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1권, 영조 5년 1729년 3월

싸라리리 2025. 9. 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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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병오

 

삼사(三司) 【대사간(大司諫) 오명신(吳命新)·부응교(副應敎) 성덕윤(成德潤)·지평(持平) 홍일보(洪一輔)·교리(校理) 이현모(李顯謨)·부교리(副校理) 이종성(李宗城)·부수찬(副修撰) 윤동형(尹東衡)이다.】 에서 구대(求對)하여 이탄(李坦)을 엄하게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인조조(仁祖朝)에 광해(光海)의 폐동궁(廢東宮) 이지(李桎)가 땅을 파고 달아났는데 안법(按法)하자는 청(請)을 허락하지 않으니, 유신(儒臣) 정경세(鄭經世)가 ‘성덕(盛德)의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필경에는 사사(賜死)했는데 그 당시의 공론(公論)은 정경세를 편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이름이 역초(逆招)에 들어가자 이귀(李貴)가 극력 정법(正法)할 것을 청했는데, 정경세는 ‘전은(全恩)하는 것이 성덕(盛德)의 일이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정경세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계사(啓辭)에 참가하자 인조(仁祖)께서 윤허하셨으니, 대개 경악(經幄)은 집법(執法)하는 곳과는 다름이 있는 것입니다. 작년에 장전(帳殿)에 이탄(李坦)이 잡혀왔을 때 신이 천안(天顔)195) 의 처참함을 쳐다보고 신이 구구한 충애(忠愛)의 정성으로써 앙달(仰達)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겨울 이후로 종사(宗社)가 외롭고 위태하여 심지어 황소(黃熽)의 상소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만약 한결같이 돈목(敦睦)하는 인덕(仁德)으로써 용서하신다면 갖가지 괴이한 일들이 반드시 층층이 발생할 것입니다. 신이 동참(同參)한 것은 여러 사람을 따라 형식적으로 응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대사간 오명신이 ‘폐인(廢人) 이지(李桎)를 폐동궁(廢東宮)이라 칭하고, 또 끌어다 비유한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집법(執法)하는 신하가 국사(鞫事)가 수쇄(收殺)된 뒤에 버려두고 논하지 아니하니, 또한 괴이하지 아니한가? 옥중(獄中)에서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하였다. 오명신이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권익관(權益寬)이 역적 임징하(任徵夏)에게 말을 돌려주었으니, 본래 거기에 해당되는 형률(刑律)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前) 방백(方伯)이 이미 금물(禁物)로 속(贖) 바치게 하여 역마(驛馬)로 만든 것이니, 이것은 곧 관물(官物)이므로 제마음대로 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권익관이 법을 범하고 제멋대로 돌려준 것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조율(照律)하여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오명신이 또 소회(所懷)를 말하기를,

"지난해 변란(變亂)이 일어났을 때 시상(施賞)과 처벌이 명백하지 못하여 곤수(閫帥)로서 두요(逗撓)196) 한 자가 해당되는 형률을 받지 않았고 장사(壯士)로서 공(功)이 있는 자가 드러난 상을 받지 못 했습니다. 녹훈(錄勳)이 너무 적어서 전공(戰功)이 있는 장사(將士)는 한 사람도 수령(守令)에 제수되지 못했고, 출전(出戰)한 군졸(軍卒)로서 부괵(俘馘)197) 을 바친 자도 상급(賞給)이 포목(布木)에 그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권첨(權詹)은 문신(文臣)이란 이유로써 처참(處斬)하지 않고 유독 이시번(李時蕃)만 처참하였으니, 또한 원통하지 않겠는가? 감훈(勘勳)이 너무 소략한 것은 도리어 너무 외람된 것보다 낫다. 미포(米布)를 처음 하교한 대로 나누어 지급하라."

하였다.3월 3일 정미

문사 낭청(問事郞廳) 윤득화(尹得和)를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친국(親鞫) 때 임금이 국문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을 불러 하교(下敎)하기를,
"당론(黨論)은 애초 사문(斯文)의 싸움에서 발생했는데, 갈수록 조정(朝廷)에까지 파급되어 신축년198)  과 또 작년의 일이 있기까지 이르렀다. 지금 황소(黃熽)의 상소가 또 나왔는데, 황소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건저(建儲)·대리(代理)에 만약 조금이라도 사의(私意)가 있었다면 곧 옳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일을 가지고 서로 ‘충신(忠臣)’이니 ‘역적(逆賊)’이니 하고 있으니, 이러하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일 정목(政目) 사이에 통의(通擬)하는 것도 또한 문구(文具)이며 성실한 마음이 아니다. 그리고 저들도 또한 마음속으로는 출사(出仕)하지 않는 것이 의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만약 출사하게 되면 동당(同黨)의 비웃음을 살 것이기 때문에 다만 인거(引去)하는 것으로써 의리(義理)로 삼을 뿐이다. 조 판부사(趙判府事)199)  가 어찌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이런 일을 하겠는가?"
하니, 동의금(同義禁)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신과 송인명(宋寅明)은 ‘오늘날 조정(朝廷)에서 영상(領相)을 버리고는 국사(國事)를 처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양신(李亮臣)은 만고에 없는 흉역(凶逆)이라고 생각하니, 탕평(蕩平)을 어떻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네 사람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천기(李天紀)와 김용택(金龍澤)의 초사(招辭)에 난만(爛熳)하게 나온 사람도 있고 단지 연차(聯箚)에 서명(署名)만 한 사람도 있어, 비록 경계선이 있기는 하지만, 저 무리들이 이기기를 좋아하므로 처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은 말하기를,
"신은 젊어서부터 영상(領相)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데, 한쪽편 사람들의 소견은 또한 이양신보다도 심한 것이 있습니다. 건저(建儲)·대리(代理)는 그 형적(刑跡)으로써 말한다면 국가를 위한 것이었는데, 조태채(趙泰采)의 일에 성상께서 협잡(挾雜)이라 하여 지난(持難)해 하시는 바가 있으니,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정인중(鄭麟重)과 서덕수(徐德修)의 악(惡)은 네 신하와 관계가 없으니, 죄가 있는 자이면 죄를 주고 죄가 없는 자이면 죄를 벗겨주는 것이 처분하시는 데 있어서 순조로울 것입니다. 건저는 본래 그르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의리(義理)가 이와 같으므로 자기의 견해를 지키다가 죄를 받는다면 옳은 것입니다. 어찌 시비(是非)를 버리고 오직 좋은 벼슬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이태좌(李台佐)는 말하기를,
"어찌 일찍이 건저(建儲)·대리(代理)를 두 마음을 가진 것이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까? 조태채(趙泰采)는 연차(聯箚)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성교(聖敎)에, ‘건저의 일에 있어서 범진(范鎭)의 마음200)  이 없었다면 장심(將心)201)  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신은 ‘이것은 진실로 의리(義理)가 정미(精微)한 하교이시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건저·대리는 본디 역적(逆賊)이 되지 아니합니다만, 그 마음을 살펴볼 때 과연 범진(范鎭)과 같았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출사(出仕)하지 않은 의리로 삼는 것을 신은 평소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송인명이 신에게 말하기를, ‘그 당시의 정청(庭請)에서 유락(唯諾)했던 사람들과 삼사(三司)의 청대(請對)했던 여러 사람들을 만약 한결같이 모두 수용(收用)하여 이런 한 가닥 길을 열어놓는다면, 저들도 또한 완론(緩論)과 준론(峻論)이 있으니, 완론을 따르는 자들은 와서 사진(仕進)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이른바 한 가닥의 길이란 말단적인 것입니다. 신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반드시 거취(去就)를 같이하고자 하는 것을 보니, 내가 기대한 바와는 다르다. 김일경(金一鏡)의 무리가 조정을 떠맡고 있을 때 오로지 제뜻에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 만약 경위(涇渭)202)  를 구분한다면 두 사람은 마땅히 분간(分揀)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인데, 경의 뜻은 넷에 있지 않고 둘에 있다. 영상(領相)의 경우는 네 사람에 대해 도무지 경위(涇渭)가 없었으므로 너무 심각하게 보는 우려가 없지 아니하니, 저쪽도 또한 너무 지나치고 이쪽도 또한 너무 지나치다. 나는 절충하여 처분하고자 하나 의리(義理)란 것이 끝이 없으므로 처음에 조금 틀리게 되면 나중에 큰 차이가 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약 저들이 들어오도록 처분하여 들어온 뒤에 영상(領相)을 역적(逆賊)이라고 한다면 어찌 난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윤득화(尹得和)가 앞으로 나와서 아뢰기를,
"연신(筵臣)이 사대신(四大臣)의 일을 논한 것을 들으니, 충분(忠憤)을 능히 스스로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사대신의 고심(苦心)·혈성(血誠)은 전적으로 나라를 위하는 데서 나왔던 것이었으니, 어찌 일찍이 협잡(挾雜)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역적이라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신 등은 이른바 충신(忠臣)이 지금 도리어 역적이 되었으니, 신 등이 아무리 물러가지 않으려 해도 그것이 되겠습니까? 이양신의 상소는 충직(忠直)한 데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남을 참소한 것으로 지목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소회(所懷)가 있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안 될 것이 없으나 제 위치를 벗어나 영호(營護)하였으니, 처벌(處罰)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추고(推考)하라 명하였다. 교리(校理) 이현모(李顯謨)가 말하기를,
"사흉(四凶)203)  의 역모(逆謀)가 명백하니, 정미년204)  의 처분은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스럽지 아니할 것입니다. 좌상(左相) 홍치중의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진망(李眞望)이 교문(敎文)의 일로 청대(請對)하였을 때 조태채(趙泰采)는 빼 버릴 것을 청하였다. 순제(舜帝) 때 사흉(四凶)205)  이 있었으므로 김일경이 부회(傅會)하여 사흉(四凶)이라 명칭했던 것인데, 저 한쪽편에서는 사대신(四大臣)이라 칭하니 진실로 그릇된 것이며, 또 반드시 사흉(四凶)이라 하니 그릇된 것이다. 나는 요탈(撓奪)된 일이 없는데, 대론(大論)이 바야흐로 벌어지고 있는 때에 별다른 말을 군더더기로 진달하였으니, 협잡(挾雜)임을 면할 수 없다. 이현모를 추고(推考)하라. 그리고 차후로 김일경의 당(黨)의 문자(文字)를 다시 쓴다면 마땅히 논죄(論罪)하겠다."
하였다. 홍치중이 추가로 연좌(緣坐)를 시행한 여러 사람들의 일을 품정(稟定)하자, 이태좌가 말하기를,
"형장(刑杖)을 맞아 죽은 자에 대해서는 원래 역률(逆律)의 법을 쓴 적이 없었습니다. 심기원(沈器遠)이 복주(伏誅)되었을 때는 형장을 맞아 죽은 한 사람에게만 역률(逆律)을 시행했고 경신년206)  에는 조성(趙晟)이 형장을 맞고 죽게 되자 역률을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법이 점차 넓어지고 있습니다. 왕자(王者)의 법이란 마땅히 한번 정하고 나서는 추이(推移)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역절(逆節)이 비록 낭자하기는 하지만 불복(不服)하고 죽을 경우 역률을 쓰지 않는 것은 대개 뒷날 비록 애매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이 법을 쓸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원(豐原)207)  의 말이 옳다. 승복하지 아니한 자를 정법(正法)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4일 무신

사서(司書) 윤득화(尹得和)를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출보(黜補)시키라 명하였다. 윤득화가 상소하기를,
"사대신(四大臣)의 신축년208)  의 일은 의리(義理)가 지극히 명백하여 쉽사리 알 수가 있었는데도, 구무(構誣)하는 자들은 연차(聯箚)와 대리(代理)를 나누어 둘로 만들어 두 마음을 가졌던 것이라고 이르는가 하면, 혹은 대리(代理)의 의논이 원년(元年)에 있었다 하여 협잡(挾雜)이니 사의(私意)니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신축년의 일은 이미 경종(景宗)의 특교(特敎)에서 나왔고 이 특교를 받들어 마땅히 대리(代理)를 하실 분은 바로 우리 전하(殿下)였으니, 인신(人臣)이 된 자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 이러쿵저리쿵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감히 위태롭게 핍박할 음모를 품자, ‘놀라고 당황하며 근심하고 의혹한다.’는 말로 변했다가 또 ‘몰래 옮긴다.’는 말로 변했습니다. 그러다가 천위(天位)가 이미 정해진 뒤 감히 배척하여 말하지 못하게 되자, 또 사대신(四大臣)에게로 옮겨 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정인중(鄭麟重) 무리의 일과 지친(至親)이 간범(干犯)했다는 말로써 의란(疑亂)·형혹(熒惑)시키는 계책으로 삼았으나, 정인중은 정인중이고 사대신은 사대신일 분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명달(明達)하심으로 도리어 이 따위의 말에 흔들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가만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이양신(李亮臣)이 충신의 억울함을 공공연히 호소하고 간흉(奸凶)을 통렬하게 배척했으나, 전하께서는 도리어 남을 참소한다는 등의 제목을 억지로 씌우셨으니, 유독 사기(士氣)가 저상(沮喪)되고 국맥(國脈)이 손상됨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비록 평일에 스스로 두각(頭角)이 조금 별다르다고 이르는 자도 또한 미루어 영수(領袖)로 삼는데, 능히 국사(國事)를 해나갈 수 있다는 말을 전석(前席)에서 꺼내기까지 하였으며, 또 권익관(權益寬)처럼 역상(逆狀)이 환히 드러난 자를 감히 용납·비호하여 마침내 방송(放送)하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래도 공의(公議)의 엄정함을 두려워하면서도 책임을 모면할 계사(啓辭)를 내었으니, 저 무리들이 일분이나마 두려워하거나 꺼림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윤득화가 조금이라도 엄외(嚴畏)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직 복관(復官)이 되지 아니한 사람을 감히 대신(大臣)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때를 타서 허구날조하였으니, 용의(用意)가 아주 놀랍다. 이런 사람을 엄격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가 나라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하고, 이내 이런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분무 공신(奮武功臣)과 원종 별단(原從別單)을 신칙(申飭)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역적의 친족(親族)으로서 국법(國法)을 응당 시행해야 할 자 이외에는 구애없이 조용(調用)하고 이름이 적초(賊招)에 들어갔으나 신문하지 아니한 자도 또한 평인(平人)의 예(例)에 의거해 조용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판(吏判) 김동필(金東弼)이 박필욱(朴弼彧)을 침랑(寢郞)에 의망(擬望)했으니, 곧 박필몽(朴弼夢)의 종제(從弟)였다. 이양신(李亮臣)이 상소하여 논척(論斥)하자 김동필이 상소하여 변명했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진(晉)나라 때 왕도(王導)와 왕돈(王敦)의 경우209)  가 있었으니, 어찌 한 사람 때문에 일족(一族)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을 역적(逆賊) 같기도 하고 역적 아닌 것 같기도 한 가운데 두는 것이 어찌 왕정(王政)이 할 바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같은 예로 조용(調用)하라 명하였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사묘(私廟)에 동가(動駕)하실 때 전하께서 시사복(視事服)을 입으시기로 예조(禮曹)에서 이미 계하(啓下)받았습니다. 그리고 시위(侍衛)하는 제장(諸將)의 복색(服色)은 상복(上服)을 따라 흑립(黑笠)·백천익(白天翼)·백포대(白布帶)에다 입식(笠飾)을 제거하고 칼·활·화살을 차도록 하였으며, 대장(大將)은 흑천익(黑天翼)에다 호수(虎鬚)와 입식(笠飾)을 갖추도록 하였습니다. 별군직(別軍職)과 어가(御駕) 뒤의 금군(禁軍)·별초 무사(別抄武士), 협련(協輦)하는 포수(砲手)·살수(殺手)는 모두 순전히 검은 색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좋다. 다만 별군직은 시위하는 복색을 따르고, 협련하는 포수는 백군복(白軍服)·흑호의(黑號衣)로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와 주서(注書)를 모두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이현모(李顯謨)와 윤득화(尹得和)의 추고(推考)는 동일한 것이었는데도 하교(下敎)를 써낸 것에 상세하고 간략한 것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3월 5일 기유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교리(校理) 이현모(李顯謨)와 부수찬(副修撰) 윤동형(尹東衡)이 연차(聯箚)하여 죄인 이탄(李坦)을 형률(刑律)에 의해 처단(處斷)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3월 6일 경술

