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9권, 영조 7년 1731년 4월

싸라리리 2025. 9. 1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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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계사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조상경(趙尙絅)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조상경은 회탕(恢蕩)111)  의 논의를 주장하여 홍치중(洪致中)·조문명(趙文明)과 좋게 지내는 사이였다.

 

4월 1일 계사

사은사(謝恩使) 서평군(徐平君) 요(橈) 등이 복명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분부 하기를,
"변무(辨誣)하는 일이 잘 이루어졌다. 저들 사기(史記)의 간본(刊本)을 미처 보지는 않았으나 고치려고 하던 것을 고쳤다고 하니, 참으로 나라의 다행이다."
하니, 요가 말하기를,
"모두 성상의 성효(誠孝)가 그렇게 한 것이지 신(臣)들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하고는, 인하여 궤(櫃) 안에서 등본(謄本) 한 권을 내어 올렸는데, 그 책에는 ‘칙수명사고(勅修明史藁)’란 제호(題號)가 쓰여져 있었다. 요가 말하기를,
"유보(留保)는 바로 그 나라에서 주문(主文)하는 사람으로 상명(常明)과 혼인관계가 있는 사이이며 또 총재관(摠裁官) 장정옥(張廷玉)과는 친우 사이입니다. 상명은 우리 나라에 대해 평소 마음을 다한 자인데 유보와 장정옥 두 사람을 맞이하여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쳐 주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감격하여 허락하였습니다. 상명이 신에게 말하기를, ‘국사(國史) 가운데 고치려고 하는 자구(字句)를 모두 지적(指摘)하여 보여달라.’ 하였으므로, 신 등이 주필(朱筆)로 ‘찬(纂)’자, ‘확(攫)’자 및 ‘자립(自立)’ 등의 글자에 점에 찍어 보내주었습니다. 그러자 상명이 유보에게 보이고 답서(答書)하기를, ‘병오년112)   황상(皇上)이 이미 특별히 허락하셨은즉 뜻에 따라 고쳐주겠다.’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자립(自立) 운운’ 한 것은 야사(野史) 가운데 있는 말이요, 명사(明史)에는 없는데 이미 없는 것을 어찌 반드시 고치기를 청하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그의 말을 믿을 만하였고, 문세(文勢) 역시 창졸간에 만들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역관(譯官) 김시유(金時瑜)가 상명과 서로 만나자 상명이 말하기를, ‘간본(刊本)은 동지사(冬至使) 행차에 내보낼 터이니, 마땅히 5,6천 금(金)으로 사례(謝禮)해야 한다.’ 하고 인하여 좋은 말[馬]과 명주(明珠) 두 개를 요구했습니다. 호인(胡人)들은 비록 문학(文學)하는 자라 하더라도 재리(財利)에는 매우 인색한데, 유보(留保)만은 뇌물(賂物)을 받지 않고 말하기를, ‘사책(史冊)을 보낸 다음 국왕(國王)의 사례가 있으면 사양하지 않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보는 조금 뇌락(磊落)113)  하나 역시 많이 요구하는 뜻이다. 사국(史局)은 중대한데 유보가 비록 권한이 중하나 홀로 어떻게 사견(私見)으로 임의로 고치겠는가? 대신은 의심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사람들은 성품이 본래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필삭(筆削)하는 권한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어찌 다른 염려가 없겠는가?"
하니, 요가 말하기를,
"두 사람 이외에 역사를 주관할 만한 사람이 없고, 또 그들이 뇌물을 받지 않는데 무엇이 괴로워 우리를 속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어 묻기를,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니, 요가 말하기를,
"들으니 다시 서정(西征)의 역(役)이 있어 목극등(穆克登)이 바야흐로 말과 군사를 모으고 있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곳에도 역시 지진(地震)이 있었는가?"
하니, 요가 말하기를,
"20일 정오에 갑자기 큰 풍우(風雨)가 닥치는 듯 앉아 있는 의자가 흔들리므로 급히 나와 면했습니다. 그날 지진으로 사망한 자가 2만여 명이라 하였고, 상명(常明)의 말을 듣건대 호황(胡皇)은 배를 타고 장막에 거처하여 붕압(崩壓)을 피했으며, 또 태화전(太和殿)은 바로 명(明)나라 때 건물로서 계석(階石)이 새로 쌓은 듯 말끔했는데, 역시 모두 무너졌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요가 말하기를,
"사은사(謝恩使)의 행차를 면제한다고 명한 것은 우리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의 폐단을 줄이려는 것입니다. 이번의 조칙사(弔勅使)인 예부 시랑(禮部侍郞) 부덕(傅德)은 성품이 아주 광포(狂暴)하며, 통관(通官) 역시 사악한 자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서로(西路)에 신칙하여 모든 접대에 특별히 마음을 쓰게 하라."
하였다.

 

4월 2일 갑오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친히 행하였다.

