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을해
이진순(李眞淳)·오광운(吳光運)을 승지(承旨)로, 신치운(申致雲)을 집의(執義)로, 정형복(鄭亨復)·이성효(李性孝)를 지평(持平)으로, 이만유(李萬維)를 헌납(獻納)으로, 허집(許集)을 정언(正言)으로, 심택현(沈宅賢)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윤동형(尹東衡)을 교리(校理)로, 권혁(權爀)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부사직(副司直) 장붕익(張鵬翼)이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과거(科擧)를 자주 거행했고 그 사이에 또 과시(科試)의 법규가 점점 허술해져서 전후 출신(出身)의 부류들이 무려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사로(仕路)는 한정이 있어 부직(付職)시키기가 쉽지 않은 탓으로 무사(武士)들의 적체(積滯)가 요즘보다 더 심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사세가 국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으니, 과거를 설행(設行)하여 인재를 뽑은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만일 참상(參上)292) 선전관(宣傳官)3과(窠)293) 와 부장(部將) 10과와 수문장(守門將) 5과를 합하여 18과(窠)를 참하(參下)의 과로 정하고 무겸(武兼)은 참상의 38원(員) 가운데서 참하 8과(窠)를 더 정한다면, 사로가 좀 넓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할 경우 승륙(陞六)294) 된 뒤에 조용(調用)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만, 당초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을 적에다가 견주면 차이가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삼군문(三軍門)295) 의 초관(哨官)이 각기 5과(窠)인데 유엽전(柳葉箭)을 열 차례 쏘게 하는 것으로 시재(試才)하여 차임하게 하고, 각 군문의 교련관(敎鍊官) 2과(窠)는 출신과(出身窠)라고 명명하여 《병학지남(兵學指南)》을 강(講)하는 시험을 보여 차임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4월 2일 병자
유성(流星)이 고루성(庫樓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3척(尺)쯤 되었으면 적색(赤色)이었다. 또 유성이 좌각성(左角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쯤 되었으며 적색이었다.
서명빈(徐命彬)을 응교(應敎)로, 김상성(金尙星)을 교리(校理)로, 조적명(趙迪命)·윤광익(尹光益)을 부교리로, 윤휘정(尹彙貞)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덕(李匡德)을 추고(推考)하여 무겁게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처음 전주부(全州府)에 건지산(乾止山)이 있었는데 국초(國初) 때부터 백성들이 경작(耕作)하는 것을 금해 왔었다. 이때에 이르러 내수사(內需司)의 관원이 새로 태어난 옹주방(翁主房)에서 절수(折受)296) 케 한 계하 공문(啓下公文)297) 을 가지고 가서 관찰사에게 보이고 나서 타량(打量)298) 하려고 하자 이광덕이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이어 치계(馳啓)하기를,
"건지산은 옛부터 경기전(慶基殿)299) 의 주맥(主脈)이라고 일컬어 왔는데, 땅이 비옥한 탓으로 이를 침점(侵占)하려는 사람들이 분분했었습니다. 훈신(勳臣) 유순정(柳順汀)과 임해군방(臨海君房), 숙안 공주방(淑安公主房), 새로 태어난 옹주방(翁主房), 숙원방(淑媛房), 진휼청(賑恤廳), 충훈부(忠勳府), 종부시(宗簿寺)에서 전후로 절수하려 했으나 일체 모두 방색(防塞)당하였습니다.
지난 겨울 호조(戶曹)의 낭관(郞官)이 적간(摘奸)하여 타량할 적에도 신(臣)의 의견에는, 끝내 하루 아침에 경작을 허락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고,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산 아래 평지 가운데 경작할 만한 곳에다 경계(境界)를 정하여 놓고 개간하여 경작하게 하되, 진전(眞殿)에 획속(劃屬)시켜서 태상(太常)300) 의 적전(籍田)301) 의 예(例)와 같이 하여 제향(祭享)과 수리(修理)의 비용에 대비하게 한다면 대체(大體)가 경근(敬謹)히 하는 도리에 합치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런 내용으로 논하여 호조에 이문(移文)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 태어난 옹주방에 절수되었다는 것으로 내수사(內需司)의 타량관(打量官)이 계하된 관문(關文)을 가지고 왔습니다. 국가에서 유용하게 쓸 토지는 국용(國用)에 보태게 하거나 아니면 백성들을 위하는 데 보태게 하는 것이 이에 국가의 정당한 도리인 것인데, 이제 국용에 보태지도 않고 또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쓰지도 않은 채 부질없이 귀엽게 여기는 사방(私房)으로 귀속시켰으니, 사방에서 이런 풍요로운 토지를 얻는 것이 국가와 백성에게 무슨 이익될 것이 있습니까?
4백 년 이래 열성(列聖)들의 왕자(王子)·대군(大君)·공주(公主)·옹주(翁主)의 숫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만, 모두 감히 이 토지에 대해 차지하려는 마음을 먹지 못했었습니다. 설사 간혹 마음을 먹었을지라도 곧바로 방색당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루아침에 출급(出給)한다는 것은 실로 성덕(聖德)에 누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결단코 그것이 성덕에 누가 된다는 것이 틀림없음을 알고서야 어떻게 감히 구차스럽게 명(命)을 봉행하여 스스로 아첨했다는 비난을 자초할 수 있겠습니까? 일체 열성조(列聖朝)의 판하(判下)302) 에 의거하여 일체 경작을 금지시키되 혹 평지에는 개간하여 경작하게 해서 이를 진전(眞殿)의 적전(籍田)으로 삼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귀엽게 여기는 사방(私房)이란 말과 그 숫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는 등의 이야기는 말을 구성함에 있어 가리지 않고 한 말이 많으니, 일이 무엄하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번신(藩臣)303) 은 사체(事體)가 경관(京官)과 크게 차이가 있다. 그가 묘당에다 구기(口氣)304) 를 부렸다 해도 마음에 편치 못한 점이 있는 것인데 군부(君父)에게 진언(陳言)함이 또다시 이와 같으니, 더욱 미안(未安)한 노릇이다. 번신의 이런 기습(氣習)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라. 그의 말은 방자하지만 중히 여겨야 될 점도 들어 있으니, 일체 호조(戶曹) 낭관의 타량에 의거하여 논과 밭의 절반을 본부(本府)에 소속시키고 나머지 반은 해궁(該宮)에 소속시키라."
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오광운(吳光運)이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 조정(朝廷)에 나아가게 되면 시비(是非)하는 일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비록 일단 고심(苦心)한 끝에 스스로 자신하게 된 것이나 사람들은 도리어 신이 당습(黨習)에 물들었다고 의심하니, 신이 어떻게 스스로 변해(辨解)할 수 있겠습니까? 아침에 임금이 계신 앞에서 붕당(朋黨)을 타파시켜야 한다고 청하고 나서 저녁에는 사실(私室)에서 당론(黨論)을 제창하고도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을 신은 실로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이 나를 보는 것이 내가 남을 보는 것과 같지 못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바치는 것은 신이 스스로 맹세한 바입니다만, 신하가 된 몸으로 국사(國事)를 위하여 죽는 것은 가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노여움 때문에 죽는 것은 불가한 일입니다. 아! 몸이 있어야만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이니, 신이 오늘날 세화(世禍)를 피하는 것은 바로 뒷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지난번 연석에서 다 말하여 풀어주었는데, 다시 제기할 필요가 뭐 있는가?"
하였다.
4월 3일 정축
유명응(兪命凝)을 승지로, 서명빈(徐命彬)을 집의로, 강필경(姜必慶)을 사간으로, 박필기(朴弼琦)를 장령으로 삼았다.
4월 4일 무인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행례(行禮)하고 나서 향사(享祀)가 성실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또 전교(傳敎)를 내려 ‘농상(農桑)에 힘쓰도록 권면하고 백성은 농한기에 부리라[勸課農桑 使民以時]’는 여덟 글자로 팔도(八道)와 양도(兩道)305) 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4월 5일 기묘
임금이 태묘(太廟)에서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행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조석명(趙錫命)이, 아헌관(亞獻官)이 늦게 왔다는 것을 이유로 아헌관과 대감(臺監)306) ·묘사(廟司)307) 는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고 수복(守僕)들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금(囚禁)하여 다스리게 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승선(承宣)308) 이 추고하기를 청한 것이 단지 아헌(亞獻)·종신(宗臣)·음관(蔭官)·대감(臺監)에게만 미쳤고 문관(文官)에게는 미치지 않았는데, 문관은 유독 추고해서는 안된단 말인가? 해당 승지는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고 행례(行禮)한 뒤 늦게 도착한 집사(執事)들은 아울러 파직(罷職)시키고 대감은 잡아다 추문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어제 바람에 나부끼는 휘장(揮帳) 사이로 보니 어압(御押)309) 을 가진 사람이 지나갈 적에 집사들이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바로 대축(大祝)310) 들이었다. 아울러 파직시키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내관(內官)이 어압(御押)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어찌 심상(尋常)하게 볼 수가 있단 말인가? 잘 검칙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주서(注書)와 중관(中官)을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라."
하고, 또 명하기를,
"만일 심히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종신(宗臣)을 제관(祭官)에 차출하지 말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종반(宗班)은 바로 금지 옥엽(金枝玉葉)으로 품질(品秩)은 당하(堂下)이지만 초모(貂帽)를 쓰고 홍대(紅帶)를 띠었으므로 외조(外朝)의 당상(堂上)과 대등한 것이다. 그런데 적간(摘奸)받을 때마다 앞으로 나아가 예배(禮拜)를 한다고 하니, 이는 종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다. 이 뒤로는 혹 제관에 차출하더라도 예배를 하지 말게 할 것으로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4월 6일 경진
대신(大臣)과 비당(備堂)311) 을 인견(引見)하고 《서정록(西征錄)》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공을 논하여 상(賞)을 행한 것이 이미 충분한데도 군교(軍校)들이 모두들 별단자(別單子)에 들지 못한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있으니, 상을 바라는 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별단자는 갑자년312) 과 경신년313) 의 전례에 따라 만들어 군정(軍情)을 위로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 조현명(趙顯命)·이삼(李森)·이수량(李遂良)에게 나가서 다시 초록(抄錄)하여 가지고 와서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이광덕(李匡德)의 장계(狀啓)는 말을 가리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이광덕의 인품과 문사(文辭)가 여유 작작하지 못하여 비국(備局)에 보고하는 서장(書狀)도 으레 모두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품이 본디 이러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지난번 절수(折受)를 파하신 데 대해 누군들 우러러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건지산(乾止山)의 절수를 파하는 것에 무슨 어려워할 것이 있기에 사기(辭氣)가 이와 같단 말입니까? 자못 정직을 권장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번신(藩臣)의 도리는 경악(經幄)이나 대간(臺諫)과는 다르다. 그가 고집하는 것은 옳지만 말을 어찌 이렇게 무엄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이태좌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진전(眞殿)의 주맥(主脈)이 되는 지역을 기필코 새로 태어난 옹주 궁방(翁主宮房)에게 절수(折受)케 하려고 하는 이유를 신은 실로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3백여 년 동안 진전을 위하여 오래도록 묵혀 왔던 땅을 어떻게 궁방에 절수케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보고 듣기에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그것이 진전의 내맥(來脈)인 줄 알았다면 어찌 궁방에 출급(出給)했겠는가?"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유순정(柳順汀)은 국가를 중흥(中興)시킨 제일의 훈신(勳臣)이었습니다만, 이 땅을 사급(賜給)한 뒤에 그것이 진전의 주맥이라는 이유로 도로 중지했었습니다. 그러니 도로 진전에 예속시키도록 명하시고 궁가(宮家)에는 다시 다른 곳을 사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시 관문(關文)을 보내려고 했습니다만, 하교가 전하께서 평일에 하시던 처사와 달랐기 때문에 우선 중지하고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성지(聖旨)를 봉행만 할 뿐이라면, 이는 신을 이 직책에 둔 의의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진달합니다. 사신(史臣)이 태조(太祖)의 진전(眞殿)의 주맥으로 4백 년 동안 오래도록 묵혀 왔던 땅을 아무 임금 때 궁방(宮房)에 절수케 하였다고 기록한다면, 어찌 성덕(聖德)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오랫동안 하답(下答)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문명(趙文命)이 주달하기를,
"예천(醴泉)의 전 군수(郡守) 서종일(徐宗一)은 변이 발생한 초기를 당하여 공로가 없지 않았는데도 원종 공신(原從功臣)에서 누락되었으니, 의당 원종 공신 일등(一等)에 추록(追錄)해야 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신이 건지산의 일 때문에 진달하여 아직 발락(發落)을 받기도 전에 조문명이 경솔하게 다른 일을 진달하였으니, 청컨대 추고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사간(司諫) 강필경(姜必慶)이 나아가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아뢴 바에 대해 오랫동안 답을 내리지 않으시니, 이는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광덕의 일에 대해 바야흐로 생각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미처 하답(下答)하지 않았는데, 간신(諫臣)의 말이 진실로 옳다. 비망기(備忘記)를 마땅히 고쳐서 내리겠으니, 도로 들이게 하라."
하였다. 조문명이 진달하기를,
"역관(譯官)들 가운데 한어(漢語)를 하는 사람이 장차 끊어지게 되었으니, 청학(淸學) 하는 10원(員) 가운데 세 개의 요과(料窠)314) 에서 두 개의 요과를 덜어내어 한학(漢學)에 이속(移屬)시킴으로써 재주를 시험보여 요과(料窠)에 붙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또 진달하기를,
"한학의 겸교수(兼敎授)는 전혀 벼슬자리를 위하여 사람을 가린다는 뜻이 없습니다. 성종조(成宗朝) 때 내섬시 부정(內贍寺副正) 최시진(崔時珍)은 미천한 사람이었습니다만, 한어(漢語)를 잘했기 때문에 겸교수가 되었었고, 예전에 장령(掌令) 김덕승(金德承)도 한어를 잘한다는 것으로 오랫동안 겸교수를 지냈습니다. 2원 가운데 1과(窠)는 문관 가운데에서 한어(漢語)를 잘하는 사람을 극진히 가려 파격적으로 차하(差下)하는 것이 마땅할 듯 싶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태좌가 더 초록(抄錄)한 군공(軍功)의 별단(別單)을 올리니, 임금이 열람하고 나서 승지에게 쓰라고 명하고서 이르기를,
"당초의 별단(別單) 가운데에서 우하형(禹夏亨)·손명대(孫命大)·박민웅(朴敏雄)·신진소(申震熽)·이태창(李泰昌)·여필선(呂必善)·이우석(李禹錫)·이귀서(李龜瑞)·임수(任洙)·전만적(田萬積)·박경태(朴慶泰)·최이준(崔以俊)·김이장(金爾章)은 모두 군공에 의거하여 가자(加資)했으니, 양전(兩銓)315) 으로 하여금 실직(實職)에 각별히 녹용(錄用)하게 하라. 이천구(李天球)·민제만(閔濟萬)은 이미 승전(承傳)을 받들었는데도 지금 실직(實職)이 없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자리를 만들어 조용(調用)하게 하라. 추가로 올린 별단 가운데 김유한(金有漢)·강상주(姜相周)·최시만(崔時晩)·박준경(朴俊慶)·조득중(趙得重)·홍이원(洪以源)·신만(申漫)·고도성(高道成)·이세보(李世寶)·민제장(閔濟章)은 모두 군공에 의거하여 이미 가자(加資)되었으니, 또한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각별히 녹용(錄用)하도록 하되, 그 가운데 실직에 차임하도록 승전(承傳)을 받은 사람은 우선 궐원(闕員)이 나는 대로 즉시 보임(補任)하게 하라. 강석기(姜碩耆)·석서욱(石瑞昱)·오수붕(吳壽鵬)·이한진(李漢震)은 이미 상당(相當)한 관직을 제수하라는 승전이 있었다. 고만세(高萬世)·유석량(劉錫亮)·이흥상(李興祥)과 처음의 별단 가운데 방득규(方得規)·최윤(崔潤) 등은 이미 변장(邊將)에 제수하라는 승전이 있었는데도 아울러 아직껏 조용(調用)하지 않고 있으니, 격려 권면하는 의의가 아니다.
