10월 1일 계미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정기(鼎器)747) 에 상서(祥瑞)가 어리니 바야흐로 사중(四重)748) 의 칭송이 자자하고, 이위(離闈)749) 에 짝을 지었으니 크게 만복(萬福)의 근원을 열게 되었도다. 이 사실이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으므로 국가의 경사(慶事)를 밝히는 바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국가의 근본(根本)은 총사(冢嗣)750) 에 달려 있고 왕화(王化)의 기간(基幹)은 혼인(婚姻)에 연유된다고 여긴다. 비창(匕鬯)751) 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것은 진괘(震卦)의 일색(一索)752) 에 의해 장남(長男)을 얻은 데 힘입은 것이요, 하주(河洲)753) 의 훌륭한 성예(聲譽)는 국풍(國風)을 선양한 이남(二南)754) 의 공에 도움준 것이다. 과거에 부덕(不德)한 내가 외람되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았으므로 드디어 이저(貳儲)755) 를 일찍 세우게 되었다. 종조(宗祧)의 부탁이 막중했는데 내가 적당한 사람을 얻게 된 것을 기쁘게 여겼고, 부모의 마음은 모두가 같았으므로 네가 아내 두기를 바라게 되었다.
왕세자의 빈(嬪) 조씨(趙氏)는 아름다운 품성(稟性)에 곤덕(坤德)을 지녔는데 덕용(德容)을 타고났다. 성대하고 이름난 명족(名族)으로 취한 것은 유행(儒生)이므로 방유(芳猷)와 의측(懿則)이 모두 원량(元良)의 배필이 되기에 합당하였기 때문에 자전(慈殿)께서 의심없이 간택(簡擇)하였는데, 과연 여귀(女歸)756) 가 길조(吉兆)에 화협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이달 29일(임오)에 초계례(醮戒禮)와 세자(世子)의 친영례(親迎禮)를 끝마쳤다. 음양(陰陽)과 강유(剛柔)가 서로 교합함을 이루게 되니 도(道)는 한결같이 형가(刑家)757) 에 근본하는 것이고, 단면(端冕)758) 과 적유(翟褕)759) 가 서로 따르게 되니, 예(禮)는 한 쌍이 문침(問寢)760) 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처음 낳았을 때는 늦게 얻었다고 여겨 애타게 관취(冠娶)할 시기를 기다렸는데, 이제 다행히 욱조(旭朝)761) 에 혼례를 거행하였으니 더욱 신민(臣民)의 소망에 부응하게 되었다. 이는 나 한 사람만의 기쁨이 아니므로 팔방(八方)과 함께 경신(更新)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 희주(姬周)762) 때 주량(舟粱)763) 의 성대한 의식(儀式)를 꾸몄으니 상서(祥瑞)가 이미 가부(佳婦)에게서 정하여졌고, 성조(聖祖)의 선화(仙畫)의 은미한 뜻을 본받으니 축복(祝福)이 다시 신손(神孫)에게 깊었다. 그리하여 기주(箕疇)에 복(福)을 내리고 아울러 수역(壽域)에 인덕(仁德)이 널리 흡족하게 되었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이 지어 올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69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747] 정기(鼎器) : 왕위(王位)를 이름.[註 748] 사중(四重) : 법도 있는 말, 덕이 있는 행실, 위의가 있는 외모, 남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중언(重言)·중행(重行)·중모(重貌)·중호(重好)를 말함.[註 749] 이위(離闈) : 왕세자.[註 750] 총사(冢嗣) : 왕세자.[註 751] 비창(匕鬯) : 종묘(宗廟)에서 제사 지낼 때 쓰는 그릇. 대를 이어 종사(宗祀)를 받든다는 뜻으로, 왕세자의 지위를 이른 말.[註 752] 진괘(震卦)의 일색(一索) : 《주역(周易)》 진괘(震卦)의 맨 아래에 있는 양효(陽爻)를 가리키는 말로, 일양(一陽)이 생겼다는 뜻에서 장자(長子)를 얻는다는 말로 쓰임.[註 753] 하주(河洲) : 관저(關雎)를 말한 것. 《시경(時經)》 관저장(關雎章)의 "關關雎鳩 在河之洲"에서 따온 말.[註 754] 이남(二南) :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두 편명. 주남은 주나라 문왕의 후비가 수신 제가(修身齊家)한 일을 노래한 것이고, 소남은 남국(南國)의 제후(諸侯)가 후비의 덕화(德化)를 입은 것을 읊은 것임.[註 755] 이저(貳儲) : 세자(世子).[註 756] 여귀(女歸) : 시집가는 것.[註 757] 형가(刑家) : 집안에서 모범을 보여 이를 미루어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에서 온 말.[註 758] 단면(端冕) : 임금을 가리킴.[註 759] 적유(翟褕) : 왕후의 옷.[註 760] 문침(問寢) : 임금에게 하루에 세 번씩 문안하는 것.[註 761] 욱조(旭朝) : 제때에 알맞게 혼례(婚禮)를 올렸다는 뜻. 《시경(詩經)》 포유 고엽장(匏有苦葉章)에 나오는 말로 예법(禮法)과 시기(時期)를 맞추어 혼례를 해야 한다는 내용임.[註 762] 희주(姬周) : 성이 희씨인 삼대(三代)의 주나라.[註 763] 주량(舟粱) : 주(舟)나라 문왕(文王)이 후비(后妃)를 맞이할 때 배로 다리를 놓은 의식을 한 데서 온 말임.
이날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나라에 큰 경사가 있었는데도 백성이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실로 백성과 함께 경사를 함께한다는 의의가 없는 것이다. 지난번 차대(次對) 때 이미 전세(田稅)를 견감시킬 것으로 하교(下敎)한 바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은택이 아래에까지 미쳐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국가(國家)의 저축이 탕갈되어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군병(軍兵)들에게 급료를 지급할 수 없는 실정이고 공물가(貢物價)도 계속해서 지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삼남(三南)의 대동미(大同米)를 만일 1두(斗)씩 감한다면 감하는 것이 3만 석(石)에 이르게 될 것이니, 깊이 헤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남(三南) 가운데 더욱 극심한 고을의 분수재(分數災)를 처음에 허급(許給)했다면 실제의 혜택이 될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이미 절기(節期)가 늦어 실로 난처(難處)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영묘(靈妙)한 것은 백성과 같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대동미의 견감을 삼남(三南)에만 시행한다면 나머지 오도(五道)의 백성들이 반드시 서운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니, 고르게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 삼남(三南)의 더욱 극심한 고을은 으레 감하는 신공(身貢)·신포(身布) 이외에 4분의 1을 감하게 하라."
하였다.
송인명(宋寅明) 등 18인을 지제교(知製敎)로 선발하였다.
이광덕(李匡德)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경석(李慶錫)을 장령(掌令)으로 삼고, 심공(沈珙)을 발탁하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삼았다.
10월 2일 갑신
왕세자의 가례(嘉禮) 때의 공로를 기록하여 상을 차등 있게 내렸는데, 정사(正使) 조태억(趙泰億), 부사(副使) 김동필(金東弼),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이광좌(李光佐)와 【안구마(鞍具馬)를 내렸다.】 도감 제조(都監提調) 오명항(吳命恒)·이태좌(李台佐)·이집(李㙫), 교문 제술관(敎文製述官) 강현(姜鋧), 서사관(書寫官)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전문 서사관(篆文書寫官)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 죽책문 제술관(竹冊文製述官) 윤순(尹淳), 서사관(書寫官) 송성명(宋成明), 옥인 전문 서사관(獄印篆文書寫官) 조문명(趙文命)과 【숙마(熟馬)를 내렸다.】 도청(都廳) 조지빈(趙趾彬)·오명신(吳命新), 보덕(輔德) 조익명(趙翼命), 필선(弼善) 이정필(李廷弼)과 【가자(加資) 하였다.】 전교관(傳敎官) 우승지(右承旨) 정석삼(鄭錫三), 상례(相禮) 윤대영(尹大英), 사옹원 부제조(司饔院副提調) 평원 도정(平原都正) 이표(李標)와 【가자(加資) 하였다.】 여러 집사(執事), 차비관(差備官)과 【현궁(弦弓)을 내리기도 하고 승서(陞敍)하기도 하였다.】 원역(員役)·공장(工匠) 들이었다. 【미포(米布)를 하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69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정언(正言) 여광헌(呂光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정형익(鄭亨益)의 아들 정홍상(鄭弘祥)이 격쟁(擊錚)764) 하고 올린 원사(爰辭)를 보건대, 신의 처음 계사(啓辭) 가운데 착오된 몇 글자를 집어내어 이것으로 자기 아비의 죄안(罪案)을 곡해(曲解)하도록 만들기 위한 패병(欛柄)765) 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신의 처음 계사(啓辭)에서 이른바 ‘드러내어 지적해서 핍박했다.[顯有指逼]’는 네 글자는 진실로 일이 지난 뒤 추기(追記)한 데서 나온 잘못이었기 때문에 즉시 재계(再啓)에서는 산개(刪改)한 것이었는데, 정홍상이 급급히 몰래 산개했다는 것을 이유로 신을 적발한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참으로 매우 웃을 만한 일입니다. 그 아비의 소장 가운데 ‘망측한 계교이다[罔測之計]’라고 한 네 글자를 번설(飜說)한 데 이르러서는 심히 교묘하다고 할 수 있는데, 유문(流聞)이라고 핑계하면서 증언할 사람이 있다고 한 것은 말이 이미 졸렬하기 짝이 없고 일도 또한 무엄한 것입니다. 아! 당시에 조사하기를 청한 거조는 진실로 인신(人臣)으로서는 그만둘 수 없는 의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방만규(方萬規)의 부도(不道)와 이의천(李倚天)의 요악(妖惡)이 아니라면 ‘망측(罔測)’이라는 두 글자를 멋대로 씌울 수 없는 것입니다. 정형익의 소장은 오로지 방만규의 수법을 답습하고 이의천의 의견을 모방하여 다시 하나의 ‘계(計)’ 자를 더 붙인 것이니, 이는 어맥(語脈)의 흐름으로 보아 저절로 숨길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정홍상이 이미 산개(刪改)한 이 일구(一句)를 빙자하여 자기 아비를 죄과가 없는 지경으로 올려놓으려 하고 있으니, 아! 또한 딱한 노릇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처음 계사(啓辭)에서 소홀히 한 잘못에 대해서는 신이 스스로 해명(解明)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3일 을유
의금부(義禁府)에서 정형익(鄭亨益)을 용천(龍天)에, 이의천(李倚天)을 사천(泗川)에 정배(定配)시켰다. 이는 대각(臺閣)에서 안치(安置)시키자는 것을 정계(停啓)했기 때문에 이제 비로소 정배하게 된 것이다. 정배 단자(定配單子)를 입계(入啓)하자마자 임금이 특명(特命)으로 정형익을 석방하게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우승지(右承旨) 정석삼(鄭錫三), 좌부승지(左副承旨) 박내정(朴乃貞), 우부승지(右副承旨) 채성윤(蔡成胤) 이제(李濟)이다.】 아뢰기를,
"정형익의 죄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방만규(方萬規)의 여론(餘論)을 주워 모은 것으로 그 내용이 매우 음흉하여 방만규와 일체이면서 둘로 나뉘어 있는 것입니다. 당시 궁비(宮婢)의 조사를 청한 대계(臺啓)는 실로 화근(禍根)을 끊어서 막고 군부(君父)를 평안히 보존케 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사의(私意)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정형익이 억지로 부도(不道)라는 죄안(罪案)을 만들어 망측(罔測)한 계책이라고 했으니, 이는 더없이 절통한 일입니다. 원찬(遠竄)시키는 형벌도 또한 말감(末勘)인 것이니, 정형익을 방송(放送)시키라는 명을 정지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국가의 경사에 의한 사면(赦免)이 어찌 당목(黨目)이라고 해서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교리(校理) 임광(任珖)과 수찬(修撰) 윤광익(尹光益)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원찬(遠竄)한 죄인 정형익을 방송하라는 명령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승정원의 계사(啓辭)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보덕(輔德) 조익명(趙翼命), 겸보덕(兼輔德) 오명신(吳命新), 필선(弼善) 이정필(李廷弼), 겸필선(兼弼善) 조지빈(趙趾彬), 문학(文學) 조현명(趙顯命), 사서(司書) 정석오(鄭錫五), 겸사서(兼司書) 여선장(呂善長), 설서(說書) 이주진(李周鎭), 겸설서(兼說書) 이종백(李宗白)이다.】 상소(上疏)하여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기를,
"효우(孝友)를 돈독히 하여 덕기(德基)를 후하게 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예지(睿知)를 개발시키고, 완호(玩好)를 물리쳐 외부의 유혹을 단절시키고, 동작(動作)을 삼가서 위의(威儀)를 엄숙하게 하소서. 그리고 공경으로 힘써 솔선한다는 교훈을 행하여 규곤(閨梱)을 바로잡게 하고, 희설(戲褻)을 방지하게 하며 미워하지 않는 엄함을 지녀 근습(近習)들을 단속시키고 사닐(私昵)을 경계하게 하며, 섭양(攝養)은 때에 맞추게 하고 음식(飮食)은 절도 있게 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지평(持平) 이정석(李廷錫)이 상소하기를,
"오늘날의 큰 시비(是非)는 ‘충(忠)’, ‘역(逆)’이란 두 글자에 있으니,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일제히 모아 임인년766) 의 국안(鞫案)을 가져다가 따져 묻고 상의하여 어느 것이 역적인가를 밝혀 국시(國是)를 확정한 다음 이를 공안(公案)으로 환히 게시(揭示)한다면 ‘역(逆)’이라는 한 글자는 저절로 귀결될 데가 있게 될 것이며, 역적이 아닌데도 역적으로 몰린 자들은 변명(辨明)을 기다릴 것도 없이 저절로 변명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내가 방금 처분(處分)을 내리려 하고 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삼공(三公)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속히 매복(枚卜)767) 을 행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조정에 이광좌(李光佐)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서묘(誓墓)에 대한 일을 추문(追聞)해 보니 글을 지어 고묘(告墓)는 했지만 실제로 맹세한 일은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는 대례(大禮)가 이미 지나갔으니 개석(開釋)하려고 하고 있다."
하였다. 조택억이 또 아뢰기를,
"옥당(玉堂)768) 의 신록(新錄)은 성명(成命)이 이미 있었습니다만, 동벽(東壁)769) 에는 사람이 없고 오명신(吳命新)은 새로 가자(加資)되었으나 하비(下批)770) 하기 전이니, 의당 응교(應敎)를 환차(還差)하여 그로 하여금 권점(圈點)을 완결짓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王世子)와 세자빈(世子嬪)의 묘현례(廟見禮)를 명년 봄으로 물려서 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가례(嘉禮)가 이미 지났으니, 마땅히 묘현례(廟見禮)를 행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어린 나이인데 종묘(宗廟)를 알현할 적에 궁료(宮僚)가 함께 들어갈 수 없고 단지 시녀(侍女)가 일을 집행할 뿐이니, 예의에 어긋나기가 쉬울 것이다. 내가 명년 봄 전알(展謁)할 적에 함께 알현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에게 반궁(泮宮)771) 에서 시사(試士)하도록 명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니,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4일 병술
정도륭(鄭道隆)에게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명했는데, 이는 반제(泮製)772) 에서 으뜸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오명신(吳命新)을 부응교(副應敎)로, 이광덕(李匡德)을 교리(校理)로, 신치운(申致雲)을 수찬(修撰)으로, 이정응(李挺應)을 필선(弼善)으로, 김중희(金重熙)를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10월 5일 정해
사간(司諫) 조상경(趙尙絅)이 인피(引避)하고 아뢰기를,
"지난번 정형익(鄭亨益)을 원찬(遠竄)하라는 명령은 대계(臺啓)에서 감죄(勘罪)한 것에서 일등(一等)을 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찬배(竄配)를 시행했다면 감률(勘律)의 고하(高下)는 심각하게 다툴 것이 못되기 때문에 감히 정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추후(追後)에 생각해 보니, 신이 갑자기 정지한 것은 이미 대관(臺官)의 체통을 잃은 처사였는데, 이제 또 특별히 방송(放送)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당연히 극력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여 전일의 잘못을 보상토록 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신(臺臣)들이 발계(發啓)할 처음에 임금에게 아뢰는 문자(文字)에 대해 상세하고 신중하지 못했던 탓으로 산개(刪改)를 면하지 못함으로써 죄인의 아들로 하여금 이를 구실로 삼아 현란(眩亂)시킬 계책을 부리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초 발계한 대신(臺臣)에 대해 의당 규경(規警)시키는 논핵이 있어야 했는데도 신은 또 그렇게 하지 못하여 당연히 논핵해야 할 것을 논핵하지 않았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퇴(辭退)하지 말라."
하였다.
이세근(李世瑾)·양정호(梁廷虎)·이정걸(李廷傑)을 승지(承旨)로, 정수기(鄭壽期)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임광필(林光弼)을 장령(掌令)으로, 강필경(姜必慶)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광덕(李匡德)을 겸 교서 교리(兼校書校理)로 삼았다.
수찬(修撰) 이광보(李匡輔)가 상소하기를,
"어제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하여 오명신(吳命新)을 우선 동벽(東壁)에 그대로 두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거(典據)할 만한 전례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동벽도 또한 전망(前望)773) 이 있으니, 인원을 갖추어 권점(圈點)을 완결지음에 있어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상으로 내리는 가자(加資)는 특은(特恩)에 관계된 것이니, 하비(下批)하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우선 논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동벽에 환차(還差)한 것은 도당록(都堂錄)774) 때문이다."
하였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조문명(趙文命)이 상소하기를,
"가례(嘉禮)가 있은 다음날 미포(米布)를 견감시키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이는 백성들과 경사를 함께한다는 성대한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저축이 탕갈되어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대동미(大同米)는 견감시킬 수가 없습니다. 각 고을의 조적(糶糴)을 파악하여 금년분의 모곡(耗穀)을 감하되 반을 감하기도 하고 3분의 1을 감하기도 한다면 백성들이 그 은택을 고루 입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심수현(沈壽賢)이 아뢰기를,
"지난번 차대(次對)하는 날 처분(處分)에 대한 분부가 있자 좌상(左相)이 인혐(引嫌)했기 때문에 오늘 차대에서도 탈품(頉稟)775) 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명(成命)이 있은 뒤 미루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군정(群情)의 답답함이 오랠수록 더욱 과격해지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시임(時任)·원임(原任)이 대신(大臣)과 육조(六曹)·경조(京兆)776)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빈청(賓廳)에 모으라."
