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정미
임금이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를 인견(引見)하였다. 이광좌(李光佐)가 동궁(東宮)의 환후(患候)를 묻고 나서 아뢰기를,
"양역(良役)의 변통을 처치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한 필(匹)을 줄인다면 신역(身役)을 고르게 할 수 있겠지만, 그 한 필을 갈음할 수를 채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달아나거나 죽은 수를 채우는 책임을 바야흐로 오로지 삼남(三南)의 방백(方伯)에게 맡기는데, 박문수(朴文秀)는 사람됨이 도량이 있고 이광덕(李匡德)은 사람됨이 깨끗하고 밝아서 모두 장점이 있으니, 성상께서 위 문후(魏文侯)가 악양(樂羊)을 믿고 쓴 것717) 처럼 하신다면 성효(成效)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박문수는 지혜가 있으나 혈기가 많고 이광덕은 밝고 투철하나 자기 뜻만을 고집하니, 경(卿)이 이것을 두 사람에게 칙려(飭勵)함이 옳겠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이 하교하신 말씀의 뜻을 글로 만들어 칙려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양남(兩南)의 감사(監司)를 어사(御史)로 제배(除拜)한 것은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마땅한 사람에게 위임하였으니, 걱정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는 감사 이형좌(李衡佐)가 설치하는 모든 일을 다 잘하고, 평안 감사 윤유(尹游)는 정치에 이미 두서를 이루었고, 함경 감사 송진명(宋眞明)은 새로 제배되었다고는 하나 요즈음 장계로 보면 반드시 잘할 것이고, 황해 감사 김시혁(金始㷜)과 경기 감사 이정제(李廷濟)는 장계로 보더라도 그 다스리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서(湖西)는 양남과 같지 않으나, 일을 당하면 반드시 착오되는 일이 있을 것인데, 염려되는 것은 지나치게 인자한 것이니, 경 또한 이 뜻을 글로 만들어 면려(勉勵)하도록 하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기는 하나, 그 부족한 것을 면려하는 것은 조정에서 일을 같이하는 사람만 못하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삼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11월 2일 무신
대사헌(大司憲) 이병상(李秉常)을 삭출(削黜)718) 하였다. 이병상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은 신축년719) 연차(聯箚)에 찬성한 사람입니다. 그때 혹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 데에는 다행하고 불행한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죽일 때에 귀양가고 신리(伸理)할 때에 거두어진 것으로 말하면, 굴신 영욕(屈伸榮辱)을 상관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연차(聯箚)를 바야흐로 악역(惡逆)으로 논하여 단서(丹書)의 죄적(罪籍)이 죽은 사람에게까지 미쳐서 이미 내린 시호(諡號)를 삭제하고 이미 만든 서원(書院)을 허물었으니, 찬성한 자는 본디 한결같이 이미 행한 예(例)에 의하여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성자(聖慈)가 지나치게 인서(仁恕)하여 다시는 연좌를 현저히 시행하지는 않으시더라도, 추방하여 전리(田里)의 편맹(編氓)을 잡아 청조(淸朝)의 사적(仕籍)에 끼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인데, 이제 조정의 처분에 전혀 결말이 없습니다. 묘당(廟堂)에서는 스스로 징토(懲討)를 엄하게 한다고 하나, 양전(兩銓)의 극망(極望)에 구애됨이 없고, 전조(銓曹)는 반드시 탕평(蕩平)을 핑계하려 하여 대헌(臺憲)의 청선(淸選)에 주의(注擬)720) 받았습니다. 죄가 있고 죄가 없는 사이에서 엄호(掩護)하고 잠시 놓아 두었다가 곧 부리는 사이에서 우롱하는데, 그 시비(是非)가 전도(顚倒)되고 본말(本末)이 어긋나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어찌 매우 우습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대한 이 일이겠습니까? 추탈(追奪)은 또한 죽은 사람에 대한 극벌(極罰)인데, 이제 유명(幽明)을 달리하는 즈음에 차마 떠맡아서 스스로 화복(禍福)을 달리하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처럼 염치없고 의롭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한산한 군직(軍職)일지라도 그 거취를 의논할 수 없는데, 더구나 이 언책(言責)의 중임(重任)이겠습니까?
요즈음의 일로 말하더라도, 저 대신(大臣)은 총애가 바야흐로 융숭하고 세력이 바야흐로 강성하여, 소원(疏遠)한 소신(小臣)이 독립하여 과감하게 말하고 대각(臺閣)의 풍채가 넉넉히 많은 자는 아깝게도 충성을 펴기 전에 엄한 벌이 먼저 가해져 황급히 해도(海島)로 귀양보내니, 듣는 자가 놀라 의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성조(聖朝)의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머뭇거리며 잠자코 보고만 있고, 끝내 감히 무릅써 한 마디 말을 올려 위로 명주(明主)의 흠을 보도(補導)하고 아래로 직신(直臣)의 기개를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의 언론이 매우 연약할지언정 그 마음에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구하게 스스로 주자(朱子)의 둔퇴(遯退)할 때를 당하여 글을 불사른다는 뜻에 붙이는 것인데, 또한 시세가 그렇게 시키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니, 임금이 처분을 어지럽히고 마음껏 붕당을 비호하였다 하여 그 벼슬을 갈았다. 이윽고 또 이병상을 황해 감사(黃海監司)에 보임하라고 명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그 죄가 무거운데 벌이 가볍습니다.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그 아뢴 말을 옳게 여겨 이병상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이병상(李秉常)의 상소 때문에 약원(藥院)에서 궐문 밖으로 나갔는데, 임금이 여러 번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여 마지않으니, 이광좌가 약원에서 직숙(直宿)하는 일 때문에 명에 따라 들어왔다.
장령(掌令) 강필신(姜必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병상(李秉常)의 상소는 전편(全篇)의 뜻이 모두 시비를 어지럽히고 충역(忠逆)을 바꾸어 놓으려는 생각이니, 아!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처분이 크게 밝아지고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져 전후의 성교(聖敎)가 단청(丹靑)처럼 명백한데, 이제 그 말을 거리낌없이 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대개 평소에 임금을 사당(私黨)만 못하게 여기고 국법을 당론만 못하게 여긴 것이다. 신은 엄히 벌주어 다른 사람들을 면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건극(建極)721) 의 공부에 지극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오늘날의 조정이 구차하게 조정하려 하여도 될 수 없으니, 오히려 어찌 탕탕 평평(蕩蕩平平)한 정치를 바라겠습니까? 탕평한 도리를 행하려면 반드시 건극의 공부를 먼저 하고, 그 정당한 데를 선택하여 굳게 지켜야 하며, 또한 ‘탕평’ 두 자를 한구석에 마구 붙여서 마음속에 소통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왕부(王府)722) 의 죄인 임징하(任徵夏)는 선왕을 무함할 수 있고 임금의 명을 항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국법을 업신여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완강함을 믿고 스스로 방자하여 결안(結案)에 서명하지 않고 금오(金吾)의 보통 형장(刑杖)은 회초리처럼 여기고 세월을 보내니, 국청(鞫請)을 시켜 곧바로 결안을 받아 주토(誅討)하는 법을 엄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병상을 파직한 것은 벌이 가벼우므로 특별히 삭출(削黜)을 시행하였다. 임징하의 일도 매우 놀랍다고 생각한다마는, 한때에 쾌하게 하더라도 뒷 폐단에 관계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11월 4일 경술
임금이 동지 정사(冬至正使) 윤순(尹淳)·부사(副使) 조익명(趙翼命)·서장관(書狀官) 권일형(權一衡)을 인견(引見)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전에 청인(淸人)의 빚 때문에 모욕이 국가에 미쳤는데, 이것은 잠상(潛商)에게서 말미암았으므로, 바야흐로 신칙(申飭)하였습니다. 그런데 방물(方物) 수백 바리를 책문(冊門)부터 고차(雇車)로 나를 즈음에 상호(商胡)들이 책문에 모여와서 우리 나라 사람들과 섞여 가므로, 이 때문에 사행(使行)이 데려가는 자들과 상호가 서로 친숙해져서 빚을 내는 길을 열게 됩니다. 이번 사행 때에는 상호를 엄히 금하여 책문에서 서로 모이지 못하게 하고, 그대로 쇄마(刷馬)로 방물을 실어 나르고 고차를 쓰지 않아야 청인의 빚을 내는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다. 다만 염려하건대, 봉황성 장(鳳凰城將)이 고차에서 세(稅)를 거두어 자기 이익으로 삼는데, 고차를 쓰지 않으면 말썽을 일으킬 염려가 있을 듯하니, 이것도 살펴서 처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곳에 이른 뒤에 형세를 보아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5일 신해
조현명(趙顯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태좌(李台佐)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윤광익(尹光益)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부수찬(副修撰)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반유(泮儒)가 신이 접때 연석(筵席)에서 말한 것 때문에 유적(儒籍)에 부황(付黃)723) 하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접때 공관(空館)724) 하였을 때에 차자(箚子)를 올리고 연석에서 아뢴 것은 성교(聖敎)가 지나친 것을 거두기를 바라고 학정(學政)의 수거(修擧)를 우러러 권면한 것인데, 무엇이 유생들을 저버린 것이기에 갑자기 이런 전에 없던 일을 당해야 합니까?"
