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3권, 영조 5년 1729년 윤7월

싸라리리 2025. 9. 2.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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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7월 1일 계유

왕대비전(王大妃殿)에서 복(服)을 벗었다. 사헌부에서 【지평 김권(金權)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죄인 박호랑(朴虎狼)이 윤득형(尹得衡)·이척(李滌) 두 역적과 함께 이하(李河)의 집에 왕래(往來)한 정상을 그들이 이미 바른 대로 공초하였으니, 그 동안의 음흉한 정절을 반드시 알지 못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다시 엄하게 형벌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 유면기(兪勉基)는 명문가(名門家)의 자제(子弟)로서 마음가짐이 간사하고 행사(行事)가 바르지 못하여 오만 가지로 변신(變身)하므로 온 세상에서 침을 뱉으며 욕합니다. 본직(本職)을 제수함에 미쳐서는 또한 야비하고 잗달다는 기롱이 많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상주 목사(尙州牧師)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여 민막(民瘼)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외방(外方) 고을에 나가자마자 이처럼 조목조목 진달한 것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아울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추천한 여러 사람 가운데 4인은 이미 오광운(吳光運)이 추천한 가운데에 들어 있었으나, 3인은 이름이 모두 틀렸는데, 경(卿)의 상소 가운데에서 이미 모두 알았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일체로 조용(調用)하게 하겠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심수현(沈壽賢)이 진소(陳疏)하여 견책받기를 바라니, 온비(溫批)를 내렸다.

 

윤7월 2일 갑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광좌(李光佐)에게 별유(別諭)를 내리고 함께 오도록 한 승지로 하여금 전유(傳諭)하도록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정언 이중경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제주 목사(濟州牧使) 원백규(元百揆)는 숙명(肅命)한 뒤에도 부임할 뜻이 없어서 재촉해도 한결같이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숙천부(肅川府)에 부마(夫馬)를 보내어 이미 쇄환(刷還)한 기첩(妓妾)을 태워 오도록 했으니, 지금까지 지체하고 있음은 대개 이런 때문입니다. 여색(女色)에 연연하여 국가의 금법을 위반했으니, 청컨대, 제주 목사 원 백규를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관기(官妓)를 쇄환하는 것은 새 법령이 바야흐로 엄중한데, 수재(守宰)가 된 몸으로 마땅히 각별하게 준수(遵守)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숙천 부사 박성검(朴性儉)은 이미 쇄환한 원백규의 기첩을 보내주도록 허락하여 사정(私情)만 돈후(敦厚)하게 따르고 조정의 금법을 멸시했으니, 청컨대, 숙천 부사 박성검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검토관(檢討官) 정우량(鄭羽良)을 돌아보며 하문하기를,
"해은군(海恩君)546)  의 후사(後嗣)가 된 아들이 어린가?"
하니, 정우량이 대답하기를,
"아직 성동(成童)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현궁(梨峴宮) 밖 동쪽의 것이 곧 해은군의 집인가? 보건대, 하나의 새 정문(旌門)이 있었는데, 곧 해은군의 정문이니, 마음이 매우 창연(愴然)하다."
하니, 참찬관 신치운(申致雲)이 아뢰기를,
"국가에 큰 공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효행(孝行)이 더욱 가상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가정에서 효자가 되었고 조정에서는 충신이 되었으니, 이 점이 더욱 기이하다."
하였다.

 

윤7월 4일 병자

최치중(崔致重)을 장령(掌令)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지평 김권(金權)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앞서 아뢴 유면기(兪勉基)의 일만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부 군수(古阜郡守) 김양호(金養浩)는 일찍이 함종 부사(咸從府使)로 있었을 때 고을의 기녀(妓女)에게 고혹(蠱惑)되어 정사를 아객(衙客)에게 위임하였고, 뇌물받는 문을 크게 열어 놓았으므로 온 고을이 도탄(塗炭)에 빠졌습니다. 호남(湖南)의 피폐한 고을을 결단코 감당해 갈 가망이 없으니, 청컨대, 고부 군수 김양호를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장우(張禹)547)                  의 일을 강하였다. 시독관        윤광익(尹光益)이 아뢰기를,
"이 편(編)은 오로지 외척(外戚)들이 국정에 간여한 폐해를 경계한 것입니다. 동한(東漢)과 서한(西漢)은 외척들의 해독이 가장 참혹했는데, 장우의 말이 이처럼 사녕(邪佞)하여 천년 뒤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개탄(慨歎)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주운(朱雲)의 일은 기개가 정직하고 언행이 조심스러웠다. 효종조(孝宗朝) 때 유신(儒臣)이 절함도(折檻圖)를 올렸었고, 선왕조(先王朝) 때에는 그 절함도의 찬(贊)을 지었으므로, 내가 일찍이 흠송(欽誦)해 왔었다."
하였다. 검토관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동탁(董卓)의 때에도 오히려 사론(士論)을 두려워하여 최후에는 명류(名流)들을 거의 모두 베어 버리어 동한(東漢)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순욱(荀彧)은 명사(名士)이었는데도 그만 조조(曹操)의 모신(謨臣)이 되었으니, 이는 곧 당화(黨禍)548)                  가 있은 뒤 사기(士氣)가 소멸되어 버린 소치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말이 절실하다."
하였다. 윤광익이 아뢰기를,
"당고(黨錮)의 화(禍) 때에 명사들을 모두 죽여버리고서 후한(後漢)이 망하였고, 당(唐)나라 때에도 청류(淸流)들을 탁하(濁河)에 던져버린549)                   뒤에 당나라가 또한 멸망했으니, 옛날부터 나라의 보존과 멸망은 사기(士氣)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하고, 홍문관에 있는 《태평요람(太平要覽)》을 들여 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관(臺官)의 계사(啓辭) 내용에, ‘유면기(兪勉基)는 오만 가지로 변신한다.’고 한 말을 유신(儒臣)도 알고 있는가?"
하였는데, 윤광익이 아뢰기를,
"그는 처신이 이랬다저랬다 하여 제배(儕輩)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하였다.

