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임인
사간(司諫) 박필기(朴弼琦)가 상소하기를,
"보은(報恩) 땅을 지나가고 있는 중에 사자암(獅子庵) 중의 말이 ‘이는 원종(元宗)의 원당(願堂)이라’고 했는데, 불우(佛宇)의 곁 1칸의 누추한 집에다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있어 불결(不潔)하고 불경스러움이 이보다 심할 수 없었습니다. 성조(聖祖)의 하늘에 계시는 영혼이 어찌 차마 이런 예가 아닌 제사를 흠양하시겠습니까? 성조(聖朝)에서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어 천고(千古)에 빛이 나게 되었는데, 이 일 한 가지는 어떤 연유로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善)을 하면 복을 받게 됨은 본시 상리(常理)인 것인데, 어찌 혹시라도 다시 치곤(緇髡)704) 무리들의 축원(祝願)에 의하여 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일은 이미 조가(朝家)에서 명한 것이 아닐 것이니, 오욕(汚辱)과 설만(褻慢)함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친히 사핵(査覈)하여 철거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호서(湖西)는 풍년이 들면 곡가(穀價)가 너무나 지천(至賤)이니, 시가(市價)를 평균하게 하는 것이 민생을 돌보는 요무(要務)입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가격을 절충해서 정하여 풍년에는 돈 1냥에 쌀 6두(斗), 중간 해에는 5두, 흉년에는 4두씩으로 하는 것을 영구히 영갑(令甲)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이 지극히 놀랍고 해괴하니, 장차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사실(査實)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말단의 일은 네 말이 비록 옳기는 하나, 이는 조가(朝家)에서 지휘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함흥(咸興)에 홍역(紅疫)이 퍼져 죽은 사람이 5백여 명이나 됩니다. 정해년705) 홍역 때의 예에 따라 의원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집이 아뢰기를,
"어제 궁인(宮人)을 추천한 사람을 정배(定配)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김주정(金周鼎)은 숙질간으로서 부동(符同)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니, 일체로 정배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부교리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오직 궁금(宮禁)을 엄숙하고 맑게 하는 데에 달린 것입니다. 현종조(顯宗朝)에 양녀(良女)를 추천하는 것도 일체 금방(禁防)했었는데, 하물며 양반(兩班)의 딸이겠습니까? 신(臣)이 어제 비망기(備忘記)를 보고서 반가운 마음으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이 아뢴 말이 진실로 적절한 것이나 궁중이 엄숙해지게 하는 도리는 한 가지만으로 족한 것이 아니니, 이로 인해 더욱 힘써 간다면 어찌 성상의 덕이 더욱 빛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잡아다가 추문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액례(掖隸)들이 이장(移葬)할 때에 쓰는 편죽(編竹)을 내의원(內醫院)에서 구득하려 한다고 합니다. 청대죽(靑大竹)은 곧 어약(御藥)에 쓰는 것인데, 상장(喪葬)의 수용(需用)에 이용하려 했다기에 액례들의 이름을 사핵(査覈)해 내려고 하자, 장무관(掌務官) 이하가 죽기를 작정하고 버티면서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단히 범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해 전에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청대죽 일을 가지고 진달했을 적에 성상께서, ‘다급한 병에 쓰게 되는 것을 어찌 전연 막아버릴 수 있느냐?’고 분부하시게 되자, 액례들이 승전(承傳)을 받들었다고 자칭하며 더욱 멋대로 구색(求索)하게 되었다고 하니, 임금은 조짐이 되는 언동(言動)을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단지 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주어야 할 것으로 답을 했던 것이다. 어찌 승전을 받들게 할 이치가 있겠는가? 유사(攸司)로 하여금 죄를 과(科)하게 하고, 이뒤로는 구득하려는 사람을 일체 금단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유건기(兪健基)가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0월 2일 계묘
무지개가 나타나고 번개가 쳤다.
사간원에서 【정언 유건기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어느 시대엔들 난역(亂逆)이 없겠습니까마는, 지난해의 역변(逆變)처럼 하늘에 사무치게 된 적은 없었습니다. 무릇 혈기(血氣)를 지닌 인류(人類)라면 그의 고기를 씹으며 조금이라도 한 하늘 밑에서는 살 수 없는 분개를 풀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사인(士人) 김시제(金時濟)는 행색(行色)과 의논이 본래부터 궤비(詭秘)하고 해괴한 사람으로서, 감히 많은 사람의 좌중(座中)에서 역적 박필몽(朴弼夢)의 자호(字號)를 부르는 짓을 하매, 소문이 낭자(狼藉)하게 퍼지므로 놀라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해괴한 귀신 같은 무리를 만일 엄하게 징치(懲治)를 가하지 않는다면 시골의 무식한 무리들이 반드시 장차 광혹(誑惑)하게 될 것이니, 사인 김시제를 먼 지역에 정배(定配)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근래 궁녀(宮女) 추천에 관한 일로 김주정(金周鼎)을 잡아다가 추문하라는 명이 계셨는데, 듣고서 흠탄(欽歎)했습니다. 이미 추천한 사람을 죄주게 되었고 보면, 그 여인에 있어서도 마땅히 처분이 계셔야 할 것인데, 비망기(備忘記) 내용에 거론하지 않으셨기에 바깥 공론이 자못 근심하고 의아하게 되었으니,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여인을 처분한 다음에 이 비망기를 내린 것이다. 이미 사인(士人) 가문의 서얼(庶孽)이라고 했고 보면, 어찌 일시라도 머물러 둘 수 있겠는가? 약간의 물건을 주어 보내도록 하겠다. 옛적에 당 태종(唐太宗)이 궁녀를 풀어 줄 적에도 또한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은 돌보아 주었었으니, 나도 또한 이를 본받아 주게 한 것이다."
하매,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제 내리신 분부를 받들고 나니, 과연 석연해집니다. 혹자의 망령된 생각에는 미인(美人)이기 때문에 지금도 오히려 머물러 두고 있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전연 나의 뜻을 알지 못한 사람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4,5년 전에 박사관(朴師寬)이 자색(姿色)이 있는 여인을 길러 대내(大內)에 잠입(潛入)시켰다고 하니, 일이 지극히 놀랍고 해괴합니다. 진실로 반드시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알았지마는, 지난해 이래로는 근심스럽고 염려되는 사단(事端)이 한 가지만이 아니니, 이뒤로는 근거가 없이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박사관이 궁녀를 들여보냈다는 말은 지극히 요망하고 고약한 일이다. 경자년706) 이후에는 세도(世道)가 흉흉(洶洶)하기에 매양 궁금(宮禁)이 엄숙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엄하게 금칙(禁飭)을 가해 왔다마는, 등잔 밑이 밝지 못하다는 말처럼 혹시 그런 일이 없지 않을까 싶으므로 엄하게 처분을 가하였다. 진달한 말은 모두 절실한 말이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지난해 이후로는 국가의 사세가 위태위태한데, 요사이에 두 차례나 천둥의 이변이 생겼습니다. 신(臣)은 알지 못합니다마는, 구중 궁궐(九重宮闕)의 깊은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보존하십니까? 마침내 한낱 사자(私字)를 극복(克服)하여 제거하지 못하실까 신은 진실로 근심됩니다. 지난번에 김시홍(金時泓)의 회계(回啓) 내용에 3건의 일이 있었는데, 1은 사출(査出)에 관한 것이고, 1은 초기(草記)의 성책(成冊)에 관한 것이며, 1은 별성(別星)707) 을 남칭(濫稱)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이 처음으로 승정원에 들어갔을 적에 추조(秋曹)의 문서를 보건대, 단지 별성에 관한 것만 거론하고 초기의 성책에 관한 일은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은 실제가 아닐 것이라 여기며 문서를 도로 내주었었습니다. 그 뒤에 4개월이 넘어서 추조의 공사(公事)가 승정원에 이르렀는데, 김시홍에게 물어보았다는 것은 단지 문제 이외의 것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치않은 하나의 액속(掖屬)에 지나지 않는 사람인데, 그의 이른바 ‘도신(道臣)은 수령(守令)의 말만 듣고, 묘당(廟堂)은 도신의 말만 믿는다.’고 운운한 것은 은연중 말을 허망한 지경에 억지로 돌리려고 한 것이니, 진실로 놀랍게 여겨집니다. 그 초기는 신이 진실로 참여하여 들어본 것이니, 형관(刑官) 및 김시홍의 죄를 특별히 감처(勘處)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경(卿)과 수어사(守禦使)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었다. 경은 내가 사자(私字) 하나를 제거하지 못했다고 여기지만, 나는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없다. 김시홍은 봉보 부인(奉保夫人)708) 의 아들이다. 해가 지나도록 갇히어 있었으니, 만일에 내가 사사로운 뜻이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했겠는가? 선왕조(先王朝)에 봉보 부인의 아들이 금리(禁吏)에게 잡혀 가자 들어와서 간절하게 호소했었는데, 선왕(先王)께서 손을 저어 통렬히 물리치시므로 봉보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었다. 내가 비록 밝지 못하기는 하지만 봉보 부인이 감히 조그마한 사사(私事)도 간청(干請)하는 일이 없었다. 김시홍의 죄를 당초에 별성(別星)을 남칭(濫稱)한 것을 들어 말을 하기에, 내가 마땅히 먼 데로 귀양가게 되겠다고 여기며 잠시 말미를 주어 모자(母子)가 서로 만나 보게 하려고 했었는데, 지금 조율(照律)한 것은 곧 태(笞) 50으로 속죄(贖罪)케 한 것이니, 비록 지금 무망죄(誣罔罪)로 하더라도 장(杖) 80을 넘지 않을 듯하다. 만일에 내가 사정이 있었다면, 당초에 멀리 귀양 가게 될 것을 염려하면서도 어찌 처분이 없었겠는가? 경이 전번에 유옥교(有屋轎)를 타파해야 한다는 말을 진달하기에 내가 뜻이 있는 것임을 알았었다. 이번에 김시홍의 일은 그의 서계(書啓)에 당초부터 초기의 성책은 말하지 않고 단지 수본(手本)만 정상(呈上)하였음은 대개 김시홍이 내수사(內需司) 관원에다 본궁(本宮)의 소임을 겸임했기 때문이다. 비국(備局)에서 이런 속사정을 잘 살피지 않았고, 추조의 공사(公事)도 또한 잘못된 것이었다. 내가 처음에 조율이 매우 가볍게 된 것을 보고서 웃으며 말하기를, ‘추조의 관원이 김시홍에게 있어서 나보다도 안정(顔情)이 두터웠다.’고 했었다. 김시홍의 공초(供招)가 비록 말을 가리지 않고 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때 글자를 잘못 놓은 것이기에 죄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그 궁방(宮房)의 수본(手本)이라고 했기에 사체에 있어 구별이 있는 것인데, 한 번 조율한 다음에 다시 가율(加律)하려고 했으니, 이는 너무 심하게 된 것이다. 경이 젊은 나이에 재상의 반열(班列)에 올라 예기(銳氣)를 시험해 본 바가 없으므로, 매양 비국의 초기에 있어 언사가 자못 온순하지 못하고 너무 모가 드러나게 되기에 내가 웃었었다. 묘당(廟堂)에서의 법도는 대체를 알아서 하는 것이 귀중한 법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 듣건대, 현종조(縣宗朝)에 문을 수직하는 내관(內官)이 문에 기대어 졸고 있자, 한 재상이 발로 차며 이르기를, ‘너는 빨리 일어나라. 만일에 대간(臺諫)이 보게 되었다면 반드시 논하여 아뢰게 되었을 것이다.’고 했었다. 옛적의 재상들이 어찌 차분하게 용납해 주지 않은 것이겠는가?"
하매, 조현명이 아뢰기를,
"나이가 젊어 기가 예민한 병통을 신이 진실로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마는, 이 일은 예민한 기운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서계(書啓)나 수본(手本)을 막론하고 초기의 성책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초기의 성책은 이미 올려왔는데 어람(御覽)하실 성책을 바로 마련하여 올리지 않은 것을 들어 특별히 엄한 분부를 내리시게 되셨으니, 김시홍이 무망한 죄를 이에서도 면할 수 없습니다. 김시홍이 봉보 부인의 아들임을 신은 이제야 비로소 듣고서 알았습니다마는, 지켜야 할 바는 법이니 형조 관원의 일도 또한 괴이합니다. 어찌 봉보 부인의 아들이기 때문에 죄를 늦추어 줄 수 있고,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을 놓아 두고 문제 이외의 문목(問目)을 끄집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진실로 사(私)가 없었는데, 억지로 잔인하게 흔들어대어 고치려 하니, 내가 알 바 아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사가 있고 사가 없고를 막론하고 김시홍은 곧 내수사에 속한 사람인데, 묘당에서 논책(論責)하다가 도리어 성상께서 견책하심을 만나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듣기에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이기기를 좋아하여 하는 일이 아니다."
