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1728년 5월

싸라리리 2025. 8. 2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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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신해

이재(李縡)를 동돈녕(同敦寧)으로, 이세근(李世瑾)을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간원(諫院)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기 수사(京畿水使) 최도장(崔道章)을 체차(遞差)하는 일과 함경 중군(咸鏡中軍) 박창제(朴昌悌)를 나문(拿問)하는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홍중징(洪重徵)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별군직(別軍職) 박세재(朴世梓)를 나문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여러 훈신(勳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풍릉군(豐陵君)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신(臣)이 이수량(李遂良)의 출전(出戰)할 때의 일을 들으니, 그 충용(忠勇)한 기운이 사람을 늠연(凛然)하게 합니다. 당초 회령 부사(會寧府使)가 올라왔을 때에 신이 들은 것이 있으므로 아뢰었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회군한 뒤에 곧 이수량을 불러 그런 곡절을 말하고서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하는 뜻을 보였더니, 그가 또한 ‘그때 남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그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 말이 더욱 아름다우므로, 감히 사실(私室)에서 주고받은 말을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그때 아뢴 데에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이번에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한 것은 더욱 아름답다. 완춘군(完春君)이 전에 한 번 그의 얼굴을 보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늙으면 의기가 더욱 씩씩해야 한다.[老當益壯]’는 옛말은 이 사람에게 써야 하겠다."
하였다. 함은군(咸恩君) 이삼(李森)이 말하기를,
"신은 당초에 젊은 사람을 보내려 하였는데, 그가 자원하여 출정(出征)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순무사(都巡撫使)가 말하기를, ‘군중(軍中)에서 부르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영기(令旗)를 보고서야 오게 하였고 동지(動止)에 매우 절도가 있었다.’ 한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함녕군(咸寧君)은 중군(中軍)으로서 이만빈(李萬彬)이 힘을 다해 싸운 때의 일을 상세히 알 것이니 말하도록 하라."
하니, 박찬신(朴纘新)이 말하기를,
"신이 처음에 적병(賊兵)이 산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려 하였으나, 복병(伏兵)이 있을까 염려하여 이만빈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네가 먼저 들어가면 내가 대병(大兵)으로 뒤따르겠다.’ 하였더니, 이만빈이 곧 영기(令旗)·영전(令箭)을 청하여 개연(慨然)히 곧바로 들어가 손수 박종원(朴宗元)을 베었습니다."
하고, 한원군(韓原君) 이만빈(李萬彬)이 말하기를,
"박종원이 백마를 타고 직금 전포(織錦戰袍)를 입고 적병을 거느리고 그 동구(洞口)를 지키는데 우리 군사가 넘어 들어가 탄환 한 발로 맞히니 곧 땅에 쓰러졌기에 이어서 어지러이 베었습니다만, 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은 제 환공(齊桓公)에게 거(莒)에 있던 때를 잊지 말라고 권하였고,382)  우리 나라의 정도전(鄭道傳)도 태조(太祖)께 말에서 떨어졌던 때를 잊지 마시기를 청하였다.383)   오늘날 중흥(中興)하는 책임이 나에게 있기는 하나 경들은 희정당(熙政堂)에서 한 말을 잊지 말며, 훈신(勳臣)들도 공을 세운 것을 기쁘게 여기지 말고 영외(嶺外)384)  의 전역(戰役)을 잊지 말며, 장사(將士)는 출전하였을 때의 노고를 잊지 말라.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임금이 이만빈에게 명하여 철추(鐵椎)를 들어 보게 하자, 이만빈이 곧 전정(殿庭)으로 내려가 철추를 들어 돌리고 있던 곳에 도로 놓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역사(力士)이다."
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이사로(李師魯)·임환(任環)을 대질(對質)시켰다. 임환이 말하기를,
"내가 책을 빌리기 위하여 이유익(李有翼)의 집에 갔더니, 은영자(銀纓子)를 한 손님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야기하다가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싫어하는 기색이 있으므로, 나는 책을 빌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니, 이사로가 말하기를,
"내가 이유익의 집에 갔더니, 네가 이유익의 상을 보고 ‘너는 화청안(火晴眼)·봉암미(鳳巖眉)이니 중정(中頂)이 낮지 않으면 일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 않았는가? 이유익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요망한 말을 하는가?’ 하지 않았는가? 이유익이 또 내 상을 가리켜 ‘과연 어떠한가?’ 하니, 네가 말하기를 ‘네 눈썹은 추미(箒眉)이니 골몰(汨沒)할 상이다.’ 하지 않았는가? 정시현(鄭始顯)의 아우 정태현(鄭泰顯)과 원만주(元萬周)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또한 너에게 상을 논하니, 네가 말하기를, ‘살벌(殺伐)한 기운이 많으니 반드시 이것을 벗고 나서야 좋아질 것이다.’ 하지 않았는가? 원만주가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군사를 모으므로 네 말이 그러한 것이다.’ 하였고, 이유익이 너를 평안 병사(平安兵使)에게 보내려 한다 하였는데 이하(李河)가 서얼(庶孽)은 깔보이기 쉬우므로 안 된다 하니, 이유익이 또 말하기를, ‘황부(黃溥)의 아들을 보낼 만하나 수원(水原)에 있는데 그 집을 모르므로 임환을 보내어 불러오려 한다.’ 하였다."
하였다. 임환이 말하기를,
"낯이 여위고 눈이 누런 자가 이유익의 집에 있었는데 나를 보면 싫어하지 않았는가?"
하니, 이사로가 말하기를,
"그때 은영자를 한 손은 어느 사람인지 잘 모르겠으나, 무릇 모여 앉았을 때에 네가 오면 이유익이 반드시 매우 기뻐하고 은밀히 말하였는데 꺼리려 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황부의 아들은 네가 어찌 천문(天文)·지리(地理)·검술(劍術)을 안다 하고는 데려오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임환이 말하기를,
"나는 황부의 아들을 모른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말이 막혀서 맞대면에서 꺾이나 장전(帳殿)에서 고할 일이 있다."
하니, 임금이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물러서게 하고 말하기를,
"이들은 우두머리이니 대신(大臣)과 금당(禁堂)385)  이 상세히 물으라."
하였다. 임환이 고하기를,
"이세우(李世遇)는 참으로 큰 역적입니다."
하였는데, 다시 임환을 추문(推問)하니, 임환이 공초(供招)하기를,
"신(臣)과 이유익은 서로 아는데, 이유익이 악역(惡逆)으로 신을 꾀었습니다. 그 사람됨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굳세고 사나우며 말을 하지 않으나,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뜻에 맞는 사람이 있으면 진심을 털어놓는데, 남태징(南泰徵)과 이사주(李思周)가 내응(內應)한다고 늘 말하고는 했습니다. 대개 갑진년386)  부터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이 비로소 마음먹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유익의 집에 갔더니 이사로·이헌민(李獻民)도 모여 앉아 있었는데, 이유익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점 잘 보는 사람을 얻겠는가?’ 하니, 박필현이 말하기를, ‘영남(嶺南)에 소강절(邵康節)387)   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이윤사(李允師)이다.’ 하였습니다. 이유익이 사람을 보내려고 의논하다가 신이 눈살을 찡그리고 싫은 기색을 한 것은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여서입니다. 을사년388)   봄에 박필현과 이유익이 가산(家産)을 처분하고 삼남(三南)에 출몰하여 혹은 둑을 쌓는다고도 하고 혹은 집을 짓는다고도 하였습니다. 박필현은 상주(尙州)에 가서 한세홍(韓世弘)을 주인으로 삼았다가 괴산(槐山)으로 옮겨 가서 이인좌(李麟佐) 4형제와 결탁하였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이인좌가 장사(將士)이기는 하나 그 아우만 못하다.’ 하였으나, 박필현이 말하기를, ‘호남 병사(湖南兵使)는 이인좌가 맡도록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임징하(任徵夏)의 소(疏)가 나온 뒤에 박필현이 시골에서 달려와 낙중(洛中)389)  의 친구를 찾아 보고 말하기를, ‘이제 때가 바뀌었으나 임징하가 대행 대왕(大行大王)을 범하여 능멸하므로 인심이 요란해질 것이다.’ 하였는데, 그 뜻은 임징하를 죽이지 않으면 한 가지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미년390)   7월 1일에 일이 일어나고 8, 9월쯤에 박필현과 한세홍이 이유익의 집에 모여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론(老論)이 아직 있으면 일이 쉬울 것인데, 지금은 소론(少論)이 뜻밖에 다시 들어갔다. 비록 들어간 자는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이긴 하나 준절(峻切)한 소론에게는 희망이 있다. 무릇 인심이 조금 누그러져서 자못 영도(榮塗)에 들어가면 미운 마음도 많이 풀릴 것이니, 이제는 낙중의 우리들이 손을 거두고 관망해야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미년 겨울 석 달 동안은 그들이 다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무신년391)   정월에 한세홍과 양명하(梁命夏)가 이유익 등을 겁주어 말하기를, ‘삼남에서 처결한 자는 녹림(綠林)392)  의 무리이니, 지금은 편안히 앉아 있더라도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이가(李哥)에게 전하여 사흘 동안 치재(致齋)하고 분향(焚香)하고서 척점(擲占)393)  하게 하였더니 점사(占辭)에 ‘처음에는 3, 4월 사이에 반드시 막히고 실패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뒤에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동쪽에서 잃은 것을 서쪽에서 거둔다는 것입니다. 영남의 군사가 이른바 도원수(都元帥)·부원수(副元帥)는 누구누구라는 말은 그것이 귓속말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사자(士子) 1천여 인이 처음에 큰 절에서 모이고 다시 산속에서 모인 것은 대개 3월 13, 14일인데, ‘보름 이전에 호남 군사가 서방에 응하여 일어나고, 민관효(閔觀孝) 등의 이천(利川)·여주(驪州) 군사가 중간에서 일어나고, 성안이 소란하면 이유익·남태징이 이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을 소탕할 것이니, 일이 쉬울 것이다.’라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들이 상의할 때에 이유익이 번번이 눈살을 찡그리고 말하기를, ‘환국(換局)하지 않았으면 일이 석권(席卷)하듯이 쉬울 것인데, 긴요하지 않은 환국이 있었기 때문에 살육할 즈음에 죄 없는 자가 많이 억울하게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을 가리킨 것입니다. 3월 9일에 훈장(訓將)394)  ·어장(御將)395)  ·영상(領相) 집에 장사(壯士)를 몰래 들여보내어 죄다 막되 만약에 동요하면 쳐죽인다 하였으니, 이사로의 서찰의 말도 근거가 있습니다. 3월 3일에 한세홍과 민관효 등이 이유익의 집에 모였는데, 와서 모인 자 30여 인 중에는 혹 문 안에 말을 매어 둔 자도 있고 걸어서 간 자도 있었으며 이사로도 그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신이 마침 가서 그 이름을 물었더니, 이유익 등이 다 숨기고 혹 자(字)로 부르는데 윤관보(尹寬甫)가 곧 윤덕유(尹德裕)였습니다. 한세홍이 말하기를, ‘녹림 군사가 이제 태인현(泰仁縣)에 모였으므로 일이 장차 일어날 것이고, 양성(陽城) 군사도 모였으므로 중지할 수 없는 형세이니, 이 뜻을 평안 병사에게 알려서 빨리 군사를 일으키게 해야 하겠다.’ 하고, 한세홍(韓世弘)이 또 말하기를, ‘일은 이미 급해졌는데 평안 병사에게 알리면 왕래할 즈음에 고변하는 일이 있을 듯하다. 이뒤로는 모든 의논을 길가에다 집을 짓듯이 하지 말고, 밤에 잡아서 거사하면 일이 쉽고 편할 것이다. 서원수(西元帥)에게 알릴 것 없으니, 서로(西路)에 가는 것은 중지하는 것이 옳겠다.’ 하니, 그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말하기를, ‘무릇 일은 대장(大將)이 영을 낸 뒤이라면 변경하는 연유를 모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한세홍이 비를 무릅쓰고 서로로 달려갔습니다. 그뒤 7, 8일쯤에 양성에서 한 서찰이 왔는데, 이유익이 말하기를, ‘양성 적중(賊中)에서 온 서찰이 있는데, 지금 차례로 군사를 일으키니 낙중의 친구도 전에 약속한 것과 같이 빨리 주선하라 하였으니, 이 뜻도 평안 병사에게 알리려 한다.’ 하였습니다. 이럴 즈음에 군관(軍官) 안추(安樞)가 마침 왔으므로 이 기별을 알리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그들이 신이 상변(上變)할까 염려하여 한순(韓洵)의 집에 가두어 두었으므로, 신이 상변하려 하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해 8, 9월쯤에 한유(韓游)·이하(李河)·이사성(李思晟)이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과 청남(淸南)396)  을 죄다 죽이려는 모의를 하였다 합니다. 한세홍이 지난해 겨울에 평안 병영(平安兵營)에서 이사성의 말을 전해 왔는데, 그는 말하기를,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과 청남이 보합(保合)하여 어가(御駕)를 보호하고 팔로(八路)에서 군사를 징발하는데, 죄다 근왕(勤王)397)  하지는 않더라도 근왕하는 자도 반은 될 것인데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였으나, 이사성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여기서 군사를 일으켜 나가면 도성(都城)의 군사가 죄다 나갈 것이고 삼남(三南)의 남은 자도 적을 것이니, 한 번 쳐서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청남은 거론하지 않고 완화책을 취하는 소론은 죄다 죽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청남은 자연히 근본으로 돌아가고 노론의 완화책을 취하는 자와 소론의 완화책을 취하는 자도 앞으로 보답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세우(李世遇)와 이사로(李師魯)를 대질(對質)시켰다. 이사로가 말하기를,
"내가 이하(李河)의 집에 갔더니, 윤덕유(尹德裕)·민관효(閔觀孝)·이유익(李有翼)과 네가 같이 앉아 있는데, 이유익이 너에게 말하기를, ‘이 노인이 일을 아니, 양성(陽城)에 가서 군량(軍糧)을 주고 군사의 반을 경성(京城)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니, 네가 말하기를, ‘20년 동안 말을 타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멀리 가겠는가?’ 하지 않았는가? 이유익이 말하기를, ‘반계 노옹(磻溪老翁)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니, 네가 말하기를, ‘반계 노옹이 어찌 사환(使喚)이 되겠는가?’ 하지 않았는가?"
하니, 이세우가 말하기를,
"평안 병영에 갔다는 일은 맞대면 때에 이미 꺾였는데, 또 나를 반계 노옹의 일로 무함하려 하는가?"
하였다. 이사로가 말하기를,
"네가 또 ‘내 소견으로는 한 계책이 있다.’ 하지 않았는가? 큰 군사가 남한(南漢)을 점거하면 대가(大駕)가 반드시 강도(江都)398)  로 들어갈 것이고, 강도의 길을 막아서 조운(漕運)을 끊으면 반드시 옹옹(喁喁)399)  하여 자진(自盡)할 것이라 하며 이어서 줄곧 손을 돌리면서 ‘이것이 묘책이다.’ 하였다."
하니, 이세우가 말하기를,
"그날은 내가 본디 이하의 집에 가지 않았으니, 네 말이 어찌 허망하지 않은가? 손을 돌렸다는 말은 더욱 우습다. 남한과 강도는 국가에서도 지키기 어려운데, 더구나 네가 말하는 4, 5백의 적병(賊兵)으로 남한을 점거하고 강도를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세우를 한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공초(供招)는 여전하였다.

