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2권, 영조 5년 1729년 5월

싸라리리 2025. 9. 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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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을사

병조참의        나학천(羅學川)이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옛날 주 성왕(周成王) 때에 사방(四方)의 나라들이 잇따라 난을 일으켰으므로 왕실(王室)이 하마터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그래서 소비시(小毖詩)403)                  에 ‘내가 징계함은 후환(後患)을 삼가는 것일세. 벌을 건드리지 말지어다. 건드리면 쏘이게 되느니라. 처음에는 도충(桃蟲)404)                  인 줄 믿었더니 그것이 하늘을 날으는 새인 줄 몰랐도다.[予其懲 而毖後患 莫矛䈂蜂 自求辛螫 肇允彼桃蟲 拼飛維鳥]’ 하였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도 날이 이미 지나갔지만 더욱 후환을 징계하는 방법을 생각하소서. 저 박필몽(朴弼夢)·박필현(朴弼顯)·이사성(李思晟)·남태징(南泰徵)의 무리를 처음에는 누군들 도충(桃蟲)이라고 여기지 않았겠습니까만, 결국은 아프게 쏘는 독을 뿜었으니,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청하기를,
"세자(世子)의 혼궁(魂宮)과 묘소(墓所)에 공상(供上)하는 물품은 3년을 기한으로 선혜청(宣惠廳)에서 진배(進排)하게 하고 기타는 호조(戶曹)와 선혜청에서 전대로 반씩 나누어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호조 판서        권이진(權以鎭)에게 하유(下諭)하기를,
"호판(戶判)을 체차(遞差)하고 다시 제수한 것은 도민(都民)의 원성(怨聲)이 하늘에 사무친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 직임은 구임(久任)시킴으로써 민원(民怨)이 시일의 오램에 따라 저절로 없어지게 한 것이다."
하였다. 수어사(守禦使)        김재로(金在魯)를 폄출(貶出)하여 황해도 관찰사로 삼고 윤순(尹淳)을 수어사로 삼았으니, 군대를 거느리는 사람은 사체(事體)가 자별한 것이어서 전후로 특별히 효유하였는데도 끝내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임(時任) 감사(監司)        김시혁(金始爀)은 체직시켜 경직(京職)에 붙이라고 명하였다. 사간(司諫)        윤동형(尹東衡)이 전에 아뢴 것을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계장(鄭啓章)의 일에 이르러서는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유경유(柳慶裕)는 심술이 요악(妖惡)스럽고 행실이 음비(陰祕)스러워 임인년405)                  의 국청(鞫廳)에 잡혀 들어갔었는데, 그가 오서종(吳瑞鍾)과 난만(爛漫)하게 모의(謀議)한 정상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먼 변방에 정배(定配)한 것은 너무 늦추어 준 실수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가 석방(釋放)된 뒤에 이르러서도 전의 습관을 고치지 않았었으니, 작년에 변란이 발생한 처음에 대계(臺啓)에서 도배(島配)하기를 청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또 석방시키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음흉하고 간사한 부류들은 결단코 쉽사리 소석(疏釋)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니, 유경유를 석방시키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사행(使行)이 가지고 온 은(銀)을 훈련 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호위청(扈衛廳)에 도합 6천 냥, 경상도에 2천 3백 냥, 전라도에 7백 냥, 충청도에 5백 냥, 황해도에 2백 냥, 강원도·송도(松都)·북한(北漢)에 각각 1백 냥씩 나누어 주겠습니다."
하니, 그리하라고 비답(批答)하였다. 또 아뢰기를,
"공조(工曹)에서의 계목(啓目)을 인하여 연강(沿江)의 선척(船隻)들을 낭청(郞廳)을 보내어 적간(摘奸)하여 세금을 거두어들일 것을 명하였습니다만, 이 일은 연강 백성들의 소요를 초래하기 쉬우니 내버려두소서. 그리고 문안(文案)에 붙여져 있는 선척을 농간하여 도탈(逃脫)시킨 것은 놀라운 일이니, 각 아문(衙門)과 여러 궁가(宮家)의 선안(船案)을 일제히 이정(釐正)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안변(安邊)·금곡(金谷)의 은(銀)이 생산되는 곳을 적간(摘奸)한 뒤에 은점(銀店)을 설치하여 은을 채취하게 하소서."
하니, 그리 하라고 비답하였다.

 

5월 1일 을사

내의원(內醫院)의 수의(首醫)인 권성징(權聖徵)을 사유(赦宥)하였다. 권성징은 효장 세자(孝章世子)406)  가 훙서(薨逝)할 적에 약(藥)을 잘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대계(臺啓)에 의거하여 극변에 찬배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신사년407)  에 내린 처분(處分)은 사리를 따진 것이 매우 분명하므로 선조의 뜻을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인데, 어찌 묵은 나무 뿌리와 썩은 풀잎에 효험이 있기를 독책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필경(姜必慶)을 집의(執義)로, 정우량(鄭羽良)을 교리(校理)로, 이종성(李宗城)을 부교리로, 김상성(金尙星)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3일 정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4일 무신

