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을축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祭)를 몸소 행하였다.
1월 2일 병인
임금이 여사(麗史)001) 를 보다가 전교하기를,
"고려(高麗) 때 허공(許珙)은 종 하나를 거느리고 해골(骸骨)을 묻어주기를 거의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왕자(王者)의 도(道)를 말하자면, 문왕(文王)의 다스림은 역시 은혜가 고골(枯骨)에까지 미쳤다. 승국(勝國)002) 의 여러 능침(陵寢)에 혹시라도 나무를 베고 입장(入葬)하는 자가 있지 않겠는가? 역대의 시조(始祖) 능 및 여조(麗朝)의 네 능은 《대전(大典)》의 계한(界限)에 의해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때때로 순심(巡審)하여 초동 목수(樵童牧竪)를 막고 입장(入葬)하는 자를 엄금하게 하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3일 정묘
임금이 효장궁(孝章宮)003) 담사(禫祀)에 곡림(哭臨)하였다. 오시(午時)에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신주(神主)를 창의궁(彰義宮)으로 옮겨 봉안했는데, 임금이 친히 보내고 예조에 명하기를,
"혼궁(魂宮)과 빈궁(殯宮) 소속은 백모(白帽)·포대(布帶)로 담사(禫祀) 때의 변복(變服)하는 절차를 하라."
하고, 드디어 입묘(入廟)할 때의 여러 향관(享官)에게 상전(賞典)을 베풀었다.
간원(諫院)에서 【정언(正言) 정광은(鄭光殷)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금군(禁軍)의 호궤(犒饋)가 끝나지 않아 금려(禁旅)004) 가운데 말을 달려 지난간 자가 있었습니다. 일이 군사의 기율에 관계되니, 청컨대 해당 대장(大將)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별장(別將)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군액(軍額)의 물고(物故)005) 및 도망하여 기한이 넘은 자를 대정(代定)하지 못한 경우는 수령을 죄주고, 비록 대정했더라도 가명(假名)을 거짓으로 기록한 자는 그 인원 수에 따라 연한을 배로 하여 금고(禁錮)하라고 명하였으니, 경기 어사(京畿御史) 김상성(金尙星)이 진달한 바를 따른 것이다.
1월 4일 무진
호남 어사(湖南御史) 황정(黃晸)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불러 보고 호남이 병폐를 하문(下問)하니, 황정이 말하기를,
"남쪽 연해(沿海)에 여러 섬이 많은데 군역(軍役)을 피하려는 사나운 백성이 찾아가 하나의 도망하는 자들의 숲이 되었고, 역노(逆孥)006) 로 연좌(緣坐)된 자들이 또 이따금 섞여 거처하니 방비가 허술해 깊이 염려스럽습니다. 마땅히 관장(官長)을 설치해 목관(牧官)의 예처럼 관장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물어보고 백성들을 소란하게 한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인하여 수령(守令)의 잘 다스리는지의 여부를 물어보고 남평 현감(南平縣監) 한사선(韓師善)을 발탁하여 한 자급(資級)을 올리고, 잘 다스리지 못한 자는 해조에 내려 복계(覆啓)하게 하였다.
1월 5일 기사
낮에 캄캄해지며 바람이 불었다. 진시(辰時)에는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이현모(李顯謨)를 부응교(副應敎)로, 전(前) 현감(縣監) 한사선(韓師善)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한사선은 어사가 순리(純吏)로 포장(褒奬)하여 갓 탁질(擢秩)된 사람이다.
