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1728년 7월

싸라리리 2025. 8. 2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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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경술

지평(持平) 김상성(金尙星)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한 번 변란이 일어난 뒤로 남은 무리 중에 흩어져 달아난 자가 몰래 저들의 지경으로 넘어가면 혹은 만분의 일이라도 말썽을 꾸밀 염려도 없지 않을 것이니, 주문(奏聞)하는 일은 늦출 수 없습니다. 빨리 묘당(廟堂)을 시켜 글을 지어 이번 사행(使行)에 부치게 하고, 역당(逆黨)으로 연좌되어 극변(極邊)과 절도(絶島)에 정배(定配)된 자는 관장(官長)을 시켜 적간(摘奸)하여 뜻밖의 걱정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심류(沁留)502)  ·북백(北伯)503)  은 무슨 매우 어려운 정세가 있어서 임금의 명을 어기려 한다는 분부가 매우 엄한데도 하루 이틀 오직 부름을 어기는 것을 능사로 삼습니까? 더 칙려(飭勵)하여 빨리 부임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재로(金在魯)의 소(疏)는 오로지 국시(國是)를 어지럽히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감히 사대신(四大臣)이 순국(殉國)하였다는 따위 말을 버젓이 말하고 끝에는 또 관작(官爵)을 빼앗아 시호(諡號)를 삭제한 것을 그 무리가 억울함을 하소하는 것으로 삼았으니, 방금(防禁)을 엄하게 하는 도리로서는 매우 꾸짖어 내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분명하게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번 사행 때에 주문(奏文)을 지어 바치는 일은 마땅히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김재로의 일은 네 말이 참으로 옳으나, 이미 내 뜻을 보였다. 심류·북백은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재촉하라. 나머지 일은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를 인견(引見)하여 지금 급히 힘쓸 일을 물으매, 최규서가 수령(守令)을 신중히 선택하는 것이라고 아뢰었다. 임금이 또 묻기를,
"역적을 다스리는 논의는 혹은 너그럽게 하기를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엄하게 하기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어는 것이 득이 되고 어느 것이 실이 되겠는가?"
하매, 최규서가 말하기를,
"상놈이 역적에게 들어간 것은 협종(脅從)504)  이므로 다스리지 않아야 하겠으나, 양반이 역적에게 들어간 것은 협종이 아니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마는, 정상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일은 가장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혹은 친구 또는 일가가 그 가운데에 들어갔다는 것을 그들이 공개하여 말하였더라도, 이미 친히 듣지 못하였고 또 근거할 만한 문서가 없다면 고발하기 어려워서 절로 지체하였을 것인데, 이러할 즈음에 혹은 다른 사람이 먼저 안 자가 있다면 반드시 정상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에 걸릴 것입니다. 신(臣)으로 말하면 그 명위(名位)·처지가 어떠한지를 돌이켜볼 것인데, 안박(安鑮)이 먼저 고변(告變)하였다면 어찌 정상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것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거니와, 내 생각은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을 주장하고 싶으나, 신하들이 엄하게 하기를 주장하는 논의에도 의견이 없지 않다."
하였다. 임금이 또 전화(錢貨)의 편부(便否)를 물으니, 최규서가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뇌물은 다 돈 가운데에서 나오므로 그 폐단이 지극하나, 궁하면 통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궁하면 통할 것이라는 말은 돈을 없애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최규서가 말하기를,
"돈의 폐단이 아무리 지극하더라도 갑자기 폐기하고 다시 저폐(楮幣)·상목(常木)505)  으로 대신한다면 그 폐해가 돈보다 심할 것입니다. 무릇 변통에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폐단의 근원을 정밀히 생각하여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이 돈을 없애는 것을 옳게 여기므로 내 마음에도 없애려는 뜻이 없을 수 없었는데, 이제 경의 말을 들으니 그 고심을 알겠다."
하였다. 임금이 최규서의 손을 잡고 머무르도록 권하는 것이 매우 진지하였으나, 최규서가 끝내 머무르지 않았다.

 

7월 2일 신해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재로(金在魯)를 파출(罷黜)하였다. 이에 앞서 김재로가 상소하기를,
"사대신(四大臣)은 충성하였는데도 관작(官爵)을 삭탈하였고, 지금 조정에 등용된 자는 다 신(臣)이 지난번 토죄(討罪)하기를 청한 자인데 신이 또한 그들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다 거두어 모두 쓰려 하시더라도 그럴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평(持平) 김상성(金尙星)·집의(執義) 이춘제(李春躋)가 잇달아 죄를 청하므로 이 명이 있었다.

 

신광하(申光夏)를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7월 3일 임자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정고(呈告)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별유(別諭)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제 국가가 다시 안정된 것이 누구의 공로인가? 참으로 경(卿)의 충성 때문이다. 인심이 동요하여 국사(國事)가 위태로웠으나 유악(帷幄)에서 획책하고 도와서 남들이 감히 엿보지 못하게 한 자가 경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우상(右相)이 남정(南征)하였을 때에 경이 병조(兵曹)의 일을 맡았기 때문에 안에서나 밖에서나 비로소 걱정이 없어 조금 안심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을 미루어 보아도 내가 평소에 의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의 소원을 굽혀 따르느라 이번에 상주지 않았으니, 경의 마음을 알고 경의 뜻을 몸받은 것은 지극하다 하겠으나, 뜻은 실로 경이 안심하고 나라의 일을 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경이 사신(使臣)의 일 때문에 인혐(引嫌)하나 이는 전후의 하교(下敎)가 정녕하였을 뿐이 아니고, 경이 김재로(金在魯)의 일을 혐의하나 이는 새로운 말이 아니다. 아! 비록 추향이 같지 않은 자일지라도 이번 일을 보면 환히 알 수 있을 것인데, 깨닫지 못할 뿐이 아니라 도리어 침범하여 공박한다. 세도(世道)가 이러한데 다른 것을 오히려 어찌 말하겠으며, 김재로가 이러한데 다른 사람을 어찌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미 호오(好惡)를 밝히는 뜻을 보였다. 아! 경은 나라의 일을 보라. 지금이 어찌 보상(輔相)이 피혐할 때인가? 틈을 보아 들어와서 한편으로는 내 마음에 부응하고 한편으로는 조야(朝野)의 희망을 위로하라."
하고, 이어서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정제(李廷濟)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시골에 사는 속오군(束伍軍)은 근골(筋骨)을 노고(勞苦)하였으므로 좋은 음식을 먹고 자란 경군(京軍)과 같지 않으니, 만약 군제(軍制)를 수명(修明)하고 기계(器械)를 정리(精利)하게 하면 실로 일국의 강병(强兵)이 될 것입니다. 올봄의 변란 때에 10초(哨)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가에서 방수(防守)하였는데 다들 목숨을 버릴 마음을 가졌고, 파하여 돌아가게 되어서는 미처 적을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므로 신이 참으로 기특하게 여겼습니다마는, 명수(名數)가 많아서 정하게 가리지 못하여 군장(軍裝)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묘당(廟堂)을 시켜 절목(節目)을 상의하여 정(精)한 것을 힘쓰고 많은 것을 힘쓰지 말아서 반드시 건장한 자를 가리고 흉년이라 하여 연습을 그만두지 말도록 엄히 명령하면, 나라에는 양병(養兵)하는 비용이 없이도 급할 때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묘당에 내려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계환(金啓煥)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일형(權一衡)을 정언(正言)으로, 홍상인(洪尙寅)을 헌납(獻納)으로, 임수적(任守迪)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유척기(兪拓基)를 삭출(削黜)하였다. 유척기가 상소(上疏)하여 사직하기를,
"죄가 같은 신하들이 아직 죄적(罪籍)에 있으니, 신(臣)의 처지로서 어찌 차마 그 승탁(陞擢)을 영화로이 여기고 세간에서 부끄러이 여김이 있는 줄 모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명에 따르지 않는 것을 노여워하여 그 처분을 어지럽혀 붕당을 보호할 계책을 한다고 꾸짖고 이런 명이 있었다.

 

7월 6일 을묘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동의금(同義禁)        김상옥(金相玉)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탕평(蕩平)의 근본은 달고 쓴 것을 조제(調劑)하여 아울러 모두 수용(收用)하는 데에 있지 않고, 실로 임금의 마음이 위에서 표준을 세워 크게 공평하고 지극히 바른 지경에 이르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더구나 이번 역적의 변란은 빚어 온지 이미 오래 되었고 뿌리가 또한 깊으므로 간사한 의논을 시작하자 한 마디에 또 한 마디를 더하여, 역적 목호룡(睦虎龍)과 역적 김일경(金一鏡)에 이르러 극심하였는데, 주토(誅討)가 엄하지 않아서 왕법(王法)이 펴지 못하였으므로 남은 흉당(凶黨)에 전습(傳習)되어 몰래 이도(異圖)를 품어서 중외(中外)에서 규합한 것이 거의 온 나라의 반이 되었습니다. 진실로 그 근본을 구명하면 실로 윤상(倫常)이 무너지고 인심이 나쁜 데로 빠져 들어가는 데서 연유하여 오늘날 하늘에 사무치는 변란을 가져왔으니, 먼저 해야 하고 급히 해야 할 것은 의리를 밝히고 시비를 바로잡아 난적(亂賊)이 말미암아 온 것을 밝히고 충역(忠逆)이 나뉘는 까닭을 엄하게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규모(規模)와 거조(擧措)가 정대(正大)하고 광명(光明)하면 색목(色目)을 달리하는 버릇이 절로 사라질 것이나, 우선 미봉하는 것만을 일삼아 조정의 화평한 복을 바란다면 근본을 버려두고 말단을 다스려 어지럽고 어그러지는 것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탕평의 아름다움은 실로 이루어질 희망이 없고 화란(禍亂)의 싹이 또 어두운 가운데에 숨어 있게 될 듯합니다."
하였는데, 하교(下敎)하기를,
"이 소본(疏本)을 보니 지적한 뜻이 교밀(巧密)하고 말한 것이 음비(陰祕)하다. 의리를 밝히고 시비를 바로잡는다는 한 귀절의 말은 조정의 신하를 악역(惡逆)의 조로 모는 것이니, 이것이 무슨 마음인가? 한 번 붕당이 생긴 뒤로는 충역(忠逆)의 이름을 씌우는 것을 보통으로 여기니, 이것이 난역(亂逆)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옛일로 말하면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506)                  을 말할 뿐이고 온 세상을 들어서 반역이라고 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고, 국조(國朝)로 말하면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을 말할 뿐이고 온 조정을 들어 반역이라고 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옛말에 ‘범을 그릴 때 가죽은 그려도 뼈는 그리기 어렵고 사람을 알아볼 때에 낯은 알아도 마음은 모른다.’ 하였거니와, 흉역(凶逆)의 속마음은 상지(上智)의 자질일지라도 미리 알 수 없는데, 한 역적이 나왔다 하여 세상의 반을 가리켜 반역이라 하는 것은 임금을 위하여 마음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곧 그 붕당을 위하여 날뛰는 것이다. 김상옥을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다.

