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9권, 영조 7년 1731년 5월

싸라리리 2025. 9. 1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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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계해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祭)를 친히 행하였다.

 

5월 2일 갑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부교리 황정(黃晸)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호남(湖南) 일로(一路)는 옛날부터 인재(人才)의 고장이어서 본래 신수(身手)가 좋고 기예(技藝)가 정미한 자가 많으니, 마땅히 서북 친기위(親騎衛)의 예에 의해 단속하여 훈련시키면 반드시 급할 때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처리하소서. 신이 작년 겨울 안렴(按廉)하러 가서 호남의 해도(海島)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그곳 백성들이 마치 산야(山野)의 짐승처럼 교화(敎化) 밖의 지역이 되었고, 그곳 토지(土地)와 어염(魚鹽)은 모조리 여러 궁가(宮家)와 각사(各司)의 절수(折受)로 들어가고, 경외(京外)의 호족(豪族)들이 사사로이 점유해 갖가지로 침학(侵虐)하여 풍속과 습성이 완악합니다. 혹은 나이 많은 백발 노인이 있어 관장(官長)을 보고는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맞이하는 자까지 있었으니, 이에서 민심(民心)을 감화(感化)시키기가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상확하여 읍(邑)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어 한편으로는 섬 백성들을 수습하는 방도를 삼고, 한편으로는 해방(海防)을 관할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친기위의 일은 전에 없었던 일이니 윤허할 수 없으며, 해도(海島)에 읍을 설치하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5월 3일 을축

예조(禮曹)에게 경휘궁(敬徽宮) 연제일(練祭日)의 변제 절목(變制節目)을 올리며 말하기를,
"당초 절목을 마련할 때에 을묘년132)  에는 대전(大殿)·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중궁전(中宮殿)의 상궁(尙宮) 이하는 상(上)의 복제(服制)를 따랐고, 갑자년133)  에는 상궁 이하가 자최(齋衰) 3년이었는데 구별이 없었으며, 각전 상궁 이하의 외출(外出) 복색(服色)을 마련하는 일은 상년(上年) 국휼(國恤) 초상(初喪)에 복제는 한결같이 을사년134)  ·무신년135)   절목에 의해서 대왕 대비전 상궁 이하 및 빈궁(嬪宮)·수규(守閨)는 상의 복제(服制)를 따르고 외출 복색은 대전·중궁전 상궁 이하의 복색과 같이 마련하여 계하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번 변제 절목(變制節目)도 역시 이에 의해 마련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후에 또 대신에게 물어 백관의 복색은 밖에 있을 때는 홍포(紅袍)를 입고, 입대(入對)할 때는 천담복(淺淡服)으로 하였는데, 조신(朝臣)의 복은 이미 다하였으나 임금은 아직 길복(吉服)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총호사(摠護使) 홍치중(洪致中)과 도감 당상(都監堂上) 및 남원군(南原君) 설() 등이 후릉(厚陵)의 방혈(旁穴)을 봉심(奉審)하고 돌아 왔다. 임금이 불러 물으니, 지사(地師) 이봉명(李鳳鳴)이 극찬하고, 설 등도 역시 찬양하였는데, 다른 지사 이필(李弼)과 마익룡(馬翼龍) 등이 옆에서 훼방을 놓아 말하기를,
"유방(酉方)136)  이 낮아 요풍(凹風)이 들어오며, 맥(脈)이 계축(癸丑)을 범하여 길지(吉地)가 못됩니다."
하니, 임금이 헐뜯고 칭찬이 일치되지 않는다 하여 다시 헌릉(獻陵)의 다른 혈(穴)을 간심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응교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우헌납(右獻納) 황근(黃瑾) 등은 고려(高麗)말의 혼란한 세상에도 능히 직언(直言)을 하였는데, 지금은 언로가 막히어 도리어 고려말보다 심함이 있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고려는 중엽(中葉) 이후부터 어둡고 용렬한 임금이 서로 이어졌으니 그래도 찬시(簒弑)의 변을 일으킨 자가 없었던 것은 실질(實質)을 숭상한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엽에 이르러 실질이 사라지고 문식(文飾)이 생겨 권흉(權凶)이 정권을 농락해 김용(金鏞)의 난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는 문식을 숭상하여 점차 쇠미(衰微)하기에 이르렀다. 신축년137)   이전에는 조신(朝臣)의 시비가 거의 완료하지 못한 안건(案件)과 같았고, 지금은 충(忠)으로 자처해 남을 역(逆)으로 몰아넣으니, 이것은 문식인가, 실질(實質)인가? 위에 있는 사람이 지성으로 만류하는데도 오히려 그치지 않으니, 이는 임금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국사가 만약 공민왕(恭愍王)의 연구(聯句)할 때에 이르면 비록 나라를 위해 입근(入慬)138)  하는 자가 있더라도 평시에는 미워하는 자와 함께 조정에 서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오늘날의 시상(時象)은 참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사가(私家)로 말하건대 노복(奴僕)들이 서로 시기하면 그 집안은 반드시 망하게 된다. 지금 조제(調劑)하고 보존하며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여 조정을 공고(鞏固)히 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조신(朝臣)들이 어떻게 죽어서 그들 할아비와 아비를 볼 것인가?"
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것은 오직 성상께서 도리를 다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비록 이러하나 신은 전하의 강극(剛克)하고 분려(奮勵)하는 공부가 끝내 부족함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대저 기강을 떨치고 엄숙하게 하는 도리는 마땅히 너그러워야 할 때는 너그러워야 하고 강(剛)해야 할 때에는 강하게 한 연후에야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천하의 일은 한 가지도 정성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어 정성이 이르는 바로는 금석(金石)이라도 뚫게 되니, 오직 원하건대 더욱 유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였다.