 

4월 2일 갑오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이 면대(面對)를 원하였다. 임금이, 민진원은 폐부지친(肺腑之親)이라 하여 영의정 홍치중(洪致中)과 함께 장릉(長陵)을 봉심하라고 명하였다. 민진원이 의리상 감히 대신으로 자처할 수 없다 하여 진소(陳疏)하여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면대를 원하여 더욱 간절히 사양하니, 임금이 면유(面諭)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 역시 명을 받들고 들어왔다. 임금이 불러 보고 장릉의 천봉(遷奉)하는 일을 물으니, 이광좌가 여러 신하들이 아뢴 것처럼 대답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신사철(申思喆)이 수어사(守禦使)로서 강연(講筵)에 참석하여 청하기를,
"장신(將臣)으로 하여금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형편을 살펴 서장대(西將臺)와 한봉(汗峰)의 성첩(城堞)을 더 쌓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며, 전의 하교(下敎)에 의해 전망(戰亡)한 터에도 비(碑)를 세워 사기(士氣)를 권장(勸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명신(趙命臣)을 우승지로, 이재(李縡)를 대사헌으로, 이광부(李光溥)를 집의로, 서명구(徐命九)를 사간으로, 이태징(李台徵)을 장령으로,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으로, 이성룡(李聖龍)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포청(捕廳)의 죄수인 남편을 죽인 여인 옥이(玉伊)의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된다하여 금부(禁府)로 옮겨 삼성 추국(三省推鞫)114)  을 베풀어 결안(結案)하여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4월 4일 병신

엄경하(嚴慶遐)를 헌납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정언으로, 박사익(朴師益)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5일 정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이집(李㙫)이 귀가 어둡다는 이유로 사직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중후(重厚)함에 힘입어 퇴폐한 습속(習俗)을 진정시키고 있으니,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이집이,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는 공평하고 민달(敏達)하니, 마땅히 전임(專任)할 만하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는 형편상 인혐하고 나오지 않으니, 마땅히 모두 나오도록 권해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비국 당상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운두산성(雲頭山城)을 지금 개축하고 있으니, 청컨대 청성 첨사(淸城僉使) 오석종(吳錫宗)을 볼하 첨사(乶下僉使)와 바꾸어 차임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 허락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도치(圖治)하는 데 마음을 다해 빈대(賓對)가 빠짐이 없었고 대신과 제재(諸宰)가 날마다 입시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우모(訏謨)115)  는 잗단 것에 불과했고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아뢴 것도 긴요한 말이 없었으므로 사신(史臣)이 기주(記注)하는 데 지쳤었다. 장령 이태징(李台徵)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민정(閔珽)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무능한지라 대선(臺選)에 맞지 않아 당초 제수되었을 때에 거듭 논박을 받았고 여론에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또 대각에 있는 날에는 지론(持論)이 굳지 못하여 비웃는 사람이 많았으니, 이 때문에 대계(臺啓)가 발론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체직되었다 하여 그냥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정언 민정을 다시는 납언(納言)하는 자리에 의망(擬望)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 논한 바가 공심(公心)에서 나왔다면 오늘 이어 논박하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겠지만, 그 영격(迎擊)함을 알아 이미 파직했는데 그대로 따라서 연계(連啓)하니,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하고는, 윤허하지 않았다. 처음에 장령 이응(李膺)이 탑전(榻前)에서 민정을 논계하다가 황정(黃晸)의 배척을 받아 인피하니, 특체(特遞)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태징이 또 잇달아 아뢰니, 임금이 드디어 미안한 비답을 내린 것이다. 또 아뢰기를,
"이하택(李夏宅)이 적의 초사에서 긴밀하게 나온 것이 전후로 한번이 아니며, 옷 속에다 감춘 서찰(書札)은 모역(謀逆)을 했다는 단안(斷案)이 되기에 족한데 이미 잡아 왔다가 문득 석방(釋放)하고 겨우 윤허하였다가 즉시 정침하시어 역적의 괴수가 아직도 법망(法網)에서 벗어나 있으니, 실형(失刑)함이 큽니다. 이제 박해정(朴海正)의 초사로 보건대 옷을 주고 유숙시켰으며 적진(賊陣)을 왕복한 것이 모두 증거가 있으니 철저히 핵실해 실정을 알아내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이하택은 국청을 설치해 엄히 신문하여 왕법을 바루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광운(李光運)을 헌납으로, 박사정(朴師正)을 부수찬으로, 윤광운(尹光運)을 부교리,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4월 8일 경자

전교하기를,
"북도(北道)의 별과(別科) 시권(試券)은 모두 위격(違格)이 없으니, 실차(實差) 4장(張)으로 방(榜)을 써 들이라. 예차(預差) 가운데 북관(北關)의 생원(生員) 정시린(鄭時麟)은 궁벽한 고장의 유생(儒生)으로서 나이가 일흔을 넘었으며 더군다나 이 도에서 과거를 보인 것은 그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니, 노인을 돌보는 뜻에 어찌 별다른 전례(典禮)가 없겠는가? 특별히 병과(丙科) 끝에 붙이도록 하라. 이번 나의 이 거조는 요행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니, 내 뜻을 시관(試官)에게 유시하라."
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이귀휴(李龜休)를 장령으로, 이현모(李顯謨)를 교리로 삼았다.