 

7월 7일 병진

임금이 어수당(魚水堂)에 나아가 친히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吏曹判書) 윤순(尹淳)과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문명(趙文命)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오늘 이 당에서 개정(開政)하는 뜻을 경들은 아는가? 이 당은 인조(仁祖)께서 세워서 신하들을 인접(引接)하고 치도(治道)를 강론하셨으며 선조(先朝)에서도 전에 인접하신 때가 있었으므로 이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니, 이는 다만 한때 계술(繼述)하는 일일 뿐이 아니다. 인조께서 전후에 현판(懸板)하신 것이 모두 벽에 걸려 있으니, 입시(入侍)한 신하들은 기좌(起坐)할 때에 우러러보라. 남쪽 벽에 ‘풍운의 기회가 부합하여 임금과 신하가 기쁨을 같이하니 하늘과 땅이 서로 형통하여 태평한 기상이 있다.[風雲契合 魚水歡同 天地交泰 太平有象]’는 16글자가 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친정(親政)에 즈음하여 지은 글이 있으니, 개정하기 전에 보라."
하고, 드디어 손수 쓴 어시(御詩) 두 통을 내렸다. 하나는 동전(東銓)507)  을 경계하는 시인데 ‘이 당에서 개정함은 우연한 뜻이 아니다. 바로 지금 급한 일은 먼저 수령 뽑는 것이다. 사(私)를 버려 자제하면 공정하게 될 것이다. 간절한 이 분부를 경은 삼갈지어다.[此堂開政 意非偶然 當今急務 擇守爲先 袪私克己 公必在前 丁寧此敎 卿其愼旃]’ 하였고, 하나는 서전(西銓)508)  을 경계하는 시인데 ‘이 당에서 친정한 뜻을 몸받아야 한다. 구근을 말하지 말라. 나는 청아한 것을 취한다. 무관의 붕당은 종사에 관계된다. 동도 서도 편들어 치우지지 말지어다.[親政此堂 卿必體也 毋曰久勤 在予淸雅 武弁朋黨 係關宗社 不東不西 莫上莫下]’ 하였다. 개정하게 되어서는 의망(擬望)할 때마다 누구냐고 묻고, 말하기를,
"진주(晉州)의 삼망(三望)은 전에 다 대간(臺諫)·시종(侍從)을 지낸 근밀(近密)한 신하이므로, 하점(下點)하려면 또한 누가 과연 이 직임에 합당한지 모르겠으니, 어떻게 전관(銓官)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꾸짖겠는가?"
하였다.

 

이태좌(李台左)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박사수(朴師洙)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정우량(鄭羽良)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휘정(尹彙貞)을 수찬(修撰)으로, 조지빈(趙趾彬)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정사(政事)가 끝나매, 이어서 선온(宣醞)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입시(入侍)한 신하들도 사옹원(司饔院)에서 생선을 받아들이는 것을 멈춘 일을 아는가? 고기 안에 뱀이 있다는 말은 매우 무리(無理)한데 차차로 와전하여 이런 간사한 말을 한 것은 모두 민심을 어지럽히려는 뜻이다. 사옹원에서 대봉(代捧)하기를 청하였는데, 마음에는 믿어지지 않을지라도 바야흐로 양동조(兩東朝)509)  를 모시므로 신중히 하는 도리로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당 태종(唐太宗)은 백성을 위하여 황충(蝗蟲)을 삼켰거니와, 이제 고기 뱃속에 참으로 뱀이 있더라도 씻고 삶아서 먹으면 어찌 황충을 삼키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백성을 위하여 의심을 타파하는 도리로서는 같은 예(例)로 대봉할 수 없으니, 단연코 어공(御供)부터 비롯하여 대봉하지 말라."
하였다.

 

집의(執義) 이춘제(李春躋)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심성연(沈成衍)의 상변(上變)은 대계(臺啓)로 말미암아 배소(配所)로 보낼 즈음에 나왔으므로 정상이 본디 괴이하거니와, 형신(刑訊)하게 되어서는 공초(供招)한 것이 또한 어지러웠으니, 끝까지 조사하여 정상을 알아내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겠습니다. 전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翼寬)은 전 간장(諫長)이 이미 나핵(拿覈)을 청하는 논의를 냈고 새 방백(方伯)은 여러 번 바뀌었으므로 안무사(安無使)가 이어서 오래 지체하니, 빨리 감사를 각별히 가려서 기한을 정하여 보내도록 명하여 안무사가 행사(行査)하고 빨리 돌아오게 하소서. 청백리(淸白吏)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라는 분부는 문득 겉치레가 되어 청렴한 절조(節操)에 거의 향화(香火)가 이어지지 못하게 하니, 일세(一世)를 격려하는 방도는 이러하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삼가 듣건대, 김상옥(金相玉)을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고 홍용조(洪龍祚)를 곧 그 곳에 정배(定配)하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김상옥이 붕당을 위하여 죽을 것을 달갑게 여긴 정상은 이미 환히 밝혀졌으나, 홍용조에 이르러서는 당론(黨論)이 용색(容色)과 언사(言辭)에 나타난 일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과연 실병(實病)이 있다면 부임하지 못하는 것을 형세가 혹 그러할 수도 있을 것인데, 실정을 구명하지 않고 문득 무거운 견벌(譴罰)을 더하면 마침내 예우(禮遇)하여 부리는 방도에 결함이 있게 될 것이니, 특별히 반한(反汗)510)  의 명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심성연(沈成衍)은 마침내 처결해야 할 것이다. 함경 감사의 일은 묘당을 시켜 곧 천망(薦望)하게 하라. 청백리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는 일은 각별히 신칙(申飭)하라. 홍용조의 일은 이미 처분이 있었다."
하였다.

 

안음현(安陰縣)을 혁파(革罷)하여 함양부(咸陽府)에 붙였다. 역적의 괴수 정희량(鄭希亮)이 안음에서 났기 때문이다.

 

7월 8일 정사

유수원(柳壽垣)을 지평(持平)으로, 이광보(李匡輔)를 응교(應敎)로, 임수적(任守迪)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7월 9일 무오

추국(推鞫)에 참여한 신하 이광좌(李光佐)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주었다.

 

진주 부사(陳奏副使) 정석삼(鄭錫三)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역적을 토벌한 일을 진주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저들이 혹 힐문(詰問)할 것이니, 대답할 말을 미리 강구하여 정하고 주문(奏文)도 미리 꾸미게 하여 때에 임박하여 궁박(窮迫)한 걱정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석삼이 말하기를,
"근래 변경(邊境)의 방비가 엄격하지 않아서 범월(犯越)511)  이 매우 많으니, 황진기(黃鎭紀)가 망명하여 반드시 범월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혹 난적(亂賊)의 범월을 묻고 또 말썽을 일으키는 꼬투리가 있을 것이니, 수작할 말을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희(康熙)512)   때에는 일이 있어서 문득 자문(咨文)을 보내는 일이 있으면 번번이 허락받았으나, 이제는 자문 때문에 끝없는 모욕을 당하니, 만약 범월한 일 때문에 좋지 않은 말이 있으면 치욕이 매우 클 것이다. 황진기는 범월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자문을 시험삼아 꾸몄다가 저들에게 간 뒤에 형세를 보아 바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대신(大臣)과 상의해서 하라."
하였다. 정석삼이 말하기를,
"신축년513)  에 유락(唯諾)514)  하였다 하여 견벌(譴罰) 받은 자는 이제 다 죄를 씻어 주고 거두어 썼으나, 저 네 사람은 연명(聯名)하여 상차(上箚)한 일 때문에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으니, 그때 유락한 사람들이 어찌 안심하고 출사(出仕)할 수 있겠습니까? 김재로(金在魯) 등의 상소에는 인혐(引嫌)한 말이 있었는데도 견벌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 한 사람을 죄주고 내일 또 한 사람을 죄주어 묵은 원한은 여전하고 새 원수를 또 맺으면, 나날이 귀양보내더라도 어찌 금지할 수 있겠습니까? 김상옥(金相玉)은 자신이 금부 당사(禁府堂上)이면서 친국(親鞫)을 당하였으므로 조용히 자처하여도 안될 것이 없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붕당을 위하여 죽기를 달갑게 여기듯이 하였으니, 도리가 매우 놀랍습니다마는, 그 소(疏) 가운데에 있는 ‘시용(始俑)515)  ’ 두 글자로 말하면 곧 유봉휘(柳鳳輝)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유봉휘가 신축년에 상소한 것은 유식한 자가 한탄하는데도 난역(亂逆)이 일어난 뒤에는 스스로 본원(本源)에 거슬러 올라가 논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용’ 두 글자는 그 귀착되는 바를 알겠으나, 끝에 맺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역적 목호룡(睦虎龍)에 이르러 극심하였다고 한 것은 마디마디 뜻이 있다. 반드시 조정의 신하를 무함하려는 것이니,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지 않으면 시비가 어찌 어지럽지 않겠는가? 먼저 그 근본을 바로잡고서야 절로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전후에 여러 번 탕평(蕩平)의 뜻을 보였으나, 조정의 신하가 지극한 뜻을 몸받지 않고 구투(舊套)를 변통 없이 지키니, 이것은 모두 내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가 없어서 아랫사람을 바르게 거느리지 못한 탓이다."
하였다. 정석삼이 말하기를,
"공도(公道)를 넓혀 탕평하려는 뜻은 하교가 간절하였습니다. 일전에 어수당(魚水堂)에서 친정(親政)하실 때에 어제(御製)를 내리기까지 하여 수령(守令)을 각별히 선택할 것을 여러 번 분부하셨으나, 동전(東銓)의 세 당상(堂上)의 성의(聖意)를 우러러 몸받지 못하므로 차제(次除)516)  할 때에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 것이 많아서 혹 사의(私意)를 따르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사의가 가로 흘러도 그것이 그른 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굳지 않아서 일에 동요가 많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평소의 논의에 피차의 견제(牽制)가 워낙 많아서 끊어 버리지 못하는 병폐가 곳곳이 빌미가 되어 정사를 해롭게 합니다. 만약 수령을 죄다 마땅한 사람을 얻어 오래 맡겨 성적(成績)을 책한다면 그 보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피차를 물론하고 색목(色睦)에 관계없이 오직 인재를 천거하면 탕평하는 방도가 절로 그 가운데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판(吏判)은 결코 사의(私意)가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안다마는, 색목 가운데의 속투(俗套)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였다.

 

7월 10일 기미

심성연(沈成衍)이 처형되었다. 심성연은 승지(承旨) 심중량(沈仲良)의 손자이다. 집이 매우 부호(富豪)하여 사치하고 교만하며 함부로 날뛰는 것이 개 돼지 같아서 벗들이 침뱉고 버려서 사람 축에 끼지 못하였는데, 대신(臺臣) 권부(權扶)가 논계(論啓)를 내게 되어 먼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 당숙(堂叔) 심상관(沈尙觀)이 권부와 평소에 친분이 두텁기 때문에 그의 행사를 권부에게 전하여 말하였으리라고 의심하여 드디어 심상관 부자가 반역을 꾀하였다고 무고하였으나, 대질(對質)하게 되어서는 말이 다 꺾였으므로, 네 차례 형신(刑訊)하여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고하고 반역을 꾀하는 데에 같이 참여한 것으로 결안(結案)하였다. 미처 처형하기 전에 죽었으므로 법대로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고 심상관 등을 백방(白放)517)  하였다. 그 뒤 을해년518)  에 심성연의 아우 심정연(沈鼎衍)이 또 반역을 꾀하여 처형되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講讀)하였다. 주서(注書) 홍정명(洪廷命)이 정자(程子)의 이름을 휘(諱)하지 않은 것을 옥당(玉堂) 정우량(鄭羽良)이 비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는 다 이름을 휘하는데 염계(濂溪)519)  ·횡거(橫渠)520)  의 이름을 휘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유신(儒臣)은 옛일을 상고하여 정식(定式)하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이집(李㙫)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탄(坦)521)  의 죄명은 관계되는 것이 중대한데 참작하여 처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왕법(王法)이 지극히 엄하고 여론이 더욱 격렬하여지니, 대계(臺啓)에 쾌히 따르소서. 오상억(吳尙億) 등은 민백효(閔百孝)의 공초(供招)에 긴요하게 나왔고 집뒤에 병기를 감추었다는 말도 이조겸(李祖謙)·민제상(閔齊尙)의 공초에 나왔으며, 김덕유(金德裕) 등은 역적 민관효(閔觀孝)가 끌어댄 것이 매우 낭자하여 사람들의 말이 망측하니, 용서할 수 없겠습니다. 이명의(李明誼)는 역적 김일경(金一鏡)·목중형(睦重衡)의 혈족이며 역적 이인좌(李麟佐)의 지친(至親)으로서 의심스러운 정상이 많으니, 그 죄는 결코 그대로 가두어 두고 기다릴 수 없겠습니다. 남수언(南壽彦)·목중형(睦重衡)은 혹 호남 대장(湖南大將) 이라고도 하고 주사 대장(舟師大將)이라고도 하니, 이것은 다시 추문(推問)할 것도 없겠습니다. 홍계일(洪啓一)에 대한 형신(刑訊)을 멈춘 것이 매우 당찮거니와, 이제는 그대로 가두어 두니 더욱 어그러집니다. 신필회(申弼誨)가 결탁한 의심스런 자취는 결코 귀양보내고 말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조덕보(趙德普)도 역적 민관효·이조겸의 공초에 긴요하게 나온 자인데 역적 민관효가 그 형제에게서 머물러 있었던 정상을 이미 스스로 숨기지 못하였으니, 그의 정적(情跡)은 엄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엄히 신문하여 반드시 정상을 실토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목광원(睦光遠)은 목천제(睦天齊)의 아들로서 목중형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니, 비록 추국(推鞫)할지라도 어찌 아들로서 아비를 밝힐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가두어 둘 필요는 없으니, 소석(疏釋)해야 될 듯합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번에 참작하여 처치한 것은 내가 이미 헤아렸다. 그 가운데에서 이명의의 일은 경(卿)의 말이 더욱 명쾌하고, 내 생각도 그러하다. 그 밖에 아뢴 것은 경의 말이 옳을지라도 이미 헤아려 처치하였고 쟁집(爭執)할 만한 다른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다시 추문(推問)해야 하겠는가? 목광원의 일은 경의 말이 과연 옳으니, 김덕조(金德祚)와 마찬가지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임금이 부제학(副提學) 조현명(趙顯命)이 요직(要職)을 힘껏 사양하기 때문에 해면(解免)하도록 윤허하고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부수찬(副修撰) 정우량(鄭羽良)이 상소하기를,
"조현명 같은 자는 사류(士類)가 의지하여 존중하는 바와 국가가 의지하여 힘입은 바가 어떠한데 훈명(勳命)을 나와서 받는 것은 구차하게 바라면서 경악(經幄)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까? 조현명의 훈록(勳錄)은 삭제할 수 있으나 벼슬은 결코 면직하도록 윤허하셔서는 안된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유의하겠다."
하였다

