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계축
신광하(申光夏)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11월 2일 갑인
김중기(金重器)를 총융사(摠戎使)로, 남일명(南一明)을 부교리(副校理)로, 조진희(趙鎭禧)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보덕(輔德)으로, 조최수(趙最壽)·정우주(鄭宇柱)·이정필(李廷弼)을 승지(承旨)로, 강박(姜樸)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윤(右尹) 이정제(李廷濟)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제 양역(良役)913) 의 폐단을 논하는 자가 매번 말하기를, ‘폐단을 바로잡는 방책은 오직 1필의 군포(軍布)914) 를 감하고 용도(用途)를 절약함에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은 그럴 듯하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오늘날 수봉(收捧)하는 군포(軍布)가 대략 70여 만 필인지라, 만약 반액으로 감한다면 35만여 필이 되는데, 국가의 경비를 반액으로 감하지 않는다면 반액으로 감한 군포로써는 결코 수용(需用)에 충당하기 어려워서 그 형세가 장차 부세(賦稅)를 더하는 데에 이를 것입니다. 2필의 수봉이 비록 무거우나 유래(流來)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부세를 더하는 폐단이 새로 생긴다면 온 나라 백성들이 모두 놀라서 장차 토붕 와해(土崩瓦解)에 이르를 것이니, 오직 균역(均役)하는 한 가지 일만이 조금이나마 이 고질적인 폐단을 구제할 것입니다. 아! 온 팔도(八道)의 창생(蒼生)이 전하의 적자(赤子)915) 아닌 자가 없는데도 신역(身役)의 경중(輕重)은 현저하게 같지 않은지라 그 경사(京司)에서 곧장 정해 주는 자도 있고 각 영문(營門)에서 사사로이 옹호(擁護)하는 자도 있으며, 각역(各驛)의 보인(保人)916) 과 그리고 향교(鄕校)·서원(書院)·둔전(屯田)·목장(牧場) 및 각읍(各邑)·각청(各廳)에서 혹은 모입(募入)이라 일컫고 혹은 보솔(保率)917) 이라 일컬으며 혹은 장인(匠人)이라고 일컫는 자가 비록 군보(軍保)보다는 많지 않으나 거의 4, 5분(分)의 1, 2에 밑돌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역이 가벼운 자는 백 가지 계략을 내어 뚫고 들어가 몸을 마치도록 편안하게 지내고 신역이 무거운 자는 거의가 침탈(侵奪)을 입어 가산(家産)을 탕진하고 유리 표박(流離漂泊)하다 죽으니, 성명(聖明)의 세대(世代)에 백성을 통제(統制)하는 법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무릇 양민(良民)으로서 1필(疋)의 신역에 들어 있는 자는 북관(北關)과 관서(關西)를 제외하고는 서울과 외방(外方) 각처의 소속을 물론하고 그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모두 도망하고 물고(物故)된 자의 대신에 보충하게 하여 온 나라의 한정(閑丁)을 모두 2필의 신역을 바치도록 할 것입니다. 각영문(各營門)과 각역(各驛)·각처(各處)에서 종전(從前)대로 수용(需用)하던 자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손쓸 도리가 없을 것이니, 그 폐단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는 한 가지 방도가 있으니, 우리 나라의 백성은 양민(良民)과 공사천(公私賤)이 상반(相半)되는데 양민으로 군역(軍役)에 들어 있는 자와 공사천으로서 각기 신공(身貢)을 바치는 자의 1년 동안 연호(煙戶)와 방리(坊里)의 신역(身役)을 통산한다면 거의 2냥(兩)의 전문(錢文)에 밑돌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서울과 외방의 각영문·각역·각처에서 수봉(收捧)하는 1필의 신역을 모두 겸역(兼役)하는 자와 공사천에게서 취(取)해다가 그 대신으로 보충하고는 연호와 방리의 신역을 면하게 한다면 겸역하는 자와 공사천의 무리들은 그 연호와 방리의 신역에 수응하기 보다는 차라리 각처(各處)에 투속(投屬)하기를 원하여 기꺼이 따르는 자가 많을 것이니, 각처에서 1필을 수봉하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양인(良人)과 천류(賤類)들의 신역이 매우 균평(均平)하게 되고 국가가 백성을 통제(統制)함에 있어서도 찬연히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 의논하는 자가 ‘전일(前日)에 1필을 바치던 자가 이제 2필을 바치게 된다면 반드시 칭원(稱冤)하는 사단(事端)이 있을 것이다.’라고 할 것이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군역(軍役)을 내는 자와 그 인족(隣族)의 무리가 무슨 죄고(罪辜)가 있어 가산(家産)을 탕진하며, 각처에 투속(投屬)한 무리들은 무슨 공로(功勞)가 있기에 해마다 가벼운 신역만을 낸단 말씀입니까? 종전(從前)에 요행히 면한 것만도 또한 다행한데 이제 와서 신역을 고르게 하는 마당에 어찌 감히 원망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소사(疏辭)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3일 을묘
태백성(太白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사간(司諫) 김유(金濰)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해에 당한 바는 실로 범상(凡常)한 유례(類例)가 아니었습니다. 홍봉조(洪鳳祚)는 신이 성지(聖旨)를 교무(矯誣)했다 하여 죄상(罪狀)을 낭자(狼藉)하게 논열(論列)하였고, 역신(逆臣) 임징하(任徵夏)는 홍봉조가 신의 죄를 얽은 말을 이끌어 선조(先朝)의 어지러웠던 한 증거를 삼아 앞에서 창도(倡導)하고 뒤에서 화응(和應)하였으니, 그 계획함이 지극히 심각(深刻)함이 있습니다. 대개 신이 일찍이 임인년918) 에 처음으로 간직(諫職)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진달하기를, ‘박치원(朴致遠) 등을 나국(拿鞫)하라는 전교(傳敎)가 있었는데도 공초(供招)받기를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작처(酌處)하도록 한 것은 대신(臺臣)이 환수(還收)의 계사(啓辭)를 올린 때문이었습니다. 청컨대 당초의 성교(聖敎)에 의하여 구문(究問)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신의 반차(班次)가 약간 떨어져 있어 성교(聖敎)의 종위 여부(從違與否)를 소상히 살펴 듣지 못하여 드디어 나아가 전일의 계사(啓辭)를 읽었는데, 몇 구절도 채 읽지 않아서 연신(筵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일은 겨우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하여 이미 윤허를 입었으니 정계(停啓)함이 마땅하다.’고 하기에 신이 곧 읽기를 멈추고 물러나와 정계(停啓)한 것으로 조지(朝紙)919) 에 써 내었던 것인데, 사관(史官)의 기록한 바와 서로 어긋나서 정원(政院)에서 말을 만들어 품계(稟啓)한 뒤에 이르러서야 성교의 청종(聽從)하지 않으심을 비로소 알았으니, 그 사이의 곡절(曲折)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을 논박하는 자들은 혹은 임금을 기만(期瞞)하였다느니 혹은 성지(聖旨)를 교무(矯誣)했다느니 하며 나문(拿問)을 청하고 찬배(竄配)를 청하는 등 심각하게 죄를 얽었던 것이니, 오직 이 한 가지 일로 해서 역신 임징하(任徵夏)가 ‘선조(先朝)를 무욕(誣辱)했다’는 자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 이른바 ‘불윤(不允)한 것을 의윤(依允)이라고 했다.’ 함은 신의 이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이 일이 과연 선조(先朝)가 어지러웠던 한 사단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수찬(修撰) 강박(姜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저번에 간략히 한 소장(疎章)을 갖추어 연석(筵席)에서 다하지 못한 뜻을 모두 아뢰었는데, 국구(國舅)를 논한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신이 다만 그 사훈(辭勳)의 소(疏)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그 당시의 일에 대하여는 분명히 지척(指斥)하지 않았으며, 지금에 와서 비로소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 소장(疏章)의 어맥(語脈)과 정신(精神)이 당초 훈자(勳字) 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국구의 이에 대한 소장에 홀연히 정삼석(鄭三錫)의 이름이 나온지라 신이 보고 매우 해괴하고 의아하였습니다. 그리하다가 신을 특별히 파직(罷職) 하였을 당시의 거조(擧條)를 본즉 ‘정삼석의 일을 언급한 것은 매우 옳지 않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녹훈(錄勳)할 당시의 일을 들어 말하여 김일경(金一鏡)의 추잡한 논의를 도습(蹈襲)하였다.’고 하여, 마치 신의 소장 가운데에 정삼석 및 녹훈(錄勳)할 때의 일을 들추어내어 여열(臚列)한 것처럼 했으니, 신이 이에 놀라고 떨려 무슨 연유로 전전(輾轉)하여 이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저번의 하교(下敎)는 경계하고 신칙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영 대장(御營大將) 신광하(申光夏)는 문벌과 경력(經歷)이 본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재능이 없고 천성이 어리석어 융무(戎務)에 익숙하지 못하며 글을 전혀 알지 못하고 또 글씨도 쓰지 못하여 보통 문첩(文牒)도 입으로 제사(題辭)를 부르지 못하는데도 오랫동안 총융청(摠戎廳)에 재직하고 있어 군졸들의 비웃음을 받은 바 이미 많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이수(移授)하시니 물정이 더욱 마땅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청컨대 어영 대장 신광하를 개차(改差)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 정계장(鄭啓章)은 유약(柔弱)하고 용렬(庸劣)하여 절도(絶島)에서의 목민(牧民)과 방어의 책임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대간의 의논을 아랑곳하지 않고 염의를 무릅쓰고 서둘러 부임(赴任)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필익(李必益)은 탐학(貧虛)하고 불법한 일이 많았으며 인삼을 남봉(濫捧)하여 원망을 부른 죄과가 있었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11월 4일 병진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봉상(李鳳祥)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下獄)시켰다. 이봉상이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와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에게 찾아가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곧장 조정에서 하직(下直)한지라 이광좌가 차자를 올려 나문(拿問)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윤빈(尹彬)이다.】 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나주 영장(羅州營將) 전일상(田日祥)이 일찍이 단천 부사(端川府使)로 있을 때에 혹독한 형장(刑杖)으로 사람을 죽여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청컨대 전 일상을 나문(拿問)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충청 수사(忠淸水使) 유준(柳濬)이 전에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있을 때에 재물을 탐내고 법을 어겨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에 들었으니 팽아(烹阿)의 법920) 을 모면한 것만도 또한 다행입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웅주 거목(雄州巨牧)을 역임(歷任)하고 다시 수사(水使)에 발탁되었으니, 탐학의 풍습을 어떻게 징계해 다스리겠습니까? 청컨대 유준을 율(律)에 비추어 감처(勘處)토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11월 5일 정사
정언(正言) 김시형(金始炯)이 소(疏)를 올려 전일 계사(啓辭) 가운데의 신광하(申光夏)·정계장(鄭啓章)·이필익(李必益)의 일을 거듭 논하고, 또 탕평(蕩平)과 인협(寅協)의 도리를 진달하기를,