하고, 교리(校理) 김상성(金尙星)이 연석에서 아뢴 것이 이종성과 다름없다 하여 의리를 끌어대어 상소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반유가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고 이런 놀라운 일을 하였으니, 잘못은 저들에게 있다. 너희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하였다.
11월 6일 임자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진연(診筵)에 나아갔다. 하교(下敎)하기를,
"이종성(李宗城)이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는데, 약방 제조(藥房提調) 김시환(金始煥)이 말하기를,
"반유(泮儒)가 이종성이 현관(賢關)을 죄를 짓고 도망한 자의 소굴과 다름없다고 한 것으로 잘못 들었으므로, 유생의 논의가 한꺼번에 일어나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석에서 한 말이 잘못 전해져 이렇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유생이 진신(縉紳)을 벌하는 것은 선조(先朝)의 금령(禁令)이 이미 있었다. 선비의 도리로 말하더라도 자기를 배척한 까닭에 경악(經幄)에 출입하는 사람을 경솔히 벌한 것은 매우 놀라우니, 재임(齋任)은 3년 동안 정거(停擧)725) 시키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본관(本館)의 당상(堂上)을 시켜 반유에게 연석에서 한 말이 잘못 전해졌다는 뜻을 타일러 곧 부황(付黃)을 풀도록 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유생들이 명에 따라 도로 들어갔는데, 이종성을 해벌(解罰)하라는 분부와 다시 재임이 벌받았다는 것을 듣고는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없다며 의리를 끌어대어 드디어 공당(空堂)하고 나갔다. 이때 재임 윤득재(尹得載)가 생각하는 바를 써 보낸 데에, ‘이종성이 겉으로는 광구(匡救)하는 빛을 보이고 속으로는 난처한 사람을 더 괴롭힐 생각을 하여 흐렸다 개었다 열었다 닫았다 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사기(士氣)가 떨치지 않는다 한 것은 어그러지고 격렬한 것을 꾸짖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종성이 아뢴 것은 첫째 현관을 위하고 둘째 사습(士習)을 위한 것인데,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고 도리어 노여움을 남에게 가하였으니, 현관을 지키고 성훈(聖訓)을 배우면서 노여움을 옮기고 자신의 잘못은 은폐하는 것이 모두 어찌 이리 지나친가? 잘 타이르지 못하여 이런 장황한 말을 듣게 되었고, 삼가도록 명한 뜻이 아주 없으니, 더욱 스스로 부끄럽다."
하였다.
11월 7일 계축
이날 동궁(東宮)의 환후(患候)가 더 위중하였다.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가 어수당(魚水堂)에서 구대(求對)하였다.
11월 8일 갑인
왕세자가 진수당(進修堂)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이때 환후가 날로 위중해져 가므로, 임금이 기품(氣稟)이 본디 청약(淸弱)하다 하여 삼다(蔘茶)를 쓰려 하였으나, 약원 제도들이 번조(煩燥)한 것을 염려하여 귤피죽여탕(橘皮竹茹湯)을 청하였는데, 끝내 결정하지 못하였다.
11월 9일 을묘
조최수(趙最壽)를 대사성(大司成)으로, 박사익(朴師益)을 지돈녕(知敦寧)으로, 양득중(梁得中)을 장령(掌令)으로, 신치근(申致謹)을 지평(持平)으로, 조명교(曺命敎)를 검상(檢詳)으로 삼았다.
대사헌(大司憲)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듣건대, 접때 호남(湖南)의 유생(儒生)이 한 소(疏)를 바쳐 성상께서 역적을 평정하신 공렬(功烈)을 성대히 아뢰고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후사(喉司)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합니다. 설령 그 소가 올려졌더라도 전하께서는 일월(日月)같은 밝음으로 도깨비 같은 무리의 뜻을 통촉하실 것이니, 그 말이 절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줄 본디 압니다. 더구나 물리쳐졌으니, 더욱 논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의혹되는 것이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임금의 마음이 있는 곳에는 신하가 반드시 바람이 지나가면 풀이 움직이듯이 따른다 하는데, 이것은 반드시 그러한 형세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겸덕(謙德)을 지키려 힘쓰는데 과대(夸大)하는 일을 바라는 사람이 있고,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직언(直言)을 듣는 것을 기뻐하시는데 아첨하는 말을 아뢰는 사람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신은 황공합니다마는, 전하께서 겸덕을 좋아하시기는 하나 은미한 가운데에 혹 조금이라도 자만(自滿)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시고, 전하께서 직언을 좋아하시기는 하나 받아들일 때에 혹 도리에 어긋나고 상례(常例)에 어긋난 말을 따르는 치우침이 없지 않으시므로, 도깨비 같은 무리가 이를 엿보고 이렇게 상소하는 일이 있게 된 것이 아닌지요? 전하께서는 이에 대하여 돌이켜 스스로 반성하시고, 더욱더 겸양을 따르고 아첨을 물리치는 데에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전하의 일을 생각하건대, 조짐을 막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하니, 작은 불이 붙기 시작할 때에 일찍 다스리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신은 현관(賢關)에 분부하여 상소한 유생의 성명을 적발하여 부황(付黃)·영삭(永削) 등 유림(儒林)의 벌을 주게 하고, 정원(政院)에 신칙(申飭)하여 이런 상소가 잇따라 이르는 일이 있으면, 전과 같이 물리치고 일체 받아들이지 말게 하고, 이어서 법전에 싣도록 명하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내가 덕이 없기는 하나, 어찌 이런 괴이한 일이 있을 줄 알았겠는가? 소두(疏頭)를 곧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여 내 뜻을 보이라."
하였다.
11월 10일 병진
임금이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광좌(李光佐)·제조(提調) 김시환(金始煥)·부제조(副提調) 송성명(宋成明)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동궁(東宮)의 환후가 더욱 침중(沈重)하였으므로,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태좌(李台佐)·이조 판서(吏曹判書) 김동필(金東弼)·이조 참판(吏曹參判) 송인명(宋寅明)·공조 참판(工曹參判) 박사수(朴師洙)도 모두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동궁의 환후가 이러하므로 종묘(宗廟)·사직(社稷)에 기도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을 듯한데, 전례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태좌가 말하기를,
"이것은 전례를 상고해 볼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면 오르내리시는 조종(祖宗)의 신명이 어찌 국본(國本)을 잠잠히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본디 벼슬이 높고 낮은 데에 달려 있지 않고, 또 일이 있으면 고하는 것은 왕공(王公)과 필서(匹庶)가 다를 것이 없다. 날짜를 잡지 말고 기도제(祈禱祭)를 설행(設行)하되, 이참(吏參)·공참(工參)의 나라를 위하는 깊은 정성을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기니, 특별히 차출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약방은 이날부터 익위사(翊衛司)로 옮겨 입직(入直)하게 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문안 단자(問安單子)에서 지돈녕(知敦寧) 박사익(朴師益)·완릉군(完陵君) 이현록(李顯祿)·행사직(行司直) 심택현(沈宅賢)·사직(司直) 홍현보(洪鉉輔) 등이 들어온 것을 보고 모두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직 근심하는 가운데 경(卿)들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곧 소견(召見)한 것은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 뒤로는 거취를 전과 같이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좌상(左相) 홍치중(洪致中)이 강교(江郊)에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근심하여 마음이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다행하게 여겼다."
