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3권, 영조 5년 1729년 9월

싸라리리 2025. 9. 2. 13:54
반응형

9월 1일 임신

지평(持平) 유최기(兪最基)와 정언(正言) 윤광의(尹光毅)를 아울러 삭출(削黜)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유최기는 그의 편당(偏黨) 속에 반역한 사람 이천기(李天紀)를 벗어나게 하여 양인(兩人)616)  의 처지를 깨끗하게 신설(伸雪)하려고 했기 때문이고, 윤광의는 시비(是非)를 모호(模糊)하게 만들었다고 하여 처분(處分)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뜻을 토로하며 대신들을 침해하여 공격하기도 하고 제신(諸臣)들을 절박하게 기롱했었기 때문이다. 또 분부하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분부한 내용의 ‘애핍(礙逼)’ 두 글자에 있어서 본사(本事)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겉면만 가지고서 고체(固滯)하여 더러는 ‘애핍’을 무핍(誣逼)으로 여기고 있으니, 나의 뜻과는 크게 다르다. 뒷날에 구설거리로 삼을 폐단을 엄중하게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광좌(李光佐)에게 수서(手書)를 내리며 승지(承旨)로 하여금 가서 돈유(敦諭)하여 함께 오도록 하였다.

 

상참(常參)617)  을 행하였다. 집의(執義) 이세진(李世璡)이 앞서 아뢴 일을 전주(傳奏)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또 지평 이희(李憙)를 출사(出仕)하게 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상소에 말이 합당하게 되지 못하였음을 들어 특별히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9월 1일 임신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들어와 사례(謝禮)하니, 명을 내려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8월 18일에 연석(筵席)에서 내린 분부를 홍치중에게 보여 주고, 또 분부하기를,
"박상검(朴尙儉)의 일은 곧 천고(千古)에 없던 것이니, 내가 통유(洞諭)를 한 까닭은 혹시라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일분(一分)이나마 깨닫게 되기를 바라서였다. 이석효(李錫孝)의 흉악한 말을 혹자는 심유현(沈維賢)·이천해(李天海)의 무리가 빚어낸 것이라고 여겼지만 나는 아니라고 여겼었다. 대개 여염(閭閻) 사이에서 들었을 것이니, 비록 역적이 아니더라도 환득 환실(患得患失)618)  하는 무리들이 또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경종조(景宗朝)에 조태구(趙泰耉)를 가복(加卜)619)  하여 정승으로 제배(除拜)하였을 때에 동조(東朝)620)  께서는 아득히 알지 못하고 계셨었다. 내가 그때에 마침 입시(入侍)했었기 때문에 알게 되었었으니 여타의 것은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세상의 변이 층층으로 생기어 흉악한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미치게 되기에 합문(閤門)을 닫아버렸었다마는, 어찌 내가 그렇게 하기 좋아한 것이겠는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애핍(礙逼)’이란 두 글자 때문에 불안해 한다니, 내일 아침에 사관(史官)은 연석(筵席)에서 한 그 말을 가지고 가서 보여 주어야 한다."
하매, 홍치중이 아뢰기를,
"경종께서 항시 조용하게 조섭(調攝)하고 계시어 기무(機務)를 수응(酬應)하기 어려우셨으니, 신자(臣子)들로서 대리(代理)케 하라는 명을 그대로 받드는 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반역에 가까울 리가 있겠습니까? 그때에 적환(賊宦)과 역비(逆婢)들이 합문을 닫아 놓고 받아들이지 않았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흉악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 외부(外部)의 세력을 믿지 않았다면 반드시 감히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변(告變)한 자의 말이 동궁(東宮)에 미쳤었고 보면 도리가 마땅히 먼저 이 죄인(罪人)을 다스려야 할 것인데 단지 쓰지 말라고만 청하였으니, 귀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가 듣게 된 일인데 쓰지 않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조태구가 청대(請對)한 다음에 세 사람이 다시 따라 들어간 것이 비록 전도(顚倒)된 짓인 듯하기는 하지만, 그때의 사세가 만일 따라 들어가지 않는다면 사태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절목(節目) 내용에 설사 잘 처리하지 못한 사항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반역에 가까울 것이겠습니까? 의심하여 저지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노론(老論)들은 경종께 순일(純一)한 충성이 없다고 지나치게 의심하였기 때문에 이런 사항을 보게 되자 의심이 없지 않게 된 것입니다. 연명(聯名)하여 올린 차자(箚子)를 반역하는 것으로 몰아붙이기는 당초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논에서 나왔던 것인데도 바로 지금까지 신설(伸雪)하자는 논의에 대하여 지난(持難)하고 있음은 선입(先入)한 말이 주(主)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연명한 차자를 반역한 것으로 해버린다면 분의(分義)에 있어서나 도리에 있어서나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리하는 것은 곧 선위(禪位)와 같은 것인데, 제신(諸臣)들이 논쟁하지 않았다면 의심해야 하겠지만, 이는 어찌 털끝만치라도 의심을 해야 할 것이겠습니까? 신설하는 논의에 대하여 지난하고 있는 것은 신(臣)도 또한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네 사람들이 죄가 있다면 다 같이 있어야 하고 없다면 다 같이 없어야 하는데 어찌 구분하여 두 가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당초에 사사(賜死)하게 될 때에 국안(鞫案)과 연명한 차자를 구분하여 죄안(罪案)으로 했던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 4인의 연명한 차자로써 근본을 삼았으며, 정미년621)  에 추탈(追奪)할 때에도 또한 국안에 있어서는 거론하지 않고 단지 ‘4인의 연명한 차자는 분의(分義)를 범한 것이다.’고만 했었습니다. 이제는 4인들이 연명하여 차자를 올린 의리가 이미 펴졌는데도 양인(兩人)에 대하여는 그대로 죄적(罪籍)에 두었으니 차별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게 된 일입니다. 그들의 아들과 손자의 일 때문에 그대로 죄안에 둔다면 사리가 결코 그렇지 않으니 그들의 아들이나 손자가 장폐(杖斃)하게 될 때에 당초 역률(逆律)을 적용하지 않았다가 이기지(李器之)에게는 뒤좇아 역률을 시행했었지만 김성행(金省行)에게는 역률을 쓰지 않았으며, 정미년에도 또한 노륙(孥戮)하는 법을 쓰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역률을 시행한다면 반드시 다시 연좌(緣坐)의 율을 사용해야만 바야흐로 그들의 부조(父祖)에게까지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손자로 인한 연좌는 조부에게는 미치지 않는 법이니, 이로써 죄를 삼는다면 어찌 균평함에 결함됨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탕평(蕩平)으로써 말을 하더라도 네 사람이 연명하여 올린 차자의 의리를 통쾌하게 펴 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혹시라도 다시 편당하는 풍습을 답습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극률(極律)을 쓰겠다.’는 것으로 분부를 하신다면, 마땅히 탕평의 효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미년의 처분이 모호(模糊)했었기 때문에 진퇴(進退)에 있어서의 하나의 겉치레 거리가 되어버렸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622)  도 역시 당론(黨論)의 소굴(巢窟) 속의 사람으로 갑술년623)   뒤부터 노론(老論)들은 경종(景宗)께 순일한 충성이 없는 것으로 의심했었고, 거기에다가 노론들이 잘못한 데가 많이 있었다. 조성복(趙聖復)이 한 일은 이는 마땅히 대신들이 진달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만 조성복이 먼저 하게 된 것이다. 만일 실심(實心)으로 국가를 위한다면 사생(死生)과 화복을 헤아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마땅히 대신이 청대(請對)했어야 하는데 또한 하지 않았다가 일이 지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청했으므로, 소론(少論)들이 이 때문에 노론이 조성복을 분장(扮粧)하여 내놓은 것으로 여긴 것이다. 조태구가 북문(北門)으로 해서 들어온 것에 이르러서는 노론들을 논죄(論罪)하려고 했었으니, 그들의 마음에는 잠시 사이에 큰 거조(擧措)가 있게 될까 싶어한 것으로서, 이도 또한 노론들을 지나치게 의심해서인 것이다. 요망한 박상검(朴尙儉)이 신축년624)   이전부터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결탁했었다. 그러므로 우상(右相)이 들어오게 될 때에도 구중 궁궐(九重宮闕)에서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요망한 박상검의 무리들은 중간에서 선동하고 요망한 박상검과 결탁한 사람들은 또한 궁내(宮內)에서 선동했었기 때문에 경종께서 미처 조찰(照察)하지 못하시어 청대(請對)하는 계사(啓辭)를 입계(入啓)하기도 전에 갑자기 인견(引見)한다는 명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조태구가 바쁘게 들어왔었음은 곧 바빠진 뒤라 잘못 되어버린 것인데, 영중추부사의 말이 ‘이미 정청(庭請)해 놓고서 무엇하러 연명하여 차자를 올리고, 이미 연명하여 차자를 올려 놓고서 무엇하러 환수(還收)하기를 청한 것인가?’라고 했었다. 이는 비록 지나치게 의심하여 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때의 거조는 역시 바쁜 나머지에 잘못되어버림을 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을 아직도 죄안(罪案)에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때의 거조를 잘하지 못한 데가 많아서이다. 서덕수(徐德修)가 승복(承服)할 때에 국청(鞫廳)에서 묻지도 않았는데 앞질러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악한 말을 하였으니, 그의 마음을 알기 어렵지 않다. 서덕수의 무리들이 스스로 시종(始終) 애매(曖昧)하게 되었다고 여겨, 정책(政策)한 공을 고려하지 않고 마침내 나에게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백지(白地)에 흉악한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에 국청에서 마땅히 먼저 목호룡(睦虎龍)을 두들기어 그의 흉악한 말을 추궁했어야 하는데도 이를 하지 않았다. 내가 이미 그 진신(搢紳)들에게 화를 전가(轉嫁)하게 될 것을 알고서, 만일 내가 자리를 피해버린다면 조정의 분위기가 마땅히 진정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에는 내가 차마 조지(朝紙)625)  를 보지 않았었고, 정미년의 비망기(備忘記) 내용에 ‘경종께 충성하지 않는다면 나에겐들 충성을 하겠느냐?’는 말을 했던 것도 대개 이 때문이었다. 김창집(金昌集)은 잘못한 일이 많았고, 또한 여러 차례 역적들이 공초(供招)에도 나왔었다. 이이명(李頤命)은 정유년626)  에 독대(獨對)할 때에 숙종(肅宗)께서 선조조(宣祖朝)의 일곱 신하의 일로서 부탁했었으니, 성고(聖考)께서 생각이 심상한 사람들보다도 천 배 만 배나 뛰어나신 것이다. 신축년과 임인년627)   무렵의 일만 보더라도 성고께서는 자애(慈愛)하는 마음으로 십세(十世)의 일을 알 수 있으신 것이니, 성고께서는 생각이 진실로 원대(遠大)하셨던 것이다. 손바닥에 글자를 쓰는 것은 곧 잡류(雜類)들이 한 짓인데, 노론(老論)들 중에는 성심으로 국가를 사모하는 사람이 이이명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기에 수작(酬酌)할 적에 우연히 ‘양자(養字)’를 쓰게 되었었을 것이다. 김창집에 대한 역적들의 공초와 이이명에 대한 손바닥에 쓴 글자에 있어서 이번에 만일 완전히 신설(伸雪)해 준다면 한편 사람들의 마음이 반드시 울불(鬱怫)할 것이니, 아직은 두 사람을 그대로 두고 한편의 의리를 펴지게 한 다음에 장래에는 피차(彼此)의 제신(諸臣)들을 한 전당(殿堂)에서 일제히 모아 동이(同異)를 조정(調停)하여 점차로 해소시켜, 울불한 사람들은 마음을 화평하게 갖도록 하고 분하여 원망하는 사람들은 기운을 낮추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애핍(礙逼)’과 ‘무핍(誣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다. 내가 지나간 일들을 뒤좇아 생각해 보건대, 마음에 진실로 개탄스러웠기 때문에 영중추부사가 탈출해버리게 될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런 분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혹시라도 세속의 풍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거나 ‘애핍’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하여 역적과 편당하는 구덩이에 돌아가게 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최하층(最下層)의 사람이다. 유최기(兪最基)가 이천기(李天紀)와 같은 무리의 원통을 호소하였음은 통탄스러운 일이다."
하매, 홍치중이 아뢰기를,
"진실로 그들의 원통함을 아신다면 어찌 한편의 사람들이 울불해 하는 것에 구애되어 신설(伸雪)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단지 두 사람만 벗겨 주면 노론들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네 사람을 모두 벗겨 주면 소론들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니,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한다면 조정의 명령을 어떻게 시행하겠는가? 지난해에 소론들 중에서도 이미 역적이 나오게 되었었는데 소론들은 능히 잘라서 버리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낭자(狼藉)하게 칭병(稱兵)을 했었기 때문에 엄폐할 수가 없어 그렇게 한 것이다. 소론들은 그의 당 속의 역적을 능히 미워하여 끊어 버렸는데 노론들은 이러한 착안(着眼)이 모자란다. 예로부터 중관(中官)628)  과 결탁하는 자가 그의 마음이 어찌 선량(善良)했겠는가? 이천기의 무리가 이런 것이니, 이천기의 무리들이 한 일은 자신 하나의 이욕(利慾)에서 나온 것이고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 하나만 위한다면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그 결과에는 반드시 이정(李檉)629)  의 ‘저도 역시 임금이고 이도 역시 임금이다.’라는 말과 같게 될 것이니, 이는 곧 이루어지지 못한 역적이다. 전인좌(錢仁佐)가 공초(供招)한 것만 보더라도 목호룡(睦虎龍)이 본래 장세상(張世相)과 친근하다가 마침내 이론(異論)을 가지게 된 것은, 필시 이천기의 무리가 욕심이 속에 그득했기 때문에 목호룡을 시기하여 자연히 소원해지게 되고 끝에는 상변(上變)하게 된 것이다. 김일경(金一鏡)의 무리가 이미 흉악한 마음이 있었고 서덕수(徐德修)의 공초에 또 흉악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로 구실을 삼았으니, 이는 또한 통탄스러운 일이었기에 이 무리들을 한결같이 모두 잘라 버리게 된 것이다. 단지 사신(四臣)의 차자(箚字)가 광명(光明)하다고 일컫는다면 어찌 합당하게 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오늘날의 처분은 단지 사신(四臣)의 차자를 신설(伸雪)하기 위한 데에서 나왔으니, 역안(逆案)의 뜻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한 전당(殿堂) 안에서 피차(彼此)가 서로 감화(感化)하게 된다면 어찌 다시 생각해서 해 갈 방도가 없겠는가? 16인의 일에 있어서는 곧 박필몽(朴弼夢)이 발계(發啓)했던 것이다. 그때는 곧 목호룡의 급서(急書)가 올라오지 않은 참으로서, 이천기를 등지고 김일경과 박필몽에게 투족(投足)한 때이다. 만일 목호룡이 김일경과 박필몽에게 투족하지 않았었다면 박필몽이 어떤 연유로 16인의 명자(名字)를 알게 되었겠는가? 내가 유최기(兪最基)와 윤광의(尹光毅)를 둘 다 죄 준 것은 곧 싸움을 막으려는 뜻이다."
하였다.

 

9월 2일 계유

권업(權𢢜)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유겸명(柳謙明)을 수찬(修撰)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허옥(許沃)을 헌납(獻納)으로, 이광부(李光溥)와 남태경(南泰慶)을 정언(正言)으로, 오명신(吳命新)과 서종옥(徐宗玉)을 승지(承旨)로, 심태현(沈泰賢)과 이중경(李重庚)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9월 2일 계유

