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7권, 영조 4년 1728년 4월

싸라리리 2025. 8. 2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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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신사

전(前) 병사(兵使) 이언상(李彦祥)을 무주 부사(茂朱府使)로 삼았다. 그곳이 적굴(賊窟)에 가깝기 때문이다.

 

경상 병사(慶尙兵使) 이여적(李汝迪)이 사폐(辭陛)224)  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의 여러 도적을 속히 평정하라고 유시(諭示)하였다. 이 여적이 전라 병사(全羅兵使)를 남원(南原)으로 와서 진치게 하여 양로(兩路)를 공제(控制)225)  하게 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감호제군사(監護諸軍使) 윤순(尹淳)에게 유시하여 옥천(沃川)에서부터 호남(湖南)으로 전진하여 영남(嶺南)의 도적을 치게 하였으니, 그 장청(狀請)에 따른 것이다.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에게 유시하기를,
"이제 장계(狀啓)를 보건대, 또 영남으로 향한다 하는데, 안죽(安竹)에서 보첩(報捷)하고서 즉시 반사(班師)226)  하지 않고 이제 또 남쪽으로 내려갔으니, 내가 매우 염려스럽게 여긴다. 경(卿)은 비록 남쪽으로 향하지마는, 안죽의 승첩(勝捷) 때의 사졸(士卒)의 군공(軍功)을 먼저 문부(文簿)로 작성하여 올려 보내라."
하였다.

 

역적 이웅보(李熊輔)와 정희량(鄭希亮) 등이 함양(咸陽)에서 거창(居昌)으로 돌아와 군사를 나누어 둘로 만들었다. 이웅보는 우지령(牛旨嶺) 밑에 둔쳐서 장차 지례(知禮)로 향하려 하고, 정희량은 생초역(省草驛)에 둔쳐서 장차 무주(茂朱)로 향하려 하는데, 선산 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이 금오진(金烏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지령의 험한 곳을 먼저 점거하고, 무주의 고갯길에도 또한 전라도의 군사가 점거하여 지킴이 있으니, 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때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시번(李時蕃)이 진주(晉州)에 있어, 성문을 닫고 군사를 가지고서도 끝내 적을 치지 않았다. 곤양 군수(昆陽郡守) 우하형(禹夏亨)이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에 이르니 문지기가 거절하므로, 우하형이 검(劍)으로 위협하여 드디어 들어가서 이시번을 책망하기를,
"역적의 난(亂)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자(臣子)의 분의(分義)로서는 마땅히 피를 흘려 얼굴을 씻으면서 토벌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공은 대장(大將)이 되어서 강병(强兵)을 가지고도 나아가지 않으니, 장차 무엇으로써 천주(天誅)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시번은 성품이 나약하여 끝내 감히 나가지 못하고 영장(營將) 이석복(李碩復)을 시켜 우하형 등을 거느리고 먼저 가게 하였다. 이석복이 산음(山陰)에 이르러 다시 머무르고자 하므로, 우하영이 강개(慷慨)하여 검을 치면서 말하기를,
"적을 치는 일이 날로 급한데, 어찌 노약자를 버리고 정장(精壯)을 가려 뽑아서 빨리 달려가 핍박하여 싸우지 않겠는가?"
하니, 이석복이 더듬거리며 말하기를,
"그대가 능히 이것을 하겠는가?"
하였다. 우하형이 말하기를,
"내가 능히 할 수 있다."
하고, 드디어 이석복과 군사를 나누어 천총(千摠) 남해 현감(南海縣監) 윤하(尹㵑)와 기복(起復)227)  한 전(前) 현감(縣監) 하필도(河必圖) 등을 거느리고 이틀 걸을 길을 하루에 걸어서 빨리 달려가고, 이석복은 하동 부사(河東府使) 박도상(朴道常)과 함께 잇따라 나아갔으며, 이시번도 또한 뒤따라 나갔으나 삼가현(三嘉縣)에 이르러서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조경(趙儆)이 장계하여 말하기를,
"병영(兵營)의 무인(武人) 조만정(趙萬挺)이 나주(羅州)에 귀양살이하는 사람 이진유(李眞儒)를 가서 보고 스스로 박필몽(朴弼夢)의 간 곳을 따라가겠다고 말하므로, 이진유가 조만정을 붙잡아 영장(營將) 전일상(田日祥)에게 고하여 잡아 가두었습니다."
하니, 명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정국(庭鞫)에서 다시 한순(韓洵)·윤천경(尹天擎)·심유현(沈維賢)·허간(許侃)을 추문(推問)하여 형벌을 한 차례 하니, 모두 공초(供招)가 전과 같았다. 다시 안익태(安益泰)를 추문하여 형벌을 한 차례 하니, 안익태가 공초하기를,
"신이 안박(安鑮)이 있는 곳에서 그 말을 듣고 정관빈(鄭觀賓)에게 말하였더니, 정광빈이 말하기를, ‘자세히 탐문(探問)하여 함께 고변(告變)하자.’고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안박이 있는 곳에 가서 탐문하니, 안박이 말하기를, ‘장차 장용(張鏞)·장전(張錪)·장성징(張聖澄)·허간·평병 군관(平兵軍官) 안추(安樞)와 함께 반역(叛逆)을 꾀한다.’고 하였습니다. 손님이 온다는 것으로써 핑계로 삼아 집으로 돌아와 잠들려고 하는데, 안박이 또 와서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이를 알았으니 어찌 다시 오지 않는가?’고 하기에, 신은 다음날 마땅히 다시 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정관빈의 집에 가서 이를 말하니, 정관빈이 말하기를, ‘그대는 그 문자(文字)를 받아 가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안박의 집에 갔더니, 안박이 말하기를, ‘이 계획을 한 지가 이미 다섯 해인데, 그대는 함께 가지 않을 수 없으니, 13일에 마땅히 양성(陽城)의 권서봉(權瑞鳳)의 집이나 혹은 가천(加川)의 최진사(崔進士) 집에 모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정관빈의 집에 이르러 이를 말하니, 정관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안헌장(安獻章)도 또한 와서 말하였는데, 그대의 말과 같았으니, 나와 함께 여주(驪州)의 홍정승(洪政丞) 집으로 가서 이를 고하자.’고 하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여주는 길이 멀으니, 수원부(水原府)에 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정관빈이 말하기를, ‘13일에 마땅히 함께 가야 한다.’고 하기에, 신이 집에 돌아가 가속(家屬)을 처치(處置)한 뒤에 나아갔더니, 정관빈이 먼저 가버렸으므로, 신은 미처 동행(同行)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상(情狀)을 앎이 실지대로입니다."
하였다.

 

태인 천총(泰仁千摠) 김흡(金洽)을 원도(遠道)에 정배(定配)하였다. 처음에 박필현(朴弼顯)이 김흡을 천총(千摠)에, 유방언(劉邦彦)을 별군관(別軍官)에 임명하고 3월 20일에 읍(邑)의 장터 가장자리에 결진(結陣)하였다가 이튿날 다시 남루(南樓) 밑으로 진을 옮기면서 핑계대기를, ‘국가에 환란(患亂)이 있으니 마땅히 근왕(勤王)해야 할 것이다.’고 했는데,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오기에 미쳐, 경주인(京主人)228)  이 또 신관(新官)229)  이 방금 온다는 것을 알리니, 박필현이 김흡 등을 불러 말하기를,
"신관은 조정(朝廷)에서 보낸 관원(官員)이 아니다. 청주(淸州) 근처의 수령(守令)을 적도(賊徒)가 많이 살해(殺害)했으니, 이것도 또한 청주의 일처럼 도적이 반드시 나를 죽이고 이 군대를 빼앗으려고 금부 도사를 가칭(假稱)하고 온 것이다. 오늘 급히 행군(行軍)하여 전주(全州)로 가면 전주에서 반드시 괴이하게 여겨 물을 것이니, 너희들이 수기(手旗)를 흔들며 답하기를, ‘근왕(勤王)하러 올라간다.’고 하면 반드시 의심치 않고 문을 열어 줄 것이다."
고 하였다. 21일에 금구(金溝)에 이르자, 큰길을 버리고 우회(迂回)하는 길을 따라서 가며 군관(軍官) 이장욱(李長郁)을 시켜 서간(書簡)을 가지고 전주 진영(全州鎭營)으로 가게 하였다. 전주의 삼천(三川)에 이르자, 이장욱이 서간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박필현이 그 자식과 함께 은밀히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매우 두려워하여 겁내는 뜻이 있더니, 이내 말에서 내려 길 곁에 앉아 그 자식 및 아객(衙客) 이만빈(李萬彬)을 시켜 예리한 검(劍)을 뽑아 휘두르게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청주로 향하고자 하는데, 너희들은 따르기를 원하나?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이검을 쓸 것이다."
하였다. 김흡이 몰래 유방언에게 말하기를,
"박필현은 반드시 다른 뜻이 있으니 어찌하겠느냐?"
하니, 유방언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무엇 때문에 역적을 따르겠는가?"
하고 드디어 모두 도망하여 달아나니, 장교(將校)와 군졸(軍卒)이 일시에 모두 무너졌다. 감사(監司) 이광덕(李匡德)이, ‘김흡이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職任)이 되었으므로 처음부터 반드시 역모(逆謀)를 알았을 것이라.’는 이유로 장계(狀啓)하여 죄주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뒤에 어사(御史) 김시형(金始炯)이 또 말하기를,
"역적 박필현의 군대의 무너짐은 김흡 등이 실로 이를 창도(倡導)한 것이므로, 마땅히 상주어야 하고 죄줄 수 없으니, 청컨대 방송(放送)하소서."
하니, 이광덕(李匡德)이 또 다투었다.

 

비변사(備邊司)에 명하여 방문(榜文)을 만들어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에게 보내어 군인과 백성에게 게시(揭示)케 하였으니, 방문에 이르기를,
"이번의 역적(逆賊) 이웅보(李熊輔)는 곧 머리를 벤 역적 이인좌(李麟佐)의 아우로서 역적 정희량과 함께 안음(安陰)에서 반란(叛亂)을 일으켰는데, 이인좌는 이미 주살(誅殺)되고 여러 도적들도 모두 주륙(誅戮)되어 도적의 소굴이 탕진되었으니, 대군(大軍)이 한 번 출정(出征)한다면 이웅보와 정희량도 또한 마땅히 곧 주멸(誅滅)될 것이다. 백성으로서 그릇 도적을 따른 자가 이때에 미쳐, 정도(正道)로 돌아와 와서 항복한다면 재화(災禍)를 돌려 복(福)으로 만들고 또 중상(重賞)을 얻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역적의 괴수 이웅보(李熊輔)와 정희량(鄭希亮)을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바치는 자는 양민(良民)이면 마땅히 녹훈(錄勳)하고 봉군(封君)하여서 은택(恩澤)이 영세(永世)에 미치고 은(銀) 천 냥을 상줄 것이며, 공천(公賤)·사천(私賤)이면 부모·처자를 모두 종량(從良)한 뒤에 작상(爵賞)의 반을 줄 것이며, 그 나머지 적장(賊將)을 벤 자도 또한 벼슬을 주고 상을 줄 것이며, 비록 도적을 베지 못하였더라도 죄를 뉘우쳐 와서 항복하는 자는 마땅히 쾌히 그 죄를 용서할 것이다."
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다섯 길로 진병(進兵)하기를 아뢰어 말하기를,
"합천(陜川)·삼가(三嘉)에서 군병(軍兵)을 모아 고을을 파수(把守)하다가 한번 적보(賊報)를 듣고는 처음부터 교봉(交鋒)230)  하지 못하고 수재(守宰)는 벌벌기며 멀리 달아났으니, 이로써 인심(人心)의 파탕(波盪)한 것이 일마다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신의 병영(兵營)은 안음(安陰)·거창(居昌)과 이틀길이고, 진주 병영(晉州兵營)과 사흘길이니, 안음에서 기찰(譏察)·탐지하여 병영에 알려 왔을 경우, 가령 성화(聖火)처럼 거행한다 하더라도 자칫하면 사나흘은 허비하게 되며, 변고(變故)가 진주 영장(晉州營將)의 관할 안에서 일어났다면 상거(相距)가 또한 이틀길에 불과합니다. 용병(用兵)의 법은 일이 급하다면 비록 백부(百夫)231)  의 우두머리일지라도 미처 승품(承稟)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호령(號令)을 세우게 됩니다. 이제 이 흉적(凶賊)은 졸도(卒徒)의 다과(多寡)를 논할 것 없이 실로 하늘에 통하는 대역(大逆)이니, 오늘의 신자(臣子)된 자는 마땅히 피를 흘리고 울음을 삼켜 성토(聲討)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변고가 문장(門墻) 안에서 일어나 그 형세가 또 급한데도, 병사와 영장은 줄곧 관망만 하고 앉아서 역적의 세력을 치성(熾盛)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이 도적들이 변변찮은 좀도둑으로서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토포(討捕)하는 장교(將校)를 시켜 묶어 오게 할 것이고, 만약 여러 성(城)을 연결하고 큰 고을을 점거해 다른 도적에 비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즉시 토벌하여 그 세력이 퍼지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인데도, 이 두 가지에 있어 조금도 유념하지 않고 조정(朝廷)의 명령이 없다고 말하면서 군대를 움직일 뜻이 없습니다. 신이 여러 번 재촉하여 사자(使者)가 길 위에서 서로 잇닿은 뒤에야 비로소 느릿느릿 군대를 일으키면서도 또한 여러 고을의 뒤에 있습니다.
신이 스스로 생각건대, 적세(賊勢)가 회오리바람이나 세찬 비와도 같음이 있어 날로 점점 커지며, 흉서(凶書) 속에 시일(時日)을 기약하여 북상(北上)한다는 말이 있으므로, 마음을 썩이며 통완(痛惋)해 함이 극도에 이른 나머지 결코 수신(帥臣)의 처치(處置)를 기다릴 수 없어서 변고가 생긴 뒤 즉시 각 고을에 전령(傳令)하여 협력해 초토(勦討)케 하였습니다.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을 우방장(右防將)으로 삼고, 초계 군수(草溪郡守) 정양빈(鄭暘賓)·고령 현감(高靈縣監) 유언철(柳彦哲)은 그 군사를 거느리고 어제 합천의 도적의 소혈(巢穴)에서 5리(里) 남짓되는 금양역(金陽驛)에 진박(進薄)232)  하고, 대구 영장(大丘營將) 하옥(河沃)은 파직(罷職) 중에 풍병(風病)이 또 중(重)하여 말을 통하지 못하므로, 신의 병영 군관(軍官) 김진옥(金振玉)을 독전장(督戰將)으로 명칭하여 가영장(假營將)을 겸차(兼差)하여서 정병(精兵) 3초(哨)를 가려 주고 또 고령·현풍(玄風)의 군사를 덧붙이어 협력하여 가서 토벌하게 하고, 금산(金山)·개령(開寧)·지례(知禮) 세 고을의 군병은 우두치(牛頭峙)의 요해처(要害處)를 방수(防守)하여 북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게 하고, 원병(援兵) 중의 선산 부사(善山府使)는 1기(起)가 되고 상주 영장(尙州營將)은 2기가 되고 안동 영장(安東營將)은 3기가 되어 뒤를 잇게 하고, 진주 영장(晉州營將)은 지난달 27일에 단성로(丹城路)로 진병(進兵)하고, 우병사(右兵使)는 지난달 그믐날 삼가로(三嘉路)로 나아가서 무릇 다섯 길로 진병(進兵)하였으며, 함양 군수(咸陽郡守)는 전라도의 운봉 현감(雲峰縣監)과 함께 팔량치(八良峙)를 협력하여 지키니, 도적의 무리가 이미 제로(諸路)의 군병이 나란히 나아감을 듣고 매우 곤궁하여 움츠려드는 세(勢)가 있습니다. 그 사이의 초토(勦討)의 일의 정상(情狀)을 탐지(探知)하여 계문(啓聞)합니다."
하였다.

 

4월 2일 임오

명하여 충청도 전(前) 감사(監司) 권첨(權詹)을 그 도(道)에서 충군(充軍)케 하고, 어사(御史) 이도겸(李道謙)의 벼슬을 삭탈(削奪)하여 도순무영(都巡撫營)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케 하였으니, 권첨은 적변(賊變)을 당하여 능히 토벌하지 못하고, 이도겸도 또한 명을 받들어 본도(本道)에 있으면서 능히 군사와 백성을 규합(糾合)하여 도적을 치지 못하고 몸을 빼어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정언(正言) 권혁(權爀)이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권첨의 죄상은 군율(軍律)에 관계됩니다. 더욱이 집이 공주(公州)에 있는데도 또 편오(編伍)로 명칭하면서 본도(本道)로 보낸다면 스스로 편안하고자 하는 계책을 맞추어주는 결과가 될 것이니 장차 무엇으로써 한 도의 백성에게 사죄(謝罪)하겠습니까? 마땅히 군율을 시행하여서 신하된 사람의 절조(節操)를 면려(勉勵)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극변(極邊)에 충군(充軍)하라고 고쳐 명하였다. 처음에 권첨(權詹)이 막 방백(方伯)이 갈리어 미처 교귀(交龜)233)  하기 전에 청주(淸州)에서 도적이 일어났는데, 연기 현감(燕岐縣監) 임상태(林象台)가 흉격(凶檄)234)  을 보고 영문(營門)으로 달려가 고하자, 권첨이 새 방백(方伯)을 기다리게 하고 조치(措置)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각 고을이 즉시 군사를 내어 도적을 치지 못하게 되어 적세(賊勢)가 더욱 치성(熾盛)하였던 것이니, 경외(京外)의 인심(人心)이 모두 놀라고 분개하였다. 뒤에 대계(臺啓)로 인해 잡아다가 국문(鞫問)하고 또 사형(死刑)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충군(充軍)하였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 등이 거창(居昌)의 도적을 격파하고 적괴(賊魁) 정희량(鄭希亮)·이웅보(李熊輔)를 잡아 목베었다. 적도(賊徒)가 거창 지경의 우지치(牛旨峙)에 둔쳐 웅거하였는데, 선산 부사        박필건이 우지치의 험지(險地)에 먼저 웅거하였다. 이보혁(李普赫)과 정양빈(鄭暘賓)은 이미 합천의 도적을 격파하고 거창(居昌)으로 진병(進兵)했으며, 이석복(李碩復)과 우하형(禹夏亨)도 또한 진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올라가니, 도적이 곤궁하여 움츠려져서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박필건이 이를 정탐하여 알고 아전 김진평(金鎭平)을 시켜 적진(賊陣)에 들어가 장교·군졸과 더불어 기(旗)를 휘둘러 신호(信號)를 삼을 것을 약속케 하고, 박필건이 선봉(先鋒)이 되어 고개를 넘어 적진을 바라보고 기를 휘두르면서 크게 고함치니, 적병이 일시에 모두 무너졌다. 이웅보는 몸을 빼어 말을 버리고 달아나 정희량의 군진(軍陣)으로 들어갔다. 이때 우하형이 군사를 이끌고 빨리 달려 성초역(省草驛)을 핍박하니, 도적의 진루(陣壘)에서 5리 떨어졌다. 도적의 장교 정빈주(鄭彬周)와 금위군(禁衛軍) 여해달(呂海達)·염마당(廉馬堂) 등이 이웅보·정희량과 도적의 도지휘(都指揮) 나숭곤(羅崇坤) 및 그 무리 이세규(李世奎) 등 21인을 결박하여 장차 군진(軍陣) 앞으로 보내려다가 길에서 우하형의 군사를 만나니, 우하형이 먼저 정희량·나숭곤 두 역적을 베고 이석복이 뒤이어 이르러서 이웅보 등 여러 역적을 모두 베었다. 정희량은 여력(膂力)이 있었으므로, 결박한 때에 조총(鳥銃)을 그 등에 댄 뒤에야 비로소 묶었으며, 이웅보는 흰노새를 탔는데, 그 크기가 손을 위로 올려야만 등을 만질 정도였다. 경상 감사        황선이 적괴(賊魁)의 수급(首級)을 함(函)에 담아 조정에 올려보내고 치계(馳啓)하여 말하기를,
"박필건은 험요(險要)에 웅거하여 도적을 방어하여 도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무너져서 사로잡히게 하였으니, 수공(首功)이 되고, 우하형은 군사로 도적의 진루(陣壘)에 핍박하였으니, 마땅히 박필건의 다음을 차지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웅보를 산 채로 잡았으면 마땅히 서울로 잡아 보내야 하는데도 갑자기 베어 죽였으니, 극히 부당합니다. 이석복은 변고가 생긴 처음에 편안하게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므로, 신이 여러 번 발병(發兵)을 재촉하여도 줄곧 관망만 하다가 산음(山陰)에 와 둔치고 있었는데, 적병(賊兵)이 양초(糧草)를 끊으려고 하므로 형세가 전진(前進)하기 어렵게 됨으로써 장황하게 치보(馳報)하였으며, 이보혁(李普爀) 등이 이미 합천을 평정하고 거창에 진병(進兵)하게 되자, 이석복은 적병이 달아나 지례(知禮)로 향함을 엿보고서야 비로소 뒤를 밟아 이미 사로잡은 도적을 베어 죽이고서 자랑하여 보여서 공(功)을 요구할 계책을 하였습니다. 우병사(右兵使)        이시번(李時蕃)은 처음에 군사를 모아 성문(城門)을 닫고서 나오지 않고 있다가 일이 급하여진 뒤에도 오히려 군사를 발동하는 한 가지 일로 멀리 묘당(廟堂)의 처분을 청하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삼가(三嘉)에 머물러서 다시 한걸음의 땅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다가 이어 싸움이 끝나서 돌아왔습니다. 청컨대 중률(重律)로써 다스리시어 인심(人心)을 정숙(整肅)하게 하소서. 상주 영장(尙州營將)        한날(韓㻋)은 느릿느릿 행군하여 가는 곳마다 지체하고 머물러서 군중(軍中)의 의기(義氣)를 분발(奮發)하는 인사(人士)가 분개하여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그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대개 우하형은 처음에 적의 부로(俘虜)235)                  를 만나자, 정희량 등이 부도(不道)의 말을 많이 꺼냈으므로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칼을 가지고 손수 목을 베려고 하였는데, 이술원(李述源)의 아들이 원수를 갚으려고 종군(從軍)한 이유로써 스스로 목을 베고 간(肝)을 쪼개어 마시기를 청하였으므로 우하형이 이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정국(庭鞫)에서 이정(李檉)과 조상(趙鏛)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불복(不服)하였다. 처음에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조상을 잡으려 여주(驪州)의 조상의 집으로 갔는데, 조상이 이미 도망갔으므로, 조상의 형을 잡아 가지고 오다가 중로(中路)에서 또 잃어버리게 되었다. 금부 도사가 다시 여주로 가서 조상의 뒤를 밟아 찾았으나 능히 찾아내지 못하고 조상의 아이종을 찾아내어 결박하고 물으니, 종이 ‘조상이 깊은 산골짜기 속으로 들어갔으나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므로, 그종을 잡아 가지고 함께 가서 두루 산골짝 속을 뒤졌는데, 갑자기 말 한 필이 골짜기 속에서 나왔으므로, 종이 ‘이것이 조상의 타는 말이다.’고 하였다. 금부 도사가 그 말을 채찍질하여서 앞으로 가게 하여 그 말이 가는 곳을 따라가서 조상을 암혈(巖穴) 속에서 찾아내었는데, 조상이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잡아왔다.

 

상주 영장(尙州營將) 박민웅(朴敏雄)이 은명(恩命)에 응하지 않으니, 글을 내려 포장(褒奬)하여 유시(諭示)하기를,
"미친 도적이 흉포(凶暴)를 자행하여 장수와 벼슬아치들을 죽이고 함부로 범궐(犯闕)의 계책을 하게 되니, 적신(賊臣) 박종원(朴宗元)이 맨 먼저 무릎을 꿇었으며, 세록(世祿) 명가(名家)의 후손으로서 자목(字牧)을 맡은 자 박필현(朴弼顯)·임상극(林象極) 같은 무리가 서로 잇따라 이에 향응(響應)하였으니, 하북(河北)에 의사(義士)가 없다는 탄식236)  이 불행히도 이에 가깝다. 그대는 초개(草芥)의 한미(寒微)한 선비로서 내가 내력을 알지 못하는 바이나 의려(義旅)237)  를 창도(倡導)하여 일으켜 적괴(賊魁)를 무찔러 죽이고 한 고을을 수복(收復)하여 정의(正義)의 명성(名聲)이 빛났으므로, 내가 이를 가상히 여겨 발탁하고 진영(鎭營)을 주었는데도, 그대는 지나치게 겸양을 고집하여서 명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대는 진실로 충의(忠義)에 격동(激動)되어 당연히 할일을 하였으므로 나에게 구(求)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국가에서 공(功)을 포상(褒賞)하고 의(義)를 권장하는 은전(恩典)에 있어서는 장차 베푸는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보통 사람의 심정(心情)은 권면(勸勉)을 기다려서 일어나게 되는데, 그대가 비록 작상(爵賞)에는 뜻이 없다 하더라도 홀로 뜻을 굽혀 이에 나아가서 우리 사방의 의사(義士)의 의기(意氣)를 고취(鼓吹)하지 않으려는가? 하물며 지금 영남의 도적이 잇따라 치성(熾盛)하므로, 내가 바야흐로 그대를 믿음이 장성(長城)과 같으니, 그대는 모름지기 힘써 은명을 받고 군사를 내보내어 적을 토벌하라. 도적이 모두 멸망하기를 기다려 그대의 고결(高潔)한 뜻을 이루는 것도 또한 늦지 않다."
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정제(李廷濟)가 장계하여 말하기를,
"성상께서 민폐(民弊)를 진념(軫念)하사 진도(津渡)의 행려(行旅)를 모두 폐단 없이 통행케 하셨으니, 삼강(三江)의 상선(商船)·곡선(穀船)·어선(漁船)의 생리(生理)에 관계되는 것은 허락하여 왕래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수(把守)를 이미 정철(停徹)케 하였으며, 강 위에는 늙은 장교(將校) 중에서 전함(前銜)이 혹은 금려(禁旅)238)  를 지내고 혹은 첨사(僉使)·만호(萬戶)를 지내서 나라에 충성을 다한 자가 많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송파(松坡) 밑에서부터 공암(孔巖) 위에 이르기까지는 병조(兵曹) 혹은 각 군문(軍門)에서 따로 수삼 십 인을 가려뽑아 배를 전관(專管)하여 일일이 선척을 기탐(譏探)하여 북쪽 물가에 옮겨 두어서 사사로이 건너는 일이 없게 하였다가 사변이 평정된 뒤에 정파(停罷)하는 것이 적당한 듯합니다. 지금의 이른바 주막(酒幕)은 곧 옛날의 관정(關亭)으로서, 적도(賊徒)가 밤에는 주막에서 자고 낮에는 장터에서 모이니, 착실하게 형찰(詗察)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서로(西路)의 검암점(黔巖店)과 동로(東路)의 누원점(樓院店)은 모두 별장(別將)이 있으니, 이제 마땅히 기포(譏捕)가 보통이 아닐 것이오며, 과천(果川)에서 소사(素沙)에 이르는 길, 판교(板橋)에서 죽산(竹山)에 이르는 길, 경안(慶安)에서 충주(忠州)에 이르는 길, 평구(平丘)에서 수원(水原)에 이르는 길은 신의 병영(兵營)에서 합당한 사람 각 한 사람씩을 가려 보내어 별장(別將)으로 이름하여 환모(還耗)로 요(料)239)  를 주고 각로(各路)의 여러 점(店)을 관할케 하여, 수상하게 오가는 자를 수탐(搜探) 금지케 하여 혹은 본관(本官)에 고하도록 하고 혹은 영문에 고하도록 하면, 마땅함을 얻게 될 듯합니다. 각 영문, 각 고을의 파수 중에 혹 연줄을 타고 작폐(作弊)하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하니, 모두 조사해 내어 군율(軍律)로 논죄하겠으며, 각 군문 각 진도(津渡)·관량(關粱)240)  의 파수(把守)하는 곳에도 약속을 더욱 엄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4월 3일 계미

제도(諸道)에 유시(諭示)를 내려 수령(守令)이 적도(賊徒)를 함부로 죽임을 금하고 순영(巡營)에 조사 보고한 뒤에 처참(處斬)케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각처(各處)의 방수(防守)가 십분(十分) 긴절(緊切)한 곳 외에는 모두 철파(轍罷)하기를 계청(啓請)하니, 허락하였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그끄저께 장전(帳殿)에 입시(入侍)한 장사(將士)에게 나의 뜻을 대략 유시(諭示)하였다. 아!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을까마는, 어찌 이번의 흉역(凶逆)과 같은 적이 있었겠는가? 세가 대족(世家大族)과 명공 거경(名公巨卿)의 후손(後孫)이 그 속에 들었으니, 또한 하나의 진신(搢紳) 사이의 변괴(變怪)다. 왕장(王章)241)  이 지극히 엄하니, 그 응당 연좌(連坐)되는 형률(刑律)에는 마땅히 법을 시행하겠지만, 친척(親戚), 고구(故舊)로서 안팎에 벌려 있는 자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수가 많을 줄로 생각된다. 비록 친척이라 하더라도 옛날에 왕돈(王敦)의 왕도(王導)에게 관계된 것이 있었으니,242)   지금 나는 결코 이것으로 죄를 삼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친족도 아니고 인척(姻戚)도 아니면서 안면(顔面)을 서로 알고 벗으로서 서로 친한 자이랴? 이런 따위는 깨끗이 씻어 버려서 의심하지 않겠다. 만약 그 친척되는 자, 고구(故舊)되는 자가 이 일로 인해 마음이 불안하다면 실로 나의 본뜻이 아니다. 아! 이 몸이 비록 사문 목목(四門穆穆)243)  의 덕은 없으나, 한(漢)·당(唐)의 중주(中主)244)  가 한때의 성심(誠心)으로 사람을 심복(心腹)에 두었던 것을 내가 평소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아! 그대들 중외(中外)의 신서(臣庶)들은 나의 이 교시(敎示)를 알아서 모름지기 안심하라. 아! 당당(堂堂)한 천승(千乘)의 임금으로서 어찌 친절하게 면유(面諭)한 뒤에도 의심하겠는가? 이와 같이 한 뒤에도 왕언(王言)을 믿지 않고 만약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품는다면 이는 그대들이 스스로 나와 관계를 끊는 것이니, 나의 말이 지극히 간곡하지 않음은 아니다. 마땅히 폐부(肺腑)에 새겨서 마음을 정하라."
하였다.

