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갑술
조문명(趙文命)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심택현(沈宅賢)을 지돈녕(知敦寧)으로, 윤광운(尹光運)을 지평(持平)으로, 윤동형(尹東衡)을 수찬(修撰)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이광덕(李匡德)이 또 망발을 했습니다. 그의 의견은 ‘내가 명주(明主)를 만났으니 끝까지 극진하게 말한다면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니, 그의 본심(本心)을 추구해보면 실로 가상스러운데 전하의 사교(辭敎)가 화평하지를 못했습니다. 따라서 저 윤광익(尹光益)과 같은 소장을 어찌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실언(失言)을 하셨으니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어떻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심지어는 이런 소장은 봉입(捧入)하지 말라고 정원(政院)에 신칙하셨으니, 이는 언로(言路)를 두절시키는 것입니다."
하고, 교리(校理) 정우량(鄭羽良)은 아뢰기를,
"신이 이광덕의 소장을 보고서는 매우 부끄러워했습니다. 이광덕의 소장은 위곡(委曲)스러운 점은 부족하였으나 인신(人臣)의 도리는 정직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위곡은 원래 아름다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삼사(三司)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번신(藩臣)은 말을 하였으니, 신의 의견에는 삼사는 죄를 주고 번신을 상을 준 연후에야 격려하고 권면하는 도리에 합치될 것 같습니다. 전하의 자손(子孫)이 된 분은 부귀하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이 없으니, 이로 인하여 건지산(乾止山)을 도로 출급(出給)한다면, 성덕(聖德)이 어찌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신이 호남(湖南)에 갔을 적에 이광덕이 이 일을 가지고 신을 절실하게 책하였는데, 신이 부끄러워 승복했습니다. 신이 감히 전하의 뜻을 모르겠습니까만, ‘지금은 자애로운 마음이 평상시의 배나 되기 때문에 비록 중도에 지나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자(臣子)의 도리에 있어 억지로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기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되어 군부(君父)의 정리(情理) 때문에 임금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따른다면 이는 부시(婦寺)457) 의 충성이니, 이광덕은 곧 전하의 보신(寶臣)인 것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 이집(李㙫), 도승지 이정제(李廷濟)도 말을 하였다. 정우량이 아뢰기를,
"이광덕의 소장에 새로 탄생한 옹주(翁主)가 몇 분이나 되는지 모르겠다고 한 말은 이것이 또한 어찌 할 수 없는 말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은 이보다 심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당(唐)나라의 위징(魏徵)의 소릉(昭陵)에 대한 대답458) 과 우리 나라의 조식(曹植)이 궁중(宮中)의 한 과부(寡婦)라고 한 말459) 에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이 이르길, "효종(孝宗)께서는 다섯 후궁(後宮)을 두었었기 때문에 고(故)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용만(龍灣)460) 과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일로 경계했었다. 그러나 새로 태어난 옹주가 몇 분인지 모르겠다고 한 말은 불만스러워하는 말인 것이다.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고 한 것은 내가 부끄러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국세(國勢)의 외로움과 위태로움을 멀리 팔방(八方)과 객사(客使)에게 전파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묘조(成廟朝)에서는 궁방(宮房)의 일 때문에 간쟁하여 논집(論執)한 계사(啓辭)가 있었는데, 성묘께서 ‘이 꽃이 핀 뒤에 다시는 필 꽃이 없다[此花開後更無花]’는 시구(詩句)를 읊자, 그때 제신(諸臣)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따라서 그 장계를 즉시 중지하였다. 지난 겨울부터 내가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억제하고 있었으나, 심사(心事)가 어찌 안정(安定)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불만스럽게 여겼다고 한 하교는 또한 공평함을 잃은 데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신이 아무리 못났기로서니 어찌 이광덕을 위하여 유세(游說)하겠습니까?"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김계환(金啓煥)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신(大臣)과 제신(諸臣)이 비망기(備忘記)를 환수(還收)하라고 청한 것은 진실로 우국 애민(憂國愛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삼사(三司)가 해이(解弛)하여 떨치지 못한다는 말이 연주(筵奏)에서 교대로 잇따라 발론되고 있으니, 신은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각(臺閣)이 해이하여 떨치지 못하는 풍조는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이광덕과 같은 괴이한 거조를 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였다. 지평 권일형(權一衡)이 전에 아뢴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정필(李廷弼)이 군사를 버린 것은 갑작스레 변란을 당한 즈음에서 나온 소치이므로 설사 중간에 주선(周旋)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족히 그 죄를 가리어 줄 수는 없습니다. 당초에 벌을 박하게 준 것은 너무 너그러운 데에 치우친 실책이었는데 곧이어 직첩(職牒)을 지급한 것은 더욱 경솔한 데에 관계되는 것이니, 직첩을 환급(還給)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원에 내린 비망기를 도로 정지하소서."
하고, 승지 조석명(趙錫命)은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소장을 정원에서 어찌 봉입(捧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신칙시키라고 한 것은 그 뜻이 봉입하지 말라는 것과 다르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회덕(懷德)·진잠(鎭岑) 두 고을의 군액(軍額)이 가까스로 1백 50명인데, 도신(道臣)이 가까스로 다른 고을에 이정(移定)했습니다. 이정된 자의 당년(當年)의 미수(未收)된 군포(軍布)를 지금 바야흐로 두 고을에 독봉(督捧)하고 있는데, 궐액(闕額)까지도 백징(白徵)461) 한다면 참으로 이른바 가죽이 없는 터럭의 꼴이 되었으니, 청컨대 도신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조사하여 과연 백성에게 있는 것이라면 햇수를 한정하여 탕감(蕩減)시키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조현명이 또 아뢰기를,
"이봉상(李鳳祥)의 군관(軍官)으로서 절사(節死)한 사람인 홍임(洪霖)의 청주(淸州) 기첩(妓妾)이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절의(節義)를 지킨 사람의 종자를 그대로 천적(賤籍)에 둘 수는 없으니, 본부(本府)로 하여금 면천(免賤)시키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봉교(奉敎) 박필균(朴弼均)이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검열(檢閱) 조상행(趙尙行)이 올리지 못한 소장에 ‘사천(史薦)462) 때 한번도 서로 상의하지 않았다.’고 했고, 또 말하기를, ‘수천(首薦)된 사람의 결과(決科)가 법식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관중(館中)의 고사(故事)에 비록 주천인(主薦人)이라도 혐의스런 단서가 있어 죄를 받았으면 원래 문의(問議)하는 법규가 없기 때문에 신이 전례에 따라 묻지 않았습니다만, 회천(回薦)463) 하기 전에 즉시 간통(簡通)을 보내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윤급(尹汲)의 낙서(落書)가 법식을 어긴 것은 본래 무심(無心)한 데서 나온 것이니, 무슨 털끝만큼인들 하자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조상행(趙尙行)도 또한 소장을 올려 아뢰기를,
"윤급의 인품·처지·재예에 무슨 불가한 것이 있겠습니까만, 과명(科名)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대소(臺疏)에서 회복시켜 주기를 청한 것은 실로 물의(物議)의 비웃음을 받았었습니다. 따라서 난대(蘭臺)464) 에서 사필(史筆)을 잡게 하는 데에는 끝내 혐의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유최기(兪最基)·김약로(金若魯)·김상익(金尙翼)·심성진(沈星鎭) 같은 이들이 어찌 갑자기 과명(科名)에 하자가 있는 윤급만 못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모두에게 예사 비답을 내렸다.
