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5권, 영조 4년 1728년 2월

싸라리리 2025. 8. 2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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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계미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제 경장(更張)과 탕척(蕩滌)하는 날을 당하여 죄범(罪犯)이 중하지 않은 자는 참작하는 도리가 있음이 마땅하다. 전(前) 장령(掌令) 유시모(柳時模)·김시빈(金始鑌)을 모두 서용(敍用)하라. 전 승지(承旨) 이중술(李重述)은 저번에 저지른 일이 색목(色目)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치(所致)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이로써 오랫동안 폐고(廢錮)할 수가 있겠는가? 전례에 의하여 수용(收用)하도록 하라. 이진수(李眞洙) 등은 전조(銓曹)에 분부하여 복제(服制)를 마치기를 기다려 수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정(都政)071)  을 행하였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태좌(李台佐)·이조 참판(吏曹參判) 윤순(尹淳)·이조 참의(吏曹參議) 윤혜교(尹惠敎)·승지(承旨) 채팽윤(蔡彭胤)·병조 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병조 참판(兵曹參判) 조최수(趙最壽)·병조 참의(兵曹參議) 서명연(徐命淵)·승지(承旨) 유만중(柳萬重)이 참석하였다. 조문명(趙文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정제두(鄭齊斗)를 찬선(贊善)으로, 임광(任珖)을 응교(應敎)로, 신치운(申致雲)을 부교리(副校理)로, 유운(柳運)을 지평(持平)으로, 황정(黃晸)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2월 3일 갑신

정제두(鄭齊斗)를 우참찬(右參贊)으로, 박사수(朴師洙)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조문명(趙文命)을 도승지(都承旨)로, 김시경(金始慶)을 좌승지(左承旨)로, 김집(金潗)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이하원(李夏源)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현명(趙顯命)을 교리(校理)로, 황정(黃晸)을 집의(執義)로, 임수적(任守迪)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2월 4일 을유

소대(召對)072)  를 행하여 《황명통기(皇明通紀)》를 강론(講論)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정우량(鄭羽良)이 문의(文義)를 진달한 다음 인하여 관서(關西) 무사(武士)를 채용할 만한 정상과 연강(沿江)의 파수(把守)가 허술한 형세를 아뢰고, 전조(銓曹)의 유사(有司)를 신칙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5일 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양역(良役)은 비록 크게 변통(變通)할 수 없으나 군액(軍額)을 태정(汰定)하는 일은 이미 삼남 어사(三南御史)로 하여금 편의(便宜)에 따라 충정(充定)하게 하였으니, 만약 잘 변통이 된다면 백골 징포(白骨徵布)073)  와 인족 침징(隣族侵徵)074)  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과를 살펴보고 다른 도에도 경관을 나눠 보내어 잡색(雜色)의 명목(名目)을 태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薄)하게 할 데에 후(厚)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니, 어떻게 자기 일과 같이 살펴볼 수가 있겠는가? 백성들이 변통하기를 바란 지 오래이니, 균역(均役)의 한 절목을 강구(講究)하여 빨리 시행한 후에야 백성들의 위급한 처지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군액을 태정(汰定)하는 일을 우선 세 사람의 성효(成効) 여부를 살펴본 다음 십분 선처(善處)하여 소요스런 걱정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2필(疋)의 신역(身役)에서 만약 1필을 감제한다면, 백성들의 위급한 처지를 펼 수 있겠지만, 지금 국고(國庫)가 탕갈되었으니, 이와 같이 변통한 후에 거의 모양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호포(戶布)에 이르러서는 시세(時勢)를 살펴 헤아려보면 그 해로움이 양역(良役)보다 갑절이나 되는데, 호포를 감제하는 의논 또한 갑자기 이룩하기가 어렵습니다. 무릇 균역은 이미 잘 변통할 방도가 없고, 다만 잡색의 명목을 추려내어 도망한 자와 물고(物故)된 자의 대신으로 충정하여야 되는데, 이는 수령(守令)의 재능(才能)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수령을 선택하여 차출(差出)한 후에야 백성들이 혜택을 입을 수 있는데, 허다한 수령을 모두 잘 선택하는 것은 사세(事勢)가 또한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을 비록 잘 선택하더라도 임지(任地)에 부임(赴任)한 후에야 그 치적(治績)을 살펴볼 수 있다. 호포(戶布)를 감제(減除)하는 의논은 참으로 아름다우나 대동(大同)의 역(役)을 시행한 후에야 할 수 있다. 반 필을 감제하면 비록 약간 허름하기는 하나 그 폐단은 마침내 마찬가지이니, 백성들이 괴로움을 피하고 허름함을 좇아 잡역(雜役)에 투입(投入)하는 자는 우선 태정(汰定)함이 옳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크게 변통하기 전에는 수령을 선택함이 제일 급선무가 된다. 그런데 감사(監司)가 적임자가 아니면 다만 한 도(道)의 폐단만 더하게 되니, 호포의 감제는 시행할 수 없다. 조정에서는 비록 어사(御史)에게 책임을 맡겼으나, 감사와 수령 또한 폐단을 제거하는 데 동심 협력(同心協力)하여야 할 것이니, 어찌 어사에게만 미룰 수 있겠는가?"
하였다. 수찬(修撰) 정우량(鄭羽良)이 수령을 선택하여 성효(成効)를 책임 지우기를 청하였으며, 좌참찬(左參贊) 김시환(金始煥)은 말하기를,
"호포(戶布)와 인구세(人口稅)는 이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로써 결코 창설(創設)할 수 없으니, 각읍의 《잡역에》 투입한 무리들을 태정하는 것밖에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국초(國初)에 전안(田案)이 1백 45만 9천여 결이었는데, 숙묘조(肅廟朝)에 이르러서는 다만 1백 14만 30여 결이니, 국초에 비교한다면 30여 만 결이 감축(減縮)되었습니다. 그리고 각항(各項)의 잡탈(雜頉)을 제한다면, 현재 행용(行用)하는 실결(實結)은 79만 5천 8백 결에 지나지 않는데, 매결(每結)에 혹은 조(祖) 4, 5두(斗)를 바치고 혹은 6, 7두를 바쳤습니다. 고을마다 그 규모가 각기 같지 않았지만, 일찍이 결복(結卜)의 수량과 군포(軍布)의 수량을 계산해 보았더니, 매결에 만약 1냥(兩) 5전(錢)씩 받아들인다면 79만 5천 8백 결에서 받아 들이는 돈이 총계 1백 19만 3천 7백여 냥이였습니다. 그리고 8도(八道) 군포(軍布)는 수량이 90만 필(疋)에 지나지 않는데, 90만 필에서 절반을 감제한다면, 45만 필이 되며, 45만 필의 값을 돈으로 환산(換算)하면 90만 냥이 되니, 만약 이 90만 냥을 내어놓고 군포 1필을 감해 준다면 2필을 바치던 무리들이 반드시 힘을 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나머지 29만 3천 7백여 냥은 각 영문(營門)에 분급(分給)하여 잡역의 경비(經費)에 충당하게 한다면, 또한 넉넉할 것이니, 이것은 비록 변통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소요스러운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광좌가 말하기를,
"명분(名分)이 바르지 않으면 일이 순조롭지 못한 것인데, 각읍(各邑)의 시탄(柴炭)과 얼음 값으로써 군포(軍布)의 부족한 수량을 채운다면, 국가의 체면으로써 논하더라도 마침내 구차한 데에 속하니, 새로 설행(設行)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각읍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모두 그릇된 규례인데, 조정에서 또 덧붙여 가져다 쓴다면 사체가 구차하니, 대신의 말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을 잘 선택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어사(御史)가 포장(褒奬)하는 것은 알기 쉽지만, 여러 번 성적을 상고하여 여러 번 상(上)에 오른 자는 알기가 어렵다. 십고 십상(十考十上)075)  인 자와 오고 오상(五考五上)인 자는 전조(銓曹)에 분부하여 매양 세말(歲末)에 초계(抄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저번에 정언(正言) 이춘제(李春躋)와 장령(掌令) 이세진(李世璡)이 몇몇 수령의 치적(治績)을 소진(疏陳)하여 장용(奬用)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대간(臺諫)의 체통이 손상된 것이니, 책벌(責罰)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경중(輕重)의 차별이 없지 않으니, 이춘제는 체차(遞差)하고 이세진은 파직하라."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최집(崔)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장흥 부사(長興府使) 신재하(申在夏)는 국고(國庫)의 곡식을 환롱(幻弄)했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송라 찰방(松羅察訪) 이후경(李厚敬)은 이익을 탐내는 간사한 소인(小人)이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지(任地)로 내려간 후에 만약 직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논박함이 가하겠지만, 지레 논핵(論劾)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신재하의 일은 후에 연달아 입계(入啓)하니, 인하여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청송 부사(靑松府使) 윤지익(尹志益)은 여러 차례 수령의 직책을 맡았으나 전혀 치적이 없었으며, 죽산 부사(竹山府使) 최필번(崔必蕃)은 정령(政令)을 지체시켜 비방이 많았으니, 청컨대, 윤지익은 개차하고 최필번은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지익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최필번의 일은 저번에 대신(大臣)의 진달한 바를 들었는데, 이와 같지 않은 듯하니, 다시 살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형조 정랑(刑曹正郞) 이세련(李世璉)은 노혼(老昏)하고 병이 깊어 일에 임하여 두서(頭緖)를 차리지 못하므로, 시위 소찬(尸位素餐)076)  의 기롱이 많으니, 청컨대, 태거(太去)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6일 정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유수(柳綏)와 송진명(宋眞明)을 승지(承旨)로, 주형리(朱炯离)를 장령(掌令)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지평(持平)으로, 이성효(李性孝)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2월 7일 무자

