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계묘
장태소(張泰紹)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헌납 허옥(許沃)이 상소하기를,
"지금 ‘탕평(蕩平)’ 이란 명칭만 있고 탕평의 실속은 없습니다. 심성희(沈聖希)와 정홍상(鄭弘祥)의 상소는 이흡(李潝)의 상소와 비해 보면 조금 가벼웠는데, 일체로 정배(定配)했으니, 마땅히 너그럽게 돌보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의(大意)는 옳지만, 심성희는 이미 처분이 있었고, 정홍상은 어찌 가볍게 의논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어영 대장 장붕익(張鵬翼)이 의주(義州)에 있는 궁각(弓角)572) 을 가져다 쓰기를 진달했었습니다마는, 당초에 의주에 표류(漂流)해 온 배에 궁각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어느 나라의 물건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제 세월이 조금 오래 되었으므로, 비록 가져다 쓰자는 청이 있었으나, 이는 곧 명분이 없는 물건이니, 마침내 구차스러운 혐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경(卿)의 말을 들어보건대, 명분이 없는 물건을 가져다가 쓰는 것은 마침내 구간(苟簡)한 데에 관계되니, 앞서의 분부를 도로 정지한다."
하였다.
8월 2일 갑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8월 3일 을사
주강을 행하였다. 신택(申)·성덕윤(成德潤)·장태소(張泰紹)·신치운(申致雲)·권시경(權始經)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8월 4일 병오
지평 조한위(趙漢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번날 연신(筵臣)이 경비(經費) 수천 꿰미를 궁내(宮內)에 들여온 일을 간하자, 성상께서 제수(祭需)에 쓸 것이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원릉(園陵)의 제수는 옛날에도 있었던 것이지만, 유사(有司)에게서 가져다가 공급하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는데, 지금 성상께서 창시(創始)하셨습니다. 이런 길이 한 번 열려서 제한이 없게 된다면, 국가의 경비가 장차는 임금의 사사로운 용도(用度)가 되어버릴 것이고, 국사(國史)에 씌어지고 초야(草野)의 사람들이 전파하여 장차 이를 가지고 전하를 기롱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선왕조(先王朝)에는 내수사(內需司)의 재화(財貨)가 유족(裕足)하여 더러 흉년을 당하면 천금(千金)을 유사에게 내주어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도리어 유사에게서 가져다가 쓰셨으니, 선왕조의 일과 견주어 보아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들여간 전화(錢貨) 중에 아직 쓰지 않은 것은 도로 유사에게 내주어 성덕(聖德)이 빛나게 하소서."
하고, 또 선혜청(宣惠廳)과 호조(戶曹)의 신하들이 봉승(奉承)하기에만 급급하여 개진(開陳)하기를 생각하지 않았음을 논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제수 때문임을 안 다음에도 이처럼 번거롭게 진달함은 미안하다."
하였다.
강필경(姜必慶)을 사간(司諫)으로, 심공(沈珙)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8월 5일 정미
밤 오경(五更)에 목성(木星)이 천시성(天市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이석효(李錫孝)를 친국(親鞫)하였다. 이석효는 제천(堤川) 사람으로 여주(驪州) 민세철(閔世哲)의 집에 왔는데, 주머니 속에 역적의 글이 있으므로, 민세철이 목사(牧使) 박황(朴璜)에게 고발하고, 박황은 감사(監司) 조최수(趙最壽)에게 신보(申報)하니, 조최수가 계문(啓聞)했었다. 이석효를 국문하니, 공술하기를,
"전(前) 제천 현감(堤川縣監) 정석(鄭錫)과 원한이 있습니다. 또 정석이 노론(老論)인 까닭에 신(臣)을 소론(少論)이라 하여 박대하였으므로, 정석의 아들이 임금이 될 기상이 있다고 무고하였습니다. 지사(地師) 차유철(車有轍)은 곧 정석의 가신(家臣)이기 때문에 함께 무함하였고, 박대후(朴大厚)는 곧 조작한 허명(虛名)입니다. 이른바 역적의 글은 모두 신이 자작 자서(自作自書)한 것입니다."
하므로, 남을 무함한 것으로 결안(結案)하여 행형(行刑)하였다. 이석효가 그의 사촌(四寸) 이석형(李錫衡)을 끌어대었으므로, 이석형을 체포하여 이석효와 면질(面質)하도록 명한 다음에 면질한 문안을 불태우도록 명하였다. 여주 목사 박황을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으니, 이석효를 올려 보낼 때에 민세철을 함께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사간 조익명(趙翼命)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석효의 문서 중에는 이석형의 과거(科擧) 때 서표(書標)를 서로 내통한 문서가 있었으니, 청컨대, 이석형을 잡아다가 가두고 구핵(究覈)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대신 심수현(沈壽賢)·이태좌(李台佐)·이집(李㙫)을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난해의 변란 때에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었다. 오늘날 신자(臣子)로서는 마땅히 마음이 놀라 뼈에 사무쳐야 할 것인데, 감히 다시 당심(黨心)을 먹을 수 있겠는가? 조정에 당목(黨目)이 있기 때문에 시골 구석의 하찮은 무리들이 감히 빙자(憑藉)하는 것이다. 지난날 이도장(李道章)이 영남(嶺南)에서 출현하였고, 이번에 이석효가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자리를 언급하였으니, 이는 모두 당목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이 없다. 대저 지난해의 역적 이외에는 당론(黨論)에 관계가 있더라도 차마 베어서 끊어버리지 않았었는데, 오늘날 신자(臣子)들은 오히려 당심(黨心)을 먹고 있다. ‘탕평(蕩平)’ 이란 명칭이 나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마침내 실효(實効)가 없고, 표방(標榜)이 더욱 심해져서 변괴만 겹쳐서 생기고 있으니, 이는 내가 성심(誠心)으로 감동시키지 못한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이석효가 한 말을 들어 보건대, 내가 경(卿)들을 볼 면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로 동조(東朝)께 입시(入侍)할 면목조차 없다. 송인명(宋寅明)이 일찍이 ‘여러차례 그런 기회를 잃었다.’고 말했었는데, 내가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만 요행(撓倖)한 때를 틈타 갑자기 한다면, 사력(詐力)에 가까워 성심으로 감동시키는 것만 같지 못해서였다. 그래서 지체하다가 과연 기회를 잃게 된 것이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피차의 사람들을 한 전당(殿堂)에 불러다 모아놓고 옮음과 그름을 분석하여 지성으로 효유(曉諭)하면, 감화시키는 도리가 있게 될 것이다.’고 했었으나, 다만 생각하건대, 피차의 소견이 협조하여 일치하지 못한다면, 연석(筵席)만 시끄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상(領相)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들어와서 조용하게 문의(問議)하여 소상(昭詳)하게 일을 처리한다면, 경(卿)들을 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경들을 접할 뜻이 없다. 이런 말은 한때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경들은 이를 알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내가 마땅히 대략 이를 말하겠다. 정홍상(鄭弘祥)이, ‘군하(群下)들을 견제(牽制)한다.’는 말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 내가 하려고만 한다면 하나의 비망기(備忘記)면 족하다. 또한 진퇴(進退)시키는 권병(權柄)은 임금에게 있는 것이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또 이렇게 하는 것은 지극한 성의로써 믿음을 보여 반드시 영상과 영중추부사를 초치(招致)한 다음에 한 전당(殿堂)에서 마음을 열어 놓고 조용히 해야 할 것이니, 뒷날의 차대(次對)와 시사(視事)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하였다.
윤유(尹游)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진희(趙鎭禧)를 집의(執義)로, 박내우(朴來羽)를 장령(掌令)으로, 정익하(鄭益河)와 권영(權穎)을 지평(持平)으로, 김상성(金尙星)을 헌납(獻納)으로, 이중경(李重庚)과 이성효(李性孝)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8월 6일 무신
사복시(司僕寺)에서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에서 옹주방(翁主房)의 수본(手本)으로 인하여 건지산(乾止山)의 절수(折受)를 도로 정지하고 대신 본시(本寺)에서 관장하고 있는 장단(長湍)의 낙하(洛河)·호관(壺串)의 둔전(屯田)을 절수하라는 일로 명을 내리셨습니다. 일찍이 신묘년573) 에 고(故) 상신(相臣) 서종태(徐宗泰)의 차자와 제도(諸道) 순무사(巡撫使)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목장(牧場)과 전답 가운데 병인년574) 이후 궁가(宮家)에서 절수한 둔전 6곳을 특별히 도로 본시(本寺)에 소속하도록 명했었습니다. 청컨대, 낙하·호관을 그전대로 본시에 소속시키고, 뒷날에도 제궁가(諸宮家)에서 태복시의 목장을 절수하는 것을 일체 방지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들여주지 아니하였다.
사간원 【 헌납 김상성(金尙星)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석효(李錫孝)가 요망한 말을 떠벌여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한 죄는 이미 정법(正法)하였으나, 요망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서로 부동(符同)하여 요행한 공리(功利)를 바라며 조정을 경동(驚動)시키는 짓은 정상이 절통합니다. 이석효가 잡힌 것은 이미 민세철(閔世哲)의 고발로 인해서였으니, 기미를 알고 고발할 적에 반드시 곡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청컨대, 민세철을 바로 놓아주게 하신 명을 정지하고, 구문(究問)해서 감처(勘處)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석효가 무고(誣告)한 정상을 실정대로 털어놓기 전에 영문(營門)으로 올려 보낼 적에는 심상한 죄수에 견줄 수 없는 법인데, 단지 하나의 형리로 하여금 압령(押領)하게 하였음은 일이 지극히 소홀하고 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민세철은 이미 의당 추문했어야 하는 계제(階梯)인데, 당초에 아울러 보내지 않았으니, 청컨대, 여주 목사(驪州牧使) 박황(朴璜)을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겸춘추(蒹春秋)들이 기사(記事)를 전연 자세하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겸춘추의 소임은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사람임을 논하지 말고 각별히 가려서 차임(差任)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사자(士子)들이 서수(書手)에 관한 일로 공인(貢人)·시인(市人)의 족속(族屬)중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갖가지로 위협 공갈하고, 구금(拘禁)해 놓고 매질까지 하고 있으니, 청컨대, 드러나는 대로 엄중하게 구핵(究覈)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8월 8일 경술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일은 직임(職任)을 감당하지 못하고서도 요행히 벗어난 것으로서, 공언(空言)은 이로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헌신(憲臣)이 상소하여 문비(問備)575) 하기를 청한 것은 위로 임금의 비위(非違)를 규찰(糾察)하여 바로잡고 아래로 관원의 잘못을 책망하여 바로잡은 것으로서, 그의 말은 늠연(澟然)하여 풍채(風采)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하나의 이광덕(李匡德)을 책망하시자 겸손한 말이 이르렀고, 하나의 이종성(李宗城)의 말을 들어주시자 약석(藥石)과 같은 규간(規諫)하는 말이 이르렀습니다. 이는 지극히 미미한 일이었지만 따르고 어기는 즈음에 언로(言路)의 열리고 막힘이 이와 같으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조한위(趙漢緯)의 상소는 과중(過中)한 것으로서, 이미 알고난 뒤에는 사체가 또한 미안한 것인데, 풍채가 있는 것으로 허여(許與)했으니,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지평 정익하(鄭益河)의 상소를 도로 내주도록 명하였다. 정익하가 상소하기를,
"지난해에 논했던 세 역적들은 김일경(金一鏡) 및 박필몽(朴弼夢)의 사당(死黨)이 아닌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비록 모두 신임 사화(辛壬士禍)를 일으킨 사람들인데 하는 말과 하는 일마다 반드시 역적 김일경이라 하고 역적 박필몽이라 말하고 있으니, 생각하건대, 성상의 교화(敎化)가 미치는 바에 과연 모두 착한 사람으로 변하여 옛날의 심장(心腸) 그대로가 아니라면 반드시 감히 멋대로 괴이한 의논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데 어찌하여 한 사람의 계사(啓辭)가 겨우 나오자마자 뭇사람의 노기(怒氣)가 겹쳐서 격렬해진단 말입니까? 처음에는 나라 정권을 잡은 두 정승이 힘을 내어 영구(營救)하였고, 마침내 입시(入侍)한 제신(諸臣)이 많은 말을 하여 변명(辨明)하였습니다. 그러자 난(難)을 두려워하여 연계(連啓)를 정지한 사람은 인피(引避)하며 떠보는 짓을 하였고, 명색이 이름 내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율법을 바꾸어 색책(塞責)만 하였으니, 이러한 사세로는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정(萬鼎)은 본시 이진검(李眞儉)의 비부(婢夫)로서 이진검이 죽었을 적에 그의 상여(喪輿)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가, 돌아갈 적에는 또 이광보(李匡輔)와 함께 이진유(李眞儒)의 적소(謫所)에 갔었는데, 이는 곧 무신년576) 2월 무렵의 일로서 남쪽 땅의 사람들 가운데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경지(李慶祉)가 잡혔을 적에 이경지가 두고 타던 준마(駿馬)를 이진유가 빼앗아 타고 갔으므로, 나졸(羅卒)들이 여러 차례 가서 간청하다가 모두 쫓겨났으니, 이는 신(臣)이 그때의 나졸들을 불러다 물어보고 적실하게 안 일입니다. 권익관(權益寬)이 지금도 수령(首領)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그 사가(査家)가 몰래 비호(庇護)해 주는 힘이 아님이 없습니다. 저 응모(應募)했던 장령(掌令)은 그의 계책이 어찌 특히 율법만 고치는 데 그치겠으며, 그전에 이웃이었던 금부 당상(禁府堂上)은 그 의언(議讞)이 어찌 다만 종경(從輕)하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이하택(李夏宅) 부자의 배소(配所)를 가까운 이웃 고을에 정하여 마침내 지난해의 변을 초래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정익하의 상소는 편당하는 버릇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들어 도로 내주도록 명하였다.
8월 9일 신해
송필항(宋必恒)을 사간(司諫)으로, 허옥(許沃)을 장령(掌令)으로, 신치근(申致謹)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옥당(玉堂) 이종백(李宗白)·이만유(李萬維) 등이 경연 고사(經筵故事)를 써서 올리니, 비답하기를,
"수일(數日)을 철강(撤講)하게 되어도 마음에 항시 두려웠었는데, 하물며 까닭없이 법강(法講)과 소대(召對)를 5,6일이나 아울러 거행하지 못한 것이겠는가? 대강(對講)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일전에 장전(帳殿)에서 이미 대신들에게 일렀는데, 내가 비록 정성이 모자라기는 하지만 어찌 형식으로 하겠으며, 또한 어찌 이런 일을 즐겨서 하겠느냐?"