 

4월 9일 신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우승지 이광보(李匡輔)가 아뢰기를,
"일이 기강(紀綱)에 관련되니, 들은 바가 있으면 감히 숨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장신(將臣) 하나가 초헌(軺軒)을 타고자 하여 장교(將校)를 보내어 대신(大臣)에게 청하니, 대신이 허락하였습니다. 또 한 곤수(閫帥)로서 붙잡혀 온 자가 외람되이 양재역(良才驛)의 일기(馹騎)116)  를 탔으며, 선전관(宣傳官) 천망(薦望)은 무변(武弁)의 청선(淸選)인데도 액례(掖隷)의 동서(同婿)와 천의(賤醫)의 여서(女婿)가 모두 이 선(選)에 들었다고 하니,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놀랄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해부에 명하여 사문(査問)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 들으니 한 대신이 서리(署吏)를 시켜 비랑(備郞)을 대신해 서역(書役)을 하게 했다니, 어찌 체면을 손상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묘당이 이러하기 때문에 기강이 점차 퇴폐해진다."
하였다. 이른바 장신(將臣)이란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인데, 장붕익은 교만과 사치가 심해 매양 반드시 문재(文宰)를 본받으려고 해서 심지어 초헌을 타기까지 하였다. 후에 연신(筵臣) 임정(任珽)의 계사로 인해 무장이 초헌 타는 것을 영원히 금하였다.

 

4월 10일 임인

이광덕(李匡德)을 승지로, 김상신(金相紳)을 정언으로, 황정(黃晸)을 교리로 삼았다.

 

헌부 【장령 정홍제(鄭弘濟)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민정(閔珽)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간원 【 헌납 이광운(李光運)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유봉휘(柳鳳輝)의 죄는 실로 천지가 용납하지 않고 《춘추(春秋)》의 법으로도 반드시 토죄(討罪)해야 합니다. 무신년117)   역란이 있던 날 더욱 마땅히 먼저 그 죄를 바루어야 했었는데 왕장(王章)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신(神)·인(人)이 모두 분노하고 있습니다. 나홍언(羅弘彦)의 책자(冊子)가 나오기에 미쳐서는 그의 흉역(凶逆)한 심보가 더욱 드러나 감추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 흉소(凶疏)를 한번 창도(倡導)하자 난적의 마음을 열어주어 김일경(金一鏡)과 박상검(朴尙儉)의 앞잡이가 되었으며, 김일경과 박상검이 세제(世弟)를 모해(謀害)하려는 계책은 심유현(沈維賢)과 이유익(李有翼)이 효시(嚆矢)가 되어 심유현과 이유익이 거병(擧兵)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악의 우두머리가 된 정상과 난의 계제(階梯)가 된 죄는 죽이더라도 속죄(贖罪)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역적 나홍언의 기록만 보더라도 몇 구절의 말로써 단안(斷案)을 삼아서 판결(判決)할 수가 있습니다. 종사(宗社)를 모위(謀危)한 죄가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비록 생전(生前)에 법을 바루지 못했더라도 끝내 죽은 후에라도 주륙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유봉휘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두 대신(臺臣)을 앞으로 불러 전교하기를,
"너희들은 어찌 감히 해가 오래 된 일로 이처럼 공변되지 못한 논의를 내어 마음을 떠보려는 계책으로 삼는가?"
하니, 정홍제(鄭弘濟)가 말하기를,
"이는 한 나라의 공공(共公)한 논의로 신들이 대간의 직책에 있으면서 말하고자 한 것은 공적일 뿐입니다. 어찌 이미 죽은 유봉휘를 미워하여 이 계사(啓辭)를 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의 녹(祿)을 먹으면서 어찌 이와 같이 어긋나고 과격한 논의를 하는가?"
하니, 정홍제와 이광운 등이 말하기를,
"유봉휘의 가득찬 죄는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만약 탕평(蕩平)의 정치를 하고자 하신다면 죄 있는 자에 대해 먼저 그 죄를 바로잡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탕평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신하가 아니다."
하니, 정홍제가 말하기를,
"신들이 이미 전하를 위해서 역적을 토벌했으니, 이는 바로 전하의 신하입니다."
하고, 이광운은 말하기를,
"나홍언의 책자가 나오자 유봉휘의 죄가 더욱 환히 드러났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홍언의 책자에 무슨 말이 있었는가?"
하니, 이광운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보지는 못했으나 국옥(鞫獄)에 참여한 여러 신하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당습(黨習)이 있던 때가 아니었다."
하니, 이광운과 정홍제 등이 말하기를,
"무신년118)  의 역변은 실로 유봉휘의 한 소장에서 말미암았는데,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어찌 굽어 살피지 못하십니까? 신이 이 계사를 발론한 것으로 죄를 입는다면 비록 만 번 죽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군신(君臣) 사이는 부자(父子)와 같으니, 조금 노여움을 거두시고 앞에서 말씀을 다 드리도록 해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노여움이 심해 면전에서 책망하고 이어 체직을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전 지평 정홍제(鄭弘濟)와 헌납 이광운(李光運)은 군부를 시험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려고 했으니, 단지 체직만 해서는 불가하다. 아울러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고, 간통(簡通)119)  한 대신(臺臣)은 아울러 파직하라."
하였다. 이어 합계에 대한 비답을 내리지 않고 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승지 심준(沈埈)이 말하기를,
"유봉휘의 소는 망령되고 경솔하지 않은 바는 아니나 그 본의는 결단코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상이 변읍(邊邑)으로 내쫓는 박벌(薄罰)을 베푸셨고, 그가 죽은 후에는 그 아들로 하여금 분상(奔喪)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이번에 대신(臺臣)이 다시 제거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조정을 어지럽히려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유봉휘가 결단코 다른 뜻이 없다고 한 것은 경솔함을 면치 못하였다." 하고는 처음에는 체직하였다가 곧바로 파직을 명하였다. 이때 대직(臺職)에 있는 자가 모두 두려워 위축되어 감히 유봉휘의 일을 발론하지 못했는데 이광운 등이 언관(言官)에 제배되자 비로소 발계하였다. 임금이 진정시키는 뜻으로 처분함이 있었지만 그러나 심준을 척파(斥罷)한 것은 성상의 뜻을 보인것이다.

