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진
의정부(議政府)에서 중외(中外)에 통고한 글에 이르기를,
"아!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이 안팎으로 화응(和應)하여 위란(危亂)을 꾀하는 것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일월(日月)처럼 밝으신 선대왕(先大王)께 힘입어 마침내 동요할 수 없게 되서는, 드디어 교문(敎文) 가운데에서 버젓이 근거 없이 욕하여 그 부도(不道)한 마음을 부려서 그 하늘에 사무치는 대역(大逆)의 죄가 남김없이 다 드러났는데도 갑진년457) 에 이르러서야 처형되었으니 늦었다 하겠다. 그 혈족의 유얼(遺孼)이 그래도 징계되어 두려워하지 않고 몰래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흉악한 말을 전파하여 하늘을 헐뜯고 해를 보고 짖어 인심을 속이고 어지럽히는 방도를 못하는 짓이 없이 하였는데, 을사년458) 역적 이천해(李天海)의 변란과 지난해 겨울에 흉서(凶書)가 나오기에 이르러 극심하였다. 무릇 혈기(血氣)가 있는 자라면 누구인들 팔을 걷어붙이고 이를 갈며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자려 하지 않으랴마는, 호서(狐鼠)459) 의 소굴을 부수지 못하고 이매(魑魅)460) 의 정상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오히려 통탄스럽더니, 이제야 하늘이 진노하고 종사(宗社)에 위령(威靈)이 있어 죄인을 찾아내어 왕법(王法)을 쾌히 바로잡았다. 그 흉악한 말과 반역한 정상의 내력과 근인(根因)이 역적들의 옥사(獄辭) 가운데에 낭자하게 다 드러났는데, 시험삼사 그 대략을 뽑아서 말하여 보겠다. 역적 이유익(李有翼)의 공초(供招)에 ‘경중(京中)에서 괘서(掛書)한 적(賊)은 곧 이서우(李瑞雨)의 첩자(妾子)이고 민관효(閔觀孝)의 처남인데 이는 바로 이순관(李順觀)·이익관(李翼觀)이며, 호남(湖南)에서 괘서한 적은 곧 산음(山陰) 사는 정가(鄭哥)인데 이는 바로 정탁(鄭倬)입니다.’ 하였다. 역적 이익관의 공초에 ‘당초 흉악한 말을 한 자는 이유익·박필현(朴弼顯)이며, 민관효가 이익관에게 괘서하는 일을 시키며 말하기를, 「그대들이 이 일을 하면 좋은 벼슬을 얻을 것이다.」 하였으며, 이익관이 글을 짓고 이순관이 썼으며, 2월 22일 날이 밝기 전에 성안에 들어가 서소문(西小門)에 그 글을 걸었으며, 이순관이 그 글을 민관효에게 보이고 민관효가 이유익에게 말하였는데, 이순관은 곧 역적 신광원(愼光遠)의 매부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흉적(凶賊) 이천해는 군사이며 이익관이 경중에 왕래할 때의 주인(主人)인데 그가 당돌할 줄 평소에 알기 때문에 이익관 형제가 흉악한 말을 하도록 시켜서 보냈습니다.’ 하였다. 역적 이사로(李師魯)의 공초에 ‘흉악한 말의 내력에는 대개 그 연유가 있습니다. 역적 심유현(沈維賢)이 늘 한탄하며 말하기를, 「이런 때가 아니라면 우리집이 어찌 이처럼 곤궁하겠는가?」 하였는데, 심유현이 척리(戚里)461) 로서 고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이런 원망하는 말을 하였으므로, 이유익·박필현 등이 말하기를, 「네가 흉악한 말을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면 인심을 어지럽힐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역적 임환(任環)의 공초에 ‘을사년부터 박필현·이유익이 가산을 정리하고 삼남(三南)에 출몰하여 집을 짓는다고도 하고 둑을 쌓는다고도 하며 심유현을 꾀어 차마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말을 날조하게 하여 인심을 선동하여 그 반역하는 일을 성취하려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을사년에 이천해가 흉악한 말을 하였기 때문에 처형되었으나, 그 흉악한 말은 박필현·이유익·심유현 등이 지어낸 것입니다. 한세홍(韓世弘)이 이유익에게 말하기를, 「심유현의 일이 발각되었으면 의당 큰일이 났을 것인데,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으니 순조로이 이루어진다 하겠다」 하니, 이유익이 말하기를, 「심유현은 기민하고 주밀하므로 이런 말을 만들어 퍼뜨려서 항간에서 현혹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유익 등이 반역을 꾀하고 서로 화응한 뒤에 말하기를, 「그때 이천해를 부추기어 흉악한 말을 하게 한 것이 도움됨이 없지는 않았다.」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심유현이 부귀를 꾀하려다가 이유익·박필현에게 유인당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제 이 역적들의 공초는 맥락이 관통하고 포치(布置)가 음밀(陰密)한 것이 대개 이러하였다. 아! 통탄스럽다. 계묘년462) 의 교문이 바로 김일경이 흉악한 말을 앞장서 선동한 근본이며, 그 뒤 이천해의 변란과 심유현이 흉악한 말을 만들어 퍼뜨리고 이순관이 괘서한 것은 다 민관효·박필현·이유익 등이 지휘한 것인데 한결같이 역적 김일경의 교문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다. 박필현·이유익·심유현은 또한 다 역적 박필몽(朴弼夢)을 종주(宗主)로 삼았으니, 박필몽은 또한 역적 김일경과 몸은 둘이나 마음은 하나로 악을 같이하여 서로 도운 자이다. 무릇 이 역적들은 혹 선조(先朝)에서 죄를 얻어 세상에서 버려진 집안이 되어 감히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거나, 지위를 얻으려고 애쓰고 얻은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다가 원한을 쌓아 드디어 임금을 업신여기는 흉악을 부렸다. 반역하려는 의기가 서로 연합하고 흉악한 기질이 함께 모이자, 이에 감히 천지를 속일수 있고 일월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처럼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극히 흉악한 말을 지어내어 역적 김일경이 갑진년 이전에 임금을 속인 도리에 어그러지는 말에 화응(和應)한 것은 모두가 민심을 속여 어지럽히고 종사(宗社)를 기울여 엎으려는 흉악한 의도에서 나온 것인데, 오히려 턱없이 지어낸 자취가 분명하여 숨길 수 없을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심유현은 왕실의 인척이므로 그의 말은 사람들을 어지럽히기 쉽고 또 그가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은 이로운 일로 꾈 수 있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꾀어서 체결하여 그 입을 빌어 그 거짓을 퍼뜨리려 하였는데 심유현은 본디 경솔하고 사악한 한낱 무뢰한으로서 부귀를 탐내 흐뭇하게 동정하였다. 그래서 민관효·이익관의 무리가 때를 타서 화응하여 즐거이 들어가 합치고 박필현·이유익의 무리가 몰래 주장하고 비밀히 선동하여 갖가지 꾀로 위태롭게 동요시켜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순리를 범하여 하늘의 토벌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천지와 군신(君臣)이 생긴 이후로 흉역(凶逆)의 정상에 이 역적만큼 음참(陰慘)하고 흉교(凶巧)한 것이 없었다. 대개 이인좌(李麟佐)·이웅좌(李熊佐)·정희량(鄭希亮)·나숭곤(羅崇坤) 등 여러 역적은 모두 박필현·이유익·심유현이 종용한 것인데, 그 초두의 발단은 다 역적 김일경의 교문에서 비롯하였으니, 앞뒤로 벌인 것이 바로 일관하여 온 것이다. 팔도의 백성이 본연의 착한 마음으로 윤리를 지키는 천성을 생각하면 귀역(鬼蜮)463) 의 환롱(幻弄)에 조금도 미혹할 리가 없을 것인데, 오직 이 역적들이 흉악한 말을 하여 몰래 선동하고 현혹하였을 뿐이다. 한 나라의 위아래 모든 사람이 피를 흘리고 눈물을 머금으며 말을 지어낸 흉악한 사람의 뒤를 쫓았으나 잡지 못하므로 뭇사람의 뜻이 애통하기 그지없고 4년이 하루같이 두렵고 불안하였는데, 이제 다행히 흉악한 무리가 스스로 승복하여 처형되고 난역(亂逆)의 속마음이 여러 공초에 죄다 드러나서 여러 해 동안 법망에서 빠졌던 역적이 모두 처형되니, 팔도의 하늘 아래에 사는 모든 사람의 분노가 이제야 비로소 시원히 풀렸다. 그러므로 역적들의 흉악한 공초를 중외(中外)에 분명히 보여, 이 역적이 빚어낸 본말의 시초가 있어서 하루아침이나 저녁의 일이 아님을 모두 알게 한다. 이번에 통고하는 사연은 봉조하(奉朝賀)와 시임 대신(時任大臣)가 서울에 있는 원임 대신(原任大臣)의 뜻이 다 중외에 통고하여 이 통쾌한 뜻을 같이하려 하므로 연중(筵中)에서 아뢰고 글을 보내어 통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상차(上箚)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병이 심하기 때문인데,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면직을 윤허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입시(入侍)하여 아직 감정(勘定)을 다하지 못한 군공(軍功)을 품지(稟旨)하였다. 품지가 끝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공은 이미 끝났으므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급한 일이다. 지난번 헌의(獻議)한 일을 높은 다락에 묶어 두면 무익할 것이니, 미원장(薇垣長)464) 을 우선 갈아 조정에서 계책을 의논하는 일에 같이 참여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일 신사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기찰 장교(譏察將校) 양경징(粱景徵)이 글로 고한 문의(文義) 사람 황침(黃琛)은 고(故) 대장(大將) 황징(黃徵)의 손자입니다. 이인좌(李麟佐)의 아내가 청주(淸州)에 갇혀 있을 때에 황침도 같이 갇혀 있었는데, 이인좌의 아내가 황침에게 말하기를, ‘네가 대원수(大元帥)의 자리를 다투었으나 되지 못하였으므로 우리 집을 저버린 것이 심하였다.’ 하였으니, 버려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잡으라고 명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세진(李世璡)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제 삼가 보건대 국청 죄인(鞫廳罪人)의 아들이 전정(殿庭)에 마구 들어와 땅에 엎드려 호소한 거조는 놀라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대저 죄인의 아들은 과거 볼 수 있는 몸이 아니고 선비를 시험하는 전정은 억울함을 소리내 호소하는 곳이 아닌데, 때를 타서 몰래 들어와 이런 놀라운 일을 하였으니, 그 무엄한 죄에 대하여 국가에서 처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작문(作門)465) 의 초관(哨官)과 금란(禁亂)·금훤(禁喧) 등의 관원은 허다한 거자(擧子)466) 가 혼잡하게 들어올 때에 판별하기가 어렵기는 하나, 그 직책을 생각하면 검칙(檢飭)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해당 초관과 금훤랑(禁喧郞)·금란관(禁亂官)은 모두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하시고 작문의 군졸은 본군문(本軍門)을 시켜 결곤(決棍)하게 하고 하리(下吏) 등은 유사(攸司)를 시켜 가두어 죄주게 하여 뒷날을 징계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3일 임오
