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기묘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575) 을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오명항(吳命恒)이 말하기를,
"공안(貢案)에 관한 문서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시켜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셨습니다. 양역(良役)에 관한 수의(收議)는 따로 강구하여 결정한 뒤에야 거행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갑자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다시 조용히 의논하여 처리해야 하겠으나, 내가 밤낮으로 잊지 못하는 것은 양역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쇠나 돌도 통과할 수 있다. 그 까닭을 구명하는 것이 바로 내가 스스로 반성할 곳이다."
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 말하기를,
"변란 때에는 비국 당상 1원(員)이 번갈아 입직(入直)하였으나, 국청(鞫廳)을 파한 뒤에는 번갈아 입직하는 것도 멈추었습니다. 이제 격식을 정하여 2원이 동반해 입직하여 문서를 뽑아 보게 하면 전념하여 강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오명항은 말하기를,
"유사 당상(有司堂上) 1원과 다른 당상 1원이 번갈아 동반하여 입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합천(陜川)과 안음(安陰)에는 갇혀 있는 역당(逆黨)이 매우 많은데, 살리고 죽일 즈음에 잘못되기 쉬우니, 반드시 도내의 강명(剛明)한 수령(守令)과 상의하여 사핵(査覈)해야 잘못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박문수가 또 아뢰기를,
"군정(軍政)을 크게 변통하는 이때에 각 군문(軍門)의 유황군(硫黃軍)을 죄다 폐지하고서야 군역(軍役)을 충정(充定)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문명(趙文命)에게 하문하였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지금 유황을 캐는 곳은 본디 죄다 폐지하기 어려우나 나지 않은 곳은 폐지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황이 나는 곳 이외는 각 군문의 유황군을 모두 폐지하라."
하였다.
판결사(判決事)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금 조신(朝臣) 가운데에는 식견과 학문이 조현명(趙顯命)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그가 청요직(淸要職)을 힘껏 사양하는 것도 이미 너무 집요한데, 성상께서 끝내 굽혀 따르시는 것은 더욱이나 실정(失政)입니다. 전하의 성덕(聖德)이 인조 대왕(仁祖大王)과 누가 더하시며 조현명이 어질기가 문충공(文忠公) 신(臣)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과 누가 더하겠습니까마는, 장·최 두 상신(相臣)은 삼사(三司)의 장관이 되고 전병(銓柄)을 잡고 문형(文衡)을 잡았다가 마침내 대배(大拜)에 올랐으나 당시에는 깎아내리는 의논이 없었고 후세에서는 그 현명을 칭송하니, 이제 조현명이 장·최가 사양하지 않은 것을 사양하려 하고 전하께서 인조께서 윤허하시지 않은 것을 문득 윤허하신 것은 신이 국가를 위하여 이 일을 아깝게 여깁니다. 《감란록(勘亂錄)》을 찬수(纂修)하는 일은 송인명(宋寅明)이 당초에 이미 명을 받았고 송인명의 재주로 한 책자를 편술(編述)하는 것은 열흘쯤에 끝낼 만한 일일 뿐인데, 어찌 신을 써서 군더더기로 삼겠습니까? 찬수하는 일을 오로지 송인명에게 책임지우고 조현명은 그대로 논사(論思)의 직임에 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합계(合啓)한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한사선(韓師善)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궁관(宮官)576) 을 둔 것은 사체(事體)가 절로 다르고, 나인(內人) 등속은 궁액(宮掖)에서 부리는 무리에 지나지 않으므로 매우 미천한데, 접때 궁관이 강독(講讀)을 마치고 시강원으로 돌아갈 때에 한 궁인(宮人)이 말을 타고 가로질러 달려가므로 원례(院隷)가 꾸짖어 물리쳤으나 태연히 피하지 않고 보통으로 여겼습니다. 높낮이에 등급이 없어 보기에 놀라우니, 내사(內司)577) 를 시켜 적발하여 죄를 다스리고 이 뒤로는 궁속(宮屬)을 각별히 신칙(申飭)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사에 신칙하였다."
하였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서종옥(徐宗玉)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윤정(胤征)578) 을 강독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평세(平世)의 임금은 어질되 의리로 구제하고 난세(亂世)의 임금은 의롭되 인애로 구제합니다. 우리 나라는 규모가 매우 엄하여, 심온(沈溫)이 세종(世宗)의 국구(國舅)로서 종묘(宗廟)의 군사를 사사로이 부린 것을 극형으로 처치하였는데, 근래는 쇠퇴한 것이 남송(南宋)과 거의 같으니,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동지사(同知事)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임금을 인도하여 주살(誅殺)하도록 하려는 것은 아니나, 지금의 형세가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시비를 묻지 않고 오직 주살을 힘쓴다면 옳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옥석(玉石)이 함께 탄다는 것을 경계하고 뒤에 위엄이 그 사랑을 이기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8월 2일 경진
임금이 전라 병사(全羅兵使) 이익필(李益馝)·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온양 군수(溫陽郡守) 조국빈(趙國彬)·호서 어사(湖西御史) 김시형(金始炯)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이익필에게 말하기를,
"친공신(親功臣)579) 은 쉽사리 외방(外方)에 내보낼 수 없으나, 지금은 외방이 중요한 때이므로 어쩔 수 없이 내보내니, 모든 일에 유념해야 한다."
하매, 이익필이 말하기를,
"무비(武備)를 신칙(申飭)하여 정돈해서 위임하신 성의(聖意)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보혁이 말하기를,
"본읍(本邑)은 사노(寺奴)와 방군(防軍)이 가장 병폐이므로, 일전에 도신(道臣)이 천역(賤役)을 면한 사노를 모두 천역으로 되돌릴 뜻을 아뢰어 윤허받았고, 신이 천역을 면한 무리를 찾아낸 것도 60여 명이나 되니, 방군을 보충하기 어려운 폐단을 조금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조국빈은 말하기를,
"신이 부임한 뒤에 폐단이 있으면 도신과 상의하여 변통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이웃과 겨레붙이에게 침징(侵徵)하는 폐단을 신칙하였으니, 내려간 뒤에는 유의해서 하라."
