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9권, 영조 7년 1731년 2월

싸라리리 2025. 9. 1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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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갑오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윤급(尹汲)·임집(任)을 지평으로, 성덕윤(成德潤)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4일 정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대신(臺臣)은 입대(入對)한 자가 없었다. 전교하기를,
"감시관(監試官)이 갖추어지지 않아 시험을 정지하여 수천 명의 거자(擧子)들이 이로 인하여 유체(留滯)되었으니 상례(常例)로 감죄(勘罪)하여 그들이 바라는 바를 맞추어 줄 수 없다. 대사간 성덕윤(成德潤)은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지평 이유신(李裕身)은 진해 현감(鎭海縣監)으로 출보(黜補)하라."
하였다.

 

탐리(貪吏) 박치원(朴致遠)·여위량(呂渭良)의 자손은 괴원(槐院)051)  에 통의(通擬)하지 말고, 전 감사 김조택(金祖澤)의 자손은 상복(喪服)을 벗은 후에도 3년을 한정하여 청직(淸職)을 허락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김조택은 호남(湖南)의 방백(方伯)이 되어 전곡(錢穀)을 요리한 잘못이 있는 자로 어사(御史) 이광덕(李匡德)이 돌아와 아뢴 것인데, 금부의 복계(覆啓)로 인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김조택의 경우 막 죽어서 사핵(査覈)하지를 못한 채 비록 장률(贓律)을 시행하기는 했으나, 광성 국구(光城國舅)052)  의 가문(家門)이 조잔(凋殘)해서 특별히 연한을 정하라는 분부가 있었던 것이다.

 

유엄(柳儼)을 대사간으로, 서명구(徐命九)를 집의로, 안성(安晟)을 장령으로 이성효(李性孝)를 지평으로, 김상성(金尙星)을 헌납으로, 서명형(徐命珩)·송징계(宋徵啓)를 정언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장단(長湍)의 유학(幼學) 황신홍(黃信弘) 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묘(聖廟)는 천하가 함께 숭봉(崇奉)하는 바입니다. 위로는 제왕(帝王)에서부터 아래로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존경하니, 만약 침범(侵犯)한 일이 있다면, 이는 진실로 성문(聖門)의 난적(亂賊)이며 세도(世道)의 큰 변괴입니다. 이번에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와서 그의 아들을 본읍(本邑)의 성묘 1백 수십 보(步) 되는 청룡(靑龍)의 원신(元身) 안에 장사지냈는데, 그 사이에 별달리 서로 막힌 언덕이 없고, 혈(穴) 옆에 궁장(宮墻)의 옛터가 있어 하나의 낮은 언덕을 이루어 성묘(聖廟)를 가리고 있습니다. 만약 이 궁장이 없다면 성묘를 앉아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나란히 솟아 있습니다. 이른바 고장(古墻)이란 바로 국초(國初)에 도읍을 세울 때 이 자리에 왕기(王氣)가 있다 하여 궁장을 쌓았던 것인데 지금도 유지(遺址)가 완연하다고 고로(古老)들이 서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송인명은 그의 아들을 장사지내는데 처음에는 객사(客舍) 뒤에다 광(壙)을 팠다가 갑자기 이곳으로 옮겨 이회(泥灰)로 하룻밤 사이에 급히 분묘를 만들어 마치 몰래 묻는 것처럼 했습니다. 때마침 향교(鄕校)의 유생(儒生)들이 모두 물러가 있었고 유독 지키는 하인 한 사람이 있다가 법에 의거해 다투었으나, 엄한 말로 공갈하면서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으니 풍수설(風水說)에 미혹된 것이 아니면 반드시 그 권력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저 중재(重宰)로서 성묘의 지중함을 생각하지 않고 감히 장사지내지 못할 땅에 장사를 지냈으니 실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분명한 명을 내리시어 즉시 파 가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경조(京兆)053)  로 하여금 적간(摘奸)하게 하였다. 경조 낭관(郞官)의 녹계(錄啓)가 한결같이 유생의 상소와 어긋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만약 유소(儒疏)와 같다면 중신(重臣)을 죄주어야 하고, 만약 실상이 아니라면 상소한 유생에게 잘못한 죄가 있다. 이제 도형(圖形)을 보고 다시 원소(原疏)를 보건대, ‘청룡의 원신(元身)’이라는 말은 절로 거짓말이 되었다. 이른바 ‘고도(古都)’라고 한 유생의 말은 격동시키기에 힘써 말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억지로 무함한 것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마땅히 중벌(重罰)을 베풀어야 할 것이나, 사기(士氣)를 손상하게 할까 두려우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효유하게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또 상소하여 변명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과 도승지 박문수(朴文秀) 등이 아뢰기를,
"향유(鄕儒)들이 경솔하게 남에게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한 것이 이미 당습(黨習)에서 나왔고 또 후일의 폐단에 관련되니, 소두(疏頭)054)  에게 마땅히 중한 견책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사주(使嗾)를 받은 황신홍(黃信弘)은 비록 아까울 것이 없지만 만약 중벌을 시행하면 사기(士氣)를 손상시킬까 염려스럽다."
하고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2월 4일 정유

