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병인
임금이 친히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兼謝恩使) 서평군(西平君) 요(橈) 등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보냈다.
전 한산 군수(韓山郡守) 윤동원(尹東源)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론(士論)의 분쟁(分爭)은 마침내 나라와 함께 망하게 되고 민생의 곤고(困苦)는 앞으로 근본마저 뒤흔들리게 할 것이니, 이러고서도 나라가 위태롭지 않은 일은 예로부터 듣지를 못했습니다. 전하께서는 당론(黨論)을 제거하려는 마음을 가지셨으나 와각(蝸角)486) 은 종전과 같으니, 백성을 구휼하려는 은정(隱情)을 가지셨으나 전련(顚連)487) 은 더욱 심한데, 성덕(聖德)을 백성에게 널리 알리지 못한 것은 비록 군하(群下)의 죄요 유사(有司)의 잘못이지만, 그 근본을 구명(究明)해 본다면 또한 전하께서도 요령을 얻지 못하고 도리를 다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한 사람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지 천하로써 한 사람을 받드는 것이 아닌 뜻을 아시고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마음을 미루어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정사를 행하신다면, 백성들은 그들의 생활을 즐기고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황극(皇極)488) 의 도리를 다하시어 호오(好惡)와 여탈(與奪)을 한결같이 공도(公道)에 따르고 조금의 사의(私意)라도 맞아들임을 용납치 않으신다면, 인심은 저절로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 모두가 전하의 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대학(大學)》의 성의(誠意) 공부는 바로 전하께서 오늘날 하셔야 할 제일 시급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11월 2일 정묘
전 참판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우리 나라의 당론(黨論)은 실로 나라를 멸망시킬 고질적인 폐단이지만, 신축년489) 의 당화(黨禍)에 이르러서는 어찌 당론으로써 논하겠습니까? 아! 선왕(先王)께서 불행하게도 질병이 있으시자 군간(群奸)들은 틈을 타서 흉심(凶心)을 풀어보려고 환관(宦官)·궁첩(宮妾)과 짜고 권병(權柄)을 도득(圖得)하려 하였는데, 그 용심(用心)과 계획이 다만 전하를 불리하게 하는 데 있어서 모사(謀事)의 배포(排布)를 차례대로 실천했으니, 위험하고 두려운 말은 이미 잠저(潛邸)에 계실 때 나왔었고, 착오(錯誤)를 규정(糾正)하는 논의는 또 위호(位號)를 정한 뒤에 나왔습니다. 김일경(金一鏡)의 상소가 밖에서 창도(唱導)하고 박상검(朴尙儉)의 고변(告變)이 안에서 응하더니, 마침내는 역적 목호룡(睦虎龍)을 책봉 사신(冊封使臣)의 선래(先來)가 나온 이튿날에 앞세워 무망(誣罔)하고 핍박하는 말이 과연 흉악한 입에서 나왔으니, 신하된 자가 누군들 피눈물을 뿌리고 울음을 삼키며 시원스럽게 변명코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에 도리어 옥사(獄辭)가 동궁(東宮)에 관련된 것은 문안(文案)에 쓰지 말 것을 청하면서 즉시 정국(庭鞫)을 그만두고 본부(本府)490) 로 옮겨서 마치 어떠한 사정이 그 속에 숨어 있기나 하는 듯이 숨겨서 허실(虛實)과 의사(疑似)의 경지에 둠으로써 위에서 듣게 됨을 현혹시키려 했으니, 그 음흉한 계략과 교묘한 모사는 익히 연습하고 미리 짜놓은 것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후 사태가 갈수록 위급해지자 권익관(權益寬)의 상소가 먼저 나왔는데, 그 속셈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옥당(玉堂)의 차자(箚子)가 뒤이어 나와 터놓고 지척(指斥)을 가하더니, 마침내 교문(敎文)491) 이 지어져 흉역(凶逆)의 심보가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 시종의 실정은 불을 보듯이 환하게 살필 수가 있는데도 지금에 와서 천죄(千罪) 만악(萬惡)이 전부 한 사람의 김일경에게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흉서(凶書)나 역격(逆檄)이 모두 교문에서 원유(源由)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문의 지극히 흉악한 점은 처음부터 알기 어려운 바가 아니었는데, 어찌하여 대정(大庭)에서 선독(宣讀)할 때는 조정에 가득한 백관(百官)들이 모두 귀를 기울여 듣고 손을 잡으려 하례할 따름으로 한 사람도 마음에 놀라고 뼈에 사무쳐 성죄(聲罪) 청토(請討)한 자가 없었음은 또한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아! 통탄스럽습니다.
만일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으로써 처단(處斷)한다면, 그날의 제신(諸臣)들 중 능히 조돈(趙盾)492) 과 허지(許止)493) 의 필주(筆誅)를 면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 관대하고 지나치게 용서하는 논리로 따져본다면 혹시 경중(輕重)과 천심(淺深)을 구별할 바도 없지 않으니, 말이 비록 길어지더라도 그 설명을 마치려고 합니다. 대저 김일경을 지휘하여 그의 모주(謀主)가 되었던 자가 있었고, 김일경에게 붙어서 그의 심부름꾼이 되었던 자도 있었으며, 안으로는 실제로 찬조하면서 밖으로는 의견이 틀린 것처럼 보인 자도 더러 있었으니, 그의 계교를 알고 성패(成敗)를 앉아서 보기만 한 자는 모두 세태의 형세에 따라가며 그렇게 하였습니다. 마음으로는 그것이 역적(逆賊)이 되는 줄 알면서도 당사(黨私)에 끌리어 이해(利害)를 따지고 두려워 주저하여 입으로 감히 말하지 않은 자는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그 당시에는 한 시대의 명망과 평론이 김일경에게 돌아갔기에, 사직(社禝)을 도운 공신(功臣)으로써 칭찬하고 팔좌(八座)494) 의 열(列)에 뽑히는 등 추허(推許)와 장발(奬拔)이 지극치 않음이 없었으며, 귀양을 간 뒤에도 오히려 구해(救解)하는 말을 올렸고 사형(死刑)을 당한 후에도 적몰(籍沒)의 형벌을 청하지 않았으니, 교문(敎文)을 죄로 여기지 않았음이 어찌 명백하고 증험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신년495) 칭병(稱兵)496) 한 뒤에는 대역(大逆)의 괴수라고 포고(布告)의 맨앞에 썼으니, 죄는 매한가지로서 옛날이라고 더 작은 것이 아니고 지금이라고 더 큰 것이 아닌데도 무신년의 앞과 뒤에 경중(輕重)이 아주 다르게 되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대개 김일경으로 하여금 전일의 죄를 혼자 담당케 했더라면 자신들은 혹시 수사(收司)497) 되는 형률을 면할까 하여서 그런 것이겠지만, 되레 심장(心腸)과 수족(手足)이 더욱 드러난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가소롭고 가련합니다. 신이 《감란록(戡亂錄)》을 보니 정상을 알았다 해서 죽음을 당한 자도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무릇 김일경을 이인좌(李麟佐)의 괴수라 하면서 이인좌의 정상을 알았던 자는 법에 죽고 김일경의 정상을 알았던 자는 버젓이 날뛰며, 정상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어울려 죄악을 같이 행한 자도 현용(顯用)되고 있으니, 만약 김일경을 역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마는, 역적으로 여긴다면 천하에 어찌 이러한 법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죄가 유봉휘(柳鳳輝)와 같으면서도 관계(官階)는 전과 같고 죄악이 권익관과 같으면서도 자리에 누워 편안히 죽었으며, 당차(堂箚)498) 의 제적(諸賊)들도 나란히 요직(要職)을 차지하고 있고 김일경을 발탁한 자는 권우(眷遇)가 유달리 지극하며 김일경을 신구(伸救)한 자는 내외(內外)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있습니다. 그밖에 죄범(罪犯)이 지극히 무겁고 실상이 다 드러난 자도 한정이 없지만, 전하께서는 통틀어 용서하고 아직껏 죄를 바루지 않으시니, 처분이 상경(常經)과 배치되고 정형(政刑)이 정당(正當)에 어긋나서 국강(國綱)은 이미 해이해졌고 인심은 날로 무너져 군부(君父)를 가벼이 보기를 초개(草芥)와 같이 하고 난역(亂逆)을 돕는 것을 예사로 알아, 원흉(元兇)과 거악(巨惡)이 중외(中外)에 꽉 차고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전후로 잇달아 일어나서 고변(蠱變)과 구화(構禍)까지 있기에 이르렀고, 역적놈이 대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으니, 다시 여지(餘地)가 없게 되었습니다. 강상(綱常)은 무너지고 의리는 막혀 임금은 임금의 도를 하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하지 못하여 결국 3백년 예의(禮義)의 나라를 암흑 천지로 만들어 점점 빠르게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니, 견식이 있는 사람의 심우(深憂) 호탄(浩歎)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탕평(蕩平)의 의논은 더욱 세도(世道)의 큰 해독(害毒)이 되어 역적의 절반은 충신이 되고 충신의 절반은 역적이 되며, 옳은 것도 아주 옳은 것이 되지 않고 그른 것도 전적으로 그른 것이 되지 않아서 주의(注擬)499) 할 때에도 다만 절반만 참여시키려 하고 출척(黜陟)할 즈음에도 반드시 상대(相對)를 구하여 기구(崎嶇)하고 간신(艱辛)하여 억지로 만들고 강제로 성사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바로 이는 주자(朱子)의 이른바 자연스런 탕평과는 아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서 훈유(薰蕕)와 빙탄(氷炭)을 한 그릇 속에 뒤섞으면서도 옛것을 타파하고 새것을 도모한다 이르고는, 전일에 관계된 일들은 일체를 지나간 옛날의 것으로 넘겨 버리려 합니다. 아! 