 

판부사 민진원(閔鎭遠) 등이 장릉(長陵)을 봉심하고 돌아오니, 임금이 불러 묻고는 전교하기를,
"전에 장릉을 옮겨 봉안하려는 뜻은 감여가(堪輿家)의 근거없는 설에 불과했으므로, 그때 성교(聖敎)가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가르침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옮겨 봉안하는 것은 옛날과 크게 달라 능침(陵寢)의 더러운 물건을 이미 대신들이 재차 봉심한 걸음에 보았다고 하였으니, 슬픈 마음이 그지없이 더욱 간절하여 천릉(遷陵)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 안으로는 대신(大臣)·경재(卿宰)와 밖으로는 기구(耆舊)·유신(儒臣)의 여러 의논이 일치하여 모두 이의(異議)가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계축년 예에 의해 거행하게 하라. 옮겨 봉안하는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모든 일을 마땅히 주밀(周密)하게 하기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뜻을 가지고 별도로 도감(都監)에 신칙하라."
하고, 명하기를,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을 산릉 총호사(山陵摠護使)로 삼으라."
하였다.

 

4월 11일 계묘

임금이 전경 문신강(專經文臣講)에 친림(親臨)하여 수석을 차지한 전적(典籍) 신이복(愼爾復)에게 숙마(熟馬)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전강(殿講)에서 배강(背講)하는 규정을 하지 않고 처음으로 임강(臨講)을 명해 문장의 뜻을 토론 하도록 했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전일 합계한 대신(臺臣)에 대한 처분이 지나쳤다고 신구(申救)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봉휘의 일은 이미 지나간 일로 붙여야 한다. 목내선(睦來善)과 같은 자는 죄명이 얼마나 중한가? 그런데도 오히려 방환(放還)하여 직첩(職牒)을 주었다. 유봉휘는 이미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였으니, 지금 어떻게 추론(推論)하겠는가? 더군다나 지금 나라의 형세가 어떠한데 그들이 반드시 이렇게 하고자 하여 겉으로는 성궁(聖躬)을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나로 하여금 피곤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박벌(薄罰)을 그만둘 수 없다."
하였다.

 

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민정(閔珽)을 헌납으로, 김상익(金尙翼)을 지평으로, 이현모(李顯謨)를 부교리로,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덕수(李德壽)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권이진(權以鎭)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4월 12일 갑진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동지사(同知事) 송인명(宋寅明)이 나아가 아뢰기를,
"천하의 일은 언제나 서두른 후에 착오가 생깁니다. 혹 성상의 노여움이 폭발하는 즈음에 처분을 미처 깊이 헤아리지 못하여 후일의 폐단에 관계된 것이 많으니, 이번 합계(合啓)를 돌려준 한 가지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임금은 말하는 사람에게 그 뜻이 합당하지 않으면 비록 꺾을 수는 있지만 이미 나온 계사(啓辭)는 억제해 마멸(磨滅)시켜서는 안됩니다. 전하께서는 이에 대해 단지 가부만 말씀하실 뿐이요, 정계(停啓)하거나 연계(連啓)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대각에 있는 자에게 맡겨야 하니, 돌려 주라는 명은 마땅히 곧 반한(反汗)120)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臺臣)을 이미 처분하였으니, 비답할 곳이 없다. ‘돌려주라[還給]’는 두 글자는 정원에서 잘못한 것이니, 고쳐서 선시(宣示)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청하기를,
"음관(蔭官)으로 이미 출륙(出六)121)  한 자와 문신(文臣) 참하관(參下官)을 산릉 감조관(山陵監造官)으로 차출하고 서사자(筮仕者)122)  를 전용(專用)하지 말아 조급히 진출하는 습성을 막고 소체(疏滯)되는 길을 조금이라도 고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는데 후에 대신(大臣)의 말로 인해 중지되었다. 송인명은 임금이 향용(嚮用)123)  하는 신하로서 군덕(君德)을 성취하는 직임에 있으니, 마땅히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유봉휘가 흉소(凶疏)한 역절(逆節)을 분명하게 말하여 성상의 마음을 열지 않았고, 또 대신(臺臣)을 꾸짖은 잘못된 일을 곧바로 논해 임금의 잘못을 구하지 않고서 이에 ‘말이 합당하지 않으면 꺾어도 좋다.’는 등의 말로 억양(抑揚)해 말하여 임금의 대각을 경시하는 길을 열었으니, 이 한 마디 말의 실수가 애석하다 하겠다.