양사(兩司) 【헌납(獻納) 정우량(鄭羽良)과 지평(持平) 박필기(朴弼琦)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이명근(李命根)이 괘서(掛書)에 동참(同參)했음을 승복하였으나, 결안(結案)하여 정법(正法)하는 것이 한 시각이 급합니다. 따라서 이미 조사를 행하라 하였으나, 사장(査狀)이 지금까지 오지 아니함은 지극히 지체(遲滯)시키는 것입니다. 청컨대 해당 도신(道臣)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박문수(朴文秀)가 이도장(李道章)의 일로 상소하여 변명하니,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집의(執義) 박필주(朴弼周)를 체직(遞職)시키라 명하였다. 박필주는 유학(幼學)으로 초빙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여 말하기를,
"탕평(蕩平)이라고 말한 것은 홍범(洪範)에 비로소 보이는데, 이렇게 된 까닭을 따져보면 반드시 다소(多少)의 일이 윗면에 있어, ‘혼자만 좋아하는 일도 혼자만 싫어하는 일도 짓지 말라[無作好惡]’고 하였으니, 한 개의 ‘작(作)’자가 마땅히 눈을 두어 변별(辨別)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이쪽은 저쪽을 가리켜 ‘역(逆)’이라 하고 저쪽은 이쪽을 가리켜 ‘역’이라 하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사대부(四大夫)는 단지 이 수효만 있을 뿐이므로 저쪽이 아니면 바로 이쪽이고, 이쪽이 아니면 바로 저쪽이니, 어디로 간들 역당(逆黨)의 명목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신료(臣僚)들을 일체 금지하여 ‘역(逆)’이란 글자로써 서로 모멸(侮蔑)하지 못하도록 하셨으니,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심합니다. 어찌 명석한 지휘(指揮)를 내리시어 그 누가 ‘역(逆)’인지 누가 ‘역’이 아닌지를 명백하게 알게 하는 것만 같겠습니까? 한 유신(儒臣)이 시휘(時諱)를 건드려 범하였으되, 외로운 충성과 곧은 기개가 사람을 우뚝 솟게 하였는데도 절역(絶域)의 변방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신은 오히려 감히 한 마디 말로도 구정(救正)하지 못하였으니, 이와 같고도 도리어 언관(言官)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개연(慨然)스럽다.’고 비답하고, 이내 체직을 허락하였다.

 

지평(持平) 홍일보(洪一輔)가 상소하여 빨리 합계(合啓)를 윤허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황위(黃煒)는 의당 신문(訊問)하여 정상(情狀)을 캐내야 할 것입니다. 주봉명(周鳳鳴)도 또한 그대로 가두어 두고 같이 신문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뢰배(無賴輩)들이 떼를 지어 스스로 포청(捕廳)의 기찰(譏察)이라 일컫고는 향곡(鄕曲)을 두루 돌아다니며 혹은 가재(家財)를 뒤지기도 합니다. 청컨대 삼남(三南)의 도신(道臣)에게 분부(分付)하여 잡히는 대로 즉각 효시(梟示)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황위와 주봉명의 일은 이미 상세히 헤아려서 작처(酌處)하였다. 거짓으로 기찰을 일컫는 무리들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 계문(啓聞)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이 끝나자, 동지사(同知事)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건저(建儲)·대리(代理)는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였으니, 이것은 역적(逆賊)이 아닙니다. 이희지(李喜之)·이기지(李器之)의 무리가 무뢰배들과 체결(締結)하여 종적(蹤跡)이 음비(陰祕)하였으므로 나랏사람들이 의심하였는데,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에게 패자(悖子)·역손(逆孫)이 있어 그 가운데 들었으니, 그들이 알고 알지 못했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죽은 뒤에 복관(復官)한 것은 곧 포장(褒奬)입니다. 추탈(追奪)이 비록 일률(一律)210)  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다시 복관을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는 국초(鞫招)에서 나온 일이 없었으니, 연차(聯箚)를 역적으로 돌린 것은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건저(建儲)와 대리(代理)는 그 당시 대신(大臣)이 만약 사심(私心)이 없고 순수한 마음에서 나왔다면 충신(忠臣)이 되는 것이니, 역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한쪽편 사람으로 한세량(韓世良)과 같은 사람은 ‘하늘에는 두 해[日]가 없다.’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당론(黨論)과 화(禍)를 무서워하는 마음에서 나왔던 것으로 옳은 가운데서도 잘못됨이 있고 잘못된 가운데서도 옳음이 있다. 경(卿)은 그때 소관(小官)에 있었으나 영상(領相)은 알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었다. 이건명의 경우 김일경(金一鏡)의 당(黨)이 네 번째의 차자(箚子)를 장심(將心)에서 나온 것이라 여겨 중도(中道)에서 사검(賜劍)하였으니, 원통한 일이었다. 따라서 빼내는 것이 마땅하다. 조태채의 경우는 원통하다. 영상이 조태채의 일을 진달했는데, 나의 마음은 끝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들이 영상을 흉악하다고 여기는 것도 또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민진원(閔鎭遠)이 을사년211)   이후 한번 경종(景宗)의 시정(時政)을 뒤집으려고 수차(袖箚)를 올려 고묘(告廟)·반시(頒示)하려고 했는데, 신은 마음속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소하여 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보건대, 민진원이 말한 바는 순리(順理)인 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경(卿)과 정석삼(鄭錫三)의 상소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반드시 대단히 후회했을 것이다. 이것은 곧 차마 제기할 수 없는 일로서 경 등의 상소를 보고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쪽은 경상(經常)이 되고 저쪽은 권변(權變)이 되므로 청한 바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민진원이 당론(黨論)에 심하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경종께 두 마음을 가졌던 사람은 아니었다. 경이 민진원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윤동형(尹東衡)이 말하기를,
"재작년의 대처분(大處分)은 마땅히 백세(百世)에 전하여 변경되지 않을 것이온데, 지금 변개(變改)하는 뜻을 가지시니, 마음속으로 매우 개연(慨然)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대처분이라 하더라도 옳은 것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고 잘못된 것 가운데 옳은 것이 있으니, 참작해서 절충한다면 불가할 것이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황소(黃熽)의 상소를 신민(臣民)들이 누군들 분개하고 원통스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만, 전하께서 만약 마음에 머물러 두시고 오랫동안 잊지 않으신다면 병(病)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신(宰臣)은 아직도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보잘것없는 무리가 감히 이런 말을 한 것은 그 마음의 소재처(所在處)가 삼성(三聖)212)  의 혈속(血屬)이 없음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건저(建儲)·대리(代理)의 청이 나라를 위하는 데서 나왔다면, 내가 어찌 이 따위의 말에 동요되겠는가? 그러나 만약 협잡(挾雜)이 있었다면 충신(忠臣)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일찍이 송(宋)나라 태종(太宗)의 ‘짐(朕)을 어느 곳에 두는 것인가?’라는 말을 편협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찌 이런 일로써 마음속에 묶어 두겠는가?"
하였다.

 

3월 7일 신해

이정소(李廷熽)를 승지(承旨)로, 강필경(姜必慶)을 집의(執義)로, 남일명(南一明)을 교리(校理)로, 윤광익(尹光益)을 수찬(修撰)으로, 이언상(李彦祥)을 남병사(南兵使)로, 장태소(張泰紹)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우하형(禹夏亨)을 우수사(右水使)로 삼았다.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였다. 무릇 세 차례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박필기(朴弼琦)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본부(本府)의 우물쭈물하는 여러 대관(臺官)을 삭출(削黜)하여 현고(現告)하는 가운데 마땅히 들어가야 할 것인데도 들어가지 아니한 자와 마땅히 들어가서는 안 되는데도 들어간 자가 있었습니다. 청컨대 승지를 추고(推考)하고 다시 구별하여 현고(現告)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병조 참판(兵曹參判) 심공(沈珙)이 권익관(權益寬)을 방송(放送)할 때 입시(入侍)했던 여러 신하들 중 한 사람으로서 윤득화(尹得和)의 소척(疏斥)으로 인해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오늘날의 두세(頭勢)가 한결같이 어찌하여 을사년213)   초기와 같습니까? 전하께서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이나 촉(蜀)나라의 제갈양(諸葛亮)처럼 믿으시던 사람들이 이미 8,9분이나 움직였으니, 그 나머지 신(臣) 등의 무리처럼 처음부터 일찍이 지우(知遇)를 받지 못했던 경우야 더욱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바야흐로 갖은 계책으로 뚫고 들어오므로 그 형세를 막을 수가 없으니, 사대부(士大夫)들은 이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시비(是非)를 비교하고 득실(得失)을 다툴 수가 없으므로 마땅히 몸을 깨끗이 하고 움츠려 물러날 뿐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을사년은 어떠하였고 신축년214)  은 어떠하였는가? 위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공정하게 듣고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말은 아직도 색목(色目) 가운데서 유래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연조(年條)로써 표적(表的)을 세우는 것을 지금 비로소 경(卿)에게서 들었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제주(濟州)에서 식년(式年)마다 말을 공물(貢物)로 바칠 때 산마(山馬)를 2백 필(匹)로 한정하여 올려보내게 하였으니, 성질이 억세고 기운이 왕성하여 전마(戰馬)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조문명(趙文命)의 말을 따른 것이다.

 

3월 8일 임자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였다. 무릇 세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3월 9일 계축

임금이 사묘(私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환궁(還宮)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2품(品)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이탄(李坦)을 형률(刑律)에 의해 처단(處斷)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재차 아뢰었으며, 승정원에서도 또한 계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0일 갑인

승지(承旨)의 망(望)215)   가운데 항상 무변(武弁) 1원(員)을 의망(擬望)하라고 명하였다.

 

빈청(賓廳)과 승정원(承政院)에서 재차 아뢰고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세번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영남 안핵 어사(嶺南按覈御史)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여 영남(嶺南)의 유생(儒生) 이재(李栽) 등 22명을 천거하여 조용(調用)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오늘날 탕평(蕩平)을 말하는 자는 명목(名目)을 거짓으로 꾸며 전하를 속이고 있으니,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고 천지(天地) 사이에 세워도 어긋남이 없는 국시(國是)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흉얼(凶孽)의 지류(支流)가 거의 나라의 반을 널리 차지하고 있으니, 마땅히 광탕(曠蕩)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폐고(廢錮)된 집안들을 소통(疏通)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현궁(弦弓)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 그리고 원소(原疏)를 해조(該曹)에 보여주고는 다시 들여와 유중(留中)하였다.

 

3월 11일 을묘

승정원(承政院)에서 재차 아뢰고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세번을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이 끝나자, 특진관(特進官) 박사수(朴師洙)가 말하기를,
"오광운(吳光運)의 상소는 탕평(蕩平)의 논의를 거짓으로 꾸며 군주를 속이는 죄과(罪科)로 죄다 몰아넣었는데도,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시고 상까지 주었으니, 신은 개연(慨然)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탕평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지극히 공정한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으로 망령되게 세도(世道)에 대한 근심을 품어, ‘여러 당(黨)의 말류(末流)들이 모두 빛이 나도록 깨끗한 것은 아니나 그 가운데서 경중(輕重)과 심천(深淺)을 가지고 논한다면 연차(聯箚)는 끝내 「역적(逆賊)」으로 단정할 수가 없지만, 경신년216)                  ·기사년217)                  ·신사년218)                  의 역적이 첩첩이 나타나고 층층이 생겨나서 이번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서 너무 심한 논의를 주장해서는 아니되므로, 반드시 먼저 지난날의 사람들로부터 더불어 화합하여 국사(國事)를 함께 처리하면서 한편으로는 오광운 무리처럼 간범(干犯)함이 없었던 사람들을 소통(疏通)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의 차례가 대개 이와 같은데, 이것은 큰 시비(是非)에 관계되는 것이니, 끝내 뒤죽박죽으로 뒤섞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날 마침 오광운이 복명(復命)하자 임금이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박사수와 오광운이 서로 다투고 따지자 참찬관(參贊官)        조명교(曺命敎)가 두 사람의 말소리와 기색이 너무 드러났다 하여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추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술잔을 나누며 감정을 푼 일이 있었다. 입시하게 한 것은 개석(開釋)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박사수가 오광운이 입시하는 것을 갑자기 보고 피하여 나가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의심하여 멀리한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연석(筵席)에 나아가 조현명(趙顯命)에게 묻기를,
"경(卿)도 또한 오광운을 박사수처럼 의심하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오광운은 근본이 자별(自別)하므로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신 등의 본래 뜻은 지난날 폐출(廢黜)된 사람들부터 먼저 함께 융화한 연후에 오광운의 무리처럼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하는 부류들을 차례로 쓰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광운의 무리는 지난날의 사람들과 빙탄(氷炭)219)                  의 관계에 있어 이번의 탕평(蕩平)의 논의가 그의 무리들에게 이롭지 아니하므로 두뇌(頭腦)가 본래 맞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송인명(宋寅明)도 또한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신이 자수(藉手)하여 성상을 섬긴 것이 황극(皇極)220)                  의 제일의(第一義)에서 벗어날 것은 아닌데, 지금 삼가 오광운의 상소를 보건대, 낭자하게 죄를 성토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 떨고 어쩔 줄 모르게 하였습니다. 아! 이른바 ‘탕평(蕩平)을 가식(假飾)했다.’고 하는 것에는 또한 심히 권형(權衡)이 있습니다. 오광운이 불식(拂拭)하는 바의 역가(逆家)와 빙탄(氷炭)의 관계에 있는 부류에게 두루두루 보합(保合)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장차 다시 지난 봄처럼 격렬하게 변란(變亂)을 일으킬 것입니다. 오광운처럼 난(亂)의 근원을 깊이 알고 있는 자로 하여금 이미 그 숨겨진 근심을 견디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필경에 조조(鼂錯)의 경우221)                  와 같은 죽음을 신이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신 등을 빨리 물리치시어 그 사설(辭說)을 용납되지 않게 함으로써 황극(皇極)의 다스림을 이루어 나가고 뒷날의 후회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어찌 상소의 말 중에 헤아리지 못한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이미 지적해서 배척한 일이 없었으니, 어찌 먼저 과격(過激)한 것을 조장(助長)하여 갈등을 만들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호군        이여적(李汝迪)이 같은 강연(講筵)에 입시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해도(海島) 가운데 역적의 무리를 찬배(竄配)한 것이 너무 많으므로 도민(島民)에게 해(害)를 끼치고 있으니, 마땅히 다른 군(郡)으로 이배(移配)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읍(郡邑)에서 자주 점고(點考)하는 일을 의금부(義禁府)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서로 의논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이여적이 또 말하기를,
"속오군(束伍軍)은 영장(營將)이 거느리도록 맡겼기 때문에 수령(守令)은 수하(手下)에 군사가 전혀 없으니, 보인(保人)으로서 쌀과 포(布)를 바치는 자를 각읍(各邑)으로 하여금 단속하게 해서 평상시에는 포를 받고 난리 때에는 거느리게 한다면 편의(便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박사수가 말하기를,
"이노 작대(吏奴作隊)는 경인년222)                  에 해적(海賊)이 소란을 일으킨 것으로 인해 조정의 명령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절목(節目) 가운데 ‘이노(吏奴)와 보인(保人)은 한결같이 모두 작대(作隊)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인들이 혹은 ‘삼군문(三軍門)의 보인입니다.’라고 하여 각읍에서 봉행(奉行)하는 데 헷갈린 나머지 구습(舊習)에 따라 행하여 그대로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이여적이 또 말하기를,
"하동 부사(河東府使)        우하형(禹夏亨)은 지난 봄의 변란(變亂) 때 드러난 공로(功勞)가 많았으나, 공로와 죄과(罪科)가 서로 비등(比等)하게 되어 논상(論賞) 가운데서 누락이 되었습니다. 우하형은 그 당시 곤양 군수(昆陽郡守)로서 10초(哨)의 군사를 인솔하고 맞바로 역적이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는데, 5리(里)를 못미쳐 적군(賊軍)이 그 괴수를 결박하여 맞이하며 항복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정희량(鄭希亮)을 사로잡고 이웅보(李熊輔)가 우두치(牛頭峙)를 넘지 못한 것은 모두 우하형이 적진(賊陣)으로 곧장 들이닥친 공(功)입니다. 정희량과 이웅보가 진(陣) 앞으로 잡혀와서 부도(不道)한 말을 허다히 퍼붓자 우하형이 손수 처참(處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창(居昌)의 순절(殉節)한 좌수(座首)        이술원(李述源)의 아들 이지인(李至仁)이 뒤에서 말리며 ‘제가 마땅히 처참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우하형이 누구인지를 따지지도 않고 군관(軍官)인 줄로만 알고서 처참하게 했던 것입니다. 천총(千摠)·파총(把摠) 이하는 모두 가자(加資)했으나, 우하형만 유독 동일한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므로 직접 눈으로 본 군민(軍民)들이 억울하다고 일컫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하고, 오광운과 박사수도 또한 ‘영남 사람들이 모두 우하형의 공(功)을 일컫고 있다.’고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하형이 이미 역적의 괴수를 잡았다면, 마땅히 서울로 잡아보내어 왕법(王法)을 시원하게 바루었어야만 했을 일이다. 그런데 도리어 개인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 사람에게 내맡겼으니, 공(功)은 비록 가상하나 일은 순미(純美)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감훈(勘勳)하는 데 들어갔으나 곧 빼버렸던 것이다. 별단(別單)이 바야흐로 들어왔으니, 내가 마땅히 헤아려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여적이 또 말하기를,
"안음(安陰)을 정희량이 태생(胎生)한 고을이라 하여 혁파(革罷)하는 일을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는데, 함양(咸陽)에 붙이려고 한다면 고을 사람들이 죽기를 작정하고 원하지 않을 것이고, 거창(居昌)에 붙이려고 한다면 본래 땅이 넓어 다스리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안음은 천봉 만학(千峰萬壑)이므로 달아난 자들의 소굴이 아님이 없으니 관장(官長)을 멀리 둘 수가 없습니다. 도신(道臣)도 또한 신의 말을 옳게 여기고 있으니, 만약 그 이름을 ‘충순현(忠順縣)’으로 고쳐서 그대로 둔다면 좋겠다고 합니다."
하자, 박사수가 말하기를,
"고을 백성 중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 있었을 경우 아름다운 이름으로 고쳐서 내린 적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만, 어찌 고을 백성이 역적을 따랐는데 충순(忠順)으로 고을 이름을 고친 적이 있었습니까? 신은 일찍이 마땅히 혁파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듣건대, 지세(地勢)가 험하여 도둑이 많다고 하니, 지금 만약 옮겨서 소속시킨다면 거리가 관부(官府)와 아주 멀게 되는 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역적의 괴수가 나왔으니, 그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을 알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결코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 나누어 소속시킬 곳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3월 12일 병진

