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3권, 영조 5년 1729년 7월

싸라리리 2025. 9. 2. 13:07
반응형

7월 1일 갑진

사헌부(司憲府)  【장령 박내우(朴來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故) 학생(學生) 이한귀(李漢龜)의 아내 홍씨(洪氏)가 고장(告狀)을 가지고 헌신(憲臣)의 집에 와서 울며 호소하기를, ‘가옹(家翁)의 죽은 형이 후사(後嗣)로 삼은 아들 이계(李綮)가 침해하며 모욕하고 내쫓으며 자물쇠를 열고 재물을 도둑질했다고 하여 강도로 몰아세운다.’고 했습니다. 윤기(倫紀)에 관계되는 일이니, 이계를 유사(攸司)로 하여금 잡아 가두어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민형수(閔亨洙)에게 삭출(削黜)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명하였으니, 민형수는 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의 아들이다. 그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지난해의 흉악한 역적의 변고는 어찌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변란은 발생하는 날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연유하는 바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니, 진실로 폐단의 근원을 뽑아 화근(禍根)을 끊지 못한다면, 한때 조금 안정된 것은 믿을 수가 없어서 앞으로의 근심이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대개 일찍이 거슬러 올라가 논한다면 갑진년495)   대상(大喪)을 당했을 적에 편찮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휘음(諱音)을 받들게 되었었습니다. 약원(藥院)에서도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한 일이 없었고, 교문(敎文)에도, ‘한밤에 옥궤(玉几)에 기댔다496)  ’는 말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이르기를, ‘우리 임금께서 불행히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홍서(薨逝)하셨다’고 하여 사모하여 통곡하며 망극(罔極)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했었습니다. 그 뒤에 비로소 약원일기(藥院日記)를 볼 수 있었는데, 그 때의 증세를 자세히 기록하기를, ‘여러 달 동안 위중하시다가 딴 증세가 겹쳐 생겨서 마침내 승하(昇遐)하시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당초 여러 달 동안 위중하셨을 때에 온 나라 사람들이 승문(承聞)할 수 없었으므로 그 까닭을 알지 못했던 것인데, 약원일기(藥院日記)를 본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이에 역적 심유현(沈維賢)이 선왕(先王)의 긴밀한 지친(至親)으로서, 감히 이런 시기를 틈타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내고는 마침내 뭇 불령한 무리들과 협동해서 서로 선동(煽動)했는데, 그 말이 심유현에게서 나온 까닭에 기꺼이 듣고서 이를 믿어 따르지 않음이 없으니, 끝내 군사를 일으켜 격서(檄書)를 전파하는 의거(義擧)라고 자칭하기까지 했습니다. 천경지의(天經地義)497)  가 남김없이 멸절(滅絶)되어 을사년498)   봄에 이천해(李天海)의 일은 조짐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전하(殿下)께서 진실로 끝까지 구핵(究覈)을 가하여 죄다 주토(誅討)하고, 따라서 선왕의 환후의 시말을 들어 팔방(八方)에 효유(曉諭)하셨더라면, 인심을 안정시키고 역절(逆節)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령 한둘의 악역(惡逆)들이 그 흉악한 계획을 부렸더라면 반드시 나라 절반이 붙좇아 그처럼 기세를 떨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변란을 감단(勘斷)한 다음에 이르러 제일 먼저 친국(親鞠)하실 때에 약간의 복법(伏法)된 자들과 진중(陣中)에서 참수(斬首)된 자 외에는 전하께서 용서하시는 데 힘쓰시며 여러 차례 윤음(綸音)을 내리어 문득 그들의 마음을 위안(慰安)하려고 하셨고, 본사(本事)에 이르러서는 매양 차마 듣지 못하겠다고 하교하시면서 제기(提起)하여 말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성상(聖上)의 깊은 계책을 감히 추측(推測)해 볼 수는 없었습니다마는, 이 때문에 흉악한 무리들이 기세를 더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위축(萎縮)되는 뜻이 없었는데, 조정 안에서는 또한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근본을 추구(推究)해서 분명하게 말을 하여 위로는 성상의 무함(誣陷)을 변석(辨釋)하고 아래로는 간사한 마음의 싹을 꺾어버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저 흉도(凶徒)들이 다시는 딴마음을 먹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도 없고, 전하께서 효도하고 우애하시는 심덕(心德)과 천승(千乘)의 나라를 헌신짝처럼 버리려 하신 마음을 마침내 천하 후세에 폭백(暴白)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신민들의 분개하고 원통하여 죽고 싶어하는 정성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충신과 의사(義士)로서 마음이 아프고 뼈에 사무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신이 이런 때에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으면서 어찌 명을 들은 즉시 달려나와서 극력 말을 하고 힘을 다해 논하여 전하께서 받으신 망극(罔極)한 무함을 남김없이 통쾌하게 풀어드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성심(聖心)에 시원스럽지는 않더라도 또한 뒷날에 증거삼아 믿게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사사로운 분의에 구애되어 감히 염의를 무릅쓰고 조정에 나아갈 수가 없으니, 궐문(闕門)을 바라보며 다만 통탄스러운 울음이 간절할 뿐입니다. 아!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임금과 어버이가 무함받음을 목도(目覩)하고 한마디 말도 변명(辨明)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臣)은 진실로 인륜에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아! 흉악한 역적들의 지난해의 소위가 비록 극도로 흉악하였으나, 스스로 인륜을 간범(干犯)한 데 지나지 않는데, 어찌 차마 다시 제기(提起)할 수 있겠는가? 또 이미 왕법(王法)대로 복주(伏誅)하여 팔방에 선시(宣示)하였으면, 임금을 무함한 부도(不道)한 죄는 자연히 드러난 것인데, 어찌 다시 논할 것이 있겠는가? 지금 정언 민형수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아비를 위해 원통함을 호소하려는 뜻이 있어 다시 이 일을 제기한 것이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심덕(心德)과 천승(千乘)의 나라를 헌신짝처럼 버리려는 마음을 천하 후세에 폭백(暴白)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아! 흉악한 역적들의 부도한 말이 비록 극도로 마음이 아프겠지만,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겠느냐? 이는 곧 노여워할 점이 저들에게 있는 것이다. 본사(本事)를 호소하면서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것이 많았으니, 그대로 둘 수 없다. 민형수를 삭출(削黜)하고, 이 상소를 도로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심공(沈珙)이 상소하기를,
"요사이 연신(筵臣)들의 진달하는 말이 지리(支離)하고 한만(汗漫)하여 더러는 일반 집에서 수작(酬酢)하는 것과 같아 공경과 삼감이 모자라니, 신칙(申飭)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재신(宰臣)이 이함(李椷)을 도태(淘汰)하기를 청했습니다마는, 이함은 일찍이 비복(婢僕)에 관한 일로 박치원(朴致遠)에게 논핵(論劾)받았다가 죄가 없음이 밝혀지게 되었고, 개명(改名)은 또한 횡역(橫逆)499)   이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함은 대원군(大院君)의 후손으로서 근간하고 사리(事理)를 아는 사람인데, 여러 차례 과거(科擧)를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했으므로,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사실이 아닌 죄 때문에 일명(一命)500)  의 관직을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신칙(申飭)하라고 청한 뜻은 좋으나, 신칙하였다가 혹시라도 두려워하여 함묵(緘默)하는 폐단이 있으면, 어찌 화합하여 태평해지는 도리가 되겠는가? 이함에 관한 일은 재신이 진달한 바가 중도에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므로, 비록 윤허하지 않았으나,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되어 한낱 재랑(齋郞)의 원통을 호소해 줌이 합당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소대(召對)501)  를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이르기를,
"민형수(閔亨洙)가 아비를 위해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그 말이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에 죄주었다. 민형수의 현재 소임이 대간(臺諫)이니, 사리가 마땅히 먼저 체차(遞差)한 다음에 삭출(削黜)해야 하는데 내가 미처 조검(照檢)하지 못하였고, 승정원(承政院)에서도 제품(提稟)하지 않았으니, 해당 승지(承旨)를 추고하라."
하였다.

