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임오
진연청(進宴廳)에서 아뢰기를,
"진연(進宴)할 때에 모든 일을 갑진년965) 에 이미 시행한 규례에 따라야 하는데, 그 《등록(謄錄)》을 상고해 본즉, 갑진년에는 선조(先朝) 정사년966) 의 절손(節損)한 전례를 인용(引用)하여 외방에 나누어 복정(卜定)하는 폐단을 제거하고 진휼청(賑恤廳)의 쌀 1천 석을 획급(劃給)하여 연수(宴需)에 보충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도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획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진휼청에서 쌀 8백 석을 획급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86면
【분류】왕실(王室) / 재정(財政)
[註 965] 갑진년 : 1724 경종 4년.[註 966] 정사년 : 1677 숙종 3년.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초복(初覆)967) 을 행하였다.
12월 2일 계미
이광덕(李匡德)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수익(李壽益)을 지평(持平)으로, 여선장(呂善長)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신치운(申致雲)을 교리(校理)로, 조덕린(趙德隣)을 수찬(修撰)으로, 조상경(趙尙慶)을 필선(弼善)으로, 박사수(朴師洙)를 승지(承旨)로, 이정응(李挺膺)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 진연(進宴)을 2월 20일로 정하고 왕대비전(王大妃殿) 진연을 2월 21일로 정했으니, 예조(禮曹)의 계청(啓請)에 따른 것이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진연청등록(進宴廳謄錄)》을 상고해 본즉, 외조(外朝)의 명부(命婦)968) 는 감생(減省)하는 것으로 이미 정해진 규식(規式)이 있으나 왕비(王妃)의 모친(母親)과 공주(公主)·옹주(翁主)와 왕자 부인(王子夫人)과 대전 유모(大殿乳母)는 연회(宴會)에 참여하는 절목(節目)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마련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별겸춘추(別兼春秋) 여선장(呂善長)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별겸춘추의 직임을 여러 사람을 거쳐 신에게까지 미쳤는데, 본관(本館)의 격례(格例)가 예로부터 심히 엄격하여 일찍이 서차(序次)를 뛰어넘어 차출하여 그 임무를 대행(代行)한 자가 없으며, 또 별겸(別兼)한 사람이 그 추천(推薦)하는 일을 홀로 담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결같이 고집하고 상지(相持)하여 사관(史官)의 추천을 천연(遷延)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그 후에 여선장이 또 소를 올려 말하기를,
"별겸(別兼)이 추천을 주관한 것은 숭정(崇禎)969) 임오년970) 에 시작되었는데, 선진(先進)의 모든 사람이 다 차출(差出)되어 함께 모여서 널리 상의토록 하였는데 근래 기사년971) 이래로 별겸은 다만 2원(員)만을 갖추게 하였으니, 옛뜻에 비추어 본다면 그 실당(失當)함이 이미 멀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만이라도 오히려 인원을 갖추어 상의할 수가 있었는데 홀로 한 사람만을 차출함에 이르러서는 전례를 널리 상고해 보더라도 이는 일찍이 없었던 바이며, 다만 전번에 처음 창설(刱設)하여 시행했을 뿐이니 오늘날에 있어 경계할 만하나 본받을 것은 못됩니다. 더구나 신의 아랫자리에 아직도 자그마치 네 사람이 있는지라 설혹 조가(朝家)에서 이 네 사람의 염의(廉義)를 곡진히 펴기 위하여 다시 거론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본관(本館)에서는 명백히 조정(調定)하여 한 절목(節目)을 마련한 후에야 규례를 넘어 체당(替當)하는 혐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춘추관(春秋館)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되었다.
호서 어사(湖西御史) 이도겸(李道謙)이 하직(下直)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효유(曉諭)하기를,
"모름지기 양남 어사(兩南御史)와 같이 연수(年數)를 한정하지 말고 효과(効果)를 이룩하도록 기필하라."
하였다.
12월 3일 갑신
유만중(柳萬重)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와 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이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을 위하여 민간(民間)의 가사(家舍)를 빌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조태억이 질병이 있고 집이 성(城) 밖에 있었는데 시임 대신(時任大臣)은 으레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으므로 민간의 집을 빌려 장차 병을 조섭(調攝)하려 하였다. 그러나 민간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금령(禁令)이 극히 준엄하였으므로 이광좌가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옮겨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였고, 심수현이 잇달아 진달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이미 거듭 금령을 내려놓고 대신의 병을 조섭하기 위하여 억지로 허락한다면, 이는 성실히 예우(禮遇)하는 뜻이 아니다. 비록 대신이라도 일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법을 지키는 도리에 있어 더욱 소중하지 않겠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조가에서 법을 지키는데 만약 존귀(尊貴)한 자와 근시(近侍)로부터 시작이 된다면, 어찌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에 이익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이 기쁘고 다행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 자신이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법을 어기고 진달한 것도 이미 사체(事體)를 잃은 것이며, 임금이 또 허락하지 않고 법을 지키는 도리로써 하교하였은즉 마땅히 몸을 움츠려 인책(引責)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한다. 그런데도 감히 다스리는 도리에 유익(有益)하다는 말로써 말머리를 돌려 극구 아양을 떨었는데, 이는 그의 본래의 태도가 그러했으니 어찌 족히 책망할 것이 되겠는가? 그러나 임금이 그를 대함도 너무 박하다고 이를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86면
【분류】인사(人事) / 주생활-가옥(家屋)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 자신이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법을 어기고 진달한 것도 이미 사체(事體)를 잃은 것이며, 임금이 또 허락하지 않고 법을 지키는 도리로써 하교하였은즉 마땅히 몸을 움츠려 인책(引責)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한다. 그런데도 감히 다스리는 도리에 유익(有益)하다는 말로써 말머리를 돌려 극구 아양을 떨었는데, 이는 그의 본래의 태도가 그러했으니 어찌 족히 책망할 것이 되겠는가? 그러나 임금이 그를 대함도 너무 박하다고 이를 만하다."
양사(兩司) 【장령(掌令) 권부(權孚)와 정언(正言) 정우량(鄭羽良)이다.】 에서 전번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고 또 소회(所懷)를 말하면서 윤종(允從)하기를 힘써 청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거취(去就)를 걸고 다투다가 인피(引避)하고 사직(辭職)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간원(諫院)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의 장계를 본즉 ‘함안 군수(咸安郡守) 이광형(李光炯)이 한 가지 미세(微細)한 일로 인하여 의령(宜寧) 사람 김승철(金承哲) 부자(父子)에게 지나친 난장(亂杖)을 안겨 보름 사이에 잇달아 죽었다.’고 하였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고 참혹하여 예사 파직(罷職)에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이광형을 잡아들여 추문(推問)하여 엄중히 처단(處斷)하소서. 도신(道臣)은 태장(笞杖)을 허락하여 이광형으로 하여금 구실(口實)을 삼게 했으며, 또 그 아들까지 죽이게 했으니, 책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황선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2월 5일 병술
소대(召對)972) 를 행하여 《심경(心經)》을 강론하고 인하여 자의(諮議) 심육(沈錥)을 입참(入參)하게 하였다.
12월 6일 정해
우승지(右承旨) 송진명(宋眞明)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헌신(憲臣)의 피사(避辭)에 신이 경연(經筵)에서 아뢴 말을 들어 억지로 끌어대어 혐의로 삼았고, 또 식가(式暇)973) 에는 장계(狀啓)를 궐(闕)하는 것이 일찍이 전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대각(臺閣)의 가고 옴은 그 관계됨이 가볍지 않아서 나라의 기제(忌祭)나 일·월식(日月食)의 재계(齋戒) 및 해 저물 때 성상소(城上所)974) 에 〈관원이〉 없어 공탈(公頉)의 경우 이외에는 사사로운 복제(服制)의 식가(式暇)로 인하여 우선 정계(停啓)한다고 써 낼 수가 없는 것인데, 계사를 전달하지도 않고 정지하지도 않은 채 공연히 계사(啓辭)를 궐했으니 사체가 매우 미안합니다. 신은 청컨대, 지금부터 일정한 규식(規式)을 마련하여 다시는 전일의 그릇된 관습을 답습하지 않도록 하소서. 또 하루에 두 번 아뢰지 않는 것도 또한 대각(臺閣)의 규례입니다. 전일 연석(筵席)에서 간신(諫臣) 정우량(鄭羽良)이 이미 물러갔다가 도로 들어와 다시 추고(推考)의 계사를 발론하고 소회(所懷)로써 진달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두 번 아뢴 것으로 귀결되었으니, 이것도 또한 규례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이때에 지평(持平) 이수익(李壽益)이 식가(式暇)로 인하여 다만 처치(處置)하는 일만 아뢰고 전번의 계사를 전달하지 않았으니, 대개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 일찍이 이 규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드디어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명하고 ‘이후로부터는 대계(臺啓)를 사사로운 연고로 인하여 우선 정계(停啓)하지 말라.’고 하였다.
12월 7일 무자
강박(姜樸)을 교리(校理)로, 조덕린(趙德隣)을 사간(司諫)으로, 여선장(呂善長)·윤광익(尹光益)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조현명(趙顯命)을 문학(文學)으로, 김흡(金潝)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연령군(延齡君) 이헌(李昍)의 계자(繼子) 이공(李糿)을 봉(封)하여 상원군(商原君)으로 삼았다. 이때 공(糿)의 연령(年齡)이 봉군(封君)할 나이에 차지 않았는데도 임금이 특별히 전조(銓曹)에 명하여 벼슬을 붙여 주도록 하였다.