하였다. 임금이 또 승지(承旨)를 전옥(典獄)에 보내어 여느 사유(赦宥) 때에 용서하지 않을 자 이외의 죄가 가벼운 죄수는 곧 석방하고, 국체(國體)에 관계되는 자는 우선 보방(保放)726) 하고 품지(稟旨)를 기다리게 하고, 금오(金吾)의 죄수들의 문안도 가지고 들어와 품지하여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교리(校理) 권혁(權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추탈(追奪)된 제신(諸臣)은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이것이 어찌 신하의 절조를 저버린 것이겠습니까? 사람을 논하는 도리는 일에 따라 일을 논할 뿐인데, 종사(宗社)를 염려하여 큰 계책을 도와 정한 것을 이심(二心)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계책을 정한 것을 죄안(罪案)으로 삼아 제신에게 화를 입히려고 꾸민 것을 공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만으로도 당장 밝힐 수 있는데 현혹하는 말이 마침내 성총(聖聰)을 가려서 일세(一世)의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졌다가 다시 변하였으니, 구천의 원통한 혼백이 두 번 죽어 억울함을 풀지 못합니다. 신은 그래서 성조(聖朝)의 거조(擧措)가 어그러지는 것이 어찌하여 이에 이르렀는지 한탄하며, 또한 나라의 일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는지 모르겠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고 상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신이 전 장령(掌令) 홍상용(洪尙容)이 상소하여 피혐(避嫌)한 것을 보니, 근일 사진(仕進)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을 곧바로 역적을 비호한 죄로 단정하고, 이것으로 대신(大臣)을 협박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 이들이 변란이 일어난 처음에 목을 움츠렸다가 오늘날 눈썹을 펴고 감히 이러한 논의를 방자히 하는 것도 전하의 오늘날의 처분을 엿보고 다시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조한위(趙漢緯)가 상소하여 고(故) 참판(參判) 정홍명(鄭弘溟)의 일을 인용한 것에 이르러서는 끌어대어 견준 것이 처음부터 맞지 않고 말뜻이 더욱이 매우 추악하고 어그러집니다. 이러한 말은 본디 서로 꾸짖을 것도 못됩니다마는, 청조(淸朝)의 대각(臺閣)에 이런 윤기(倫紀)가 없는 무식한 논의가 있으니, 이것이 서글픕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이제 권혁의 상소를 보니, 전편의 정신이 사당(私黨)을 비호하고 처분을 어지럽히려는 뜻이다. 이 소를 도로 내어 주고 우선 그 벼슬을 갈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1일 정사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여 동궁(東宮)의 증후를 논의하였다. 임금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옥루(玉淚)가 마구 흐르고 크게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도제조(都提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조정준(趙廷俊)이 처음에 증상을 잘못 잡았다 하여 여러 의원(醫員)들의 의논이 일치되지 못하였으므로, 보제(補劑)를 일찍 쓰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유시(酉時)에 동궁이 뜸을 떴다.
11월 14일 경신
왕세자가 또 뜸을 떴다.
11월 16일 임술
밤 3경(三更) 1점(一點)에 왕세자가 창경궁(昌慶宮)의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이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서 두 번째 기도를 거행하였는데, 밤에 병이 더욱 심해져 해시(亥時)에 훙서하였다. 임금이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문명(趙文命) 등을 대하여 슬피 곡하며 말하기를,
"종묘·사직을 장차 어찌할 것인가?"
하고, 한참 만에 곡을 그쳤다. 임금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에 내시(內侍)를 시켜 흑곤포(黑袞袍)를 담은 검은 함을 들려 앞세우고 임금이 뒤따라 나왔다. 장차 복(復)727) 하려 할 때에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들은 춘방(春坊) 및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계하(階下)에서 곡한 뒤에 나가서 옷을 갈아입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사(師)·부(傅)·빈객(賓客)을 지낸 사람과 입학 때의 박사(博士)와 시임(時任) 사·부·빈객과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은 마찬가지로 계하에서 거애(擧哀)하라. 을유년728) 소현 세자(昭顯世子) 상사(喪事) 때의 전례에 따라 궁성을 호위(扈衛)하고, 시임·원임(原任) 대신(大臣)과 예판(禮判)·승지(承旨)·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는 모두 유문(留門)729) 하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이광조가 말하기를,
"소현 세자의 상사 때의 전례를 춘추관(春秋館)의 당상(堂上)·낭청(郞廳)을 시켜 등록(謄錄)에서 상고해 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오례의(五禮儀)》를 들여오고 예방 승지(禮房承旨)도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어둑새벽에 예방 승지가 흑곤포를 담은 함을 받쳐들어 내시에게 전해주니, 내시가 전(殿)의 지붕 모퉁이에 올라가 호복(呼復)하고 내려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성군(礪城君) 이집(李㙫)·함평군(咸平君) 이홍(李泓), 유학(幼學) 조재호(趙載浩)·조재혼(趙載混)은 모두 와서 기다리라."
하였는데, 조재호·조재혼은 빈궁(嬪弓)의 오라버니이기 때문이었다.
11월 17일 계해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을유년730) 등록(謄錄)을 살펴보았더니, 그때 예조에서 《오례의》를 인용하여 계품(啓稟)함에 따라 위에서 찬궁(欑宮)731) 을 설치하지 말고 나흘만에 성복(成服)하게 하였습니다. 이제도 이대로 거행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그대로 하되, 을유년·무술년732) 에는 마침 4월·2월에 당하였으나, 이번에는 한추위를 바로 당하였으니, 찬실(欑室)을 덕종 대왕(德宗大王)께서 동궁에 계시다가 훙서(薨逝)하셨을 때의 전례에 따라 간략하게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오늘부터 18일까지 정원·옥당(玉堂)·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예조(禮曹)에서 을유년733) 의 전례에 따라 특별히 생기(省記)734) 하여 궐내에 입직(入直)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禮曹)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이번 왕세자 상사에는 염습(斂襲)한 뒤에 백관(百官)은 천담복(淺淡服)·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를 갖추고 예문(禮文)대로 거애(擧哀)하고, 반수(班首)가 이름을 아뢰어 받들어 위로하고, 파산인(罷散人)과 유생(儒生)·서민(庶民)은 백의(白衣)·흑립(黑笠)을 갖추고 궐문 밖에서 백관과 함께 곡림(哭臨)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대렴(大斂)·소렴(小斂) 때에 궁료(宮僚) 1원(員)과 빈궁 당상(殯宮堂上)이 같이 들어가 참여해야 합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재실(榟室)에 안치할 때에만 들어가 참여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명정(銘旌)의 서식(書式)은 전례대로 금자(金字)로 ‘왕세자 재실(王世子榟室)’이라 쓸 것인지, 감히 아룁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또 아뢰기를,
"을유년735) 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왕세자의 상사에는 성상과 중궁전(中宮殿)의 복제(服制)를 자최 기년(齊衰期年)736) 으로 만 30일을 마련하였습니다. 이것은 의경 세자(懿敬世子)737) ·순회 세자(順懷世子)738) 의 상사 때에 비롯하였는데, 절목(節目) 가운데에 장기(杖期)739) 라는 뚜렷한 글이 없었습니다. 백관(百官)의 복제에 이르러서는 자최 3월로 마련하였습니다. 무술년740) 단의 왕후(端懿王后)741) 의 상사는 그때의 대신에게 수의(收議)한 데에 따라 기공복(期功服)742) 을 역월(易月)743) 한 제도였는데, 성상께서 특별히 명하여 바로잡아 고치셨으니, 30일 역월의 제도는 이제 거론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경자년744) 의 국휼(國恤) 때에 복제를 바로잡아 고친 뒤 모든 복제의 절목이 을유년 이전의 고사(故事)와 다른 듯하므로, 감히 곧바로 을유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과 왕대비전(王大妃殿)의 복제도 마련해야 할 것인데,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막중한 전례(典禮)이므로 신들의 어리석은 학문과 얕은 소견으로는 감히 용이하게 단정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두 동조(東朝)의 복제를 문의하는 일은 곧 거행하되, 복제에는 또한 선조(先朝)의 변개하지 못할 영갑(令甲)이 있으니, 기복(期服)을 행해야 할 것이다. 백관의 복제에는 또한 양조(兩朝)에서 이미 행한 전례가 있으니, 자최 3월(齊衰三月)의 제도를 행하는 것이 옳겠다. 역월의 제도에 이르러서는 명나라의 구제(舊制)가 있기는 하나, 일찍이 무술년에 우리 성고(聖考)께서 역대(歷代)에서 회복하지 못한 일을 회복하셨으니 매우 성대한 일인데, 이제 어찌 거론하겠는가?"