 

금오랑(金吾郞)400)  과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주(李思周)를 잡아들이고 정찬술(鄭纘述)을 평안 병사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5월 2일 임자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은밀히 함경 감영(咸鏡監營)에 관문(關文)401)  을 보내어 임환(任環)의 형 임정(任珵)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임정은 이때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의 막하(幕下)에 있었는데, 뒤에 정배(定配)되었다.

 

도승지(都承旨)        박사수(朴師洙)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삼가 듣건대, 간원(諫院)에서 아뢰어 고(故) 영남 감사(嶺南監司)        황선(黃璿)은 공이 있으므로 녹훈(錄勳)해야 한다고 논하였는데, 원훈 중신(元勳重臣)은 탑전(榻前)에서 ‘그가 분발하여 적을 치지 못하였다.’고 매우 배척하였다 합니다. 신도 새로 영외(嶺外)에서 왔습니다만, 어찌하여 중신이 본 바가 신이 들은 바와 다릅니까? 신이 듣건대, 이 적이 안음(安陰)에서 처음 일어난 것은 3월 20일이고 이정필(李廷弼)이 합천(陜川)을 버린 것은 26일이며 그 전 합천에서는 이미 군사를 모아 진을 쳤는데 그 모은 군사는 다 황선의 전령(傳令)에 따른 것이었으니, 중신이 이른바 수령(守令)이 망설이고 감히 군사를 모으지 못하였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여 나온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변이 일어난 뒤에 황선이 이시번(李時蕃)을 시켜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으나 이시번이 따르지 않았고, 이석복(李碩復)을 시켜 적을 치게 하였으나 이석복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보혁(李普赫)·정양빈(鄭暘賓)을 시켜 좌우에서 나아가 치게 하고, 박필건(朴弼健)을 시켜 북상하는 길을 굳게 지키게 하고, 한날(韓㻋)·김정상(金鼎相)을 시켜 길을 나누어 잇달아 원조하게 하고, 또 그 군관(軍官)        김진옥(金振玉)을 시켜 대구(大丘)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독전(督戰)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지휘하고 조치하는 것을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으니, 신은 참으로 그 공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 충성에 감동됩니다. 다만 황선은 관망(觀望)한 장수와 도망하여 숨은 수령을 감싸지 못하고 아뢰는 서장(書狀)에 여러 번 나타냈을 뿐인데, 이것이 또한 무슨 나라를 저버린 것이겠습니까? 공을 정하고 상을 주는 것은 예전부터 공평하기 어렵습니다. 단청(丹靑)402)                  ·대려(帶礪)403)                  의 영화가 더구나 이미 죽은 뒤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슬퍼하고 아까워하는 것은 공이 있는 자에게 보답하지 않고 따라서 뒤미처 허물하는 의논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중외(中外)를 획책(畫策)한 대신(大臣)도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도신(道臣)이 한때 지휘한 것을 어찌 논공(論功)까지 하겠는가?"
하였다.

 

간원(諫院)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臣)은 이정열(李廷說)을 본부(本府)에서 엄히 형신(刑訊)하여 정상을 알아 내게 하신 분부에 대하여 매우 의아하여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정열이 군사를 모아 넘겨 준 것은 이미 적의 관문(關文)에 대한 도부(到付)404)  가 있고, 인부(印符)를 풀어서 적에게 준 것은 그가 스스로 승복한 공초(供招)에 있으니, 이 두가지에 대하여 절로 해당하는 율문(律文)이 있습니다. 이정열을 본부에서 엄히 형신하라는 명(命)을 도로 거두시고 이어서 국청(鞫廳)에서 곧바로 결안(結案)405)  을 봉입(捧入)하여 국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부(該府)에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제도(諸道)에 하유(下諭)하기를,
"이 뒤로는 역옥(逆獄)에 관계된 사람은 본도(本道)에서 엄히 핵사(覈査)하여 그 실상을 알아내서, 정상에 의혹이 없는 자는 아뢰어 처형하고, 의혹이 있는 자는 아뢰어 품지(稟旨)하고, 그 나머지 사형(死刑)을 감면하거나 소석(疏釋)해야 할 자는 본도에서 참작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최필번(崔必蕃)의 사형을 감면하여 극변(極邊)에 충군(充軍)406)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임환(任環)을 다시 추문(推問)하였는데, 한 차례 형신(刑訊)하니, 임환이 공초(供招)하기를,
"갑진년407)  ·을사년408)   사이에 이천해(李天海)가 흉언(凶言) 때문에 주벌(誅罰)받았는데, 이것은 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이 흉언을 만들어 내고 이천해를 남몰래 부추기어 또한 이 말을 항간에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한세홍(韓世弘)·이유익이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였는데, 그들이 매양 말하기를, ‘그때 이천해를 부추기어 흉언한 것이 이제 와서 자못 도움이 된다.’ 하였습니다. 한세홍은 또한 말하기를, ‘심유현이 당초에 흉언한 것이 일찍이 발각되었다면 의당 큰일이 났을 것인데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으니,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하겠다.’ 하고, 이유익은 말하기를, ‘심유현은 재빠르고 주밀(周密)하므로 이 말을 퍼뜨렸는데, 그가 반역할 마음을 품었을 뿐더러 밀풍군(密豐君)을 추대할 뜻이 있었고, 밀풍군은 이것을 모르기는 하나 늘 황포(黃袍)를 몸에 걸친다는 말을 하였다.’ 하였습니다. 2, 3월쯤에 한세홍이 이유익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내군(內軍)이 모자라니 어찌할 것인가?’ 하니, 이유익이 말하기를, ‘이 별장(李別將)과 남 대장(南大將)이면 넉넉하다. 많아야 되는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한세홍이 가고 나서 신(臣)이 이별장을 모르므로 이유익에게 물으니, 이유익이 웃으며 답하기를, ‘이사주(李思周)이다.’ 하였는데, 이유익의 말이 이사주는 밀풍군의 족속으로서 바야흐로 금군 별장(禁軍別將)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유현이 반역할 마음을 품고 밀풍군을 추대하려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만들어 성덕(聖德)을 더럽혀서 인심을 선동하여 그 반역하는 일을 이루려 하였는데, 신은 심유현이 이천해에게 부탁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홍계일(洪啓一)을 추문(推問)하니, 홍계일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흉적(凶賊) 이유익(李有翼)과 안면이 익숙하기는 하나 정의(情誼)는 길가는 사람과 같을 뿐더러 서로 좋아하지 않을 까닭이 있어서 끊으려 하지 않아도 절로 끊어졌습니다. 이유익뿐이 아니라 신은 역적 심유현(沈維賢)·역적 박필현(朴弼顯)·이사로(李師魯) 등과도 다 안면이 있으나, 신은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고 경서(經書)가 아니면 읽지 않고 집이 아무리 가난하기는 하나 조금도 남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는데, 역적 이유익 등이 경영하는 것을 보면 청탁하고 뇌물받고 구걸하고 방납(防納)409)  하는 일뿐이므로, 마음으로 늘 더럽게 여겼습니다. 을사년410)   벗의 집에 갔더니 이유익이 먼저 와서 자리에 있었는데, 그 주인이 이유익이 임거정(林巨正) 성기(城基)를 지나면서 지은 시에 ‘대성을 위하지 않고 차라리 너를 위하여[不爲大聖寧爲汝]……’라 한 것을 거론하기에, 신이 속으로 놀랍고 분하여 잠자코 말하지 않으니, 이유익이 비웃으며 말하기를, ‘취중에 지은 것을 어찌하여 반드시 퍼뜨려 말해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돌아와서 친한 사람에게 전하고 말하기를, ‘이 사람의 심술이 이러하니 반드시 능히 적(賊)이 될 것이다.’ 하고, 그 뒤로는 교제를 끊으려 하였으나, 역적 이유익이 흉악한 것이 보통이 아니므로 그에게 중상당할까 염려하여 뚜렷이 말하여 끊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지난해 9월에 적성(積城)을 지나다가 역적 이유익이 박엽(朴燁)의 무덤에 들러 절하고 평생을 태산(泰山)처럼 우러러본다는 말을 듣고 신이 말하기를, ‘박엽을 태산처럼 우러러본다면 그 사람을 알 만하다.’ 하였습니다. 이 두 시(詩)를 본 뒤로는 승냥이나 이리처럼 여겼으므로 그 뒤로 신은 한 번도 그 집에 간 일이 없는데, 병오년411)  에 신이 어미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 역적 이유익이 한두 번 보러 왔습니다. 이사로가 상을 당한 뒤에 신이 가서 조문(弔問)하였는데 조문받는 거동이 이상하므로 신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 여기고 그 뒤로는 다시 찾아간 일이 없습니다. 이유익·이사로 등과는 정분이 이러한데, 어찌 같이 모의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여적(李汝迪)이 장계(狀啓)하기를,
"역적 대장(大將) 정세유(鄭世儒)와 그 아들 정의경(鄭宜璟)·정의장(鄭宜璋) 등을 잡아 효시(梟示)하고 역적 위중군(僞中軍) 우세장(禹世章)·위부지휘(僞副指揮) 우세만(禹世萬)·위군관(僞軍官) 정중건(鄭重建)과 역적 정숭유(鄭崇儒)·정홍유(鄭弘儒)·정상유(鄭象儒) 등을 잡아 엄히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유숭(兪崇)을 도승지(都承旨)로, 박사익(朴師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우참찬(右參贊) 정제두(鄭齊斗)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몸소 행하여 보람이 있는 것을 아뢰라."
하니, 정제두가 말하기를,
"경(經)에 ‘날로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진다.’ 하였습니다. 본령(本領)이 이미 서고 공부가 이어지면 천운(天運)이 쉬지 않고 일월(日月)이 바로 밝은 것과 같을 것이니, 그런 뒤에야 독실한 공부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다. 어떻게 하면 조정(朝廷)의 기상이 탕평(蕩平)하고 백성이 생업에 안정하겠는가?"
하니, 정제두가 말하기를,
"중정(中正)을 세워 탕평하면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습니까? 양역(良役)을 변통할 방법과 정치하는 체례(體例)를 밝히는 일 같은 것을 강구하여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선온(宣醞)412)  하라고 명하였다.

 

5월 3일 계축

심택현(沈宅賢)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5월 4일 갑인

대신(大臣)과 2품(品) 이상에게 내일 조당(朝堂)에 모여 백성을 구제할 방책을 상의하라고 명하였다.

 

대신(大臣)과 금오 당상(金吾堂上)과 문사 낭청(問事郞廳)413)  으로 옥사(獄事)를 국문(鞫問)한 전말을 상세히 아는 자에게 명하여, 전후 국안(鞫案)에서 상고해 내고 지금 갇혀 있는 죄인을 초록(抄錄)하여 각각 이름 아래에 그 죄의 경중과 끌어댄 맥락(脈絡)을 써서 한 책을 만들게 하였다.

 

조관규(趙觀奎)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세 차례 형신(刑訊)하니, 조관규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신윤조(辛胤祖)·조덕규(趙德奎)·조상(趙鏛) 등이 바야흐로 군사를 징발하여 반역한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멸족(滅族)할 일을 하려 하는가?’ 하였으나, 조상이 듣지 않고 군사를 징발하여 청주(淸州)로 향하였는데 거느린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신윤조도 가정(家丁)을 거느리고 조상과 같이 갔다고 들었습니다. 정상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하니,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신경귀(辛景龜)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신경귀가 공초(供招)하기를,
"3월 10일에 신의 아비가 말하기를, ‘난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조관규(趙觀奎)·조덕규(趙德奎) 등에게서 들었는데, 그들이 같이 참여하고 남수언(南壽彦)·목중형(睦重衡)이 장수가 된다 하더라.’ 하였습니다. 조관규 등이 신의 아비를 공갈하고 죽이려 하므로, 신의 아비가 신에게 말하기를,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남수언·목중형이 죽이려 할 것이고, 고변(告變)하려 하면 고변하기 전에 죽일 것이다.’ 하고, 가족을 데리고 산속으로 피하려 지평(砥平)의 용문산(龍門山)으로 갔습니다. 정상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소대(召對)414)  를 행하였다. 주자 봉사(朱子封事)를 강독(講讀)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오광운(吳光運)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하게 여기는 정치에 힘쓰시나, 구습을 따라 이제까지 한갓 한바탕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뿐이니, 어찌 아깝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일은 오로지 고식(姑息)을 일삼는다. 양역(良役)의 변통으로 지난번에 2품이 모여 의논하라고 분부하였으나, 한 달이 지나도 아직 거행하지 않는다. 변란을 겪은 뒤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도 오히려 이러하니,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 내일 아침에 대신(大臣) 이하 2품 이상과 양사(兩司)와 유신(儒臣)이 조당(朝堂)에서 상의한 뒤에 등대(登對)하여 여쭈라."
하였다.