밤 2경(二更)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판부사(判府事) 조도빈(趙道彬)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故) 숙부(叔父) 신(臣) 조태채(趙泰采)는 저번 4대신(四大臣)077)  을 추후하여 죄줄 때에 오히려 차등(差等)을 두어 감단(勘斷)한 가운데에 있었으니, 저승과 이승 사이에 원통하고 참혹한 일입니다. 근일에 또 듣건대, 연석(筵席)에서 정청(庭請)한 연차(聯箚)로써 두 마음을 품었다고 하여 마침내 관작을 추삭(追削)함에 이르렀다 합니다. 아! 당일의 연차는 종사(宗社)를 위하고 선왕(先王)을 위한 것이었는데, 마침내 역적 김일경(金一鏡) 등에게 무함받아 외로운 충성을 변명하지 못하고, 절해(絶海)의 고도(孤島)에서 억울함을 품은 채 죽었습니다. 이에 성상(聖上)께서 관직을 회복시키고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사당(祠堂)을 세워 치제(致祭)하게 하셨던 바입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전일의 하교를 일체 돌이켜서 심지어 이윤(伊尹)078)  ·주공(周公)079)  의 일을 끌어댔으니, 아! 이 무슨 하교이십니까? 자성(慈聖)과 선왕(先王)의 뜻을 받들어 세제 책봉(世弟冊封)에 협찬(協贊)하였고, 선조(先朝)께서 이미 시행한 규례에 따라 한 차자(箚子)로써 진품(陳稟)하였을 뿐이요, 당초에 털끝만큼도 이윤·주공의 일에 비슷함이 없었으니, 유심(有心)이나 무심(無心)이라는 말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의 이 하교는 도리어 간흉(奸凶)들의 말을 옳게 여겼으므로, 저들의 사이를 틈타는 계획이 두 마음을 품었다는 논의를 베풀어 애당초 무함하려는 수단을 다시 이루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아! 정사를 대리케 하겠다는 임금의 하교를 받들고 일제히 울부짖어 힘써 다투며 그 말씀을 환수(還收)하기를 바랐으며, 여러 차례의 성비(聖批)가 고요히 섭양(攝養)하며 수고로움을 나누겠다는 뜻에서 나왔으니, 자세하게 우러러 품의(稟議)하여 그 처분을 기다린 것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몸으로 나라에 순절(殉節)한 자는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이었고, 충량(忠良)을 무함하고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자 꾀한 자는 두 흉적(凶賊)입니다. 두 흉적의 역모(逆謀)가 낭자(狼藉)하여 비록 그 도당(徒黨)들도 오히려 감히 드러나게 신구(伸救)하지 못했으니, 노론 사대신의 충성은 진실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죄명(罪名)이 한결같이 두 흉적의 무함한 바와 같았으니, 만약 전하께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정(私情)을 앞세우지 마시고 오직 노론 사대신의 몸을 희생하여 나라에 보답한 것이 어떠한 의리이며,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무리가 임금을 속이고 충량(忠良)을 무함한 것은 무슨 뜻이며, 오늘날 조신(朝臣)들이 반드시 죄안(罪案)을 번복시키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인지 시험삼아 그 일을 평탄한 마음으로 궁구(窮究)해 보시면, 또한 척연(惕然)히 깨닫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이 처분은 말세의 기강을 떨치기 위한 것인데, 경(卿)은 어찌 속습(俗習)에 따라 변론하는 말이 이다지도 많은가? 경의 평일 순후(醇厚)한 마음을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 나의 경장(更張)의 뜻을 본받아 옛 투습(套習)에 얽매이지 말라."
하였다.

 

2월 8일 기축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유신(儒臣)이 문의(文義)를 진달하기를 마치자, 동지경연사(東知經筵事)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포청(捕廳)에 있는 적인(賊人)으로 형조(刑曹)에 이송(移送)한 자는 갑신년080)  의 정탈(定奪)로 인하여 재차 포청에서 자복(自服)을 받아 곧장 결안(結案)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인명(人命)을 살해하거나 죄범이 낭자한 자는 비록 본조(本曹)에서 자백(自白)을 받지 않고 곧장 율(律)을 적용하더라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겠지만, 혹시 인명을 살해하지 않고 재물도 빼앗지 않은 자에 대하여 자복(自服)을 기다리지 않고 정형(正刑)한다면 자못 인명(人命)을 흠휼(欽恤)하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인명을 살해한 무리는 갑신년의 하교에 의하여 포청에서 재차 자복을 받아 이송(移送)한 자는 곧장 결안을 지어 정법(正法)할 것이요, 인명을 살해하지 않은 도둑에 대하여는 갑술년081)  의 정식(定式)에 의하여 포청에 세 차례 왕복한 후에야 비로소 정형한다는 뜻으로 정식을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범죄한 실정을 자세히 살펴 그 율을 올리고 내림이 옳으니, 진달한 바에 의하여 다시 정식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전(前) 가주서(假注書) 허집(許集)을 주서(注書)에 의망(擬望)082)  하지 말도록 분부하였다. 조도빈(趙道彬)의 소비(疏批)083)  를 내렸는데, 허집이 남에게 미루고 전달하지 않았으므로, 이에 임금이 분부하기를,
"허집은 한갓 좋아하고 미워하는 뜻이 있을 뿐만 아니라, 왕명(王命)을 전달하지 않았으니, 사국(史局)에 그대로 둘 수가 없다. 경묘실록청(景廟實錄廳)의 등록 낭청(謄錄郞廳)에 개차(改差)하고 다시 주서에 의망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설서(說書) 조진세(趙鎭世)가 상소(上疏)하여 참찬(參贊) 정제두(鄭齊斗)를 불러들여 주연(胄筵)에서 시강(侍講)하게 하기를 청하니,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지평(持平)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윽이 전하의 거조(擧措)를 보건대, 강무(剛武)가 아주 부족합니다. 대개 탕평(蕩平)의 일념(一念)이 먼저 성심(聖心)에 자리잡고 있어 한갓 편당(偏黨)을 말살(抹殺)하기에 급급하고, 오로지 준엄히 억제하는 데에 힘써 옳고 그름을 공정하게 살펴보지 못하시니, 사마광(司馬光)084)  의 이른바 인(仁)·명(明)·무(武)의 세 가지 덕(德)에 하나가 결함되지 않겠습니까? 민진원(閔鎭遠)의 일에 이르러서는 비지(批旨)의 말씀이 비창(悲愴)하니, 성상(聖上)의 뜻한 바를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명목은 원찬(遠竄)이라고 하면서 실상은 중도(中途)에 붙여 조종(祖宗)의 법칙을 문득 올리고 내리는 바가 있으니, 헌장(憲章)을 소중히 여기는 전하께서 사사로운 뜻에 흔들리게 됨을 면하지 못하실 줄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판부사(判府事) 조도빈(趙道彬)의 상소는 처분한 일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통렬히 비난하고,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감히 사사로운 억울함을 하소연했으니, 더욱 무엄(無嚴)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성비(聖批) 가운데에 기강을 엄중히 다루지 않을 수 없다고 하교하셨으니, 무릇 대강령(大綱領)에 관계되는 일은 옳고 그름을 밝게 보여줌이 마땅할 것입니다. 북자(北咨)가 잇따라 이르러 나라의 치욕(恥辱)됨이 한정이 없는데, 착하고 악한 말에 대하여 족히 기뻐하고 노여워할 것은 없으나, 변명의 방도를 조금도 늦출 수는 없습니다. 앞서 사신(使臣)이 이미 출발하였고, 선후책(善後策)도 벌써 정해졌으나, 구구하게 걸련(乞憐)하는 방책은 족히 우리의 자강(自强)을 넓히는 방도가 될 수 없습니다. 송(宋)나라가 금(金)나라와 교전(交戰)할 즈음에 있어서도 주자(朱子)께서 인주(人主)의 본원(本源)을 밝히는 데에 일찍이 마음을 쏟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자강의 술책(術策)은 성지(聖志)를 분발(奮發)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울러 비옵건대, 유의(留意)하소서."
하니,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정언(正言) 조상명(趙尙明)이 상소(上疏)하여 시폐(時弊)를 진달하였는데, 첫머리에 말하기를,
"전답(田畓)이 진폐(陳廢)된 것은 개량(改量)한 후에 다시 급재(給災)085)  하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았으니, 빨리 변통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호남(湖南) 해변(海邊)의 절수(折受)를 혁파한 후에 차인(差人)도 길이 작파(作罷)하여 백성의 폐해를 제거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민역(民役)의 균등(均等)하지 않은 것과 인족(隣族)의 침징(侵徵)을 속히 변통하여 실지의 혜택을 입히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호조(戶曹)에 신칙하여 마땅히 지급해야 할 공물(貢物)의 값을 빨리 획급(劃給)하게 하고, 오래 된 포흠(逋欠)은 적당히 헤아려 감제(減除)하며, 외방(外方)의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한 환곡(還穀) 또한 탕척(蕩滌)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또 붕당(朋黨)의 화(禍)에 대해 진달(陳達)하기를,
"무릇 당론(黨論)이 날로 횡행(橫行)하고부터 인심이 빠져들어 매양 한 번 판국(版局)에서 패(敗)하게 되면 뜻을 같이하는 자끼리 출사(出仕)하지 않은 채 고초(苦楚)를 참고 지조를 지켜 후일의 공적(功績)을 세울 계획을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혹 우물쭈물하며 벼슬을 버리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조롱하고 헐뜯어 사류(士流)에 끼워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득지(得志)한 날에는 밤낮으로 경영하는 바가 사복(私腹)을 채우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대개 그 계획이 이때에 가산(家産)을 넉넉하게 모으지 않으면 훗날 파직될 때에 목숨을 보존할 수 없다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이에 멋대로 탐도(貪饕)하여 장오(贓汚)가 낭자(狼藉)하더라도 심상하게 여겨 태연히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니, 하소연할 곳이 없는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즉위(卽位)하신 초기에 먼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탕평(蕩平)’ 두 글자로 붕당(朋黨)을 깨치는 요점(要點)을 삼으셨는데, 이어 정주(政注)를 보았더니, 저번에 이른바 삼분 오열(三分五裂)이 되고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자들도 대부분 경악(經幄)의 자리와 대간(臺諫)의 반열(班列)에 가득했으니, 전하께서 이미 온 나라의 4분의 3을 경장(更張)의 한 테두리 안에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저 한편의 사람들을 점차 무마하여 화해시키기가 어찌 어렵겠습니까마는, 뜻을 잃은 무리들은 한갓 분개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매양 정령(政令)이 한 번 나오면 문득 비방(誹謗)하는 망언(妄言)을 퍼뜨렸으니, 오랜 세월을 두고 물든 습속(習俗)을 갑자기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그 중에 언의(言議)가 너그럽고 마음이 조금 평온한 자를 선택하여 외읍(外邑)의 수령에 두루 시험하고, 세월이 지나 일이 진정(鎭定)된 후에 점차 내직(內職)으로 옮긴다면, 혹 길이 다르더라도 함께 돌아가는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전조(銓曹)의 임무를 맡은 자들은 그 한두 사람을 들어 관직에 비의(備擬)하여 탕평의 이름을 얻고자 하고 있으나, 저들이 어찌 마음에 달갑게 여겨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농락(籠絡)을 받겠습니까? 매양 제지(除旨)를 한 번 내리면 문득 미친 듯이 분노(憤怒)하고 어지럽게 부르짖어 죄를 얻은 뒤에야 그만두기를 기필하니, 오직 그 소원하는 데에 들어맞을 뿐입니다. 가까운 효험을 꾀하지 말고, 원대(遠大)한 계책을 기필해야 할 것이니, 먼저 이들을 외읍(外邑) 수령의 자리에 시험하여 점차 내직에 등용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염우(廉隅)의 한 절목은 사대부(士大夫)의 입신(立身)하는 대방(大防)086)  이니, 분의(分義)로써 책망하여 진퇴(進退)에 어렵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과 출신(武科出身)으로서 적체(積滯)된 자는 각 군문(軍門)의 장관(將官)과 감영(監營)·병영(兵營)의 별장(別將)·감관(監官) 등의 직무에 차정(差定)하고, 전례에 따라 천전(遷轉)시키소서."
하고, 또 언로(言路)를 열어놓을 것과 수령을 잘 선택할 것을 말하니,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2월 9일 경인

