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무인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신(臣)들이 정부(政府)의 당상(堂上)과 육조(六曹)의 참판(參判) 이상과 관각(館閣)의 당상과 함께 빈청(賓廳)에 모여 왕세자(王世子)의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삼망(三望)774) 을 갖추었는데, 첫째는 장효(莊孝) 【정도(正道)를 이행하고 뜻이 화평한 것을 장(莊)이라 하고, 자혜(慈惠)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이고, 둘째는 효장(孝章) 【자혜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라 하고, 경신(敬愼)하고 고명(高明)한 것을 장(章)이라 한다.】 이고, 셋째는 장헌(章獻) 【경신하고 고명한 것을 장이라 하고, 지혜로운 바탕이 성스러운 것을 헌(獻)이라 한다.】 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수망(首望)이 비록 좋으나, 효란 것은 백 가지 행동의 으뜸이기 때문에 두 번째를 취하도록 하라."하였다.
교리(校理)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의 비망기(備忘記)에 우리 저하(邸下)의 지극한 인자와 성대한 은택이 미처 아래로 백성에게 이르지 못한 것을 매우 슬퍼하시고 정자각(丁字閣)과 묘석(墓石)의 제도를 예전보다 간략하게 하고 관동(關東)에 배정한 대들보 재목도 요구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대저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세자의 송종(送終)775) 을 위하여 한 재목이라도 백성을 번거롭게 할까 성려(聖慮)에서 깊이 걱정하시니, 깊은 산이나 궁벽한 골짜기 가운데에 있더라도 누구인들 우리 전하의 이 분부에 대하여 한 글자마다 한 번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다만 말세의 풍속은 괴이한 것을 좋아하여 기초(祈醮)가 버릇되었으므로, 혹 궁액(宮掖)의 무리가 전하께서 모르시는 가운데에 망령되게 스스로 그런 마음을 일으킨다면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는 것은 본디 말할 겨를도 없거니와 또한 평소에 정도를 기른 뜻에 어그러지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봉조하(奉朝賀) 신(臣) 최규서(崔奎瑞)·찬선(贊善) 신(臣) 정제두(鄭齊斗)는 지금의 대로(大老)입니다. 태산 교악(泰山喬岳)이 움직이지는 않더라도 백성이 모두 바라보면 나라에 본받을 바가 있을 것이니, 더욱 정성과 예(禮)를 더하여 경저(京邸)에 들어오도록 권면하여 한결같이 주 문왕(周文王)이 태공(太公)을 대우한 것776) 처럼 기덕(耆德)을 우양(優養)하고, 반드시 한(漢)나라 임금이 제갈양(諸葛亮)에게 물은 것처럼 큰일에 대하여 자문하소서. 그러면 성주(聖主)는 의지하여 근심하지 않을 바가 있고 국인(國人)은 믿어서 두렵지 않을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도타이 비답(批答)하였다.
12월 3일 기묘
이선행(李善行)을 장령(掌令)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교리(副校理)로, 임수적(任守迪)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시환(金始煥)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오광운(吳光運)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광덕(李匡德)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우리 나라의 강토와 백성을 살펴보시면, 예전에도 더 넓지 않았고 이제도 더 줄지 않았으며, 기근으로 유망(流亡)하는 일이 근년에 참으로 심하나 예전에도 하늘의 운행에 따라 홍수와 가뭄이 없지 않았으며, 소민(小民)이 아래에서 내고 국가가 위에서 거두는 것도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조종(祖宗)의 시기를 오늘날에 견주면 국가의 저축이 어떠하며 백성의 도탄(塗炭)은 또 어떠합니까? 위에서 나라의 용도는 날로 줄어들고 아래에서 백성의 힘은 날로 괴로워지니, 신은 단연코 나라에 들어오지 않고 백성에게 돌아가지 않은 데에는 중간에서 국가의 영성(榮盛)을 깎고 백성의 힘을 빼앗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에서는 액례(掖隷)·조리(曹吏)가 함부로 인정채(人情債)를 받고 밖에서는 영문(營門)과 각 고을에서 마구 거두어들이며, 교활한 아전이 세력에 기대어 약탈하고 토호(土豪)가 이익을 농락하여 겸병(兼幷)하니, 이 몇 가지는 지금 나라의 좀벌레이고 백성의 도둑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정치할 때에 반드시 먼저 이 몇 가지를 없애면 백성의 이익은 백성에게 돌아가고 나라의 이익은 나라에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 몇 가지는 모두 전부터 내려온 예규(例規)인데, 금지한다면 아전이 어떻게 의지하여 살며 영문과 각 고을에서 어떻게 모양을 이루겠느냐?’ 