소대를 행하였다. 승지에게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안변(安邊)의 채은(採銀)을 정지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문의(文義)로 인하여 깨달은 바가 있다. 권만기(權萬紀)는 직책이 어사(御史)이면서 은을 채취할 것을 청하였으니, 임금을 인도하여 도(道)로 나아가게 하는 의가 아니다.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수백만 꿰미[緡]의 은을 얻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훌륭한 인재를 얻는 것이 낫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제왕(帝王)의 체통을 깊이 체득한 것이었다. 대저 채은(採銀)이 탁지(度支)408)  의 입장에서는 백성에게 유익함이 있다고 하겠지만 실상은 큰 폐단이 생기게 되는 것이어서 한갓 상고(商賈)들에게 이익을 독점하게만 해 줄 뿐이다. 변방의 금법(禁法)이 엄하지 않은 것도 여기에서 연유되는 것이니, 북관(北關)의 은점(銀店)은 정파(停罷)시키는 일을 호조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정걸(李廷傑)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의 죄인 임징하(任徵夏)를 24차 형문(刑問)했는데도 서명(署名)하지 않았다. 죄인 유호(柳灝)를 3차 형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5월 5일 기유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종부시(宗簿寺)의 계목(啓目)에 의하면 ‘대왕(大王)의 적파(嫡派)인 종성(宗姓) 후손은 대수(代數)를 한정하여 정역(定役)시키게 한 것은 조종조(祖宗朝)의 정제(定制)가 아니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기사년409)  에 적서(嫡庶)를 물론하고 대수(代數)를 제한하지 않게 한 다음 모두 족친위(族親衛)410)  에 넣도록 구전(口傳)한 것에 의해 정탈(定奪)411)   하였습니다. 병자년412)  에 또 《선원록(璿源錄)》에 입록(入錄)된 것으로 한정하고 대수는 9대(代)로 한정하여 천역(賤役)에 정역시키지 말 것을 전교(傳敎)하였습니다. 정유년413)  에는 묘당(廟堂)의 계문(啓聞)에 의거하여 10대(代) 이하는 적서(嫡庶)를 막론하고 천역 이외의 군역(軍役)은 감면시키지 말게 하였고, 대군(大君)·왕자(王子)의 적장손(嫡長孫)은 공신(功臣)의 적장손의 예(例)에 따라 대수를 제한하지 말고 충의위(忠義衛)414)  에 넣도록 구전(口傳)한 것에 의거하여 정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필흥(李必興)이 상언(上言)하여 억울하다고 일컫고 종부시(宗簿寺)에서 변통(變通)시킬 것을 계청(啓請)한 것은 자못 근거할 바가 없습니다. 단지 공신(功臣)들의 충의위(忠義衛) 때문에 대수(代數)를 일찍이 9대(代)로 가정(加定)한 일은 있습니다. 대왕(大王)의 자손들은 공신의 자손에게 견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게 된 것인데, 공신의 충의위도 병인년415)  에 적장(嫡長)으로서 세습(世襲)하는 사람 이외의 지손(支孫)은 5대(代)로 한정하도록 정탈하였고 따라서 법을 속이고 충의위에 예속된 사람은 일체 아울러 사태(査汰)했습니다.
임인년416)  에 훈부(勳府)417)  에서 왜곡되이 공신 자손의 호소를 따라 공신의 자손으로서 충의위에 예속되는 것은 9대로 가정(加定)하여 한정하고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자손은 3대로 한정하고 충익위(忠翊衛)·충찬위(忠贊衛)에 예속되는 자들은 5대로 가정(加定)할 것을 묘당에서 의논도 하지 않은 채 멋대로 복계(覆啓)하였습니다만, 갑진년418)  에 호서(湖西)의 도신(道臣) 송인명(宋寅明)의 장계(狀啓)를 인하여 복계(覆啓)해서 도로 5대로 회복시켰습니다. 그런데 병오년419)  에 훈부(勳府)에서 또 9대로 가정했습니다. 수년 사이에 조정의 명령이 세 번이나 바뀌었으므로 종성(宗姓)의 후손들이 이 점을 구실로 삼아 속적(屬籍)된 이외의 사람이 군역(軍役)을 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종부시(宗簿寺)의 계문에 들어 있는 적서(嫡庶)에 대한 이야기도 또한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9대 이전은 비록 천첩(賤妾)의 아들이라도 입록(入錄)되어 있고 9대 이후는 대군·왕자의 적장(嫡長)으로 세습(世襲)하는 이외의 지손(支孫)은 구전(口傳)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지금 어떻게 한외(限外)의 지손 가운데에서 다시 적서(嫡庶)를 나눌 수 있단 말입니까? 당초의 정식(定式) 가운데는 대왕(大王)의 자손은 9대로 한정하고 공신의 자손은 5대로 한정하며 족친위도 5대로 한정하였고 원종 공신의 자손은 충익위와 충찬위에 예속시키되 3대(代)로 한정하여 분한(分限)과 등급(等級)이 매우 명백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연신(筵臣)들의 진백(陳白)을 인하여 족친위를 9대로 가정(加定)함으로써 드디어 공신 자손들에게 요행을 바라고 외람되이 속이려는 마음을 품게 하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개국 공신(開國功臣) 조반(趙胖)은 태조(太祖)께서 친필(親筆)로 내리신 교지(敎旨)에 영세(永世)토록 사유(赦宥)를 받게 하라는 말이 있다는 것으로 신축년420)  에 충훈부에서 아뢴 것에 의해 그 자손들은 모두 군역(軍役)에서 면제시킬 것을 허락했습니다. 태조의 자손도 9대로 한정했는데 조반의 후손을 어떻게 대수에 한정이 없이 다 면제시켜 줄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청컨대 종성(宗姓)을 충의위에 예속시키는 것은 한결같이 병자년과 정유년의 수교(受敎)에 의거하여 9대를 한정하고 10대 이후의 적서(嫡庶)를 논하지 말며 천역(賤役) 이외에 군역(軍役)은 면제할 수 없게 하소서. 공신의 자손을 충의위에 예속시키는 것은 한결같이 병인년의 수교에 의거하여 5대를 한정하고 임인년·병오년 이후 법을 속이고 예속된 자는 일체 사태(沙汰)시켜 군역에 충정(充定)하게 하소서. 원종 공신의 자손을 충익위·충찬위에 예속시키는 것은 3대로 한정하고 족친위는 5대로 한정하며 법을 속이고 예속된 자는 아울러 사태시키고 군역에 충정시키소서. 조반의 자손은 적장손을 제외하고 역시 사태시켜 군역에 충정시키소서. 그리고 종성(宗姓)과 훈신(勳臣) 자손의 상언(上言)은 일체 시행하지 말고 비록 해사(該司)에서 복계(覆啓)하더라도 반드시 묘당(廟堂)의 관유(關由)421)  를 거치도록 분부(分付)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대수(代數)를 한정했는데, 대수가 다한 뒤에는 종성(宗姓)은 거개가 피폐(疲弊)되어 도리어 여염(閭閻)의 사람이 족당(族黨) 가운데 벼슬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를 의지하여 중히 여김을 받는 것만도 못하게 된다. 따라서 10대 후손이라 할지라도 조금이나마 양반(兩班)의 모양을 갖춘 경우에는 군역에 강제로 충정시키지 말 것으로 신칙(申飭)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성덕윤(成德潤)을 부응교로, 이현모(李顯謨)를 부수찬으로, 윤휘정(尹彙貞)을 수찬으로, 심공(沈珙)을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공조 판서 윤순(尹淳)이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남의 말을 싫도록 들었습니다만, 극심한 타매(唾罵)가 이와 같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남의 선고(先故)를 소급해 거론하여 선인(先人)을 잊고 오랑캐에게 아첨한 불효스럽고 의리가 없는 죄과(罪科)로 몰아넣고 있으니, 부끄럽고 통분하여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감히 처의(處義)의 당부(當否)를 가지고 그와 함께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에서는 상명(常明)과 함께 서로 왕래하면서 종이를 보내고 글씨를 요구했으므로 몇차례 부응(副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답례로 준 것도 네 자루의 붓, 두 홀의 먹, 서화(書畵) 두어 첩(帖)에 불과했는데, 출발할 적에 또 1백여 자루의 붓과 20홀의 먹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이는 13왕(十三王)422)  이 보낸 것으로 그가 전부터 우리 나라를 위하여 힘써 준 것이 많아서 물리치는 것이 불편하겠기에 즉시 임역(任譯)에게 맡겨 그로 하여금 근례(近例)에 의거하여 지부(地部)에 귀속시키게 했습니다."
하니, 우악(優幄)한 비답을 내려 개석(開釋)시켜 주었다.

 

대사헌(大司憲) 이정제(李廷濟)가 소장을 올려 아뢰기를,
"윤득화(尹得和)의 상소(上疏)에서 이에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을 양조(兩朝)의 원로(元老)로서 충성을 다하다가 사직(社稷)을 위하여 순절(殉節)했다고도 하고 10년 동안 약원(藥院)에 있으면서 집을 잊고 나라를 걱정했다고 하면서 비호하는 짓도 부족하여 찬탄(贊嘆)하기를 마지않고 있습니다. 권혁(權爀)의 소장이 나오는 데 이르러서는 더더욱 멋대로 날뛰고 있어 또한 매우 구차스럽습니다. 이른바 차자(箚子)를 올리는 것을 혐의하지 않고 반드시 승낙을 얻으려는 것을 기필했다고 한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어서 더욱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입니다. 이것이 수규(首揆)423)  를 협박하기 위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상은 죄를 받은 자들을 전적으로 해탈(解脫)시키기 위한 장본(張本)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런 등의 일에 관계되는 것은 엄히 방지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윤순(尹淳)이 당한 억울함에 대해서는 이런 등등의 풍습에 대해 신은 그윽이 한심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장에 진달한 내용은 모두가 심히 사의(事宜)에 합당하다."
하였다.

 

5월 6일 경술

황해도 관찰사 김재로(金在魯)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사직소(辭職疏)를 진달하였는데, 하교하기를,
"특별히 전교(傳敎)를 내려 외직에 보임시켰는데 감히 사직소를 올렸으니,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황해 감사 김재로를 추고하여 중히 다스리고 그로 하여금 내일 안으로 올라와서 사조(辭朝)하게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특진관(特進官) 이삼(李森)이 아뢰기를,
"각 군문(軍門)에 소속된 군관(軍官)과 각사(各司)의 공장(工匠)이 그 명액(名額)이 매우 많은데도 모두 방역(坊役)에 응하지 않고 있으니, 일체 초출(抄出)하여 묘당(廟堂)에서 액수(額數)를 정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납속(納粟)424)  의 부류들이 호적(戶籍) 안에 단지 통정(通政)이나 절충(折衝)이라고 쓰고 납속임을 쓰지 않음으로써 신역(身役)을 면할 계책을 삼고 있으니, 이정(釐正)하도록 신칙시키소서. 그리고 이 뒤로 납속임을 쓰지 않는 자는 무거운 율(律)로 다스리소서."
하니, 아울러 윤허하였다. 성내(城內) 여러 산의 송충(松蟲)을 백성을 동원하여 잡게 하는 역사(役事)를 중지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송충이를 잡는 역사는 그 폐단이 작지 않아서 백성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또한 많다. 당 태종(唐太宗)은 중주(中主) 정도에 불과한데도 오히려 황충(蝗蟲)을 삼켰으니, 송충이를 잡느라 백성들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금원(禁苑)의 소나무 잎을 먹게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내가 부덕한 소치로 충재(蟲災)가 발생했으니, 이것은 내가 스스로 반성해야 될 곳이다. 어떻게 송충이를 잡는 일 때문에 도리어 민력(民力)을 손상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이어 위소(衛所)의 군졸을 시켜 사단(社壇)의 송충이만을 잡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잡게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북병사(北兵使) 김집(金潗)이 아뢰기를,
"철령(鐵嶺)·함관령(咸關嶺)·마운령(磨雲嶺)·마천령(磨天嶺)에 수목(樹木)을 기르라는 일로 명이 있었습니다만, 근래 산곡(山谷)에 화전(火田)을 일구는 데 대한 절제와 제한이 없어서 산의 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산 허리 이상은 화전을 금단하게 하고 또 즉시 불을 끄지 않아서 다른 데로 번져가게 한 경우에는 이를 적발하여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삼이 아뢰기를,
"북병영(北兵營)에는 목면(木綿)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개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습니다. 평안 병영(平安兵營)에는 정목(正木)425)  이 상당히 여유가 있으니, 북병영의 마포(麻布) 10여 동(同)을 매년 평안 병영으로 보내어 10동의 무명과 바꾸어 군관과 장교의 의복과 상격(賞格)에 쓸 자료로 삼도록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5월 7일 신해

영두성(營頭星)이 천중(天中)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았다.