김중희(金重熙)를 사간(司諫)으로, 홍상용(洪尙容)을 장령(掌令)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지평(持平)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열고 《서전(書傳)》을 강론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저번에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은 다만 나라를 위하여 법강(法綱)을 엄중히 하고 백성의 윤리(倫理)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자질(子姪)에게 원망받고 질시(嫉視)받는 것은 돌아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이제 판부사(判府事) 조도빈(趙道彬)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망측(罔測)한 말을 신의 몸에 가하였습니다. 무릇 그 마음에 사사로운 원한을 품는 것은 오히려 가하겠지만, 공조(公朝)에 소장(疏章)을 드러내어 제멋대로 반격(反擊)을 가했으니, 이는 실로 지난날에 듣지 못했던 일입니다. 신이 비록 졸렬(拙劣)하나, 어찌 말을 허비하여 나라의 체통을 거듭 손상시키겠습니까? 더욱이 무상(無狀)한 신일망정 한 조각의 충심(衷心)이 있었으니, 천일(天日)이 위에 있어 밝게 굽어보는 바입니다. 의리를 분석(分析)하고 참소를 밝힘에 이르러서는 전후의 소주(疏奏)가 있었으니, 그의 위태로운 말이 깊이 들어맞았다 하더라도 어찌 족히 만분의 일인들 현란(眩亂)시킬 수 있었겠습니까마는, 감히 다시 거침없이 말을 늘어놓아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이 두 흉적이라는 지목(指目)은 차마 들을 수가 없으니, 이 말을 듣고 하루라도 살아 있는 것은 사람된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저번에 진달한 말은 순수(純粹)한 충심(衷心)에서 나온 것임을 또한 이미 통촉(洞燭)하였는데, 이러한 말들을 또 어찌 개의(介意)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임금이 하직 인사를 올리는 여러 수령(守令)을 인견(引見)하고, 각기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방책을 순문(詢問)하였다.

 

2월 10일 신묘

임금이 하직 인사를 올리는 여러 수령을 인견하고 권면(勸勉)하며 신칙하여 보냈다.

 

2월 11일 임진

서종옥(徐宗玉)을 지평(持平)으로, 오광운(吳光運)을 수찬(修撰)으로, 박문수(朴文秀)를 부교리(副校理)로, 이종성(李宗城)을 홍문 정자(弘文正字)로 삼았다.

 

2월 12일 계사

밤 3경(三更)에 달이 헌원(軒轅) 우각성(右角星) 안에 들어갔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첫 번째로 정사(呈辭)087)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특별히 하유(下諭)하였다. 이때에 판부사(判府事) 조도빈(趙道彬)이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呼訴)하고 대신이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대하여 죄주기를 청한 것으로써 크게 침척(侵斥)을 가하였다. 이에 이광좌가 인입(引入)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명(命)을 기다리더니, 이에 이르러 사단(辭單)을 올린 것이었다.

 

2월 13일 갑오

문학(文學) 조현명(趙顯命)이 《조감(祖鑑)》을 지어 동궁(東宮)에게 올리니, 임금이 특별히 서문(序文)을 지어 시강원(侍講院)에 내렸다.

 

채팽윤(蔡彭胤)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제(李濟)를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유정(柳綎)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조진세(趙鎭世)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2월 14일 을미

신시(申時)에 햇무리하고, 밤 4경(四更)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른바, ‘추죄(追罪)의 문안(文案)을 만든 것은 한갓 그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참혹한 무욕(誣辱)입니까? 신이 지난 가을에 올린 소장(疏章)에 이르기를, ‘정청(庭請)하였을 때에 쟁집(爭執)한 여러 신하들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성상(聖上)의 대리 청정(代理聽政)에 대하여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이의(異議)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선왕(先王)께서 정무(政務)를 대리케 하는 것은 이치에 있어 감히 승봉(承奉)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정무를 대리케 하는 것은 설령 만년(晩年)에 있다 하더라도 신자(臣子)의 정리에 오히려 망극(罔極)할 것인데, 하물며 즉위(卽位)한 원년(元年)이겠습니까? 약원(藥院)의 신하들이 하루도 임금의 환후(患候) 때문에 직숙(直宿)하여 약(藥)을 의논한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환후 때문에 정무를 대리케 하겠다는 하교를 받들고 문득 승봉(承奉)한다면 어찌 신자로서 감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정무를 대리케 하겠다는 하교를 차마 승봉할 수 없었다 하여 대리 청정에 이의가 있다고 하며 성명(聖明)의 아래에서 여러 신하를 무함하려 하였으니, 그 계획이 또한 너무 소루(疏漏)한 것입니다. 만고(萬古)의 인신(人臣)이 어찌 태자(太子)에게 충성을 드리기 위하여 문득 대조(大朝)에게 신절(臣節)을 다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신의 정리(情理)는 이에 다하였습니다. 그 추죄(追罪)의 문안(文案)을 논한 것이 어찌 임금을 업신여긴 데로 돌아가겠습니까? 아! 또한 통분(痛憤)합니다. 신이 원래 도성(都城) 밖으로 물러가고자 하여 이미 인마(人馬)를 대기시켰는데, 또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의정(議政)의 직책에 있으면서 남의 죄를 논하였다가 그 자질(子姪)들의 반격으로 인하여 갑자기 도성 밖으로 나간다면, 조정의 대체(大體)에 손상이 되므로 반복하여 생각한 끝에 힘써 중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직명(職名)을 반드시 체임(遞任)되고자 하는 데 이르러서는 실로 염의(廉義)의 당연한 바이니, 이 어찌 신이 털끝만큼이라도 지나치게 인혐(引嫌)하여 그러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은 나라의 주석(柱石)이니 거취(去就)를 경솔히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내가 경(卿)을 의지함이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니, 비록 경의 굳이 사양함으로 인하여 상직(相職)의 체임(遞任)을 힘써 따르지만, 곧 다시 제수(除授)할 것이다. 오늘 체임을 허락하고 명일에 다시 복상(卜相)088)  하여 이같이 세월만 보낸다면, 나라 일을 어느 때에 구제하겠는가? 마땅히 전지(前旨)에 따라 곧 나와서 일을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태좌(李台佐)와 부제조(副提調) 조문명(趙文命)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태좌가 말하기를,
"회자(回咨)는 따로 재자관(䝴咨官)을 정하여 들여보냈는데, 일찍이 계해년089)  에 고(故) 상신(相臣) 정재숭(鄭載嵩)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자문(咨文)을 보고 예부(禮部)에 자문을 올렸더니, 저들이 이르기를, ‘배신(陪臣)이 길에서 황지(皇旨)를 보고 지레 변무(辨誣)를 청하였다.’고 하며 격노(激怒)하여 모욕(侮辱)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금번의 일도 다만 앞서 들어간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예부에 자문을 올리게 한다면 계해년의 일과 같이 될까 두려우니, 따로 사신을 보내어 예부에 자문을 올리는 것이 격노하는 데에 이르지 않을 듯합니다. 영상(領相)의 뜻도 이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을 상사(上使)로 삼고 대제학(大提學)을 부사(副使)로 삼는 것이 순편(順便)함을 알지 못함은 아니나, 나의 의견에는 앞서 들어간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그 성사(成事)의 여부(與否)를 보고 다시 사신을 보내고자 하니, 우선 대신이 출사(出仕)하기를 기다려서 강구(講究)하여 결정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태좌가 말하기를,
"이 임금이 모욕을 받아 신하가 죽어야 마땅한 날을 당하여 만약 사행(使行)의 일로써 영상을 부른다면 어찌 변동(變動)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조문명으로 하여금 별유(別諭)를 써서 내리게 하였다. 이태좌가 말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군향미(軍餉米)를 조적(糶糴)090)  할 때에 수어사(守禦使)가 종사관(從事官)을 보내어 새로 봉(封)한 창고(倉庫)는 폐쇄(閉鎖)하고 옛날 봉한 창고를 열어 백성에게 분급(分級)하였습니다. 정해년091)   이후에는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이를 전관(專管)하여 새로 수봉(收捧)한 쌀을 모두 분급했으니, 구곡(舊穀)이 점차 부패(腐敗)할 뿐만 아니라, 아전들이 농간(弄奸)을 부려 처음에는 재고미(在庫米)가 13만 석(石)이었는데 지금은 절미(折米) 2만 7천여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후에는 종사관(從事官)을 보내어 당초의 정식(定式)과 같이 개폐(開閉)하고, 별환곡(別還穀)을 받기를 원하는 자는 일체 방색(防塞) 할 것이며, 방출(放出)의 수량을 1만 석으로 정하되 금년에는 우선 병오년092)  에 수봉한 9천여 석으로써 분급함이 순편(順便)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태좌가 말하기를,
"남한 산성의 수첩군(守堞軍)이 2만 7천 명인데, 이는 기병(騎兵)·보병(步兵)의 정군(正軍)과 달라서 도망한 자와 물고(物故)된 자의 대정(代定)을 각 고을에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므로, 궐오(闕伍)가 매우 많고 노약(老弱)이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습조(習操)를 오랫동안 폐지한 채 다만 해부 초관(該部哨官)으로 하여금 매년 가을에 부근 고을에서 조련(操鍊)만 할 뿐이니,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후에는 이미 편성(編成)된 군졸을 만약 다른 부역(夫役)에 이정(移定)하면 그 수령을 논죄(論罪)하고, 매년 한 차례씩 중군(中軍)이나 혹 종사관(從事官)을 보내어 순시(巡視)하고 점열(點閱)하여 인하여 시사(試射)를 시행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2월 15일 병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임금이 사신(使臣)을 보내는 편부(便否)를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에게 물으니, 조태억이 대답하기를,
"다만 재자관(䝴咨官)만을 보낸다면 사체(事體)가 소홀합니다. 임금이 모욕(侮辱)을 받으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한 분의가 있는데, 신자(臣子)가 어찌 감히 힘을 다하여 신리(伸理)하지 않겠습니까? 요상(僚相)이 차자(箚子)를 올려 사행(使行)으로 가기를 청하였는데, 바깥 의논도 또한 영상을 사신으로 보낸다면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제학(大提學)으로 하여금 영상(領相)을 찾아가 상의하여 명일 입대(入對)할 때에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태억이 괘서(掛書)한 흉적을 아직 잡지 못하였다 하여 좌우 포장(左右捕將)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종사관(從事官)과 부장(部將)은 모두 태거(汰去)하라."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호남 어사(湖南御史) 이광덕(李光德)의 보장(報狀)을 보았더니, 호남의 죄수 나상규(羅祥奎)에게 연루된 사람인 유수창(劉壽昌)·박태흥(朴泰興)·수만(守萬) 등 3명을 어사가 서울로 올라올 때에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잡아 가두고 장교(將校)를 정하여 압송(押送)하도록 하였는데, 포도 대장(捕盜大將)이, ‘그들이 병이 있어 보방(保放)093)  한다.’ 하고, 도망하도록 방치(放置)하였다고 합니다. 포도 대장 신광하(申光夏)의 일이 해괴하니,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사주(李思周)를 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왕세자(王世子)가 시민당(時敏堂)에 나가서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았으니, 생신일(生辰日)인 때문이었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2월 16일 정유