"아무런 사고(事故)가 없는 사람은 서용(敍用)함이 마땅합니다. 김재로(金在魯)와 같은 총명과 민첩, 재능과 지략은 실로 동배(同輩) 중에서도 추중(推重)받는 바인데, 다만 지론(持論)이 준열(峻烈)하지 못하고 시의(時議)와 약간 다르다 하여 거듭 권귀(權貴)의 뜻에 거스린 바 되고 이로 인해 침체하고 소외되어 있으나, 신의 생각에는 전조(銓曹)에서 인재를 발탁 수용(收用)하는 방도는 의당 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명언(李明彦)의 재능도 환로(宦路)921) 에서 오랫동안 막힘을 당함은 온당치 않습니다. 전번에 있었던 대간의 의논도 또한 옥당(玉堂)에 있을 때 올렸던 소장(疏章)을 추구(追咎)하여 약간의 청탁(淸濁)의 뜻을 보인 데 지나지 않을 뿐인데 지금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낙점(落點)하기를 아끼시니, 어찌 큰 덕(德)에 겸연(歉然)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신은 근일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도 그윽이 근심되는 바가 있습니다. 헌부(憲府)의 계사 가운데에 ‘부박(浮薄)하고 소활(疎濶)하다는 지척(指斥)은 짐량(斟量)에 결흠(缺欠)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진실로 지나칩니다. 그러나 대신(臺臣)이 이미 일에 따라 서로 규계(規戒)하는 뜻을 붙였는데 유신(儒臣)이 이를 협잡(挾雜)으로 지목하여 낙과(落科)에 두고자 하였으니, 논사(論思)의 처지에서 이러한 당사(黨私)의 논의가 있으리라고는 뜻하지 않았습니다. 전번 정우량(鄭羽良)의 일도 나이 젊고 기세(氣勢)가 날카로워 부추기고 억누르는 사이에 너무 편벽됨을 면하지 못했다고 이를 만하나 간사한 무리들의 작태를 도습(蹈襲)했다는 등의 말은 실로 제목(題目) 밖의 일인지라 이를 신은 개연(慨然)히 여기는 바입니다. 재신(宰臣)의 소장(疏章)은 사체가 가볍지 않은데, 정석삼(鄭錫三)이 진달한 소장(疏章)을 정원(政院)에 보내 온 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말할 만한 것이면 당연히 말을 해야 하나 말하지 못할 일이면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제 입계(入啓)하였다고 소보(小報)에 써 냈더니 도로 가져갔고 오늘 입계하였다고 소보에 써 냈더니 또 가져갔으니, 그 거조(擧措)의 전도(顚倒)됨을 듣는 자가 해괴해 합니다.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는 그 청아(淸雅)한 명망(名望)이 세상의 모범이 되었고 전하께서도 일찍이 동강 일사(桐江一絲)922) 에 비유했으니, 예우(禮遇)의 융숭하심이 고금에 드물다고 이를 만합니다. 무릇 중대한 의논이나 큰 정령(政令)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사신을 보내어 문의하여 의지하는 뜻을 보인다면 원로(元老)가 비록 세상 일을 단념하였다 해도 반드시 그 의견(意見)을 진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가장(嘉奬)하였다.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고 나서 양역(良役)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와 전화(錢貨)를 혁파하는 일의 가부(可否)를 물으니,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로 하여금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혹은 전화(錢貨)를 혁파함이 마땅하다 하고, 혹은 혁파함이 부당하다 하였으며, 혹은 저화(楮貨)를 사용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양역의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에 이르러서는 혹은 호포(戶布)를 시행함이 옳다 하고, 혹은 인구세(人口稅)923) 를 시행함이 옳다 하였으며, 혹은 군문(軍門)를 혁파하고 오위(五衛)의 제도를 복구(復舊)함이 옳다 하였고, 혹은 군문을 모두 혁파함은 불가하니 다만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만을 혁파하고 그 군병으로서 양역(良役) 가운데서 도망치거나 물고(物故)한 자를 대신 보충함이 옳다 하였으며, 혹은 군액(軍額)을 감함이 옳다고 말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윤순(尹淳)은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은화(銀貨)와 저화(楮貨)를 아울러 시행하였고 중간에 면포(綿布)를 사용했으나 모두 불편하다고 일러 왔기 때문에,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비로소 전화(錢貨)의 시행을 건의(建議)했으나 시행하지 못하였고, 갑인년924) 이후에 비로소 시행되었습니다. 대개 전화는 가벼운 화폐(貨幣)이므로 탐장(貪贓)과 뇌물에 이용되고 도둑이 만연(蔓延)되고 농민까지도 말리(末利)를 좇게 되어 인심의 간교함이 모두 전화에 연유되었습니다. 봄철에 가난한 백성들이 부자(富者)의 돈 1냥(兩)을 빌리면 그 값이 쌀 1, 2 두(斗)에 해당하는데 가을에 갑절의 이식을 곡식으로 환산(換算)하면 상환하는 바가 1석(夕)이 넘으며, 봄철에 번포(番布) 값으로 4냥을 빌려 가을에 8냥을 상환하는데 이를 곡식으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5, 6석에 이르니, 아무리 농사에 힘쓰더라도 부채(負債)를 갚고 나면 민간은 모두 텅 비고 맙니다. 이제 비록 백만 냥의 돈을 더 주조(鑄造)한다 하더라도 그 돈은 한갓 부자의 집으로 모일 뿐이며 빈민(貧民)의 고통은 전일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정사년925) 이전에는 돈이 없었어도 오히려 나라를 다스려 갔는데, 이제 어찌 전화(錢貨)를 혁파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고, 판윤(判尹) 김동필(金東弼)은 말하기를,
"전화를 혁파한 후에는 반드시 또 다른 행화(行貨)하는 물건이 있어야 할 것인데, 저화(楮貨)와 면포는 전에 이미 폐단이 있어서 도로 혁파하였으니, 이제 비록 전화를 혁파하는 다른 화폐(貨幣)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폐단은 돈과 다름이 없을 것인지라, 전화를 혁파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이미 혁파할 수 없다면 그 형세가 의당 주전(鑄錢)을 더 하여야 되는데 주전하는 것도 폐단이 있습니다. 이제 만약 방식을 정하여 각읍(各邑)에서 응당 수봉(收捧)할 것은 모두 면포로써 대봉(代捧)하며 백성에게 주는 것은 돈으로 출급(出給)하게 하여 돈을 관고(官庫)에 머물러 두지 말게 하고 다만 나라 안에서만 통용하게 한다면 어찌 부족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태좌(李台佐)는 말하기를,
"돈을 만약 많이 주조(鑄造)하여 온 나라에 많이 퍼지게 한다면 부민(富民)들이 조종(操縱)할 권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돈을 주조하지 않은 지 거의 30년이 되어 돈이 날로 귀해지고 있는지라, 이제 돈이 귀한 폐단을 구제하려면 돈을 많이 주조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저화(楮貨)의 대소(大小)는 어떠한가?"
하니, 박태항(朴泰恒)은 말하기를,
"신이 저화를 보니 장지(壯紙)를 둘로 접은 부피였습니다."
하고, 이광좌(李光佐)는 말하기를,
"소신(小臣)도 또한 일찍이 보았는데 그 제도(制度)가 마치 호조(戶曹)의 선첩(船帖)과 같았고, 초료장(草料狀)보다는 컸는데 사면(四面)에 귀를 만들었고 중간에 관인(官印)을 찍었습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조지빈(趙趾彬)이 말하기를,
"‘옛 규례에 장지(壯紙) 1장을 혹은 12조각으로 쪼개고 혹은 반(半)으로 쪼개어 〈저화(楮貨)로〉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신도 또한 자세히 알지는 못하오나, 이제 만약 1장의 장지를 16조각으로 쪼개어 한 조각마다 동전(銅錢) 1푼으로 대용(代用)한다면, 한 덩이[塊]의 장지를 쪼개면 3백 20냥의 저화를 얻게 됩니다. 장지 한 덩이의 값은 동전 6, 70냥에 지나지 않는데, 동전 6, 70냥으로써 저화 3백 20냥의 수량을 얻는다면 그 이익이 심히 많으며 만들기도 또한 용이(容易)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화(錢貨)를 어찌 혁파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지난번에 주전(鑄錢)을 더하게 하고는 밤중에 이르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 의논을 파한 연후에야 비로소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으니, 나의 생각에는 결단코 혁파하려 한다. 양역(良役)은 호포(戶布)를 시행한 연후에야 백골 징포(白骨徵布)926) 와 인족 침징(隣族侵徵)927) 의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백성을 구제하는 그 근본은 오직 용도(用途)를 절약함에 있고, 그 지엽적(枝葉的)인 것을 구제하는 방책은 상사(上司)에서 부역(賦役)을 직접 정하는 폐단을 과감히 개혁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대개 상사의 가벼운 부역은 그 명목이 수(數)도 없으며 거의 모두 상사에서 직접 정해버리는데, 본읍(本邑)에서는 실지의 수효조차 알지 못하므로 이를 빙자하여 한가히 놀고 있는 자가 거의 열 갑절에 이르고 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무릇 위에서 직접 정하는 명목과 원액(元額) 및 소명(小名)을 각읍에 반포(頒布)하게 하고 이 밖에 빙자하는 자도 시행하지 말고 모두 양정(良丁)으로 돌릴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상사에서 결단코 직접 정하지 말고 반드시 본읍에 관문(關文)을 거쳐 비로소 대정(代定)한다면 빙자하거나 청탁(請托)하는 길이 영원히 끊어지고 인족 침징(隣族侵徵)의 폐단도 거의 구제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절목을 계하(啓下)하여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1월 6일 무오
"형조 참판(刑曹參判) 정석삼(鄭錫三)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스스로 힘쓰시는 바도 탕평(蕩平)이요 군하(群下)의 승순(承順)하고자 하는 바도 또한 탕평입니다. 국외(局外)에 있는 사람도 오히려 허물을 씻고 서로 타협(妥協)하여 함께 정도(正道)를 가려 하는데, 하물며 같은 당중(堂中)에 있으면서 어찌 뒤좇아 지적(指摘)을 가하여 쟁단(爭端)을 일으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혹은 탕평의 명칭을 내세우면서도 괴격(乖激)함을 숭상하고 힘쓰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겉으로는 진정(鎭定)에 힘쓰는 것같이 하면서 실지는 공평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세도(世道)의 근심을 이루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무릇 사람을 채용(採用)하고 물리치는 것은 오직 전조(銓曹)에 달려 있는데, 혹은 이미 의망(擬望)928) 하였다가 도로 뽑아내기도 하고 혹은 6, 7번의 정사(正事)929) 를 넘겨 기다리게 하는 일도 있으며, 심지어는 해유(解由)930) 에 있어서도 혹은 구애(拘碍)되는 자가 있고 혹은 구애되지 않는 자도 있으니, 이것이 과연 일호(一毫)의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끼지 않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우량(鄭羽良)이 사람을 논평함에 있어 너무 까다로운 것은 신도 또한 그를 병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컨대 청탁(淸濁)을 가리기 위한 논의인 것이요 또한 터무니없는 일을 거짓 얽은 것은 아니라면, 공의(公議)를 주장하는 입장에 있는 자로서는 오직 그 기개(氣槪)만은 허여(許與)하고 그 절박(切迫)함만 책망할 일인데도, 이에 도리어 옳지 못하다는 지목(指目)을 가했으니, 이 어찌 물정(物情)에 놀랄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우량이 처음에는 대간(臺諫)의 천망(薦望)에 막힘을 당했으나 처치(處置)한 신하나 탄핵을 입은 사람이 과거의 기풍(氣風)을 새롭게 불식(拂拭)하였는데도 그 천거에 대한 검속(檢束)이 전일과 같으니, 전조(銓曹)에서 등용하고 버림이 과연 타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엄(柳儼)이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두 전랑(銓郞)을 논계(論啓)한 것은 부박(浮薄)하고 소암(疎闇)한 자로 하여금 한때의 전선(銓選)의 권병(權柄)을 관장하면서 더욱 괴격(乖激)한 버릇을 유발(誘發)하지 않게 하려고 한 데 지나지 않았으니, 이 또한 성상(聖上)의 탕평의 뜻을 본받은 데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 유신(儒臣)은 오로지 당파를 보호하려는 사심(私心)을 가지고 감히 협잡을 자행(恣行)했다고 지척(指斥)했으니, 진실로 이와 같다면 대각(臺閣)에 있는 자는 괴격(乖激)한 무리를 반드시 높이 포장(褒奬)한 연후에야 비로소 탕평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총재(冢宰)931) 가 평일에 당파와 관련이 없음을 이미 깊이 알고 있는 바이나, 이 경장(更張)의 시기(時期)를 당하여 어찌 경계함이 없겠는가? 추고(推考)하여 칙려(飭勵)토록 하라. 윤광익(尹光益)이 유엄(柳儼)을 처치(處置)함에 있어 반드시 낙과(落科)에 두려고 한 것을 마음에 항상 해괴하게 여겼다. 특별히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정우주(鄭宇柱)와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정제(李廷濟)이다.】 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총재(冢宰)를 특별히 추고하라는 분부와 유신(儒臣)을 특별히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정침(停寢)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우량의 논한 바가 가혹(苛酷)하기는 하나, 그 뜻을 궁구(窮究)한다면 다른 마음은 없었다. 정우량이 오래도록 대간(臺諫)의 천망(薦望)에 참여하지 못한 것과 유수(柳綏)를 바로 다른 천망에 추천한 것은 마침내 지나치게 부추기고 억누른 것임을 면할 수 없으며, 전랑(銓郞)의 일에 이르러서도 방금 경장(更張)과 칙려(飭勵)하는 날에 있어 한갓 문벌(門閥)만을 취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대저 임광(任珖)이 정우량을 처치(處置)한 것만도 시속(時俗)의 투식(套式)을 모면하지 못했거니와, 이제 이 전랑의 일은 더욱 해괴하다. 유엄의 논한 바가 지나치다고 말하였다면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윤광익의 소장(疏章) 가운데에 협잡하였다고 지척(指斥)하였다. 자신이 경연(經筵)의 신하가 되어 부추기고 억누름이 이와 같으니, 임금의 칙려(飭勵)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량은 지극히 정선(精選)하는 것이어서 예로부터 중난(重難)하게 여겨온 바이니, 새로 의망(擬望)함에 있어 어찌 삼가고 살피지 않겠습니까? 성덕윤(成德潤)은 선정(先正)의 적손(嫡孫)으로서 문학(文學)에는 넉넉하나 오직 시골에서 자라나 어리석고 질박(質樸)한 기질(氣質)이 많아서 적응되지 못한 것은 다만 이 경망한 것이 그 때의 모양이었습니다. 임광(任光)은 문벌이 현혁(顯爀)하여 세상에서 육대 옥당(六代玉堂)이라고 일컫는 바이니 설령 소장(疏章) 사이에 한때 선택하지 못한 말이 있었더라도 어찌 이로써 해치는 데 이를 수야 있겠습니까? 대계(臺啓)가 갑자기 일어나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신이 무슨 면목으로써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정에 나아가겠습니까?