 

7월 11일 경신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였다.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공천(公薦)을 쓰지 않는다 하여 권당(捲堂)522)  하니, 하교(下敎)하기를,
"초사(初仕)를 가려서 천거하는 일을 간절히 경계하였으면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감히 천거하지 않아야 사리에 맞는다 할 것이니, 재임(齋任)으로서는 단자(單子)를 바치고 인혐(引嫌)하는 것은 오히려 괜찮겠으나, 관천(館薦)을 쓰지 않는다 하여 서로 이끌어 권당하였으니, 방정(方正)한 절조(節操)가 무너졌다. 또 이판(吏判)이 바야흐로 문형(文衡)523)  을 겸대(兼帶)하고 지관사(知館事)로 있으니,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있으므로 더욱 이러지 않아야 할 것이다. 권당을 앞장서 말한 유생 황만정(黃萬程)은 해조(該曹)를 시켜 벌주게 하라. 생각한 바를 써서 바친 가운데서 ‘지난 역란(逆亂) 중에 1백 인에 가까웠던 유생이 거의 다 흩어져 수십 인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태학(太學)에서 선비를 배양하는 것은 조종조(祖宗朝)에서 배양하신 뜻이 매우 특이하였는데, 소추(小醜)524)  가 있다는 말을 듣고도 오히려 이러하였으니, 이것은 유생의 허물일 뿐이 아니라 곧 사유(師儒)의 허물이다. 예전에는 대현(大賢)으로서도 살촉을 맞은 자가 있었는데, 이제는 역적의 소식을 듣고도 성묘(聖廟)를 돌보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사유의 허물일 뿐이겠는가? 실로 과덕(寡德)한 내가 군사(君師)의 책임을 잘하지 못한 것이다. 그때의 대사성을 월봉 1등(越俸一等)525)  하여 내가 진작(振作)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관유(館儒)가 권당하면서 생각하는 바를 써 바친 것을 보고 거관(居館)하는 자는 다 시골 유생이고 재임은 재사(齋舍)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매우 그르게 여겨, 드디어 과거(科擧)에 응시할 생원(生員)·진사(進士)는 식당 15점(食堂十五點)526)  에 찬 뒤에야 과거에 나아가도록 허가하고 재임과 색장(色掌)은 번갈아 입직(入直)하여 성묘를 지키라고 명하였으나, 풍속이 이미 어지러워졌고 당의(黨議)가 갈라졌으므로 마침내 임금의 분부대로 되지 못하였다.

 

대사헌(大司憲) 박사수(朴師洙)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바야흐로 난역(亂逆)이 겨우 평정되었으나 근심은 아직 큽니다. 민심이 소란하고 조선(漕船)이 파손되고, 또 변란을 겪은 뒤로 비국(備局)의 재신(宰臣)들은 아직 한 번도 인접(引接)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런 때에는 정고(呈告) 중인 대신(大臣)을 권하여 나오게 하고 이어서 다른 정승 및 재신들과 함께 연석(筵席)에 등대(登對)하여 나라의 계책을 강구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령을 선임하는 일로 말하면 오늘날 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마는, 대정(大政) 때에 차출한 수령 중에서 이철징(李鐵徵)처럼 늙어서 정신이 어지럽고 이민호(李敏好)처럼 술을 취하여 망령되고 이광보(李光輔)처럼 흐릿하고 어리석으며 박황(朴潢)처럼 다스리지 못하고 장석(張)처럼 의심받고 비방받는 자는 빨리 도태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소(疏) 가운데에 있는 다섯 고을 수령의 일은 그날 친정(親政)할 때에 그 중에도 하문한 자가 있었거니와, 경(卿)이 들은 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철징·이민호·이광보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모레 와서 모이도록 비국의 재신들에게 이미 명하였다."
하였다.

 