하나, 대저 생활에는 후박(厚薄)이 있고 모양에는 대소가 있으므로, 생활과 모양을 생각하려 한다면 그 형세가 지극히 후하지 않고 지극히 크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예전부터 내려온 예규라는 말이 많아도 아전이라면 오히려 가하겠지만, 사대부가 탐욕하고 사치하는 화(禍)는 반드시 하늘에 사무칠 것이므로, 신이 정치할 때에 스스로 더욱 힘쓴다 하여도 남들이 비방하는 것은 문득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비분하여 힘써 행하는 것은 모두 저 몇 사람이 잘 헐뜯고 공교히 욕하는 바탕이 될 것이니, 신은 참으로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호남(湖南)은 전결(田結)이 23만여 결(結)인데, 해마다 조세(租稅)를 거두는 것은 많아도 17,8만 결에 지나지 않고, 호남의 군총(軍摠)777) 은 겨우 8,9만여 호이며, 해마다 인족(隣族)에게 거두는 것은 몇 만호나 되는지 모르겠으니, 그 전토(田土)가 어찌 다 재상(災傷)을 입었겠으며, 백성이 어찌 다 유산(流散)하였겠습니까? 서원(書員)을 무역하는 규례가 생겼으나 이것은 수령(守令)이 낯을 바꾸어 도둑질하는 것이며, 보인(保人)·공장(工匠)·군교(軍校)의 무리가 증가하였으나 이것은 놀고 먹는 백성이 몸을 의탁하는 소굴입니다. 고을의 군총을 성책(成冊)하여 내는 것은 대개 이러한 일 때문입니다마는, 고을의 군총을 성책한 뒤에 53고을에서 횡렴(橫斂)하는 일과 누락된 장정이 있었고, 가렴 주구(苛斂誅求)하여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일이 있었으며 여러 가지 간사한 짓이 있었는데, 대저 십중 팔구는 손바닥에서 가리키듯이 알기 쉬우니, 아무 역(役)에 대한 횡렴은 고쳐서 도태하여 이정(移定)해야 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백성이 소생할 수 있을 것이고, 백성이 소생하면 나라가 안정될 것입니다.
신이 정치하는 것은 큰 방도가 이러하거니와, 대저 나라의 좀벌레가 되고 백성의 도둑이 되는 줄 알았으면, 좀벌레를 없애는 것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법이고 도둑을 없애는 것이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병을 고칠 때에는 먼저 사악한 기운을 다스리고 원기를 길러야 하는 것이니, 원기를 기르되 사악한 기운도 아울러 기르려고 하는 것은 다스릴 줄 아는 자의 말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신의 생각에 자모(慈母)에게는 도리를 어기는 아들이 있으나, 강장(强將)에게는 약한 군사가 없는 법이니, 느슨히 풀어 두어 범법(犯法)하게 한 뒤에 죄주는 것은 처음부터 엄하게 단속하여 저도 범하는 것이 없게 하고 나도 죄주는 일이 없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신의 도내(道內)에 아직 큰 장죄(贓罪)를 범하여 낭자에게 드러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을 신은 바야흐로 매우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으나, 의논하는 자는 또 수령이 손발을 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병폐라 합니다. 사람의 소견이 각각 다르니, 신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호남 한 도의 일은 오로지 경(卿)에게 맡겼으니, 헤아리지 못하는 말이 있더라도 어찌 중산(中山)의 일778) 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본성을 지키는 것이 굳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데에 대해서는 금석(金石)처럼 고정(固定)하고 있다. 이와 같지 않다면 처음부터 어찌 이 직임을 경에게 맡겼겠는가?"
하였다. 이광덕이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데에 사납고 폐단을 바로잡는 데에 철저하니,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 조문명(趙文命)·조지빈(趙趾彬)이 헐뜯었으므로, 이런 상소가 있다.
보덕(輔德) 김호(金浩)·필선(弼善) 이세진(李世璡)·문학(文學) 유엄(柳儼)·겸문학(兼文學) 서종옥(徐宗玉)·사서(司書) 이성효(李性孝)·설서(說書) 심성진(沈星鎭)·겸설서(兼說書) 김상익(金尙翼)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들이 삼가 을유년779) 의 등록(謄錄)을 상고하건대, 해조(該曹)에서 춘궁(春宮)의 존폐를 계품(啓稟)하니, 성조(聖祖)께서 무익(無益)하고 폐단만 있다고 하교하시어 드디어 우선 폐지하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생각하건대, 상흉(喪凶)의 예(禮)는 되도록 후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예절을 바꿀 때에도 반드시 점차로 해야 할 것입니다. 장례(葬禮)와 우제(虞祭)를 겨우 치렀으나, 아름다운 명성이 사라지지 않고 생전처럼 본떠 설치한 것이 엄연히 예전과 같은데, 강원(講院)의 요속(僚屬)에 대해서만 마침내 곧 폐지한다면, 신들이 몹시 서운한 사정(私情)은 본디 말할 것도 못되나, 빈궁(嬪宮)에게 문후(問候)할 길이 없고 아침 저녁으로 참곡(參哭)할 사람이 없어져서 텅 비고 쓸쓸하여 의지할 데가 없을 것이니, 정리(情理)로 헤아려도 참으로 차마 못할 바이고, 점차로 바꾸고 되도록 후하게 하는 예(禮)에 있어서도 어찌 흠결이 있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정리에 따라 예절을 참작하고 전례에 얽매이지 말아서 재결하여 처치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3년도 안되어서 원명(院名)을 먼저 없애면 사물을 대하여 일어나는 느낌을 더구나 어찌 견디겠는가? 그러나 전례를 잘 모르므로 해조를 시켜 전례를 상고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하였다.
