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신해
신시(申時)에 해에 중운(重暈)이 있었는데, 내운(內暈)에는 양이(兩珥)가 있고 운 위에는 배(背)가 있고 운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다. 외운(外暈)에는 위에는 배가 있고 빛깔은 모두 안은 적색, 밖은 청색이었으며, 흰 기운이 좌이(左珥)에서 나와 구불구불 동쪽으로 향하였는데, 매우 오래 있다가 사라졌다.
소대(召對)121) 를 행하였다.
3월 2일 임자
밤 2경(二更)에 운기 같은 검은 구름 한 줄기가 곤방(坤方)으로부터 일어나 곧바로 간방(艮方)을 가리키며 길게 하늘에 뻗쳤다. 너비는 1척 남짓하였는데, 매우 오래 있다가 없어졌다.
3월 3일 계축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황단(皇壇)122) 에 친사(親祀)하였다.
3월 4일 갑인
임금이 하직하는 여러 수령(守令)을 불러 보고 백성들의 폐해를 묻고 칙려(飭勵)하여 보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는데, 공조 좌랑(工曹佐郞) 윤동원(尹東源)에게 시강(侍講)하도록 명하였다.
김시형(金始炯)을 집의(執義)로, 이수익(李壽益)을 헌납(獻納)으로, 정우량(鄭羽良)을 교리(校理)로, 오광운(吳光運)을 부교리(副校理)로, 정석오(鄭錫五)를 응교(應敎)로 삼았다.
이한겸(李漢謙)이 《명사강목(明史綱目)》 30권을 올렸다. 이한겸의 아버지 고(故) 좌참찬(左參贊) 이현석(李玄錫)이 《명사》 30여 질(秩)을 가지고 고증하여 편집한 것인데, 일찍이 숙종 때 소(疏)를 올려 한가한 시간을 얻어 이 일을 마치게 해주기를 바라자, 숙종이 가장(嘉奬)하여 조용히 일을 마치도록 하라고 면려했다. 그후 초고(草藁)를 거두어들여 한 번 어람(御覽)를 거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 이한겸이 그 책을 올린 것이다. 임금이 비답을 내려 아름답게 여겼다.
대사간(大司諫) 채팽윤(蔡彭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대저 임금이 천하의 일을 다스리는 데는 그 근본이 한 마음에 달려 있으므로, 한 가지라도 바르지 못한 것이 있게 되면 의리(義理)가 정해지지 않아 근심이 많고 미혹하기가 쉬워서, 대정(大庭) 가운데서 수식(修飾)하기는 쉬우나 연신(燕申)123) 하는 자리에서 계근(戒謹)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역(周易)》에, ‘그 근본을 바르게 하면 만사가 다스려진다.’ 하였습니다. 삼가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일, 학문에 힘쓸 일, 세자(世子)를 훈계하는 일, 중정(中正)의 도(道)를 세우는 일, 사람을 쓰는 일,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일, 백성을 구제하는 일,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일 등 여덟 가지 잠언(箴言)을 조목으로 아룁니다. 여덟 가지 잠언 가운데서도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일에 전하께서는 더욱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받아들이고, 원소(原疏)는 궁중에 머물러 두라고 명하였다.
3월 5일 을묘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현명(趙顯命)·전경(典經) 이종성(李宗城)이 글의 뜻을 진달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헌부(憲府) 【집의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평(持平) 윤상백(尹尙白)은 호남(湖南)에 장시(掌試)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산(公山)에 도착해 난민(亂民)에게 혹독한 욕설을 들어 나라의 체통을 잃었으니, 체차(遞差)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공산 현감(公山縣監) 이경원(李慶遠)은 자신이 수토(守土)하는 관원이 되어 이민(吏民)을 엄히 단속하지 못해 난민이 사객(使客)에게 함부로 욕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방백(方伯) 역시 잘 단속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공산 현감 이경원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충청도(忠淸道) 전 감사(監司) 권첨(權詹)은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 【정언 이성효(李姓孝)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임징하(任徵夏)를 잡아오는 금부 도사(禁府都事) 김유(金磂)는 내려간 지 7일 만에 비로소 해남(海南)에 도착했고 배를 출발시키기 전에 또 18일을 허비했으며, 죄인의 가속(家屬)을 먼저 들여보냈다는 설이 도하(都下)에 크게 전파되었습니다. 장본(狀本)을 보기에 미쳐서는 갖가지 늘어 놓은 사설이 오로지 도회관(都會官)만 허물하는 등 현저히 미루고 미봉(彌縫)하는 정상이 있었으니, 청컨대 나문하여 정죄(定罪)하게 하고, 도회관도 일체로 나문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회령 부사(會寧府使) 민제장(閔濟章)은 일찍이 전라 병사(全羅兵使)를 맡았는데, 탐오(貪汚)와 불법(不法)을 일삼아 각 창고가 텅 비었습니다. 대신(臺臣)이 이를 논계하여 조사하기를 청하자, 조사를 마치기도 전에 당돌하게 나와 숙배(肅拜)하였으니, 파직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차대(次對)124) 를 행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호남(湖南) 각 군문(軍門)의 미납한 미포(米布)는 아울러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여 백성들에게 실신(失信)함이 없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 참의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작년 7월 이전에는 국세(國勢)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린 듯하였는데도 당습(黨習)이 혁연하였으나, 경화(更化)한 뒤에 달리 크게 진작(振作)하거나 크게 변동한 일이 없어 마치 물이 더욱 깊어가고 불길이 더욱 타오르는 것 같으며, 묘당(廟堂)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계책도 언제나 빈말로 돌아가고 맙니다. 탕평(蕩平)으로 말하더라도 지금 막혀 있는 자는 1색(色)에 불과할 뿐 3색은 통용되고 있으며 막혀 있는 자는 그들에게 죄가 있는데도 그들은 죄가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국가에서 모름지기 지성으로 개유(開諭)하여 감화되도록 만들어 점차 조용(調用)한다면 저절로 탕평하게 될 것인데도 시일만 끌고 실효가 없으니,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허물이다. 지난번에는 오직 당습에만 힘써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였으니, 지난해 7월의 일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하교(下敎)를 여러 차례 내렸는데도 지금까지 인순(因循)하여 아직껏 실효가 없으니, 신하들을 대하면 실로 부끄러움이 많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지금 한갓 죄 있는 자를 다스릴 줄만 알고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할 줄 모른다면 그저 서로 과격한 공박만 일삼을 뿐 결코 그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세상에서 모두 신이 소론(少論) 중에서 준열하다고 말하나, 소신은 실로 편론(偏論)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신의 심붕(心朋)에 최창대(崔昌大)와 한지(韓祉)가 있는데 서로 면계(勉戒)하는 것이 매양 당론이었습니다. 그리고 당론 가운데 휩싸여 들어가 마치 좁은 골짜기 속에서 몸도 놀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 본심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신의 마음은 하늘에도 물을 수 있습니다. 탕평의 의지가 어찌 감히 송인명에게 뒤지겠습니까만, 지금의 세도(世道)가 아주 괴이하여 저 한 무리 사람들은 감화(感化)시킬 길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심각(深刻)한 자는 통렬하게 배척하고 억제한 후에는 점차 세월에 갈리고 모서리가 깎여 점차 탕평하는 데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송인명의 뜻이 소신의 뜻과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으나 그것을 하는 방법에는 조금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지난번의 사람들이 환득 환실(患得患失)125) 하는 마음으로 경종(景宗)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부터 스스로 위태로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점차 수십 년 동안 쌓아 오면서 경종을 향해 군신(君臣)의 의(義)가 없었습니다. 만일 탕평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처분이 엄정하여 광명 뇌락(光明磊落)한 연후에 사소하게 탕평할 곳은 자연히 점차로 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날 처분에 설마 미진한 곳이 있다 하더라도 대체(大體)가 이미 서서 국사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금번의 처분은 끝내 엄정함이 부족하여 오히려 사방의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송인명의 의중은 ‘대략 이미 거행했으니 족히 탕평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신의 뜻 역시 크게 형률(刑律)을 쓰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나, 그 중 한두 사람에게는 기강(紀綱)을 엄히 세우고, 그 나머지는 비록 죄가 있어 마땅히 깊이 다스려야 할 자라도 탕척(蕩滌)하는 과(科)에 넣어도 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신이 혹 이런 말을 친지들에게 했더니, 모두 말하기를, ‘만약 그런 말을 진달한다면 성상께서 반드시 편벽되게 논의하는 사람으로 아실 것이다.’ 하면서 말리는 자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신은 ‘이는 국가의 근본적인 일에 관계되는지라 비록 성상께서 편벽된 논의를 하는 사람으로 아시더라도 어찌 소회가 있는데도 다 말하지 않아서 단지 어지러움과 혼란만 더하게 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김재로(金在魯)·이병태(李秉泰) 등 몇 사람은 실로 추장(推奬)하여 임용함이 합당하나 이병태는 임징하(任徵夏)를 구원하는 데 참여하였으니, 이는 조금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진달한 말을 보건대, 매우 조리가 있어 신은 쓸 만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신이 명색이 대신(大臣)이 되어 단지 성상의 뜻을 맞추기에만 힘쓰고 평일의 소회를 진달하지 않는다면 어찌 불충(不忠)한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은 정직한 도리로서 신이 그 말의 옳음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을 구제하는 길이 시급하여 반드시 한 등급을 낮춘 연후에야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하고, 교리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송인명의 말이 광명정대함은 비록 대신에게 뒤지지만 지금 현실을 구제하는 도리로서는 반드시 좋은 계책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습(黨習)의 고질이 이미 고황(膏肓)126) 에 들었다. 선조(先朝) 때도 일찍이 색목(色目)이 없지는 않았으나 요사이보다 심한 적은 없었으니, 신축년127) ·임인년128) 의 일로 말하더라도 그때 한 사람만 있어도 한쪽이 모두 다 역적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이른바 말이 ‘패만하게 나오면 역시 패만하게 들어간다.’는 것이니, 만고에 어찌 신축년·임인년의 일 같은 것이 있었겠는가? 경이 이제 대신으로 있으니 자세히 생각해 보라. 그 사람들이 분한 마음을 쌓아 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근일에 처분을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조금도 없었으니, 한마디 한마디 갈수록 더욱 심하게 되면, 어찌 괴격(乖激)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경이 진달한 민진원(閔鎭遠)의 일은 신하의 도리로서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그 사람의 경망함으로 연유한 소치이나 그후 말이 경종께 미치면 항상 눈물을 흘렸으니, 나는 그가 결코 다른 마음이 없었음을 알고 있다. 경 등이 신축년·임인년 사이에 있으면서 끝내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죄를 바로잡지 못했으니, 반성하는 도리가 이에 있다. 지금 비록 민진원·정호(鄭澔) 등 10여 무리에게 율(律)을 가한다 하더라도 하루에 한 가지의 율을 쓰게 되면, 한갓 그들의 원분(怨忿)만 격발시킬 뿐 어찌 탕평하는 도리에 도움이 되겠는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조제(調劑)해 나가면 스스로 탕평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하교하심이 시원하고 바를 뿐 아니라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어놓으시니,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인들 어찌 유독 편벽된 논의에 마음이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오직 본심만은 아직도 있습니다. 지난날의 일에 직분을 다하지 못함은 신에게 큰 허물이 있으니 실로 만번 죽어 합당하나, 나라를 향하는 마음만은 저 푸른 하늘에 맹세할 수가 있습니다. 저 사람들이 경종께 조금의 성의(誠意)도 없었음을 소신이 항상 환히 알고 있었습니다. 고묘(告廟)하기를 청한 것으로 말하더라도 만고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통렬하게 준엄한 배척을 가하시면 기강이 엄연하게 설 것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야 나머지 사람도 탕평할 수 있을 것이고 말도 순하고 이치에도 맞을 것입니다. 만약 충애(忠愛)하는 마음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말을 진달하여 다른 사람과 원한을 맺겠습니까? 신은 차마 전하를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다.
사간 김중희(金重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후의 성교(聖敎)를 보건대, 전하께서 본디 이미 현사(賢邪)·충역(忠逆)의 분별을 통찰하고 계시나, 그 이른바 적절하게 구처(區處)한다는 것은 우이(牛梨)129) ·천삭(川朔)130) 이 서로 득실(得失)이 있는 것 같은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처분을 내릴 때 미봉(彌縫)하는 뜻을 면치 못하는데, 아래에서 받들어 행하는 자 역시 구차하게 승순(承順)하는 기색이 없지 않습니다. 신은 의(義)를 따르고 중정(中正)을 세우는 도리가 결코 이래서는 안되며, 이른바 탕평도 한갓 이름만 있고 그 실상은 없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의(大義)는 비록 좋으나 아직도 그 속투(俗套)를 벗지 못하였다."
하였다.
반시(泮試)131) 를 베풀어 진사 이광찬(李匡贊)에게 급제를 내렸다.
호조 판서 권이진(權以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명(聖明)한 시대를 만나 지위와 직임이 융숭하고 현달하여 망령되이 기우(杞憂)를 품고 문득 어리석은 충심(忠心)을 진달하였습니다. 의절(儀節)은 거칠고 말이 어리석고 망령됨에도 천안(天顔)은 온화하고 수답(酬答)은 메아리같아 천고의 인신(人臣)들이 그 임금에게 얻지 못했던 것을 신만이 전하께 얻었는지라, 만분의 하나라도 보답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일신이 멸망하고 종족(宗族)이 침몰하는 것 역시 감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양심(養心)하는 공부와 학문(學問)하는 요체를 진달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3월 7일 정사
밤 1경(一更)에 달이 오거 동남성(五車東南星)을 범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공산 현감(公山縣監) 이경원(李慶遠)은 검소하게 살고 폐단을 혁파한 공효가 있으니 잉임(仍任)132) 시키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남일명(南一明)을 보덕(輔德)으로, 박필기(朴弼琦)·유운(柳運)을 지평(持平)으로, 이삼(李森)을 좌윤(左尹)으로, 서종옥(徐宗玉)·조명교(曺命敎)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3월 8일 무오
밤 3경·4경에 동쪽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3월 9일 기미
간원(諫院) 【헌납(獻納) 이수익(李壽益)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 남취명(南就明)은 그 위엄이 한 도(道)를 안찰하기에 부족하고, 술이 과하여 또 정령(政令)을 해쳤으니, 체차(遞差)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10일 경신
임금이 사묘(私廟)에 나아가 전배(殿拜)하였다. 왕세자가 어가를 따라갔다.
교리(校理) 정우량(鄭羽良)·조현명(趙顯命), 부교리(副校理) 오광운(吳光運), 부수찬(副修撰) 홍경보(洪景輔)·이현모(李顯謨), 정자(正字) 이종성(李宗城)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듣자오니, 지난해 본궁(本宮)에 거둥하여 지나실 때 잠저(潛邸)133) 에서 모시던 무리들이 모두 알현(謁見)함을 입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구사(丘史)134) 같이 천한 자들 역시 그 사이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들으니, 구사의 무리들이 행전(行殿) 옆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천한 무리들의 발자취가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청란(淸鑾)135) 이 머무는 곳에 가까이 해서는 안되며, 더군다나 동궁 저하(東宮邸下)께서도 바야흐로 어가를 따르고 계시는지라 더욱 예(禮)가 아닌 것을 보이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원하건대 내쫓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사전례(私展禮)를 마치고 나니, 내 감회가 새롭다. 너희들이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일에 따라 진계함을 내가 가상히 여긴다. 내 비록 학문이 깊지 못하나 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느냐? 지금 들으니, 그 궁속(宮屬)들이 감히 집안에 있을 수 없어 행랑 밑에 와 있다고 하기 때문에 즉시 내보내라고 명하였거니와, 이후에 따로 이르겠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사묘에 전례(展禮)를 행하고 동궁이 어가를 배종(陪從)하니 성상의 마음이 슬퍼져 눈물이 곤포(袞袍)를 적셨는데, 옥당의 차자가 마침 이르러 성비(聖批)가 이러했으니, 역시 허심 탄회하시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겠다.
부교리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재를 넘어 여러 고을을 두루 다녔습니다. 대개 영남(嶺南)은 산에 동철(銅鐵)이 있고 바다에서는 어염(魚鹽)이 생산되면 토양도 비옥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폐단이 천만 가지가 되어 있으니, 더욱 심하기는 여러 궁가(宮家)의 도장(導掌)136) , 여러 상사(上司)의 차인(差人)137) , 각 군문(軍門) 각 영문(營門)의 감관(監官)138) 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호남(湖南)의 절수(折受)139) 를 파하여 열성조에서 행하지 못한 성대한 은전을 거행하셨으니, 이제 영남만이 유독 의심을 가지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양역(良役)의 폐단이 오늘날 으뜸이 되고 각궁의 절수가 버금이 되고 있으니, 원하건대, 먼저 절수를 파하고, 곧 각영·각읍에 명하여 사사로이 모집한 것을 모두 혁파하고, 정군(正軍)에 옮겨 충당하게 하소서. 그리고 생각하건대, 만사가 모두 임금의 한 마음에 근본을 두니,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자기의 사욕을 버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을 쓸 즈음에 이르러서도 언어가 민첩한 자가 반드시 모두 성실한 것이 아닌데도 개납(開納)하심을 많이 입고, 의모(儀貌)가 지둔(遲鈍)한 자가 반드시 순근(純謹)하지 못한 것이 아닌데도 문득 가볍게 보시는 경향이 있어 부박(浮薄)한 습성이 점차 자라나고 독후(篤厚)한 풍습이 점차 더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성상의 학문이 광대(廣大)한 지역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개납(開納)하였다.
3월 11일 신유
헌부(憲府) 【지평(持平) 유운(柳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영변 현감(寧邊縣監) 신덕하(申德夏)는 찬가(饌價)라고 칭탁하고 시임(時任) 재상의 집에 전화(錢貨)를 싸보냈는데 재상이 놀라 물리쳤다 합니다. 돈과 물건을 사사로이 보낸 것이 듣기에 놀라우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필철(朴弼哲)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강필신(姜必愼)을 지평(持平)으로, 신치근(申致謹)·홍보(洪輔)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영남 별견 어사(嶺南別遣御史) 박문수(朴文秀)가 환조(還朝)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자인 현감(慈仁縣監) 남국한(南國翰)은 지식이 밝지 못하고 또 술을 좋아하는 지라 아전은 좋아하고 백성들은 원망하며, 대구 판관(大丘判官) 윤숙(尹潚)은 사람과 관직이 걸맞지 않고 전혀 일을 모르며,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만유(李萬維)는 혼미하여 일을 보살피지 못해 아전들이 그것을 빌미로 간사함을 부리니, 청컨대,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용인 현감(龍仁縣監) 송성원(宋性源)은 능(陵)에 행행(幸行)하실 때 길에 횃불을 많이 배정해 놓고는 횃불 하나에 2냥씩을 받았으며, 또 전정(田政)에 민원(民怨)이 많으니, 우선 파직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선 파직하고, 범한 바는 후에 조사해 묻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2일 임술
밤 1경에 달이 헌원 좌각성(軒轅左角星)을 범했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옥당(玉堂) 오광운(吳光運)·이현모(李顯謨)가 주자 봉사(朱子封事)를 강(講)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참찬관(參贊官) 유정(柳綎)이 아뢰기를,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정원에 말을 보내오기를, ‘심유현(沈維賢)이 석방되지 못했는데, 부부인(府夫人)이 양근(楊根) 땅에 이르러 병세가 위중하다 하니, 이 일을 마땅히 위에 아뢰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유현이 원정 공사(原情公事)를 미처 내리지 못했는데, 부부인의 병세가 이러하다면 고율(考律)하여 의언(議讞)140) 할 즈음에 지연될 것이니, 우선 방송(放送)하고, 금오(金吾)로 하여금 후에 마감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이어 부부인의 병소(病所)에 어의(御醫)를 보내 약물을 가지고 역마(驛馬)로 달려가 보게 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심유현은 적의 와주(窩主)141) 가 되어 그 일로 인해 갇혀 있었는데, 조태억이 급급하게 그의 당인 유정을 시켜 천청(天聽)을 속여 옥에서 나오게 하였고, 며칠이 되지 않아 거의 하늘을 뒤덮는 화(禍)를 이루게 했으니, 비록 통모(通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믿겠습니까?"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좌의정 조태억(趙泰億)·대제학 윤순(尹淳)·좌포도 대장(左捕盜大將) 이삼(李森)을 인견하였다. 이삼이 아뢰기를,
"포교(捕校)가 전주(全州)에 가서 마침 행동이 수상한 자를 만나 함께 여사(旅舍)에 앉아 술을 사마시기를 권하였던 바 매우 취한 후 그 사람이 일어서자 작은 종이가 땅에 떨어졌는데 말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결박하여 영장(營將) 이경지(李慶祉)에게 고하여 엄히 가두고 이름을 물었더니 임피(臨陂)에 사는 이세룡(李世龍)이라 이름하는 놈이었습니다. 포교 4인 가운데 한 사람이 밤낮으로 올라와 그 작은 종이를 가져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보기를 마치고는 이내 대신 및 윤순에게 보였다. 그 편지(片紙)는 여러 줄이 씌여 있었으나 전혀 문리(文理)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구(語句) 가운데 나라에 대한 부도(不道)한 말이 많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경지가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였다. 처음에 별도로 군교(軍校)를 정하여 압송(押送)하지 않고 경솔하게 중장(重杖)을 시행했으니, 지레 죽을까 염려스럽다. 가도사(假都事)를 주야로 가서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전교하기를,
"최초의 흉서(凶書)는 글도 능하고 글씨도 능하여 이 작은 종이와는 비록 다르나, 아래 조항의 말은 대략 같은 것이 없지 않다. 경들은 이미 그 글의 사의(辭意)를 보지 못했으니, 마땅히 대략만이라도 일러 주어야 하겠다."
하고는 이어 좌우를 물리치고 또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기록하지 말라고 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호남의 인심이 흉괴(凶怪)하여 옥구(沃溝)·임피(臨陂) 사이에서는 울타리에 괘서(掛書)가 있는데도 예삿일로 보았습니다. 이제 이세룡의 호적(戶籍)을 보니 역시 임피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마땅히 엄히 단속해 금단해야 합니다."
하였다.
정석오(鄭錫五)를 승지로, 권호(權頀)를 사간으로 삼았다.
3월 14일 갑자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급변(急變)을 올리니,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이조 판서 이태좌(李台佐)·병조 판서 오명항(吳命恒)·호조 판서 권이진(權以鎭)·예조 판서 이집(李㙫)·형조 판서 서명균(徐命均)·좌참찬 김시환(金始煥)·판윤 김동필(金東弼)·이조 참판 조문명(趙文命)·호조 참판 윤순(尹淳)·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호조 참의(戶曹參議) 송인명(宋寅明)·도승지(都承旨) 이정제(李廷濟)를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이광좌가 나와 말하기를,
"어젯밤 봉조하 최규서가 급히 달려 올라왔는데 보고를 듣고 그 까닭을 물었더니, 답하기를, ‘이웃에 놀랍고 괴이한 일이 있어 상달(上達)하고자 해서이다.’라고 하기에 한편으로는 다시 글로 묻고 한편으로는 여러 재신을 비국(備局)으로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부좌(赴坐)하는 길에서 그 답서를 지닌 채 한 사람을 데리고 오는 봉조하의 아들 최상정(崔尙鼎)을 만나 신이 그 답서를 보고서야 비로소 적변(賊變)의 대강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바로 용인(龍仁) 안박(安鑮)의 동생형(同生兄)인 지리학 교수(地理學敎授) 안호(安鎬) 및 종 막실(莫實)이었습니다. 초사(招辭)를 받은 후 안호와 막실은 구류했고, 최규서의 답서 및 안호 등의 초사는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기를 마치고 말하기를,
"외간(外間)에도 역시 이런 소란이 있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소란은 본래 근거가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으나, 수일 사이에 양반(兩班)의 내행(內行)142) 이 나루터를 메워 사람들이 많이 괴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른바 장흠(張欽)은 송전(松田)에 사는데 안박과 함께 흉역(凶逆)을 같이 모의하여 13일에 군사를 모으고 14일에 소사(素沙)로 가서 15일에 거사를 한다고 하여 원로 대신이 급히 올라온 것이니, 이는 근거없는 소란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또 소사는 거리가 멀지 않으니, 조가(朝家)에서 환란을 방지하는 것을 늦추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문이 적실하다면 죄인을 체포하는 일이 긴급한데, 14일에 모이고 15일에 동병(動兵)한다는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장흠 등이 집에 있지는 않을 듯하다."
하였다. 김중기가 말하기를,
"양성(陽城)은 서울과의 거리가 지극히 가까워서 15일에 거사한다면 사세가 급박하니, 완만하게 처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속히 군사를 동원하여 호위(扈衛)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노장(老將)의 말이 좋으나, 아직 단서(端緖)를 알지 못하니 경솔하게 먼저 군사를 움직여서는 안될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소요가 크게 번졌으니, 만약 그대로 피해가는 인파를 놓아 둔다면 성안은 거의 비게 될 것이고, 또 흉한 무리들이 흘러들어와 몰래 숨어 있을 것이니, 또한 염려스럽습니다. 비록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 힘들지만 마땅히 훈국(訓局)으로 하여금 성문을 파수하여 비상(非常)하게 살피게 하고, 또 5군문(五軍門)으로 하여금 장교(將校)를 호남(湖南)·호서(湖西)·기내(畿內)·관동(關東) 등지에 보내어 잘 기찰(譏察)해 붙잡아서 소홀히 하는 근심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가 계엄(戒嚴)하지 않고 먼저 여러 적을 잡게 되면 격동시켜 이루게 함이 반드시 빠르게 될 것이다. 옛 역사에서도 난적(亂賊)들이 간혹 기모(機謀)가 누설됨으로 인해 곧바로 거병하여 경사(京師)로 진격한 적도 있었다. 만약 변란을 일으킬 실제의 자취도 없는데 한갓 소동만 일으킨다면, 비단 적의 계책에 빠질 뿐만 아니라 또 조가(朝家)에서 진압해 안정시키는 도리도 아니다. 단서를 자세히 안 연후에 방비해 막는 대책을 강구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광좌·조태억이 서로 번갈아 아뢰어 계엄(戒嚴)하기를 극력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사를 움직여야 할 곳은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아야 할 곳은 움직이지 않은 후에야 사기(事機)를 잃지 않는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니, 송인명은 말하기를,
"지난 인종조(仁宗朝) 유효립(柳孝立)의 역변(逆變)143) 때에 성문 및 진두(津頭)를 파수했으니, 지금도 이 예에 의해 거행하고 형찰(詗察)하도록 신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동필은 말하기를,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군병을 성문과 진두에 매복(埋伏)시켜 수상한 자를 형찰하게 하고, 또 부오(部伍)를 정제하여 사변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좋은 계책일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판윤(判尹)의 매복시키자는 말이 좋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궐내(闕內)의 각문 이외에 8개 문에도 군사를 더 보태 파수하고, 경외(京外)에도 군교(軍校)를 보내 형찰을 비상하게 하면서 꼼짝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간사한 무리들이 스스로 움츠러들고 민심이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하고, 오명항(吳命恒)은 말하기를,
"지레 먼저 소동(騷動)해서는 안되니, 아직은 성문과 나룻목을 파수하지 말게 하고, 군문에서 멀리 척후(斥候)하고 군병을 정돈하고는 은밀히 각 나루를 형찰한다면 적도들이 어찌 어지러이 건너오겠습니까? 근래에 괘서(掛書)하는 한 가지 맥락이 오로지 공동(恐動)할 계책으로 나온 것이지 군사를 일으켜 난을 일으키는 것이 어찌 용이하겠습니까?"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장흠(張欽)이 비록 도망하였지만 적의 꾀는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도사(都事)를 곧바로 그 집에 보내 수색해 잡은 후에 소사(素沙)로 전송(轉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흠 부자는 긴요하게 나왔으니, 두 도사를 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원기(元氣)가 실(實)하지 못하면 객사(客邪)가 밖에서 침범하게 마련이다. 해마다 기근(飢饉)이 든 나머지 백성들의 고통이 거꾸로 매달린 듯한데, 더군다나 승평(昇平)한 지 오래되어 백성들이 전쟁을 보지 못하였다. 간사한 무리들이 이런 것을 헤아려 알고는 서로 이끌어 난동을 일으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고는, 인하여 훈국에 명하여 대궐문과 성문에 군사를 더 보태 파수하고, 어영(御營)과 금영(禁營)은 각 나루를 파수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괘서(掛書)의 한 맥락이 이 적도와 한 꿰미로 연관되어 경외에 흩어져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으로 하여금 군교(軍校)를 보내서 기찰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남한(南漢)·북한(北漢)·강도(江都)는 모두 보장(保障)의 중요한 땅이다. 일찍이 어느 대신이 도성(都城)의 형세를 논하면서 한 산성(山城)으로 해야 편리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말이 이치가 있었다. 도성은 위로 종사(宗社)를 받들고 아래로는 신민(臣民)이 있으며 공경(公卿)과 사서(士庶)에게는 모두 부모 처자가 있으니 만약 조가(朝家)에서 굳게 지키려는 뜻을 알게 되면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고 반드시 힘을 내어 사수(死守)할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도성은 주위가 40리나 되어 한 장수가 호령해 관섭(管攝)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극력 불가하다는 말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수(攻守)하는 방책은 오늘 논할 바가 아니나, 내 뜻은 본래 그렇다."
하고는 명하여 최규서(崔奎瑞)를 입시하라 하였다. 최규서가 이르자 임금이 두 소환(小宦)에게 명하여 부축해 전(殿)으로 오르게 하고 수고함을 위유(慰諭)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글 가운데 기록한 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는가?"
하니, 최규서가 말하기를,
"기록한 바는 단지 안박(安鑮)의 말일 뿐이고, 그 외에도 혹 들은 바가 없지 않으나 항간에 떠도는 것에 불과한데, 이는 인종(仁宗) 때 적신(賊臣) 유탁(柳濯)이 유인(誘引)한 인물의 일과 비슷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누구누구가 들어 있다는 설은 허황하여 알기가 어렵습니다. 송전(松田)의 장흠(張欽)을 잡아다 국문하면 그 두서(頭緖)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적의 거병(擧兵)은 어느 날로 기약했는가?"
하니, 최규서가 말하기를,
"안박이 말한 바를 들으면 13일부터 14일 4경(四更)까지 군사를 모아 소사(素沙)에서 호궤(犒饋)하고, 15일 거사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안박의 입에서 나왔는가?"
하니, 최규서가 말하기를,
"비단 안박의 말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향리의 노소가 모두 그런 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이 이미 봉조하(奉朝賀)의 말을 들었으니, 각기 의견을 진달하라."
하니,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정월 초이튿날, 경중(京中)에 소란이 갑자기 일어났고 연달아 괘서의 변이 있었습니다. 듣자오니, 4, 5일 전에는 진위(振威)에 사는 백성들이 서로 경동(驚動)하여 산 위로 피란했다고 하니, 이는 형적이 없는 일이 아닙니다."
하고, 조문명은 말하기를,
"남쪽에서 괘서한 후 또 서문(西門)의 변이 있었고, 정월의 와언(訛言) 역시 변괴이니, 이는 반드시 간흉한 무리들이 선동한 소치입니다. 일찍이 정월에 신의 집에 익명서(匿名書)가 있었는데, 그 말이 아주 흉패하고 나라에 대해 부도(不道)하였으며, 끝에 가서는 신의 신상을 공갈했는데, 능문 능필(能文能筆)이어서 마음에 더욱 의아하고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봉조하의 말을 듣고보니, 이는 일시적으로 불러 모은 적도가 아닌 듯합니다. 군문(軍門)에서 거행할 일들을 즉시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로 대신이 마음에 놀라서 올라왔으니, 평소 우국하는 정상을 볼 수 있다. 만약 13일날 모여서 15일에 거행한다면, 병(兵)이란 속이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법이니, 마땅히 숨기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찌 먼저 일의 기미를 누설하겠는가? 이는 반드시 떠도는 말을 선동하여 백성들을 동요하게 하려는 것이니, 조정에서 먼저 움직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영상의 계엄하자는 말은 혹 경동하는 데 가깝고 여러 신하들이 진달한 바는 분수에 지나치다. 죄인을 잡아다가 국문하면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니, 천천히 의논해 조치해도 늦지 않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진위(振威)·용인(龍仁)·양성(陽城)·직산(稷山) 등의 고을은 모두 요충지인지라, 이럴 때 음관(蔭官)에게 맡겨 둘 수 없으니, 무신(武臣)으로 가려 차임해야 할 것입니다. 공주(公州)는 호중(湖中)의 인후(咽喉)인데 영장(營將) 김구령(金九齡)은 진려(振勵)하는 기력이 없으며, 청주(淸州)는 이미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이 있는데 영장 남연년(南延年)은 노쇠하여 맡기기가 어려우니, 아울러 우선 개차(改差)하고 극진히 가려서 내려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 경종(景宗)과 영조(英祖)께서 왕위를 주고받은 것은 정대(正大)하여 천지(天地)에 의논을 내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鬼神)에게 물어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이 흉언을 지어내고 역도(逆徒)들과 결탁하여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하는 데 이르렀으니, 누가 예의(禮義)의 나라에 기록에도 드문 이런 변고가 있으리라 생각했겠습니까? 그 흉언의 와굴(窩窟)과 근저(根柢)는 바로 심유현(沈維賢)인데, 심유현은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아우였습니다. 사람됨이 요사(妖邪)·경험(傾險)하여 이유익(李有翼)·박사관(朴師寬) 등과 함께 무뢰한(無賴漢)들과 친밀하게 놀았는데, 영조께서 그가 단의 왕후의 척속(戚屬)이라 하여 아주 후하게 대우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고관(高官)을 얻지 못한 것을 불만스레 여겨 원망하였습니다.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 여러 적들이 갑진년144) 이전에 주상을 모위(謀危)하려다가 이미 이루지를 못하자, 밤낮으로 역모를 꾀하다가 심유현이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는 이유익 등으로 하여금 교결(交結)하게 하여 더욱 그 사특한 마음을 도발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심유현이 흉언을 지어내어 원근에 전파한 것입니다. 아! 심유현을 잘못되게 한 자는 본디 효경(梟獍)145) 의 종자이지만 참으로 심유현의 처지가 척속이 아니었다면 또 어찌 그 선동하고 광혹(誑惑)하게 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겠습니까? 이때에 상신(相臣)과 장신(將臣)이 모두 김일경과 박필몽(朴弼夢)의 구당(舊黨)이었으나, 오직 우리 영조(英祖)께서 넓으신 대도(大度)로 하늘을 덮고 땅을 포용하여 의심없이 위임(委任)해 심복(心腹)에 배치하자 팔도의 적이 차례로 그 목을 바쳤으니, 이는 비단 황천(皇天)과 조종이 우리 나라를 돌본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영조의 대략(大略)에 힘입은 것이니, 훌륭하고 성대하다 하겠습니다.