또 김유경(金有慶)의 소장은 그 일편(一篇)의 정신이 오직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려는 계획에 있는지라, 조정의 사류(士類)를 김일경(金一鏡)의 혈당(血黨)이라 이르고 언론(言論)을 김일경의 심법(心法)이라 이를 뿐 아니라 역신(逆臣)의 잔당(殘黨)이 좌우에 가득하다는 말로써 끝을 맺어 오직 김일경으로 연유하여 많은 선류(善類)를 더럽히고 조정의 진신(搢紳)을 무함하려 했으니, 아! 심하옵니다. 그 이른바 처음 정사(政事)에 포장(褒奬)하여 등용했다는 것은 대개 여선장(呂善長)을 가리킨 것입니다. 무릇 여선장이 3년 동안 절도(絶島)에 정배(定配)되매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다고 일컬었으며, 전일의 벼슬자리로 다시 의망(擬望)함에 미쳐서는 신이 그 당시 이조 참의(吏曹參議)였던 조문명(趙文命)과 더불어 상의하여 합의(合議)를 보았고 연석(筵席)에서 품달하여 성명(聖明)의 재결(裁決)을 얻었던 것입니다. 윤서교(尹嶼敎)를 대간(臺諫)의 천망(薦望)에 수의(首擬)했다는 것은 더욱이 터무니 없는 낭설(浪說)입니다. 무릇 윤서교의 일은 이미 품청을 거치지 못한 것이어서 또한 감히 천거(薦擧)도 하지 못했는데 김유경이 또 어떻게 억지로 이를 주어 문자(奏御文字)에 질언(質言)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전랑(銓郞)의 일은 본래 지나치게 혐의할 일이 아니며, 김유경의 소장(疏章)은 이미 소상히 알고 있다."
하였다.
11월 7일 기미
영부사(領府事) 홍치중(洪致中)이 현·도(縣道)를 거쳐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저번에 정신(廷臣)의 계청으로 인하여 임인년932) 옥사(獄事)를 다시 처분하셨다 하오니, 신이 이에 갑절이나 송구(悚惧)해 하는 바입니다. 대개 신이 을사년933) 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있을 당시 성상(聖上)께서 그 여러 신하의 원굴에 대하여 민망히 여기심을 보았고, 더욱이 사대신(四大臣)934) 의 일에 있어서는 그 무함을 밝게 살피시어 사지(辭旨)가 간곡하셨으며, 또 역적 목호룡(睦虎龍)이 고변(告變)하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옥사(獄事)를 다스렸다고 하심은 그 지적하신 뜻이 어디에 있음을 알기에 어렵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이른바 승복(承服)한 자의 결안(結案)의 초사(招辭)에도 서로 어긋난 사단(事端)이 매우 많았으므로 신이 과연 한두 가지 소회(所懷)를 진달하였는데, 오늘날 처분이 갑자기 이에 이르렀으니, 신이 범한 죄가 역당(逆黨)을 옹호한 데로 돌아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아! 을사년에 성교(聖敎)를 팔방(八方)에 선포하여 비록 부녀자와 어린아이, 하천(下賤)에 이르기까지 듣지 않은 자가 없으며 포장(褒奬)한 유서(諭書)와 은휼(隱恤)의 은전(恩典)이 특교(特敎)에서 나온 것이 많았은즉, 이제 와서 별달리 새로운 죄가 없을 것인데도 일체 전일의 성교와 상반(相反)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임(信任)하는 정신(廷臣)에게 바야흐로 정사(政事)를 위임하고 있으므로 우선 여러 사람의 심리(心理)를 따라 그 마음을 위로하고자 한 데에서 나온 듯하오나, 마침내는 성덕(聖德)의 하자(瑕疵)가 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제(世弟)로서 대리 청정(代理聽政)하신 것까지도 여러 신하들의 허물로 삼은 것은 그 관계가 지극히 중대한 데도, 근일에 들은즉 조정 위에서 가끔 방자하게 말하는 자가 있었으나 전하께서 이 일이 성궁(聖躬)에 관련된다 하여 일례(一例)로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엄척(嚴斥)을 가하지 않으신다 하니, 이 어찌 성인(聖人)은 혐의를 피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세도(世道)를 위한 우려를 어찌 이루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헌납(獻納) 임광(任珖)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번에 전랑(銓郞)의 의망(擬望)에 오른 것은 실로 꿈 밖에 일이었는데, 과연 탄핵을 입어 하자(瑕疵)가 모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또 정우량(鄭羽良)의 소장(疏章)에 신이 저번에 처치한 일을 끌어대며 헐뜯는 말이 여지(餘地)가 없었는지라, 신이 이제 처지가 위축(危蹙)되어 어떻게 감히 쟁변(爭變)을 하겠습니까? 다만 정우량이 새로 대각(臺閣)에 들어와 의기(意氣)가 사납고 수법(手法)이 맹렬하여 그의 심각(深刻)한 언론과 구렁에 빠뜨리는 수완 등은 모두 맑은 조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신이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히 최절(摧折)을 가하였다가 그의 노여움이 이미 깊어 온갖 후욕(詬辱)이 갖추어 이르렀으니, 신은 마땅히 길이 벼슬길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1월 8일 경신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중용(中庸)》을 강론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진희(趙鎭禧)가 북관(北關)의 여러 고을에 군비(軍備)가 허술함을 진달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회령(會寧)은 성중(城中)에 우물이 없어 주민(住民)들이 모두 성 밖에 나가서 물을 길어가니, 위급한 때에 믿을 만한 곳이 되지 못합니다. 들은즉 ‘본부(本府)의 수십 리 밖에 운두성(雲頭城)이 있는데 천연(天然)의 험준(險峻)함이 매우 장대(壯大)하고 성중에 또 우물이 있으며 변방 사람들이 서로 전해 이르기를 완안성(完顔城)이라 하고 혹은 오국성(五國城)이라 일컫는다.’고 합니다. 이제 만약 이 성을 수리하여 회령부(會寧府)를 옮기거나 혹은 보라 첨사(甫羅僉使)로 하여금 살게 한다면, 부령(富寧)으로 더불어 무산령(茂山嶺)을 협수(夾守)하여 족히 내외 관방(內外關防)의 형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형편을 살피고 다시 상확(商確)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한 다음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서북(西北) 지방의 별과(別科)를 명년 가을로 물려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왕세자(王世子)의 입학(入學)과 관례(冠禮) 및 가례(嘉禮)의 세 경사(慶事)를 합친 별시(別試)를 장차 명년 봄에 시행할 것이므로 이 명이 있었다.
11월 9일 신유
강박(姜樸)을 부교리(副校理)로, 임광필(林光弼)을 필선(弼善)으로, 주형리(朱炯离)를 장령(掌令)으로, 이도겸(李道謙)을 충청도 별견 어사(忠淸道別遣御史)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번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필익(李必益)의 일에 대해서는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초10일의 차대(次對)935) 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이날은 바로 동지(冬至)인지라 임금이 음기(陰氣)를 억누르고 양기(陽氣)를 부추기며 관문(關門)을 닫고 고요함을 기르는 뜻에서 이 분부가 있었다.
11월 10일 임술
임금이 하교하기를,
"《주역(周易)》의 복괘(復卦)에 ‘복(復)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착한 마음의 실마리가 싹트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어제 천도장(天道章)을 강론하고 오늘 양복일(陽復日)936) 을 만난지라 나도 모르게 때를 만나 느낀 바 있어 오늘의 차대(次對)를 후일로 물려서 행하도록 한 것이나, 양기(陽氣)가 소생하는 때를 바로 만나 하늘을 본받는 도리는 바로 나 자신(自身)에 있는지라 마땅히 더욱 면려(勉勵)하여야 될 것이나 어찌 서로 경계하는 방도가 없겠는가? 아! 오늘날 신칙하고 면려하는 것은 탕평(蕩平)인 것이니, 탕평이 이룩된 후에야 화기(和氣)를 부를 수 있고 화기를 부른 연후에야 조정이 안정(安定)될 수 있으며 조정이 안정된 뒤에야 백성이 평안함을 얻을 수 있다. 아! 한 가닥 양맥(陽脈)이 처음 회복하는 날을 만나야만 초목과 만물이 모두 소생(蘇生)하는 뜻을 가지게 되는 법인데 가련한 우리 백성만이 홀로 살아날 길이 없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매 차라리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다. 이 모두가 내 자신이 더욱 수성(修省)을 가할 바이기에 서로가 면려(勉勵)하자는 뜻을 간략히 보이는 바이다."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국가의 재정(財政)이 탕갈되어 명년의 경비(經費)가 부족한데, 취해 쓸 자원(資源)이 없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각사(各司)의 당상(堂上) 이상의 관원은 그 구가(丘價)937) 를 전수(全數) 회록(會錄)938) 하고 당하관(堂下官)은 구가를 적당히 헤아려서 회록할 것이며, 호조(戶曹)의 경용(經用)은 한결같이 무신년939) 《등록(謄錄)》을 준행하고 각군문(各軍門)의 약방(藥房)과 신영(新營)은 모두 정파(停罷)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릇 회록한 수량은 선혜청(宣惠廳)에 보내어 경비(經費)에 보충하도록 하되 그 출납에 있어서는 모두 묘당(廟堂)을 거치도록 할 것이며 인하여 규식(規式)을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11일 계해
형혹성(熒惑星)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니, 이는 병상(兵象)인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무신의 변란(變亂)940) 이 있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다시 양역(良役)과 전화(錢貨)의 폐단에 관해 여러 신하에게 하순(下詢)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는 호포(戶布)와 인구세(人口稅)를 시행할 수 없음을 힘써 진달하였고, 병조 참판(兵曹參判) 조문명(趙文命)은 말하기를,
"호포의 법이 왕도(王道)의 정사(政事)에 가까운 듯하나, 그 실은 왕도의 정사가 아닙니다. 고려(高麗) 말엽에 시작되었다가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 특명(特命)으로 혁파하였으니, 이제 전하께서 비록 시행하고자 하시더라도 또한 시행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전폐(錢弊)의 시급함을 구제하려면 주전(鑄錢)을 더하는 것이 가장 양책인데, 이제 전폐의 문제로써 전화를 혁파한다면 저화(楮貨)의 폐단이 또한 어찌 돈과 다르겠습니까?"