 

양호(兩湖)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해안(海岸) 일대와 영애(嶺阨)의 요로(要路)가 되는 것은 모두 파수(把守)를 엄중히 하되, 행장(行裝)과 공문(公文)이 있는 사람은 서로 고찰(考察)하여 넘겨 보내어 침탈(侵奪)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계청(啓請)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에는 이제 경략(經略)245)  한 일이 없으니, 순무사(巡撫使)를 소환(召還)하고 군병을 혁파(革罷)하여 돌려보내되, 정장(精壯) 2초(哨)를 지극히 정밀하게 골라서 전대로 머물러 두어서 뜻밖의 사변에 대비하게 하고, 또한 윤번(輪番)으로 귀농(歸農)케 하며, 무릇 집에 있는 군졸은 모두 20리 밖을 나가지 못하게 하여 징발(徵發)할 때 매우 짧은 시간에 불러 모으는 터전으로 삼으시고, 우선 종사관(從事官) 이수익(李壽益)을 머물러 두어서 방어사(防禦使)와 함께 군무(軍務)를 살피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정제(李廷濟)가 장계하여 말하기를,
"도적 권서린(權瑞麟)을 잡았습니다."
하니, 명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이홍관(李弘觀)을 정국(庭鞫)하였으니, 이홍관은 이순관(李順觀)의 적형(嫡兄)이다. 이홍관이 공초(供招)하기를,
"이달 17일에 이익관(李翼觀)이 울면서 이순관이 흉역(凶逆)의 일을 한 것을 고하면서 장차 집안을 모두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기에, 신이 관가(官家)에 고발하려고 한 지가 여러 번이었으나 검극(劍戟)이 길에 가득차서 두려웠기 때문에 감히 즉시 고발하지 못하였습니다. 신광원(愼光遠)이 복법(伏法)된 뒤에 이순관이 그 어미와 함께 가고자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이익관이 울면서 신에게 고한 것입니다. 정상(情狀)을 앎이 사실입니다."
하니,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듣건대, 열읍(列邑)에서 적도(賊徒)를 추포(追捕)하여 곳곳에서 주살(誅殺)하는데, 양민(良民)도 또한 억울하게 많이 들어 있다고 하니, 실로 측은합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다시 더욱 엄하게 신칙하게 하여, 열읍에 참으로 간적(奸賊)이 있다면 비록 마땅히 규포(糾捕)하여야 하나, 허실(虛實)을 끝까지 하여 순영(巡營) 및 순무사(巡撫使)에게 보고하여 처단하고, 혹시 함부로 죽임이 없어서 죄없이 억울하게 걸리는 폐단을 끊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옥당(玉堂) 이종성(李宗城)이 임금께 아뢰기를,
"동조(東朝)에 진연(進宴)함은 전하께서 애일(愛日)246)  한 정성으로 한 나라의 봉양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3백 년 종사(宗社)를 전안(奠安)247)  함이 대효(大孝)가 되는 것이니, 효도가 어찌 한때의 잔치하여 즐김에 있겠습니까? 먼저 진연을 중지하고 이어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節減)하여 군신(君臣) 상하가 신칙하고 면려(勉勵)하며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좋은 계획을 분발하여서, 억조 창생(億兆蒼生)의 기축(祈祝)의 정성을 저버리지 말게 하소서."
하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는 말하기를,
"변변찮은 좀도적이 처음에는 깊이 염려할 것이 못되었으나, 기내(畿內)에 수만(數萬)의 군병(軍兵)과 영남(嶺南)에 수만 군병이 오래도록 둔쳐 머물러서 기민(饑民)이 먹을 것을 모두 소비하였습니다. 하물며 대군(大軍)이 지나는 곳은 백성이 흩어져서 경작(耕作)의 시기를 놓치고 음려(陰沴)248)  의 기운이 위로 천화(天和)를 범하여 강역(疆域)이 무너져 어지러워서 국가의 명운(命運)이 장차 보전치 못할 처지입니다. 상란(喪亂) 뒤에 만약 잔치의 즐거움을 시작한다면 하늘이 굽어 보고 반드시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사(宗社)를 안정시키는 것이 제왕(帝王)의 대효가 되고 한때의 잔치의 즐거움은 효도의 소절(小節)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성의 말은 충고(忠告)에서 나왔으나 상수(上壽)249)  의 한 예절은 3년250)  을 지낸 뒤에는 예법상 마땅히 곧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동조(東朝)께서 하고자 하지 않으시어, 사변(事變) 뒤에 자교(慈敎)가 근간(懃懇)하였으나, 나는 차마 뒤로 물리어 행할 수가 없다. 여러 신하들이 진달한 바를 동조께서 만약 아신다면, 반드시 불안하실 듯하다. 그러나 내가 사문 목목(四門穆穆)의 덕이 없으므로, 난적(亂賊)으로 하여금 스스로 왕장(王章)251)  에 나아가게 하였으니, 그 원인을 구명(究明)해 본다면 곧 내가 덕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만약 이 일 때문에 또 상수(上壽)하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에 부끄러울 것이니, 더욱 다시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도적의 수급(首級)을 그릇 보고한 사람에게 효시(梟示)의 명을 내려 여러 승지(承旨)들이 청대(請對)하여 환수(還收)하게 한 것은 일이 진실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듣건대, 그때 하교(下敎)가 지극히 엄하여 승지로 효수(梟首)하라는 하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근밀(近密)의 신하가 군상(君上)의 잘못된 거조(擧措)를 눈으로 보고 성명(成命)을 작환(繳還)함에 있어 혹시 말이 조금 지나침이 있더라도 스스로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여야 할 것인데, 성교(聖敎)가 박절(迫切)하여 사령(辭令)을 해침이 있음은 정말로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성대한 뜻이 아닙니다. 옛날에 장사숙(張思叔)252)  은 노복(奴僕)을 꾸짖어 책망하면서도 오히려 마음을 움직이고 성품을 참고 견디어 더욱 면려(勉勵)하는 방도로 삼았으니, 원컨대, 깊이 성상께서 유의(留意)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를 효수하는 일에 대해서는 본디 이런 하교가 없었다. 그때 유명응(兪命凝)을 형벌하여 죽이라는 말이 매우 타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령(辭令)이 혹 지나쳤던 것이다. 그러나 면려하여 경계함이 마땅함을 얻었으니, 어찌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신치근(申致謹)이다.】 에서 아뢰기를,
"이인엽(李人燁)은 왕실(王室)의 친족으로서, 역당(逆黨)에 몸을 던져 뜻이 서로 맞아서 극도로 흉악한 정절(情節)이 남김이 없이 모두 드러났으니, 속히 노륙(孥戮)의 형벌의 베푸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4일 갑신

명하여 동조(東朝)의 진연례(進宴禮)를 올 가을에 물리어 정하게 하였다.

 

임금이 은자(銀子) 1천 냥을 내려 기전(畿甸)과 호서(湖西)에 나누어 보내서 민간에서 종량(種糧)253)  이 절핍(絶乏)한 자를 도와주었다.

 

강진(江津)의 파수 군병을 모두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이종성(李宗城)과 교리(校理) 오광운(吳光運)을 나누어 보내어 위유(慰諭)하여 보내게 하고, 군문(軍門)에서 믿을 만한 장교(將校)를 가려 정해 1대(隊)의 군사를 거느려 윤번(輪番)으로 가서 한강(漢江)과 동작(銅雀) 두 나루를 지키게 하였다.

 

영남 참무관(嶺南參撫官) 김동준(金東俊) 등에서 유시(諭示)하여 안무사(安撫使) 박사수(朴師洙)의 절제(節制)를 받게 하고, 방문(榜文)을 걸어 효유(曉諭)하여 1방(方)을 위안하게 하였다. 김동준은 영남 사람인데, 바야흐로 칠곡(漆谷)에서 상제(喪制)를 지키고 있으면서 소모사(召募使) 황익재(黃翼再)에게 글을 보내어 도적을 깨뜨리는 방략(方略)을 논하였으므로, 황익재가 그 글을 박사수에게 보내고, 박사수는 또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에게 전송(轉送)하여, 송인명이 조정에 아뢰어서 드디어 기복(起復)시켜 참무관으로 삼았다.

 

임금이 삼군문(三軍門)254)  의 군병이 한데서 거처하며 호위(扈衛)하므로 병들고 상한자가 많다 하여 의사(醫司)에 명하여 약물(藥物)을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감호사(監護使) 윤순(尹淳)이 장계(狀啓)하여, 계원장(繼援將) 박동추(朴東樞)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호남(湖南)으로 전진하여 감사(監司) 이광덕(李匡德)과 서로 의논하여 진병(進兵)하여서 영남(嶺南)의 도적을 초토(勦討)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이하원(李夏源), 집의(執義) 임광필(林光弼), 장령(掌令) 홍중징(洪重徵)·이춘제(李春躋), 지평(持平) 유운(柳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인엽(李人燁)에게 노적(孥籍)의 형률(刑律)을 시행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난적(亂賊)의 무리가 장차 징계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속히 노적의 형벌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심유현(沈維賢)이 물고(物故)하니, 역률(逆律)을 행하되 노적(孥籍)은 말도록 명하였으니, 부부인(府夫人)이 있기 때문이었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형좌(李衡佐)가 장계하여 말하기를,
"망명(亡命)한 도적 양명하(粱命夏)가 칼을 뽑아 스스로 목찔러서 춘천(春川) 땅에서 죽었습니다. 양명하의 종 문생(文生) 등이 공초(供招)하기를, ‘양명하가 정월(正月) 초승에 안주 병영(安州兵營)으로 가서 닷새를 묵고 경성(京城)을 향하여 돌아오다가 길에서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만나자 행장(行裝)을 버리고 달아나 춘천의 사탄면(史呑面)에 숨어 말하기를, 「내가 남의 말을 듣고 그릇 행동한 일이 있으니, 만약 붙잡혀서 승복(承服)한다면 다만 자손이 해(害)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을 많이 다치게 될 것이니, 차라리 자결(自決)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합니다."
하였다.

 

4월 5일 을유

남한 순무사(南漢巡撫使) 김동필(金東弼)이 조정으로 돌아오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하였다. 김동필이, 산성에 둔쳐 머무르는 2초(哨)의 군병을 혁파하여 귀농(歸農)시키고, 봉수대(烽燧臺)의 군사가 능히 경보(警報)를 알리지 못한 죄를 조사하여 다스리기를 청하니, 모두 허락하였다.

 

출정 장사(出征將士)의 가속(家屬)을 위로하고 차등 있게 쌀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서명연(徐命淵)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서명연이 능히 감영(監營)으로 곧장 가서 군사를 내어 도적을 치지 못하고 사잇길을 따라 홍주(洪州)에서 군사를 두었기 때문이다. 뒤에 대계(臺啓)로 인해 극변(極邊)에 귀양보냈다.

 

전(前) 양성 현감(陽城縣監) 김태수(金泰壽)를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하고, 전 직산 현감(稷山縣監) 김근사(金近思)를 도배(徒配)하였다. 김태수는 변란이 일어난 때에 관차(官次)255)  에 있지 않았고, 김근사는 도적을 보고도 방어(防禦)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를 논함에 차등이 있었다.

 

전(前) 찰방(察訪) 강백(姜栢)을 정배하였으니, 강백은 변란이 발생한 것을 듣자 놀라 겁을 집어먹고 거짓으로 분상(奔喪)256)   하였으니, 거조(擧措)가 놀라왔기 때문이다. 뒤에 대계(臺啓)로 인해 극변(極邊)에 충군(充軍)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장계하여 말하기를,
"상주 영장(尙州營將)        한날(韓㻋)이 도적의 가짜 병사(兵使)        신천영(申天永)의 아비 신상(申淌)과 김신위(金信渭)를 잡아 효시(梟示)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천영은 본명(本名)이 신복영(申復永)이고 아비는 신은(申垽)이니, 신상은 곧 천영의 삼촌(三寸)으로서 아들의 이름이 천영이라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도적 천영의 아비로 잘못 인정하여서 벤 것이었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박필몽(朴弼夢)을 친히 국문(鞫問)하였으나 박필몽이 승복(承服)하지 않으므로, 신문(訊問)하라고 명하였는데, 박필몽은 더욱 발악하며 공초(供招)를 바치려 들지 않았다. 낙형(烙刑)257)  을 행하라 명하였으나 역시 잠잠히 있으면서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으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의현(李宜顯)이 압슬형(壓膝刑)을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중간에 폐지한 법을 다시 행할 수 없다 하여 허락(許諾)하지 않고, 인하여 다음날을 기다려 정법(正法)케 하였다.

 

나숭대(羅崇大)에게 물으니, 나숭대가 공초하기를,
"신은 이호(李昈)와 전후(前後)에 서로 본 일이 없고, 금년 2월에 이호가 나숭의(羅崇誼)를 찾아 보고 와서 신을 만났습니다. 신의 7촌 나만치(羅晩致)는 괴이한 인물로서 문식(文識)도 없고 무략(武略)도 없으면서 발자취가 닿지 않는 곳이 없어 삼남(三南) 지방의 인물로 서로 알지 못하는 이가 없습니다. 이호가 말하기를, ‘원례(元禮)와 서로 친하다.’고 하였는데, 원례는 곧 나만치의 자(字) 입니다. 밤에 같이 잘 때에 이호가 신의 의중을 넌지시 떠보기를, ‘그대는 호남(湖南)의 세가(世家)로서 이처럼 침체(沈滯)되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나의 조부(祖父) 같은 분도 과거에 오로지 못하였는데, 나 같은 자가 어찌 지나친 바람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호가 말하기를, ‘남아(男兒)가 문관(文官)·무관(武官)이 되는 외에 어찌 다른 방도(方道)가 없겠는가?’ 하기에, 신이 웃으며, ‘준마(駿馬)와 가희(佳姬)가 또한 남아의 일이지마는 궁곤한 선비가 또한 어찌 쉽게 마련하겠는가?’고 하였더니, 이호가 전마(戰馬)를 사려면 값이 얼마인가?’고 하길래 신이 ‘좋으면 백금(百金)이나 들고 적더라도 30냥(兩)을 밑돌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호의 말이 또 나만치의 아우 진사(進士) 나만서(羅晩瑞) 및 나만규(羅晩揆)에게 미쳐서 ‘이 세 사람은 나와 더불어 정의(情誼)가 자별하다.’고 하고, 또 ‘나만서의 아들에 아명(兒名)이 갑손(甲孫)이라는 자는 웅재 장략(雄才將略)이 있다'고 하며 칭찬하여 마지않았으니, 갑손은 곧 청주(淸州)의 적괴(賊魁) 이인좌(李麟佐)의 매부(妹夫)이고, 나만규의 사위는 또 이인좌의 막내아우입니다. 이오의 말이 또 정원형(鄭元亨)에 미쳤는데, 이 사람은 자(字)가 백숙(伯叔)이고 청파(靑坡)에 사는 자로 ‘조만간에 마땅히 그대를 찾게 될 것이다.’고 하기에, 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었더니, ‘색목(色目)은 남소북(南小北)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수작(酬酌)하고서 자리를 파하였던 것입니다. 이호가 처음 이름을 통할 때에 이름을 이만(李晩)이라 하였는데, 간 뒤에 신이 나숭의에게 ‘이만이 너를 찾아왔다가 네가 진잠(鎭岑)에 갔기 때문에, 내 집에서 자고 갔다.’고 하였더니, 나숭의가 그 형상(形狀)을 묻고서 말하기를, ‘이는 이만이 아니라, 곧 ‘날일[日]’자 변에, ‘지게 호(戶), 자를 한 글자를 이름으로 하는 자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비로소 그 성명(姓名)을 변환(變幻)하여 종적(踪迹)이 수상한 것을 의심하였습니다. 그 후에 정생(鄭生)이 찾아왔으나 신이 밖에 나갔다고 핑계대고 만나지 않았으니, 이는 이만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생은 나두동(羅斗冬)의 집에서 자고 돌아갔으니, 신이 과연 이와 더불어 동모(同謨)하였다면 어찌 이만이 부탁한 정생을 만나지 않을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대저 이 화근(禍根)을 양성(養成)한 자는 나만치가 수괴(首魁)가 되는데, 나만치가 비록 신과 7촌의 사이나 일찍이 틈이 있었습니다. 나만치가 이미 청주(淸州)의 역모(逆謀)에 참여하였다면 어찌 괘서(掛書)의 변(變)에 참여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의 가정(家丁)258)  이 10명에도 차지 않으니, 설령 신이 참으로 불측(不測)한 마음이 있었을지라도 어느 곳에서 군사를 얻어 거느리고 가겠습니까?"
하였다.

 

4월 6일 병술

백관(百官)을 차례로 세우고 역괴(逆魁) 박필몽(朴弼夢)을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목베이고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역적 박필몽은 일찍이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더불어 흉역(凶逆)의 마음을 서로 단단히 맺은 것이 이미 극도로 절통(絶痛)한데도 그 머리를 보전하여 다만 천극(荐棘)259)  만 베풀고 끝에 가서는 또 육지로 나오게 하였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재생(再生)이라고 이를 만하건만, 구악(舊惡)을 고치지 못하고 도리어 지극히 흉악한 마음을 일으켜 박필현(朴弼顯) 등 여러 역적과 병란(兵亂)을 일컬어 서울로 향할 계책을 공모(共謀)하였다. 호남(湖南)의 도적을 쳐서 멸해 박필현의 군대가 무너지게 되자 도망쳤으며, 그 자식이 명령을 어기고 달아나 숨은 뒤에도 끝내 국법(國法)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는 몸이 죄적(罪謫)에 있으면서도 수령(守令)을 속여 죽도(竹島)로 달아나 숨었다가 마침내 체포(逮捕)되었고, 친국(親鞫)에 미쳐 직초(直招)하였으니, 그의 지극히 흉악한 정절(情節)은 고금(古今)을 통하여 없는 바이다. 지극히 흉악한 대역(大逆)을 상례(常例)로 처단할 수 없으니, 군기시 앞길에 백관이 차례로 서서 능지(凌遲)하여 죽음에 처하고 엿새 동안 현수(懸首)260)  한 뒤에 수급(首級)을 소금에 담가 도순무영(都巡撫營)으로 보내어 진중(陣中)에 효시(梟示)하여서 남쪽의 도적으로 하여금 간담(肝膽)이 서늘케 하고 지체(肢體)는 8도(八道)에 전하여 보이라."
하였다.

 

수원(水原)에 유둔(留屯)하는 6초(哨)의 군사를 파진(罷陣)해 보내어 귀농(歸農)케 하라고 명하였다.

 

호서 소모사(湖西召募使) 유숭(兪崇)을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고, 여러 의병장(義兵將)이 모집한 군사를 파진(罷陣)하고 보내어 귀농(歸農)케 하라고 명하였다.

 

군문(軍門)에서 회인(懷仁)의 전(前) 현감(縣監) 김도응(金道應)과 황간(黃澗)의 전 현감 이정휘(李挺徽)를 효시(梟示)케 하라고 명하였으니, 도적의 관문(關文)을 도부(到付)261)  하여 신하의 절조(節操)를 잃었기 때문이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출신(出身)으로서 시골에서 변고(變故)를 듣고 올라온 자와 서울에 있으면서 병란(兵亂)을 피하지 않은 자를 마땅히 경조(京兆)262)  로 하여금 기록하여 아뢰게 하고, 전조(銓曹) 및 군문에서 조용(調用)에 격려하고 권면(勸勉)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재로(金在魯)가 장계하여 응교(應敎) 민응수(閔應洙)와 전(前) 사어(司禦) 한원진(韓元震)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의 장계(狀啓)에 말하기를,
"영천(榮川) 사람 전(前) 참의(參議)        나학천(羅學川)·전 장령(掌令)        김정(金)·전 군수(郡守)        장후상(張后相) 등이 풍기(豐基)·순흥(順興) 등 지방의 사인(士人)과 더불어 바야흐로 의병(義兵)을 선창(先倡)하여 일으키고, 호소사(號召使) 조덕린(趙德隣)도 또한 안동(安東)에서 조사(朝士)와 유생(儒生) 1백여 인을 모아 의병을 선창하여 일으켜서 전 정랑(正郞)        유승현(柳升鉉)을 의병장(義兵將)으로 삼고, 정자(正字)        권만(權萬) 등이 이를 도와 이제 바야흐로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모아 앞으로 적진(敵陣) 근처로 가서 관군(官軍)을 돕고자 하며, 소모사(召募使)        황익재(黃翼再)를 바야흐로 상주(尙州) 등 지방으로 보내어 하도(下道)로 향하여서 사민(士民)을 초유(招諭)케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국(庭鞫)하였다. 박태후(朴太厚)를 신문하니, 박태후가 공초(供招)하기를,
"양성(陽城) 사람 이세채(李世彩)가 신이 술을 즐기는 것을 알고서 13일 오후에 그의 집으로 오기를 청하였습니다. 신이 내려갔더니, 이세채가 신에게 술을 접대하면서 ‘양성(陽城)의 최경우(崔擎宇)와 권서린(權瑞麟)이 신두(薪頭)에 진을 치고서 충청 병영(忠淸兵營)을 침범하려 한다.’고 하고 함께 가기를 요구하므로, 신이 그를 따라서 유천(柳川)에 이르르니, 이세채가 신에게 이르기를, ‘바로 본관을 쳐서 군기(軍器)를 빼앗아야 한다.’고 하기에, 신이 듣지 않으니, 이세채가 신을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신은 이 일로써 몸을 피하여 도망하였습니다."
하였다.

 

나숭대(羅崇大)를 두 차례 형벌하니, 숭대가 공초하기를,
"이호(李昈)가 신과 같이 잤던 그날 밤에 신에게 ‘호서(湖西)·호남(湖南)의 친구가 도당(徒黨)을 맺어 반역(反逆)을 도모한다.’고 하기에, 신이 ‘중대한 말을 신자(臣子) 된 자가 어찌 경솔하게 꺼낼 수 있겠는가?’ 하니, 이호가 ‘나만치(羅晩致)와 나만서(羅晩瑞)가 「한 번 거사(擧事)하면 8로(八路)가 향응(響應)할 것이다」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신이 ‘영남에서 일을 주관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물었더니, 이호가 ‘영남 사람은 모두 들어왔으며 그 중에 정동계(鄭桐溪)263)  의 자손인 상인(喪人)이 일을 주관하고 있으며 거사하는 날에는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은 평안도(平安道) 병사를 거느려 올라오고, 남태징(南泰徵)은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서 서울 안에서 일을 주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다만 이호의 말이 이와 같음을 들었을 뿐이니,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겠습니까? 나숭곤(羅崇坤)은 나만서의 아들 나갑손(羅甲孫)의 이름인 듯하오며, 나숭의(羅崇誼)는 바로 이호의 4촌 매부(妹夫)인 나만적(羅晩積)의 아들입니다. 이호가 ‘태인 현감(泰仁縣監) 박필현(朴弼顯)이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와 계획에 맞추어 군사를 일으 것이니, 너도 또한 가정(家丁)을 거느리고 올라오라.’고 하기에, 신이 ‘나는 군사가 없으니 무엇으로 서로 응(應)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정상(情狀)을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윤흥국(尹興國)과 이일(李溢)을 신문하였다. 처음에 호산군(壺山君) 정(檉)이 급변(急變)이 있다고 일컬으면서 청대(請對)하므로, 임금이 장전(帳殿)에서 인견(引見)하니, 이호(李浩)·윤흥국(尹興國) 등이 역모(逆謀)를 한다고 고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처음에 이호를 망명(亡命)한 이호(李昈)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일을 잡아다 문초(問招)하자, 윤흥국은 불복(不服)하고 이일은 공초하기를,
"3월 12일에 안엽(安熀)의 아우 안정(安𤊟)이 신의 집을 지나면서 말하기를, ‘너를 보고 일을 말하려고 했으나 손님이 있어서 말을 할 수가 없으므로 호산군의 집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날 2경(二更)에 호산군은 남여(藍輿)를 타고서 종10여 인을 거느리고, 안정은 말을 타고 와서 찾기에 신이 나가서 만났더니, 호산군이 ‘조용하지 못하니 안방에 앉아 술을 얻어 마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안정이 호산군에게 ‘밤이 깊었으니 마땅히 돌아가야 합니다.’ 하므로, 신이 배행(陪行)하여 한 언덕 모퉁이를 넘겨주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안정이 다시 와서 신을 불러 ‘너는 근래의 소란스런 일을 아느냐?’ 하기에, 신이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더니, 안정이 ‘이것은 곧 우리 나라의 소란스러움이다. 나의 형님이 너를 쓸만하다 하여 일을 시키고자 하지만, 네가 일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만약 누설된다면 큰일이 나기 때문에 내가 우선 너에게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만, 5, 6일 뒤에는 스스로 마땅히 알게 될 것이니, 비록 처자(妻子)일지라도 누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안정이 손을 이끌고 호산군의 집으로 갔는데, 반쯤 가서 사람 없는 곳에 이르자 안정은 신으로 하여금 가서 호산군에게 ‘내가 여기에 있으니, 여서(女壻) 신택주(申宅周)와 함께 오되 남여는 타지 말게 하라.’고 알리게 하였습니다. 신이 가려고 하지 않으니, 안정이 ‘이곳까지 와서 만약 듣지 않는다면 마땅히 큰 일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므로, 신이 어쩔 수 없이 가서 알렸습니다. 호산군이 그 사위 신가(申哥)와 함께 지팡이를 끌고 나와 자리에 함께 하여 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하였는데, 안정이 호산군에게 ‘만약 이와 같다면 영감(令監)께서는 반드시 능히 일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고 하니, 호산군이 대답하기를, ‘내가 만약 남의 뒷전이 된다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하였으며, 조금 있다가 또 나즈막한 말이 몇 번 오고 갔으나 듣지 못하였습니다. 호산군이 ‘만약 보전(保全)된다면 여기도 임금이고 그도 임금이니 어찌 관계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또 안정에게 ‘조용히 서로 만나서 한 번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길 옆이 되어 사람의 보는 눈이 놀라게 될 것이니, 자리를 파(罷)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기에, 신이 먼저 돌아왔습니다.
해가 저물 때에 안정이 신에게 돈을 보내면서 ‘이것으로 술을 사고 너희 집에 닭이나 개가 있으면 이를 잡아 호산군의 집에 모이자.’고 하였으니, 신은 그 기색(氣色)이 수상함을 보고서 두려워 떨림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술과 사고 닭을 잡아 호산군의 집으로 갔더니, 호산군이 아들·사위 및 안정과 같이 앉아 노래를 불렀는데, 안정의 가사(歌辭) 중에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非無信]’라는 한 구절을 여러 번 불렀으나, 기억하지 못하며 닭이 운 뒤에야 모임을 파하였습니다. 15일 밤에 호산군이 집을 닫고 도망갔다가 말을 듣고 신이 가서 보았더니 집은 이미 텅비어 있었으며, 다시 안정의 집에 갔더니 역시 집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는 길에 차례로 정치신(丁致愼)·조철(趙鐵)을 만나보고 돌아왔습니다. 이달 3일에 호산군이 종을 보냈으므로, 가서 만났더니, 술 한 잔을 주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신이 ‘서울 일을 듣고자 한다.’고 하였더니 호산군이 ‘반드시 들을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이 ‘안가(安哥)의 일이 매우 괴이하다.’고 하였더니, 호산군이 ‘어찌 말을 꺼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을 머물게 하여 해가 저물자 ‘술이 있으면 마땅히 마셔야 한다.’ 하고 이어 동임(洞任) 20여 명을 불러 호산군이 호령하여서 신을 잡아 읍내(邑內)에 이르서 착가(着枷)264)  하여서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하였다.

 

호서 안무사(湖西安撫使) 김재로(金在魯)의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역적 한세홍(韓世弘)이 이름을 바꾸어 한종백(韓宗白)이라 일컫고 보행(步行)으로 산을 넘어 충주(忠州) 땅에 도착하였으므로, 진사(進士) 이정(李濎)이 비밀리에 면임(面任)을 불러 결박시키고 관아(官衙)에 바쳤는데, 그 주머니를 뒤지니 은(銀) 1봉(封)이 있었습니다."
하니,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한세홍은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의 영문(營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변고를 듣고 망명한 것이다. 이정은 뒤에 상전(賞典)으로 6품직에 올랐다.

 

4월 7일 정해

밤 4경(四更)에 유성(流星)이 각성(角星) 밑에서 나와 사방(四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자 남짓하였으며, 빛깔은 붉었다.

 

역괴(逆魁) 박필현(朴弼顯) 부자(父子)의 수급(首級)이 상주(尙州)에서 오니, 의금부(義禁府)와 한성부(漢城府)의 당상관(堂上官)이 일제히 한 곳에 모여, 박필현의 서제(庶弟) 박필충(朴弼忠)·박필호(朴弼虎) 및 박필현의 전에 데리고 다니던 하인(下人)인 김두량(金斗良)·김정삼(金鼎三)을 잡아다가 분별하여 안 뒤에 이어 거리 위에서 효시(梟示)하라고 명하였다.

 

제도(諸道)에 유시(諭示)하기를,
"지금 이후로 외방(外方)에서 잡은 의심스런 인물은, 그 중 정절(情節)이 별달리 흉악하고 사나운 자는 서울로 올려보내고, 그 밖에 초사(招辭)가 명백하지 못한 자 및 그릇 속임수에 빠지거나 위협을 받아서 따른 무리는 그 부근에다 혹은 도순무사(都巡撫使), 혹은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여 상세히 핵실(覈實)하여 그대로 가두어서 품계(稟啓)하고 뒤섞여 서울로 올려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
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광덕(李匡德)의 장계에 이르기를,
"금산 군수(錦山郡守) 이덕린(李德隣)이 도적의 군사 이원휘(李元暉)·정돌시(鄭突屎) 등을 잡았는데, 이원휘는 공초하기를, ‘청주(淸州)의 도적이 봉서(封書)를 내어 주면서 무주(茂朱)의 적진(敵陣)에 전하라고 하기에, 무주로 갔더니, 적괴(賊魁)는 부(府)의 동서쪽 50리 되는 태산(泰山) 장곡(長谷) 속에 있고, 모인 적당(賊黨)이 거의 수십 초(哨)에 가까웠으며, 청주의 적장(賊將)의 청병(請兵)으로 인하여 수삼 초(哨)의 군병이 연달아 끊어지지 않게 올라가고 있었으나 뒤에 청주 패군(淸州敗軍)의 보고를 듣고는 무주의 도적도 또한 차츰 도망하여 흩어져서 남은 것이 3, 4초라고 하였습니다. 무주의 도당은 바로 청주의 후진(後陣)이며 모여 있는 곳은 곧 집 없는 빈 산으로서 밤낮으로 노처(露處)하니, 이른바 장수가 군막(軍幕)을 베풀어서 거처한다는 것입니다.’고 하였고, 정돌시는 공초하기를, ‘3월 17일에 청주 읍내(邑內)로 들어갔더니, 읍촌(邑村)이 거의 텅 비어 있고 홀로 한 백성이 들에서 밭을 갈고 있었는데, 적도(賊徒)가 불러들여 술을 주고 상(賞)을 주므로, 이 말을 듣고 그 무리에 들어갔습니다. 19일에 적장이 1봉(封)의 서찰을 내어 주면서, 전라 감영(全羅監營)에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정사효(鄭思孝)가 전라 감사로 되었는데, 도적의 위세에 겁을 내어 서봉(書封)을 가지고 전주(全州)의 북문(北門) 밖에 이르니, 성문을 이미 닫아 문 지키는 자도 대부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서봉을 문 지키는 사람에게 주고 그 곳에서 즉시 무주의 도적 있는 곳으로 도망하였습니다.’고 하므로, 모두 효시(梟示)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친국(親鞫)하였다. 나숭대(羅崇大)를 세 차례 형벌하니, 나숭대가 공초하기를,
"나만치(羅晩致)가 신에게 보낸 서신(書信)에 이르기를, ‘양성(陽城)의 이호(李昈)는 우리 무리 중에서 중망(重望)을 지난 사람이니, 만약 그대의 처소(處所)에 가거든 모든 일을 서로 의논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호에게 ‘서로 의논하라는 것이 곧 무슨 일인가?’ 하니, 이호가 ‘반역(反逆)을 도모하는 일이니, 한 번 군사를 일으키면 8로(八路)가 향응(響應)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그대는 어찌 적족(赤族)265)  될 말을 하는가? 나주(羅州)의 나가(羅哥)가 나만치로 인하여 장차 모두 죽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호는 이내 부안(扶安)의 성옥(成玉)의 집으로 가고, 박필현(朴弼顯)은 태인(泰仁)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를 함락시켜서 이호를 후원하려고 하였으며, 신은 성(城) 안 및 외촌(外村)의 백여 명을 얻어 이호와 함께 적도(賊徒)를 원조(援助)하려고 하여 범궐(犯闕)한 뒤에 마땅히 은상(恩賞)을 논할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나만서(羅晩瑞)가 신을 와서 보았는데, 청주의 도적의 패전한 소식이 마침 이르렀으니, 나만서가 매우 좋지 않은 안색으로, ‘나는 장차 영남(嶺南)으로 방향을 바꾸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가(羅哥) 중에 서문(西門) 안에 사는 자는 적당(賊黨)에 들어가지 않고 동문(東門) 안의 나가는 간혹 적당에 들어간 자가 있었으며, 태인(泰仁)의 송하(宋賀)는 둔갑술(遁甲術)로써 이름이 있었는데 역시 적당에 들어갔으니,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기를 법대로 하였다.