이때 도하(都下)에 근거없는 풍문이 날로 흉흉하여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려 들고 서 있어 조석 사이도 보장할 수 없는 듯하였고, 남산(南山) 아래 일대에는 가족을 이끌고 피해 도망하는 사부(士夫)들이 많아서 나룻터에 길이 막혔으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함은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최규서(崔奎瑞)가 창황하게 상변(上變)하기에 미쳐서야 비로소 그 변고에 자취가 있음을 대략 알아 비로소 포졸(捕卒)을 풀어 잡도록 명했다. 마침내 적정(賊情)이 드디어 드러나니 뜻을 잃은 불량한 무리들이 박필몽·심유현과 체결하여 역변을 지은 것이었는데, 남산 아래에 사는 나라를 원망하는 많은 부류들은 그 역모를 서로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현(姜鋧)은 숭반(崇班)의 중신(重臣)으로서 몰래 그 가속(家屬)을 호중(湖中)에 보내고는 스스로 소분(掃墳)146) 한다는 핑계를 대고 따라서 하향(下鄕)하였으니, 이에서도 그 세변(世變)을 볼 수 있다.
이정제(李廷濟)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윤순(尹淳)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3월 15일 을축
포도 대장(捕盜大將) 남태징(南泰徵)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본청(本廳)의 부장(部長)이, 상인(喪人) 성탁(成琢)과 상한(常漢) 김옥성(金玉成)의 언어와 행동이 수상하기 때문에 붙잡아 왔는데, 좌우를 물리치고 친히 물었더니, 그 말하는 바에 의심스런 것이 많았습니다."
하고, 인하여 성탁과 김옥성의 초사(招辭)를 올리니, 임금이 명하기를,
"성탁 등을 의금부에 가두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12일(임술)에 수원 부사(水原府使) 송진명(宋眞明)이 새로 부임하였는데, 용인의 유생(儒生) 정관빈(鄭觀賓)이 급변(急變)을 고하기를,
"출신(出身) 안익태(安益泰)가 동네 사람 안박(安鑮)의 말을 전해 이르기를, ‘토적(土賊)이 바야흐로 일어나는데 경외(京外)가 서로 응하고 남북이 합세하여 장차 수원(水原)을 먼저 습격하여 주수(主倅)를 해치고는 그 고을을 점거해 난을 일으키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송진명이 정관빈을 구속하고 군교(軍校)를 보내 안익태를 붙잡게 하고는 먼저 군관(軍官) 허수(許樹)를 서울로 보내 그의 종제(從弟) 호조 참의(戶曹參議) 송인명(宋寅明)에게 글로 보고하였다. 이에 송인명이 영의정 이광좌·좌의정 조태억·판의금 오명항·훈련 대장 이삼·어영 대장 조문명과 함께 희정당(熙政堂)에서 입대(入對)하였는데, 송인명이 송진명의 사서(私書)를 올렸다. 임금이 허수를 부르라 명하고 합문(閤門)에 이르러 송인명을 보내 이삼·오명항 등과 함께 일의 정상을 묻게 하였다. 허수가 정관빈의 말을 대략 써서 고하니, 오명항이 허수가 고한 글을 올렸다. 임금이 가도사(假都事)를 나누어 보내어 고변 가운데 든 사람을 붙잡으라 명하고, 밀유(密諭)를 송진명에게 내려 역시 기포(譏捕)하고 경비(警備)하게 하였다. 훈련 대장 이삼도 정관빈의 초사 속에 나왔는데, 적당(賊黨)이 말하기를,
"조정에서도 내응하는 자가 많은데 훈련 대장 같은 사람은 나라에서 재생(再生)의 은혜를 받았지만 알고도 모르는 체하고 있다."
하니, 이삼이 대죄(待罪)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성심(聖心)에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이 가시면 쾌히 처분을 내리시고 그렇지 않으면 확실하게 소석(昭釋)하여 군무(軍務)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여 출사하게 하였다.
곡산 부사(谷山府使) 이여적(李汝迪)을 이언형(李彦馨) 대신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로 삼았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서명연(徐命淵)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면유(勉諭)해 보냈다.
이때 급서(急書)가 여러 번 올라와 인심이 흉흉하여 두려워하고, 여러 적을 미처 잡지 못하여 조정에서 단서(端緖)를 예측하지 못해 여러 차례 설국(設鞫)하여 먼저 상변한 자를 문초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수원 부사 송진명(宋眞明)이 또 정관빈(鄭觀賓) 및 체포한 안익태(安益泰)를 가도사에게 붙여 서울로 보냈는데, 임금이 역시 곧 국청을 설치하지 않았다. 교리(校理) 오광운(吳光運)·수찬(修撰) 홍경보(洪景輔)가 정자(正字) 이종성(李宗城)에게 말하기를,
"역적이 일어나는 것은 본래 정한 곳이 없는 것이며, 반드시 모두 상한(常漢)에게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 조정의 처분이 이처럼 너그럽게 용납하니 어찌 주액(肘腋)의 변이 없을 것을 알겠는가?"
하였다. 이광좌·조태억이 그 말을 듣고는 드디어 오광운·홍경보·이종성 등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초혼(初昏)에 희정당에서 입시해 빨리 정국(庭鞫)을 설치하고 궁성(宮城)을 호위하기를 청하고, 또 오광운 등이 수작한 말을 고하니, 임금이 비로소 친국(親鞫)을 허락하고 곧 삼군문(三軍門)147) 에 명하여 호위하게 하였다.
적(賊)이 청주성(淸州城)을 함락시키니, 절도사(節度使) 이봉상(李鳳祥)과 토포사(討捕使) 남연년(南延年)이 죽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權瑞鳳) 등이 양성(陽城)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賊魁) 이인좌(李麟佐)와 더불어 군사 합치기를 약속하고는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행상(行喪)하여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병기(兵器)를 실어다 고을 성(城) 앞 숲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 이에 앞서 성안의 민가에서 술을 빚으니, 청주 가까운 고을 민간에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했다. 병사(兵使) 이봉상을 보고 말한 자가 있었으나 이봉상이 믿지 않고 설비를 하지 않으니, 성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이날 밤에 이르러 적이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 소리로 외치며 영부(營府)로 돌입하니, 영기(營妓) 월례(月禮) 및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문을 열어 끌어들였다. 이봉상이 창황하게 침상 머리의 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적이 끌어내 칼로 위협했다. 이봉상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
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 군관(軍官) 홍임(洪霖)이 변을 듣고는 돌입하여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말하기를,
"내가 진짜 절도사다."
하니, 적이 끌어내어 항복하라 협박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욕을 퍼부었다. 이인좌가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기 때문에 죽인다. 그러나 일이 성사된 후 너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겠다."
하였다. 홍임이 다시 꾸짖기를,
"나에게는 본디 아들이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어찌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겠느냐?"
하고는 드디어 죽었다. 적이 또 진영(鎭營)에 들어와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에게 항복하라 협박하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면 장차 크게 등용하겠지만 항복하지 않는다면 참(斬)하겠다."
하니, 남연년이 꾸짖기를,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 어찌 개새끼 같은 너희를 따라 반역을 하겠느냐?"
하였다. 적이 꿇어앉지 않는 데 노하여 칼로 무릎을 쳤으나,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말하기를,
"어서 내 머리를 베어라."
하면서 끊임없이 꾸짖다가 죽었다. 우후(虞候) 박종원(朴宗元)은 상당 산성(上黨山城)에 있었는데 적이 부르니, 박종원이 투항하였다. 이인좌가 자칭 대원수(大元帥)라 위서(僞署)하여 적당(賊黨) 권서봉(權瑞鳳)을 목사(牧使)로, 신천영(申天永)을 병사(兵使)로, 박종원(朴宗元)을 영장(營將)으로 삼고, 열읍(列邑)에 흉격(凶檄)을 전해 병마(兵馬)를 불러 모았다. 영부(營府)의 재물과 곡식을 흩어 호궤(犒饋)하고 그의 도당 및 병민(兵民)으로 협종(脅從)한 자에게 상을 주었다.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淸州)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表忠祠)라 사호(賜號)했다. 남연년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했는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임(洪霖)에게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추증하였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3월 16일 병인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임어하여 안호(安鎬)를 친히 국문하니, 안호가 공술하기를,
"이달 초5일 동생제(同生弟) 안박(安鑮)이 언서(諺書)로 말하기를, ‘장흠(張欽)이 충청도에 적변이 일어났다고 전해주어 장차 피란하고자 서울을 떠나려는데 무슨 소문을 들었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장흠의 매부 안세최(安世最)를 대정동(大貞洞)으로 가 만나 보았더니, 안세최가 묻기를, ‘그대에게도 역시 향서(鄕書)가 있었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왔다.’고 하였습니다. 안세최가 말하기를, ‘나에게도 역시 장흠의 글이 왔다.’ 하고는, 장흠의 서간 사연을 전해 말하기를, ‘이번 13일에 피란해 골짜기로 들어가니 모름지기 내 누이와 함께 와 사생을 같이 하자.’고 하였다 하고는, 함께 괴이한 장흠의 말을 웃었습니다. 신의 종 막실(莫實)이 용인(龍仁)에서 와 전언하기를, ‘봉조하(奉朝賀)가 금방 들어왔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장흠의 종이 저에게 전하기를, 우리 상전(上典)이 나갈 때 그의 아들과 종들에게 「너희들은 피란하지 말고 집을 잘 지키고 있거라. 나는 죽지 않는다. 이번 15일 소사(素沙)에서 군사를 모으겠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봉조하를 전생서(典牲署)에 나가 맞아 막실의 말을 고하였더니, 봉조하가 신을 따라오라 하기에 이미 비국(備局)에 가서 납초(納招)한 것입니다."
하였다. 막실을 문초하니, 막실은 공술하기를,
"13일에 용인에 이르니 송전리(松田里)에 사는 백성으로서 농사철을 당해 곡물을 묻고 장흠을 따르는 자가 12인이었는데, 장흠이 각자에게 돈 1냥(兩)씩을 주어 주육(酒肉)을 준비해 먹게 하고는 같은 현(縣)의 기패관(旗牌官) 이순망(李順望) 등 20여 인과 함께 양성(陽城)으로 향했는데, 장흠은 구만리(九萬里)로 향하고, 그 나머지는 가천역(加川驛)을 향하였습니다. 들으니, 12일 저녁에 모여 13일에 진위(振威)·양성 등지의 군사와 합쳐 소사(素沙)에서 조련하고, 15일, 16일 사이에는 충청도 병영에 이르러 병사(兵使)가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고, 그 군사를 빼앗아 금산(金山)의 적 7만 명과 합세하여 서울로 들어가되, 세 길로 나누어 혹은 수로(水路)로 혹은 육로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안박을 문초하니, 안박은 공술하기를,
"신이 사는 곳이 장흠의 집과 몇 리 떨어져 있는데, 이번 11일에야 비로소 장흠이 무리를 모으고 돈을 갖고 주육(酒肉)을 준비해 먹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안에는 신의 행랑처에 사는 상한(常漢) 5인도 있었는데, 12일 밤 이들이 장흠의 집에 모여 장흠이 거느리고 양성으로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신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해 봉조하(奉朝賀)의 아들 홍천 군수(洪川郡守) 최상복(崔尙復)에게 가 말하고 신은 즉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봉조하가 이 일로 상경하자 장흠의 동생 장전(張錪)이 그 말을 듣고는 신을 원망하므로 신은 깜짝 놀라 산골짜기로 숨었습니다. 적당(賊黨) 가운데 또 진위(振威)의 정계윤(鄭季允)과 이천(利川)의 정종윤(鄭宗允)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나, 이는 모두 풍문입니다."
하였다.
가도사(假都事) 등이 장흠(張欽) 등을 붙잡기 위해 양성(陽城)에 이르렀다가 적의 추격을 받아 도망해 돌아왔다. 임금이 거기에 동행한 포도 부장(捕盜部將) 이행빈(李行彬)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초나흗날 장흠이 사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촌사(村舍)가 한결같이 비어 있어 그집 비부(婢夫) 서애룡(徐愛龍)을 붙잡아 장흠이 간 곳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양성 구만리(九萬里) 권서방(權書房) 집에 가 모였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애룡을 데리고 구만리 근처로 달려가서 앞산 봉우리를 건너다 보았더니, 모여 있던 자들이 백기(白旗)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떠들썩하게 욕을 했습니다. 다시 앞으로 가까이 가니 화살과 탄환이 어지러이 떨어지기 때문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주야로 올라온 것입니다."
하였다. 훈국(訓局)의 척후 장교(斥候將校) 역시 와서 고하기를,
"적의 무리가 혹 2백 명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마군(馬軍) 1백 명, 보군(步軍) 1백 명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이때 급서(急書)가 올라온 지 이미 2일이 지났는데도 아직껏 적정(賊情)의 허실을 몰랐다가 이에 이르러 상하가 경동했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이럴 때 성상께서 만약 경동하면 중심(衆心)을 진정시켜 안도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진정시키고자 하는데, 경이 진달한 유비 무환(有備無患)의 설을 내가 이제야 탄복하겠으니, 경은 주밀(周密)하도다."
하였다. 드디어 여러 장신(將臣)을 불러 의논하라 명하고는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로 순토사(巡討使)를 겸임케 하고 박찬신(朴纘新)을 중군(中軍)으로 차출하여 출정(出征)하게 하였다. 김중기가 청하기를,
"5도(道)에서 징병(徵兵)하여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스스로 거느리고 동성(東城) 밖에 진을 친 뒤 먼저 박찬신을 보내 금위군(禁衛軍)을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 가 본진(本鎭)의 군사를 거두어 돌아와 강상(江上)에 진을 쳐 적을 방어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사간 송인명이 그것이 계책이 못됨을 말하여 드디어 제도(諸道)의 징병을 중지하고, 단지 기읍(畿邑)의 군사만 징발하였다. 또 청하기를,
"급히 박찬신을 보내 수원에 진을 치고 적을 토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박찬신을 불러 위로하고 타일러 보냈다. 또 수어 종사관(守禦從事官) 이수익(李壽益)을 보내 광주 부윤(廣州府尹) 김상규(金尙奎)와 함께 군사를 징발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을 지키게 하고, 조엄(趙儼)을 관성장(管城將)으로 삼아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도성문(都城門)은 닫고 단지 흥인문(興仁門)·숭례문(崇禮門) 및 서소문(西小門)만 열게 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이 청하기를,
"향리(鄕里)에 있는 대신 및 전임 장신(將臣)을 부르고, 김재로(金在魯)·유척기(兪拓基) 등을 기용하소서. 그리고 적신(賊臣) 민암(閔黯)·윤휴(尹鑴)·이의징(李義徵)·민종도(閔宗道)의 자손은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해야 하니, 민종도의 자손으로서 서울에 있는 자를 우선 잡아 가두게 하소서. 태인 현감(泰仁縣監) 박필현(朴弼顯)은 개차하고 무신(武臣)을 차출해 보내고, 상강(上江)의 주군(州郡) 및 강도(江都)의 수신(守臣)에게 신칙하여 방비를 엄히 설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밖에 있는 대신에게 별유(別諭)를 내리고, 민종도의 아들 민관효(閔觀孝)·이의징의 손자 이일좌(李日佐) 등을 옥에 가두었다. 송인명이 또 청하기를,
"가도사(假都事)로 도망해 돌아온 자는 군율(軍律)에 의해 효시(梟示)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곤장을 치게 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박찬신(朴纘新)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폐(廢)한 장붕익(張鵬翼)을 기용하고자 하니, 이광좌가 술을 먹으면 객기(客氣)를 부리고 도량이 좁은 것을 단점으로 지적하면서 그르칠까 염려스럽다고 하며 임금이 연중(筵中)에 세 번이나 물었지만 모두 막아버렸다.
판윤(判尹) 김동필(金東弼)이 청하기를,
"도민(都民)에게 효유(曉諭)하여 경동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김동필에게 가서 타이르라고 명하였다. 김동필이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성상의 덕음(德音)으로 글을 지어 가로(街路)에 효고(曉告)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조정의 덕의(德意)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요스런 즈음에 쌀값이 뛰어올라 살아갈 길이 없을 듯하니, 청컨대 강창미(江倉米)로 공물가(貢物價)를 응당 주어야 할 자에게 나누어 주고, 군병(軍兵)의 다음달 요미(料米) 역시 미리주어 위안해 기쁘게 하여 진정시키는 도리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양성(陽城) 사람 출신(出身) 김중만(金重萬)이 적 가운데서 달려와 훈국(訓局)의 진(陳) 앞에 가서 변란을 보고하니, 임금이 잡아들여 물으라 명하였다. 김중만이 공술하기를,
"양성 구만리(九萬里)의 양반 권서룡(權瑞龍)과 권서린(權瑞鱗), 가천역(加川驛) 양반 최경우(崔擎宇)·정세윤(鄭世允), 용인 도촌 김종윤(金宗允), 안성(安城)의 출신 정계윤(鄭季胤)·윤희경(尹熙慶), 과천 호현(狐峴)의 신광원(愼光遠)이 역모를 하였는데, 최경우의 집에서 1백여 명이 모였고, 권서린의 집에서 1백 50여 명, 평양(平壤) 박파총촌(朴把摠村)에서 50여 명이 모이고, 괴산 유상택(柳尙澤) 집에서 50여 명이 모여 모두 3백여 명입니다. 이달 초이렛날 구만리에 모여 12일 밤에 어둠을 타고 군사를 합쳐 청주(淸州) 병영(兵營)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영남(嶺南)의 대군(大軍)이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모인 자들은 모두 각처의 명화적(明火賊)으로, 지금은 바야흐로 가천(加川)과 구만리 두 곳에 나누어 둔치고 있어 사방의 이웃 고을 백성들이 소동해 촌락이 모조리 비었습니다. 13일에 신이 적의 숲에서 탈출해 와서 그후의 일은 알지 못하나, 만약 영남의 군사가 이르게 되면 곧바로 경성을 범하려고 합니다. 이 적들이 삼남(三南)과 교통(交通)하고 있는데, 영남은 청주 송면(松面)에 사는 사인(士人) 이인좌(李麟佐) 4형제가 주관하여 명령이 상주(尙州)와 통하며, 호남은 안성의 상인(喪人) 원만주(元萬周)가 주관하여 나주(羅州)의 나씨(羅氏) 성을 가진 양반과 교통하고 있습니다. 지금 적들이 부족한 것은 무기로서 10명 가운데 칼을 든 자는 겨우 1인뿐이고, 모두 능장(稜杖)148) 을 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한 영읍(營邑)을 먼저 얻어 그곳 군기를 취하고자 합니다. 적진 가운데서 추대되어 장령(將領)이 된 자는 이인좌인데, 풍문에 여력(膂力)과 계려(計慮)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인좌는 영남의 군사가 이르지 않았다 하여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아서 적군에는 이제 두령(頭領)이 없습니다. 그래서 백의(白衣)로 변복하고 행인 모양을 하고 경중(京中)으로 흘러 들어오려 합니다. 신광원(愼光遠)이 내응(內應)을 주관하고, 경중(京中)의 내응은 적당(賊黨) 중의 자호(字號)가 원례(元禮)인 자인데, 신은 그의 이름은 모릅니다. 양서의 목주경(睦周敬)이 말하기를, ‘그 일가로서 청파(靑坡)에 사는 자가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이름을 기억하는 자는 단지 목수경(睦壽敬)뿐입니다. 적당(賊黨) 가운데 이호(李昈)는 얼굴빛이 조금 누르고 위는 넓고 아래는 좁으며 수염의 길이는 한 치 남짓하며 수염이 드물어 숫자가 적고 키는 보통 사람 정도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비록 안호(安鎬) 등의 고변이 있었으나, 적정의 요령을 얻은 것은 실로 김중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에 도사를 나누어 보내 모든 적을 나포(拿捕)하라 명하였다.
김옥성(金玉成)을 문초하니, 김옥성이 공술하기를,
"초 10일에 진위(振威) 갈원(葛院)외향(外鄕)149) 에 도착하니, 외숙(外叔) 최정룡(崔廷龍)이 말하기를, ‘이곳 근처에서 군사를 모아 12일 밤에 부락이 일시에 모두 비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는 도망하여 중미(中彌) 주막에 이르러 한 상인(喪人) 【바로 성탁(成琢)이다.】 을 만났더니, 상인이 말하기를, ‘갈원에 사는 양반 김정현(金廷賢)과 그 매부 박영동(朴寧東) 등이 1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이 군사 일으키기를 기다려 함께 서울을 범하려고 하였다. 갈원 주막 사람들은 모두 김정현의 노속(奴屬)이어서 김정현이 백색(白色) 군복(軍服)을 만들게 하였는데, 기일에 미쳐 주막 사람들이 모두 김정현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김정현이 그 무리를 잃고는 겁이 나 도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상인과 함께 서울로 들어와 남문(南門) 밖 팔패(八牌)150) 에 숨어 있었는데, 상인이 동네 유사(有司)를 불러 신을 붙잡아 인계하였습니다. 지금 삼남(三南)은 이미 어떻게 해볼 수가 없으니, 속히 평안 병사(平安兵使)에게 일러서 성안 창고의 군기(軍器)를 굳게 지키게 해야만 비로소 미칠 수 있습니다. 내응(內應)할 약 1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와 각고(各庫)의 군기를 하룻밤에 불태운다는 설이 성안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위해 취할 방도로는 멀리 강원·황해·평안·함경도의 군사를 징발해야만 위급함을 구제할 수 있는데, 양서(兩西) 지방(地方)이 모두 저들 무리에게 들어가서 그 군사가 이미 어느 지점에 도달하였는지 모르오니, 성상께서는 강화(江華)·남한(南漢)으로 들어가시면 거의 무사할 것입니다. 신이 진위에 있을 때 여론이 이와 같았고, 우협(禹悏)·유시무(柳時茂) 등도 역시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감히 고합니다."
하였다.
어영 기찰 장교(御營譏察將校)가 의심스런 사람인 출신(出身) 이징관(李徵觀) 및 아노(兒奴) 귀금(貴金)을 성밖에서 잡아 대궐로 올려보냈다. 국문하여 한 차례 형신(刑訊)했으나, 불복하였다. 귀금을 문초하니, 공술하기를,
"상전(上典)은 직산(稷山)에 사는데 전립(氈笠)을 쓰고 환도(環刀)를 차고 적당(賊黨)에 들어가고자 하였습니다. 적은 변산(邊山) 정도령(鄭都令)과 갈원(葛院) 권진사(權進士) 등으로서 장군(壯軍)을 모집하여 군복(軍服)을 만들었으며, 박창급(朴昌伋)은 그 일족이 매우 많은데 모두 적중에 들었습니다. 이번 15일에 경성을 포위하고자 하여 이른바 정도령이 구만리(九萬里) 권생원(權生員) 집에 와 상의하였는데, 능히 둔갑(遁甲)·부작(符作)151) 등을 잘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형 목시룡(睦時龍)과 김일경(金一鏡)의 아들 김영해(金寧海)를 죽이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김일경과 목호룡 등이 임금을 해치려 모의해 목호룡은 상변(上變)하고 김일경은 교문(敎文)을 지어 마구 흉언을 하였다. 갑진년152) 에 김일경과 목호룡은 부도죄(不道罪)에 걸려 죽었으나, 노륙(孥戮)까지는 미치지 않았으며, 을사년153) 에 목호룡의 형 목시룡이 국문을 받았으나 감사(減死)되었다. 대관(臺官)이 목시룡 및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를 율(律)에 의해 처단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따르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굳게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생업에 안정하지 못하고 유리(流離)하여 떠돌아다니니, 불령한 무리들이 그 속에서 요동시켜 소요를 일으킵니다. 별도로 안집(安集)시키는 뜻을 8도에 하유(下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참으로 일정한 산업이 없으면 일정하게 지키는 마음도 없다.’고 하였다. 기근이 든 나머지 이러한 소란이 있어 백성들이 모두가 동요하게 된 것이니, 이는 작은 근심이 아니다. 하유하는 일은 갈증이 나서야 우물을 파는데 가까우니, 우선 천천히 두고 보아야 한다."
하였다. 박문수(朴文秀) 등이 궁성을 호위한 후에 장전(帳殿)에 나가 임어하라는 뜻으로 번갈아 극력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으고자 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소요함이 이와 같은데 취각(吹角)하여 군사를 모으면 비단 도하(都下)가 동요할 뿐만 아니라, 인마(人馬)가 소란을 피울 즈음에 혹 저들이 기회를 타고 잠복(潛伏)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전령(傳令)해 군사를 모으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양 군문(兩軍門)만으로 호위할 것인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밤이면 장전(帳殿)으로 나가 임어하시는데 어찌 호위를 소홀하게 하겠습니까? 마땅히 각 군문으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여야 하는데 성문(城門)에 이미 자물쇠를 내렸으니, 이럴 때 문을 열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성안의 군사로 호위하고, 성밖의 군사는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하니, 역시 그대로 따랐다.
3월 17일 정묘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임어하여 친국(親鞫)하였다. 병조 판서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성문을 닫은 후로 도성 백성들이 배나 더 흉흉하고 두려워하니, 청컨대 다시 열어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돈의문(敦義門)·광희문(光熙門) 두 문은 열고, 훈국(訓局)·어영(御營)에 명해 군졸을 더 정해 파수하게 하라."
하였다.
명하기를,
"삼군문(三軍門)은 적도가 몰래 성안으로 유입하는 것을 규찰하여 집집마다 파즐(爬櫛)154) 토록 하라."
하고, 또 명하기를,
"군문(軍門)과 포청(捕廳)은 무뢰배들이 여염에서 행패 부리는 것을 금지하라."
하고, 또 제로(諸路)에 요충지를 엄히 방비하라 명하였다. 교리(校理) 조현명(趙顯命)은 호위하는 군병을 위로하기를 청하고, 오명항은 청하기를,
"애통(哀痛)해 하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기백(畿伯)에게 명하여 효유하는 방(榜)을 통구(通衢)155) 에 걸어, 적 가운데서 그 무리를 붙잡아 바치는 자는 중상(重賞)하게 하여 적의 모의를 깨뜨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기 감사에게 유서(諭書)를 내리니, 대략 이르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백성들이 상성(常性)을 잃어서 일종의 범법하여 난동을 짓는 자들이 제멋대로 도당을 불러 모아 도로를 막고 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미 처분함이 있어 토멸의 거조가 목전에 있는데, 몇몇 고을의 사민(士民)들이 지나치게 소요하여 서로 다투어 피하고 숨어 촌락이 온통 비어 농사철을 어기니 매우 염려스럽다. 경은 내가 걱정하는 뜻을 체념(體念)하여 백성들에게 포고하라."
하였다. 이어 경외에 방(榜)을 걸어 효유하였는데, 방에 이르기를,
"1. 적도(賊徒) 1명이라도 숨겨 준 백성은 대역률(大逆律)을 적용하여 주륙(誅戮)이 그 부모·처자에게까지 미친다.
1. 백성으로서 적을 붙잡아 바친 것이 명백한 자는 곧바로 2품(二品)으로 뛰어올려 주고 겸하여 후한 상을 준다.
1. 백성으로서 다른 백성이 적을 숨겨준 자를 붙잡아 고한 자 역시 2품으로 뛰어올려 주고 겸하여 후한 상을 준다.
1. 죄없는 자를 무고(誣告)한 자는 반좌(反坐)156) 한다."
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어영 상번군(上番軍)이 호남은 3초(哨), 호서는 2초가 이번에 올라오는데, 중도에서 적의 협박을 받으면 투항해 들어갈 염려가 없지 않고, 비록 적을 따르지 않더라도 반드시 환산(渙散)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장교(將校)를 보내 중로에서 맞아 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교리(校理) 조현명(趙顯命)이 청하기를,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순토사(巡討使) 김중기(金重器)를 따라 죽음으로써 공을 세우게 해 주소서."
하니, 허락하고 이어 연로(沿路)를 안무(安撫)하라고 명하였다. 김중기가 입대(入對)하여 말하기를,
"신이 평시에 군사를 거느린 일이 없었으니, 단기(單騎)로 내려가는 것은 신중한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장단(長湍)의 군사가 올라오면 거느리고 가겠습니다."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곽자의(郭子儀)157) 는 13기(騎)로 토번(吐蕃)의 군영에 들어갔고, 주아부(周亞夫)158) 는 행군하면서 군사를 모아 낙양(洛陽)에 이르러 오(吳)·초(楚)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했으니, 김중기의 말은 잘못입니다."
하고, 이광좌는 말하기를,
"이런 위난(危難)한 때를 당하여 분발해 몸을 돌아보지 않고 분개하여 즉시 가는 것이 곧 장수의 일입니다. 총융청(摠戎廳)의 표하군(標下軍)이 본래 적지 않고, 수원(水原)으로 출진(出陳)하면 또 7천 명의 군사와 말이 있는데 어찌 군사가 없다고 사피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이른바 의논을 정할 때 노(虜)는 이미 강을 건넜다는 것과 같다. 박찬신(朴纘新)을 어제도 내보내지 못하였으니, 오늘날의 군신(君臣)은 참으로 느슨하다고 이를 만하다. 일이 급한데 어느 겨를에 기읍(畿邑)의 군사를 기다리겠는가? 순토사는 오늘 과천(果川)으로 나가 군사를 합쳐 전진해야 옳다."
하니, 김중기가 또 말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정자(正字)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김중기가 친히 면대하여 명을 받고도 아직껏 머뭇거리고 또 말이 없다고 번거로이 품(稟)하고 있으니, 청컨대 중히 책망하여 경칙(謦飭)하소서."
하니, 임금이 추고(推考)하라 명하였다.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이 ‘박찬신이 막 사조(辭朝)한 뒤에 도성 안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출발한 것은 기율(紀律)에 관계가 있다.’ 하여 추고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김중기는 관망(觀望)을 핑계대었고, 박찬신은 사조한 뒤에 도성 안에서 하룻밤을 자고 비로소 출발하였으니, 적의 초사에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그들이 흉모(凶謀)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 죄를 성토하여 죽이지 못하고 추고하고 율(律)로써 경계해 책망하고자 했으니, 군율이 이와 같았는데도 나라가 위태롭지 않은 것이 천행(天幸)이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 이성좌(李聖佐)의 체직을 명하고 전(前) 참판(參判) 김재로(金在魯)를 기용해 대신했다. 김재로가 사폐(辭陛)하면서 입대하여 말하기를,
"충주 땅은 영남(嶺南)에 접해 있어 혹시 위급한 일이 있으면 미처 품지(稟旨)하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비록 감히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지는 못하더라도 역시 변통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직책이 수령인데 편의로 하기를 허락하면 후일의 폐단과 관계됩니다. 영장(營將)과 함께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정관빈(鄭觀賓)을 문초하니, 정관빈이 공술하기를,
"이달 12일에 신이 집에 있으면서 책을 읽고 있는데, 동네 사는 출신(出身) 안익태(安益泰)가 와서 말하기를, ‘이웃에 사는 안박(安鑮)이 저를 불러 토적(土賊)의 기미가 있음을 전해 주고, 또 어떤 사람이 장차 저를 붙잡아 갈 것이라고 하였다.’고 하기에 신이 안익태로 하여금 고변(告變)하게 했더니, 안익태가 말하기를, ‘화가 금명간에 있어 미처 상경하여 고변하지 못하겠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신의 생각에 수원이 가장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에 수원 부사에게 가서 고했더니, 부사가 즉시 토포장(討捕將)으로 하여금 안익태와 신을 붙잡아 오게 해 취초(取招)하여 올려 보낸지라, 전에 공초한 것 이외에 달리 들은 말이 없습니다."
하였다.
안익태를 문초하니, 안익태가 공초하기를,
"신이 안박의 협박을 받아 거짓으로 함께 모의하면서 인하여 그 곡절을 자세히 물었더니, 안박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경영해 온 지 이미 4, 5년이 되며, 장흠(張欽)·장용(張鏞)·장전(張錪)·장성징(張聖澄)·허간(許侃)이 모두 들어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 몇 사람으로 어떻게 준비하겠는가?’ 하니, 안박이 말하기를, ‘먼 곳 사람도 많이 그 가운데 들어 있는데 모두 알지는 못하며, 상한(常漢)들에게는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혹은 13일에 가천(加川) 최진사(崔進士)에게로 가서 호군(犒軍) 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구만리(九萬里) 권서봉(權瑞鳳)에게로 가서 호군하여 전진한다고 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어디로 향하는가 물었더니, 답하기를, ‘청주 병영(兵營)으로 가서 병사를 죽이고 그 군사를 거느리고 상경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정관빈(鄭觀賓)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정관빈이 신으로 하여금 다시 한두 문자(文字)를 얻어 그 실정을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장흠의 아들 장성징을 불러 묻기를, ‘너희 무리가 큰일을 하고자 하면서 나에게 숨김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장성징이 말하기를, ‘그대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최가(崔哥)가 무리를 얼마나 모았으며 권서봉은 무리를 얼마나 모았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하고도 성사할 수 있겠는가?’ 하니, 장성징이 말하기를, ‘영남의 군사가 응당 8만 명은 될 것이고 전라도의 대진(大陣)이 또 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삼남이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지만 국가에 어찌 서로(西路)의 군사가 없겠는가?’ 하니, 장성징이 말하기를, ‘안추(安樞)가 평안도에서 와 이곳 일을 알고 난 후 돌아가고자 하니, 그 후에는 관서(關西)의 대군이 장차 오게 되면 관서의 일은 걱정할 것이 없다.’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안박과 안박의 조카 안여악(安如岳)에게 물었더니, 그 말이 장성징과 같았고, 안박이 또 말하기를, ‘안추가 적 가운데 들어가 형세를 살피고 곧 평양 병영 막하로 돌아간다.’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정관빈을 만나 의논했더니, 정관빈이 말하기를, ‘적의 무리가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너와 함께 여주(驪州)로 가 홍상(洪相)159) 을 만나 말하자.’ 하기에 신 역시 그렇게 서로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적도들이 매양 그 무리로 끌어들이고자 하여 안박이 또 신을 보고 말하기를, ‘왜 모임에 오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장흠 등이 먼저 가면서 말하기를, ‘만약 술 1석(石) 남짓을 받으면 마땅히 동행하는 공(功)이 있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럴 즈음에 정관빈이 말을 전해 동행할 것을 요구했는데, 안박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못하고 몰래 정관빈에게 말을 전해 먼저 가서 고변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안박을 문초하니, 안박이 공술하기를,
"이달 초아흐렛날 안익태가 신을 찾아왔기에 신이 말하기를, ‘장흠이 전답을 팔아 8, 90냥의 돈을 얻어 군사 1명마다 1냥씩을 주고는 가천에서 모이도록 요구하고 있다.’라고 했으나, 4, 5년 동안 경영했다는 말은 신이 실로 전하지 않았으며, 모의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를 센 일은 과연 실상입니다. 권서봉과 최진사는 신이 실제 몰랐고 장흠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충청 병사를 격살(擊殺)한다는 일 역시 장흠에게서 듣고 전했으며, 장흠이 또 말하기를, ‘평안 병사가 마땅히 군사로써 서로 도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장전(張錪)은 말하기를, ‘안추(安樞)가 보검(寶劍)과 군복(軍服)을 우리에게 준다.’ 하였는데, 안추는 또 말하기를, 평안 병사가 천은(天銀) 50냥으로 달마(達馬)160) 를 사서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안추는 봉조하(奉朝賀)의 마을에 살고 있는데, 일찍이 경상도 병마 우후(兵馬虞候)를 지냈습니다. 장흠이 또 말하기를, ‘이 달 16일, 17일 사이에 상소하는 자가 있게 되면 마땅히 알 만한 일이 있을 것이고 서울 안에서도 역시 호응할 자가 있을 것이니, 상소가 들어가기를 기다려서 상경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장흠은 적의 졸개에 불과한데도 그가 말하기를, ‘경상도에 대군을 거느릴 만한 자가 있고 우리는 대장(隊將)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장흠에게 묻기를, ‘네가 비록 장수의 지략이 있다 하더라도 좀스러운 유생(儒生)에 불과하고, 또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이런 일을 능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장흠이 말하기를, ‘어찌 시골뿐이었겠는가? 서울에 있는 자 또한 많다. 영남의 7만 명이 2월 보름날 청주로 들어가기로 약속했는데 진위(振威)의 정계윤(鄭季胤)이 이를 알고 있고 또 그 사촌 정종윤(鄭宗胤)과 함께 중간에서 주선하고 있는데 양성(陽城)과 직산(稷山) 두 고을 사이에 있는 염통리(念通里)에서 서로 모여 영남의 군사가 넘어오기를 기다려야 하고 호남 군사도 오면 길을 나누어 상경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장흠이 또 말하기를, ‘영은문(迎恩門)철삭(鐵索)161) 을 꺾은 8장사(將士) 가운데 4장사와의 체결을 얻어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차이황(車以黃)이란 자가 또 군문(軍門)에 와 고변하니, 임금이 이광좌(李光佐)에게 명하여 문사랑(問事郞)과 함께 비국(備局)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차이황이 공술하기를,
"신은 수원 오대(五臺)에 살며 장용(壯勇)으로 알려졌습니다. 신의 종 유골(有骨)은 용감하고 건장하며 각저(角抵)를 잘하는데, 11일 적의 무리가 덮쳐 잡고자 하므로, 신은 산으로 피했다가 그대로 서울로 들어오고, 유골 역시 피란하다가 12일에 적에게 붙잡혔습니다. 적이 말하기를, ‘후군(後軍)이 호남으로부터 많이 오고, 또 수로(水路)로 오는 자도 있으며, 양서(兩西)로부터 호인(胡人) 모양을 하고 오는 자도 있으니, 전혀 염려할 것이 없다.’ 하면서 적이 유골로 하여금 호군(犒軍)하는 데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유골은 적의 무리가 3인을 효수(梟首)하여 매다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놀라 도망하였으니, 만약 수원에서 군사를 모은다는 말을 듣게 되면 반드시 관병(官兵)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이 적의 초사에 긴히 나온 것을 이유로 청하기를,
"급히 나국(拿鞫)하게 하고, 총관(摠管) 이사주(李思周)로 대신하여 방략(方略)을 몰래 주어 선전관(宣傳官)·금오랑(金吾郞)과 함께 밤에 성문을 열고 보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이사주를 보내면서 유시하기를,
"편의한 대로 일을 행하라."