하고,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경상 감영에서 명을 받들고 있을 때에 장계를 올려 호포(戶布)의 폐단을 논할 일이 있었는데, 그 후에 주상께서 장계를 상고해 보시고 하교하시기를, ‘호포와 구전(口錢)이 거의 균역(均役)의 방도가 될 줄로 알았으므로 저번에 언급(言及)하였던 것인데 병조 참판의 진달한 바가 좌상(左相)의 장계와 그 언론이 서로 부합(符合)하는지라 이제야 비로소 환하게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호포는 곧 고려 말엽에 시행하였던 정사(政事)인데 태종조(太宗朝)에 혁파하고 시행하지 않았으니, 만약 과연 폐단이 없었다면 어찌 혁파하였겠습니까? 요(堯)·순(舜)을 본받고자 한다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합니다. 전폐(錢弊)가 이미 극도에 달하였는데 이미 돈을 혁파하지도 못하고 또 주전(鑄錢)을 더하지도 못한다면 그 가운데에서 더 시급한 폐단을 구제한 연후에야 목전(目前)의 급박한 문제를 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광좌는 말하기를,
"백성들이 크게 괴로워하는 바는 부민(富民)들의 채무(債務)이니 이는 특히 갑절의 이식(利息)뿐이 아닙니다. 봄에 1냥의 값에 해당한 곡식을 주고 가을에 1냥 5전을 받는데, 가을의 1냥 5전을 곡식으로 계산한다면 거의 3, 4배(倍)나 되는지라, 가난한 백성들의 탕패(蕩敗)가 오로지 이에 연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이 폐단을 엄금하고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을 것이요, 【정식에 의하면 돈 1냥에 대한 1개월의 이자가 2푼을 넘지 못하며, 10개월에 이르러 2전(錢)이 되면 이에서 더 받지 못한다. 곡식 10두(斗)에 대한 1개월의 이자가 5승(升)을 넘지 못하며 10개월에 이르러 5두를 채우면 그치고 비록 10년이 지나더라도 또한 더 받지 못한다. 공채(公債)에 있어서는 전·곡(錢穀)의 이자가 모두 10분의 1에 그친다고 되어 있다.】 사사로이 주고 갑절의 이자를 받는 자는 형배(刑配)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정식(定式)을 팔도(八道)에 반포(頒布)하라고 명하였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모두 한가로운 말들이고, 인재를 가려 구임(久任)941) 시키는 것이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선묘조(宣廟朝)에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여섯 차례 체임(遞任)시켰는데도 적임자를 얻지 못하다가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극례(權克禮)가 청대(請對)하여 진달하므로 이에 죄적(罪籍) 중의 이원익(李元翼)을 기용(起用)하여 차송(差送)하매 드디어 안주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명종조(明宗朝)에는 상주 목사(常州牧使)의 적재(適材)를 얻기가 어려우므로 심지어는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수의(收議)케 하였으니, 조종조(祖宗朝)에서 수령(守令)을 선택함에 신중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각사 낭관(各司郞官)을 구임(久任)하는 법을 거듭 엄중히 하여 효과(効果)가 있는 자는 상(賞)을 주고 효과가 없는 자는 논책(論責)하게 하였으며, 또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으로서 수령(守令)이 된 자는 2주년(週年) 이내에는 승천(陞遷)을 허락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문신(文臣)으로서 삼사(三司)에 기한을 채우지 않고 이수(移授)하는 자는 계청하여 의망(擬望)하게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구임(久任)의 절목(節目)이 이미 이루어지자 【호조(戶曹)의 정랑(正郞)·좌랑(佐郞) 2원(員)은 30삭(朔)이요, 그 나머지는 6삭을 준(準)한다. 병조(兵曹)의 정랑·좌랑 2원은 30삭이요, 형조(刑曹)의 정랑·좌랑 각 1원은 15삭이며, 그 나머지는 6삭을 준한다. 공조(工曹)의 정랑·좌랑 가운데 1원은 12삭이요, 한성부(漢城府)의 판관(判官)·주부(主簿) 가운데 1원은 15삭이며, 그 나머지는 6삭을 준한다. 금부 도사(禁府都事)와 감찰(監察)은 전례에 의하여 6삭을 준하였고, 장례원(掌隷院)·사의(司儀)·사평(司評) 가운데 1원은 15삭이요, 그 나머지는 전례에 의하여 6삭을 준한다. 성균관(成均館)의 장무관(掌務官) 1원은 15삭이요, 사복시(司僕寺)의 첨정(僉正)·판관(判官)은 30삭이요, 군자감(軍資監)의 판관(判官)·주부(主簿) 가운데 1원은 12삭이며, 광흥창(廣興倉)의 주부 1원은 12삭이요, 장악원(掌樂院) 관원에서 음률(音律)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입계(入啓)하여 30삭으로 한정(限定)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의금부(義禁府)와 사헌부(司憲府)는 6삭(朔)으로 준(準)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아뢰기를,
"서울 안에 방리(坊里)의 부역(夫役)이 고르지 않아서 부역에 나아가는 자가 심히 적으니, 방민(坊民)들이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고(故) 판서(判書) 이정영(李正英)은 자신이 정경(正卿)이 되고서도 가속들을 보내어 좌경(座更)942) 에 들게 하여 지금까지 한 미담(美談)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고,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은 말하기를,
"국가의 제도(制度)에 대군(大君)·왕자(王子)·대신(大臣)을 제외한 정경(正卿) 이하는 모두 번갈아 야경(夜警)을 돌게 되어 있는지라, 이제 다만 옛 제도를 거듭 밝힌다면 방민(坊民)들의 편벽된 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광좌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조목(條目)을 엄중히 세우고 규식(規式)을 정하여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황감(黃柑)을 성균관(成均館)에 나누어 주고 인하여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에게 명하여 유생(儒生)들을 시험 보이게 하였으며, 송질(宋瓆)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11월 12일 갑자
윤동수(尹東洙)를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고, 조문명(趙文命)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조최수(趙最壽)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집의(執義)로, 정석삼(鄭錫三)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장차 동조(東朝)943) 에게 진연(進宴)하려고 이집(李㙫)·권이진(權以鎭)·조문명(趙文命)을 진연 당상(進宴堂上)으로 차하(差下)하였다.
11월 13일 을축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이 하직 인사를 올리므로 임금이 불러 보았는데, 권익관이 군졸을 연습시키고 군기(軍器)를 정비(整備)하는 등의 계책을 진달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신은 말한다. "권익관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지친(至親)으로서 화심(禍心)을 품고 있음을 사람들이 모두 지목(指目)해 왔는데, 함경 감사로 부임함에 미쳐 김유경(金有慶)이 소를 올려 논박함이 거의 변란(變亂)을 고(告)하는 글과 같았으니, 만약 1분이라도 신하(臣下)된 마음이 있는 자라면 스스로 처신(處身)할 도리를 생각함이 옳은데도, 권익관은 이를 심상(尋常)하게 보고 서둘러 부임하면서 첫머리에 군졸을 연습시키고 군기(軍器)를 정비(整備)할 계책을 진달했으니,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82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권익관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지친(至親)으로서 화심(禍心)을 품고 있음을 사람들이 모두 지목(指目)해 왔는데, 함경 감사로 부임함에 미쳐 김유경(金有慶)이 소를 올려 논박함이 거의 변란(變亂)을 고(告)하는 글과 같았으니, 만약 1분이라도 신하(臣下)된 마음이 있는 자라면 스스로 처신(處身)할 도리를 생각함이 옳은데도, 권익관은 이를 심상(尋常)하게 보고 서둘러 부임하면서 첫머리에 군졸을 연습시키고 군기(軍器)를 정비(整備)할 계책을 진달했으니,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집사(執事) 조상경(趙尙絅)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호남(湖南)의 전 방백(方伯) 김조택(金祖澤)은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일도(一道)에 해독(害毒)을 입혔으며, 나씨(羅氏)의 성(姓)을 가진 편비(褊裨)를 신임(信任)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사욕을 차리는 정사(政事)을 일삼아 간사한 무리와 서로 악한 일을 돕고 있어 백성들이 견딜 수가 없으며, 도내(道內)의 유생(儒生)도 조금이라도 그와 뜻을 달리하면 모두 잡아 가두고 참혹한 형장(刑杖)을 안기는지라 유생과 백성들이 모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어사(御史)로 하여금 그 죄상을 사핵(査覈)해 내어 빨리 변방에 정배(定配)하게 하고 나성(羅姓)의 편비(褊裨)는 본도(本道)에서 효시(梟示)하여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소서.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태원(李太元)은 저번에 탄핵(彈劾)을 입은 것이 범연한 데에 비할 바가 아닌데도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더니, 본직(本職)에 제수되자 남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차히 염의를 무릅쓰고 부임했으니, 파직시킴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김조택의 일에 대하여는 이미 처분하였다. 이태원의 일은 이미 수용(收用)했으니 깊이 견책(譴責)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필선(弼善) 임광필(林光弼)이 소를 올렸다. 그 내용에 먼저 큰 뜻을 세워 나라의 형세를 떨치게 하고, 백관[群工]을 칙려(飭勵)하여 공적을 이룩하게 하며, 양역(良役)을 개정하여 서민의 고통을 제거하고, 경비(經費)를 크게 아껴 나라의 재정(財政)을 넉넉히 하며, 전정(田政)을 변통하여 실지의 혜택이 미치게 하고, 병정(兵政)을 강구하여 융비(戎備)를 충실히 하며, 외방에 신칙하여 군기(軍器)를 정돈하고, 성루(城壘)를 수축(修築)하여 들판에 쌓아둔 곡식을 남김없이 거둬들이며, 주현(州縣)을 줄여서 백성의 힘을 펴게 하고, 수령(守令)을 신중히 선택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게 위임하며, 실속 있는 정사를 행하는 데 힘써 그 효과를 얻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백관을 칙려하는 조항에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5일 만에 한 번 휴식(休息)하고 10일 만에 한 번 목욕하는 제도를 본받아 대소의 관원으로 하여금 10일 동안에 다만 2일의 휴가를 허용하고는 월말[月終]에 이르러 대신(大臣)이 그 사일(仕日)944) 의 많고 적음을 상고하고 재능(才能)의 여부(與否)를 살펴 그 출척(黜陟)을 분명히 보인다면 공적(功績)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양역(良役)을 개정하는 조항에는 말하기를,
"호역(戶役)으로써 군역(軍役)을 대신하고 쌀로써 면포(綿布)를 대신하며 호수(戶數)에 따라 귀천(貴賤)과 존비(尊卑)를 물론하고 일체로 부역(賦役)을 균평하게 한다면 내는 자는 심히 가볍고 거두는 자도 손실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그 경비(經費)를 크게 아껴야 한다는 조항에는 말하기를,
"전·포(錢布)를 관장하는 아문(衙門)에서는 한결같이 외방(外方)의 규례에 의하여 중기(重記)945) 를 새로 만들어 두고 서로 전장(傳掌)하여 농간을 막도록 하여야 하며, 각사(各司)의 이서(吏胥)와 원역(員役)은 스스로 정해진 액수(額數)가 있는데도 근래 첨가된 액수(額數)가 거의 1만 명에 이르고 있으니, 국고(國庫)의 탕갈이 이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긴요하고 허름함을 헤아려서 정해진 액수를 감생(減省)해야만 고질적인 폐단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엊그제 비국(備局)의 초기(草記)946) 로 인하여 당상(堂上)의 구가(丘價)를 모두 회록(會錄)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이는 아마도 성세(聖世)의 체통은 아닌 듯합니다. 국가 경비의 태반이 이서(吏胥)의 농간에 좌우되는데 이를 변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조신(朝紳)의 월봉(月俸)을 감하려는 것은 경중(輕重)이 어긋나고 사체(事體)만 크게 손상될 것이니, 빨리 정침(停寢)하도록 명하심이 타당합니다."