춘당대(春塘臺)의 시재(試才)에서 4푼(分)을 받은 사람도 궐원에 따라 수용(收用)했는데, 더구나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공을 세운 사람이겠는가? 양전으로 하여금 상당한 관직에 우선 조용하게 하라. 변장에 제수하라고 승전을 받은 사람은 관무재(觀武才)316) 의 예(例)에 의거하여 과(窠)를 만들어 부직(付職)시키라. 그리고 김주천(金柱天)은 은(銀)을 상가(賞加)하였고 이미 첨사(僉使)에 제수되었으니, 지금은 일후(日後)에 조용(調用)할 것을 논할 것이 없다. 조태선(趙泰先)은 탈상(脫喪)한 뒤에 이미 동지(同知)를 제수하게 했으니, 지금은 논하지 말라. 이진일(李震一)은 이제 실직을 받았으나, 공이 김천주에게 밑돌지 않으니, 첨사에 제수하라. 지난번 포도 군관(捕盜軍官)으로 있으면서 전후로 힘을 다한 것이 이미 많은 사람으로서 이미 별단에 든 사람에 대해서는 의당 격려하고 권면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니, 이천만(李天萬)은 첨사에 제수하라. 거창(居昌)의 가장(假將) 정재흥(丁載興) 등은 외방(外方) 사람이니, 의당 먼저 격려 권면시켜야 한다. 병조로 하여금 각별히 조용(調用)하게 하라. 전 감사(監司) 황선(黃璿)은 이미 졸서(卒逝)하였으므로 증직(贈職)하였고 충주 목사(忠州牧使) 김재로(金在魯)는 이미 포상(褒賞)하고 가자(加資)하였다. 중신(重臣)에 대해서는 사체가 중하여 시행할 만한 상이 없으니, 임세겸(林世謙)·김상정(金尙鼎)과 함께 아울러 논하지 말게 하라. 정관빈(鄭觀賓)·정수방(鄭壽邦)·유기상(柳耆相)·김두강(金斗剛)은 아울러 승진 서용(敍用)하고, 김유(金濰)는 한 품계를 가자하며, 이만흥(李萬興)·유일장(柳一章)에게는 아울러 실직을 제수하라. 문이익(文以益)·안취장(安就章)에게는 모두 변장(邊將)에 제수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라.
그밖에 수령·변장에서 아래로 군사(軍士)·노예(奴隷)에 이르기까지 가자(加資)하기도 하고 승서(陞敍)하기도 하며 준직(準職)317) 을 제수하기도 하고 우임(右任)318) 에 차정(差定)하기도 하며 면역(免役)시키기도 하고 면천(免賤)시키기도 하며 말을 지급하기도 하고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기도 하며 본도(本道)로 하여금 참작하여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도록 하라. 무장(茂長)의 관노(官奴)인 명휘(命輝)·애만(愛萬)은 아울러 면천시키고 옥구 현감(沃溝縣監) 신이형(申以衡)은 승서(陞敍)하라. 운봉(雲峯)의 전 영장(營將) 손명대(孫命大)는 이미 상을 주었으니 논하지 말라. 전주(全州)의 한량(閑良) 이태삼(李泰三)은 가자하고, 무장(茂長)의 장교(將校) 손익도(孫益道)·김인하(金麟河)·염응규(廉應圭)에게는 아울러 가자하며, 전주의 한량 김윤정(金潤鼎)은 향장관(鄕將官)에 차정하고, 진안(鎭安)의 전 현감(縣監) 이정(李淨)에게는 준직(準職)을 제수하라. 운봉의 천총(千摠)인 절충 장군(折衝將軍) 강만하(姜萬廈)에게는 가자하고, 사과(司果) 박기룡(朴起龍)은 이미 상을 주었으니 논하지 말라. 초관(哨官)인 판관(判官)의 최여대(崔汝大)와 남원(南原)의 전 파총(把摠) 이인방(李仁邦)은 우임(右任)에 차정하고, 전주의 사과(司果)인 전필방(全弼邦)은 우임에 차정하고 미포를 제급하라. 한량 도세강(都世康)에게는 가자하고 남원의 도장(都將) 홍세일(洪世一)에게는 미포(米布)를 넉넉하게 제급하라.
옥구(沃溝)의 하리(下吏)인 임치영(林致榮)은 향장관(鄕將官)에 차정하고 무장의 장교 김재휘(金再輝)·황처곤(黃處坤)·설후건(薛厚建)·김태성(金泰城)·신한우(申漢宇)·김필준(金弼俊)·김순광(金順光)과 인리(人吏)319) 김백령(金百齡)·김상현(金相鉉)·김상담(金相潭)·김덕구(金德球)·김광한(金光漢)·안시익(安時益)·박치흥(朴致興)·장여태(張麗台)·김상윤(金相潤)과 사령(使令) 배차중(裵次中)·박상(朴尙)·김독돌(金纛突)·박막련(朴莫連)·이독이(李纛已)·김승백(金升白)과 관노(官奴) 필흥(弼興)·파회(破回)·치삼(致三)·칠월(七月)·김정량(金挺亮)·명토리(明土里)에게는 아울러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라. 전주 판관 이석인(李錫仁)은 준직을 제수하고, 운봉의 토포 군관(討捕軍官) 한량 장한삼(張漢三)은 이미 상을 주었으니 논하지 말라. 남원 천총(千摠)인 한량 김도규(金道圭)에게는 가자하고, 운봉의 토포 군관인 판관(判官) 박완업(朴完業)은 우임(右任)에 차정하고 미포(米布)를 넉넉하게 제급하라. 남원의 첨정(僉正) 허협(許浹)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용하게 하고, 운봉의 파총(把摠)인 판관 김성옥(金聲玉)은 우임에 차정하고, 기고관(旗鼓官)인 판관 이만점(李萬點)은 우임에 차정하고, 첨정(僉正) 최만흘(崔萬屹)에게는 미포(米布)를 제급하며, 토포 군관인 판관 박석빈(朴碩彬)에게는 가자하고, 향리(鄕吏) 박필청(朴必淸)에게는 가자하며, 함양(咸陽)의 하리(下吏) 서문징(徐文徵)과 사령(使令) 송유발(宋有發)에게는 이미 상을 주었으니 논하지 말라. 운봉의 초관(哨官)인 한량 백일대(白日大)는 우임(右任)에 차정하고 미포를 제급하라. 대변색(待變色) 김진채(金震采)는 향장관(鄕將官)에 차정하고, 하리(下吏) 김호량(金虎良)·최석택(崔碩泰)는 향장관에 차정하며, 관노(官奴) 재광(再光)·국방(國蒡)과 사령(使令) 오봉선(吳奉先)·한간의(韓間儀)에게는 아울러 쌀이나 베를 제급하게 하라.
진안(鎭安)의 전 첨사(僉使) 전순좌(全舜佐)는 해조로 하여금 조용(調用)하게 하라. 노제(老除)320) 된 하리(下吏) 정후태(鄭后泰)와 한량 고준적(高俊迪)은 향장관에 차정하고, 기패관(旗牌官) 최호(崔浩)와 영장(領將) 최상기(崔尙起)와 군관(軍官) 서해필(徐海必)·박명귀(朴命龜)·김석창(金碩昌)은 이미 향장관에 제수된 사람이니 우임(右任)에 차정하고, 그 나머지는 아울러 향장관에 차정하라. 장수(長水)의 장교(將校) 정익한(鄭益漢)·정운철(鄭雲哲)에게는 미포를 제급하고 무주(茂朱)의 권무사(勸武士) 한량 이세달(李世達)은 향장관에 차정하고, 관노(官奴) 행원(幸元)·의준(義俊)은 3년을 기한으로 면역(免役)시키며, 영장(領將)인 전 파총(把摠) 장진량(張震良)과 하리(下吏) 박태호(朴泰好)와 군관(軍官)인 한량 한신기(韓藎起)와 사령(使令) 임득만(林得萬)과 군관인 한량 김두재(金斗載)와 하리 백운징(白雲澄)에게는 아울러 미포를 제급하라. 전주의 사과(司果) 장중익(張重翊)과 고산(高山) 민인(民人)인 임영원(林英遠)과 장교(將校) 임덕채(林德采)와 운봉의 한량 김윤구(金允耉)에게는 아울러 미포를 제급하라. 절충(折衝) 임동필(林東弼)에게는 미포를 넉넉하게 제급하고, 지구관(知彀官)인 판관(判官) 이재방(李再芳)과 사과(司果) 이치달(李致達)에게는 미포를 넉넉하게 제급하라. 남원의 초관(哨官)인 한량 유일성(柳一星)과 운봉의 초관인 한량 박신일(朴信一)은 우임(右任)에 차정하라. 한량 김이내(金以內)와 사과(司果) 조한징(趙漢徵)과 향리(鄕吏) 박필경(朴必敬)·박태흥(朴泰興)과 남원의 기패관인 한량 공덕금(孔德金)과 운봉의 기패관인 한량 박내채(朴乃采)와 곡성(谷城)의 초관인 한량 여태익(呂泰益)·김덕보(金德輔)에게는 아울러 미포를 제급하라.
창원(昌原)의 천총(千摠)인 한량 현영징(玄永徵)과 남원의 파총인 판관 어만광(魚萬光)과 초관인 한량 임원대(林元大)와 창평(昌平)의 초관인 한량 문두천(文斗天)과 남원의 초관인 한량 정필구(丁必具)·장두걸(張斗杰)·강시걸(姜時傑)과 옥과(玉果)의 별장(別將)인 한량 심세영(沈世榮)과 남원의 별장인 한량 서한중(徐漢重)과 운봉의 대변 군관(待變軍官)인 한량 김언장(金彦章)·전시대(全時大)·김세망(金世望)과 토포관인 형방리(刑房吏) 서치도(徐致道)와 토포 군관인 한량 양만팽(楊萬彭)과 진안(鎭安)의 군관(軍官)인 김중철(金重喆)·안이태(安以泰)·조중려(趙重呂)와 운봉의 초포장(勦捕將)인 절충(折衝) 곽후교(郭後僑)와 기패관인 한량 이처삼(李處三)과 장수의 기패관(旗牌官)인 사과(司果) 김시만(金始萬)과 파총인 한량 이필천(李弼天)과 초관(哨官)인 한량 김세중(金世中)·이상위(李尙魏)와 진안(鎭安)의 군관인 이석재(李碩才)·김광필(金光弼)·박유천(朴有天)·박원종(朴元宗)·김성운(金成雲)·심선백(沈善白)·김미달(金未達)과 장수(長水)의 하리인 정화정(鄭華晶)·우정구(禹廷九)와 사령(使令) 서한귀(徐漢龜)와 별패(別牌) 강후득(姜厚得)과 무주의 권무사(勸武士)인 한량 한석순(韓碩順)·박자진(朴自進)과 기패관인 한량 서이창(徐以昌)과 하리 김재중(金再重)·윤시형(尹是衡)·양계징(梁啓澄)과 관노(官奴) 숙골리(夙骨里)와 사령 김검동(金黔同)과 하리 황재호(黃再灝)와 사령 최가팔리(崔加八里)·강물리금(姜㐎里金)과 군관인 한량 이세욱(李世郁)과 사령(使令) 김석시(金石屎)와 영장(領將)인 전 별장(別將) 이만득(李晩得)과 관노(官奴) 순이(順伊)와 영장인 절충(折衝) 한시국(韓藎國)과 관노 막산(莫山)과 영장인 한량 장명유(張命維)와 사과(司果)인 김응필(金應弼)에게는 아울러 미포(米布)를 등급을 나누어 제급하라. 남원의 군관 박유장(朴

章)은 향장관(鄕將官)에 차정하고 미포를 제급하라.
사령(使令)인 양인(良人) 서한창(徐漢昌)과 사노(私奴) 강단오(姜丹午)와 도장(都將) 이귀대(李貴大)·서위대(徐渭大)와 군관(軍官) 조상채(趙尙采)·김하식(金夏植)·정동익(鄭東益)·박필희(朴弼羲)와 진안의 군관인 정하명(鄭夏命)·전유직(田有稷)·이귀만(李龜萬)·김용(金龍)·유여망(劉汝望)·서필선(徐必先)·황여재(黃汝才)·박선창(朴先昌)·윤필흥(尹必興)과 파총(把摠) 이시만(李時蔓)과 초관 김필영(金必英)·김정화(金廷華)와 기패관 장시건(張時建)·박인종(朴仁宗)·정상오(張相五)·이여매(李如梅)와 지구관(知彀官) 이창배(李昌培)와 여산(礪山)의 초관인 김인각(金仁覺)과 진안의 군관인 서위창(徐魏昌)과 무주의 토포 군관인 한량 김상성(金尙惺)과 하리 박이검(朴以檢)과 보병(步兵) 한흥삼(韓興三)과 관노(官奴) 순이(順伊)와 사령 임득만(林得萬)과 토포 군관인 사과(司果) 이태경(李泰景)과 한량 이지욱(李枝郁)과 기패관인 한량 윤일취(尹日就)·김진필(金震弼)과 무학(武學) 조기봉(趙起鳳)과 권무사(勸武士)인 한량 양시해(梁時海)와 초관 박진발(朴進發)과 사령 원귀천(元貴千)과 관노 매돌(梅突)·신영(信永)·행득(幸得)과 중군(中軍)인 한량 최봉래(崔鳳來)와 중부(中部)의 천총인 한량 이만번(李萬蕃)과 좌사 파총(左司把摠)인 한량 김이경(金以鏡)과 전 초관(哨官)인 겸사복(兼司僕) 김대석(金大錫)과 판관 강태민(姜泰民)과 한량 정이창(鄭以昌)·양이제(梁以濟)와 지구관(知彀官)인 겸사복(兼司僕) 김중현(金重鉉)과 기고관(旗鼓官)인 겸사복 김만경(金萬鏡)과 기패관인 한량 김기태(金起兌)와 겸사복 최성석(崔成錫)과 한량 김시경(金時慶)·박치삼(朴致三)·박태화(朴泰華)·최익경(崔益京)·김의택(金義擇)과 겸사복인 최일선(崔日善)·박무재(朴茂載)와 한량 이만득(李晩得)과 사과 김자정(金自成)과 한량 김성발(金聲發)·최준경(崔俊京)·황영필(黃英弼)·양덕백(梁德白)·황연징(黃連澄)·김성원(金聲遠)·조을선(趙乙善)·신건리금(申件里金)·이필선(李弼先)·김성갑(金成甲)·장효중(張孝仲)·박이기(朴以杞)·양석지(梁碩祉)·서이창(徐以昌)과 겸사복 이성대(李聲大)·김여재(金汝載)·김영재(金永才)와 진산(珍山)의 좌부 좌사(左部左司) 우초관(右哨官) 양준재(梁俊載)와 중초관 윤진걸(尹辰傑)과 기패관 최선발(崔善發)·이무재(李茂才)·조석재(趙碩載)·박태검(朴泰儉)·한상선(韓尙善)·금산(錦山)의 천총인 한량 유연(柳淵)과 초관인 한량 홍만귀(洪萬龜)·황하청(黃河淸)과 파총인 한량 양봉지(梁鳳至)와 초관인 한량 신필종(辛必宗)·권만정(權萬貞)과 판관 박성봉(朴成鳳)과 용담(龍潭)의 초관인 판관 박성업(朴成業)과 한량 박진무(朴震茂)와 기패관인 사과(司果) 백수옥(白受玉)과 한량 송세망(宋世望)·이하주(李夏柱)·이대성(李大成)과 전주의 절충(折衝) 김우기(金禹器)에게는 아울러 미포를 등급을 나누어 제급하라.