 

5월 8일 임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임금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군부(君父)가 벌을 내렸는데도 신자(臣子)가 되어 감히 사절할 수가 있었는가? 명목은 외직에 보임한 것이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벌은 변방에 귀양보낸 것과 같은데, 현도(縣道)를 통하여 소장을 올린 채 신칙시키는 명이 내렸어도 아직껏 올라오지 않고 있다. 귀양보내는 명을 어기는 것이 김재로(金在魯)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겠는가? 다시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고 그로 하여금 즉시 올라와서 사조(辭朝)하게 하라."

 

5월 10일 갑인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김재로의 사조(辭朝) 날짜를 조금 늦추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내일 사조(辭朝)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영남(嶺南)에는 양맥(兩麥)이 흉년이 들었고, 팔도(八道)에는 황충(蝗蟲)이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전에는 성변(星變)이 발생했는데, 영두성(營頭星)은 병란(兵亂)이 발생할 조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재황(災荒)과 천변(天變)이 이와 같으니, 삼가 바라건대,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으로 더한층 몸을 바루고 반성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각별히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변이 있은 뒤 《천원보력(天元寶曆)》을 열람하였는데, 영두성의 그림을 보니 그 꼬리 부분이 빗자루와 같았던 반면, 이번의 것은 그 꼬리 부분이 주먹과 같았었다. 《천원보력》에 또 이르기를, ‘이 별이 밤에 떨어지면 천고성(天鼓星)이 되어 소리가 나게 되고 낮에 보이면 영두성이 되어 병란을 상징하는 데 속하게 된다.’고 하였다. 경 등은 여기에 대해 과연 의심이 없는가?"
하니, 이태좌가 아뢰기를,
"관상감(觀象監)에 문의하니, 또한 분명히 지적하여 상세히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틀림없이 영두성인 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호조 참판 박사수(朴師洙)가 아뢰기를,
"유언철(兪彦哲)·정양빈(鄭暘賓)의 상전(賞典)이 너무 박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박사수가 아뢰기를,
"송인명(宋寅明)이 황선(黃璿)의 공을 진달하였는데, 그것은 직분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이는 전하(殿下)의 실언(失言)입니다. 만일 황선이 한 일을 직분상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무슨 상줄 것이 있느냐고 한다면, 오명항(吳命恒)의 일은 그것이 직분 밖의 일이었습니까? 녹훈(錄勳)할 때의 일에 대해서 신이 시비(是非)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황선의 군관(軍官)인 김진옥(金振玉)은 많은 군공(軍功)이 있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해서 시상(施賞)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작년의 일에 대해 사신(史臣)이 반드시 ‘호서(湖西)의 역적은 병조 판서 오명항이 토평(討平)했고 영남(嶺南)의 역적은 경상 감사 황선이 토평했다.’고 쓸 것입니다."
하니, 이태좌가 아뢰기를,
"송인명의 말은 한쪽만 옹호하고 있습니다. 오명항이 안성(安城)·죽산(竹山)의 싸움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영남의 역적이 풍문만 듣고 저절로 무너진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大臣)과 재신(宰臣)의 말이 또한 모두 흠이 있다. 대신이 말한 풍문만 듣고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지나친 것이고, 재신이 영남의 역적은 황선이 토평했다고 한 말도 지나친 것이다. 저 재신은 매양 탕평(蕩平)을 위주로 하여 피차를 가리지 말자는 의도가 가슴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오명항과 황선이 각각 토평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김진옥은 무슨 상줄 만한 일이 있는가?"
하였다. 박사수가 아뢰기를,
"신은 이미 공이 없습니다만, 신의 군관(軍官)들은 원종(原從)의 1등·2등에 들었고, 해서 안무사(海西按撫使) 조지빈(趙趾彬)의 군관도 원종 1등·2등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황선의 군관은 처음부터 4등·5등에도 들지 못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영남에서는 교전(交戰)한 일이 없었는데 어떻게 전공(戰功)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박사수가 아뢰기를,
"박필건(朴弼健)·이보혁(李普赫)은 모두 황선의 절제(節制)를 받은 사람입니다. 어찌 대장(大將)이 공이 없는데 그 휘하의 사람은 모두 봉공(封功)을 받는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종성(李宗城)은 김진옥이 이정필(李廷弼)을 잡아가둔 것 때문에 김진옥에게 곤장을 안겼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신이 본사(本事)의 내용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설령 이 일이 죄가 되더라도 그 뒤에 많은 군공이 있었으니, 어찌 논상(論賞)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이태좌가 아뢰기를,
"이는 큰 일이 아닌데 번거롭게 반복해서 진달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고례(古例)에 의하면 단지 편모(偏母)인 경우에만 걸군(乞郡)426)  을 허락했고 부모가 함께 생존해 있는 경우에는 걸군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편모인 경우에는 임소(任所)로 모시고 갈 수 있지만 부모가 함께 생존한 경우에는 모시고 가기가 곤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근래 부모가 함께 생존해 있는데도 걸군하는 것은 진실로 미안한 일이니, 청컨대 신칙하여 일체 구례(舊例)를 따르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이 관기(官妓)를 쇄환(刷還)시키라고 계문(啓聞)한 의도는 단지 관기 일신(一身)만을 쇄환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소생(所生)으로서 이미 결혼한 남자나 시집간 여자의 경우에는 일례(一例)로 쇄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제도(諸道)에서 소생까지 아울러 쇄환하고 있다고 하니, 분간(分揀)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자손은 면천(免賤)·면역(免役)의 부류를 물론하고 일체로 쇄환하되 환천(還賤)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서원(書院)의 편액(扁額)을 철거하는 일을 바야흐로 거행하고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는 간혹 특별한 하교(下敎)로 편액을 내린 것도 있고 특별한 하교에 의거하여 그대로 두게 한 것도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울러 논하지 말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주자(朱子)의 서원(書院)에 대해 품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논하지 말라."
하였다. 박사수(朴師洙)가 아뢰기를,
"지명(地名)이 우연히 같다는 것 때문에 서원을 창립한 곳이 많은데, 이미 건립한 서원은 철거할 수 없지만 이 뒤로는 절대로 창건하지 말 것으로 신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문성공(文成公) 윤증(尹拯)의 서원(書院)은 단지 홍주(洪州) 한 곳에만 있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서원은 호남(湖南)에 있는데, 갑진년427)  에 편액을 철거했다가 을사년428)  에 도로 걸게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울러 논하지 말라."
하였다. 포청(捕廳)의 죄인 소동철(蘇東轍)은 사형을 감하여 먼 곳에 정배(定配)하고 김간(金簡)은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명하여 대사간(大司諫) 정수기(鄭壽期), 사간(司諫) 윤동형(尹東衡), 정언(正言) 윤광운(尹光運)·남태경(南泰慶), 지평(持平) 이성효(李性孝)를 파직시키게 하였는데, 이는 빈청(賓廳)의 소대(召對) 때에 무단히 패초(牌招)429)  를 어겼기 때문이었다.