 

7월 3일 병오

오광운(吳光運)을 우승지(右承旨)로, 이종백(李宗白)을 정언(正言)으로, 신치운(申致雲)을 부교리(副校理)로, 조진희(趙鎭禧)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파주(坡州)에서 베어다 바치는 봉상시(奉常寺)의 땔나무를 금천(金川)과 함께 윤번으로 베어 바치도록 명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7월 4일 정미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천시원(天市垣)으로 들어갔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진수(李眞洙)가 아뢰기를,
"당 태종(唐太宗)이 전사옹(田舍翁)을 죽이겠다는 말502)  로써 살펴보건대, 성상께서 간하는 말을 들어주는 것이나 아래에서 말을 진주(進奏)하기가 모두 어려운 일입니다. 당 태종이 위징(魏徵)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러했는데, 소원(疏遠)한 신하가 군부(君父)의 앞에서 능히 말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말씀을 하실 때나 말을 들으실 즈음에 인색하고 지체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번연(翻然)히 간하는 말을 들어주시는 미덕이 적으시므로, 신하로서 간혹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더욱 우악(優渥)하게 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간절하고 극진하니, 내가 마땅히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겠다."
하였다.

 

7월 5일 무신

유필원(柳弼垣)을 승지(承旨)로,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윤섭(尹涉)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7월 5일 무신

상중(喪中)에 있는 신하 조지빈(趙趾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민형수(閔亨洙)의 상소에 또 선신(先臣)503)  이 지은 갑진년504)  의 교문(敎文) 가운데 한 귀절의 말을 거론했는데, 조정순(趙正純)과 이양신(李亮臣)이 한 말과 견주어 보면 더욱 뼈에 사무칩니다. 지난해에 정유(鄭楺)가 이런 말을 했을 적에 성교(聖敎)에 명백하고 통절(痛切)하다고 하셨었는데, 화응(和應)한 말이 또 정유의 소하(疏下)에 연명(聯名)한 민형수에게서 나왔습니다. ‘반야(半夜)’라는 두 글자는 심상하게 사용하는 어구(語句)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공사(公私)의 제문(祭文) 내용에, ‘어찌하여 하루 저녁에[云胡一夕]’라고 한 어구와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을사년505)   후로 삼사(三司)의 12인이 연명한 계사(啓辭)에도 또한, ‘하룻밤 사이에 그만 한없는 애통을 안게 되었다.’고 했었는데, 이는 그들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문구(文句)로써 남을 모함하기에 급급하여 이를 가지고 죄목(罪目)을 삼은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민형수의 상소는 말이 지극히 해괴하고 패리(悖理)한 것이었으므로 이미 견벌(譴罰)을 내렸는데, 첫 머리의 두어 구절은 이양신 등의 말을 주워 모은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대의 상소를 보고서야 비로소 민형수가 정유의 소하(疏下)가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대의 선경(先卿)에 대해서는 어찌 조금이라도 원통하게 여길 만한 단서가 있겠는가마는, 그대의 상소를 보고 그대의 아비를 생각해 보니, 더욱 애도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하였다.

 