하였다.
10월 6일 무자
부응교(副應敎) 오명신(吳命新)이 이광보(李匡輔)가 올린 소장으로 인하여 관록(館錄)777) 을 외람되이 감당할 수 없다는 뜻으로 상소(上疏)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윤유(尹游)가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군정(軍政)이 허술하니, 감영(監營) 작대군(作隊軍)에게 쌀을 받고 입번(入番)을 정지시키는 법을 혁파하고 그들로 하여금 입번(入番)하게 하여 이를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목호룡(睦虎龍)이 임인년778) 에 무고(誣告)한 죄안(罪案)을 들이라고 명하여 을사년779) 의 처분(處分)을 일체 번복시켰다. 처음에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번안(飜案)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누차 진달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광좌·조태억이 판의금(判義禁) 심수현(沈壽賢),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 대사헌(大司憲) 김시환(金始煥),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집(李㙫), 형조 판서(刑曹判書) 서명균(徐命均), 부제학(副提學) 윤혜교(尹惠敎), 대사간(大司諫) 정수기(鄭壽期)와 함께 금오(禁吾)780) 의 국안(鞫案)을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신(君臣) 상하가 칙려(勅勵)해야 한다는 뜻은 이미 다 말하였다. 역자(逆者)를 역(逆)이라 하고 역자가 아닌 것은 이를 분간(分揀)하여 계한(界限)을 결정한 다음에야 후세에 전하더라도 할 말이 있게 되는 것이다. 지난번의 사차(四箚)와 삼수(三手)781) 가 똑같았다는 이야기가 역시 괴이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아주 가볍게 감률(勘律)하였으니 합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거기에 사의(私意)가 있는 자는 과연 충(忠)이 아닌 것이고 따라서 한쪽 사람들도 반드시 모두 역(逆)은 아닐 것이니, 변별(辨別)해야 된다. 지난번에 경(卿) 등을 논할 적에는 매양 나를 불만스럽게 여긴다는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았었는데, 경 등이 어찌 나를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겠는가? 설혹 불만스럽게 여긴 것이 있을지라도 나는 괘념(掛念)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경 등에게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이겠는가? 유 판부사(柳判府事)782) 가 모르고서 한 말일 것이다. 혐피(嫌避)라고 한 것은 잘못은 잘못이다."
하니, 이광좌(李光佐)가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지난날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지 않았다면 신(臣) 등에게 어찌 오늘이 있었겠으며, 유봉휘(柳鳳輝)가 어찌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국옥(鞫獄)에 대한 일을 이제 앙품(仰稟)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름마다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정인중(鄭麟重)·심상길(沈尙吉)·정우관(鄭宇寬) 등은 역적 모의를 한 정절(情節)이 낭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최석항(崔錫恒)이 일찍이 말하기를, ‘큰 옥사(獄事)에는 으레 부당하게 죽는 경우가 없지 않다.’고 했는데, 김극복(金克復)과 같은 사람들은 실제로 사형(死刑)에 해당되는 죄가 아니었으므로 늘 딱하고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같은 부류들은 잔인하다고 할 만하였다. 이헌(李瀗)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결안(結案) 가운데 역모(逆謀)한 정절이 낭자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송(趙松)이 불을 들었다[擧火]는 이야기에 대해 경 등은 그 일을 모르는 것같다. 장세상(張世相)과 같은 자가 어떻게 독대(獨對)할 때의 일783) 을 참여하여 알 수가 있겠는가? 만일 문목(問目)에서 나온 것이라면 《주례(周禮)》의 팔형(八刑)784) 으로 논죄하여 난언율(亂言律)에 해당시켜야 한다."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이헌(李瀗)이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있을 적에 실어가지고 온 8백 석(石)의 쌀은 끝내 간 곳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두라. 정우관(鄭宇寬)의 일은 물을 필요가 없다. 명자(名字)도 상세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따질 것이 뭐 있겠는가? 그대로 두라."
하였다. 김창도(金昌道)의 일에 이르러는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심진(沈榗)의 일에 이르러서는 오명항이 말하기를,
"심진은 곧 심상길(沈尙吉)의 숙부(叔父)입니다. 심진이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있을 적에 심상길에게 포목 1동(同), 돈 3백 냥, 선자(扇子) 50병(炳), 대호지(大好紙) 수십 권(卷)을 보냈었기 때문에 여기에 연루(連累)된 것입니다."
하자, 이광자가 말하기를,
"명목(名目)이 각기 다른데 이제 와서 추론(追論)함에 있어서는 의당 참작하는 도리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이제 거론(擧論)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이광좌가 말하기를,
"논하지 마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만, 그에게 회복시킨 관작(官爵)은 빼앗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작만 빼앗고 그 나머지는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이정식(李正植)의 일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서덕수(徐德修)는 팔의(八議)785) 로 논한다면 묻지 말아야 마땅합니다."
하고, 이태좌(李台佐)는 말하기를,
"그때의 위관(委官)도 진백(陳白)하여 윤허를 받았으므로 연좌(緣坐)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임(原任)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만일 직명(職名)이 있다면 뺏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한 조항에 대해서는 내가 늘 놀라고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다. 독약(毒藥)을 쓰려고 한 일은 이정석·서덕수·김창도에게서 나왔다고 했는데, 이것이 어디서 나왔고 그가 어디서 알았으며 장세상을 그가 어떻게 교결(交結)할 수 있었는가? 전에 정호(鄭澔)가 소장을 올려 일체 신원(伸冤)시킬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무복률(誣服律)로 논단(論斷)했었는데 이제 대신(大臣)의 말이 이러하니, 서덕수는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김일관(金一觀)의 일에 이르러서는 조태억이 말하기를,
"이밖에 김극복 같은 사람은 당시에도 이미 원통하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김극복이 부채를 찾는 일로 우연히 이우항(李宇恒)에게 갔다가 수작(酬酌)한 것이 있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사람들은 논죄하지 말고, 김극복까지도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유취장(柳就章)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등류의 결안(結案)은 반드시 때에 따라서 죽을 곳에서 살기를 구하는 계책을 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떠한 의사(意思)가 없지도 않을 것이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처음에는 승복(承服)하였으나 실정을 알고 있는 것과 역적 모의한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실정을 알고 있었다.’고 하기에, 드디어 실정을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결사(結辭)를 만들었는데 대계(臺啓)가 곧이어 발론되었기 때문에 다시 신문(訊問)을 가하였더니, 역적 모의에 동참했다고 승복(承服)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드디어 노적(孥籍)까지 시행했습니다."
하고, 조태억은 말하기를,
"그의 아우 유정장(柳貞章)이 회령(會寧)에 있을 적에 국옥(鞫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스스로 목찔러 죽었으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의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경우는 고의로 허풍을 치면서 남을 속이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실정을 알고 있다고 논한 것은 이 때문인 것 같다. 삼사(三司)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김시환(金時煥)·정수기(鄭壽期)·윤혜교(尹惠敎)가 대답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주달한 것으로 살펴보건대, 혹시 동참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실정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판의금(判義禁)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심수현(沈壽賢)이 말하기를,
"양익표(粱益標)는 군병(軍兵)의 일에 참섭(參涉)한 적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실정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감단(勘斷)하였으니, 유취장은 양익표에게 견주면 중한 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의 의견이 모두 같은가?"
하니,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유취장은 자기 아들과 함께 사형을 당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지나쳤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취장과 같은 자는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끝에 네 번 차자(箚子)를 올렸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등류의 일을 그가 어떻게 참여하여 알 수 있겠는가? 단지 중군(中軍)을 얻으려고 도모했을 뿐인데, 실정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감단(勘斷)한 것이다. 회복시킨 관작(官爵)은 빼앗도록 하라. 양익표도 또한 똑같이 논단(論斷)하라."
하였다. 김성절(金盛節)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이명좌(李明佐)의 일에 이르러 조태억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궁금(宮禁)을 교통(交通)한 것으로 감죄(勘罪)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국면(局面)이 바뀌기만을 모도했다는 것으로 말을 했으니, 이는 일체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우홍채(禹洪采)의 일에 이르러 조태억이 말하기를,
"지만(遲晩)786) 이 낭자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떠하였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우홍채는 신이 이미 안치(按治)하였으므로 감히 앙대(仰對)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이영(二英)787) 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일이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공초(供招)에 들어 있다. 묵세(墨世)의 일도 이와 같으니 논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백망(白望)·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장세상(張世相)은 이야말로 육시(戮屍)해야 할 네 사람인데 일을 주장(主張)한 것은 모두 이들이었으니,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들은 승복(承服)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이미 결안(結案)되었는데도 아직 정형(正刑)에 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추륙(追戮)하자는 거조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백망은 성질이 흉악하여 자복하지 않고 죽었습니다만, 이 옥사의 핵심(核心)은 덕사(德寺)의 은봉(銀封)의 일에 있습니다. 1천여 냥의 은을 봉함하고 겉에다가 덕조(德操)의 투서(套書)라고 써 붙였는데 덕조는 바로 한(漢)나라 때 사마 휘(司馬徽)의 자(字)로 유선주(劉先主)788) 를 초매(草昧)789) 할 적에 처음 안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손바닥에 쓴 글자에 관한 일과 낱낱이 몰래 부합되니, 더더욱 흉패(凶悖)스럽습니다."
하고, 이광좌는 말하기를,
"오늘날에 와서 다시 육시(戮屍)하자는 의논이 있다면 버려두어도 무방하겠습니다만, 이미 자복(自服)을 받은 상태에서 아직 정형(正刑)에 처하지 않은 것이니, 결단코 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문안(文案)을 보고 대략 알 수 있었다. 육시(戮屍)하는 법은 옛날 인조조(仁祖朝)에 비로소 막았으니, 조종조(祖宗朝)의 깊고도 두터운 인덕(仁德)을 어찌 후왕(後王)이 마땅히 본받아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당시에 위관(委官)이 이 법을 행한 것은 실로 잘못이었다."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이제는 마땅히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이광좌는 말하기를,
"그대로 두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그대로 둔다면 다시 연좌법(緣坐法)을 시행해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역가(逆家)의 아들 가운데 나이가 차지 않은 사람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예(例)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호생지덕(好生之德)790) 때문에 드디어 이 법을 없앴던 탓으로 지금은 추시(追施)하는 예가 없어졌습니다. 만일 4명의 죄인까지도 역안(逆案)에서 빼어버린다면 어찌 법의(法意)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그대로 두기도 하고 혹시 논죄하지 말기도 하더라도, 어찌 역안(逆案)에서 빼어버릴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논죄하지 말라는 것은 죄가 가벼워 거론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대로 두라는 것은 그전대로 따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중이 현격하게 다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 밖의 정법(正法)에 처할 사람에게 이제 다시 전율(前律)을 시행할 수는 없다. 그 4명의 죄범(罪犯)은 같지만 승복(承服)은 이미 달랐으니, 구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서명균(徐命均)·오명항·이태좌·김시환 등이 모두 대답하기를,
"백망·장세상·김용택·이천기 등을 역과(逆科)에 두지 않는다면 군정(群情)이 반드시 억울해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별하려고 한 것뿐이다."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역절(逆節)이 저러한데 논죄하지 말라고 논하는 것은 신은 결단코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극도로 흉악한 정절(情節)은 단지 ‘덕사(德寺)의 은봉(銀封)’과 ‘덕조(德操)의 투서(套書)’ 등의 일에 있기 때문에 을사년791) 사람들은 그 은(銀)을 이삼(李森)의 물건으로 귀결시키기 위해 포장(捕將) 오중주(吳重周)에게 핵실(覈實)을 주관하게 하고 다시 장붕익(張鵬翼)에게 구핵(究覈)하게 한 것인데, 지금까지도 결말(結末)된 것이 없습니다. 이의천(李倚天)의 무리들도 기필코 이삼의 물건으로 귀결시키려 했었습니다만, 끝내 그 계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옥사(獄事)의 핵심은 모두 ‘은봉(銀封)’과 ‘투서(套書)’에 달려있습니다. 역적의 정절(情節)이 이러하니 일개 백망(白望)이야 어렵게 여길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백망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법 밖의 형벌을 쓰는 것은 4인이 모두 같기 때문에 묻지 않으려 한 것이다."
하였다. 이태좌가 말하기를,
"백망은 이미 장물(贓物)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다만 모질고 사나웠던 탓으로 곤장[杖]을 참다가 지레 죽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곤장을 맞다가 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하였다. 심수현이 말하기를,
"홍순택(洪舜澤)은 곤장을 맞다가 죽었는데 역률(逆律)을 시행했고, 이우항(李宇恒)은 승복(承服)한 뒤 지레 죽었기 때문에 실정을 알았다는 것으로 결단하여 단지 가산(家産)만 적몰(籍沒)하였습니다."
하고, 서명균은 말하기를,
"당초에는 비록 법 밖의 형벌을 적용하였지마는, 이제 이것 때문에 그의 본죄(本罪)를 용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일은 끝내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나의 의견은 늘 지나쳤다고 여기고 있다. 이들에게 이미 법 밖의 형벌을 시행하였는데 비록 전율(前律)을 시행할 수는 없으나, 만일 ‘물(勿)’자를 자한다면 문득 죄명(罪名)을 탕척(蕩滌)시키는 것과 같게 되니 그대로 두라. 그리고 여율(餘律)은 논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희지(李喜之)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희지의 ‘영정행(永貞行)’은 이것만으로도 넉넉히 결안(結案)을 만들 수 있다."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다만 ‘영정행(永貞行)’ 뿐만이 아닙니다. ‘언서(諺書)에 이른바 취반(炊飯)’이란 말은 더더욱 흉패(凶悖)스럽습니다."
하였다. 이기지(李器之)·홍순택(洪舜澤)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홍순택이 약(藥)을 구한다는 이야기에 관해서는 장물(贓物)이 있었는가?"
하니, 이태좌가 말하기를,
"이것도 또한 법 밖의 형벌임을 면치 못했습니다. 당시 ‘장역관(張譯官)’이라고 운운한 말이 있었습니다만, 끝내 그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국옥(鞫獄)에 간범(干犯)된 사람을 전에는 비록 그 역절(逆節)이 낭자한 것을 명백히 알았더라도 승복(承服)하지 않고 죽은 경우에는 역률(逆律)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경신년792) 역옥(逆獄) 때 조성(趙䃏)이 역적을 모의한 정절이 낭자하면서 곤장을 참고 자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청(鞫廳)에서 역률로 논죄하여 노륙(孥戮)하는 형벌을 시행하였었습니다. 이 무리들도 곤장을 참고 자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옥사(獄事)를 다스리던 제신(諸臣)이 조성의 예(例)을 인용하여 법 밖의 형벌을 추후 시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성교(聖敎)가 지극히 윤당(允當)하니, 이것이 천백 대(代) 뒤에도 족히 본받을 만합니다. 이희지에 대해서는 이미 영정행(永貞行)이 있으니 넉넉히 결안(結案)을 만들 수 있겠다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이희지 이하 승복하지 않은 부류에 이르러서는 모두 버려두고 노적(孥籍)의 형벌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아마도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순택을 노적(孥籍)에 처한 것은 지나쳤다."
하니, 조태억이 말하기를,
"이기지(李器之)·이홍술(李弘述)을 노적(孥籍)에 처한 것도 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희지(李喜之) 이하는 누구인가?"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이희지·이상건(李尙建)·홍의인(洪義人)·이기지·홍철인(洪哲人)·현덕명(玄德明)·이상집(李尙)·묵세(墨世)·백열(白烈)·이홍술(李弘述)·유후장(柳厚章)·조송(趙松)·김민택(金民澤)·김성행(金省行)·이우항(李宇恒)·오서종(吳瑞鍾)·김시태(金時泰)·홍순택·윤각(尹慤)·백시구(白時耉)·전인좌(錢仁佐)·김창언(金昌彦)·형의빈(邢儀賓)·이덕준(李德駿)·이숭조(李崇祚)·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 등은 모두 곤장을 맞고 죽은 자들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희지는 그대로 두라. 이상건은 무슨 일인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처음에는 환술(幻術)로써 이름을 내려서 환지(幻紙)로 돈을 만들고 인지(印紙)로 공명첩(空名帖)793) 을 만든다고 일컫다가 법사(法司)에 체포되었습니다. 이는 홍의인(洪義人)과 상통(相通)한 자인데 이제 추론(追論)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죄를 다스린 것이 옳으니, 지금은 버려두라."
하였다. 홍의인·홍철인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논하지 말라는 것과 버려두라는 것의 경중(輕重)이 어떠한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버려두라는 것이 논하지 말라는 것에 견주어보면 중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버려두라. 이기지(李器之)의 노적(孥籍)이라고 쓴 아래에다 ‘물론(勿論)’이라고 써넣으라."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이건명(李健命)의 두 아들에게 모두 지평(持平)을 추증(追贈)한 것은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버려두라고 한 것은 벼슬이 있으면 추탈(追奪)하고 벼슬이 없으면 논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백시구(白時耉)·이상집(李尙)·조이중(趙爾重)은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있을 적에 1만여 냥의 은화(銀貨)를 공공연히 가져다 썼는데, 그 돈이 모두 간 곳이 없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고(故) 상신(相臣) 최석항(崔錫恒)이 말하기를, ‘이들의 노비(奴婢)·전택(田宅)을 옮겨서 그들이 공용(空用)한 죄를 보상하게 하고 또 칙수(勅需)에 보태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최석항이 이런 내용으로 진백(陳白)하였으나 그 당시 발락(發落)한 하교가 없었습니다. 그뒤 신이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대죄(待罪)794) 하고 있을 적에 이 일이 거조(擧條)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때의 사상(事狀)은 이와 같았을 뿐이니, 막바로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직을 추탈(追奪)하고 가산을 적몰했다면 묻지 말라."