영중추부사        이광좌(李光佐)가 시골에서 올라오니, 임금이 명을 내려 인견(引見)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지성으로 편당하는 풍습을 없애려고 하시는데도 말세(末世)의 폐단은 못하는 짓이 없게 되어 윤서(倫序) 없는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미치었으니, 그 근본을 추구(推究)해 보면 모두가 편당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신(臣)의 본심은 편당하는 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닙니다마는, 필경에는 편당하는 색목(色目) 속의 사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임금께 고하는 말에 있어서도 애핍(礙逼)한 데에 돌아감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도승지(都承旨)가 전하께서 즉각 본부를 내리시지 않아 신하의 죄를 키우게 되는 것임을 들어 앙달(仰達)했었으니, 이 사람은 국가에 성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았겠으나, 전하께서 만일 하교(下敎)하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가 알아차리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갑진년630)                   겨울에 내가 이미 경(卿)의 마음을 알았었는데, 경인들 어찌 내 마음을 알지 못했겠는가? 갑진년 이후에 경을 처벌했던 것은 피배(彼輩)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려는 것이 아니었고 경이 끝내 근본인 것에 대하여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가 있었기 때문에 경에게 책비(責備)하고 경을 옥성(玉成)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궁중(宮中)의 일을 바깥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경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가 있은 것이니, 경의 고심(苦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내가 부덕(不德)하기는 하지만 경에게 화를 내지 않았던 것은 경의 고충(苦衷)이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이었고 애핍(礙逼)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경이 불안스러워함은 대개 알아차린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이에 따라 더욱 경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들어왔음은 반드시 반성하여 깨달은 데가 있는 것이기에 매우 기쁘게 여긴다."
하매, 이광좌가 이르기를,
"신이 그때에 만일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무리가 요망한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한 것을 알았었다면 마땅히 몸을 돌보지 않고 배척했을 것인데 전연 알지 못했었습니다. 분부를 받들고서야 비로소 알았었으니, 통한(痛恨)스러움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미년631)                  에 입시(入侍)했을 적에 해은(海恩)632)                  이 마침내 나의 마음을 알지 못했었으니, 저들이 경의 마음을 알지 못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내가 경들의 본심을 양해하면서도 오히려 백세(百世) 이후에 공론이 어떻게 여길까 염려했으니, 저들이 의심하는 것을 어찌 이상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그때에 김일경이 유독 신(臣)을 꺼리었었으니, 만일 신이 실패하여 물러나버렸으면 김일경을 억제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접때의 사람들이 유독 신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었으니, 신하가 된 사람으로 궁내(宮內)의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은 또한 어찌 좋은 일이겠습니까? 신이 대리(代理)하기를 청한 사람들에 대하여 논급한 것은 그 사람들의 거조(擧措) 사이에 있어서 논한 것이고 본시 대리에 관한 본사(本事)에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비록 신들이 알고 있지 못하는 일들을 알고 있었습니다마는, 신은 춘방(春坊)에도 또한 행공(行公)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신축년633)                   이전에는 일찍이 한 번도 입시(入侍)하지 않았었으니, 경종(景宗)께서 비록 병환이 침중(沈重)하셨더라도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었겠습니까? 조정에서 본시 한번도 병환 때문에 근심하며 당황하여 착실하게 의약(醫藥)을 써 본 일이 없었는데, 원년(元年)에 갑자기 기무(機務)를 놓으려고 하시므로 놀라움과 애통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또한 정청(庭請)을 했었는데, 정청을 이미 정지하고 연명한 차자(箚子)를 막올렸을 때에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 및 신과 이태좌(李台佐)·이조(李肇)가 바야흐로 청대(請對)하려고 하였는데, 이집(李㙫)이 서함(書緘)으로 묻기를, ‘마땅히 상소해야 된다고 생각되니, 각기 상소하고 싶으면 각기 상소하고 연명으로 상소하고 싶으면 연명하여 상소하자.’고 한 까닭에 ‘우상(右相)이 바야흐로 청대하는데 시급히 와서 함께 참여하라.’고 답했었습니다. 인견(引見)이 계하(啓下)된 다음에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간즉, 그때에 대간(臺諫)이 바야흐로 조태구를 삭출(削黜)하자고 아뢰려다가 갑자기 멀리 귀양 보내기로 고치고서 소보(小報)를 보내어 보여 주었으니, 대개 공갈을 하여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조태구는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조금 있다가 삼공(三公) 이하가 어수선하게 들어와 정신없이 모였는데, 김창집(金昌集)은 빠른 걸음으로 오느라 숨이 차서 안정되지 않았으며, 대신들은 으레 서로가 읍(揖)을 하는 법도가 있는데 김창집이 주저앉아버리고 읍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건명(李健命)은 조태구를 향하여 ‘무엇하러 청대(請對)했느냐?’고 물었으며, 조금 있다가 입시(入侍)하라는 명이 내렸었는데, 조태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달하였고 김창집 이하도 비록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진달하는 말이 간절하고 측은하기는 조태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연명하여 차자를 올린 것은 잘못임을 들어 귀찮게 번거로이 인죄(引罪)하면서 그들의 죄를 다스리고 비망기(備忘記)를 거두어 들이라고 청하자, 김창집이 향안(香案)에 받들어 놓으니, 경종께서 옥수(玉手)를 들어 한 번 만져 보셨습니다. 홍석보(洪錫輔)가, 승정원에서 품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조태구가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되셨는지를 들어 임금께 다그쳐 물으면서 말씨가 발끈하게 되자, 최석항(崔錫恒)이 책망하기를, ‘어찌하여 조용하게 진달하지 않고 이처럼 무례하게 구는가?’라고 했었습니다. 정청(庭請)할 때에 당해서는 신으로 하여금 한번 계사(啓辭)를 짓게 하였는데 그 중에 긴요한 말들을 모두 지워버리기에, 신이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이 ‘이러한 말뜻은 앞서의 계사에도 이미 있었다.’고 하기에, 신이 ‘제목이 이미 같고 보면 말의 뜻도 같을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긴요한 말들을 모두 빼버린다면 마땅히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이 글을 쓰지 않는다면 할 수 없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고칠 필요가 없다.’고 하니, 이건명이 크게 화를 내면서 글을 좋게 고친 곳도 한결같이 모두 지워버리기에, 신이 웃으면서 ‘좋게 고친 데를 어찌 꼭 지워버리느냐?’고 했었습니다. 이 한 가지 조항에 있어서도 신(臣)은 이미 정청(庭請)의 정성(精誠)이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연명하여 올린 차자에 청한 일은 얼마나 큰 일입니까? 신들이 비록 청대(請對)하더라도 저들로서는 당연히 말하기를, ‘이러한 큰 일을 이미 작정이 된 뒤에 어찌 감히 딴 의논을 하느냐? 고 하며 신들을 죄주자고 청할 것입니다. 정유년634)                   절목(節目)을 굳게 행하는 것은 사리에 있어서 당연하다 하겠으나, 겨우 절목을 올리고 또 신들을 따라 입대(入對)하였으니, 이러한 앞뒤가 서로 반대되는 거조(擧措)를 논한 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대리(代理)하는 일에 있어서 애핍(礙逼)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조현명(趙顯命)의 상소에도 또한 분명하게 이랬다저랬다 하는 수단을 말했었거니와, 그들의 거조 사이에 있어서 족히 그들의 심장(心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신들은 생각에 이를 논하는 것은 조금도 애핍하는 바가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신들이 경종(景宗)의 병환을 알고 있음이 당조(當朝)한 사람들만 못했음을 정미년 가을에 송인명(宋寅明)도 또한 진달하였습니다. 성후(聖候)가 이러하셨다면 약원(藥院)에서는 의약(醫藥)으로 보호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신들은 빈청(賓廳)에 좌기(坐起)하면서 2품 이상의 관원을 모아 눈물을 흘리며 함께 의논하여 대리(代理)하시기를 앙청(仰請)했었다면 어찌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게 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전후에 있어서의 거조가 지극히 허겁지겁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진실로 내가 말해야 할 바가 아니다마는, 만일에 과연 조용히 조섭(調攝)하게 할 계획이었다면 반드시 미미한 관원 조성복(趙聖復)에게서 말이 나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그때에 대간(臺諫)이 조성복을 섬으로 귀양 보내기를 계청(啓請)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아뢰기를,
"자제(子弟)인 나의 마음에 있어서라면 그렇겠지만 국가 일을 해 가는 대신의 도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인데 나중에야 정청(庭請)하다가 바로 정지했으니, 대개 김일경과 박필몽의 무리가 배포(排布)해 놓은 정상을 알고서 무서워하여 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이명(李頤命)이 어찌 경종(景宗)에게는 화를 당하게 될까 두려워하고 나에게는 요공(要功)할 사람이겠는가마는, 나중에 와서 경(卿)들이 청대(請對)한 뒤에야 인혐(引嫌)한 일을 본다면, 지난번에 내가 말한 바 ‘저들은 용렬하다.’고 한 그대로이다. 이러한 큰 일은 마땅히 사람들과 의논을 맞추어 해 가야 하는 것인데 화를 무서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이렇게 해 가지 못하고 부지불각(不知不覺) 중에 자신이 망측(罔測)한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저들은 궁내(宮內)의 일을 잘 알고 있는데 경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시종 의심하여 멀리하게 된 것이다. 김일경과 박필몽의 일을 노론(老論)들은 보는 바와 아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경이 김일경과 박필몽을 알고 있고 요망한 박상검(朴尙儉)의 무리와도 서로 알고 있는 것으로 의심한 것이지만, 노론들이 또한 어찌 모두 장세상(張世相)과 결탁한 것이겠는가? 또한 설령 죄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주사(誅死)했는데 이제 와서 추탈(追奪)하는 것은 또한 너무 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도 또한 어찌 노론들은 모두가 장세상과 결탁했다고 여기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궁내의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은 또한 어찌 신하인 사람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요망한 박상검이 홍수(紅袖)635)                  들과 약속하여 제 스스로 이르기를, ‘연명한 차자를 이미 올렸으니 만일에 노론(老論)이 들어오기만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인데, 우상(右相)을 만나게 된 것이 다행이다.’라고 하여, 대궐 안이 진동하게 되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비록 대궐 뜰이 가깝기는 하지만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겠는가? 그래서 저들이 우상도 역시 아는 바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게 된 것이다. 경(卿)들을 인대(引對)하고 난 다음 그날밤의 정사(政事)에서 조태구(趙泰耉)도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를 삼았었는데, 홍수들이 남인(南人)과 소론을 좋게 여겨 모두들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지마는 어찌 조태구가 그들과 결탁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이를 두고 생각해 본다면 피차(彼此)가 역자(逆子)에 있어서는 마땅히 모두 버려야 하고 ‘노소(老少)’ 두 글자는 다시는 거론하지 않은 다음에야 바야흐로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그때의 인대에 신(臣)도 또한 입시(入侍)했었습니다. 만일에 요망한 박상검이 그때의 청대(請對)를 다행하게 여겼었다면, 신들의 수치(羞恥)가 무엇이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신이 들은 바로는 전하께서 내리신 분부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진달한 바가 모두 분수(分數)에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본사(本事)는 반드시 그만둘 수 없는 것을 깊이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당시의 거조가 황란(慌亂)하고 현환(眩幻)한 곳에 있어서도 더러는 지나치게 추서(推恕)하셨던 것인데, 영중추부사는 단지 겉면만 보고 그들과 더불어 혈전(血戰)하였으므로 오히려 사린(私吝)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어찌 사린한 마음이 있은 것이겠습니까? 18일에 연신(筵臣)이 또한 ‘대리(代理)하기를 청하였음은 경종에게 충성스럽지 못한 마음이 있어서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윤순(尹淳)이 한 말이다. ‘사린’이라고 함은 도승지의 말이 지나치게 된 것이고, 내가 너무 지나치게 추서(推恕)했다는 말도 또한 과당한 것이다. 오늘 연석(筵席) 중에 군신(君臣) 3인도 모두 과오가 있었지만, 나의 과오를 경들의 과오에 비하여 분수(分數)가 덜하다."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축년 겨울에는 신들은 그런 기미(幾微)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신은 바야흐로 강(江) 밖에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의 일을 내가 마땅히 말하겠다. 예로부터 환국(換局)할 참에는 호위(扈衛)하는 거조가 없었는데, 문유도(文有道)가 무예 별감(武藝別監)으로서 시민당(時敏堂)을 호위했었으니, 이러한 거조는 어찌 흉악하지 않은 것이겠는가? 혹은 노론들이 변을 일으키게 될까 두려워하여 그런 것이다."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그때에 김연(金演)이 호조 판서이고 이조(李肇)는 형조 판서이고 신(臣)은 예조 판서로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으며, 이조 판서도 또한 소론(少論) 중에서 차출(差出)한 듯한데 심단(沈檀)이 제수되었습니다. 초아흐레와 열흘 이틀 동안의 밤에 소신(小臣)을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제수했었는데, 신은 제수하시게 된 성상의 뜻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잉임(仍任)한 뒤로는 감히 입조(入朝)하지 못하여 진퇴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망한 박상검의 변을 듣고서야 청대(請對)하기 위해 창황(蒼黃)하게 들어왔다가 따라서 수어사의 밀부(密符)를 받고서는 나가지 못하게 되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제수에 관한 한 가지 절목에 있어서는 내가 차마 분명하게 말할 수 없거니와, 요망한 박상검이 모해(謀害)하려고 할 때에 상소한 초고(草稿)가 있는데 춘방(春坊)의 김동필(金東弼)이 등서(謄書)해 놓았다. 중간에 두 환관(宦官)을 멀리 귀양 보낸 다음에는 ‘내 자신이 하였다.’는 분부가 있었는데 나는 차마 분부를 내렸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때를 당해 장차 어떻게 해야 했겠는가? 나의 심사(心事)를 폭백(暴白)할 수도 없고 경종께 누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만 사위(辭位)하는 거조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 당해 요망한 박상검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그의 화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었으랴? 장차 경종의 지극하신 인(仁)과 지극하신 덕에 누를 끼침을 면할 수 없게 되겠기에 부득이하여 사위하는 거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 내가 이해를 헤아리고서 자정(自靖)할 생각을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그때의 상소 초고에도 대략 말을 하였다. 그날 사부(師傅) 및 궁관(宮官)들을 인접(引接)하여 이 일을 언급하였는데, 조태구(趙泰耉)는 알아차리지 못하였고 이명의(李明誼)는 사기(辭氣)가 불평스럽기에, 내가 ‘동궁(東宮)이 어찌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을 알고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가소로운 일이다…….’라고 했었다. 또 내가 지극한 애통이 있으니, 이제는 마땅히 분명하게 말하겠다. 갑진년의 대점(大漸)636)                  하시던 날 저녁에 내가 의약(醫藥)의 이치를 알지 못하므로 초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그날 밤에 동조(東朝)께서 친림(親臨)하여 증세가 어떤지를 물으시고 수라(水剌)를 들기 위하여 환궁(還宮)하시었다. 그날 비와 눈이 섞이어 내려 모시고 가는 동안에 의복과 건(巾)이 젖어버려 의복을 바꾸어 입다가 미처 다시 모시지 못했었다. 주상께서 소입(召入)하라는 명이 있음을 듣고서는 미끄러운 층계(層階)에서 낙상(落傷)을 해 가며 창황(蒼黃)하게 입시(入侍)했더니 손을 들어 부르시기에 나아가 엎드리니 두 손으로 나의 두 손을 꼭 쥐시었다. 내가 ‘어찌하여 이러시느냐?’고 했었지만, 그때는 증세가 위급하게 되어 하교(下敎)를 하실 수 없었는데, 궁인(宮人)들의 말을 듣건대,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명하고 이어 세제(世弟)를 부르도록 하신 것을 궁인들이 당초에 자세히 듣지 못하고서 잘못 딴 물건을 올리자 손을 저어 다시 분부하시므로, 조금 뒤에야 비로소 알아차리고서 나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환취정(環翠亭) 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소입하라는 명이 있음을 듣게 되어 마침내 친히 하교(下敎)하시는 것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마음속에 있는 지극한 애통을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저번날 분부를 내리신 이후에 어찌 의심하여 멀리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바로 지금의 도리는 각기 옳은 점을 신장(伸張)해 가고 그른 점을 지척(指斥)해 간다면 하나도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말은 옳은 중에도 그른 점이 있고 그른 중에도 옳은 점이 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도승지의 말이 옳다. 영중추부사는 지척(咫尺)의 자리에 있으면서 오히려 환히 풀리지 않는 데가 있다. 저편 사람들이 조태채(趙泰采)의 일 때문에 더욱 경을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의 고충(苦衷)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만일에 경과 영상(領相)이 없다면 내가 일을 해 갈 수 없을 것이다."
하매, 조현명이 아뢰기를,
"그때에 영중추부사의 의견이 제신(諸臣)들과 맞지 않았고, 송인명(宋寅明)은 영중추부사와 서로 논쟁하였으나 또한 일찍이 서로 양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는 비록 의견이 조금 참차(參差)하는 일이 있었지만 오늘에 이르러 환히 알게 된 뒤에는 그전의 때를 씻어버리고 함께 탕평(蕩平)을 이루어 간다면 어찌 매우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조태채(趙泰采)에 있어서는 신(臣)도 또한 차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미 죽은 사람에 있어서는 경중을 막론하고 단지 추탈(追奪)만 하는 한 가지 조관뿐이었습니다. 비록 차등이 있기는 했지만 구별할 수가 없으니, 사세가 그러해서이었습니다. 신이 전후에 자신의 소견을 극력 고집하였으나 어찌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도승지는 ‘신의 의사가 제신(諸臣)들과 맞지 않았다.’고 했습니다마는, 그러나 송인명은 조태채의 일에 있어서 그때부터 이론(異論)이 있었으면서도 세 차례나 논단을 변경하게 된 것이 진실로 엄격(嚴格)하게 되어 있고, 조현명도 또한 이랬다저랬다하는 수단이라고 했었으면서 이제는 그만 ‘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은 단지 ‘이랬다저랬다하는 수단이라.’고만 했었고, 일찍이 역적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정미년 이후로는 소신(小臣)이 장심(將心)637)                  이라고 일러 왔는데, 이 장심은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내가 분명하게 말을 하지 않는다면 경종(景宗)의 지극하신 덕을 손상하게 될까 싶었고, 또 정석삼(鄭錫三)의 말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기에 그 즉시 제신(諸臣)들에게 환하게 말해 주었으며, 또 《가융문견록(嘉隆聞見錄)》에 대하여 분부한 것이 있었거니와, 지난번 ‘내가 선조(宣祖)의 일을 송전(誦傳)한 것이 도리어 하성군(河城君)638)                   때만 못하게 했었느냐?’고 한 말은 역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붕당(朋黨)의 화 때문에 장차 나라를 망치게 될까 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기필코 조화(調和)해 가려고 하시므로, 신들이 딴 일에 있어서는 비록 옳음과 그름을 말해야 할 것이 있더라도 모두 탕척(蕩滌)해버릴 수 있습니다마는, 지켜 온 오직 이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특히 중요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내가 영상(領相)과 경(卿)이 조정에 있은 다음에야 일을 해 가게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왕안석(王安石)639)                  이 한 말이니 인용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이 일은 큰 관계가 있으니, 어찌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마땅히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서 경의 몸을 부호(扶護)하겠으니, 가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안정하여 함께 탕평(蕩平)을 해 가야 한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곧지 않으면 도(道)가 실현되지 않는 것이니, 청컨대 신이 바로잡겠습니다. 영중추부사는 임인년640)                  에 흔들림을 모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내면으로 더없이 위태하고 절박한 지경을 겪고 계시는데도 전연 알지 못하고서 밖에서 토역(討逆)만 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완화(緩和)와 준엄(峻嚴)을 구분해서 종사(宗社)가 힘입게 되었으니, 그의 심사(心事)에 있어서는 국가에서 마땅히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번은 흉악한 역적들이 구실(口實)을 삼게 된 다음이라 마땅히 마음을 돌려 완화해 갈 도리를 생각해야 할 것인데도 마침내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신(臣)이 개탄(慨歎)하는 바입니다. 이 이후부터는 지나간 일들을 선천(先天)으로 돌리고 다시는 거론하지 아니하여 반사(頒赦)하는 글에 이른바 ‘매상(昧爽) 이전의 일은 모두 용서해 준다.’고 한 규례와 같이 하여, 길이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조현명이 신을 애매(曖昧)하게 여기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변란 뒤에도 완화하지 않고 있다는 말들은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입니다. 정미년 이후에는 지금의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처음으로 전관(銓官)의 자리를 담당했었는데 정목(政目)의 사이에도 역시 주객(主客)의 차이가 있게 했었고, 또 전하께서 처분하실 적에도 또한 주객의 차이가 있으셨습니다. 신은 10월 말에야 비로소 정승의 직에 출사(出仕)하였다가 다시 곧 도로 들어가 있었고 지월(至月)641)                   초승에 다시 출사했었는데, 묘당(廟堂)의 천망(薦望)이 또한 그전의 투식(套式)대로 답습(踏襲)하기를 면하지 못했었고, 지난해의 변란 이후에 복상(卜相)642)                  할 때에도 정승이란 이름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써서 입계(入啓)했었습니다. 이조 판서를 천망(薦望)할 때에 있어서도 또한 어찌 청탁(淸濁)이 없겠습니까마는, 수대로 써서 입계하였으며, 오직 이재(李縡)에 있어서는 앞서의 상소가 임징하(任徵夏)와 유사(類似)한 데가 있어 당론(黨論)의 병폐가 있었기 때문에 유독 빼 놓았었습니다. 그 뒤의 천망 때에도 또한 모두 그대로 통용(通用)했었으니, 이는 곧 실상(實狀)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본사(本事)에 있어서 이미 양해하지 않았고 보면 비록 천망(薦望) 때에 간혹 소통(疏通)을 한다 하더라도 어찌 참으로 풍원(豐原)643)                  의 말과 같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이 전후의 일에 있어서 실수한 것이 많았습니다마는, 큰 관계가 있는 고비에 있어서는 감히 사생(死生)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비록 부월(鈇鉞)이 앞에 당하더라도 기필코 지키려고 해 왔는데, 이러한 큰 일에 있어서 어찌 자주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송인명과 조현명을 그르다고 여깁니다. 을사년644)                   이후에 공산(公山)에 있을 때에 김용택(金龍澤)과 이천기(李天紀) 등에게 추증(追贈)했다는 말을 듣고서 진실로 마음에 놀랐었습니다. 이제는 이미 환수(還收)해 버렸습니다만, 그때에 추증하기를 청한 사람들에게 어찌 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이번의 대처분(大處分) 한 가지 일 이외의 것에 있어서는 크게 탕척(蕩滌)해 주어 모두가 유신(維新)에 참여하여, 편당(偏黨)하는 풍습을 제거하고 탕평(蕩平)의 다스림을 이룩하는 것이 신의 본의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두 흉악한 무리들이 몰래 장세상(張世相)과 연락한 것이 비록 그런 사실이 있은 것이기는 하지만, 묵세(墨世)에 있어서는 백망(白望)의 족속(族屬)이라고 핑계하여 필경에는 형장(刑杖) 아래 죽였으니, 어찌 잔인하고 혹독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 한없이 흉측하고 극도로 악독한 목호룡(睦虎龍)은 어찌 살려야 할 역적이어서 마침내 봉작(封爵) 증직(贈職)하여 군(君)이라고 부르게 하였던 것인가? 이이명(李頤命)은 본래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내가 알고 있는 바이고, 또한 선왕조(先王朝)에 6년 동안이나 신임을 받았었으며 시탕(侍湯)하는 공로도 적지 않았었다. 설사 그의 자제(子弟)들이 장세상과 서로 내통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깊은 약원(藥院)에 있으면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손바닥에 양자(養字)를 썼다.’는 말은 더욱 근거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때에 있어 누가 국가를 붙잡아 갈 수 있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이이명이 곧 그때의 제1인이었으니, 그의 자(字)를 써서 보이었음은 곧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비록 오늘날로 말하더라도 경(卿)은 곧 국가의 원보(元輔)이니, 누가 혹시 묻게 된다면 경의 명자(名字)를 써서 보여 주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또 정유년의 독대(獨對) 때의 일에도 운운(云云)한 바가 있었으나, 그때에 내가 도총부(都摠府)에 있으면서 대자(大字)로 ‘고죽청풍(孤竹淸風)’ 네 글자를 써 주었었으니 내가 진실로 뜻이 있었던 것이고, 그날에 약원 제조(藥院提調)가 ‘우국망가(憂國忘家)’ 네 글자를 썼다고 들었으니, 이에 있어서 그는 자기(自期)한 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창집(金昌集)은 비록 평소에 마음이 옹졸한 병통이 있기는 했지만 또한 어찌 반역을 할 사람이겠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이이명은 곧 신(臣)의 지친(至親)입니다. 평소에도 과연 지혜가 있는 사람이기는 합니다마는, 신이 다투게 된 바는 오직 이 한 가지의 일입니다. 송인명과 조현명 등 제인(諸人)은 당초에 의견이 대략 신(臣)과 같았었기 때문에 정미년 가을에 명백하게 진달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제 와서는 그처럼 변동(變動)하고 있습니다. 당초에 진달할 적에는 어찌하여 그처럼 경솔하였고 이제 와서는 변개하기를 또한 어찌 그리 급급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래서 신이 두 신하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또 예로부터 전연 시비(是非)가 없는 나라는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변화시키려고 하는 바는 곧 1백 년이 넘는 고질(痼疾)인데 반복해서 악화(惡化)되어 변화시키기 어렵게 되었으니, 지켜 오던 바를 자주 변경하여 엄격하고 굳건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변화시켜 갈 가망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짐작(斟酌)해 보지 않고 하는 것이겠는가?"
하고, 이광좌에게 탑전(榻前)으로 다가오도록 명하였다. 이광좌가 나아가 부복(俯伏)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앞으로 더 가까이 오라."
하자, 이광좌가 더 나아가 부복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어나서 서라."
하였다. 이광좌가 일어나서 서자, 임금이 이광좌의 손을 잡고서 이르기를,
"오늘날의 이 거조(擧措)는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다. 나라를 망치게 될 화가 눈앞에 박두해 있다. 지난해에 변란을 평정한 것이 국가를 재조(再造)해 갈 공로가 있은 것이 아니고, 반드시 탕평(蕩平)하는 다스림을 이룬 다음에야 국가의 중흥(中興)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만일에 영상(領相)과 경이 없다면 일을 해 갈 수 없는데, 어제는 영상이 들어왔고 오늘은 경이 들어왔기에 나의 마음에 마치 소득이 있는 것과 같게 되었다. 또한 경도 각오(覺悟)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내가 더욱 차마 경을 놓아버릴 수 없으니, 통쾌하게 머물러 있는다고 승낙하는 것이 좋겠다."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물러나서 진달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영상이 이미 조정(調停)해 가기로 승낙하여 나의 마음과 근력을 펴주게 되었다. 또 경은 약원(藥院)의 소임을 띠고 있어서 매양 나의 질병을 근심해 왔었으니, 경이 이제는 되도록 서울에 머물러 있으며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면 이는 곧 과인(寡人)의 몸을 보호해 주는 도리이다. 자신도 자기의 소유(所有)가 아니라는 의리를 가지고 통쾌하게 머물러 있기로 승낙하라."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성상께서 이처럼 분부하시는 말씀을 받들었으니, 마땅히 삼가 아직은 머물러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직은 머무른다고 대답하지 말고 흔쾌하게 머물러 있기로 승낙하라."
하매,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머물러 있겠습니다."
하였다.

 

전 영상(領相) 정호(鄭澔)에게 직첩(職牒)을 주고, 전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을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정호는 평소에 의논하는 말이 편당하는 풍습에 병이 들어 있음을 내가 마음에 항시 통탄스러웠기 때문에 정미년645)  의 처분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호는 노쇠(老衰)가 특히 심한데, 지난해의 망령되고 경솔했던 거조는 노쇠한 사람으로는 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민진원은 지난날의 소위가 망령되기는 정말 망령된 것이었으나, 그의 시말(始末)을 내가 알고 있은 지 오래이다. 매양 일에 있어 솔이(率易)한 병통이 많았으니 이도 또한 당습(黨習)에서 말미암았으나, 그의 고충(苦衷)에 단정코 딴마음이 없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오늘날에 시·원임 대신(時原任大臣)들을 한 전당(殿堂)에 모아 면유(面諭)하여 분명하게 옳음과 그름을 깨우치게 하여 잘못을 바로잡아 주고 침체(沈滯)를 펴 주는 날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처분을 하는 도리가 있어야 한다. 전 영중추부사 민진원에게는 서추(西樞)646)  의 직질(職秩)을 도로 주어, 부부인(府夫人)을 받들고 경외(京外)에서 우유(優遊)하게 하라. 이는 곧 나의 추원(追遠)하는 뜻이다. 귀양갔다가 풀린 사람 정호에게도 직첩을 도로 주라."
하였다.