헌납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일전에 두 의관(醫官)에게 상(賞)을 베푼 전례(典禮)는 신묘년055)  의 구례(舊例)가 있으니, 대저 기쁨을 표시하는 마음으로 노고에 보답하는 뜻을 보인 것을 여러 신하들이 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금백(金帛)은 궁부(宮府)의 상이요, 자질(資秩)은 공조(公朝)의 전례(典禮)입니다. 기쁨에는 경중이 있고 상에는 대소가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기쁨으로 오늘날 같은 상을 내린다면 설사 이보다 중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증질(增秩)의 은전(恩典)을 어떻게 더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윽이 걱정하는 것은 전례(前例)가 있고 없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한 때 의관 등의 지나친 상 때문에 누누이 이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모든 대소 은상(恩賞)의 전례를 모름지기 한결같이 구례를 따르지 마시고, 또한 마땅히 경중을 헤아려서 환수(還收)하는 명을 꺼리지 마소서. 남덕하(南德夏)가 장신(將臣)에게 하직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비록 곡산 부사(谷山府使) 이명상(李命祥)이 이미 행한 예를 답습한 것인데, 남덕하가 이미 죄를 입었으니, 이명상 역시 어찌 벌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다만 남덕하를 특별히 상당(上黨)056)  으로 정배한 것은 성상의 뜻이 비록 난리의 근원을 추념(追念)하여 징예(懲艾)하려고 한 것이나, 다만 처분에 너무 지나침이 없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남덕하를 탁용(擢用)한 것은 그 아비의 순국한 총성을 생각해서 였습니다. 그런즉 그 자급을 그대로 두어 후예를 녹용(錄用)하는 자취를 있게 하고, 그 사람을 폄직(貶職)하여 선대를 욕되게 한 죄를 드러내게 한다면, 그는 반드시 부끄러움을 더 느낄 것이고 사람들은 듣고 더욱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차마 밟지 못할 땅으로 내쫓아 남의 아들된 마음을 상하게 하며, 또한 하필 옛날 내려 준 은자(恩資)를 모두 빼앗아 당초 충신을 장려한 뜻을 없애는 것입니까? 신은 못내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전(賞典)은 전례가 있고 오늘날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명상은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2월 6일 기해

조언신(趙彦臣)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죄인 목성관(睦聖觀)을 다시 형추(刑推)하고, 오필만(吳必萬)을 2차 형신했으나 불복하였다. 억경(億京)을 2차 형신하니, 그 초사에 이르기를,
"직장(直長)과 두 진사(進士) 및 그의 자질(子姪)이 함께 모였는데 말을 가지고 온 자는 그의 종 개노미(介老味)·이만(二萬)·수택(守澤)입니다. 이른바 이동지(李同知)는 낯빛이 검지 않고 나이 쉬흔이 못되며 키는 중인(中人)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함정립(咸廷立)이란 자가 지키어 〈잡인을〉 엄히 금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사람을 금한 까닭을 함정립에게 물었더니, 함정립이 말하기를, ‘궐내(闕內)에 방화(放火)할 계책을 모의했으니, 삼가 누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2월 7일 경자

큰비가 내리고 밤에는 바람이 크게 불었다.

 

본부에 국청을 설치하여 죄인 이만(二萬)과 자근동(者斤同)을 잡아다 가두고 공초를 받았는데 모두 불복(不服)하였다. 목성관(睦聖觀)과 억경(億京)을 면질(面質)시키고 수택(守澤)을 다시 추문(推問)했으며 오필만(吳必萬)을 3차 형신하였으나, 모두 불복하였다.