 

5월 5일 을묘

이춘제(李春躋)를 사간(司諫)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심전(沈㙉)을 장령(掌令)으로 삼고, 조현명(趙顯命)의 자급(資級)을 더하여 가선(嘉善)으로 하였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이수익(李壽益)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번에 역적이 공초한 가운데에서 무고(誣告)한 것을 스스로 승복한 말은 원래 논할 만한 것이 없거니와, 흉적(凶賊)이 죽이려 하였다는 공초에는 믿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마는, 그 나머지 모든 사람의 이름이 여러 번 나오고 혹 그 상세한 것을 드러내어 고한 것은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으므로 곧 조사하여 처리해야 하겠으니, 청컨대 이번에 역적이 공초한 데에 나온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명백히 무고당한 자 이외에는 모두 나문(拿問)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대신(大臣)·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정석삼(鄭錫三)이 말하기를,
"정희량(鄭希亮)이 심유현(沈維賢)이 지어낸 흉언(凶言)을 듣고 화답하고 창도(唱導)하여 인심을 의혹시켜 한 나라의 반쯤 되는 사람이 흉역(凶逆)으로 빠져 들었는데, 역적 임환(任環)·이사로(李師魯) 등이 승복한 뒤로 국가에 대한 무혹(誣惑)이 비로소 시원하게 씻어졌으니, 그 죄인이 공초한 것을 팔방에 반포하여 보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대고(大誥)를 지어 팔도에 효유(曉諭)하면 더욱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영남(嶺南) 사람을 보면 죄다 속지는 않았으므로 온 도(道)의 사람이 호응하지 않았습니다마는, 죄인의 긴요한 공초를 초록(抄錄)하여 명백히 반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풍릉군(豐陵君)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갑진년415)  에 한 흉언을 심유현이 받아서 갑진년 이후의 흉언을 만들었고, 이천해(李天海)가 임금을 헐뜯은 일도 다 심유현이 꾀어 시킨 탓인데, 두 역적의 공초가 나온 뒤로 흉언의 근저(根柢)가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하고,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역적의 지극히 흉악한 정상은 다만 한때 반포하여 보이기만 하고 말 수 없으니, 전후의 국안(鞫案)을 죄다 가져다가 한 통(通)을 초록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 인쇄하여 널리 전파하여 천만세(千萬世)에 명백하게 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말하기를,
"국안(鞫案) 중에서 긴요한 것을 베껴 내어 예전 이괄(李适)의 변란 때의 《서정록(西征錄)》처럼 한 책을 만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광좌가 말하기를,
"요상(僚相)과 송인명(宋寅明)이 전말(顚末)을 잘 아니, 이 사람들에게 맡겨서 반포하되 《무신감란록(戊申勘亂錄)》이라 이름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조문명이 말하기를,
"당초에 역도(逆徒)가 반드시 갑진년416)   이전의 패역(悖逆)한 말을 이어받아 펴려고 심유현을 꾀어 흉언을 지어낸 정상이 이제 이미 마디마디 드러났으니, 팔도에 고유(告諭)할 뿐더러 책자를 만들면 만세에 전하는 것이 더욱 완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유(告諭)는 한때에 보일 뿐이고 책자는 만세에 전할 수 있으니, 좌상(左相)이 그 일을 주관하고 송인명이 찬술하고 제신(諸臣)이 참증(參證)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 등이 아뢰기를,
"예전부터 역란(逆亂)하여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한 자는 있으나, 갖가지 흉언을 지어내어 방자하게 임금을 무함하고 인심을 어지럽힌 것으로 말하면 어찌 오늘날 역변(逆變)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대개 그 흉악한 꾀와 반역한 정상은 참으로 역적 김일경이 지은 교문(敎文) 가운데에서 나왔고, 이천해(李天海)·이순관(李順觀)·정탁(鄭倬) 등 여러 역적의 변란도 다 심유현이 몰래 부추긴 데에서 말미암았는데, 역적 이사로·임환의 공초가 나와서 흉언의 근저가 여기에서 더욱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더구나 그 집이 가난하다는 말로 보면 그가 몰래 반역할 뜻을 일으켜 부귀하려고 꾀한 것은 일조일석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역란이 일어난 것은 김일경에게서 비롯하여 심유현에게서 마쳤으므로 그 흉역의 속마음이 일관하여 왔으니, 그 죄악을 논하면 참으로 모든 역적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그는 이미 완악하여 신장(訊杖)을 맞다가 지레 죽었으므로, 왕법(王法)이 시행될 것은 집을 부수고 그 자리에 못을 파는 일뿐이니, 청컨대 역적의 괴수 심유현의 집에 부수고 못을 파는 율(律)을 빨리 왕부(王府)417)  에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고, 장령(掌令) 홍중징(洪重徵) 등이 아뢰기를,
"역적 김일경이 교문을 지은 뒤로부터 또 이천해가 임금을 헐뜯는 흉언이 있었는데, 그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극히 흉악한 죄는 참으로 임금과 신하가 있은 이래로 없던 변고이니, 오늘날의 신하로서 누구나 다 속을 썩이고 뼈가 아파 피눈물을 흘리며 한 번 임금이 몹시 무함당한 것을 씻으려 생각한지 이제 몇 해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굽어보고 귀신이 옆에 벌여 있어 몰래 행한 역모(逆謀)가 자연히 드러나서 이번 국옥(鞫獄)에서 비로소 흉언을 지어낸 것이 본래 심유현에게 비롯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역적 김일경을 이어받고 이천해를 꾀어 비밀히 퍼뜨리고 몰래 선동하여 인심을 어지럽혀 서로 전하고 이어받은 것이 일관하여 온 정상이 역적 임환의 공초에 이르러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와서 보면 이유익(李有翼)·민관효(閔觀孝)·박필현(朴弼顯)·박필몽(朴弼夢)·한세홍(韓世弘)·이하(李河)와 여러 나가(羅哥) 등 역적이 모두 이 역적의 우익(羽翼)이고 폐고(廢錮)된 족속으로서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와 먼 지방의 어리석고 사나운 무리가 휩쓸려 붙어서 서로 창화(唱和)하여, 처음에는 글을 내어 걸어 중외(中外)에 퍼뜨리고 나중에는 군사를 일으켜 호서(湖西)·영남(嶺南)에서 설친 것도 모두 이 역적이 주장한 것이니, 역적의 공초 가운데에 이른바 그 집이 적막(寂寞)하다는 말은 참으로 흉역(凶逆)의 속마음을 다 드러낸 것입니다. 그 죄악을 논하면 베어서 만 토막을 만들어도 족히 신명과 사람의 분노를 풀만하지 못한데 형장을 맞다가 지레 죽어서 그 목을 보전하였으니, 이미 크게 실형(失刑)한 것이며, 역적을 토죄(討罪)하여 으레 시행해야 할 율이 아직 시원히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이것이 성의(聖意)를 두신 것이 있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왕법이 무너지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므로 여정(輿情)의 울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오늘날 신들이 임금을 위하여 분을 풀 것은 집을 부수고 못을 파는 한 가지 일뿐이니, 청컨대 역적의 괴수 심유현의 집을 부수고 못을 파는 율을 빨리 시행하소서."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연계(連啓)하여 한 해를 넘기며 쟁집(爭執)하였으나, 임금이 부부인(府夫人)이 있기 때문에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역적들이 흉언을 지어낸 것이 어디에서 말미암아 나왔는가? 역적 김일경과 역적 목호룡(睦虎龍)이 마음에 다른 뜻을 품고 바야흐로 모반을 꾀할 때에 서덕수(徐德秀)의 아주 패악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공초가 나왔으므로 그들이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듯하여 더욱 흉악한 마음을 싹틔우고 흉악한 말을 내게했는데, 흉악한 말을 낸 자는 심유현이고 뒤미처 김일경·목호룡을 이어받아 악역(惡逆)을 방자하게 행한 자는 역적 박필몽과 여러 역적들이다. 이것을 미루어 보면 일이 어찌 앞뒤가 없겠는가? 역적의 변란이 있은 뒤에 번번이 한 마디 말하려 하였으나, 이 일에 언급하면 마음과 창자가 모두 아팠고, 이미 버려두어 논하지 말게 한 뒤에는 너무 심함을 면할 수 없으므로 미처 하교하지 못하였다. 역적을 토죄하고 거짓을 밝히는 이때를 당하여 흉악한 말을 처음 내고 흉악한 마음을 일으킨 사람을 버려두고 묻지 않으면 내 처분이 뇌뢰낙락(磊磊落落)하다 하겠는가? 서덕수를 그대로 역안(逆案)에 두라고 해부(該府)에 분부하라."
하였다.

 

호서 안무사(湖西安撫使) 김재로(金在魯)가 장계(狀啓)하기를,
"역적 이조겸(李祖謙)·한대명(韓大命)·민백효(閔百孝)·민덕효(閔德孝)·민성효(閔性孝)·민경효(閔景孝) 등을 잡아 엄히 가두었습니다."
하니, 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이백전(李百全)을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이백전이 공초하기를,
"정상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이정열(李廷說)이 처형되었다. 당초 이정열이 청안 현감(淸安縣監)이 되었는데 적을 보고 놀라고 겁나서 인부(印符)를 풀어 주고 적의 관문(關文)을 도부(到付)하였으므로 처형되어야 할 것인데, 이정열이 의병(義兵)과 함께 적을 쳐서 베고 청안현을 회복한 것은 공이 죄를 갚을 만하다고 말하였으므로 임금이 살려 주려고 생각하였으나, 이미 나국(拿鞫)당하고서도 오히려 적의 위호(僞號)를 부르고 혼미하여 발명할 줄 몰랐고, 청주(淸州) 사람 신대기(辛大器) 등이 또 그가 공이 있다고 속이는 정상을 하소하였으므로 금부(禁府)에 내렸다. 형신(刑訊)을 받고 첫 공초에 곧 스스로 승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형되었다.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상소(上疏)하기를,
"삼가 성교(聖敎)를 보건대, 가엾이 여겨 슬퍼하시는 뜻이 말씀에 넘칩니다. 전하께서 여기에 대하여 먼저 힘쓸 일을 알고 따라서 오늘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염려하신다면 오직 수령(守令)을 신중히 선택하는 것이 가장 긴요합니다. 팔도의 3백여 고을을 죄다 가리기는 어려우나, 잘 살피고 삼가서 차출하여 제수하도록 전조(銓曹)에 요구하고 엄명(嚴明)하게 출척(黜斥)하도록 도신(道臣)에게 요구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이것을 힘쓴다면, 적중하지는 못하더라도 멀리 벗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것이 절실하니 매우 감탄스럽다."
하였다.

5월 5일 을묘

대신(大臣)과 2품(品) 이상과 삼사(三司)를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이 곤궁하다는 말은 참으로 예사롭게 하는 말이다. 이제 큰 변란을 당한 뒤이므로 돌볼 방책이 참으로 급하니, 오늘 2품 이상을 인대(引對)한 것은 의도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만약 좋은 모책(謀策)이 있으면 글로 써서 아뢰라. 그러나 호포(戶布)·결전(結錢)·구전(口錢) 같은 것은 지금의 인심으로는 결코 시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니,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듣건대, 양서(兩西)의 수령(守令)에게 제번전(除番錢)이 많이 있고, 함경도에도 가솔군관전(假率軍官錢)이 많이 있다 하니, 반은 관가(官家)에 주어 공용(公用)에 보태고 반은 민간에 주어 징포(徵布)의 수를 채우게 한다면, 지식이 있는 수령은 반드시 미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그 해 전조(田租)의 반을 내려 주었는데, 이것은 백성이 정상(正常)으로 나라에 바치는 것을 내려 준 것이므로 백성이 그것이 늘 있지 않은 일인 줄 알았으나, 이제는 이것과 크게 달라서 고을에서 받아들인 물건을 빼앗아 백성에게 주는 것이므로, 내년에도 이 일을 바라면 어떻게 이어 가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러한 은전(恩典)은 늘 있지 않은 일인데, 어찌 번번이 거행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도 의당 알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들 생각하는 것을 써서 바치게 하였다.

 

5월 6일 병진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문명(趙文命)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사직(司直) 김흥경(金興慶)이 상소(上疏)하고 남으로 돌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번 신칙(申飭)하였는데 조정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진작 시골로 내려갔으니, 신하의 분의(分義)가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이 소(疏)는 도로 내리고 빨리 올라오라는 뜻으로 별유(別諭)하라."
하니, 도승지(都承旨) 유숭(兪崇)이 말하기를,
"신하는 도(道)로 임금을 섬기므로 떠날 만하면 떠나야 할 것이고, 임금은 예(禮)로 신하를 부리므로 소나 말처럼 매어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들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다 떠나거라. 경들이 떠나더라도 내가 어찌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죄인 이도(李燾)를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대저 이도의 공초(供招)에 이미 갑진년418)   겨울에 이인좌(李麟佐)가 보러 와서 군사를 논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대저 이인좌가 반드시 갑진년 겨울에 군사를 논한 것은 그 뜻을 알 만한데, 반드시 법을 굽혀서 용서하려 한다면 왕법(王法)은 어찌되겠습니까? 유독 이미 죽은 다른 역적에게 원통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거두시고 다시 엄히 국문(鞫問)하소서. 죄인 홍익귀(洪益龜)는 역적의 지친(至親)으로서 어지러이 같이 참여하였고 그가 이미 정상을 알았다고 스스로 승복하였으니, 전하께서 부당하게 용서하시려 하더라도 안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도의 일은 경의 뜻이 그러하니,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라. 홍익귀는 이미 참작하여 처치하였으니, 다시 논할 것 없다."
하였다.

 

5월 7일 정사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관규(趙觀奎)를 친국(親鞫)하였다. 조관규가 공초(供招)하기를,
"조상(趙鏛)이 어느 날 달밤에 찾아와서 말하기를, ‘급제하여도 사람된 직책을 얻지 못하니, 노론(老論)이 되지 않으면 남쪽 월(越)로 달아나거나 북쪽 호(胡)로 달아나는 밖에 다른 방책이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신을 용동(聳動)하게 할 뜻이었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니, 조상이 말하기를, ‘남방에 도둑이 있다 하니 내가 들어가려 한다.’ 하였습니다. 정상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김덕삼(金德三)을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두 차례 형신(刑訊)하고 낙형(烙刑)으로 위협을 베푸니, 김덕삼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의 사위 안정(安𤊟)이 신에게 말하기를, ‘형 안엽(安熀)과 이유익(李有翼) 등이 반역을 꾀하는데, 일은 4월에 있을 것이고, 한세홍(韓世弘)이 평안도에 갔다가 돌아온 뒤에야 일이 되고 안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여기에서 마흔 냥이나 쉰 냥쯤의 돈을 장만하여 주면 일이 이루어진 뒤에 보답을 잘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일영(申日永)은 신의 사위이며 신천영(申天永)과 형제가 되는데, 신일영이 기(旗)를 만들어 최봉익(崔鳳翼)에게 주어 청주(淸州)에 보낼 때에, 신이 장지(壯紙)를 내어 주고 신일영이 종이를 잘라 기를 만들고 스스로 썼습니다. 신일영·안정이 말하기를, ‘서울에 있는 적도(賊徒)가 흉언(凶言)을 지어내어 도당을 꾀어 들이고 종이 기를 만들어 병영(兵營)에 보내려 한다.’ 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처자를 노적(孥籍)하였다.

 

호서 안무사(湖西安撫使) 김재로(金在魯)가 장계(狀啓)하기를,
"역적 위천총(僞千摠) 조백(趙柏) 등을 잡아 효시(梟示)하였습니다. 적(賊) 민백효(閔百孝)의 종 춘흥(春興)·순봉(順奉) 등이 공초(供招)하기를, ‘3월 13일에 민백효가 과거 보러 간다고 서울로 올라가 이조겸(李祖謙)의 집에서 잤는데, 이조겸이 당상(堂上)이 되고 싶다 하니, 민백효가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지면 당상이 될 뿐이 아닐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죽산(竹山)에 있는 정진사(鄭進士)의 집에 갔더니 대여섯 양반이 모여 밤새워 모의하였는데, 다 은밀한 말이었습니다. 정가(鄭哥)가 민백효에게 말하기를, ‘청주(淸州) 군사가 올라오자면 용인(龍仁)의 금량(金梁) 길을 거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소사(素沙) 길을 거칠 것이니, 그러면 내가 의당 급히 알려서 약속대로 나와 군진(軍陣)에 나아가도록 하겠다.’ 하니, 민백효가 허락하고 용인에 있는 조보은(趙報恩)의 집에 가서 적병이 올라오기를 기다렸습니다. 17일 날이 밝기 전에 정가가 민백효에게 와서 자세히 말한 뒤에 민백효의 행장 가운데에 감추었던 군복(軍服) 두보[褓]를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내어 줄 때에 보았는데, 두 보에 싼 크기는 다 안식(案息)419)  만 한데 자못 길었고, 보 틈으로 보니 다 흰 군복이었으며, 철편(鐵鞭) 따위 물건을 싼 듯하여 들기에 자못 무거웠습니다. 21일에 안성(安城)의 패보(敗報)를 듣고 문득 복판에 자빠져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 때이니 내 가족이 죄다 멸망할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음식을 끊었다 합니다."
하였다. 모두 엄중히 가두었다.