하였다. 이보혁이 말하기를,
"감병영(監兵營) 소속과 경각사(京各司)의 긴요하지 않은 색목(色目)을 다 폐지하여 정군(正軍)에 채우고 이웃과 겨레붙이에게 침징하지 말라는 것은 국가의 지극한 뜻을 알 수 있으나, 구애되는 데가 있습니다. 그 밖에 연한이 차지 못한 무리는 충정(充定)하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겨레붙이에게서 거두어야 할 것이니, 새 영(令)이 내려지면 수령이 된 자는 죄를 범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그렇지 않다. 영문(營門)이나 여러 상사(上司)의 소속에 얽매이지 말고 잡색군(雜色軍)을 죄다 폐지하면 수령이 손쓸 길이 있을 것이다. 변통하는 처음에 이미 이처럼 어려워하니 참으로 바라는 바에 어그러진다. 여러 상사에서 혹 허락하지 않으면 수의(繡衣)가 절로 염문(廉問)하여 신보(申報)할 것이다. 봉행하지 못하면 친공신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보혁이 말하기를,
"당년(當年)에 탈하(頉下)580) 하는 법을 시작하면 간사한 백성으로서 도망하였다는 공문을 무릅써 내는 무리가 날로 점점 세차게 번져 도망하고 죽었다는 자가 어지러이 많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어 가기 어려운 방도이므로 결코 당년에 탈하하는 규례를 시작하지 말아야 할 것이나, 10년의 연한을 지키면 겨레붙이에게서 거두는 폐단을 마침내 또한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을 찬찬히 밝혀보면 이처럼 구애되는 데가 있으므로, 감히 명대로 따르겠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한에 얽매인다면 그만이겠으나, 연한이 지난 뒤에도 등록해야 할 자를 충정하지 못한다면 국가에서 변통하는 뜻에 어그러질 것이니, 그 책임이 어찌 수령에게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김시형이 말하기를,
"태인(泰仁)은 박필현(朴弼顯)이 반란한 곳이므로 신(臣)이 곧바로 달려갔더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동문산(同文山)에는 남은 도둑이 있다.’ 하기에 신이 곧 들어가 그 형세를 살폈는데, 산에는 일곱 절이 있고 촌락도 크며 사민(士民)이 피란하여 있는 자도 많아서 작은 도둑의 무리가 빼앗아 차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므로, 도둑이 있다는 말은 낭설인 듯합니다. 돌아와 호서(湖西)로 들어가 먼저 청주(淸州)에 가서 들으니 ‘당초 도둑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형세가 매우 미약하였으나, 도신이 손을 묶고 앉아 있으므로 수령이 겁내어 조치를 잘못하여 하루 이틀 뒤에는 도둑의 형세가 사납게 벌어졌다.’ 합니다. 도둑이 처음에 청주에서 일어났으나, 이인좌(李麟佐) 한 사람 밖에 그 나머지 불러모은 자는 다 경기(京畿)의 도둑인데 무기가 없으니, 반드시 병사(兵使)를 죽여야 군기를 빼앗을 수 있을 것이므로 반드시 죽이려 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장수를 죽이는 변란이 있게 되었습니다. 충주(忠州)의 도둑은 벌인 형세가 청주의 도둑과 같은 것은 아니었으나, 방비를 마땅하게 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한 것은 모두 김재로(金在魯)의 공입니다. 조령(鳥嶺)의 도둑은 조세추(曹世樞)가 우두머리이었는데, 김재로가 또한 예방을 잘하여 도둑의 무리가 많이 충주에서 적발되었고 난리를 겪은 뒤에 진무(鎭撫)를 마땅하게 하였으므로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합니다. 농사로 말하면 신이 올 때에 보니 전답의 각색 곡식이 모두 무성하여 백성이 다들 수십년 이래로 처음 보는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근일 연달아 비가 내렸으므로 손상이 많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란(兵亂)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있는 것이나, 올해에는 밀보리가 잘 여물었으므로 가을걷이에도 희망을 가졌는데, 이번 장마 뒤에는 이미 큰 흉년임을 판단하게 되었으니 더욱이 한스럽고 아깝다."
하였다.
헌부(憲府) 【집의(執義) 김시형(金始炯)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도둑이 문정(門庭)에 닥쳐 성을 함락시키고 장수를 죽였으면 임기 응변은 오로지 방백(方伯)에게 달려 있는 것인데, 이번 호서의 도둑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능히 즉시 징발하여 협력해서 토벌하였다면 어찌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게까지 되었겠습니까마는, 죄인 권첨(權詹)은 이미 벼슬이 갈렸다 하여 팔짱끼고 태연히 보기만 하여 흉악한 무리가 거의 대궐에 닥치게 하였습니다. 신이 좌우도(左右道)에 들렀을 때에 여러 군영(軍營)의 수령들이 모두 권첨에게 허물을 돌리고 한 도(道)에서 일제히 분노하는 것이 아직도 그치지 않습니다. 의논하여 처치하라는 분부는 정법(情法)을 참작하라는 뜻에서 나온 줄 물론 압니다마는, 머뭇거리며 관망한 죄는 한 때 혼미한 오류의 탓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죄인 권첨을 엄히 국문(鞫問)하여 정상을 알아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부(該府)를 시켜 다시 엄히 국문하라."
하였다.
헌납(獻納) 서종옥(徐宗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호서(湖西)의 군공(軍功)은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연명겸(延命謙)은 이정열(李廷說)의 무리인데 도리어 남의 공을 빼앗아 수공(首功)을 차지하였으며, 김두만(金斗萬)은 적지(賊地)에 나아갔다가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고향 사람들이 모두 그를 버렸고, 김우태(金遇兌)는 역적 권서봉(權瑞鳳)의 가족을 몰래 숨겼으므로 그 마음이 망측한데 여러 가지로 부탁하여 공부(功簿)에 무릅써 기록되었으니, 도신(道臣)을 시켜 낱낱이 사문(査問)하여 징계와 권장이 다 마땅하게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광흥(廣興)·군자(軍資) 두 창고의 이례(吏隷)가 해마다 묵고 썩은 쌀을 개색(改色)581) 한다는 핑계로 수백 석(石)을 제급(題給)받고는 새 세곡(稅穀)을 창고에 들일 때에 문서를 꾸며내어 창고에 들인 수를 거짓으로 늘리고서 개색한 것은 하나도 도로 내지 않는데, 관원도 살피지 않으므로 정해년582) 번고(反庫)583) 때에 축난 수가 3천여 석이나 되었으니, 해부(該府)를 시켜 축난 것이 심한 자는 중한 법으로 다스리게 하여 개색의 폐단을 엄히 금지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명릉(明陵)의 사초(莎草)를 고쳤다. 능 위의 주석(柱石)에 틈이 있고 사초도 조금 손상되었으므로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8월 3일 신사
하교(下敎)하기를,
"이번 능행(陵幸) 때에는 산성(山城)과 이천(利川)의 행궁(行宮)·객사(客舍)를 수리하되 단청하지 말고 후지(厚紙)를 쓰지 말 것을 해조(該曹)와 본도(本道)에 분부하라."
하였다.
김시형(金始炯)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허옥(許沃)을 장령(掌令)으로, 유운(柳運)·정익하(鄭益河)를 지평(持平)으로, 권혁(權爀)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춘제(李春躋)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경비가 없어서 영구히 떨어질 걱정이 조석에 닥쳤는데, 경신년584) 회맹제(會盟祭) 이후 상격(賞格)의 수를 상고하니 무명이 9동(同) 20필(匹)입니다. 선조(先朝)에서 상주는 것을 삼가해서 비용을 줄인 방도는 참으로 백세(百世)에서 본받아야 할 것인데, 이번 상격은 각사(各司)에서 전례를 상고하지 않고 함부로 써 들였으니, 전에 없던 명목은 일체 시행하지 말고 10동에 한하여 마련해서 나누어 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8월 4일 임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585) 를 행하였다.
8월 5일 계미
하교(下敎)하기를,
"여러 관사(官司)의 구임(久任)586) 하는 낭청(郞廳) 가운데에서 미포(米布)를 맡은 아문(衙門)과 그 밖의 긴요한 관사에 있는 낭청은 수거(修擧)할 일이 있으면 상참(常參) 때에 입시(入侍)하여 아뢰되 또한 그 관사의 당상(堂上)을 시켜 맡아 돌보아서 아뢰게 하라. 구임한 뒤에는 보람을 이루도록 신칙(申飭)해야 하니, 여러 관사의 구임하는 낭청은 번번이 계삭(季朔)587) 에 그 근만(勤慢)을 당상이 조정에 아뢰되 그 가운데에서 한가한 관사는 번번이 봄·가을로 조정에 아뢰도록 정식(定式)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8월 6일 갑신
정우량(鄭羽良)을 정언(正言)으로, 강필경(姜必慶)을 보덕(輔德)으로, 서종급(徐宗伋)을 부응교(副應敎)로, 이현모(李顯謨)를 부교리(副校理)로, 이봉익(李鳳翼)·이중협(李重協)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7일 을유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영남 별견 어사(嶺南別遣御史) 이종성(李宗城)의 장계(狀啓)로 말미암아 안동 부사(安東府使) 윤양래(尹陽來)를 파직(罷職)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안동은 영남의 수읍(首邑)으로서 한 해 동안에 네 번 수령(守令)을 바꾸었으니, 어찌 지탱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윤양래는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 치효(治效)가 이미 나타났고 장계에 따라 파직하게 된 일도 작은 일에 관계되는 것이니, 특별히 명하여 파직하지 말고 그대로 맡겨 보람을 이루도록 책망하소서. 또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형좌(李衡佐)가 이천 부사(伊川府使) 백수일(白守一)을 파직하기를 계청(啓請)한 것을 보면, 훈국(訓局)588) 에서 본관(本官)을 시켜 둔세(屯稅)를 거두어 들이게 하였는데 백수일이 잉포(剩布)를 더 받은 것이 많아서 12동(同)이나 되고 그 밖의 잡종(雜種)도 매우 많고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이때에 도리어 군관(軍官)을 새로 두고 가전(價錢)을 받아 사사로이 썼다 하였습니다. 파출(罷黜)만 하고 말 수 없으니, 해부(該府)를 시켜 나처(拿處)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장차 영릉(寧陵)589) 에 전알(展謁)하려 하였는데, 신하들이 여러 번 간쟁(諫諍)하니 그만두고 내년 2월에 다시 품정(稟定)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장차 능에 전알하려 하였는데 능은 여주(驪州)에 있어 서울에 떨어진 것이 2일정(日程)이나 되므로,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큰 변란이 겨우 평정되고 백성이 홍수에 손상되었으니, 군민을 노동시켜 먼 능에 거둥하실 수 없겠습니다."