하고, 명을 내려 대신에게 문의하게 하니,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는 말하기를,
"오복(五服) 안에서 높이고 낮추는 구별은 귀하고 천한 데에 그리 차이가 없으니, 요상(僚相)이 인용한 《상례비요(喪禮備要)》 오복도(五服圖)가 의거하여 행할 만한 것일 듯합니다. 삼가 성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은 말하기를,
"두 동조께서 행하셔야 할 복제는 우리 나라 제도에서 상고하여도 이미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즈음에 고례(古禮)를 두루 살펴볼 수도 없으니, 《상례비요》 오복도를 참조하여 행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왕대비전의 기년(期年) 복제와 전하의 복제를 생각하면 높이고 낮추는 절차가 없고 자최로 하는 것과 자최로 하지 않는 것은 예의(禮意)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기년 복제는 같으니 또한 방해되는 단서가 될 듯합니다. 막중한 전례이므로 억견(臆見)으로 경솔하게 의논드리기 어려운 바가 있으니, 오직 성상께서 널리 물어서 정하여 행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성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곧 유신(儒臣)에게 문의한 뒤에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반함(飯含)745) 의 전례를 상고하여 내라고 명하셨는데, 전례를 상고해 보았으나 나타난 글이 없습니다. 이 밖에 상고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하였다."
하였다.
이날 오시(午時)에 왕세자 상(喪)의 목욕(沐浴)·습(襲)을 행하고 술시(戌時)에 소렴(小斂)을 행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백관(百官)의 복제(服制)는 자최 3월(齊衰三月)로 마련하라고 명하셨으니 최복(衰服)이 있어야 할 듯하나, 3월의 복제는 방상(方喪)746) 의 복제와 다르므로 최복은 마련하지 말아야 할 듯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계품(啓稟)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자최에 어찌 최복이 없겠는가? 더구나 상례(喪禮)를 다시 밝힌 뒤에 날로 달을 바꾼다 하여 포모(布帽)를 쓰겠는가? 크게 옳지 않다. 또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낸 가운데에 최복을 입는 일이 명백히 실려 있다. 당초에 인조(仁祖)께서 명나라 장경 태자(莊敬太子)의 예(禮)를 따라 기년제(期年制)를 입으라고 명하셨다가, 뒤에 실록에서 상고해 낸 것에 따라 자최 3월로 하라는 명이 있었다. 30일의 복제에 비하면 그대로 3월을 입는 것이 중한 듯하나, 본래의 복제로 말하면 기년이 도리어 중하다. 신하의 도리로서 임금의 세자를 위하여 기년 동안 최복을 입는 것이 예(禮)에 있어서 당연하다. 구례(舊禮)를 회복한 이때에 명나라에서 이미 행한 전례를 따르고 성조(聖祖)께서 당초에 명하신 뜻을 본받아 기년 동안 자최를 입는 것이 정례(情禮)에 있어서나 사체(事體)에 있어서나 모두 마땅하다. 곧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물어서 품처(稟處)하되, 최복을 입는 일과 상시(常時)의 복색(服色)은 우선 고례(古例)에 따라 경외(京外)에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명을 내려 곧 대신에게 물었더니,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신종군복도(臣從君服圖)에는 ‘세자에게는 자최 부장기(齊衰不杖期)를 입는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의거할 만한 명문(明文)인데, 한(漢)·당(唐) 이후에는 능히 역월(易月)의 제도를 따른 일이 드무니, 더욱 구간(苟艱)합니다. 이제 전하께서 성고(聖考)를 몸받아 단호하게 위해서 행하고 미루어 뭇 신하에게 미치시니,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한결같이 고례(古禮)에 따라 뭇 신하가 따라서 자최 부장기를 입되, 무릇 1주년 동안에 상사(喪事)에 관계되는 자는 모두 최복으로 종사하고, 시사(視事) 때와 연거(燕居) 때의 복색도 다 위를 따르고, 공제(公除)747) 전에는 백포(白布)·백모(白帽)·백립(白笠)·백의(白衣)·백대(白帶)·백화(白靴)를 쓰고 공제 뒤에는 오모(烏帽)·오립(烏笠)·오대(烏帶)·백의(白衣)·백화를 쓰고, 최복을 벗을 때까지 최인(衰人)을 받지 않고 최복만 입지 않고 그 밖의 의립(衣笠)은 같이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삼가 성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도 영의정과 의논이 같았다. 하교하기를,
"의논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조(吏曹)에서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을 수묘관(守墓官)으로,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를 빈궁(殯宮)·묘소(墓所)·예장(禮葬) 세 도감(都監)의 도제조(都提調)로 삼았다.
11월 18일 갑자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번 왕세자 상사(喪事)의 공제(公除)는 이제 11월 19일에 성복(成服)하고부터 오는 12월 1일까지 계산하면 만 13일이 되니, 그달 2일부터 각 아문(衙門)에서 개좌(開坐)하여 형살(刑殺)에 관한 문서를 비로소 행하라는 뜻을 알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을유년748) 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았으나, 항시(巷市)749) 에 관하여 나타난 글이 없었습니다. 무술년750) 의 전례에 따라 5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할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을유년과 무술년은 차등이 있었을 듯하니, 7일 동안 조시를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7일 동안 조시를 정지하라고 명하셨으므로, 이대로 알렸습니다. 그런데 《오례의(五禮儀)》 국휼계령조(國恤戒令條)에 항시 5일이라 실려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후 국휼 때에 예문(禮文)에 따라 5일 동안 거행하였다면, 이번에 7일 동안 조시를 정지하는 규례를 쓸 수 없을 것이니, 5일 동안 항시하는 규례를 써야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성복 별단(成服別單)을 갖추어 입계(入啓)하였는데, 그 별단에 이르기를,
"전하(殿下)는 자최 기년(齊衰期年)인데, 의(衣)·상(裳) 【버금가는 거친 생베[生布]를 쓴다.】 ·관(冠) 【조금 고운 생베로 테두리[武]와 끈[纓]을 만든다.】 수질(首絰)·요질(腰絰) 【흩어서 드리웠다가 성복한 뒤에 다시 꼬아 맨다.】 ·교대(絞帶) 【베로 만든다.】 ·백피화(白皮靴)를 쓰고, 13일 만에 공제(公除)하기 전의 시사복(視事服)은 백포(白布)로 싼 익선관(翼善冠) 【갓도 같다.】 ·백포(白布)로 싼 오서대(烏犀帶)를 쓰고, 공제 후에는 익선관·백포·오서대 【연거(燕居)할 때에는 백대(白帶)이다.】 를 쓰고서 기년을 마친다. 중궁전(中宮殿)은 자최 기년인데, 대수(大袖)·장군(長裙) 【버금가는 거친 생베를 쓴다.】 ·개두(蓋頭)·두수(頭𢄼) 【조금 고운 생베를 쓴다.】 ·죽차(竹釵)·포대(布帶) 【버금가는 거친 생베를 쓴다.】 ·포리(布履) 【흰 무명[白綿布]으로 만든다.】 를 쓰고, 13일 만에 공제 후에는 백포로 만든 대수·장군과 흑개두·흑두수 및 흑대(黑帶)와 백피혜(白皮鞋)를 쓰고, 13개월 만에 상제(祥祭)를 지낸 뒤에 길복(吉服)을 입는다.