6월 2일 을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특진관(特進官)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인조조(仁祖朝)의 신하인 유백증(兪伯曾)의 소차(疏箚)에 간절하고 지극한 말이 많으니, 가져다가 열람하시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김호(金浩)가 아뢰기를,
"남연년(南延年)이 해를 당할 적에 그의 여비(女婢)가 적진(賊陣) 밖에서 울부짖고 통곡하면서 이어 적도(賊徒)들에게 빼앗긴 의복을 요구하니, 적장(賊將)이 그 여비를 충성스럽게 여겨 드디어 의복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의 여비는 그 의복을 가지고 가서 염습(斂襲)한 다음 피눈물을 흘리면서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연년의 첩(妾)이 도보(徒步)로 도망쳐 나오니 어떤 노(奴)가 적의 말을 훔쳐 내어 태워가지고 변란을 피했다고 하니, 의당 아름답게 여겨 포상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면천(免賤)시키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연년의 아내는 떠돌다가 음성(陰城) 땅에 살고 있는데, 나이도 늙고 빈궁(貧窮)하다고 합니다."
하니, 본도(本道)에 명하여 식물(食物)을 넉넉하게 지급하게 하였다.
6월 3일 병자
사간(司諫) 서명빈(徐命彬)이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광덕(李匡德)의 소장은 그 대의(大意)가 궁방(宮房)에서 절수(折受)받는 것에 대한 폐단을 논한 것에 불과한 것인데, 당초의 비교(批敎)에는 미안하게 여기는 뜻이 너무 드러나 있었고 계속해서 내린 비망기(備忘記)에는 성색(聲色)의 노여움을 현저하게 더하여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는 명이 있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더욱 성인(聖人)의 광명 정대한 체통이 아닌가 합니다. 임금의 말이 한번 나오면 사신(史臣)이 그것을 기록하고 팔도에 그것이 전해지기 때문에 비록 한때 숨기려고 해도 도리어 백세(百世)에 비난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은대(銀臺)465) 의 신하는 일에 따라 임금의 궐루(闕漏)를 보좌하는 것이 그 직임인 것입니다. 그런데 위복(違覆)466) 하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명대로 봉행하는 것이 공손함이 된다는 것을 알 뿐이라면, 직임을 더럽힌 죄에 대해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신은 해당 승지(承旨)를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려야 된다고 여깁니다. 대각(臺閣)은 바로 임금의 이목(耳目)이고 정원(政院)은 바로 임금의 후설(喉舌)인 것인데, 이목의 하는 바를 후설이 어떻게 관섭(管攝)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서로 고치(高致)로 삼고 있는데, 이는 지리할 뿐만이 아니라 진실로 미안스러운 데에 관계되는 것이다."
하였다.
공조 참의(工曹參議) 성환(成瑍)이 소장을 올려 청하기를,
"낭청(郞廳)을 보내어 강 위에 왕래하는 선척(船隻)을 적간(摘奸)하여 구법(舊法)대로 수세(收稅)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본조(本曹)에서 수철(水鐵)467) 로 주조(鑄造)하는 기구를 능침(陵寢)과 제처(諸處)의 신조(新造)와 수보(修補)에 대해 본디 연월(年月)의 정한(定限)이 없습니다. 청컨대 신조하는 것은 2년으로 정하고 수보는 1년으로 정한하되 기면(器面)에다 주공(鑄工)의 이름자를 새기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장에서 진달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소장의 말단에 거론한 일은 잗단 데에 관계된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전 영중추부사 이관명(李觀命)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6월 4일 정축
임금이 안질(眼疾) 때문에 침을 맞았다. 수찰(手札)을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에게 내렸는데, 예조 판서 김시환(金始煥)을 보내어 그로 더불어 함께 오게 하였다.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종백(宗伯)468) 을 보낸 것은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간원(諫院)에서 【헌납(獻納) 이만유(李萬維)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충주(忠州)의 전 영장(營將) 신익흠(申益欽)은 변란에 임하였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국가를 잊고 의를 무시하였으니, 청컨대 먼 변방(邊方)에 정배(定配)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청풍(淸風)의 전 부사(府使) 황태하(黃泰河)는 역적의 관문(關門)이 본고을에 도착했을 때를 당하여 관례(官隷)로 하여금 이웃 고을에 차례로 전하게 하였는데, 마치 평상시 응당 행해야 하는 첩문(牒文)을 전례에 따라 전하는 일처럼 하면서 조금도 의심을 가지지 않았으니, 청컨대 먼 변방에 정배시키소서."
하니, 아울러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신이 을사년469) 새로 경화(更化)된 초두(初頭)에 제일 먼저 경연관(經筵官)에 제수되었는데 그때 성무(聖誣)를 신설(伸雪)하고 국적(國賊)을 토죄하는 것으로 제일의 의리를 삼았었습니다만, 성의(誠意)가 깊지 못하여 감회(感回)시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성조(聖朝)의 처분으로 하여금 고식적이고 구차하게 만듦으로써 적세(賊勢)가 확장되게 만들어 종사(宗社)가 거의 경복(傾覆)될 뻔했으니, 고요히 생각하여 보매 신의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사충(四忠)의 절혜(節惠)470) 의 은전(恩典)에 참여하여 의논한 사람이 신이 오며 삼사(三司)에서 역적을 토죄하자는 의논이 발론되었을 적에 합사(合辭)하게 한 것도 또한 신입니다. 그런데 신이 이른바 충(忠)이라고 한 사람은 이제 도리어 역(逆)이 되었고 신이 이른바 역이라고 한 사람은 이제 도리어 충이 되어 있으니 역을 비호하고 충을 무함한 꾸짖음을 신이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처분(大處分)이 있은 뒤에 충이니, 역이니 하면서 마음대로 현란시키려 한다는 것으로 본직(本職)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상주 목사(尙州牧使) 박사수(朴師洙)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상주 한 고을에는 탕평책(蕩平策)에 의한 정사를 펼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그 공효를 보고 싶다."
하였다. 【박사수는 재상(宰相)의 반열(班列)에서 걸군(乞郡)하여 외임(外任)에 보직되어 나가게 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8책 22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33면
【분류】인사(人事)
6월 5일 무인
임금이 침을 맞았다.
헌부에서 전에 아뢰었던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 헌납 이만유이다.】 전에 아뢰었던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황태하(黃泰河)가 차마 역적의 관문(關文)을 전한 것은 실로 겁에 질려 죽음을 두려워한 데에서 나온 소치였습니다만, 호좌(湖左)의 사람들로서는 입이 있는 이는 모두 전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니, 허실(虛實)을 조사하여 율법에 의거해서 감단(勘斷)하는 것을 왕법(王法)에 있어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잡아가 추문하여 처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6월 6일 기묘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집(李㙫)을 우의정(右議政)에 제배하고,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을 영의정(領議政)으로, 우의정 이태좌(李台佐)를 좌의정으로, 이관명(李觀命)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문명(趙文命)을 이조 판서로,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삼(李森)을 발탁하여 병조 판서로 삼았다. 복상(卜相)471) 하라고 명하자, 이태좌(李台佐)가 청대(請對)하여 품지(稟旨)하고 이집(李㙫)을 명에 응해 천거했다.
헌부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7일 경진
조문명(趙文命)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았다. 조문명은 총재(冢宰)로서 문형(文衡)을 겸하였고 또 원융(元戎)을 겸했으니, 이는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6월 10일 계미
이성룡(李聖龍)을 승지(承旨)로, 성덕윤(成德潤)을 집의(執義)로, 윤섭(尹涉)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진망(李眞望)을 부제학(副提學)으로, 김시혁(金始爀)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고, 장붕익(張鵬翼)을 발탁하여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6월 11일 갑신
헌부에서 【지평 윤광운(尹光運)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총유청(摠戎廳)의 초관(哨官) 나억령(羅億齡)은 주장(主將)이 중군(中軍)을 시켜 곤장(棍杖)을 쳤는데, 곤장 한 대를 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서서 도리어 포악한 말을 마구하여 주장을 꾸짖고 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장교(將校)들이 죄주기를 청한 뒤에야 비로소 태거(汰去)시켰으니, 청컨대 나억령은 각별히 과죄(科罪)하고 총융사(摠戎使) 신광하(申光夏)는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선릉 봉사(宣陵奉事) 이필(李弼)은 망령되고 허탄하며 비열하고 잗단데, 미천한 술법(術法)을 빙자하여 사적(仕籍)에 허통되었으니, 청컨대 태거시키소서."