하고, 옥당(玉堂) 임광(任珖) 등도 간쟁하였으나, 다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 등이 대신·삼사(三司)와 함께 명을 도로 거두기를 힘껏 청하기를,
"올해에는 결코 먼 외방(外方)으로 거둥하실 때가 아닙니다. 서울을 떠나 예니레 계시면 민심이 반드시 흔들릴 것이고 홍수 끝에 길을 닦느라 농사를 손상하고 곡물을 해칠 것이니, 생업을 잃은 백성을 또 다시 이렇게 하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들의 간절한 정성을 내가 어찌 모르랴마는, 심정대로 지레 행하는 일이라면 다투어도 괜찮겠으나, 정리(情理)가 당연한 일을 반드시 다투려 하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감사(監司)가 봄·가을로 봉심(奉審)하는 행차 때에 가교(駕轎)가 지나는 것도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선조(先朝)에서 장차 영릉에 거둥하시려 할 때에 느껴 꿈꾸신 일이 있거니와, 나도 꿈속에서 떠날 때를 임하여 준비하였으니, 올해 안에 전알하지 못한다면 정리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큰 변란을 겪은 뒤에는 안정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또 천재(天災)·시변(時變)이 이처럼 매우 참혹할 때에는 바로 두렵게 여겨 덕을 닦고 허물을 살펴야 할 것이니, 먼 외방으로 거둥하실 수 없겠습니다. 임금의 효도는 한 때의 전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니, 대개 종사(宗社)와 만 백성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동정 하나하나에 반드시 만전의 방도를 살펴야 하는데, 이제 끝내 천청(天聽)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한다면 정청(庭請)590)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애써 따르고 내년 2월로 물려 정하라고 명하였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정익하(鄭益河)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접때 역변(逆變)은 일조일석의 까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그 연유를 밝히면 참으로 칠적(七賊)이 연명(聯名)한 상소에서 비롯합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철적의 흉악하고 도리에 어그러진 뱃속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여 지극히 악한 대죄(大罪)가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역적 박필몽(朴弼夢)은 이미 처형하였고 흉악한 이명의(李明誼)는 바야흐로 엄히 국문(鞫問)하라 명하였으나, 이진유(李眞儒) 등 삼적(三賊)에 이르러서는 이제까지도 누워서 편안하게 쉬고 있으니, 여정(輿情)의 울분이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이진유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종주(宗主)이고 역적 박필몽의 사우(死友)인데, 귀양살이하는 중이기는 하나 기염이 아직도 세차므로, 나라를 위하여 근심되는 것이 김일경·박필몽보다 훨씬 더하니, 배소(配所)로 돌려보낸 죄인 이진유와 서종하(徐宗廈)는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고 죄인 윤성시(尹聖時)는 빨리 처형하소서. 이명언(李明彦)은 천성이 음흉하고 사나우며 마음 쓰는 것이 흉악합니다. 신축년591) 이후로 역적 김일경과 주무(綢繆)하게 체결하여 음모 흉계(陰謀凶計)에 익히 참섭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역적 김일경의 갑진년592) 상소에 이명언과 거취를 같이 한다는 말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이번 국옥(鞫獄) 때에 그 아들 이하택(李夏宅)의 이름이 먼저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오고 이어서 이명언의 이름이 여러 번 긴요하게 나왔으며, 조세추(曹世樞)의 공초 가운데에 있는 호복(胡服)으로 거사(擧事)한다는 말은 결코 갑자기 지어낸 말이 아니니, 이사성(李思晟)의 흉도(凶圖)는 이명언이 부추기어 만든 것입니다. 나국(拿鞫)하여 엄히 밝히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묻지 말라는 명이 법외에 내려졌으니, 여정의 울분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이하택의 일은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간섭이 없다면 어떻게 뒷날에 잡혀올 것을 알고 미리 봉서를 써서 옷에 꿰매 두어 스스로 변명할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멀리 귀양보낸 죄인 이명언은 국청을 시켜 곧 나래하여 엄히 핵문(覈問)하여 정상을 알아내어서 흔쾌히 왕법(王法)을 바루소서. 권익관(權益寬)은 본래 역적 김일경의 지친(至親)이고 역적 박필현(朴弼顯)의 매서(妹婿)로서 음흉한 마음을 감추고 원한을 깊이 품은 지 본디 오래 되었거니와, 북로(北路)를 안찰(按察)하게 되어서는 박창제(朴昌悌)를 심복으로 삼고 흉악한 황부(黃溥)를 조아(爪牙)로 삼았습니다. 박창제가 점마(點馬)한 것은 그가 서명하여 이첩(移牒)한 일인데 처음에는 전례에 따른 것이라 하고 안무사(安撫使)의 상소가 나온 뒤에는 병들어서 혼미하여 잊었다 하였고, 황부가 배[船]를 만든 것은 그가 지휘한 일인데 처음에는 거론하지 않다가 안무사가 장문(狀聞)한 뒤에는 ‘신(臣)이 참여하여 들었습니다.’라고만 말하였습니다. 더욱이 통탄스러운 것은 박창제가 만든 전진(戰陣)의 도구는 모두 비상한 물건이고 영고(營庫)에서 나온 포목(布木)·미장(米醬) 따위 물건이 허다한데, 이것이 어찌 중군(中軍)이 마음대로 가져다 쓸 것이겠습니까? 그의 공초 가운데에 있는 주장(主將)에게 치보(馳報)하였다는 말을 보더라도 그것은 권익관이 지시한 것임을 참으로 숨길 수 없습니다. 더구나 말을 역적 남태징(南泰徵)에게 돌려보냈다는 것은 실로 제외(題外)의 말인데 까닭없이 소(疏) 가운데에 허튼 말을 하였으니, 이것은 그 뜻이 박창제가 만든 전구(戰具)를 먼저 고한 일과 일반입니다. 율문(律文)에 따라 처단하기를 곧바로 청해야 본디 마땅하겠으나, 국문(鞫問)하는 체례(體例)로서는 한 번 구명하지 않을 수 없으니, 권익관은 국청을 시켜 곧 나핵(拿覈)하여 정상을 알아내어 국법을 바루소서.