전교하기를,
"삼양(三陽)007) 이 돌아와 만물이 봄을 맞이하니, 바로 왕자(王者)가 인(仁)을 본받아 도(道)를 행할 때인데 그 가운데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은 농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라의 근본은 백성에게 있고 백성들의 하늘은 식량에 있으니, 중요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근년에는 농사가 조금 풍등(豐登)하였으나 나는 일찍이 백성들이 풍년을 원하지 않는 마음을 불쌍히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묵은 포흠(逋欠)008) 을 탕감(蕩減)해 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어깨를 쉬게 하였다. 아! 방백(方伯)과 수령들은 나의 이런 뜻을 본받아 농사철에 요역(徭役)을 일으켜 농경(農耕)을 해치지 말며, 여리(閭里)에 물어보고 종자와 식량을 주되 시기에 늦지 말게 하며, 전야(田野)를 살펴보고 게으른 사람을 경각시켜서 추수할 것이 있기를 기약하라. 그 가운데서 우심(尤甚)한 경우는 보살피는 데 더욱 마땅히 마음을 써야 하며, 북도(北道)·남관(南關) 몇 고을은 개간(開墾)하여 경작함이 거의 개벽(開闢)하는 것과 같으니 또한 마땅히 착실하게 진휼해야 한다. 아! 바야흐로 화창한 봄이 되어 초목도 또한 소생하고 있는데,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소생할 기약이 없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매 먹고 쉬는 것이 어찌 편안하랴? 비록 군제(軍制)로 말하더라도 양남(兩南)의 도신(道臣)이 정성을 다해 바로잡은 것이 얼마 되지 않은데, 어제 호남 어사가 진달한 바를 들으니 궐액(闕額)의 침징(侵徵)이 여전하여 금방 낳아 머리털이 채 마르지도 않은 아이 또한 충정(充定)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호남이 이와 같으니 영남을 알 만하며, 영남이 이와 같으니 다른 도는 더욱 알 만하다. 아! 여러 도신(道臣)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고 백성들의 불쌍함을 생각하라. 규모(規模)가 이미 정해졌으니, 지켜 흔들리지 말고, 황구(黃口)009) 의 충정과 인족(隣族)의 침징(侵徵)을 마치 자식의 일처럼 보아 부지런히 돌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정성이 있는 곳에 어찌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한 지어미가 억울함을 호소하면 5월에 서리가 내리는 법이다. 하물며 3백 60여 주(州)가 모두 억울함을 품고도 펴지 못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랴? 아! 너희 도신(道臣)과 수령들은 나라를 집안처럼 보아야 한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은 우리 동포(同胞)다.’라고 한 말이 서명(西銘)010) 에 실려 있다. 왕화(王化)를 한 도에 선포(宣布)하고 백리재(百里才)011) 로서 한 고을을 다스리라. 백성을 구제하지 못하면 비록 왕장(王章)012) 에서는 벗어나더라도 하늘에서 환하게 살펴보고 있다. 나의 이 교서(敎書)를 가지고 팔도 및 양도(兩都)013) 에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오늘이 바로 조참일(朝參日)이니, 이 몇 마디 말로 전석(前席)의 유시(諭示)에 대신한다. 아! 시상(時象)에 대한 내 뜻은 확고하니, 지키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증자(曾子)와 같은 현인도 오히려 하루 세 번씩 반성하였는데, 바로 새 봄을 당하여 어찌 서로 권면(勸勉)함이 없겠는가? 전조(銓曹)는 오직 인재(人才)를 등용하고, 묘당(廟堂)은 기강을 떨치며 진신(搢紳)014) 은 삼가 공직(供職)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능히 행하되 마땅히 나라를 집안처럼 보고 임금을 어버이 같이 본다면, 동인 협공(同寅協恭)015) 은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이르리라. 나도 마땅히 마음으로 힘쓸 터이니, 여러 신하들도 역시 더욱 마음을 가다듬으라."
하였다.
1월 6일 경오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춘향 대제(春享大祭)를 몸소 행하였다.
황해도 해주(海州) 유학(幼學) 안민(安敏)의 처(妻) 강씨(姜氏)가 그의 남편을 위해 불에 타 죽었다고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이르기를,
"강씨의 절행(節行)은 옛날 열부(烈婦)에도 부끄럽지 않다. 막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반포(頒布)했으니, 마땅히 특별한 포상을 더해야 할 것이다."
하고, 해조에 명하여 정포(旌褒)하게 하였다. 또 강화부(江華府)의 1백 세가 넘은 여인에게 세찬(歲饌)을 내렸는데, 나이 많은 자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이병태(李秉泰)를 승지(承旨)로 삼았는데, 이병태가 극력 사양하고 명에 응하지 않으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꾸짖고는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출보(出補)했다.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신주를 입묘(入廟)할 때, 대축(大祝)은 으레 자급을 올리는 법이므로 부교리(副校理) 김상성(金尙星)을 대축이었던 까닭으로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김상성은 이때 30세가 못되었으므로, ‘나이는 너무 적은데 벼슬이 너무 급작스레 올라간다.’면서 진소(陳疏)하여 극력 사양하고, ‘임금은 한 번 웃고 한 번 찡그리는 것조차 조심해야 한다.’는 경계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은상(恩賞)은 마땅히 신중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우악(優渥)하게 답하였다.