대신과 비당(備堂)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경외(京外)의 군병(軍兵) 중에 원종(原從)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응당 군역(軍役)을 면하는 것으로 여기고는 망령되게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면천(免賤)하는 준례를 들어 요란하게 비국(備局)에 정소(呈訴)하고 있습니다. 장자(長子)나 장손(長孫)으로서 음직을 계승한 자 이외에는 그 당자에 있어서도 군역 면제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니, 정하여 영갑(令甲)을 삼으소서."
하였는데, 대사성(大司成)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3천 명의 군사를 한꺼번에 군역을 면제해 주기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녹권(錄券)을 고찰해 보았더니, 1등도 단지, ‘부모는 증직(贈職)하고 자손은 승음(承蔭)하게 한다.’는 조문(條文)만 있고, 당자의 군역을 면제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충훈부(忠勳府)의 신유년506)   등록(謄錄)에, ‘출신(出身)과 양국(兩局)의 군병(軍兵)은 항오(行伍)를 떠나게 되기 전에는 구전(口傳)507)  하지 말고, 장자나 장손으로서 승음(承蔭)에 해당되는 사람을 초계(抄啓)하도록 한다.……’ 했으니, 당자는 군역 면제를 허락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청컨대, 다시 충훈부로 하여금 오랜 동안의 등록을 자세히 고찰해 보아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동백(東伯)508)  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통천(通川) 옥사(獄事)를 사핵(査覈)한 일은 권부(權扶)가 지극히 잘못하였다. 그의 아들이 폭사(暴死)한 것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아내(衙內) 사람들의 꿈에 나타났다고 했다가, 또한 그의 꿈에 나타났다고 하면서 요망한 무당으로 하여금 증거를 만들게 했었다. 이는 시종신(侍從臣)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남형(濫刑)하여 사람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세도(世道)를 크게 해친 것이었다. 비록 친국(親鞫)한다 하더라도 하루에 두 차례의 형벌을 넘지 않는 것인데, 이는 하루에 세 차례 형벌을 시행하는 데 이르렀으니, 또한 불법(不法)이다. 금부(禁府)로 하여금 시급히 의언(議讞)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선왕조(先王朝)부터 가장 중시한 것이 살옥(殺獄)이었다. 이번에 권부가 의사(疑似)한 일을 가지고 삼부자(三父子)를 죽였는데, 비록 역적을 다스린다 하더라도 이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부의 아들 한 사람 때문에 이미 6,7인을 죽여서 족히 상명(償命)하게 되었으니, 감영(監營)의 옥에 갇혀 있는 관련자들을 형조(刑曹)의 복계(覆啓)를 기다릴 것 없이 놓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삼(李森)이 아뢰기를,
"근래에 형장(刑杖)은 그전의 법을 따르지 않는 자가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문하는 형장 및 신문하는 한계를 정하는 법대로 하도록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이집(李㙫)이 또 아뢰기를,
"대사성 조현명이 아뢴 말에 따라 1년 동안 반궁(泮宮)의 과거(科擧) 가운데 1,2 과거를 덜어내어 반궁의 유생(儒生)들을 시취(試取)하는 일을 품처(稟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삼일제(三日製)·구일제(九日製)·칠석제(七夕製)·인일제(人日製)·황감제(黃柑製) 다섯 가지 과거 가운데 두 과거를 덜어내고, 다만 원점(圓點)509)  만 하도록 하였다가 4차례의 석채(釋菜)510)  에 참여한 사람만 부거(赴擧)를 허락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조현명이 아뢰기를,
"인일제와 칠석제의 과거는 오랫동안 폐하고 시행하지 않았으니, 이로써 반궁의 유생들에 관한 과거를 정하면 좋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본관(本館)의 당상(堂上)이 묘당(廟堂)과 모여서 의논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품정(稟定)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허옥(許沃)이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교 찰방(金郊察訪) 최제항(崔齊恒)은 본역(本驛)의 비복(婢僕)을 몰래 간음하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정언(正言) 심성진(沈星鎭)이 전계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 홍우균(洪禹均)은 처신이 이미 비루하고 패려(悖戾)하여 사대부(士大夫)의 모양이 전혀 없으니, 청컨대 도태해 버리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7월 6일 기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기를,
"민형수(閔亨洙)의 상소는 망측(罔測)한 말이 많았습니다. 돌아보건대, 죽지 못하고 있는 여생(餘生)이 어찌 차마 다시 그 당시의 일을 제기(提起)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당한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또한 어찌 함묵(緘默)할 수 있겠습니까? 갑진년511)   7월 그믐 무렵에 약원(藥院)에서 날마다 문후(問候)하여 약을 의논했었고, 8월 초닷새날 의관(醫官)들이 별입직(別入直)하고 얼마되지 않아 차비문(差備門)에서 대령(待令)하였으며, 세 제조(提調)가 직숙(直宿)하고 약방(藥房)을 주원(廚院)에다 옮기어 설치하였으니, 편찮으신 증세가 한없이 침중하고 위독하셨음을 이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약방의 계사(啓辭)가 조보(朝報)512)  에 나왔는데도 이제 말하기를,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가 갑자기 휘음(諱音)을 받들게 되었다.’고 했으니, 이는 과연 이치에 가까운 말이겠습니까? 그때에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못하였음은 단지 전례에 따른 것으로서, 모두 망극(罔極)하여 차마 거론하지 못하다가, 점차 위독해진 뒤에 가슴을 두드리며 경황이 없어 이에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은 성감(聖鑑)에도 통촉하시는 바입니다. 약방(藥房)을 주원에다 옮겨 설치하는 사체는 시약청을 설치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여러 재상(宰相)들이 모두 궐문 아래에 모였고 만백성이 초조하여 당황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그들이 말한 바와 근사(近似)한 것이겠습니까? 구무(構誣)하기에 급한 것인데, 신들이 어찌 차마 그들의 부도(不道)한 말을 가지고 위로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민형수의 상소에 이른바,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 말은 곧 교묘하게 하려고 하였다가 도리어 졸렬해지게 된 것이다. 이미 《승정원일기》에 실렸었으니, 그가 조지(朝紙)에 난 것을 보지 못했겠는가? 경(卿)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반드시 날조하려고 한 것임을 남김없이 통촉하고 있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8일 신해

녹훈 도감 당상(錄勳都監堂上) 조문명(趙文命)에게 명하여 도청(都廳) 성덕윤(成德潤)은 가자(加資)하고, 낭청(郞廳) 및 교서 제술관(敎書製述官) 이하는 각각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도록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월 10일 계축

밤에 달이 방성(房星)의 셋째 별을 침범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검토관(檢討官) 윤광익(尹光益)이 아뢰기를,
"바깥 말이 궁중(宮中) 안에 들어가지 않고 궁중 안의 말이 바깥에 나오지 않아 궁금(宮禁)이 엄숙해진 다음에야 천하(天下)가 편안히 다스려지는 것이니, 만일 안과 밖의 구분이 엄숙하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니, 대궐 안이 엄숙해지게 하는 도리에 유의(留意)하심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좋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윤동형(尹東衡)이 아뢰기를,
"한 고을의 관장(官長)이라 하더라도 아문(衙門) 안이 엄숙하지 못하면 다스려 갈 수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제왕가(帝王家)는 궐문의 안과 밖이 절연(截然)해진 다음에야 사정을 쓰는 부정한 길을 막아서 다스려 가는 도리가 엄정(嚴正)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7월 11일 갑인

햇무리하였는데, 왼쪽에 이(珥)가 있었다.

 