 

5월 11일 을묘

김계환(金啓煥)을 대사간으로, 윤광익(尹光益)을 사간으로, 심성진(沈星鎭)·민형수(閔亨洙)를 정언으로, 권일형(權一衡)을 지평으로, 이진망(李眞望)을 승지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로, 유운(柳運)을 지평으로, 심공(沈珙)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충주목(忠州牧)에서 보고하여 온 바에 의하면, 역적 민원보(閔元普)의 아들 민복효(閔復孝)·민득효(閔得孝)는 연좌(緣坐)시켜 교형(絞刑)에 처하였고 어미 이녀(李女)는 나이 70이 넘었는데 율문(律文)에 ‘부인(婦人)의 나이 60세이거나 폐질(廢疾)을 앓는 사람은 논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아내 필애(畢愛)와 딸 탄녀(歎女)는 민백효(閔百孝)의 연좌가 된 것 때문에 이에 앞서 계집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민원보의 아들 민덕효(閔德孝)의 아내 신녀(申女)와 민득효(閔得孝)의 아내 이녀(李女)와 민복효(閔復孝)의 아내 나녀(羅女)는 관문(關文)이 내려가는 날 일시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하니, 이는 비밀을 철저히 지키지 못한 소치인 것입니다. 목사(牧使) 유정(柳綎)을 추고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지평 정형복(鄭亨復)을 체직(遞職)시키라고 명하였다. 정형복이 사문(斯文)의 일 때문에 소장(疏章)을 올려 전에 아뢴 이야기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황소(黃熽) 옥사(獄事)의 간련인(干連人) 장소강(張小江)이 사사로이 사환(使喚)을 시켜 황소에게 보낸 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데에 관계가 되니 의당 잡아다가 엄히 국문(鞫門)해야 됩니다. 권익관(權益寬)의 막비(幕裨) 유호(柳灝)는 포청(捕廳)에서 금부로 이송(移送)시켰으니 의당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히 국문해야 됩니다. 작년의 변무 사신(卞誣使臣)도 국청을 설치하여 엄히 국문하고 그때 수역관(首譯官)도 일체로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일전에 상사(上使)와 서장관(書狀官)을 특별히 석방시키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후원(喉院)과 삼사(三司)에서 한 마디도 위복(違覆)하는 말이 없었으니, 의당 척벌(斥罰)하는 형전(刑典)이 있어야 합니다."
하고, 끝에는 이정제(李廷濟)가 일찍이 시비를 현란시킬 것을 시도하여 사신(四臣)의 억울함을 극력 변호한 것에 대해 논하고, 또 논하기를,
"귀양가 있는 대신(大臣)을 방환(放還)시키라는 것이 특은(特恩)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노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는 하교(下敎)는 아마도 실언(失言)을 면치 못한 것 같습니다.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이 전후 서로 잇달았는데 성색(聲色)이 너무 사나워서 마치 노예를 꾸짖는 것 같아 하셨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한 조각 정신(精神)이 처분(處分)을 현란시키려는 데 있다. 장소강(張小江)과 사신(使臣)에 대한 이야기는 의도한 것이 놀랍고 패려스럽다."
하고,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이종성(李宗城)이 소장을 올리기를,
"근래 풍문을 통하여 삼가 듣건대, 경덕궁(慶德宮) 안에 바야흐로 별전(別殿)을 축조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별전을 전에 헐었다가 다시 건립한 것이어서 경승지(景勝地)를 가려서 새로 건립하는 것에 견줄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또 그 간가(間架)도 수영(數楹)에 불과하여 비용이나 사람을 부리는 것이 그리 심하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깊이 우려해야 될 점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국세의 위태로움을 비기건대 마치 천 칸이나 되는 큰 집이 세월이 오래 되어 기울어짐에 따라 동쪽을 받치고 서쪽은 버팀목을 세우며 위로는 비가 새고 옆에는 바람이 새어들어서 무너질 걱정이 늠연(凛然)히 금방 닥칠 상황에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당여(黨與)를 비호하는 사심(私心)과 서로 경탈(傾奪)하려는 습성이 또 기와를 헐고 벽에다 낙서를 하는 것과 같은 해를 주고 있을 뿐만이 아니니, 그 큰 집이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형상은 슬기로운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의당 마음과 뜻을 전일하게 지녀 부전책(扶顚策)을 마련하기를 겨를 없이 하더라도 오히려 구제할 수 없을까 두려우니, 이런 상황에서는 별전을 띠풀로 이고 흙으로 계단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족히 소박할 것이 없고, 굵은 베로 옷을 해 입고 굵은 명주로 관(冠)을 해 쓴다 하더라도 그것이 족히 검소할 것이 없습니다. 중건(重建)이거나 신창(新創)이거나 간가(間架)의 다소를 막론하고 전각(殿閣)에 대한 역사(役事)는 진실로 때가 아닌 것입니다. 신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재물의 허비와 사람들을 부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전하께서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는 마음이 해태해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변란이 발생했을 처음에는 징계하는 마음이 감발(感發)되어 기욕(嗜慾)을 눌러 참으면서 정신의 집중과 거조(擧措)의 시행이 한 번도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일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진실로 목하(目下) 중흥책(中興策)에 절실한 것이 아니면 그것이 비록 전장(典章)·의문(儀文) 등 태평(太平)을 장식하는 제구라 할지라도 모두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전장·의문에만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선정전(宣政殿)·희정당(熙政堂) 등 날마다 나아가서 정사를 듣는 곳의 창살이나 난간이 부러져 훼손되어 당연히 바꾸어야 할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은 그 창살이나 난간을 얽어매고 보철(補綴)하고서 시일을 넘겨야지 오늘날 별전을 짓는 것처럼 공역(工役)을 일으켜 수치(修治)하는 데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필코 보증할 수 있습니다. 대저 마음이란 두 가지에 똑같은 비중으로 쓸 수 없는 것이어서 이것을 중히 여기게 되면 곧 저것은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가 정심장(正心章)을 해석하면서 당시(唐詩)를 인용하여 비유하기를, ‘얼굴을 들어 새를 보는 데 빠지게 되면 머리를 돌려 사람에게 응하는 데에는 어긋나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새를 보는 데 뜻을 두게 되면 사람에게 응하는 데에는 무심(無心)하게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지금 풍화(風化)가 행해지지 않아 습속(習俗)이 점점 오염되어 가고 있어 사부(士夫)의 제택(第宅)이 날로 광역화되어가고 서인(庶人)의 옥벽(屋壁)도 날로 사치스러워져가고 있으니, 목요(木妖)430)  의 재앙이 천문(天文)이 경계를 고한 것보다 더 심한 상황입니다. 의당 전하(殿下)게서는 전우(殿宇)를 높이는 데 대한 경계심을 지니고 궁실(宮室)을 낮게 하는 덕을 높이시며 아로새기는 치장을 깎아 소박하게 만들고 영선(營繕)을 근절시켜 공사(工事)를 일으키는 것을 삼가야 하는데, 이번의 이 명(命)은 실로 검소한 덕을 밝혀 만백성에게 보이시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한 달 전에 듣기로는 박철(薄鐵) 수백 근을 내수사(內需司)에서 만들어서 대내(大內)로 들여오게 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고 또 장수(匠手)들 가운데 공교로운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차비(差備)로 대령(待令)시키게 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그 박철을 어디에 쓰시려는 것이며 장수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시려는 것입니까? 쓰는 곳과 부리는 일이 진실로 도리에 맞는 것이라면 수형(水衡)431)  에서 자재를 제공하고 고공(考工)432)  에서 관장할 것인데, 내수사(內需司)에 유지(有旨)를 내려 장수들을 차비로 모으게 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전하께서 명하신 것은 곧 기식(器飾)에 해당되는 완호품들이어서 외정(外庭)으로 하여금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 신이 유악(帷幄)을 떠난 지가 지금 4개월이 되었으므로 경연에서 강하는 것이 바야흐로 무슨 편(篇)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옛사람의 말에 ‘빨라서 놓치기 쉬운 것은 기회요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시간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지난 봄 변란이 일어났을 적에 감히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때에 대대적으로 경장(更張)하여 큰 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우러러 면려하시도록 아뢴 바 있었습니다만, 덧없는 것이 세월이어서 이미 1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설치한 것이 과연 무슨 계책이었으며 착수한 일은 과연 무슨 사업이었습니까? 백성은 곤궁하고 군사는 지친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극심해지고 나라의 기강과 임금의 위엄은 날로 쇠하여져 가고 있으니 되돌아봄에 아득키만 하여 실로 기회를 놓치고 시간을 흘려버린 탄식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급하지 않은 영작(營作)에 마음을 두고 아무런 유익이 없는 완호품에 뜻을 두고 계시니, 잘 다스려지는 공효는 볼 수 없고 나태한 조짐만이 날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보고 듣는 데 미친 것도 이미 이렇게 많은데, 더구나 깊숙한 궁정(宮庭) 안에서와 신료(臣僚)들이 보고 듣는 것 이외에도 우려스럽고 경계해야 될 것을 또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영두성(營頭星)이 땅에 떨어졌으니 전쟁의 조짐이 걱정스럽고 명충(螟蟲)이 곡식 싹을 먹으니, 보리 농사가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혀 세상을 살펴보니 위태롭고 걱정스러운 단서가 이루 셀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국사는 제대로 잘 되어갈 기약이 없고 임금이 일예(逸豫)에 마음을 두는 걱정이 있으니, 이것이 신이 성세(聖世)에 대해 개탄스럽게 여기고 명주(明主)에 대해 우려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소장(疏章)의 끝에 진술한 내용은 진실로 절실한 것이어서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경덕궁의 수보(修補)하는 곳은 전각(殿閣)이 아니라 바로 연전에 불에 탄 두어 칸의 행각(行閣)인 것이다. 