 

2월 8일 신축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친림(親臨)하여 거재 유생(居齋儒生)에게 강(講)의 시험을 보여 이수덕(李壽德)·신명좌(申命佐) 두 사람에게 급제를 내렸다. 성균관 유생(儒生)들의 원점(圓點)057)  을 다시 정해 90점을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대사성(大司成) 김상규(金尙奎)를 앞으로 나오게 하여 유시하기를,
"태학(太學)은 바로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크게 변한 연후에야 향숙(鄕塾) 역시 따라서 크게 변하게 된다. 당(唐)나라의 하번(何蕃)058)  과 고려(高麗)의 안유(安裕) 역시 학교를 흥기(興起)시켰다. 나는 네가 평소 녹록(碌碌)059)  하지 않음을 알았으니 유생(儒生)을 다스려 사습(士習)을 크게 변하게 하기를 바란다. 또 여러 중재(重宰)로 하여금 자질(子姪)을 권계(勸戒)하여 시상(時象)에 구애되지 말고 모두 태학에 들어가 경학(經學)을 강명(講明)하게 한다면 성취의 효과가 어찌 옛날에만 유독 아름다웠겠는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규가 청하기를,
"태학의 공천(公薦)하는 옛법을 신명(申明)하여 애례(愛禮)하는 뜻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9일 임인

전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반드시 사유(四維)060)  를 일컬으나 일이 있으면 고집을 세워 서로 버티고 벼슬이 있으면 간구(干求)한다. 요즘 일로 말해도 이목(耳目)의 관원을 외읍(外邑)에 많이 제수하는데, 간촉(干囑)061)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 전조(銓曹)에 신칙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상(領相)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근래에 분경(紛競)062)  이 특히 심합니다. 신은 성품이 졸렬하여 비록 부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오히려 남에게 청탁을 면하지 못하니, 남을 책망할 겨를이 없습니다. 한번 정사에 빈자리가 나오면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정관(政官) 역시 자유롭게 하지 못하니, 어떻게 사람을 정선(精選)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신부터 먼저 시작하여 일체 경계할 터이니, 조가(朝家)에서도 마땅히 엄히 신칙하여 범하는 자가 있으면 대각(臺閣)에서 따라서 논핵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일에 임하여 슬그머니 회피하는 것이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처치는 관계된 바가 없는데도 장령 안성(安晟)과 지평 이성효(李性孝)는 혹 위패(違牌)하고 혹은 진소(陳疏)하여 자취가 규피(規避)하는 데 가까우니 경칙(警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안성과 이성효를 체차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충청도 아산(牙山)의 유학(幼學) 변세구(卞世矩)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고(故) 충신(忠臣) 이봉상(李鳳祥)을 그의 할아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묘(廟)에 추배(追配)하여 조정에서 표충(表忠)하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해조에 명하여 복계(覆啓)하게 하였다.

 

2월 11일 갑진

북자(北咨)063)  가 왔는데 사신을 보내 치제(致祭)한다는 글이 있었으므로 형조 판서 박사익(朴師益)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주형리(朱炯离)를 장령으로, 오언주(吳彦胄)를 정언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부교리로, 이광세(李匡世)·이덕부(李德孚)를 승지로 삼았다.

 

충청도 문의(文義)의 유생(儒生) 신만식(申萬湜) 등이 상소하여 진달하기를,
"문의 한 고을은 땅이 작은데도 군액(軍額)이 많으니, 청컨대 회덕(懷德)의 예에 의해 다른 고을로 이송해 주소서."
하고, 인하여 본읍 사람 강계주(姜繼周)가 무신년064)   적변(賊變)에 항의(抗義)한 사적(事蹟)에 대해 포상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라고 명하였다.

 

2월 19일 임자

해 위에 관(冠)이 있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명신(趙命臣)·이광보(李匡輔)를 승지로, 윤유(尹游)를 형조 판서로, 윤동수(尹東洙)를 호조 참의로, 이종백(李宗白)을 부교리로, 황정(黃晸)을 수찬으로, 이흡(李潝)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2월 21일 갑인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병조 좌랑(兵曹佐郞) 이징하(李徵夏)가 황장목 경차관(黃腸木敬差官)065)  으로서 돌아올 때에 복태(卜駄)066)  가 매우 많아서 심지어 짐이 무거워 말이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정도를 넘어 역마를 타는 것은 본디 해당 율(律)이 있으니, 청컨대 이징하를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삼척 영장(三陟營將) 전운상(田雲祥)은 도둑을 다스릴 때에 옥석(玉石)을 구분하지 않고 형살(刑殺)이 너무 지나쳤으며, 기타 불법을 범한 정상은 낱낱이 열거(列擧)하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청컨대 전운상을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유건기(兪健基)·권집(權䌖)을 지평으로 삼았다.