반궁(泮宮)513)  의 유생(儒生)에게 시험을 보여 수석한 생원(生員) 김도(金䆃)를 직부 전시(直赴殿試)514)  하도록 명하였다. 입시(入侍)하여 과차(科次)515)  를 정할 때 대제학(大提學) 조문명(趙文命)이 문형(文衡)을 해면(解免)해 주기를 간절히 청하였는데, 승지 조석명(趙錫命)이 조문명의 연중(筵中)에서 사직한 것을 들어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송인명(宋寅明)이 오광운(吳光運)의 상소한 것에 따라 진소(陳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경신년516)  과 기사년517)  의 당인(黨人)들을 오광운이 또한 ‘그일을 타기(唾棄)하고 그들을 단죄한다.’고 했으니, 결단한 수완(手腕)이 용맹스러움은 오광운을 위해 축하할 만합니다마는, 반드시 옳지 못하다는 지목을 함부로 남에게 가하였으니, 어찌 자신만 벗어나기에 급급하여 미처 말씨를 가리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신(臣)이 오광운에게 더 권면하고 싶은 것은 한갓 그들의 얼굴에 침만 뱉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용서하지 말아야 하고, 한갓 그들을 단죄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당류(黨類)를 비호(庇護)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한 번 비약(飛躍)하여 악인(惡人)들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난다면, 신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고 신의 입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는 말을 어찌 서로 변명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포도 대장(捕盜大將) 장붕익(張鵬翼)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포도청(捕盜廳)에서 지난해의 역변(逆變) 때 야경(夜驚)이 의심스러웠던 까닭에 매양 기찰(譏察)해 왔었는데, 어제 도적을 잡아 추문(推問)했더니 수십 인을 끌어대었습니다. 지난해 야경이 맨처음 밤에는 남산(南山)에서 일어났고, 다음 밤에는 종가(鍾街)에서 일어났으며, 그 다음 밤에는 죽전동(竹前洞)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신이 속임수를 써서 죄가 마땅히 참형(斬刑)에 처할 사람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성언(聲言)하기를, ‘야경하는 짓을 한 사람의 머리를 베었다’고 했더니,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문안(文案)을 보고서 죄인들의 성명을 물으니, 승지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이척(李滌)은 초명(初名)이 택(澤)으로서 역적 이하(李河)의 아우인데, 역적들의 공초(供招)에 나오게 되어 도순무(都巡撫)의 군중(軍中)에서 잡아왔다가, 작은 군공(軍功)이 있었다 하여 참작하여 처결했습니다. 박필함(朴弼咸)은 지금 교관(敎官)이 되어 있고, 그의 아우 박필욱(朴弼彧)은 효릉 참봉(孝陵參奉)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횡액(橫厄)에 걸린 일이라면 마땅히 저절로 깨끗이 벗어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국가의 근심이 작지 않은 일이니 마땅히 통렬(痛烈)하게 그 근원을 뽑아야 합니다."
하였다. 서종옥에게 명하여 죄인 윤득형(尹得衡)·여필주(呂必周)·여문익(呂文翊)·이척(李滌)·박필인(朴弼人)·김언형(金彦亨)·박창덕(朴昌德)·박필함(朴弼咸)·임가(林哥)·홍가(洪哥)·박경욱(朴景勗)·정덕장(鄭德章)·송필후(宋必煦)와 박필함의 아들 박호손(朴虎孫)·박호랑(朴虎狼)을 벌여서 쓰게 하고, 국청(鞫廳)에서 체포하되, 포도청에서 체포한 사람은 우선 포도청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이날부터 잇따라 추국(推鞫)을 시행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친히 도목정(都目政)518)  을 이틀 동안 거행했는데, 좌승지(左承旨) 신택(申)·이조 판서(吏曹判書) 조문명(趙文命)·참판(參判) 송성명(宋成明)·참의(參議) 오명신(吳命新)·좌랑(佐郞) 이종성(李宗城)·우승지(右承旨) 서종옥(徐宗玉)·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삼(李森)·참판 남취명(南就明)·참의 권익순(權益淳)·참지(參知) 심준(沈埈)이 입시(入侍)하였다.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신치운(申致雲)을 응교(應敎)로, 김시환(金始煥)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서명균(徐命均)을 공조 판서(工曺判書)로, 송성명(宋成明)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조현명(趙顯命)과 성덕윤(成德潤)을 승지(承旨)로, 이정제(李廷濟)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박필기(朴弼琦)를 헌납(獻納)으로, 이중경(李重庚)을 정언(正言)으로, 이종성(李宗城)을 교리(校理)로, 윤섭(尹涉)을 수찬(修撰)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응교로, 김상성(金尙星)을 부교리(副校理)로, 한현모(韓顯謨)와 심태현(沈泰賢)을 별겸춘추(別兼春秋)로, 오광운(吳光運)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김동필(金東弼)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이유(李瑜)를 부사(副使)로, 심성진(沈星鎭)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7월 13일 병진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어제 해가 질 때 해에 매우 큰 양이(兩珥)가 있었는데, 관상감(觀象監)의 측후관(測候官)이 아뢰지 않았으니, 입직(入直)한 관원을 치죄(治罪)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조문명(趙文命)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심태현(沈泰賢)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사헌부 【장령 허옥(許沃)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작년(昨年) 봄에 적병(賊兵)이 하마터면 서울을 침범하게 되었을 적에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의 모든 봉수(烽燧)가 하나도 경보를 알리는 곳이 없었고, 목멱산(木覓山)의 으레 올리는 봉수도 까닭없이 들지 않고 구름이 어두웠었다고 핑계한 것이 사문(査問)하였을 때에 드러났고, 술에 취하여 거행하지 않았음이 항간(巷間)에 낭자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준례대로 감단(勘斷)하여 대강 곤형(棍刑)을 베푸는 것은 진실로 봉수를 중히 여기고 뒷날을 징계하는 방도가 아니니, 청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다시 사핵(査覈)하여 감률(勘律)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7월 16일 기미

좌의정 이태좌(李台佐)와 우의정 이집(李㙫)이 연명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국청(鞫廳)의 의계(議啓)에 대한 판부(判付)에, ‘죄인에게 낙형(烙刑)519)  을 가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종전에 역절(逆節)이 더욱 심하게 흉악하고 완강한 자는 가끔 낙형을 사용하였으나, 지난 여름에 장흠(張欽)을 친국(親鞫)하였을 때 대관(臺官) 송인명(宋寅明)의 발언(發言)에 따라 여러 대신(大臣)들이 잇따라 진달하기를, ‘번거롭게 법외(法外)의 형을 가(加)할 것이 못된다.’고 하니, 드디어 정지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는 지난해에 특별히 압슬(壓膝)520)  의 형벌을 없애도록 한 뜻과 함께 똑같이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시는 성덕(聖德)에서 나온 일입니다. 죄인들의 정상(情狀)이 비록 지극히 간사하고 악독하기는 합니다마는, 어찌 그들의 완강하고 잔인한 것 때문에 법외의 형벌을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형벌을 어찌 요망하고 악독한 윤득형(尹得衡)에게 아낄 것이 있겠는가? 경(卿)들의 요청은 대의(大意)가 이미 옳은 것이고, ‘그런 형벌까지 번거롭게 할 것이 못된다.’는 말 또한 사체에 맞는 것이지만, 다시 각별하게 엄중히 심문을 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참찬관(參贊官)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대신들이 낙형(烙刑)을 정지하기를 청하는 일로써 차자를 진달하였습니다. 작년에 역적 장가(張哥)가 심육(沈錥)을 거짓말로 끌어대었기 때문에 낙형을 가하도록 명하셨었는데, 신(臣)이 송인명(宋寅明)에게 말하기를, ‘임금께 향하여 부도(不道)한 말을 한 역적 또한 낙형을 쓰지 않았는데, 한낱 선비를 무고(誣告)하여 끌어댄 때문에 낙형을 쓰는 것은 경중이 도치(倒置)된 것이다.’ 하자, 송인명이 들어와 계청(啓請)하니, 드디어 정지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낙형은 어디까지나 법외(法外)의 형벌이니, 대신들의 말에 따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신년521)  의 옥사(獄事) 때에도 이 형벌을 썼는데, 위관(委官)들의 의계(議啓)에 낙형하기를 청하는 자가 많았다. 지난해에 압슬형(壓膝刑)을 없애라는 명이 있었으나, 이 낙형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대신들의 논집(論執)이 옳으니, 마땅히 하교(下敎)하겠다."
하였다.