하였다. 이종백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장전(帳殿)에서 신료(臣僚)들을 면대(面對)하겠다는 하교가 없었으니, 전하께서 이에 대해서 실언하신 것입니다. 세 차례의 법강과 두 차례의 소대를 한결같이 폐각(廢閣)하셨으니, 혹은 목이 메인 때문에 음식을 폐하는 것과 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위태로운 국세(國勢)를 유지해 가야 하고 문란(紊亂)해진 세상의 도의를 만회해 가야 하는 일이 어느 것이나 전하 한 몸의 책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러하시니, 달리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연(經筵)의 직책에 있으면서 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히려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지난봄 이후로 당습(黨習)에 빠진 피차(彼此)의 사람들이 혹은 의도(意圖)를 바꿀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도로 전과 같은 짓을 하고 있다.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시는 날 맨 먼저 하교(下敎)하신 것이 곧 붕당(朋黨)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번에 이 폐습(弊習)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앞날에 무슨 면목으로 성조(聖祖)를 뵈올 수 있겠는가? 이석효(李錫孝)의 공술(供述)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언급했던 것을 즉시 기록하지 말라고 명했었으니, 통탄스럽고 놀라움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위에 있는 사람이 능히 중정(中正)의 도를 세워 간다면 어찌 이에 이르겠는가? 이에 내가 자책(自責)하며 신료(臣僚)들을 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이는 끝까지 돌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므로, 영상(領相)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및 시임 대신(時任大臣)들이 동시에 등대(登對)한다면, 평소에 다 말하지 못한 뜻을 털어 놓아 의리의 은미(隱微)한 부분을 밝히겠지만, 그렇게 해도 감동하여 풀어버리지 못한다면 문책함과 처벌함 또한 불가할 것이 없다. 작년부터 한 번 하고 싶으면서도 지금까지 천취(遷就)해 왔었는데, 이석효의 말이 나오고 보니 마음속에 통탄이 쌓이게 된다. 한 번 개유(開諭)하기 전에는 진실로 신료들을 대할 뜻이 없다."
하였다.
8월 10일 임자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헌납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지난해에 이종성(李宗城) 등에게 내리신 수서(手書)에 ‘대우(大禹)도 오히려 촌음(寸陰)을 아꼈다.’고 하셨고, 하물며 삼대(三代) 시절의 교화(敎化)를 본받으려고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하려고 하는 뜻이 있으시면서도 할 수 있는 재질이 없으시다면, 신이 비록 간절한 말을 하더라도 쓸데없는 공언(空言)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전하께서 할 수 있는 재질이 있으시더라도 하려고 하는 뜻이 없으시다면, 신이 비록 정성껏 보필하더라도 소용이 없는 어리석은 충성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전하께서는 할 수 있는 재질과 하려고 하시는 뜻이 있으시면서도 크게 힘쓰고 크게 분발하지 않고 계십니다. 바라건대, 즉시 자리를 열도록 명을 내리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조한위(趙漢緯)를 풍채(風采)가 있다고 허여하였음은 또한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하교하셨는데, 조한위는 소원(疏遠)한 신하일 뿐입니다. 그의 선혜청 일에 관한 논의는 스스로 위로는 임금을 규계(規戒)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경계하는 체례를 갖춘 것이므로, 조현명이 그 허물을 받아들이고도 부족하게 여겨 또 따라서 장후(奬詡)한 것인데, 전하께서 문득 미안한 뜻을 보이셨습니다. 인신(人臣)이 임금을 광정(匡正)할 적에는 허물이 싹트는 조짐을 막음이 귀중한 것이고, 성주(聖主)께서 후손(後孫)을 위하여 규식(規式)을 세울 적에는 마땅히 시작을 신중히 하기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당차(堂箚)에 대한 비답에 말을 했다."
하였다.
수찬 유엄(柳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당론(黨論)의 폐단은 한때의 시비(是非)를 다투는 데에서 시작되었는데, 변하여 골수에 사무치는 원수가 되어버려 지난해의 역변(逆變)을 순치(馴致)하게 되었습니다. 당론(黨論)의 폐해를 바로잡으려면 ‘탕평(蕩平)’ 두 글자만한 것이 없습니다마는, 사세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은 범연한 데로 돌아가서 탕평이란 명칭만 있고 탕평의 실속은 없게 되었습니다. 저 한편의 사람들이 명에 응하지 않는 것도 또한 고집하는 바가 없지 않은데, 나오지 않는 것을 책망하여 문득 찬축(竄逐)하기만 한다면, 마침내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가 없고, 갈수록 더욱 괴격(乖激)해지기만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료(臣僚)를 대하지 않는 것은 법강(法講)을 정폐(停廢)한 허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의(大意)는 진실로 옳지만, 아직도 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저번날 장전(帳殿)에서 ‘하나의 비망기(備忘記)면 족하지 한 전당(殿堂) 안에서 개심(開心)하게 되는 것만 못할 것이다.’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8월 11일 계축
한덕후(韓德厚)를 헌납(獻納)으로, 채응만(蔡膺萬)과 유최기(兪最基)를 지평(持平)으로, 김상성(金尙星)과 윤휘정(尹彙貞)을 교리(校理)로, 임정(任珽)을 수찬(修撰)으로 삼았으니, 이조 참의 윤혜교(尹惠敎)가 주의(注擬)한 것이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시국(時局)의 정세는 조정(調停)해 가지 못하고 먼저 정목(政目)만 미화(美化)하고 있으니, 진실로 형식만 차림이 심하다고 할 수 있다. 매양 정사(政事)에 당하면 나도 모르게 개탄스러워지며 진실로 붓을 들어 낙점(落點)할 마음이 없어진다."
하였다.
승정원과 옥당(玉堂)에서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하셔서 세상의 도의를 바로잡아 가는 책무에 대하여 혹시라도 평소 강구(講究)하신 바가 있으면 신료(臣僚)들에게 개시(開示)해 주셔야 옳을 것입니다. 혹시 처분을 경솔하게 할 수가 없고 물정(物情)을 평윤(平允)케 하기 어려움이 있음을 염려하셔서, 반드시 일제히 모여서 자세하게 논의하여 힘써 지당한 데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시면, 한편으로는 신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분명하게 가부(可否)를 내려 주시고, 한편으로는 외방에 있는 대신들을 돈소(敦召)해서 차례로 등대(登對)하게 하여 자세하게 서로 의논하는 것이 또한 불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 요상(僚相)들이 청대(請對)했을 때 마침내 옥계(玉階)의 방촌(方寸)의 땅조차 허락하지 않으시므로, 한나절을 빈청(賓廳)에서 머뭇거리다가 물러갔으니, 전하께서 이들에게 있어서 정성과 예를 다하신 것이었습니까? 아! 붕당(朋黨)을 타파하고 세상의 도의를 만회하는 일이 얼마나 지극히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비록 화평한 마음과 홀가분한 기분으로 성의를 다하여 개도(開導)하더라도 진실로 대중의 말이 똑같아서 대중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가 없을 것인데, 이제 먼저 격뇌(激惱)한 뜻을 보이셔서 거듭 서로 반목하는 단서를 열어 놓았고, 조용히 깊이 계시느라 구대(求對)해도 할 수 없으니, 신은 전하께서 진정(鎭定)시키는 데 힘쓰시는 것이 마침 분요(紛擾)함을 초래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나의 이 거조(擧措)는 본시 이기기 좋아해서가 아니고 마음에 통탄스럽기 때문이니, 경(卿)은 모름지기 깊이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사하고 간악한 사람은 모두 당폐(黨弊)에서 근원된 것이니, 신이 어찌 우러러 성의(聖意)를 헤아려 보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의리의 정미(精微)는 요컨대 갑작스럽게 응대(應對)하여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법인데, 성명께서는 어찌하여 갑자기 그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가 있으십니까? 신이 명색이 대신으로서 방촌(方寸)의 자리를 빌리고자 하였는데 경홀(輕忽)히 여김도 부족하시어 일체 돌아보지 않으시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백관(百官)들의 위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오늘날의 이 일은 세상의 도의가 무상(無狀)함을 개탄하고 과인(寡人) 자신의 성의가 부족함을 부끄럽게 여겨서이니, 어찌 기꺼이 하는 것이겠느냐? 어제 인대(引對)하지 못하였음은 곧 성심과 신의로 경(卿)을 대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였다.
부교리 이종백(李宗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외방에 있는 대신들을 일제히 모이게 하여 품고 계신 성심(聖心)을 분명히 보여 주시고, 의리가 있는 바를 강확(講確)하여 백대(百代)의 단안(斷案)을 크게 정하게 함으로써 온 세상의 인심을 감복시키려는 것이 실로 성상께서 마음에 잊지 못하시는 바인데, 이제까지 천취(遷就)하게 되니, 성심이 답답하실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격뇌(激惱)하심으로 인하여 인접(引接)하는 상례의 절차까지 아울러 폐해 버리신다면, 중외(中外)의 보고 듣는 이들이 놀랄 것입니다. 향안(香案)이 지척(咫尺)인 자리에서 마침내 한나절 인접(引接)하지 않으셨으니, 전하께서 경연(經筵)의 신하를 박하게 대접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한 번 환히 개유(開諭)하기 전에는 이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
하였다.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광덕(李匡德)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진실로 한 점의 음예(陰翳)나 한 조각의 구름이 마침내 훤히 하늘이 갠 날의 광채를 오래 가릴 수 없으니, 전환(轉環)하시는 미덕이 마땅히 하루아침을 넘기지 못할 것을 알고서 기다렸었는데, 과연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시는 하교가 있어서 덕음(德音)이 한 번 반포되자, 사방이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아! 애호(愛護)하면 부유해지게 하고 싶음은 대성인(大聖人)도 면하지 못하는 바이니, 지존(至尊)께서 아리땁게 애호하시는 옹주(翁主)에게 한 지역(地域)의 진황지(陳荒地)를 떼어 주셨음은 성상께 있어서는 본시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것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심정이 그렇지 않음이 없는데, 하나의 작은 일 때문에 장황(張皇)하게 떠들어댔으니, 일은 공손하지 못하고 말은 겸손하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적수(敵手) 이하의 사람에게 받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모두 거슬렸을 것인데, 감히 이로써 존비(尊卑)가 동떨어진 사이에서 요행히 죄가 없기를 바랐으니, 또한 천하에 망령된 사람입니다. 이번에 반년 동안이나 지키고 있던 차관(差官)들을 하루아침에 철거해 버리고 전후에 이미 시행하셨던 성지(聖旨)를 모두 도로 정지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천하에 지극히 간절한 것은 자애(慈愛)하는 사정(私情)인데도 돌볼 것이 없게 하셨으니, 더욱이 허물없이 대하는 편폐(便嬖)의 해로움을 물리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을 것이고, 천하에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인데 스스로 꺾을 수 있으셨으니, 더욱이 재물이나 여색과 안일하려는 욕심은 이겨내지 못할 것을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이며, 천하에 놀라운 것은 패류(悖謬)한 말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도 용납하셨으니, 더욱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사랑하는 약석(藥石)과 같은 말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근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더욱 전하의 용기는 맹분(孟賁)577) ·하육(夏育)578) 보다 더하고, 덕은 성탕(成湯)에 비길 수 있으니, 마음은 성현의 마음이고 정치는 요순(堯舜)의 정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의 일은 경(卿)의 소위가 진실로 미안(未安)하였었으나, 한 번 경연(經筵)에서 하교한 뒤로 조금도 마음에 꺼림칙한 것이 없었다. 상소 내용에 진달한 말이 이처럼 권권(眷眷)하므로 깊이 그 성의를 아름답게 여겼으니, 상하가 서로 힘써야 할 일이 어찌 없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지금부터 이후로 중앙(中央)과 외방(外方)에 관원을 둔 뜻을 생각하여 마땅히 더 스스로 척념(惕念)해서 조정이 존중해지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2일 갑인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오늘의 거조(擧措)는 어찌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피차(彼此)가 쟁집(爭執)하는 바를 재량하여 처리하시려다가 특히 중론(衆論)이 더러 가지런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혹 복종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러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의 근심은 전하께서 의리가 혹은 밝지 못한 데가 있고 권탁(權度)이 혹 정밀하지 못한 데가 있어 천재(千載)의 안(案)을 결단하지 못하실까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바라건대, 신료(臣僚)들의 접견(接見)을 윤허하소서."
하고, 옥당(玉堂)의 김상성(金尙星)과 이종백(李宗白) 등이 또한 차자를 올려 청대(請對)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8월 13일 을묘
승정원과 옥당에서 청대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승정원과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거듭 청대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옥당의 차자에 대략 이르기를,
"세 차례 차자를 올리고 두 차례나 청대하였으나, 끝내 불러서 접견하지 않으시니, 우리 전하께서 신들을 가볍게 여기기를 한결같이 이에 이를 줄은 뜻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전하께서 이번의 거조(擧措)를 과연 적중한 것이라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비록 성의를 다하고 신의를 힘쓴다고 여기시지만, 실제로는 권모 술수(權謀術數)를 마구 쓰고 계시며, 전하께서 비록 마음을 화평하게 하여 사리를 궁구(窮究)한다고 여기시지만 실제로는 오로지 이기기를 힘쓰고 계십니다. 번신(藩臣)을 꺾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편사(偏私)의 병폐임을 아시면서도 그른 일을 하여 허물이 됨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대각(臺閣)을 견제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는 하교를 내리기까지 하여 광정(匡正)하는 길을 끊어지게 하고 계십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료(臣僚)들을 면대(面對)할 뜻이 없다.’고 하신 하교를 승선(承宣)들이 광구(匡救)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추고(推考)하여 경책(警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간신(諫臣)과 시골에 내려간 유신(儒臣)은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당습(黨習)이 날로 심해져서 고칠 줄을 알지 못하고, 군부(君父)의 하교를 가볍게 여기고 편당하는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있으니, 이와 같은데도 나라가 나라답게 되겠는가? 무상(無狀)한 말이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자리에 미치기까지 했으니, 통탄스러운 마음이 어찌 한이 있겠느냐? 이번의 이 거조는 부득이하여 하는 일인데, 그만 ‘권모 술수(權謀術數)’라느니 ‘각승(角勝)’ 이라느니 하여 위를 의심하고 있다. 지난날 군부(君父)의 마음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붕비(朋比)만 일삼는 것도 오로지 이에서 연유한 것인데, 지난일을 첨입하기까지 한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하고, 다만 승지를 추고하는 것과 대간과 유신을 파직하기를 청한 것만 윤허하였다.
8월 14일 병진
밤 5경(五更)에 금성(金星)이 헌원성(軒轅星) 제14성을 범하였다.