전일 다투었던 바는 다만 갑(甲)과 을(乙)의 시비(是非)이고 저쪽과 이쪽의 장단(長短)에 관한 것일 뿐이고 원래 국가의 흥망이나 조정의 이해(利害)에 관계된 것이 아니었으니, 참으로 지공(至公)으로써 인도하고 지성으로써 면려하여 양쪽이 다 은수(恩讐)를 잊고 일심으로 협조케 한다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도 보합(保合)할 수가 있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도 뭉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와 대륜(大倫)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하늘에서 얻어 자기 본성(本性)에 타고나 천지를 지탱하고 고금을 통하여 변경할 수 없는 상도(常道)가 되어 있으니, 비록 천백번 세상이 바뀐다 해도 결단코 세상과 더불어 변천되고 시대에 따라 변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전하의 신하로서 어떻게 차마 전하의 역신(逆臣)과 어깨를 맞대고 발꿈치를 맞추며 반열(班列)에 달려 다니면서 언의(言議)나 우모(訏謨)의 틈새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주선(周旋)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신하들을 경시(輕視)하심은 본래부터의 병통이었지만, 당론(黨論)이 있었던 뒤로는 갑자기 나왔다가 갑자기 물러갔다가 하면서 번복(翻覆)이 일정함이 없으며, 벼슬을 얻기만을 바라고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여 염치는 흔적도 없어졌고 풍습은 아주 무너졌으며 기절(氣節)은 전혀 없어져, 집에서는 자기 행실을 닦고 나와서는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자중(自重)할 줄 아는 선비가 별로 없었으니, 그들이 임금에게 모멸을 받는 것도 또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전하의 마음은 오로지 탕평(蕩平)에 있었기에 폐기(廢棄)된 자를 기용하고 침체된 자를 올려 주는 등 널리 수소(收召)를 베푸셨으나, 다만 작록(爵祿)으로써 미끼를 주어 꾀고 분의(分義)로써 어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신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일찍이 옛사람들의 임금 섬기는 도리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에 있어서 오직 의리에 합당한가만을 따져, 만약 그것이 의리일 때는 비록 탕화(湯火) 속에 뛰어든다 해도 낙지(樂地)로 여겼고, 그것이 의리에 어긋나면 비록 천사(千駟)의 부(富)나 만종(萬鍾)의 많은 녹(祿)을 주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신하를 이익으로써 부리고 의리로써 부리지 아니하여, 물리칠 때에는 개나 돼지를 내쫓듯 하시고 임용할 때에는 소나 말을 잡아매듯 하여서, 위노(威怒)로써 으름장을 놓고 견벌(譴罰)로써 위협하여 조금만 뜻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꾸짖고 내쫓아 비록 소회(所懷)가 있더라도 말할 수 없게 하니, 뜻은 막히고 기상은 풀이 죽어 있습니다. 이러고서도 중정(衆情)을 염복(厭服)시키고 온 세상을 변화시켜 무편 무당(無偏無黨)의 다스림을 이루기를 바라고 계신데, 그것이 되겠습니까? 아! 당론(黨論)이 발생한 것은 오래 되었습니다. 그것이 분열(分裂)된 초기에는 비록 사정(邪正)의 구별이 있었지만, 말류(末流)에 있어서의 서로서로 당벌(黨伐)500) 하고 오로지 경알(傾軋)만 일삼는 일을 신이 항상 마음속으로 미워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일을 논할 적에는 오직 옳고 그름만 따졌고 사람과 사귐에는 색목(色目)에 구애(拘碍)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소견을 지나치게 믿고 세상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적었으므로, 포의(布衣) 때부터 비방을 받음이 많았고, 벼슬길에 오른 뒤로는 저어(齟齬)가 더욱 심하여 사적(仕籍)에 통한 것이 20여 년이 되었으나 서울에서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수삼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이 진취(進取)에 서둘지 않음과 언론에 편파적이 아님은 실로 온 조정이 다 아는 바인데, 백수(白首)로 죽음이 임박한 나이로 또 온갖 생각이 다 식어버린 처지에 무슨 심장(心腸)으로 짐짓 괴격(乖激)한 말을 해서 전하의 청문(聽聞)을 거슬리게 하겠습니까? 다만 구구(區區)한 의견을 위와 같이 진달하는 것은 성질이 본디 한 번 집착(執着)하면 능히 고치지 못하여서입니다.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임금의 무참(誣譖)을 풀어 드리지 못하면 신은 비록 거친 음식을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단코 사진(仕進)할 계획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읽어보고 매우 노하여 전교하기를,
"아! 나의 뜻이 아주 정해졌는데, 오늘날에 북면(北面)하는 자로서 어찌 감히 나의 마음을 흔들려 하는가? 이는 신하의 절개가 없는 것이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김유경의 응지(應旨)를 핑계한 한 편의 상소는 그 버릇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 말의 두서없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는가? 그 중에 더욱 해괴한 것을 내가 차마 들추어 말하지 아니한 것은 그의 뜻에 영합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소는 되돌려 주기만 해서는 안된다. 만약 철저히 다스리면 이것도 또한 그의 뜻에 맞춰 주어 한층 격동을 더할 것이다. 즉시 전정(殿庭)에서 불살라 나의 참소를 미워하는 뜻을 보여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하려다가 옥당(玉堂)의 비원(備員)이 되지 않아 정강(停講)하였다.
전교하기를,
"졸곡(卒哭)을 겨우 지나니, 애모(哀慕)가 더욱 간절하다. 이럴 때 시사복(視事服)을 입고 편전(便殿)에서 법강(法講)을 여는 것은 상감(傷感)만 간절히 할 뿐이지만, 고성(古聖)의 대의(大義)를 본받아 시사(視事)를 처음 아뢰었을 때 바로 개강(開講)을 명했으니, 경악(經幄)의 신하된 자는 오랫동안 강연(講筵)을 철폐한 뒤이므로 패초(牌招)를 청할 것도 없이 마땅히 바로 비원(備員)을 서둘러야 할 것인데도 위패(違牌)501) 가 줄을 이어 법강을 정지케 하였으니, 위패한 사람은 의금부(義禁府)에서 신문하고, 해당 승지는 신칙을 잘못하여 시일이 늦도록 했으니 무겁게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부교리 이종백(李宗白)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덕종 대왕(德宗大王)의 묘실(廟室) 축문을 대신의 수의(收議)에 의하여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케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예종 황제(睿宗皇帝)를 별제(別祭)한 축호(祝號)를 들어 아린 것에 있어서 진실로 ‘사(嗣)’ 자를 칭하지 않고 다만 효증손(孝曾孫)이라고만 칭한 축문은 실로 중통(重統)에 별혐(別嫌)의 뜻이 있으므로, 오늘날의 고거(考據)할 일단(一端)이 될 뿐입니다. 이것은 만력(萬曆) 때에 작정한 예로 가정(嘉靖) 연간의 이른바 ‘대례의(大禮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인데도 지금 유신(儒臣)의 수의(收議)에서는 심지어 ‘우리 조종(祖宗)의 가법(家法)이 있는 바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가정(嘉靖)의 변례(變禮)502) 는 장총(張璁)·계악(桂萼) 등의 이 일로써 한 시대를 크게 어지럽히고 천하 후세에 죄를 지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고계(考啓)한 서두에도 이미 ‘황명(皇明) 세종이 예종이라 칭한 바는 오늘날에 본뜰 만한 것이 아니나, 다만 소주(小註) 중에 신종 황제가 예종이라 칭한 축호는 오늘날 방고(傍考)의 자료가 될 듯하다.’ 하였으니, 신 등의 부경(孚敬)503) 이 영합(迎合)하는 의논을 엄중히 배척한 것은 신종이 ‘사(嗣)’자를 일컫지 않은 뜻에 취함이 있음을 환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세종이 예종이라 일컬은 것은 우리 나라 성종(成宗)이 덕종(德宗)이라 일컬은 것과는 아주 다르다.’고 하였으니, 우리 조종의 가법이 명백하고 정대(正大)함은 천고에 뛰어났습니다. 신 등이 중점을 둔 것은 사실 만력(萬曆)에 있었으나 이 일의 발단은 가정(嘉靖)에 있었으니, 일의 머리에 따라 상설(詳說)하려 함은 사세(事勢)가 그렇게 되었는데, 어찌 일찍이 사론(邪論)을 추중(推重)한 것이 당시의 석서(席書)504) 처럼 하여 양신(楊愼)505) 등의 죄인이 된 것을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전 현감 채지홍(蔡之洪)이 응지(應旨)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덕은 높고 사업은 넓어 하늘까지 쌓이고 끝까지 닿으니, 비평할 여지가 없습니다만, 헤아려보면 지금 국옥(鞫獄)은 해마다 연이어 끝날 기약이 없으니, 고문의 형벌은 소원(疏遠)한 데만 미치고 관용의 은전(恩典)은 귀근(貴近)에게만 치우치게 미치는 것입니까? 조정이 분열되어 경알(傾軋)함이 습성을 이루었으니, 군자(君子)의 진용(進用)은 띠뿌리가 연하여 뽑히듯이 일제히 진용되지 못하고 소인(小人)의 물러남은 며느리발톱이 떨어지듯이 일제히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까? 기구(耆舊) 대신이 밖에서 방황하니, 정사(政事)가 혹시 궐실(闕失)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언관(言官)이 아래에서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아첨하는 사람이 혹시 뜻을 편 것이 아닙니까? 명교(名敎)는 문란하고 관기(官紀)가 혼잡하니, 덕의(德義)는 쇠하고 오독(汚瀆)이 판친 것이 아닙니까? 사경(私逕)이 열리고 원왕(寃枉)이 쌓였으니, 화뢰(貨賂)가 행해지고 은택(恩澤)이 막힌 것이 아닙니까?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혹시 위태롭게 될 것이니, 다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화평한 마음으로 생각을 바꾸시고 자기 몸에 반성(反省)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늦추고 백성의 마음에 따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1월 3일 무진
완릉군(完陵君) 이현록(李顯祿)이 졸(卒)하였다. 전교하기를,
"훈신(勳臣)의 손자로 그 재주가 쓸 만함도 알고 있는데, 이제 이 단자를 보니 마음이 매우 슬프다. 후하게 부의(賻儀)를 내려 나의 뜻을 보여라."