자의(諮議)가 강론하는 자리에 참여하는 예절을 대신(大臣)에게 문의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의 의논에 이르기를,
"옛날 현종(顯宗)께서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진선(進善) 권시(權諰)가 서연(書筵)에 입참(入參)하였는데, 그의 좌차(座次)가 시강원(侍講院)의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사이에 있었습니다. 자의(諮議)는 참하관(參下官)975) 에 해당하고 또 새로 설정(設定)한 때문에 평상시의 좌목(座目)에는 설서(說書)의 아래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예우(禮遇)하는 도리로서는 설서의 위에 앉히는 것이 옳습니다. 상접(相接)하는 예절에 이르러서는 현종께서 처음에는 대면(對面)할 때 서로 읍(揖)을 하라는 영(令)을 내렸고 출입(出入)할 때에는 일어나도록 하였는데, 그 후에 유현(儒賢)이 굳이 사양함으로 인하여 예관(禮官)이 위에 품(稟)하여 읍(揖)을 하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기로 하였습니다. 진선(進善)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자의는 관질(官秩)이 더욱 낮으니, 다만 대우만 자별(自別)하게 함이 합당하며 달리 논의할 만한 예절은 아마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되 설서의 위에 앉히더라도 별달리 중(重)할 것이 없고 한갓 당사자(當事者)로 하여금 불안하게만 할 뿐이니, 좌목에 따라 입시(入侍)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이수익(李壽益)이다.】 에서 전번의 계사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좌랑(佐郞) 이중환(李重煥)은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일처리가 괴상한데다가 지난날의 죄명은 비록 벗어났다 하더라도 흉적(兇賊)과 결탁한 정상은 이미 밝게 드러났으니, 청컨대 먼 변방에 정배토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前) 지평(持平) 이정박(李廷樸)은 본래 약은 사람으로서 조금만 글재주를 끼고 간교한 언변을 가장해 이익을 도모하여 남의 재물을 빼앗은 일이 허다하였으니, 사생(死生)에 즈음하여 벗을 배반하고 그 재물을 취하였으며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백성을 학대해서 그 전토를 차지했습니다. 청컨대 잡아들여 추문(推問)하고 엄중히 조사하여 그 죄상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요상(僚相)의 연주(筵奏)에 민간의 집을 빌림을 허락해 달라는 말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죄를 인책하니, 비답하기를,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는 혹 대신을 박절하게 대한다고 말하겠으나, 이것이 진실로 후한 것이니, 경(卿)은 지나치게 인책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연(尹㝚)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석삼(鄭錫三)의 상소 가운데에 이른바 6, 7차례의 정사(政事)를 넘겨가며 기다리게 했다는 것은 곧 신을 가리킨 것인데, 말단에 이르기를, ‘이것이 과연 사사로운 의사가 그 사이에 개재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으니, 그 지적한 뜻이 심각하여 바로 탄핵문(彈劾文)과 같았습니다. 신이 외람되이 이 자리에 있음으로 인하여 비난하는 말이 장석(長席)976) 에까지 미쳐 마침내 체임(遞任)하는 데에 이르고야 말았으니, 신이 응당 체임될 것은 여러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2월 8일 기축
임금이 북자(北咨)에서 진주(陳奏)한 일로써 다시 여러 신하에게 순문(詢問)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혹자는 말하기를,
"마땅히 은자(銀子)를 징수하여 상환(償還)하여야 하나 부족한 수량은 조가(朝家)에서 마련하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받기 어렵다고 하였고 저들도 이미 너그러이 면제해 주기로 허락하였는데, 이제 그 속뜻을 이미 억측(臆測)하여 포흠(逋欠)난 은자를 다시 보내는 것은 성실한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허다한 부채(負債)가 있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하교가 비록 호생(好生)의 덕의(德意)에서 나왔으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저들의 노여움을 풀기 어렵습니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북자(北咨)에 비록 너그러이 면제해 주기로 허락했다고 하였으나 채은(債銀)을 받아들이려는 뜻이 문자(文字)에 드러났으니, 이미 내탕은(內帑銀)이라고 말한 이상 상환(償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약간의 은자를 먼저 보내고 인하여 끝내 그 수량에 준하여 상환할 뜻을 보인 연후에 비로소 변무(辨誣)할 수가 있습니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당초에 만약 약조(約條)에 의하여 채무(債務)를 진 자를 죽이고 채은을 받아 보냈다면, 패만(悖慢)한 말이 어찌 이에 이르겠습니까? 이제 마땅히 일 처리를 잘하지 못한 실수를 뒤따라 사과하고 인하여 채은을 상환할 뜻을 보이게 하소서."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오늘에 이르러 뒤따라 사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은 말하기를,
"신이 이미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게 되었는데, 백 가지로 생각해도 실은 좋은 방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만 중강(中江)에서 안사(按査)하기를 청하여 저들이 만약 인사를 허락한다면 신이 저들과 더불어 통관(通官)의 무리를 이끌고 중강에 나아가 서로 면대(面對)하여 분명하게 조사한다면, 채은의 많고 적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그 은자를 마련하여 갚는다면 어려움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의 일을 처리함이 어진 데에 지나쳤으니, 그 허물은 나에게 있다. 부채자(負債者)들을 약조에 의하여 국경 위에서 효시(梟示)했다면 어찌 상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는 한두 사람이 몰래 들어가 채은을 진 것이 아니다. 심양(瀋陽) 책문(柵門)에 많은 물화(物貨)를 쌓아놓고 우리 나라 사람에게 대출(貸出)했으므로 포흠을 진 자가 자그마치 2백여 명에 이르렀으니, 차마 어떻게 모두 죽이겠는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여덟 글자[八字]의 무함은 선조(先朝)를 위하여 변명할 일이요, 회자(回咨) 가운데에 만약 어휘(御諱)를 바꿔 쓴다면 사신(使臣)이 반드시 장차 당저(當宁)977) 를 위하여 변명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을 위하여 변무(辨誣)하는 것을 내가 스스로 담당한다면 선왕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不能辨理]’는 네 글자는 거의 변명해 씻게 될 것이고 어휘를 바꿔 쓴 뒤에는 오직 자신이 상심(祥審)하여 처리하는 데에 달려 있다."
하였다.
양사(兩司) 【지평(持平) 이수익(李壽益)·정언(正言) 정우량(鄭羽良)이다.】 에서 전번의 합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번의 계사 가운데 윤봉조(尹鳳朝) 및 간련(干連)된 사람을 설국(設鞫)하여 엄문(嚴問)하라는 일에 대하여 답하기를,
"한 가지 일을 두 번 국문하지 못한다는 뜻으로써 여러 차례 하교한 바 있었다. 그러나 만약 멀리 찬배(竄配)하는 데에 그친다면 여정(輿情)이 울분(鬱憤)할 것이니, 특별히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토록 하라."
하였다. 【대계(臺啓)가 있었으므로 전지(傳旨)를 받들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현감(縣監) 민진굉(閔鎭紘)이 일찍이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에 환곡(還穀)과 이전미(移轉米)를 감관(監官) 및 색리(色吏)와 부동(符同)하여 작전(作錢)해서 사복(私腹)을 채웠으니, 엄중히 치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민진굉을 잡아다가 추문(推問)하게 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밝게 사핵(査覈)하여 그 죄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9일 경인
임광필(林光弼)을 헌납(獻納)으로, 이춘제(李春躋)를 정언(正言)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조상경(趙尙絅)을 보덕(輔德)으로, 조진희(趙鎭禧)를 부교리(副校理)로, 송진명(宋眞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정필(李廷弼)을 승지(承旨)로, 윤상백(尹尙白)을 사서(司書)로, 정석오(鄭錫五)를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12월 10일 신묘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삼경(三慶) 【왕세자의 입학(入學)·관례(冠禮)·가례(嘉禮)였다.】 을 합친 별시 무과(別試武科)의 초시 액수(初試額數)를 기유년978) 의 규례에 의하여 8백 인으로 정하고 서울과 외방에 분배(分排)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서울은 양소(兩所)에 각기 2백 20인을,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은 각기 80인을, 호서(湖西)·해서(海西)·관서(關西)는 각기 50인을, 관동(關東)은 20인을, 함경남도(咸鏡南道)와 북도(北道)는 각기 15인을 취(取)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87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註 978]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獻納) 임광필(林光弼)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언(正言) 조적명(趙迪命)의 소장에 양사(兩司)의 합계를 이미 발론하였다가 곧 정지하였다 하여 심지어 대각(臺閣)의 기풍(氣風)이 위축되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대개 저번에 이정석(李廷錫)의 독계(獨啓)는 격례(格例)에 어긋난 것이므로 신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있을 때에 요대(僚臺)와 더불어 상의하고 우선 정계(停啓)할 것을 간원(諫院)에 통보하였는데, 당시 간원에 행공(行公)하는 자가 없어서 여러 날 천연(遷延)되어 양사가 마침내 함께 회합(會合)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마지못하여 대각에 나아가 인피(引避)했은즉, 〈양사가〉 끝내 합계하지 못한 것은 신이 짐짓 정계(停啓)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2월 11일 임진
궁성(宮城)에 입직(入直)하는 군졸들에게 의자(衣資)와 약물(藥物)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일기가 심히 차가워 군졸 가운데 동상자(凍傷者)가 많으므로 이 분부가 있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 조문명(趙文命)이 소장을 올려 북자(北咨)에 관한 일을 논하니, 비답하기를,
"소장 가운에 진달한 바가 주밀(周密)하나 이미 경연(經筵)에서 하유(下諭)한 바와 같이 이번 사신을 보내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일이다."