왕세자빈(王世子嬪)은 참최 3년(斬衰三年)인데, 대수·장군 【가장 거친 생베를 쓴다.】 우리 나라의 장삼(長衫)과 군(裙)을 쓰는데, 군은 치마[裳]이다. 개두·두수 【조금 고운 생베를 쓴다.】 개두는 우리 나라의 여자 갈모[女笠帽]이고 두수는 우리 나라의 머리쓰개[首帊]를 대용(代用)한다. 죽차 【대비녀[箭䈂]이다.】 ·포대 【거친 생베를 쓴다.】 ·포리 【흰 무명으로 만든다.】 를 쓰고, 13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백포를 만든 대수·장군 【누인 베[練布]를 쓴다.】 ·개두·두수·대와 백피혜를 쓰고, 25개월 만에 상제를 지낸 뒤에는 짙게 물들인 옥색(玉色) 대수·장군과 흑개두·흑두수 및 흑대·흑피혜(黑皮鞋) 【금(金)·주(珠)와 붉은 수[紅繡]를 쓰지 않는다.】 를 쓰고, 27개월 만에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길복을 입는다.
내명부(內命婦)의 상궁(尙宮) 이하는 자최 기년인데, 배자(背子) 【버금가는 거친 생베를 쓴다.】 ·개두·두수 【조금 고운 생베를 쓴다.】 ·포대·소혜(素鞋) 【흰 가죽[白皮]으로 만든다.】 를 쓰고, 공제 후에는 백포로 만든 배자와 흑개두·흑두수 및 흑대와 백피혜를 쓰고 【시위(侍衛)하는 궁인(宮人)은 공제 후에 흰 배자[白背子]·흑대(黑帶)를 쓰고 전하의 복이 끝난 뒤에 길복을 입는다.】 수규(守閨) 이하는 참최 3년인데, 상전(上殿)의 복색을 따른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자최 기년인데, 의·상 【버금가는 거친 생베를 쓴다.】 ·관(冠) 【양관(梁冠)인데, 3품(品) 이상은 3양(梁)이고, 5품 이상은 2양이고, 9품 이상은 1양이며, 베로 테두리와 끈을 만든다.】 ·수질·요대(腰帶)·교대 【베로 만든다.】 ·백포화(白布靴)를 쓰고, 모든 상사(喪事)에 관계되는 자는 최복(衰服)을 입고, 시사복과 연거복은 상전의 복색을 따르고, 공제 전에는 백포로 만든 모(帽)·입(笠)·의(衣)·대(帶)를 쓰고, 공제 뒤에는 오모(烏帽)·오립·오대를 쓰고, 연거할 때에는 백의(白衣)·백대(白帶)를 상복을 벗을 때까지 쓰며, 각도(各道)의 대소 사신(大小使臣)과 외관(外官)의 복색은 백관과 같다.
수묘관(守墓官)·시묘관(侍墓官)은 모두 자최 3년이고, 동궁(東宮)은 내시(內侍)·반감(飯監)은 참최 3년인데, 의·상 【가장 거친 생베를 쓴다.】 ·관 【버금가는 거친 생베를 쓴다.】 ·수질·요질·교대를 쓰고, 공복(公服)에는 베[布]로 만든 단령의(團領衣) 【거친 생베로 단을 단다.】 와 생포(生布)로 싼 모(帽)·대(帶)와 백피화를 쓰고, 모든 상사에 관계하는 자는 최복을 입는다. 별감(別監)·각 차비인(差備人)은 가장 거친 생포로 만든 직령의(直領衣)·두건(頭巾)·마대(麻帶)·백승혜(白繩鞋)를 쓰고서 3년을 마친다. 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의 내시 이하의 복색은 각각 상전의 복색을 따르고, 밖에 나갈 때에는 백관과 같다. 사직서(社稷署)·종묘서(宗廟署)와 제릉(諸陵)·제전(諸殿)의 낙원들이 입직(入直)할 때에는 모두 상복(常服)을 입고 밖에 나갈 때에는 백관과 같이 입는다. 갑사(甲士)·정병(正兵)은 공제 전에는 백의(白衣)·백립(白笠)·백대(白帶)·백피화(白皮靴)를 쓰고 공제 후에는 백의·흑립(黑笠)·백대를 쓴다. 직사(職事)가 있던 전함인(前銜人)과 성중관(成衆官) 【내금위(內禁衛)·충순위(忠順衛)·충의위(忠義衛)·별시위(別侍衛)·족친위(族親衛) 등이다.】 은 백의와 백포로 싼 모(帽)·대(帶)와 백피화를 쓰고, 공제 뒤에는 오모·오립·오대를 쓰고, 연거할 때에는 백대를 쓴다. 유생(儒生)은 공제 전에는 백립·백의·백대를 쓰고 공제 뒤에는 흑립·백의·백대·백리(白履)를 쓴다. 녹사(錄事)·서리(書吏)는 공제 전에는 백립·백평정두건(白平頂頭巾)·백의·백대를 쓰고 공제 뒤에는 흑립·흑평정두건(黑平頂頭巾)·백의·백대·백화(白靴)·백리를 기년까지 쓴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은 시마(緦麻)751) 인데, 대수(大袖)·장군(長裙)·개두(蓋頭)·두수(頭𢄼) 및 대(帶) 【가장 고운 흰베를 쓴다.】 ·백피혜(白皮鞋)를 쓰고 13일 만에 공제한 뒤에는 짙게 물들인 옥색(玉色) 대수·장군과 검은 개두·두수 및 대·피혜(皮鞋)를 쓰고서 3개월을 마친다. 왕대비전(王大妃殿)은 대공(大功)인데, 대수·장군·개두·두수 및 대 【조금 거친 누인 베[熟布]를 쓴다.】 ·백피혜를 쓰고, 13일 만에 공제 뒤에는 짙게 물들인 옥색 대수·장군과 흑개두·흑두수 및 흑대·흑피화를 쓰고서 9개월을 마친다. 대왕 대비전·왕대비전의 상궁(尙宮) 이하의 복색은 각각 상전(上殿)의 복색을 따르고, 밖에 나갈 때에는 대전·중궁전의 상궁 이하의 복색과 같으며, 내시(內侍) 및 각 차비인(差備人)은 전하의 복이 끝나기 전에는 대전·중궁전의 내시 이하의 복색과 같다."
하였다.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의 연백(筵白)으로 인하여 뒤미처 마련하여 아뢰었다.】 이날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가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좨주 정제두를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슬피 곡하니, 정제두도 곡하며 말하기를,
"동궁의 상변(喪變)은 천운이니 말할 수 없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위로 두 동조(東朝)를 반드시니 십분 너그럽게 억제하여 종사(宗社)와 신민의 희망에 부응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믿는 것은 오직 원량(元良)뿐이었는데, 장차 종사를 어찌하는가? 경(卿)을 이런 때에 보니, 더욱 슬픔을 금할 수 없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두 동조의 복제(服制)에 관한 일을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과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유신의 말을 듣는 것이 옳겠습니다. 신(臣)이 갑진년752) 의 대상(大喪) 때에 복제를 의논하였는데, 통서(統緖)를 잇는 것이 중대하므로 형제의 복제를 쓰지 않고 한결같이 경종(景宗)께서 숙종(肅宗)의 상(喪)을 입은 예(禮)를 따랐습니다. 이번에는 갑작스러워 미처 생각나지 않아서 《상례비요(喪禮備要)》 오복도(五服圖)에 실린 것을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찬선(贊善)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정제두가 말하기를,
"대왕 대비전은 증손의 복제를 쓰시고 왕대비전은 손자의 복제를 쓰시되, 《예경》을 상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광조가 말하기를,
"제왕가(帝王家)에서는 통서를 잇는 것이 중대하므로, 형의 후사가 없으면 아우로 잇고 숙부(叔父)의 후사가 없으면 조카로 잇되 다 아버지에 대한 도리로 섬기는 것은 통서를 잇는 것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하고, 정제두가 말하기를,
"예전에 인종 왕후(仁宗王后)의 상(喪)에 대하여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명종(明宗)의 복제를 수숙(嫂叔)753) 의 복제로 정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기대승(奇大升)이 뒤미처 와서 그 잘못을 크게 배척하여 말하기를, ‘통서를 잇는 복제를 써야 하는데, 어찌 수숙으로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황이 크게 옳게 여겨 말하기를, ‘기대승의 말이 아니었으면 천고(千古)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이광좌가 말하기를,
"이 의논은 해와 달처럼 명백합니다.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갑진년에는 통서를 잇는 것으로 의논드렸는데, 이제는 갑작스러워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소공(小功)으로 할 것인가?"