 

친국(親鞫) 때에 하교(下敎)하기를,
"전후에 붕당(朋黨)을 타파하라고 분부한 것이 한두 번뿐이 아니었는데 점점 더하여 과연 대역(大逆)이 일어나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겨우 터럭 하나에 달려 있는 것처럼 되었다. ‘역(逆)’자를 피차에 서로 씌워 집을 버리고 친족을 원망하며 감히 반역할 꾀를 일으키니, 그 말미암은 바를 구명하면 어찌 당론의 탓이 아니겠는가? 이 뒤로는 전의 일을 전생의 일처럼 여기고 오직 국가에 마음을 다할 것을 생각하라. 경(卿)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우리 조종(祖宗)을 3백 년 동안 섬겨 왔는데, 이제 다들 나를 버리고 가겠는가? 지난번에 한두 중신(重臣)이 문득 시골로 내려간 것을 나는 늘 잘못으로 여긴다. 도승지(都承旨)의 말을 듣건대, 김흥경(金興慶)이 떠난 데에는 주장하는 것이 있었다 하니, 아마도 종래의 충역(忠逆)에 관한 뜻일 것이다. 오늘날 난적(亂賊)을 토벌하는 것은 충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같이 삼가고 함께 공경하도록 하라."
하니, 이유민(李裕民)·홍석보(洪錫輔)·김상옥(金相玉)·김취로(金取魯)·홍현보(洪鉉輔) 등이 아뢰기를,
"시비를 가리지 않고 한갓 탕평(蕩平)하려 하면 참으로 삼가고 공경하기를 바랄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구적(寇賊)이 평정되어 국가가 이미 편안해졌으니, 신(臣)들이 어찌 하루라도 지체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겨우 하교하였는데 경들의 말이 이러하니, 물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하겠다. 경들이 다 의리를 밝히고 시비를 가리고서야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의도가 국면(局面)을 바꾸어 놓은 뒤에서야 머무르려고 하는 것이다. 색목(色目)이 중한가, 임금이 중한가? 이는 곧 선조(先朝)에서 하교한 바이다. 색목이 비록 환히 제거되진 않더라도 피차가 병신년420)   전의 일과 같이 하는 것이 옳겠다. 국가가 있고서야 붕당이 있는 것이다. 나라가 없으면 경들이 어느 곳에서 당론을 펴겠는가? 경들이 굳게 지키고 고치지 않으니, 내가 참으로 위에 군림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5월 8일 무오

국청(鞫廳)에 명하여 죄인 이탄(李坦)421)  에게 가벼운 칼을 씌우고 양손에 고랑을 채우지 말며 먹을 것과 땅에 깔 것을 각별히 신칙(申飭)하게 하였다.

 

정국(庭鞫)하였다. 조동규(趙東奎)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는데 세 차례 형신(刑訊)하니, 조동규가 공초(供招)하기를,
"임서호(任瑞虎)가 반역을 모의한 정상을 신에게 상세히 말하기를, ‘이사성(李思晟)이 평영(平營)422)  에서 철차(鐵車)를 만들었는데, 철차의 제도는 사면에 창검(槍劍)을 꽂고 안에 조총(鳥銃) 따위 물건을 감추었으므로 한꺼번에 1백 인을 당할 만하다.’ 하였습니다. 난리가 난 뒤에 임서호가 또 신에게 말하기를, ‘이유익(李有翼)의 말을 듣건대, 밀풍군(密豐君)이 말하기를, ‘이처럼 시끄럽고 또 망극한 말을 들었으니, 청대(請對)하여 아뢰야 하겠다.’ 하므로, 이유익이 밀풍군에게 말하기를, ‘도망할 일이 있게 되면 노량(露梁) 길로 가야 할 것이고, 외방(外方)의 군사 중에 반드시 구제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그뒤에 임서호가 와서 말하기를, ‘밀풍에게 노량으로 달아나기를 바랐으나 서로 호응할 방도가 없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부채를 흔들어서 서로 호응하면 배를 준비한 자가 밀풍인 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그 말이 밀풍에게 전해졌는지는 신은 모릅니다. 배를 준비한 자는 창산군(昌山君) 민관효(閔觀孝)인데, 이것은 임서호의 말입니다."
하였다. 네 차례 형신하니, 조동규가 또 공초하기를,
"망극한 말이라는 것은 추대하는 일이며, 고변(告變)하려 한 일은 탄이 확실히 말하였는데, 임서호가 말하기를, ‘무슨 일 때문에 고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기에, 신이 임서호에게 말하기를, ‘청대하면 이유익 등이 일족을 멸하는 화를 당할 것인데 두려운 빛이 없겠는가?’ 하니, 임서호가 말하기를, ‘이유익은 두려운 빛이 없었으니 믿는 것이 있는 듯하다.’ 하였습니다. 이유익과 탄은 서로 아는데 자주 가기 번거로워서 탄의 처조카를 시켜 중간에서 왕래하게 하였습니다. 이유익이 탄에게 도망하기를 권하였을 때 탄이 대답한 말은 신이 듣지 못하였습니다. 탄의 처조카가 이유익의 말을 탄에게 전하면 탄이 말하기를, ‘상대(尙大)가 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나라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임서호가 또 말하기를, ‘이사성과 탄은 같이 총관(摠管)이 되었으므로 입직(入直)한 가운데에서 익숙히 상의하였다.’ 하는데, 이것도 이유익의 말입니다."
하였다.

 

박미귀(朴美龜)를 추문(推問)하였다. 한차례 형신(刑訊)하니, 박미귀가 공초(供招)하기를,
"지난해 10월에 신이 어사(御史)에게 잡혀 공초를 바친 뒤에 석방되어 담양부(潭陽府)에 갔는데, 유봉사(柳奉事)라는 자가 책방(冊房)에 있었습니다. 정월 2일 밤에 중방(中房)423) 임가(林哥)가 열쇠를 가지고 와서 화약고(火藥庫)를 열고 화약을 내어 심유현(沈維賢)의 종에게 주었고 내동헌(內東軒)에서 열 여섯 봉(封)으로 싸서 메었는데, 한봉은 열 닷 근(斤)이었습니다. 심유현의 첩기(妾妓)의 아비 이시형(李時衡)과 기녀(妓女) 국부용(鞠芙蓉)의 아비 국시건(鞠時建)이 그동안의 정상을 아는데, 신과 유봉사를 시켜 남태징(南泰徵)·이유익(李有翼)에게 운반하여 보내게 하였고, 화약을 훔쳐 낸 뒤에 고지기를 시켜 불을 놓아서 그 자취를 없애게 하였습니다. 지난해 섣달 밤에 심유현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큰일이 있어서 경영하는 것이므로 따르지 않으려 하여도 그럴 수 없다.’ 하기에 신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심유현이 말하기를, ‘지금 평병(平兵)424) 이사성(李思晟)과 남태징·남태적(南泰績)·이유익 등이 바야흐로 큰 일을 꾀하는데, 서병(西兵)425)  이 장차 일어날 것이고 서병이 일어나면 북병(北兵)426)  도 일어날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충병(忠兵)427)  은 반드시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나, 갈아서 친구가 맡게 하면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경상 감사(慶尙監司)·안동 부사(安東府使)도 색목(色目)이 다르므로 영남(嶺南) 사람이 처치할 것인데, 처치는 곧 죽인다는 것이다. 경상 좌병사(左兵使)·우병사(右兵使)가 각각 군사를 일으키면 방백(方伯)·안동(安東)을 제거하고 참여하기 쉬울 것이다. 남태징이 장사(將士) 4백 명을 뽑아 거느리어 양식을 주고 충청도로 가면 충청도에도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사성은 무후(武侯)428)  의 병법을 쓰니, 이 사람이 일어나면 누가 당하겠는가? 전라도로 말하면 정사효(鄭思孝)는 용렬한 사람이니 내쫓고 박필현(朴弼顯)으로 대치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유봉사가 데려온 순창(淳昌)의 사인(士人) 양응태(楊應泰)·양응택(楊應澤)·양효기(楊孝起) 세 사람과 한 자리에서 수작할 때에는 번번이 좌우를 물리쳤습니다. 3월 5일에 심유현이 잡혀 삼례(三禮)에서 잘 때 박사관(朴師寬)이 심유현을 보러 갔다가 돌아와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 원[倅]의 일이 곧 내 일이고 내 일이 곧 그대 원의 일이다. 충청도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남태징이 반드시 총융사(摠戎使)로서 수원(水原) 군사를 거느리고 충청도 군사와 합세하여 국도(國都)를 침범할 것이니, 그대들은 좋든 싫든 간에 어기고 떠날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심유현이 잡혀온 뒤에 나머지 일은 박사관·박필현에게 부탁하였고, 박필현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22일인데, 신은 전주(全州)에 줄곧 있고 박필현의 군중(軍中)에 가지 않았습니다. 박필몽(朴弼夢)의 종이 박필현이 파직(罷職)되었다는 기별을 듣고 박사관에게 전하니, 박필몽이 겁나서 태인(泰仁)에 와서 박필현에게 군사를 일으키기를 권하며 말하기를, ‘잡아오라는 명이 이미 내려 졌으니 너희 고을에 머무르는 것은 이롭지 않다.’ 하고 무장(茂長)으로 돌아갔다가 이어서 죽도(竹島)로 들어갔습니다. 태인 군사가 삼천(三川)에 진을 치고 이장욱(李長郁)을 보내어 감사(監司)에게 글을 전하였으나, 영장(營將)·수문장(守門將)이 그 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박필현이 처음에 나라의 명으로 군사를 일으킨다고 말하였으나, 군졸은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닌 줄 알고 죄다 흩어졌습니다. 삼천은 관군(官軍)이 있는 곳에서 7리 떨어져 있으므로 감영(監營)에서 군사를 출동시키면 박필현을 잡을 수 있을 것인데 그가 달아나도록 버려두었습니다. 감사와 박사관은 오촌 사이이므로 박사관이 늘 왕래하였는데, 박사관이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감사·영장과 이미 약속하였는데 수문장이 모르고서 말하기를, 「파수(把守)하는 이때에 서찰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므로 그대로 달아났다.’ 하였습니다. 박사관이 감사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처음에는 답하기를, 「죽음이 있을 뿐이다. 따를 수 없다.」 하므로 내쫓을 생각이 있었는데, 그뒤에 박사관이 말하기를, 「일이 드러나면 형세가 같이 죽게 될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다면 군사를 일으켜서 오겠다.」 하였다.’ 합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5월 9일 기미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조동규(趙東奎)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는데, 다섯 차례 형신(刑訊)하니, 조동규가 공초(供招)하기를,
"음흉한 말을 신이 과연 하였습니다. 밀풍(密豐)을 거론하면 혹 살길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상대(尙大)가 아명(兒名)이라는 것을 신이 양원군(陽原君)의 사위이므로 종실(宗室) 집으로 말미암아 알았습니다. 이미 밀풍을 거론하였으므로 또 그 이름을 거론하여 그 일을 긴중(緊重)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지평(砥平)의 원[倅] 남수언(南壽彦)은 조관규(趙觀奎)의 매부이므로 신의 형이 조관규에게 지평에 가도록 권하였습니다. 3월 13일에 조덕규(趙德奎)가 와서 신윤조(辛胤祖)를 꾀어 얻은 일과 조관규를 지평에 보낸 일을 말하였으나, 지평의 원이 승낙하였는지는 능히 알 수 없었습니다. 조덕규가 이유익(李有翼)을 만나보았는데, 이유익이 말하기를, ‘경중(京中)에서는 한 군졸도 모으지 못하였다. 그대들과 신윤조는 몇 초(哨)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만약 지평의 관군(官軍)을 아울러 얻어 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 하기에 조덕규가 말하기를, ‘잘못하여 한세홍(韓世弘)과 결탁하였으니, 화가 이르게 될 것이다. 신윤조의 군사는 1백 명이 못되나, 지평의 군사를 얻으면 16일에 경성(京城)에서 70리나 80리쯤 되는 곳에 와서 모였다가 적병(賊兵)이 오기를 기다려 합세할 생각이다.’ 하였다 합니다. 신이 신의 형에게 말하기를, 적이 패하면 우리도 살 수 없을 것이니, 여주(驪州)에 군사를 출동시킬 때에 급히 알리면 필마(匹馬)로 가서 종사관(從事官)이 되겠다.’ 하였습니다. 적 가운데에서 아는 사람은 한세홍·임서호(任瑞虎)뿐이므로 늘 신 형제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지평 군사 40명이나 50명쯤을 얻어 경중에 들여보내면 신이 상두꾼[香從軍]429)  을 품사서 동소문(東小門) 안에서 기다렸다가 밖과 약속하여 함성을 지르고 지평 군사가 밤을 타서 불을 놓으면 신이 안에서 상두꾼과 함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고 특별히 만든 도끼 세 자루면 열쇠를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임금이 조동규가 공초할 때에 이탄(李坦) 부자를 끌어대었다 하여 승복한 뒤에 친국하여 형신을 가하여 조동규가 무고(誣告)임을 자복하게 하고서야 비로소 처형하고, 전에 공초한 말을 결안(結案) 속에서 빼라고 명하였다.

 

박미귀(朴美龜)를 다시 추문(推問)하니, 박미귀가 공초(供招)하기를,
"전라 병사(全羅兵使)가 장계(狀啓)하여 심유현(沈維賢)을 파직(罷職)하기를 청하였을 때에 박사관(朴師寬)과 심유현이 서로 말하기를, ‘친구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이러하다.’ 하였으니, 그들이 상의하여 반드시 병사를 중상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부총관(副摠管) 조빈(趙儐)을 앞에 나오게 하여 분부하기를,
"경(卿)의 아우가 비록 역적의 공초에 나오기는 하였으나, 당초에 심유현이 반역하는 정상을 적발하였으니, 크게 공이 있다. 그 마음을 내가 환히 알았으므로 그 사람을 암담한 가운데에 버려둘 수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특별히 이르니, 의구(疑懼)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하니, 조빈이 일어섰다가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조빈은 전라 병사 조경(趙儆)의 형이다.