승정원에서 진계(陳啓)하여 구대(求對)하고 정언 조상명(趙尙命)이 청대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8월 15일 정사
채팽윤(蔡彭胤)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권호(權頀)를 사간으로, 홍상인(洪尙寅)을 헌납(獻納)으로, 이경석(李慶錫)과 이제항(李齊恒)을 장령(掌令)으로, 이희(李憙)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장계(狀啓)하기를,
"본도(本道)는 수재가 매우 참혹하여 떠내려가거나 익사한 사람이 1천 명에 가깝습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놀라서 측은하게 여겨 북도(北道)의 물선(物膳)은 내년 가을까지 절반으로 감하여 봉진(封進)하되, 올해는 봉진하지 말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이어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고, 본도의 안집 어사(安集御史)에게 단(壇)을 만들어 치제(致祭)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표류하여 죽은 사람의 건져낸 시신(屍身)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매장하도록 명하고, 그의 처자와 가속(家屬)은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돌보아 구제하도록 하였다.
수찬 유엄(柳儼)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한 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면, 또한 마땅히 광명(光明)하고 탄솔(坦率)하게 처치하셔야 할 것인데, 조회(朝會)를 폐하고 법강(法講)을 정지한 채 신린(臣隣)들을 굳게 거절하고 계시니, 자못 쾌활한 기미가 없고 도리어 구속(拘束)하는 뜻만 있습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김상성(金尙星)·이종백(李宗白)의 차자에 대한 엄격하신 비답은 천지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덕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상례의 비답을 내렸다.
8월 16일 무오
밤에 달이 규성(奎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경릉(敬陵)579) 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나서 잠깐 동안 한데에 앉아 있을 때 승정원과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가, 여러 차례 청하자 비로소 윤허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고양(高陽)의 부로(父老)들에게는 오히려 ‘와서 기다리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신들은 거절하고 만나 주지 않으시니, 이는 일찍이 고양의 부로들만 못하게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양의 부로들은 당론(黨論)을 하지 않아서이다. 유신(儒臣)의 상소에 권모 술수(權謀術數)라느니 각승(角勝)이라느니 하는 말은 비록 진언(盡言)하는 의리에서 나왔다 하지만, 나의 뜻을 알지 못함이 심하여 내가 매우 개연(慨然)하게 여긴다. 장전(帳殿)에서 하교(下敎)한 것은 일부러 굳게 고집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 차례 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한 것이니, 만일 바삐 서둘러 하면, 그전의 이른바 환국(換局) 때의 거조(擧措)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환궁(還宮)할 때에 연서역(延曙驛)의 비각(碑閣)에 임하여 우의정 이집(李㙫)을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반정(反正) 뒤에 충신과 역적의 구분이 어찌 특히 오늘날과 같았었겠는가마는, 반드시 맨 먼저 당론을 제거하려고 했었다. 만일 이번에도 마침내 탕평(蕩平)을 이루지 못한다면 다른 날에 어떻게 성조(聖祖)를 뵐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눈물을 흘렸다. 이집이 아뢰기를,
"처분을 감등(減等)하는 것은 두 대신을 기다려서 할 일이요, 평소와 같이 시조(視朝)하시는 것이 곧 소망입니다."
하고, 수찬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만일 전하께서 지공 무사(至公無私)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면 서울에 있는 대신과 더불어 한 마디 말이면 결단하실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외방에 있는 두 대신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두 대신의 입을 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피차(彼此)의 사람들이 중시하여 의지하는 바가 오직 두 대신이어서인데, 두 사람이 일일이 서로 맞지 못한 것도 모두 고충(苦衷)이 있어서이고 사당(私黨)을 위해서가 아니다. 비록 두 대신이 온다 하더라도 그들의 말이 반드시 조금 어긋나는 점이 있을 것을 내가 또한 알고 있으며, 이미 그들이 고충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함께 같이 의논한 다음에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8월 17일 기미
전라도 관찰사 이광덕(李匡德)이 계청(啓請)한 것에 따라 별군직(別軍職) 전(前) 현감(縣監) 이형원(李馨遠)을 중군(中軍)으로 차하(差下)하고,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첫번째 정사(呈辭)하니, 임금이 손수 써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8월 18일 경신
영중추부사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기슬(蟣虱)과 같은 적수(賊竪)가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를 범하는 말을 했으므로, 성상께서 반드시 제신(諸臣)에게 환히 일러서 당습(黨習)을 일소(一掃)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재단하여 처치하기를 진실로 천리(天理)에 맞게 하고 조지(操持)하기를 깊이 요도(要道)에 맞게 하되, 영구히 엄중하게 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고질이 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탕평(蕩平)하는 실효를 거둘 수 있고, 또한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그러지지 않고 후세에 전해져도 할말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혹시라도 그렇지 아니하여 재정(裁定)이 천리에 적합하지 못하고 조지(操持)가 요도를 잃어 쉽사리 변동하여 자주 고치게 된다면 국가의 일이 대단히 어그러질 것입니다. 신이 지난해에 경연(經筵)에서 아뢴 말은 한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은 것이 아니라, 실로 정밀하게 조제(調劑)와 요량(料量)을 더하여 국가를 위한 만세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 때문에 온 세상의 원망을 입어 겨우 죽음을 면한다 하더라도 소중한 바가 있으므로, 신은 감히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가령 탑전(榻前)의 자리에 참여하더라도 신이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마음을 속여 형편에 따라 변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큰 기강(紀綱)이 세워지지 못하고 큰 권징(勸懲)이 시행되지 않는다면, 나라 꼴이 될 수 있겠습니까? 군상(君上)이 중정(中正)의 도(道)를 세워 온 나라를 통솔해 가면 신민(臣民)들이 따르는 것은 천리인 것입니다. 군상이 만세토록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할 의리를 세워 놓았는데, 신하들이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여 다시 낮추어 굽혀서 고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국가의 정령(政令)이 다시는 신하들에게 시행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두어 가지 조항은 진실로 대체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성상께서 깊이 유의하신다면 진실로 국가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말한 소회(所懷)는 내가 이미 알고 있으며, 경의 마음을 내가 또한 알고 있다. 이 상소를 이미 올리고 번연(翻然)히 일어나 나오기는 반드시 어려울 것이니, 한결같이 돈박(敦迫)함은 경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다. 부득불 좌우상(左右相)과 두서너 경재(卿宰)를 불러들여 평소에 품고 있는 뜻을 털어놓겠다."
하였다.
8월 18일 경신
고(故) 좌의정 이건명(李健命)과 고 우의정 조태채(趙泰采)의 관작(官爵)을 복구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좌의정 이태좌(李台佐)·우의정 이집(李㙫)·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호조 판서 서명균(徐命均)·예조 판서 김시환(金始煥)·형조 판서 윤순(尹淳)·예조 참판 이정제(李廷濟)·평안 감사(平安監司) 송인명(宋寅明)·도승지 조현명(趙顯命)·수찬 유엄(柳儼)을 인견(引見)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지금 한편의 사람들이 나오기 어려운 단서는 네 사람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한 데에 있으니, 모두 벼슬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절의(節義)를 삼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대신이 모두 모인 다음에 의리를 강명(講明)하여 하교(下敎)하시고, 영상(領相)과 영중추부사는 비록 탄핵을 받은 바가 있으나, 바로 처분하신 일로 효유(曉諭)하여 돈소(敦召)하신다면, 어찌 감히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을 내가 어찌 하기 즐거워하는 것이겠는가? 이석효(李錫孝)의 일은 지난해의 괘서(掛書)에 비하면 백배(百倍)나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 말은 환득 환실(患得患失)580) 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조정 사람들이 편당 속에서 생장하여 화근(禍根)이 있는 데를 알지 못하고 오직 역적 심유현(沈維賢) 등으로 근본(根本)을 삼고 있으니, 이는 말단만 다스리고 근본을 빠뜨리는 데 가깝지 않겠느냐? 고(故) 참판 정석삼(鄭錫三)이 비록 경솔한 병폐가 있었지만, 만일 오늘날 생존해 있다면 군신(君臣)의 사이에 마땅히 기휘(忌諱)하지 않고 죄다 말했을 것이다."
하고, 한참 동안 얼굴을 가리고 울다가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 어진 벗을 위하여 운 사람이 있었다. 군신의 사이에도 또한 우의(友誼)가 있는 것이니, 어진 신하 생각이 나는데 어찌 감회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내가 두 동조(東朝)를 모시면서 효성이 부족하여 성모(聖母)로 하여금 마음이 편치 못하시게 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지난번의 방만규(方萬規)의 말을 동조께서 들으신다면 마음이 어떠하시겠는가? 지난해의 흉역(凶逆)들의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미친 것을 일체 동조께 고하지 않았다. 내가 갑진년581) 이후로 잘해 왔다면 반드시 지난해의 변이 없었을 것이고, 지난해 이후로 잘해 왔다면 반드시 이석효(李錫孝)의 말이 없었을 것이니, 첫 번째도 나의 과실이고 두 번째도 나의 과실이다. 오늘 경들이 나를 보려고 하는 것은 국사(國事)를 다스리고자 해서이다. 조정이 다같이 화협(和協)한 다음에야 믿을 수 있는 것이니, 믿을 것이 없고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는 고집이 있는 사람인데, 어제의 상소를 보건대 과연 고치지 않고 변동이 없었다.
오늘은 내가 마땅히 먼저 경들의 병통을 말하겠다. 좌상(佐相)은 비록 당론(黨論)에 대하여 분수(分數)가 덜하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고 영중추부사는 고집스러운 데가 있으나, 경들이 마침내 규제(規制)하지 못했으므로, 내가 부족하게 여긴다. 우상(右相)은 정승을 제배(除拜)할 때에 ‘충후(忠厚)’ 두 글자를 가지고 논했는데, 정홍상(鄭弘祥)이 비록 배척하였으나, 우상의 의견은 영중추부사와는 다른 데가 있다. 이조 판서는 가슴속에 오직 탕평(蕩平)을 생각하고 있다. 생각하건대, 승지로 있었을 때 일을 말한 것 때문에 경주(慶州)에 출보(黜補)했다가, 정미년582) 가을에 비답(批答)을 내렸던 것을 경들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원량(元良)의 정혼(定婚) 때에 다른 점을 취한 것이 아니라 당론(黨論)이 심하지 않은 것을 취했었는데, 정혼한 뒤 마음에 매우 기쁘게 여겼던 나의 뜻을 이조 판서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정목(政目)이 모두 좋으나, 반드시 나오게 하는 방법을 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문을 닫으면서 사람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일이다. 평안 감사는 내가 자리를 사양하였을 때에 이필(李泌)의 일583) 을 들어 진달했었으므로, 심사(心事)를 알 수 있었다. 그 뒤에 문사 낭청(問事郞廳)을 삼았으므로, 내가 ‘이 문사 낭청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나왔으니, 말과 일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매우 개탄하였다. 그 나머지 세 중신(重臣)은 평소 논란한 바가 없어서 당론에 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경들이 마음을 열어 놓으면 나 또한 마음을 열어 놓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겠다.
하였다. 이집이 아뢰기를,
"탕평(蕩平)을 조정(調停)하는 도리는 진실로 난처한 바가 있습니다. 네 신하 가운데 두 갈래로 나누어 혹은 신설(伸雪)해 주고 혹은 그대로 둔다면 그때의 사람들이 탕평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고, 만일 전부를 소설(昭雪)한다면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더러 편안하지 못하여 물러가기를 구할 것이니, 이와 같다면 어떻게 화협(和協)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가지 건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나 역시 말하고 싶은 것이 또한 두 가지 건에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정미년584) 에 순전히 진퇴(進退)의 예투(例套)를 써서 군하(群下)들이 하고 싶어하는 바를 모든 말과 일마다 모두 들어주어 초기에 바로잡지 못했다가, 이제 뒤에 와서 후회하게 되었으니, 수고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갑술년585) 이후 소론(少論)이 노론(老論)을 의심하였고, 신축년586) 의 일은 상례(常例)와 달라서 이면(裏面)의 사항을 추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론이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고 자처하면서 떼 지어 일어나 공격 했었는데, 영중추부사는 신축년과 임인년 사이에 혈전(血戰)한 사람으로서 분개(憤慨)하고 질시(嫉視)하는 마음이 방관(傍觀)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추탈(追奪)이 조태채(趙泰采)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용이하게 들어주신 것이 다른 날에 군신(君臣)의 사이가 서로 보존하지 못하는 조짐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묻지 않고 기분(氣分)에 따라 승낙하면, 비록 계합(契合)은 융성(隆盛)한 것 같겠지만, 의아하는 마음이 한 번 발동하면 일마다 의심하게 되는 법이니, 시종(始終)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이는 진실로 나의 과실이다. 영중추부사가 지성으로 진달했었기 때문에 들어주었다. 그 때에 영중추부사가, ‘두서너 재신(宰臣)들이 모두 이의(異議)가 없었다.’고 했었는데, 이제 경의 말을 들어 보니, 비로소 그렇지 않았음을 알겠다. 입시(入侍)했던 사람 중에 혹시 그의 의논에 찬동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자, 이집과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들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한편의 사람들이 신축년과 임인년 일의 참혹함을 한스럽게 여겼으므로, 일일이 보복하려고 하였고, 이(李) 영중추부사도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으니, 내가 마음에 매우 개탄스럽게 여긴다. 지난해 이후로 노론과 소론 모두 역적이 나왔으므로, 매양 근원(根源)을 시원하게 말하고자 하였는데, 오늘 어찌 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리(代理)·건저(建儲)587) 의 일은 옛날에도 있었는데, 어찌 이를 당론(黨論)에 넣을 수 있겠는가? 내가 늦게 출생해서 당론의 근원을 알지는 못하지만, 소론은 노론이 경종(景宗)께 딴 마음이 있었다고 여기고, 노론은 소론을 경종을 위함이 뒷날의 처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조태구(趙泰耉)의 ‘피차(彼此)가 선정(先正)이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균평한 듯하므로, 내가 가만히 마음속으로 감복하였고, 그 뒤에 약원(藥院)에 들어오니 성고(聖考)께서 보시고 또한 마음에 기쁘게 여기시었었다. 그 뒤에 건저(建儲)를 청하는 상소가 마침 노론에게서 나오자, 고(故) 상신(相臣) 유봉휘(柳鳳輝)의 상소가 괴이하였으나, 또한 어찌 반역을 한 것이겠는가?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록 건저를 청하였으나, 나의 도리에 있어서 만일 건저한 공로를 책훈(策勳)했다면 후세에서 나를 어떠한 임금이라고 하겠는가? 이에 시종 그 한계를 엄격하게 하여 당습(黨習)을 조정(調停)하려면 탕평(蕩平) 이외에 다른 계책이 없음을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경종(景宗)의 비망기(備忘記)에 ‘양가(兩可)’라고 하신 글자는 소론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한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연차(聯箚)한 절목(節目)에 대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는 역심(逆心)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지만, 저들이 어찌 반드시 반역하려 한 것이겠는가? 반역이라고 하는 경우 어찌 애핍(捱逼)함이 되지 않겠는가? 경종께 충성하는 자는 나에게도 충성함이 되고, 나에게 충성하는 자는 경종께도 충성함이 되는 것이다. 누가 대리(代理)·건저(建儲)한 것을 반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소론이 오히려 기휘(忌諱)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한 것이다.