하고, 선전관 구간(具侃)에게도 유시하기를,
"만약 어려운 일이 있으면 네가 차고 있는 칼로 편의에 따라 일을 행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이 명령은 바로 그 머리를 베라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수원 부사 송진명(宋眞明)이 치계(馳啓)하기를,
"성환 찰방(成歡察訪) 강백(姜栢)이 임소(任所)에서 달려와 고하기를, ‘16일 밤 3경에 어떤 사람이 관문(關文) 한 장을 전해 주면서 모조리 역마(驛馬)로 발송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적도가 돌입하여 역졸들이 모두 두려워 겁을 먹고 투항했기 때문에 단신으로 도망해 나왔는데, 소사교(素沙橋) 가에 흰 옷을 입은 자 수십 명이 모여 있다가 잡고서 보내 주지 않아 말을 둘러대어 빠져 나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적보(賊報)가 이러한데도 순토사(巡討使)가 아직 진(鎭)에 이르지 못했으니, 아마도 이 노장(老將)이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을 것 같다."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합니다. 신이 스스로 가서 적을 토멸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장병(將兵)의 신하가 멀리 나가서는 안된다.’고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 판서는 강개(慷慨)하여 스스로 담당하니, 반드시 능히 해낼 것이다. 명을 받았으니 즉시 나가도록 하라."
하고, 이어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차출하고, 박찬신(朴纘新)을 중군(中軍)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김중기(金重器)는 순토사(巡討使)의 칭호를 감해 도순무의 절제(節制)를 받도록 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 판서에게 이미 출정(出征)을 허락하였으니, 중권(中權)의 직임을 잠시라도 비워둘 수 없다. 영의정으로 하여금 병조 판서의 일을 겸직해 살피게 하고자 한다."
하니, 이광좌가 뜰로 내려가 관(冠)을 벗고 고사(固辭)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 이태좌(李台佐)에게 명하여 관을 주고 부축해 전상으로 올라오게 하고는 손을 잡고 돈유(敦諭)하기를,
"역적의 변이 이에 이르러 나라 형세가 위급하다. 경이 만약 중권(中權)을 고사하면 장차 3백 년의 종사(宗社)를 어디다 두겠는가? 내가 시사(視事)하지 않고자 한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의 고심(苦心)을 살피시어 칭호를 내리지 마시고 단지 겸해 살피도록 하신다면 신은 마땅히 봉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광좌에게 영병조사(領兵曹事)를 겸하도록 명했다.
강원도 감사(江原道監司) 조석명(趙錫命)을 체직하고 원주 목사(原州牧使) 이형좌(李衡佐)를 발탁하여 대신했다. 대사간 송인명이 ‘관동은 바위로 막혀 있어 염려스러우니, 마땅히 이형좌를 방백으로 발탁하여 진압케 해야 한다.’고 하므로 임금이 옳게 여겨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병조 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토멸하게 하였다. 오명항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오명항에게 유시하는 글을 입으로 부르기를,
"이번 적도가 소추(小醜)에 불과한데도 승평(昇平)한 지 오래여서 와전(訛傳)하는 말에 잘 유혹되어 인심이 안정되지 않고 있으니, 진무해 안정시키는 도리를 몸소 분발해 면려토록 하라. 그러나 이런 요악한 무리는 빨리 토멸하지 않을 수 없으며, 수원(水原)은 기보(畿輔)의 중진(重鎭)이니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는 단지 본장(本將)의 칭호만을 띠고 세 진(鎭)의 군병을 통솔할 것이며, 수원 부사 송진명(宋眞明)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본부(本府)에 남아 진압토록 하며, 병조 판서 오명항은 이내 금영(禁營)을 겸임케 하여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삼고 순토 중군(巡討中軍) 박찬신(朴纘新)을 그대로 도순무 중군(都巡撫中軍)으로 차임하며, 영남 어사(嶺南御史) 부교리(副校理) 박문수(朴文秀)로 종사관을 겸임케 하니, 이내 즉시 내려가 이 소추들을 물리쳐 평정하고 백성을 안무(安撫)토록 하라."
하였다. 인하여 갑주(甲胄)와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고 유시하기를,
"중군(中軍)·감병사(監兵使) 이하 여러 장령(將領)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로써 종사(從事)하라."
하고, 박문수에게 태복마(太僕馬)를 주고 선온(宣醞)하여 보내니, 밤이 이미 4경이 되었다. 그 뒤 오명항이 또 계청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을 종사(從事)로 삼아 수원에서부터 데리고 가겠습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집(李㙫)을 오명항을 대신하여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임금이 급히 이광좌·오명항·송인명을 불러 환시(宦侍)를 물리치고 밀유(密諭)하기를,
"친국(親鞫)할 때 이사성(李思晟)의 이름이 적의 초사에서 나오자 시위(侍衛)하던 선전관 가운데 한 사람이 창황하게 나갔다. 지난번 내시사(內試射) 때 그 얼굴을 보고 이름을 알았는데, 이는 바로 선전관 이사필(李思弼)이다. 이 사람이 이사성과 어떻게 되는가?"
하니, 오명항이 대답하기를,
"이는 그의 종제(從弟)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광좌가 청하기를,
"입직(入直)하는 여러 곳을 적간(摘奸)하여 궐직(闕直)한 것으로써 나문(拿問)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8일 무진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비변사의 제재(諸宰)는 모두 비국에 모이라고 명하니, 대사간 송인명이 청하기를,
"대사성(大司成) 박사수(朴師洙)·형조 참판(刑曹參判) 윤용(尹容)을 불러와 궐중에 있게 하여 일을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다. 박사수와 윤용이 청대(請對)하였는데, 박사수가 말하기를,
"이번 출병(出兵)이 모두 수원의 대로(大路)를 따라가 광주(廣州)·용인(龍仁) 방면의 방수(防水)가 매우 소홀한데, 적이 어찌 반드시 대로만을 따라서 오겠습니까? 마땅히 친신(親臣) 중의 숙장(宿將)을 보내어 남한(南漢)을 진수하게 하고, 군사를 나누어서 모든 요로를 끊게 하소서. 그리고 북한(北漢)은 도성의 인후(咽喉)에 자리하고 있어 뜻밖의 근심에 방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수장(守將)을 가려 엄히 대비해야 합니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이징휴(李徵休)는 목민(牧民)과 방어를 함께 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니니, 청컨대 체직케 하고, 문신(文臣) 가운데서 차임해 보내 동로(東路)의 방비를 맡기도록 하소서."
하였다. 윤용은 청하기를,
"상류(上流)의 가흥창(可興倉)에 있는 조곡(漕穀)을 별도로 관원을 보내 독운(督運)해 서울로 가져다가 군량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판윤(判尹) 김동필(金東弼)이 청하기를,
"혜청(惠廳)으로 하여금 이 달의 공가(貢價)162) 로 응당 내려 주어야 할 것을 계산하여 주게 하고, 제사(諸司)에서 체포하여 가두는 것을 금하며, 전옥(典獄)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고 설국(設鞫)한 후 금부와 해사(該司)에서 값을 주지 않고 함부로 시전(市廛)의 물건을 빼앗는 것을 금하고, 각사 당랑(堂郞)으로 하여금 궐내에서 대기하는 자 이외에는 모조리 사진(仕進)하게 하소서. 본사의 강창관(江倉官)은 전부 창사(倉舍)를 수직하게 하고 다시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때로 순검(巡檢)하게 하며, 기호(畿湖) 양도에 유시하여 군사가 행군하여 지나가는 곳의 도망해 흩어지는 백성들을 안집시켜 모두 농사를 권면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치중(洪致中)이 여주(驪州)로부터 입조(入朝)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위유(慰諭)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여주와 이천(利川)은 평소 도적이 많고 지금 사민(士民)들이 흩어져 옮기는 자가 많으니, 청컨대 무신(武臣)을 가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치중은 정미년163) 부터 이호(梨湖) 경내에 은둔해 살았는데, 무인(武人) 윤봉휘(尹鳳輝)가 문하에 출입하다가 마침 적변이 장차 일어날 것을 알고는 3월 13일 급히 홍치중에게 가서 적의 정세를 갖추 말하고 상소하여 고하기를 권하였다. 홍치중이 죄폐(罪廢) 중이라 하여 사양하니, 또 청하기를,
"조문명(趙文命)이 척신(戚臣)으로서 바야흐로 장임(將任)을 띠고 있으니, 이런 말을 들으면 반드시 위에 알릴 것입니다. 원하건대, 편지 한 장을 얻어 주야로 달려 상경하고자 합니다."
하였으나, 또 듣지 않자, 윤봉휘가 분연히 소매를 떨치고 가면서 말하기를,
"적의 형세가 바야흐로 급한데, 대신이 듣고도 아무렇지 않으니, 나라 일을 알만하다."
하고는 관동(關東)으로 달려 들어갔다. 대저 죄폐중이라 하여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한만(閑漫)한 일이지 화란이 박두했는데 어찌 죄폐중이라 하여 사양하겠는가? 최상(崔相)164) 의 상변이 만약 하루 이틀만 늦었더라도 홍치중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가도사(假都事)가 진위(振威) 땅에서 적을 붙잡았다. 적당 이문저(李文著)가 굴속에 숨어 있는 것을 잡아가지고 온 것이다. 이문저를 문초하니, 이문저가 공술하기를,
"12일에 소요를 듣고 굴을 파서 가속을 숨겨 두고, 신은 말을 타고 나가 오중주(吳重周)를 만나 보고자 하였는데, 도적이 곳곳에 둔취(屯聚)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적이 신의 말을 빼앗으려 하였으므로 신이 도주하여 평택(平澤)의 궁촌(宮村)에 이르렀는데, 1백여 명의 적을 보고는 드디어 양성(陽城) 염통촌(念通村) 길을 따라 직산(稷山)으로 향했습니다. 들으니, 진위(振威)의 양반 원(元)·권(權)·어(魚)·이(李) 네 성씨는 적 가운데 들지 않았기 때문에 적이 죽이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임인년165) 권서봉(權瑞鳳)이 상소할 때에 전문(錢文) 3전(錢)으로 소하(疏下)를 모집하기에 신이 일찍이 ‘3전 유생(三錢儒生)’이라고 지목해 권서봉의 무리가 신을 원망해 왔는데, 지금 권서봉이 적의 모주(謀主)가 되었기 때문에 신이 적에게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도망했다가 또 적의 형세가 매우 성하지는 않은 것을 보고 14일에 집으로 돌아와 굴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한 차례 형신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괘서(掛書)한 적 이세룡(李世龍)이 전주(全州)에서 잡혀 왔다. 이세룡을 문초하니, 이세룡이 혀를 물고 말을 하지 않아 1차 형신을 했으나 역시 말을 하지 않았다.
김중만(金重萬)과 신광원(愼光遠)을 대질(對質)하게 하였다. 김중만이 신광원에게 말하기를,
"초 7일에 너와 권서린(權瑞麟)의 집에서 함께 자면서 나와 용인(龍仁) 김종윤(金宗胤)이 팔씨름을 하자, 네가 ‘팔씨름으로는 그 힘이 많고 적음을 알기에는 부족하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후 내가 다시 권서린의 집에 도착하니, 권서린이 말하기를, ‘신광원이 그 사이에 다시 다녀갔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인좌(李麟佐)가 11일에 회합하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오지 않으니 의아하게 여길 만하다. 이인좌는 재능이 상장(上將)이 될 만하고 너는 부장(副將)이 될 만하다.’고 하였다."
하니, 신광원이 말하기를,
"나는 본시 네 얼굴을 모르며, 이인좌는 상장이 될 만하고 내가 부장이 될 만하다면, 내가 어찌 부장이 되지 못하고 집에 있다 붙잡혔겠는가?"
하였다. 김중만이 말하기를,
"너희가 행인(行人)처럼 꾸며 백의(白衣)로 올라오려고 했으니, 네 귀가(歸家)는 괴이할 것이 없다. 또 네가 일찍이 당나귀를 타고 권서린의 집에 가지 않았느냐? 나와 서로 만나 내가 누구냐고 물으니, 권서린이 말하기를, ‘이는 능히 남산(南山) 소나무를 뽑은 신광원이다.’ 하자, 네가 ‘우연히 장차 넘어질 소나무를 뽑은 것이 어찌 이상하겠는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또 한 마디로 증거할 만한 것이 있다. 초이렛날에 권서린의 집에서 함께 만났는데 좌중에서 이인좌의 용력을 칭찬하자, 네가 ‘이인좌의 할아버지 이운징(李雲徵)이 신력(神力)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손자도 내맥(來脈)이 있는 것인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그 당시 나를 깔보아 네가 중군(中軍)이 되면 나를 초관(哨官)으로 삼으려고 했었다. 너희들이 혹 2백 냥의 돈을 내고 혹은 3백 냥의 돈을 내거나 혹은 볏섬을 내어 좋은 말과 좋은 옷을 샀는데, 내가 당시 말이 없는지라 네가 말하기를, ‘마땅히 말을 사서 주겠다.’라고 했는데, 가천(加川)의 역마(驛馬)도 어찌 빼앗지 않았느냐? 최경우(崔擎宇)는 상인(喪人)의 몸으로 가서 참석하였는데, 그때 너 역시 좌중에 있지 않았느냐?"
하니, 신광원이 말하기를,
"너는 모의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에 최경우·이인좌의 무리를 알지만, 나는 처음부터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이인좌만 대략 알 뿐 나머지는 모두 모른다."
하였다. 김중만이 말하기를,
"너와 권서린 등이 ‘거사할 때 먼저 영상(領相)·병판(兵判)과 양국(兩局)의 대장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니, 신광원이 말하기를,
"조정에 있는 사람이 어찌 유독 영상·병판과 양국의 대장뿐이겠는가?"
하였다. 김중만이 말하기를,
"영상·병판과 양국의 대장을 너희들이 모두 꺼려했기 때문에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
하였다. 신광원에게 1차 형신을 하니, 신광원이 공술하기를,
"전(前) 참봉(參奉) 이하(李河)는 이명세(李命世)의 아들로 주동(鑄洞)에 살고 있는 자인데, 민관효(閔觀孝) 등과 말하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이 마땅히 군사를 출동시켜 서울로 올 것이고, 훈련 대장(訓鍊大將)은 국가에 재생(再生)의 은혜가 있으며, 영의정은 충절이 있어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나, 그 밖의 남태징(南泰徵)·남태적(南泰績)·이정(李檉) 등은 모두 밀풍군(密豐君)을 추대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하가 또 말하기를, ‘양명하(粱命夏) 및 용인의 사인(士人) 안엽(安熀)을 평안 병영으로 내려 보냈다.’ 하였고, 이하와 민관효가 말하기를, ‘영남(嶺南) 및 양성(陽城)의 군사가 출동하여 장차 3월 20일에 대궐을 범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신이 양성을 왕래한 일은 김중만의 말이 모두 사실입니다."
하였다. 남태징을 나문하라 명하였는데, 이때 남태징은 금군 별장(禁軍別將)으로 중병(重兵)을 장악하고 대궐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임금이 다른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대신에게 계책을 물었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명소(命召)166) 로 불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선전관을 보내 표신(標信)167) 을 지니고 부르게 하고, 궐문에 들어서기에 미쳐 금오랑(禁吾郞)에게 명하여 잡아서 들어오게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너는 훈신(勳臣)의 자손으로 그 받은 은혜가 어떠한데 감히 소추(小醜)들과 함께 역모를 했느냐?"
하니, 남태징이 불복하였다.
이날 청주(淸州)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대개 목사(牧使) 박당(朴鐺)이 인부(印符)를 버리고 산골짜기 사이로 도망하여 비국에 장계로 알린 것이다. 대궐 안팎이 크게 놀라니, 임금이 명하여 총관(摠管) 장붕익(張鵬翼)과 정자(正字) 이종성(李宗城)을 입시하게 하였다.
판윤(判尹) 김동필(金東弼)을 남한 순무 동로 경략사(南漢巡撫東路經略使)로 삼아 남한 산성에 나가 진압하게 하였다.
간원(諫院)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이다.】 에서 계청하기를,
"궐직(闕直)한 선전관 이사필(李思弼)을 효시(梟示)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는데, 이사성(李思晟)이 복법(伏法)된 후 비로소 그대로 따랐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붕익(張鵬翼)을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으로 삼았다.
3월 19일 기사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할 때 호남의 보고가 처음으로 이르렀으므로 도성이 들끓자 임금이 자못 근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나아가 아뢰기를,
"적보(賊報)가 비록 급하지만 스스로 천주(天誅)를 재촉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의연하게 동요하지 마시고 태산(泰山) 반석(盤石)처럼 계시면 중외가 가라앉아 적은 평정할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 심공(沈珙)으로 하여금 별기위(別騎衛) 3백 명을 중군(中軍)을 시켜 거느리고 서울로 오게 하고,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 이여적(李汝迪)은 군사를 거느리고 앞서 와서 동작진(銅雀津)가에 진을 치게 하며, 춘천 부사(春川府使) 정도원(鄭道元)은 보병 7초(哨), 마병(馬兵) 1초를 거느리고 서울로 와서 동성(東城) 밖에 진을 치게 하고, 도감(都監)의 복마(卜馬)를 내어 강창(江倉)의 미두(米豆)를 경창(京倉)으로 실어오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과 대사성(大司成) 박사수(朴師洙)를 가선(嘉善)의 자급으로 올리고는 아울러 비국 당상(備局堂上)으로 차임하였다. 또 형조 참의(刑曹參議) 윤용(尹容)을 비국 부제조(備局副提調)로 차임하였다. 그리고 바로 박사수를 영남 안무사(嶺南按撫使) 겸안동 부사(兼安東府使)로 삼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를 체직하고 어사(御史) 이광덕(李匡德)을 발탁하여 대신했다. 전 판서(判書) 권업(權𢢜)을 다시 기용하여 호서 안무사(湖西按撫使)로 삼고, 청주(淸州) 사람 박민웅(朴敏雄)을 초수(超授)하여 청주 우후(淸州虞候) 겸창의사(兼倡義使)로 삼으니, 이는 박사수가 일찍이 박민웅이 장재(將才)가 있다 하여 별천(別薦)한 바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어영 대장 조문명(趙文命)이 다시 임금께 아뢰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도승지(都承旨) 윤순(尹淳)이 충청 병영의 발병부(發兵符)를 적에게 잃어 관병(官兵)을 도발(盜發)할 염려가 있다 하여 청하기를,
"급히 본도 감사에게 유지를 내려 발병할 때에는 반드시 감영(監營)의 병부를 기다려서 대조·징험해 시행하라는 뜻을 열읍(列邑)에 알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단(長湍)의 군사가 곧 서성(西城) 밖에 도착하게 되자 이광좌가 도성 사람들이 놀라 소요할 것을 염려하여 청하기를,
"기일보다 앞서 유고(諭告)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남한 순무 겸동로 경략사 김동필이 사폐(辭陛)하면서 입대(入對)하니, 임금이 갑주(甲胄)를 하사하고 위유(慰諭)하여 보냈다.
영남 안무사 박사수가 사폐하니, 명하기를,
"전적(典籍) 유내(柳徠)와 사인(士人) 강규환(姜奎煥)을 종사관으로 차출하여 대동해 가라."
하였다. 조문명(趙文命)·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유내는 위인이 비록 불길(不吉)하나 평소 재명(才名)이 있고 영남의 일에 익숙합니다."
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시혁(金始㷜)에게 유시하기를,
"3천 명의 군병을 내어 동선령(洞仙嶺)을 막아 지키다가 이사성(李思晟)을 붙잡아 오기를 기다린 후 파하라."
하였다.
황해 병사(黃海兵使) 원백규(元百揆)에게 유시하기를,
"친기위(親騎衛) 3백 명을 내어 거느리고 서울로 오라."
하였다.
유척기(兪拓基)를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이행검(李行儉)을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영남 사람 전(前) 참의(參議) 이형상(李衡祥)을 발탁하여 가선(嘉善) 자급으로 하고, 전(前) 응교(應敎) 조덕린(趙德隣)을 통정(通政) 자급으로 하여 아울러 경상도 소모사(慶尙道召募使)로 삼았다. 하유하기를,
"이형상은 벼슬을 쉬고 물러난 지 이미 30여 년인지라, 나이가 비록 많지만 인망(人望)이 가장 무겁다. 이처럼 어려운 때에 권장해 쓰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되며, 조덕린은 그 문학(文學)과 식견이 영남 선비들이 우러러보는 바인데, 지금까지 막히고 눌려 있어 군정(群情)이 아깝게 여기는 바이니, 아울러 가자(加資)하고, 인하여 영남 상하도의 소모사로 차임하여 인심을 수습하고 충의(忠義)를 격려하며, 왕실에 힘을 다하고 남쪽 지방을 편안케 하여 조정에서 특별히 발탁하여 위임하는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도빈(趙道彬)이 부름을 받고 입대(入對)하였다.
3월 19일 기사
민관효(閔觀孝)를 문초하였으나 불복하였으므로, 민관효와 신광원(愼光遠)을 대질시켰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이달 초여드렛날 네가 어찌 ‘우리 무리가 장차 모조리 죽게 되었다.’라고 하지 않았으며, 네가 또 이하(李河)와 함께 우리 집에 오지 않았느냐? 네가 주머니에 은(銀) 40냥, 견설금(犬舌金) 12편(片), 기은(棊銀) 3편을 넣어서 나에게 주면서 양성(陽城) 권서린(權瑞麟)의 집으로 가서 무리들을 먹이라고 권하지 않았느냐?"
하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허무맹랑한 말이다."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네가 ‘이 은은 강상(江上)의 창산군(昌山君)168) 집에서 가져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창산군의 아들이 네 집에 오자, 네가 ‘이는 말을 숨길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나를 양성으로 가라고 권할 때 너와 이하가 힘써 권하였고, 어찌 창산군의 인마(人馬)를 보내 주지 않았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양성에 갈 때 이하가 어찌 권서린에게 편지 쓰기를, ‘그 일은 이 벗에게 물으면 알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근래에 네가 이하를 만나서 혹 한 말이 있었느냐? 나는 원래 수작한 바가 없다. 창산군 집은 종실(宗室) 중에서 가난한 집인데, 어떻게 은자를 마련하겠느냐?"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네가 매양 이유익(李有翼)의 자(字)를 일컬으면서 ‘성례(聖禮)는 마땅히 태평 재상(太平宰相)이 될 것인지라, 내가 늘 일을 의논하고 있다. 이인좌가 이달 10일에 군사를 일으켜 14일에 모두 안동(安東)에서 만나고, 권서린(權瑞麟)은 13일에 양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15일에 모두 청주에서 모여 충청 병사를 참(斬)하기로 하였다.’라고 하고는, 네가 나를 시켜 이런 소식을 양성에서 탐지하도록 하지 않았느냐? 권서린이 13일에 출발하고자 하였는데 이인좌가 약속한 기일에 이르지 않아 고민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남태징(南泰徵)의 일은 너와 이하에게 들었다."
하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네가 온 세상을 일망타진하려 하는구나."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초여드렛날, 내가 과천(果川)에 있을 때 네가 종을 보내 나를 불렀기 때문에 배를 타고 현석(玄石)에서 왔는데, 그날 빗속에 창산군의 아들이 와 돈을 내어 돼지 고기를 사 먹었다. 그때 네가 ‘이제 곧 사람을 평안 병영으로 들여보내 40금(金)으로 말을 사서 기다리고자 한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였다. 민관효를 1차 형신하였으나 불복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남태징·신광원·민관효·이세룡을 진문(陣門) 밖에서 참(斬)하라."
하였다. 남태징은 평소 경박하고 어리석었는데,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에게 붙어서 통제사(統制使)에 제수되고 차례로 장임(將任)에 올랐다. 호남 괘서(掛書) 사건이 일어나자 훈장(訓將) 이삼(李森)이 기찰(譏察)을 보내도록 권고했는데, 핑계해 미루고 응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전주영(全州營)의 기찰하는 장교(將校)가 변산(邊山)의 적도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까지 지어내어 이삼을 공갈했다. 14일에 상변(上變)하기에 이르러서는 남태징이 이삼을 와서 보았는데, 평지(平地)에서 세 번이나 넘어져 사람들이 그의 마음이 동요되어 있는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모역한 형상이 환히 드러나자, 임금이 그냥 두었다가는 변이 생길까 염려하여 신광원 등과 함께 빨리 죽이게 하니, 이로부터 인심이 조금 진정되고 적의 기세 역시 크게 꺾이어 모두 임금의 독단(獨斷)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하(李河)를 문초하였으나 불복하므로, 임금이 이하와 신광원을 대질(對質)시키도록 했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초여드렛날 네가 비를 맞으며 와서 양성(陽城) 권서룡(權瑞龍)의 서찰에 대한 일을 묻지 않았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11일에 민관효가 은을 가지고 오고 이하가 권서린에게 보내는 글을 지어가지고 와서 이어 신을 시켜 임서호(任瑞虎)를 가서 보게 하였는데, 그의 집을 몰라서 가서 보지 못하였습니다. 임서호는 바로 임서봉(任瑞鳳)의 아우입니다."
하고, 이하는 말하기를,
"민관효를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민관효가 어느 날 왔기에 사는 곳을 물었더니, 민관효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근일 영남에 큰 거조(擧措)가 있다.’ 하기에 내가 무슨 거조냐고 물었더니, 민관효가 ‘영남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기로 하였다. 그대가 박필현(朴弼顯)과 친한데 이 일을 어찌 모르는가?’ 하였습니다. 그후 민관효가 세 번 와서 신광원의 일을 말하기를, ‘양성의 대적(大賊)이 영남의 적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만약 이하에게 물으면 어떻게 우리집에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이하가 말하기를,
"내가 민관효에게 묻기를, ‘누가 양성을 왕래하고 있는가?’ 하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그런 사람이 있다.’라고 하여 함께 신광원의 집에 가서 서로 만나보고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이하가 말하기를, ‘내가 원룡(元龍)대감을 만나 상의할 일이 많은데, 그 집은 이목이 번잡해 내가 가서 만나볼 수가 없어 피차 모두 늦추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이하가 말하기를,
"원룡은 남태징(南泰徵)의 자(字)인 듯합니다."
하였다. 신광원이 말하기를,
"영남과 호남에서 회합할 기약을 어기자 이하가 나를 시켜 임서호에게 가서 물어보도록 했는데, 그 사람을 모르기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하를 1차 형신하니, 이하가 공술하기를,
"신은 박필현과 중년에 서로 친하게 되었는데, 박필현이 말하기를, ‘영남과 서울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 너도 그 무리에 들고자 하는가?’ 하기에, 신이 누구누구가 들어 있는가 물었습니다. 박필현이 말하기를, ‘영남 및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군사를 일으켜 들어오면, 일이 성취될 것이다. 함께 일하는 자는 나와 한세홍(韓世弘)·이인좌(李麟佐), 동계(桐溪)169) 의 자손인 정가(鄭哥)로 이름을 모르는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박필현이 장차 태인(泰仁)으로 부임하려 할 때 말하기를 ‘양성에 정세윤(鄭世胤)이란 자가 있어 충청도 일을 주관한다.’고 하였는데, 하루는 정세윤이 신의 집에 와서 묻기를, ‘박평중(朴平仲)170) 을 아는가?’라고 하므로, 신이 안다고 하였습니다. 정세윤이 말하기를, ‘평중을 안다면 내 일도 알 것이다. 내가 이제 군사를 모아 모반(謀叛)하려 하는데 영남이 모두 일어나고, 양성의 최경우(崔擎宇)·권서린(權瑞麟)도 군사를 모으는데 괴수(魁帥)는 바로 나다. 서울에서는 이유익(李有翼)·양명하(粱命夏)가 일을 주관하는데 남태징 역시 참여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영남의 군사는 정세윤의 무리가 안에서 일어나고 평안 병사가 군사를 일으켜 들어오면 반드시 일이 성취될 것이며, 남인(南人)은 민관효(閔觀孝)가 주관하고, 소북(小北)은 양명하가 주관하며, 소론(少論)은 박필현·이유익·윤덕유(尹德裕)가 주관하는데, 박필현이 비록 읍재(邑宰)로 나가 있지만, 사실상 괴수(魁帥)이며, 창산군(昌山君) 역시 그 가운데 들어 있어 내병(內兵)은 창산군이 그 집 종들을 모으고 양성의 군사 절반을 서울로 올라오게 해 쓰며, 한유(韓游)·한순(韓洵)·한광(韓光)·윤천경(尹天擎), 정가(鄭哥)로 자(字)가 백통(伯通)인 자, 윤연(尹㝚)·윤수(尹邃)·남태적(南泰績)·이정(李檉) 역시 그 가운데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박필현과 한광의 말로서 신은 그 얼굴을 모르며, 한음(漢陰)의 자손 이지인(李志仁)은 바로 신광원(愼光遠)의 주인(主人)인데, 이지인의 4촌인 이흥인(李興仁)은 어떤 사람은 들었다 하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았다고 하기도 합니다. 박필몽의 큰 아들과 무겸(武兼)으로 황씨(黃氏) 성을 가진 자와 사인(士人) 이사백(李師白)이 평안(平安) 병영으로 간 것은 대개 이 일을 위해서인데, 가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민관효가 양성의 군사를 호궤(犒饋)하기 위해 처음에 돈 3백 냥을 보냈고, 재차 보낸 은(銀)은 몇 냥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외에도 들어간 사람이 없지 않은 듯하나 전한 말이 자세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2차 형신하니, 이하가 또 공술하기를,
"모의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문관(文官) 조상(趙鏛)이 누락되었습니다. 이지인(李志仁)은 장사(壯士)여서 신광원과 친한 장사가 이지인의 집에 많이 모이는데, 만약 신광원에게 물으면 그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지인의 조카가 있어 ‘원룡(元龍) 대감’의 말을 조카와 수작하였는데, 내용은 ‘일이 이루어지면 훈장(訓將)은 점칠 수 있는 것인데, 이삼(李森)의 어머님 병이 바야흐로 중하니, 만일 상을 당한다면 내가 마땅히 훈장을 차지할 것이다.’고 한 데 불과했을 뿐입니다. 영남의 군사는 숫자가 도합 8천 명이요, 양성의 군사는 3천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3차 형신하니, 처음 문초할 때와 같이 불복(不服)하였다. 인엽(人燁)을 문초하니, 인엽이 공술하기를,
"신은 민관효와 사촌 남매(娚妹)간입니다. 정월 사이에 민관효가 은냥(銀兩)을 요청하기에 80냥을 빌려 주었지 40냥이 아닙니다. 말은 8, 9일 전에 민관효가 보령(保寧)으로 간다고 와서 빌리기에 신이 과연 빌려 주었는데, 은자는 지금 호군(犒軍)하는 데 썼고 말을 빌린 것이 양성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신이 몰랐습니다. 신광원은 한 차례 민관효의 집에서 만났으나 대화한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윤연(尹㝚)을 문초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윤수(尹邃)를 문초하니, 윤수가 공초하기를,
"신이 별시(別試) 초시(初試)를 보기 위해 이유익(李有翼)과 동접(同接)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이유익을 길에서 만나 내려가 여염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들어오기에 물으니, 이하(李河)였습니다."
하였다. 한광(韓洸)·한유(韓游)·한순(韓洵)·최봉소(崔鳳韶)·이세록(李世祿)을 문초하였으나, 모두 불복하였다. 안호(安鎬)와 막실(莫實)은 석방하였다.
명하기를,
"파주 목사(坡州牧使) 정혁선(鄭赫先)은 임진 별장(臨津別將)과 함께 임진강을 방비하라."
하였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박당(朴鏜)이 성을 버린 죄를 사(赦)하였다. 처음에 박당이 잠을 자고 있던 중 급창(及唱)171) 이 적이 이르렀다고 고하자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 놀라 어쩔 줄을 모르고 인부(印符)와 처자를 버리고 몸을 빼내어 담장을 뛰어넘어 도망해 지경 내에 있는 절간에 이르렀다. 그의 처자가 하룻밤을 자고 난 후 간신히 뒤좇아 왔는데, 혹 발자취가 드러날까 염려하여 짧은 옷과 평량자(平涼子) 차림으로 운유 거사(雲遊居士)라고 청탁하면서 승려들 가운데 섞여 있었다. 의병장(義兵將) 박민웅(朴敏雄)이 적을 평정했다고 보고하고 고을 일을 다스리기를 청했지만 깊이 숨고 나오지 않다가 힘껏 청하자 비로소 나왔으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분개했다. 조정에서는 단지 파직만 하고 엄히 다스리지 않았는데, 이는 대개 절로 숨던 날 보장(報狀)으로 아뢰어 대략 적정(敵情)을 알렸기에 묘당에서 평서(平恕)의 논의를 주장해 중벌을 요행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병사(兵使)가 해를 당한 후 장교(將校) 조중백(趙重伯)·김지행(金志行)이 관속(官屬)을 거느리고 적괴(賊魁)에게 읍소(泣訴)하여 병사의 시체 수습하기를 청하니, 적이 의롭게 여겨 허락하여 그 시체를 여염집으로 옮겨 관을 사서 치상(治喪)하였다.
