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9권, 영조 7년 1731년 3월

싸라리리 2025. 9. 10.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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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병인

함경도에 별도로 중신(重臣)을 보내어 시사(試士)할 때에 시권(試券)에 각기 ‘남(南)·북(北)’ 두 글자를 써 남쪽에서 두 사람을 뽑고 북쪽에서 한 사람을 뽑아 3인을 정액(定額)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육진(六鎭)은 먼 지방이라 그곳만 유독 빠질까 염려하여 다시 한 사람을 더 뽑아 합계 4인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민응수(閔應洙)를 부제학으로, 조석명(趙錫命)을 대사성으로, 이일제(李日躋)를 헌납으로 삼았다.

 

3월 4일 정묘

형조 판서 윤유(尹游) 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 등이 삼가 듣건대, 일전에 수릉관(守陵官)의 장계(狀啓)로 인해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는데, 사지(辭旨)가 아주 엄했다고 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이 일은 스스로 곡절이 있는데 장계의 조어(措語)와 실지의 정상은 차이가 많으니 이는 중간에서 말을 과장해 전했기 때문입니다. 대개 일전에 두 환관(宦官)이 소장을 가지고 와서 호소했는데, 자칭 시릉(侍陵)하는 내관(內官)의 양자(養子)라고 하면서 그의 아비가 그 동네 상한(常漢)에게 욕을 당했으니 치죄(治罪)해 달라고 청하길래 그 말을 듣고는 심히 놀라 곧 붙잡아 오게 하였습니다. 그날밤 또 산릉 참봉(山陵參奉)의 보장(報狀)이 있었는데 말하기를, ‘산릉의 원역(員役)이 사람들에게 구타당했으니, 청컨대 그 형제 3인을 치죄하라.’고 하였습니다. 사체의 소재로 보아 마땅히 통렬하게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드디어 엄히 가두도록 했는데 그때는 두 일이 한 가지 일임을 전혀 몰랐습니다. 이튿날 두 일을 조사해 보니, 바로 내시(內侍)의 가노(家奴)와 이웃 사람이 서로 싸웠는데, 내시가 그 가노를 위해 분을 내어 스스로 결박해 난타하고는 이렇게 먼저 소장(訴狀)을 냈던 것입니다. 낭료(郞僚)의 간심(看審)과 월령(月令)069)  의 수본(手本)에, 결박했던 상처의 흔적을 모두 숨길 수가 없고, 산릉 참봉의 보장 가운데 이른바 ‘원역이 구타를 당했다.’는 것은 바로 내시의 집에 있는 종이며, 서로 싸운 것이 성중(城中)에서 있었으니, 산릉과는 이미 서로 상관이 없었습니다. 가노를 원역이라고 말한 것은 그 계책이 본디 자중(藉重)070)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며, 싸운 자는 한 사람인데 그 여러 형제를 가두는 것도 역시 법리(法理)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들이 이미 그가 권세를 끼고 보복하려는 계책임을 알았기 때문에 단지 양쪽의 서로 싸운 것과 사사로이 결박한 죄만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초 소장을 낸 두 환관이 공정(公庭)에 돌입하니, 그 기세의 사나움과 언사의 패만(悖慢)함이 사람을 두렵게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치를 따져 책망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내시(內侍)를 취급함이 지극히 엄격하니, 너희들은 더욱 겸손하고 두려워함을 생각하여 문을 닫고 깊이 엎드려 있어야 할 것이며, 감히 사람들과 입씨름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그 사나운 종을 시켜 여염에서 싸우게 하고 금단(禁斷)시킬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에 사문(私門)에서 결박까지 하고 공정에서 소란을 피우니, 결코 근신(謹愼)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는 인하여 손을 저어 물러가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더욱 화를 내어 크게 외치기를, ‘그렇다면 어찌 대간으로 하여금 발계(發啓)하여 내시부(內侍府)를 모조리 혁파하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서로 돌아다보고 놀란 눈으로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성세(聲勢)를 이처럼 떨치니 참으로 작은 근심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시릉관(侍陵官)의 사사로운 통문(通文)이 또 급히 와서 싸우며 때린 형제를 잡아 가두라고 하였으며, 얼마 후 별감(別監) 한 사람이 다시 뒤좇아와서 시릉관의 분부라면서 해당 형리(刑吏)를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신들이 그 별감을 불러 말하기를, ‘산릉의 도리(道里)가 비록 가까우나 실로 기읍(畿邑)의 땅인데 법사(法司)의 아전을 외방에서 말로 불러가는 것은 비단 예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 후일의 폐단에도 관계된다.’고 했을 뿐이요, 일찍이 수릉관과 산릉 참봉에게 한 마디 말도 핍박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별감이 무슨 말로 돌아가 보고 했는지 모르나 수릉관이 자기의 일처럼 담당하여 까닭없이 노여움을 내어 심지어는 신들이 초기(草記)071)  에 내지도 않은 태거(汰去)를 청했다는 말로서 갑작스레 천청(天聽)에 아뢰어 엄교(嚴敎)를 번거롭게 했으니, 바라건대 아울러 척파(斥罷)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내관(內官)의 소행이 아주 놀라우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산릉(山陵)의 수릉관이 인혐하고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입직(入直) 재랑(齋郞)도 역시 지레 나가버렸다. 헌납 이일제(李日躋)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산릉의 여러 관리가 인혐하여 후사(喉司)에서 번거로이 계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자세한 곡절은 대개 추조(秋曹)072)  의 여러 당상의 상소에 말미암은 것이나, 원래 그 본사(本事)는 환시(宦寺)의 한 가노(家奴)가 사사로이 싸운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지극히 미세한 일인데, 시릉 내관이 그 삼가지 않은 것은 신칙하지 않고 도리어 대신 노여워하여 그 아들이 마음대로 재려(齋廬)를 떠나 대신 형옥(刑獄)의 뜰에서 호소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이미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침랑(寢郞)073)  이 법부(法府)에 이문(移文)한 것이나 별감(別監)이 가서 형리(刑吏)를 부른 것은 모두 크게 떠벌린 것에 관계되는데 이로써 확대되어 심지어는 존중(尊重)한 수릉관이 가로맡아 억지로 인혐하여 제전(祭奠)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것이 무슨 사체입니까? 대저 수릉관은 작질(爵秩)이 아니요 가까운 종실(宗室)이 전하를 대신하여 재려(齋廬)를 삼가 지키는 제도인데, 이것이 어찌 피혐하고 사양할 자리이기에 이런 거조를 한단 말입니까? 비록 한때의 염우(廉隅)074)  를 돌본 것이라고는 하지만 유독 모(某)를 대신하여 재계(齋戒)하는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신은 빨리 구제(舊制)를 상고하여 정식(定式)을 거듭 밝혀 후일 마음대로 체모를 손상시키고 전례(典禮)를 궐하는 폐단이 없게 하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환관이 사문(私門)에서 결박하고 공정(公庭)에서 포악을 부린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이 누구이기에 감히 ‘대간으로 하여금[使臺諫]’이란 세 글자를 입에 올려 법관(法官)에게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대각(臺閣)에 있는 자들이 비록 무르다고는 하지만 어찌 해사(該司)의 지휘를 받아 단지 풍문(風聞)에 인해 월대(月臺)075)  의 법(法)을 비워두고 거론하지 않아 하찮은 이 무리들이 감히 조정(朝廷)을 얕잡아 보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묻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대각(臺閣)의 수치이며 우러러 성조(聖朝)의 청평한 다스림에 누(累)됨 또한 큰 것입니다. 근일에 환관 황도성(黃道晟)이 액속(掖屬)을 음형(淫刑)한 것도 역시 치장(鴟張)076)  하는 조짐을 볼 수 있었는데, 전하의 공명(公明)함으로도 처음에 통렬히 징계하여 조정의 체통을 높이며 제방(堤防)을 엄중히 하지 않고 단지 유사(攸司)로 하여금 예에 따라 다스리도록 하여 마치 책임을 다한 듯하였으니, 사방에 들리도록 하기에는 부족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황도성(黃道晟)의 일은 나 역시 놀랐기 때문에 하교가 있었고 아울러 금부(禁府)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종중 감률(從重勘律)하게 하였다."
하였다.