 

성득하(成得夏)를 추문(推問)하니, 성득하가 공초(供招)하기를,
"정세윤(鄭世允)은 곧 신의 사촌인데, 올해 3월에 조상(弔喪)한다고 신의 집에 왔습니다. 낯을 모르는 한 사람이 정세윤과 같이 왔기에 그 이름을 물으니 원만주(元萬周)이었습니다. 같이 잘 때에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장사(壯士) 네 명이 방안에 들어왔는데, 그 사람을 보니 모두 여덟 자의 큰 키에 큰 칼을 찼으므로, 마음이 매우 떨렸습니다. 정세윤이 말하기를, ‘우리들에게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네가 만약 듣지 않으면 곧 죽이겠다.’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니, 정세윤이 말하기를, ‘내응(內應)·외응(外應)이 있으니 조금도 의심하고 염려할 것이 없다. 내응은 남태징(南泰徵)이고 외응은 평안 병사(平安兵使)이니, 일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태인(泰仁)의 원[倅]과 서로 약속하고 왔다.’ 하기에, 신이 잠시의 목숨을 늘이려고 허락하였습니다. 동내 사람 이경구(李景九) 등이 마침 신의 집에 왔는데, 원만주가 상격(相格)이 매우 좋다고 하며 이어서 거사를 언급하니, 이경구 등이 허락하였습니다. 정세윤이 장사 한 사람을 거느리고 충청도로 가면서 신과 원만주에게 뒤따라서 여산(礪山)의 황화정(皇華亭)으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14일에 원만주가 신을 데리고 가려 하였으나, 신이 숨어 피하였다가 일이 안정된 뒤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이한초(李漢楚)를 추문하니, 이한초가 공초하기를,
"3월 초에 금구(金溝) 사는 김일채(金一彩)가 여러 번 신을 청하므로 신이 가서 밤을 지내는데, 한 사람이 옆에 있었습니다. 김일채가 칼을 뽑고 말하기를, ‘이 물건이 쓰이는 데를 너는 아는가?’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태인의 원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키니 너도 따라서 참여하라. 만약 듣지 않으면 이 칼로 쳐죽이겠다.’ 하기에, 신이 마지못하여 따라서 참여하겠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 14일에 신이 고부(古阜) 평교(平橋)에 갔더니, 김일채·성득하와 김일채의 사촌 김선필(金善弼) 등 예닐곱 사람이 모였는데, 성득하가 말하기를, ‘이곳 군사의 수가 거의 육칠십 명쯤 되는데 오늘 우세(雨勢)가 이러하므로 죄다 흩어져 갔다.’ 하고, 또 말하기를, ‘원가(元哥)·정가(鄭哥)는 먼저 충청도로 갔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유내(柳徠)가 죽었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0일 경신

양서 안무사(兩西安撫使) 조지빈(趙趾彬)이 조정에 돌아와 입대(入對)하여 이사성(李思晟)이 창설한 군제(軍制)인 삼부(三部)를 두고 장사(壯士)를 뽑는 일을 영구히 폐지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정국(庭鞫)하였다. 유진정(柳晉楨)을 추문(推問)하였으나 유진정이 승복하지 않으므로, 박미귀(朴美龜)·유진정을 대질(對質)시켰다. 박미귀가 말하기를,
"네가 심유현(沈維賢)에게 ‘무신년430)  은 소복(素服)의 해이다.’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대개 무신년은 황후(黃猴)431)  의 해이므로 비기(祕記)에 ‘백의서생(白衣書生)이 조정(朝廷)에 찰 것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유진정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런 말을 했겠는가?"
하니, 박미귀가 말하기를,
"심유현이 파직된 뒤에 네가 유임을 청원하는 상서의 초안을 만들어 이시형(李時亨)에게 주어서 감영(監營)에 보내어 비국(備局)432)  에 전달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유진정이 말하기를,
"상서의 초안은 과연 만들었으나, 그것이 어찌 반역하는 일인가?"
하니, 박미귀가 말하기를,
"상서한 것은 유임시켜 그 일을 꾀하려는 뜻이었다."
하였다.

 

민창기(閔昌基)를 석방하였다. 민창기는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서 박미귀(朴美龜)가 공초에 끌어대었으므로, 나문(拿問)받았는데, 공초하기를,
"박미귀와 혐의가 있으므로 유감을 품어 무고(誣告)한 것입니다."
하였고, 박미귀도 무고임을 자복하였으므로, 석방하였다.

 

호서 안무사(湖西安撫使) 김재로(金在魯)가 장계(狀啓)하기를,
"역적 민백효(閔百孝)의 종 말종(末從)이 공초(供招)하기를, ‘3월 17일에 민원보(閔元普)가 봉서(封書) 하나를 주며 말하기를, 「보은(報恩) 원[倅]이 바야흐로 괴산(槐山)에 머물러 있으니 이 글을 급히 전하고 답을 받아 오라.」 하므로 괴산에 갔더니, 보은 원이 향교동(鄕校洞) 이생원(李生員) 집에서 권진사(權進士) 등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었고, 답을 받아 밤에 돌아왔는데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민원보가 글을 보고 곧 종 만재(萬才)를 데리고 노새를 타고 날이 밝기 전에 괴산으로 달려갔다가 그 날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청주(淸州)에서 패전한 뒤에 불러서 조총(鳥銃)을 주며 말하기를, 「이 고을의 하인들과 대소 관인(大小官人)을 막론하고 불시에 들어오는 자는 다 쏘아 죽이라.」 하고 밤낮으로 큰 사랑에서 지키게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종 성적(成績)이 또 공초하기를, ‘만재가 서간(書簡)을 받아 줄곧 영남(嶺南) 합천(陜川) 등에 왕래하였고, 청주에서 변이 일어난 뒤에는 만재를 시켜 이인좌(李麟佐) 형제와 괴산 이생원 집에 왕래하게 하여 모의하여 충주성(忠州城)을 도륙(屠戮)하려 하였고, 적병이 패하였다는 말을 들은 뒤에는 집 뒤에 있는 서당(書堂)에 가족을 옮겨 피하게 하였습니다. 민백효가 과거보러 간다 하고 서울에 올라가 포수(砲手) 10여 명을 모았고 종들 중에도 포수가 있었는데, 낮에는 꿩을 사냥한다는 핑계로 산봉우리에 벌여 세우고 밤에는 읍내 같은 곳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본주(本州) 성 위에 벌여 세웠을 때에 한대명(韓大命)·이조겸(李祖謙)·민성효(閔性孝)·민경효(閔景孝) 등이 밤을 타서 노새에 안장을 얹게 하고 한대명 등과 포수를 거느리고 읍내에 갔다가 밝기 전에 돌아왔는데, 이렇게 한 것이 두 번이었습니다. 당초 속오군(束伍軍) 등이 성안에 부진(赴陣)할 때에 민원보가 술과 안주를 많이 장만하여 길가에 앉아 술을 따라 권하니, 군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형세를 보아 정도령(鄭都令) 편에 들어가야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청주의 적병이 이곳에 와서 모이기로 약속하였으므로 민원보 등이 밤낮으로 정제하고 기다렸습니다. 종에게 조총을 주며 말하기를, 「근래 충주·괴산 등에 내려온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많이 있으니, 네가 중도에서 쏘아 죽이면 후히 상주겠다.」하므로, 종이 답하기를, 「천지간에 어떻게 명을 받든 사신을 죽이겠는가?」 하였습니다. 민원해(閔元楷)가 잡혀갈 때에 집에 감추었던 잡물(雜物)을 죄다 묻어 두고 군복(軍服)·군기(軍器)는 만재를 시켜 불살랐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약방(藥房)433)  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광좌(李光佐)가 나아가 말하기를,
"실록(實錄)을 찬수(纂修)한 뒤에 차례로 봉안(奉安)해야 할 것인데 나라에 변란이 있어서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일이 매우 미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접때 거빈(去邠)434)  한다는 말이 중외(中外)에 퍼졌는데 실록을 봉안하면 인심이 흔들리기 쉬울 것이므로 곧 거행하지 못하였다. 겨우 변고를 겪었고 또 농사철을 당하였으니, 이달 안에 우선 강도(江都)에 봉안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봉안하기 전에 먼저 세초연(洗草宴)435)  을 거행하는 것이 규례입니다마는, 변란을 겪은 나머지에 다른 일에 겨를이 없으니, 지금은 거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부터 내려온 성대한 규례를 폐기할 수 없으니, 아직 앞으로 거행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영남 어사(嶺南御史) 이종성(李宗城)의 장계(狀啓)에 따라 아뢰기를,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姊妹)가 지금 문경현(聞慶縣)에 갇혀 있는데, 율문(律文)으로는 본디 연좌(連坐)되지 않아야 하겠으나, 이와 같은 것은 한 고을뿐이 아니니, 한 번 품재(稟裁)를 거치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이번에 군사를 일으킨 것은 대역(大逆)이니 본디 한 등급을 더하는 율(律)을 써야 하나, 출가한 자매에게 전연 문죄하지 않는 것은 법의 뜻이 있으니, 각처에 갇혀 있는 가운데에서 이미 출가한 자는 놓아 보내게 하고 출가하지 않은 자는 규례대로 조율(照律)하여 처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조언신(趙彦臣)이 상소(上疏)하여, 박민웅(朴敏雄) 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친 공로를 포상(褒賞)하기를 청하고, 아울러 신포(身布)의 무면(無面)436)  과 전정(田政)의 허결(虛結)437)  에 관한 폐단을 아뢰고, 또 말하기를,
"청주(淸州) 한 고을은 참으로 영남(嶺南)·호서(湖西) 사이의 요충지(要衝地)이므로, 그 설비하는 방도는 다른 고을과 동등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병사(兵使)·영장(營將)을 설치한 까닭인데, 혹 병사(兵事)가 있으면 병사·영장은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에 나아가나, 목사(牧使)는 본디 수하(手下)의 친병(親兵)이 없이 빈 성(城)에 홀로 앉아 있으니, 비록 지혜와 용맹을 갖춘 자가 맡게 하더라도 홀로 막고 지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이 한 고을의 군적(軍籍)을 가져다 살펴보니, 원군(元軍)과 보인(保人)을 합하여 모두 9천여 명인데, 원군은 다 싸움에 나아가는 군사이므로 목사에게 나누어 붙일 수 없으나, 보인은 쌀과 베를 바치는 무리에 지나지 않으므로 변란을 당하면 문득 노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갖가지 보인은 그 수가 거의 4천을 넘는데, 이에 이들을 묶어서 대오(隊伍)를 만들면 엄연히 하나의 큰 군사가 될 것입니다. 평시에는 베를 바치고 변란을 당해서는 성을 지킨다면, 백성에게는 겹치는 신역(身役)이 되지 않고 급할 때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오늘날 급히 먼저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마는, 다만 생각건대, 기계(器械)가 있고서야 군졸을 쓸 수 있고 군수(軍需)가 있고서야 기계를 장만할 수 있는데, 본주(本州)는 아주 피폐하여 이미 스스로 장만할 형세가 아니고 나라의 저축도 아주 없으므로 또한 변통할 길이 없으니, 본주에 있는 갖가지 환곡(還穀)의 모곡(耗穀)438)  을 6년 동안만 본주에 갈라 주어 편의대로 요리하여 기계를 장만하게 하고 다시 비국(備局)을 시켜 문서를 맡아서 창곡(倉穀)과 마찬가지로 연말에 마감하게 하여 중간에서 낭비하는 폐단이 없게 한 뒤에 그 나머지를 본주의 군수로 남겨 두어 따로 한 창고를 설치하여 조만간에 쓸 양향(粮餉)으로 삼으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칭찬하고 묘당(廟堂)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5월 12일 임술

정국(庭鞫)하였다. 이홍부(李弘溥)를 형신(刑訊)하니, 이홍부가 공초(供招)하기를,
"한식(寒食) 하루 전에 이인좌(李麟佐)가 와서 말하기를, ‘지금의 일은 이미 쏜 화살이 되었다. 박필현(朴弼顯)과 함께 반역을 하는데, 이사성(李思晟)·남태징(南泰徵)과 연양군(延陽君)의 봉사손(奉祀孫) 이하(李河)와 이명세(李命世)의 아들도 같이 모의하였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네가 양반의 아들로서 어찌 차마 이런 흉역(凶逆)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인좌가 말하기를,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제 중지할 수 없다.’ 하였는데, 신은 오촌친(五寸親)으로서 차마 고발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상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5월 12일 임술

김장(金墇)을 네 차례 형신(刑訊)하니, 김장이 공초(供招)하기를,
"3월 초에 안엽(安熀)이 신과 엄악발(嚴惡發)에게 같이 서울에 올라가기를 청하므로 따라서 용산(龍山)에 있는 이생원(李生員)의 집에 갔더니, 주인은 없었는데 그대로 머물러 잤습니다. 그날 밤에 안으로부터 돈 1백 냥을 내어 보냈고, 첫 새벽에 주인이 나왔는데 신이 보니 몸집이 커서 한 아름쯤 되었습니다. 신과 엄악발을 시켜 돈을 가지고 서울에 들어가 명주와 전립(戰笠)을 사서 판교(板橋)에 와 모이도록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전립을 사서 무엇에 쓰는가?’ 하니, 안엽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서 병란(兵亂)이 있을 것인데, 내가 이것을 쓰고 피란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최봉조하(崔奉朝賀)가 서울에 올라오니, 안엽이 자못 놀라고 겁내며 말하기를, ‘내가 이제 군사를 일으켜 역적질하려는데 너도 나와 함께 일을 같이 하는 것이 좋겠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대가 군사를 일으키면 어느 곳으로 가려 하는가?’ 하니, 안엽이 말하기를, ‘양성(陽城)에서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대로 따라서 양성에 갔더니, 적의 형세가 크게 떨쳤습니다. 안엽이 파총(把摠)이 되고 신이 군량 차지(軍糧次知)가 되었으며 대장(大將)은 이인좌이고 부장(副將)은 정세윤(鄭世胤)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얼굴을 아는 자는 진위(振威)에 사는 김정현(金鼎鉉)이었습니다. 이어서 행군하여 청주(淸州)로 향하였는데, 비바람이 크게 일어 군사의 태반이 달아나 흩어졌고, 신과 엄악발도 달아났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니,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박필상(朴弼祥)과 신효조(辛孝祖)를 대질(對質)시켰다. 신효조가 말하기를,
"3월 13일 늦게서야 네가 와서 말하기를, ‘여주(驪州)·이천(利川)은 시끄러운 근본이다. 이천의 정가(鄭哥)가 갑자기 달아나 간 곳을 모르므로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였더니, 봄에야 비로소 와서 말하기를, 「내가 영남 청룡 대장(嶺南靑龍大將)이 되었는데, 대장 12원(員) 가운데에서 제1장(第一將)은 정가이고 제2장은 박필현(朴弼顯)이고 내가 제6장이다. 호남 대장(湖南大將)은 배를 타고 순풍을 만나 곧바로 강화(江華)로 향하고 지평(砥平) 군사는 남한(南漢)으로 나아갔다.」 하더라.’ 하였다. 이렇게 시끄러운 일을 네가 어찌 나에게 전하지 않았겠는가?"
하니, 박필상이 말하기를,
"과연 난리에 관한 말을 너에게 말하였다. 이천에 사는 정조윤(鄭祚胤)의 육촌 정세윤(鄭世胤)은 과연 흉악한 사람인데, 지난해부터 간 곳이 없더니 올봄에 돌아왔다가 또 어디론가 갔고 정조윤도 따라갔으며, 박필현·정세윤이 장수가 되고 정조윤이 서기(書記)가 되었다는 말은 나도 들었으나, 지평·정읍(井邑) 군사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말한 일이 없다."
하였다.

