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병오
하유(下諭)하여 팔도(八道)와 양도(兩都)001) 에 농사일을 권려(勸勵)하게 하였다.
박필균(朴弼均)·이종백(李宗白)을 봉교(奉敎)로, 조상행(趙尙行)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1월 5일 경술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국휼(國恤)의 발인(發靷) 뒤 현궁(玄宮)을 내리기 전에 산릉(山陵)의 아침 저녁 제전(祭奠)에 봉진(封進)하는 생물(生物)을 각도(各道)에 분정(分定)하고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이는 전례(前例)가 있습니다. 이번 왕세자(王世子)의 상(喪)에도 전례에 의거하여 아홉 종류를 마련하여 들이겠습니다."
하니, 1미(尾) 외에는 모두 반으로 줄여 봉진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전화(錢貨)의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영원히 혁파하는 것과 더 주전(鑄錢)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편리한가를 물었다. 사직(司直) 박사수(朴師洙)가 말하기를,
"영상(領相) 외에 윤순(尹淳)·심단(沈檀) 같은 이는 모두 더 주전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합니다마는, 거만(巨萬)의 재화(財貨)를 어찌 헛되이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더 주전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혁파하지도 않고 주조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채전(債錢)을 주지 않게 한다면 옳겠는가?"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외방(外方)에 있는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문의(問議)하라고 명하였다. 이광좌가 각 아문(衙門)과 군문(軍門)의 모든 수용(需用)에 관계되는 것을 돈으로 내어 주고, 외방의 돈이 많은 곳은 점차 곡식으로 바꾸도록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지중추(知中樞) 심단(沈檀)이 각도(各道)의 은결(隱結)002) 과 여러 곳의 면세전(免稅田)을 사정(査正)하여 공가(公家)에 귀속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은 본디 정해진 결수(結數)가 있으니, 각도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 내고, 각 군문(軍門)의 면세전도 모두 한결같이 사정하여 일후(日後)에 품정(稟定)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공조 참판(工曹參判)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신이 경악(經幄)에 있을 때 매번 선조(宣祖)께서 용만(龍灣)003) 에 계실 때와 인조(仁祖)께서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계실 때의 일로써 진계(進戒)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생각해 보소서. 용만과 남한 산성에 계실 적에 아침 저녁의 어선(御膳)도 또한 능히 때맞춰 진어(進御)하지 못했는데, 후궁(後宮)·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에 대해서 어느 겨를에 생각이 미쳤겠습니까?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피난했을 때 황자(皇子)의 무리들이 심지어 서로 다투어 음식을 빼앗기까지 했다고 하니, 원컨대 언제나 이런 일을 성심(聖心)에 간직하시어 풍형 예대(豐亨豫大)004) 한 곳에는 미리 재량하여 줄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평일의 마음은, 조석(朝夕)은 몇 그릇으로 요기(療飢)만 하면 그만이고 입성 또한 추운 데 이르지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있다. 제(齊)나라의 태조(太祖)가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3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면, 마땅히 주옥(珠玉)을 분토(糞土)처럼 여기게 하겠다.’005) 고 했는데, 소도성(簫道成)이 또한 능히 이런 말을 했었으니, 말을 채용(採用)하는 도리란 그 사람의 인품 때문에 버리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주금(酒禁)과 누호(漏戶)006) 의 금(禁)을 거듭 명하였다. 또 각사(各司)의 초기(草記)007) 로써 품정(稟定)한 것과 탑전(榻前)에서 정탈(定奪)한 것을 모두 비국(備局)에 알리도록 명하였으니, 이광좌가 아뢴 것이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6일 신해
사간(司諫) 이세진(李世璡)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시켰다. 이세진이 상소하여 집의(執義) 박필주(朴弼周)와 장령(掌令) 양득중(梁得中)이 몇 달 동안 분곡(奔哭)하지 아니함을 논핵하고, 체직(遞職)시킬 것을 청하자, 임금이 산림(山林)008) 을 모욕하고 유자(儒者)를 업신여겼다 하여 이런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교리(校理) 윤동형(尹東衡)과 조적명(趙迪命)이 벌(罰)이 너무 무겁다 하여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은 산림(山林)을 불러 위로하는 일로써 나에게 권고하는 것이 직책일 뿐이다. 그런데 이세진은 도리어 남을 억제하여 구속하려고 했으니, 그 끼쳐질 폐단은 장차 군주(君主)로 하여금 산림을 가벼이 보고 싫어하고 박대하는 마음이 발생하게 할 것이다. 왕자(王者)의 은미할 때 방지하고 조짐을 두절(杜絶)시키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엄중하게 처분하지 않은 수가 있겠는가? 산림을 대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역대(歷代) 조종(祖宗)의 가법(家法)이므로 국맥(國脈)의 유지(維持)는 실로 유교(儒敎)를 부식(扶植)하는 데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다. 뒤에 양득중이 상소하여 이세진에게 견책(譴責)을 받았다 하여 스스로 인피(引避)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세진에게 죄를 준 것은 그대 때문이 아니고, 훗날 소인(小人)이 어진이를 참소하는 폐단을 방지하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1월 7일 임자
소대(召對)를 행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였다.
오명신(吳命新)을 승지(承旨)로, 이진수(李眞洙)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서종옥(徐宗玉)을 사간(司諫)으로, 김상성(金尙星)을 헌납(獻納)으로, 권신(權賮)과 윤종하(尹宗夏)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1월 8일 계축
응교(應敎) 김용경(金龍慶)을 파직(罷職)시켰다. 김용경은 지난 가을 김일경(金一鏡) 상소의 소하(疏下) 오적(五賊)을 발계(發啓)할 때 견책(譴責)을 당한 일로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疑)’란 한 글자를 먼저 성념(聖念)에 두시고 충(忠)과 사(邪), 숙(淑)과 특(慝)을 일체 바꾸어 변경시키셨습니다. 성고(聖考)009) 의 병신년010) 처분(處分)에 이르러서는 해와 별처럼 환히 내걸리어 주가(周家)의 적도(赤刀)·대훈(大訓)011) 과 같을 뿐만이 아닌데도, 전하께서는 쉽사리 한때의 진정(鎭定)시키는 법령으로 돌리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처분(處分)을 현란시키고 쉽사리 진정(鎭定)시키는 법령으로 돌렸다는 말은 더욱 무엄하다고 하여 이런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1월 9일 갑인
해의 위에 배(背)가 있었다. 빛깔은 안은 붉고 밝은 푸르렀다.
윤동수(尹東洙)를 승지(承旨)로, 윤동원(尹東源)과 홍상용(洪尙容)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윤동원은 윤증(尹拯)의 손자이고, 윤동수는 윤증의 종손(從孫)이다. 모두 초선(初選)으로 징소(徵召)한 것이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형좌(李衡佐)에게 표리(表裏)012) 1습(襲)을 내렸다. 이형좌는 음관(蔭官)으로 주(州)·현(縣)을 맡아 다스렸는데, 젊어서부터 명성이 있었다. 무신년의 난(亂)013) 때 원주 목사로서 본도의 관찰사에 초수(超授)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장계가 임금의 뜻에 맞으니,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다만 능리(能吏)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선량(善良)한 신하이다."
하고, 먼저 표리를 내리고 또 해조(該曹)로 하여금 탁용(擢用)하게 하였다.
각 궁방(宮房)의 면세전(免稅田) 가운데서 정해진 액수(額數) 외에는 모두 세금을 내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전조(田租)를 준 것014) 은 실로 절약(節約)하려는 데서 말미암았다. 여러 궁가(宮家)의 면제전은 그 수량이 매우 많으니, 전세(田稅)가 아주 줄어드는 것은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약 이정(釐正)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수진궁(壽進宮)·명례궁(明禮宮)·용동궁(龍洞宮)·어의궁(於義宮)·창의궁(彰義宮) 등 다섯 궁가의 면세전을 1천 결(結)을 한정하여 표준으로 삼되, 명례궁과 용동궁 두 궁가는 두 동조(東朝)015) 께서 관할하는 바이니 특별히 5백 결을 더 주도록 허락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수진궁에서 각 궁방의 제전(祭田)을 모은 것은 이 한도 내에 두지 않고 그 밖의 궁방은 8백 결로 제한하며, 사묘(私廟)의 제전(祭田)은 5백 결로 한정하되 지금은 당분간 창의궁의 예(例)에 의거하게 하였다. 세자(世子)의 사친(私親) 제전(祭田)은 3백 결로 제한하되, 지금은 당분간 다른 궁방의 예에 의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해진 액수 외에 전토(田土)는 모두 전세(田稅)를 내어 경비에 보충하게 하고, 각 궁방의 전토로서 혹은 전세를 면제받다가 전세를 내게 된 경우나 혹은 전세를 내다가 전제를 면제받게 된 경우를 요컨대 정해진 액수를 넘지 않도록 하게 했으며, 각 궁방으로 하여금 두 개의 문부(文簿)를 작성하여 하나는 내수사(內需司)에 보내고 하나는 호조(戶曹)에 보내어 몰래 증가시키는 폐단을 방지하게 하였다. 또 각 아문(衙門)의 둔전(屯田)으로서 전세를 면제받는 경우는 한결같이 모두 전세를 내게 하고, 서원(書院)의 위전(位田)은 사액 서원(賜額書院) 외에도 옛 법식(法式)에 의거하여 전세를 내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병조(兵曹)의 고군(雇軍)016) 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도태(淘汰)시켜야 할 것이라고 하여 그 액수를 열서(列書)하여 들이라고 명하고, 그 밖의 명목(名目)이 긴요하지 아니하며 사치에 가까운 것은 비국(備局)에서 사정(査正)하라고 명하였다. 또 주(州)·현(縣)의 전결(田結)은 은루(隱漏)에 대한 금제(禁制)를 엄중하게 하라고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서종옥(徐宗玉)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차비(差備)로 대령(待令)한 여러 의관(醫官)들은 이미 감처(勘處)를 거쳤으니, 청컨대 그 당시의 수의(首醫) 권성징(權聖徵)을 아주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지평(持平) 한사득(韓師得)·채응만(蔡應萬)은 혹은 억지로 혐의의 단서를 일으켜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들이려고 꾀하였고, 전 지평 권굉(權宏)은 어제 이미 명(命)을 받들겠다고 응하고서도 지금 갑자기 패초(牌招)017) 를 어기고 있습니다. 원래 핑계댈 만한 사정이나 병(病)이 없는데도 터무니없이 끌고 버티면서 반드시 규면(規免)하고야 말려고 하니, 청컨대 한사득과 채응만은 파직(罷職)시키고 권굉은 삭직(削職)시키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사직(司直) 박사수(朴師洙)를 추고(推考)하라 명하였다. 이때 사헌부(司憲府)에서 이진유(李眞儒)의 도배(島配)에 대한 계사(啓辭)가 있었는데, 사헌부의 관원 중에는 정계(停啓)와 연계(連啓) 양쪽을 다 어렵게 여겨 교묘하게 회피하려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박사수가 일찍이 임금 앞에서 ‘사헌부는 혁파(革罷)할 만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지평(持平) 권신(權賮)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박사수의 말은 속박하고 업신여기는 뜻이 있어 조정(朝廷)의 체모를 손상시켰으니, 마땅히 경책(警責)을 가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세진(李世璡)의 벌이 너무 지나칩니다."
하니,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이세진이 문외 출송(門外黜送)된 지 며칠 후 지평 윤종하(尹宗夏)가 아뢰기를,
"권신은 전일의 계사(啓辭)를 회피하려고 하여 갑자기 말에서 떨어졌다고 핑계를 대어 규면(規免)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권신이 말에서 떨어진 것은 진실로 납리(納履)의 혐의018) 를 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설령 권신이 과연 무상(無狀)하다 할지라도 전하께서 속임을 당하심에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 더구나 채 살펴보지도 아니한 일을 곧장 ‘반드시 그럴 것이다.’라고 귀결짓는 것은 아마도 능히 그 마음을 꺾어 복종시키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옳다."