하고, 그 병정(兵政)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조항에서는 말하기를,
"팔도(八道)의 무과 출신(武科出身)으로 춘추(春秋)에 거행하는 무예(武藝) 시험에서 수석(首席)으로 합격한 자는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혹은 변장(變將)에 차출해 보내고 혹은 군문(軍門)에 예속시킨다면 설혹 변란이 있더라도 그 힘을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각읍의 이서(吏胥)와 노복(奴僕)을 한 부대(部隊)를 편성(編成)한 것은 실로 좋은 법이였는데 잠깐 시행하였다가 바로 혁파되었으니, 이제 만약 속오(束伍)947) 의 제도와 같이 단속하여 연습시킨다면 위급할 때 임하여도 흩어지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그 수령(守令)을 신중히 선택하여야 한다는 조항에서는 말하기를,
"이제 근시(近侍)하는 자리에 출입하는 자로 하여금 열읍(列邑)의 사이에 끼어 탄압(彈壓)하게 한다면 탐학(貪虐)하는 수령들이 그 위세(威勢)를 두려워하여 반드시 그 버릇을 자제하게 될 것이요, 변방의 수령도 간혹 문신(文臣)을 끼워 둔다면 무변(武弁)948) 의 방자한 자들도 반드시 꺼려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11월 14일 병인
심수현(沈壽賢)을 진주 정사(陳奏正使)로, 송성명(宋成明)을 부사(副使)로, 조진희(趙鎭禧)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심양(瀋陽) 책문(柵門)에서 은자(銀子)를 빌린 일로써 청국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포흠(逋欠)을 징수하려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채무(債務)를 진 자가 자그마치 2백 명에 이르고 성명도 또한 착오가 많아 환상(還償)하기가 어려우므로 사실에 의거하여 회자(回咨)한 바가 있었다. 이에 이르러 청국에서 자문이 또 왔는데, 채은(債銀) 6만 냥은 너그러이 면제해 주겠다 하고는 옛날 우리 나라에서 채은의 포흠(逋欠)을 진 자에 대하여 정형(正刑)에 처한 일을 뒤좇아 제기(提起)하면서 숙묘조(肅廟朝)의 정령(政令)의 엄숙함을 극진히 찬양하고 경종(景宗)에 대하여는 패만(悖慢)한 말이 많았다. 임금이 자문을 보고 놀라고 통분하여 세 대신(大臣)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번의 자문에는 무슨 말을 꾸며댔기에 이런 말이 있기에 이르렀는가? 난두(攔頭)949) 를 혁파한 일로 인하여 감정(憾情)을 품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난두를 혁파한 것이 어느 해에 있었는지 적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일은 임인년950) 에 있었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북자(北咨) 가운데에는 ‘지금 자문(咨文)에 의거했다.’고 이미 말하였는데, 경종(景宗)의 어휘(御諱)를 들어 말했으니 실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고, 승지(承旨) 정석삼(鄭錫三)이 말하기를,
"저들이 어휘를 소상히 알지 못해서 그런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선조(先朝)의 휘자(諱字)를 오인(誤認)한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선조께서 무함을 입은 것도 본시 놀랍고 분통한 일이오나, 만약 당저(當宁)951) 를 가리켰다면 신자(臣子)의 마음이 또한 어떠하였겠습니까? 사신을 보내어 변무(辨誣)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16일 무진
간원(諫院) 【사간(司諫) 김유(金濰)이다.】 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제 이 북자(北咨)는 오로지 우리 나라 자문의 성실(誠實)하지 않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아! 두 나라 사이의 교제(交際)는 오로지 사명(辭命)에 달려 있으니, 만약 글을 짓는 사람이 말을 잘 만들어 정성과 신의(信義)를 위주로 했다면, 어찌 저들이 듣고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제 그 조사(措辭)를 보건대, 채무(債務)를 진 상고(商賈)의 무리만을 위하여 마음을 다해 변명하였다가 무한(無限)한 모욕을 당했으니, 청컨대 그 당시 자문 지은 사람을 빨리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자문을 받들고 갔으면 또한 당연히 자문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어야 하는데, 재자 역관(齎咨譯官) 이추(李樞)가 돌아와서는 다만 맡은 바 임무를 이루었다고만 일컫고 회자(回咨)를 받지 않고 빈손으로 왔으니, 그 실직(失職)한 죄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며, 패만한 글이 잇달아 이르러 욕이 국가에 미쳤습니다. 이추는 여러 해를 두고 연거푸 왕래하여 저들과 친숙(親熟)한지라, 모든 사정(事情)을 두루 짐작할 것입니다. 더구나 〈채은(債銀)을〉 너그러이 면제해 준 일을 제가 이미 명백히 알고 왔은즉 자문 가운데 말도 또한 어찌 전혀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저곳에 있을 때에 이미 지성껏 주선하지 못하고 끝내 자문보다 먼저 돌아와서 패만한 글을 가져온 죄를 모면하려 했으니, 그 정상(情狀)과 곡절이 망측(罔測)한데다가 패악(悖惡)한 말이 생긴 꼬투리도 또한 반드시 모를 이치가 없습니다. 청컨대 현재 금부(禁府)에 갇혀 있는 죄인 이추를 설국(設鞫)하여 엄중히 추문(推問)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저번의 자문은 이미 어람(御覽)을 거쳤으니 사신(詞臣)에게 그 허물을 돌릴 필요는 없으며, 또 〈그 자문 중의〉 대의(大意)인즉 임금의 뜻인데 그 근본은 궁구(窮究)하지 않고 도리어 사신(詞臣)에게 죄를 주려 하니, 이 경장(更張)의 날을 당하여 이러한 버릇은 먼저 제거함이 옳을 것이다. 더구나 평탄한 마음으로써 본다면 대각(臺閣)이 비록 논책(論責)한다 하더라도 어찌 절도 정배(絶島定配)에 이를 수야 있겠느냐? 재자관(齎咨官)은 이미 나문(拿問)하도록 명하였는데, 억측(臆測)으로 죄를 줄 수 없다는 대신(大臣)의 말이 옳다."
하였다.
집의(執義) 조상경(趙尙絅)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제 이 북자(北咨)의 패악(悖惡)한 말은 범연한 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신이 그 당시의 자문을 상고해 본즉, 교묘하게 글을 꾸미고 이리저리 말을 둘러대어 오로지 상고배(商賈輩)들의 처지(處地)만을 두둔하고 국체(國體)의 손상은 돌아보지 아니하여 선왕(先王)에게 무한한 추욕(醜辱)을 초래하였으니, 나라를 욕되게 한 죄상은 어찌 죽음에서 모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묘당에 있는 자는 삭탈 관직(削奪官職)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952) 하는 형전(刑典)을 베풀고, 자문을 지은 자는 절도 정배(絶島定配)의 율(律)을 가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때에 자문은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는데, 무슨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느냐?"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조최수(趙最壽)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듣건대 북자(北咨)에 상고(商賈)들이 채은(債銀)을 포흠(逋欠)낸 일로 그 욕이 선조(先朝)에까지 미쳤다고 합니다. 당당(堂堂)한 천승(千乘)의 나라가 상고배(商賈輩)의 천류(賤類)와 무슨 관련이 있기에 곧장 이 무리들의 사기(詐欺)와 실신(失信)으로 인하여 국가에서 망극한 무함을 받게 한단 말입니까? 오늘을 위한 대책(對策)은 오직 하루바삐 채은(債銀)의 포흠(逋欠)을 진 상고(商賈)들을 조사하여 국경(國鏡) 지대에서 효시(梟示)하고, 이 뒤에는 사신(使臣)의 행차에 조목(條目)을 엄중히 세워 이 무리들의 왕래하는 길을 영원히 막아서 일후(日後)의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에 진달한 말이 옳다. 지금부터 엄중히 신칙하되 만약 범금(犯禁)하는 자가 있으면 월경(越境)한 율(律)로써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빈(王世子嬪)이 홍역(紅疫)을 앓으니,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광좌(李光佐)가 삼제조(三提調)의 인원을 갖추어 직숙(直宿)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전례의 유무(有無)를 묻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일찍이 전례는 없는데 중궁전(中宮殿)에서 1등을 강등(降等)하여 마련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만 1원(員)만 직숙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7일 기사
왕세자(王世子)가 경춘전(景春殿)으로 거처(居處)를 옮겼으니, 왕세자빈(王世子嬪)이 홍역을 앓기 때문이었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한즉,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 홍역을 앓을 때에 각사(各司)에서는 형장(刑杖)을 금하였고, 궐내(闕內)에서는 태장(笞杖)을 금하였으며, 내시사(乃試射)도 또한 정지한 전례가 있었으니, 청컨대 지금도 또한 이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진주 부사(陳奏副使) 송성명(宋成明)이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잉임(仍任)953) 되고, 이명언(李明彦)으로 대임(代任)토록 하였으니,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이 천거한 때문이었다. 이때에 이명언이 귀양에서 풀려나와 서용(敍用)을 입게 되었는데 임금이 오래도록 은점(恩點)을 아끼는지라 이명언이 그대로 하동(河東) 적소(謫所)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조태억·심수현이 그 쓸 만한 인재임을 말하였고, 이광좌가 이에 진달하기를,
"위급한 상황이 있을 때에 믿을 만한 자는 오직 이명언입니다. 이제 주상께서 망극한 욕을 당하고 사명(使命)을 받드는 일이 바야흐로 급하니, 왕역(往役)의 뜻으로써 파발마(擺撥馬)를 달려 하유(下諭)한다면 이명언이 반드시 당일로 올라올 것입니다. 이명언이 일찍이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거쳐 저들의 일을 익숙히 알고 있으니, 전대(轉對)954) 의 책임은 그 적임자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말한다. "이명언이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깊이 품고는 아직도 하동(河東)에 있었으며 귀양에서 풀려난 지 반년이 지나도 그대로 머물러 있고 올라오지 않는지라, 비록 그 당류(黨類) 속의 두둔하는 무리들도 또한 의심하는 자가 많았고 임금도 은점(恩點)을 아끼게 되었다. 이에 이광좌가 이 기회를 타서 이명언이 아니면 적임자가 없다고 힘써 진달하였으므로 이 분부가 있게 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83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953] 잉임(仍任) : 그 직(職)의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옮기지 않고 계속하여 그 직을 맡겨 둠. 유임(留任).[註 954] 전대(轉對) : 외국에 사신으로 나간 사람이 본국과 상의 없이 임의로 물음에 대답하거나 또는 임시로 일을 처리하던 것.