 

금부(禁府)의 복계(覆啓)로 인해 내수(內竪)077) 이정상(李廷相)·서행달(徐行達)을 고부(古阜)와 자산(慈山)으로 편배(編配)하였다. 두 환관은 바로 시릉관 박찬문(朴纘文)의 양자(養子)로서 송정(訟庭)에서 소란을 피운 자들이다. 임금이 비록 근습(近習)078)  을 비호했으나 조신(朝臣)이 서로 이어 소론(疏論)하므로 부득이 유사(有司)에게 넘기어 다스리게 한 것인데 해부에서 모두 좋은 곳으로 편배한 것이다.

 

또 내수 황도성(黃道晟)을 편배하였다. 처음에 황도성이 근행(近倖)으로서 액례(掖隷)에게 사사로운 분(忿)이 있어 그 사람에게 무릎을 드러내고 유기로 만든 동이[鍮盆] 위에 꿇어앉게 하여 아파 견딜 수 없도록 했다. 일이 발각되자 임금이 노하여 금오(金吾)에 넘기도록 명했는데 대간이 상소로 또 말하여 드디어 멀리 유배하라 명한 것이다.

 

3월 7일 경오

정우량(鄭羽良)을 대사간으로, 유엄(柳儼)을 승지로, 정형익(鄭亨益)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윤섭(尹涉)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신치근(申致謹)을 부교리로 삼았다.

 

3월 10일 계유

정언 민정(閔珽)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난역(亂逆)이 횡행하여도 징토(懲討)가 엄하지 않으므로 국옥(鞫獄)이 늦어져 수미(首尾)가 4년이 되었습니다. 갇혀 있는 무리들은 참으로 날마다 개좌(開坐)하여 엄히 신문하고 자세히 조사해 흉추(凶醜)한 요얼을 상형(常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야 마땅하며, 그 가운데서 참작하여 처리해야 할 자는 또한 즉시 논단해 죄수가 지체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온 여러 사람에 관한 계사를 중간에서 이미 윤허했다가 갑자기 중지하였고, 심성연(沈成衍)의 초사 가운데서 나온 심득행(沈得行)·이선수(李善修)에 이르러서는 끌어댄 것이 명백하고 정적(情跡)이 의심스러운데도 시종 법망(法網)에서 벗어나 유독 옥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지금 비록 따져 물어 정상을 알아낼 길은 없으나 환난을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먼 변방으로 유배하여 연곡(輦轂)079)  에서 멀리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이인좌(李麟佐)가 청주(淸州)에서 변을 일으키기 전에 하루에 고을 밑에 있는 한 사인(士人)의 집에서 투숙하면서 긴밀하게 모의하고, 옷을 벗어 주었으며, 변이 일어난 후에 또 다시 사람을 보내어 왕래하였으니, 함께 모역(謀逆)한 정절(情節)이 낭자합니다. 진천(鎭川) 박해정(朴海正)이란 자가 그가 유숙하고 왕복한 정상을 목격하고 전(前) 현감(縣監) 채지홍(蔡之洪)에게 분명히 말했으며, 채지홍은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글로 알렸다고 합니다. 악역(惡逆)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흉참(凶慘)한 일입니까? 그런데 채지홍은 이름이 초정(招旌)080)  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이미 그 사람에 대해 듣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았으니, 신은 개연하게 여깁니다. 박해정을 포청(捕廳)에서 시급히 잡아다가 엄중히 신문하여 가두고 차례로 사핵(査覈)하게 하여 흉얼로 하여금 법망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 끝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고, 심득행과 이선수는 극변(極邊)에 정배하라."
하였다. 민정의 소 가운데서 말한 사인(士人)이란 바로 이명언(李明彦)의 아들 이하택(李夏宅)이다.