 

정(檉)을 신문했으니, 정은 곧 호산군(壺山君)이다. 정이 공초하기를,
"이호(李澔)의 말은 모두 허구 날조(虛構捏造)이며, 이호는 곧 이일(李溢)입니다. 3월 11일에 동네 사람 조한발(趙漢發)이 찾아와 소란스러움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난(亂)을 피하겠습니까?’ 하기에, 신이 ‘이것은 곧 소란스러움이지 참 난리는 아니다. 나는 나라와 휴척(休戚)을 같이하는 사람이니 어떻게 난리를 피하겠는가?’ 하였습니다. 12일에 안정(安𤊟)이 와서 ‘영감(令監)은 소란스러움에 동요되어 장차 고변(告變)하려 한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기에, 신이 ‘괴이한 말을 어디서 들었는가?’ 하니, 안정이 ‘이호가 말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13일에 안정이 또 나귀를 타고 와서 종일토록 있다가 밤이 되자 과연 노래를 부른 일이 있었으며 안정은 이호의 집에서 잤습니다. 14일에 안정이 또 이날 밤에 이호의 집에 모여 이야기하기를 청하고 이호도 또 와서 청하였기 때문에 신이 수상하게 여겨 사양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15일 새벽에 도망하여 서울로 돌아와서 고변하려고 하였는데, 이호가 ‘고변은 성사(成事)가 되는지 안되는지 간에 바로 멸족(滅族)의 일입니다.’ 하고, 또 4, 5일 동안 만약 출입(出入)하지 않는다면 무사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종시 매우 수상하였습니다. 지금 이호가 신을 고발하는 것은 신이 그를 지적하여 고발했기 때문에 신을 무함(誣陷)하려고 한 것입니다. 신이 서올로 올라온 뒤에 신의 자식이 서신(書信)으로 알리기를, ‘이호가 검(劍)을 차고 정치신(丁致愼)의 집에 가서 공갈하기를, 「내가 안엽(安熀)과 일을 함께 하였는데, 이 말을 낼 것 같으면 내가 마땅히 너를 해치겠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특별히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하택(李夏宅)을 놓아주고, 하교하기를,
"이번의 역적(逆賊)은 천고(千古)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세가 대족(世家大族)이라 하더라도 정절(情節)이 탄로나면 단연코 용서하지 않은 것이니, 세도(世道)를 통탄(痛歎)하기 때문이다. 네가 역적의 공초에 나온 것이 이미 범연한 초사(招辭)이고, 또 상언(上言)한 문자(文字)에서 심사(心事)를 알 수 있으므로 특별히 놓아 보낸다. 너는 모름지기 한평생을 마칠 때까지 마음에 새기고 오늘 쾌히 놓아보내는 은택(恩澤)을 알아서 이 뒤에 만일 교사(敎唆)하고 유혹하는 자가 있다면 잡아서 바침이 옳다."
하였다. 이하택은 이명언(李明彦)의 아들이니, 일찍이 진사(進士) 1등이 되었다.
이일좌(李日佐)의 초사(招辭) 때문에 잡혔는데, 이하택이 공초에서 일컫기를,
"적당(賊黨)에 들어가지 않은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다. 청주에서 사변이 나자, 전(前) 지평(持平) 이일제(李日躋)와 서로 의논하여 글을 만들어 적정(賊情)을 논하여서 사람을 보내어 안성(安城)에 이르렀으니, 수원 부사(水原府使)에게 꼭 전하려 한 것인데, 도적에게 막힌 바 되어 전달되지 못하였으나 그 초고(草藁)가 아직도 있습니다."
하고, 그가 입고 있는 바지에서 꺼냈다. 여러 신하들이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관명(李觀命)만은 홀로 말하기를,
"이 문자가 만약 문서(文書)를 뒤져서 증거를 잡는 데에 들어 있었다면 의심이 없겠지마는, 창졸간에 바지속에 들어 있으니, 이는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하고,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국청의 죄인은 법에 마땅히 몸에 물건을 붙이지 못하게 마련인데, 창졸간에 문서를 바지속에 감추어 넣었다면, 반드시 잡아온 금부 도사(禁府都事)의 능히 엄금(嚴禁)·신밀(愼密)하지 못한 소치이므로 금부 도사에게 죄가 있으니, 마땅히 조사하여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지나치게 의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모두 살피지 않았다.

 

운봉 현감(雲峰縣監) 손명대(孫命大)의 장계에 이르기를,
"함양 군수(咸陽郡守) 박사한(朴師漢)이 역적인 가짜 함양 군수 최존서(崔存緖) 및 허격(許格) 등을 잡아서 엄중히 가두었는데, 최존서는 함양에 살면서 병기(兵器)를 도적의 진중(陣中)에 수송하고, 허격은 창고의 곡식을 꺼내어 적병(賊兵)을 호궤(犒饋)한 자입니다."
하였다.

 

4월 8일 무자

호서(湖西)와 영남(嶺南) 두 도(道)에 유시(諭示)기를,
"이번의 적변(賊變)에 절의(節義)를 세운 자 및 의병을 일으켜 도적을 토벌한 자를 등급을 나누어 계문(啓聞)하라."
하였다.

 

제도(諸道)에 유시(諭示)를 내리기를,
"이번 출정(出征) 때 열읍(列邑)의 양민(良民)으로서 뒤섞여 칼날에 맞아 죽은 자는 본도(本道)에서 각별히 거두어 묻고, 나라를 위하여 적병에게 죽음을 당한 자는 별달리 돌보아 구휼(救恤)하라."
하였다.

 

감호사(監護使) 윤순(尹淳)이 아뢰어 말하기를,
"영남의 역적 정희량(鄭希亮) 등은 사로잡혔으므로, 계원장(繼援將) 박동추(朴東樞)가 거느린 어영군(御營軍)은 호궤한 뒤에 전원(全員)을 해산시켜 보냈습니다."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이제 수응(酬應)이 차츰 줄어드니,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의 직숙(直宿)을 마땅히 1원(員)을 감하고, 승정원 및 병조의 별입직(別入直)도 또한 마땅히 감하여야 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진주 영장(晉州營將) 이석복(李碩復)은 도적 치기를 느리게 하였다는 이유로 일찍이 나문(拿問)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이제 양남(兩南)의 장계를 보건대, 이석복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적을 토벌하여 마침내 토멸(討滅)하였으니, 공이 넉넉히 죄를 보상할 만하므로, 마땅히 분간(分揀)하여야 합니다."
하니, 명하여 잉임(仍任)하게 하였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과 금원군(錦原君) 박사익(朴師益) 등이 상소하기를,
"역적(逆賊)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박사관(朴師寬)은 동종(同宗)에서 나왔지마는, 나라를 배반하여 선조(先祖)를 욕되게 하였으니, 어찌 차마 이 도적과 더불어 그 형제까지 함께 일컫는 이름을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 등의 이름 글자 중에서 ‘필(弼)’자와 ‘사(師)’자를 다른 글자로 고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였는데, 고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추풍령(秋風嶺)을 넘었으나 영남의 도적이 이미 평정됨을 듣고 거창(居昌)·안음(安陰)·함양(咸陽)을 거쳐 팔량치(八良峙)를 따라서 가니, 장차 전라도에서 반사(班師)266)  하려는 것이었다. 종사관(從事官) 박문수(朴文秀)를 남겨두고 난리를 겪은 네 고을을 진무(鎭撫)케 하고 장계(狀啓)로 아뢰었다. 이때 네 고을의 군사와 백성들은 협박을 받아 도적을 따랐으나 도적이 평정되자, 모두 스스로 의구심을 품어 산골짝 사이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전야(田野)와 촌락이 텅 비어 다시 인연(人煙)이 없었다. 박문수가 단기(單騎)로 여러 고을을 두루 다녀서 달아나 피한 자를 불러오고, 조가(朝家)에서 협박을 받아 따른 자는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효유(曉諭)하여 모두 귀농(歸農)케 하여 농사지을 양식을 주어 경작(耕作)을 권면하니, 백성이 비로소 안도하여 인심이 차츰 진정되었다. 어떤 사람이 박문수에게 군사를 거느려 스스로 호위(護衛)하여 다니기를 권하니, 박문수가 듣지 않고 말하기를,
"이는 위태로움과 의심을 진정시켜 편안히 하는 길이 아니다. 비록 뜻밖의 근심이 있을지라도 어찌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는 것을 겁내겠는가?"
하였다.

 

북로 안무사(北路安撫使) 윤헌주(尹憲柱)의 장계에 이르기를,
"영흥(永興) 이북 지방이 매우 소란스러워 민정(民情)이 물결처럼 흔들리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순영 중군(巡營中軍) 박창제(朴昌悌)가 변고(變故)가 발생한 것을 들은 처음에, 갑작스럽게 영하(營下)의 친기위(親騎衛)를 모아 점열(點閱)하여서 여러 날 머물러 두고 나서 비로소 파(罷)하였으므로 함흥(咸興) 한 지경이 모두 솥에 물끊듯 한다.’고 하였습니다. 박창제가 비록 말을 점검(點檢)한 것을 핑계로 삼지마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이러한 망령된 거조(擧措)를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이때 함경 감사(咸鏡鑑司) 권익관(權益寬)이 북쪽을 순시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박창제가 진영(鎭營)에 머물러 순영(巡營)을 비웠으며, 처음 변고를 듣자, 즉시 말을 점검하여 비어 모자라는 것을 채우고, 영고목(營庫木)267)   여러 동(同)268)  을 내어 전대(纏垈)를 만들고 또 4동의 베와 염장(染醬)을 내어 미식(糜食)269)   몇 섬을 만들고 시장(市場)에서 파는 전립(戰笠)·마혜(麻鞋)270)  를 모조리 사들였는데, 윤헌주가 이르렀음을 듣자, 창황하게 말 점검을 파(罷)하고 무명과 미식을 돌리어 창고 속에 넣고 전립과 짚신을 서둘러 도로 흩어주었다. 윤헌주가 의심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뒤에 대각(臺閣)에서 나국(拿鞫)을 청하여서 마침내 장폐(杖斃)271)   하였다.

 

정국(庭鞫)하였다. 다시 민원해(閔元楷)와 김홍수(金弘壽)를 추문(推問)하였는데, 민원해의 공초는 전과 같고, 김홍수는 공초하기를,
"정월 그믐달 정준유(鄭遵儒)가 안음(安陰)의 길을 가면서 총총히 지나가기에, 신이 ‘너는 무슨 볼일이 있어 가느냐?’고 물었더니, 정준유가 ‘선인(先人)이 조부(祖父)를 위하여 부석사(浮石寺) 근처에다 묏자리 하나를 가려 얻어 놓아서 늦은 봄이나 초여름에 산소를 옮기려고 하는데, 큰 절의 중의 기세(氣勢)가 감당해 내기 어려움이 있어서 장차 안음의 고향땅으로 가서 전장(田庄)을 헐값으로 팔아서 군정(軍丁)·노속(奴屬)·친척(親戚)을 많이 얻어 가지고 오려 한다.’고 하였으며 점심을 먹고 떠나갔는데, 이때부터 통신(通信)한 일이 없었습니다. 일전에 졸지에 안음의 정동계(鄭烔溪)의 자손되는 상인(喪人)이 군사를 모아 반란(叛亂)을 꾀한다는 말을 듣고 신은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즉시 안동(安東)으로 들어가서 의병(義兵)의 일에 참여하여 들었습니다."
하였다.

 

김옥성(金玉成)을 네 차례 형벌하고 유심(柳淰)을 한 차례 형벌하였으나 모두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박태후(朴太厚)를 한 차례 형벌하니, 박태후가 공초하기를,
"이세채(李世彩)가 도적의 초관(哨官)이 되어 도목(都目)을 가지고 신을 유인하기를, ‘정도령(鄭都令)이 장수가 되어 8도(八道)가 모두 응하였다. 네가 비록 나이 늙었으나 강태공(姜太公)272)  은 나이 80세에 오히려 공(功)을 이루었으니, 너는 모름지기 동참(同參)하라.’ 하기에, 신이 이내 따라서 유천(柳川) 땅으로 갔더니, 적도(賊徒)가 합쳐 13대(隊)이고 대마다 각각 12명이었습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니, 명하여 효시(梟示)하게 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탱(李樘)을 놓아주었다. 이탱은 국문을 당하였으나 여러번 문초(問招)에 승복(承服)하지 않았으므로 국청에서 그 사실이 아님을 의심하여 방송(放送)을 계청(啓請)한 것이다. 뒤에 수원부(水原府)에서 잡히어 승복하여서 주륙(誅戮)을 당하였다.

 

4월 9일 기축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이제 이 역변(逆變)은 실로 고금(古今)을 통하여 없는 것이지마는, 다행히도 하늘과 조종(祖宗)의 묵우(默祐)에 힘입고 또 여러 신하들이 왕사(王事)에 힘을 다했기 때문에 기호(畿湖)가 먼저 평정되고 여당(餘黨)도 또한 거의 모두 소탕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 몸의 박한 덕으로 이룬 바이겠는가? 지금 영남의 첩보(捷報)가 또 이르렀으므로, 출정(出征)한 장사(將士)가 마땅히 가까운 날에 개선(凱旋)할 것이니, 그들의 복명(復命)을 기다려 녹훈(錄勳) 등의 일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케 하라."
하였다.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장계(狀啓)하여, 여러 곳의 창의 소모사(倡義召募使)의 위호(位號)를 폐지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천고(千古)에 없는 역변(逆變)이 스무날 안쪽에 깡그리 소멸된 것은 지난날의 기록에서 보지 못한 바입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날을 가려 태묘(太廟)에 고하고, 진하(陳賀)·반사(頒赦)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고묘(告廟)만 허락하고 진하는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박한 덕으로 인해 이 역변(逆變)을 초래하여 우리 조종(祖宗)의 척강(陟降)하시는 혼령(魂靈)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오히려 남은 두려움이 있다. 진하 1절(節)은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뒤에 여러 신하들이 힘써 청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권혁(權爀)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올리고 또 아뢰기를,
"장수를 죽이고 성(城)을 도륙한 도적이야말로 어떤 흉역(凶逆)입니까? 그런데도 충군 죄인(充軍罪人) 권첨(權詹)은 자신이 도신(道臣)이 되어 도적을 토벌(討伐)하는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먼저 몸을 보전할 계책을 세워 이미 벼슬이 갈렸음을 핑계로 수수방관하였으며, 도적의 관문(關文)이 번갈아 왔는데도 이를 예사로 보고 열읍(列邑)이 겁을 내어 동요하는데도 일찍이 지휘하지 아니하여서 흉봉(凶鋒)으로 하여금 곧장 기전(畿甸)을 핍박하는데 이르게 하였으니, 청컨대 본도(本道)의 지경 위에서 효시(梟示)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군졸(軍卒)이 폭로(暴露)273)  하니, 마땅히 속히 반사(班師)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사를 기다려 도순무사가 몸소 스스로 괵(馘)274)  을 바치고 역적의 괴수 정희량(鄭希亮) 등의 수급(首級)은 소금에 담가 올려 보내라."
하였다.

 

각 군문의 성 머리에 벌려 세우는 군사를 폐지하여 보내고 다만 성문(城門)의 파수(把守)만 남아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각 군문(軍門)에서 진영(陣營)에 남아 결진(結陣)하는 것을 폐지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의 장계에 이르기를,
"대구(大邱)·상주(尙州)·진주(晉州)·금오(金烏)·독용(禿用)·초계(草溪) 등 고을의 진영(鎭營) 군사로서 거창(居昌)의 지경에 모인 자가 2만 명의 수효에 이르렀는데, 명령을 전하여 해산하여 보냈으며, 각 산성(山城)의 영애(嶺阨)275)  의 방수(防守)도 또한 해산하여 보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친국(親鞫)하였다. 한세홍(韓世弘)을 신문하였으나 승복(承服)하지 않으므로, 한 차례 형벌하니, 공초하기를,
"지난해부터 이유익(李有翼)·박필현(朴弼顯)·이인좌(李麟佐)가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심유현(沈維賢)이 영천 군수(永川郡守)가 되었을 때, 박필현이 그 연소(年少)하고 사리(事理)에 밝음을 일컬었습니다. 신이 들으니, 그 이름난 도적은 밖에서는 양성(陽城)·진위(振威)·용인(龍仁) 사이에서 매우 대단하였고 안에서는 남태징(南泰徵)이 이를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성(李思晟)이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서두르고 있으니 이것이 매우 걱정스럽다.’고 하고, 또 ‘전라도(全羅道)는 비록 도적이 있을지라도 장사(壯士)가 4, 5백 명에 지나지 않고, 양성의 도적도 또한 4, 5백 명을 넘지 못하므로, 허술하기가 매우 심하니, 이것으로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이 몸은 가을을 기다려 하고자 하는데, 술수(術數)가 이와 같다.’고 하였으며, 또 ‘그대는 다시 오지 못하더라도 편비(褊裨)는 장차 왕래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서로 의논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편비란 원재린(元再麟)입니다. 이사성이 또 ‘서울 안의 여러 도적이 날더러 미복(微服) 차림으로 올라오라고 하니 인사(人事)가 이와 같았으므로, 역적질은 진실로 논할 것 없지만 비록 절도(竊盜)라도 또한 능히 알 수가 없다.’고 하므로, 신이 그렇게 여겼습니다. 이유익은 처음부터 서로 친하였는데, 재작년에 서울에 올라왔더니, 이유익이 신의 얼굴을 관찰하고 말하기를, ‘복(福)이 적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갔더니, 이유익이 ‘일조의 괴악(怪惡)한 무리가 반역(叛逆)을 꾀하는 일이 있는데, 그대가 일을 같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기에, 신이 ‘일이 두려울 뿐만 아니라 나는 마음이 옹졸하고 복이 적으니 어찌 능히 큰 일을 처리 할수가 있겠는가?’라고 답하였습니다. 이유익·박필현·이사성 및 도적 이하(李河)가 난만(爛漫)하게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서울 안은 이유익이 주장하고 그 다음은 이사성이 계려(計慮)가 있으므로 이 두 사람이 괴수(魁首)가 되고, 남태징은 그 무리들이 용렬하다고 여겨서 이유익 외에는 이하(李河)가 다음이 되었습니다. 민관효(閔觀孝)는 한강 밖에 있기 때문에 상면(相面)하였을 뿐이므로 능히 자주 왕래하지 못하였으며, 내응(內應)하는 일은 이유익이 가장 빈틈이 없었습니다. 2월 25일 무렵에 이인좌가 서울에 들어와 ‘그대는 용렬하니, 내가 영남(嶺南)에서 모사(謀事)를 같이할 사람 10여 명을 얻었는데, 정희량(鄭希亮) 등이다.’라고 하였는데, 많은 사람이 자리에 있었으므로, 아무아무라고 성명(姓名)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15일의 일은 신이 평안도(平安道)에 갔었기 때문에 능히 알지 못합니다. 내응(內應)의 일은, 각 사람은 가동(家僮)을 모으고, 남태징은 포도청(捕盜廳)의 군사가 있었으므로, 이하가 또 박필현의 말을 전하기를, ‘홍화문(弘化門)과 돈화문(敦化門)의 두 문은 열기 가장 어려우니, 만약 화약(火藥)을 많이 쌓아 두고 화전(火箭)으로 쏜다면 문을 깰 수 있다.’고 하고, 이유익은 ‘마땅히 군사를 성안에 모아야 한다.’고 하고, 이하는 ‘마땅히 군사를 동소문(東小門) 밖에 모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전년 9월에 이유익·이하와 더불어 함께 의논한 말입니다. 이인좌가 이하에게 ‘그대는 어떻게 군사를 모으겠는가?’ 하니, 이하가 ‘5, 60명은 있고 그 밖에 노복(奴僕) 같은 것이 5, 60인이며 중서(中庶)276)                  가 또한 5, 60이니, 합쳐 계산하면 마땅히 1백 5, 60인은 될 것이다.’ 하였으니, 아마도 여산(礪山)에 큰 전장(田庄)이 있기 때문에 군정(軍丁)이 호남에서 많이 나왔던 것입니다. 재작년에 신이 상주(尙州)에 있을 때 대계(臺啓)에 ‘음모 비계(陰謀祕計)로써 장차 16, 7인을 논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신이 상주에 있는지 겨우 1년 남짓에 박필현이 또한 와서 ‘한세홍이 있기 때문에 나도 또한 따라 왔다.’라고 말을 퍼뜨렸으니, 세상에서 신을 박필현의 주인으로 여겨 16, 7인 속에 신과 박필현이 들어 있고 그 나머지는 윤덕유(尹德裕)·민원해(閔元楷)·이하·이사성·이유익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그 말에 놀라 두려워하였는데, 대계(臺啓)는 과연 발론(發論)되지 않았지마는, 반역을 도모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나만치(羅晩致)를 신문하니, 나만치가 공초하기를,
"3월 초승 날이 어두운 뒤 소년(少年)이 누런 말을 타고 6, 7인을 거느리고 신의 집에 왔으므로, 신이 나가서 만났더니, 자신을 양성(陽城)의 이만신(李晩臣)이라고 하기에 신이 ‘무슨 까닭으로 급하게 나를 만나 보려고 하는가?’ 하고 물었더니, 이만신이 ‘다른 손님이 있다.’고 하여 잠시 문밖에 나가 섰습니다. 이만신이 가만히 말하기를, ‘우리들이 반역을 도모하는 일이 있어 서로 의논하려고 하는데, 군인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8도(八道)에 이름이 알려진 인사(人士)를 모두 뽑아 기록하였는데, 그대도 또한 그 속에 들어 있다.’고 하기에, 신이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지중한데, 어찌 이처럼 부도(不道)한 말을 할 수가 있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전주(全州)를 지날 때 신의 종이 말을 전하기를, ‘일전에 양반(兩班)이 수천 명을 거느리고 선학사(仙鶴寺)로 들어가 승도(僧徒)를 모두 쫓아버린 일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조카 나갑손(羅甲孫)은 곧 나숭곤(羅崇坤)이니 이인좌의 사위입니다. 괘서(掛書)한 사람은 곧 산음(山陰)에 사는 정탁(鄭倬)이며 정탁도 또한 선학사에 모였습니다. 송하(宋賀)가 요술(妖術)을 하는데, 부안(扶安)의 김만신(金萬信)이 신과 서로 말하는 자리에서 신의 말이 송하의 요술의 일에 미치니, 김만신이 ‘정탁의 요술이 송하보다도 낫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은진(恩津)으로 간 것은 신의 4촌형 권설(權卨)을 따라 내려간 것이며, 이번 괘서 때에는 권설의 왕성곡(王城谷)의 박성(朴姓)의 사람과 서로 연결되었으니, 박가는 곧 박필현의 심복(心腹)입니다."
하였다. 한 차례 형벌하였으나, 공사(供辭)는 전과 같았다.

 

처음에 이인좌의 아내 자정(紫貞)은 곧 윤휴(尹鑴)의 손녀인데, 청주(淸州)의 옥(獄)에 갇히어 공초하기를,
"지난 10월에 한세홍이 지아비의 집에 왔으므로, 지아비도 또한 상주(尙州)에 갔다가 돌아오더니, ‘나는 능히 살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까닭을 물으니, ‘남인(南人)·소론(少論)의 무리가 바야흐로 나라를 향하여 일을 일으키고 나를 협박하여 동참하라고 하니, 병을 핑계대는 외에 다른 계책이 없다.’고 하고 이내 전신불수(全身不收)의 시늉을 하면서 오랫동안 누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1월에 지아비가 서울 안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병을 알도록 하려고 초교(草轎)277)  를 타고 서울에 올라갔더니, 박필현이 와서 지아비를 보고 ‘틀림없이 핑계를 대어 큰 일에 참여하지 않을 뜻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정월에 돌아와서 순흥(順興)의 정준유(鄭遵儒)의 집에 갔다가 20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전주(全州)의 이지시(李之時)가 지아비의 집에 왔다가 이내 지아비 및 지아비의 아우 이웅좌(李熊佐)와 함께 이지시의 집으로 가서 5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2월에 권서린(權瑞麟)의 집에 갔다가 돌아와 ‘권서린의 3형제가 명화적(明火賊)의 무리를 모아 나로 하여금 장수가 되라고 하기에 사양하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또 서울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가서 유내(柳徠)를 만났더니,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과 군사를 일으킬 것을 서로 약속하였다.’고 하였습니다. 3월 초승에 지아비가 충주(忠州)에 가서 민창도(閔昌道)의 아들 민원보(閔元普)를 만나고 와서 그날로 곧 또 양성(陽城)으로 갔습니다. 제가 ‘반드시 적족(赤族)의 재앙이 있을 터인데, 어찌 이런 행동을 하느냐?’ 하였더니, ‘나도 또한 동참하려고 아니하여 병을 핑계대기까지 하였는데도 여러 사람이 힘써 권하니 형세상 면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정준유의 서찰(書札)은 번번이 김홍수의 집에서 전하여 왔습니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역적 윤휴(尹鑴)의 자손으로서 여주(驪州)에 있는 자가 변란(變亂)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철가(撤家)하여 도피해 숨었으니, 형적(形跡)이 수상한 데 속하며, 또 듣건대, 이인좌가 또 역적 윤휴의 손서(孫壻)라고 하니, 청컨대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절도(絶島)에 정배(定配)케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도배 죄인(徒配罪人) 강백(姜栢)은 갑자기 도적의 형세를 보고 문득 관차(官次)278)  를 떠났으니, 이미 불충(不忠)이고, 집에 늙은 어미가 있는데도 분상(奔喪)을 핑계대었으니, 또한 불효(不孝)에 속하며, 또 그 적세(賊勢)를 장황하게 늘어놓아 민심(民心)을 놀라게 하고 현혹시킨 죄는 더욱 매우 절통하므로, 도배(徒配)의 박벌(薄罰)로는 그 죄를 징계시킬 수가 없으니, 마땅히 극변(極邊)에 충군하는 형률(刑律)을 써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조언신(趙彦臣)이 상소(上疏)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새로 도임(到任)하여 보건대, 전세(田稅)와 군포(軍布)로 이미 백성에게 거둔 것을 도적에게 잃게 된 것은 거듭 징수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탕감(蕩減)을 내리고,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을 가을을 기다려서 변란 뒤의 민심을 위안(慰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아들 정의련(鄭宜璉)과 정의황(鄭宜璜)을 잡아 보낸다고 장계(狀啓)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박필현(朴弼顯)이 무너져 달아난 뒤에 그 동생 박필충(朴弼忠)이 잡혔는데, 그때 군사를 일으킨 정상(情狀)을 그가 반드시 알았을 것이니, 바로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집(李㙫)은 말하기를,
"박필현의 동생 박필호(朴弼虎)도 이미 잡혀 포도청(捕盜廳)에 갇혔다고 하니, 마땅히 박필충의 예(例)에 의하여 똑같이 효시(梟示)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내 명하여 그 조카를 절도(絶島)에서 종이 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인자(李麟佐)와 이웅좌(李熊佐)가 모두 적괴(賊魁)이니 그 아우 이기좌(李麒佐)를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이인좌의 아내는 박필현의 아내의 예에 의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그 아이는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으니, 사형(死刑)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종이 되게 하라. 박태후(朴泰厚)는 비록 이미 승관(承款)하였지만 이미 협종(脅從)하였으니, 여러 도적과 똑같이 정법(正法)하고 별달리 구별(區別)하는 뜻이 아니니, 훈련 도감(訓鍊都監)으로 하여금 큰 거리에서 효시(梟示)케 하라. 나유(羅煣)는 이미 대원수(大元帥)의 전령(傳令)을 받았는데도, 지금 충청 감사(忠淸監司)와 소모사(召募使)의 장계를 본다면, 채지홍(蔡之洪) 등이 여러번 정문(呈文)하여 반드시 깨끗이 죄를 벗기려고 하였으니,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을 분별하지 못하므로 매우 무상(無狀)한 것이 된다. 충주 목사(忠州牧使)의 역적을 효시(梟示)하여서는 안된다는 말도 또한 놀라우니,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나유는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바로 효시하게 하고 정문한 유생(儒生) 등은 모두 정저(停擧)하게 하라. 임상극(林象極)의 경우 연호(年號)에 쓴 대원수(大元帥) 관문(關文)이라고 한 것은 역률(逆律)을 쓰더라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으나, 반역을 도모한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그 아내는 종을 만들고 형제는 섬으로 정배하라."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하원(李夏源)이 아뢰기를,
"역적의 관문(關文)을 봉행(奉行)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賊陣)으로 달려간 죄는 청안(淸安)·진천(鎭川)·회인(懷人) 세 고을이 처음에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상극과 김도응(金道應)은 모두 역률(逆律)을 받았지만, 이정열(李廷說)만은 홀로 면하여 고을 안의 창의(倡義)를 가로채어 자기의 공적(功績)으로 삼았으니, 정상이 절통(絶痛)합니다. 청컨대, 청안(淸安)의 전(前) 현감(縣監) 이정열을 임상극 등의 예에 의하여 처단(處斷)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사핵(査覈)을 행하였으니, 기다려서 처치(處置)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죽산(竹山)은 이미 영장(營將)을 겸하였으니, 마땅히 병마(兵馬)를 정돈하여 막아 지키는 계책을 하여야 할 것인데도, 전(前) 부사(府使) 최필번(崔必蕃)은 역적의 노문(路文)279)  을 보고 겁내어 도망하였으니, 청컨대, 죽산의 전 부사 최필번을 군율(軍律)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최필번이 백의(白衣)로 적진(賊陣)에 간 것은 진실로 매우 수상하니, 일률(一律)280)  도 아까울 것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다시 도순무영(都巡撫營)의 군중(軍中)으로 갔다니, 엄중히 국문하여 처치(處置)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송인명이 아뢰기를,
"영남(嶺南)의 도적이 마구 날뛴 것을 우병사(右兵使) 이시번(李時蕃)은 처음에 초토(勦討)하지 않고, 또 장문(狀聞)하지도 않았으며, 순영(巡營)에서 재촉하여도 딴 일을 핑계로 움직이지 않았으니 그 정상을 생각한다면, 아주 놀라우니, 청컨대 군율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를 잡아 오기를 기다려 사형(死刑)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충군(充軍)하게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임상극의 죄를 받은 것은 이미 역률(逆律)로써 효시(梟示)하였고, 그 자식은 참작하여 사형(死刑)을 감하였으나, 법을 집행하는 도리를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임상극의 자식도 연좌(緣坐)시켜 법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10일 경인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정의련(鄭宜璉)을 친국(親鞫)하였다. 정의련이 공초하기를,
"지난 겨울에 신의 아재비가 상인(喪人)으로서 문경(聞慶) 송면(松面)의 이인좌(李麟佐)가 있는 곳에 갔습니다. 이인좌·이웅좌(李熊佐)의 무리는 아재비와 서로 친하여서 김홍수(金弘壽)·한세홍(韓世弘)·나만치(羅晩致)의 무리와 더불어 불궤(不軌)를 하였습니다. 서울 안에서는 윤연(尹㝚)·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의 부자(父子)와 이명언(李明彦)도 또한 역모(逆謀)에 들어갔다고 하며, 이명언은 지금 바야흐로 중국에 사신갔으니, 나올 때에 평안도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명언이 역모에 들어갔다는 말은 이인좌가 와서 신의 아재비 최필웅(崔必雄)에게 말하여서 전하였습니다. 종실(宗室)은 밀풍군(密豐君)이 있다고 하였으며, 전라도의 괘서(掛書)는 나만치(羅晩致)가 만들었습니다. 이인좌와 이웅좌는 갑진년281)   이후부터 흉언(凶言)을 하였습니다. 지난해 8월에 신이 안음(安陰)에 갔다가 10월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인좌가 와서 ‘내년 3월에 그 일을 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이웅좌는 예천(醴泉)에 왔다가 3월 10일 뒤에 크게 성내어 돌아가면서 ‘안동(安東) 놈들 때문에 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처음에 이정소(李廷熽)를 목베어 안동을 통일하려고 하였는데, 안동 사람이 크게 꾸짖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였으므로, 이웅좌가 이 말 때문에 성내어 떠나갔던 것입니다. 서사촌(庶四寸) 정의숙(鄭宜琡)은 안음 옛고을에 사는데, ‘의성 현령(義城縣令) 한사억(韓師億)도 또한 역모에 들었으니, 한사억은 곧 일찍이 경상도(慶尙道)의 수령(守令)을 지낸 이사상(李師尙)의 사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웅좌의 무리가 흉언을 지어내어 소론(少論)의 강경파가 그 안에 많이 들었으므로, 윤성시(尹聖時)도 또한 그 중에 들었습니다."
하였다. 한차례 형벌하였으나, 공사(供辭)는 전과 같았다.

 

조상(趙鏛)을 세 차례 형벌하니, 조상이 공초하기를,
"신이 신윤조(辛胤祖)와 서로 친하므로, 신윤조가 반역을 도모하는 일을 들었습니다. 신윤조는 노복(奴僕)이 많기 때문에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오려고 했다 하는데, 신의 7촌숙(七村叔) 조덕규(趙德奎)가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유익(李有翼)은 김중기(金重器)와 사돈(査頓)이고 김중기가 대장(大將)이 되었으므로, 신윤조가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올라오면 마땅히 합세하여 이를 맞이하고 밀풍군(密豐君)을 추대(推戴)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7촌인 조덕규·조관규(趙觀奎)가 알았기 때문에 신도 또한 이를 듣게 되었으며, 조덕규 형제는 바야흐로 원주(原州)에 있습니다. 정상(情狀)을 알고 있었음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조담(趙倓)의 장계에 이르기를,
"역적 이만구(李萬衢)를 잡았는데, 공초하기를, 3월에 안동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웅좌·이숭곤(李崇坤) 등을 용궁(龍宮)에서 만났는데, 이웅좌 등이 「우리들이 바야흐로 큰 일을 경영하여 형 이인좌는 양성(陽城)으로 가서 권서룡(權瑞龍) 등과 모의(謀議)하여 군사를 모으고, 정세윤(鄭世胤)은 전라도로 가서 도당(徒黨)을 불러 모아 전라 병영(全羅兵營)에서 변을 일으켜 군병(軍兵)을 탈취하여 서울로 올라올 것을 약속하였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정세윤은 길을 돌려 태인현(泰仁顯)으로 가고, 이사성(李思晟)은 평안도(平安道)에서 군사를 움직일 것이며, 정준유(鄭遵儒)가 안음(安陰)에서 모레 군사를 일으켜 길을 떠나면 내가 중로(中路)에서 맞이하여 이내 서울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충청 병영(忠淸兵營)에서 변을 일으키는 기일이 바로 내일이므로 일이 매우 급하니, 너는 나와 함께 안음으로 가서 일을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 4도(道)의 군사가 모두 일어나고 또 내응(內應)도 있으니, 일을 이루지 못할 이치가 없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므로, 효시(梟示)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 11일 신묘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시번(李時蕃)을 사형(死刑)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충군(充軍)시키라고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이시번이 군사를 한 곳에 머물러 두고 있으면서 즉시 도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군율을 행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따르지 않고 이 명이 있는 것이다."