1월 7일 신미
대사간(大司諫) 이춘제(李春躋)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근래에 법강(法綱)이 점차 무너져 온갖 관원이 태만해졌습니다. 신은 마땅히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를 따라 묘사유파(卯仕酉罷)016) 의 법을 신칙하고, 번막(藩幕)의 직임을 정선(精選)하며 감찰(監察)의 관원을 잘 간택하고 은상(恩賞)을 신중히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교리 김상성은 젊은데다 학문이 넉넉하니, 마땅히 고문(顧問)에 갖추어 두어야 하나 준직(準職)을 겪지 않았으니, 청컨대 그의 자급(資級)을 거두소서. 승지 한사선(韓師善)은 승급(陞級)이 치적(治績)에서 말미암았으나 은혜가 중비(中批)017) 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그 명을 거두어 전직(前職)으로 돌려야 합니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신광하(申光夏)는 지난번 수의(繡衣)의 서계(書啓)에 이미 말하기를, ‘아전이 허복(虛卜)018) 을 받았는데도 살피지 못했고, 향소(鄕所)에서 민전(民錢)을 징수했는데도 금하지 못했다.’고 하여 그 논열(論列)한 바가 폄(貶)은 있고 포(褒)는 없었으니, 마땅히 그 직임을 체차(遞差)하여야 합니다. 사족(士族)의 부녀(婦女)로서 음설(淫褻)함을 자행하여 풍교(風敎)를 더럽힌 자는 무거운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형전(刑典)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故) 해숭위(海嵩尉)019) 윤신지(尹新之)의 봉사손(奉祀孫)의 아내인 김성(金姓)을 가진 과녀(寡女)가 근래 아이를 낳은 변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는 관(官)에 고하지 않고 자진(自盡)020) 하게 하여 간통(奸通)한 남자를 적발하지 못하였습니다. 풍교에 관계된 바니, 그대로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땅히 유사(攸司)로 하여금 엄히 그 비복(婢僕)들을 문초해 구핵(鉤覈)하여 법을 바루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신광하는 체직하라. 김상성의 가자(加資)는 바로 고례(古例)이며 경악(經幄)에 인재가 모자라니, 다시 참작함이 마땅하다. 한사선의 경우 상격(常格)을 따르지 않은 것은 중한 바가 백성에게 있기 때문이다. 상소 말단의 일은 풍교에 있어서 매우 놀라우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 계문하게 하라."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황정(黃晸)이 원조(元朝)021) 의 면계(勉戒)로 인해 상소하여 종사(螽斯)·인지(麟趾)022) 의 뜻을 인용해 청하기를,
"먼저 궁중(宮中)을 화협(和協)케 하고 인정(仁政)을 사해(四海)에 베풀어 하늘에 국운(國運)이 영원하기를 비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답하였다.
1월 7일 신미
충청도 황간 현감(黃澗縣監) 정형태(鄭亨泰), 목천 현감(木川縣監) 이정주(李挺柱)가 새 감사 신방(申昉)과 대대로 혐의(嫌疑)가 있는 사이로 전 감사 이성룡(李聖龍)이 두 수령의 직임을 계파(啓罷)하였다. 임금이 사사로운 혐의로 공사(公事)를 폐하는 것은 불가하고, 또 상문(上聞)하는 것도 불가하다고 하여 두 사람의 직을 도로 잉임(仍任)023) 시키고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이성룡과 신방이 상소하여 인혐(引嫌)하니, 임금이 책망하여 유시하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장령(掌令) 김정윤(金廷潤)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조(正朝)에 익릉(翼陵)024) 의 향관(享官)이 나오지 않은 것은 비록 사세가 과연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막중한 향관이 인원수를 갖추지 못했으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청컨대 도착하지 않은 향관은 나문(拿問)하여 조사해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입묘(入廟)할 때 여러 집사(執事)의 상전(賞典) 가운데 대축(大祝) 김상성(金尙星)을 가자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전례의 유무(有無)는 미처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준직(準職)을 지내지 않았고 또 너무 지나치게 뛰어올랐으니, 청컨대 김상성을 가자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술년025) 부묘(祔廟)할 때 궁위령(宮闈令)도 또한 가자하도록 하였다. 한때의 부묘도 오히려 이러했는데, 하물며 3년 후이겠는가? 대신(臺臣)이 사체를 모르는 것이다."
하니, 김정윤이 인피하였다. 임금이 즉시 체차하니, 도승지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비록 맞지는 않더라도 꺾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사직하지 말하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춘제(李春躋)의 상소 가운데 있는 과녀(寡女)란 누구의 집을 말하는가?"
하니, 좌승지 이광보(李匡輔)가 말하기를,
"바로 김간(金榦)의 질녀(姪女)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사대부 집에서는 개가(改嫁)를 하지 않는데, 이제 이와 같으니 세변(世變)을 볼 수 있다. 해조로 하여금 엄히 그 간부(間夫)를 조사하게 하라."
하니, 좌부승지 조명익(趙明翼)이 말하기를,
"그 집에서 간부를 조사하지 않고 먼저 그녀를 죽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마침 또 추국하는 일로 인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이 그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문랑(問郞)이 되거든 반드시 먼저 구인(鉤引)026) 하는 데 마음을 쓰지 말고 단지 죄인의 말에 따라서 장삼 이사(張三李四)로 변환(變幻)하여 뒤섞여 나오게 하는 폐단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후손이 번성하기에 마땅하다. 내가 친국(親鞫)할 때 보건대, 항양(桁楊)027) 아래에서 미란(迷亂)하지 않은 자가 거의 드무니, 문랑이 만약 구인하는 데만 마음을 쓴다면 그 피해가 더욱 어떠하겠는가? 장차 나의 이러한 뜻을 가지고 그 여러 문랑에게 신칙하라." 하였다. 이때 왕부(王府)에 국옥(鞫獄)이 연달아 설치되었는데, 성상의 뜻이 매양 흠휼(欽恤)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1월 8일 임신
서명균(徐命均)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조상경(趙尙慶)을 승지로 삼았다.