박사수(朴師洙)를 영남 안무사(嶺南按撫使)로 삼았다. 박사수가 사폐(辭陛)하면서 입대(入對)하니, 이광좌가 청하기를,
"안무사 종사관 유내(柳徠)를 안동 판관(安東判官)으로 차임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이 청하기를,
"길주 목사(吉州牧使) 이행검(李行儉)과 영종 첨사(永宗僉使) 유만증(柳萬增)을 유임시키소서."
하고, 박사수는 청하기를,
"오중주(吳重周)와 유성추(柳星樞)를 불러 쓰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정우주(鄭宇柱)는 실지(失志)한 사람으로 바야흐로 여주에 머물고 있었는데,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상유(上游)172) 는 중요한 지역이니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하라 명하고, 이행검으로 대신 명하였다. 명하기를,
"전 참판(參判) 김취로(金取魯) 전 승지(承旨) 이유(李瑜)·전 대장(大將) 신광하(申光夏)·전 판서(判書) 이병상(李秉常)을 서용하라."
하고, 이병상을 판윤(判尹)으로, 이유를 승지로 삼으니, 송인명과 박사수의 말을 따른 것이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조령 산성(鳥嶺山城)에는 이미 관수(管守)하는 군량이 없으니, 환상(還上)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군기(軍器)는 마땅히 안동(安東)으로 옮겨 두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수(轉輸)하게 되면 폐단을 끼친다는 이유로 따르지 않고, 박사수에게 왕래하면서 관리하라 명하였다.
전 참판(參判) 유숭(柳崇)을 기용해 충청도 소모사(忠淸道召募使)로 삼고, 전 지평(持平) 이일제(李日躋)를 기복(起復)173) 하여 소모 종사관(召募從事官)으로 삼았다. 유시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간민(奸民)이 무리를 지어 심지어 병사(兵使)를 죽이고 병영(兵營)에 들어와 점거하기까지 하니, 치열하게 번질 걱정을 이루 말할 수 없으니, 만약 즉시 섬멸하지 않으면 호서 지방이 장차 무너지게 되었다. 경이 경재(卿宰)로서 바야흐로 본주에 살고 있으니,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생각건대, 생각이 나랏일에 미치면 통읍(痛泣)하고 있을 것이다. 본주는 사대부(士大夫)의 고장으로 반드시 뜻을 같이하는 선비가 많을 것이니, 분의(奮義)의 인사를 거두어 모으면 스스로 한 방면을 막기에 족할 것이다. 경을 호서 좌도 소모사(湖西左道召募使)로 삼으니, 경은 마음과 힘을 다해 방편에 따라 토벌해 정녕하게 부탁하는 내뜻에 부응토록 하라. 전 지평 이일제가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는데 역시 본읍에 살고 있으므로, 금혁(金革)174) 때문에 기복(起復)시켜 종사관으로 차출해 주획(籌畫)을 도와 제승(制勝)할 터전으로 삼으니, 본 고을의 선비로서 과연 재능을 품고 충의를 분발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 보답할 자가 있다면 역시 즉시 지명(指名)하여 장문(狀聞)하라. 그러면 파격적인 예로 탁용하겠다."
하였다.
3월 20일 경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를 기복시켜 대궐 안에 들어와 있도록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사서(私書)를 바치고 청하기를,
"오명항의 말에 의하여 양영(兩營)으로 하여금 장교 2인을 선택해 정포(精砲) 1초(哨)를 나누어 거느리고 미음진(美陰津) 상하에 유둔(留屯)하게 하여 선박과 행인을 수색해 조사하도록 하여 비상시에 대비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남연년(南延年)의 아들 남덕하(南德夏)에게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이봉상(李鳳祥)의 아들 이한필(李漢弼)을 기복시켜 일체로 승품(陞品)하고 복수장(復讐將)이라 칭호하여 군영으로 나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사간 송인명이 청하기를,
"박종원(朴宗元)을 빨리 노적(孥藉)하여 징권(懲勸)함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전 판서 윤헌주(尹憲柱)를 기복시켜 북도 안무사(北道按撫使)로 삼고, 병조 참의 조지빈(趙趾彬)을 양서 안무사(兩西按撫使)로 삼았다. 대사간 송인명이, 이사성(李思晟)·남태징(南泰徵)·권서봉(權瑞鳳)이 모두 새로 북쪽 변방에서 와서 다른 변란이 있을까 염려된다며 청하기를,
"중신(重臣)을 보내 진정시키고, 또 이사성이 바야흐로 관서로부터 붙잡혀 와 서쪽 백성들이 반드시 소란할 것입니다. 청컨대 조신(朝臣)을 보내 안무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울러 받아들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명하기를,
"좌윤(左尹) 장붕익(張鵬翼)을 진어 대장(鎭禦大將)으로 삼아 장단(長湍)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한 산성 아래에 주둔해 서쪽 근심을 막게 하라."
하였는데, 바로 이사성을 붙잡아 서쪽 변방에 급함이 없다 하여 다시 명하기를,
"수원(水原)으로 출진(出鎭)하라."
하였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유척기(兪拓基)에게 진어사(鎭禦使)를 겸하게 해 본 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누원(樓院)에 진을 치게 했다.
밀풍군(密豐君) 탄(坦)의 이름이 적의 초사 가운데서 나왔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나포(拿捕)를 명하지 않았는데, 대신과 삼사(三司)에서 일제히 나포해 국문하기를 청하고 극력 다투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따랐다.
안추(安樞)를 문초하였다. 안추는 용인(龍仁)에서 적과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이사성(李思晟)에게 이를 보고하고자 도로 평안 병영으로 가다가 반현(盤峴)에 이르러 말이 갑자기 발을 절어 전진하지 못하고 마침내 체포되었던 것이다. 안추가 공술하기를,
"작년 동짓달에 신이 평안 병영에 갔다가 2월 초에 올라왔습니다. 보검(寶劍)은 과연 장전(張錪)에게 주었으며, 군복(軍服)은 평안 병영에 있을 때 스스로 준비해 입은 것입니다. 이사성이 개시(開市)175) 했을 때 달마(㺚馬) 2필을 사서 신에게 1필을 주었으나 정절(情節)은 실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장전이 신에게 말하기를, ‘근래 소요가 있으니, 이는 남아가 뜻을 얻을 때이다.’라고 하기에, 신은 듣고서 매우 놀랍고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1차 형신하니, 안추가 또 공술하기를,
"장전이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소론(少論)을 쓰기 때문에 노론(老論)이 바야흐로 거사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소론은 장차 모조리 죽게 되므로 이를 위해 먼저 그들을 제압하려는 계책을 낸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2차 형신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윤덕유(尹德裕)를 문초했으나, 불복하였다. 이하(李河)와 윤덕유를 대질시켰다. 윤덕유가 이하에게 말하기를,
"너 혼자 죽는 것이 옳다. 3월초에 부동(部洞)에서 이유익(李有翼)을 만났더니, 이유익이 말하기를, ‘근래에 들으니, 영남(嶺南)에 정동계(鄭桐溪)의 후손으로 이름이 정희량(鄭希亮)이란 자가 있어 여러 해 동안 군사 모으는 일을 경영하여 호남과 서로 통하고 있는데, 모두 모이는 날은 3월 초닷새이다. 처음에 듣기로는 군사가 8만 명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들으니, 겨우 8천이라고 했으니, 그것이 과장된 것임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언근(言根)을 물었더니, 이유익이 말하기를, ‘이운징(李雲徵)의 손자 이인좌(李麟佐)에게서 들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들은 것은 이뿐이다."
하니, 이하가 말하기를,
"양성(陽城)의 일, 영남(嶺南)의 일, 호남의 일을 네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어제 이와 같이 납공(納供)한 것이다.
하였다. 윤덕유가 말하기를,
"영남의 일은 내가 우연히 들은 것이지만, 양성의 일은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니, 이하가 말하기를,
"나는 어제 다만 박필현(朴弼顯)의 무리가 이 일을 안다고 말했을 뿐이며, 또한 네가 모반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하였다. 임금이 이하가 말을 바꾸었다 하여 또 1차 형신하였으나, 공술이 전과 같았다.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장계하기를,
"적당이 용인(龍仁) 산골짜기에 출몰하고 있어 바야흐로 총융사(摠戎使)로 하여금 정포(精砲) 1천을 내게 하고, 허정(許鼎)을 천총(千摠)으로 차출하여 이들을 거느리고 용인읍 밑으로 가서 주둔하여 기다리게 했습니다."
하였는데, 바로 또 보고하기를,
"총융사가 군사를 나누어 보내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니, 청컨대 수어청(守禦廳)으로 하여금 혹 남양(南陽) 방영(防營)에서 정병을 뽑아 보내어 적을 막게 하소서."
하니, 회유(回諭)하여 기율(紀律)이 총융사에게 행해지지 않음을 책망하였다. 또 김중기(金重器)에게 유시하여 순무사의 명령에 의하여 군사를 보내 용인을 지키게 하였다. 오명항이 또 치계하기를,
"경성의 수위(守衛)가 고단하고 미약하니, 청컨대 안산(安山)·양천(陽川)·금천(衿川)·과천(果川) 네 고을 군사로 하여금 노량진(露梁津) 사장(沙場)으로 건너오게 하고,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성안 사람들의 집을 적간(摘奸)하여 수상한 사람의 인접(引接)을 금하게 하고, 아울러 각처의 나루터를 철거하여 각 나루의 배를 한두 곳에 모아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한 수상한 사람이 금위영 초관(哨官) 김옥(金沃)을 만나기를 요구하므로 그 주머니 속의 글을 수색해 보았더니, 의심스런 말이 많았습니다. 엄하게 곤장(棍杖)을 쳐 물었더니, 적진(賊陣)에서 온 자로서 적의 상황을 매우 자세히 말하므로 즉시 참(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패(牌)를 조사해 보니 바로 김옥의 종제(從弟) 김윤(金潤)이었는데 김옥은 그때 박찬신(朴纘新)의 군중에 있었기 때문에 붙잡아 묶어 두었습니다."
하였다. 오명항이 장차 김옥을 참하려고 하자 종사관 박문수(朴文秀)가 김옥이 역적을 따른 형적이 드러난 것이 없다 하여 죽이지 말고 스스로 공을 세워 죽음을 면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총융사 김중기(金重器)가 장계로 병사(兵事)를 논하고, 또 말하기를,
"한 경내의 백성들이 모두 항오(行伍)에 편입되어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습니다. 설령 형적을 나타내는 적이 있더라도 경병(京兵)이 족히 격파할 수 있으니, 본부의 군사는 번(番)을 나누어 왕래하면서 농사 일을 폐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는데, 묘당에서 방략(方略)이 합당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회유(回諭)하여 책망했다.
윤화정(尹和鼎)을 총융 중군(摠戎中軍)으로 삼아 수원으로 내려 보냈다.
판중추부사 이의현(李宜顯)이 소명을 받고 입조하였다. 영남 소모사(嶺南召募使) 조덕린(趙德隣) 등에게 모두 안무사 박사수(朴師洙)의 절제를 받으라 명하였으니, 판부사 이의현의 청을 따른 것이다. 임금이 도순무(都巡撫)의 대군에 후원군이 없음을 염려하여 맹장(猛將)한 사람을 가려 보내고자 하여 별군직(別軍職) 등을 불러모아 자청해 가고자 하는 자를 모집하니, 이형원(李馨遠)·박세재(朴世梓) 등이 가기를 청하였다. 명하여 민제장(閔濟章)을 계원장(繼援將)으로 삼아 이형원·박세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후에 민제장이 바야흐로 안성(安城)에 있으면서 행군하지 않으므로 박동추(朴東樞)로 바꾸어 보냈다.
정찬술(鄭纘述)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에 특제(特除)하였다.
충청도 감사(忠淸道監司)와 병사(兵使)·수사(水使)가 적들이 흉관(凶關)176) ·흉격(凶檄)177) 을 여러 고을에 투입한 것을 올리니, 모두 불태우라 명하고, 그것을 지니거나 전하는 자는 참하라고 유시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흉격(凶檄)의 조어(措語)는 본디 마땅히 곧바로 쓰고 숨기지 말아서 흉적이 천일(天日)을 욕한 죄를 드러냈어야 한다. 아! 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의 무리는 우리 성상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은 지 오래이다. 유봉휘의 흉악한 상소로 건저(建儲) 초에 창도하고, 역적 김일경은 종무(鍾巫)178) 의 상소를 뒤이어 올렸는데, 안으로는 환첩(宦妾)과 체결하여 양궁(兩宮)을 교대로 얽고, 겉으로는 목호룡(睦虎龍)을 꾸며내어 저위(儲位)를 위태롭게 핍박하였다. 경종(景宗)께서 인성(仁聖)하시어 그 계략이 이루어지지 않자 역적 김일경이 또 ‘접혈금정(蹀血禁庭)179) ’ 등의 말을 위훈(僞勳)의 교문(敎門)에 써서 온갖 계책으로 위동(危動)하였다. 갑진년180) 겨울에 임금이 단지 김일경과 목호룡만 죽이고 나머지 일당은 불문에 붙였으니, 이는 실로 산림(山林)·수택(藪澤)에 악한 자를 숨겨주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인데, 흉적들이 스스로 하늘에 닿는 죄를 알고는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반역을 모의하여 역적 김일경의 종무(鍾巫)에게 제사한다는 말을 조술(祖述)하여 온 세상을 기만하고, 유혹하고도 오히려 흉악한 말이 전파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심유현(沈維賢)을 종용하여 차마 들을 수도 없고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말을 만들어 내게 하여 은밀한 곳에서 말을 퍼뜨려 중외를 의혹(疑惑)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대개 심유현은 궁액(宮掖)의 척속(戚屬)으로 성품이 본시 간특하여 항상 분에 넘치는 바람을 품었는데,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李有翼)이 그의 사특한 마음을 알고 이익으로 꾀어 마침내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 여러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흉한 격문이 도로 위에 교체(交替)해 나돌았는데, 심지어 ‘납일초주 사왕숙대(臘日椒酒思王叔帶)’ 등의 말을 함부로 쓰기도 했다. 이는 실로 천고에 없는 흉역(凶逆)이며, 그 원두(源頭)를 추구해 보면 모두가 당론(黨論) 속에서 나온 것인데, 유봉휘와 김일경이 그 괴수가 되고, 박필현과 심유현이 다음이 되며, 이인좌·정희량 등 여러 적에 이르러서는 호서(狐鼠)의 무리에 불과했으니, 족히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3책 16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23면
【분류】정론(政論) / 변란(變亂) / 역사-사학(史學)
[註 176] 흉관(凶關) : 역적의 관문(關文).[註 177] 흉격(凶檄) : 역적의 격문(檄文).[註 178] 종무(鍾巫) : 종무는 옛날의 신령스런 무당[神巫]. 노(魯)나라의 은공(隱公)이 일찍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정(鄭)나라 사람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정 대부(鄭大夫) 윤씨(尹氏) 집에 갇히자 윤씨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가신(家神)인 ‘종무’에 기도를 드렸다. 마침내 윤씨와 함께 노나라로 돌아와서 ‘종무’의 사당을 지었다. 은공 11년 우보(羽父)가 태재(太宰)를 탐하여 은공의 이복제(異腹弟)인 환공(桓公)을 죽이자고 청하였는데, 은공이 듣지 않자 우보가 도리어 환공을 충동질하여 은공이 ‘종무’에 제사지내려고 대부(大夫) 위씨(寪氏)의 집에 유숙할 때 악당(惡黨)을 시켜 살해한 고사(故事). 곧 아우가 왕위를 노려 형을 살해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음.[註 179] 접혈금정(蹀血禁庭) : 대궐의 뜰에 유혈(流血)이 낭자하여 그것을 밟고 건널 정도였다는 뜻. 당(唐)나라 초기 고조(高祖)가 장자(長子) 이건성(李建成)을 태자(太子)로 세웠는데, 이건성이 당(唐)의 건국(建國)에 공(功)이 많았던 아우 이세민(李世民)이 자기 자리를 넘볼까 염려하여 미리 제거하고자 하니, 이세민이 군사를 동원하여 현무문(玄武門)으로 들어가 이건성을 죽였음. 이때의 처참했던 상황을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이렇게 ‘접혈 금정’이란 말로 묘사했는데, 아우가 형을 잔인하게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註 180] 갑진년 : 1724 영조 즉위년.
사신은 논한다. 흉격(凶檄)의 조어(措語)는 본디 마땅히 곧바로 쓰고 숨기지 말아서 흉적이 천일(天日)을 욕한 죄를 드러냈어야 한다. 아! 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의 무리는 우리 성상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은 지 오래이다. 유봉휘의 흉악한 상소로 건저(建儲) 초에 창도하고, 역적 김일경은 종무(鍾巫)178) 의 상소를 뒤이어 올렸는데, 안으로는 환첩(宦妾)과 체결하여 양궁(兩宮)을 교대로 얽고, 겉으로는 목호룡(睦虎龍)을 꾸며내어 저위(儲位)를 위태롭게 핍박하였다. 경종(景宗)께서 인성(仁聖)하시어 그 계략이 이루어지지 않자 역적 김일경이 또 ‘접혈금정(蹀血禁庭)179) ’ 등의 말을 위훈(僞勳)의 교문(敎門)에 써서 온갖 계책으로 위동(危動)하였다. 갑진년180) 겨울에 임금이 단지 김일경과 목호룡만 죽이고 나머지 일당은 불문에 붙였으니, 이는 실로 산림(山林)·수택(藪澤)에 악한 자를 숨겨주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인데, 흉적들이 스스로 하늘에 닿는 죄를 알고는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반역을 모의하여 역적 김일경의 종무(鍾巫)에게 제사한다는 말을 조술(祖述)하여 온 세상을 기만하고, 유혹하고도 오히려 흉악한 말이 전파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심유현(沈維賢)을 종용하여 차마 들을 수도 없고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말을 만들어 내게 하여 은밀한 곳에서 말을 퍼뜨려 중외를 의혹(疑惑)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대개 심유현은 궁액(宮掖)의 척속(戚屬)으로 성품이 본시 간특하여 항상 분에 넘치는 바람을 품었는데,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李有翼)이 그의 사특한 마음을 알고 이익으로 꾀어 마침내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 여러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흉한 격문이 도로 위에 교체(交替)해 나돌았는데, 심지어 ‘납일초주 사왕숙대(臘日椒酒思王叔帶)’ 등의 말을 함부로 쓰기도 했다. 이는 실로 천고에 없는 흉역(凶逆)이며, 그 원두(源頭)를 추구해 보면 모두가 당론(黨論) 속에서 나온 것인데, 유봉휘와 김일경이 그 괴수가 되고, 박필현과 심유현이 다음이 되며, 이인좌·정희량 등 여러 적에 이르러서는 호서(狐鼠)의 무리에 불과했으니, 족히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군사가 진위(振威)로 행군하여 현(縣)의 남쪽 들판에 진을 쳤다. 날이 처음 어두워질 무렵에 나졸이 보고하기를,
"궁검(弓劍)을 찬 장교(將校)가 와서 말하기를, ‘가도사(假都事)가 평택(平澤)에서 죄인을 잡아가지고 진(陣) 밖에 와서 머물러 있는데, 거느린 기마병(騎馬兵)과 보병(步兵)이 반초(半哨)가 넘어 밤에 지나가면 놀라고 의심을 받게 될까 두렵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오명항이 군중(軍中)에 명하여 그 장교를 잡아 묶게 하고 계엄하여 기다리게 했다. 얼마 후 가도사 김성옥(金聲玉)이 만나기를 청하므로 묶어 들이게 하였다. 이때가 밤 2경(二更)이었는데, 진 뒤에서 함성이 일어나고 포시(炮矢)가 어지럽게 날자 백의를 입은 군졸들이 종횡으로 달려 달아났다. 김성옥 역시 소란한 틈을 타고 어지러운 군사 속으로 도망하므로 중군(中軍)이 마침내 김성옥을 잡아 묶었다. 또 한 적도가 칼을 휘두르며 대장의 장막을 침범하였는데 군관(軍官) 신진숙(申震熽)이 달려가 칼을 빼앗고 목을 베었다. 이때 밤은 어둡고 갑자기 변이 일어나 군사가 장차 크게 궤멸하게 되었는지라, 종사관 조현명(趙顯命)이 옷소매를 잘라 종자(從者)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것으로 징표로 삼으라."
하였다. 얼마 후 군사가 조금 진정되어 김성옥 등 정탐(偵探)하러 온 10여 인을 모두 효수(梟首)하고는 다시 항오를 정돈하고 수검(搜檢)을 계속하여 또 몇 명의 적을 찾아 참하였다. 어떤 적이 막 묶이면서 갑자기 몸을 솟구쳐 진을 뛰어넘어 도망했는데 잡지 못했으니, 이는 바로 적장(賊將) 이배(李培)였다. 이배는 후에 국문하는 자리에 나와 스스로 말하기를,
"자객(刺客)이 되어 진위의 도순무(都巡撫) 진영에 들어갔으나, 묶였다가 도망하였다."
라고 했다.
3월 21일 신미
임금이 인정문에 나가 친국하였다.
전(前) 승지 조언신(趙彦臣)을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삼았다.
경기 감사 이정제(李廷濟)에게 유시하기를,
"기읍(畿邑)의 군사를 나누어 보내 상하(上下) 강의 나루터를 방수하라."
하였다.
시신(侍臣)을 나누어 보내 소와 술을 가지고 가서 장단(長湍)·양주(楊州)·개성부(開城府)의 군병(軍兵)으로서 성밖에 이른 자를 위문하게 하였다. 이여적(李汝迪)이 곡산(谷山)으로부터 장단(長湍)에 이르러 교귀(交龜)181) 하고 군사를 이끌고 빨리 달려 가장 먼저 성 밖에 이르렀다.
유신(儒臣) 정우량(鄭羽良)에게 명하여 교서(敎書)를 짓게 하고 이를 언서(諺書)로 번역해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들을 효유(曉諭)하였다.
예산 현감(禮山縣監) 민윤창(閔允昌)을 붙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유준(柳濬)의 장계에 말하기를,
"민윤창이 적의 관문(關文)을 베껴 수영(水營)에 통보하면서 곧바로 어휘(御諱)를 썼습니다."
하니, 대신이 잡아다 다스리기를 청하여 이 명이 있게 되었는데, 뒤에 충군(充軍)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조도빈(趙道彬)에게 명하여 도성 안에 백성에게 효유(曉諭) 하였다.
도승지 윤순(尹淳)이 청대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호서 어사(湖西御史) 이도겸(李道謙)이 엄교(嚴敎) 아래에서 감히 구대(求對)하지 못하였는데, 적도들이 진천(鎭川)에서부터 좁은 길로 사방으로 흩어져 올라오면서 마치 나그네 같이 꾸미고는 각처 나루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같은 시간에 일제히 출발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양국(兩局)의 대장 및 총융사·수어사에게 거듭 명하여 각기 나루터를 나누어 관장하여 엄히 지키면서 형찰(詗察)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집의 김시형(金始炯) 등이 말하기를,
"총융사 김중기(金重器)는 명을 받던 날 머뭇거리는 형적이 현저하게 있었고, 출진(出鎭)한 후에도 혼미하여 그르친 일이 많이 있었으니, 삭직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충청도 전 감사 권첨(權詹)을 청주가 함락되었는데도 즉시 창의(倡義)하여 적을 토멸하지 않았으니, 파직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김시형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괴산 군수(槐山郡守) 박필우(朴弼禹)를 붙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박필우는 박필현(朴弼顯)의 형인데, 적변이 있자 산골짜기 사이로 숨었다고 적을 잡은 도사(都事)가 장계하여 그 형상을 말하니,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지인(李志仁)을 문초하였으나, 이지인이 불복하였다. 1차 형신을 하니, 이지인이 공술하기를,
"신과 민관효(閔觀孝)는 일찍이 서로 만난 일이 없었는데, 금년 봄 고향에서 오면서부터 비로소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민관효가 말하기를, ‘대적(大賊)이 장차 일어나는데 우리 무리가 혹 모처(某處)에 모여 국사를 위하고 혹은 피란할 계책을 위하여 마땅히 상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영위(營爲)하는 일이 없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하자, 민관효가 말하기를, ‘우리 같은 무리가 적의 소식을 듣고 편안히 앉아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에게 무슨 계려(計慮)가 있겠는가?’ 하자, 민관효가 이하(李河) 역시 함께 모의하고 있는데 신에게 여력(膂力)이 있다 하여 함께 일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2월에 말을 보내 신을 만나고자 하면서 편지를 보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몇 사람이 와서 만나기로 하였다.’라고 하였기에 가서 보았더니, 다른 손은 없었고, 민관효가 말하기를, ‘이하가 약속을 해놓고 오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3차 형신하니, 이지인이 공술하기를,
"양성(陽城) 사람 권서린(權瑞麟), 용인(龍仁) 직곡(直谷)에 사는 진사(進士) 안헌국(安憲國)의 아들 안엽(安熀), 같은 마을에 사는 안지원(安趾遠), 과천(果川) 상포(霜浦)에 사는 이운징(李雲徵)의 손자 이인좌(李麟佐) 형제가 모처에서 모였습니다."
하였다.
적이 청주로부터 군사를 동원해 북쪽으로 올라오려고 하면서 먼저 글을 죽산(竹山)에 보내니, 부사(府使) 최필번(崔必蕃)이 놀라서 고을을 버리고 백의(白衣)를 입고 인신(印信)을 지고서 걸어서 도순무사 오명항의 군중으로 달아나 와서 말하기를,
"관리들이 모두 도망하여 각 고을의 군사가 한 명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하니, 오명항이 장(狀)으로 치계하기를,
"최필번으로 하여금 진위(振威)의 군사를 거느리고 본부(本府)로 돌아가 군민(軍民)을 거두어 모아 후일에 공을 도모하도록 했습니다."
하였다.
남한 순무사(南漢巡撫使) 김동필(金東弼)이 장계를 올려 적의 정세에 대해 말하고 청하기를,
"용인(龍仁)의 직곡(直谷)과 양지(陽智)의 좌찬현(左贊峴) 및 미음강(渼陰江) 어귀를 방수(防守)토록 하소서."
하였다.
결성 현감(結城縣監) 이두삼(李斗三)이 수영(水營)에 적의 관문(關文)을 보낼 때 곧바로 적괴(賊魁)의 ‘대원수(大元帥)’란 위호(僞號)를 호칭하였으므로, 충청 수사(忠淸水使) 유준(柳濬)에게 효시(梟示)하라 명하였다.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재로(金在魯)가 장계하기를,
"이달 17일에 적이 관문을 본주 경내에 투입시켜 인심이 놀라고 있습니다. 충주는 영남의 요충지이며 병기(兵器)와 창고의 곡식이 가장 많으나, 성이 이미 퇴락하고 사람들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여 주중(舟中)의 적국(敵國)이 되어 있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군병이 영남과 연결되어 있다는 설이 이미 국초(鞫招)에 나왔는데, 이제 본주(本州)의 죄수 나유(羅煣)가 고한 바를 듣건대, 영남의 적병이 길을 나누어 올라온다고 합니다. 적의 형세를 헤아리기 어려운데 청주(淸州)와 충주(忠州) 두 고을이 만약 적에게 함락당하면, 그 석권(席捲)하는 형세가 장차 서울까지 미칠 것입니다. 조령(鳥嶺)의 길목에는 문경(聞慶)에 무신을 차출해 보냈는데, 죽령(竹嶺)에만 유독 변통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입니까? 경상도 감사와 병사에게 역시 하유(下諭)하여 정찰(偵察)하고 방비하게 하여 고개를 넘지 못하게 하소서. 이런 때 영장(營將)을 이미 체직시키고 그 대신을 차출하지 않으니, 참으로 어설프다고 하겠습니다. 강원 감사에게 명하여 황급히 와서 구원하게 하소서. 왕사(王師)가 출정(出征)한 후의 동정 역시 그 대개는 하시(下示)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3월 22일 임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판부사(判府事)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이천 부사(利川府使) 강세윤(姜世胤)은 변을 제압할 인재가 아니니, 체직을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고 서행진(徐行進)으로 대신하였다.
장붕익(張鵬翼)을 김중기(金重器) 대신 총융사로 삼아 수원(水原)으로 출진하게 하였다. 장붕익이 청하기를,
"이덕재(李德載)를 기복(起復)시켜 종사관으로 삼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승지 이병태(李秉泰)가 말하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권첨(權詹)은 교귀(交龜)하기에 급하여 계책을 세운 바가 없고, 신(新) 감사 서명연(徐命淵)은 아산(牙山)에서 머뭇거리며 즉시 영(營)으로 달려가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홍양(洪陽) 공산(公山)으로 가서 성지(城池)와 기계(器械)가 장차 적의 소유가 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 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권첨과 서명연은 나문(拿問)하고 이병태로 서명연을 대신하게 하라."
하였다. 판부사 홍치중이 말하기를,
"안무사(按撫使) 권업(權𢢜)은 일찍이 방백(方伯)을 지내어 도내(道內)의 사정에 밝아서 진압하고 위무(慰撫)하는 재능이 이병태보다 낫습니다."
하자, 다시 권업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영남 안무사 박사수(朴師洙)가 길에서 상경하는 상주(尙州) 사람 종성 부사(鐘城府使) 황익재(黃翼再)를 만나 징계하기를,
"황익재는 재능이 있으니, 청컨대 그와 함께 가겠습니다."
하니, 소모사(召募使)로 차출하여 따라가라고 명하였다. 박사수가 또 서명연(徐命淵)이 바야흐로 호우(湖右)에 있기 때문에 그 호령이 좌도(左道)에는 행해질 수 없다 하여 청하기를,
"김재로의 사호(使號)를 호령하여 충주 근읍을 진무하게 하고, 상주 영장(尙州營將) 한날(韓㻋)은 잔약하여 쓸 수가 없으니, 청컨대 맹장(猛將) 한 사람을 보내어 대신에게 하여 화령로(化寧路)를 따라 청주의 적을 좌우로 공격하게 하소서."
하였다.
대사헌 이하원(李夏源)과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호중(湖中)의 적변(賊變)이 막 일어났으니, 역적 항(杭)182) 의 아들 소(炤)를 홍주(洪州)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계원장(繼援將) 박동추(朴同樞)에게 명하기를,
"개성부(開城府)의 마병(馬兵) 2초(哨)를 거느리고 죽산(竹山)으로 출발해 가서 도순무 대군(大軍)의 후원이 되게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권혁(權爀)이 상소하기를,
"금랑(禁郞)이 여주(驪州)에서 죄인을 붙잡아 오는데 호송하는 군졸이 하나도 없고, 죄인 역시 낭두(囊頭)183) 를 하지 않고 밤에는 칼[枷]을 풀어주어 도망하게 했으니, 금랑과 나졸은 국문해야 마땅하며, 이천 부사(利川府使) 강세윤(姜世胤) 역시 나포해 국문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남태징(南泰徵)을 정법(正法)한 후에는 마땅히 지체(肢體)를 자르고 머리를 함(函)에 담아 출정(出征)한 군중(軍中)으로 치송(馳送)해 깃대에 달아 조리돌려 적의 간담을 떨어지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도순무 군관(道巡撫軍官) 신진숙(申震熽)에게 가선(嘉善)을 가자(加資)하여 동지(同知)를 제수하였다.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진위(振威)의 야경(夜警) 때 신진숙이 칼을 무릅쓰고 적을 베어 주장(主將)을 구원했다 하여 포상을 청하였으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영부사(領府事) 이관명(李觀命)이 향리로부터 들어와 말하기를,
"숙위(宿衛)가 단약(單弱)하니, 청컨대 성안의 한산(閑散) 무사(武士)로 부대를 만들어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에게 붙여 궁성을 호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여러 대신과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3월 22일 임신
또 이하(李河)를 1차 형신하니, 이하가 공술하기를,
"박필현(朴弼顯)이 신을 그들 무리에 들어와 함께 일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이인좌(李麟佐)·한세홍(韓世弘) 등과 역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이지인(李志仁)을 3차 형신하니, 이지인이 공술하기를,
"신광원(愼光遠)은 바로 신의 6촌(寸)으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 서로 왕래하며 역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도 법대로 하였다.
박상순(朴尙淳)을 문초하니, 박상순이 공술하기를,
"적이 군사를 양성(陽城)에 모아 소를 잡아먹고, 군사를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진위로 가고, 한 패는 평택으로 가서 두 고을 수령을 모살(謀殺)하고, 곧이어 청주(淸州)로 향하였는데, 그 숫자는 불과 안성(安城) 장터 사람만큼 되었습니다. 적장은 권서룡(權瑞龍)·권서봉(權瑞鳳)·박태제(朴泰齊)·이호(李昈)였습니다. 박태무(朴泰武)란 자가 말하기를, ‘적의 무리가 영남(嶺南)의 군사를 기다리는데 용인(龍仁) 직곡(直谷)의 안씨(安氏) 성을 가진 양반이 그 일을 주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들으니, 죽산(竹山) 사람 윤취상(尹取商)·서문석(徐文錫)이 적중으로 갔다고 합니다."
하고는, 또 적의 도목(都目)을 바쳤다. 임금이 ‘김옥성(金玉成)의 처음 공초 가운데 「강도(江都)·남한(南漢)·4도(道)에서 징병하였다」는 등의 말에는 공동(恐動)하려는 뜻이 있다.’ 하여 1차 형신하니, 전과 같이 공초하였다.
도총 도사(都摠都事) 윤취리(尹就履)·허빈(許賓) 등을 조운 차사원(漕運差使員)으로 삼아 강의 위아래로 나누어 보내어 세선(稅船)을 독운(督運)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아뢰기를,
"청주의 적인(賊人) 이시옥(李始沃)·이시겸(李始謙)은 먼저 적의 정세를 물은 후 효시(梟示)하라고 이미 명하셨는데, 두 사람이 고백한 적도가 아주 많습니다. 만약 지레 효시를 시행하면 방문할 길이 끊어지니, 우선 포청(捕廳)에 가두어 두고 여러 적을 붙잡아 오기를 기다린 후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이 손바닥에다 ‘화공 내응(火功內應)’이란 네 자를 써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적의 계책이 흉독(凶毒)하니, 내응한 여러 적을 다 붙잡은 연후에야 뜻밖의 우환이 없을 것입니다. 방비할 계책을 대신과 함께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로 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장계하기를,
"수령(守令)들이 대부분 겁이 많아 어쩔 줄을 모르는데, 유독 안성 군수(安城郡守) 민제장(閔濟章)과 진위 현령(振威縣令) 조동빈(趙東彬)만은 약간의 군사를 불러 모아 신의 군영으로 왔습니다. 양호(兩湖) 지방의 전명(傳命)은 이들이 아니면 결단코 상통하기가 어렵습니다. 조동빈은 본읍에 남아 지키게 하고, 민제장은 본군으로 돌아가 촌백성들을 불러 안집(安集)시켜 조정의 영(令)을 전통(傳通)하게 했습니다. 듣건대, 남한에서 징병한다고 하니, 두 고을은 거느리고 오지 말게 할 것을 치계합니다."
하였다.