 

9월 3일 갑술

김취로(金取魯)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송필항(宋必恒)을 집의(執義)로, 이정제(李廷濟)를 대사헌(大司憲)으로, 권지(權贄)와 양득중(梁得中)을 장령(掌令)으로, 김상익(金尙翼)을 지평(持平)으로, 이춘제(李春躋)를 사간(司諫)으로, 박필기(朴弼琦)를 헌납(獻納)으로, 정우량(鄭羽良)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열조보감(列朝寶鑑)》 편찬을 계속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도록 하여, 드디어 실록(實錄)을 고찰해 낸 다음에 문학(文學)이 있는 사람들을 각별히 가리어 거행하도록 명했다.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영상(領事) 이집(李㙫)이 유최기(兪最基)와 윤광의(尹光毅)의 상소를 들어 인책(引責)하고, 또 아뢰기를,
"대관(臺官)의 말은 꺾어버릴 수 없는 법이니, 유최기와 윤광의에 대한 삭출(削黜)을 도로 정지하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한 무리들에 있어서는 바로 죄주기를 청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과당하게 자신이 인책하고 있으니, 이러고서 어떻게 나라의 꼴이 되겠는가? 처분은 경(卿) 등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기에,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것은 내가 진실로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사간 이춘제(李春躋)가 앞서 아뢴 일을 전주(傳奏)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합문(閤門)을 닫았을 때에 양사(兩司)가 마땅히 배달(排闥)하고 들어가 규합(叫閤)하는 일을 했어야 하는데 단지 대신과 유신(儒臣)에게만 맡겼으니, 그때의 양사들을 외방(外方)에 있은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파직하기 바랍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강(朝講) 때에 양사(兩司)의 변통함을 후사(喉司)647)  가 잘 거행하지 못하여 너무도 늦어지게 만들었으니, 해당 승지를 엄중하게 추고(推考)하기 바랍니다."
하니, 모두를 아뢴 대로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저번날 처분을 내리실 때에 대신과 경재(卿宰)들만 입대(入對)하였고 대간(臺諫)은 참여하지 못했었습니다. 일이 옳고 그름을 논할 것 없이 이는 어떠한 처분이라고 대간은 참여하여 듣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오래도록 합문(閤門)을 닫아버렸던 나머지에 비로소 입시(入侍)하도록 윤허하셨고 보면 대간으로서는 마땅히 서로 데리고 청근(請覲)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이틀날에는 마땅히 대각(臺閣)에 나아가 자핵(自劾)했어야 할 것인데, 채팽윤(蔡彭胤)이 단지 강필경(姜必慶)을 신구(伸救)하기만 하였고 그 나머지는 자열(自列)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공론이 자연 대간이 직책을 잃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간신(諫臣)들이 합문을 닫으셨을 때에 청대(請對)하지 않은 대신(臺臣)들을 죄주기를 청한 것은 사체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일에 있어서도 논급(論及)한 바가 없었으니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선(承宣)의 말이 진실로 옳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9월 4일 을해

신무일(愼無逸)을 승지(承旨)로, 윤양래(尹陽來)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유숭(兪崇)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수찬 유겸명(柳謙明)의 상소를 합문(閤門) 밖에서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였다. 유겸명의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예로부터 신하된 사람으로서 과연 염치(廉恥)를 상실하고 기탄(忌憚)함이 없는데 능히 신하의 절조(節操)를 보존하게 된 사람을 보셨습니까? 저 이광좌(李光佐)가 진 죄명(罪名)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전일에 이양신(李亮臣)이 열거(列擧)한 12조항은 신하된 사람의 지극한 죄상 아닌 것이 없었거니와, 그 뒤에 삼사(三司)의 제신(諸臣)들이 죄를 들어 성토(聲討)한 것이 또한 몇 사람이었습니까? 한번이라도 혹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이미 천지(天地)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지나치게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벌을 가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가 진실로 일분(一分)이라도 인간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버젓이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아 조금도 징계하고 두려워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그는 몰래 김일경(金一鏡) 박필몽(朴弼夢)의 흉악한 논을 주장하여 지난해의 변란을 빚어냈고 역적들의 공초(供招) 내용에 나온 제적(諸賊)들을 극력 비호(庇護)하여 뒷날의 화근(禍根)을 심었으며, 그 밖에 천만 가지 흉악을 하나 하나 들 수도 없습니다. 또 이번의 처분 때에 연석(筵席)에서 분부하신 것으로 보더라도 그의 죄안(罪案)은 낭자(狼藉)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진실로 국가의 전법(典法)이 행해진다면 그가 어찌 지금까지 버젓이 방 안에서 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이제는 연명하여 올린 차자(箚子)에 의리가 다시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지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고 보면, 평소에 사신(四臣)의 차자가 반역을 한 것이라는 논을 주창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했던 사람들은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위충현(魏忠賢)648) 같은 위권(威權)과 김안로(金安老) 같은 방자함으로도 죄명(罪名)이 드러나게 되고 공론이 이미 발동한 다음에 당해서는 오히려 또한 두려워하여 떨면서 죄를 받으며 죽음을 면하려고 하기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광좌에 있어서는 죄상을 성토하는 글이 관서(官署)에 잇달게 되고 미안스럽게 여기시는 분부를 연석(筵席)에서 내리시게 되었는데도 태연히 마음 쓰지 않으며 오히려 으르렁거리는 짓을 마구 했습니다. 당초에 비록 도성(都城)에서 나섰다고 했었지만 강 위쪽에서 배회(徘徊)하여 마치 기다리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지극히 불측스러운 일입니다. 이번에 처분이 내리는 날에 당하여는 죄상(罪狀)이 더욱 드러나게 되자 대명(待命)한다고 핑계하고서 어느새 돌연(突然)히 들어왔으니, 신(臣)은 무슨 꼴이 이런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도성 안 사람들의 심정이 그가 장차 들어온다는 것을 듣고서는 놀라워하고 의아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분주하게 서로들 하는 말이 ‘이광좌가 온다.’고 했으며, 더러는 ‘안온다.’고 하기도 하고, 또한 ‘이광좌 가 과연 들어왔다.’고 했으며, 더러는 ‘필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전일에는 종백(宗伯)649) 을 보내어 수서(手書)를 내리어도 오지 않던 사람이 이번에는 어찌하여 까닭도 없이 올라왔으며, 전일에는 고을의 감옥에서 석고 대죄(席藁待罪)하던 사람이 오늘에는 어찌하여 금부(禁府)에서 대명(待命)하는 것입니까? 진실로 풍병(風病)이 들어 천성(天性)을 잃어버렸거나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단코 이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까 보건대, 한 대신이 고자세(高姿勢)로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거드름 피우면서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과연 이광좌이었습니다. 거리의 아이들이 손가락질하고 저자의 사람들이 타기(唾棄)하기를 마치 하나의 큰 변괴를 보듯이 하였고, 허허하며 탄식하는 사람의 말이 ‘대신으로서 이처럼 염치(廉恥)가 없게 되었으니, 지난 봄의 변란(變亂)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아! 이광좌에게 염치를 책망함은 또한 너무나 용서해 주는 것인데 환득 환실(患得患失)하여 하지 못할 짓이 없었으니, 작게는 종기(腫氣)를 빨고 치질(痔疾)을 핥으며 크게는 변란을 일으켜 반역하게 되는 짓이 모두가 염치가 없는 가운데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광좌가 입대(入對)할 적에는 여혜경(呂惠卿)650) 의 체읍(涕泣)을 가장하여 군부(君父)께서 애련(哀憐)해 주기를 얻어내고, 조정에 있을 때에는 이임보(李林甫)651) 처럼 흉악한 간계를 농간하여 온 세상을 견제(牽制)해 가는 술수(術數)를 부리고 있었으니, 그의 평생에 재주 부리는 심술(心術)이 본래부터 이와 같았습니다. 이번에 방자하게 마구 들어왔음도 또한 반드시 위로는 군부를 우롱(愚弄)하고 아래로는 조정의 공론을 억눌러, 그의 화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마음을 이루어 가려는 것입니다. 그의 거조(擧措)를 보면 염치를 가지고 논할 수가 없고 그의 두세(頭勢)를 보면 또한 탄핵(彈劾)으로는 제어할 수가 없으니, 어찌 어그러진 것이 아니고, 어찌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이번 행동은 진실로 그의 꾀가 작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보면 비록 온 나라가 일어나 공격한다 하더라도 단정코 그가 조금도 동념(動念)하지 않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臣)이 권흉(權凶)은 방자해지고 주세(主勢)는 외롭고 위태함을 목격(目擊)하고서 충성과 분개가 격렬해지기에 대략 이와 같이 논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혁연(赫然)히 분발하시고 확연(廓然)히 건단(乾斷)을 내리시되, 우선 그를 척출(斥黜)하여 눈앞의 근심거리가 풀리게 하소서."

하였다. 이광좌 금오(金吾)652) 에서 대명(待命)하고 있었으므로, 임금이 승지를 보내며 가서 효유(曉諭)하여 그와 함께 오도록 하니, 이광좌가 그대로 도성(都城)에서 나가버렸다. 유겸명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니, 유겸명이 입대(入對)하여 우러러보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우러러보는 사람들을 엄중하게 신칙하도록 했었는데도 승정원에서 신칙하지 않은 것이냐?"

하매, 승지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신칙하도록 하신 영이 조지(朝紙)에 났었는데, 어찌 승정원에서 신칙하기를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일찍이 시종(侍從)으로서 드나들었거니와, 네 마음에 국가가 보존하게 되는 것이 좋겠느냐 국가가 멸망하게 되는 것이 좋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소신(小臣)이 성심으로 국가가 하루라도 더 부지(扶持)하게 되기를 바라 왔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국가가 중요하냐 당론(黨論)이 중요하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국가와 당은 경중(輕重)을 어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마음에도 또한 국가가 당보다 중요함을 알고 있느냐? 피차가 노론(老論)이니 소론(少論)이니 하는 논은 필경에는 마땅히 군부(君父)를 시해(弑害)하게 되고야 말 것이다. 내가 반드시 탕평(蕩平)에 힘써 세도(世道)를 조정(調停)해 가려고 하는데도 너희들이 마침내 그대로 받들지 아니하여 내가 병이 나게 된다면, 너희들의 마음에 편안하겠느냐?"

하매, 서종옥이 아뢰기를,

"만일에 교회(敎誨)하고 책망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면 마땅히 조용하게 개유(開諭)하셔야 하고, 말씀하시는 사이에 있어 마땅히 이렇게 하지 않으셔야 할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말이 비록 그렇게 되기는 했다마는, 당초에 언성(言聲)과 기색(氣色)을 높이려 한 것은 아니다. 옛사람의 말이 ‘진정표(陳情表)653) 를 읽고도 울지 않는 사람은 효자(孝子)가 아니요, 출사표(出師表)654) 를 보고도 울지 않는 사람은 충신(忠臣)이 아니라.’고 하였다. 내가 전일에 영상(領相)에게 말하기를, ‘내가 심력(心力)을 허비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었거니와, 유겸명만이 아니라 피차(彼此)를 막론하고 군부(君父)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그 편당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은 것은 군부를 친애(親愛)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벼슬을 얻지 못해서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잃게 될까 근심하느니라.’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주해하기를, ‘작게는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게 되며 크게는 부모와 임금을 시해(弑害)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으니, 성현(聖賢)들의 교훈이 과격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대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전번에 이양신(李亮臣)의 상소에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였으니, 역시 하나의 급서(急書)이었었다. 그때에 내가 국문(鞫問)하려고 하다가 옥당(玉堂)의 제신(諸臣)들이 모두 나서 극력 간쟁(諫爭)했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했었다. 이번에 네가 진달한 말을 마땅히 조목조목 하문(下問)하겠는데, 네가 능히 분명하게 답변을 한다면 남을 무함한 율(律)을 면하게 될 것이거니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게 되면 마땅히 남을 무함한 율을 받게 될 것이다. 너의 상소에 ‘국가의 안전과 위태로운 기틀에 관계된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영중추부사가 들어온 것이 무슨 국가가 위태로워질 것이 있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분부가 더없이 준엄하시어 거의 국문(鞫問)과 같으니, 소신(小臣)이 황송하여 진달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신은 생각에 군자와 소인의 진퇴(進退)와 소장(消長)은 국가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관계가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누가 군자이고 누가 소인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광좌는 소인이고 신들은 군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군자도 또한 등분(等分)이 있는데, 너처럼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무슨 군자이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옛적에 좌웅(左雄)655)  서숙(徐淑)에게 강박하여 묻기를, ‘안연(顔淵)은 한 가지를 듣고는 열가지를 알았었다. 효렴(孝廉)656) 은 한 가지를 들으면 몇 가지를 알게 되는가?’라고 하매, 서숙이 답변하지 못했었습니다. 성상께서 이처럼 강박하여 하문하시니, 소신이 다시는 진달할 것이 없게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大臣)은 한 사람의 아래이고 만 사람의 위이기에 그의 이름만을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영중추부사의 관작(官爵)이 그대로 있고 죄를 가한 일이 없었는데, 어찌 성(姓)을 써 넣을 수 없는 악역(惡逆)이 있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중니(仲尼)의 문하에서는 삼척 동자(三尺童子)들도 오패(五霸)를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겼었습니다. 노론(老論)의 가문에서는 비록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광좌’라고 부르는 일이 없고 혹은 ‘광좌’라고 하거나 혹은 ‘’이라고 합니다. 신도 역시 집을 있을 적에는 항시 광좌라고 해왔으므로 이번에 군부(君父)께 말씀드릴 적에도 또한 평소에 말해 오던 대로 말씀드리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군부(君父)의 앞에서 어찌 노론들의 사사로이 편당하는 풍습을 그대로 앙달(仰達)할 수 있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옛사람도 또한 ‘필단(筆端)은 부월(鈇鉞)과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전후에 광좌를 논척(論斥)한 사람이 유독 신(臣)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번은 그전과는 다르다. 이양신(李亮臣)이 말한 12조목을 너도 모두 옳다고 여기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은 감히 이양신의 12조목을 조목마다 명백하게 되었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른바 ‘몰래 김일경(金一鏡) 박필몽(朴弼夢)의 흉악한 논을 주장했다.’고 한 말은 급서(急書)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김일경 박필몽의 논은 곧 광좌의 논이고, 광좌의 논은 곧 김일경 박필몽의 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역적들의 공초(供招) 내용에 나온 제적(諸賊)들을 극력 비호했다.’는 말은 누구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이명언(李明彦)·이진유(李眞儒)·홍계일(洪啓一)·남태적(南泰績)과 같은 무리들이 이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남태적도 또한 영중추부사가 안치(按治)할 때의 일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가 당국(當國)한 대신이고 위관(委官)이 된 몸으로서 엄하게 다스리지도 끝까지 핵실(覈實)하지도 못했고 보면 의금부의 당상(堂上)이 역적들을 비호하여 느슨하게 다스리는 것을 또한 어찌 하나하나 나무라고 책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신축년657)  임인년658) 의 옥사(獄事)는 단련(鍛鍊)해서 구성한 것으로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오직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기에, 지금에 와서는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지난해의 일에 있어서는 내가 이렇게 될까 염려되기에 피로한 것도 잊어버리고서 한여름에 친국(親鞫)을 했었다. 임금이 친국을 하는 것은 천고(千古)에 드문 일이고, 옥사의 실정을 처음에서 끝까지 하나하나 친히 안찰(按察)하여 한 것인데, 네가 감히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협잡한 것이라고 여겨, 군부(君父)가 친국한 것에 있어서도 의심을 하며 느슨해진 옥사라고 하는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 자신이 위관(委官)이 되었으니, 군부(君父)께서 비록 혹시 느슨하게 다스리시더라도 만일 그가 구핵(究覈)하여 통렬하게 다스렸었다면 무슨 안될 것이 있겠습니까? 권익관(權益寬)을 짐작하여 처결한 것이 또한 어찌 역적을 비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권익관의 일에 있어서는 영중추부사가 너희의 무리들에게 쫓겨난 뒤의 일이었다. ‘강 위쪽에서 배회(徘徊)하고 있어 불측스럽다.’고 했는데, 어떻게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만일에 광좌가 과연 칭병(稱兵)하여 대궐을 범하게 되었었다면 신이 마땅히 곧장 대궐 안으로 들어가 상변(上變)했었을 것입니다. 무엇하러 ‘염치(廉恥)를 상실했다’ 느니 ‘기탄(忌憚)이 없었다’ 느니 하는 등의 말들로 항소(抗疏)를 올려 탄핵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무슨 일이고, ‘불측스럽다.’고 한 것은 무슨 일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가 낮이나 밤이나 기다리고 있던 바는 곧 도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번에 돌연(突然)히 들어오게 된 것도 기다리고 있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마음은 진실로 불측스러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조태구(趙泰耉) 북문(北門)으로 가만히 들어왔을 적에 박상검(朴尙儉)과 서로 호응한 일이 있었다. 이번에 영중추부사도 군상(君上)과 서로 호응하게 된 것이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의 죄명(罪名)이 저러하므로 결단코 들어올 수 없는데, 까닭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돌연히 들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까닭이 없은 것이 아니다. 이번에 처분이 있은 다음에 자신이 과오를 알아차리고서 들어온 것이다. 대개 각오(覺悟)가 있은 것인데, 어찌하여 돌연히 들어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합문(閤門)을 닫으셨던 날에 당하여 ‘대죄(待罪)하기 위하여 왔다.’고 했다면 오히려 혹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마는, 이번에 졸연(卒然)히 들어온 것은 무슨 의거한 데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찌하여 돌연히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없겠습니까? 궐한(厥漢)659) 은 오직 환득(患得)하고 환실(患失)하며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꾸짖기를,

"네가 어찌 감히 대신을 ‘궐한’이라고 하는 것이냐?"

하매, 서종옥이 아뢰기를,

"대신은 죄가 있어도 그 죄만 논하고 말아야 하는 법인데, ‘궐한’이라고 하기까지 하였음은 지극히 무엄(無嚴)한 짓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른바 ‘도성 안의 인심이 경동(驚動)하고 의구(疑懼)하여 분주하게 움직인다.’고 한 것은 도적들이 어디에서 오게 된다는 것인가?"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광좌가 몸에 허다한 죄명(罪名)을 짊어지고 있어 정상(情狀)이 편안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합문(閤門)을 닫으셨을 때에도 마침내 들어오지 않았다가 이번에 돌연히 들어오자 인심이 괴이하고 놀랍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어, 모두들 하는 말이 ‘그 정승이 또한 들어왔다는 말인가?’라고 했습니다. 전후에 사람들의 말이 어떠하였는데 오히려 들어왔으니, 전혀 염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미워하지 않는 대신은 비록 이러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네가 반드시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비록 신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일에 이러한 일이 있게 된다면, 어찌 신이 말하지 않겠습니까? 노론(老論)에는 원래 이런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앞에서 어찌 노론이나 소론의 명칭을 거론하는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말은 성상께서 내리신 분부에도 또한 있었기에 신도 역시 말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죄를 주지 않게 된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불울(拂鬱)해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언성을 높여 이르기를,