사시(巳時)부터 진시(辰時)에 이르기까지 햇무리하였는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으며, 빛깔은 안이 붉고 밖이 푸르렀다. 흰 구름 한 줄기가 기운처럼 건방(乾方)에서 일어나 햇무리 가장자리를 질러 갔는데, 길이는 5, 6장(丈)이 되고, 너비는 1척(尺) 가량 되었으며, 얼마 후에 사라졌다. 초저녁에 흰구름 한 줄기가 기운처럼 건방(乾方)에서 일어나 곧장 동쪽을 가리켰는데, 길이는 10여 척이고, 너비는 1척 가량 되었으며, 얼마 후에 사라졌다.

 

임금이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을 불러 보았다. 윤순이 말하기를,
"앞서 들어간 사신(使臣)이 돌아온 후에 형세를 보아 임기응변(臨機應變)한다는 성교(聖敎)가 지당합니다마는, 앞서 들어간 사신이 5, 6월에 돌아올 것인데, 뒷 사신이 행장(行裝)을 차리려면 연말(年末)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저들이 반드시 지체시켜 성실하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주장하는 바는 사리(詞理)가 매우 올바르므로, 이 기회를 인하여 사실을 밝히면 국가의 무욕(誣辱)을 깨끗이 씻게 될 것이니, 우리의 체통을 유지하여 저들이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이 이 한번의 조치(措置)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사신이 청한 일을 인준(認準)받지 못한다면, 비록 머리가 부서지더라도 힘껏 다투어 결단코 그만두지 않아야 할 것이니, 영상(領相)의 의견이 또한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영상을 의지함이 가볍지 않으므로, 이번에는 사행(使行)으로 보내기가 결코 어렵다. 만약 영상을 사행에 보낸다면, 경(卿)을 부사(副使)로 채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옛날 임진년094)  에 정곤수(鄭崑壽)가 일곱 번 연경(燕京)에 들어갔으니, 국가에 일이 있을 때에는 신자(臣子)된 자가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꺼려 하겠습니까? 성상(聖上)께서는 일이 난처(難處)하게 된 후에 바야흐로 영상을 보내겠다고 하교하시는데, 기미(機微)에 앞서 선처(善處)하여야만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난처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비로소 의장(倚仗)하는 사람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신은 비록 여러 차례 행역(行役)하더라도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이 등대(登對)하기를 기다려 소상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세 번 정사(呈辭)하니, 임금이 별유(別諭)를 내려 나오기를 권면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심경(心經)》을 강론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 성학(聖學)의 조예(造詣)가 이미 있었는데, 신이 서연(書筵)에 등대(登對)한 지 벌써 거의 5, 6년이 지났습니다.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성명(聖明)의 공부가 어느 경지(境地)에 이르렀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기필(期必)하여 범상(凡常)한 임금되기를 부끄럽게 여겼으나, 다만 실지의 공부가 없어 오늘날의 정치(政治)에 그쳤으니, 상채인(上蔡人) 사양좌(謝良佐)095)  의 명리설(名利說)로써 보건대, 감개(感慨)한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다. 보필하고 인도하는 책임을 오직 경악(經幄)의 신하에게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2월 17일 무술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소명(召命)을 받들고 대궐에 나아가니,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인견(引見)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과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무욕(誣辱)을 입은 것이 이와 같은데, 회자(回咨)를 다만 재자관(䝴咨官)의 행차에 부치는 것은 결코 신자(臣子)가 힘을 다하여 신리(伸理)하는 분의(分義)가 아닙니다. 하물며 이번의 일은 저들이 올바르지 못하고 우리가 올바르니, 이런 기회(機會)를 인하여 밝게 신리한다면 거의 후일의 책망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외람되지만 상사(上使)에 충당하고 윤순을 부사(副使)로 삼아 즉시 길을 떠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조태억이 말하기를,
"영상은 국가의 안위(安危)를 담당하였으니 멀리 나갈 수가 없고, 신이 비록 질병은 있으나 갔다 올 만합니다. 만약 보내고자 하지 않는다면, 청컨대, 정축년096)  에 고(故) 상신(相臣) 윤지선(尹趾善)의 진정(陳情)을 들어준 전례에 의하여 신의 상직(相職)을 체차(遞差)하고 다시 어진이를 복상(卜相)하여 사신(使臣)의 일을 맡기소서."
하였는데, 윤순이 말하기를,
"수상(首相)은 멀리 나가기가 어렵고 좌상(左相)은 병이 위중(危重)하니, 상사(上使)는 종반(宗班)에서 각별히 선택하고 서장관(書狀官)은 상례(常例)에 구애됨이 없이 선정(選定)할 것이며, 신을 부사(副使)로 충정(充定)한다면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음으로 기필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옹정(雍正)097)  이 천하(天下)에 군림(君臨)하여 채은(債銀)을 차마 받지 못하고 너그럽게 면제해 주었는데, 뜻밖에 사단(事端)이 일어나 허세(虛勢)를 부려 공갈 협박하는 바가 이에 이르렀으니, 서서히 살펴보아 경(卿) 등을 보내려고 하였다. 이번에는 비록 대제학만 보내더라도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인하여 또 하교하기를,
"상사는 누구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하였는데, 이광좌 등이 말하기를,
"종반(宗班)은 외조(外朝)와 접촉이 드물어 누가 나은지 모르니, 성상께서 재택(裁擇)하소서.
하니, 임금이 밀창군(密昌君) 직(樴)을 상사에 충정하라고 명하였다. 또 서장관을 각별히 선택할 것을 명하였는데, 윤순이 신치운(申致雲)으로 차하(差下)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불령(不逞)한 무리들의 처형(處刑)이 아직 지연되고 있는데, 종가(鍾街)에 또 괘서(掛書)의 변괴가 있으니, 상(賞)을 걸어 체포(逮捕)하게 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분부하고자 하였으나, 인심이 소요를 일으킬까 염려하였는데, 경의 말을 들어보니 상을 걸어 체포하게 함이 옳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사주(李思周)는 교귀(交龜)098)  하고 올라오려면 장차 지연이 될 것이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2월 18일 기해