하였다. 묵세(墨世)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묵세는 버려두는 것이 좋겠다. 그의 문안(文案)을 내가 이미 보았는데, 곤장을 맞다가 죽은 사람은 모두 버려두라."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백시구(白時耉)는 은화(銀貨)를 정우관(鄭宇寬)에게 내어준 일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실정을 자백하는 것으로 한정하였을 뿐, 잇따라 형장(刑杖)을 가하려는 뜻이 없었습니다만, 그가 이에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숙장(宿將)이 모두 살해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서 살 수 있겠는가? 속히 장살(杖殺)하라.’고 했습니다. 금당(禁堂)795) 들이 이 말을 듣고 일제히 분개하여 곤장을 치게 한 것이 배로 엄했기 때문에 2차의 형신(刑訊)에서 곧 죽었습니다. 그때의 옥사(獄事)에서는 전혀 검장(檢杖)하지 않고 일체 으레 시행하는 형장(刑杖)을 가했었는데, 다만 백시구는 이 때문에 지나친 곤장을 맞고 죽었으므로 마음속에 늘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이홍술(李弘述)에게는 일찍이 증직(贈職)을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곤장을 맞고 죽었는데 증직을 그대로 둘 수 있는가? 제신(諸臣)들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심수현·오명항 등이 말하기를,
"복관(復官)과 증직(贈職)을 마땅히 그대로 보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증직과 복관은 차별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태좌가 말하기를,
"이미 곤장을 맞아 죽었고 또 노적(孥籍)했으니 이제 특은(特恩)으로 구관(舊官)을 보존하게 하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고, 김시환이 말하기를,
"추탈(追奪)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홍술이 참섭(參涉)한 일이 있는가? 경(卿) 등은 말하여 보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궁성(宮城)을 호위(扈衛)하는 일은 이홍술이 주장(主張)했습니다."
하고, 조태억이 말하기를,
"육현(陸玄)을 장살(杖殺)한 것은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탈(追奪)을 그만둘 수가 없다는 말인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당시에 이미 참작하여 조처했을 것입니다. 어찌 노적(孥籍)하기에 이르렀겠습니까?"
하고, 조태억은 말하기를,
"뒷날 혹시 사전(赦典)으로 인하여 다시 처분(處分)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고, 심수현은 말하기를,
"이런 등류의 죄인은 본디 사전(赦典)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니, 이홍술을 어떻게 복관(復官)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홍술은 추탈(追奪)하고 노적(孥籍)했으니, 논하지 말라."
하였다. 유후장(柳厚章)·조송(趙松)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들은 버려두라."
하였다. 김민택(金民澤)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어떠한가?"
하니, 조태억이 말하기를,
"김민택이 약(藥)의 일에 참섭했는데, 그 곡절에 대해서는 신이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핵심(核心)이 되는 것을 말하여 보겠다. 서덕수(徐德修)와 정우관(鄭宇寬)의 공초(供招)는 모두가 허구(虛構)의 말 같았다. 그들이 김민택을 끌어들인 것이 실상(實狀)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이는 일종의 불령배(不逞輩)들이 익히 보고 들었기 때문에 이런 오인(誤引)이 있었던 것이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약(藥)은 회금(灰金)이 주관했다는 말이 국초(鞫招)에서 나왔습니다. 형의빈(邢儀賓)이 서로(西路)에서 잡혀 올 적에 사현(沙峴)에 도착하자 어떤 사람이 소나무 사이에서 외쳐 말하기를, ‘김성절(金盛節)이 이미 죽었으니 그대는 이 일을 알고 있으라.’ 하고는 이어 높은 봉우리의 정상(頂上)을 향하여 가버렸습니다.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그 말을 듣고 국청(鞫廳)에 알렸는데, 이는 매우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형의빈은 누구 때문에 국청에 들어갔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김운택(金雲澤)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심수현은 말하기를,
"이는 버려두어야 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이태좌가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말한 것으로 살펴보건대, 진위(眞僞)를 알 수가 없으니, 의신간(疑信間)796) 에 두어야 될 것입니다."
하고, 심수현은 말하기를,
"곤장을 맞고 죽은 사람을 모두 다 버려두더라도 관작(官爵)에 이르러서는 추탈(追奪)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오명항·김시환·정수기·윤혜교는 말하기를,
"관작(官爵)은 그대로 두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운택(金雲澤)은 어떠한가?"
하니, 이광좌는 말하기를,
"김운택이 형신(刑訊)을 받게 된 것은 오로지 김성절의 공초(供招) 때문인데, 행약(行藥)에 대한 한 조항은 회금(灰金)이 주관했다고 합니다. 인하여 김운택과 김민택을 현고(現告)했는데도 김민택은 그때 이미 죽었고 김운택은 대계(臺啓)로 인하여 형신을 받다가 죽었습니다."
하고, 오명항은 말하기를,
"김운택은 그의 공사(供辭)로써 살펴보건대, 비통하고 애타는 말이 누누이 적혀 있어 넉넉히 사람을 감동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신도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본 적이 있었는데 자못 근신(謹愼)스러운 듯하였으므로 김민택에게 견주어 보면 좀 나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신리(伸理)시키려고 한다면 신은 그것이 불가한 것으로 압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김민택의 일에 대해서는 정우관·김성절의 초사(招辭)에 또한 맹랑한 점이 많았다. 지난번 함우신(咸禹臣) 때의 비망기(備忘記)를 보았는가? 말세의 속습(俗習)이 이와 같으니 권세에 빌붙은 사람은 모두 역적 목호룡의 부류인 것이다. 지난번에 자질(子姪)들을 모두 정배(定配)한 것은 더욱 심한 조처였다. 그리고 팔의(八議)로써 논한다면, 광성(光城)797) 의 봉사(奉祀)가 거의 멸절(滅絶)하기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늘 지나쳤다고 여겼다. 김민택은 추탈(追奪)하고, 김운택은 증직(贈職)을 환수(還收)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성행(金省行)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버려두라."
하였다. 이우항(李宇恒)의 일에 이르러 이광좌가 말하기를,
"이우항의 일은 그때의 옥관(獄官)이 잘못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당초 잡아들였을 적에 이미 지만(遲晩)했었고 김극복(金克復)을 잡아온 뒤에도 별로 새로운 죄명이 없었는데도 당초의 공사(供辭)를 가져다가 결안(結案)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당시 옥사(獄辭)를 다스릴 적에 노여움을 격발시킨 의논이 있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는 것은 논하지 말라."
하였다. 오서종(吳瑞鍾)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버려두라."
하였다. 김시태(金始泰)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버려두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이 다스린 것은 유죄(有罪)와 무죄(無罪)를 가리는 것이므로, 신은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복관(復官)은 빼앗도록 하라."
하였다. 홍순택(洪舜澤)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논하지 말라."
하였다. 윤각(尹慤)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어떠한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윤각의 일은 전후에 곡절이 많습니다. 당초에는 국초(鞫招)에서 나왔습니다만, 계제(階梯)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참작 조처하여 사형(死刑)을 감해 제주(濟州)에 정배(定配)했었던 것입니다. 그뒤 또 김창도(金昌道)의 공초(供招)에서 나왔으나 김창도가 이미 죽었으므로 빙문(憑問)할 길이 끊겼습니다. 또 참작하여 조처하려 하였으나 그뒤 또 김성절의 공초(供招)에서 나왔는데, 그 내용에 ‘윤각(尹慤)에게 은(銀)을 대여(貸與)받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국초(鞫招)에서 나왔으므로 일이 매우 의심스러웠는데, 대계(臺啓)가 또 발론되었으므로 누차 형추(刑推)를 가하였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위관(委官) 최석항(崔錫恒)과 상의하여 참작해서 조처했었습니다. 그뒤 대계(臺啓)가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한 해가 지나도록 서로 버티는 것은 실로 난처(難處)한 일이었는데도 여정(輿情)이 모두 분개하면서 윤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가 하고는 신이 끝내 죄에 해당시키지 않으려 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끝에 가서 다시 국청(鞫廳)을 설치한 것이고 이내 장하(杖下)에서 죽게 된 것입니다. 유성추(柳星樞)에 있어서는 이른바 ‘은(銀)·전(錢)·포(布)를 올려보냈다.’고 한 것은 원래 주고받은 계제(階梯)가 없으므로, 허술한 데에 관계되는 듯하기 때문에 다시 작처(酌處)하여 정탈(定奪)해서 제주(濟州)에 편배(編配)798) 시켰었는데 을사년에 방환(放還)되었습니다."
하고, 조태억은 말하기를,
"유성추는 을사년 이후에는 끝내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혹 그에게 억울함이 있는가 의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각(尹慤)의 일은 문안(文案)에 분명한 곳이 없는데도 장하(杖下)에서 죽기에 이르렀으니, 이제 와서 다시 논할 필요가 없다. 다만 증직(贈職)만 환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제신(諸臣)들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니, 심수현과 이태좌가 말하기를,
"일이 김운택의 경우와 비슷하니, 이에 의거하여 논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운택에게 견주어 보면 그래도 가벼운 편이다."
하니,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신의 의견은 이제 와서 추론(追論)함에 있어 지나치게 각박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하고, 김시환과 정수기는 말하기를,
"신들도 추론할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홍계적(洪啓迪)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증직(贈職)만 환수하라."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죄범(罪犯)이 지극히 중하니 증직(贈職)만 환수해서는 안 됩니다. 신축년799) 에 홍계적이 도승지(都承旨)로 있을 적에 전혀 인신(人臣)의 절조(節操)가 없었으며, 더구나 또 국청(鞫廳)에까지 잡혀 들어갔으니, 그 죄를 이루 다 주토(誅討)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곤장을 맞아 죽었다면 또한 넉넉히 징계될 만하다."
하니, 조태억이 말하기를,
"홍계적은 한쪽에 치우치게 의논을 하는 것이 병통인데다 괴이한 행사가 많았기 때문에 흑산도(黑山島)에 안치(安置)되어 인정(人情)이 모두들 통쾌하게 여겼으나 죽은 날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간혹 그가 반드시 죽을 죄가 아닌데 죽은 것으로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하고, 심수현과 김시환은 말하기를,
"홍계적이 과거 승정원(承政院)에 있을 적에 한 일은 매우 놀랍고 통분스럽습니다."
하고, 조태억은 말하기를,
"이른바 홍계적이 승정원에 있을 적에 한 일이라는 것은 바로 고상신(故相臣) 조태구(趙泰耉)에게 내린 별유(別諭)를 되돌린 일입니다. 그때 경종(景宗)께서 ‘장차 멸망하려는 나의 나라를 부지(扶持)시키라.’는 등의 말로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렸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안타까왔습니다만, 홍계적이 승정원에 있으면서 이를 저지시켜 막아서 행해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가 곤장을 맞아 죽은 데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혹시 지나쳤다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하고, 이태좌는 말하기를,
"중률(重律)로 처치하여도 무슨 애석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조송(趙松)의 말 때문에 곤장을 맞아 죽기에 이른 것은 명백(明白)하지 못한 조처인 듯합니다. 이것과 저것의 경중을 참작하여 본다면 증직(贈職)만 환수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고, 이광좌는 말하기를,
"그가 국청(鞫廳)에 잡혀가 곤장을 맞아 죽은 것은 곧 조송(趙松)의 공초로 인한 것이요 본죄(本罪)는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증직만 환수한다면 비록 지난날의 사람들일지라도 또한 당연한 조처라고 여길 것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점차 융합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홍계적(洪啓迪)·이만성(李晩成)의 부류 들을 기필코 일률(一律)800) 로 다스린다면, 저들이 반드시 심복(心腹)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승정원(承政院)에서 있었던 일이 매우 통분스럽기는 하지만 형률(刑律)은 안치(安置)시키는 데에서 그치면 족한 것이다. 기필코 일률(一律)로 논죄할 것이 뭐 있겠는가? 더구나 이미 곤장을 맞아 죽었으니, 마땅히 참작하여 조처해야 될 듯하다."
하니, 심수현이 말하기를,
"이만성의 경우는 원통하게 죽었다고 해도 가합니다. 홍계적에 이르러서는 비록 사죄(死罪)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끝내 증직만 환수하고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이만성에게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만성은 논하지 않도록 하라."
하니, 서명균(徐命均)과 오명항은 말하기를,
"이만성의 일은 물의(物議)가 모두 무죄(無罪)라고 하니, 마땅히 성교(聖敎)에 따라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이광좌는 말하기를,
"김운택(金運澤)과 윤각(尹慤)의 증직만 환수한 것에 대해 신도 또한 어찌 그 죄의 유무(有無)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신이 다스렸던 것을 원통하게 죽었다고 귀결시키고 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참섭(參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홍계적(洪啓迪)에 이르러서는 신도 또한 일찍이 대헌(大憲)801) 을 지낸 사람인데 곤장을 맞아 죽었다는 것으로 말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죄(本罪)는 끝내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뜻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군신(君臣)의 의리는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미 곤장을 맞아 죽었다면 그에게도 족히 징계되었을 것이다. 따르지 않는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신축년802) 과 임인년803) 을 당하여 역적 목호룡(睦虎龍)이 꾸며내어 무옥(誣獄)을 증성(證成)시킨 다음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구 다그쳐 장살(戕殺)하면서 먼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들을 제거하였는데, 그들이 품은 야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을사년804) 에 이르러 하늘이 종팽(宗祊)을 도와서 의리가 잠시 밝혀져서 역적 목호룡의 훈적(勳籍)을 삭제하고 무옥(誣獄)의 옥안(獄案)을 번복시킴으로써 단서(丹書)805) 의 원통함을 씻어 조금이나마 충혼(忠魂)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징토(懲討)가 엄중하지 못하여 왕장(王章)806) 이 펴지지 못했던 탓으로 거괴(巨魁)의 혈당(血黨)들이 편안하게 아무 일이 없이 지내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시 낭묘(廊廟)에 오르게 되어 조정(朝廷)에 충만하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일이 을사년의 처분(處分)을 일체 번복시킨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다. 연차(聯箚)로 대리(代理)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을 역적 김일경(金一鏡)·목호룡의 도(道)에 귀결시키고, 이를 세광(世光)·이삼(李森)에게 시행시켜서 장상(將相)의 자리에 나누어 웅거하고 있는데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이 또 뒤따라 육지(陸地)로 나왔으니, 종국(宗國)의 걱정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고 두렵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70면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歷史)
[註 778]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779]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780] 금오(禁吾) : 의금부.[註 781] 삼수(三手) : 삼종(三種)의 수법(手法)이란 말. 즉 대급수(大急手)·소급수(小急手)·평지수(平地手)를 이름. 대급수는 용사(勇士)를 시켜 칼을 품고 궁중(宮中)에 들어가 왕을 시해(弑害)하는 것이요, 소급수는 중국에서 사온 환약(丸藥)을 궁녀(宮女)에게 주어 음식물에 타서 왕을 독시(毒弑)하는 것이요, 평지수는 선왕(先王:숙종)의 전교(傳敎)를 위조하여 왕을 폐출(廢黜)시키는 것임.[註 782] 유 판부사(柳判府事) : 유봉휘(柳鳳輝).[註 783] 독대(獨對)할 때의 일 : 숙종 43년(1717)에 있었던 이이명(李頤命)의 독대를 가리킴. 경종 2년(1722) 이헌(李瀗)의 결안(結案)에 "정유년(1717) 사이에 들으니 장세상(張世相)이 장차 독대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먼저 이이명에게 통지하자 이이명이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과연 독대가 있으므로 비로소 장세상을 신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라는 말이 보임.[註 784] 팔형(八刑) : 주(周)나라 때의 여덟 가지 형벌(刑罰). 곧 불효(不孝)·불목(不睦)·불인(不姻)·부제(不悌)·불임(不任)·불휼(不恤)·조언(造言)·난민(亂民)에 대한 형벌.[註 785] 팔의(八議) : 평의(評議)에 의해 형벌을 감면받는 여덟 가지 조건. 즉 의친(議親)·의고(議故)·의공(議功)·의현(議賢)·의능(議能)·의근(議勤)·의귀(議貴)·의빈(議賓)임.[註 786] 지만(遲晩) : 죄인이 스스로 자백할 때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던 말.[註 787] 이영(二英) : 백망(白望)의 처(妻).[註 788] 유선주(劉先主) : 유비(劉備).[註 789] 초매(草昧) : 창업(創業)하기 이전을 이름.[註 790] 호생지덕(好生之德) : 자애심이 많아 살생하기를 꺼리는 제왕(帝王)의 덕.[註 791]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792] 경신년 : 1680 숙종 6년.[註 793] 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않은 임명장.[註 794] 대죄(待罪) : 관리가 그 관직에 있는 것을 겸손하여 이르는 말.[註 795] 금당(禁堂) : 금부 당상.[註 796] 의신간(疑信間) :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정도.[註 797] 광성(光城) :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註 798] 편배(編配) : 유배(流配) 죄인을 배치하는 것.[註 79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800] 일률(一律) : 사형(死刑).[註 801] 대헌(大憲) : 대사헌(大司憲).[註 802]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803]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804]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805] 단서(丹書) : 죄인의 죄명과 성명을 주서(朱書)해 놓은 문서.[註 806] 왕장(王章) : 왕법(王法).
사신은 말한다. "신축년802) 과 임인년803) 을 당하여 역적 목호룡(睦虎龍)이 꾸며내어 무옥(誣獄)을 증성(證成)시킨 다음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구 다그쳐 장살(戕殺)하면서 먼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들을 제거하였는데, 그들이 품은 야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을사년804) 에 이르러 하늘이 종팽(宗祊)을 도와서 의리가 잠시 밝혀져서 역적 목호룡의 훈적(勳籍)을 삭제하고 무옥(誣獄)의 옥안(獄案)을 번복시킴으로써 단서(丹書)805) 의 원통함을 씻어 조금이나마 충혼(忠魂)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징토(懲討)가 엄중하지 못하여 왕장(王章)806) 이 펴지지 못했던 탓으로 거괴(巨魁)의 혈당(血黨)들이 편안하게 아무 일이 없이 지내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다시 낭묘(廊廟)에 오르게 되어 조정(朝廷)에 충만하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일이 을사년의 처분(處分)을 일체 번복시킨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다. 연차(聯箚)로 대리(代理)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을 역적 김일경(金一鏡)·목호룡의 도(道)에 귀결시키고, 이를 세광(世光)·이삼(李森)에게 시행시켜서 장상(將相)의 자리에 나누어 웅거하고 있는데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이 또 뒤따라 육지(陸地)로 나왔으니, 종국(宗國)의 걱정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고 두렵게 여겼다."