하매,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신이 임금을 섬겨온지 10년이 되는데, 하나의 지극히 미미한 일을 쟁집(爭執)하다가 마침내 개석(開釋)하여 윤허해 주심을 받지 못하게 되니, 진실로 개탄스러워집니다. 묘당의 제신(諸臣)들이 한낱 봉보 부인의 아들을 논하였는데도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따라서 준엄하게 꾸지람을 가하시니, 신(臣)의 임금 섬김이 무상(無狀)함을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10월 3일 갑진
사헌부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시독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외방(外方) 사찰(寺刹)의 요망한 중들이 더러 내수사(內需司)의 원당(願堂)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박필기(朴弼琦)의 상소에 이미 그 폐단을 진달했었습니다. 신이 광릉 재랑(光陵齋郞)으로 있을 때에 봉선사(奉先寺) 중의 말이 ‘이는 광릉의 원당이라’고 하기에, 신이 듣고서 놀랍게 여겨 중들을 책망했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더욱 통렬하게 배척을 가한 다음에야 세속을 어지럽히는 근심거리가 끊어지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옳은 말이다.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유엄이 아뢰기를,
"비국(備局)에서 김시홍(金時泓)의 일을 들어 죄주기를 청했는데, 형조(刑曹)의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의 초기(草記) 문제에 대하여 성상께서 미안스러운 일이란 분부가 계셨습니다. 바깥 사람들이 전하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서 혹시라도 전하께서 김시홍을 치우치게 비호(庇護)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어찌 성상의 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김시홍을 치우치게 비호하는 것이겠느냐? 선조조(宣祖朝)에도 또한 금법을 범한 자가 있어 그의 어미가 울면서 간청했었으나 선조께서 책망하시므로 그 어미가 울면서 나갔었다. 가령 내가 조현명(趙顯命)의 말처럼 비록 사자(私字) 하나를 제거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조종(祖宗)께서 하신 일을 내가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가지 미미한 일로 인해 이처럼 번거롭게 하고 있으니, 묘당(廟堂)의 체통을 또한 어찌 돌아보지 않는가?"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요사이 국가의 기강(紀綱)이 문란해져 공법(公法)이 엄격하지 못합니다. 저번에 형조(刑曹)에서 김시홍(金時泓)을 조율(照律)한 계목(啓目)은 지극히 괴이하여 놀라운 것인데다가 또한 본사(本司)에 간섭(干涉)한 것이 있었습니다. 대개 김시홍이 말한 바 타량(打量)한 것을 초기(草記)하여 성책(成冊)한 것과 수본(手本)을 계하(啓下)할 적에 번거롭게 별판부(別判付)를 내린 데 대하여 본사에서 복계(覆啓)할 때에 가져다가 상고해 본즉, 곧 갖가지의 잡물(雜物)을 수합한 건기(件記)에다 답인(踏印)한 것이고, 타량한 것을 초기한 성책이 아님은 명백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복계(覆啓) 내용에 타량한 것을 초기한 성책이라고 가칭(假稱)하며 속여서 서계(書啓)한 것을 들어 유사(攸司)로 하여금 중(重)한 데 따라 논죄(論罪)하도록 해야 함을 말했었으니, 그 복계에 한 말과 성책(成冊)의 진위(眞僞)를 추조(秋曹)의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이 스스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복계 내용에 없는 말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삼아 많은 말을 허비해 변명(辯明)하여 마침내 백탈(白脫)하게 하였으며, 처음에는 한결같이 미루어 나가다가 나중에는 또한 구차하게 결말을 지었습니다. 하물며 김시홍의 공초(供招)에 ‘감영(監營)에서는 본관(本官)의 신보(申報)하는 것에 따라 장문(狀聞)하였고, 묘당(廟堂)에서는 본도(本道)에서 장문(狀聞)한 것에 따라 복계(覆啓)해 버려, 지극한 원통을 신소(伸訴)할 데가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은연중에 침범하여 흔들어 놓으려는 뜻이 있었고, ‘비국(備局)에서는 초기(草記)의 성책(成冊)을 입계(入啓)한 양 복계했다.’고 한 말에 있어서는 말의 뜻이 지극히 방자합니다. 그가 하치않은 액속(掖屬)으로서 묘당을 업신여기고 침해하기를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해당 당상(堂上)들을 무겁게 추고(推考)하고 해당 낭청(郞廳)은 잡아다가 처치하며, 김시홍은 다시 잡아 가두고서 엄중하게 핵실하여 과단(科斷)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통탄스럽고 해괴하게 여기는 바는 별성(別星)이라고 일컬은 일이다. 큰 것에 있어서는 이미 고율(考律)했으니, 소소한 것을 세밀하게 따지는 것은 마땅치 않다. 당초에 내린 판부(判付)는 서계(書啓)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곧 수본(手本)에 관한 것이었다. 본궁(本宮)에 대한 사체는 딴 데와 자별하니, 또한 이처럼 함은 마땅치 않은 것이다.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이 다음에 이러한 버릇은 엄하게 단속하도록 하라."
하고, 또 분부하기를,
"대저 묘당의 회계(回啓)는 대체(大體)를 갖지 못하고 너무 세밀하게 살핌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강령(綱領)을 들어 제사(諸司)들을 총괄(總括)해 가야 하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어제 비국(備局)의 초기(草記) 가운데의 일에 따라 내 뜻을 보인 것이고, 본시 단지 한 가지 일 때문에 격뇌(激惱)하여 분부를 내린 것은 아니었다. 또 본사(本事)는 또한 하나의 타량관(打量官)을 위한 것이 아니고, 본궁(本宮)에 대한 사체는 다른 데와 자별(自別)하기 때문에 곧 사체를 중히 여겨 말을 하게 된 것인데, 연신(筵臣)이 진달한 말은 본뜻을 알지 못한 것이기에 어제 이미 환하게 효유(曉諭)했던 것이다. 비록 일기(日記)에 실려 있지만 근밀(近密)한 신하도 오히려 또한 나의 뜻을 알지 못하는데, 외정(外廷)의 신하들이야 더욱 어떻게 이러한 줄을 자세히 알게 되겠는가? 나의 정사를 가다듬어 가는 뜻이 아니니, 어구(語句)를 고쳐 써서 나의 뜻이 보이게 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정언 유건기(柳健基)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안집 어사(安集御史) 이종성(李宗城)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삼수 부사(三水府使) 김박(金礴)은 한없이 민재(民財)를 수탈(收奪)하여 도무지 염치가 없으니, 우선 잡아다가 가두고 어사로 하여금 자세하게 사출(査出)하여 장문(狀聞)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서종하(徐宗廈)의 아들 서명년(徐命年)을 진사(進士) 과방(科榜)에서 빼버리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처럼 토역(土逆)을 준엄(峻嚴)하게 해 가는 날에 당하여, 그의 아비가 바야흐로 죄를 받아 귀양살이하는 중에 있는데 그 아들이 의기 양양(意氣揚揚)하게 과거를 봄은 어찌 크게 윤리(倫理)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제의 감시(監試)709) 의 회시(會試)의 과방은 지극히 놀라운 것인데, 승지와 유신(儒臣)이 보았었는가?"
하매, 검토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그는 곧 서종하의 아들 서명년입니다."
하고, 참찬관 이정소(李廷熽)는 아뢰기를,
"바깥 공론은, 비록 입격(入格)했다 하더라도 시관(試官)이 또한 어찌 감히 빼버리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입격한 뒤에 시관이 어떻게 멋대로 빼버릴 수 있겠는가? 삼적(三賊)의 죄는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결탁한 데에 있고, 역적 김일경의 죄는 요망한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한 데에서 원했다. 지금 바야흐로 삼적에게 가율(加律)하게 되었고, 배소(配所)를 좋은 지역으로 정한 것 때문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파직까지 하게 된 것은, 곧 역적 김일경을 통렬하게 다스리려는 뜻이다. 서종하의 아들로서는 마땅히 황송하게 여기며 위축되어 있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찌 감히 의기 양양하게 과거를 볼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은 마땅히 대관(臺官)의 말을 기다려야 할 것이나 아직도 고요하니, 빼버리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10월 4일 을사
이봉익(李鳳翼)을 승지(承旨)로, 신처수(申處洙)를 장령(掌令)으로, 서종옥(徐宗玉)을 대사성(大司成)으로, 한사득(韓師得)을 정언(正言)으로, 윤순(尹淳)을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삼았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비국(備局)의 초기(草記)는 차인(差人)의 가증스러운 정상을 통탄하고 형관(刑官)이 사실(査實)하여 다스림이 엄하지 못함을 논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도리어 미안스러운 비답을 받들게 되니 부끄럽고 두려우며 근심되고 한탄스럽습니다. 삼가 고쳐서 내린 비답을 받들건대, 얼마 안가서 회복되는 훌륭한 덕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처분은 마침내 궁부(宮府)는 일체가 되어야 하는 의리에 겸연(歉然)함이 있게 되었으니, 다시 바라건대, 더욱 예념(睿念)을 가하시어 성상의 덕이 빛이 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에게는 조금도 불안스러울 단서가 없었는데, 인혐(引嫌)함은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10월 5일 병오
유성(流星)이 위성(胃星) 밑에서 나와 남쪽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서너 자 정도였으며, 빛깔은 붉었다.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어제(御製)한 《감란록(勘亂錄)》 서문을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에게 써올리게 하여 간행(刊行)하도록 명하였다.
김시혁(金始㷜)과 서명빈(徐命彬)을 승지(承旨)로, 심공(沈珙)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삼았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김시홍(金時泓)의 일을 조현명(趙顯命)이 경연(經筵)에서 아뢴 다음에 자못 개석(開釋)하는 분부가 계시기는 했습니다마는, 자질구레한 일이라고 핑계하시며 단지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엄하게 단속하도록 하시고, 묘당(廟堂)의 초기(草記)에 있어서는 마침내 들어주기를 아끼셨습니다. 어찌 하치않은 한 가지 일이 장차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침을 면하지 못하게 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애석하게 여겨집니다. 그윽이 보건대, 전하의 생각에 조현명이 예민(銳敏)한 것을 병통으로 여기시는 듯하였는데, 나이가 젊고 의기가 날카로운 사람은 그 말이 비록 더러 중도(中道)에 지나친 것이 있으나, 그러나 완고하고 둔하면서 유약(柔弱)한 사람과 비한다면 어찌 동등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자긍(自矜)하는 기색(氣色)은 크게 언로(言路)에 방해로운 것이니, 성명께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 말단(末端)의 일에 있어서는 경(卿)도 또한 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시독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서문(序文) 내용에 ‘역적 심유현(沈維賢)이 흉악한 말을 만들어 제적(諸賊)들의 흉계를 이루게 했다.’고 한 것은 아마도 미진하게 된 듯싶습니다. 역적 심유현이 어떻게 제 뜻으로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습니까?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무리를 근본으로 삼아 차자로 조술(祖述)하였으며, 이유익(李有翼)의 무리가 심유현을 위협하고 유인해 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저 《감란록(勘亂錄)》은 꼬리만 있고 머리는 없었으니, 이세진(李世璡)이 한 말이 의견이 없지 않은 것이다. 다만 교문(敎文)으로 《감란록》의 수제(首題)를 삼는다면 마침내 천백년(千百年)의 정안(正案)이 되지 못하여 일기(日記)와 같은 것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어제 서문을 지으면서 ‘혹은 차자(箚子)를 올리거나 혹은 상소를 하거나 한 것은 의조(疑阻)하는 소치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음은 내가 그들의 본심(本心)이 반역하려고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글자를 놓게 된 것이니, 오직 이것이 변란의 근본이 되었음을 보인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들은 진실로 마땅히 선천(先天)에 붙여야 하나, 김일경과 박필몽의 일이 생겼는데도 공격하여 배척하지 못한 것은 마침내 견제(牽制)되는 데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박필몽이 당초에 16인을 들어 논계(論啓)한 뒤에 다시 목호룡(睦虎龍)을 분장(粉粧)해 내어 신축년710) 과 임인년711) 의 일을 이루게 된 것이니, 실지는 목효롱이 고발한 것이 아니라 곧 박필몽이 고발한 것이다. 목호룡이 고발한 사람들은 곧 박필몽이 고발한 16인 중의 사람이었다. 만일에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지 않았었다면, 목호룡이 고발하기 전에 어떻게 목호룡이 마땅히 고발하게 될 사람임을 알고서 그런 논계(論啓)를 하게 되었겠는가? 이 맥락을 만일 그 첫머리까지 미루어 올라가 말한다면, 예설(禮說) 때부터 이미 유래한 바가 있어 오래 된 것이다. 역적 목호룡이 흉서(凶書)를 만들어 앞에서 주창하고 서덕수(徐德修)와 김성절(金盛節)은 뒤에서 이루어 가며 내응(內應)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을 김일경과 박필몽의 무리가 번번이 귀를 기울이고서 듣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경이 기화(奇貨)를 얻은 듯이 여겨 교문(敎文)을 짓기는 했으나, 다시는 어떻게 해 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심유현을 유인하여 흉악한 말을 만들어 내게 한 것이다. 만일에 심유현의 흉악한 말이 없었다면 어찌 괘서(掛書)가 나오게 되었겠는가?"
하매, 유엄이 아뢰기를,
"심유현을 내응(內應)으로 삼고서 지극히 흉악한 사람이 주장한 것이니, 심유현을 주장한 사람으로 삼음은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것인 듯합니다. 신축년과 임인년 무렵에 자신이 청류(淸流)라고 이르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기세가 외롭고 힘이 약하여 단지 근심하고 분개하는 마음만 가지고서 오히려 의리(義理)는 확정하지 못하다가, 지난해에 역변(逆變)이 생기게 됨에 미쳐서야 그만 비로소 툭 터지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문에 그런 어구(語句)를 놓은 것은 뭉뚱그려서 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 진달하는 것을 들어보건대, 글자를 놓음이 매우 고단(孤單)하게 되었다."
하고, 이어 원초(原草) 내용을 점개(點改)하도록 명하였다.
10월 6일 정미
흰 무지개가 해를 꿰고, 햇무리했는데 양이(兩珥)가 있고 햇무리 위에는 관(冠)과 배(背)가 있었으며 햇무리 아래에는 이(履)가 있고 햇무리의 좌우에는 극(戟)이 있었으며, 빛깔이 안쪽은 붉고 바깥은 푸르렀다.