하고, 드디어 권신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1월 10일 을묘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이진(權以鎭)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작년 연향(宴饗) 때 포도 6백 덩이에 돈 5백 냥을 썼습니다. 전하께서 진어(進御)하실 때 어찌 이와 같은 줄을 아셨겠습니까? 또 근습(近習)019) 을 엄중하게 금지한 후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릇 궐중(闕中)에 진배(進排)하는 것들을 중관(中官)과 액례(掖隷)의 무리가 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점퇴(點退)020) 한다 할지라도 각사(各司)에서는 오로지 비위를 거스리게 될까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미봉(彌縫)하는 즈음에 소비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근습에서 시작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동필(金東弼)은 말하기를,
"작년에 신이 공물(貢物)을 더 쓰는 폐단을 진달했더니, 성상께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원공(元貢)의 정수(定數)를 써서 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조(擧條)021) 를 들일 적에 미쳐서는 써서 들이라는 명(命)을 도로 정지하셨고, 또 변통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또 상방(尙房)에서 초모(貂帽)를 만들어 들이는 것이 매우 많아 호조(戶曹)에서 그 값으로 지급하는 것이 많은 경우는 백금(白金) 8백 냥에 이른다고 합니다. 쓸데없이 소비하는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는 알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판(戶判)의 말이 절실하니, 내가 마땅히 유의하겠다. 내가 평소에 과고(果苽) 등의 물건을 즐기지 아니하니, 한 가지 물건의 소비가 이 지경에 이른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일후에 만약 이와 같은 지나치게 소비하는 일이 있다면 계달(啓達)하는 것이 옳다. 이판(吏判)의 진계(陳啓)도 또한 매우 절실하니, 전에 내린 하교(下敎)에 의거하여 원공(元貢)의 정수를 써서 들이라. 초모(貂帽)의 일은 진달한 바가 참으로 좋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시수(時囚)022) 의 명부(名簿)를 읽으라고 명하였는데, 홍계일(洪啓一)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어떠한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이사로(李師魯)가 공초(供招)에서 말하기를, ‘이유익(李有翼)이 「홍계일은 경망(輕妄)하니 평안 병영(平安兵營)에 보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했는데, 홍계일은 공칭(供稱)하기를, ‘다른 집에서 이유익을 만났는데, 흉시(凶詩)를 들었으나 능히 절교(絶交)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는 상종(相從)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시(詩)를 보고 절교하지 않은 것은 형벌(刑罰)을 쓸 만하겠기에 형신(刑訊)이 두 차례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본죄(本罪)는 다스릴 만하나, 단지 시를 들었던 것뿐이라면 두 차례의 형신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사간(司諫) 서종옥(徐宗玉)은 말하기를,
"이사로가 말하기를, ‘홍계일이 「다른 일은 이사맹(李師孟)으로 하여금 알게 할 수 있으나, 깊은 곳은 알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홍계일의 하나의 중대한 공안(公案)이 됩니다. 시(詩)에 관한 일은 죽일 만한 것이 아닙니다만, 이 일은 꾸민 것이 아니니 경솔히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면질(面質)했을 때도 또한 의심할 만한 것이 있었다."
하니, 헌납(獻納)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명백하게 억울한 일 이외에도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문안(文案)을 살펴보고 품처(稟處)하라."
하고, 오언빈(吳彦賓)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 자는 평안 병영(平安兵營)에서 갈 수 있는 사람의 수효에 들었을 뿐이다."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그 자의 불행입니다. 그런데 그 자는 이것을 알지 못했으니, 마땅히 살리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지만 전석(全釋)023)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 곳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조덕보(趙德普)에 이르러 이금이 말하기를,
"조덕보가 긴요하게 나오나, 선정(先正)의 자손(子孫)이 만약 조덕보가 없다면 남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정희량(鄭希亮)도 또한 주륙(誅戮)했으나, 이 경우는 일이 의심스럽고 명백하지 않다. 이 자는 민백효(閔百孝)의 초사(招辭)에 나왔는데, 민백효는 처음부터 끝까지 간사한 짓이 많았다."
하니, 서종옥이 말하기를,
"조문보(趙文普)는 분명히 역적(逆賊)이지만 조덕보는 반드시 참여해 알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사계(査啓)가 왔는데, ‘23일이면 환궁(還宮)한다.’는 말이 그의 공초(供招)와 서로 부합합니다. 24일에 안성(安城) 싸움에서 패배한 뒤 민백효가 몸을 땅에 던지며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기를, ‘하늘이 망하는 날을 조덕보는 볼 것이다.’라고 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백효가 몸을 땅에 던졌을 때 조덕보와 조박보(趙博普)가 보았다는 말은 그 종[奴]의 초사(招辭)다. 그대로 가두어 두는 것이 옳겠는가?"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마땅히 형신(刑訊)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추문(推問)하라."
하였다. 신후삼(愼後三)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 자는 용서할 만한 점이 있는데, 어떠한가?"
하니, 홍치중이 말하기를,
"이 자는 역적의 사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가(羅哥)의 사위라 해서 어찌 반드시 모두 역적이겠는가?"
하니, 김흥경은 말하기를,
"사장(査狀)이 왔는데, 고응량(高應亮)이 말하기를, ‘평교(平橋)의 적(賊)이 태인(泰人)·진주(晋州)의 군사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흩어져 갔는데, 김수종(金守宗)이 중간에서 주선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응량은 김수종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미워해서 고발(告發)했다고 합니다."
하니, 서종옥은 말하기를,
"김수종은 변산(邊山) 아래에 있으면서 집안이 부유하고 형세(形勢)가 있어 누차 재랑(齋郞)에 의망(擬望)되었으니, 대개 호강(豪强)한 품관(品官)입니다. 신후삼은 처음에는 김수종과 친하다고 말했다가 뒤에 일이 김수종에게 비롯되었음을 알고는 드디어 친하지 않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신후삼은 김수종을 다시 조사해 오기를 기다린 뒤에 품처(稟處)하리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목중형(睦重衡)과 남수언(南壽彦)에 대해서 홍치중이 말하기를,
"목중형과 남수언은 모두 긴요하게 나오는 자들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포(靑布)를 주었다는 한 가지 일은 사장(査狀)이 왔으나, ‘주사 대장(舟師大將)’ 등의 말은 허탄(虛誕)하여 믿을 수가 없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남수언은 의심스럽습니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거둥하시어 나루를 건널 때 난(亂)을 일으킨다는 말이 역적의 초사에서 나왔는데, 그 말이 지극히 흉악합니다. 그와 관련된 자는 여러 조가(趙哥)이고, 조관규(趙觀奎)의 매부(妹夫)이기도 합니다."
하였다. 송국휴(宋國休)·송중홍(宋重弘)·송해(宋楷)에 이르러서 홍치중이 말하기를,
"세 사람은 모두 심성연(沈成衍)의 공초(供招)에 나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성연이 죽은 뒤에는 물을 만한 계제가 없고, 심성연이 무고(誣告)로써 자복(自服)했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안성(安城)과 죽산(竹山) 사이에 의심스러운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송가(宋哥)는 죽산에 사는데 집안이 부유하고 능히 풍수(風水) 잡술(雜術)을 알아 늘 사람들의 말썽이 많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작하여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이명언(李明彦)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그 사람의 국량(局量)이 넓지 못하여 역적질을 할 사람이 아니다. 이하택(李夏宅)은 그가 이명언의 아들인 이유로써 방송(放送)하였는데, 청의(淸議)는 불울(拂鬱)해 하나, 나는 이명언이 결단코 역적질을 할 사람이 아닌 줄로 알고 있다. 정익하(鄭益夏)가 아뢴 뒤에 송인명(宋寅明)이 신문(訊問)할 만하다고 말하였으므로 나문(拿問)했던 것이다."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이명언은 역적의 초사에서 여러 번 나왔으니, 죄명(罪名)이 중대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로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너무 헐(歇)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론(黨論)에 용감하여 청의(淸議)에 버림받았지만, 어찌 이것을 가지고 그가 역적질을 했다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의(公議)가 이와 같다면 아주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이만동(李萬東)에 이르러서 홍치중이 말하기를,
"호서(湖西)의 사계(査啓)에 이르기를, ‘우(禹)·강(姜) 등 세 사람에게 물었더니 우여천(禹如天)이 공칭(供稱)하기를, 「이만동의 말이 상사(上司)의 소식은 막연하여 들은 것이 없으나, 청주(淸州)의 관문(關文)이 이처럼 명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 우여천이 무고(誣告)로 자복(自服)하였지만, 강(姜)·이(李) 두 사람은 이만동을 구하지 않았으니, 이 두 구절의 말은 끝내 창졸간에 꾸며낸 말 같지는 않으며, 무복(誣服)도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우여천이 호궤(犒饋)할 즈음에 나적(羅賊)이 와서 말하기를, 「사기(事機)가 그릇되었다. 그러므로 이만동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公州)로 갈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만동의 공초(供招)에는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의 전투는 곧 24일간이었는데, 이른바 사기가 그릇되었다는 말은 21일에 한 말이었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거짓임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또한 반드시 그렇지 아니한 바가 있습니다. 안성과 죽산에서 패배한 뒤라면 어찌 반드시 다시 그릇되었음을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적(賊)이 청주(淸州)를 함락시킨 뒤 팔도(八道)에서 응하는 사람이 없었고 병판(兵判)이 이미 내려갔으니 일이 그릇되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안성과 죽산 전투 뒤에 일이 아닙니다. 이만동은 곧 이지시(李之時)의 같은 성(姓)의 동서(同婿)이고 두 나가(羅哥)가 발병(發兵)하기 전날 와서 잤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형신(刑訊)을 청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북도 안문사(北道安撫使)의 사계(査啓) 가운데 ‘전립(氈笠)과 초혜(草鞋)를 거두어 사들인 것은 박창제(朴昌悌)의 일이 아니고 곧 감영(監營)의 군관(軍官) 유호(柳灝)가 한 짓이라고 하였습니다. 친기위(親騎衛)를 점열(點閱)한 일은 박창제가 처음에는 으레 하는 점열이라고 공칭(供稱)했다가 중간에는 탈(頉)을 잡아 다시 점열한 것이라 공칭하였고, 끝에 가서는 ‘역변(逆變)을 들었으므로 군사를 징발하여 대기하고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실상이 과연 그러했다면 처음에는 어찌하여 말을 하지 않고 세 번이나 그 말을 바꾸었겠습니까? 그리고 조정의 명령 없이 비식(糒食)을 마련하고 전복(戰服)을 지었으니, 누군들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유품(儒品) 중에서 용력(勇力)이 있는 자를 선발한 것도 또한 의심스럽고, 군용(軍容)을 갖추고 금군(禁軍)을 불러 들인 일, 공문(公文)을 뜯어 본 일, 먼저 남태징(南泰徵)의 생사(生死)를 물어 본 것도 또한 의심스럽습니다. 박창제는 승복(承服)하지 않고 형(刑)을 집행하기 전에 죽었지만, 유호는 국청(鞫廳)으로 이송(移送)하리까, 포청(捕廳)에 출부(出付)하리까?"
하니, 임금이 이광좌에게 물었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박창제에게 만약 숨기는 실정이 없다면 유호는 마땅히 신문할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포도청(捕盜廳)에서 구문(究問)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은정(李殷鼎)의 일로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진달한 뒤에 홍경보(洪景輔)가 나래(拿來)할 것을 청하였는데, 나는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맹단(盟壇)에 동가(動駕)할 때 누차 시위(侍衛)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잡아 가두었다가 곧 석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경지(李慶祉)에게 이미 형신(刑訊)을 시작했으므로 다시 잡아 가두라고 했던 것이나, 곧 후회하였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이경지에게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면 이은정은 즉시 석방하고, 의심할 만한 점이 있다면 정배(定配)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경지의 일은 오한익(吳漢翊)과 이주연(李周衍)이 비록 말한 것이 있으나,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이미 형장(刑杖)을 맞고 죽긴 했지만 이은정은 애초 잡아 가둔 것이 이미 잘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정배(定配)한다면 전일의 실수를 미봉(彌縫)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재차의 과오(過誤)를 용납하겠는가?"