 

지평 유건기(兪健基)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예지(睿智)가 고금(古今)에 탁월하고 성학(聖學)이 날로 고명(高明)한 데 이르러 규모와 기대는 반드시 왕도(王道)를 목표로 삼고 계십니다. 하지만 시행하시는 바가 과연 편벽(偏僻)된 잡념(雜念)을 모조리 제거하셨는지요? 허식(虛飾)을 혁파하지 못하여 혹 이름을 좋아하는 허물이 있는가 하면 지키는 바가 쉽게 흔들려 혹은 오래 견디는 덕(德)이 모자라기도 합니다.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즈음에 혹 신기(新奇)한 공(功)을 숭상한 나머지 도리어 장원(長遠)한 경영(經營)을 소홀히 하시는가 하면,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대하는 즈음에 연못 속의 물고기를 살피듯 너무 찬찬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이쪽 저쪽을 섞어 쓰는 즈음에는 반드시 양쪽에서 싫어하여 배척하는 자를 안배해 아울러 써서 건극(建極)의 다스림을 이루고자 하시니, 《주역(周易)》의 동인괘(同人卦)의 뜻으로 보자면 비록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으나 다만 부억(扶抑)과 취사(取舍)하는 방법이 실로 지공(至公)·지평(至平)하는 도리에 합당한지를 모르겠습니다. 나라의 흥망은 오로지 언로가 통하느냐 막히느냐에 달려 있는데, 전하께서 당론(黨論)이 나라를 망칠 것을 깊이 징계하고 혹 대각(臺閣)이 소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이동(異同)을 조제(調劑)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약간 지나치며 신료(臣僚)를 접대함에 영기(英氣)를 너무 드러내십니다. 전폐(殿陛) 위에서 조금이라도 혹 실의(失儀)를 하면 책망이 너무 엄하시고, 장주(章奏) 사이에 성지(聖旨)를 조금만 거스려도 견책이 따릅니다. 응대(應對)를 민첩하게 하고, 논의(論議)가 거침이 없는 자를 훌륭한 대간(臺諫)이라 지목하고, 행동이 질둔(質鈍)081)  하며 언어(言語)가 곤픽(悃愊)082)  한 자는 시골의 숙맥으로 여기십니다. 처지와 명망이 훌륭하여 스스로 명류(名流)로 자처하는 자를 이 직임에 제수하면 하찮은 것으로 여겨 갖가지로 규피(規避)하니 이 직임에 있는 자는 거의가 허술하고 세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대망(臺望)이 날로 낮아지고 대권(臺權)이 더욱 가벼워집니다. 대소(臺疏)에 ‘계(啓)’자를 찍어 내주는 것은 더욱 대각을 접대하는 도리에 어긋나니, 이런 처분에서도 역시 언관(言官)을 경시하는 한 단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식(寒食) 대제(大祭) 때에 공릉(恭陵)083)  의 헌관(獻官)이 하나의 미세한 일로 인하여 효장묘(孝章廟) 서원(書員)에게 뇌물을 요구하여 침갈(侵喝)하였으며, 평안 도사(平安都事) 신일청(申一淸)은 이 음악을 금단(禁斷)하는 상기(喪期)를 당하여 도내(道內) 새 출신(出身)에게 창우(倡優)를 강제로 작정하였으니 듣기에 놀랍습니다. 마땅히 모두 파직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절실하니 유의하지 않겠는가? 소 끝의 두 가지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3월 11일 갑술

삼일제(三日製)084)  를 추설(追設)하라고 명하여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최용현(崔龍賢)에게 급제를 내렸다.

 

헌부(憲府) 【지평(指平) 유건기(兪健基)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대선(臺選)이 외람되고 혼잡하여 식자들이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서북 사람을 통청(通淸)085)  하는 것이 비록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는 뜻에서 나왔으나, 오직 가려서 뽑아야 마땅한데, 전(前) 장령(掌令) 안성(安晟)은 전석(前席)에서 실대(失對)하였으니 아주 가소롭습니다. 더군다나 지난번 처치(處置)를 규피(規避)하고 까닭 없이 소명(召命)을 어겨 거조가 놀라우니, 청컨대 전조(銓曹)로 하여금 다시는 의망(擬望)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한사득(韓師得)을 집의로, 이응(李膺)을 장령으로, 이광운(李光運)을 헌납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한현모(韓顯謨)를 부교리로 삼았다.

 

3월 12일 을해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3일 병자

조석명(趙錫命)·이광보(李匡輔)·조명익(趙明翼)을 승지로, 심악(沈)을 정언으로 삼았다.