무지개의 변괴에 따라 구언(求言)하는 분부를 내렸으니, 대략 이르기를,
"내가 부덕한 몸으로 임금이 되어 덕으로 조정을 바로잡아 가지 못하고 은혜로 백성들을 구제해 가지 못하므로, 조정의 기상(氣象)이 문란하고 민생들이 곤궁해 지게 되었다. 만물이 폐장(閉藏)하는 철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무지개가 나타나더니, 이번에는 또 음홍(陰虹)이 해를 꿰는 변괴가 있었다.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한이 없어 편히 있을 겨를이 없는데, 조정에는 돈후(敦厚)한 기풍(氣風)이 없고, 이목지관(耳目之官)은 직절(直截)한 기개가 없으며, 묘당(廟堂)에서 하는 일은 형식에 따른 하치않은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고 풍헌(風憲)들은 단지 고지(故紙)가 되어버릴 등전(謄傳)하는 일만 하고 있다. 제 분수를 어기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짓이 서울이나 외방(外方)이나 모두 그러하고, 요망한 사람과 괴이한 물건들이 전후에 층층으로 생겨나며, 사치가 날로 심해져 서로 경쟁하여 본받고 있으니, 옛말에 ‘궁중(宮中)에서 상투를 높이기 좋아하매 사방 사람들이 한 자[尺]나 높였다.’고 한 것과 같은 일이다. 만일에 내가 성심으로 사치를 싫어한다면 반드시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또한 나의 허물이다. 임금이 명소(命召)하면 수레에 멍에 매기를 기다리지 않고 우선 나선 것은 공자(孔子)께서 한 일인데, 요사이는 염우(廉隅)의 경중과 질병(疾病)의 고헐(苦歇)을 논하지 않고서 문득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고상한 일로만 삼아, 버젓이 사사 집에 있으면서 임금의 명 어기기를 마치 심상한 일처럼 하여 태만하고 건방진 것이 풍습이 되어버렸다. 군부(君父)가 마음속을 털어 환히 효유(曉諭)한 뒤에도 오히려 깨우치지 아니하여 상하(上下)가 이처럼 막히어 있으니, 어떻게 천지의 화기(和氣)를 불러 오게 할 수 있겠는가? 성인(聖人)도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르며 남에게서 취하여 선(善)을 이루는 법인데, 하물며 재주도 없고 부덕한 과인(寡人)의 몸이 어찌 선언(善言)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소(大小)의 신료(臣僚)들은 각각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하여 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바로잡도록 하라. 말이 비록 과중한 것이더라도 내가 허물하지 않겠거니와, 난잡한 사사 뜻을 끼고서 지나간 일을 뒤좇아 제기하는 자에 있어서는 특히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단코 보지도 않겠다. 근밀(近密)한 신하들은 나를 대신하여 교문(敎文)을 기초하고, 의정부에서는 널리 곧은 말을 구하여 과인의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대신 기초하게 하지 말기를 청하고, 재차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5진(津)에 장정 50명씩을 모집하여 대오(隊伍)를 만들어 입번(入番)하여 배를 정비(整備)하여 대기(待期)하는 절목(節目)을 계하(啓下)받아 시행해 온 지 오래입니다. 오직 양화도(楊花渡)는 병오년712) 에 나루 부근 방민(坊民)들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경조(京兆)에서 방역(坊役)을 감당하기 어려운 점을 들어 단지 10명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감해버렸었으니, 다른 나루의 50명씩의 예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김동필(金東弼)이 아뢰기를,
"숙종(肅宗)께서 편치 못하셨을 적에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이 약을 의논하는 일로 같이 참여하여 여러 해를 약원(藥院)에서 직숙(直宿)했었습니다. 정은 집이 가난하여 도성(都城) 안에 집이 없었으므로, 연신(筵臣)이 진달한 말에 따라 군문(軍門)의 은(銀) 4백 냥(兩)을 꾸어주어 집을 사게 하도록 명했었는데, 정이 죽은 뒤에는 가난과 피폐가 더욱 심해져 아직도 상환(償還)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천군이 약원에 오래 있었음은 내가 목도(目覩)한 바인데, 시탕(侍湯)할 때에 의견이 맞지 않는 것 때문에 근심하고 노심(勞心)하다가 죽었었다. 선왕조(先王朝)에서 특별히 분부하신 뜻을 본받아 탕감해 주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10월 7일 무신
승정원에서 무지개의 변괴를 들어 경계를 진달하며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칠가우설(七可憂說)’을 들어 아뢰니, 가상하다는 비답을 내리고 일곱 가지 조항을 따로 써서 입계(入啓)하도록 명하여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0월 8일 기유
홍봉조(洪鳳祚)를 수찬(修撰)으로, 심태현(沈泰賢)과 남태량(南泰良)을 정언(正言)으로, 이현모(李顯謨)를 부응교(副應敎)로, 신치근(申致謹)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경석(李慶錫)을 장령(掌令)으로, 윤유(尹游)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삼았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무지개의 변괴를 들어 경계를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하늘에 응하여 재변을 해소해 가는 길은 그 요체(要諦)가 실속이 있게 하고 형식으로 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니, 과오를 고치기에 인색하지 말고 간하는 말을 거스리지 말고 들어주며, 일에 임하여서는 총명을 믿고서 자용(自用)함을 경계하고, 말을 들을 적에는 반드시 뜻에 순종하는지 거스리는지를 생각하여 구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신이 앞서 올린 차자에 감히 김시홍(金時泓)의 일을 들어 그 말단에 진달했었습니다. 하치않은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근신(近臣)이 간쟁(諫諍)하여도 듣지 않고 대신이 말을 해도 윤허하지 않으시니, 삼가 생각해 보건대, 성상께서 생각에 이는 미미한 일인데 어찌 크게 해로울 것이 있겠느냐고 여기시는 것입니다마는,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침이 진실로 적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말은 절실한 것인데, 체념(體念)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차자의 말단에 말한 일은 판부(判付)와 하교(下敎)에 이미 자상하게 효유하였다."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청대(請對)해 입시(入侍)하고, 북병사(北兵使)의 범월인(犯越人)에 관한 장계(狀啓)를 읽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북병사가 경동(警動)하고 신칙(申飭)하는 뜻이 없으니, 무상(無狀)한 짓이다."
하매, 홍치중이 아뢰기를,
"피인(彼人)들이 이미 구집(拘執)해 놓은 다음에 만일 영고탑(寧古塔)에서 먼저 북경(北京)에 신보(申報)하게 되고, 우리 나라의 자문(咨文)은 그 뒤에야 가게 된다면 일이 염려스럽게 되기는 합니다마는, 모든 사람들의 의논이 다 같이 자문을 보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에 우리 나라에서 먼저 신보했다가, 영고탑에 있는 장수가 먼저 신보하지 않은 것 때문에 죄를 받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 나라에 감정을 품고서 도리어 트집을 부리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앞서의 의주(義州) 일로 말하건대, 저들이 저희 나라 백성이 도망하게 됨은 우리 나라의 변방 금방(禁防)이 엄하지 아니하여 간민(奸民)들을 용납해 숨겨 준 때문이라고 하면서 책욕(嘖辱)이 비상했었습니다. 만일 이번에 자문을 보내지 않고 있다가, 영고탑 장수가 혹시라도 제 나라에 치보(馳報)하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앞에 한 말을 사실화 하려고 하여 책욕이 반드시 전보다 더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영고탑 장수가 이미 구집(拘執)해 놓은 사람들을 놓아 주어버렸는데, 우리 나라에서 먼저 앞질러 주문(奏聞)하게 된다면 영고탑 장수가 비록 혹은 불안스럽게 될 점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우리 나라에서 그들의 욕설을 만나게 될 염려와 비교하면 경중(輕重)이 같지 않으니, 급급하게 주문(奏文)을 보내는 것이 완전할 듯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은 아뢰기를,
"재자관(䝴咨官)이 들어갈 때에 심양(瀋陽)을 지나가는 길에 피인(彼人)들이 보문(報聞)했는지 않았는지를 탐문해 보아, 만일에 이미 보문했다면 밤낮없이 길을 재촉해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재자관을 급급하게 꾸리어 보내고, 자문 보내는 뜻을 북로(北路)에 분부하여 저들로 하여금 또한 우리 나라에서 먼저 북경(北京)에 신보한 뜻을 알게 해야 한다."
하였다. 홍치중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취로(金取魯)는 나이 80의 늙은 어미가 있으니, 마땅히 체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처음부터 나와서 사은(謝恩)하지 않은 것을 들어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홍치중이 또 전 감사 송진명(宋眞明)을 잉임(仍任)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분부하기를,
"대신할 만한 적임자가 난중(難重)하다. 내가 조현명(趙顯命)을 생각해 보았지만 외방(外方)에 내보내기는 또한 곤란하다."
하매, 김동필이 아뢰기를,
"묘당(廟堂)이 조현명으로 인하여 모양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하고, 홍치중이 아뢰기를,
"묘당의 일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연석(筵席)에서 곧장 숨김없이 진달하여 군덕(君德)을 보도(輔導)해 오기는, 지금의 조정 진신(搢紳)들 중에 오직 조현명 한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런 때에 어찌 이런 사람을 내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9일 경술
홍현보(洪鉉輔)를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동지 경연사(同知經筵事)로, 유척기(兪拓基)를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아뢰기를,
"초군(哨軍) 김한중(金漢重)이 봉산(鳳山)에서 승호군(陞戶軍)713) 으로 올라왔었습니다. 20일 밤에 그의 집에 불이 났었는데 그 이튿날 살펴보니 잿더미 속에 단지 몇 개의 해골과 반쪽의 두골(頭骨)이 있었고, 봉산에서 사문(査問)해 보니 그의 아내가 발상(發喪)했었다고 했는데, 그뒤에 김한중이 과연 본고장으로 돌아왔다가 적발되어 잡히게 되었습니다. 무릇 군병(軍兵)이 처음으로 도망한 것은 장(杖) 1백에 처하고 재차 도망한 것은 효시(梟示)하게 되어 있습니다. 김한중은 정상이 더없이 통탄스러워 처음으로 도망한 것으로 논죄(論罪)할 수 없으니, 효시하여 군율(軍律)을 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항이 마땅히 효시를 하여 대중을 경계해야 한다마는, 도망한 군병을 초범과 재범을 구별하였음은 법이 우연하게 된 것이 아니니, 법대로 장1백에 처하라."
하였다.
헌납 박필정(朴弼正)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해의 역변(逆變)은 어찌 차마 말을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행히도 하늘의 도움을 힘입어 오늘이 있게 되기는 했습니다마는, 생각하자면 마음이 서늘해지고 말을 하자면 기가 막힙니다.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은 불의에 변이나자 그대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렸었고,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은 의리로 항쟁하다가 굴하지 않고 죽었으니, 이 두 사람의 충절(忠節)은 고금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순절(殉節)한 자리에 사당을 세우고 춘추(春秋)로 향사(享祀)하는 것이 곧 도내(道內) 유생(儒生)들의 지극한 소원인데, 공역(功役)이 크고 재정이 모자랍니다. 만일 조가(朝家)에서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재력(財力)을 돕게 하신다면 한 칸의 사우(祠宇)를 거의 불일간에 낙성(落成)할 것이며, 또한 충절을 장려하고 후세를 격려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해미 현감(海美縣監) 박민웅(朴敏雄)의 충용(忠勇)과 지략(智略)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으로서 지난해에 역적들을 섬멸한 일은 어찌 그리 장한 것이었습니까마는, 조가에서 노력에 보답하고 공을 상주게 된 것이 지현(知縣)의 벼슬에 지나지 않았으니, 뒷날에 이 사람을 본받고서 일어나게 될 사람이 또한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특별히 전조(銓曹)에 명하여 발탁해서 임용(任用)하게 하소서. 도신(道臣) 권첨(權詹)이 머뭇거리며 관망(觀望)한 짓은 마땅히 왕법(王法)대로 복주(伏誅)되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머리를 보존하고 있으며, 도내의 수령(守令)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친 짓은 마땅히 무거운 율(律)을 받아야 할 것인데 좋은 벼슬로 옮겨간 자가 많습니다. 이로부터 호서(湖西)의 사람들이 분개하며 한탄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마는, 조정에서 지금까지 적적함은 무슨 일입니까? 신이 그윽이 한심스럽게 여깁니다. 무지한 군졸(軍卒)들은 오직 장수가 명령하는 대로 따라야 할 뿐인 것인데다가 죄주려고 해도 모두 죄줄 수 없는 것이거니와, 장교(將校)들에 있어서는 감히 공을 바라고 상을 바라는 마음으로써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敵)에게 빌붙기를 마치 즐거운 데로 가버리듯이 했으니, 만일에 이를 엄하게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는다면 뒷날에는 폐해가 장차 하지 못하는 짓이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신들에게 순문(詢問)하여 경중에 따라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소하(疏下) 삼적(三賊)의 죄는 위로 하늘에 사무친 것이니, 자질(子姪)인 사람들은 마땅히 섬[島] 속에서 함께 그대로 지내며 조가(朝家)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데도, 역적 서종하(徐宗廈)의 아들 서명년(徐命年)은 외람되게도 과장(科場)에 나아가기를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하여, 인륜이 어그러지게 되고 사람의 도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입격(入格)한 뒤에 당하여 고관(考官)인 사람은 마땅히 즉각 계품(啓稟)하여 논죄(論罪)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인데, 태연히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준례대로 과방(科榜)을 내걸었으니, 역적 서종하를 사모한 죄를 논하지 않고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 서명년은 먼 지경으로 정배(定配)해야 하고, 모든 시관(試官)들은 일체 모두 파직하기를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신하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이미 차례를 뛰어 가자(加資)하였고 또 절혜(節惠)를 내렸는데, 이런 일은 사체가 중대한 것이니 경솔하게 의논할 수는 없다. 박민웅의 일에 있어서는 이미 그의 자급(資級)을 올렸으니, 앞으로 조용(調用)할 적에 어찌 한 주(州)의 주목(州牧)에 그치고 말겠는가? 권첨에 있어서는 네가 논한 뜻이 비록 옳기는 하다마는, 당초에 참량(參量)하여 조처함이 뜻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의 역란(逆亂)이 일어났을 때에 확 쏠리어 적에게 빌붙고 머뭇거리며 달려가지 않은 유들은 이미 모두 경중을 구분하여 논죄(論罪) 했었으므로 다시 논할 것이 없다. 각 고을 장교들에 있어서는 그 중에 죄가 큰 자는 이미 왕법(王法)대로 처단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협종(脅從)한 자들로서 죄를 다스리지 않는 범위 안에 넣은 것인데, 어찌 다시 시끄럽게 할 것이 있겠는가? 서명년이 과거를 본 일은 비록 지극히 통탄스럽고 해괴한 것이기는 하나 특별히 빼버리도록 명했는데, 멀리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음은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상소 말단의 일에 있어서는, 아! 군부(君父)가 얼마나 신칙(申飭)을 했는데도 이런 부당한 일을 가지고 오히려 이처럼 의조(疑阻)하는 짓을 한단 말인가? 나의 뜻이 굳게 정해져 있으니, 비답을 내리지 않겠다."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경종실록(景宗實錄)》의 역사(役事)를 시작했는지 묻고, 신칙(申飭)하여 시급히 사역(史役)을 완성하도록 명하였다.
10월 10일 신해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빈청(賓廳)으로 나와 모이는 일로써 명이 내렸는데도 본사(本司)의 당상(堂上)들이 하나도 와서 참여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조 판서 김시환(金始煥)·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병조 판서(兵曹判書) 김동필(金東弼)·사직(司直) 심공(審珙)·우윤(右尹) 이진순(李眞淳)을 패초(牌招)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김시환 등이 재차 패초하여도 재차 어기자, 분부하기를,
"차대(次對)714) 를 명한 뒤에 정지하게 되기는 전후에 없던 일이다. 논박을 입은 사람 이외에 아직 숙배(肅拜)하지 않은 사람들을 패초하라."
하였으나, 제신(諸臣)들이 또 패초를 어기자, 분부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부자간과 같은 것이다. 아버지가 정녕(丁寧)하게 분부하는데도 아들이 어찌 제 뜻만 고수(固守)할 수 있겠는가? 군신간에는 비록 의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임금과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고, 충성과 효도도 또한 두 가지 이치가 아닌 것이다."