하니, 이광좌·서종옥·김상성이 모두 마땅히 정배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당초의 처분(處分)이 끝내 경솔했던 것 같고, 이미 후회스럽다고 생각하신다면, 곧장 석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배는 곧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의 아들이라고 해서 어찌 사람마다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교(上敎)로 즉시 석방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처음에 이명언(李明彦)이 하동(河東)에 귀양갔다가 정미년024) 에 사유(赦宥)를 입어 돌아오게 되자, 서울로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영남(嶺南)에 살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이명언이 답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믿고 의지하는 곳이 있지만 나만 홀로 그런 곳이 없기 때문에 조령(鳥嶺)을 의지하여 앉아 있고자 한다.’라고 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가 불평(不平)스런 마음을 가진 줄을 알았다고 한다."
1월 10일 을묘
양사(兩司) 【사간(司諫) 서종옥(徐宗玉)과 지평(持平) 윤종하(尹宗夏)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여 문출 죄인(門黜罪人) 심수현(沈壽賢)을 먼 곳에 귀양보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사사(使事)는 내가 이미 하촉(下燭)하였다. 다만 해를 넘기도록 서로 버티고 있으니, 대신(大臣)이 마땅히 불안해 할 것이다. 그리고 먼 곳에 귀양보내는 것은 너무 지나치니 중도 부처(中途付處)025)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의 계사(啓辭) 가운데서 김덕유(金德裕)을 원배(遠配)하라는 명(命)을 도로 정지하고 그대로 엄하게 국문(鞫問)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청한 일은 홍치중(洪致中)의 아룀으로 인하여 윤허하였다. 홍치중이 또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청 죄수(鞫廳罪囚)에게는 옛날부터 양축법(兩杻法)이 없었는데, 듣건대, 지난 봄부터 처음 시작되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현재 있는 국청 죄수에게는 단지 우축(右杻)만 채우고 지금부터 후에는 다만 구례(舊例)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1월 12일 정사
밤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1월 13일 무오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임금이 친히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재실(榟室)에 상(上)자를 쓴 뒤에 거애(擧哀)하고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시호는 위에 보인다.】 명정(銘旌)을 바꾸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4일 기미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윤종하(尹宗夏)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주 영장(慶州營將) 곽내태(郭來泰)는 거조(擧措)가 해괴하고 도적을 다스리는 일을 완전히 팽개쳐 버렸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철원 부사(鐵原府使) 이국형(李國馨)은 금령(禁令)을 범하고 그의 어버이를 경내(境內)에 이장(移葬)하였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소서. 전옥 주부(典獄主簿) 권익준(權益儁)은 파산 군관(罷散軍官)으로서 외람되게도 사적(仕籍)에 통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청대(聽大)하고, 입시(入侍)해서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관서(關西)의 세미(稅米)를 본도(本道)에 남겨 둔 것은 실로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임진년026) 의 난리 때 평양성(平壤城) 안의 쌀이 18만 휘[斛]에 이르렀으므로, 이것으로 큰 힘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세미(稅米)를 호조(戶曹)에서 발매(發賣)하는 것이 이미 폐습(弊習)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어영청(御營廳)에서 비록 내국(內局)027) 과 상방(尙方)028) 에서 무역(貿易)한 가은(價銀)의 대미(代米)라고 하면서 경사(京司)에 청하고 있긴 하지만, 이 길이 만약 한번 열리면 뒷날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땅히 도신(道臣)의 말을 따라 허락하지 않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길례(吉禮) 때 의대(衣襨)의 조목(條目)은 지극히 번잡(煩雜)하고 상례(喪禮) 때 대렴(大斂)·소렴(小斂)의 이불은 모두 금선(金線)으로 만드는데, 금(金)은 몸에 가까이 하는 물건이 아니니, 아마도 마땅한 바가 아닐 듯합니다. 지금 세속의 사치스런 풍속이 안에서는 귀근(貴近)에서 비롯되어 밖으로는 여항(閭巷)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사(法司)029) 에서 능히 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위에서 법을 제정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신이 일찍이 어선(御膳)을 내려 주심을 받았는데 가짓수가 대단히 풍성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명선 공주(明善公主)와 명혜 공주(明惠公主), 그리고 상주(殤主)030) 의 경우 지금까지도 여전히 공비(供費)를 두어 감(減)하지 않고 있습니다.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031) 도 오히려 체천(遞遷)032) 하는 예(禮)가 있고, 상제(殤祭)는 구근(久近)에 따라 예(禮)에 명문(明文)이 있으니, 두 공주는 여러 상주(殤主)와 더불어 모두 한 곳에 모아 공제(供祭)하는 물자를 조금 줄이고 그 나머지는 죄다 내수사(內需司)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유숙의방(劉淑儀房)의 경우도 또한 지금까지 감하지 않고 있으니, 그 신주(神主)를 여러 후궁(後宮)으로서 후사(後嗣)가 없는 신주와 더불어 한 곳에 같이 두고 그 제수(祭需) 물자를 조금 주고, 그 나머지는 내수사에 귀속시키는 것을 또한 두 궁방(宮房)의 예(例)와 같이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일에 능히 몸소 본보기가 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사치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습속(習俗)이 이미 고질이 되어 창졸간에 바꾸기 어려울 뿐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문채(文彩)나는 옷이나 진귀한 노리개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혹시 볼 것을 부끄러워하였으니, 대개 또한 성벽(性癖)이 마침 꼭 그러했던 것이다. 계사년033) 에 봉안사(奉安使)로 심도(沁都)034) 에 갔을 때 갓끈을 검은 색 명주로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찍이 듣건대, 선조조(宣祖朝) 때는 면포(綿布)로 바지와 이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번 초상(初喪) 때 금선(金線)을 두른 이불은 나의 뜻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선(御膳)은 경(卿)이 때마침 알성(謁聖)035) 때에 본 것인데, 여러 궁가(宮家)에서 올린 것일 뿐이고 평상시에는 이와 같지는 않았다. 두 공주방(公主房)은 명성 대비(明聖大妃)의 하교(下敎)로 한계를 정해 놓았기 때문에 당분간 감히 의논할 수 없다. 유숙의방(劉淑儀房)의 경우는 마음속에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다. 그러나 또한 어찌 길이 한절(限節)이 없겠는가?"
하고, 금중(禁中) 각처(各處)의 고군(雇軍) 1백 64명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병조(兵曹)에서 이미 고군의 액수(額數)를 써서 들이자 임금이 금중 고군의 액수 안에서 참작해서 덜고 감하게 하고, 이내 궐외(闕外) 금군(禁軍) 중에서 지나치게 많은 자를 역시 일체로 재량해서 줄이라고 명하였다. 금중 고군의 삯 중에서 비용을 줄인 수량이 일년에 약 면포(綿布) 4천여 필이나 된다고 한다.
광흥수(廣興守) 양득중(梁得中)을 인견(引見)할 것을 명하였다. 양득중은 호남(湖南) 사람으로 윤증(尹拯)의 문인(門人)이다. 초선(抄選)으로서 징소(徵召)되어 서울에 도착하자 소대(召對)에 같이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의부(李義府)는 간사스럽고 아첨을 잘했는데, 말은 당직(讜直)한 것 같았으니, 이때를 당하여 그도 또한 이로움이 당직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자, 양득중이 말하기를,
"군주(君主)가 정직(正直)한 것을 좋아하면 간사한 신하도 모두 능히 바른 말을 하고, 정직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면 정직한 신하도 또한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하는 법이니, 이것이 치란(治亂)의 기틀입니다."
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경기(京畿) 양주목(楊州牧)의 지아비를 죽인 죄인 경천(京天)을 이미 잡아다 가두었는데, 강상(綱常)에 관계되니 법례(法例)에 의거하여 삼성 추국(三省推鞫)036)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월 15일 경신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세자(王世子)의 신주(神主)를 만드는 일은 이번 1월 21일에 마땅히 그 역사(役事)를 끝내도록 하고, 22일 오시(午時)에 본조(本曹)의 당상관(堂上官)과 봉상시 제조(俸常寺提調)가 봉심(奉審)한 뒤에 경현당(景賢堂)에 봉안(奉安)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심태현(沈泰賢)을 지평(持平)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수찬(修撰)으로, 조석명(趙錫命)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이태좌(李台佐)가 여덟 번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자 이태좌가 곧 그날로 명(命)에 응하였다. 처음의 연석(筵席)에서 맨먼저 이양(頤養)037) 하는 방도를 진달하고, 주강(晝講)을 정지하고 소대(召對)를 행할 것을 청하였다.
1월 16일 신유
월식(月食)하였다.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장흥(長興)의 저인(邸人) 강세우(姜世遇)는 군포(軍布)를 가지고 간사한 짓을 하다가 장신(將臣)의 진달로 인해 효시(梟示)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핵실(覈實)하여 정법(正法)038)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월 17일 임술
지평(持平) 정우량(鄭羽良)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진유(李眞儒)는 성격이 편협하고 당론(黨論)에 병통이 있으나, 그 마음은 목을 길게 빼고 나라를 위하여 죽기만을 원할 정도입니다. 간관(諫官)을 출보(出補)시킨 한 가지 일은 마음은 비록 성실(誠實)하여 딴 마음은 없을지라도 자취는 당(黨)을 부식(扶植)한 데로 돌아갑니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그 상소에 탈을 잡아 그 마음을 지워버렸으니, 이진유는 통분(痛憤)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용서하고 그 자취를 그냥 그대로 둔다면 공의(公議)가 더욱 격렬해질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근래 대각(臺閣)에서 일을 담당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곧 전일의 계사(啓辭) 중의 한 가지 일 때문이다. 바야흐로 하교(下敎)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정우량은 동료들 가운데서 지론(持論)이 가장 관완(寬緩)한 자라고 일컬어지는데, 이진유를 위해 간사하게 비호하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아! 견문(見聞)의 편협함과 언의(言義)의 잘못으로 인해 그 마음을 함닉(陷溺)시킨 것이 모두 이러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재실(榟室)039) 을 묶어 쌀 때 곡림(哭臨)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실을 닦는 일은 누가 할 것인가?"
하니, 도감 제조(都監提調)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묘소(墓所)에 도착한 뒤 참찬(參贊)이 닦기로 되어 있으므로 아직 와서 기다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자, 장생전 제조(長生殿提調)가 닦으라고 명하였다. 구의(柩衣)는 홍단(紅緞)을 썼는데 분(粉)으로 보문(黼文)을 그렸다. 그리고 유금(襦衾)을 깔았는데 겉은 흑단(黑緞), 속은 홍단(紅緞)으로 하였으며, 다음에 홍전(紅氈)으로 쌌다. 먼저 소면삭(小綿索)으로 묶고 그 다음에 대면삭(大綿索)으로 묶었는데, 내시(內侍) 등이 그 묶은 대삭(大索)을 걸어 윤여판(輪輿板)에 봉안하였다. 윤여판은 검은 색 칠(漆)을 했고 판(板) 위에는 강연화문석(絳緣花紋席)을 깔았다. 또 모욕판(毛褥板)을 깔았는데 좌우에 여섯 개의 고리를 붙였다. 장인(匠人)이 홍색(紅色)의 대대(大帶)로 묶고 모구의(毛柩衣)를 덮었다.
비변사(備邊司)의 당상관(堂上官)이 윤번(輪番)으로 직숙(直宿)하는 것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비국(備局)에는 옛날에 직숙하는 규정이 없었는데, 작년의 역란(逆亂) 때 송인명(宋寅明)의 진달(陳達)로 인해 특별히 직숙하도록 명한 것이므로, 이때에 와서 이를 혁파한 것이다.
1월 18일 계해
권익순(權益淳)을 승지(承旨)로, 송성명(宋成明)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조명교(曺命敎)를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1월 19일 갑자
밤에 유성(流星)이 하늘 복판에서 나와 북방(北方)의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와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자[尺]쯤이었으며, 색깔은 흰색이었다.