12월 4일 경진
예조(禮曹)에서 국장(國葬) 전에 장사하고 제사하는 것을 금하고 국장 뒤에 혼인을 금하는 등의 일을 여쭈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장사는 먼저가 경하고 뒤가 중하므로 국가에서 사향(祀享)을 중지하는 일을 행할 수 있으니, 사제(私祭)는 감히 행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묘제(墓祭)를 중지하는 것은 이미 정론(定論)이 있으나, 기제(忌祭) 때에 예절을 갖추지 않고 주과(酒果)로 상사(喪事) 끝의 슬픔을 펴고 매월 초하룻날에 선현(先賢)에게 참배하는 것은 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의 의논도 같으니,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2월 6일 임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780) 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역적의 지속(支屬)은 죄다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였는데, 섬의 인심이 육지와 달라서 죄를 입었거나 주인을 배반한 자들이 다 들어가 농사를 일삼지 않고 어채(漁採)를 생업으로 삼으므로, 품성이 사납고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으니, 이번 역적을 여러 섬에 정배한 것은 참으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양남(兩南)의 조운(漕運)이 막힐 걱정이 없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해방(海防)의 여러 곳에서 때때로 기찰(譏察)하되, 정배한 무리를 각 고을에 흩어 살게 하여 토착(土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섬을 소굴로 삼아 주진(朱陳)의 마음을 이룬다면781) , 어찌 도둑이 될 염려가 없겠는가? 눈앞의 근심이 없고, 또한 이미 죽은 풀과 같은데, 이처럼 소요하면 업신여김을 당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점차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이 황력 재자관(皇曆䝴咨官)의 수본(手本)은 도하(都下)에서 한 번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은 본디 소동이 없는데 우리 나라에서 먼저 스스로 겁내는 것이 괴이하고, 옹정(雍正)782) 의 일도 한 번 웃을 만하다. ‘기유 7년(己酉七年)’이라는 말에 과연 무슨 응험이 있겠는가마는, ‘연종진수(年終盡數)’라는 넉 자를 ‘세응전수(歲應全數)’라 고치도록 하라.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이것을 일삼는 것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기(己)’·‘칠(七)’ 두 자를 써내지 않더라도 존망의 운수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강희(康熙)783) 라면 결코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도 강쇄(降殺)의 탓이니, 어리석은 백성이 의혹하는 것이 괴이할 것도 없다."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김몽좌(金夢佐)의 일은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의현(李宜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화(禍)를 빚었을 때에 역적 박필몽(朴弼夢) 등이 연차(聯箚)한 일에 대하여 논하고 신(臣)들을 가리켜 순종하였다고 하였으니, 저들이 꾸민 죄안(罪案)에 차등이 없지는 않았으나, 죄명은 똑같았습니다. 그 뒤 여러 억울한 일을 풀어 줄 것을 의논할 때에 신이 울면서 이제까지 여러 신하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성을 아뢰고, 추포(追褒)하는 은전을 내리기를 청하여 드디어 복관(復官)하고 사시(賜諡)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국가의 처분이 일체 도치(倒置)되어 다시 극률(極律)을 가하고 장심(將心)784) 으로 지목하였습니다. 대저 장심은 본디 반역이고, 그 장심에 순종하였다는 것도 반역인데, 또 그 충성 때문에 죽은 것을 힘껏 칭송하고 드러내어 장려하는 은전까지 청하였으니, 어떠한 죄가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걸리는 죄안의 첫째입니다. 지난해부터 시의(時議)가 또 현재의 두 상신(相臣)에게 죄를 꾸미는 것이 매우 참혹하여 거의 땅 위에 버려두려 하지 않습니다. 신이 당초에 이미 수차(袖箚)에 대한 일을 듣고 원로 대신이 차자(箚子)를 올린 뒤에 청문(淸問)에 우러러 대답하였을 때에도 차자를 올린 뜻을 옳다고 하였으니, 두 신하의 죄가 곧 신의 죄인데, 어찌 한 시각이라도 스스로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걸리는 죄안의 둘째입니다.
신이 조정에 있던 날에 무릇 징토(懲討)하는 의리에 대해서 감히 남에게 뒤지지 아니하여 궐정(闕庭)에서 호소하고 연석(筵席)에서 진청(陳請)하는 일에 대부분 참여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오늘날 크게 죄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 사대(賜對)하셨을 때 오적(五賊)의 일로 반복하여 진청하여 늦추어 때를 기다리면 흉도(凶圖)가 발생할까 염려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고, 그 뒤에 여러 번 사대하셨을 때마다 삼사(三司)와 함께 힘껏 다투었는데, 올봄에 이르러 역적 박필몽이 과연 뭇 추악한 자를 앞장서서 이끌고 네 도(道)를 합하여 일어났으니, 신이 전일에 염려하던 것이 불행하게도 적중하였습니다. 신이 이진유(李眞儒)의 안문(按問)을 입에 내었다가 엄한 꾸중을 받게 되어 송구한 마음이 아직도 그치지 않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그때 쟁론(爭論)한 삼사가 모두 죄적(罪籍)에 있고, 성교(聖敎)에도 우롱하고 기망하였다 하여 죄라 하셨습니다. 성의(聖意)는 과연 어느 일을 가리키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토죄(討罪)한 여러 신하들도 죄가 같다면 삼사의 죄는 자연히 아울러 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이것이 신이 걸리는 죄안의 셋째입니다.