청안(淸安)의 출신(出身)인 양민후(梁敏垕)·이혼(李混)에게는 아울러 가자하고, 민도창(閔道昌)과 절충 연세홍(延世鴻)은 아울러 조용(調用)하라. 관노 허익반(許益返)·장기준(張起俊)에게는 아울러 면천(免賤)시키고 유학(幼學) 연약한(延若漢)에게는 반숙마(半熟馬)를 제급하고 상당 산성(上黨山城)의 절충 김한익(金漢翊)에게는 가자하고 실직(實職)을 제수하라. 출신(出身) 조중렴(趙重廉)은 가자하고, 절충 김지행(金志行)과 판관 조중태(趙重泰)에게는 아울러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라. 절충 김종필(金從弼)과 한량 성지항(成至恒)·황용택(黃龍澤)과 절충 임만규(林萬揆)·이진우(李震祐)에게는 아울러 변장에 제수하도록 승전(承傳)을 받들고 미포를 더 제급하라. 영노(營奴) 김상정(金尙鼎)은 면천시키고, 진무(鎭撫) 최서징(崔瑞徵)에게는 미포를 넉넉히 제급하게 하고, 영노 이후성(李后成)·김만필(金萬弼)은 면천시키고, 영노 김차웅(金次熊)·박흥만(朴興萬)·황여헌(黃汝憲)은 이미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들었으니 아울러 논하지 말라. 한량 양만중(梁萬重)·양두경(梁斗慶)에게는 미포를 제급하고, 전 별장(別將) 김진희(金晉熙)와 진무(鎭撫) 유근번(柳根蕃)과 한량 박천로(朴天老)·조춘석(趙春錫)과 절충 이태석(李泰錫)·곽신장(郭信章)·김만일(金萬鎰)과 한량 정태백(鄭泰伯)·조중벽(趙重璧)·김만근(金萬根)·나득추(羅得秋)와 진무(鎭撫) 김필징(金弼徵)과 전 별장(別將) 이진필(李震弼)과 출신 최성우(崔成禹)에게는 아울러 미포를 제급하라. 관노(官奴) 김차걸(金次傑)과 영노(營奴) 김차운(金次云)·장신원(張信元)·박두망(朴斗望)은 이미 원종(原從)에 들었으니 논하지 말라. 공생(貢生) 곽차송(郭次松)과 한량 곽신하(郭信夏)와 양인(良人) 김이태(金以太)와 어영군(御營軍) 손지철(孫之哲)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라. 출신 조중백(趙重伯)에게는 가자하고 한량 이진의(李震儀)와 판관 윤두령(尹斗齡)에게는 변장을 제수하고, 영노 조차석(趙次錫)은 이미 원종(原從)에 들었으니 논하지 말라.
사령 최운선(崔雲先)에게는 미포를 제급하고 한량 표이귀(表以貴)와 사과(司果) 김상적(金尙迪)과 한량 김만석(金萬錫)·김만종(金萬鍾)·김두일(金斗鎰)과 영노 유천삼(柳天三)·김귀걸(金貴傑)과 한량 나필선(羅弼善)·임시무(林時茂)·김천석(金天碩)·유만성(柳萬成)·김시징(金時徵)·김재중(金載重)과 사과 김두재(金斗載)와 진무 송일천(宋日天)·주철만(朱哲輓)·김득경(金得鏡)·양두실(梁斗實)·김필지(金弼枝)·양두익(梁斗益)·송순걸(宋順傑)·김두강(金斗剛)·박동취(朴東就)와 공사(貢士) 곽두칠(郭斗七)과 한량 김만징(金萬徵)과 사노(私奴) 박명기(朴明起)와 사령(使令) 장돌동(張突同)·김태명(金太明)과 관노(官奴) 김의달(金義達)과 사노 김원석(金元石), 이상의 관노(官奴)와 영노(營奴) 등은 5년을 기한으로 면역(免役)시키고 그 나머지는 쌀이나 베를 제급하고 진천(鎭川)의 천총(天摠)인 우하철(禹夏哲)에게는 가자하고, 사인(士人) 조중관(趙重觀)에게는 반숙마(半熟馬)를 제급하며, 조중정(趙重鼎)에게는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라.
송재태(宋載泰)에게는 미포를 제급하고, 전 판관(判官) 임봉서(林鳳瑞)와 유학(幼學) 김정필(金鼎弼)과 장교(將校) 지칠성(池七星)에게는 아울러 쌀이나 베를 제급하라. 괴산(槐山)의 전 군수(郡守) 전이장(全爾璋)과 출신 성우적(成禹績)에게는 아울러 가자하고, 가리(假吏) 이지망(李枝望)은 변장에 제수하라. 목천(木川)의 유학 이명달(李命達)에게는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고, 유학(幼學) 윤이관(尹以寬)·이기현(李箕賢)·윤이오(尹以五)·윤병(尹柄)·윤거(尹椐)·김동래(金東來)·이진하(李振夏)·윤두(尹枓)·이약제(李若濟)·김태두(金泰斗)·최창조(崔昌祚)·이시봉(李蓍鳳)·이약유(李若裕)·윤이천(尹以天)·이광하(李光夏)에게는 아울러 미포(米布)를 제급하라. 죽산(竹山)의 한량 김필웅(金弼雄)과 목천(木川)의 공생(貢生) 신약연(申若演)과 율생(律生) 안상서(安上瑞)와 한량 조완벽(趙完璧)에게는 아울러 미포를 제급하고, 천안(天安)의 토포 군관 이정하(李廷夏)에게는 가자(加資)하고, 군뢰(軍牢) 전업삼(全業三)에게는 미포를 제급하고, 청주(淸州)의 토포 군관 고윤창(高允昌)에게는 가자하며, 군뢰 이왕산(李往山)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라. 괴산의 음우석(陰禹碩)에게는 미포를 제급하고, 청주의 초관(哨官) 김일호(金一豪)와 군뢰 박씨동(朴氏東)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며, 토포 군관 한두징(韓斗澄)에게는 가자하고, 군뢰 최옥속(崔玉粟)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며, 군뢰 김만석(金萬石)에게는 미포를 제급하고, 공산(公山)의 토포 군관 변득태(邊得泰)와 역리(驛吏) 신종필(申從必)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라.
청주의 사령(使令) 곽차만(郭次萬)은 그 자신에 한해 면역(免役)시키고, 진천의 아전 손두추(孫斗樞)·이효재(李孝才)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며, 괴산의 가리(假吏) 배시홍(裵始弘)은 변장에 제수하고, 면천(沔川)의 어영(御營)의 보인(保人)인 한무치(韓無致)는 그 자신에 한해 군역(軍役)을 면제시키며, 한량 구시화(具時華)에게는 가자하고, 회인(懷仁)의 사인(士人) 박내익(朴來翊)에게는 가자하며, 연기(燕岐)의 좌수(座首) 장석징(張碩徵)은 군공 체아(軍功遞兒)인 첨지(僉知)에 제수하라. 청주의 토포 군관인 김한정(金漢廷)은 향장관(鄕將官)의 우임(右任)에 차정(差定)하고, 군뢰(軍牢) 김산익(金山益)과 목천의 절충(折衝)인 신서휘(申瑞輝)와 사노(私奴) 김곤징(金崑澄)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라. 청주의 사령(使令)인 사노 한순립(韓順立)은 이미 원종(原從)에 들었으니 논하지 말라. 옥천(沃川)의 장교(將校) 정시웅(鄭時雄)·정시대(鄭時大)에게는 미포를 제급하고, 청주의 절충인 유귀열(劉貴說)과 옥천의 장교 이만번(李萬蕃)과 보은(報恩)의 관노 이직(李直)·이인번(李仁蕃)과 보은(報恩)의 출신(出身) 주도흥(周道興)과 한량 박진흥(朴震興)과 천안의 유학(幼學) 유시화(柳時華)와 기병(騎兵) 우석장(禹石章)과 청안의 출신 임세희(林世禧)와 청주의 사령 이만업(李萬業)과 목천의 유학 이만경(李萬慶)·진성시(陳聖時)와 청주의 대변 군관(待變軍官) 성지항(成至恒)과 회덕(懷德)의 유학 송하주(宋夏疇)와 온양(溫陽)의 사과(司果) 방최일(方最一)과 청안의 별장(別將) 한시진(韓時秦)에게는 아울러 미포를 등급을 나누어 제급하라.
청주의 토포 군관 정수일(鄭壽一)은 우임(右任)에 차정하고, 군뢰(軍牢) 이백은동(李白隱同)에게는 미포를 제급하며, 청주의 사노(寺奴) 곽석창(郭碩昌)과 청주의 토포 군관인 김성진(金聲振)과 군뢰 이자필(李自必)과 토포 군관인 이영배(李永培)·송의원(宋義原)과 군뢰 박독거비(朴纛巨非)·이왕산(李往山)·김미동(金米同)과 군뢰인 사노(私奴) 박시동(朴時同)과 진천의 아전인 송취재(宋就載)·함시휘(咸時輝)와 장교 강필성(康必成)과 괴산의 향리(鄕吏) 음광훈(陰光薰)과 가리(假吏) 음억년(陰億年)·음체곤(陰體坤)·배팔만(裵八萬)과 직산(稷山)의 사과(司果)인 이만근(李萬根)과 목천의 유학 김홍운(金弘運)과 전의(全義)의 사노(寺奴) 정세웅(鄭世雄)과 진천의 한량 김운형(金運亨)과 청주의 한량 양차전(梁次佺)에게는 아울러 쌀이나 베를 등급을 나누어 제급하라. 박시동(朴時同)은 이미 원종(原從)에 들었으니 논하지 말라. 단양(丹陽)의 유학 신익화(辛翊華)·이만욱(李萬煜)·신주윤(申周潤)·권우항(權宇恒)·장세규(張世逵)·신치태(申致泰)·이만형(李萬馨)에게는 아울러 연호(煙戶)의 역(役)을 3년을 기한으로 제감(除減)해 주라. 공산(公山)의 토포 군관 이찬(李燦)은 논하지 말라. 광주(廣州)의 출신 정하익(鄭夏翊)과 청주의 절충(折衝) 우선대(禹善大)·박태중(朴泰重)과 군뢰(軍牢) 양지래(楊至來)에게는 아울러 미포를 등급을 나누어 제급하고, 청주의 사령(使令) 박용(朴龍)과 대흥(大興)의 전 초관(哨官) 윤도웅(尹道雄)과 청주의 기패관(旗牌官) 김영태(金靈泰)·곽운징(郭雲徵)·김두재(金斗載)와 사령 유유재(劉有才) 이상은 본도(本道)에서 참작(參酌)하여 시상(施賞)하게 하라."
하였다.
4월 7일 신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광덕(李匡德)을 추고하라는 전지(傳旨)를 고쳐서 내리기를,
"이제 전라 감사 이광덕의 장계(狀啓)를 살펴보건대, 건지산(乾止山)에 대한 일로 장황하게 진달했는데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그 가운데 귀여운 사방(私房)이라고 한 것과 그 숫자를 이루 헤일 수 없다고 한 등의 이야기는 이미 마음이 편치 못한 데에 관계가 되는데, 이미 백성에게 경작하도록 허가하였으니 궁가(宮家)에 대해서나 관가(官家)에 대해서나 논할 것이 아니다. 또 도신(道臣)이 고집할 것은 아닌데, 장계의 말뜻이 이러한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리고 번신(藩臣)의 사체는 비록 소회(所懷)가 있다고 하더라도 문장을 구성한 조어(措語)를 어찌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사체에 있어 진실로 몹시 미안스러운 일이니,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라. 청한 내용은 중한 일이니, 호조의 낭관(郞官)이 타량(打量)한 것에 따라 반은 본도(本道)에 소속시키라."
하였다.
4월 8일 임오
김계환(金啓煥)·이유(李瑜)를 승지로, 이진망(李眞望)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현모(李顯謨)를 교리로, 김상성(金尙星)을 수찬으로, 신치운(申致雲)을 응교로, 임수적(任守迪)을 집의로, 김동필(金東弼)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이정제(李廷濟)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유(李瑜)가 소장을 올리기를,
"신은 곧 신축년321) 에 정청(庭請)하면서 파봉(罷封)을 의논할 때 올린 연차(聯箚)322) 에 대해 승낙한 사람입니다. 이 때문에 죄를 받아 먼 해도(海島)에 유찬(流竄)되었던 몸이고 지금도 이 일이 큰 안건(案件)이 되어 극률(極律)이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두루 미치고 있으므로, 이에 죄가 있으면 자수(自首)하는 예(例)에 붙입니다."
하니, 명을 받들지 않는다 하여 체직(遞職)시켰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총융청(摠戎廳)에서 본청(本廳)의 소속인 경상도의 유황군(硫黃軍) 3백 명을 그대로 보존시키고 혁파하지 말 것을 청하고 있는가 하면, 도신(道臣)은 혁파할 것을 굳게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문(軍門)의 사세는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절반을 파정(罷定)함으로써 피차가 모두 편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리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신(武臣) 이복휴(李復休)가 아뢴 바에 따라 선적(善積)은 요새지인데도 군사가 적다는 것으로 위라(位羅)의 군사 2초(哨)를 선적으로 이속(移屬)시키고 문산(文山)의 군사 2초를 위라로 이속시키려 하니, 청컨대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논계(論啓)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리 하라."
하였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좌수참(左水站)의 배 15척(隻)의 수부(水夫)에게 각각 보인(保人)을 주고 복호(復戶)323)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병술년324) 에 선혜청(宣惠廳)에서 액수(額數)를 감정(減定)하면서 보인과 복호는 거론하지 않았고 정미년325) 에 또 원액(元額)을 감하였습니다. 수부들이 이 때문에 도망해 흩어졌으니, 진실로 유안(劉晏)326) 이 후한 대가를 지불하고 선원(船員)을 모집했던 뜻과 다릅니다. 청컨대 일체 병술년에 정한 액수대로 따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리 하라."