하였다. 이현록은 부허(浮虛)하여 거용(擧用)할 것이 없었는데도 조문명(趙文命)의 당에 붙어 맨 먼저 공직(供職)하였기에, 임금이 총애(寵愛)하여 죽음을 슬퍼한 것이다.
약방(藥房)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의 관원이 임금의 병환을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마패(馬牌)에 관한 일은 재자관(䝴咨官)506) 의 수본(手本)507) 을 보건대 무사히 되었다 하니, 다행한 일이다. 듣건대, 그 재이(災異)가 예사롭지 않은 모양인데, 혹자는 말하기를, ‘오랑캐는 백년의 국운(國運)이 없다.’고 하지마는, 우리 나라도 마땅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니,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이번 그곳의 지진(地震)은 옛날에 없었던 것으로, 성안의 인가(人家)가 무너진 것이 거의 4만에 이르렀다 합니다. 우리 나라는 저들 나라와 분야(分野)가 같기 때문에 재이(災異)도 매양 서로 비슷하게 되니, 이 점이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듣건대, 황극전(皇極殿)의 한 모퉁이가 무너졌다 하니, 이것은 멸망할 징조(徵兆)입니다. 그곳에 난리가 있으면 우리 나라에도 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성상께서 자반(自反)과 계구(戒懼)의 전교가 계셨음은 나라의 복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승(萬乘)의 임금으로서 지진을 피하여 배를 띄워 막을 치고 거처한다 하니, 거조(擧措)가 해괴하다 하겠다. 방금 그곳의 재이(災異)를 말하고 있으나, 어제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를 보니, 이것도 또한 재이이다. 지금 조정은 좀먹은 나무와 같으므로 형세가 완전하지 못하고 아직도 의심과 간격(間隔)이 많지만, 힘써 보합(保合)하고 끊임없이 진작(振作)하면 효과가 있으리라 여기는데, 김유경의 상소 가운데 말뜻이 아주 참혹한 것은 내 차마 끌어내 말하지 못하지만, ‘조정에 가득히 있는 신료들이 손을 잡으면서 서로 하례했다.’는 말은 진신(搢紳)을 도륙(屠戮)하려는 계책에 불과한 것이니, 이를 참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상소를 진짜 재이로 여긴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기필코 조정을 영정(寧靖)케 하려 하시지마는, 근래에 사람들의 의견이 같지 않아 진출하기를 어렵게 여김을 옳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는데, 다만 김유경 한 사람뿐이 아닙니다. 김유경은 재주가 있어 쓸 만하므로, 본래부터 경알(傾軋)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됨이 준엄(峻嚴)하기 때문에 상소의 어조(語調)가 완곡(婉曲)하지 못한 것이지만, 소장을 불사른다는 말은 일찍이 듣지 못한 바로서 신은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유경은 기필코 진신(搢紳)을 도륙(屠戮)하려고 한 것이다. 저의 의도에 이러지 않고서는 군주를 움직이지 못할 것으로 여긴 것이다. 내가 비록 혼암(昏暗)하지만 어찌 저의 정상(情狀)을 모르겠는가? 이 사람은 반복하여 토역(討逆)을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을사년508) 에는 피면(避免)하더니 이제는 무신년509) 에 조정에 있던 사람은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 하니, 실정을 안 사람은 이미 사형(死刑)을 당하여 살아남은 자가 다시는 없는데, 제가 제 눈으로 보고 알았다는 것인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을사년에는 김유경이 최석항(崔錫恒)과 5촌 숙질(叔姪)이 되었던 까닭으로 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참으로 토역(討逆)을 하려면 마땅히 대의 멸친(大義滅親)을 주계군(朱溪君)처럼 하여야 할 것인데,510) 어떻게 5촌 친척(親戚)에 있어서이겠는가? 이 또한 말이 조리에 맞지 않는다. 소인(小人)이 구참(構譖)하는 상소는 결단코 남겨두어 후사(後史)에 기록케 할 수는 없다. 만일 승정원(承政院)에 내주어 불사르라 한다면 혹시 승정원을 비난하고 지척(指斥)하여 그대로 시끄러운 단서(端緖)가 되겠기에, 어제 전정(殿庭)에서 불사르게 한 것이다. 김유경을 위하여 편을 든 사람이 역사를 쓴다면 혹시 직언(直言)이라고 쓸 수가 있겠지마는, 조금이라도 신하로서의 마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상소는 이미 불에 던져졌는데 무슨 혐의할 일이 있기에, 어제 한림(翰林) 홍창한(洪昌漢)의 진소(陳疏)가 곧바로 나왔으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는 한 사람의 미관(微官)으로서 어찌 감히 형적(形迹)을 스스로 나타내는가? 나추(拿推)하고 이후로는 이 일로 인혐(引嫌)하는 상소는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대상(大祥)이 이미 다가왔는데, 예조(禮曹)에서 비록 의주(儀註)를 마련한 일은 없으나 성인(聖人)이 정리(情理)로 인하여 예절을 제정하였으니, 모든 예절이 인정(人情) 밖에 벗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일찍이 사부(師傅)·빈객(賓客) 및 춘방(春坊)511) ·계방(桂坊)512) 의 요속(僚屬)들이 의주가 없다는 이유로써 진참(進參)하지 않는다면, 어찌 결연(缺然)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특별히 배제(陪祭)를 허락하심이 옳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윤혜교(尹惠敎)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추(朴樞)·박윤동(朴胤東)을 장령(掌令)으로, 신택하(申宅夏)를 정언(正言)으로, 김상성(金尙星)을 헌납(獻納)으로, 이정제(李廷濟)를 예조 참판으로, 김상옥(金相玉)을 병조 참판으로, 송진명(宋眞明)을 우윤(右尹)으로, 정석오(鄭錫五)를 동의금(同義禁)으로, 박문수(朴文秀)를 도승지(都承旨)로, 안중필(安重弼)을 승지로, 윤순(尹淳)을 함경도 별견 중신 시관(別遣重臣試官)으로 삼았다.
