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8권, 영조 6년 1730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9.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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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병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교(傳敎)하기를,
"나의 덕이 적은 것으로 인하여 하늘의 경고(警告)가 없는 해가 없었으나, 지금은 뇌전(雷電)의 재이가 갑자기 겨울철에 나타났으니, 인애(仁愛)한 하늘이 무엇을 돌봐 주려고 이러한 이변(異變)을 이루었는가를 알지 못하겠다. 어제 어두워질 무렵에 처음 들은 뒤로 밤새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다가 아침에 관상감(觀象監)의 보고를 보니,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든다. 아! 조정의 형편이 아직도 일체가 되지 못하고 백성들이 이토록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진실로 나의 정성이 부족한 소치이며, 그 밖에 재이(災異)를 초래할 수 있는 단서(端緖)는 그 허물이 내게 있는 것인데, 하늘의 돌봐 줌이 이와 같으니, 어찌 매우 조심하고 힘차게 반성할 일이 아니겠는가? 또 서로 권면하고 경계함은 나라를 다스리는 긴요한 방법인데, 오늘의 조정 형편이 비록 먼저보다는 조금 나아진 듯하나 의심하는 마음과 경알(傾軋)하는 기풍은 아직도 마음속에서 없어지지 않아서, 일마다 겹쳐서 나타나 조정에는 항상 주저하는 빛이 있고 항간에는 억울함을 펴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 그 까닭을 따져보면 바로 나 자신에게 있는 일이긴 하나 여러 신하들도 어떻게 ‘나는 반성할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이 눈앞에 닥쳤을 때에는 조심을 하다가도 시일이 가면 소홀해지기 쉬운데, 이것이 어찌 위로 하늘의 뜻에 보답하는 도리이겠는가? 하물며 서울은 백성들이 모이는 곳이어서 방역(坊役)이 치우치게 무거우며, 공인(貢人)들의 고생스러움도 요즘보다 더 심할 때가 없었을 것이다. 이르노니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은 이 점을 늘 염두에 두어 날마다 백성 구제할 방책을 강구하고 남은 습성을 통쾌히 물리쳐 더욱 공손하고 협조하는 도리에 힘써야 할 것이다. 전곡(錢穀)을 맡은 신하는 공가(貢價)를 고르게 지급하고, 한성부(漢城府)를 맡은 신하는 방민(坊民)의 부역을 고르게 시키도록 힘쓰며, 승정원에서는 나의 경구(警懼)하는 마음을 본받아 산림(山林)에서 독서하는 무리들을 은근하게 별유(別諭)해야 하는데, 이런 때에 기구(耆舊)의 신하들은 나라의 동량(棟樑)인 것이니, 최봉조하(崔奉朝賀)424)  ·정 판부사(鄭判府事)425)  , 정 좨주(鄭祭酒)426)  ·김찬선(金贊善)427)  에게는 사관(史官)을 보내서 돈유(敦諭)하라. 나를 대신하여 교서(敎書)를 초하고 정부로 하여금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돕게 하라. 쓸 만한 말은 쓰고 쓰지 못할 말은 버릴 따름이다. 만일 이를 계기로 구습(舊習)을 가지거나 시태(時態)를 가까이 하는 자들은 결코 용납치 않을 것이다.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노니, 지금의 나의 권권(眷眷)한 마음을 받들어 각기 직무에 힘을 다하여 밝고 밝으신 하늘의 뜻에 보답토록 하라. 나도 마땅히 마음에 힘쓸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비망기(備忘記)로 반포하기를 계청하고, 돈유나 별유도 바로 이 사연으로 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재계(再啓)하기에 이르자, 답하기를,
"경(卿) 등의 청이 이러하니, 마지못해서 따르겠다. 기로소(耆老所)에 하유하는 글을 승정원에 명하여 별유(別諭)케 하였기 때문에 돈독하게 권면하는 뜻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 경우는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는 예대로 글을 따로 지어 계하(啓下)한 뒤에 사관(史官)을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10월 2일 정유