하였다.
부수찬 한현모(韓顯謨)가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정미년327) 에서부터 정사(政事)가 있을 때마다 검거(檢擧)328) 되었는데, 이는 신의 성질이 우회적이고 묵묵히 말없이 따르는 것을 이롭게 여겨 끌어다가 탕평책(蕩平策)의 자료로 가식(假飾)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 신이 묵묵히 말없이 따르는 것은 본디부터 미열(未劣)하게 우기면서 지켜온 습성이었습니다. 진실로 능히 한 마디 말을 하며 한 가지 일을 논한 것이 일찍이 이양신(李亮臣)·윤득화(尹得和)·오원(吳瑗)과 같았더라면 어찌 이렇게 곤혹스러움을 당했겠습니까? 이수해(李壽海)가 견책을 받은 데 이르러서는 그것이 또한 무슨 죄명(罪名)이었습니까? 비사(祕史)의 내용을 몰래 희롱한 죄를 들추어내어 말하면서 당시의 사실을 인용하여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호오(好惡)가 너무 일방적이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궁기(窮奇)·도올(檮杌)329) 같은 악한 자일지라도 감싸주고 위로해 줌에 있어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만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급암(汲黯)330) 같은 충성이 있어도 용납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그윽이 우려하고 탄식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득화(尹得和) 등 3인을 위하여 이와 같이 영호(營護)하고 나서니, 진실로 미안한 데에 관계된다."
하였다.
4월 9일 계미
의금부(義禁府)에서 이탄(李坦)331) 에 관한 연좌(緣坐) 및 적몰(籍沒)하는 것을 율문(律文)에 의하여 거행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분무 녹훈 도감(奮武錄勳都監)에서 아뢰기를,
"별군직(別軍職) 안취장(安就章)과 전 군수(郡守) 서종일(徐宗一)을 원종(原從) 1등에 추가하여 녹훈(錄勳)하도록 일체로 부표(付標)하여 들이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박문수(朴文秀)가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에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양신(李亮臣)의 참소(讒訴)에 대해 끝내 철저히 통촉하여 엄히 조처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신과 이양신을 실정을 알고 실정을 모른 것과 남을 무함하고 남을 무함하지 않은 어중간한 데에다 뒤섞어 두는 것이 됩니다. 이양신은 자기의 동류(同類)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그가 역도(逆徒)인 줄 알면서도 오히려 역도라고 말을 하지 않고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도 억지로 역도라는 이름을 가하고 있으니, 이는 편당을 위해 사력(死力)을 다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데에 연유되어 그런 것입니다. 왕부(王府)332) 로 하여금 신과 이양신을 잡아다가 그 죄를 핵정(覈正)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개석(開釋)한 뒤에도 한결같이 잡고 늘어지나, 끝내는 정도가 지나치게 되는 데 관계가 된다."
하였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 포장(捕將) 이삼(李森)·이수량(李遂良)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는데, 외방(外方)의 군공(軍功)에 대한 단자(單子)를 일일이 진품(陳稟)하여 등급을 나누어 시상(施賞)하였다. 이삼·이수량이 포청(捕廳)의 죄인에 대한 문안(文案)을 진달하니, 임금이 명하여 남원(南原)의 죄인 한익명(韓益命)·김간(金簡)·김귀로(金龜老)·김태동(金泰同)·김익정(金益鼎)·김봉로(金鳳老)·김연단(金鍊丹)·김서기(金瑞基)는 다시 엄히 형장(刑杖)을 가하여 철저히 신문(訊問)하게 하고, 소동철(蘇東轍)은 그대로 가두게 하였으며, 이영징(李永徵)·형재망(邢載望)은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고, 소철(蘇撤)은 석방(釋放)하게 하고, 수원(水原)의 죄인 엄악발(嚴惡發)은 사형(死刑)을 감하여 변방(邊方)으로 정배(定配)하였으며, 용인(龍仁)의 죄인 주신휘(周信輝)·김광석(金光石)·임익제(林益齊)는 엄악발과 면질(面質)시킨 뒤에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유호(柳灝)의 일은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수량이 아뢰기를,
"청주(淸州)의 병영(兵營)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는 바로 유호의 맏형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금군(禁軍)이 들어갈 때 박창제(朴昌悌)가 칼을 잡고 앉아 있었다고 했는가?"
하니, 이삼이 아뢰기를,
"장교(將校)들은 모두 칼을 차고 있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곤장(棍杖)을 들고 천아성(天鵝聲)333) 을 울렸다고 하니, 박창제의 거조가 매우 해괴하다. 박창제는 이미 형장을 맞다가 죽었는데, 박창제가 원통하다면 유호도 원통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이 만약 범한 것이 있다면 권익관(權益寬)의 죄는 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게 될 것이니, 유호는 일차(日次)334) 에 구애할 것 없이 엄한 형신(刑訊)을 가하여 철저히 핵문하라."
하니, 이삼이 아뢰기를,
"호남(湖南)·영남(嶺南) 사이에 혹은 정팔룡(鄭八龍)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정도령(鄭都令)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포교(捕校)를 보내어 잡아왔더니 손에 철추(鐵椎)를 들고 스스로 배수일(裵守一)이라고 일컬었는데, 위인이 매우 요악(妖惡)스러웠습니다."
하고, 이태좌는 아뢰기를,
"작년에 강원도 감사(江原道監司)가 이종성(李宗城)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정인홍(鄭仁弘)의 증손(曾孫) 가운데 겹눈동자인 사람이 있는데 영남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구 몰려들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잡아다가 살펴본즉 또한 겹눈동자가 아니었으니, 이는 바로 인심을 현혹시키려는 계책이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장살(杖殺)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4월 10일 갑신
정수기(鄭壽期)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시환(金始煥)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임수적(任守迪)을 수찬(修撰)으로, 김호(金浩)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명하여 태인현(泰仁縣)의 파총(把摠)으로서 기(旗)를 휘둘러 군사를 궤산(潰散)시킨 자를 포상(褒賞)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기(旗)를 휘둘러 군사들을 궤산시킨 것이 사력을 분발하여 적을 살상한 것만은 못하지만, 역적 박필현(朴弼顯)이 간담이 서늘해진 것은 실로 여기에 연유된 것이니, 의당 격려 권면하는 방도가 있어야 한다.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또 명하여 평안도를 왕래한 선전관(宣傳官)·금오랑(金吾郞)과 무겸(武兼)·가도사(假都事) 가운데 출사(出使)한 것이 제일 많은 사람은 일체(一體)로 포상하게 하였다. 다음날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진달하기를,
"천총(千摠) 김흡(金潝)은 당초 역적 박필현을 추종했었는데, 어사(御史) 김시형(金始炯)은 말하기를, ‘역적 박필현이 붕궤되어 달아난 것은 김흡 등이 먼저 도망한 것에 연유된 것이다.’고 하고, 감사(監司) 이광덕(李匡德)은 말하기를, ‘김흡이 궤산한 것은 사기(事機)가 기울어진 것을 안 뒤였다.’고 합니다. 비국(備局)에서는 정죄(情罪)을 분명히 알기는 감사가 어사보다 낫다고 하여 이광덕의 말에 따라 정배하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석방(釋放)시키라."
하였다.
명하여 훈련 주부(訓鍊主簿) 김시형(金時亨)에게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박필몽(朴弼夢)을 잡아왔기 때문이다.】
【태백산사고본】 18책 22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123면
【분류】인사-관리(管理)
이제(李濟)를 승지로, 송인명(宋寅明)을 예조 참판으로, 윤휘정(尹彙貞)을 부수찬으로, 윤동형(尹東衡)을 사간으로, 허옥(許沃)을 장령으로, 남태경(南泰慶)을 정언으로, 조현명(趙顯命)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이광좌(李光佐)의 소장(疏章)에 답하고 도승지(都承旨) 이진순(李眞淳)을 보내어 그와 함께 오게 하였다. 이광좌가 양주(楊州)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수필(手筆)로 수십 줄에 달하는 답서(答書)를 내렸는데, 그 가운데에 이르기를,
"경(卿)의 마음은 신명(神明)이 통촉하는 바이고 나도 알고 있는 바이다."
하였다.
4월 11일 을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전경 문신(專經文臣)335) 에게 강독(講讀) 시험을 보였다.
명하여 창원 부사(昌原府使) 구간(具侃)에게는 가자(加資)하고 홍산 현감(鴻山縣監) 조명재(曺命宰)는 승서(陞敍)하게 하였다. 【구간은 이사성(李思晟)을 잡아올 적에 선전관이었고, 조명재는 금부 도사(禁府都事)였다.】 또 명하여 이유익(李有翼)과 박필현(朴弼顯)을 잡아온 금부 도사에는 모두 가자하고 포상하게 하였다.
4월 12일 병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이 끝나자, 무신(武臣) 이행검(李行儉)이 아뢰기를,
"지난 봄 역변(逆變)이 있을 적에 봉수(烽燧)가 하나도 역변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그때 여주 목사(驪州牧使)로서 죽산(竹山)의 영장(營將)에 임시로 차임되어 죽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도(賊徒)들이 경내(境內)에 가득했건만 본읍(本邑)에서 봉화를 올리는 것은 평상시와 같았기 때문에 신이 봉군(烽軍)을 불러서 힐문(詰問)해 보고는 그에 대한 법문(法文)을 강하고서 교습(敎習)시킨 다음 보냈습니다만, 다른 봉대(烽臺)에서는 끝내 향응(嚮應)하지 않았습니다. 각도(各道)에 신칙시켜 법문을 강하고 교습시키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4월 13일 정해
간원(諫院)에서 【정언(正言) 남태경(南泰慶)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어 청하기를,
"역괴(逆魁) 이탄(李坦)336) 에 관한 연좌(緣坐) 및 적몰(籍沒)하는 등의 일을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명하여 대축(大祝)을 파직시키고 주서(注書)·중사(中使)를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시키게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정제(李廷濟)가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근래 모든 관리들이 나태하여 조정의 위의(威儀)가 엄숙하지 못하니, 실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지난번에 바람에 나부끼는 휘장(揮帳) 사이로 보았다는 전교와 중관(中官)에게 감히 누구도 어찌하지 못한다는 분부는 어쩌면 전하의 실언(失言)이 여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아! 임금이 신하에 대해서는 진실로 은밀하게 동정(動靜)을 살펴 지나치게 독책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며, 또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규검(糾檢)하게 하는 것도 불가한 일입니다. 그때 제신(諸臣)들이 과연 어압(御押)이 지나갈 적에 경건한 자세를 어긴 허물이 있었으니, 책벌(責罰)을 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왕언(王言)인 것이고 우려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인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경의 소장을 살펴보니, 매우 절실한 내용이었다. 그 뒤 생각해 보니, 폐단이 있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경의 말을 인하여 그때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거조(擧條)를 효주(爻周)337)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을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이광덕(李匡德)의 장계가 비록 잘못되기는 했습니다만, 전하께서 내린 비지(批旨)의 내용에 사기(辭氣)가 폭발되었으니, 신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으로 전하의 얕고 깊음을 엿보게 될까 두렵습니다. 유사(有司)에게 내어 맡겨 모두 경비(經費)로 귀속되게 한다면 어찌 광명 정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궁방(宮房)에 절수(折受)케 하는 것이야 어느 곳인들 불가할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계속 윤허하지 않으시니, 구간(苟簡)스러움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말인즉슨 좋다. 그러나 지금 유사에게 내어 맡긴다면 그 또한 사의(私意)임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하였다.
반시(泮試)를 설행(設行)하여 생원(生員) 심명열(沈命說)을 직부 전시(直赴殿試)338) 하도록 명하였다.
4월 14일 무자
소대(召對)339) 를 행하였다.
4월 16일 경인
목성(木星)이 정성(井星)으로 들어가고 달이 방성(房星)의 세 번째 별을 범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에게 강경(講經) 시험을 보였는데, 유학(幼學) 박수태(朴壽台)·홍이집(洪以揖)에게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시관(試官)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대사성(大司成)은 으레 주관 당상(主管堂上)으로서 입참(入參)하게 되어 있는데도 조현명(趙顯命)은 훈신(勳臣)이 청현직(淸顯職)을 띠고 행공(行公)하는 것은 미안스럽다는 것으로 끝내 명패(命牌)를 받들지 않았습니다.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의 경우에는 일등 공신(一等功臣)으로서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조현명은 너무 고집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신칙시켜 행공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각도의 관찰사는 과만(瓜滿)340) 이 되기 전에 경관(京官)에 의망(擬望)341)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송진명(宋眞明)이 이수해(李壽海)의 소장을 인하여 상소(上疏)하여 스스로 변해(卞解)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4월 17일 신묘
간원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 판서(判書) 윤헌주(尹憲柱)가 졸(卒)하였다.
4월 18일 임진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참찬관(參贊官) 권익순(權益淳)이 아뢰기를,
"한 관사(官司)에서 초기(草記)342) 를 올려 윤허를 받고 난 뒤에 또 한 관사에서 초기를 올려 윤허를 받았으므로 피차 교대로 청하여 마치 서로 다투는 것 같습니다. 이는 사체에도 미안스러울 뿐만이 아니라 문서(文書)도 매우 번거로운 것은 물론 처분(處分)도 한결같지 않습니다. 피차 당초에 정당(停當)343) 하게 했더라면 어찌 이런 폐단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내용이 진실로 옳다. 본원(本院)에서 각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9일 계사
장태소(張泰紹)·양성규(梁聖揆)·김호(金浩)를 승지로, 윤순(尹淳)을 공조 판서로, 성덕윤(成德潤)을 집의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각사(各司) 구임(久任)344) 인원의 근만(勤慢)에 관한 초기(草記)를 신칙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승지 권익순(權益淳)의 아룀에 따른 조처였다.
4월 20일 갑오
전 집의(執義) 박필주(朴弼周)가 소장을 올려 전에 올린 소장에 대한 비지(批旨)에 의거 스스로 인책하였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곽종근(郭從謹)이 이른바 궐문(闕門)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 말은 매우 두려워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지난날 일을 말한 신하의 말이 미덥지 못한 것이었다면 이는 진실로 국가의 복이겠습니다만, 만일 혹시라도 그렇지 않다면 과감하게 말하는 풍조에 의한 것으로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언직(言職)을 제수하고 곧이어 말한 것 때문에 유찬(流竄)시킨다면, 이는 국가에서 삼사(三司)를 설치한 것이 구언(求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에 대해 죄를 주기 위한 것이 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산림(山林)에서 독서(讀書)를 하고서도 만약 쇄연(洒然)히 속태를 벗지 못한다면 세습(世習)에 골몰한 부류이니, 어떻게 족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大臣)·비당(備堂)345) 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태좌(李台佐)가 청하기를,
"비당(備堂) 2,3원(員)으로 하여금 날마다 돌아가면서 본사(本司)에 사진(仕進)하되 묘시(卯時)에 출근(出勤)하여 유시(酉時)에 퇴근(退勤)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 번 나아와 좌기(坐起)하는 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데, 묘유법(卯酉法)을 시작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정제(李廷濟)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나태한 것이 고질적인 병통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에 대해 기꺼이 심복(心服)하는 경우가 이니면 자연히 용동(聳動)하는 뜻이 없게 됩니다."