사사(史事)에 이르러서는 관계되는 것이 더욱 중대한데, 신이 외람되게 문병(文柄)에 있었으므로, 찬술(纂述)하는 일을 오로지 담당하여 시비(是非)와 여탈(與奪)을 모두 신이 주장한 것이니, 무릇 죄가 있으면 신이 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듣건대, 접때 입대(入對)한 여러 신하가 번갈아 나아가 힘껏 배척하였는데, 그 말이 대부분 위구(危懼)하여 개수(改修)하는 일까지 있었다 합니다. 그 말에 의거하면 신이 허리와 목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 끝내 가벼운 견책도 없었습니다. 여파(餘波)가 한정이 없고 형세가 하늘에 사무칠 듯하여 이당(貳堂)·말료(末僚)가 차례로 찬축(竄逐)되었고, 또한 이 때문에 병들어 요사(夭死)한 자도 있는데, 신만이 시골에서 한가하게 놀며 절로 여느 사람과 같으니, 생성(生成)의 지극한 은혜를 입었다 하더라도 동료들에게 부끄러워서 어떻게 낯을 들겠습니까? 이것이 신의 걸리는 죄안의 넷째입니다.
아! 무릇 지금의 조신(朝紳)은 조금만 다른 사람에게 배척당하면 반드시 마음대로 진퇴(進退)하여 패초(牌招)785) 를 어긴 채 인입(引入)786) 하는데, 혹 체직(遞職)되거나 파직(罷職)되고 말아도 위아래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대개 자처(自處)하는 도리로서 절로 그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걸린 것으로 말하면 얼마나 큰 죄안인데, 한결같이 물리치고 반드시 소나 말처럼 매어 두려 하십니까? 이것은 뭇사람의 뜻이 함께 답답하게 여기는 바인데, 신 같은 자는 비록 보잘것이 없으나, 또한 일찍이 외람되게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진퇴하고 출처(出處)하는 것을 더욱 사방의 인사가 바라보는 바이니, 어찌 이런 죄안을 지고도 염치를 버리고 웃음과 욕을 무릅쓰고서 조정에 끼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소 가운데의 말에 맞지 않는 것이 많으니, 내가 참으로 개탄한다."
하였다.
12월 7일 계미
국장 도감(國葬都監)의 당상(堂上)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찬미(饌米) 1백 석을 우선 내어 주어 재목을 나르는 품삯으로 삼아 조금이라도 백성의 힘을 느슨하게 하려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국가에서 이러한 때에 한 번 백성을 움직이는 것이 어찌 안될 것이 있겠는가마는, 혹 난잡한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므로 백성을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허다한 재목을 며칠 안에 나르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군문(軍門)의 전포(錢布)를 우선 대용(貸用)하고, 도감에서 인부를 고용해서 나르게 하되, 혜청(惠廳)에서 으레 내사(內司)로 옮겨 보내는 쌀이 있으니, 이것을 보태어 쓰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의 말이 위대하다. 비통하고 애도하는 가운데에서도 백성을 사랑하여 경비를 아끼는 마음이 상장(喪葬)의 제구를 마련하는 데 유감이 없게 할 때에 애연(藹然)하니, 인자(仁者)에게 뒤가 있는 사리와 우리 나라가 바랄 수 있는 희망이 여기에 있겠다."
【태백산사고본】 16책 20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95면
【분류】재정-국용(國用) / 물가-임대(賃貸)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임금의 말이 위대하다. 비통하고 애도하는 가운데에서도 백성을 사랑하여 경비를 아끼는 마음이 상장(喪葬)의 제구를 마련하는 데 유감이 없게 할 때에 애연(藹然)하니, 인자(仁者)에게 뒤가 있는 사리와 우리 나라가 바랄 수 있는 희망이 여기에 있겠다."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김유경(金有慶)·신노(申魯)·조정순(趙正純)을 석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김유경의 양이(量移)787) 를 윤허하고 나머지는 다 따르지 않았다. 이광좌가 ‘조정순이 신(臣)을 논하였는데 아직도 적소(謫所)에 있으니 이것이 신이 불안한 까닭입니다.’ 하였기 때문이다.
12월 10일 병술
초복(初覆)788) 을 행하였다.
