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8권, 영조 6년 1730년 12월

싸라리리 2025. 9. 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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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을미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 친히 삭제(朔祭)를 지냈다.

 

전 판부사(判府事) 이관명(李觀命)의 서용(敍用)을 명하였다.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로, 이저(李著)를 사간(司諫)으로, 이선행(李善行)을 헌납(獻納)으로, 윤경룡(尹敬龍)과 신만(申晩)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2월 2일 병신

임금이 친히 시민당(時敏堂)에서 초복(初覆)562)  에 임석(臨席)하였다. 간원(諫院) 【사간(司諫) 이저(李著)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연대(筵對)하는 규정은 반드시 여러 신하들의 진주(陳奏)가 끝나기를 기다려 비로소 일제히 물러가는 것인데, 승선(承宣)이 갑자기 여러 재신(宰臣)의 퇴출을 청하였으니 비록 생소(生疎)한 소치에서 연유한 것이겠으나, 사체(事體)가 미안합니다. 청컨대, 도승지(都承旨) 박문수(朴文秀)를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 【장령(掌令) 박윤동(朴胤東)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적 나두동(羅斗冬)의 시체를 남원(南原) 땅에 투장(偸葬)하였는데, 관가의 색리(色吏)와 면임(面任)이 돌봐준 일이 있었다 합니다. 나두동이 어떠한 악역(惡逆)인데, 수령으로서 과연 관리로 하여금 돌봐주게 했다면 그 죄는 다만 파직에 그칠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남원 전 현감(縣監) 최집(崔)을 잡아와서 엄중히 신문하여 처치하고 호상인(護喪人)과 색리·면임 등은 영문(營門)에서 친히 사핵(査覈)하도록 감영(監營)에 분부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3일 정유

사헌부 【지평(持平) 조상행(趙尙行)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괴원 분관(槐院分館)563)  의 일로 대신(臺臣)이 이미 권점(圈點)을 주관하는 사람을 탄핵하여 성상께서 특별히 삭파(削罷)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천감(天鑑)의 통촉(洞燭)으로 공의(公議)도 신장(伸張)되었으니, 비록 부정(不靖)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어찌 감히 저지하고 무함(誣陷)하는 계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금번 승문원 부정자(副正字) 박성원(朴聖源)은 일이 끝난 뒤에 떠맡아 무멸(誣衊)의 계책을 달갑게 여기면서 본원의 제거(提擧)에게 장사(狀辭)를 던졌는데, 거기에 있기를, ‘정시(庭試)의 방(榜)에 있어서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고 대장(臺章)564)  도 엄격하게 나올 것이니, 전방(全榜)을 모두 거론(擧論)하지 못하게 하여 공의(公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그의 뜻은 유독 한 사람에게 말다툼을 할 뿐이 아니라, 그 말이 맥락을 따져보면 은연중 전방을 싸잡아 오멸(汚衊)하려는 뜻이 있으니, 그 용심(用心)의 교험(巧險)을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엄징(嚴懲)하고 통변(痛卞)하는 거조가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박성원을 나문(拿問)하여 처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보잘것없는 신진(新進)이 신칙을 무시하고 감히 제 습성을 풀려 하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예조 참판 이정제(李廷濟)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재실(齋室) 안에 있는데, 날이 저물 무렵에 이조(吏曹)에서 효장궁(孝章宮) 삭망제의 의주(儀註)에 관한 전교를 가져와 보였습니다. 대개 의주 중에 곡(哭)하는 절차(節次)가 없었으므로, 성교(聖敎)에 ‘경자년565)  과 갑진년566)  에는 대상(大祥) 뒤와 담제(禫祭) 전의 망제(望祭)에 모두 곡하는 절차가 있었는데도 해조(該曹)에서는 이를 알지 못하고 잘못 마련하였으니 다시 마련하여 올리라.’고 하였는데, 신은 사실 마음에 의심나는 것이 있었으나 시간이 급박하여 고거(考據)할 겨를도 없이 성교대로 곡하는 절차를 부표(付標)하여 올렸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생각해 봐도 마음이 풀리지 않은 바가 있었습니다. 나라의 전례(典禮)는 전후로 이정(釐正)하여 거의 유감(遺憾)이 없어야 할 것인데 혹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굳이 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정도(正道)를 잃는 것이니, 구차히 그만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이 주자(朱子)의 상례(喪禮)를 상고해 보니, 상복(喪服)을 벗은 후에는 곡이 없다 하였습니다. 옛날 장군(將軍) 문자(文字)가 이미 상복을 벗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월인(越人)의 조문을 받으니, 군자(君子)가 이르기를, ‘예절에 가깝다.’고 한 것은 대개 곡할 때는 이미 지났으나 슬퍼하는 정을 잊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예절에 가깝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왕가(王家)의 예절은 사가(私家)와는 달라서 대상일(大祥日)에 미쳐 부묘제(祔廟祭)를 지낼 수 없기에 신묘년567)  의 수의(收議)할 때에 여러 상신(相臣)들이 이르기를, ‘대상과 담제 사이의 삭망제(朔望祭)에 곡은 불가하다 한 것은 강쇄 즉길(降殺卽吉)의 예절이기에 그런 것이나, 영좌(靈座)가 아직 그대로 있으니 없어지지 않은 효사(孝思)가 어떻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친제(親祭) 때에는 곡례(哭禮)로써 마련하였습니다. 그 뒤로 국휼(國恤)의 대상(大喪) 때에는 연달아 이 의논을 써왔는데, 역시 영척(寧戚)568)  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섭행(攝行)에 있어서는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이 본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 전후로 곡하는 절차를 기록해 놓은 문건(文件)은 없습니다. 금번 효장궁(孝章宮)의 상후(祥後)·담전(禫前)의 삭망제(朔望祭)는 모두 섭행인데 곡하는 절차를 마련하면 결국 미안한 일일 듯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소견으로 억단(抑斷)할 일은 아니오니, 여러 대신들에게 수의(收議)케 하여 지당(至當)한 도리를 얻도록 힘쓰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예제(禮制)에 고거(考據)하면 의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고계(考啓)케 하였더니, 경(卿)의 상소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 섭행(攝行)하는 예(例)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조명익(趙明翼)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민응수(閔應洙)를 부제학(副提學)으로, 박내정(朴乃貞)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5일 기해