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건지산(乾止山)의 일과 같은 경우는 신하들이 심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대사성 조현명(趙顯命)은 아뢰기를,
"작년에 있었던 역변(逆變)은 천고(千古)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지난 겨울 이후로는 더욱 온갖 일에 대해 의욕이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이런 때에 궁방(宮房)에 절수(折受)하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정제는 아뢰기를,
"건지산의 일은 아마도 사의(私意)에 의한 것이었다는 귀결을 면할 수 없을 듯합니다. 신은 전하께서 굉걸(宏傑)스럽게 조처하지 못하시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도헌(都憲)·풍원(豐原)346) ·재신(宰臣)의 말이 모두가 아름답다. 〈건지산은〉 이미 진전(眞殿)347) 의 내맥(來脈)이 아니기 때문에 반은 본부(本府)에 출급(出給)하게 했고 반은 궁방(宮房)에 소속시키게 하였는데, 이는 사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수어사(守禦使) 김재로(金在魯)는 제배(除拜)된 지가 반년이 되었는데도 끝내 행공(行公)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은 장임(將任)에 제수되었는데도 오래도록 행공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외직(外職)에 보임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말한 대로 하교(下敎)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이 아뢰기를,
"화약(火藥)을 제조(製造)함에 있어 삼가지 않는 자는 엄히 다스리고 사사로이 제조하는 자는 사주전(私鑄錢)의 예(例)에 의거하여 엄히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주전(私鑄錢)과 똑같이 논단(論斷)하는 것은 과하니, 곤장(棍杖)을 때리고 변방(邊方)으로 옮기게 하라."
하였다. 이정제가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전하고 또 이탄(李坦)348) 을 노적(孥籍)349) 시킬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正言) 남태경(南泰慶)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전하고 또 아뢰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 정계장(鄭啓章)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것이 날로 극심해져 원망의 소리가 높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1일 을미
전라도 관찰사 이광덕(李匡德)이 장계(狀啓)하기를,
"죽전(竹田)이 있는 각 고을의 전죽(箭竹)을 아울러 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낙안(樂安) 등 세 고을은 수년(數年)을 기한으로 정봉(停捧)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활은 있는데 화살이 없으면, 적을 쏠 수 있겠는가? 도신(道臣)이 몸소 왕년의 일을 경험했으면서도 문신(文臣)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사(武事)를 소홀하게 여겨 경솔히 숫자를 감하기를 청한 것이다."
하고,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특진관(特進官) 이삼(李森)이 청하기를,
"군기시(軍器寺)에 보관되어 있는 고(故)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가 제조한 화차(火車)를 수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화차는 하나의 화차에 총(銃) 50병(柄)을 실었는데, 한끝에다 불을 붙이면 10총이 함께 발사된다.
유명응(兪命凝)·정우주(鄭宇柱)를 승지로, 이현모(李顯謨)를 수찬으로 삼았다.
4월 22일 병신
국청(鞫廳)에서 아뢰기를,
"남편을 시해(弑害)한 죄인 유영(有永)은 이미 승복(承服)하였으므로 정형(正刑)에 처하였으니, 법례(法例)에 따라 집을 헐어 못을 파고 자녀(子女)는 노비를 만들고 읍호(邑號)를 강등(降等)시키게 하소서."
하고, 비답하기를,
"그리 하라."
하였다.
동지사(冬至使) 윤순(尹淳)·조익명(趙翼命)·권일형(權一衡)이 복명(復命)하였다. 윤순이 아뢰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황제(皇帝)가 검은 것을 희다고 해도 군신(君臣)들 가운데 그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이가 없다고 하고 또 잘 살펴서 적발해 내는 것으로 아랫사람을 다스리기 때문에 대소 관원들이 단지 고알(告訐)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조세(租稅)는 4백만 석만 호부(戶部)로 납입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돈으로 만들며, 또 은화(銀貨)를 긁어모은 것이 내탕고(內帑庫)에 가득 차고 넘쳐서 밖에다가 쌓아두기에 이르렀는데, 밖에서 바라보면 마치 빙산(氷山) 같았습니다만, 거민(居民)들은 모두 빈곤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니 말하기를, ‘위에서는 재물을 긁어모으고 아래에서는 백성이 흩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잠상(潛商)의 폐단은 방물(方物)과 세폐(歲幣)에 연유된 것입니다. 인마(人馬)가 심양(瀋陽)에 도착했다가 되돌아올 적에 멋대로 물품을 매매(賣買)하는데도 단련사(團練使)가 첨사(僉使)·만호(萬戶)의 부류들이어서 관질이 낮은 탓으로 탄압(彈壓)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회령(會寧)에서 개시(開市)350) 할 적에 북도 평사(北道評事)가 검찰(檢察)하는 예(例)에 의거하여 평안 도사(平安都事)를 시종(侍從) 가운데에서 풍도와 역량이 있는 사람으로 차임하여 보낸다면 탄압하는 효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또 진달하기를,
"황주(黃州)의 성지(城池)는 유성추(柳星樞)가 병사(兵使)로 있을 적에 개축(改築)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성(本城)에는 예전에 참호(塹壕)가 있었습니다만, 세월이 오래되어 메워져 버렸으므로 백성들이 폐기된 참호 자리에 집을 지은 것이 많았습니다. 성은 있으나 참호가 없으면 어떻게 적을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대로 참호를 파고 민가(民家)를 철거하여 성안으로 옮길 것을 수신(帥臣)에게 분부(分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참호를 복구하게 해야 한다."
하였다.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을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송성명(宋成明)을 부사(副使)로, 박사정(朴師正)을 서장관(書狀官)으로, 구성임(具聖任)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한범석(韓範錫)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3일 정유
포청(捕廳)의 죄인 김연단(金鍊丹)·김태동(金泰東)·임익제(林益齊)는 정배(定配)하고 김봉로(金鳳老)·김서기(金瑞基)는 도배(島配)하며 주신휘(周信輝)·김광석(金光石)은 석방(釋放)시키라고 명하였다.
경상도 의성(義城)·함창(咸昌) 등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4일 무술
헌부(憲府)에서 【지평(持平) 이성효(李性孝)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적(逆賊) 임서호(任瑞虎)는 이인좌(李麟佐)와 원수(元帥)가 되기를 다툰 자이고 민원보(閔元普)·민원해(閔元諧)는 호남과 영남의 여러 적도(賊徒)들과 체결하였으니, 그 정절(情節)로 보아 하나의 적괴(賊魁)인 셈인데 곧바로 장하(杖下)에서 죽었습니다. 청컨대 속히 노적(孥籍)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제 주강(晝講)의 명이 내렸는데, 경연관(經筵官)이 무단히 지레 나간 탓으로 강연(講筵)을 금방 철회하게 되었으니, 청컨대 지레 나간 옥당(玉堂)은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광익(尹光益)·박사정(朴師正)을 교리(校理)로, 서명균(徐命均)을 원접사(遠接使)로, 임수적(任守迪)을 부교리로, 조적명(趙迪命)을 수찬으로 삼고, 권이진(權以鎭)을 특별히 호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정세(情勢) 때문에 체직을 허락하였으나 전망(前望)에 들었던 탓으로 곧바로 제수되었다.】
【태백산사고본】 18책 2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2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4월 25일 기해
호조 판서 권이진이 소장을 올리기를,
"정미년351) 에 받아들인 돈이 11만 8천 3백 냥 영(零)이고 받아들인 포목(布木)이 2천 동(同)이었는데 용하(用下)352) 한 것은 포목은 거두어들인 숫자와 같습니다만, 돈은 12만 7천 냥이나 되어 끝에 가서는 군문(軍門)에서 개대(丐貸)하였습니다. 무신년353) 에는 받아들인 돈이 9만 2천 6백 냥이고 포목이 1천 1백여 동(同)이었는데, 용하한 것은 포목은 거두어들인 숫자와 같습니다만, 돈은 7만 냥 영입니다. 그러나 1년 동안에 누차 큰 비용의 지출을 겪어야 하니 비용을 아끼는 데서 오는 원망은 형편상 반드시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섭향고(葉向高)354) 가 말하기를, ‘이(利)를 추구하게 되면 일에 따라 폐단이 생겨 나는 법이니 십분 비용을 절약하여야만 끝내 평온함을 누릴 수 있다.’고 했는데, 십분절용(十分節用)은 재물을 쓰는 데 있어서의 사자부(四字符)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수입을 가지고 이와 같이 지출함에 있어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또한 세용을 지탱시켜 가면서 국가를 위하여 계획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어찌 또다시 이와 같이 고집한단 말인가? 경외(京外) 백성들의 생업(生業)이 비록 현격하게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이 의뢰하여 생활하는 것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일 경의 의견과 같이 한다면 무엇 때문에 대동(大同)355) 을 설치하였으며 무엇 때문에 공물(貢物)을 설치했겠는가? 이제 다시 경을 기용함에 있어 원망을 떠맡으면서 공무(公務)를 봉행하는 점만을 취한 것이다. 집체(執滯)되는 일에 대해서는 어찌 경에게만 맡겨둔 채 재억(裁抑)을 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大臣)·비당(備堂)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평안 감영(平安監營)의 돈 10만냥을 진휼청(賑恤廳)으로 수송(輸送)해 오게 하는 일에 대해 지난번 계품(啓稟)한 것을 인해 관문(關門)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감사(監司) 윤유(尹游)가 말하기를, ‘조정의 경비가 부족하여 가져다 쓴다면 의당 봉행하여야 하겠지만, 진휼청으로 수송하는 데 이르러서는 쓰고 남는 것을 가져다 바치는 것과 거의 같다.’고 하였습니다. 호조(戶曹)에서 진휼청의 쌀을 대여(貸與)해다가 쓴 것이 5만 석에 이르는데, 감사로 하여금 호조로 수송하게 하고서 진휼청의 것을 도로 갚는 것이라고 한다면 좋겠습니다."
하고, 예조 참판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경외(京外)의 저축이 모두 공허한데 오직 관서(關西)만이 조금 넉넉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가져온다면 유사시의 수요가 점차 고갈될 것입니다. 신의 의견은 조정에서 우선 관서에 전화(錢貨)가 있다고 여기지 말고 잊은 듯이 버려두고서 돈을 주조하여 곡식을 사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대사헌 이정제(李廷濟)는 아뢰기를,
"관서의 천류고(泉流庫)는 호조에서 구관(句管)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교체되어 바뀔 적에 남는 재화가 있으면 이 창고에 실어다 두는데, 호조에서 비용이 부족할 때에는 가져다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국(備局)에서 가져오도록 구처(區處)하라."
하였다. 공조 판서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황해 병사(黃海兵使) 민제장(閔濟章)은 산산 극성(蒜山棘城)을 축조하게 할 것을 비국에 보고하여 왔는데, 극성은 길이가 5리(里)에도 차지 않는가 하면 예전에 축조했던 누토(壘土)가 완연하니, 병사로 하여금 조판(措辦)하여 역군(役軍)을 모집해서 축조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도신(道臣)과 수심(帥臣)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해서 농한기를 이용하여 축조하게 하라."
하였다. 청강 만호(淸江萬戶)를 승진시켜 첨사(僉使)로 삼고 진(鎭)을 좌현(佐峴)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윤순(尹淳)이 연경(燕京)에 사신갔다가 돌아와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명하여 무신년356) 의 역적인 소성(蘇晟)·소면(蘇冕)·소정(蘇鼎)·최용서(崔龍瑞)·김종윤(金宗胤)·이기좌(李箕佐)·정중익(鄭重益)·박제명(朴際明)·안후기(安厚基)·정계윤(鄭啓胤)·김연견(金鍊堅)·이성좌(李聖佐)·조백(趙栢)·이의형(李義衡)·정세윤(鄭世胤)·심수명(沈壽明)·곽장(郭長)·장용(張鏞)·장전(張錪)·이지경(李之暻)·최섭(崔涉)·정조윤(鄭祚胤)·윤취징(尹就徵)·장성(張鋮)·곽중징(郭重徵)·윤희경(尹喜慶)·최필대(崔必大) 【혹 최경우(崔擎宇)라고도 일컬었다.】 ·이태발(李泰發)·김신위(金信渭)·조성좌(曹聖佐)·조덕좌(趙德佐)·권만항(權萬恒)·정세유(鄭世儒)·정원유(鄭源儒)·한억(韓億)·고몽량(高夢良)·김성달(金聲達)·최존서(崔存瑞)·변우익(邊遇翼)·원백주(元伯周)·이수익(李壽益)·이만구(李萬衢)·이홍규(李弘規)·윤태징(尹台徵)·정상림(鄭商霖)·이제시(李濟時)·조경소(趙景傃)·정중건(鄭重建) 등은 노적(孥籍)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게 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역옥(逆獄)에 간련(干連)된 외방의 죄수들에 대해 대신(大臣)이 비당(備堂)·삼사(三司)의 제신(諸臣)들과 빈청(賓廳)에 모여서 노적(孥籍)에 해당되는 자들을 의정(議定)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대신과 제신들이 회의(會議)한 뒤에 아뢰기를,
"원수(元數) 6백 42명 가운데 정범(情犯)이 가장 흉참(凶慘)스런 사람이 46명인데, 노적(孥籍)에 해당이 됩니다. 그 다음 56명은 다시 국안(鞫安)을 조사하여 품재(稟裁)하겠습니다."
하고, 다음날 또 아뢰어 품재할 질(秩)에 오른 56명 가운데 16명을 초출(抄出)하여 노적(孥籍)하는 쪽에다 옮겨 놓았다. 이때에 이르러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응당 노적(孥籍)해야 될 사람이 도합 62명인데, 적(籍)의 사령장(辭令狀)을 받은 자들로서 파총(把摠) 이상만을 초출하였습니다만, 오명항(吳命恒)이 생존해 있을 적에 또한 점치(點置)하여 노적에 해당시켜 두었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곧 군사를 이끌고 대궐(大闕)로 향하려 한 역적들로서 원래 구별을 둘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만, 성상(聖上)의 살리기 좋아하시는 덕을 본받아 뽑고 또 뽑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소정(蘇鼎)·소면(蘇冕)이 육장사(六壯士)에 들었는가?"
하니, 대사성(大司成)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진위(振威)의 소가(蘇哥)·권가(權哥)와 안음(安陰)의 정가(鄭哥)와 용인(龍仁)의 장가(張哥)가 바로 역적의 장본이기 때문에 무거운 쪽으로 의정(議定)했습니다. 조백(趙栢)은 곧 진천(鎭川)의 파총(把摠)인데, 적군들이 형(刑)을 받을 적에 모두들 말하기를, ‘파총 조백의 전령(傳令)이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알지도 못하고 따라갔었다.’했습니다. 이태발(李泰發)은 곧 영남(嶺南)의 역적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포수(砲手)를 거느리고 고령 현감(高靈縣監) 유언철(兪彦哲)을 영부(領付)할 때에 살해할 계획을 세운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고몽량(高夢良)은 팔장사(八壯士)에 든 사람이고 이수익(李壽益)은 종실(宗室)의 후예로서 동서(東西)로 뛰어다니면서 한 곳에 이르러 역적들을 따르지 못하게 되자 또 다른 곳으로 가서 기어이 역적이 되기를 기필한 자입니다."