이삼(李森)을 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유신(儒臣)이 문의(文義)를 진달하기를 마치자, 승지(承旨) 서명연(徐命淵)이 말하기를,
"전라 병사(全羅兵使) 조경(趙儆)이 담양 부사(潭陽府使) 심유현(沈維賢)을 장파(狀罷)099)  하였는데, 대개 병사(兵使)가 화약고(火藥庫)를 실화(失火)하였다 하여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를 추론(推論)하였는데, 심유현이 보내지 않았으므로 발노(發怒)하여 장파(狀罷)한 것입니다. 병사가 수령을 장파하는 것은 전례(前例)에 없던 일이니, 장계는 도로 보내고, 조경은 추고(推考)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전례를 물었다. 지경연사(知經筵事)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병사가 군무(軍務)로 인하여 감관과 색리를 추론하였는데, 수령이 보내지 않고 논보(論報)하여 침욕(侵辱)했으니, 심유현의 한 일이 진실로 옳지 않습니다. 병사가 장파한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나, 만약 감사(監司)에게 통의(通議)하지 않았다면 병사 또한 허물이 없지 않으니, 추고하라는 장계는 시행하도록 윤허함이 사체에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선정전(宣政殿)의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조현명(趙顯命)과 전경(典經) 이종성(李宗城)이 진강(進講)하기를 마치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붕당(朋黨)이 2백 년 동안 고폐(痼弊)가 되었는데, 전하께서 불편 부당(不偏不黨)의 뜻을 가지고 지성(至誠)으로 일을 처리하시니, 어찌 소융(消融)과 탕평(蕩平)의 방도가 이룩되지 않겠습니까? 작년 이후로 인심과 세도(世道)가 신축년100)  ·임인년101)  ·을사년102)  ·병오년103)   연간(年間)에 비교한다면, 조금이나마 성효(成效)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윽이 조정의 거조(擧措)를 살펴보건대, 아직도 당론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진용(進用)되는 자가 어찌 모두 현인(賢人)이 되겠으며, 배척하여 물리친 자가 어찌 모두 불초(不肖)한 사람이겠습니까? 혹은 파직하고 혹은 폐출(廢黜)함이 비록 시국(時局)을 진정(鎭定)시키는 뜻에서 나왔으나, 그 경중(輕重)을 참작하여 임용(任用)해서 먼저 외읍(外邑)의 수령에 시험했다가 점차 조정에 불러들여 지성으로 신칙하고 권면한다면, 어찌 감동(感動)하여 뜻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 태종(唐太宗)이 이른바 조정의 붕당(朋黨)을 제거하기 어렵다는 말에 대하여 내가 일찍이 개연(慨然)히 여겼는데,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고 몸이 단정(端正)하면 그림자가 곧은 것이니, 임금이 지성으로 신칙하고 권면한다면 당론(黨論)을 제거하기가 어찌 어렵겠는가? 조정에서 범절(凡節)를 조처하는 사이에 옛 습속을 버리지 못한 것은 나의 정성이 천박(淺薄)한 소치이니, 이는 실로 남을 책망하기는 쉽지만 자신을 책망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항상 이 마음을 간직하여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다면 어찌 후일의 효험이 없겠는가?"
하였다.

 

조문명(趙文命)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서명연(徐命淵)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이정제(李廷濟)를 도승지(都承旨)로, 권익순(權益淳)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박필기(朴弼夔)를 교리(校理)로, 윤상백(尹尙白)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순전(舜典)을 강론하였다. 선기옥형(璇璣玉衡)에 이르러 조현명이 말하기를,
"특진관(特進官) 권이진(權以鎭)이 이에 대하여 소상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자세하게 해석(解釋)하여 아뢰라고 명하니, 권이진이 훈고(訓誥)를 해석하여 대답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순(舜)임금은 옥형(玉衡)을 살펴 천체(天體)의 운행(運行)을 가지런하게 했으며,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하고 흠경각(欽敬閣)과 보루각(報漏閣)을 세웠으며, 숙묘조(肅廟朝)에서는 제정각(齊政閣)을 설치하고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안치(安置)하여 공경하는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을 본받아 도(道)를 행하는 일에 깊이 유의(留意)하소서."
하고, 이종성은 말하기를,
"다만 선기옥형만 살피고 한 마음이 하늘의 덕(德)과 합하지 않는다면 또한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우리 세종 대왕께서는 동방의 성인(聖人)으로서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크게 갖추어졌으니, 세종 대왕의 덕화(德化)가 있은 후에 간의대와 흠경각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록 이 물건이 있더라도 어찌 백성들이 찬탄(讚歎)하여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은덕(恩德)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매우 옳게 여겼다.

 

2월 19일 경자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아!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인심의 함닉(陷溺)됨이 어찌 오늘날과 같은 적이 있었겠는가? 호남(湖南)의 괘서(掛書)의 변고(變故)에 이르러서는 극단(極端)에 달했다고 할 것이니, 아! 참으로 분통한 일이다. 어떤 요망한 사람이 이 윤기(倫紀)가 없는 요악(妖惡)한 말을 지어내어 민중(民衆)을 미혹시킬 계획을 하는지 이는 부도(不道)할 뿐만 아니라 곧 난민(亂民)이니, 곧 추포(追捕)하여 전형(典刑)을 밝게 보여야 마땅하다. 말이 비록 놀랍고 분통하나 요망한 데에 지나지 않고 일이 익명(匿名)에 관련되므로, 두 차례 올린 것을 모두 불사르고 구포(購捕)하는 한 절목을 또한 거론(擧論)하지 못하게 한 것은 대개 무고(無故)한 사람이 뜻밖에 재앙에 걸려들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내가 비록 박덕(薄德)하여 인심을 감화(感化)시키고 간계(奸計)를 근절시키지는 못하나, 감히 제멋대로 지척(咫尺)의 도문(都門)에 또 흉서(凶書)를 붙였으니, 이는 각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 한 사람이 저지른 일이다. 이런 요악하고 흉악한 사람은 잡지 않을 수 없으므로,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우선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은밀히 탐사(探査)하여 잡게 하였고, 상(賞)을 걸어 구포(購捕)하게 하는 것은 추후로 하교하겠다는 뜻으로 이미 저번 연석(筵席)에서 말하였으나 아직 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이미 포장(捕將)을 추고(推考)하고, 또 종사관(從事官)을 태거(汰去)하였으므로, 그전대로 버려둘 수는 없다. 잡아서 발고(發告)하는 자는 선조(先朝)의 전례에 의하여 천금(千金)의 상을 내리고 2품(品)의 자급(資級)을 줄 것이다. 아! 없어지지 않는 것은 병이(秉彝)이나, 내가 비록 문죄(問罪)하지 않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이런 무리는 죽어야 마땅함을 생각할 것이다. 이런 요악한 자가 이와 같이 횡행(橫行)하는 데도 버려두고 묻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데에 이를 것이다. 이에 이와 같이 상을 걸고 구포(購捕)하게 하는 바이니, 그 요악한 계획을 알면서도 즉시 고하지 않았던 자가 그 허물을 뉘우치고 잡아 고발한다면 마땅히 그 죄를 용서하여 상을 내릴 것이요, 만약 옛날의 사혐(私嫌)으로 인하여 기회를 틈타 무고(誣告)한다면 특히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이에 해당한 벌칙(罰則)이 있을 것이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서울과 외방(外方)에 효유(曉諭)하여 모두 상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고 《황명통기(皇明通記)》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종(神宗) 말년(末年)에는 백료(百僚)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는데, 광종(光宗) 초년(初年)에 폐출(廢黜)한 사람을 기용(起用)하여 각 관아(官衙)의 자리가 찼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제 유신(儒臣)이 진달한 ‘오직 인재를 등용하라.’는 말은 참으로 옳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군자의 당(黨)이 있고 소인(小人)은 소인의 당이 있으니, 구양수(歐陽修)104)  의 붕당론(朋黨論)과 주자(朱子)의 저서(著書)가운데에도 모두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일에는 그렇지 아니하여 당파(黨派)가 나뉜지 이미 5, 6대에 이르렀으니, 군자의 자손에 어찌 소인이 없겠으며 소인의 자손에도 어찌 군자가 없겠습니까? 마땅히 그 사람의 평일(平日)에 행한 일을 보아 어진이는 등용하고 불초(不肖)한 자는 버려야 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자와 소인도 오히려 부족하여 지금은 서로 상대방을 가리켜 충(忠)이니 역(逆)이니 지칭(持稱)하기에 이르렀는데, ‘충역(忠逆)’의 두 글자를 어찌 가볍게 남에게 덮어씌울 수 있겠는가? 이제는 극단(極端)의 경지에 이르렀다. 혹시 태평의 운회(運會)가 돌아오는 시기라면 그렇지 않을 것인데, 국운(國運)이 장차 떨치지 못할 듯하다."
하였다.

 

교리(校理) 박필기(朴弼夔)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판부사(判府事) 조도빈(趙道彬)이 그 숙부(叔父)를 위해 상소하여 변명한 것은 이미 지극히 무엄(無嚴)한 일인데, 그 장심(將心)105)  을 숨기기 위하여 감히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죄목을 방자(放恣)하게 도리어 연청(筵請)한 대신에게 더하였습니다. 죄인의 자질(子姪)이 도리어 무함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진실로 세도(世道)의 큰 변고(變故)인데, 전하께서는 조도빈의 소비(疏批)에 준엄한 말로 배척하지 않았고, 또 대신에 대한 전후의 비답과 하유(下諭)에도 이 한 조항에 대하여는 통렬히 변명하지 않으셨으니, 옳고 그른 것을 밝게 분별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렇게 함은 옳지 않습니다. 빨리 성지(聖旨)를 내려 명백한 변석(辨釋)을 보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옳고 그른 것을 밝히는 일은 너의 말이 옳다. 다만 말하는 것이 비록 미안하나, 이미 대신의 직질(職秩)이 있어 억압하는 뜻이 드러나 있고, 말하는 사이에 성(姓)을 버리고 이름만 불렀으니, 이러한 습속(習俗)은 내가 오늘날 취(取)하지 않는다."
하였다.