3월 23일 계유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여 스스로 가서 독전(督戰)하기를 청하였는데, 대개 도순무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간 지 며칠이 되었는데도 적을 격파했다는 보고를 아직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송인명은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남한 순무사(南漢巡撫使) 김동필(金東弼)이 장계하기를,
"흉적의 노문(路文)184) 이 바야흐로 죽산(竹山)을 지났다고 하는데, 도순무의 대군은 소사(素沙)로 전진하여 용인과 이천 두 길이 비어 있습니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유척기(兪拓基)가 바야흐로 동로 진어사(東路鎭禦使)로 누원(樓院)에 주둔해 지키고 있으니, 바라건대, 유척기에게 명하여 미음강(渼陰江)으로 옮겨 방어하게 하고, 춘천 방어사(春川防禦使) 정도원(鄭道元), 여주 목사(驪州牧使) 이행검(李行儉)도 모두 신의 절제를 받도록 명하여 유척기와 함께 협력해 방수(防守)하게 하소서."
하니, 회유(回諭)하기를,
"다시 정병(精兵)을 뽑아 요충지에 나누어 웅거하게 하고는 산골짜기를 두루 수색하여 오는 길을 끊어 도순무와 앞뒤로 협공(夾功)하라."
하였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송진명(宋眞明)이 장계하여 말하기를,
"정탐하는 사람이 고하기를, ‘적병이 이달 22일에 진천(鎭川)에서 호군(犒軍)하고, 23일에는 죽산을 향해 출발하였는데, 적중의 도목(都目)은 30초(哨)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송진명의 계본(啓本)을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도승지 윤순(尹淳)이 청하기를,
"남한 순무사(南漢巡撫使)로 하여금 군사를 발동하여 좌잔령(左棧嶺)을 방수하게 하소서."
하고, 어영 대장(御營大將) 조문명(趙文命)은 청하기를,
"급히 계원장(繼援將) 박동추(朴東樞)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南下)하게 하소서."
하고,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은 청하기를,
"양주 목사 유척기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경성(京城) 밖으로 오게 하소서."
하고, 영의정 이광좌는 청하기를,
"급히 춘천 방어사 정도원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오게 하고, 황해 병사(黃海兵使) 원백규(元百揆)는 청석령(靑石嶺)으로 진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윤순이 청하기를,
"유만증(柳萬增)을 거느리고 남한으로 가서 정예병을 가려 영애(嶺隘)를 지키고, 장사(將士)를 독려해 싸움터로 가겠습니다."
하였는데, 이광좌가 윤순이 평소 지세(地勢)에 밝다는 이유로 허락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유만증을 불러 보고 묻기를,
"어떻게 적을 막겠느냐?"
하니, 유만증이 청하기를,
"강궁(强弓)·경전(勁箭)을 얻어서 잘 쏘는 무사 수백 명을 스스로 모집해 데리고 가겠습니다."
하니, 검(劍)을 하사하고 유시하기를,
"이것은 선조(先朝)에서 별군직(別軍職)에게 내리시던 칼이다. 청주 우후(淸州虞候)가 적에게 항복하여 범순(犯順)했으니, 너는 이 칼로 참수(斬首)해 가지고 와서 바치라."
하였다.
내병조(內兵曹)에서 정국(庭鞫)하여 윤덕유(尹德裕)를 2차 형신하니, 윤덕유가 공술하기를,
"신이 이미 영남의 일을 알아 수작한 바 있으니, 그 정실(情實)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음이 사실입니다."
하였으므로, 법대로 참형에 처하였다.
이문저(李文著)를 문초하니, 이문저가 공초하기를,
"미태(米馱)를 적중으로 싣고 간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안추(安樞)를 문초하니, 안추가 공술하기를,
"보검(寶劍)을 과연 장전(張錪)에게 주었고, 이사성(李思晟)이 신에게 달마(㺚馬)를 주었으니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으므로, 모두 참형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성탁(成琢)을 문초하니, 성탁이 공술하기를,
"3월 13일 신이 중미(中彌) 주막에 이르니, 김옥성(金玉成)이 뒤좇아 이르러 주막 사람과 서로 말을 나누었습니다. 신이 옆에서 그 말을 들으니, 김옥성이 말하기를, ‘어제 아침 소사(素沙)·갈원(葛院) 사람들이 흩어져 달아났기에 나 역시 그곳에서 도망해 돌아온 것이다. 이는 바로 이곳 의병장(義兵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하고, 또 말하기를, ‘내 이름 역시 적의 성책(成冊) 가운데 들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김옥성에게 말하기를, ‘의병장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하니, 김옥성이 말하기를, ‘이곳의 20명이 변산(邊山)·지리산(智異山)의 적과 화응(和應)하여 이번 3월 16일에 한 사람마다 1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는데, 기일이 점차 임박하자 갈원과 소사 백성으로 적의 성책에 들어 있는 자들이 모두 스스로 놀라 흩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적장들 역시 모두 도주해 적소(賊所)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김옥성에게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는 바로 적병(賊兵)인데 의병(義兵)이라고 말하니 너무 무식하다.’ 하였더니, 김옥성이 말하기를, ‘적병이냐 의병이냐를 논할 것이 없이 일의 기미가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이어 스스로 적중의 사정을 분명하게 안다고 칭하기 때문에 신이 즉시 붙잡아 고발하고자 하였으나, 강하고 약함이 같지 못하고, 그곳이 적도들이 출몰하는 곳 같기 때문에 계책을 써서 유치(誘致)하여 청파(靑坡)에 이르러 붙잡아 고한 것입니다.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에 대한 이야기는 금시 초문이며, 원래 지휘하거나 모의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순무사 오명항이 진위 땅에 있으면서 종사관 등과 더불어 진병(進兵)할 것을 의논하여 각기 그 이해를 개진하였다. 오명항은 단지 말하기를,
"시험삼아 직산(稷山)으로 진군하고,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다."
하고, 드디어 진군해서 소사에 이르러 점심밥을 먹고 나니 전군(前軍)은 이미 직산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오명항이 갑자기 말에 기대어 두 종사관을 불러 귀에다 대고 명령하기를,
"안성 군수(安城郡守) 민제장(閔濟章)으로 하여금 본군(本郡)으로 돌아가 양초(糧草)를 정돈해 기다리게 하라."
하고, 큰소리로 말하기를,
"직산으로 운반하라."
하였다. 당보 초관(塘報哨官)185) 을 불러들여 귀를 잡고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서 몰래 깃발을 흔들도록 명하여 지레 안성으로 가게 하였다. 이는 대개 오명항이 처음 행군하여 과천(果川)에 이르러 기졸(旗卒) 방득규(方得規)가 정한(精悍)하여 부릴만한 것을 보고는 별무사(別武士)로 올리어 그의 환심을 사고 수원에 이르러 밀령(密令)으로 간첩을 만들어 청주의 적진에 투입시켜 적이 가는 방향을 탐지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방득규가 과연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또 소금 장수 차림을 한 적의 간첩을 잡아 바쳐 비로소 적이 진천(鎭川)에서부터 군사를 나누어 한 부대는 죽산(竹山)으로 향하고, 한 부대는 안성으로 향하여 민제장을 습격하여 죽이고자 함을 알게 되었다. 오명항이 이미 안성으로 향하기를 결심하고 남보다 앞서 빼앗는 계책을 쓰고서 그 모책의 비밀이 누설될까 염려해 발표하지 아니한 채 직산의 대로(大路)로 향한다고 소리쳐 말했던 것이었다. 소사(素沙)에 이르니, 정탐하는 자 4, 5명의 말 역시 서로 부합하는지라 중도에서 길을 바꾸었고, 이로 인해 승리를 얻었으니, 이는 하늘이 실로 도운 것이다. 안성에 이르니 날이 이미 어두웠는데, 적의 간첩 최섭(崔涉)이란 자를 붙잡아 힐문해 적의 정세 및 적장(賊將)의 성명을 알아내고 주머니 안을 조사해 이봉상(李鳳祥)의 패영186) 을 찾아냈다. 잠시 후 앞산에 몇 개의 횃불이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오면서 포성(砲聲)과 함성이 계속해서 일어나더니 적병이 진을 침범했다고 후졸(候卒)이 급히 보고해 왔다. 이때 풍우가 크게 몰아치고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장작불을 미처 피우지 못해 진 밖은 지척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먹지 못한 군마(軍馬)가 반이 넘어 뭇사람들의 마음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오명항이 굳게 드러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단지 진오(陣伍)를 정돈한 채 경솔하게 포를 쏘지 말고 적이 가까이 오면 비로소 쏘도록 신칙하였다. 그리고 죽을 준비해 사졸들을 먹이고 평소처럼 코를 고니 진중이 거기에 힘입어 안정되었다. 이튿날 새벽 진 밖의 1백여 보 되는 곳에 적병의 인마(人馬)가 탄환에 맞아 죽고 버린 무기들이 보였다. 대개 적은 각처의 토적(土賊) 및 청주진(淸州鎭)·목천(木川) 등 고을의 마병(馬兵)과 금어군(禁禦軍)으로서 정예한 자를 뽑아 장사치와 거지 차림을 하여 피난민 가운데 섞여 은밀히 안성(安城) 청룡산(靑龍山) 속에 모여 있었는데도 산 아래 촌락이 거의 적의 소굴이 되어 있어 누구 하나 와서 고하는 자가 없어 안성군에서는 아직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적의 첩자가 번번이 관군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적도들도 단지 대군(大軍)이 직산(稷山)으로 향한 줄만 알았지 진을 안성으로 옮긴 줄은 모르고 어두운 가운데 안성군의 진(陣)인 줄 잘못 알았기 때문에 원근을 구별하지 못해 포(袍)와 화살을 어지러이 쏘았으나 다 미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대군이 쏜 신기전(神機箭)을 보고서야 비로소 경영(京營)의 군사가 온 것을 알고 놀라고 겁에 질려 물러나 도망하니, 위협에 못이겨 따른 무리는 이때 대부분 도망해 흩어지고, 적의 괴수 이인좌(李麟佐)·박종원(朴宗元) 등은 4, 5초(哨)의 병력을 거느리고 청룡산 속으로 물러가 둔을 치고 죽산(竹山)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대군도 적이 둔을 친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날 아침에 교련관(敎鍊官) 권희학(權喜學)이 민제장(閔濟章)이 적의 첩자를 사로잡은 것을 보고는 곧 달래고 힐문해 비로소 적병이 산속 가지곡(加之谷) 대촌(大村) 속에 있는 것을 알았으니, 관군과 겨우 5리 남짓 떨어진 지점이었다. 오명항이 멀리서 그 지형을 바라보니, 청룡산 한 줄기가 수백 보(步) 정도로 길게 구부러져 마치 소가 누워 있는 형상으로 3면을 둘러 안았는데, 5, 60호의 마을이 그 안에 자리해 있었으며 전면은 평야였다. 즉시 중군(中軍) 박찬신(朴纘新)으로 하여금 보군(步軍) 3초(哨)와 마군(馬軍) 1초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경계하기를,
"기(旗)를 눕히고 북소리를 내지 말며, 갑옷과 투구를 벗고 빨리 달려나가되 보군 1초는 산 뒤쪽을 거쳐 먼저 높고 험한 곳을 점거하고, 2초는 두 날개로 나누어 포를 쏘고 화전(火箭)을 쏘아 그 촌락을 불태우라. 그렇게 하면 그 형세로 보아 반드시 앞들로 도망해 나올 것이니, 이에 마군(馬軍)으로 짓밟으라."
하고, 또 민제만(閔濟萬)에게 명하기를,
"안성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로 향해 의병(疑兵)187) 을 만들어서 적의 도주로를 막으라."
하였는데, 전군(前軍)이 절제(節制)를 어기고 기를 세우고 북을 울리며 행군했으므로 적이 눈치채고 군기와 집물(什物)을 버리고 급히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붉은 일산(日傘)을 세워 백기(白旗)로 지휘하니, 관군이 지리(地利)를 잃어 올려다만 볼뿐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권희학이 한 촌 할미를 붙잡아 위협해 적장 한 사람이 마을 가운데 있음을 알고는 이만빈(李萬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장사(將士)가 아닌가? 하찮은 적을 보고 겁을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만빈이 분연히 말하기를,
"내 마땅히 죽으리라."
하고는 말에 오르면서 용사를 구하기를,
"누가 나를 따르겠는가?"
하니, 중초군(中哨軍) 조태선(趙泰先) 등 50여 명이 따르기를 원했다. 마침내 앞장서 마을로 들어가는데 적장 박종원의 말이 사나와서 재갈을 물지 않으므로, 지체하고 도는 사이에 관군이 이미 핍박하였다. 박종원이 소리치기를,
"시간을 끌다가 목숨이 이에 이르게 되었구나."
하고는 칼을 뽑아들고 벗어나려 하였다. 조태선이 먼저 한 발을 쏘아 그 목을 맞히니, 박종원이 몇 걸음을 달려가다가 쓰러졌다. 이만빈이 말에서 내려 목을 베고 또 그의 군관 몇 사람을 베었다. 그리고 그 목을 깃대에 매달고 산 위로 달려가니 적이 바라보고 기운이 빠지고, 또 궁포(弓砲)가 모두 밤비에 젖어 쓸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산꼭대기로 도망하여 올라갔는데, 그때 동북풍(東北風)이 세게 불고 적은 서남쪽에 있어 관군이 바람을 타고 힘을 분발해 올라가니, 적은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도망하려다가 민제만의 의병(疑兵)을 보고는 다시 돌아 서쪽으로 가니 형세가 더욱 위축되어 기와 북을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군이 추격해 1백여 명을 베었으며, 마병 임필위(林必偉)란 자는 적 1명을 사로잡아 겨드랑이에 끼고 달리니, 보는 자들이 장하게 여겼다. 그들의 짐바리와 홍산(紅傘)·기치(旗幟) 등을 노획했다. 처음에 관군이 올려다보며 적을 공격하여, 적은 산 위에서 진퇴(進退)하며 유인하는 형상을 짓기도 했는데, 적과 관군이 모두 군사를 거두어 산을 내려온 후에는 막연하여 그 승부를 알 수가 없었다. 종사관(從事官) 등이 해상(垓上)에 올라가 바라보고는 관군이 적에게 함몰되는가 싶어 매우 초조해 하니, 오명항이 웃으며 말하기를,
"적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정오가 채 못되어 말을 달려 승첩을 알려 왔고, 포시(晡時)188) 에 박찬신(朴纘新)이 고각(鼓角)을 울리며 깃대에다 적의 머리 여러 개를 매달고 오니, 군중에서 승전곡(勝戰曲)을 울리고 군사와 말이 기뻐 날뛰었다. 첩서(捷書)를 써서 박종원 등의 머리를 함에 담아 군관 신만(申漫)에게 주어 서울로 치보(馳報)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상하가 밤낮으로 초조하게 걱정하며 첩보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날 동북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모두 말하기를,
"왕의 군대에 이롭다."
했는데, 과연 크게 이겼던 것이다.
처음에 대군(大軍)이 소사(素沙)에 진을 치고 있을 때 한 촌동(村童)을 끌어다가 적의 정세를 살피게 했는데, 그 아이가 말하기를,
"지난번 적의 무리가 마을가에 둔을 쳤는데, 그 가운데 한 적장은 얼굴이 검고 눈이 둥근 것이 상모(狀貌)가 아주 흉악했으며, 야채를 날것으로 몇 광주리나 씹어 먹었습니다."
하여 듣는 자들이 매우 악독하게 여겼었다. 이번 싸움에서 민제만(閔濟萬)이 적장 설동린(薛同麟)을 잡아 바쳤는데, 설동린은 본래 순창(淳昌) 사람으로 형용이 흉악하고 추하였으며, 목의 크기가 작은 아이의 두(肚)189) 만 하였다. 혹은 맨손으로 이봉상(李鳳祥)을 죽였다고 하니, 동자가 말한 자는 대개 설동린을 가리킨 것이다.
이날 아침에 적의 졸개를 붙잡았는데, 그가 지닌 글에 이르기를,
"민제장(閔濟章)이 군사를 낸 것은 당랑(螳螂)190) 이 팔뚝을 뻗친 것과 같다. 다만 들으니, 소사의 진(陣)이 와서 구하고자 한다고 하는데, 오늘 밤은 풍세(風勢)가 매우 좋다. 불을 놓아 읍촌(邑村)을 불태운다면 그 군사들이 반드시 어지러울 것이니, 정포(精砲) 수백 발을 쏘면 남은 것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대개 죽산(竹山)의 적이 몰래 안성의 적에게 계책을 준 것이었으나, 마침 지체되어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사로잡힌 적이 말하기를,
"경군(京軍)이 진위(振威)에 있던 밤에 적이 먼저 첩자를 보내 각 고을의 양초군(糧草軍)속에 섞이어 진중에 들여보내고, 이어 마보군(馬步軍) 4, 5초(哨)를 보내 안에서 응하고 밖에서 습격할 계책이었는데, 관군이 이미 계엄(戒嚴)하고 포와 화살을 동시에 일제히 쏘아 놀라 도망해 숨었습니다."
하였다.
군중에 김화구리(金禾九里)란 자가 있었는데, 진산(珍山)의 군사이다. 늙고 몸이 약한데다 병이 있어 돌아가게 했더니, 즐겨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가 험천(險川) 싸움에서 죽었는데, 나라고 유독 할 수 없겠습니까?"
하였다. 강제로 가라 하니 분해서 눈물을 흘렸다. 바야흐로 모상(母喪)을 입고 있었는데, 고기를 권하자 말하기를,
"우리 풍습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충효군(忠孝軍)으로써 급복(給復)191) 하고 향장관(鄕將官)으로 승차시켰다.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재로(金在魯)에게 본도(本道) 안무사(按撫使)를 겸하라 명했다.
전(前) 수찬(修撰) 신노(申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청주영(淸州營)은 서울에서 거리가 불과 사흘 거리인데, 관군이 출정(出征)한지 5, 6일에 아직도 지체하여 적으로 하여금 아무렇지 않게 청주영을 점거하게 하였으니, 신은 그간의 사정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지체함이 심합니다. 효유(曉諭)하는 글을 속히 반시(頒示)하여 협박에 못이겨 따른 자는 돌아와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무리를 이끌고 와서 고할 경우 중한 상을 준다고 허락한다면 반드시 이산(離散)하는 거조가 있을 것입니다. 어찌 굳이 군사로 번거롭게 토벌하겠습니까? 충주(忠州)의 새 목사 김재로는 재신(宰臣)인데, 택차하여 맡긴 것은 그 직임을 중하게 여긴 데서 나온 것이나, 수령(守令)은 본래 수하(手下)에 군사가 없으니, 바라건대, 박사수(朴師洙)의 예에 의해 김재로로 하여금 그대로 안무(按撫)하는 임무를 살피게 하고, 일로(一路)의 병마(兵馬)도 총괄해 살피게 하소서. 들으니, 조지빈(趙趾彬)을 양서 안무사(兩西按撫使)로 삼았다고 하는데, 조지빈은 한갓 어리석고 무식한 일개 미친 아이일 뿐입니다. 이런 중임을 그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여러 신하 가운데서 널리 가리어 다시 제수하소서."
하였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말하기를,
"국가가 위급하고 의혹에 빠진 때를 당했으니, 마땅히 구습(舊習)을 버리고 다같이 두려워하고 공경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신노(申魯)가 상소한 내용을 보건대, 쓸 만한 것이 없지는 않지만, ‘아직도 지체하고 있다.’, ‘어리석고 무식하다.’는 등의 말은 현저히 그 뜻이 있다. 신노를 우선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즉일로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이후로 만약 당의(黨議)를 끼고 감히 사(私)를 도모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효시(梟示)하여 거리에 매달아 군부(君父)를 등지고 사당(私黨)을 따른 죄를 쾌히 바로잡겠다."
하였다.
정언(正言) 권혁(權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금은 수비(守備)가 매우 허술하나, 거빈(去邠)192) 하는 데 이르러서는 애당초 조정의 계책도 이에 미치지 않았거니와 성상께서도 역시 경동(驚動)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어리석은 백성이 도리어 만에 하나의 염려를 하고 있으니, 조사(朝士)·유생(儒生)·방민(坊民)을 막론하고 무릇 성안에 있는 자는 모두 항오(行伍)에 편성하여 혹은 호위청(扈衛廳)에 소속시키거나 혹은 별도로 한 청(廳)을 설치하여 한 대신으로 하여금 영솔(領率)하게 하여 각기 성첩(城堞)을 지키게 하면, 온 성이 군병이 될 것입니다. 또 도성(都城)의 사면이 산에 의지하고 있어서 본래 낮으니, 쉽게 넘을 수 있는 곳은 역시 수리하게 하여, 한편으로는 넘어오는 것을 방지하고, 한편으로는 반드시 지킬 형세를 보이면, 충의심(忠義心)을 격발시키고 민심을 진정시켜 편안하게 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에 진달한 바는 이미 상량(商量)했던 것이다."
하였다.
3월 24일 갑술
감호 제군사(監護諸軍使) 윤순(尹淳)이 사폐(辭陛)하고 입대(入對)하니, 임금이 절월(節鉞)과 밀부(密符)를 내리고, 윤순에게 명하여 적이 오는 길의 영애(嶺隘)를 지도로 그리게 하니, 윤순이 손으로 그림을 그려 바쳤다. 임금이 위로하고 면려해 보냈다.
전(前) 방어사(防禦使) 유만증(柳萬增)을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보내 순사(巡使)의 조용(調用)에 따르게 하였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유척기(兪拓基)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고암(鼓巖)에 진을 치고, 춘천 부사(春川府使) 정도원(鄭道元)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광진(廣津)에 진을 치니, 임금이 시신(侍臣)을 나누어 보내어 노문(勞問)하였다.
경기 방어사(京畿防禦使) 이여적(李汝迪)에게 명하여 경영(京營)의 정병 2천 명과 송도(松都)의 마병(馬兵) 1초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출발에 임하여 임금이 시신을 내어 노문(勞問)하였다.
동중추(同中樞) 유성추(柳星樞)을 진어사(鎭禦使)로 삼아 이여적을 대신하여 장단(長湍)의 군사를 거느리고 탕춘대(蕩春臺)에 진을 치게 하라고 명하였다.
북도 안무사(北道按撫使) 윤헌주(尹憲柱)가 사폐(辭陛)하고 입대하여 청하기를,
"성상의 뜻을 굳게 정하시어 거빈(去邠)할 계획을 하지 마시고, 임진 왜란 때 용만(龍灣)193) 에서 내리신 교문에 의하여 팔도에 효유하여 역순(逆順)을 밝히소서."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남한 순무사(南漢巡撫使) 김동필(金東弼)이 장계하기를,
"중군(中軍) 구성임(具聖任)은 바야흐로 독전장(督戰將)으로 차출되어 나가서 적을 토벌하는데, 적은 죽산(竹山)을 경유하여 돌진하고 있으나 도순무(道巡撫)의 군사는 깊이 목천(木川)으로 들어가 있으므로, 청주 지경과 응접할 도리가 없습니다. 청컨대 급히 경포수(京砲手) 5, 6초(哨), 마병(馬兵) 4, 5초를 내려 보내고, 맹장(猛將) 한 사람을 정해서 신의 절제를 받아 급한 예봉(銳鋒)을 막게 하소서."
하고, 또 장계하기를,
"어저께 적병이 죽산에 와서 자고, 오늘은 양지(陽智)에 도착했으니, 청컨대 급히 한 부대의 군사를 보내어 경안(慶安) 일로(一路)를 굳게 지키게 하소서. 적군은 흰 옷을 입은 자가 모두 5, 6초인데, 청주의 관군(官軍)의 전구(前驅)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정국(庭鞫)하여 윤천경(尹天擎)을 문초하니, 윤천경이 공초하기를,
"신의 처남(妻娚)이 이천(利川) 땅에 있는데, 천장(遷葬)하는 일로 서울에 들어와 신에게 묻기를, ‘그대는 이번 소란한 상황을 듣지 못했는가?’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최백이 말하기를, ‘향간(鄕間)에는 과연 동요되어 누구누구를 지목하는 말들이 많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누구냐고 물으니, 최백이 말하기를, ‘박필현(朴弼顯)이 모역을 주도하고 한세홍(韓世弘)이 그 도당이 도었으며,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 역시 그 가운데 들어 있고, 이천의 임가(任哥) 의인(醫人) 역시 함께 모의했으니, 이 소란은 거짓말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너는 누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느냐?’ 하니, 최백이 말하기를, ‘근처에 사는 최만주(崔萬柱)의 아우에게 들었다. 최만주의 아우 역시 적당(賊黨)에 들었고 그 사람의 처부(妻父)도 들었는데, 가계(家計)가 가난하지 않아서 재물로써 적을 돕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이 말이 과연 사실이라면 내가 마땅히 고발해야겠다.’하니, 최백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비록 나에게 묻더라도 어찌 곧바로 고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이튿날 새벽에 신은 이곳으로 붙잡혀 들어왔습니다. 또 의인(醫人) 임가가 적당이 된 것은 신 역시 마음으로 알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주(驪州) 사람 신윤조(辛胤祖)와 일찍부터 서로 알고 지냈는데, 이번에 갑자기 와서 말하기를, ‘이번 소란에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적에게 참살(斬殺)당했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어찌 이런 괴이한 말을 하는가?’ 하니, 신윤조가 말하기를, ‘황선은 분명히 참살되어 현수(縣首)되었는데, 양령(兩嶺)의 길이 끊겼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이런 상황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어디에서 들었는가?’ 하니, 신윤조가 말하기를, ‘이천 사는 의인(醫人) 임가에게서 들었는데, 이는 바로 임서봉(任瑞鳳)의 동생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이 적을 격파하고 적의 괴수 이인좌(李麟佐) 등을 함거(檻車)194) 에 실어 서울로 보냈다. 오명항이 군중(軍中)에 명령하여 각기 점심밥을 싸가지고 안성으로부터 죽산으로 향하니, 좌우가 모두 첩첩 장곡(長谷)이었다. 먼저 안성군(安城軍)을 보내고 복명(伏明)을 수색하면서 30리를 가니, 당보군(塘報軍)이 보경(報警)해 왔다. 오명항이 그 지형을 보니, 앞에 한 재가 있어 이름을 장항령(獐項嶺)이라 하는데, 매우 험준하였다. 적이 먼저 점거할까 염려하여 급히 기(旗)를 점검하고 마보군(馬步軍)을 재촉하여 몇 길로 아울러 나가 일제히 고개로 오르게 했다. 그랬더니 적의 마군(馬軍) 몇 초(哨)가 이미 고개 밑 수십 보 되는 곳 안에 있다가 졸지에 관군의 형세가 큰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 무너졌다. 관군은 안성에서 승첩하면서 예기(銳氣)가 한창 왕성하였고, 서풍(西風)이 고개 위에서부터 거꾸로 불어와 깃발을 나부끼니 모두 펄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적의 대대(大隊)가 바야흐로 들판 가운데다 진을 치고 있었는데 장막이 성대하였으며, 기고(旗鼓)를 늘어놓고는 소를 잡고 술을 걸러 장차 군사를 먹이려고 하다가 관군을 바라보고는 적장이 포를 쏘며 깃발을 흔들어댔으나, 군사들이 응하지 않자 진의 일각이 미동(微動)하였다. 관군이 바람을 타고 가파른 언덕으로 달려 내려가니, 그 형세는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였다. 전대(前隊)가 곧바로 죽산부(竹山府)로 들어닥치니, 앞의 적(賊)들이 크게 궤멸되어 적장이 금지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어서, 형세가 군박(窘迫)하여 숨어 도망하였다. 관군이 사면에서 엄습하여 죽이니 참획(斬獲)함이 매우 많았다. 이때 적장 정세윤(鄭世胤)은 일명이 행민(行旻)인데 위칭(僞稱) 부원수(副元帥)라는 자로 이만빈(李萬彬)·이우석(李禹錫)에게 쫓기어 형세가 궁해지자 포박당하였다. 군중에서는 그의 역적질이 더욱 심하다 하여 먼저 지체(肢體)를 가른후에 참수했는데, 이미 사지(四肢)를 잘랐으나 그래도 꿈틀거렸으니 그 흉악함이 이러하였다. 정세윤의 동생 정계윤(鄭季胤)은 위칭 죽산 부사(竹山府使)란 자였다. 바야흐로 객사(客舍)에 앉아 있다가 군사가 패해 도망하는 것을 보고는 읍촌(邑村)에 숨어 있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참살되니, 적이 대략 평정되었다. 오명항은 평민(平民)이 뒤섞여 살육될까 염려하여 명을 내리기를,
"사로잡은 자는 상을 주겠으나 참수해 바친 자는 논상(論賞)하지 않겠다."
하니, 이에 장사(將士)들이 무수한 적당(賊黨)을 사로잡아 바쳐 큰 새끼로 고기 꿰미처럼 엮은 것이 진중에 가득하였다. 종사관 박문수와 조현명에게 명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조사하게 하여 강포하고 사나운 자만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곤장을 쳐서 방면하게 하여 조가(朝家)의 덕의(德意)를 선포하였다. 적의 괴수 이인좌를 붙잡지 못하자, 오명항이 급히 장교를 내어 사방으로 나가 사로잡게 했는데, 마침 위칭 삼남 대원수(三南大元帥)라는 자로 처음에 정세윤과 함께 군사를 두 편대로 나누어 자신은 안성으로 갔는데, 안성의 군사가 패배하자 밤에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겨우 죽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진이 또 궤멸되자 도주하여 산사(山寺)로 들어가니, 촌백 성인 신길만(申吉萬) 등이 승려들과 함께 힘을 합쳐 붙잡아 바친 것이다. 위칭 청주 목사(淸州牧使) 권서봉(權瑞鳳), 위칭 진천 현감(鎭川縣監) 이지경(李之經)·위칭 장군(將軍) 목함경(睦涵敬)·박상(朴尙)·곽장(郭長) 등도 백성들이 사로잡아 바치니, 혹 함거에 실어 보내기도 하고 혹은 효시하기도 하였다. 적의 유둔(留屯)했던 곳에는 버려진 군기(軍器)·마필(馬匹)·미포(米布)·의복(衣服)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 노획한 것을 모두 전사(戰士)에게 상으로 주었다. 박문수가 청하기를,
"군기(軍器)를 나누어 상으로 주어야 합니다."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군기와 역마(驛馬)는 모두 관물(官物)이라 마음대로 줄 수 없다."
하였다. 민제만(閔濟萬)을 죽산의 임시 수령으로 삼아 군기를 수습하게 하니, 거의 40바리나 되었다. 30바리는 청주 병영(淸州兵營) 병기라 하여 본영으로 돌려보내고 7, 8바리는 죽산에 남겨 두었으니, 대개 군기에는 각기 그 영읍(營邑)의 자표(字標)가 있었던 것이다. 또 목인(木印)을 노획하였는데, 전각(篆刻)으로 ‘대원수(大元帥)’라 하였고, 그 크기는 말[斗]만 하였다. 종사관 및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이인좌의 살점을 떼어서 죽여 분을 풀고자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이 적은 마땅히 함거에 실어 서울로 보내어 오형(五刑)195) 을 갖추어 정법(正法)해야 한다."
하고, 거짓으로 군중에 명령하기를,
"이인좌를 참하여 그 머리를 매달라."
하였다. 그리고 장대 위에 ‘적괴 이인좌’라고 크게 썼는데, 사실은 다른 적이었고 이인좌가 아니었다. 함거에다 이인좌와 권서봉(權瑞鳳)·목함경(睦涵敬) 등을 가두어 군관 박경봉(朴慶奉)으로 하여금 서울에 바치도록 하였다. 오명항은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장사(將士)들 가운데 죄가 있는 자가 있으면 약간 꾸짖어 책망하고 한 사람도 매를 때리지 않았다. 조현명(趙顯命)이 간하기를,
"위엄으로 하지 않고 관대하게 하면 군중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국가가 태평한 지 1백 년이어서 경군(京軍)이 평소 느슨하게 되었는데, 이제 갑자기 형륙(刑戮)을 가하면 반드시 원망하고 두려워하여 마음이 떠나는 자가 있게 될 것이니, 은혜로운 뜻으로 어루만지고 충의(忠義)를 격려하여 그들이 죽을 힘을 내어 싸우게 하는 것이 낫다."
하였다.
안성 싸움에서 밤에 비가 쏟아붓는 것처럼 왔는데, 아군은 우구(雨具)로 막아 군사 물자가 젖지 않았지만, 적의 기계(器械)는 탄환 한 발 화살 한 대를 쏘지 못했다. 청룡산(靑龍山)의 동북풍(東北風)과 장항령(獐項嶺)의 서풍(西風)이 모두 왕의 군대에서 유리하여 관군은 졸병 하나 손상시키지 않고 크게 전승(全勝)을 거두었으니, 모두 하늘이 몰래 도운 덕분이었다.
남한 순무사(南漢巡撫使) 김동필(金東弼)이 장계하기를,
"적장 정조윤(鄭祚胤)·곽중휘(郭重輝)를 붙잡아 보냅니다."
3월 25일 을해
도순무 종사관(都巡撫從事官) 조현명(趙顯命)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돈화문루(敦化門樓)에 임어하여 헌부례(獻俘禮)196) 를 행하니, 선전관(宣傳官)이 적괴(賊魁) 박종원(朴宗元) 등의 수급(首級)을 바쳤다. 임금이 명하기를,
"깃대에 매달라."
하고, 명하기를,
"박종원의 아들은 진(陣) 밖에서 참수하라."
하였다. 오부(五部)197) 의 부로(父老)들을 누각 아래로 불러 모아 시신(侍臣)에게 명하여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다.】 에서 아뢰기를,
"오늘날의 역변(逆變)은 실로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당초 무상(誣上)의 율(律)로 다스린 것이 그 흉역의 죄를 바로잡는데 부족하였으니, 청컨대 대역(大逆)으로 감단(勘斷)하여 집을 허물고 못을 파는 등의 일을 법에 의해 거행케 하소서. 죄인 박필몽(朴弼夢)의 아들이 적의 초사 가운데 긴하게 나왔는데, 그 흉악하고 음려(陰戾)한 박필몽이 반드시 아들과 함께 악한 일을 같이 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 청컨대 국청(鞫廳)에서 잡아다가 엄하게 문초하게 하소서. 청주의 역변이 있으면서부터 인근의 수령이 혹 머리을 훔츠리고 쥐처럼 숨거나 혹은 적을 맞아들여 정성을 바치고, 한 사람의 의(義)를 따라 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종중 논죄(從重論罪)하여 풍화(風化)를 격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해서 등급을 나누어 엄히 밝히어 죄를 바로잡게 하소서. 경외(京外)의 이졸(吏卒)이 혹은 적의 정세를 탐지해 알리고 혹은 명령을 전통(傳通)하여 나라를 위해 바친 노고가 거의 평일 책을 읽은 선비들보다 나았으니, 포숭(褒崇)하고 격려해 권면함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경외의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기록해 두고 중하게 논상(論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태인 현감(泰仁縣監) 박필현(朴弼顯)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했는데, 전주(全州) 삼천(三川)에 이르렀다가 군사가 궤멸해 도주하였다. 박필현은 음특하고 흉패하여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더불어 사생(死生)을 같이하기로 교결(交結)하였다. 그러다 김일경이 복법(伏法)되자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깊이 품고 영남(嶺南)의 뜻을 잃은 무리들과 사귀어 결탁하고는 임금을 욕하고 꾸짖으며 몰래 모반을 도모하였다. 이때 그의 종형(從兄) 박필몽(朴弼夢)이 무장(茂長)으로 귀양가니, 함께 의논하고 군사를 일으키고자 태인 현감에 차임되기를 도모했으며, 부임한 후에는 몰래 담양 부사(潭陽府使) 심유현(沈維賢)과 함께 모의하였다. 청주의 변이 일어난 후 19일에 근왕(勤王)한다는 핑계로 경내의 병마를 징발하고 관속(官屬)을 단속하여 3일 동안 조련(操鍊)하면서 관문(官門)에다 진을 쳤다. 박필현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들어가 그의 어머니를 보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 아들의 모습이 병조 판서(兵曹判書)는 될 만하니, 새 임금을 잘 섬기거라."