하니, 정제두가 말하기를,
"왕대비전에서는 손자의 복제를 써서 대공(大功)으로 하시고 대왕 대비전에서는 증손의 복제를 써서 시마(緦麻)로 하셔야 할 것인데, 여기에는 곡절이 있습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적자(嫡子)가 있으면 적손(嫡孫)이 없으며, 적손이 있더라도 승중(承重)754) 하지 않았으면 승중한 적손의 복제를 할 수 없으므로, 왕대비전에서는 낮추어 대공을 쓰시고 대왕 대비전에서는 낮추어 시마의 복제를 쓰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대왕 대비전에서 손자의 복제를 쓰시고 왕대비전에서 형제의 아들의 복제를 쓰신다면 대단한 착오일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 동조의 복제는 아뢴 것이 옳다. 궁인(宮人)은 백의(白衣)·청상(靑裳)으로 할 것인가?"
하였는데, 이광좌가 말하기를,
"공제(公除) 뒤에 부인(婦人)은 중색(中色)을 쓰고 붉은 복색을 쓰지 않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공제 뒤에 경들의 복색은 어떻게 하는가?"
하니, 이광조가 말하기를,
"신들은 전하의 복색을 따르기로 의정(議定)하였습니다."
하고, 정제두가 말하기를,
"자최 기년(齊衰期年)의 복제입니다마는, 궐내에 들어오면 공복(公服)을 써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는 상례(喪禮)가 예전대로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이따금 날로 달을 바꾸었고, 신사년755) 으로 말하면 내관(內官)은 최복(衰服)을 입지 않고 마대(麻帶)를 대었을 뿐이고 공제 뒤에는 곧 길복(吉服)을 입었으며, 경자년756) 이후에는 최복을 썼다."
하였는데, 정제두가 말하기를,
"공제 전에 의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이 통서가 중대하다고 논한 바에 따라 대왕 대비전의 복제는 증손의 복제 시마를 쓰고 왕대비전의 복제는 손자의 복제 대공의 예(禮)를 쓰라고 해조(該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빈궁 도제조(殯宮都提調) 이광좌(李光佐)·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집(李㙫)·도승지(都承旨) 송성명(宋成明)과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날 왕세자 상(喪)의 대렴(大斂)이 끝나고 시민당(時敏堂)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재실(榟室)에 안치하는 예(禮)를 거행하려 할 때에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문명(趙文命)·여성군(礪城君) 이집(李㙫)·함평군(咸平君) 이홍(李泓)·조재호(趙載浩)·조재혼(趙載混)도 입시(入侍)하여 집사(執事)하였다. 왕세자의 상을 받들어 재실(榟室)에 내린 뒤에 임금이 친히 숙고(肅考)의 의대(衣襨) 1습(襲)을 재실에 넣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며 하교(下敎)하기를,
"한 번 여기에 들어갔으니, 어찌 다시 살아날 리가 있겠는가?"
하니, 입시한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가렸다. 예가 끝나고 이광좌가 말하기를,
"장례는 석 달 만에 치르는 예를 써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흘 만에 성복(成服)하고 석 달 만에 장사지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동쪽·서쪽의 능(陵) 근처를 치부(置簿)한 곳을 먼저 간심(看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19일 을축
오시(午時)에 왕세자 상의 성복례(成服禮)를 행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을유년757) 소현 세자(昭顯世子) 훙서(薨逝) 때에 고부(告訃)한 전례를 살펴보았더니, 사신도 보내지 않았고 주문(奏文)도 하지 않았으며, 공조(工曹)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자문(咨文)을 가져가서 고부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조정의 의논이 모두 ‘절사(節使)가 미처 강을 건너지 않았으니 그 편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곧 승문원(承文院)을 시켜 자문을 지어내고 따로 금군(禁軍)을 정하여 사신이 도착해 있는 곳으로 내려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튿날 이광좌(李光佐)가 고부하는 예는 중대하다 하여 구례(舊例)대로 재자관(䝴咨官)을 보내기를 다시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윽고 또 전에 하교한 대로 사행(使行) 편에 부치게 하였다.
사간(司諫) 윤광익(尹光益), 지평(持平) 신치근(申致謹)·박필기(朴弼琦) 등이 동궁의 병구완을 한 여러 의관(醫官)들이 정성을 다하고 기술을 다하여 증세에 맞추어 약을 쓰지 못하였다 하여 수의(首醫)는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고 차비 의관(差備醫官)은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기를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장수·단명은 하늘에 달렸다. 어찌 구구한 약을 믿겠는가? 수의 이하를 마찬가지로 나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구전(口傳)하여 상선(常膳)을 회복하기를 계청(啓請)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두 동조(東朝)께서 상선을 회복하시도록 여쭈어 윤허받았으나, 나는 소선(素膳)을 행한 지 오래지 않은데 정리(情理)가 어찌 차마 문득 상선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20일 병인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번 복제(服制)의 절목(節目)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탈(定奪)해서 마련하였습니다마는, 신사년758) 의 등록(謄錄)을 다시 상고해 보았더니, 전하의 복제조(服制條)에 13일 만에 최복(衰服)을 벗기 전에는 늘 백두면(白頭冕)·소의(素衣)·소대(素帶)·백피화(白皮靴)를 쓰고, 13일 만에 최복을 벗은 뒤에는 흑두면(黑頭冕)·백목면 단령(白木綿團領)·생마포 대(生麻布帶)·백피화로 갈아 쓰고, 30일 만에 복을 벗으며, 졸곡(卒哭) 전에는 늘 흑두면·소의·소대·백피화를 쓴다고 실려 있습니다. 시사복(視事服)과 연거복(燕居服)은 본디 고례(古禮)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오직 전례에 따라서 해야 할 것인데, 신사년의 전례에는 두면을 검은 것으로 바꾼 뒤에도 대는 오히려 백색을 썼으니, 이번 공제(公除) 뒤의 대를 흑색으로 마련한 것은 실착임을 면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시사복을 오모(烏帽)·오서대(烏犀帶)로 하는 것은 본디 변통할 도리가 없습니다마는, 연거복을 신사년의 전례에 따라 백색을 쓰시고, 신민의 복색도 여기에 맞추도록 분부하셔야 하겠습니다. 대신의 뜻도 이러하니, 절목 가운데에 고쳐 부표(付標)759)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의약(議藥)을 잘못하였다 하여 중벌을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서 의관(醫官)에 관하여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니, 답하기를,
"어제 일렀다. 또 신사년 선조(先朝) 때의 하교(下敎)가 지극히 마땅하므로 따라서 행한 것이 많으나, 이것은 사체(事體)가 그렇지 않다. 의관들의 일은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수의(首醫)는 너희 뜻을 나도 안다마는 감률(勘律)할 때에 어찌 가감하여 아픈 마음을 풀어 주지 않겠는가? 우선 마찬가지로 거행하라."
하였다.