성덕윤(成德潤)을 승지로, 이종백(李宗白)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12월 6일 경자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삼복(三覆)하는 일에 친히 나아갔다. 충청 감사 신방(申昉)이 하직하려 하니, 인대(引對)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요사이 연석(筵席)이 엄숙치 못합니다. 어제 계복(啓覆)569)  할 때만 보더라도 여러 신하들이 매우 분잡(紛雜)하게 진달하여 자못 숙경(肅敬)하는 예의가 없었습니다. 마땅히 신칙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초복(初覆) 때에도 과연 이와 같기에 하교한 바가 있었다. 그 이튿날 군호(軍號)로 ‘간엄(簡嚴)’ 두 자를 써서 올리라 했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입시(入侍)하고 퇴출하는 신하들이 연석의 엄숙치 못함을 볼 것이기에 이것으로 넌지시 타이른 것이었다."
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하교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혹시 주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더구나 마땅히 신칙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경외(京外)의 죄인으로 계복(啓覆)에 포함된 자는 다만 5명뿐이었는데, 세 사람은 정리(情理)가 용서할 수 없다는 이유로써 형률대로 적용할 것을 명하고 두 사람은 특별히 감사 도배(減死島配)를 명하였으니, 임금의 죄수의 죽을 곳에서 꼭 살릴 길을 찾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관서(關西)는 기자(箕子)를 봉했던 도읍으로 예문(禮文)이나 학교가 모두 그곳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세도(世道)는 날로 퇴폐하고 인심은 순박치 못하여 내가 사위(嗣位)한 이후 수년 동안 계복(啓覆)한 가운데 본도(本道)에서 자식을 죽인 자와 아내를 죽인 자가 있더니, 이제는 심지어 한 가지 죄안(罪案) 안에 아우이면서 그 형수(兄嫂)에게 패행(悖行)을 하고 조카이면서 손수 그 이모(姨母)를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인자(仁慈)하고 현명했던 교화(敎化)가 해가 오래 되매 점점 없어져서 그렇게 된 것인가? 이것은 서도(西道)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도신(道臣)이나 주쉬(主倅)가 잘 도솔(導率)하지 못한 과실이다. 처분이 내리기 바쁘게 서도(西道)에 깊이 개탄스럽다는 뜻을 보이고 또 도신으로 하여금 조석정(趙石丁)을 정형(正刑)하고 이런 뜻으로 도내에 효유(曉諭)하여 풍속을 바꾸는 지경에 이르게 하라."
하였다. 조석정은 바로 그 이모(姨母)를 죽이고 계복(啓覆)의 죄안(罪案)에 들었던 자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복(詳覆)570)  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인데도 의정부의 회좌(會坐)에서 일찍이 옥정(獄情)이나 당률(當律)은 자세히 구명(究明)하지 아니하고서 아까 조석정의 일로 하교한 것을 가지고 도리어 율문(律文)이 지나치지나 않았나 의심하니, 율문에 미심(未審)스런 점이 있으면 어찌 미리 강구치 않았는가?"
하니, 홍치중이 말하기를,
"근래에는 상복(詳覆)이 문구(文具)가 되어 문안(文案)은 전연 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교리(校理) 윤휘정(尹彙貞)은 말하기를,
"오늘의 결수(決囚)가 다만 5인뿐인데, 계복(啓覆)에 붙여질 자가 어찌 이것뿐이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도신(道臣)이 치옥(治獄)에 게을러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신칙을 가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해서(海西)의 일로써 말한다면 살옥(殺獄)의 수효가 많게는 40여 건에 이르지만 이번에 한 건도 계복(啓覆)에 들어 있지 않았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한 달에 세 번만 싸잡아 추문(推問)함에 그쳐 미처 일을 추진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경기의 암행 어사(暗行御史) 김상성(金尙星)의 장청(狀請)에 의하여 경기 내의 환곡(還穀) 5년 조(條)는 각기 5분의 1만 받으라 명하였다. 충신 남연년(南延年)의 장자(長子)를 조용(調用)하라 명하였으니, 부원군(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말에 따른 것이다. 사헌부 【장령(掌令) 박윤동(朴胤東)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인신(印信)을 위조한 죄인 양응한(梁應漢)을 그 죄범이 조금 경(輕)하다 하여 참작 감사(減死)한다는 명이 있었으나, 바가지 쪽에다 도장을 파서 문서를 만들어 준 자라도 삼척(三尺)571)  으로써 논죄한다면 용서할 수 없는 바가 있으니, 법대로 처단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최명주(崔命柱)가 본도 수사(水使)로 있을 때에 영교(營校)572)  가 병영의 위세(威勢)를 빙자하여 백성들의 어기(魚碕)573)  를 협탈(脅奪)하였다가 소송에서 진 바가 있었는데, 최명주가 그의 종용(慫慂)에 의하여 패소(敗訴)한 장교(將校)로 하여금 백성들을 덮쳐 잡아가서 곤장 70대씩을 혹독하게 때려 죽은 자가 4명이고, 한 사람은 붙들려 갈 때에 폐사(斃死)하여 살옥(殺獄)을 이룬 바 있었다 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죽인 것은 해당되는 형률이 있는 것이니, 최명주는 나문(拿問)하고 감영에 분부하여 원통하게 죽은 사람은 낱낱이 조사 보고하여 법대로 정죄(定罪)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 지방의 풍문(風聞)이므로 확실하지 않을 듯하나, 일이 살옥(殺獄)에 관계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금 전 조석정의 옥사(獄事)를 논단(論斷)할 때에 그의 아내 옥매(玉梅)는 참작 처리하라고 특별히 명하셨으나, 옥매와 조석정이 공모하여 그 이모(姨母)를 교살(絞殺)한 형적이 그의 초사(招辭)에 모조리 드러났으니, 어찌 수종(首從)574)  의 구분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옥매를 법대로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정업(貞業)을 적정(賊情)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와 타인을 악역(惡逆)으로 무고한 죄로 결안(結案)을 받아 당고개(堂古介)에서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우참찬(右參贊) 서명균(徐命均), 전 참판(參判) 송성명(宋成明)·정형익(鄭亨益), 전 우윤(前右尹) 홍현보(洪鉉輔)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에 임명하였는데, 서명균은 그대로 유사 당상(有司堂上)에 임명하였다.

 

윤유(尹游)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엄경하(嚴慶遐)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12월 8일 임인

용궁(龍宮) 등 고을에 지난달 초 4일에 큰 눈이 오고 천둥도 있었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강(講)이 끝나자, 참찬관(參贊官)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근래 조정 안에는 위로 대신에서부터 아래로 서관(庶官)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지성으로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없으니, 신은 가만히 마음이 아픕니다. 나라에서는 비록 인족(隣族)575)  의 폐단을 진념(軫念)하고 탐오(貪汚)의 관리를 엄격하게 단속하려고 하지만 끝내 그 효과가 없으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조정에서 끝내 국사에는 전념하지 않고 도리어 당론(黨論)만 일삼고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날 군신(君臣)이 만일 무신년576)   3월 17일에 가졌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나라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조정의 신하 중 재국(才局)으로써 임용된 자는 전포(展布)가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고, 간관(諫官)으로써 임무를 삼은 자는 간쟁(諫諍)이 있었음을 듣지 못했으며, 경악(經幄)으로써 명칭(名稱)한 자는 보궐 습유(補闕拾遺)577)  한 일이 있었음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지금 사람이 옛사람만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위에서는 격려 권장하는 일이 없고 아래에서는 탄성 갈력(彈誠竭力)하는 일이 없음에 연유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사람을 씀에 있어서는 귀천(貴賤)에 얽매이지 않았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중세(中世) 이래로 편당(偏黨)이 사(私)가 되어 오로지 세록지인(世祿之人)만 뽑아 쓰고 초야(草野)에서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간혹 먼 지방 사람을 쓰는 일이 있기는 했으나, 임용된 사람은 아부(阿附)한 무리들에 불과하였기에 절조 있고 정개(貞介)한 사람은 수치스럽게 여겨 나오지 않았으므로, 나라에서는 끝내 현사(賢士)를 얻어 조정에 두지 못하였으니, 이는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덕망 있는 이를 좋아하고 재능 있는 이를 추천하는 정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성심으로 칙려(飭勵)하셔서 전일에 구하지 않았던 중에서 인재(人材)를 구한다면, 반드시 군자(君子)들이 만족하며 찾아드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의 시대에 있어서는 경학(經學)하는 선비를 극선(極選)하여 고문의 자리에 두고 자주 인대(引對)하여 치도(治道)를 강론하고 물러갈때에는 촛불을 잡고 보내주었으며 때로는 깊은 밤에 친히 직소(直所)에 납시어 혹은 옷을 벗어 친히 덮어 주고 혹은 등을 어루만지며 면유(勉諭)하였으므로 은권(恩眷)이 천고에 뛰어나셨으니, 이때를 당하여 신하가 되어 어떻게 지성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한 것은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전하께서는 직언(直言)을 들으려 하지 않으시니, 군신(群臣)들도 전하의 뜻을 거슬릴까만 두려워하고 있어 상하(上下)가 서로 도리를 잃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1년, 2년 지나게 되면 나라 일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권권(眷眷)한 진계(陳戒)는 말마다 모두가 절실(切實)하다. 오늘날 박문수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와 같은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10일 갑진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조명익(趙明翼)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임금은 조명(造命)578)  의 권세를 가졌으므로, 한번의 부억(扶抑)으로 세도(世道)의 오륭(汚隆)이 결정되는 것이니, 심신(審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계복(啓覆)할 때에 죄인 김효진(金孝進)의 일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어찌 이것뿐이랴? 역적(逆賊)이라 이름하고 치죄(治罪)하기를 청한 것은 모두 이런 따위이다.’ 하셨습니다. 당론에 병든 자가 혹 사람을 악역(惡逆)이라고 무함하면 진실로 그 죄가 있는 것이지만, 역적이 법망(法網)에서 누락되어 엄핵(嚴覈)을 청함에 있어서는 이것은 임금을 위함이요 종사(宗社)를 위함인데, 전하께서는 어떻게 차마 이런 말을 하셔서 여러 신하들을 강기(綱紀)의 죄인에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역신(逆臣)을 가리켜 역적이라 함은 죄가 되고 역심(逆心)을 품고 역적질을 한 자는 도리어 죄가 없단 말입니까? 오명신(吳命新)의 일에 있어서도 오명신은 바로 이함(李椷)의 생질이니, 이함은 오가(吳家)와 한 집안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정이 끝내 의심할 만하여 인심이 갈수록 더욱 불평(不平)하고 있는데 전대로 조용(調用)하라는 명령이 도리어 원고(元告)가 처형(處刑)되기도 전에 내렸으니, 세도(世道)의 걱정이나 일후(日後)의 염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또 신이 얼마 전에 들으니, 재신(宰臣)이 현도(縣道)를 거쳐 올린 소를 전하께서는 불에 넣으라 명하시고 그 사람의 평생을 논단하시어 소인(小人)으로 지목하셨다 합니다. 대저 김유경(金有慶)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초준(峭峻)한 면은 있으나 소인다운 정태(情態)는 절대로 방불 근사함이 없습니다. 이 일은 다만 예절을 갖추어 신하를 사용하는 도리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장독(章牘)을 불사르라 명하신 것은 실로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이므로, 후일에 끼칠 폐단이 큽니다. 그 일이 성덕(聖德)에 하자가 되고 군청(群廳)을 미혹하는 것이 또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오명신의 일에 의조(疑阻)하는 마음이 이와 같으나,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칙려했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이는 재상자(在上者)의 잘못이다. 그러나 신칙이 내렸는데도 그대로 구습(舊習)을 따르는 것도 또한 미안한 일일 듯하다."
하였다.