하니, 아울러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간원에서 【정언(正言) 심성진(沈星鎭)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장(武將)을 발탁하여 병판(兵判)에 제수한 것은 1백 년에 겨우 두서너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오랫동안 숭반(崇班)에 있으면서 여망(輿望)에 흡족하게 된 뒤에 제수했습니다. 병조 판서 이삼(李森)은 재략(才畧)이 있고 공훈은 말할 수가 있습니다만, 겨우 정경(正卿)에 오르자마자 갑자기 발탁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미덥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실로 적격자가 있다면 어찌 백년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으며 적격자를 얻지 못했다면 어찌 백년 뿐이겠는가? 그는 지금껏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으나 근세(近世)의 명무(名武)이니 오늘의 직책이 어찌 외람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속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본조(本曹)에서 관장하고 있는 각사(各司) 노비(奴婢)가 신공(身貢)을 상납(上納)할 즈음에 본조(本曹)와 사섬시(司贍寺)에 모두 작지(作紙)472) 와 역가(役價)가 있습니다. 신공을 바칠 노비가 3명을 초과하면 계류목(稽留木) 1필(疋), 작지 3장(張), 공인(貢人)의 역가목 3필을 원래의 납입할 숫자에 따라 순차적으로 지계(支計)하되 작지목은 5필, 역가목은 15필을 한정으로 하여 중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섬시의 경우에는 공목(貢木)의 매 동(同)마다 포대목(布袋木)이 반 필, 노비(奴婢) 매 구(口)마다 작지가 1장(張)으로 계산하여 받아들이되 5필을 초과하지 못하게 하고, 역가목은 2척(尺) 4촌(寸)으로 계산하여 받아들이되 원공목(元貢木) 50동으로 한정하여 중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외방 고을의 경우에는 노비 매 구(口)마다 후목(後木) 반 필을 거두어 받아들이게 되어 있는데, 노비의 숫자가 많은 고을은 반 필의 후목을 추이(推移)하여 상납해도 충분하지만 노비의 숫자가 적은 고을은 후목을 거두어 받아들이는 숫자가 도리어 원공(元貢)의 숫자보다 많게 됩니다.
작년에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광덕(李匡德)이 변통(變通)시킬 것을 장문(狀聞)했는데, 노비 매구마다 후목 10척을 본조(本曹)에서 받아들이되 양사(兩司)의 작지(作紙)와 역가(役價)는 숫자를 나누어 계산해서 지급한다면 노비들이 봉납하는 것이 공평하지 못한 폐단이 없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경사(京司)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줄어들겠지만 그 의도가 백성을 구휼하자는 데 있으므로 인색하게 아낄 필요가 없겠기에 복계(覆啓)하여 윤허를 받았으며, 이를 각도(各道)에 반포했습니다. 이로부터 숫자가 적은 고을의 노비들은 더 내는 폐단이 없어졌고 숫자가 많은 고을의 노비는 덜 바치는 혜택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영남(嶺南)의 노비들만이 매 구(口)마다 후목(後木) 반 필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노비의 숫자가 많은 고을의 남는 것을 가지고 숫자가 적은 고을의 부족한 숫자에 옮겨다가 채운다고 합니다. 본도(本道)에서는 전부터 노비의 매 구(口)마다 후목 반필씩을 계산하여 받아들이고 본조(本曹)의 정식(定式)에 따라 상납한 뒤에 남는 숫자는 본도에서 별회(別會)라고 일컬으면서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영남(嶺南)처럼 크고 풍부한 데에서 잔민(殘民)들이 상납한 잉여품을 떼어다가 쓴다는 것은 진실로 구차스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노비 매 구마다 후목 20척(尺)을 감하여 10척으로 하면 큰 혜택이 되겠습니다. 그런데도 본도에서는 쟁집(爭執)하면서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사체에 있어 미안스러운 일입니다. 청컨대 일체 여기에 의거하여 정탈(定奪)하시고 10척 이외의 나머지 숫자는 감제(減除)할 것은 물론 별회(別會)라는 잘못된 법규(法規)도 혁파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이정법(里定法)을 오랫동안 준행하지 않았고 호적법(戶籍法)도 근래 또 엄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식년(式年)을 당하여 호적법을 엄히 신칙하여 반드시 가좌(家坐)에 따라 5가(家)로 통(統)을 만들고 통내(統內)에 만일 1정(丁)이 도피했을 경우에는 나머지 4호(戶)에게 죄를 매긴 뒤에 본 마을로 하여금 한정(閑丁)을 대납(代納)하게 하소서. 그리고 통내에 내접(來接)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원래 거접(居接)해 있던 고을과 신역(身役)과 성명(姓名)을 물은 뒤에 허접(許接)케 하되 행동거지가 의심스러우면 이접(移接)을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이어 면임(面任)으로 하여금 매달 말일에 고을에 보고하게 한다면 군역(軍役)을 도피하는 부류들이 거의 숨을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오가 작통(五家作統)과 이정법(里定法)은 지금에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구제(舊制)이니, 신칙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태좌가 또 아뢰기를,
"사천(史薦)이 또 실패되었습니다. 박필균(朴弼均)·조상행(趙尙行)은 함께 행공(行公)할 형세가 없으며 피천(被薦)된 사람인 윤급(尹汲)·신만(申晩)도 강(講)에 응할 수 없으니, 아울러 전례에 의거해서 송서(送西)473) 하여 출륙(出六)474) 시키소서. 그리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별겸춘추(別兼春秋)를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속히 완천(完薦)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6월 12일 을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3일 병술
간원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4일 정해
윤혜교(尹惠敎)를 승지(承旨)로, 윤순(尹淳)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조진희(趙鎭禧)를 수찬(修撰)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상성(金尙星)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광익(尹光益)을 부수찬으로, 이재항(李載恒)을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정익하(鄭益河)·민형수(閔亨洙)를 별겸춘추(別兼春秋)로 삼았다.
간원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 설서(說書) 이종백(李宗白)을 승륙(陞六)475) 시켜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이종백은 곧 전일 한림(翰林)에서 패천(敗薦)된 사람이고 또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친척이라는 혐의가 있어 다시 사국(史局)에 들어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춘추(知春秋) 김동필(金東弼)의 아룀에 따라 이 분부가 있었다.