승정원에서 진계(陳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백성은 곧 하늘이라 할 수 있으니, 백성의 마음이 화평해야만 하늘의 뜻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팔역(八域)의 백성으로 누군들 전하의 적자(赤子)가 아닌 자가 있겠습니까만, 그 심신이 괴롭고 고생스러움은 원근(遠近)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진휼(軫恤)하는 의도는 다만 방민(坊民)과 공민(貢民)에게만 미치고 있습니다. 지금 도하(都下) 민생의 고생스러움은 실로 지탱하기 어려울 걱정이 있으니, 성상께서 눈앞의 허둥거림을 차마 보지 못하셔서 이러한 칙려(飭勵)의 전교를 내리신 것을 진실로 알 수가 있는데, 만일 먼 지방의 백성들이 왕언(王言)의 전해짐을 듣고 지팡이를 짚고서 바라고 있을 즈음에 은혜가 도민(都民)에게만 미치고 저들에게는 미치지 못함을 보게 된다면, 장차 반드시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한 탄식이 있을 것입니다. 신(臣) 등은 성상의 염려하신 바가 가까운 곳에서 비롯하여 차츰 멀리 미치게 하려는 것임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기왕 우견(愚見)을 가졌으니 감히 숨길 수는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백성을 구휼하는 방책을 더욱 강구케 하소서. 그리고 무릇 진휼하는 일이 방역(坊役)과 공민(貢民)만을 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면 전하의 백성들은 모두 차별이 없는 균일한 은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조정에 항상 주저하는 빛이 있다 함은 참으로 전하의 하교하신 바와 같습니다. 아! 전하께서 임금으로 계신데도 오늘의 정치가 이 지경에 그치고 있는 것은 대개 군신(群臣)들이 잘 받들지 못한 죄이오니, 실로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는 탄식이 있겠지만, 전하께서는 자신을 반성(反省)하는 일로써 자책(自責)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정직해진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다.’ 하였으니, 참으로 위에 있는 이가 지성으로 인도하기를 한(漢)나라 신료(臣僚)가 이른바 ‘마음을 바룸으로써 조정을 바룬다.’는 바와 같이 한다면 어찌 시국의 형상이 바르지 못함을 걱정하겠습니까? 하교(下敎) 중의 ‘자면(自勉)’이란 말은 아랫사람을 책망하는 뜻과 큰 차이는 없으나, 상하(上下)가 서로 권면함이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탕(成湯)의 신하들도 전부 착한 것은 아니었는데, 여섯 가지 일로 자책함이 단지 자신에게만 그쳤으니428)  , 이로 보면 전하의 말씀은 아마도 반궁 자성(反躬自省)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또 사람이 드리는 말이라 해서 반드시 다 경위에 맞는 것은 아니니, 혹시 임금의 마음에 감동되지 못함이 있다 해도 마땅히 받아들여 취사(取捨)하여야 합니다. 근년 이후로는 불행하게도 파당(派黨)이 고질(痼疾)을 이루어 배척과 알력이 잇달았기에 성상께서는 싫어하고 미워하여 비록 구언(求言)할 즈음에 있어서도 미리 금하고 억제하여 말이 나오기 전에 엄하게 방지하였으니, 이는 혹시 하늘은 본디 사심(私心)이 없어 조화(造化)가 그 가운데에서 행해지게 하는 뜻에 어긋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하는 말이 참으로 절실(切實)하니, 매우 가상히 여긴다.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비망기의 사연으로 되레 진계(陳戒)한 것은 나의 뜻을 자세히 이해하지 못한 바가 있으니, 대략 터파(攄破)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팔역(八域)의 민생이 곤궁함은 요즘보다 심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먹은 것이 목구멍에 내려가지 않으니, 내가 어찌 조금이라도 원근(遠近)을 차별하겠는가? 그러기에 먼저 백성들의 위태로움을 말하고 다음에 도민(都民)을 말하였으며 끝으로 신칙하는 뜻을 말하였으니, 이른바 구민책(救民策)을 생각한다 함은 팔도(八道)의 백성을 두고 한 말이다. 묘당(廟堂)에 신칙하고 공인(貢人)과 방민(坊民)은 맡고 있는 신하들에게 신칙하였으니, 나로서는 경중(輕重)을 분별하여 한 말이건만, 말이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여 승정원에서 잘 알지 못하고 있으니, 경(卿) 등의 면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더 자세히 하유(下諭)할 수 있었겠는가? 하물며 현시의 상황에 있어서는 서로 면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서로 조화(調化)하고 협공(協恭)함을 이루지 못한 것은 실로 나의 잘못이지만, 당초에는 서로가 이기기를 힘썼으므로 위에서는 염려가 되어 병이 날 듯한데도 아래에서는 오히려 뉘우쳐 고치지 아니하였으니, 어떻게 칙려(飭勵)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도 또한 내가 말로만 교유한 잘못에서 연유한 것이다. 면계한 바는 절실하니, 어찌 깊이 반성(反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평일에 스스로 기약하신 바는 한(漢)나라·당(唐)나라보다 휠씬 뛰어 나고자 함이었는데, 형식(形式)만 잘 꾸미려는 의사가 늘 이기고 실지로 독실하게 실천하려는 공력은 늘 적었습니다. 어제의 성교(聖敎)로 말하더라도 선비를 존숭하고 늙은이를 존경하는 일을 어찌 재앙이 닥칠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그런데 두서너 사람의 신하를 부른 일들은 아마도 허식의 말에 지나지 않음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전하의 마음에 과연 지성으로 꼭 불러들일 뜻이 있었다면 나라의 동량(棟樑)으로 여기면서 산야(山野)에 버려둘 이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 일찍이 평일에 정성을 다하여 ‘늙은이를 버리지 말라.’는 뜻을 본받지 아니하시고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유소(諭召)케 하라는 명을 오늘에야 내리십니까? 산림에서 독서(讀書)하는 무리들에게도 은근스럽게 별유(別諭)하라 하신 것은 말씨나 예모(禮貌)에 있어서 구차하고 만홀(慢忽)하다고 여김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저들 암혈(巖穴) 속에서 스스로 그 몸을 아끼는 무리들 중에 참으로 몇이나 현사(賢士)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오나, 일컫기를 ‘독서하는 무리’라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제발로 걸어오게 하려고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존유(尊儒) 경로(敬老)한다는 명성은 있으나 존유 경로하는 실상은 없는 것이니, 황발자(黃髮者)429)  는 들에 숨고 독서자는 암혈에 숨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형식을 버린다 하시면서 형식은 더욱 늘고 실덕(實德)에 힘쓰겠다 하시면서 실덕은 튼튼하지 못하니, 오늘날 조정 신하로서 전하를 섬긴 자들은 그 폐단이 마침내 허위에 그침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뜻이 같은 사람은 두호(斗護)하는 즈음에 피혐(避嫌)하면서 오직 계교(計較)만 일삼고, 사(私)는 버리고 공(公)에 힘쓰는 중간에서 이름만을 얻기 위하여 오로지 가식(假飾)만 만들어 냅니다. 허물이 진취(進取)에 방해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분수에 지나친 의논을 창도(倡導)하여 두각(頭角)을 바꾸려 하고, 사단(事端)이 후고(後顧)의 염려가 있거나 꺼리는 바에 저촉되면 오로지 윗사람의 처분에 맡겨 미봉(彌縫)하기만을 구차하게 바라고 있으니, 그 까닭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일세(一世)를 이끌어가는 표방은 반드시 다함께 대동(大同)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자 하심이니, 뜻하신 바가 지공 지정(至公至正)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만 다스려짐은 구함이 너무 급하고 효과를 바람이 너무 빨리 말이 시사(時事)에 관계되면 구습(舊習)을 버리지 못하였다고 책망하시고 말이 조정의 현실에 미치면 마음을 씻지 못하였다고 의심하시므로 오늘날 한 마디 말을 올리고 한 가지 일을 논하는 자들은 문득 백방으로 헤아려서 반드시 구습을 버린 것으로 꾸미고 마음을 씻어버린 것으로 꾸미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공정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 비록 지성에서 나왔지마는, 다만 군신(君臣)들이 형편이 없고 오로지 성실성이 모자람으로 해서 기절(氣節)은 날로 더욱 저상(沮喪)되고 언론은 날로 더욱 모호하게 되었으니, 세도(世道)를 걱정함에 있어서 어찌 대단히 상심(傷心)하지 않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을 깔보심은 실로 전하 자신의 큰 흠이 되고 있습니다. 다만 작록을 잡아매는 것을 구사(驅使)하는 제일 상책이라 여기시므로, 대신(大臣)을 우대하는 마음이 연주(筵奏)하는 사이에 나타나지 않고 대각(臺閣)을 멸시하는 기풍이 비유(批諭)할 즈음에 번번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말 한마디를 하시고 글 한 줄을 씀에 있어서 스스로 옳다고만 여기시면, 대신이 비록 간하고 대간(臺諫)이 비록 말하더라도 흔연히 받아들여 고루 베푸는 아름다움은 전연 없고 한갓 허물을 숨기고 나쁜 짓을 그대로 하려고 하는 병폐만 있게 됩니다. 여러 신하들도 ‘우리들의 성의가 부족한데 어떻게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가 있겠는가?’라고 여기면서 오로지 잠잠히 따르고 용인(容認)하는 것으로써 자신을 위하는 계획으로 삼아 우탄(憂歎)하는 말은 사실(私室)에서만 들리고 광구(匡救)하는 의논은 어좌(御座)에까지 미치지 못하니, 신은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신 등이 가만히 듣건대, 엊그제 연석(筵席)에서 염퇴(恬退)의 기풍을 권장하자고 청한 사람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이런 사람들을 중용한다면 앞으로 분분하게 고퇴(告退)할 것이다.’라고 전교하셨다 하니, 애석합니다. 전하의 말씀이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진실로 그의 뜻이 득실(得失)에만 있다면 전하께서 비록 날마다 상을 내리면서 물러가기를 바라도 반드시 이루지 못할 것이며, 진실로 그의 뜻이 명절(名節)430)  에 있다면 전하께서 비록 날마다 상을 내리면서 나오기를 바라도 이 또한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참다운 염퇴(恬退)와 거짓 염퇴를 논할 것 없이 이들은 상층에 속한 사람들이니, 나약한 사람을 분기(奮起)시키고 욕심이 많은 사람을 청렴케 하는 도리로써 마땅히 이들을 부기(扶起)시켜야 하는데, 이름을 구하여 스스로 잘난 체하는 무리들은 쉽사리 높은 벼슬을 얻고 물러나서 조용히 자기 본분을 지키는 선비는 조그만 봉록(俸祿)도 얻지 못하니, 이는 전하께서 반드시 탐연(貪戀)하고 분조(奔躁)하는 것을 권면하지 아니했다 할 수 없습니다. 신하로서 본받는 도리는 오직 임금의 호오(好惡)에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 왕자(王者)의 탕평(蕩平)에 힘쓰려 하시기에 여러 신하들도 탕평에 힘쓰다 보니 그 폐단이 가식과 허위에 병폐가 있게 되었고, 전하께서 조정의 영정(寧靖)을 바라셨기에 그 폐단이 함묵(含默)과 천연(遷延)이 병폐가 생겼으며, 전하께서 신하들의 직무 충실을 바랐기에 그 폐단이 골몰(汨沒)과 구차(苟且)의 병폐가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은(殷)나라의 실질(實質)을 숭상하던 기풍도 주(周)나라 말엽의 문식(文飾)에 지나친 폐단이 되었으니, 가식과 허위의 병폐는 무엇으로 구해야 하고 함묵 천연의 걱정은 무엇으로 고쳐야 하며 구차 골몰의 폐습은 무엇으로 바로잡으려 하십니까? 가만히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총찰(聰察)하시다 보니 응중(凝重)하고 침잠(沈潛)하는 공력이 혹시 모자라게 되고, 정신만 믿다 보니 홍대(弘大) 관용의 도량이 조금 부족합니다. 총명이 부족하지 아니하시어 은밀한 것을 들추어내시기도 하고 과단이 부족하심은 아니신데 가차(假借)와 고식(姑息)을 일삼고 있으십니다. 경연에서의 전교는 너무 지번(支繁)에 관계되고 조정의 체통은 전연 간엄(簡嚴)한 면이 없습니다. 위에서는 지중(持重)할 뜻이 없고 아래에는 친압하는 폐단이 있어서 기강(紀綱)은 날로 해이해지고 체통은 날로 문란해지며, 규모는 날로 좁아지고 기상은 날로 위축되어 갑니다. 세상에서는 색부(嗇夫)의 구변(口辯)431)  에만 힘쓰고 장상여(張相如)432)  의 중후(重厚)한 인품으로써 부끄럽게 여기며, 사람들은 가의(賈誼)433)  의 젊음을 취하고 안사(顔駟)434)  의 늙은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조종조(祖宗朝)의 독후(篤厚)한 기풍을 지금은 볼 수가 없으니, 견식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매우 걱정하고 깊이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극기 복례(克己復禮)의 공부에 있어서도 이는 바로 성학(聖學)의 대요(大要)에 관계되는 일인데 여러 가지 흠집이 모두 사의(私意)로부터 나오게 되어 일이 궁례(宮隷)에 관계되면 반드시 막아주고 두호하려는 뜻이 있으며, 말이 궁방(宮房)에 관계되면 바로 호되게 꾸짖고 싫어하시는 빛을 보이십니다. 얼마 전 이희태(李熙泰)를 잡아들였다가 바로 풀어 준 일에 있어서도 거조(擧措)의 전착(顚錯)을 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혈기의 사의(私意)가 항상 의리의 함양(涵養)을 이겨 듣기에 거스른 말씀이 저절로 사령(辭令) 사이에 폭로된 것이겠습니까? 생각건대, 조용한 밤 정신이 맑을 때에 전하께서는 반궁 자성(反躬自省)하시지도 않으셔서 오늘이 겨우 지났는가 하면 내일은 또 그러하십니다.
신(臣) 등이 깊이 아쉬워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전하의 심학(心學)이 순수치 못하신 점입니다. 대저 일에 접하고 사람을 대하는 도리가 중정(中正)에 맞도록 힘써야 함에도 전하께서는 모든 희로(喜怒)가 발로할 즈음에 절도에 맞지 않을 때가 많아 신하로서 견책을 당한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죄를 얻었지만 내일이면 풀려날 것이다.’하면서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포상을 받은 자도 말하기를, ‘내가 비록 이를 받았지만 남들도 많이 받았었다.’하면서 영예롭게 여기지 아니하며, 우레 같은 위엄이 땅을 흔들어도 예사로 보고 거룩한 포상은 햇빛처럼 빛나도 등한하게 여기니,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어찌 크게 경성(警省)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근래에는 모든 기무(機務)의 정체됨이 많고 조석(朝夕)의 소대(召對)를 모두 폐해 버려 은대(銀臺)435)  의 사소한 문서를 더러는 밤이 지나도록 내려보내지 않으시고 옥서(玉署)436)  의 많은 강관(講官)들은 한갓 번갈아 수직(守直)하기에만 번거로울 뿐입니다. 이런 일들은 대개 빈소(殯所)에서 애훼(哀毁)하시는 가운데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겠으나, 진실로 일성(日省)의 공력을 처음처럼 부지런히 하시려거나 시민(時敏)의 공부를 전처럼 서둘러 하시려고 하셨다면, 전번 인산(因山)437)  이 촉박하기 전에라도 어찌 한두 번 독례(讀禮)할 겨를이야 없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얼마 전부터 여러 차례 애척(哀慽)을 겪으셔서 의지도 꺾이시고 정신도 소멸(消滅)되시니, 매양 천안(天顔)438)  을 우러러보면 이전과 같지 않으시다는 느낌이 항상 들었습니다만, 분발하고 진작하는 방도는 오직 성심(聖心)의 자려(自勵)에 있으니, 신 등의 경경(耿耿)한 마음이 어찌 더욱 비격(悲激)치 않겠습니까? 대소(大小)의 직무를 게을리 하고 중외(中外)가 태만하니, 모유(謨猷)와 주획(籌畫)은 정히 민우(民憂)를 강구하기에 시급한데도 매년 왕언(王言)을 내리신 바는 지상(紙上)의 공담(空談)을 면치 못하고, 1년 동안 묘당(廟堂)에서 연구한 바는 옥하(屋下)의 한담(閒談)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 궁방(宮房)에서 절수(折受)439)  한 것이 아직까지 산택(山澤)을 점거하고 있는데도 그대로 두라는 판부(判付)440)  를 혹 위복(違覆)할 즈음에 내리시고 각 아문(衙門)의 장토(庄土)가 민간에 널려 있는데도 제외시키라는 영갑(令甲)441)  이 법으로 정한 뒤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논의해야 할 일들이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만, 신 등이 정성들여 진계(陳戒)한 바는 성상께서 유루(遺漏)하신 것을 지적함에 그쳤습니다. 참으로 군주의 마음만 한번 바로잡히면 모든 일이 다 잘 되어질 것이니, 재앙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일 방책이 오로지 ‘성(誠)’자의 바탕위에서 착공(着工)을 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성명(聖明)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리고 원차(原箚)는 궁궐 안에 머물러 두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옥당(玉堂)의 김상성(金尙星)·이종백(李宗白) 등은 강경한 소론(少論)으로써 송인명(宋寅明)·유엄(柳儼) 등의 조정(調停)하려는 의논에 불만이 있었기에 차사(箚辭) 가운데 약간의 비방함을 보였으나, 군덕(君德)을 논한 대목에는 절실한 말들이 많았다.

