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무인
임금이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원명(趙遠命)을 인견(引見)하였다. 조원명이 말하기를,
"대흥 산성(大興山城)은 지세가 아주 험하고 다섯 문이 있을 뿐이므로 약간의 군사를 벌여 세우면 나는 새라도 넘어가지 못합니다. 본영(本營)의 군사는 7천 7백여 명이고 중군(中軍)이 거느려 지키며 성안은 물이 깊어서 마르지 않고 땔나무를 댈 방도도 넉넉합니다. 병진년670) 에 체부(體府)를 폐지한 뒤에 이 성을 설치하고 군향(軍餉)은 성밖의 여섯 고을에서 제방미(除防米)를 받아 두는데 여러 고을 백성이 돌길[石路]로 날라 들이기를 꺼려서 탈보(頉報)하였으므로 도신(道臣)이 비국(備局)에 신보(申報)하여 본읍(本邑)에서 받아 두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지(城地)에 군사만 있고 양식이 없으면 당초 설치한 뜻이 헛된 곳으로 돌아갈 것이니, 올 가을부터 비롯하여 여러 고을에 있는 환곡(還穀)은 반드시 성안에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향을 본읍에 받아 두는 것은 참으로 깊은 폐단이니, 신칙(申飭)하여 산창(山倉)으로 나르게 하라."
하였다.
10월 2일 기묘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장령(掌令) 홍상용(洪尙容)의 소(疏)를 보건대, 당고(黨錮)의 폐단을 크게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장황입니다. 혹 악역(惡逆)을 구호한다고도 하고, 한갓 붕당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할 마음을 품는다고도 하며 끝에는 매우 징계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그 나열한 것이 모두 신하의 지극한 죄이니, 신은 매우 놀랍고 두려워 못견디겠습니다. 신이 감히 떠들어 쟁변(爭辨)할 수 없으나, 그 죄를 논한다면 신이 실로 우두머리가 될 것이니, 유사(有司)를 시켜 쾌히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홍상용에 대한 비지(批旨) 가운데에 옳다고 한 것이 어찌 경(卿)을 가리켜 말한 뜻이겠는가? 대저 조정의 기상이 탕평할 기약이 없으므로 서글프다. 다만 그 말은 한층 격렬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경에게 무슨 조금이라도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병태(李秉泰)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송인명(宋寅明)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이유(李瑜)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3일 경진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경석(李慶錫)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청주(淸州)의 부자 김두만(金斗萬)은 도둑이 성안에 들어왔을 때에 몰래 목사(牧使)의 인신(印信)을 훔쳐 이인좌(李麟佐)의 진(陣)에 들어가 붙었고, 산동면(山東面)의 사대부를 먼저 베어 죽일 꾀와 청천창(靑川倉)에 군사를 보내어 먼저 공격할 계책도 다 김두만이 시킨 것이니, 그 죄상을 논하면 아주 통분합니다. 역적 이인좌가 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인신을 반납하였는데, 마침 그때에 본주(本州)의 출신(出身) 윤이교(尹以敎)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거느리고 역적을 잡아 헌괵(獻馘)671) 하여 여러 번 큰 공이 있었습니다. 김두만이 관리와 체결하고 뇌물을 써서 그 공을 빼앗았으므로 그는 포상(褒賞)하는 은전까지 입었으나, 윤이교는 끝내 거론한 일도 없습니다. 조정의 형상(刑賞)이 이러하면 장차 충의를 권장하고 난적(亂賊)을 징계할 수 없을 것이니, 본도의 감사(監司)를 시켜 명백히 살펴서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김두만을 효시(梟示)하여 왕법(王法)을 바루소서.
청주 영장(淸州營將) 노흡(盧恰)은 어리석고 무식하여 거조(擧措)가 망령되어 법을 벗어나 종[奴]을 추쇄(推刷)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였으니, 사판(仕版)672) 에서 삭제하소서. 운산 군수(雲山郡守) 장두주(張斗周)는 요사한 기녀(妓女)에게 홀려서 크고 작은 결송(決訟)에 모두 그 말을 들어주어 뇌물이 버젓이 행해지고 탐욕이 그지없으니, 파직하소서. 감찰(監察)은 곧 옛 전중 어사(殿中御史)인데, 감찰 이의(李檥)는 본디 시골의 비천한 무리로서 사람됨이 어리석고 더러워 이 직임에 맞지 않습니다. 두 번 서경(署經)673) 에서 다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물의가 만족하지 않는 것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으니,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김두만의 일은, 처음에는 역적을 따랐더라도 나중에는 귀순하였으니, 효시를 청하는 것은 대고(大誥)의 뜻에 어그러진다. 그러나 남의 공을 제 공으로 삼은 것으로 말하면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도신을 시켜 상세히 살펴 계문하게 한 뒤에 처치하라. 노흡·장두주의 일은 풍문을 어찌 반드시 죄다 믿겠는가? 끝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였다. 강이 끝나자, 사경(司經)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동조(東朝)에 진연(進宴)하는 성례(盛禮)를 잘 거행하여 성정(聖情)이 기쁘시니, 모든 신하가 누구인들 기쁘지 않겠습니까?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 한 가지 여쭈려는 것이 있습니다. 대저 여악(女樂)은 본디 임금이 보아야 할 것이 아니니, 공자(孔子)께서 노(魯)나라를 떠난 것이 곧 이 때문이었습니다.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왜인(倭人)을 접대하는 예(禮)에는 반드시 여악을 썼는데,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가 부제학(副提學)이었을 때에 여러 번 아뢰매 중종(中宗)께서 따라서 없앴으니, 실로 천고에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내간(內間)의 진연은 이와 달라서 여악이 아니면 음악은 연주할 수 없으므로 여기(女妓)의 징발이 외방(外方)까지 미치는데, 이것은 본디 사세가 마지못하는 것이나 그 예에 어그러지는 것을 보는 것은 큽니다. 