 

심득연(沈得衍)을 철산(鐵山)으로, 전(前) 전라 병사(全羅兵使) 이익필(李益馝)을 고령(高靈)으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이익필은 무신년086)   훈신(勳臣)으로서 곤임(閫任)087)  이 되었는데 탐욕스러워 어사(御史) 황정(黃晸)의 서계(書啓)에 든 자이다.

 

3월 15일 무인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죄인 신치근(愼致謹)에게 역적 정희량(鄭希亮)과 교통한 정상을 물으니, 신치근이 공초하기를,
"영기(令旗)를 든 자가 과연 와서 봉서(封書)를 전했는데 신정모(申正模) 역시 봉서를 뜯어 보았으며, 그 사람에게 대답한 정성은 담장 밖에서 본 것은 사실이오나 봉서 가운데 말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김성옥(金聲玉)을 문초하였으나, 김성옥이 불복하였다.

 

3월 16일 기묘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에게 지사(地師) 및 남원군(南原君) 설()을 데리고 장릉(長陵)088)  에 가서 봉심(奉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는데, 좌의정 이집(李㙫)이 말하기를,
"파주(坡州)의 장릉(長陵)은 선조(先朝) 때 천봉(遷奉)하려는 의논이 있었으나 의논을 하다가 곧 중지하였습니다. 근래 듣건대 능침(陵寢) 사이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변이 있어 가끔 출몰한다고 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습니까? 세간에서 전해 오기를, ‘이 능을 처음 개광(開壙)할 때에 뱀의 변이 있었으나 총호사(摠護使) 김자점(金自點)이 숨기고 그대로 능을 봉했다.’고 합니다. 고(故) 판서(判書) 윤강(尹絳)이 감여설(堪輿說)089)  을 아는데 ‘우두혈(牛頭穴)에 장생파(長生破)’라는 말을 그의 아들 고(故) 상신(相臣) 윤지선(尹趾善)에게 말하였고, 윤지선이 또 그의 사위인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에게 말했으며, 민진원이 또 신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백년 된 선침(仙寢)090)  을 하루아침에 옮겨 모시는 것은 일에 마땅히 어려워하고 신중함을 더해야 할 것이나 변이 이미 망극하니 옮겨 모시는 것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속담에 ‘그때 한 중이 있어 〈광중(壙中)을〉 다지면서 소리치기를, 「정혈(正穴)을 버리고 사혈(蛇穴)을 쓰는구나」하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좌참찬 서명균(徐命均)·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은 모두 말하기를,
"풍수설(風水說)이 비록 황망(荒茫)하나 뱀의 변은 듣기에 아주 놀라우니, 신들도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수설에 미혹되지 말라는 선조(先朝)의 가르침이 만세의 교훈으로 내려 왔으니 망령되이 의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물건이 지극이 경건한 땅에서 나왔다 하니, 듣기에 아주 놀랍고 가슴 아프다. 밖이 오히려 이러하니 안에도 어찌 반드시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더욱 두렵다. 더군다나 오래된 능침을 옮겨 모시는 것은 극히 어렵다. 대신과 예관으로 하여금 봉심(奉審)하게 하고, 또 밖에 있는 대신에게도 물어 중의(衆議)를 널리 채납하라."
하였다.

 

헌부 【집의(執義) 한사득(韓師得)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목중형(睦重衡)의 일만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안성(安晟)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간원 【정언(正言) 민정(閔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7일 경진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응교로, 임정(任珽)을 교리로, 송성명(宋成明)을 도승지로, 김용경(金龍慶)을 승지로, 송진명(宋眞明)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때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동전(東銓)091)  ·서전(西銓)092)  의 장(長)으로서 정사(政事)를 행하였는데, 임금이 칙유(飭諭)하고, 또 수령(守令)을 가려 뽑고, 초사(初仕)를 정선(精選)하되, 충신(忠臣)과 염리(廉吏)의 자손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3월 18일 신사

간원 【정언 민정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박해정(朴海正)을 신의 상소로 인해 포청(捕廳)에서 붙잡아 왔는데, 미처 구핵(究覈)하기 전에 갑자기 석방하고 말았습니다. 대저 박해정은 역적 이인좌(李麟佐)가 이하택(李夏宅)의 집에서 투숙하면서 함께 긴밀히 모의하고 옷을 벗어 서로 준 정상을 목격하고 이미 채지홍(蔡之洪)에게 말하였으며, 채지홍 역시 친구에게 글로 알렸으니 증거가 명백합니다. 그런데도 단지 꾸며대는 초사를 믿고 지레 용서해 석방하고 구문(究問)하지 않았으니 역적을 엄히 토벌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명을 다시 거두어 들이고 국청으로 이송해 다시 신문하여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민정(閔珽)이 전운상(田雲祥)에 대한 전계(前啓)를 정지하였다.

 

본부에 국청을 설치하고 죄인 신정모(申正模)와 신치근(愼致謹)을 면질시켰다. 신치근이 말하기를,
"흉적(凶賊)이 글을 가지고 와서 답장을 써 달라고 한 것과 신정모가 답장을 써서 관인(官印)을 찍는 형상은 과연 제가 보았습니다."
하매, 신정모에게 질언(質言)하니, 신정모는 버티면서 불복하였다. 목중형(睦重衡)을 4차 형신하였으나 불복하였고, 김성옥(金聲玉)을 다시 형추하였다.

 

조적명(趙迪命)을 부수찬으로, 안중필(安重弼)·심준(沈埈)을 승지로, 조한위(趙漢緯)를 수찬으로, 심육(沈錥)을 지평으로, 심공(沈珙)을 부제학으로, 이종백(李宗白)을 부교리로 삼았다.