 

2월 22일 을묘

토역 정시(討逆庭試)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실시하고 많은 선비들에게 친히 책제(策題)를 내어 시험보였다. 심악(沈) 등 5인에게 급제를 하사하였다.

 

2월 22일 을묘

전교하기를,
"근래에 선비가 오로지 문화(文華)를 숭상하여 부화(浮華)가 우세하고 실질(實質)이 적다. 정시(庭試)의 친책(親策)은 뜻이 우연하지 않으니, 여러 시관(試官)들은 고시(考試)할 즈음에 반드시 그 문채를 버리고 실질(實質)을 취하며 제생(諸生)에게도 먼저 내 뜻을 효유하라. 나에게 대하여 비록 과격한 말이 있더라도 내가 죄를 주지 않을 것이니, 사실을 숨기지 말고 실제대로 진술하여 사람을 구하는 정성을 외롭지 않게 하라."
하였다. 이때 입격(入格)된 한 시권(試券)에 탕평(蕩平)을 공격한 말이 있어 심지어는 ‘진가(眞假)를 구별하지 않고 상하가 서로 몽롱(朦朧)하다.’고 말하였는데, 임금이 가져다 보고는 발거(拔去)하기를 명했다가 곧 중지 하였다. 그 이름을 개탁(開托)해 보니 바로 김석일(金錫一)이었다.

 

2월 25일 무오

본부(本府)에 국청을 설치하여 죄인 자근동(者斤同)·수택(守澤)·신정모(申正模)를 다시 추문하고, 오필만(吳必萬)은 4차 형문하였으나 불복하였다.

 

2월 26일 기미

함경도에 별도로 보내는 시관(試官) 윤순(尹淳)이 하직 인사를 올리니, 임금이 불러 보고는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충청도 유생(儒生) 정제회(鄭齊晦)가 상소하여 청하기를,
"고(故)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과 충문공(忠文公) 민진후(閔鎭厚)의 사당을 충원(忠原)에 세우소서."
하니, 임금이 금령(禁令)이 있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7일 경신

경상도 암행 어사(暗行御史) 이흡(李潝)이 복명하였다. 임금이 사대(賜對)하고 도내 수령의 치적 여부를 묻자, 이흡이 대답하기를,
"병사(兵使) 최명주(崔命柱)는 청백(淸白)하게 봉공(奉公)하고, 통제사(統制使) 이수량(李遂良)은 한갓 한가롭게 노는 것만 일삼고 있으니, 마땅히 한 사람은 포상(褒賞)하고 한 사람은 벌을 주어야 합니다. 영천(永川)의 박필모(朴弼謨)와 합천(陜川)의 오명서(吳命瑞), 의흥(義興)의 이사제(李思悌)는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고, 청도(淸道)의 이중경(李重庚)은 탐학(貪虐)이 우심(尤甚)했으며, 의성(義城)의 이제상(李齊尙)은 불법을 자행하였으니 역시 권징(勸懲)해야 마땅합니다. 또 합천과 거창(居昌) 사이에 조(曺)067)  ·鄭 【정희량(鄭希亮).】  두 역적(逆賊)의 잔당(殘黨)이 조가에서 지나치게 베푼 광탕(曠蕩)한 전례로 인해 함부로 횡행하는 그 당여(黨與)들이 매우 많습니다. 붙잡아 가두고 구핵(鉤覈)하여 낱낱이 승복(承服)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역란(逆亂) 때 거창 현감(居昌縣監) 신정모(申正模)는 정희량(鄭希亮)과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그때의 관리 신익현(愼益顯)이 신정모가 역적을 따른 상황을 자세히 말했습니다. 좌수(座首) 이술원(李述原)은 능히 적에게 항의(抗義)하여 심지어 톱으로 베여 죽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신정모는 조정의 명리(命吏)로서 흉적(凶賊)과 내통하였으니 더욱 분통스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술원의 아들이 참봉(參奉)인가?"
하니, 이흡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또 진달하기를,
"안동(安東)의 권징수(權徵粹)·유몽서(柳夢瑞)·권구(權榘) 등은 적과 내통하였는데 유독 김성탁(金聖鐸)만은 관문(關門)을 걸어 닫고 적에게 항거하였으며, 전(前) 승지 나학천(羅學川)은 통문(通文)하여 적을 토벌하였으니, 모두 가상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서계(書啓)를 묘당에 내려 복주하게 하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신정모를 잡아다 사핵(査覈)하게 하라."
하였다.