심단(沈檀)을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로 삼았다. 애초 신축년040) 겨울에 김일경(金一鏡)의 상소가 들어갔던 바로 그날 심단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김일경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었는데, 중비(中批)041) 였다. 을사년042) 손형좌(孫荊佐)의 옥사(獄事) 때 심단의 아들 심득행(沈得行)이 ‘골설(骨屑)’이란 말 때문에 역적의 초사(招辭)에 인증(引證)되어 체포·원배(遠配)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심단의 나이가 90에 가까운데도 갑작스레 상약(嘗藥)043) 하는 곳으로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1월 20일 을축
국청 대신(鞫廳大臣)을 인견(引見)하여 조덕보(趙德普)·목중형(睦重衡)·우여천(禹如天)·강필제(姜必齊)·김덕유(金德裕)·박태견(朴泰堅)·박태삼(朴泰三)·홍계일(洪啓一) 등을 작처(酌處)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무신년044) 의 역적 민백효(閔百孝)가 공초(供招)에 일컫기를, ‘조덕보가 역적 모의를 알고서 안성(安城)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쉰 일은 3월 15일이었습니다.’라고 했는데, 조덕보는 공초하기를, ‘3월 18일에 서울에서 용인(龍仁)으로 내려갔고, 23일에 용인을 출발하여 직산(稷山)에서 하루를 잔 뒤 호현(湖縣)045) 에 부임(赴任)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본도(本道)에 명하여 사문(査問)하게 했더니, 관인(官人)의 공초(供招)가 조덕보의 말과 똑 같았다. 임금이 ‘조덕보는 민창도(閔昌道)와 혼인을 맺고 몸가짐을 근신(謹愼)하지 아니하여 이렇게 되었으나,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여 참작하여 아주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목중형은 무신년 역적의 초사에 누차 나왔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3월 15일에 판교(板橋)에 모이기로 약속했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청파(靑坡) 목정읍(睦井邑)046) 이 호남(湖南) 역적의 대장(大將)’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러나 목중형은 공초하기를, ‘3월 15일은 곧 청주(淸州)에서 변(變)을 일으킨 날이니, 판교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3월 15일은 곧 영남과 호남 각도(各道)의 여러 역적들이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한 날이니, 이것은 스스로 변명하는 단서가 될 수는 없지마는, 죄가 명백하지 않다.’ 하여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우여천은 진잠현(鎭岑縣)의 좌수(座首)이고 강필제는 진잠현의 아전이었는데, 현감(縣監) 이만동(李萬東)이 역적을 따랐을 때 혹은 흉언(凶言)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혹은 적진(賊陣)에 왕래하기도 하였다. 임금이 위협받아 따른 것이라 하여 용서하고 우여천은 절도(絶島)에 정배하고 강필제는 원지(遠地)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김덕유는 충추(忠州) 사람으로 민암(閔黯)의 사위이고 한세홍(韓世弘)의 내구(內舅)047) 이다. 처음에 민백효에 의해 인좌(引坐)되었으므로 체포해 추문(推問)하다가 곧 작처(酌處)했던 것인데, ‘김덕유가 법망(法網)에서 빠져나갔다.’고 충주 사람들의 말이 자자(藉藉)하였으므로 사간(司諫) 서종옥(徐宗玉)이 다시 국문(鞫問)할 것을 계청(啓請)하자,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누차 형신(刑訊)을 가하였지만 단서(端緖)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을 따랐던 것은 여러 사람 마음의 의심을 풀어주려고 한 것일 뿐이었다. 김덕유는 이미 작처(酌處)를 거쳤는데, 곧 다시 곤장(棍杖)을 맞아 죽는다면 무릇 작처를 거친 자들이 어찌 모두 의심과 두려움을 품지 않겠는가? 의심으로써 사람을 죽이는 것은 왕자(王者)의 도리가 아니다."
하고, 특별히 감사(減死)해서 대정현(大靜縣)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박태삼은 순천 부사(順天府使)가 되었을 때 박태견은 박태삼의 동성(同姓) 족친으로서 박태삼의 편지를 박필몽(朴弼夢)의 적소(謫所)에 전해 주고, 지나는 길에 태인(泰仁)을 들렀는데 박필현(朴弼顯)이 바야흐로 군사를 점열(點閱)하고 있었으므로 박태견이 타고 있던 말을 바꾸어 주었던 일이 있었다. 임금이 ‘박태삼이 박필몽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역절(逆節)이 채 드러나기 전에 있었고, 박필현이 반란(叛亂)을 일으켰을 때 근왕(勤王)한다고 거짓 핑계를 대었으므로, 박태견이 말을 바꾸어 주었으니, 속임을 당한 것은 괴이히 여길 것이 없다.’ 하여 박태견은 정배하고, 박태삼은 아주 먼 변방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홍계일은 이유익(李有翼)의 혈당(血黨)이다. 이유익이 이사성(李思晟)의 평안 병영(平安兵營)에 심부름시킬 만한 자를 골랐는데, 홍계일이 거기에 들었으며, 또 이유익의 흉시(凶詩)를 본 자이기도 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누차 형신(刑訊)했으니, 넉넉히 죄를 징계할 수가 있겠다. 죽이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하고, 감사(減死)하여 아주 먼 변방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일에 대해 깊이 후회하는 것이 있으니, 이경지(李慶祉)의 아들 이은정(李殷鼎)을 특별히 잡아 가둔 일이다. 이경지가 만약 형(刑)을 집행하기 전에 죽지 않았다면 작처(酌處)하려고 했었다."
하니,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이경지는 끝내 의심할 만한 것이 있으니, 3월 20일에 박사관(朴師寬)을 찾아가 만난 것은 명백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백문채(白文彩)는 곧 그 매부(妹父)이고 오한익(吳漢翊)은 곧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 만약 20일에 찾아가 만난 일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반드시 공공연하게 무고(誣告) 날조했겠습니까? 17일에 박사관을 만난 일은 승복(承服)하였지만, 20일에 박사관을 만난 일은 시종일관 굳게 숨겼으니, 반드시 숨기는 사정(事情)이 있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성(城)을 닫고 적(賊)에게 항거하였으니, 족히 용서할 만하다.’고 생각하시지만, 박필현이 삼천(三川)에 와서 진(陣)을 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아니었으니, 사세로 보아 마땅히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경지는 군사의 행동을 정지시키고 전진(前進)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또한 죽일 만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태좌(李台佐)는 말하기를,
"오명항(吳命恒)이 전주(全州)에서 올라올 때 ‘이경지가 공(功)이 있다.’고 했는데, 백마(白馬)를 타고 내도(來到)한 사람은 곧 이경지에게 간찰(簡札)을 전하러 온 자였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경지의 죄는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또 한 가지 깊이 후회하는 일이 있다. 작년 봄 박종원(朴宗元)의 아들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하여금 효시(梟示)하게 했더니, 이종성(李宗城)이 그만둘 것을 간(諫)하였고 이병태(李秉泰)도 또한 ‘비록 한때는 시원하시겠지만 반드시 뒷날 후회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종성과 이병태는 지금의 강직(剛直)한 신하이다."
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역적을 다스리는 데는 본래 그에 마땅한 법이 있습니다. 곧장 군문(軍門)에서 효시(梟示)하게 하는 것은 다만 법(法)에 어긋날 뿐 아니라 뒷날의 폐단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박종원(朴宗元)의 아들을 효시(梟示)한 것은 병란(兵亂)이 평정되기 전에 있었는데, 이종성·이병태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불가함을 고집하였고 얼마 안 가 성상께서도 또한 후회하시었으니, 뒤에 그만둘 것을 간한 말을 생각하심은 참으로 성덕(盛德)인 것입니다. 그러나 을해년048) 의 옥사(獄事)에 이르러서는 군문(軍門)에서 효시(梟示)하는 것이 곧 하나의 안치(按治)하는 예(例)가 되어버렸습니다. 아깝게도 이종성과 이병태의 말을 다시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홍상용(洪尙容)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권익관(權益寬)에 대한 전일의 계사(啓辭)에 이르러서는 고쳐서 말하기를,
"권익관이 역적의 부름에 대해 말[馬]을 돌려보낸 것이 비록 변란(變亂)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 부탁을 받고 공물(公物)을 추급(推給)하였으니, 그가 흉적(凶賊)과 아주 친밀하게 지냈던 정상은 진실로 이미 놀라운 일이며, 박창제(朴昌悌)와 흉적 황부(黃溥)를 또 막속(幕屬)으로 내어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박창제가 점마(點馬)한 것은 그가 서압(署押)한 공첩(公牒)의 일이었고 황부가 배[舟]를 만든 것도 또한 그의 지휘(指揮)에서 나왔는데, 다만 점마(點馬)가 곧 흉적이 군사를 일으킬 즈음에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암암리에 배를 만든 것은 원래 조가(朝家)에서 아는 일이 아니었으니, 비록 박창제의 공사(供辭)와 그의 소장(疏狀)을 가지고 보더라도 일이 의심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그런데 흉적 황부와 박창제가 이미 형(刑)을 집행하기 전에 죽었으니, 지금 국청(鞫廳)에서 다시 빙문(憑問)할 곳이 없습니다. 청컨대 권익관을 빨리 왕부(王府)049) 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핵실(覈實)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당론(黨論)이 갈라진 뒤로 의심하는 것이 너무 심각하고 용서하는 것은 너무 너그러우니, 이것은 말류(末流)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반드시 한번 추핵(推覈)한 뒤에야 그에게 있어서도 벗어날 길이 있게 될 것이고 여러 사람의 의심도 또한 풀릴 수 있을 것이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이진유(李眞儒)에 대한 전일의 계사를 전하니, 비답하기를,
"이진유의 일은 정우량(鄭羽良)의 상소에 소상하게 언급하였다. 만약 이진유의 심장(心腸)이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그 죄는 다만 절도(絶島)에 귀양보낼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사건이 각각 다른 것이니, 이진유를 죄준 것은 그 상소의 일 때문이 아닌 것이다. 대개 그는 당론(黨論)이 너무 심각한데다 또 역적 김일경과 절교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죄줄 만한 것이다. 오늘날 대각(臺閣)에서 우물쭈물하면서 규피(規避)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진유의 말에 말미암고 있으니, 이 계사(啓辭)는 오랫동안 버틸 것이 못된다. 그리고 조가(朝家)의 법(法)은 마땅히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니, 여러 해 동안 천극(栫棘)050) 한 나머지에 도배(島配)051) 한다면 지나친 것이다. 아주 먼 변방에 귀양보내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국청의 승복(承服)한 죄인 이명근(李命根)은 흉역(凶逆)과 체결(締結)하여 괘서(掛書)에 동참하였음을 이미 승복(承服)하였습니다. 청컨대 즉시 결안(結案)하여 참형(斬刑)에 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귀휴(李龜休)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청컨대 박태삼(朴泰三)의 정배(定配)를 도로 정지하시고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실정을 캐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권익관은 김일경의 지친(至親)이며 박필현(朴弼顯)의 매서(妹婿)052) 로서 김일경이 복주(伏誅)될 때 찾아가 보고는 흐느끼며 한숨을 쉬면서 마치 아픔을 참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 무신년053) 의 변란(變亂) 때 박창제(朴昌悌)·황부(黃溥)와 더불어 배를 만들고 전구(戰具)054) 를 수리하였는데, 윤헌주(尹憲柱)가 온다는 소문을 듣자 황부의 첩(妾)을 강물에 던져 죽인 일이 황부의 동생의 공초(供招)에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천염(薦剡)055) 을 배포(排布)하여 이사성과 권익관으로 하여금 서북 양계(兩界)를 맡게 한 것은 누가 한 일인지요?
【태백산사고본】 17책 21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10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사학(史學) / 교통-마정(馬政)
[註 049] 왕부(王府) : 의금부.[註 050] 천극(栫棘) : 유배(流配)된 죄인에게 가해지는 형벌. 곧 배소(配所)의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설치하여 외부와 격리(隔離)시키는 것.[註 051] 도배(島配) : 섬으로 귀양보냄.[註 052] 매서(妹婿) : 매제(妹弟).[註 053]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054] 전구(戰具) : 전쟁에 필요한 기구.[註 055] 천염(薦剡) : 사람을 천거한 공문서. 곧 천거.