그곳은 선조(先朝)께서 거처하시던 곳으로 보기에 미안스러웠기 때문에 단지 수리하라고만 명했던 것이다. 이는 또한 조용히 두어 해 동안 수리하게 한 것이니, 나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철(正鐵)을 들여오게 한 것도 칠정재(七政齋)를 보수하기 위한 것인데, 그대가 들은 것은 풍문에 전한 것이 사실과 어긋난 데 연유된 것이다. 그러나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면 되는 것이다.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것은 그대가 전일 연석(筵席)에서의 하교(下敎)를 몸받아서 품은 마음을 숨김없이 아뢴 그 점이다. 따라서 각별히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이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는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백대(百代)의 제왕(帝王) 가운데 뛰어나셨습니다. 다만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실덕(實德)을 힘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 폐단은 겉치레가 성하게 되었고 총명함을 쓰시기 좋아하기 때문에 그 유폐(流弊)가 까다롭고 잗단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탕평책(蕩平策)이 이미 시행이 되었지만 알력을 일으켜 서로 빼앗는 계교가 그 기회를 타게 되었으며, 제방(隄防)이 점점 해이해져 현혹시키는 말이 그 사이에 멋대로 횡행하게 되었습니다. 연석에서의 하교가 많은 경우에는 수천 마디에 이르고 적어도 수백 마디를 밑돌지 않습니다만, 그 끝에 가보면 한 마디로 결단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도 많은 말을 허비해 가면서 극구 말씀하시는 것이 곧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니 말을 할 때에는 행실을 돌아보고 일을 행할 때에는 말을 돌아보라는 의의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바라건대, 사령(辭令)을 간략하고 진중하게 하며 겉치레를 엄금하여 실심(實心)을 가지고 실정(實政)을 행하소서. 당의(黨義)가 갈라져 달리함에 따라 문호(門戶)가 분열되어 피차 승부(勝負)를 다투기 때문에 조정에서 얻는 것은 단지 한쪽의 인재(人材)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이것이 탕평책을 쓰자는 의논이 나오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적(仕籍)에 통할 수 있는 길이 이미 열려 있어 폐기된 자 가운데 기용된 부류가 또한 많은데도 벼슬에 추천해 준 의의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창을 거꾸로 돌려잡고 반격할 마음을 품었습니다. 정익하(鄭益河)는 오명항(吳命恒)을 축출하고 이양신(李亮臣)은 이광좌(李光佐)를 축출했는가 하면, 그 독봉(毒鋒)이 뻗쳐 권이진(權以鎭)·김동필(金東弼)에게까지 파급되었고 오원(吳瑗)은 오광운(吳光運)을 무함하고 권혁(權爀)은 전대 사신(專對使臣)을 모욕하였으니, 이로부터 조정이 장차 텅 비어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져서 만대(萬代)에 우러러보게 되어 있는데, 제방(隄防)이 조금 해이해지자마자 사의(私意)가 멋대로 난무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간략하게 논의를 제기하여 의견을 타진해 보는 방편으로 삼았다가 끝에 가서는 환히 드러내어 칭송함으로써 미혹시킬 계책을 들어먹히게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법에 의해 복주(伏誅)된 무리들까지도 마치 국가를 위하고 의를 위해 죽은 것같이 하고 있습니다만, 윤득화(尹得和)·권혁(權爀)의 소장(疏章)은 더욱 기탄없는 것이었습니다. 국안(鞫案)이 분명히 있고 길가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니,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아! 천지 귀신이 환히 포열(布列)해 있으니, 매우 두려운 것인데, 속일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큰 처분(處分)을 굳게 지니시어 더욱 큰 의리를 밝힘으로써 군신의 대의(大義)로 하여금 해나 별처럼 밝게 내어 걸어서 변란을 평정한 공렬(功烈)과 함께 아울러 영구히 천지(天地)에 전해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이 진실로 옳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5월 11일 을묘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권혁(權爀)의 소장 때문에 상소(上疏)하여 변해(辨解)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특진관(特進官) 박사수(朴師洙)가 진달하기를,
"겸춘추(兼春秋) 이한상(李漢相)은 조심스런 마음가짐으로 공사(公事)를 봉행하여 수거(修擧)된 일이 많고, 장례원(掌隷院)의 구임 낭청(久任郞廳)인 심석현(沈碩賢)은 술을 즐겨 완숙된 사람이 못됩니다."
하니, 이한상은 조용(調用)하고 심석현은 개차(改差)하라고 명하였다. 또 진달하기를,
"서북인(西北人)과 송도인(松都人)을 조용(調用)하라는 하교는 그 덕의(德意)가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제주(濟州)의 문무 출신(文武出身) 가운데 서울에 올라와서 사환(仕宦)하고 있는 사람이 매우 적으며, 무인(武人)의 경우는 바야흐로 사판(仕版)433)  에 올라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작년 봄 변란이 일어났을 적에 그들은 예속된 곳이 없었는데도 스스로 호위(扈衛)하기를 원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스럽습니다. 양전(兩銓)434)  에 분부하여 조용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무신(武臣) 박재신(朴再新)이 아뢰기를,
"삼남(三南)의 봉대(烽臺)는 양미(粮米)가 저축되어 있으나 북도(北道)의 봉대에는 한 되의 쌀도 저축되어 있는 것이 없으니, 청컨대 본고을로 하여금 저축해 둔 군향(軍餉)에서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광세(李匡世)를 입시(入侍)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광세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표류인(漂流人)을 데리고 온 차왜(差倭)가 3년 동안 가지 않고 머물러 있습니다. 임술년435)  에 고(故) 상신(相臣) 윤지완(尹趾完)이 통신사(通信使)로 갔을 때의 약조(約條)에, ‘표류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한 경우에는 패선(敗船)하여 운명(隕命)한 사람 이외에는 순부(順付)436)  하여 보내게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뒤 표류하여 대마도에 도착한 사람을 차왜가 데리고 오는 것을 우리 나라에서 척거(斥拒)하기는 했으나 끝에 가서는 예(例)대로 접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회답하는 서계(書契) 가운데 ‘이 뒤로는 전례로 삼지 말라[後勿爲例]’는 네 글자가 있었기 때문에 차왜가 이 네 글자를 고쳐줄 것을 청하면서 한사코 가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임술년에 약조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뒤 차왜를 접대함에 있어 항식(恒式)이 없었다. 우리 나라는 모든 일에 대해 처음에는 약조를 굳게 정하지 않았다가 끝에 가서는 모두 따르고 있는데, 저 차왜가 이미 우리 나라에서 모든 일을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어코 들어 준 뒤에야 그만두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2일 병진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역적 김중휘(金重輝)의 아들 김감(金瑊), 역적 윤희경(尹熙慶)의 아들 윤칠웅(尹七雄), 역적 권서린(權瑞麟)의 아들 권계강(權戒江)을 교형(絞刑)에 처했습니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정제(李廷濟)가 정형복(鄭亨復)의 소장을 인하여 대소(對疏)를 올려 조목에 따라 변해(卞解)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양사(兩司)가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3일 정사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기해년437)   이후의 서원(書院)·사우(祠宇)에 특별히 편액(扁額)을 내리라고 명한 곳과 특교(特敎)를 인하여 그대로 두게 한 곳 열두 군데는 전에 의하여 그대로 두게 하고, 그 나머지 여덟 군데는 즉시 편액을 철거하게 한 뒤에 각도(各道)로 하여금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집의(執義) 강필경(姜必慶)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각궁(各宮)과 각사(各司)의 노비(奴婢) 가운데 각 고을에 산재해 있는 자들을 추쇄(推刷)할 즈음에 속이는 것인가 의심하여 도산(逃散)한 지가 오래거나 이미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탈하(頉下)438)  되지 못한 채 전처럼 공포(貢布)를 징수당하고 있기 때문에 침탈이 백골(白骨)에게까지 미쳐 그 피해가 인족(隣族)에 두루 파급되고 있으니, 청컨대 각도의 도신(道臣)에게 분부(分付)하여 이정(釐正)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런 폐단에 대해 각별히 신칙시키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정언(正言) 심성진(沈星鎭)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부사(府使) 한성흠(韓聖欽)은 일찍이 회령(會寧)에 있을 적에 역적 이사성(李思晟), 역적 남태징(南泰徵)과 주도 면밀하게 모의한 정적(情跡)이 많습니다. 이미 역적의 지친(至親)으로서 행적(行蹟)의 의심스러움이 또 이와 같으니, 청컨대 속히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소서. 능주 목사(綾州牧使) 박당(朴鏜)은 당초의 처의(處義)가 어떠했는가는 논할 것 없이 지난번 경연(經筵)에서 이미 처분(處分)이 반박(斑駁)하다는 의논이 있었고 성교(聖敎)도 또한 그렇게 여겼는데도 무릅쓰고 부임(赴任)했으니, 파직시키소서. 장릉 참봉(章陵參奉) 남월(南)은 역적 남태징(南泰徵)을 빙자하여 외람되어 음로(蔭路)439)  에 허통(許通)된 사람이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전 우의정(右議政) 심수현(沈壽賢)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5월 14일 무오