 

3월 19일 임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 남원군(南原君) 설() 등이 장차 장릉(長陵)을 봉심하기 위해 사폐(辭陛)하고 나가니, 임금이 진수당(進修堂)에서 사대(賜對)하였다. 조문명과 신사철 등이 또 진달하기를,
"능(陵) 위에 뱀의 변괴가 아주 확실합니다."
하고, 설은 또 산가(山家)093)  의 염정(廉貞)에 대한 말로써 아뢰고, 또 말하기를,
"그때 지사(地師) 이간(李榦)이 홀로 길지(吉地)라고 말하여 큰 일을 그르쳤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땅을 잘 보는 자를 가려서 데리고 가라."
하고는, 또 명하기를,
"국조(國朝)에서 여러 능을 옮겨 모시는 의절(儀節)을 상고해 들이라."
하여, 드디어 옮겨 모실 계획을 정하였다.

 

3월 20일 계미

금부(禁府)에 국청을 설치하고 죄인 박해정(朴海正)을 신문하기를,
"이인좌가 이성(李姓) 진사(進士)의 집에서 유숙하고 옷을 벗어 서로 주며 친밀하게 모의(謀議)한 정상을 네가 이미 눈으로 보고 채지홍(蔡之洪)에게 전하여 말한 것이 참말인가?"
하니, 박해정이 공초하기를,
"난리가 난 10여 일 후에 이인좌가 청주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사람을 빙고동(氷庫洞) 이진사(李進士)에게 보내어 안부를 물었더니, ‘상경(上京)한다 하고 그대로 출피(出避)했다’고 하였으므로 과연 이 일을 진천(鎭川) 정성(鄭姓)을 가진 양반에게 말하였을 뿐이고, 채지홍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목중형(睦重衡)을 5차 형신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청도 군수(淸道郡守) 이중경(李重庚)이 탐욕스럽다는 명목으로 어사 이흡(李潝)의 서계(書啓)에 들었으므로 전에 의금부에 나핵(拿覈)하라 명한 적이 있었다. 이때 이르러 본부에서 예(例)대로 형문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부수찬 윤용(尹容)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대저 나라에서 죄수를 신문하는 규정은 비록 죄가 장오(贓汚)에 관계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철저하게 조사하여 그 실정을 분명하게 알아낸 연후에야 그 죄를 더하는 법이니, 이는 바로 형(刑)을 신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중경이 범한 바가 비록 중대하다고는 하지만 어사가 염문(廉問)하는 즈음에 간민(奸民)이나 완리(頑吏)가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무함하고 들추어낸 데 말미암지 않았다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한번 조사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기에 금오(金吾)의 상례를 따른 계사로 곧바로 형신(刑訊)하라는 명을 내리십니까? 비록 미관(微官)·천품(賤品)이라도 그렇게 해서는 부당한데 하물며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신하이겠습니까? 저 이중경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조가(朝家)의 형정(刑政)에 관계된 바가 과연 어떻겠습니까? 이미 경악(經幄)에 있으며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중경의 공사(供辭)에 대하여 판부(判付)하려고 하다가 뒤섞여 영이 내려졌다."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다시 들이자 인하여 형신을 면제하고 의논해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3월 21일 갑신

판부사(判府事) 정호(鄭澔)에게 식물(食物)을 내리고, 그 아들 정희하(鄭羲河)에게 가까운 고을을 주어 봉양하기에 편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조명익(趙明翼)의 계사로 인해서였다. 조명익이 아뢰기를,
"판부사 정호는 일찍이 선조(先祖) 때에 호연(浩然)하게 떠나 염퇴(恬退)한 한절조는 옛사람도 하기 어려운 바로써 작록(爵祿)은 사양할 수 있으나 판득(辦得)은 더욱 어렵습니다. 하물며 지위가 수상(首相)에 이르러 집에 한 짐의 곡식이 없었으니, 만약 염리(廉吏)를 뽑는다면 그가 마땅히 첫째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이 바로 한 세상의 공론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천 부사(成川府使) 윤용(尹容)은 그의 아비 윤지인(尹趾仁)의 청백(淸白)을 이어받았으니, 역시 장려해 탁용하는 가운데 들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전조(銓曹)로 하여금 승용(陞用)하게 하고, 또 이렇게 명한 것이다.

 

부제학 심공(沈珙)·응교 김상성(金尙星)이 홍문록(弘文錄)을 회권(會圈)하여 오원(吳瑗)·이철보(李喆輔) 등 24인을 뽑았다.

 

3월 22일 을유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3일 병술

임금이 현기증이 있어 약원(藥院)에서 성심산(醒心散)을 올릴 것을 청하였다. 대개 옹주(翁主)의 참척(慘慽)094)  을 막 겪어 성상의 마음에 슬픔이 있어서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 등이 장릉(長陵)095)  을 봉심하고 돌아왔다. 임금이 불러서 물으니, 조문명 등이 말하기를,
"신이 이틀 사이에 아홉 마리의 뱀을 눈으로 보았는데 큰 것은 서까래만하고, 작은 것은 낫자루만 했습니다. 산가(山家)의 염정(廉貞)에 대한 말을 비록 믿을 수는 없으나 깨끗하지 못한 근심이 이와 같으니, 옮겨 모시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아주 중대하니, 마땅히 다시 재야(在野) 대신들에 묻고 조정에 있는 중재(重宰)들과 모의해 결정해야 한다."
하였다.