조석명(趙錫命)을 승지(承旨)로, 김상규(金尙奎)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춘제(李春躋)를 사간(司諫)으로, 윤휘정(尹彙貞)을 정언(正言)으로, 이광세(李匡世)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빈청(賓廳)과 승정원(承政院)에서 재차 아뢰고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세번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좌승지(左承旨) 이정소(李廷熽)의 상소를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에 이르기를,
"이양신(李亮臣)이 직언(直言)으로 과감하게 간(諫)하자 절역(絶域)의 변방으로 찬배(竄配)하였고, 윤득화(尹得和)가 항장(抗章)하여 힘써 간(諫)하자 외읍(外邑)으로 내치셨으니, 지금부터 이후로 누가 기꺼이 전하를 위해 한 마디 말을 올리려 하겠습니까? 심공(沈珙)의 상소는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감히 을사년223)   등의 말로 농락하고 협지(脅持)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엄외(嚴畏)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원(吳瑗)은 대직(臺職)에 제배(除拜)된 것이 몇 달이 되었고, 전하께서 서경(署徑)224)  을 하라고 신칙(申飭)하신 것이 또한 이미 여러 번이었는데도 어찌하여 지금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신은 가만히 통탄스럽게 생각합니다. 신은 곧 유락(唯諾)했던 사람입니다. 어찌 감히 홀로 근밀(近密)한 곳에 스스로 출입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은 그의 뜻이 상시(嘗試)하는 데 있고 경알(傾軋)하려고 했다는 이유로써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김해부(金海府)의 죄인 이도장(李道章)을 박태순(朴泰純)의 예(例)에 의거해 본진(本鎭)의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결안 취초(結案取招)한 뒤 정법(正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남 안핵 어사(嶺南按覈御史)의 사장(査狀)에 따른 것이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이 끝나자, 지사(知事)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친공신(親功臣)225)  에 대해 사여(賜與)가 매우 풍부하여 종신토록 그 부요(富饒)를 누렸는데, 이번의 친공신은 기한(饑寒)을 면하지 못하고 장복(章服)을 갖추지 못한 자가 있으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도리가 아주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서명균이 권설 도감(權設都監)에서 마음대로 사람을 가두는 것을 엄금(嚴禁)하고 또 직수 아문(直囚衙門)226)  의 낭청(郞廳)이 사사로운 일로써 잡아가두는 것을 금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종신(宗臣) 밀양군(密陽君) 이완(李梡)이 헌대(憲臺)에서 도총부(都摠府)의 하인(下人)을 가두었음을 진달하자, 임금이 도총부는 왕자(王子)와 대군(大君)이 겸대(兼對)하는 아문(衙門)이라는 이유로써 풍문(風聞)에 관계된 일 외에는 하인을 잡아가두지 말게 하라고 명하였다.

 

3월 13일 정사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이탄(李坦)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三司) 및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과 육조(六曹)의 참의(參議)가 드디어 청대(請對)하여 힘껏 간(諫)하였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인엽(人燁)이 형신(刑訊)받을 때도 오히려 차마 보지 못하셨고, 이탄(李坦)의 일에 이르러서는 장전(帳殿)에서 눈물을 흘리셨으니, 누군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국사(國事)는 마땅히 엄의(嚴毅)를 위주로 해야 하는 것인데 성덕(成德)은 측달(惻怛)을 위주로 하시니, 한쪽의 치우친 데로 귀착되는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작년에 인화문(仁和門)을 나설 때 그가 시위(侍衛)하는 가운데 있는 것을 보았었다. 나는 이미 흉격(凶檄)을 보고 이미 이런 지경이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심회(心懷)가 좋지 않아서 차마 그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오늘의 마음은 곧 그때의 마음이다. 위에 있는 사람은 진실로 마땅히 이것을 알아야 하겠지만, 아랫사람의 도리는 어찌하여 한결같이 예예(泄泄)할 수가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황소(黃熽)의 상소가 나오자 지난번에 과연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 먼저 즉시 발계(發啓)하였으니 오비이락(烏飛梨落)227)  과 같음이 있었다.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반드시 나에게 죽이려고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였다. 이태좌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약 외인(外人)의 의논이 있음을 혐의쩍게 여기시어 즉시 윤종(允從)을 내리지 않으신다면 이는 끝내 계교(計較)하는 사심(私心)으로 귀착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3월 14일 무오

햇무리하였다.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차자(箚子)를 올렸다. 대략 이르기를,
"오광운(吳光運)의 상소에 ‘비록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고 천지(天地) 사이에 세워도 어긋남이 없는 국시(國是)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흔들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축년228)  과 임인년229)  의 네 신하는 밝으신 명령을 받들어 대책(大策)을 정하였으니 의리(義理)가 밝고 정대하였는데,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심지어 ‘몰래 천위(天位)230)  를 옮긴다.’고 지목하였고, 김일경(金一鏡)은 곧장 찬역(竄逆)으로 귀착시켰습니다. 이것은 그 뜻이 어찌 한갓 네 신하만을 죽이고야 말겠다고 한 것이겠습니까? 네 신하의 화(禍)는 김일경과 박필몽(朴弼夢)의 무함(誣陷)에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연차(筵箚)는 그 바탕이 되었으니, 김일경과 박필몽이 역적(逆賊)인지 역적이 아닌지와 네 신하가 원통한지 원통하지 아니한지는 판가름이 났습니다. 지금 김일경과 박필몽 등 여러 역적들은 모두 현륙(顯戮)231)  을 당했는데, 네 신하는 아직도 복분(覆盆)232)  의 아래에 있으니, 고금(古今)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실로 경(卿)에게 기대하던 바가 아니다.’라고 비답하였다.

 

권익순(權益淳)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3월 14일 무오

사간(司諫) 황재(黃榟)의 상소를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신은 신축년233)   겨울 연차(筵箚)에 유락(唯諾)한 가운데 든 사람입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그 구차하게 모면하여 스스로 허물을 가린 것으로 인해 다른 충혼(忠魂)이 가려지고 억눌러지도록 내맡겨 둔 채 내가 홀로 좋은 벼슬을 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면, 개나 돼지도 장차 그 나머지를 먹지 않을 것입니다. 탕평(蕩平)이 오늘날의 새 제목(題目)이고, 조정에서 신을 처우하는 것도 또한 이 탕평(蕩平)이란 글자를 빌린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과연 참다운 탕평을 해내가려고 하신다면, 똑같은 죄안(罪案)인데도 추탈(追奪)의 법이 혹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 미치기도 하고 화현(華顯)의 직함이 유독 살아 있는 자에게 매이기도 하니, 어찌 반박(斑駁)234)  된 것이 이다지도 심합니까? 사정(邪正)이 구분되지 않고 시비(是非)가 구별되지 아니한 채 한갓 일체 포괄(抱括)하려고 하여 조정을 하나의 뒤범벅이 된 곳으로 만들려 하니, 신은 참으로 죽을 죄입니다만, 전하께서는 한갓 탕평(蕩平)이 아름다운 줄만 아셨지 탕평을 하는 방법은 알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저쪽과 이쪽을 융화시켜 모두 거두어 함께 쓰려고 하시니, 성의(聖意)를 누군들 우러러 감탄하지 않겠습니까만, 아래에서 봉승(奉承)하는 사람들은 전혀 일분의 성실한 의사(意思)도 없이 다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성상의 뜻을 거스를 것만을 염려하여 이처럼 외면(外面)을 빌리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 지위를 굳히는 계책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신처럼 성품이 나약하고 정세가 위태로운 자는 단지 그 무한한 농락을 받으며 탕평에 필요한 한 사람의 수효를 채우고 있으니, 또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이양신(李亮臣)의 상소는 일신(一身)의 화(禍)와 복(福)을 돌아보지 아니한 채 단지 국가를 위해 깊이 근심한 것이오니, 청컨대 변방의 찬배(竄配)를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황재는 차라리 임금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차마 그 당(黨)을 배반하지는 못하니 따라서 책벌(責罰)을 가한다면 그의 의도에 들어맞게 될 것이다.’하여 단지 소본(疏本)만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이탄(李坦)을 형률(刑律)에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5일 기미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정청(庭請)하고, 삼사(三司)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장령(掌令) 이정석(李廷錫)·헌납(獻納) 정우량(鄭羽良)·정언(正言) 윤휘정(尹彙貞)·부수찬(副修撰) 윤동형(尹東衡)이다.】 에서 복합(伏閤)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대리(代理)를 막았다고 하는 것은 더욱 무리(無理)한 말입니다. ‘선왕(先王)께서 정무(政務)를 그만두시는 것을 간(諫)하였다.’고 하지 않고, ‘성상의 대리(代理)를 막았다.’고 하는데, 그 무리들도 애초에 또한 정청(庭請)하였으니, 역시 대리(代理)를 저지하여 막는 데서 나왔던 것입니까? 장차 봉승(奉承)하려 했었다면 정청(庭請)은 왜 했으며, 이미 정청하였다면 차자(箚子)의 진달은 왜 했던 것입니까? 그리고 이미 차자로 절목(節目)을 청하였다면 또 어찌하여 남을 따라 들어가 벌벌 떨며 사죄(謝罪)하고 다시 회수(回收)할 것을 청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어떠한 대사(大事)인데 이에 이처럼 이랬다저랬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마음은 성실(誠實)하기가 이와 같았으므로 신명(神明)이 통감(通鑑)하시니, 화(禍)·복(福)이 어찌 능히 움직일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신이 김일경(金一鏡)의 일에 대해 능히 직분을 다하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죄입니다. 하지만 만약 김일경을 조종했다고 신을 허물한다면 나랏사람들이 반드시 장차 승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흉적(凶賊)을 육지로 나오게 하는 데 뒤섞어 넣었던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프나 후회해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적모(賊謀)란 하루라도 발생하기 전에는 미리 볼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에 훗날 칭병(稱兵)을 성사시켰다고 하니, 설령 없는 죄를 꾸며 만들려고 하더라도 무엇이 할말이 없을까 걱정이 되기에 이런 망측한 말을 차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남태징(南泰徵)과 이사성(李思晟)의 천망(薦望)은 신이 본래 참여해 들었습니다. 눈이 있으면서도 효경(梟獍)인 줄 알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장수규(張守珪)의 감별(鑑別)이 어두웠던 것235)  보다 심히 부끄럽습니다. 신은 장차 죽을 때까지 스스로 자책(自責)할 것입니다. 홍계일(洪啓一)의 일은 더욱 맹랑합니다. 말단에 작처(酌處)한 것은 또 신이 관여한 바가 아니니, 무엇에 근거하여 신이 생살(生殺)을 마음대로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이진유(李眞儒)의 성상을 향한 성심(誠心)은 유독 신(臣)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정석삼(鄭錫三)의 연주(筵奏)와 정우량(鄭羽良)의 사직소(辭職疏)를 보더라도 여러 사람들의 의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장령(掌令) 이정석(李廷錫)·헌납(獻納) 정우량(鄭羽良)·정언(正言) 윤휘정(尹彙貞)·수찬(修撰) 윤동형(尹東衡)이 연명(聯名)한 상소를 도로 돌려주고 상소를 봉입(捧入)한 승지를 파직(罷職)하라 명하였다.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힘껏 간(諫)하였으나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하여 끝내 천청(天聽)236)  을 감동시켜 돌이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써 진소(陳疏)하고 경출(徑出)237)  하니, 하교하기를,
"며칠 동안 복합(伏閤)하고 세 차례 청대(請對)했다가 이처럼 경출하는 일이 있으니, 처음에는 어찌하여 느슨하였다가 끝에 가서는 어찌하여 성급한가? 이와 같다면 장차 경출로 인해 극치(極致)가 될 것인가?"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박사정(朴師正)의 상소를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언사(言事)의 신하가 서로 잇달아 득죄(得罪)하였습니다. 대저 말하는 직분을 준 사람은 반드시 입을 다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지는 않아야 하는데, 진언(進言)하게 되어서는 언제나 찬출(竄黜)을 가하시니, 이것은 관직을 함정으로 삼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때를 탄다[乘時]’란 두 글자는 전하께서 신자(臣子)를 대우하심에 있어서 또한 야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명(聖明)에 있어서는 실언(失言)이 되고 군하(群下)에 있어서는 지극한 수치가 됩니다. 만약 전약수(錢若水)로 하여금 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성급하게 물러나 달아났을 것이오, 다만 급류(急流)에서 용퇴(勇退)하고 말 뿐이 아닙니다."238)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7책 21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1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註 238] 전약수(錢若水)로 하여금 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성급하게 물러나 달아났을 것이오, 다만 급류(急流)에서 용퇴(勇退)하고 말 뿐이 아닙니다." : 전약수(錢若水)는 송(宋)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 전약수가 젊었을 때 마의도자(麻衣道者:관상가(觀相家))를 만나 상을 보았더니 ‘소용돌이 치는 벼슬길에서 과감하게 물러날 사람이라’고 했는데, 뒤에 추부(樞副)로 치사(致仕)하니 나이 겨우 40세였음. 곧 벼슬에서 물러나는 데 표본이 되는 사람임.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6일 경신

정청(庭請)하여 재차 아뢰고, 승정원(承政院)에서 한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성균관(成均館)에서 아뢰기를,
"유생(儒生)을 시취(試取)하라는 명(命)을 내리신 뒤 신(臣) 이집(李㙫)이 반중(泮中)에 왔더니, 수재 유생(守齋儒生)이 말하기를, ‘근래에 동재(東齋)·서재(西齋)의 재임(齋任)을 차출(差出)할 수가 없어 미처 서로 이끌고 대궐문에서 부르짖지는 못하나 토역(討逆)의 논의가 바야흐로 한창이어서 정청(庭請)까지 설치하였는데, 이때 어찌 부거(赴擧)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이 되풀이하면서 효유(曉諭)했지만 끝내 회청(回聽)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잘 전유(傳諭)하여 즉시 응제(應製)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유생들이 끝내 응제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기(士氣)가 이와 같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진실로 한때의 절제(節製)로 위로해 기쁘게 하는 것보다 낫다. 글제를 가지고 도로 들어와 여러 유생들의 기개를 성취시켜 주라."
하였다.