 

좌부승지 이성룡(李聖龍)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일전 두 대신(臺臣)을 처분함이 아주 중도(中道)에 벗어나 원계(原啓)를 돌려주라는 명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아! 합계(合啓)하여 논하는 것은 실로 춘추(春秋)의 대의(大義)가 있는 바이니, 역란(逆亂) 이후에는 더욱 하루라도 이러한 논의가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각에서 고요하여 들리는 말이 없어 당당한 대조(大朝)가 하나의 법 없는 나라가 되어 신(神)·인(人)이 다분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번 두 대신이 징토(懲討)한 계사는 본디 너무 늦었으며, 그 말은 바로 한 나라의 공론입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개납(開納)하심을 내리시어 왕장(王章)을 펴야 할 것인데, 지척(咫尺)의 전석(前席)에서 꾸짖고 내치시어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심은 무슨 까닭입니까? 전하께서는 매사를 한갓 미봉(彌縫)하고 고식적으로 처리하여 구차스레 목전의 무사함만을 바라시고 유독 의리와 기강이 관계되는 바를 방치하여 전도(顚倒)시킬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대신의 계사는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하니, 비록 예사로운 조용한 의논이라 하더라도 돌려주었다는 일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합사(合辭)한 대론(大論)을 돌려준 것은 실로 이 3백 년 동안 없었던 것인데 전하의 명성(明聖)하심으로서 어찌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를 하시는 것입니까? 그날 입시(入侍)했던 승선(承宣)은 대신(臺臣)이 견책을 받을 때를 타서 평일 당(黨)을 옹호했던 계책을 이루었으니, 이미 아주 무엄합니다. 후사(喉司)와 언관(言官)이 군부(君父)의 지나친 거조를 보고도 또 한 마디 말로도 광구(匡救)하지 않았으니, 오늘날 전하의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사간 서명구(徐命九)가 또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발계(發啓)한 두 신하가 삭출(削黜)하라는 엄한 명을 입기까지 하였는데, 이 계사는 신하된 자가 그 직분을 다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비록 즉시 개납하심을 내리시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꺾어서 견책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두 신하의 죄상에 대해 ‘군부를 떠보고 조정을 어지럽히려고 하였다.’ 하셨는데, 신은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상의 뜻이 크게 정해져 동료들끼리 협력하기에 힘쓰는데, 저 두 신하가 감히 무슨 마음으로 굳게 지니신 성상의 뜻을 떠보려 했겠습니까? 합사(合辭)의 의논은 바로 고금에 걸쳐 바라는 대의이니, 오늘날 북면(北面)하여 전하를 섬긴 자라면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 가운데 구호(舊好)에 견제되어 결단하지 못한 자는 논할 것도 없고, 신들처럼 겁을 먹고 발계하지 못한 것은 본래 신의 죄인데 다만 특히 두 신하만이 먼저 그 단서를 꺼낸 것입니다. 그러나 조어(措語)를 감안하여 결정한 것이 당초에 비해 8,9분을 감한 정도가 아니니, 이 역시 성상의 뜻을 본받은 것입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의(聖意)가 왜 깊이 미워하시는지요? 더군다나 신이 삼가 시의(時議)를 듣건대, 세도(世道)를 위해 깊이 염려하고 서슴없이 용감하게 반드시 토멸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고 하니, 한 나라의 공의(公議)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조정을 어지럽히며 논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신은 빨리 환수(還收)하심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제 처분이 이미 아주 예사롭지 않았으니 정원(政院)에 있는 자는 즉시 작환(繳還)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수수방관(袖手傍觀)하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입시한 승선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함부로 영호(營護)하되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꺼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언의(言議)를 근밀(近密)한 곳에서 함부로 하여 전하를 저버리고 세도(世道)를 무너뜨림이 이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한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돌려주라고 명하면서 말하기를,
"이성룡(李聖龍)과 서명구(徐命九)의 사람됨이 이럴 줄은 내가 몰랐다. 그런데 오히려 이와 같으니 오늘날 세도와 시상(時象)이 도리어 군부보다 중하구나."
하였다.

 

4월 13일 을사

내국(內局)에서 상후(上候)를 입진(入診)하고 자보(滋補)하는 약제(藥劑)를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만 가지 보약(補藥)이 모두 헛것이다.’라고 하였다. 시험삼아 오늘날의 시상(時象)을 보건대,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으니, 묵은 나무뿌리와 썩은 풀로 효과 보기를 바란다면 옳은 일이겠는가? 경들은 어찌하여 이 무리들을 조제(調劑)하지 않는가?"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받들지 못한 것은 본래 여러 아랫사람들의 죄이니, 여러 아랫사람에게 죄가 있으면 죄를 줄 뿐이지 어찌 성심(聖心)을 번거롭혀 성후(聖候)를 손상(損傷)하는데 이르게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있고 신하가 있으면 의당 상(賞)이 있고 벌(罰)이 있게 마련인데 내가 일체 그냥 버려 두었다고 사책(史冊)에 쓴다면, 후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합계한 일은 진소(陳疏)해도 되는데 반드시 합계하여 과장하였으니, 그뜻이 교밀(巧密)하였다. 이광운(李光運)·정홍제(鄭弘濟)가 홀로 마련한 것이 아니요 반드시 시킨 사람이 있을 것인데, 나는 그 마음이 무장(無將)124)  이라고 생각한다. 폐합(閉閤)한 후에 감히 이러한 일을 한 것은 참으로 임금을 하찮게 본 것이다. 명 태조(明太祖)가 ‘신하로서 임금 보기를 원수같이 한다’는 한 마디 말로써 맹자(孟子)를 출향(出享)하였으니, 그 강대(剛大)한 기상을 마음으로 항상 흠보하였는데 명 태조로 하여금 오늘날의 여러 신하를 보게 한다면, 모두 무장(無將)의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시킨 자가 적발된다면 비록 중벽(重辟)125)  에 처하더라도 임금은 먼저 억측을 가해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노론(老論)·소론(少論) 두 당(黨)을 섞어 써서 시고 짠 것을 조화했는데, 성의(聖意)가 금석(金石)처럼 굳었다. 그러나 혹 합계가 나온 뒤 그것으로 인해 계속해 발론함이 있을까 염려하여 상신(相臣)을 독책(督責)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명 태조를 흠앙한다.’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우연히 발론(發論)하여 한때 말한 실수에 불과했는데, 그후 한원진(韓元震)이 길가에 전해진 말로 상소하여 광구(匡救)하기에 이르렀고 말을 많이 부연(敷衍)하여 마침내 성상의 노여움을 크게 촉발시켜 과중(過中)한 처분이 있게 되었다.