〈세제(世弟)로〉 책봉(冊封)된 뒤에 목호룡(睦虎龍)이 변서(變書)를 올렸었다. 김일경(金一鏡)이 나를 꺼려하여 목호룡을 부추겨 내게 한 것인데, 그 변서 내용에, ‘동궁(東宮)을 위해서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나를 욕한 것이었으나, 조정에서는 놀라지도 통분(痛憤)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내가 자리를 사양했을 때에 이어 동조(東朝)와 경종에게 사면(辭免)하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이 마음을 청결(淸潔)하게 가져 단지 「연잉군(延礽君)」이란 세 글자만으로 선왕(先王)께 돌아가 뵙겠습니다.’하였고, 그 뒤로는 조보(朝報)를 보지 않았었다. 그 때에 백망(白望)의 족속(族屬)이라는 자가 나를 제거하려는 뜻에서 나왔으나, 이를 돌아보지 않고 묵세(墨世)의 족속이라 하며 공공연히 타살(打殺)하였으니, 이를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영중추부사와 조 판중추부사(趙判中樞府事)가, ‘목호룡의 일은 몹시 통탄스러운 것이니 마땅히 추문(推問)해야 한다.’는 말을 진선문(進善門)에서 김일경(金一鏡)을 친국(親鞫)할 때 비로소 진달했었는데, 목호룡의 정상을 처음에 어찌 알지 못했겠는가? 당초에 목호룡은 마땅히 즉각 타살해야 했었으니, 그가 어찌 동성군(東城君)에 봉(封)해질 수 있는 자이겠는가? 당초에 이천기(李天紀)와 함께 난만(爛漫)하게 악한 짓을 하다가 마침내 김일경을 위하여 동궁(東宮)을 제거하려고 한 자인데, 어찌 살려 둘 수 있겠는가? 저 노론들은 또한 그르지 않았으나, 내가 인자하고 유약하기 때문에 노론들이 그 뜻을 펴지 못하여 단지 윤취상(尹就商)과 이사상(李師尙)을 죽였을 뿐이다. 이외에 죽은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정미년의 처분 뒤에 경들이 마땅히 먼저 풀었어야 하는데, 들어온 뒤에도 오히려 맺힌 것을 집착(執着)하여 풀지 않았었다. 연차(聯箚)는 반역한 것이 아니고, 또 어버이를 위하여 휘(諱)하는 것은 옛적부터의 도리이다. 연차는 결코 반역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나, 만일 충성이라고 한다면 또한 과당한 것이니, 시호(諡號)를 내리고 서원(書院)을 세우는 것은 더욱 과당한 일이다. 이제 영중추부사의 상소는 내가 다정(多情)하기 때문에 준엄하게 배척하지 못했다. 소하(疏下)에 대한 계사(啓辭)는 정지해서는 안되고, 소하에 있는 사람은 또한 마땅히 육지로 내보내기를 청하지 못하는 법인데, 해은군(海恩君)588) 이 육지로 내보내기를 청하자 영중추부사가 또한 엄격하게 지키지 못했었다. 역적 김일경이 연차와 역옥(逆獄)을 뒤섞어 하나로 만들고 유락(唯諾)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게 하려고 했었다. 그 유락했던 사람들은 지금 이미 임용(任用)했는데, 어찌 유독 연차를 올렸던 사람들을 죄줄 수 있겠는가? 이이명(李頤命)이 약원(藥院)에서 ‘우국 망가(憂國忘家)’라는 네 글자를 쓴 것을 나는 스스로 기약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여겼었으니, 반역으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또한 충성이라 할 수는 없으므로, 시호를 주고 서원을 세움은 지나친 일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역변(逆變)에 들어 있으므로 관작을 추탈(追奪)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은 옳지 못한 데가 더욱 많고, 그의 손자가 역옥(逆獄)에 들어 있으니 관작을 추탈하면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의리가 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전대로 관작을 추탈하고 연차는 놓아두고서 저쪽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이건명(李健命)에 이르러서는 나를 위해 명(命)을 청하여 성사(成事)시키고 돌아온 사람인데, 김일경이 배소(配所)에 가서 베었으니, 또한 무엄(無嚴)한 일이 아니겠는가? 을사년589) 의 처분 때 영상(領相)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단지 이건명의 일만 호소했었으니, 공정(公正)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영중추부사에 대해서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었고 이명언(李明彦)과 이진유(李眞儒)에 대하여 시종(始終) 곡진하게 두둔했으니, 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번에 역적 이석효(李錫孝)의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까지 미쳤었다. 동조(東朝)께서 천지처럼 치우침이 없으신 훌륭한 덕으로 날마다 당론이 조금이라도 제거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김후연(金後衍) 형제는 또한 근신(謹愼)하고 소심(小心)한 자인데, 이번에 이런 말을 했으니, 이는 모두 나의 허물이다."
하였다.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하게 하기를 청하는 것을 어찌 반역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정미년590) 에 하문하셨을 때 신이, ‘조태채(趙泰采)는 단지 연차에만 참여했으니, 구별하여 관작(官爵)을 복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주대(奏對)했었습니다. 의리와 사세는 더러 서로 추이(推移)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니, 진실로 국가의 일에 유익함이 있고 그다지 의리에 어긋나지 않는 듯하면, 어찌 감히 자기 소견만 굳게 지키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영중추부사는 ‘연차에 참여한 자를 반드시 죄준 다음에야 군신(君臣)의 의리를 밝힐 수 있다.’고 했으나, 대리(代理)의 한 절목은 사체가 자별(自別)한 것이다. 만일 후세에 건저(建儲)·대리(代理)를 청하는 자가 있을 경우 또한 장차 모두 반역으로 돌린다면 어찌 국가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이제 연차를 올린 것을 죄주었다가 후세에서 이를 들어 구실로 삼는다면, 자제(子弟)된 사람들이 어찌 민망하고 절박하지 않겠는가?"
하자, 이집이 아뢰기를,
"건저·대리는 진실로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거조이었는데, 어찌 연차를 올린 것을 반역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신도 근일에 매양, ‘연차를 올린 것은 결단코 죄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해 왔습니다. 성교(聖敎)가 진실로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김시환이 아뢰기를,
"경년(頃年)에 국시(國是)를 강정(講定)하였을 때 조태채(趙泰采)가 연좌된 것은 단지 연차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신(臣)이 대사헌으로서 입시(入侍)하여 쟁집(爭執)하지 못한 때문에 대관(臺官)이 상소하여 비난과 배척을 받기에 이르렀으나, 본래 전후로 마음이 다른 적은 없었습니다."
하고, 서명균이 아뢰기를,
"연차는 화복(禍福)에 움직인 것으로서, 분의(分義)를 다한 것이 되지 못하나, 조태채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아비가 권응(權譍)을 구원한 일은 대신의 체통이 있는 일이었다. 경의 아비 때문에 경을 당론(黨論)하는 것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연차를 처음에는 비록 반역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의심했었지만, 이제 와서는 그대로 반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때에 청정(廳政)한 것이 가한 일인지 불가한 일인지는 전하께서 마땅히 스스로 알고 계신 것입니다. 연차는 만일 그 당시가 아니라면 반역이 되겠지만, 그 당시에는 반역이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또 하나의 절목(節目)이 있었으니, 이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일에 관한 중요한 부분이다. 진신(搢紳)들이 상소한 뒤 요망한 박상검의 족조(族祖)가 나에게 와서 하는 말이, ‘동궁(東宮)을 위한 상소를 입계(入啓)하였음을 박상검에게서 들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박상검이 김일경과 부동(符同)하여 합작(合作)한 것이다. 또 요망한 박상검이 또한 그와 주무(綢繆)한 자를 시켜 나에게 공갈하기를, ‘세제(世弟)도 남인(南人)과 소론(少論)을 쓰느냐?’고 했었으니, 그의 마음은 길거리의 사람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경자년591) 에 대신(臺臣)이 신사년592) 에 죄를 입었던 사람들을 석방하는 일로 논쟁할 때 요망한 박상검이 갑자기 말하기를, ‘성상께서 어찌하여 빨리 정지하고 번독(煩瀆)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므로, 내가 그때에 곁에 있었으나, 눈을 감고 듣지 못한 듯이 했었다."
하였다. 윤순이 아뢰기를,
"지금 입시(入侍)한 3,4인은 모두 의논이 부드러운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이건명(李健命)을 처참(處斬)한 일에 대하여 여러 차례 괴이하고 놀라움을 말하곤 했습니다. 그 뒤에 교문(敎文)이 나왔을 때 신 형제가 이정제(李廷濟)와 함께 마음속으로 늘 근심하여, ‘만일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로써 영중추부사에게 말하기를, ‘그 중에 준열(峻烈)한 논의를 한 사람들을 효유(曉諭)하여 가려 뽑은 다음에야 그 사람을 죄줄 수 있다.’고 했더니, 이광좌(李光佐)가 대답하기를, ‘내가 먼저 실패하여 가버리면 누가 김일경을 억제할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신의 형이 정수기(鄭壽期)와 함께 강연(講筵)에서 극력 논하려고 했었는데, 김일경이 기미를 알고서 박징빈(朴徵賓)을 사주(使嗾)하여 신을 참혹하게 논핵(論劾)하므로, 신의 형이 이 때문에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사간 김동필(金東弼)이 상소하여 신을 구원하고 이어 김일경의 교문(敎文)에 관한 일을 언급하였습니다. 역적 김일경과 원수가 된 실상은 이와 같습니다. 사신(四臣)의 일에 이르러서는 경종(景宗)께서 분의를 다하지 못한 것을 꾸짖어 죄를 줌은 가하지만, 모두 죽인 것은 지나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의 죄를 논한다면 관작을 삭탈(削奪)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하자, 윤순이 아뢰기를,
"그 중에 두 사람은 진실로 차이가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추탈(追奪) 이하의 벌이 없으므로, 율(律)을 똑같이 적용하였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사람이 만일 지금 비로소 죽었다면 추탈하는 것이 가하겠지만, 전에 이미 참형(慘刑)을 입었으니, 지금 다시 추탈하는 것은 어찌 분수에 지나치지 않겠는가?"
하므로, 윤순이 아뢰기를,
"신은 추탈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다고 여깁니다. 만일 지금 절반을 나누어 감등(減等)하셔서 서로 화협(和協)할 수 있게 된다면 진실로 할 만한 일이지만, 이는 우상(右相)의 말처럼 난처(難處)한 일이 많으므로, 일에는 이로울 것이 없고 한갓 형정(刑政)만 전도(顚倒)될 듯합니다. 을사년부터 지금까지 5년 동안 처분을 세 차례나 고쳤는데, 이번의 처분도 또한 영구히 금석(金石)과 같은 법이 될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국시(國是)는 마침내 여러 번 고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을사년에는 앞서의 참혹했던 일을 바로잡으려다가 너무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였고, 정미년의 처분은 내가 진실로 잘못했었다. 그러나 오늘 하교한 다음에 어찌 이런 염려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송인명이 아뢰기를,
"노론은 김일경과 박필몽(朴弼夢)의 일을 보고 소론을 모두 의심하였고, 소론은 이천기(李天紀)와 김용택(金龍澤)의 무리로 인하여 노론을 모두 의심하였습니다. 노론은 단지 이면(裏面)의 일만 보고서 소론을 반역으로 의심했으므로 거조(擧措)해 갈 적에 전도(顚倒)되고 황란(慌亂)스러움을 헤아리지 않았고, 소론은 이미 노론을 반역으로 의심하고 또한 이면의 일을 알지 못했으므로 더욱 다급하게 자신들의 말을 주장하여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것이 많았습니다. 정미년에 신이 네 사람이 분의(分義)를 다하지 못한 것을 들어 시호와 서원의 혁파를 청했을 적에 신이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에 대해서는 세 단계로 말을 했었지만, 연차는 감히 논하지 않았었습니다. 이천기와 김용택의 무리가 반역을 했고, 김창집과 이이명은 아들과 손자가 역적의 초사에 나왔으니,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에 이르러서는 추죄(追罪)할 수 없으므로, 늘 등급을 나누자는 의논을 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차는 역과(逆科)에 둘 수가 없으니, 연차는 버려 두고 별도의 죄로써 이이명과 김창집에게 죄준다면 사체에 있어 어찌 딴 일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영상(領相)은 ‘네 사람이 연차를 올린 것은 결코 두 가지로 구분할 수는 없으니, 일체로 모두를 신설(伸雪)한 다음 만일 다른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혹 대관(臺官)이 계청(啓請)하는 것이 가할 듯하다.’고 했습니다."