하고, 인하여 원소(原疏)는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라고 명하였다.
윤대(輪對)979) 를 행하였다.
임금이 서원(書院)에 대한 금령(禁令)을 내린 후에 첩설(疊設)한 것은 훼철(毁撤)하라고 명하였으니, 시독관(侍讀官) 조진희(趙鎭禧)의 청에 따른 것이다. 조진희가 문의(文義)로 인하여 아뢰기를,
"명(明)나라 말엽에 문학(文學)을 숭상한 폐단이 심했습니다. 운양 순무(鄖陽巡撫) 이재(李材)가 군중(軍中)에서 학문을 강론(講論)하였고 무리를 모아 서원(書院)을 세우는가 하면 또 군량(軍糧)을 덜어내어 강학(講學)의 경비에 제공하여 장교(將校)들로 하여금 난동을 일으키게 했으니, 실로 오늘날의 감계(鑑戒)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서원을 첩설(疊設)한 것이 많아서 도리어 양민(良民)의 해가 되고 실효(實效)가 없으니, 문채(文彩)를 덜고 바탕을 숭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령(禁令)을 내린 후에 첩설(疊設)한 서원을 삼남 어사(三南御史)로 하여금 조사해서 계문(啓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진희가 말하기를,
"비록 도학(道學)이 높은 사람이라도 다만 서원 하나만을 허용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훼철(毁撤)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훼철하도록 명하였는데, 다만 금령을 내린 후에 첩설한 서원만을 훼철하게 하였다.
춘추관(春秋館)에서 아뢰기를,
"별겸춘추(別兼春秋) 여선장(呂善長)의 상소로 인하여 품신해 처리하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연고가 있어 추천(推薦)을 담당할 수 없으니, 여선장으로 하여금 홀로 담당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에 여선장이 이종백(李宗白)을 추천하였다.
12월 13일 갑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14일 을미
채팽윤(蔡彭胤)을 승지(承旨)로, 이광보(李匡輔)를 교리(校理)로, 홍상인(洪尙寅)을 필선(弼善)으로 삼고, 권부(權孚)를 발탁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이수익(李壽益)이다.】 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희릉 참봉(禧陵參奉) 신구(申球)의 연전의 상소가 지극히 패만(悖慢)하고 망령되었는데, 반연(攀緣)을 타서 외람되게 사적(仕籍)에 올랐으며, 비루하고 잗다른 행동이 많으니 능졸(陵卒)들이 모두 호원(呼冤)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신구를 사판(仕版)980) 에서 삭거(削去)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관노비(館奴婢)의 추쇄(推刷)981) 는 실로 열읍(列邑)의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작년에 전라우도 추쇄관(全羅右道推刷官)이 온 도내(道內)의 원망을 부른 정상을 어사(御史)가 이미 진달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추쇄관을 파직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전번 계사 가운데 정형익(鄭亨益)에 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헌납(獻納) 임광필(林光弼)이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수년 전에 영남 대동미(大同米)를 선혜청(宣惠廳) 아전이 한 고을의 수납(收納) 한 쌀을 전량 도둑질해 먹은 정상이 드러났는데도 마침내 무사(無事)하였고, 작년에는 병조(兵曹)의 아전이 은밀히 도둑질한 문서를 각 고을에 분배(分排)하였다가 관장(官長)에게 현착(現捉)되었는데도 사령(赦令)으로 인하여 방면(放免)함을 입었으니, 국가의 경용(經用)이 탕갈되는 것은 실로 전포 아문(錢布衙門)의 문서가 소루(疎漏)한 소치(所致)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병판(兵判)으로 있을 때에 고(故) 감사(監司) 허지(許墀)가 낭관(郞官)이 되어 따로 사중기(私重記)982) 를 만들어 팔도(八道)에서 수납되는 전 수량을 총계(總計)해 놓고 매삭(每朔) 경비(經費)를 지급하니, 아전들이 손을 쓸 수가 없었으므로 각 창고에 재물이 가득하였습니다. 마땅히 각아문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이 규례를 따라 중기(重記)를 새로 만들어서 체임(遞任)할 즈음에 창고를 샅샅이 조사하여 전장(傳掌)하는 것으로 길이 규식을 정하게 하소서. 그리고 해당 낭관도 또한 반드시 구임(久任)한 연후에 중기의 법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12월 16일 정유
정원(政院)에 명하여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가 봉진(封進)한 흉서(凶書)를 불사르게 하였다. 이때에 흉역(凶逆)의 무리가 임금을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말로써 몰래 선동(煽動)하여 민심을 광혹(誑惑)케 하더니, 이에 이르러 익명서(匿名書)를 전주(全州) 시장(市場)에 걸어놓았으므로 정사효가 장계와 함께 봉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저번에 연은문(延恩門)에 걸었던 방서(榜書)와 비슷하다."
하고, 드디어 승지를 시켜 그 글을 불사르게 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익명서(匿名書)를 물이나 불속에 던지는 것은 법문(法文)에 실려 있으며, 비록 부자간(父子間)이라도 서로 볼 수 없는 것인즉, 이와 같이 흉패(凶悖)한 글을 어떻게 상달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감사(監司)는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판관(判官) 이석인(李錫仁)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범인(犯人)을 기포(譏捕)하려 한다면 한갓 그들의 계책에 빠질 것이니 기포하지 말라."
하니, 승지(承旨) 정석삼(鄭錫三)이 대답하기를,
"이는 성덕(盛德)이 되는 일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정사효와 이석인은 흉역(凶逆) 속에 속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흉서를 거리낌 없이 계문(啓聞)하여 천청(天聽)을 공동(恐動)케 하고 여러 사람의 이목(耳目)에 전파되기를 요망(要望)했으니, 그 마음속에 품은 바는 길가는 사람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여러 신사들이 진실로 당저(當宁)를 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놀라고 통분하여 피눈물을 머금고 정사효를 성토(聲討)하고 원범(元犯)을 기포(譏捕)했어야 한다. 그런데 입시(入侍)한 승선(承宣)이 체포하지 말라는 성교(聖敎)를 다행히 여겨 성덕(盛德)이라고 일컬으며 희롱해 찬양하였으며, 위로는 대신에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통분히 여기는 뜻이 없었으니, 그 죄가 어찌 죽임에서 모면할 수가 있겠는가? 이때에 터무니없는 말이 날로 일어나 청파동(靑坡洞)에서는 집채 같은 바위를 어둔 밤에 굴려 옮겼다 하였고, 남산(南山)에서는 소나무 수백 주를 뽑아서 산밑에 쌓아놓았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심이 소요하여 흙더미가 무너지는 형세에 놓여 있었으니, 흉역한 무리들의 소행이 이와 같은데도 임금은 구중 궁궐(九重宮闕)에 깊이 있어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88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정사효와 이석인은 흉역(凶逆) 속에 속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흉서를 거리낌 없이 계문(啓聞)하여 천청(天聽)을 공동(恐動)케 하고 여러 사람의 이목(耳目)에 전파되기를 요망(要望)했으니, 그 마음속에 품은 바는 길가는 사람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여러 신사들이 진실로 당저(當宁)를 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놀라고 통분하여 피눈물을 머금고 정사효를 성토(聲討)하고 원범(元犯)을 기포(譏捕)했어야 한다. 그런데 입시(入侍)한 승선(承宣)이 체포하지 말라는 성교(聖敎)를 다행히 여겨 성덕(盛德)이라고 일컬으며 희롱해 찬양하였으며, 위로는 대신에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통분히 여기는 뜻이 없었으니, 그 죄가 어찌 죽임에서 모면할 수가 있겠는가? 이때에 터무니없는 말이 날로 일어나 청파동(靑坡洞)에서는 집채 같은 바위를 어둔 밤에 굴려 옮겼다 하였고, 남산(南山)에서는 소나무 수백 주를 뽑아서 산밑에 쌓아놓았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심이 소요하여 흙더미가 무너지는 형세에 놓여 있었으니, 흉역한 무리들의 소행이 이와 같은데도 임금은 구중 궁궐(九重宮闕)에 깊이 있어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12월 17일 무술
홍문관 신록(弘文館新錄)을 행하여 조현명(趙顯命)·박문수(朴文秀)·서명빈(徐命嬪)·윤동형(尹東衡)·조명교(曺命敎)·조적명(趙迪命)·홍경보(洪景輔)·윤상백(尹尙白)·임수적(任守迪)·이종성(李宗城) 등 20인을 발취(拔取)하였다.
달이 헌원 우각성(軒轅右角星)을 범하였다.