 

홍상빈(洪尙賓)·한사선(韓師善)을 승지로, 유언통(兪彦通)을 헌납으로, 황정(黃晸)을 부교리로 삼았다.

 

4월 14일 병오

양정호(梁廷虎)를 승지로, 임광필(林光弼)을 사간으로 삼았다.

 

4월 15일 정미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4월 16일 무신

죄인 성탁(成琢)이란 자는 선혜청(宣惠廳)의 소리(小吏)로서 무신년126)   역적 김옥성(金玉成)의 초사에 원인(援引)되어 해남(海南)으로 정배(定配)되었는데, 성탁이 말미를 받아 임의로 서울에 들어와 머무르면서 돌아가지 않으니 비국(備局)에서 정탐하여 알고는 형조로 하여금 붙잡아 배소(配所)로 돌려 보낼 것을 계청하였다. 성탁이 붙잡히자 봉서(封書) 하나를 바치면서 상변(上變)이라고 하였다. 형조 판서 윤유(尹游)와 참판 홍현보(洪鉉輔)가 그것을 가지고 구대(求對)하였다. 임금이 봉서를 보고 나서 전교하기를,
"이는 심익연(沈益衍)과 하나이면서 둘이다. 무신년에 만약 이 무리들을 다 죽였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성탁은 소리(小吏)로서 약간 재주가 있는 자인데 그가 조정을 어지럽히려고 한다. 조정의 기상이 이와 같은데 이 무리 역시 이와 같으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가 말한 바 이윤중(李允中)이란 자는 누구인가?"
하니, 동의금(同義禁) 조원명(趙遠命)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이윤행(李允行)의 종제(從弟)로서 해남으로 귀양간 자입니다."
하였다. 명하기를,
"봉서에 고한 자인 김중휘(金重輝)와 아울러 일체로 잡아오라."
하였는데, 김중휘는 바로 흉적 정사효(鄭思孝)의 종으로서 이윤중과 더불어 긴밀한 사이라 한다.

 