하였다. 군사를 동원한 후 박필몽이 오기를 기다려 대장으로 추대해 서울로 향하고자 하였는데, 박필몽은 오지 않았다. 마침 금오랑(金吾郞)이 지나가다 관문(官門) 밖 주막을 거쳐가자 군중(軍中)에서 말을 잘못 전하기를,
"붙잡으러 온 도사(都事)가 이르렀다."
하니, 서로 전해가며 선동하여 군정(軍情)이 크게 소란스러웠다. 박필현은 군사가 궤멸할 것을 염려하여 그날로 떠나 금산사(金山寺) 고개를 넘어 밤에 전주의 삼천(三川)에 이르렀다. 감사 정사효(鄭思孝) 역시 박필현과 함께 모의하고 기일을 약속해 군사가 일으키기로 했었는데, 성품이 본래 교활하고 조정에서 예비함이 있는 것을 알고는 관망(觀望)하기로 계책을 삼고는 문을 닫고 맞아들이지 않았다. 천총(千摠)이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징을 쳐서 군사를 후퇴시키니, 군병이 일시에 놀라 흩어졌다. 박필현은 단지 가속(家屬)·동복(童僕)만을 데리고 말을 몰아 도망해 새벽녘에 건지산(乾止山) 아래에 도착하여 밥을 지어 먹었다. 감영(監營)의 영리(營吏) 김성건(金聲健)이란 자가 박필현이 쉬고 있는 곳을 알고는 감사에게 고하니, 정사효는 좋아하지 않았다. 김성건이 죄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세 번씩이나 들어와 고하자, 정사효가 비로소 영장(營將) 이경지(李慶祉)를 불러 상황을 이야기하니, 이경지는 병을 핑계대어 가서 박필현을 붙잡지 않고 그가 도망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를 잡아들이고 이광덕(李匡德)으로 대신했다. 정사효가 장계(狀啓)하기를,
"21일 밤에 백마(白馬)를 탄 사람이 군정(軍丁) 7, 8인을 데리고 봉서(封書)를 지니고 성문(城門) 밖에 이르러 자칭 태인(泰仁)의 천총(千摠)이라고 하면서 문을 열라고 불러댔습니다. 문을 지키는 자가 굳게 고집하고 열지 않으니, 백마를 탄 자가 말하기를, ‘우리 대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너는 마땅히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하며 공갈을 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영장(營將)과 판관(判官)으로 하여금 성문을 나누어 지키며 계엄하게 하였는데, 날이 밝자 적의 소식이 다시 없어 장교(將校)로 하여금 정탐(偵探)하게 했습니다."
하였다. 정사효가 다시 치계하기를,
"즉시 의심되는 자 2인을 붙잡았더니, 손에 나팔과 장창(長鎗)을 들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태인의 사령(使令)인데 본현의 현감 박필현이 신관(新官)이 갑자기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본현의 군병(軍兵)을 발동해 지난밤 8초(哨)를 거느리고 전주 삼천에 이르렀으나, 전주에서 계엄한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물려 돌아갔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김상옥(金相玉)이 말하기를,
"전라 감사 정사효가 박필현이 군사를 동원했다고 보고하였는데, 말의 사연이 전혀 경통(驚痛)해 하는 뜻이 없고, 태인은 영문에서 60리이니 역적 박필현이 3일 동안 습조(習操)하는 것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범연하게 정탐했다고 말했으니, 그 일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마땅히 처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송인명(宋寅明) 역시 말하기를,
"장계 가운데 ‘적장(賊將)이 봉서(封書) 한 통을 가지고 성문을 지키는 장수를 불렀다.’는 설은 중간에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지 않으니, 마땅히 정사효를 나문(拿問)하고, 이광덕(李匡德)을 재촉해서 부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이 말하기를,
"박필현이 모역한 형상이 이미 발각되었으니, 그의 형 박현기(朴顯夔)를 마땅히 국청(鞫廳)에서 캐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아울러 박필기의 여러 형제를 잡아다 국문하라."
하였다.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죽산(竹山) 첩서(捷書)가 이르렀는데, 단지 말하기를,
"신이 군사를 이끌고 죽산의 적이 있는 곳으로 진군하니 적이 기고(旗鼓)를 바라다보고 흩어졌는데, 도주한 군병 등을 달려 좇아가서 붙잡았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고,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 장계를 보건대, 오명항이 공을 자랑하지 않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하였다.
역적 이사성(李思晟)이 붙잡혀 서울에 왔다. 이사성은 평소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져 금오랑(金吾郞)을 발송한 후 조정에서 깊이 염려했었다. 평산 부사(平山富使) 심준(沈埈)이 이사성의 사람을 붙잡아 이사성의 집에 올리는 편지를 얻었는데, 모두 잗단 부녀자들의 말이었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염려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과연 붙잡힌 것이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관직이 곤수(閫帥)에 이르렀으니, 나라에서 너를 박하게 대접하지 않았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이러한 흉역을 저질렀느냐?"
하니, 이사성이 공술하기를,
"호남(湖南)·영남(嶺南)에 적도(賊徒)가 번성한데, 심유현(沈維賢)과 박필현(朴弼顯)이 모주(謀主)가 되어 용감한 사람을 모집하여 삼남 지방과 교통(交通)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많이 전파하고 있었으나, 신의 생각에는 끝내 실정을 정탐해 얻지 못할 것 같아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두었다가, 과연 혹 난을 일으킨다면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지고 종사(宗社)가 위망(危亡)하게 될 것이므로, 신이 그 실정을 탐지하여 고변(告變)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적당(賊黨)에 들어가 박필현·한세홍(韓世弘)과 더불어 깊이 사귀면서 마음을 같이하는 자를 물었더니, 단지 심유현·이유익(李有翼)·이하(李河) 등만 말하고, 그 나머지 10여인은 단지 그 성(姓)만 말하고 그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장수 재목이 없어 필경에는 군사를 모은 후에 신을 대장으로 삼았습니다. 신이 평안 병영으로 부임한 후 12월의 10일에서 보름 사이에 용인(龍仁)에 사는 안엽(安熀)과 용인의 적 정세윤(鄭世胤)이 박필현의 편지를 받아가지고 종을 찾으러 왔다고 핑계하고 왔습니다. 하루 저녁에는 안엽이 말하기를, ‘정세윤은 녹림(綠林)의 도둑 1백여 명과 인연이 있는데, 만약 수백 냥의 은자(銀子)만 있으면 3, 4백 명은 모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 그들 무리에 들어간 것은 그 적의 숫자를 탐지하고자 해서였고 원래 많이 얻으려는 뜻이 없었기 때문에 답하기를, ‘창고의 저축이 영세하여 함부로 쓸 수가 없다. 2, 3월 사이에 마땅히 빚준 은을 받아들일 터이니, 적도를 많이 모집한 후에 지명(地名) 및 사람 수를 써서 보고하면 마땅히 넉넉하게 보내겠다.’ 하고는 끝내 1전(錢)의 은도 주지 않고 단지 전냥(錢兩)과 무명베만 주었습니다. 3월 초 6일에 한세홍이 와서 전하기를, ‘호남의 도적이 1천 명 가까이 되고 영남의 도적이 거의 수천에 이르니, 만약 더 보충하는 일만 있으면 거사하기에 족하다. 원컨대, 백은(白銀) 5, 6백 냥만 얻었으면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창고의 저축이 이미 고갈되었고 준 빛 역시 받아들이지 못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모집한 지 이미 오래되어 사람들의 말이 두려우니, 속히 돌아가라. 어느 고을의 어느 사람이 어느 곳을 공격할 것만 지휘하고 이내 은냥을 보내 주겠다. 그러나 군도(群盜)가 혹 한 곳에 모이면 누설되기가 쉬우니, 각각 부(部)를 나누어 밤을 타고 아무 고을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고을 사람들이 나와 막지 못할 것이며, 고을에 들어간 후에는 단지 환곡(還穀)만 취하여 군사를 호궤(犒饋)하고, 읍수(邑倅)는 죽이지 말라. 그리고 백성은 한 사람도 죽이지 말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지 말며, 부인들을 겁탈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감사(監司)·병사(兵使)·영장(營將)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문죄(問罪)하게 되면 오합지졸(烏合之卒)이 대항하지 못할 것이니, 여러 영(營)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밤을 타서 먼저 가되, 전일의 도적들이 역적질을 하듯이 한다면 추격해 와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산군(山郡)이면 산골짜기에 숨고, 강변(江邊) 고을이면 바닷섬에 모이면 거사하는 날 군사를 합치는 데 편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가르쳐 준 자는 비록 신(臣)이었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군도(郡盜) 1만여 명을 비록 모조리 붙잡는다 하더라도 하나 하나 다 죽일 수가 없고, 더군다나 한곳에 모여 있으면 민병(民兵)을 쓰기 전에는 붙잡기가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먼저 부를 나누어 정해 두고 그 모집한 영장(領將)을 알아둔 후에 별도로 경아문(京衙門)의 포도 군관(捕盜軍官)으로서 영리한 자를 정해 영장(領將)의 군사를 조발(調發)해 다른 곳에 있는 도적을 잡게 하여 영장(領將)의 무리들을 제거하고 군졸들은 그 군적(軍籍)을 조사해 그들이 거주하는 고을로 하여금 별도로 사찰(伺察)하게 하면, 군도를 비록 다 죽이지 않더라도 스스로 환난을 늦출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관직이 재열(宰列)에 이르러 있는데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계책을 세워 외곤(外閫)으로 출재(出宰)하였으나, 이미 함께 일을 할 사람이 없어서 즉시 탐지하여 장문(狀聞)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고발을 당해 끝내 악역(惡逆)의 죄과에 돌아갔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정세윤에게 처음 은을 주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영남의 일이 만약 전일 정세윤의 일과 같았다면 일이 공허한 데로 돌아가 반드시 장차 화를 부를 것이기 때문에 우선 인정(人情)에 따라 임서호(任瑞虎)에게 군복(軍服)을 주었고, 이유익(李有翼)에게 혼수(婚需)를 주었습니다. 안추(安樞)는 계청(啓請)으로 몇 달 동안 수행(隨行)시키다가 돌아갈 때에 예에 의해 첩(帖)을 주었으나, 적들과 교통했는지 여부는 알지 못합니다. 신의 몸이 평안 병사가 되었는데 어찌 은화(銀貨)가 없었겠습니까? 정세윤이 요구한 은이 불과 수십 냥이었고, 한세홍이 요구한 바는 5, 6백 냥에 불과했는데도 1전의 은도 끝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 뜻은 군도를 많이 얻으려고 재물을 허비하는 데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1차 형신하니, 이사성이 또 공술하기를,
"괘서(掛書)와 흉격(凶檄)에 대해서는 신은 실로 모르며, 이사백(李思百)은 원래 신의 영(營)에 내려온 일이 없습니다. 양명하(粱命夏)가 이 일을 위해 신의 영에 왔고, 한세홍은 이유익과 박필현의 무리에 의해 보내진 자인데, 한세홍 지금 문경(聞慶)에 있으며, 양명하는 청파(靑坡)에 있고, 이사백은 이천(利川)에 있으며, 이사필(李思弼)은 도주하던 날에 통지한 일이 없고, 전에도 역시 함께 모의한 일이 없습니다. 호남의 적은 정세윤이 주관했고, 영남의 적은 한세홍이 주관했으며, 양명하는 광주(廣州)·포천(抱川) 등지의 가동(家僮) 무리를 모으는 데 불과했는데, 각기 주관하는 자가 있었으나 장령(將領)은 없었습니다. 남인(南人)과 소북(小北)이 모두 그 가운데 들었으니, 한세홍은 남인이고 양명하는 소북인데, 그들 말로는 친구간으로 왕래한다고 했습니다. 정세윤은 군사를 일으킬 때 영남에 통지하기를, ‘일이 급하니, 청컨대 서로 구해 달라.’고 하였는데, 자기들 가운데서 고변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세홍은 말하기를, ‘정세윤이 오활하여 가는 곳마다 말을 했기 때문에 일이 장차 누설되게 되었다.’ 하면서 신으로 하여금 급히 기병(起兵)하게 하였으나, 신은 ‘나는 장차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다.’고 답하였습니다. 한세홍이 말하기를, ‘영남에 구원을 청하고자 하나 날짜가 미치지 못하고, 또 비록 반드시 이르지는 않을 것이고, 또 반드시 수하(手下) 사람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사성에서 낙형(烙刑)으로 위세를 보이니, 이사성이 공초하기를,
"전년 6월 사이에 신이 박필현 및 한세홍과 함께 묵동(墨洞) 박필현의 서제(庶弟) 박 만호(朴萬戶)의 집에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한세홍이 말하기를, ‘여주(驪州)·이천(利川)·광주(廣州)의 친구로 함께 모의하는 자가 10여 인이다.’ 하였는데, 그때 혹 그 성만 말하고 그 이름은 말하지 않았으니, 대개 상의할 때에는 각기 친한 자가 있으나 그 사람과 친하다고 남에게 언급하지 않는 것은 후일 일이 혹 누설되어도 대질(對質)할 증빙이나 증거를 없애려는 계책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10여 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유익(李有翼)을 문초하니, 불복(不服)하였다. 1차 형신하고 이어 낙형을 시행하여 3차에 이르니, 이유익이 공술하기를,
"신이 이사성과 함께 모의(謀議)한 사실은 참으로 이사성의 말과 같습니다. 서울 안에 괘서(掛書)한 사람은 바로 이서우(李瑞雨)의 첩자(妾子)이며, 건 곳은 바로 서소문(西小門)입니다. 이하(李河)·이사성·박필현은 과연 모역에 동참한 사람이며, 전라도에 괘서한 사람은 바로 산음(山陰) 사는 정가(鄭哥)입니다. 이서우의 첩자가 괘서했다는 설은 민관효(閔觀孝)에게 들었는데, 그는 바로 민관효의 첩남(妾娚)입니다. 인엽(人燁)에 대한 말 역시 민관효에게 들었습니다. 이인좌 및 그의 아우가 경상도의 친구를 많이 모아 역모를 하고자 하였는데, 서울에서 이사성과 박필현이 외임(外任)으로 나갔기 때문에 내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경상도에서 기병(起兵)할 날짜를 택한 것은 3월 27일이라고 이인좌가 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는데, 호남에서의 기병도 대저 이 무렵이어서 4월 사이에 내응하고자 하였으나, 경상도 사람들이 지레 먼저 기병했기 때문에 미처 내응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4월에 내응할 때 각각 인정(人丁) 1백여 명을 내어 야간을 틈타 변을 일으키고 이사성은 근왕병(勤王兵)으로 올라올 계획이었습니다. 한세홍과 이인좌는 영남의 일을 주관하고, 정세윤은 호남의 일을 주관한다고 하였는데, 신은 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이하(李河)에게서 들었습니다. 호남의 일은 정세윤과 나만치(羅晩致)가 함께 했고 따로 모주(謀主)는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사성이 조금 나았기 때문에 모주를 삼고자 하였고, 1천여 명의 군사는 다섯 사람이 각기 1백여 명씩 모으면 마땅히 5, 6백 명은 되고, 영남의 군사가 오면 합해 1천여 명이 되며, 종실(宗室) 가운데서 장파(長派)198) 중의 장파로 추대하기로 하였는데, 이 말은 그 집에 관문(關文)을 통하지는 않고 일이 성취한 후를 기다려서 청하고자 한 것이니, 역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송인명이 말하기를,
"고자(告者) 김중만(金重萬)은 공이 있으니, 마땅히 차꼬를 풀어 내보내어 적의 정세를 자세히 묻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청하기를,
"천금(千金)을 상으로 내걸어 망명한 적의 괴수 박필현 등을 잡아야 합니다."
하니, 명하기를,
"8도에 행회(行會)199)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아! 내가 덕이 박한 탓으로 국가가 판탕(板蕩)한 때를 당해 안으로는 우리 조상(朝象)을 평화롭게 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해 얼신(孼臣)·흉예(凶裔)들이 흉억(胷臆)을 함부로 행해 호남과 기전(畿甸)에서 창궐하게 만들었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없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랴마는, 그 흉한 계책을 배포(排布)해 세우고 연구하여 경영함이 이와 같은 적은 아직까지 있지 않았다. 그들이 몸을 세상에 보존한 것만도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감히 불궤(不軌)한 마음을 내어 주곤(主閫)의 신하를 함부로 죽여 그 죄악이 온 천지에 가득 찼으니, 어찌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비단 지사(志士)·열부(烈夫)만이 현륙(顯戮)을 생각하겠는가? 충의에 죽은 혼백(魂魄)까지 어두운 가운데 제거해 죽일 것을 함께 의논했을 것이다. 또 명신(名臣)의 후예와 세가(世家)의 족속으로 들어간 자가 많았으니, 아! 통탄스럽다. 국가가 저들에게 무엇을 등졌기에 저희 할아비와 아비를 생각하지 않고 차마 적도를 따랐단 말인가? 이 적도들이 비록 왕장(王章)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어찌 신명(神明)의 주륙을 면할 수 있겠는가? 아! 우리 나라는 예의지방(禮義之邦)으로서 문치(文治)를 숭상하여 동경(東京)200) 의 절의(節義)를 기약할 수 있었다. 독서(讀書)한 선비,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풍문만 듣고도 도망해 숨고 머뭇거리며 관망(觀望)하면서 흉격(凶檄)을 봉전(封傳)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이것이 무슨 마음이란 말이냐? 비록 조정은 꺼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일에 부조(父祖)를 볼 면목이 있겠는가? 기타 잔약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부득이해서 적을 따른 경우는 그 정상이 애처로우니, 죄를 용서할 만하다.
그 연유한 바를 추구하건대, 바로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조정에서 오직 붕비(朋比)만을 일삼아 오직 재능 있는 자의 등용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색목(色目)만을 추중(推重) 권장하는 데 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재능이 없어도 소매를 떨치고 앞장서서 당설(黨說)을 장황하게 말하는 자는 급급히 권장해 등용하기를 오직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니, 비루하고 하찮은 무리와 불령한 무리가 분분하게 섞여 나와 중요하고 현달한 관직을 거치지 않음이 없으나, 만약 직책을 지키는 데 조심하고 색목에 들지 않으면 무능하다고 지목하여 천거해 쓰지 않았다. 심한 경우 그 사람은 비록 쓸 만하더라도 단지 색목만을 논하고 그 재능을 취하지 않아 당로(當路)한 자는 현사(賢邪)의 구별에 어둡고 물러가 숨은 사람은 스스로 반성할 줄을 모른 채 도리어 무료(無聊)함이 생겨 위로는 천화(天和)를 해치고 아래로는 인심을 상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공격할 즈음에 그 말이 위에 저촉되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음흉하고 불궤(不軌)한 계책으로 그 말을 부연(敷演)하고 흉언을 첨가해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속임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더욱 절통한 것은 적도 가운데 들어가 국옥(鞫獄)에 갇힌 자들이 모두 유명한 사대부(士大夫)요 세가(世家)의 대족(大族)인 것이다. 이 어찌 기한(飢寒)에 몰려서이겠는가? 바로 당화(黨禍)가 빚어낸 것이니, 이는 당의(黨議)의 소치(所致)인 것이다.
또 하나는 해마다 연달아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구제해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당벌(黨伐)만을 일삼는 것으로,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조정이 있음을 모른 지 오래 되었다. 그들이 와해(瓦解)되어 적도에게 투입한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요 실로 조정의 허물이니, 이 역시 당의의 소치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하나도 붕당이요, 둘도 붕당이라는 것이다. 아! 병이(秉彛)의 마음은 사람마다 같은 것이거늘, 우리 동국(東國)의 신하들은 무슨 심장(心腸)을 가졌길래 이와 같이 지극히 흉악한 일을 한단 말인가? 비록 적당(賊黨)에 든 자라 하더라도 혹 포박해 고하거나 혹은 머리를 베어 바치는 자는 그 죄를 용서하고 중한 상을 줄 것인데, 하물며 그밖의 사람이겠는가? 의심스러운 사람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오직 가벼운 율(律)을 따라 중전(重典)에 처하지 않을 것이며, 혹 형제·친속(親屬)이라도 그 자신이 악역을 하지 않았고 또 마땅히 연좌(連坐)시킬 자가 아니면 형제·친속이라 하여 그 사람을 의심하거나 그 사람을 죄주지 않을 것이다. 또 더군다나 양민으로서 흉악한 협박에 겁을 먹고 역순(逆順)을 구별하지 못해 억지로 적을 따라 모르는 사이에 적에게 빠진 자는 마땅히 그 정상을 슬피 여기고 그 죄를 용서할 것이다. 어찌 다만 붙잡은 후에도 죽이지 않을 뿐이겠는가? 관군이 이르는 곳에는 깃발을 내리고 적을 붙잡아 왕사(王師)에게 항복하면 조정에서는 마땅히 상을 줄 것이고, 너희들은 다시 양민(良民)이 될 것이다. 남쪽을 정벌하여 승첩을 알려 오고 흉적(凶賊)·반신(叛臣)의 머리가 먼저 베어졌으니, 순역(順逆)의 이치는 이에서 구별할 수 있다. 아! 난적의 무리는 반드시 그 종말이 좋지 못할 것이고, 남은 흉얼(凶孽)들도 마땅히 빠른 시일 안에 모두 거두어질 것이다. 다만 내가 통분해 하는 것이 있으니, 국가가 그들에게 무엇을 등졌기에 이와 같이 고금(古今)에 없는 흉역을 한단 말인가? 아! 내가 재능이 없고 덕이 박한 탓으로 은혜가 우리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덕이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조종(祖宗)과 우리 선왕(先王)의 심후한 인택(仁澤)이 사람들의 피부와 골수에 스몄을 것인데, 너희들은 무슨 마음으로 차마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옛날 동·서한(東西漢) 때에도 백성들이 오히려 한(漢)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노래한 바 있는데, 아! 우리 나라 백성들이 어찌 한나라 백성에게 미치지 못해 위로는 진신(縉紳)·사류(士類)로부터 아래로는 우민(愚民)·필부(匹夫)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적에게 붙어 편안히 여기고 부끄러워할 줄 몰랐으니, 3백 년 동안 예의(禮義)를 배양(培養)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오늘날 백성들의 뜻과 군사들의 마음을 보건대, 분격(奮激)하여 적과 맞닥뜨리고자 함이 있고 안집(安集)하면 감격함이 있어 매양 노군(勞軍)하고 돌아오거나 선유(宣諭)하고 돌아오면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옷깃을 적시곤 했다. 이로써 보건대, 적에게 붙은 백성들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굶주림에 지쳐서 순역(順逆)의 이치를 구분하지 못한 소치이니, 이는 너희들이 나라를 등진 것이 아니라 실로 내가 너희들을 등진 것이다. 아! 꿈틀대는 어리석은 백성들도 오히려 이러한데, 더군다나 세가(世家)·대족(大族)들로 녹(祿)을 받으며 조정에선 사람들이 도리어 아래 백성들만도 못하단 말인가? 아! 매양 탕평(蕩平)을 말하였으나 너희들은 겉치레로 보아서 지금은 한갓 기미뿐만이 아니라 그 해가 이와 같게 되었으니, 지금 이후로도 당(黨)을 심고 사(私)를 옹호하는 마음을 가지겠는가? 지금부터 앞으로는 그런 옛마음을 끊기를 마치 한 칼로 양단(兩斷)하듯 하여 일심으로 봉공(奉公)하고 동인협공(同寅協恭)하여 화를 돌리어 편안함이 되게 하면, 이 역시 중흥(中興)하는 데 일조(一助)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한 후에도 감히 당을 옹호하는 마음으로 임금 앞에 나아오고 남을 해칠 뜻으로 조정에 선다면, 비단 왕장(王章)이 현륙(顯戮)할 뿐만 아니라 신명(神明) 역시 함께 죽일 것이다. 이번에 궐문에 임어하여 포로를 받은 것은 사치스럽게 과장하고자 함이 아니라 바로 통한(痛恨)해 하는 뜻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먼저 부로(父老)에게 유시하고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라. 아! 지금 나의 이 말은 오로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모두 유지(諭旨)에 따라 옛 습성을 고쳐 새로이 힘쓰라."
하였다.
이사필(李思弼)을 도감진(都監陣) 앞에서 참(斬)하였다.
3월 26일 병자
백관을 군기시(軍器寺) 앞길에 차례로 서도록 명하고, 이사성(李思晟)·이유익(李有翼)을 죽이고 아울러 그들의 처자(妻子)도 함께 죽였으니, 이사성과 이유익의 역절(逆節)이 다른 적에 비해 더욱 흉악했기 때문이다.
박세재(朴世梓)·한세준(韓世俊) 등을 보내어 도순무(都巡撫) 대군(大軍)의 후원(後援)이 되게 하였다. 박세재 등이 죽산(竹山) 좌잔령(左棧嶺)에 이르러 죽산에서 패한 적을 만나 많이 잡아 죽여 수급(首級)을 바쳤는데, 후에 대신(臺臣)이 양민을 혼동해 죽였다고 논계하여 죄를 주었다.
총융사(摠戎使) 장붕익(張鵬翼)이 도망한 적의 괴수 이배(李培)를 포박해 보냈다. 이배는 진위(振威)의 진에서 망명한 후로 변복(變服)하고 섬으로 들어가고자 수원(水原) 해촌(海村)에 들어갔다. 총융 천총(摠戎千摠) 오성재(吳盛載) 등이 기찰(譏察)하여 군사를 이끌고 해변으로 향하다가 길에서 이배를 만났는데, 평소 얼굴을 알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묶인 것이다.
임금이 손수 ‘지확공고(志確功高)’란 네 자를 써서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에게 하사하고, 인하여 유시하기를,
"이번 남쪽 적은 바로 하나의 추류(醜類)이니 어찌 왕장(王章)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만 이 적은 온양(醞讓)해 온 지 이미 여러 해 되었고, 또 승평(昇平)한 지 오래여서 군사들의 싸움이 어떨지 몰랐으니, 내가 염려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경은 본래 문재(文宰)로서 무사(武事)를 익히지 않았는데도 밤중 장전(帳殿)에서 강개하게 가기를 청하였으니, 그 마음에 탄복하였고, 그 뜻이 가상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청한 바를 윤허하고 인해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여 편의대로 일을 행하게 했지만 어찌 수일 사이에 연달아 첩보(捷報)가 올라올 줄 뜻했으랴? 지금은 역괴(逆魁)와 여러 적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했으니, 그 공이 일세에 빛나고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고 하겠다. 응당 행하여야 할 모든 전례(典禮)는 개선(凱旋)한 후에 마땅히 거행하겠으나 먼저 몇 줄의 수서(手書)로써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고, 이어서 또 네 자를 특별히 종이 끝에 써서 경의 언행(言行)이 서로 부합됨을 표한다. 인하여 생각건대, 해마다 기근이 든 나머지 이와 같은 병란(兵亂)을 만났으니, 우리 생령(生靈)들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경이 이미 순무사의 명호를 띠었으니 유민(流民)을 안집(安集)시켜 농사를 권하고 진휼(賑恤)하는 등의 일에 뜻을 두어 거행하되, 농량(農糧)과 종자(種子)가 어려운 자에게 면세(免稅)하는 일같은 것은 내사(內司)에서 관리하는 것을 막론하고 편의대로 나누어 주라. 백성들 가운데 적을 붙잡아 바친 자가 있으면 등급을 나누어 즉시 계문(啓聞)하여 먼저 상을 줄 터전을 마련하라. 여러 날 노숙(露宿)하여 군병들이 반드시 많이 상했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옥식(玉食)이 어찌 편하겠는가? 이런 뜻으로 장교(將校)와 군졸(軍卒)들을 위로하라."
하고, 또 유시하기를,
"남쪽의 적보(賊報)가 또 이르렀으나, 경은 우선 호서(湖西)에 머물러 본도를 지휘하여 완전히 평정되기를 기약하라. 안성과 죽산의 싸움에서 한 병졸도 상하지 않았음을 내가 또 기뻐한다."
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조현명(趙顯命)이 도순무사(都巡撫使)의 군진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하여 위유하고, 곧 적을 격파한 상황을 자세히 진달하라 명하니, 조현명이 매우 자세하게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이인좌가 매우 허망하였으나, 조금은 계려(計慮)가 있었습니다. 압송해 올 때 군졸이 무슨 까닭에 패했느냐고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높은 봉우리에서 연달아 기를 흔들어 독전(督戰)하였으나 군사들이 끝내 나아가 싸우지 않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정세윤(鄭世允)은 언어가 패만(悖慢)하고 또 날쌔고 건장했기 때문에 이미 참했습니다. 이봉상(李鳳祥)을 손으로 쳐 죽인 자는 바로 장전(張錪)과 이배(李培)였으며, 아군은 한 사람의 사상자(死傷者)도 없었습니다. 들으니, 청주의 적은 겨우 1초(哨)이고 군량도 근근이 20여 석뿐이어서 반드시 이미 해산했을 것입니다. 도순무는 장차 청주로 진군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정제(李廷濟)가 장계하기를,
"송파(松坡)에서부터 공암(孔巖)에 이르기까지는 배열해 세울 군사가 없어서 방수(防守)가 많이 빠져 있습니다. 청컨대 연강(沿江)의 민호(民戶)를 좌경(坐更)201) 의 예에 의해 징발하고자 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형좌(李衡佐)가 장계하여 말하기를,
"가흥(可興)·흥원(興原) 두 창고의 미곡(米穀)을 잃게 될까 염려스러우니, 청컨대 수참선(水站船)202) 을 내려 보내 서울로 운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시형(金始炯)을 호남 안무 겸순안 어사(湖南安撫兼巡按御使)로 삼아 양호 지방의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고, 역적 박필현(朴弼顯)을 기포(譏捕)하게 하였다. 김시형이 들어와 하직하니, 임금이 위로하고 권면하여 보냈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임어하여 친국(親鞫)하였다. 이인좌(李麟佐)를 형신(刑訊)하니, 이인좌가 공초하기를,
"한세홍(韓世弘)·이유익(李有翼)·이하(李河)·남태적(南泰績)·남태징(南泰徵)·김중기(金重器)가 이 일을 하였고, 임서호(任瑞虎)·조관규(趙觀奎)·임서봉(任瑞鳳)·임서린(任緖麟)·조덕징(趙德徵)·이배(李培)·이만(李晩)·이의형(李義衡)은 이번에 양성(陽城)에 모여 곧바로 청주(淸州)로 달려갔는데, 그때 모인 자 정행민(鄭行旻)·원만주(元萬周)는 양성에 살고, 권서봉(權瑞鳳)은 수원에 살며, 조동규(趙東奎)는 서울 향교동(鄕校洞)에 살았습니다. 권서린(權瑞麟)·권서룡(權瑞龍)·목함경(睦涵敬)은 양성에 살고, 이지경(李之景)은 청주에 살며, 위종사관(僞從事官) 유급(柳伋)은 양성에 사는데 도목(都目)203) 을 가지고 도망하였습니다.
청주에서 변란을 일으킬 때 부원수(副元帥)는 정행민·정계윤(鄭季胤)이 함께 하였는데, 병사(兵使)는 이배가 죽였으며, 영장(營將)은 목함경이 죽였습니다. 권서봉을 청주 원으로 삼고 안성(安城)에 왔고, 가병사(假兵使)는 신경제(申慶濟)의 손자 ·신천영(申天永)으로 정했습니다. 군사는 양성에 있을 때 2초(哨)였는데, 관문(關文)을 내어 징병했더니, 청안(淸安)의 원과 진천(鎭川)의 원은 도주하고, 장교(將校)가 군사를 이끌고 왔으며, 회인(懷仁)의 원 역시 도주했는데, 장교가 군사 15명을 이끌고 오니 박종원(朴宗元)이 투항하였습니다. 종사관(從事官) 유급이 흉관(凶關)과 흉격(凶檄)을 썼고, 외원(外援)에 대해서는 한세홍이, ‘호남 변산(邊山) 도적이 2초가 있고, 또 심유현(沈維賢)·박필현(朴弼顯)의 군사가 있으며, 나주(羅州)에서 나숭대(羅崇大)가 가정(家丁)과 족속(族屬)을 이끌고 오고, 평안 병사로 이사성(李思晟)이 들어올 것이다.’하였는데, 한세홍은 평안 병영(兵營)으로 내려갔습니다. 이호(李昈)는 양성에 사는데 모은 군사가 2초이고, 영남은 정희량(鄭希亮)이 안음(安陰)에 사는데 이번에는 오지 않았으나 이제 영남에 있으면서 군사를 동원하였으며 정희량의 족속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김홍수(金弘壽)는 상주(尙州)에 사는데 군사의 숫자는 군사를 동원하기 전에는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무려 1천여 명은 됩니다. 당초에 기일을 3월 초 10일로 기약했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습니다. 신은 응병(應兵)이 당도하였기 때문에 15일에 과연 군사를 일으키면서 임서린으로 하여금 탐지하도록 했는데 아직껏 서울에 오지 않았습니다.
내응(內應)은 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만약 영남·호남에서 군사를 동원하면 연곡(輦轂)의 친병(親兵)이 마땅히 모두 출정(出征)하게 될 것이니, 남태징·남태적이 서울의 일을 하되, 서울은 이유익이 주장하고 영남은 정희량이 하며, 그 나머지 김홍수등 6, 7인이 돕기로 했습니다. 정희량은 동계(桐溪)204) 의 후손인데, 1백 20명을 모아 이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의 선봉(先鋒) 정중복(鄭重復)은 양성에 살며, 중군(中軍) 이배(李培), 부장(副將) 정행민(鄭行旻), 진용 도위(進勇都尉) 목함경(睦涵敬)·이의형(李義衡)이 하였습니다. 이유익·한세홍이 항상 밀풍군(密豐君)이 인망(人望)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유익이 가서 보고 말하였더니, 밀풍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금년 정월에 신이 상경하여 이하(李河)의 집을 방문했더니, 이하가 말하기를, ‘일은 애안(涯岸)205) 이 없고, 동당(同黨)이 매우 적다.’고 하기에,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그렇다면, 왜 시골에 있는 자를 일으켜 일을 하려 했느냐?’ 하였더니, 이하가 말하기를, ‘이는 마치 언덕에 올라 걷는 것과 같은데 어찌 중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권서린(權瑞麟) 역시 와서 이유익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장차 다 죽고 말 것이다.’ 하니, 이유익이 말하기를, ‘권서린으로 하여금 군인을 거두어 입성시켜 반역하게 하자.’ 하기에, 신은 불가하다고 하였더니, 이하와 이유익은 말하기를, ‘우리들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너를 죽이겠다.’ 하였고, 권서린은 말하기를, ‘영남을 탐지하는 일은 밖으로부터 기병(起兵)을 해야 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정월에 영남으로 내려가 김홍수와 정희량의 집에서 탐지했더니, 1백20명의 군사로 하고 날짜는 초 10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이런 일을 알고 돌아와 장차 응병하고자 하여 15일에 과연 거사하였습니다.