정국(庭鞫)하였다. 조명규(趙命奎)를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조명규가 공초(供招)하기를,
"지난해 9월쯤에 신(臣)이 형 조관규(趙觀奎)·아우 조형규(趙亨奎)와 함께 조덕규(趙德奎)의 집에 모였을 때에 조동규(趙東奎)도 서울에서 와서 그 아우 조흥규(趙興奎)와 함께 다 그 자리에 있었는데, 조동규의 말을 들으니 ‘한세홍(韓世弘)이 말하기를 「소현(昭顯)467) 의 집에서 다시 해야 할 듯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났다는데, 대개 밀풍(密豐)의 아들을 가리킨 것이다.」 하고, 또 남태징(南泰徵)·이사성(李思晟)도 같이 모의한다 하더라.’ 하였습니다. 지난해 8월에 한세홍이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제 곧 평안 병영(平安兵營)에 갈 것인데, 네가 이 뜻을 네 형과 조덕규에게 말하여 쓸 만한 사람을 많이 구하여 기다리라.’ 하기에, 신이 신의 형과 조덕규에게 말하였더니, 조덕규가 용맹한 선비 신윤조(辛胤祖)를 구하였는데, 신윤조는 집이 넉넉하고 장사(壯士)가 많아서 혼자 1백명을 당할 만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세 차례 형신하니, 또 공초하기를,
"2월 22일에 신이 조동규·조덕규와 서울에서 모였을 때에 두 사람이 말하기를, ‘신윤조는 동대문(東大門)에서 들어오고 이사성은 서로(西路)에서 들어오고 남태징은 성안에서 일어나 화공(火功)한다.’ 하였습니다. 조덕규는 가노(家奴)와 비부(婢夫) 중에서 건장하고 용맹한 자 수십인을 모으고 신도 말을 장만하여 15일에 일제히 모이기로 약속하였는데, 고변(告變) 때문에 모두 다 달아나 흩어졌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이만휘(李晩輝)를 추문(推問)하니, 이만휘가 공초하기를,
"15일에 이배(李培)가 선봉(先鋒)이 되어 병영(兵營)에 들어가 병사(兵使)를 죽였는데 신도 따라갔고, 정희윤(鄭禧胤)·서홍섭(徐弘涉)을 청주(淸州)의 객사(客舍)에서 만났습니다. 청주에서 6, 7일 동안 머물렀는데, 서울에서 온 양반이 적장(賊將)과 장막 안에서 앉아 이야기하고는 길을 나누어 빨리 가게 하였습니다. 이튿날 군사들이 안성(安城)으로 향하였는데, 신은 이현(梨峴)에 이르러 달아나 돌아왔습니다. 적을 따른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효시(梟示)하라고 명하였다.
이인복(李仁復)을 승지(承旨)로, 박사수(朴師洙)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4일 계미
조명규(趙命奎)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네 차례 형신(刑訊)하였는데, 조명규의 공초(供招)에 밀풍(密豐)의 아들을 추대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추문하라고 특별히 명한 것이다. 조명규가 공초하기를,
"신이 조동규(趙東奎)에게서 들은 지 세월이 조금 오래 되었으므로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가 밀풍이라 하였는지 그 아들이라 하였는지는 명백하지 않으니, 절로 무고(誣告)한 죄가 됩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조일규(趙一奎)를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조일규가 공초(供招)하기를,
"3월 12일 2경(二更) 쯤에 신이 조덕규(趙德奎)의 집에 갔는데 발이 당(堂)에 미치기 전에 엿들으니, 조덕규가 그 처자와 서로 말하기를, ‘이사성(李思晟)이 바야흐로 모반하는데 함께 일을 같이한다. 한세홍(韓世弘)이 바야흐로 평안 병영(平安兵營)에 내려간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적들이 혹 여주(驪州)에 두루 미칠는지 모르니, 너희들은 일찍 원주(原州)로 피란하라.’ 하기에, 신이 듣고 놀라서 곧 방에 들어가 조덕규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관가에 고하겠다.’ 하니, 조덕규가 크게 노하여 목침으로 신을 때렸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조덕규는 이미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정상을 안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시혁(金始㷜)이 장계(狀啓)하기를, ‘이번에 군사를 동원시킨 것은 갑자기 나왔으나 오히려 해주(海州)에서 수천의 병마(兵馬)를 징발하여 창릉(昌陵) 앞벌로 이진(移陣)하였습니다. 판관(判官) 이명곤(李明坤)은 곡물(穀物)을 나누어 주는 데에 조금도 허술함이 없고 금천 군수(金川郡守) 박종(朴琮)은 평소에 마음을 다하여 보수하였으니, 두 고을 수령(守令)에게는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관직을 맡아 직분을 다하고 일에 임하여 준비를 잘하였으므로 모두 아름다우니, 단양 군수(丹陽郡守) 윤동설(尹東卨)의 예(例)에 따라 3품(品)으로 승서(陞敍)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6월 5일 갑신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사은 부사(謝恩副使) 정석삼(鄭錫三)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광좌가 변무사(辨誣使)가 돌아올 때에 나라를 욕되게 한 말이 있다 하여, 스스로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광좌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게 대신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조정(朝廷)을 일월(日月)처럼 높이지는 못하더라도, 소신(小臣)의 손으로 나라의 일을 그르쳐 마침내 망측한 말로 우리 군부(君父)를 욕되게 하였으니, 어찌 군주가 욕되었는데 신하가 죽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사신의 일을 윤허하시지 않으면 청컨대 견책을 받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정석삼이 말하기를,
"경계를 범하여 넘어온 일은 글로 논열(論列)하여 시기에 앞서 지어 바쳐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범하여 넘어온 일에 대하여 피차의 곡직(曲直)을 논하면, 반드시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저들의 사기(事機)를 이제 이미 익히 알았는데, 시끄러이 다투어 밝히려면 한갓 모욕받을 뿐일 것이니, 다만 범하여 넘어온 사람의 곡절을 써서 각부(閣府)에 이자(移咨)하고 다만 다시 더 신칙(申飭)하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도 그러하다. 상격(常格)으로 대우할 수 없다. 나머지 일은 사신이 그때 그때 잘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신치근(申致謹)이 서원(書院)을 거듭 설치하는 폐단을 아뢰고, 참찬관(參贊官) 조덕린(趙德隣)이 말하기를,
"자손이 융성하면 들어가지 않아야 할 것인데도 들어가고, 자손이 잔미(殘微)하면 들어가야 할 것인데도 들어가지 못하니, 이것은 당론(黨論)의 소치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제부터는 서원의 편액(扁額)을 허가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태좌(李台佐)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조상명(趙尙命)을 정언(正言)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우윤(右尹)으로, 서종옥(徐宗玉)을 부교리(副校理)로, 임수적(任守迪)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조덕린(趙德隣)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영남(嶺南)은 평소에 문헌(文獻)의 고장이라 일컬어 사람들이 예의의 풍습을 이어받는데도 흉역(凶逆)의 무리가 그 사이에서 싹트니, 마음 아프고 머리 아파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적의 입에 나타난 한두 사람은 곧 잡아와서 그 죄를 조사하여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범한 것이 있는 자가 처형되고 사실이 없는 자가 억울함을 씻는다면, 공평하고 정대한 정치와 불쌍히 여기고 돌보는 도리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영남의 일은 이미 도신(道臣)하게 하유(下諭)한 것이니, 임금의 말은 의당 믿어야 한다."
하였다.