 

10월 3일 무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0월 4일 기해

새벽부터 진시(辰時)까지 안개가 끼고 미시(未時)에는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동지 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인 서평군(西平君) 요(橈)와 부사(副使) 윤유(尹游) 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사행(使行)의 일을 논한 것이 끝나자, 윤유가 아뢰기를,
"신이 관상감(觀象監)에 있을 때에 역법(曆法)을 강희(康熙)의 《역상고성(曆象考成)》을 모방하여 썼더니, 점점 착오가 생겨 매년 6,7처(處)의 틀린 곳이 꼭 있었습니다. 감관(監官) 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역법을 알아오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윤유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근래에는 오래도록 입시하지 못하였습니다. 듣건대, 대신(大臣)이 백성의 구휼과 나라의 경영은 할 줄 모르고 진달한 바가 인물의 서용(敍用)에 관한 일 뿐이라 하니, 성상께서 경시(輕視)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묘당(廟堂)에는 국사를 담당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그 허물은 내게 있다."
하였다. 대개 근일에 이집(李㙫)·조문명(趙文命) 등이 노론(老論)을 위하여 혹은 서용을 청하기도 하고 혹은 방석(放釋)을 청하기도 하면서 어울러 즐기려는 계획을 하니, 윤유가 준론(峻論)으로 못마땅하게 여겼기에 그의 말이 이와 같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산림(山林)의 선비들은 내가 소외(疎外)시키는 것은 아니니, 양득중(梁得中)은 요사이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가?"
하니, 유엄(柳儼)이 답하기를,
"지금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어제의 꿈이 허망한 듯하기는 하나, 군신(君臣) 사이에 숨길 것이야 있겠는가? 꿈에 양득중을 만났는데 대접하기를 마치 위수(渭叟)442)   대하듯 하였다. 깬 뒤에 혼자 생각하기를, ‘초야(草野)에 혹 재덕(才德)을 가진 자가 있어 양득중을 빌어 현신(現身)한 것이나 아닐런지?’ 하였다."
하였다. 윤유가 답하기를,
"꿈에 양득중을 만난 일은 정인(正人)을 얻을 조짐으로, 공손하고 조용히 치도(治道)를 생각하신 데서 나온 것입니다. 천거(薦擧)하는 조목을 내걸어 산림의 선비로 하여금 듣고 용동(聳動)케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연석(筵席)에서 한 일이 비록 비밀스러우나, 어찌 듣지 못하겠는가? 천거하는 조목을 내거는 것부터가 바로 형식이다."
하였다. 승지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이광좌(李光佐)와 민진원(閔鎭遠)은 모두 지성으로 나라를 생각하고 있는데, 올라오지 않는다는 이유로써 버려두면 조정에 나올 기회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내가 어찌 이들을 버려두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광좌와 민진원은 참으로 물과 불처럼 정반대되는 사이이다. 이광좌의 말이 옳다면 민진원은 반역이 되는 것이고 민진원의 말이 옳다면 이광좌는 반역이 되는 것이다. 시비(是非)란 뒤섞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하물며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에 있어서이랴? 유엄의 말에 ‘두 사람이 다 지성으로 나라를 위한다.’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논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1책 28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229면
【분류】외교(外交) / 정론-간쟁(諫諍) / 변란(變亂) / 사법(司法) / 과학-역법(曆法) / 역사-사학(史學) / 인사(人事)