11월 4일 기사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충청도 홍양(洪陽) 유학(幼學) 김두린(金斗麟)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 등이 살고 있는 곳에 노은 서원(魯隱書院)이 있는데, 바로 육신(六臣)을 병향(並享)한 사액(賜額) 서원으로 성삼문(成三問) 부자(父子)가 살던 유지(遺址)입니다. 성삼문의 집 전토(田土) 십수여 결(結)이 도내(道內)의 연산(連山) 땅에 있는데, 당초에는 충훈부(忠勳府)에 적몰(籍沒)됐던 것을 특명으로 환급(還給)하여 면세(免稅)해 온 지가 거의 3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계묘년513) 에 이르러 갑자기 전세(田稅)를 내라는 영이 있었으나, 대신(大臣)의 건백(建白)으로 노은 서원의 위토(位土)는 모두 면세할 것을 특교(特敎)로 판하(判下)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전세를 내라는 영이 다시 그전과 같아서 지금 십수 결의 전세가 곧 관아의 독납(督納)하는 속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영고(寧考)514) 께서 획급(劃給)하신 성대한 뜻을 추념하여, 전일에 이미 반하(頒下)하신 성명(成命)대로 특별히 전세를 징수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원전(院田)은 다른 원전과는 구별이 있으니, 특별히 전대로 면세케 하라."
하였다.
대사간 심준(沈埈)이 상소하여 해서(海西)515) 역전(驛田)의 복호(復戶)516) 를 강매(强買)하는 폐단과 무학(武學)·진군(鎭軍)의 과외(科外)의 군역(軍役)에 대하여 아뢰고 특별히 엄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11월 5일 경오
사헌부 【집의(執義) 한사득(韓師得)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제 삼도감(三都監)에서 서계(書啓)한 상전(賞典) 가운데 여러 승선(承宣)517) 에게 논상(論賞)하는 은전(恩典)이 혹은 가자(加資)하고 혹은 마필(馬匹)을 내리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전례에 없던 것이므로 무슨 공로가 있었기에 이러한 상(賞)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청컨대 여러 승선에게 논상하는 명을 모두 환수(還收)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승정원으로 하여금 고계(考啓)하라 하였다."
하였다.
신만(申晩)을 지평(持平)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정언(正言)으로, 정형익(鄭亨益)을 형조 참판으로, 송인명(宋寅明)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이종백(李宗白)을 교리(校理)로, 한현모(韓顯謨)를 부교리로, 서명구(徐命九)를 수찬(修撰)으로, 여선장(呂善長)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전 평사(評事) 이흡(李潝), 교리(校理) 황정(黃晸), 병조 좌랑 오원(吳瑗), 헌납(獻納) 김상성(金尙星)을 인견(引見)하고 친히 봉서(封書)를 주면서 경상·전라·충청·경기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어 감사와 수령의 치부(治否)를 염찰(廉察)케 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지금 멀리 떠나게 되었으니, 감히 우러러 진달(陳達)합니다. 조정은 사방의 근본이니 조정이 바르게 된 뒤에라야 교화(敎化)가 사방에 두루 미치며, 조정의 근본은 임금의 마음에 있으니 임금의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야 조정이 바루어질 수 있습니다. 신 등이 떠나간 뒤에라도 자주 강연(講筵)을 열어 좋은 치도(治道)를 물어서 자혜(子惠)518) 의 은택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면 어찌 일시의 염찰(廉察)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북방에서 전해온 소시근 놀라울 일이 없지도 않는데, 주자(朱子)도 ‘내정(內政)을 정돈하고 외적(外敵)을 물리쳐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분발하셔서 우리의 자강(自强)하는 계획을 넓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을 받들고 나가면서도 마음을 국사에 두어 면계(勉戒)하는 말이 자못 절실하니, 유념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11월 6일 신미
하교하기를,
"일전에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를 불사른 것은 참소를 미워하는 뜻으로 또한 한 소제(漢昭帝)의 일519) 을 따랐던 것이다. 그 뒤에 생각해보니, 후왕(後王)이 나의 본뜻은 살피지 못하고 충신의 직언(直言)에 이 일을 인용한다면 그 폐단은 나에게서 비롯될 것이니, 어찌 중도에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어제 입진(入診)하였을 때에 이미 뜻을 보였는데, 승선(承宣)의 진계(陳戒)가 절실하니, 바로 나의 뜻과 같았다. 이미 그것이 중도에 지나쳤음을 알았으니, 하유(下諭)하지 않으면 어찌 성심(誠心)이겠는가? 역시 식비(飾非)520) 를 면치 못할 것이다. 아! 이번의 하교는 나의 과실을 알리는 것이지 원소(原疏)가 옳다는 것은 아니다. 이르노니, 대소(大小) 관원들은 마땅히 나의 참소를 미워하는 마음을 체념(體念)하고 나의 과실을 알지어다."
하였다. 승지 유엄(柳儼)이 연석(筵席)에서 ‘그 사람은 죄줄 만하지만 그 상소를 불사를 수가 없다.’고 진계(陳啓)한 바가 있었으므로, 임금이 이 하교를 내린 것이다.
약방(藥房)의 도제조(都提調) 이하가 임금의 증후(症候)를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장연 부사(長淵府使) 이유(李瑜)는 경직(京職)으로 돌리고 정의 현감(旌義縣監) 권혁(權爀)은 옥서(玉署)에 검의(檢擬)521) 하라 명하니, 도제조 홍치중(洪致中)의 말에 따른 것이다.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정제(李廷濟)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정석오(鄭錫五)를 좌윤(左尹)으로 삼았다.
11월 7일 임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여러 승지(承旨)에게 논상(論賞)하는 명을 환수하는 일은 정지시켰다.
도승지(都承旨) 박문수(朴文秀)가 구대(求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지금 겸무하고 있는 바는 보호(保護)의 직책입니다. 겨울 추위가 요사이 혹심하니, 능행(陵幸)을 내년 봄까지 미루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이 말은 고심(苦心) 끝에 나왔겠으나, 경도 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능행(陵幸)을 중지해서는 안됨을 알 것이다. 동지(冬至)가 이달 13일이니 처음 절일(節日)을 맞아 꼭 친히 제사지내려고 했으나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동지에는 섭행(攝行)하여 경의 권권(眷眷)한 성의에 답하겠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이양신(李亮臣)의 상소에 신이 적정(賊情)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이런 무망(誣罔)이 밝혀지기 전에 신이 어떻게 세상에 서겠습니까? 신이 만일 실정을 알았다면 쾌히 지정 불고(知情不告)의 죄를 승복할 것이며, 이양신이 사람을 무구(誣構)했다면 무인(誣人)의 형률이 있기 마련이니 나라에서 엄중히 징벌(懲罰)하는 도리로서는 마땅히 명백하게 핵실(覈實)했어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신과 이양신을 실정을 알았는지 실정을 몰랐는지, 무함(誣陷)했는지 안했는지의 중간에 두고 아무런 처분도 없이 한갓 작록(爵祿)으로 얽어매고 분의(分義)로만 책망하니, 신이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끝내 지나치도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공이 있는 사람을 포상함은 실로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가 됩니다. 무신년522) 적변(賊變)이 발생했을 때에 문경(聞慶)의 남도일(南圖逸)은 마침 관청이 비었을 때를 당하여 군병을 이끌고 조령(鳥嶺)의 요해처를 지키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새 수령(守令)을 차송(差送)했는데도 마패(馬牌)나 관교(官敎)가 없었던 까닭에 남도일이 이치에 의거해 받아주지 않다가 조정에서 차송하였음을 분명히 안 연후에야 비로소 도임(到任)을 허락했으며, 진주(晉州)의 문응익(文應翼)은 변란의 초기에 영장(營將)이 진작 토적(討賊)치 않자 문응익은 천총(千摠)으로 충분(忠憤)을 견디지 못하여 병사(兵使)를 들어가 만나보고 말하기를, ‘토적(土賊)이 처음 일어났을 때 즉시 초멸(勦滅)치 않다가 흉세(凶勢)가 점점 커지면 참으로 제어키 어렵습니다.’ 하고, 이어 영장의 형편없음을 털어놓고 말하다가 곤장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수용(收用)치 않으면 무엇으로 격려 권장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을 수용하도록 양전(兩銓)523) 에 분부하라."
하였다. 뒤에 대신의 주청(奏請)에 의하여 남도일은 참봉(參奉)에 부직(付職)되고 문응익은 먼저 금위 군관(禁衛軍官)에 차하(差下)했다가 첨사(僉使)에 전차(轉差)하라는 명이 내렸다.
박사정(朴師正)을 교리(校理)로, 임수적(任守迪)을 부교리(副校理)로, 박사익(朴師益)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10일 을해
임금이 시사복(視事服)을 입고 보련(步輦)으로 명정문(明政門)을 거쳐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가서, 쌍교(雙轎)를 타고 의릉(懿陵)에 당도하여 재실로 들어가 잠시 쉬고 능 아래에 나아가 전애(展哀)한 후, 먼저 경종(景宗)의 능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다음으로 왕후의 능으로 나아가 봉심하였으며, 정자각(丁字閣)에 나아가 제물(祭物)의 간심(看審)을 마치고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시사복으로 갈아입고 구(舊) 정자각에 나아가 행사(行祀)를 마친 다음 최복(衰服)을 입고 신 정자각에 나아가 행사(行祀)하고 군신(君臣)이 모두 곡하며 전애(展哀)하고는 능 아래로 돌아와 곡하고 하직하였다. 재실에서 경기 감사 조상경(趙尙絅)과 각 차원(差員)을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양주(楊州) 백성들이 새 능역(陵役)을 전적으로 담당하였으니, 무슨 위로할 만한 정사가 있겠는가?"