전하의 평소의 학문으로서는 조금도 예에 어그러지는 것에 흔들릴 여지가 있지 않을 것입니다마는, 동궁 저하(東宮邸下)는 춘추가 한창이고 바로 몽양(蒙養)할 때이므로 더욱이 삼가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예에 어그러지는 것을 보시는 데에 과연 흔들리는 것이 없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좋다. 늘 내연(內宴)을 당할 때마다 춘궁(春宮)도 입시(入侍)하므로 전부터 춘방(春坊)에서 으레 경계를 아뢰는 말이 있었다. 이것은 겉치레에 가깝더라도 예를 아끼고 존양(存羊)하는 의리674) 에서는 폐기할 수 없는데, 이번에는 이틀 동안 진연에 참여하여도 이러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아마도 겉치레로 여겨서 말하지 않았겠으나, 내가 서글펐다. 예전에 한휴(韓休)가 아느냐는 말이 있었는데,675) 유신(儒臣)이 입시하면 반드시 운운하였다. 내가 학문에 천박하기는 하나, 어찌 여악에 흔들릴 수 있겠는가? 그러기는 하나 누르기 어려운 것이 마음이니 면계(勉戒)하는 뜻이 좋으니, 유의하겠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명교(曺命敎)가 말하기를,
"민진원(閔鎭遠)은 죄가 지극히 무거우므로 당초에 근지(近地)에 부처(付處)676) 한 것이 이미 공론에 어그러지는데 한 해가 지나지 않아 또 석방을 명하시어 왕법(王法)이 너무 굽혀지고 사은(私恩)이 너무 펴졌으니, 강필경(姜必慶)이 상소하여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이 참으로 체례(體例)에 맞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차(袖箚)677) 한 가지 일에 대하여 내가 어찌 그른 줄 모르랴마는, 이것은 국량(局量)이 넓지 못한 탓이다. 어찌 불궤(不軌)678) 의 마음이 있어서 그렇겠는가? 성모(聖母)의 동기(同氣)에게 차마 못할 바가 있으나 공론을 어기기 어려워서 처음에는 부처하였더라도 이제는 벌이 이미 행해졌는데, 특별히 석방을 명한들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또 직첩(職牒)은 내어 주지 않았으므로 거두어 서용(敍用)하는 것과 차이가 있고, 전리(田里)에 방귀(放歸)하여 노년을 마치게 한 것이니, 어찌 사은을 펴고 공법(公法)을 보존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10월 4일 신사
조태억(趙泰億)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여러 해 동안 외지에 체류하여 몸에 손상을 입은 것이 이미 많았고 전에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하느라 손상을 더한 것이 훨씬 많았었다. 증세가 더하게 된 뒤에 비록 간절히 염려하기는 하였으나 약을 쓰지 않게 되기를 바랐는데, 어찌 한 가지 병이 반년 넘게 이어지다가 문득 이 지경이 될 줄 생각하였겠는가? 몹시 슬픈 것이 더욱 절실하여 스스로 억누를 수 없는데, 내 병이 아직 쾌히 낫지 않아서 거애(擧哀)하는 일을 예절대로 하지 못하니, 더욱이 매우 상심된다. 예장(禮葬) 등의 일을 규례대로 거행하고 관판(棺板)도 가려 보내며 녹봉(祿俸)은 3년 동안 그대로 이어서 주어 내 뜻을 보이라."
하였다.
10월 5일 임오
지평(持平) 조정순(趙正純)을 도배(島配)하였다. 조정순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번에 추국(推鞫)한 일을 말하여 보겠습니다. 안치(按治)할 때에 거의 다 약한 것은 먹고 강한 것은 토하여 구차하게 미봉하였으므로, 폐고(廢錮)된 족속과 영락(零落)한 자손은 거의 죄다 처형하고 가문이 크고 세력이 성한 자는 다 느슨하게 다스렸으니, 신은 통탄합니다. 또 전하께서는 이번 역변(逆變)을 누가 앞장서고 누가 불러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의 시의(時議)는 다 폐고된 족속에게 미룹니다마는, 공심(公心)·공안(公眼)으로 본다면 신축년679) 에 흉소(凶疏)를 올린 칠적(七賊)이 근본이라 생각합니다. 대개 그 소장 가운데에 있는 부도(不道)한 말과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가 일관되고 그 뒤 교문(敎文)도 이 소에서 부연(敷演)하여 낸 것입니다. 그 화를 일으키고 반역하려는 마음이 이미 그때에 나타났는데, 다행히 우리 전하의 환한 명단(明斷)에 힘입어 먼저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죽이고 뒤따라 육적(六賊)을 귀양보내어 간사한 싹을 미리 잘라 종사(宗社)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때 조금이라도 주토(誅討)를 늦추었다면 이들이 하늘을 욕보이려는 계책은 오늘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났을 것입니다마는, 절도(絶島)에 내쳤기 때문에 사나운 독을 품었더라도 감히 불쑥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지난 가을에 육지로 나오게 된 뒤로 남은 불꽃이 다시 세차져 흉계(凶計)를 다시 부렸습니다. 괘서(掛書)의 변이 그 도(道)에서 비로소 나왔는데 흉악하고 도리에 어그러지는 말들이 다시 교문(敎文)에 뒤따르고, 군사를 일으키는 역적 또 그 가운데에서 나와 이명의(李明誼)·윤성시(尹聖時)와 박필현(朴弼顯)·남태징(南泰徵)이 우익(羽翼)이 되어 앞장서서 흉악한 무리를 이끌어 거의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그 시말(始末)을 밝혀 보면 칠적(七賊)이 우두머리이니, 신은 당초에 육지로 나오게 하기를 청한 사람이 역적을 놓아 우환을 길러 낸 죄를 면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접때 대신(大臣)이 올린 차자(箚子)에 대해서도 서글픈 바가 있습니다. 대저 이진유(李眞儒)는 역적 김일경의 종주(宗主)이고 역적 박필몽(朴弼夢)의 사우(死友)이며, 흉소를 주장하고 교문에 동의하여 사생(死生)·화복(禍福)을 서로 같이하고 흉역(凶逆)의 마음을 서로 잇대었으니, 김일경·박필몽이 반역하는 것을 이진유가 어찌 몰랐겠습니까? 이진유는 김일경·박필몽과 조금 구별되므로 죄가 죽어야 하지는 않더라도, 이 역란(逆亂)을 겪은 뒤에는 생각하면 마음이 싸늘해지고 말하면 입이 더러워지므로, 멀리하기를 바라고 가까이 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배척하고 싶고 구제하고 싶지 않은 자입니다. 이것은 본디 상정(常情)이 반드시 그러할 것인데, 더구나 그 죄진 것도 피차가 다른 것이 아니니, 매우 미워하고 지극히 분한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대신은 오적(五賊) 적심(赤心)이라는 따위 말로 크게 칭찬하니, 또한 무슨 생각입니까? 이진유는 군사를 일으킨 자취가 없다 하여 역적으로 부르려 하지 않는다면, 접때 대신이 오적을 신구(伸救)할 때에 박필몽을 구별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아! 