6월 7일 병술
북도 안무사 윤헌주(尹憲柱)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박창제(朴昌悌)는 올해 2월 도시(都試)468) 가 파할 때에 임하여 말을 점고하는 일 때문에 감히 도시를 치른 지 한달이 지난 뒤에 불시에 전령(傳令)하여 서둘러 군사를 모으는 일을 전례라고 칭탁하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상례로 점고하는 것이라면 날짜를 정하여 모이되 다만 말을 가지고 와서 점고받게 해야 할 것인데, 이제는 곧 각각 군장(軍裝)을 정제하고 영하(營下)에 대오(隊伍)를 벌여 머물러서 고함지르기를 3, 4일 동안이나 오래 하다가 신이 내렸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해산하여 보냈습니다. 박창제(朴昌悌)가 과연 변고를 듣고서 정제하고 기다리는 정성이 있었다면, 신이 왔기 때문에 허둥지둥 파하여 보낼 필요가 없을 것이니, 거조(擧措)가 매우 수상합니다. 박창제가 변고를 들은 당초에 영고(營庫)의 쌀 10석(石)을 내어 죽을 만들고 베 4동(同)을 내어 자루를 만들고 또 허다한 무명을 내어 청장(淸醬)에 적셔 말리고 그 밖에 군복(軍服)·군막(軍幕)·마철(馬鐵)·황촉(黃燭) 따위 물건도 많이 장만하고 한 장(場)에서 파는 짚신·전립(戰笠)을 죄다 빼앗아 들였다가, 신이 간다는 글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장만한 물건들을 창고 속에 깊이 감추고 빼앗은 짚신·전립을 혹 본주인에게 돌려주기도 하였으니, 그 조치가 처음부터 군사를 징발하는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정제하고 기다리는 뜻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신의 소장(疏章)을 금오(金吾)469) 에 내려 엄히 구핵(究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박창제의 일은 매우 놀라우니, 금오를 시켜 이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6월 9일 무자
정국(庭鞫)하였다. 안찬서(安贊瑞)를 다시 추문(推問)하니, 안찬서가 공초(供招)하기를,
"3월 14일 밤에 신과 김장(金墇)과 양성(陽城) 사람 등이 죽산(竹山)·양성의 두 적진(賊陣)이 서로 모인 곳에 함께 갔는데, 안엽(安熀)과 정대윤(鄭大胤)이 모든 일을 상의하였고, 평안 병사(平安兵使)에게 왕래하는 일은 안엽을 시켜 맡게 하였고, 정대윤이 김장을 안엽에게 보내어 돈 20냥을 찾아와서 신에게 주어 말을 사서 적진에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하는 일에 같이 참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황부(黃溥)를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한 차례 형신(刑訊)하니, 황부가 공초(供招)하기를,
"경원(慶源) 사람 남귀석(南龜錫)이 순영 군관(巡營軍官)의 전령(傳令)을 가지고 경흥(慶興)에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순사도(巡使道)가 마침 경원(慶源)에 있을 때에 삼봉도(三峰島)에 관한 말을 듣고 나를 시켜 알아보게 하여 찾을 바탕으로 삼았다.’ 하기에, 신이 탐지하였는지를 물었더니, 남귀석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두리산 봉대(頭里山烽臺)에 올라 날이 갠 때를 당하면 그 섬모양을 겨우 볼 수 있는데 누운 소와 같다.」 하므로, 신이 써서 순사에게 신보(申報)하기를, ‘이 섬을 찾으려면 반드시 스무 사람을 구하여 그 한 해 동안의 신역(身役)을 면제하되 자원하여 용맹하게 가도록 해야 할 것이고, 북도(北道)의 어선(漁船)은 말구유[馬槽]같아서 바다를 건널 수 없으므로 반드시 판선(板船)이 있어야 섬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순사가 답하기를, ‘이 섬이 판도(板圖)에서 빠진 것은 참으로 아까우니 빨리 판선을 만들어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에게 배를 만드는 일을 조금 아는 종이 있으므로 2월부터 먼저 본판(本板)을 만들었으나, 미처 일을 끝내지 못하고 변고를 들었으므로 버려두었습니다. 바다로 들어가 피란한다는 말은 본디 신이 입에서 낸 것이 아닙니다. 김세준(金世俊)과 시창(時昌) 등을 잡아와서 대질(對質)하면 허실(虛實)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황인(黃鏻)은 신의 얼칠촌숙(孽七寸叔)이고 참판(參判) 이명언(李明彦)의 외사촌인데 본디 심병(心病)이 있어서 아중(衙中)에 데려다 두었습니다. 황인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나문(拿問)받은 뒤의 일은 신이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북도 안무사(北道安撫使)가 아뢰기를,
"삼봉도는 예전부터 서로 교통한 일이 없는데, 황부는 죄인의 아비로서 배를 만들어 들어갈 생각을 하였으니, 매우 흉악하고 교활합니다. 나라에 급한 일이 있으면 이 새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들어 가 그 난을 피한다는 말은 황부와 좌수(座首) 김세준이 수작할 때에 급창노(及唱奴)470) 시창·만창(萬昌) 등이 매우 상세히 들었습니다."
하였고,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이 아뢰기를,
"황부의 얼숙(孽叔) 황인은 아객(衙客)으로서 황부의 첩을 따라 함흥(咸興) 땅에 가서 버젓이 밤을 타서 물에 들어가 죽었습니다."
하였다.
김재로(金在魯)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서명빈(徐命彬)을 교리(校理)로, 박사성(朴師聖)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대사간(大司諫)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이정필(李廷弼)의 일 때문에 탑전(榻前)에서 신의 성명을 들추어, 신은 다만 순영(巡營)에서 들은 바에 따라 이정필을 논하였을 뿐이므로 그 말이 절로 도순무(都巡撫)와 다르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아! 신이 이정필에게 무슨 쌓인 원한과 깊은 노여움이 있어서 반드시 죄(罪)주려 하겠습니까? 이정필(李廷弼)이 고을을 버린 일을 지금 의논하는 자가 혹 달아날 것이 아니라 구원을 구한 것이라 하나, 예전부터 성(城)이 에워싸여 다급한 것은 수양(睢陽)471) 보다 더한 일이 없는데, 남제운(南霽雲)472) 이 비장(裨將)으로서 하란 진명(賀蘭進明)473) 에게 구원(救援)을 구한 일은 있으나 장순(張巡)474) ·허원(許遠)475) 이 어찌 성을 버리고 스스로 간 일이 있었습니까? 더구나 역적은 바야흐로 갇혀 있고 군사는 이미 대열을 이루었는데, 무슨 변란이 근심스러워 곧 자신이 스스로 구원을 청하느라 고을을 역적에게 줍니까? 병영(兵營)에 군사를 청하여 얻지 못하면 순영에 달려가 청해야 할 것인데, 역적이 이미 고을을 차지한 뒤에 순영으로 가지 않고 적의 소굴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돌아와 숨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적의 대세가 꺾여 변이 저희 장막(帳幕) 안에서 일어난 것은 실로 이보혁(李普爀)이 군사를 이끌고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니, 이정필에게 무슨 기록할 만한 공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정필에게 공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보혁의 공훈은 삭제해야 하고 기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틀림없이 이러하니, 도신(道臣)을 믿고 도순무를 믿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아! 역란(逆亂)이 겨우 평정되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우니, 대각(臺閣)에 있는 자는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의(私意)를 버려 법기(法紀)를 엄하게 하고 조강(朝綱)을 떨쳐서 성주(聖主)께서 분려(奮勵)하시는 뜻을 도와 능히 국가가 떨쳐 일어나는 공열(功烈)을 도모해야 할 것인데, 근일의 일을 보면 이정필을 논하지 않을 뿐이 아닙니다. 북정(北庭)476) 의 무함은 저들의 일이므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전대(專對)477) 를 책임진 자가 이미 머리를 부수고 뼈를 묻어서 신하로서 목숨을 바칠 의리는 본받지 않고 도리어 두려워하며 잠자코 한마디도 변리(辨理)하지 않고 돌아왔으므로, 합계(合啓)하여 나국(拿鞫)하기를 청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 것인데, 지난번에 파직(罷職)·삭직(削職)을 명하신 것은 처분이 너무 너그러우니, 벌을 더하기를 청하는 계(啓)가 곧 나와야 할 것인데, 여러 날 동안 소식을 기다려도 아직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이명언(李明彦)에 이르러서는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 나온 것이 한두 번뿐이 아니니, 가령 그 말이 반드시 진실하지는 않더라도 신하가 이런 이름을 지고도 밝히지 못하였으면, 어떻게 천지 사이에 스스로 설 수 있겠습니까? 돌아온 이때에 언책(言責)을 맡은 자들이 또한 특별히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는 논리가 있어야 할 것인데 아직도 고요하니, 이것이 어찌 대각에서 견제되어 돌아보고 망설이는 정태(情態)가 많고 분통하여 격절(激切)한 의사가 적기 때문이겠습니까? 또한 신이 듣건대, 영영(嶺營)478) 에 독(毒)이 쓰인 일은 어제 연신(筵臣)이 아룀에 따라 또한 본도(本道)의 도사(都事)를 시켜 안핵(按覈)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이 일은 이미 전 간장(諫長)479) 이 상소한 말에 따라 특별히 경옥(京獄)에 잡아오라고 명하셨고, 그 날짜를 헤아리면 죄수들이 이미 길을 떠나 며칠 사이에 서울에 들어올 것인데, 이제 와서 도로 또 돌려보낸다면 조정의 명령은 이미 거꾸러졌거니와 옥사(獄事)도 지연되기 쉬울 것이니, 신은 전에 이미 명하신대로 경옥에 잡아와서 안핵하는 체례(體例)를 엄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조정에서 기상이 이러하니, 탕평(蕩平)이 어찌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0일 기축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여적(李汝迪)이 장계(狀啓)하기를,
"곤양군(昆陽郡)에 보내진 흉서(凶書)의 등본을 올립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대신(大臣)과 금오(金吾)의 당상(堂上)과 양사(兩司)를 소견(召見)하여 이를 보이고 불사르라고 명하고, 이어서 하교(下敎)하기를,
"원흉(元凶)·대악(大惡)이 죄다 왕법(王法)에 따라 처형되었어도 흉적(凶賊)의 여얼(餘孽)이 역심(逆心)을 고치지 않았다. 이제 경상 우병사의 계본(啓本)과 곤양에 보내진 흉서를 보니 매우 놀랍다. 그 글을 보니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유종(遺種)임을 알 수 있다. 좌우 포청(左右捕廳)에 분부하여 각별히 살펴 잡게 하고, 영백(嶺伯)과 좌우 병사(左右兵使)에게도 마찬가지로 하유(下諭)하여 기어이 잡게 하라. 잡으면 2품 벼슬을 내리고 후히 상을 주겠다."
하였다. 그 뒤에 기찰(譏察)이 적당(賊黨) 이명근(李命根)·김처삼(金處三) 등의 의심스러운 정상을 알아냈으므로 국청(鞫廳)에서 잡아와 국문(鞫問)하였고 고발이 많이 있어 모두 잡아와 국문하였으나 사실을 알아내지 못하였는데, 이명근·김처삼 등은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고 나머지는 다 참작하여 처치하였다.
임금이 금오(金吾)의 당상(堂上)과 양사(兩司)를 인견(引見)하고 국청(鞫廳)의 죄수들을 등급을 나누어 참작하여 처치하였다. 정사효(鄭思孝)·이광적(李光績)·강세윤(姜世胤)·박경순(朴景淳)은 모두 정배(定配)하고, 이도(李燾)는 절도(絶島)에 정배하였으며, 황침(黃沈)·오붕만(吳鵬萬)은 모두 극변(極邊)에 정배하고, 이진유(李眞儒)·서종하(徐宗廈)는 모두 배소(配所)로 도로 보내고, 윤성시(尹聖時)는 금부(禁府)의 남간(南間)으로 옮겨 가두고, 이형상(李衡祥)·한사억(韓師億)·오명시(吳命始)·권서경(權敍經)·이희진(李喜震)·홍명원(洪命源) 등은 모두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정국(庭鞫)하였다. 민순효(閔純孝)를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민순효가 공초(供招)하기를,
"적사촌(嫡四寸)이 신에게 말하기를, ‘시세가 이러하니 많은 사람을 모아서 반역을 꾀하는 일을 해야 하겠다.’ 하기에, 신이 그 모의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네가 어떻게 알겠는가? 묵동(墨洞) 이진사(李進士)가 모주(謀主)이다. 너는 내 말대로 심부름하라.’ 하였습니다. 이진사가 1백 냥을 내고 신의 사촌이 논을 판 돈으로 2백 냥을 내어 군사 5백 명이 먹을 군량(軍粮)을 두령(頭領)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금산군(錦山郡)의 유학(留學) 고만운(高萬雲)의 집에서 송아지가 태어났는데, 머리가 둘이고 눈이 넷이고 귀가 셋이고 입이 둘이고 코가 둘이었다.