조지빈(趙趾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저(李著)를 장령(掌令)으로, 김시환(金始煥)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번 홍문록(弘文錄)983) 에 응당 참여할 사람이 많지 않음이 아닌데 마침내 회권(會圈)에 든 자는 요로(要路)에 있는 약간명(若干名)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너무 서둘러 처리하여 물정에 협흡(協洽)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권점(圈點)을 주관할 응교(應敎)가 저번에 맡은 바 직책을 다하지 못한 탓으로 지색(枳塞)을 당했는데, 옛자리에 다시 통망(通望)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친혐(親嫌)을 묻지 않고 갑자기 의망(擬望)에 올랐으니, 정례(政例)가 그렇지 않습니다. 신에게 마침 전랑(銓郞) 여선장(呂善長)이 찾아왔기에 사체(事體)가 그렇지 않음을 말하였는데 다음날 응교가 출사(出仕)하여 숙배(肅拜)하고 홍문관 신록(弘文館新錄)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자신이 대신(大臣)이 되어 공의(公議)에 의거하고 정사(政事)의 격식(格式)을 지켜서 말한 것인데 명류(名類)가 들은 체하지 않고 안연(晏然)히 권점을 주관했으니, 신이 어떻게 구차하게 묘당의 위에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의 진달이 비록 대체(大體)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나, 추천을 담당한 자와 신록(新錄)에 참여한 자로 하여금 한 가지 불안한 단서(端緖)를 안겨주는 것이니, 경(卿)은 이를 체량(體諒)하고 다시 혐의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掌令) 주형리(朱炯离)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사람을 등용하는 법은 오로지 격례(格例)만을 따라 팔도 군·현(八道郡縣)의 어느 자리는 문관(文官)이 맡고 어느 자리는 무관(武官)이 맡으며, 어느 자리는 음관(蔭官)이 맡는다고 되어 있어 진실로 그 맡을 자리가 아니라면 비록 치민(治民)의 재능(才能)이 있다 해도 애당초 의망(擬望)하여 제수(除授)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 어찌 관(官)을 위하여 인재를 선택하는 뜻이 되겠습니까? 관북(關北) 일도(一道)는 참혹한 충재(蟲災)를 입었고 금년의 환곡(還穀)도 아직 모두 수납(收納)하지 못했는데 또 연구(年久)한 조세(租稅)의 포흠(逋欠)을 독책(督責)하니, 민간이 소요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영(令)을 정침(停寢)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수령(守令)을 차송(差送)하는 일에 대하여는 일찍이 하교한 바가 있고, 소말(疏末)의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2월 18일 기해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첫 번째 정사(呈辭)984)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독히 타일렀다.
부수찬(副修撰) 윤광익(尹光益)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번 헌신(憲臣)의 계사(啓辭)에 사당(私黨)이 논박을 입은 데에 감정을 품고 자신과 취향(趣向)을 달리하는 자가 요로(要路)에 있음을 꺼려하여 전혀 이치에 당치도 않은 제목(題目)을 꾸며 반드시 공격하여 제거하려고 하는지라, 이에 신이 그를 낙과(落科)에 두려고 한 것입니다. 미세한 정성이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엄중한 비답이 내렸거니와, 헌신(憲臣)의 소장이 종이에 가득히 늘어놓은 바가 오직 추악하게 헐뜯어 반격만을 일삼았으니, 진실로 깊이 책망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저 간신(諫臣)과 재신(宰臣)들은 또한 무슨 노여워할 만한 일이 있었기에 기회를 타고 합세(合勢)하여 신을 협박하기에 더욱 급하여 반드시 신을 진구렁에 빠뜨린 후에야 말려고 하였는지요?"
하니, 비답하기를,
"스스로 반성(反省)할 줄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극구 배척했으니, 이런 버릇을 내가 실로 그르게 여긴다."
하였다.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광덕(李匡德)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의 차본(箚本)에 홍문록(弘文錄)을 새로 선정(選定)할 때에 전조(銓曹)의 잘못을 심각하게 논평한 것은 모두가 신의 죄입니다. 정석오(鄭錫五)를 당초에 지색(枳塞)케 한 것도 신이요, 다시 통망(通望)하게 한 것도 신입니다. 다시 통망된 여부(與否)는 신이 의당 상세히 알 것이온데 대신이 곧장 다시 통망됨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으니, 혹시 정목(政目)이 누락되어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응교(應敎)를 차출하라는 분부가 내려진 후에 여선장(呂善長)을 의망(擬望)에 올림이 마땅하오나 여선장이 겸양(謙讓)하여 인피(引避)하였습니다. 전조(銓曹)의 옛 격례(格例)에 낭관(郞官)이 의망에 오르기를 자원(自願)하지 않으면 억지로 의망에 올리는 규례가 없었으므로 부득이하여 정석오를 의망에 올리게 된 것입니다. 대개 궁료(宮僚)와 관직(館職)은 비록 의망에 오르더라도 모두 상피(相避)985) 함이 없는 것이 전래(傳來)해 오는 옛 규례입니다. 지금 대신이 친혐(親嫌)을 묻지 않고 갑자기 의망에 올렸다고 책망했으니, 이것도 또한 아직 정목(政目)을 보지 아니하여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차본(箚本)이 한번 나오자 조정의 형상이 크게 결렬(決裂)되어 전조(銓曹)에는 행공(行公)할 사람이 없고 도당록(都堂錄)은 회권(會圈)을 마칠 기약이 없으니, 이는 모두 신이 취한 지색과 통망이 차서를 잃었으며 부추기고 억제함이 공정하지 못한 소치(所致)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신록(新錄)이 겨우 성취되자 뜻밖에 그 배척이 대신에게서 나왔으니, 이는 반드시 그 곡절을 소상히 알지 못한 소치일 것이다. 네가 어찌 사면하랴?"
하였다.
12월 19일 경자
도승지(都承旨) 정석삼(鄭錫三)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윤광익(尹光益)의 상소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을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헌신(獻臣)의 한 논계가 남보다 약간 강직(剛直)한 뜻이 있기는 하였으나, 윤광익의 그 사당(私黨)을 두둔하고 공공연히 방자하게 헐뜯음은 지극히 무엄(無嚴)합니다. 신이 저번에 올린 한 상소는 공정한 울분(鬱憤)에서 나온 데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그 이른바 ‘기회를 타고 합세했다.’는 등의 말은 어찌 심히 해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그릇되고 어그러진 말을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좌상(左相)의 소본(疏本)을 보고 그 정석오(鄭錫五)의 동벽(東壁)986) 에 관한 일을 논박한 데 대하여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석오는 관직(館職)에서 지색(枳塞)을 당한 지 이제 5개월이 되었는데 낭관(郞官)이 이미 다시 통망(通望)함을 허락하여 여러 차례 옛자리에 의망(擬望)하였고, 친혐(親嫌)에 대하여는 위에 아뢰어 의망을 청한 것이 의거할 만한 전례가 있습니다. 응교(應敎)의 의망에 오를 사람은 본시 여선장(呂善長)이 있으나, 전조(銓曹)의 고사(故事)에 낭관(郞官)의 승품(陞品)은 반드시 그의 자청(自請)을 기다리는 법인데 여선장이 끝내 자원(自願)하지 않았은즉, 이제 정석오을 의망하여 차출한 것이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이 개재(介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대신이 여선장에게 수작(酬酢)함이 이것이 정녕(丁寧)하였음에도 여선장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막연히 이를 듣지 못하고, 연달아 정석(政席)에 나아갔으니, 마음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이 차자에 진달한 말은 필시 그 곡절을 소상히 알지 못한 소치일 것이다."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송진명(宋眞明)과 교리(校理) 이광보(李匡輔) 등이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소를 올려 인피(引避)하니, 임금이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조태억이 소장을 올리고 성(城) 밖으로 나갔다. 그 소장에 이르기를,
"신이 어찌 신록(新錄)을 방해할 뜻이 있겠습니까? 다만 권점(圈點)을 주관하는 응교(應敎)가 진실로 인망(人望)에 속(屬)해 있는 자가 아니며, 또 격례(格例)에 응당 구애되는 사람인지라, 신이 물의(物議)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과연 여선장을 대하여 이를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정석오가 출사(出仕)하여 숙배(肅拜)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권점(圈點)을 완료했다는 보고가 이르렀으니, 정석오가 신의 말을 개의하지 않고 안연히 권점을 담당한 것은 참으로 해괴한 일입니다. 그리고 낭관(郞官) 이광덕(李匡德)은 장황히 소를 올려 온갖 비난과 수모를 가(加)하고 제가 극력 지색케 했던 정석오를 권점을 주관하는 응교 자리에 합당하다고 하였으니, 지극히 어그러진 일입니다. 그 이른바 ‘궁료(宮僚)와 관직(館職)은 비록 승진해 의망에 오르더라도 모두 상피(相避)하는 규례가 없다.’는 것은 전혀 실지와 어긋난 일이니, 전조(銓曹)의 낭관(郞官)에서 곧장 응교의 의망에 오른 자는 원래 다시 통망하는 일이 없으므로 친혐(親嫌)에 구애받지 않으나, 그 나머지는 이런 규례가 없었습니다. 옛 규례는 그러한데 이광덕(李匡德)의 말은 저와 같으니, 어찌 근래에 혹 새로 만든 규례가 있는데 신이 듣지 못한 것이란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불러 보고 진주(陳奏)에 관한 일을 다시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은 ‘먼저 은화(銀貨)를 보냄이 마땅하다.’고 하고, 어영 대장(御營大將) 조문명(趙文命)과 대사성(大司成) 송인명(宋寅明)은 ‘먼저 재자관(齎咨官)을 보냄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세 사람의 말이 어떠한가?"