12월 11일 정해
이태좌(李台佐)를 우의정(右議政)으로, 홍경보(洪景輔)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춘제(李春躋)를 사간으로, 허옥(許沃)을 정언(正言)으로, 한사득(韓師得)을 지평(持平)으로, 이세진(李世璡)을 헌납(獻納)으로, 신치근(申致謹)을 부교리(副校理)로, 이현모(李顯謨)를 수찬(修撰)으로, 이봉익(李鳳翼)을 승지(承旨)로, 박사익(朴師益)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덕원 부사(德源府使) 김한국(金翰國)을 나문(拿問)하였다. 김한국은 동궁(東宮)을 위하여 성복(成服)한 지 며칠 뒤에 검은 의관(衣冠)을 착용한 채 기녀(妓女)를 끼고 여느 때처럼 형벌을 썼으므로, 감사(監司) 송진명(宋眞明)이 장문(狀聞)하여 나처(拿處)하기를 청하였다.
12월 12일 무자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12월 14일 경인
이진수(李眞洙)를 승지(承旨)로, 김진상(金眞商)을 부교리(副校理)로, 정우량(鄭羽良)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12월 15일 신묘
하교(下敎)하기를,
"한문제(漢文帝)가 단상(短喪)한 뒤로 3년의 제도가 역대(歷代)에서 회복되지 않았는데, 무술년789) 에 우리 성고(聖考)께서 역대에서 회복되지 않았던 일을 회복하셨다. 경자년790) 대상(大喪) 때에 그 제도를 따라 비로소 3년상을 행하여 천고의 누를 쾌히 씻었는데, 그래도 역월(易月)의 제도가 있었으나, 이번에 원량(元良)의 상에 따라 역월의 제도도 남김없이 씻었다."
하였다.
12월 16일 임진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비망기(備忘記)에, ‘두 동조(東朝)의 궁인(宮人)의 담복(淡服)과 길복(吉服)은 상전(上殿)의 복색을 따라야 하겠지만, 중궁(中宮)은 나의 복이 다하기 전에는 나의 복색을 따라야 할 것인데, 해조(該曹)에서 처음에 잘 살피지 못하고 마지막에 구차하게 부표(付標)해서 또한 살피지 못하였다. 이 일은 미안한 데에 관계되니, 해당 당상(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을사년791) 의 전례를 다시 상고하여 계품(啓稟)하여 문의(問議)하라고 하교한 뒤에 혹 나가는 것을 지체하거나 혹은 아직까지 나가지 않았으니, 해조의 당상(堂上)을 모두 추고하라.’ 하셨습니다. 을사년 연제(練祭) 때의 절목(節目)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상궁(尙宮) 이하의 복색과 같게 하고, 내시(內侍)와 각 차비인(差備人)은 각전의 내시 이하의 복색과 같게 하는 것으로 마련하여 계하(啓下)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복제(服制)에 대왕 대비전과 왕대비전(王大妃殿)의 상궁·내시 이하의 복색은 대략 을사년의 절목을 본떠 두 동조의 복제 단자(服制單子) 가운데에 개부표(改付標)792) 하여 들였고, 졸곡(卒哭) 이후 조신(朝臣)이 진현(進見)하는 복색과 사가(私家)의 대소의 상제(祥祭)·우제(虞祭)·졸곡을 참작하여 정하는 일은 예(禮)를 아는 유신(儒臣)에게 문의할 것으로 승전(承傳)을 봉입(捧入)하였고, 조신(朝臣)이 은전(殷奠)793) 에 참반(參班)하는 일은 밖에 있는 대신·유신에게 수의(收議)하는 낭관(郞官)이 하직(下直)한 때이므로 마찬가지로 문의하러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가(可)하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19일 을미
임금이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를 인견(引見)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곤수(閫帥)·영장(營將)이 얼마나 중요한 직임입니까? 평소 등용하는 데에는 유약(柔弱)한 사람만을 뽑았다가 어지러울 때에 갑자기 다른 사람을 가려 보내어 절충(折衝)하고 어모(禦侮)하기를 요구하니, 사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 뒤로는 위급할 때에 믿을 만한 사람을 특별히 가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 방도는 자목(字牧)에 적합하면 주부(州府)에 있게 하고, 곤수에 적합하면 절진(節鎭)을 맡겨서 그 재기(才器)에 따라 쓰는 것이 옳은데, 우리 나라는 오로지 문벌에 따라 사람을 쓰므로 번번이 인재가 적은 것을 걱정한다. 전백론(全百祿)은 북도(北道) 사람인데 선조(先朝)에서 수사(水使)에 발탁하였고, 전성일(田成一)은 특별히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하였는데 그때에 물의가 있으니, 선조에서 명나라 병부 상서(兵部尙書)의 자손으로서 어찌 이 직임을 맡을 수 없겠느냐고 하교하셨다. 접때 병비(兵批)794) 의 정사(政事) 때에 김중만(金重萬)을 오위 장에 의망(擬望)한 것도 격려하는 뜻에서 나온 줄 알고 있는데, 모든 군문(軍門)의 공이 있는 자를 각별히 발탁하여 써야 장사(將士)가 힘을 다할 것이니, 한 가지 재주가 있더라도 각별히 거두어 쓰라고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이선행(李善行)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황해 병사(黃海兵使) 민제장(閔濟章)은 집안에 들어앉아 병을 요양하느라 크고 작은 군무(軍務)를 게을리하여 무슨 일인지 모르니, 청컨대, 파직하여 중대한 직무를 비우지 말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해미 현감(海美縣監) 이현(李炫)은 마음대로 병선(兵船) 한 척과 노질을 잘하는 군사 수십 명을 친한 사인(私人)에게 빌려 주어 가재(家材)를 실어 나르게 하였는데, 수십 일 뒤에야 비로소 돌아와 정박하였으니,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곤수를 자주 체차(遞差)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소(疏) 끝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정제(李廷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양(高陽)에서 맡은 청주목(淸州牧)의 증미(拯米)795) 는 이미 내년 가을이 되거든 거두어들이게 하였으나, 금위영(禁衛營)에서는 잇따라 독촉하여 받아들이니, 일체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어야 하겠습니다. 