7월 13일 임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죄수들이 이 한더위에 줄곧 잡혀 있는 것은 왕자(王者)의 흠휼(欽恤)하는 도리가 아니다. 혹 용서할 자도 없지 않을 것인데, 번번이 추국(推鞫)하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 하여 아직도 버려 두었으니, 참작할 방도가 없어서는 안된다. 윤경제(尹景濟) 부자는 이인좌(李麟佐)의 처부(妻父)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가 없으니, 윤경제·윤상덕(尹相悳)·윤상정(尹相靖)·윤상헌(尹相憲)은 판부(判付)527)                  대로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문보(趙文普)·조제보(趙濟普)·조덕보(趙德普) 세 사람 가운데에서 조덕보는 죄가 조금 가벼우므로 참작하여 처치하려 한다. 김덕조(金德祚)는 곧 한세홍(韓世弘)의 외삼촌인데 한세능(韓世能)을 잡아서 관가에 바친 자이며, 오상억(吳尙億)·오상직(吳尙稷)은 오가(吳家) 마을에서 군사를 모았다는 말이 있으므로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으니, 극변(極邊)에 정배하라. 김덕유(金德裕)·김덕조(金德祚)·신필인(申弼仁)은 원지(遠地)에 정배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필회(申弼誨)가 군사를 징발하여 서로 화응(和應)하였다는 것은 강세윤(姜世胤)·이광적(李光績)의 일과 서로 같다."
하니,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신필회는 그 논의가 매우 괴이하고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진친 곳에 나아간 것은 또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곳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정덕좌(鄭德佐)는 시골에서 짚자리를 엮는 무리에 지나지 않는데 당초에 혼동하여 잡았습니다. 혹 정우좌(鄭禹佐)인가 의심하여 형신(刑訊)하였으나, 실은 애매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덕좌는 놓아 보내라. 충주(忠州)에서 잡아 가둔 정요좌(鄭堯佐) 등 여러 사람도 놓아 보내라. 홍계일(洪啓一)은 그대로 가두어 두어 결말(結末)을 기다리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언빈(吳彦賓)의 일은 어떠한가?"
하매, 오명항이 말하기를,
"오언빈은 신(臣)의 의친(懿親)인데, 어찌 감히 가부를 말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언빈은 별로 물을 일이 없으니, 입시(入侍)하지 않은 대신에게 물어서 품처(稟處)하라. 목중형(睦重衡)·김구령(金九齡)의 일은 어떠한가?"
하매, 오명항이 말하기를,
"목사청(睦泗淸)을 잡아 올 때 나졸(羅卒)이 말을 누설한 자취가 있고 그 사람됨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한 차례 형신하였으나, 별로 잡아서 물을 일이 없습니다. 누설한 정상은 나졸과 함께 형조(刑曹)로 옮겨 보내어 상세히 핵사(覈査)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목사청·창협(昌協)은 추조(秋曹)528)                  로 옮겨 보내어 나졸과 마찬가지로 사문(査問)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최장오(崔章五)는 놓아 보내라. 송국휴(宋國休)·송해(宋楷)·송중홍(宋重弘)은 그대로 가두어 두라."
하매, 오명항이 말하기를,
"신이 군사를 돌이켜 공주(公州)에 이르렀을 때에 김구령이 감영(監營)의 중군(中軍)이었는데 나와서 신을 보고 사기(辭氣)가 강개(慷慨)하였으니, 역적을 따른 일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구령은 놓아 보내라. 권협만(權協萬)은 형장(刑杖)을 가하여 신문하고 이명의(李明誼)는 그대로 가두어 두어 결말을 기다리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목중형(睦重衡)·목광원(睦光遠)·남수언(南壽彦)의 일은 마찬가지이다."
하매, 장령(掌令)        강필신(姜必愼)이 말하기를,
"목중형·남수언은 신효조(辛孝祚)529)                  의 공초(供招)에 같이 나왔으므로 정적(情跡)이 의심스럽습니다."
하고,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남수언은 신이 남한(南漢)에 있을 때에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왔습니다. 만약 반역을 꾀한 일이 있다면 그가 어찌 군사를 거느리고 왔겠습니까? 두 사람의 일은 상세히 심사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오명항이 말하기를,
"목중형·남수언의 일은 반신반의인 듯하나, 목중형은 그 외사촌인 나만적(羅萬迪)을 포교(捕校)가 잡지 못한 것을 그가 능히 잡아 바쳤으니, 이 한 가지는 반역을 꾀한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수언·목중형은 그대로 가두어 두고 다시 추문(推問)하라. 목광원은 그대로 가두어 두어 결말을 기다리라. 윤성시(尹聖時)는 극변에 정배하라. 남태적(南泰績)은 별로 어긴 단서가 없다."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남태적은 철산 부사(鐵山府使)이었을 때에 가장 성적(聲績)이 있었고 무예가 뛰어났습니다. 신이 그와 함께 강변(江邊) 고을들을 동행하면서 쓸 만한 인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반역한 정상을 잡은 것이 없다면 용서할 꼬투리가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현(李玹)·박계상(朴啓祥)은 아까워할 것도 없으니, 살려 두더라도 앞으로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정(李檉)은 혹 용서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판부(判付)를 쓰게 하기를,
"남태적은 역적의 괴수 이인좌의 공초 가운데에 ‘남태징은 어리석은 자이므로 들어왔을 것이나 남태적을 많이 속여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였으므로 용서할 꼬투리가 없지 않고, 여러 차례 엄히 형신하여도 단서가 없으니, 사형을 감면하여 절도(絶島)에 정배하라. 윤수(尹邃)는 당초 역적의 공초에서 끌어댄 것이 ‘들어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어찌 문득 엄히 형신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의 공초 가운데에 있는 역적 이유익(李有翼)·역적 이하(李河)와 서로 만났다는 말은 매우 수상하다. 그러나 만약 역적들과 공모하였다면 어찌 별안간 다른 사람의 집에서 수작할 수 있겠는가? 사형을 감면하여 절도에 정배하라. 윤연(尹㝚)은 역적의 공초에서 끌어댄 것에 달리 긴밀한 것이 없고 이미 시종(侍從)을 지냈는데 그 사람됨이 본디 간사한 무리가 아니나, 근신하였다면 형제가 어찌 역적의 공초에 나왔겠는가? 먼 곳에 정배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덕정(趙德鼎)은 이미 죽었다. 경들은 오늘 입시하게 한 데에는 내 뜻이 있으니, 맨 먼저 쓴 자를 경들은 생각하라."
하고, 임금이 이어서 슬피 눈물을 흘리며 하교하기를,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은 사람됨이 결코 이인좌 등과 반역할 자가 아니다. 흉적(凶賊)의 관문(關文)·격문(檄文)에 그 이름이 낭자하나, 추대한 사람을 어찌 글에 나타내어 고할 수 있겠는가? 조덕정을 형신할 때마다 혹 밀풍에게 해로운 일이 있으까 염려하였는데, 마침내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다. 조덕정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외손이고 역적 이하의 사위인데, 그가 밀풍에 끌어댈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찌 형장을 참고 승복하지 않으려 하겠는가? 전에 비몽사몽간에 문득 밀풍과 서로 만나 느껴 울다가 목이 메어 놀라 깨었다. 그때에 처분하려 하였으나, 조동규(趙東奎)의 공초에 마침 나왔으므로 결말을 짓지 못하였다. 이는 조덕정이 죽었으므로 내 마음에는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나, 이것은 여흥(驪興)530)                  의 일과 다르므로 전석(全釋)하자면 조종(祖宗) 때에 법을 세운 뜻에 어그러질 것이니, 참작하여 부처(付處)531)                  하라."
하였다. 대신과 제신들과 삼사(三司)가 잇달아서 성명(成命)을 빨리 거두기를 힘껏 청하였으나, 임금이 누누이 하교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司諫)        강필경(姜必慶)·장령(掌令)        강필신(姜必愼)이 전에 합계(合啓)한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강필경이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예전부터 종신(宗臣)이 추대된 죄명을 지고도 천지 사이에서 편히 사는 자는 없었습니다. 역적의 공초와 격문이 낭자하여 엄폐하기 어려운데다가, 법이 지극히 중대하고 공론이 또한 엄하므로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로 굽힐 수는 없으니, 청컨대 죄인 탄(坦)532)                  을 참작하여 부처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고 율문(律文)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이 아뢰어 쟁집(爭執)하는 것은 사의(事宜)에 맞는다마는, 성인(聖人)이 다스릴 때에 유언(流言)을 면하지 못하였다. 오늘 참작하여 처치하는 뜻은 이미 하교한 데에 다 있으니, 빨리 멈추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죄인 오상직·오상억은 역적 민백효(閔百孝)의 공초에 긴요하게 나왔는데, 영남(嶺南)의 역적을 영접하였다고 말하기까지 하였고 또 병기(兵器)를 감추었다는 말이 있으므로 결코 지레 짐작하여 처치하여서는 안되겠으니, 청컨대 오상직·오상억을 원지에 정배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고 엄히 국문(鞫問)하여 정상을 알아내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강필신이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법이 지극히 엄하므로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로 굽힐 수 없고, 더구나 탄의 죄는 종사(宗社)에 관계되는데 왕법(王法)을 펴지 못하여 여정(輿情)이 모두 분개하니, 청컨대 탄을 참작하여 부처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시고 율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이하·이유익·윤수는 모인 것이 주무(綢繆)하고 정상이 음비(陰祕)하므로 먼저 마감하여 처치하는 것은 참으로 추국(推鞫)하는 체례(體例)를 엄하게 하는 도리에 어그러지니, 청컨대 윤수를 사형을 감면하여 절도에 정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이어서 엄히 국문하게 하소서. 남태적은 자신이 무변(武弁)533)                  이면서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 나왔으므로 여러 번 형신을 겪었으나 끝내 항거하였는데 참작하여 처치하는 것은 추국하는 체례를 중히 여기는 도리에 매우 어그러지니, 청컨대 남태적을 절도에 정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이어서 엄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권일형(權一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금산(金山)에서 추풍(秋風)으로 가는 한 길은 영남·호서 사이의 지름길인데, 전에 진수(鎭守)하는 시설이 없었습니다. 이번 흉적(凶賊)이 안음(安陰)·거창(居昌)에서 날뛴 것은 그 계획이 진실로 나아가 호서의 적병과 합하여 곧바로 서울 교외를 범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장차 조석간에 고개를 넘어올 형세이었는데, 본군(本郡)의 군사는 선산(善山)에 넘겨주었으므로 다시 방어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만일 적의 형세가 장구(長驅)하였다면 장차 막을 곳이 없었을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본군에 독진(獨鎭)을 따로 두고 이어서 부(府)로 승격하고 또 본군에 입적(入籍)된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기병(騎兵)·보병(步兵)과 속오군(束伍軍)·아병(牙兵)을 각 영문(營門)의 각 군보(軍保)와 함께 본군에 전속(專屬)시키고 신역(身役)이 없는 무리를 조사해 내어 성주(星州)의 독용진(禿用鎭)과 마찬가지로 대오(隊伍)를 만들면, 관방(關防)을 굳게 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령(鳥嶺)에 성을 쌓은 것은 참으로 우연한 것이 아니니, 칠원(漆原)·곡성(谷城)의 규례처럼 성안에 읍치(邑治)를 옮겨 설치하되 빨리 도신(道臣)·수신(帥臣)을 시켜 상세히 살펴서 변통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군제(軍制)는 급할 때에 믿을 것이 속오군과 아병뿐이므로 변란을 당하여 징발할 때에는 명령을 듣고 일제히 도착하여도 기계(器械)가 썩고 무디고 앉고 서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법을 모르며 봄·가을의 순점(巡點)은 이따금 그만두는 일이 많으니, 장차 적을 대할 때에 어떻게 쓰겠습니까? 별다른 양식으로 수정(修整)하여 자주 점열(點閱)해야 하겠습니다. 각 고을의 역리(驛吏)·역노(驛奴)로 대오를 만드는 것은 전에 조정의 명령이 있었고, 각 역리·역노로 말하면 또한 더 많으니, 마땅히 속오군·아병과 마찬가지로 단속하여 대오를 만들고 찰방(察訪)을 시켜 봄·가을에 시열(試閱)하고 군기(軍器)를 획급(劃給)하고 힘에 따라 새로 장만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찌 뒷날 힘을 얻는 방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전 경상 병사(慶尙兵使)        이시번(李時蕃)은 적이 성읍(城邑)을 함락시켜 사기(事機)가 위급하던 때에 조금도 경동(驚動)할 뜻이 없다가 형세가 파죽(破竹)같이 된 뒤에야 천천히 행군하여 겨우 70리 되는 곳에서 멈추었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었는지 참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군율(軍律)을 시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뒷날을 징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 상주 영장(尙州營將)        한날(韓㻋)은 군사를 거느리고 스스로 지키며 겁을 낼 뿐이었고 가장 뒤에 행군하여 40리 가서 머물러 자고 다시 그대로 머무르려다가 도순무(都巡撫)가 고개를 넘었다는 말을 듣고는 나아가 40리 되는 곳에서 또 수일 동안 잤으니, 군율로 논하면 죽어도 남은 죄가 있을 것 입니다. 이제 역적 박필현(朴弼顯)을 베었다 하여 그 사죄(死罪)를 용서한 것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해롭지 않으나, 사형을 감면하여 충군(充軍)하는 것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소 가운데에 아뢴 것은 다 의견이 있으나, 일이 변통하는 것에 관계되니, 묘당(廟堂)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라. 소 끝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박사수(朴師洙)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오늘 판의금(判義禁)은 문서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하니, 이는 반드시 국옥(鞫獄)을 참작하여 처리하기 위한 일일 것입니다. 성의(聖意)는 오직 서둘러 끝내는 것을 급하게 여기시니, 이는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심성연(沈成衍)이 고한 일은 처음부터 반복하여 구명하지 못하고 미리 엄히 형신(刑訊)하고는 문득 거짓으로 승복하였다하여 일체 풀어 주었으므로 이미 식자(識者)가 속으로 한탄함이 있었습니다. 민백효(閔百孝)가 끌어댄 충주(忠州)의 적들은 정상이 더욱 의심스럽고 홍계일(洪啓一)의 정적(情跡)은 요사한데도 까닭없이 형신을 멈췄으므로 물정이 놀라워하고 불만스러워합니다. 더구나 수상(首相)이 옥정(獄情)을 잘 아는데 그 정고(呈告) 중인 것을 버려두고 일찍이 권하여 나오게 하지 않고서 지레 이런 일이 있으니, 믿고 맡긴 뜻이 또한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신은 먼저 김덕유(金德裕)·홍계일 등을 차례로 신문하고 참작하여 처리하는 일은 반드시 수상을 권하여 나오게 한 뒤에 하여, 국체(國體)가 존엄하고 인심이 상쾌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번 처분은 나라의 일이 미루어 가는 것을 민망히 여긴 것이다. 전후 다섯 달이나 되었는데 어찌 서두른다 하겠는가? 홍계일·김덕유의 일은 이 일의 소치를 능히 상세하게 알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변사(備邊司)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양역(良役)에 관한 수의(收議)는 이미 본사(本司)의 당상 2원(員)이 구관(句管)하여 초록(抄錄)하여 내기를 청하였으나, 갖가지로 헤아려도 참으로 잘 변통하기 어렵습니다. 이웃과 일가에서 침징(侵徵)하는 폐단은 일체 막는 것만한 것이 없으니, 이제 만약 금령(禁令)을 만들어 각 고을에 엄히 경계하면 백성의 원망을 조금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백성이 번식하였는데 어찌 대정(代定)하기 어렵겠습니까마는, 신역(身役)이 헐해지는 길이 넓어져서 한정(閑丁)을 얻기 어려우니, 감영(監營)·병영(兵營)과 경각사(京各司)·각진(各鎭)·각관(各官)·각청(各廳)의 소속을 막론하고 정군(正軍)에 관계된 자가 아니면 그 가운데에서 조금 건실한 자를 뽑아서 달아났거나 죽은 자의 대신으로 옮겨 정하되, 죽었다고 속이거나 달아났다고 속인 무리는 반드시 본리(本里)·본면(本面)과 인근 면의 신역이 헐한 자로 채우면 절로 고발할 것이므로 간사한 짓을 용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뜻으로 각도에 분부하고, 이 뒤로는 이웃과 일가에게 침징한 일이 나타난 자는 관리에게 엄중히 죄주도록 정식(定式)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가에게 거두는 것에 촌수가 정해져 있는가?"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동성(同姓) 팔촌과 이성(異姓) 육촌으로 한정되어 있으나, 촌수를 논하지 않고 옮겨 침징하여 평소에 누구인지 모르던 사람에게도 색리(色吏)와 수족(首族)이 별음기(別音記)534)  라 하며 여러 곱으로 마련하고, 중간에서 훔쳐 먹는 자도 수를 알 수 없이 많으니, 이 폐단을 뿌리뽑지 않으면 백성이 참으로 보존할 수 없는 형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영·병영 및 각처의 소속으로서 정군에 관계되는 자가 아니면 망설이지 말고 죄다 내어 주어 달아났거나 죽은 자의 대신으로 충정(充定)하게 하되, 각별히 수령(守令)을 신칙(申飭)하라. 이 뒤에 다시 전의 버릇대로 이웃과 일가에게 침징하는 폐단이 있으면 의당 어사(御史)를 보내어 염문(廉問)할 것이고, 발각된 자가 있으면 중률(重律)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정군(正軍) 각 색목(色目)에서 그 중에 도망하거나 죽은 것을 먼저 초록(抄錄)해 내어 곧 대신하게 하되, 각별히 반포(頒布)하여 엄히 신칙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동래(東萊)에 표류하여 온 왜인이, 기한이 차서 공급을 그만두었어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일이 매우 고약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이진(權以鎭)이 말하기를,
"신이 전에 동래를 맡았을 때에는 교활한 왜인의 정상을 대강 알기 때문에 약속한 것 외에는 요구하는 것을 일체 주지 않았습니다. 왜차(倭差)535)  가 전에 문서를 가지고 나와 국서(國書)라 하며 무역(貿易)을 청하는 수가 거의 1만 금(金)이나 되는데 도서(圖書)536)  를 바치지 않으므로 신이 엄히 막고, 훈도(訓導)·별차(別差) 등이 반드시 일을 일으킬 것이라 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허락하기를 청하여도 신이 끝내 따르지 않으니, 왜차가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고(故) 참판(參判) 이세재(李世載)가 과연 왜인에게 미움받아 왜인이 함부로 나온 일 때문에 파직(罷職)되었으니, 그들은 조금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문득 함부로 나오는 것을 능사로 삼습니다. 신이 왜인과 서로 겨룰 때에 함부로 나온 일이 있었으나, 신이 피혐(避嫌)하지 않고 장문(狀聞)하여 파직되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왜관(倭館) 안으로 도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굽혀서 그들의 요청에 따르면 저들의 욕심이 만족할 줄 몰라서 반드시 처치하기 어려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회계(回啓)한 것은 시행하지 말고 변신(邊臣)하게 분부하여 곧바로 막고 훈도·별차 등을 시켜 타일러 빨리 돌아가게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7월 14일 계해

밤 3경(三更)에 월식(月蝕)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에서 번갈아 탄(坦)을 참작하여 처치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며 누누이 쟁집(爭執)하니, 임금이 애써 따랐다.