11월 21일 정묘
정원(政院)·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상선(常膳)을 회복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자전(慈殿)께서 상선을 회복하신 뒤에 내가 상선을 회복하겠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 등이 상소하여 상선을 회복하기를 청하니,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批答)과 같이 답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문수(朴文秀)가 강변 고을의 물에 잠긴 면(面)의 환상(還上)760) 을 받아들이는 일을 멈추기를 치계(馳啓)하였습니다마는, 당년에 흉년이 들더라도 을해년761) 같은 홍수 때에도 줄여서 받아들이라는 영이 없었던 것은 대개 한 번 이 길을 열면 뒷 폐단이 그지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포(身布)에 이르러서는 전에 홍수 때에 가장 심하고도 심한 곳도 멈추고 줄여 준 것이 절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본디 모두 줄여 준 전례가 없으니, 청한 대로 시행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1월 24일 경오
김흥경(金興慶)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11월 26일 임신
정제두(鄭齊斗)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현모(李顯謨)를 헌납(獻納)으로, 박사정(朴師正)을 응교(應敎)로, 강필경(姜必慶)을 교리(校理)로, 윤동형(尹東衡)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임금이 친히 세자의 행록(行錄)을 지어 정원(政院)에 내렸는데, 그 행록에 이르기를,
"세자의 휘(諱)는 행(緈)이고, 자(字)는 성경(聖敬)이다. 기해년762) 2월 15일 신시(申時)에 순화방(順化坊) 창의궁(彰義宮)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임신하였을 때에 꿈에 서조(瑞鳥)가 당(堂)에 모인 것을 보았고 또 금귀(金龜)를 보았는데, 곧 정빈(靖嬪) 이씨(李氏)가 낳은 바이다. 겨우 두어 살에 성인(成人) 같은 데가 있어서 행동거지가 여느 아이보다 뛰어났다. 신축년763) 가을에 내가 세제(世弟)가 되어 대궐에 들어올 때에 세자는 나이 겨우 세 살이므로, 어린 나이여서 일찍이 대궐에 같이 들어오지 못하고 잠시 사제에 남겨 두었더니, 노는 중에나 자고 깨는 사이에 자주 아버지를 부르고 혹 계속 부르다가 목이 멘 것은 어버지를 효사(孝思)하는 마음이 천성에 뿌리박혔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대궐에 들어온 뒤로 동조(東朝) 양전(兩殿)을 모실 때에는 무릎꿇고 바로 앉아 응대하는 것이 영향(影響) 같으므로, 삼전(三殿)에서 특별히 사랑하였다. 갑진년764) 겨울에 비로소 경의군(敬義君)에 봉하였고, 을사년765) 봄에 세자로 진봉(進封)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으나 대정(大庭)에서 행례(行禮)하고 정당(正堂)에서 하례(賀禮)받을 때에 거동하고 주선하는 것이 예절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본성이 그런 것이다. 어찌 보통 가르침이 미칠 바이겠는가?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세자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궁료(宮僚)를 접대할 때뿐만 아니라 한가한 가운데 중관(中官)과 있을 때에도 엄연하기가 어른 같아서 장난하는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작은 내관(內官) 두 사람이 서로 말다툼하여 행동을 삼가지 않으므로 세자가 한참 잠자코 보다가 다른 중관을 불러 말하기를, ‘이 내관은 다시 시종하지 말게 하라.’ 하였는데, 중관이 그 까닭을 몰라서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조금 전에 내 앞에서 서로 다투어 공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중관이 이 일을 대조(大朝)께 여쭈어 경계하겠다고 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으니, 잠시 사이에도 조용하고 엄숙한 것이 이러하였다. 또 평소에 중관과 학문을 강구하며 글자를 썼으며, 젊은 내관과 놀지 않고 늘 노성(老城)한 중관과 있었으니, 그 상정(常情)보다 뛰어난 것이 한결같았다. 모든 완호(玩好)에 조금도 마음두지 않고 늘 말하기를, ‘볼 만하기는 하나 한 번 보면 족하다. 어찌하여 반드시 마음두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운관(雲觀)766) 에서 문신종(問辰鍾)을 바쳤으나, 이것도 한 번 보고는 서당(書堂)에 두었는데, 젊은 내관이 보다가 우연히 손상하였다. 이 일을 나에게 고하므로, 다른 뜻이 없이 일어난 일이라 하여 문책하지 말게 하였더니, 세자가 옆에서 웃었다. 내가 돌아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하치않은 물건인데, 하찮은 물건 때문에 웃었습니다.’ 하므로, 내가 절로 마음이 감탄되어 스스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세자의 도량이 너그러워 이와 같이 용납하니, 이것은 우리 동방의 복이다.’ 하였다. 《효경(孝經)》을 다 강독(講讀)하고 내 앞에서 전강(殿講)할 때에 내가 효란 어떤 것이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어버이를 섬기되 도리를 다하는 것이 효입니다.’ 하였으니, 그 요지(要旨)를 아는 것이 이러하였다. 주연(胄筵)767) 에서 소대(召對)할 때에 궁관(宮官)이 아뢴 것이 혹 틀리거나 아뢴 것이 전에 강독한 것이면, 그 주연을 마치고서 좌우에게 묻기를, ‘전후의 궁관이 말이 어찌하여 서로 다른가? 또 아뢴 것은 《효경》 어느 장(章)과 《소학(小學)》 어느 편(篇)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였으니, 그 마음을 쏟아 듣고 늘 유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미년768) 봄에 선성(先聖)을 전알(展謁)하고 입학하였고, 그해 가을 9월에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또 그 달에 초례(醮禮)를 행하였다. 그때 아홉 살이었는데, 강독하는 소리가 청랑(淸朗)하고 거동하는 예절이 성인(成人)처럼 엄연하였다. 육례(六禮)를 행한 날은 날씨가 모두 청명하였다. 마음이 절로 기뻐서 ‘그 형상을 보지 못하나 그 그림자를 살피고 싶다.’ 하였으나, 모든 일에 하루도 한가한 틈이 없었다. 책봉(冊封)하고부터 무릇 입학·관례·가례(嘉禮)하던 날에 일기가 모두 청랑하여 밤이나 아침이나 흐리지 않았고 그 행사가 번번이 이러하였으니, 하늘이 종사(宗社)를 돕는 것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었다. 나는 덕이 없을망정 세자는 동국(東國)의 희망이었는데, 어찌 오늘날 갑자기 서거할 줄 알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면 절로 길게 탄식하게 된다. 새것을 맛볼 때마다 차마 먼저 맛보지 못하고 반드시 다 바쳤고, 병이 있더라도 중하지 않으면 반드시 세수하고 의대(衣帶)를 갖추고 나를 찾았다. 동기를 우애(友愛)하는 것도 본연(本然)에서 말미암았는데, 대궐 안의 사례(事例)는 거처하는 곳이 다르므로 자주 가서 보았고, 좌우의 궁인(宮人)이 불화한 말을 하면 세자가 혹 틈이 벌어질 것을 마음 아파하여 눈물을 머금고 나에게 고하였으니, 그 효우(孝友)하는 성품이 모두 이러하였다. 또 모든 일에 미안한 일이 있으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중관(中官)을 시켜 엄정하게 타이르니, 궁인이 모두 두려워하고 탄복하였다.