하니, 조상경이 말하기를,
"금년은 조금 풍년이 들었으나 여러 해의 환곡(還穀)을 전량 독봉(督捧)케 한다면 백성들이 장차 지탱하지 못할 것이니, 구환(舊還)의 포흠(逋欠)을 정봉(停捧)케 한다면 마땅히 실혜(實惠)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안성 군수(安城郡守)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구포(舊逋)의 환곡은 토호(土豪)들이 으레 미납이 많으니, 비록 탕감(蕩減)해준다 해도 혜택이 백성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대동미(大同米)를 제감(除減)해 주는 것도 또한 부민(富民)에게만 유익하고 소민(小民)에게는 이로움이 없습니다. 결역(結役)을 견감(蠲減)하는 것만이 실혜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을사년524) 기유년525) 에도 결역(結役)을 제감해 준일이 있었으니, 비국 당상(備局堂上)으로 하여금 품의(稟議)해 처치케 하라."
하였다. 이종성이 선반미(宣飯米)를 갑진년526) 의 예(例)대로 지부(地部)527) 로 하여금 능소(陵所)로 직납(直納)케 하여 경기 백성들의 폐해를 덜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예(例)를 상고하여 품처(稟處)할 것을 윤허하였다. 미시(未時)에 궁궐로 돌아와서 수릉관(守陵官) 해풍군(海豐君) 강(橿) 이하의 관원에게 가자(加資)를 명하고 하교하기를,
"나라에 연이어 상고(喪故)가 있어 경기 백성이 곤췌(困悴)가 근년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 하물며 양주(楊州) 백성은 10여 년 동안 큰 역사를 당한 것이 그 수가 더욱 많았다. 신릉(新陵)에 전애(展哀)하니 망극지통(罔極之痛)이 새롭고 평일에 백성을 구휼(救恤)하던 덕을 본받아 경기 백성들의 곤췌한 모습을 살펴보니 애통한 중에도 다친 자를 보듯 하는 마음이 풀리지를 않는다. 을사년과 기유년의 봄거둥 때에 이미 베푼 바가 있었으나 일이 선후가 다르니 마땅히 때에 따라 실시해야 할 것으므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등대(登對)할 때에 품처(稟處)케 하라."
하였다.
11월 10일 을해
제갈무후(諸葛武候)528) ·악무목(岳武穆)529) ·왕 문중자(王文中子)530) 에게 제사지낼 것을 명하고 옹정(雍正)531) 의 연호를 쓰지 말라 하였다.
11월 11일 병자
임금이 윤대관(輪對官)532) 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조명신(趙命臣)이 말하기를,
"난역(亂逆)이 어느 시대엔들 없겠습니까마는, 어찌 무신년533) 의 역적과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무신년의 역류(逆類) 중에서도 어찌 나홍언(羅弘彦) 같은 자가 또 있겠습니까? 흉두(凶肚)·역장(逆腸)으로 후세에까지 속이려 하였으니, 신 등이 부심(腐心)·통골(痛骨)한 바는 다만 여기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다른 염려는 없지마는, 시일이 멀어지면 날로 잊혀지고 때가 지나면 일도 변하여 어떠한 변괴(變怪)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발생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일전에 유신(儒臣)의 상소를 보건대, 책을 한 권 만들어 후세에 전시(傳示)하려고 한다 하였으니, 이른바 심장(深長)한 생각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 흉역(凶逆)의 말은 말할 가치도 없으니, 비록 책자를 만든다 해도 분소(分疏)534) 와 같을 것이다. 저와 같은 흉언(凶言)은 비유하자면 사기(邪氣)와 같으므로 자연히 소멸할 것인데, 어찌 문자에 기재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야사(野史)에 기록하는 것이 좋을 것이나, 조정에는 공필(公筆)이 없으니 누구더러 기록하라 하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지엽적(枝葉的)인 것이다. 승지가 마침 나홍언의 책을 보았기에 그렇게 말한 것인데, 저 나홍언처럼 숨어 있는 것은 또 어떻게 처치해야 할 것인가?"
하였다.
형조 판서 이진망(李眞望)을 진수당(進修堂)에서 인견하고 서울 집에 머물면서 경연(經筵)에 출입해 줄 것을 권면하니, 이진망이 우선 머물러 있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진망은 임금의 사저(私邸) 때의 사부(師傅)이다.
박찬신(朴纘新)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윤흥무(尹興茂)와 조상행(趙尙行)을 지평(持平)으로, 신치근(申致謹)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11월 12일 정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고 양주(楊州)의 구환곡(舊還穀)과 신포(身布)는 모두 정봉(停捧)하며, 기타 기읍(畿邑)은 가장 많은 1년 조 가운데 5분의 4만 받으라 명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 등이 주전(鑄錢)의 논의를 다시 펴고 매우 힘주어 청하니, 임금이 시종 난색(難色)을 보이며 말하기를,
"전번에도 2품 이상의 관원이 주전(鑄錢)의 일로써 헌의(獻議)하였었는데, 말이 대부분 긴요치 않으므로 마침내 행해질 수가 없었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각도(各道)에 공문(公文)을 보내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민정(民情)을 수렴하여 장계(狀啓)로 주달(奏達)케 하라."
하였다.
11월 13일 무인
경휘전(敬徽殿)의 동지(冬至) 제사를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다.
11월 15일 경진
임금이 친히 경휘전에 망제(望祭)를 올리고 전교하기를,
"내가 경자년535) 이후로 여러 차례 배제(陪祭)에 참여하여 보니, 정시(正時)가 되기 전 1각에 외의(外儀)가 올라가고 외의가 올라간 후에 감찰(監察)이 점시(點視)하면 헌관(獻官) 이하의 제관(祭官)이 이어서 자리에 나가 정제(整齊)하고 정시(正時)가 되기를 기다렸었다. 그후에는 대신들이 오래 서 있기를 꺼려 수복(守僕)을 호되게 꾸짖었기에 매양 정시(正時)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불러들여 자리에 나아가게 하였는데,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엊그제 동지(冬至)의 향사(享事)는 비록 섭행(攝行)을 하였으나, 나의 거처와는 아주 가까웠던 까닭으로 들어보니, 역시 정시가 된 뒤에야 불러들여서 자리에 나아가게 하였는데, 이것은 편(便)한 대로 하려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 나는 전후로 친히 제사지낼 때에 시각이 된 뒤에는 편안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바로 나가서 기다렸다. 요사이 혼궁(魂宮)의 조석 상식(上食)에도 매양 정시가 된 뒤에 제관(祭官)을 불러 들어와 자리에 나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그대로 유례(謬例)가 되어 이러한 폐단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후로는 친행(親行)·섭행(攝行)을 막론하고 모든 제향(祭享) 때에는 정시(正時)의 1각(一刻) 전에 감찰이 점시한 후에 헌관 이하의 제관(祭官)이 모두 자리에 나아가 정시를 기다리도록 신칙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혼궁(魂宮) 대상일(大祥日)에 친림(親臨)할 것이니, 소상(小祥) 때의 의주(儀註)대로 마련하여 들이라. 이번에도 역복(易服)536) 의 절차가 없으니, 정시(正時)에 마땅히 친히 나갈 것이다. 작년의 예대로 승지·사관(史官)·예조 판서·통례(通禮)·인의(引儀)는 입시(入時)하고 내일과 모레는 긴급한 공사(公事)가 아니면 들이지 말라."
하였다.
11월 16일 신사
임금이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혼궁(魂宮)에 친히 나가서 전애(展哀)하였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7일 임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사신(使臣)의 장계를 보건대, 부사(副使) 윤유(尹游)가 중도에서 병이 위중하여 사행(使行)의 일이 낭패(狼狽)되었다고 하니, 변통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홍치중이 공조 판서 윤순(尹淳), 수어사(守禦使) 신사철(申思喆),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을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으로 임명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쪽의 보고(報告)가 이와 같은데 비국의 소임이 이름만 있고 실상(實狀)은 없으니, 적합한 사람을 골라 계하(啓下)토록 하라. 참의(參議) 이광덕(李匡德)을 서용(敍用)하여 유사의 직임(職任)에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임금이 홍치중에게 하유하기를,
"경은 재자관(䝴咨官) 이추(李樞)를 만나보았는가?"
하니, 승지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승정원에서 불러와 물어보니, 그가 몸소 지진(地震)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에서는 모두 사기(沙器)를 쓰고 있는데 서로 부딪쳐 깨졌고, 그가 나온 뒤에 지진은 더욱 심했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성(皇城) 바깥도 또한 그러했다 하더냐?"