 

이현보(李玄輔)를 승지로, 김정윤(金廷潤)을 장령(掌令)으로, 윤섭(尹涉)을 헌납(獻納)으로, 송성명(宋成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광보(李匡輔)를 승지로 삼았다.

 

12월 11일 을사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원종기(元宗紀)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조(高麗朝)는 질박(質樸)을 숭상하였고 또 나라를 세운 과정의 인후(仁厚)함이 한대(漢代)와 같았기에, 비록 암우(暗愚)한 것이 원종(元宗)579)  같고 나라 형편이 이와 같았지만, 백성들이 한(漢)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래도 즉시 망하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 나라는 문채(文采)를 숭상하였으나 지금은 문(文)도 아니요 질(質)도 아니어서 말할 만한 것이 없다. 나는 매양 만일 사변이 발생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와해(瓦解)될 것이라 여겼는데, 무신년580)  의 일로써 보면 민심이 아직도 믿을 만하여 속오(束伍)의 군병들이 점호(點呼)에 빠짐이 하나도 없었으니, 자못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안으로 대신에서부터 밖으로 팔도(八道)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다 적합한 사람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재주는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백성을 다스림에 성실하면 거의 회보(懷保)하는 혜정(惠政)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진달한 팔도(八道)란 말에서 나는 개연(慨然)한 생각이 난다. 하늘의 우로(雨露)는 땅의 더럽고 깨끗함을 가리지 않고 내리는 것이다. 제왕(帝王)은 삼무사(三無私)581)  를 받들어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치 하늘이 우로를 베푸는 것처럼 원근(遠近)의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제 3백 60주(州)를 친히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도신(道臣)이 있어서 은택을 받들어 교화를 펴며, 수령(守令)이 있어서 백리 안에서 걱정을 나눠 갖는 것이니, 수령이란 백리의 우로(雨露)이다. 신중히 가리는 도리를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래에는 그렇지 못하여 아주 먼 변방이나 장려(瘴癘)의 땅에는 반드시 무변(武弁)이나 세력 없는 사람을 보내는데, 어찌 그 사람이 그 지방 풍토에 익숙하거나 제왕(帝王)이 백성을 보는 도리에도 원근에 따라 애증(愛憎)이 있어서 그렇겠는가? 이는 다른 것이 아니다. 위로 대신에서부터 아래로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백성 보기를 다친 자를 보듯이 하는 마음이 없고 다만 그 사람만 살펴보고서 반드시 그 지방의 좋고 나쁜 것을 가리게 되고, 매우 괴이한 일이다. 설사 잘 다스릴 사람이 있어도 혹시 손상(損傷)을 당할까 염려하여 아껴서 보내지 않으니, 저들 황예(荒裔)582)  ·장향(瘴鄕)583)  의 백성들도 누군들 나의 적자(赤子)가 아니리요마는, 한 사람의 양리(良吏)를 만나 왕화(王化)에 젖어 보지 못하고 있으니, 원근(遠近)의 차별이 없이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다. 나는 전조(銓曹)에서 만약 사람을 위하여 고을을 고르지만 않는다 해도 아마 우리 백성의 행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고을의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다만 사람의 능부(能否)만 가려서 교대로 보낸다면 반드시 그 효과가 있을 것인데, 조금 이름이 있는 자는 매양 좋은 곳만 얻게 되고 본디 이름이 없는 자는 번번이 먼 벽지(僻地)에 임명되니, 이는 전조(銓曹)의 고폐(痼弊)이므로 내가 일찍이 개탄하고 있는 바이다. 옛날 정도전(鄭道傳)이 중국에 입조(入朝)하지 않으려 하자 권근(權近)이 전대(專對)584)  를 자청하였으니, 신하된 도리에 위란(危亂)도 사피(辭避)하지 않는 것을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하물며 장향(瘴鄕)과 변읍(邊邑)이 비록 나쁜 곳이라 하더라도 어찌 위난이 있는 고장이겠는가? 마땅히 진신(搢紳)의 자제(子弟)들부터 자청하여 부임(赴任)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앞으로 있을 도목정(都目政)585)  에는 내가 의당 관안(官案)을 점검하여 만일 전처럼 고을을 가려 사람을 맡기는 폐단이 있으면 마땅히 죄를 줄 것이다. 이조 판서(吏曹判書)는 장용(奬用)을 맡은 신하이니, 상벌(賞罰)은 반드시 이러한 사람에게 먼저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런 뜻으로 신칙하라."
하였다.

 

12월 13일 정미

임금이 친히 경휘전(敬徽殿)에서 납향(臘享) 제사를 지냈다.

 

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이덕재(李德載)를 지평(持平)으로, 박사창(朴師昌)을 정언(正言)으로, 김몽로(金夢魯)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고, 전 정(正) 이한필(李漢弼)에게 절충 장군(折衝將軍)을 가자(加資)하였으니, 이한필은 순절(殉節)한 사람인 이봉상(李鳳祥)의 아들이다.

 

12월 15일 기유

경휘전(敬徽殿)에서 망제(望祭)를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다.

 

12월 16일 경술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는데, 남원 현감(南原縣監) 윤동원(尹東源)도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강(講)을 마치자, 윤동원이 말하기를,
"지난번의 정목(政目)에 후궁(後宮)의 봉작(封爵)에 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대척(大慽) 중에 계시니 평상시와는 다름이 있는데, 혹시 전하께서 미처 성찰하지 못하지나 않으셨나 합니다만, 혹시 전하의 성덕(聖德)에 하자가 있게 된다면 실로 서글픈 일입니다. 이는 비록 미세한 일이지만 모두 조검(照檢)하시어 순수하게 한결같이 천리(天理)에서 나오도록 하시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임금이 자녀(子女)를 두면 으레 봉작(封爵)하는 일이 있었기에 벌써 봉한 바가 있었으나, 마침 사고(事故)를 당했으므로 이제야 하교하였던 것이다."
하고, 이어서 윤동원이 외직(外職)을 교체하고 한직(閑職)을 고쳐 맡겨 그로 하여금 자주자주 경연(經筵)에 나와 계옥(啓沃)586)  에 보탬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충신 남연년(南延年)의 아들 남덕하(南德夏)를 인견(引見)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가 순국(殉國) 효충(効忠)하여 대절(大節)을 높이 세웠음을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있으나, 당일의 일을 상상해보면 이루 슬픔을 말할 수 있겠는가? 절의(節義)를 숭장(崇奬)하는 것은 세상을 격려하여 무딘 것을 날카롭게 하는 일이다."
하고, 초모(貂帽) 하나를 특별히 내려 주었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에게 명하여 유생(儒生)들을 인정전(仁政殿)에서 강경(講經)하게 하고 수석(首席)을 차지한 임덕승(林德升)은 회시(會試)에 바로 나가게 하였다.

 

이춘제(李春躋)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현량(李顯良)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2월 17일 신해