윤지술(尹志述)을 사현사(四賢祠)에서 출향(黜享)시키고 이어 증직(贈職)을 환수하였다. 조성복(趙聖復)의 관작(官爵)을 추탈하고 임창(任敞)의 증직을 환수했으니,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의 말을 따른 것이다.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의 관작을 추탈하고 증시(贈諡)를 환수하고 서원(書院)을 철훼(撤毁)하였으며,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의 증시(贈諡)를 환수하고 서원을 철훼하였으니, 이는 영부사(穎府事) 이광좌(李光佐)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날 국안(鞫案)을 번복시키고 나서 조태억(趙泰億)이 연차(聯箚)의 일을 이유로 혐의하여 가부(可否)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면서 먼저 물러갈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어 이광좌에게 이르기를,
"사차(四箚)와 삼수(三手)는 본디 두 건의 일인데 지난번에는 사차(四箚)를 국옥(鞫獄)에 혼입(混入)시켰고 끝에 가서 감률(勘律)할 적에 노적(孥籍)하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중도(中道)에 지나친 처사가 아니겠는가?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그 사이에 사의(私意)가 끼어 있다면 어찌 충(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이명의 일에 대해 나는 손바닥에 쓴 글자는 그의 죄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약원(藥院)에 있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는데, 다만 그의 인품이 순일(純一)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결단코 그가 모의에 참여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김창집(金昌集)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그의 인품을 상세히 알 수 있겠는가마는 그가 몸가짐을 근신하지 못한 점은 있다. 이건명에 이르러서는 억울하다고 할 만하다. 궤참(跪斬)시킨 한 가지 일은 곧 왕돈(王敦) 이후에는 없었던 일인데,807) 이에 이 사람에게 시행했으니, 내가 마음속으로 일찍이 당황하고 놀랐었다. 또 조태채도 그 가운데 혼입(混入)시켰는데, 이 때문에 근년(近年)에 이진망(李眞望)이 교문(敎文)을 개찬(改撰)할 때에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조태채는 국초(鞫招)에 거론되지 않았으니 옥안(獄案)을 상세히 상고하여 조처하소서.’ 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조 판부사(趙判府事)의 일은 그 사이에 경중이 없을 수 없으니, 또한 마땅히 구별(區別)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조(先朝)께서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했을 때 내가 입시(入侍)하여 대간(臺諫)의 합계(合啓) 내용을 들었는데, 매양 연차(聯箚)를 올린 것을 죄로 삼았었으므로 내가 그럴 때면 조금 물러나왔다가 들어가지 않았었다. 대개 그때의 대신(大臣)들은 한 사람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는데 다만 김우항(金宇杭)만이 유독 그 가운데에서 빠지게 되었다. 대저 죄주어야 할 사람은 죄를 주고 용서해야 할 사람은 용서해야 될 것이다. 지난번 노적(孥籍)의 형벌은 이미 지나쳤던 것이다. 사우(祠宇)를 세우고 시호(諡號)를 내린 것은 전혀 근사(近似)하지 않은 처사였다. 오늘 내가 참작하여 죄를 정함에 있어 지당(至當)한 곳으로 귀결시키려고 힘쓰고 있으니, 경(卿) 등은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은 이 일에 대해 참섭(參涉)할 수 없다는 혐의가 좌상(左相)과 다름이 없습니다. 동성(同姓)과 이성(異姓)은 비록 같지 않지마는, 사촌(四寸)임에는 같습니다. 감죄(勘罪)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신이 감히 앙달(仰達)할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어찌 털끝만큼인들 전하(殿下)께서 대리(代理)하는 데 대해 이의(異議)를 품었겠습니까? 선왕(先王)808) 께서 집무하지 않은 데 대한 슬퍼하는 마음은 이것이 사람의 도리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가지고서 전하께서 대리(代理)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하여 맞바로 흉역(凶逆)으로 몰아넣으려 하니, 이것은 신이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느냐 하는 관두(關頭)809) 이므로 이 일에 관계가 되는 곳이면 혐애(嫌碍)도 또한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김창집·이건명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지난날 연석(筵席)에서 상세히 진달했거니와, 신은 그들이 역절(逆節)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명은 최석항(崔錫恒)의 진대(進對)에 노여움을 품고 그때의 승지(承旨)를 추문(推問)할 것을 청하였는데, 실로 이것은 절대로 상정(常情)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정청(庭請)할 적에 한 번 올린 계사(啓辭)는 곧 신이 지은 것인데, 그 가운데 극력 간쟁한 말은 이건명이 모두 산삭(刪削)하여 보냈습니다. 이 두 건의 일을 가지고 보면 그가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길 가는 사람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참(莅斬)810) 한 일은 과연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유생(儒生)이나 필서(匹庶)일지라도 신문(訊問)하지 않고 바로 죽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것인데, 더구나 대신(大臣)이겠습니까? 그때 신은 판의금(判義禁)으로 국좌(鞫座)에 있었는데, 금부 도사(禁府陶事)가 이참(莅斬)하라는 전지(傳旨)를 받아서 가지고 나왔으므로 신이 소장(疏章)을 올려 이참(莅斬)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논하기 위해 즉시 소지(疏紙)를 찾았으며, 이를 찾아내는 즈음에 궐문(闕門)이 이미 닫혀 버렸습니다. 그 이튿날과 또 그 다음날은 모두 국기(國忌)라서 재계(齋戒)하느라고 소장을 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김창집과 이건명이 두 마음을 품은 것은 명백하여 의심이 없으니, 결단코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고, 심수현(沈壽賢)은 말하기를,
"김창집과 이건명의 죄상은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가 매우 분명하고 올바른 것이었으니, 신은 다시 진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참(莅斬)한 일에 이르러서는 대신(大臣)도 또한 그르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참(莅斬)했다는 것 때문에 그 죄를 차감(差減)할 수는 없습니다. 이이명(李頤命)은 대신이 사(私)를 혐의하여 거론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연차(聯箚)를 올렸고 곧바로 정청(庭請)하였으니, 그 죄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조태채에 이르러서는 조금 구별을 두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김시환(金始煥)은 말하기를,
"죄범(罪犯)이 이러하여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한데, 그 관작을 회복시키고 그 시호를 내리고 그 사당을 건립하였으니, 인정(人情)이 어찌 억울해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신(大臣)이 이미 진달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그 청한 것을 윤허하소서."
하고, 오명항(吳命恒)은 말하기를,
"이이명 등 3인은 모두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습니다. 조태채는 다만 연차(聯箚)에만 참여하였을 뿐인데 교문(敎文)에 혼입(混入)시켜 두었기 때문에 함께 역안(逆案)으로 귀착되고 말았습니다. 근년(近年)에 이진망(李眞望)이 교문을 개찬(改撰)할 적에 조태채는 그 가운데서 빼어버릴 것을 청했었는데, 이제 참작하여 죄를 정해서 처분(處分)이 합당하게 된다면 인심이 어찌 열복(悅服)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집(李㙫)은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이미 인혐(引嫌)하였는데, 신도 이건명과는 우서(友婿)811) 관계가 있어 응당 피혐해야 하므로 감히 가부(可否)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정수기(鄭壽期)와 윤혜교(尹惠敎)는 말하기를,
"김창집 등의 죄범은 오로지 환득 환실(患得患失)812)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환득 환실 때문에 임금을 무시하려는 마음을 품었으니, 이것이 역적(逆賊)이 아닙니까?"
하고, 서명균(徐命均)은 말하기를,
"환득 환실하는 마음에서일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사생(死生)을 우려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자의 노적(孥籍)하는 형률(刑律)도 친착(襯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서명균이 대답하려 하였는데, 미처 말을 하기 전에 임금이 말하기를,
"우선 중지하라. 이미 그뜻을 알고 있다. 나의 의견은 지난번의 노적(孥籍)에 대한 한조항은 탕척(蕩滌)시켜 논하지 말고 건립한 사묘(祠廟)는 훼철할 것이며, 김창집·이이명·이건명 3인은 추탈(追奪)하고, 조태채는 구별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고 여기는데, 대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조태채만 어찌 유독 그 직명(職名)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비록 똑같이 처분(處分)했더라도 주상께서 구별하라는 분부가 있으면 이는 구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끝내 그의 직명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그의 시호(諡號)만 제거하면 될 것이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이번의 이 처분은 만세(萬世)를 위하여 인극(人極)을 확립시키는 것입니다. 비록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의 다른 점은 있을지라도 대광(大匡)813) 이란 작명(爵名)은 결코 그대로 보존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심수현은 말하기를,
"3인의 죄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지만, 조태채의 경우는 끝내 차등(差等)의 구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미 사당(祠堂)을 훼철하고 시호를 삭제하였는데 다만 본직(本職)만을 빼앗지 않음으로써 3인의 죄보다 차감(差減)한다는 것을 보였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강쟁(强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태좌(李台佐)는 말하기를,
"조태채는 구별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의 본직(本職)은 그대로 두고 증직(贈職)만 제거하라는 성상의 분부가 당연합니다. 신도 봉승(奉承)할 뜻이 있습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비록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의 구별은 있으나 당시의 거조(擧措)는 거의 분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관질(官秩)을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오명항은 말하기를,
"이이명 등 3인은 그들의 자질(子姪)과 문객(門客)이 국청(鞫廳)에 들어간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감히 집에 있어서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태채는 저 3인과 차이가 있는데 이제 성상(聖上)께서 구별하여 시호를 환수하려 하시니, 신도 또한 강쟁(强爭)할 뜻이 없습니다."
하고, 김시환(金始煥)·서명균(徐命均)·윤혜교(尹惠敎)는 모두 오명항의 말과 같았으며, 이집(李㙫)은 말하기를,
"조태채의 관작을 빼앗는다면 구별한다는 의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똑같이 처분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이광좌는 말하기를,
"조태채가 금천(衿川)에 있을 적에는 다른 사람에게 견주어 보면 스스로 달리한 것이 현저하였는데, 신축년814) 에 이르러 마구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하고, 정수기(鄭壽期)는 말하기를,
"조태채에게는 별다른 구별이 없지 않지만 이미 연차(聯箚)가 있었으니, 그 관작을 그대로 보존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똑같이 추삭(追削)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태채의 일은 당연히 다른 점이 있어야 될 것이다. 서원을 훼철하고 시호를 환수했으니, 추탈(追奪)은 할 수 없다."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김창집·이이명·이건명은 시호를 삭제하고 관작을 추탈하고 서원을 훼철하며, 조태채는 다만 시호를 환수하고 제향(祭享)을 훼철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윤성시(尹聖時)·정해(鄭楷)·서종하(徐宗廈)·이명의(李明誼)를 육지(陸地)로 나오도록 명하고, 박장윤(朴長潤)은 감등(減等)시켜 양이(量移)하도록 명했으니, 이는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 판의금(判矣禁) 심수현(沈壽賢),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의 청을 따른 것이다. 대개 이진유(李眞儒) 등 6인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상소(上疏)에 동참한 자들인데, 박장윤은 명릉(明陵)815) 의 지문(誌文)을 고치자고 청한 자이다. 이때에 심수현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김일경의 옥사(獄事)를 다스렸었습니다. 그때에는 다만 교문(敎文)과 소어(疏語)만을 문목(問目)으로 삼았고, 신축년816) 의 소장은 원래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때 소장에 동참했다는 것으로 소하(疏下)817) 의 사람을 죄주었으니, 이는 매우 옳지 못한 조처였습니다. 더구나 그 소장의 내용에 어찌 죄줄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때 진신(搢紳)들의 소장이 처음 나왔을 적에 무직자(無職者)와 전함자(前銜者)가 모두 동참했었는데, 신은 그때 소두(疏頭)로써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갔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동참한 사람 가운데 서울에 있던 사람은 유독 김일경뿐이었는데, 그의 직질(職秩) 때문에 소두(疏頭)로 추대되었으며, 소장(疏章)도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동참한 사람은 단지 한때 연명(聯名)만 했을 뿐이니 어찌 변별(辨別)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오명항이 나아가 아뢰기를,
"나라에 큰 경사가 있었고 또 오늘 대처분(大處分)을 거쳤으니, 찬배(竄配)되어 있으면서 방송되지 않은 부류들을 순서대로 방송시키는 일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저 이진유·박장윤 등 제인(諸人)은 해도(海島)로 찬배된 지 꼭 3년이 찼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장윤이 지문(誌文)을 고치자고 청한 것은 너무도 생가하지 못한 처사였다. 개찬(改撰)한 뒤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이는 매우 망령된 일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잇달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시 진신(搢紳)의 소장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어찌 7인뿐이었겠는가? 그런데 하필이면 김일경과 동사(同事)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상소 내용이 어쩌면 그리도 참혹하고 각박스러운가? 경솔히 의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찬배된 지 이미 3년이 되었고 더구나 국가에 큰 경사가 있는 때이니, 분별(分別)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감등(減等)하여 육지(陸地)로 나오게 하도록 명하였다. 【이진유(李眞儒)는 나주(羅州)로, 박필몽(朴弼夢)은 무장(茂長)으로, 이명의(李明誼)는 흥양(興陽)으로, 윤성시(尹聖時)는 영광(靈光)으로, 서종하(徐宗夏)는 무안(務安)으로, 박장윤(朴長潤)은 성주(星州)로 이배(移配)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73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註 815] 명릉(明陵) : 숙종의 능호.[註 816]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817] 소하(疏下) : 연명(聯名)으로 올리는 소장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주동이 되는 사람을 소두(疏頭)라 하는데, 이 소두 밑에 이름을 적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임.
전교(傳敎)하기를,
"이중환(李重煥)은 이미 참여한 증거가 없고 누차 대사(大赦)를 겪었으니, 방송하라. 원일서(元一瑞)는 원지(遠地)에 정배하라."
하였다.
10월 7일 기축
다시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領議政)으로 삼고, 심수현(沈壽賢)을 발탁하여 우의정(右議政)으로, 이태좌(李台佐)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오명항(吳命恒)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지평(持平) 이정석(李廷錫)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정형익(鄭亨益)의 죄상은 대간(臺諫)의 소장과 승정원의 계사(啓辭)와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서 이미 상세히 진달되었습니다. 당초 제신(諸臣)들이 궁비(宮婢)를 조사하자고 청한 것은 단지 화근(禍根)을 두절시켜 군부(君父)를 편안하게 하자는 뜻이었을 뿐이니, 어찌 조금이라고 핍박에 근사한 점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정형익이 ‘헤아릴 수 없는 계교다.’라는 등의 말로 정신(廷臣)들을 부도(不道)의 죄과(罪科)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는 제신(諸臣)들을 어육(魚肉)을 만들려는 계책에서 나온 짓인데도 그것이 스스로 부도(不道)의 죄에 빠지는 것이 될 줄 깨닫지 못했으니, 죄가 원찬(遠竄)에 그친 것도 너무 경하게 한 흠이 있는데, 완전히 석방하는데 이르러서는 실률(失律)이 더욱 큽니다. 더구나 후원(喉院)818) 의 비답(批答)에서 붕당으로 지목하였으니, 신은 개연(慨然)한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청컨대 원찬(遠竄)한 죄인 정형익을 방송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사흉(四凶) 가운데 조태채(趙泰采)는 단지 증시(贈諡)만 환수하고 본작(本爵)은 보존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아! 연차(聯箚)가 역적(逆賊)이 되는 이유는 임금을 무시(無視)하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 통의 차자(箚子)에 연명(聯名)을 하였는데, 어찌 수범(首犯)·종범(從犯)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흉(三凶)의 관작을 추탈하고 서원을 훼철한 것은 또한 말감(末減)을 따른 것인데 말감한 가운데서 또 다시 둘로 나누었으니, 여정(輿情)의 울분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 삼흉(三凶)과 함께 똑같이 논단(論斷)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8일 경인
전교(傳敎)하기를,
"지금 이 처분(處分)은 후세의 군신(君臣)의 의리를 정하였고 조정(朝廷)의 공평(公平)하게 처리한 뜻을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처분한 뒤에도 당습(黨習)을 달갑게 여겨 스스로 당을 위해 진력(盡力)할 계책을 세우는 자는 마땅히 역적을 두호[護逆]하는 형률로 논죄하여 먼 지방으로 내치겠다. 나이가 젊고 기세(氣勢)가 날카로운 무리 가운데 과격하여 이기기를 힘쓰는 자들은 조정에 비록 사람이 모자랄지라도 결단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임용하지 않을 것이니, 각자 조심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대신(大臣)의 직명(職名)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일사(一司)가 독계(獨啓)하지 않는 것이 바로 구례(舊例)인데, 어제 지평(持平) 이정석(李廷錫)이 고례(古例)를 무시하고 무분별하게 독계(獨啓)하였으니, 처분을 분명히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지평(持平) 이정석을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좌승지(左承旨) 박내정(朴乃貞), 좌부 승지(左副承旨) 양정호(梁廷虎)이다.】 이정석을 체차하라는 명령을 도로 중지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답하기를,
"이런 사람들에게 경책(警責)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일세(一世) 사람의 마음을 열복(悅服)시킬 수 있겠는가? 지금의 이 복역(覆逆)은 실로 뜻밖이다. 그러고도 왕명(王命)의 출납을 진실하게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문신(文臣)에게 중시(重試)819) 를 실시하여 이정작(李庭綽) 등 5인을 뽑았다.
10월 9일 신묘
오시(午時)에 무지개가 북방에 나타났고, 저녁에는 무지개가 동방에 나타났다.
권이진(權以鎭)을 발탁하여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윤순(尹淳)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조문명(趙文命)을 도승지(都承旨)로, 윤빈(尹彬)을 장령(掌令)으로, 권호(權頀)를 헌납(獻納)으로, 이정작(李庭綽)을 지평(持平)으로, 홍경보(洪景輔)를 정언(正言)으로, 남일명(南一明)을 사간(司諫)으로, 송진명(宋眞明)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정제두(鄭齊斗)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집의(執義) 이중관(李重觀)이 상소하여 이정석(李廷錫)을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령을 도로 정지할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렇게 경장(更張)할 때를 당하여 이정석 같은 사람에게 경칙(警飭)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제주(濟州)의 무사(武士) 홍진하(洪鎭夏) 등이 상소하여 본주(本州)의 목장(牧場)을 폐지하고 경작지로 개간하게 해 줄 것을 청하고, 또 진달하기를,
"본도(本島) 사람도 한결같이 서북(西北) 사람의 예(例)에 따라 수용(收用)할 것을 청합니다."