하니, 부사(副使) 이명언(李明彦)은 말하기를,
"먼저 재자관을 보낸다면 저들이 혹 말을 희롱하여 저들을 정탐(偵探)하려는 것으로 의심할 것이요, 만약 직접 은화(銀貨)를 보낸다면 탈을 잡을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윤순은 말하기를,
"변무(辨誣)하는 일이 중대한데, 만약 은화를 가지고 간다면 저들이 비록 받지 않더라도 반드시 노여워하지는 않을 것이요, 만약 받는다면 비록 전에 보낸 칙지(勅旨)를 수환(收還)하지는 않더라도 좋은 말을 듣게 되면 바로 변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은화 6만 냥을 아껴 갚지 않는다면 이 뒤에 다시 패만한 말이 없을 것을 어찌 알며, 그 때에는 비록 10갑절로 환상(還償)하려 하여도 아마도 여의치 못할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이진(權以鎭)은 말하기를,
"마땅히 주 문왕(周文王)이 곤이(昆夷)987) 를 섬기고 구천(句踐)988) 이 오(吳)나라를 섬긴 것처럼 채은(債銀)의 포흠(逋欠)에 준(準)하여 환상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는 말하기를,
"이제 이 채은은 피차(彼此)의 간사한 백성들이 사사로이 주고받은 것인데, 조가(朝家)에서 이것을 채워서 갚는다면 어찌 이러한 거조(擧措)가 있겠습니까? 〈간민(奸民)에게〉징수(徵收)하여 보내는 것은 오히려 가(可)하거니와 채워서 보내는 것은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조정의 의논이 반드시 채워서 보내고자 한다면 신은 차라리 좌상(左相)과 같이 성(城) 밖으로 나갈지언정 감히 받들어 시행할 수 없습니다. 또 저들이 한번 언성(言聲)을 높임으로써 은자 6만 냥을 들여보낸다면, 후일에 10만 냥이나 20만 냥을 다시 내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번 자문(咨文)에 패만한 말이 있었다고 하여 이제 만약 은자(銀子)를 가지고 들여보낸다면, 저들이 비록 오랑캐라 하더라도 장차 우리를 무엇이라 이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주장이 옳다. 이제 만약 관은(官銀)으로써 마련해 갚는다면 그 폐단이 한정이 없을 것이다. 재자관(齎咨官)을 먼저 보낸다는 설은 이제 이미 시기(時期)가 늦었으나, 별자(別咨)는 겸하여 보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이제 이번 사행(使行)에서는 반드시 정문(呈文)할 일이 있을 것이니,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 가운데에서 문장에 능숙한 자 한 사람을 별달리 가려 계하(啓下)하여 데리고 가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윤순이 말하기를,
"선묘조(宣廟朝)에 종계 변무(宗系辨誣)989) 할 때 최입(崔岦)을 질정관(質正官)으로 삼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별종사관(別從事官)이라 이름하여 데리고 가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명항(吳命恒)이 아뢰기를,
"박치원(朴致遠)을 율(律)로써 감단(勘斷)한다면 그 죄가 유(流)에 해당하나,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냈으니 형벌을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치원은 제가 일찍이 탐리(貪吏)를 논핵(論劾)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자신이 수재(守宰)가 되어서는 스스로 범죄함이 이와 같으니, 비록 전정(殿庭)에서 팽형(烹刑)990) 을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시종(侍從)이라 하여 관대할 수가 있겠는가? 상례에 의하여 형장(刑杖)으로 추문(推問)함이 옳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박치원은 그 행신(行身)과 처사(處事)에 진실로 해괴한 바가 많았으나, 이선(李譔)의 날조된 무함으로 형장으로 추문하라는 분부가 있어 시론(時論)이 자못 원통하다고 일컬었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89면
【분류】사법(司法) / 역사(歷史)
[註 990] 팽형(烹刑) : 탐관(貪官)을 처벌하는 극형을 의미함.
사신은 말한다. "박치원은 그 행신(行身)과 처사(處事)에 진실로 해괴한 바가 많았으나, 이선(李譔)의 날조된 무함으로 형장으로 추문하라는 분부가 있어 시론(時論)이 자못 원통하다고 일컬었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0일 신축
진청(賑廳)의 쌀 5천 석과 금위영(禁衛營) 및 어영청(御營廳)의 쌀 7천 석을 호조(戶曹)에 대출(貸出)하도록 분부하였다. 이때에 나라의 경용(經用)이 탕갈되어 동쪽에서 빌어 서쪽을 메꾸었으니, 그 구차함이 이와 같았다.
12월 21일 임인
남일명(南一明)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강박(姜樸)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에게 돈유(敦諭)하였다. 조태억이 또 소를 올려 힘써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번의 합계(合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주형리(朱炯离)이다.】 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홍성보(洪性輔)·경성회(慶聖會)는 모두 경화(京華)의 세족(世族)으로서 몸가짐이 추잡하고 마음씀이 간사하며 부귀(富貴)를 탐내어 시세(時勢)에 따라 반복(反覆)했으니, 그 전후(前後)의 변덕스러운 태도는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홍성보와 경성희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영외(嶺外)의 변변찮은 나학천(羅學川)이 시세(時勢)를 노려 얼굴을 바꾸고 오로지 유리(有利)한 데로 추종(趨從)하는 것을 어찌 족히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대부(士大夫)의 염의(廉義)를 이런 무리들에게 바랄수 없으니, 일후에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릴 것을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청컨대 홍성보·경성희·나학천을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토록 하소서."
하였고, 또 아뢰기를,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강욱(姜頊)은 용렬하고 추잡한 사람인데, 웅대한 곤수(閫帥)에 제수됨에 미쳐 오로지 탐학(貪虐)만을 일삼아 백성의 재물을 박탈(剝奪)하여 사복(私腹)을 채운 일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임광필(林光弼)이다.】 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허인(許繗)은 윗사람을 잘 섬김으로써 발신(發身)하여 현직에 제수된 후에 물의(物議)가 시끄러움을 저도 또한 아는지라, 움츠리고 나오지 않다가 정치가 바뀜에 미쳐 조정이 거의 비자 그 틈을 타서 조정에 하직(下直)하고 서울에 있는 대관(臺官)들에게도 또한 두루 찾아보지 않은 채 황망히 달려갔으니, 그 거조(擧措)가 해괴합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가 또 흉서(凶書)를 봉진(封進)하여,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불사르게 하였다. 이때에 남원 시장(南原市場)에 또 흉서가 걸렸으므로 정사효가 계문(啓聞)했으니, 대개 그 글은 전주(全州)에 걸렸던 흉서와 말이 같고 필적(筆跡)도 또한 한 솜씨로 쓴 것이었다.
12월 22일 계묘
이종백(李宗白)을 검열(檢閱)로 삼았으니, 별겸춘추(別兼春秋) 여선장(呂善長)의 추천이었다.
해주(海州) 진사(進士) 강봉휴(姜鳳休) 등이 소를 올려 본주(本州)의 청성묘(淸聖廟)991) 에 비석(碑石)을 세우 주자(朱子)가 쓴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대자(大字)를 새기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병조 참지(兵曹參知) 이현장(李顯章)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번에 올린 소장(疏章)은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위한 것이며 양궁(兩宮)을 위한 것입니다. 어찌 언관(言官)의 말과 비슷한 점이 있겠습니까? 오직 저 원망하는 무리들이 반드시 신에게 원하는 바를 풀기 위하여 문자(文字)를 꼬집어서 죄목을 얽어 끝내 망측한 죄과(罪科)에 빠뜨렸던 것입니다. 또 용만(龍灣)992) 의 일로써 대관(臺官)을 사주(使嗾)하여 마음껏 무함을 얽어 사핵(査覈)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모두 허위(虛僞)로 돌아가고 잡을 만한 증거가 없자 또 인삼(人蔘) 한 행담(行擔)993) 과 당태(唐馱)994) 로써 무명과 상환(相換)했다는 등의 말을 백지(白地)에 지어내어 반드시 다그쳐 보려고 했으니, 아! 또한 심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일을 가지고 어찌 혐의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12월 23일 갑진
여선장(呂善長)을 부교리(副校理)로, 조진희(趙鎭禧)를 수찬(修撰)으로, 이광보(李匡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경악(經幄)995) 의 논사(論思)하는 자리는 숙유(宿儒)가 아니면 있을 수가 없는 것인데, 당파의 사욕(私慾)이 횡행하고 선택(選擇)이 엄정하지 못하여 청루(靑樓)에서 행패나 하던 완패(頑悖)한 무리와 남읍(南邑)에서 기생(妓生)을 끼고 놀던 소년(少年)들이 곧 외람되이 학사(學士)의 반열에 끼었으니, 군덕(君德)의 성취(成就)를 어떻게 이 무리들에게 책임지울 수 있겠는가? 공의(公議)의 개탄(慨歎)함을 금(禁)할 길이 없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89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995] 경악(經幄) : 경연(經筵).