대사간 이춘제(李春躋)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近年) 이후로 역변(逆變)이 겹쳐 발생하여 죄수(罪囚)들이 옥에 가득하지만,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한결같이 구습(舊習)에 따라 행하여 탈품(頉稟)587)  하는 사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릇 국옥(鞫獄)에 탈품할 수 있는 경우는 반드시 시간을 끌어가도 결말이 나지 않아 거의 밤이 깊었을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인데, 요사이는 혹 일모(日暮)가 되지 않았는데도 언송(言送)이 이미 이르곤 합니다. 어제 같은 때는 대신이 전강(殿講)에서 방(榜)을 낸 뒤에 날이 아직 일러서 국청(鞫廳)을 열려고 했는데, 탈품의 계사가 이미 아침에 들어와 있어 대신도 그 탈품의 이름을 원망하였습니다. 승정원에서는 마땅히 유난(留難)했어야 했는데도 관례에 따라 계달한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해당 승지는 추고(推考)하고 지금부터는 크게 칙려(飭勵)를 가하여 모야(暮夜)를 가리지 않고 종일토록 개좌(開坐)하며 참국(參鞫)의 명을 어긴 사람은 중신(重臣)과 대각(臺閣)을 막론하고 즉시 견책(譴責)을 가하여 금부 당상(禁府堂上)이나 양사(兩司)의 비원(備員)이 되지 않은 이유로써 매양 탈품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옳다고 비답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강(講)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홍다구(洪茶丘)가 김방경(金方慶)을 국문한 것은 가히 참독(慘毒)하다 하겠습니다. 남형(濫刑)과 혹벌(酷罰) 아래 무복(誣服)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천지의 대덕(大德)은 생(生)이라 하니, 임금이 꼭 죽게 된 처지에서 사람을 살리려 하는 것은 바로 천도(天道)를 본받는 까닭입니다. 신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온 뒤에도 화형(火刑)의 도구가 아직 전정(殿庭)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군주가 정치(政治)를 하는 곳에서 아직도 남형의 도구가 놓여져 있으니, 견식이 있는 사람의 가만히 탄식하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물건이 아직도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였다. 유신(儒臣)이 먼 지방에 나갔던 것도 이제야 비로소 들었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북경의 재변은 참으로 놀랄 만합니다. 옹정(雍正)588)  이 망국지주(亡國之主)가 되고 청(淸)나라 운수가 갑자기 끝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전고(前古)의 사첩(史牒)으로 보더라도 재변이 있는 이후로 북경의 재앙과 같은 것은 있지 않았습니다. 이번의 재변의 우리 나라 북도(北道)의 재앙이기도 합니다. 천리(天理)는 환하게 밝으므로 실로 감추기 어려운 것입니다. 정강(靖康)589)  의 수재(水災) 때에 이강(李綱)590)  은 눈물을 흘리며 장소(章疏)로써 진달하였고, 임진 병란(壬辰兵亂)이 일어나기 전에 조헌(趙憲)도 상소(上疏)하여 할말을 다했는데, 그때 사람들이 모두 요언(妖言)이라 했으나 필경엔 이강·조헌의 말은 부절(符節)을 맞추듯이 꼭 들어맞았습니다. 군주는 이러한 말을 듣기 싫어하기에 옛날에도 ‘관동(關東)의 도적은 능히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란 말이 있었습니다.591)   현재 북경의 재이(災異)는 현저히 복망(覆亡)의 징조가 있고, 저들이 비록 복망에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 북경을 잃는다면 반드시 본토(本土)로 돌아올 것인데, 심양(瀋陽)은 우리 평안도와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따라서 평안도 전체가 앞으로 버린 땅이 될지도 모르니, 이는 첫째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또 영고탑(寧古塔)의 장군이 배반하지 않을 것도 기필할 수가 없으니, 영고탑의 장군이 만약 배반한다면 북경으로 나갈 수도 없고 영고탑으로 물러설 수도 없으니, 그럴 경우 그 형세가 반드시 우리 육진(六鎭)으로 오게 될 터이니, 이것이 둘째 걱정입니다. 만일 육진에 의거하여 오래 머무를 계획을 세운다면, 우리 나라 형세는 앞으로 장차 어찌되겠습니까? 이것이 셋째 걱정입니다. 한가하고 무사할 때에 마땅히 승산(勝算)을 마련할 도리를 강구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랜만에 만나서 권권(眷眷)한 진달을 듣게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이 된다. 청(淸)나라 국운이 비록 갑자기 끝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내는 반드시 불안케 될 것이니, 저들이 불안하면 우리만 어찌 홀로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진달한 세가지 일은 사실 내가 미처 생각치 못한 일이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지금의 나라 형편은 가히 아침에 저녁일을 예측할 수 없는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반드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조처하는 거조가 있는 후에라야 모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날마다 소대(召對)하여 분전(墳典)592)   속에 출입하고 경사(經史)를 토론하더라도 앞으로 연미(燃眉)593)  의 위급에 부응치 못할 것입니다. 이강(李綱)의 주의(奏議) 중에 인재를 동남(東南)594)  에서 구하라는 말이 있었고, 주자(朱子)의 봉사(封事) 중에는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말이 있는데, 꼭 오늘의 귀감(龜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성으로 군주를 섬기는 마음을 깊이 가상하게 여겨 감탄한다. 진덕수(眞德秀)595)  가 말하기를, ‘조강(朝講)이 야대(夜對)만 못하다.’ 하였으니, 내일은 마땅히 야대를 명할 것이다. 조용히 강론하라."
하였다.

 

헌납(獻納) 윤섭(尹涉)이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가만히 생각하기를 우리 임금의 출천(出天)한 효우를 밝히고 흉적(凶賊)의 망극한 무욕(誣辱)을 변명하는 것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무리만 제하고는 온 나라의 신하가 누군들 이런 말을 즐겨 들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도리어 꾸짖는 말이 대신(大臣)의 반열에서 나왔으니, 참으로 세상의 변란이라 하겠습니다. 그 상소는 수미(首尾)로 누누 부절(縷縷不絶)함이 단순히 다단(多端)하다고만 할 수 없는 정도요 모두가 난잡(亂雜)하게 지껄이는 말이지마는, 그 중에서 관계가 매우 큰 것만을 신이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이른바 심유현(沈維賢)의 흉언(凶言)에 한 마디도 변명을 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그가 박절하게 해치는 말들이었기 때문이었으나, 실상이 이와 같아서 어찌할 수 없으니, 이에 치옥(治獄)하는 일로써 감히 제가 잘했다 함은 가소롭지 않습니까? 국옥(鞫獄)의 치죄(治罪)가 어떠했는지는 참으로 신이 미리 알 수 없었으나, 급서(急書)가 이미 올려지고 적병(賊兵)이 압박해 들어온 뒤에 있어서 자신이 위관(委官)이 된 자로서 신국(訊鞫)하는 절차가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 장차 어떻게 하려 했겠습니까? 그가 역적 초사(招辭)의 반시(頒示)로써 근원을 엄밀히 캐려 한 것이라고 돌려 변명의 자료로 삼으려 한 것은 더욱 그의 둔사(遁辭)의 심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이른바 ‘어찌 틈을 타서 비로소 망칙한 일을 꾸몄을까?’ 한 것은 그가 과연 이번의 흉역(凶逆)으로 간극(間隙)이 없는데도 나왔다고 여겼겠습니까? 아! 흉역의 무리들이 선동하고 속이고 하여 도당을 집합시킨 것은 이미 흉언에 빙자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나, 시약청(侍藥廳)을 마련치 않았다 한 말이 실은 인심을 미혹케 한 단서가 되었으니, 신이 이른바 간극(間隙)이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법의(法意)를 깊이 생각하고 원인(援引)하여 죄를 삼았다면 또한 어찌 일분(一分)의 용서할 단서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이 일은 하지 않고 다만 한결같이 저뢰(抵賴)596)  로써 능사(能事)로 여겨 전후로 성죄(聲罪)의 소장(疏章)이 모두 이와 같아 언관(言官)을 깔아뭉개고 함부로 추저(醜詆)하니, 신이 비록 불초(不肖)하지만 다시는 그와 더불어 자꾸 지껄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겠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니, 임금이 노하여 되돌려 주라 명하였다.

 