하고, 이정제는 아뢰기를,
"신은 당초부터 생각에 이이명과 김창집은 경종(景宗)의 순신(純臣)이 아니므로, 그런 마음이 양지(良知)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당론(黨論)에서 나온 것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고, 연차에 이르러서는 분의를 다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고려하는 데가 있기 때문에 항시 이로써 죄를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앞서 도헌(都憲)에 있을 때부터 그 당시의 사람들의 소장(疏章)을 보면 경종에게 고기(顧忌)하는 바가 없으므로 마음속에서 매우 통탄스럽게 여기며 마침내 이이명과 김창집의 일을 들어 상소하여 논했었습니다. 만일 이번에 다른 죄로 이이명과 김창집을 죄주고 연차에 대해서는 버려두고 논하지 않는다면, 세도(世道)를 바로잡아 가는 데에 이로움이 있을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에 대리(代理)하는 것을 정무(政務)를 놓는 것으로 여겼었으니, 어찌 괴이하고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자,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성교(聖敎)는 진실로 당연하니, 그때에도 이러한 말이 있었습니다. 대저 대리하여 청정(廳政)하기를 청하는 것을 신은 본시 반역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다만 그 당시의 거조(擧措)가 안정(安靜)하거나 전일(專一)하지 않았으므로, 신 또한 의심이 없을 수 없다가 지난해에 변란(變亂)이 일어나기에 이르러 신이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어느 시대엔들 난신(亂臣)이나 역신(逆臣)이 없었겠습니까마는, 한 조항의 그럴 듯한 의리를 만들어 내어 임금을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짓을 하다가 마침내 칭병(稱兵)까지 한 것은 박필몽(朴弼夢)과 빅필현(朴弼顯)의 무리와 같은 자가 일찍이 없었는데, 이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에서 근본한 것입니다. 역적 김일경과 대두(對頭)가 된 사람은 이미 용서할 만한 도리가 있는 것이며, 또한 당초에 내부(內部)와 외부(外部)에서 결탁하여 성상의 몸에 위해(危害)를 가하려고 도모하였으니, 대리(代理)를 청한 것은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므로, 안정되지 못하고 전일하지 못했던 것은 또한 용서할 만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김일경과 박필몽의 무리가 곁에서 호시탐탐(虎視眈眈)하고 있었으니, 크게 담력과 역량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찌 동요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양가(兩可)’ 두 글자로 하교(下敎)하신 것을 받들어 보건대, 더욱 명확하게 알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 박상검(朴尙儉)과 김일경의 무리가 경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인(南人)들로서 뜻을 잃고 국가를 원망하는 자들을 끌어들여 함께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동궁(東宮)에 있었을 때에 당했던 바는 또한 간책(簡策)에도 없던 것이었으니, 만일 경종(景宗)의 지극히 인애(仁愛)하신 성덕(聖德)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오늘날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경들이 김일경에게 속은 것이다. 노론(老論) 가운데 김일경과 박필몽이 요망한 박상검과 결탁하는 기색을 안 것은 반드시 장세상(張世相)으로 인하여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겁을 먹고 대리를 청한 것이니, 반역한 것은 아니다. 이천기와 김용택의 무리가 장세상과 결탁하여 수족(手足)이 되어 김일경·박상검과 대두(對頭)가 되었으므로, 알게 된 것일 뿐이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박상검의 옥사(獄事) 때에 신(臣) 형제가 송인명과 상대하여 시사(時事)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는데, 송인명의 말이 ‘사위(辭位)하는 일 한가지는 영웅의 수단(手段)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 좌상(左相)도 그 옥사에 참여하였으니, 김일경이 어찌 혼자서 제멋대로 죽일 수 있었겠는가? 그때 경종께 고하여 비망기(備忘記)를 쓰게 한 사람은 곧 김몽상(金夢祥)이고, 전한 사람은 박찬문(朴纘文)이었다. 그래서 박상검이 질시(嫉視)하여 끌어대었던 것인데, 노론(老論)은 어떤 계제(階梯)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다투어 신문(訊問)하기를 청하였으니, 모두 은미한 속셈을 알지 못한 소치였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흉악한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미쳤는데,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경동(驚動)하여 조제(調劑)하는 도리가 아니다. 대개 연차를 올린 것을 만일 반역한 것으로 논단해 버린다면 핍박이 결국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비록 그르다 하더라도 이미 주사(誅死)하였는데, 이제 와서 관작을 추탈(追奪)하는 것은 또한 너무 심하지 않겠는가? 분의를 다한 충성이라고 하여 서원(書院)을 세우고 시호를 내리는 것도 과당한 일이다.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은 그의 이름 및 아들과 손자가 역적들의 공초(供招)에 자세하게 나왔으므로 거론할 수 없으니, 앞서 추탈(追奪)한 대로 하고,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는 관작을 복구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런 하교를 만일 일찌감치 정미년593) 7월에 말씀하시어 군하(群下)들로 하여금 분명히 알도록 하셨더라면, 반드시 그런 죄를 양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안정(顔情)에 이끌려 기미(幾微)를 살피지 못하셨으므로, 군하들이 죄를 범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니, 이 또한 전하의 과오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신사(知申事)의 말이 옳다. 이는 진실로 나의 과실이다. 아까 호조 판서의 말은 조금 모호(模糊)하여 미진한 데가 있었고, 형조 판서와 예조 참판은 내가 일찍이 당론(黨論)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으나, 예조 참판의 말은 오히려 내 마음에 미진한 바가 있다. 형조 판서는 다시 생각해 보라. 장래에 대한 말 또한 미진하여 마침내 나의 소망에 맞지 않으므로, 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를 다 말한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 다음에 한편의 사람들이 반드시 두 사람의 죄를 모두 벗겨 주려고만 하면, 그때에는 좌상(佐相)과 우상(右相)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한 일을 하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두 사람을 죄주는 것은 곧 나의 뜻이고 대신의 건백(建白)에 따른 것이 아닌데, 좌상·우상이 무슨 미움받을 일이 있겠는가?"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하교(下敎)하실 적에 자주 혐의스러운 말씀을 하시니, 이는 전하께서 학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을사년 건저(建儲)할 때에도 과연 ‘혐의(嫌疑)’ 두 글자 때문에 그 당시의 해백(海伯)이 말을 했었다. 그래서 내가 옳게 여겼는데 조금 있다 다시 그런 말을 했으니, 이후로는 마땅히 더 힘쓰겠다."
하였다.
8월 19일 신유
김흥경(金興慶)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심공(沈珙)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삼(李森)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김재로(金在魯)를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병태(李秉泰)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정소(李廷熽)를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조명익(趙明翼)을 헌납(獻納)으로, 심태현(沈泰賢)과 이종백(李宗白)을 교리(校理)로, 민응수(閔應洙)를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이봉익(李鳳翼)을 승지(承旨)로, 박사정(朴師正)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함경도 어사(咸鏡道御史)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기를,
"호조에서 혼궁(魂宮)의 제수(祭需) 값으로 본도(本道)에 배정한 돈이 2천 9백 냥(兩) 됩니다. 지금 재해를 입은 모든 곳의 의지할 데 없어 유리(遊離)하는 백성들은 직공(職貢)과 상역(常役)도 오히려 마련하여 바칠 수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심지어 탄일(誕日)의 진상(進上) 대가(代價)까지 면제해 주셨는데, 지금 수천 꿰미의 돈을 조석(朝夕) 사이에 죽어가는 가운데 징수하는 것은 결코 왕정(王政)이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해조(海曺)로 하여금 좋을 대로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정언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기를,
"빈대(賓對)·법연(法筵)·상참(常參)에는 모두 양사(兩司)를 패초(牌招)594) 하는 전례가 있습니다. 바로 이번에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을 연속해서 패초하도록 하신 명이 있었으니, 평상시의 일차(日次)보다는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인데, 정원(政院)에서 양사를 패초하기를 청하는 계사(啓辭)가 없었습니다. 신이 집법(執法)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조가(朝家)에서 큰 거조(擧措)가 있는데도 의석(議席)의 말단(末端)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조가에서 대각(臺閣)을 대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원에서도 신을 법종(法從)으로 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례의 비답을 내렸다.
정언 이성효(李性孝)가 상소하여 청대(請對)를 윤허하지 않았음은 잘못임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들의 의견이 비록 가지런하지 않고 물정(物情)이 비록 균평하기는 어려우나, 진실로 지극히 공정한 혈성(血誠)으로 조용히 일을 해가며 조금도 속에 감추어둔 것이 없고, 조금도 허위가 없다면, 또한 족히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가지런하게 할 수 있고 균평하지 못한 것을 균평하게 할 수 있는 법인데, 무엇 때문에 괴롭게 그처럼 팔짱만 끼고 함묵(緘默)하고 계시면서 도리어 ‘이는 성실한 마음으로 하는 일이고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그윽이 생각하건대, 전하의 이런 거조는 한(漢)나라나 당(唐)나라 이래로 강압과 겸제(鉗制)의 술책에서 나온 것임을 면하지 못하게 되어, 마침내 성신(誠信)을 다하여 신료(臣僚)를 대우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는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일은 어제 이미 하교하였는데, 어찌 내가 하기 좋아한 것이겠느냐? 너의 상소 가운데 ‘겸제’ 등의 말은 본의(本意)에 크게 어긋난 것이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20일 임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정홍상(鄭弘祥)은 병이 위중해서 길을 갈 수 없으니, 만일 이로 인하여 치사(致死)한다면 불쌍한 일입니다."
하고, 검토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일전에 내리신 처분은 자못 정홍상이 한 말을 청납(聽納)한 것인데, 그의 말은 써 주면서 그의 몸에는 죄를 줌은 합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홍상이 탕평(蕩平)하는 일을 깨뜨리려고 했으니 그의 마음이 옳지 않았지만, 정홍상의 상소 내용에 좋은 것은 내가 이미 들어주었다. 유신(儒臣)의 놓아 주기를 청한 말은 옳은 말이니, 비록 청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또한 처분하려 하고 있었다. 이양신(李亮臣)은 과당하기는 했지마는, 똑같이 놓아주는 것이 가하다."
하고, 이어 삭출(削黜) 이상의 유배인(流配人)들을 모두 놓아주도록 명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상우도(慶尙右道) 시장(試場)의 녹명(錄名) 가운데 관(官)을 경유(經由)하지 않는 백문(白文)595) 의 도목(都目)이 있고, 또 녹명책(錄名冊)에 책을 끼고 들어간 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친족 및 조가(曹哥)의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유생(儒生)들이 과거(科擧)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거의 6,7백 인이나 되었다고 하니, 한번 사핵(査覈)하여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시험이 끝난 다음에 시관(試官)으로 하여금 잡아다가 추문(推問)하도록 명하였다. 서명균이 진휼청(賑恤廳)의 30년 전 구미(舊米) 7백여 석(石)을 개색(改色)596) 하여 나누어 주되 1석 마다 콩 2석씩을 바꾸어 받아들이게 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서명균이 또 아뢰기를,
"칙사(勅使)의 행차 때 양서(兩西)에서 준례로 증정(贈呈)하는 수량이 칙사에게는 원래부터 가감(加減)이 없었고, 통관(通官)들에게 주는 것은 점차로 증가되었는데 태반이 중간에서 소모(消耗)되다가, 오명항(吳命恒)이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있을 때 감(減)해서 준 다음부터 정식(定式)이 되었습니다. 을사년597) 에는 민진원(閔鎭遠)이 묘당(廟堂)에 있을 때인데, 하극돈(阿克敦)이 거듭 온 까닭에 그전대로 주라는 뜻으로 관문(關文)을 보냈었습니다. 이번의 칙사 행차 때에는 감사 윤유(尹游)가 갑진년598) 의 정식에 견주어 조금 수량을 더하여 주고서 잘 미봉(彌縫)하고, 따라서 정식으로 삼았는데, 칙사 한 사람 앞에 감한 것이 거의 2천여 냥(兩)이나 되었으니, 청컨대, 양서에 분부하여 고친 정식대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유엄이 또 아뢰기를,
"일전에 내리신 처분은 진실로 천고(千古)에 드물게 있는 일이었으므로, 이 뒤로는 조금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을 듯합니다마는, ‘가차(假借)’라는 두 글자는 성상(聖上)의 광명(光明)하신 마음에 허물이 될 것이니, 깊이 경계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에 풍원군(豐原君)599) 이 진달한 말이 명쾌했었다. 나의 병통을 어찌 내 자신이 알지 못하겠는가?"
하자, 서명균이 아뢰기를,
"신하들이 과오가 있으면 큰 것은 벌을 주고 작은 것은 용서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마음속에 두고서 그 과오가 커지게 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마음을 정했다. 이 뒤로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대해서도 되돌아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주금(酒禁)의 편리 여부를 하문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앞서 정석삼(鄭錫三)의 말을 듣건대, 술을 금단하는 것 때문에 민원이 적지 않다고 했었다. 듣건대, 호남 방백(湖南方伯) 이광덕(李匡德)은 엄중하게 금하므로 술을 빚는 일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광덕은 혹독하기 때문에 온 도(道)를 호령할 수 있지만, 나는 혹독하지 못하므로 명령이 시행되지 않아 술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검토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술이 비록 곡식을 허비하지만, 백성들이 살아가는 길이 또한 이를 힘입는 수가 많습니다. 또 오부(五部)에서 수색하여 고발할 때의 폐단이 매우 심하니, 이제부터는 단지 술주정하는 것만 금단하게 하고 수속(收贖)하지 말도록 하며, 술항아리를 수색해서 고발하는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주금을 없애고 술주정하는 것만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2일 갑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산협(山峽) 백성들이 산전(山田)을 개간(開墾)한 곳에 사대부(士大夫)들이 일찍이 입안(立案)한 것이 있음을 빙자하여 세를 받으며, 수령(守令)들은 또 속전(續田)이라고 하여 세를 징수하고 있으므로, 두 가지 세를 내고 있으니 불쌍합니다."
하고, 검토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대개 주인이 없는 공한지(空閑地)를 입안한 것은 진실로 해괴한 일이니, 마땅히 규식(規式)을 정하여 엄하게 금지해야 합니다."
하니, 도신(道臣)들에게 분부하여 엄금하도록 명하였다. 참찬관 김시환(金始煥)이 아뢰기를,
"조정은 장차 당론(黨論) 때문에 망하고, 소민(小民)들은 장차 군역(軍役)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민생들이 가련하지만, 만일 1필(匹)씩으로 군역을 정하면 마침내 반드시 군역을 반 필씩으로 하려고 할 것인데, 반 필로 한 다음에는 또 어떻게 감할 것인가? 호포(戶布)를 거두자는 의논을 내가 일찍이 좋게 여겼었는데, 또한 폐단이 있었다."
하였다.
8월 23일 을축
이현록(李顯祿)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이병태(李秉泰)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일제(李日躋)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지평 이희(李憙)가 상소하기를,
"저번날 큰 처치(處置)를 하신 것은,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마음에 쌓여서 고질이 된 당습(黨習)을 몹시 미워하고 조정의 절반이 물러나 있는 것을 깊이 진념(軫念)하시어, 드디어 더러운 것도 받아들이고 추한 것도 포용하시면서 융통성 있게 조정(調停)하여, 뜻을 잃고 있는 사람들을 위안해 주며 나와서 사진(仕進)하는 길을 열어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무릇 그 붕당(朋黨)이 뿌리 박힌 지 오래 되어 진실로 일조일석 한마디 말로 타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의 제신(諸臣)도 그 가운데에 또한 몸을 조촐히 간직하는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특히 풍성(風聲)과 기습(氣習)에 전염(傳染)됨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오직 신의가 믿어지게 하심으로써 한 시대의 황극(皇極)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이끌고서 황극에 모여 들고 황극에 돌아오게 하는 교화(敎化)에 함영(涵泳)하도록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어찌 그들이 물러서서 거만하게 구는 버릇을 곡진히 용서해 주며 구차하게 조정(調停)하는 의논을 하여 그들의 뜻에 부응(副應)하기를 마치 자모(慈母)가 어린 자식을 기르듯이 하려고 하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제부터 더욱 힘써 큰 덕을 밝히시며 의리의 근원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무릇 동작(動作)이나 운위(云謂)와 대소(大小)의 사무(事務)에 있어서 반드시 신중하게 살피고 정중하게 처리하시어 국가의 사체가 행복해지고 성상의 정사가 빛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의(大意)는 옳은 말이다마는, 이번의 처분은 살핀 지 오래이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남한산성과 마주한 봉우리 가운데 산성 안을 굽어볼 수 있는 봉우리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한봉(汗峯)이라 하고 하나는 봉봉(蜂峯)이라 합니다. 윤지완(尹趾完)이 건의하여 봉봉이 산성 안에 들도록 성을 쌓고, 따라서 한봉에까지 잇대어 쌓으려고 하다가 하지 못했습니다. 기사년600) 에 오시복(吳始復)이 다시 역사를 계속했었지만 잇대어 쌓지는 못했으며, 갑술년601) 이후에는 중지했다가 민진후(閔鎭厚)가 그 성은 쓸데없는 것이라 하여 드디어 쌓은 것을 헐어버렸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한봉은 결코 산성 밖에다 둘 수 없습니다. 한봉에 앉아서 보면 대궐(大闕)을 내려다 보고 산성 안의 허실(虛實)을 도적들이 엿보아 알 수 있으니, 그전의 공역(功役)대로 산성 안에 넣어서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내년의 행행(幸行) 때에 마땅히 상확(商確)하여 하겠다."