"불울하게 되기 때문에 역적이 생기게 된 것인데, 네가 어찌 감히 군부의 앞에서 ‘불울’ 두 글자를 내놓는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들이야 어찌 반역하는 짓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천기(李天紀) 김용택(金龍澤)의 무리를 벗어나게 하려고 한 것은 반역하는 짓이 아니겠느냐? 임금의 위세(威勢)를 어찌하여 ‘외롭고 위태하다.’라고 한 것이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인주(人主)가 묘연(眇然)한 몸 하나를 만백성의 위에 의탁하고 있으면서 무슨 기력(氣力)과 위세로 천하의 만백성을 총제(摠制)해 갈 수 있겠습니까마는, 대개 도리(道理)란 것이 있고 기강(紀綱)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대부(士大夫)들이 염우(廉隅)를 지키고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여 의리가 아닌 일은 비록 죽게 되더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기강이 세워지게 되어, 임금이 능히 만백성을 총제해 가며 외롭거나 위태로운 염려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광좌처럼 염치도 없고 비웃음과 욕설도 돌아보지 않으며 권력(權力)을 탐하고 세도(勢道)를 좋아하여 방자하고 기탄도 없이 돌연히 들어오기를 일삼게 된다면, 장차 하지 못할 짓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다른 신하들도 모두 이렇게 된다면 임금이 믿고 힘입을 데가 없을 것이니, 어찌 외롭고도 위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너와 말을 하기는 목석(木石)이나 허수아비와 말을 하기나 다를 것이 없다마는, 내가 마땅히 처음부터 끝까지 말을 하겠으니, 네가 잘 들어보아라. 이번에 연석(筵席)에서 말한 것을 보았었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그저께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을 보러 갔다가 연석에서 한 말 1통을 구득해 놓았기에 신이 비로소 보기는 했습니다마는, 조용히 심역(尋繹)해 보지 못하여 대략만 알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소위 피차(彼此)의 당목(黨目)이 이미 생긴 뒤에는 서로 의심이 생기게 되었다. 지난날의 유봉휘(柳鳳輝)의 일을 오늘날은 처분을 한 뒤이기에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소론들은 노론이 경종(景宗)에게 해를 끼칠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에 유봉휘도 또한 그렇게 의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론이나 소론이나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겠느냐? 노론과 소론이 시기와 의심을 쌓아가며 갈수록 서로 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무함하기 때문에, 내가 또한 그대로 용서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봉휘의 일에 있어서는 주벌(誅罰)하기를 청한 것이 또한 의리가 있는 것이었고, 건저(建儲)의 초두(初頭)에 당해서는 조정의 사체에 있어서 진실로 마땅히 이렇게 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경여(李敬輿)에 비하면 어찌 서로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에는 오히려 원손(元孫)이 있었기 때문에 인조(仁祖)께서 처분하여 벌을 내리셨어도 치우친 논이 되지 않았지만, 이는 당론(黨論)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효종(孝宗)께서 이경여를 대우한 일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경종 때에는 유봉휘를 베도록 논쟁하는 것이 옳았겠지만 나에게 이르러서는 옳지 못한 것이니, 너희들도 이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의거할 데가 있을 것이다. 지난날에 대신들을 남김없이 도륙(屠戮)했었다. 그들은 비록 이러했었지만 너희들은 어찌 차마 다시 그럴 수 있겠는가? 조태구(趙泰耉) 최석항(崔錫恒)을 처음에는 내가 조금 좋게 여겼었는데, 끝에 와서 보건대, 혼모(昏耄)가 심했었다. 그러나 또한 어찌 반역을 하겠는가?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 갑술년660) 의 일에 불만이 있었고, 최석정(崔錫鼎) 윤지완(尹趾完) 신사년661) 의 일을 부족하게 여겨, 출향(黜享)하기를 발론(發論)하기까지 하였음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목호룡(睦虎蘢)이 처음에는 노론에 들어갔다가 다시 소론에 붙었엇다. 그러나 유래한 근본이 있은 것이니, 어찌 공중(空中)에서 나오게 된 것이겠느냐? 너희들은 또한 을사년662)  병오년663) 이후에 이런 무리들을 잘라내어 버리고 다만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하기를 청한 것으로써 말했다면, 어찌 당당한 정론(正論)이 아니었겠느냐? 조태구 최석항이 죄가 없지 않기 때문에 추탈(追奪)하였으며, 영중추부사 이광좌(李光佐)와 판중추부사 조태억(趙泰億)도 마침내 김일경(金一鏡)을 잘라내어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특별히 삭출(削黜)하게 되었음은 이래서이었다. 지난해의 변란 때에 심유현(沈維賢)의 음흉한 말이 진실로 흉악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김성절(金盛節) 서덕수(徐德修)도 또한 어찌 흉악한 말이 없었느냐? 이의천(李倚天) 이천기(李天紀)의 무리에게 추증(追贈)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노론들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느냐? 정호(鄭澔)도 역시 혼모(昏耄)하여 을사년 초두에 먼저 서덕수를 신설(伸雪)해 주기를 청하였고,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은 또한 편당하는 논이 심하여 서덕수를 신설해 주었을 때에 ‘전하께서 내리신 처분은 진실로 합당하나 서종일(徐宗一)이 진달한 상소는 외월(猥越)한 것이다.’라고 했었으니, 내가 영중추부사 민진원의 심사(心事)를 알게 된 것은 여기에 있다고 여겼었다. 소하(疏下)의 오적(五賊)664) 중에 박필몽(朴弼夢)은 이미 복주(伏誅)되었고 이명의(李明誼)는 형장(刑杖)에 죽었다. 나도 또한 이진유(李進儒)를 미워했으니 너희들이 베려고 했던 것이 진실로 옳기는 했지마는, 내가 또한 그렇게 하려는 심술(心術)은 바르게 여기지 않았었다. 이진유를 잡아 왔다가 도로 놓아 주었던 것은 또한 영중추부사가 그를 애석하게 여겨서가 아니고 실제는 내가 놓아 주게 했던 것이다. 나 역시 이진유가 치우친 논을 하는 것은 미웠지만, 반역한 자가 아닌데 어찌 반역으로 논죄(論罪)할 수가 있겠는가? 서종하(徐宗廈) 윤성시(尹聖時)는 진실로 족히 책망할 것이 없었거니와, 이명언(李明彦)도 역시 글렀었으니 소견이 넓지 못했었다. 그러나 또한 반역을 한 사람은 아닌데도 너희들이 기필코 반역한 사람 속에 넣어 죽이려고 했으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다. 요망한 박상검(朴尙儉)의 일이 드러난 다음에 너희들이 의심을 가지는 것을 내가 또한 그르게 여기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소론들이 이미 노론을 의심하고 있으니 노론들이 소론을 의심하는 것은 또한 이상할 것이 없어서 이다. 지난해의 변란 이후에는 영중추부사가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는 여부(與否)를 알게 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보지 못했지만 보게 된 사람이 또한 많을 것이다. 이번에 돌연히 들어온 것도 또한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연석(筵席)에서의 말이 이미 나간 다음에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알아차리고서 도성(都城) 동쪽에서 대명(待命)하고 있다가 그대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가 처음에는 연명하여 올린 차자(箚子)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한 말이 쓰임받지 못했기 때문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본시 고집스러운 사람인데 한 말이 쓰임받지 못했으니 어찌 한 걸음의 땅이라도 들어오려고 했겠는가마는, 오늘날 들어온 것은 또한 스스로 깜짝 놀라 깨우치게 된 것이니, 그렇게 짐작해야 한다. 대저 사람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반복(反覆)해서 성찰(省察)하며 깨달아 간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는 법이니, 사람들이 모두 그렇기만 한 것이라면 옛사람들이 무엇하러 오자(悟字)를 만들었겠는가? 너희들의 방법은 가져다가 비유할 만한 것이 있으니, 강도와 절도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같이하는 것과 같은 유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충성과 믿음이 있고 편당하지 않으나 소인은 편당을 하고 충성과 믿음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편당만 하고 충성과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네가 ‘노론에는 역적이 없지만 소론에는 역적이 있다.’고 하는데, 네가 그 근본을 생각해 보라. 노론에도 또한 어찌 역적이 없었느냐? 목호룡(睦虎龍) 이천기(李天紀)의 무리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어찌 노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 만석군(萬石君)665) 이 밥상을 대하여 먹지 않으매 모든 아들들이 복죄(服罪)했었고, 한연수(韓延壽)666) 가 합문(閤門)을 닫고서 잘못을 생각하고 있으매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복종(服從)하였다. 내가 비록 믿고서 감동되게 하는 정성이 없기는 했다마는, 너희들이 어찌 차마 다시 편당하는 논을 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또한 전생(前生)의 일로 알고 다시는 편당하는 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있어서 또한 곡진하게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미 관작(官爵)을 복구해 주었고 두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관작을 복구하지 않았지만, 저번에 내가 영상(領相)에게 말하기를, ‘들어온 다음에 하더라도 늦지 않다.’고 했었으니, 너도 또한 반드시 듣게 되었을 것인데, 너희들이 지금도 오히려 밖에 그대로 있어, 의를 펴게 된 다음에도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음은 무슨 까닭이냐? 너희들 자신이 성무(聖誣)667) 를 가려야 된다고 하면서도 반대로 도리어 성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노론이나 소론이나 다 같이 난역(亂逆)을 했다고 여기십니다마는 심유현(沈維賢) 이유익(李有翼)의 무리가 김성절(金盛節) 서덕수(徐德修)의 공초(供招)로써 구실(口實)을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지난봄의 변란도 또한 김성절 서덕수에게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부 김성절 서덕수에게서 나왔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김일경(金一鏡)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하였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당론(黨論)만 하고 몸은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소신(小臣)이 또한 노모(老母)가 있고 독신으로 형제간도 없습니다마는, 의리의 관두(關頭)나 국가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관계가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비록 죽게 된다 하더라도 돌아 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당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신축년과 임인년의 옥사(獄事)에 대해서 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에 단련하여 무옥(誣獄)이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모두 단련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에 한 가지 옥사가 3년 동안이나 연장되었었으니 진실로 단련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게 되었지마는, 다만 바로 단련한 것이라고만 해도 안된다. 을사년과 병오년에는 노론들의 일이 혼란했었고, 신축년과 임인년에는 소론들의 일이 혼란스러웠다. 이는 바로 속담에 ‘내 코가 석 자나 빠졌다.’고 하는 말과 같게 된 것인데, 너희들이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의 일을 논할 수 있겠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소신이 아뢴 말들은 소신 혼자만의 소견이 아니고 모두 신(臣)의 제배(儕輩)들 사이에서 공언(公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언성을 높여 이르기를,

"내가 이미 반복해서 회유(誨諭)했는데도 네가 또 노론이니 소론이니 제배들이니 하는 말을 감히 내 앞에서 하는 것이냐?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말을 감히 군부(君父)의 앞에서 하는 자는 반드시 군부를 시해(弑害)하게 될 사람이다."

하고, 드디어 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이르기를,

"네가 감히 마음먹고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이석효(李錫孝)의 말이 동조(東朝)께 미친 뒤인데, 네가 또한 감히 제배들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이냐? 네가 언제 일찍이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편당하는 풍습 때문에 군부(君父)와 태후(太后)에게 욕이 미치게 되는 일을 보았었느냐?"

하매, 유겸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분부를 하시는 것입니까? 이석효 이인엽(李寅燁)의 팔촌(八寸) 친족이기에 자연히 소론들 중에서 모의(謀議)한 흉악한 말을 가지고 공초(供招)하게 된 것인데, 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너희들의 거조(擧措)가 그러하므로 이석효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상방 참마검(尙方斬馬劍)668) 을 너와 같은 자에게 써야 한다. 내가 너를 베어도 되고 너를 귀양 보내도 되는데, 너희들은 당을 위해 죽으려고 하여 절도(絶島)나 아주 먼 변방을 마치 낙지(樂地)에 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네가 처음에 이런 상소를 올릴 적에 기필코 벌을 받으려고 하여 왔을 것이다. 만일에 지금 죄를 준다면 네가 반드시 달갑게 여기며 소원대로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주지 않는다. 내가 벌주려고 하여 너를 부른 것이 아니다. 선조조(宣祖朝)에 일찍이 ‘공신(功臣)이라도 또한 베겠다.’는 분부가 있었는데, 내가 오늘날 한편으로는 동조(東朝)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종사(宗社)를 위하여 어찌 사람 하나를 베이지 못하겠는가? 이렇게 분부를 내린 뒤에도 다시 당론(黨論)을 하는 자는 시급히 국가의 전형(典刑)대로 하여 물리쳐버려야 할 것이니, 물러가 너의 제배들에게 말을 하여 전일처럼 하지 말도록 하라. 한갓 이익만 없게 될 것이니, 다시는 지난날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

하고, 임금이 손수 유겸명의 상소를 말아 서종옥(徐宗玉)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이 상소를 내가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거나 혹은 도로 주어버릴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마는, 만일에 이 상소를 그대로 둔다면 올린 사람을 죄주지 않을 수 없으니 차라리 이를 불태워 없애버려야 한다. 승선(承宣)은 이 상소를 사관(史官)에게 주어 합문(閤門) 밖에서 불태워버리도록 해야 한다. 나 역시 지나친 거조(擧措)임을 알고 있다."

하였다.

 

 

 

9월 4일 을해

이정제(李廷濟)를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내치었다. 이정제가 대사헌으로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요사이 대관(臺官)의 상소가 하나는 ‘성상께서 합문을 닫고서 신료(臣僚)들을 접하지 않으시는데도 군하(群下)들이 경동(驚動)하지 않고 있다.’고 한 것이고, 하나는 ‘성상께서 큰 처분이 계실 적에 입시(入侍)한 제신(諸臣)들이 ‘녜녜’하며 그대로 받들고 물러갔었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신도 또한 입시하는 반열(班列)에 끼어 있으면 단지 ‘녜녜’ 하기만 하고 물러났기에, 대관들의 말에 있어 무어라고 변명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좌우에서 공박하는 말이 모두 다 간절하고 지극한 말이었으니, 신을 체직(遞職)하여 공론에 답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이미 비답을 내리고 나서 바로 분부하기를,
"이처럼 처분을 한 날에 당하여 어찌 분명하게 호오(好惡)를 보여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 도헌(都憲)은 평소에 편당하는 풍습이 심하지 않음을 이미 벌써 알고 있었기에 엊그제 처분을 할 때에 두서너 경재(卿宰)를 부르면서 일체로 명소(命召)했던 것이다. 오늘 상소를 보건대, 은연중 괴복(愧服)하는 마음과 ‘네네’ 하며 그대로 받든 사람들을 기롱하는 말이 있었으니, 어제 그대로 받든 것이 옳았다면 오늘 괴복하는 것이 괴이한 것이고, 오늘 괴복하는 것이 옳다면 어제 그대로 받든 것이 괴이하게 된 것이다. 이 사람이 오히려 이러하니 그 나머지의 편당하는 풍습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마땅히 먼저 이런 사람들을 경칙(警飭)해야 할 것이니, 대사헌 이정제를 우선 체차(遞差)하여 충청 감사를 제수하라."
하였다. 또 분부하기를,
"군부(君父)가 지극한 통탄으로 말미암아 정녕(丁寧)하게 분부를 내린 때이니, 오늘날의 신자(臣子)가 된 사람들이 만일에 도로 편당하는 풍습에 따라 다시 색목(色目)을 찾는다면, 이는 신하의 지조가 없는 것으로서 나의 신자가 될 수 없다. 이런 짓을 차마 한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하물며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과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흉서(凶書)와 서덕수(徐德修) 및 김성절(金盛節)의 흉악한 공초(供招)는 피차(彼此)가 흉악한 말을 하여 임금을 무함한 부도(不道)한 것이거니와, 그 중간에 있으면서 이쪽에 붙고 저쪽에 붙어 제멋대로 무함하여 핍박을 한 것에 있어서는 목호룡이 더욱 심했었다. 하물며 지난해에 걸었던 흉서는 더욱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단지 저쪽에만 의심을 두었었고, 신축년과 임인년의 옥사를 난잡하게 다스려 흉악한 역적들로 하여금 이를 빌어 구실거리를 삼게 되었다. 일당(一黨) 중의 사람들에서 마음은 김일경과 박필몽(朴弼夢)의 무리들 밖에는 단정코 딴마음이 없음을 환히 알겠기 때문에, 이래서 내가 용서하게 되었던 것이다. 분별을 하지 아니하여 편당을 비호(庇護)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역적들을 비호하는 결과가 되어 도리어 흉적(凶賊)들에게 의심을 사서 그들의 구실거리를 삼게 되었다. 곧 일당 중의 사람들에게는 비록 모호하고 애매한 죄가 있었지만, 그 중에도 한 가닥의 고충(苦衷)은 있었기 때문에 내가 또한 용서하게 되었던 것이다. 감히 다시 그전과 같은 마음으로 군부(君父)에게 써먹으려고 하는 것은 곧 군부를 무시하는 짓으로 반역하는 것이니, 승정원은 잘 알아차려야 한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9월 5일 병자

금성(金星)이 태미원(太微垣)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가고,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밑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바리때와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서너 자 정도였으며 빛깔은 붉었다.
9월 6일 정축

동학(東學)의 유생(儒生)들을 사실(査實)해 내어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다. 겸교수(兼敎授) 이종백(李宗白)이 상소하기를,
"신이 옥당 입직(玉堂入直)으로 동학(東學)에 나아가 유생들에게 제술(製述) 시험을 보이고, 시한(時限) 전에 정권(呈券)한 것을 봉표(封標)하여 훈도(訓導)에게 준 뒤, 문한(門限)에 미쳐 직차(直次)로 들어왔었는데, 예백(曳白)669)  한 유생들이 훈도 및 이례(吏隷)를 구축(驅逐)해버리고서 봉치(封置)해 놓은 시권(試券)을 봉투를 찢고서 표지를 지워버리고 거의 모두를 움켜 가버렸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자(士子)의 몸으로 행신이 이러하였으니 출신(出身)하게 된들 어디에 쓰겠느냐? 이러한 유들은 결단코 사자로 대우할 수 없으니, 해조(該曺)로 하여금 사실해 내어 먼 변방에 충군하도록 하라. 동학의 훈도는 도피하였으니, 자못 수직(守直)하는 본의가 없게 되었다. 훈도가 비록 미천(微賤)한 벼슬이기는 하지만 곧 사장(師長)인데, 수재 유생(守齋儒生)들은 훈도가 구축당하는 것을 보고는 동념(動念)하려고 하지 않았고, 교수는 비록 옥당에 입직하기는 했지만, 본학(本學)에 이미 전에 없던 해괴한 일이 있었으니, 마땅히 경칙(警飭)이 있어야 한다."
하고, 훈도는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여 처벌하고, 수재 유생들은 1년 동안 정거(停擧)하며, 교수는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9월 7일 무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시독관(侍讀官)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저번날 궁부(宮府)에 관한 일을 환히 깨우치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진실로 천고(千古)에 없었던 거룩한 일입니다."
하고, 검토관(檢討官)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유겸명(柳謙明)에게 단지 회책(誨責)만 가하고 견벌(譴罰)은 내리지 않으셨으니, 진실로 처분이 합당함을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바야흐로 지금 조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하교(下敎)한 것을 듣고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감동하지도 않는 사람은 신하의 지조가 없는 사람이고, 다시 소론(少論)이란 색목(色目)을 마음에 두는 사람은 신자(臣子)가 아니다."
하였다. 이종백이 아뢰기를,
"유겸명을 인견(引見)하실 때에 마치 인자한 아버지가 미혹한 아들을 회책하듯이 하셨습니다마는, 다만 사기(辭氣)가 화평하시지 못했습니다. 신(臣)이 유겸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는 경연관(經筵官)인데, 삼가 듣건대, 그날 상방검(尙方劍)으로 목을 베어 도성 문에 현수(懸首)한다는 분부가 계셨다고 했습니다. 신은 생각에 신료(臣僚)를 대우하는 도리를 마땅히 이렇게 하지 않으셔야 할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하번(下番)의 말은 전하는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다. 상방검(尙方劍)이란 말은 내가 주운(朱雲)670)  이 칼을 빌어서 아첨하는 신하의 머리를 베기를 청했던 일을 말한 것이고, 상방검을 유겸명에게 씀을 말한 것이 아니다. 현수(懸首)란 말도 또한 다시 당론(黨論)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그런 율(律)을 써야 한다고 한 것이고, 반드시 그를 현수한다고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유엄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 송인명(宋寅明)이 나가버린 다음에는 탕평(蕩平)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 조정이 공허(空虛)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역시 빨리 소환하려고 한다."
하였다.
9월 8일 기묘

소대를 행하여 《동사(東史)》를 진강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이 규고(刲股)를 논한 대목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명 태조(明太祖)가 금령(禁令)을 만들었음은 어버이가 병이 났을 적에 단지(斷指)를 하는 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모가 병이 났을 적에 자신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어찌 중(中)이니 중이 아니니를 논할 것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하나가 모두 애친(愛親)하는 지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진실로 금할 것이 없지마는, 그 결과가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기에 금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의 부모가 굶주리는 것 때문에 공공연히 살을 베인 것이어서, 어버이의 병환에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지 않는 바가 없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명태조도 또한 폐단의 근원을 막았을 뿐이요, 지극한 심정으로 하는 것을 금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검토관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녹진(祿眞)의 이른바 ‘뇌물을 막고 청탁을 없애며 출척(黜陟)을 반드시 유명(幽明)에 따라 하고 여탈(予奪)을 애증(愛憎)에 따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녹진의 말은 단지 충공(忠恭)의 병폐를 바로잡기만 할 뿐 아니라 바로 오늘날의 약석(藥石)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탕평(蕩平)을 힘쓰는 날에 당했으니, 단지 위에 있는 사람만 이로써 자신을 힘쓸 것이 아니라 조정에 있는 사람들도 더욱 마땅히 이를 보고 신칙하여 가다듬어야 한다. 옥당(玉堂)에서는 녹진의 말을 등서(謄書)하여 승정원에 보내며 묘당(廟堂)에 반송(頒送)하도록 하고, 전조(銓曺)에서는 또한 1통을 써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성인(聖人)은 말씀을 마땅히 신중하게 하는 법입니다. 지난해에 신노(申魯)가 고(故) 상신(相臣) 오명항(吳命恒)이 출사(出師)를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들어 상소를 진달했을 적에 성상께서 ‘이뒤로는 당론(黨論)하는 사람은 효시(梟示)한다.’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그때에 신이 오광운(吳光運)·홍경보(洪景輔)와 함께 차자를 올려 도로 거두시기를 청하려고 했었는데, 이현모(李顯謨)가 유독 말하기를, ‘원융(元戎)이 도성 밖을 절제(節制)해 갈 적에 중간에서 저지하여 흔드는 것은 옛적에도 큰 금계(禁戒)이었고, 성상께서 내리신 처분도 과중하게 된 것이 아니며, 또 이처럼 작전(作戰)에 임하게 된 때에 당해서는 효시(梟示)하도록 하는 분부는 또한 과중한 것이 아니라.’고 했었기 때문에 정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겸명(柳謙明)을 인견(引見)하실 때에 ‘이뒤로는 다시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는 즉각 국가의 전형(典刑)대로 하겠다.’고 하신 분부는 진실로 과중하게 된 것입니다. 옛말에도 또한 ‘하북(河北)의 도적을 제거하기는 쉬워도 조정의 붕당(朋黨)을 없애기는 어려운 것이다.’고 했었습니다. 이처럼 붕당을 부수어버릴 때에 있어서는 성상께서 마음에 근심되고 수고로움이 어찌 지난해의 변란 때와 다르시겠습니까? 다만 대신을 배척하는 말을 한 것 때문에 격뇌(激惱)하시어 그런 분부가 있게 된 것이기는 합니다마는, 혹시라도 유겸명과 같은 영인(佞人)이 있어 다시 이런 말을 했을 경우 곧장 정형(正刑)의 율(律)을 쓴다면, 어찌 그처럼 지나친 거조가 있겠습니까? 만일에 그 다음의 율을 쓰게 된다면 또한 어찌 실언(失言)을 하시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이 옳고, 지난해에 차자를 진달하려는 것을 만류한 것도 옳았다. 상방검(尙方劍)의 말은 나도 역시 지나치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론(黨論)을 하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무슨 법을 써야 하겠는가? 이 뒤에 다시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자는 신하의 지조가 없는 것이니, 신하의 지조가 없다면 역적인데, 역적을 마땅히 죽여야 하겠느냐 살려야 하겠느냐?"
하였다. 서종옥이 아뢰기를,
"소장(疏章)을 불태워버린 것은 진실로 지나친 거조입니다. 그 내용에 말이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마땅히 사책(史策)에 써 놓아야 하는 법인데, 이미 불태워버린 뒤라 사씨(史氏)가 장차 궐문(闕文)해 놓게 될 것이니, 신(臣)과 주서(注書)가 똑같이 책임이 있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신들에게 바로잡지 못한 죄를 가하시고 전하께서는 다시 과중(過中)한 거조를 하지 않으신다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고, 시독관 유엄이 아뢰기를,
"그날 소장을 불태운 것을 신은 처음으로 듣습니다마는, 이는 진실로 과중한 거조인데도 입시(入侍)한 승지가 쟁집(爭執)하지 못했으니, 경책(警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며, 서종옥이 아뢰기를,
"유겸명은 족히 말할 것이 없지마는, 삼사(三司)의 상소를 어찌 불태워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 역시 어찌 소장을 불태움은 지나친 거조임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승정원으로 하여금 그 상소를 받지 말도록 할 것을 알지 못했겠느냐마는, 후원(喉院)에서 조종(操縱)하는 길을 열어 놓게 될까 싶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뒤로는 피차(彼此)의 것을 막론하고 일이 당론(黨論)에 관한 것이면 비록 대신의 상소라 하더라도 받지 말아야 한다. 그의 상소는 곧 급서(急書)이었다. 처음에는 승지를 시켜 불태우게 하려고 했다가 아랫사람을 부리는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불을 붙였으며 승선(承宣)이 반드시 진달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여겼었는데, 그러지 않으므로 내가 마음에 괴이하게 여겼었다."
하였다.