 

김동필(金東弼)을 판윤(判尹)으로, 송성명(宋成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박사수(朴師洙)를 함경도 관찰사로, 이태좌(李台佐)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7월 16일 을축

포도 대장(捕盜大將) 장붕익(張鵬翼)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죄인 두 사람을 잡아와서 힐문하였더니, 박필몽(朴弼夢)·박사관(朴師寬)·박필현(朴弼顯) 등이 서찰(書札)로 왕복한 일이 있다고 공초(供招)하였는데, 대신(大臣)의 뜻은 다들 국청(鞫廳)으로 옮겨 보내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일이 기밀(機密)에 관계되므로 공초받은 문서를 소매에 넣어 와서 바칩니다."
하고, 이어서 그것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자가 바로 백마를 타고 전주(全州) 성밑에 왔다는 자인가?"
하였다. 장붕익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과연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잡으라고 명하고, 이어서 나주 영장(羅州營將) 이경지(李慶祉)를 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 홍경보(洪景輔)가 이경지의 아들인 선전관(善傳官) 이은정(李殷鼎)을 잡아 가두어야 한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듣건대, 이경지는 영장이 되어 잘 다스린다 하고, 그 아들은 선전관으로서 여러 번 들어와 시위(侍衛)하였으므로 내가 그 사람됨을 안다. 국가의 사체(事體)에 있어서 사람을 반신반의하여 억지로 가둔다면, 사람마다 반드시 의심할 것이니, 또한 뒷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장붕익이 말하기를,
"내일 맹단(盟壇)에 거둥하실 때에 선전관으로서 배종(陪從)하여 장전(帳殿)에서 밤을 지낼 것인데, 죄인의 아들이 어찌 가까이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잡아 가두는 것은 까닭없는 일인 듯하기는 하나, 경(卿)의 말에도 주장하는 바가 없지 않으니, 마지못하여 애써 따른다."
하였다.

 

7월 17일 병인

임금이 장차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려고 경복궁(景福宮)에 거둥하여 신무문(神武門) 밖에 있는 재전(齋殿)에서 잤는데, 왕세자(王世子)가 따라갔다.

 

하교(下敎)하기를,
"맹제(盟祭)는 다른 제사와 다르니, 제집사(諸執事)와 단소(壇所)에 드나드는 사람은 각별히 재목(齋沐)하라."
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연(輦)을 타고 육조(六曹) 앞길에 이르렀을 때에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길가에서 지영(祇迎)하니, 임금이 연을 멈추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하유(下諭)하기를,
"경(卿)은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홍치중이 나오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억지로라도 할 수 있다면 이러한 대례(大禮)에 어찌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홍치중이 명에 따라 나와서 숙사(肅謝)하고 이어서 제사에 참여하였다.

 

7월 18일 정묘

4경(四更) 초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입고 재전(齋殿)에서 걸어서 회맹단(會盟壇) 아래에 이르니, 왕세자가 먼저 나아가 지영(祇迎)하고 승지(承旨)·사관(史官)이 좌우로 나뉘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가 손을 씻고 판위(板位)에 이르러 북향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전계(前啓)를 거쳐 단(壇)에 올라 판위에 꿇어앉아 세 번 향(香)을 올리고 천작(薦酌)하고, 중계(中階)를 거쳐 내려와 판위에 돌아와 북향하여 꿇어앉았다. 우승지(右承旨)가 혈반(血盤)을 받들어 바치니, 임금이 세 술 마시고 훈신(勳臣)들이 차례로 피를 마셨다. 축문(祝文)을 읽고, 읽는 것이 끝나니 임금이 사배례를 행하고, 예가 끝나고 걸어서 재전에 돌아왔다. 그 축문에 이르기를,
"우리가 나라를 세운 것은 예의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교화하여 다스리는 것이 이미 밝아져서는 명분에 혼란이 없었습니다. 천강(天綱)·지기(地紀)가 각각 그 자리를 얻어 위아래가 함께 편안하고 은혜와 신의가 함께 지극하였습니다. 세교(世敎)가 이미 쇠퇴하여서는 당의(黨議)가 갈라지니, 물처럼 깊고 불처럼 더워서 고질을 고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에 이르러 비색(否塞)한 운을 당하니, 칙려(飭勵)는 부지런히 하였으나 윤리가 날로 어두워졌습니다. 효음(梟音)·경장(獍腸)537)  을 가진 김일경(金一鏡)이라는 역적이 앞장서 흉악한 말을 하고 방자하게 터무니없이 속였습니다. 저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李有翼)이 때를 타서 엿보아, 백성(百姓)을 속일 수 있다 하고 하늘을 속일 수 있다 하였습니다. 붙좇는 자가 많아지고 몰래 체결(締結)하여 계묘년538)  ·갑진년539)  부터 화란(禍亂)을 일으킬 마음을 빚어 왔습니다. 흉악(凶惡)한 글을 자주 걸어 먼저 거짓말로 현혹하고서, 영남·호서로 달려가서 악한 짓을 같이할 자를 불러 모았습니다. 폐고(廢錮)된 족속이 원망을 품고 어리석은 백성이 유혹당하여 경예(鯨鯢)540)  ·망량(魍魎)541)  이 앞뒤에서 도왔습니다.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 역적을 누가 매우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흉악한 자로 말하면 남태징(南泰徵)·이사성(李思晟)·심유현(沈維賢)·박필몽(朴弼夢)입니다. 중요한 벼슬에 오르기도 하고 왕실과 혼인하기도 하여, 처음에는 간사한 붕당을 맺고 나중에는 임금을 저버렸습니다. 안팎이 서로 화응(和應)하여 포치(布置)가 거의 이루어졌는데, 화기(禍機)가 나타나기 전에 뭇사람의 마음이 자주 놀랐습니다. 원로(元老)가 화기를 통촉하여 음도(陰圖)가 먼저 드러나니, 광봉(狂鋒)이 빨리 일어나 형세가 비바람처럼 급하였습니다. 호서 지방을 이미 잃고 경기 고을이 이어서 소요하니, 위험이 호흡하는 사이에 다가와 중외(中外)가 동요하였습니다. 원융(元戎)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부월(鈇鉞)을 잡고 출사(出師)하니, 용맹한 장수가 힘을 다하고 대신(大臣)이 기책(奇策)을 바쳤습니다. 임금의 정벌에 싸움이 없이 섬멸하고 소탕하니, 여얼(餘孼)은 위세만 바라보고도 숨거나 사로 잡혔습니다. 두 장수가 성을 지키니 투구를 하사하고 유악(帷幄)에서 승부(勝負)를 결정하니 양책(良策)에 힘썼습니다. 순리를 따를 자를 물으며 역적의 모의를 고하고, 의리에 따라 분발한 사람이 손수 묶어서 도둑을 잡았습니다. 위란(危亂)에 임하여 적개(敵愾)한 것은 영남 고을의 신하들인데, 성적(成績)은 다를지라도 충성을 바침은 같았습니다. 요사한 기운이 깨끗이 없어지니 국운이 다시 창성하고, 남루(南樓)에서 헌부(獻俘)를 받으니 경복(慶福)이 그지없었습니다. 혁혁한 위령(威靈)이 굽어살펴 말없이 안정시켰으니, 도리어 나에게 무슨 힘쓴 것이 있었겠습니까? 충량(忠良)이 정성을 다하였으니 칭찬할 것은 독실한 것입니다. 공로를 갚는 데에는 구전(舊典)이 있으니, 나누어 봉(封)하고 땅을 내려 선(善)을 표창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은례(恩禮)가 이미 흡족하고 정지(情志)가 서로 합하니, 영구히 편파(偏陂)를 없애고 함께 국사의 논의를 힘쓸 것입니다. 구덕(舊德)이 후손에게 끼치는 것도 또한 모두 모아졌으니, 하늘에 질정하고 저 백수(白水)에 신의(信義)를 걸겠습니다. 충성과 효성이 쇠퇴하지 않을 것이니, 진실로 이 맹세를 바꾼다면 신명은 이에 경계하소서."
하였다. 【지제교(知製敎) 윤혜교(尹惠敎)가 지어 바쳤다.】  제사가 끝나고 환궁(還宮)하였다.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국란(國亂)이 이미 평정되었고 맹제(盟祭)도 거행하였으니, 어찌 모든 백성과 경사를 같이하는 방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금오(金吾)는 아직 처결하지 않은 자를 수일 안으로 곧 평결(評決)하고, 해방 승지(該房承旨)는 추조(秋曹)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서둘러 석방하고, 각도에 도배(徒配)한 가운데에서 백성을 침학(侵虐)한 자와 이번 군려(軍旅)에 관계된 자 이외는 4월에 사유(赦宥)한 뒤에 아직 석방되지 않은 자를 모두 석방하라고 금오와 추조에 분부하라."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역적을 토벌하고 경하(慶賀)를 아뢴 뒤에 이미 반사(頒赦)하였고 추조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한 지도 수순(數旬)이 채 못되었으니, 이번 하교는 함부로 하심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유(赦宥)를 삼가는 도리로서는 거듭 거행하여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번 하교는 곧 모든 백성과 경사를 같이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가벼운 죄수의 석방을 지난달에 거행하였더라도 그때 석방한 수효가 매우 적으므로 이 하교가 있었으나, 품계(稟啓)한 것이 마땅하니 추조의 가벼운 죄수만을 놓아 보내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환궁할 때에 보니 진전(陣前)의 군사가 비에 많이 젖어 있었다. 이 뒤로는 기우제(祈雨祭) 때 밖에는 전교(傳敎)를 기다리지 말고 비가 내리거든 군사들은 곧바로 우구(雨具)를 쓰라고 삼군문(三軍門)에 분부하라."
하였다.

 