박창제의 음비(陰祕)한 정적(情跡)은 곧 신문해야 할 것입니다마는, 접때 대소(臺疏)에 대한 비지(批旨) 가운데에 있는 ‘어찌 안무사가 한때 전해 들은 것으로 지레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분부 때문에 이 역적이 아직 보통 죄수 가운데에 있게 되었습니다. 중신(重臣)이 친히 보고 친히 들은 것을 한때 전해 들은 것이라 하여 믿을 만하지 못하다면, 당초에 국가에서 특별히 가려서 차출하여 보낸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코 줄곧 평문(平問)하여 그가 저항하는 대로 맡겨 둘 수 없으니, 금부(禁府)에 현재 갇혀 있는 죄인 박창제는 국청으로 옮겨 보내어 안무사의 최후의 상소에 조목조목 벌여 적은 것으로 문목(問目)을 내어 각별히 엄하게 신문하여 왕법을 바루소서. 대론(大論)을 경솔히 멈출 수 없는 것은 대간(臺諫)의 체례가 그러합니다. 접때 소하(疏下) 오적(五賊)에 관한 계청(啓請)은 실로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고 의리를 밝히려는 뜻에서 나왔는데, 그때의 대신(臺臣)이 뜻대로 붕당을 감싸고 마음대로 멈추었으니, 그때 정계(停啓)한 대신을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역적 조상(趙鏛)·조관규(趙觀奎) 등은 동당(同堂)인 지친(至親)이며 여주(驪州) 읍촌(邑村)에 뿌리박고 사는데 남에게 지목받는 무리이니, 민암(閔黯)의 형제 자손의 전례에 따라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이명언의 일과 정계한 대신의 일과 끝의 세 가지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박필재(朴弼載)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우리 나라 붕당의 화(禍)는 1백여 년의 고질이 되었는데, 전하께서 슬퍼하여 구완할 방법을 생각하시고 지난해 가을 초기에 탕평(蕩平)을 제목으로 삼으셨으니,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 대개 알 수 있습니다마는 그 처분에 점진(漸進)이 없고 견벌(譴罰)이 너무 지나쳐서 황극(皇極)593) 의 도리에 어그러지는 데가 있습니다. 전후 1주년 동안에 한편 사람이 명령을 받들어 한 조정에서 일을 같이한 자 중에 과연 마땅한 사람이 있습니까? 전하께서 피차(彼此)를 고루 다스리시는 방도는 맵고 쓴 것을 조화하고 은혜와 원수를 다 잊어 어려움을 함께 구제하는 것이겠습니다마는 신축년594) ·임인년595) 이후로 다른 의리가 있어 각각 굳게 지켜서 깰 수 없이 굳으므로 조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뜻을 통하여 일을 의논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득 시속(時俗)의 바뀌지 않는 법이 되었습니다. 제수하는 명을 반드시 면하려 하면 사직하는 소(疏) 가운데에 시사(時事)를 대략 제기하는데, 작으면 한없이 헐뜯고 크면 버젓이 욕하므로, 귀양가는 자가 연달아 그치지 않으니, 한편에 장차 온전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능히 하나의 정성을 다하여 신의로 구제하되 순연(純然)히 성신(誠信)에서 나오고 조금도 용서하는 빛이 없으시다면, 저 신하들도 어찌 생각을 고치고 따라서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오직 ‘탕평(蕩平)’ 두 자로 일세(一世)를 농락하는 밑거리로 삼아서 한갓 언어 문자의 말단으로써 화합시키고 해소시키는 방도로 삼는다면,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바가 절실하니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8월 9일 정해
밤 오경(五更)에 흑운(黑雲) 한 가닥이 서쪽에서 일어나 곧 동쪽에 이르렀다. 길이가 10여 장(丈)이고 너비가 1척(尺)쯤 되는데 한참 지나서 없어졌다.
우의정(右議政) 오명항(吳命恒)이 상차(上箚)하기를,
"신(臣)이 지난해에 이진유(李眞儒)의 일을 망령되게 아뢰어 육지로 나오게 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역적 박필몽(朴弼夢)이 처형된 뒤로 신이 인책하였는데, 대개 신은 이진유와 교분이 자못 두터워서 그 본정(本情)을 명백히 알기 때문에 전후에 아뢰어 밝힌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요즈음 대관(臺官)이 아뢰어 죄주기를 청하는 것이 논계(論啓)를 멈춘 두 신하에게까지 미쳤는데, 그 소(疏)의 어떠한 어구(語句)가 교문(敎文)과 흉격(凶檄)의 근원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이 건의하여 육지로 나오게 하기를 청한 것은 그 죄가 실로 논계를 멈춘 양사(兩司)보다 더하니, 신의 벼슬을 삭탈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말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체는 옳으므로 윤허한 것이다. 대신(大臣)이 하는 일은 대신(臺臣)과 차이가 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혐의삼아야 하겠는가?"
하였다.
8월 10일 무자
지평(持平) 정익하(鄭益河)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역적 이사성(李思晟)이 잡혀왔을 때에 대신이 그에게 딴 마음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종군(從軍)시키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이진유(李眞儒)에 대하여 또 명백히 안다고 허여하니, 이진유의 본정을 모르는 것이 역적 이사성에게 딴 마음이 없었다는 것에 비하여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역적의 격문(檄文) 가운데에 있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모두 흉소(凶疏)와 교문(敎文) 가운데에 나왔는데도 이제 그 차자(箚子)에는 ‘어떠한 어구가 교문과 흉소의 근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알기 쉬운 일도 오히려 모른다 하고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만은 그 본정을 명백히 안다 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대신의 차어(箚語)는 혐의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 다른 뜻이 없으니, 이제 네 소어(疏語)에 넌지시 몹시 헐뜯은 듯한 데가 있는 것은 그 사체(事體)에 있어서 매우 미안한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講讀)하다가 대순(大舜)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진덕수(眞德秀)가 이른바 섬기기 어려운 어버지를 섬긴다는 것은 옳지 않은 부모가 없다는 말과 뜻이 매우 다르거니와, 아들에게 어찌 섬기기 어려운 어버이가 있겠는가?"
하매, 참찬관(參贊官)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순에게 섬기기 어려운 어버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순이 능히 이에 대하여 신처하였으므로, 나종언(羅從彦)이 이런 말을 하였는데, 요옹(了翁)596) 이 듣고 칭찬하였다. 이른바 섬기기 어렵다는 것은 아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어버이 중에 어찌 섬기기 어려운 자가 있겠는가?"
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의 생일에 주악(奏樂)하지 않고 명황(明皇)597) 이 천추절(千秋節)이라 이름 붙인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데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무릇 가례(嘉禮)의 육례(六禮) 때에 죽 진열해 놓고 연주는 않는데, 이것은 사흘 동안 주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혹은 말하기를, ‘지금은 위로 동조(東朝)598) 를 모셨으므로 탄일(誕日)의 진하(陳賀) 때에 주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나, 이것은 또한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가례 때에 이미 주악하지 않았으면 어찌 탄일에만 행하겠는가? 이 뒤로는 탄일을 축하할 때에 진열해 놓고 연주하지 않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예조 정랑(禮曹正郞) 이지성(李知聖) 등이 상소하여, 이름이 국안(鞫案)에 오른 영남(嶺南) 사람을 나국(拿鞫)하는 일을 빨리 윤허해 옥석(玉石)이 절로 구별되게 하여 일도(一道)를 애매한 죄과에 버려두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내가 추문(推問)하지 말게 한 자는 절로 죄를 씻어 준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 영남 사람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많이 나왔는데, 임금이 진안(鎭安)하는 방도로 모두 버려두고 묻지 않았다. 이지성 등은 영남 사람인데, 그 일도의 사람이 다 애매한 가운데에 있는 것을 답답히 여겨 상소하여 변명하였다.
8월 11일 기축
박사익(朴師益)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현모(李顯謨)를 정언(正言)으로, 조진세(趙鎭世)를 문학(文學)으로, 성덕윤(成德潤)을 부응교(副應敎)로, 신치근(申致謹)을 수찬(修撰)으로, 권혁(權爀)을 교리(校理)로, 윤광익(尹光益)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8월 12일 경인
밤 2경(二更)에 달이 토성(土星)을 가렸다.
8월 13일 신묘
밤 2경부터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둘렀다.