 

 

 

9월 9일 경진

윤유(尹游)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성룡(李聖龍)을 승지(承旨)로, 조관빈(趙觀彬)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校理)로, 송수형(宋秀衡)을 지평(持平)으로, 임정(任挺)을 수찬(修撰)으로, 신처수(申處洙)를 필선(弼善)으로, 원백규(元百揆)를 금군 별장(禁軍別將)으로 삼았다.
한성부(漢城府)의 당상(堂上)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고 낭청(郞廳)을 태거(汰去)하도록 명하였으니, 산송(山訟)에 관한 공사(供辭)를 서계(書啓)한 내용에 붕당(朋黨)을 언급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호남 어사(湖南御史)가 장청(狀請)한 것에 따라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雅門)에서 절수(折受)한 어염(魚鹽)을 전부 호조(戶曹)에 소속시켰는데, 본조(本曺)에서 관할하는 향화인(向化人)671)  의 선세(船稅)도 혼동하여 그 속에 들어갔으니, 호조로 하여금 내 주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9월 10일 신사

막 어두워질 무렵에 유성(流星)이 하늘 복판의 엷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병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가 서너자 정도였으며 빛깔은 희었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임술년672)  의 통신사(通信使) 때에 ‘파선(破船)하여 운명(殞命)한 사람 이외는 모두 순부(順付)해 주고 차왜(差倭)는 보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약조(約條)를 작정했었는데도 그뒤에 왜인(倭人)들이 파선(破船)과 운명(殞命)을 나누어 두 가지 조관으로 삼아 자주자주 나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약조를 들어 당초부터 접대하지 않았으나, 왜인들의 성질이 교활하고 간사하여 매양 애걸(哀乞)했기 때문에 마침내는 공궤(供饋)를 허락했었습니다. 순천(順天) 표류인(漂流人)을 데리고 온 차왜가 3년이 되도록 돌아가지 않으며, 서계(書契) 내용에 ‘다음에는 준례로 삼지 말라.’는 말이 있는 것 때문에 기필코 고쳐 짓도록 하려고 합니다. 왜인들 법은 맡은 일을 다하지 못한 데가 있으면 죽이게 되니, 한결같이 굳게 거절한다면 단지 자문(自刎)하게 될까 염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한 임역(任譯)에게 대들어 상해를 입힐 염려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약조(約條)가 분명하게 되어 있다면 마땅히 금석(金石)처럼 굳게 지켜야 하고, 만일에 혹시라도 분명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굳이 논쟁할 것이 없다. 필경에는 응당 허락하게 될 일을 만일에 처음부터 굳게 고집하는 것은 성실(誠實)한 도리가 아니게 되는데, 왜인들이 어찌 헤아리어 알게 되지 못하겠는가? 만일 그들이 요란(搖亂) 피우기를 기다렸다가 허락하게 된다면, 그들이 반드시 우리가 겁을 낸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하매, 홍치중이 서계(書契)를 고쳐 짓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홍치중이 또 공가(貢價)를 더 쓰게 된 것을 그전에 남아 있는 것으로 계산하여 감하지 말고 수납 지출하도록 신칙(申飭)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홍치중이 또 아뢰기를,
"사복시(司僕寺)의 공가(貢價)를 1년에 6개월을 한정하여 등귀(騰貴)한 데로 좇아 수납 지출할 일을 복계(覆啓)한 뒤에 선혜청(宣惠廳)에서 달수를 감하려고 하니, 선혜청 당상을 추고(推考)하여 거행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고, 이어 이뒤로는 연석(筵席)에서 정탈(定奪)한 것을 다시 품해 보지도 않고서 곧장 거행하지 않는 것은 묘당(廟堂)에서 신칙(申飭)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衙門)에서 절수(折受)한 곳의 면세(免稅)를 혁파하는 일은 곧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두 조종 때에 의의(擬議)했다가 미처 하지 못한 것으로서 매우 덕이 훌륭하신 일이었는데, 각 관사(官司)에서 선왕조(先王朝) 때에 내려 주신 것이라고 말하며 자기들 멋대로 초기(草記)를 만들어 올려 그전대로 면세하고 있습니다. 각 관사의 초기를 만든 당상(堂上)들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고, 올해의 부세(賦稅)는 한결같이 모두 호조(戶曹)로 수송(輸送)하게 한 다음에 조용히 상탁(商度)하여 품정(稟定)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태학(太學)과 충훈부(忠勳府)의 것은 법전(法典)에 실려 있는 것이고 또한 선왕조에서 내리신 것이기 때문에 윤허했으나 종부시(宗簿寺)의 것은 윤허하지 않았고, 이 이외의 것은 초기를 만든 일이 없었다."
하였다. 홍치중이 또 아뢰기를,
"이정제(李廷濟)의 상소는 큰 처분에 대하여 조금도 어긋나는 뜻이 없었고, 듣건대 90의 홀어미가 있는데 병이 침중하다고 하니 가긍(可矜)합니다."
하니, 원소(原疏)를 다시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유겸명(柳謙明)의 상소는 의조(疑阻)가 매우 심한 것이고, 전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본심을 헤아리지 않은 것이어서, 그의 말이 그르다면 죄를 주는 것은 가하지만, 그의 상소를 불태워버린 것은 진실로 과중(過中)한 거조입니다. 유신(儒臣)이 전달하는 말에 따라 ‘과당하게 되었음을 알았다.’는 분부가 계시기는 했습니다마는, 그 하교(下敎) 내용에 ‘강절도(强竊盜)’란 세 글자가 있으셨으니, 성인(聖人)의 말씀은 결코 이와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평소에 말씀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시는 소치 때문이십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개 사생(死生)을 같이하기를 강도의 무리와 같이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비유하기를 합당하게 하지 못했으니, 잘못은 잘못이다. 대신을 ‘궐한(厥漢)’이라고까지 하여 그의 말이 통탄스러웠기 때문에 회책(誨責)할 때 말을 혹 가려서 하지 못한 것이니, 아뢴 말이 진실로 옳은 말이다."
하매, 홍치중이 인하여 이광좌(李光佐)에게 별유(別諭)를 내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알았다.’고 하였다. 이태좌가 아뢰기를,
"큰 처분을 하신 뒤에 신이 이광좌에게 보낸 서찰(書札)에 ‘성상께서 분부하실 적에 남김없이 심중(心中)을 털어놓으시기를 애상(哀傷)스럽고 측은하게 하셨는데, 내간(內間)의 사항을 일찍이 듣지 못한 것이 많이 있었으므로, 이 분부를 듣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그 동안의 우리들의 일 처리가 직분(職分)을 다하지 못한 데가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고 했었더니, 그의 대답이 ‘그 동안에 전연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이면(裏面) 사항을 알지 못하여 일처리가 진실로 미진한 데가 많았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었습니다. 이광좌가 한편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음은 상하(上下)가 다 아는 바이지만 정승의 관직은 임금과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예모(禮貌)도 특후한 것이어서, 죄를 줄 수는 있지만 모욕할 수는 없는 법인데, 유겸명(柳謙明)이 말을 그처럼 가리지 않고 하여 조정의 계급(階級)이 남김없이 무너지게 되었고, 전하께서 처분도 또한 언성과 기색을 크게 하지 않아야 하는 도리가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바라시는 바는 붕당(朋黨)을 털어내고 탕평(蕩平)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인데, 군하(群下)들이 점차로 감염된 지 이미 오래이어서 굳게 지키고 고치지 않으니, 전하께서 비록 성기(盛氣)를 내어 상대하더라도 마음을 돌려 생각을 고치게 되기를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성미를 어찌 자신이 알지 못하겠는가? 평상시에는 너그럽고 느슨하다가도 칠정(七情)이 발동하게 되는 것을 또한 면하기가 어려우니, 유겸명에게 대한 일도 대개 한때 성급하게 분개하고 통탄하는 소치에서 나온 것이다. 대저 지나간 해의 일들의 이면을 경(卿)들이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는 곧 공죄(公罪)이기에 한 번 환히 깨우쳐 준 것은 경들의 과오를 씻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입대(入對)한 그 이튿날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에게 직첩(職牒)을 도로 주었었는데, 이는 대개 양쪽 다 임용(任用)하는 도리에 뜻이 있는 것으로서 그의 마음을 완화하려고 한 것이다."
하매, 이태좌가 아뢰기를,
"저번날 처분하실 때에 내리신 분부를 듣게 되면서부터 환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정미년673)  에 처분하실 때에 환히 효유(曉諭)하셨더라면, 어찌 오늘날에 다시 처분하실 것이 있게 되었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이광좌를 의지하고 신임하시더라도 어찌 그의 말을 모두 들어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마음에 그렇게 여기지 않으시는 바를 억지로 따르셨다가 마침내 변경하게 되었으니, 당초에 참작해서 처분하시어 폐해가 없게 되는 것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뒤로는 징창(懲創)하시어 굳게 지키신다면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심사(心事)를 내가 깊이 알고 있는데, 나의 병통인 곳을 어찌 통렬하게 고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매, 홍치중이 아뢰기를,
"‘그가 한 일을 공격하지 그 사람은 공격하지 말고, 그 사람을 공격하지 그의 당은 공격하지 말라.’는 것은 지극한 말입니다. 유겸명이 군부(君父)의 앞에서 대신을 궐한(厥漢)이라고 불렀음은 식견(識見)이 없는 소치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께서는 단지 유겸명만 책망하는 것이 좋았는데 반드시 그의 당까지 들어 말씀하신 것은 잘못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흰 것을 가리켜 검은 것이라 하거나 검은 것을 가리켜 흰 것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영중추부사의 말이라 하더라도 내가 반드시 써 주지 않을 것이다. 판중추부사 민진원에 있어서는 비록 이런 일에서 깨끗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어도 그가 고충(苦衷)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특별히 서용(敍用)한 것이다. 유겸명을 불러 회책(誨責)한 것은 당론(黨論)하는 병통에서 깨우치게 하려 한 것인데, 어찌 버리고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치중이 아뢰기를,
"사신(四臣)을 사리(事理)와 법례(法例)로 헤아려 볼 때 마땅히 구별을 두지 않아야 하는데, 누구는 신설(伸雪)해 주고 누구는 해 주지 않아 의리가 밝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처분을 제신(諸臣)들의 진신(進身)을 위하여 변경해야 할 필요는 없는 법인데, 이는 사리가 매우 분명한 것이니, 삼가 통쾌하게 처분을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한편에 치우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진실로 국가의 큰 일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계한(界限)을 둔 다음에야 한편의 사람들이 또한 모두 박문수(朴文秀)가 장전(帳殿)에서 진달한 말이 옳은 말임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제신이 사진(仕進)하지 않는 것은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신(四臣)을 위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무슨 사리가 되겠는가? 경(卿)은 비록 행적이 고독하기는 하지만 마음은 고독하지 않은 것이다. 듣건대, 유겸명이 상소를 진달할 때에 경을 만나 보고 ‘어찌하여 진압(鎭壓)하지 않았었는가?’라고 말했다 하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하매, 홍치중이 아뢰기를,
"신은 그의 소본(疏本)을 보지도 않았고, 영중추부사에 관계되는 것을 당초에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만일에 혹시라도 알았었다면 신이 반드시 이루도록 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이태좌가 아뢰기를,
"영상(領相)이 그 제류(儕流)들의 논에 있어서 요탈(撓奪)함이 없지 않습니다. 저번날 분부를 내리신 뒤부터는 본사(本事)를 의당 거론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다시 청하는 바가 있었으니 그릅니다."
하매, 임금이 이르기를,
"좌상(左相)의 말은 또한 의조(疑阻)에서 나온 것이다. 영상이 어찌 밖에 있는 제신을 위해서이겠는가? 각기 소견이 다른 까닭인 것이다. 경(卿)이 항시 당론(黨論)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세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개탄스럽다. 경은 오히려 원두(源頭)에 대하여 효연(曉然)하지 못한 데가 있는 것이다. 이번 비망기(備忘記)에 이미 모두 분명하게 말을 했었으니 진실로 그대로 놓아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데, 승관(承款)을 한 사람에 대해서도 또한 비호(庇護)하고자 하는가? 만일에 이들까지 아울러 신설(伸雪)해 준다면 요사이에 처분을 내린 본의가 아니게 되니, 이는 결단코 요동하여 고칠 수 없다. 영중추부사는 반성하고 깨달은 듯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 많았다고 스스로 말하였거니와, 내가 통한(痛恨)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직도 두 가지 일이 있다. 조태구(趙泰耉)가 선인문(宣人門)으로부터 들어와 ‘장차 망하게 된 국가를 구원하려 한다.’고 말한 것과, 신축년674)   겨울 송상기(宋相琦)의 상소 비답(批答)에 ‘보호 동궁(保護東宮)’이란 네 글자가 있었기 때문에 흉악한 사람들이 인용하여 말하게 된 일이다. 내가 그때에 조보(朝報)를 보다가 서안(書案)을 향하여 혼자 한탄했었고 지금도 오히려 마음이 놀라게 되기 때문에 이제야 비로소 발설(發說)하는 것이다. 오늘날 북면(北面)하는 신하들이 이 말을 듣고서 어찌 마음과 뼈가 모두 써늘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임금이 또 분부하기를,
"내수사(內需司)의 수본(手本)을 이조와 호조로 하여금 반첩(反貼)675)  하도록 한 것은 뜻이 있는 것인데, 사친(私親)의 방(房)에 내수사의 수본이 오히려 지금까지 놓여 있다. 대개 반첩을 할 적에 자세히 살피게 하고자 하는 것은 신중하게 하려는 도리에서 나온 일인데, 아래에서 그대로 두고 거행하지 않으니, 일에 지장이 많다."
하매,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그동안에 신(臣)이 여러 차례 반첩하여 주었고, 나머지는 그대로 머물러 두었습니다. 대저 내수사 및 각궁(各宮)의 소속들이 허다히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단지 간사한 백성의 말만 듣고서 한갓 폐단을 끼치게 되고 말기 때문에, 신들이 서로 의논해 보고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이 과연 그르게 되었으니, 진품(陳稟)함이 옳다. 묘당(廟堂)이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사체로 말하건대, 계하(啓下)한 일을 아래에서 시행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홍치중과 이태좌가 돈을 주조(鑄造)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 마음에 끝내 석연(釋然)하지 않은데, 억지로 윤허함은 성실한 도리가 아닌 것이다."
하고, 또 분부하기를,
"지난해에 출정(出征)했던 군병(軍兵)으로 춘당대(春塘臺)에서 일중(一中)을 차지한 사람들이 직부(直赴)676)  하기를 바라 중관(中官)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비록 외람되기는 하지만 상언(上言)을 했으면 그래도 되는데 중관에게 호소하는 짓을 했으니, 일이 비록 하치않기는 하지만 조짐을 그대로 키울 수는 없다. 금위 대장(禁衛大將)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고, 해초(該哨)의 초관(哨官)을 중곤(重棍)으로 다스리라."
하고, 또 분부하기를,
"이정제의 상소를 다시 보건대, 짐짓 갈등(葛藤)이 생기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순편한 데에 힘썼으니, 딴 뜻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그대로 받들고 난 다음에 도리어 유유범범(悠悠泛泛)하다고 기롱한 말을 간절하고 지극한 논이라고 했으니, 자못 성실하지 못한 짓이다. 받아들인 승지를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라."
하매, 이광좌와 홍치중이 잇따라 정리(情理)가 가긍함을 진달하며 편리하고 가까운 하나의 고을에 다시 보직(補職)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원명(趙遠命)이 본부(本府)의 재력이 피폐함을 진달하며 본부의 채식(債殖)을 특별히 십이(什二)677)  의 이식으로 허락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채(私債)에 있어서는 십일(什一)로 정하고 공채(公債)에 있어서는 십이의 이식을 허락한다면 이는 맞지 않는 일이다. 우리 나라의 법령이 시행되지 않음은 오로지 자주자주 변경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처분을 내일에 또 고친다면 묘당(廟堂)에서 하는 일이 어찌 이처럼 성실하지 못함이 있겠는가? 십일의 법은 결코 변경할 수 없다."
하였다. 지평(持平) 이중경(李重庚)이 앞서 아뢴 일을 전주(傳奏)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시급히 박호랑(朴虎狼)을 먼 변방으로 정배(定配)하도록 한 명을 정지하고,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엄하게 형벌하여 정상을 얻어내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는 다시 국문(鞫問)할 일도 없고, 먼 변방은 대수롭지 않으니 절도(絶島)에 정배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이광부(李光溥)가 앞서 아뢴 일을 전주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민세철(閔世哲)을 바로 놓아 주도록 한 명을 도로 정지하고 끝까지 추문하여 감처(勘處)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무고(誣告)한 일을 이석효(李錫孝)가 이미 자복했으니, 이제 논할 것이 없다. 민세철이 전한 말은 더없이 흉악하고 참혹한 것이어서 또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먼 변방에 정배하라."
하였다.

 

반시(泮試)678)  를 보여, 수석을 한 진사(進士) 변익로(邊翼老)를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명하였다.

 

9월 11일 임오

필선(弼善) 신처수(申處洙)의 상소를 도로 내주도록 명하였다. 그 상소를 대략 이르기를,
"출향(黜享)하기를 먼저 발론(發論)한 사람은 신(臣)입니다. 신의 생각에 그윽이 여기기를 삼신(三臣)이 똑같은 사특한 생각으로 그만 함이 없는 화변(禍變)을 야기(惹起)했으니, 이러한 흠과 허물을 지니고는 배식(配食)하는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싶었습니다. 필경에 이로 말미암아 죄를 얻게 되었는데, 신이 진실로 어리석고 어두워 참회(懺悔)할 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이런 협잡(挾雜)한 말은 결단코 다시는 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찍이 분부를 내렸었는데, 어찌하여 받아들였느냐? 그렇게 조어(措語)한 것을 미워하여 퇴각(退却)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곧 사의(私意)이거니와, 받지 않음을 혐오하여 억지로 받아들였다면 또한 사의이니, 해당 승지를 추고(推考)하고, 원소(原疏)는 돌려 주라. 또 다시 그전의 투식을 가지고 나에게 진달하는 것은 마땅히 보지도 않고 비답도 내리지 않겠으니, 모두들 나의 뜻을 알아차리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무신(武臣) 최진한(崔鎭漢)이 아뢰기를,
"궁성(宮城) 안에 입직(入直)하는 금군(禁軍) 및 홍화문(弘化門)·금호문(金虎門)의 훈련 도감(訓鍊都監) 군사 각각 1백 명은 원래 습진(習陣) 때에 내다 쓰는 사례가 없지만, 건양문(建陽門)에 입직하는 금위군(禁衛軍) 1백 명에 있어서는 매달 세 차례씩 습진할 때에 표신(標信)이 없이 내다 쓰므로, 중지(重地)가 공허해져 염려됩니다. 만일에 향군(鄕軍)처럼 연습을 한다면 출번(出番)한 뒤에도 사습(私習)하기에 여유가 있게 될 것이니,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입번(入番)한 군사를 내다 쓴다면 일이 허술하게 될 것이니, 본영(本營)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9월 12일 계미

좌승지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장례원(掌隷院)에서 상언(上言)에 따라 회계(回啓)한 데에 대하여 판부(判付)하기를, ‘단천(端川) 관노(官奴) 수헌(水憲)을 면천(免賤)하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선파(璿派)의 면천은 이미 대수(代數)가 정해져 있는데, 지금 왕후(王后)의 의친(議親)679)  이라 하여 법 밖의 은덕을 입은 사람을 예로 든 것인데도 유사(攸司)에서 방계(防啓)하지 않고 진품(陳稟)했습니다.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뒤에 폐단이 한없을 것이니, 해당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추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사헌부에서 【지평 이중경(李重庚)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해의 역적 옥사 때에 망명(亡命)한 역적을 포도청(捕盜廳)에서 근포(跟捕)하게 한 지 해가 넘도록 잡아내지 못하여 지체하고 한만함이 더할 수 없이 심하니, 좌우(左右) 포도 대장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대사간 김취로(金取魯)·승지 신무일(申無逸)·부응교 박사정(朴師正) 등의 상소를 도로 내주도록 명하였다. 김취로의 상소에 말하기를,
"을사년680)  에 징토(懲討)한 논의가 정미년681)  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죄안(罪案)이 되어버려, 구구(區區)하나마 국가를 위한 한 가닥의 충적(衷赤)이 아직도 천일(天日)이 내려다보심을 입지 못하였으니, 신(臣)의 죄명(罪名)은 진실로 그대로 있습니다. 신이 지켜 오는 의리를 자신(自信)하여 돌릴 수 없으니, 은견(恩譴)을 박하게 입고 세월이 조금 오래 된 것 때문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이번에 다시 간쟁(諫諍)하는 반열(班列)에 나오기는 했지마는, 할말이 지난날에 이미 말을 한 바에 지나지 않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마는, 조가(朝家)에서 신에게 이 소임에 맡긴 것이 과연 신이 말을 하게 될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까? 평소에 국가 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친애(親愛)해 온 정성은 진퇴(進退)에 따라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마는, 말이 이미 쓰여지지 않았고 몸이 또한 폐해졌으니, 오직 장차 이런 고심(苦心)을 안고 전간(田間)에서 몸이 마치도록 자정(自靖)하는 의리를 다할 뿐입니다."
하였는데, 신무일과 박사정의 상소도 또한 대략 같았다.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구구(區區)한 적심(赤心)이 선왕조(先王朝)의 성덕(聖德)을 드러내려고 하다가 도리어 선왕(先王)을 모함하여 속이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한 세상에 의리와 인륜을 밝히려고 하다가 도리어 인륜과 의리에 어그러지는 짓이라고 지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상께서 뜻을 두시는 것에 있어서도 매양 붕당(朋黨)을 없애고 탕평(蕩平)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기에, 신이 감히 기자(箕子)의 홍범(洪範)682)  의 뜻을 추연(推演)하여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밝히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가리며 한 편에 치우치는 일을 하지 말고 사람을 쓰고 버리기를 공정하게 하여 세월을 두고 해 가면 자연히 탕평의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말들을 가지고 입시(入侍)하여 고하고 나와서는 차자(箚子)를 올렸었는데, 마침내는 몸이 또한 당론(黨論)하는 괴수가 되어지고 말았습니다. 대개 성의가 축적되지 못하고 언어가 무기력(無氣力)하여 위로는 성총(聖聰)에 부감(孚感)되지 못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신복(信服)시키지 못하였기에, 무릇 극악(極惡)과 대죄(大罪)의 명목(名目)에 관계되어 마침내 하류(下流)의 처하는 곳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 이런 죄명을 짊어졌으니, 머리를 보존하게 된 것만도 오히려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물며 감히 다시 조관(朝官)의 반열(班列)에 끼여 얼굴을 들고 세상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마음을 안정하란 비답을 내렸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지사(知事)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비국(備局)에서 회계(回啓)하는 상소 중에 윤필은(尹弼殷)의 상소가 많았습니다. 윤필은은 바야흐로 수어청(守禦廳)에 속하고 있는데, 그가 만든 천보총(千步銃)은 총대가 작고 매우 가벼워 모양이 하나의 철장(鐵杖)과 같았습니다. 성을 순찰할 때 쏘아 보았더니, 과연 1천 보(步)를 넘어 갔었습니다. 또한 그가 말한 바 강노법(强弩法)도 매우 좋은 것인데 아직 만들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에 아직 노쇠(老衰)하지 않아 오히려 임용(任用)할 만하다면, 병조(兵曹)나 혹은 본청(本廳)에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3일 갑신

뇌성이 진동하며 번개가 쳤다.