하였다.
8월 24일 병인
집의 강필경(姜必慶)이 인피(引避)하고, 아뢰기를
"임금의 비위(非違)를 바르게 간하기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곧 대신(臺臣)의 직책인데, 근일에 성상께서 지나친 거조를 내리신 것을 무릇 몇 차례 겪었습니다. 성상께서 마음에 하고 싶은 일이 있으셨는데, 혹 제신(諸臣)이 어길까 염려하여 대소(大小)의 신료(臣僚)들을 일체 인접(引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어 간쟁(諫爭)하는 길을 앞질러 꺾어 버리셨는데, 마치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의 중주(中主)들이 권모(權謀)와 술수(術數)로 신하들을 제어하듯이 하셨으니, 이는 어찌 성상의 지나친 거조가 아니겠습니까? 정미년602) 겨울에 성상께서 대신과 경재(卿宰) 및 삼사(三司)와 자세하고 세밀하게 상확(商確)하여 단정(斷定)한 국시(國是)는 금석(金石)처럼 견고하여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만하였는데, 일찍이 얼마 되지 않아서 또 갑자기 변개(變改)하시자, 그날 경연(經筵)에 입대(入對)했던 제신(諸臣)이 대부분 모두 정미년의 사람들이었으나,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고 붙좇아 그대로 받들었습니다. 아! 오늘날의 일을 국승(國乘)에 쓰고 야사(野史)에 기록하기를, ‘만세(萬世)토록 굳게 정해 놓은 국시(國是)를 갑자기 한편의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곡종(曲從)하여 변경하였으나, 제신이 명령대로 받들고 분부대로 따르면서 죄가 없는 것만 다행하게 여겼다.’고 한다면, 장차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 할 것이며, 조정에 사람이 있었다고 하겠습니까? 성상의 지나친 거조가 또한 이보다 큰 것이 없는데도 신이 대궐의 섬돌에 머리를 부수어 버리지 못한다면 직책을 저버리는 죄는 공론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파척(罷斥)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 전당(殿堂)에서 가슴에 품고 있는 바를 털어 놓았는데, 처분(處分)이 명백하였으니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곧 경계(境界)를 엄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이러한 하교(下敎)를 듣고서 감히 이의(異義)가 있을 수 있겠는가? ‘붙좇아 그대로 받들었다.’는 등의 말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고, 또한 미안(未安)한 데 관계된다."
하였다.
8월 25일 정묘
주금(酒禁) 때문에 하교(下敎)하기를,
"대저 법령은 시행할 만한 것을 시행한 다음에야 백성이 따라서 시행하는 것이니, 경사 대부(卿士大夫)들부터 시행한 다음에야 소민(小民)들이 따르는 것이다. 술로 인한 폐해를 잘 알고 있은 지 오래이므로, 병오년603) 에 진하(進賀)받던 날 군신(群臣)을 경계한 세 가지 조목 중에서 한 가지 사항으로 작정했었던 것이다. 옛날 하(夏)나라 우(禹)임금도 술의 폐해를 말했었지만, 그래도 술을 제거하지 못했고,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에 이르러서도 어찌 술의 폐해가 큼을 알지 못했겠는가? 하물며 주나라에서 매토(妹土)604) 의 백성들에게 경계했을 때에도 곡직하게 권면하는 경계를 하였으나, 오히려 술을 제거하지 못했으니, 이는 원사(元祀)605) 에 쓰이기 위해서이다. 말세(末世)에 이르러서는 술의 폐해가 더욱 심해졌으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술의 이런 폐해를 제거하려면 마땅히 주나라 무왕(武王)이 크게 경계한 뜻을 분명하게 밝히고 외람되게 술을 빚는 짓과 술주정하는 폐해를 통렬하게 징계해야 할 것인데, 이렇게 하지 않고 사고 파는 것까지 금하고 있다. 지난해에 경연(經筵)에서도 하교했었지만, 국가에는 태상시(太常寺)와 주방(酒房)이 있고, 사대부(士大夫)들 또한 술을 빚어 제사에 쓰고 있다. 어리석은 소민(小民)들은 호구(糊口)도 겨우 이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사온 술로는 제사지내지 않는 경계를 알 수 있겠는가? 국가와 사대부는 그대로 행용(行用)하고 있고, 서민에 이르러서도 비록 손님 대접하도록 허락하고 있지만, 이미 술을 사는 것을 금단하고 있는데, 이는 원사(元祀)에 쓸 술마저 금단하는 것이니, 이는 마침내 시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뜻은 마침내 그렇게 여기지 않았으나, 제신(諸臣)들의 뜻은 반드시, ‘시행할 수 있다.’고 했었기 때문에, 시험삼아 시행해 보려고 했던 것인데, 전번에 형조 판서가 진달하는 말을 들어보건대, 과연 한 가지 폐단이 있었다. ‘지난날에는 술을 빚지 않던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이득을 얻게 되었고, 사대부들의 집과 세력이 있는 가문에서 이런 짓을 하는 폐단이 적지 않다’고 했으니, 이는 술을 빚어 생활하던 서민들이 도리어 피해를 받게 된 것이다. 요전에 비국(備局)에서 회계(回啓)한 내용에, ‘남초(南草)는 한 가지 하찮은 물건으로서 빈객(賓客)을 대접하는 것도 아닌데, 기름진 땅과 비옥(肥沃)한 밭들이 모두 그로 손해를 받고 있으나, 오히려 금령(禁令)이 마침내 시행될 수 없음을 알고서 놓아 두었습니다. 술은 이미 빈객을 대접하도록 허락하면서도 오히려 또한 술을 빚는 것은 금단하고 있는데, 경대부(卿大夫)들은 심하게 빚고 있으니, 이는 《상서(尙書)》에 이른바, 「제신(諸臣)과 백공(百工)의 술에 빠지는 짓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술에 빠지는 것을 금단할 수 없다.」고 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제 형조 판서가 진달한 말에 따라 조용히 하교(下敎)하겠다는 뜻이 있었으므로, 술주정하는 짓을 금단하는 것도 또한 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했었는데, 이는 목이 메어서 음식을 먹지 않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또 면임(面任)으로 하여금 수색(搜索)하여 바치게 하는 것이 비록 이례(吏隷)들을 시키는 것보다 낫다고는 하지만, 면임이 부민(部民)들을 침학(侵虐)하는 일이 없을지 어찌 알겠는가? 무릇 그 일에 대한 권한을 잡으면 농간이 그 가운데 있기 마련이다. 이 뒤로는 면임들이 수색하여 바치게 하는 한 조항은 거행하지 말도록 하고, 만약 빙자(憑藉)하여 여리(閭里)에서 폐단을 끼치는 자가 있으면 법조(法曹)로 하여금 각별히 통렬하게 다스리도록 하되, 그 가운데 더욱 심한 자는 입계(入啓)하여 무거운 죄로 다스리도록 하라. 그리고 술주정하는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되, 범한 자에게 속전(贖錢)을 징수하지 말도록 하라. 술을 대량으로 빚는 부류들에 이르러서는 더러 1백 곡(斛)에 가깝도록 빚는다고 하는데, 이는 비록 면임(面任)이 없다 하더라도 대중의 눈에 띄게 마련이니,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다만 사대부 집에서 술을 빚어 제사에 쓰는 것은 예법에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제사를 빙자하여 외람되게 술을 빚어 파는 것은 한갓 조가(朝家)의 법령만 어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사에 있어서도 자질구레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조가에서 이목지신(耳目之臣)을 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각별히 규찰(糾察)하여 바로잡는다면, 소민(小民)들이 외람되게 술을 빚는 짓은 이로부터 금단하지 않더라도 징계하여 그치게 될 것이다. 마땅히 술을 경계하는 글을 내리어 근본부터 신칙해야 하겠기에 이렇게 분부한다."
하였다.
8월 26일 무진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당습(黨習)이 사람들의 가정과 국가에 앙화를 끼쳐 왔음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임금들이 누군들 깊이 미워하여 통렬하게 끊어버리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먼저 의리를 밝히지 못하고 한갓 말단만 일삼았기 때문에, 발본 색원(拔本塞源)하여 한 시대를 만회하는 경우가 적었습니다. 이제 성명께서 조회(朝會)에 임하여 여러 차례 탄식하시며 덕음(德音)을 환발(渙發)하여 분명하게 처분을 내리셨으니, 무릇 보고 듣는 자들은 진실로 장차 눈을 씻고서 몸을 솟구쳐 보며 안색을 펴 서로 축하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신과 같은 자는 성상께서 특별히 고충(苦衷)을 살피시어 진신(進身)할 수 있는 길을 개시(開示)해 주셨으니, 구구한 사정에 감동이 맺히는 마음을 또한 어찌 다른 사람들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길 가는 사람이라도 듣고서 오히려 측창(惻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니, 만일 사신(四臣)들이 알게 된다면 어찌 황천(黃泉)의 아래에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다만 양신(兩臣)606) 의 일에 대해서는 그들의 아들이나 손자의 일 때문에 유독 똑같이 보아 주는 은덕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진실로 성상의 뜻이 되도록 대중의 심정을 따라 주는 데 힘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윽이 생각하건대, 미처 깊이 살피지 못하신 듯합니다. 무릇 자복을 받지 못한 죄인은 그대로 연좌(連坐)시키지 않음은 본시 조종조(祖宗朝)부터의 오랜 법이었고, 비록 지난해에 역적들의 죄를 다스릴 때의 일로 말하더라도 이름이 역적들의 공초(供招)에 나온 사람은 일찍이 허실(虛實)을 추문(推問)해 보지 않고서도 문득 역안(逆案)에 넣지 않았으며, 미처 자복하지 않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모두 수사(收司)의 율(律)607) 을 쓰지 않았습니다. 인성(仁聖)하신 우리 전하께서 지난해의 흉악한 역적들에게도 시행하지 않으시던 바를 어찌 차마 원통함을 품고 이미 백골(白骨)이 된 양신(兩臣)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성왕(聖王)의 시대에는 처벌이 후사(後嗣)에게는 미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그 아비와 그의 할아비까지 파급하여 죽은 사람에게 극도의 율을 쓸 수 있겠습니까? 저 사신(四臣)들은 함께 국가의 일로 죽고 똑같은 때에 추탈(追奪)되었는데, 모두 연차(聯箚) 때문에 큰 죄안(罪案)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죄가 있거나 죄가 없거나 사리가 마땅히 똑같아야 할 것인데, 혹은 신설(伸雪)되고 혹은 신설되지 않았으니, 마침내 균평(均平)하지 못한 데에 관련됩니다. 하물며 법외(法外)의 율(律)을 가지고 억지로 구별하여, 억울하게 뒤집어 쓴 원통한 죄를 펴지 못한 채 단서(丹書)608) 에 죄명(罪名)이 그대로 있게 되었으니, 사신(四臣)의 차자에 있어서 모두 신설(伸雪)해 준 본의(本意)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 전하께서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여 환연(渙然)하게 오늘날의 처분을 내리신 것은 대개 의리와 관계된 바를 환하게 분별하여 조정을 탕평(蕩平)할 근본과 기초를 삼고자 하신 것이니, 그 지극한 정성과 간측(懇惻)하신 뜻을 훤히 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대체(大體)는 진실로 사세에 따라 굽혀서 부응(副應)하여 분쟁(紛爭)의 발단을 열어 놓아서는 안되지마는, 이러한 문제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더욱 명백하고 통쾌하게 한결같이 법리(法理)대로 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구차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수습할 하나의 큰 기회(機會)를 놓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처분은 분계(分界)가 이미 엄정(嚴正)하였으니, 그 주장(主張)한 뜻을 심상한 데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경(卿)이 설령 소회(所懷)가 있더라도 올라온 다음에 개진(開陳)한다면 내가 마땅히 분명하게 비답을 내리겠다. 이렇게 처분을 한 다음에도 경이 오히려 마음을 바꾸어 조정에 나오지 않는다면, 이는 경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니, 마땅히 앞서 분부한 대로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27일 기사
윤광의(尹光毅)를 정언(正言)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대사성(大司成)으로, 황재(黃梓)를 응교(應敎)로, 유최기(兪最基)를 지평(持平)으로 김상성(金尙星)과 유엄(柳儼)을 교리(校理)로, 조상경(趙尙慶)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헌납 조명익(趙明翼)이 상소하기를,
"성상께서 편당하는 풍습이 날로 고질(痼疾)이 되어감을 근심하고 남모르는 억울한 죄를 씻어 주지 못함을 통탄스럽게 여기셔서, 생각하고 있는 바를 밝게 개유(開諭)하시며 관작(官爵)을 추복(追復)해 주시니, 대리(代理)에 관해 연차를 올린 일이 비로소 광명(光明)한 자리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3백년의 종사(宗社)가 장차 이를 힘입어 영구히 굳건해질 것입니다. 다만 똑같이 사직(社稷)의 일로 죽은 신하들이 이처럼 신리(伸理)하는 날을 당해서도 오히려 참착(參錯)하여 균등하지 못한 한탄이 있으니, 신은 개탄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아! 임인년609) 에 화를 입고 정미년610) 에 추탈(追奪)했던 일은 모두 연차를 올려 대리(代理)하게 한 것으로 큰 죄안(罪案)을 삼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의논이 이미 연차를 정대(正大)하게 여기고 있으니, 그들을 신설(伸雪)해 주는 일은 마땅히 다름이 없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오히려 구별이 있게 하시는 것은 또한 무슨 의리에서이십니까? 아! 우리 성고(聖考)께서 명철(明哲)하심이 백왕(白王)보다 뛰어나시었지만 말년에 의지하시는 바가 오직 이 양신(兩臣)이었고, 백발(白髮)의 시기에도 그들의 단심(丹心)에서 나오는 충정(衷情)이 선왕조(先王朝)의 신장(宸章)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국가 일을 근심하여 가사(家事)는 잊어버린 정성은 전하께서 여러 차례 은장(恩奬)을 내리셨으니, 그들의 평생 일을 논한다면 결코 충성스럽지 못하여 국가를 저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그들의 아들이나 손자가 악역(惡逆)에 빠졌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어진 부형들의 누(累)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추탈(追奪)은 죽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극률(極律)이니 이것이 얼마나 무거운 법이겠습니까? 이신(二臣)이 지난날에 무함을 받았던 죄안을 이제야 겨우 신설(伸雪)되어 벗게 되었다가, 문득 아들이나 손자의 일 때문에 그대로 추탈한 채 놓아 두어 천일(天日)이 오히려 복분(覆盆)의 아래에 막혀 있고 죄명(罪名)은 단서(丹書) 가운데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연차를 올린 죄를 아울러 신설(伸雪)하는 본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또한 신은 근일에는 이희(李喜)의 상소와 강필경(姜必慶)의 피사(避辭)에 대하여 진실로 천만 번 통탄스럽고 놀라운 바가 있습니다. 이희의 상소 내용에, ‘갑작스럽게 맞추어 구차스럽게 조정(調停)했다.’는 것은 전말을 밝히지 않은 채 말을 하여 은밀히 떠보는 꾀를 부렸으니, 이미 지극히 교묘하고 흉악한 일입니다. 강필경에 이르러서는 경장(更張)하는 처분에 대하여 크게 원망하며 제신(諸臣)이 그대로 받들고 있는 것을 깊이 노여워하여 피혐(避嫌)을 빙자하고 딴 말을 삽입(揷入)하기를, ‘굳게 정해진 국시(國是)를 어쩔 수 없이 위곡(委曲)하게 변경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장차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 하겠습니까?’라고 하여, 드러나게 기롱하고 곧바로 지척(指斥)하여 조금도 두려움과 기탄없이 했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그도 역시 전하의 신자(臣子)이면서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늘날 내리신 처분은 사신(四臣)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또한 한편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지극히 중요한 관계가 있음을 통찰(洞察)하셔서 이러한 거조(擧措)를 하지 않으면 진압하여 안정시킬 수 없으므로, 곧 이렇게 신설(伸雪)하여 복구해 주는 명을 내리셨으니, 군신(君臣)의 대의(大意)를 밝히고 무함하여 박해하는 흉악한 말을 끊으려는 것입니다. 비록 정미년의 의논에 참여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한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그 사이에 감히 딴 말을 하는 자가 없었는데, 저 강필경은 유독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지난날의 버릇을 고치지 않고 더욱 흉패(凶悖)한 짓을 자행(恣行)하여 이처럼 극도에 이른단 말입니까? 또 그 날 거조를 내리신 조목 중에 ‘핍박이 어디에 미치겠는가?’