1월 9일 계유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을 때 부사과(副司果) 윤동원(尹東源)이 유신(儒臣)으로 서울에 있다가 진소(陳疏)해 돌아감을 고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윤동원이 뜻을 세우는 것으로 학업을 삼고 자신을 닦아 남을 다스리는 도리로 면계(勉戒)하면서 윤기(倫紀)를 밝히고 중화(中和)의 뜻을 이르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지우니, 임금이 우악하게 답했다. 윤동원이 또 귀주방(貴主房)의 절수(折受)028) 한 토지가 너무 많고 장획(臧獲)029) 을 매매하여 폐단을 끼치는 것은 제왕(帝王)의 집에서 복(福)을 아끼는 뜻이 아님을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기꺼이 듣고 포유(褒諭)하였다. 또 빨리 돌아가라 분부하고 이어서 납제(臘劑)030) 를 내리어 보냈다.
전(前) 응교(應敎) 이종성(李宗城)과, 교리(校理) 한현모(韓顯謨)에게 관서(關西)와 영남(嶺南)을 나누어 안렴(按廉)하라 명하고 면유(面諭)해 보냈다.
1월 10일 갑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통영(統營)에 소속된 가덕도(加德島) 안팎 바다의 어전(漁箭)을 화순 옹주(和順翁主)의 집에 절수(折授)하였는데, 비국 당상 윤순(尹淳)이 복계(覆啓)하여 환침(還寢)하기를 청하였다. 좌의정 이집(李㙫)이 또 통수(統帥)의 장계(狀啓)로 인해 청하기를,
"통영에 다시 소속시켜 그 어리(漁利)를 거두어 해방(海防)을 중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매양 궁방(宮房)에 절수하면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문득 과장하여 계문하고 비국의 회계(回啓)에 이르러서는 더욱 원래의 계문 이외에 극도로 부연(敷衍)하여 아주 번거롭고 잗달아 도리어 체통을 잃는다. 절수를 비록 환침(還寢)시키지만 내 마음은 아주 편치 못하다."
하고, 인하여 비국의 회계가 군부(君父)를 협박하였다며 책망하는 말이 많았다. 교리 김상성(金尙星)이 나아가 말하기를,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시는 덕을 그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만, 번거롭고 잗달다는 말씀을 방계(防啓)031) 한 뒤에 내셨습니다. 성상께서 스스로 기약한 바가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성기(聲氣) 사이에 이미 절도가 맞지 않았고 하루 사이에 어긋난 점이 백 가지로 나왔습니다. 절수 한 가지 일은 비록 부득이 억지로 환침하셨지만, 이로 인해 촉발(觸發)되어 사기(辭氣)가 평온함을 잃는다면 성덕에 누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성찰(省察)하는 공부에 뜻을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 역시 궁방(宮房)의 차인(差人)들이 지나치게 받아들여 폐단을 끼치는 정상과 수본(手本)을 농간하는 습성을 진달하니, 임금이 통렬히 금하라 명하였다. 형조 참판 송진명(宋眞明)이 청하기를,
"양남(兩南)으로 하여금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의 문집(文集)을 간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간원(諫院)에서 【대사간 이춘제(李春躋)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먼 곳에 정배(定配)한 죄인 황익재(黃翼再)가 당초 피고(被告)된 것은 여러 적(賊)의 초사(招辭)에서 나왔습니다. 뼛가루를 싸 주면서 간절히 잘 전하라는 부탁이야말로 어떤 악역(惡逆)입니까? 이른바 영남에서 조사한 것이란 본래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황순천(黃順天)의 말 역시 부합되니, 음흉한 정적(情迹)이 절절이 의심스럽습니다. 작처(酌處)한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여론이 격분하고 있으니, 청컨대 황익재를 다시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이만익(李萬益)이 역적을 추종한 정상을 이미 직초(直招)하여 기영(畿營)으로 출부(出付)하였는데, 또 전의 말을 뒤집어 도신(道臣)이 바야흐로 국청(鞫廳)으로 이송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금부(禁府)에서 또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 처리하도록 했는데 그후 여러 달이 되어도 다시 형을 가하지 않았으니, 그 허술하고 느슨함이 심합니다. 청컨대 해당 도신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이만익을 빨리 엄형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차대(次對)032) 에 삼사(三司)가 함께 들어오는 것은 대개 묘당(廟堂)과 시비를 다투려는 것인데, 근래에는 한 사(司)가 갖추어지지 않아 임시로 미품(微稟)하는 것이 이미 잘못된 예(例)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헌부(憲府)에서 들어오지 않았는데 정원(政院)에서 변통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를 추고하고, 이 다음에는 빈대(賓對)에 반드시 삼사를 갖추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월 11일 을해
조빈(趙儐)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국청의 죄인 심익연(沈益衍)을 흑산도(黑山島)로 정배하라 명하였다.