6월 15일 무자
종묘(宗廟)의 제사 때의 헌관(獻官)인 낙춘군(洛春君) 이전(李㙉)을 파직시키고 대축(大祝)과 묘사(廟司)를 잡아다가 신문하라고 명하였으니, 축문(祝文)에 간지(干支)를 기입해 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간원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삼(李森)을 개차(改差)하는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6월 16일 기축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목멱산(木覓山)·안현(鞍峴)의 봉수장(烽燧將)과 봉수군(烽燧軍)을 무겁게 치죄(治罪)하라고 명하였다. 15일(무자) 밤에 목멱산에서 봉화(烽火)를 들지 않았으므로 병조(兵曹)에서 봉수장과 봉수군을 불러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황혼녘이 된 뒤에 갑자기 구름이 끼어 어두워졌으므로 봉화를 들 수가 없었다.’고 했다. 구례(舊例)에 구름이 껴서 대봉(對峯)을 바라볼 수 없어 봉화를 들 수가 없으면 병조에게 계문(啓聞)하게 되어 있는데, 이날 밤 봉수군이 병조에 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조에서 계문하지 않은 것이다. 임금이 병조에 명하여 안현(鞍峴)의 봉수장을 불러서 묻게 하였는데, 봉수장이 대답하기를,
"본봉(本烽)의 대봉(對峯)은 고양(高陽)의 해포(醢浦)·고봉(高峯) 두 곳인데 모두 날씨가 청명(淸明)하여 피차 서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화를 든 뒤에 목멱산을 바라보니 한 줄기 운무(雲霧)가 끼어 있어 전해 받아 거화(擧火)하는 것을 못보고 철회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그날 밤 구름이 낀 것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목멱산 봉수장(烽燧將)의 대답은 미봉(彌縫)에 관계되고 또 병조에 고하지도 않았다는 것과 안현의 봉수장은 목멱산에서 전해 받아 거화(擧火)하기도 전에 곧바로 먼저 봉화를 철회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두 곳의 봉수장에게 곤장(棍杖)을 칠 것을 명하고 봉수졸은 죄를 매겨 다스릴 것을 명하였다. 또 목멱산에서 이미 봉화를 들지 않았는데도 광주(廣州)의 천림산(天臨山)과 양천(陽川)의 개화산(開花山) 봉수(烽燧)에서는 일기(日記)에 날씨가 청명(淸明)하여 서로 전해 받았다고 일컬었으므로, 이 두 곳의 봉수인(烽燧人)들에게도 죄를 매겨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뒤에 천림산의 봉화는 목멱산에서 전해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버려두게 했고, 개화산은 목멱산에서 서로 전해 받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먼저 봉화를 철회했다는 것으로 개화산 봉수인만 죄주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6월 17일 경인
헌부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상경(趙尙慶)을 사간(司諫)으로, 이현모(李顯謨)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6월 18일 신묘
정의 현감(旌義縣監) 상시창(尙時昌)을 잡아다가 신문하게 하였다. 본현(本縣)에서 노예가 된 죄인 민복효(閔復孝)가 그의 아우인 민득효(閔得孝)의 배소(配所)인 제주목(濟州牧)에서 함께 거주한 때문이었다.
6월 19일 임진
교리(校理) 이현모(李顯謨)를 벽동 군수(碧潼郡守)로, 윤휘정(尹彙貞)을 위원 군수(渭原郡守)로 출보(黜補)시켰는데, 이는 궐직(闕直)했기 때문이었다. 교만함과 나태함이 풍조를 이루었다는 하교(下敎)가 있었고 또 도임(到任)한 일자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승지 윤혜교(尹惠敎) 등이 소장을 올려 신구(伸救)하고, 부교리 이종성(李宗城)도 소장을 올려 아뢰기를,
"두 유신(儒臣)을 변방에 보직(補職)시킨 것은 아마도 관서(寬恕)하게 하는 정사에 혐의스러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당일 사조(辭朝)하게 하고서 도임 일자를 장문(狀聞)하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여 거조(擧措)가 엄하고도 급박했기 때문에 보고 듣는 사람이 모두 놀랐습니다."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이태좌(李台佐)가 경연(經筵)에서 도로 중지시킬 것을 주청(奏請)하였으나 역시 따르지 않고서 단지 도임 일자를 장문하게 한 분부만을 도로 중지시켰다.
헌부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니, 윤허하지 않았다.
지돈녕(知敦寧) 심택현(沈宅賢)이 소장을 올려 아뢰기를,
"같이 죄를 진 제신(諸臣)들은 모두 의리로 인책하여 물러나서 폐기(廢棄)되는 것을 달갑게 여겼는데 신만이 뻔뻔스럽게 명을 받든다면, 사람들이 장차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스스로 물러가려는 것은 어찌 내 한몸만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인혐(引嫌)하는 것은 매우 중도에서 지나친 데에 관계가 된다."
하였다. 교리 윤섭(尹涉)도 소장을 올려 인혐하니, 비답하기를,
"처분(處分)이 이미 정해진 뒤에 분의와 도리에 있어 어찌 이와 같이 함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0일 계사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도 아울러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고 낭청(郞廳)은 나추(拿推)하라고 명하였는데, 감선(監膳)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막중한 어공(御供)을 당일 늦게야 비로소 번거롭게 품달했으니, 이는 전에 듣지 못한 일이었다."
하였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신축년476) 의 절목(節目)에 삼상(蔘商)으로서 강계(江界)에 들어가는 사람은 본조(本曹)에서 첩문(帖文)을 만들어 준 뒤에야 비로소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따라서 첩문이 없는 사람은 잠상(潛商)으로 논하여 범물(犯物)을 속공(屬公)시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 본도(本道)에서 번번이 모두에게 세금을 거두고는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고 있으므로 당초 본도에서 금하고 본조에 예속시키게 한 의도와는 어긋남이 있으니, 청컨대 절목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헌부에서 【장령 허옥(許沃)이다.】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이 해를 당할 적에 군관(軍官)들 가운데 적과 내응한 자는 복주(伏誅)되고 절의에 죽은 자는 포상(褒賞)되었으니, 난을 피해 달아남으로써 원수(元帥)를 저버린 자는 나핵(拿覈)하여 엄히 처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선한 자는 장려했고 악한 자는 징계했으니, 다시 거론하여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막중한 어공(御供)을 제때에 감선(監膳)하지 않고 서로 미루기만 하다가 늦게서야 비로소 품달했으니, 청컨대 주원(厨院)의 해당 제조(提調)도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6월 21일 갑오
남일명(南一明)을 사간으로, 윤광익(尹光益)·조명익(趙明翼)을 수찬으로, 서명빈(徐命彬)을 부응교로 삼았다.
대신(大臣)·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정부(政府)에서 서사(署事)하는 것이 파한 뒤에 묘당(廟堂)의 모유(謨猷)가 비국(備局)에 있게 되었는데, 문서(文書)가 산란해져서 팔도의 변통(變通)에 대한 일과 전후 소장(疏章)·계초(啓草)에 이르기까지 한번 복주(覆誅)한 뒤에는 다시 고열(考閱)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뒤에 묘당에 있게 되는 사람은 내용을 알 길이 없습니다. 만일 부문(部門)별로 초(抄)하여 하나의 책자(冊子)를 만들어 고람(考覽)하기에 편리하게 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서문중(徐文重)이 일국의 성지(城池)와 군총(軍摠)을 기록하여 하나의 책자를 만들어 《군국총수(軍國摠數)》라고 이름했으며, 고 상신 김구(金構)는 오래 된 문서(文書)를 분류(分類)하여 《초등록(抄謄錄)》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것을 다시 합쳐 이정(釐正)해서 책을 열어 환히 알 수 있게 한다면 국가를 경영하는 대체(大體)에 반드시 유익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문서는 한번 회계(回啓)한 뒤에는 묶어서 고각(高閣)에 방치(放置)하기 때문에 어제 회계(回啓)한 것을 오늘 또 회계하기 일쑤여서 늘 개연(慨然)스럽게 여겼다. 진달한 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태좌가 각항(各項)의 공물(貢物)에 대해 과외(科外)로 침징(侵徵)하는 폐단을 엄히 방지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또 구임법(久任法)에 대해 아뢰기를,
"전 용강 현령(龍岡縣令) 조상경(趙尙慶)도 기한을 채우지 못하고 사간(司諫)으로 옮겼습니다."
하니, 임금이 조상경은 잉임(仍任)시키라고 명하였다. 또 돈을 주조(鑄造)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의 초년 때부터 돈을 쓰기 시작했는데, 우리 나라는 돈이 없이 전해온 것이 몇 세대(世代)였는가?"