안중필(安重弼)을 승지(承旨)로, 조상명(趙尙命)·이선행(李善行)을 지평(持平)으로, 강필신(姜必愼)을 필선(弼善)으로, 조명교(曺命敎)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오명항(吳命恒)이 정익하(鄭益河)의 소(疏) 때문에 강외(江外)로 나갔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진유(李眞儒)는 당습(黨習)에 병들었으나 장처(長處)도 절로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임금을 향한 적심(赤心)이 지난 겨울 연주(筵奏)에서 환히 나타났고, 또 만정(萬鼎)을 잡아 바치고 소하(疏下)라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한 데에서도 그 일단(一端)을 증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디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인데 오히려 적명(賊名)을 입고, 만정을 잡아 바친 일을 스스로 변명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니, 그것이 공론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상(僚相)이 육지로 나오게 하기를 청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역적 이사성(李思晟)의 일은 요상이 이미 스스로 깊이 인책하였고 성명(聖明)도 이미 용서하셨는데, 소 가운데에 모아 실어 주의(主意)와 말을 만든 것이 매우 심각합니다. 대저 요상이 충성스런 생각과 침착한 성질로 정성을 다하여 나라에 몸바치므로 전하께서 뽑아 쓰시고 조야에서 의지하는 바이며, 충분(忠憤)이 격렬하여 전쟁에 나아가기를 청하여 요기(妖氣)를 신속히 쓸어 없애고 나라의 형세를 태산(泰山)처럼 안정한 데에 두었는데, 이제 스스로 인책한 한 마디 말 때문에 무함당하는 것이 그지없으니, 성상께서 명백히 살피시지 않고 조정의 신하들이 먼 나라 사람이 여위는 것을 보듯이 여겨서 그가 황교(荒郊)에 물러간 대로 버려둔다면, 천하에 급한 일이 있을 때에 다시 누구를 시켜 감당하게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진유의 일은 처음에는 당습(黨習)에 감심(甘心)하는 것을 매우 놀랍게 여겼으나 특별히 차율(次律)을 명한 것은 그 사이에 의심스러운 것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만정의 일은 지엽(枝葉)에 지나지 않는 일인데 대신(臺臣)은 도리어 이것을 의심하니, 이는 뜻이 서로 막힌 탓이다. 이번에 그 계청(啓請)을 윤허한 것은 이진유 등이 참으로 이 율(律)에 해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계청은 우선 따를 만한기 때문이다. 그 말을 고치면 무슨 안될 것이 있으랴마는 곧바로 정계(停啓)하여 마치 환국(換局) 뒤에 구계(舊啓)를 모두 멈추는 것과 같이 한 것은 정당한 도리가 아니고, 이렇게 하더라도 박필몽(朴弼夢)이 없다면 모르겠으나, 한 역적이 소하(疏下) 중에서 다시 나왔으니, 정계한 대신은 평소에 가까이하던 자일지라도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즈음 정익하가 상소하여 논한 것은 과연 옳거니와 율명(律名)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니, 어찌 윤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하의 벌명(罰名)이 혹 지나치더라도 이미 정계한 사람을 죄주기를 청하였으면 그 형세가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알맞은 것은 윤허하고 지나친 것은 따르지 않았다. 대신(大臣)은 나라의 고굉(股肱)이므로 생각하는 것을 다 아뢰어 임금이 죄 없는 한 사람도 죽이게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직책이고, 대신(臺臣)은 법을 지켜 쟁론(爭論)하는 것이 또한 직책이니, 그 직분이 다르다. 기능이 현저히 다른데, 대신(大臣)에게 어찌 조금이라도 불안한 꼬투리가 있겠는가? 정익하의 소 가운데 있는 역적 이사성을 논한 말에는 과연 몹시 헐뜯는 뜻이 있으나, 이것은 뜻이 서로 막혔기 때문이다. 우규(右揆)599) 의 나라에 몸바치는 정성과 너그러운 도량으로 일소에 붙이고 차사(箚辭)에 상세히 아뢰고 말 것인데, 어찌하여 서둘러 성을 나가야 하겠는가? 이것이 내가 우규를 매우 개탄하는 까닭이다."
하였다.
8월 14일 임진
하교(下敎)하기를,
"이사주(李思周)가 이미 혐의를 깨끗이 벗은 뒤인데, 지친(至親)의 일 때문에 해조(該曹)에서 살펴서 주의(注擬)하지 않는다면, 어찌 장전(帳殿)에서 친히 장사(將士)에게 하유(下諭)한 뜻에 맞겠는가? 얽매이지 말고 등용하라고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8월 15일 계사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추국 문안(推鞫文案)이 미처 수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때의 주서(注書)가 대궐 안의 공해(公廨)에 일제히 모여 빨리 수정하고 1원(員)이 번갈아 당직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동조 진연(東朝進宴)을 내년 가을로 물리려 하였으나, 세월을 아끼는 정성이 매우 서운할 뿐더러, 더구나 나라의 변란이 겨우 평정되었으니, 어찌 위로하여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반드시 대신(大臣)과 상의하여 모레 다시 여쭈어야 한다."
하였다.
승지(承旨) 이중협(李重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삼가 보건대, 전하의 어공 의대(御供衣襨)·내입 주포(內入紬布)·어선 봉진(御膳封進)을 다 절감한 것은 대우(大禹)가 나쁜 옷을 입고 나쁜 음식을 먹은 덕과 같은데, 여염 사이에서는 사치가 날로 심하여 습속(習俗)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위형(威刑)으로 금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단 사라(綾緞紗羅)는 본디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 해마다 사행(使行) 때에 상방(尙方)600) 의 어공(御供)에 들이는 것과 영문(營門)의 기치(旗幟)에 드는 것과 각사(各司)의 별구청(別求請)을 무역하는 이외에, 혹 금령(禁令)을 범하면 잠상률(潛商律)로 벌주어, 한편으로는 온 나라 안이 사치하는 풍습을 고치고 한편으로는 사상(私商)을 데려가는 간사한 짓을 막고 한편으로는 탁지(度支)601) 의 경비를 보태게 하면,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이득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네 말은 옳으나, 임금의 곤복(袞服)과 신하의 장복(章服)이 다 이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이니, 일체 금하는 법을 시행하기 어렵다."
하였다.
지평(持平)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진유(李眞儒)의 언론이 너무 각박하고 위복(威福)을 제 뜻대로 하였으니, 이 때문에 죄를 정한 것을 그 누가 옳지 않다 하겠습니까마는, 신축년602) 의 상소한 것과 교문(敎文)으로 말하면 조리가 각각 다릅니다. 저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처형된 것은 실로 교문 중의 부도한 말 때문이고, 역적 박필몽(朴弼夢)이 순리를 범한 것은 올봄의 변란 뒤에 나타났으니, 어찌 전의 상소에 같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아울러 죽이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예사로운 비답을 내렸다.
집의(執義) 이춘제(李春躋)가 아뢰기를,
"신(臣)은 이진유(李眞儒) 등을 새로 논계(論啓)할 때에 다른 의견이 있었습니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처형된 것은 교문(敎文) 때문이고 그 상소 때문이 아니므로, 이에 앞서 일률(一律)603) 을 청한 것은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역적 박필몽(朴弼夢)이 반역한 뒤에 모두 잡아왔으나, 이진유·서종하(徐宗廈)는 끝내 한 번도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오지 않았으므로 전에 정배(定配)한 곳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윤성시(尹聖時)는 역적의 공초에 거론된 것이 있기는 하나, 성명(聖明)이 그 허황함을 살피시어 참작하여 정배하였습니다. 아! 사람을 알면 밝거니와, 제요(帝堯)도 어려워하였는데, 어찌 한때 김일경의 상소에 연명하여 참여하였다 하여 악역(惡逆)으로 같이 돌려 곧바로 아울러 죽이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이러한 줄 알면서 구차하게 연계(連啓)할 수 없으니,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8월 16일 갑오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원명(趙遠命)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왕씨(王氏)의 능침(陵寢)은 특별히 수호하나, 왕씨에는 조금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없으니, 재주 있는 자가 있으면 또한 계문(啓聞)하라."