김호(金浩)를 승지로, 조최수(趙最壽)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윤취리(尹就履)를 장령으로, 이유신(李裕身)을 지평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소환(小宦) 최필웅(崔必雄)이 궁궐 담장을 넘다가 일이 발각되자, 임금이 친문(親問)하여 그 모역한 형상을 조사하고 이미 최필웅을 정법(正法)하였는데, 여당을 끌어들여 옥에 갇힌 자가 매우 많았다. 본부(本府)에 국청을 설치하여 권세장(權世長)을 잡아다가 노미(老味)와 면질(面質)시켰으나, 권세장이 불복(不服)하면서 다만 말하기를,
"네 말이 허망하다."
하였다. 수택(守澤)을 또 권세장과 면질시켰는데 권세장이 불복하였고, 노미와 억경(億京)을 면질시키니, 말하기를,
"너희들과 여러 상전(上典)이 순지(順之)가 붙잡혔다는 말을 듣고는 문을 닫고 밥을 먹지 않은 것이 어찌 내관(內官)과 순지가 붙잡혀서 그런 것이 아니었느냐?"
하니, 억경은 말하기를,
"네 말이 절절이 그렇다."
하였다. 억경을 또 김만홍(金萬弘)과 면질시키고, 수택과 오필만(吳必萬)을 면질시켰으나, 서로 따지면서 힐난하는 것이 귀일되지 않았다. 시경(時敬)을 다시 추문하고 목성관(睦聖觀)을 붙잡아 왔으며, 권세장과 김만홍을 다시 추문하고 수택과 노미를 면질시켰다. 오필만을 일차 형신(刑訊)하니, 공초하기를,
"목씨(睦氏) 성(姓)을 가진 세 양반이 신의 집에 와서 모였으나, 이름 자(字)는 모릅니다."
하였다. 목성관에게 목천임(睦天任) 형제의 왕래한 정상 및 순지(順之)가 붙잡힌 후의 두려워한 정절(情節)을 물었는데, 목성관은 불복하였다.
1월 12일 병자
화평 옹주(和平翁主)가 마마를 앓으므로, 추국을 우선 정지하고, 모든 죄인을 죽이는 공사(公事)는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라 명하였다. 정해일(丁亥日)에 이르러 두의(痘醫) 이엽(李燁) 등에게 가자(加資)하고 상을 내렸다.
1월 16일 경진
고부사(告訃使) 신무일(愼無逸) 등이 복명(復命)하였다. 신무일은 상인과 역관들을 침해하여 화뢰(貨賂)를 많이 토색(討索)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1월 17일 신사
부호군(副護軍) 이의만(李宜晩)이 염백(廉白)033) 에 뽑혀 초질(超秩)하기에 이르렀다. 이의만이 상소하여 실제가 없는 이름을 무릅쓴 것이라 하여 극력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청렴을 숭상하여 세상을 가다듬게 하는 것이 곧 왕정(王政)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의만이 들어와 사례하기에 미쳐 임금이 소견(召見)하여 장유(奬諭)하고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1월 18일 임오
이수해(李壽海)를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삼았다. 이수해는 정미년034) 초두에 논사(論史)한 일 때문에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 직을 제수한 것이다.
1월 20일 갑신
경상도 영양(英陽)·상주(尙州) 등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다.
부교리(副校理) 김상성(金尙星)이, 강연(講筵)이 오래 정지되어 일폭 십한(一曝十寒)035) 의 걱정이 있다고 진계(進戒)하고, 또 본관(本館)의 고사(故事)로써 원월 잠규(元月箴規)를 붙였으며, 양심잠(養心箴)을 제진(製進)하여 성학(聖學)을 면려하였다. 또 속히 홍문관록(弘文館錄)을 완성하여 강관(講官) 갖추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제진한 양심잠은 그 정성이 매우 가상하니 궁중에 머물러 두고 살펴보겠으며, 새 홍문록 역시 금명간 거행하겠다."
하였다.
1월 21일 을유
주형리(朱炯离)를 장령(掌令)으로, 박사정(朴師正)을 응교(應敎)로, 김희로(金希魯)를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임정(任珽)·윤휘정(尹彙貞)을 교리(校理)로, 조석명(趙錫命)을 승지(承旨)로, 조언신(趙彦臣)을 동지(同知)로 삼았다. 조언신은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어 무신년036) 난을 당하였을 때에 백성들을 무마하여 뛰어난 성적(聲績)이 있었으므로, 어사(御史)의 포계(褒啓)로 인해 승질(陞秩)한 것이다.