하고, 또 진달하기를,
"전일 시재(試才) 때에 문과(文科) 이귀제(李龜濟)를 빼어버린 것은 억울합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삼군문(三軍門)820) 의 장관(將官) 가운데 각각 한 자리는 본도(本島)의 사람을 수용(收用)하도록 신칙(申飭)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소장으로 진달한 내용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이귀제(李龜濟)의 일은 소장으로 청한 것이 외람된 일이다."
하였다.
10월 10일 임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아뢰기를,
"숙종조(肅宗朝)에는 수령(守令)을 특별히 천거하는 일이 있으면 경재(卿宰) 이하의 관원과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각기 3인씩 천거합니다. 이는 세수(歲首)의 예천(例薦)에 견줄 수 있는 것으로 간택이 매우 정밀하여 그 효과가 없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숙종조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다시 별천(別薦)하게 하여 재주를 헤아려 의망(擬望)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 수령을 간택하라는 명령이 있어도 문득 형식적인 법문(法文)만 될 뿐이므로, 전후에 신칙해도 실효(實效)를 볼 수가 없다. 지난번에도 별천(別薦)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제 다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숙종조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별천하게 할 일로 거조(擧條)를 내어 분부(分付)하게 하라."
하였다. 오명항이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대동법(大同法)은 쌀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백성을 역사(役事)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능침(陵寢)의 역사와 담지군(擔持軍)821) 에게 제급(題給)할 적에는 저축된 대동미(大東米)를 덜어 내어 매 1인당 각각 5승(升)씩을 지급하게 되어 있으니, 고상신(故相臣) 김육(金堉)이 법을 만든 좋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이 법이 점점 폐기되어 대가(代價)를 주지 않고 백성들을 역사시키고 있습니다. 금후로는 일체 막으소서."
하니, 임금이 신칙하여 엄중히 금지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권익순(權益淳)·유정(柳綎)·조지빈(趙趾彬)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1일 계사
진사(進士) 이인보(李仁普)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이미 확정된 처분(處分)을 고치시어 사대신(四大臣)의 작시(爵諡)822) 를 빼앗으라고 명하시고 또 고(故) 태학생(太學生) 윤지술(尹志述)의 향사(享祠)를 내치라고 명하였습니다. 아! 4대신은 마음과 힘을 다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한몸의 화복(禍福)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사직(社稷)을 부지(扶持)시키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으니, 그 충렬(忠烈)의 빛나는 것은 귀신에게 질정(質正)해도 의심이 없고 수립(樹立)한 절개의 우뚝한 것은 또한 국명(國命)을 무궁(無窮)한 후세까지 연장(延長)시켰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그들의 충원(忠冤)을 살펴 환히 통촉하셨기 때문에 관작을 회복시키고 시호를 내리고 서원을 건립하여 제향(祭享)하게 하였으니, 그 처분이 광명 정대하여 천하 후세에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간사한 무리들에게 그르침을 당하여 갑자기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을 도치(倒置)시키는 거조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아! 지난날 간사한 무리들이 4대신을 없는 죄를 씌워 살해한 것은 단지 연차(聯箚) 한 가지 일이었습니다. 대저 임금의 노고를 나누기 위해 선조(先朝)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를 따른 것인데, 어찌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를 잡고 늘어져 죄안(罪案)을 만들어 기필코 제거하여 없앤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참으로 그지없는 통분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오늘날 북면(北面)하고 전하를 섬기는 자들이 어떻게 감히 ‘역(逆)’이라는 한 글자를 당일의 대신(大臣)들에게 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는 4대신이 죄없이 주륙(誅戮)당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보시고 슬픈 마음이 늘 마음에 간절하였기 때문에 참벌(斬伐)에 대한 탄식이 누차 사륜(絲綸)823) 에 나타났으니, 슬프고 안타깝게 여겨 표장(表章)한 것은 다시 유감(遺憾)이 없었는데, 얼마 안 되어 시비(是非)를 전도(顚倒)시킨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인신(人臣)이 되고 역적(逆賊)이 되는 것은 본디 바뀔 수 없는 정안(定案)이 있는 것인데, 어찌 잠깐 동안 번복되는 사이에 갑자기 충신이 되었다가 갑자기 역적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윤지술의 일에 이르러서는, 보잘것없는 일개 포의(布衣)로서 윤강(綸綱)을 굳게 잡고 지조를 굽히지 않으면서 항언(抗言)하여 의를 위해 몸바쳐 죽는 것을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여겼으니, 그 강직한 기개와 뛰어난 절조는 동선(蕫宣)824) ·하탕(何湯)825) ·진동(陳東)826) ·구양철(歐陽澈)827) 의 훌륭함에 견주어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경화(更化)하는 처음에 제일 먼저 사현(四賢)의 사당(祠堂)에다 종사(從祀)하게 한 것은 전하께서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사기(士氣)를 진작시키는 성대한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 풍절(風節)을 가상(嘉尙)하게 여겨 이와 같이 크게 숭상하시고 또 옛날의 현신(賢臣)들이 이끌어다 견주어 그 절의(節義)를 포양(褒揚)하였으니, 성충(聖衷)에 감발(感發)된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성지(聖志)가 굳지 못하여 총청(聰聽)이 쉽게 현혹되었고 따라서 참적(讒賊)들의 말에 흔들려 이미 결정된 시비(是非)를 일체 번복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며, 전후의 처분이 높은 하늘과 땅의 못[淵]처럼 판이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전하의 성명(聖明)함으로써 성덕(聖德)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명궁(明宮)828) 이 폐허가 되고 신판(紳版)이 불태워졌으므로, 비분(悲憤)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서 감히 부월(鈇鉞)829) 의 주륙(誅戮)을 무릅쓰고 서로 이끌고 나아와 울부짖으며 외치는 바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전지(前旨)를 되돌리시어 충절(忠節)을 드러내고 공의(公議)를 신장시키소서."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엄한 분부를 내려 소두(疏頭) 이인보(李仁普)를 절도(絶島)에 정배(定配)시켰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전일 자폐(自廢)했던 데 대한 뜻을 진달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10월 12일 갑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유생(儒生)들에게 시강(試講)하였는데, 유생이 문의(文義)를 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명경과(明經科)830) 는 곧 천하에 없는 것입니다. 유생의 무리들이 다만 기송(記誦)만을 힘쓸 뿐이어서 고상(故相) 남구만(南九萬)이 강경(講經)할 적에는 문의(文義)를 앞세우고 구두(句讀)는 뒤로 할 것을 청하였고, 최석정(崔錫鼎)은 1경(經)만을 전공하는 과(科)를 행할 것을 청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할 경우 경유(京儒)는 많이 합격되어 선발될 것이 틀림없지만 향유(鄕儒)들은 등제(登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은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김진규(金鎭圭)가 통독과(通讀科)831) 를 창립했는데, 이는 경서(經書)를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술(製述)도 겸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또한 실효(實効)는 있지 않았습니다. 외방의 동당과(東堂科)832) 에 이르러서는 사정(私情)이 낭자하니, 엄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로 경시관(京試官)이 사정을 쓰는 경우에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서장(書狀)을 올려 논핵하게 하고 대신(臺臣)으로 하여금 논핵(論劾)하게 하도록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우라."
하였다.
정수기(鄭壽期)를 승지(承旨)로, 윤동형(尹東衡)을 사서(司書)로, 이선행(李善行)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이 상소하여 스스로 정승의 직책에 걸맞지 않는다는 것을 진달하니, 임금이 우대하는 비답(批答)을 내리고 즉시 나와서 시사(視事)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3일 을미
설서(說書) 이주진(李周鎭)이 상소하여 춘궁(春宮)을 교도(敎導)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기를,
"복어(服御)와 기명(器皿)은 혹시라도 지나치게 사치하지 말게 하고, 유악(帷幄)과 병벽(屛壁)은 비단과 무늬놓는 것을 일삼지 말게 하시며, 반드시 옛날의 저이(儲貳)833) 가 공경하고 효도하는 방법과 현비(賢妃)의 정순(貞順)한 행실을 골라 회화(繪畵)로 그려서 병장(屛障)을 벌려 세워놓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반성하는 자료로 삼게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강규(講規)에 구애하지 말고 궁료(宮僚)들을 불러들여 토론하고 강확(講確)하게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강연(講筵)을 으레 사시(巳時)에 여는데, 겨울철에는 아침에 추우니 마땅히 오시(午時) 초각(初刻)으로 몰려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고 시각은 물려 정할 것을 허락하였다.
임금이 갑진년834) 의 《일기(日記)》를 가져다 보고 분부하기를,
"《일기(日記)》에 어공(御供)에 쓰는 기명(器皿)은 모두 은기(銀器)를 썼다는 말이 있는데 선조(先朝)835) 께서는 검덕(儉德)이 뛰어나시어 어공에 쓰는 그릇을 은보(銀寶)로 쓴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주서(注書)의 기록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반드시 주서가 시골뜨기여서 자기(磁器)를 은기(銀器)로 잘못 안 것일 것이다. 이런 말이 국사(國史)에 기재되면 선조(先朝)의 검덕을 후세에 밝힐 수가 없으니, 이런 뜻으로 사관(史官)에게 분부하여 일기를 상세하게 기록함으로써 선왕(先王)의 검덕(儉德)을 밝히게 하라."
하였다.
고(故) 상신(相臣) 박세채(朴世采)의 문집(文集)을 간행하여 들여오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대사헌(大司憲) 송인명(宋寅明)의 청을 따른 것이다. 이때 송인명이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박세채의 전후 주차(奏箚)는 치도(治道)에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갑술년836) 초에 붕당(朋黨)을 타파해야 한다는 대고(大誥) 등의 문자는 바로 오늘날 탕평책(蕩平策)을 시행하는 때에 있어 취용(取用)하기에 합당한데, 문집이 아직도 간행되지 않았습니다. 숙종조(肅宗朝)에 이미 양남(兩南)837) 으로 하여금 간출(刊出)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도 성명(成命)이 지금까지 폐기되어 있으니, 청컨대 신칙시켜 조속히 간출(刊出)하게 하고, 또한 들여오게 하여 을람(乙覽)838) 하신다면 반드시 치도(治道)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현인(賢人)을 숭장(崇奬)한 연후에야 세도(世道)를 부지(扶持)시킬 수 있다."
하고, 마침내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정언(正言) 홍경보(洪景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을 불러서 다시 국시(國是)를 정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칭정(稱停)839) 에 지나쳤고, 삼사(三司)가 뇌동(雷同)하는 것을 달갑게 여겨 원악(元惡)에게는 당연히 시행해야 될 형률을 빠뜨렸으며 죄는 같은데 혼자만 누락되는 요행이 있게 했습니다. 오늘날 시비(是非)가 조금 밝혀진 것 같기는 하지만 끝내 여정(輿情)을 크게 위로하여 후세에 모범이 되게 할 수 없고, 이런 등류의 사람들은 결단코 임용하지 않겠다고 하신 분부는 더욱 신린(臣隣)을 접대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장차는 아첨하면서 임금의 뜻만을 따르고 입을 다물고서 용납되기를 취하는 자들이 날로 조정으로 나오게 되고 염치를 힘쓰는 사람들은 옷을 걷어 올리고 떠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기기만을 힘써서 성질이 비꼬이고 과격한 사람과는 국사를 함께 할 수 없다. 소장에 진달한 내용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의도는 오로지 과격함을 추허하는 데 있으니, 진실로 이상하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진명(宋眞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나간 해에 신의 망형(亡兄) 고(故) 유수(留守) 송정명(宋正明)은 국경을 나가서 안사(按査)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그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적에 지금의 사간(司諫)인 신 남일명(南一明)이 상호(上胡)840) 의 자문(咨文)을 맡았다는 한 가지 일로써 삭탈(削奪)시키자는 논계를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시의 곡절은 갑자기 일어난 일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대론(臺論)이 낭자하게 죄를 성토하면서 구욕(搆辱)이 자심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기회를 포착하여 상대를 함정에 밀어넣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의 사심(私心)에 있어 어찌 매우 미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세월이 오래 된 뒤에 ‘형이 이미 사망하였다.’고 하여 문득 다시 혐의를 잊고 원망을 푼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석(同席)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15일 정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불러 보았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국옥(鞫獄)에 대한 일은 처분이 이미 아주 정하여졌는데, 다만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에 기재된 아랫 조항의 말과 그의 처음 공초(供招) 가운데의 부도(不道)한 말에 대해서는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떨리고 뼈에 사무칩니다. 흉패(凶悖)스런 말은 차마 하루라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속히 문안(文案)에서 삭제하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안(鞫案)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니, 비록 번안(飜案)한 뒤에라도 이동(移動)시킬 수는 없다. 다른 여러 신하들도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판윤(判尹) 김동필(金東弼)이 아뢰기를,
"당시 옥사를 다스린 여러 신하들의 주달로 인하여 혹시 문안(文案)에 쓰지 않은 말도 있었는데, 지난번 비로소 국안(鞫案)을 얻어 보니 마음이 떨리고 뼈에 사무쳤습니다. 속히 삭제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오명항(吳命恒)·이태좌(李台佐)·송진명(宋眞明)·이중관(李重觀) 등이 모두 대답하기를,
"산삭(刪削)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태억이 또 아뢰기를,
"계묘년841) 의 과거를 복과(復科)시킬 적에 과명(科名)을 별시(別試)로 고쳤습니다. 이제 역옥(逆獄)의 국안(鞫案)을 번복시켰으니, 과명(科名)도 마땅히 다시 토역(討逆)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태억이 또 아뢰기를,
"그때의 훈명(勳名)은 3등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이제 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맹제(盟祭)842) 가 있은 뒤에 참하(參下)에서 승륙(陞六)843) 한 자도 있고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된 자도 있었습니다만, 을사년844) 에 일체 모두 환수(還收)했습니다. 그때의 당상관 가운데 송인명(宋寅明)은 이미 승지(承旨)에 제수되었습니다만, 윤연(尹㝚)·유만중(柳萬重)은 일찍이 대사간(大司諫)과 참의(參議)를 역임했는데도 지금은 강등되어 당하관(堂下官)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군수(郡守)와 현감(縣監)을 역임한 자에 이르러서도 차차 강자(降資)당하였으니, 이제 처분이 올바르게 귀결된 뒤에는 의당 구질(舊秩)을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하고, 오명항은 말하기를,
"과거 기사년845) 에 훈적(勳籍)을 폐기할 때 김덕원(金德遠)의 진백(陳白)에 의해 출륙(出六)하여 승서(陞敍)된 사람은 그대로 두게 했었습니다."
하고, 이태좌·김동필 등 여러 사람들도 모두 조태억의 말과 같은 대답을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어 분부하기를,
"이조(李肇)는 특별히 증직(贈職)시키고, 윤연·유만중은 당상관(堂上官)의 자리에 의입(擬入)하라."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오명항(吳命恒)이 아뢰기를,
"이번에 연좌(緣坐)된 사람에 대해 바야흐로 배소(配所)를 정하였는데, 다만 생각건대, 모자(母子)가 노비(奴婢)가 된 경우에는 각기 다른 곳으로 나누어 보내고, 형제(兄弟)를 정배하는 경우에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게 하였으니, 비록 이들이라도 불쌍이 여길 점이 없지 않습니다. 본부(本府)의 《등록(謄錄)》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니 혹은 같은 고을에다 노(奴)가 되기도 하고 혹은 이웃 고을에 편배(編配)되기도 했는데, 관비(官婢)로서 솔축(率蓄)당하고 있던 자의 경우에도 또한 연좌 때문에 아주 먼 고을의 비(婢)가 되기도 하므로 거소(居所)를 잃고 굶주리고 있으니, 차라리 각기 본고을로 돌려보내어 그대로 정속(定屬)시켜 사역(使役)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물고(物故)된 사람은 빼어버려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자신은 비록 죄를 범했더라도 처자(妻子)야 무엇을 알겠는가? 더구나 미천한 자들이야 더욱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원근(遠近)을 논하지 말고 단지 형률(刑律)만 두도록 하라. 물고된 사람을 이제 거론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오명항이 또 말하기를,
"엊그제 처분할 때 판의금(判義禁) 심수현(沈壽賢)이 옥안(獄案)을 초출(抄出)하였는데, 그 가운데 지열(池烈)은 대계(臺啓)에 의거하여 추감(追勘)했기 때문에 품달(稟達)할 즈음에 누락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는 궁금(宮禁)을 엄중히 했는데도 맹랑한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이 때문에 더욱 그것이 맹랑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묻지 말라."
하였다.
민형수(閔亨洙)·정익하(鄭益河)·윤득화(尹得和)·정형복(鄭亨復)을 삭직(削職)시켰는데, 민형수 등은 모두 사관(史官)이다. 처음에 민형수 등이 피천인(被薦人) 권혁(權爀)이 강(講)에 응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관규(館規)에 의거해 행공(行公)하지 않은 탓으로 심성희(沈聖希)를 부직(付職)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관(史館)에 오래도록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상백(尹尙白)이 복과(復科)되어 도로 봉교(奉敎)에 부직(付職)되었는데, 윤상백이 상소하여 전례를 인용하면서 변통(變通)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에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윤상백을 승륙(陞六)시킬 것을 청하고 민형수 등 4인과 심성희는 모두 삭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어 특별히 겸춘추(兼春秋)에 차출하여 속히 신천(新薦)을 행하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직(付職)되지 않은 사람을 삭직시키는 것은 뒷날의 폐단이 없지 않다. 진달한 것은 모두 시행하되 심성희는 부직하라."
하였다.
다시 남태징(南泰徵)을 충훈부(忠勳府)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삼았는데, 이는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의 청을 따른 것이다. 처음에 남태징이 훈당(勳堂)846) 으로 대계(臺啓)를 받아 개정(改正)되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태억이 아뢰기를,
"훈당(勳堂)을 개정한 것은 3백 년 이래 없었던 것으로 이는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의 짓이니, 다시 차임하소서."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서북인(西北人)도 도총부(都摠府)의 의망(擬望)에 통하도록 할 것을 명하였으니, 이는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태좌(李台佐)의 말을 따른 것이다.