 

윤7월 5일 정축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국가에 3년 쓸 저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되므로, 신이 늘 곡식을 모아들일 방도를 진달했으나, 조가(朝家)에서 이미 주전(鑄錢)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달리 재물을 내놓아 곡식을 모을 방법이 없습니다. 병조(兵曹)의 봉부동(封不動)550)  한 목면(木綿)이 단지 4백 동(同)이 있었는데, 조문명(趙文命)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종합해 밝혀 비용을 절약하였으므로, 지금 병조에서 저축한 것이 1년 동안 수용(需用)할 것 이외에 나머지 수량이 1천여 동에 이르고,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양영(兩營)에 각각 수천 동이 있으며, 양영에서 1년 동안 상납받은 군포(軍布) 또한 6백여 동이 됩니다. 근래에 듣건대, 삼남(三南)은 쌀값이 매우 싸고 돈과 목면(木綿)이 더욱 귀하다고 합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병조의 기병(騎兵)·보병(步兵)은 두서너 번(番)을 덜어내어 금위영과 어영청 양영에서 작목(作木)한 것과 관서(關西)에서 올라오는 돈과 목면을 합계하면, 3천여 동이 될 것인데, 이를 가지고 곡식과 바꾼다면 7,8만 곡(斛)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집니다."
하였는데,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이는 곧 국가에서 큰 일을 베풀어 시행하는 것인데, 양 군문(軍門) 또한 어찌 인색하게 아낄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우참찬 김동필(金東弼)은 아뢰기를,
"관서의 돈 10만 냥은 이미 올려 보내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를 가져다가 선혜청(宣惠廳)에 붙여 공인(貢人)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그 대신의 쌀을 진휼청(賑恤廳)에 이송(移送)하게 한다면, 2,3만 석의 쌀은 작미(作米)나 환무(換貿)를 기다리지 않고도 가만히 앉아서 얻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공물 주인(貢物主人)551)  의 미곡(米穀)을 만일 조가(朝家)에서 모두 매수(買收)한다면 도성 안에 곡식이 귀해져 반드시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국가의 체통으로 말하더라도 어찌 공물 연조(貢物年條)를 매수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외(京外)에 저축이 고갈된 것은 모두 모리(牟利)에서 연유한 것이다. 고(故) 판서(判書) 김석연(金錫衍)이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있었을 때에는 저축이 특히 넉넉했으니, 이는 귀신(鬼神)들이 실어다 주어서가 아니라 곧 잘 지켜서 이룬 것이다. 공물 주인의 미곡은 모두 매수하자는 것은 처음 듣기에는 좋은 듯했으나, 이조 판서의 ‘도성 안에 쌀이 없게 된다.’는 말이 진실로 옳으니, 병조의 목면 1천동을 양 군영(軍營)의 돈과 바꾸어 선혜청에서 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태좌가 나이 많음을 들어 누누이 간절한 심정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극히 간절한 심정에서 나온 말인데, 대신들이 일제히 모였으니, 어찌 경(卿)의 뜻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지평 김권(金權)이 전계(前啓)를 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김양호(金養浩)의 일만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윤7월 6일 무인

정도은(鄭道殷)을 정언(正言)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승지(承旨)로, 윤광익(尹光益)을 부응교(副應敎)로, 김상성(金尙星)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여 인책(引責)하며 함께 오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바라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판중추부사 심수현(沈壽賢)이 시골에서 올라오니, 인견(引見)하여 위유(慰諭)하였다.

 

경상도 동래부(東萊府)에서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머리가 하나, 발이 여섯, 꼬리가 둘, 신(腎)이 두 개였다.

 

윤7월 7일 기묘

황해도 서흥현(瑞興縣)에서는 배나무가 봄에는 말라 죽었다가 7월에 꽃이 피었고, 해주목(海州牧)에서는 배나무가 봄에 꽃이 피어 열매 맺더니 7월에 또 꽃이 피었다.

 

윤7월 8일 경진

사헌부에서 【지평 김권(金權)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성 현령(固城縣令) 신월(申鉞)은 본래 천얼(賤孼)로서 전혀 경력(經歷)이 없고, 또한 그의 사람됨이 매우 용렬하여 진실로 번다한 일을 전담하며 대중을 다스릴 가망이 없습니다. 고성 현령 신월을 개차(改差)하고, 이 뒤로는 정식(定式)대로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으로 교체하되, 반드시 지망(地望)과 재간이 있는 사람을 가리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도당록(都堂錄)552)  을 행하여 11인을 뽑았다. 5점에는 이흡(李潝)·윤광운(尹光運)이고, 4점에는 이만유(李萬維)·조상경(趙尙慶)·황정(黃晸)·유엄(柳儼)·이종백(李宗白)·임정(任珽)·심성희(沈聖希)·조한위(趙漢緯)·정홍상(鄭弘祥)이었고, 이조(吏曹)의 홍문록(弘文錄)은 이종백(李宗白)·이흡(李潝)이었다.