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성 바깥도 또한 그러했으며, 원명(圓明)·창춘(敞春) 등의 궁궐도 수없이 무너지고 또 관동(關東)에는 큰 비가 내려 수천 리가 잠겼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랑캐는 백년의 국운이 없다 하더니, 재이(災異)가 이러하구나. 우리 나라는 비록 설치(雪耻)할 마음이야 있지만,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어찌 시리지 않겠는가? 청황(淸皇)537) 은 매양 우리 나라를 돌봐 주는데 우리 나라는 빈들거리며 지내고 있다."
하니, 홍치중이 말하기를,
"명(明)나라는 각박(刻薄)하여 인심을 단결(團結)시키지 못했기에 백성들이 한(漢)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538)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랑캐의 국운(國運)이 이와 같은데 우리 나라는 무사(無事)한 때에 있는 것같다. 만일 북방의 근심과 남방의 경보(警報)가 있으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홍치중이 아뢰기를, "성려(聖慮)가 심원(沈遠)하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8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23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외교(外交)
[註 537] 청황(淸皇) : 청나라 황제.[註 538] "명(明)나라는 각박(刻薄)하여 인심을 단결(團結)시키지 못했기에 백성들이 한(漢)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 전한(前漢) 말에 왕망(王莽)이 한(漢)나라를 찬탈하여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져, 이전의 한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말. 여기서는 명(明)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음을 말함.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랑캐의 국운(國運)이 이와 같은데 우리 나라는 무사(無事)한 때에 있는 것같다. 만일 북방의 근심과 남방의 경보(警報)가 있으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홍치중이 아뢰기를,
"성려(聖慮)가 심원(沈遠)하옵니다."
하였다.
박필재(朴弼載)를 정언(正言)으로, 이도원(李度遠)을 수찬(修撰)으로, 이진망(李眞望)을 지경연(知經筵)으로, 박사익(朴師益)을 형조 판서로, 윤휘정(尹彙貞)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11월 18일 계미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혼궁(魂宮)을 철거하고 입번(入番)한 종실 밀양군(密陽君) 완(梡) 이하의 관원에게 상전(賞典)을 내렸다.
김흡(金潝)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이진망(李眞望)을 좌참찬(左參贊)으로, 김동필(金東弼)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이종백(李宗白)과 황정(黃晸)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1월 19일 갑신
이진망(李眞望)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삼았는데, 전 대제학 조문명(趙文命)이 천거한 것이다.
송진명(宋眞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윤혜교(尹惠敎)를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11월 20일 을유
반궁(泮宮)539) 에 황감(黃柑)을 나눠 주고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 수석(首席)을 차지한 허후(許逅)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540) 하게 하였다.
좌의정 이집(李㙫)이 초도(初度) 정사(呈辭)541) 하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서 면유(勉諭)하였다.
11월 21일 병술
지평(持平) 조상행(趙尙行)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엊그제 연석(筵席)에서 ‘사람을 가려 자리를 메울 일이 있으면 대신에게 물어서 하라’는 전교가 계셨다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나라에서 관(官)을 설치하여 직무를 분장시킴은 각기 담당한 바가 있습니다. 현인(賢人)을 진용(進用)시키고 사인(邪人)을 물리쳐서 백관(百官)을 총리(摠理)하는 것은 원래 대신의 소임이지만, 내외(內外) 관직의 선제(選除)나 주의(注擬)의 득실(得失)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전관(銓官)에게 책임지우고 혹시 사정(私情)에 따라 공정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책망하는 것도 좋겠고 처벌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부사(府使)·목사(牧使)의 임명에까지 반드시 대신에게 품(稟)하고 자전(自專)치 못하게 한다면, 전관에 있어서는 직무를 잘못한 것이 되고 대신에게 있어서는 전조(銓曹)를 침범한 것이 되는 것이니, 이는 아마도 성조(聖朝)의 실정(失政)이 될 것입니다. 신은 빨리 명을 거두어 들여야 된다고 여깁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성찰(省察)하지 않았다.
11월 22일 정해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3일 무자
좌의정 이집(李㙫)이 재도(再度) 정사(呈辭)했으나,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서 면유(勉諭)하였다.
어영청(御營廳)에서 아뢰기를,
"본청에서 효시(梟示)한 죄인 함석량(咸錫良)은 역적의 와주(窩主)542) 이므로, 적들이 패퇴할 때 깊은 산중으로 도망해 숨었었는데, 이제 이미 잡아다가 사형(死刑)에 처했습니다. 망명한 여러 적들 중 잡지 못한 자가 아직도 많으니, 지시(指示)하거나 체포한 사람은 마땅히 별도로 논상(論賞)하는 길이 있어야겠습니다. 지시인(指示人) 한량(閑良) 이지달(李枝達)과 포착인(捕捉人) 별초 군관(別抄軍官) 최암(崔巖)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지(稟旨) 시상(施賞)케 하여 격려 권장하는 터전을 삼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24일 기축
이보다 앞서 좌부승지(左副承旨) 유엄(柳儼)이 임금께 사뢰기를,
"영희전(永禧殿)543) 에 전알(展謁)할 때에 삼실(三室)에 한 통의 제문(祭文)을 쓰는 것은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세조(世祖)와 원종(元宗)의 실(室)에 태조(太祖)의 일을 고(告)하는 것은 혹시 무방하겠지만, 태조실(太祖室)의 제문으로 세조와 원종의 실에 고하는 일은 어찌 매우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신과 유신(儒臣)들에게 물어 따로 제문을 만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전(眞殿)544) 은 비궁(悶宮)545) 과는 다르지만, 제문을 같이 쓰면서도 그대로 고치지 않는 것은 나의 마음에도 또한 미안스럽게 여겨진다. 대신과 유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은 헌의(獻議)하기를,
"한 통의 제문을 삼실에 쓰는 것은 외면(外面)으로 보아서는 참으로 미안한 것 같지만, 그러나 종묘(宗廟)의 제향 때에는 오직 선조(宣祖)의 실(室)에만 별악장(別樂章)이 있고 그 이상의 사조(四祖)와 태조·태종의 공덕에는 태조 이하의 각실(各室)에 통용하고 있으니, 어찌 소중한 것이 숙경(肅敬)의 처지에 있음으로써 유고(侑告)의 악절(樂節)은 마땅히 간략하고 번독(煩瀆)스럽지 않아야 하기에 명(明)나라 조정에서 통용하는 묘악(廟樂)의 제도에서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진전(眞殿)의 제문은 한 가지 글이라 하지만, 그 중에는 각기 지칭(持稱)하고 찬양한 말이 있으니, 그것이 오로지 사조(四祖)와 태조·태종의 악장을 각실에 통용하는 것과 비교하면 또한 다른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의 의견은 전대로 쓰는 것이 고쳐 짓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도리에 적합할 듯합니다."
하였고,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는 헌의하기를,
"삼실(三室)에 한 통의 축문을 쓰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듯하지만, 태묘(太廟)에 친향(親享)할 때도 각실(各室)의 축문이 역시 하나의 글이니, 만일 찬술(贊述)한 공덕이 각각 다르므로 통용할 수 없다고 여긴다면 다만 상세하게 조사(措辭)를 하는 것이 마땅하고, 전일에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한 규례라 하여 새로 만드는 것은 마땅치 않을 듯합니다."
하였으며,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의 의논도 이태좌와 같았으므로, 임금이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명하였다.
김재로(金在魯)와 송인명(宋寅明)을 실록(實錄) 도청 당상(都廳堂上)에 임명하고, 이종백(李宗白)과 윤섭(尹涉)을 도청 낭청(都廳郞廳)에 임명하였다.
국청(鞫廳)의 대신 조문명(趙文命) 이하의 관원이 구대(求對)하였다. 대개 일전에 국안(鞫案)을 가지고 입시(入侍)하라는 전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여러 국수(鞫囚)의 문안을 읽으라 명하였는데, 그 중에서 신문할 일이 없는 자는 놓아 보내고 조금이라도 어긴 단서가 있는 자는 참착하여 정배(定配)하였으며 정절(情節)이 의심할 만한 자는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였다. 정업(貞業)은 모역(謀逆)의 실정을 알았고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誣陷)하였다 하여 결안(結案)을 받으라 명하였고, 심익연(沈益衍)은 정형(正刑)546) 에 처할 것을 명하였으며, 형(炯)과 식(烒)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이르기를,
"세도(世道)가 괴이(乖異)하여 인조(仁祖)의 자손으로서 낙봉(駱峯) 아래에 사는 자는 빠짐이 없구나."