접때 박필몽을 알아준 것도 오늘날 이진유를 알아주는 것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 전에 이미 박필몽이 역적 박필몽이 될 줄 몰랐다면 또한 어찌 이진유가 박필몽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겠습니까? 이명언(李明彦)이 음흉한 것으로 말하면 이진유·박필몽과 다를 것이 없는데, 국가에서 변무(辨誣)할 때에 전대(專對)하는 재능에 마땅한 사람이 어찌 없기에, 반드시 귀양간 사람 가운데에서 뽑아 보내어 마침내 일을 그르치고 나라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이명언(李明彦)이 음흉한 것으로 말하면 이진유·박필몽과 다를 것이 없는데, 국가에서 변무(辨誣)할 때에 전대(專對)하는 재능이 마땅히 사람이 어찌 없기에, 반드시 귀양간 사람 가운데에서 뽑아 보내어 마침내 일을 그르치고 나라를 욕되게 해야 하겠습니까? 또 호복(胡服)으로 거사한다는 말은 더욱이 매우 놀랍고 두려운 것이므로 대신이 이에 대하여 인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듯한데, 도리어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다 하여 구제하기를 마지않았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아!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대신의 직책인데, 처음에는 박필몽의 일에서 어두웠고 뒤에는 이명언의 일에서 잘못하였으며, 이사성(李思晟)을 서곤(西閫)에 천망(薦望)하고 정사효(鄭思孝)를 남번(南藩)에 천망한 것과 남태징을 장망(將望)에 여러 번 천의(薦擬)하고 권익관(權益寬)을 발탁하여 관북(關北)에 제수한 것으로 말하면 모두 묘당(廟堂)에서 의논하여 천거한 것입니다. 대개 사람을 알기가 쉽지 않은 것은 옛사람도 그러하였고, 옆 사람의 처지에서 논하면 이 때문에 용서하여도 혹 괜찮겠으나, 스스로 변명한다면 옳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마광(司馬光)680) 이 미리 알아보는 것이 여회(呂誨)681) 만 못한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스스로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다는 데에 핑계하지 않은 까닭인데, 이제 대신이 당시에 죄로 여기지 않은 것을 후세에서 꾸짖을 수 없다는 따위 말을 요상(僚相)을 신구하는 차자에 썼으니, 이것은 요상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말한 것이라 하더라도 저러한 처지라면 또한 너무 혐의를 돌보지 않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 차자 가운데에 ‘국가에서 대신을 둔 것은 장차 천직(天職)을 같이 하려는 것이니, 처음에 반드시 그 사람을 가려야 하고 이미 가렸으면 사람들이 감히 헐뜯지 않아야 조정의 기상이 화합할 것입니다.’ 하였으니,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세대가 내려오면서 풍속이 낮아져 인물이 적어지고부터 정승의 일이 예전만 못한 것은 한(漢)·당(唐)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니, 감히 의논하지 못할 어진 정승을 어찌 얻기 쉽겠습니까? 삼대(三代)의 인물 같은 제갈양(諸葛亮)으로서도 오히려 감히 자만(自滿)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반드시 ‘내 잘못을 부지런히 공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고 도둑을 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더구나 역대에 간관(諫官)을 둔 까닭은 재상(宰相)과 함께 서로 가부(可否)를 논하게 하려 한 것이니, 이 때문에 대각(臺閣)의 말이 묘당에 미치면 재상이 대죄(待罪)하였는데, 대신의 일을 감히 논할 수 없다면, 이것은 실로 사적(史蹟)에서 보지 못하던 일일 것입니다. 그 차자에 또 말하기를, ‘조정이 깊은 못처럼 안정하고 재상이 높은 산처럼 진정하여 바라보기에 높고 깊으며 보기에 주밀(周密)하여 정신이 절충(折衝)하면 간사한 자가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사사로이 생각한건대, 대신이 국정(國政)을 행한 것도 또한 오로지하였고 또 오래되었다 하겠는데, 접때 난역(亂逆)이 일어났을 때에 한(漢)나라의 급암(汲黯)이 회남(淮南)을 미리 꺾고 당(唐)나라의 배도(裵度)가 채(蔡)의 적(賊)에게 두렵게 여겨진 것과 같은 일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 간사한 자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높은 산처럼 진정하고 바라보기에 높고 깊은 보람이 과연 이러한 것입니까? 전 고산 현감(高山縣監) 박양한(朴亮漢)은 이유익(李有翼)의 처부(妻父)이고 심유현(沈維賢)의 종숙(從叔)인데 전주(全州) 읍치(邑治) 가까이 살면서 박사관(朴師寬)과 주무(綢繆)히 왕래하여 정적(情跡)이 의심스러우므로 잡아다가 따져 물어서 정상을 밝혀 내야 할 것인데, ‘고(高)’자와 ‘괴(槐)’자의 소리가 비슷하다 하여 연좌되어 죽어야 할 박필우에게 미루었습니다.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하는 신하가 박양한과 지친(至親)이 되더라도 어찌 부당하게 이처럼 감쌀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박양한을 잡아다가 엄히 핵사(覈査)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니, 특별히 명하여 개차(改差)하게 하고, 이어서 엄한 분부를 내려 꾸짖기를,
"조정의 신하를 무함하였다. 변란을 겪은 뒤에 어찌 차마 당심(黨心)을 싹틔우는가? 대신을 위한 것일 뿐이 아니라 그 버릇을 징계하기 위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조정순(趙正純)의 상소 때문에 강교(江郊)로 나갔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송성명(宋成命)에게 명하여 가서 비망기(備忘記)를 전하게 하였는데, 비망기에 이르기를,
"아! 접때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울 때에 경(卿)이 아니었으면 어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경이 사양하기 때문에 운대(雲臺)682) 에 그리지는 못하였으나, 전국의 사람들이 어찌 듣지 않았겠는가? 접때 의심하던 자라도 스스로 의심을 풀고 마음이 승복할 만한데, 어찌 오늘날 이 조정순이 있을 줄 생각하였겠는가? 경의 단심(丹心)은 내가 통촉할 뿐이 아니라 신명(神明)이 보증할 만한데, 이러한 견줄 데 없는 말을 어찌 지나치게 혐의할 만하겠는가? 경이 성을 나간 뒤에 내 병이 또 더하여 음식을 중지하여 책상을 밀어 놓고 먼저 속마음을 유시(諭示)하니, 경은 내 지극한 뜻을 몸받아 곧 성안으로 들어오라."