사신은 말한다. "이명언이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깊이 품고는 아직도 하동(河東)에 있었으며 귀양에서 풀려난 지 반년이 지나도 그대로 머물러 있고 올라오지 않는지라, 비록 그 당류(黨類) 속의 두둔하는 무리들도 또한 의심하는 자가 많았고 임금도 은점(恩點)을 아끼게 되었다. 이에 이광좌가 이 기회를 타서 이명언이 아니면 적임자가 없다고 힘써 진달하였으므로 이 분부가 있게 된 것이다."
11월 19일 신미
권익순(權益淳)·조진희(趙鎭禧)·송진명(宋眞明)을 승지(承旨)로, 조한위(趙漢緯)를 지평(持平)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정언(正言)으로, 이명언(李明彦)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조진희(趙鎭禧)를 수찬(修撰)으로, 이주진(李周鎭)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심양(瀋陽)의 팔포(八包)955) 는 예전부터 정해진 숫자 가운데에서 청컨대 그 반액(半額)을 감하고, 다만 의주(義州)에서 3과(窠), 단련사(團練使)에서 1과, 평안 감영(平安監營)과 개성부(開城府)에서 각 1과를 보내도록 허락하고, 평안 병영(平安兵營)과 황해 감영(黃海監營)은 원래 1과이니 일체 보내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권첨(權詹)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연전에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있을 때에 고을 사람 이범(李範)의 아내가 나이 50이 넘은 뒤에 딸과 아들을 낳은 일로 해서 향원(鄕員)이 정장(呈狀)하여 이를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계문(啓聞)하기를 청한 바 있는데, 신이 미처 그 간사함을 밝혀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어사(御史)의 별단(別單)으로 인하여 사핵(査覈)하여 이 옥안(獄案)이 이루어져서 필경 이급(李笈)·이잠(李箴) 및 그 아들 이유기리(李有機里)를 극형(極刑)에 처한 바 있습니다. 무슨 일로써 이 죄안(罪案)이 이루어졌는지는 알지 못하오나, 당초에 엄중히 사핵(査覈)하지 못하여 간사한 자로 하여금 구실을 삼아 농간을 부리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자신으로 말미암아 세 사람의 무고(無辜)한 목숨이 죽을 땅에 나아가게 한 것처럼 되었음을 스스로 한탄합니다."
하니, 하교(下敎)하기를,
"권첨의 상소는 이 사건을 현란(眩亂)시키고 감히 세 무고(無辜)한 목숨이란 등의 설(說)로써 은연중에 그 원통한 정상을 하소연했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이 소장(疏章)은 도로 내려 보내게 하라."
하였다.
11월 21일 계유
간원(諫院)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호남 별견 어사(湖南別遣御史) 이광덕(李匡德)을 불러 보았다. 이광덕이 말하기를,
"신이 이번에 올라온 것은 진휼(賑恤)에 필요한 곡식을 얻기 위함인데, 호남의 열읍(列邑)에는 모두 환곡(還穀)이 없어서 만약 별달리 곡식을 모으는 방도가 없으면 접제(接濟)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들은즉, 관서(關西)의 전세(田稅)를 서울로 운송(運送)하지 않은 것이 그 수량이 매우 많다 하니, 만약 이 곡식을 호남에 옮겨 환곡으로 삼는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선후(先後)와 완급(緩急)의 분별이 있으니, 마땅히 헤아려서 조처해야 할 것이다. 영남 어사(嶺南御史) 박문수(朴文秀)가 사조(辭朝)할 때에 지속(遲速)을 교계하지 않고 기필코 효과(効果)를 이루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제 너의 서계(書啓)에도 또 수년을 한정하고 효과를 책성(責成)한다는 말이 있으니, 네가 맡은 바는 다만 진휼(賑恤)을 감동(監董)할 뿐이 아니다. 혹 묘당과 더불어 상의할 일이 있거든 임의로 왕래하면서 효과를 이룩하기를 기필하고 연수(年數)를 계교하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변산(邊山)의 도둑에 관한 일을 물으니, 이광덕이 말하기를,
"근래 거듭 흉년을 만나 곳곳에 도둑이 있으나 이는 좀도둑에 지나지 않으며, 원래 황소(黃巢)956) 의 도당(徒黨)이 산중에 웅거(雄據)한 데 비교할 바가 아니니 전(傳) 한 사람의 잘못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당시 변산(邊山)에 출몰(出沒)하는 도둑의 일로 요망한 말들이 어지럽게 퍼져서 도성(都城)의 인심이 흉흉(洶洶)하여 심지어는 피난차로 떠나는 자도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84면
【분류】왕실(王室) / 행정(行政) / 사법(司法) / 구휼(救恤) / 역사(歷史)
[註 956] 황소(黃巢) : 당 희종(唐僖宗) 때 역적(逆賊). 적당(賊黨) 왕선지(王仙芝)가 패망(敗亡)하자 그 잔당을 이끌고 여러 주현(州縣)을 공략(攻略)하였으며 낙양(洛陽)·장안(長安)도 함락시켰는데, 이극용(李克用)에게 패(敗)하여 자살하였음.
사신은 말한다. "당시 변산(邊山)에 출몰(出沒)하는 도둑의 일로 요망한 말들이 어지럽게 퍼져서 도성(都城)의 인심이 흉흉(洶洶)하여 심지어는 피난차로 떠나는 자도 있었다."
11월 22일 갑술
권호(權頀)를 집의(執義)로, 이종백(李宗白)을 설서(說書)로, 이광보(李匡輔)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정우량(鄭羽良)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지난번 일에 있어서는 그 당사자(堂事者)로서는 의당 감정(憾情)을 품을 수도 있겠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헌납(獻納) 임광(任珖)이 극구 헐뜯는 것은 참으로 괴상한 거조(擧措)입니다. 신의 대거(對擧)한 소장(疏章)에 다만 사실만을 들어서 평탄한 마음으로 당연한 도리(道理)를 말하였고 감히 털끝만치도 그 사람을 핍박함이 없었습니다. 불행히 전랑(銓郞)을 탄핵하는 의논이 대간(臺諫)에서 나왔으니, 신은 몸이 허공(虛空)에 들떠 있어 다시 무한한 곤경을 치렀던 것입니다. 이른바 의기(意氣)가 사납고 날카롭게 공격했다는 등의 말들이 갈수록 더욱 기괴(奇怪)하여 다시 몇 층을 더 가한 것입니다. 전랑의 통하고 막힘이 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머리를 뒤로 돌려 주먹을 쥐고 국외(局外)의 사람에게 노여움을 옮긴단 말입니까? 이는 이른바 방(房) 안의 노여움을 저자에서도 안색을 붉힌다는 격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당치 않은 말을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느냐?"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박사수(朴師洙)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인혐(引嫌)을 어떻게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대신(大臣)의 연주(筵奏)가 비록 김정(金)의 해유(解由)를 위한 길이라고 하겠으나 이미 ‘금석(金石)같이 소중한 법전(法典)을 경솔히 변경할 수 없다.’고 말하고 〈해유에〉 구애하지 말라는 명을 환수(還收)함에 이르렀으니, 탕척(蕩滌)은 〈해유에〉 구애하지 않은 것보다 더욱 심중합니다. 신이 탕척됨으로써 벼슬에 제수되었으니, 어찌 감히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전조(銓曹)의 장관(長官)이 또한 말하기를, ‘해유의 법이 지극히 엄중하여 탕척하는 것은 미안한 점이 있다.’고 하였으며, 요우(僚友)의 사이에도 그 말을 전송(傳誦)하고 있으니, 신이 어떻게 인혐(引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한때 사실(私室)에서 한 말을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11월 23일 을해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이진(權以鎭)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북자(北咨)를 본즉, 패만(悖慢)한 말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분별하여 처리하지 못하겠기에 너그러이 면제해 준다는 말로 끝을 맺었으니, 그 너그러이 면제해 준다는 욕됨이 패만한 말보다 더욱 심한 것입니다. 신은 저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하오나, 혹시라도 사은(謝恩)하고 변무(辨誣)하자면 반드시 그 뇌물이 있을 것을 바랄 수도 있는 일이니, 겉으로는 너그러움을 보이는 듯하나 안으로는 실상 우리에게 곤욕을 주는 것입니다. 이제 대신을 보내어 진청(陳請)하게 되면 바로 저들의 뜻에 적중하는 것이니, 일은 요령을 잡을 수가 없고 말을 만들기가 어려우며, 또 자문 속의 말에 비록 선조(先朝)를 거론했으나 이 일은 선조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臣子)로서 마음 아파하는 바는 이 일이 선조 때에 있었던 여부(與否)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황지(皇旨)라고 일컬었으니 배신(陪臣)으로서는 산삭(刪削)과 개정(改正)을 청하는 것도 어려운 바가 있으며, 또 혹시라도 다시 칙지(勅旨)가 있어 가리지 않는 횡포(橫暴)한 말이 있게 되면 선후(善後)의 방책이 망연하여 도모(圖謀)할 바를 알지 못할 것이니, 이는 시초부터 삼가고 종말까지 염려함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만 재자관(齎咨官) 한 사람을 심양(瀋陽) 예부(禮部)에 보내어 잘 변론(辯論)하여 사실을 진달할 것이며, 또 말하기를, ‘채은(債銀)은 비록 징수하기 어려우나 이제 이미 추후(追後)하여 수봉하였는지라 그 사람에게 도로 줄 수 없고 또 본국(本國)에 머물러 두고 쓸 수도 없기에 도로 보냅니다.’고 한다면, 저들이 우리를 욕보인 것이 이미 너그러이 면제해 준 데에 있었고, 그 자문 속의 패만한 말의 귀취(歸趣)도 또한 〈채은을〉 상환하지 않는 데에 있었을 뿐인지라, 우리가 〈채은을〉 돌려보내는 것도 그 추욕(醜辱)을 달갑게 받을 수 없는 데에서 나왔을 뿐이니, 나라 재력(財力)의 어렵고 쉬움과 전례의 있고 없는 것은 모두 논할 겨를도 없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이미 추징(追徵)하지 않고 추징했다고 한다면 일이 성실(誠實)하지 않다.’고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포도 장교(捕盜將校)를 보내어 〈포흠(逋欠) 낸 자를〉 엄중히 잡아가두고 〈채은을〉 추징(追徵)하며 인하여 효수(梟首)의 율(律)에 처한다면, 비록 그 수효를 모두 채우지는 못하더라도 또한 추징하여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니 또한 허위(虛僞)라고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지금 우리 나라의 재력으로써는 이를 판출(辦出)해 내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안으로 각군문(各軍門)과 사복시(司僕寺)와 호조(戶曹)에서, 밖으로는 관서(關西)와 의주부(義州府)에서 각기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는다면, 비록 창고의 저축을 몽땅 비우지 않더라도 거의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령 백관(百官)에게 추렴하게 하더라도 군부(君父)가 전일에 없었던 추욕(醜辱)을 당하는 판국에 있어 신자(臣子)된 자가 목숨도 또한 아낄 수 없거늘 하물며 재물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사신을 보내어 변무(辨誣)한다면 어찌 〈채은(債銀)의〉 돌려보내는 여부(與否)를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만약 추징(追徵)한다면 어찌 극형(極刑)을 쓸 필요가 있으며 만약 극형에 처한다면 또 어찌 추징할 필요가 있겠는가? 서울과 외방에서 마련해 낸다는 설(說)에 이르러서는 어찌 형편을 참량(參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백관에게 추렴한다는 말은 경(卿)의 생각이 어찌 이에 미쳤단 말인가? 통분(痛憤)하고 박절(迫絶)한 글을 보고서 진변(陳辨)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백관에게 추렴하여 역관(譯官)을 보내어 저들의 노여움을 풀게 한다면,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이러한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하였다.