 

특별히 호서(湖西) 한량(閑良) 윤필은(尹弼殷)에게 별군직(別軍職)을 제수하고, 분부하기를,
"윤필은은 외방(外方)의 무사(武士)로서, 선왕조(先王朝) 때부터 지금까지 상소를 12차례나 진달하여 국가에 마음쓰는 정성이 가상하였고, 또한 새로 만든 총을 보건대, 비로소 헌책(獻策)한 것이 거짓되지 않은 것임을 알았다. 12차례나 올린 상소 중에 이제야 비로소 하나의 헌책을 쓰게 되었으니, 비록 윤필은보다 더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조정에 헌책하려고 하겠는가? 특별히 장려해 주어 참으로 재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들이도록 하라."
하고, 이어 윤필은이 만든 총을 훈련 도감(訓鍊都監)에 내주어 널리 만들게 하도록 명하였다.

 

입직(入直)한 옥당(玉堂) 유엄(柳儼)과 이종백(李宗白)에게 《근사록(近思錄)》을 각각 1건씩 내리며 분부하기를,
"유신(儒臣)들이 옛사람의 《금감록(金鑑錄)》의 헌계(獻戒)를 본받아, 경연(經筵)에 있게 한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은 성상의 천추절(千秋節)683)  이었는데, 유엄 등이 하늘에 국운 연장을 기구(祈求)하는 도리를 들어 짤막하게 차자를 올리매, 임금이 보고서 아름답게 여기고 권장하는 뜻으로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9월 14일 을유

대사간 김취로(金取魯)를 체직(遞職)하도록 명하며 분부하기를,
"이번에 처분(處分)을 크게 밝히어, 연명하여 올린 차자(箚子)에 대한 한계를 이미 엄격하게 한 것이다. 비록 진달해야 할 것이 있더라도 들어와서 조용하게 진달하는 것이 분의(分義)에 당연한 일인데, 이에 두 신하의 관작(官爵)이 복구되지 않은 것을 들어 한 가지의 나오기 어려운 단서를 삼았으나, 이는 두 신하만 위하고 연명한 차자를 생각해 본 것은 아니다."
하고, 이어 이뒤로는 현도 봉장(縣道封章)을 받지 말도록 명하였다.

 

윤양래(尹陽來)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조익명(趙翼明)을 승지(承旨)로, 이진망(李鎭望)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홍경보(洪景輔)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삼았다.

 

포도청(捕盜廳)에서 아뢰기를,
"역적 윤희경(尹熙慶)의 아들인 망명(亡命)한 죄인 윤계웅(尹戒雄)을 면천(沔川) 땅에서 잡아 왔으니, 의금부로 이송(移送)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승정원에서 뇌성이 진동하고 번개가 친 것을 들어 진계(陳啓)하였다. 영상(領相) 홍치중(洪致中)이 차자를 올려 면직되기를 바라고, 이어 청하기를,
"실덕(實德)을 힘써 닦고 충성스러운 말을 살펴서 받아들이며, 재용(財用)이 넉넉해지게 하되 절약과 검소를 근본으로 삼고, 사람을 쓰고 버리기를 신중히 하되 공명(公明)을 먼저 힘쓰며, 경상(慶賞)과 위형(威刑)을 되도록 법리(法理)에 맞게 하되 반드시 고식(姑息)과 구차(苟且)를 경계하고, 시비(是非)와 호오(好惡)를 한결같이 하늘의 법칙을 따르되 혹시라도 사의(私意)가 섞이지 않게 하소서."
하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고, 좌의정 이태좌(李台佐)와 우의정 이집(李㙫)이 또한 차자를 진달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9월 15일 병술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가 서너 자 정도였으며 빛깔은 붉었다.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별겸춘추(別蒹春秋) 심태현(沈泰賢)과 한현모(韓顯謨)를 잡아다가 추문(推問)하도록 명하였으니, 시한(時限)이 지나도록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전 호조 판서 권이진(權以鎭)이 상공(上供)하는 주(紬) 1필의 대가가 목면(木綿)으로 원수(原數)가 7필씩인데, 단지 5필만 주었으므로 저자의 백성들이 원통하다고 호소합니다."
하니, 그전대로 7필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권지(權贄)가 앞서 아뢴 일을 전주(傳奏)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홍봉상(洪鳳祥)이 망명(亡命)한 죄상은 진실로 이미 성명께서 통촉하시는 바이고 대중의 심정이 다 같이 분개하는 바인데, 해가 지나도록 쟁집(爭執)하고 있으나 윤허하시는 분부가 아직도 아득하기만 하니, 국가에서 실형(失刑)하는 일이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지금 제적(諸賊)들이 서로 잇따라 망명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홍봉상이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기포(譏捕)가 끊임이 없는 날을 당하여는 홍봉상의 죄를 더욱 먼저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망명한 죄인 홍봉상을 율(律)대로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김중기(金重器)의 일에 있어서는 조어(措語)을 고쳐 아뢰기를,
"잡아다가 국문(鞫問)하기를 청하여 해가 넘도록 쟁집하였으나 오히려 윤허하는 분부를 아끼고 계시니, 신(臣)이 그윽이 개연스럽습니다. 아! 김중기는 지난해 변란의 초두에 장신(將臣)의 몸으로서 비록 ‘네가 출정(出征)하라.’는 명이 없으셨더라도 마땅히 팔뚝을 걷어붙이고 눈물을 씻으며 나가서 역적들을 죽이기로 맹세해야 하는데, 그만 감히 창황(蒼黃)하게 출사(出師)하는 날을 당해 혹은 말[馬]이 없다고 핑계하고 혹은 세 조정의 숙장(宿將)이라고 하며 갖가지로 미루어 마침내 나가기를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국법(國法)이 있다면 진실로 이미 효시(梟示)하여 삼군(三軍)을 호령했어야 하고, 하물며 이유익(李有翼)과 혼인(婚姻)했는데 그의 이름이 또한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었으니, 그가 머뭇거리고 있으며 서로 얽힌 흔적을 비록 스스로 가리우려고 하더라도 또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데도 베지 않았다가 만약 위급한 변란을 당한다면 어떻게 장신(將臣)을 문책하고 난적(亂賊)을 징치(懲治)할 수 있겠습니까? 왕법(王法)이 신장(伸長)되지 못하고 대중의 여론(輿論)이 더욱 격렬할 것이니, 사형을 감하여 먼 변방에 안치(安置)한 죄인 김중기를 잡아다가 엄중하게 국문(鞫問)하여 국법대로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이 고친 계사(啓辭)는 크게 대간(臺諫)의 체례에 맞게 되었다마는, 당초에 내린 처분도 또한 뜻이 있는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충청도 관찰사(觀察使) 이정제(李廷濟)를 파직하고, 교서 제술관(敎書製述官) 유엄(柳儼)과 해당 승지를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는데, 임금이 승지에게 묻기를,
"충청 감사의 교서 제술을 어느 사람에게 계하(啓下)했었는가?"
하자, 서종옥(徐宗玉)이 대답하기를,
"유엄에게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유엄에게 묻기를,
"짓지 않았느냐?"
하매, 유엄이 아뢰기를,
"이정제의 상소는 신(臣)이 진실로 딴 뜻이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마는, 저번날 입시(入侍)했던 제신(諸臣)들에 있어서는 이미 하교(下敎)를 받든 후에 1조관의 의리로 작성(作成)함이 당연한데, 이정제의 상소에는 구별하여 밝히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본시 취하지 않은 것인데, 승정원에서 신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서 곧장 계하(啓下)한 것입니다. 신이 비록 피연(疲軟)하기는 하지만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제술관(製述官)이 계하한 다음에도 오히려 사조(辭朝)하지 않고서 마치 관망(觀望)하고 있는 사람처럼 한 것이다. 만일에 유엄이 이정제를 그르게 여겼었다면 곧장 이런 뜻으로 지어 올려도 될 것인데, 말을 만들기에 곤란하게 여긴 뜻이 있는 듯하니, 깊이 개연스럽게 여겨진다. 승지가 아직도 변통을 하지 않았음은 일이 미안스럽게 된 것이니, 아울러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라."
하고, 이어 이정제를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9월 16일 정해

사간원에서 【정언 이광부(李光溥)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천 현감(衿川縣監) 이형수(李衡秀)는 평소의 처신(處身)이 세상의 지목을 받아 왔는데, 뇌물을 거두고 민재(民財)를 수탈(收奪)하여 불법을 자행하고, 감옥의 담장을 다시 쌓는다고 하며 가호(家戶)마다 돈을 받아내어 절반은 사용(私用)으로 돌렸고, 또 성묘(聖廟)를 수리한다는 핑계로 부민(富民)의 돈을 많이 거두었으니,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9월 17일 무자

뇌성이 진동하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팥알[小豆] 같았다.

 

온성 부사(穩城府使) 최제백(崔齊白)을 나처(拿處)하도록 명하였다. 국경을 넘어갔다가 호인(胡人)들에게 잡힌 본부(本府) 사람이 7인이나 되매, 호인들이 부사를 만나기를 청했으나 최제백이 병을 핑계하며 만나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명익(趙明翼)을 수찬(修撰)으로, 이만유(李萬維)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고금도 첨사(古今島僉使)와 해도(該島)의 지방관을 나처(拿處)하도록 명하였다. 해도에 귀양간 죄인 윤억봉(尹億奉)이 도망하여 돌아와버렸기 때문이다. 윤억봉은 국청(鞫廳)에서 형장에 죽은 죄인 윤득형(尹得衡)의 아우이다.

 

9월 18일 기축

정홍상(鄭弘祥)의 직첩(職牒)을 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정홍상이 귀양살이 속에서 죽었는데, 임금이 듣고서 측은하게 여겨 즉시 직첩을 내주고, 별부(別賦)를 시종(侍從)의 예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홍경보(洪景輔)를 내쳐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삼았다. 홍경보의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신이 조정을 떠난 지 반년 만에 조정에 돌아와 보니 풍습(風習)이 더욱 변하고 사대부(士大夫)의 기절(氣節)이 더욱 사라졌으며, 국체(國體)가 날로 더욱 손상되어 가고 시상(時象)이 날로 더욱 어그러지고 있으니, 가의(賈誼)684)  의 이른바 ‘달마다 달라지고 해마다 같지 않다.’고 한 말은 참으로 허름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아! 당론(黨論)이 사람들의 가국(家國)을 망치게 될 것은 필연(必然)한 일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깊이 징창(懲創)하려고 생각하시고 통렬하게 금억(禁抑)을 가하여, 대소의 신료(臣僚)들과 함께 다 같이 탕평(蕩平)한 지경으로 나아 가려고 생각하고 계시니, 더없이 훌륭하고 더없이 훌륭한 일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우리 국조(國朝)에서 사대부들에게 염치(廉恥)로써 연마하며 기절(氣節)을 배양시켜, 3백 년 동안 국가의 명백이 이를 힘입어 유지해 온 일이 많았습니다. 중엽(中葉)에 편당이 생긴 이후부터는 이른바 명분과 지조라는 것이 당론(黨論)에 쓰여짐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고, 붕당(朋黨)을 위하여 죽는 사람이 있게 되기까지 했지만, 그런 중에도 언론(言論)과 풍절(風節)을 당론 때문에 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대저 어찌된 것인지 탕평을 해 온 이래로 붕당은 부수어지지 않고 명분과 지조만 먼저 무너져버려, 위로 공경(公卿)에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녹(祿)을 유지하고 자리를 보존하게 되는 일이라면 비록 그 몸이 천억(千億)으로 변화하더라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도의(道義)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송(宋)나라 신하 소식(蘇軾)이 동한(東漢)과 서한(西漢)의 풍속의 변천을 논하기를, ‘서한의 쇠퇴는 확 쓸려버리기를 마치 교룡(蛟龍)이 풍운(風雲) 속의 노고에서 풀리어 환양(豢養)685)  의 낙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고, 동한의 쇠퇴는 마치 병이 든 광인(狂人)이 당우(堂宇)와 고실(高室)에서 편히 있기를 알지 못하고 소리 지르며 쏘다니다가 스스로 쓰려져버리는 것과 같다.’고 했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여러 해 전에 당론이 왕성할 때를 보건대, 사대부들이 극력 신기(新奇)하고 괴격(乖激)한 논을 하여 차라리 군부(君父)를 저버릴지언정 차마 사당(私黨)은 저버리지 아니하고, 당론(黨論)을 추어주게 되는 것에 있어서는 신을 거꾸로 신고 쏘다니기를 마치 경상(卿相)이된 영화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으니, 비록 동한(東漢) 때의 명절(名節)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 습기(習氣)는 유사했었습니다. 이제는 한번 변하여 동한 때의 쇠퇴와 같게 되었으니, 참으로 풍속의 변천은 군상(君上)이 전이(轉移)하기에 달렸다고 여겨집니다. 애석하게도 전하께서 삼대(三代)의 훌륭한 시절처럼 조치하지 못하시고 도리어 이처럼 굽은 것을 바로잡다가 곧은 데에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삼가 생각해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이래에 처분이 성실하게 되지 못한 것이 무릇 몇 차례이었습니다. 갑진년686)   초두에는 걸핏하면 성신(誠信)을 말씀하셨는데 을사년687)  부터는 보면 성신이 아니라 가차(假借)한 것이었고, 을사년 초두에도 걸핏하면 성신을 말씀하셨지만 정미년688)  부터는 보면 성신이 아니고 가차한 것이었으며, 정미년 처음에는 툭하면 성신을 말씀하셨지만 오늘날에 있어서 보면 또한 가차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니, 어찌 오늘날에도 또한 가차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균평(均平)하게 똑같이 나누며 조정(調停)하여 양쪽이 다 풀리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십니다마는, 신의 생각에는, 땅은 한정이 있는데 진(秦)나라의 요구는 끊임이 없은 것과 같아, 저들은 통쾌하게 되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고 이들은 고집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다가, 마침내는 반드시 모두 진나라가 되어 버린 뒤에야 말리라 싶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탕평(蕩平)이 되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세상의 도의(道義)에 있어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성신(誠信)하지 않은 임금의 마음으로 기절(氣節)이 없는 신자(臣子)를 임용(任用)한다면, 평소에는 비록 작록(爵祿)으로 견제해 가고 권모 술수(權謀術數)로 꾸려나갈 수 있겠지마는, 하루아침에 사변이 생긴다면 지조를 지키고 의리에 죽는 선비를 구하여도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신이 크게 두렵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홍경보의 상소에 전후의 처분을 차례로 들어 한 말은 옳은 것이나, 이번의 처분은 지난날의 것과 같은 것이 아니므로 상소에 말이 합당하게 되지 못한 것이고, 진나라에 비유한 말에 있어서는 더욱 알지 못하겠다. 이러한 지난날의 투식을 지키는 풍습은 자라게 할 수 없으니, 특별히 그를 체직(遞職)한다."
하고, 바로 또 분부하기를,
"홍경보의 상소 내용에 동한(東漢)·서한(西漢)에 관한 말은 당목(黨目)에 연연하고 탕평을 싫어하는 뜻이 있는 것임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느냐? 온성 부사를 제수(除授)하여 며칠 안으로 사조(辭朝)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9일 경인

뇌성이 진동한 이변에 따라 내린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조정의 꼴이 날로 틀려 가고 민생들이 곤궁에 지침은 모두 내가 부덕하기 때문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군부(君父)가 마음을 열어놓고 환하게 일렀는데도 오히려 당목(黨目)이 혹시라도 없어지게 될까 싶어하고, 한계를 엄정(嚴正)하게 한 다음에도 처분을 불만스럽게 여겨 나오지 않고 있으니, 당초에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하게 하기를 밝힌 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번의 분부를 들었으니 마땅히 마음에 부끄럽게 여기고 생각에 통탄스럽게 여겨야 할 것인데, 오히려 그전의 풍습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무슨 심장(心腸)이겠는가?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군부가 신자들을 그르게 여기는 경계를 듣고도 오히려 동념(動念)하지 않으니, 이렇게 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우리 동방 예의(東邦禮義)의 나라가 장차는 신하의 지조가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아! 대소의 신료(臣僚)들은 서로 공경하고 화협(和協)하여 함께 백성들을 구원하는 데 힘쓰도록 하라."
하고, 이어 명하기를,
"공가(貢價)는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신칙(申飭)하여 지급하게 하고 각 관사(官司)의 회계(回啓)한 것을 4, 5일 이내에 빠짐없이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아뢰기를,
"어선(漁船)이나 상선(商船)이 경강(京江)에 와서 정박하면 내외(內外)의 어물전(魚物廛) 사람들이 염가로 억매(抑買)하고 조금이라도 혹 논가(論價)하게 되면 난전(亂廛)하려는 것이라고 협박하게 됩니다. 경강의 백성을 뽑아서 정하여 이름을 ‘수세보민계(收稅補民契)’라 하고, 거둔 세는 응판소(應辦所) 및 각항(各項)의 방민(坊民) 역사에 보충하여 쓰게 하며, 객사(客使)가 왔을 때 방수(房守)로 들어가는 역사도 또한 병조(兵曹)에서 역가(役價)를 지급하게 할 것 없이 그들이 담당하여 어물전이 침학(侵虐)하는 폐단을 엄금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관원이 세를 받게 된다 하더라도 어물전이 침해하여 받기는 반드시 도로 전과 같게 될 것이다. 하물며 모리배들이 갖가지 부정한 길로 이전에 없던 일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어상(魚商)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욕심 내는 바가 따로 있으니, 어상들이 견딜 수 없는 일이 반드시 전보다도 많게 될 것이다. 단지 경강 백성들만 살찌게 하고 원망은 국가에 돌아오게 될 것이어서 외람되고 해괴스러우니,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권지(權贄)가 상소하여 경계를 전달하고, 또 홍경보(洪景輔)를 변방에 보임(補任)하였음은 잘못임을 논했으며, 드디어 이정제(李廷濟)의 일을 들어 논하니, 비답하기를,
"홍경보가 인용한 동한(東漢)·서한(西漢)과 진(秦)나라 사람에 관한 말들은 지극히 해괴스러운 것인데, 외방(外方)에 보직(補職)한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이정제는 이미 요량하여 처결한 것이다마는, 고을을 바꾸는 경우 또한 옛적의 사례가 있었으니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고쳐서 제수하라."
하였다.

 

9월 20일 신묘

신방(申昉)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성룡(李聖龍)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박필기(朴弼琦)를 사간(司諫)으로, 윤휘정(尹彙貞)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제주(濟州) 유생(儒生) 고한준(高漢俊) 등이 상소하기를,
"탐라(耽羅)는 곧 옛적의 탁라국(乇羅國)입니다. 먼 옛날에 세 신인(神人)인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가 9백 년 동안을 정립(鼎立)하다가 인심이 하나로 돌아가 고씨(高氏)가 임금이 되었고, 신라(新羅) 때에는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고계(高季)란 사람 3형제가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가 비로소 내부(內附)가 되기를 청하므로 신라 임금이 이름을 내리어 맏이는 성주(星主), 가운데는 왕자(王子), 막내는 도내(都內)라고 하였으며, 양을나의 후손에게는 신라 말엽(末葉)에 성을 양(梁)이라고 내렸고, 고씨의 외손 문씨(文氏)가 또한 계승하여 왕자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 태종조(太宗朝)에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 등이 명칭이 참람함을 들어 고쳐 주기를 청하여 윤허받음으로써 성주와 왕자의 이름이 비로소 혁파되었습니다. 신들이 그윽이 한 칸의 띳집에서 주 소왕(周昭王)을 향사(享祀)하는 의리689)  를 붙여 사당을 창설하여 고(高)·부(夫)·양(梁) 3을나(乙那)에게 향사(享祀)하되, 성주 고후, 왕자 고청, 도내 고계와 고봉례·문충세를 배향(配享)했습니다. 바라건대, 한(漢)나라와 송(宋)나라의 고사(故事) 및 우리 동방(東方) 역대의 조묘(祖廟)와 삼성사(三聖祠)의 예에 의거하여 사액(賜額)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탐라는 신라·고구려·백제와는 다르다. 하물며 전조(前朝)에서 우리 국조(國朝)에 들어온 지 몇 백년이 되도록 시행하지 않은 일을 이제 와서야 소청(疏請)을 함은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또 전대(前代)를 추념(追念)하고 옛적의 현자(賢者)를 사모하여 사우(祠宇)를 세우는 일은 혹 위에서 처분을 내리게 되거나 혹은 아래에서 청하여 하게 된 것은 있었다. 이는 그렇지 아니하여 마치 고국(古國)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같이 되어 있으니, 과연 사체에 맞는 것이겠는가? 상소 내용에 한 칸의 띳집에서 주소왕을 향사한다는 말은 특히 친착(襯着)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번읍(蕃邑)으로 작정하여 신하 노릇을 하고 백성 노릇을 하게 된 지가 또한 몇 백년이 되는데 감히 이러한 말을 장주(章奏)에 올렸으니, 이 상소를 도로 내주라."
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차자를 진달하며 친혐(親嫌)을 들어 면직되기를 바랐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은 이태좌의 부제(婦弟)이다.】