하였다. 조원명이 말하기를,
"지금 성상께서 백성을 염려하여 공채(公債)의 이식을 10분의 2로 하는 법을 없애셨으나, 송도(松都)의 형세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백성의 뜻이 다 10분의 2를 시행하는 것을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이미 10분의 1로 정하였는데 송도에서만 10분의 2를 시행하면, 조정의 명령이 성신(誠信)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이정걸(李廷傑)을 승지(承旨)로, 조석명(趙錫命)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강필경(姜必慶)을 사간(司諫)으로, 임수적(任守迪)을 헌납(獻納)으로, 이성효(李性孝)를 사서(司書)로, 서종옥(徐宗玉)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상성(金尙星)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남일명(南一明)을 응교(應敎)로, 정석오(鄭錫五)를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8월 17일 을미
하교(下敎)하기를,
"진연(進宴)하는 일을 동조(東朝)에 아뢰었더니, ‘지극한 정성이 이러하니 따르겠으나 잔치에 드는 것을 절약해야 한다’고 분부하셨다. 본디 정한 날에 거행하되 되도록 절약한다면 세월을 아끼는 마음과 뜻을 기르는 도리가 모두 마땅할 수 있을 것이니, 이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18일 병신
진연(進宴) 때의 사화봉(絲花鳳)을 없애고 지화(紙花)로 갈음하고 한과(漢果)에는 칠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자교(慈敎)에 따른 것이다.
해은 부원군(海恩府院君) 오명항(吳命恒)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역적 이사성(李思晟)을 잡으러 보낼 때 신이 명을 받고 금오랑(金吾郞)604) 과 선전관(宣傳官)을 가려서 보냈는데, 그때에 구간(具侃)·조명재(趙命宰)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선전관이 먼저 표신(標信)을 가지고 빨리 달려 들어가면 이사성이 병부(兵符)를 빼앗고 군사를 징발할 줄 모를 것이고, 황급히 병부를 맞추어 볼 즈음에 이어서 급히 외치기를, 「새 병사(兵使)가 도임하였다.」 하면 군영(軍營) 안의 모두가 진동할 것이다. 금오랑이 곧 그 뒤에 달려가서 잡으면, 역모(逆謀)가 있었더라도 결코 감히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하고, 또 이사주(李思周)에게는 완력이 있는 심복 군관(軍官) 두 사람을 따로 가려서 가게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뒤에 구간의 말을 들으니, 역적 이사성이 과연 다리를 떨며 포박을 받았다 합니다. 신이 역적 이사성이 딴 마음이 없는 줄 명백히 알았다면 갑작스러울 즈음에 어찌하여 이것을 염려하여 구간에게 비밀히 부탁하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이진유(李眞儒)의 일로 말하면, 신이 차자(箚子)에 이른바 그 본정(本情)을 명백히 안다는 것은 역절(逆節)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또 그 상소 가운데의 어떤 말이 교문(敎文)과 흉격(凶檄)의 근원인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제 헌신(憲臣)이 이진유의 어떤 일이 역적이 되고 상소 가운데의 어느 말이 교문과 흉격의 근원이 된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고 한 번 바뀌고 두 번 바뀌어 맥락이 관통한다……’ 하였습니다. 그 상소에 과연 한 자 한 구라도 말이 부도(不道)에 관계되는 것이 있다면, 어찌하여 뽑아내어 명백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 이른바 이처럼 알기 쉬운 일을 오히려 모른다 한다는 것은 끝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경(卿)의 충성은 내가 이미 통촉하였고 나라 사람이 다 일컫는데, 어찌하여 이미 통촉한 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였다.
8월 19일 정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상주고 벌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어떻게 일세(一世)를 용동(聳動)시키겠습니까? 근래 관방(官方)이 혼란하여 사람들이 관작(官爵)을 영예로 여기지 않고, 모든 관원이 게을러서 경중(京中)에서 봉직(奉職)하는 자가 싫어하는 뜻이 없지 않아서 편한 것을 취하여 외방(外方)으로 나가 고식(姑息)하고 미봉(彌縫)하기만을 바랍니다. 이 때문에 위에 있는 자가 권장하고 징계하는 권세를 잃었으니, 이러하여도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사욕이 많기 때문이다. 근래 벼슬이 2품에 이르면 두루 지내지 않는 것이 없는데, 육부(六部)의 인재는 각각 마땅한 것이 있으므로 전형(銓衡)605) 에는 마땅하나 사구(司寇)606) 에는 마땅하지 않은 자가 있고 춘경(春卿)607) 에는 마땅하나 하관(下官)608) 에는 마땅하지 않은 자가 있다. 그러므로 순(舜)임금 때의 열두 사람에게는 각각 분장(分掌)이 있고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다. 이것이 예전에 정치가 융성하였던 까닭인데, 지금은 다들 한 벼슬에 오래 있으려 하지 않으니, 참으로 슬프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예전에 선조(宣祖) 때 정여립(鄭汝立)이 처형되었는데, 이경중(李敬中)이 전랑(銓郞)이었을 때에 정여립을 의망(擬望)하기를 망설였으므로 특별히 포증(褒贈)하였습니다. 이경중도 어찌 정여립이 반역할는지 알았겠습니까마는, 국가에서 권장하는 방도가 이러하였습니다. 접때 을사년609) 에 여러 신하가 역적 김일경(金一鏡)에 연좌되어 죄를 받았는데, 상소하여 역적 김일경을 논한 김동필(金東弼)이 섞여서 벌을 받았고, 정미년610) 에 삼사(三司)가 죄받은 것은 역적 박필몽(朴弼夢)을 논죄(論罪)하였기 때문인데, 이제 와서 역적 박필몽의 역변(逆變)을 겪은 뒤에도 그대로 죄적(罪籍)에 두었으니, 모두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은 옳으나, 내가 어찌 역적 박필몽을 논죄하였다 하여 죄주었겠는가? 그때 연중(筵中)에서 실로 속이고 우롱한 일이 있으므로 내가 매우 통탄하였으니, 아직 거두어 서용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다."
하였다. 종일 청대(請對)하다가 삼사 이외의 전후에 죄받아 파직된 사람을 별단(別單)으로 써 들였는데, 대개 정미년에 삼사가 파출(罷黜)되었기 때문이다. 소하(疏下) 육적(六賊)을 처형하기를 아울러 논하였으나, 임금이 다만 차율(次律)로 처치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이 힘껏 다투니, 임금이 차율도 도로 거두려 하므로, 신하들이 일제히 소리내어 말하기를,
"차율은 실형(失刑)이 되기는 하나 오히려 도로 거두는 것보다 나으니, 차율로 하라는 명을 다시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삼사가 농락하고 우롱한다 하면서 모두 파출하였으므로 드디어 국면(局面)이 뒤집혔었다. 이때에 이르러 송인명이 아뢴 것을 듣고 이 분부가 있었다.
하교(下敎)하기를,
"번임(藩任)611) 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데 인부(印符)를 어찌 마음대로 줄 수 있으랴마는, 이제 함경 도사(咸鏡都事) 이사덕(李師德)의 장계(狀啓)를 보면 전 감사(監司) 권익관(權益寬)은 인부를 마음대로 도사에게 주었다. 감사의 정세가 그러하였더라도 지레 먼저 한 짓임을 면할 수 없고 도사가 받은 것도 온당하지 못한 일이니, 권익관을 나문(拿問)하여 처치하고 도사는 인부를 새 감사에게 전해 주기를 기다려 나문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이중협(李重協)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 신축년612) 이후로 모든 신민이 경종(景宗)의 고금에 으뜸가는 성대한 덕을 우러르고 전하께서 밝은 덕을 이어 펴신 큰 공렬(功烈)을 칭송하여 사랑하고 추대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자가 없는데, 오직 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흉언(凶言)·역모(逆謀)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도(倡道)하고 응답하여 하늘에 사무치는 변을 이루었으니, 오직 저 김일경·박필몽과 상소를 같이한 자는 그 창자가 아울러 일관하고 손발이 서로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역란(逆亂) 뒤에는 더욱이 눈을 밝게 뜨고 용맹을 떨치며 분한 마음이 뼈에 사무쳐서 반드시 토벌하고 말아야 하는 것이 신하의 의리인데, 지금 구제하려 해명하는 말은 너무 너그럽고 여러 갈래입니다. 《역경(易經)》에 ‘중심(中心)에 의혹이 있는 자는 그 말이 갈라진다.’ 하였거니와, 이것은 의혹하고 희미하여 갈라진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이른바 편당(偏黨)을 절단하지 못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신의 한 마디 외로운 말이 오늘날의 정신(廷臣)에게 요긴한 경계가 되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도로 내어주라고 명하였다.