 

여러 군문(軍門)의 호위 군병(護衛軍兵)에게 호궤(犒饋)를 행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 송인명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는 자신이 장신(將臣)이 되어 역변(逆變)의 초기에 능히 분발하여 도적을 치지 못하였습니다. 또 역적의 괴수 이유익(李有翼)과는 매우 가까운 인척(姻戚)으로, 성명(姓名)이 여러 번 국초(鞫招)에 나왔으니, 하루도 서울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형(死刑)을 감하여 극변(極邊)에 안치(安置)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김중기에게 수원(水原)으로 나가서 지키라고 명하였는데, 김중기는 말이 없다는 핑계로 뭉기적거리며 머무르는 형상이 현저히 있었다. 이유익(李有翼)이 망명하자 포교(捕校)가 뒤쫓아 철원(鐵原)의 김중기의 묘사(墓舍)에서 붙잡았으니, 대개 김중기의 아들 김숙(金潚)이 바로 이유익의 매부(妹夫)이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중기의 이름이 또 국초(鞫招)에 나왔으므로, 송인명이 나문(拿問)하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자, 먼저 이 계청(啓請)을 하여 서울을 떠나게 만들고 곧 또 나국(拿鞫)하자는 계사(啓辭)를 내었던 것이다.

 

다시 조상(趙鏛)을 추문(推問)하니, 조상이 공초하기를,
"박필현(朴弼顯)이 ‘네가 수없이 무고(誣告)한다면 그들이 겁을 내어 아직 나오지 않은 자는 스스로 두려워하여 주선(周旋)할 것이고, 이미 나온 자는 감히 옥사(獄事)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조덕규(趙德奎)는 족장(族長)으로서 매양 와서 역모(逆謀)에 들기를 권하고 점장이의 말로 유인하였기 때문에 역모에 들어 적중(賊中)의 사정을 들었으니,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륙(孥戮)하였다. 조상이 처음에 참판(參判) 윤순(尹淳)을 무고(誣告)하여 끌어들였으나, 곧 윤순이 문형(文衡)282)  이 되어 옥당록(玉堂錄)283)  을 주관했는데도 그가 선발(選拔)에 참여되지 못한 것 때문에 한(恨)을 품고 무고로 끌여들였음을 자복(自服)하였다. 형벌하라고 명하였으나, 공사는 또 이와 같았다.

 

포도청(捕盜廳)에 명하여 장희재(張希載)의 아들 장휘(張輝)를 체포케 하였으니, 이규서(李奎瑞)의 공초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나만치(羅晩致)를 추문(推問)하여 세 차례 형벌하니, 나만치가 공초하기를,
"신의 자(字)는 원례(元禮)입니다. 박필현(朴弼顯)이 정탁(鄭倬)으로 하여금 남원(南原)에 괘서(掛書)케 하고, 송하(宋賀)로 하여금 전주(全州)에 괘서케 하였는데, 글은 박필현이 짓고, 송하의 5촌 조카가 썼습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륙(孥戮)을 하였다.

 

다시 나만규(羅晩揆)를 추문(推問)하니, 나만규가 공초하기를,
"이호(李昈)가 신의 집에 와서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나의 동당(同黨)이 되는데, 그가 전라도·충청도에서 먼저 군사를 일으키면 이사성(李思晟)도 또한 평안도에서 근왕병(勤王兵)이라 핑계대고 올라오고, 태인 현감(泰仁縣監) 박필현은 「너희들이 군사를 일으킨다면 나도 또한 마땅히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손님이 흩어진 뒤에 신이 신의 형에게 ‘이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고 물었는데, 신의 형이 이호의 말을 전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정상을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처음에 안동(安東) 사람 권후(權煦)가 국초(鞫招)에 나왔으므로 잡아오라고 명하였는데, 안동 부사(安東府使) 박사수(朴師洙)가 이 고을의 지경 안에 권후라는 이름이 없다며 권구(權榘)를 잡아 보냈다. 권구는 곧 안동에서 명망이 있는 선비로서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있었다. 취초(取招) 때 공초하기를,
"이번의 역변(逆變)이 불행하게도 사족(士族)에서 나왔으므로 분하고 슬픈 마음이 다른 도(道)보다도 갑절이나 더합니다. 몇 사람의 사류(士類)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역적을 치는 일로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의 서원(書院)에 모였으므로, 신도 또한 바야흐로 모임에 갔는데, 소호사(召號使)가 글을 보내 서로 의논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신이 ‘소호사는 이미 조정의 명령을 받았으니 마땅히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하고 바야흐로 앞으로 나아가려 했는데, 안무사(安撫使)가 또 글을 보내서 불렀기 때문에 이내 부중(府中)으로 갔다가 잡혀서 오게 되었습니다. 을사년284)   무렵에 신이 예천 서원(醴泉書院)에 갔더니, 원장(院長) 및 지방의 장로(長老) 5, 6인이 함께 모였는데, 한 소년이 들어와서 스스로 ‘육임점(六壬占)285)  을 배우려고 합니다.’ 하기에 신이 ‘그대를 보건대, 또한 소년이고 재주가 있으므로 배울 만한 것이 많은데, 어찌 잡술(雜術)을 배우려고 하는가?’ 하였습니다. 뒤에 물어 보니, 이인좌(李麟佐)였습니다. 정희량(鄭希亮)은 순흥(順興)에 살고 이인좌(李麟佐)는 문경(聞慶)에 살며 서로 교통(交通)하여서 한 가지 말과 한 가지 일도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니, 바야흐로 그 변(變)을 일으킬 때 가령 서로 관계되는 일이 있다면 그들이 어찌 서로 통하지 않고서 도리어 김홍수(金弘壽)에게 들었다는 이유로 핑계를 삼을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늙어 쓸모없는 선비이니, 그들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3월 16일에 한 벗이 와서 신에게 ‘변산(邊山)에 도적(盜賊)이 크게 일어났으니, 처자(妻子)를 가야산(伽倻山) 속에 대피시켜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기에, 19일에 신이 권덕수(權德秀)와 함께 갔는데, 저녁 뒤에 절의 중이 와서 청주(淸州)의 변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신이 권덕수와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고 ‘예로부터 역변(逆變)에 어찌 한정이 있었으리오만, 어찌 일시(一時)에 두 수신(帥臣)을 함께 죽인 일이 있었겠는가? 이는 신자(臣子)로서 편안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 인하여 권덕수와 함께 산을 내려와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의 집에서 자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 의병(義兵)을 일으켜 역적을 칠 계책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고개 밖에 있으면서 일찍부터 사귀어 좋아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권구가 이재(李栽)·김성탁(金聖鐸)·권덕수(權德秀)라고 대답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권구라는 이름자가 미심쩍으니, 마땅히 안무사(按撫使)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게 하여 장문(狀聞)한 뒤에 처리하여야 합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는 말하기를,
"조화(造化)의 신축(伸縮)이 각각 스스로 때가 있으니, 이와 같은 무리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는 것이 백성들을 권장하여 움직이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가서 안무사를 만나본 일로써도 그 마음을 밝힐 수 있고, 항상 이재와 사귀어 좋아한 것으로 또한 그 벗을 가려 사귀는 단서를 알 수 있겠다."
하고, 명하여 특별히 놓아 주게 하였다. 이때 밤이 깊어 궐문(闕門)이 이미 닫혔으므로, 이내 유문(留門)286)  하여 내보내도록 명하였다. 권구가 말하기를,
"이처럼 망극(罔極)한 변을 만났어도 얼굴 빛이 일찍이 변하지 않았는데, 이제 성교(聖敎)를 받자오니 자연히 눈물이 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나장(羅將)과 포졸(捕卒)하게 명하여 호송(護送)케 하였다. 대사간 송인명이 말하기를,
"국옥(鞫獄)의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니, 마땅히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셔야 합니다. 이 뒤로는 간사한 사람이 만약 다시 이런 투를 본따서 스스로 ‘의병(義兵)을 일으킬 마음이 있었고, 아무와 사귀었다’고 한다면 장차 놓아 주시겠습니까? 놓아 주지 않는다면 처분이 공평치 못할 것이고 놓아준다면 간사(奸邪)한 폐단이 끝이 없을 것이니,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죄인을 유문(留門)하여 내보내는 것은 더욱 사체를 손상시킴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국청의 죄수로 살아 나가는 자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한 사람도 놓아 보낸 자가 없었다."
하고, 듣지 않았다. 뒤에 권구의 이름이 또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으나, 임금이 전에 이미 특별히 놓아 보냈다는 이유로써 그대로 두고 묻지 않았다. 처음에 박사수가 안동에 이르러 지경 안의 이름이 알려진 인사를 불러 모아 도적 칠 일을 의논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권구만 홀로 이르지 않았다.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권구를 나포(拿捕)하기 위해 부아(府衙)에 들어오자, 비로소 와서 박사수를 뵙기를 청하니, 즉시 붙잡아 서울로 보냈다. 권구가 풀려나자 안동 사람들이 박사수에게 말하기를,
"3월의 변란 전에 이웅보(李熊輔)가 안동의 풍산현(豐山縣)에 이르러 권구를 만나 보고 난(亂)을 일으킬 것을 모의(謀議)하니, 권구가 대답하기를, ‘내 머리는 끊을 수 있어도 이 일은 따를 수 없다.’고 하여 이웅보가 성내어 갔다."
하였다. 권구가 이런 말을 친국(親鞫) 때에 바로 대답하였기 때문에 풀려났다고 한다.

 

우참찬(右參贊) 정제두(鄭齊斗)가 진소(陳疏)하고 돌아가므로, 교리(校理) 정우량(鄭羽良)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권면(勸勉)하여 머물러 있게 할 것을 청하니, 유의(留意)하겠다는 말로 답하였다.

 

사직(司直) 이재(李縡)가 상소(上疏)하여 돌아가기를 고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이번의 흉역(凶逆)은 군신(君臣)이 있고 난 이래 없었던 바이니, 만회(挽回)하여 정돈(整頓) 하는데 힘입을 것은 오직 전하의 한 마음뿐입니다. 당(唐)나라 문종(文宗)의 말에 ‘하북(河北)의 도적을 제거하기는 쉬워도 조정의 붕당(朋黨)을 없애기는 어렵다.’고 하였는데, 신은 ‘두 가지를 없애기는 모두 쉬우나 군주(君主)의 사의(私意)를 없애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전하의 영특하고 슬기로움으로 절실하게 스스로 살피고 검속(檢束)하시어 속히 작은 은혜를 지나치게 혐오(嫌惡)함과 제반의 사사로운 지혜를 일체 타파하여 버리시고 지극히 바르고 큰 도리(道理)로 처리하신다면, 천리(天理)가 밝아지고 인심(人心)이 올바르게 되어, 비단 화란(禍亂)의 조짐을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참으로 탕평(蕩平)의 복(福)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세도(世道)는 모두 사욕(私慾)의 뭉치에다 문구(文具)를 입힌 것으로 3백 년 종사(宗社)가 그 위에 놓였으니, 아! 위태롭습니다. 위태로운 생각이 바야흐로 모이면 선(善)의 단서(端緖)가 싹트기 쉽고, 흥하고 망함이 한번 판가름나면 좋은 기회를 뒤쫓기 어렵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안으로 정사(政事)를 닦아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침은 마치 안을 곧게 하여서 밖을 바르게 함과 같다.’고 하였으니, 안이 곧지 않은데 밖이 바르게 될리가 없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엄숙하고 공손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시어 성색(聲色)·화리(貨利)287)  을 경계하시고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떠벌리는 마음을 갑자기 일으키지 마시며, 잠시 편안했다고 해서 주무(綢繆)288)  의 계획을 조금도 늦추지 마소서. 군주 되기 어려움을 아시어 남이 나를 어기지 말기를 바라지 마시고, 언로(言路)를 활짝 열고 중선(衆善)을 널리 모아서 비색(否塞)289)  을 열고 혼란을 진정시키는 기틀로 삼으소서. 지금 도성(都城)이 텅 비고 팔방(八方)이 농사를 그만두었으니, 먹을 것도 없고 백성도 없으면 무엇으로써 나라를 다르리겠습니까? 위로 승여(乘輿)·복어(服御)에서부터 아주 더 삭감하시고 아래로 궁탕(宮帑)290)  의 명목없는 재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사(有司)로 돌리시며, 대포(大布)291)  의 옷을 입고 대백(大帛)292)  의 관(冠)을 쓰시되 자신이 먼저 실행하기를, 한결같이 위 문공(衛文公)이 조(曹)에 있을 때293)  와 같게 하신다면, 또한 민심(民心)을 굳게 묶어서 천명(天命)을 맞이하는 하나의 큰 계기(契機)가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그 말을 가납(嘉納)하고 그가 가볍게 돌아감을 책하였다.

 

김취로(金取魯)를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안동(安東)에서 대구(大邱)에 이르러 장차 하도(下道)의 역적이 지나간 여러 고을을 순무(巡撫)하려고 하였는데, 감사(監司) 황선(黃璿)이 갑작스럽게 죽었다. 여러 도적의 남은 무리로서 체포되어 감영(監營)의 옥(獄)에 갇힌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감영이 있는 곳의 인심(人心)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박사수가 대구에 머물러 글월로 도순무사(都巡撫使)의 종사관(從事官) 박문수(朴文秀)를 청하니, 박문수가 바야흐로 거창(居昌)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급하게 대구로 달려와 박사수와 함께 죄수들을 안핵(按覈)·신문(訊問)하여 합천(陜川)의 도적을 따른 좌수(座首) 정상림(鄭商霖)을 서울로 압송(押送)하였다.

 

4월 12일 임진

정국(庭鞫)에서 김정현(金鼎鉉)에게 신문하니, 김정현이 공초하기를,
"3월12일에 양성(陽城)의 최경우(崔擎宇)가 신의 집에 와서 ‘술이 있어 여러 벗과 마시려고 한다.’ 하면서 그의 집으로 함께 가기를 청하였으므로, 신이 그 집에 갔더니, 낯모르는 사람 몇명이 자리에 있었는데, 최경우와 함께 신의 손을 굳게 잡고 꾀어 말하면서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좌중(座中)에서 한 사람이 큰 칼을 뽑아 들면서, ‘말이 이미 나왔는데도 이와 같이 발악(發惡)하면 능히 머리를 보전할 수가 있겠는가?’하고 신의 왼쪽 팔을 찔렀습니다. 신은 두렵고 겁이 나서 몰래 도망해 살아날 계책을 생각하고 이내 ‘나는 마땅히 집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 보고 오겠다.’고 했더니, 최경우가 즉시 신을 놓아 주었기 때문에, 이내 집으로 돌아와서 수원(水原)으로 도피(逃避)하였다가 충주(忠州)로 옮겨 갔습니다. 김동이(金同伊)는 바로 서삼촌(庶三寸)이고 서제(庶弟)는 아닙니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이하원(李夏源), 집의(執義) 임광필(林光弼), 장령(掌令) 홍중징(洪重徵)·이춘제(李春躋), 지평(指平) 유운(柳運)·강필신(姜必愼)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극변(極邊)에 안치(安置)한 죄인 김중기(金重器)는 자신이 장신(將臣)이 되었음에도 이름이 국안(鞫案)에 올랐으니, 청컨대, 국청(鞫廳)에서 나핵(拿覈)하게 하소서. 호남 어사(湖南御使) 이도겸(李道謙)을 특별히 파견한 뜻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도(本道)에 변란(變亂)이 발생한 날 창황하게 올라와 조정에 수욕(羞辱)을 제치고 한 도(道)를 실망케 하였으니, 청컨대 그 곳에서 편관(編管)294)  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신윤조(辛胤祖)를 한 차례 형벌하니, 신윤조가 공초하기를,
"조덕규(趙德奎)가 신을 청하여 ‘영남(嶺南)·호남(湖南)의 군사가 반역을 도모하는 일로 서울로 올라오는데, 네가 관솔횃대 2백 자루만 만들어 낸다면 뒷날에 반드시 큰 공신(功臣)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조덕규가 지난해에 또 신에게 ‘너의 수하에 무릇 몇 사람이나 있으며, 혹시 큰 일이 있어 불의에 조발(調發)한다면 몇 명이나 마련해 내보낼 수 있느냐?’ 하므로, 신은 그가 깊은 뜻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만약 보(洑)를 쌓는 등의 일이 있다면 4, 50명은 얻을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조덕규가 또 신에게 ‘네가 강변(江邊)에 살고 또 노복(奴僕)도 많으니, 술을 각기 한 항아리씩을 사서 사람을 모아 기다리게 하라.’고 하였으니, 그 뜻인즉 중로(中路)에서 적군(賊軍)을 호궤(犒饋)하려고 한 것입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4월 13일 계사

우포도청(右捕盜廳)에서 아뢰기를,
"죄인 김홍수(金弘壽)의 아들 김덕진(金德鎭)이 사람 둘을 거느리고 서울에 잠복하여 은밀하게 드나들었는데, 말 위의 주머니 속에 자문(咨文)을 등사(謄寫)한 것 한 장과 1천여 냥이 돈이 있고, 치부 문서(置簿文書)에는 성명을 쓰지 않고 혹 파자(破字)로 썼으며, 건기(件記)295)   속에도 각 사람의 이름자를 다만 한 자만 썼으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김덕진 및 그 주인 박경순(朴慶舜)을 마땅히 국청(鞫廳)으로 옮겨 보내야겠습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호남 어사(湖南御史) 김시형(金始炯)을 호서 어사(湖西御史)로 이차(移差)시켜 올라오지 말고 그대로 호서를 안무(安撫)하도록 명하였다.

 

적괴(賊魁) 정희량(鄭希亮)·이웅보(李熊輔)·나숭곤(羅崇坤)의 수급(首級)을 소금에 담가 광희문(光熙門) 안의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화약고(火藥庫) 안에 간직해 두고 도순무사(都巡撫使)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그 후에 괵(馘)을 바치는 예전(禮典)을 행하도록 하였다.

 

정국(庭鞫)하였다. 신효조(辛孝祖)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조관규(趙觀奎)의 무리에 괴수되는 대장(大將)이 있었는데, 지평(砥平)의 남수언(南壽彦)은 바로 조관규의 매부(妹夫)로서 조관규와 남수언이 주사 대장(舟師大將)이 되어 여강(驪江)에 정박한 선척(船隻)을 모아서 어가(御駕)가 만약 남한강(南漢江)에 행차한다면 부딪쳐 깨뜨릴 계책을 하였으니, 그런 말이 자자하였습니다. 정읍 현감(井邑縣監)        목중형(睦重衡)은 반역을 도모할 뜻이 있었고 그의 계자(繼子)296)                  로서 아명(兒名)이 광원(光遠)인 자가 여주(驪州)에 있었는데, 그 생부(生父)는 곧 목천제(睦天齊)로서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과 난만(爛漫)하게 서로 의논하였으며, 적변(賊變)이 일어난 뒤에 목광원은 그 아비가 호남의 역적의 대장(大將)이 되었음을 듣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정읍(井邑)으로 내려가 중도(中道)에서 돌아왔습니다. 남수언의 일은 신이 신윤조(辛胤祖)의 아들 신경귀(辛景龜)에게 들었습니다. 3월 13일 신이 해질 무렵에 신윤조의 집에 갔더니, 책 위에 손가락 크기의 편지가 있었는데, 봉한 데를 뜯었다가 풀칠하지 않고 다시 그 봉한 데를 붙였으며, 위에 ‘목향(木香) 두돈[二錢]’이라고 썼는데, 신이 열어 보니, 목향이 아니고 바로 관솔가지 한 개였으므로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다시 자세히 싼 글 쪽지를 보니, 분명히 조관규의 필적(筆跡)으로서 첫줄에 ‘대 뿌리를 캐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내일 마땅히 캐어 보내겠다. 어제 들으니, 영기청(嶺奇淸)과 영사(嶺事)가 반드시 이루어짐을 기약한다고 하였는데, 조금 전에 보내온 편지를 보건대, 기신(期信)을 적실(的實)히 알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답답하다. 이 편지를 광주(廣州) 임생(任生)에게 보내어서 기신(期信)을 탐지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으며, 성명(姓名)은 쓰지 않았습니다. ‘기신(期信)’이란 것은 그 뒤에 생각하여 보니, ‘기’는 일기(日期)인 듯하고, ‘신’은 신지(信地)인 듯하였습니다. 그 곁에 또 굳게 봉한 서찰(書札) 한 통이 있었고, 서면(書面)에 ‘청전(靑田)의 조진사(趙進士)의 후장(候狀)297)                  , 광진(廣津) 임생원(任生員)의 여소(旅所)298)                   입납(入納)’이라고 쓰여져 있었는데, 신이 미처 열어 보기 전에 주인이 나왔기 때문에 거짓 보지 못한 체하여 물러나 앉았습니다. 이것이 비록 남수언의 문적(文跡)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에 저서(砥書)를 보건대,’라고 말한 것으로, 남수언의 서신(書信)이 조관규에게 보내진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14일 새벽에 목광원이 그의 종 3명을 거느리고 그 생부(生父) 목천제와 함께 후포리(後捕里)의 신윤조의 집에 들어왔는데 신도 때마침 신윤조의 집에 닿았습니다. 신이 처음에 어찌 목광원이 함께 온 까닭을 알았겠습니까? 괴이하게 여겨 그 일찍 행동한 것을 물었는데, 목광원 부자가 빙그레 웃고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여러 번 캐어 물었더니, 신경귀가 곁에 있다가 신에게 ‘아저씨에게 숨기는 것은 무익(無益)한 일이니, 내가 마땅히 말하겠습니다. 정읍 현감이 호남(湖南) 역적의 대장(大將)이 되어 서울로 올라와서 평안 병사(平安兵使)와 모이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하였다.

 

안엽(安熀)을 한 차례 형벌하니, 안엽이 공초하기를,
"신이 이사성(李思晟)의 집에 가서 주무(綢繆)하게 모의(謀議)를 했는데, 정세윤(鄭世胤)도 또한 이사성의 집에 갔습니다. 신은 정세윤과 서로 안 것이 이미 수십 년이며, 지나간 겨울에 정세윤이 신과 함께 평안 병영으로 가기를 청하여서 함께 갔는데, 중로(中路)에서 정세윤이 신에게 ‘내가 대사(大事)를 도모하고 있지만 재력(財力)이 부족하니, 만약 병영에서 은(銀) 수백 냥만 얻는다면 일을 시작할 수가 있겠다.’고 하기에, 신이 병영에 이르러 먼저 이런 뜻을 이사성에게 시작할 수가 있겠다.’고 하기에, 신이 병영에 이르러 먼저 이런 뜻을 이사성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사성이 이내 정세윤을 청하여서 은밀히 말하였는데, 이사성이 ‘우선은 저축된 것이 없지만 추후로 만들어 보내겠다.’고 하였으며, 그가 혹시 벼슬이 갈려 서울로 올라오거나 군문(軍門)의 대장(大將)으로 옮겨 임명된다면 서로 연락하여 올라온 뒤에 서로 의논하여 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규서(李奎瑞)가 집을 판 돈이 있었기 때문에, 백 냥을 과연 얻어 와 엄악발(嚴惡發)에게 주어 정세윤에게로 전송(轉送)하여 군량(軍糧)과 군복(軍服)을 준비케 하였습니다. 정(檉)299)  과 이일(李溢)과는 모두 서로 아는 사이이고, 같은 당여(黨與)는 정세윤(鄭世胤)·이사성, 정세윤의 아우 정계윤(鄭繼胤)·원백주(元百周)·최경우(崔擎宇)·이호(李昈)이며, 반역을 계획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우선 결안(結案)하지 말고 친국(親鞫)하여 다시 신문(訊問)하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4월 14일 갑오

국청 죄인(鞫廳罪人) 김세운(金世云)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였다. 김세운은 박필몽(朴弼夢)의 겸인(傔人)300)  이니, 포도청(捕盜廳)에서 ‘김세윤이 바다를 건너 역적 박필몽을 따랐으니 종적이 수상하고, 이유익(李有翼)이 도망갈 때에 또 흥정을 붙여 말을 사 준 일이 있다.’ 하여 기찰(譏察)하여 체포하고 아뢰어 국청(鞫廳)으로 보냈는데, 임금이 겸인은 같은 도당(徒黨)으로 국문(鞫問)하여 다스릴 수 없다 하여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 포도청에 명하여 금후로는 이런 겸종(傔從)은 기포(譏捕)하지 말도록 하였다.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를 소환하였다. 그 어미가 병이 났기 때문이다.

 

이달 21일에 고묘(告廟)·진하(陳賀)를 거행케 하고, 금위영(禁衛營)의 장교(將校)를 내어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에게 유시하여 기일(期日)에 미쳐 올라오도록 명하였다.

 