하고, 도배(島配)를 명하였다. 혐의가 깊고 중하여 풀어줄 수 없는 자는 전대로 궁핵(窮覈)하라 명하였고, 서북의 강변(江邊)에 살면서 연좌(緣坐)된 무리들은 도내(道內)의 각 고을에 나눠 보내라 했는데, 대개 저들의 땅과 서로 가까움을 염려한 때문이다. 대사간(大司諫) 심준(沈埈)이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읽기를 계속하여 순혜(順惠)의 일에 이르자 조문명이 말하기를,
"신은 이 계사(啓辭)에 대하여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요사이 와언(訛言)이 크게 일어나 순혜가 배소에 도착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도하(都下)와 팔로(八路)가 일시에 떠들고 있습니다. 이 계사대로 따른 후에라야 와언이 그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듣기에도 매우 절통(節痛)하다. 적당한 형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궁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아이를 배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어찌 놀랍고 괴이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괴이하단 말은 내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전만적(田萬績)의 일도 아뢴 대로 하라 하고 권부(權扶)의 일에 대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일의 허실(虛實)은 알 수가 없지마는, 국청(鞫廳)에서 구문(究問)한 것은 지나친 일이다. 금오(金吾)로 하여금 엄중히 신문하라."
하였다. 심준이 또 아뢰기를,
"국청 죄인 여필적(呂必迪)은 역적 정사효(鄭思孝)가 전라 감영에 있을 때 막비(幕裨)547) 의 자리를 도득(圖得)하려 하였고 또 부안(扶安) 땅에서 잠적(潛跡)한 일도 있어 의심스런 대목이 있었는데, 이제 또 긴절하게 역적 이함(李椷)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나 미처 끝까지 캐지도 못하고 지레 작처(酌處)하였습니다. 청컨대 여필적의 절도 정배(絶島定配)의 명을 도로 거두시고 다시 엄중히 핵실(覈實)하여 기어코 죄상을 밝히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죄인 형(炯)과 식(烒)은 여러 역적의 초사에 긴절히 나왔는데도 미처 국문하지 않고 앞질러 작처하였으니, 국법으로 논한다면 결국 형정(刑政)을 그르침이 됩니다. 청컨대 형과 식을 도배(島配)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전일에 아뢴 고성 현감(固城縣監) 이만흥(李萬興)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집의(執義) 한사득(韓師得)이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형(炯)과 식(烒)은 심익연(沈益衍)의 초사(招辭)에도 긴절하게 나오고 그의 심부름을 했다는 말은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도, 갑자기 작처(酌處)하면 결국 안옥(按獄)의 사체(事體)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니, 청컨대 형·식을 정배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고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전일에 아뢴 순혜(順惠)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11월 25일 경인
대신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공신(功臣)·유현(儒賢)·청백리(淸白吏)·전망인(戰亡人)의 자손이라도 적장(嫡長) 외의 지손(支孫)은 수용(收用)하지 말라고 명을 내리셨는데, 대개 적장의 음직(蔭職) 계승은 제사를 받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손도 또한 모두 빙자(憑藉)하여 청탁(請托)하고 인연(夤緣)하여 입사(入仕)하니, 그 폐단이 도도(滔滔)하여 관리의 규율이 혼탁하고 요행의 문이 크게 열림이 이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요행의 문은 비록 막는다 하더라도 적장(嫡長)이 어찌 반드시 지손(支孫)보다 어질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공신은 백세(百世)토록 부조(不祧)548) 하는데, 적장손(嫡長孫)은 혹 쇠체(衰替)하여 향화(香火)를 잇지 못한 자가 있으니, 나라에서 적장을 녹용(錄用)하는 것은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신·유현·청백리·전망자의 자손을 논할 것 없이 그 적장과 적장이 없는 경우는 지손으로 봉사(奉祀)한 자만 녹용하고 그 밖의 지손은 논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저들과 우리 나라가 교제하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역관(譯官)에게만 의지해 왔는데, 근래에 한어(漢語)는 거의 씨가 끊어져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대개 한학 우어청(漢學偶語廳)은 바로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창설한 것이므로, 한인(漢人)인 정선갑(鄭先甲)·문가상(文可相)을 훈장(訓長)으로 삼아 생도(生徒)를 가르치게 했던 까닭으로, 그때에는 아주 성과가 있었는데, 지금의 통역(通譯)하는 무리 중에서 한어를 잘하는 자들도 또한 지류(支流)입니다. 지금은 우어청의 그 이름만 있고 그 실효는 없습니다. 대저 권장하는 길은 반드시 상전(賞典)이 있어야 격려 권장할 수가 있는데, 녹과(祿窠)도 없고 따라서 체아직(遞兒職)549) 도 우어청에 미치는 일이 없습니다. 대개 설학(舌學)은 10인이 청(廳)을 이루면 녹과(祿窠)는 하나뿐이지만, 청학(淸學)에 있어서는 열 사람이 청을 이루면 녹과가 셋이나 됩니다. 또 의주(義州)의 군관(軍官)이 맡았던 한 자리도 얼마 전에 의주부(義州府)에 되돌려 주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마는, 이것은 되돌려 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만일 청학의 한 자리와 의주(義州)의 한 자리를 우어청에서 떼어내어 매월마다 획(畫)을 계산하여 획이 많은 자를 연경에 보내면 조정에서는 따로 녹과를 내어 체아직에게 주는 폐단이 없이 스스로 용동(聳動)·격권(激勸)의 길이 있게 될 것입니다. 또 훈장(訓長)의 녹과는 한 자리뿐이요, 훈장도 한 사람뿐이므로, 가르치는 것도 그다지 근실(勤實)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이추(李樞)와 김시유(金是瑜) 두 사람이 바야흐로 별록(別祿)을 먹고 있으니, 이 두 사람을 훈장에 가정(加定)하여 격려 권장하여 교훈(敎訓)하는 터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학(淸學)도 황폐해졌으니, 이것도 격려 권장하기가 바쁜데, 어떻게 그 녹과(祿窠)를 빼앗겠는가? 의주의 군관(軍官) 한 자리를 떼어 주는 것과 훈장을 가정(加定)하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꼭 역관(譯官)을 격려 권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과 이정귀(李廷龜)는 임진란(壬辰亂)을 당하여 화사(華使)를 응접(應接)하면서 역관이 없는데도 임시로 수작하면서 막힘이 없었다 합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시종(侍從) 중에서 따로 권과(勸課)케 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역관들이 비록 한어(漢語)를 잘한다 하더라도 문관(文官)이 강해(講解)하지 못하면 역관이 비록 흰 것을 검다 해도 어떻게 이를 알 것인가? 이 뒤로는 괴원(槐院)550) 의 포폄(褒貶)을 각별히 신칙하여 착실하게 거행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오명신(吳命新)은 명백하게 품의(稟義)를 거치고 공의(公議)도 일제히 허여(許與)한 후에라야 전처럼 등용할 수가 있을 것이니, 대신과 판의금(判義禁)에게 하순(下詢)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순문(詢問)할 것까지 있겠는가? 매양 하교(下敎)하려고 했으나 이를 잊고 있었다. 오명신은 역적과 동모한 사람이 아니다. 전번에 숭문당(崇文堂)에서 우상(右相)이 말하기를, ‘설사 그가 모역(謀逆)할 마음이 있었다 해도 그의 형을 어떤 처지에 두려 했겠는가?’ 하였는데, 이것도 불성실한 말이다. 그가 참으로 형편없는 사람이었다면 그 형을 돌보려 했겠는가? 그러나 정업(貞業)의 공초(供招)에 무고로 자복(自服)했으니, 무슨 구애가 있겠는가? 오명신이 이미 전처럼 조용(調用)된다면 최명상(崔命相)을 그대로 삭출(削黜)하는 것은 탕평(蕩平)의 도리가 아니니, 방석(放釋)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송인명이 오명신을 쓰려 하였으나 물의(物議)가 있을까봐 말을 돌려 하순(下詢)할 것을 청하여 구실을 삼는 자료와 상대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계획을 만들려고 했으나, 신사철(申思喆)과 김재로는 묵묵히 한 마디의 가부(可否)도 없었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최명상의 일은 어제 판의금(判義禁)이 진달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이판(吏判)은 한 마디로 윤허를 받았으니, 신은 개석(慨惜)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은 듯하다. 외면(外面)으로써 살펴본다면 내가 한쪽을 부추기고 한쪽을 억누르는 일이 있는 듯하지만, 시상(時象) 때문에 나의 거조(擧措)가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군신(君臣)이 마땅히 서로 면려(勉勵)할 처지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만일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논하면 성상께서는 반드시 당론(黨論)으로 보시는 까닭으로 요사이 언로(言路)가 넓혀지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고, 우의정 조문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힘써 움켜쥐고 계시기에 시상(時象)이 근근이 이 지경에 이르렀지마는, 피차(彼此)가 답답해 하면서 심정을 풀려고 하고 있으니, 제방(隄防)을 조금만 늦춰주면 막혔던 물이 터져 무너지는 것과 같아서 그 해독은 도리어 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고 있다. 내가 어찌 규각(圭角)이 있는 처분을 하여 피차(彼此)의 당인(黨人)으로 하여금 속을 푸는 기회를 갖게 하겠는가? 작년에 합문(閤門)을 닫았을 때의 처분으로 보더라도 나의 마음의 고정(固定)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심익연(沈益衍)의 정형(正刑)이 합당치 않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심익연을 절통하게 여기는 마음은 병판(兵判)이 알고 있는데 경의 아룀도 이와 같으니, 대신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심준(沈埈)이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권부(權扶)와 여필적(呂必迪)의 일은 그대로 따랐다. 집의(執義) 한사득(韓師得)이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종성(李宗城)을 부응교(副應敎)로, 권혁(權爀)과 윤휘정(尹彙貞)을 교리(校理)로, 임정(任珽)을 부교리로, 박사정(朴師正)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11월 26일 신묘