본부에 국청을 설치하여 성탁에게 봉서의 내용을 가지고 이윤중과 수작한 정상을 물으니, 성탁이 공초하기를,
"이인좌(李麟佐)의 흉격(凶檄) 가운데에 밀풍군(密豐君)을 거론한 것은 밀풍군을 제거하려고 해서였으며, 여흥군(驪興君)은 남인(南人)이 추대(推戴)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무신년 역적은 경중(京中)에서 내응(內應)할 것을 믿었고, 한세홍(韓世弘)이 팔로(八路)의 종약장(從約長)이 되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정의 귀인(貴人)들과 교통(交通)한 서간(書簡)이 모두 청주(淸州) 적진(賊陣)으로 들어갔으며, 초야(草野)의 근거지는 영남(嶺南) 안동(安東)입니다."
하였다. 조정 귀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이윤증이 낮은 목소리로 이광좌(李光佐)·이삼(李森)·권이진(權以鎭)의 이름을 들었다. 그래서 놀라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으니, 이윤중이 말하기를,
"이세악(李世岳)에게 들었습니다. 이세악은 바로 이백전(李百全)의 아들입니다. 이백전과 이인좌의 아비 이홍덕(李弘德)은 조하주(曹夏周)의 사위가 되니 이세악과 이인좌는 이종(姨從)이 되어 정분이 형제와 같았습니다. 무신년에 이세악이 이인좌의 진중(陣中)에 들어가 여러모로 익히 상의하였고, 조하주의 아들 조경수(曹景洙)·조경사(曹景泗) 역시 정상을 알고서 동참한 자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영남에 명망이 있는 선비 셋이 있었으니 경주(慶州)의 최광두(崔光斗), 안동(安東)의 권구(權榘), 선산(善山)의 이도(李燾)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초록 대장(草綠大將)·서묘 대장(鼠猫大將)이란 말이 영남에 성행했는데 그 뜻은 속담에서 ‘초록은 동색이다[草綠同色]’라고 하였기 때문이며, 서묘(鼠猫)는 크고 작은 쥐를 한 항아리에 넣어두면 큰 놈이 작은 놈을 잡아먹기 때문에 큰 쥐를 서묘(鼠猫)라고 지목하는데, 초록·서묘라 칭한 것은 대개 출정(出征)한 사람의 당명(黨名)이 많아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정사효(鄭思孝)의 종 김중휘(金重輝)는 글을 잘하고 영리한데 이번 봄에 이윤중을 찾아와 말하기를, ‘신천지(新天地)가 된 후에는 마땅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후에 정사효의 아들 정도륭(鄭道隆)이 편지로 김중휘를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하였으니, 만약 김중휘를 조사하면 반드시 같은 도당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금 해남에 소요(騷擾)가 크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2월에 본현(本縣)에서 백일장(白日場)을 열었는데 ‘잠룡(潛龍)의 뜻을 격발(激發)하라.’는 것이 부제(賦題)여서 많은 선비들이 글을 짓지 않고 나와 버렸습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장흥(長興)의 정덕재(鄭德載)가 이번 봄에 이윤증을 찾아와 말하기를, ‘담양(潭陽)의 화약(火藥)에 대한 일에 사람들의 말이 낭자하여 병사(兵使) 조경(趙儆)이 장계하려고 하였는데 정사효가 권하여 그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정미년127)   농사가 크게 풍년이어서 이듬해 봄 시가(市價)가 1민(緡)에 거의 10두(斗)가 되었는데 어사(御史)가 해선(海船)을 엄금하여 조운(漕運)하지 못하게 한 것은 머물러 두어 적의 양식을 삼고자 한 것입니다. 이로써 병조 판서에게 가서 고해 상문(上聞)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았었습니다."
하였다. 김중휘를 문초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임금이 성탁(成琢) 및 그의 동생 성박(成璞)을 친국하고, 전교하기를,
"해남(海南)의 원이 ‘잠룡의 뜻을 격발하라.’는 것으로 과제(科題)를 삼은 것은 괴이하다."
하니,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유득장(柳得章)의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문수(朴文秀)가 대명(待命)한 것은 안연석(安鍊石)을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일 때문인가?"
하니,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는 말하기를,
"정희량(鄭希亮)에게 조문(弔問)하고 이세악(李世岳)을 옹호하며 권구(權榘)를 방문한 일 때문입니다."
하자, 조문명이 말하기를,
"박문수가 정희량을 조문한 것은 난리 전이었는데, 성탁의 말이 이와 같습니다. 또 박문수가 이세악을 추문(推問)한 것을 수작하여 영호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광덕(李匡德)이 조운(漕運)을 막고는 마침내 망극한 무함을 입었으니, 나는 그윽이 비웃었다."
하였다. 성탁과 성박을 아울러 각기 형장 13도(度)를 시행하였다.

 

이로부터 연달아 본부에 국청을 설치하여 이윤중(李允中)을 문초하니, 이윤중이 공초하기를,
"밀풍군(密豐君)은 적진(賊陣)에 있지 않았는데 이름이 흉격(凶檄)에 올라 있으니, 애매한 듯합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성탁과 수작함이 비록 많았으나 별로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성탁과 면질(面質)시키니 이윤중의 말이 많이 막혔다. 성탁을 2차 형신하고 이윤중을 1차 형신했으나 모두 불복하고 마침내 물고(物故)되었다. 성탁을 8차 형신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이 정승(李政丞), 이 대장(李大將), 박 감사(朴監司)와 질오(嫉惡)함이 많기 때문에 과연 이렇게 무함하여 이끌어 들인 것입니다."
하였다. 성탁을 9차 형신하니 무고(誣告)로 지만(遲晩)했는데, 인하여 장폐(杖斃) 되었다. 성박은 3차 형신했으나 불복하므로 여러 죄수와 함께 작처(酌處)하여 성박은 나로도(羅老島)로, 김중휘(金重輝)는 삼수(三水)로 정배하였다.

 

4월 17일 기유

김간(金侃)을 장령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8일 경술

조세후(趙世垕)·박준(朴㻐)을 장령으로, 정형복(鄭亨復)·박사창(朴師昌)을 지평으로, 임수적(任守迪)을 사간으로 삼았다.

 

4월 19일 신해

안개가 크게 끼고 흑운(黑雲)이 해 가운데로 들어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여 마치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이춘제(李春躋)를 대사간으로, 홍상인(洪尙寅)을 사간으로, 이종백(李宗白)을 헌납으로, 이덕재(李德載)·이현량(李顯良)을 정언으로 삼았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함은군(咸恩君) 이삼(李森)·전(前) 승지(承旨) 이광덕(李匡德)·공조 판서(工曹判書) 권이진(權以鎭)·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 등이 죄인 성탁의 초사에 피고(被告)되었다 하여 서로 연달아 서명(胥命)128)  하니, 임금이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하고 사신(史臣)을 보내어 이광좌를 위유(慰諭)하고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4월 20일 임자

조최수(趙最壽)를 대사간으로, 임수적(任守迪)을 집의로, 이귀휴(李龜休)를 장령으로, 윤지원(尹志遠)을 지평으로, 박필균(朴弼均)을 정언으로 삼았다.

 

조칙사(弔勅使) 백마 탑달 부덕(白馬嗒達傅德)이 홍제원(弘濟院)에 당도하니 좌의정 이집(李㙫)이 명을 받들고 나가 영접하였다.