역적 이인좌(李麟佐)·이웅보(李熊輔)·박필현(朴弼顯)·이사성(李思晟)·정희량(鄭希亮)·박필몽(朴弼夢)·남태징(南泰徵)·민관효(閔觀孝)·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 등 10명을 역괴(逆魁)로 정하여서 사문(赦文)과 하전(賀箋)을 모두 이에 의하여 말을 만들게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황선(黃璿)이 졸(卒)하였으니, 이때 본도(本道)에 역란(逆亂)이 막 평정되어 그 남은 무리를 제치(除治)하고 있었다. 황선은 본디 병이 없었으며, 졸(卒)한 날에도 또한 일을 보살피고 손님을 접대하며 저녁에 이르기까지도 몸이 좋았는데, 날이 어두운 뒤 된죽을 먹고 나서 조금 있다가 병이 발작하여 갑작스럽게 죽었으며, 죽은 뒤에 중독(中毒)의 증상(症狀)이 많았으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대신(臺臣)의 말에 따라 본영(本營)의 다비(茶婢)301)   및 감선(監膳)302)  하는 아전을 경옥(京獄)으로 잡아와서 죄를 다스려 고문(拷問)하였으나 실상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황선은 조정(朝廷)에 있을 때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가서 신칙(申飭)과 면려(勉勵)로 칭찬을 받았으며, 후에 큰 번병(藩屛)을 맡게 되어 영적(嶺賊)이 갑자기 창궐하였으나, 조치가 마땅함을 얻어 흉추(凶醜)를 쳐 평정하여 변란(變亂)이 겨우 진정되었는데, 별안간 졸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혹 그가 중독(中毒)되었는가를 의심하여 안핵(按覈) 조사하였으나, 마침내 실상을 알아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
황선이 이미 졸(卒)하자, 도사(都事)        이대원(李大源)이 유장(遺狀)을 봉하여 올렸는데, 이르기를,
"4월 초8일에 거창 천총(居昌千摠)        정빈주(鄭彬周)·어영 장관(御營將官) 여해달(呂海達)·금위 장관(禁衛將官) 남태정(南泰鼎)·어영 기총(御營旗摠)        배두필(裵斗必)에게 거창의 적괴(賊魁) 이웅보(李熊輔)·정희량(鄭希亮) 등을 포착(捕捉)한 곡절(曲折)을 물었더니, 이른바 대원수(大元帥)        이가(李哥)는 거창군(居昌軍)의 속오(束伍) 8초(哨) 및 그 수하(手下)의 군사 5초를 거느리고 우지치(牛旨峙)에 둔쳤는데 정빈주는 이 진(陣)에 들어갔고, 이른바 부원수(副元帥)        정가(鄭哥)는 함양병(咸陽兵) 7초, 금위군(禁衛軍)의 안음군(安陰軍) 3초 및 금위군을 거느려 합쳐 12초 남짓이 되어 소사(所沙)에 둔쳤는데, 여해달·남태정·배두필 등은 이 진에 들어갔다 하였습니다. 우지치는 바로 지례(知禮)의 지경이고 소사는 곧 무주(茂朱)의 지경으로서 두 진의 거리는 10리 남짓되었습니다. 선산 부사(善山府使)는 우지치의 도적이 있는 곳에서 10리 남짓되는 장곡역(長谷驛)에 진을 치고 고개의 험하고 좁은 곳에 복병(伏兵)시켰습니다. 정빈주는 비록 협박을 받아 진중(陣中)에 머물러 있었지만 마음은 늘 통완(慟惋)하여 매양 포착(捕捉)하려고 하였으나, 이가(李哥)의 여력(膂力)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으므로 감히 생각을 내지 못하였는데, 도적의 진중에서 대군(大軍)이 앞에 이르렀음을 알자 협박을 받은 군사들이 차츰 흩어져 갔으므로, 이가(李哥)가 거느린 군병은 겨우 2백여 명, 정가(鄭哥)의 군사는 겨우 7, 8초에 이르렀습니다. 정빈주는 적도(賊徒)의 대세(大勢)가 이미 줄어든 것을 알고 적괴(賊魁) 이가(李哥)를 향하여 총을 쏘아서 처음에 뺨 위를 맞히고 다시 왼쪽 갈빗대를 맞혔으나, 모두 깊이 상처를 입히지 못했으므로, 이가가 정가의 진중으로 달아나려고 정가의 진 근처에 이르니, 정빈주가 뒤쫓아 가서 사로잡았습니다. 이른바 부원수(副元帥)라는 정가 역적 및 나가(羅哥) 역적과 다른 나머지 적당(賊黨) 모두 17명을 여해달 등 세 사람이 또한 진중에서 죽을 힘을 내어 포착하여서 사로잡고, 금위영과 어영의 군사를 거느려 좌우(左右)의 높은 언덕에 나누어 진을 치고 정가의 수하(手下) 군사를 불러 이르기를, ‘너희들이 한 사람이라도 혹시 나온다면 마땅히 조총(鳥銃)으로 마구 쏘아버릴 것이다.’고 하니, 이른바 수하의 군사란 조총에 익숙하지 못하고 다만 철편(鐵鞭)만을 가졌기 때문에 움츠려 엎드려서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협력해 먼저 이가를 잡고 다음으로 정가의 진중(陣中)에 들어가니, 수하의 군사가 모두 흩어졌으며, 그중에서 뛰어나 보이는 자를 모두 결박하였으니, 장차 본관(本官)으로 보내어 구처(區處)할 계책을 한 것입니다.
10리 남짓한 임곡리(任谷里)의 서원(書院) 근처에 이르렀을 때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진주진 중군(晉州鎭中軍)으로써 군사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이 사로집힌 도적을 보자 빼앗아 가지고 진 속으로 들어갔으나, 정빈주는 그 적군(賊軍)을 포착한 까닭 때문에 진에 들어감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거창(居昌)에서 죽임을 당한 좌수(座首)        이술원(李述原)의 아들이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진중에 있다가 곤양 군수에게 죽이기를 청하므로, 군수가 정가와 나가 두 역적을 이술원의 아들에게 내주었더니, 이술원의 아들이 곧 머리를 베고 간(肝)을 갈랐으며, 그 나머지 이가 등 16명은 곤양 군수가 진주진(晉州鎭)으로 전송(轉送)하여 영장(營將)이 보내 온 16명을 모두 목베었습니다. 추후에 들으니, 적도(賊徒)로서 종 또는 모군(募軍) 5명을 영장(營將)이 또 베어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가의 진중에서나 나가·정가의 진중에서 안음(安陰) 사는 김태준(金兌俊)이 지휘하고 호령하였는데, 김태준에게서 적괴(賊魁)의 성명을 자세히 들어보았더니, 우지치에 결진(結陣)한 이가는 과연 이웅보(李熊輔)였는데, ‘낯에 주근깨가 있고 수염은 없으며, 키가 컸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필의 흰 노새를 타는데 그 크기가 손을 치켜올려 등에 닿는다 하였습니다. 소사진(素沙陣)의 정가는 바로 정희량(鄭希亮)인데, 낯이 얽은데다 크며 키가 크고 여력(膂力)이 있었기 때문에 결박할 때에 조총을 그 등에 세웠으며, 나가는 바로 나숭곤(羅崇坤)인데, 용략(勇略)이 있고 모든 일을 지휘했으므로 도지휘(都指揮)로 일컬어졌습니다. 역적들이 팔량현(八良峴)을 넘으려고 하니, 거창의 군병 등이 모두 ‘마땅히 이 도(道)의 군병과 합세한다면 옳겠지만, 다른 도(道)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면 옳지 못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팔량현을 넘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4월 2일 밤에 우지치를 넘으려고 하였으나 선산(善山)의 군사가 복병(伏兵)하여 길을 끊었기 때문에 감히 넘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정가 역적을 잡을 때 함양(咸陽)의 금군 장관(禁軍將官) 박정신(朴挺身)이 또한 죽을 힘을 다하여 힘을 합쳐 잡았는데, 정빈주에게 총도 있고 검(劍)도 있으므로, 도적의 무리를 죽여 없애는 것이 곧 쉽고 편리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이 역적은 다른 도적과는 달라 반드시 사로잡아 조가(朝家)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였기 때문에 혹은 도상(刀傷)도 입고 혹은 장타(杖打)도 당해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어 힘을 합쳐서 사로잡았는데도, 이 곤양 군수는 공공연하게 두 역적을 좌수(座首)의 아들에게 주어 그 사사로운 원수를 갚게 하였으니 일이 매우 부당하오며, 나머지 있는 자들은 진주 진영에서 모두 베어 죽였으니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서로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거창 좌수 이술원은 역적의 무리가 본읍(本邑)의 군사를 일으켜 나오게 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신법(新法)이라 일컫고는 머리를 베어 반면(半面)을 가로 끊으니 곧 죽었으며, 그 첩 김동일(金同日)은 자결(自決)하여 죽었습니다. 역적 중에서 차출(差出)된 좌수 김학령(金鶴齡)은 따라가지 않으려고 도망하였으며, 적진(賊陣)이 함양으로 옮겨간 뒤 향중(鄕中)에서 차출된 신명익(愼溟翊)은 역적의 무리가 돌아온 뒤에 또한 호령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써 큰 곤장(棍杖) 29도(度)를 쳤으므로 이제 아침 아니면 저녁에 목숨이 끊어지려고 합니다. 거창의 가수(假守)303)                  는 당초에 와서 마을 안에 있었으나 후에 적진이 옮겨 가게 되자 관가(官家)로 들어와서 비로소 의병(義兵)을 모집하였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았으므로, 뒤를 밟아 추격할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정빈주 등의 공초(供招) 안에 ‘적괴(賊魁) 이웅보·정희량·나숭곤 등 20여 인을 제가 적진 속에서 사로잡은 정상(情狀)이 절절이 명백하고 행군(行軍)한 처소(處所)도 자연히 뭇사람의 목도한 바이므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곤양 군수        우하형(禹夏亨)이 진친 곳은 적진에서 10리 남짓 떨어졌고 진주 영장        이석복(李碩復)이 결진한 곳은 또 우하형의 진 뒤에서 10리 남짓 뒤에 있었으니, 처음부터 교봉(交鋒)304)                  하지 않은 정상을 이에 의거해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석복의 장계(狀啓)에는 ‘군마(軍馬)를 거느리고 성초(省草)의 동변(東邊)에서 우하형을 뒤좇아 곧장 성초의 서변(西邊)을 따라 와서 앞뒤로 협격(挾擊)하자 역적이 나아가고 물러날 길이 없었으므로 위협을 받아 따랐던 장졸(將卒)의 무리가 보는 앞에서 적괴(賊魁)를 결박하여 와서 항복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정빈주 등의 초사(招辭)와 판연하게 각각 다릅니다. 금오진 절제사(金烏鎭節制使)        박필건(朴弼健)과 독용진 절제사(禿用鎭節制使)        이보혁(李普赫)의 보장(報狀)의 사연도 또한 이석복의 장계와 매우 현격한 차이가 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협격(挾擊)했다는 말은 맹랑한 데 속하며 사로잡은 도적을 중로(中路)에서 빼앗아 간 정상이 환하게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웅보 등이 어떤 죄역(罪逆)입니까? 이미 사로잡았다면 마땅히 서울로 압송(押送)하여야 하는데도 높은 공명(功名)을 취하기에 급하여 다만 머리 끊는 것만을 위주로 하였으니, 도리(道理)로 헤아려 보건대, 이미 옳지 않은 것이며, 이같은 국적(國賊)을 거창 좌수의 아들에게 던져 주어 오로지 그 원수 갚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더욱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대저 진주 영장        이석복은 당초에 흉적(凶賊)이 그가 관장하는 고을에서 일어나서 다섯 고을을 아울러 삼키고 장차 날짜를 손꼽아 북쪽으로 올라오려고 하였으니,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는 마땅히 피를 흘리며 성토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변란이 발생한 뒤에 편안하게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신의 영문(營門)에서 여러 번 재촉하여 군사를 내어 초토(勦討)케 하였는데도 줄곧 진척(秦瘠)305)                  을 보듯 관망하고 앉아서 적세(賊勢)가 날로 점점 더 창궐하게 하였으니, 그 거조를 본다면 상정(常情)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느릿느릿 군사를 일으켜 산음(山陰)의 땅에 와 머물렀는데 곧 적병이 양초(粮草)를 끊으려고 하여 형세가 전진(前進)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거짓말까지 주워 모아 장황하게 치보(馳報)하였습니다. 신이 놀라움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엄한 말로 재촉하고, 우방장(右防將) 이보혁(李普赫)·독전장(督戰將) 김진옥(金振玉)·초계 군수(草溪郡守)        정양빈(鄭暘賓) 등이 이미 합천(陜川)을 지나 거창으로 전진하였으니, 이석복이 스스로 금후로 뭉기적거린 죄를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서 적병이 달아나 지례(知禮)의 지경으로 향함을 엿보아 알고 비로소 뒤를 밟았으며, 길에서 정빈주 등을 만나자 이미 사로잡은 도적을 베어 죽여서 현요(衒耀)306)                  의 계책을 하였으니, 정상이 절통합니다.
우병사(右兵使)        이시번(李時蕃)은 이석복과 한 덩어리가 되어 군사를 모아 성문을 닫고는, 적변(賊變)이 발생한 뒤로 촉석문(矗石聞) 밖의 일을 살피지 않은 것이 열흘이나 되었으니 토포(討捕)의 한 가지 일을 이 사람에게 책임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병영(兵營)에서 70리 되는 삼가현(三嘉縣)에 군사를 정돈하여 머물러서 다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다가 그대로 파진(罷陣)하고 돌아왔으니, 그 관망만 했던 정상을 신이 전후의 장계에서 이미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비록 이 시번의 장계를 가지고 보더라도 바야흐로 일이 급박해진 뒤에 여전히 군사를 출동하는 일을 멀리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할 것을 청하였으니, 본디 도적을 칠 뜻이 없었음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만일 일분(一分)의 기강(紀綱)이라도 있다면 이 무리가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위의(危疑)한 날 헤아릴 수 없는 무리를 만약 중률(重律)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인심을 정숙(整肅)시킬 수 없으니, 이시번·이석복의 죄상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상주 영장(尙州營將)        한날(韓㻋)은 신이 재삼 재촉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도적을 치게 하였는데, 처음에는 중진(重鎭)을 가볍게 떠날 수 없다는 뜻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보고하더니, 끝에 가서는 전로(前路)의 추량(芻粮)307)                  의 수를 떠벌리며 말해 신으로 하여금 마련하여 공급케 하여서 가는 것을 정지하도록 만들 계책을 꾸몄으며, 엄한 말로 재촉한 뒤에야 비로소 느릿느릿 행군(行軍)하여 이르는 곳마다 머물러 겨우 지례현(知禮縣)에 이르렀으나, 조금도 전진할 뜻이 없다가 그대로 파진(罷陣)하고 돌아왔으니, 군중(軍中)의 의기(義氣)를 분발(奮發)하는 인사(人士)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통분(痛憤)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죄도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안동 영장(安東營將)        김정상(金鼎相)은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케 하였더니, 이웃 지경인 의성(義城)에 당도한 뒤에 신의 영문에 일을 품(稟)한다고 핑계대고서 행군한 지 3일에 의성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저히 배회하는 정상이 있더니, 곧 행군에 폐단이 있다는 이유로 적괴(賊魁)의 초멸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파병(罷兵)하여 진영(鎭營)으로 돌아왔습니다.
초계 군수(草溪郡守)        정양빈은 좌방장(左防將)에 임명하고 이웃 고을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적도(賊徒)를 치게 하였는데, 허둥지둥하고 겁을 집어먹어 한결같이 뒤로 물러서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병부(兵符)를 발송(發送)하여 장차 군법(軍法)으로 종사(從事)할 것임을 보인 연후에야 겨우 한 고을의 군사를 거두어 모아서 앞으로 성주진(星州鎭)으로 달려갔으며, 합천을 가서 칠 때는 혹은 길을 나누어 나아가게 하기도 하고, 혹은 험애(險阨)308)                  에 웅거하여 지키게 하기도 했는데, 줄곧 머리를 흔들고 다만 성주군(星州軍)의 후미(後尾)에 쓸데없이 붙어 있었을 따름이니, 그 버릇이 매우 가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함께 합천에 갔고 또 나란히 거창에 나아갔으니, 그 사이에 힘써 주선한 일이 없지 않았습니다. 안음(安陰)의 전(前) 현감(縣監)        오수욱(吳遂郁)을 이제 비로소 잡아왔는데, 삼가(三嘉)의 전 현감        이정수(李廷秀)도 논죄(論罪)할 때에 다르게 할 수가 없으므로 똑같이 잡아왔습니다. 오수욱은 흉적(凶賊)이 본현(本縣)의 옛 고을에서 처음 일어났을 때 그 수효가 몇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고을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군사를 내어 초토(勦討)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칼을 찬 도적 한 사람을 보고서 허둥지둥 달아나 피하여서 마침내 적도(賊徒)를 강대하게 만들어 곁의 고을을 연이어 함락시키게 하였으며, 이정수는 적도가 합천을 함락시킨 뒤 영문의 분부(分付)로 인하여 군병을 관아(官衙)의 문에 모은 뒤에 적병이 이르지 않았는데도 한갓 헛소문만 듣고 군사를 버리고 달아나서 본 고을의 좌수(座首)가 군사를 거느려 도적에게 몸을 던져 항복하게 하였으니, 놀라운 사연(辭緣)을 각별히 엄중하게 구핵(究覈)하여서 조목(條目)으로 밝힌 뒤에 곤장 20도씩 쳐서 방송(放送)할 일을 치계(馳啓)합니다."
하였다.


 

 

 

영남 어사(嶺南御史) 박문수(朴文秀)를 발탁하여 본도(本道)의 감사(監司)로 삼고 명하여 조사(朝辭)309)  를 그만두고 부임(赴任)하게 하였다.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이종성(李宗城)을 영남 어사(嶺南御史)에 임명하여 당일로 내려보냈다. 이종성이 사폐(辭陛)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난역(亂逆)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경연(經筵)을 여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제 멀리 지방으로 나가는 때에도 오히려 헌체(獻替)310)  에 마음을 두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유신(儒臣)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에 권면하여 경계한 말을 마땅히 유의하여 잊지 않겠다. 서치(鋤治)311)   1절(節)에 이르러서는 엄격을 숭상해야 하는 법이니, 비록 삼대(三代)의 뜻은 아니지마는, 제갈양(諸葛亮)이 촉한(蜀漢)을 다스릴 적에도 또한 오히려 엄격을 숭상했으니, 옛말에는 ‘간척(干戚)의 춤은 평성(平城)의 포위를 능히 풀 수가 없다.’312)  고 하였다. 백성을 불러 편안히 모으는 것이 비록 먼저 힘쓸 일이나 영상(領相)의 서치(鋤治)해야 한다는 말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름지기 은혜와 위엄을 다같이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친국(親鞫)하였다. 안엽(安燁)을 두 차례 형벌하니, 안엽이 공초하기를,
"신이 평안 병영(平安兵營)으로 갈 때, 정세윤(鄭世胤)이 ‘평안 병사를 보고 반역을 도모하는 일을 말하여 은(銀) 수백 냥을 얻는다면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하고, 신으로 하여금 이사성(李思晟)에게 부탁하기를, ‘세상이 어지럽기 이와 같으니 녹림(綠林)313)  의 군사를 모아 아무 곳으로 가서 일을 일으키려 한다. 정세윤이 화적(火賊)의 무리를 거두어 모았던 것이 이미 여러 해 되었으며 그가 매양 병서(兵書)를 안다고 칭찬하면서 임인년314)  ·계묘년315)   이래로 이미 이 말이 있었는데, 갑진년316)  에 이 계획이 크게 전파되더니, 근래에 비로소 원백주(元百周)·이호(李昈)·최경우(崔擎宇)·정세윤의 아우 정계윤(鄭季胤) 등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녹림병(綠林兵) 몇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필경 거의 6, 7백 명에 이르렀으므로, 삼남(三南) 중에서 그 웅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웅거하려고 했는데, 전라도(全羅道)에서는 정세윤이 주장하여서 나숭대(羅崇大)가 녹림병 수백 명을 모아 이에 응(應)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갑진년 3월에 신이 가서 정세윤을 보고 적변(賊變)을 물었더니,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끝에 가서 이호가 신에게 자세히 말하기를, ‘처음에는 초구(草寇)317)  의 계책을 하였으나 도당(徒黨)이 이미 많아졌고 얻은 바도 또한 많아졌으므로, 비로소 반역을 도모할 마음을 일으켰다.’고 하였습니다. 가서 나숭대를 만났더니 호남에 웅거할 계책을 한다고 하였으며, 정세윤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신에게 다시 이사성과 의논하기를 요구하기에, 장차 평안 병영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적변(賊變)이 이미 일어났음을 듣고는 가는 것이 무익하였기 때문에 이내 원주(原州)로 옮겨 피하였습니다. 평안 병영에서 수작(酬酌)한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세윤이 이사성에게 ‘내가 군사 5, 6백 명이 있고 최경우도 또한 5, 6백 명이 있으니, 반드시 은화(銀貨)를 얻는다면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이사성이 ‘은화는 이 뒤에 마땅히 보내 주겠으며, 4, 5월에 벼슬이 갈려 돌아간다면 내응(內應)할 수 있다.’고 하고, 또 ‘나의 팔자(八字)를 본다면 4월 무렵에 서울로 올라갈 운수(運數)가 있으니, 훈련 대장(訓鍊大將)은 비록 쉽지 않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군문(軍門)의 대장이 된다면 도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서로 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적이 일어난다면 나라에서 반드시 마땅히 나를 시켜 이를 치게 할 것이니, 안에서 응할 수 있고, 남태징(南泰徵)도 또한 나와 모의(謀議)를 같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평상시에 이사성을 기이(奇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일마다 이사성의 말이면 따랐습니다. 이사성이 정세윤에게 ‘군병을 많이 얻을 필요는 없다. 만약 적변(賊變)을 듣는다면 나라에서 반드시 나를 시켜 군사를 거느려 치게 할 것이니, 이때를 타서 군사를 합친다면 쉽사리 원조가 될 수 있다.’고 하고, 또 ‘4월에 만약 벼슬이 갈리지 않는다면 어찌 대각(臺閣) 안의 한 사람을 얻지 못하겠는가? 탄핵하는 글을 만들어 내가 써 보낼 것이니, 만약 탄핵으로 벼슬이 갈리게 된다면 서울로 올라가서 정세윤과 화응(和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다른 계책이 없었으므로 혹은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상종(相從)하였는데, 이사성이 천문(天文)·지리(地理)에 통달하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믿고서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다시 김옥성(金玉成)을 추문(推問)하였는데, 김옥성이 공초하기를,
"정상을 알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법대로 참형에 처하였다.


 

국청(鞫廳)의 수인(囚人) 김진협(金震浹)·김당(金塘)·이흥주(李興柱)를 놓아 주었다. 김진협 등이 잡혀와서 여러 번 신문(訊問)하였으나 실상(實狀)을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놓아준 것이다.

 

박사관(朴師寬)에게 신문하였으니, 박사관은 박필몽(朴弼夢)의 맏아들이다. 두차례 형벌하니, 박사관이 공초하기를,
"무장(茂長)으로 가는 길에 태인(泰仁)에 들렸더니, 관아(官衙)의 문에 결진(結陣)하고 있었습니다. 박필현(朴弼顯)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감영(監營)에서 급한 관문(關文)이 방금 이르러 군병을 올려보내라고 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모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내가 전주(全州)에서 오는데, 급한 관문으로 군사를 올려보내라는 일을 듣지 못하였다. 어찌 급한 관문이 있다고 말하는가?’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네가 어찌 알겠는가? 우선 무장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머무르라.’고 하면서 신을 만류했습니다. 박필현이 군사를 거느려 나오고 이어 내행(內行)318)  을 거느렸는데, 박필현이 말하기를, ‘전주(全州)로 함께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금구(金溝)의 길로 가지 않고 귀산(龜山)의 소로(小路)를 따라 갔으므로, 신은 그제야 몸을 피하여 도망하였습니다. 신의 아비는 무장에 있었고 신은 전주에 있었으므로, 전주에서 무장까지의 거리가 2백 리이니, 전주에서 태인(泰仁)으로 간 것은 신의 아비가 보낸 것이 아닙니다. 이하(李河)는 다른 사람 집에서 한번 만나 보았을 뿐입니다. 청주(淸州)의 변란이 발생하기 전에 박필현이 신에게 ‘오래지 않아 호서(湖西)에 마땅히 변란이 있을 것이다.’고 하고, 또 ‘경기(京畿) 사람이 충청도(忠淸道)에서 일어나 장차 청주를 칠 것인데, 청주에서 변란이 이미 발생한다면 대구(大丘)와 안동(安東)에서 반드시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19일에 신이 청주에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길에서 듣고 태인으로 들어갔는데, 박필현이 ‘내 말이 어떠한가? 비단 호서(湖西)뿐만이 아니라, 영남(嶺南)의 변보(變報)도 또한 장차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기에, 신이 ‘우리집이 세상의 그물에 걸리어 3년 동안이나 변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찌 이런 말을 하나?’라고 하였으니, 신이 어찌 박필현과 이하의 반역을 도모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박필현과 이하는 ‘너는 죄화(罪禍)를 입은 집 사람이니 들어오기를 권할 필요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박필현이 신에게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는 곧 너의 지친(至親)이다.’라고 하였으니, 정사효는 신의 어미와 4촌이 되기 때문에 지친이라고 한 것이며, 그가 태인에 와서 정사효로 하여금 그 반역을 도모하는 일을 알게 하려고 하여 신으로 하여금 가서 전하게 하였으나 정사효는 매우 정밀(精密)한 사람이니 어찌 감히 이 말을 꺼냈겠습니까? 맨 먼저 반역을 도모하는 의논을 꺼낸 것은 곧 이하입니다. 이하는 주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이미 흉계(凶計)를 냈으니, 밀풍군(密豐君)과 집을 연이어 살았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이 계책을 낸 것이며, 김일경(金一鏡)의 외손(外孫)이 이하의 사위가 되는데, 김일경이 주상을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말을 수없이 하였기 때문에 이하가 이 계획을 한 것입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4월 15일 을미

임금이 하교하기를,
"병변(兵變)이 일어난 이래로 각처(各處)의 강진(江津)과 요로(要路)에 모두 파수(把守)가 있었으나, 시일(時日)이 이미 오래 되매 비단 군졸(軍卒)이 한데서 지내는 것이 깊이 가엾을 뿐만 아니라, 행려(行旅)가 이르는 곳마다 길이 막히어 백성을 괴롭힘이 적지 아니하니, 위촉(委囑)이 염려스럽다. 더욱이 지금 난역(亂逆)이 평정되었으니, 더욱 마땅히 한결같이 방수(防守)하게만 할 수는 없다. 각처의 강진과 요로의 파수를 한결같이 모두 치워 버리고 군사 등을 당일로 돌려보내서 사민(士民)으로 하여금 안정하여 동요됨 없이 농상(農桑)에만 전념하게 하라. 도신(道臣) 및 수령(守令)들은 모름지기 나의 백성 보기를 다친 자를 보듯 하는 생각을 본받아 별달리 편안하게 하고 품어 어루만져서 사랑하여 긍휼(矜恤)하는 도리를 다하게 하라."
하였다.

 

고변인(告變人) 김중만(金重萬)·정관빈(鄭觀賓)을 놓아주고 김중만을 실직(實職) 동지(同知)에 정관빈을 실직 첨지(僉知)에 임명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장복(章服)을 주어서 사은 숙배(謝恩肅拜)시키게 하라고 명하고, 역적의 집 각 1구(區)와 노비(奴婢)·미석(米石)을 내려 줌이 차등이 있었다. 정관빈이 상소(上疏)하여 스스로 공이 없음을 일컫고 또 과거에 나아가고자 함을 말하고 가자(加資)를 사양하니, 임금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이를 허락하고 다시 별제(別提)에 임명하였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유척기(兪拓基)의 벼슬을 갈아 양주진 방어사(楊州鎭防禦使)를 겸임(兼任)하게 하라고 명하고, 선전관(宣傳官)의 궐내(闕內) 별입직(別入直)을 폐지하고 서북 안무사(西北安撫使) 윤헌주(尹憲柱)·조지빈(趙趾彬)에게 유시(諭示)하여 서울로 올라오게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친국(親鞫)하였다. 역적 민관효(閔觀孝)의 족속인 민천효(閔天孝), 이인좌(李麟佐)의 족속인 이덕좌(李德佐) 및 국청 죄인(鞫廳罪人) 이진좌(李震佐)·이유좌(李儒佐)·이숙(李熽) 등을 절도(絶島)에 정배하였다. 장령(掌令) 강필신(姜必愼)이 처음에 민관효·이인좌 두 역적의 족속은 시마(緦麻)·대소공(大小功) 이하의 친족을 모두 정배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의 시마·대소공의 친족을 처벌하는 것은 국법(國法)에 어긋난다고 간(諫)하니, 임금이 다만 그 가운데 행지(行止)가 수상한 자만을 처벌하게 하여 드디어 민천효·이덕좌를 정배하고, 이진좌·이유좌 등은 여러 번 문초하였으나 실상은 알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작처(酌處)를 명한 것이다.
안정(安𤊟)을 두 차례 형벌하니, 안정이 공초하기를,
"용인(龍仁)의 정대윤(鄭大允)이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과 반역을 도모하면서 그 6촌인 정계윤(鄭季胤)을 남중(南中)319)  으로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오게 하고, 그는 안에서 이에 응하여 주도하게 준비하고 모의하였습니다. 신은 연소하여 비록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과연 이를 들었으니, 이일(李溢)이 신의 집에 왕래하기 때문에 이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이일(李溢)을 한 차례 형벌하니, 이일이 공초하기를,
"3월 12일 밤에 안정(安𤊟)이 신에게 ‘소란스러움을 너는 알고 있는가? 이는 다른 나라의 난리가 아니고 바로 나라 안의 난리이다. 내 형이 장차 너를 쓰려고 하지만 네가 너희 족속에게 말을 전하여서 큰 일이 날까 두렵다.’고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나는 용력(勇力)과 지략(智略)이 없으니,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안정이 이내 함께 호산(壺山)의 집에 가기를 요구하여 고개 위에 이르러 머물러 앉아 호산을 청하여 와서 귓속말을 하는데, 신이 가만히 들으니, 호산이 ‘만약 보전(保全)한다면 이도 군주(君主)이고 저도 군주인데 무슨 해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정상을 알고 있었음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에 처하기를 법대로 하였다.
이진유(李眞儒)·이명의(李明誼)·서종하(徐宗廈)·윤성시(尹聖時)를 국안(鞫案)에서 빼내라고 명하고 이내 남간(南間)320)  에 가두게 하였다. 처음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로 의심을 받았으므로 모두 잡아 오게 하여 임금이 직접 신문하였는데, 취초(取招)하게 되자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뒤에 이명의는 역적 임서봉(任瑞鳳)의 근친(近親)으로서 서로 내통했다 하여 장(杖)을 맞고 죽었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안경우(安慶祐)를 석방하였다. 안경우는 곧 정관빈(鄭觀賓)의 표숙(表叔)321)  인데 정관빈에게 말을 빌려주고 그를 따라 수원(水原)에 갔다가 수원에서 함께 올라 오는 도중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석방되었다.
군문(軍門)에다 이만광(李萬光)을 효시(梟示)하라고 명했다. 초사(招辭)가 부도(不道)했다 하여 즉시 참(斬)하라고 명한 것이다.


 

안익태(安益泰)를 두 차례 형신(刑訊)하였는데, 안익태가 공초(供招)하기를,
"실정을 안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함양 군수(咸陽郡守) 박사한(朴師漢)이 적장(賊將) 심수명(沈壽明), 안음(安陰)의 위현감(僞縣監) 신수헌(愼守憲)과 그의 아들 신윤증(愼潤曾) 등을 체포하여 효시(梟示)하였고, 적당(賊黨) 이만채(李萬采)·이익춘(李益春)·정규서(鄭奎瑞) 등은 엄중히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한세능(韓世能)을 두 차례 형신(刑訊)하였다. 한세능이 공초하기를,
"영남(嶺南)에는 왕래한 일이 없고 작년 겨울 서울에 와서 들은 것이 있습니다. 이유익(李有翼)을 만났는데, 이유익이 ‘불궤(不軌)를 도모한 일이 있어 호남(湖南)에서 군대를 일으켰는데 내응(內應)할 일이 있다.’ 하고, 신으로 하여금 신의 형(兄)에게 전하게 했습니다. 신의 형이 한식(寒食) 때 원주(原州)로 왔기 때문에 신이 과연 이유익의 말을 전했더니, 신의 형이 ‘내가 서울에 올라간 뒤에야 상세히 알 수 있다.’ 했습니다. 그뒤 신의 형이 신에게 서한을 보내어 ‘시사(時事)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영남의 일은 이인좌(李麟佐)가 담당하였다.’ 하고 군사를 일으키는 계책을 말하였으니,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장령(掌令) 강필선(姜必善)이 아뢰기를,
"이인좌(李麟佐)·민관효(閔觀孝)의 시마(緦麻)·대소공(大小功) 이상의 친척을 모두 도배(島配)하도록 청하였으나, 성비(聖批)에 법 밖의 일이라 하여 어렵게 여기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아주 가깝고 흉녕(凶獰)한 자들은 서울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의 자손은 똑같이 섬으로 귀양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강필신이 아뢰기를,
"이홍보(李弘輔)를 지금 막 먼 곳에 귀양보냈는데, 이의징(李義徵)·이석징(李碩徵)의 자손도 온 가족이 악역(惡逆)을 저질렀으니, 이유좌(李儒佐)·이진좌(李震佐)와 똑같이 섬으로 귀양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그대로 따랐다.

 

4월 16일 병신

국청 죄인(鞫廳罪人) 안익태(安益泰)를 사형(死刑)을 감면시켜 절도(絶島)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안익태가 실정을 알았다고 지만(遲晩)322)   했는데, 임금이 안익태가 정관빈(鄭觀賓)과 함께 수원(水原)에다 고발할 수 없었던 것은 사세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요, 관망(觀望)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참작하여 작처한 것이다.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장계를 올려 인죄(引罪)하기를,
"마병(馬兵)과 표하군(標下軍)을 중군 별장(中軍別將)을 시켜 나누어 인솔하고 서울로 돌아가게 하겠으며, 신은 백의(白衣)로 뒷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간곡한 내용의 답서(答書)를 내려 즉시 군대를 인솔하고 올라오게 하였으며, 선전관(宣傳官)을 시켜 말을 타고 달려가서 회유(回諭)하게 하였다. 처음에 오명항이 안성(安城)에 도착하기 전에 대신(臺臣) 신노(申魯)가 머뭇거리고 있다고 지척(指斥)하자 임금이 엄한 하교를 내려 죄책을 가하여 파출시켰다. 그리고 출정(出征)할 적에 편전(便殿)에서 하직하면서 말하기를,
"이사성(李思晟)이 체포되었을 경우 실상이 없으면 중군(中軍)으로 하송(下送)시키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경(卿)이 아니면 반드시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오명항이 오히려 황공스럽게 여겨 이를 이유로 인죄(引罪)한 것이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청하기를,
"이정열(李廷說)의 죄상은 소모사(召募使) 유숭(兪崇)에게 문의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임금이 유숭을 인견(引見)하고 하문하자, 대답하기를,
"군인들이 ‘도적들이 떠난 뒤 이정열이 군대를 이끌고 왔다.’고 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도적이 처음 왔을 적에는 피했었지만 적도(賊徒)들이 위세를 부리고 공갈하면서 그의 인부(印符)를 찾자 이정열이 겁이 나서 내어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죄를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공주(公州)의 전(前) 영장(營將) 김구령(金九齡)과 충주(忠州)의 전 영장 신익흠(申益欽)을 잡아다가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소모사(召募使) 유숭(兪崇)이 적을 잘 토벌하지 못했다 하여 죄줄 것을 청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나숭의(羅崇誼)를 한 차례 신문(訊問)하였으나, 나숭의가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이어 사람들을 물리칠 것을 청하고 이호(李昈)가 간 곳을 고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이호가 경상도 칠곡(漆谷)으로 갔는데, 이호의 처부(妻父)인 윤휴(尹鑴)의 아들인 전(前) 별제(別提) 윤경제(尹敬濟)의 집입니다."
하니, 사람을 보내어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국청 죄인(鞫請罪人) 안박(安鑮)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고 성탁(成琢)을 석방시켰다. 안박은 적당(賊黨)이었지만 능히 봉조하(奉朝賀)에게 고하여 상문(上聞)하게 한 공이 있었다 하여 참작해 조처한 것이다. 성탁은 남태징(南泰徵)과 사교(私交)가 있는 것으로 의심했는데, 형신을 가했지만 사실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고발한 사람을 죽일 수 없다 하여 방송(放送)시켰다.


 

 

 

조세추(曹世樞)를 신문(訊問)하였다. 조세추는 이인좌(李麟佐)의 표종제(表從弟)로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재로(金在魯)가 체포하여 취초(取招)한 다음 서울로 올려 보냈다. 한 차례 형신을 가하니, 조세추가 공초(供招)하기를,
"3월 7일에 광주(廣州)를 떠나 출발했고 10일에 문경(聞慶)으로 들어갔는데, 이인좌가 이미 6일에 충주(忠州)·양성(陽城)을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안동(安東)의 권구(權榘)·권덕수(權德修) 부자(父子)와 유몽서(柳夢瑞)도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유몽서가 권덕수가 있는 곳에서 이능좌(李能佐)의 집에 와서 권덕수의 말을 전했는데, 이것은 신이 직접 들었습니다. 예천(醴泉)의 이윤사(李允師), 상주(尙州)의 김홍수(金弘壽), 중산(中山)의 황침(黃沈), 선산(善山)의 이도(李燾) 형제와 오붕만(吳鵬萬)이 들어갔다는 말은 이능좌에게서 들었습니다. 충주의 민원보(閔元普) 형제가 제일 먼저 이웅좌와 서로 의논하였고 임서호(任瑞虎)·권서봉(權瑞鳳)의 3형제와 서울의 이언좌(李彦佐)·유내(柳徠)·조상(趙鏛)도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매양 은어(隱語)로 말했기 때문에 신은 상세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2월 13일에 청주적(淸州賊)의 군관(軍官)이 이인좌의 집에 와서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이 사신(使臣) 이가(李哥)와 함께 올라온다.’고 했는데, 그가 사신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이명언(李明彦)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평안도의 군대는 호병(胡兵)처럼 꾸며가지고 올라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해미(海美)의 영장(營將)이 군대 3천 명을 이끌고 올라온다고 했는데,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신석영(申錫永)은 여주(驪州)에 사는데 우윤(右尹)을 지내다가 귀양가서 죽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이 사람과 동작(銅雀) 나루에 살다가 문경으로 이사를 간 이세주(李世舟)란 사람도 그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은 현감(報恩縣監)        조문보(趙文普)도 승도(僧徒)들을 이끌고 온다고 했습니다. 이능좌가 가서 권구를 만났더니 처음에는 허락했다가 뒤에 등불을 밝히고 앉아서 얼굴을 본 다음에 ‘형세를 보아가면서 하자.’고 했고, 권덕수·김민행(金敏行)·유몽서도 역시 형세를 보아가면서 하겠다고 하자, 이능좌가 분노하여 유몽서를 꾸짖기를, ‘유독 우리들만 죽을 곳으로 들어가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적도(賊徒)들 가운데는 한 번 생각하고 두 번 생각하고 세 번 생각한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모의하고서 자신이 스스로 간 사람은 한 번 생각한 자이고, 같이 모의하고서 자기의 아들을 보낸 사람은 두 번 생각한 사람이고, 같이 모의하고서 자신과 아들이 모두 가지 않은 사람은 세 번 생각한 자입니다. 이는 충주(忠州)의 의논이요, 영남(嶺南)의 말이 아닙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이삼(李森)을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처음 조세추(曹世樞)의 공초에서 황익재(黃翼再)가 스스로 의병(義兵)이라고 일컬었고 이삼의 내응하기로 했다는 말을 이인좌의 군관(軍官)에게서 들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군관에게서 들었다는 말은 매우 허술하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미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으니 허실(虛實)을 논할 것도 없이 1차 잡아다가 국문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가 불량한 조카와 서로 내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금부 당상(禁府堂上) 이병상(李秉常)이 말하기를,
"역옥(逆獄)은 엄중한 것인데 그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들어 있는 자를 매양 덮어두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에 있어서도 대질(對質)하여 깨끗이 벗어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후 역적의 공초에 이삼이 들어 있다고 일컬은 자도 있고 들어 있지 않다고 일컬은 자도 있으므로, 준신(準信)할 수가 없다. 이삼에게 그와 같은 불량한 조카가 있었다면 반드시 이미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와서 바쳤을 것이다."
하였다.