 

본부(本府)에 국청을 설치하여 신정모(申正模)를 문초하니, 신정모가 공초하기를,
"이웅보(李熊輔)와 정희량(鄭希亮)이 연명(聯名)으로 글을 지어 함께 일하고자 하여 영기(令旗)를 지닌 사람에게 답(答)을 요구했으나 바야흐로 감영(監營)에 치보(馳報)하느라 답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고는 그대로 버티면서 불복하였다. 죄인 노미(老味)와 이만(二萬)·수택(守澤)·자근동(者斤同)을 면질시키고, 억경(億京)과 이만을 면질시키고, 수택과 억경을 면질시켰으나, 다투면서 불복하였다. 목시경(睦時敬)·목성리(睦聖履)·김만홍(金萬弘)을 다시 형추(刑推)하였다.

 

2월 28일 신유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본부에 국청을 설치하여 죄인 목시경을 방송(放送)하고, 목성리는 1차 형신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이만은 1차 형신하니, 공초하기를,
"말을 끌고 궐문(闕門) 밖으로 따라 간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 상전(上典)과 해명(海命)이 귀에다 대고 서로 말을 나누었는데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술만 마시고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만약 수청노(隨廳奴) 개노미(介老味)·억경(億京)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자근동을 1차 형문하니, 공술하기를,
"임천(林川)에 내려가 권 진사(權進士)를 맞이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였다. 두정(斗貞)과 권세장(權世長)을 다시 형추하였다.

 

2월 29일 임술

부응교 이현모(李顯謨)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대저 임금이 말을 듣는 도리가 혹 남의 말을 거부하고 스스로 성인(聖人)인 체하면 좌우와 전후가 모두 뜻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이에 임금이 오만하고 스스로 만족한 나머지 여러 신하들이 자기만 못하다고 여겨 업신여겨 보는 것도 부족하여 노예처럼 대접하고, 그 신하된 자는 또 녹(祿)을 탐하여 떠나지 않으면서 혹시라도 임금의 마음을 거스릴까 염려하니, 상하가 서로 몽롱해져 나라가 따라서 망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이치입니다. 직언(直言)이 나오고 나오지 않음도 역시 임금의 한 마음이 공(公)인가 사(私)인가의 구분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아! 우리 성상께서 학문을 강론(講論)하여 이치를 밝히심이 정밀하지 않음이 아니나 행할 때가 말씀하실 때와 같지 않고, 하는 일이 아는 것만 못하여 직언을 받아들이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도 미신(微臣)의 바람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는 대개 극치(克治)의 공부가 전일(專一)하지 못하여 스스로 주장하는 뜻이 너무 지나치고, 규모(規模)가 너무 좁아 선(善)을 취함이 넓지 못하며 남을 책망하는 데에 밝은 것이 항상 자신을 책망하는 것보다 앞서고, 사(私)를 따르는 뜻이 매양 공(公)을 넓히는 것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한 마음에 있어서 공사와 주객(主客)의 구별에 능히 힘을 써 분별하지 못한 채 단지 본분(本分)이 총명한 것만을 마음 속으로 믿고 일을 해 나가기 때문에 편사(偏私)를 버려 직언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전학(典學)068)  의 공부가 날로 진보되지 못하고 날로 퇴보하며 갖가지 병통이 모두 이를 따라 나옵니다. 오직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자신의 사욕을 버리고 직언을 용납해 받아들이시며 음사(淫邪)한 붕당을 타파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소서. 지난번 궁장(宮庄)의 차인(差人)에 관한 것은 아주 작은 일인데도 성상의 마음이 격노하여 낭묘(廊廟)의 신하가 모두 불안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김석일(金錫一)의 시권(試券)은 촉휘(觸諱)한 것이 없는데도 역시 특별히 발거(拔去)하기를 명하셨습니다. 비록 다시 중지하기는 하셨지만 직언을 좋아하지 않으신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한 세상을 용동(聳動)시켜 권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유의(留意)하겠다고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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