[註 442] 위수(渭叟) : 강태공(姜太公).
사신은 논한다. "이광좌와 민진원은 참으로 물과 불처럼 정반대되는 사이이다. 이광좌의 말이 옳다면 민진원은 반역이 되는 것이고 민진원의 말이 옳다면 이광좌는 반역이 되는 것이다. 시비(是非)란 뒤섞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하물며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에 있어서이랴? 유엄의 말에 ‘두 사람이 다 지성으로 나라를 위한다.’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논이겠는가?"

 

10월 5일 경자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1경(一更)에 금성(金星)이 남두(南斗)의 제3성을 범했고, 달은 화성(火星)을 범하였다.

 

10월 6일 신축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7일 임인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민감(閔堪)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라 병사(全羅兵使) 허인(許鱗)은 지난해 군병의 도안(都案)을 이미 마감한 후에 열읍(列邑)에 관문(關文)을 발송하여 사열을 거듭 행하니, 청탁(請託)이 모여들고 회뢰(賄賂)는 공공연히 행해져 관리들은 벼락부자가 되고 민원(民怨)은 크게 일어났습니다. 국상(國喪)이 난 뒤에도 푸줏간을 걷어치우지 않았으며 또 성복(成服) 전에 곡림(哭臨)할 때에는 기생들로 하여금 부액(扶掖)케 하고 줄을 지어 늘어세웠으니, 이와 같이 법에 어긋난 사람은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유(尹游)를 도승지(都承旨)로,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정광은(鄭光殷)을 지평(持平)으로, 신방(申昉)을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삼았다.

 

10월 8일 계묘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올리고 명정(銘旌)을 고쳐 썼다.

 

사간원 【정언(正言) 이저(李箸)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벽동(碧潼) 군수 전만적(田萬績)은 본래 범을 잡은 이유로써 발신(發身)하여 외람되게 수령의 소임을 받은 자로서, 눈으로 ‘정(丁)’자도 몰라 정사는 아전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집도 또한 가까워 짐바리가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국경 지대에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파직을 청합니다. 공조 좌랑 윤세관(尹世觀)은 성질이 본디 우패(愚悖)하고 행실도 추잡하여 처음 침랑(寢郞)443)  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탐비(貪鄙)한 이유로써 쫓겨났고, 이어 생관(牲官)444)  을 받았으나 또 토색(討索)으로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무식하고 무법한 사람을 수령의 품계에 둘 수는 없으니, 도태(淘汰)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장령 박규문(朴奎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부터 군주가 직언(直言)을 구하려면 숨기고 꺼리지 않는 길을 널리 열어 놓은 연후에라야 소원(疎遠)한 사람의 말도 위에까지 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먼저 선을 그어 놓고 듣고 싶은 말만을 가려서 말하게 한 때는 없었습니다. 지금 말할 만한 일은 궁중의 기율이 엄하지 못하여 사경(邪逕)445)  을 막지 못한다는 것과 각 궁의 절수(折受)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궁례(宮隷)들의 횡포가 심하다는 것과 궁내(宮內)에 들어가는 재물이 너무 많아서 재정이 궤갈(匱竭)되었다는 것들이지마는, 이는 전하께서 듣고 싶어하는 바가 아닐 것이며, 임금의 무망(誣罔)이 변명되지 못한 것과 유원(幽寃)이 신설(伸雪)되지 못한 것과 흉역(凶逆)을 다 제거하지 못한 것과 조정 정사에 궐실(闕失)이 많다는 것들이겠으나, 이것들은 전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중외(中外)의 신민들이 말하는 것으로써 기휘(忌諱)로 인정하여 서로 경계하고 신칙하면서 말하기를, ‘아무일은 말할 만하고 아무 의논은 논할 만하지마는, 한번 입에서 나와 기휘(忌諱)에 저촉되면 크게는 형륙(刑戮)을 당하고 작게는 찬축(竄逐)을 당하여 다만 일신에 이익되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임금의 허물만 들춰내기에 알맞다.’ 하고 있으니, 구언(求言)이 비록 근실(勤實)하더라도 진언(進言)은 기약이 없으니, 어찌 전하께서 스스로 반성할 대목이 아니겠습니까?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익필(李益馝)은 본시 영남산[嶺南之産] 으로서 내력도 분명치 않은데 서곤(西閫)446)  의 중요한 자리를 월차(越次)하여서까지 함부로 제수하였습니다. 그의 천망(薦望)이 나왔을 때 모두 놀라고 의심했으며, 대신이나 무장들도 함부로 부임케 할 수는 없다 하였지만, 버젓이 숙배(肅拜)하고서 스스로 처신할 바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청주(淸州)는 막 변란을 겪었으니 곤수(閫帥)를 가려서 보냈어야 하는데, 김중려(金重呂) 같은 우매한 인물은 불시에 군병에 집합시키는 일의 소중함도 모르고 쉽사리 영장(營將)의 요청에 응하였다가 군병들의 호령과 각소리를 듣고는 변란이 다시 일어난 줄 알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진정이 되었습니다. 대신(臺臣)의 논한 바가 이미 풍문이 적실함에 근거하였고 도신(道臣)447)  의 사계(査啓)에서도 실상을 엄폐할 수 없음이 나타났는데, 묘당(廟堂)에서 추고(推考)를 청한 것은 너무도 완만(緩慢)한 실책이요, 당초 품계를 바꿔 가려서 의망(擬望)한 것은 또 무슨 공로로 그리했단 말입니까? 이익필과 김중여는 모두 파직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지(傳旨)에 응하여 올린 소(疏)에서 먼저 당습(黨習)을 드러내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평안 병사의 일은 능연(凌煙)448)   구신(舊臣)을 영남산[嶺南之産] 이라고 한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할 일이요, 김중려의 일은 소문이 지나치지 않았는가?"
하였다.

 