1월 22일 병술
헌납(獻納) 이일제(李日躋)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전하께서 여러 아랫사람들을 독려해 거느리고 여러 관료(官僚)들을 경칙(警飭)하심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간쟁(諫諍)하는 한 길만이 더욱 기구(崎嶇)해져 게으르고 진작되지 않아 바른 말 하는 것을 들을 수가 없으니, 이는 본디 여러 신하들이 겁내고 두려워하는 소치입니다. 신이 전야(田野)에 있으면서 풍문으로 전해진 말을 듣건대, 교접(交接)하는 사이에 예모(禮貌)가 전혀 없고, 수답(酬答)하는 사이에 정지(情志)가 상통하지 않으며 비록 위노(威怒)와 폄극(貶殛)은 없으나 ‘놀랍다.’느니, ‘근거가 없다.’느니 하는 등의 하교를 대장(對仗)할 때에 자주 내리고, 연신(筵臣)들이 또 거기에 따라 비난하고 책망한다 합니다. 승여(乘輿)037) 를 지척(指斥)하는 임무를 맡았는데도 걸핏하면 군부(君父)에게 경모(輕侮)를 당하고, 묘당을 공박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도리어 옆에 있는 사람의 경계를 받게 됩니다. 이는 대간(臺諫)의 가소로운 일인데도 감히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단지 스스로 황공해 하면서 물러가 있으니, 그 기상이 쇠미하여 여지가 없습니다. 때로 혹 시무(時務)를 말하고 군덕(君德)을 논하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먼저 몇 구절의 좋은 말을 써서 성덕을 찬양하고, 바야흐로 제어(題語)로 들어가서는 말을 간곡하게 들려 맞추어 모난 말이 한 마디도 없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올립니다. 그러면 성상께서는 역시 불과 ‘가상하다.’느니, ‘유의하겠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써 으레 따뜻한 비답만 내리고 말 한마디 일 한 가지 채택해 씀이 없습니다. 또 조지(朝紙)에 나온 것 한두 가지를 보더라도 엄경하(嚴慶遐)의 ‘사포(絲布)를 내입(內入)했다.’는 상소는 그 뜻이 경비를 아끼자는 것이었고, 김정윤(金廷潤)이 상전(賞典)을 환수하라고 아뢴 것은 그 말이 은전(恩典)을 신중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터놓은 일이 아닌가? 사체(事體)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하여 꺾었습니다. 비록 두 신하가 소활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직임에 두었는데 도리어 소홀히 여기시니, 신진(新進)을 장려하고 천근(淺近)한 말을 살피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또 듣건대, 전하께서 연석에서 혹 말이 궁장(宮庄)에 미친 것이 있으면 비록 친밀(親密)한 근시(近侍)와 소중한 재집(宰執)이더라도 쉽게 사색(辭色)을 가하고 지나치게 화를 내어 처상(凄傷)한 하교와 노여워하는 뜻은 신하들이 감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독서하고 이치를 강론하심이 무릇 몇 해인데 구용(九容)038) ·구사(九思)039) 의 천근(淺近)한 공부도 역시 행하지 못한 곳이 있어 마침내 사방으로 하여금 그 천심(淺深)을 엿보게 하시니, 성덕에 누가 됨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스스로 성인(聖人)이라는 마음을 누르시고 와서 간하는 길을 넓히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월 24일 무자
신무일(愼無逸)·이광보(李匡輔)를 승지로, 한사득(韓師得)을 집의로, 이귀휴(李龜休)를 장령으로, 윤섭(尹涉)을 헌납으로 삼았다.
1월 25일 기축
수찬(修撰) 이도원(李度遠)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요즈음 진언하는 자가 많은데도 전하께서 한결같이 모두 물리치고 조금도 용납하지 않아 충성스런 사람이 입을 다물게 만들어 의리가 어두워지고 있다 합니다. 신은 청컨대 근본되고 절실한 바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자량(慈良)함은 남음이 있으나 강엄(剛嚴)함이 부족하고, 작은 것은 살피되 큰 것은 빠뜨리며, 가까운 곳은 힘쓰나 먼 곳은 소홀히 하며, 성각(誠慤)은 적고 사린(私吝)은 많으며, 형식(形式)을 숭상하고 명예(名譽)를 좋아하시니, 이는 전하의 기질(氣質)이 편벽된 곳입니다. 더군다나 신축년040) ·임인년041) 이후부터는 차마 듣지 못할 무함을 당했고 갑자기 지극히 처리하기 어려운 변을 당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위축과 협박을 받았으니 도리어 세 번 생각하다 미혹(迷惑)됨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단지 자기 한 몸의 사사로운 일로 여겨 한 개의 ‘혐(嫌)’자를 자처(自處)하는 의리로 삼아 생각하기를, ‘천하의 의리로 이와 바꿀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저 죄를 짓고 두려워하는 자들이 그 천심(淺深)을 엿봄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감히 ‘문생 국로(門生國老)042) 란 말을 하여 협박하는 계책을 삼아 우리 전하의 사의(私意)를 더욱 굳게 만들어 조금만 혐의에 관계된 것이 있으면 오직 조심스레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간흉(奸凶)의 죄로 성궁(聖躬)에 관련된 것을 자기 하나의 사사로운 원수로만 보아 종사(宗社)의 죄인으로 다스리지 않으시니, 천하에 어찌 이럴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무신년043) 적들에 이미 죽을 자들을 살려 준 지극한 덕이 있고 또 총애로 돌보고 녹(祿)으로 대우함이 바야흐로 융숭하였으나, 조정을 혼란시키고 임금을 해치려고 하며 흉계가 더욱 심하였습니다. 