달이 심후성(心後星)을 범하였다.

 

조상경(趙尙絅)을 좌윤(左尹)으로, 심수현(沈壽賢)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삼았다.

 

부수찬(副修撰) 김상성(金尙星)이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 또한 정형복(鄭亨復)에게 일차 논박을 받은 사람입니다만, 묵묵히 따르면서 사적으로 편당했다는 말이 한결같이 어쩌면 그리도 이해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아! 오랑캐의 글이 방자하고 패만스러워 우리 나라를 무함한 것이 망극하기 그지없으니, 저 사신(使臣)들이 어떻게 사명(使命)을 잘 봉행하지 못했다는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목숨을 걸고 극력 간쟁(諫爭)하지 못한 것이 어찌 전혀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는 제도(諸道)에 절수(折受)하는 폐단을 혁파하였으면서도 궁방(宮房)에 분속(分屬)시키라는 명은 중지시키지 않으셨으며 관동(關東) 지방 백성들의 양목(樑木)에 소모되는 경비(經費)는 감하였으면서도 행각(行閣)을 중수(重修)하는 역사(役事)를 철회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윽이 생각건대, 전하의 의중(意中)은 틀림없이 지존(至尊)이 아리땁게 여기는 귀염둥이를 위해서 이미 봉호(封號)를 정했으니, 한 구역 기름진 땅을 할급(割給)한들 어찌 그것이 성덕(聖德)에 누가 되기에 이르겠으며, 선조(先朝)께서 거처하시던 전각(殿閣)이 혹 무너진 데가 있어서 두어 칸 토목(土木) 공사를 벌이는 것이 어찌 국력(國力)을 번거롭게 하는 데 이르겠느냐고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생각하여 보소서. 절수를 혁파하라고 명하셨을 적에는 그 마음이 얼마나 쇄락(洒落)440)  했으며 양목을 감하라고 명했을 때에는 그 마음이 얼마나 측은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성심(聖心)이 점점 나태해졌으므로 연안(燕安)을 즐기려는 사심(私心)이 마음에 싹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마리의 개는 미세한 동물이지만 소공(召公)은 오히려 그것이 사람의 의지를 잃게 할까 경계했으며,441) 백금(百金)은 적은 재물이지만 한 문제(漢文帝)는 오히려 비용을 아낄 것을 생각했습니다.442)   전하의 명성(明聖)함으로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여 반성해 보시지 않은 채 끝내 즉시 정지하도록 명하시는 것을 아끼고 계십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세도(世道)가 날로 험악해지고 인심(人心)이 날로 투박해져서 오늘 충역(忠逆)에 대한 일을 논하다가 불리하게 되면 또 사문(斯文)에 대한 일을 논하고 사문의 일을 논하다가 불리하게 되면 춘추 대의(春秋大義)로 따집니다. 그리하여 내일 이광좌(李光佐)를 축출하고도 부족하면 또 심수현(沈壽賢)을 축출하고 심수현을 축출하고도 부족하면 또 재보(宰輔)의 신하들을 언급하는가 하면, 심지어 남의 선조(先祖)를 모욕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탕평(蕩平)’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도 또한 어찌할 수가 없으니, 이런 것은 오히려 여사(餘事)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유독 놀랍고 통분(痛憤)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그 이름이 죄를 지어 죽어야 할 죄적(罪籍)에 들어 있고 국가에서 이미 결단한 죄안(罪案)이 있는데도 공공연히 추장(推奬)하여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관작(官爵)을 회복시킬 때와 다름없이 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흰 머리 늙은 헌장(憲長)이 차마 침묵을 지킬 수 없어 말을 하였는데, 세염(勢焰)과 풍지(風知)가 물러나 있는 대신(大臣)과 무슨 관계가 있길래 멋대로 패려스러운 추욕(醜辱)을 가하면서 비난과 모욕을 마구 퍼붓고 있으니, 그 또한 가소로울 뿐입니다. 그리고 사설(邪說)을 충동질하여 확장시키고 공의(公議)에 대해 극력 공격했다는 등등의 말은 한결같이 어쩌면 그리도 무엄합니까? 만일 무장(無將)443)  의 죄를 징토(懲討)한 사람을 사설(邪說)을 충동질했다고 배척하며 기강을 간범한 자를 비호하고 나서서 공의(公議)라고 추장한다면, 당당한 토복(討復)의 의리가 이에 도리어 세상에서 기휘(忌諱)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소장(疏章)에서 면계(勉戒)한 대의(大意)는 옳으나 아직도 나의 뜻을 잘 모른 것이다. 권혁(權爀)·정형복(鄭亨復)의 소장 내용은 이미 통촉하고 있다. 이는 내가 성심(誠心)으로 표준을 세우지 못한 데에서 온 소치에 불과한 것이니, 스스로 면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근래 피차 다투는 것은 각자가 중정(中正)의 도를 세운다고 하지만 중도(中道)를 확립시키는 의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 연후에야 중정(中正)하다고 할 수 있다. 피차를 막론하고 그 자신들의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곳에 나아가 바로잡아서 중도에 맞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극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광운(吳光運)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지난번 재신(宰臣)의 말이 지나친 것 같았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오광운의 재주와 기국은 내외직(內外職)에 모두 가합니다만, 색목(色目)에 물든 것이 바로 흠입니다."
하였다. 이세진(李世璡)에게 직첩(職牒)을 제급(題給)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송인명이 아뢴 것을 따른 것이었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역적 집안의 전답(田畓) 가운데 40결(結)은 남한(南漢)에 획급(劃給)하고 20결은 북한(北漢)에 획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박사수(朴師洙)가 아뢰기를,
"조지빈(趙趾彬)이 민정(閔珽)의 개정(改正)을 청한 것은 잘못입니다. 민정의 할아비인 민용(閔鏞)은 기사년444)  에 수립(樹立)한 공이 있습니다."
하니, 다시 의망(擬望)하여 기용하라고 명하였다. 전 집의 이근(李根), 전 장령 이광운(李光運), 전 지평 안상휘(安相徽)·정언섭(鄭彦燮), 전 정언 송수형(宋秀衡)·정홍제(鄭弘濟), 전 교리 조명익(趙明翼), 전 부교리 윤섭(尹涉)·조명택(趙明澤) 전 수찬 홍봉조(洪鳳祚)·유겸명(柳謙明), 전 부수찬 이도원(李度遠)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는데, 이근 등은 정미년445)  에 삼사(三司)로 있었으니, 송인명이 건의한 것을 따른 것이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5월 15일 기미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선묘조(宣廟朝)에 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은 국가의 공사(公事)에 대해 수응(酬應)하는 일이 매우 많아서 자못 보호(保護)하는 도리를 잃게 될까 저어하여 승지(承旨)를 시켜 요점이 되는 말을 뽑아서 부첨(付籤)하여 들여오게 할 것을 청했으니, 의당 이 전례에 따라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숙고(肅考)께서는 말년(末年)에 늘 환후(患候) 중에 있었기 때문에 공사(公事)를 재절(裁折)하여 들이게 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장계(狀啓)만 요점을 뽑아서 부첨하여 들이도록 명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선조(先朝) 때에는 비록 그 대략을 뽑아서 입계(入啓)했었지만 선조(先朝)에서는 항상 그 대략을 열람하고 나서 또 반드시 그 나머지도 열람하시었다."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정형복(鄭亨復)의 소장은 그 어세(語勢)를 살펴보면 심수현(沈壽賢)도 국문(鞫問)하자는 뜻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는 대개 이명언(李明彦)을 빌어서 심수현에게까지 파급시키려는 것이어서 지의(指意)가 매우 흉독(凶毒)스럽습니다."
하고, 이어 출사(出仕)하도록 면려시킬 것을 청하였다.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이는 김재로(金在魯)가 무단히 명을 어긴 것과는 다르니, 책려(責勵)시켜 그로 하여금 명에 응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재로는 충주 목사(忠州牧使)에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을 적에 망령된 말을 한 일이 있어 논죄(論罪)했었다. 대신(大臣)이 그가 공이 있다는 것으로 승진 발탁시킬 것을 진달하였으나 전일의 혐의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하였다. 우참찬(右參贊) 김동필(金東弼),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문명(趙文明)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김재로에 대해 영상(領相)이 천발(薦拔)했다고 하셨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 응당 혐의스런 단서가 되는 것이니, 전하께서 실언(失言)임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게 기용당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장차 자기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이 발탁해 주기를 기다릴 뿐이니, 이는 국가가 절로 피차를 나눈 것으로 군하(群下)가 편당하는 것을 질책할 수 없게 됩니다."
하고, 조문명이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 어영 대장(御營大將) 장붕익(張鵬翼)과 함께 진달하기를,
"각도(各道) 친기위(親騎衛)의 몰기(沒技)한 것 가운데는 간교한 속임수가 많으니, 청컨대 금군 도시(禁軍都試)446)  의 예(例)에 의거하여 3등(三等)에 들고서 몰기된 자에게만 비로소 급제(及第)를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무사(武士)들이 장차 억울한 마음을 품게 된다는 것으로 윤허하지 않고 단지 간계(奸計)를 방지하도록 신칙시킬 것만 명하였다. 그리고 시험을 관장하는 사람이 엄하게 하지 못하여 중간에 사심(私心)을 쓴 자가 있으면 과장(科場)에서 사정(私情)을 쓴 율(律)에 의거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집의 강필경(姜必慶)이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작년에 역적 이배(李培)의 공초(供招) ‘전 영흥 부사(永興府使) 김정하(金鼎夏)의 아들인 출신(出身) 김성달(金成達)이 적도(賊徒)에 들어갔는데, 이른바 육장사(六壯士) 가운데 한 사람이며, 김정현(金鼎鉉)·김세후(金世垕) 등 역적은 또 김정하의 절족(切族)이라고 했으니, 나라 사람들의 의혹스럽게 여기는 것이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역적의 초사가 과연 실상(實狀)이라면 그의 아비가 어떻게 감히 스스로 평인(平人)의 틈에 끼어 관직(官職)에 의망(擬望)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른바 김성달이 김정하의 아들이 분명한가의 여부를 한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김정하를 잡아다가 핵실(覈實)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이미 핵실하는 데에 관계된 것이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형조 참의(刑曹參議) 이승원(李承源)은 무릇 송사(訟事)를 처리할 즈음에 한결같이 청탁(請託)만을 따르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5월 16일 경신