하고, 또 분부하기를,
"상기(上氣)하게 되는 증후(症候)는 비록 여러 해를 상심(傷心)해 온 소치이지만, 오늘날 더하게 되는 것은 진실로 세도(世道)를 깊이 개탄해 하는 데 말미암은 것이다. 갖가지 보양(補養)하는 방법이 심자(心字)를 벗어나지 않는데, 내가 비록 성실(誠實)하지는 못하지만 깊이 싫어하는 것은 형식이니, 이뒤로는 약원(藥院)이 문안하는 것도 또한 하지 말라."
하였다. 이어 차대(次對)를 정지하고 제신(諸臣)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다시 품할 것이며, 비국(備局)의 당상으로 한 차례의 패초에 나오지 않은 사람은 추고(推考)하고 두 차례 패초해도 나오지 않은 사람은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1일 임자
약방(藥房)에서 아뢰기를,
"약을 의논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만일 지금 약을 의논하기를 허락할 것이라면 어제 무엇하러 말을 했겠느냐? 묵은 뿌리가 비록 천 가지 백 가지일지라도 협자(協字) 하나만 못할 것이다. 입진(入診)도 하지 말고 또한 문안도 하지 말라."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정제(李廷濟)를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지평 최명상(崔命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8월 18일 연석(筵席)에서 하신 담화(談話)의 계하(啓下)된 것을 보건대, 성상께서 내리신 분부에 ‘경종(景宗)의 비망기(備忘記) 내용에 있는 양가(兩可)의 뜻을 소론(少論)에게 담당시키면 장차 어떻겠는가? 연명(聯名)하여 올린 차자(箚子) 한 가지는 선왕조(先王朝)에서 이미 시행한 일과 무엇이 달라서 그만 반역이라고 의심하는 것인가? 반역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또한 애핍(捱逼)한 바가 있지 않겠는가? 누구로써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케 하는 것이기에 반역이라고 하게 되는 것인가? 이는 오히려 기휘(忌諱)할 바를 알지 못하는 짓이니, 연명한 차자도 반역의 죄목에 둘 수 없다.’고 하셨으니, 원두(源頭)를 분석하여 헤쳐놓기를 명백하고 통쾌하게 하신 것으로서 진실로 토복(討復)하는 의리를 신장(伸長)하고 애핍하는 짓을 한 죄상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거행할 조목(條目)에 내놓은 것을 보면, 1에는 ‘비록 그르다고는 하지만 이미 베어 죽였으니 이제 와서 추탈(追奪)함은 또한 너무 심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셨으니, 이는 단지 죽은 뒤에 추탈을 함은 너무 심한 것으로만 여겨 관작(官爵)을 복구해 준 것입니다. 2에는 ‘연명한 차자는 반역으로 하고, 유락(唯諾)715) 하는 자만 벼슬하게 하는 것은 어찌 조정의 도리가 되겠는가?’라고 하셨으니, 이는 단지 유락하는 사람들의 진로(進路)만을 위하여 관작 복구를 한 것이 됩니다. 연명한 차자의 의리가 과연 훤하게 개석(開釋)되고 통쾌하게 펴이게 된 것이겠습니까? 신은 생각에 거행 조목 내용에서 ‘수왈비의(雖曰非矣)’ 이하 두 구절을 도로 거두어 버리고, 단지 연석에서 분부하신 내용에서 ‘양가(兩可)’ 이하의 두어 조목만 가지고 거행 조목을 고쳐서 내놓아 성상의 뜻을 분명하게 보이셔야 한다고 여깁니다. 소하(疏下)의 제적(諸賊)들은 곧 요망한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하여 성상의 몸을 모해(謀害)하려고 한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혈당(血黨)들입니다. 그 동안 법대로 다스리자는 논은 곧 토복(討復)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의 신자(臣子)인 사람이라면 어찌 감히 흉적(凶賊)들을 영구(營救)하고 비호(庇護)하여 멋대로 논계(論啓)를 정지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저 언관(言官)의 자리를 담당한 우두머리가 급급하게 정계(停啓)해버렸음은 진실로 지극히 통탄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정계하게 되자 육지(陸地)로 내자는 의논이 잇따라 일어나게 되었고, 육지로 내자 지난해의 변란이 일어났던 것인데, 소하(疏下)의 박필몽·이명의(李明誼)가 실로 그런 음모를 주장했던 것이니, 흉적들을 놓아 줌으로써 환란을 끼치게 된 것을 당면한 지금에 징계해야 합니다. 하물며 저번날의 연석(筵席)에서 정계와 육지로 내온 것을 불가하게 여기신 분부가 엄절(嚴截)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조금 자신을 빼내려고 한 대신(臺臣)은 또한 섬에 가두어 두자는 논으로 우선 색책(塞責)하기를 꾀하였고, 그 나머지는 공론이라고 빙자하여 실은 미봉(彌縫)만 하려고 하였으니, 또한 지극히 해괴스러운 일입니다. 신의 생각하건대, 당초에 정계(停啓)한 대신(臺臣)에게는 마땅히 견책(譴責)을 가하고, 섬으로 귀양 보내기를 소청(疏請)한 대신(臺臣)에게도 또한 책벌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역적 서종하(徐宗廈)의 아들이 의기 양양(意氣揚揚)하게 과거를 보아 참방(參榜)하게 되었는데도 합좌(合坐)했던 모든 시관(試官)들이 한사람도 놀랍게 여기며 과방(科榜) 속에서 빼버리지 않았음은 너무도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하물며 역적 김일경의 조카 김관해(金觀海)는 이미 역적의 괴수와 지친(至親)이므로 의당 감히 평인(平人)으로 자처(自處)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이에 감히 몰래 제 자신이 도목안(都目案)에다 이름을 쓰고 버젓이 선산(善山)의 과시(科試)에 나갔었다가, 1천이 넘는 다사(多士)들이 과장(科場)에 함께 있지 않으려고 하여 서로 이끌고 가버리게 만들었으니, 그의 방자하고 기탄없음은 진실로 너무나 해괴하고 패악(悖惡)한 일입니다. 또 역적 김일경의 동기(同氣) 한 사람이 선산(善山) 땅에 살면서 김일경의 아들이 있는 곳에 왔다갔다하여 종적이 수상(殊常)하고 하는 일이 음험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말하여 소문이 파다했으니, 의구(疑懼)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은 생각에 역적 김일경의 제질(弟姪)들을 민관효(閔觀孝)의 족속(族屬)에게 내린 예대로 먼 섬에 나누어 귀양 보내어 대중의 분개가 풀리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전(前) 고산 현감(高山縣監) 박양한(朴亮漢)은 곧 역적 이유익(李有翼)의 처부(妻父)이고 심유현(沈維賢)의 외종숙(外從叔)입니다. ‘담양(潭陽)에 있는 화약(火藥)을 그의 집에 실어다 두었다.’고 한 말은 국문(鞫問)한 때의 공초(供招)에 나온 것인데도 그만 고(高)와 괴(槐)의 글자 음이 서로 비슷한 것 때문에 박필우(朴弼隅)에게 떠미는 짓을 했습니다. 실지로 박필우는 을사년716) 이후에 집을 팔고서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 때에는 또 괴산(槐山)의 임소(任所)에 있었고 서울에는 본시 집이 없었습니다. 박양한이 역적 모의에 동참(同參)하였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인데도 오히려 머리를 보존하고 있으니, 그의 도리로서는 진실로 마땅히 머리를 숙이고 칩복(蟄伏)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그가 바야흐로 공주(公州) 땅에 가서 민가(民家)를 빼앗아 입주(入住)했습니다. 전 병사(兵使) 민창기(閔昌基)의 이웃에 살고 있으면서 어두운 밤이면 서로 모이어 거조(擧措)가 궤비(詭祕)한 것도 이미 망측(罔測)한 일이거니와, ‘민창기가 좌병사(左兵使)’라는 말이 이미 정희량(鄭希亮)의 사찰(私札)에 나왔었고, 그의 이름이 또한 역적들의 승복(承服)하는 공초(供招)에 긴요하게 나왔었습니다. 다만 옥사(獄事)를 너그럽게 다스렸기 때문에 요행히 왕법(王法)으로 안주(按誅)함을 면하게 되었습니다마는, 신은 생각에 이 두 사람은 마땅히 먼 데로 귀양 보내도록 명하여 화근을 끊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엊그제 전교(傳敎)하신 내용에 김하정(金夏鼎)의 서녀(庶女)가 궁인(宮人)으로 들어온 일을 들어 추천한 사람을 정배(定配)하도록 하신 명이 있으셨습니다마는, 결단코 준례대로 죄만 과하고 말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생각에 마땅히 다시 유사(攸司)로 하여금 추천하며 청탁한 경로(徑路)를 엄밀하게 사핵(査覈)하도록 하고, 김하정의 아들도 또한 마땅히 일체로 구문(究問)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번에 추천한 사람을 논죄(論罪)하도록 하신 거조(擧措)는 진실로 성상의 덕에 광채가 있게 된 일입니다마는, 다만 김하정의 딸을 밖으로 내보내도록 하신 명은 없으시니, 혹은 이미 금내(禁內)에서 거행하게 해놓고도 우연히 전교에는 언급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만일에 다시 분명하게 성지(聖旨)를 내리시어 척출(斥黜)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송(宋)나라 임금이 사사로이 바친 여인들을 내준 일이 유독 옛적에만 그런 아름다운 일이 있은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니, 어찌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의 일에 있어서는 이번에 분부를 내린 것이 없었다면 모르거니와, 어찌 감히 다시 그전의 뜻을 고수(固守)하여 이렇게 하는 것인가? 박양한의 일에 있어서는 고(高)와 괴(槐)의 글자 음을 이미 친히 국문(鞫問)할 때에 밝히었었다. 김일경의 족속들을 멀리 귀양 보내는 일은 법에 없는 것이기에 자주 시행할 수 없다. 김하정은 이미 잡아다가 추문(推問)했으므로 지금 다시 논할 것이 없다. 그의 딸은 이미 추천한 사람의 죄를 다스렸고 보면 내보내는 일은 자연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기에 판부(判付)에 논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경로를 물었기에 내수사(內需司)에 물어보고 멀리 귀양 보내란 명을 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 또 논하기를,
"어제 비국(備局) 당상(堂上)들이 패초(牌招)를 어긴 것 때문에 성상께서 마음에 근심하고 고달파하시어 심지어는 병이 더하다는 분부를 하시게 되었으니, 이는 군하(群下)들의 죄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학(鶴)이 울면 새끼가 화답하게 됨은 기류(氣流)가 감동되지 않을 수 없어서이고, 위에서 주창하면 아래에서 호응하게 됨은 이치가 또한 당연히 그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마땅히 차분한 자세로 발동을 억제해 가고 화평한 마음으로 사물(事物)을 접응(接應)하여 밝은 임금들이 황극(皇極)을 세운 도리와 성인이 질병을 조심하던 방법의 두 가지가 행해지고 어그러지지 않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번 일로 인해 격뇌(激惱)하시어 약원(藥院)에서 진후(診候)하는 것까지 또한 다시 손을 저어 물리쳐 버려 거조(擧措)가 적중을 잃게 되었으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우매한 신(臣)의 고충(孤衷)에 잊혀지지 않기에 감히 스스로 숨기지 않고 말씀드립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차자 말단의 일에 있어서는 이미 오늘 대신과 제신(諸臣)들의 소청대로 윤허하기는 했거니와, 유익함이 없는 것은 진실로 비답에 말한 것과 같다."
하였다.
사간 박필기(朴弼琦)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액정(掖庭) 소속 김시홍(金時泓)이 지은 죄는 곧 한낱 자질구레한 일인데, 비국(備局) 당상(堂上)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고 대신이 차자를 올려 논하여도 성상께서 마침내 개석(開釋)하여 들어주기를 아끼고 계십니다. 작은 일에 있어 이러하니, 큰 일에 있어서도 또한 감히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의지하여 중히 여기며 신임(信任)하는 대신이 한 말에 있어서도 오히려 이러하시니, 미천하고 소원한 신하에게 말을 다 하도록 책할 수 있겠습니까? 또 형조(刑曹) 당상이 올린 상소에 있어서는 그윽이 개탄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그 말에 ‘구구(區區)한 잔경(殘景)717) 에 무슨 바라는 뜻이 있어서 한낱 액정 소속을 위하여 많은 말로 변명하는 데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어찌 합당한 말이 되겠습니까? 만일에 액정 소속을 위하여 변명한 것이 바라는 뜻이 있어 하는 것이라면, 액정 소속들이 과연 남들의 바라는 뜻에 부응(副應)할 수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약원(藥院)에서 문안(問安)하는 것을 또한 하지 말도록 분부하신 것에 있어서는 더욱 신자(臣子)로서는 천번 만번 감히 들을 수 없는 일이니, 삼가 바라건대, 이 과중한 분부를 도로 거두시어 모두에게 고쳐진 일월(日月)을 우러러보듯 하게 해 주신다면 더 없이 다행하겠습니다. 또 ‘갖가지 보양(補養)이 심자(心字)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신 분부는 더욱 감명(感銘)되는 바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심자(心字)’ 하나로 갖가지 보양의 주체를 삼으셨고 보면, 전하께서 반드시 이미 본원(本源) 위에 나아가 실속 있게 공부를 하시어 참으로 그 공효(功效)를 아시게 된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거나 병을 다스림이 본시 하나의 도리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본원이 이미 바로잡아지고 희로(喜怒)가 스스로 맞아지게 되면 수화(水火)가 모두 조화를 이루어 갖가지 병이 자연히 제거되는 것이고, 진실로 능히 이렇게 해가면 천지(天地)가 자리잡히고 만물이 육성(育成)되는 공적(功績)이 점차 이루어지게 되며 화협(和協)의 공효도 또한 이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이목지관(耳目之官)으로서 규정(糾正)하기를 생각하지 않았음을 들어 비답하였다.