충청도 충원(忠原)의 진사(進士) 이명하(李明夏)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故) 우의정 신(臣) 이완(李浣)은 신 등의 동향(同鄕) 사람입니다. 인조(仁祖)·효종(孝宗)·현종(顯宗)의 세 조정을 두루 섬겼는데, 효종 대왕께서는 큰 뜻을 분발하시어 일찍이 단독으로 선소(宣召)를 내려 천하 대사를 논하셨으니, 대개 앞으로 군병을 훈련시켜 10년 후에 대비코자 하심이기에 임금의 뜻에 부응해 왔었는데, 효종께서 다시 밀유(密諭)하시기를, ‘위급한 정세가 앞에 닥치면 나는 경(卿)과 더불어 사생(死生)을 함께 하겠다.’ 하셨으니, 그 제우(際遇)의 융숭함과 모유(謨猷)의 주밀(周密)하였음은 천재(千載) 후에도 사람을 감읍(感泣)케 하는데, 그 간직한 바 의리는 청천 백일(靑天百日)과 같아서, 앞으로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아 위로 황조(皇朝)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 선왕(先王)의 수치(羞耻)를 씻으려 하였는데, 하늘이 어질지 못하여 갑자기 궁검(弓劒)만을 남기게 되었으니,551) 이제 와서 소급해 생각해보면 누군들 마음이 무너지고 가슴을 치며 천하를 위하여 통한(痛恨)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의 사당에 나란히 향사(享祀)케 하여 대의(大義)를 포장(褒奬)하고, 후인(後人)들을 풍동(風動)케 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정익(貞翼)552) 의 성조(聖朝)와 계합(契合)한 것은 천재(千載)에 드문 일이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합향(合享)의 요청이 적당한지는 자못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11월 27일 임진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거둥(擧動) 때에 상언(上言)을 받으라고 명하신 것은 경외(京外)의 궁민(窮民)들이 지극히 원통해도 호소치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서인데, 근래에는 조정의 체통이 높지 못하고 사람들은 요행을 바라서 감사(監司)나 현감(縣監)이 재결할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가지고 감히 번거롭게 말하니, 일의 한심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금년의 상언으로써 살펴보더라도 뒤이어 상언한 이외에는 애당초 뽑아서 내려보낼 것까지도 없었지만, 만약 싸잡아 버리면 또한 상언을 받으라 하신 성의(盛意)에 부응함이 아니겠기에 48장을 해당 각사(各司)에 나눠 보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위하여 영전(榮典)을 바라는 자가 그 사이에 필시 나이를 올리고 거짓을 꾸민 일이 많았을 것이나, 사람의 존비(尊卑)와 나이의 고하(高下)를 핵실할 길이 없기에 수직(壽職)에 관한 상언 80장을 모두 해조(該曹)로 내려 보냈다가 외람된 것 50장은 도로 받아들여 효주(爻周)553) 하고 각별히 해조(該曹)에 신칙하여 응당 가자(加資)할 만한 것은 명백히 조사하여 입계(入啓)하라 하였습니다. 그 외의 도적(盜籍) 증년(增年)한 자는 장적(帳籍)을 엄중히 조사해 무겁게 논죄하여 후일의 남잡(濫雜)한 폐단을 막음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에 나아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도(道)를 실추(失墜)하지 않는 길은 건극(建極)554) 에 있고 건극의 도는 무편 무당(無偏無黨)에 있으니, 이 뜻을 군신 상하는 마땅히 척념(惕念)해야 할 것이다."
하니, 승지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전하의 마음은 비록 이러하시지만, 현재 효험(效驗)을 봄은 적고 폐단이 생기기는 쉬워 스스로 꺾이기가 쉽습니다. 만일 굳게 지키고 흔들리지 않으시면 응당 처음에는 어렵고 껄끄럽겠지만, 끝내는 쾌활(快活)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빠른 효과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시상(時象)을 조제(調劑)하기 어려움은 학문의 공부보다 어려우나, 끝까지 해 나가면 어찌 그 효과가 없겠는가? 피차(彼此)가 함께 공직(供職)치 않겠다 하여 성식(聲息)에 미치지 못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함께 조정에서 주선(周旋)하여 정의(情意)가 조금씩 통해가니, 이것이 그 효과이다."
하니, 정우량이 말하기를,
"신이 산릉(山陵)에 있을 때 당상(堂上) 신사철(申思喆)과 이진망(李眞望)이 다정하기가 평생지우(平生之友) 같은 것을 보니, 효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정우량에게 묻기를,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묘(廟)에도 담제(禫祭)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입묘(入廟)는 마땅히 담제 뒤에 있어야 하는가?"
하니, 정우량이 명백하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중관(中官)555) 을 시켜 가례(家禮)556) 를 가져오게 하여 정우량에게 묻기를,
"중월이담(中月而禫)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였으나, 정우량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사관(史官) 홍창한(洪昌漢)이 말하기를,
"《상례비요(喪禮備要)》는 동방 예문가(禮文家)의 삼척(三尺)557) 입니다. 왕가(王家)에서도 마땅히 준용(遵用)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책이 가례(家禮)에 비교하여 더 상비(詳備)하였는데, 내가 잠저(潛邸) 때에는 보았으나 대궐 안에는 인본(印本)이 없다."
하고는, 중관을 시켜 감귤(柑橘) 한 쟁반을 여러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신사철(申思喆)을 예조 판서로, 김시환(金始煥)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서명균(徐命均)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송귀명(宋龜明)과 정유량(鄭游良)을 효장 세자(孝章世子) 묘(廟)의 수위관(守衛官)으로 삼았다. 처음에 여러 묘(廟)의 수위관은 서얼(庶孽)로 단부(單付)558) 하였었는데, 임금이 사체(事體)에 미안하다 하여 사인(士人)으로 삼망(三望)을 갖춰 임명하기를 침랑(寢郞)559) 과 같이 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는 ‘사인(士人)들은 필시 이렇게 행해서는 안되는 일을 즐거워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인명이 그의 족제(族弟)를 수망(首望)에 추천하였다.
귀인(貴人) 이씨(李氏)를 봉하여 영빈(暎嬪)을 삼았다. 정청(政廳)에 전교하기를,
"고첩(誥牒)을 드릴 때에는 청복(靑袱)·흑함(黑函)에다 차길(借吉)560) 하여 행하라."
하였다. 이때에 인산(因山)이 막 끝나자 온 나라 사람이 흰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러한 명령이 있으니 서울과 지방에서 놀랍게 여겨 탄식하였다.
11월 28일 계사
평안도의 강서(江西) 등 고을에 뇌진(雷震)이 있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9일 갑오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이 현도(縣道)를 경유하여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요사이 대신이 장신(將臣)을 나오게 하는 일로 심지어 신과 사사로이 수작한 말까지 연석(筵席)에서 진달했다 하니, 신은 참으로 황공하고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일전에 조정에 나갔을 때에 우상(右相)이 물은 바가 있어 신은 ‘당초 진소(陳疏)한 뜻은 다만 성상(聖上)의 처분이 이상(異常)한 것을 개석(慨惜)히 여긴 데서 나왔고 그 사람이 어떠한지는 논할 겨를도 없었으니, 지금이라도 원소(原疏)에서 그 문세(文勢)를 살펴보면 저절로 알 수 있다.’고만 대답하였는데, 일찍이 이 말이 오늘날 자중(藉重)561) 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저 이삼(李森)은 곧 전하께서 신임하고 총행(寵幸)하는 신하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신이 말의 망령됨은 엄중히 꾸짖으셨으니, 이삼의 찰직(察職)에는 거리낄 것이 없을텐데, 또 어찌 기어코 신의 말을 기다려서 그의 거취(去就)를 정하려 하십니까? 장신(將臣)의 진퇴가 그의 한 마디 말에 달렸으니, 이것이 어떠한 권력인데, 신과 같이 죄를 지고 물러나 국정(國政)에는 애당초 간섭치도 않은 자에게 느닷없이 이런 일이 있으니, 신은 실로 두렵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의 상소가 이와 같으니, 장신(將臣)에게 더더구나 무슨 혐오(嫌惡)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개 이에 앞서 우상(右相) 조문명(趙文命)이 이삼(李森)을 나오게 하려면서 원임 대신과 수작한 바를 빙자하여 진달한 바 있었으므로, 민진원의 상소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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