12월 18일 임자

정형익(鄭亨益)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야대(夜對)를 행하여 처음으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신이 가만히 보니, 전하께서는 단속하여 다스리지 못하는 병통이 있고 쉽사리 동요하여 자주 변경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법제(法制)로 말한다면 주금(酒禁)의 한 가지 일은 능히 궁민(窮民)들의 실리(失利)를 진휼해 주는 것이지만 시행한 지 한달이 채 못되어 금했다가 다시 철회했고, 사람을 가려 쓴 것으로 말한다면 정권을 개정(改正)한 초년에는 오명항(吳命恒)·권이진(權以鎭)을 얻어 호판(戶判)을 삼아 관직(官職)을 위하여 사람을 가리는 뜻이 있는 듯하더니 이제는 점차 구습(舊習)을 따라 행하게 되었으며, 구임(久任)으로 말한다면 백성들의 곤췌(困悴)가 오로지 수령에게 있기에 처음에는 구임시켜 효과를 요구하자는 의논이 있더니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갈아치우고, 탐관(貪官)을 징계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법금(法禁)이 점차 해이해져 고폐(錮廢)한 탐리(貪吏)들을 요즘은 거의 수용(收用)하여 김조택(金祖澤) 같은 이는 애당초 한번도 문죄하지 않으면서도, 유독 장법(贓法)을 한미(寒微)한 김인서(金麟瑞)에게만 시행했으며, 청렴을 권장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윤용(尹容)·이병태(李秉泰) 같은 이는 일찍이 포장을 못받았고 전 참판(參判)        이의만(李宜晩)은 빙벽(氷蘗)597)                  을 견뎌내는 절조가 세상에서 보기 드문바이지만 한번 배척한 뒤로 다시 임용하지 않았으니, 이러고서도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 다섯 가지를 굳게 지켜 잃지 마시고 지키기를 산악(山岳)과 같이 하며 시행하기를 사시(四時)와 같이 하신다면, 수년이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큰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유신(儒臣)을 못 보았더니, 오늘에야 이러한 간절하고 지극한 말을 듣게 되었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현재 폐해를 구제하는 계책을 마땅히 내정(內政)을 닦고 외이(外夷)를 물리침을 선무(先務)로 하여야 하니, 삼남(三南)의 인심을 단단히 결합(結合)시키고 서북(西北)의 변무(邊務)를 강구한 후에야 일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인심을 단단히 결합시키는 것이 비록 제일 급무이긴 하지만, 단단히 결합시키는 방법은 역시 재용(財用)을 넉넉히 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예사로운 책려(責勵)만으로써 목첩(目睫)의 위급을 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옛날 사마광(司馬光)598)                  도 묘사(廟社) 제사(祭祀)를 줄이기를 요청한 말이 있었는데, 신이 이 말을 인용하면서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한 기운이 감통(感通)하면 반드시 정례(情禮)에 크게 해로움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종묘(宗廟) 제향의 절차도 마땅히 권의(權宜)에 따라 줄여야 된다고 여깁니다. 갑자년599) 이괄(李适)의 난(亂)600)                   때에 인목 대비(仁穆大妃)도 일시 궐공(闕供)한 일이 있었습니다. 비록 천승(千乘)의 나라에 태모(太母)601)                  의 존엄으로써도 환란(患亂)을 만났을 때에는 역시 예절대로 공봉(供奉)을 할 수 없습니다. 신은 반드시 이것을 전감(前鑑)으로 삼아 자전(慈殿)의 공선(供膳) 절목(節目)도 의당 권의(權宜)에 따라 재감(裁減)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병자년602)                  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었을 때 어선(御膳)이 떨어졌는데 마침 꿩 한 마리가 공중에서 떨어졌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기이(奇異)하게 여긴 일이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이것을 거울삼아 평상시의 어공(御供)도 견감(蠲減)하시기를 바랍니다. 임진년603)                  의 파천(播遷) 때 어연(御輦)이 동파역(東坡驛)에 머물고 있으면서 군신(君臣) 상하가 하루 동안 궐식(闕食)했는데, 장단(長湍)에서 수라(水剌)가 마침 당도하니 여러 왕자들이 손으로 거친 여반(糲飯)604)                  을 움켜 먹었습니다. 이것으로써 살펴본다면 나라가 평안한 후에야 여러 궁가(宮家)도 평안하게 될 것이니, 신은 원컨대 이것으로 마음을 먹고 여러 궁가에서 절수(折受)하는 것을 모두 견파(蠲罷)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분발 진작할 방도를 생각해보면 마땅히 재용(財用)을 저축하고 인심을 결합시키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할 것이니, 근본이 서지 못하면 비록 단속하여 다스리는 말절(末節)에 잗달게 맞춰나가려 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종묘의 제향(祭享)과 자전(慈殿)의 공봉을 신이 어떻게 감히 줄일 것을 청하겠으며, 또 어떻게 감히 어공(御供)을 줄일 것을 말하겠습니까마는, 신으로서는 임진(壬辰)·병자(丙子)의 변란이 조석(朝夕)에 닥쳐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만일 일이 발생하기 전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후일 비록 온 집안이 순절(殉節)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먼저 용도를 줄이시고 대신과 백관(百官)들을 칙려하여 능히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명백히 견벌(譴罰)을 보이소서. 그렇게 해도 재용이 모이지 않고 국세(國勢)가 떨치지 않는다면 신은 청컨대 망언(妄言)의 주륙(誅戮)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묘(宗廟)와 태후(太后)의 봉공(奉供)을 줄이라고 청한 사람을 만약 그 당시의 임금으로서 보게 되면 반드시 촉범(觸犯)605)                  이라 할 것이다. 내가 비록 덕이 없는 사람이지마는, 어찌 유신(儒臣)의 말을 그르다고 여기겠는가? 유신의 말은 바로 나의 마음이요 나의 마음은 바로 유신의 말이다. 다만 실행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어찌 다만 체념(體念)할 뿐이겠는가?"
하였다. 이종성이 또 서북(西北) 양도(兩道)의 감사(監司)·병사(兵使)는 10년씩 오래 맡기고 서도(西道)의 강변 칠읍(江邊七邑)606)                  과 북도의 육진(六鎭)607)                  , 삼수(三水)·갑산(甲山) 등의 수령은 특별히 가려 써야 한다는 뜻으로 상세히 진달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12월 19일 계축