 

 

 

4월 17일 정유

감호제군사(監護諸軍使) 윤순(尹淳)이 조정으로 돌아와 명을 기다리니, 임금이 명을 기다리지 말고 들어오라고 하였으므로 윤순이 입대(入對)하였다. 처음 이삼과 윤순이 함께 역적 조세추(曹世樞)의 공초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이삼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조금이라도 경(卿)을 의심했다면 다른 장수로 대임(代任)하는 것이 무어 어렵겠기에 중권(中權)을 제수했겠는가?"
하고, 윤순에게 이르기를,
"경이 당한 경우는 생각하면 절통(絶痛)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결안(結案)할 적에 이미 무고(誣告)였다는 것을 승복받았으니, 경에게 어찌 조금이라도 안심(安心)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니, 윤순이 말하기를,
"신이 스스로 변해(辯解)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누누이 위유(慰諭)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여러 진영(陣營)을 두루 살펴보니, 기계(器械)가 좋지 못했고 절제(節制)도 매우 허술했는데, 믿을 것이라고는 군심(軍心)뿐이었습니다. 신이 진문(陣門)을 열고서 주상(主上)의 교서(敎書)를 선포하니, 도성에 있던 친병(親兵)들이야 명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만, 먼 지방의 속오군(束伍軍)으로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까지도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뻐 뛰면서 전진(戰陣)을 향하는 것을 낙지(樂地)로 달려가듯이 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점고(點考)할 때에는 하나도 빠지거나 도망한 사람이 없었고, 약한 아이들과 허리굽은 노인도 풍문을 듣고 모이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안성(安城)·죽산(竹山)의 첩보(捷報)가 도착하기 전이었습니다만, 이미 이 일로써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신이 전주(全州)에 도착하였는데, 방백(方伯)의 장계(狀啓)에 원래 경급(警急)한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은 조정이 경동(驚動)할까 우려해서였던 것이므로, 관군(官軍)이 며칠만 지체되었더라면 흉도(凶徒)들이 대대적으로 모이는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저 임실(任實)의 회미산(回美山) 속에 불러 모인 적도들이 있었는데, 시기를 타고 변란을 일으키려 했었으나 여러 고을에서 영남의 적도들 때문에 군대를 모아 방수(防守)했고 남원 현감(南原縣監)이 또 사람을 풀어 기포(譏捕)했기 때문에 적당들이 각기 스스로 흩어져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각 고을의 기찰(譏察)에 의거 체포되어 옥에 갇힌 사람이 수효가 많았고, 자복(自服)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박필현(朴弼顯)의 무리와 계모(計謀)가 조금 달랐던 것은 박필현의 무리가 군대를 일으켜 팔도(八道)가 마구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그들 무리는 그대로 호남(湖南)을 할거(割據)하려고 했다 합니다. 승복한 적도들이 끌어들인 3인은 중으로 이름이 대유(大有)라는 자와 술사(術士) 송하(宋賀)와 순창에 사는 성가(成哥)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유는 지리산의 굴속에 숨어 있고 송하는 도주했으며 성가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신이 호남으로 향할 적에 회덕(懷德)을 지나갔는데 모두들 ‘윤휴(尹鑴)의 집에 모여서 군사를 일으켜려 한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모두 전언(傳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이런 내용을 병영(兵營)에 말하였습니다만, 병사(兵使)가 움직일 마음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변란이 발생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군병들이 역적들을 따라갔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박종원(朴宗元)이 성(城) 안으로 몰아넣어 위협하고 공갈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순역(順逆)을 분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적중(賊中)에서 영(令)을 들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때 인근의 수령(守令)들 가운데 수백 명의 군병을 이끌고 와서 성중(城中)에 고유(告諭)했더라면 그 적도들을 빠짐없이 모두 체포했을 것인데,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수량(李遂良)은 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몸소 사졸(士卒)들의 앞장을 섰으니, 그 공이 큽니다. 이만빈(李萬彬)은 육박전을 벌려 죽산(竹山)의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박찬신(朴纘新)이 선봉(先鋒)이 되어 많이 죽이고 노획했으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피난차 떠났던 사람들이 또한 그 가운데 뒤섞여 죽었다고 합니다. 이행검(李行儉)의 진중(陣中)에 40여 인의 수급(首級)이 달려 있었고 진문(陣門) 밖에도 수급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별군직(別軍職) 박세재(朴世梓)가 벤 사람이 13인인데 죽산 백성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일컬었습니다. 대저 허씨(許氏)와 조씨(趙氏)의 두 양반(兩班)이 사는 마을에 어떤 적도(賊徒)가 숨어 있었는데, 두 양반들과 마을의 장정들이 힘을 합쳐 포획(捕獲)하여 묶은 다음 이행검의 진중(陣中)으로 끌고 갈 즈음이 야밤이었습니다. 그런데 행군하는 박세재의 군대를 만나게 되었던 바 박세재의 군대가 모두 적당들인가 의심하여 여러 사람이 일제히 총을 발사하였으므로 전부 살해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죽산 백성들 가운데 박세재(朴世梓)의 군대에게 죽은 사람들은 본고을에서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고 그 가속(家屬)들은 돌보아 구휼(救恤)하게 하였다.
수원(水原)의 군대인 2초(哨)에서 박동추(朴東樞)를 따라 전장(戰場)으로 달려갈 것을 자원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시상(施賞)할 것을 명하였다. 감호사(監護使) 윤순(尹淳)의 말을 따른 것이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조경(趙儆)을 잉임(仍任)323)   시키라고 명하였다. 조경이 장계을 올려 심유현(沈維賢)을 파직시키게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국(庭鞫)하였다. 다시 이정(李檉)에게 두 차례 형신(刑訊)을 가하니, 정이 공초하기를,
"신이 3월12일에 적모(賊謀)를 알았습니다만, 즉시 발고(發告)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증거댈 만한 문서(文書)가 없고, 일이 허술한 데에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주저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안정(安𤊟)이 와서 ‘서울에 올라가 고변(告變)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밀풍군(密豐君)이 했다고 하니, 무슨 관계될 것이 있겠는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저도 임금이고 이도 임금이니 내가 어떻게 그 가운데 참여하여 고변(告變)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과 안정이 부도(不道)한 말을 주고받았으니, 대역(大逆)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교형(絞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민원보(閔元普)를 세 차례 형문(刑問)하니, 민원보가 공초하기를,
"윤상정(尹尙鼎)의 아들이 신의 집에 와서 흉격(凶檄)에 관한 일을 본 것은 사실입니다. 역적이 흉격을 만들어 여러 고을로 보낼 적에 신의 집이 연풍(延豐)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 고을 좌수(座首)가 그것이 관청의 소식이라는 이유로 등서(謄書)하여 신의 집으로 보냈으므로 윤상정의 아들이 마침 그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4월 18일 무술

계원장(繼援將) 박동추(朴東樞)가 군사를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 도착하였다. 이들을 위하여 호궤(犒饋)를 베풀고 방견(放遣)하라고 명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조현명(趙顯命)에게 명하여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동작(銅雀) 나루에서 노문(勞問)하고 장사(將士)들을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국청 대신(鞫廳大臣)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역적(逆情)의 허실은 애시당초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엄중히 조사하여 처단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번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던 사람 가운데 무고(誣告)임을 자복(自服)한 말에 대해서는 원래 논할 것이 없는 것이므로, 흉적(凶賊)이 살해하기 위해 그랬다는 공초가 신빙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밖에 명자(名字)가 발고(發告)에서 자주 나와서 매우 상세한 경우에는 그 정실(情實)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잡아다가 엄중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 감사 이광덕(李匡德)이 장계를 올려 역적 한익명(韓益命)·송하(宋賀)·김익정(金益鼎) 등을 체포하여 올려보낸다는 것과 또 역적 박필현(朴弼顯)의 족속인 박필희(朴弼希)를 체포하여 보낸다는 것을 아뢰었다.


 

 

 

4월 19일 기해

사도 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군대를 정돈하여 조정으로 돌아와 남쪽 성 밖에 진을 쳤는데, 임금이 숭례문(崇禮門)의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영접하였다. 승지 조명신(趙命臣)·조현명(趙顯命)을 시켜 마군(馬軍)과 보군(步軍)을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덕이 없는 소치로 그대들이 출정(出征)하여 외지(外地)에서 노숙(露宿)하게 한 것이 거의 1개월 남짓이나 되었다. 내가 이를 생각하면 금의(錦衣)·옥식(玉食)도 마음에 편안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그대들이 서로 힘을 합친 것에 힘입어 흉적(凶賊)을 깨끗이 쓸어 내고 왕사(王師)가 빨리 돌아왔으니, 나의 기쁘고도 다행스런 마음 어찌 끝이 있겠는가? 먼 길을 바삐 달리는 즈음에 반드시 손상된 것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매우 염려하고 있다. 궐문(闕門) 밖에 이르러 호궤(犒饋)를 받은 뒤에는 마땅히 즉시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와 처자(妻子)들을 만나 보도록 하라."
하였다. 또 도승지        김취로(金取魯)를 시켜 오명항을 위로하기를,
"어제 승지를 보내어 위문했지만, 이제 또 문루(門樓)에 나가서 경(卿)이 반사(班師)하여 궐문 밖에 주둔한 것을 보니, 기쁘고 흐뭇한 마음 견딜 수 없다."
하니, 오명항이 대답하기를,
"하늘의 신령함을 힘입어 흉적(凶賊)을 섬멸하였고 군사들도 한 명의 손상자가 없는데, 이러한 위문을 받드니 황공스럽고 감격스런 눈물이 흘러 진달한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오명항이 노포문(露布文)324)                  을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큰 교화로 중생(衆生)들을 훈도하여도 효경(梟獍)325)                  같이 사나운 성품은 변혁시킬 수 없고 하늘이 인후(仁厚)함으로 만물을 배양하여도 상설(霜雪)의 위엄은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虞)나라와 주(周)나라 때 삼묘(三苗)326)                  와 서국(徐國)327)                  이 왕명에 항거했고 당(唐)나라와 진(晉)나라 때 주자(朱泚)328)                  와 왕돈(王敦)이 난리를 일으켰으며, 가까이는 이괄(李适)이 서곤(西閫)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인거(李仁居)329)                  가 동관(東關)에서 변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모두 타고난 흉추(凶醜)들로 스스로 왕장(王章)을 범하였으므로 승리를 다짐하는 군대를 출동시켜 천토(天討)를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전하의 예산(睿筭)에 힘입어 감히 역적인 포로들을 바칩니다. 삼가 주상 전하께서는 항상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니시어 그토록 신무(神武)스러웠음에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영성(盈盛)된 왕업을 안존(安存)시킴에 있어서는 깊은 연못에 가서 엷은 얼음을 밟듯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지켰으며, 화락한 인덕(仁德)에 근본하여 광대한 산수(山藪)에 작은 해독(害毒)을 감추어 주었습니다. 도거(刀鋸)330)                  를 오랫동안 폐지시켜 죄가 있든 죄가 없든간에 한결같이 생성(生成)의 은택을 베풀어 주었고, 낭유(稂莠)331)                  를 제거하지 않고서 죄가 있는 자는 오형(五刑)332)                  에 의거 죄주고 덕이 있는 이는 오복(五服)333)                  에 의거하여 상을 주어 오직 관대함을 숭상했습니다. 따뜻한 봄기운이 널리 펴지니 꿈틀거리는 갈거미까지도 모두 화기(和氣)에 흠씬 젖었습니다. 밝은 태양이 높이 솟아 있는데도 아직 도깨비 같은 자들이 은밀히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니, 간활(奸猾)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고 있는 이때에 강기(綱紀)를 간범하는 무리가 있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흉악한 말이 비등하여 먼저 궁벽한 산골의 광포(狂暴)한 자들을 꾀었고, 폐기된 족속들이 화응하여 일어나 연곡(輦轂)334)                   아래서 오랑캐 같은 자들이 은신하게 되었습니다. 화기(禍機)가 은밀한 가운데 자라났으니,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털끝과 같았음을 차마 말을 할수가 있었겠습니까? 외로운 성(城)이 갑자기 함몰되니 가련하게도 장군(將軍)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섬으로 밤중에 도망간 자들이 있었는데 성상께서 그들을 저버린 것이 무엇이며 하북(河北)에 하나도 강개한 의사(義士)가 없었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성상께서 걱정하는 때를 당하여 외람되이 ‘그대가 가서 정벌하라’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아침에 한강(漢江)을 건너니 군사들의 기개가 백배나 왕성하였고 저물녘에 수원(隋原)335)                  을 가리키니 역적들의 간담이 이미 떨렸습니다. 승리의 바람이 큰 깃발에 불어오니 안성(安城)에 개미떼처럼 주둔하고 있는 적도들이 먼저 무너졌고, 요란한 천둥소리가 신봉(神鋒)에서 걷히니 죽산(竹山)에서 저항하던 무리들이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가마솥 속의 물고기와 불길에 휩싸인 제비집의 제비 같은 놀란 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형벌을 받았으며, 까마귀처럼 모이고 쥐처럼 달아나는 무리들이 차례로 사로 잡혔습니다. 나쁜 기운이 없어지고 나니 절도(節度)의 옛 진영(鎭營)이 아무 탈이 없게 되었고, 산하(山河)가 바뀌어지지 않았으니 백성들이 편안히 사는 것이 전과 같게 되었습니다. 영남(嶺南)의 적도들을 소탕하는 데 이르러서는 실로 도신(道臣)의 계획에 도움을 받았으니, 대병(大兵)이 천천히 진군하면서 그저 고라니나 거북을 사냥하였을 뿐이고, 여러 고을이 숙청(肅淸)되었는데도 반마(班馬)336)                  가 놀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활을 활집에 넣고 화살을 화살통에 담은 뒤에 정휘(征麾)337)                  를 정돈하여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문하였고, 고삐를 거머잡고 수레를 정지시킨 뒤에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덕의(德意)를 선포했습니다. 하찮은 적도들은 본디 성상의 걱정을 번거롭게 할 것도 없었는데, 선성(先聲)이 지나쳐서 조정을 놀라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순역(順逆)이 이미 나누어지자 천지 귀신이 은밀히 도와주었고, 또한 위령(威靈)이 멀리 파급된 탓으로 기전(畿甸)·호남(湖南)·영남(嶺南)이 즉시 평정되었습니다.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시행되었으니, 남인(南人)이 다시 배반하지 않을 것이며, 경계하고 면려할 것이 여기에 있으니 우리 나라가 이로부터 흥왕해질 것입니다. 지금 신은 본디 호신(虎臣)338)                  이 아닌데 우연히 역적의 소굴을 소탕한 것입니다. 신은 각곡(卻穀)339)                   같은 시서(詩書)의 공부가 모자라고 길보(吉甫)340)                   같은 문무(文武)의 재능도 부족하므로, 장재(長才)에는 부끄러운 점이 있었는데, 성주(聖主)의 위덕(威德)에 의지하고 군수(群帥)들의 충심(忠心)에 힘입게 되었으니, 감히 하찮은 공로를 말하겠습니까? 단지 경축하고 기뻐하는 정성만 간절할 뿐입니다. 삼가 노포(露布)를 받들어 아룁니다."
하였는데, 이는 교리(校理)        정우량(鄭羽良)이 지은 것이다. 이어 헌괵례(獻馘禮)341)                  를 거행했는데, 오명항이 황금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고 꿇어앉아서 적괴(賊魁) 이웅보(李熊輔)·정희량(鄭希亮)·나숭곤(羅崇坤)의 세 수급(首級)을 단하(壇下)에서 올렸다. 판의금(判議禁) 김흥경(金興慶)이 이를 받아 단상(壇上)에다 진열하였고 영병조사(領兵曹事)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수급을 받은 뒤 문루(門樓)로 올라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모두 장대에 매어달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수가(隨鴐)한 군중(軍中)과 순무영(巡撫營)의 마보(馬步) 진중(陣中)으로 하여금 함께 승리를 얻게 된 군악(軍樂)을 연주하게 하였다. 이어 오명항을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고 앞으로 나오게 한 다음 그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경(卿)이 비분 강개하여 출행(出行)하기를 청할 적에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병력(兵力)이 어떠한지를 몰랐었는데 경이 과연 호남과 영남의 흉추(凶醜)들을 깨끗이 소탕하였으니 중임(重任)을 부탁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종사(宗社)가 다시 편안해지고 두 분 동조(東朝)께서 칭찬하며 기뻐하시게 된 것은 모두 경의 공이다. 오늘 남문(南門)에 나가서 역적의 수급을 받은 것은 실로 세상에 드문 일이니, 내 기쁜 마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오명항이 아뢰기를,
"하늘의 신령이 도와주시어 흉적(凶賊)들이 머리를 바친 것이니, 이는 성상의 위덕(威德)에 연유한 것이며 국운이 영장(靈長)했던 소치인 것입니다. 신이 무슨 공이 있기에 이처럼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황공하고 감격스러운 나머지 눈물이 흘러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무사히 돌아왔고 군병들도 사상자(死傷者)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더욱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오명항이 인죄(引罪)하면서 퇴척(退斥)시켜 시종 한결같은 은총을 보전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누누이 위유(慰諭)하였다. 임금이 환궁(還宮)하여 도순무사(都巡撫使)와 출정(出征)했던 중군 별장(中軍別將)에게 모두 선정전(宣政殿)으로 입시(入侍)하게 하라고 명하고, 출정했던 군졸들은 대궐 문 밖에서 호궤(犒饋)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궁궐을 나올 적에 광통교(廣通橋) 위에서 말을 정지시키고 두 승지(承旨)를 시켜 도성의 백성들을 위유(慰諭)하라고 명했는데,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올리자 임금이 눈물을 흘렸다. 난리를 평정한 뒤 이제 처음으로 백성들을 대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안성(安城)과 영남의 적변(賊變)이 발생했을 때의 사상(事狀)에 대해 하문하니, 오명항이 매우 상세하게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안성·죽산 전투에서 참획(斬獲)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경이 장계(狀啓)로 아뢴 데에는 그 수효가 매우 적었다. 이는 공을 자랑하지 않으려는 마음인 것이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대체로 나라에 역적이 나면 토벌해야 하고, 토벌하여 평정시켰으면 녹훈(錄勳)하는 것은 사리(事理)에 매우 분명하다."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신은 삼군(三軍)의 원수(元帥)로서 오래도록 머뭇거리면서 군대를 가지고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을 뿐이니, 죄만 있고 공은 없습니다. 어떻게 무훈(茂勳)342)                  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항상 장좌(將佐)들에게 ‘조정에서 기필코 강박하려 한다면 나는 마땅히 중이 되겠다.’고 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선온(宣醞)343)                  하라고 명하고 스스로 한 개의 큰 술잔에다 술을 따루어 친히 내려 주며 이르기를,
"경의 공을 가상하게 여겨 친히 한 잔을 내리는 것이니, 경은 중군 별장(中軍別將)과 함께 나누어 마시라."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성은(聖恩)이 이에 이르니, 황공스럽고 감격스러워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늘의 신령이 돌보아준 바로서 군졸에 사상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모두가 성상의 인덕과 은혜가 미친 소치입니다. 신이 두 종사관(從事官)과 함께 이런 내용으로 군중에 효유(曉諭)했는데, 그때 군사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국가를 위하여 목숨바칠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은택이 사람들의 뼛골에까지 흡족하게 젖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조종(祖宗)의 덕택이 사람들에게 깊이 배어들어간 소치이다. 나에게 어찌 그런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과 빈청(賓廳)·국청(鞫廳)의 여러 신하들이 입직(入直)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여러 군문(軍門)의 대장(大將)이 유영(留營)하는 것과 궐문(闕門) 각처의 파수(把守)를 폐하라고 명하였다.

 

4월 20일 경자

녹훈(錄勳)할 것을 명하였는데, 사도 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 병조 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을 원훈(元勳)으로 삼았다. 임금이 원훈을 의정(議定)하기 위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와 판부사(判府事) 홍치중(洪致中)을 인견(引見)하고 책상 위에다가 ‘기구(耆舊)·정수(征帥)’라는 네 글자를 써서 보였는데, ‘기구’는 최규서(崔奎瑞)를 가리킨 것이고 ‘정수’는 오명항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광좌가 ‘차서(次序)에 있어 진실로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나 순편(順便)한 도리를 따라야 한다.’고 답하자, 임금이 드디어 결단을 내려 오명항을 원훈(元勳)으로 삼았다.

 

역적들의 집에서 수색하여 찾아낸 문서(文書)와 적진(賊陣) 중의 도목(都目)을 모두 불사르게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친히 송하(宋賀)를 국문하였다. 송하가 공초(供招)하기를,
"이른바 요술(妖術)이라는 것은 12세 때 황산사(黃山寺)의 중으로 이름을 문학(文學)이라 하는 자가 신에게 ‘병자년344)   너의 나라에서 설치(雪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을 주는 것이다.’ 했는데, 단서(丹書) 1권, 《소서(素書)》 상·하권, 《옥장현기(玉帳玄機)》 3권으로 당판(唐板)으로 인쇄된 책이었습니다. 신이 이것을 황산사의 탑(榻)에 보관해 두었었는데, 17세가 된 뒤에 신의 어미가 신에게 이런 등등의 일은 하지 말라고 경계했기 때문에 중으로서 이름을 처상(處相)이라 하는 자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신은 원래 요술을 배운 일이 없습니다. 박필현(朴弼顯)이 도임한 뒤에 2, 3일 만에 찾아와서 만나기는 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부호군(副護軍) 윤오상(尹五商)이 근신(近臣)에게 모욕을 가했는데, 말이 매우 비루하고 패려하였으며 문안(問安)하는 반열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편히 앉아서 위의(威儀)에 어긋나는 짓을 하였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21일 신축

헌납(獻納) 이수익(李壽益)이 상소(上疏)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대란(大亂)이 겨우 평정되어 종사(宗社)가 다시 편안해졌으니, 곧 군신(君臣) 상하가 마음을 합쳐 시작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따라서 피맷힌 원한과 뼈에 사무친 원수로서 함께 조정에 서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전생(前生)에 있었던 일로 치부하고 해묵은 폐습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기쁨을 강론하여 완성시키기 위해 다함께 마음을 합쳐 왕사(王事)에 진심(盡心)하는 것이 바로 분의(分義)를 극진히 하고 군부(君父)를 섬기는 도리인 것입니다."
하고, 끝에는 전일의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일을 조심하여 절검(節儉)할 것과 궁방(宮房)의 절수(折受)를 폐지하여 지부(地部)345)  로 돌려줄 것과 백성들은 품복(品服)이 아니면 비단을 입을 수 없게 하라고 말하였다. 이어 삼가 현감(三嘉縣監) 이정수(李廷秀)의 죄를 논핵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실상은 조사하게 하여 법에 의거 바루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고, 이정수의 일도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이정수가 군대를 동원하여 가지고 영장(營將)에게 영부(領付)시키지 않고 향임(鄕任)으로 하여금 대신 그 군대를 거느리게 했는데, 향임이 그 군대를 역적에게 영부시켜 주었으니, 그 사이에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자취가 있는 것 같았다.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삼(李森)이 청대(請對)하여 이만준(李萬準)의 종 두거비(斗去非)가 서소문(西小門) 밖의 길에서 부도(不道)한 말을 많이 했다고 고하니, 임금이 이만준과 아울러 잡아다가 국청(鞫廳)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4월 22일 임인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백관(百官)들이 하례(賀禮)를 받았다.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기로(耆老)·군민(軍民)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난적(亂賊)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흉변(凶變)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음산한 여기(沴氣)346)  를 금방 쓸어내고 나니 곧 구우(區宇)347)  가 맑아짐을 보게 되었다. 이에 진실한 환음(渙音)을 널리 반포하여 더없이 큰 새로운 경사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바이다. 과거에 과덕(寡德)한 내가 외람되이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았으나 상성(常性)으로 사람을 꾸짖어도 일찍이 반역(反逆)을 모의하리라고는 의심하지 않는 법인데, 사악(邪惡)한 붕당(朋黨)들이 나라에 화(禍)를 끼치는 것이 반드시 같은 반열의 신하에게서 나올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런데 악종(惡種)들을 폐고(廢錮)시키던 처음에 추류(醜類)들의 감별(鑑別)을 철저히 하기가 어려웠다. 명의(名義)의 대안(代案) 때문에 여러 족속(族屬)들의 원망과 저주가 더욱 깊어졌고, 교문(敎文)에 흉언(凶言)이 있었는데도 한 명의 역적에 대한 주토(誅討)를 이미 늦추게 되었으므로 결국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교결 합심하여 감히 오랫동안 병란(兵亂)이 없었던 시기를 이용하여 일어났다. 한번 자칫 차질(差跌)이 있게 되면 나라가 전복될 뻔했으니, 말이 여기에 이르자 통분스런 마음을 감당할 수 없다.
역적 이인좌(李麟佐)·이웅보(李熊輔)와 민관효(閔觀孝)·이의징(李義徵)·이홍발(李弘渤)의 지친(至親)과 민종도(閔宗道)·민언량(閔彦良)의 유얼(遺孽)들이 사나운 기운을 뭉쳐 과연 그 효음(梟音)을 고치지 않고 오래도록 은밀한 계획을 품고 있었던 것이 마치 궁지에 몰린 짐승이 돌아서서 사람을 무는 것과 같았다.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은 귀역(鬼蜮)348)  의 모습에 시랑 같은 심장(心臟)을 지니고 있었다. 치초(郗超)349)  가 역적 환온(桓溫)의 막빈(幕賓)이 된 것을 당시에 자취가 은밀하게 살필 수 없었고, 월초(越椒)350)  가 약오(若敖)의 귀신을 굶주리게 한 것을 지금 사람은 분명히 아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중외(中外)의 무뢰배들과 교결하여 시종 불궤(不軌)한 짓을 주장했던 것이다. 남태징(南泰徵)·이사성(李思晟)은 혹은 훈구(勳舊)를 빙자하여 작위(爵位)를 승습(承襲)하기도 하였고 혹은 보잘것 없는 처지에서 발신(發身)하기도 하여 주려(周廬)351)  의 숙위군(宿衛軍)을 총괄하게 되었으니, 어찌 안녹산(安祿山)의 반상(反相)352)  을 알 수가 있었겠는가? 정병이 집결되어 있는 대곡(代谷)에 있었으므로, 도리어 진희(陳豨)353)  의 흉악한 마음을 계발(啓發)하게 되었다. 심유현(沈維賢)·정희량(鄭希亮)의 처지는 어떠했는가? 선조(先祖)의 공렬이 아직도 남아 있었는데도 조정에서 대우하는 간곡한 은혜를 잊고 폐족(廢族)들과 교통도 남아 있었는데도 조정에서 대우하는 간곡한 은혜를 잊고 폐족(廢族)들과 교통(交通)하였으며 향리(鄕里)의 호족(豪族)의 권세에 의지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협박해서 난리를 일으킬 것을 생각하였다. 비록 세대가 바뀌어도 선조의 공렬은 보존되지 않음이 없을 터인데 수자(竪子)354)  에 대해 또한 무엇을 꾸짖을 수 있겠는가?
가장 안타까운 것은 박필몽(朴弼夢)으로 세 조정을 두루 섬겼고 지위가 2품에 이르렀는데도 은밀한 모의와 비밀스런 계책을 주장하였으며 패려스러운 아들 박유관(朴有寬)이 흉역(凶逆)을 일으킬 마음을 품고 서로 관여하였다. 그들의 사우(死友)는 김일경(金一鏡)인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어야 한다고 했지만 천지(天地)는 본디 자애심(慈愛心)이 많아 살생(殺生)하기를 꺼리는 것이므로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켰다가 육지(陸地)로 옮겨 오게 하였으니, 내가 무엇을 저버렸기에 네가 반역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그리하여 하늘을 보고 맹세하지 않으면 땅을 그어 다짐을 하면서 오직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뿐이었다. 이것이 모두 외방의 적도들로서 내응(內應)한 괴수(魁首)가 10명이었고 협박에 의하여 따라붙은 자들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품어온 지가 오래 되었으니, 실상은 적신(賊臣)의 부도(不道)한 말에서 시작이 된 것이고 역도들은 배포(排布)한 것이 갈수록 커졌으니, 복법(伏法)된 죄인들의 후손인 자들이 많게 되었다. 이에 심유현(沈維賢)은 그지없이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난역(亂逆)의 계제(階梯)를 순치(馴致)시켰고 이유익(李有翼)은 마치 수컷이 부르면 암컷이 화답하듯이 적도가 되어 스스로 모주(謀主)라고 일컬었다. 그리하여 몰래 화약(火藥)을 훔쳐 내고서, 불에 탔다는 내용으로 핑계댄 거짓 공문을 올렸으며, 각각 가정(家丁)을 출동시켜 흉악한 계획을 밤중에 일으킬 것을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전후 서로 호응한 상황을 따져본다면 실로 천지 사이에 용납하기 어렵다.
민관효(閔觀孝)가 그림자와 자취를 감춘 채 팔을 걷어 올리고 주동자(主動者)로 나서서 임금을 매도하는 망극한 짓을 한 것은 김일경·심유현과 선후를 통하여 뿌리를 같이하였으며 나라를 안중에도 없는 것으로 여겨 이유익(李有翼)·이순관(李順觀)을 사주(使嗾)하여 방문(榜文)을 걸게 하였다. 귀신(鬼神)이 환히 살펴보고 있는데 네가 이런 마음을 지니고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강상(綱常)이 무너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여 살점을 먹으려 하고 있으며, 추대(推戴)한 사람이 본디 있는데 또 지목(指目)하여 장차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 약속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기일(期日)을 아! 또한 헤아릴 수 없었다. 신광원(愼光遠)은 도성(都城)의 오랑캐들이 숨어 의지하는 장본인이 되었고, 인엽(人燁)도 또한 역적에게 화물(貨物)을 도와주게 되었다. 아! 저 역적 남태징(南泰徵)이 어떻게 차마 국은(國恩)을 저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훈장(訓將)의 자리를 스스로 대신하겠다고 한 것은 모두가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는 의도에서였다. 원룡(元龍)355)  의 태상(台相)356)  의 글자란 말에서 더욱 주도 면밀한 형지(形止)를 알 수가 있겠다. 이는 다만 그가 군병을 거느린 것을 빙자한 것뿐이요 실제로 지휘(指揮)한 자는 이사성(李思晟)이었다. 역적 이괄(李适)이 왜병(倭兵)을 사용했던 자리를 점거하여 근왕(勤王)을 핑계하면서 기미를 살폈고, 역적 허견(許堅)이 오랑캐의 복색(服色)을 하게 한 계획을 답습하여 사람들을 협박해서 변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조아(爪牙)의 임무는 안추(安樞)·안엽(安熀)이 쓰여졌고 성식(聲息)은 한세홍(韓世弘)·정세윤(鄭世胤)이 내통하였다. 그리하여 도성의 성문을 화공(火攻)하도록 계책을 세웠고 육군(陸軍)과 수군(水軍)이 연합하도록 지시했으나 일이 발생되기 전에 급변(急變)이 먼저 서울로 올라왔고, 옥사(獄事)가 이루어지자마자 경보(警報)가 곧이어 전하여졌다.
이인좌·이웅보와 정희량이 과연 상당성(上黨城)에서 반역을 일으켰고 또 두류산(頭流山) 아래다 적도들을 불러모아, 나의 군읍(郡邑)과 성수(城守)를 함몰시키고 나의 절진(節鎭)의 수신(帥臣)을 살해하였다. 혹은 먼저 일어나기도 하고 혹은 뒤에 일어나기도 하면서 호남과 영남에 나누어 웅거하여 거짓으로 원수(元帥)라 일컫고는 흉악한 관문(關文)과 격문(檄文)을 보내어 아랫사람을 속이고 윗사람을 방자하게 기망(欺罔)하였으므로 쓸리듯이 극휘(極徽)가 정성을 다하였고 통분스럽게 박종원(朴宗元)이 무릎을 꿇었다. 일이 이미 돌풍처럼 급박하게 되자 독봉(毒鋒)이 드디어 기좌(畿左)에까지 이르렀고 형세가 매우 강성해지자 반기(叛氣)가 남쪽 지방에서 점차 번지게 되었다. 박필현(朴弼顯)이 하읍(下邑)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박필몽(朴弼夢)도 또한 수산(囚山)에서 몸을 빼어 나와서, 곧바로 완산부(完山府)·고성(高城)을 범하기 위해 밤중에 말을 달려 이르렀고, 스스로 은대(銀臺)의 장관(長官)이라고 일컬으면서 대낮에 멋대로 돌아다녔다. 사로(四路)의 적도가 일제히 일어나 반역한 것은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백년 동안 내려온 세족(世族)에서 반역자가 많이 나왔으니, 내가 실로 통한스럽게 여긴다. 소란이 계속되자 여리(閭里)가 거의 텅 비게 되었고, 국가의 안위(安危)가 실로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박도(迫到)하게 되었다. 다행히 나의 하경(夏卿)357)  이 스스로 분발하여 드디어 천토(天討)를 크게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군(三軍)이 주먹을 쳤으니, 모두들 필사(必死)의 뜻을 품었고 적도들이 혼비 백산하니 거칠 것이 없는 군사를 휘몰아 갔다. 안성(安城)·죽산(竹山)의 첩보(捷報)가 계속 날아들었고 거창(居昌)·합천(陜川)의 적진(賊陣)이 저절로 무너졌다. 그리하여 거추(巨酋)가 모두 참획(斬獲)되었고 도망한 무리가 남김없이 체포되었다. 군대를 돌려 승전고를 올리니 한 명의 군졸도 손상된 탄식이 없었고, 남문(南門)에 올라 수괵(首馘)을 받으니 많은 백성들이 다투어 구경하면서 기뻐하였다. 국청(鞫廳)에 갇힌 죄수들에 이르러서도 모두 기시(棄市)하는 국법(國法)을 시행하였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고발하여 적도들을 벤 것은 대로(大老)358)  의 충성이요 일거에 적의 소굴을 소탕한 것은 상장(上將)359)  의 힘이었다.
이미 역적 이인좌(李麟佐)·이웅보(李熊輔)·정희량(鄭希亮)·민관효(閔觀孝)·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이사성(李思晟)·남태징(南泰徵)·심유현(沈維賢)·이유익(李有翼)·나숭곤(羅崇坤)·나숭대(羅崇大)·이하(李河)·이지인(李志仁)·신광원(愼光遠)·윤덕유(尹德裕)·안추(安樞)·이문저(李文著)·이배(李培)·이순관(李順觀)·이익관(李翼觀)·박종원(朴宗元)·목함경(睦涵敬)·나만치(羅晩致)·신윤조(辛胤祖)·안엽(安熀)·박사관(朴師寬)·안정(安𤊟)·한세능(韓世能)·조세추(曹世樞) 등은 모두 잡아서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재산을 적몰(籍沒)하였으며, 연좌(緣坐)된 사람 이인엽(李人燁)·이정(李檉)은 감등(減等)시켜 교형(絞刑)에 처하였으며, 이홍관(李弘觀)·김옥성(金玉成)·이일(李溢)·이일좌(李日姉) 등은 그 자신만 주참(誅斬)하였다. 그리고 역적 김일경(金一鏡)도 소급하여 대역률(大逆律)에 처하였다. 오랫동안 없었던 간과(干戈)의 종사(從事)가 불생하게도 지금 있게 되었고, 전에 없던 부월(鈇鉞)의 위엄이 어찌 내가 즐겨하는 것이겠는가? 거듭 생각하건대, 많은 백성들이 생업(生業)을 잃었으니 더욱 침반(寢飯)이 달갑지 않음을 깨닫겠다. 그러나 신인(神人)의 분노를 푼 것은 실로 종사(宗社)의 큰 복에 힘입은 것이고 모든 동식물(動植物)이 다같이 기뻐하고 있으니, 어찌 큰 은택을 함께 베푸는 것을 아낄 수 있겠는가? 전후 반포한 윤음(綸音)에서 거론된 것에 대해 내가 바야흐로 포용하려고 힘쓰고 있으니, 비록 잘못을 범하여 의구심을 품고 있는 자들이라도 어찌 마음을 고치기를 꺼려 해서야 되겠는가? 이달 22일 새벽 이전을 기준으로 하여 모반(謀叛)·대역(大逆)과 자손(子孫)이 조부모(祖父母)나 부모(父母)를 모살해·구타·매도하였거나, 처첩(妻妾)이 남편을 모살했거나 노비(奴婢)가 주인(主人)을 모살(謀殺)했거나, 고의로 사람을 살해했거나, 염매(廉魅)360)  ·고독(蠱毒)361)  을 했거나, 국가의 강상(綱常)에 관계되거나, 장오(贓汚)나 강·절도(强竊盜)를 제외한 잡범(雜犯)의 사죄(死罪) 이하 도(徒)·유(流)·부처(付處)·안치(安置)·충군(充軍)된 자는 이미 배소(配所)에 이르렀거나 아직 배소에 이르지 않았거나,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사유(赦宥)하여 준다. 감히 유지(有旨)가 있는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발할 경우에는 그 죄로 죄주겠다. 관직(官職)에 있는 사람은 각각 한 자급(資級)씩 가자(加資)하고 자궁자(資窮者)는 대가(代加)하라. 아! 조용히 생각하여 보니, 그 이유가 있었다. 만촉(蠻觸)362)  이 서로 다투다가 국가의 위망(危亡)을 초래하게 되었는데 혹시 간과(干戈)의 쟁투가 거듭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신자(臣子)가 아니겠는가? 나의 진심을 부연(敷衍)하여 크게 고하는 것은 건곤(乾坤)의 일신(一新)되기를 바라서인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의당 다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7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4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윤리-강상(綱常) / 어문학(語文學) / 가족-친족(親族) / 변란(變亂)