사신은 말한다. "권익관은 김일경의 지친(至親)이며 박필현(朴弼顯)의 매서(妹婿)052) 로서 김일경이 복주(伏誅)될 때 찾아가 보고는 흐느끼며 한숨을 쉬면서 마치 아픔을 참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 무신년053) 의 변란(變亂) 때 박창제(朴昌悌)·황부(黃溥)와 더불어 배를 만들고 전구(戰具)054) 를 수리하였는데, 윤헌주(尹憲柱)가 온다는 소문을 듣자 황부의 첩(妾)을 강물에 던져 죽인 일이 황부의 동생의 공초(供招)에 완전히 드러나게 되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천염(薦剡)055) 을 배포(排布)하여 이사성과 권익관으로 하여금 서북 양계(兩界)를 맡게 한 것은 누가 한 일인지요?
1월 21일 병인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발인(發靷) 때 궁성(宮城)의 호위(扈衛)를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인조(仁祖)을유년056)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발인 때 궁성의 호위를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거행하였는데, 이때는 금위(禁衛)·어영(御營) 두 군문이 채 창설되지 않았었다. 이때에 와서 병조(兵曹)에서 품지(稟旨)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검열(檢閱) 조상행(趙尙行)이 상소하여 체직(遞職)을 원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같이 〈논핵을〉 당하였던 여러 사람들은 끝내 강(講)에 응하지 않았고, 주천(主薦)했던 우료(右僚)도 또한 이미 자핵(自劾)하였습니다. 예문관(藝文館)의 규례(規例)에 의거하면 만약 천거받은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지적해서 논핵할 경우 같이 천거받은 사람 역시 감히 행공(行公)하지 못하는 것이 3백 년 이래의 고례(古例)입니다."
하였다. 처음에 한원(翰苑)057) 에서 조상행을 천거했을 때 정홍상(鄭弘祥)을 같이 추천하였다. 그런데 회천(回薦)058) 이 이미 완료된 뒤에 일찍이 〈한림 벼슬을〉 거친 사람인 조지빈(趙趾彬)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홍상의 아비 정형익(鄭亨益)의 지난해 상소는 방만규(方萬規)의 상소와 서로 비슷하니 정홍상은 마땅히 한림(翰林)이 될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조상행이 시종일관 극력 사직했던 것이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우의정(右議政) 이태좌(李台佐)가 상소하여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수어 대장(守禦大將) 직임을 사직했는데, 근래의 규례를 상고하여 연달아 면부(勉副)059) 를 허락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명 공주(貞明公主) 이후로 효종(孝宗)의 다섯 공주가 채 포대기를 떠나기도 전에 먼저 제택(第宅)과 전원(田園)을 차지하였으니,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왕녀(王女)는 장성하기를 기다려 전원을 주고 제택을 지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병태(李秉泰)가 일찍이 이 일로써 진달하였고 이재(李縡)도 또한 이 일로써 간곡하게 면계(勉戒)했었다. 그런데 경(卿)의 말도 또 이와 같으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사친(私親)의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옹주(翁主)로 하여금 주관하게 한 것이다. 외간에서 드디어 전원을 많이 경영한다는 말이 있게 되었으나, 사실 따로 차지한 일은 없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병태는 기질(氣質)이 매우 아름답다."
하였다.
승지(承旨) 오광운(吳光運)을 경상도에 파견하여 이도장(李道章)의 옥안(獄案)을 안핵(按覈)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박문수(朴文秀)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본도(本道) 사람 이도장 등이 ‘박문수가 일찍이 소사령(素沙嶺)의 적진(賊陣)에 앉아 있었다.’고 하였다. 소사령은 안음(安陰)과 무주(茂朱)의 두 고을 경계에 있는데, 역적 정희량(鄭希亮)이 군사를 일으킨 곳이다. 박문수가 이차(離次)하여 왕명(王命)을 기다리니, 임금이 이 옥사(獄事)는 박문수로 하여금 안사(按査)하게 할 수 없다고 여겨 특별히 오광운에게 안핵(按覈)할 것을 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 따로 오광운에게 유시(諭示)를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은 그 대부(大夫)를 비난하지 않는다. 일찍이 듣건대, 영남의 풍속은 관장(官長)을 침욕(侵辱)하거나 능멸하는 습속이 없다고 하는데, 한번 정희량의 무리가 나오고 나서부터 영남의 아름다운 풍속을 손상시키고 더렵혔으며, 이번에는 또 방백(方伯)을 무욕(誣辱)하는 일이 일어났다. 관장(官長)을 무함(誣陷)하면 본래 거기에 합당되는 형률(刑律)이 있는데, 하물며 한 도(道)를 다스리는 방백(方伯)의 경우이겠는가? 시례(詩禮)를 숭상하는 고을에서 또 이런 무리들이 나왔으니, 이것은 위에 있는 사람이 능히 부식(扶植)하고 장려하지 못한 소치이다. 이것은 덕이 없는 내가 마땅히 반성해야 할 곳이기도 하다. 정희량이 소사(素沙)에 진을 쳤던 것은 곧 도신(道臣)이 도순무(都巡撫)를 수행하여 서울에서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막부(幕府)에 종사하고 군사를 진격시켜 역적을 토벌하였는데, 언제 소사에 갈 수가 있었겠는가? 안핵(按覈)하는 일이 끝나거든, 내 뜻을 도내(道內)에 효유(曉諭)하고 많은 선비들 가운데서 학식(學識)이 있는 사람들을 인접(引接)하여 선현(先賢)의 유풍(遺風)으로 서로 더욱 힘쓰게 하라. 그리고 듣건대, 지난번에 흉역(凶逆)이 나왔기 때문에 유생(儒生) 중에 정거(停擧)060) 된 자가 많다고 하는데, 비록 지친(至親)이라 하더라도 죄다 그르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물며 십실지읍(十室之邑)061) 에도 반드시 성실하고 미더운 사람이 있는 법인데, 안음(安陰) 한 고을에 어찌 선(善)한 사람이 없겠느냐? 아울러 이것을 열읍(列邑)에 널리 유시하도록 하라. 아! 본도(本道)는 곧 인재(人才)의 고장인데, 조정에서 오랫동안 조용(調用)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침굴(沈屈)되었다. 경학(經學)이 있는 선비를 직접 가서 방문하고 역시 조정에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2일 정묘
김재로(金在魯)를 수어사(守禦使)로, 오명신(吳命新)을 승지(承旨)로, 서종옥(徐宗玉)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1월 23일 무진
경상도 관찰사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여 세 가지 일을 말하였다. 그 첫 번째 것은 군정(軍政)인데, 이르기를,
"각읍(各邑)의 군정(軍丁) 중의 결원(缺員)은 청컨대 각영(各營)에서 모집한 군보(軍保)062) 로써 정원(定員)을 채우고 군보의 자손(子孫)으로서 유학(幼學)이라고 거짓 일컫는 자를 찾아내어 각영에 소속시키되 군관(軍官)이라 이름하고 모보(募保)의 예(例)처럼 포(布)를 거두게 하소서."
하고, 두 번째의 것은 진전(陳田)인데, 이르기를,
"청컨대 견감(蠲減)한 수량은 반드시 새로 기경(起耕)한 것을 얻어 그 대신을 채운 뒤에야 허락하게 하소서."
하고, 세 번째의 것은 역노비(驛奴婢)인데, 이르기를,
"청컨대 모록(冒錄)의 형률(刑律)을 엄하게 하소서."
하였다. 또 각 군문(軍門)의 유황군(硫黃軍)의 폐단에 대해 말하고, 청하기를,
"유황이 있는 고을은 액수(額數)만 남겨 두고, 유황이 없는 고을은 죄다 태거(汰去)하여 군액(軍額)에 충원시키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이귀휴(李龜休)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종묘(宗廟)의 일에 있어서 경종(景宗)을 황형(皇兄)으로 숙종(肅宗)을 황고(皇考)로 일컬으셨는데, 이번 세자(世子)의 복제(服制)에 있어서 왕대비전(王大妃殿)께서 종자(從子)로써 손자(孫子)를 삼으셨습니다. 계체(繼體)063) 가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칭호는 복제(服制)를 이르는 것이니 본래 서로 상응하는 법입니다. 이름이 이미 정해졌다면 복제 또한 거기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상례(喪禮)는 부제(祔祭)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왕세자(王世子)는 소현 세자(昭顯世子)에 대하여 여러 조부(祖父)에 부제(祔祭)해야 된다는 설에 합당한데, 또 중일(中一) 이상에 부제해야 한다064) 는 글이 있으니, 마땅히 소현묘(昭顯廟)에 부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비답(批答)을 내려 따르지 않았다.
1월 24일 기사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발인(發靷) 때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거둥하여 곡림(哭臨)하고 집영문(集英門)까지 전송하였다. 기일(期日) 사흘 전에 사직(社稷)·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에 고제(告祭)를 지냈고, 하루 전에 계찬실전(啓欑室奠)을 지냈으며, 같은 날 사시(巳時)에 조전(祖奠)을 지냈다. 24일 축시(丑時)에 빈궁 해사제(殯宮解謝祭)를 지내고, 같은 날 도로 교량제(道路橋梁祭)·각문십오신위제(各門十五神位祭)·명산 대천제(名山大川祭)를 지냈다. 같은 날 주정소(晝停所)065) 에서 영장 궁성 빈전(靈帳宮成殯尊)을 지냈고, 25일에는 노찬실전(路欑室奠)을 지냈으며, 26일에는 천전(遷奠)·입주전(立主奠)·사후토제(謝后土祭)·안묘(安墓奠)·초우제(初虞祭)를 지냈다.
기일(期日)에 앞서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 우주(虞主)를 만들어 혼백(魂魄) 뒤에 봉안(奉安)하였다. 그날 견전(遣奠)이 끝나기를 기다려 재실(榟室)을 드는 관원이 순(輴)을 빈궁(殯宮) 문 밖에 올려서 남향(南向)하게 하고 혼백거(魂帛車)를 순(輴)의 남쪽에 진설(陳設)하였다. 섭상례(攝相禮)가 나아가 영좌(靈座) 앞에 꿇어앉아 찬(贊)이 영좌를 내리고 여(轝)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내시(內侍)가 교명 책인(敎命冊印)·시책인(諡冊印)·애책(哀冊)을 집사자(執事者)에게 주어 각각 요여(腰轝)에 두게 하였고, 집사(執事)는 향로(香爐)·향합(香盒)을 받들어 향정(香亭)에 두었다. 대축(大祝)이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요여(腰轝)에 안치하고 우주궤(虞主櫃)는 그 뒤에 두었다. 내시(內侍)가 요여(腰轝)를 받들어 중문(中門)을 거쳐 나가자 섭상례(攝相禮)가 나아가 재실(榟室) 앞에 꿇어앉았고, 찬(贊)이 순(輴)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내시가 명정(銘旌)을 받들고 계단을 내려서자, 참찬(參贊)이 재실(榟室)을 마주들 관원과 내시를 거느리고 윤여(輪轝)로써 재실을 받들어 계단을 내려서서 소금저(素錦褚)로 덮으니, 내시들이 모두 곡(哭)하였다. 섭상례(攝相禮)가 앞을 인도하자 충의위(忠義衛)가 삽(翣)으로 재실(榟室)을 가렸고 명정(銘旌)이 앞장서 중문(中門)에 이르렀다. 섭상례가 나아가 혼백여(魂帛轝) 앞에 꿇어앉자, 찬(贊)은 여(轝)에서 내려 거(車)에 올릴 것을 청하였고, 대축(大祝)은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거(車)에 안치하고 우주궤(虞主櫃)는 그 뒤에 두었다. 재실(榟室)이 중문(中門) 밖을 나서자 섭상례가 재실 앞에 꿇어앉았으며, 찬(贊)이 순(輴)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참찬(參贊)이 재실을 마주들 관원 등을 거느리고 재실을 받들어 순(輴)에 올리자, 섭상례(攝相禮)가 앞을 인도하였다. 외문(外門) 밖에 이르러 섭상례가 나아가 순(輴) 앞에 꿇어앉으니, 찬(贊)이 순(輴)에서 내려 영여(靈轝)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참찬(參贊)이 재실(榟室)을 마주들 관원 등을 인솔하고 재실을 받들어 영여에 올리고 남쪽을 향하였으며, 혼백여(魂帛轝)·시책인요여(諡冊印腰轝)·애책요여(哀冊腰轝)·우보(羽葆)·명정(銘旌) 및 삽(翣)을 차례로 진열하였다. 섭상례(攝相禮)가 나아가 혼백거(魂帛車) 앞에 꿇어앉자 찬(贊)이 나아가 출발할 것을 청하였다. 또 나아가 영여(靈轝) 앞에 꿇어앉으니, 찬(贊)이 나아가 출발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위의(衛儀)가 인도하고 따르는 것을 법식(法式)대로 하였으며 탁(鐸)을 잡은 자가 탁을 흔들었다. 혼백거(魂帛車)가 종묘(宗廟) 앞길에 이르자 섭상례가 혼백거(魂帛車)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았다. 찬(贊)이 조금 멈출 것을 청하자, 여사(轝士)가 영여(靈轝)를 돌려 북향(北向)하게 하고 욕석(褥席)에서 정지하였다. 조금 있다가 섭상례가 꿇어앉자, 찬(贊)이 나아가 출발할 것을 청하였고 여사(轝士)가 거(車)를 돌려 나아가 출발하였다. 영여(靈轝)가 이르자, 섭상례가 나아가 영여 앞에 꿇어앉았다. 찬(贊)이 조금 멈출 것을 청하니, 여사(轝士)가 영여를 돌려 북향(北向)하게 하여 욕석(褥席)에 안치하였다. 조금 있다가 섭상례가 꿇어앉자, 찬(贊)이 나아가 출발할 것을 청하였다. 창덕궁(昌德宮) 동구(洞口) 앞길에 이르러 혼백거(魂帛車)와 영여(靈轝)가 도착하자 섭상례가 그 앞에 꿇어앉았고, 찬(贊)의 잠시 머무를 것을 청하였으며, 나아가 출발하는 것을 종묘(宗廟) 앞길에서의 의식(儀式)대로 하였다. 영여(靈轝)가 숭례문(崇禮門) 앞에 이르자 섭상례가 나아가 그 앞에 꿇어앉았고, 찬(贊)이 잠시 머물러 강(杠)을 고칠 것을 청하였으며, 나아가 출발하기에 앞서서 의식과 같이하였다.