하였다. 호판(戶判) 권이진(權以鎭)이 궁방(宮房)에서 절수(折受)한 면세(免稅)된 전토(田土)는 대수(代數)가 다한 뒤에는 혁파해야 한다고 진달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듣건대, 고(故) 재신(宰臣) 박필명(朴弼明)의 말에 의하면, ‘소현궁(昭顯宮)은 당초 절수(折受)한 것이 없었는데, 강빈(姜嬪)의 옥사(獄事)477) 가 있은 뒤에 그 자손이 의지할 데가 없게 되자 효종(孝宗)께서 불쌍하게 여겨 처음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매월 곡물을 지급하게 하였고 그 뒤에 그 자손이 성장하자 적몰(籍沒)했던 사패지(賜牌地)를 모두 출급(出給)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이는 특별히 효종께서 우애(友愛)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어떻게 대대로 출급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효종의 덕의(德意)를 이제 모두 파기시킬 수는 없다. 경선군(慶善君) 이하는 각각 50결(結)을 정급(定給)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대군(大君)의 4백 결(結) 가운데 대수가 다한 경우에는 봉사조(奉祀條) 1백 50결 이외에는 당연히 환납(還納)하게 해야 한다."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연령군방(延齡君房)에 소속된 영암(靈巖)의 소안도(所安島) 둔임(屯任)들이 군역(軍役)을 침징(侵徵)당하고 있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침학하지 말 것을 내수사(內需司)에 수본(手本)으로 계하(啓下)하소서. 그리고 전라 감사 이광덕(李匡德)이 군정(軍政)을 이정(釐正)할 적에 과외(科外)의 명목(名目)은 태정(汰定)한 것이 많으니, 의당 3분의 1은 본궁(本宮)에 환속(還屬)시켜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내수사의 보장(報狀) 가운데 ‘본도(本道)에서 장문(狀聞)했다고 일컬으면서 계하(啓下)된 공사(公事)를 무시하고 곧바로 충정(充定)하였으니. 그것이 과연 명령이 봉행하는 데 가까운 것입니까?’ 하면서 번신(藩臣)을 비난하고 무시하는 의도를 현연히 드러냈으니, 사체가 놀랍습니다. 선조조[宣廟朝]의 고(故) 상신(相臣) 이준경(李浚慶)은 내시(內侍) 가운데 공손하지 못한 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비국(備局)으로 불러다가 꾸짖기도 하고 입계(入啓)하여 죄를 청하기도 했으니, 의당 엄히 신칙하여 체모(體貌)를 보존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수사에서는 단지 본궁(本宮)의 수본(手本)을 점계(粘啓)한 것인데, 문자(文字) 사이에 살피지 않은 것은 진실로 경의 말과 같다. 이 뒤로는 엄히 신칙시키도록 하겠다."
하였다. 대사헌 심공(沈珙)과 대사간 김시환(金始煥)이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심공이 아뢰기를,
"홍임(洪霖)은 이봉상(李鳳祥)과 더불어 정계(精契)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때 데리고 있던 군관(軍官)에 불과했는데도 변란에 임하여 절의(節義)에 죽었습니다. 비록 정려(旌閭)는 하였으나 아직도 증직(贈職)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흠전(欠典)입니다."
하고, 이태좌는 아뢰기를,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절의에 죽자 군관(軍官)·통인(通引)·노자(奴子)와 그의 첩(妾)이 함께 죽었는데, 조정에서는 단지 송상현에게만 증직(贈職)했고 같이 죽은 사람에게는 특별히 포증(褒贈)한 것이 없습니다. 이봉상은 국가를 위해 죽었고 홍임은 이봉상을 위하여 죽었으니, 이봉상과 일체로 정려하면 되는 것이요 증직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하였다. 우참찬 김동필(金東弼)은 아뢰기를,
"홍임이 죽은 것은 곧 나라를 위해서 죽은 것이니, 증직시켜야 합니다."
하고, 심공은 아뢰기를,
"청주(淸州)에서 절의에 죽은 세 사람 가운데 홍임이 더욱 귀중합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홍임은 이봉상을 위해서 죽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나라를 위해서 죽은 의리가 있으니, 중신(重臣)의 말이 옳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고증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3일 병신
장령 박내우(朴來羽)가 소장을 올려 이현모(李顯謨)·윤휘정(尹彙貞)을 변방에 보임(補任)시키는 것을 도로 중지시킬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한 마디 말은 사방에 두루 전송(傳誦)되는 것인데, 정원(政院)에 비답(批答)한 내용에 ‘두 신하에 대해서는 후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 전하의 이런 등등의 사령(辭令)은 끝내 병통의 근원을 제거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종성(李宗城)의 소장에 대한 비답에서는 능가(凌駕)하는 뜻이 현연히 드러나 있으니, 우리 전하의 사기(辭氣)가 종종 화평함을 잃는 것이 어찌하여 여기에 이른단 말입니까? 임금의 한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인 것이므로 조금만 화평함을 잃게 되면 마음에서 생기는 해로움을 이루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바라건대, 이를 인하여 맹렬히 반성하고 점검하여 소홀히 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신이 대신(臺臣)이 되었으니 이런 등등의 일은 마땅히 규제하여 바로잡아야 하는데, 도리어 두둔하고 나서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보덕(輔德) 송필항(宋必恒)이 소장을 올려 아뢰기를,
"을사년478) 초두에 삼사(三司)와 더불어 논할 적에 삼가 성무(聖誣)를 변해(卞解)하고 천토(天討)를 행해야 한다는 대의(大意)를 붙였었는데, 지금은 일체 전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차스레 면한 것을 요행으로 여겨 모르는듯이 명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또 현도(縣道)를 통하여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니,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함께 올라오도록 한 예판(禮判)으로 하여금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시강관(侍講官) 윤동형(尹東衡)이 아뢰기를,
"이현모(李顯謨) 등을 변방에 보임시키는 것은 중도에 지나친 조처이니, 그 벌을 조금 가볍게 해야 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윤동형을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수찬(修撰) 윤광익(尹光益)의 소장을 도로 내어주라고 명하였다. 그 소장에 아뢰기를,
"초봄에 궁방(宮房)의 면세(免稅)된 전토를 재감(裁減)하라는 명이 있자 모두 성덕(盛德)을 흠송(欽頌)했었습니다. 그러나 건지산(乾止山)의 일은 실로 처음의 마음을 계속해 가지 못한다는 탄식이 있게 했습니다. 신은 도신(道臣)의 입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명(聖明)을 위하여 이 일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삼가 임금을 허물이 없는 데로 인도한다는 뜻에 붙입니다."
하였는데, 도로 내어주라고 명하였다.