 

대신(大臣)과 의금부(義禁府)의 여러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이태좌(李台佐)에게 묻기를,
"반유(泮儒)239)  의 일이 어떠한가?"
하니, 이태좌가 말하기를,
"유생들이 고집하는 바가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비의 기습(氣習)이 귀하게 여길 만하다. 태학(太學)에 옛날에도 또한 토역(討逆)하여 봉장(封章)한 일이 있었던가?"
하니, 동의금(同義禁)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선조조(宣祖朝)에 오윤겸(吳允謙)이 재임(齋任)이 되었을 때 유생의 무리가 정여립(鄭汝立)을 토죄(討罪)하는 일로 발론(發論)하자, 오윤겸이 ‘선비는 마땅히 조론(朝論)에 간섭해서는 안된다. 단지 교화(敎化)가 밝지 못한 이유로써 이처럼 흉역(凶逆)의 상소가 있게 된 것이다.’ 하고 토역소(討逆疏)에 참여하지 않으니, 선배(先輩)들이 견식이 있다고 허여(許與)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태좌가 삼사(三司)의 연명 상소에 대한 비답이 중도에 지나침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며칠 동안 복합(伏閤)하고서 경솔하게 앞질러 경출(徑出)하였으니, 풍절(風節)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달한 바는 좋았다."
하고, 소비(疏批)를 들이라고 명하여 ‘거조(擧措)가 어찌하여 이처럼 황망하고 급한가? 참으로 타당하지 않다.’로 고쳐 써서 내렸다. 이태좌가 또 심공(沈珙)의 소비(疏批)에 혼후(渾厚)함이 결여되어 있는 점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을사년240)   운운(云云)한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정소(李廷熽)의 ‘환실(患失)241)  ’이란 지척(指斥)이 어찌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황옥현(黃玉鉉)을 어떻게 처리함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이태좌가 말하기를,
"한번 국본(國本)이 텅 비고 나서부터 사대부(士大夫)들이 누군들 나라를 위해 깊이 근심하지 않았겠습니까? 황소(黃熽)가 경향(京鄕)을 출입하면서 이것을 황찬(黃燦)에게 전해 말하자, 황찬이 ‘지금 만약 이런 상소를 올린다면 나에게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그대로 권유하여 성사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황소는 단지 공(功)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해괴한 상소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황가(黃哥) 세 사람이 모두 장하(杖下)에 죽었으니, 아마도 호생(好生)하시는 성덕(聖德)을 손상시킴이 있을 것이므로, 먼곳으로 물리쳐 보냄이 마땅할 듯합니다."
"지금 만약 형장(刑杖)을 써서 그 숨겨진 실정(實情)을 신문(訊問)해서 과연 촉망(屬望)한 곳이 있었다면 마땅히 역률(逆律)을 써야 하겠지만 두 사람이 이미 죽었으므로 숨겨진 실정을 캐낼 수가 없으니, 망언(妄言)한 죄가 반드시 죽음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황옥현은 도배(島配)하고 황위(黃煒)는 아주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판의금(判義禁) 김시환(金始煥)이 윤득화(尹得和)에게 논척(論斥) 당한 일을 끌어대어 권익관(權益寬)의 의언(議讞)을 무릅쓰고 맡을 수 없음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권익관의 일은 내가 마땅히 직접 결단하겠다."
하고, 마침내 변방 먼 곳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전(前)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도빈(趙道彬)·전 판서(判書) 심택현(沈宅賢) 전 좌윤(左尹) 장붕익(張鵬翼)·전 참판(參判) 김유경(金有慶)·전 감사(監司) 김조택(金祖澤)·전 부사(府使) 조영복(趙榮福)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진수(李眞洙)를 승지(承旨)로, 성덕윤(成德潤)을 집의(執義)로, 유엄(柳儼)을 헌납(獻納)으로, 박사수(朴師洙)를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조상행(趙尙行)과 오원(吳瑗)을 정언(正言)으로, 윤휘정(尹彙貞)을 교리(校理)로, 정우량(鄭羽良)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취리(尹就履)와 이정석(李廷錫)을 장령(掌令)으로, 이흡(李潝)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전(前) 대장(大將) 장붕익(張鵬翼)을 다시 어영 대장(御營大將)에 차임(差任)하라고 명하였다.

 

3월 17일 신유

조도빈(趙道彬)을 영돈녕(領敦寧)으로, 송성명(宋成命)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김집(金潗)을 남병사(南兵使)로, 신명윤(申命尹)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삼았다.

 

정청(庭請)하여 세 번 아뢰고 승정원(承政院)에서 한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납(獻納) 유엄(柳儼)과 정언(正言) 조상행(趙尙行)이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또한 따르지 않았다.

 

부교리(副校理)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윤득화(尹得和)가 권익관(權益寬)의 일을 상소하여 논하였는데, 의취(意趣)가 신의 아비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신의 아비가 이 일을 당한 것은 신이 전날 연석(筵席)에서 대답한 일에서 말미암았으니, 일이 신의 몸에서 빌미가 되어 욕이 아비에게까지 미쳤으므로, 속마음이 부끄럽고 아픈 것이 마치 칼날에 찔린 것 같습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신데도 유독 이탄(李坦)의 일에 있어서는 아끼고 숨김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안으로는 돈친(敦親)하는 정(情)에 끌리시고 밖으로는 집법(執法)의 논의에 몰리시어 시간을 끌면서 이리저리 얽혀서 차마 주벌(誅罰)을 가하지 못하시니, 성심(聖心)은 가면 갈수록 차마 하지 못하시겠지만, 여러 사람의 마음은 가면 갈수록 더욱 불울(拂鬱)해질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인혐(引嫌)이 너무 지나치다. 덧붙여 진달한 일은 나의 뜻을 이미 연중(筵中)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지평(持平) 이흡(李潝)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양신(李亮臣)과 윤득화(尹得和)는 나라를 위해 할말을 다하여 화복(禍福)을 담각(擔却)하였고, 황재(黃榟)는 먼 지방에서 봉장(封章)하여 스스로 그 직책(職責)을 다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실로 어찌 전하를 저버린 것이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이탄(李坦)의 일은 작년 봄 이래로 조금도 시기에 미쳐 징토(懲討)하는 뜻이 없었고, 늦게서야 연신(筵臣)의 발단(發端)으로 인해 비로소 합사(合辭)하자는 청(請)이 있었습니다. 거조(擧措)가 범완(泛緩)하고 이륜(彝倫)이 캄캄하게 막혔으므로, 신은 실로 기가 막혀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릇 마땅히 성토(聲討)해야 할 죄에 대해 우물쭈물하며 규피(規避)했던 자들에게 먼저 징려(懲勵)를 가한다면,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이 일분이나마 깨우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당습(黨習)에 물든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그리고 당인(黨人) 때문에 명(命)에 응하지 않다니,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8일 임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삼사(三司) 【교리(校理) 신치운(申致雲)·부수찬(副修撰) 윤광익(尹光益)·장령(掌令) 윤취리(尹就履)·헌납(獻納) 유엄(柳儼)·정언(正言) 조상행(趙尙行).】 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탄(李坦)의 일로 번갈아 나아가 힘써 진달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일의 계사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9일 계해

진시(辰時)에 해에 겹햇무리가 있었다. 안쪽의 햇무리에는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는데, 안은 붉고 밝은 푸르렀다.

 

봉교(奉敎) 박필균(朴弼均)이 하위(下位)인 조상행(趙尙行)의 승륙(陞六)242)  으로 인해 상소하여 관규(館規)를 인용하고,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전례(前例)를 상고해 품처(稟處)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뒤에 춘추관의 계품(啓稟)으로 인해 조상행의 출륙(出六)을 도로 정지시키고 그대로 삭직(削職)한 뒤 신천(新薦)은 박필균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

 