 

윤7월 9일 신사

이종백(李宗白)을 부교리(副校理)로, 심성희(沈聖希)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유엄(柳儼)을 수찬(修撰)으로, 정홍상(鄭弘祥)을 부수찬으로, 이광부(李光溥)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지제교(知製校) 29인을 뽑았으니, 황재(黃梓)·서명빈(徐命彬)·조명익(趙明翼)·조명택(趙明澤)·한현모(韓顯謨)·홍봉조(洪鳳祚)·유겸명(柳謙明)·신치근(申致謹)·홍성보(洪聖輔)·정도은(鄭道殷)·송필항(宋必恒)·이만유(李萬維)·박필기(朴弼琦)·윤광운(尹光運)·심성희(沈聖希)·최명상(崔命相)·한사득(韓師得)·이중경(李重庚)·홍일보(洪一輔)·조상명(趙尙命)·이귀휴(李龜休)·허집(許集)·남태경(南泰慶)·유수원(柳壽垣)·심성진(沈星鎭)·유운(柳運)·이종백(李宗白)·이흡(李潝)·조한위(趙漢緯)이다.

 

양사(兩司)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는데,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심육(沈錥)도 함께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윤7월 10일 임오

밤에 달이 남두성(南斗星)과 기성(箕星)의 네 번째 별을 범했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북자(北咨)의 오욕(汚辱)은 오로지 심양(瀋陽) 책문(柵門)의 잠시(潛市)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금단하려면 쇄마(刷馬)를 혁파하고 고거(雇車)를 사용하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간사한 민생들이 반드시 저지하려고 하여 저자들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할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역(首譯) 김경문(金慶門)이 당초에 이미 담당했으니, 사은사(謝恩使)가 갈 때 다시 김경문을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경문을 우선 가자(加資)하여 다시 들여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이번의 사행(使行) 때에 만일 상고(商賈)들 중에 잠입(潛入)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그 곳에서 효시(梟示)553)  하도록 하라."
하였다. 함경도(咸鏡道) 도과(道科)의 시관(試官) 박사익(朴師益)을 엄하게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으니, 즉시 사조(辭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지 부사(冬至副使) 이유(李瑜)와 북도 평사(北道評事) 이종성(李宗城)을 개차(改差)하도록 명하였으니, 늙은 어버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집이 송도(松都)의 피폐함을 진달하고 10분의 2의 이식(利息)을 허락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조정에서 금령(禁令)을 내린 뒤에도 그전처럼 이식을 받는 자를 엄하게 단속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겸임하고 있는 문형(文衡)을 해면하기를 바라니, 체직하도록 허락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심공(沈珙)이 아뢰기를,
"각 아문(衙門)의 면세(免稅)에 관한 일은 모두 호조(戶曹)에 속한 것입니다마는, 사액(賜額)한 서원(書院)의 전답(田畓)은 특별히 그전대로 면세하도록 하셨으니, 청컨대,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 태학(太學)의 전답 4백 결(結)도 조세를 내지 말라는 일을 해조(該曺)에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역적을 잡아다 바친 사람 진사(進士) 홍서귀(洪瑞龜)에게 그에 상당하는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일찍이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승지 성윤덕(成潤德)이 홍서귀는 바야흐로 과거(科擧) 공부에 힘쓰고 있다고 주달했기 때문이다.
사간 이만유(李萬維)·장령 이광부(李光溥)가 전계(前啓)를 전주(傳奏)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7월 11일 계미

양사(兩司)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대관(輪對官)들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윤7월 12일 갑신

조익명(趙翼命)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진희(趙鎭禧)를 집의(執義)로, 심육(沈錥)을 지평(持平)으로, 이흡(李潝)을 부교리(副校理)로, 조상명(趙尙命)을 정언(正言)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응교(應敎)로, 오명신(吳命新)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사헌부 【장령 이광부(李光溥)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국가의 상벌(賞罰)은 지극히 중요한 데 관계되므로, 한 가지라도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권징(勸懲)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해에 영남(嶺南)에서 역적들이 함부로 날뛰었을 때 함양 군수(咸陽郡守) 박사한(朴師漢)이 다른 고을로 도피해 버려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는데,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의 수재(守宰)로서 이 때문에 죄를 얻게 된 사람이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박사한은 도신(道臣)과 상피(相避)554)  가 되는 것 때문에 마침내 순체(順遞)하는 데 이르러 바로 내직(內職)을 제수했었는데,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으니, 공론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사람들의 말이 끊임없었습니다. 그 동안의 사실을 분명하게 사핵(査覈)하여 감처(勘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전 함양 군수 박 사한을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7월 13일 을유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차자를 올려 걸해(乞骸)555)  하고, 또 논하기를,
"함흥(咸興) 고을 등지를 뒤덮었던 수재(水災)는 실로 이전에 없던 일입니다. 이런 시기에 시예(試藝)하려면 거조(擧措)가 거창하게 되니, 청컨대, 도과(道科)를 내년 봄으로 늦추어 정하소서."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아니하고, 도과에 관한 일은 그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7월 14일 병술