김중희(金重熙)를 사간(司諫)으로, 권영(權穎)을 지평(持平)으로, 정운주(鄭雲柱)를 헌납(獻納)으로, 강필경(姜必慶)을 보덕(輔德)으로, 정석오(鄭錫五)를 사서(司書)로, 여선장(呂善長)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신치운(申致雲)을 부교리(副校理)로, 남일명(南一明)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이정작(李庭綽)을 발탁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삼았으니, 중시(重試)에서 으뜸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대사간(大司諫) 송진명(宋眞明)이다.】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배창석(裵昌碩) 등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김종태(金宗台)·박수(朴璲)·유굉(柳紘)에게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이는 전강(殿講)에서 으뜸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10월 16일 무술
영남(嶺南)의 별견 어사(別遣御史) 박문수(朴文秀)가 청대(請對)하여 영남의 진구(賑救)에 대한 일을 진달하고 또 탐관(貪官)을 징계하는 법을 엄중히 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경주(慶州) 등 고을의 양전(量田)847) 은 추생(抽栍)848) 하여 타량(打量)하게 할 것을 청하였고, 또 전조(銓曹)를 신칙하여 바닷가의 쇠잔한 고을에는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모두 가리지 않고 차임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허락하였다. 또 말하기를,
"외방의 장문(狀聞)은 비록 열 번에 이르더라도 묘당(廟堂)에서는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크게 변통시켜야 할 일이 있으면 신이 왕래하면서 품의(稟議)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주전(廚傳)849) 에 폐단이 있다는 것으로 어렵게 여겼다. 승지(承旨) 조지빈(趙趾彬)이 말하기를,
"암행(暗行)과 선무(宣撫)는 왕래하면서 할 수 없지만, 진구(賑救)를 감독하는 것은 으레 모두 왕래하면서 했습니다. 오명준(吳命峻)·홍석보(洪錫輔)도 또한 그전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로서 왕래하면서 품정(稟定)한 전례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전례가 있으면 진달한 대로 왕래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8일 경자
임광(任珖)을 헌납(獻納)으로, 정우량(鄭羽良)과 황정(黃晸)을 정언(正言)으로, 조진희(趙鎭禧)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광덕(李匡德)을 겸사서(兼司書)로, 심성희(沈聖希)를 검열(檢閱)로, 이중관(李重觀)을 승지(承旨)로, 윤동수(尹東洙)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국조어첩(國朝御牒)》과 《선원보략(璿源譜畧)》을 이제 수정(修正)하려 합니다. 구관 당상(句管堂上)과 교정관(校正官)을 차출하여 본시(本寺)의 당상(堂上)·낭청(郞廳)과 함께 동역(董役)해야 하는데, 전례를 조사하여 보니, 왕세자의 자(字)를 정하는 것과 빈궁(嬪宮)의 책봉(冊封)에 대한 것은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청(廳)을 설치하지 않으면 사체를 중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기해년850) ·계묘년851) ·을사년852) 의 전례에 따라 청을 설치하여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이조(韓頤朝)가 상소하여 본고을의 재황(災荒)에 대한 정상을 아뢰면서 군포(軍布)853) 와 환곡(還穀)은 절반만 받아들이고 사군포(射軍布)와 사노포(寺奴布) 가운데 물고(物故)된 지가 오랜 사람의 경우는 특별히 탕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통영(統營)의 곡식을 획급(劃給)하여 명년 봄 진구(賑救)하는 자료로 쓰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는데, 《심경(心經)》을 강(講)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윤순(尹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사국(史局)에서 교정하고 인간(印刊)하고 보수(補修)하는 일을 하루도 지체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후사(喉司)854) 에서 매양 개정(開政)855) 할 때마다 패(牌)를 발송하기 때문에 패에 따라 왕래하느라 하루의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이뒤부터는 후사에게 사국(史局)에서 현탈(縣頉)856) 하였을 경우에는 당초에 패를 발송하지 말도록 분명히 신칙시키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0월 19일 신축
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이 또 상소하여 사면(辭免)을 원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즉시 나와서 시사(視事)할 것을 명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는데,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아뢰기를,
"이조(李肇)가 찬배(竄配)되었다가 죽었는데, 그의 죄명(罪名)을 박상검(朴尙儉)을 박살(撲殺)했다는 것으로 문안(文案)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박치원(朴致遠)이 무함한 것입니다. 복관(復官)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그의 집안에서 감히 치제(致祭)할 것을 청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즉시 분부하여 거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20일 임인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또 상소하여 사면(辭免)할 뜻을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번의 사람들이 시골의 무지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소장을 올려 신의 아비857) 를 제사지내는 서원(書院)858) 을 철훼(撤毁)시킬 것을 청하면서, 홍주(洪州)를 공산(公山)으로, 병술년859) 을 임인년860) 으로 바꾸어 마치 신이 현달(顯達)하게 된 뒤에 비로소 그곳에다가 영건(營建)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들의 기망(期罔)이 이런 유(類)가 많습니다. 생각하건대, 그 소장에 있는 여덟 글자의 지목은 무욕(誣辱)이 더욱 극도에 이르렀으니, 신이 다시 세로(世路)에 나간다면 다시 무슨 위욕(危辱)을 받을지 알 수가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불러 보았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임인년861) 의 국안(鞫案) 가운데 흉패(凶悖)스런 말에 대하여 신이 지난번에 산개(刪改)하자는 청을 올렸었습니다. 그 국안은 이제 모두 첨지(籤紙)를 붙여서 들여왔는데 탑전(榻前)에서 펴서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오명항(吳命恒)에게 명하여 첨지를 붙인 부분을 읽게 하였다. 읽고 나자, 임금이 말하기를,
"첨지 위에다 ‘말이 부도(不道)를 범했기 때문에 품지(稟旨)하여 산개(刪改)하게 했다.’고 쓰라. 이렇게 하면 목호룡(睦虎龍)이 정법(正法)된 일을 뒷사람이 알 수가 있어서 일이 암매(暗昧)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포도청(捕盜廳)에서 은(銀)과 검(劒)에 대한 문서를 봉하여 가지고 와서 의금부(義禁府)에 유치(留置)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그때 ‘뒷날 차대(次對) 때 가지고 들어오라.’는 전교(傳敎)가 이미 있었으므로 지금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열어서 읽어보라."
하니, 오명항이 펴서 읽었는데 검(劒)을 수색하여 낸 군관(軍官) 박이송(朴以松)의 초사(招辭)에 이르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몇 사람이나 공초(供招)를 바쳤는가?"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은(銀)과 검(劒)을 수색하여 가지고 온 군관이 모두 6인인데 공초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덕사(德寺) 승(僧)과 참견(參見)한 각인에게 반드시 모두 공초를 받았을 것인데, 그것은 의금부(義禁府)로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청(本廳)의 대장(大將)은 누구였는가?"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오중주(吳重周)였던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은(銀)을 찾아온 군관의 초사(招辭)를 읽는데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역적 목호룡의 공초에 이미 보검(寶劒)이라고 했는데, 그 칼은 바로 자루가 부러진 칼이니, 이것을 어떻게 보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당시 당연히 다른 보검을 찾아주는 일이 있었어야 되는데 하지 않았으니, 일이 매우 모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이게 만들었다."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이 초사(招辭)를 가지고 본다면 칼이 이미 자루가 부러졌고, 또 이끼도 끼었으니, 그것이 보검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김용택(金龍澤)의 공초에서도 이미 자신의 칼이라고 자복(自服)했습니다. 덕사(德寺)의 은(銀)에 이르러서는 백망(白望)이 또한 은(銀)과 투서(套署)862) 가 모두 자신의 물건이라고 자복하였고 또한 오서종(吳瑞鍾)의 은(銀)이라고 일컬었으니, 지난번 이의천(李倚天)이 이를 ‘이삼(李森)이 스스로 보관했다가 스스로 내어놓았다.’ 하면서 사람을 무함할 계책을 삼았던 것은 진실로 너무도 교묘하고 참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문서(文書)는 버리고 시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태억(趙泰億)이 또 아뢰기를,
"이번 진퇴(進退)할 처음에 전후로 정청(庭請)·청대(請對)한 여러 신하들을 한결같이 모두 삭출(削黜)했는데, 이는 진실로 분뇨(紛鬧)를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에는 경중이 있고 사람에게는 수종(首從)863) 이 있는데도 한 가지 명목(名目)을 설립하여 놓고 모두 같은 당여(黨與)로 거론하여 쓸어버린 것은 매우 왕자(王者)의 관대한 형벌은 아니었습니다. 국시(國是)가 이미 정하여져 처분(處分)이 지극히 엄중하니, 지금부터는 의당 소탕(疏蕩)시키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따라서 외보(外補)라고 명칭한다면 저들이 어찌 감히 부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좋은 곳으로 차견(差遣)하여 허물을 반성하게 하고 그들의 개과 천선(改過遷善)을 권면(勸勉)할 수가 있으니, 청컨대 이런 뜻으로 전조(銓曹)를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 군하(群下)에게 탕평(蕩平)을 요구하면서 도리서 스스로는 탕평을 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비록 사세(事勢)로 인연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마는, 치우치게 된 탄식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청(庭請) 때 따라서 참여한 사람 가운데도 또한 경중이 없지 않을 것이다. 먼 지방 사람에 이르러서는 역시 깊이 책망할 것이 뭐 있겠는가? 삼사(三司) 외의 먼 지방의 문신(文臣)은 일체 모두 서용하라."
하였다.
조태억(趙泰億)이 또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최석항(崔錫恒)은 정승에 임명된 지 수일(數日) 만에 역적 박상검(朴尙儉)의 변고가 난 것을 듣고는 즉시 출숙(出肅)864) 하고 청대(請對)하여 국옥(鞫獄)은 사체가 자별(自別)하다는 것을 남김이 없이 진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최석항은 이른바 외영(外影)의 제인(諸人)들에게는 그 일이 만연될 것을 염려하여 끝내 나래(拿來)하기를 청하지 않았었습니다. 이희지(李喜之)의 어미에 대해서도 언찰(諺札)을 이유로 옥사(獄事)를 이루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문에 붙이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며, 김일관(金一觀)이 승복(承服)했을 적에도 추대인(推戴人)이 세 번이나 그 이름을 고쳤고, 군사를 동원한다는 날짜가 서로 틀린다는 이유로써 의계(議啓)에 기재하지 않았으니, 이 몇 가지 일을 살펴보면 또한 그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목호룡(睦虎龍)의 처치(處置)에 대한 실착(失着)은 진실로 전일 송인명(宋寅明)이 주달한 바와 같은 것으로 애매 모호하게 처치하기 위한데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신(大臣)이 복관(復官)되면 으레 치제(致祭)가 있는 것이니, 다른 정승과 함께 똑같이 사제(賜祭)하는 것이 아마도 광탕(曠蕩)시키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최상(崔相)에 대한 일은 항상 개연(慨然)하게 여겼다. 그는 국량(局量)이 많으므로 연소(年少)한 대간(臺諫)에게 핍박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끝에 가서 이와 같았으므로 마음속으로 늘 개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조 영상(趙領相)865) 과는 대우에 차이(差異)를 두어 대략 경위(涇渭)866) 의 구별을 보이려 했었다. 대신(大臣)이 진달한 것이 진실로 좋은 말이니, 치제(致祭)하는 한 절목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날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이 사폐(辭陛)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니, 이사성이 아뢰기를,
"병영(兵營)에 이미 단속(團束)하여 연습시키는 군사가 없으므로 식자(識者)들이 한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삼부(三部)의 군사를 창설하여 그 신포(身布)를 감하고, 영장(營將)이 거느린 장무대(壯武隊)의 마병(馬兵)도 신포를 감하여 자보(資保)867) 를 정급(定給)하려 하는데, 감포(減布)한 것에 대한 대체(代替)는 반드시 어떻게 변통해야 될 것인지를 신이 도신(道臣)과 서로 의논하여 계문(啓聞)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의 말을 듣건대, 병사(兵使)가 추생(抽栍)하여 여러 고을의 군기(軍器)를 적간(摘奸)하면 여러 고을에서 평상시 늘 두려워하여 잘 보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신도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해 주소서. 그리고 계속해서 계품(啓稟)할 수가 없으니 출발하는 날 치문(馳聞)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에 대한 당부(當否)를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대답하기를,
"이삼(李森)이 이미 진달한 바, ‘추종(騶從)을 간략하게 하여 왕래하면서 점열(點閱)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했으니, 그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사성이 또 아뢰기를,
"병영(兵營)에는 이미 단속(團束)된 군대는 없고 다만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관(軍官)만 10초(哨)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겨울 3개월은 으레 2초(哨)로 보름을 기한하여 돌려가면서 입번(入番)하게 하고 있는데, 근년(近年)에는 매양 쌀을 바치고 입번을 면제시켜 주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들을 입번(入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김중기(金重器)가 말하기를,
"관서(關西)는 군제(軍制)가 허술하여 병사(兵使)의 수하(手下)에 친병(親兵)이 없고, 여러 고을에 입번을 면제받은 군관(軍官)이 돈을 바치는 법규가 있는데, 이는 다른 도(道)에는 없는 일입니다. 이제 병영에다 예속시켜 단속(團束)하여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번전(番錢)을 면제한다면 이들이 당연히 정병(精兵)이 될 것입니다. 마땅히 병사(兵使)로 하여금 도신(道臣)과 서로 의논하여 변통하도록 하소서."
하고, 조태억은 말하기를,
"이사성은 무장(武將) 가운데 식견이 많고 또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감사(監司)와 서로 의논하여 즉시 변통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김중기는 말하기를,
"감영(監營)에 저축된 미전(米錢)을 병영으로 옮겨 지급하게 하면 병사(兵使)가 이를 운용(運用)할 방도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각 고을의 농방포(農防布) 가운데 의주(義州)에 수송(輸送)한 것도 의당 병영에 획급(劃給)하여 설시(設施)할 재원(財源)으로 삼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은 말하기를,
"과연 김중기가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의당 묘당(廟堂)에서 서로 의논하여 변통하게 해야 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서관(西關)의 일 가운데 해야 될 것은 병사(兵使)가 모쪼록 잘 조처해야 한다."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임헌(臨軒)하여 수신(帥臣)을 보냄에 있어 성상의 하교(下敎)가 이와 같이 정중(鄭重)하니, 병사는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조처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사성(李思晟)은 부임한 지 얼마 안되어 역적 모의를 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이날 주달한 것은 모두가 군비(軍備)를 핑계하고서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품계(稟啓)하지 않고 여러 고을의 병기(兵器)를 점열(點閱)하겠다는데 이르러서는 더욱 헤아릴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런데도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입을 모아 찬조하여 무신(戊申)의 변란(變亂)868) 을 만들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76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역사(歷史)
[註 867] 자보(資保) : 보포(保布)를 내어 실역(實役)에 복무하는 군정(軍丁)을 돕던 보인(保人).[註 868] 무신(戊申)의 변란(變亂) :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가리킴.
사신은 말한다. "이사성(李思晟)은 부임한 지 얼마 안되어 역적 모의를 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이날 주달한 것은 모두가 군비(軍備)를 핑계하고서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품계(稟啓)하지 않고 여러 고을의 병기(兵器)를 점열(點閱)하겠다는데 이르러서는 더욱 헤아릴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런데도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입을 모아 찬조하여 무신(戊申)의 변란(變亂)868) 을 만들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수령(守令)의 남솔(濫率)869) 에 대한 금법(禁法)을 엄중히 신칙하여 범금자(犯禁者)는 영문(營門)에서 결장(決杖)하게 하였다. 그리고 결장받았다고 해서 벼슬을 버리는 자는 즉시 그곳에다 정배(定配)하게 하였다. 이때 영남(嶺南)의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수령의 남솔(濫率)에 대해서는 파직(罷職)시키는 형률(刑律)이 있는데, 근래에 체직(遞職)되기를 바라는 자들이 일부러 이 형률을 범하고 있습니다. 권익관(權益寬)이 호서(湖西)의 방백(方伯)870) 이 되었을 적에 남솔(濫率)한 수령을 환상거말례(還上居末例)871) 에 의거 결장(決杖)했었으니, 지금도 이에 의거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은 말하기를,
"결장(決杖)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수치로 여겨 벼슬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벼슬을 버리는 자들을 엄중히 금지한 후에야 남솔(濫率)한 데 대한 법이 시행될 수 있습니다."