 

필선(弼善) 조정순(趙正純)이 상소(上疏)하기를,
"고 참판(參判) 신 조희일(趙希逸)이 지은 《동학초독(童學初讀)》이라는 글을 바칩니다. 《동몽선습(童蒙先習)》에 비하여 더욱 간략하니, 춘궁(春宮)에 내려 한가할 때에 참고할 자료로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올린 책자를 보건대, 간략하고도 상세하니, 네 정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동궁(東宮)에게 보이겠다."
하였다.

 

5월 13일 계해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한대명(韓大命)을 추문(推問)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으므로 한 차례 형신(刑訊)하니, 공초(供招)하기를,
"3월 12일에 민원해(閔元楷)가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관서(關西)·영동(嶺東)의 여러 곳에서 군사를 많이 일으켰으니 같이 가서 거사하기 바란다.’ 하기에, 신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민원해가 말하기를, ‘좋은 곳이 있으니 소사(素沙)로 같이 가자.’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어느 때에 가겠는가?’ 하니, 민원해가 말하기를, ‘17일에 포수(砲手)를 데리고 진친 곳에 가서 곧바로 경성(京城)을 침범하면, 너희 같은 무리에게도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하기에, 신이 같이 가려 하였으나, 16일에 신의 아내가 마침 낙태(落胎)하였으므로 적진(賊陣)에 가지 못하였습니다. 민원보(閔元普)의 집에 둔 것은 조총(鳥銃) 20여 자루와 환도(環刀) 10여 자루와 철편(鐵鞭) 20여 자루이고, 군복(軍服)은 민원보 일가 중의 이교항 진사(圯橋項進士)라고 칭명(稱名)하는 사람의 집에 만들어 두었으며, 번번이 서로 모의하기를, ‘이 일이 성공하면 우리들은 벼슬하여 영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민원보의 아들 민덕효(閔德孝)가 종 만재(萬才)는 적진에 글을 전하게 하였기 때문에 비상(砒礵)으로 독살하여 입을 없애려 하였으나, 그 종이 낌새를 알고 달아나 피하였습니다. 신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달래어 협박을 당한 탓입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윤득화(尹得和)를 지평(持平)으로, 신치근(申致謹)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법대로 이사로(李師魯)·김장(金墇)을 처형하고 노적(孥籍)하였다.

 

5월 14일 갑자

정국(庭鞫)하였다. 이조겸(李祖謙)을 추문(推問)하니, 이조겸이 공초(供招)하기를,
"민원보(閔元普)가 신을 시켜 포수(砲手)를 많이 구하게 하였으나, 신의 근처에는 본디 포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약(火藥)을 구할 수 없으니, 민원보가 값을 치른 돈을 한대명(韓大命)에게 내어 주고 사서 들이게 하였습니다. 2월 13일에 민백효(閔百孝)가 과거보러 간다는 핑계로 신의 집에 와서 잤는데, 신에게 말하기를, ‘너는 당상(堂上)이 되고 싶은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당상이 어찌 좋으랴마는, 네 일은 매우 위험하다.’ 하니, 민백효가 말하기를, ‘이 일이 어찌 성공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대가 서울에 올라갔다가 일이 급하여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민백효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여지면 마구 달아나겠다.’ 하였습니다. 민경효(閔景孝)가 신에게 말하기를, ‘청주(淸州) 적중(賊中)에는 비록 가지 못하더라도 적이 충주(忠州)에 이르면 나가 맞이하겠다.’ 하였습니다. 3월 16일에 신이 민원보 및 민원보의 종 말종(末終)·만재(萬才)와 함께 청주에 갔다가 괴산(槐山)에 이르러 군사가 패하여 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충주로 돌아왔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에게 분부하기를,
"이번에 사신을 보내는 뜻은 전의 거짓을 밝히려는 것인데 욕설이 더욱 심하므로 내가 처음에는 사신을 보내려 하지 않았으나, 자문(咨文)439)  에 경종(景宗)의 어휘(御諱)가 있으므로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인조(仁祖) 이후로 모든 일은 다 악언(惡言) 때문에 노여워하지 않고 처치하였습니다. 네 조정에서 다 그러하였는데, 병인년440)  에 고(故) 상신(相臣) 정재숭(鄭載嵩)이 글을 바쳐 신리(伸理)하다가 도리어 욕을 당하였고, 상신 남구만(南九萬)이 이어서 갔으나 감히 한마디 말을 내어 다투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집정(執政)이 되어 옛일을 알았다면 위에서 아무리 사신을 보내려 하시더라도 당초에 어찌 다투지 않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는 말이 곧고 사리가 바르나, 그들은 휘(諱)를 건드리는 것을 노여워하니, 이번 별사(別使)는 결코 보낼 수 없다. 전에는 사은사(謝恩使)가 해를 지낸 뒤에 동지사(冬至使)를 겸하여 갔으니, 등록(謄錄)에서 상고해 내어 다시 여쭈도록 하라. 재자관(䝴咨官)을 급히 보내는 것을 내가 본디 망설여 왔다. 지금의 일로 보면 저들이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 더욱 심할 듯하니, 재자관은 우선 멈추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성려(聖慮)가 심원(深遠)하십니다. 재자관과 선전관(宣傳官)에게 분부하여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게 하고, 대신(大臣)들과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역당(逆黨) 중에서 잡히지 않은 자가 혹 북으로 달아났을 염려가 있으므로 자문을 만들어 역관(譯官)을 시켜 주어 보내고 선전관을 시켜 따라서 잡아서 데려오게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이윤신(李潤身)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홍정상(洪廷相)이 청렴하고 삼가는 것은 본디 취할 만한 것이나, 눌러 따르게 하는 것은 그가 잘하는 것이 아니므로 변방의 중임(重任)에 오래 두지 말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갈아 차출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5일 을축

이달에 관무재(觀武才)441)  를 설행(設行)하고 외방(外方)의 장사(將士)는 본도(本道)에서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시취(試取)하여 등급을 나누어 아뢰고 상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이의전(李義全)을 한 차례 형신(刑訊)하니, 이의전이 공초(供招)하기를,
"3월초에 안엽(安熀)이 와서 말하기를, ‘장차 이하(李河)의 집에 가서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 등과 함께 군사 1백여 명을 얻어서 벌이고 3월 13일에 거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시훈(李時勳)을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이시훈이 공초(供招)하기를,
"3월 초에 신이 괴산(槐山)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이사익(李師益)이 이유익(李有翼)의 집으로부터 신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이인좌(李麟佐)가 군사를 일으켜 반역한다.’ 하고 신에게 전립(戰笠)을 쓰고 강 밖에 가서 적병(賊兵)을 맞이하게 하였는데, 이유익·윤덕유(尹德裕)·이하(李河)·민관효(閔觀孝)·이사익도 다 강 밖에 가서 적을 맞이하였습니다. 신은 광주(廣州)에 가서 피란하였다가 이인좌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나가서 남태징(南泰徵)을 맞이하여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려 하였습니다. 김덕삼(金德三)이 속오군(束伍軍)을 많이 거느리고 적을 맞이하고, 신의 아재비 이진화(李震華)가 역마(驛馬)를 품사서 진천(鎭川)의 적진으로 향하는 것을 신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니,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예전에 인조(仁祖)갑자년442) 공주(公州)행재소(行在所)443)  에서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하여 위로하여 기쁘게 하고 회란(回鑾)444)  뒤에도 과거를 설행하여 사람을 뽑았다. 또 《정원일기(政院日記)》를 보면 그때 옥후(玉候)가 편찮으신데 날마다 잇달아 시취(試取)하셨으니, 군사를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도리는 늦출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번 병란(兵亂) 뒤에 군사들이 안으로는 달을 넘기며 호위(扈衛)하고 밖으로는 창을 들고 군진(軍陣)에 나아가니, 어찌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또 선조(先朝)에서 이미 행한 일이 있고 한더위가 멀지 않았으니, 이 달 그믐쯤으로 길일(吉日)을 가려서 송도(松都)와 외방(外方)의 싸움에 나아간 장사(將士)와 하번(下番) 군사는 본도(本道)의 유수(留守) 및 도신(道臣)·수신(帥臣)을 시켜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시취한 뒤에 입격(入格)한 자는 쌀과 베를 제급(題給)445)  하게 하라는 뜻으로 병조(兵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충훈부(忠勳府)에서 아뢰기를,
"이번 분무 공신(奮武功臣)의 녹봉(祿俸)을 마련할 때에 대호군(大護軍) 5망(望)과 부호군(副護軍) 5망과 사직(司直) 5망도 전례에 따라 더 차출하고 옮겨서 녹을 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양사(兩司)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이다.】 에서 아뢰기를,
"진주사(陳奏使)의 장계(狀啓)를 즉시 받아 보건대, 교만한 글로 나라를 욕보인 것이 전의 자문(咨文)보다 한층 더하니, 사신을 가려 보냈으나 이미 조금도 전의 모욕을 씻지 못하였습니다. 또 차마 들을 수 없는 이 말을 보면 오직 피를 흘리고 눈물을 머금으며 뼈에 사무치게 스스로 맹세해야 할 것인데, 관례에 따라 내린 물건을 받아 가지고 오래지 않아 돌아오는 것이 마치 보통 사행(使行)과 같으니, 신하가 나라를 위하여 몸바치는 의리가 어찌 이러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사신이 도강(渡江)하기를 기다려 상사(上使) 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은 우선 파직(罷職)하고 부사(副使) 이명언(李明彦)과 서장관(書狀官) 조진희(趙鎭禧)는 모두 나국(拿鞫)하여 엄히 묻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논열(論列)한 것은 사체(事體)가 본디 그러하나, 사신이 주선을 잘하지 않은 탓이 아니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탄(李坦)은 가까운 종친(宗親)으로서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으므로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니, 칼을 씌우고 고랑을 채우는 일들을 어찌 사사로운 은혜로 면제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죄인 탄의 고랑을 풀어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6일 병인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민백효(閔百孝)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는데, 세 차례 형신(刑訊)하니, 민백효가 공초(供招)하기를,
"민관효(閔觀孝)는 곧 신의 일가인데, 민관효가 처형되었는다는 말을 듣고 조덕보(趙德普) 형제가 서로 말하기를, ‘그가 화를 입은 집안의 살아 남은 사람으로서 이런 흉악한 일을 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 때이다.’ 하였습니다. 지난해 3월에 신이 서울에 올라가 마침 서강(西江)에 가서 민관효를 보았습니다. 때마침 사람이 없었는데, 민관효가 말하기를, ‘한세홍(韓世弘)과 이유익(李有翼)·이하(李河)와 내가 국가의 큰 변을 만들어 내려 한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위험한 말을 내는가?’ 하니, 민관효가 말하기를, ‘네가 가흥(可興)에 가면 한덕징(韓德徵)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이 말을 전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가흥에 갔으나, 한덕징이 원주(原州)에 갔으므로 전하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조덕보가 막 서울에서 와서 민관효의 일을 전하며 말하기를, ‘역모(逆謀)가 낭자하니 화가 장차 네집까지 미칠 것이라 하더라.’ 하였습니다. 하늘이 망하게 한다는 말은 이 때문에 나온 것인데, 조덕보 형제는 민관효가 처형되기 전에 그가 반역한다는 말을 들어서 알았고 조덕보의 아우가 그 가운데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신이 재작년 봄에 여주(驪州)에 가서 청심루(淸心樓)에 앉아 있는데 임서호(任瑞虎)가 그 제자 안귀만(安龜萬)을 보내어 말을 전하기를, ‘어찌하면 서로 만나겠는가?’ 하기에, 신이 안귀만에게 말하기를, ‘영남(嶺南) 군사가 크게 일어나려 하는데, 이인좌(李麟佐)는 본디 일을 좋아하는 무리이고 또 임서호와 공을 다투려는 마음을 가졌고 또 그 대장(大將)을 다투므로 반드시 저해하려 할 것이니, 그대가 모름지기 한세홍에게 말하여 중간에 들어 조정하는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때 한세홍이 바야흐로 조덕징(趙德徵)의 집에 있었습니다. 지난해 정시(庭試) 때에 신이 향교항(香橋項)에 홀로 앉아 있는데 한세홍이 마침 왔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 일은 지금 어떠한가?’ 하니, 한세홍이 말하기를, ‘거의 조정되었으나 그래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임서호의 의논에 들어간 자는 조관규(趙觀奎)·조일규(趙一奎)와 조관규의 아들 조수(趙鐩)와 조우경(趙宇擎)과 여주의 도둑 도등패(都等牌)인데 역변(逆變) 전에 이미 죽었고 한세홍의 외삼촌 김덕유(金德裕)·김덕조(金德祚)와 김덕유의 매부(妹夫) 신필인(申弼仁)도 한세홍의 당(黨)이며 조관규의 아우 조명규(趙命奎)도 그 가운데에 들어갔습니다. 신의 집에서 한세홍과 같이 역모하였는데, 관가에서 보낸 사람이 만약 오면 신이 종 담사리(淡沙里)를 시켜 놓은 곳에 올라 망보다가 포(砲)를 쏘아 죽이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집안에서는 신의 종 말종(末終)이 능장(稜杖)을 메고 교생(校生) 민제상(閔齊尙)에게는 조총(鳥銃)을 주어 관군(官軍)이 신의 집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멀리서 망보고 가까이서 망보게 한 것입니다. 군복(軍服) 20여 건(件)과 화약(火藥) 8봉(封)을 과연 가지고 가서 장차 청주(淸州)의 적진(賊陣)에 같이 들어가려 하였으나 뜻밖에 청주의 적병이 패하여 미처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군복은 죄다 불사르고 화약은 죄다 물에 가라앉혔습니다. 민덕효(閔德孝)·민경효(閔景孝)는 정상을 알았고 민성효(閔性孝)는 같이 참여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민덕효(閔德孝)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민덕효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안성(安城) 진중(陣中)에 갔다가 싸움에 패한 뒤에 용인(龍仁)으로 돌아가 복병(伏兵) 때문에 길이 막혀서 충주(忠州)로 돌아가지 못하였고, 신의 형은 흰 무명으로 군복(軍服) 30여 건을 만들고 화약(火藥) 대여섯 봉(封)에 각각 대여 섯 근을 담아서 안성(安城) 군진(軍陣)에 갔었는데, 용인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이 실패한 것은 천운(天運)이다. 그 적(賊)은 다 용렬하여 성세(聲勢)를 허장(虛張)할 뿐이고 관군(官軍)을 만나면 다 군기(軍器)가 없어서 패배하였다. 이는 다 이인좌(李麟佐)가 용렬하여 꾀가 없는 탓이다. 처음에는 이인좌가 대장(大將)이 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갔는데, 가서 보니 이인좌였다. 처음에 박필현(朴弼顯)으로 갈았더라면 이처럼 용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인좌는 단지 공명(功名)에 도취하여 스스로 하였을 뿐이고, 당초에 이사성(李思晟)을 대장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가 평병(平兵)446)  에 있으므로 미치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의 형은 군사가 패한 뒤에 서울에 들어가 역적질하려 하였으나, 복병(伏兵)이 파수(把守)하므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경중(京中)에서 호응하는 자는 조동규(趙東奎)·조덕규(趙德奎)이었는데, 조덕규가 그때 도망하였으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상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하니,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민백효(閔百孝)를 다시 추문(推問)하니, 민백효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사묵(申思默)이 신에게 말하기를, ‘수령(守令) 중에 혹 호응하는 자가 있으니 맞이하여 군사를 합해야 하겠다.’ 하기에, 신이 수령은 누구누구이냐고 물었더니, ‘영덕(盈德)의 족장(族長)도 서로 호응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박필상(朴弼祥)을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한 차례 형신(刑訊)하니, 박필상이 공초(供招)하기를,
"3월 10일에 정조윤(鄭祚胤)이 신에게 말하기를, ‘청룡 대장(靑龍大將)은 곧 정팔룡(鄭八龍)이고 정세윤(鄭世胤)이 제6장(第六將)이 되고 박필현(朴弼顯)이 제2장이 되어 장차 역적을 하려 한다. 내가 바야흐로 서기(書記)인데 앞으로 대장이 될 것이니, 너는 내 군관(軍官)이 되어서 가는 것이 좋겠다. 성공하면 반드시 목사(牧使)나 부사(府使)가 될 것이다.’ 하고, 칼로 겁주며 말하기를, ‘내가 이제 소사(素沙)에 갈 것인데, 네가 만약 따라가지 않으면 내가 죽이겠다.’ 하므로, 신이 마지못하여 따라갔습니다. 적장(賊將) 이인좌(李麟佐)가 소사에 장막을 설치하였고 보병(步兵)이 거의 7초(哨)이었으며, 정세윤의 군관으로 치부(置簿)하였는데, 그때가 3월 11일이었습니다. 군사를 호궤(犒饋)할 때에는 통개(筒箇)447)  를 차고 정조윤의 뒤로 네 번째에 섰는데, 첫째는 곽중휘(郭重暉)이고 둘째는 서홍섭(徐弘涉)이며 셋째는 최백(崔栢)이었습니다. 정조윤이 신에게 말하기를, ‘남수언(南壽彦)이 와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는데 제때에 미처 오지 않으므로 곧 군관을 보내어 남수언을 불러 와서 모이게 하려 하였으나 군관도 미처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정조윤이 말하기를, ‘군관은 필연코 달아났을 것이다. 목중형(睦重衡)이 15일까지 판교(板橋)에 와서 모여야 할 것인데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약속하였는데 다 오지 않으니, 우리들은 청주로 가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11일 밤에 적들이 청주로 가려 하는데, 신은 그 꾀를 알고 달아나 여주(驪州)로 돌아왔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임금이 손수 쓴 글로 역적이 거짓으로 끌어댔음을 하유(下諭)하고, 이어서 환히 밝혀졌다는 뜻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치중(洪致中)에게 보이고, 어영 대장(御營大將) 장붕익(張鵬翼)과 병조 참판(兵曹參判) 남취명(南就明)을 장전(帳殿)에서 인견(引見)하여 위유(慰諭)하고 대죄(待罪)하지 말게 하였다. 처음에 홍치중 등을 역적 이시훈(李時勳)이 거짓으로 끌어댔으나 이시훈이 거짓임을 승복하고 처형되었다. 장붕익과 남취명이 바야흐로 대명(待命)하는 중이므로 인견하여 위유하였고, 홍치중은 병이 위독하였기 때문에 추후에 인견하여 위면(慰勉)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조문보(趙文普)를 추문(推問)하니, 공초(供招)하기를,
"3월에 석역(石役) 때문에 음성(陰城)에 갔는데, 15일에 소요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벼슬에 있는 자는 한인(閑人)과 다르므로 서둘러 돌아오다가 직산(稷山) 읍(邑) 아래에 이르러 이도문(李道聞)의 집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였으나, 민원보(閔元普)의 글은 본디 전하러 온 일이 없고 민원보도 찾아온 일이 없으며, 신은 곧 관아(官衙)로 갔으므로 머물러 잔 일도 없습니다. 21일에 차원(差員)으로서 보은(報恩)을 떠났는데, 보은에 있을 때에 만재(萬才)가 온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박경순(朴景淳)·정덕좌(鄭德佐)·민사맹(閔思孟)을 추문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조박보(趙博普)를 추문(推問)하였다. 조박보는 일명 조제보(趙濟普)인데, 공초(供招)하기를,
"15일에 민백효(閔百孝)가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난리가 이러하므로 회시(會試)를 할런지 하지 않을런지 알 수 없으니, 내가 이곳에 머물러 탐문하려 한다.’ 하고, 그 종의 집에 며칠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혹 때로는 신을 보고 말하기를, ‘이 도적은 범연하지 않다. 임서호(任瑞虎)도 그 가운데에 들어갔다. 전에 들으니, 조원보(趙元普)가 병을 고치러 임서봉(任瑞鳳)의 집에 갔었다 한다.’ 하므로, 민백효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가 전에 임서봉의 집에 있었는데 어찌 그런 일을 듣지 못하였겠는가?’ 하니, 민백효가 말하기를, ‘본디 그런 일이 없었다 한다.’ 하였습니다. 신의 선세(先世)는 충효(忠孝)로 서로 전해 왔는데, 민백효가 역신(逆臣)일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하였다.