7월 19일 무진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갔다.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 오명항(吳命恒)이 제공신(諸功臣)에게 내리는 교서(敎書)의 권축(卷軸)을 받들어 탑전(榻前)에 바치니, 임금이 퍼서 보고 나서 도로 내렸다. 부수찬(副修撰) 정우량(鄭羽良)이 동계(東階)에 서서 서향(西向)하여 교서를 읽었는데, 교서에 이르기를,
"흉얼(凶孼)이 제거되어 화란(禍亂)이 평정되었으므로 곧 큰 경사를 맞이하였고, 종사(宗社)가 안정되어 충로(忠勞)가 나타났으므로 모여 상법(常法)을 거행해야 하니, 안팎에서 주선한 것을 돌보아 드디어 18인의 위차(位次)를 정하였다. 근일의 변란을 말하면 참으로 전사(前史)에 없던 일이다. 흉악한 말로 터무니없이 속인 것은 대개 간사한 신하가 끼친 계책을 이어받은 것이고, 추악한 무리가 모인 것은 폐고(廢錮)된 족속의 사악한 마음을 몰래 부추긴 것이다. 통행하는 거리에 부도(不道)한 글을 걸고 은밀한 곳에서 군사를 연합하는 약속을 맺었다. 패란(悖亂)이 이러하고 배포(排布)한 것이 깊으니, 도하(都下)의 오랑캐가 몰래 숨어서 감히 내란을 꾀하고 호서·영남의 반역이 뒤따라 치열하여 문득 남방을 놀라게 하였다. 화기(禍機)가 호흡하는 사이에 다가와 국사(國事)가 철류(綴旒)542)  의 형세처럼 두려웠으나, 다행히 때때로 나는 유위(有爲)한 호걸이 임금이 분개하는 자를 정벌하는 노고를 다하였다. 원융(元戎)이 눈물을 흘리며 가기를 청하며 충담(忠膽)이 스스로 격동하고, 뭇 장수가 용맹을 부려 군진에 오르매 군세(軍勢)가 멀리 드날렸으며, 막중(幕中)에서는 두 종사관(從事官)이 협력하여 꾀하고, 행간(行間)에서는 교위(校尉)들이 힘을 다하였다. 대군(大軍)이 하늘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거의 설야(雪夜)에 달려가는 것과 같아서, 소추(小醜)가 위풍만 바라보고도 달아나고 이윽고 청주(淸晝)의 첩보(捷報)를 아뢰었으니, 신공(神功)을 가까이 도운 것은 시서(詩書)에 능한 극곡(郤穀)543)  처럼 위대하고 경위(警衛)를 더욱 엄하게 한 것은 사직(社稷)을 위한 서평(西平)544)  과 참으로 같았다. 남방의 구적(寇賊)이 섬멸된 것으로 말하면 또한 수령(守令)이 충성을 떨친 데에 말미암으니, 적진(賊陣)을 정탐하여 적의 음모를 격파하고 괴수의 목을 베고, 관군(官軍)을 멀리 두고 험한 데로 들어가 여얼(餘孽)을 잡았다. 혹 흉악한 자를 손수 묶어서 진장(鎭將)에게 바치기도 하고 혹은 급박한 정상을 직접 말하러 군문(軍門)에 나아가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다 충신(忠臣)·의사(義士)가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잊었기 때문에 난역(亂逆)한 자의 목과 요사한 자의 허리가 처참(處斬)된 것이다. 군사가 전쟁하지 않고도 요사한 기운이 아주 사라지고, 군사가 행군하지 않고도 군악(軍樂)을 울리면서 빨리 돌아왔다. 숙위(宿衛)하는 곳에서는 딱다기를 울리는 경보(警報)를 그치니 조야(朝野)가 안정되고, 반궁(泮宮)에서는 헌괵(獻馘)545)  의 의식을 거행하니 사녀(士女)가 둘러서서 보았다. 신기(神祇)가 굽어살펴 말없이 도운 것이라 할지라도 실로 싸우고 지키는 일에 인재를 얻은 데에서 힘입은 것이다. 난리가 일어난 처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서늘하고 머리털이 서나, 오히려 고굉(股肱)의 힘을 의지하여 다행히 번개 치고 천둥하는 듯한 맹렬한 형세를 얻어, 한수(漢水) 이남 대령(大嶺) 밖의 변방까지 다시는 교화가 막힐 염려가 없어졌으니, 황하(黃河)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닳도록 변하지 않을 재서(載書)546)  의 맹약을 어찌 늦추겠는가? 모토(茅土)547)  를 나누어 봉(封)을 열어서 경사를 같이하고, 운대(雲臺)548)  에 초상을 밝게 그려서 무궁(無窮)함을 분명히 보이며, 길일(吉日)을 잡아서 하늘에 고하고, 영단(靈壇)에 나아가 일을 행하니, 성대한 의식을 갖추어 거행하여 구법(舊法)을 준행하였다. 아! 군신(君臣)은 제회(際會)하기 어렵고 공업(功業)은 보수(保守)하기가 쉽지 않다. 비록 국난(國難)이 평정되었더라도 오히려 근심되는 기틀이 많으니, 특별한 은총을 받는다 하여 스스로 편안하지 말고 고락을 같이하는 의리를 더욱 힘쓰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지제교(知製敎) 조원명(趙遠命)이 지어 바쳤다.】  예(禮)가 끝나고서 특별히 명하여 선온(宣醞)하고, 선정전(宣政殿)에서 공신(功臣)들을 인견(引見)하여 위유(慰諭)하고, 어제 수서(御製手書)를 내렸는데, 이르기를,
"회맹례(會盟禮)를 지내고 권축(卷軸)의 반포를 이미 행하였으니, 훈척(勳戚)의 신하(臣下)는 나라의 폐부(肺腑)이다. 경(卿)들은 혹 본병(本兵)549)  의 장(長)으로서 강개(慷慨)하여 가기를 청하여 능히 큰 공(功)을 이루기도 하고 양국(兩局)550)  의 군사를 총령(摠領)하여 나가면 왕성(王城)을 호위(扈衛)하고 들어오면 유악(帷幄)에서 찬책(贊策)하기도 하였고, 혹 아장(亞將) 또는 마병(馬兵)·보병(步兵)의 영장(領將)으로서 몸을 떨쳐 선봉을 담당하여 산동(山東)의 공을 이루었고, 혹 막부(幕府)에서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왕사(王事)에 힘을 다하였고, 혹 편비(褊裨)로서 힘을 다한 것이 컸고, 혹 역적의 괴수를 잡아 바쳐서 국가가 힘입어 편안하게 하였고, 혹 순역(順逆)을 명쾌히 밝혀 밤을 새워 아뢰거나 자신이 영남 고을에서 앞장서 역적을 토벌하여 세상에 드문 공을 세웠으니, 세 등급의 이름이 있기는 하나 그 공은 마찬가지이다. 이번에 운대에 초상을 그리고 철권(鐵券)551)  을 반사(頒賜)한 것을 어찌 다만 구례(舊例)를 따른 것이라 하겠는가? 단서 철권(丹書鐵券)552)  이 영화로운 것은 사실이거니와, 그 근본을 요약하면 한결같은 정성에 있다. 임금과 신하가 늘 전일의 마음을 간직하여, 위에 있는 자는 훈신(勳臣)을 보안(保安)하여 피를 마시고 맹약한 때를 잊지 말고, 아래에 있는 자는 조심하고 삼가서 게으르고 편안한 것을 경계한다면, 나라에 있어서나 집에 있어서나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하고 나서야 국가가 길이 편안하여 만세에 공훈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정성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경들은 몸담고 경들은 몸받으라. 나도 마음에서 스스로 힘쓸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한 당(堂)에서 어수(魚水)553)  ·풍운(風雲)554)  을 얻어 간절한 마음이 대례(大禮)를 치르고도 오히려 잊혀지지 않아서 일개 성자(誠字)로 경들에게 권면(勸勉)하니, 훈각(勳閣)555)  에 간수하여 내 뜻을 잊지 말라. 또 경들은 혹 문관(文官) 또는 무관(武官) 또는 음관(蔭官)인데, 조사(朝士)에는 본디 세족(世族)인 자도 있고 한미한 집에서 일어난 자도 있으므로 처음에는 다를지라도, 인각(麟閣)556)  에 초상을 그린 뒤에는 정의(情誼)가 형제와 같고 의리가 벗과 같으니, 어찌 피차가 다르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 정성스럽다 하겠는가? 능히 이 정성을 지키면 태평을 바랄 수 있겠으나, 이 정성을 지키지 못하면 맹단(盟壇)이 저기에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니, 내 간절하고 정녕한 말을 몸받아야 한다."
하니, 공신들이 배사(拜謝)하였다. 임금이 이보혁(李普爀)만이 봉군(封君)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명하여 가자(加資)하고 봉군하게 하고, 또 명하여 회맹제(會盟祭) 때의 찬례(贊禮)인 좌참찬(左參贊) 김시환(金始煥)·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인복(李仁復)과 독서문관(讀誓文官)인 응교(應敎) 이광보(李匡輔)에게 모두 가자하고 여러 승지(承旨) 이하에게 차등을 주어 상주었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 【사간(司諫) 강필경(姜必慶)·헌납(獻納) 홍상인(洪尙寅)·정언(正言) 권일형(權一衡)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죄인 김덕유(金德裕)는 흉족(凶族)에서 아내를 얻고 비류(非類)와 혼인을 맺어 역적 한세홍(韓世弘)을 생질로 삼고 역적 조문보(趙文普)와 친밀히 사귀었으며, 한세능(韓世能)을 잡은 일로 말하면 스스로 변명하여 벗어나려고 꾀한 계책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을 가지고 지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가두고 엄히 국문(鞫問)하여 정상을 알아내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상전(賞典)은 임금이 세상을 격려하는 도구입니다. 문사랑(問事郞)으로 오래 봉사하면 가자(加資)하도록 명하는 것은 전례(前例)가 있기는 하나, 준직(準職)557)  을 지내지 않으면 벼슬을 높이지 않는 것도 구법(舊法)이니, 서종옥(徐宗玉)·조명교(曺命敎)에게 가자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상전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논한 것이 대체(大體)에 맞으니, 서종옥·조명교는 모두 준칙을 제수하라."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강필신(姜必愼)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에 남루(南樓)에서 헌괵(獻馘)을 받은 일을 누구인들 기뻐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때의 포장(捕將) 정찬술(鄭纘述)은 역수(逆竪) 강위징(姜渭徵)을 불러다가 천상(天象)을 물었는데 그 수작한 것이 이미 매우 음참(陰慘)하였고, 명을 받고 서방으로 내려갈 때에는 강위징·이현(李玹)·박계상(朴啓祥) 등 일종의 흉적(凶賊)을 특별히 계청(啓請)하여 군관(軍官)으로 데려가려 하였으니, 전후의 정적(情跡)이 모두 매우 망측합니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정찬술을 나문(拿問)하여 엄히 핵사(覈査)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지난번의 악역(惡逆)은 곧 예전에 없던 것이므로 의심한다는 것은 병통임을 면하지 못한다. 정찬술이 강위징에게 물은 것은 억지로 물은 것이 아니라 박계상의 말 때문이었으니, 어찌 이 때문에 그 정적을 의심하겠는가? 더구나 군관을 계청한 것은 그 허명(虛名)을 들었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데도 의심하니, 모르겠으나 반역 이전에 혹 서로 안 것도 다 의심스럽다고 한다면 완전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정찬술의 사람됨을 내가 이미 알거니와, 결코 조금도 거기에 비슷한 자가 아니니, 이는 정지(情志)가 통하지 않는 탓에 지나지 않는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맹제(盟祭) 때의 제집사(諸執事)에게 상을 내렸다.

 

7월 20일 기사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강독(講讀)이 끝나고서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묘당(廟堂)의 문서가 적체(積滯)되니, 참으로 민망스럽다. 내가 전(前)에 선조(宣祖) 때의 야사(野史)를 보니, 임진년558)   난리 이후 조정을 처음 열었을 때에 어느 날 정원(政院)에서 하인이 호창(呼唱)하는 소리가 대내(大內)에 들리므로 곧 명하여 불러들여 상주었다 하였다. 이제 국난(國亂) 뒤에 처음으로 강연(講筵)을 여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 오늘의 마음을 내가 늘 간직하여 잊지 않을 것이니, 경(卿)들도 척념(惕念)하여 칙려(飭勵)하여야 한다."
하였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홍상용(洪尙容)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과장(科場)이 엄하지 않은데 외방(外方)이 더욱 심합니다. 정유년559)   관서 도과(關西道科)의 서제(書題)는 유생(儒生)들 가운데에 미리 꾸민 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방(榜)을 뜯어 본 뒤에는 방에 든 사람들이 다 뜻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올해에 또 도과로 추택(推擇)한다는 기별을 듣고 유생 수백 인이 과제(科題)를 탐지하러 성안에 왕래하니, 청컨대 도신(道臣)을 시켜 과시(科試)에 임박하여 서울에 올라오는 사람들을 적발하여 충군(充軍)하여 과장을 엄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과장을 엄하게 하는 도리는 참으로 그렇겠으나, 외방의 유생이 서울에 올라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어떻게 어느 사람이 시제(試題)를 탐지하러 왔는지 알겠는가? 다만 서제를 엄히 비밀에 붙여야 할 뿐이다. 어찌하여 반드시 유생을 죄주어야 하겠는가? 따르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연풍 현감(延豐縣監) 김우채(金宇采)는 사람됨이 어리석고 어지러워서 전에 두 고을을 맡았으나 치적(治績)이 들리지 않습니다. 이 변란을 겪은 뒤를 당하여 호남 고을의 수령(守令)은 각별히 가려야 할 것이니, 청컨대 고쳐 차출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1일 경오

하교(下敎)하기를,
"친공신(親功臣)560)  의 적장(嫡長) 가운데에서 녹용(錄用)할 사람이 있으면 오늘 정사(政事) 때에 벼슬을 주라."
하였다.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를 진주 정사(陳奏正使)로, 서종옥(徐宗玉)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광보(李匡輔)를 승지(承旨)로, 엄경하(嚴慶遐)를 지평(持平)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정언(正言)으로, 박찬신(朴纘新)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삼았다.