외난(外難)으로 이미 선동하고 내환(內患)이 뒤이어 일어나 하마터면 사직(社稷)이 망하고 종묘(宗廟)에 주인 없을 뻔하였으니, 화(禍)의 기미를 추측할 수가 없고 성궁(聖躬)이 고단하고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말이 이에 미치니 놀라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매양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때 반측자(反側子)를 편안하게 하고, 적심(赤心)을 미루어 베풀었다는 말을 끌어대어 본보기로 삼지만, 이 역시 전하께서 이치를 보심이 정밀하지 못하고 본받는 데에 마땅함을 잃은 한 단서인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차례를 이어 대통(大統)을 계승하여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주인이 되신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반역(叛逆)하는 무리가 세신(世臣)·귀족(貴族)에서 많이 나왔는데, 만약 나라를 처음 세운 영주(英主)가 배반하는 무리를 받아들이고 항복한 자를 초치(招致)하는 예를 쓰신다면 군신간의 큰 의리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네 신하를 처분하심에 이르러서도 역시 마음이 성실하지 못한 병폐를 볼 수가 있습니다. 작년 등급을 나누어 처분한 후에 하교하시기를, ‘두 신하의 일은 여러 신하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다시 마땅히 처분하겠다.’고 하셨는데 얼마 후 또 ‘빨리 하려다가 도리어 늦어진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대저 두 신하가 신원(伸冤)되고 신원되지 않는 것은 실로 들에게 죄가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으니, 다른 사람의 거취(去就)와 말하는 자의 득실(得失)이 무슨 관계가 있어 성교가 곧 이와 같은 것입니까? 이른바 탕평(蕩平)의 정치는 옛날의 소위 탕평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개 전하께서 조정 신하들이 편당(偏黨)하는 습성을 깊이 미워하여 드디어 당(黨)을 없애고 왕도(王道)의 탕평을 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이런 명목(名目)을 주장하여 피차를 합치고 동이(同異)를 조절함으로써 함께 일을 하는 데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자(箕子)가 말한 바 ‘편당(偏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피차의 사이에 시비(是非)를 논하지 않고 둘을 서로 좋도록 조절하는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어찌 오늘날처럼 심법(心法)에 근본하지 않고 공의(公義) 충역(忠逆)을 혼동시켜 하나로 삼고, 훈유(薰蕕)044) 를 뒤섞어 한 그릇에 담으려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전하의 뜻은 반드시 생각하기를, ‘한편만 반드시 모두 옳은 것이 아니고 한편만이 모두 그른 것이 아니니 어찌 시비를 논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교 하셨습니다. 그러나 붕당이 생긴 지 오래여서 피차가 배격하고 알력하는 즈음에 본디 상호간에 시비가 없지 않았고, 근년에 다툰 바는 당론(黨論)과는 관계 없이 단지 역순(逆順)의 큰 시비만 있습니다. 이런데도 구별하지 않으면 나라가 어찌 나라꼴이 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부추기거나 억제하고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사사로움을 먼저 마음 속에 두지 마시고 오직 죄가 있는지 없는지, 사람이 그른가 곧은가를 살피시어 하나같이 공심(公心)으로 판단하셔야 합니다. 어찌 반드시 남이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강요하되, 견벌(譴罰)로 위협하고 이록(利祿)으로 이끌어 억지로 끌어다 부합하게 하나, 실제로는 시기하고 어긋난 마음을 가지기를 건중(建中)의 조정(調停)045) 처럼 한 연후에야 옳게 여기시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이 당론(黨論)에 관계된다 하여 그 소장을 돌려주게 하였다.
1월 26일 경인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광운(李光運)을 헌납으로 삼았다.