하고, 송인명은 아뢰기를,
"이만광(李萬光)은 곧 작년에 장전(帳殿)에서 성상(聖上)께서 장계(狀啓)의 내용에 흉언(凶言)이 있다고 하교하시고 내리지 않았던 그 자입니다."
하고, 조현명은 아뢰기를,
"설동린(薛東麟)은 안성(安城)의 역적들이 이른바 부장(副將)이라 한 자였습니다. 안성에서의 전투에서 체포했는데, 이른바 부장은 바로 설동린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습이 매우 흉녕(凶獰)스럽게 생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노적(孥籍)하는 가운데 혹 잘못 혼동되어 들어간 자가 있다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김덕삼(金德三)은 당초에 빼려고 했습니다만, 그가 가지고 있던 깃발을 복수(復讐)라고 이름하여 매우 흉참(凶慘)스러웠기 때문에 넣었습니다. 안후기(安厚基)는 곧 음성의 가쉬(假倅)357) 이고, 소성(蘇晟)은 곧 이배(李培)의 육장사(六壯士) 가운데 든 사람이고, 정중신(鄭重愼)은 곧 정희량(鄭希亮)의 족속붙이며, 이진좌(李振佐)는 곧 이인좌(李麟佐)의 육촌(六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소성 등 48인을 노적(孥籍)할 것으로 논하고, 정재화(鄭再華)·최봉익(崔鳳翼)·정하윤(鄭夏胤)·노이호(盧爾瑚)·유백(柳伯)·박준의(朴遵義)·김세흠(金世欽)·정중신(鄭重愼)·이만광(李萬光)·장성징(張性澄)·소동린(蘇東麟)·유해(柳海)는 아울러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판의금(判義禁) 김시환(金始煥)이 아뢰기를,
"수노(收孥)에 해당되는 부류들을 그의 아비가 정법(正法)에 처해진 해로 한정해야 합니까?"
하자, 제신(諸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의당 감률(勘律)한 해로 한정해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감률한 해로 한정하라고 명하였다. 김시환이 또 아뢰기를,
"민가(閔家)의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는 지난번 조현명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을 인하여 구별하여 소석(疏釋)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적 조상(趙鏛)의 일족(一族)인 여러 조가(趙哥)들은 지난번 대계(臺啓)를 인하여 모두 발배(發配)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본부(本府)에서 아직 복계(覆啓)하여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린 아이에게까지 죄를 주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것을 면할 수 없다. 어떻게 한계를 정하면 사의(事宜)에 알맞게 되겠는가?"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오직 삼척(三尺)358) 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장폐(杖斃)된 사람에게 노적률(孥籍律)을 적용하는 것은 이것이 법 밖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김자점(金自點)의 옥사(獄事) 때 변사기(邊士紀)는 그 정범(情犯)에 절통(切痛)한 점이 있었는데, 지레 죽었기 때문에 노적률을 시행했습니다. 경신년359) 의 옥사 때 조성(趙䃏)에서 변사기의 예(例)를 적용했고 임인년360) 의 옥사 때에도 이 예를 적용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변사기 때문에 법 밖의 율(律)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이 뒤로는 전례로 삼지 말게 하라.’는 명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경신년과 임인년에 이를 전례로 원용(援用)했습니다. 신의 의견은 그 자신이 적진(賊陣)에 달려가 가담한 자는 자복했거나 자복하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노적률을 시행하고, 국옥(鞫獄)에서 장(杖)을 맞다가 죽은 사람은 대계(臺啓)가 비록 발론되었다고 하더라도 상법(常法)을 동요시켜서는 안 됩니다. 민백효(閔百孝)와 조상(趙鏛)은 흉적의 괴수여서 실로 그 종류(種類)를 멸절시키고 싶습니다만, 법 밖의 율(律)은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기 때문에 당시 발계(發啓)한 대관(臺官)도 처음에는 일족을 모두 정배(定配)하려 했다가 추가로 먼 친족과 어린아이는 혼동하여 정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괄(李适)·한명련(韓明璉)에게 1등을 가(加)한 전례에 의거하여 4, 5촌을 한계로 연좌(緣坐)시키는 것은 혹 가하겠습니다만, 온 족속을 모두 정배시키는 데 이르러서는 법 밖의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가(閔家)들은 대대로 흉역(凶逆)한 짓을 했으니, 멸절시켜도 애석할 것이 없다. 그러나 천도(天道)는 호랑이와 이리·사갈(蛇蝎)이라고 해서 모두 멸절시켜 종자도 남기지 못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이다. 종전에 광성(光城)361) 집안의 자손들을 모두 발배(發配)한 것은 실로 너무 심한 것이었다. 조상(趙鏛)은 당초 폐족(廢族)이 아니었는데도 온 족속이 역적질을 했으니, 더욱 통분스럽기 그지없지만 기타의 족속들을 어떻게 모두 정배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강필신(姜必愼)이 이런 의논을 제기했습니다만, 신은 너무 심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심충(沈充)은 역적을 따랐지만 그 아들은 충성을 바쳤으니 어떻게 역족(逆族)을 모두 멸절(滅絶)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윤순(尹淳)은 아뢰기를,
"은(殷)나라의 완악(頑惡)한 백성들을 옮긴 전례362) 에 따라 민가(閔家)의 족속들을 모두 정배하고 있습니다만, 두어 살이 된 아이까지 모두 정배하는 것은 너무 심합니다. 나이에 한정을 두어 참작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아뢰기를,
"나이가 어린 자들은 석방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이정제는 아뢰기를,
"어린 아이는 분간(分諫)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또한 서울에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법 밖의 율(律)을 쓰는 것이 한때의 마음은 통쾌하겠지만, 법을 한 번 저앙(低仰)시키면 어찌 의구(疑懼)스러움을 품는 자가 없겠는가? 여러 민가(閔家)들 가운데 14세 이하는 석방(釋放)하라. 조상은 온 족속이 역절질을 했고, 8인이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으니, 1등을 더하는 율을 써야 한다는 말이 좋다. 그러나 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의 무리에게도 이 율을 적용하지 않았는데 유독 조상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함을 면할 수 없으나, 응당 연좌될 사람 이외에는 논하지 말라."
하고, 또 하교(下敎)하기를,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은 사람을 노적(孥籍)하는 것은 매우 중난(重難)한 것으로, 임인년363) 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개연(慨然)스러움을 느꼈었다. 일단 법 밖의 율(律)을 만든다면 그 뒤에는 이를 적용하게 되는 것이어서 그 폐단이 끝이 없다.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도 노적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법 밖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범(情犯)이 아무리 절통(切痛)하더라도 형장을 맞다가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연좌(緣坐)를 논하지 말라."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형장을 맞다가 죽은 사람 가운데 김정현(金鼎鉉)·임서린(任瑞麟)은 역적을 따르기도 하고 망명(亡命)하기도 하였으니 승복(承服)의 여부에 대해서는 원래 논할 것이 없은즉, 노적(孥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들은 효시(梟示)한 죄인의 예(例)에 따라서 노적해야 한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의심스럽다는 것 하나로 찬배(竄配)된 사람이 많으니, 다시 적적(謫籍)을 조사하여 품지(稟旨)하게 한 다음 소석(疏釋)시키는 것이 의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고, 드디어 전교(傳敎)를 쓰게 하면서 이르기를,
"역옥(逆獄)은 이제 수쇄(收殺)364) 하였는데, 작년에 대계(臺啓)와 대소(臺疏)를 인하여 정배된 자가 많은데 이 많은 사람들을 암담(黯黮)하고 의심스러운 상태로 방치해 둘 수는 없다. 국옥(鞫獄)에 관계된 사람과 죄명(罪名)이 명백한 사람 이외에는 금오 당상(金吾堂上)과 추관(推官)이 초입(抄入)하여 소결(疏決)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외방의 역적 가운데 효시(梟示)된 자와 연좌 및 수노(收孥)된 부류들에 대해서는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내지 말고 각기 그곳 감영(監營)에서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금령(禁令)이 있은 뒤에 새로 건립한 서원(書院)은 아울러 편액(扁額)을 철거하라고 명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서원은 실로 그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양정(良丁)이 줄어들고 사습(士習)이 비루하여진 것이 여기에 연유된 것이 많기 때문에 숙종(肅宗) 때 병을 조섭(調攝)하는 가운데도 직접 아무 서원은 헐고 아무 서원은 그대로 두라고 결단하였고 또 성묘(聖廟)에 종사(從祀)된 사람일지라도 중첩되게 서원을 설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하고, 김시환은 아뢰기를,
"지방에서 사당(祠堂)을 세운 것은 곧 사람이 죽은 뒤에 향현사(鄕賢祠)에서 제사지내는 뜻이니, 금단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윤순은 아뢰기를,
"적인걸(狄仁傑)365) 이 오(吳)·초(楚) 지방의 모든 사당(祠堂)을 다 헐어 버리고 단지 태백(泰伯)과 오자서(吳子胥)의 묘당(廟堂)만 그대로 두게 하였습니다. 건립한 서원(書院)은 총사(叢祠)366) 와는 다른 것인데, 하루아침에 그 위판(位版)을 묻어 버린다면 경상(景像)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아직 선액(宣額)하지 않은 서원은 그 원유(院儒)를 바로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고 또 구청(求請)하는 폐단을 금하여 막는다면 그 서원은 의당 저절로 훼파(毁破)되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도덕(道德)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서원을 중첩으로 설립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서원은 당파(黨派)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고 있다. 근래 창건을 금하는 법이 매우 엄하였기 때문에 서원을 건립하겠다는 소장(疏章)을 당초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이미 건립한 서원을 하루아침에 모두 헐어 버리면 유생(儒生)들이 반드시 억울한 마음을 품을 것이지만, 선조(先朝)에서 성명(成命)을 내렸는데도 아직껏 편액(扁額)을 철거하고 있지 않은 것은 엄하게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편액을 철거하고 난 다음에 서원으로 대우해 주지 않는다면 헐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절로 헐게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새로 건립한 서원의 편액은 철거하라고 명하였다. 이정제가 전에 아뢴 것을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민원보(閔元普)를 노적(孥籍)할 일은 안무사(按撫使)의 장계(狀啓)를 인하여 비국(備局)에서 회계(回啓)했고 이어 금부(禁府)에 분부(分付)했습니다만,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원(政院)에서 또한 재촉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전후 당상(堂上)들과 해당 승지를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리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남태경(南泰慶)이 전에 아뢴 것을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7일 신축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외방의 연좌(緣坐)된 죄인은 토포사(討捕使)와 지방관(地方官)이 안동(眼同)367) 하여 교형(絞刑)에 처한 후에 계문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사간(司諫) 윤동형(尹東衡)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기 도사(京畿都事) 이종성(李宗城)은 경악(經幄)에 출입하면서 임금을 도운 것이 많았는데도 좌막(佐幕)368) 에 보직(補職)되어 나가서는 정체(政體)가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도사에서 체직시켜 관직(館職)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고 전관(銓官)을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전 판서(判書) 유명홍(兪命弘)이 졸(卒)하였다.
4월 28일 임인
병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각도의 친기위(親騎衛)의 별무사(別武士)들 가운데 우등(優等)으로 몰기(沒技)369) 한 사람들에게 시상(施賞)하는 일은, 청컨대 출신(出身)의 경우에는 변장(邊將)에 제수하고 한량(閑良)의 경우에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며 관노(官奴)들은 아울러 면천(免賤)시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4월 29일 계묘
장령(掌令) 박내우(朴來羽)가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역적 심유현(沈維賢)은 아직도 집을 헐고 못을 파는 벌을 면하고 있으며 역적 이탄(李坦)370) 에 대해서는 아직 수노 적산(收孥籍産)을 거행하지 않았고, 기타의 역적들도 아직 실정을 자복하지 않고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건단(乾斷)371) 을 내리시어 노적(孥籍)에 해당되는 사람은 노적을 거행하고 국문(鞫問)해야 할 사람은 국문하여 혹시라도 망설이는 일이 없게 하소서. 사행(使行)이 돌아올 적에 은(銀)을 내려준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근심스럽고 개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이번에 준 1만 정(錠)의 은화(銀貨)는 그쪽에서 우리에게 준 것도 명분이 없는 것이고 우리가 받은 것도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물화(物貨)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올 수 있단 말입니까? 전래(傳來)하는 말에도 ‘남의 은혜를 받게 되면 뒤에 반드시 남의 걱정을 걱정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항(閭巷)의 필부(匹夫)라도 남에게서 밥 한 그릇의 은혜를 받으면 오히려 부끄러움으로 마음이 위축되어 불안한 것인데, 당당한 천승(千乘)의 임금으로서 갑자기 대국(大國)에게 명분없는 선물을 받았으니, 어찌 먼 장래를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사명(使命)을 받든 신하는 당연히 좋은 말로 극력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본국의 역변(逆變)은 외적(外賊)이 침략해 온 것이 아니고 강역(疆域) 안에서 숨어 있는 적도들이 절발(竊發)한 것이다.
우리 임금께서 내린 처치(處置)가 사의에 맞았기 때문에 큰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고, 따라서 나라에서 재화를 허비한 것이 없어 장사(壯士)들에게 상을 내린 것이 이미 흡족해서 빠뜨린 것이 없다. 이제 소국(小國)에 변이 있었던 것을 인하여 대국에서 번거롭게 은상(恩賞)을 내리기에 이른 것은 실로 의의가 없는 것이다. 돌아가서 우리 임금께 바치면 반드시 사양할 것이어서 감히 받을 수가 없다.’고 했어야 했는데, 애석하게도 사명(使命)을 받든 신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야 바로잡을 수가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바로잡을 수가 있으니, 이번 사개(謝价)의 사행(使行)에는 굳게 사양하는 뜻을 갖추어 진달하기를, ‘소국의 장사(將士)들이 적(賊)을 토벌한 하찮은 수고로움은 있었지만 본국에서 이미 시상(施賞)했는데, 지금 이렇게 상을 주는 데 쓰라고 내려준 은자를 받고 보니 끝내 불안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래도 우리가 받기를 사양하는 예(禮)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으레 내려 주는 선물로 여겨 단지 기뻐하고 감격해 하는 뜻만 보인다면 대국에게 수모를 받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반드시 후세에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윤허하지 않는 데에는 의도가 있다. 소장의 끝에 기재한 일은 그 뜻이 강개하기는 하지만 사체를 깨닫지 못한 것은 크다."
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박내우(朴來羽)의 소장(疏章)이 도리에 있어 정대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사세를 알고 우려한 것도 두루 갖추어졌습니다. 이 일은 본디 깊고 은밀하여 깨닫기 어려운 의리가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사명(使命)을 받든 신하뿐만이 아니라 조정의 대소 신하들도 이 일에 대해 임금 앞에서 의논한 것이 많았지만 그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하나의 박내우가 말을 했는데도 임금이 또 그의 말을 써주지 않았으니, 애석합니다.