호남의 허실(虛實)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신의 동생이 5형제인데, 이웅좌(李熊佐)가 울면서 말렸고 기타 형제는 이준좌(李駿佐)·이기좌(李騏佐)이며, 끝의 동생은 아명(兒名)이 기아(夔兒)입니다. 신의 이름은 본래 현좌(玄佐)였는데 인좌로 고쳤습니다. 신이 봄에 동성(同姓) 5촌(寸)인 이홍부(李弘溥)의 집에 올라왔는데, 이홍부가 풍설에 대해 묻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왜 박필현과 사귀어 남의 말을 듣게 하느냐? 근신하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박필현은 재작년 상주(尙州)로 이사할 때 보아 잘 압니다. 모의(謀議)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자객(刺客)은 반드시 정행민이 보냈을 것이고, 자객이 될 만한 자는 목함경(睦涵敬)과 정중복(鄭重復)·정중익(鄭重益) 등 형제이며, 직산(稷山)에 사는 권서린 역시 용력이 있고, 박준(朴晙)은 죽산에 살며 역시 용력이 있는데 군중에 와 있었고, 정중려(鄭重勵)는 직산에 삽니다. 이 밖에는 용력이 있는 자는 없습니다. 정행민과는 영(營)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들으니 정행민이 효용(驍勇)한 무사를 뽑아 자객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권서룡은 15일에 서울로 보냈더니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경상도에서 초닷새에 기병한다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신들 역시 지레 먼저 기병한 것입니다. 청주 병사를 반드시 먼저 제거해야 일이 완비되고, 고단(孤單)한 군졸로는 서울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청주를 함락시킨 것입니다. 경중(京中)을 정탐하기 위해 박준(朴晙)을 올려 보냈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지금은 이유익의 집에 보냈는데 모양은 늑염(勒髥)206) 이고 복색(服色)은 도포(道袍)를 입었으며 18일에 올라왔습니다. 김중만(金重萬) 역시 알았는데 중간에서 약속을 어기고 속였습니다. 권서린은 중간 키에 수염이 조금 나고 얼굴이 얽었으며 백포(白布) 도포를 입었는데 역시 이유익의 집으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징관(李徵觀) 역시 동당(同黨)인 듯한데, 동당과 약속하기를, ‘비록 패하더라도 다시 청주에서 만나 성을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재를 넘어 함께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자.’고 하였습니다. 정행민이 변산(邊山)의 적과 통하며 금방 올라온다고 하였으나 소식이 없고, 청주에 남아 있는 병사는 모두 관군입니다. 신이 대원수(大元帥)가 된 것은 바로 적도 가운데 권서린 무리가 모두 추존(推尊)하여 삼은 것이며, 홍양산(紅涼傘)207) 은 신이 스스로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일을 한 것입니다. 정행민(鄭行旻)은 바로 고(故) 상신(相臣)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입니다. 이유익과 조덕징(趙德徵)이 밀풍군(密豐君)의 집을 왕래한 것은 대개 조덕징이 밀풍군의 처질(妻姪)이기 때문인데, 이유익이 직접 가지 않고 조덕징을 시켜 탐문(探問)하기를, ‘외간에 이러한 말이 있다.’고 하니, 밀풍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덕징은 나이 스무 살 남짓되며 이삼(李森)은 그 안에 들지 않아서 처음에는 이유익과 더불어 제거할 뜻이 있었습니다. 남태적(南泰績)의 일은 신이 이유익과 한세홍에게서 들었는데, 남태적은 꾀를 써서 피하였고 남태징은 어리석은 자라서 그 가운데 들었습니다. 이유익이 말하기를, ‘이사주(李思周)와 밀풍군은 사촌(四寸)이 되므로, 만약 영남으로부터 오게 되면 마땅히 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괘서(卦書)의 일은 이하가 전라도에 가서 들으니, 나씨(羅氏) 성을 가진 사람과 산음(山陰) 사는 정가(鄭哥)가 했다고 합니다. 나가(羅哥)에게 물으면 알 수 있는데, 나가는 바로 나 숭대(羅崇大)의 7촌숙(七寸叔) 나만치(羅晩致)입니다. 황익재(黃翼再)와 김홍수(金弘壽)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여서 김홍수는 말하기를, ‘마땅히 함께 일을 할 듯하다.’ 하였는데, 신은 단지 김홍수의 말만 들었지 황익재의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임서호(任瑞虎)는 신이 아는데 역모에 동참(同參)한 것이 확실합니다. 조관규(趙觀奎)는 신이 알지 못하나 임서호가 동참했다고 말하였으며, 조덕징은 신이 알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기 전에 이미 들었습니다. 정월에 왔을 때 이하(李河)의 집에서 동참하여 난만하게 모의하였는데, 그가 비록 나이가 젊어 주장(主張)하지는 못했으나 동참한 것은 확실합니다. 이만(李晩)과 이의형(李義衡)은 군중(軍中)에 갔으며, 조동규(趙東奎)는 신이 알지 못하고 단지 임서호의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나숭대는 신이 모르는 사이지만 역모한 것이 확실합니다."
하였는데, 2차 형신하였으나 전과 같이 공초하였다.
죄인 정조윤(鄭祚胤)을 문초하니, 정조윤이 공초하기를,
"신이 적중(賊中)에 있으면서 거짓으로 복병군(伏兵軍)으로 가기를 청했더니, 과연 허락하므로 정세윤(鄭世胤)의 가죽 주머니를 훔쳐가지고 왔습니다. 가죽 주머니에 든 것은 바로 가짜로 만든 비변사(備邊司)의 공사(公事)로 성지(聖旨)를 가탁하여 익산(益山)·여산(礪山)·고부(古阜)·부안(扶安) 등 네 고을에 분부하여 군사를 내어 변산의 적을 잡으라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정세윤이 만든 것으로서 군사를 모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적이 이천(利川)으로 향하고자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단약(單弱)한 군사를 가지고 어떻게 이런 거조를 하겠는가? 하였더니, 정세윤이 답하기를, ‘호남과 영남의 원군(援軍)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그대의 모역(謀逆)은 스스로 하려는 것인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인가?’ 하니, 정세윤이 답하기를, ‘장차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세윤은 부원수(副元帥)가 된 후에 이름을 행민(行旻)으로 고쳤습니다. 정세윤이 또 말하기를, ‘일이 실패하면 마땅히 조령(鳥嶺)을 넘어가야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죽산(竹山)에 가서 동병(動兵)하는 상황을 보고는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밤중에 도주하면서 가죽 주머니를 훔쳐 가지고 와 여주(驪州) 관아에 고했습니다. 이인좌(李麟佐)가 그 무리 가운데서 가장 낫기 때문에 대원수(大元帥)로 삼고, 최경우(崔擎宇)는 상인(喪人)으로서 우장군(右將軍)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곽중휘(郭重輝)를 문초하니, 곽중휘가 공초하기를,
"이달 17일에 신이 안성장(安城場)에 갔다가 적도를 만나 청주 병영(兵營)으로 몰려 들어갔는데, 들으니, 이인좌가 병사(兵使)가 되었다가 후에 대원수(大元帥)로 승격되었으며, 신씨(申氏) 성을 가진 사람이 그 대신 병사가 되고, 정세윤이 영장(營將)이 되었다가 후에 부원수가 되었으며, 곽장(郭長)이 목천 현감(木川縣監), 이지경(李之慶)이 진천 현감(鎭川縣監), 목함경(睦涵敬)이 청안 현감(淸安縣監)이 되었으며, 좌장군(左將軍)은 최경우(崔擎宇)였고, 우장군(右將軍)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가(李哥)였습니다. 각 고을의 군사를 모아 21일에 양영(兩營)이 습진(習陣)한 후에 산성으로 들어갔는데, 신은 뛰쳐 나올 수가 없어서 죽산(竹山)으로 따라 가다가 중도에서 도망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군문(軍門)에 회부하여 효시(梟示)한 후 노적(孥籍)을 추가해 행하도록 하였다.
박필몽(朴弼夢)이 무장(茂長) 배소(配所)로부터 반(叛)하였다가 박필현(朴弼顯)이 패했다는 말을 듣고는 도주하였다. 박필몽은 음흉하고 교활하여 사류(士類)들이 배척하여 쓰지 않았다. 신임(辛壬) 연간에 김일경(金一鏡)의 우익(羽翼)이 되어 갑자기 아경(亞卿)으로 뛰어올랐는데, 갑진년208) 에 역적 김일경의 소하(疏下)에 들었다 하여 제주(濟州)로 갔다가 정미년209) 에 오명항(吳命恒)이 임금에게 아뢰어 육지로 나와 무장(茂長)으로 유배되어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는 그의 종제(從弟) 박필현과 흉모를 주장하여 나라를 원망하고 뜻을 잃은 무리들과 체결하였다. 이인좌·이유익과 기일을 약속하고 군사를 일으켜 청주(淸州)의 변이 생긴 틈을 타서 도승지(都承旨)로 소명(召命)이 있었음을 칭탁하고 교자(轎子)를 타고 칼을 차고 말을 탄 23명의 장사(壯士)를 거느리고 곧바로 태인(泰仁)의 진(陣)으로 달려갔다. 본현에 이르러 박필현의 군사가 궤멸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교자를 버리고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도망하니, 금부 도사(禁府都事) 이양(李亮)이 박필몽의 장사(長子)를 붙잡기 위해 배소(配所)에 이르러 장계(狀啓)로 치계해 말하니, 임금이 탄식하기를,
"무장에는 수령(守令)이 없더냐?"
하고는 곧 현상(縣賞)하여 박필몽과 박필현 부자를 붙잡도록 하고, 별도로 문자(文字)를 지어 중외에 반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무장(茂長)으로 출륙(出陸)한 죄인 박필몽은 일찍이 참판(參判)을 지낸 자로서 부자로 역모하여 도망해 나오지 않고 있으며, 박필현은 태인 현감으로서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여 군사가 궤멸되자 도망하였으니, 이 두 적은 실로 천고에 없는 극도로 흉악한 적이다. 능히 박필몽과 박필현의 머리를 베어 바치는 자가 있으면 녹훈(錄勳)·봉군(封君)하고 그 은전이 영원히 미치게 할 것이며, 천금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공천(公賤)·사천(私賤)이면 그의 부모와 처자를 종량(從良)한 후 작상(爵賞)을 내리겠다."
하였다. 임금이 역적 김일경의 소하(疏下)에 든 여섯 사람 중에 이미 두 적(賊)이 나왔으니, 남은 4명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아울러 국청에서 나래(拿來)하도록 명하였다.
각진(各鎭)의 귀농(歸農)시킬 군사를 뽑으라고 명하고, 임금이 교문(敎文)을 입으로 부르기를,
"호남의 소추(小醜)들이 차례로 죽었으니, 지금 농사를 권면하는 정사(政事)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 더군다나 백성들이 병화(兵火)를 모른 지 오래이고, 또 해마다 기근이 든 나머지 징소(徵召)한 지 여러 날이 되어 노천(露天) 아래에서 병으로 상하는 것 역시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영솔한 군사 및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가 영솔한 마병(馬兵)·보병(步兵)과 송도(松都)의 마병으로 출정(出征)한 이외의 1초(哨)는 아울러 먼저 파하여 보내도록 하라. 기백(畿伯)이 영솔한 금천(衿川)·과천(果川)·양성(陽城)·안성(安城) 네 고을의 군사 및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거느린 군사와 춘천 방어사(春川防禦使)가 거느린 마군(馬軍)·보군(步軍)은 아울러 절반을 파하여 보내도록 하라. 남한 순무사(南漢巡撫使)가 영솔한 각 고을의 군관(軍官)·군병(軍兵) 및 수원 총융사(水原摠戎使)가 영솔한 마병·보병은 우선 10초로 윤번(輪番)하게 하고 긴요하지 않은 잡색(雜色)은 파하여 보내도록 하라. 허정(許鼎)이 영솔한 남양(南陽)의 군사는 그 가운데서 정병(精兵) 5초를 한정해서 뽑아 남겨 거느리고, 그 나머지는 파해 보내되 남겨 둔 5초는 도순무의 절제를 받도록 하라. 계원장(繼援將) 박동추(朴東樞)가 영솔한 어영(御營)의 향군(鄕軍)과 송도의 마병과 잡색(雜色) 표하(標下)의 무리들 역시 도순무의 절제를 받도록 하라. 도순무가 영솔한 향군은 우선 그대로 두고, 파해 보내는 무리는 부자(父子)·형제(兄弟)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 솔정(率丁)이 없고 단신(單身)인 자, 병들고 약한 자를 구별하여 먼저 파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도 상주진(尙州鎭)에서 망명(亡命)한 적 박필현(朴弼顯)을 잡아 참하였다. 박필현이 그의 아들 박사제(朴師濟)와 함께 망명하여 상주의 촌가(村家)에 숨었는데, 파총(把摠) 박동형(朴東亨) 이 그 부자의 관(冠)에 입식(笠飾)한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의심하여 이를 영장(營將) 한날(韓㻋)에게 고하였고, 한날이 장교를 내어 붙잡은 것이다. 박필현이 이미 붙잡히게 되자 한날은 병위(兵威)를 크게 베풀고 박필현을 잡아들이니, 박필현이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기를,
"내가 과연 의거(義擧)하였다. 너처럼 용렬한 자가 어찌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을 알겠느냐? 근래에 서북풍(西北風)이 연달아 부니, 하늘의 뜻을 볼 수가 있다. 우리의 맹주(盟主) 이사성(李思晟)이, 생각건대, 이미 거병하여 서울을 함락하였을 것인데, 일개 영장의 군사가 어떻게 온 나라의 군사를 당하겠는가?"
하였다. 이때 함창 현감(咸昌縣監) 이현도(李顯道)가 자리에 있다가 서로 돌아보고는 실색(失色)하며 군졸로 하여금 결박하게 하여 장차 참하려고 하니, 박필현이 상변(上變)할 일이 있다며 지필(紙筆)을 요구했다. 한날이 아전에게 주라고 명하니, 박필현이 칼[枷]위에다 썼는데, 처음 줄에는 ‘상변서(上變書)’란 세 자를 쓰고, 가운데 행에다 쓰기를,
"금일의 사대부(士大夫)는 문관(文官)·남행(南行)210) ·무관(武官)·남인(南人)·소북(小北)·소론(少論)을 막론하고 동시에 거의하여 평안 병사 이사성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아 난적(亂賊)을 토멸하여 종사(宗社)를 안정시키려 했다."
하고, 끝 행에는 ‘박필현(朴弼顯)’이란 세 자를 쓰고, 크게 외치기를,
"내가 이미 상변하였으니, 너희 무리가 어찌 감히 나를 마음대로 죽이겠는가? 급히 서울로 올려 보내라."
하였다. 한날이 재촉하여 형을 집행하여 그의 부자 수급(首級)을 깃대에 매달고, 변서(變書)를 감사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알린 것이다.
이삼(李森)이 이인좌의 초사에 나오니, 임금이 몰래 이광좌(李光佐)에게 유시하기를,
"이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성상의 마음에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시다면 법대로 문초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시원스레 소석(昭釋)하여 장신(將臣)으로 하여금 더욱 의구(疑懼)하는 마음을 품지 말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 역시 생각한 바가 있다."
하고는 이삼을 불렀다. 이삼이 뜰에 이르러 관(冠)을 벗고 부복하고 이내 장부(將符)를 올리니, 임금이 명하여 전상(殿上)으로 오르게 하여 손을 쥐고 효유하기를,
"흉적의 계책을 내가 이미 통촉하고 있다. 만약 경을 의심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런 때 이런 직임을 어찌 경에게 맡기겠는가?"
하였다. 이삼이 울음을 삼키면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을 만 번 죽음 가운데서 건져 주시니, 나라를 위해 죽을 마음을 저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합니다. 원하건대, 백의 종사(白衣從事)로써 박필몽과 박필현의 머리를 베어 바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위유(慰諭)를 내렸다.
헌부(憲府) 【대사헌(大司憲) 이하원(李夏源)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망령한 흉도(凶徒)가 한둘이 아니어서 청(淸)나라로 도주하는 자가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서북 강변(江邊)의 파수와 연해(沿海) 배가 닿는 곳의 방수(防守)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품처하면 너무 늦게 될 것이니, 곧바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연원 찰방(連源察訪) 한종희(韓宗禧)는 한갓 착하기만 하고 잔열하여 적의 관문(關文)이 처음 이르자 겁을 먹고 어쩔 줄을 몰랐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諫院) 【대사간 송인명(宋寅明)이다.】 에서 아뢰기를,
"나라의 형세가 위의(危疑)하여 서북 변방의 방비를 거듭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원 부사(慶源府使) 박필후(朴弼垕)는 사람됨이 용렬하여 한 지방의 보장(保障)도 감당할 수 없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신(臣)은 삼가 살펴보건대, 임금이 이삼(李森)을 의심하지 않은 것이 이광좌를 위해서였습니다. 이광좌가 힘껏 이삼을 옹호하므로 임금이 바야흐로 이광좌에게 의심하지 않음을 보였고, 이광좌가 수상(首相)의 자리에 있었으니, 이삼의 장임(將任)을 체직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도(聖度)는 하늘과 바다처럼 포용하였으므로 큰 난리를 평정했으나, 오랑캐를 지척에 끼고 있어 위험하고 염려되는 사단이 많았었으니, 이는 한때의 요행(徼幸)이지 만세의 법(法)이 될 수는 없습니다.
3월 27일 정축
백관(百官)이 군기시(軍器寺) 앞길에 차례로 서 있는 앞에서 역적의 괴수 이인좌(李麟佐)를 참하고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가 장계하기를,
"적이 안음(安陰) 고현(古縣)에서 일어나 둔을 쳐서 진(陣)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였다.
처음에 국청(鞫廳) 여러 적의 초사에 모두 정희량(鄭希亮)이 괴수가 되었다고 하여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정희량을 잡기 위해 순흥(順興)에 도착하니, 부사(府使) 이성지(李聖至)가 도사를 도둑이라 하여 잡으려 하였다. 또 부내(府內) 사람으로 정희량이란 이름이 없다고 서로 한나절을 버티다가 비로소 포졸을 내어 체포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정희량은 이미 집에 없었고 그의 자질(子姪) 역시 도망하였다. 안무사(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순흥에 이르러 이성지를 엄히 책망하여 정희량의 어미와 처를 가두게 하고, 장계로 이성지를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성지가 두려워하여 정희량의 자질(子姪)로 도망한 자를 잡아 바쳤는데, 후에 조정에서 이성지를 나문(拿問)했으나 풀려났다. 정희량이란 자는 고(故) 명신(名臣) 정온(鄭蘊)의 후손이며 참봉(參奉) 정중원(鄭重元)의 아들로, 처음 이름은 준유(遵儒)이다. 정중원이 대대로 안음(安陰)에 살아 성명(盛名)이 있었고, 온 도(道)에서 그 호부(豪富)함이 알려졌으며, 장획(臧獲)211) 과 전택(田宅)이 매우 많았다. 정중원이 만년에 순흥(順興)으로 이사하여 막 죽었다. 정희량이 이인좌·박필현·한세홍(韓世弘)의 무리와 체결(締結)하여 영남에서 거사하여 서로 응하기로 약속하고는 거짓으로 조묘(祖墓)를 이장(移葬)한다고 일컬으면서 안음 옛집에다 전곡(錢穀)을 쌓아두고 가동(家僮)과 민정(民丁)을 모집하고는 기병할 때에 미쳐서는 부석사(浮石寺) 뒤에다 장사를 지내려고 했는데, 승도(僧徒)들이 금지하려 하기 때문에 변(變)에 대응하기 위해 쌀과 돈을 주고 민정을 모았다고 핑계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정미년212) 가을 사이에 도하(都下)에 소문이 널리 퍼졌는데, 한 시골의 풍채 좋은 거사(居士)가 건장한 말을 타고 종복(從僕)과 자장(資裝)을 매우 성대하게 하고는 여사(閭舍)에 와서 그 주인으로 하여금 저자 백성을 불러서 각색 채단(綵緞)을 혼수(婚需)로 사겠다고 약속하고, 먼저 은(銀) 한 봉(封)을 내어 맡기고 수십필을 가지고 오게 하여 빛깔과 품질을 보고는 내일 아침 공평한 값으로 사들이겠다고 약속하니, 시장 사람들이 믿고서 물건을 두고 갔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가서 보니 그 사람이 그 채단을 모조리 가지고 새벽을 틈타 도망해 간 곳을 몰랐다. 그가 잔 곳을 수색해 보니 다만 한 궤짝에 돌멩이를 두터운 종이로 싸서 가짜 은으로 꾸민 것 몇 덩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때에 변산(邊山) 적의 풍설이 한창 무성해지므로, 도성 사람들은 혹 변산 적도의 소행이 아닌가 의심하였는데, 정희량이 난을 일으키기에 미쳐서 그 채단으로 만든 깃발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가 패하자 적당들의 공초에 이르기를, ‘정희량이 서울 저자의 채단을 훔쳐와서 이것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적이 거창(居昌)을 함락시키니, 현감(縣監) 신정모(申正模)는 성을 버리고 도망하고 좌수(座首) 이술원(李述源)이 죽었다. 이웅보(李熊輔)는 이인좌의 동생 이웅좌(李熊佐)의 변명(變名)이다. 이인좌가 청주에서 양성(陽城)으로 갈 때 이웅보가 먼저 정희량과 안동(安東)에서 만나 거사하기로 약속하고 3월 13일에 안동에 이르러 보니 정희량이 안음에 있으면서 오지 않았다. 이웅보가 드디어 안음으로 가서 모집해 놓은 군사를 고현창(古縣倉)에서 일으키고 그 창고의 곡식을 풀어 먹였다. 20일에 적당(賊黨)이 칼을 차고 말을 타고 곧장 안음 현아(安陰縣衙)로 들어가 현감 오수욱(吳遂郁)을 보고는 글을 던지고 갔다. 오수욱에게 던진 그 글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수가 기울어 병민(兵民)이 사방에서 일어나 종사(宗社)가 장차 위태롭게 되었으니, 마치 불이 처음 붙은 것과 같아 그 형세는 반드시 꺼야만 한다. 이러한 때에 그 누가 능히 한 모책(謀策)을 내어 나라를 위한 심장(深長)한 걱정을 하겠는가? 이웅보(李熊輔)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의리상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하므로, 마땅히 죽을 힘을 다해 분발해서 위로는 종사를 안정시키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 이에 3월 20일에 동지(同志) 한두 사람과 함께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사직(社稷)을 위할 계책을 하는데, 혹 이런 충적(忠赤)을 좌우(左右)에 알려 주지 않아서 포란(暴亂)의 죽음을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감히 이런 충정(衷情)을 알리니, 이 죄를 조금만 용서하여 이 일이 성공되게 한다면 종사의 다행함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오수익이 두려워하여 병영(兵營)으로 도망했다. 또 거창 현감 신정모에게 투서(投書)하기를,
"국운(國運)이 불행하여 이제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종사가 망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 못된다. 내가 선파(璿派)의 가계(家系)에서 태어났으니 비단 세신(世臣)일 뿐만이 아니므로, 의리상 나라와 함께 죽어야 한다. 망령되이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들고자 하여 밤낮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드디어 동계(同溪)의 후손 정희량(鄭希亮)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종사(宗社)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전케 할 계책을 삼고자 하니, 마땅히 먼저 합하(閤下)에게 나가 충적(忠赤)을 토론하면 거의 양해하여 좌우(左右)로 공제(共濟)할 것 같기에 감히 전진하지 않고 고현(古縣)에 퇴복(退伏)하여 신사(信使)가 왕복하기를 기다리겠다. 이로써 이 놈의 온 가슴속에 충적(忠赤)이 있을 뿐 맹세코 다른 마음이 없음을 밝힌 연후에 함께 죽을 힘을 다해 종사를 붙들기를 원하나, 충심(衷心)을 폭로하지 못하여 두려움이 더욱 깊다. 이는 국가의 일이므로 외읍(外邑)의 수령 역시 범연하게 보거나 대수롭지 않게 듣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된다. 귀읍(貴邑)의 병마(兵馬) 및 제반 군기(軍器)를 혹 빌려준다면 며칠 안에 북상(北上)하여 국난(國難)에 달려갈 것이다."
하였는데, 신정모 역시 두려워하여 담을 넘어 도주하였다. 좌수 이술원(李述源)이 도보로 20여 리를 달려가 산골짝 사이에서 신정모를 뒤좇아가서 그의 소매를 잡고 감개하며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웅보(李熊輔)가 서울을 침범하려고 꾀하니, 이는 신인(神人)이 함께 통분해 하는 바인데 무슨 까닭으로 성을 버리고 부인이나 여자들이 하는 일을 하십니까?"
하였으나, 신정모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웅보가 본현으로 들어와 장사(壯士) 50여 인을 보내 이술원을 찾으며 말하기를,
"이술원은 어디에 있느냐?"
하니, 이술원이 칼을 빼어들고 손으로 자신을 찌르려다 포박을 당하자, 이웅보를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나는 네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 빨리 나를 죽여라."
하였다. 정희량이 말하기를,
"상형(上刑)을 쓰지 않으면 영(令)을 어긴 자를 징계하기에 부족하다."
하고는 이에 지당(支黨) 나숭곤(羅崇坤)으로 하여금 콧대를 베게 하니, 이술원이 죽음에 임하여 안색을 변치 않고 큰소리로 꾸짖기를,
"정희량이 반역을 하니, 나숭곤 너 역시 반역하느냐?"
하였다. 눈과 코를 베어 잠시 후에 곧 죽었는데, 이때 나이 50이었다. 침류정(枕流亭)에서 비전(飛電)이 나왔는데 그 빛이 붉어 본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임금이 어사(御史) 이종성(李宗城)을 보내어 그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증직(贈職)하고, 관찰사(觀察使)에게 명하여 사우(祠宇)를 세우게 하여 포충사(褒忠祠)라 사액(賜額)하였다. 처음에 정희량이 거창현(居昌縣)에 들어가 이술원을 죽이고 또 향임(鄕任) 신명익(愼溟翊)을 붙잡아 장살(杖殺)하니, 신명익의 나이 53세였다. 이 일이 보고되자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였다. 이때 두 고을의 이민(吏民)과 군졸(軍卒)이 모두 적을 따르니, 적이 창고의 곡식과 공세(貢稅)의 미포(米布)를 더 내어 군민(軍民)에게 흩어주고, 각절의 승도로 하여금 기계(器械)와 기고(旗鼓)를 운반하게 하였으며, 각역(各驛)으로 하여금 마필(馬匹)을 세우게 하니, 위세가 아주 드높았다. 합천(陜川) 사람 조성좌(曹聖佐)는 본군의 대성(大姓)인데, 역시 정희량에게 응하고자 하여 먼저 군수(郡守) 이정필(李廷弼)을 보고 안음(安陰)의 적의 형세를 크게 과장해 공갈하고 위협했다. 이정필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후에야 그가 적임을 알고 가두었으며, 또 본군의 군사를 풀어 객사(客舍) 밖에 진을 쳐 자위(自衛)하니, 좌수(座首) 정상림(鄭商霖)이 조성좌와 함께 적을 따르고자 하여 이정필을 협박하기를,
"안음과 거창의 병세(兵勢)가 극히 성대하여 조석 사이에 합천을 도륙(屠戮)할 것인데, 조성좌 형제의 가동(家僮)이 또 수백 명이나 됩니다. 이제 조성좌를 가두어 이 무리들이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니, 공은 진주(晉州)로 가서 병영(兵營)에 구원을 청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이정필이 그 말을 믿고 22일 새벽에 도망해 가니, 정상림이 즉시 옥문을 열고 조성좌 등을 석방하고, 군중(軍中)으로 들어가 장교(將校)와 이졸(吏卒)을 거느리고 절을 하였다. 삼가(三嘉) 좌수 신만항(愼萬恒) 역시 현감 이정수(李廷秀)를 내쫓고 그 군사를 가지고 합천의 적에 붙었다. 감사 황선(黃璿)이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爀)에게 격문을 보내 우방장(右防將)을 삼아 성주·지례(知禮)·고령(高靈) 등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초계 군수(草溪郡守) 정양빈(鄭暘賓)을 좌방장(左防將)으로 삼아 의령(宜寧)·함안(咸安)·단성(丹城) 등 고을의 군사를 거느려 좌우로 나누어 진격하게 하였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은 본진(本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로(北路)를 따라 진군하면서 상주 영장(尙州營將) 한날(韓㻋)을 후원(後援)으로 삼고, 대구 영장 하옥(河沃)은 병이 심하여 황선이 그 군관 김진옥(金振玉)을 가영장(假營將)으로 차출하여 독전장(督戰將)이라 칭하여 여러 고을의 진군하는 군사를 독려하게 했다. 또 안동(安東) 영장 김정상(金鼎相)으로 하여금 속읍(屬邑)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날과 기각(掎角)을 이루어 함께 나가도록 하고, 또 우병사(右兵使) 이시번(李時蕃), 진주(晉州) 영장 이석복(李碩復)으로 하여금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南路)를 따라 진군하게 하였다. 이시번이 ‘마땅히 조정의 지휘를 기다려야 한다.’ 하면서 즐겨 군사를 내지 않으니, 오수욱(吳遂郁)·이정필(李廷弼) 등이 밤새 달려와 군사를 청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황선이 적의 정세가 연속(連續)되어 있다는 것을 조정에 치계하고, 황선이 오수욱·신정모를 잡아 장(杖)을 치고 이정필을 가두었는데, 신정모는 후에 좌죄(坐罪)되어 귀양갔다.
청주(淸州)를 수복하고, 위병사(僞兵使) 신천영(申天永) 등이 복주(伏誅)하였다. 본주의 장교 등이 상당성(上黨城)에 남아 있는 적을 토벌하기를 꾀하고 있는데, 안성(安城)·죽산(竹山)의 패보(敗報)가 이르자 적을 따르던 자들 역시 스스로 공을 세워 속죄(贖罪)하고자 하여 모두 호응하였다. 이때 신천영 등이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고 있었는데, 장교 등이 성을 지키는 군졸을 몰래 꾀어 문을 열고 들여보내 드디어 위병사 신천영, 적의 괴수 이인좌의 동생 이기좌(李麒佐), 적의 비장(裨將) 하홍점(河鴻漸)·박만겸(朴萬兼) 등을 포박하고는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을 청해 와서 의논하니, 박민웅이 말하기를,
"적의 뒤가 염려되니,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
하여, 모두 참하였다. 호서 좌도 소모사(湖西左道召募使) 유숭(兪崇)이 장계하기를,
"적신 천영과 이기좌의 수급(首級)을 올려 보냅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청하기를,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으로 하여금 이긴 기세를 타고 영남으로 진군하여 적들을 섬멸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어영 대장(御營大將) 조문명(趙文命)은 청하기를,
"급히 안음(安陰)·죽산(竹山)의 첩보(捷報)를 영남에 보내어 적도를 해산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전후의 승첩장(勝捷狀) 수십 통을 팔도에 반포하되 봉하지 않고 보내 백성들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해야 합니다."
하고, 조문명이 또 청하기를,
"영남 좌우도(左右道)의 영장과 수령으로 하여금 도순무사의 군대를 기다리지 말고 편의에 따라 적을 토벌하여 속히 섬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때에 옥천 군수(沃川郡守) 임세겸(林世謙)은 조정의 명령이 내리기 전에 급히 격서(檄書)를 지어 안성·죽산에서 승전한 소식을 재빨리 알리니, 영남 각 고을의 적도들이 이를 듣고는 기가 꺾여 마침내 패하기에 이르렀다.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안동(安東)에 이르니, 영남에서는 청주의 변란이 있으면서부터 인심이 환산(渙散)되어 수습할 수 없었는데, 뜻밖에 박사수가 재를 넘어오는 것을 보고는 비로소 조정이 있는 줄을 알게 되어 백성들의 의지가 이에 힘입어 점차 진정되었다. 박사수가 이미 이르러 청주의 적이 비록 패했으나 정희량(鄭希亮)과 이웅보(李熊輔)가 또 안음(安陰)에서 일어남을 듣고 즉시 글을 지어 역시 역순(逆順)의 구분을 진술해서 도내에 효유(曉諭)하고, 문경(聞慶)사람 전 찰방(察訪) 신필정(申弼貞)과 상주(尙州) 사람 전(前) 부수(副率) 성이홍(成爾鴻), 영천(永川) 사람 전 참봉(參奉) 정규양(鄭葵陽)에게 치서(馳書)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두 사민(士民)을 인도해 거느리고 의기를 분발해 적을 토벌하게 하고, 안동(安東)의 사민(士民)으로 명망(名望)이 있는 자 이재(李栽) 등 수십 명을 다 불러 성안에 거처하게 하였다. 본부(本府) 협현(峽縣)에 별포수(別砲手) 5백 명이 있는데, 평소 포를 잘 쏘아 정졸(精卒)이라고 일컬어 왔다. 그래서 박사수가 친신(親信)하는 장교에서 위임하여 그들을 거느리고 진을 쳐서 자위(自衛)하여 뜻밖의 변을 방비하게 하였다. 이때 종사관(從事官) 강규환(姜奎煥)으로 하여금 성밖에서 조련(操鍊)하게 하고 감사 황선(黃璿)과 왕복해 상의하고는 먼저 영장 김정상(金鼎相)을 보내어 속읍(屬邑)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해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처음에 박사수가 사민을 불러 모으는데 권구(權榘)가 유독 늦게 이르렀다. 마침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와서 권구를 붙잡았는데, 국청(鞫廳)의 문서에는 권후(權煦)라고 이름이 쓰여 있었다. 박사수가 말하기를,
"안동에는 단지 권구 한 사람만이 명망이 가장 중하니, 만약 역모에 가담했다면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하여 드디어 권구를 붙잡아 도사에게 붙여 서울로 보냈다. 예천(醴泉)의 술사(術士) 이윤행(李允幸)이 일찍이 적과 서로 왕래해 통하면서 길흉(吉凶)을 점쳐 주었는데, 박사수가 정탐해서 붙잡아 서울로 보냈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죽산 부사(竹山府使) 최필번(崔必蕃)은 적의 관문(關文)을 보고 도망하여 양성(陽城)으로 숨었고, 현감(縣監) 한일운(韓日運)은 적을 보기도 전에 크게 놀라 밤중에 도주하였으니, 아울러 마땅히 별도로 논죄(論罪)하여야 합니다. 양성(陽城)의 좌수(座首)는 관병(官兵)을 이끌고 소사(素沙)에 와서 기다렸으니, 마땅히 가장(嘉奬)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여 최필번은 충군(充軍)하고, 한일운은 정배(定配)하고, 양성의 좌수 이사(李葸)는 상당한 직임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배(李培)를 문초하니, 이배가 공초하기를,
"신이 전년 10월에 평안 병영(平安兵營)에 갔으나 병사는 보지 못하고 단지 군관(軍官) 안추(安樞)만 만나보고 자산(慈山)에 이르러 겨울을 나고 3월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11일에 갈원(葛院) 사는 김정현(金廷賢)이 와서 보고는 양천의 가천(加川) 최경우(崔擎宇)의 집에 함께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김정현과 최경우가 백기(白旗)에다 ‘의(義)’자를 써가지고 가서 변산(邊山)의 적을 격파하자고 청하였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변산의 적은 국가에서 마땅히 토벌할 것이고 우리들이 토벌할 것이 아니다.’ 하고는 그대로 도망해 오고 말았는데, 장사(壯士) 두 사람이 갈원 뒷고개에 모여 있다가 신을 붙잡아 권서룡(權瑞龍)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집에는 바야흐로 군사 3초(哨)가 모여 있었고, 적당(賊黨)은 권서봉 3형제와 박영동(朴寧東)·김정현(金廷賢)·최경우(崔擎宇)였습니다. 전라도 나주에 방을 건 자인 나가(羅哥)가 3천 명을 거느리고 변산으로 들어갔는데, 태인의 수령 박필현(朴弼顯)이 그 당이어서 모든 적이 박필현에게 가서 의논하고 왔습니다. 10일 청주에서 모인 자는 양반(兩班)이 거의 2백 명이나 되어 하나하나 그 성명을 기억할 수가 없고, 여섯 장사(壯士)는 고몽량(高夢良)·김성달(金成達)·김두백(金斗白)·정치룡(鄭致龍)·소성(蘇晟)·최경우(崔擎宇)·목주경(睦州敬)이었으며, 내응(內應)은 남태징(南泰徵), 통진 부사(通津府使) 남태적(南泰績),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이었고, 신은 정세윤(鄭世胤)의 중군(中軍)이 되었습니다. 병사(兵使)를 죽인 자는 바로 군인 최갑(崔甲)인데 최용서(崔龍瑞)·최경우(崔擎宇) 역시 함께 하였습니다. 이인좌가 신으로 하여금 가서 영장을 잡아오라 하기에 신이 남문(南門)에 앉아서 군사를 보내 붙잡아 오게 해서 신이 붙잡아 가지고 이인좌에게로 갔습니다. 이인좌가 말하기를, ‘죽이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신으로 하여금 끌어내어 죽이게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2차 형신했으나 전과 같이 공초하여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임금이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올린 적중의 도목(都目)을 내리고 명하기를,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과 홍문 정자(弘文正字) 이종성(李宗城)으로 하여금 구별하여 초출(抄出)하게 해서 도순무사 오명항에게 보내어 처치하게 하라. 도목 가운데 양반 및 사나워서 두목(頭目)이 된 자, 일찍이 여러 적의 초사(招辭)에 나온 자는 효시(梟示)하는 질열(秩列)에 두고, 소민(小民)으로 협종(脅從)한 자는 결곤(決棍)하는 질열에 두라."