10월 9일 갑진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민응수(閔應洙)와 전(前) 감사 이광덕(李匡德)을 파직시켰다. 이보다 앞서 호남(湖南)에서 쌀 몇 만석을 사서 강도(江都)449)  에 주기로 하여 감사로 하여금 진작 수송하도록 하였는데, 감사 민응수가 즉시 거행치 않다가 10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늦춰서 실어 보내겠다고 계문(啓聞)하니, 비변사에서 겨울철에 멀리 수송함은 좋은 계책이 아닐 듯하다 하여 아직 실어 보내지 않은 것은 해창(海倉)에 쌓아 뒀다가 봄철을 기다려 운반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면서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해서 도신(道臣)을 파직하였고, 또 전교를 내려 조정의 명령이 행해지지 않은 것은 전 감사 이광덕이 더욱 심했다고 하여 똑같이 파직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뇌전(雷電)의 재변으로 기구 대신(耆舊大臣)에게 직언(直言)을 구했었는데, 판부사(判府事) 정호(鄭澔)의 계사(啓辭)에 이르기를,
"임금은 재이(災異)를 당하여 걱정을 하고 계신데 신하된 사람이 늙고 패망(悖妄)한 이유로써 핑계하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또한 분의상(分義上)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성유(聖諭)에 언급한 바에 따라서 간략하게 진달하겠습니다. 아! 조상(朝象)450)  의 분열과 민생의 곤췌(困悴)는 진실로 오늘날 막대한 걱정거리나 조정을 바루는 것이 많은 백성을 바루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조정이 바루어지지 못하고 많은 백성이 제자리를 얻은 일은 없었습니다. 요사이 듣건대, 전하께서는 탕평(蕩平)의 정치에 마음을 두시려 하여 여러 신하들을 칙려(飭勵)하고 계회(戒誨)하심이 순절(諄切)하시다 하나, 지금껏 몇 해 동안에 조상(朝象)과 민우(民憂)는 날로 더욱 무너져 탕평의 정사는 아득하게 마치 바람을 잡는 것과 같으니, 신은 진실로 의심이 나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탕평의 도를 한다 하심은 한갓 색목(色目)의 가증스러움만 아시고 훈유(薰蕕)451)  의 합하기 어려움은 생각치 못하셔서 피차(彼此)를 모두 임용하고 시비(是非)를 모두 옳다 함으로써 족히 신감(辛甘)452)  을 조제하고 동이(同異)를 보합(保合)했다고 여긴 것이 아니신지요? 이는 당송(唐宋) 건중(建中)453)  의 복철(覆轍)454)  로 주 부자(朱夫子)께서 일찍이 당시에 통탄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돌이켜 성찰하시어 그러한 점이 있으면 고치시고 없으면 더욱 힘써 피차 색목에 대한 말은 일체 쓸어버리시고, 다만 그 사람의 사정(邪正)과 일의 시비(是非)만을 살펴보아서 바르고 옳은 것은 취하고 간사하고 그른 것은 버리시어 한결같이 의리로 단정하고 사의(私意)가 서로 얽히지 못하게 하여, 취사(取舍)·출척(黜陟)이 광명 정대(光明正大)에서 나옴이 마치 순(舜)이 사흉(四凶)455)  을 베고 팔신(八臣)456)  을 등용함과 같이 한 후에야 비로소 탕평의 사업을 참으로 이루어 천심(天心)도 즐겁게 하고 민우(民憂)도 풀 수가 있을 것입니다. 듣건대, 뇌정(雷霆)이란 것은 군주의 호령을 의미한 것입니다. 신은 또 일찍이 길거리의 소문을 들은 바 전하께서는 때때로 희로(喜怒)가 폭발하시면 대간(臺諫)의 논사(論事)한 장소(章疏)를 대궐의 문밖에서 거절하시고, 경악(經幄)의 논사(論思)의 신하를 절해(絶海) 가운데로 내치신다 하는데, 이같은 사령(辭令)이나 거조는 천의(天意)에 합당케 하고 인심을 복종시키는 데도 또한 거리가 먼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후의 지나친 거조는 빨리 모두 철회하셔서 쾌히 뉘우치는 뜻을 보이셔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보고 전교하기를,
"계구(戒懼)하여 돈소(敦召)한 날에 그 아뢴 바는 구투(舊套) 그대로이다. 기구 대신으로 어떻게 차마 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는가? 이것도 또한 나의 정성이 얕은 소치이다."
하였다.

 

김상규(金尙奎)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10월 10일 을사

임금이 주원(厨院)457)  에 명하여 내일부터는 소찬(素饌)을 올리라 하니, 약방(藥房)에서 구전(口傳)으로 아직은 상선(常膳)458)  을 드시다가 때가 임박해지면 소찬을 드실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판부사(判府事) 이의현(李宜顯)이 죄를 진 신하라 자칭하고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공조 판서 윤순(尹淳)이 전 참판 김유경(金有慶)에 대하여 올린 소를 보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멀리는 방서(謗書)와 무사(誣史)의 추개(追改)를 버리고 가까이는 인묘(仁廟)·숙고(肅考)의 지난 일을 그만뒀다.’ 하였습니다. 그 상소의 뜻을 살펴보면 대개 전일 고친 것이 실은 이 두 가지 일의 예(例)를 따른 것이라 여기고 김유경을 책망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찬술(撰述)한 바는 바로 선조(先朝)의 일이니, 그가 이른바 무사이니 방서이니 한 것은 이것을 장차 어떠한 처지로 돌리는 것입니까? 아! 신하가 되어 선조(先朝)의 역사를 편수하면서 감히 선조(先朝)를 무방(誣謗)할 마음을 품고 책을 만들어 그 흉심을 풀려 하였다면, 이는 대역(大逆)이요 극악(極惡)입니다. 실로 왕법(王法)에 있어서 반드시 주륙(誅戮)할 바요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바이온데, 아직도 편히 숨을 쉬고 있으니, 어찌 형정(刑政)의 적당한 것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신의 죄범을 들어 왕장(王章)을 밝게 베푸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재신(宰臣)의 상소 가운데 원우(元祐)459)  의 일에 비유한 것은 지나친 일이었기에 중신(重臣)의 대소(對疏)도 중정(中正)을 잃은 것이다. 경(卿)이 재신(宰臣)을 대신하여 인혐(引嫌)한 것은 너무 지나친 중에서도 너무 지나친 일이다. 하물며 대광(大匡)을 쓰지 않은 것은 어찌 지극히 미안한 일이 아니겠는가? 도리어 스스로 국가의 체통을 가벼이 여김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10월 11일 병오

밤에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쳤다.

 

사헌부 【지평(持平) 민감(閔堪)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물고 죄인(物故罪人) 엽(燁)460)  ·전(㙉)461)   등의 극흉한 정상은 이미 심익연(沈益衍)의 공초(供招)에서 모조리 드러났으나 미처 승복하기 전에 지레 장폐(杖斃)하였으니, 노적(孥籍)의 형벌을 법대로 집행할 수는 없을지라도 양세(兩世) 흉역의 씨들을 결코 그대로 연곡지하(輦轂之下)462)  에 방치하여 후일의 화근을 키울 수는 없으니, 청컨대 엽(燁)·전(㙉)의 여러 아들 중 장성한 자는 일일이 조사해 내어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약방 제조 김재로(金在魯) 등이 청대(請對)하여 아직은 상선(常膳)을 드시다가 앞으로 봐가면서 소선(素膳)을 들기를 청하니, 임금이 한참 생각하다가 이르기를,
"갑진년463)  의 예대로 16일부터 소선을 들겠다."
하였다. 좌의정 이집(李㙫)과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구대(求對)하여 상선을 들 것을 청하려 하였다가 임금이 이미 약원(藥院)의 청에 따르기로 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유생(儒生)으로서 권무 군관(勸武軍官)464)  이 될 사람을 장신(將臣)이 친히 만나보기가 쉽지 않은데, 혹 부적합한 자가 잘못 뽑히면 일이 모람(冒濫)에 관계되니, 미리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뒤로는 장신이 권무 군관이 될 사람을 청하고자 하면 먼저 묘당(廟堂)의 대신들과 서로 의논한 후에 진달케 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도성(都城) 안에서 혹 채전(菜田)을 경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 벼농사만은 전부터 금해 왔습니다. 지금도 전대로 일체 금해야 합니다. 또 장목전(長木廛)이 있는 까닭에 집을 팔려는 자가 모두 집을 뜯어 재목을 전포에 주고 터는 밭을 만들어 경작하고 있는데, 일찍이 대간(臺諫)의 계청으로 금하였지만 지금도 그 폐단은 그전과 같습니다. 각별히 신칙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은 권설(權設)465)  된 아문(衙門)이지마는, 상피(相避)의 법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하므로, 이집이 말하기를,
"도제조(都提調)는 아문을 포폄(褒貶)할 수 있는데, 어찌 상피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형조 판서 김취로(金取魯)의 말을 듣건대, 반인(泮人)466)  의 한 짓이 매우 해괴하다 합니다. 북부(北部)의 장의동(壯義洞) 주위에 금송(禁松)의 정령(政令)이 행해지지 않기에 사람을 시켜 살펴봤더니, 반인의 무리들이 생솔을 함부로 베어가기에 사람들이 잡으려고 하니 도끼로 사람을 찍고 성을 넘어 도주하여 그대로 반촌(泮村) 안에 숨었는데, 모든 금란(禁亂)에도 반촌엔 감히 들어갈 수 없었기에 잡아 낼 길이 없다 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대사성으로 각별히 신칙할 것을 명하였다. 뒤에 재생(齋生)들이 이 일로 권당(捲堂)467)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기를,
"이것은 여러 유생들을 성취시키기 위해서였다."
하니, 여러 유생들이 다시 들어갔다.