 

이때에 북칙(北勅)096)  이 곧 도착하게 되었는데 조제(吊祭)한다는 명분이어서 신사철(申思喆)을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내전(內殿)의 치조(致吊)는 국조(國朝) 갑자년097)  과 임오년098)  의 구례(舊例)가 있으나 문헌에 기록된 것이 없었다. 전에는 위차(位次)를 허설(虛說)하고 장막을 막고서 조제를 받은 예가 있었으나 임오년에는 가주(假主)099)  를 만들어 행례(行禮)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가주를 만들면 반드시 제주(題主)100)  를 하여야 하고, 제주를 하게 되면 난처한 일이 있게 되니, 대신에게 물어 국조에서 이미 행한 장막을 막고서 제사를 지내는 예로 정해 쓰되 가주는 안에서 만들도록 하며 제주하지는 말았다가 사용하고 나서 불태우라."
하였다.

 

3월 24일 정해

본부에 국청을 설치하고 죄인 목중형(睦重衡)을 6차 형신했으나, 불복하였다. 박해정(朴海正)을 다시 문초하였다.

 

민응수(閔應洙)를 대사간으로, 이근(李根)을 사간으로, 심성희(心聖希)를 교리로, 정홍제(鄭弘濟)를 지평으로 삼았다.

 

3월 25일 무자

전 현감(縣監) 채지홍(蔡之洪)이 박해정(朴海正)에 대한 일로 상소하여 변명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무신년101)   적변(賊變) 때 근왕(勤王)102)  하기 위해 오다가 진천(鎭川) 땅에 이르러 읍 아래에서 한 상한(常漢)을 보고 우연히 청주의 사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상한이 말하기를, ‘청주를 함락한 것은 적(賊)이 아니라 바로 양반이다. 내가 성이 함락되기 전에 이진사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새벽에 양반 두 사람이 도보로 멀리서 찾아오니 이진사가 기뻐하면서 함께 유숙(留宿)하고 옷을 벗어 입혀 주었다.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러 역적 이인좌가 하인을 보내어 이씨 성 진사에게 문안하니, 이씨 집 하인이 적진(賊陣)에 들어갔다. 그 전갈(傳喝)로써 청하여 온 자를 보니 바로 전일 와서 유숙하고 간 양반이었다.’라고 했기 때문에 신이 듣고는 놀라서 그 상한의 성명을 물었더니 박해정으로 이 진사의 비부(婢夫)인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본래 서울에 있는 친구가 없어 글로 알리지 못하였고, 또 상(喪)을 당해 그때 즉시 등문(登聞)하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충원 현감(忠原縣監) 정익하(鄭益河)의 족인(族人)이 마침 자리에 있다가 참여해 듣고 우연히 정익하에게 말을 전하였으며, 정익하가 자세히 한 통을 기록해 신에게 전보(轉報)하면서 사실 여부를 묻기에 신이 과연 서너 군데 잘못된 곳을 고쳐 답해 주었습니다. 대신(臺臣)이 혹 잘못 들었거나 전문(轉聞)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원소(原疏)를 금부(禁府)에 내려 문목(問目)에 첨가해 박해정을 엄히 문초하라."
하였다.

 