 

7월 17일 경신

조상경(趙尙絅)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삼고, 신치운(申致雲)을 발탁하여 승지(承旨)로 삼았다.

 

7월 19일 임술

사간원 【정언 이중경(李重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국청(鞫廳)의 좌기(坐起)는 사체가 중요한 것인데, 동지의금부사 이세근(李世瑾)과 조상경은 다섯 차례나 소명(召命)을 어기어 국좌(鞫坐)가 정지되게 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시키소서. 음관(蔭官)은 사송(詞訟)의 직임을 겪은 뒤에 수령(守令)으로 나가도록 윤허하신 것은 뜻한 바가 있는데, 근래에 겨우 사송의 직임에 제수(除授)하자마자 곧 수령(守令)으로 천전(遷轉)되고 있으니, 청컨대, 이제부터 사송의 직임을 겪은 지 1고(考)522)  가 된 뒤에야 비로소 수령에 의망(擬望)523)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으소서. 예빈시 별제(禮賓寺別提) 정숭(鄭崇)은 행동이 이미 몹시 패려(悖戾)하여 향당(鄕黨)에서도 내침을 받았으니, 청컨대, 도태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되, 정숭의 일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찬집청(纂集廳) 당상(堂上) 송인명(宋寅明)이 《감란록(勘亂錄)》을 지니고 입시(入侍)하였는데, 이어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도과(道科)는 부자(父子)가 한 과장(科場)에서 함께 과거를 보는 것을 구애받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에게 묻자, 조현명이 불가하다고 하니, 임금이 드디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지계(地界)의 분할은 품지(稟旨)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인데, 북도에서는 치우쳐서 먼 때문에 더러 자기들 멋대로 구처하는 일이 있습니다. 해당 도신(道臣)을 추고(推考)하고, 다시 도신으로 하여금 헤아려 보아 장문(狀聞)하게 하되, 이 뒤로 분할은 장문하고서 시행하는 것을 법식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사(監司)를 추고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회양(淮陽)의 은점(銀店)을 혁파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조현명이 전달하기를,
"정미년524)   7월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가운데에는 소장(疏章)을 산절(刪節)한 곳이 많이 있어 해괴스러우니, 마땅히 경책(警責)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의 주서(注書)를 잡아다가 추문(推問)하고, 지난해의 추국일기(推鞫日記) 가운데에도 심유현(沈維賢)의 일은 상교(上敎)가 없었으나 오록(誤錄)해 놓은 것이 있었으니, 해당 주서를 또한 잡아다가 추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근래에 시급한 거조(擧條)를 즉시 계하(啓下)하지 않기도 하고, 심지어 잊어버리고 빠뜨리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일찍이 《주사등록(籌司謄錄)》을 보건대, 입시(入侍)했던 승지는 거조를 계하하기 전에는 체직(遞職)을 윤허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이 법을 거듭 밝혀서 영구히 법식으로 삼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0일 계해

심공(沈珙)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양득중(梁得中)을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오중주(吳重周)를 좌윤(左尹)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국청(鞫廳)의 대신 이하가 청대(請對)하여 입시하니, 죄인 윤득형(尹得衡)은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 밖의 여러 죄인들은 참작해서 처결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호랑(朴虎狼)을 문초한 다음에 박필욱(朴弼彧)을 심문하였으면 하는데, 종이 한 말로 인하여 형신(刑訊)을 한다면, 이는 곧 종을 상전(上典)의 증인으로 삼는 것이니, 옥사(獄事)의 사체가 아니다."
하였는데, 승지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종을 상전의 증인으로 삼음은 진실로 옳지 않은 일이나, 역옥(逆獄)은 이런 전례를 적용할 수 없으니, 팽총(彭寵)의 종을 불의후(不義侯)로 봉작(封爵)했던 것525)  이 그런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역옥이라 하더라도 종을 상전의 증인으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의 중간에는 간혹 영세(零細)한 도둑들이 숨어 있습니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우하형(禹夏亨)은 영남의 물정(物情)을 잘 아는 사람이니, 청컨대,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신명윤(申命尹)과 서로 바꾸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장령(掌令) 박내우(朴來羽)가 전계(前啓)를 전(傳)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국청(鞫廳)의 옥사는 엄정하고 비밀해야 하는 것인데, 장붕익(張鵬翼)의 상소에, ‘국청 죄수의 흉악한 말이 망극(罔極)하다.’고 하였으니, 국청의 사체가 엄밀하지 못한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장붕익이 앞질러 옥사의 실정을 장주(章奏)에 누설한 짓은 사체가 미안한 일이니, 청컨대, 금오 당상(金吾堂上)과 판윤(判尹) 장붕익을 모두 엄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전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는데, 대관(臺官)의 사체가 그러해야 할 것이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간 박필기(朴弼琦)가 전계를 전(傳)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정숭(鄭崇)의 일만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신치근(申致謹)·한사득(韓師得)·채응만(蔡膺萬)·강필신(姜必愼)·이선행(李善行)을 놓아주도록 명하였다. 종성 부사(鐘城府使) 유승현(柳升鉉)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지난해의 역변(逆變) 때 거의(擧義)한 사항을 하문하고, 이어 유시(諭示)하기를,
"영남(嶺南) 한 도(道)는 추로(鄒魯)526)  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전에 교유(敎諭)하였을 적에 영남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옛사람처럼 모습이 어떤지를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특별히 머물러 대기하도록 한 것은 한 번 얼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7월 21일 갑자

임금이 태묘(太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봉심(奉審)한 다음 환궁(還宮)하였다.