빈궁(嬪宮)이 홍역(紅疫)을 앓았을 때에 약원 제신(藥院諸臣)의 노고를 생각하여 상(賞)을 내려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그 약원 제신은〉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광좌(李光佐) 【안구마(鞍具馬)와 표피(豹皮)를 내려 주었다.】 , 제조(提調) 오명항(吳命恒)과 부제조(副提調) 정석삼(鄭錫三) 【각기 숙마(熟馬)와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 사관(史官) 【승륙(陞六:7품 이하의 벼슬아치가 6품에 오르는 일)하였다.】 , 춘방관(春坊官) 【각기 아마(兒馬)를 내려 주었다.】 , 의관(醫官) 이엽(李燁) 【가자(加資)하고 숙마(熟馬)와 은자(銀子)를 내려 주었다.】 , 차비 제의관(差備諸醫官) 【가자(加資)하고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 장무관(掌務官) 957) 하고 혹은 가자(加資)하였다.】 , 의약(議藥)에 함께 참여한 여러 의관(醫官) 【혹은 숙마(熟馬), 혹은 아마(兒馬), 혹은 현궁(弦弓)을 내려 주었다.】 , 원역(員役) 【쌀과 면포를 내려 주었다.】 이었다.
이인복(李仁復)·박필철(朴弼哲)을 승지(承旨)로, 조덕린(趙德隣)을 집의(執義)로, 권부(權孚)를 장령(掌令)으로, 이도겸(李道謙)을 지평(持平)으로, 이정응(李挺膺)을 보덕(輔德)으로, 이세진(李世璡)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조적명(趙迪命)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근일의 처분에 있어 그윽이 개탄(慨歎)하는 바가 있습니다. 조태채(趙泰采)의 죄범(罪犯)은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있는데 전하께서도 또한 일찍이 연차한 자는 장심(將心)958) 이 있다고 하셨으니, 인신(人臣)이 된 자가 장심을 품는다면 그 관작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조태채의 관직을 빨리 추탈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북자(北咨)의 〈패악(悖惡)한 말이〉 선조(先朝)에 추욕(醜辱)을 끼침이 한정이 없었습니다. 당초에 자문을 지은 사람이 이러저리 말을 꾸며 오로지 상고배(商賈輩)의 처지를 두둔한 것이 참으로 대계(臺啓)의 말과 같은데도 전하께서는 도리어 엄교(嚴敎)를 내리셨으니, 실로 뜻밖의 일입니다. 이번에 사신을 보내는 것은 대개 망극(罔極)한 무함을 씻어버리기 위함이오나, 저들의 한량없는 욕심이 수만 냥의 은자를 공공연하게 잃고도 어찌 두려워하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도로 보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있을 추욕(醜辱)이 아마도 이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을 위한 계책으로는 먼저 평안 감·병영(平安監兵營)의 은화(銀貨)를 〈채은(債銀)의〉 수량에 맞추어 빌려가고 16년 동안 사행(使行)에 따라간 여러 역관에게 서서히 나누어 징수하여 그 빌려간 수량을 상환(償還)하도록 함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또 여러 역관을 사핵(査覈)하여 징수할 즈음에 그들의 간악한 정상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니, 범한 자를 효시(梟示)한다면 저들도 반드시 감동하고 부끄러워하여 전일의 〈무함을〉 깨끗이 씻어 줄 것입니다. 이제 이 자문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범연히 여기고 일찍이 물리치지 않았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의 의주 부윤은 중벌(重罰)에 처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국고(國庫)가 탕갈되어 경관(京官)의 구가(丘價)마저 감하기에 이르렀다면 외방의 절손(節損)도 또한 이에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각읍(各邑)이 이미 월름(月廩)으로 지급하는 것이 있은즉, 이른바 아문 녹사(衙門錄事)의 위전답(位田畓)은 공가(公家)에 거두어 들임이 마땅할 것입니다. 낱낱이 고출(考出)하여 국가의 용도를 펴도록 빨리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달한 일은 너무 지나치다. 저번의 자문은 원래 아래에서 요청한 바가 아니었은즉, 소장에서 논한 바가 지나치며 환상(還償)의 한 절차는 호판(戶判)의 상소 비답에 하유(下諭)하였다. 의주 부윤의 일은 황지(皇旨)를 변방의 신하가 어떻게 도로 보낼 수 있겠는가? 외방 아문의 녹사(錄事)는 서울과 다르며 또 우리 나라는 본래 강토(彊土)가 작아 녹봉(祿俸)이 넉넉하지 않은데, 이미 오래 된 위전답(位田畓)을 모두 고출(考出)하여 탐관 오리(貪官汚吏)가 백성의 재물을 박탈하는 길을 열어 놓겠다는 것이냐?"
하였다.
11월 24일 병자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박사수(朴師洙)의 소본(疏本)을 본즉, 신이 사실(私室)에서 수작(酬酌)한 말을 가지고 나아가기 어려운 사단(事端)으로 삼으니, 신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요우(僚友)들 사이에 박사수의 해유(解由)로 인해 전조(銓曹)에서 즉시 탕척(蕩滌)하지 않았다고 말한 자가 있기에 신은 이르기를, ‘대신(大臣)은 비록 진달한다 하여도 전관(銓官)으로서는 감히 파격적으로 탕척을 청할 수 없다.’고 하였은즉, 박사수에게 무슨 혐의하고 구애될 일이 있어 억지고 이끌어 혐의한단 말입니까?"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하였다.
필선(弼善) 이세진(李世璡)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해에 외람되이 초초(草草)한 몇 마디 말씀을 진달한 일이 있었는데, 요즈음 들은즉, 한 유신(儒臣)이 경연(經筵)에서 신의 전일의 소장을 배척하여 이르기를 ‘권세를 시새우고 승진(陞進)을 간구(干求)했다.’고 하였으니, 이 무슨 말입니까? 공론(公論)을 거짓 꾸며 명예를 구하고 대신을 두둔하여 아양을 떨었다면 승진을 구했다고 할 수 있으나, 신은 망령되어 시론(時論)에 기휘(忌諱)를 범하여 귀양을 자초(自招)했으니, 승진을 구하는 자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전랑(銓郞)의 천거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대개 해유(解由)가 아직 오지 않은 데에 연유함인데, 언관이 이를 막힘을 당했다고 하여 천청(天聽)에까지 진달했으니, 사람을 논함이 너무 경솔함을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하였다.
전(前) 판서(判書) 심택현(沈宅賢)이 고(故) 좌윤(左尹) 심정보(沈廷輔)의 아내 이씨(李氏)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소를 올려 대변(對辨)하매, 비답하기를,
"나의 의중에도 또한 참량(參量)하는 바가 있는데, 아직 처분하지 않은 것은 공주(公主)의 봉사(奉祀) 때문이다."
하였다. 이때에 심정보의 아내는 심택현의 아우 심태현(沈泰賢)으로써 입후(立後)하고자 하여 여러 차례 상언(上言)하여 대신과 의논하라는 분부까지 있었는데, 심택현이 소를 올려 그 온당치 않음을 진달하였으므로 임금의 비답이 이와 같았다.
수찬(修撰) 조진희(趙鎭禧)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제 이 북자(北咨)의 무욕(誣辱)이 위로 선조(先朝)에까지 미쳤으니, 진변(陳辨)의 거조를 조금도 늦출 수 없으나, 다만 지극히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대개 난두(攔頭)를 혁파한 뒤에 저들의 원망이 뼈에 사무쳤는데, 이제 〈채은(債銀)을〉 너그러이 면제해 달라는 요청으로 인하여 이런 패악(悖惡)한 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을 위하는 계책으로서는 그 가운데 수봉(收捧)할 만한 자는 수봉하고 수봉할 수 없는 자는 그 친족(親族)에게 나누어 징수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며, 빨리 각아문(各衙門)의 공화(公貨)를 모으되 요는 원채(原債)의 반액(半額)만 채워 먼저 들여보내고 곤란한 실정을 잘 말한다면 진변(陳辨)의 청원이 거의 순조롭게 이루어질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지 않다면 〈채은(債銀)에 관련된〉 간사한 백성들을 모두 잡아다가 저들과 더불어 참핵(參覈)하고 그 가운데에서 우심(尤甚)한 자는 국경 지대에서 효시(梟示)한다면 우리의 법도 펴고 저들의 마음도 시원하게 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오히려 채은을 상환(償還)하여 그 욕심을 채워 주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신에게 유시(諭示)했다."
하였다.
11월 25일 정축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이 사면(辭免)하였다. 이때에 오명항이 정석삼(鄭奭三)의 상소로 인하여 인혐(引嫌)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그의 관직을 체임(遞任)하도록 허락하였다. 이태좌(李台佐)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오명항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조문명(趙文命)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권부(權扶)를 정언(正言)으로, 이하원(李夏源)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권호(權頀)를 사간(司諫)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11월 25일 정축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상전(賞典)은 지나치거나 범람해서는 아니됩니다. 비록 표피(豹皮)로 말하더라도 1령(領)의 값이 무명 60필에 이르니, 신은 실로 축연(踧然)히 마음에 불안합니다."