지돈녕(知敦寧)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기를,
"당일 정청(庭請)을 정지했던 것은 네 신하이나, 정지하는 것을 옳다 하여 유락(唯諾)했던 것은 신(臣)입니다. 옛사람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산 사람이 부끄럽지 않다.’고 했는데, 신은 죄를 면하여 외람되게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죽은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그래도 말할 수 있겠지만, 저승에 있는 이에게 부끄러움을 지게 되었으니, 어떻게 스스로 설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몸에 장임(將任)을 띠고 한결같이 인혐(引嫌)하니, 참으로 타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243) 홍응인(洪應寅) 등이 상소하여 이탄(李坦)을 정법(正法)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오원(吳瑗)의 관직을 삭탈(削奪)하라고 하였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오늘날 국세(國勢)는 외롭고 위태하며 왕강(王綱)은 무너져 결단이 났습니다. 천재(天災)는 거듭 닥치고 인심(人心)은 피폐하고 백성은 허덕이며 온갖 것들이 소모되어 바닥이 나기에 이르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계고(稽古)에 총명하시지 않음이 아니건만, 성실한 마음에는 물흐르듯 행하는 실상이 없고 사사로운 뜻에는 고집하는 해(害)가 많습니다. 연석(筵席)에 임하시는 것이 비록 빈번하고 강(講)을 여시는 것이 비록 부지런하시지만, 대략 잃어버리고 문의(文義)를 대충 논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선유(先儒)가 말한 ‘글은 글 그대로이고 나는 나 그대로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성인(聖人)과 현인(賢人)들의 경전(經傳)은 그 말에 지극한 이치가 있는 것인데, 지금 전하의 사륜(絲綸) 사이에 인용하는 왕왕 그다지 들어맞지 아니한 문자(文字)로써 반드시 옳거나 마땅하지 아니한 의리(義理)를 증명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앞사람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지 아니하시며 혹은 앞사람의 가르침을 굽혀서 자신의 뜻에 덧붙이시니, 독서(讀書)란 이로움이 있는 것인데 도리어 해(害)가 있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그 까닭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셨다면 궁리(窮理)·격물(格物)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니, 진실로 성학(聖學)에 결여됨이 있는 것이며, 만약 이러한 줄을 아시고서도 여전히 이것을 능사(能事)로 삼으신다면 성인(聖人)의 말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그 잘못이 더욱 큽니다. 전하께서는 매번 스스로 쓸데없는 문학을 통렬하게 배척하신다고 하시지만, 시조(施措)를 살펴보면 끝내 돈후(敦厚)하고 박실(樸實)한 뜻이 부족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죽을 죄가 됩니다만, 망령되게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말할 때마다 반드시 문구(文具)를 경계하신 것이 바로 심한 문구가 됨을 볼 수 있습니다. 군신(君臣)의 사이에는 성신(誠信)을 귀하게 여기는데, 전하께서 신하를 인접(引接)하심은 실정(實情)에 지나친 언사가 많으십니다. 비록 이것으로써 총자(寵藉)하고 가차(假借)하는 자료로 삼으려고 하더라도, 얻은 자는 반드시 참으로 영광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른바 ‘추심치복(推心寘腹)244)  ’이란 것이 어찌 말소리나 웃음 띤 얼굴 사이에 있겠습니까? 언어(言語)로 사람을 쓰는 것은 본래 종핵(綜核)245)  의 정치가 아닙니다. 번신(藩臣)246)  의 장계(狀啓)가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것을 말하여 그 사람이 과연 쓸 만하다면, 훗날 올려 발탁해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겠습니다만, 한 장의 장계로 인해 윤발(綸綍)247)  로 포장(包奬)하고 표리(表裏)248)  를 내리심이 너무도 절제(節制)와 한량(限量)이 없습니다. 정경(正卿)·아경(亞卿)의 하교를 마치 약속을 지키듯이 미리 허락하시니, 한 마디 개언(槪言)이 있어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설령 정사(程事)가 효과를 나타낸다면 장차 무엇으로 그 포장(褒奬)을 더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매번 스스로 ‘나는 사의(私意)가 없다.’고 이르시지만 끝내 허다한 장애(障礙)가 있음을 면하지 못하십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비평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하늘의 법칙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보다 앞서시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은밀히 헤아리시는 뜻이 무릇 정리(正理)를 따르려고 하는 뜻을 빼앗으니, 왕왕 언사(言辭)를 허다히 소비하여 먼저 스스로 해설(解說)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두 전하의 가슴속에 먼저 한 개의 ‘사(私)’자가 있기 때문이니, 의리(義理)로 보아 마땅히 혐의쩍게 여기거나 구애될 것이 없는데도 지나치게 스스로 혐의쩍게 여기고 구애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이 의심하거나 노여워할 만한 것이 아닌데도 갑작스레 의심과 노여움을 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마땅히 베풀지 말아야 할 곳에 은혜를 베푸시는가 하면, 마땅히 굽혀서는 안될 사람에게 위엄을 굽히시기도 하십니다. 또 반드시 덕색(德色)을 보여 감격스러움을 알게 하려고 하시어, 이경지(李慶祉)의 아들을 특별히 방송(放送)했을 때와 같은 경우에는 윤음(綸音)을 지나치게 내렸으니, 이것은 흉도(凶徒)의 업신여기는 길을 열어주기에 꼭 알맞은 것일 뿐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매번 마음을 비운 채 직언(直言)을 받아들이도록 스스로 힘쓴다고 하시면서 비록 이른바 ‘너그럽게 용납하고 옳게 여겨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일지라도 참되게 시행되는 실상이 전혀 없으시니, 조금이라도 뜻을 거스름이 있으면, 번번이 가혹하게 자질구레한 일까지 따지시고 꾸짖어 물리침을 그만두지 않으십니다. 무릇 그 인물을 발탁함에 있어서는 조금이나마 당직(讜直)한 데 가까운 사람은 대부분 좋아하지 않으시고 날렵하고 영리하고 부드럽고 악착스런 사람만 취하시니, 거의 한 사람도 감히 한 마디 말을 올려 군주의 귀를 거슬리게 하고 군주의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며, 다투어 편녕(便佞)하는 태도와 미열(媚悅)하는 말을 익히고 있습니다. ‘성교(聖敎)가 지당하십니다.’ ‘성덕(聖德)이 탁월하십니다.’하는 말이 하전(廈氈) 위에 끊어지지 아니하여 마침내 군도(君道)는 날로 교만해지게 하고 성심(聖心)은 날로 오만해지게 만드니, 국사(國事)는 날이 갈수록 더욱 어지러워지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 무리들은 바야흐로 또 성상의 뜻을 깊이 얻어 총애와 이익을 보전하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른바 대료(大僚)라는 자는 곧 더욱 부끄러움이 없는 자입니다. 옛사람이 아첨하며 봉승(奉承)하는 것을 완희(玩戲)라 했는데 군부(軍父)를 완희하는 것이야말로 그 죄가 어떠합니까?
전하께서 겪으신 바는 지극한 어러움과 지극한 변(變)이 아님이 없습니다. 옛부터 성인(聖人)이 역경(逆境)에 잘 대처하신 바는 ‘지성대공(至誠大公)’이라고 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끊은 듯이 명의(名義)를 바로잡고 윤강(倫綱)을 엄격히 하는 것을 큰 본령(本領)으로 삼으시어, 영의(英毅)함으로써 결단하시고 강대(剛大)함으로써 실행하셨으니, 그 후손(後孫)에게 훈계를 전해 주신 것이 이미 혁연(爀然)하게 빛나고 밝았습니다. 그런데 일종의 간사한 사람인 허적(許積)이 명의(名義)와 원수가 되어 뜻을 잃자 원한을 쌓으며 그 화심(禍心)을 풀고자 했습니다. 경자년249)   이후 경종 대왕(景宗大王)께서 선왕(先王)의 뜻을 준행하여 받드시며 일찍이 혹시라도 흔들림이 없자, 이 무리들이 온갖 방법으로 틈을 뚫고 들어오려고 했지만 그 계책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저위(儲位)가 이미 정해진 뒤에 미쳐서 역적 유봉휘(柳鳳輝)가 기치(旗幟)를 세우자 여러 역적들이 그림자처럼 따르며 반드시 전하에게 제마음대로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열성(列聖)의 몰래 도우심과 양궁(兩宮)의 보우(保佑)하심에 힘입어 종사(宗社)가 오늘날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통(哀痛)하게 여길 만한 것은 우리 경종(景宗)께서는 지극히 효성스럽고 지극히 인자하시며 관후(寬厚)하고 온량(溫良)하셨는데, 저 간흉(奸薨) 무리들이 이에 차마 국가가 불행한 때를 다행으로 여기고는 숙종의 옛 신하를 해쳐 죽이고 숙종의 옛 법을 고치고 바꾸어 오로지 자기들의 사의(私意)만을 행하며 제뜻에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경종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전하의 을사년250)   하교(下敎)에 ‘간사한 자들이 사총(四聰)을 속이고 가렸으며, 국병(國柄)을 제멋대로 농락하였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대저 경종의 본심(本心)을 아는 이가 전하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 무리들의 죄악을 환히 아시는 것도 또한 전하만한 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을사년 이후 무릇 토죄(討罪)하는 법에 있어서 한결같이 너그럽게 놓아주시어 드디어 이 무리로 하여금 전하의 조정에서 입술을 나불거려 곧 신축년251)  ·임인년252)  의 제멋대로 농락한 죄를 모두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에게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에 감히 나라를 위해 죽은 여러 신하들을 뒤따라 비난하고, 당일(當日)의 옛 투식을 몰래 드러내며 곧 스스로 ‘선왕(先王)에게 충성이고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비록 그들이 방종하고 무엄하여 ‘전하는 우롱할 수 있다.’고 여기더라도 유독 선왕의 척강(陟降)하시는 혼령이 환히 굽어 살피고 계심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효제(孝悌)를 하늘로부터 타고 나셨으므로 매번 선조(先朝)를 들추는 말을 들으실 적마다 번번이 ‘차마 듣지 못하겠다.’고 하시니, 이는 참으로 천리(天理)의 본연(本然)입니다. 그러나 다만 ‘차마 듣지 못할 분이다.’라는 것은 효제(孝悌)의 한 가지 단서일 뿐입니다. 이러한 ‘차마 듣지 못하는 마음’을 미루어 선왕의 본심을 밝히고 난신(亂臣)의 죄악을 토죄(討罪)하여 마침내 숙종의 영의(英毅)하고 강대(剛大)했던 규모를 따르는 것이 효제의 전체적인 큰 쓰임인 것입니다. 건저(建儲)·대리(代理)는 의리(義理)의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것이 백세(百世)를 기다릴 수 있었으니, 무릇 숙종과 경종의 신하가 된 자가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뜻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대책(大策)이 정해진 것이 옛 신하들이 나라를 담당했던 때에 있었으므로, 눈을 쳐다 보면서 남의 속을 헤아리는 무리들은 다만 국본(國本)이 영원히 굳어짐으로써 제 뜻을 얻을 날이 없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만번 죽더라도 생사(生死)를 돌아보지 않고 싸우는 자들이 나와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니,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 등 여러 역적들이 칭병(稱兵)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이미 간과(干戈)253)  에 종사(從事)할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봉휘(柳鳳輝)에게서 비롯되어 한세량(韓世亮)이 되었고, 칠적(七賊)에게서 비롯되어 역적 박상검(朴尙儉)이 되었으며,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변서(變書)에서 비롯되어 역적 김일경의 교문(敎文)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의논은 다만 역적 김일경의 교문을 지난 봄의 난역(亂逆)의 원인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것이 과연 말이 조리(條理)에 맞겠습니까? 역적 유봉휘의 관질(官秩)은 예전과 같고 삼적(三賊)의 머리도 아직까지 보전되어 있는데, 적변(賊變)이 있은 뒤에 끝내 유봉휘의 죄를 추토(追討)한 자가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김일경의 상소와 교문을 나누어 두 가지 일로 만들고는 반드시 삼적의 역명(逆名)을 벗겨주려고 하니, 신은 가만히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자상하시고 용서를 잘하시어 항상 자신에게 관계된 일이 혹시라도 한쪽으로 치우치게 흐를까 두려워하시기 때문에 비록 여러 신하들은 추장(追奬)하여 정표(旌表)와 증직(贈職)한 것이 혁연(赫然)할지라도 한 생각의 사이에 왜곡되게 혐의(嫌疑)하시는 뜻이 없지 아니하여, 마침내 이륜(彝倫)이 무너져 끊어지고 시비(是非)가 거꾸로 뒤집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호리(毫釐)의 차이가 천리(千里)나 어긋나게 된다.’는 것이 어찌 헛된 말이겠습니까?
신이 어제 이광좌(李光佐)의 자송(自訟)254)  하는 상소를 보았는데, ‘대처분(大處分)이 한번 흔들리게 되면 이륜(彛倫)이 무너져서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저 이광좌는 어찌 지난번에 이른바 ‘사총(四聰)을 가리고 국병(國柄)을 제멋대로 부리던 자’가 아니겠습니까? 대리(代理)의 의논을 그는 스스로 저지하여 막았다고 일컬으면서도 도리어 연차(聯箚)는 이륜에 관계된 것으로 돌렸습니다. 대저 연차란 것은 곧 대리(代理)의 절목(節目)에 관한 차자(箚子)이니, ‘이륜’이란 두 글자를 어찌 감히 이 일에 쓰며, 이에 차마 입에서 꺼내어 방자하게 전하 앞에서 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 지적하는 뜻의 소재(所在)가 역적 김일경의 상소에 있는 삼강 오륜(三綱五倫)이란 말과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양시(李亮臣)의 상소는 거개 모두 일을 지적하고 사실에 의거한 것으로 변명해 밝힐 말이 없었으므로, 고심(苦心)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해명하는 자료로 삼았던 것인데, 전하의 일월(日月)같은 밝으심으로 어찌 통촉(洞燭)하지 못하십니까?
아! 지난 봄의 역란(逆亂)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전하께서는 언제나 그것이 붕당(朋黨)에서 나왔다고 하시면서, 오로지 구유(呴嚅)하여 광탕(曠蕩)하시고, 고식(姑息)의 은혜로 효경(梟獍)의 심장(心臟)을 감화시키려고 하십니다. 이천해(李天海)와 같이 지극히 흉악한 경우에 이르러서는 만약 그때 명백하게 끝까지 힐문(詰問)하고 사주(使嗾)한 자를 뿌리까지 캐들어갔더라면, 오늘날 유익(維翼)255)  의 흉역(凶逆)이 어찌 이처럼 낭자했겠습니까? 원구(元舅)256)  의 소맷속 차자(箚子)와 원로(元老)의 마음을 드러낸 말은 실로 고침(苦忱)·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이나,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또 조용히 깊이 생각하시면서 ‘이미 흉악하고 추악한 무리로 하여금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고치게 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정미년257)   10월의 처분(處分)에서 흉역(凶逆)의 마음에 굽혀 부응한 것이 지극하고도 극진하였으나, 그래도 환란(患亂)을 방지하고 소멸시키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작년 3월 이후로 전하께서는 황연(恍然)하게 깨달으시어 무릇 간범(干犯)함이 있으면 한결같이 전법(典法)으로 종사(從事)하심이 또한 마땅했음에도 여전히 도철(塗轍)을 따르시어 징비(懲毖)할 것을 생각하시지 아니한 채 예전의 악(惡)이나 새로 범한 것이나 일체 관대히 용서하셨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옥사(獄事)를 감단(勘斷)하는 대신(大臣)이 용납·비호하는 논의에 우물쭈물하면서 견제되어 법에 있어서 응당 나문(拿問)을 청해야 할 것인데도 처음부터 나문을 청하지 아니한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마땅히 작처(酌處)해서는 안될 것인데도 경솔하게 앞질러 작처한 경우가 매우 많기도 하였으므로, 아주 중대한 대옥(大獄)을 구차하게 마무리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리(事理)가 그럴 듯하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어찌하여 그리도 지나치게 용서해 주었는지요? 동종(同宗)의 친혐(親嫌)은 더욱 법의(法意)에 있어서 감히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몸이 정석(鼎席)258)  에 있어 군부(君父)를 위해 난역(亂逆)을 토죄(討罪)하면서도 이에 능히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함이 이와 같았으니, 전하께서는 장차 저 정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 당시 금오(金吾)259)  의 장관(長官)이 일찍이 역적 정해(鄭楷)를 방질(放秩)260)  에 둔 것은 그 죄가 이미 큰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옥사(獄事)를 담당하게 되자 또 다시 한결같이 기대고 의지하면서 다만 흉당(凶黨)에게 거스릴까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니, 안옥(按獄)하고 토역(討逆)하는 의리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입니까?
오광운(吳光運)은 간사한 자들의 나머지로 감히 ‘깊이 근심하고 먼 장래를 염려한다.’는 말로 전하를 공동(恐動)시켰는데, 그가 조용(調用)하기를 청한 고폐(痼廢)된 집이란 경신년261)  의 흉얼(凶孽)이 아니면 곧 기사년262)  의 역종(逆種)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는 중죄(重罪)에 두지 않으시고 또 뒤따라 총애하여 상을 내리셨으니, 어찌 민관효(閔寬孝)의 역정(逆情)을 알고 상변(上變)한 뒤에 발설(發說)한 것이 진실로 족히 공(功)으로 여길 만하다고 하겠습니까? 이재(李栽)는 곧 이현일(李玄逸)의 아들입니다. 이현일은 말이 성모(聖母)를 무핍(誣逼)하였으니, 죄악이 지극히 무거웠습니다. 지난번에 천거하고 발탁한 것만 해도 이미 매우 무엄하였는데, 이번에 오광운은 또 천염(薦剡)263)  의 첫머리에 두었습니다.
박장윤(朴長潤)의 부범(負犯)은 관계됨이 어떠합니까? 그런데도 후사(喉司)264)  의 신하가 감히 귀근(歸覲)시키자는 청(請)을 진달하여 반드시 윤허를 얻어내고야 말았습니다. 작년의 변무 사신(卞誣使臣)이 연산(燕山)에 뼈를 묻는 일은 이 무리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지마는, 끝내 한 차례로 글을 올려 임금의 무욕(誣辱)을 변명하지 아니한 채 그들의 업신여기는 글을 받고 그리고는 상(賞)을 받아 잔치에 나아갔다가 돌아왔으니, 신하의 절조(節操)가 땅을 쓴 듯 없어졌는데도, 대각(臺閣)의 신하는 책임이나 때우려는 계사(啓辭)조차 갑자기 정지했으니, 통분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정필(李廷弼)은 고을을 버리고 도망해 숨었으니, 죄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않는 벌을 어찌 이러한 부범(負犯)에 베풀 수 있겠습니까? 권익관(權益寬)의 역절(逆節)은 환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데도, 윤득화의 상소가 나온 후에 심공(沈珙)과 같은 자는 이에 감히 ‘역적(逆賊)이니 역적이 아니니 방송(放送)할 것인가 방송하지 않을 것인가?’ 하며 다만 척오(尺五)265)  의 하늘을 취하여 재량(裁量)하였습니다. 아! 군부(君父)가 역수(逆竪)의 죄를 직접 신문하시는데 자신이 옥관(獄官)이 되어 한결같이 가리고 비호하다가, 사람들의 말이 있게 되면 ‘이것은 군상(君上)의 일이니 내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니, 이것이 어찌 인신(人臣)의 도리이겠습니까?
전하께서 ‘탕평(蕩平)’이란 두 글자로 보합(保合)·조화(調和)시키려고 하시자, 한쪽편 사람들 중에서 스스로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나와서 봉승(奉承)하며, 무릇 전하의 조정에 선 자들은 소리를 따라 ‘탕평(蕩平)! 탕평(蕩平)!’하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아! 오늘날 이른바 탕평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진실로 지키는 바의 의리(義理)를 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성심(聖心)이 당(黨)을 소멸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므로, 이 말을 한 것인데도 영합되기를 바라고 은총을 굳히는 계책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역적은 곧 신축년·임인년의 역적인데도 오늘날에 대해서는 조절(操切)하기를 엄격하게 하려고 하면서도 신축년·임인년의 여러 역적들에 대해서는 도리어 느슨하게 하여 위복(威福)을 제멋대로 부리게 합니다. 이진유(李眞儒)의 죄를 결단하면서도 이진유의 때를 당하여 권세(權勢)와 명위(名位)가 이진유와 비교될 정도뿐만이 아니었던 자를 이에 도리어 영수(領袖)로 추대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합니다. 그 말을 들어보면 공정(公正)한 데 가까운 듯하고, 그 자취를 살펴본다면 중도(中道)에 합치되는 듯하니, 무릇 성심(聖心)을 어지럽히고 천총(天聰)을 미혹시키는 것으로서 이것보다 큰 것은 있지 않았습니다. 아! ‘건중(建中)266)  이란 두 글자가 어찌 왕정(王政)에 마땅히 먼저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만, 당(唐)·송(宋)의 복철(覆轍)267)  이 환히 보일 뿐만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남(嶺南)은 명현(名賢)이 쏟아져 나왔고 유풍(遺風)이 민멸(泯滅)되지 아니하였는데, 정희량(鄭希亮)·이웅보(李熊輔)와 같은 여러 역적들이 불행하게도 그 땅에서 나왔으니, 놀라 통탄하고 분하여 미워함이 반드시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적초(賊招)에 나온 사람들은 일체 신문하지 않으시니, 마땅히 한번 탐구 분석하시어 토죄(討罪)할 만한 자는 토죄하고 용서할 만한 자는 용서해야 할 것인데, 어찌 고식적(姑息的)으로 가리고 덮으려는 뜻으로 마치 반측자(反側者)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하여 영남 사람을 부끄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작년의 역적들의 수로(水路)와 육로(陸路)에서 한꺼번에 진공(進攻)하려는 계책은 사람들의 뼛속까지 떨리게 만들었으니, 마땅히 바닷가의 방수(防守)를 신칙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망명(亡命)한 여러 역적들이 또한 섬 가운데 흩어져 숨어 있을 염려가 있으니, 마땅히 거듭 엄하게 근포(跟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옥사(獄事)를 감단(勘斷)한 대신(大臣)은 곧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고, 금오(金吾)의 장관(長官)은 곧 김흥경(金興慶)이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금 오원(吳瑗)의 소본(疏本)을 살펴보니, 면계(勉戒)한 말에는 마땅히 유의(留意)해야 하겠지만 한 편(篇)의 정신은 수상(首相)에 대해 허구날조하고 진신(搢紳)을 경알(傾軋)시키려는 것이었다. 또 조정에 있는 대신(大臣)을 침척(侵斥)하고 탕평(蕩平)을 주장하는 신하들을 비난·배척하여 인주(人主)의 눈을 어지럽혔으니, 그 마음의 소재(所在)는 반드시 뜻을 같이하는 자를 모두 나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아! 오원이 어찌 다른 세록지신(世祿之臣)에게 비교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종국(宗國)이 붕당(朋黨) 때문에 거의 망해가는 때에 달갑게 여기기를 이와 같이 하니, 나의 통탄스러움과 놀라움은 다른 사람에게 견줄 바 아니다. 삭직(削職)하라."
하였다. 오원은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아들이다.
사신은 말한다. "오원은 당저(當宁)268)  의 지친(至親)으로서 처음 대지(臺地)에 들어와 시사(時事)를 극론(極論)하였는데, 상세한 수천 마디의 말이 아주 적절하고도 명백하였다. 그가 상궁(上躬)의 궐실처(闕失處)를 말한 것은 더욱 절실하고 적확(的確)하였으니,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바를 말했다고 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21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114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변란(變亂) / 역사-사학(史學)