 

이도문(李道聞)을 추문(推問)하니, 이도문이 공초하기를,
"3월 16일에는 신이 집 뒷산에서 피란하였습니다. 18, 19일쯤에 조문보(趙文普)가 들러서 머물러 잤습니다. 각방에서 잤는데, 조문보가 아침에 일어나 와서 말하기를, ‘밤사이에 조원보(趙元普)의 서찰이 왔다.’ 하더니, 아침밥을 먹을 때에 조원보가 왔습니다. 조문보가 신에게 말하기를, ‘역적이 막 일어났으므로 이제 관아(官衙)로 돌아가 군사를 모으려 하나, 영장(營將)이 이미 죽었으므로 넘겨 줄 곳이 없다. 이러한데도 군사를 모으면 군사를 일으킨다는 의심을 일으키게 할 듯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영문(營門)에서 군사를 징발하기를 기다린 뒤에 징발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습니다. 조원보의 서찰은 신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조원보가 온 뒤에 조문보가 군사를 징발하는 일을 물으니, 조원보가 말하기를, ‘그대는 속리산(俗離山)에 피해 앉아 있으면서 좌수(座首)·색리(色吏)에게 분부하여 군사를 모으면 병사(兵使)·영장이 살해될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조문보가 옳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간원(諫院)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영남(嶺南)의 수령(守令)은 특별히 가리지 않아서는 안되는데, 영덕 현감(盈德縣監) 신필회(申弼誨)는 명성은 전혀 없고 비방은 많이 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사인(士人) 이지간(李之榦)은 역적 민관효(閔觀孝)와 이웃에 살며 서로 친하였고 사람됨이 불길(不吉)하므로 이러한 때에 서울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변방(邊方)에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7일 정묘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직장(直長) 김옥(金沃)은 역적 박필몽(朴弼夢)에게 길러졌고 또 역적 박엽(朴燁)의 고모부이므로 그 주무(綢繆)한 정상을 사람들이 다 지목합니다. 이만춘(李萬春)은 조덕규(趙德奎)의 처남이고 이지경(李之景)의 지친(至親)이며 나만적(羅萬迪)의 절인(切姻)이므로 엄히 방지하는 이때에 서울에 둘 수 없습니다. 모두 변방(邊方)에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친림(親臨)하는 별시(別試)를 27일로 정하였으나 날씨가 아직 더우므로, 영상(領相)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사흘 동안 잇달아서 더위를 무릅쓰고 친시(親試)하시면 어찌 손상이 없으리라 보장하겠습니까? 물려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번에 출정(出征)한 장사(將士)는 목숨을 버리고 적(賊)에게 나아가 창을 베고 한데에 있었는데 나는 넓은 궁전에 있었으니, 노고와 안일이 너무나도 달랐다. 내가 한때 장전(帳殿)에서 노고하는 것을 꺼려서 이미 정한 날짜를 중간에서 철회한다면, 옛사람이 위아래가 고락을 같이하던 뜻에 어그러질 것이다."
하였다.

 

이저(李著)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5월 18일 무진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9일 기사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전에 연경(燕京)에서 세공(歲貢)을 감면하였을 때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반드시 별사(別使)를 보냈는지를 상고하여 다시 여쭈라고 명하셨습니다. 등록(謄錄)에서 상고하였더니, 숙종(肅宗)계유년448)   1월에 세공 중에서 황금(黃金)과 목면(木綿)을 영구히 그만두게 하였을 때에는 그해 5월에 따로 사은사(謝恩使)를 보냈고, 신묘년449)   10월에 세공 중에서 백은(白銀)과 홍표피(紅豹皮)를 또 영구히 그만두게 하였을 때에는 임진년450)   2월에 따로 사은사를 보냈고, 임진년 6월에 사은 방물(謝恩方物) 중에서 표피(豹皮)를 영구히 감면하였을 때에는 그해의 절사(節使)에 사은을 겸부(兼附)하였습니다. 전례는 한결같지 않습니다마는, 다만 신묘년 10월에 세공을 감면하는 자문(咨文)이 나왔을 때에는 절사의 행차가 오래지 않아 떠날 것이므로 사은을 붙이는 것이 사세(事勢)가 매우 온당하나, 절사에 붙이지 않으면 반드시 이듬해 2월을 기다려 별사를 보낸 것은 그때의 처분이 참으로 우연하지 않았습니다. 임진년 6월에 방물 중에서 표피를 또 감면하였으나, 사은 방물을 감면한 것은 세공에 비하여 사체가 조금 가벼울 뿐더러 그해 2월에 별사가 이미 갔는데 다시 별사를 보내는 것이 도리어 번거로우므로, 절사에 겸하여 붙인 것은 이 때문인 듯합니다. 이번에는 별사가 이미 행장(行裝)을 차렸으니, 7월 사이에 그대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하교(下敎)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5월 20일 경오

정국(庭鞫)하였다. 조문보(趙文普)를 다시 추문(推問)하니, 조문보가 공초(供招)하기를,
"3월 17일에 과연 괴산(槐山)의 이도문(李道聞)이 사는 근처에서 잤는데, 이튿날 날이 밝으려 할 때에 조원보(趙元普)가 과연 보러 와서 이도문 부자와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며 피란하는 일을 상의하였으나, 반역을 꾀하는 일에는 한 마디 말도 미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양서 안무사(兩西安撫使) 조지빈(趙趾彬)이 장계(狀啓)하여 자세히 말하기를, ‘역적 이사성(李思晟)이 6읍(邑)에 사사로이 장교(將校)를 보내어 건장한 군사 5천여 명을 뽑아 3부(部)의 제도를 창설하려 하고, 또 4부를 더 만들어 하번(下番) 군졸에게 베를 거두어 입번(入番) 군졸의 양식으로 삼으려고 28읍에 군관(軍官)을 나누어 보내어 건장한 군사 1만여 명을 뽑았는데, 비국(備局)에서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여 관문(關文)을 보내고 논책(論策)하는 일이 미처 결말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장교의 요포(料布)가 많이 삭감되고, 사사로이 나무를 기른 산에서 총거(銃車) 재목을 베어 가므로 또한 백성의 원망이 많고, 주성(州城)과 5군보(軍堡)에 드는 재목 값과 군기(軍器)를 만드는 정철(正鐵)451)   값 1천여 냥을 내어 주고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루(堡樓)를 더 만드는 것은 긴요하지 않을 듯한데 재목을 나르므로 백성의 원망이 많습니다. 재목과 정철의 값은 도로 바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3부를 만드느라 장정을 뽑은 것은 곧 도로 파산(罷散)하여 모든 군제(軍制)를 한결같이 적(賊) 이사성이 고치기 전대로 시행하고 장사(將士)의 요포는 곧 도로 복구하고 사사로이 기른 나무는 내어 주고 재목과 정철의 값은 도로 받아들이라고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분부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지금 옥당(玉堂)의 초기(草記)452)  를 보니, 역적 집의 서책(書冊)을 거두어들이기를 청한 것이 있다. 운각(芸閣)453)  에는 혹 그런 규례가 있으나, 권강(勸講)하는 곳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이러한 책을 거두어들일 수 없으니, 초기를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박사수(朴師洙)를 우윤(右尹)으로, 신사철(申思喆)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이광세(李匡世)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이광보(李匡輔)가 상소하기를,
"출정(出征)한 군사는 구명(軀命)을 버리고 시석(矢石)을 무릅썼으므로 호위(扈衛)한 자에 비하면 노일(勞逸)의 구별이 있는데, 국가의 상전(賞典)에는 피차의 차이가 없었으니, 이번 관무재(觀武才) 때에는 출정한 군사에게 초시(初試)를 보지 말고 응시할 수 있도록 하여 격려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지평(持平) 이윤신(李潤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사행(使行)이 돌아오려 할 때에 국가에 대한 무함이 그지없었으니, 그 악언(惡言)을 들은 것을 노여워할 것이 못된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구인들 피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가리고 한 번 설치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강약이 같지 않고 힘이 당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오직 분노를 머금고 아픔을 참으면서 스스로 강해질 방도를 힘써야 할 것이고, 또한 스스로 처치할 수 있는 일을 어찌 꺼려서 감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저 되[虜]가 악을 부린 것은 실로 하찮은 상인(商人)·역관(譯官)들이 금령(禁令)을 어기고 빛을 진 데에서 빌미가 생겼으니, 이제 만 토막으로 베더라도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 만하지 못합니다. 당초에 죽을 죄를 용서하라는 분부는 스스로 나타날 길을 열어 준 것에 지나지 않고, 또 저 되가 도리에 어그러지는 말을 하기 전에 있었으니, 본디 살리기 좋아하시는 큰 덕에 해롭지도 않은데, 이미 처형하지 않고 또 은(銀)을 갚지도 않았으므로, 일의 꼬투리가 이리저리 옮아가고 마디가 거듭 생겨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다시 양조(兩朝)에 미치게 하였으니, 실신(失信) 여부는 이제 논할수 없으나, 어찌 그들이 하루라도 천지 사이에서 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빚진 상인·역관 중에서 이미 나타난 자는 엄히 구문(究問)하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자는 기한을 정하여 찾아 잡아서 숙종(肅宗) 때의 옛일처럼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구별하여 곧 효시(梟示)하게 하고 나서야, 나라 사람의 분노를 위안하고 저 되의 마음을 승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저 되가 크게 바라는 것은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는 너그러이 면제하여 주는 듯이 말하기는 하나 그 뜻은 아닌게아니라 은화(銀貨)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아무리 작기는 하나 어찌 6, 7만 냥의 은화를 장만하지 못하여 두려워하고 우물쭈물 따르면서 이 끝없는 곤욕을 앉아서 받겠습니까? 이제 모두 운반해 보내는 그 욕심을 채워 주면 저들이 매우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반드시 감히 다시는 방자하게 악언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울러 바라건대, 전하께서 묘당(描堂)에 의논하여 처치하여 뒷날 후회하지 않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5월 21일 신미