교하(交河)에서 맡아 온 북한(北漢)의 쌀 7백여 석은 본읍(本邑)에서 받아 두어 내년 봄의 위급함을 구제해야 하겠습니다. 파주(坡州)는 지방관(地方官)으로서 모든 책응(責應)하는 것이 다른 고을보다 10배나 더할 뿐만 아니니, 묵은 환자곡(還子穀)을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는 외에 역(役)을 면제하고 베[布]를 줄이는 등의 일을 한결같이 가장 심한 고을의 예에 따라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연서(延曙) 등 네 역(驛)은 변란 때에 거의 북한의 쌀을 받아 먹은 일이 있는데, 산성(山城)에서 날마다 독촉하여 거두어 들이면서 매질하고 가두므로 거의 난리와 같으니,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탕감(蕩減)하여 조금이라도 지탱할 방도를 삼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아뢴 것을 모두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2월 20일 병신
김시환(金始煥)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윤동형(尹東衡)을 지평(持平)으로, 윤광익(尹光益)을 수찬(修撰)으로, 신치운(申致雲)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백관(百官)이 동궁(東宮)의 복을 입되 백포모(白布帽)로 기년(期年)을 마치게 하였다. 당초 동궁의 상이 난 뒤에 백관의 관복(冠服)을 대신(大臣)들과 예(禮)를 아는 유신(儒臣)에게 묻게 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혼자 말하기를,
"천담복(淺淡服)과 백포(白袍)는 그리 다를 것이 없고, 또 상전(上殿)의 복색을 따르는 규례가 있는데, 성상께서 이미 기최(期衰)를 입으셨으니, 우선 그대로 지금 입은 복색으로 하여도 불가(不可)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백관에게 명하여 기년(期年)을 마치되 백모(白帽)·백포를 입게 하였다.
12월 21일 정유
정우량(鄭羽良)을 수찬(修撰)으로, 조명교(曺命敎)를 부수찬(副修撰)으로, 강필신(姜必愼)을 장령(掌令)으로, 김흥경(金興慶)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12월 22일 무술
승지(承旨) 채팽윤(蔡彭胤)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채팽윤은 일찍이 숙종조(肅宗朝)에 21세로 호당(湖堂)에 뽑혔고 시명(詩名)이 일세에 떨쳤으나, 갑술년796) 이후로 배척되어 조용(調用)되지 않았으므로 문을 닫고 조용히 살면서 크게 문장에 힘쓰고 학도(學徒)를 교육하였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시종(侍從)에 들어간 자가 네 사람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옥당(玉堂) 신치근(申致謹)이 그 일을 아뢰었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였다.
대사간(大司諫) 홍경보(洪景輔)가 상소하여 여섯 가지 조목을 논하였다. 첫째는 성궁(聖躬)을 보전하여 경명(景命)을 맞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대지(大志)를 분발하여 비운(否運)을 구제하라는 것이고, 셋째는 징토(懲討)를 엄명(嚴明)히 하여 윤상(倫常)을 바로잡으라는 것이고, 넷째는 붕당(朋黨)을 타파하여 인재를 수용(收用)하라는 것이고, 다섯째는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민력(民力)을 펴게 하라는 것이고, 여섯째는 군정(軍政)을 수거(修擧)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12월 23일 기해
임금이 돌아온 세 사신(使臣)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정석삼(鄭錫三)·신치운(申致雲)을 인견(引見)하였다. 이요가 말하기를,
"사책(史冊)의 인간(印刊)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직 멀었는데 역관(譯官)을 시켜 알아보았더니, 우리 나라에서 고치기를 바라는 것은 죄다 고쳤으나 열전(列傳)에 붙인 것은 황제가 친히 필삭(筆削)하므로 아직 다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까지 미안하던 문자를 과연 이미 개간(改刊)하였는가?"
하자, 요가 소매 속에서 기록한 글을 내어 읽기를,
"3월 계묘(癸卯)797) 에 이(李) 【인조(仁祖)의 휘(諱).】 가 그 국왕 혼(琿)798) 을 폐하고 자립(自立)하였다는 말은 이제 3월 계묘에 조선에서 그 임금 이 【인조의 휘.】 를 세웠다고 고친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그 말과 같다면 고친 것이 자못 잘 되었는데, 그 책자를 못보니 매우 답답하다."
하였다.