[註 244] 추심치복(推心寘腹) : 다른 사람을 성심(誠心)으로써 대우함.[註 245] 종핵(綜核) : 치밀하게 속속들이 뒤지어 밝힘.[註 246] 번신(藩臣) : 지방의 감사.[註 247] 윤발(綸綍) : 임금의 말씀.[註 248] 표리(表裏) : 옷의 겉감과 안찝.[註 249]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250]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251]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252]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253] 간과(干戈) : 전쟁.[註 254] 자송(自訟) : 자책(自責).[註 255] 유익(維翼) : 심유현(沈維賢)·이유익(李有翼).[註 256] 원구(元舅) : 민진원(閔鎭遠).[註 257] 정미년 : 1727 영조 3년.[註 258] 정석(鼎席) : 정승의 자리.[註 259] 금오(金吾) : 의금부.[註 260] 방질(放秩) : 방면(放免)할 죄수를 기록한 것.[註 261] 경신년 : 1680 숙종 6년.[註 262]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263] 천염(薦剡) : 추천.[註 264] 후사(喉司) : 승정원.[註 265] 척오(尺五) : 가까운 거리를 비유함.[註 266] 건중(建中) : 중도를 세움.[註 267] 복철(覆轍) : 실패한 자취의 비유.[註 268] 당저(當宁) : 현재의 임금.
사신은 말한다. "오원은 당저(當宁)268)  의 지친(至親)으로서 처음 대지(臺地)에 들어와 시사(時事)를 극론(極論)하였는데, 상세한 수천 마디의 말이 아주 적절하고도 명백하였다. 그가 상궁(上躬)의 궐실처(闕失處)를 말한 것은 더욱 절실하고 적확(的確)하였으니,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바를 말했다고 할 만하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덕(李匡德)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양신이 상소하여 신의 몸을 논죄(論罪)했는데, 끝내 없어서는 안 될 말입니다. 하지만 혹시 만약 소란스러움을 듣고서도 고발(告發)하지 않았다는 것을 죄로 삼는다고 한다면 작년의 소란스러움은 온 나라에서 듣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어찌 유독 어사(御史)만 문제삼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혹시 어사가 만약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지방 사람의 사민(士民)으로부터 알게 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인데, 사민(士民)들이 알지 못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어사가 어디로부터 알 수가 있겠습니까? 사민(士民)으로부터 알게 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인데, 사민(士民)들이 알지 못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어사가 어디로부터 알 수가 있겠습니까? 사민(士民)들이 만약 알고서 말했다면 마땅히 김중만(金重萬)보다 앞서 고변(告變)한 자가 있었을 터이고,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면 삼남(三南)의 사민(士民)들이 모두 마땅히 실정(實情)을 알고서도 고하지 않은 형률(刑律)을 먼저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구차스런 논의로서 사사로이 신을 비호하는 말입니다. 반드시 이양신의 말처럼 된 후에야 바야흐로 뒤에 와서 봉명(奉命)하는 자들이 어두워 살피지 못하는 도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을 죄준다면 신에게 있어서 억울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알(傾軋)하는 말에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청(庭請)하여 세 차례 아뢰고 승정원(承政院)에서 한 차례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三司)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응교(應敎) 신치운(申致雲)·장령(掌令) 윤취리(尹就履)·헌납(獻納) 유엄(柳儼)·부수찬(副修撰) 윤광익(尹光益)·정언(正言) 조상행(趙尙行)이다.】 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번갈아 나아가 힘써 진달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윤취리(尹就履)가 전일의 계사(啓辭)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正言) 조상행(趙尙行)이 전일의 계사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가 또 아뢰기를,
"장령 윤취리는 늙고 병든데다 정신이 혼미하여 일에 실수가 많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헌납(獻納) 유엄(柳儼)이 또 아뢰기를,
"이처럼 대론(大論)이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는 때를 당하여 삼사(三司)의 관원을 갖추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외방(外方)에 있는 삼사(三司)의 관원을 모두 체차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도헌(都憲)269)  은 체직(遞職)을 허락한다. 그 외에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고, 이어 서울에 있으면서 참여하지 아니했던 사람들을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또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혜교(尹惠敎)를 파직하라 명하였으니, 윤취리를 대직(臺職)에 의망(擬望)했기 때문이었다. 신치운(申致雲)과 유엄이 모두 그 벌이 너무 지나침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윤취리뿐만이 아니라, 이흡(李潝)은 반드시 행공(行公)하지 않을 것인데도 대론(大論)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날에 또한 대직(臺職)에 의망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유엄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실언(失言)을 면하지 못하십니다. 전하께서 이흡이 행공하지 않을 줄을 만약 확실하게 아셨다면 애초에 어찌하여 낙점(落點)하셨습니까? 이는 성실한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과연 실언(失言)하였다."
하였다.

 

3월 20일 갑자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參判)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오원(吳瑗)의 상소를 얻어 보았는데, 그가 논한 영남(嶺南) 사람 이재(李栽)의 일에 대해 신은 지극히 두려워 떨림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지난 봄에 봉명(奉命)하여 남쪽으로 내려갈 때 오로지 탕척(蕩滌)하고 견발(甄拔)270)  하여 인심(人心)을 수습하는 것을 급무(急務)로 생각했기에 그 선조(先祖)의 죄과(罪過)에 대해서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또 오원의 말은 비록 오광운(吳光運)과는 빙탄(氷炭)의 관계에 있지만, 그가 탕평(蕩平)을 배척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난 배척하는 말에 대해 내가 이미 개석(開釋)하였다. 오늘날 이것을 버리고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채팽윤(蔡彭胤)이 박장윤(朴長潤)의 일 때문에 상소하여 인혐(引嫌)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송인명(宋寅明)이 오원의 상소 때문에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오광운과 오원의 상소는 색목(色目)은 다르지마는 내용은 같았으니, 신은 스스로 벗어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설령 오원의 말과 같다 하더라도 군상(君上)의 아름다운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군상을 잊고 당(黨)을 위해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박사수(朴師洙)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3월 20일 갑자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와 헌납(獻納) 유엄(柳儼)이 차자(箚子)로써 이탄(李坦)을 안법(按法)할 것을 청하고, 홍문관(弘文館)에서도 역시 차자로써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正言) 조상행(趙尙行)이 상소하여 ‘정유(庭籲)271)  가 바야흐로 한창 일어나고 있는 날에 심공(沈珙)이 체직(遞職)된 뒤 무단히 지레 강교(江郊)로 돌아가서 정반(庭班)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파직할 것을 청하다.

 

주강(晝講)을 행하여 열명(說命)272)  을 강(講)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윤광익(尹光益)이 말하기를,
"고종(高宗)273)  이 처음 생장(生長)할 때 소을(小乙)274)  이 그에게 백성의 질고(疾苦)를 알게 하려고 밖에 두었기에 그가 고생과 어려움을 겪고 나서 백성의 질고를 알게 되었으니, 곧 학문이 되는 까닭입니다. 전하께서도 역시 사저(私邸)에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받드셨기에 민간(民間)의 이병(利病)과 정위(情僞)를 상세히 알지 못함이 없으시니, 오늘날 정사(政事)를 행하고 일을 정함에 있어서 힘을 얻기에 정말 좋은 것입니다. 고종(高宗)의 이 일을 종이 위의 말로 만들지 마시고, 특별히 체인(體認)을 가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참으로 좋다."
하였다. 무신(武臣) 조경(趙儆)이 전라 병영(全羅兵營) 근처의 강진(康津)·장흥(長興)·보성(寶城)·해남(海南)·영암(靈巖)·나주(羅州)·남평(南平)·능주(綾州) 여덟 고을의 보인(保人) 중에서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보인(保人)과 병조(兵曹)의 기병(騎兵)·보병(步兵)은 제외하고 각 가문(衙門)의 보인을 모두 본영(本營)의 먼 고을의 보인으로 서로 교환하여 대오(隊伍)를 만들 것을 청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조경이 또 ‘양남(兩南)에도 마땅히 서북(西北)의 감영(監營)·병영(兵營)의 예(例)에 의거해 친기위(親騎衛)를 선발해 두고 마대(馬隊)로 만들며,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격려하고 권장할 것’을 청하니, 역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오원(吳瑗)이 상소하여 배척한 것 때문에 도성(都城) 밖으로 나가니, 별유(別諭)를 내리고 사관(史官)에게 명해 유지(諭旨)를 전한 뒤 같이 오게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박태용(朴泰容) 등이 상소하여 전일에 청했던 것을 거듭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1일 을축

예조(禮曹)에서 동궁(東宮)의 월령(月令) 및 삼명일(三名日)의 진상(進上)에 대해 계품(啓稟)하니, 비답하기를,
"3년을 한도로 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동필(金東弼)과 참판(參判) 송인명(宋寅明)의 체직(遞職)을 허락하라고 명하고 송성명(宋成明)을 이조 참판으로,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정청(庭請)에서 세 차례, 승정원(承政院)에서 한 차례 아뢰고, 여성군(礪城君) 이집(李㙫)이 여러 종반(宗班)을 거느리고 재차 아뢰었으며, 사간원(司諫院)과 옥당(玉堂)에서 또한 차자(箚子)로써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종신(宗臣)을 보내어 대원군(大院君)의 화상(畫像)을 간심(看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고성(固城)에 있다.】


【태백산사고본】 17책 21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116면
【분류】왕실-국왕(國王)


 

 

 

3월 22일 병인

이집(李㙫)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한이조(韓頤朝)와 서종옥(徐宗玉)을 승지(承旨)로, 김동필(金東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송인명(宋寅明)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현명(趙顯命)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병태(李秉泰)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임수적(任守迪)을 집의(執義)로, 심성희(沈聖希)와 조상명(趙尙命)을 지평(持平)으로, 김광운(金光運)과 박내우(朴來羽)을 장령(掌令)으로, 유운(柳運)과 윤종하(尹宗夏)를 정언(正言)으로, 이진순(李眞淳)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부교리로, 심태현(沈泰賢)을 수찬으로, 한현모(韓顯謨)와 이현모(李顯謨)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정수기(鄭壽期)를 대사성(大司成)으로, 김집(金㙫)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과 사간원(司諫院)·옥당(玉堂)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헌납(獻納) 유엄(柳儼)·응교(應敎) 신치운(申致雲)·수찬(修撰) 윤광익(尹光益)이다.】 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이탄(李坦)을 정법(正法)할 것을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호군(護軍) 이숙(李潚)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비록 즉시 신원(伸冤)하기는 하였으나, 일찍이 군신(群臣)의 주청(朱請)을 따르지 않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하니,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였다. 좌승지(左承旨) 조석명(趙錫命)이 말하기를,
"이숙이 망발(妄發)하였으니, 청컨대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적진(賊陣) 가운데서 ‘이때는 비록 이 사람을 추대(推戴)하는 이름으로 삼지만 서울에 올라간 뒤에는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는가?’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하니, 이태좌가 말하기를,
"이유익(李有翼)의 초사(招辭)에 ‘적장(嫡長)’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사직(司直)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그가 알았고 몰랐고는 국문(鞫問)한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대(推戴)란 것이 무망(誣罔)한 것이었다면 옛날에도 또한 살아난 자가 있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은 처음에 듣고 믿지 않았습니다만, 조덕정(趙德鼎)과 이하(李河)가 나오게 되자 비로소 그가 벗어날 수 없음을 믿었습니다."
하고, 이태좌가 말하기를,
"백일지하(白日之下)에 격문(檄文)을 사도(四道)로 전했으니, 이 한 가지 일이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성(同姓)의 친족은 나에게 있어서 본디 멀고 가까움이 있지만 조종(祖宗)의 처지에서 본다면 모두 혈속(血屬)이다. 그러나 죄상이 명백하다면 비록 지친(至親)이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다. 조덕정(趙德鼎)이 밀풍(密豐)을 찾아가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한 가지 일은 신문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나의 생각으로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문하지 않았던 것이었으니, 만약 ‘응당 죽을 사람이기에 신문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신문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잘못이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느냐?’고 한 말은 허황하지 않은 듯하다. 심유현(沈維賢)·이유익·박필몽(朴弼夢)은 역적 이인좌(李麟佐)의 무리를 와주(窩主)275)  로 삼아 서로 표리(表裏)가 되었는데, 심유현·이유익·박필몽은 흉악하고 교활함이 넉넉하였으니, 끝에 가서 역적 이인좌의 무리를 따라서 반복(反覆)할 계책이 있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오늘의 이야기가 가면 갈수록 지리해져 과연 무신(武臣)의 망발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하였다. 이태좌가 말하기를,
"동지사(冬至使)의 별단(別單) 가운데 ‘은(銀) 1만 냥을 내보내어 전사(戰士)들에게 상(賞)을 더 주게 한다.’고 하셨는데, 저들이 작년 은채(銀債)의 일로 외국(外國)을 의심하여 ‘은을 아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히 은을 아끼지 않는 뜻을 보이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꾸짖고 욕한 일에는 나는 관심이 없었다. 존주 대의(尊周大義)를 채 펴기 전인데, 그 욕설을 어찌 더불어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태좌가 말하기를,
"외부(外部)의 의논은 ‘그 은(銀)을 상(賞)주는 일에 쓴다면 자못 굶주린 수치를 받게 될 것이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굶주린 수치를 받게 될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은 말하기를,
"의주(義州)에 머물러 두어서 저 사람들을 접대할 때 쓴다면 좋겠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시환(金始煥)은 말하기를,
"사대(事大)에는 속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의 동정(動靜)을 저들이 알지 못함이 없으니, 변방에 둘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은(銀)은 공가(公家)에는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의주(義州)에 두어 저들을 접대하는 비용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너의 물건으로써 너를 접대한다.’는 격이니, 일이 야속(野俗)한 데 가까우며 왕자(王者)가 다른 사람을 접대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니, 이태좌가 말하기를,
"마땅히 영상(領相)과 좌상(左相)에게 물어 다시 품(稟)하겠습니다."
하였다. 이태좌가 군공(軍功)의 별록(別錄)에 관한 일을 진달하기를,
"오명항(吳命恒)이 기록한 바는 너무 적으니, 조현명(趙顯命)으로 하여금 김흡(金潝)·이수량(李遂良)과 서로 의논하여 누구는 변장(邊將)에 적합하고 누구는 어떤 직임(職任)에 적합하다고 따로 별록(別錄)을 만들게 하여 자리에 따라 수용(收用)하게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헌납(獻納) 유엄(柳儼)은 말하기를,
"지난번에는 이른 아침에 청대(請對)하였으나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허락을 내리셨고, 오늘은 진시(辰時)에 청대하였으나 미시(未時)에 허락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신료(臣僚)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며, 또한 황태(荒怠)의 염려가 없지 아니합니다. 이 뒤로는 이른 아침에 하는 데 뜻을 더 두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동조(東朝)께 문후(問候)하였고, 오늘은 또 날씨가 매우 더우므로 조금 늦은 것이다. 갑진년276)   겨울에 무망각(無妄閣)에서 인견(引見)했을 때 이명언(李明彦)이 이른 아침에 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진달하였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는데, 간신(諫臣)의 말이 또 이와 같으니,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이진(權以鎭)을 앞으로 나오라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작년 변란(變亂) 때 대신(大臣)을 보내어 선유(宣諭)하고 공미(貢米)를 나누어 주게 하였는데, 지금 고집하면서 주지 않으니, 백성들이 반드시 ‘위급할 때는 애휼(愛恤)하더니 이미 안정된 뒤에는 버리고 애휼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하니, 권이진이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비록 도민(都民)을 염려하시지만 도민은 요역(徭役) 없이 놀고 먹으니, 시골 백성들이 불쌍합니다."
하였다. 이춘제가 전일의 계사(啓辭)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엄이 또 아뢰기를,
"이숙(李潚)이 감히 신원(伸冤) 등의 말을 진달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본디 고의성이 없고 망발(妄發)한 것이다. 그러나 대간(臺諫)의 체모는 옳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종신(宗臣)이 재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전(前) 판의금(判義禁) 김흥경(金興慶)과 전 참판(參判) 심공(沈珙)을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송요경(宋堯卿)·김인경(金麟慶)·유두기(兪斗基)를 종신(終身)토록 금고(禁錮)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이의록(李宜祿)과 정택하(鄭宅河)를 장오(贓汚)로 종신토록 금고하라고 명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송요경 등이 또 장오로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에 들었으므로 이의록 등의 예(例)에 의거하여 금고하라고 명한 것이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오원(吳瑗)이 상소하여 탕평(蕩平)에 대해 성죄(聲罪)하기를, ‘성심(聖心)을 어지럽히고 천청(天聽)을 미혹시킨다.’ 하였는데, 그가 말한 것이 어찌 그렇게도 오광운(吳光運)과 비슷합니까? 지금 사람들은 각자가 의리(義理)를 꾸며대며 ‘충신(忠臣)’이니 ‘역적(逆賊)’이니 하나, 신이 보기에는 참으로 이른바 ‘제(齊)나라·초(楚)나라가 모두 잘못한 것이며, 《춘추(春秋)》에 의로운 전쟁이 없다.’는 격입니다. 아! 당인(黨人)에게 순전히 옳은 것도 순전히 그른 것도 없게 된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국외(局外)의 공정한 눈으로 처리하는 바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저 굳게 정하고 억지로 고집하며 겨루어 이기기에 힘쓰는 자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고집하는 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연중(筵中)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3월 23일 정묘