정국(庭鞫)하였다. 이만빈(李萬彬)을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이만빈이 공초(供招)하기를,
"신(臣)이 태인(泰仁)에 있을 때에 박필현(朴弼顯)이 청주(淸州)에 적(賊)이 일어났으므로 가서 토벌할 것이라는 핑계로 패(牌)를 내어 군사를 일으켜 박필몽(朴弼夢)의 맏아들을 부장(副將)으로 삼고 아전(衙前) 송원창(宋元昌)을 천총(千摠)으로 삼았습니다. 신을 아중(衙中)에 머물러 두어 그 가족을 거느리게 하고, 박필현은 장차 전라 감영(全羅監營)에 가서 군사를 합하여 적을 토벌할 것이라 하였는데, 박필몽의 아들과 귓속말을 하는 것이 수상하였습니다. 백마를 타고 전라 감사(全羅監司)에게 글을 전한 자는 곧 태인의 천총 이장욱(李章旭)이었는데, 그 글은 박필몽의 글이었고, 박사관(朴師寬)이 전주(全州)에 살면서 감영에 왕래하였습니다. 박필현이 전주로 향하였는데, 전주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서 중군(中軍)이 먼저 달아났습니다. 대개 글을 전한 자가 와서 말하기를, ‘감사에게 전하는 글이 판관(判官)에게 잘못 전해졌는데 판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역적이다.」 하며 잡으려 하였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군이 먼저 달아나서 군졸이 흩어졌으므로, 신도 달아났습니다. 신이 태인에 있을 때에 정가(鄭哥)라는 얼굴이 크고 수염이 많고 살쩍이 희끗희끗한 자가 갈원(葛院)사는 정생원(鄭生員)이라 하며 와서 말하기를, ‘남태징(南泰徵)·이사성(李思晟)과 박필몽 부자와 이유익(李有翼), 그리고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가 이유익의 사돈으로서 그 가운데에 들었다.’ 하였는데, 박필현이 신의 종적(蹤跡)은 달아나기 쉽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끝내 그 모의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본디 팔힘이 세므로 박필현이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군중(軍中)에 따라가게 하였으나, 신과 박필현의 중방(中房) 원세형(元世衡)은 맡은 일이 없었습니다. 전주에 이르러 군사가 흩어졌으나, 신은 박필현에게 끌려서 고산(高山)까지 따라갔습니다. 군사가 흩어질 때에 신이 과연 칼을 뽑아 군중에서 호령하며 중군이 달아난 일을 고하지 않은 것을 꾸짖었습니다. 당초 정가가 왔을 때에 박필현 부자가 신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를 따라서 일을 같이하면 공로가 있을 것이다. 너는 관상이 박하지 않으므로 장래에 반드시 호식(好食)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신석영(申錫永)을 여섯 차례 형신(刑訊)하니, 신석영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의 이름이 과연 일영(日永)입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개성 유수(開城留守) 심공(沈珙)이 장계(狀啓)하여 청하기를, ‘강도(江都)의 전례에 따라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하였으나, 이번에 싸움에 나아간 기사(騎士)는 날쌔어 쓸 만할 뿐더러, 그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한 것은 마침 적(敵)을 만나지는 못하였더라도 특별히 표창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싸움에 나아간 기사·보졸(步卒)에게 따로 관무재(觀武才)를 설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광덕(李匡德)이 장계(狀啓)하기를, ‘다섯 산성(山城)의 군향(軍餉)은 이제부터 감영(監營)에서 모곡(耗穀)을 받는 일을 오로지 맡아서 함부로 쓰는 것을 엄히 막고 별장(別將)의 양료(粮料)만을 내려 주고, 성(城)과 기계(器械)를 수리하고 갖추는 모든 일은 모두 감영에 붙여 성첩(城牒)·군기(軍器)·군병(軍兵)을 감영에서 주장해야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 일은 감영·병영(兵營)을 물론하고 오직 마땅한 사람을 얻기에 달려 있습니다. 뒷날에 감사가 일에 힘쓰지 않는다면 해이하여 피폐하는 것이 도리어 오늘날보다 심해지겠으나, 우선 청한 대로 시행하되 군향의 모곡은 번번이 3분의 2는 양료와 상격(賞格)으로 내려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5월 22일 임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23일 계유

정국(庭鞫)하였다. 원만주(元萬周)을 추문(推問) 하니, 원만주가 공초(供招)하기를,
"을사년454)   3월에 신이 우연히 정세윤(鄭世胤)의 집에 갔더니, 정세윤이 부도(不道)한 말로 내므로, 신이 실색(失色)하였습니다. 정세윤이 말하기를, ‘오늘날 내외 팔로(內外八路)가 모두 우리들의 일에 참여하는데 애석하게 홀로 참여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며 협박하는 듯한 뜻이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몸에 상복(喪服)을 입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억지로 일을 같이하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정세윤이 말하기를, ‘반드시 장령(將令)이 있을 것인데 그때에 네가 회피하려 하더라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2월 28일에 들으니, 정세윤이 전라도에 가서 계하 공사(啓下公事)455)  라 거짓말하여 상인(喪人) 아무에게 전령(傳令)하여 불러오게 하였다 하므로, 신이 두려워서 부안(扶安) 성득하(成得夏)의 집에 따라갔더니, 정세윤이 그 곳에 있었는데 말하기를, ‘4월 12일에 거사할 것인데 나에게는 심복이 없다. 오직 그대가 어려서부터 친구이므로 불러왔다.’ 하고, 신에게 상복을 벗고 종군(從軍)하게 하며 말하기를, ‘네가 따르지 않으려면 나를 위하여 글을 하나 지으라.’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무슨 글을 얻으려 하는가?’ 하니, 정세윤이 말하기를, ‘정팔룡(鄭八龍)과 군사를 연합하려 하니 격서(檄書)를 지어야 하겠다.’ 하므로, 신이 정팔룡은 어떠한 사람이냐고 물으니, 정세윤이 말하기를, ‘정팔룡은 영남(嶺南)에서 때에 맞는 호걸인데 군사 수천을 기르므로 내게 함께 군사를 연합하려 한다.’ 하며 다그쳐 격서를 짓게 하므로, 마지못하여 지었습니다. 이어서 곧 떠나 안성에서 원주(原州)로 갔습니다. 그 뒤의 일은 전혀 모릅니다."
하였다.

 

5월 24일 갑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내일부터 국문(鞫問)을 멈추고 대신(大臣)·원훈(元勳)은 군공(軍功)을 기록하는 일을 의논하여 정하라고 명하였다.

 

정국(庭鞫)하였다. 원만주(元萬周)를 다시 추문(推問)하니, 원만주가 공초(供招)하기를,
"정세윤(鄭世胤)이 신(臣)이 글을 잘한다 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습니다. 신이 적진(賊陣)에 따라가서 문서를 맡아 볼 때에 이인좌(李麟佐)의 글이 급하게 왔는데, ‘고변(告變)이 장차 들어갈 것이니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올라오라.’하였습니다. 정세윤과 신은 철수하여 청주(淸州)로 향하였는데, 약속한 나가(羅哥)·김가(金哥)의 군사는 날짜를 어기고 미처 오지 않았습니다. 14일 밤에 청주에 이르니, 권서룡(權瑞龍)·이인좌가 군사를 거느리고 읍내에서 5리쯤 되는 산골짜기에 주둔하여 있었습니다. 15일 밤에 이인좌가 대장(大將)이 되고 정세윤이 부장(副將)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에 들어가 병사(兵使)를 죽였습니다. 안성(安城)에서 군사가 패하고 신은 몸을 빼어 달아났으므로, 그 뒤의 일은 신이 모릅니다. 신이 적중(賊中)에 들어갔을 때에 흉한 격서(檄書)를 지은 것이 세 번인데, 하나는 영남(嶺南) 정희량(鄭希亮)에게 보내고 하나는 평안 병영(平安兵營)에서 보낸 역사(力士)로서 이인좌의 군관(軍官)이 된 관서(關西) 사람 임국량(林國良)을 시켜 이사성(李思晟)에게 보내고 하나는 호남(湖南) 나만치(羅晩致)에게 보냈으며, 흉한 관문(關文)을 지은 것은 대여섯 번인데 호서(湖西)의 여러 고을에 전파하였습니다. 최경우(崔擎宇)가 가천역(加川驛) 마을에 있을 때에 평안 병사(平安兵使)가 양식을 사고 말을 살 자금으로 은(銀) 3백 냥을 보내고 이인좌가 60냥을 내어 주어 말을 사서 바치게 하였는데, 신이 최경우와 함께 반으로 나누어 음식을 사 먹고는 최경우와 공모하여 가천역의 역졸(驛卒)을 꾀어 역마(驛馬) 열 두 필을 훔치게 하여 청주 군중(軍中)에 넘겼습니다. 정세윤이 관군(官軍)을 만나게 되어 밤에 싸우려 하는데, 신이 말리며 말하기를, ‘도감(都監)의 군사는 본디 날쌔어 저항할 수 없으니 물러가 험조(險阻)에 웅거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나, 정세윤이 듣지 않아서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당초 두 역적이 진군(進軍)할 때에 신이 말하기를, ‘한 지대(枝隊)는 양지(陽智)로부터 나아가고 한 지대는 용인(龍仁)으로부터 나아가 광주 산성(廣州山城)을 합공(合功)하며 평안 병사가 진군하여 와서 원조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였으나, 두 역적이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적진(賊陣)의 모든 일은 이인좌가 주장하였고, 모사(謀士)는 영광(靈光)사람 허담(許湛)이라는 자인데 나이 열 일곱에 천문(天文)을 알고 병법(兵法)을 알았으며 용모는 파리하고 얼굴에 얽은 데가 많으며 양반은 아니나 정세윤이 얻어서 이인좌에게 보낸 자입니다. 장사(壯士)로서는 고득운(高得雲)이 기총(旗摠)이 되고 고몽량(高夢良)이 파총(把摠)이 되었습니다. 역적이 정행민(鄭行旻)이라 칭하는 자는 곧 정세윤인데, 그 가족(家族)이 드러나서 잡힐까 염려하여 이름을 고쳐 부른 것입니다. 또 안찬서(安贊瑞)가 있는데 또한 장사라 칭합니다. 신의 아우 원백주(元百周)는 좌잔현(左棧峴)에서 죽었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5월 25일 을해

윤순(尹淳)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조원명(趙遠命)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세진(李世進)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남하운(南夏運)은 이의징(李義徵)의 사위이고 이홍발(李弘渤)의 매부이며 역적 박필현(朴弼顯)과 요망한 유내(柳徠)의 심복인데, 요행히 법망(法網)에서 빠져 이제까지 편히 사니, 청컨대 도배(島配)하소서. 유뇌(柳耒)는 역적 유내의 동기로서 흉역(凶逆)의 속마음이 일관하여 왔으니, 청컨대 원배(遠配)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춘당대 관무재(春塘臺觀武才)에 친림(親臨)하였다. 사흘 동안 행하고서 끝났다.

 

5월 26일 병자

임금이 이날부터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 오명항(吳命恒)·형조 판서(刑曹判書) 서명균(徐命均)을 인견(引見)하여 군공(軍功)을 상을 주되 등급을 나누어 차등을 두었다. 6월 1일에 이르러 비로소 끝났다.

 

5월 27일 정축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무사(武士)를 시취(試取)하였다.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은 초시(初試)를 보지 않고 과거(科擧)에 나아가게 하였는데, 오명항(吳命恒)의 말을 따른 것이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下敎)하기를,
"언성군(彦城君) 김중만(金重萬)에게 전에 하교한 대로 집을 주고 상을 내리기 전에 호조(戶曹)에서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장복(章服)을 갖추어 주라."
하였다.

 

기호(畿湖)에서 피난한 양민(良民)으로서 봉적(鋒鏑)에 죽은 자는 단(壇)을 설치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스스로 제문(祭文)을 지어 두 도(道)에 나누어 보내어, 호서(湖西)는 본도(本道)의 어사(御史)를 시켜 제사하게 하고 경기에는 따로 옥당(玉堂) 신치근(申致勤)을 보냈다.

 

5월 28일 무인

회맹제(會盟祭) 때에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근수(跟隨)456)  가 녹훈(錄勳)에 참여하고 천역(賤役)을 면하는 법을 폐지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 헌납(獻納) 이광보(李匡輔)의 말을 따른 것이다.

 

5월 29일 기묘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유생(儒生)을 시험하여 오원(吳瑗) 등 세 사람을 뽑았다.

 

양사(兩司) 【장령(掌令) 이세진(李世璡), 헌납(獻納) 이광보(李匡輔)이다.】 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일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사행(使行)의 일은 사신이 주선을 잘하지 못한 탓은 아니나, 대신(臺臣)이 쟁집(爭執)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본디 그러한 것이다. 상사(上使)의 일은 아뢴 대로 하고 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은 모두 삭출(削黜)하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 【 헌납 이광보·정언(正言) 서종옥(徐宗玉)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전(李)은 곧 이익관(李翼觀)·이순관(李順觀)의 집안 조카이고 민관효(閔觀孝)·권서린(權瑞麟)의 처남입니다. 한 마을에 같이 살고 정적(情跡)이 주무(綢繆)하므로 흉역(凶逆)을 꾀한 정상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가 출계(出繼)하였기 때문에 연좌(連坐)를 면할 수 있었으니, 청컨대 이전을 도배(島配)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진잠 현감(鎭岑縣監) 이만동(李萬東)은 전에 청주(淸州)에서 적변(賊變)이 일어났을 때에 순영(巡營)의 관문(關文)에 따라 군사를 징발하여 관문(官門) 밖에 모인 지 무릇 사흘이 되어도 넘겨 주지 않았습니다. 비록 사세가 어떠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전하는 말이 낭자하여 듣기에 놀라우니, 청컨대 잡아다 조사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만동은 진잠에 있을 때에 이지시(李之時)·나만치(羅晩致) 등 여러 역적과 왕래가 주무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의심하였다. 변란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公州)로 향하였는데, 진잠에서 공주까지 큰길은 멀고 지름길이 가까우나, 청주의 군사들이 이만동이 역적에게 들어갈까 의심하여 지름길을 버리고 큰길로 가기를 굳이 청하였어도, 이만동이 강요하였으므로 되지 않았다. 이 계청(啓請)이 있게 되어 나문(拿問)당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본도(本道)에서 조사하여 역적을 따른 실상을 알아내고 국청(鞫廳)으로 옮겼는데,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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