별겸춘주(別兼春秋) 정익하(鄭益河)가 소장을 올리기를,
"상신(相臣)이 전천(前薦)을 아울러 파기시키라는 말은 실로 관규(館規)가 아닙니다. 조상행(趙尙行)이 논한 것은 단지 윤급(尹汲)에게만 언급되었습니다. 따라서 윤급은 말할 것이 없겠습니다만, 아무 연고가 없는 말천(末薦)은 무슨 일 때문에 삭직(削職)시킨단 말입니까? 만일 회천(回薦)할 때에 혹 물의(物議)가 있어 패천(敗薦)시키는 것은 진실로 논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분향(焚香)하였으니, 이는 완천(完薦)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말썽을 일으킨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척(指斥)받은 자 이외에는 역시 다 파기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근래 조익명(趙翼命)이 논박을 받았을 적에 같이 피천(被薦)된 사람 가운데 홍계적(洪啓迪)·송성명(宋成明)은 대부분 행공하였습니다. 이밖에 무오년479) 사천(史薦), 기미년480) 사천, 무자년481) 사천, 무진년482) 사천도 모두 그렇게 했는데, 이제 새로 천거하게 한다면 신만(申晩)은 장차 어떻게 조처하겠습니까? 연석에서 주달하는 신하들도 일찍이 경험한 바 있는 사람들이니 이런 등등의 사례(事例)를 모를 리가 없는데도 이렇게 말을 하니, 어찌 변통시키는 데 급급하여 미처 전례를 고증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상행의 일에 이르러서는 놀랍고 망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 사람은 본직(本職)에 대해 스스로 조처하기에도 겨를이 없으니, 한천(翰薦)의 한 조항은 그가 알 바가 아닌 것입니다. 가령 당천(當薦)된 사람이 관규(館規)를 모르고서 사사로이 서로 통의(通議)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의 염우(廉隅)에 있어 진실로 인피(引避)하여 마지 않아야 하는데, 이제 어떻게 당초 사사로이 의논하지 않은 것에 대해 노여움을 발하여 끝내는 이미 완료된 일에 대해 말썽을 일으킨단 말입니까? 그가 사직(史職)에 대한 마음을 잊을 수 없어서라면 하번(下番)이 사천(史薦)을 주장하는 것은 본디 옛 규례인 것이니 염치를 무릅쓰고 나와서 담당한다면 누가 금억(禁抑)할 수 있겠습니까? 아! 과명(科名)이 부정(不正)한 사람이 이 선발을 더럽힌 적이 있더라도 진실로 좋아하는 자라면 조금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복과(復科)시켜 의망(擬望)하기를 청한 것이 전후에 한정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만, 혹시라도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기필코 하자를 찾아내려 하고 있으니, 신진(新進)들의 이런 풍습은 진실로 이미 아름답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직소(辭職疏) 끝에 두루 4인의 성명을 거론했는데, 이는 실로 비천(祕薦)인 것인 바 천만고에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신은 진실로 이로부터 사신(史臣)이라 명칭(名稱)하는 사람들이 각기 사사로이 좋아하는 자로써 천염(薦剡)483) 에 이름을 올리는 것 이외에 임금의 앞에서 질정하여 취하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그 말류(末流)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5일 무술
춘추관(春秋館)에서 아뢰기를,
"정익하(鄭益河)의 소장에서 인용한 바 관규(館規)는 진실로 사국(史局)에서 응당 행해야 하는 규례인 것입니다. 조상행(趙尙行)의 소장 내용에 윤급(尹汲)만 지척(指斥)하고 다른 말은 없었다면 으레 신만(申晩)을 나오도록 독책하여 그로 하여금 강(講)에 응하게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박필균(朴弼均)이 조상행의 소장을 대변(對卞)한 내용에, ‘수천(首薦)을 드러나게 배척했으나 이미 서로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으니, 이는 한번의 거조로 아울러 중상한 것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천사(薦事)가 이로부터 패천(敗薦)되게 되었으니, 이는 대계(臺啓)에서 조익명(趙翼命) 같은 이를 한 사람만 단거(單擧)한 등의 일과는 다릅니다. 지금 신만(申晩)을 아무리 독책하더라도 결코 명에 응할 형세가 없으니, 정익하의 사직소는 버려두고 청컨대 민형수(閔亨洙)를 재촉해 올라오게 하여 그로 하여금 완천(完薦)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라도 우수사(全羅道右水使) 우하형(禹夏亨)과 청주 목사(淸州牧使) 조준명(趙駿命)을 인견(引見)하였다. 조준명이 아뢰기를,
"옛사람은 새로이 대란(大亂)을 겪은 백성을 새로 심은 나무와 날기 시작하는 새에 견주었습니다. 신은 마땅히 성의(聖意)를 우러러 몸받아 무휼(撫恤)하는 것으로 우선을 삼겠습니다. 본주(本州) 각 아문(衙門)의 오래 된 포흠(逋欠)은 무명이 23동(同) 영(零)이고 쌀이 1천 4백여 석(石)인데, 이는 모두 도망하거나 물고(物故)된 것이어서 사세가 인족(隣族)에게 독책하여 징수해야 될 형편입니다. 탕감시키거나 우선 정봉(停捧)하게 했다가 본주(本州)가 완전히 소복(蘇復)된 뒤에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작년의 역변(逆變)이 그곳에서 발생했으니, 우선을 사납게 다그치고 나서 나중에 너그럽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곳이 겨우 변란을 겪은 뒤라서 의구심(疑懼心)이 없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먼저 너그럽게 하고 나중에 다그치는 정사를 시행해야 한다. 미수(未收)된 것의 하자가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간리(奸吏)나 토호(土豪)에게 있다면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역적이 청주에 들어가서 먼저 감역(減役)시킨다는 것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구(賑救)하기에 이르렀으니, 모두 주륙(誅戮)해도 된다. 그러나 그 실정을 따져보면 역적에게 속은 것에 불과하니, 실상은 딱하고 불쌍한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본주(本州)의 군정(軍丁)의 궐액(闕額)이 장차 1천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순영(巡營)·병영(兵營) 이하 잡색(雜色)의 역명(役名)은 을유년484) 사이에 이정청(釐政廳)에서 그 액수(額數)를 정하였고 을사년485) 에 또 신칙시켰는데도 정식(定式)을 준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액수가 점점 증가하여 서원(書院)의 생도와 모입(募入)한 자가 또한 많으니, 의당 모집하여 정액(定額) 외에는 태정(汰定)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신칙시키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역도(逆徒)들 가운데 법망에서 누락된 자가 혹 일을 인하여 발각이 될 경우에는 병사(兵使)·영장(營將)과 함께 안치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 광무(漢光武)는 반측자(反側子)486) 로 하여금 스스로 편안하게 하였다. 안음(安陰)·거창(居昌)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주륙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청주(淸州)는 마땅히 협박에 의해 따른 사람은 다스리지 않는 정사를 적용해야 한다. 그대의 말과 같이 한다면 온 경내(境內)가 의구심을 품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가벼운 사람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는 방도로 효유(曉諭)시키고 중한 자는 본주(本州)에서 죄를 다스린 뒤에 영문(營門)에 보고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우하형(禹夏亨)에게 지난 봄 적변(賊變)이 일어났을 때의 일에 대해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3월 20일 곤양(昆陽)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을 적에 우병사(右兵使) 이시번(李時藩)이 글을 보내어 불렀는데, 서간(書簡)을 가지고 온 사람이 청주의 변란을 구전(口傳)했기 때문에 즉시 달려가서 닭울 녘에 들어가 이시번을 만나보니, 청주의 변란이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금산(金山)의 보장(報狀)이 도착했는데 곧 청주에서 있는 변보(變報)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안음(安陰)의 보장이 뒤따라 도착했는데 급보(急報)가 있었고 또 흉격(凶檄)도 싸가지고 왔었습니다. 그것을 읽어가노라니 울분이 북받쳐 이시번에게 속히 군대를 동원하여 나아갈 것을 면려시키고 신은 저물녘에 고을로 돌아왔습니다. 이어 군병을 불러 모아 놓고 지휘(指揮)가 있기를 기다렸는데, 23일 병영(兵營)에서 군대를 모으라는 전령(傳令)이 도착했고 26일 군진(軍陣)으로 달려가라는 전령이 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시번은 교제(矯制)487) 인가 겁을 먹어 날짜를 허비하고 지체한 폐단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신은 그날 군대를 거느리고 병영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군대를 중지시키고 대포(大砲)를 쏘았습니다만, 성중(城中)에서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는 신으로서 의심하는 생각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었는데, 재차 대포를 쏘니 그제야 비로서 응답하는 대포를 쏘았으므로 직접 성문(城門)에 이르러 치진장(馳進狀)을 입송(入送)했습니다. 그런데 성문을 지키는 장교(將校)가 즉시 압송하기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신이 꾸짖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군병을 거느리고 군진(軍陣)으로 달려온 군대를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조금 있다가 병사(兵使)가 데리고 있던 군관(軍官)을 보내어 영기(令旗)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곤양 군수(昆陽郡守)는 배행(陪行)하는 통인(通引)만 데리고 들어오라.’ 하고 군병은 입성(入城)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홀로 들어가 이시번을 만나 성내(城內)에 둔병(屯兵)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시번이 영장(營將)과 상의한 뒤에 비로소 군병의 입성을 허락했습니다. 나성(羅姓)의 역적들은 곧 진주 목사(晋州牧使) 신후삼(愼後三)의 처당(妻黨)의 족친(族親)들로 모두 근접한 지역에 살고 있었으므로, 만일 틈을 타고 들어와 웅거하게 된다면 군향(軍餉)·기계(器械)가 적당(賊黨)의 소유가 될까 두려워한 끝에 이시번이 즉시 병영(兵營)을 떠나지 못하고 먼저 신과 영장 이석복(李碩復)으로 하여금 일곱 고을의 군대를 거느리고 역적이 주둔하고 있는 거창(居昌)으로 향하게 하였고 이시번은 김해(金海)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려 삼가(三嘉)로 향하여 진발(進發)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그대가 병사(兵使)와 상의했다고 했는데, 병사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때 정희량(鄭希亮)이 흉녕(凶獰)스러웠던 일을 다 진달하라."