아! 병이 위독하여졌을 때에도 그 스승이 들어온다는 말을 들으면 벌떡 일어나 앉아 다시 용모를 단정히 가다듬고 또 말하기를, ‘빈객(賓客)이 들어오므로 일어나고자 하나 힘이 미치지 못한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평소의 성품을 알 수 있다. 한 번 병들어 낫지 않은 채 오래 끌게 된 뒤로 설사를 막고 어지러움을 돕는 데에 의약(醫藥)이 효험이 없으니, 탄식하며 나에게 고하기를, ‘세상에 명의(名醫)가 없는데 잡되게 여러 약을 써보면 괴로움만 가져올 뿐이니, 다시 약을 쓰지 말고 조용히 스스로 안정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그 약을 물리치고 천명에 맡기는 것은 노사(老師)·숙유(宿儒)가 사리에 통달하여도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임종 때에 내가 얼굴을 얼굴에 대고 나를 알겠느냐고 부르자 희미하게 응답하는 소리를 내며 눈물이 뺨을 적셨으니, 간절한 효심(孝心)이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마음 아프다. 무신년769) 11월 16일 해시(亥時)에 창경궁(昌慶宮)의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니, 수(壽)는 겨우 10세이고, 세자 자리에 있었던 것이 겨우 2년이다. 아! 내가 덕이 없어서 믿는 것이 오직 원량(元良)이었고, 성품도 이러하므로 동방의 만년의 복이기를 바랐는데, 어찌 나이 겨우 열 살에 이 지경이 될 줄 알았겠는가? 종사를 생각하면 아픔 또한 누르기 어렵다. 이제 행록에는 평소에 뛰어난 것만을 기술하였으니, 어찌 한 자 한 구라도 그 일보다 불렸겠는가? 내가 배우지 못하였더라도 그런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 모두 중관이 함께 듣고 조신(朝臣)이 함께 본 것이었다. 꿈이 상서로워 상서로운 조짐에 가까웠던 것으로 말하면 전후의 시장(諡狀)에 이미 이러한 말이 있으나, 모두 내가 꿈꾼 것이므로 처음에 대략 적었다. 아! 애통한 가운데 차마 상세히 쓰지 못하고 간략하게 지었다. 시장을 제술(製述)하는 관원은 내가 다하지 못한 곳을 상세히 해야 하나, 과대하지 않아야 한다. 국기(國忌)를 당할 때마다 어린 나이라 하여 소선(素膳)을 장만하지 않으면 중관을 시켜 장선 궁인(掌膳宮人)을 불러 엄한 말로 타일렀으므로, 안팎 사람들이 모두 동색(動色)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관상감 영사(觀象監領事) 이광좌(李光佐)·도감 당상(都監堂上) 송인명(宋寅明)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지금 산사(山事)는 동쪽이 아니면 서쪽이어야 하므로 동쪽과 서쪽에서 극진히 찾았더니 숭릉(崇陵)770) 오른편에 쓸 만한 곳이 있었습니다. 다만 내년 정월(正月)은 마침 월극(月克)에 해당하는데, 남원군(南原君) 이설(李)이 말하기를, ‘월극이 있더라도 내외향(內外向) 때문이라면 제살(制殺)하여 변통하는 방도가 없지 않다.’ 하나, 신(臣)은 정견(定見)이 없으므로 여쭙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순회묘(順懷墓)의 청룡(靑龍) 밖에 혈(穴)이 있다 하는데, 그것은 어떠한가?"
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본디 쓸 만한 곳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순릉(順陵) 【성종비 공혜 왕후의 능.】 왼편 혈은 어떠한가?"
하자, 이광좌가 말하기를,
"그 혈은 매우 좋아서 신들의 소견으로 말하더라도 조금도 미진한 데가 없었습니다. 또 산세가 웅대하여 싸안은 정취가 있고 분명하게 맺힌 데가 있으니,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는 곳입니다. 숭릉 오른편의 혈은 내외향이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곳을 결정하는 외에 적합한 곳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접때 대왕 대비전께서 하교하시기를, ‘순회묘 근처에서 쓸 만한 혈을 잡으면 좋겠다.’ 하셨으나, 내가 차마 서로 같은 처지를 따르는 것 같게 할 수 없었는데, 더구나 쓸 만한 혈이 없는 것이겠는가? 숭릉 오른편 혈의 내외향은 진실로 불가(不可)할 것이 없으나, 양주(楊州)의 민사(民事)로 말하면 겨우 갑진년771) 의 국장(國葬)을 겪었는데, 이제 또 장사를 겪으면 백성의 힘이 감당할 수 없는 바가 많을 것이니, 이것은 실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작지 않은 데이다. 순릉 외편 혈은 가는 길이 명릉(明陵)772) 을 지나므로 세자의 정리(情理)로 말하더라도 반드시 다행하고 백성의 힘도 나누게 될 것이니, 이번 세자의 묘소는 순릉 좌강(左岡)의 을좌 신향(乙坐辛向)인 언덕으로 정하여 쓰도록 하라."
하였다. 파할 즈음에 임금이 승지(承旨)를 시켜 쓰기를,
"내가 원량(元良)에게 바라던 바는 당초에 이뿐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만사가 끝났다. 원량의 덕이 미처 아래로 백성에게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어찌 상사(喪事)로 인하여 도리어 백성에게 폐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정자각(丁字閣)의 대들보를 관동(關東)에 배정한 것을 곧 그만두게 하라. 나무통이 혹 조금 작더라도 튼튼하여 세 간의 대들보가 될 만한 것을 기내(畿內)에서 구하여 관동 백성이 날라오는 폐단을 덜도록 하라. 정자각의 제도에 이르러서는 근래의 익실(翼室) 규례를 쓸 필요가 없으니, 한결같이 구제(舊制)대로 하라. 석물(石物)은 후릉(厚陵)773) 에서 모양을 따서 만들되, 사가(私家) 석물의 풍후(豐厚)한 것에 견주어 조금 크면 두어 치를 줄이도록 하라. 내가 평소에 원량에게 기대하던 뜻을 오늘날에 펴는 것은 이 두어 가지 일일 뿐이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를 인견(引見)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왕세자의 행록(行錄)을 정원(政院)에 내리셨으므로 신도 받들어 보았습니다. 신이 평소에 본디 이미 지혜로운 바탕이 일찍부터 성취된 줄 잘 압니다마는, 이제 행록에서 그 신식(神識)이 일찍 통달하고 덕미(德美)가 천품으로 이루어진 것을 더욱 알았습니다. 하늘이 이러한 성자(聖姿)를 내었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이에 이르렀습니까? 옛말에 ‘쇠퇴한 주(周)나라에 화기(和氣)가 한정되었으니, 중니(仲尼)를 기른 것이 이미 많았으므로 다시 안자(顔子)를 기를 수 없었다.’ 하였는데, 오늘날의 일이 바로 이와 비슷합니다. 신이 받들어 읽을 때에 저절로 목메어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어서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 지극히 사랑하는 정으로 지나치게 칭찬하지 않고 말을 쓰는 사이에 아주 적당하게 하셨으므로, 참으로 이른바 더할 수도 줄일 수도 없는 것이며, 신들이 듣고 본 바로서도 조금도 틀린 데가 없으니, 곧바로 무궁한 후세에 전하여 천만대에 할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사신(詞臣)을 시켜 대찬(代撰)하더라도 반드시 결코 감히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왕세자가 유궁(幽宮) 안에서 성제(聖製)를 모실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감동하고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전례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으로는 무엇보다 어제 행록(御製行錄)을 곧바로 지문(誌文)으로 삼아서 완염(琓琰)에 새기는 것이 실로 정문(情文)에 맞을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사대부는 본디 문화(文華)가 많아서 행록·시장(諡狀)에 어지럽게 크게 떠벌려 찬양하는 것을 죽은 자의 영화로 여기는데, 마음속으로 이를 매우 그르게 여겼다. 나는 사실만을 적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어찌 번잡하게 꾸미겠는가? 접때 사친(私親)의 신도 비명(神道碑銘)을 지을 때에 전 대사성(大司成) 이진망(李眞望)을 제술관(製述官)으로 계하(啓下)하였다가 내가 그때에 한 도위(都尉)에게 부탁한 것은 대개 그 사실만을 서술하고 문화(文華)를 취하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행록도 어찌 사랑하는 정 때문에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경들과 중관들이 눈으로 본 것에 대하여 그 평소의 행사를 적었을 뿐이니, 이 일 밖에 더할 말이 없었다. 내가 평소에 이러한 글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처음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여 대찬(代撰)하게 하였으나, 이제 어제(御製)를 곧바로 써서 광중(壙中)에 넣는다면 유명(幽明) 사이에 유감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니, 아뢴 대로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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