성문(城門) 밖의 노제소(路祭所)에 이르자 도성(都城)에 남아 있던 여러 관원들이 동서(東西)로 나누어 차례대로 서 있었다. 혼백거(魂帛車)와 영여(靈轝)가 이르자 찬의(贊儀)가 꿇어앉아서 곡(哭)할 것을 외쳤고, 도성에 남아 있던 여러 관원들은 꿇어앉아 곡하였다. 혼백거가 장궁(帳宮)의 유문(帷門) 밖에 이르자 섭상례가 나아가 거(車) 앞에 꿇어앉았으며, 찬(贊)이 거(車)에서 내려서 여(轝)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내시(內侍)가 요여(腰轝)를 가지고 거(車) 앞에 나아가자, 대축(大祝)이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요여에 안치하였다. 유문(帷門) 안에 이르러 섭상례가 꿇어앉자 찬(贊)이 여(轝)에서 내려 좌(座)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대축(大祝)이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유궁(帷宮) 속에 있는 영좌(靈座)에 안치하고 우주궤(虞主櫃)는 그 뒤에 두었다. 영여(靈轝)가 장유(帳帷) 안에 이르자 섭상례가 나아가 여(轝) 앞에 꿇어앉았고, 찬(贊)이 조금 머무를 것을 청하였다. 【하루 전에 전설사(典設司)에서 영장궁(靈帳宮)을 노제소(路祭所)에 남향(南向)으로 설치하였는데, 병장(屛帳)을 쳐서 남쪽에 유문(帷門)을 두었고 영좌(靈座)를 바로 한가운데 설치하였다. 또 연달아 장유(帳帷)를 영장궁(靈帳宮)의 서쪽에 설치하여 영여(靈轝)가 잠시 머무르는 막차(幕次)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2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101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사시(巳時)와 오시(午時)에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고 햇무리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는데, 색깔은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1월 25일 경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국휼(國恤)066) 의 3년 안에서 졸곡(卒哭) 뒤의 대사(大祀)에는 음악을 쓰지만 중사(中祀)·소사(小祀)에는 음악을 정지합니다. 그리고 왕세자(王世子) 상(喪)의 졸곡 뒤의 중사·소사는 음악을 쓰고, 내상(內喪)의 기년(朞年) 안의 중사·소사도 평상시처럼 음악을 씁니다. 그런데 이번에 상례(喪禮)의 복제(服制)에 있어서 이미 역월(易月)의 그릇됨을 혁파하였으니, 예절(禮節)이 전에 비해 다른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중사에 음악을 쓰는 것은 미안한 데 관계될 듯합니다."
하니, 중사(中祀) 이하는 기제(朞制)의 복(服)을 다 입은 뒤에 음악을 쓰라고 명하였다.
1월 26일 신미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장사지냈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망곡(望哭)을 행하였고, 백관(百官)들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곡하였다. 묘(墓)는 파주(坡州)의 순릉(順陵) 왼쪽 언덕에 있는데, 을좌(乙坐)·신향(辛向)이고, 외안산(外案山)은 묘좌(卯坐)이다. 무신년067) 12월 9일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선릉사(先陵祠)의 후토신(后土神)에게 고하고, 풀을 베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15일에 옹가(瓮家)068) 를 짓고 21일에 금정(金井)069) 을 열었는데, 혈(穴)의 깊이는 8척(尺) 9촌(寸)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했다.】 이었다. 그리고 광(壙)을 파는 일을 끝마친 뒤 외재실(外榟室)을 내렸다. 정월 26일 신미(辛未) 묘시(卯時)에는 묘소(墓所)의 찬실(攅室)을 열었다. 하루 전날 전설사(典設司)에서 길유궁(吉帷宮)을 정자각(丁字閣) 영유궁(靈帷宮)의 서남향(西南向)에 설치하였는데, 장막을 치고 남쪽에 유문(帷門)을 두었다. 당일 전의(典儀)가 궁관(宮官) 및 익위사(翊衛司) 관원들의 위차(位次)를 유문(帷門) 밖에 북향(北向)해서 설치하고, 찬의(贊儀)·인의(引儀)의 위차를 평상시처럼 설치하였다.
전설사(典設司)에서는 재실(榟室)을 안치할 악차(幄次)을 현실(玄室) 문 밖에 남향(南向)으로 설치하고, 유사(攸司)는 욕석(褥席)을 악(幄) 안에 설치하였다. 전의(典儀)는 참찬(參贊)이 옥백(玉帛)을 올릴 위차(位次)를 악(幄)의 동쪽에다 북쪽 가까이 서향(西向)하여 설치했고, 애책(哀冊)을 들 관원과 옥백(玉帛)을 들 관원의 위차(位次)를 그보다 남쪽으로 조금 물려 서향(西向)으로 북쪽이 위가 되게 설치하였다. 또 정자각(丁字閣)의 영장궁(靈帳宮) 유문(帷門) 밖에 길흉 거여(吉凶車轝)를 발인(發靷) 및 의장 명기(儀仗明器)를 발인(發靷) 때의 의식대로 진설하였다. 유사(攸司)가 예찬(禮饌)을 올리자 영좌(靈座) 앞에 설치했고, 향로(香爐)와 향합(香盒)과 촛불까지 그 앞에 설치하였다. 축문(祝文)을 영좌의 왼쪽에 두고 준(樽)을 영장궁(靈帳宮) 동남(東南)쪽에 북향(北向)으로 설치하였으며, 잔(盞) 셋을 준소(樽所)에 두었다. 방상씨(方相氏)070) 가 먼저 들어와서 현실(玄室)에 이르러 창[戈]으로 네 구석을 쳤고, 명기(明器)·복완(服玩)·증옥(贈玉)·증백(贈帛) 등의 물건이 이르자 현실 문 밖 동남쪽에 북쪽을 위로 하여 설치하였다.
인의(引義)가 궁관(宮官) 이하를 인솔해 들어가서 위차(位次)로 나아가 곡(哭)하였다. 재배(再拜)를 마치자 대전관(代奠官)이 세 번 향(香)을 올리고, 술을 따라 영좌(靈座) 앞에 올렸다. 대축(大祝)이 축문(祝文)을 읽고 이를 마치자 궁관(宮官) 이하가 곡하며 슬픔을 다하였다. 유사(攸司)가 찬(饌)을 거두고 축문을 감(龕)에 묻자, 인의(引儀)가 참찬(參贊)을 인솔하여 꿇어앉아 찬도(攅塗)를 열 것을 아뢰었다. 선공감(繕工監) 관원이 찬도를 걷자 참찬(參贊)이 수건으로 재실(榟室)을 닦았다. 섭상례(攝相禮)가 나아가 영좌(靈座) 앞에 꿇어앉자 찬(贊)이 좌(座)에서 내려 여(轝)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내시(內侍)가 교명책인(敎命冊印) 및 시책인(諡冊印)을 받들어 집사자(執事者)에게 주자 각각 요여(腰轝)에 두었고, 향로(香爐)와 향합(香盒)을 받들어 집사자에게 주자 각각 향정(香亭)에 두었다, 대축(大祝)이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여(轝)에 봉안하고 우주궤(虞主櫃)는 그 뒤로 두고서는 받들어 길유궁(吉帷宮)으로 나아가니, 섭상례(攝相禮)는 꿇어앉았고 찬(贊)은 여(轝)에서 내려 좌(座)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대축(大祝)이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영좌(靈座)에 봉안하고 우주궤(虞主櫃)는 그 뒤에 두었다. 책인(冊印)·향로(香爐)·향합(香盒) 등의 물건은 의식(儀式)대로 영좌(靈座) 앞에 두었고, 길장(吉仗)은 유궁문(帷宮門) 밖 좌우에 진설하였다.
섭상례가 나아가 재실(榟室) 앞에 꿇어앉으니, 찬(贊)이 순(輴)에 올려 현실(玄室)로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내시(內侍)가 애책함(哀冊函)을 받들어 집사자(執事者)에게 주어 요여(腰轝)에 안치했고, 순(輴) 앞에 세웠다. 충의위(忠義衛)가 명정(銘旌)을 받들고 앞을 인도하자, 참찬(參贊)이 재실(榟室)을 마주들 관원 등을 인솔하여 재실을 받들어 순에 올렸다. 섭상례가 앞을 인도하며 삽(翣)을 받들고는 그 삽으로 재실을 가렸으며, 여사(轝士)가 순을 받들어 나아갔다. 인의(引儀)가 궁관(宮官) 이하 및 배종(陪從)했던 백관(百官)들을 인솔하여 곡하며 따라가 연도(羨道)071) 의 남쪽 봉사위(奉辭位)에까지 이르렀다. 순(輴)이 현실(玄室)의 방목(方木) 위에 이르자 녹로대(轆轤臺)를 이용하여 재궁(榟宮)을 받들어 내렸는데, 내시(內侍)가 관의(棺衣)를 덮고 명정(銘旌)을 가져와서 강(杠)을 제거한 다음 그 위에 놓았다. 인의(引儀)가 참찬(參贊)을 인도하여 옥백위(玉帛位)로 나아가니, 애책(哀冊)을 받든 관원과 옥백(玉帛)을 받든 관원이 그들을 따랐다. 참찬(參贊)이 재실(榟室)을 마주들 관원 등을 거느리고 윤여(輪轝)로 재실(榟室)을 대관(大棺) 안에 봉안하여 북쪽으로 하였다. 참찬(參贊)이 내시(內侍)를 거느리고 다시 관의(棺衣)·명정(銘旌)을 정돈하여 평평하고 바르게 하자, 예장 도감 제조(禮葬都監提調)가 그 소속을 인솔하여 보불삽(黼黻翣)·화삽(畫翣)을 재실(榟室) 양쪽가에 세웠으며, 집사자(執事者)가 명기(明器)·복완(服玩) 등의 물건을 각각 차례대로 올렸다.