임금이 춘당대 관무재(春塘臺觀武才)에 친림(親臨)하고 아울러 오원(吳瑗) 등의 창제(唱第)480) 를 행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영상(領相)을 명초(命招)481) 하여 복상(卜相)482) 하게 하라."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을 좌의정(左議政)으로, 오명항(吳命恒)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임광(任珖)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6월 11일 경인
임금이 승지(承旨)를 시켜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에게 손수 쓴 글을 보냈는데, 이르기를,
"아! 내가 오늘날 경(卿)을 다시 정승으로 뽑은 것은 지난해의 회한(悔恨)을 씻으려는 마음과 오늘날의 탕평(蕩平)을 성취하려는 뜻 때문이다. 경이 비록 지난번의 일을 혐의하기는 하나, 전후에 이런 일을 당한 대신(大臣)들이 어찌 이 때문에 스스로 끊었겠는가? 아! 한밤에 장전(帳殿)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교한 것을 경은 이미 잊었는가? 잊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경이 성을 나갔다는 말을 듣고는 거의 입맛을 잃고 거가(車駕)를 대령하게 하여 몸소 가서 머무르도록 권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이제 다른 말을 할 것 없다. 지난 일을 묵은 먼지에 버려두고 시의(時議)를 생각 밖의 일로 물리치고서 즉일로 들어와서 내가 한 번 말하는 것을 들으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3일 임진
밤 1경(一更)에 달이 남두괴성(南斗魁星) 가운데로 들어갔다. 2경에 유성(流星)이 후고성(後鼓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너댓 자쯤 되고 색이 붉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정국(庭鞫)하였다. 이희천(李希天)을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이희천이 공초(供招)하기를,
"신(臣)이 청주(淸州)의 적진(賊陣)에 가서 파총(把摠)이 되어 획책(畫策)하기를, ‘한성에 군사를 감출 수 없으니 반드시 죽산(竹山)·안성(安城)을 얻으면 좋을 것이다.’ 하니, 역적들이 신의 말에 따라 안성·죽산으로 진군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송내익(宋來翼)을 다시 추문(推問)하니, 송내익이 공초(供招)하기를,
"17일에 역적의 격문(檄文)이 왔는데, ‘도부(到付)’ 두 글자를 써서 영문(營門)에 낱낱이 신보(申報)하여 빙고(憑考)할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그때 천총(千摠)이 와서 묻기를, ‘역적의 관문(關文)을 어찌하겠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도부를 써 주었다.’ 하니, 천총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도부를 써 주었는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도부를 아무리 써 주더라도 적진에 가지 않고 영문에 신보하면 무엇이 해롭겠는가? 병법(兵法)은 먼저 약한 것을 보이고서 그 뒤를 도모해야 하니, 이렇게 해야 옳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서종옥(徐宗玉)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출정(出征)한 장사(將士) 이외에 군문(軍門) 소속으로서 초시(初試)를 면제받은 자는 본디 한정이 있는데 모두 파격(罷格)하였으니, 설령 한때 호위(扈衛)한 노고가 있더라도 어찌 생사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간 군사와 견주어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삼중(三中)483) 에 급제를 내리는 것은 처음부터 정식(定式)이 있는데 또 이중(二中)도 아울러 뽑으라고 명하셨으니, 이 뒤에 끌어대어 전례로 삼으면 그 어지러운 것을 견딜 수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삼가 듣건대, 출정한 장사로서 겨우 일중(一中)한 자가 일제히 대신(臺臣)에게 하소하되, 이괄(李适)의 변란 뒤에 있었던 과거(科擧)의 전례를 증거로 삼아 억울하다고 말하여 마지않는다 하니, 이것이 그 한 가지 증험입니다. 분명한 분부를 내려 이 뒤에는 이렇게 하여서는 안된다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번 별시(別試)는 오로지 위로하여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상격(常格)과 다른데,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한때 위로하여 기쁘게 하려는 뜻이니, 뒤에 전례로 삼지 말 뿐더러 그 요행의 길을 열어 줄 수도 없으니, 각별히 신칙(申飭)하게 하라."
하였다.
홍상용(洪尙容)·강필신(姜必愼)을 장령(掌令)으로, 조한위(趙漢緯)·조상명(趙尙命)을 지평(持平)으로, 한현모(韓顯暮)를 정언(正言)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부교리(副校理)로, 조명교(曺命敎)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6월 14일 계사
임금이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 판의금(判義禁) 이태좌(李台佐), 동의금(同義禁) 이익한(李翊漢)·송인명(宋寅明)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역적의 정상은 아주 통분하고 처형된 자도 60여 인이나, 또한 앞으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인데,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여적(李汝迪)의 장계(狀啓)가 또 이르렀다. 역적의 유얼(遺孽)이 다시 날뛸 생각을 하여 흉악한 격문(檄文)을 우하형(禹夏亨)에게 보냈는데, 말이 매우 음흉하니, 지금은 옥사(獄事)가 쉽사리 마무리되지 않을 듯하다."
하고, 이어서 계본(啓本)을 내려 보이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우하형이 당초에 영남(嶺南)에서 역적을 토벌한 일은 매우 분명하지 않은데, 이제 이 흉악한 글을 물이나 불에 던지지 않고 베껴 보내기까지 하였으니, 잘못 생각한 것임을 면하지 못한다. 이러한 역당(逆黨)은 각별히 잡아서 다스려야 할 것인데, 어사(御史) 이종성(李宗城)이 인유(仁柔)에 지나치니, 능히 이를 판별하겠는가? 또 이 흉악한 글이 있었으므로 도하(都下)의 인심이 반드시 의구(疑懼)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합문(閤門) 밖에 가서 뭇사람을 대하여 불사르고 다들 정희량(鄭希亮)의 무리가 한 짓인 줄 알게 하라."
하매, 송인명이 말하기를,
"역당이 이 흉악한 글을 보낸 것은 오로지 겁줄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조용히 동요를 억제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이광좌가 말하기를,
"짐승이 궁하면 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너그러움과 사나움이 알맞아서 거조(擧措)가 마땅하게 하고서야 점차 다스려서 진압해 복종시킬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집(李㙫)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춘제(李春躋)를 집의(執義)로, 서명빈(徐命彬)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양사(兩司) 【사간(司諫) 임광(任珖)·홍상용(洪尙容)이다.】 에서 아뢰기를,
"이번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왔을 때에 삼가 듣건대, 오만한 글로 나라를 욕한 것이 전의 자문(咨文)보다 훨씬 더 망극하다 합니다. 전대(專對)를 가려 뽑은 데에는 성의(聖意)가 있었는데, 이미 전에 욕본 것을 조금도 씻지 못하였거든, 또 그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보았으면 오직 피를 흘리고 울음을 머금으며 뼈를 묻을지언정 돌아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하고 반드시 그 마음을 감동시켜야 할 것인데, 처음부터 연경(燕京)의 궁정(宮庭)에서 머리를 부수는 일을 한 적이 없고 또 예부에서 거적을 깔고 앉아 어쩔 줄 몰라 몹시 박절한 뜻을 다하지 못하고서 관례에 따라 내려 준 물건을 받고 오래지 않아서 돌아왔으니, 신하가 나라를 위하여 몸바치는 의리에 어찌 이러한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파직(罷職)·삭직(削職)의 가벼운 벌에 그칠 수 없으니, 청컨대 정사(正使) 전 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은 우선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고 부사(副使) 이명언(李明彦)과 서장관(書狀官) 조진희(趙鎭禧)는 모두 멀리 귀양보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전에 이미 사신이 주선을 잘하지 못한 일이 아니라고 하교하였으나, 처음부터 잘하였으면 어찌 이 지경이 되었겠는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해당 수역(首譯)484) 을 도배(島配)하는 일은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6월 15일 갑오
헌부(憲府) 【장령(掌令) 강필신(姜必愼)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이도(李燾)는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오고 단서가 조금 드러났습니다. 역적의 모의가 갑진년485) 겨울에 비롯될 때 이인좌(李麟佐)가 그의 집에 찾아가 함께 병사(兵事)를 논한 것은 속마음이 서로 연계되어 한자리에서 서로 마주한 것이니, 어찌 흉악한 말이 어지럽지 않았겠습니까? 청컨대 이도를 참작하여 도배(島配)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곧 국청(鞫廳)을 시켜 엄히 형신(刑訊)하여 정상을 알아내게 하소서. 어제의 처분은 너무 너그러움을 면하지 못합니다. 한사억(韓師億)은 정의련(鄭宜璉)이 고했는데, 정의련은 역적 정희량(鄭希亮)의 조카이므로 다른 역적과는 차이가 있으니, 평소에 잡류(雜類)와 사귀어 몸가짐을 삼가지 않은 정상을 이것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권서경(權敍經)은 전후에 공초한 것이 매우 어지러워 확실히 가리켜 변명한 꼬투리가 전혀 없고 그가 스스로 밝힌 것도 스스로 묻히기 위한 것입니다. 청컨대 한사억과 권서경을 모두 참작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서종옥(徐宗玉)·수찬(修撰) 권부(權扶)가 연명하여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어제 국청(鞫廳)의 죄수를 재량하여 처치한 일은 우리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큰 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입시(入侍)한 양사(兩司)의 신하는 가부를 논할 때에 매우 쟁집(爭執)하지 않았으므로 재신(宰臣)에게 엄한 배척을 받았습니다. 대저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임금의 덕이고 법을 지키는 것은 대관(臺官)의 직책인데, 이제 만약 임금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만 알고 나에게 있어 반드시 다투어야 할 법이 굽히는 바가 있게 된다면, 전폐(殿陛)에 서서 시비를 다투는 의리가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그날 입시한 양사의 신하들은 모두 그 벼슬을 가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어제의 처분은 삼가고 가엾이 여기는 데에 뜻이 있었으나, 대신(臺臣)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6월 16일 을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신치근(申致謹)이 말하기를,
"신이 조제(弔祭)하는 일 때문에 명을 받들고 죽산(竹山)에 갔을 때에 박세재(朴世梓)를 죽이기를 청하러 오는 과부 13인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대개 죽산의 백성 13인이 정세윤(鄭世胤)의 처남 윤태징(尹台徵)을 잡아 관군(官軍)에게 바치러 왔는데 박세재에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적인(賊人)을 잡아 바친 것은 공이 있는 양민(良民)인데 박세재가 죄다 죽였으니, 국가에서 함부로 죽인 벌을 주고서야 고아(孤兒)·과처(寡妻)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사사로이 죽인 것과 다르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강필경(姜必慶)을 사간(司諫)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장령(掌令)으로, 박사정(朴師正)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정국(庭鞫)하였다. 송내익(宋來翼)을 세 차례 형신(刑訊)하니, 송내익이 공초(供招)하기를,
"도부(到付)의 사연은 다만 ‘해미 영장(海美營將)이 도부에 관한 일로 알린다. 군사를 징발하여 향응(響應)하라. 관문(關文)은 당일 도부하였다.’ 하였기 때문에 그 첩정(牒呈)의 한 쪽에 대원수(大元帥)라 써서 가져온 자에게 도로 주어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병법은 속이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이미 관문을 도부하였으니 곧 화응(和應)한 결과가 됩니다."