서명빈(徐命彬)을 승지(承旨)로, 양득중(梁得中)을 장령(掌令)으로, 허옥(許沃)을 헌납(獻納)으로, 신방(申昉)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윤7월 15일 정해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부교리 이흡(李潝)을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이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해의 역변(逆變)은 진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변괴였으나, 왕령(王靈)이 미쳐서 다행히 평정(平定)되었으니, 다시는 우려할 바가 없을 것 같은데도, 도성(都城)의 백성들이 짐을 꾸리며 하루에도 세 번씩 경동(驚動)하고 있습니다. 대개 뿌리가 뽑히지 않아서 아직도 잠복(潛伏)해 있는 근심거리가 많은데, 전하를 위해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또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는 곧 《춘추(春秋)》의 법에 반드시 베도록 되어 있는데, 전하께서 전후에 안국(按鞫)하시는 즈음에 추문(推問)해야 할 것을 일찍이 끝장을 내지 않고 베어야 할 자를 더러는 살리기로 의논하였으므로, 국가 기강(紀綱)의 괴열(乖裂)과 인심(人心)의 파탕(波蕩)이 날로 심해지고 달마다 달라져서 한정이 없으니, 신은 그윽이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네 대신의 국가를 위한 충성은 제신(諸臣)들이 이미 진달하였고, 신이 일찍이 듣건대, 전하께서도 경연(經筵)에서 여러 차례 죄가 없다고 하교하셨다 합니다. 아! 필부 필부(匹夫匹婦)의 원통함도 오히려 알면서 아뢰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인데, 하물며 이는 국가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되니, 얼마나 중대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또한 오히려 반쯤은 밝고 반쯤은 어두우며, 결단하려다가 결단하지 않는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저 요직(要職)에 있는 무리들이 그만 이를 가지고서 이장(弛張)하고 신축(伸縮)하는 술책을 부리고 있으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전하께서 친애(親愛)하여 신임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전후에 병용(柄用)556)  되어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일이 매우 심했습니다. 허다한 죄범을 다시 제론(提論)하고 싶지 않습니다마는, 저번에 스스로 변명한 상소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마음의 소재를 더욱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잔당(殘黨)이 스스로 마땅히 소멸하여 없어질 것이니, 〈국세(國勢)의〉 공고(鞏固)함이 태산(泰山)과 같은 뿐만이 아닐 것이다.’라는 말이 한결같이 ‘관동(關東)의 도적은 할 수 없을 것이다.’557)  라는 말과 어찌 그리도 서로 너무 흡사합니까? 옛적의 재상(宰相)이 수한(水旱)과 도적(盜賊)을 들어 아뢴 것과는 크게 상반되는 것입니다. 아! 군부(君父)의 병환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면 시약청(侍藥廳)을 베푸는 한 조항이 얼마나 긴급한 일입니까? 그런데 도리어 ‘몹시 피곤하여 미처 베풀 겨를이 없었다.’라고 핑계했으니, 이는 삼척동자(三尺童子)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앞서의 두 신하의 상소는 진실로 충성스러운 본심에서 나온 것인데, 조금도 서서히 구명(究明)해 보시지 않고 견척(譴斥)이 뒤따르게 되었음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는데, 상소를 입계(入啓)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전편의 뜻이 자신과 취향(趣向)이 다른 자를 무함하고 대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인(黨人)을 비호하고자 하여 말이 몹시 패만(悖慢)함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하고, 이어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윤7월 16일 무자

부수찬 심성희(沈聖希)를 먼 변방에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심성희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앞서 민형수(閔亨洙)의 소임은 언책(言責)이었고, 윤섭(尹涉)의 소임은 논사(論思)이었습니다. 성상의 무함을 변명한 것은 충성스러운 말을 한 것이고, 권신(權臣)과 행신(倖臣)을 배척하였음은 강직한 논의를 한 것인데, 어찌하여 전하께서 죄를 주셨습니까? 이번에 또 이흡(李潝)이 한 말을 죄주어 갈수록 더하시니, 이는 무슨 거조(擧措)입니까? 충성을 다하고 절의(節義)를 다한 신하들은 칼날에 나란히 죽어 가고, 임금께 흉악한 소리를 하고 나라를 해롭게 하는 말이 천지에 가득 찼으므로, 충성스러운 뜻이 있는 선비들이 강개(慷慨)하여 분발해서 성심(聖心)을 깨우치시기를 바라는데도, 전하께서는 일찍이 위에서 중정(中正)의 도를 세우지 못하시고, 다만 아래의 붕당(朋黨)을 깨뜨려 버리려고만 하여, 충신이 누구이고 역신(逆臣)이 누구인지 가리지 않고 곧장 이렇게 위엄으로 제압하실 따름입니다. 옛날에 당(唐)나라에서 우이(牛李)558)  로 갈라진 당은 오늘날처럼 충신과 역적이 서로 싸우는 것과 같지 않았으나, 국가 일을 집안 일처럼 근심하는 배도(裵度)559)  가 열화(烈火)같이 마음을 태우면서도 오히려 조정(調停)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당시에 ‘하북(河北)의 도적은 깨뜨리기 쉬워도 붕당(朋黨)을 설유(說諭)하기는 어렵다.’라는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겉으로는 ‘탕평(蕩平)’ 이란 명칭을 내세우고 고식적(故息的)으로 미봉(彌縫)하는 계책을 쓰시니, 이는 오늘 관직에 제수되었다가 내일 찬축(竄逐)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편의 사람들에 국한(局限)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탕평은 함정을 파놓고 사람들이 빠지게 하는 것과 거의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네 대신의 죽음은 똑같은 단심(丹心)인데, 어찌하여 전에는 정포(旌褒)하고, 철식(腏食)하게 하여 충신으로 삼았다가, 어찌하여 뒤에는 추삭(追削)하고 철원(撤院)하여 죄인으로 삼는단 말입니까? 신은 진실로 근심하고 한탄해 보아도 부족하여 곧장 통곡하고 싶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어제 하교하였는데도 오늘 또 이와 같으니, 진심으로 편당을 두둔하며 군부(君父)가 엄하게 신칙(申飭)한 분부를 돌보지 않음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단 말인가?"
하고, 이어 원찬(遠竄)하도록 명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독관 조적명(趙迪命)이 해서(海西)의 수재(水災)를 들어 수성(修省)에 힘쓰기를 바라니, 임금이 말하기를,
"매우 절실한 말이다."
하였다. 동지사(同知事)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감란록(勘亂錄)》의 일로 품정(稟定)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적(諸賊)들의 흉악한 말이 모두 심유현(沈維賢)의 말을 빙자하고 있는데, 그대로 써야 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이 북로(北路)를 갔다 온 뒤에 민간의 일로써 한 번 진달하고 싶었습니다. 덕원(德源)·고원(高原) 등지는 토질이 척박하고 본래부터 논이 적고 다만 원전(原田)560)  과 속전(續田)561)  만 있는데, 속전은 곧 화전(火田) 따위입니다. 해를 걸러 경작하므로 원전에 비할 수가 없어서, 일찍이 속6등전(續六等田)으로 전안(田案)에 등록했던 것입니다. 십수년 전에 6등 원전(六等原田)으로 시행하여 속전은 박토(薄土)인데도 원전의 세를 매겼기 때문에,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대부분 모두 묵혀 버렸습니다. 마땅히 그전처럼 속6등전으로 녹안(錄案)하고, 속전으로 시행하여 백성들이 개간하여 살아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전(前) 북평사(北評事) 서명빈(徐命彬)이 함흥(咸興) 도련포(都連浦)의 일로 상소하여 목장(牧場)을 혁파하기를 청하자, 태복시(太僕寺)의 복주(覆奏) 내용에 용마(龍馬)가 난다는 것과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말을 달리던 곳임을 들어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용마에 관한 말은 본시 아득한 일이고 말을 달리던 장소는 원래 목장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대저 목장으로 인한 민폐가 이와같은 데 이르지 않았다면, 선왕조(先王朝)에서 어찌하여 근 50년이나 혁파하였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용마에 관한 말은 《용비어천가》를 보건대, 팔준마(八駿馬)의 하나가 도련포에서 난 듯하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용마가 다시 난다 하더라도 어찌 애석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태복시로 하여금 종전에 보존하고 혁파한 사실을 자세히 고찰하게 하였다가, 후일의 차대(次對)562)   때에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항간에 전해지는 말을 듣건대, 내수사(內需司)에서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의 전화(錢貨)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와전된 말이다. 제신(諸臣)이 어떻게 알겠느냐? 금중(禁中)에 후포(帿布) 1건이 있는데, 이는 곧 선왕조(先王朝)에 만든 것으로서 해가 오래 되어 찢어져 버렸다. 한 번 열무(閱武)하려면 고치지 않을 수 없는데, 장차 반 동(同)의 베를 허비해야 한다고 한다. 옛날 한문제(漢文帝)는 백금(百金)의 허비를 아끼어 노대(露臺)를 쌓지 않았으니,563)   비록 반 동의 베라도 남비(濫費)할 수 없기 때문에 중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회(所懷)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해 주니 진실로 가상하게 여긴다. 내가 마땅히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겠고 없더라도 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옛날에 순(舜)임금이 칠기(漆器)를 만들자 간하는 사람이 7인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조(宣祖朝)에 황랍(黃蠟)을 간한 일로 보더라도, 옛적의 융성(隆盛)한 때에는 간하러 오도록 하는 덕이 이러했습니다. 이광덕(李匡德)은 조금 강직한 기개가 있고, 조현명(趙顯命) 또한 잘 간하였었는데, 지금은 벼슬이 높아져 점점 전과 같지 않습니다. 박사수(朴師洙)는 지금 이미 외방(外方)으로 나가버려, 군덕(君德)에 관하여 진계(陳戒)할 사람이 단지 이종성(李宗城) 한 사람만 있는데, 명리(名利)의 길에서 머뭇거려 하료(下僚)에서 넘나들고 있으며, 근래에 삼사(三司)에서는 말하기를 기휘(忌諱)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윤7월 17일 기축