하고, 이어서 같이 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대신을 무함하는 일이 어느 세대인들 없으랴마는, 어찌 조정순(趙正純)처럼 무함하는 자가 있겠는가? 그 천거하였다는 것은 혹 경이 외방에 있을 때이거나 경이 인퇴(引退)하였을 때이거나, 경이 정승 자리에 들어오지 않을 때에 있었으므로 모두 경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알 뿐더러 나라 사람들도 다 알 것이니, 조정순이 무함하려 하더라도 마음에 반드시 부끄러울 것이다. 장구령(張九齡)683) 은 안녹산(安祿山)을 알았으나 뒤에는 다시 아뢰지 않았고, 왕연(王衍)684) 은 석늑(石勒)685) 을 알았어도 도리어 나라에 해로웠다.
경이 조정순의 말처럼 그 사람들을 죄다 천거하였더라도, 우리 나라에서는 다만 그 벼슬에 오래 있는 차서(次序)에 따라 쓸 뿐인데 어찌 내리거나 올릴 수 있겠는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을 제요(帝堯)도 어렵게 여겼는데, 만일 의심하였다 하여 쓰지 않는다면 이는 변란을 가져오는 방도이니, 장구령이 지금 살았더라도 결코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에게 어찌 조금이라도 불안한 꼬투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당초부터 경에게 관계되지 않은 일이겠는가? 예전에 상관걸(上官傑)686) 이 속이는 것을 한 소제(漢昭帝)가 통촉하였는데, 그 뒤에는 곽광(霍光)687) 에 대하여 다시 말하는 자가 없었다. 내가 경을 대우하는 것이 어찌 한 소제가 곽광을 대우한 것만 할 뿐이겠는가? 접때 사람을 알고 얼굴을 알되 마음은 모른다고 한 하교는 이러한 무함하는 버릇을 막으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조정순이 있으니, 이것도 또한 내가 경을 대우하는 정성이 얕은 것이다. 부끄럽고 한탄스러움을 어찌 말하겠는가? 경이 병 때문에 인퇴하고부터 피로하고 초췌한 끝에 조정에 나오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는 임금이 정승의 집에 가서 논도(論道)한 일이 있고 우리 나라 예절에도 대신을 문병하는 일이 있으니, 이 생각을 가진 지 오래 되었다. 앞에는 경례(慶禮)가 있었고 뒤에는 돌림 감기를 앓았으므로 아직 수행하지 못하였으나 이 마음은 아직 있는데, 이제 경이 이처럼 사양하고 나라의 일은 한심하니, 병을 견디고 거둥할 차비를 시키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전후의 경에 대한 내 정성이 얕기는 하였으나 꾸민 말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경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뜻이겠는가? 참으로 진심에서 나온 것이니, 경은 헤아려야 한다."
하였는데, 이광조가 곧 성안으로 들어와 명을 기다리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8일 을유
이광좌(李光佐)를 실록 총재관(實錄摠裁栽官)으로, 양성규(梁聖揆)를 승지(承旨)로, 강필신(姜必愼)을 장령(掌令)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지평(持平)으로, 심공(沈珙)을 좌윤(左尹)으로 삼았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경석(李慶錫)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후릉 참봉(厚陵參奉) 구성필(具聖弼)은 본디 모리(牟利)하는 무리로서 전혀 사대부다운 모양이 없으니, 태거(汰去)하소서.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기제(鄭箕齊)는 나이가 여든에 가까워 모든 일이 혼란합니다. 무릇 왜인을 접대할 때에 거조가 해괴하고, 입대목(立代木)을 하나도 나누어 주지 않고 죄다 사용(私用)으로 돌리기까지 하니,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이진(權以鎭)이 상소하여, 공물을 더 쓰는 것을 바로잡아 고쳐야 한다는 것을 자세히 말하고, 또 대내(大內)에서 채소를 담그는 것이 1천 6백 바리나 되는 것을 절약하는 덕에 손상이 있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공물을 올리고 내리는 데에는 본디 구규(舊規)가 있으니, 간사한 관리의 외람하고 교활한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찌하여 반드시 이 일에 고집해야 하는가? 또 채소를 담근 것을 내농포(內農圃)688) 에서 각전(各殿)에 바치는 것은 요즈음 포전(圃田)이 줄었기 때문에 그 수가 전보다 매우 적으니, 절약에 관한 말은 잘 모른 탓이다. 대저 시골 마을의 두어 식구의 가난한 집을 왕궁(王宮)에 견주어 헤아리면 모든 일에 경중이 있고 다소가 있을 것이니, 이것은 경의 생각이 치우치고 막힌 곳이다."
하였다.
10월 11일 무자
정언(正言) 조한위(趙漢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듣건대, 죄인 민진원(閔鎭遠)을 석방하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대저 민진원은 죄가 선조(先朝)에 관계되므로 보통으로 가볍게 벌하여 지레 너그러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당초에 근배(近配)한 것이 본디 그 죄가 용서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고, 마침내 전석(全釋)한 것도 부부인(府夫人)을 돌보는 뜻에서 나왔다면 이것은 모두 성상께서 선후(先后)를 추념하시는 효성이겠습니다마는, 공론을 어기고 왕법(王法)에 어그러진 것은 클 것입니다. 신은 민진원을 석방하라는 명을 빨리 도로 거두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신이 듣건대, 접때 좌상(左相)이 등대(登對)하였을 때에 성상께서 손을 잡고 면류(勉留)하는 말씀을 하셨다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특이한 은수(恩數)이고 드물게 있는 지극히 도타운 대우이니, 듣는 자도 오히려 감격하고 황공한데 당한 자는 더구나 또한 어떠하였겠습니까마는, 또 갑자기 까닭 없이 떠나고 발끈하여 성을 나갔습니다. 아! 무릇 사람이 벗을 사귈 때에는 오히려 말을 하였으면 반드시 실천하고 약속이 있었으면 반드시 어기지 않아서 성신(誠信)의 도리를 잃지 않으려 하는데, 더구나 임금과 신하가 한 당(堂)에서 간절히 서약한 것이겠습니까? 대신의 거취는 으레 보고 듣는 데에 관계되는데 이미 허락하고 곧 뉘우치며 곧 나왔다가 다시 물러가 임금에게 신의를 잃는 것을 스스로 돌보지 않으니, 오히려 어찌 동이(同異)를 떨쳐 버리고 감신(甘辛)을 조화하여 함께 공경하는 아름다움을 이루기를 바랐겠습니까? 또 조정순(趙正純)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전편(全篇)의 주의(主意)는 오로지 묘당(廟堂)을 어지럽히는 데에 있고 말을 쓰고 뜻을 둔 것은 그 위구(危懼)를 극진히 하였습니다.