 

어영청(御營廳)에서 아뢰기를,
"고부(古阜)와 거창(居昌) 두 고을은 곧 본영(本營)에서 자벽(自辟)527)  하는 벼슬자리입니다. 청컨대, 새로 제수한 두 고을 수령을 개차(改差)하고, 본영의 파총(把摠)으로 의망(擬望)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거창은 가려서 차임(差任)한 것이니, 고부만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원 【 헌납 박필기(朴弼琦)와 정언 심성진(沈星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좌막(佐幕)528)  을 싫어하여 기피하는 것이 진실로 하나의 폐습(弊習)인데, 북도(北道)의 좌막을 4, 5명이나 교체하였으니, 지극히 한심한 일입니다. 청컨대, 함경 도사(咸鏡都事)를 싫어하여 기피한 전후의 사람들을 한결같이 모두 파직시키고, 수령(守令)을 싫어하여 기피하는 전례에 의거하여 일정한 달수가 차기까지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3일 병인

예조에서 아뢰기를,
"홍임(洪霖)에게 증직(贈職)하는 일로 본조(本曹)의 등록(謄錄)을 고찰해 보았더니, 고(故) 병사(兵使) 이의배(李義培)의 군관(軍官) 이억(李檍)이 이의배와 더불어 동시(同時)에 순절(殉節)하였는데, 정려(旌閭)529)  하고 증직하도록 한 명이 있었습니다. 홍임이 주장(主將)과 함께 같이 죽어 특이한 충절(忠節)이 이억에게 밑돌지 않으니, 실직(實職)으로 증직함이 합당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7월 24일 정묘

대사간 김시혁(金始㷜)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의 대각(臺閣)은 사기(士氣)가 땅에 떨어져서 거의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신(臣)이 죽을 죄를 짓고 있습니다마는, 그윽이 생각하건대, 풍습이 이에 이른 것은 오로지 성상께서 그들의 사기를 선도(善導)하여 배양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십수 년 이래로 조정의 분위기가 여러 차례 변하여 사대부(士大夫)들의 일종의 풍절(風節)이 거의 남김없이 소멸되어 비록 더러 승여(乘輿)530)  를 지척(指斥)하기는 하면서도 감히 묘당(廟堂)은 비난하여 논하지 못하며, 비록 더러 동제(同儕)를 논핵(論劾)하기는 하면서도 감히 자기와 취향(趣向)이 다른 자를 규정(糾正)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간하는 상소가 드물어진 것을 성조(聖朝)에서 결함이 없어서라고 여기시고, 대각의 의논이 고요하고 잠잠한 것을 당론(黨論)이 점점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여기십니까? 옛사람들은 언로(言路)를 열어 놓는 것을 나라를 다스리는 제1의 급선무로 삼았었습니다. 한(漢)나라 성제(成帝)는 주운(朱雲)이 휘어잡아 부러진 난간을 보수(補修)만 하였고,531)   위(魏)나라 문제(文帝)는 신비(辛毗)가 간하는 말을 용납하였으니,532)   임금으로서 장려(奬勵)하기 위한 것이었고, 당(唐)나라 신하들이 연영전(延英殿)에서 하례하였고, 또 송(宋)나라 사람은 4현(四賢)의 시(詩)가 있었으니, 아래의 신하들로서 격양(激揚)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장려하시는 거조(擧措)가 없고 군하(群下)들은 격양하는 도리가 없는데, 도리어 대관들의 사기(士氣)가 땅에 떨어진 것을 들어 오로지 언관(言官)에게 허물을 돌리고 있습니다. 아! 누가 소중(所重)한 몸으로서 무익한 말을 하여 위로 성상의 뜻에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거스르고, 아래로 조정의 의논이 반드시 싫어하는 바를 범하려 하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권이진(權以鎭)은 배척하는 탄핵이 사방(四方)에서 모여들고 있으므로, 체직(遞職)하려고 함은 괴이할 것이 없는데도 한결같이 구박(驅迫)하고 있으니, 예(禮)를 다해 부리는 도리에 부족한 듯합니다. 그리고 심단(沈檀)에게는 휴치(休致)533)  를 윤허하지 않으시고 의금부(義禁府)의 직책을 억지로 떠맡기니, 또한 늙은이를 우대하는 뜻이 모자라는 일입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이번의 선전관(宣傳官) 천망(薦望)에 영남(嶺南)에서는 하나도 참여하지 못하자, 허다한 출신(出身)들이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도로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역적의 변이 본도(本道)에서 일어났으므로 조가(朝家)에서 우리들을 업신여겨 보통 사람들에게 끼워주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한 차례의 선전관 천망 때문에 한 지방의 인심을 잃어버리게 된 것으로서, 일을 주관한 사람이 성의(聖意)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음은 놀라운 일이니, 마땅히 사문(査問)하여 책벌(責罰)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말이 절실하니, 어찌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호조 판서는 한 번 직책을 해면(解免)하여 염치와 분의를 펴게 하겠다. 그리고 선전관 천망에 관한 일은 병조로 하여금 해청(該廳)에 물어보고 아뢰도록 하겠다."
하였다. 해조(該曺)에서 아뢰기를,
"선전 관청(宣傳官廳)에 물어 보았더니, 말하기를, ‘선전관의 천망은 규례가 지극히 엄격하여 원래부터 도(道)마다 균등하게 나누어 추천하는 전례가 없었으므로, 일찍이 한 도가 완전히 빠지게 되는 때가 많았고, 영남은 서울과의 거리가 아주 멀어 문벌(門閥)과 인물(人物)을 자세하게 알기 어려운 점이 있고, 변란 이후 또한 그 사이에 신중하게 다루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은 보류(保留)하고 앞으로의 천망을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세는 그럴 듯하다마는, 하나의 도가 이미 빠져버렸으니 억울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 중에서 선전관 천망에 들 만한 사람들을 선전관 천망의 규례에 의거하여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심육(沈錥)도 함께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또한 홍문관(弘文館)에 있는 홍범도(洪範圖)를 다음의 강연(講筵) 날에 가지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7월 25일 무진

이진망(李眞望)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권(金權)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사조(辭朝)하는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을 인견(引見)하였다.

 

국청(鞫廳)의 대신 이하가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이척(李滌)은 승복(承服)하였는데, 윤득형(尹得衡)은 형추(刑推)한 뒤에도 한결같이 허황한 말을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척의 승복은 곡절이 없는 것이어서 수상(殊常)하다. 이척은 곧 이하(李河)의 아우이다. 그러나 함께 참여하지 않았는데, 단지 역적의 아우라 하여 죽인다면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다. 지난해 옥사를 다스릴 때에도 보건대, 그 중에는 또한 승관(承款)이 분명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척을 애석하게 여겨서가 아니고, 한번 애매(曖昧)한 길을 열어 놓으면 뒷날에 폐단이 한정 없을 것이다. 윤득형(尹得衡)이 공초에서 유엄(柳儼)을 끌어대었다고 하나, 유엄은 김일경(金一鏡)을 친국(親鞫)할 때 문사 낭청(問事郞廳)534)  으로 있었는데, 가장 총명하고 민첩하여 어긋난 단서를 잘 집어냈었다."
하자, 이 태좌가 아뢰기를,
"유엄이 어긋난 단서를 잘 집어내어 허위(虛僞)가 용납될 수 없게 하였으므로, 윤득형이 형추(刑推)받았을 적에 유엄을 쳐다보며 말하기를, ‘유엄 또한 남태징(南泰徵)의 집에 함께 갔었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척을 더 형벌하는 것과 정법(正法)하는 것의 합당 여부를 물으니,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정법 이외에는 딴 도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근래에 당론(黨論)이 심하므로, 의심하여 저해(沮害)하려는 경우가 없지 않다. 박필욱(朴弼彧)은 의망(擬望)받은 다음에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국옥(鞫獄)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는 오비이락(烏飛梨落)535)  과 같은 일이다. 경(卿)들의 마음은 내가 알고 있다. 이번의 옥사는 평반(平反)536)  하였으니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마는, 알지 못하는 자는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전에도 친국(親鞫)한 까닭에 옥사가 또한 과람하지는 않았었다. 윤득형과 박필욱은 간사하여 용서할 수 없다. 한 번 친국은 하고 싶지만, 파리[蠅]에게 성을 내어 칼을 뽑는 격에 가깝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수습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뒷말이 없을 수 있다. 이척은 당초에 초관(哨官)으로서 출정(出征)을 자원한 까닭에 의심이 없을 수 없었고, 경자년537)  의 국휼(國恤) 때에 미리 백립(白笠)을 갖춘 일을 보더라도 무슨 짓인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마침내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면, 형장(刑杖) 아래에서 죽게 될 뿐이니, 마음에 의심스러운 일을 가지고 정법(正法)함은 타당하지 못하다."
하고, 윤득형과 이척에 대한 문목(問目)을 써 놓고 형장을 가(加)하여 신문하도록 명하고, 또한 유엄에게는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7월 26일 기사