홍문관에서 아뢰기를,
"소대(召對) 때 책은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마친 다음에 대신의 헌의(獻議)에 따라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뒤이어 진강(進講)하기 바랍니다."
하니, 의논한 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윤7월 18일 경인

사간원 【정언 정도은(鄭道殷)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해의 큰 처분(處分)은 대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의리를 밝혀서 만세(萬世)를 위해 인륜[人紀]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저 한편의 사람들이 함부로 입을 놀려 칭원(稱冤)하고 있음은 이미 지극히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나, 당파(黨派)의 풍습에 가리워져 있으니, 진실로 모두 주벌(誅罰)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이미 백골(白骨)이 된 사람의 관작을 추탈(追奪)하는 일이 어떠한 전율(典律)인데, 장독(章牘) 사이에 문득 ‘대신(大臣)’ 두 글자를 가(加)하고 있으니, 왕강(王綱)에 관계되는 바 무엄(無嚴)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일찍이 미안한 뜻을 보이시며 고쳐서 입계(入啓)하라는 명이 있기에 이르렀으나, 한결같은 투로 서로 답습(踏襲)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징즙(懲戢)됨이 없이 마치 승부(勝負)를 다투듯이 하고 있으니, 그들이 임금의 명을 멸시하고 조정을 업신여기는 정상이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청컨대, 이후로 소장 내용에 ‘대신’을 들먹인 것은 승정원으로 하여금 즉각 도로 내주어 고쳐서 올리도록 하는 일을 법식으로 정하여 시행하소서."
하고, 또 행수 선전관(行首宣傳官)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니 영남(嶺南) 사람들을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윤7월 19일 신묘

송인명(宋寅明)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권시경(權始經)을 승지(承旨)로, 이만유(李萬維)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신치근(申致謹)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진상(金鎭商)을 집의(執義)로, 박이문(朴履文)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윤7월 20일 임진

소대(召對)를 행하고, 윤대관(輪對官)564)  들도 함께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윤7월 21일 계사

정언 정도은(鄭道殷)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풍문에 따라 대략 듣건대, 성상께서 선혜청(宣惠廳)과 호조(戶曹)의 돈을 들여오도록 명하신 액수가 매우 많다고 하니, 신은 지극히 개연(慨然)하여 근심되고 한탄스러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막 경연(經筵)의 하교로 인하여, ‘이는 혼궁(魂宮)의 제수(祭需)에 관계된 것이다.’는 말씀을 삼가 듣고 알았습니다. 설사 많은 경비(經費)가 든다 하더라도 어찌 고석(顧惜)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신이 여인(輿人)들의 말에서 알게 되었는데, ‘지난해 동짓달에 제수 돈으로 본궁(本宮)에 수납한 것이 2천 냥이고, 올봄에 또 1천 4백 냥을 들여왔으며, 오늘 또 5천 냥을 들여왔다.’고 합니다. 비록 내간(內間)의 공용(供用)이 어떠한 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1년도 되지 못하는 사이에 만 냥에 가까운 재물을 소비함은 너무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례의 비답을 내렸다.