아! 대신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과 말하는 자의 방자한 무함을 위에서 이미 남김없이 비추어 아셨으니, 이제 낱낱이 변명할 것 없습니다마는, 남태징(南泰徵)·이사성(李思晟)을 의망(擬望)한 것으로 묘당의 죄를 만든 것으로 말하면 참으로 매우 음험합니다. 대저 사람을 알아보기는 성인(聖人)도 어렵고 역절(逆節)은 상정(常情)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무신(武臣)의 직질(職秩)은 계제(階梯)를 따라 오를 뿐이니, 또한 뒷날에 반역하여 검거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예전부터 명신(名臣)·석보(碩輔)가 마땅하지 않은 사람을 잘못 천거한 일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그 사람이 반역하였다 하여 죄안(罪案)을 꾸몄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원훈(元勳)인 신하가 국가가 위급할 때를 당하여 강개하여 가기를 청하여 마침내 흉악한 자를 쓸어 없앤 것으로 말하면 그 깊은 충성과 큰 공훈에 대하여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두 말이 없을 것인데, 침공(侵攻)하는 말이 연달아 일어나 생전과 사후에 줄곧 버려두지 않고 공을 시기하고 죄를 구하는 뜻이 뚜렷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이 맑지 않은 것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신은 통탄합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히기를,
"민진원(閔鎭遠)의 일은 이미 강필경(姜必慶)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일렀다. 좌상이 성을 나간 것은 지나치다 하더라도, 이제 네 상소 가운데에 몹시 헐뜯은 것이 뚜렷이 있으니, 참으로 괴이하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상소를 살펴보면 앞뒤를 맞추고 일마다 나열한 것이 생각을 다하되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겠으니, 뜻이 비참하여 옆 사람이 대신 두려워집니다. 찬찬히 살펴 보면 사실로는 매우 맹랑하고 사리로는 의거할 바가 없으니, 또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 모두 이 지경에 이를 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전에 횡역(橫逆)을 많이 당한 것을 생각하면 모두 공론에 따르고 스스로 변명한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머리가 희어 죽어 갈 때에 저들이 죄를 구하느라 거짓을 꾸민 말에 대하여 수다스레 변질(辨質)한다면, 당세의 군자들이 신을 사람으로 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른바 대신의 일이기 때문에 감히 논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책(史冊)에서 듣지 못한 것이라 한 것은 그 말이 더욱이 두렵습니다. 과연 대각(臺閣)이 평온한 마음으로 제갈양(諸葛亮)이 말한 것처럼 묘당(廟堂)의 잘못을 논하면 어찌 술을 따라 서로 빌지 않겠습니까마는, 그 한 마디 빗나간 말을 뒤미처 다스려 곧바로 만 길 구덩이로 몰려 하니, 낮은 관원에게도 이렇게 할 수 없는데 더구나 원훈(元勳)인 대신이겠습니까? 나라의 체모로서도 참으로 한번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들이 감히 대신을 논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겠습니까?"
하고, 소 끝에 또 말하기를,
"신의 정승 벼슬이 아직 몸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말한 자가 신 때문에 귀양갔으니, 사분(私分)이 불안한 것은 이미 말할 수도 없거니와, 공체(公體)로 말하더라도 언관(言官)을 대우하는 도리가 이러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덧붙여 아뢰어 재처(裁處)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경(卿)의 단심(丹心)이 어찌 한 장의 비답에 죄다 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대간의 말이 마디마디 근거가 없는 것을 어찌 나만이 환히 알겠는가? 나라 사람들도 환히 알 것이다. 이제 내가 큰 가뭄에 무지개를 바라보듯이 밤낮으로 경이 들어오기를 바라니, 즉일로 성안에 들어와 바라는 바에 부응하라."
하였다.
임금이 충청 감사(忠淸監司) 김시형(金始炯)을 인견(引見)하여 매우 간절히 면칙(勉飭)하였다. 김시형이 말하기를,
"본도(本道)의 민사(民事)는 양역(良役)이 가장 급한데, 묘당(廟堂)에서 바야흐로 잡색(雜色)을 폐지하여 정군(正軍)으로 옮겨 충정(充定)할 것을 의논합니다. 본도에는 잡색이 자못 많은데, 신(臣)이 내려간 뒤에는 낱낱이 뽑아 내어 없애겠습니다마는, 군정(軍丁)과 잡색이 서로 맞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수령(守令)과 상의하여 하겠습니다마는, 찾아 모을 때에 백성을 동요하게 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기한을 너그럽게 잡아야 성과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난역(亂逆)의 일로 말하면 군사를 모으는 적장(賊將)이 반드시 신역(身役)을 면제하거나 신역을 줄여 준다고 말하므로 백성이 많이 응모하였다 한다. 이 일이 가장 급한데, 그 가운데에서 달아났거나 죽은 것을 죄다 충정해야 이웃이나 겨레붙이에게 끼치는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10월 12일 기축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경석(李慶錫)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벽사 찰방(碧沙察訪) 정인서(鄭麟瑞)는 군졸에게서 박탈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여 탐욕이 그지없으며 역비(驛婢)와 몰래 간통하여 말하는 대로 다 따라서 짐바리를 연달아 나르느라 역마(驛馬)와 복마(卜馬)가 많이 죽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노흡(盧恰)·장두주(張斗周)는 모두 나문(拿問)하여 처치하라. 구성필(具聖弼)·정기제(鄭箕齊)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0월 13일 경인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참지(兵曹參知) 임주국(林柱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올봄의 역변(逆變)은 전에 듣지 못한 것인데, 다행히 하늘이 잠잠히 돕고 성산(聖算)이 탁월하심에 힘입어 요망한 우두머리들이 머리를 나란히 하여 처형되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거듭 넓히시는 사업이 이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마는, 군사를 연합하였던 흉얼(凶孼)은 이미 거의 평정되었더라도 괘서(掛書) 가운데에 성상에 관한 거짓을 만들어 낸 역적은 끝내 명백히 처형된 자가 없으니, 이것이 신이 마음에서 개탄하는 까닭입니다. 성명(聖明)은 비추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10월 14일 신묘
문과 정시(文科庭試)에서 박대후(朴大厚) 등 6인을 뽑았다. 역란(逆亂)을 토평(討平)하였기 때문이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경석(李慶錫)·지평(持平) 박필기(朴弼琦)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임주국(林柱國)의 소본(疏本)에 ‘괘서(掛書) 가운데에 성상에 관한 거짓을 만들어 낸 역적은 오히려 명백히 처형된 자가 없으니 이것이 신이 개탄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니, 그 말의 뜻을 보면 명백히 가리키는 것이 있습니다. 역란(逆亂)이 겨우 평정되어 근심이 아직 그치지 않은 때이므로 살펴 내어 엄히 국문(鞫問)하여 왕법(王法)을 바루지 않아서는 안되겠으니, 임주국을 나문(拿問)하여 지적하여 고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정인서(鄭麟瑞)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말단의 일은 소(疏)가 이미 괴이하고 허망하며, 이 계(啓)도 지나치게 괴이함을 면하지 못하니, 이것은 한 가지 일의 두 가지 괴이한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관원을 보내어 양경리(楊經理)689) 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10월 15일 임진
심공(沈珙)을 부제학(副提學)으로, 황재(黃梓)를 응교(應敎)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현모(李顯謨)를 부교리(副校理)로, 심태현(沈泰賢)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임금이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승선(承宣)690) 를 보내어 고(故) 우의정(右議政) 오명항(吳命恒)에게 치제(致祭)하였다.