사헌부 【장령 김정윤(金廷潤)·지평 엄경하(嚴慶遐)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의금부(義禁府)의 죄인 이석형(李錫衡)의 옥사(獄事)는 과장(科場)에 관계된 일이니, 마땅히 즉시 끝까지 사실을 조사했어야 할 것인데도 몇 차례 형벌을 시행한 뒤로는 지금껏 양년(兩年)이 지났으나 한번도 신문하지 않았으니, 그것이 옥체(獄體)에 위배됨이 극심합니다. 각별히 신칙하여 자주 개좌(開坐)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의만(李宜晩)의 승자(陞資)를 명하였다. 옥당(玉堂)의 이종성(李宗城)이 그의 청렴결백함을 진달하였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양법(良法)과 미제(美制)가 있는데도 행하지 않은 것은 늘 먹는 밥과 반찬이 있는데도 먹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애석치 않겠는가? 승국(勝國)608)  시대에는 제도가 구비되지 못했는데, 우리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오례의(五禮儀)》와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이루어져 더욱 크게 갖춘 바가 있었다. 혹시 《경국대전》과는 다른 점이 있더라도 또 《전록통고(典錄通考)》가 있으니, 보충할 수가 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하면 마땅히 조종(祖宗)부터 본받으라.’하였는데, 새로운 법이나 초창(草創)한 규칙이 구규(舊規)나 상법(常法)만 같지 못한 것이다. 요사이 백관(百官)이 태만한 것은 거의 《경국대전》이 오래되어 폐지되고 해이된 데 연유한 것이므로, 내가 《경국대전》을 새로 닦아서 밝히려고 한 지가 오래 되었다. 지금은 꼭 실행하려고 하니, 승정원에서는 먼저 이 취지를 두루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조명익(趙明翼)을 승지로, 이하원(李夏源)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고, 윤유(尹游)를 특별히 임명하여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12월 20일 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도승지(都承旨)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제향(祭享)은 국가의 성전(盛典)이기에 각 고을마다 사직(社稷)을 두어 제사를 지내고 있으므로 위판(位版)이 있으며, 산천(山川)·성황(城隍)·여귀(厲鬼) 등의 제사에도 모두 신판(神版)이 있고 또한 각기 존비(尊卑)의 구별이 있으니, 그 위판(位版)은 각각 정결한 곳을 따로 정하여 안치(安置)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신이 영남(嶺南)에 있을 때 들으니, 각 고을에서는 사직의 위판과 산천·성황·여귀 등의 신판을 단칸방 먼지가 소복한 속에 섞어서 두고 있다 하니, 전연 경근(敬謹)하는 뜻이 없습니다. 사직의 위판을 어떻게 여귀의 신판과 한곳에 같이 둘 수 있겠습니까? 각 고을에 즉시 신칙하여 혹은 새로 집을 짓거나 혹은 헌집을 수리하거나 하여 사직의 위판을 딴 곳에 봉안케 하고 다른 신판은 비록 한 방에 둔다 하더라도 반드시 각각 자리를 마련하여 안치(安置)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영남의 일로써 미루어보면, 다른 도(道)에서도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니, 청컨대 예조(禮曹)로 하여금 각도(各道)에 관문(關文)을 발송하여 사직의 위판과 산천·성황·여귀 등의 신판을 봉안할 곳을 따로 깨끗하게 수리하여 각각 자리를 마련하여 안치(安置)케 하고 제향(祭享) 등의 행사도 수령(守令)이 친히 거행케 하며 감사(監司)가 순행할 때에도 친히 살펴 전과 같은 폐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매우 근거(根據)가 없는 일이다.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세도(世道)와 인심이 다시는 여지(餘地)가 없으니, 만일 역적이 나왔다면 피차(彼此)를 막론하고 다같이 통분하여 그 살이라도 씹어먹으려 해야 하는데, 지금은 도리어 그렇지 못하여 피차의 당(黨) 중에서 역적이 나옴을 보면 각자 미워하는 당에서 나옴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그 역적을 빙자하여 무고(無故)한 사람을 같은 반역의 죄과로 뒤섞어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로써 악명(惡名)을 부당하게 뒤집어 쓰고 원통함이 뼈에 사무친 자도 시원스레 밝힐 길도 없이 길이 암흑 속에 묻혀 있습니다. 혹시 그 원통함을 아는 사람이 있어 그 원통함을 풀어주려 해도 역적을 두호한다는 이름을 들을 것을 염려하여 집에서 긴 한숨만 쉬고 짧은 탄식만 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비록 일월(日月)과 같은 총명을 가지셨다 해도 어찌 죄다 통촉(洞燭)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바로 백성의 부모(父母)입니다. 역적을 치죄(治罪)할 때에 참으로 반역한 자는 다 죽여 군신(君臣)의 의리를 엄중히 하시고 무함을 당한 자는 모두 변석(卞釋)하여 자애로 감싸 주는 인덕(人德)을 보이시면 인기(人紀)가 바로 되고 국세(國勢)가 높아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것이 절실(切實)하다."
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이봉상(李鳳祥)은 여러 차례 곤수(閫帥)609)  를 지냈고 오래도록 장임(將任)에도 있었으므로, 거느리고 있던 편비(偏裨) 중에는 은혜를 입은 자도 필시 많았을 것이지만 결국 이봉상이 죽음을 당할 때에는 도망치지 않은 자 없었고 홀로 타인이 부탁하여 보낸 홍임(洪霖)만이 변란을 듣고 바로 들어가 이봉상과 함께 적의 칼을 맞고 동시에 순절(殉節)하였으니, 그 의열(義烈)은 족히 천고(千古)를 감격케 할 만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만일 조정에 두었다가 만에 하나 위난(危難)할 때를 당했다면 반드시 순충(殉忠)의 신하가 되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특별히 그의 여문(閭門)을 정표(旌表)하시고 또 쌀과 베로 그의 어머니를 구휼하셔야 하지만, 홍임의 어머니는 금년 나이 80세로 의지할 곳 없는 정상은 사람을 비련(悲憐)에 젖게 합니다. 국가에서 어떻게 한 명 사과(司果)의 녹봉을 아끼시렵니까? 마땅히 각별한 긍휼(矜恤)의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월름(月廩)610)  의 일은 사체(事體)가 어떠할지 알 수 없으니,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사시(四時)로 구휼케 하라."
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해월(海月)은 충청 병영(忠淸兵營)의 한 명의 천기(賤妓)에 불과합니다. 홍임(洪霖)의 좋아한 바 됐었는데 적변(賊變)이 발생했을 때 다른 기생들은 적들에게 시종을 든 자가 많았으나 해월만은 남몰래 수직자에게 뇌물을 주고 홍임의 시체를 찾아내어 엷은 판자(板子)에 넣어 장사지내려다가 이봉상이 들어갈 관(棺)이 없음을 듣고는 그 엷은 판자를 주고 홍임의 시체는 베로 싸서 이봉상을 묻은 곳에 함께 장사를 지냈습니다. 해월은 기생이 되어서도 능히 이같은 일을 했으니, 비록 의사(義士)라 해도 옳을 것입니다. 듣건대, 병영(兵營)에서 아직도 면천(免賤)을 허락치 않는다 하니, 매우 개탄할 일입니다. 병영에 분부하시어 즉시 면천케 하여 그 의로움을 표창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특별히 면천(免賤)해 주고 그 집도 복호(復戶)하라."
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무신년611)  의 변란 때에 손명대(孫命大)와 우하형(禹夏亨)은 한 사람은 운봉 현감(雲峰縣監)으로서 팔량치(八良峙)를 막아 적이 호남(湖南)으로 넘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고, 한 사람은 곤양 군수(昆陽郡守)로서 힘센 병사를 뽑아 적의 소굴로 바로 쳐들어가 적으로 하여금 군성(軍聲)을 듣고 기세가 꺾이게 하였으니, 그들의 나라를 위한 충성은 가히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만하였으나, 다만 줄이 없었던 까닭에 아직껏 병곤(兵閫)612)  의 망(望)에 주의(注擬)되지 못했으니, 국가에서 공로에 보답하고 충성심을 격려하여 온 의도(意圖)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이만빈(李萬彬)과 권희학(權喜學)은 적변을 당했을 때 둘다 나라를 위하여 죽을 결심을 가졌었고 수령이 되었을 때에도 각기 현저한 치적(治績)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서북방(西北方)의 변군(邊郡)에 둔다면 일후에 힘을 얻을 것은 알 수가 있으니,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각별히 수용(收用)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남연년(南延年)은 적을 꾸짖어 굴하지 않고 죽었으니, 가위 열장부(烈丈夫)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남연년은 그래도 영장(營將)이 되어 임금의 녹을 먹었던 것입니다. 거창(居昌)의 좌수(座首) 이술원(李述源)은 영남의 한 사인(士人)에 불과하고 털끝만큼도 나라의 은혜를 입은 일이 없었는데도 능히 항의 살신(抗義殺身)하였으니, 이는 더욱 뛰어난 사람입니다. 국가에서 권선 징악(勸善懲惡)하는 길은 시상(施賞)과 처벌이 있을 뿐인데, 시상은 먼저 미천한 사람에게 내려져야 하고 처벌은 귀근(貴近)에게 먼저 가해진 후에라야 천하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가 있습니다. 남연년의 장자(長子)는 이미 제직(除職)의 명이 있었으니, 이술원의 아들 또한 마땅히 제직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조(銓曹)에 분부하여 이술원의 아들도 똑같이 수용(收用)케 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1일 을묘

소대(召對)를 행하여 윤동원(尹東源)도 함께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사헌부 【장령 김정윤(金廷潤)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목중형(睦重衡)은 반역한 실상이 적의 공초(供招)에서 숱하게 드러났고, 심지어 호남 대장(湖南大將)이란 말까지 나왔으니, 그 범죄의 정상을 논한다면 보통으로 원인(援引)한 것에 비교될 수가 없는데도, 미처 승복도 하기 전에 갑자기 정형(停刑)을 명하시니, 옥체(獄體)에 크게 위배되는 일입니다. 청컨대 정형의 명을 도로 거두시고 다시 엄중한 형벌을 가하여 기어코 죄상을 밝히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보다 먼저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계에 의하여 의주(義州)의 죄인 김초서(金楚瑞)를 수표(手標)613)   사건으로 효시(梟示)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그때에는 사람마다 모두 수표를 받는 것을 예사(例事)로 알았고, 또 금령이 내려지기 전의 일에 속하니, 살리려는 의논에 붙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고, 도승지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죄가 밝혀진 뒤에 죽은 자는 아마 원망이 없을 것이지만, 이미 금령이 있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 지금 만얀 죽인다면 가르쳐 주지도 않고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물었으나, 의논이 모두 박문수와 같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을 형벌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일은 중대한 일이니, 입시(入侍)치 못한 대신에게 다시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조(吏曹)에서 제관(祭官)을 차출함에 있어서 참으로 잘못이 있었다. 매번 헌관(獻官)의 단자(單子)를 보면 꼭 종실(宗室)로 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순장(巡將)으로 정하고 있다. 문신(文臣)도 또한 조신(朝臣)인데 한번쯤 나라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이 방해될 일이 있겠는가? 태종(太宗)께서 재이(災異)로써 자신을 책망한 일이 있는데, 한 가지 일은 향사(享祀)를 깨끗이 못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제사의 일을 어떻게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신칙한 이후의 이조(吏曹)의 당상관을 무겁게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12월 22일 병진

지평(持平) 엄경하(嚴慶遐)가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듣건대, 엊그제 중관(中官)이 10동(同)의 무명베를 가져다 들이라는 전교라 하면서 작년 겨울의 예를 들어 호조(戶曹)와 병조(兵曹)로 하여금 나눠서 올리라 하였다 합니다. 전하의 숭검(崇儉) 절용(節用)하시는 지극한 뜻으로 보아 필시 빈어(嬪御)에게 주려고 국가의 경비를 축내시지는 아니하셨을 것이고, 다만 동조(東朝)614)  의 봉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혼전(魂殿) 제전(祭奠)의 소용에 관계된 것인데, 비록 바로 황첨(黃籤)을 내려 승정원을 경유하여 명백히 진입(進入)하게 해서 여러 신하들이 알도록 하여도 진실로 안될 것이 없을 것이며, 또 궁내(宮內)와 정부(政府)는 일체(一體)라는 뜻에도 부합하는 것일 텐데, 하필이면 일시 우연히 행해졌던 전례를 원용(援用)하고 중관(中官)의 조종하는 권세를 빌어 사람들의 의혹을 초래(招來)한단 말입니까? 일이 응당 행할 것도 아니요, 또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기도 하니, 호조(戶曹)·병조(兵曹)의 도리로서는 의당 집주(執奏)의 거조가 있어야 했는데도 일례(一例)로 봉행하고 위복(違覆)615)  한 바가 없었으니,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유사(攸司)의 사체(事體)에 그렇게 하지 못함이 있었던 것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어떠한 소용이 있으시면 반드시 승정원에 전지(傳旨)를 내리시어 빙신(憑信)할 바가 있게 하시고 중관이 전교를 청종(聽從)하는 규례는 일체 정폐(停廢)하시며, 이번에 들이신 것도 영구히 준례가 되지 못하게 하여 임금의 덕을 빛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살피지 않았다.