부응교 이현모(李顯謨)가 상소하기를,
"약원(藥院)에 대해 비답하신 분부를 이처럼 통절(痛切)하게 하셨으니, 신자(臣子)된 사람으로서 누가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구습(舊習)을 고치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이런 마음이 없다면 이는 사람다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신(群臣)들을 책망하시려는 것 때문에 드디어 약원의 진후(診候)까지 받지 않으려고 하심은 어찌 성상께서 마음이 정당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입진(入診)을 윤허하여 질병을 조심하는 방도를 다 하시고, 오로지 독책(督責)하기만 주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작금(作今)에 내린 분부는 곧 세상의 도의를 통절하게 개탄했기 때문이었는데, 대신과 제신(諸臣)들이 굳이 청하는 것에 따라 이미 입진하도록 윤허했다. 권면하고 경계한 말에 있어서는 유의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과 찬수청 당상(撰修廳堂上) 윤순(尹淳)의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홍치중이 아뢰기를,
"제신(諸臣)들이 잘못한 죄 때문에 성상께서 편치 못하신 중에도 진찰(診察)을 윤허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감히 청대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역시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 사이에 얼음이 풀리듯이 환연(渙然)해질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나는 다만 선천(先天)에 붙이면서 오래되면 자연히 잊어버리게 되기만 바라고 있는 것이다. 비록 빙탄(氷炭)이라 하더라도 얼음이 숯불에 들어가 녹지 않고 숯불이 얼음에 있어도 꺼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이, 다만 조정의 분위기를 조정(調停)해 가고 국가 형세를 유지해 가기 위하여 스스로 괴로움도 잊어버리고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국가 사세가 외롭고 약해짐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가슴속에 그득하여 속에서 버티고 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사자(私字)로서, 군부(君父)도 내가 알 바 아니요 국사(國事)도 내가 알 바 아니라고 여기고 있으니, 군부 대접을 너무도 박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며칠 이래로는 현훈증(眩暈症)이 심해졌지만 어제는 또한 억지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앉아서 기다렸는데 마침내 차대(次對)를 거행하지 못하게 되고, 아침 수라(水剌)도 오후에야 비로소 들었다. 대신과 대간(臺諫)이 이미 나왔는데도 차대를 거행하지 못한 것은 그전에 없었던 일이다. 약 먹는 것과 병 치료를 내가 장차 무엇하러 하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내가 나라를 다스려 가지 못했다고 비웃게 될 것이고, 내가 또한 어찌 성고(聖考)께 돌아가 뵈울 낯이 있겠는가? 최명상(崔命相)의 상소는 또한 의조(疑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홍치중과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잇따라 의관(醫官)을 불러 진찰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순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비록 그렇게 분부를 내리시어 군하(群下)들을 경동(警動)시키는 도리를 하고 계시므로, 군하들이 비록 한때 민망하고 절박함에 따라 더러 그대로 받드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또한 구습(舊習)을 참으로 해소하게 된 것이 아니고 특히 잠시 동안 우선 그대로 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지성으로 해 가신다면 어찌 변동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군사를 일으켜 대궐에 침입하는 수가 옛적에도 또한 있기는 했지만, 어찌 지난해와 같은 적이 있었겠는가? 시험삼아 그 근본을 생각해 보라."
하였다. 제신(諸臣)들이 잇따라 진찰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홍치중이 재자관(䝴咨官) 김시유(金是瑜)가 연경(燕京)에 갈 때 쓸 은(銀) 5백 냥을 백급(白給)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고, 다음에는 준례로 삼지 말도록 명하였다. 윤순이 진달하기를,
"남한산성 밖의 거민(居民)들이 개간(開墾)한 곳은 화전(火田)과 다를 것이 없으니, 양외 가경전(量外加耕田)의 예에 의하여 세를 거두지 말고 본부(本府)에 소속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2일 계축
부제학 이병태(李秉泰)의 상소를 환급(還給)하라 명하였다.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요사이 여러 차례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재야(在野)의 제신(諸臣)들로 하여금 모두 반열(班列)에 나아가도록 하시니, 신(臣)이 이에 더욱 속바치기 어려운 죄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바야흐로 붕당(朋黨)의 폐단을 제거하려 힘쓰고 계시는데 신이 일찍이 성상께서 내리시는 유시(諭示)에 ‘붕당을 군부(君父)보다도 중히 여긴다.’고 책망하심을 당하였고, 전하께서 바야흐로 탕평(蕩平)하는 정사를 힘쓰고 계시는데 신이 일찍이 올린 소본(疏本)에 대하여 ‘《주서(周書)》에 있는 교훈은 이렇지 않은 듯싶다.’라고 했었습니다. 비록 전하께서 내리시는 인자한 은덕을 힘입어 우선 현저한 처벌이 늦추어지기는 했습니다마는, 신이 이미 미혹하여 징개(懲改)하지 못했고 보면 어찌 감히 자신이 전일의 일을 은휘(隱諱)하고서 도리어 나아가 임용(任用)되려고 도모할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신이 3년이나 시강(侍講)하면서도 자효(自效)하는 바가 없었기에 부끄럽게 여겨지고 두렵게 여겨져 먹고 자는 것도 편치 못하다가 이렇게 유락(流落)하게 되면서는 멀리서 경광(耿光)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도로(道路)에서 전파(傳播)되는 말에 따라 그윽이 성상의 몸에 궐유(闕遺)가 점점 많아져 장차 청명(淸明)한 정치를 이루어 중외(中外)의 소망에 답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臣)이 매양 한번이라도 듣게 될 적에는 문득 감히 전하를 위하여 개탄스러웠습니다마는, 또한 자신의 죄를 자책하느라 이에 몸을 용납할 바가 없습니다."
하였다.
부교리 유엄(柳儼)이 상소하여, 약방(藥房)에 내린 비지(批旨)를 들어 경계를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권면하고 경계한 말은 절실(切實)한 것인데, 유의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하였다.
10월 13일 갑인
이덕수(李德壽)와 서종급(徐宗伋)을 승지(承旨)로, 신사철(申思喆)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한사득(韓師得)을 장령(掌令)으로, 채팽윤(蔡彭胤)을 예문학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심택현(沈宅賢)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흥경(金興慶)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박사익(朴師益)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심공(沈珙)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조명익(趙明翼)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정언(正言) 남태량(南泰良)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붕당(朋黨)의 화가 하늘에 사무쳐 장차는 반드시 나라를 망칠 근본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상께서 심각하게 인식하고 원대하게 보시고서 오직 동이(同異)를 조정(調停)해가고 피차(彼此)를 보합(保合)해가려고 생각하시어 성상께서는 더욱 뜻이 간절하신데도 군하(群下)들은 더욱 아득하게 들으며 상하(上下)가 상지(相持)하고 있어, 다시는 분의(分義)와 예절(禮節)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번의 북로(北路)의 수해(水害)는 진실로 아주 옛적에도 없던 것이기에 성상께서 우로(憂勞)하고 측은하게 여기어 조정에 임해서도 얼굴이 펴지지 않으시며 특별히 도신(道臣)을 차출(差出)하여 즉각 부임하도록 하셨으니, 신하가 된 사람은 절박한 상황을 다급하게 여겨야 하는 의리에 있어 어찌 다시 사피(辭避)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전 감사(監司) 김취로(金取魯)는 장차 나가야 할 자리임에도 진정(陳情)을 하였고, 인피(引避)할 만한 분의(分義)가 없는데도 인혐(引嫌)하며 한 번 상소하여 비답을 받들게 되자 오직 패초(牌招)를 어기기를 일삼았으므로, 마침내 묘당(廟堂)에서 변통할 것을 진달하여 체파(遞罷)하게 되고야 말았습니다. 신하가 된 사람의 처신과 의리가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신하는 있으나 시키지 못하고 혹시 한두 사람이라도 명에 응하는 자가 있게 되면 또 더러는 너무 지나치게 몸을 굽혀 그 말을 들어주었으니, 체모를 손상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책을 끼고 경연(經筵)에 들어온 유신(儒臣)이 사정과 사세를 핑계하며 글 뜻을 진강(進講)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으니, 이러한 거조는 진실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일입니다. 전 감사 김취로와 전 수찬 조명익(趙命翼)을 모두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도록 명하시기 바랍니다. 김시홍(金時泓)이 별성(別星)이라고 가칭(假稱)하여 천청(天廳)을 기망(欺罔)한 죄는 사방에 흘러 퍼지자 놀라며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도, 유사(有司)인 신하가 고개를 숙이고 위축(萎縮)되어 당연히 받아야 할 율(律)을 시행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되도록 말감(末減)하여 오직 그 일을 해산(解散)해버릴 생각만 했으니, 형조(刑曹)의 해당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을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고, 김시홍은 다시 형조로 하여금 조율(照律)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김취로와 조명익의 일에 있어서는 더러 이해하지 못한 곳이 없지는 않으나 대체에 있어서는 옳으니, 아뢴 대로 하라. 김시홍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0월 14일 을묘
예조에서 아뢰기를,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소상(小祥) 때에 전하께서 제복(除服)하실 처소를 소현세자(昭顯世子) 때의 예에 의거하여 대내(大內)의 별전(別殿)으로 마련했습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고, 뒤이어 명하기를,
"참사(參祀)에 있어서는 비록 그런 예가 없었으나, 제사 전에 먼저 혼궁(魂宮)에서 곡림(哭臨)하고, 제사가 끝나고서 옷을 바꾸어 입은 다음 또 곡림한 후에 백관(百官)들은 비로소 길복(吉服)을 입는 것으로 의주(儀註)를 써서 들이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 헌납 박필정(朴弼正)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서명년(徐命年)은 당초에 향적(鄕籍)에 입적(入籍)하지도 않고서 덮어놓고 향시(鄕試)에 나아갔습니다. 기강(紀綱)이 엄숙해지게 하고 뒷 폐단을 막아야 하는 도리에 있어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향시의 시관(試官)들을 모두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지난해의 역적 변란 때에 병사(兵使)가 살해되고 온 지경이 분탕(焚蕩)이 되었고 보면 방백(方伯)인 자로서는 마땅히 급급하게 군사를 출동하여 초멸(勦滅)하기를 도모했어야 하는데, 권첨(權詹)은 이미 체직된 것을 핑계로 짐짓 천취(遷就)하려 하고 있음으로써 역적들의 기세가 날치게 되고 흉악한 칼날이 서울에까지 접근하게 되었으니, 머뭇거리며 관망(觀望)만 하여 역적들을 놓아 주고 임금을 유기(遺棄)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충군(充軍)한 죄인 권첨을 지경 위에서 효시(梟示)하시기 바랍니다. 역적 박필몽(朴弼夢)이 복주(伏誅)된 뒤에도 삼적(三賊)들이 오히려 왕법(王法)에서 벗어났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소하(疏下)의 삼적들을 시급히 국법(國法)대로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강세윤(姜世胤)이 반역 모의에 동참(同參)하였음은 목함경(睦涵敬)의 공초(供招)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진중(陣中)의 역적들이 모두들 ‘이천 부사(利川府使)가 군사를 거느리고 호응했다.’고 했었고, 이인좌(李麟佐) 등 제적(諸賊)들이 또한 ‘이천 부사도 역시 우리와 동류(同類)로서 일찍이 그와 함께 의논했었다.’고 했었습니다. 미리 앞질러 참작해서 처리해버려 실형(失刑)이 더없이 크게 되었으니, 정배(定配)한 죄인 강세윤을 잡아다가 국문(鞫問)하여 엄하게 형벌하여 율(律)대로 처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향시의 시관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권첨의 일을 이번에 다시 논함은 과중을 면하지 못하는 짓이다. 강세윤의 일에 있어서는 이처럼 신칙(申飭)하고 격려하는 날에 당해서는 마땅히 이런 지나친 의심은 제거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지평 최명상(崔命相)의 상소를 도로 주도록 명하였다.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김취로(金取魯)는 즉시 명에 응하지 않았고 조명익(趙明翼)은 글 뜻을 진달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가령 미안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그 일 자체에 나아가 사리를 논한다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지금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겉면은 비록 두 사람을 논박하여 파직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은 것이지만 그 실지는 은연중에 요사이 제신(諸臣)들의 거취(去就)를 모두 망측(罔測)한 데로 몰아넣고 이리저리 농간을 부린 것입니다. 지향하고 있는 뜻이 심각하고 긴밀하여, 장차 이미 조정에 나와 있는 사람은 거개 불안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나오지 않은 사람은 나오기 어려운 단서를 삼게 한 것이니, 계책 마련하기를 교묘하고 세밀하게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두 신하의 일을 빙자하며 별다른 말을 삽입해 놓아 일망 타진(一網打盡)할 꾀를 부린 것입니다. 이러한 교묘하고 비밀한 짓을 하는 무리들은 결단코 언책(言責)을 맡는 중요한 자리에 둘 수 없으니, 마땅히 견파(譴罷)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분부하기를,
"어제 승정원에서 아뢴 말은 비록 이해하지 않은 곳이 있기는 했으나, 대의(大意)는 옳았기 때문에 아뢴 대로 하게 한 것이다. 최명상의 상소의 말은 신칙(申飭)한 뒤인데도 오히려 의조(疑阻)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므로, 내가 보고 싶지 않다."
하였다.
10월 15일 병진
사간원에서 【 헌납 박필정(朴弼正)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권익관(權益寬)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종제(從弟)이고 역적 박필현(朴弼顯)의 매부(妹夫)인데, 서번(西藩)에서 역적 이사성(李思晟)과 함께 대치(對峙)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성은 이미 복법(伏法)했는데도 권익관은 특별히 강성한 당(黨)의 원조와 인친(姻親)의 주선으로 유독 정해진 형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박창제(朴昌悌)가 점마(點馬)를 한 것도 실로 첩서(牒署)를 받았던 것이고, 역적 황부(黃溥)가 배를 만든 것도 또한 지휘에 따라 한 것입니다. 또 전선(戰船)에서 쓰는 제구(諸具)도 모두 감영(監營)의 창고에서 가져다가 마련하였으니, 반역을 한 정절(情節)이 특히 안무사(安撫使)의 장계(狀啓)에 훤히 나타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자신을 발명(發明)한 상소에도 사실을 자수(自首)했었습니다. 역적 남태징(南泰徵)에게 수속(收贖)해 놓은 말[馬]을 도임(到任)한 날에 ‘무장(武將)들의 전마(戰馬)는 자별하라.’는 등의 말로써 급급하게 관문(關文)을 발송하여 공공연히 돌려주어 제적(諸賊)들이 타게 하였으니, 적과 내통하여 협조한 정상을 더욱 가리울 수 없게 되었는데, 그가 미처 거병(擧兵)하지 못한 것은 단지 같은 당들이 먼저 실패해버렸었기 때문입니다. 응모(應募)한 대관(臺官)이 멋대로 엄중하게 국문(鞫問)하기를 청한 것을 정계(停啓)해버려 흉악한 녀석이 천지 사이에 버젓이 살아 있게 된 것이니, 권익관을 율(律)대로 처단하고, 형조의 당상과 낭관 및 김시홍(金時泓)의 일은 정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말이 과중하게 됨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또 본사(本事) 이외의 강성한 당의 원조니, 인친의 주선이니, 응모한 대관이니 하는 말들은 의조(疑阻)하는 마음을 부리려고 한 것이니, 진실로 해괴스럽다."