【태백산사고본】 19책 24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63면
【분류】인사-관리(管理)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아뢰기를,
"홍경보(洪景輔)가 전후에 처분한 것을 차례로 들어 논한 것은 내가 그르게 여기지 않는다마는, 하교(下敎)한 뒤에는 차마 당목(黨目)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은 신자(臣子)다운 마음이 아니다. 유최기(兪最基)는 말할 것도 없고, 이희(李憙)도 당목을 버리지 못했으며, 홍경보가 진(秦)나라 사람을 말한 것도 아직 당목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내가 비록 부덕하기는 하지만 어찌 혼동하려고 할 수 있겠는가? 김취로(金取魯)도 망발한 사람이므로 대간(臺諫)의 자리에 두지 않으려고 한다. 그 동안에 역적에 대한 옥사(獄事)가 범람하게 되었었고 더욱이 간련(干連)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한 전당(殿堂)에서 조용하게 의논하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도리이겠는가? 편당을 위하는 것인가?"
하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친히 성상께서 깨우쳐 주심을 받들고도 누가 감히 당목(黨目)을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아르기를,
"갑진년·을사년·정미년의 처분을 지적하여 말을 한 것은 군부(君父)를 믿지 않는 것으로서, 저번에 정홍상(鄭弘祥)이 탕평(蕩平)을 배척한 말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인심이 소란하므로 벼슬이 높은 사람과 사자(士子)들은 시골로 많이 내려가버려 도성 안이 거의 비었습니다."
하고, 수어사(守禦使) 윤순(尹淳)은 아뢰기를,
"지난해에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마침내 증험되었었기 때문에, 올해에는 ‘경술년에 이러이러할 것이다.’ 하여, 인심이 떠도는 말에 동요되고 있습니다. 성문 부장(城門部將)의 말을 듣건대, ‘하루 동안에 교자(轎子)를 타고 나가는 부인들이 더러는 수십 명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고, 홍치중이 아뢰기를,
"경술년에 좋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수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이는 비록 금법(禁法)을 만들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성상께서 또한 하나의 변괴라는 뜻으로 엄격하게 하교(下敎)를 하신다면, 각자가 성상께서 분부하신 것을 들어 권면하고 경계하여 그 친구들을 만류하는 외에는 딴 도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언 남태경(南泰慶)이 청하기를
"한성부(漢城府)에 분부하여 오부(五部)를 사실(査實)하게 하소서."
하고, 공조 판서 이삼(李森)이 청하기를,
"시끄럽게 떠도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을 기포(譏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만 마땅히 영상(領相)의 말대로 엄격하게 신칙해야 할 뿐이고, 집집마다 일러주고 호호(戶戶)마다 말해 주어야 할 것은 아니다. 진퇴(進退)의 즈음에 있어 관망(觀望)하다가 시골에 있기를 꾀하는 것은 모두 당론(黨論)에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홍치중이 아뢰기를,
"민진원(閔鎭遠)은 곧 폐부지친(肺腑之親)690)  으로서 진심으로 국가를 위하는 사람이니, 따로 개석(開釋)하시는 말을 하여 들어오도록 하신다면 전하께서 하려고 하시는 일이 또한 마땅히 효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진원은 경솔한 일이 많기는 하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이 판부사(李判府事)를 ‘4역적이라.’는 데에 대하여 다시 증거를 대주어도 마침내 들어오지 않고 고집하고 있다. 홍경보(洪景輔)는 그전에는 공이 있었는데, 이번의 거조를 보건대, 내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하였다. 홍치중이 아뢰기를,
"정형익(鄭亨益)을 당초에는 귀양 보내려고 했다가 그의 아들이 격쟁(擊錚)691)  하였으므로 삭출(削黜)에 그쳤고, 신노(申魯)도 또한 삭출하였으며, 심성희(沈聖希)에 있어서는 문출(門黜)을 풀어 주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오원(吳瑗)은 비록 편당에 물들기는 했지만 유독 나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도위(都尉)마저 저버렸다. 가려고 하는 사람은 가도록 맡겨 두고 시골에 잇는 사람들을 들어오도록 한다면 국가의 원기(元氣)가 자연히 굳건해져 시끄럽게 떠도는 말을 상관하지 않아도 금법 마련이 자연히 그 속에 있게 될 것이다. 돌아온다면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하도록 청한 뜻을 펴게 될 것이지만, 들어오지 않는다면 유독 내가 의심하게 되는 것만 아니라 그들의 몸과 명예에 해가 될 것이다. 지난 7월 초하룻날의 청대(請對)는 잘못한 것이니, 군부(君父)가 아주 혼암(昏暗)하지 않으면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윤순(尹淳)의 말이 ‘마속(馬謖)692)  이 승상(丞相)693)  에게 남만(男蠻)의 마음을 복종시키기를 원한다.’고 한 말은 지극히 옳은 요도(要道)이다. 3백 년 이래의 세록지신(世祿之臣)들을 내가 구제해 가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面目)으로 선왕(先王)들을 뵈올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심성희(沈聖希)의 문출(門黜)을 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대신이 원대(遠大)한 계책을 아뢰는 말은 혹은 계구(戒懼)하고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진달하거나 혹은 수한(水旱)과 도적에 대한 근심을 아뢰야 하는 것이다. 어찌 ‘경술년이 좋지 않다.’는 망령되고 허황된 근거 없는 말을 외람되게도 사총(四聰)의 아래에서 진달할 수 있겠는가? 임금을 섬기는 사체를 알지 못한 짓이라 하겠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송진명(宋眞明)을 파직하고, 북병사(北兵使) 김집(金潗)을 잡아다가 추문(推問)하도록 명하니, 온성 부사(穩城府使) 최제백(崔齊白)을 논죄(論罪)한 장계(狀啓) 내용에 파직하기를 청하지 않고 단지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기만 청했기 때문이다. 전부터의 준례가 범월(犯越)이 있게 되면, 북병사의 죄가 파직에 그치는데, 특별히 잡아다가 추문하여 경동(警動)하는 뜻을 보이도록 명한 것이다. 이어 명하기를, "변방 백성의 범월한 자를 해당 지방관이나 변진(邊鎭) 자체가 잡아서 고(告)하면 죄를 면제해 주고, 딴 길로 해서 발각하게 되면 율(律)대로 논죄(論罪)하며, 고의로 엄폐(掩蔽)하고 있다가 딴 사람이 고발하게 되면 한 등을 더한 율을 쓰라." 하였다. 예조 판서 김시환(金始煥)이 아뢰기를, "동궁(東宮)의 소상(小祥)이 멀지 않으니 미리 의주(儀註)를 강습(講習)하여,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상사 때와는 다르게 해야 합니다. 또한 신유년694)  의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대상(大喪) 때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고찰해 보건대,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가 군하(群下)들이 제복(除服)하는 날에 바로 길복(吉服)을 입음은 정례(情禮)에 어그러지게 됨을 들어, 제복하는 날은 천담복(淺淡服)을 입고서 그날을 마치고 이튿날을 기다렸다가 길복을 입기를 계청(啓請)하여 품정(稟定)한 일이 있었고, 신사년695)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복을 제복(除服)할 때에도 또한 이 예대로 했었습니다." 하매, 홍치중이 아뢰기를, "사사집들로 말하면 제복하는 날에 바로 색대(色帶)를 사용하니, 김석주가 인용한 정태화(鄭太和)가 이튿날에야 길복을 입은 예는 이번에는 인용할 수 없을 듯 싶습니다." 하고, 수어사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이번은 이미 기월(朞月)의 복제(服制)를 거행했으니, 마땅히 그전과는 다르게 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상(大喪)의 담제(禫祭) 때에도 흑견(黑絹) 곤복(袞服) 차림으로 제사를 거행하고 파제(罷祭)한 다음에 길복을 입는데, 이번에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제사를 거행하고서 그 이튿날에 길복을 입는다면 대상(大喪)보다도 또한 더하게 되는 것이다." 하매, 윤순이 아뢰기를, "복을 다 입고 나면 길복을 입게 된 것은 예(禮)에 입각(立脚)하여 정(情)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날로 길복을 입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마는, 이는 천만대(千萬代)의 정식(定式)이 되어야 할 것이니, 다시 외방(外方)에 있는 대신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응당 그래야 할 법제이니 물어볼 것 없다. 먼저 곡(哭)을 한 다음에 마땅히 길복 차림을 하고, 곡을 할 때에는 천담복 차림으로 나가도록 의주(儀註)를 만드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시환이 또 내전(內殿)이 입을 옷을 품(稟)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는 임금의 옷에 따라야 한다." 하였다. 김시환이 아뢰기를, "동궁(東宮)의 소상(小祥) 때는 군하(群下)들이 모두 천담복 차림으로 제사를 거행한 다음에 길복을 입고, 혼궁(魂宮)의 향관(享官)은 소상 뒤의 아침저녁 상식(上食) 때에 또한 마땅히 천담복 차림으로 제사를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향관의 소상(小祥) 뒤 복색(服色) 한 가지 절목(節目)은 외방(外方)에 있는 예를 잘 아는 유신(儒臣)에게 문의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9책 24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163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변란(變亂)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 / 인사(人事)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690] 폐부지친(肺腑之親) : 왕실의 가까운 친족.[註 691] 격쟁(擊錚) : 억울한 일이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하소연하기 위하여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일.[註 692] 마속(馬謖) : 촉한(蜀漢)의 장군.[註 693] 승상(丞相) : 제갈 양(諸葛亮)을 가리킴.[註 694] 신유년 : 1681 숙종 7년.[註 695] 신사년 : 1701 숙종 27년.
사신은 논한다. 대신이 원대(遠大)한 계책을 아뢰는 말은 혹은 계구(戒懼)하고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진달하거나 혹은 수한(水旱)과 도적에 대한 근심을 아뢰야 하는 것이다. 어찌 ‘경술년이 좋지 않다.’는 망령되고 허황된 근거 없는 말을 외람되게도 사총(四聰)의 아래에서 진달할 수 있겠는가? 임금을 섬기는 사체를 알지 못한 짓이라 하겠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송진명(宋眞明)을 파직하고, 북병사(北兵使) 김집(金潗)을 잡아다가 추문(推問)하도록 명하니, 온성 부사(穩城府使) 최제백(崔齊白)을 논죄(論罪)한 장계(狀啓) 내용에 파직하기를 청하지 않고 단지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기만 청했기 때문이다. 전부터의 준례가 범월(犯越)이 있게 되면, 북병사의 죄가 파직에 그치는데, 특별히 잡아다가 추문하여 경동(警動)하는 뜻을 보이도록 명한 것이다. 이어 명하기를,
"변방 백성의 범월한 자를 해당 지방관이나 변진(邊鎭) 자체가 잡아서 고(告)하면 죄를 면제해 주고, 딴 길로 해서 발각하게 되면 율(律)대로 논죄(論罪)하며, 고의로 엄폐(掩蔽)하고 있다가 딴 사람이 고발하게 되면 한 등을 더한 율을 쓰라."
하였다. 예조 판서 김시환(金始煥)이 아뢰기를,
"동궁(東宮)의 소상(小祥)이 멀지 않으니 미리 의주(儀註)를 강습(講習)하여,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상사 때와는 다르게 해야 합니다. 또한 신유년694)  의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대상(大喪) 때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고찰해 보건대,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가 군하(群下)들이 제복(除服)하는 날에 바로 길복(吉服)을 입음은 정례(情禮)에 어그러지게 됨을 들어, 제복하는 날은 천담복(淺淡服)을 입고서 그날을 마치고 이튿날을 기다렸다가 길복을 입기를 계청(啓請)하여 품정(稟定)한 일이 있었고, 신사년695)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복을 제복(除服)할 때에도 또한 이 예대로 했었습니다."
하매, 홍치중이 아뢰기를,
"사사집들로 말하면 제복하는 날에 바로 색대(色帶)를 사용하니, 김석주가 인용한 정태화(鄭太和)가 이튿날에야 길복을 입은 예는 이번에는 인용할 수 없을 듯 싶습니다."
하고, 수어사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이번은 이미 기월(朞月)의 복제(服制)를 거행했으니, 마땅히 그전과는 다르게 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상(大喪)의 담제(禫祭) 때에도 흑견(黑絹) 곤복(袞服) 차림으로 제사를 거행하고 파제(罷祭)한 다음에 길복을 입는데, 이번에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제사를 거행하고서 그 이튿날에 길복을 입는다면 대상(大喪)보다도 또한 더하게 되는 것이다."
하매, 윤순이 아뢰기를,
"복을 다 입고 나면 길복을 입게 된 것은 예(禮)에 입각(立脚)하여 정(情)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날로 길복을 입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마는, 이는 천만대(千萬代)의 정식(定式)이 되어야 할 것이니, 다시 외방(外方)에 있는 대신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응당 그래야 할 법제이니 물어볼 것 없다. 먼저 곡(哭)을 한 다음에 마땅히 길복 차림을 하고, 곡을 할 때에는 천담복 차림으로 나가도록 의주(儀註)를 만드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시환이 또 내전(內殿)이 입을 옷을 품(稟)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는 임금의 옷에 따라야 한다."
하였다. 김시환이 아뢰기를,
"동궁(東宮)의 소상(小祥) 때는 군하(群下)들이 모두 천담복 차림으로 제사를 거행한 다음에 길복을 입고, 혼궁(魂宮)의 향관(享官)은 소상 뒤의 아침저녁 상식(上食) 때에 또한 마땅히 천담복 차림으로 제사를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향관의 소상(小祥) 뒤 복색(服色) 한 가지 절목(節目)은 외방(外方)에 있는 예를 잘 아는 유신(儒臣)에게 문의하라."
하였다.

 

오는 11월 16일에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소상(小祥) 제사를 거행할 때에 전하(殿下)는 최복(衰服)을 갖추고 대내(大內)에서 별전(別殿)으로 나아가 거애(擧哀)한 다음 악차(幄次)로 나아가 최복을 벗고 다시 참포(黲袍)에 익선관(翼善冠)과 오서대(烏犀帶) 차림을 하고, 제사를 거행할 때에 자리로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의식대로 하고 난 다음에 다시 길복(吉服) 차림을 한다. 중궁전(中宮殿)은 최복을 갖추고 망곡위(望哭位)로 나아가고, 내명부(內命婦) 및 상궁(尙宮) 이하도 또한 최복 차림으로 따라 들어가 망곡위로 나아가 곡림(哭臨)한다. 중궁전 악차로 나아가 최복을 벗고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고쳐 의식(儀式)대로 곡림을 끝내며 다시 길복 차림을 하고, 내명부 이하도 또한 길복을 입는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과 왕대비전(王大妃殿)은 또한 천담복 차림으로 각기 본전(本殿)의 별당(別堂)에 자리를 만들어 놓고 망곡(望哭)한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 및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 관원은 최복을 갖추고 자리에 나아가 곡하며 재배(再拜)하고 행례(行禮)한 다음 막차(幕次)로 나가 최복을 벗고 천담복과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바꾸어 입으며 도로 들어가 자리로 나아가서 제사를 거행한 다음에 길복을 입는다. 유생(儒生)들은 흑립(黑笠)·백의(白衣)·백대(白帶) 차림으로 대궐 문 밖에서 망곡(望哭)하고 재배를 하고 나서 천담복과 흑대(黑帶) 차림으로 고치고, 제사를 거행한 다음에 길복을 입는다. 제사를 거행한 뒤에 전하가 벗은 최복과 중궁전이 벗은 최복을 상의원(尙衣院) 관원이 받들고 나와 각전(各殿)의 내시(內侍)와 더불어 시어소(時御所)의 후원(後苑) 깨끗한 땅에 매안(埋安)한다.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연제(練祭) 뒤 빈궁(嬪宮)의 변복 의주(變服儀註)는 이러하다. 빈궁은 요대(腰帶)를 벗고, 마전하지 않은 최복(衰服)과 치마, 【대공복(大功服) 때의 7승 베를 쓴다.】  연포 개두(練布蓋頭)·두수(頭𢄼) 및 띠[帶]·백피혜(白皮鞋)를 바꾸어 착용하고, 평소에는 소복(素服)을 입는다. 대전(大殿)·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왕대비전(王大妃殿)·중궁전(中宮殿)에게 뵈러 갈 때에는 흑개두(黑蓋頭)·두수·백포(白布) 대수(大袖)·장군(長裙)·백피혜를 착용한다. 빈궁의 내시(內侍)와 사약(司鑰) 이하는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을 벗고, 마전하지 않은 최복과 치마, 【대공복 때의 7승 베를 쓴다.】  갈요질(葛腰絰) 【칡이 없으면 숙마(熟麻)를 사용하되 삼중 사고(三重四股)로 하고 끈은 연포(練布)를 쓴다.】 ·건(巾) 【연포를 쓴다.】 ·연중의(練中衣)·연포대(練布帶)·마혜(麻鞋)를 바꾸어 착용하고, 공복(公服)은 백포 단령(白袍團領)·포과사모(布裹角帶)·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한다. 수묘관(守墓官)·시묘관(侍墓官)·내시(內侍) 이하는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벗고, 마전하지 않은 최복과 치마 【대공복 때의 7승 베를 쓴다.】 ·갈요질(葛腰絰)·연관(練冠)·연중의(練中衣)·연포대(練布帶)·마혜(麻鞋)를 바꾸어 착용한다.

 

9월 21일 임진

유성(流星)이 벽성(壁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서너 자 가량이며 빛깔이 붉었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검토관 조명익(趙明翼)이 글 뜻을 진달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의아하여 물으니, 주대(奏對)하기를,
"소신(小臣)이 지난해에 청대(請對)했었는데 갑자기 준엄하신 분부를 받들고서 폐기(廢棄)될 것으로 자인했습니다. 지금 허물을 씻어 주시는 은덕을 받들었기에 감히 어그러지거나 태만한 짓을 할 수가 없고, 마침 법강(法講)을 만났기에 뻔뻔스러운 얼굴로 입시(入侍)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어찌 감히 유신(儒臣)으로 자처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에 저번날 분부한 것을 들어 인혐(引嫌)하고 사진(仕進)하지 않는다면 피차(彼此)가 입조(立朝)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이미 강석(講席)에 참여하고도 글 뜻을 진달하지 않으니, 엄중하게 추고(推考)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시독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상소를 진달했다가 귀양간 사람들이 방석(放釋)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경성판관(鏡城判官) 윤득화(尹得和)는 특히 외방(外方)에 보직(補職)되어 용서하는 은덕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득화는 어찌하여 유독 방석되지 못한 것인가? 지금 우선 개차(改差)하라."
하였다. 유엄이 또 아뢰기를,
"정홍상(鄭弘祥)은 적소(謫所)에서 죽었으니, 진실로 비참하고 가련합니다. 지난해에 정찬선(鄭纘先)의 반츤(返襯) 때에는 조가(朝家)에서 담군(擔軍)을 제급(題給)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에 책벌(責罰)할 적에는 대개 한때에 경칙(警飭)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듣건대, 그가 죽었다니 측은하고 상심됨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느냐? 전례가 있었다니 담군을 제급하라."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동지사(同知事)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제갈 양(諸葛亮)이 촉(蜀)나라를 다스릴 적에 준엄(峻嚴)함을 숭상하였습니다. 이때에는 한갓 덕화(德化)만 숭상할 수 없어서 반드시 형벌로 제정(齊整)한 다음에야 무너진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할 수 있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송인명(宋寅明)의 말은 언제나 ‘마땅히 법령(法令)을 밝히고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했고, 이종성(李宗城)의 말은 언제나 ‘마땅히 순수하게 덕으로 교화(敎化)해 가야 한다.’고 했는데, 둘의 말은 모두 치우친 데가 없지 않기에 내가 매양 절충해 가려고 하면서도 마음에 당론(黨論)을 미워하기 때문에 벌을 씀이 더러 과중하게 되는 수가 없지 않았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하번(下番)이 출숙(出肅)696)  하여 강연(講筵)에 참여함은 비록 귀중하게 여겨야 할 일이기는 하나, 일제히 오게 된 다음에야 바야흐로 귀중하게 될 것이다."
하매, 검토관 조명익이 아뢰기를,
"당시에 같은 죄를 진 13인 중에 오직 이교악(李喬岳)만 죽었고 나머지는 모두 살아 있습니다마는, 종신토록 자폐(自發)할 뜻을 부형과 제우(儕友)들 사이에 말해 온 지 오래입니다. 한번 엄숙하게 분의(分義)를 펴 보이고 염퇴(斂退)하여 자정(自靖)하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요사이 명의(名儀)와 염우(廉隅)를 너무 앞세우므로 하번(下番)들은 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뒤로는 오직 ‘선천사(先天事)’ 세 글자를 가슴속에 머물러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9월 22일 계사

달이 귀성(鬼星)을 범했다.

 

김취로(金取魯)를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홍치중(洪致中)을 실록청 총재관(實錄廳總裁官)으로, 정수송(鄭壽松)을 금군 별장(禁軍別將)으로 삼았다.

 

9월 23일 갑오

달무리[月暈]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9월 25일 병신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참찬관 김시혁(金始㷜)이 아뢰기를,
"해서(海西)의 황당선(荒唐船)은 우려(憂慮)할 만한 것입니다. 경인년697)   무렵에 조가(朝家)에서 장연부(長淵府) 금사사(金沙寺)의 중들을 시켜 요망(暸望)하여 살피다가 쫓아가 잡도록 하고, 또 승대장(僧大將)을 정하여 전방선(戰防船)을 만들어 주었으며, 감영(監營)에서 돈을 빌려주어 절 앞의 포구(浦口)에 진보(鎭堡)의 모양과 같이 둑을 쌓게 하여 길이가 40리나 되었는데, 1천 섬지기 가량이나 됩니다. 절의 근처는 중들로 하여금 지어먹게 하고, 그 나머지는 민간을 모집하여 지어 먹게 하되, 세곡(稅穀)을 본사(本寺)에 받아 두고서 군향(軍餉)으로 하면 공사(公私)가 편리하게 될 것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낭관(郞官)을 보내어 간심(看審)하게 한 다음에 절목(節目)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듣건대, 북도(北道)에는 중이 많다는데,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이 와서 섞이게 된다면 이는 또한 안될 일이다. 모승(募僧)은 도신(道臣)의 장계(狀啓)를 기다려 본 다음에 처결하겠다."
하였다.

 

9월 26일 정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어 팔도(八道)에 군정(軍政)과 군기(軍器)를 신칙(申飭)하도록 하고, 또 종당에 수의(繡衣)를 내보내 염문(廉問)하라는 분부가 있었다.