본부에 국청을 설치하여 죄인 수택(守澤)을 3차 형신하고, 노미(老味)는 6차 형신하였으며, 신정모(申正模)는 1차 형신하였다. 수택을 4차 형신하고, 노미를 7차 형신했으나, 모두 불복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홍용조(洪龍祚)가 군액(軍額)에 궐원이 많고 양정(良丁)을 얻기 어렵다 하여 다른 고을로 이송하기를 청하였고, 도신(道臣)이 장문(狀聞)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백성을 옮기고 곡식을 옮기는 정사와는 다름이 있어 해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호적법(戶籍法)을 엄중히 하여 민호(民戶)가 줄어드는 것을 금하며, 원우(院宇)를 줄이고 투속(投屬)하는 폐단을 금한 연후에 양역(良役)을 변통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금하라 명하고, 원유(院儒)들이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는 경우가 있으면 그 상소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또 남자는 부역(父役)을 따르고 여자는 모역(母役)을 따르는 것으로 공사천(公私賤)의 법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금오 당상(金吾堂上)에게 국안(鞫案)을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승지 이광보(李匡輔)로 하여금 쓰게 하고, 전교하기를,
"죄인 권부(權扶)는 비록 심익연(沈益衍)의 초사에서 나왔으나 증거할 만한 문자(文字)가 없고 단지 말로만 나왔을 뿐이니 마땅히 가벼운 법을 따라서 다시 배소(配所)로 보내라. 남하문(南夏文)은 바로 형장(刑杖)을 맞다 죽은 죄인 남하범(南夏範)의 종제(從弟)인데 이감(李椷)의 초사에 나온 바가 역시 아주 흉참하니, 어찌 법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경조(京兆)에서 조사한 바가 사실과 서로 어긋나고 명자(名字)가 틀려 의심된 단서 역시 드러났으니, 참작하여 극변(極邊)으로 정배하라. 목천현(睦天顯)·목성관(睦聖觀) 등의 무신년103)   역란(逆亂)은 흉적의 교문(敎文)에서 시작되었고, 목가(睦哥)의 모역(謀逆)은 비록 목호룡(睦虎龍)에게서 시작되었다가 목천임(睦天任)에게서 결말지어졌다고 하지만 목천현과 목성리(睦聖履)는 또 수택(守澤)과 노미(老味)의 초사에서 긴밀하게 나왔으니, 어찌 왕장(王章)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다만 대루원(待漏院)104)  에서 서로 모이기로 한 날짜가 바로 태천(泰川)의 관(官)에 있던 날이었다. 노미의 초사와 서로 어긋나는데, 한결같이 신문하는 것은 신중히 살피는 도리가 아니니, 감사(減死)하여 절도(絶島)에 정배하라. 수택과 노미는 목가(睦家)의 종으로서 전후의 공사(供辭)가 아주 흉참하니, 정형(正刑)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당초에 최필웅(崔必雄)을 따라간 것은 곧 주인이 지휘한 것인데, 종과 주인 사이에 모역한 것으로 논단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과 관계되니, 다시 2차 형신을 가해 절도에 정배하라. 목성리는 목천현을 이미 작처했으니 마땅히 달리함이 없어야 한다. 먼 곳으로 정배하라. 신두정(申斗貞)·김만홍(金萬弘) 등은 특별히 방송(放送)하라. 억경(億京)·이만(二萬)·자근동(者斤同) 등은 모두 목가의 가노로서 일에 따라서 참여해 아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완전히 석방(釋放)할 수는 없다. 추조(秋曹)105)  로 하여금 먼 곳에 나누어 정배하라. 권세장(權世長)은 그 형적을 논하자면 의심스러운 바가 없지 않으나, 여러 초사를 상고해 보아도 서로 어긋남이 없지 않으므로 이미 석방했다. 목천현 역시 마땅히 작처(酌處)하여 감사(減死)해 절도에 정배하라. 오필만(吳必萬)은 특별히 석방하라. 신정모(申正模)는 달가운 마음으로 적을 따른 자는 아닌 듯하나 흉적이 날뛰는 날을 당해 적졸(賊卒)이 오는 것을 보고서 비록 분을 내어 손수 참살(斬殺)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차마 ‘서서히 의논하겠다.’라고 말해야 하겠는가? 신정모는 비록 의리로 책망할 것도 없지만 역순(逆順)의 사이에게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니, 오히려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무신년에 효수(梟首)될 것을 면한 것만 해도 이미 다행이기는 하지만 지금 일이 지나간 후에 극률(極律)을 추시(追施)하는 것은 불가하니, 형신을 가하여 절도에 정배하라. 김성옥(金聖玉)·신치근(愼致謹) 등은 아울러 석방을 명한다."
하고, 드디어 억경은 벽동(碧潼)으로, 이만은 갑산(甲山)으로, 자근동은 기장(機張)으로, 남하문은 명천(明川)으로, 목성리는 장흥(長興)으로, 수택은 거제(巨濟)로, 권세장은 남해(南海)로, 노미는 사도(蛇渡)로, 신정모는 여도(呂島)로 정배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아! 국가가 불행하여 난역이 겹쳐 나와 무신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국옥(鞫獄)이 일어나 이제 4년이 되었다. 이번에 목족(睦族)의 여러 죄수들을 이미 작처하였고 남아 있는 자는 단지 목중형(睦重衡)과 박해정(朴海正)뿐인데, 목중형은 전에 이미 작처한 자이고, 박해정은 그 신문(訊問)한 바가 적실하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그대로 국옥을 설치하여 세월만 보내면 천시(天時)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고 지부(地部)106)  의 경비만 축낼 것이니, 내가 실로 민망하게 생각한다. 목중형은 금부로 하여금 엄히 신문하여 승복(承服)받고, 박해정 역시 엄형으로 승복받아 속히 국옥을 마무리짓게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국청의 의계(議啓)에 말하였기를,
"이 옥사의 관건(關鍵)은 오로지 목천임(睦天任) 형제가 내관(內官)과 체결하여 흉역을 모의한 데에 있습니다. 그가 항상 내관의 집에 왕래했다고 한 것은 노미(老味)가 고한 바와 서로 부합되며, 이른바 ‘가주 내관(家主內官)’이란 혹은 ‘이동지(李同知) 이설리(李薛里)107)  ’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유동지(柳同知) 유설리(柳薛里)’라고도 하는데, 이제 모두 죽었기 때문에 캐물을 길이 없습니다. 남아 있는 죄수는 마땅히 다시 등대(登對)하여 품처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의 뜻이 매양 국옥이 지루하게 만연된 것에 싫증이 나서 간단한 말로 작처(酌處)하여 옥을 비게 하였으니, 의계(議啓)의 모호함과 치옥(治獄)의 소루함이 거의 이와 같았다. 집의 한사득(韓師得)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적환(賊宦) 최필웅(崔必雄)이 궁장(宮墻)을 넘어 불을 지르려고 한 계책을 목천임과 함께 낭자하게 모의하여 와주(窩主)108)  가 되었습니다. 목천현과 목성관은 목천임의 아우와 조카이니 참여하지 않았을 리가 만무합니다. 더군다나 노미(老味)의 초사에서 긴히 나왔으니, 끝까지 구문(究問)하기도 전에 급작스레 작처함은 옥체(獄體)에 어긋납니다. 마땅히 목천현과 목성관을 감사(減死)하여 절도에 정배하라는 명을 환침(還寢)하시고, 다시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남병사(南兵使) 이중익(李重翊)은 나이가 많고 잔약하여 서읍(西邑)에서 체직(遞職)시켰는데 또 중곤(重閫)을 제수해 여론이 크게 놀라니, 청컨대 이중익을 개차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민정(閔珽)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하택(李夏宅)이 역적 이인좌와 더불어 옷을 벗어 서로 주고 사람을 보내어 왕복한 일은 박해정이 감히 전연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게 삼켰다 뱉었다 하는 형적이 있습니다. 대저 이하택이 역적 이인좌와 연결되어 통모(通謀)했다는 말은 이미 이일좌(李日佐)의 초사에서 나왔고, 또 채지홍(蔡之洪)의 상소에도 있으니, 그가 흉모에 동참한 것이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박해정은 국청으로 하여금 엄히 형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고, 이하택은 엄히 신문하여 승복(承服)을 받아 왕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해정을 엄히 신문하면 저절로 귀결될 곳이 있을 것이다. 다시 어찌 이하택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6일 기축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7일 경인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장령 이응(李膺)과 사간 이근(李根)이 함께 들어와 강을 마치자 이응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인망(人望)과 지벌(地閥)이 낮고 미천하다.’는 등의 말로 헌납 민정(閔珽)을 논박하고 의망(擬望)한 전관(銓官)을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정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승지 심준(沈埈)은 말하기를
"병사(兵使) 민용(閔瑢)의 손자인데 문명(文名)이 있다고 합니다."
하고, 수찬 황정(黃晸)은 말하기를,
"민정이 이응을 논박하려고 하여 소(疏)를 이미 완성해 놓고 한 중신(重臣)에게 보였으므로 이응이 먼저 논박하였으니, 이는 영격(迎擊)109)  한 것입니다."
하니, 이응이 이로 인해 인피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석(前席)에서 과오를 저지른 것은 별난 일이 아니나 이제 유신(儒臣)의 말을 들으니 맑은 조정의 풍도가 쓸어버린 듯하다. 장령 이응을 우선 체차하라."
하였다. 사간 이근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계(前啓)한 이봉상(李鳳祥)·이중익(李重翊)에 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또 말하기를,
"장령 이응이 과오를 저지른 것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응은 새로 향곡(鄕曲)에서 올라와 겨우 전석에 나왔으니 과오를 저지른 것은 별난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이응을 특체(特遞)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특체하라. 대신(臺臣)은 마땅히 환침(還寢)하기를 청하겠으나 영격(迎擊)했다는 말이 이미 유신에게서 나왔는데 어찌 징려(懲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근이 늙고 귀가 어두어 인피할 줄을 모르니, 교리(校理) 이종백(李宗白)이 옆에서 말하기를,
"마땅히 인피해야 합니다."
하자, 이근이 비로소 인피하였으나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비납을 받지도 못한 채 또 물러갔다. 이것을 본 연신(筵臣)들이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임금이 업수이 보는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3월 28일 신묘