사간원 【정언 이중경(李重庚)과 심성진(沈星鎭)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공조(公朝)에서는 감히 사사로운 수혐(讎嫌)을 말할 수 없다는 숙종조[肅廟朝]의 명훈(明訓)이 있습니다. 전(前) 진천 현감(鎭川縣監) 윤화정(尹和鼎)은 감사(監司) 김시형(金始炯)과 본래 수혐될 만한 이유가 없는데, 1년이 되도록 연명(延命)538)  하지 않았고, 사직 장계 가운데에 이른바, ‘신축년539)  과 임인년540)  의 옥사(獄事)를 안찰했던 사람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분의에 함께 조정에 있을 수 없다.’는 등의 말은 더욱 무엄(無嚴)합니다. 무신(武臣)으로서 말씨가 패만(悖慢)하고 방자하여 파직하는데 그칠 수 없으니, 청컨대, 윤화정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고, 도신(道臣)은 그 즉시 파직하도록 논계(論啓)하지 아니하여 체통을 손상하였으니, 김시형을 엄하게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7월 27일 경오

사간원 【정언 이중경(李重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 홍중범(洪重範)은 영녕전(永寧殿)541)  의 추향(秋享) 때에 협률랑(協律郞)으로서 마땅히 참여했어야 하는데, 본원(本院)에 머문 채 대신 가관(假官)을 보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 원백규(元百揆)는 부임하기를 재촉한 지 두어 순(旬)이나 되었는데, 아직 사조(辭朝)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땅히 태만하고 교만함을 징계해야 하니, 청컨대, 먼 지방에 충군(充軍)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홍범(洪範)542)  을 진강(進講)했는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심육(沈錥)이 명을 받들고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7월 28일 신미