 

이때 양사(兩司)에서 유봉휘(柳鳳輝)에 대한 합계(合啓)가 있었는데 대각(臺閣)에 있는 자들이 정계(停啓)하거나 연계(連啓)하기를 어렵게 여겨 번번이 규피(規避)를 일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대사간 이춘제(李春躋), 집의 이광부(李光溥)가 패초(牌招)를 어기고 들어오지 않으니, 임금이 파직시켰다. 사간 홍상인(洪尙寅), 지평(持平) 박사창(朴師昌)을 독촉해 입시(入侍)하게 하니, 홍상인 등은 억지로 인피하고, 박사창(朴師昌)은 무서워 떨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임금이 내려다 보고는 퇴대(退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홍상인이 전계를 거듭 아뢰고 이어 물러가니, 유봉휘에 대한 계사는 드디어 정지되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유봉휘에 대한 계사는 양사에서 연계(連啓)하려고 하지 않으면 의견이 같지 않다는 것으로써 인피(引避)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까닭없이 물러갔으니 거조가 놀랍다. 두 대신(臺臣)을 파직하라."
하였다. 임금이 유봉휘에 대해 발계(發啓)한 처음에는 혹 점차 소란한 단서가 일어날까 염려하여 최절(摧折)함이 심했지만, 그 도당들이 함부로 정론(停論)한 것을 미워하여 드디어 박벌(薄罰)을 시행한 것이다.

 

4월 21일 계축

임금이 친히 모화관(慕華館)에 임어하여 호칙(胡勅)을 영접하고 경덕궁(慶德宮)에 주필(駐蹕)하였다. 혼전(魂殿) 영좌(靈座)를 읍화당(浥和堂)에 허설(虛說)하고, 호인(胡人)이 조제(弔祭)를 거행하였다. 조제를 마치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서 접견하고 다례(茶禮)를 의례(儀禮)대로 행하였다. 이어 환궁(還宮)하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이광좌와 함께 들어오기를 명하니, 이광좌가 황공하여 명에 응하지 않았다.

 

4월 22일 갑인

조명신(趙命臣)을 승지로, 이세진(李世璡)을 사간으로, 남태량(南泰良)·이성효(李性孝)를 지평으로 삼았다.

 

4월 23일 을묘

임금이 관소(館所)에 친히 임하여 칙사를 접견하고 또 다례를 행하였다.

 

4월 24일 병진

이집(李㙫)을 총재관(摠裁官)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으로, 윤섭(尹涉)을 헌납으로, 유건기(兪健基)를 지평으로, 황재(黃梓)를 사간으로 삼았다.

 

총호사(摠護使) 홍치중(洪致中) 등이 여러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헌릉(獻陵)129)  의 국내(局內)를 간심(看審)하고 돌아오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지사 이봉명(李鳳鳴) 등이 모두 말하기를,
"헌릉의 방혈(旁穴)은 용국(龍局)이 웅혼(雄渾)하나 화평(和平)하고 옹용(雍容)함은 후릉(厚陵)130)  의 방혈만 못함이 있는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가서 간심하라고 명하였다. 호칙(胡勅)이 장차 돌아가게 되매 송인명(宋寅明)을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다.

 

4월 25일 정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접 도감 당상(迎接都監堂上)도 역시 함께 들어와 도감의 접대하는 일로 진달하여 말하기를,
"상칙사(上勅使)는 사람됨이 염간(廉簡)하여 요구하는 물건이 없고 단지 작은 머리빗 수십 개를 요구하면서 말하기를, ‘돌아가 아손(兒孫)들에게 주고자 한다.’하였습니다. 부칙사(副勅使)는 요구하는 것이 한정이 없고 모든 물건을 다 은(銀)으로 대신 주기를 원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옹정(雍正)131)   역시 은을 사랑했는데, 이 무리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청하기를,
"인삼(人蔘) 2근(斤)과 백면지(白面紙) 수백 권을 몰래 부칙사에게 주어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장령 이귀휴(李龜休)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문명(趙文明)을 사은 상사(謝恩上使)로, 조상경(趙尙絅)을 부사(副使)로, 이일제(李日躋)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4월 26일 무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복시(司僕寺)에서 아뢰기를,
"해주 감목(海州監牧)을 등산 첨사(登山僉使)에게 이속(移屬)시킨 후 첨사가 수사(水使)에게 견제되어 소나무 밭이 무성해지는 반면, 전토(田土)는 점차 줄어들어 세입(稅入)으로 마료(馬料)를 넉넉히 댈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낭관(郞官)을 보내 살피어 백성들이 개간하기를 허락하며 굽고 작은 소나무를 베어 목민(牧民)의 이익을 넓히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4월 27일 기미

임금이 북칙(北勅)을 모화관에서 친히 전송하였다.

 

4월 28일 경신

정석오(鄭錫五)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엄경하(嚴慶遐)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9일 신유

밤에 별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백색이었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을 마치자 옥당(玉堂) 이현모(李顯謨)가 말하기를,
"《서전(書傳)》은 거의 진강(進講)이 끝나가니 마땅히 《시전(詩傳)》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상(居喪)하는 때여서 《시전》을 강하기에 합당하지 않으니, 옛날 사람이 《예기(禮記)》를 읽은 뜻으로 마땅히 《예기》로 대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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