지평(持平) 정형복(鄭亨復)이 소장을 올리기를,
"작년의 역변은 조종(祖宗)의 3백 년 기업(基業)이 하마터면 전하의 손에서 실추될 뻔했습니다. 아! 이것을 어떻게 그저 시운(時運)에 관계된 것이라고만 핑계댈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실로 전하의 마음에 하나의 ‘사(私)’자를 제거하지 못한 데에서 연유된 것으로 그 말류(末流)의 폐해가 여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간간이 한두 명의 충당(忠讜)스런 신하가 있어 죽음을 무릅쓰고 승여(乘輿)의 앞에 나아가 숨김 없는 바른 말을 했습니다만, 지금 신이 진달하려 하는 것도 한두 신하들이 이미 전에 말씀드린 것이어서 감히 중복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구구한 마음에서 우려스럽고 개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곧 정미년372) 7월 초4일에 내리신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언급된 사문(斯文)에 관한 일입니다. 아! 요순(堯舜)을 본받으려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 전교(傳敎)의 내용에 거듭거듭 일컬어졌습니다만, 정신(廷臣)을 진퇴(進退)시킬 즈음에 갑자기 우리 숙묘(肅廟)의 병신년373) 처분(處分)으로써 당습(黨習)을 진정시키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으니, 애석하게도 전하께서 이에 실언(失言)하신 것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 성고(聖考)374) 의 이 훈사(訓辭)는 곧 전하께서 옛날 직접 그 명을 받든 것이었으니, 이는 바로 요순(堯舜)이 서로 주고받은 심법(心法)과 같은 것입니다.
대저 군신(君臣) 상하가 오직 마땅히 이를 본받고 준수하여 어기지 말고 마음에 새겨 복행(服行)해야 하는 데도 전하께서는 조금도 삼가고 근엄함이 없이 쉽사리 의논을 제기하셨습니다. 신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성충(聖衷)이 격노하고 번뇌하여 위노(威怒)가 갑자기 폭발하시는 바람에 혹 서서히 따져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까? 아! 이 일의 근원은 본디 사문(斯文)의 시비(是非) 때문에 나온 것이요, 당초 조정의 용사(用捨)에는 관계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국면(局面)은 아침에 뒤집어지고 저녁에 다시 또 번복되어 시국의 양상은 천변 만화의 상황이었습니다만, 밝게 게시된 모훈(謨訓)과 확실히 결정된 시비(是非)는 진실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일번인(一番人)을 진용(進用)할 즈음에 참여시켜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 세월과 세대가 점점 멀어져 갈수록 성언(聖言)이 점차 인멸(湮滅)되어 가니, 뒷세상에서 성고(聖考)의 유교(遺敎)를 보고서 만일 혹시라도 시비의 근원을 따져보지 않고 오로지 진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면, 이에 선왕(先王)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반드시 세상에 마구 행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보책(寶冊)의 광명 정대한 모훈이 끝내는 날로 가리워지고 달로 희미해지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니, 속히 비망기를 도로 들여오게 하여 사문(斯文)을 논한 한 구절 한만(汗漫)한 말을 산개(刪改)해서 내림으로써 계술(繼述)하는 성덕(聖德)을 밝히소서.
돌아보건대, 지금 종사(宗社)가 의탁하는 바와 신민(臣民)의 기대가 오직 전하의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매 어찌 싸늘한 위태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만기(萬機)를 접응하심에 있어 근휼(勤恤)이 너무 지나쳐서 보고 듣는 데에는 반드시 총찰(聰察)을 생각하게 되고 사령(辭令)은 섬세한 데에 힘써 자질구레한 일을 빠뜨리지 않고 번거롭고 잗단 것을 꺼리지 않으십니다. 삼가 바라건대, 나아가서 정무(政務)를 보실 때에는 대체(大體)를 유지하면서 간략하고 신중히 하기를 힘쓰시고 들어와서 한가히 거처하실 때에는 사려(思慮)를 줄이고 심신(心神)을 편안하게 하심으로써 화평한 분위기를 보존하시어 길이 국운(國運)을 공고하게 하실 것을 유념하소서. 옛날 송(宋)나라의 신하인 왕소(王素)는 마음을 깨끗이 하여 욕심을 적게 하는 것으로 심신을 수양하는 묘결(妙訣)로 삼았는데, 신도 이 네 글자[淸心寡欲]를 전하를 위하여 아뢰고자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장의 끝에 면계(勉戒)하는 말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연유된 것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미년 가을의 비망기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겠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정제(李廷濟)가 소장을 올려 파직시킨 유신(儒臣)들을 뽑아서 서용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숙종 대왕께서는 학문의 강론에 부지런하시어 법연(法筵)과 소대(召對)가 거의 거르는 날이 없게 했습니다. 고(故) 재상(宰相) 이탄(李坦)은 오랫동안 영관(瀛舘)375) 에 숙직했었는데 간혹 1백여 일이 될 적도 있었습니다. 지난번 법연을 바야흐로 열었을 적에 유신이 지레 나간 것을 인하여 그 이후로는 계속 개강(開講)하라는 명이 없으니, 의당 상하가 서로 면려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4월 30일 갑진
경기 관찰사가 장계(狀啓)하기를,
"지돈녕(知敦寧) 김재로(金在魯)의 본직(本職)과 겸대(兼帶)한 수어사(守禦使)에 대해 병이 위중하여 올라갈 수가 없다는 것에 관해 계자(啓字)를 찍을 적에 곧 중관(中官)376) 이 혼동하여 찍어서 내려보냈으니, 중관을 파직시키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권혁(權爀)에게 삭출(削黜)시키는 법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권혁은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의 종자(從子)이다. 소장을 올리기를,
"신은 이수해(李壽海)와 함께 7월에 같이 사청(史廳)에 사진(仕進)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수해는 사사(史事) 때문에 죄가 도배(島配)당하기에 이르렀는데 신은 도리어 죄로 인하여 영광을 누리게 된다면, 사람들이 장차 그 나머지를 먹지 않을 것입니다. 이양신(李亮臣) 등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과연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아! 저사(儲嗣)377) 를 세워 국정을 대리(代理)하게 한 의리는 광명 정대한 것이어서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는 것입니다. 당시 제신(諸臣)들의 말은 진실로 종사(宗社)를 위한 막대한 계책을 깊이 염려하고 선왕(先王)378) 께서 노고를 나누게 해 달라는 하교를 받들어 따른 데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괴로운 마음과 피어린 정성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일종의 흉악하고 추잡한 무리들이 저사를 세운 것을 놀랍고 당혹스럽다고 했고 국정을 대리하게 한 것은 은밀히 권병(權柄)을 빼앗으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마침내는 신임(辛壬)의 화(禍)379) 를 일으켜 계책을 결정한 제신(諸臣)들을 도륙(屠戮)함으로써 드러나게 동요시킬 계책을 부리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미년380) 이후 제신들에게 추가로 죄를 가함에 있어 일체 전철(前轍)을 답습한 채 다시 징계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충역(忠逆)의 도치와 이륜(彛倫)의 단절이 여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삼가 듣건대, 성교(聖敎)가 누차 여기에 언급되어 그들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하교하기도 하고 그들이 원통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도 하교하였다고 합니다. 아! 전하(殿下)께서 깨닫지 못하였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그들이 역적(逆賊)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또 그들이 억울하다는 것을 아셨더라면 또 어찌하여 계속해서 단서(丹書)381) 에 그대로 둠으로써 큰 의리와 큰 시비로 하여금 날로 더욱 어두워지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이광좌(李光佐)의 소장(疏章)에 의거하여 대략 변해(卞解)하여 보겠습니다. 그의 소장에서 ‘선왕(先王)께서 업무를 보지 않으려는 것을 간쟁했고 성상(聖上)의 대리(代理)를 기필코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그의 허다한 죄상이 모두 대리하는 것을 힘써 막은 데에서 나왔으므로 그가 온 힘을 기울여 벗어나기를 도모하는 것도 또한 이 일단(一段)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일을 보지 않으려 한 것과 국정을 대리하게 한 것을 억지로 나누어 두 가지로 만듦으로써 여기에 의거하여 스스로 변해할 계책을 세우려 한 것입니다. 만일 이광좌의 마음이 단지 선왕께서 일을 보지 않으려 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데에 있었고 전하께서 대리하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면 당시 은밀히 권병을 빼앗으려 한다는 흉언(凶言)과 왕위(王位)를 선양(禪讓)받으려 한다는 패설(悖說)에 대해 그 말을 듣기는 당연한 일례(一例)로 여겼고 덩달아 부화 뇌동(附和雷同)하면서 끝내 한 마디도 저척(詆斥)하는 것이 없었던 것은 또한 무슨 의도에서였단 말입니까?
지난 봄 사대신(四大臣)을 추가로 죄줄 적에 곧바로 연차(聯箚)를 올린 것으로 안건(案件)을 삼아 역적을 다스리는 율(律)로 감단(勘斷)하면서 조금도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었던 것은 또 무슨 의도에서였단 말입니까? 그의 마음의 소재를 환히 알 수 있는데도 이에 감히 ‘힘써 막았다[力遏]’는 두 글자에 대해 변명하기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정청(庭請)하던 날 밤 기세가 등등하여 큰 소리 치던 때에 견주어보면 그 의기(意氣)가 8, 9분은 감소되었는데도 오히려 죄를 모르고 있으니, 그 또한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가 제신들을 깊이 증오(憎惡)한 것은 연차(聯箚)에 있는데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또 도리어 수미(首尾)가 세 번이나 바뀐 말을 가지고 돌려서 단안(斷案)을 만들었으니, 그의 이야기가 더욱 심하게 군박(窘迫)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대리(代理)하게 하라는 전교가 갑자기 뜻밖에 내려지자 국정을 담당하고 있던 신하들이 황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차마 그 명을 봉승(奉承)할 수가 없었으니, 이것이 서로 이끌고 나아가 정청(庭請)하게 된 이유였던 것입니다. 정청은 더욱 번거로워졌지만 성청(聖廳)은 더욱 아득해져서 노고를 나누겠다는 뜻이 성지(聖旨)에 더욱 간절하여 정유년382) 의 고사(故事)에서도 상고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차자(箚子)를 올려 절목(節目)을 청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온종일 면대(面對)하기를 요구하던 끝에 비로소 함께 들어오라는 명을 받들게 되었고, 지척(咫尺)에서 천안(天顔)을 모신 자리에서도 지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올린 것을 혐의하지 않고 기필코 소청을 이루게 해 줄 것을 기약했습니다. 끝에 가서 비망기(備忘記)를 환수(還收)하게 한 것은 그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제신(諸臣)들의 마음은 전후 한결같이 성실하여 모두가 선왕(先王)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털끝만큼도 그 사이에 사의(私意)가 끼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정청을 하고서 연차(聯箚)를 올렸고 연차를 올리고서 청대(請對)한 것을 가지고 억지로 이런 말을 가하여 그들의 충성을 덮어버리고 두 마음을 품은 것으로 단정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양신(李亮臣) 등이 열거하여 논한 것은 모두 사실에 의거한 것으로 변명할 말이 없어지자, 하는 말은 ‘끝없이 송죄(訟罪)할 뿐이다.’라느니 ‘후회 막급이다.’라느니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아! 이미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탁용(擢用)한 것에 대해 송죄(訟罪)한다고 했고 또 역적 박필몽(朴弼夢)을 도배(島配)에서 출륙(出陸)시킨 것을 추후하여 후회했다고 하였으니, 오히려 징계할 줄을 알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임금을 향한 단심(丹心)이라느니 인력(人力)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를 가지고 이진유(李眞儒)·이명언(李明彦) 두 역당을 극력 신구(伸救)했으니, 그가 뉘우친다고 한 말을 어느 누가 믿겠습니까? 저 이양신 등은 단지 임금이 있는 것만 알 뿐 자신의 몸이 있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일을 논하였는데, 그 사의(辭意)가 명백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문득 다 죄를 받았고 유독 신처럼 용렬한 자만이 외람되이 논사(論思)하는 반열(班列)에 충원(充員)되었으니,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고 국체(國體)에 손상을 입힌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속히 신의 본직과 겸직 두 직임을 삭제시켜 주시면 공사(公私) 모두가 다행이겠습니다.
아! 저 중주(中州)383) 를 바라보니 명(明)나라가 망한 지 1백 년이 되었고 따라서 우리 나라에 베풀었던 유택(遺澤)도 날이 갈수록 더욱 멀어져 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시 천조(天朝)384) 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한두 명의 뜻을 같이하는 대신(大臣)들과 함께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강명(講明)한 것을 힘입어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고 또한 우리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도 선지(先志)385) 를 잘 계술(繼述)하여 대의(大義)를 표장(表章)하였으므로 지금에 이르러서도 사대부(士大夫)들이 명나라를 높이는 마음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문(斯文)에 죄를 얻은 무리들이 대의(大義)를 원수로 여겨 날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달려 들어가는 까닭으로 한 조각도 《춘추(春秋)》를 펴놓고 읽을 만한 깨끗한 곳이 거의 없으니, 아!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사신(使臣)의 임무를 맡은 자가 그 옛 서울을 갔을 적에는 의당 서리(黍離)386) 의 감회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윤순(尹淳)은 도리어 청(淸)나라 오랑캐의 종이에다 붓을 휘둘러 황화(皇華)387) 의 고사(故事)를 흉내내어 말단적인 재예(才藝)를 자랑한 댓가로 증여(贈與)한 폐물(幣物)을 받아가지고 의기양양한 태도로써 스스로 광영(光榮)으로 여겼으니, 원근(遠近)에서 전해 들은 사람들은 놀라고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 비풍(匪風)·하천(下泉)388) 의 생각을 이들에게 따질 수는 없습니다만, 끝내 아픔을 참고 원망을 머금은 채 사세에 몰려 부득이했다는 뜻이 이들 때문에 일체 무너져 버리고 말았으니, 그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명규서(明揆敍)가 왔을 적에 우리 나라의 문물(文物)을 보기를 원했습니다만,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들 수치스럽게 여겨 드디어 천류(賤流)인 홍세태(洪世泰)로 하여금 응접하게 했었습니다. 윤순이 그때에도 이미 시(詩)에도 능하고 글씨도 잘 쓴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자천(自薦)해서 그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고서 이에 오늘날 스스로 저들의 나라에 가서 자신의 재능을 판단 말입니까? 더구나 윤순이 처신(處身)해야 할 의리는 더욱 다른 사람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만일 오랑캐와 상대했을 즈음에 정묘년389) 의 일을 생각했다면 또한 그의 이마에 땀이 흘렀을 것입니다. 비록 〈사신으로〉 가는 일에 핍박되어 사정(私情)을 감히 말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오랑캐의 조정에서 기예(技藝)를 자랑하면서 이를 훌륭한 일을 한 것처럼 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지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양조(兩朝)390) 의 지사(志事)를 잘 추모하여 바야흐로 대의(大義)를 밝히고 있는 중인데 봉사신(奉使臣)이 성의(聖意)의 의도하는 바를 잘 몸받지 않고서 이에 도리어 이와 같은 짓을 함으로써 소중화(小中華)391) 의 기풍을 더럽혔으니, 신은 특히 절통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권혁이 이양신·이수해를 영구(營救)하여 비호하였고 소장의 끝에 기재한 일은 그저 풍문(風聞)만 들은 것으로 비난이 너무 심하였으니, 더더욱 놀랍다. 의리(義理)의 회명(晦明) 때문에 이 사람을 부추기고 저 사람을 억제하였으니 만약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패려스러운 사습(士習)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삭직(削職)시킬 것을 명하였다.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의금부에서 이홍매(李弘邁)의 의언(議讞)할 일로써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니, 체통은 잃는 것을 면치 못한 처사였습니다. 청컨대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추고(推考)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판의금 김시환(金始煥)에게 하문하니, 김시환이 대답하기를,
"이홍매가 대동미(大同米)를 작전(作錢)하여 9백 20여 냥을 모두 사사로이 썼다는 것을 자복(自服)하였습니다. 율문(律文)에 의하면 장물(贓物)이 40관 이상이면 모두 극형(極刑)에 처하게 되어 있는데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박치원(朴致遠)은 참형(斬刑)에 처하지 않고 유독 이홍매(李弘邁)만 참형에 처하는 것은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문안(文案)을 상세히 상고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태좌가 진달하기를,
"변란이 있은 뒤에 영남(嶺南)에는 이종성(李宗城)을 보내어 효유(曉諭)하였습니다. 조현명(趙顯命)이 이제 실록(實錄)의 봉안(奉安)으로 인하여 호남(湖南)으로 내려가게 되었으니, 청컨대 지나는 길에 따라 효유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이어 호서(湖西)도 똑같이 효유하도록 명하였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이 청하기를,
"북경(北京)에서 상은(賞銀)으로 준 것은 출정(出征)한 장사(將士)들 이외에 호위(扈衛)한 군병들에게도 똑같이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삼이 아뢰기를,
"삼군문(三軍門)392) 의 순라(巡邏)는 고례(古例)에 의거하여 날짜를 나누게 하여 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태좌가 작년에 대언(臺言) 때문에 찬배(竄配)된 자에 대해 품달하였는데 이제겸(李濟兼)에 이르러 이태좌가 아뢰기를,
"변란이 일어났을 적에 자기 집으로 달려갔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이지간(李之榦)·김옥(金沃)·이만춘(李萬春)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이르기를,
"석방(釋放)시키라."