하고, 판윤(判尹)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옛날 인묘조(仁廟朝)에 상벌(賞罰)을 신중하게 하고 명기(名器)를 아끼어 어의(御醫) 이형익(李馨益)·박군(朴頵)이 편벽되게 임금의 은총(恩寵)을 입었는데도 이형익은 벼슬이 3품(三品)의 산질(散秩)에 지나지 않았고 박군은 겨우 6품의 주부(主簿)에 그쳤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어의가 모두 금관자(金貫子)·옥관자(玉貫子)를 달고 혹은 품질(品秩)이 숭품(崇品)에 이르렀으며 주현(州縣)의 수령(守令)에 제수된 자가 한때에 자그마치 3, 4인에 이르고 있으니, 이는 작상(爵賞)이 너무 범람한 소치입니다. 또 기우제(祈雨祭)의 헌관(獻官)과 열무(閱武)959) 때의 대장(大將)·별장(別將)에게는 모두 내구마(內廐馬)를 내리시니, 아마도 상전(賞典)을 신중히 하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여러 도(道)의 감·병사(監兵使)가 체임(遞任)되어 돌아갈 때 창고에 남아 있는 재물을 비국(備局)에 보고하도록 명하였으니, 영의정 이광좌의 청에 따른 것이다. 이때에 나라의 재정이 탕갈되었으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국가의 제도에 아문(衙門)의 녹봉(祿俸)이 심히 적어서 경관(京官)의 녹봉과 같았는데, 승평(昇平)한 세월이 이미 오래되매 징렴(徵斂)이 한정없으므로 비로소 대동법(大同法)960) 을 시행하여 관수(官需)를 따로 지급하였으니, 아문의 녹봉은 정상적인 봉급(俸給)이요 관수는 관가(官家)에서 사용하는 경비입니다. 그런데 감영(監營)과 병·수영(兵水營)에 이르러서는 거처(居處)와 음식이 임금을 모방하여 날로 사치(奢侈)가 늘고 있으니, 오늘날의 계책으로서는 사치의 과람함을 통렬히 금지함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여러 도의 감영과 병·수영으로 하여금 되도록 절약에 힘쓰고 항상 축적(蓄積)에 유의(留意)하여 체임(遞任)되어 돌아갈 때 임박하여 그 남아 있는 수량을 낱낱이 비국(備局)에 보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하순(下詢)하였다. 여러 신하의 의논이 일치(一致)되지 아니하여 혹자는 말하기를,
"묘당(廟堂)에서 〈지방관에게〉 절약을 독책(督責)하고 남은 수량을 낱낱이 보고하게 하는 것은 한갓 대체(大體)에 손상만 있을 뿐 아니라 탐관 오리(貪官汚吏)와 재능(才能)을 과시(誇示)하는 무리들은 반드시 백성의 재물을 박탈하여 첨록(添錄)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극력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치가 날로 늘어나는 것은 재력이 탕갈되는 장본(張本)이다. 옛날 성군(聖君)은 처마[簷牙]의 띠[茅]를 자르지 않았고 3급(級)의 토계(土階)를 쌓았으며, 위 문공(衛文公)은 거친 포백(布帛)으로써 의복을 지어 입었다. 외방의 각영(各營)을 내가 비록 알지 못하나 기읍(畿邑)의 객사(客舍)는 내가 또한 지나 본 적이 있다. 내가 궁중(宮中)에서 생장한지라 의당 경과해 본 바에 지나지 않으나, 객사의 침장(寢帳)을 살펴본즉, 사치가 지나치므로 즉시 철거(撤去)하게 하였다. 선조(先朝)의 어선(御膳)도 몇 그릇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 때의 외방에 〈절약하도록〉 신칙하였으나 지금까지 그 효과가 없기에 드디어 이 분부가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연전에 윤상백(尹尙白)이 예문관(藝文館)에 있을 때에 세초(洗草)961) 하지 말자는 말이 있었는데, 아직 회계(回啓)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순문(詢問)하였다. 영의정 이광좌는 말하기를,
"사초(史草)에는 한림(翰林)의 공정한 말과 강직한 필법(筆法)이 많으니, 세초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윤순은 말하기를,
"국초(國初)에는 세초하는 규례가 없었는데,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찬수(纂修)할 때에 대북(大北)의 당인(黨人)들이 전적으로 주관하여 일체 그들의 사사로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대로 맡겨졌는지라 〈후일〉 공의(公議)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비로소 세초를 창시(創始)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 후에 그 규례에 의하여 세초하였으니, 좋은 사기(史記)와 올바른 필법(筆法)을 장차 어디에서 고징(考徵)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초하는 것은 그 뜻이 있으니, 사초(史草) 가운데 한때의 취사(取捨)를 어떻게 모두 올바르게 할 수가 있겠는가? 혹은 보고 들은 것이 각기 다름으로 인하여 반드시 시비(是非)를 다투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말많은 세상에서 보궐(補闕)의 역사(役事)에서 온갖 힘을 다하였으나 또 세초를 하지 않는다면 분운(紛紜)한 말을 어떻게 진정하겠는가? 세초함이 옳다."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이광좌가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세척(洗滌)하여 보수(補修)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개 《선원보략》 가운데에 관직이 추탈(追奪)된 사람의 직명(職名)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바야흐로 대신의 직책을 띠고 있는데 《선원보략》 가운데에 비록 급제(及第)라고 써도 손상될 것이 없을 듯하온데, 큰 처분을 내리신 뒤에도 관직이 추탈된 여러 사람의 그 직명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만약 세척(洗滌)하여 개정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사체(事體)에 손상이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원보략》은 조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데, 번복(飜覆)하여 사람을 쓰고 내쫓을 즈음에 매양 보수(補修)하고 개정(改正)한다면 어찌 개연(慨然)할 일이 아니겠는가? 선조(先朝)에서도 또한 엄중한 처분이 있었는데도 《선원보략》에는 죄를 입은 사람들의 관작을 그대로 둔 곳이 많이 있다."
하니, 이광좌가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였다.
11월 26일 무인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작년에 흉년으로 인하여 삼남(三南) 및 경기(京畿)의 용도(用度)를 이미 재감(裁減)하였습니다. 금년에는 비록 약간 낫다고 하나 국고의 저축이 탕갈되었으니, 삼남 감영(三南監營)의 관수(官需)를 전년 그대로 모두 8분의 1을 재감하고 무릇 응당 지급할 것은 선가(船價) 이외에는 또한 8분의 2를 재감할 것이며, 경기는 감영의 관수(官需)를 전에 이미 재감하였지만 모든 잡비(雜費)도 또한 삼남의 규례에 의하여 8분의 2를 재감하여 절약하는 뜻을 보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권부(權孚)이다.】 와 간원(諫院) 【정언(正言) 정우량(鄭羽良)이다.】 에서 전번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면서 그 조어(措語)를 개정하여 이르기를,
"저번 합계의 비답에 ‘정호(鄭澔)는 부처(付處)962) 하고 민진원(閔鎭遠)은 관작을 삭탈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범죄가 이미 지극히 중한데 선왕(先王)께서 승하(昇遐)하신 후에도 차마 무함과 패만한 말을 가(加)하면서 심지어는 위로 태묘(太廟)에 고하고 아래로는 팔방(八方)에 하유(下諭)케 하고자 하였으니 이 어찌 남의 신자(臣子)된 자로서 감히 마음에 품고 입으로 발설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근본을 추구(推究)한다면 수차(袖箚)가 곧 그것이니, 그 분의(分義)에 어그러진 죄상은 두 사람이 매한가지입니다. 이제 이 부처(付處)의 박벌(薄罰)이 정호의 죄를 감처(勘處)하기에 족하지 않으며, 맨 먼저 간악한 말을 창도(倡導)한 민진원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어찌 정호에 비하여 차등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부처한 죄인 정호와 급제(及第) 민진원(閔鎭遠)을 모두 원방(遠方)에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제 이 북자(北咨)는 실로 국가에 더없이 큰 치욕(恥辱)입니다. 당초 이 일이 발단되었을 때에 만약 국사(國事)를 담당한 대신이 변고(變故)에 대응하여 마음을 다하여 미봉(彌縫)하고 보내는 자문(咨文)을 지을 때 힘을 다하여 말을 잘 얽었다면, 어찌 이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사람의 심정이 함께 울분해 하고 여론(輿論)도 또한 격렬하니, 청컨대 그때 정무(政務)를 담당한 대신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저번의 처분도 이미 참량(參量)한 바인즉, 삭출(削黜)도 오히려 지나치거늘, 하물며 원방에 정배함이겠느냐? 나의 뜻이 굳게 정하여졌으니, 결단코 윤종(允從)하기 어렵다. 아! 팔의(八議)963) 로써 논하더라도 또한 용서함이 마땅하며, 또 전번의 하교도 신하들을 감동하게 한 바가 있었는데 도리어 가율(加律)하자는 거조가 있으니, 이런 일은 내가 실로 세도(世道)의 병통으로 여긴다. 말단에 논한 일은 더욱이 지나치다."
하였다.
이태좌(李台佐)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이도겸(李道謙)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 가을 사간원(司諫院) 관원에 임명된 것은 신이 처음 환로(宦路)에 들어오게 된 날이었는데, 위로는 군주의 덕(德)을 보필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시정(時政)의 잘못을 규핵(糾劾)하지 못한지라, 비방(誹謗)이 온 세상에 가득하였고 논박(論駁)이 격렬하여 마침내 외방(外方)의 우관(郵官)964) 으로 좌천되니, 공의(公議)의 준엄함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신(大臣)이 신의 이름을 천거하여 안렴(按廉)의 초선(抄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저번에 외방에 보임된 것은 곧 전조(銓曹)에서 관직을 천가한 일이었다."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박만보(朴萬普)가 북자(北咨)의 변무(辨誣)하는 일로써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채은(債銀)을 도로 보낸다는 설(說)을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대개 사리(事理)로써 논하더라도 먼저 이미 거절하였다가 이제 징수하여 돌려보낸다면 전일에 거절한 것은 자연히 거짓을 꾸민 것이 되고 오늘날 징수하여 돌려보내는 것은 오로지 약속을 두려워하는 연유인 것으로 될 것이며, 또 이해로써 말하더라도 만약 그 채은을 돌려보냄으로써 나라의 수치를 씻을 수 있고 저들의 마음을 복종(服從)시킬 수 있다면, 비록 공사(公私)의 저축을 통틀어 주더라도 어찌 아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거조(擧措)는 한갓 우리의 수치만을 더하고 저들의 기세를 올릴 뿐이니, 아직은 저들이 다시 협박하거나 다시 요구함을 기다려서 어쩔 수 없게 된 뒤에 돌려 보내더라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 자문은 원래 우리 나라에 직접 보낸 것이 아니고 그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서로 수작(酬酌)한 말에 지나지 않으니, 만약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서 선뜻 변명하는 것은 어찌 경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너의 소장(疏章)을 보니, 그 일에 대하여 소상히 알지 못하는 바가 있다. 오늘날 사신을 보내는 것은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느냐?"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수령(守令)이 만약 죄가 있어 파직된 경우가 아니라면 무릇 과만(瓜滿)으로 체임(遞任)되거나 지레 체직(遞職)된 자는 마땅히 본읍(本邑)의 지경 위에서 〈신구 수령(新舊守令)이〉 서로 면대(面對)하여 교대(交代)하는 것으로 길이 정식(定式)을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가 또 아뢰기를,
"수령이 2년에 한번 근친(覲親)하고 3년에 한 차례 소분(掃墳)하며 어버이의 병환에 가서 간호하고 조부(祖父) 및 조모(祖母)의 장사(葬事)에 가서 보살피며 과거(科擧)의 응시를 허용하는 일들은 곧 법전(法典)에 정해진 바입니다. 이 6개 조항 이외에는 절대로 휴가(休暇)를 허락하지 말 것이며, 휴가를 받아 체임(遞任)을 도모한 자와 휴가를 받지 않고 직무를 버린 자는 마땅히 그 고을에 정배(定配)하는 것으로 길이 정식(定式)을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8일 경진
임금이 묘당(廟堂)과 전조(銓曹)에 명하여 경학(經學)에 밝은 선비를 가려 올리도록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는 많이 선발할 필요가 없고 또한 경연관(經筵官)으로 선발하지도 말라."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더불어 선발하여 올릴 것이오나, 신의 아는 바로는 경성(鏡城) 사람 이재형(李載亨)입니다. 이재형은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어버이를 섬겨 어진 사람으로 이름이 드러난지라 북쪽 사람들이 사표(師表)로 추대(推戴)하고 있습니다. 신이 북도(北道)의 방백(方伯)으로서 순행차(巡行次)로 경성(鏡城)에 당도했다가 서로 만나 대화(對話)를 나누었는데, 식견(識見)이 매우 높았으며, 또 예절(禮節)의 의문(疑問)을 가지고 서신(書信)을 왕복함으로써 조예(造詣)가 남보다 뛰어남을 알았습니다. 고(故) 판서(判書) 김창협(金昌協)이 북도(北道)의 평사(評事)로 있을 때에 이재형이 찾아가 경학(經學)을 물었고, 그 후에 김창협의 아우 김창흡(金昌翕)이 산수(山水)를 유람하려고 북도(北道)에 들어갔다가 그를 만나 보고 탄복하였으며, 돌아와 그의 형 김창집(金昌集)에게 말하여 드디어 부참봉(部參奉)에 제수되었으니, 부관(部官)을 사부(士夫)로 대우한 것은 일찍이 듣지 못한 바이므로 신이 전관(銓官)이 되었을 때에 천거하여 교관(敎官)이 되었고, 다시 부수(副率)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니, 이제 특별히 6품(六品)에 승진(陞進)시켜 적당한 자리에 등용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을 만약 경연관(經筵官)으로 부른다면 그 명칭을 혐의하여 나오지 않을 것이니, 6품으로의 승진은 아직 천천히 하고 우선 본도(本道)로 하여금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오게 하되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근유(勤諭)해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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