라는 하교는 지극히 엄절(嚴截)한 것이었으니, 진실로 한 가닥 선량한 천성(天性)이 없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징계되어 두려워해야 마땅할 것인데, 오히려 분노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서 감히 저지하여 막으려는 꾀를 부렸으니, 그 저의(底意)의 소재를 진실로 지극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이에 대하여 엄중한 방지를 가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이후부터 분의(分義)를 범하는 무리가 반드시 장차 자취를 이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분명하게 그의 죄를 바로잡아 인신(人臣)으로서 무엄(無嚴)한 짓을 하는 자들이 경계를 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처분은 경계(境界)를 엄중하게 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밝혀 놓은 것이다. 또한 그날 분명하게 하교하였으니, 마땅히 대체(大體)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너의 상소에 논한 말들은 처분에 배반되는 뜻을 면하지 못한 것이니, 이처럼 인순(因循)하려면 무엇 때문에 심곡(心曲)을 털어 놓을 것인가? 이희가 상소한 말은 처분을 내린 뜻을 잘 알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이는 또한 오히려 세속의 투(套)를 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 족히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강필경에 이르러서는 너의 상소에 이른바 ‘흉패(凶悖)하여 헤아릴 수 없다.’ 한 말은 지극히 괴이한 것이다. 이번에 내린 처분은 이런 과격(過激)한 말을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대저 피혐하는 말에 미안(未安)한 뜻을 보였는데, 이처럼 탕평(蕩平)에 힘쓰고 처분을 밝히는 날에 이러한 버릇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를 파직하여 다른 사람들의 징계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모든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고, 평안 감사(平安監司) 송인명(宋寅明)도 같이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중국의 연해변(沿海邊) 땅에는 으레 공한지(空閑地)가 많이 있으므로 척후(斥候)하는 지역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관방(關防)은 깊은 데에 두고 군읍(郡邑)은 드러난 데에 두고 있습니다. 의주성(義州城)의 경우도 또한 압록강 기슭에 가깝게 있으므로, 병자년의 변란 때에 임경업(林慶業)이 의주를 지키면서 한 가지 계책도 조치하지 못했었습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이 더러 말하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은 봄과 여름에는 성 안에 있다가, 가을과 겨울에는 마땅히 조금 내지(內地)로 들어가 있게 하고, 창성(昌城) 등의 고을도 마땅히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있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범월(犯越)한 죄인을 그 읍진(邑鎭)에서 고발하는 경우 그 지방관(地方官)은 죄주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승지 장태소(張泰紹)가 아뢰기를,
"북도(北道)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그렇게 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장태소가 또 아뢰기를,
"무산령(茂山嶺) 이북의 승도(僧徒)들은 마땅히 내지(內地)에 옮겨 놓아야 합니다. 수십 년 전에 남문(南門)의 현고(懸鼓) 가죽을 도둑이 베어 간 일이 있었는데, 그 뒤에 청(淸)나라 차원(差員)이 말하기를, ‘그들 가운데 떠도는 말이, 「조선(朝鮮)에서 장차 후춘(厚春)을 침벌(侵伐)하려 하므로, 정탐하러 왔던 세작(細作)이 북의 가죽을 베어 가지고 가서 갔다 온 증거를 삼은 것이다.」라고 한다.’고 했었습니다. 변방의 방비가 이처럼 엄격하지 못한데도 연안(沿岸) 지역에 무뢰(無賴)한 승도들을 많이 두고 있는 것은 뒷날의 염려가 없지 않은 일입니다."
하였는데,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이 말은 원대한 생각이 있는 말입니다. 신치근(申致謹)도 일찍이 이 일을 들어 진청(陳請)했었습니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양덕(陽德)과 맹산(孟山)은 북도(北道)의 영흥(永興) 등의 고을과 서로 등지고 있는데, 그 사이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노략질하는 도둑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 지역은 두 도(道)의 인후(咽喉)가 되는 곳인데, 방어영(防禦營)이 매우 멀어 진실로 허술한 염려가 있습니다."
하고, 장태소가 아뢰기를,
"그 사이에서 태산(泰山)과 준령(峻嶺)이 많아서 모두 무인지경(無人之境)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도망간 자들이 점유하여 소굴로 삼고 있습니다."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양덕의 중간에 만일 하나의 토포영(討捕營)을 둔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처분(處分)은 십분 요량하여 마땅함을 얻은 것인데, 때가 늦은 한탄이 없지 않습니다. 신은 이 일을 마땅히 아래에서 먼저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성상의 결단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만일 다시 조금이라도 중도에 벗어난다면 한쪽에 치우침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 군하(群下)에 대하여 너무 가차(假借)하지도 말고 또한 너무 꺾어버리지도 마시고, 부지하고 억제함과 좋아하고 미워하기를 한결같이 올바른 데에 따라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사람을 임용(任用)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언론에 따라 사람을 취택할 것이 없습니다. 신(臣)이 이광좌(李光佐)와는 의논이 또한 다른 데가 많았습니다마는, 그의 심사(心事)는 성실하여 딴마음이 없었고, 논하는 바도 소견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특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뿐만이 아니라, 해은군(海恩君)도 이번의 일에 대해서는 또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오광운(吳光運) 또한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서로 논쟁한 일이 있었습니다마는, 이 사람은 곧 뜻이 있는 선비이기 때문에, 외방(外方)에 나가서는 실수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사수(朴師洙)가 오광운의 일에 대해서 한 말은 진실로 지나친 것이었다."
하였다.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인출(印出)하여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고, 감영(監營)에서 각인(刻印)하여 널리 배포하게 하였다.
금군(禁軍)에게도 군문(軍門)의 군졸에 관한 사례대로 병조(兵曹)에서 요구철(腰鉤鐵)을 만들어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8월 28일 경오
대사간 채팽윤(蔡彭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강필경(姜必慶)이 논한 말은 진실로 규간(規諫)하는 뜻에서 나왔는데, 공격하는 사람이 심지어 흉패(凶悖)하여 헤아릴 수 없다고 지목하기까지 했으니, 전하께서 듣지 않으려고 하신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조정에 처분이 내렸을 때 대각(臺閣)에서 함묵(緘默)함은 국가의 복이 아닌데, 어찌하여 전하께서 한쪽은 부지(扶持)하고 한쪽은 억제하셔서, 차별 없이 탕평(蕩平)해야 하는 날에 너무 치우치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희(李憙)의 상소 내용을 어찌 족히 책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신 하교에 이르러서는 대각을 대우하는 바가 아닌 듯합니다. 신이 감히 이희의 처지를 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애석하게 여겨지는 바는 대각의 체면입니다."
하니, 상례의 비답을 내렸다.
8월 29일 신미
이유(李瑜)를 승지(承旨)로, 이세진(李世璡)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지평 유최기(兪最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내린 처분은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인데, 일종의 언자(言者)들이 더러 감히 내친 사람들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며 진신(進身)할 길을 열어 주기 위한 것으로 돌려, 마치 전하께서 의리를 밝히고 국시(國是)를 정해 놓으신 본뜻을 안면(顔面)에 이끌려 할 수 없이 그러신 것으로 돌리는 듯하니, 이는 진실로 매우 방자하고 기탄없는 짓입니다."
하고, 이어 논하기를,
"이희(李憙)의 상소는 오로지 시험해 보는 짓을 한 것이니, 일체로 책벌(責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전하께서 연차의 한 가지 사항에 대하여 이미 분명하게 죄줄 수 없음을 아시는데, 오히려 양신(兩臣)을 단서(丹書)에 그대로 두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양신과 그의 아들 또는 손자의 이름이 처음에는 목호룡(睦虎龍)의 초사(招辭)에서 나와 마침내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손에서 이루어졌고, 이제 추죄(追罪)하는 극률(極律)이 황천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양신에게 파급하게 되었습니다. 저 두 신하들은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지만, 가문(家門)이 판탕(板蕩)되고 자손도 보존하지 못하였는데, 관질(官秩)의 보존과 삭탈(削奪)이 썩은 백골(白骨)에게 무슨 관계가 있으며, 전후의 제신(諸臣)은 또한 어찌 그들에게 고려하는 바가 있어 감히 조금이라도 성명(聖明) 아래에서 속이는 것입니까? 대개 사신(四臣)들의 원통한 무함이 신설(伸雪)되지 않는다면, 의리가 밝아지지 못하고 인륜(人倫)이 아주 막혀서 사람이 사람답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한연수(韓延壽)는 일개 풍익(馮翊)의 원에 지나지 않았지만 문을 닫고 들어앉아 허물을 생각하니,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머리를 깎고 육단(肉袒)611) 하고서 사죄(謝罪)했었습니다. 지금 지존(至尊)하신 군부(君父)께서 이러한 예사롭지 않은 거조가 있으셨으니, 조정의 신하들은 마땅히 백관들을 불러 거느리고서 거적을 깔고 사죄해야 할 것인데, 별로 경동(驚動)하는 뜻이 없이 심상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신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마땅히 이렇게 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소하(疏下)의 제적(諸賊)들을 까닭없이 내륙(內陸)으로 내보냈다가 이미 작년 봄의 변란을 초래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진유(李眞儒)와 이명언(李明彦)이 근접(近接)한 지역에서 이웃이 되어 있고, 윤성시(尹聖時)와 서종하(徐宗廈)를 좋은 지역에 그대로 두고 있으므로, 여론(輿論)이 한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바다의 섬에 나누어 정배(定配)하여 금방(禁防)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기필코 경계(境界)를 혼란시키려고 하는 것이 곧 너희들이 병통이다. 오늘날 제신(諸臣)이 경동(驚動)하지 않는 것을 그르게 여긴다마는, 이번의 정녕한 하교를 들었으면서도 네가 또한 다시 그전의 마음이 싹터서, ‘시험해 본다’는 논의를 어찌하여 유독 이희(李憙)에게만 가하는 것이냐? 진실로 괴이한 일이다. 또 정청(庭請)을 하지 않은 것으로써 오늘날 제신의 허물로 삼으려고 하는데, 이는 자못 세상의 도의를 조정(調停)하려는 뜻이 없고, 하나의 갈등(葛藤)만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오늘날 다시 진달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 윤광의(尹光毅)가 상소하기를,
"붕당(朋黨)의 앙화가 지난해 역적들의 난리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이른바 당인(黨人)들이 문호(門戶)를 나누어 각각 명목(名目)을 내세우는데 그 수효가 넷이나 되니, 오늘날 전하의 신자(臣子)들은 이런 명목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초에는 청탁(淸濁)과 사정(邪正)의 구별이 없지 않았으나, 요컨대, 모두가 임금을 기망(欺罔)하고 국가를 저버린 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당파를 들어 군자로 지목할 자도 없고, 또 한 당파를 들어 소인으로 지목할 자도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그 색목(色目)이 어떠한지를 묻지 마시고 각각 그 중에서 공평하고 돈후(敦厚)하여 당의(黨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뽑아내어 임용(任用)하고 이와 반대되는 사람은 배척하신다면, 갖가지 색목들이 거의 깨뜨려지고 흩어져 모두 전하의 교화(敎化) 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일전에 내리신 처분은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입시(入侍)했던 제신(諸臣) 중에는 지난해의 처분에 참섭(參涉)한 자도 있었는데, 어찌하여 똑같이 ‘녜녜’ 하기만 하고 한 마디도 가부를 밝히는 말은 없이 단지 처분을 빨리 내리기만 앙청(仰請)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지난해에도 이미 ‘녜녜’ 하며 그대로 받들기만 하였고 오늘날에도 ‘녜녜’ 하며 그대로 받들기만 하고, 일의 가부와 국가의 이해(利害)는 돌아보지 않은 채 으레 그대로 받들기만 마음먹었으니, 설령 다른 날 전하께서 지난친 거조(擧措)가 있으실 적에도 장차 모두 그대로 받들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고도 나라가 나라다워질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각기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하여 은휘(隱諱)하는 바가 없도록 하신 다음에 좋은 것은 들어주고 부족한 것은 버려 두되, 혹시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반드시 먼저 최절(摧折)을 가하거나 앞질러 위노(威怒)를 보여서 군하(群下)들의 입을 막지 않도록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대신(臺臣)은 곧 전하의 이목(耳目)인데, 일전에 처분하셨을 때 마침내 함께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스스로 이목을 가리워버리신 것이니, 전하께서 대신(臺臣)을 너무 박하게 대우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필경(姜必慶)이 피혐(避嫌)한 계사(啓辭)는 비록 지나친 데가 있으나, 그의 마음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반드시 진달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특별히 파직하게 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너무 과당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의 처분은 이미 탕평(蕩平)하려고 하시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므로, 무릇 피차(彼此)가 논의할 적에 마땅히 너무 지나친 억양(抑揚)이 없어야만 바야흐로 같지 않은 말들을 화합시키고 온 세상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켜서 탕평하는 길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상소에 논한 말들을 나는 오히려 하나의 ‘붕(朋)’ 자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분명하게 의사(意思)를 말하지 않았으나, 불만이 이러하니, 탕평을 이룩할 수 있겠느냐? 그날 제신(諸臣)들이 각기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했었고, 당초부터 똑같은 말로 받들기만 한 일이 없었으며, 전후에 공격하여 배척하던 제신들도 이 일을 불만스럽게 여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모호(模糊)한 말을 가지고 도리어 소회(所懷)를 진달한 제신을 배척하여 혹은 경동(驚動)하지 않는 것으로 조정 신하들의 잘못으로 삼고, 혹은 ‘녜녜[唯唯]’ 두 글자를 가지고 제신들을 그르게 여긴단 말인가? 나의 생각에는 심곡(心曲)을 털어놓아 세도(世道)를 조정(調停)하려고 한 것인데, 도리어 피차(彼此)의 공격하고 배척하는 한 가지 소란한 단서로 삼고 있으니, 진실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합문(閤門)을 열어 놓고 심곡을 털어놓은 것이 이제 합문을 닫고서 자책(自責)하는 것만 못하게 되어버렸다."