성덕윤(成德潤)을 집의(執義)로, 김진상(金鎭商)을 보덕(輔德)으로, 여필용(呂必容)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조명교(曺命敎)를 교리(校理)로, 한현모(韓顯謨)를 수찬(修撰)으로, 정우량(鄭羽良)을 개성부 시재 어사(開城府試才御史)로 삼았다.
8월 20일 무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송진명(宋眞明)이 사폐(辭陛)613) 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힘써 다스려서 돌보는 뜻에 부응하라고 권면하였다. 송진명이 말하기를,
"듣건대, 북관(北關)의 수재(水災)는 전에 없던 것이어서 물에 가까운 밭은 거의 깎아 버린 듯하고 들에는 푸른 빛이 없어 보이는 것이 슬픈데 궁벽한 곳에 달리 옮기어 보낼 방도가 없다 합니다. 듣건대, 양남(兩南)은 농사가 조금 낫다고 하니, 영남(嶺南)의 북쪽에 가까운 연해(沿海) 고을에서 약간 곡식을 옮기게 하여 진구(賑救)할 때 모자라는 것을 보태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의 사세도 염려스럽다. 백 번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니, 부임한 뒤에 상세히 살펴서 계문(啓聞)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송진명이 말하기를,
"북평사(北評事)를 둔 것은 대개 뜻이 있습니다. 일찍이 숙종(肅宗) 때에는 혹 과만(瓜滿)614) 하여도 갈리지 않은 자가 있고 주년(周年)이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온 자도 있는데, 이것은 신이 보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북평사는 번번이 명관(名官)을 차출하여 보내지만 잠시 갔다가 곧바로 돌아와서 실효가 없으니, 이 뒤로는 과만하기는 쉽지 않더라도 예닐곱 달 동안 재임하면서 개시(開市)615) 를 살피고 이어서 봄 동안의 진정(賑政)도 살펴서 열읍(列邑)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것이 있게 하면 반드시 그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평사는 과만한다 하더라도 서울에 있을 때가 많으니, 어찌 보람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각별히 신칙(申飭)하여 반주년(半周年) 동안 재임하라는 뜻을 분부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8월 21일 기해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예기(禮記)》를 강독(講讀)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명교(曺命敎)가 말하기를,
"홍범편(洪範篇)616) 에 있는 위엄을 짓고 복을 짓는다는 등의 말에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르는 의리를 알 수 있습니다. 위복(威福)을 어찌 아래에 있는 자가 감히 마음대로 할 바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큰 의리가 거꾸로 놓인 곳은 이미 말할 것도 없으나,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른다는 말은 진 시황(秦始皇)의 일이니, 본디 본받을 만하지 못한다. 역적 조조(曹操)의 내가 주 문왕(周文王)이 된다고 한 것은 동경(東京)617) 의 청의(淸議)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붕당으로 말하면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쓰고 자기에게 뜻을 달리하는 자는 쓰지 않으니, 어찌 위복을 짓는 일이 아니겠는가? 예전에는 덕이 성대하면 벼슬을 성대히 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붕당이 성대하면 벼슬을 성대히 주며, 일률(一律)을 청하고 귀양보내자고 아뢰는 것은 보통으로 남에게 가하나 탐관 오리(貪官汚吏)는 논핵(論劾)할 겨를이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신치근(申致謹)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이진유(李眞儒)를 논하여 위복을 짓는다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그럴 듯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진유는 치우친 논의가 강퍅하기 때문이다. 우규(右揆)618) 로 말하면 그 심사를 알기 때문에 그 말이 그러하였고, 정익하(鄭益河)는 뜻이 서로 막혔으므로 그 말이 그러하였으니, 이러한 곳에 비교할 것이 있다. 사대부가 당론 때문에 서로 살육(殺戮)을 더한 집은 이미 말할 것도 없으나, 그 밖에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어찌 줄곧 전과 같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 사문(斯文)의 일로 말썽을 일으켰다가 한번 신칙(申飭)한 뒤로 근래에는 아직 이러한 유소(儒疏)가 없으나, 대저 신축년619) ·임인년620) 이후에 더욱 서로 체결한 곳이 있다. 이제는 피차를 물론하고 그 ‘역(逆)’이라는 한 자를 버리면 탕평(蕩平)의 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8월 23일 신축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독(講讀)이 끝나자, 검토관(檢討官) 신치근(申致謹)이 아뢰기를,
"신(臣)은 북평사(北評事)의 직임에 있으므로 북로(北路)의 사정을 대략 압니다. 육진(六鎭)은 극변(極邊)이고 요충지(要衝地)이므로, 전에는 무변(武弁)이 반드시 육진의 수령(守令)을 지낸 뒤에야 곤수(閫帥)621) 에 의망(擬望)622) 되었으며 혹 곤수의 직임을 지내고 육진의 수령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뒤로는 자격과 명망이 매우 높은 사람을 가려서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로는 무변은 반드시 삼수(三水)·갑산(甲山)과 육진의 수령을 지낸 뒤에야 곤수에 의망하라고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김호(金浩)를 집의(執義)로, 유엄(柳儼)을 문학(文學)으로, 김진상(金鎭商)을 부응교(副應敎)로, 박사정(朴師正)을 수찬(修撰)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허옥(許沃)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본부(本府)에서 전 평안 병사(平安兵使) 정찬술(鄭纘述)을 나핵(拿覈)할 것을 논계(論啓)한 바가 있는데, 어제 비지(批旨)에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분부하셨으나, 신은 옳지 않게 여깁니다. 역란(逆亂)이 처음 평정되고 왕사(王師)가 개선(凱旋)하였을 때에 무릇 혈기(血氣)가 있는 자라면 누구인들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정찬술은 역수(逆竪) 강위징(姜渭徵)과 천상(天象)이 어떻다는 따위 말을 상대하여 수작하였고, 명을 받아 서방으로 내려갈 때에는 강위징·이현(李玹)·박계상(朴啓祥) 등 세 역적을 군관(軍官)으로 데려갔습니다. 전후의 정적(情跡)이 다 매우 수상하니, 나핵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 무장 현감(茂長縣監) 김몽좌(金夢佐)는 변란 때에 태인(泰仁)에 가서 박필현(朴弼顯)과 면밀하게 모의하고 본읍(本邑)에 돌아와 그날로 군사를 모았고, 역적 박필몽(朴弼夢)과 같이 앉아서 아병 장관(牙兵將官) 김상채(金尙采)라는 자를 불러들여 아병 1초(哨)를 거느리고 박필몽을 호위하여 전주(全州)로 가게 하였더니, 김상채가 굳게 거절하고 따르지 않으므로, 김몽좌가 마지못하여 대오(隊伍)를 지은 이노(吏奴) 30명에게 각각 검(劍)과 장(杖)을 들게 하고 또 고마청(雇馬廳)의 말 14필을 내어 준비하여 보냈는데, 역적 박필몽 부자가 길에서 역적 박필현의 패보(敗報)를 듣고 달아나 죽도(竹島)에 숨었다가 관인(官人)에게 추포(追捕)되니, 김몽좌가 듣고서 낯빛이 흙빛처럼 되어 마지못하여 가두었습니다. 이것은 경내의 모든 백성이 똑같이 전하는 말일 뿐더러 김상채의 공사(供辭)에도 매우 상세하니, 김몽좌를 국청(鞫廳)에서 먼저 잡아와 엄히 신문하게 하여 쾌히 왕법(王法)을 바루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본부의 신계(新啓)가 발의되었을 때에 대관(臺官)들의 소견이 혹 같지 않다면 혹 멈출 수도 있고 그대로 계속할 수도 있을 것인데 무엇이 두렵고 어려운 바이겠습니까마는, 전 집의(執義) 이춘제(李春躋)는 여러 날 동안 인퇴(引退)하였다가 마침내 굳이 피혐(避嫌)하였고, 전 지평(持平) 유운(柳運)은 이미 출사(出仕)한 뒤에 까닭 없이 명소(命召)623) 를 어겼으며, 지평 조상명(趙尙命)은 바삐 상소하여 책임을 면하려는 듯하였으니, 모두 경계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모두 파직(罷職)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이명언(李明彦)·박창제(朴昌悌)의 일과 끝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김몽좌는 금오(金吾)를 시켜 먼저 엄히 핵실(覈實)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조석명(趙錫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역적을 다스리는 법이 아직도 쾌히 바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 무장 현감(茂長縣監) 김몽좌(金夢佐)는 역적 박필몽(朴弼夢)이 올라올 때에 군사를 징발하여 중도에서 호송하였으므로 마지막에 잡아 바쳤다 하여 너그러이 용서할 수 없으니, 나국(拿鞫)하여 법을 바루어야 하겠습니다. 