사신은 말한다. "경악(經幄)995) 의 논사(論思)하는 자리는 숙유(宿儒)가 아니면 있을 수가 없는 것인데, 당파의 사욕(私慾)이 횡행하고 선택(選擇)이 엄정하지 못하여 청루(靑樓)에서 행패나 하던 완패(頑悖)한 무리와 남읍(南邑)에서 기생(妓生)을 끼고 놀던 소년(少年)들이 곧 외람되이 학사(學士)의 반열에 끼었으니, 군덕(君德)의 성취(成就)를 어떻게 이 무리들에게 책임지울 수 있겠는가? 공의(公議)의 개탄(慨歎)함을 금(禁)할 길이 없다."
12월 25일 병오
정석오(鄭錫五)를 수찬(修撰)으로, 송인명(宋寅明)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홍상용(洪尙容)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문학(文學) 조현명(趙顯命)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대신(大臣)이 그 아들 자의(諮議) 신(臣) 심육(沈錥)을 데리고 갔는데 전하께서 체직(遞職)을 명하여 가도록 허락하셨다 하니, 신이 가만히 생각하기에 전하께서 경솔히 허락하신 듯합니다. 심육이 소명(召命)을 받들고 서울에 들어와 겨우 한 번 소대(召對)를 겪었는데, 이제 갑자기 멀리 떠나감을 허락하시고 조금도 어려워하는 바가 없었다 하니, 이는 당초 힘써 징소(徵召)하신 뜻과 과연 어긋남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심육에 관한 일은 너의 말이 옳다. 그러나 그 소청(所請)을 들어준 것은 소중(所重)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겸사서(兼司書) 이광덕(李匡德)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엊그제 망령되이 한 소장(疏章)을 진달하여 대신의 뜻을 거듭 거슬러서 대신이 성 밖으로 나가 차자(箚子)와 소장을 연달아 올렸고, 또 들은즉, 대사간(大司諫) 조지빈(趙趾彬)이 한 소장을 얽어 신에 관한 일을 심하게 논했다고 하는데, 전하는 자가 비록 그 어구(語句)를 모두 외우지는 못하였으나 그 대강(大綱)의 뜻을 말한다면, ‘신이 일찍이 인척(姻戚)의 힘을 빙자하여 외람되이 청선(淸選)의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니, 대개 신이 궁관(宮官)에 의망(擬望)된 것은 참의(參議) 조문명(趙文命)이 곧 신의 처삼촌 숙부(妻三寸叔父)임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소본(疏本)이 아직도 대신의 곁에 있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니, 결코 상달(上達)되지 않은 소장이라고 하여 가리워 둔 채 염의를 무릅쓰고 출사(出仕)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리(事理)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달되지 않은 소장(疏章)을 고집(固執)하고 혐의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데 속한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광덕(李匡德)의 소장에 이르기를, ‘대신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였고, 또 ‘통망(通望)과 지색(枳塞)이 차서를 잃었다.’고 하였는데, 신은 당초에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소상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혹자의 말에는 ‘신의 아들 조지빈(趙趾彬)의 이름이 삼전(三銓)996) 의 의망(擬望)에 들었는데 이광덕이 저지했는지라 신이 혹시 저에게 불평하고 있지나 않은지 의심하여 이런 차자(箚子)가 있게 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정석(政席) 사이에서의 당상과 낭관[堂郞官]의 수작(酬酢)은 외간(外間) 사람의 알 바가 아닌지라, 신이 과연 당초에는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장차 성(城) 밖으로 나갈 때 비로소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아비는 대신의 자리에 있고 아이는 근시(近侍)의 반열에 있는지라 복록이 이미 극도에 달함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데 무슨 부족함이 있고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의망(擬望)의 선후(先後)에 원한을 품고 전관(銓官)에게 감정(憾情)을 보복하려고 했다면 이는 그 사람됨이 참으로 못할 짓이 없는 소인(小人)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반열에 참여할 수 없는 비루(鄙陋)한 인간입니다. 남들이 저를 업신여김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다면, 비록 미관 말직(微官末職)에 있더라도 오히려 얼굴을 들고 세상에 나다닐 수가 없거늘, 더구나 명색이 대신이 되어 남에게 이런 모욕을 받고 어떻게 감히 염치를 무릅쓰고 백료(百僚)의 위에 쪼그리고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신의 차자(箚子) 가운데 ‘정례가 그렇지 않다[政例不然]’는 네 글자는 다만 격식(格式)을 말한 것이고 원래 전조(銓曹)를 깊이 허물한 뜻이 아니며, 전장(銓長)과 아전(亞銓)이 모두 깊이 인혐(引嫌)하는 사단(事端)이 없었는데, 홀로 이광덕이 공공연히 담당하고 나서 신을 의심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천만 본의(本意) 밖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광덕(李匡德)의 상소 가운데 말이 무슨 일이었는지 소상히 알지 못했더니, 이제 경(卿)의 상소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 이는 나이 젊고 기품(氣稟)이 날카로워서 말을 가려하지 않고 붓을 댄 소치이니, 경의 넓은 도량으로서 어찌 이와 같이 지나치게 혐의하는가?"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사욕(私慾)은 하늘에 사무치고 염치는 땅에 떨어진지라, 명리(名利)의 길목에서 앞뒤를 다투고 동제(同儕)의 사이에서 의심과 노여움을 자아냈으니, 조지빈(趙趾彬)은 정사(政事)의 격례(格例)를 핑계대고 가만히 이광덕의 청선(淸選)에 통망(通望)됨을 평론했으니, 이는 반드시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 있는 것이며, 이광덕은 좌상(左相)의 차자(箚子)를 변론하면서 조지빈의 삼전(三銓)에의 의망(擬望)을 저지한 것을 은연중 말하였으니, 요는 후일에 입을 열지 못하도록 견제(牽制)한 것이다. 그런즉 조지빈의 실책은 시기하며 이기려는 데에 있고 이광덕의 과오(過誤)는 박절한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오직 이 백발(白髮)의 노상신(老相臣)은 나이와 지위가 모두 높고 가문(家門)의 영화가 이미 극진한데도 식견(識見)이 천단(淺短)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젊은 사람들의 영화를 다투는 자리에 오히려 뛰어들어 무한한 모욕을 자초(自招)함은 무슨 연유인가?"
【태백산사고본】 12책 14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89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996] 삼전(三銓) :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말함.
사신은 말한다. "사욕(私慾)은 하늘에 사무치고 염치는 땅에 떨어진지라, 명리(名利)의 길목에서 앞뒤를 다투고 동제(同儕)의 사이에서 의심과 노여움을 자아냈으니, 조지빈(趙趾彬)은 정사(政事)의 격례(格例)를 핑계대고 가만히 이광덕의 청선(淸選)에 통망(通望)됨을 평론했으니, 이는 반드시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 있는 것이며, 이광덕은 좌상(左相)의 차자(箚子)를 변론하면서 조지빈의 삼전(三銓)에의 의망(擬望)을 저지한 것을 은연중 말하였으니, 요는 후일에 입을 열지 못하도록 견제(牽制)한 것이다. 그런즉 조지빈의 실책은 시기하며 이기려는 데에 있고 이광덕의 과오(過誤)는 박절한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오직 이 백발(白髮)의 노상신(老相臣)은 나이와 지위가 모두 높고 가문(家門)의 영화가 이미 극진한데도 식견(識見)이 천단(淺短)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젊은 사람들의 영화를 다투는 자리에 오히려 뛰어들어 무한한 모욕을 자초(自招)함은 무슨 연유인가?"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불러 보았다. 판윤(判尹)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방역(坊役)의 변통에 관하여는 이미 절목(節目)을 마련하였습니다. 대개 경중(京中) 5부(五部)의 총호수(總戶數)가 3만 7천여 호인데, 위로 공경 대부(工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서민(庶民)에 이르며 밖으로는 군병으로부터 안으로는 액례(掖隷)에 이르기까지 모두 방역에 참여한다면, 1년 동안 2일간의 부역(赴役)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조(先朝)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통하지 않은 것은 군병과 액례를 구별(區別)하기 어려운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는 말하기를,
"흉년과 여역(癘疫)으로 인하여 백성의 곤궁함이 이미 극도에 도달해 있는데 이제 만약 새로운 법을 시행한다면 반드시 소요(騷擾)를 초래하는데 이를 것이니, 백성의 소생(蘇生)함을 조금 더 기다려서 반포(頒布)하여 시행함이 사리(事理)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진주 겸 사은사(陳奏兼謝恩使)를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개정(改定)하도록 명했으니, 영의정 이광좌의 말을 따른 것이다. 대개 사대(事大)의 도리는 사은(謝恩)을 먼저 하고 진주(陳奏)를 뒤에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광좌가 청한 것인데, 임금의 생각에도 또한 그렇게 여겨 드디어 이 분부가 있게 된 것이다.