하니, 이에 임금이 이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수원(水原)의 관무재(觀武才)872) 를 내년 봄으로 물려서 거행하도록 명했으니, 이는 좌의정 조태억의 말을 따른 것이다.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윤연(尹㝚)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정언(正言) 황정(黃晸)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연차(聯箚)한 죄를 마땅히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헌신(憲臣)의 독계(獨啓)한 것이 비록 격례(格例)에는 어긋나지만 마땅히 그 사람은 책망하더라도 그 말은 써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양역청(良役廳)을 설치하여 구획(區劃)해 온 지가 오래 되었는데, 을사년873) 에 출척(黜陟)이 있은 이후 이 일이 곧 폐기되었으니, 의당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전대로 청(廳)을 설치하여 대책을 강구(講究)해서 반포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박치원(朴致遠)이 장오(贓汚)와 불법(不法)을 저지른 것이 이선(李譔)의 초사(招辭)에 낭자하게 드러났는데, 여러 달 수금(囚禁)되어 있는 채 아직도 감단(勘斷)하지 않고 있습니다. 해부(該府)에 신칙하여 제때 조속히 사처(査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정언(正言) 정우량(鄭羽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대간(臺諫)에 들어와서 망령되이 한마디 말을 하였는데, 유수(柳綏)의 일은 세상이 다같이 아는 것입니다. 신치운(申致雲)은 한원(翰院)874) 의 동천인(同薦人)으로 명(命)을 받으려 하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본래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없는 사실을 꾸며 날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간장(諫長)875) 김동필(金東弼)의 소장(疏章)이 있으면서부터 저 자신도 죄악이 너무도 커서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하나 얻어서 마치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만들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죄목(罪目)을 덮어서 없애버리기 위한 계책을 세우려 했던 것인데, 이것이 유수(柳綏)에게서 ‘추솔 무망(麤率誣妄)’이란 네 글자가 나오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 네 글자로 역적 김일경의 죄를 덮으려고 했고, 뒷날에는 이 네 글자로 자기 자신의 죄를 면하려고 했습니다. 더욱 웃을 만한 것은 그의 형을 탄핵한 사람에게 지금은 삼가 그의 관함(官銜)을 써서 그가 와서 문안한 것을 감사하고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이것은 더욱 말할 것도 못됩니다. 신치운에 이르러서는 지난번 언자(言者)의 현사(賢邪)를 논할 것도 없이 이미 자신이 몸가짐을 잘하지 못한 것에 연유된 것인데, 그 사실이 조지(朝紙)876) 에 기재되어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그가 스스로 원망하고 스스로 책망하면서 가슴이 무너지고 골수에 사무치는 아픔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대사간(大司諫) 송진명(宋眞明)이다.】 전일에 아뢰었던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흉역(凶逆)의 서원(書院)을 훼철하고 위판(位版)을 불사르라는 명은 실로 성상(聖上)께서 윤의(倫義)를 바루고 징토(懲討)를 엄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조처입니다. 그런데 저 도당(徒黨)을 위해 사력(死力)을 다하면서 의(義)를 어기는 무리들은 이에 예관(禮官)이 명을 받기 전에 배류(輩流)들을 불러 서둘러 떼 지어 몰려가서 그 위판의 판면(版面)을 닦고 그 제자(題字)를 지워버렸으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왕명을 받든 신하가 이런 사실을 분별하지 못하고 덮어두고서 다만 글자가 지워진 목판(木版)만 불살랐으니, 예조(禮曹)의 낭청(郞廳)을 태거(汰去)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또 소회(所懷)를 진달하기를,
"남쪽 지방에 적환(賊患)이 치성하여, 근래에는 부안(扶安)과 변산(邊山)에서 적도(賊徒)들이 많이 몰래 점거(占據)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낮에 장막(帳幕)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노략질을 하고 있는데, 변산(邊山)에 있는 큰 절에 적도들이 들이닥쳐 절의 중을 불러서 말하기를, ‘삼동(三冬)에는 밖에서 거처할 수 없으니 너희들이 우선 절을 빌려주어야 하겠다.’ 하자, 중들이 두려워 감히 따지지 못하고 모두 눈물을 흘리고 흩어져 갔다고 합니다. 남쪽에서 온 사람이 호남 어사(湖南御史)의 말을 듣고 와서 이런 사실을 자자하게 전하였습니다. 전주(全州)의 영장(營將) 전순원(全舜元)은 도적을 금하는 행정(行政)이 너무도 소활(疏闊)하니,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또 부안(扶安) 근처 고을의 수령들을 무신(武臣)으로 가려서 차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후(虞詡)877) 는 일개 문사(文士)였지만 능히 조가(朝歌)의 도적을 평정하였으니, 무수(武倅)878) 를 차송하는 데 대해서는 내가 항상 옳지 않게 여겨왔다. 처음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기곤(飢困)을 견디어 내지 못하게 만들고서는 끝에 와서 또 잡아서 죽이는 것은 형벌을 가지고 강제로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수의(繡衣)를 차견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심(誠心)으로 구제하고 잡역(雜役)을 면제시킨 다음 불러오게 한다면 저절로 안집(安集)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의(繡衣)가 성심을 가지느냐 성심을 가지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니, 특별히 어사(御史)를 신칙해야 한다."
하였다.
10월 21일 계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검토관(檢討官) 조진희(趙鎭禧)가 아뢰기를,
"북관(北關)의 여러 고을은 감영(監營)에서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비록 살옥(殺獄)이 발생하더라도 처음 검사한 뒤 영문(營門)에 논보(論報)하여 재검관(再檢官)을 정하기를 청할 때까지는 순월(旬月)의 시간이 허비되곤 합니다. 때문에 살옥(殺獄)이 있을 경우는 스스로 서로 사화(私和)하고 있어 아주 법의(法意)에 만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니, 북병영(北兵營)에서 직접 검관(檢官)을 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심공(沈珙)이, 전(前) 유수 조영복(趙榮福)이 부방미(赴防米)를 청하여 얻은 전례에 의거 병조(兵曹)로 하여금 신방(新榜)의 부방미를 획급(劃給)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심공(沈珙)에게 여조(麗朝)의 여러 왕릉(王陵)을 수축하고 왕씨(王氏)의 자손도 찾아서 장문(狀聞)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심공이 사폐(辭陛)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어 양전(兩銓)879) 에 하교하기를,
"끊겨진 세대(世代)를 이어주는 것은 왕정(王政)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나는 전조(前朝)880) 의 자손을 끊고 싶지 않은데, 근래의 정목(政目)881) 에 왕씨(王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없으므로 매우 개연(慨然)스런 마음이었다. 각별히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승지(承旨) 조지빈(趙趾彬)이 아뢰기를,
"의금부(義禁府)의 국안(鞫案)에 있는 부도(不道)한 말은 겨우 산삭(刪削)했습니다만, 충훈부(忠勳府)에도 1건(件)의 국안(鞫案)이 있으니 이것도 또한 마땅히 똑같이 산삭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의금부에 이미 1건이 있으면 맹부(盟府)882) 에 겹으로 둘 필요가 없으니, 가져다가 불태워 버려라."
하였다.
10월 22일 갑진
검열(檢閱) 심성희(沈聖希)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위의 동료들이 모두 말천인(末薦人)이 강(講)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단서를 삼고 있습니다. 끝내 명에 응하지 않으면 신의 거취(去就)인들 어찌 다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마땅히 처분(處分)을 내리겠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출숙(出肅)하니,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이광좌가 눈물을 흘리면서 서울과 지방의 재력(財力)이 부족한 것을 진달하기를,
"갑술년883) 에는 병조(兵曹)에서 저축한 포목(布木)이 수천 동(同)이었고 은(銀)이 30여 만 냥이었으며 진청미(賑廳米)가 14만 석이었는데, 관서미(關西米)를 발매(發賣)한 호조(戶曹)의 은(銀)까지 첨가하여 계산한다면 40만 냥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은 은이 6만 냥에도 차지 않고 전(錢)과 포목(布木)은 원래 저축이 없는가 하면 쌀도 모자라고 있는 실정이니, 다만 성상께서 절검(節儉)을 대대적으로 행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근일에 듣건대, 호남(湖南)의 유민(流民)들이 무리를 모아 도당을 이루어 하나는 변산(邊山)에 있고 하나는 월출산(月出山)에 있는데, 관군(官軍)이 체포할 수가 없어 그 기세(氣勢)가 크게 떨친다고 하니,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 호남의 수령을 각별히 가려서 차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을 비록 가려서 보내더라도 영장(營將)을 만약 가려서 차임하지 않는다면 실제의 효과를 요구하기가 어려우니, 영장도 각별히 가려서 차임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또 아뢰기를,
"살옥(殺獄)에 대해 5일에 1차 동추(同推)884) 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영갑(令甲)885) 인데, 동추관(同推官)이 한 달에 여섯 번을 다른 고을로 간다면 고을 일에 마음을 전일하게 기울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기강이 점점 해이해져서 한 달에 1차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한 달에 3차씩 하는 것을 결단코 정폐(停廢)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남유상(南有常)과 신만(申晩)의 귀양살이를 풀어주고, 김약로(金若魯)를 상주(常州)로 이배(移配)하며, 이성해(李聖海)를 김제(金堤)로 이배하도록 명하였다. 남유상 등은 사국(史局)의 낭청(郞廳)으로 총재관(摠裁官) 이광좌(李光佐)를 논척(論斥)했다가 찬적(竄謫)된 사람들이다. 이광좌가 출사(出仕)하고 나서 남유상과 신만을 석방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광좌가 또 윤득징(尹得徵) 등의 일에 언급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윤득징은 비록 거론(擧論)하기가 어렵지만 소하(疏下)인 김약로 등 2인에 대해서는 의당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득징은 그대로 정배하고 소하인 2인은 감등(減等)하라."
하였다.
10월 23일 을사
김정(金政)을 장령(掌令)으로, 윤광익(尹光益)을 교리(校理)로, 유엄(柳儼)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는데,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는데,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처음에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4경(四更) 이전에는 취침(就寢)하시지 않으시어 공사(公事)가 간혹 4경에 내려오면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다스려지기를 구하는 정성을 서울과 지방에서 흠송(欽頌)하고 있습니다만, 성궁(聖宮)이 편안한 뒤에야 만사(萬事)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뒤로는 공사(公事)의 출납(出納)을 2경으로 한정짓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승지(承旨) 조지빈(趙趾彬)이 아뢰기를,
"본원(本院)에서 문서를 밤새도록 출납하고 있는데, 이것이 진실로 우근(憂勤)하시는 성의(聖意)에 있어 잠잘 겨를이 없게 하시는 데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밤마다 잠이 부족하시게 되면 정신(精神)이 노고로 하여 피폐되는 것이니, 이점이 매우 민망합니다. 마땅히 경고(更鼓)로 한정을 정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고로 한정을 정하는 것은 본디 구규(舊規)가 아니다. 선조(先朝)께서 병환이 나실 적에 비록 이러한 법제가 있었지마는, 나는 평소 일찍 잘 수가 없었다. 만일 경고로 한정을 정한다면 스스로 안일(安逸)에 빠질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마음에 편안하지 못하다. 그러나 대신(大臣)이 이미 진달하고 승선(承宣)이 또 계달(啓達)하였으며, 3경은 바로 밤중[夜分]이니 밤중이 된 뒤에는 변보(邊報)와 대신(大臣)의 장주(章奏)로서 일이 시급한 데 관계된 것 이외의 한만(閑漫)한 문서는 봉입할 필요 없이 승정원에서 헤아려 거행하라."
하였다.
10월 24일 병오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상소하여 경자년886) 에 다시 양전(量田)한 뒤 백지(白地)에 세금을 징수하는 억울함에 대해 실제의 현탈(縣頉)을 조사해 주기를 청하고, 또 해마다 흉년이 들어 인민(人民)들이 유망(流亡)하는 정상을 아뢰어 특별히 은혜로운 휼전(恤典)을 내려 제때에 안집(安集)시키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사간(司諫) 김중희(金重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무함받은 일에 대해 한번 폭백(暴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인년887) 에 복합(伏閤)888) 하여 삼사(三司)에서 국문(鞫問)하기를 청한 논계(論啓)에 대해 을사년889) 봄에 처음으로 발론되었는데, 계사(啓辭)하여 이것으로 여러 신하들의 죄안(罪案)을 없는 사실을 꾸며서 만들었습니다. 그 하나는 ‘성궁(聖躬)을 위핍(危逼)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적하여 핍박한 것에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 예로부터 소인(小人)이 사람을 함해(陷害)한 것이 한 없이 많았습니다만, 그 계책의 참독(慘毒)함과 말의 위파(危怕)함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당시 복합(伏閤)한 계책은 연차(聯箚)가 역적(逆賊)이 된다는 것과 징토(懲討)의 대의(大義)를 엄중하게 해야 된다는 것을 밝힌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 계사(啓辭)가 아직도 있으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지금 서울과 지방의 은화(銀貨)가 탕갈된 것은 오로지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使行)이 가지고 들어가는 데 연유된 것입니다. 전일에는 황력 재자관(皇曆齎咨官)890) 의 사행이 가지고 들어가는 은(銀)이 거의 15만 냥에 이르렀으므로 감사(監司) 한지(韓社)가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팔포(八包)891) 의 법(法)을 엄중히 지켰기 때문에 그 수량이 매우 적었습니다만, 그러나 그 사행이 아무 탈없이 돌아왔습니다. 임인년892) 이후에는 새로 법식(法式)을 정하여 1천여 냥을 지급했는데도 그 사행이 또한 조금도 구애가 없었습니다. 이 뒤로는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사사로이 역관(譯官)에게 은을 대여(貸與)하거나 혹 무역(貿易)을 핑계하고 지나치게 지급하는 경우에는 엄격히 금단(禁斷)하여 이를 범한 사람은 비록 대관(大官)일지라도 무거운 책벌을 가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대사간(大司諫) 송진명(宋眞明), 지평(持平) 유엄(柳儼)이다.】 전일에 아뢴 합계(合啓)를 다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진원(閔鎭遠)의 일은 그것이 어찌 삭출(削黜)에까지 이르겠는가? 갑자기 죄인이라는 이름을 민진원에게 가하는 것은 그것이 오르내리며 보살피는 성모(聖母)의 영령(英靈)에 대해 어떠하겠는가? 대계(臺啓)를 한번 따르면 또 가율(加律)시키라는 계사(啓辭)가 있을 것이니, 따를 수가 없겠다. 민진원은 다만 관작(官爵)만 빼앗으라. 정호(鄭澔)는 한번 보고도 이미 그가 노쇠(老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원찬(遠竄)시켰다가 죽게 된다면 대신(大臣)을 죽였다는 이름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다."
하고, 인하여 근처(近處)에다 부처(付處)893) 하였다. 대관(臺官)들이 그 처벌이 가볍다는 것을 극력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을 삭출(削黜)시키는 것이 어찌 가벼운 처벌이겠는가? 이밖에 더 가중시킬 수는 없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동남쪽의 여러 병영(兵營) 가운데 물력(物力)이 풍부한 곳은 다만 통영(統營)과 전라 병영(全羅兵營)뿐인데, 작년과 금년에 창고의 저장이 탕갈되어 기록된 장부(帳簿)가 전혀 모양을 이루지 못하므로 전하는 이야기가 낭자하게 퍼지고 있으니, 특별히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장부를 명백하게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법금(法禁)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법사(法司)의 계방(稧坊)의 폐단에 연유된 것입니다. 금리(禁吏)들이 미포 아문(米布衙門)에 소속된 사람과 각전(各廛)의 시민(市民)들과 계방(稧坊)을 만들고는 뇌물을 받고 금제(禁制)를 면제해 주고 있으니, 삼사(三司)에 출금(出禁)894) 을 신칙시키고 잘못된 법규를 파기시킨 다음 드러나는 대로 무겁게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일에 아뢴 것 가운데 이봉상(李鳳祥)의 일에 대해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에 나이가 찼었는가? 그가 망명(亡命)한 것이 어찌 그의 한 짓이겠는가?"
하고, 이어 대신(大臣)에게 하문하니, 영의정(領議政)은 인혐(引嫌)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며,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과 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은 대계(臺啓)를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대답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응당 죽어야 할 사람이 다시 살아났는데 이제 또 죽인다는 것은 왕자(王者)의 관대한 형벌이 아니다. 감사(減死)하고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신(武臣)이 당론(黨論)을 하는 것은 망국(亡國)의 근본이라는 전후의 성교(聖敎)가 매우 엄준하였는데도 이재항(李載恒)은 이에 품계가 높은 무신(武臣)으로서 자기 아들에게 벼슬을 버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경화(更化)한 처음에 병을 핑계하고서 기필코 군문(軍門)의 직임에서 체직되는 등 멋대로 무엄하게 굴었습니다. 이재항을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인물의 진퇴(進退)는 전지(銓地)에 달려 있는 것인데, 신진(新進)의 견품(甄品)895) 을 오로지 병필(秉筆)의 관원에게 책임지우고 있습니다. 지난번 새로 통의(通擬)한 두 사람은 세덕(世德)과 가벌(家閥)이 화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혹은 부랑(浮浪)에 가깝기도 하고 혹은 소암(疎闇)에 관계되기도 하여 물정(物情)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데도 갑자기 통의(通擬)하여 조금도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기는 뜻이 없었으니, 해당 당상관과 낭청(郞廳)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성덕윤(成德潤)은 선정신(先正臣) 성혼(成渾)의 손자이고 임광(任珖)은 고(故) 참의(參議) 임수간(任守榦)의 아들입니다. 가세(家世)가 이러한데다 전랑(銓郞)이 이미 통의(通擬)하고 난 뒤 하자에 대한 논의가 없었는데도 이에 부랑하다느니 소암(疎闇)하다느니 하고 논하는 것은 실로 과당(過當)한 것입니다.
하고, 조태억(趙泰億)·심수현(沈壽賢)도 잇달아 진달한 것이 이광좌의 말과 같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규경(規警)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윤허한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시배(時輩)들에게 권병(權柄)을 다투어 분당(分黨)하려는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계사(啓辭)가 있었던 것인데, 부랑하고 소암(疎闇)하다는 지척(指斥)은 실로 과중(過中)한 것이 아니었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78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행정(行政)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역사(歷史)
[註 893] 부처(付處) : 유배(流配)에 처한 죄인에게 그 정상을 너그럽게 참작하여 배소(配所)로 가는 도중에 한곳을 정하여 지내게 함. 중도 부처(中途付處).[註 894] 출금(出禁) : 일정한 지역 내에 하리(下吏)들을 내보내어 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것.[註 895] 견품(甄品) : 등급을 매기는 일.
사신은 말한다. "시배(時輩)들에게 권병(權柄)을 다투어 분당(分黨)하려는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계사(啓辭)가 있었던 것인데, 부랑하고 소암(疎闇)하다는 지척(指斥)은 실로 과중(過中)한 것이 아니었다."
검열(檢閱) 심성희(沈聖希)를 삭직(削職)시키고 별겸춘추(別兼春秋)를 차출하여 속히 한림(翰林)의 권점(圈點)을 행하게 하였다.