정청(庭請)하여 세 번 아뢰고, 종신(宗臣)이 세 번 아뢰고, 삼사(三司) 【대사헌(大司憲) 송인명(宋寅明), 집의(執義) 임수적(任守迪),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 응교(應敎) 신치운(申致雲), 지평(持平) 조상명(趙尙命), 헌납(獻納) 유엄(柳儼), 부교리(副校理) 김상성(金尙星), 정언(正言) 유운(柳運)·윤종하(尹宗夏), 수찬(修撰) 윤광익(尹光益), 부수찬(副修撰) 이현모(李顯謨)이다.】 에서 복합(伏閤)하여 네 번 아뢰고 승정원(承政院)에서 한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안상철(安相喆) 등이 또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또한 따르지 않았다.
3월 24일 무진

정청(庭請)하여 재차 아뢰고 종신(宗臣)이 재차 아뢰고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네 번 아뢰고, 승정원(承政院)에서 한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오원(吳瑗)이 상소하여, 신이 남의 권유를 받아 고의적으로 옥정(獄情)을 느슨하게 했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기는 하지만 차마 이런 것이야 했겠습니까?"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개석(開釋)하였다.
국청 죄인(鞫廳罪人) 홍계일(洪啓一)을 배소(配所)로 도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세 차례 형신(刑訊)했지만 단서(端緖)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3월 25일 기사

심공(沈珙)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승지(承旨)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校理)로, 이진순(李眞淳)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정청(庭請)하였다. 처음의 아룀에 대해 답하기를,
"마음에 정한 바가 있어 결코 윤종(允從)하기 어려우나 상하(上下)가 서로 버티고 있으므로 국사(國事)가 끝이 없으니, 마지못해서 특별히 윤허한다. 그러나 한순간의 청(請)을 아껴 대신(大臣)이 들어와 인원을 갖추기를 기다려서 상확(商確)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대신(大臣)을 기다리라는 하교를 신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족(公族)에게 법(法)을 시행할 때는 마땅히 신중하게 살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태좌가 율명(律名)을 분명하게 보여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진(自盡)하는 것 외에는 다른 율(律)이 없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송인명(宋寅明), 대사간(大司諫) 이진순(李眞淳), 집의(執義) 임수적(任守迪),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 지평(持平) 조상명(趙尙命), 헌납(獻納) 유엄(柳儼), 교리(校理) 김상성(金尙星), 조적명(趙迪命), 정언(正言) 윤종하(尹宗夏)·유운(柳運), 수찬(修撰) 윤광익(尹光益), 부수찬(副修撰) 이현모(李顯謨)가 합계(合啓)하여 역적의 괴수 이탄(李坦)을 다시 극률(極律)로 감처(勘處)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극률을 쓸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고, 하교하기를,
"경(卿) 등은 시험삼아 생각해 보라. 지난번의 역변(逆變)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던가? 당습(黨習)의 해(害)가 아님이 없었다. 신축년277)  ·임인년278)   무렵의 일을 차마 제기해 말할 수 없다만, 서덕수(徐德修)의 흉초(凶招)에서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청천백일(靑天白日)’이란 말이 나왔으므로, 마음속에 통한(痛恨)해 하던 것이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았는데, 역적 김일경의 여당(餘黨)을 그래도 또 믿어 쓰며 의심하지 않았기에 작년의 변란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무리들은 따로 일종의 의논을 만들어 그들의 흉역(凶逆)을 정도(正道)로 여겼기 때문에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을 부지(扶持)한다.’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조덕정(趙德鼎)이 중간에 있었던 것을 내가 실로 이상하게 생각했고 이탄(李坦)이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과연 알 수가 없으나 제일의(第一義)로 책망한다면 죽어도 또한 원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태좌가 말하기를,
"그가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으로서 왕으로 추대(推戴)한다는 말을 들었으면 마땅히 급급하게 와서 고(告)해야 할 것인데, 잠자코 답하지 않았으니, 이 한 가지 일은 실로 만번 주륙(誅戮)하기에 합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은 다만 그 자취만 볼 뿐이지만, 나는 정상을 참작해 용서한다. 만약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함을 명백히 알고서도 다만 그 자취만을 보아 억지로 법을 집행한다면 이를 사책(史冊)에 썼을 때 후세(後世)에서 나를 어떠한 군주(君主)라 하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번의 윤허를 내가 어찌 즐거운 마음으로 하겠는가? 지난해 여름 가벼운 칼[枷]을 씌우라는 하교를 내렸다. 그때 내가 이곳에서 옷을 입은 채 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 사람을 보니 평일의 얼굴과 같았다. 그래서 노고(勞苦)를 위로하는 즈음에 목메어 울다가 깨어났었다."
하였다. 이에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청(請)이 이와 같으니, 대신(大臣)을 기다리라는 하교는 정지한다. 그러나 비록 일률(一律)을 쓴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상례(常例)로 볼 수야 있겠는가?"
하고, 특별히 명하여 자진(自盡)하게 하라고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이 전일의 계사(啓辭)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호남 백(湖南伯)279)  의 사장(査狀) 가운데 전전(前前) 감사(監司)가 범한 장오(贓汚)가 낭자(狼藉)하니, 청컨대 똑같이 형률(刑律)을 상고해 감처(勘處)하게 하소서."
하니, 이뢴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법(贓法)을 거듭 엄하게 하는 것이 단지 정미년280)   이후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에만 미치고, 정미년 이전에는 미치지 않으니, 청컨대 왕부(王府)281)  에 명하여 다시 제도(諸道)의 서계(書啓)를 가져다가 엄하게 고핵(考覈)을 가하여 똑같이 감률(勘律)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권익관(權益寬)의 죄명(罪名)은 결코 좋은 곳에다 박벌(薄罰)로 찬배(竄配)하여 책임을 때울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이진순(李眞淳)이 전일의 계사(啓辭)를 전하고 또 아뢰기를,
"청컨대 홍계일(洪啓一)을 배소(配所)로 도로 보내라는 명(命)을 환수(還收)하시고, 그대로 엄하게 국문(鞫問)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춘제(李春躋)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신이 홍상용(洪尙容)을 삭탈(削奪)하는 일을 발론(發論)하자 동료들의 의논이 모두 같아 이론(異論)이 없었는데, 입시(入侍)한 장료(長僚)는 발계(發啓)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언의(言議)가 경시(輕視)되었으니, 청컨대 체척(遞斥)하소서."
하자, 유운(柳運)과 서종하(徐宗夏)도 또한 인피(引避)하였다. 이진순이 아뢰기를,
"홍상용에 대한 계사(啓辭)를 신은 불가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 계사(啓辭)가 너무 많았기에, ‘내일 서로 의논하자.’고 했더니, 동료 대관(臺官)이 굳게 고집하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작스럽게 인피하니, 신이 어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체척(遞斥)하소서."
하니, 모두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송인명이 논하고자 하는 것에 고집하는 바가 있다는 이유로 이춘제와 유엄·서종하를 출사(出仕)시키고, 대체(臺體)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이진순을 체차(遞差)시킬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영남 어사(嶺南御史) 이종성(李宗城)과 호서 어사(湖西御史) 이도겸(李道謙)·김시형(金始炯)의 서계(書啓) 가운데 든 불법(不法)한 수령(守令)으로서 고신(告身)을 빼앗는 것 이상으로 조율(照律)한 자는 일체로 금고(禁錮)하라고 명하였다.


 

 

 

주서(注書) 이수해(李壽海)를 강진현(康津縣)에 찬배(竄配)하였다. 이수해가 상소하기를,
"신은 지난해 역사를 교정하는 직임에 있었는데, 마침 조정이 뒤바뀌는 때를 만나 총재 대신(摠裁大臣) 이하의 관원이 모두 견출(譴黜)을 당하여 온 실록청(實錄廳)이 거의 텅 비게 되었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선조(先祖)의 실록은 지극히 엄하고 중대한 것이니, 겨우 끝난 찬수(纂修)와 절반이나 이루어진 인역(印役)을 전적으로 한쪽편 사람들의 농락하는 손에 맡겨둘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에 새 당상(堂上)이 인역(印役)을 속개(續開)한 날에 신은 과연 옛 동료들을 책면(責勉)하여 매일같이 다시 출사(出仕)케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히 중간에 사기(事機)가 갑자기 변하여 반드시 이를 괴란(壞亂)시키려고 하는 총재(摠裁)가 졸지에 들어가니, 한결같이 약속을 지키던 당상(堂上)이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의(異議)가 드디어 시끄럽게 일어났으나, 옛날의 여러 낭청(郞廳)들은 이미 옥(獄)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뒤덮는 한 개의 그물이 사국(史局)에 높이 펼쳐지매, 권흉(權凶)에게 굽히려 하지 않는 자는 아주 먼 변방에 찬축(竄逐)되었고, 조금이라도 말이 사국(史局)의 일에 미치는 자는 절도(絶島)에 투배(投配)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새로 들어온 낭청(郞廳)이 있어 온 사국(史局)을 속여 몰래 인판(印板)을 뽑아냈는데, 신이 교열(校閱)할 즈음에 우연히 깨닫고는 ‘저들이 제멋대로 이미 인쇄한 판(板)을 뽑아낸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 사책(史冊)을 변란(變亂)시키려는 뜻이다.’라고 생각하여 뜻을 같이하는 여러 동료와 더불어 합사(合辭)로 봉장(封章)해 그 간악함을 적발해 내려 하였으나, 또 일종의 의논이 있어 ‘몰래 뽑아낸 뜻은 반드시 개편(改編)하려는 계책일 것이니, 그들이 개편하여 바치기를 기다려 의리(義理)로 책망하고 등문(登聞)해도 늦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마음속으로 참고 견디면서 시일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형리(刑吏)를 대하는 날에 이르러 공사(供辭) 가운데 대략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은 까닭없이 물리쳐 버린 채 권문(權門)에 잽싸게 보고해 급히 짧은 차자(箚子)를 올려 천노(天怒)282)  를 격발(激發)시키려고 했지만, 성도(聖度)283)  로 포용하시어 즉시 벌(罰)을 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옥(獄)를 겨우 벗어나게 되자 사직(史職)마저 또 삭탈(削奪)되었으니, 신이 비록 말하려고 해도 그 계제(階梯)가 없는데야 어찌하겠습니까? 그들의 배포(排布)한 것이 참으로 지극히 교묘하고 치밀하였던 것이니, 신이 영해(領海)로 귀양가는 것을 면한 것도 대개 또한 이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신이 찬축(竄逐)된 여러 동료들과 동시에 공초(供招)를 바쳤다면, 그 대의(大意)란 요컨대 단지 새 총재(摠裁)와 더불어 당상(堂上)·낭청(郞廳)의 예(禮)를 행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대저 무알(誣訐)이 이루어져 완성된 사책(史冊)을 장차 고치려 하는데, 남아 있던 등록 낭청(謄錄郞廳)이 감히 잠자코 있을 수 없어 신의 미처 등철(登徹)하지 않았던 공초(供招)를 드디어 또한 제기해 말하니,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의 스스로 변명하는 상소에서는 곧 신의 공초가 날이 저물어 자리를 떠나려는 시간에 도착하였기에 잠깐 몇 줄을 보고 즉시 되돌려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전후로 두루 가로막아 기관(機關)284)  을 모두 썼던 것은 인판(印板)을 뽑아낸 사국 낭청(史局郞廳)의 권력(權力)이 두려워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조롱(嘲弄)하고 기망(欺罔)하는 결과에 빠지게 됨을 깨닫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국 낭청의 상소(上疏)는 비록 장황하게 패합(捭闔)285)  하기는 했지만 인판(印板)을 뽑아냈던 실상을 졸지에 완전히 숨기기가 어렵게 되자 공공연히 ‘새로운 예(例)는 어긋난다.’는 등의 말로 이에 감히 비사(祕史)를 고알(告訐)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아! 또한 무엄한 것이었습니다.
사국(史局)의 식례(式例)는 인쇄해야 할 판(板)에 혹은 자구(字句)가 의사(疑似)하여 마땅히 총재(摠裁)의 강질(講質)을 거쳐야만 할 것이 있을 경우, 분판(粉板)을 감히 씻지 못하고 주자(鑄字)를 감히 치워버리지 못한 채 모두 간수해 두고 삼가 기다리는 법이니, 비록 오래되어도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곧 서둘러 분판을 씻고 갑작스레 주자를 치워버렸으니, 어찌 세도(世道)의 큰 변괴(變怪)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등록(謄錄)을 맡은 여러 낭청들을 꾸짖으며 심지어 ‘이 무리들은 일개 서역(書役)을 담당한 관원에 불과하니, 사국(史局)의 이면(裏面)은 감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도청관(都廳官)도 또한 서역을 담당한 관원이니 똑 같은 서역을 담당한 관원인데, 자기는 몰래 사판(史板)을 뽑아내고 남은 도리어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우려 한단 말입니까? 사람의 교만 방자하고 그릇되고 어긋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까? 그러나 같은 말로 공초를 바쳤던 사람들이 모두 먼 변방으로 찬축(竄逐)되었으니, 구차하게 죄를 면한 부끄러움은 신이 스스로 해명(解明)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수해가 감히 지나간 일을 제기하여 제멋대로 꾸짖어 무함(誣陷)하였는데, 한 편(篇)의 정신이 또 수상(首相)에게 있었다. 이처럼 군명(君命)을 업신여기며 당습(黨習)을 즐겨하는 무리는 먼 변방으로 내쫓지 않을 수 없으며, 더불어 나라에 같이 있을 수가 없다."
하고, 이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3월 26일 경오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다섯 차례 아뢰고,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차자(箚子)로 이탄(李坦)을 안율(按律)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적 민백효(閔百孝)의 초사(招辭)는 사수(死囚)가 어지러운 말로 원인(援引)한 것과는 같지 않은데, 나국(拿鞫)한 후에 한결같이 모두 같이 벗어났으므로 물정(物情)이 진실로 대부분 불평(不平)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오상억(吳尙億) 등에 이르러서는 비록 충주(忠州)의 장계(狀啓) 가운데 있는 ‘오가촌(吳家村)에서 불이 일어났다.’는 말로써 살펴보더라도, 그 치밀하게 꾸며 화응(和應)한 자취가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는데, 형신(刑訊)을 시작한 지 오래 되지 아니하여 갑자기 작처(酌處)함이 있었고 대계(臺啓)를 성급하게 정지했으니, 공의(公議)가 더욱 놀라고 있습니다. 청컨대 오상억·오상직(吳尙稷) 등은 다시 엄하게 국문(鞫問)하고 정계(停啓)했던 대관(臺官)은 파직(罷職)하여 서용(叙用)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정계했던 대관은 곧 전(前) 정언(正言) 이귀휴(李龜休)이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권익관(權益寬)을 나국(拿鞫)해야 한다는 계사는 대개 옥체(獄體)를 소중하게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장령(掌令) 홍상용(洪尙容)은 공의(公議)를 생각하지 않고서 제마음대로 형률(刑律)을 고쳤으니, 자취는 구간(苟簡)한 데 관계되고 일은 상시(嘗試)와 같습니다. 청컨대 삭탈 관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3월 27일 신미