영의정 이광좌가 아뢰기를,
"계사년997) 에 청국(淸國)에서 사은사(謝恩使)의 방물(方物)을 감제(減除)해 주었으나, 금번 사행(使行)에는 진주사(陳奏使)의 방물이 있으므로 사은사의 방물은 보내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마는, 금번의 행차(行次)는 다른 사행과 다르므로 〈방물을〉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저들이 만약 받지 않는다면 〈다음 사행 때〉 당연히 옮겨 준용(準用)할 것이니, 이를 《승문원등록(承文院謄錄)》에 실어 후일의 상고가 되게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진상(進上)에 봉진(封進)하는 물건을 선조(先朝)에서 이미 바로잡았으나, 그 폐단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자전(慈殿)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녹포(鹿脯)한 가지로써 말하더라도 궁중(宮中)에 들여와서는 별로 쓸 데가 없고 외방에서는 폐단이 있으니 정지함이 마땅하고, 무릇 기타 모든 진상도 모두 반액으로 감하여 봉진하게 하라.’고 하셨다. 자전의 덕의(德意)가 이와 같으시니, 그 양지(養志)하는 도리에 있어 진실로 우러러 본받음이 마땅하겠다. 삭선(朔膳) 및 정조(正朝)의 물선(物膳)을 주원(廚院)998) 에 물어보고 별단(別單)에 써서 아뢰도록 하라. 마땅히 표지(標紙)를 붙여 감제(減除)할 것이다."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저(李著)이다.】 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전계(前啓) 가운데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강욱(姜頊)에 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장물(贓物)에 관한 법이 엄중하지 않아서 탐재(貪財)하는 풍습이 날로 성행하는데, 그 자신이 방백(方伯)이 되어 재물을 한량없이 탐한 자로는 전 감사(監司) 유복명(柳復明) 같은 자가 없었습니다. 유복명이 전번에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있을 때에 무릇 죄인으로서 도년(徒年)이나 정배(定配)되어 온 자들에게 한결같이 속전(贖錢)을 징수하였고 혹은 문법(文法)으로 옭아 율(律)에 비추어 억지로 돈을 바치게 하여 1년 동안에 모은 재물이 이루 셀 수가 없으며, 선편(船便)으로 잇달아 운반하여 모두 사복(私腹)을 채우고는 서울에 굉장히 사치스러운 제택(第宅)을 세웠습니다. 더욱이 해괴한 것은 산협(山峽)의 가난한 백성들이 뗏목[筏木]으로 생활하는 자에게 송금(松禁)을 빙자하여 모두 빼앗았으며, 다시 그들을 잡아 가두고 태장(笞杖)을 가하고는 또 속전(贖錢)을 독책(督責)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영속(營屬)들을 가까운 군현(郡縣)에 자주 보내어 재목을 남벌(濫伐)한 것이 수천 주(數千株)만이 아니어서 산협이 모두 민둥산이 되었다고 소문이 파다하니, 그 탐욕스럽고 불법(不法)한 죄는 이미 체직(遞職)되었다고 하여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치죄(治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위원 군수(渭原郡守) 김창혁(金昌爀)은 천성이 원래 어리석은 사람인데, 세도(勢道)에 빌붙어 외람되이 사적(仕籍)에 올랐으며, 그 고을에 도임(到任)함에 미쳐서는 오직 사복(私腹) 채우는 것만을 일삼아 할박(割剝)하는 정사(政事)는 이루 형언하기가 어려우며, 집이 같은 도(道)에 있어 돈 바리가 잇달았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削除)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풍문(風聞)을 모두 믿을 수 없으니, 다시 소상히 살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12월 26일 정미
이조 참판(吏曹參判) 윤순(尹淳)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직 우리 숙종(肅宗)께서는 그 큰 규모(規模)와 아름다운 정사(政事)가 사책(史策)에 찬란하게 빛나는지라, 진실로 후세(後世) 임금이 모범이 되시었으니, 신이 매양 실록(實錄)을 펼쳐 보면서 정성껏 외우고 찬탄(讚歎)하였습니다. 다만 그 궤실(櫃室)이 한번 닫히고 연대(年代)가 점차 멀어지면 이를 준수(遵守)하고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 아침저녁으로 항상 눈여겨 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명신(名臣) 이식(李植)이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찬수(纂修)함에 있어 모범될 만한 교훈(敎訓)과 규모를 간추려 별도로 한 서책(書冊)을 만들어 예람(睿覽)에 대비(對備)하시기를 청한 바 있었는데, 그 서책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식이 갑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아들 고(故)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가 소를 올려 그 아비의 뜻을 뒤쫓아 이룩토록 하기를 청했으니, 이 또한 오늘날에도 이에 의거하여 인용(引用)할 만한 바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실록이 완성되기 전에 도청(都廳)의 여러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신 등과 함께 상의하여 긴요한 부분을 간추려 서책을 인출(印出)하여 어람(御覽)에 제공(提供)토록 한다면, 신 등이 선조(先朝)의 덕업(德業)을 선양(宣揚)하는 책임을 거의 조금이나마 메꿀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오로지 경(卿)에게 부탁하니, 경은 모름지기 옛일을 계술(繼述)하여 간추려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수찬(修撰) 정석오(鄭錫五)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동벽(東壁)의 자리를 받을 때 어찌 이를 감당할 가망이 있었겠습니까마는, 관록(館錄)이 시급하여 염치를 무릅쓰고 한 번 나갔을 뿐인데, 뜻밖에 대신(大臣)의 차자(箚子)가 나오자 홍문록(弘文錄)을 완료한 여러 사람이 모두 배척을 입었으나 신이 당한 바는 더욱 심각합니다. 여선장(呂善長)이 사국(史局)의 회천(回薦)999) 으로 인하여 신에게 찾아왔기에 신이 어디서 오느냐고 물은즉, 대답하기를, ‘방금 좌상(左相)의 집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별다른 말이 없었고, 다만 말하기를, ‘홍문록(弘文錄)의 일이 매우 급한데, 어찌 이와 같이 서로 끌기만 하는가?’라고 하더라기에 홍문록의 회권(會圈)의 한 가지 일을 난만(爛漫)히 상의하였는데, 끝내 안색(顔色)에 나타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이 참으로 지극히 어리석어서 말하기 전에 미리 이를 억측(臆測)하지 못하고 무한(無限)한 낭패(狼狽)를 자취(自取)하게 되었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벌써부터 알고 있다."
하였다.
승지(承旨) 이정필(李廷弼)이 임금께 아뢰기를,
"국가에서 숭의전(崇義殿)1000) 을 설치(設置)한 것은 그 뜻이 심히 거룩합니다. 그 적장손(嫡長孫)으로 하여금 대대로 제사(祭祀)를 받들게 하였는데, 이제 숭의전의 영(令) 왕성원(王聖元)이 영(令)이 된 지 10년에 아직도 승급(陞級)이 되지 않았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에 의하여 승급하게 하소서."
하고, 또 진달하기를,
"고려(高麗) 말엽의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김주(金澍)·길재(吉再)의 봉사손(奉祀孫)을 거두어 녹용(錄用)토록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12월 27일 무신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大司諫) 조지빈(趙趾彬)과 이조 좌랑(吏曹佐郞) 이광덕(李匡德)을 파직시키니,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의 상소에 따른 것이다. 그 소에 대략 이르기를,
"조지빈과 이광덕이 서로 쟁론(爭論)하는 것은 혹은 그림자만 보고도 지나치게 의심한 데서 나왔고, 혹은 규례에 어두워 무리하게 논박한 데에서 말미암았으니, 피차가 서로 잘못이며 이로써 조정의 기상(氣傷)마저 아름답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두 사람은 모두 중하게 견책(譴責)을 가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저번에 성상(聖上)께서 중신(重臣)에게 문책한 것은 한때 책려(責勵)하는 뜻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번거로이 되돌리는 데에 이르며, 그 당시 승선(承宣)의 논계한 말도 매우 장황하고 일이 편벽된 데에 속하며 엄중한 하교가 이미 내렸는데도 한결같이 점잔만을 부리니, 그 염의를 논하건대, 사체(事體)가 전도(顚倒)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책벌(責罰)의 거조(擧措)를 단연코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불행히 남에게 의심을 받아 성(城) 밖에 나가 감죄(勘罪)하기를 기다렸는데, 뜻밖에 이광덕이 또 신의 자식 조지빈의 발표(發表)하지도 않은 소초(疏草)를 가지고 신에게까지 침책(侵責)함이 미쳤으니, 신은 의아(疑訝)하고 탄식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신의 자식의 소초에 의심과 무함이 아비에게 미쳤다 하여 그 불안한 뜻을 진달하고자 하기에 신이 과연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의심을 받았으니 내가 변명할 것인데 네가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 하고 드디어 그 초고(草稿)를 없애버렸으니, 그 곡절이 이와 같을 뿐입니다. 이광덕도 또한 이를 알고 있는데도 그 상소의 내용을 보면 마치 신이 그 소초를 자리 옆에 놓아두고 사람이 찾아오면 내보이는 것처럼 했으니, 그 또한 사람을 대우(待遇)함이 너무 박절합니다."
하니, 임금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12월 28일 기유
권익순(權益淳)을 승지(承旨)로, 박사제(朴師悌)를 지평(持平)으로, 유엄(柳儼)을 정언(正言)으로, 성덕윤(成德潤)을 수찬(修撰)으로, 남일명(南一明)을 교리(校理)로, 유최기(兪最基)를 설서(說書)로, 남태적(南泰績)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조동빈(趙東彬)을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로 삼았다.