[註 346] 여기(沴氣) : 요악한 기운.[註 347] 구우(區宇) : 천하(天下).[註 348] 귀역(鬼蜮) : 귀신과 물여우. 물여우가 모래를 입에 물고 있다가, 물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에 뿌리면 그 사람이 병에 걸리는데, 물여우는 귀신과 같이 그 형태를 볼 수 없다 함. 한편으로 음흉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도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이러한 뜻으로 쓰였음.[註 349] 치초(郗超) : 동진(東晉) 때 사람으로, 반역(叛逆)할 마음을 품고 있던 환온(桓溫)의 막하(幕下)가 되어 여러 가지 일들을 획책하였음.[註 350] 월초(越椒) : 초(楚)나라 약오씨(若敖氏) 집안의 사람으로 성질이 난폭하였는데, 초왕(楚王)을 배반하여 군대를 일으켰다가 초왕에게 전멸당하여 제사지낼 후손도 끊겨 버렸음.[註 351] 주려(周廬) : 한(漢)나라 때 숙위군(宿衛軍)이 머무는 장소(場所)임. 여기서는 금군 삼청(禁軍三廳)인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음.[註 352] 안녹산(安祿山)의 반상(反相) : 안녹산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반신(叛臣)임. 안녹산이 처음에 평로 토격사(平虜討擊使)가 되어 오랑캐를 치다가 패전하여 군율(軍律)을 범했으므로, 재상(宰相) 장구령(張九齡)이 안녹산(安祿山)의 용모에 반상(反相:반골(反骨))이 있으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을 것이라고 했으나 현종이 사면(赦免)하고 범양(范陽)·하동(河東)의 절도사(節度使)로 중용(重用)하였다. 뒤에 안녹산이 양국충(楊國忠)과의 반목으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國號)를 대연(大燕)이라고 했으나 곧이어 패망하였음.[註 353] 진희(陳豨) : 한 고조(漢高祖) 때 사람으로 양하후(陽夏候)에 봉해졌었으나 대곡(代谷)에서 군사를 일으켜 배반하다가 드디어 복주(伏誅)되었음.[註 354] 수자(竪子) : 어린애.[註 355] 원룡(元龍) : 남태징(南泰徵)의 자(字).[註 356] 태상(台相) : 대신(大臣).[註 357] 하경(夏卿) : 원수(元帥).[註 358] 대로(大老) : 최규서를 가리킴.[註 359] 상장(上將) : 오명항.[註 360] 염매(廉魅) : 주문(呪文)이나 주술(呪術)로 남을 저주하여 죽게 만드는 것. 염(魘)은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쇠꼬챙이로 심장을 후벼 파고 손발을 묶는 것이고, 매(魅)는 나무나 돌로 귀신을 만들어 놓고 저주를 비는 것임. 염승술(魘勝術).[註 361] 고독(蠱毒) : 뱀·지네·두꺼비 등의 독으로 만든 독약을 사람에게 몰래 먹여서 배앓이·토혈(吐血)·하혈(下血)·부종(浮腫) 등의 증세를 일으켜 점차 미치거나 실신하여 죽게 만드는 일.[註 362] 만촉(蠻觸) : 《장자(莊子)》에 나오는 이야기로 달팽이의 왼쪽 뿔에는 만씨(蠻氏)가 있고 오른쪽 뿔에는 촉씨(觸氏)가 사는데 이들이 늘 서로 싸웠다고 한 데서 온 말로, 하찮은 일로 다투는 것을 비유한 말임.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아! 보잘것없고 덕이 없는 내가 조종(祖宗)께서 이루어 놓은 간대(艱大)한 서업(緖業)을 이어받아 외람되이 큰 자리를 지켜 온 지가 이미 4년에 이르렀다. 그런데 정성이 신서(臣庶)들을 감동시켜 미덥게 하지 못하고 인덕(仁德)이 소민(小民)을 돌보아 혜택을 주지 못했으므로, 세공(歲功)363) 은 해마다 거듭 흉년이 들었고 백성들은 도탄(塗炭)에 허덕이고 정치는 그럭저럭 고식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했고 부세(賦稅)는 백골(白骨)까지 침학하고 조정에는 서로 반목하는 전쟁이 잇따랐고 재상(宰相)들은 재물을 탐내는 풍조가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업무는 다잡아 하지 않은 채 날짜만 넘길 뿐이고 습속(習俗)은 사치스러움이 날로 만연되어 가고 있다. 지금 이 여덟 가지 조항이 어찌 다른 사람의 탓이겠는가? 덕이 없는 나의 탓인 것이다.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 내가 더없이 어려운 때를 만났으므로 주야로 깊은 못에 가서 얇은 얼음을 밟듯이 조심하고 두려워해 왔다. 그런데 이에 난역(亂逆)이 횡행하여 그 화가 삼로(三路)에 파급되어 역적들이 수신(帥臣)을 살해하고 장리(長吏)들을 쫓아내었다. 그리하여 이들이 세가(世家)·대족(大族)·아장(亞將)·중곤(重閫)과 체결하였으므로 준동할 기미가 호흡하는 사이에 걸려 있었고 국가의 안위(安危)가 터럭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다행히 원로(元老)가 충성을 바친 데 힘입어 음모(陰謀)가 먼저 발각되었고 요망한 난역(亂逆)들의 목이 차례로 복주(伏誅)되었다. 사마(司馬)364) 가 충의(忠義)를 분발하고 여러 장수들이 힘을 다한 덕분으로 전복(甸服)365) 이 제일 먼저 평정되었고 영표(嶺表)366) 가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리하여 원악 대대(元惡大憝)367) 가 모두 목을 바치게 되었으니, 이것은 실로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우리 동방(東方)을 돌보아 주신 소치인 것이다. 어찌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 나로 인한 소치이겠는가?

돌이켜 생각하건대, 삼군(三軍)이 친척과 이별하고 원정(遠征)의 길에 올라 창을 베개삼아 한데에서 거처하였으니, 어찌 아픔이 내 몸에 있는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아! 흉악한 거괴(巨魁)의 성품이 효경(梟獍)처럼 사나워 죄악(罪惡)이 매우 컸기 때문에 스스로 천기(天紀)를 간범(干犯)하게 되었다. 그러한 협박에 의해 따른 무리들은 이에 잘못되어 죄에 빠진 자들이니, 그 본래의 실정을 살펴보면 어찌 측은하고 불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양민(良民)과 역적이 뒤섞여 옥석(玉石)을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혹은 체포되기도 하고 혹은 칼날에 손상되기도 하였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매 침식(寢食)을 편안히 할 수가 없었다.

아!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형벌을 받아 끊긴 자는 다시 되붙일 수 없는 법이다. 협박에 의해 따른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죄없는 평민(平民)이 부당하게 법망에 걸려 화(禍)를 당한 경우이겠는가? 항상 이 일 때문에 우려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었는데, 감호사(監護使)가 진달한 것을 듣게 되자 죄없는 사람 13인이 참혹하게도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을 들은 뒤부터 내가 손수 잘못하여 죽인 것만 같아서 며칠이 되도록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아! 알게 된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겠다. 아! 백성들이 나의 덕이 없는 소치로 해마다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또 나의 덕이 없는 소치로 이런 적란(賊亂)을 당했고 나의 덕이 없는 소치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으니, 백성들을 곤궁하게 만든 것도 나 때문이고 백성들을 떠돌게 한 것도 나 때문이고 백성들을 전쟁에 죽게 한 것도 나 때문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조종(祖宗)께서 어루만져 돌보던 백성들을 평시에는 한 번의 좋은 정사를 행하여 잘 구제하지도 못했고 난리를 당해서는 또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데에서 잘 구제하지 못하면서도, 많은 백성 위에 군림(君臨)하니,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겠는가? 밤새도록 잠을 잊은 채 차라리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난리가 겨우 평정되었으나 농사철이 이미 시기를 어겼는가 하면 떠돌던 사람들도 돌아오지 않은 채 의심하고 놀라면서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들을 보호하고 안정시키는 일을 어찌 시각을 지체할 수 있겠는가? 아! 방백(方伯)·수령(守令)·안무(按撫)·수의(繡衣) 등 여러 신하들은 나의 애통해 하고 절박해 하는 마음을 본받아 힘을 다하여 안집시키고 위로하고 무마하고 의심을 풀어주라. 그리하여 굶주린 자들은 먹여 주고 종자가 없는 자를 대여(貸與)하여 주되 곡물(穀物)을 취용(取用)할 즈음에는 전일에 하교(下敎)한 것이 있으니, 중첩되게 하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농사지을 소가 없는 경우에는 이웃 마을끼리 서로 돕게 하도록 구획(區劃)하여 지시하되 조목별로 곡진하게 함으로써 반드시 전리(田里)를 편안하게 하여 생업(生業)을 이루어 가게 하라. 그리하여 제때에 심고 가꾸게 하여 가을의 수확이 있게 만들도록 하라. 그리고 왕자(王者)가 백성을 돌보는 데 있어 어찌 경중의 차별을 둘 수 있겠는가? 더구나 병란(兵亂)이 일어난 뒤이니, 의당 무휼(撫恤)을 가하여 각기 본업(本業)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사민(四民) 가운데 지금 언급한 것은 농자(農者) 하나뿐이었지만 나머지 세 가지도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니, 의당 상세히 살펴 본받아야 한다. 여러 고을의 장사(將士)들 가운데 역적의 구사(驅使)가 되었으나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었던 자들을 내가 모두 탕척(蕩滌)시켜 무엇을 따지는 일이 다시 없을 것이며, 그 가운데 공을 세워 스스로 충성을 바친 자는 장차 후한 상을 내릴 것이다. 설령 역적과 같이 일을 한 자일지라도 스스로 몹시 징계하고 뉘우쳐 악한 마음을 씻고 개과천선(改過遷善)한다면 내가 마땅히 감싸고 용서해 주고 보호해 주는 것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죄악이 쌓인 지가 이미 오래고 미혹(迷惑)되어 선(善)으로 돌아올 줄 몰라서 끝내 감화되지 않은 자들이야말로 스스로 단절하는 것이니, 뒤에 뉘우쳐도 소용이 없다. 이 점을 명백하게 알려서 환하게 깨우치게 함으로써 각기 분발할 줄을 알게 하라.

위에서 하교(下敎)한 것과 같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도신(道臣)·안무(按撫) 등의 신하들이 각별히 방문(訪問)하여 각기 그 고을로 하여금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게 하고 친척이 있는 자는 또한 찾아서 알리게 하라. 또 본 고을로 하여금 각별히 그들의 집을 돌보아 구휼하게 하여 내가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이라.

듣건대, 안성(安城)·죽산(竹山)·청주(淸州)의 전투에서 시체가 온 들판에 가득 쌓였었다고 하는데, 그 더러운 기운과 피를 흘리고 죽은 시체가 반드시 평민(平民)들을 오염시키고 반드시 농작물을 해치게 될 것이니, 본 고을과 부근의 고을로 하여금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한 곳에 가두어 모아서 흙으로 덮게 하라. 군병(軍兵)들 가운데 칼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여러 날 노숙(露宿)한 탓으로 건강이 손상되어 병든 사람들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각 고을로 하여금 또한 방문(訪問)하여 병든 자에게는 의약(醫藥)을 지급하여 구제하여 주고, 죽은 자에게는 미포(米布)를 지급하여 구휼하게 하라. 그리고 왕자(王者)의 정치는 가까운 데부터 시작하여 먼데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다. 이번 역적의 병란(兵亂)이 있은 뒤에 도성의 백성들 가운데 성 밖으로 떠돌면서 관금(關禁)에 곤란을 겪는 광경을 내가 친히 보는 것과 같다. 성문(城門)이 닫히고 나루터에 배가 끊겼을 때의 광경을 상상해 본다면 남은 회포가 안정되기 어렵다. 3일 전 군대를 위로하러 갈적에 길에서 서울의 사녀(士女)들을 살펴보고서 지난날의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픈 감회를 금할 수 없었다. 나라에 바치는 정당한 공물(供物)은 감하더라도 백성에게 지급할 물건은 지체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를 맡은 신하에게 신칙하라. 그리고 응당 지급해야 할 공물(貢物)의 대가(代價)는 반드시 공법(公法)에 의거 차하[上下]368)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대가(代價)가 없는 역사(役使)가 없게 하라. 아! 한 사람이 안정된 처소를 얻지 못해도 그것이 나의 책임인 것인데, 하물며 이런 때를 당한 경우이겠는가? 국용(國用)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역시킬 적에는 농한기(農閑期)를 이용하라는 것은 공자(孔子)의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인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글귀는 내가 엄격히 스스로 면려해야 될 것이지만 또한 어찌 상하(上下)가 서로 면려해야 될 도리가 없겠는가? 위로 공경(公卿)·대부(大夫)로부터 아래로 미관 말직의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구습(舊習)을 탈피하여 사치스러움을 제거하고 분문(奔問)하던 마음과 강개한 뜻을 항상 가슴속에 보존하여 잠시도 이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우리 동방을 비색한 운수에서 태평한 운수로 전환시킬 수 있는 하나의 큰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만일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려 한다면 그 요점은 인재를 임용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근래 사람을 임용하는 방법이 오로지 문벌(門閥)만을 숭상하고 그 재능은 돌아보지 않고 있으며 대관(大官)·소관(小官)을 막론하고 경력(經歷)만을 근본으로 삼을 뿐이고 재용(才用)은 뽑지 않고 있다. 이렇게 하고서도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가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마땅히 그 재능의 적당(適當)에 따라서 뽑아야 할 것이요 다시는 경력을 일삼지 않아야 한다. 삼공(三公)과 양전(兩銓)의 신하들은 나의 오늘 이 하교를 본받도록 하라. 무릇 사람을 천거하고 주의(注擬)할 즈음에는 단지 인재의 합당한 것만을 뽑음으로써 마지못해서 천거하고 주의하는 잘못된 습관을 속히 제거한다면 이것도 또한 막힌 운수를 태평한 운수로 전환시키는 데 있어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다. 은거(隱居)하여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재덕(才德)이 고매(高邁)한데도 산림(山林)에 숨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는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들로 하여금 그 고장의 공론(公論)을 채취하여 도신(道臣)에게 보고하게 하고, 도신은 또한 도내(道內)의 공론을 취택하여 조정에 장계(將啓)로 보고하게 하라. 그리고 현량(賢良)·방정(方正)하고 경서(經書)에 널리 통달한 사람들도 도신이 또한 빨리 계문(啓聞)하도록 하라. 의지할 데 없는 환과 고독(鰥寡孤獨)으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은 서울의 경우에는 경조(京兆)369) 에서, 외방의 경우는 열읍(列邑)에서 각별히 돌보아 구휼하게 하되, 사대부(士大夫) 가운데 나이 80세 이상인 사람은 각도(各道)의 수령들이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존문(存問)하도록 하고 소민(小民) 가운데 나이 90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서리(胥吏)를 보내어 돌보아 위문하게 할 것이며, 이번 난리를 겪은 뒤 나라를 위해 절개를 세운 사람들도 방문(訪問)하여 계문(啓聞)해서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함으로써 일세(一世)를 풍동(風動)시키는 등류의 일이 바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경외(京外)로 하여금 이에 의거해 거행하게 하라.

기근이 겹친 끝에 또 이런 병란을 당하였으니, 경외의 탕갈이 더욱 다시 어떠하겠는가? 의당 나부터 더욱 절약에 힘쓰도록 하겠다. 제도(諸道)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에 대해서는 이미 먼저 처분(處分)을 내린 바 있는데, 위에서 승여(乘輿)·복식(服飾)으로부터 아래로 백사(百司)에 이르기까지 긴급하지 않은 비용은 의당 묘당(廟堂)에서 조목별로 헤아려서 정감(停減)시킬 것을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라. 안성(安城)·죽산(竹山)·청주(淸州)·안음(安陰)·거창(居昌)·함양(咸陽)·합천(陜川) 등지에 이르러서는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장차 버려야 될 지경이라고 하니,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환곡(還穀)을 옮겨 지급하게 하고 군기(軍器)도 전용(轉用)하게 하라. 그리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안집(安集)시키고 군민(軍民)들을 무휼(撫恤)하는 등의 일에 대해 각별히 상의하여 품지해서 도신(道臣)과 어사(御史)에게 거행하도록 분부(分付)하라. 영남(嶺南)은 우리 동방의 웅주(雄州)이고 예로부터 명현(名賢)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군신(君臣)의 의리가 이 도(道)에 의해 밝혀졌는데, 불행하게도 효경(梟獍) 같은 사나운 무리들이 흉악하고 패려스러운 말로 남도(南道) 사람들을 속여 현혹시켰기 때문에 역적 정희량(鄭希亮)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세도(世道)의 불행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영남의 불행인 것이다. 아! 삼남(三南)은 국가의 근본이 되는 곳으로 또 더구나 영남은 양남(兩南)에 견주어 볼 때 더욱 큰 곳이다. 그러데도 순역(順逆)을 분변하지 않은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의리의 골상(汨喪)370) 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르게 되었는가? 아! 역적 심유현(沈維賢)·이유익(李有翼)·박필현(朴弼顯)·민관효(閔觀孝)·박필몽(朴弼夢)의 무리가 차마 말할 수도 없고 차마 들을 수도 없는 견줄 데 없이 그지없는 흉악한 말로써 앞에서 창도(唱導)했고, 이인좌(李麟佐)·이웅보(李雄輔)·정희량(鄭希亮)의 무리가 밖에서 호응하였으며, 역적 이사성(李思晟)·남태징(南泰徵)이 흉모(凶謀)를 주장하여 여러 역적들을 지휘하였는데, 이들이 불령(不逞)한 마음을 품고 감히 창화(唱和)하려고 했으니, 이는 역사의 기록이 있어 온 이래 있지 않았던 흉역(凶逆)인 것이다. 마음을 함께하여 주도 면밀하게 계획하여 난만(爛漫)하게 역적질을 한 자들 이외에 협박을 받아 따른 부류와 미혹당하여 빠진 무리들에 대해서는 내가 관대히 다스려 논죄(論罪)하지 않으려 한다. 하물며 원도(遠道)에 있는 사람이겠는가? 비록 현혹당해서 망동(妄動)했거나 적에게 협박당하여 따른 자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고쳐 개과 천선(改過遷善)하려 한다면 어찌 불문(不問)에 붙일 뿐이겠는가? 마땅히 위의 하교(下敎)와 같이 평민과 차별이 없이 대할 것이다. 아! 영남에서 한 명의 정희량이 나온 것은 또한 하나의 세변(世變)인 것이니, 어찌 다시 정희량 같은 자가 나오겠는가? 엊그제 친히 국문할 적에 호서(湖西)의 적진(賊陣)에 있었던 도목(都目)을 특별히 전정(殿庭)에서 불에 태우라고 명한 것은 바로 내가 협박에 의해 따른 사람은 묻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또 안동(安東) 사람을 방송(放送)할 적에 나의 의도는 이러했다. 역적 김홍수(金弘壽)는 이미 논할 것이 없는 것이지만 그 외의 관계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또한 상도(上道)의 변괴(變怪)인 것이다. 그리고 이 지방의 풍속을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응당 대역죄(大逆罪)을 받을 사람 이외에는 차마 체포할 수가 없다. 더구나 흉적(凶賊)들이 빙자하여 난언(亂言)한 사람이겠는가? 나의 뜻이 이와 같은데도 각자가 불안하게 여겨 도리어 의구심을 낸다면, 이것은 내가 그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곧 영남 사람들이 스스로 나와 관계를 끊는 것이 된다. 깊은 밤 궁궐에 누워 생각이 영남의 일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아! 도신(道臣)과 어사(御史)는 모쪼록 지극한 나의 뜻을 본받아 순역(順逆)에 대해 효유(曉諭)하여 각기 안심하게 함으로써 선현(先賢)의 유풍(遺風)을 실추시키지 않게 한다면 내 마음의 기쁨이 어찌 영남의 역적을 평정한 것에 견줄 정도일 뿐이겠는가?

그리고 경외(京外)의 사람들 가운데 혹 적의 공초(供招)에 무인(誣引)된 사람이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흉적(凶賊)들이 형세를 떨치기 위한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웅보(李熊輔) 조성좌(曹聖佐)에게 보낸 서신(書信)에게 그들의 흉계를 떠벌리기 위한 것임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다만 이 한통의 서신이 무함당한 사람을 신리(伸理)시킬 수 있는 하나의 큰 증거라고 할수 있다. 만일 이 사람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위태롭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내가 의심하지 말라 하고 묻지 말라고 한 뜻을 따르는 것이겠는가? 모두들 나의 말을 듣고 각기 안심하도록 하라. 아! 붕당(朋黨)의 폐단을 초두(初頭)의 비망기(備忘記)에서 이미 말했으므로 이제 거듭 말하지 않겠다.

지금은 국사(國事)가 이미 안정이 되었고 하례(賀禮)를 이미 거행했으므로 조정에서 함께 벼슬하는 사람들이 국사를 위하여 마음을 다하려는 뜻이 생각건대, 반드시 분문(奔問)할 때만은 못하리라고 여겨진다. 아! 지금의 이 적란(賊亂)이 어디에 연유하여 일어난 것인가? 특별히 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슨 마음으로 다시 당습(黨習)을 생각하여 국세(國勢)를 이렇게 만들어 백성들을 보전할 수 없게 한단 말인가? 설사 각기 개인적인 원수는 있을지라도 조정에 대해서는 감히 원수로 삼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에 대한 고사(古事)가 분명히 있고 또한 선조(先朝)께서 신칙하신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개인적인 원수 때문에 군부(君父)의 조정에 벼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일에 대한 의리는 해나 별처럼 환한 것이므로 알기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당초 원수질 일이 없었는데도 색목(色目)에 구애되어 거취(去就)를 혼동(混同)시키는 경우이겠는가? 의리의 정미(精微)한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 수 없지만, 마땅히 연석(筵席)에서 한 번 효유(曉諭)해야 하겠다. 아! 군신(君臣)은 부자(父子) 사이 같은 것이다. 아버지가 환란을 겪고 있는데 그 아들이 감히 환란이 겨우 안정되자마자 그 아버지를 떠나서 출타(出他)하여 그 붕우(朋友)만을 위한 채 부모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선조(宣祖)께서 용만(龍灣)371) 에 머물러 계실 때 지은 어제시(御製詩)를 삼가 오늘날 낭송하노니 여러 신하들은 내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 지금 이 하교를 종이 위의 빈말이 되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를 위해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 오늘날은 곧 우리 동방의 비색과 태평이 가름나는 분기점(分岐點)이니, 경(卿) 등은 다함께 힘과 마음을 합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세도(世道)를 능히 만회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내가 개과 천선하지 못한 잘못인 것이다. 이와 같이 구습(舊習)을 고치지 않고서 임금을 위에서 고립되게 하여 나라를 잘다스리려 해도 어떻게 할 수 없게 만든다면, 이것은 비단 나의 잘못만이 아니고 실로 경 등이 스스로 저버린 것이 된다. 그리고 마음 속에 유감을 쌓아두고 상대를 경알(傾軋)시킬 계획을 부리는 사람은 조금도 용서없이 죄주어 찬축시킬 것이다. 그러나 제왕이 나라의 근본 법칙을 세우는 법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한몸에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힘차게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국문(鞫問)하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고 여얼(餘孽)들이 아직 평정되지 않으며 백성들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인데 국가의 저축은 고갈되었으니, 전상(殿上)에 나와서 하례(賀禮)를 받는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만 위로 종사(宗社)가 다시 편안하게 된 것을 중히 여기고 아래로 여러 사람들의 간절한 청에 따라서 억지로 따랐던 것이다. 의리가 폐색된 것을 생각하고 백성들이 한숨짓는 것을 생각하면 감개스런 마음이 절실하고 계구심(戒懼心)이 깊어진다. 논리가 잘 안맞는 글로 대략적인 내용을 기초하여 고하는 것이 내가 뜻했던 것 처럼은 잘 되지 못했으니,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나의 이런 의도를 본받아서 대고(大誥)를 대신지어 중외(中外)의 신서(臣庶)들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또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에게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널리 선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4월 22일 임인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오늘의 연석(筵席)에서 이미 유시한 바 있는데, 이번의 녹훈(錄勳)을 봉조하(奉朝賀)가 설마 사양하겠는가마는, 훈명(勳名)을 치사(致仕)한 원로(元老)에게 가하는 것은 경례(敬禮)하는 뜻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30년 동안 굳게 지켜온 뜻으로 여든이란 늙은 나이에 하루에 백리길을 달려 적변(賊變)을 고했으니, 이는 진실로 천고(千古)에 드문 일이었다. 수십 년 동안 굳은 뜻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득실(得失)에 대해 계구(戒懼)하는 사람의 뜻인 것이다. 그리고 노쇠한 나이에 적변(賊變)을 아뢴 것은 곧 평일의 단충(丹忠)에서 발현된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이 어찌 말세(末世)에 크게 이익됨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제 만약 훈명(勳名)을 갑자기 원로에서 더한다면, 이는 갑진년372)   겨울에 특별히 지극한 간청을 따른 뜻이 아닌 것이다.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엄자릉(嚴子陵)의 뜻을 이루어 준 것373)  을 선유(先儒)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그러나 나는 엄자릉의 뜻을 이루어 준 것은 지극한 것이지만 정성을 기울여 낭묘(廊廟)에 머무르게 하지 못한 것은 미진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원로(元老)의 거취(去就)가 여기에 관계된 경우가 아니면 예(禮)로써 대우하고 성심으로 만류하는 것이 아름다울 것 같다. 더구나 그의 뜻을 드러내고 그의 충성을 포장(褒奬)하는 방법은 전례에 따라 훈명(勳名)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끝내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되 마땅히 별례(別例)에 의거 포상하겠다는 내용으로 하교(下敎)하겠다. 원로가 이미 지난해 비지(批旨)에 있었던 ‘일사(一絲)’라는 두 글자를 일생의 좌우명(左右銘)으로 삼겠다고 했으니, ‘일사’라는 두 글자에다가 또 ‘부정(扶鼎)’이라는 두 글자를 보태어 특별히 수필(手筆)로 써서 내려 주겠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이것을 전각(鐫刻)하여 정문(旌門)하는 방법을 본떠서 즉시 봉조하(奉朝賀)의 서울 집 앞에 세우게 하여 내가 기풍을 세워 세상을 면려시키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해조(該曹)에서 최규서(最奎瑞)의 본가(本家)에다 한 칸의 집을 지어 어서(御書)을 봉안(奉安)하게 하고 ‘어서각(御書閣)’이라고 이름하였다.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정배(定配)된 죄인 이유좌(李儒佐)·이진좌(李震佐)를 만나는 곳에서 효시(梟示)하도록 명하였다. 이를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형좌(李衡佐)가 장계(狀啓)를 올려 이유좌 등의 흉역스런 정절(情節)을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제도(諸道)의 절도(絶島)나 극변(極邊)에 있는 죄인들에 대해 담당 고을에서 검찰(檢察)하여 점고(點考)함으로써 허술해지는 폐단이 없게 할 것과 만일 사사로이 이웃 고을을 왕래하게 할 경우에는 마땅히 해관(該官)을 논죄하겠다는 것을 유시(諭示)하였다.