하고, 이어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생원(生員)·진사(進士) 시험의 방방(放榜)을 하였다.
10월 16일 정사
송필항(宋必恒)을 사간(司諫)으로, 허옥(許沃)을 헌납(獻納)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지평(持平)으로, 박사정(朴師正)을 부응교(副應敎)로, 김상성(金尙星)을 교리(校理)로, 오명신(吳命新)과 장태소(張泰紹)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유생(儒生)들에게 전강(殿講)을 보여 거수(居首)한 유학(幼學) 유일심(柳一心)을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도록 명하였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기를,
"성상께서 덕이 지극히 인자하시어, 사사 통한(痛恨)을 폭백(暴白)하지 못하고 눈을 감지 못하게 되었던 귀신들에게, 일월(日月)과 같은 빛이 돌아와 황천 길을 다시 비추어 주게 되었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똑같이 화를 받았던 두 신하는 아직도 죄적(罪籍)에 남아 있으니, 선신(先臣)이 캄캄한 속에서라도 앎이 있다면 반드시 몸이 국축(跼縮)하여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진실로 잠시라도 죽지 않고 있다가 국가의 사세가 편안해지는 날을 보게 된다면 초야(草野)에 물러가 농사를 지으며 성상의 은택(恩澤)을 노래할 것이고, 혹시 불행하여 사변이 있게 된다면 마땅히 연(輦) 앞의 위졸(衛卒)이 되기 바라겠습니다."
하니,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기를,
"김시홍(金時泓)의 일을 신이 진실로 시종 주장해 왔습니다. 만일 당초에 놓아 두었다면 형관(刑官)이 한 가지 일을 잘못 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인데, 신이 망작(妄作)함으로 말미암아 허다한 회한(悔恨)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윽이 생각해 보건대, 이는 본시 미미한 일인데 묘당(廟堂)에서 발론(發論)하여 까다롭고 세밀한 데에 가까움은 진실로 성상께서 분부하신 말씀과 같기는 합니다마는, 대각(臺閣)에 있어서는 관계가 있는 것이어서 반드시 쟁집(爭執)하여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일전에 아간(亞諫)의 상소 내용에 조금 발단(發端)을 하기는 했지만 낙착(落着)이 없는 말을 하여 이미 직절(直截)한 기풍(氣風)이 없었는데, 납언(納言)이 급급하게 정계(停啓)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듯이 하였음은 또한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애석하게도 전하께서 납언(納言)을 체직(遞職)하실 적에 이를 들어 죄주지 않으시어, 그가 한 마디 말도 자복(自服)함이 없어 대각(臺閣)의 수치를 씻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당초에 논계(論啓)한 것이 혹은 잘못이기도 하지만, 자주 아뢰다가 갑자기 정계하였음은 전도(顚倒)를 면하지 못한 일이다. 이미 윤허하지 않고 있다가 정계하는 것을 책망함은 성실한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과연 분부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경(卿)이 비난하여 배척한 것이 대의(大意)는 절직(切直)한 것이지만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전후에 그만두지 않고 이를 상지(相持)하는 것은 너무 미워하는 데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장령 한사득(韓師得)이 상소하기를,
"이세진(李世璡)의 상소는 어구(語句) 사이에 비록 잘 맞지 않는 곳이 있기는 하여도 대체에 있어서는 진실로 대중의 공론에서 나온 것이니, 먼 외방(外方)에 보임(補任)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정지하셔야 합니다. 최명상(崔命相)의 상소도 진실로 소회(所懷)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그 상소를 도로 들이게 하여 비답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세진을 외방에 보임한 것과 최명상의 상소에 비답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10월 17일 무오
밤에 달이 정성(井星)으로 들어갔다.
10월 18일 기미
이종성(李宗城)을 응교(應敎)로, 임정(任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정익하(鄭益河)를 정언(正言)으로, 윤양래(尹陽來)를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장령 이경석(李慶錫)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상 도사(慶尙都事) 이희춘(李喜春)은 문지(門地)가 낮아 미천하니,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이세련(李世璉)은 너무 늙고 술을 즐기며 비루하고 망령되니, 도태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0월 19일 경신
신무일(愼無逸)을 승지(承旨)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장령 이경석(李慶錫)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부여 현감(扶餘縣監) 윤성적(尹盛績)은 거칠고 경솔하여 일을 알지 못하는데 행정을 한결같이 청탁에 따라 하고 첨정(簽丁) 때에 뇌물을 받는 소문이 낭자했으니,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유척기(兪拓基)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여러 차례 신칙(申飭)하여도 마침내 나와서 사은(私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 수사(京畿水使) 구성임(具聖任)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구성임이 상소하기를,
"십행(十行)의 윤음(綸音)이 당장의 병폐에 딱 맞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마는, 사치하는 폐단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서인(庶人)들의 얼첩(孼妾)들도 비단옷만 입고 진미(珍味)만 먹으므로 재화(財貨)가 날로 고갈되고 사치하는 풍습이 날로 성해집니다. 능단(綾緞) 등속은 엄중하게 금단하는 조례(條例)를 세우되, 만일에 범하는 자가 있으면 잠상(潛商)의 율(律)로 시행하고, 사서인(士庶人)의 길례(吉禮)와 흉례(凶禮)에도 단지 토산(土産) 명주로써 상복(上服)을 삼게 하고, 혹시 하나라도 법제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집 가장(家長)을 죄주어야 합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전화(錢貨)는 진실로 폐해가 많아 농부(農夫)와 상인(商人)이 다같이 곤궁해지고 인심이 날로 간사해지니, 전화(錢貨)를 혁파하되 공사(公私)가 저축하고 있는 것을 거두어 모아 기용(器用)의 감으로 하도록 명하시기 바랍니다. 또 전하께서 ‘조정에는 순후(淳厚)한 풍습이 없고 이목지관(耳目之官)은 직절(直截)한 기개가 없다.’고 분부하시고, 말단에는 아래 있는 사람들이 태만하고 건방진 짓을 하는 것이 풍습이 되었음을 들어 특별히 회책(誨責)을 가하셨습니다. 만일에 전하께서 능히 죄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벌을 주고 공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주며, 협잡이 끼이는 사의(私意)를 제거하고 특히 광대한 공심(公心)을 보이신다면, 시비(是非)의 분쟁이 스스로 탕평(蕩平)으로 돌아가고 조정의 분위기가 자연히 화협(和協)하게 될 것입니다. 일을 말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도 비록 더러 과당한 말을 하더라도 절대로 꺾어버리지 마소서. 만일에 군하(群下)들이 의리의 소재는 돌아보지 않고서 오직 임금이 명하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거의 작록(爵祿)을 탐하는 데로 돌아가버리지 않겠으며, 또한 어찌 청명(淸明)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되겠습니까?"
하였고, 말단에 논하기를,
"본영(本營)의 소속인 송가도(松家島)의 둔전(屯田)은 전함(戰艦)·군기(軍器)·호군(犒軍)·상사(賞賜) 등의 응하(應下)를 오로지 여기에 기대고 있기에, 여러 궁가(宮家)들이 절수(折受)한 것과는 구별이 있으니, 호조(戶曹)로 하여금 세를 거두지 말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이기에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사치를 금단하는 일은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선도(善導)하여 거느리기에 달려 있음이 경(卿)이 말한 대로라면 금지하는 법령은 맨 끝의 것이 되겠다. 전화(錢貨)의 일에 관한 말은 진실로 나의 뜻과 같기는 하다마는, 이는 졸연히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송가도의 둔전 일은 대처분(大處分)을 한 뒤라 뒤이어 변경할 수가 없다."
하고, 곧장 분부하기를,
"‘이번의 처분 이후에도 만일 마음속에 불만을 갖는다면 신하된 사람으로서 지조가 없는 것이다.’ 란 뜻으로 일찍이 이미 분부를 내렸었다. 하물며 무신(武臣)의 이런 버릇에 있어서는 얼마나 신칙(申飭)했었는가? 또 훈신(勳臣)의 후예로서 그의 조부가 인조(仁祖)의 두터운 은덕을 받았었고 보면 다른 무변(武弁)들보다는 더욱 구별이 있다. 상소 내용에 ‘필상(必賞)·필벌(必罰)’ 등의 말은 혹 상례의 투어(套語)로 볼 수도 있겠지만, ‘협잡이 끼인 사의(私意)를 제거하라.’는 어구와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명령만을 따른다.’는 말은 딴 의사가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에 있어서 비록 문신(文臣) 재상이라 하더라도 결단코 이러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무신이겠느냐? 그의 상소는 곧 응지(應旨)하여 올린 것이기 때문에 비답을 내리기는 했다마는, 이러한 버릇은 다시 자라게 할 수 없으니, 수사 구성임을 파직하라."
하였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시독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최명상(崔命相)이 논한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친속(親屬)에 관한 일은 논집(論執)한 말이 옳았습니다. 민관효(閔觀孝)·윤성시(尹聖時)의 족속에 있어서도 이미 먼 데로 귀양 보냈는데, 역적 김일경의 지친(至親)에 있어서는 어찌 출계(出繼)한 것 때문에 아무 일이 없이 편안할 수 있겠으며, 심지어 무턱대고 시장(試場)에 들어가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역적 김일경의 친속들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통쾌하게 형법을 씀은 또한 뒷날의 폐단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즉시 윤허하지 않은 것인데, 이미 그의 대의(大意)가 옳은 줄은 알고 있다."
하고, 이어 최명상의 상소대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유엄이 아뢰기를,
"최명상이 남태량(南泰良)의 일에 관해 한 말은 지나친 것입니다. 남태량이 어찌 그 사이에 무슨 딴 뜻이 있은 것이겠습니까? 이는 의조(疑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조명익(趙明翼)의 일은 또한 지나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남태량의 말은 혹 조어(措語)가 지나치기는 했지만 체통에 있어서는 옳았는데, 어찌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구성임(具聖任)의 상소를 들어 하문하매, 유엄이 아뢰기를,
"그의 마음속에 무슨 간직한 것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성인의 만물을 포용하는 도리는 하치않은 것을 적발함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들추어내는 짓은 본시 불가한 것이다마는, 대저 사진(仕進)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편에 계루(係累)되어 있기 때문에 일에 당해 발로(發露)하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이 저절로 나온 것이다."
하였다.
10월 20일 신유
심공(沈珙)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권부(權孚)를 승지(承旨)로, 윤양래(尹陽來)를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서종급(徐宗伋)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정언 정익하(鄭益河)가 앞서 대관(臺官)의 직에 있을 때에 일을 말했는데도 비답을 받들지 못했던 것을 들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대관(臺官)이 일을 논한 상소를 비답이 없이 도로 내주었음은 진실로 전고(前古)에 들어볼 수 없던 지나친 거조입니다. 대각(臺閣)을 가볍게 보임이 신(臣)으로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인혐(引嫌)하는 것이다."
하였다.
대사헌 조상경(趙尙絅)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번에 내리신 처분은 연명(聯名)하여 올린 차자에 말한 의리를 통쾌하게 펴준 것이기는 합니다마는, 다만 두 정승을 분등(分等)해 놓아 동이(同異)의 차별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아들과 손자들의 일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주(周)나라 임금 때의 죄를 서로 파급되지 않게 한 아름다운 법이 아니게 됩니다. 하물며 그들의 아들이나 손자가 당초에 승복(承服)한 일도 없는데, 어찌 아비와 조부에게 파급될 수 있겠습니까? 만일에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불안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것이라면, 연명한 차자를 이미 신설(伸雪)해 줄 경우 그 당시에 연명한 차자를 가리켜 반역하는 것이라고 한 사람들은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가 ‘나는 일찍이 연명한 차자를 반역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면, 비록 사신(四臣)을 일체로 신설해 주더라도 무엇을 고집하여 혐의할 것이 있겠습니까? 《감란록(勘亂錄)》의 서문은 곧 정론(定論)을 분명하게 게시(揭示)하여 백대(百代)토록 전하며 보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보면, 난역(亂逆)이 유래한 바를 명백하게 설파(說破)해 놓지 않아서는 안될 것인데, 전하께서 과연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으로써 근원을 삼으려 하십니까?
아! 옛적부터 간흉(奸凶)한 무리들이 몰래 화를 만들기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서 비밀히 이롭지 못하게 만드는 꾀를 부리는 수가 비록 더러 있기는 했지만,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진 뒤에 분명하게 말을 하며 현저하게 핍박을 가한 자는 유봉휘(柳鳳輝) 한 사람뿐입니다. 김일경과 박상검(朴尙儉)이 결탁하여 배짱이 맞고 안팎에서 일을 도모한 것이 또한 어찌 믿는 데가 없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이세진(李世璡)의 상소의 말이 비록 구차하기는 했지만, 대체(大體)에 있어서는 옳았습니다. 이는 이세진이 감히 혼자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다 같은 공론임을 미루어서 알 수 있는 것이니, 마땅히 이세진을 먼 외방(外方)에 보임(補任)하도록 하신 명을 거두셔야 합니다. 말을 들을 때에 있어서의 도리는 반드시 의리를 가지고 옳음과 그름을 판단해 가야 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제신(諸臣)들이 일을 말하게 될 적에 저쪽의 말이 이쪽에 간섭(干涉)이 되고 이쪽의 말이 저쪽에 간섭이 되면, 선천(先天)으로 돌려버리기도 하고 의조(疑阻)하는 것으로 미루어버리기도 하시는데, 진실로 이렇게 하신다면 장차 조정 안에서 잘못을 바로잡아 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박필정(朴弼正)을 특별히 체직하였음은 포용(包容)하는 도리에 어그러지게 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달한 일에 있어서는 이미 대신들에게 말을 한 것이고, 이세진을 외방에 보임한 일도 또한 이미 상세히 효유(曉諭)하였다. 관직(官職)이 그대로 있는 경우 감히 그 성(姓)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관직을 소중히 여긴 것인데, 하물며 대신의 경우이겠는가? 사체에 있어서 진실로 미안하게 된 것이다. 박필정의 일에 있어서는 만일 지금 그런 풍습을 가차(假借)해 주려면 무엇하러 처분을 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과 비국(備局)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형조 판서 심택현(沈宅賢) 등에게 이르기를,
"나의 뜻이 금석(金石)처럼 굳은데도 오히려 그전의 투(套)대로 알고 있으니, 그르다."