이진망(李眞望)을 승지(承旨)로, 조최수(趙最壽)를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이진수(李眞洙)를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이정제(李廷濟)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성덕윤(成德潤)을 부응교(副應敎)로, 채팽윤(蔡彭胤)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삼사(三司) 【대사헌(大司憲) 송인명(宋寅明), 집의(執義) 임수적(任守迪),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 지평(持平) 조상명(趙尙命), 교리(校理) 조적명(趙迪命), 헌납(獻納) 유엄(柳儼), 부교리(副校理) 이현모(李顯謨)·김상성(金尙星), 정언(正言) 유운(柳運)·윤종하(尹宗夏), 수찬(修撰) 윤광익(尹光益)이다.】 에서 복합(伏閤)하여 세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복궁(景福宮)의 바람에 넘어진 나무를 베어 낼 즈음에 수직군(守直軍)이 빙자하여 함부로 베어서 민간(民間)에 팔아먹었습니다. 청컨대 내관(內官)과 위장(衛將)을 나문(拿問)하여 과죄(科罪)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기첩(妓妾)을 데리고 사는 것에 대해 국금(國禁)이 지극히 엄한데, 근래 조신(朝臣)들이 국금을 범하며 데리고 살아 매우 시끄럽습니다. 청컨대 해부(該府)로 하여금 기한을 정하여 돌려보내도록 독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서민(庶民)이 빚을 져도 오히려 갚을 것을 생각하는 법인데, 하물며 나라에서 이미 시전(市廛)에 응당 지불해야 할 물품 값이 있는데도 재정(財政)이 바닥이 났다는 핑계로 즉시 내어 주지 않고 있으니,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킴이 어떠하겠습니까? 청컨대 해조(解曹)로 하여금 낱낱이 내어 주게 하고, 지금부터 응당 지불해야 할 수량을 달을 넘기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숭릉 참봉(崇陵參奉) 이보헌(李普憲)은 명가(名家)의 자제(子弟)로서 몸가짐이 도리에 어긋났습니다.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심성희(沈聖希)가 상소하여 이탄(李坦)의 일은 논핵하고, 또 말하기를,
"권첨(權詹)은 또한 하나의 반신(叛臣)일 뿐입니다. 흉적(凶賊)이 함부로 날뛸 때를 당하여 자신이 도신(道臣)이 되어 부인(符印)이 신변(身邊)에 있었음에도 이미 체직(遞職)되었다고 핑계하면서 발병(發兵)할 뜻이 없어 흉봉(凶鋒)으로 하여금 왕기(王畿)까지 와서 핍박하게 하였으니, 그가 국란(國亂)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앉아서 성패(成敗)를 관망(觀望)한 정상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아동(兒童)·주졸(走卒)286)  도 모두 죽어야 한다고 하는데, 충군(充軍)이란 박벌(薄罰)로 아직까지도 누워 숨을 쉬고 있으니, 신은 빨리 군율(軍律)을 시행하여 뒷사람을 징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권익관(權益寬)의 스스로 변명하는 상소는 곧 이것이 결안(結案)이었는데도 아직도 한 차례의 신문(訊問)하여 사핵(査覈)하는 일을 거치지 아니한 채 역적(逆賊)인 것 같기도 하고 역적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박창제(朴昌悌)는 비록 죽었지마는, 문안(文案)이 아직도 있으니 한 번의 나국(拿鞫)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권익관을 작처(酌處)할 때 옥관(獄官)의 우두머리가 된 자는 일체 전하의 재량에 맡기고 담당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윤득화(尹得和)의 말로써 혐의로 삼는다면, 신구(伸救)하는 것은 진실로 감히 하지 못하겠지만, 쟁집(爭執)하는 것도 또한 혐의가 있다는 것입니까? 겉으로는 공의(公議)를 회피하면서 안으로는 당사(黨私)를 도왔으니, 신은 마땅히 칙려(飭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양신(李亮臣)을 찬축(竄逐)하고 윤득화를 출송(黜送)하며 오원(吳瑗)을 삭직(削職)하시는 것입니까? 충언(忠言)과 당론(讜論)을 앞에서 번갈아 진달하자 투찬(投竄)과 견척(譴斥)이 뒤에 서로 이어졌으니,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입니까? 신은 빨리 마땅히 전에 내리신 명령을 환수(還收)하여 공의(公議)가 민멸(泯滅)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저 세 신하가 권이진(權以鎭)을 논핵한 것이 어떠하였으며, 심공(沈珙)을 논핵한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탄핵하는 글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권이진은 염치도 없이 행공(行公)하였고, 심공은 급작스레 국자감(國子監)287)  의 장관(長官)에 의망(擬望)되었습니다. 권이진은 그의 행한 일을 추적해 보면 취렴(聚斂)하는 신하에 지나지 않고 심공은 그 상소의 말을 보건대 임금을 공경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신은 두 사람을 죄주어 물리치고 또 심공을 검의(檢擬)한 자를 책망해 신하의 절행(節行)을 신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첨은 가율(加律)할 필요가 없다. 권익관은 이미 계제(階梯)가 없어졌으므로 끝까지 신문할 단서도 없다. 판의금(判義禁)의 일은 그대의 말이 지나치다. 이양신·윤득화·오원은 벌이 또한 가벼웠다. 권이진은 비록 고집하는 병(病)이 있기는 하지만, 전후로 번갈아 나와 쫓아내고서야 그만두려 한다. 심공의 상소의 말은 비록 매우 경솔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무슨 심각한 죄이기에 사유(師儒)에 의망(擬望)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러한 곳이 서로 막고 과격하게 구는 곳이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번갈아 진달하며 힘써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같은 인덕(仁德)으로도 후세(後世)의 비평이 있었다.288)   지금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써서 후세에 보인다면,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후세의 시기하는 무리들이 이를 보게 된다면 경계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한(漢)나라·당(唐)나라의 시기하고 의심했던 폐단을 징계하는 것은 옳습니다만, 이 일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빨리 참작하여 처분(處分)을 내려 주소서."
하니, 정언(正言) 유운(柳運)은 말하기를,
"시기하고 의심한다[猜擬]’는 두 글자는 오늘의 일에는 해당되지 아니합니다."
하고,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는 말하기를,
"참작(參酌)하시라는 주청(奏請)은 실언(失言)입니다."
하였다. 헌납(獻納) 유엄(柳儼)은 말하기를,
"기첩(妓妾)의 무리로서 혹은 공로(功勞)가 있어 속량(贖良)한 자를 한결같이 모두 쇄환(刷還)하는 것은 실신(失信)에 가까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수(自首)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는데, 송인명은 말하기를,
"아마도 예(禮)로 부리는 도리에는 적합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사헌부(司憲府)에서 선생(先生)289)  을 높인다고 일컬으면서 비록 이미 체직(遞職)된 관원일지라도 하리(下吏)가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며, 금조(禁條)로 잡혀 온 사람을 억지로 분간(分揀)하게 하여 속전(贖錢)을 덜어주게 하면 하리가 속전을 대신 바칩니다. 청컨대 드러나는 대로 논죄(論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매우 놀라운 일이니, 각별히 엄금(嚴禁)하라."
하였다.

 

3월 28일 임신

죄인 이탄(李坦)290)                  을 자진(自盡)하도록 명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송인명(宋寅明), 집의(執義)        임수적(任守迪), 지평(持平)        조상명(趙尙命), 헌납(獻納)        유엄(柳儼), 정언(正言)        유운(柳運)과 윤종하(尹宗夏)가 아뢰기를,
"역적 이탄(李坦)의 일은 성상께서 이미 일률(一律)을 허락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연교(筵敎)가 측달(惻怛)하시므로 또한 그것이 은혜와 법(法) 사이에 크게 어긋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상께서 결단코 윤허하지 않으실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억지로 율명(律名)을 다투느라 시일(時日)을 질질 끌어 이미 시행했어야 할 법을 즉시 거행하지 못하게 한다면, 종사(宗社)의 하루의 근심이 도리어 여기에 있고 이른바 ‘법(法)으로 다툰다.’는 것이 끝내 참으로 임금을 사랑하고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며 참으로 역적을 토주(討誅)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과 충분히 소상하게 의논한 뒤 오늘에는 예궐(詣闕) 진차(陳箚)하여 성상의 가부(加否)를 기다리는 한편, 대론(大論)을 임시로 정지하여 종사(宗社)의 하루의 근심을 풀고나서 물러나 자핵(自劾)하며 끝내 법을 다투지 못한 죄를 받기를 바라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가 부박(浮薄)한 의논에 이쪽저쪽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이의(異義)를 제기하였습니다. 신 등이 비록 무상(務狀)하지마는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이야 어찌 다른 사람보다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위로는 능히 성주(聖主)의 들으심을 돌이키지 못하고 아래로는 능히 요석(僚席)의 의논을 통일시키지 못하여 필경에는 나랏일을 그르치고 왕법(王法)을 굽히는 결과가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삭파(削罷)를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실수(失手)는 저쪽에 있으니, 나에게 무슨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사직(辭職)하지 말라."
하였다. 사간(司諫)        이춘제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역적 이탄(李坦)이 범(犯)한 것은 어떠한 죄명(罪名)입니까? 나라에 법(法)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법이 있다면 이것에 시행하지 않고 어디에 시행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왕법(王法)을 시행하소서."
하고, 이어 정유(庭籲)할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서울에 있으면서도 나아가 참여하지 아니한 자와 근기(近畿)에 거주하면서도 들어오지 아니한 자를 적발하여 과죄(科罪)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하교(下敎)에 내 뜻을 죄다 말했으니 이처럼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것이 정성스럽다고 하겠는가? 정성스럽지 않다고 해야 하겠는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다만 마땅히 성심으로써 해야 하는 법이다. 그 혹시라도 문구(文具)만 지키고 심복(心腹)을 터놓은 하교를 본받지 않는다면 성심이 아니다. 앞뒤로 이리저리 돌아보고서 반드시 스스로 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성심이 아니니, 이러한 습관을 내가 실로 병통으로 여긴다. 상소의 끝에 말한 일은 지나치다."
하였다. 교리(校理)        조적명(趙迪命)·부교리(副校理)        이현모(李顯謨)·수찬(修撰)        윤광익(尹光益)이 이춘제가 이론을 제기한 것으로 인하여 논의를 정지하고, 인혐(引嫌)하며 앞질러 나갔는데, 대의(大意)는 송인명의 계사(啓辭)와 같았다. 송인명 등이 드디어 합계(合啓)를 정지하고 또 상소하기를,
"신 등이 이미 능히 천청(天聽)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해 역적의 괴수로 하여금 잠시나마 숨을 쉬게 하였고 또 능히 요석(僚席)을 성실하게 감동시키지 못해 이의(異議)가 터져 나오게 하였습니다. 대론(大論)이 수쇄(收殺)될 기약이 없기에 삼사(三司)에서 서로 의논하여 대론(大論)을 임시로 정지하였으니, 비록 성실한 이 마음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지마는, 전형(典刑)을 무너뜨리고 직책을 저버린 죄는 만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대궐 밖으로 달려나가 석고 대명(席藁待命)291)                  하오니, 원하옵건대 신 등의 죄를 다스려 대각(臺閣)을 격려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환하게 알고 있으니, 사직(辭職)하지 말라. 또한 대명(待命)하지도 말라."
하였다. 조적명 등도 역시 상소하여 인혐하였는데, 비답이 또한 같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서종옥(徐宗玉)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이탄(李坦)의 일은 삼사(三司)에서 논의를 정지하였으니, 마땅히 전지(傳旨)를 받들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처(自處)하는 것으로 써 내도록 하라."
하고,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법(法)이란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법이고 나 한 사람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지마는 옛날 제왕(帝王)이 이러한 곳에 대해 보전할 수 있는데도 잘 처리하지 못한 경우를 두루 보고서 마음속으로 늘 개탄해 왔다. 나의 덕(德)이 적은 것으로 인해 친족(親族)에게 돈목(敦睦)하는 교화가 나라에 행해지지 아니하여 흉적(凶賊)으로 하여금 구실로 삼게 만들었으니, 통한(痛恨)스런 나머지 목이 메어 능히 다 유시(諭示)할 수가 없다."
하고, 이탄(李坦)이 자진(自盡)할 때 독촉하지 말며 비록 검험(檢驗)하는 것이 구례(舊例)라 할지라도 단지 부관(部官)·의생(醫生)·부리(府吏)만 들어가 검험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강원도(江原道)의 전(前) 감사(監司) 이형좌(李衡佐)를 그대로 유임시키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방백(方伯)은 중임(重任)이니, 이미 적당한 사람을 얻었다면 구임(久任)시켜야만 바야흐로 그 성효(成效)를 요구(要求)할 수가 있다. 내년 가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유임시켜서 성효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오원(吳瑗)이 마구 몰아대고 협박한 것은 이양신(李亮臣)에 비해 더함이 있습니다. 그 상소에 ‘연차(聯箚)를 이륜(彝倫)에 관계된 바로 돌렸는데, 「이륜」이란 두 글자를 어찌 감히 이 일에 쓸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신의 전의 상소에서는 ‘대처분(大處分)이 한 번 흔들리게 되면 이륜이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의 그 말뜻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오원이 말한 바에 가깝겠습니까? 시종 한마음으로 변경한 바가 없으니, 그의 처음에서 끝까지 세 번 변했다는 것은 유독 어찌된 것인지요? 전하의 처분은 실로 만만세(萬萬世)토록 민극(民極)을 세우신 것이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하신 하교는 장차 천지와 더불어 환하게 후세(後世)에 전할 것이니,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것이 유독 이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근시(近侍)를 소환(召還)하고 이어 신의 죄지은 것을 감정(勘定)하라 명하소서."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강원도(江原道) 강릉부(江陵府)에서 말이 망아지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에 발이 여섯이었다.

 

3월 29일 계유

윤휘정(尹彙貞)을 교리(校理)로, 정우량(鄭羽良)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사간(司諫) 이춘제(李春躋)가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빈청(賓廳)에서 한 번 차자(箚子)를 올리고 곧장 정유(庭籲)를 걷어치우며 준청(準請)의 책임을 한결같이 삼사(三司)에 맡겼는데, 뜻하지 않게도 집법(執法)하는 곳에서 갑자기 성상의 뜻을 순종(順從)하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성상의 이 거조(擧措)가 진실로 법과 사리(事理)에 맞은 것이라면 다만 마땅히 곧 그날에 봉승(奉承)해야 할 것인데, 어찌 복합(伏閤)하고 청대(請對)를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능히 집법(執法)하지 못하는 것이 잘못인 줄을 알아 즉시 자핵(自劾)하고자 했다면, 그들이 임시로 정지한 바는 성실한 것이었습니까? 정직한 것이었습니까? 대피(臺避)에 대한 비지(批旨)는 신의 본정(本情)을 통촉(洞燭)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청컨대 체척(遞斥)하소서."
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정언(正言) 허집(許集)이 ‘집법(執法)하는 논의는 대간(臺諫)의 체통이 본디 그러한 것이니 성상의 비답과 동료의 배척에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이춘제를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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