 

판부사(判府事)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역당(逆黨)들 가운데 망명(亡命)한 사람이 혹시 청(淸)나라로 들어가서 흉악한 말을 전파시켜 국가를 무함할 우려가 없지 않으니, 마땅히 자문(咨文)을 지어 들여보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대제학(大提學) 윤순(尹淳)에게 찬출(撰出)하라고 명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조명신(趙命臣)이 아뢰기를,
"적당들 가운데 법망(法網)에 누락된 자들이 중이 되어 산속으로 들어간 경우가 많으니, 마땅히 제도(諸道)로 하여금 각사(各寺)에 신칙하여 기포(譏捕)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처음에 허락했는데,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역적들이 용납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흉악한 마음을 굳건히 하여 변란을 쉽사리 촉발시킬 것이니, 좋은 계칙이 아닙니다."
하니, 정지시키라고 명하였다.

 

10월에 토역 정시(討逆庭試)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두거비(斗去非)를 주살(誅殺)하고 이만준(李萬準)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두거비가 국문을 받을 적에 이만준의 지시를 받아 흉언(凶言)을 했다고 했으나 말이 분명하지 않았다. 이만준이 올린 공초(供招)에서 억울하다고 일컬었으므로 면질(面質)시켰으나 사실을 밝혀 내지 못했다. 그래서 임금이 참작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친히 소정(蘇檉)을 국문하여 한 차례 형신을 가하니, 소정이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이라고 공초하자,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송하(宋賀)를 한 차례 형문하니, 송하가 공초하기를,
"이른바 요술(妖術)이라는 것은 곧 현포 비결(玄圃祕訣)로서, 처음에 성규헌(成揆憲)에게서 얻어 보았습니다. 그 술법이 한 손에서 칼을 들고 또 한 손에는 대추나무와 화부(畫符)374)  를 잡고 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장생(長生)하는 선술(仙術)이라고 했습니다만, 시험해 보아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영남 안무사(嶺南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장계를 올리기를,
"여적의 위대장(僞大將) 정세유(鄭世儒)와 위비장(僞裨將) 임태겸(任泰謙) 등을 잡아서 효시(梟示)했습니다."
하였다.

 

4월 24일 갑진

밤 5경(五更)에 유성(流星)이 위성(胃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바리때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쯤 되었다. 빛이 붉어 땅을 비추었다.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하였다. 박사수가 말하기를,
"예천(醴泉)의 군사 박국지(朴國只)가 조령(鳥嶺)을 지키다가 종기가 터져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군수(郡守) 서종일(徐宗一)이 집에 돌아가 병을 조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박국지는 마땅히 지키던 곳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끝내 가지 않고 있다가 그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마땅히 그의 집을 돌보아 구휼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돌보아 구휼하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학천(羅學川)이 영외(嶺外)에서 맨 먼저 의병(義兵)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수용(收用)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또한 옳게 여겼다. 또 청하기를,
"안음(安陰)은 개혁하여 법대로 분속(分屬)시키고 함양(咸陽)·거창(居昌) 두 고을은 모두 부사(府使)로 승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함양에 절진(節鎭)을 설치하여 거창 등 고을의 군대를 예속시켜 팔량로(八良路)를 방수(防守)하게 하면 뒷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나만서(羅晩瑞)를 목베라고 명하였다. 나만서는 괘서(掛書)의 일 때문에 형벌을 받았으나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나숭곤(羅崇坤)이 군사를 일으켰다 하여 이괄(李适)과 한명련(韓明璉)의 전례(前例)에 의거해 즉시 형을 집행하였다.

 

역적 윤휴(尹鑴)의 손자들을 절도(絶島)에 분배(分配)하라고 명하였다.

 

이윤행(李允幸)을 신문하여 한 차례 형신하니, 이윤행(李允幸)이 공초(供招)하기를,
"지난해 12월 한세홍(韓世弘)이 와서 문경(聞慶) 선교(船郊)의 보(洑)를 축조하는 데 대한 성사(成事) 여부를 점치고, 이어 말하기를, ‘변산(邊山)의 적도가 매우 성대한데 이현좌(李玄佐)와 여주(驪州)의 한가(韓哥) 등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이는 신이 점술(占術)을 대강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와서 성패(成敗)에 대해 문의한 것인데, 신이 육임점(六壬占)을 만들어 답하기를, ‘성록(聖籙)375)                  이 영장(靈長)하여 사직(社稷)이 안녕(安寧)하니, 비록 일을 하려고 해도 반드시 패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세홍이 성을 내면서 돌아갔습니다. 모역(謀逆)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사서(司書) 김상성(金尙星)이 상소(上疏)하여 주연(胄筵)을 열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옛사람은 포위된 가운데에서도 학문을 강론했고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글을 배웠으니, 필사(匹士)도 오히려 그렇게 했습니다. 지난번 적변(賊變)이 발생했을 때와 친히 국문할 때에는 사세가 혹 정강(停講)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지금은 걱정이 조금 해소되었으니, 한때 국옥(鞫獄)을 정지하든 정지하지 않든 그것이 주연(胄筵)의 개강(開講)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몇 달 동안이나 기일을 정할 수 없는 일을 이유로 하루도 폐해서는 안되는 학문을 정지한다면, 이는 성상의 학문이 날로 진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전하께서 오늘 배우지 않더라도 내일이 있다고 여겨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 염려스럽습니다. 이 한 가지 생각이 곧 그럭저럭 핑계하고 퇴보하면서 스스로 본원(本源)의 공부에 힘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니,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후손을 편안하게 할 모유(謨猷)를 전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칭찬하였다.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와 개성 유수(開城留守) 심공(沈珙)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심공이 말하기를,
"군병을 조발(調發)할 적에 이른바 3백 마병(馬兵)이라 하는 것은 바로 출신(出身)인 선무 군관(選武軍官)들이었는데, 비분 강개하여 전장에 달려가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병(牙兵)은 곧 돈을 바친 부류들인데도 행상(行商)하는 이외에 명령을 들으면 즉시 모였고 간혹 스스로 와서 점고(點考)를 받기도 했습니다. 인심이 이와 같았으니, 천명(天命)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하고, 박사수는 말하기를,
"나라에 내변(內變)이 있게 되면 왜인(倭人)들이 교사(巧詐)스런 방법으로 우리의 형편을 엿보아 왔는데, 이번의 변란을 교활한 왜적이 또한 어찌 몰랐겠습니까? 앞으로 사단(事端)을 발생시킬까 염려스럽습니다. 듣건대, 동래 부사(東萊府使) 권부(權孚)가 변란이 발생한 이후 한 번도 왜관(倭館)의 사정에 대해 도신(道臣)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했으므로, 신도 엄중히 신칙했습니다만, 권부는 끝내 회보(回報)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듣건대, 칠곡(漆谷) 남쪽 사람들이 피난한다고 일컬으면서 권부에게로 가려는 사람이 많았는데, 심지어 낙동강(洛東江)에 배를 준비해 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새로 임명된 수령을 재촉해서 내려 보내지 않을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민응수(閔應洙)에게 말을 주어 발송(發送)시키라."
하였다. 박사수가 말하기를,
"나라의 반쪽이 역적이 되었으니, 어디서 인재를 찾아 얻어 임용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물리친 사람들을 융화시켜 모두 기용한 뒤에야 국세(國勢)가 공고해질 것입니다. 신이 승정원(承政院)에 앉아 있다가 마침 재신(宰臣)을 만났는데, 또 소장(疏章)을 올리고 서울을 떠난 사람이 있다고 했으니, 오직 전하께서 성심으로 효유(曉諭)하시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신이 평일에 어찌 민진원(閔鎭遠)을 옳다고 생각하겠습니까만,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하였으므로 신이 원주(原州)를 지나다가 가서 만나보고 일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大臣)을 차례로 만났다는 이 말이 매우 좋다. 오늘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은 견준다면 마치 단단한 돌덩이와 같으니, 어떻게 융합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학문의 강론에 부지런했는데, 처음 즉위하여서는 인산(因山) 전에도 하루에 세 번 강(講)하는 것을 폐하지 않았었다. 이때 큰 난리가 겨우 평정되었는데도 오히려 법강(法講)과 소대(召對)를 행하였으니, 참으로 후왕(後王)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장령(掌令) 홍중징(洪重徵)이 상소(上疏)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양역(良役)에 대한 일을 변통시키는 한 가지 일 때문에 강론한 지가 여러번 이었고 이에 관한 발언(發言)이 조정에 가득했습니다만, 결국 계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평일 떠돌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자들이 어찌 역적의 소굴로 투입(投入)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원컨대 2품 이상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조당(朝堂)에 모여 각기 모유(謨猷)를 진달하게 하기를 천장각(天章閣)376)  의 고사(故事)처럼 하여 2, 3명의 대신(大臣)들과 절충해서 재택(裁擇)하소서. 수령이 적격자가 아니면 날마다 덕음(德音)을 내리더라도 실제의 혜택은 끝내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니, 천주(薦主)377)  도 따라서 연좌(緣坐)시키는 법을 거듭 밝히소서. 경외(京外)에서 방수(防守)하는 장교(將校)들이 공을 세워 상을 타기 위해 오로지 수급(首級)만을 숭상하였었으니, 마땅히 법에 따라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영남(嶺南)의 흉역(凶逆)은 사족(士族)인데도 불문에 붙이고 만다면 순역(順逆)을 분변하지 않는 죄과(罪科)와 같게 되는 것이니, 잡아다가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궁가(宮家)의 절수(折受)는 이미 폐지시켰고 제도(諸道)의 물선(物膳)도 이미 감손시켰으니, 이런 마음을 확충시켜 더욱더 힘쓰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소장에 진달한 내용은 옳은 말이다. 유념하자 않을 수 있겠는가? 체포(逮捕)에 대한 일은 이미 연석(筵席)에서, 그리고 비망기(備忘記)로 효유하였다. 각처의 파수병을 잘못 살해했다는 것은 그대의 말이 비록 옳지마는, 그때를 당하여 미처 상세히 살피지 못했던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소급해서 죄를 주는 것은 소요를 야기시킬 뿐만이 아니다. 더구나 파수병 때문에 목숨으로 보상하는 벌을 내린다면 한번의 일에 두 사람을 살해하는 꼴이 되고 만다. 2품 이상의 관원을 조당(朝堂)에 모이게 하여 헌의(獻議)하게 하는 일은 진실로 옳다. 승정원으로 하여금 이에 따라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5일 을사

병조 판서 오명항(吳命恒)이 원훈(元勳)을 사양하고 대궐밖에 나아가 대죄(待罪)하니, 임금이 패소(牌召)하여 인견하고 누누이 면려하였다. 오명항이 굳이 사양하다가 한참 뒤에야 비로소 명을 받들고 말하기를,
"권요(權要)의 자리에 이르는 것은 결단코 그 자리에 있지 않겠습니다. 성상께서 본직(本職)의 체차를 허락하여 주신다면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유하기를,
"경(卿)이 원훈(元勳)을 받는다면 내가 마땅히 송 태조(宋太祖)가 공신(功臣)을 보전했던 도리378)  로 경을 대우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친히 국문하였다. 이지시(李之時)를 세 차례 형문하니, 모역(謀逆)한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장흠(張欽)에게 한 차례 형문을 가하였다. 처음 장흠이 망명(亡命)하였을 때 성명(姓名)을 바꾸어 한입(韓立)의 호패(號牌)를 차고 해미(海美) 땅에 숨어 있다가 홍주(洪州)의 진영(鎭營)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성이 한(韓)이요 장흠이 아니라고 하니 영장(營將)이 사실을 조사할 길이 없었으므로, 곤장(棍杖)을 치고 방송(放送)하였다. 겨우 영문(營門)을 나서자마자 장흠과 같이 마을에 살던 소금장수가 마침 지나가다가 장흠을 보고서 묻기를,
"장생(張生)이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가?"
하므로, 영장이 비로소 그가 장흠인 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체포해서 서울로 보냈는데, 장흠이 모역(謀逆)한 것이 사실이라고 공초(供招)하였다.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4월 26일 병오

죽산(竹山) 사람 신길만(申吉萬)에게 특별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신길만을 곧 죽산의 농민(農民)인데, 마을 사람 24인과 함께 역괴(逆魁) 이인좌(李麟佐) 등을 사로잡아 바친 사람이다. 상으로 은(銀) 1천 냥을 지급하고 2품의 관직으로 뛰어 올려 제수하라고 명하니,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마땅히 역마(驛馬)로 불러 올려서 사람들을 용동(聳動)시키게 해야 합니다."
하자, 허락하였다.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절의 중이 실제로 역적을 체포한 것인데, 신길만이 대신 바치고 공을 받았다고 한다.

 

훈호(勳號)를 수충 갈성 결기 효력 분무 공신(輸忠竭誠決幾効力奮武功臣)이라고 정하였다. 오명항(吳命恒)을 1등으로 삼고, 박찬신(朴纘新)·박문수(朴文秀)·이삼(李森)·조문명(趙文命)·박필건(朴弼健)·김중만(金重萬)·이만빈(李萬彬)을 2등으로 삼고, 이수량(李遂良)·이익필(李益馝)·김협(金浹)·조현명(趙顯命)·이보혁(李普赫)·권희학(權喜學)·박동형(朴東亨)을 3등으로 삼았다. 그리고 오명항을 녹훈 도감(錄勳都監)의 당상(堂上)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오명항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옥천 군수(沃川郡守) 임세겸(林世謙)은 안성(安城)의 역적들이 무너진 뒤 즉시 영남(嶺南)에 이문(移文)했는데, 영남의 역적이 패몰한 뒤 그 이문이 안음(安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규획(規畫)이 진실로 칭찬할 만하니, 마땅히 포상(褒賞)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조명교(曺命敎)와 부수찬(副修撰) 이현모(李顯謨)가 차자(箚子)를 올려 여덟 가지 조항을 진달하였다. 첫째는 성학(聖學)을 밝혀 정치를 시행하는 근원을 단정하게 할 것. 둘째는 황극(皇極)을 확립하여 음붕(淫朋)의 해를 없앨 것, 셋째는 교화(敎化)를 펴서 이륜(彝倫)의 순서를 밝힐 것, 넷째는 노성(老成)한 사람을 임용하여 돈독하고 후덕한 기풍을 조장할 것, 다섯째는 사풍(士風)을 변혁시켜 국맥(國脈)이 장구하게 할 것, 여섯째는 백성의 고통을 살펴 방본(邦本)을 공고히 할 것, 일곱째는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국력(國力)을 넉넉하게 할 것, 여덟째는 신하를 경시하는 것을 경계하여 언로(言路)를 넓힐 것 등이었다. 또 아뢰기를,
"마음을 다스리는 근본은 학문을 강론하는 데 있으니, 이를 시작하다가, 철폐하는 걱정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연해(沿海)의 파수(把守)하는 곳에서 흔히 수급(首級)으로 상(賞)을 받기 위해 잘못으로 살해를 당하는 일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사세가 진실로 그렇게 되었다는 데로 돌려버린 채 함부로 사람을 살해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수급만을 숭상하여 경솔하게 함부로 사람을 살해한 자는 마땅히 무겁게 죄를 주어 징계하고 면려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여덟 가지 진계(陳戒)한 조항은 모두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므로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차본(箚本)을 그대로 머물러 두고 더욱 스스로 면려하도록 하겠다. 차자의 끝에 있는 일은 한 번 대신(大臣)에게 하교(下敎)하려고 한다."
하였다.

 

4월 27일 정미

청안(淸安)의 사노(私奴) 막남(莫男)의 군공(軍功)에 대해 상을 주었다. 의병(義兵)들이 청안을 공격할 적에 막남이 혼자서 먼저 분격(奮擊)하여 위현감(僞縣監)을 목베었기 때문이었다.

 

4월 28일 무신

충청도의 전 감사(監司) 서명연(徐命淵)을 귀양보내었다. 대신(臺臣) 강필신(姜必愼)의 아룀에 따른 것이다.

 

양지 현감(陽智縣監) 이용신(李龍臣)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지례 현감(知禮縣監) 이세윤(李世玧)에게는 준직(準職)을 제수하고, 김천 찰방(金泉察訪) 권일형(權一衡)은 승륙(陞六)시키라고 명하였다. 병조 판서 오명항(吳命恒)이 그들이 난리를 당하여 공로가 있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고(故)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봉상(李鳳祥)과 청주 영장(淸州營將) 남연년(南延年)을 장사지낼 적에 본도(本道)와 본고을에서 특별히 돌볼 것을 명하였다.

 

4월 29일 기유

임금이 장전(帳殿)에서 동지(同知) 신길만(申吉萬)을 인견(引見)하였다. 신길만이 이인좌(李麟佐)를 체포할 때의 사상(事狀)을 매우 자세히 고하니, 임금이 상현궁(上弦弓)379)  을 하사(下賜)하라고 명하였다.

 

분무 일등 공신(奮武一等功臣) 오명항(吳命恒)을 봉하여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으로 삼고 이어 우찬성(右贊成)에 임명하였다. 이등 공신(二等功臣) 박찬신(朴纘新)을 함은군(咸恩君)으로 삼고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뛰어 승급시켰는데, 뒤에 함녕군(咸寧君)으로 고쳤다. 박문수(朴文秀)를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뛰어 승급시켰는데, 뒤에 영성군(靈城君)으로 삼았다. 이삼(李森)을 함은군(咸恩君)으로, 조문명(趙文命)을 풍릉군(豐陵君)으로 삼고 모두 자헌 대부로 뛰어 승급시켰다. 박필건(朴弼健)을 가선 대부로 뛰어 승급시켰는데, 뒤에 금릉군(錦陵君)으로 삼았다. 김중만(金重萬)을 언성군(彦城君)으로, 이만빈(李萬彬)을 한원군(韓原君)으로 삼고, 모두 자헌 대부로 뛰어 승급시켰다. 김중만은 뒤에 가선 대부로 도로 내렸다. 삼등 공신(三等功臣) 이수량(李遂良)은 완춘군(完春君)으로서 가의 대부로 뛰어 승급시켰고, 이익필(李益馝)은 가선 대부로 뛰어 승급시켰는데, 뒤에 전양군(全陽君)으로 삼았다. 이보혁(李普赫)은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뛰어 승급시켰다가 뒤에 또 가선 대부로 승급시켰다. 인평군(仁平君) 조현명(趙顯命)은 뒤에 풍원군(豐原君)으로 삼았다. 김협(金浹)은 화천군(花川君)으로, 박동형(朴東亨)은 충원군(忠原君)으로, 권희학(權喜學)은 화원군(花原君)으로 삼고, 모두 가선 대부로 뛰어 승급시켰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금 이 삼등(三等)을 감훈(勘勳)하는 가운데 동부승지(同副承旨) 조현명(趙顯命)·천총(千摠) 김협(金浹)·교련관(敎鍊官) 권희학(權喜學)은 비록 격권(激勸)시킨 모의는 있었지마는 본디 드러난 공은 없었으니, 삼등에 선발 참여된 것은 끝내 외람된 데 관계됩니다. 모두 뽑아버리도록 명하소서. 자객(刺客)을 박격(搏擊)하고 신세윤(辛世胤)을 체포하여 벤 사람과 영외(嶺外)에서 지휘한 도신(道臣)은 사리상 당연히 감록(勘錄)해야 하는데 누락됨을 면하지 못했으니, 대신(大臣)과 원훈(元勳)에게 명하여 상의해서 추가로 감록하게 하소서. 사인(士人) 유경유(柳景裕)는 일찍이 국청(鞫廳)에 들어가 극변(極邊)에 정배(定配)되었다가 방환(放還)된 부류입니다. 그런데도 구습(舊習)을 고치지 않고 행동이 음비(陰秘)스러우니, 마땅히 절도(絶島)에 다시 귀양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경유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소회(所懷)를 아뢰기를,
"역적의 공초(供招)에 거론된 사람들이 바야흐로 곤수(閫帥)나 수령(守令)으로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계사(啓辭)에 대한 윤허를 아끼신 채 그대로 임소(任所)에 두고 있으니, 더욱 염려스러울 듯합니다.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순차로 개체(改遞)하도록 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말에도 의심스러우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이미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계사를 윤허하지 않고서 또 공공연히 다 체직시키게 하는 것은 더욱 사리에 합당하지 않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강필신(姜必愼)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호남(湖南)의 역적이 창궐할 적에 역적의 차인(差人)과 흉악한 관문(關文)을 모두 역(驛)의 인마(人馬)를 이용했으니, 각역(各驛) 찰방(察訪)의 죄는 이루 다 벨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율봉 찰방(栗峰察訪) 이제겸(李濟謙)은 영외(嶺外)로 달아나 자기 집에서 누워 있었던 탓으로 본역(本驛)의 인마(人馬)가 모두 역적에게 제공되었으니, 먼 변방으로 충군(充軍)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부교리(副校理) 오광운(吳光運)을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북로 안무사(北路安撫使) 윤헌주(尹憲柱)에게 우선 올라오지 말고 그대로 경흥(慶興)에 머물러 있으라고 유시하였다. 전(前) 부사(府使) 황부(黃溥)가 바야흐로 북로(北路)에 있었는데, 그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문수(朴文秀)에게 하유(下諭)하는 글에 이르기를,
"지난번 역적 이웅보(李熊輔)의 이종(姨從)인 조세추(曹世樞)가 체포되었을 적에 같이 참여한 정절(情節)에 대해 일일이 승복(承服)했는데, 그 가운데 ‘3월 13일에 이인좌(李麟佐)가 하회(河回)의 진사(進士) 유몽서(柳夢瑞)의 집으로 가서 이내 유몽서를 권덕수(權德秀)·김민행(金敏行)의 집으로 보내어 일을 의논하게 했다. 밤이 깊은 뒤에 유몽서가 돌아왔는데 이능좌(李能佐) 혼자만 나와서 보았으므로 그 사이의 사정은 상세히 알 수 없다.’고 했다. 유몽서·권덕수·김민행은 마땅히 법에 따라 잡아다가 그 정죄(情罪)를 철저히 따져 조사하여 조처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조카인 정의련(鄭宜璉)의 초사(招辭)에 의하면 ‘3월 10일 뒤에 이능좌가 예천(醴泉)에 왔다가 크게 분노하여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안동(安東) 놈들 때문에 나의 일을 이룰 수 없다.」 했다. 처음에 이정소(李廷熽)를 목베고 안동을 통괄하려고 했으나 안동 사람들이 크게 꾸짖기를,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자, 이능좌가 이 때문에 분개하면서 가버렸다.’고 했다. 이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안동 사람들은 순역(順逆)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역적을 꾸짖어 물리침으로써 역적에서 분노하여 가도록 만든 것은 진실로 칭찬하고 감탐한 만한 일이다. 지금 권덕수의 무리가 거론된 것은 무슨 곡절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함(誣陷)을 받은 데서 나온 것이라면 또한 이럴 리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설령 처음에 저들의 현혹시킴에 빠져 잘못되었을지라도 곧 깨달아 징계하여 끝내 따르지 않았으니, 곧 깨끗이 씻고 벗어나 개과 천선(改過遷善)함으로써 명향(名鄕)의 충효(忠孝)스런 습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에 일체 모두 탕척시켜 주고 다시 철저히 추구하지 않기만 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나의 이런 뜻을 모를 것이니, 경(卿)이 그들을 불러다가 무함을 받았어도 방면되게 된 수말(首末)을 상세히 말하여 주어 그들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한 다음 안심하고 거주(居住)하면서 더욱 충의(忠義)에 힘쓰게 하라. 인하여 안동의 사민(士民)들로 하여금 내가 훌륭한 풍속을 가상히 여기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이때 안동 사람들이 잇따라 역적의 공초에 거론되었으나, 임금이 일체 불문에 붙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와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안동 사람들에 대해 불문에 붙이기만 할 뿐이라면 그들이 어떻게 조정의 덕의(德意)를 알겠습니까? 반드시 의구심만 더 심해질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이미 잡아다가 국문하려 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문자(文字)로써 특별히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에게 효유하여 모두 탕척시킨다는 뜻을 안동의 사민들에게 효유함으로써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혜를 생각하게 하는 터전을 만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이광좌로 하여금 유지(有旨)를 찬진(撰進)시키게 하였다. 뒤에 박문수가 교지(敎旨)를 받들고 직접 안동부(安東府)에 가서 경내(境內)의 사인(士人)들을 불러서 향교(鄕校)로 모이게 하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유몽서·권덕수·김민행 3인을 불러들여 교지를 선시(宣示)하고 덕음(德音)을 낭독하여 전하게 하니, 유몽서 3인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사인(士人) 정동규(鄭東奎) 등 3백여 인이 글을 올려 임금의 은덕(恩德)을 칭송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친히 국문하였다. 다시 이사로(李師魯)를 한 차례 형문하니, 이사로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과연 이유익(李有翼)의 서간(書簡)을 가지고 평안도 병영(兵營)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유익이 서간을 줄 때 ‘우리들의 일이 급하게 되었다. 밤에 거사해야 되겠는가? 아니면 낮에 거사해야 되겠는가? 겨우 한세홍(韓世弘)을 보냈는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다시 가서 탐지해 가지고 온다면 마땅히 공모가 있게 될 것이다.’ 했는데, 이른바 낮에 거사한다고 한 것은 영남(嶺南)에서 군대를 일으키는 일이었고 밤에 거사한다고 한 것은 저들이 적도을 모아 밤에 이용하여 대궐을 범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이 처음 들어갔을 적에 이유익이 초시(初試)을 본 뒤 가서 치하(致賀)했는데, 그때 마침 조용히 관상(觀相)하는 자가 있었던 바 임환(任環)이란 자였습니다. 그가 이유익의 상(相)을 보고 ‘벼슬이 2품에 이르겠다.’ 하였고, 또 신의 상(相)을 보고서는 말하기를, ‘이 사람도 관상이 좋다.’ 하였습니다. 이유익이 ‘이미 관상이 좋다면 함께 일을 해도 되겠는가?’ 하니, 임환이 ‘좋다.’ 하였습니다. 이유익이 ‘그대의 관상이 좋다고 하니 우리들이 하는 일에 그대가 들어오고 싶은가?’ 하기에, 신이 ‘하려는 것이 무슨 일인가?’ 하니, 이유익이 ‘모역(謀逆)하는 일이다.’ 하였으므로, 신이 ‘그대가 어찌하여 이런 괴이한 말을 하는가?’ 했습니다. 이유익이 ‘나는 박필현(朴弼顯)과 절친한 사이어서 그만두려 해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일을 하는 것이다.’ 하기에, 신이 ‘지금은 성덕(聖德)이 뛰어나시다. 소론이 패몰한 뒤에 다시 천일(天日)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유봉휘(柳鳳輝)를 죽이지 않은 일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성덕의 지극함을 알 수 있다.’ 하니, 이유익이 ‘국운(國運)이 좋지 않으니 어찌 성공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유익이 신에게 ‘그대가 들어오려고 한다면 반드시 공로를 세운 뒤에야 될 수 있다. 그대는 반드시 이 서간을 가지고 평안 병사(平安兵使)에게 가야 된다.’ 하기에, 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서간을 전했다가 서울로 포박하여 보낸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니, 이유익이 ‘나의 서간을 가지고 가면 반드시 들어오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신이 과연 그 서간을 가지고 갔더니 문지기가 저저시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이유익이 나에게 가기를 권할 적에 ‘한유(韓游)의 삼형제(三兄弟)를 보내도 되는데 한광(韓洸)·한유는 지금 벼슬에 종사(從事)하고 있고 한순(韓洵)은 일을 맡은 것이 있으므로 보낼 수가 없다. 황부(黃溥)의 아들을 보낼 수 있지만 지금 수원(水原)에 가 있고 임환(任環)을 보낼 수도 있는데, 이하(李河)가 서얼(庶孽)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여기고 있다. 민사맹(閔思孟)을 보낼 수 있지만 어영 대장(御營大將)과 친하므로 혹시 누설될까 염려스럽고 홍계일(洪啓一)은 인물이 경망스럽고 항심(恒心)이 없으므로 보낼 수 없다. 구성언(具聖彦)은 술을 취하면 망발하기 때문에 보낼 수 없고 도사(都事) 이세우(李世遇)는 늙어서 보낼 수가 없고, 오명시(吳命始)·오언빈(吳彦賓)은 계모(啓謨)가 많으므로 보낼 수 없다. 홍계일이 항상 「민사맹은 보통 일은 모두 시킬 수 있으나 깊은 일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했습니다. 구성언은 바로 역적 이하의 매부(妹夫)이고 윤덕유(尹德裕)의 주인(主人)입니다. 구성언이 신에게 나도 이 일에 동모(同謨)했는데 항상 오언빈의 부자(父子)와 함께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4월이 된 뒤에는 그가 마땅히 평교자(平轎子)를 탈 것이라고 했습니다. 흉모(凶謨)의 정절(情節)에 대해 이유익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영남의 군대가 마땅히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는 일어날 것인데 그대는 한가한 몸이니 평안 병사에게 가서 서간을 전하라.’ 하기에, 신이 ‘각기 가정(家丁)을 이끌고 나간다는 일은 가소롭다.’ 하니, 이유익이 ‘우리들은 빈한하지만 남인은 부잣집이 많으므로 군병을 고용(雇用)할 수가 있다.’ 했습니다. 남태징(南泰徵)은 일언 반사(一言半辭)도 신에게 언급한 것이 없었습니다. 신이 데리고 간 이징(李澂)은 일가(一家)의 종이요 남태징이 보낸 사람은 아닙니다. 작년 겨울부터 비로소 이유익을 알았는데 신의 일가인 이헌민(李獻民)이 염병으로 죽었으므로 그 상가(喪家)에 있을 적에 보내 온 서간의 내용에 ‘한진사(韓進士)의 일행이 지금까지 올라오지 않고 있으니 괴이스럽기 그지없다. 분명히 효유시키는 일을 어떻게 완정(完定)해야 되겠는가? 영남 군대의 일을 올지 안올지 우선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선성(先聲)이 크게 진동하고 있으니 기쁜 일이다. 관사(官事)에 제지(制止)하는 일이 없으면 몸을 숨겨 올라오라. 그러면 우리들이 주가(主家)에다 보호시켜 주겠다.’ 했는데, 주가는 임금으로 추대(推戴)한 집을 가리키고 분명히 효유한다는 것은 낮과 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흉언(凶言)의 근본은 이유익이 박필현에게서 들었는데 본래는 심유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심유현은 경종(景宗)의 척리(戚里)로서 고관(高官)이 될 수 있는 사람인데, 시세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마땅히 초초(草草)하게 서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나라를 원망하는 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유익이 ‘이와 같은 말을 전파시킨다면 인심을 의혹(疑惑)시킬 수 있게 될 것이고 더욱 많이 전파될수록 인심이 모두 그렇게 여길 것이다. 이 일을 성취시키는 것은 오직 인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적도(賊徒)들에게 투입한 사람들도 모두 흉언(凶言)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으나, 욕심에 끌려 이 역모에 함께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이명의(李明誼)가 물고(物故)되었다. 이명의가 여러 번 역적의 공초(供招)에 거론되었으므로 국문하니, 이명의가 공초하기를,
"권서봉(權瑞鳳)이 과연 사촌(四寸)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만나보지 않은 지가 거의 10년이 되었고 권서룡(權瑞龍)도 만나보지 않은 지가 이미 5, 6년이나 되었습니다. 신은 흥양(興陽)에 있었으니 어떻게 동모(同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을사년380)   이후 이명의는 북변(北邊)으로 귀양가 있었고 권서봉도 또한 근읍(近邑)으로 귀양가 있었다. 그런데 정미년381)  에 이르러 이명의는 호남(湖南)으로 이배(移配)되었고 권서봉도 잇따라 방한(放還)되었다. 권서봉이 돌아올 적에 이명의가 엿보던 기생을 데리고 와서 자기 집에 머물러 두었는데, 이명의가 연달아 서간으로 서로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그 서찰을 가지고 가던 사람이 수원(水原)의 진중(陣中)에 잡히게 되었다. 그뒤 도순무(都巡撫)의 군대가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의 역적을 격파하고 문서(文書)를 수색하던 중 이명의가 권서봉에게 보낸 서간의 봉투와 내용이 나왔다. 오명항(吳命恒)·송인명(宋寅明)·박문수(朴文秀)·조현명(趙顯命) 등이 말하기를,
"이명의가 역적과 내통하고 서로 전일의 공초에서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됩니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형신을 받게 되었으니, 승복(承服)하지 않고 죽었다.

 

신석영(申錫永)을 절도(絶島)에 보내어 노예를 만들게 하고, 박경순(朴景淳)·임희대(林喜大)·전한상(全漢相)은 방송(放送)시키고, 권설(權卨)과 심유현(沈維賢)의 종인 돌몽(突蒙)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신석영은 뒤에 다시 잡아다가 그에게 자백(自白)을 받고 정형(正刑)에 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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