 

2월 20일 신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외방에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는 일이 바야흐로 벌어졌습니다. 영남이 더욱 심하고 호서는 양남에 견주어 약간 차이가 있는데, 기민을 정밀하게 추려내고 진곡(賑穀)이 정실(精實)한 후에야 백성들이 혜택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대저 토호(土豪)의 노복(奴僕)으로 기민에 섞여 들어간 자가 많으며 색리(色吏)가 허명(虛名)을 만들어 섞어 기록하니, 백급(白給)106)  하는 곡식이 태반(太半)이나 이에서 소모(消耗)되어 기민이 받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감사(監司)와 어사(御史)로 하여금 기민을 정밀하게 분급하도록 하여 전일과 같은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여러 도(道)의 각 고을에 각기 한 가지 폐단이 있고, 혹은 한 도(道)에 공통적인 폐단이 있으며, 혹은 한 고을에 국한된 폐단도 있으니, 그 절급한 것은 양역(良役)의 갑절이나 되는 것도 있습니다. 각도의 감사가 각 고을의 폐단을 모두 채취(採取)해서 장문(狀聞)하여 변통하여야 하는데, 일이 영문(營門)에 관계되면 열읍(列邑)에 폐단을 끼치더라도 계문(啓聞)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삼남(三南)은 어사로 하여금 감사에게 상의하여 큰 일은 장문하고 작은 일은 묘당(廟堂)에 보고하되,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을 낱낱이 조진(條陳)하게 할 것이며, 도내(道內)의 선치(善治)하는 수령 몇 사람을 가려서 장계와 함께 올려 보내어 묘당(廟堂)에서 면대(面對)하여 진달하거나 혹은 입대(入對)하여 아뢰어 장점(長點)에 따라 변통해서 백성들의 위급한 처지를 구제하도록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평안 감사(平安監司) 윤헌주(尹憲柱)는 수만 냥의 은화(銀貨)를 경역(京譯)에게 대출(貸出)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자취가 탐도(貪饕)에 관계됩니다. 지금 듣건대, 본영(本營)에서 보고를 올렸고 형조에서 바야흐로 조사하여 독촉한다고 하니, 불법(不法)한 정상을 이에 이르러 숨기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그리고 채무(債務)를 진 경역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잡아 가두고 엄중히 징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매사(每事)에 내가 반드시 당론(黨論)으로 의심한다고 하니, 마음에 있는 바를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만약 윤헌주가 아니었다면 정경(正卿)을 나문(拿問)하자고 청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우선 비국으로 하여금 본도(本道)에 사문(査問)한 다음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옥당(玉堂) 조현명(趙顯命)과 이종성(李宗城)이 옥당의 고사(故事)를 써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 또 차대(次對)를 겪었는데, 만기(萬幾)를 보살피는 나머지 여가가 적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은, 삼강(三講)107)  과 양대(兩對)108)  를 모두 폐지하시니, 돌아보건대, 촌음(寸陰)을 아끼는 공부에 겸연(歉然)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차대(次對)를 파(罷)하고 오시(午時)를 겨우 지나자 종일토록 금중(禁中)에서 관복(冠服)을 갖추고 기다리며 하찮은 소견(所見)을 아뢰고자 하였으나, 어느새 저녁이 되어 궁문(宮門)이 닫히고 선소(宣召)는 끝내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선현(先賢)의 말을 인용하여 고사(故事)를 갖추어 올리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어필(御筆)로써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이제 써 올린 고사(故事)를 보고 그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아! 우(禹)임금 같은 성인(聖人)도 오히려 촌음을 아꼈는데, 하물며 삼대(三代)를 본받고자 하는 자이겠는가? 마땅히 분음(分陰)을 아껴야 하겠지만, 오늘 사대(賜對)를 내리지 않은 것은 어찌 안일(安逸)함을 생각하고 마음이 게을러서 그러했겠는가? 경계한 말은 진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말미암았기에 특히 수필(手筆)로써 대답하여 나의 가상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는 바이다."
하니, 조현명 등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정언(正言) 이성효(李性孝)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상(聖上)께서 작년에 내린 처분은 대개 사람의 정도(正道)를 세우고 신자(臣子)의 절조(節操)를 가다듬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한때의 진퇴(進退)와 출척(黜陟)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후(前後)의 연교(筵敎)와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말씀하시기를, ‘이제 이 처분은 후세(後世)의 임금이 임금 구실을 하고 신하가 신하 구실을 하는 분의(分義)가 정해졌다.’ 하였고, 또 말씀하시기를, ‘선왕에게 충성하지 않고 후왕(後王)에게 충성하는 자가 없다.’고 하셨으니, 이에서 전하께서 의리의 바른 것을 일찍이 강구(講究)하고 충역(忠逆)의 분변(分辨)을 깊이 살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 흉적(凶賊)의 역안(逆案)으로 인하여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죄명을 다시 감단(勘斷)하여 처분이 이미 엄정하였고, 사지(辭旨)가 또 순절(諄切)했으니, 비록 일찍이 그들을 두둔하는 자라 하더라도 진실로 상도(常道)를 지키는 마음이 있다면 성교(聖敎)의 아래에서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조도빈(趙道彬) 같은 자는 처지가 이미 자별(自別)하니 사체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방자하게 소장(疏章)을 올려 심지어는 미워하고 사랑함에 갑자기 달라져 일체 전일과 반대가 되었다는 등의 말로써 공공연히 떠들어댔으며, 죄악이 조태채(趙泰采)보다 더한 삼흉(三凶)109)  을 극력 영호(營護)하고 극진히 찬양하여 반드시 공의(公議)와 싸워 옳고 그른 것을 현란(眩亂)시키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그대로 버려 둔다면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운 분의(分義)가 반드시 땅에 떨어지는 데 이를 것이니, 빨리 밝은 성지(聖旨)를 내려 엄중히 죄벌을 더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뜻은 옳으나 다만 내 뜻을 아직도 알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다. 고대 신칙했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어찌 위에 있는 자가 먼저 의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2월 21일 임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광좌(李光佐)가 호조 참의(戶曹參議) 송인명(宋寅明)을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에 차출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대개 송인명은 재주가 영민(英敏)하여 먼저 비국에 차출했으니, 장차 크게 쓰일 예정이었다. 대신 이하가 모두 물러나가니,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들이고 폐막을 순문(詢問)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평소에 개강(開講)하는 시기를 당하여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이 선영(先塋)을 성소(省掃)하는 일로 휴가(休暇)를 청하는 자가 많으니, 이후에는 관료(館僚)의 정사(呈辭)를 한때에 받아들이지 말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와 이슬이 이미 내렸으니, 어찌 선조(先祖)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봄을 만나 성소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금하지 말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이 근밀(近密)의 자리에 오래 모시고 있어 그윽이 우리 성상(聖上)의 타고나신 효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온 우애(友愛)를 살펴보건대, 천고(千古)에 뛰어나셨으니,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동작(動作)이 효제(孝悌)의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었다. 비와 이슬이 이미 내렸다는 하교에서도 온 나라를 효도(孝道)로 다스리는 거룩한 뜻을 볼 수 있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족하니, 아! 아름다운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5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1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신이 근밀(近密)의 자리에 오래 모시고 있어 그윽이 우리 성상(聖上)의 타고나신 효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온 우애(友愛)를 살펴보건대, 천고(千古)에 뛰어나셨으니,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동작(動作)이 효제(孝悌)의 가운데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었다. 비와 이슬이 이미 내렸다는 하교에서도 온 나라를 효도(孝道)로 다스리는 거룩한 뜻을 볼 수 있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족하니, 아! 아름다운 일이다.

 

2월 22일 계묘

윤연(尹㝚)을 승지(承旨)로, 서명빈(徐命彬)을 헌납(獻納)으로, 이현모(李顯謨)·홍경보(洪景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이성효(李性孝)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창성 부사(昌城府使) 이천준(李天駿)은 사람됨이 혼모(昏耗)하고, 또 술을 좋아하여 일찍이 서읍(西邑)에 있을 때에 이미 실정(失政)이 드러났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수령으로 명예를 구하는 자는 비록 탐리(貪吏)와 다르다고 하겠으나 그 마음가짐은 어긋난 것이다. 비록 침학(侵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사간(公私間)에 모두 폐단이 있을 것이니, 이런 무리들은 억제(抑制)를 가하고 숭장(崇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강계(江界)와 갑산(甲山)에는 월경(越境)을 범하는 자가 매우 많아서 가끔 저들에게 피살(被殺)되고 그 가족들이 밤을 틈타 강을 건너가 시체(屍體)를 찾아오는 일이 있는데, 변장(邊將)과 수령(守令)은 혹시 죄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서로 숨기고 있습니다. 저들이 월경하는 일도 오히려 사단(事端)을 일으켜 나라에서 무욕(誣辱)을 입은 경우가 한정이 없는데, 변방 백성이 국경을 넘어 인삼을 몰래 캐다가 혹시라도 저들에게 붙잡힌다면 그 무욕을 받음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수령·변장이 만약 범월(犯越)한 자를 잡으면 상사(上司)에 보고하여 법에 따라 정죄(定罪)하되, 수령·변장은 죄를 주지 말도록 영갑(令甲)110)  을 정한다면 범월하는 폐단이 거의 조금이나마 징계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이정제가 말하기를,
"갑산 등지에 일찍이 시종(侍從)에 있던 자를 수령으로 차송한다면 반드시 탄압(彈壓)하는 효과가 있고 또한 범월의 근심도 징계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조(銓曹)에 신칙하라고 분부하였다.

 

2월 23일 갑진

임금이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임금의 존엄(尊嚴)으로써도 공사(公事)를 한나절 지체하는 것을 오히려 중난(重難)하게 여기고 있으니, 신자(臣子)된 자는 반드시 각근(恪勤)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게으름이 습속(習俗)이 되어 각사(各司)에 계하(啓下)한 공사(公事)를 높은 다락에 치워 놓고 혹은 수개월을 넘기거나 혹은 해를 넘겨 비로소 회계(回啓)하며, 그 가운데 시급히 회계할 것도 달을 넘김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특히 본사(本司)의 공사가 지체될 뿐만 아니라, 그 상언(上言)한 원방(遠方) 사람이 서울에서 머무는 폐단이 또한 적지 않으니, 심히 미안한 일이다. 각사의 당상(堂上)들을 아울러 추고(推考)하고 경책(警責)하여 각별히 신칙을 가하고, 비국에 적체(積滯)된 공사도 모두 즉시 회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박치원(朴致遠)을 갑산부(甲山府)에 정배(定配)하였다. 박치원이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었을 때 탐장(貪贓)을 범하여 나문(拿問)하였는데, 끝내 자복(自服)하지 않으니, 임금이 금부(禁府)에 명하여 형장(刑杖)으로 추문(推問)하게 하고 형위(刑威)를 베풀기에 이르러 비로소 자복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일찍이 시종(侍從)에 있던 자가 이와 같이 탐오(貪汚)를 범하고서도 끝내 지만(遲晩)111)  하지 않다가, 신문(訊問)할 즈음에 형장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곧장 공초(供招)했으니, 참으로 탐오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다. 이미 임금의 뜻을 본받지 않고 탐학(貪虐)을 일삼았으니, 지극히 해괴하다. 만약 애매하다면 형위(刑威)를 베푼 데에 겁을 내어 자복하겠는가? 이런 사람은 전정(殿庭)에서 팽형(烹刑)에 붙여 다른 탐리(貪吏)를 징계함이 마땅하겠지만, 그 초사(招辭) 가운데에 부모(父母)의 공양에 썼다고 하였으니 참작함이 마땅하다. 유배(流配)는 너무 가벼우니 극변(極邊)에 정해진 연한(年限)이 없이 정배하고 종신토록 금고(禁錮)112)  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4일 을사