10월 26일 무신
부사직(副司直)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사국(史局)에 있는 제신(諸臣)들의 연청(筵請)으로 인하여 성상께서 특별히 찬수(纂修)한 여러 당상(堂上)들을 삭출시키라는 명을 내렸다가 곧바로 반한(反汗)했다고 하니, 신은 심골(心骨)이 함께 떨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잇달아 윤득징(尹得徵) 등의 소본(疏本)을 보고서야 그 경개(梗槪)를 대략 알 수 있었습니다. 신도 여러 당상(堂上)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니, 바로 인죄(引罪)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감히 사사(史事)에 대해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구구한 근심하고 개탄하는 정성에 있어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아! 오늘날 당론(黨論)은 비록 고질(痼疾)이 되었습니다만, 한 가닥 공심(公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비록 동지(同志)일지라도 어찌 나쁜 점을 알지 못하며, 저들이 비록 자신과 의견을 달리할지라도 어찌 좋은 점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에 천재(千載)에 미더움을 전할 사서(史書)에다 어떻게 차마 자신의 사적(私的)인 호오(好惡)로써 그 사이에 여탈(予奪)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늘이 반드시 재앙을 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소장(疏章) 가운데 논의에 관계된 것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양쪽을 다같이 보존함으로써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다투는 일에 대한 본말(本末)을 알아서 시비(是非)를 정하게 해야 합니다. 가령 당론을 좋아하는 자가 그런 직임을 맡더라도 저들의 말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할 것인데, 산략(刪畧)하고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은졸(隱卒)을 기록하는 준례는 그의 평생의 언행(言行)을 서술하고 끝에다 사신(史臣)의 의견으로 단정(斷定)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선하면 포양(褒揚)하고 악하면 폄척(貶斥)하는 것으로 또한 감히 있는 것을 없다 하고 사실을 가리켜 허위라 하지 못하며 한결같이 당시의 공의(公議)를 따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언자(言者)들은 피차(彼此)의 장소(章疏)에 상략(詳略)이 같지 않고 제신(諸臣)의 은졸(隱卒)을 기록한 것도 공평하지 않았다고 인정하고 있으니, 아! 너무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사서(史書)의 내용을 전설(傳說)하는 데 대해서는 국가에 상형(常刑)이 있으니, 그 사례(事例)의 엄중함이 어떠합니까? 이제 이에 사실을 지적하여 거론하고 시비(是非)를 논평하면서 ‘아무 해의 일은 이렇게 기록했고 아무 사람의 일은 이렇게 기재했다.’고 하면서 멋대로 방자하게 진달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었습니다. 또 경신년896) 의 구례(舊例)를 인용하여 맞바로 추개(追改)할 것을 청하였으니, 사람으로서 방자함이 어쩌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입니까? 현종[顯廟]의 《실록(實錄)》 가운데 누락시키고 기록하지 않은 것에는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과 국가의 전례(典禮)가 많았으니, 품지(稟旨)하여 따로 편찬하는 것은 사세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때의 선배(先輩)들이 혹 어렵게 여기기도 한 것은 대개 사사(史事)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경솔히 의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제 한둘의 사당(私黨)이 직필(直筆)에 폄척(貶斥)을 받은 것은 그 대소(大小)와 공사(公私)의 구별이 하늘과 땅의 차이 정도가 아닌데, 어떻게 감히 경신년의 일에다 의의(擬議)하여 멋대로 속이면서 말재주를 부려 농락하여 기필코 자기들의 계책을 이루고 난 뒤에야 그만두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길이 한번 열렸는데도 엄중하게 막지 않으면 말류(末流)의 폐단은 하지 못할 짓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경우에는 유자광(柳子光)과 같은 화(禍)를897) 빚어내게 되고 큰 경우에는 이사(李斯)와 같은 분서(焚書)의 변이898) 있게 될 것이 오늘날의 조짐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은 아직도 사서(史書)를 수찬(修撰)할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항상 여러 신하들과 벌여 앉아서 찬수(纂修)할 적에 동료(同僚) 당상(堂上)의 부형(父兄)이 간혹 폄척(貶斥)하는 속에 들어 있는 경우가 있었어도 감히 돌아보지 못하고 일에 따라 직서(直書)했습니다만, 인정(人情)의 있는 바에 그가 보고 알까 두려워하여 문득 사초(史草)를 덮어 비밀에 붙였습니다. 낭청(郞廳)의 부형(父兄)이 또한 폄척하는 속에 들어 있는 경우에는 다른 낭청을 시켜 중초(中草)899) 를 베껴 내게 한 적도 간혹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도 또한 모두 세족(世族)이니 자기의 조선(祖先)과 부형(父兄)의 일이 보개(補改)하는 속에 들어 있지 않을 줄 어떻게 알기에 다시 생각해보지 않고서 이와 같이 쉽사리 진청(陳請)한단 말입니까? 아! 이들이 권세를 휘두르면서 임금을 속이는 것은 이것이 본래 구투(舊套)인 것인데, 자기들의 사심(私心)을 충족시키기 위해 《실록(實錄)》을 고치자고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천고(千古)에 없었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殿下)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법을 굽혀 그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뒷날 양사(良史)가 쓰기를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을 이미 간행(刊行)하였는데, 몇몇 신료(臣僚)들이 사당(私黨) 사람들의 은졸(隱卒)에 대한 내용이 자기들의 뜻에 차지 않는 것에 노하여 완성된 사서(史書)를 고치자고 청하자 임금이 즉시 허락하여 첨삭(添削)과 변환(變幻)을 일체 그들의 하는 짓에 맡겼다.’고 한다면, 천하 후세에서 오늘날의 처분(處分)을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고는 잇달아 통곡하고픈 마음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성명(成命)을 중지하시면 사사(史事)에도 다행이 되고 성덕(聖德)도 빛나리라고 여겨집니다.
신이 또 삼가 대신(大臣)의 차자(箚子)를 보건대, 찬수한 여러 신하들의 평일의 언행(言行)을 논한 데 이르러 더없는 무욕(誣辱)을 가하였습니다. 신 등의 언행은 진실로 일컬을 것이 없습니다만, 말의 경박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조정을 탁란(濁亂)시킬 때를 당하여 맨 먼저 김일경(金一鏡)을 실록 당상(實錄堂上)으로 삼았으니, 사람의 언행이 반드시 김일경과 같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사서(史書)를 찬수하는 직임에 합당하단 말입니까? 김일경의 역절(逆節)은 남김없이 드러났는데도 대신(大臣)이 특별히 추장(推奬) 발탁하여 대사마(大司馬)900) 에 의망(擬望)하기에 이르렀으니, 대신의 언행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신 등이 대신(大臣)에게 배척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신이 지난해에 권익관(權益寬)의 소어(疏語)가 음흉한 데 대해 소장을 올려 논했었는데, 이제 듣건대, 권익관이 소장을 올려 진달하여 스스로 변명하면서 침해하고 비난하는 말이 낭자할 뿐만이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비록 그 소장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삼가 놀랍고 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김일경의 지친(至親)으로서 모주(謀主)가 되었었으니, 무릇 김일경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은 모두 이 사람이 지시한 바이므로 그의 소어(疏語)의 음흉함은 다만 여사(餘事)일 뿐이었습니다. 국가에서 형벌을 잘못하여 죄가 북변(北邊)에 귀양보내는 데 그쳤으므로 여정(輿情)의 분노가 오래갈수록 더욱 심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지난번 묘당(廟堂)에서 제일 먼저 발탁 기용한 것은 이것이 무슨 의도입니까? 김일경의 역절(逆節)은 실로 소장(疏章)가 교문(敎文)에 있는데 교문을 지은 것은 임인년901) 9월에 있었고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려 진달한 것은 8월에 있었으니, 교문 가운데 무핍(誣逼)에 관계된 문자는 모두 옥당(玉堂)의 차자 가운데서 나온 것이므로, 첨가한 것은 단지 ‘금정(禁庭)에서 피를 밟았다[蹀血禁庭]’902) ’는 네 글자뿐입니다. 김일경이 복주(伏誅)된 뒤에 이르러 저들이 승정원(承政院)의 《일기(日記)》를 먹으로 지우고 옥당(玉堂)의 《등록(謄錄)》을 빼내어 고쳤는데, 이는 모두 전하께서 직접 눈으로 보신 일입니다. 그 죄악의 정상이 더없이 절통(絶痛)한 것으로 당초 섬[島]에 귀양보낸 것도 이미 왕장(王章)을 어긴 것인데 이제 와서 마구 방면하고 있으니, 이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더욱 놀라워합니다. 그런데도 전조(銓曹)의 장관(長官)이 처음 정사(政事)에서 서둘러 추장(推奬)하여 기용하기를 마치 공(功)이 있는 자에게 보상하듯이 하였습니다. 윤서교(尹恕敎)를 대망(臺望)에 수망(首望)으로 의망한 것 같은 것은 생각하건대, 논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바야흐로 뜻을 기울여 총애하는 자세로 사람을 진용(進用)하고 있으므로 비록 죄과(罪過)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다만 덮어주려고 힘쓰고 있는데, 저들의 도리에 있어서 일호(一毫)라도 고석(顧惜)903)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이런 등류의 죄범을 저지른 부류들을 어떻게 감히 전처럼 기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김일경은 비록 죽었지만, 김일경의 혈당(血黨)이 조정에 가득차 있고, 김일경의 심법(心法)이 다시 오늘날에 전하여지고 있으며, 김일경의 언의(言議)가 다시 오늘날에 행해지고 있는데, 김영해(金寧海)의 계사(啓辭)가 이직도 고지(故紙)에 전하고 있으니, 세속에서 이른바 ‘낫으로 눈을 가린다[以鎌掩目]’는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킨 말입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어찌 이런 논의(論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사사로이 우습기도 하고 절통하기도 합니다.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조정을 바르다고 여기십니까, 바르지 않다고 여기십니까? 만일 바르다고 여기시면 역신(逆臣)의 유얼(遺孼)들이 어떻게 성상의 좌우(左右)에 포열(布列)해 있을 수 있겠으며, 만일 바르지 않다고 여기시면 어찌하여 바르게 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농락하여 궤란(壞亂)시키는 대로 맡겨 두어 의리(義理)가 날로 어두워지고 기강(紀綱)이 날로 문란하게 만드십니까?
신은 청컨대, 바로잡는 도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어(古語)에 말하기를, ‘자신의 마음을 바루어 백관(百官)들을 바룬다.’ 했고, 또 말하기를, ‘자신을 바룬 뒤에야 상대를 바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조정을 바로잡는 도리는 다만 전하께서 자신을 바로잡는 데에 달려 있는데, 전하께서 자신을 바로잡는 데 대한 요점은 계술(繼述)을 잘하고 성신(誠信)을 힘쓰고 궁위(宮闈)를 엄중히 하고 사경(邪逕)을 막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늘 여기에 마음을 두시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마소서. 신은 진실로 이 한마디가 발론되자마자 큰 화(禍)가 금방 닥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신의 이해(利害)만을 계교한 채 마음속으로는 말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으로 감히 말하지 않는다면 살아서는 불충(不忠)한 신하가 될 것이요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이기에 감히 부월(斧鉞)을 무릅쓰고서 신엄(宸嚴)904) 을 번독스럽게 합니다."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엄중한 교지(敎旨)를 내려 대정현(大靜縣)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켰다.
10월 27일 기유
부수찬(副修撰) 윤광익(尹光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양사(兩司)에 대한 처치(處置)가 본관(本館)905) 으로 귀착되었습니다. 신이 부수찬(副修撰) 조진희(趙鎭禧)와 입락(立落)을 서로 의논할 즈음에 신은 헌신(憲臣)의 논계는 오로지 협잡(挾雜)에서 나온 것으로 공의(公議)를 아주 거스른 것이라 여겨 낙과(落科)에 두려고 하였습니다만, 동료(同僚)의 의논은 양쪽이 다 그르다는 의논을 펴서 시끄러움을 진정시키려는 계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끝내 의논이 귀일(歸一)되지 않았습니다."
하고, 조진희도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평(持平) 유엄(柳儼)의 처치(處置)에 대해 신은 생각하기를 성덕윤(成德潤)·임광(任珖)이 두 사람의 세덕(世德)과 문벌(門閥)은 어떤 선발이든지 합당하지 않겠는가 하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덕윤은 조그만 구애되는 단서가 있고 임광은 지난번 올린 차소(箚疏)에서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물정(物情)이 바르게 여기지 않고 있는데 전조(銓曹)에서 모두 극선(極選)에 의망(擬望)한 것은 갑자기 한 일에 관계되는 것 같으니, 이것이 사헌부의 계사(啓辭)가 과격하게 나오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반드시 조금도 한쪽을 도우고 한쪽을 누르는 일이 없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분요(紛鬧)를 진정시키는 방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료(同僚)들의 의논이 서로 어긋나는 탓으로 끝내 귀일(歸一)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하번(下番)의 의논은 그 뜻이 진실로 옳다. 지금은 탕평(蕩平)을 힘쓰는 때이니, 어찌 한결같이 예투(例套)를 따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28일 경술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아래로 지나갔는데, 그 빛이 땅을 비추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윤순(尹淳)이 김유경(金有慶)의 소장(疏章)으로 인해 인혐(引嫌)하면서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맡은 것은 간간이 빠뜨려진 것을 보찬(補撰)하여 따로 편말(編末)에 붙이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저 사람이 추개(追改)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마치 그전 것을 산삭(刪削)하고 새로운 것을 첨가하는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유자광(柳子光)과 이사(李斯)를 예로 들어 더할 수 없는 비난을 퍼부었으니, 너무도 무리(無理)한 처사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김유경의 소장에 대해서는 이미 처분(處分)을 내렸다. 이런 등류의 비난하는 말을 어찌 입에 담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문학(文學) 조현명(造顯命)과 정언(正言) 황정(黃晸)이 김유경의 상소로 인하여 또한 모두 상소하여 인혐(引嫌)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김유경의 상소(上疏)에 신이 권익관(權益寬)을 발탁 기용한 것을 허물로 삼았는데, 권익관이 지난번에 좌죄(坐罪)된 것은 전혀 없는 사실을 꾸며서 날조한 데서 나온 것이고 또 병한(屛翰)의 재주는 이 사람보다 나은 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잇따라 검거(檢擧)906) 하여 북백(北伯)907) 에 수망(首望)으로 의망했던 것인데, 이는 재주 있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29일 신해
김시형(金始炯)을 정언(正言)으로, 강필경(姜必慶)과 신치운(申致雲)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광익(尹光益)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사행(使行) 때에 사상(私商)들의 매매(賣買)를 금하는 법을 다시 엄중하게 신칙했다. 이에 앞서 평안 감사(平安監司) 윤유(尹游)가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행의 사상(私商)에 대한 폐단을 진달하고 과조(科條)를 엄중히 제정할 것을 청하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 폐단을 엄중하게 막지 못하면 만윤(灣尹)908) 은 중률(重律)로 다스리고 범법자(犯法者)에게는 잠상률(潛商律)로써 시행하라."
하고, 이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니,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상고(商賈)와 역관(譯官)의 무리가 은화(銀貨)를 가지고 가서 멋대로 잠상(潛商)질을 하기 때문에 돌아올 때 잇닿은 복마(卜馬)가 거의 1천 필(匹)에 이르는데, 만부(灣府)909) 에서는 세금 거두어 들이는 것을 이롭게 여겨 금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염찰(廉察)하여 계문(啓聞)하게 한 다음 해당되는 형률(刑律)을 시행하게 하소서."
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
대사성(大司成) 송인명(宋寅明)이 김유경(金有慶)의 소장(疏章)으로 인해 상소(上疏)하여 인혐(引嫌)하기를,
"사서(史書)를 개찬(改纂)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전례가 있으므로, 원래 새로 만들어 노여움을 받을 그런 일이 아닌데, 더구나 지금에 보궐(補闕)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빠진 것을 별지(別紙)에 추보(追補)하는 것이니 ‘고친다[改]’는 한 글자에 관해서는 논할 것이 못됩니다. 그런데 무오 사화(戊午史禍)와 진(秦)나라 때의 분서(焚書)를 또 무엇 때문에 성세(聖世)에 이러한 지나친 우려를 한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대제학(大提學)의 소장(疏章)에 대한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김유경(金有慶)의 소장은 그 내용이 망극(罔極)하여 그의 소장에게 말한 ‘아무 해에는 이와 같았고 아무 사람은 이와 같았다.’고 한 말은 전혀 허망(虛妄)한 것입니다. 성상(聖上)께서 신에게 ‘어느 해의 책자(冊子)를 간열(看閱)했느냐?’고 묻기에, 신이 ‘아무아무 해’라고 답하였는데, 그때 이러니저러니 한 것이 어찌 이것을 가리킨 것이었겠습니까? 김일경(金一鏡)을 사임(史任)에 차임한 것에 이르러서는 신이 조정(朝廷)에 나오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신과 김일경은 연월(燕越)910) ·빙탄(氷炭)911) 같은 사이로서 그의 자급(資級)을 올려 의망(擬望)한 것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그것이 포장(褒奬)하여 발탁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 세상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신은 이것을 이유로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고 전후 소계(疏啓)를 올려 끝없이 송죄(訟罪)했습니다. 신이 조정에 나온 지 수개월에 악언(惡言)이 세 번이나 이르렀으니, 물러가 전리(田里)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10월 30일 임자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봉상(李鳳祥)을 폄출(貶出)하여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삼았다. 이때 이봉상이 정청(庭請)에 따라서 참여했다는 것으로 인혐(引嫌)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으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군병을 거느리는 신하는 다른 사람과 저절로 다르기 때문에 비록 큰 혐의의 단서가 있을지라도 분의(分義)에 있어 한결같이 거절해서는 안되는데, 더구나 무변(武弁)이 색목(色目)을 하는 것이겠는가? 내가 이를 엄격하게 징계하려 했었지만 우선 정청(庭請)에 따라서 참여한 사람에 대해서는 논죄하지 말게 하였으니, 자신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으면서 한번 인혐하는 것은 그래도 그럴 수 있겠지마는, 누차 소장을 올려 비답을 받은 뒤에 개석(開釋)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소명(召命)을 거듭 어기고 있으니, 이미 미안(未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습진(習陣)까지 탈품(頉稟)한 것은 더욱 미안스럽기 그지없는 처사이다."
하고, 드디어 이 명을 내렸다.
김유(金濰)를 사간(司諫)으로, 이광보(李匡輔)와 남일명(南一明)을 수찬(修撰)으로, 조적명(趙迪命)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함창(咸昌)의 유생(儒生) 곽붕세(郭鵬世)가 상소(上疏)하여 시폐(時弊) 아홉 조항을 진달하였다. 첫째는 명분(名分)을 바루어 기강(紀綱)을 밝힐 것, 둘째는 수령(守令)을 가려서 쇠잔한 백성들을 소생(蘇生)시켜 줄 것, 셋째는 과법(科法)을 엄중히 하여 사정(私情) 쓰는 것을 막을 것, 넷째는 구적(舊糴)을 정지하여 민정(民情)을 진정시킬 것, 다섯째는 방납(防納)912) 을 엄중히 하여 민폐(民弊)를 제거할 것, 여섯째는 유정(游丁)을 없애어 군액(軍額)에 충당시킬 것, 일곱째는 전화(錢貨)를 파기하여 공사(公私)를 편리하게 할 것, 여덟째는 공죽(貢竹)을 배[船]로 운송하여 헛된 경비를 줄일 것, 아홉째는 조령(鳥嶺)을 수축하여 관방(關防)을 튼튼하게 할 것 등이었는데,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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