12월 25일 신축
서명빈(徐命彬)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임집(任)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임금이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광덕(李匡德)에게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호남 백성의 고락을 오로지 경(卿)에게 위임하였는데, 방백(方伯)을 면교(勉敎)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으나 관리들을 칙려(飭勵)하는 것은 경 한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에 힘써 오늘 면유(勉諭)하는 뜻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각사(各司)의 구임(久任)799) 하는 낭청(郞廳)을 불러서 보고 폐단을 순문(詢問)하였다. 임금이 이판(吏判) 김동필(金東弼)에게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규모는 인재를 얻는 것밖에 없다. ‘수령을 가린다[擇守令]는 석 자가 가장 중요하니, 여느 때에도 마땅히 신중하게 가려야만 하는데, 더구나 변란을 겪은 뒤이겠는가? 비록 대순(大舜) 같은 성인으로서도 16인을 얻고서야 다스렸다. 지금 3백 60주(州)의 수령을 죄다 가리기는 어려우나,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구하면 적중하진 않더라도 매우 어그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접때 영상(領相)과도 말한 적이 있거니와, 대저 사람을 쓰는 도리는 각각 그 기량에 따라서 쓰는 것이니, 주목(州牧)에 적합하면 주목에 쓰고 군현(郡縣)에 적합하면 군현에 쓰되, 문벌을 보지 말고 재능에 따라 쓴다면 어찌 인재를 얻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은 문벌만 취하므로 그 길이 매우 좁다는 것을 전에도 말하였다. 비·이슬·서리·눈은 땅을 가리지 않고 내리니, 임금이 사람을 쓸 때에 어찌 귀천에 얽매이겠는가? 전일 박사정(朴師正)을 외방에 보임하였다가 그 수토(水土)가 좋지 않다고 하므로 곧 갈았는데, 나는 가서 교대한 자에게는 무슨 죄가 있느냐고 생각한다. 시종(侍從)인 사람이 반드시 좋은 곳을 가리니, 한미한 무리가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폐읍(弊邑)·악향(惡鄕)에는 반드시 한미한 잡기(雜技)의 무리를 쓰므로 고을에도 폐단이 있고 백성도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니, 괴롭고 헐한 것이 고루 나뉘어진 후에야 그 폐단이 없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는 법제(法制)를 오랫동안 준수(遵守)하지 못하는데, 과연 고쳐서 유리하다면 소각(銷刻)한다는 혐의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호조(戶曹)·병조(兵曹)의 구임(久任)으로 말하면 미포(米布)를 맡은 아문(衙門)이므로 가려서 맡기기도 하나, 그 나머지 구임은 늙고 병든 사람으로 수를 채우는 것이 이미 신칙(申飭)한 뜻에 어그러지는데, 이제는 구임하는 법이 점차로 해이해져서 마침내 폐지될 지경에 이르렀으니, 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민망스럽다. 만약 인재(人材)가 절핍(絶乏)됨을 염려한다면, 색목(色目)·한산(閑散)을 논하지 말고 파직(罷職)된 사람일지라도 자목(字牧)에 적합한 자가 있거든 전조(銓曹)에서 주(注)를 달아 의망(擬望)하여 들이도록 하라. 그러면 서용(敍用)하여 보내는 것을 윤허할 것이니, 상격(常格)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을 가리는 것만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7일 계묘
임금이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정제(李廷濟)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지금 기내(畿內)의 여러 고을이 국역(國役)에 지쳤는데, 이런 때에는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부지런히 힘써야 하니, 백성을 보전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면 모두 아뢰어야 마땅하다. 애통하여 마음을 태우는 가운데에서도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니, 어찌 차마 국역으로 백성을 괴롭히겠는가? 나도 스스로 힘쓰겠으니, 경도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열줄의 하교가 인천(仁天)·덕해(德海)처럼 애연(藹然)하니, 대개 백성을 화평하게 하는 정성이 천품에 근본하기 때문입니다. 상을 다하여 애통해 하는 가운데에서도 오직 민역(民役)을 늦추는 것을 첫째 의리로 삼으니, 아! 덕이 지극합니다.
도정(都政)800) 을 행하였다. 심택현(沈澤賢)을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지돈녕(知敦寧)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진순(李眞淳)을 승지(承旨)로, 윤동형(尹東衡)을 교리(校理)로, 이세진(李世璡)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동필(金東弼)이 정사(政事)를 주관하였다.