1월 27일 신묘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흡(李潝)을 헌납으로, 남태량(南泰良)·정형복(鄭亨復)을 정언(正言)으로, 윤광운(尹光運)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1월 28일 임진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말하기를,
"체통(體統)을 엄히 하는 것은 바로 조정을 받드는 것입니다. 무변(武弁)은 무장(武將)에 대해 체통이 본디 다른데도 황해 수사(黃海水使) 남덕하(南德夏)는 시임(時任) 주당(籌堂)046) 의 장신(將臣)과 전에는 혐의를 갖지 않았으나 곤임(閫任)047) 을 제수하면서부터 갑자기 혐의를 가져 끝내 역사(歷辭)048) 하지 않았습니다. 무부(武夫)의 이런 습관을 제멋대로 부리도록 내버려 둘 수 없으니, 마땅히 남덕하를 파직하여 후일의 폐단을 징계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말하기를,
"무변이 시상(時象)을 붙좇는 것은 바로 망국의 징조이다. 어찌하여 감히 구습(舊習)을 부리려 하는가? 더군다나 구성임(具聖任)을 칙려(勅勵)한 일을 남덕하 역시 반드시 들었을 것이다. 무신년049) 의 역란(逆亂)이 어찌하여 일어났던가? 그 까닭을 따져 보면 시상(時象)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남덕하로 하여금 만약 그 아비의 원수를 생각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청주(淸州)의 적만 있겠는가? 이제 도리어 아비의 원수의 근본이 당습에서 연유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난을 평정하여 책훈(策勳)이 된 장신(將臣)과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은 무슨 마음인가? 그의 자급(資級)을 낮추어 청주(淸州)로 정배(定配)하여 남덕하로 하여금 통감(痛感)하여 스스로 면려(勉勵)하게 하라. 하지만 그의 아비가 왕년에 순국(殉國)한 것을 내가 어찌 잊겠는가? 본주(本州)로 하여금 보살펴 주게 하여 내가 충신(忠臣)을 생각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남덕하는 바로 고(故) 충신 남연년(南延年)의 손자인데, 그때의 장신(將臣)인 이삼(李森)과 원수진 혐의가 있어 즐겨 역사(歷辭)하지 않음은 인정과 세리(勢理)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비국에서 번거로이 임금께 아뢰어 남의 아들을 차마 밟지 못할 땅에 정배(定配)하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정언(正言)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근래 조처하는 가운데 인심에 맞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궁내(宮內)에서 작호(爵號)를 내린 것은 이미 오늘날 급한 일이 아니요, 또 그 의물(儀物)을 차길(借吉)050) 한 것도 역시 사체에 미안할 듯합니다. 국사가 망연하여 끝날 날이 없는 때에 이런 거조가 있으니, 끝내 부질없는 데로 돌아감을 면치 못합니다. 그런데 또 삼가 듣건대 지난날 차대(次對)에서 영남의 어전(漁箭)에 대한 일로써 성상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심지어는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하교까지 있게 되었다 하니, 듣고서 서로 돌아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요? 대저 궁가(宮家)의 절수(折受)가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실로 오늘날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니 저 여러 신하들이 감히 받들지 못함은 그들 한 몸의 사(私)를 위함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사정(私情)에 얽매어 능히 재량(裁量)하지 못하시고 심지어는 전고(前古)에 없는 과격한 거조가 계셨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하교를 하심은 혹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 아랫사람들을 제어하여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여겨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기(樞機)의 중함을 신중히 여기지 않고 그 과실을 없애기가 어려움을 돌보지 않으시면서 곧 상정(常情)에 당치 않는 말씀을 하시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한때 아랫사람을 어거하는 임시방편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유독 성덕에 누가 되어 후세의 비난을 받음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 전하를 이에 이르도록 인도한 것은 여러 신하들의 죄입니다. 신이 듣건대 요즈음 연석(筵席) 사이에서 승순(承順)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성상의 뜻한 바에 한결같이 마음으로 영합(迎合)하여 ‘성교(聖敎)가 지당하다.’는 말이 문득 하나의 마땅한 의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얼굴로는 따르고 마음으로는 어겨 구차스레 보전하고 전혀 바른 말을 하는 절조가 없으며 한갓 순순히 따르는 태도만 보입니다. 이 때문에 성상께서 신하들을 대하시면 한결같이 거리낌없이 능가(凌駕)하시고, 조금만 어긋나는 점을 캐어 밝히려 하면 곧 꾸짖음을 가하여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점차 자라나 예(禮)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道)가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를 따져 보면 이는 누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까? 시험삼아 지난날 연신(筵臣)들의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로는 대료(大僚)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군부의 비상한 거조를 목견하고도 두려워한 나머지 움추려 물러나 감히 한 마디도 시정(是正)하지 못하였으니, 좌우에서 보필하는 의리가 이에 이르러 땅을 쓴 듯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승지와 삼사(三司)의 인원을 갖춘 것이 대개 그들로 하여금 일에 따라 규계(規戒)을 올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이 직무를 게을리한 죄는 모면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신은 그때 입시했던 승지와 삼사에게 아울러 견벌(譴罰)을 시행해 징려(懲勵)하는 방도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날 유신(儒臣)이 이미 광구(匡救)하였으니, 견별해야 한다는 청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면계(勉戒)한 대체는 옳으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개 후궁(後宮)을 봉작(封爵)할 때 의물(儀物)을 차길(借吉)한 거조는 실로 성덕에 누가 되어도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했는데, 정형복이 말을 했으니, 말한 것이 비록 채용(採用)되지는 않았지만 식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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