집의 강필경(姜必慶)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사행(使行)이 왕래할 때에 상고(商賈)를 엄금하는 것은 외상질하여 미납(未納)되는 일을 두절(杜絶)시키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저 청나라 사람들의 물화(物貨)에 대해 아직도 변상(邊商)들이 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이런 말이 사행이 책문(柵門)을 나올 때 발론되기에 이르렀으니, 이 뒤로 만일 계속 덮어두고 오랫동안 환보(還報)하지 않았다가 사행이 왕래할 때 탄로가 난 경우에는 강변(江邊)에다 효시(梟示)하겠다는 뜻으로 개성 유수(開城留守)·평안 감사(平安監司)에게 분부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문(牓文)을 내어 걸게 하여 개성부(開城府)와 평양(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 등지에 엄히 신칙시킴으로써 뒷폐단을 엄히 방지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17일 신유

이기진(李箕鎭)을 대사헌으로, 이현모(李顯謨)를 부교리로 삼았다.

 

졸(卒)한 우의정 오명항(吳命恒)에게는 충효(忠孝)라는 시호(諡號)를, 졸한 영돈녕(領敦寧) 조태억(趙泰億)에게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졸한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에게는 효희(孝禧)라는 시호를, 졸한 예조 판서 서문유(徐文𥙿)에게는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졸한 예조 판서 김첨경(金添慶)에게는 숙간(肅簡)이라는 시호를, 증(贈) 이조 판서 박상(朴祥)에게는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증 좌찬성 이봉상(李鳳祥)에게는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증 병조 판서 남연년(南延年)에게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증 숭선군(崇善君) 이총(李灇)에게는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증 해원군(海原君) 이건(李湕)에게는 충효(忠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헌부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각궁(各宮)과 각사(各司)의 노비들을 이정(釐正)하는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관명(李觀命)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시장(諡狀)을 진술하면서 시장(諡狀)의 내용에 서덕수(徐德修)의 일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붓을 들고 지워가지고 내리면서 또 하교하기를,
"지금 세교(世敎)를 면려하는 때를 당하여 이런 등등의 부분에 대해서는 의당 삼가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은 시사(時事) 때문에 저앙(低仰)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대처분(大處分)은 끝내 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연전에 이천기(李天紀)의 일에 대해 하교할 적에 이미 경위(涇渭)447)  의 뜻을 보였었고, 정호(鄭澔)가 영상(領相)으로 있을 적에 올린 차자(箚子)의 비답(批答)에서도 상세하게 하교했었다. 이미 내가 이런 등등의 처분을 엄히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장(諡狀)을 빙자하여 오만스럽게 송원(訟冤)하였으니, 파직시키라."
하였다.

 

5월 18일 임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잇따라 소장을 올려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허부(許副)448)  하였다.

 

이광좌(李光佐)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삼았다.

 