12월 29일 경술
조원명(趙遠命)을 승지(承旨)로, 정필령(鄭必寧)을 필선(弼善)으로, 여선장(呂善長)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설서(說書) 유최기(兪最基)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옛 신하를 모두 쫓아버리고 한쪽 사람만을 등용하시면서 첫머리에 ‘탕평(蕩平)’이란 두 글자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삼았습니다. 이에 조신(朝臣)들이 성상의 뜻을 은밀히 헤아리고 비위를 맞추기에 공교한 자들은 입을 열면 문득 탕평을 말하니, 그 말을 듣는다면 참으로 밝은 왕화(王化)를 선양(宣揚)하여 붕당(朋黨)에 아첨하는 자가 없을 듯하나, 그 행동과 처사를 상고해 본다면 도리어 일체 이와 상반(相反)되는 것입니다. 기만과 은폐를 자행(恣行)하는 일로써 말한다면 충량(忠良)을 무함하기를 마치 사사로운 원수를 갚듯이 하고 저희들 멋대로 국사(國史)를 고치기를 청하였으며, 난적(亂賊)을 용서하고 옹호하는 것으로써 말한다면 배소(配所)를 벗어나 육지로 나오는가 하면 관작을 회복시키고 치제(致祭)를 내리는 등의 일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어 청하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역적의 처자(妻子)를 은밀히 비호하여 김영해(金寧海)의 전번 장계를 짐짓 빼버린 자를 청요(淸要)한 자리에 추천하여 갑자기 성가(聲價)를 더해 주었고, 흉악한 차자(箚子)에 연명(聯名)하여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에 앞장 선 자의 죄상을 닦아 주고 포장(褒奬)하여 가장 먼저 요직(要職)에 두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소를 올려 밀고(密告)하여 사류(士類)들에게 앙화를 입힌 사람에게 김일경의 지시(指示)를 받아 극력 숭봉(崇奉)하던 무리들이 조문명(趙文命)이 전조(銓曹)에 있던 날만해도 오히려 모두 저지를 당하여 혹은 승선(承宣)의 의망(擬望)에서 뽑아버리고, 혹은 대각(臺閣)의 옛자리에 다시 들어감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들을〉 급급히 발탁(拔擢)하여 번갈아 모두 추천(推薦)하여 마치 큰 공로를 갚듯이 하여 행여나 뒤질 것을 두려워했으며, 심지어 요직(要職)에는 침을 삼키고 명환(名宦)에는 머리를 다투어 서로 기미(幾微)를 엿보면서 쟁탈(爭奪)을 벌였으니, 식자(識者)가 침을 뱉고 여대 하천(輿儓下賤)도 비웃었습니다. 전하께서 밤낮없이 근고(勤苦)하시며 비록 탕평(蕩平)을 기약하고 계시나, 신료(臣僚)들이 주야(晝夜)로 추구하는 것은 오직 붕당(朋黨)에 있음을 온 세상 사람들이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홀로 성명(聖明)께서 구중 궁궐(九重宮闕)에 깊숙이 계시어 그 정상을 통촉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즈음에 홀연히 신을 정원(政院) 주서(注書)의 자리에 충당하여 은연중에 탕평의 한 도움이 되는 것처럼 했으니, 이는 대개 신이 유약(柔弱)하고 우둔(愚鈍)함을 알고 족히 소나 말처럼 매어놓고 한 세상의 이목(耳目)을 가리우며 성명(聖明)의 근고(勤苦)하시는 뜻에 색책(塞責)하려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깨끗하진 못하나 심히 결렬(決裂)된 바는 없는데, 참으로 7척(尺)의 몸으로 차마 시인(時人)들의 수를 갖추는 물건이 되어 염치를 무릅쓰고 나아가 수치(羞耻)를 모르는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제 유최기의 소본(疏本)을 본즉, 일편(一篇)의 정신이 오직 당파를 두둔하고 진신(搢紳)1001) 을 경알(傾軋)1002) 하려는 계획에만 있으니, 참으로 통분하고 해괴한 일이다. 이렇게 피차(彼此)의 취향(趣向)이 다르다 하여 차마 스스로 이견(異見)을 세우는 기습(氣習)은 족히 논할 것이 못된다.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로서 만약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방자(放恣)하고 거리낌 없음이 어찌 이같이 심할 수가 있겠는가?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관직을 삭탈하고 성문(城門) 밖으로 추방(追放)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유엄(柳儼)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저번 사헌부(司憲府) 관직에 있을 때에 망령되이 논평함이 있었는데, 엊그제 윤광익(尹光益)의 상소에 이르기를, ‘헌신(憲臣)의 계사는 사당(私黨)의 논박을 입은 데에 감정을 품고 자신(自身)과 취향(趣向)이 다른 자가 요직(要職)에 있음을 꺼려하여 함부로 무함을 가하여 반드시 공격하여 물리치고자 했다.’고 하였으니,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른바 사당이 논박을 입었다는 것은 대각(臺閣)에서 차자를 올려 정우량(鄭羽良)을 논박한 일을 가리킨 듯한데, 이는 신이 논계한 가운데에는 당초 거론(擧論)한 일이 없는데 저 윤광익이 어떻게 억측하고 억지로 말한단 말입니까? 저들이 비록 자신과 취향이 다르다 하여 스스로 소외(疎外)하고 있으나 신의 소견(所見)과 같다면 조정에 함께 서서 언론(言論)을 서로 통하고 가부(可否)를 서로 협조해야 할 것인데, 생각건대, 어찌 자신과 취향이 다르다고 지목하여 요로(要路)에 있을 길을 막는단 말입니까? 신이 저번에 규핵(規劾)한 것도 진실로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윤광익이 당론(黨論)을 두둔하기에 급급하여 자신과 취향이 다르다느니 붕당(朋黨)에 사정을 두었다는 등의 말로써 현혹(眩惑)시킬 계획을 하려고 하니, 그 또한 가소롭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그러진 말을 네가 어찌 혐의할 것이 있느냐?"
하였다.
12월 30일 신해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와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설서(說書) 유최기(兪最基)의 상소로 인하여 모두 소를 올려 인혐(引嫌)하니, 임금이 모두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설서 유최기의 소본(疏本)을 본즉, 이른바 ‘충량(忠良)을 무함하고 배소(配所)에서 풀려나 육지(陸地)로 나왔다.’는 등의 말은 지난날 대처분(大處分)의 일을 지적한 듯한데, 신이 그때에 금부 당상(禁府堂上)으로 있어 약간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 상소에 이미 성상을 기만하고 붕당(朋黨)을 두둔하였다는 죄목을 가(加)했으니, 신이 어찌 감히 안연(晏然)하게 반성(反省)하지 아니하여 스스로 거리낌 없는 죄과(罪科)에 빠지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유최기의 경알(傾軋)하려는 계책을 남김없이 통촉했으니, 경(卿)이 어찌 마음에 괘념(掛念)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윤순(尹淳)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방금 유최기(兪最基)의 상소를 본즉, 괴휼한 말과 깊은 함정에 온 조정의 사류(士類)를 죄에 빠뜨렸으며 사기(史記)를 날조(捏造)했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전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이제 이 실기(實記)를 추후하여 편수(編修)하는 것은 옳다 하고 그르다 한 양쪽의 말을 다 그대로 두어 백세(百世) 후의 공의(公議)를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니, 전 사람이 이루어 놓은 서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최기는 오히려 고치기를 청했다는 말로써 남을 협박하니, 옳다고 한 것과 그르다고 한 두 가지를 다 그대로 두는 것을 미워하여 억지로 저지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중초(中草)를 모두 세초(洗草)하여 증험(證驗)할 바가 없게 한 후에 이루어진 문안(文案)을 고쳐 바꾸려 했다는 것입니까? 세상 길은 변고(變故)가 많은 것이니, 일후에 만분지일(萬分之一)이라도 〈감정을〉 풀려는 일이 반드시 없을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유최기가 무함하는 상소는 이미 통촉하는 바이다. 경(卿)이 어찌 지나치게 혐의하는가?"
하였다.
헌납(獻納) 홍상인(洪尙寅)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번에 유최기가 한원진(韓元震)의 남긴 논의를 주워 모아 심지어는 역적의 처자(妻子)를 몰래 감싸주었다는 등의 말로써 신을 짐짓 계사에서 빼버린 죄과(罪科)에 몰아넣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실은 전번의 상소에 대략 진달하였은즉, 거듭 말할 필요는 없으나, 김영해(金寧海) 등의 장계는 홀기(笏記)1003) 에 없었으므로 우연히 살피지 못하고 곧 다시 발론하지 않았으니, 이는 생소(生疎)한 소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최기의 무리들이 앞뒤로 언쟁(言爭)하며 반드시 신의 죄안(罪案)으로 삼고자 하니, 이는 또한 무슨 뜻입니까? 제가 윤봉조(尹鳳朝)·임징하(任徵夏)의 당파로서 계(啓)의 발론이 신으로부터 나왔음을 깊이 노여워했으나 감히 윤봉조·임징하를 위하여 신구(伸救)하지 못하고 신의 한때 소루(疎漏)하였던 허물을 적발하여 반드시 윤봉조·임징하를 위하여 보복하려고 하였으니, 이런 음흉(陰凶)한 말에 대하여 신이 수다하게 쟁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무함하는 말을 어찌 꼭 깊이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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