소대(召對)를 행하고 《명기편년(明紀編年)》을 강론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후에 탐장(貪贓)을 다스리는 정사를 많이 시행하여 조서(詔書) 가운데에 문득 팽아(烹阿)의 율을 인용하였으나, 혁연(赫然)히 단행한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어찌 두려워하여 징계되겠습니까? 염치(廉恥)를 권면(勸勉)하고 예의(禮義)를 진흥시키면 자연히 감화(感化)되는 효과가 있어 비록 금지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근신(謹愼)하여 탐오의 풍습이 점차 지식(止熄)될 것이니, 이는 임금이 인도(引導)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숭정 황제(崇禎皇帝)가 만약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을 때에 처음부터 끝까지 행정(行政)에 마음을 두었다면 환관(宦官)들이 어떻게 정사를 천단할 수 있으며, 백성들이 어찌 흐트러져 나라가 멸망하는 데에 이르렀겠는가? 이는 실로 거울삼아 경계할 곳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전하의 병통은 사심(私心)을 버리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대개 기질이 강경(剛勁)하면 강경한 데로 인하여 사심이 발동(發動)하고, 기질이 유약하면 유약한 데로 인하여 사심이 발동하며, 또 성색(聲色)이 치우친 데로 인하여 사심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전하께서 사심에 대하여 이미 대체(大體)를 아시니, 만약 사심이 생기는 곳을 점검(點檢)하여 제거한다면, 성학(聖學)이 반드시 고명(高明)한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25일 병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의 조강(朝講)에 나아가니, 시독관(侍讀官) 조현명(趙顯命)과 전경(典經) 이종성(伊宗城)이 《서전(書傳)》 대우모(大禹謨)를 진강(進講)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정제(伊廷濟)가 아뢰기를,
"해서(海西)는 관방(關防)의 요해지(要害地)이고 관서(關西)는 영애(嶺阨)의 긴요한 중지(重地)인데, 연달아 절수(折受)한 가운데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도신(道臣) 및 수신(帥臣)의 장계와 비국의 회계로 인하여 성상께서 환수(還收)하도록 쾌히 허락하셨는데, 차인(差人)들이 열읍(列邑)에 왕래하면서 여러모로 뇌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속여서 진고(進告)하는 자는 적발(摘發)하여 형조에 보내어 감죄(勘罪)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사(領事)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복(福)을 아끼는 도리를 말하건대, 바야흐로 강보(襁褓)에 있는 아기에게 먼저 제택(第宅)과 전원(田園)을 마련해 주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선묘조(宣廟朝) 때에 공주(公主)와 옹주(翁主) 가운데 수복(壽福)을 누린 이가 많았는데, 세상에서 말하기를, ‘전원과 제택을 검소(儉素)한 데 힘썼으므로 이와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억지로 꾸며낸 말에 가까우나, 또한 이런 이치가 없지도 않습니다. 혹은 잠저(潛邸)113)  때에 쓰던 바와 다른 유족(裕足)한 궁가(宮家)에서 형편에 따라 나누어 보내게 하고, 다시 절수(折受)하지 말도록 한다면 다만 국가에 유익할 뿐 아니라, 그 궁가에도 반드시 복(福)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특진관(特進官) 여필용(呂必容)이 말하기를,
" 증(贈) 좌랑(佐郞) 엄흥도(嚴興道)는 충절(忠節)이 특이(特異)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손이 없어 외손(外孫)이 봉사(奉祀)하고 있는데, 몹시 빈한(貧寒)하여 향화(香火)를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복호(復戶)114)  하여 그 제향(祭享)을 받들고 분묘(墳墓)가 있는 산에 초목(樵牧)을 금지하게 한다면, 실로 은휼(隱恤)의 전례(典禮)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미(寒微)한 사람을 낭서(郞署)에 증직(贈職)했으니, 선조(先朝)의 포상(褒賞)한 뜻을 볼 수 있다. 대대로 군역(軍役)을 면제하고 복호도 참작하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말하기를,
"여위량(呂渭良)은 유(流) 3천 리의 율(律)에 적용하였는데, 대신에게 의논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여위량은 박치원에게 비교한다면 차이가 있어 공물(公物)을 많이 범용(犯用)했으니, 유 3천 리에 1등을 더하여 죄를 줌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극변(極邊)에 정배하고 종신토록 금고(禁錮)에 처하게 하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호당(湖堂)115)  의 학사(學士)는 조종조(祖宗朝)에서 휴가를 주어 서당(書堂)에서 혹은 책자를 진강(進講)하기 위하여 먼저 강습(講習)을 하며 혹은 시문(詩文)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동호 서당(東湖書堂)이 이미 퇴폐(頹廢)되었으니, 이제 비록 학사를 선발하더라도 유접(留接)할 곳이 없습니다. 조가(朝家)에서 성중(城中)의 관청 건물을 가려 주어 시율(時律)로써 종사(從事)하지 말고 오로지 강독(講讀)에 힘쓰게 하되, 매월 초에 익힌 서적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고, 가끔 주효(酒肴)를 내린다면, 참으로 사가(賜暇)의 실효(實效)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이진(權以鎭)이 말하기를,
"절수(折受)는 백성들의 극심한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듣건대,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의 자손이 나라에서 내려 주어 받은 토지를 신생 옹주방(新生翁主房)에 매도(賣渡)했는데, 그 땅은 진폐(陳廢)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부근에 있는 백성들이 기간(起墾)하여 경작(耕作)한 지 이미 여러 대(代)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만약 궁가(宮家)에서 매수(買受)했다면 백성들은 장차 전지(田地)를 잃을 것이니, 어찌 나라를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에서 백성의 전지를 빼앗는다면 나라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액정(掖庭)의 소속(所屬)들이 인연(夤緣)하여 간사한 짓을 한다면 민간에 폐해를 끼쳐서 훗날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데에 이를 것입니다. 대저 다스리는 도리는 가정(家庭)에서 시작되어 나라에 이르는 것이니, 가정을 바루지 못하고 나라를 다스린 자는 없었습니다. 백성의 괴로움이 이와 같은데, 대신 이하는 이를 도외시(度外視)하여 내버려두고 있고, 전하께서는 문의(文義)를 강론할 뿐이요, 백성의 걱정과 나라의 장원(長遠)한 계책에 대하여는 강구(講究)하는 것이 없습니다. 제왕(帝王)의 학문은 마땅히 만물이 제자리를 얻고 그 생육(生育)을 이룩함으로써 그 공적(功績)을 삼는 것이니, 남상(南床)116)  과 호당(湖堂)의 선정(選定)에 이르러서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경연(經筵)의 위에서 어기고 거스리는 말은 듣지 못하고 모두 성덕(聖德)을 찬양하기만 하니, 신은 개연(慨然)히 근심하고 탄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대개(大槪)가 가상하다. 그러나 경(卿)이 일찍이 조정에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궁가의 절수하는 폐단은 예로부터 이와 같아 갑자기 혁파하기가 쉽지 않다. 궁속(宮屬)들이 빙자(憑藉)하여 폐단을 끼치는 일에 이르러서는 경의 말이 옳으니, 신칙함이 옳을 것이다. 임금이 덕의(德義)를 성취시키는 것은 경연관(經筵官)의 책임인데, 경연에서 강독하는 것을 어찌 형식으로만 볼 수 있겠는가? 경이 가끔 시골뜨기의 말이 있어 앞뒤를 알지 못하는데, 연석(筵席)의 도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였다. 권이진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경연을 설치한 것은 장차 임금의 덕의를 성취시키려는 것인데, 그 진달한 말 가운데 거스르는 말은 듣지 못하고 모두 찬양만 하고 있습니다. 신이 비록 시골뜨기이나 찬양함으로써 임금의 덕의를 성취시킨다는 것은 듣지 못한 일입니다. 그리고 절수의 폐단이 이미 극도에 달했는데, 또다시 백성의 경작하는 전지를 사들였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감당하며 나라가 장차 어디에 의뢰하겠습니까? 신이 시골뜨기도 아니요, 또한 연석의 체면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절의(節義)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신하는 임금의 안색(顔色)을 거스르면서 직간(直諫)하는 가운데에서 구하는 것이니, 신하들이 찬양하는 말은 임금에게 이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미안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간곡한 뜻은 매우 가상하나, 스스로 시골뜨기가 아니라는 것이 실로 시골뜨기의 말이다. 대략의 뜻은 비록 좋으나, 액정(掖庭)에서 매매(賣買)했다는 말은 자못 미안한 일이다."
하였다. 권이진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백성과 매매하는 것은 신이 그 옳지 않음을 단연코 알고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신궁(新宮)에서 매수(買受)하였으므로 조세(租稅)를 면제하였으니, 국가에 관련된 일이 아니다. 이런 말은 사리(事理)에 통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권이진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온 나라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백성의 경작하는 전지를 매수했으니, 이 일은 단연 시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호판(戶判)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데, 국가에서 매수한 것이 아니다."
하니, 권이진이 말하기를,
"비록 궁가에서 매수해다 하더라도 궁가의 주인은 전하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국가에서 매수했다고 신이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민사(民事)의 걱정스러움이 참으로 권이진의 말과 같으니, 위문공(衛文公)이 대포(大布)와 대백(大帛)으로 의관(衣冠)을 지은 일117)  은 다만 목전(目前)의 폐단을 제거하는 방도가 될 뿐만 아니라, 실로 장래에 국가를 유족(裕足)하게 하는 술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권이진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착락(着落)이 분명하였으나, 입시할 즈음에 매양 말을 망발(妄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살펴본다면 충성되고 강직하여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의 승평 시대에는 신하들이 말을 하며 뜻을 거스르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고, 임금 또한 너그럽게 용납하여 노여워하지 않았는데, 후세(後世)에 이르러 임금의 뜻을 거슬러서 죄를 받은 자가 많았습니다. 권이진이 초야(草野)에서 조정에 들어와 당원(黨援)이 없이 무처럼 외로이 서서 오직 일단의 충성만 있으므로 간곡하게 말을 다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 등이 거리낌없이 말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신 등이 아부하여 구차하게 용납받으려 한다고 말했으니, 이와 같은 신하를 어찌 얻기가 쉽겠습니까? 전하의 영특한 자질(資質)을 믿고 숨김없이 곧바로 말하며 성의(誠意)가 가슴속에 가득 차서 말을 가리지 않았으니, 오직 성명(聖明)께서는 너그럽게 용납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판(戶判)이 직무(職務)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오직 시골뜨기이므로 연석(筵席)의 체례(體例)를 알지 못했으니, 내가 그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권이진이 평생을 시골에 살았으니 시골뜨기가 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겉치레만 잘하는 서울 사람에 비교한다면 그 실질(實質)이 뛰어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겉만 화사(華奢)하기로는 차라리 소박(素朴)한 것이 나으니, 시골뜨기 또한 취할 점이 있다. 내가 호판을 취(取)하는 것은 질박(質朴)한 때문이다."
하였다.