5월 19일 계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5월 20일 갑자

정언(正言) 심성진(沈星鎭)이 김정하(金鼎夏)에 대한 계사(啓辭)에 거론한 바 있었던 김성달(金成達)은 김정하의 아들이 아니었고 김정현(金鼎鉉)·김세후(金世垕)는 김정하의 절족(切族)이 아니었다는 것 때문에 피혐(避嫌)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이정제(李廷濟)를 승지(承旨)로, 여필용(呂必容)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김중려(金重呂)를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유성추(柳星樞)를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한번 대통력(大統曆)을 고쳐 시헌력(時憲歷)으로 만든 뒤로부터 역법(曆法)이 정밀해져서 일식(日飾)·월식(月飾)과 절기(節氣)의 분각(分刻)이 합당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청력(淸曆)과 향력(鄕曆)에 서로 차이나는 부분이 많은데, 이는 대개 천도(天道)가 점차로 차이가 생겨 누적되어온 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시헌법(時憲法)은 숭정(崇禎)449) 무진년450)                  을 역원(曆元)으로 삼았는데, 지금까지 1백 2년이 되었습니다. 추측(推測)하여 수정(修正)하는 것은 바로 역법을 정리하는 공통된 방법이고 천리(天理)를 공경하여 따르는 대도(大道)인 것인데, 우리 나라에는 측량(測量)에 관한 제반 기구(器具)가 없어서 일체 청나라에서 개정(改正)한 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용법(用法)과 방서(方書)를 지난해 절행사(節行使)가 있을 적에 역관(譯官)        고시언(高時彦)이 얻어가지고 왔습니다만, 그 법이 매우 어려워서 주야로 해석(解釋)하여 낸다고 해도 사세로 보아 하기 어렵고 일과(日課)로 인출(印出)하자니 앞으로 시기가 어긋남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합삭(合朔)451)                  과 절기(節期)·시각(時刻)을 우선 이정(釐正)하게 하소서. 그리고 방서(方書) 44책 가운데 이른바 팔선표(八線表) 등 두서너 조항이 붙여진 것은 다 가져오지 못했으므로 칠정(七政)452)                  의 위도(緯度)와 화성(火星)의 경도(經度)를 추보(推步)하는 방법에 대해 손을 댈 수가 없으니, 불가불 본감(本監)의 관원(官員) 1인을 정송(定送)하여 빠진 부분의 책을 구득하여 오게 해서 그 용법(用法)을 배운 연후에야 칠정을 다 추보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고, 이어 고시언에게 우선 가자(加資)하고 책자(冊子)를 간포(刊布)하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박치원(朴致遠)의 사형을 용서해 준 것은 그것을 부모(父母)를 위해서 썼기 때문입니다. 이홍매(李弘邁)는 이미 탐장(貪贓)임을 승복했는데도 박치원을 죽이지 않은 것 때문에 또 이홍매도 죽이지 않고 있으니, 신은 장법(贓法)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무너질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의당 옥관(獄官)으로 하여금 곧바로 일률(一律)453)  로 해당시켜 아뢰게 한 다음 성상께서 특별히 처분(處分)을 내리시는 것이 가한 조처일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박치원의 장물(贓物)을 이홍매에 견주어 본다면 몇 배가 되는데, 유독 이홍매만 죽인다면 진실로 원통한 일이다. 박치원은 도류안(徒流案)에다가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한 다음 종신토록 금고(禁錮)에 처하되 ‘감사(減死)’라는 두 글자를 써 넣으라. 이홍매는 감사(減死)하여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먼 곳에 정배한 다음 종신토록 금고시킴으로써 당연히 사형에 처해야 하는데 우선 감면하였다는 뜻을 보이게 하라. 그리고 박치원과 이홍매의 자손은 현관(顯官)에 서용하지 말 것을 전조(銓曹)에 분부하라. 이 뒤로는 범장(犯贓)에 관계된 모든 사람은 본부(本府)에서 곧바로 일률로 감단(勘斷)하게 하라."
하였다. 이태좌가 또 청하기를,
"역적들에게서 적몰(籍沒)한 전답(田畓) 2백 78결(結) 안에서 공신들에게 나누어 줄 숫자를 정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원훈(元勳)에게는 25결을 주되 2등·3등은 등수에 따라 5결씩 감하고 그 나머지 가운데 절반은 충훈부(忠勳府)에 주고 절반은 양향청(糧餉廳)에 주게 하라."
하였다. 역적에 연좌된 사람 가운데 출계(出繼)하여 남의 후사(後嗣)가 된 사람은 논하지 말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의금부(義禁府)에서 역적 최경우(崔擎宇)에 대한 연좌 가운데 출계(出繼)한 사람의 연좌 여부를 계품(啓稟)한 것에 따른 까닭이었다. 하교하기를,
"출계(出繼)한 사람은 논하지 말라는 것이 이미 법전(法典)에 실려 있으니, 최경우가 비록 대역(大逆) 죄인이기는 해도 법을 어찌 달리할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논하지 말 것을 영원히 항식(恒式)으로 정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장령 허옥(許沃)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가(逆家)의 전토(田土)를 적몰한 것은 이미 본읍(本邑)의 전안(田案)에 의거한 것인데, 해조(該曹)에서 그들의 정소(呈訴)를 인하여 되돌려준 것이 많습니다. 조세추(曹世樞)·나만치(羅晩致)에 이르러서는 온 도내(道內)에서 제일가는 부자인데도 충훈부에 이속(移屬)된 것은 몇 결(結)에도 차지 않으니, 그 소루(疏漏)함을 알 수 있습니다. 청컨대 호조(戶曹)의 당상(堂上)을 추고하게 하고 여러 역적들의 전답(田畓)을 충훈부로 하여금 다시 문적(文籍)을 조사하여 일체 도로 적몰에 넣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김시형(金始炯)이 충주(忠州)의 죄인 이광진(李光震)은 적당(賊黨)을 효시(梟示)하라는 관문(關文)에서 거론하지 말라는 것으로 본사(本司)에 보고하여 왔습니다만, 이광진이 청주(淸州)의 진영(鎭營)에 돌입하여 흉칙스런 짓을 저지른 정절(情節)은 이미 자복을 받았으니, 청컨대 일체로 효시하게 하라고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의금부의 죄인 유호(柳灝)를 3차 형문(刑問)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임징하(任徵夏)를 25차 형문하였으나, 서명(署名)하지 않았다.

 

5월 22일 병인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영접하였다. 환궁(還宮)한 뒤 혼궁(魂宮)에서 조제례(弔祭禮)를 거행하였다.

 

충청도(忠淸道) 아산현(牙山縣)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몸통은 하나이고 머리는 둘이었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시강원(侍講院)의 존파(存罷)에 대해 실록(實錄)에서 조사하여 보니, 순회 세자(順懷世子)가 돌아가셨을 적에는 춘방(春坊)454)  의 존파에 대해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곳이 없습니다만, 3년 안의 정목(政目)에는 춘방의 인원을 차출한 일이 없었습니다. 을유년455)   대신(大臣)들의 수의(收義)에도 순회 세자가 돌아가셨을 적에 궁관(宮官)은 장사(葬事)를 지낸 뒤에 혁파했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을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니, 1년이 지난 뒤에 혁파하라고 명하고 이 뒤로는 단지 실관(實官)만을 차출하게 하였다. 익위사(翊衛司)에는 궐원(闕員)이 나도 보임(補任)시키지 말게 하였으며 춘방(春坊)의 겸관(兼官)도 궐원이 나도 보임하지 말게 하였다.

 

5월 24일 무진

임금이 관소(館所)에 행행(幸行)하여 칙사(勅使)를 접견하고 연향(宴享)을 베푼 뒤에 환궁(還宮)하였다.

 

서명균(徐命均)을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다.

 

5월 26일 경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우산장(牛山章)의 야기잠(夜氣箴)456)  을 홍문관(弘文館)에서 정사(精寫)하여 들여오도록 명하였다.

 

5월 27일 신미

헌부에서 【지평 권일형(權一衡)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산 현감(慶山縣監) 민정모(閔廷模)는 형장(刑杖)을 삼가지 않아서 백성들이 죽음을 당하고 있고, 보성 군수(寶城郡守) 유탄(柳綻)은 어리석고 미련하여 패려스러운데다가 술에 빠져 미쳐 날뛰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조관(朝官)이 일에 대해 논한 소장(疏章)과 외방에서 폐단에 대해 진달한 장계(狀啓)를 품처(稟處)하라고 명을 내렸는데도 묘당(廟堂)에서 복계(覆啓)하지 않고 있으니, 날마다 개좌(開坐)하여 상의해서 회계(回啓)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덕(李匡德)이 소장을 올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잘 다스려지기를 원하고 계신데도 태평을 노래하는 소리가 아직도 이렇게 적적한 것은 전하의 총예(聰睿)가 부족하고 자인(慈仁)이 부족하며 강과(剛果)가 부족하고 명찰(明察)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한 가지 병통이 있으니, 사정(私情)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신은 외방(外方)에 있었기 때문에 옹주(翁主)가 새로 탄생한 것이 모두 몇 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삼가 생각건대, 모두가 강보(襁褓)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강보에 싸여 있는 어린 자손(子孫)을 위해서 미리 생계(生計)를 마련해 주어 일찍 산업(産業)을 증식시키고 계시니, 이는 여항(閭巷)의 사대부(士大夫)들도 오히려 고치(高致)라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전하(殿下)께서 사랑하시는 자손인데, 부귀(富貴)하지 못할 것이 무슨 걱정이 되기에 기필코 서둘러 일찍이 계교를 하신단 말입니까? 지금 전하의 마음이 이미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힘을 쓰고 계신데, 또 어느 겨를에 이런 등등의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쓰신단 말입니까? 대저 인정이 승하면 연연하는 것이 많게 되고 사사로움이 많으면 쇄락(灑落)함이 적게 되는 것인데, 연연하는 것이 많은 마음을 가지고 쇄락한 것이 적은 정치를 행하면서도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경우는 신이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특별히 추고하라는 명이 내렸는데도 이와 같이 장황한 사설을 올렸으니, 사체에 있어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번신(藩臣)으로서 조어(措語)를 가리지 않은 것이 많으니 더욱 미안스러운 데 관계된다."
하였다.

 

5월 29일 계유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사(勅使)를 전송하고 이어 환궁(還宮)하였다.

 

간원에서 【정언(正言) 심성진(沈星鎭)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통천(通川)의 관리(官吏)가 수재(守宰)를 죽이려 모의하여 흉기(凶器)를 품은 변이 있기에 이르렀는데, 군수(郡守) 권부(權扶)의 독자(獨子)가 이것을 빌미로 병을 앓아서 마침내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권부가 구핵(鉤覈)할 적에 형장(刑杖)을 외람되이 시행하여 목숨을 잃은 사람이 6, 7인이나 되며 혹 부자(父子)를 때려 죽인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청컨대 변을 일으킨 관리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일일이 엄히 조사하여 율법에 의거해서 감단(勘斷)하게 하고 권부는 나문(拿問)하여 처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간(司諫) 윤광익(尹光益)이 소장을 올려 이광덕(李匡德)을 신구(伸救)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광덕을 추고하라고 명하였고 또 조보(朝報)에도 내지 말라고 명했기 때문에 윤광익의 소장 내용에 그것을 언급하였다. 비답하기를,
"도신(道臣)을 특별히 추고하라는 것은 한때의 희로(喜怒)에 의해 발한 것이 아니다. 비망기의 내용도 도신을 곡진히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니, 그런 비망기를 보고서도 무슨 마음에서 감히 부진(附陳)한단 말인가? 진실로 매우 미안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옥당(玉堂) 이현모(李顯謨)도 소장을 올려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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