임금이 약방 제조(藥房提調) 조문명(趙文命)·부제조(副提調) 송성명(宋成明)을 인견(引見)하였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상주(尙州)의 충군(充軍)한 죄인 박민웅(朴敏雄)은 국가에서 의병장(義兵長)으로서 공을 이룬 자라 하여 발탁하여 영장(營將)을 제수하기까지 하였는데, 곧 상하관(上下官)의 체례(體禮)를 잘 행하지 않았다 하여 충군의 율(律)을 받게 되었으니, 장차 어떻게 뒷사람을 격려하겠습니까? 공은 공이고 죄는 죄라고는 하나 대체로 논하면 그러하지 않을 듯합니다. 또 그 사람은 본디 방외(方外) 사람이므로 상례(常例)로 책망할 수 없는데 이제는 벌도 이미 행하였으니, 참작할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벌을 이미 행하였으니, 특별히 놓아 보내고 이어서 서용(敍用)하되 한결같이 과목(科目)에 따라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6일 계사
간원(諫院) 【헌납(獻納) 임수적(任守迪)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남포 현감(藍浦縣監) 김익겸(金益謙)은 변란이 일어난 처음에 신사(神祠)로 달아나 숨고 모든 고을 사무에 관계되는 것을 좌수(座首)에게 일임하였고, 군사를 징발하여 넘겨 줄 때에 양식을 나르는 데에 드는 것이라고 핑계하여 8결(結)마다 8냥(兩)의 돈을 거두어들였으나 백성이 바야흐로 달아나 흩어져 있으므로 두루 거두지 못하였는데, 사변이 막 평정된 뒤에는 결전(結錢)을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한 것을 고르지 않다 하여 당초에 바치지 않은 백성에게서 4냥의 돈을 다시 거두었고, 또 진자(賑資)에 보탠다고 핑계하여 돈 1냥에 소금 30두(斗)를 거두었습니다. 변란에 임하여 조치를 잘못한 것이 본디 크게 놀랍거니와, 변란에 따라 가혹하게 거두어들인 것은 더욱이 매우 통탄하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용인 현령(龍仁縣令) 신명한(申鳴漢)은 도임 이후 여러 가지로 거두어들였습니다. 여름에 절사 은자(節使銀子)를 기호(畿湖)에 나누어 보내 종자 양식에 보태도록 특별히 명하신 것은 실로 백성을 돌보시는 성의(盛意)에서 나온 것인데, 신명한이 굶주린 백성을 먹인다고 핑계하여 돈을 바꾸어 보리를 산 것이 1백 석(石)에 가까우나 가난한 백성을 조금 뽑아 조금씩만 주었으므로 나누어 준 것을 합계하여도 10석이 못되고 나머지 수가 많은데 죄다 사용(私用)으로 돌렸습니다. 이것도 이렇게 하였으니 다른 것은 미루어 알 만합니다.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신명한은 나문(拿問)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10월 18일 을미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평시에 대궐을 지키다가 뜻밖의 일이 있으면 무기를 들고 앞장서야 하니, 어찌 돌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접때 나라를 위하여 노고를 다하였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어제 추위가 긴박하였고 저녁 이후로 더욱 심하였으므로 밤에 동옷[襦衣] 따위 물건을 제급(題給)하라고 명하기는 하였으나, 밤이 깊은 뒤에 북풍이 싸늘해서 그 추위가 더욱 혹심하여 벌떡 일어난다. 대궐에서 큰 담요를 깔아도 이러한데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어찌 견딜 수 있으랴고 생각하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그대로 아침까지 불안하여 온전히 자지 못하였다. 속담에 ‘첫추위가 한추위보다 심하다.’ 하였거니와, 동옷을 제급하는 등의 일을 곧 거행하게 하고 각영(各營)에서 입직(入直)한 군사 가운데에서 옷이 특히 심하게 얇은 자에게는 솜을 조금 주어 내가 돌보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김상성(金尙晟)을 교리(校理)로, 조상명(趙尙命)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고(故) 우의정(右議政) 오명항(吳命恒)의 여문(閭門)에 정표(旌表)하였다. 오명항이 졸(卒)하였을 때에 옥당(玉堂)691) 에서 그의 평소의 효행에 정려(旌閭)692) 가 있어야 마땅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대신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의논하기를,
"우의정 오명항의 평소의 지극한 행의(行誼)는 참으로 연신(筵臣)이 아뢴 것과 같으므로 이제 거듭 아뢰지 않습니다마는, 돌이켜보면 상신(相臣)이 상(喪)을 당하였을 때에 나이가 늙어 가고 벼슬은 방백(方伯)을 지냈으며 봉양이 평소에 박하지 않았으나 3년 동안 죽먹기를 단연코 변하지 않았으므로 비위(脾胃)가 손상되고 학질이 거듭 나서 위독한 지 여러 달인데 마침 국상(國祥) 때문에 들것에 실려서 성안에 들어와 몸과 정신이 아주 쇠약하여 보기에 비참하므로 친구들이 모두 맛난 음식을 권하고 여러 가지로 견주어 타일렀으나 끝내 듣지 않고 상제(喪制)를 마치고야 말았습니다. 그 행의가 도탑고 절조가 굳은 것은 온 세상에 짝할 자가 드무니, 이는 궁벽한 시골의 낮은 백성에게도 포가(褒嘉)해야 할 일인데, 더구나 대신이겠습니까? 빨리 포정(褒旌)을 베푸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서민이라도 이런 행의가 있으면 정포(旌褒)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대신이겠는가? 참으로 드물게 있는 일이니 해조(該曹)를 시켜 곧 정문(旌門)하라."
하였다.