하매, 심택현 등이 주대(奏對)하기를,
"남태량(南泰良)이 김취로(金取魯)를 논박한 뒤에는 신들이 감히 바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집(李㙫)이 아뢰기를,
"사행(使行) 때 팔포(八包)718) 이외에 더 은화(銀貨)를 보내는 것은 금하고 있는데, 이번의 사행 때에는 터무니없이 범람한 폐단이 있었으니, 신칙(申飭)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은 아뢰기를,
"의정부(議政府)에서도 또한 들여보낸 것이 있었습니다."
하니, 의정부 당상(堂上)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고, 금단을 신칙하도록 명하였다. 이집이 또 아뢰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기를 싫어하고 기피하여 체직을 도모하게 되니 해괴스럽습니다."
하니, 원백규(元百揆)는 파직하고, 홍원익(洪元益)은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며, 이수신(李守身)은 곧 그 도(道)의 바닷가 고을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이들은 전후에 목사로 임명된 사람들이다. 이집이 또 아뢰기를,
"이병상(李秉常)은 삭출(削黜)된 지 이미 해가 넘었습니다."
하니, 놓아주고 직첩(職牒)을 도로 주어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찬수청(纂修廳) 당상(堂上)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선조(先朝)의 《국조보감(國朝寶鑑)》속에 갑인년719) 이후의 예론(禮論)과 임술년720) 이후의 사문(斯文)에 관한 일은 수록하지 말도록 이미 분부를 받들었거니와, 전후에 내린 처분도 또한 수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의 꼴이 이러한 때라 반드시 시끄러워지는 사단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미 《실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으니, 수록하지 말라."
하였다. 윤순이 또 황단(皇壇)에 관한 일을 마땅히 수록해야 할지를 품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문집(文集)도 또한 별집(別集)이 있었으니, 마땅히 따로 속편(續編)을 만들어 비장(秘藏)해 두고 비린내 나는 풍진(風塵)이 맑아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매, 예조 판서 박사익(朴師益)이 아뢰기를,
"속편으로 만듦은 구차하게 되고, 또 사문(斯文)에 관한 일도 또한 아울러 수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조 참판 홍현보(洪鉉輔)와 호조 참판 이현록(李顯祿)도 다 같이 사문에 관한 일을 수록하지 않을 수 없음을 진달하였다. 심택현이 아뢰기를,
"말년에 하신 처분들은 단청(丹靑)처럼 빛이 나는 것인데, 이를 수록하지 않는다면 어찌 《보감(寶鑑)》을 편찬하는 뜻이 되겠습니까?"
하고, 조현명이 아뢰기를,
"전후의 처분 때에 하교(下敎)하신 것을 모두 수록하여 백세(百世)의 공론을 기다리는 것이 또한 무방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피차(彼此)의 사문에 관한 일과 예론(禮論)에 있어서는 단지 《대비망기(大備忘記)》에만 수록하는 것이 좋겠다."
하매, 윤순이 아뢰기를,
"예론에 있어서는 대단히 난처한 사정이 있습니다. 방례(邦禮)에 관해 내린 처분을 모두 수록하기로 한다면, 제신(諸臣)들이 존숭하고 경앙(景仰)하는 원로(元老)에게 준엄(峻嚴)한 하교(下敎)를 내린 일이 많았고, 또한 그 뒤에 명백하게 예론을 개석(開釋)하신 일도 없었습니다."
하고, 조현명이 아뢰기를,
"예론의 시비(是非)에 있어 경신년721) 이후에는 또한 분부를 내리신 것이 없었습니다."
하고, 교리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남인(南人)들은 방례(邦禮)를 고집하고 제신(諸臣)들은 사문(斯文)을 고집했었으니, 만일 모두를 수록하지 않는다면 피차(彼此)가 반드시 울불(鬱拂)하게 여길 것이요, 만일에 산삭(刪削)해버리려고 하면 세상의 공정한 필단(筆端)이 없게 될 것이니, 이 점이 난처하게 됩니다."
하니, 제신들에게 조금 물러가 있도록 명하였다가 이윽고 제신들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분부하기를,
"이 두 건의 일은 보감에 수록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곧 나의 본뜻이었는데, 지금 제신들이 모인 처음에 당해서는 가차(假借)하려는 마음이 없지 않게 되니, 이러고서 무슨 일을 하게 될 수 있겠는가? 경신년에 단지 선정(先正)의 원통한 것만을 신설(伸雪)해 주었고 방례(邦禮)에 대한 시비(是非)에 있어서는 제기(提起)하여 분부하신 바가 없었으니, 이런 데에서 준엄한 처분을 내리시게 된 뜻을 알 수 있다. 사문에 관한 일은 선조(先朝)의 금석(金石)과 같은 분부가 있으니, 비록 《보감》에 수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변경하게 될 수 있겠는가? 그때에 조용히 조섭(調攝)하시는 중에도 이 일로써 번뇌(煩惱)하심이 많았으니, 내가 유한(遺恨)으로 여겼었다. 제신들이 이 두 가지 일을 수록하려고 하는 것은, 선천(先天)에 붙여버리기로 한 본의가 아닌 일이다. 근원과 유래를 논한다면 예설(禮說)과 사문(斯文)으로부터 해독이 흘러와 지난해의 역란(逆亂)이 있게 된 것이다. 선조(先朝)께서 내리신 ‘지수(持守)해 가고 변경하지 말라.’고 하신 분부를 내가 또한 알고 있는데, 만일에 일이 과연 잘못되어 가령 한소재(漢昭帝)가 곽광(霍光)에게 비록 외로운 태자(太子)를 부탁했었다고는 하나 만일에 곽광이 충성스럽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 죄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선조의 처분이라 하더라도 나중에 폐해가 있게 될 적에는 또한 선조(先朝)에 관계가 있는 일인 것 때문에 고치지 않고 그대로 준수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일이 잘못되어 가는 것은 뒤따라 고쳐야 하는 법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성고(聖考)의 뜻을 이어가는 일인 것이다."
하고, 이어 어제(御製)한 절목(節目)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글을 범례(凡例) 위에 쓰되 ‘소하 어제(所下御製)’로 쓰라."
하였다. 박사익이 아뢰기를,
"구구(區區)하게 지켜 온 의리이기에 진실로 변경하여 고칠 수 없습니다. 성상에 대한 무함을 신설(伸雪)하게 되기 전에는 어찌 의리를 밝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괘서(掛書)의 변이 진실로 역란(逆亂)의 근본이 된 것인데, 그 괘허한 난적(亂賊)을 뒤쫓아 잡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를 다스리지 않고도 오히려 역당(逆黨)들을 다 다스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심택현은 아뢰기를,
"연명하여 차자를 올려 대리(代理)하게 한 의리가 이미 밝혀졌으니, 마땅히 사신(四臣)을 일체로 소석(昭釋)해야 할 것인데, 처분이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어찌 이미 백골이 된 사신(四臣)을 위하여 우리 전하를 속이는 짓을 하겠습니까?"
하고, 이현록은 아뢰기를,
"엊그제 대신들에게 분부하신 바가 있으셨고, 제신(諸臣)들이 이미 한 전당(殿堂)에 모이었으니, 마땅히 처분이 있으셔야 할 듯합니다."
하고, 심택현은 아뢰기를,
"연명하여 올린 차자는 곧 똑같이 한 일인데, 누구는 신설(伸雪)되고 누구는 신설되지 않아 절반은 어두운 그대로이고 절반만 밝게 되었습니다.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의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연명하여 차자를 올린 의리를 이미 밝혔는데도 오히려 잡고 늘어지는 짓을 함은 사신(四臣)을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卿)들이 군부(君父)를 위하여 말을 한다면서 한갓 국가로 하여금 존중하지 못하게 만드니, 사체에 있어 불만스러운 짓이다. 내 마음이 이러한데 다시 무엇하러 많은 말을 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조 판서 조문명(趙文命)이 구성임(具聖任)의 상소가 협잡스러움을 들어 벌을 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장령 이경석(李慶錫)이 앞서 아뢴 일을 전계(傳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심유현(沈維賢)의 파가 저택(破家潴澤)722) 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이르기를,
"금오(金五)로 하여금 사문(査問)하여 품하도록 하고, 이희춘(李喜春)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0월 21일 임술
심택현(沈宅賢)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김시환(金始煥)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서명균(徐命均)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김동필(金東弼)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이병상(李秉常)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유운(柳運)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도록 명하였다가 곧장 아직은 소대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명이 승정원에 내리자, 사관(史官)이 갖추어지지 않았음을 들어 미품(微稟)723) 하니 임금이, 사관 1원(員)이 뒤좇아 입시(入侍)하는 것은 또한 그런 전례가 있었음을 들어 소대를 거행하도록 명했던 것인데, 옥당(玉堂)의 유엄(柳儼)과 임정(任珽)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국가에서 좌사(左史)와 우사(右史)를 두었음은 뜻이 있는 것으로서, 우사는 행동을 기록하고 좌사는 언어를 기록하는 것이기에 하나도 빼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록 더러 이미 그렇게 한 전례가 있었다 하더라도 사체에 있어 미안스러운 일이니, 우선 소대를 정지하도록 명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사체에 합당하게 된 것으로 비답을 내리고, 이어 정지하도록 명한 것이다.
10월 22일 계해
이춘제(李春躋)를 집의(執義)로, 조진희(趙鎭禧)를 사간(司諫)으로, 조적명(趙迪命)을 헌납(獻納)으로, 허집(許集)을 지평(持平)으로, 이현록(李顯祿)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지문(誌文)에 ‘회현동(會賢洞) 우사(寓舍)에서 탄강(誕降)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미 우사라고 했고 보면 본가[本第]가 아닌 듯하기에, 낭청(郞廳)을 회현동의 심유현(沈維賢)의 집에 내보내 자세히 탐문해 본즉, 단지 수직(守直)하는 노비(老婢)만 있었는데 ‘왕후께서 탄강한 본가(本家)가 적실하다.’고 했었고, 그 밖에는 빙문(憑問)해 볼 데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당초에 이러한 듯싶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았던 것이다. 토역(討逆)을 엄중하게 해야 하는 도리에 있어 한 차례 자세히 탐문해 보지 않을 수 없기에 사문해 보도록 명했던 것인데, 이제 과연 이러하니, 〈파가 저택(破家瀦澤)은〉 결코 거행할 수 없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장령 이경석(李慶錫)이다.】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양 부사(南陽府使) 김홍석(金弘錫)은 음험하고 포악하며 교활하고 편벽된 사람으로, 신축년724) 과 임인년725) 에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무리가 용사(用事)하던 날에 당하여 현저하게 그들의 기세를 도와주었고, 그들의 괴패(乖悖)하고 참독(慘毒)한 논에 있어서는 팔뚝을 걷어붙이며 가담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니, 아주 변방에 멀리 귀양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홍봉상(洪鳳祥)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급재(給災)에 관한 일을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할 적에 지나치게 과장한 실없는 말로 간주(看做)하여, 억제하고 승인을 아끼는 상례의 투식을 내리었습니다. 신이 외람되게 한 지방의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아닐 수 없습니다마는, 신은 결단코 그대로 봉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의 회계(回啓)가 비록 혹시 불쾌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진강(進講)이 끝나자, 시독관 유엄(柳儼)과 검토관 임정(任珽)이 아뢰기를,
"법과 기강(紀綱)이 해이되면 나라가 나라 꼴이 아니게 되는 법입니다. 홍봉상(洪鳳祥)이 망명(亡命)을 한 짓은 법에 있어 마땅히 논쟁해야 할 일인데, 장령 이경석(李慶錫)이 경솔하게 정계(停啓)하여 대관(臺官)의 체통을 손상했으니, 체차(遞差)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참찬관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진휼청(賑恤廳)에 곡식 저축이 탕갈되었는데 당면한 지금 도성(都城) 안의 쌀값이 지극히 천한데다 각 청(廳)에 전화(錢貨)가 고갈되어 공가(貢價)를 낱낱이 지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 은(銀)을 빌려다가 공가를 주고 쌀을 받아 놓고서 곡식이 귀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전매(轉賣)하여 도로 갚는다면, 남는 이익이 장차 1만여 석(石)이 되겠기에 이미 대신들과도 의논해 보았는데, 본청(本廳)의 은 4천 냥(兩) 이외에 또 1만 냥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간직되어 있으며, 황금(黃金) 30여 냥도 또한 호조(戶曹)에 보내어 은으로 바꾸면 됩니다. 또 강계(江界)에 있는 은 2천 냥과 강도(江都)에 있는 은 5천 냥도 또한 가져다가 쓰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남한산성과 강도에 있는 은은 이동할 수 없다. 그 나머지의 경리청(經理廳) 은을 참작해서 덜어내다가 작미(作米)하라."
하였다.
10월 23일 갑자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수항(李壽沆)에게 말을 내리었다. 분부하기를,
"저들이 강가에 막사(幕舍)를 짓고 있는데, 1통(通)의 첩문(牒文)을 보내어 그 성장(城將)의 마음을 개오(開悟)시켜 통쾌하게 금단하게 되었고, 몸소 강가까지 나가 살펴보아 깊이 변신(邊臣)의 체통에 맞게 했으니, 특별히 반숙마(半熟馬) 1필(匹)을 내리라."
하고, 또한 훈도(訓導) 김정기(金鼎奇)가 주선을 잘하였음을 들어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혼궁(魂宮)에 있어 소상(小祥) 뒤에 향관(享官)이 제사 지낼 때의 복색(服色)을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물어본 다음에 천담복(淺淡服)차림으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현록(李顯祿)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과 흉악한 음모(陰謀)를 꾸며 반역을 하게 된 절차는 신축년726) 의 상소 하나에서 시작된 것인데, 함께 참여한 적도들에 대한 형벌을 놓치어 악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박필몽(朴弼夢)은 반역을 주창한 괴수이고 이명의(李明誼)는 난을 일으킨 역적이며, 이진유(李眞儒)는 이명의보다 죄악이 웃돌고 박필몽과 음모를 통했었는데, 박만정(朴萬鼎)을 잡아들인 것이 박필현(朴弼顯)의 패전(敗戰)한 뒤에 있었으니, 반역 모의에 함께 참여한 것을 환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김일경은 베었으나 박필몽과 이명의는 용서해 주었다가 마침내 후환을 남기게 되었었고 보면, 박필몽과 이명의는 제거하고 이진유를 그대로 둠은 또한 장차 어떠한 변괴를 가져오려는 것이겠습니까? 대신(臺臣)이 아뢴 대로 윤허하시어 종사(宗社)가 다행해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처분이 합당하게 되었다 할 수 있는데 무엇하러 가율(加律)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집의 이춘제(李春躋)가 상소하기를,
"본부(本府)에서 역적 심유현(沈維賢)의 일을 아직 정지하고 있으며, 홍봉상(洪鳳祥)의 일은 논계(論啓)를 정지하고 있으니, 그윽이 놀랍고 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품처(稟處)하는 동안에 아직 정지하는 것은 심상하게 앞서부터 아뢴 일에 있어서만 그렇게 할 수 있고, 토역(討逆)하는 큰 논계(論啓)에 있어서는 시행할 수 없는 법입니다. 홍봉상에 있어서는 선조(先朝) 때에 망명(亡命)한 죄인이니, 짊어진 범죄가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이번에 한 사람이 혼자서 얕은 소견을 가지고 경솔하게 3년이나 극력 쟁집(爭執)해 온 논계(論啓)를 정지하여 대관(臺官)의 체통을 다시 여지가 없이 손상해버렸으니, 논계를 정지해버린 대관에게 특별히 견책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말이 옳으니, 파직하게 하라."