 

간원(諫院) 【사간(司諫) 강필경(姜必慶)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관서(關西)의 유생(儒生)을 충군(充軍)하는 일을 만일 낱낱이 적발하려 하면 잡기 어려울 뿐더러 반드시 소요스런 근심을 빚어낸다 하여, 도신(道臣)을 시켜 각별히 더 신칙(申飭)하여 간사한 길을 막는 것으로 조사(措辭)를 고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필선(弼善) 윤광익(尹光益)·설서(說書) 정도은(鄭道殷) 등이 상소(上疏)하여 동궁(東宮)에게 강독(講讀)을 권면(勸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도타이 비답(批答)하였다.

 

7월 22일 신미

임금이 평안 병사(平安兵使) 박찬신(朴纘新)·평안도 별견 중신(平安道別遣重臣) 김동필(金東弼)을 인견(引見)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서명균(徐命均)이 명을 받고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서명균에게 말하기를,
"오늘 경(卿)이 써 들인 서제(書題)의 부의(副擬)·밀의(末擬)는 어떠한가?"
하니, 서명균이 말하기를,
"서제는 유의하지 않았으므로 갑자기 뽑아 내느라 살펴 선택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부의·말의도 수의(首擬)와 같습니다."
하였다. 김동필이 말하기를,
"소신(小臣)은 이미 서제를 받았으니, 청컨대 먼저 나가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사물(賜物)을 받고 물러갔다. 박찬신이 앞으로 나아가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관(西關)은 일이 중대하므로 마지못하여 경을 보낸다. 경을 쓸 데가 있으면 부르겠다."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강관(侍講官) 조적명(趙迪命)이 문의(文義)를 설명하고 나서, 이어서 말하기를,
"호조 참판(戶曹參判) 정석삼(鄭錫三)이 이판(吏判)을 논하여 배척하고 그 심술(心術)을 의심하였으니, 어찌 성세(盛世)의 좋은 일이겠습니까? 신들 두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겉으로 너그럽고 속으로 준열(峻烈)한 자라고 말하기까지 한 것은 조정의 반을 애매한 죄로 본 것이니, 사대부로서 말할 일이 아닐 듯합니다. 어찌 조정의 체통을 손상하고 사대부의 풍속을 손상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자는 두루 사귀되 편당을 만들지 않고 소인은 편당을 만들되 두루 사귀지 않는다’한 것은 바로 성인(聖人)의 말이다. 유신(儒臣)이 아뢴 바 조정의 체통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그 뜻을 모르겠다. 그렇다면 조정에 붕당이 있어도 시비하지 않아야 체통이 존엄하다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동경연(同經筵)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흥덕 현감(興德縣監) 민후기(閔厚基)는 부임한 뒤로 치적(治績)이 현저하고 군비(軍備)를 보완하였습니다. 지난번에 평교(平橋)의 적이 이미 모였다가 곧 흩어진 것은 그 대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낱 수령(守令)으로서 흉적(凶賊)이 두려워하는 바가 되었으니, 각별히 장려하여 써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참작하여 조용(調用)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변란 때에 조엄(趙儼)이 북한(北漢) 소속 군졸·승도(僧徒)와 함께 성에 올라가 한데에서 지냈으니, 다른 군문(軍門)의 예에 따라 호궤(犒饋)561)  하고 또 송도(松都)·수원(水原)에서 시재(試才)한 예에 따라 중신(重臣)을 보내어 시재하고 상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관(主管)하는 당상(堂上)과 별장(別將)이 함께 시재(試才)하라."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서종옥(敍宗玉)이 말하기를,
"《감란록(勘亂錄)》을 송인명이 겸양(謙讓)하고 만들지 않으니, 모름지기 재촉하시는 분부가 있어야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재신(宰臣) 한 사람이 일을 같이하면 상의하여 지을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사수(朴師洙)와 일을 같이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전에 서명연(徐命淵)이 멀리 돌아가서 부임한 것은 신도 감히 선처하였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마는, 하루 사이에 능히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으고 여러 고을에 보낸 관문(關文)의 말이 격절(激切)하여 인심을 감동시킨 것은 권첨(權詹)과 아주 다른데, 마침내 권첨과 같은 죄로 변방에 정배(定配)되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감등(減等)하여 가벼이 책벌하여 공과 죄가 서로 가리워지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전에 박사정(朴師正)이 상소하여 전조(銓曹)를 논하였다가 흥양(興陽)으로 출보(黜補)되었습니다. 직책이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이므로 주의(注擬)에 관한 일에 논급(論及)한 것은 삼사(三司)와 같지 않은데, 배척하여 악지(惡地)에 보임하였으므로 다들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낭관이 행공(行公)하기 전에 당상을 논하여 배척한 것을 어찌 조정의 체통이라 하겠는가? 내 생각도 오래 버려두려 하지 않는다."
하였다. 승지(承旨) 김집(金潗)이 말하기를,
"마름쇠[菱鐵]562)  를 진지에 벌여 놓는 것은 진지에 닥쳐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밧줄로 연결하면 뒤섞여 어지러워지기 쉬우니, 쇠로 사슬을 만들면 쓰기에 편리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역리(驛吏)·역노(驛奴)로 대오(隊伍)를 만들도록 신칙(申飭)하고서 기계를 갖추지 않을 수 없으니, 모곡(耗穀)을 적당히 갈라 주어 장만하게 하소서."
하니, 묘당(廟堂)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7월 23일 임신

임금이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문수(朴文秀)를 인견(引見)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유몽서(柳夢瑞)·권덕수(權德秀)는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에 있으므로 안동(安東) 사람들이 다 보러 가지 않고 황익재(黃翼再)·권만(權萬)은 이제까지도 대죄(待罪)하여 방황한다 하니, 의심스러우면 죽이고 의심스럽지 않으면 의심하지 않는 뜻을 시원히 보여야 하겠습니다. 연좌된 사람들을 다 연변(沿邊)에 두었는데 이것은 가장 염려스러우니, 점차 평민(平民)을 만들어 신실(信實)한 고을로 옮겨 두고 수령(守令)이 검찰(檢察)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대신에게 하문하여 처치하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다 좋으니, 내가 깊이 생각하여 처치하겠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상주(尙州)의 사대부들이 사승(寺僧)을 침학(侵虐)하므로 장차 이산(離散)할 조짐이 있습니다. 또 남한(南漢)의 승군(僧軍)은 실로 큰 폐단입니다. 52읍(邑)에 절수(折受)563)  한 곳이 있으므로 궁가(宮家)의 차인(差人)이 폐단을 짓는 것이 매우 큽니다. 영안위궁(永安尉宮)에서 절수한 것은 많기가 8천 76결(結)이나 되는데, 이제 4대(代)가 지났으니, 의당 국법에 따라 줄여야 하겠습니다. 돈녕부(敦寧府)의 어전(魚廛)은 폐단이 작지 않으니, 이러한 폐단을 곧 변통하면 곤궁한 백성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남행(南行)·무신(武臣)인 수령이 재상(宰相)에게 물건을 보내어 섬기는 것은 그 근본이 낮은 백성의 고혈(膏血)에서 나오니, 성궁(聖躬)부터 비롯하여 이끌어 칙려(飭勵)하시어 이 버릇을 아주 고쳐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다 좋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박필재(朴弼載).】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태원(李太元)을 멀리 귀양보내는 일은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회덕 현감(懷德縣監) 조정속(趙廷涑)은 역적의 관문(關文)을 전하여 보냈으니, 나문(拿問)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홍양 현감(洪陽縣監) 남위로(南渭老)는 젊고 생소하여 전혀 일을 경험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갈아 차출하소서.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을 벼슬을 올리고 봉군(封君)하라고 특별히 명하신 것은 이미 상례(常例)에 어긋난 것이고, 또 미리 기르고 아끼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가자(加資)를 도로 거두어 상전(賞典)을 중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심상관(沈尙觀)을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니, 임금이 무함당한 것이 분명하다 하여 따르지 않았다.

 

7월 24일 계유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가을철의 찬 비가 농사에 가장 해로우니, 청컨대 26일에 비롯하여 사흘 동안만 사문(四門)에 영제(禜祭)564)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폐고(廢錮)565)  된 족속으로서 연변(沿邊)에 두어진 자가 몇 사람인가? 내지(內地)에 옮겨 두고 빨리 상인(常人)을 만들면 후환이 없을 듯하다."
하매, 시독관(侍讀官)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국법에 역적의 아들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죽인다는 법이 있었으나, 이제는 폐지되었습니다. 이인좌(李麟佐)의 아들은 나이가 다섯 살인데 능히 검무(劍舞)하는 모양을 짓고 ‘내가 어찌 살겠는가?’ 합니다. 이런 무리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없지 않을 것이니, 옥에 가두어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이 한 번 흔들리면 뒷 폐단을 막기 어렵다. 옥에 가두어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말하면 왕법(王法)을 헤아려도 너무 심함을 면하지 못하여 국조(國朝)의 인후(仁厚)한 풍습이 무너질 것이다."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박필재(朴弼載)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내자 주부(內資主簿) 김정룡(金廷龍)은 비미(卑微)하고 피잔(疲殘)하며,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경천회(慶千會)는 정신이 흐리고 늙었으며 아첨하고 굽히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김가건(金可虔)은 행동 거지가 해괴하며, 전옥 주부(典獄主簿) 우성률(禹聲律)은 뇌물을 써서 벼슬을 얻었으니, 청컨대 모두 태거(汰去)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미 폄목이 아니다[旣非貶目]’라는 네 글자를 써서 태거하기를 청하니, 그 뜻을 모르겠다. ‘아첨하고 굽힌다[諂屈]’는 두 글자는 붕당을 가른 뒤의 말이니, 이런 논의는 듣고 싶지 않다. 뇌물을 써서 벼슬을 얻었다면 준 것이나 받은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미관(微官)일지라도 어찌 분명하지 않게 버려둘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인재를 가리라고 신칙(申飭)하는 때이므로 이 사람부터 먼저 칙려(飭勵)해야 하겠으니, 우성률을 나문(拿問)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검토관 서종옥(徐宗玉)이 인(仁)·의(義)의 체(體)·용(用)을 논하고 강건(剛健)한 덕(德)을 힘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건은 다 좋으나 편중할 것은 없다. 《대학(大學)》에 ‘오직 인인(仁人)이라야 방류(放流)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인을 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인복(李仁復)이 말하기를,
"아첨하여 웃는 인(仁)은 곧 옳은 인이 아닙니다. 만약 인의 본체를 확충하면 강(剛)이 곧 거기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갈양(諸葛亮)의 정치가 엄한 것을 숭상한 것은 때에 따라 가감하는 뜻이 있으므로, 제갈양이 중원(中原)을 다스렸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인데, 후세에는 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566)  를 배웠다고 공명(孔明)을 추의(追議)하는 자가 있으나, 이는 공명의 본의를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이후로 성(性)은 착하다는 설이 크게 밝혀졌으나 백세(百世)에 선치(善治)가 없는 것은 다만 알 뿐이고 능히 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문(孔門)의 70 제자는 성언(聖言)을 듣자 곧 깨달았는데, 이제는 성경(聖經)의 주해가 자세하여 의심나고 모를 곳이 없어도 깊이 몸받아 힘써 행하는 자가 없으니, 참으로 슬프다."
하매, 정우량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입을 열면 문득 주공(周公)·공자(孔子)를 말합니다마는, 행하지는 못하는데, 성교(聖敎)가 이에 미친 것은 신민의 복입니다. 바라건대, 늘 보고 익히 음미하여 한갓 헛된 말이 되고 말게 하지 마소서."
하였다.