10월 21일 무술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였다. 유신(儒臣) 이 문의(文義)를 설명하는 일이 끝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학관(學官)이 사습(士習)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답답하였는데, 동몽 교관(童夢敎官)으로 말하더라도, 집[家]에는 숙(塾)이 있고 고을[州]에는 서(序)가 있고 나라[國]에는 상(庠)이 있어 사자(士子)들이 어려서부터 학습하였으나, 이제는 교관(敎官)이 문득 겉치레가 되었다. 대저 교관은 곧바로 6품(品)이 되므로 설치한 뜻이 매우 중대한데 가르치는 데에 종사하지 않고 앉아서 6품에 오르는 것은 그들의 도리에서도 부끄러움이 많을 것이니, 예조(禮曹)에 신칙(申飭)하여 가르치는 일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보아서 승천(陞遷)의 바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의 문집(文集)은 말의 조리가 매우 지극하여 곧바로 염락관민(濂洛關閩)693) 의 글과 서로 참고할 수 있습니다. 좌우에 두고 늘 보시면 성학(聖學)에 도움이 클 것이니, 곧 운관(芸館)694) 을 시켜 박아 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0월 23일 경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라도 유생(儒生) 조덕희(趙德禧)가 상소하여 고(故) 대사헌(大司憲) 임영(林泳)의 원액(院額)695) 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24일 신축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역법(曆法)이 점점 예전만 못하여 이십사기(二十四氣)·합삭(合朔)696) ·현월(弦月)697) ·망월(望月)의 시각이 모두 어긋나니, 연경(燕京)에 역관(曆官)을 보내어 《어정역법(御定曆法)》을 구하여 배워 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양사(兩司) 【지평(持平) 박필기(朴弼琦)·헌납(獻納) 임수적(任守迪)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지평 현감(砥平縣監) 김대(金岱)는 어리석고 여려서 이미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알았으니, 개차(改差)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하양 현감(河陽縣監) 이기만(李基萬)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여려서 보기에 변변치 못하니,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5일 임인
성균관(成均館)에서, 성묘(聖廟)의 담 밖에서 나졸(邏卒)이 나포(拿捕)하는 짓을 하였다 하여 초기(草記)698) 로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순라(巡邏)를 신칙(申飭)하는 이때에, 묘사(廟社)의 지극히 중한 담 밖일지라도, 야금(夜金)을 범한 도둑이 있다면 매우 징계해야 할 것인데, 순라하는 장졸(將卒)이 야금을 범한 관례(館隷)를 잡은 것이 무슨 성묘에 불경한 것이 있기에 반속(泮屬)699) 이 호소하는 것만을 듣고 도리어 나졸을 다스리려 하는가? 그렇게 하면 대궐 안에는 장차 내순(內巡)이 없어질 것이다. 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이러한 것 때문이니, 해당 당상(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이 초기는 도로 내어 주되 이 뒤로는 야금을 범한 사람을 잡더라도 성묘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서는 떠들지 말게 하라고 신칙하라."
하였다.
10월 26일 계묘
예조(禮曹)에서 거재 유생(居齋儒生)이 비망기(備忘記)의 사지(辭旨)가 매우 엄하기 때문에 함께 권당(捲堂)700) 하였다는 뜻을 아뢰니, 비답(批答)하기를,
"그저께 일에 대한 신칙(申飭)은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고 말단의 하교(下敎)는 오로지 성묘(聖廟)를 위한 것이니, 신칙과 학문을 위하는 뜻이 둘 다 행해졌다 하겠는데, 이번에 권당한 것은 실로 뜻이 없다. 사체(事體)에 있어서 매우 미안하니, 권당에 앞장선 재임(齋任)은 본관(本館)을 시켜 유벌(儒罰)701) 을 주고 대사성(大司成)·동지관사(同知館事)를 모두 곧 패초(牌招)하여 가서 권하여 들여보내게 하라."
하였다.
10월 27일 갑진
옥당(玉堂)에서 상차(上箚)하기를,
"신들이 예조(禮曹)의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批答)을 보건대, 권당(捲堂)에 앞장선 유생(儒生)을 본관(本館)을 시켜 벌주라는 명이 있었고, 이어서 후사(喉司)702) 에서 작환(繳還)703) 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는데, 신들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순라(巡邏)가 반중(泮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국법에 명문이 없기는 하나, 대개 또한 3백 년 동안 내려온 오랜 규례이며, 국가에서 현관(賢關)704) 을 우대하기 위한 뜻입니다. 당초에 반당(泮堂)705) 이 초기(草記)한 것은 대개 유생이 말해 왔기 때문인데, 문비(問備)706) 하는 꾸중이 사석(師席)에 내려졌으니, 말해 온 재생(齋生)이 도리어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장보(章甫)707) 는 조신(朝紳)708) 과 다르므로 바로잡고 격려할 일이 있더라도 그 대체를 보아야 할 뿐인데, 또한 어찌하여 반드시 깊이 꾸짖어야 하겠습니까? 신들이 듣건대, 예전에 인조(仁祖) 때 궁장(宮墻)을 순라하던 초관(哨官)이 반수(泮水) 안으로 잘못 들어간 것을 인조께서 듣고 곧 대장(大將)을 추고하는 초관을 결곤(決棍)하라고 명하셨는데, 이제까지 반중에서 아름다운 일로 전해 옵니다. 성상께서 유생에게 벌주신 것은 그 당상이 경솔한 것을 꾸짖으신 것이는 하나, 그 근본을 밝히면 실로 순라의 일에서 말미암았으니, 오늘의 처분이 인조 때의 일에 비하여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여 권당한 유생에게 벌주라는 명을 빨리 거두고 이어서 위유(慰諭)를 내려 곧 도로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바로잡는 말은 참으로 아름답다. 내가 현관을 경시한 것이 아니라, 유생들이 스스로 거취를 경솔히 한 것이다. 신칙할 것은 신칙해야 하고 부식(扶植)할 것은 부식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연한을 정하여 정거(停擧)709) 하지 않고 다만 본관에서 벌주라고 명한 것도 참작하였기 때문이다. 인용한 옛일에 대해서는 본관의 초기에 대한 비답에 이미 일렀다."