하였다.
고효점(高效點)을 추문(推問)하니, 고효점이 공초(供招)하기를,
"고응량(高應良)이 한 봉서(封書)를 주며 성득하(成得夏)의 집에 가서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고응량과 함께 성득하의 집에 갔더니 10여 인이 같이 모여 있는데, 상인(喪人) 원가(元哥)가 그 가운데에 있다가 신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돌아간 뒤에 혹 누설할 염려가 없지 않다.’ 하고, 칼을 뽑아 협박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바야흐로 평교(平橋)에 진친 것을 네가 만약 누설한다면 지금 당장 죽이겠다.’ 하기에, 신이 입에 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장차 평교에 이르려 할 때에 모여 든 적(賊)이 이미 50여 명이었습니다. 장차 부안(扶安)을 함락시키려 할 때에 두 병졸이 평교에서 와서 말을 전하기를, ‘적괴(賊魁)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하였으므로, 신은 중도에서 달아났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조형규(趙亨奎)를 세 차례 형신(刑訊)하니, 조형규가 공초(供招)하기를,
"조덕규(趙德奎)가 한세홍(韓世弘)의 무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표목(標目)을 만들어 아무개는 쓸 만하고 아무개는 쓸 만하지 못하다 하였는데, 번번이 임서호(任瑞虎)를 쓸 만하다 하였고, 경중(京中)은 이유익(李有翼)을 주인(主人)으로 삼고 민원보(閔元普)도 넣었으며, 여주(驪州)의 정석진(丁錫震)과 원주(原州)의 한덕징(韓德徵)과 신의 형 조관규(朝觀奎)·조덕규를 한세홍이 다 쓸 만하다 하였습니다. 조덕규가 지난해에 상주(尙州)에 가서 할 일을 탐문하였는데, 한세홍이 말하기를, ‘도모할 일을 많이 입수하지 못하였다. 경중에 가서 이유익을 만나보아야 알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한세홍이 조덕규에게 말하기를, ‘여러 사람을 두루 보았으나 한덕징 밖에는 다른 인재가 없다.’ 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조한위(趙漢緯)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동의금(同義禁) 김취로(金取魯)는 스스로 형적(刑跡)을 남기고 날마다 어기고 오만하기를 일삼으니, 분의(分義)의 도리가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486) 에 나아갔다. 주자봉사(朱子封事)를 강독(講讀)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시독관(侍讀官)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국옥(鞫獄)에 들어간 자는 혹 참작하여 처치하더라도 사형(死刑)을 감면하여 도배(島配)하는 것은 혹 마땅하겠으나, 일전에 정배(定配)한 것은 마치 작은 잘못이나 가벼운 허물이 있는 자인 듯하므로 공론이 불만스럽습니다. 금오(金吾)의 당상(堂上)이 이 때문에 상소하여 고쳐 정배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러한 일은 성상으로부터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셔야 바야흐로 공론을 펴고 인심을 따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홍경보(洪景輔)가 말하기를,
"금오의 당상이 추문(推問)하기를 청한 자는 이희진(李喜震)·홍명원(洪命源)입니다. 민백효(閔百孝)의 공초에 같이 들어 있는데 이희진은 석방되고 오상직(吳尙稷)은 국옥에 있으므로 이렇게 일체로 국문(鞫問)하기를 청함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 고쳐 정배하기를 청한 것은 박경순(朴景淳)·강세윤(姜世胤)·정사효(鄭思孝) 등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오의 당상이 추문하기를 청한 것은 그 뜻이 좋으나, 이희진·홍명원은 참 섭한 일이 없으니, 추문할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정사효는 박필현(朴弼顯)의 가족을 잡아 바쳤으므로 그 공이 없지 않으나 그 조카 정도형(鄭道亨)이 역적의 공초에 요긴하게 들어 있고 또 백마(白馬)를 타고 서찰을 가지고서 전주(全州) 성밖을 왕래하였다는 것도 수상한 데에 관계된다. 자신이 방백(方伯)이면서 역적의 구실이 되었으니, 몸가짐을 삼가지 않은 것을 알 만하다. 이것은 강세윤·이광적(李光績)과 차이가 있으니, 극변(極邊)에 정배하라."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권부(權扶)가 말하기를,
"홍명원·이희진·오상직은 민백효의 공초에 같이 나왔으니, 홍명원 등은 오상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다시 공초한 데에 본디 명백하게 변명한 꼬투리가 없으니, 또한 마찬가지로 엄하게 핵사(覈査)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상억(吳尙億)이 조가(趙家) 마을에 복병(伏兵)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하므로 우선 사문(査問)한 것이다."
하였다.
6월 17일 병신
좌포청(左捕廳)에서 아뢰기를,
"윤경제(尹景濟)는 흉적(凶賊) 이인좌(李麟佐)의 아내의 아비로서 올해 2월에 공산(公山)의 본고장을 버리고 까닭없이 경상도 칠곡(漆谷)의 깊은 산골짜기로 옮겨 사는 것이 매우 의심스러우므로 일찍이 사람을 보내어 잡으려는 뜻을 아뢰었는데, 윤경제와 그 아들 윤상정(尹尙靖) 등에 이제 이미 잡아왔으니, 청컨대 국청(鞫廳)에 옮겨 보내 주소서."
하니, 임금이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윤경제는 역적 윤휴(尹鑴)의 아들이다. 그 뒤에 대간(臺諫)이 엄히 국문(鞫問)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윤허하였는데, 여러 번 국문하였으나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고 드디어 배소(配所)로 보냈다.
정국(庭鞫)하였다. 고응량(高應良)을 다시 추문(推問)하였는데 두 차례 형신(刑訊)하니, 고응량이 공초(供招)하기를,
"올해 2월에 성득하(成得夏)의 아우 성상하(成尙夏)가 그 무리의 장사(壯士) 두 사람과 함께 와서 신을 묶고 고부(古阜)에 같이 가기를 요구하므로 신이 따라 갔는데, 같이 간 자는 진사(進士) 김수종(金守宗)·진사 박창한(朴昌漢)·진사 김창수(金昌洙)·파총(把摠) 임진량(任震亮) 등이고 장사 세 사람이 괴수이었습니다. 모여서 평교(平橋)에 갔더니, 모이기로 약속한 태인 현감(泰仁縣監) 박필현(朴弼顯)의 군사와 나두동(羅斗冬)의 사위 진주 목사(晉州牧使) 신후삼(愼後三)의 군사가 다 와서 모이지 않았으므로 곧 헤어져 돌아왔습니다. 변산(邊山)의 적(賊)에 관한 말은 맥락이 있습니다. 김수종은 가세가 넉넉하고 종이 많으며 집이 변산 아래에 있는데, 박필현이 전에 50여 인을 거느리고 가서 김수종의 집에 모였고, 박필몽(朴弼夢)이 무장(茂長)에서 재차 수십 인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가서 검모포(黔毛浦)에 배를 대고 김수종의 집에 모여 모의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孥籍)하였다.