하였다.
이인엽(李人燁)을 문초하니, 인엽이 공초하기를,
"정월 사이에 민관효(閔觀孝)가 은자(銀子) 40냥을 빌려 주기를 원하므로 신이 그 사용처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말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또 40냥을 빌려 주기를 원하므로 신이 또 그 사용처를 물었더니, ‘장차 양성(陽城) 땅에다 방죽을 쌓으려 한다.’ 하였으므로 다시 물었더니, 말하기를, ‘바야흐로 군사를 모아 종사(宗社)를 범할 것을 모의하고 있는데, 호궤(犒饋)하고 말을 빌리는 일에 쓰려한다.’ 하였습니다. 민관효가 말하기를, ‘마땅히 보령(保寧) 땅으로 가야 한다.’ 하기에 신이 과연 빌려 주기를 허락하였으니, 정황을 안 것이 사실입니다."
하니,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도순무사 오명항이 장계하기를,
"적의 위장군(僞將軍) 목함경(睦涵敬)과 위목사(僞牧使) 권서봉(權瑞鳳)을 붙잡아 보냅니다."
하였다.
이순관(李順觀)을 문초하니 낙형(烙刑)을 베푸니, 이순관이 공초하기를,
"과연 괘서(卦書)한 일이 있으니, 역모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이익관(李翼觀)을 문초하니, 이익관이 공초하기를,
"신은 이유익(李有翼)을 모르고 신의 아우가 이유익을 아는데, 신의 아우가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짓고, 스스로 쓰고, 스스로 서소문(西小門) 밖에다 걸고는 민관효에게 보였더니, 민관효가 이유익에게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순관을 붙잡아 바치려 했으나 형제 사이여서 차마 하지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책망하였더니 그가 답하기를, ‘영웅(英雄)들이 창기(倡起)하여 축록(逐鹿)213) 하려는 마음이 이러하니, 공(功)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신광원(愼光遠)의 매부(妹夫)이기 때문에 이처럼 흉악한 일을 한 것입니다. 신은 비록 형제 사이지만 실상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에게 명하기를,
"내일부터 빈청(賓廳)에 나아가 군무(軍務)에 수응하라."
하였다.
호서 좌도 소모사(湖西左道召募使) 유숭(兪崇)이 장계하기를,
"청주의 의병장(義兵將) 전(前) 익찬(翊贊) 변관하(卞觀夏), 종사관(從事官) 전 참봉(參奉) 변희하(卞熙夏)는 6백여 인을 창솔(倡率)하였고, 전 수사(水使) 김몽로(金夢魯), 종사관 저 주서(注書) 유언협(兪彦協)은 수백 명을 창솔하였으며, 사인(士人) 이붕해(李鵬海)·박징최(朴徵最)·오덕명(吳德明)·박지후(朴之垕)·연수창(延壽昌)·민진수(閔鎭綏)·이경우(李慶雨)·이세명(李世命)과 한량(閑良) 박민준(朴敏俊)은 각기 차등 있게 창솔하여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포상해야 합니다."
하고, 또 적(賊) 신천영(申天永) 등을 포박해 참할 때의 의사(義士) 박민웅(朴敏雄)과 내외에서 호응한 출신(出身) 조중렴(趙重廉)·박천로(朴天老) 등 70여 인을 기록하여 올렸다.
총융사(摠戎使) 장붕익(張鵬翼)이 장계하기를,
"적의 위방어사(僞防禦使) 안후기(安厚基)를 붙잡아 참형에 처하였습니다."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8일 무인
안음(安陰)의 적 정희량(鄭希亮) 등이 거창(居昌)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함양(咸陽)으로 들어가 장차 전라도 경계를 넘으려 하였다. 운봉 영장(雲峰營將) 손명대(孫命大)가 안음의 적변을 듣고는 미처 감사(監司)·병사(兵使)에게 보고하지 못하고 급히 속읍의 군사를 동원하여 먼저 팔량령(八良嶺)을 점거하니, 적이 이 때문에 감히 넘지 못하고 하루를 머물다가 거창으로 돌아갔다. 함양 군수(咸陽郡守) 박사한(朴師漢)이 처음에 군사를 내어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이 모두 적과 내응하니, 박사헌은 낭패(狼狽)하여 오수욱(吳遂郁)과 더불어 손명대의 군사에 의탁해 함께 영애(嶺隘)를 지키다가 적이 함양을 버리자, 박사헌이 다시 본군으로 들어가 이민(吏民) 가운데 적을 따른 자를 죽였다. 운봉(雲峰)의 천총(千摠) 정후교(鄭後僑)는 강개(慷慨)하고 담략(膽略)이 있었는데, 손명대가 군사를 내어 적을 막을 때 정후교의 힘이 많았다. 적이 함양에 들어오자, 정후교가 수백 명의 군사로 함양으로 달려들어가 적괴의 머리를 베어 바치겠다고 청하였으나, 손명대는 감사(監司)가 경계를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여 쓰지 못했다.
도순무사 오명항에게 유시하기를,
"경은 단번에 미친 적을 소탕해 섬멸하였는데도 전열(前列)의 한 졸병도 잃지 않았으니, 전고(前古)에 없던 일이다. 이는 오직 경이 충의(忠義)를 분발한 효험으로 내가 실로 가상하게 여겨 겨우 포양(褒揚)해 유시한 바 있었다. 외방의 노천(露天)에서 지낸 지 이제 이미 여러 날이 되어 마땅히 즉시 개선(凱旋)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해야 할 것이나, 다만 생각건대, 미친 적들이 좌전(左甸) 6, 7읍(邑)에서 소란을 일으켜 백성들이 놀라 흩어져 여염의 마을이 거의 비게 되었다. 게다가 군사를 일으킨 탓으로 번거로운 비용이 여지가 없고, 간혹 그릇되게 적과 내통하였다가 문득 다시 깨닫고도 놀라고 의심하여 아직 진정되지 않은 자도 있으려니와, 또한 협종(脅從)한 무리로 패산(敗散)하여 도망한 자도 있을 것이니, 이는 모름지기 경이 한동안 머물면서 진정시켜 흩어져 도망한 자는 불러모아 구업(舊業)을 회복하게 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융석(融釋)시켜 스스로 앞길을 막게 함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또 굶주리고 지친 백성을 진대(賑貸)해 구제하여 때에 미쳐 있는 힘을 다하여 농사짓는 데 진력할 것을 늦추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거듭 생각하건대, 잘못 생각하고 협종한 자도 비록 한결같이 탕척(蕩滌)하는데 들어 있지만, 그 흉악하고 교활하게 역모하여 적의 심복(心腹)이 된 부류는 반드시 끝까지 체포해서 탕멸하여 그 역기(逆氣)로 하여금 싸늘하게 식게 한 후에야 비로소 영원한 안녕을 기할 수 있으니, 이것 역시 모름지기 경이 한 번 수고해야 할 것이다. 지금 호남 번신(藩臣)의 장계를 다시 보건대, 이달 23일 운봉 현감(雲峰縣監) 손명대(孫命大)의 치보(馳報)에 일컫기를, ‘안음에 적도가 크게 모여 방자하게 창고의 곡식을 먹고 군기(軍器)를 약탈하여 본현에서 이미 수백 명의 군사를 다 내어 영애(嶺隘)를 막고 있다.’ 하였으니, 적도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이 불러모아 함부로 날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시 양남(兩南)의 수신(帥臣)과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즉시 편의에 따라 토멸하게 하였는데, 향후의 일은 조정에서 멀리서 지휘하기가 어려우니, 경은 깊이 생각하여 호남·영남 사이의 편리하고 합당한 곳으로 진주(進駐)하여 척후(斥候)를 많이 풀어 적의 정세를 자세히 탐지하고, 모든 영(營)의 여러 진(陣)을 잘 지휘하여 기회를 엿보아 편한 때에 즉시 소탕하여 남쪽을 돌보아야 할 근심을 누그러뜨리도록 하라. 경이 거느린 마군(馬軍)은 우선 머물러 두고, 보군(步軍)은 경이 주둔하고 있는 가까운 영의 군사와 교체하고, 경병(京兵) 잡색(雜色)은 늙은이와 약한 자를 뽑아 돌려보내고 단지 정장(丁壯)만 머물러 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오명항이 청주에 도착하여 영남의 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행군하려 하다가 재의 길이 험하여 적이 매복해 있을까 염려하니, 종사관(從事官) 박문수(朴文秀)가 청하기를,
"제가 단군(單軍)으로 빨리 달려 조령(鳥嶺)을 따라 가면서 안동(安東)의 별포수(別砲手)를 거두어서 곧바로 적의 소굴로 쳐들어갈 터이니, 대군(大軍)은 다시 적이 물러갔다는 보고를 들은 뒤에 진지(進止)하소서."
하니, 오명항이 허락하였다. 박문수가 군중에서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를 모집하여 정졸(精卒) 1백 수십 명을 얻어 교련관(敎鍊官) 권희학(權喜學)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다. 장차 가려고 하는데, 오명항이 박문수에게 묻기를,
"종사관이 재의 길을 잘 알고 있으니, 대군이 재를 넘는 데 매복한 적이 없을 것을 보장하겠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적이 안음에서 일어났는데, 선산진(善山鎭)이 그 앞에 막혀 있고 상주(尙州)가 또 선산의 뒤에 있어 적이 반드시 이 두 진을 깨뜨리지 못할 것이니, 만약 군사가 행군하여 영을 지나가는데 적이 이미 길을 막고 있다면, 청컨대 이 박문수를 참하소서."
하니, 오명항이 박문수와 군사를 이끌고 추풍령을 넘었다.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와 도신(道臣)·수신(帥臣)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때에 맞춰 안음(安陰)의 적을 섬멸하되, 한결같이 도순무사의 절제를 받도록 하되, 급하거든 편의대로 하라."
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과 우병사(右兵使) 이시번(李時蕃)에게 유시하기를,
"안음의 적이 일어난 후 본도에서 계문(啓聞)함이 없으니, 우선 문비(問備)214) 하고, 또 적당히 헤아려 군사를 내어 때맞춰 토멸토록 하라."
하고, 이어 속히 귀순(歸順)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농사를 지으라는 뜻으로 곳곳에 방(榜)을 걸어 효유(曉諭)하게 하였다.
충청병 우후(忠淸兵虞候) 박민웅(朴敏雄)을 발탁하여 상주 영장(營將)으로 삼았다. 영남의 적이 창궐하고 상주가 그 요충지가 되기 때문에 택차하여 보낸 것이다.
탕춘대(蕩春臺)에 유둔(留屯)해 있는 군사와 여주(驪州)·춘천(春川) 등 여러 고을의 군사를 파해 보내라 명하였으니, 군사를 줄이고자 한 까닭이었다.
헌부(憲府) 【대사헌(大司憲) 이하원(李夏源)이다.】 에서 계청하기를,
"역적 이순관(李順觀)의 적형(嫡兄)·적질(嫡姪)을 아울러 잡아다 정상을 알았던 율(律)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국청(鞫廳)에서 나문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목함경(睦涵敬)을 문초하니, 목함경이 공초하기를,
"전(前) 참봉(參奉) 이동형(李東馨)의 조카 이호(李昈)·김중만(金重萬)과 함께 모의하였으나, 신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윤몽징(尹夢徵)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호가 양성(陽城) 사람과 모의하고 있다.’ 하기에 초아흐렛날에 신이 가서 이호를 만나 보았더니, 김중만과 함께 자고 있었습니다. 김중만이 간 후에 신이 물었더니, 이호가 말하기를, ‘네가 만약 권서린(權瑞麟)의 집으로 가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권서린의 집으로 갔더니 바야흐로 소를 잡고 수백 명이 모여 있었는데 도검(刀劍)이 무서웠습니다. 대개 도둑떼를 모은 것으로서 최경우(崔擎宇)가 상인(喪人)으로 변복(變服)하고 수백 명을 모아온 것인데, 장수는 이인좌(李麟佐)였습니다. 김중만이 80명을 거느리고 와서 모인다고 했는데 한 사람도 온 자가 없었고, 이배(李培)가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와 호군(犒軍)하고 사습(私習)하였습니다. 좌장군(左將軍)은 이호(李昈), 우장군(右將軍)은 최경우(崔擎宇)이고, 신은 진용 도위(進勇都尉)가 되었으며, 군사를 정돈하여 장차 평택을 공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집으로 돌아와 김중만을 찾아 갔으나 간 곳을 몰랐고, 3월 13일에 정세윤(鄭世胤)의 아들 정일화(鄭一華)가 신을 데리고 이호의 종의 집으로 가서 협박하므로 신이 부득이 따라갔습니다. 15일에 비를 맞으며 청주(淸州)로 들어가 길을 나누어 안성(安城)으로 향하였는데, 신이 적도들에게 말하기를, ‘들으니 안성의 군사가 모두 도망하였다고 한다. 만약 금위군(禁衛軍)을 나에게 주면 내가 마땅히 가서 안성을 깨뜨리겠다.’ 하니, 허락하였기 때문에 거짓으로 군사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갔다가 그대로 흩어져 도망하다가 진천(鎭川)에 이르러 관군에게 붙잡혔습니다.
듣건대, 해미(海美)의 영장(營將)이 17일에 군사를 이끌고 적과 화응하였으나, 오지 않았다 하니 그 보장(報狀)이 적실(的實)하며, 영남의 군사가 15일에 올라온다고 하였으나 역시 오지 않았습니다. 정세윤(鄭世胤)이 일을 주관했으나 패하여 죽었고, 민창도(閔昌道)의 아들 민원해(閔元楷)가 충주(忠州)에서 수창(首唱)하였으니, 만약 민원해를 붙잡아 묻는다면 충주의 일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세윤과 안엽(安熀)이 평안도에 가서 모의하고자 하였는데, 안엽은 신의 친척으로 용인(龍仁) 직곡(直谷)에 삽니다. 정세윤이 또 정월에 호남에 갔고 이호도 뒤좇아 갔는데, 태인의 원이 암암리에 군사를 점열(點閱)하였고, 나주(羅州)의 부자 나만적(羅晩績)이 전포(錢布)를 많이 내어 이호에게 주었습니다. 적군이 청주로 들어갈 때 모두 소복(素服)을 하였고, 장흠(張欽)·장용(張鎔)은 간 곳을 모르며, 권서린(權瑞麟)은 패해 죽었다고 들은 듯하고, 권서룡(權瑞龍)은 죽산의 진(陣)으로 향했습니다. 위목천 현감(僞木川縣監) 곽장(郭長)은 도순무영(道巡撫營)에 사로잡혔으며, 정일화(鄭一華)의 처남(妻娚) 윤취징(尹就徵)은 양지(陽智)에 사는데 군사 3백명을 모았습니다. 적의 괴수가 말하기를, ‘영남의 군수 수만 명이 15일 안동을 격파하고 문경(聞慶)에 둔을 치고 있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남태적(南泰績)이 본부(本府)에 있으면서 3백 명이 군사로 장차 서로 호응하려 기다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좌장군 이호의 휘하에 진용 오도위(振勇五都尉)가 있는데, 그 둘은 신과 이의형(李義衡)이며, 나머지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적도들이 또 말하기를, ‘태인의 군사가 15일에 공주(公州)로 향했다.’고 하였습니다. 양반(兩班)이 처음에는 1백 20명이었으나 청주와 진천에 이르러서는 거의 2백 명이 되었는데, 적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죽산(竹山)에 가면 이천 부사(利川府使)가 의당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로 호응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권서린과 이인좌가 모두 말하기를, ‘일찍이 이천 부사와는 서로 아는 사이로서 역시 우리와 같은 무리이니, 반드시 서로 호응할 것이고, 통진(通津)과 이천 두 부사는 모두 우리들이 일찍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민망해 하였다.’ 하였습니다. 유검(柳儉)·윤태징(尹台徵)은 양지(陽智)에 사는데 이호(李昈)와 모두 한 동네이며, 이는 이호의 동서(同婿)이며 신의 6촌(寸)입니다. 안성 군수(安城郡守) 이광적(李光績) 역시 그 가운데 들었습니다. 유검이 말하기를, ‘남인(南人)이 태반이나 들었으니, 만약 각기 5, 6인씩만 내어 차차 성안으로 흘러 들어가 각기 각자의 집에 숨어 있다가 변을 일으키면 좋을 것이다.’ 하였으니, 만약 청녕교(淸寧橋)에 살고 있는 유검의 형 유염(柳淰)에게 물으면 그 계획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배(李培)가 병사(兵使)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에게 대문(大門) 안에서 베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때 닭이 울자 이인좌가 신에게 환도(還刀)와 군복(軍服)을 주었습니다. 낱낱이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으므로, 참형에 처하고,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임금이 목함경은 병사(兵使)를 죽였다 하여 정법(正法)한 후 지체(肢體)를 원수의 집에 주라 하였다.
권서봉(權瑞鳳)을 문초하니, 권서봉이 공초하기를,
"이인좌가 정세윤과 함께 모의하기를, ‘영남의 군사가 마땅히 16만은 된다.’고 하기에 신이 그 허망함을 책망하였더니, 이인좌가 말하기를, ‘일찍이 상소한 소유(疏儒)가 1만여 명이나 되었으니, 각기 가정(家丁)을 거느리면 족히 12만은 되며, 괴수(魁首)는 정씨(鄭氏) 성을 가진 사람이다. 호남의 군사는 마땅히 2천여 명이 되는데 괴수는 나씨(羅氏) 성을 가진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정세윤이 말해서 청주에 이르러 신(臣)을 위목사(僞牧使)로 삼았고, 정세윤은 세 차례 호남을 왕래하였으며, 정대윤(鄭大胤)으로 하여금 신을 협박하였는데, 정대윤은 바로 정세윤의 사촌으로 여주에 삽니다.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으므로, 참형에 처하고,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이익관(李翼觀)을 문초하니, 이익관이 공초하기를,
"괘서(掛書)할 때 민관효(閔關孝)의 집에 모여 신이 짓고 신의 아우가 썼는데, 이유익(李有翼)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유익이 처음으로 이런 흉언(凶言)을 하였는데, 그도 박필현(朴弼顯)에게 들었다 하였습니다. 이천해(李天海)는 군사(軍士)인데, 신이 압니다. 이천해가 처음에 생민동(生民洞)에 살다가 수각교(水閣橋)로 이사하여 신이 서울로 왕래할 때 이천해를 주인으로 삼았는데, 좁쌀 말을 얻기 위해 마침 신의 집으로 나왔기 때문에 신의 형제가 밤에 이천해와 함께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천해는 평소 당돌하였으므로 신이 과연 그 언근(言根)을 또 이일좌(李日佐)에게서 나왔다고 말하라고 하였으니, 이일좌는 이홍택(李弘澤)의 아들로 과천(果川)에 살며, 이인좌의 일족(一族)으로 적당에 들었다고 하니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으므로, 참형에 처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임서호(任瑞虎)를 문초하고 1차 형신을 가하였는데, 임서호가 가장 사나워서 여러 차례 형신을 받았으나,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일좌(李日佐)를 문초하였으나 불복하였으므로, 2차 형신하였다. 이일좌가 공초하기를,
"신은 입이 가벼운 탓으로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이익관에게 말하였으며, 이인좌의 행동거지를 신 역시 대략 들었습니다. 이인좌가 음흉한 무리들과 연결한 것은 서울 안은 이명언(李明彦)의 아들 이하택(李夏宅), 권규(權珪)의 아들 권서경(權敍經),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이며, 청주와 영남 사람이 많이 들었다고 하니, 그른 정상을 안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으므로, 처참하기를 법과 같이 하였다. 일찍이 을사년215) 에 임금이 의릉(懿陵)을 알현(謁見)할 때 이천해(李天海)란 자가 이교(二橋) 목에서 어가(御鴐) 앞에 나와 흉언을 하였는데, 음참(陰慘)하기 짝이 없어 국문하여 죽였다. 이천해는 흉악하여 끝까지 버티며 끝내 언근(言根)을 실토하지 않았는데, 이익관이 이일좌의 초사(招辭)에서 나오자 비로소 박필현과 이유익의 무리가 시킨 것임을 알게 되었다.
3월 29일 기묘
남한 순무사(南漢巡撫使) 김동필(金東弼)에게 유시하기를,
"성을 지키는 군사를 파해 보내되, 기포(譏捕)를 잘하는 자를 뽑아서 남겨두고 부리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사효(鄭思孝)가 장계하기를,
"죄인 박필몽(朴弼夢)이 3월 22일 밤에 무장(茂長) 배소(配所)로부터 갑자기 도망하여 현감 김몽좌(金夢佐)가 급히 장교(將校)를 풀어 추적하였습니다. 박필몽은 태인(泰仁)으로부터 고부(古阜) 길을 따라 가다가 다시 흥덕(興德) 땅으로 향해 해구(海口)로 들어갔는데, 죽도(竹島)는 칠산(七山) 앞 바다에 위치해 있어 변산(邊山)과는 단지 한 대수(帶水)를 사이에 두었을 뿐입니다. 박필몽이 그의 아들 박사침(朴師沈)과 종 명금(鳴金)과 함께 섬 가운데 있는 우거진 대숲 속으로 도망해서 숨어 있는 것을 군교(軍校)들이 잡아와 모두 엄히 현옥(縣獄)에 가두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나래(拿來)하여 엄히 그 정절(情節)을 국문한 후에 정형(正刑)하고자 하였으나, 중도에서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드디어 별도로 선전관(宣傳官) 및 가도사(假都事)를 선택해 인견하여 보내고, 각 고을로 하여금 군사를 내어 호송하게 하되, 만일 뜻밖의 일이 있게 되면 즉시 그 자리에서 참수(斬首)하여 오라고 유시하였다. 박필몽은 박필현과 서로 내통하여 역모를 꾀하고는 거짓으로 도승지(都承旨)가 된 조지(朝旨)가 있다고 하면서 배소(配所)로부터 마음대로 출발하여 박필현의 군영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박필현의 군사가 궤멸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해도(海島)로 숨었다가 체포된 것이다.
처음에 무장 현감(茂長縣監) 김몽좌(金夢佐)가 박필몽을 놓아주어 잃었다는 이유로 나래(拿來)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바로 붙잡아 바친 공이 있다 하여 나래하라는 명을 거두고 행상(行賞)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몽좌가 군사를 내어 박필몽을 자송(資送)한 것이었고, 뒤에 그 사실이 발각되어 국문을 받고 죽었다.
영남의 적보(賊報)가 날로 이르고, 전라 감사 정사효가 또 치계하기를,
"남원의 연곡사(燕谷寺)와 쌍계사(雙溪寺) 두 절에 적도가 둔취(屯聚)해 있습니다."
하였다.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시번(李時蕃)을 파직하라 명하고,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여적(李汝迪)이 지용(智勇)이 있어 쓸 만하다고 하여 우병사로 차출하여 훈국(訓局)의 정포(精砲)를 거느리고 가서 영남의 적을 격파하게 하였으며, 도순무사는 마땅히 호남과 영남 사이에 군사를 주둔하고 양남의 일을 절제하게 하였다. 계원장(繼援將) 박동추(朴東樞)가 어영군(御營軍) 및 송도(松都)의 병마를 거느리고 바야흐로 도순무사의 군중에 있었는데, 도순무로 하여금 박동추와 박찬신(朴纘新) 가운데서 한 사람을 택하여 호남의 적을 격파하게 하였다. 또 중외(中外)의 파수 군병을 파하고 단지 기영병(畿營兵)의 정장(精壯) 절반과 양주(楊州)의 2초(哨)만 남겨 진도(進渡)를 지키라고 명하였다.
남한 순무사(南漢巡撫使) 김동필(金東弼)이 장계하기를,
"붙잡은 적(賊) 윤희경(尹熙慶)의 취초(取招)와 윤희경을 아울러 올려 보냅니다."
하였는데, 그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이 적의 근인(根因)은 당초 나주의 나두동(羅斗冬)·나숭대(羅崇大)·나만치(羅晩致) 세 사람에게서 비롯되어 양병(養兵)한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양지(陽智) 사람 이호(李昈)는 그들 사이에서 이인좌 등과 서로 통하게 하였고, 이번 군사를 낼 때에는 정세윤(鄭世胤)이 나두동에게 군사를 청하자, 나두동이 허락하지 않고 스스로 말하기를, ‘나 역시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영남의 적정(賊情)은 상주(尙州)의 한세홍(韓世弘) 형제가 알고 있으며, 서울 안에서의 내응(內應)은 이유익(李有翼)·남태징(南泰徵)·민관효(閔觀孝)가 하기로 하고, 이사성(李思晟)은 근왕병(勤王兵)을 칭탁해 올라오고, 전 도사(都事) 조상(趙鏛)은 적도 중에 와 모였다가 이내 이인좌에게로 갔습니다. 이인좌는 14초(哨)를 거느리고 정세윤은 16초를 거느렸습니다. 양성(陽城)의 설동린(薛東麟)·이의형(李儀亨), 진위(振威)의 이배(李培)·최호서(崔虎瑞)도 그 가운데 들었습니다."
하니, 군문(軍門)에 회부해 효시(梟示)하였다.
다시 심유현(沈維賢)을 추문(推問)하니, 심유현이 공초하기를,
"적의 초사에 이른바 ‘차마 들을 수도 없고 차마 할 수도 없는 말’이란 일은 신이 무슨 일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갑진년216) 에 신이 영천 군수(永川郡守)가 되었다가 병오년217) 에 올라와 경묘(景廟)의 대상일(大喪日)에 이유익을 곡반(哭班)218) 에서 만났습니다. 이유익이 갑진년 국휼(國恤)에 대해 언급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그때 유문(留門)219) 하고 급히 부르기에 환취정(環翠亭)에 이르러서 들어가 우러러 보았더니, 옥색(玉色)이 평상시와 같았는데, 대신이 고복(皐復)220) 을 청하여 비로소 승하하심을 알았다.’ 하였습니다. 이유익이 말하기를, ‘환취정 안에 유독 한 환관(宦官)과 더불어 거처하시어 신세가 비통하였다.’ 하고는 이어 탄식하므로, 신이 책망하기를, ‘너는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습니다. 그때의 수작(酬酌)이 이에 불과하였는데, 신이 전한 바가 어찌하여 차마 듣지 못할 말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대신 이하가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심유현과 이유익이 수작한 말이 매우 흉참(凶慘)하니, 마땅히 신문(訊問)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30일 경진
임금이 대궐 내외의 호위 군병(扈衛軍兵)이 노천(露天)에서 상할까 염려하여 파해 보내고, 단지 원래 입직(入直)하던 군병만 남게 하였다.
대장(大將)에게 명하여 각기 군사를 영솔하고 본영(本營)만 직숙(直宿)하게 하였다.
돈화문(敦化門)·광의문(光義門) 등의 문을 열고 수직군(守直軍)을 더 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를 나오게 하고 유시하기를,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랴만, 그 배포(排布)한 흉계와 췌마(揣摩)하여 경영해 안에서는 화응(和應)하고 밖에서는 군사를 동원케 한 것이 이와 같은 적(賊)은 없었다. 그 악역(惡逆)을 범한 자는 스스로 삼척(三尺)221) 이 있어 용서할 수 없으나, 친척(親戚)·고구(故舊)에 이르러서는 나는 역적의 친속이라 하여 털끝만큼도 의심하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이번 입시(入侍)한 장사 가운데서도 어찌 악역을 범한 친척·고구가 없겠는가? 그러나 평일에 그들이 역적질을 할 줄을 헤아리지 못하고 함께 서로 친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 만약 갑자기 그 친척·고구 때문에 스스로 의구(疑懼)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이는 내 본의가 아니다. 내가 비록 덕이 박하나 어찌 정녕하게 면유(面諭)하고서 두 말을 하겠는가? 이번에 하교한 후에는 비록 역적의 가까운 친속이라 하더라도 응당 좌죄(坐罪)될 자 이외에는 마땅히 깨끗이 씻어주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각기 이런 뜻을 본받아 안심하고 직분을 다함이 옳다."
하였다.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이 합천군(陜川郡)에 들어가서 장교 하세호(河世浩)·김계(金洎)·함만중(咸萬重) 등의 적의 괴수 조성좌(曹聖佐)·조정좌(曹鼎佐)·허택(許澤) 등을 잡아 묶어 왔다. 허택은 역적 허견(許堅)의 조카로 일찍이 연좌(緣坐)되어 이곳에 적거(謫居)하던 자이다. 장차 이보혁에게 바치려 하는데, 군수 이정필(李廷弼)이 진주(晉州)로부터 돌아와 읍 가운데 숨어 있다가 적이 붙잡혔다는 말을 듣고는 진중(陣中)으로 달려들어가 병사(兵使) 이시번(李時蕃)에게 그 벤 목을 보냈다. 처음에 이보혁은 감사(監司)의 영(令)을 듣자 울면서 군중에게 맹세하며 사졸로 하여금 ‘왕사(王師)’란 글자를 가슴 앞에 달게 하고 27일에 여러 고을의 군사를 양장평(洋腸坪)으로 모이기로 기약하였다. 길에서 적을 따른 중 해림(海林)과 철묵(哲默)을 만나 잡고는 죽이지 않기로 허락하고 해림으로 하여금 다시 적중으로 들어가 왕사(王師)의 형세가 굉장하다고 크게 떠들어 적의 마음을 동요하게 하고, 이어 전령(傳令)으로서 적을 따른 장리(將吏)에게 역순(逆順)을 효유하여 적을 사로잡아 공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날 밤에 이르러 합천 금양역(金陽驛)에 주둔하니, 본군에서 5리 되는 곳이었다. 군사의 위엄이 크게 떨쳐 적이 듣고서 기가 꺾이자 그의 군교(軍校) 하세호(河世浩)로 하여금 와서 도전(挑戰)하게 하고, 또 허실(虛實)을 엿보게 하였다. 이에 이보혁이 도순무사가 안성·죽산의 적을 격파한 관문(關文)을 내보이니, 하세호가 크게 놀라 성주(星州)의 장교와 사사로이 적을 잡아 공을 세우겠다고 약속하고는 갔다. 해림 역시 적중으로부터 돌아와 적의 장수를 사로잡을 수 있는 상황을 말하였다. 적의 장교 함만중(咸萬重)이 인리(人吏)222) 이소경(李召卿)과 함께 모의하고 적의 장수를 속여 객사(客舍)로부터 밤을 틈타 나와 빙고현(氷庫峴)에다 진을 치게 했으니, 적이 객사에 있으면 공격해 붙잡는 데 형세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새벽에 적의 장교가 장막(帳幕)의 죽삭(竹索)을 끊어버리고 여러 적을 엄습해 사로잡고는 수본(手本)223) 을 갖추어 이보혁에게 보고하자, 이보혁이 이를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 들어가니, 군수 이정필이 먼저 이미 들어와 적진을 점거하고 네 적을 베어 버렸다. 감사 황선(黃璿)이, 이정필은 전에 이미 군사를 버리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망하였고, 이번에는 또 제마음대로 적의 괴수를 베었다 하여 치계하고 조정에 죄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여 심유현(沈維賢)을 문초하였다. 임금이 유시하기를,
"너는 아이 때부터 궁중을 출입하여 받은 은혜가 매우 많았고, 내가 너를 대우한 것 역시 박하지 않았는데, 어찌 차마 이런 흉악을 저질렀느냐?"
하니, 심유현이 공초하기를,
"이유익(李有翼)이 묻는 바에 신은 그런 흉심(凶心)이 있음을 몰랐으며, 신의 수작 역시 여기에서 그쳤을 뿐 별로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1차 형신하니, 전과 같이 공초하였다. 임금이 심유현을 나래(拿來)한 금오랑(金吾郞)을 불러서 앞으로 오게 하여 유시하기를,
"일찍이 군중(郡中)에 신칙하여 부부인(府夫人)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하니, 금오랑이 대답하기를,
"이미 성교(聖敎)에 의하여 신칙했습니다."
하였다.
조덕정(趙德鼎)을 문초하니, 조덕정이 공초하기를,
"이유익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밀풍군(密豐君)에게 가서 전하라.’ 하였으나, 신은 가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후에 이유익을 신의 처가(妻家)에서 만났더니, 이유익이 말하기를, ‘난리가 났다. 밀풍군이 어떤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무엇을 묻는가?’ 하니, 이유익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좋은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답하기를, ‘그 사람은 사인(士人)과 같았다.’ 하였습니다. 이유익이 말하기를, ‘네가 가서 밀풍군을 만나보고 난리가 곧 일어나는데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서 오너라.’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난리가 일어난다는 설을 어찌 반드시 물어야 하는가?’ 하니, 이유익이 말하기를, ‘너의 인사(人事)는 이 모양이다.’ 하고는 돌아앉아 혀을 찼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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