하였다.
지평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앞서 상소한 뒤에 이광좌(李光佐)·이정제(李廷濟)·김상성(金尙星)·김호(金浩) 등이 대변(對卞)하는 소(疏)를 올려 자인(自引)하니, 도로 내주도록 명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시독관 유엄(柳儼)이 아뢰기를,
"이경석(李慶錫)이 새 계사(啓辭) 내용에 김홍석(金弘錫)에 관한 일을 논한 말이 옳았습니다. 죄상이 가장 현저한 사람들을 대관(臺官)의 계사 내용에 끌어들여 언급하지 않았었습니다. 1은 조정만(趙正萬)을 귀양 보내기를 청한 것이었고, 1은 고(故) 상신(相臣) 조태구(趙泰耉)를 공격하여 쫓아내자는 일이었는데, 조정만의 일을 논한 말은 그 뜻이 지극히 음험한 것이었고, 조태구의 일에 있어서는 조태구가 신축년727) 연초의 연석(筵席)에서 깊이 기사년728) 의 흉당(凶黨)들을 배척했었고, 임인년729) 의 옥사(獄事)가 일어남에 미쳐서는 또 완화를 주장하는 의논을 하다가 그 무리들에게 깊이 미움을 받아 마침내 공격받아 쫓겨나게 된 것이니, 마땅히 대관이 아뢴 대로 윤허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유엄이 또 아뢰기를,
"신이 정미년730) 연초에 윤봉조(尹鳳朝)를 아주 먼 변방에 정배(定配)할 것을 발론(發論)했었습니다. 그 뒤에 생각해 보건대, 만일 방만규(方萬規)를 교사(敎唆)하여 유인한 일이 없었다면 또한 애매(曖昧)한 처지에 둘 수 없으므로, 잡아다가 추문(推問)하기를 앙달(仰達)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하물며 이제는 이미 지나간 일들을 모두 선천(先天)에 붙이게 되었으니, 마땅히 탕척(蕩滌)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때에 방만규의 공초(供招)에 ‘가서 소본(疏本)을 보이자 윤봉조가 또한 발명(發明)하지 못했다.’고 했었다. 당초에 보았던 소본과 방만규가 올린 소본은 비록 경중(輕重)이 어떤지를 알 수 없었으나, 엄하게 배척하지 않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었다. 내가 본사(本事)의 애매한 것인 줄을 알았기 때문에 비록 임용(任用)하게 되면서도 낙점(落點)을 아낀 것이 대개 이런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본사에 있어서 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오래도록 애매한 처지에 둘 수 있겠는가? 우선 감등(減等)하여 육지(陸地)로 나오게 하라."
하였다. 동지사(同知事)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유신(儒臣)이 이미 김홍석(金弘錫)의 일에 있어서 대관(臺官)이 아뢴 대로 윤허해 줄 것을 청하고 또 윤봉조를 놓아주기를 청했으니, 이는 곧 지공(至公)한 듯하면서 치우친 처사입니다. 대신(大臣)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처분하시더라도 안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유엄이 아뢰기를,
"김홍석은 원래부터 한 번도 죄를 입은 일이 없었고, 윤봉조는 오래 귀양살이 속에 있었습니다. 이는 신(臣)이 저 사람은 죄를 주고 이 사람은 놓아주기를 청한 것이니, 중신(重臣)이 진달한 말도 또한 지공(至公)한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해의 괘서(卦書)가 방만규의 상소와 똑같은 모양의 것이므로, 지난해에 윤봉조를 멀리 귀양 보내자고 청한 것도 잘못된 것이며, 그뒤 국문(鞫問)하기를 청한 것도 또한 잘못된 것이다."
하매, 윤순이 아뢰기를,
"신축년과 임인년 무렵에 심한 자는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에게 들어가고 그 다음의 사람은 한 떼가 떠드는 시론(時論) 속에 들어가 언론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기염(氣焰)이 대단했었으니, 만일에 고(故) 상신(相臣) 조태구(趙泰耉)와 최석항(崔錫恒) 등이 조력(助力)했다면 화가 장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것인데, 이 두 사람이 극력 조정(調停)했었습니다. 그뒤에 마침내는 조태구를 쫓아내고 또 최석항도 쫓아냈었는데, 그때에 괴이하고 놀라운 짓을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도리어 개두 환면(改頭換面)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臣)이 목도(目覩)한 사람 중에 이러한 유가 많으니, 전하께서 취택하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지나친 말이다. 이세진(李世璡)이란 사람은 은연중에 따로 서려는 뜻이 있는 사람이다. 이세진의 말이 진실로 그르지는 않았다마는, 다만 당면한 지금은 감(甘)과 신(辛)을 조화해 가는 때이기에 이러한 사람은 쓸 수 없는 것이다. 홍봉상(洪鳳祥)의 일을 정계(停啓)하였음은 수상한 듯하지만 이런 일은 유신(儒臣)에게 붙여 공론을 보이도록 할 뿐인데, 이경석도 공론을 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매, 윤순이 아뢰기를,
"이러한 의논을 또한 좋은 것도 있지만 좋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본래부터 그 마음이 이러한 사람은 이러한 의논을 해도 되지만, 그 마음이 본래 이러하지 않은 사람은 이러한 논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중신(重臣)의 말은 병폐가 있는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각기 그전대로만 지켜가고 변동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
하였다. 유엄이 아뢰기를,
"심유현(沈維賢)에 관한 파가 저택(破家瀦澤)하는 한 가지 일은 비록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마는,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국법(國法)이 중요한 것이지만 사체도 또한 중요한 것이다. 윤허를 아끼었음은 뜻이 있는 것이었는데, 진달한 바 법례(法例)는 곧 그러하다. 가산 적몰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되 가사(家舍)는 적몰하지 말고, 부부인(府夫人)을 앞으로 제사받들 적에 쓸 물건들은 참작해서 갈라 내어 주게 하라."
하였다. 유엄이 돈을 주조(鑄造)하기를 청하니, 뒷날의 연석(筵席)에서 다시 상확(商確)하도록 명하였다.
10월 24일 을축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의 복시(覆試)를 설행(設行)하였다.
윤순(尹淳)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채응만(蔡膺萬)을 지평(持平)으로, 윤휘정(尹彙貞)을 헌납(獻納)으로, 신처수(申處洙)를 장령(掌令)으로, 김용경(金龍慶)을 부응교(副應敎)로, 이흡(李潝)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사령(赦令)이 내린 이후에 도신(道臣)이 놓아줄 사람과 놓아주지 않을 사람을 정리하여 올리는 장계(狀啓)를 그 해를 넘기지 않게 하도록 명하였다. 전라도 관찰사(觀察使) 이광덕(李匡德)이 정미년의 가례(嘉禮)731) 로 사령이 내린 뒤의 놓아 줄 사람과 놓아주지 않을 사람을 이제야 비로소 장계를 하여, 특히 마음이 서글퍼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명령은 마땅히 믿어야 하는 의리가 아니게 되었기에 이런 명을 내리게 되었고, 이어 이광덕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부수찬 임정(任珽)이 상소하기를,
"윤봉조(尹鳳朝)는 섬으로 귀양간 것만도 또한 다행한 일인데, 어제 연석(筵席)에서 우료(右僚)가 돌연히 혼자 나서서 전해 들은 말과 억측(臆測)한 것을 가지고 질언(質言)을 하여 깨끗이 벗겨 주었으니, 윤봉조의 처지를 위해서는 후한 일이거니와, 유독 전장(典章)은 무너뜨릴 수 없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육지(陸地)로 내오도록 하신 명을 정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신(儒臣)이 진달한 말은 진실로 숨김이 없는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만일에 의견이 있었으면 바로 그 때에 진달했어야 하는데, 물러나와서 소장(疏章)을 진달하고 있으니 진실로 괴이한 짓이다."
하고, 또 분부하기를,
"오늘날의 신자(臣子)들은 그전의 풍습을 고치지 않고 있다. 지난번에 이진유(李眞儒)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아뢴 말이나 방금 윤봉조를 감등(減等)해 줌은 그르다고 하는 말은, 비록 사항은 다른 것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마음은 똑같은 것이기에, 차마 스스로 달라지지 못하는 버릇을 내가 취택하지 않는다."
하였다.
10월 25일 병인
정우량(鄭羽良)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정제(李廷濟)를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김취로(金取魯)를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10월 26일 정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부제조 조현명(趙顯命)이 북한산성 소속인 삼남(三南) 각 사찰의 주지(住持)와 승장(僧將) 등의 소임을 모두 총섭(摠攝)732) 의 부하에 있는 장교승(將校僧) 중에서 구근(久勤)에 관한 조례에 따라 차임(差任)하여 보내고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사사 사람으로 차출하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였고, 제조 윤순(尹淳)이 남한산성에서도 일체로 시행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동궁(東宮)의 부제(祔祭)는 곧 상례(喪禮)의 큰 절목(節目)이니, 마침내 폐할 수 없습니다. 이귀휴(李龜休)도 또한 이 일을 진달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귀휴가 단정코 딴마음이 없은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이미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지 않았는데 마땅히 어디에 부제를 할 것인가? 억지로 구차한 일을 함은 계체(繼體)를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하고, 조현명과 윤순이 유신(儒臣)에게 문의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심유현(沈維賢)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할 때의 단의 왕후(端懿王后)가 사여(賜與)한 물건과 부부인(府夫人)의 의복과 집물(什物)이 남아 있는 것은 한결같이 모두 구별하여 적몰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동지(冬至)의 3사신(使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정사(正使) 김동필(金東弼)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대체(大體)를 유지해 가기를 힘쓰는 것이 귀중한 법이니, 자질구레한 일은 털어버리고 보색(保嗇)하는 도리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이 이를 들어 진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항시 체념(體念)하였고 일에 임하면 문득 경이 한 말을 생각해 왔지만 마땅히 더 유의하겠다."
하였다. 김동필이 또 아뢰기를,
"탕평(蕩平)에는 또한 방도가 있는 법이니, 반드시 분명하게 의리를 내걸고 엄격하게 방한(防限)을 지켜 간 다음에야 참다운 탕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갑진년733) 겨울에 전하께서 바야흐로 영상(領相) 이광좌(李光佐)를 신임하여 쓰시었고, 민진원(閔鎭遠)도 또한 놓이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은 피차(彼此)의 속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사람입니다. 신이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는 을사년의 처분이 비록 전하의 본뜻은 아니었지만 대단한 진퇴(進退)가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방한(防限)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고, 정미년734) 에도 또한 진퇴하는 일을 면하지 못했었으니, 송인명(宋寅明)이 ‘탕평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고 한 말은 진실로 지언(知言)이었습니다. 만일에 참다운 태평(太平)을 이루려면 반드시 의리의 큰 관두(關頭)에 있어서 굳게 지켜 가고 흔들리지 않게 된 다음에야 고식(姑息)과 구차하게 되는 염려가 없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탕평(蕩平)을 이룰 수 없고 마침내는 뭉그러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말은 모두 절실한 것이므로,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10월 28일 기사
햇무리가 졌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혼궁(魂宮)과 묘소(墓所)에서 연제(練祭) 다음에 곡하고 행사하는 것을 신사년735) 의 경녕전(敬寧殿)에서의 예대로 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함경 남도 안집 어사(安集御史) 이종성(李宗城)을 인견(引見)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이제부터는 진휼(賑恤)하는 행정이 끝난 다음 논상(論賞)할 때에 곡식 수량의 다소로 기준을 삼지 말고 관찰사(觀察使)의 장계에 조어(措語)한 것을 보아서 시행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예조 좌랑 진재박(陳在搏)은 함흥(咸興) 사람인데, 덕원(德源) 객사(客舍)에 와서 무당을 불러다가 자기가 친히 문복(問卜)하는 짓을 하여 체모를 손상하고 진신(搢紳)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으니,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김시홍(金時泓)의 일은 정계(停啓)한 대관(臺官)은 참으로 이른바 인간으로서 수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전법(銓法)에 있어서 마땅히 벌을 내려야 할 것인데, 며칠이 되지 못하여 잇따라 대권에 의망(擬望)했습니다. 박필정(朴弼正)을 의망한 전관(銓官)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종성이 아뢰기를,
"듣건대, 어제 전 서리(書吏) 정창휘(鄭昌輝)가 상소하여 존호(尊號) 올리기를 청했다고 했습니다. 비록 조정의 진신(搢紳)들이 상소하여 청하게 되더라도 성상께서 마땅히 존엄하게 물리치어 성상의 덕에 빛이 나게 하셔야 합니다. 하물며 하치않은 미천한 사람의 외람되고도 놀라운 짓이겠습니까? 승정원에서 단지 물리쳐 보내기만 하고 죄주기를 청하지 않았음은 사체를 잃어버린 짓임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창휘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되도록 무겁게 죄를 과하도록 하고 그날 사진(仕進)한 승지도 모두 엄중하게 추고(推考)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0월 29일 경오
양주 목사(楊州牧使) 김호(金浩)가 상소하기를,
"본주(本州)는 민호(民戶)가 1만여 호인데, 적곡(糴穀)736) 이 6천 석(石)뿐이고 쌀은 더욱 모자랍니다. 해마다 북한산성에서 이전미(移轉米) 1천여 석을 받아 오는데 길이 험악하고 멀어 폐해가 있으니, 어떤 쌀이든 몇 천 석을 갈라 주어 영구히 본주에 두고 조적(糶糴)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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