 

7월 25일 갑술

임광필(林光弼)을 사간(司諫)으로, 서종옥(徐宗玉)을 헌납(獻納)으로, 조상명(趙尙命)을 지평(持平)으로, 임광(任珖)을 응교(應敎)로, 신치운(申致雲)을 수찬(修撰)으로, 조원명(趙遠命)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인조(仁祖) 때 맹제(盟祭) 뒤에 대군(大君)이 겨우 두 살이어서 명호(名號)가 없었는데, 위에서 명호를 정하여 내리시어 원종록권(原從錄券)에 넣었습니다. 전례는 이러하나, 왕세자(王世子)를 넣어야 할 것인지는 의거할 만한 글이 본디 없으니, 위에서 재처(裁處)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가 비록 지금의 경우와 같지는 않으나, 세자는 회맹록권(會盟錄券) 가운데에 실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회맹록권과 서문(誓文)에 ‘국왕(國王) 성모(姓某)’, ‘왕세자 신(臣) 모(某)’라 써야 할 것인데, 상고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문에 의당 어휘(御諱)를 써야 하는가?"
하니, 오명항이 말하기를,
"서문은 하늘에 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당 어휘를 써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에 의거하여 하되 안으로부터 마땅히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하교하겠다."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도감(都監)으로부터 직접 어휘를 쓰게 하는 것은 일로 보아 몹시 황공(惶恐)하니, 승지(承旨)가 대신 압날(押捺)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부시(宗簿寺)의 어첩(御帖)에도 사자관(寫字官)을 시켜 쓰는데, 충훈부(忠勳府)에서 써낸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이명의(李明誼)는 권서봉(權瑞鳳)과 지친(至親)이고 그 첩이 권서봉의 집에 살았으므로 서찰이 왕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친국(親鞫)할 때에 이명의는 말하기를, ‘권서봉과는 여러 해 동안 서로 통문(通問)하지 않았습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을 속인 것입니다. 예전에 선조(宣祖) 때 상신(相臣) 정언신(鄭彦信)이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끌어댄 말에 나왔으므로 정언신에게 정여립과 서로 교통하는지를 물었더니, 한 아들은 곧이 고하기를 권하고 한 아들은 숨겨야 한다고 권하였는데, 정언신이 마침내 숨겨야 한다는 말을 따랐습니다. 선조께서 정여립의 문서 가운데에서 ‘종로(宗老)’라고 써 있는 두 장의 서찰을 찾아내어 내려 보이고 엄히 국문(鞫問)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언신이 마침내 이 때문에 형신(刑訊)받고 귀양가 죽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을 섬김에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이명의 등에게 바라기는 어려우나, 그는 이미 시종(侍從)을 지낸 자이니, 더욱 절통(切痛)하다. 또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이명의가 변변치 못한 것을 눈으로 보았다. 목호룡(睦虎龍)의 일이 나왔을 때에 심한 자는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듯하였고 심하지 않은 자도 통쾌한 마음을 가졌는데, 내가 그때의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는 않았으나 사위(辭位)할 때를 당하여 울며 말하였더니, 그때의 영상(領相)은 사세(事勢)에 얽매이고 또 강단이 없었으나 감동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는데, 이명의는 내 말을 듣고 내 앞에서 발끈 낯빛이 변하였다. 더구나 밖에 있을 때이겠는가? 이명의는 이미 당론(黨論)에 심하였으니, 세도(世道)를 어지럽힌 것이 어찌 박필몽(朴弼夢)보다 덜하겠는가? 이명의가 만약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간다면 이는 법이 없는 나랏일 것이다."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지난번 변란을 당하여 비국 당상(備局堂上) 이태좌(李台佐)·서명균(徐命均)은 처음부터 끝까지 직숙(直宿)하며 기밀(機密)을 협찬(協贊)하였고, 낭청(郞廳) 신사언(申思彦)은 문서를 전담하였으며, 이희하(李喜夏)·신광덕(申光德)은 번갈아 입직(入直)하였고, 서리(書吏) 세 사람도 잇달아 직숙하며 노고를 다하였다 하니, 두 중신(重臣)은 혹 가자(加資)하고 신사언·이희하·신광덕은 승서(陞敍)하며, 서리 세 사람은 서제(書題)로 승전(承傳)567)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본디 전례가 없다. 중신에게 이 때문에 가자하는 것은 이미 예대(禮待)하는 도리가 아니다. 남한(南漢)과 수원(水原)에 출정(出征)한 재신(宰臣)에게 말[馬]을 면급(面給)568)  하였을 뿐이니, 이보다 더하지 않아야 할 듯하다. 이 또한 말을 면급하라.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수원 부사(水原府使) 송진명(宋眞明)은 변란이 일어난 처음에 임기(臨機)하여 조치한 공로가 적지 않으니, 특별히 상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부터 그 사람이 상명(詳明)한 줄아니, 전조(銓曹)에서 탁용(擢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안음(安陰)에서는 이미 역적의 괴수가 나왔으므로 혁파(革罷)해야 마땅하나, 따로 한 명호(名號)를 세워 혹 영장(營將)을 두어서 악을 제거하여 다스리는 곳으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안음은 악을 징계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는 안되니, 비록 오늘 혁파하였다가 내일 회복하더라도 결코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 영장을 옮겨 두는 것이 편리할지 여부를 내려간 뒤에 상세히 형편을 살펴서 장문(狀聞)하라."
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일전에 친공신(親功臣)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마는, 다만 친공신의 자손은 본디 법에 따라 벼슬을 주는 규례가 없으니, 이번 은명(恩命)은 필경 지나친 것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보사 공신(保社功臣)은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분부하시어 1, 2, 3등을 물론하고 적장(嫡長)·지자(支子)를 죄다 녹용(錄用)하였다. 그때는 공신의 수가 적었으나 이제는 공신의 수가 많아서 참작하려 하였으므로 그 적장만을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또 녹용하라 하고 벼슬을 주라 하지 않은 것은 벼슬자리가 나는 대로 쓸 만한 자를 쓰라는 뜻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강필신(姜必愼)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찬술(鄭纘述)에 관한 계청(啓請)에 대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난초(亂初)에 박계상(朴啓祥) 등 세 사람이 신(臣)의 진전(陣前)에 와서 보기에 신이 불러 보았더니, 이현(李玹)은 이력이 있으나 지난 겨울에 사진(仕進)하지 않았다 하고 강위징(姜渭徵)은 내력이 분명하지 않으므로 모두 군관(軍官)으로 기록하지 않았고, 박계상은 군관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남영(南營)·북영(北營)의 군사를 호궤(犒饋)할 때에 박계상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하괴성(河魁星)이 남영에 떨어졌으니 대장(大將)은 가지 말아야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남루(南樓)에서 헌부(獻俘)받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으므로, 정찬술은 중군(中軍)으로서 범연히 수작하였을 뿐이고 본디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본의를 몰라서 그런 듯하다."
하였다.

 

수찬(修撰) 김상석(金相奭)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김상석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최초에 잡아 지킨 것은 실로 임금을 높이는 대의(大義)이므로 바위 골짜기에서 말라서 아홉 번 죽더라도 회한(悔恨)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차마 죄다 버리지 못하여 반드시 사진(仕進)하게 하시려는 것은 본디 탕평(蕩平)하시려는 성의(盛意)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이제 그 시비를 바로잡지 않고 음양(陰陽)을 섞어 한 투(套)를 만들어 사정(邪正)이 어떠한지를 가리지 않고 시비가 어떠한지를 묻지 않는다면, 탕평이 어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사류(士類)의 의리가 펴지기 전에는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어찌 모르겠습니까? 우선 약간의 사람을 드문드문 천거하여 겉으로는 탕평하시려는 성지(聖旨)를 우러러 따르는 듯하나, 감히 사진하게 할 수 없다는 본의를 말하게 되면 또 처음부터 몰랐던 자인 듯이 말하기를, ‘나는 참으로 합심하여 같이 성취하려 하나 저들이 따르지 않는다.’ 합니다. 아! 또한 교묘합니다마는, 성명(聖明)이 바야흐로 총애하여 쓰시므로 간파하지 못하실 뿐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엄히 분부하여 그 벼슬을 파면하고 그 소(疏)를 도로 주게 하였다.

 

7월 26일 을해

간원(諫元) 【헌납(獻納) 서종옥(徐宗玉)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정룡(金廷龍) 등의 일은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수찬(修撰) 윤휘정(尹彙貞)은 전에 문경 현감(聞慶縣監)을 맡았는데 역란(逆亂)이 일어났을 때에 관아(官衙)에 있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 차출하여 보낸 무신(武臣)이 서울에서 달려갔더니 윤휘정은 오히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날 동안 지체하여 기다려서야 교대하였다 하니, 윤휘정이 처음에 관아를 떠난 것이 무슨 일 때문이며,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들은 뒤에도 곧 관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이것은 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전수찬 윤휘정을 나핵(拿覈)하여 처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27일 병자

하교(下敎)하기를,
"아! 내가 덕이 없기 때문에 4년 동안 홍수와 가뭄으로 기근(饑饉)이 잇달아 올해에는 예전에 없던 역란(逆亂)을 겪었으니, 슬픈 우리 백성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옛말에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반드시 큰 흉년이 있다.’ 하였는데, 다행히 두 해가 큰 흉년에 이르지는 않아서 농사는 오히려 바랄 수 있으나, 그래도 불안한 것은 가을철이 아직 멀어서 그 사이의 홍수·가뭄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가을 곡식이 거의 익어가는데 찬 비가 장마를 이룰 줄 알았겠는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에 천심(天心)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이 홍수·기뭄의 흉년을 가졌왔으니, 만약 칙려(飭勵)하는 일이 없으면 어떻게 하늘을 감동시키겠는가? 의당 내 몸부터 비롯해야 할 것이다. 두 동조(東朝)의 어공(御供) 이외의 공미(供米)는 각각 3분의 1을 줄이고 날이 개더라도 열흘 동안 공물(貢物) 가운데에서 진배(進拜)에 긴요하지 않은 것은 별단(別單)을 우선 줄이라는 뜻은 그저께 이미 하교한 것이 있었다. 주사(籌司)569)  의 당상(堂上)이 대신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내일 안으로 써서 들이게 하라. 양역(兩役)에 관하여 의논드리는 문서도 일찍 초록(抄錄)해내어 비당(備堂)570)  과 대신들을 시켜 차대(次對)571)   때에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이태좌(李台佐)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송진명(宋眞明)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김상성(金尙星)을 수찬(修撰)으로, 윤광익(尹光益)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남일명(南一明)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7월 29일 무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공물(貢物)에 관한 일로 말하면 또한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으나, 밖의 의논은 다 기인 공물(其人貢物)572)  의 일을 말하는데, 대내(大內)에 들어가는 것에는 지나친 것이 없지 않아도 견제되는 꼬투리가 있어서 줄이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이(災異)가 이러하므로 못 견디게 근심스럽고 두렵다. 내가 덕이 없는 탓이므로 반성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니, 찬선(饌膳)을 줄이라는 분부에 내 뜻을 대략 보였다. 공물 가운데에 대내에서 긴요하지 않은 것도 있는데 혹 공인(貢人)이 감당하기 어려운 꼬투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니, 진배(進排)하는 수를 벌여 써서 들이면 아주 줄일 것은 아주 줄이고 임시방편으로 줄일 것은 임시 방편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어공(御供)은 도총사(都摠使)·혜청(惠廳)573)  ·호조(戶曹)에서 초록(抄錄)해 내어 대신들과 상의한 뒤에 여쭐 것입니다. 또 어공 밖에도 궁물의 명목은 매우 많으나, 도민(都民)이 이것으로 의지하여 사는데 이제 죄다 폐지하면 생업을 잃을 것이 염려스러우니, 만약 전혀 쓸데없는 것은 그 공급을 줄여서 그 남는 것을 경비에 보태어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廟堂)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구관(句管)하여 호판(戶判)·혜당(惠堂)574)  과 그대로 둘 것과 줄일 것을 상의하고 대신과 의논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오명항이 말하기를,
"호조·혜청의 패선(敗船)된 수가 모두 4만 7천여 석(石)이고 이 밖에 군문(軍門)의 패선된 수도 많습니다. 9, 10월 이후 반급(頒給)할 녹봉(祿俸)이 떨어질 것이라 하니, 각도에 있는 곡물을 적당히 가져와서 눈앞의 급한 것을 구제하고 각도·각 군문의 남은 전화(錢貨)를 참작하여 가져와서 곡물을 사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일체의 낭비를 엄금해야 할 것이니, 먼저 내주방(內酒房)부터 폐지하는 것이 좋겠고, 내외의 영선(營繕)도 폐지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주방은 전후에 이미 두 병(甁)을 줄였으므로 이제 다시 줄일 것 없고, 긴요하지 않은 토목(土木)일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으므로 신칙(申飭)할 것 없다."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채팽윤(菜彭胤)을 승지(承旨)로, 한사선(韓師善)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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