수찬(修撰) 윤섭(尹涉)에게 삭출(削黜)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윤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언자(言者)들은 걸핏하면 성상께서 받은 무함을 변명하여 말을 하고 있으나, 한편의 사람들은 잠자코 한마디 말도 이에 언급하는 일이 없습니다. 똑같은 신자(臣子)들인데, 피차(彼此)가 각각 다른 것은 또한 너무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우리 전하의 지성스러운 효도와 우애는 진실로 천성(天性)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 10년을 병으로 누워 계셨을 때 오랜 동안 시탕(侍湯)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으셨으니, 무릇 듣고서 감동하여 칭송(稱訟)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동궁(東宮)에 계셨을 적에는 경종 대왕(景宗大王)을 받들어 섬기는 데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사복(嗣服)하는 날에 미쳐서는 차마 천조(踐阼)543)  하지 못하시고 슬픈 안색(顔色)을 띤 채 애통하게 곡읍(哭泣)하시니, 감동한 반열(班列)의 군하(群下)들이 우러러보지 못하였습니다. 아! 옛적의 제왕(帝王)들을 손꼽아 보더라도 우리 전하와 같은 분이 몇이나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효도하고 우애하는 덕이 이처럼 지극하셔서 신명(神明)을 감동시키고 돈어(豚魚)에게도 신임받게 되었는데,544)   천지 사이에 일종의 지극히 흉악하고 간특한 사람들이 있어 백지(白地)에 귀로 들을 수 없고 입으로 말할 수 없는 패역(悖逆)하고 망측(罔測)한 흉언(凶言)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천해(李天海)에게서 나왔고 중간에는 괘방(掛榜)에 나왔으며 마침내는 흉악한 격문(檄文)에 나왔는데, 임금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어 이루 한정이 없었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차마 말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러한 우애로 흉악한 역적들의 저러한 무욕(誣辱)을 받으셨으니, 통탄스럽고 절박하여 차마 들으실 수 없음을 곧 성상의 심정에 당연한 것입니다. 무릇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누가 감히 차마 곧장 제기(提起)하여 우리 전하의 망극(罔極)하신 심정을 아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성궁(聖躬)의 무함을 하루에 밝혀 내지 못한다면 신자(臣子)들의 하루의 죄가 증가하게 되고, 이틀에 밝혀 내지 못한다면 신자들의 이틀의 죄가 증가하게 되므로, 원통과 분개함이 극도에 달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 이천해가 저지른 일은 전감(前鑑)이 멀지 않은 것이었는데, 그뒤부터 전하께서는 애통하여 차마 듣지 못하시고, 군하(群下)들은 머뭇거리며 감히 말하지 못하고서 벙어리처럼 덮어 두고만 있다가 지난봄의 변란을 순치(馴致)하게 된 것입니다. 아! 이는 어찌 성상을 무함하는 말을 멋대로 하고 있는데도 마침내 한 사람도 변백(辯白)하는 자가 없는 과실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에 민형수(閔亨洙)가 근본에 소급(遡及)하여 극력 논하였음은 진실로 성상을 위하여 원통하고 분개하여 죽고 싶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약원(藥元)에 있던 자 가운데 진실로 조금이나마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려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일에 대한 정실(情實)의 유무를 물론하고 곧장 마땅히 법을 위해 죄악으로 받아들이고 잘못을 인책(引責)하며 죄를 자복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감히 말을 하여 저뢰(抵賴)하고 있으니, 아! 그의 죄는 위로 하늘에 사무친다고 하겠습니다.
그 때의 조보(朝報)에 나온 바가 어떠했는지는 그대로 놓아 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나라는 3백년 동안 열성(列聖)들께서 승하(昇遐)하실 즈음에 모두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였으니, 무릇 그처럼 위급할 적에 누군들 분주하고 황급하여 겨를이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를 가지고 자신을 해명(解明)하는 거리를 삼고 있으니,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만일 시약청을 그때에 설치했었다면, 성상께서 병세가 위독해진 정상을 온 나라 사람들이 효연(曉然)하게 알지 못함이 없었을 것이고, 교문(敎文) 내용에도, ‘밤중에 옥궤(玉几)에 기댔다.’는 말들이 없었다면, 자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광혹(誑惑)케 하는 발단이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한없이 흉악하고 극도로 포악함이 심유현(沈維賢)과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감히 그런 간극(間隙)을 타서 백지(白地)에 망측(罔測)한 말을 용이하게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며, 가령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어찌 능히 나라 절반의 흉역(凶逆)들이 붙좇아 곧이듣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약원(藥院)의 대신(大臣)으로서 심유현의 흉악한 말에 대해서는 대략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다가, 민형수가 통분을 참고 원통함을 품은 채 절박하여 어쩔 수 없이 한 말에 대해서는 도리어 부도(不道)하다고 배척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씨로는 이쯤이야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마는, 다만 그가 그런 말을 하였을 때 이마에 땀이 솟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저 흉악한 역적들의 소위는 스스로 천주(天誅)받을 짓을 한데에 지나지 않으니, 돌아보건대, 성덕(聖德)에 어찌 조금이라도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노여워할 것이 저들에게 있음은 진실로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사지(辭旨)와 같습니다마는, 고금 천하에 어찌 신자(臣子)가 되어 군부(君父)가 망극(罔極)한 무함을 받는 것을 직접 보고서도 일찍이 한마디 변백(辯白)하는 말을 하지 않고 아울러 다른 사람이 변백하려고 하는 것까지 가금(呵禁)하여 입을 열지 못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마음의 소재를 진실로 알 수 없습니다. 아! 전하께서 흉악한 역적들의 무함을 받으신 것이 무릇 몇 차례나 됩니다. 잠저(潛邸)에서 저위(儲位)에 들어오셨을 적에는 유봉휘(柳鳳輝)의 무함이 있었고, 대리(代理)하라는 명을 내렸을 적에는 조태구(趙泰耉)와 김일경(金一鏡)의 무함이 있었고, 봉전(封典)을 준청(準請)했을 적에는 목호룡(睦虎龍)의 무함이 있었고, 왕위(王位)에 등극하신 후에는 이천해(李天海)의 무함이 있었습니다. 한 고비에 한 고비를 더해 오다가 작년 봄에 방(榜)을 걸어 칭병(稱兵)함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으니, 앞으로 다시 어떤 모양의 변괴가 있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곤양(昆陽)에서의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그런 무궁한 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섬멸되지 않은 여당(餘黨)이 있다가 이유익(李有翼)이나 심유현(沈維賢)처럼 사납고도 교활한 자가 흉언(凶言)을 변개(變改)함이 없고 역심(逆心)을 옛날 그대로 가지고서 국가를 원수로 여기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변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작은 일에 있어 참지 않으면 큰 계획을 어지럽히게 된다.’는 교훈에 깊이 치의(致意)하셔서, 역적들이 평정(平定)되어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기지 마시고, 요행히 안정된 것을 믿을 수 있다고 여기지도 마시고, 깊이 화란의 근원을 구명(究明)하고 더욱 징토(懲討)하는 법을 엄하게 하여 3백 년의 종사(宗社)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신다면, 신(臣) 또한 함께 다행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금 윤섭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민형수의 소어(疏語)를 주워 모은 것으로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무함하기를 또 다시 이에 이르렀다. 윤섭이 진실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차마 망측한 말을 제기하여 백지(白地)에 무함하기를 한결같이 이에 이르는 것인가? 이러한 무리는 깊이 죄를 다스리고 싶지 않지만, 한갓 괴격(乖激)한 기미(氣味)만 더해지니, 이러한 자에 대해서는 엄하게 통척(痛斥)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삭출(削黜)하도록 명하였다.

 

7월 29일 임신

본관록(本館錄)545)  을 행하여 15인을 뽑았는데, 5점(點)을 받은 사람은 이종백(李宗白)이고, 4점을 받은 사람은 조상경(趙尙慶)·이춘제(李春躋)·정익하(鄭益河)·유엄(柳儼)·임정(任珽)·이현보(李玄輔)·정도은(鄭道殷)·이흡(李潝)·심성희(沈聖希)·윤광운(尹光運)·이귀휴(李龜休)·정홍상(鄭弘祥)·엄경하(嚴慶遐)·심성진(沈星鎭)이었다.

 

사간원 【정언 이중경(李重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前) 부사(府使) 이성지(李聖至)는 역적의 괴수 민원보(閔元普)의 인친(姻親)입니다. 변란의 초기에 순흥 부사(順興府使)로 있을 때 정희량(鄭希亮)이 지경 안에 있었으므로,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체포하기 위하여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마땅히 마음속으로 놀라고 뼈에 사무쳐서 즉시 체포하도록 힘썼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금부 도사를 도적이라 하여 처음에는 구수(拘囚)하려 하다가 할 수 없으니 마침내 또 본부(本府)의 호적에 정희량이란 이름이 없다고 하여 반나절을 서로 버티다가 비로소 체포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정희량은 이미 소재를 알 수 없었으며, 마침내 칭병(稱兵)하여 반역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임금이 보낸 사람을 저지하여 고의로 역적의 괴수를 놓아준 정상이 안무사(按撫使)의 장계(狀啓)에 명확히 드러나 있으므로 가볍게 감단(勘斷)하여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청컨대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국청(鞫廳)의 죄인 이척(李滌)을 잡아올 적에 가도사(假都事) 유상기(柳祥基)가 죄인의 병이 위중하다고 핑계하여 도중에서 장문(狀聞)하고, 한 보름이 된 뒤에야 비로소 복명(復命)했습니다. 신(臣)이 연일 국좌(鞫坐)에 참여하면서 죄인을 직접 보았는데, 원래 현저한 병상(病狀)이 없었으니 실제로 병든 것이 아님을 이에 의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청컨대, 유상기를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조적명(趙迪命)·정우량(鄭羽良)과 참찬관(參贊官) 서종옥(徐宗玉)이 이현모(李顯謨)와 윤휘정(尹彙貞)을 용서하여 외방(外方)에 보임(補任)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서종옥이 아뢰기를,
"무신(武臣)과 문신(文臣) 재상(宰相)이 다르기는 하지만 좌윤(左尹) 오중주(吳重周)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봉장(封章)을 올린 것은 사체가 미안한 일이니, 청컨대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