 

10월 12일 정미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하교(下敎)하기를,
"지난달의 뇌전(雷電)의 재이(災異)에도 오히려 계구(戒懼)의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겨우 열흘 남짓 지나서 꿍꽝하는 소리와 번쩍번쩍하는 빛이 성하(盛夏)와 다름이 없으니, 알 수가 없지마는, 인애(仁愛)로운 하늘이 무슨 경고할 일이 있기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구명해 보면 분명 내 자신에게 말미암은 것이니, 더욱 간절한 계구가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는 마땅히 실질로써 하고 문식(文飾)으로써 하지는 말아야 하니, 먼저 내 몸에 자책(自責)하는 것이 곧 하늘에 실질로써 답하는 길이다. 내일부터는 상선(常膳)을 감하여 계구 자책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펴보겠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계사(啓辭)를 올려 ‘성(誠)’ 자로 진계(陳戒)하고 또 부연(敷演)하여 사(辭)를 지어 권면하니, 비답하기를,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13일 무신

미시(未時)에 태백성이 나타났다.

 

사간원 【정언(正言) 김성재(金聲載)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적 해(垓)468)  의 무리들이 권부(權扶)를 사주하여 심성연(沈成衍)을 쳐서 없애어 증언(證言)할 사람을 죽여 없애려고 했다는 말은 심성연의 공초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권부가 역적들을 위하여 힘을 썼고 역적의 정상을 은폐하려 한 죄는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권부를 빨리 국청(鞫廳)으로 하여금 잡아와 엄중히 문초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승지 조명익(趙明翼)이 임금께 아뢰기를,
"종묘(宗廟)에 계빈(啓殯)을 고하는 축문에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에서부터 단의 왕후(端懿王后)까지의 각위(各位)를 열서(列書)하고 다른 두사(頭辭)나 결어(結語)도 없이 바로 ‘원일엄박 소빈장계(遠日奄迫 素殯將啓)’라 쓴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미안한 일인 듯하니, 만약 ‘대행 경순 대비 계빈(大行敬純大妃啓殯)’으로써 조어(措語)를 하고 원일(遠日)로써 쓴다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관(禮官)에게 대신과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라 명하였다.

 

민정(閔珽)을 장령으로, 임정(任珽)을 수찬(修撰)으로, 이수항(李壽沆)을 전라도 관찰사로, 김취로(金取魯)를 평안도 관찰사, 신방(申昉)을 충청도 관찰사로, 조호신(趙虎臣)을 전라 병사(全羅兵使)로, 이진망(李眞望)을 형조 판서로, 어유기(魚有琦)를 전라 수사(全羅水使)로 삼았다.

 

10월 14일 기유

태백성이 나타났다. 삼공(三公)이 재이(災異)로써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辭免)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우비(優批)를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정언(正言) 김성재(金聲載)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고성 현감(固城縣監) 이만흥(李萬興)은 본디 비천한 사람으로서 이력(履歷)도 없었기 때문에 제목(除目)469)  이 내리자 물정(物情)이 놀라와 했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전계(前啓)한 공조 좌랑 김세관(金世寬)의 일은 정계(停啓)470)  시켰다.

 

10월 16일 신해

진시(辰時)에 계빈(啓殯)하고 오시(午時)에 찬궁(欑宮)471)  을 열었다. 내시(內侍)들은 전하의 위차(位次)를 빈전(殯殿)의 동쪽에 마련하고 전의(典儀)는 백관(百官)들의 자리를 영경문(永慶門) 밖에 마련하였다. 임금이 부복하여 곡하고 사배(四拜)를 올렸다. 상식(尙食)은 술을 따라 영좌(靈座) 앞에 드리고 전언(典言)은 축문을 읽고, 이를 마치자 영좌와 전(奠)을 전내(殿內)로 옮겨 서향(西向)케 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꿇어앉아 아뢰기를, ‘우의정 신(臣) 모(某)는 삼가 길진(吉辰)에 찬도(欑塗)을 엽니다.’ 하니, 상부(尙傅)가 내시들을 거느리고 올라가 찬도를 걷었다. 상부는 수건을 받아 재궁(梓宮)을 닦고 관의(棺衣)를 덮었으며, 내시는 영좌와 영침(靈寢)을 모두 처음과 같이 마련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국휼(國恤)472)   초부터 고병(告病)473)  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출사(出仕)하였다.

 

임금이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과 빈전 당상(殯殿堂上)·국구(國舅)를 덕유당(德游堂)으로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구의(柩衣)를 정돈하고 재궁(梓宮)을 닦아 구의로 싸고 밧줄로 얽어 동여매는 사이에 쥐가 둘러싼 홍전(紅氈)을 쏠아 다 뚫리지 않은 것이 세 곳이나 되는데 흔적이 가는 손가락 같았으니, 일이 꺼림칙하여 마음에 잊을 수가 없다. 여기가 어떠한 곳인데 이러한 재변이 있단 말인가?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하니,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현궁(玄宮)에 쓰일 문건이라면 비록 조금만 불결해도 마땅히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물건은 며칠 후면 불살라버릴 것이니, 싼 것을 풀어서 고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쥐가 쏠은 곳을 잘라내고 다른 홍전 조각으로 때우되, 궁녀 중 바느질 솜씨가 있는 자로 하여금 정하게 꿰매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의 말도 모두 같으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현궁(玄宮)에 하관할 때 민 판부사(閔判府事)의 진참(進參)을 명하고, 초상(初喪) 때 집사(執事)와 외임(外任) 이외는 모두 진참하라 명하였다.

 

10월 18일 계축

신시(申時)에 빈전(殯殿)에서 조전(祖奠)을 행하였다.

 

조문명(趙文命)을 호위 대장(扈衛大將)으로 삼았다.

 

10월 19일 갑인

3경(三更) 1점(一點)에 빈전(殯殿)에서 견전(遣奠)을 행하였다. 총호사(摠護使) 이하의 관원이 빈전에 입시하니, 재궁(梓宮)은 윤여(輪轝)에 실려 건례문(建禮門)을 나섰다. 여시(女侍)들이 호곡하며 따르는 자가 수없이 많았으므로, 임금이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멈추게 하였으나 막을 수 없었다. 총호사가 여러 승지를 시켜 임금에게 곡을 그치고 궁안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흥명문(興明門) 안에 이르러 임금이 총호사 이집(李㙫)에게 하유하기를,
"나는 모시고 갈 수 없으므로 대사(大事)를 경(卿)에게 맡겨니, 경은 모름지기 마음을 다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라."
하자, 이집이 말하기를,
"감히 전교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자전(慈殿)께서 아직도 곡을 그치지 않고 계시니, 내가 들어가서 위로해 드려야겠다."
하고, 대내(大內)로 걸어서 돌아왔다. 조금 후에 임금이 백여(白輿)를 타고 나와 현모문(顯謨門)에 이르러 연(輦)을 바꿔 탔다. 여러 신하들은 최복(衰服) 차림으로 걸어서 따르고 노병자는 판륜(板輪)을 타고 보제원(普濟院)에 이르렀다. 임금은 곡하며 대여(大轝)에 하직하고 친히 나가 봉심한 후에 궁궐로 돌아왔다.