 

주강을 행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특진관(特進官) 이정제(李廷濟)가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수재(水災)는 진실로 예사롭지 않은 재해(災害)입니다. 함흥(咸興)은 도신(道臣)의 장계(狀啓)가 간혹 실지보다 지나친 것이 많아서 심지어 대우(大禹)565)   때의 홍수도 반드시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세교(萬歲橋)가 하룻밤에 떠내려가고, 도련포(都連浦) 목장(牧場)의 말이 80여 마리나 익사했으며, 이성(利城)은 작은 고을인데 민가가 3백 60여 호나 떠내려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말로는 덕원(德源) 원산 포구(元山浦口)에 시체가 수없이 쌓였으므로, 덕원 부사(德源府使)가 날마다 묻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함흥의 본궁(本宮)은 곧 용흥(龍興)하신 옛터인데 무너져 손상을 입은 재난(災難)은 마음에 지극히 놀라운 일이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변괴입니다. 만일 어사(御史)를 차송(差送)하여 안무(安撫)하게 하고, 남관(南關)이 이미 영동(嶺東)의 아홉 고을과 영남의 연해(沿海) 고을과 서로 가깝고 쌀을 실은 배가 또한 많이 와서 모이니, 관서(關西)의 돈 1만 냥을 꾸어 보내어 빨리 곡식을 무역(貿易)하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사의 소임은 이종성(李宗城)이 아니면 할 수 없다. 비록 어버이의 나이가 많다 하여 이제 막 북평사(北評事)에서 체직되었지만, 어사는 곧 왔다갔다 하는 소임이니 이 종성으로 어사를 차출(差出)하도록 하라. 곡식을 옮기는 것은 곧 왕정(王政)의 큰 일이니, 영남의 곡식 1만 석(石)과 관서의 돈 1만 냥을 시급히 꾸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윤7월 23일 을미

조한위(趙漢緯)를 지평(持平)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응교(應敎)로, 송성명(宋成明)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이정제(李廷濟)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북로 어사(北路御史) 이종성도 함께 입시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종성이 아뢰기를,
"비록 영남(嶺南)의 곡식 1만 석(石)을 한정해서 옮겨다 주라는 명이 있었으나, 바닷길이 1천 리나 되므로 지속(遲速)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현재 창고에 있는 영동(嶺東)의 곡식과 앞으로 환곡(還穀)을 받아들인 후에 어느 곡식을 막론하고 차례차례 배로 운반하여 가져다 쓰고서 영남 쌀로 수량을 헤아려 강원도에 지급해 주는 것이 매우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곡식을 옮기어 주는 것은 왕자(王者)의 큰 정책인데, 우리 나라의 일은 매양 더디고 느려서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강원도 곡식은 비록 옮기어 준 사례가 없었으나, 영남 쌀로 상환(償還)하자는 말이 또한 좋으니, 특별히 강원도 도신(道臣)에게 별유(別諭)를 내리겠다."
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신의 이번 길은 명칭이 어사(御史)이나, 조서(詔書)를 문자(文字)로 하교(下敎)하신 것이 없으니, 신이 비록 내려가더라도 장차 성상의 덕의(德意)를 선포(宣布)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조(辭朝)하는 날 마땅히 별유를 써서 내리겠다."
하였다. 이종성이 또한 방물(方物)과 갑주(甲胄)566)   값을 진자(賑資)에 보충하여 쓰고 내수사(內需司)에 바칠 베도 또한 머물러 두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멀리 떠나게 되었으니, 이미 생각하고 있던 바를 감히 모두 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건지산(乾止山)을 절수(折受)567)  하는 일로 인해 전후에 내리신 성상의 비답과 경연(經筵)에서의 하교는 진실로 전하께 바라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광덕(李匡德) 한 사람은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지만, 성상의 덕에 누가 됨이 큽니다."
하였는데, 지경연사(知經筵事)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이종성의 말은 진실로 국가를 근심하고 임금을 친애(親愛)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이광덕을 돌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광덕은 마땅히 책벌(責罰)을 가해야 하겠지만, 다시는 이 일을 개의(介意)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성덕(聖德)에 광채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덕의 첫 상소는 전연 말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조금 경칙(警飭)을 가했었으니 번신(藩臣)의 도리에 있어 마땅이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인데, ‘새로 출생한 옹주(翁主)는 몇 분이냐?’는 등의 말을 감히 글에다 써서 현저하게 노여워하는 뜻이 있었으며, 반드시 함부로 그 기세를 부리고야 말려고 했었다. 이와 같은데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또한 마음 편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니, 이종성이 아뢰기를,
"이광덕이 죄가 있든지 죄가 없든지 신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당당하신 천승(千乘)의 나라 임금께서 어찌 한낱 번신과 승부(勝負)를 겨루듯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건지산의 절수를 특별히 도로 정지하신다면 어찌 성덕(聖德)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기기를 좋아하여 그러는 것이겠는가? 이광덕의 일은 마침내 개탄스러운 마음이 없을 수 없지만, 경(卿)들의 말이 임금을 친애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어찌 아름답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이제부터는 흔쾌하게 그의 일을 풀어버리고 건지산 절수 또한 도로 정지하여 탁지(度支)에 돌리겠다."
하자, 이종성이 아뢰기를,
"너무도 다행합니다. 신 등이 오늘 전환(轉環)하시는 덕음(德音)을 친히 받들었으나, 이광덕의 죄는 가벼운 벌에 그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와서 내가 어찌 그 일 때문에 벌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윤7월 24일 병신

밤에 목성(木星)이 귀성(鬼星)으로 들어갔다.