각사(各司)에 명하여 묘시(卯時)에 출근하고 유시(酉時)에 퇴근하는 법을 신칙하였으며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매일매일 개좌(開坐)110)  하여 백사(百司)를 동독(董督)하고 신칙해 서로 면려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부교리 이종백(李宗白)과 수찬 황정(黃晸)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방금 간신(諫臣) 이근(李根)이 마음대로 망명(亡命)한 죄인 이봉상(李鳳祥)에 대한 계(啓)를 정지했으니, 신들은 놀라고 개탄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봉상이 망명한 죄는 법으로 보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으로도 아직껏 윤허해 따르지 않으셨으나, 자신이 대각이 된 자는 마땅히 힘껏 다투어 공법(公法)을 엄정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간신(諫臣)이 감히 지난번 당여(黨與)를 감싸는 습성을 드러내어 갑자기 거듭 낸 논계를 정지했으니, 이근의 파직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심공(沈珙)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이 향리로부터 도성(都城)에 들어왔다. 임금이 불러 보고 전교하기를,
"천릉(遷陵)하는 일을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민진원이 말하기를,
"신의 족질(族姪) 민임수(閔任洙)가 침랑(寢郞)이 되어 그 뱀의 변을 목격했습니다. 신의 처부(妻父) 고(故) 상신(相臣) 윤지선(尹趾善) 역시 그의 아버지 윤강(尹絳)의 풍수이 설로 매양 택조(宅兆)가 불길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때 광중(壙中)을 만든 사람인 김성(金姓)을 가진 자 역시 광중에 석환(石患)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어찌 반드시 빨리 돌아가려 하는가?"
하고는, 매우 진지하게 만류하였다.

 

3월 29일 임진

임금이 장릉(長陵)을 옮겨 봉안하는 일로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 및 문무(文武) 종신(宗臣) 2품 이상을 명소(命召)하여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였다. 판부사 민진원 등이 모두 말하기를,
"능침에 사변(蛇變)이 있었으니 마땅히 즉시 옮겨 모셔야 합니다."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에 이의(異義)가 없었다. 판부사 이관명(李觀命)은 병으로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하고 차자로 대신 의논하기를,
"개장(改葬)하는 일은 옛사람이 중히 여겨 장구(葬具)에 빠뜨린 것이 있거나 그 묘(墓)가 물에 깎여 나가지 않으면 경솔히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 능을 옮겼다는 일은 많이 듣지 못하였습니다. 성조(聖祖)의 의관(衣冠)을 묻은 지 이제 80여 년이 되었는데, 옮겨 모시자는 의논이 일찍이 숙묘조(肅廟朝) 때에 나왔으나 성고(聖考)께서 풍수의 설에 흔들리지 않고 바른 의리로써 결단하시어 성상의 결단이 분명해지자 여러 의논이 스스로 진정되었습니다. 이번에 위아래가 놀란 것은 전과 달라 지극히 경엄(敬嚴)한 땅에 더러운 물건이 이와 같이 낭자하고, 대신과 예관(禮官)이 이미 목도하여 말이 전해지기에 미쳐 대소가 경악하였으니, 신처럼 늙고 혼미한 자가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 널리 물으시어 신중히 결정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신중히 하라는 청은, 내 뜻도 또한 이와 같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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