 

조상경(趙尙絅)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성덕윤(成德潤)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세진(李世璡)을 사간(司諫)으로, 김성발(金聲發)을 장령(掌令)으로, 정도은(鄭道殷)을 지평(持平)으로, 박필주(朴弼周)를 집의(執義)로, 박필정(朴弼正)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9월 27일 무술

궁녀(宮女)를 잘못 추천한 사람을 먼 변방에 귀양 보내도록 명하고, 분부하기를,
"지난해에 양민(良民)을 궁녀로 추천했었기에 그 사람을 정배(定配)하도록 명했었는데도, 그전의 버릇을 고치지 않고 양반(兩班)의 서녀(庶女)를 추천하여 궁녀로 삼도록 청탁했다. 곧 고(故) 부사(府使) 김하정(金夏鼎)의 서녀이고 지금의 첨사(僉使) 김주정(金周鼎)의 서질(庶姪)로서, 이미 적숙(嫡叔)이 있는데도 투탁(投托)하여 시녀(侍女)로 삼았으니, 지극히 해괴하다. 추천한 사람의 이름을 내수사(內需司)에 물어보아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 이세진(李世璡)을 내쳐 장기 현감(長鬐縣監)으로 삼았다. 이세진의 상소에 이르기를,
"《감란록(勘亂錄)》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을 머리에 실린 것은 자못 내력(來歷)이 없는 것이니, 마치 머리가 없는 뱀과 같은 것입니다. 대개 고 상신(相臣) 유봉휘(柳鳳輝)의 지나간 해의 한 상소는 그의 마음을 미루어 보면, 비록 당초에 딴 뜻이 없은 것이라고는 하지마는, 작년의 역변(逆變)이 있은 뒤에 이르러 근본에 소급(遡及)하여 논한다면 역적 김일경이 지은 교문은 진실로 박필몽(朴弼夢)과 박필현(朴弼顯)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고, 유봉휘의 상소는 또한 역적 김일경의 구실(口實)거리가 되는 것으로서, 앞뒤가 서로 계승(繼承)되고 맥락(脈絡)이 이미 통해진 것입니다. 《감란록》 내용에 반드시 이 상소로 기두(起頭)를 한 다음에야 본말(本末)이 환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후세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론(黨論)으로 협잡을 부린 해독이 결국에는 하늘에 사무치는 앙화를 순치(馴致)하게 된 것을 분명하게 알고서 징창(懲創)하는 바가 깊어지게 될 것이니, 《감란록》 내용에 유봉휘의 상소로 기두하도록 명하기 바랍니다."
하고, 비답하기를,
"고(故)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유봉휘의 상소는 망령되기야 망령된 것이기는 하지마는, 그의 마음에 딴 뜻이 없는 것임을 이미 환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일찍이 극률(極律)에 처하지도 않았고 끝에는 또한 관작(官爵)을 복구하게 된 것이다. 이미 딴 뜻이 없는 것임을 알고도 그의 상소를 입록(入錄)하는 것은, 고금 천하에 어찌 그러한 거조(擧措)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고, 또 분부하기를,
"이세진이 올봄에 상소한 말은 지극히 괴상한 것이기에 이미 벌을 받았으니 마땅히 스스로 가다듬어야 할 것인데, 이번의 상소의 말은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닌 것이었고, 더러는 고상(故相)이라고 했다가 더러는 단지 이름만 지적하였으니, 말이 순서와 골자(骨子)가 없는 것이다. 바야흐로 백관(百官)들을 신칙하여 탕평(蕩平)을 힘쓰고 있는 날을 당하여 통엄(痛嚴)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장기 현감을 제수하여 내일로 사조(辭朝)하게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28일 기해

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를 절도(絶島)에 이배(移配)하도록 명하였다. 장령 김성발(金聲發)이 상소하기를,
"김일경(金一鏡)과 박상검(朴尙儉)이 결탁한 상황이 이미 드러나서 소하(疏下)의 제인(諸人)이 자연히 어두워서 밝히기 어려운 속에 들어 있으니, 진실로 육지(陸地)에 두고 있음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진유가 박만정(朴萬鼎)을 잡아 바친 것이 이미 역적 박필현(朴弼顯)의 군사가 패전한 뒤에 있었기에 그 사이의 정절(情節)이 더욱 의심스럽게 되었으니, 한결같이 모두 절도에 천극(栫棘)698)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본사(本事)는 이미 명백하게 분부를 내린 것이니, 소하(疏下)의 제인들을 육지에 그대로 둘 수 없기는 하다마는, 만일에 다시 천극을 한다면 지나치게 되니 모두 절도에 정배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동지사(同知事) 윤유(尹游)가 아뢰기를,
"사행(使行) 때에 개시(開市)하는 것과 세마(貰馬) 등의 일을 상역(商譯)들의 빚을 청산해야 하는 한 가지 일로 인하여 국가에 치욕이 미치고 있기 때문에 엄하게 막고 있습니다마는, 의주(義州) 성 안의 백성 3천 호(戶)의 생계가 영구히 끊어지게 되었으니, 변통하는 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은화(銀貨)를 많이 가지고 들어가 먼 곳의 쓸데없는 물건들을 무역해다가 사치를 조장하고 있으니, 이는 막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윤유가 아뢰기를,
"삼(參)을 캐는 호인(胡人)들이 압록강 가에다 막사를 치고 그대로 머물러 거주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옹정(雍正)699)  이 장표(章標)를 주어 내보내고 있는데 한 장표에 더러는 10여 인씩이나 되니, 얼음이 얼어버리면 더욱 쉽게 상통(相通)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주문(奏文)을 보내어 쟁집(爭執)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옹정이 본시 은(銀)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고 또한 이기기 좋아하는 병통이 있는데, 지난날에 우리에게 곤욕(困辱)을 보인 것도 또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의 일을 좋게 여기지 않은 때문이었다. 만일 지금 주문을 보낸다면 그가 반드시 부끄럽게 여겨 트집을 부리기 쉬울 것이니, 그대로 놔두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생원(生員)·진사(進士)에게 복시(覆試)700)  를 보여 생원 박사백(朴師伯)과 진사 이석표(李錫杓) 등 2백 인을 뽑았다.

 

9월 29일 경자

사헌부에서 【장령 김성발(金聲發)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세진(李世璡)을 먼 외방(外方)에 보직(補職)한 일은 신(臣)이 근심과 개탄이 지극해짐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아! 당론(黨論)의 화가 장차 하늘에 사무치게 되면서 서로 엉키어 굳어져버렸으므로, 속투(俗套)에서 자신을 빼내게 되는 사람이 적습니다마는, 유독 이세진이 저편도 아니고 이편도 아니면서 장차 온 세상에 옳음과 그름을 정하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 황극(皇極)701)  을 세우시는 도리에 있어 진실로 우악(優渥)하게 용납하고 아름답게 여기며 권면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꺾어버리고 또한 따라서 배척하여 내쫓아, 처분이 온당하지 않고 경상(景象)이 아름답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급히 전 사간(司諫) 이세진을 먼 외방에 보직하도록 하신 명을 정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저번에 지난간 일은 선천(先天)에 붙이도록 하였던 것은 심상한 뜻이 아니었다. 만일에 근본을 캐내어 벌을 주고 지난날의 당목(黨目)은 물론하기로 한다면, 조정 신하들 중에 이를 면하게 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저번에 삼적(三賊)에 대해 아뢰는 말을 시급히 윤허하였고, 이미 김일경(金一鏡)과 박상검(朴尙儉)의 일에 대하여 환하게 효유(曉諭)했었다마는, ‘삼적(三賊)’의 적자(賊字)는 역적(逆賊)의 적이 아니라 곧 사당(私黨)을 비호(庇護)하고 세상의 도의를 어지럽히는 적을 말한 것이다. 특별히 적자(賊字)를 쓴 것은 이 뒤에도 편당을 잊어버리지 않고 국가를 저버리는 자의 마음을 죄주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9월 30일 신축

이정소(李廷熽)와 신치운(申致雲)을 승지(承旨)로, 최명상(崔命相)을 지평(持平)으로, 박필기(朴弼琦)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조한위(趙漢緯)를 수찬(修撰)으로, 유건기(兪健基)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첫 번째 정사(呈辭)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손수 써서 내리며 승지를 보내며 함께 들어오도록 하였다.

 

대신과 비국(備局)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언로(言路)가 열림과 닫힘은 국가의 번성과 쇠퇴에 관계가 있는 것인데, 요사이 전하께서 대각(臺閣)의 신하들에 대하여 너무 지나치게 꺾어버리십니다. 이세진(李世璡)의 상소는 언뜻 보면 이상스러운 듯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옛말이 ‘독수리가 해를 입게 되면 난조(鸞鳥)와 봉황(鳳凰)은 더 가버리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그의 말이 죄를 줄 것이 없는데도 죄준다면 사람들이 장차 혀를 다물어버리게 될 것인데, 누가 감히 말을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치우치게 그 사람을 비호(庇護)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제신(諸臣)들을 권면하여 그전의 일들을 모두 버리어 선천(先天)에 붙여버리게 하려고 한 것이다. 아까 춘추관(春秋館)의 단자(單子)를 보건대, 충청 감사 이성룡(李聖龍)의 교서(敎書) 제술관(製述官)을 반드시 승지 신무일(愼無逸)로 전차(塡差)한 것도 또한 그전의 투식(套式)을 답습(踏襲)한 소치이었다. 김성발(金聲發)이 진달한 소하(疏下) 삼적(三賊)에 관한 일은 한 말이 너무 유순하고 부드러웠었다. 이 일에 있어서는 말을 하지 않으려면 그만이거니와 말을 한다면 어찌 그렇게 유순하고 부드럽게 하여 어두운 속에 놓아 둘 수 있겠는가? 어제의 비망기(備忘記) 내용에 ‘적(賊)’이란 한 글자는 역적(逆賊)이란 적자(賊字)가 아니라, 곧 사당(私黨)을 비호하고 군부(君父)를 망각하며 세상의 도의(道義)를 어지럽히는 적(賊)을 말한 것이다. 이미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과 결탁했었고 보면, 사당을 비호한 죄가 있음을 자연히 알 수 있는 것인데도, 김성발이 분명하게 그의 죄를 말하지 않았었으니, 이는 개탄스러운 일이다. 이세진의 말은 조금 그의 마음을 고친 것 같았으니, 편당하는 테두리에서 뛰어나와 자호(自好)하게 되었다면 어찌 반가운 일이 아니겠는가마는, 나는 그가 구차하게 세속에서 빠져나오고 말기만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세진의 말이 겉면에서 보기에는 좋은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다. 유봉휘(柳鳳輝)의 상소는 망령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신이 죽은 뒤에는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이 준례인데도 준례대로 시호를 내리지 않았던 것은 뜻한 바가 있은 것이다. 옛적에 인조(仁祖)께서 고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일에 있어서 ‘단정코 딴마음이 없은 것을 반드시 후세 사람들이 알게 해야 한다.’고 분부하셨었다. 오늘날의 일은 조정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그때에 극력 유봉휘를 옳게 여겨 불차 탁용(不次擢用)702) 했던 것도 잘못된 것이고, 반역할 마음을 품은 것이라 하여 안율(按律)하기를 청하게 되었던 것도 또한 분수(分數)에 벗어나게 된 것이었다. 내가 평소에 그 사람을 알고 있었고 시종 지탱해 가게 보호했었지마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의리에 있어서도 밝지 못했었다. 반드시 유봉휘와 같은 마음은 없으면서 유봉휘와 같은 상소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할 것이나, 지나치게 용서해 주는 것은 또한 잘못하는 것이다. 지금 이세진 유봉휘의 상소를 《감란록(勘亂錄)》 첫머리에 넣기를 청한 것이 표면으로는 허름한 것 같지만 그 뜻은 진실로 심각한 것이다. 당론(黨論)이 어찌 유봉휘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또한 어찌 고(故) 상신(相臣) 조태구(趙泰耉)의 차자(箚子)가 없었으며, 또한 어찌 사문(斯文)703) 들의 일이 없었는가? 밀고 올라 간다면 몇 층이라도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때에 송인명(宋寅明)이 연석(筵席)에서 품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참작해서 분부했던 것인데, 지금 유봉휘의 상소를 첫머리에 넣지 않은 것을 들어 머리가 없는 뱀과 같다고 하였으니, 《감란록》을 찬수(撰修)한 사람들이 또한 장차 어떤 사람이 되어지겠는가? 이렇게 되면 다시 한정이 없는 갈등이 생기게 될 것이다. 지금 이세진이 저편도 아니고 이편도 아니면서 이에 상소 내용에 있어서 곧바로 배척하고 싶지 않으므로, 처음에는 고 상신(相臣)이라고 했다가, 또한 유봉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공정한 논이라고 하지 않을까 염려되므로 아래에서는 그의 성(姓)을 빼어버렸으니, 이는 한난(寒暖)에 있어서도 부당하고 피차(彼此)에 있어서도 부당한 짓으로서, 그 말류(末流)의 폐단이 장차 붕궤(崩潰)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매,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배척하여 먼 고을에 보직(補職)한 것은 너무 지나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란록》을 찬수(纂修)한 사람들도 또한 모두 ‘단지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으로 첫 머리를 삼으면 내력(來歷)이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명을 도로 거두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이번의 이 한 상소는 그전부터 유봉휘를 좋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의 하나의 큰 단서(端緖)가 되는 것이다. 만일 이번에 이세진을 제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금지할 수 있게 되겠는가?"

하였다. 교리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이세진이 봄 무렵에 올린 한 상소는 자못 긴요하지 않은 것인데, 봄 무렵에 상소한 말을 괴이하고 망령된 것이라고 분부하심은, 자못 남의 과실은 기억하지 않아야 하는 성덕(聖德)에 흠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저편도 아니요 이편도 아니라[不彼不此]’는 네 글자는 너무도 드러나게 됨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한 비망기(備忘記)에 두 군데나 실언(失言)을 하시게 되었으니, 신(臣)은 이를 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신(儒臣)이 진달한 말이 옳다. 이세진의 의사를 유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매, 정우량이 아뢰기를,

"《감란록》을 찬수한 사람들을 공격한 것이 아닙니다. 그 상소를 《감란록》에 넣는 것이 어떠할지는 알지 못하오나, 그의 뜻은 찬수한 사람들을 해롭게 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평소에 내가 유신을 그렇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지금 유봉휘의 상소를 《감란록》의 첫머리에 수록하는 것의 합당 여부를 알지 못한다니, 개탄스럽다."

하였다. 정우량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기휘(忌諱)하는 데가 있어 말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이 일은 송인명(宋寅明) 박사수(朴師洙) 《감란록》을 찬수할 때에도 또한 그런 의논이 있었습니다. 지난봄의 역란(逆亂)은 진실로 김일경이 지은 교문(敎文)에서 근원한 것이기 때문에 송인명이 청대(請對)하여 품정(稟定)했었지만, 유봉휘의 상소에 있어서는 아래에서 감히 멋대로 첫머리에 수록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이미 이 《감란록》을 끝냈는데, 다시 무슨 구애할 것이 있어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김일경이 지은 교문은 유봉휘의 상소 뒤에 나온 것인데, 결국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소회(所懷)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대각(臺閣)의 사체가 본시 그러한 것인데, 배척하여 멀고 고약한 데에 보직(補職)하였으니, 마침내 과당한 데에 관련된 것입니다."

하고, 장령 김성발(金聲發)이 아뢰기를,

"이세진의 말은 그른 것이 아닙니다. 역적 김일경의 상소도 이미 유봉휘의 상소에서 연유한 것이고 박필현(朴弼顯) 박필몽(朴弼夢)의 일도 또한 유봉휘의 상소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에 말한 것이니, 잘못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유봉휘의 상소를 반드시 《감란록》의 첫머리에 수록하려고 하는 것은 대개 그 역적들의 근본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에 있어서는 어두워서 분명하지 못한 처지에 놓아 두고 그의 상소에 있어서는 《감란록》의 첫머리에 올리려고 함은 어찌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직명(職名)은 그대로 있는데 사람만 벌주기를 청하니, 내가 들어줄 수 없다. 만일 ‘그의 마음에 비록 딴 생각이 없었으나 이처럼 옳음과 그름을 밝히는 날에 당하여 그 상소를 《감란록》의 첫머리에 수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면, 어찌 공평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김성발이 아뢰기를,

"유봉휘의 일은 본시 반역할 마음이 없은 것이니, 성상께서 분부한 말씀이 지당합니다마는, 이미 그의 상소로 인하여 묘맥(苗脈)이 생겼고 보면 《감란록》에 넣는 것이 안 될 것도 없습니다. 그의 마음은 비록 반역한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의 상소는 빼버릴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관(臺官)들의 말은 소견이 있는 것이기에 더러 과격하게 되어도 좋은데, 이는 망령된 데가 없지 않았다. 저번날 유겸명(柳謙明)이 연석(筵席)에서 대신을 배척하여 논하면서 ‘그놈[其漢]’이라고까지 했지만 내가 외방(外方)에 보임(補任)하지 않고 유독 이세진에게만 외보(外補)한 것을 혹은 내 마음이 치우치게 들어가는 데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 생각할 것이므로 물어본 것이다. 내 생각에 유봉휘의 상소를 《감란록》의 첫머리에 수록하자는 사람의 의논은 반드시 별다르게 옳음과 그름이 있을 것이므로 그 말을 들어보려고 한 것이다. 지금 이렇게 진달하는 말들은 별다른 뜻이 없는 것이었으니, 곧 나의 소견이 치우치게 들어가지 않았음을 알겠다. 유봉휘가 만일 반역할 마음이 있었다면 그의 상소를 첫머리에 수록하는 것이 단정코 옳지마는, 그렇지 않다면 더 넓히어 당론(黨論)까지를 아울러 올려야 할 것이다. 이정제(李廷濟)의 일에 있어서는 딴 뜻이 아니라, 상소의 뜻이 모호했기 때문에 책비(責備)하는 뜻으로 벌을 준 것이고, 홍경보(洪景輔)의 상소는 범연히 본다면 ‘기절(氣節)이 시들해졌다.’고 한 말은 또한 소견이 없지 않은 것이었으나, 오늘날 당론에 고질병이 든 사람들이 반드시 이 말을 본받게 되어 세상에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또한 벌을 주게 된 것이다."

하고, 승지에게 받아 쓰도록 명하면서 이르기를,

"엊그저께 이세진에게 분부한 내용에 저편도 아니요 이편도 아니라는 등의 구절은 당초에 십분(十分) 상량(商量)해 보지 않고 썼으므로 또한 다시 생각해 보려는 뜻이 없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 유신(儒臣)이 진달한 말을 들어 보건대,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겠다.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바야흐로 지금 백관(百官)들을 신칙하여 격려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피차(彼此)’ 두 글자를 비망기(備忘記)에 썼으니, 지극한 정성으로 신칙하고 격려하는 뜻이 아니게 되었다. ‘노여움을 딴 사람에게 옮기지 말라.’는 것은 성현(聖賢)의 경계이다. 첫 구절의 말은 지금 유신이 진달하는 것에 따라 또한 과중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비망기 가운데 이세진 아래 ‘금춘(今春)’에서 ‘자려(自勵)’까지의 18자를 지워버리고, ‘불피 불차(不彼不此)’ 네 글자를 ‘아주 모호한 데 관계된다[殊涉模湖]’로 고쳐, 내가 지극한 정성으로 편당을 없애려고 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이집(李㙫)이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衙門)의 면세(免稅)에 관한 일을 아뢰니, 임금이 아뢰기를,

"성균관(成均館)·충훈부(忠勳府)·종부시(宗簿寺)와 공상(供上)을 맡아 보는 아문 이외는 모두 마땅히 혁파해야 한다."

하고, 또 분부하기를,

"사옹원(司饔院)의 시산(柴山)은 그전과 달라졌으니, 묘당(廟堂)에서 시산을 가려서 주어 절수(折受)하도록 하고 긴요하지 않은 것은 혁파하라."

하였다. 판윤(判尹) 장붕익(張鵬翼)이 청하기를,

"도성(都城) 안팎에 있는 양부전(量付田) 이외에 개간(開墾)한 곳은 모두를 도로 묵히게 하여 수목(樹木)을 장양(長養)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불법으로 경작함이 많은 것은 땅이 귀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번에 한결같이 모두 강박하여 묵히도록 한다면, 민생들이 반드시 제 잘못은 알지 못하고 원통해 할 것이다. 도성 안과 성 밑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만 묵히게 하고, 이 뒤에 범람하게 경작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해야 한다."

하였다. 김성발 이세진의 외방 보임을 정지하기를 청했다가 윤허받지 못한 것을 들어 인피(引避)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비답한 분부는 뜻을 보인 것에 지나지 않고, 오늘 내린 분부도 또한 깊은 뜻이 없는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집이 아뢰기를,

"소하(疏下)의 삼적(三賊)들이 요망한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한 것은 얼마나 흉참한 정상(情狀)이겠습니까? 죄명이 이미 드러난 뒤에 대관(臺官)의 상소에 따라 섬에 귀양 보내기로 개정했으니 마땅히 멀고 고약한 땅으로 보내야 할 것인데, 금부(禁府)에서 정한 데는 곧 좋은 지역으로서, 마치 진구렁 속에서 빼내어 평탄한 육지 위에 놓은 것과 같게 되었으니, 변방에서 섬으로 옮기도록 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해당 금부 당상(堂上)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고, 죄인들은 마땅히 모두 배소(配所)를 개정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세상의 도의가 점점 무너진 뒤부터 밉지 않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지역을 주고 미운 사람에 있어서는 간혹 흑산도(黑山島) 등에 보내는 짓을 한다. 전번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진달한 말에 따라 특별히 분부한 이외에는 배소를 정하지 말 것을 정탈(定奪)했었다. 이번에 삼적(三賊)들의 배소는 마땅히 제주(濟州) 대정(大靜) 등지에 정해야 하는데도 그만 좋은 지역에 정하여 단자(單子)를 입계(入啓)할 때에 내가 미처 요량해 보지 않고서 계하(啓下)해 버린 것이다. 지도(智島)·고금도(古今島)·진도(珍島) 등지는 비록 바다 속의 섬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곧 좋은 지역이니, 경(卿)의 말이 옳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환시(宦寺)와 결탁한 것을 이진유(李眞儒)의 무리가 어찌 알지 못했는가? 어제 내린 분부를 듣기 이전에는 용서하더라도 혹 될 수 있었거니와, 이번에 분부를 내릴 적에 이미 특별히 ‘적자(賊字)’를 써서 분명하게 단안(斷案)을 보여 주어 모훈(謨訓)과 같이 했었고 보면, 도리에 있어 마땅히 더럽힌 옷을 벗어버리듯이 하고 그전의 풍습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인데, 아직도 계련(係戀)하는 마음이 있어 좋은 지역에 정배(定配)하였으니, 사체에 있어 지극히 미안스러운 일이다. 신칙하고 격려하는 도리에 있어 책벌(責罰)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으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서명균(徐命均)은 파직하고 삼적(三賊)들의 배소는 다른 곳으로 다시 정해야 한다."

하매, 정우량이 아뢰기를,

"서명균이 어찌 삼적을 옹호한 사람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옹호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증오(憎惡)하는 마음이 깊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이집이 아뢰기를,

"그의 아비가 또한 일찍이 이진유에게 곤욕을 당했었기 때문에 평소에 친호(親好)하게 지내는 일이 없었는데, 오늘날에 와서 어찌 옹호할 수 있겠습니까? 신(臣)도 또한 그 무리에게 곤욕을 당했었기에 고념(顧念)하지 않는데, 저 서명균이 또한 어찌 삼적들을 고념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좋은 지역에 정배한 죄는 마땅히 경책(警責)을 가해야 하지만, 파직에 있어서는 과중하게 됨을 면하지 못할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과중한 일이 아니다. 어제 내린 분부를 들은 뒤에는 마땅히 이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