 

박필건(朴弼健)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이일제(李日躋)를 헌납(獻納)으로, 홍상인(洪尙寅)을 사간(司諫)으로, 정광은(鄭光殷)과 윤흥무(尹興茂)를 정언(正言)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응교(副應敎)로, 윤동형(尹東衡)을 수찬(修撰)으로, 이유(李瑜)를 이조 참의로, 정형익(鄭亨益)을 동춘추(同春秋)로,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3일 정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24일 무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혼가(婚嫁)를 제때에 하게 함은 왕정(王政)의 선무(先務)입니다. 지금 경외(京外)의 처녀로 나이가 2,30이 넘도록 시집 못간 자가 매우 많아 원망이 가슴에 맺혀 화기(和氣)를 손상할 것입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전록통고(典錄通考)》에 기재된 바로 보아도 나라에서 이 점에 마음을 쏟은 바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왕(文王)의 교화에 반드시 환과 고독(鰥寡孤獨)616)  부터 먼저 돌보았으니, 진달한 것이 옳다. 안으로는 경조(京兆)의 부관(部官)이 찾아 물어서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보고하여 각별히 돌봐주게 하고 밖으로는 감사와 수령이 역시 혼수(婚需)를 갖춰 주어 시기를 넘김이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오늘날의 조정 신하들이 비록 옛사람들만은 못할 것이나, 전하께서 그들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시면, 한 시대의 인재로 한 시대의 일을 꾸려갈 사람이 없다고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신의 눈앞의 큰 걱정은 3백 년의 세실(世室) 대가(大家)가 태반(太半)이 역족(逆族)이 된 것이니, 이는 모두 당파 싸움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역적이 이쪽 당에서 나오면 비록 오염되지 않은 사람도 기어코 동역(同逆)의 죄과로 뒤섞어 몰아넣으려고 하니, 안면을 바꾸고 동정받기를 생각하여 저쪽 당에 투입(投入)하지 아니한 자는 역적을 면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만약 끝내 뒤섞어 몰아넣지 못하게 되면 아무 까닭없이 폐기(廢棄)하고 수용(收用)하지 않으며, 비록 몸에 허물이 있었던 자라도 한 번만 투입하게 되면 전대로 쓰여져 투입하는 길이 열리고 널리 당파를 세우는 계책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 밖으로는 투입한 듯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그렇지 아니한 자가 있고 혹 속으로는 실제로 투입했으면서도 밖으로는 그렇지 않은 체한 자도 있으니, 사대부(士大夫)의 처신(處身)과 마음가짐이 어렵기가 이와 같아서 다시는 세상에 수치스런 일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풍절(風節)은 무너져 없어지고 있습니다. 저쪽은 반드시 역당(逆黨)을 다 몰아냈다 하여 다행으로 여기고 이쪽은 또 역명(逆名)을 뒤섞어 당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죄범이 있고 죄범이 없는 것을 환하게 조사하여 죄범이 있으면 죽이고 죄범이 없으면 쓰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만일 민우(民憂)와 국계(國計)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조정이나 초야를 막론하고 조목마다 비답을 내려 그 말을 채택하여 쓰시고 저들 시태(時態)의 말은 비록 묶어서 높은 시렁 위에 얹어두고 사용하지 않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위에서 먼저 형적(形跡)을 보일 수가 있겠는가? 나는 마땅히 더욱 굳게 지켜 근거 없는 의논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신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니, 절수(折受)란 두 자가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인구의 출생이 많지 않고 토지도 개간이 덜 되었기에, 각처의 절수를 혹은 논을 만들고 혹은 밭을 만들어 조세(租稅)를 받아도 백성들에게 별로 해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인구는 이미 많고 토지는 모조리 개간되어 얼마 안되는 토지가 각기 주인이 있습니다. 비록 근래에 각궁(各宮)이나 옹주방(翁主房)의 절수는 말하더라도 도처(到處)의 절수가 문득 낭패를 당하여 소득이 없게 되었으니, 이는 실제로는 공지(空地)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대개 듣건대, 절수할 때에 도장(導掌)617)  의 무리들이 엄중한 관문(關文)을 가지고 각도(各道)로 내려가 백성들의 토지를 강점(强占)하거나 혹은 소송에 걸려 있는 토지를 사들여 횡점(橫占)할 계획을 하는데, 백성들이 문기(文記)를 가지고 관청에 와서 다투어 송사를 하나 도장(導掌)에게 굽힘을 당하는 사례가 열이면 여덟 아홉이 되므로, 민원(民怨)은 이로써 더욱 심하게 되고 사체(事體)는 이로써 더욱 손상하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숙종조(肅宗朝)에도 절수의 폐단이 있었으므로,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게 될까 염려하여 각 군문(軍門)과 각 아문(衙門)에 소속된 둔전(屯田)을 절수(折受)로 나눠 주고 백성의 전답을 침탈하지 말 것을 청하였었는데, 남구만의 말이 참으로 견식이 있는 말이었습니다. 각처(各處)의 어장(漁場)과 어전(漁箭)을 호조(戶曹)에 분부하여 망납(望納)케 하면, 도장(導掌)의 무리들이 빙자하여 작폐(作弊)하는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를 알지 못하겠는가? 이미 대신(大臣)에게 하유하였다."
하였다.

 

12월 25일 기미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지원(尹志遠)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2월 26일 경신

각사(各司)의 묘유사(卯酉仕)618)  를 파하라 명하였다.

 

약방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의 관원이 임금의 체후(體候)를 입진(入診)하였다. 좌의정 이집(李㙫)이 연속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올렸으나, 임금이 출사(出仕)를 권면해 마지 않으니, 이집이 명령을 받들었다.

 

경기도 암행 어사(暗行御史) 김상성(金尙星)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김상성이 음죽 현감(陰竹縣監) 김도언(金道彦)의 매우 법에 어긋난 실상을 진달하니, 임금이 먼저 파면하고 뒤에 잡아오기를 명하였다. 김상성이 군역(軍役)과 인족(隣族)의 폐해를 통절(痛切)히 진달하고 이어 금년 이후로는 모든 종[奴]의 양처(良妻) 소생은 공천(公賤)·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모역(母役)에 따르게 하여 양정(良丁)의 수효를 늘릴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대신들에게 하문(下問)하니,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힘주어 찬성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사(御史)의 진달한 바를 들으니, 양민(良民)의 날로 줄어든 폐단이 오로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사소한 폐단 때문에 대체(大體)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니, 금년부터 소생(所生)은 영갑(令甲)으로 정하여 공천(公賤)·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모역(母役)에 따르게 하라."
하였다. 김상성이 또 전화(錢貨)를 시급히 더 주조(鑄造)치 않을 수 없음을 상세히 진달하고 조문명의 진달도 김상성의 말과 같으니, 임금이 ‘응당 처치하겠다.’고 전교하고, 이어 외방 각 영문(營門)의 기부전(記付錢)은 군포(軍布)로 대신 올려 보내게 하되 우선은 군포를 쌀로 받아 각 영문에 유치(留置)케 하라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천군(醴泉郡)에서 이 달 11일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12월 26일 경신

하교하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전록통고(典錄通考)》를 여러 승지들은 항상 눈에 익혀두라고 하교하였었는데, 비록 서계(誓戒)를 받은 일로써 말하더라도 향사(享祀) 때를 당하여 한때 훈신채(葷辛菜)를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무엇이 어려워서 여러 집사(執事)가 서계를 따르지 않아 향사가 정결하지 못하니, 그러고서도 능히 신명(神明)을 이르게 할 수가 있겠는가? 전중 어사(殿中御史)로 하여금 각별히 규찰(糾察)케 하라. 또 국가에서 이목지관(耳目之官)619)  을 둔 것은 무엇에 쓰려고 한 것인가? 또한 마땅히 듣는 대로 논죄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27일 신유

사간원 【사간(司諫) 홍상인(洪尙寅)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수령이 관할 경내(境內)에서 묘지(墓地)를 점유(占有)할 수 없음은 조정의 법령이 지극히 엄중한데, 춘천 부사(春川府使) 정도원(鄭道元)은 그의 자부(子婦)를 위하여 경내에서 산지(山地)를 점유했습니다. 그밖에도 불법한 일이 숱하게 많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平) 이덕재(李德載)가 현도(縣道)를 경유하여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니, 전교하기를,
"내가 정한 대체(大體)란 것은 ‘시습을 씻고 다 함께 협조하고 기강을 바로잡고 오직 재주만을 취하여 쓴다’는 열두 글자만을 알 따름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을 나는 확연히 알고 있다. 이제 비록 앞에서 현란하려고 하지마는, 이 마음이 이미 굳혀지니 보이지 않은 것도 보이고 들리지 않은 것도 들린다. 이른바 시상(時象)이란 뜻도 학문이 얕고 뜻이 막혀서 끝내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덕재가 먼저 이 상소로 인도하고 그 뒤에 뜻을 행하려고 했지마는, 그것도 또한 오활(迂闊)한 짓이다. 이 상소를 도로 내려보내어 그로 하여금 잠심(潛心)하고 전사(前史)의 복철(覆轍)에 대하여 공부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의 임금은 탕평(蕩平)의 정치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혹 누가 시정(時政)에 대하여 비판하면 반드시 꺾었다. 이덕재의 상소에는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는데도 미리 억단(臆斷)한 하교를 이와 같이 내린 것이다.