송내익(宋來翼)을 다시 추문(推問)하였다. 네 차례 형신(刑訊)하니, 송내익이 공초(供招)하기를,
"해미(海美) 사람 성동순(成東順)이 말하기를, 강진사(姜進士)라는 자가 서산(瑞山)·태안(泰安) 사이를 왕래하는데, 힘이 남보다 세고 활을 잘 쏘았는데, 마을 사람을 꾀어 말하기를, 「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한다.’ 하였습니다. 이현(李玹)이 또 와서 말하기를, ‘덕산(德山)의 중이 박계상(朴啓相)에게 말하기를, 「우리 절에 비상한 소년이 있으니 그대는 가서 보라.」 하므로, 박계상이 가서 보고 같이 잤는데, 헤어져 갈 때에 소년이 발로 큰 섬돌을 잠깐 미니 돌이 땅속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 소년이 또 와서 말하기를, 「그대는 갑자기 부귀를 얻을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이미 20년 동안 군사를 길렀는데 나만한 자가 4백이나 5백쯤 되고 나보다 훨씬 나은 자가 2백 남짓 되고 힘이 남보다 뛰어난 자가 1백 남짓 된다. 이것으로 거사할 만하나 반드시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얻고서야 할 수 있으므로 이제까지 머물러 기다렸는데, 이제는 이미 천시와 인사를 얻었으므로 장차 봄 사이에 거사할 것이다.」 하므로, 박계상이 답하기를, 「그렇다면 나도 일을 같이하고 싶다.」 한다. 나는 이미 같이 들어가기로 하락하였는데,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하므로, 신이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인좌라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나도 들어가고 싶은데 반드시 내 이름을 도목(都目) 가운데에 써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현이 또 와서 말하기를, ‘이미 박계상에게 말하여 그대의 이름을 쓰게 하였다.’ 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공주(公州)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영장(營將)에게 도목책(都目冊) 하나가 왔는데 그대의 이름도 그 가운데에 있었다.’하였습니다. 신이 듣고 빙그레 웃었는데, 얼마 안 가서 역적의 격문(檄文)이 과연 왔으므로, 신이 이제는 일이 과연 성취되었다고 생각하고 도부(到付)를 만들어 주어 화응(和應)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노적(怒積)하였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다른 사람과 일을 같이하였는데 그 사람이 아직 죄적(罪籍)에 있고, 더구나 그 심사(心事)는 오늘날 역적의 변란이 있었던 뒤에 절로 밝혀질 만하나 싸움이 어지러운 때를 당하였으므로 홀로 아직 용서하는 은혜를 받지 못하였는데, 죄가 같은 신하가 편안히 정승 자리를 차지하고 태연히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참으로 이른바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사대신(四大臣)487) 의 일로 말하면 관계가 더욱 큰데, 신이 이미 그것이 억울한 줄 알고도 힘이 적고 정성이 작은 것을 스스로 헤아려서, 성충(聖衷)을 개도(開導)하고 의리를 아뢰어 성조(聖朝)의 처분이 다시 매우 마땅한 데로 돌아가게 하지 못하였으니, 조정에서 역적을 감싼 죄로 신을 죄주지 않아서 정승 자리를 채우고 묘당(廟堂) 사이를 출입하게 하는 것이 또한 어찌 국가의 체례(體例)가 마땅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소(疏) 가운데에 있는 두 가지 일은 경(卿)이 이 때문에 인혐(引嫌)하는 것은 너무 지나침을 면하지 못한다. 이 일은 등대(登對)하는 날에 면유(面諭)하겠다. 경이 비록 주장하는 것이 있더라도 나와서 일을 본 뒤에 연중(筵中)에서 아뢰면, 옳다 하거나 그렇지 않다 하는 것은 오직 나에게 달려 있을 것인데, 이 때문에 사진(仕進)하기 어렵다는 꼬투리를 만드는 것은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 세상에서 이른바 사진하기 어려운 길이라는 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사리를 밝혀도 분명하지 않은데 붕당(朋黨)과 함께 거취를 같이하는 것이 한 가지이고, 비록 사진하려 하더라도 뭇사람의 의논이 서로 공박하므로 몸을 둘 수 없는 것이 한 가지이고, 뜻이 비록 조금 다르기는 하나 결코 차마 색목(色目)을 저버릴 수 없으므로 종신토록 마치 절개를 세우는 자인 듯이 하는 것이 한 가지이다. 이런 세 가지는 평소에 본디 경에게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었으나, 이제 경의 이 거조(擧措)를 남에게 보이면 어찌 세 가지에 대하여 의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8일 정유
정국(庭鞫)하였다. 이현(李玹)을 추문하니, 이현이 공초 하기를,
"2월에 박계상(朴啓相)의 집에 갔더니, 박계상이 말하기를, ‘중들이 와서 말하기를, 「가야산(伽倻山)에 산을 돌아다니는 한 소년이 있는데 매우 수상하다.」 하므로, 매[鷹]을 가지고 절에 올라가 그 놈을 잡아 묶으려 하였는데, 함께 이야기하여 보니 소년의 사람됨이 쓸 만하였다. 내게 말하기를, 「근래 자못 소란한 일이 있으니 이것은 신민(臣民)이 우려할 바이다.」 하므로 내가 듣고 기특히 여겼고, 그 용력(用力)도 당할 수 없으므로 다시는 잡아 묶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소년의 성명은 강위징(姜渭徵)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현과 박계상은 그 뒤에 다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고 강위징은 승복하고 형장을 맞다가 죽었다.
조석명(趙錫命)을 승지(承旨)로, 서명구(徐命九)를 수찬(修撰)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서명균(徐命均)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듣건대, 근래 도민(都民)의 살길이 점점 어려워져서 술을 팔아 생업으로 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고 그 가운데에서 많이 빚은 자는 혹 1백 곡(斛)이 넘기도 하였으나, 시가가 뛰어올라 투구(鬪毆)하고 살상한다 합니다. 점차 금지하려고 신칙(申飭)하는 뜻으로 오부(五部)에서 감결(甘結)488) 을 받았는데, 나라의 풍속이 두려워하고 와전되어 금란(禁亂)을 가탁(假托)하여 속이고 협박하며 뇌물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가탁하는 자 두어 사람을 잡았더니, 바로 헌부(憲府)에서 내쫓긴 하인과 포청(捕廳)에서 물러난 군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뒤부터 술집에서 내기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그쳤는데 쌀가게에서 부르는 값은 갑자기 더하므로, 바야흐로 들어가 아뢰어 먼저 술 많이 빚는 자를 금하고 이어서 옛 제도를 더욱 밝히기를 청하려 하는데 승선(承宣)489) 이 문득 폐단을 끼친다고 말하니, 폐단을 고치려다가 도리어 백성에게 폐해를 가져온다는 뜻일 것입니다. 신의 벼슬을 삭탈하여 경망한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재작년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할 때에 신하들에게 경계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하나는 붕당(朋黨)이고 하나는 사치이며 술을 경계한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미 술을 경계하였는데 술을 금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이 때문에 도민을 침탈하여 원망을 위로 돌린다면 통탄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그 현착(現捉)한 사람들을 각별히 두 차례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고 사유(赦宥) 때에도 용서하지 말라."
하고, 인하여 포청을 시켜 염탐하게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주서(朱書)》를 강독(講讀)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시독관(侍讀官)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유신(儒臣)의 인접(引接)은 잦으나, 그 나머지의 진대(進對)는 매우 드무니, 일이 없을 때에는 송(宋)나라 때 천장각(天章閣)의 옛일처럼 육경(六卿) 등 신하들을 자주 인대(引對)하여 고문(顧問)을 대비하소서."
하고, 참찬관(參贊官) 이인복(李仁復)이 말하기를,
"다만 치도(治道)를 강구한다는 이름만을 취하고 성심으로 행하지 않으면 또한 실효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실속이 있고서야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실속이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제도와 좋은 정치라도 다 겉치레가 될 것이다."
하였다. 송영종(宋寧宗)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영종의 일은 매우 해괴하니, 주자(朱子)는 의당 착한 데로 나아가게 하여 간사한 데에 이르지 않는 것으로 권면(勸勉)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당(唐)나라 임금이 무릎을 안고 젖을 빤 일을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매, 이인복이 말하기를,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일단 유연(油然)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주자가 인용하니, 처음에는 부자(父子)의 도리로 간절히 아뢰고 끝에는 다시 당나라 임금의 일을 아뢰었으니, 주자의 뜻은 대개 마지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6월 20일 기해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개암 크기만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도감(都監)의 마군(馬軍)·보군(步軍) 중에서 등제(登第)한 자가 1백 50여 명인데 등과(登科)한 뒤에는 으레 다 봉료(俸料)가 떨어지게 되므로 생계가 가엾습니다. 1백 50여 인 중에서 마병(馬兵)으로서 등과한 98명은 모두 나이가 젊고 기사(騎射)를 잘하니,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명호(名號)를 정하여 대오(隊伍)를 만들어 그대로 두면 요미(料米)를 더 소비하는 것도 없거니와 급할 때에 쓸 수 있는 군사가 될 것입니다.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일에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조 좌랑(吏曹佐郞) 박사정(朴師正)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조(銓曹)에서 차자를 뛰어넘어 의망(擬望)490) 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개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대저 낭관(郞官)의 차출은 격례(格例)가 매우 엄한데, 사고가 없고 으레 의망해야 할 사람이 신(臣)보다 앞에 있어도 처음에는 춘방(春坊)491) 의 겸관(兼官)에 의망하지 않고 다시 문득 장헌(掌憲)의 벼슬에서 좌천하였으니,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신이 듣건대, 일찍이 그 벼슬을 지냈거나 새로 그 벼슬에 통한 사람은 파직(罷職)·삭직(削職)에 들었었더라도 변통하여 의망한다 하니, 오늘날 전형하는 지위에 있는 자가 과연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의(私意)를 없애려 한다면 전에 의망하였던 사람들을 거론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신으로 말하면 불안한 정적(情迹)이 마찬가지인데 외람되게 벼슬받은 것이 이에 이르렀으므로, 주의(注擬)가 일정치 않고 정사의 격례가 어그러지니, 신이 어찌 차마 남에게 농간당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겠습니까? 원컨대 신의 벼슬을 삭제하소서."
하였는데, 하교(下敎)하기를,
"이제 박사정(朴師正)의 소(疏)를 보면 반드시 그 본직(本職)을 면하려 하면서 도리어 그 당상(堂上)을 범하여 공박하였다. 비록 시종(侍從)에 출입한 사람이기는 하나 이제는 한 낭관인데, 그 사체(事體)에 있어서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위에 있는 자의 칙려(飭勵)가 어떠하였기에 마음껏 붕당을 지키고 붕당을 위하여 절개를 세우는가? 어찌하여 반드시 조정에서만 벼슬해야 하겠는가? 흥양 현감(興陽縣監)을 제수하여 내일 안으로 사조(辭朝)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1일 경자
임금이 윤대관(輪對官)492) 을 소견하여 각사(各司)의 폐단을 물었다.