묘소 도감 제조(墓所都監提調)가 그 소속을 인솔하여 현실(玄室)을 자물쇄로 잠그자, 참찬(參贊) 및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함께 자물쇄로 잠그는 것을 감독하였다. 【장령이 신(臣)이라 일컬으며 서명(署名)했다.】 참찬(參贊)이 흙 9삽을 덮고 이어 회(灰)를 쌓아 막았다. 또 애책(哀冊)을 가지고 들어가 꿇어앉아 퇴광(退壙)의 서쪽에 두었으며, 증옥(贈玉)과 증백(贈帛)을 넣은 함(函)을 꿇어앉아 애책(哀冊)의 남쪽에 두었다. 예장 도감 제조(禮葬都監提調)가 그 소속을 거느리고 명기(明器)·복완(服玩) 등 제구(諸具)를 받들어 각각 차례대로 진설하였고, 묘소 도감(墓所都監)에서는 지석(誌石)을 내렸다. 【묘(墓) 남쪽의 가까운 땅에 묻었는데, 석상(石床)의 북쪽이다.】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세자(世子)의 휘(諱)는 행(緈)이고 자(字)는 성경(聖敬)이며, 기해년072) 숙종(肅宗) 45년 2월 15일 신시(申時)에 순화방(順化坊) 창의궁(彰義宮)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그를 잉태하게 되자, 꿈속에서 상서로운 새가 방에 모여드는 것을 보았고, 다시 금빛 거북을 보기도 하였으니, 곧 정빈 이씨(靖嬪李氏)가 낳은 바이다. 겨우 두 서너 살 때 마치 어른과 같음이 있어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보다 뛰어났다. 신축년073) 가을 저사(儲嗣)의 명(命)을 받들고 입궐(入闕)하게 되었을 적에 세자(世子)는 나이가 겨우 세 살이었으므로 어린 나이라 능히 따라서 궐중(闕中)에 들어올 수가 없어서 우선 사제(私第)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런데 장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꿈속에서도 자주 불러대었으며, 혹 울부짖음으로 인하여 목이 메이기도 했던 것은 효친(孝親)의 마음이 천성(天性)에 근본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 입궐(入闕)한 뒤 동조(東朝) 양전(兩殿)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응대(應對)하는 것이 울림이 소리에 응하듯 했으므로, 삼전(三殿)께서 기특히 여기시고 사랑하셨다. 갑진년074) 겨울에 비로소 경의군(敬義君)에 봉하였고, 을사년075) 봄에 저부(儲副)076) 에 올려서 책봉했으니, 곧 나의 원년(元年)이었고 나이 겨우 일곱 살 때였다. 그러나 대체로 대정(大庭)에서 예(禮)를 행하고 정당(正堂)에서 하례(賀禮)를 받을 때에 이르러 행동과 주선이 예절(禮節)에 맞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본성(本姓)이 그러했던 것이다. 어찌 평상시의 가르침이 미친 바이겠는가?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있으면서 이 이극(貳極)077) 를 이어받았는데도 비단 궁료(宮僚)를 접대할 때뿐만이 아니라 중관(中官)과 더불어 거처하면서도 의젓한 대인(大人)과 같아 일찍이 장난하고 논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소내관(小內官) 두 사람이 서로 더불어 말로 따지고 거조(擧措)가 근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자가 묵묵히 한참 동안 보다가 다른 중관(中官)을 불러 ‘이 내관은 모름지기 다시 시중들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중관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그 까닭을 청해 물으니, 곧 말하기를, ‘조금 전에 내 앞에서 서로 따졌는데 공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중관이 청하기를, ‘이것은 대조(大朝)께 여쭈어 경칙(警飭)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그가 잠깐 사이에도 조용하고 엄숙한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평상시에는 중관과 더불어 강학(講學)하거나 글씨를 썼고 나이 젊은 내관(內官)과 더불어 놀지 아니하였으며, 언제나 노성(老成)한 중관과 더불어 거처하였으니, 그 상정(常情)을 초월한 것이 한결같았다. 무릇 여러 가지 완호물(玩好物)에 잠심(潛心)하는 법이 없었고, 항상 말하기를, ‘비록 볼 만한 것이라 해도 한번 보면 되는데 어찌 반드시 마음에 둘 것인가?’라고 하였다.
서운관(書雲觀)에서 문신종(問辰鐘)을 올렸으나 이것 역시 한 번 보았을 뿐이었고 그냥 서당(書堂)에 두었다. 젊은 한 내관(內官)이 보고서 우연히 손상시키고는 이 일을 나에게 고했는데, 사건이 정상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었기에 묻지 않았다. 그런데 세자가 곁에서 웃었으므로, 내가 돌아보며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찮은 물건입니다. 그런데 하찮은 물건 때문에 사람을 벌줄 것을 청하였으니 이 때문에 웃었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나도 몰래 마음속으로 감탄하고 스스로 기뻐하며 ‘세자의 기도(器度)와 관용(寬容)이 이와 같으니, 우리 동방의 복이다.’라고 하였다. 《효경(孝經)》의 강(講)을 마치고 나에게 전강(殿講)할 때 내가 ‘《효경》이란 어떤 일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 효(孝)입니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요지(要旨)를 알고 있음이 이와 같았다. 주연(胄筵)의 소대(召對)에 있어서 궁관(宮官)이 진달한 바가 전에 강(講)한 것일 경우 강(講)이 끝나고 나서 측근에게 묻기를, ‘전후(前後) 궁관(宮官)의 말이 어찌하여 서로 어긋나는가? 또 진달한 것은 《효경》의 아무 장(章)이 아니고, 《소학(小學)》 아무 편(篇)에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으니, 그가 잠심(潛心)하여 듣고 평상시에 유의(留意)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정미년078) 봄 알성(謁聖)하고 태학(太學)에 입학(入學)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관례(冠禮)를 행하였고 또 같은 달에는 초례(醮禮)를 행하였다. 그때 나이 9세이었는데, 강(講)하는 목소리는 맑고 명랑하였으며 행동과 예절(禮節)은 의젓하게 어른과도 같았다. 육례(六禮)를 치르던 날 일기(日氣)가 모두 청명(淸明)하길래 마음속으로 스스로 기뻐서 ‘그 형태를 보지 못하면, 그 그림자를 살피기 원하는 법이다. 모든 일이란 하루의 겨를도 어려운 것인데, 책봉(冊封) 때부터 입학(入學)·관례(冠禮)·가례(嘉禮)하는 날까지 날씨가 모두 맑고 명랑하였다. 그리고 밤이나 아침에는 비록 흐리긴 했지만, 예(禮)를 행할 때가 되면 언제나 이와 같았으니, 하늘이 종팽(宗祊)079) 을 도우심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다. 내가 비록 덕(德)이 적지마는 우리 나라는 희망을 가질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 오늘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을 하다 이에 이르니, 나도 몰래 긴 한숨이 나온다. 언제나 새로운 식물(食物)이 있으면 차마 먼저 맛보지 않고 반드시 모두 올렸고, 아무리 병이 있어도 위중한 데 이르지 아니하면, 관세(盥洗)하고 의대(衣帶)를 갖추고서 나를 보았다. 언제나 국기일(國忌日)을 만나면 그 어린 나이에도 만약 소찬(素饌)을 갖추지 아니하면 중관(中官)을 시켜 찬(饌)을 맡은 궁인(宮人)을 불러 엄한 말로 타이르니 안팎의 사람들이 안색을 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기간의 우애(友愛)도 또한 본연(本然)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대궐 안의 사례(事例)는 거처를 달리하는 법인데 자주 찾아가 보았으며, 측근의 궁인(宮人)이 만약 화합하지 않은 말을 하면 세자가 그것이 혹시나 흘러들어가 이간시킬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눈물을 머금고 나에게 고하였으니, 그 효우(孝友)의 성품은 한결같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모든 일에 미안(未安)한 일이 있으면, 당황하는 안색을 짓지 않고 중관(中官)을 시켜 엄정(嚴正)하게 효유(曉諭)하였으므로 궁인(宮人)들이 두려워하며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아! 병이 위독해졌을 때 그 사(師)가 들어오는 것을 듣자 벌떡 일어나 앉아 다시 용모를 단정히 하였고, 또 빈객(賓客)이 들어오는 것을 듣고 일어나려 하였으나 힘이 부쳐 하지 못하였으니, 이에서도 또한 평일의 성품(性稟)을 볼 수 있었다. 한 번 병이 오래 끌기 시작한 뒤로부터 보사(補瀉)080) 가 서로 어지럽히고 의약(醫藥)이 효험이 없자 탄식하는 목소리로 나에게 고하기를, ‘세상에 명의(名醫)가 없으므로 여러 가지 약을 섞어 썼지만 한갓 번거롭게 고하게만 만들었습니다. 원하건대 다시 약을 쓰지 마시고, 조용히 스스로 정양(靜養)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그 오래 묵은 약초 뿌리를 물리치고 천명(天命)에 맡긴 것이 만약 노사(老師)·숙유(宿儒)로서 이치에 통달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미칠 수 있었겠느냐? 무릇 병세가 극심할 때 임하여 내가 내 얼굴을 그 얼굴에 갖다대며 ‘나를 알아보겠느냐?’ 하고 부르자, 가느다란 목소리로 응답하며 눈물이 뺨을 적셨으니, 진실된 효심(孝心)이 걱정이 가득한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통탄스럽다. 무신년081) 11월 16일 해시(亥時)에 창경궁(昌慶宮)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였으니 곧 사기일(私忌日)이며, 나이 겨우 10세로써 이극(貳極)에 있는 지 겨우 4년이었다. 같은 해 2월 초 2일에 시호(諡號)를 의정(義定)하여 ‘효장(孝章)’이라 하고, 기유년082) 정월 26일에 예(禮)를 갖추어 파주(坡州) 조리동(條里洞) 을좌(乙坐) 신향(辛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순릉(順陵)083) 의 왼쪽 산등성이다. 아! 나의 비덕(匪德)으로 믿는 바는 오로지 원량(元良)084) 이었고, 성품이 또한 이와 같았기에 동방(東方)의 만년의 복이 될 것을 바랐는데, 어찌 나이 겨우 10세 만에 이 지경에 이를 줄 생각했겠는가? 종사(宗社)를 생각하니 아픔을 더욱 억제하기가 어렵다. 이번의 이 행록(行錄)은 다만 평일에 눈에 띄게 드러난 것을 기술한 것일 뿐이니, 어찌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본래의 일을 과장했겠는가? 내가 비록 배우지 못하였으나 이런 짓은 하지 않으며, 모두 중관(中官)이 함께 들은 바이고 조신(朝臣)이 함께 본 바인 것이다. 꿈의 상서로움에 이르러서는 비록 부회(傅會)한 데 가까우나 전후의 시장(諡狀)에 이미 이러한 말이 있었으며, 모두 내가 꿈을 꾸었던 바이므로 여기에 대략 기록한 것이다. 아! 애통(哀痛)한 가운데 생각하자니 마치 살을 베는 듯하여 대략 줄여 찬술(撰述)한 것인데,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하여 사신(詞臣)에게 다시 지문(誌文)을 찬술하지 않게 하고, 다만 행록(行錄)에 몇 가지 문자(文字)를 첨가해 친히 돌에 새겨 넣고 유실(幽室)에 간직하게 한다. 아! 이 회포를 거의 펼 수 있겠는가? 아! 슬프고 아! 슬프도다."