하였다. 우하형(禹夏亨)이 아뢰기를,
"신이 영장(營將)과 하루에 4,50리씩 행군했는데, 4월 초2일에야 비로소 안음(安陰)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마침 적중(賊中)에서 도망쳐 나온 자를 잡아서 적에 대한 소식을 탐문하고 나서 영장과 군대를 나누었는데, 각기 9백 30여 명이었습니다. 오전에 70리를 가니 선봉(先鋒)이 이미 적과 맞닥뜨렸는데, 적이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이웅보(李熊輔)·정희량(鄭希亮)과 여러 역적 수십 명을 군중(軍中)으로 포박하여 왔는데, 신이 조금 넓은 곳으로 물러나와 진을 치고서 적의 이름을 물어 보고문(報告文)을 초(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정희량·나숭곤(羅崇坤)이 끝내 굴복하지 않고 임금을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말을 꺼림없이 마구하였기 때문에 신이 분노를 견딜 수가 없어 도훈도(都訓導)를 불러서 참수(斬首)하게 했습니다만, 군병들이 싫어하면서 피하였기 때문에 신이 직접 칼을 빼들고 뛰어나갔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만류할 즈음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크게 부르짖으면서 말하기를, ‘소인(小人)이 베겠습니다.’ 하고, 즉시 두 역적의 머리를 베고는 그들의 간을 꺼내어 먹었습니다. 괴이하게 여겨 물어보았더니 바로 거창(居昌)에 사는 좌수(座首) 이술원(李述原)의 아들이었는데, 자기 아비를 위해 복수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이 숙배(肅拜)하였다. 임금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경이 종전에 해온 일을 살펴보건대, 불편 부당(不偏不黨)이라고 할 수 있었으므로 복상(卜相)한 것이다."
하니, 이집이 아뢰기를,
"신의 평소의 언의(言議)가 남에게 중히 여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광좌(李光佐)와 심수현(沈壽賢)을 불러서 수용(收用)하고 영상(領相)에 출사(出仕)하도록 면려한 뒤에야 탕평책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6월 28일 신축
정배(定配) 죄인 유두기(兪斗基)를 사유(赦宥)하였다.
윤순(尹淳)을 발탁하여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6월 29일 임인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衙門)의 면세(免稅)된 전답(田畓)을 일체 판하(判下)한 내용에 의거해서 구별(區別)하여 별단(別單)에 써서 들였는데, 낙선군 부인(樂善君夫人)이 졸서(卒逝)한 뒤 본궁(本宮)의 면세된 전답에 대해 아직껏 조세(租稅)를 내지 않고 있으니, 제위전(祭位田) 1백 결(結)만 그대로 두고 나머지는 모두 전례에 의거하여 조세를 내게 하소서. 각 아문 가운데 내수사(內需司)와 훈국(訓局)·양향청(糧餉廳)은 전교(傳敎)에 의거하여 아직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구궁가(舊宮家)의 제위전에 이르러서는 4대(代)를 기한으로 면세하게 되어 있는 것이 본래의 법례(法例)입니다. 제사(祭祀)를 주관하던 후손이 죽고 나면 지손(支孫)의 유무(有無)는 논할 것이 없이 일체 아울러 조세를 내게 할 것으로 직접 성교(聖敎)를 받들었습니다. 구궁가의 자손을 국구(國舅)와 공신가(功臣家)로 더불어 면세하는 것은 모두가 법전에 없는 일이고 승사(僧寺) 위전(位田)의 면세는 더욱 부당한 데에 관계가 되는데, 이것이 모두 응당 감면하는 가운데에 들어 있습니다.
본조(本曹)의 전해 오는 등록(謄錄)을 가져다 조사해 본즉, 단지 영원 부원군(鈴原府院君)은 성종조[成廟朝]의 국구(國舅)라는 것과 중종조[中廟朝]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의 본궁(本宮) 전답이라는 것으로, 모두 영원히 사여(賜與)하고 이에 면세하게 하였는데, 이외에는 모두 고증할 만한 문서(文書)가 없습니다. 그런데 각 고을의 수조(收租) 가운데 기인(其人)으로서 면세한다고 현록(懸錄)된 것이 매우 많은데, 이는 반드시 잘못 알고 그릇 면세시킨 소치가 틀림없으니, 일체 아울러 조세를 내게 하소서. 만일 근거할 만한 것이 있으면 본가(本家)에서 와서 변해(卞解)하기를 기다려 사실을 조사하게 하며, 구궁가의 자손 가운데 사대손(四代孫)임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경우 이외에 대수(代數)가 다한 것이 분명한 곳과 조사하기 어려운 것과 법전에 없는 경외(京外)의 모록(冒錄)된 면세에 이르러서는 일체 아울러 조세를 내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가운데 혹 대수가 다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경우 본조(本曹)에서 미처 상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그 집에서 스스로 와서 분변한다면 그들이 호소하는 데 따라 사실을 조사하여 도로 면세시켜 주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
경혜 공주(敬惠公主)의 작호(爵號)를 회복시켰으나 면세하는 등등의 일은 일찍이 거론한 적이 없었습니다. 정유년488) 에 그 후손인 정억(鄭檍)의 상언(上言)에 의거하여 특별히 면세시켜 주었고 본조(本曹)에서 50결(結)로 결정하여 2대(代)를 기한으로 면세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경혜 공주(敬惠公主)에게 작호를 회복시켜 주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생전에 이미 면세의 은전(恩典)을 받지 못했는데, 이제 세대(世代)가 오래 된 뒤에 특별히 면세를 허락하신 것은 비록 불쌍하게 여기는 성덕(盛德)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마는, 이렇게 전정(田政)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때를 당하여 법례(法例)에 없는 면세를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또한 일체로 혁파해야 됩니다. 숭선군(崇善君) 집의 것도 구궁가(舊宮家)의 제위전(祭位田)인 1백 결(結) 외의 나머지 숫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전례에 의거하여 조세를 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라도(全羅道) 순천(順天)의 전답 1백 결은 이미 제위전으로 면세했고 김제(金堤)의 전답 1백 결은 인묘조(仁廟朝)께서 특별히 사여(賜與)했기 때문에 병술년489) 에 여러 궁가의 전답을 이정(釐正)할 적에 수교(受敎)를 인하여 또한 정수(定數) 가운데 넣지 않았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혜 공주의 전답에 대해 면세하게 한 것은 그 숫자가 많지 않고 숭선군에게 특별히 사여(賜與)한 전답은 다른 것과 구별이 있으니, 아울러 논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현명(趙顯命)을 선혜청(宣惠廳) 당상(堂上)으로 차임(差任)하였다.
6월 30일 계묘
대신(大臣)·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박문수(朴文秀)가 장계(狀啓)를 올려 안음(安陰)을 혁파할 수 없다는 것과 진주(晉州)의 영장(營將)은 이설(移設)하기 어렵다는 것을 논하였습니다."