정언(正言) 한현모(韓顯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편당(偏黨)을 미워하시는 것이 심하였습니다. 그 미워하시는 것이 심하므로 의심하는 것이 지나칩니다. 지난번 신노(申魯)의 말을 한 번 의심하여 천둥 같은 위엄으로 진노하시고 드디어 금령(禁令)을 만들어 굳이 물리치어 언로(言路)가 막히는 것을 돌보지 않으셨으니, 이때부터 정적(情跡)이 신노와 같은 사람은 감히 다시 오늘날의 일을 말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당색(黨色)에 초연한 사람이라야 전하의 의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인데, 세도(世道)가 불행하여 사람들은 다 일정한 색목(色目)이 있고 또 천심(天心)을 감동시킬 만한 평소에 나타난 충성이 없으니,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큰 변란이 겨우 평정되어 어렵고 근심되는 일이 두루 많은 것을 생각하면 어찌 명주(明主)에게 한 번 진언(進言)하기를 바라는 충성스런 선비가 없겠습니까마는, 겉으로 사당(私黨)의 색목을 피하고 속으로 득실(得失)의 혐의를 품으면서 문득 물러가 돌아보고 머뭇거리는 것을 면할수 없습니다. 비록 전하께서 의심하고 노여워하지 않으시더라도, 조금 삼가고 염치를 차리는 사대부는 그 마음이 이러하지 않을 수 없는데, 누구나 전하께서 이미 의심하였으니, 신하들의 도리로서는 오직 부끄러워 물러가서 입을 다물어야 할 뿐입니다. 이제 신은 그 벼슬을 물으면 언책(言責)이고 그 자취를 돌아보면 말할 수 없으니, 또한 부끄러워 물러가야 할 뿐입니다. 감히 말할 수 없으면서 언직(言職)에 있는다는 것은 그럴 도리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탕평(蕩平)하는 뜻은 구차히 같이 한다는 것이 아니다. 네 소(疏)처럼 각각 색목을 지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면 위에 있는 자가 무슨 칙려(飭勵)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2일 신축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회맹제(會盟祭) 때에 경상 감사(慶事監司) 박문수(朴文秀)가 임소(任所)를 떠나서 올라오기는 매우 어려우나, 친제(親祭)하여 하늘에 고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합니다. 본도(本道)의 어사(御史) 이종성(李宗城)이 미처 일을 끝내지 못하였으니, 감사가 감영(監營)에 돌아갈 동안 대신 병부(兵符)를 맡아 감사의 일을 행하면 일이 매우 온당할 것입니다. 정원(政院)을 시켜 이렇게 하유(下諭)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조지빈(趙趾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유척기(兪拓基)를 함경도 관찰사(咸鏡道管察使)로, 정석오(鄭錫五)를 승지(承旨)로, 권부(權扶)를 헌납(獻納)으로, 신치운(申致雲)을 부교리(副校理)로, 민정(閔珽)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재로(金在魯)·전 감사(監司) 이기진(李箕鎭)·우윤(右尹) 송성명(宋城明)·호조 참판(戶曹參判) 정석삼(鄭錫三)·전 대사간(大司諫) 박사수(朴師洙)·부제학(副提學) 조현명(趙顯命)을 본사(本司)의 당상(堂上)으로 차출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우의정(右議政) 오명항(吳命恒)이 모두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타일러 권면(勸勉)하여 같이 오게 하였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조한위(趙漢緯)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어제 포청(捕廳)의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批答)을 보건대, 윤경제(尹景濟) 부자를 도배(島配)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대저 윤경제 부자는 화를 입어 폐기된 집안으로서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왔습니다. 역적의 변란이 일어난 처음에 간신(諫臣)이 맨 먼저 아뢰어 모두 해도(海島)에 안치(安置)한 것은 대개 나라를 위하여 깊이 염려한 데에서 나왔습니다. 더구나 역적의 괴수 이인좌(李麟佐)·이호(李昈)가 모두 윤경제의 사위이니, 흉역(凶逆)의 정상이 철저하게 교통된 것은 사리가 반드시 그러하였을 것이므로, 호중(湖中)493) 사람들이 모두 역적의 괴수로 지목합니다. 또 2월에 영외(嶺外)494) 로 피란한 일로 보면, 그가 흉모(凶謀)를 미리 알았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이러한 무리는 국청(鞫廳)의 공초에 나오지 않았다 하여 부당하게 너그러이 용서할 수 없으니, 청컨대 윤경제 부자를 도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엄한 형(刑)으로 국문(鞫問)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3일 임인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講讀)하였다.
6월 24일 계묘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문수(朴文秀)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3월 17일 밤에 오명항(吳命恒)이 수백 기(騎)로 빨리 역적을 묻어 죽이기를 청하매 성상께서 독단하여 윤허하셨으나, 건너갈 즈음에 절로 지체하게 되어 수성(隋城)에 가까이 가면 반드시 밤이 깊어질 것이므로, 신(臣)이 생각하기를 ‘지금 적보(賊報)가 별로 없고 군사는 오래 지쳤는데, 땀을 흘리고 발이 부르트며 밤에 50리를 달려가 힘이 다하면, 아무리 적을 만나더라도 어떻게 싸우겠는가?’ 하여, 신이 곧 대장(大將)을 보고 말하였더니, 오명항이 똑바로 보며 말하기를, ‘출사(出師)하는 날에 도리어 지체할 것을 의논하는가? 군식(軍食)을 재촉하여 밤이라도 반드시 수성에 이르러야 한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주장(主將)이 사조(辭朝)하고 곧 떠났으므로 전구(戰具)·군장(軍裝)이 많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는데, 이제 두세 시(時) 동안 기다리면 미쳐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서로 반향(半餉)495) 동안 버티다가 오명항이 애써 참아서 떠나는 것을 멈추었는데, 이튿날 진위현(振威縣)에 이르러 밤에 자객(刺客)의 변이 있었습니다. 포성(砲聲)이 잇달아 들리고 일군(一軍)이 계엄(戒嚴)하였으나 장사(將士)가 피로하여 북을 쳐서 일어나지 않으므로, 신이 또 그대로 하루 동안 머무르자는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오명항·조현명(趙顯命)은 다 망설였는데, 신이 저항하여 다투기를 ‘오늘 떠나면 가서 멈출 곳이 바로 적지(賊地)이므로 또 어제 밤처럼 밤에 놀랄 것이고, 내일 청주(淸州)에 이르면 적을 만나지 않아도 사기(士氣)가 이미 다 떨어질 것이니, 국가의 존망을 어찌하겠는가?’ 하니, 신의 말을 따라 그대로 유진(留陣)하였습니다. 아침에 행군하여 소사(素沙)에 이르렀는데, 오명항이 은밀히 신을 불러 말하기를, ‘정탐한 말을 들으니 적이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 안성(安城)에 이를 것이라 한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정탐한 것은 믿기 어렵다. 만약 지레 안성으로 가고, 적은 직산(稷山) 길을 거쳐 이 곳을 지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종사(從事)는 다만 정도(正道)만 알고 기계(奇計)를 모른다. 나는 내 계책을 행하겠다.’ 하고 곧 군중(軍中)에 호령하여 빨리 안성으로 향하였는데, 비바람이 불고 밤이 어두우며 포성(砲聲)이 갑자기 일어나서 군중이 밤에 놀랐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교련관(敎鍊官) 권희학(權喜學)이 적군이 10리 안에 둔쳤다고 비밀히 고하니, 오명항이 곧 중군(中軍)을 시켜 가서 토벌하게 하여 장수를 베고 군졸을 격파하였습니다. 또 적이 죽산(竹山)에 둔쳤다는 말을 듣고 이튿날 아침에 군사를 정제하여 앞다투어 가니, 적은 바람에 쓸리듯이 다 흩어지므로 치고 쏘아 섬멸하였습니다. 과천(果川)에서 한나절 동안 지체하고 진위에서 하루 동안 지체한 것은 신 때문입니다. 오직 저 번갈아 공박하는 말이 오명항만을 배척하니, 신이 어찌 차마 제 죄를 스스로 숨길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신의 죄를 명백히 바로잡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도타이 비답(批答)하였다.
송진명(宋眞㝠)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윤순(尹淳)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오명신(吳命新)을 부사(副使)로, 조적명(趙迪命)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심성희(沈聖希)를 정언(正言)으로, 김상석(金相奭)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양사(兩司) 【집의(執義) 이춘제(李春躋)·사간(司諫) 강필경(姜必慶)·장령(掌令) 강필신(姜必愼)·헌납(獻納) 권부(權扶)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이번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올 때에 저들이 오만한 글로 나라를 욕보인 것이 전의 자문(咨文)보다 훨씬 더 망극합니다.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이 이 때문에 귀양갔으니, 정사(正使)만 달라서는 안되겠습니다. 죄인 심수현(沈壽賢)을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번에 진주(陳奏)한 일은 사신이 잘하지 못한 탓이 아니다. 이미 정문(呈文) 할 수 없었으니, 어떻게 머무르겠는가? 만약 내려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장차 어떠한 지경에 이를는지 모를 것이다. 더구나 대신(大臣)은 사체(事體)가 다른 사람과 절로 구별되는데, 어찌 부사·서장관과 견주어 같이 벌줄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진사(進士) 김화윤(金華潤)·김형윤(金衡潤)은 그 형 김태윤(金泰潤)이 이홍발(李弘渤)의 옥사(獄事) 때에 형신(刑訊)받았고 민언량(閔彦良)을 따라 신사년496) 의 옥사 때에 처형되었으며, 역적의 괴수 민관효(閔觀孝)가 곧 그 혈당이고 역적 안귀만(安龜萬)이 또 그 문객(門客)이므로, 주무(綢繆)하고 음비(陰祕)한 자취를 사람들이 다 의심합니다. 청컨대 모두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현감(縣監) 이태원(李太元)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응견(鷹犬)이며 역적 김일경이 지은 교문(敎文) 가운데 자구(字句)를 수작한 것이 있으니, 역적 김일경을 뒤미처 죄준 뒤에 악을 징계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소서. 사인(士人) 심수관(沈受觀)은 성질이 본디 어리석고 패악한 데다가 잡된 무리와 체결하였는데, 근년 옥사 때에 국문(鞫問)당하고 요행히 풀려난 뒤에도 잘못을 고치려고 생각하지 않고 음비(陰祕)가 여전합니다. 또 그 아들 심성연(沈成衍) 형제는 아주 도리에 어그러지기가 짝이 없는 것이 그 아비보다 더하며 또 흉적(凶賊) 원만주(元萬周)도 일찍이 집안에 데려다 두었습니다. 청컨대 심수관과 그 아들 심성연·심익연(沈益衍)을 극변(極邊)에 정배하소서. 전 홍양 현감(洪陽縣監) 유엄(柳儼)은 변란을 당한 처음에 겁내어 조치를 잘못하였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경주 부윤(慶州府尹) 최종주(崔宗周)는 치적(治績)이 알려진 것이 없고 비방하는 의논이 또한 많으니, 청컨대 갈아 차출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大司諫) 조지빈(趙趾彬)이 상소(上疏)하여 유엄을 위하여 변명하고 정발(鄭撥)·송상현(宋象賢)의 일을 끌어대어 그가 죄가 없다는 것을 밝히기까지 하였으므로, 듣는 자가 모두 놀라고 한탄하였다.