 

위원 군수(渭源郡守) 윤휘정(尹彙貞)과 벽동 군수(壁潼郡守) 이현모(李顯謨)를 내의(內擬)568)  하도록 명하였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조도빈(趙道彬)이 졸(卒)하였다. 조도빈은 조태채(趙泰采)의 조카[從子]이다. 부음(訃音)을 듣고는 임금이 선정전(宣政殿) 전무(前廡)에서 거애(擧哀)하고, 특별히 애도(哀悼)하는 교지(敎旨)를 내리고, 조제(弔祭)와 상장(喪葬)에 쓸 물품을 예문(禮文)에 의하여 거행할 것을 명하고, 녹봉을 3년 동안 그대로 주도록 명하였다.

 

부수찬 정홍상(鄭弘祥)을 대정현(大靜縣)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정홍상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국가를 위하여 깊이 근심하고 원대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난적(亂賊)을 다 제거하지 못한 것과 인심이 안정되지 못한 것을 첫째의 일로 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마는, 어리석은 신은 그윽이 국가에서 깊이 근심하고 멀리 염려해야 할 것이 단지 이 몇 가지 일에만 있지 않다고 여깁니다. 지금 이른바 ‘탕평(蕩平)’ 두 글자는 진실로 목전의 위급한 병폐와 위급한 조짐을 위한 것이지만, 신은 인순고식(因循姑息)하다가 전하의 나라를 멸망으로 순치(馴致)함이 오로지 이에 달려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대략 진달하겠습니다. 재작년에 전하께서 한편의 사람들을 진퇴시킨 것은 어찌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무리를 총애(寵愛)해서 등용하여 함께 탕평하는 일을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탕평하는 일을 가지고 전하를 섬기는 사람들은 또한 소매를 걷어붙이고 담당하는 것으로 자기들의 소임을 삼고, 하는 말마다 탕평이고 하는 일마다 탕평이어서 마치 얼마 안되어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만 그 이른바 탕평이란 것은 정사(政事)하고 주의(注擬)하는 사이에서 분식(粉飾)하여 온 세상 사람의 안목(眼目)을 현혹시키고 구중 궁궐(九重宮闕)의 성감(聖鑑)에 대비하고 마는 데 지나지 않다가, 세월이 조금 오래 되어 처분이 크게 달라진 후에는 정목(政目)569)  의 사이에 탕평하는 것마저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봄의 난역(亂逆)은 그 근원을 추구(推究)해 보면,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무리에게서 연유한 것이었으니,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진실로 마땅히 면목을 고치고 방침을 바꾸어야 할 것인데, 심상한 일처럼 보고 고치는 사람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조금 이름 얻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제신(諸臣)을 신설(伸雪)해야 한다는 논의를 수창했었으나, 신설해야 한다는 논의를 대략 들어 보면 세 가지로 달랐으니, 혹자는 전부를 신설하는 것이고, 혹자는 등급을 나누는 것이며, 혹자는 준엄하게 막는 것이었습니다. 아! 저 준엄하게 막는 사람은 김일경과 박필몽의 심법을 전해 받은 사람으로서, 그가 비록 얼굴을 북으로 향하여 전하를 섬기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바가 있으며, 저 등급을 나누자는 의논을 힘써 간한 사람들 또한 이리저리 끌리다가 마침내 앞서다 물러서다 우물쭈물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연명하여 차자를 올린 것은 한 가지인데 만약 이로써 죄를 삼지 않으려면, 억지로 등급(等級)을 나누려 한 것은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군자(四君子)의 처사는 마땅히 이처럼 기구(崎嶇)하고 구차하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이러고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윽이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부지(扶持)하고 억제(抑制)함이 너무 치우치시고 미워하고 사랑함이 두드러지게 다르시니, 물리친 신하에서 나온 말은 비록 충성스럽고 정직하여도 당류(黨類)를 비호(庇護)하는 것으로 돌리고, 요로(要路)에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 말은 괴패(乖悖)하여도 문득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십니다. 전하의 마음이 이처럼 치우치시니, 탕평한 다스림을 이루려고 하심은 연목구어(緣木求魚)570)  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소를 입계(入啓)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편당하는 풍습을 달갑게 여기는 무리들이 여러 가지로 별스러운 말을 하며 방자한 뜻으로 편당을 비호하는 짓이 근일보다 심한 때가 있지 않았는데, 정홍상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탕평에 관한 한 가지 일을 배척하고 헐뜯어 위로 군부(君父)를 기롱하고 아래로 조정의 신하들을 침해하여 배척하니, 이는 다름 아니라, 이 일을 헐뜯음으로써 그들의 심사(心事)를 이루려는 것이다. 만일 무엄(無嚴)함을 통절하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데에 이를 것이다."
하고, 이어 먼저 체직한 다음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윤7월 25일 정유