하였으니, 어제(御製)였다. 현실(玄室) 왼쪽의 땅을 깨끗이 소제하고 관상감(觀象監)에서 처음처럼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영여(靈轝) 및 순(輴) 등속은 백성(柏城)085) 안의 경지(庚地)에서 불사르고 인신(人臣)과 통용(通用)하는 것은 불사르지 않았다. 재실(榟室)이 현실(玄室)로 들어갈 때 궁관(宮官) 이하 배종(陪從)한 백관(百官)들이 곡(哭)하고 재배(再拜)하였고, 또 곡하고 재배하였다. 현실(玄室)을 닫는 것이 장차 끝나려 하자, 전의(典儀)가 궁관 및 익위사(翊衛司) 관원의 자리를 길유궁(吉帷宮) 문 밖에 남쪽 가까이 북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제주관(題主官)·전의(典儀)·찬의(贊儀)·인의(引儀)의 자리를 궁관의 북쪽에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였으며, 또 찬의·인의의 자리를 궁관의 북쪽과 동쪽을 향하여 설치하되 모두 북쪽을 위로 하였다.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의 탁자(卓子) 세 개를 영좌(靈座) 동쪽·남쪽에 서쪽을 향하여 【제주 탁(題主卓)은 북쪽에 있고 그 다음은 필연탁(筆硯卓)이고 그 다음은 반이탁(槃匜卓)이다.】 설치하고 필연(筆硯)·먹·반이(槃匜) 【향탕(香湯)을 갖추었다.】 ·건(巾) 【백세저포(白細苧布)이다.】 을 갖추어 놓았다. 제주관(題主官)·전의(典儀)·찬의(贊儀)·인의(引儀)가 먼저 들어가 그 장소로 나아가자, 인의가 궁관 및 익위사(翊衛司)를 인도하여 자리로 나아갔으며, 또 도제조(都提調) 및 예조 당상(禮曹堂上)·빈궁 도감 제조(殯宮都監提調) 각 1원(員)을 인도하였다. 승지(承旨)가 탁자 앞으로 나아가자 대축(大祝)이 영좌(靈座) 앞으로 올라가 꿇어앉은 채 우주(虞主)를 받들어 건(巾)으로 닦고 나서 탁자에 눕혀 두었다. 제주관이 손을 씻고 탁자 앞으로 올라가 서쪽을 향하여 서서 법식대로 앞면에 먹으로 쓰기를 마치자 대축(大祝)이 우주(虞主)를 받들어 궤(櫃)에 넣고 덮개를 덮어 영좌(靈座)에 봉안하였으며 혼백함(魂帛函)은 그 뒤에 두었다. 유사(攸司)가 영좌 앞에 찬(饌)을 설치하자 대축이 우주(虞主)를 받들어내어 영좌(靈座)에 설치하고 백저건(白苧巾)으로 덮었으며 호궤(護几)는 그 뒤에 두었다. 대전관(代奠官)이 술잔을 드리고 이를 마치자 대축(大祝)이 축문(祝文)을 읽고 궁관(宮官) 이하가 곡(哭)하고 재배(再拜)하였으며 대축이 우주(虞主)를 받들어 궤(櫃)에 넣었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삼도감(三都監)의 도제조(都提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이번 세자(世子)의 상(喪)에 있어서 모든 일은 반드시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음을 선무(先務)로 한다는 것을 경(卿)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저 혼례(婚禮)와 상례(喪禮)는 나라에 있어서나 가정(家庭)에 있어서 중대한 일로서 비록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 해도 또한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또 극심한 추위를 당하였으니, 내가 진념(軫念)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이번에는 여러 당상관(堂上官)들이 마음을 다하고 공장(工匠)과 군졸(軍卒)들이 힘을 다 바쳐 일을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며, 날씨도 또한 청명(淸明)하였다만, 지난 가을의 일을 소급하여 생각하건대, 비통한 심회를 억제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애구(哀疚)하는 가운데 이것은 다행이라 할 것이다. 다만 날씨가 이처럼 추우니, 배위(陪衛)하는 군병(軍兵)과 여사(轝士)·군졸 그리고 그 밖의 공장(工匠)·제색(諸色)의 사람과 각색(各色)의 관리들로 와서 기다린 무리들이 몸을 손상한 경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군병의 경우 따로 중관(中官)을 보내어 적간(摘奸)하게 하고 호위(扈衛)를 맡았던 자들은 그대로 노문(勞問)하게 하되, 도감(都監)에서 추위를 막을 도구를 군졸과 공장 등에서 나누어 주어 나의 뜻을 보이게 하라. 아! 원량(元良)이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비록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일은 없을지라도 나의 기대가 어찌 이에 이르겠는가? 그러므로 전후의 연석(筵席)에서 하교(下敎)한 것이 있었던 것인데, 또한 마음속에 아프게 여기고 있다.
지금은 중대한 일이 장차 거의 다 이루어졌음을 보고하려는 판이나, 군교(軍校)와 공장(工匠) 등으로서 묘소(墓所)에 대령(待令)하는 자들을 신칙(申飭)하는 일을 비록 소홀히 할 수는 없을지라도, 태(笞)·곤(棍) 등을 쓸 일이 있다면 반드시 삼령 오신(三令五申)086) 으로 하여 추위를 당해 근로(勤勞)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조금 쉬게 하도록 하라. 그렇게 한다면 이것이 곧 초상(初喪) 때 부지런하지 않았던 관리(官吏)를 특별히 석방했을 때 하교했던 뜻인 것이다. 열읍(列邑)에 이르러서는 와서 대령(待令)할 즈음에 낭비되는 비용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이와 같은 즈음에 어찌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줄을 알 수가 있겠는가? 도신(道臣)의 도차사원(都差使員)과 도로(道路)에서 전어(傳語)하는 차원(差員) 이외에는 모두 먼저 관사(官事)로 복귀하도록 분부(分付)하고, 그 가운데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남아 있는 자로 하여금 겸무하게 할 것이다. 또 그 가운데서 합쳐서 관장할 수 있는 경우는 도신(道臣)과 상의하여 시행해 일분이나마 인부(人夫)와 말이 머물러 지체하는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라. 또 왕래하는 길가에 사는 백성들도 또한 번거롭게 금지하지 않게 하여 일로(一路)의 백성들로 하여금 거의 장사(葬事)가 이미 지나갔음을 알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다만 내가 백성들을 진념(軫念)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실로 원량(元良)이 펼치지 못한 은혜를 보이는 것이다. 애구(哀疚)가 새로 솟아나는 가운데서 수서(手書)로 경(卿)들에게 유시한다."
하였다.
의식(儀式)대로 초우제(初虞祭)를 지냈다.
1월 27일 임신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반우(返虞)하였다. 임금이 혼궁(魂宮)에 나아가 곡(哭)하고 별전(別奠)을 지냈다. 초우제(初虞祭)가 끝나자 전의(典儀)가 궁관(宮官) 이하 및 배종(陪從)하는 백관들의 사묘위(辭墓位)를 설치하니, 궁관(宮官) 및 백관들이 곡(哭)하고 재배(再拜)하였다. 섭상례(攝相禮)가 꿇어앉으니, 찬(贊)이 좌(座)에서 내려 여(轝)에 올릴 것을 청하였고, 집사자(執事者)가 시책인(諡冊印) 등을 받들어 각각 요여(腰轝)에 두었다. 대축(大祝)이 우주궤(虞主櫃)를 받들어 여(轝)에 봉안하고 혼백함(魂帛函)을 그 뒤에 봉안(奉安)하였다. 섭상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유문(帷門) 밖에 이르러 꿇어앉자 찬(贊)이 여(轝)에서 내려 거(車)에 올릴 것을 청하였고, 대축(大祝)은 우주궤(虞主櫃)를 받들어 거(車)에 봉안하였다. 섭상례가 꿇어앉자 찬(贊)이 출발할 것을 청하였다. 주정소(晝停所)에 이르자 진찬(進饌)하고 예(禮)를 거행하기를 조석전(朝夕奠) 때와 같이하였다. 그것을 마치자 섭상례가 꿇어앉았고, 찬(贊)이 거여(車轝)에 올리고 내렸다 출발한 것을 청하였는데, 인도하고 따르는 것이 처음과 같았다. 우주궤(虞主櫃)가 성문(城門) 밖에 이르자, 도성(都城)에 남아 있던 여러 관원들이 맞이하여 곡(哭)하고 재배(再拜)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사(攸司)가 영좌(靈座)를 혼궁(魂宮) 북쪽 벽(壁)에 남향(南向)으로 설치하였는데, 우주거(虞主車)가 혼궁의 문 밖에 이르자 섭상례가 꿇어앉았다. 찬(贊)이 거(車)에서 내려 여(轝)에 올릴 것을 청하니, 내시(內侍)가 우주궤를 받들어 거(車)에서 내려 여(轝)에 올렸다. 섭상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혼궁에 이르러 계단 위에 꿇어앉으니, 찬(贊)이 여(轝)에서 내려 좌(座)에 올릴 것을 청하였다. 내시(內侍)가 우주궤를 영좌(靈座)에 봉안(奉安)하고, 혼백함(魂帛函)은 그 뒤에 두었으며 책인(冊印)은 받들어 영좌 앞에 두었다. 궁사(宮司)가 선개(扇蓋)를 좌우에 설치했다.
혼궁 도감 도제조(魂宮都監都提調) 이광좌(李光佐)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광조가 말하기를,
"신(臣) 등이 죄를 청할 일이 있어 감히 이처럼 면대(面對)를 구하였습니다. 당상(堂上) 조현명(趙顯命)이 회삼물(灰三物)087) 과 막(幕)을 간검(看檢)하는 일로 나아갔기에 신은 당상(堂上) 김흥경(金興慶) 및 두 승지(承旨)와 같이 제주(題主)하는 일을 간검하였는데, 제주관(題主官) 함평군(咸平君) 이홍(李泓)이 먼저 함중(陷中)088) 에 쓴 후에 갑자기 실수를 하여 마땅히 ‘효(孝)’자를 써야 할 곳 위에 점을 떨어뜨려 더럽혔습니다. 이홍이 ‘목적(木賊)089) 으로 갈아내면 좋을 것이다.’라 하면서 자신이 직접 갈아버리고자 했지만, 신은 공장(工匠)의 손으로 잘 깎아내는 것만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공장의 손으로 깎아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먹의 흔적이 나뭇결 속으로 깊이 배어 들어갔으므로, 먹의 흔적이 없는 곳까지 깎아 갈아낸다면 신주(神主) 몸체 윗쪽의 둘로 나눈 곳에 끝내 미세한 틈과 흔적이 없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지극히 중차대(中且大)한 일에 종사(從事)하면서 봉폐(封閉)하는 한 가지 절차에 대해서는 마음속에 유감스런 바가 없었는데 제주(題主)하는 한 가지 절차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대하(大何)090) 를 받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고의성이 있는 일이 아니니, 대죄(待罪)하지 말라. 의주(儀註)에 ‘우주(虞主)091) 를 봉안(奉安)한다.’는 글이 있고 또 연주(練主)가 있는데, 역시 밤나무인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우주는 곧 밤나무입니다만, 연주를 고쳐 만드는 일은 없는 듯합니다. 함평군(咸平君)의 말을 듣건대, 고령(古嶺)의 장사(葬事) 때도 그가 역시 제주(題主)를 하였는데, 그때에도 또한 이번과 같은 일이 있었으나 그가 직접 깎아 갈아내어 조금도 방해되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처럼 미세한 흔적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 지금 경(卿)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또한 기억이 난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경자년092) 에 보니 삼중 구의(三重柩衣)를 썼고, 무술년093) 에 보니 홍색(紅色) 일습(一襲)을 썼었는데, 이번에는 앞쪽은 청색을 끼고 뒷쪽은 홍색을 끼었다. 지금 듣건대,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는 윗쪽은 현색(玄色)을, 아랫쪽은 훈색(纁色)을 쓴다고 하는데, 윗쪽을 현색으로, 아랫족을 훈색으로 하는 것이 예(禮)에 맞다."
하고, 승지에게 명해 쓰게 하기를,
"이번의 구의(柩衣)는 윗쪽은 현색(玄色)으로, 아랫쪽은 훈색(纁色)으로 하는 것이 예문(禮文)에 합당하다. 2건(件)은 이것을 준용(遵用)하고 1건은 현색(玄色)을 따르도록 하라. 그러나 현색은 곧 완전한 현색이 아니라, 곧 녹색(綠色)인 것이다. 이것을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의궤(儀軌)에 써 넣게 하라."
하였다. 이광좌가 사부(師傅)의 겸함(兼銜)을 감하(減下)할 것을 청하자, 졸곡일(卒哭日)에 감하하라고 명하였다가 ‘실제로 겸직(兼職)하라.’고 고쳐 비답(批答)을 내렸다.
1월 28일 계유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재우제(再虞祭)를 지냈다.
1월 29일 갑술
밤에 유성(流星)이 헌원성(軒轅星) 위에서 나와 남방(南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다.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尺)이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1월 30일 을해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삼우제(三虞祭)를 지냈다.
묘소(墓所)의 역군(役軍)으로서 병들어 죽은 자에 대해 경조(京兆)094) 와 호조(戶曹)로 하여금 고휼(顧恤)하게 하고, 승군(僧軍)으로서 병들어 죽은 자에 대해서도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고휼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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