 

12월 28일 임술

사헌부 【지평 엄경하(嚴慶遐)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일의 아뢴 보성 군수(寶城郡守) 이태창(李泰昌)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사간원 【정언 정광은(鄭光殷).】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옥송(獄訟)을 기한이 지나도록 지체시키는 것이 실로 서울과 지방의 막대한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산송(山訟)이나 살옥(殺獄)에 있어서는 송관(訟官)이 된 자가 결판하기가 어려워 밀쳐 나감이 더욱 심합니다. 지금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다시 밝히는 때를 당하여 별도의 칙려(飭勵)가 없지 않을 수가 없으니, 청컨대 이제부터는 매월 말에 반드시 한 달 안에 결송(決訟)할 시종(始終) 일자(日字)를 서울에서는 비국(備局)에 기록하여 보고케 하고 지방에서는 방백(方伯)에게 서면(書面)으로 보고하도록 하여 진실로 전일과 같이 지체한 자가 있으면 각별히 논죄하기로 다시 규정을 정하되, 그 중에서 혹 마지못해 기한을 넘길 경우는 사유를 밝혀 계문(啓聞)케 하여 한결같이 《경국대전》에 따라 시행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에 특별히 신칙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엊그제 야대(夜對)의 명이 있었는데 승정원에서 옥당(玉堂)이 병이 있다는 이유로써 번거롭게 아뢰었다 하는데, 신은 가만히 이를 괴이하게 여깁니다. 옥당(玉堂)에서 참으로 병이 있었다면 당초에 병을 말한 상소를 받아들였어야 하는데도 상소는 이미 되돌려 주었고 또 방금 직려(直廬)에 있다 하니, 그 병이 못견딜 정도에 이르지 아니한 것은 이것에 의거해도 알 수 있는데, 성명(成命)이 내린 뒤에도 이러한 번품(煩稟)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청컨대 입직(入直)한 승지와 옥당(玉堂)을 모두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고, 말단의 일은 아뢴 대로 따랐다.

 

12월 29일 계해

임금이 예조(禮曹)에서 올린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신주(神主)를 배종(陪從)할 사람의 복색(服色)에 관한 초기(草記)에 답하기를,
"을사년620)   사묘(私廟)에 입묘(入廟)할 때는 천담복(淺淡服)을 썼으므로, 내가 하교한 것은 대략 이준례를 본받았다. 담(禫)이란 것은 담담(淡淡)하고 평안한 뜻인데, 담일(禫日)에 입묘(入廟)하기 때문에 융복(戎服)에는 호수(虎鬚)를 떼고 관복(冠服)에는 흉배(胸背)를 뗀 것이 곧 담복(淡服)이라 하였으나, 예문(禮文)의 일은 중대한 것이니 대신에게 물어서 품처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헌의하기를,
"예전에는 반우(返虞)할 때에 이미 신도(神道)로 섬겼는데, 하물며 3년상을 이미 마치고 입묘(入廟)할 때에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이번 예조 절목(禮曹節目)에 연여(輦輿)와 의장(儀仗)을 모두 길색(吉色)으로 마련하였으니, 연여에 딸린 배종자는 내시(內侍)와 대축(大祝)에서 각 차비(差備)에 이르기까지 모두 길복(吉服)을 입어야 하며, 압굴(壓屈)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없습니다. 시위(侍衞)하는 여러 신하들도 같은 배종이지만 각 차비와는 의당 차이가 있습니다. 검은 색은 압굴(壓屈)에 방해로울 것 같고 흰 빛은 길복(吉服)을 따르는 데는 혐의스러우니, 천담복(淺淡服)으로 고쳐 마련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의 헌의도 홍치중과 같으니, 전교하기를,
"대신들의 뜻이 이러하니 당초의 하교대로 거행하되, 다만 비단만은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말단의 서울과 지방의 결송(決訟)을 계문하는 일은 아뢴 대로 따랐다. 사헌부 【지평 엄경하(嚴慶遐)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라도 금성현(錦城縣)의 하의(荷衣)·태금(苔錦) 등 위아래 세 섬의 백성들이 정장(呈狀)하기를, ‘정명 공주방(貞明公主房)의 면세전(免稅田) 20결(結)이 섬 속에 있었다가 그 뒤에 공주의 외손(外孫)들에게 전해졌는데, 선조(宣祖) 때 전체의 섬을 절수(折受)했다 핑계하고는 민전(民田) 1백 60여 결에 대하여 몽땅 수세(收稅)하니, 백성들이 원통함을 견디지 못하여 계묘년621)   무렵에 한성부(漢城府)에 송사를 냈으나 결국 졌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성부의 송안(訟案)을 가져와 상고해 보니, 대개 이 송사의 요점은 면세(免稅)냐 절수(折受)냐의 분별에 있었고, 절수인지의 여부는 왕패(王牌)622)  의 유무(有無)에 달려 있는데, 한성부에서 처결(處決)할 때에 이러한 곡절은 버려두고 묻지도 않고서 도리어 백성들의 2백장이나 되는 문서를 관사(官斜)가 없다 하고 패소(敗訴)로 처결해버렸습니다. 대저 노비(奴婢)의 매매를 제외한 전답의 문서에는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관사를 한 일이 절대로 없었는데, 이것으로써 해도(海島)의 우맹(愚氓)에게 요구했으니, 이것이 벌써 칭원(稱寃)의 사단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각 궁가(宮家)의 노복(奴僕)의 무리들이 궁차(宮差)623)  라 거짓으로 일컫고는 한꺼번에 내려가서 세력을 믿고 함부로 설치니, 닭이나 개들도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합니다. 백성들이 천리 길에 바다를 건너 발을 싸매고 와서 호소를 하였으니,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이 없었다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청컨대 한성부의 송안(訟案)과 원고(原告)·피고(被告)를 본도(本道)로 내려보내 감사로 하여금 직접 맡아 분명하게 판결토록 하여 다시는 호소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약재(藥材) 중에서는 인삼(人蔘)이 가장 소중하기에 간계(奸計)를 써서 밀조한 자는 은전(銀錢)을 사주(私鑄)한 죄와 똑같이 다루어 왔지만, 근래에 법령이 해이하여 서울의 간사한 무리들이 마음대로 계(契)를 만들어 간혹 다른 물건을 섞어 아교로 붙여서 인삼을 만들어 이득을 독점하고 있으니, 참으로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이 뒤로도 이러한 무리들이 만약 전일과 같이 인삼을 만든다면 일죄(一罪)624)  로써 논죄할 것이며, 서북(西北) 지방의 인삼을 채취(採取)하는 곳에도 지방관에 분부하여 똑같이 엄중히 신칙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장태소(張泰紹)를 금군 별장(禁軍別將)으로, 이광도(李廣道)를 집의(執義)로, 김상성(金尙星)을 부교리(副校理)로, 윤순(尹淳)을 좌참찬(左參贊)으로, 홍원익(洪元益)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12월 30일 갑자

하교하기를,
"지난번 진시(辰時) 전에 먼저 향소(享所)로 나간 친제(親祭)한다고 신칙하라 했는데, 비록 3년상(三年喪) 안에는 적간(摘奸)하는 일이 없었지만 요사이는 모든 관원들이 더욱 태만하여 이미 패초(牌招)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에 적간해 보니 찬례(贊禮)나 집례(執禮), 대축(大祝)들이 모두 향소(享所)에 나아오지 않았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무겁게 추고(推考)하고 이 뒤로는 특별히 신칙을 가하라."
하였다.

 

이때에 국청(鞫廳)의 죄수 중 작처(酌處) 속에 끼지 못한 자가 아직도 많았다. 죄인 목천임(睦天任)의 종 노미(老味)와 수택(守澤) 등이 목천임이 상시 환관(宦官)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납초(納招)하여, 목천임은 형장(刑杖)을 맞아 죽었고,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국청에서는 연일 개좌(開坐)하여 형신(刑訊)하며 구핵(鉤覈)하였으나, 승복한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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