북도 어사(北道御史) 이종성(李宗城)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별유(別諭)를 내리기를,
"북로(北路)는 왕업(王業)을 일으킨 옛땅이므로,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우리 선왕(先王)에 이르기까지 권고(眷顧)하심이 심상한 데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내가 사복(嗣服)한 뒤로는 덕으로 화육(化育)하지 못하였고, 혜택이 두루 미치게 하지도 못했었다. 4년 동안에 수재(水災)·한재(旱災)·풍재(風災)·상재(霜災)가 없었던 해가 없었는데, 올해의 북도 수재에 이르러서는 옛날에 없던 일로서, 그 장계(狀啓)를 보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눈이 처참해진다. 옛사람들은 한 사람이 제곳을 얻지 못하게 되어도 마치 저자에게 매를 맞은 것처럼 부끄러워했는데, 하물며 수천 리 안의 민생들이 구렁에 나뒹굴게 된 것이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식음(食飮)과 침면(寢眠)도 편치 않다. 이에 특별히 위유 안집 어사(慰諭安集御史) 이종성(李宗城)을 보내어 위무(慰撫)하고 권집(勸集)하게 하고, 이 이외에 진구(賑救)해야 할 일도 정녕하게 면유(面諭)하여 민생들을 구제하고 민생들을 보호할 수 있는 일들을 편의(便宜)하게 거행하도록 한다. 곡식을 옮겨 가는 한 가지 사항 또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시급히 거행하도록 하겠거니와, 감영(監營)의 전포(錢布)와 북관(北關)의 내노비(內奴婢) 조(條)와 주창(州倉)에 올려다 놓은 것들도 일체 가져다 쓰되, 떠내려간 민가와 익몰(溺沒)한 민정(民丁) 또한 휼전(恤典)을 거행하여 내가 상심하고 참혹하게 여기고 있는 뜻을 알리도록 하라. 내가 비록 부덕(不德)하나, 조종조 및 우리 선왕께서 애호(愛護)하여 돌보시던 적자(赤子)들이 구렁에 나뒹굴게 되었는데, 구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측은하게 여기며 상심하는 뜻을 다 효유(曉諭)하지 못하고 어사에게 맡기어 보내니, 각기 이 분부를 체념(體念)하도록 하라. 군기시(軍器侍)에서 탄일(誕日)에 봉진(封進)하는 갑주(甲胄) 값도 특별히 정지하여 감해 주도록 한다."
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남도(南道)의 11고을에서 사재감(司宰監)에 바칠 백대구어(白大口魚) 2천 7백여 미(尾)도 당면한 지금의 민생들 힘으로는 마련할 길이 만무한 형세이니, 관서(關西)의 전목(錢木)이나 혹은 감영(監營)의 저축으로써 추이(推移)하여 바치게 하고, 제읍(諸邑)에는 곧바로 감제해 줄 것이며, 회령(會寧)에서 개시(開市)571)  할 때에 남관(南關)에 나누어 배정한 저구(狙口) 또한 다른 데에서 마련해서 쓰고 재해를 입은 고을에는 나누어 징수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이종성이 또 돈을 주조해서 도신(道臣)에게 맡기어 민생을 구제하는 자금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정홍상(鄭弘祥)을 강진현(康津縣)에 이배(移配)하도록 명하였는데,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뢴 말에 따른 것이다.

 

윤7월 26일 무술

달이 세성(歲星)을 범하고, 달이 천시원(天市垣)에 들어갔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7월 28일 경자

김동필(金東弼)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이조 참판 송인명(宋寅明)과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정홍상(鄭弘祥)의 상소 내용 때문에 각각 상소하여 인책(引責)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사(知事) 조문명(趙文命)이 진달하기를,
"정홍상(鄭弘祥)을 멀리 귀양 보낸 것과 심성희(沈聖希)가 폄적(貶謫)된 것은 조가(朝家)에서 벌을 줌이 차이가 있음을 면하지 못한 것이니, 청컨대, 세 번 더 생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조문명이 또 아뢰기를,
"유황(硫黃)은 곧 군기(軍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물건인데, 훈국(訓局)에서 쓰는 것을 오로지 양남(兩南)의 경주(慶州)와 구례(求禮) 등의 고을에서 생산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생산하지 않는 고을은 모군(募軍)을 혁파하고 생산하는 고을만 모군을 그대로 두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특진관 장붕익(張鵬翼)이 아뢰기를,
"호마(胡馬)를 무역(貿易)하여 전마(戰馬)를 갖추는 것을 그전대로 금지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 장사는 금단하고, 사행(使行)이 사 오는 것은 금단하지 말라."
하였다. 장붕익이 또 당각(唐角)을 무역하기를 청하니, 의주부(義州府)에서 속공(屬公)한 당각을 관문(關文)을 보내어 가져다 쓰도록 명하였다. 포도청(捕盜廳)에 있는 죄인 김검산(金儉山)을 군문(軍門)에서 효시(梟示)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곧 청주(淸州) 역변(逆變) 때에 고(故)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의 금권(金圈)을 도둑질해 간 사람인데, 장붕익이 아뢴 말에 따른 것이다.

 

윤7월 29일 신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7월 30일 임인

밤에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의 하늘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2,3척 가량이었으며, 빛깔이 붉었다. 또 필성(畢星) 위에서 나와 남쪽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3,4척 가량이었으며 빛깔이 붉었다.

 

서명균(徐命均)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진순(李眞淳)을 좌윤(左尹)으로, 임정(任珽)을 수찬(修撰)으로, 이현모(李顯謨)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송인명(宋寅明)을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집(李㙫)이 북도(北道)에서 돈을 주조(鑄造)하도록 윤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관(北關) 사람들은 처음부터 돈을 알지 못한 것이 귀중하다. 이제 만일 크게 주조한다면 두만강(豆滿江)을 넘어가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종성(李宗城)이 장문(狀聞)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좋을 대로 변통해야 한다."
하였다. 이집이 또 아뢰기를,
"제도(諸道)의 검전(檢田)은 경차관(敬差官)을 차출하지 말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심성희(沈聖希)를 용서하여 윤섭(尹涉)의 예대로 삭출(削黜)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집이 아뢴 말에 따른 것이다. 대사간 조익명(趙翼命)이 전계(前啓)를 전주(傳奏)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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