 

선의 왕후(宣懿王后)를 의릉(懿陵)474)   동강(同崗) 하혈(下穴) 신좌(申坐)의 언덕에 부장(祔葬)하였다. 이보다 먼저 8월 12일에 참초(斬草)·파토(破土)하였고, 9월 13일에 금정(金井)475)  을 열었는데, 혈심(穴深)은 8척 4촌 【영조척(營造尺)을 쓴다.】 이었다. 10월 16일에 찬궁(欑宮)을 열어 이날 자시(子時)에 발인(發靷)하기 전 5각(五刻)에 이르러 임금이 견례(遣禮)를 의식대로 행하니, 내시(內侍)가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요여(腰轝)에 안치하고 중문(中門) 밖에 이르러 또 수레에 봉안하였으며, 우주궤(虞主櫃)를 그 뒤에 놓았다. 좌의정 이집(李㙫)이 재궁(梓宮)을 메는 관원과 내시를 인솔하고 윤여(輪轝)에 재궁을 모시어 뜰을 내려와 흰 비단 덮개[褚]로 덮으니, 내외(內外)가 모두 곡하였다. 내시가 삽(翣)과 행장(行障)·좌장(坐障)으로 재궁을 가리고 명정(銘旌)이 앞에서 인도하였다. 중문에 이르러 상여[輴]에 올려 외문(外門)을 나와서 대여(大轝)에 올려 드디어 길을 떠나니, 의위(儀衛)의 도종(導從)을 의식대로 하였다. 방울을 잡은 자가 방울을 흔드니, 궁인(宮人)은 말을 타고 곡하며 따랐고, 내시들은 모두 곡하며 걸어서 따랐는데, 승지(承旨) 2인도 수행하였다. 혼백(魂帛)의 수레가 종묘(宗廟) 앞길에 이르자 섭통례(攝通禮)가 잠깐 멈출 것을 계청(啓請)하고, 수레를 돌려 북쪽을 향하게 하였다. 조금 후에 다시 길을 떠나기를 계청하였는데, 대여가 이르자 똑같이 그렇게 하였다. 대여가 흥인문(興仁門)에 이르러 잠깐 멈춰 강(杠)을 고쳤는데, 이미 문을 나서자 다시 강을 고쳤다. 영가(靈駕)가 노제소(路祭所)에 이르니, 내시는 혼백함을 받들어 장전(帳殿) 안에 들어가 안치하였고, 섭통례는 영가가 잠깐 멈출 것을 계청하여 향을 올리고 노제(路祭)를 의식대로 지냈다. 섭통례가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좌(座)에서 내려 여(轝)에 오를 것을 계청하고, 또 여에서 내려 수레[車]에 오를 것을 계청하고, 또 대여 앞에 나아가 출발을 계청하였다. 능소(陵所)에 이르러 좌의정 이집이 재궁(梓宮)을 메는 관원을 인솔하여 재궁을 모셔 탑상(榻上)에 안치하고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내시가 영좌를 재궁의 남쪽에 남향으로 설시하여 혼백함을 받들어 영좌에 안치하고 우주궤는 그 뒤에 두었으며, 향안(香案)은 그 앞에 설시하였다. 명정(銘旌)은 영좌의 오른쪽에 두고 시책보(諡冊寶)·애책(哀冊) 및 평시의 책보(冊寶)와 인(印)은 영좌의 왼쪽에 두었으며, 또 영침(靈寢)은 재궁의 동쪽에 설시하였다. 궁인(宮人)은 시위(侍位)에 나가 처음과 같이 곡하였다. 이날 천전(遷奠)은 의식대로 행해졌다. 방상씨(方相氏)가 도착하여 현궁(玄宮)에 들어가 창으로 네 모퉁이를 두들겨보고 명기(明器)·복완(服玩)·증옥(贈玉)·증백(贈帛)을 현궁의 문 밖에 진열하였다. 섭통례가 재궁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상여에 올라 현궁으로 나아갈 것을 계청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수건을 받들고 나아가 재궁을 닦았다. 좌의정 이집이 재궁을 메는 관원과 내시를 이끌고 재궁을 받들어 상여에 올리니, 내시는 삽(翣)과 행장(行障)·좌장(坐障)으로 재궁을 가리고 여사(轝士)는 상여를 받들어 왼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머리를 하고 곧 현궁으로 나아가려 하니, 궁인은 모두 곡하고 배종(陪從)한 백관(百官)들도 곡하며 걸어서 따랐다. 상여가 현궁의 방목(方木) 위에 이르자 녹로(轆轤)를 이용하여 재궁을 받들어 내리니, 내시들이 관의(棺衣)로 덮고 명정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좌의정 이집이 재궁을 메는 관원을 이끌고 윤여(輪轝)로 재궁을 받들어 연도(羡道)로부터 들어가 현궁의 대관(大棺) 안에 북쪽으로 머리하여 안치하였다. 우의정 조문명이 다시 관의(棺衣)와 명정을 정돈하고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먼저 애책을 퇴광(退壙)의 서쪽에 드리고 다음에 증옥·증백을 애책의 남쪽에 드리니, 배종한 백관들은 부복하여 곡한 후 사배(四拜)를 올리고 하직하였다.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진망(李眞望) 등은 보삽(黼翣)·불삽(黻翣)·화삽(畫翣)을 재궁의 양쪽 곁에 세우고 집사자(執事者)가 명기·복완을 받들어 드리니, 집의(執義) 이현보(李玄輔)가 쇄폐(鎖閉)를 감독하였다. 우의정 조문명이 흙 아홉 삽을 덮은 다음 지석(誌石)을 내리고 우주(虞主)를 세워 전례(奠禮)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신시(申時)에 초우제(初虞祭)를 산릉(山陵)에서 행했는데, 임금은 광명전(光明殿)의 뜰 위에서 망곡(望哭)하였다.

 

10월 20일 을묘

태백성이 나타났다.

 

진시(辰時)에 임금이 창경궁(昌慶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돈화문(敦化門)으로 들어가 협양문(協陽門)을 거쳐 대내로 들어갔는데, 양음(亮陰)476)  중이기에 인정전(仁政殿)의 정문(正門)을 거치지 않았던 것이다. 동조(東朝)477)  는 진시(辰時)에, 중궁(中宮)은 사시(巳時)에 빈궁(嬪宮)은 오시(午時)에 거처를 옮겼다.

 

오시(午時)에 임금이 협양문(協陽門)에서 출발하여 관왕묘(關王廟)478)   앞에 이르러 신연(神輦)을 곡하며 맞아 배종(陪從)하여 홍화문(弘化門)을 거쳐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렸다. 신연은 명정전의 안뜰을 거쳐 건복문(建福門)을 지나 문정전(文政殿) 위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보행으로 전 안에 따라들어와 내시와 함께 신위(神位)를 모셔내어 신탑(神榻) 위에 안치하고 친히 재우제(再虞祭)를 지냈다. 예를 마치고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는 법령이 엄하지 않아서 사대부(士大夫) 집의 하인들이 마땅히 청의(靑衣)를 입어야 할 때에는 백의(白衣) 차림으로 대궐에 들어오고 백의를 입어야 할 때에는 청의 차림으로 대궐에 들어오고 있다. 지금 재하자(在下者)는 비록 기년복(朞年服)이지만 윗사람이 3년 상복을 입으면 마땅히 윗사람을 따라 백의를 입어야 함에도 오늘의 거동에 이례배(吏隷輩)의 대궐에 들어온 자는 청의와 백의가 뒤섞였으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각사(各司)의 이례로 청의를 입은 자는 해당 관원을 추고(推考)하고 조사(朝士)의 겸종(傔從)은 각각 그 관원을 일체로 추고하라."
하였다.

 

10월 21일 병진

조명신(趙命臣)을 승지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임금이 먼저 상선(常膳)으로 회복하여 동조(東朝)도 상선으로 회복하도록 우러러 권할 것을 계청하고, 또 내일의 삼우제(三虞祭)를 섭행(攝行)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동조께서 상선으로 회복하도록 할 일은 마땅히 우러러 아뢰겠지만, 나는 형편을 보아서 하겠다."
하였다.

 

10월 22일 정사

3경(三更) 4점(四點)에 임금이 베로 싼 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 차림으로 베로 싼 보련(步輦)을 타고 빈양문(賓陽門)으로부터 나가 명정전(明政殿)을 거쳐 재실(齋室)에 나아갔다. 4경 1점에 임금이 최장(衰杖)을 갖추고 혼전(魂殿)에 나아가 삼우제(三虞祭)를 지내고, 이를 마치자 대궐로 돌아왔다.