12월 28일 갑진
권굉(權硡)을 지평(持平)으로, 정형복(鄭亨復)·신치운(申致雲)을 응교(應敎)로, 이현모(李顯謨)를 부교리(副校理)로, 윤휘정(尹彙貞)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종성(李宗城)을 헌납(獻納)으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이 어찌 사람에게 달려 있겠는가? 장수와 단명을 고르게 하는 것도 천리이다. 당초에 나문(拿問)을 청한 것은 사체(事體)를 보존하려는 것이었겠으나, 선조(先朝) 신사년801) 의 하교가 극히 마땅하므로 경자년802) 이후로 이 하교를 따라 행하였으니, 금오(金吾)에서 의처(議處)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한 해가 끝나 가는데 한 해를 넘겨도 결단하지 못하면 선조에서 정제(定制)한 성대한 뜻에 어그러지니, 수의(首醫) 이외는 모두 삭직(削職)하여 방송(放送)하도록 하라. 수의 권성징(權聖徵)은 대간(臺諫)의 계청(啓請)을 윤허하기는 하였으나 귀양보내는 것은 경자년 이후로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다시 시작할 수 없으니, 마찬가지로 삭직하여 방송하고 국방(局方)에서 삭적(削籍)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9일 을사
정언(正言) 허옥(許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접때 이진유(李眞儒)를 섬에 안치(安置)하기를 계청하였었는데, 듣건대, 근일에 성상께서 두 사람이 오히려 육지에 나와 있으니 이진유만 달리함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셨다 합니다. 비지(批旨)가 그러하였으므로, 지평(持平) 임집(任)이 감히 드러내어 쟁론(爭論)하되 역적의 공초(供招)에 쓰지 않았다고까지 말하고, 방자하게도 정계(停啓)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근원을 소급하여 통렬히 진술하겠습니다. 올봄의 역변(逆變)은 실로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에서 비롯되었는데, 역적 김일경은 추악한 무뢰배로서 하류(下類)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김일경을 여우 새끼처럼 보지만, 단지 이진유 등은 편당(偏黨)에 가리워 그 우익(羽翼)이 되어 부식(扶植)하니, 그 세력이 더욱 왕성해졌습니다. 김동필(金東弼)을 보더라도 김동필이 감히 김일경의 죄를 바로 말하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는데, 이진유가 앞에서 창도(倡導)하고 이명언(李明彦)이 뒤에서 이어받으니, 김동필이 거의 영해(嶺海)로 귀양가는 것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에 청의(淸議)를 지키던 자는 혹 항론(抗論)하고 토죄(討罪)할 생각이 있었으나, 말은 이루어지지 않고 화가 먼저 이를까 두려워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저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또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에 부끄러움이 성해지자, 선류(善類)는 입을 다물고 말았으니, 마침내 오늘날의 화를 빚은 것이 과연 누구의 죄입니까?
지금 이진유를 구제하는 자는 혹 이진유가 죄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3년 동안 도배(島配)한 것은 역시 너무 심하다 하나, 을사년803) 에 귀양보낸 것은 신축년804) 에 따라서 참여한 소(疏)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데, 더구나 올해의 역란(逆亂)을 겪고 모든 사람의 뜻이 팔을 걷어붙이고 분격하는 것이겠습니까? 근본에 소급하여 근원을 궁구하면 당시에 김일경을 토죄한 것이 엄하지 못하였던 것이 더욱 한스러운데, 김일경을 엄중하게 토죄하지 못하게 한 자가 바로 이진유입니다. 이것으로 그를 꾸짖으면 그가 장차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당애(黨愛)에 병든 자는 도리어 앞장서서 대송(代訟)하니, 이진유의 창자가 역적 김일경과 연결되어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 나왔다면 그 처지는 바로 또 하나의 박필몽(朴弼夢)이요 하나의 이명의(李明誼)일 것입니다. 천망(天網)이 느슨하더라도 반드시 도피하지 못할 것인데 도리어 어찌 도배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제 역적의 공초에 나오지 않았다 하여 역적 김일경을 부식(扶植)했던 죄도 아울러 벗으려 하니, 과연 사리에 맞는 말입니까? 김일경은 천고에 없던 역적이니, 그 마음을 알고 그를 부식한 자도 한 역적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이로써 이론을 세운 대관(臺官)과 처치한 유신(儒臣)에게 물으시되, 다른 새 의견이 있어 신의 말을 꺾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신은 망령된 말을 하여 남을 무함한 죄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제 네가 상소한 뜻이 매우 강개한 것을 보니,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이때 국옥(鞫獄)을 아직 수습하지 못하였다. 이경지(李慶祉)는 정사효(鄭思孝)의 중군(中軍)으로서 몰래 박사관(朴師寬)과 체결하고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과 주무(綢繆)하였다가, 박필몽·박필현이 패하고서야 비로소 박사관·박필현 등을 잡아 바쳤는데, 군교(軍校) 이주연(李周衍)·백문채(白文采)가 끌어 대었으므로 세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며, 박창제(朴昌悌)는 권익관(權益寬)의 중군이 되어 건량(乾粮)·장포(醬布)와 군사를 모아 역적에게 응하려 꾀한 것이 안무사(按撫使) 윤헌주(尹憲柱)에게 발각되어 대간(臺諫)의 계청으로 국문(鞫問)하였는데, 다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다. 김몽좌(金夢佐)는 무장(茂長)의 수령(守令)이 되어 박필몽이 반역하고 달아날 때에 관례(官隷) 30명을 내어 병장(兵杖)을 가지고 호송하게 하였으므로, 대간의 계청으로 나국(拿鞫)하였는데, 완강히 저항하고 형장을 맞다가 죽었다. 이명의·이명언은 여러 번 역적의 공초에 나왔는데, 이명의는 네 차례 형신받고 죽었고 이명언은 도로 섬으로 유배(流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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