하였다. 한사억(韓師億)에 이르러서 이태좌가 아뢰기를,
"이 사람은 잡류(雜類)들을 체결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감등(減等)시키라."
하였다. 권서경(權敍經)에 이르러서도 임금이 이르기를,
"감등시키라."
하였다. 정사효(鄭思孝)에 이르러서는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정사효의 죄는 남쪽 지방 사람들이 자자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박필현(朴弼顯)이 아무리 흉악하다고 하더라도 만약 감사(監司)와 서로 통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감히 군사를 몰고 곧 바로 영하(營下)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 이집(李㙫)은 아뢰기를,
"끝내 박필현을 추포(追捕)하지 않은 점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하였으며, 예조 참판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박필현이 믿는 데가 있었기 때문에 군사를 몰고 곧바로 이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박경순(朴景淳)·이경좌(李慶佐)·이정좌(李楨佐)·이명좌(李命佐)·이천록(李千祿)·강백(姜栢)에 이르러서도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이소(李炤)에 이르렀는데, 이소는 이항(李杭)393) 의 아들이다. 임금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때 좌죄(坐罪)를 면한 사람인데 지금 어떻게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대사성(大司成)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 사람은 행동거지가 흉악하여 그 머리털을 풀어내린 채 하늘의 해를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炤)에 대한 계사(啓辭)는 곧 이하원(李夏源)이 발론한 것인데, 창졸간에 환란을 우려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깊은 뜻은 없는 것이다. 본군(本郡)에 안치시키고 그곳의 관장(官長)으로 하여금 구속(拘束)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 전대로 방귀 전리(放歸田里)394) 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배윤명(裵胤命)에 이르러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 사람은 상당히 재주가 있지만 불길(不吉)한 자라고 합니다."
하고, 이집은 아뢰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배윤명의 인품은 매우 간사하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김해명(金海鳴)·전근사(全近思)·김태수(金泰壽)·이문표(李文標)·이희령(李熙齡)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이르기를,
"석방(釋放)시키라."
하였다. 이태원(李太元)에 이르러서는 이태좌가 아뢰기를,
"교문(敎文) 가운데 한 글자를 도와서 고치게 한 자입니다."
하고, 조현명은 아뢰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이른바 붕우(朋友)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한 사람은 곧 이태원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석삼(鄭錫三)이 전에 이태원이 글자 하나를 도와서 고치게 한 것이 무슨 중한 죄가 되겠느냐고 했었다. 특별히 감등(減等)시키라."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임상극(林象極)에게 적용할 율문(律文)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만일 역률(逆律)을 적용한다면 어미는 계집종이 되어야 하고 아들은 교형(絞刑)에 처해야 하는 데, 그의 아들과 조카들은 모두 노예가 되어 절도(絶島)에 가 있고 그 어미는 집에 있으니, 율명(律名)을 낙찰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의 조카는 아들에 견주어 볼 때 차등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조현명은 아뢰기를,
"임상극(林象極)은 경종 대왕(景宗大王) 8년이라고 적진(賊陣)에 보내는 보장(報狀)에 썼으니, 정상(情狀)이 매우 흉악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8년이라고 한 말은 매우 흉녕스럽다. 이 사람을 어떻게 논할 수 있겠는가?"
하고, 임금이 또 이르기를,
"민가(閔哥)와 윤가(尹哥)는 참으로 난형 난제(難兄難弟)인 자들이다. 윤가 일족(一族)을 한 섬에다 안치시킨 것은 또한 우려스러운 점이 많으니, 민가의 예(例)에 의거하여 14세 이하는 석방(釋放)시키라. 그 나머지는 모두 민가의 예에 의거하여 바다나 육지로 분배(分配)한다면 그들에 있어서는 양이(量移)395) 가 될 것이고 또 뒷날의 걱정도 없게 될 것이다. 민(閔)·윤(尹)의 족류(族類)들과 이인좌(李麟佐)의 족당(族黨)들을 정배(定配)한 곳의 관장(官長)에게 분부하여 그들을 착실하게 점고(點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채팽윤(蔡彭胤)과 참의 이승원(李承源)이 형조의 죄인을 초출(招出)한 책자(冊子)를 올렸다. 이여(李畬)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김태윤(金泰潤)·김화윤(金華潤)에 이르러 채팽윤이 아뢰기를,
"김태윤은 김언량(金彦良)과 종형제(從兄弟) 사이인데도 경사(慶事)나 흉사(凶事)에 서로 내왕이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석방시키라."
하였다. 유뇌(柳耒)·유매(柳楳)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유내(柳徠)의 동생(同生)이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남하운(南夏運)에 이르러 이태좌가 아뢰기를,
"남하운은 곧 이의징(李義徵)의 여서(女壻)인데, 유내와 서로 친밀합니다."
하고, 윤동형(尹東衡)은 아뢰기를,
"경솔하게 의논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석방시키라."
하였다. 이심(李審)·전익민(全益敏)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심상관(沈尙觀)에 이르러 이태좌가 아뢰기를,
"한(韓)·유(柳)의 자리 위에 한 그루 소나무[韓柳席上一株松]’라고 한 등등의 말은 의심스럽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아뢰기를,
"‘강녀(江女)와 중매로 결혼했다[江女媒婚]’는 말은 곧 수적(水賊)과 교통(交通)하여 선척(船隻)을 살 때의 은어(隱語)라고 합니다."
하였으며, 송인명은 아뢰기를,
"심성연(沈成衍)은 무고(誣告)한 것 때문에 복법(伏法)되었는데 옥사(獄事)의 정상이 음비(陰祕)스러우니, 경솔히 석방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조현명은 아뢰기를,
"신이 도순무(都巡撫)의 진중(陣中)에서 올라올 적에 양지(陽智)의 좌찬진(佐贊陣)에 이르러 들은 바에 의하면, 죽산(竹山)의 미륵촌(彌勒村)에 사는 송가(宋哥)의 일문(一門)이 모두 역적을 따르고 있는데 바야흐로 술을 빚고 곡식을 쌓아놓고서 역적을 영접할 계책을 세우고 있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심성연이 심상관(沈尙觀) 등을 발고(發告)하기에 이르렀고 그 뒤에 송가(宋哥)들이 옥사(獄事)에 많이 개입되었으니, 신이 좌찬진에서 들은 것과 서로 들어맞았습니다. 심상관의 옥사는 매우 수상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유경유(柳慶裕)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임인옥(壬寅獄)에 들어 있는 자이다. 이 또한 의심스러운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는 외로운 쥐요 썩은 병아리와 같은데 따질 것이 뭐 있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유경유의 임인옥(壬寅獄)은 매우 수상했는데도 김일경(金一鏡)이 두루 가로막아 감싸주었기 때문에 오서종(吳瑞鍾)은 지레 죽었고 따라서 유경유는 또한 철저히 신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일경이 오서종과 유경유를 철저히 신문하지 않은 것은 그의 소행이 반드시 발로(發露)될 것을 염려한 때문인 것이다."
하고, 이어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신정모(申正模)는 어떠한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정모가 거창 현감(居昌縣監)으로 있을 때 적병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신정모가 도주했기 때문에 감사(監司)가 곤장을 때렸습니다. 박당(朴鏜)은 청주 목사(淸州牧使)로서 도주했었는데 비국(備局)에 보고한 일이 있다고 하므로 다시 목사에 제배(除拜)했습니다. 그런데 신정모는 아직도 적적(謫籍)에 들어 있으니, 신은 그것이 균일한 조처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석방시키라."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한일운(韓日運)의 일도 신정모의 경우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도 석방시키라."
하였다. 김시환(金始煥)이 이경열(李景說)을 금고(禁錮)시키라는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듣건대, 유정(柳綎)은 치적(治績)이 도내(道內)에서 제일이라고 하고 이경열은 매우 탐오스러웠다고 한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전 청주 목사(淸州牧使) 조언신(趙彦臣)은 변란을 당하여서도 임소(任所)로 달려가기를 우후(虞詡)396) 가 조가(朝歌)로 달려간 것과 다름없이 하여 남은 역적들을 쓸어 없애고 민인(民人)을 안집(安集)시켰습니다. 그리고 어사(御史) 김시형(金始炯)의 장계에 의거하여 살펴본즉 치적이 도내에서 으뜸이라고 했고 또 적괴(賊魁)의 아내인 자정(紫貞)이 고한 것을 올려보냈는데, 거기에 역적들의 정절(情節)이 낭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정법(正法)에 처하기도 하고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기도 하였는데, 이번 원종(原從)397) 에서 누락되었으니, 의당 추가로 넣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숙마(熟馬)를 사급(賜給)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변란이 일어났을 적에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의 공이 가장 많았으니 의당 녹훈(錄勳)되었어야 하는데, 지금은 일이 지났습니다. 군관(軍官) 김진옥(金振玉)은 대구(大丘)의 영장(營將)이 병이 있다는 것으로 가영장(假營將)에 차임했었는데, 군사를 이끌고 합천(陜川)에 이르러 많은 군공(軍功)을 세웠습니다만, 원종(原從)에서 누락되었습니다. 고령 현감(高靈縣監) 유언철(兪彦哲)은 처음 이보혁(李普赫)의 중군(中軍)으로서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가서 적로(賊路)를 지켰고 합천의 역적들이 평정된 뒤에는 우두령(牛頭嶺)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고서 정희량(鄭希亮)의 진루(陣壘)를 핍박하였습니다. 초계 군수(草溪郡守) 정양빈(鄭暘賓)은 이보혁을 따라가서 합천을 평정하였고, 또 정희량이 체포되던 날에는 함께 거창으로 진군했는데도 상(賞)이 승서(陞敍)에 그쳤고 원종(原從)에는 들지 못하였으므로 개연(慨然)해 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황선은 직분상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김진옥이 황선의 전령(傳令)이라고 빙자하면서 이정필(李廷弼)을 5리(里) 밖에서 잡아들여 순영(巡營)으로 결박지워 압송했으므로 이종성(李宗城)이 어사(御史)로 있을 적에 말하기를, ‘이정필은 승지(承旨)를 지낸 사람인데 가영장(假營將)이 어떻게 감히 잡아들일 수 있느냐?’고 하면서 김진옥을 잡아들여 곤장(棍杖) 다섯 대를 쳤다고 합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서원(書院) 가운데 조정에 새로 건립한다고 품하지 않은 것과 겹쳐 설치된 것을 훼철(毁撤)하는 것을 어느 해로부터 결단을 내려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기해년398) 의 성명(成命)을 기준으로 결단하도록 하라."
하고, 전 상신(相臣) 정호(鄭澔)와 정미년399) 에 진주(陳奏)했던 사신(使臣)은 사유(赦宥)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태좌에게 하문하기를,
"정호는 경(卿)이 지난번에 그 단서를 은미하게 말로 했었는데, 정호의 소위는 통분스럽고 놀랍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늙어 쇠하였으므로 옛날의 정호가 아니다. 석방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이태좌가 아뢰기를,
"다 같이 죄를 진 사람인데 한 사람은 석방하고 한 사람은 그대로 두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신이 진달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종전에 그를 보았더니 노쇠하고 혼모(昏耗)했었다. 범한 것이 비록 중하였지만, 이는 노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적소(謫所)에서 죽는다면 조정에서 죽인 것과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지난해에 원찬(遠竄)시킨 것만으로도 벌이 이미 시행된 것이다. 특별히 석방시키라."
하였다.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심수현(沈壽賢)이 작년의 봉사(奉使) 때 그곳에서 망극한 모욕을 받았으니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당연히 목숨을 걸고 다투었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의 죄가 아닐 수 있습니까? 그러나 마침 옹정(雍正)400) 이 사납고 괴팍하여 제멋대로 할 때를 만나 인력(人力)으로 어찌할 수 없어 모욕을 받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때의 대신(臺臣)들이 한때의 분통스런 마음에서 발고(發告)했기 때문에 조사(措辭)를 가리지 않았습니다만, 심수현의 정세(情勢)는 매우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주(陳奏)한 세 사신(使臣)에 대해 대신(臺臣)이 벌을 주기를 청하였으나, 그 일은 이미 통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사(上使)의 계(啓)에 대해서는 해가 바뀌도록 윤허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끝에 가서 참작하여 부처(付處)401) 하라고 한 것은 또한 뜻 둔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벌이 이미 행하여졌다. 부사(副使)는 다른 죄 때문에 정배(定配)되었다. 상사(上使)와 서장관(書狀官)은 아울러 석방시키라."
하였다. 사간(司諫) 윤동형(尹東衡)이 전에 아뢴 것을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이성효(李性孝)가 전에 아뢴 것을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소(李炤)는 역적 이항(李杭)402) 의 아들인데, 처신(處身)과 행사(行事)가 세상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으므로 선조(先祖) 때부터 대계(臺啓)가 해가 바뀌도록 고집하여 논쟁했는데, 이는 이미 깊고 통렬하게 증오하는 뜻에서 나온 조치였으며, 작년에 도배(島配)한 것은 또 국가의 장래를 우려한 데에서 나온 조처였습니다. 그런데 막바로 먼저 특별히 석방시키는 것은 크게 물정(物情)에 어긋나는 조처이니, 방귀 전리(放歸田里)하게 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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