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서 아뢰기를,
"유생(儒生)들을 불러모아 성상의 하유를 전해 내리고 도로 들어가게 하였더니, 유생들이 해당 당상(堂上)과 재임(齋任)이 모두 벌준 가운데에 들어 있으므로 염치와 의리로 헤아리면 재사(齋舍)에 들어갈 수 없으니, 벌을 같이 받기 바란다 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고사(故事)에 말미암은 것일지라도, 지금은 파수(把守)를 철수하지 아니하여 성문(城門)을 여닫는 것도 평상으로 회복하지 않았으니, 신칙(申飭)하는 도리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당상을 추고(推考)하지 말고 재임을 벌주지 말아야 비로소 도로 들어갈 수 있는가? 사체(事體)에 있어서도 결코 그렇지 않은데, 더구나 장황하게 써 들여 반드시 스스로 변명하려 하니, 사습(士習)이 이러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성묘(聖廟)에서 권당(捲堂)한 지 이미 수일이 되었으니, 그 사체에 있어서 더욱이 미안하다. 각별히 권유하여 들여보내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 김시환(金始煥)을 인견(引見)하였다. 김시환이 말하기를,
"동지사(冬至使)의 배표(拜表)710) 와 행기(行期)가 멀지 않은데, 흑초(黑草)711) 는 사대(査對)하고 나서야 정서(正書)할 수 있습니다. 방물(方物)의 봉과(封裹)는 대신(大臣)이 없더라도 다만 정부(政府)에서 진참(進參)한 전례가 있으나, 흑초의 사대는 반드시 대신을 기다려서 해야 하는데,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는 병세가 바야흐로 심하여 행공(行公)할 형세가 아니고,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은 바야흐로 강교(江郊)에 있습니다. 본원(本院)의 등록(謄錄)을 상고하니 ‘병술년712) 동지사가 갈 때에 세 대신이 마침 유고하여 흑초의 사대를 할 수 없으므로 승문원 제조 황흠(黃欽)이 청대(請對)하여 여쭈니, 선왕께서 하교하여 제조들이 영상(領相)의 집에 일제히 모여 상의해서 하게 하셨는데,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상차(上箚)하기를, 「사실(私室)에서 사대하여 공체(公體)에 방해되는 것이 있으니 제조를 시켜 본원(本院)에 일제히 모여 사대한 뒤에 본원의 관원을 시켜 와서 보이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따르셨다.’ 하였습니다. 전례는 이러하더라도 품정(稟定)하여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배표할 시기가 임박하여 대신의 병이 낫기를 기다릴 수 없고 또 선조(先朝)의 전례가 있으니, 이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경주(慶州) 사람 김봉룡(金鳳龍)이 상소하기를,
"삼척(三陟)에 선릉(先陵)의 분형(墳形)이 완연한 데가 분명히 있으니, 예관(禮官)을 시켜 신과 함께 적간(摘奸)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해조(該曹)에 내려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수찬(修撰) 신치근(申致謹)이 북도(北道)에서 돌아와 상소하여, 먼저 백성의 고통을 말하고, 중간에 말하기를,
"정익하(鄭益河)가 원훈(元勳)을 깎아내려 마침내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이제 또 헌신(憲臣)의 말 때문에 수규(首揆)713) 가 황급히 성을 나갔으니, 나라의 일이 어느 지경까지 갈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년에 사죄인(四罪人)714) 은 추탈(追奪)을 시행하기까지 하였는데도 편드는 자는 감히 대신이 적발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다고 썼습니다."
하고, 끝에는 북도(北道) 사람 이재형(李載亨) 등 15인을 천거하였다. 수규는 이광좌(李光佐)이고 죄인은 사대신(司大臣)을 가리킨 것이다. 신치근은 흉당(凶黨)의 응견(鷹犬)으로서 신치운(申致雲)과 뱃속이 서로 통하여 말하는 것이 견줄 데 없으니, 그에게 어찌 책망하겠는가?
10월 28일 을사
윤혜교(尹惠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박태항(朴泰恒)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성덕윤(成德潤)을 부응교(副應敎)로, 임정(任珽)을 지평(持平)으로, 조적명(趙迪命)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비국 당상(備局堂上)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영월 관노(寧越官奴) 전지화(田枝華)라는 놈이 연전에 진부면(珍富面) 수다촌(水多村)에 왕래하며 꾀하여 입안(立案)을 내서 한 마을을 모두 제 문건으로 만들어 도저동(桃渚洞) 박 감사(朴監司) 집에 몰래 팔았고 박 감사 집에서는 숙빈방(淑嬪房)에 전매하였습니다. 이른바 박 감사는 어느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사대부의 집에서 이러한 허술한 땅을 사고 또 숙빈방에 팔았으니, 그 풍습이 또한 놀랍고, 숙빈방으로 말하더라도 어찌하여 반드시 이러한 곳을 사서 끝없는 민폐를 끼쳐야 하겠습니까?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전가(田哥)가 입안한 곳을 살펴서 아뢰게 하여 과연 부실한다면 숙빈방에서 산 곳을 도로 물리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여러 궁가(宮家)에서 이런 허술한 물건을 사면 민폐가 되므로 이제 입시(入侍)한 승지(承旨) 조석명(趙錫命)이 전에 어사(御史)·본관(本官)을 시켜 그 허실(虛實)을 사문(査問)한 뒤에 그 매매를 결정하여 간사한 백성이 훔쳐 파는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숙종(肅宗)께서 특별히 청한 것을 윤허하여 법전에 실으셨습니다. 이것은 다시 더욱 밝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한 일을 내가 일찍이 개연(慨然)히 여겼다. 재신(宰臣)의 말이 이러하니, 아뢴 대로 더욱 밝히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9일 병오
기사관(記事官)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신이 오대산(五臺山)의 포쇄(曝曬) 때에 보니 《문종실록(文宗實錄)》의 신미년715) 10월 이후 임신년716) 2월 이전이 빠져 있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마는, 인쇄한 종이가 얇고 나쁘며 또 주필(朱筆)한 흔적이 있었으니, 찬수(纂修)할 때의 중초(中草)일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곳의 포쇄 때에 상고하여 여쭈도록 하라."
하였다. 이종백이 말하기를,
"오대산 사각(五臺山史閣)의 금표(禁標) 안에서 촌백성이 몰래 화전(火田)을 경작하는 폐단이 있으니, 지방관(地方官)에게 신칙(申飭)하여 금단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포쇄 때에는 사관(史官)이 금단해야 할 것이니, 해를 걸러 본도의 도사(都事)를 시켜 복심(覆審) 때에 적간(摘奸)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병이 있어 약방(藥房)에서 진찰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때때로 혹 조금 낫기도 하나 번번이 더할까 걱정된다. 어린 나이이어서 약을 쓰기 어려웠으나 이제는 자고 먹는 것이 평상 같지 못하여 증상이 쉽게 낫지 않을 듯하므로, 의관(醫官)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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