하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합문을 닫아버리기를 어찌 좋아서 하겠느냐? 군신(君臣) 사이는 부자 사이와 같은 것이므로,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자책(自責)하면 여러 아들들이 육단(肉袒)하여 개과(改過)할 것인데,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감동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서 이로 인해 갈등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위에 있는 나는 합문을 닫고서 자책하고 있는데, 제신(諸臣)은 오히려 이기기 좋아하는 짓을 하고 있으니, 임금 보기를 아버지처럼 한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느냐?"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나주(羅州)의 여러 섬 가운데에 고을을 설치하는 일로 우러러 주달(奏達)하니, 임금이 두루 제신(諸臣)에게 하문하였다.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압해도(狎海島)와 장산도(長山島) 두 군데가 가장 크고 옛적의 읍치(邑治) 자리가 아직도 완연(宛然)한데, 장산도가 중앙에 있어 더욱 좋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제도(諸島)는 소속된 데가 없어 관할(管轄)하지 않고 있는가?"
하자, 이태좌가 아뢰기를,
"제도 가운데 10에 7,8은 모두 나주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소속한 고을에서 잘 관할해 왔으면 좋을 것인데, 소속한 고을에서 이미 잘 관할하지 못했으니, 설령 고을을 설치하여 분속(分屬)한다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관할하겠는가? 지도(地圖)로 보면 비록 서로 가까운 듯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거리가 멀어서 혹시라도 사변이 있으면 다급한 때에 임하여 서로 통하기가 나주에 견주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장산도에 수령을 둠은 정배(定配)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세력이 있는 사람은 부임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마침내 잔약하여 세력이 없는 사람을 차임(差任)하여 보낼 것이니, 도민(島民)들이 반드시 모두 조소(嘲笑)하여 조정의 명령이 도리어 가벼워져서 섬 안에 시행되지 못할 것이다. 또 고을을 설치한 다음에는 반드시 하리(下吏)들과 토호(土豪)들이 침탈(侵奪)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제신이 고들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말하는 자가 많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조정에서 기강(紀綱)이 서지 않았는데, 어떻게 외방(外方)에서 시행되겠는가? 이로써 말한다면, 비록 장산도에 고을을 둔다 하더라도 지금 어떻게 수십여 섬에 모두 법령이 시행될 수 있겠는가? 또 고을을 설치한 뒤에도 도민(島民)들이 의당 배를 타고 왔다갔다 할 것인데, 이렇게 되면 제도(諸島)는 각자 제도 그대로이고, 원이 된 사람은 단지 장산도를 관할하게 될 뿐인 것이다. 또 섬 풍속이 비록 완강하고 사납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순박(淳朴)한데, 고을을 설치한다면 반드시 항교(鄕校)를 세워야 하고, 또 군제(軍制)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섬 백성들이 교생(校生)이 되고 무학(武學)이 되면, 반드시 장차 점점 교사(巧詐)한 데에 이를 것이니, 도신(道臣)이 장청(狀請)한 대로 수영(水營)에 소속시켜서 편비(編裨)로 하여금 가끔 순시(巡視)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저번에 내리신 처분은 곧 피차가 시비(是非)하고 있는 사이의 큰 일에 관련된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이광좌(李光佐)와 함께 여러 차례 논란했는데, 이광좌가 말하기를, ‘대리 청정(代理聽政)은 곧 여러 대의 조정에서 이미 시행한 일인데, 누가 감히 그르다고 의논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다만 거조(擧措)를 세 차례나 변경한 것이 그르다. 만일 청정하는 일을 가지고 감히 조금이라도 마음에 의심을 가지게 된다면 이는 또한 반역하는 짓이다.’라고 했었습니다. 정미년612) 가을에 연석(筵席)에서 제신(諸臣)이 더러는 장심(將心)으로 단정하기도 하고, 더러 음양 수단(陰陽手段)이라고 하기도 한 것은 이광좌와 똑같은 의견이었는데, 신의 소견인들 또한 어찌 이와 달랐겠습니까? 이는 대개 그때의 거조가 전도(顚倒)되어 한 말이고 본일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조태채(趙泰采)는 조금 달랐었습니다. 이번에 이광좌가 비록 같이 입시(入侍)하지 못했습니다마는, 또한 어찌 딴 의논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는 끝까지 고집이 있었다. 대개 소론(少論)이 노론(老論)은 경종(景宗)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고 여겼던 것은 그들의 의심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하기 싫은 바는 다른 사람들도 하기 싫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해은군(海恩君)이 박필몽(朴弼夢)의 무리를 육지로 내보내기를 청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나왔는데, 영중추부사가 또한 의리에 입각하여 결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의논이 서로 같았던 것은 장심(將心)이었던 것이니, 이것이 한 단계이고, 비록 김일경과 박필몽이 그른 줄을 알았지마는 다만 당론(黨論)으로 인하여 비호해 주었으니, 이것이 한 단계이었으며, 평소에 자신과 의향이 다른 자를 지나치게 의심하여 단지 거조(擧措)만 보고도 의심했던 것이 또 한 단계이다. 소론 가운데에는 또한 옳으면서도 그른 자와 그르면서도 옳은 자가 있었고, 노론은 이기기 좋아하는 것이 소론들보다 더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어찌 모두 반역에 가담했겠으며, 영부사(領府事) 민진원(閔鎭遠)이 또한 어찌 와주(窩主)가 되어 반역하였겠는가? 경자년613) 에 노론으로서 겁을 낸 사람들은 모두 장심(將心)이 있는 사람들이고, 심익창(沈益昌)은 몸가짐을 근신하지 못한 사람이며, 요망한 박상검(朴尙儉)은 곧 심익창의 제자(弟子)이다. 내가 거려(居慮)하였을 때에 요망한 박상검이 지나는 길에 찾아와서 동정(動靜)을 탐색(探索)했었다. 경자년에 대간(臺諫)이 신사년614) 에 죄를 입은 사람들을 서용(敍用)하자는 의논에 맞서 쟁집(爭執)하였을 때 요망한 박상검이 계사(啓辭)를 보고서 말하기를, ‘이런 계사는 어찌하여 시급히 정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것으로 비답하지 않느냐?’고 했었는데, 내가 그때에 눈을 감은 채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했었다. 또한 그가 친근한 사람을 시켜 나에게 공갈하기를, ‘세제(世弟) 또한 남인(南人)과 소론(少論)을 임용할 수 있느냐?’고 하므로, 내가 ‘남인이라도 만일 허물을 고쳐 새 사람이 되었다면 또한 어찌 임용하지 않겠느냐?’고 했었는데, 이 때문에 노론이 소론은 모두 요망한 박상검과 서로 내통하는 것으로 의심했었다. 요망한 박상검이 김일경·박필몽과 서로 내통하고 있는 사실을 안 사람은 이천기(李天紀)와 김용택(金龍澤)의 무리이었다. 그 뒤에 또 참벌(斬伐)하는 앙화가 있었으므로, 노론이 역적(逆賊)들의 그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오직 굽혀서 비호(庇護)했지만, 어찌 이천기의 무리들을 옳게 여길 이치가 있었겠는가? 이병태(李秉泰)는 그렇지 않았었다. 신축년615) 에 내가 동궁(東宮)에 들어갔었기 때문에, 더러 내가 노론을 임용(任用)할까 염려했었는데, 내가 비록 부덕(否德)하나 어찌 정책(定策)한 공로로 하여 임용하겠는가? 김일경과 박필몽의 무리들은 모두 내가 마땅히 건저(建儲)한 사람들을 임용하고, 저희들은 모두 버릴 것으로 염려했던 것이다. 대개 김일경과 박필몽의 무리들은 요망한 박상검으로 계제(階梯)를 삼고 있었으므로, 그 요망한 박상검이 당초에는 말하기를, ‘국가를 원망하는 무리들을 마땅히 모두 없애자.’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또 ‘세제(世弟)는 마땅히 남인(南人)들을 임용해야 한다.’고 말을 하였으니, 내가 이 말을 듣고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과 뼈가 동시에 싸늘해졌었다. 영상(領相)은 요망한 박상검의 조화(造化)가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남을 알지 못하였고, 영중추부사 또한 김일경과 박필몽의 계제인 것을 알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니, 그의 마음은 영상과 똑같은 것이다."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신들은 미련하고 어두워 알지 못했습니다마는, 유독 조문명(趙文命)은 먼저 역적 김일경이 모반(謀反)하려는 마음을 알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요망한 박상검이 죽은 뒤 김 일경은 한쪽 팔이 꺾인 격이 되었으므로, 주청(奏請)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가 주청한 일이 또한 이루어지니, 드디어 분을 풀 길이 없어서 이건명(李健命)을 이참(莅斬)한 것이니, 그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역적 김일경의 상투(常套) 속에 빠졌던 것이다."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그때에 이광좌(李光佐)가 어찌 역적 김일경을 엄하게 다스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광좌는 그 자신이 있은 다음에야 바야흐로 저들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저들을 배척하였다가 이겨내지 못한다면 국가에 화를 초래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에서 영중추부사의 심사(心事)를 알 수 있다. 역적 김일경이 세제(世弟)를 제거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니, 문임(文任)을 다툰 것은 특히 자질구레한 일이다."
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영중추부사의 심곡(心曲)은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었습니다. 지난해에 다시 추탈(追奪)하기를 청했던 것은 단지 분의(分義)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서이고, 연차를 올린 일에 이르러서는 어찌 그르게 여겼겠습니까?"
하고, 이태좌가 아뢰기를,
"연차와 역안(逆案)을 명백히 구별했으니, 처분은 합당하였습니다. 이광좌는 일마다 근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옳지 않게 여겼던 것은 그들의 거조(擧措)가 괴이하고 놀라웠기 때문이었고, 본시 대리(代理)에 관한 본사(本事)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노론이 김일경과 박필몽의 무리가 곁에서 엿보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먼저 두려운 마음이 생겨 거조가 전도(顚倒)되었던 것이니, 이는 이이명(李頤命)이 영중추부사만 못한 점이다. 비록 경의 말이 아니더라도 영중추부사의 성실(誠實)한 마음을 나 또한 알고 있으나, 다만 영중추부사는 저들을 의심하는 마음이 머리속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였다. 이집이 아뢰기를,
"영중추부사는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임인년에 역적 김일경의 무리가 옥사(獄事)를 느슨하게 다스렸다 하여 죽이려 했었고, 노론은 도리어 단련(鍛鍊)하였다고 말했었습니다."
하고, 이태좌가 아뢰기를,
"이광좌는 사방에서 적(敵)을 만났었습니다. 남인(南人)은 경종(景宗)의 사친(私親)을 복작(復爵)시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상소하여 논하였다 하여 잘못된 일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또 노론과 소론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으므로 그가 매양 독부(獨夫)가 되었음을 스스로 웃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영중추부사에 대해 미편하게 여겼겠는가?"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임인년에 김동필(金東弼)이 반교문(頒敎文)의 일을 진소(陳疏)하고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된 뒤 신(臣)이 초토(草土)에 있었을 때에 영중추부사가 찾아 왔었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대감께서는 이 일을 그대로 두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국가가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국가가 있으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신자(臣子)들이 다른 날 신하로서 섬길 마음이 있다면, 마땅히 이번 일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영중추부사가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고 있다가 말하기를, ‘이번 일은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장심(將心)을 가진 사람들은 마땅히 그들이 그만한 죄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므로, 신이 다시 말하기를, ‘다른 날 일이 터진 다음에는 저들과 다르다고 해서 유독 모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고 했었습니다. 이렇게 수작(酬酌)한 것만 보더라도 역적 김일경과는 구별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지극히 어렵다[至難]’라는 두 글자를 노론이 들었다면 또한 반드시 죄안(罪案)을 삼았던 것이다."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정미년의 대처분(大處分) 때에 전하(殿下)께서 이와 같은 곡절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더라면 어찌 갈등이 있겠습니까? 한편의 사람들은 애핍(礙逼)을 한층 더하여 무핍(誣逼)이라고 하며 이광좌의 죄안으로 삼고 있는데, 하교가 이러하니, 다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기필코 구제(救濟)하여 나오게 하려면 마땅히 성상께서 생각을 많이 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담(常談)에, ‘가정 안의 아름답지 못한 일은 외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하였다. 지난날의 환시(宦寺)들의 일을 내가 그 즉시 말하지 않았던 까닭은 우유부단(優柔不斷)해서가 아니라, 곧 차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김시환(金始煥)이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있는 태봉(胎封)의 석물(石物)은 조금 체제(體制)를 감해서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마는, 감하기가 미안(未安)합니다."
하고, 이태좌와 이집도 모두 감해서는 안됨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조(先王朝)에서 후릉(厚陵)의 석물 제도(制度)가 참으로 좋았기 때문에 특별히 이를 모방(模倣)하여 법제로 삼도록 명하였으나, 석물의 체중(體重)도 오히려 감하여 작게 하였다. 하물며 태실(胎室)을 표시하는 것이겠는가? 석물의 체중이 크거나 작은 것이 어찌 사체에 관계가 있겠는가? 만일 3분의 1을 감한다면 운반해 가기도 조금 나을 것이다. 또한 이번에 이미 감한다면, 뒷날에 마땅히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아 준행할 것이니, 오늘날의 민폐(民弊)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뒷날의 폐해를 제거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태좌·이집·김시환이 감하지 말기를 극력 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집이 아뢰기를,
"광주(廣州)의 여결(餘結)은 본래부터 부윤(府尹)이 사사롭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곧 장사(將士)에게 지급하는 요미(料米)와 상격(賞格)의 자금(資金)으로 삼아 왔었는데, 이번에 칙교(飭敎)로 인하여 그 여결과 전세(田稅) 및 대동(大同)을 군향(軍餉) 속에 아울러 넣었습니다. 그 가운데 3백 석(石)을 특별히 획급(畫給)하여 요하(料下)와 상격(賞格)에 쓰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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