6월 25일 갑진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6일 을사
하교(下敎)하기를,
"이번 도정(都政)497) 은 변란을 겪은 뒤 첫 정사(政事)이다. 그 면려(勉勵)하는 도리에 있어서 다른 정사와 절로 구별되므로 첫날에는 친정(親政)하겠으니, 이것을 분부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사헌(大司憲) 박사익(朴師益)이 상소(上疏)하여 논하기를,
"거센 이웃이 범하여 성낸 말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는데도 사신(使臣)인 자가 태연히 받아 왔는데 가벼운 벌을 주고 말았으며, 흉악한 글이 나붙고 모의를 쌓아서 일어나려는 것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연고하는 것이 아닌데도 겨울부터 봄까지 한 사람도 전하(殿下)를 위하여 잡기를 청하지 않아서, 마침내 천고(千古)에 없던 역적의 변란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이번 역적들은 대대로 벼슬한 오랜 집안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문장을 잘하여 이름난 자도 있습니다. 이들이 흉역(凶逆)을 행한 것이 이미 상하의 염려가 미친 적이 없는 것이니, 뒷날에 일어날 화기(禍機)가 어두운 가운데에 다시 숨어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성명(聖明)은 도둑의 변란이 이미 평정되었다 하여 경계하고 조심하는 것을 조금도 늦추지 마소서. 전하께서 숨김없이 말하는 문을 크게 열고 착한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시더라도 오히려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 알려지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도리어 꺾고 눌러 하나의 방금(邦禁)이 되었으므로 말하기를 꺼리니, 이제부터는 아무리 위급한 기틀이 가까이 닥쳐 있더라도 누가 전하를 위하여 말하려 하겠습니까?"
하고, 또 국용(國用)이 아주 비었음을 말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용도를 줄이는 도리를 권면하였는데, 소(疏)가 들어가니 궁중에 머물러 두었다.
6월 28일 정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29일 무신
김상성(金尙星)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사간(司諫) 강필경(姜必慶)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접때 호서(湖西)의 역란(逆亂)을 당하였을 때에 전 목천 현감(木川縣監) 윤취은(尹就殷)은 혹 직산(稷山)에 피하여 있었다고도 하고 공주(公州)에 가서 머물렀다고도 하나, 고을에 남아 있는 향소(鄕所)498) 에서 뜻대로 군사를 징발하여 방자하게 역적에게 화응(和應)하였는데, 그가 고을에 돌아와서는 간략하게 곤벌(棍罰)을 보였습니다. 향소는 이미 처형되었더라도 윤취은은 홀로 편안하니, 이는 나라에 법이 없는 것입니다. 역적 고응량(高應良)·김수종(金守宗)이 부안(扶安)에 살면서 읍내(邑內)의 여러 사람과 체결하여 함께 반란하고, 역적의 괴수 박필몽(朴弼夢)이 수십 인을 거느리고 무장(茂長)에서 바다에 건너 김수종의 집에 이르러 난만하게 모의한 자취를 숨기기 어려운데도 전 부안 현감(扶安縣監) 이문표(李文標)는 흐릿하여 몰랐습니다. 알고도 고하지 않았으면 또한 나라를 저버린 죄가 있을 것입니다. 악을 징계하는 도리로서 결코 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윤취은·이문표를 모두 나문(拿問)하여 엄히 핵사(覈査)하여 그 죄로 죄주소서. 목천의 향소에서 군사를 모을 때에 군사들이 다 모르고 와서 모였으나 출발할 즈음에 비로소 깨닫고는 뭇사람이 다 분노하여 말하기를, ‘우리를 시켜 역적을 친다면 옳겠으나, 어찌 차마 나라를 저버리고 역적에게 화응할 수 있겠는가?’ 하고 한꺼번에 흩어져 가고 하나도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충의(忠義)의 의기가 반신(叛臣)으로 하여금 부끄러워 죽게 할 만하였으니, 도신(道臣)을 시켜 그 맨 먼저 창의(唱義)한 자를 조사해 내어 쌀과 베를 넉넉히 주는 일은 권장하는 도리로서 결코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황익재(黃翼再)·권만(權萬)은 이미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으므로 곧 나국(拿鞫)하여 그 허실(虛實)을 상세히 살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번번이 영남(嶺南)이기 때문에 일체 버려두시고 대계(臺啓)도 아울러 윤허를 아끼시어, 여러 사람을 반신반의의 어두운 지경에 섞어 두어 천지 사이에 스스로 설 수 없게 하십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윤취은·이문표의 일과 창의한 사람에게 쌀과 베를 주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황익재·권만의 일은 이미 묻지 말게 하였는데 이제 어찌하여 다시 거론하는가?"
하였다.
승지(承旨) 정석삼(鄭錫三)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선인문(宣仁門)의 부장(部將)이 와서 말하기를, ‘유생(儒生)같은 자가 상변(上變)한다 하며 금문(禁門)을 불쑥 들어오므로 병조(兵曹)에서 물었더니, 말하기를, 「춘천(春川) 사람 심성연(沈成衍)인데 시급히 상변할 것이 있다.」 하였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국청(鞫廳)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심성연을 국문하니, 심성연이 공초(供招)하기를,
"심상관(沈尙觀)은 오촌(五寸)인 지친(至親)이나 어찌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심상관이 5월 2일에 신에게 돈을 빌리기에 어디에 쓰느냐고 물었더니, 말하기를, ‘반역을 꾀하는 일에 완수(緩手)·급수(急手)가 있는데, 급수는 이사성(李思晟)이고 완수는 우리들이다. 당(黨)이 굳고 뿌리가 깊으니 머뭇거리지 말고 곧 돈을 내라.’ 하고, 심상관의 어미도 신에게 전택(田宅)과 보패(寶佩)를 죄다 팔라 하며 말하기를, ‘뒤에 절로 마땅한 것을 얻을 수 있다.’ 하였으나, 신이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6월 5일에 심상관을 보러 갔더니, 심상관의 어미가 제호탕(醍醐湯)을 만들어 권하기에 종기를 핑계하여 조금 마셨는데 입에 대니 입술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심상관은 늘 독약을 두고 그 모의를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곧 죽였습니다. 심상관이 또 말하기를, ‘추대(推戴)는 여흥(驪興)499) 이고 급당(急黨)·완당(緩黨)이 각각 대오(隊伍)를 만들었다. 형제 사이라도 말하지 않는데, 완당은 10여 년 동안 경영할 생각이다. 여흥의 아내가 그 모의를 알았으므로 그 아내가 허술하여 그 오라비에게 누설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국수에 독을 넣어 죽였다.’ 하였고, 심상관의 어미가 신에게 말하기를, ‘심종연(沈宗衍)과 심상관의 아들 심윤손(沈胤孫)·심유손(沈裕孫)도 참여하여 들었는데 심유손은 여흥의 처조카 사위이며, 심상관이 늘 여흥을 오기(吳起)500) 에 견주었다. 여흥이 그 아내의 상(喪)을 당하여 총모(騘帽)를 쓰고 상(喪) 옆에 앉아 노기(怒氣)가 넘치므로 종 숙경(淑景)이 와서 말하니, 심윤순이 좌중에 있다가 또한 말하기를, 「죽은 뒤에 이렇게 할 것 없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심상관의 어미가 신에게 말하기를, ‘여릉군(驪陵君)이 그 형이 하는 짓을 한탄하여 가슴을 치고 소리내어 울었고 여흥의 아내도 그 모의를 알고 울부짖었다.’ 하였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동요(童謠)를 지어 ‘그 상(相)을 보면 느린데 성(性)은 어찌 급한가?’ 하였는데 상(相)은 심상관을 가리키고 성(性)은 이사성을 가리킵니다. 또 동요를 지어 ‘한유(韓柳)의 석상(席上)에 한 그루 송(松)’이라 하였는데, 한은 한유(韓游) 등이고 유는 유내(柳徠)이고 송은 청송 심가(靑松沈哥)입니다. 심상관 등이 큰 배를 많이 샀습니다. 그 종과 무리를 시켜 선부(船夫)가 되게 하고 이어서 머리를 깎게 하고 바다에 출몰하며 세곡(稅穀)을 훔치기도 하고 전화(錢貨)를 주조(鑄造)하기도 하고 군기(軍器)를 만들기도 하고, 삼강(三江)501) 의 배를 죄다 사서 그 무리의 물건으로 만들려 하였습니다. 또 장상(將相)의 집에 자객(刺客)을 두어 5, 6인을 죽여서 소요하고 어지럽게 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배를 살 때에 ‘강아지씨혼사간선(江阿只氏婚事看選)’이라고 암호(暗號)를 지었고 공모(共謀)한 사람은 다 시골의 미천한 선비로서 전곡(錢穀)이 조금 있는 자이고 나타난 사대부(士大夫)와 조사(朝士)가 없습니다. 심상간이 신(臣) 3부자가 그 모의에 참여하지 않고 또 돈을 빌려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신과 역적 원만주(元萬周)가 서로 친하다 하였으므로, 귀양가게 되었습니다. 심상관 등이 함께 모의한 자는 음죽 목가(陰竹睦哥)인데 전곡을 많이 모았고, 여흥의 집에 대대로 전하는 쓰지 못하도록 봉하여 둔 은자(銀子)가 있는데 이번 역모(逆謀)에 죄다 흩어 내어 주었다 합니다."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경제(尹景濟)의 일은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6월 30일 기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심성연(沈成衍)을 친국(親鞫)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19권, 영조 4년 1728년 8월 (3) | 2025.08.25 |
|---|---|
|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1728년 7월 (5) | 2025.08.25 |
|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1728년 5월 (4) | 2025.08.25 |
| 영조실록17권, 영조 4년 1728년 4월 (5) | 2025.08.25 |
| 영조실록16권, 영조 4년 1728년 3월 (4) | 2025.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