 

헌납(獻納) 서명빈(徐命彬)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경연(經筵)에 나가셔서 참된 지식과 실천(實踐)하는 과정을 토론(討論)하셨으니, 백 가지 효과가 날마다 드러나야 할 것인데, 마침내 이런 징험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절약(節約)과 검소(儉素)는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가법(家法)인데, 이 전래(傳來)하는 규모를 준수하여 복어(服御)의 범절(凡節)을 검소한 데로 좇았으나, 백성의 습속(習俗)이 사치(奢侈)를 숭상하여 옛 풍습을 고치지 않으므로, 전곡(錢穀)을 탕진하여 거의 남음이 없으니, 이는 본원(本源)의 심지(心地)에 믿음직한 실덕(實德)이 없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탕평(蕩平)의 도(道)를 강구하여 아래에 붕당(朋黨)이 없기를 기대하였는데, 옛 버릇을 답습하여 실효(實效)를 보지 못하였고, 옳고 그름을 논평할 즈음에는 먼저 색목(色目)을 보아 문득 취향(趣向)이 다른 자를 공격하는가 의심하여 지레 억측(臆測)을 가하였으며, 언자(言者)를 너그럽게 용납하였으나 이를 시행하는 실상이 있음을 보지 못했으니,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점은 ‘실(實)’의 한 글자보다 앞설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에 깊이 힘쓰지 않으신다면, 비록 기이(奇異)한 계책과 고명(高明)한 언론(言論)이 있더라도 실지(實地)의 일에 이익됨이 없고 한갓 보고 듣는 아름다움에 그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2월 26일 정미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의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유신(儒臣)이 문의(文義)를 진달하기를 마치자, 지경연사(知經筵事)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이헌장(李獻章)은 죄가 없는데도 그 아비 이사상(李師尙)의 죄로 인하여 극변(極邊)에 멀리 정배(定配)되었습니다. 이사상이 당론(黨論)으로 인하여 죽었으니, 이헌장은 연좌(緣坐)되지 않았는데, 극변의 배소(配所)에서 해를 넘긴 것은 자못 형벌이 아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뜻에 어긋납니다. 은유(恩宥)를 내림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사상의 소는 그 말이 윤기(倫紀)가 없어서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도왔으니, 이 일에 대하여 이 율(律)을 적용한 것은 오히려 용서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김영해(金寧海)는 나이 어려 알지 못하겠지만, 이헌장은 나이가 적지 않고, 또 유생(儒生)과 다르며, 그 형제(兄弟)를 방목(榜目)에서 뽑은 것은 선조(先朝)의 처분인데, 급급히 복과(復科)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니, 어찌 석방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무과(武科)의 출방(出榜)이 멀지 않았는데, 방목(榜目)을 초출(抄出)할 즈음에 만약 조금이라도 공정하지 않음이 있다면 반드시 원망이 조정에 돌아갈 것이다. 시관(試官) 이하는 사정(私情)을 쓴 율로 다스려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이로써 일소(一所)와 이소(二所)118)  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무과가 지극히 공정하지 않으매 거자(擧子)들이 궐문(闕門) 아래에서 회곡(會哭)함이 이르렀으므로 이 하교가 있었다.

 

2월 27일 무신

총재관(摠裁官) 이광좌(李光佐),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 윤순(尹淳)·송인명(宋寅明) 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실록(實錄)의 보궐(補闕)은 따로 1부(部)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권권마다 첨입(添入)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당초에는 따로 1부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열람(閱覽)에 순편케 하기 위하여 권말(卷末)에 첨입하였는데, 1, 2장(張)이 되는 것도 있고 4, 5장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책(冊)의 이름은 보궐(補闕)로 명칭하려 하였으나, 찬출(撰出)한 후에 다시 살펴보았더니, 혹은 자신(自身)의 의견으로 추개(追改)한 곳도 있어 보궐의 이름으로 포괄(包括)할 수 없으므로 이와 같이 품청(稟請)합니다."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누락된 곳은 수합(收合)하여 기록하였고, 옳고 그름이 사실과 다른 것은 고쳐서 썼으니, 만약 보궐(補闕)이라고 이름한다면 이름과 실상이 다르고, 만약 정오(正誤)라고 명칭한다면 사실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보궐 정오’의 네 글자를 합하여 이름을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보궐 정오(補闕正誤)로 이름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광좌가 한림(翰林)의 시정기(時政記)를 세초(洗草)119)  하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세도가 이러하니, 그대로 둔다면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 " 이광좌가 말하기를,
"실록을 찬수(纂修)할 즈음에 만약 사사로운 뜻을 따라 그 포폄(褒貶)과 시비(是非)를 임의로 조종(操縱)하여 일편(一片)의 문서(文書)를 이룬 후에 시정기(時政記)의 초고(草稿)를 따라서 세초해 버린다면, 참으로 옳고 그른 것을 후세(後世)에서 어디로 좇아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윤순은 말하기를,
"세초는 근대(近代)의 규례에서 나왔으니,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간(民間)에 스스로 전래(傳來)하는 공론(公論)이 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왕자(王子)와 공주(公主)·옹주(翁主)에게 다만 직전(職田)이 있었는데, 중간에 비로소 절수(折受)가 생겼고 절수가 폐단이 되므로 면세(免稅)로 개정(改正)하였으며, 면세로는 이어 나가기 어려우므로 또 값을 계산하여 은자(銀子)를 주었습니다. 만약 절수 등의 그릇된 규례를 모두 혁파한다면 이것이 실로 제일 좋은 상책(上策)이 될 것이요, 그 다음가는 계책을 논한다면 비록 이런 그릇된 규례를 모두 혁파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절수 가운데에 폐단이 있는 것을 혁파하고 궁가(宮家)에서 전지(田地)를 매수(買受)하여 백성에게 원망을 듣는 것도 혁파하여야 합니다. 해숭위궁(海嵩尉宮)에서 전지를 매수한 일로써 보건대, 한번 그릇 판결된 송사(訟事)를 빙자하여 신궁(新宮)으로 하여금 매수하게 하여 수천 명의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으니, 궁가에서 돈을 가지고 어느곳에서 전지를 매입(買入)할 수 없어서 국가에 원망이 돌아가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말하기를, ‘내 아들이 어찌 감히 선제(先帝)의 아들과 대등(對等)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지금 국가의 경용(經用)이 탕갈되어 매사에 절약하여야 하니, 신옹주궁(新翁主宮)에는 으레 은자 4천 냥과 쌀·콩 각각 5백 석을 주었으나 나는 그 절반(折半)을 주고자 하며, 모든 사여물(賜與物)에 있어서도 옛날 10동(同)이면 이제 1동을 주려고 한다. 위에 있는 자가 절약하여 검소하면, 교화(敎化)가 아래에 시행되는 것이니, 진어(進御)하는 의복도 비록 무명[木綿]을 쓴들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나의 뜻이 본래 이와 같은데, 일전에 호판(戶判)은 말하기를, ‘국가에서 백성의 경작(耕作)하는 전토(田土)를 매입하였다.’ 하며, 스스로 ‘시골뜨기가 아니다.’ 하였으니, 파대(罷對)한 후에 마음이 매우 불평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또 생각해 보았더니, 영상(領相)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한때에 듣기 싫어하여 만약 진달한 일을 그르다고 한다면 후세에서 나를 어떠한 임금이라고 하겠는가? 지금은 노여움이 풀려 개의(介意)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전일 권이진(權以鎭)이 진달한 바는 절실하고 강직한 말이 많았습니다. 신이 조정에 들어온 지 30여 년에 권이진과 같이 나라 일을 위하여 한 몸의 이해(利害)를 돌아보지 않은 자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전(內殿)에 돌아오신 후에 약간 불평하신 뜻이 있었으나, 곧 깨닫고 개의(介意)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이제 하교를 받고 비로소 알았습니다. 옛날 한문제(漢文帝)는 풍당(馮唐)의 곧은 말을 듣고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갔으며, 당태종(唐太宗)은 ‘이 전사옹(田舍翁)을 죽이겠다’는 말이 있었으니,120)   한(漢)·당(唐)의 어진 임금도 오히려 곧은 말을 듣기 싫어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곧 노여움을 푸셨고, 간(諫)하는 자의 말을 들으시고는 의리로써 사심(私心)을 이겼으니, 신은 감탄(感歎)하여 지극한 흔행(欣幸)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해숭위방(海嵩尉房)에서 궁가(宮家)와 더불어 땅을 매매(賣買)하여 백성의 원망을 부르게 되었으니, 매수하지 말도록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숭위방에서 세전(世傳)해 오던 전지를 제외하고 백성과 더불어 소송(訴訟)하는 땅은 백성에게 출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8일 기유

선정전(宣政殿)에서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2월 29일 경술

조덕린(趙德隣)을 부응교(副應敎)로, 홍중징(洪重徵)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공조 좌랑(工曹佐郞) 윤동원(尹東源)이 시강(侍講)하였는데, 임금이 경전(經傳)의 뜻을 고문(顧問)하고 위유(慰諭)하여 머물러 있도록 권면(勸勉)했으니, 대개 윤동원이 경학(經學)으로 이름이 드러났으므로 예우(禮遇)함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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