하고, 우의정 이집(李㙫)은 아뢰기를,
"안음은 곧 온 경내(境內)가 역적을 따른 고을이니 《서경(書經)》에 이른바 ‘종자를 남기지 않고 진멸(殄滅)시킨다.’라는 데에 해당되는 곳인데, 이미 혁파하고 나서 곧바로 회복시키는 것이 보고 듣기에 어떠하겠습니까? 영백(嶺伯)은 안음의 지형(地形)을 가지고 수재(守宰)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작년에 읍수(邑倅)가 적에게 쫓겨났으니 수재를 둔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영장(營將)이 바야흐로 진(鎭)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 수비(守備)하고 토포(討捕)하는 도리에 있어 더욱 착실히 할 것입니다. 안음은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거창(居昌)과 함양(咸陽)으로 할속(割屬)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실로 그러하다. 그리고 비상한 일이 있었으면 비상한 벌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안음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묻지 말고 탕척(蕩滌)시키는 것이 또한 관전(寬典)인 것이다. 작년의 악역(惡逆)은 사책(史冊)에 없던 것인데, 작년에 혁파하고 이제 또 회복시킨다는 것은 사체에 있어 전도되는 일이다. 영백(嶺伯)이 경솔히 청한 것은 사체에 미안스러운 일이니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라. 그리고 안음은 함양·거창 두 고을로 나누어 예속시킴으로써 안음의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의리를 알게 하라.
하였다. 이태좌가 또 아뢰기를,
"저 청나라에 대한 잠상(潛商)들의 사흠(賒欠)의 폐단은 오로지 세폐(歲幣)와 방물(方物)을 실어다 운반하는 인마(人馬)가 돌아올 적에 임의로 매매(賣買)하는 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지난해의 절사(節使)는 이미 수레를 세하는 것으로 변통(變通)시켰으므로 인마가 아예 책문(柵門)으로 들어갈 수 없어 매매하는 길이 자연히 두절되었습니다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의주(義州) 사람들이 요양(遼陽)·봉황성(鳳凰城)의 상호(商胡)들과 부화뇌동하여 저해할 우려가 없지 않다고 합니다. 이번 사사(謝使)가 갈 적에는 역관(譯官)들에게 각별히 신칙하고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작년에 일을 성사시킨 수역관(首譯官) 등은 본원(本院)으로 하여금 논상(論賞)하게 하고 이번에 가는 수역관 이하가 혹 법규를 준수하지 않으면 정배(定配)할 것이며, 만상(灣商)490) 이 만일 청나라 사람들과 부화뇌동하여 법을 어기는 짓을 하면 일률(一律)491) 을 시행할 것을 미리 알리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백(嶺伯) 박문수(朴文秀)의 장계에 이진수(李眞洙)를 안동(安東)의 수재로 자벽(自辟)492) 했는데, 이진수는 병이 극심해서 허락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윤순(尹淳)은 아뢰기를,
"바야흐로 승지(承旨)로 있는 시종(侍從)의 신하를 번신(藩臣)이 어떻게 자벽(自辟)할 수 있습니까? 박문수는 의당 추고(推考)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체가 그러하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집이 아뢰기를,
"작년 안동(安東)의 의병장(義兵將)인 유승현(柳升鉉)은 지금 막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승진되어 있고 상주(尙州)의 의병장 손경석(孫景錫)은 바야흐로 능주 목사(陵州牧使)에 임명되어 있으니 실로 발탁하여 권장하는 도리에 합치됩니다. 청컨대 전조(銓曹)로 하여금 각별히 조용(調用)하게 하소서."
하니, 이태좌는 아뢰기를,
"의병(義兵)을 창도한 사인(士人)으로서 현연히 드러난 사람 가운데 전일 연신(筵臣)이 천거한 이만부(李萬敷)도 또한 조용(調用)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의병을 창도한 사람을 조용할 것을 전조(銓曹)에 신칙하라."
하였다. 임금이 예조 참판(禮曹參判) 송인명(宋寅明)에게 북로(北路)의 일에 대해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8릉(陵)의 참봉(參奉)은 본도(本道)의 생원(生員)·진사(進士)로 차출하는데, 임기(任期)가 만료되면 다시 사인(士人)이 되어야 하니, 매우 딱합니다. 만일 준원전(濬源殿) 참봉(參奉) 1과(窠)로서 8릉(陵)의 참봉이 승천(陞遷)할 수 있는 계제(階梯)를 만들어 본도로 하여금 잘 선발하여 8릉의 참봉으로 차임한 뒤 30 개월이 차면 사만(仕滿)을 이조(吏曹)에 보고하고, 준원전 참봉으로 승진시켜 그로 하여금 수직(守直)하게 한다면, 북로(北路)에 음사(蔭士)의 길이 열리게 되고 또 진전(眞殿)이 허술해지는 폐단도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참봉 이감(李椷)은 하는 짓에 놀라운 점이 많으니, 태거(汰去)시키소서."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북관(北關)은 진실로 인심을 굳게 맺어야 하니, 진달한 내용이 좋다. 준원전 참봉 1과(窠)는 8릉의 참봉이 승천(陞遷)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어 사일(仕日)이 많은 자 세 사람을 현주(懸注)하여 의망(擬望)해서 들이게 하라. 만일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당초의 천주(薦主)를 도신(道臣)이 전례에 의거하여 논죄(論罪)하게 하라. 재신(宰臣)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이감(李椷)은 파직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파직될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도련포(都連浦) 목장(牧場)은 함흥(咸興)·정평(定平)·홍원(洪原) 사이에 있으므로, 세 고을에서 해마다 장정을 출동시켜 목책(木柵)을 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목장은 모두 산이나 바다를 의지해 있는데 도련포는 40리 큰 들판 가운데 있기 때문에 목책을 설치할 곳이 호대(浩大)합니다. 그래서 먼 곳의 백성들은 품을 사서 역사(役事)에 응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선조(先朝) 무진년493) 에 특별히 목장을 폐기시키고 거기서 기르던 말을 근처 네 곳의 목장에다 나누어 두었었는데, 기축년494) 에 이르러 본시(本寺)에서 목관(牧官)의 말을 잘못 믿고 다시 목장을 설치했습니다. 그 뒤 감사(監司)와 사신(使臣)이 누차 이에 대한 폐단을 진달했으나, 본시에서 방색(防塞)하였습니다. 본 목장에서 기르는 말은 1백여 필(匹)이고 또 그곳은 토질이 비옥하여 목장을 혁파했을 때 개간하여 경작했기 때문에 모두 좋은 전답(田畓)이 되어 있습니다. 의당 목장을 도로 혁파하고 마필(馬匹)을 네 곳의 목장으로 나누어 보낸 뒤 백성들에게 농사지어 먹게 허락하고서 조세를 본사(本司)로 납입하게 한다면, 양쪽이 온편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감사도 이미 장계를 올려 청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장계에 대한 회계(回啓)가 있을 적에 특별히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판윤(判尹) 장붕익(張鵬翼)이 성외(城外)에서 소나무를 베어 내고 개간(開墾)하는 곳이 많다는 것을 이유로 죄를 주어 금단(禁斷)시킬 것을 청하였다. 승지 김호(金浩)가 아뢰기를,
"성내(城內)에도 개간하여 농사짓는 곳이 많습니다. 남소영(南小營) 근처의 산등성이에 더욱 많으니, 적간(摘奸)하여 과죄(科罪)하고 엄히 금단하도록 신칙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사람마다 죄줄 수 없다. 그리고 이미 씨를 뿌린 곡식을 진폐(陳廢)시키는 것은 불가하다.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 성외(城外)는 보수(步數)를 정하여 금단(禁斷)하고 성내(城內)도 일체 똑같이 엄금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심공(沈珙), 사간(司諫) 김시환(金始煥)이 전에 아뢴 것을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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