죄인 정사효(鄭思孝)는 죄준 것이 귀양보내는 데에 그쳤으나, 역적 박필현이 진(陣)을 머물러 두고 글을 보냈다는 말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명백히 나왔고, 그 조카 정도형(鄭道亨)이 역적의 공초에 긴요하게 나왔는데 형장(刑杖)을 맞다가 지레 죽었습니다. 형적(刑跡)을 엄폐하기 어려우니, 나치(拿致)하여 엄히 국문(鞫問)하소서. 옥사(獄事)를 국문하는 일은 늦출 수 없는데 삼공(三公)이 유고하여 집무를 폐기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곧 돈면(敦勉)하여 빨리 결말내게 해야 하겠습니다. 전 목천 현감(木川縣監) 정유일(鄭惟一)은 벼슬살이 사흘 동안에 관미(官米) 50석(石)을 쓰고는 쇄가(刷價)라 칭하고 민간에서 1백 20냥의 돈을 억지로 받아들였으니,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해야 하겠습니다. 정익하(鄭益河)의 세 번째 계청(啓請)이 나왔을 때에 헌관(憲官)이 규피(規避)를 일삼았습니다. 그 말이 옳다면 연계(連啓)해야 할 것이고, 그 말이 그르다면 정계(停啓)해야 할 것인데, 혹 피혐(避嫌)하거나 상소하여 반드시 갈리기를 바랐습니다. 구차하고 물러터진 버릇이 놀라우니, 조상명(趙尙命)·이춘제(李春躋)는 삭직(削職)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두 가지 일은 이미 처분하였다. 정유일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정사효의 일은 이미 참작하여 처치하였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다시 물어야 하겠는가? 집무하도록 돈면하는 일은 네 말이 옳다."
하였다.
8월 26일 갑진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인(仁)·명(明)·무(武) 셋 중에서 인과 명은 극진하여 더할 데 없으나 무로 말하면 혹 모자라신 듯합니다. 지금 국문(鞫問)하는 일로 말하면 지나치게 삼가고 돌보아 반드시 살리는 의논에 붙이시니, 이러한 곳은 무덕(武德)이 모자라서 그러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承旨)의 말이 옳으나, 근래 대계(臺啓) 중에서 아직 처분하지 않고 남은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임금의 말은 사시(四時)가 제때에 돌아오듯이 미더워야 하는데 어찌 지레 처치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도 한 해를 넘기면 쟁집(爭執)한 일이 있거니와, 종래의 일로 말하면 많은 논계(論啓)가 모두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박필몽(朴弼夢)이 반드시 소하(疏下) 중에서 나올 줄 알았다면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이 있다 하겠으나, 또한 어찌 반드시 알았겠는가? 그리고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도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것과 다른데, 부사(副使) 이하가 이미 귀양갔으니, 대신을 어찌 반드시 아울러 귀양보내야 하겠는가? 소하인 사람을 정계(停啓)한 대관(臺官)을 파직한 뒤로 규피(規避)하는 형적이 뚜렷하니, 이러하고도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관원이 태만한 가운데에서도 대각(臺閣)이 더욱 심하여 논계를 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대저 대각은 임금의 이목(耳目)이므로 일을 당하면 피하지 않는 것이 본디 대각의 직책이니, 날마다 대청(臺廳)에 나아가 다툴 만한 것은 다투고 멈출 만한 것은 멈추면 무엇이 안될 것이기에 무릇 일의 꼬투리가 있으면 으레 규피하니,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는가? 대사헌(大司憲) 심공(沈珙)으로 말하면 송도(松都)에서 도헌(都憲)624) 으로 이배(移拜)하였는데 처음에는 나와서 숙배(肅拜)하지 않고 이어서 또 갈아 주기를 청하였으니, 당초에 무엇하러 이 벼슬을 맡았으며 국가의 체모에 있어서도 장차 무엇이라 하겠는가? 두 번이나 정원(政院)에서 도로 내어 주었는데, 받아들인 승지(承旨)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정릉(靖陵)625) 에 거둥할 때 시위(侍衛)할 군사의 절목(節目)을 바야흐로 마련하는데, 정해년626) 의 등록(謄錄)을 상고하니, 금군(禁軍)과 훈국(訓局)·금영(禁營)의 마군(馬軍) 등은 기일 하루 전에 먼저 강을 건너게 하고 회란(回鑾) 때에는 대가(大駕)가 주정소(晝停所)627) 에 이른 뒤에 또한 먼저 건너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군·보군(步軍) 등이 한꺼번에 건널 즈음에 혼잡하고 지체되는 폐단을 염려한 데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전후상(前後廂)의 마군이 하루 전에 모두 먼저 강을 건너는 것은 군행(軍行)을 엄하게 하는 도리에서는 소홀합니다. 이번에는 후상의 군사는 여느 때와 같이 시위하고, 출궁(出宮)·환궁(還宮) 때에 먼저 달려가는 금군(禁軍)과 마군은 초엄(初嚴)628) 전각(前刻)에 입계(入啓)하고 곧 내보내어 강을 건너 진을 치게 하였다가 대가가 건넌 뒤에 상례(常例)대로 시위하고, 전 상보군(前廂步軍)은 정해년의 전례에 따라 어선(御船)의 행선포(行船砲)를 기다리지 말고 차례로 먼저 건너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하니, 이대로 마련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8월 28일 병오
김동필(金東弼)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윤순(尹淳)을 판윤(判尹)으로, 오명신(吳命新)을 승지(承旨)로, 조정순(趙正純)을 지평(持平)으로, 임광필(林光弼)을 보덕(輔德)으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조적명(趙迪命)이 말하기를,
"비록 극(極)629) 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혹 허물에 걸리지 않거든 임금이 반드시 포용해 받아들여 복을 주는 데 이른다면, 사람들이 어찌 극이 있는 데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편론(偏論)으로 말하면 임금이 극을 행하지 않는 탓에 달려 있으니, 어찌 오로지 신하를 책망하겠는가?"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당론(黨論)의 폐단은 거의 1백 년이나 되었으니 어찌 갑자기 크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세월을 두고 힘쓰면 혹 줄어드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탕평(蕩平)하시면, 신하로서 어찌 감동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일에는 감동하더라도 당에만은 본디 감동하는 마음이 없다. 무편 무당(無偏無黨)을 위에 있는 사람 때문에 말하는 것인가, 아래에 있는 사람 때문에 말하는 것인가? 접때 왕도 탕탕(王道蕩蕩)으로 글제를 냈더니, 무편 무당으로 오로지 위에 있는 사람이 이끄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었다."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국가에서 형벌을 쓰는 데에는 알맞은 것이 중요한데, 접때 김재로(金在魯)가 처분이 이미 정해진 뒤에 상소하였으므로 책벌(責罰)을 시행하였으나, 충주(忠州)의 일로 말하면 공로가 적지 않고 또 책벌도 이미 행하였으니, 먼저 그의 문외 출송(門外黜送)을 풀어 주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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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실록19권, 영조 4년 1728년 9월 (7) | 2025.08.25 |
|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1728년 7월 (5) | 2025.08.25 |
|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1728년 6월 (3) | 2025.08.25 |
| 영조실록18권, 영조 4년 1728년 5월 (4) | 2025.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