 

약방(藥房)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의 관원과 예조 판서 서명균(徐命均)이 구대(求對)하니,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 나아가 포립(布笠)·포포(布袍)·백피화(白皮靴) 차림으로 흰 의자 위에 앉았다. 도제조 홍치중(洪致中)이 상선(常膳)을 들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동조(東朝)께서 내가 여러 날 소선(素膳)드는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하교(下敎)하셨으니, 그런 까닭으로 마지못해 권도(權道)를 따르겠다."
하였다. 홍치중 등이 함께 이르기를,
"이러한 추위에 연일 새벽에 일어나서 제사를 지내고 곡읍(哭泣)하시면 성후(聖候)가 어찌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이 뒤로는 마땅히 섭행(攝行)을 명하셨다가 졸곡일(卒哭日)에 이르러 기력을 보아 친히 행하는 것이 신(臣) 등의 바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체읍(涕泣)하며 이르기를,
"십수 년 동안 최마(衰麻)로 몸을 감았으니, 지나온 일을 말하자면 어떻게 나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의릉(懿陵)을 바라보면 다시는 나의 정리를 펼 곳이 없구나. 다섯 달 동안 빈전(殯殿)을 생각하고 하루 다섯 때를 곡읍해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는데, 왕가(王家)는 여염(閭閻)과 달라 우제(虞祭)가 지나면 곡읍할 절차(節次)가 없게 되니, 어떻게 슬픔을 펼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경(卿) 등의 말이 이와 같으니, 만일 병이 생기면 의당 섭행을 명하겠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천재(天災)도 이러하고 나라 형편도 어려우니, 조정에 대소(大小) 신료가 모여야만 유지(維持)될 듯합니다. 이광좌(李光佐)와 민진원(閔鎭遠)을 머물러 있게 하면 나라 일이 잘 되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 영부사(李領府事)가 강상(江上)으로 돌아가려 함은 그 처지가 응당 그렇게 된 것이지 내가 버린 것은 아니다. 민 판부사(閔判府事)는 비록 불러도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니, 여러 해가 지난 뒤에는 혹시 깨닫는 바가 있을까? 가까운 곳에 와서 지내라고 하유(下諭)하려 한다. 이병상(李秉常)과 김흥경(金興慶)은 능소(陵所)에 올라왔다는데 벌써 돌아갔는가?"
하니, 홍치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흥경은 비록 논척(論斥)을 당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어떻게 감히 이럴 수가 있겠는가? 이병상은 성질이 편협하여 한 가지 일로 오랫동안 버티려고 하니, 어떻게 매번 용서하여 놓아줄 수가 있겠는가? 상인(常人)의 일로 말하건대, 평일에 비록 서로 다투는 꼬투리가 있었더라도 부모의 상(喪)을 당하면 마땅히 찾아가 조문을 하는 것인데, 아주 가까운 서울에 끝내 들르지 않고 갔으니, 군신(君臣)의 의리가 없어진 것이다. 모두 파직하고 서용치 말라."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전 주서(注書) 이덕재(李德載)는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한 재주가 있으니, 6품직으로 올려서 조용(調用)함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어떠한지를 모르지만 경이 쓸 만하다고 여긴다면 출륙(出六)479)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0월 23일 무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 친히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밤 기온이 매우 차고 사나운 바람이 집을 뒤흔들었다. 아헌관(亞獻官)인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가 여러 승지(承旨)·옥당(玉堂)과 더불어 진수당(進修堂)에서 구대(求對)하여 임금이 이러한 풍한(風寒)을 무릅쓰고 친히 제사를 지내는 것은 결단코 안된다고 힘써 아뢰고 섭행(攝行)하기를 명하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4일 기미

임금이 친히 사우제(四虞祭)를 지냈다.

 

내국(內局)480)  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의 관원들이 구대(求對)하여 우제(虞祭)를 섭행(攝行)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5일 경신

가랑눈이 내렸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구대(求對)하여 우제(虞祭)를 섭행(攝行)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6일 신유

임금이 친히 오우제(五虞祭)를 지냈다.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혼궁(魂宮)을 창경궁(昌慶宮)으로 옮겨 모셨다.

 

도승지 윤유(尹游)가 임금께 아뢰기를,
"성상께서 혹한(酷寒)에 친히 제사를 지내시니, 지금은 신하로서 질병을 말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에 곡반(哭班)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는 집에 돌아가 울었다고 합니다. 이 뒤로는 신칙하여 전처럼 그러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나 중신(衆臣)들이 다 아는 바이다. 노병자 이외에 2품 이상의 관원은 무겁게 추고(推考)하고 당상관 이상의 관원은 파직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승지 조명익(趙明翼)이 말하기를,
"신이 종반(宗班)의 문안에 참여해 보니, 전연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찰(監察)이 고과(考課)를 올린 일은 있었으나 검찰(檢察)을 잘못한 것이니 잡아다가 추고하고, 종신(宗臣)은 종부시(宗簿寺)에서 검찰하지 못한 것이니 제조(提調)를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다.

 

10월 27일 임술

약방(藥房)이 도제조(都提調) 이하와 좌의정 이집(李㙫)이 구대(求對)하여 합사(合辭)로 우제(虞祭)를 섭행(攝行)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도감 당상(都監堂上)이 일을 마치고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경자년481)  에 상제(喪制)를 복고(復古)한 뒤로 사서인(士庶人)은 졸곡(卒哭) 후에, 통훈 대부(通訓大夫) 이하는 연제(練祭) 후에, 통정 대부(通政大夫) 이상은 담제(禫祭) 후에 허혼(許婚)하기로 정식(定式)하였기에, 이번의 국휼(國恤)에도 한결같이 경자년의 예대로 마련하였으나, 금번의 상제(喪制)는 경자년과 달라서 연제 뒤에는 신료(臣僚)들의 복제(服制)가 이미 다 되었으니 허혼(許婚)을 못할 까닭이 없을 듯하니, 통정 대부 이상 통훈 대부 이하를 막론하고 모두 연제 뒤에는 허혼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우의정 조문명(趙文命)도 금번에 허혼하는 일은 당연히 경자년·갑진년482)  에 비교하여 차등 있게 정식(定式)해야 될 듯하나, 다만 통훈 대부 이하는 하대부(下大夫)와 아울러 소상(小祥) 후에 허혼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28일 계해

임금이 친히 육우제(六虞祭)를 행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재전(齋殿)에 나아가 판의금(判義禁) 윤순(尹淳)을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금오(金吾)483)  의 초기(草記)484)   중에 국수(鞫囚)로서 본가에 통서(通書)한 자가 있다 했는데, 누군가?"
하니, 윤순이 말하기를,
"목천임(睦天任)입니다."
하매, 임금이 빙긋이 웃었다. 윤순이 말하기를,
"수직군(守直軍)이 나졸(羅卒)과 짜고 그의 옷보따리를 전하려다가 도사(都事)에게 발각됐는데, 그 속에 언문 편지가 있었으나 별로 옥사(獄事)의 정상(情狀)에 관한 일을 누설한 바는 없고 다만 공사(供辭)를 잘 대답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정(原情)485)  을 지어 주었다는 말은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목천임이 다른 죄인의 원정을 지휘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로서는 의당 공순히 처분을 기다려야 할 처지에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끝내 용서하기는 어렵겠다."
하였다.

 

한사득(韓師得)을 집의(執義)로, 오원(吳瑗)을 지평(持平)으로, 윤순(尹淳)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으로, 이중익(李重翊)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삼았다.

 

10월 29일 갑자

임금이 친히 칠우제(七虞祭)를 지냈다.

 

이삼(李森)을 좌변 포도 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22일의 제반(祭班)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 중 중신(重臣)은 추고(推考)하고 종2품 시종(侍從)과 각사(各司)의 정(正)은 모두 파직하라 명하였다.

 

10월 30일 을축

도감(都監)에 상전(賞典)을 내렸다. 총호사(摠護使) 이집(李㙫) 이하의 관원에게 가자(加資)하고 상을 준 것이 차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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