 

5월 5일 정묘

해의 빛깔이 붉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단오제(端午祭)를 친히 행하였다.

 

5월 6일 무진

해에 양이가 있었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고명편(顧命篇)을 강하면서 말하기를,
"이 책에 실린 것이 우리 나라의 사복(嗣服)할 때의 광경을 완연히 그려 낸 듯하여 지난날을 추억하니 모르는 사이에 감회가 일어난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공경하여 우리 원자 교(釗)를 보호하라’ 하였는데 조종(祖宗) 때에는 조종의 신하들이 국가를 보익(輔翊)함이 모두 원자(元子)를 경보(敬保)하는 뜻에 있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당론(黨論)만을 생각하여 거의 국가가 망하게 되었는데 그 근본은 이기기를 좋아하는 데서 나왔으니, 역시 사의(私意)이다."
하였다. 응교 김상성이 말하기를,
"천하의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없으니, 그 요점을 상하가 서로 믿고 군신(君臣)이 서로 면려하는 데 두면 어찌 옛날 성강(成康)139)  의 다스림만 오로지 아름답겠습니까?"
하였다.

 

이주진(李周鎭)을 지평으로, 이성효(李性孝)를 정언으로 삼았다.

 

5월 7일 기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휘정(尹彙貞)을 사간으로, 이일제(李日躋)을 헌납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정언으로 삼았다.

 

수찬(修撰) 조한위(趙漢緯)가 막 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부임하였다가 소환(召還)되매, 상소하여 강진의 폐단 다섯 가지를 진달하기를,
"첫째는 병영(兵營)에 소속된 군액(軍額)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요, 둘째는 제주(濟州)의 공마(貢馬)를 몰아오는 것이 너무 고된 폐단이며, 셋째는 남당포(南塘浦)를 지나가는 선박을 붙잡는 것이 폐단이 되어 선격(船格)140)  들이 지탱하기가 어려운 것이요, 넷째는 본읍에 찬배(竄配)된 자가 너무 많아 섬 백성들이 응접할 겨를이 없으며, 다섯째는 수령(守令)이 자주 체직되어 영송(迎送)이 이민(吏民)에게 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5월 8일 경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응교(應敎)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신에게 소회가 있어 감히 진달합니다. 듣건대 전하께서 선비를 양성하는 도구로 열성조(列聖朝)에서 일찍이 성균관(成均館)에 절수(折受)해 준 것을 또 다시 궁가(宮家)로 이속시키고, 현관(賢關)141)  에는 다시 다른 곳을 떼어주라고 명하셨다 합니다. 대개 열성조에서 특별히 전토를 태학(太學)에 내려 주어 용도를 넉넉하게 함은 그 뜻이 성대하였습니다. 이제 태학에 하사한 것을 궁가로 이속시킨 후에 사관(史官)이 쓰기를 ‘전하께서 학궁(學宮)의 전토를 빼앗아 궁방(宮房)에 주었다.’라고 하면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너는 그 양(羊)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142)  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옛날처럼 현관에 소속시키고 궁가에는 다른 곳을 주어 사체를 중히 하고 그전대로 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역시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은 비록 나이가 젊지만 전후로 입시하여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여 행여나 빠뜨린 것이 있을까 염려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그러나 현사(賢士)를 양성하는 학궁(學宮)에 세가(世家)의 자제(子弟)로 입학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 어떻게 청아(菁芽)143)  의 교화를 베풀겠는가? 유신이 근본을 모르고 아뢰는 것이다."
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인재를 배양하는 도리는 마땅히 그 근본에 힘써야지 어찌 그 말단을 거론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처분을 중외(中外)에서 들으면 반드시 성상께서 궁가에는 후하게 하고 현관(賢關)에는 박하게 한다고 할 것이니, 어찌 유도(儒道)를 높이고 중히 여기는 뜻에 부족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근래에는 현관이 비록 옛날과 같지 않으나 조금전 성교(聖敎)는 실언(失言)을 면치 못하셨습니다. 신은 매양 우리 성상께서 요순(堯舜)처럼 되기를 기대하였는데 성교가 이와 같으시니, 이는 실로 신이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이 실언하였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그러하나 이번에 절수(折受)한 것은 바로 선조(先祖)에서 절수한 곳에 떼어 준 것이니, 내가 어찌 사체가 자별(自別)함을 모르겠는가?"
하였다. 또 문의(文義)로 인해 사전(祀典)에 대한 일을 논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나라의 대사(大事)는 제사에 있다고 말한 것은 옳습니다. 전하께서 사전(祀典)에 극진한 도리를 하지 않음이 없으시나, 신이 일찍이 보건대 태묘(太廟)의 향사(享祀) 때 친림(親臨)하지 않으시면 인도(引導)하는 자가 수복(守僕)에 불과할 뿐이니, 자못 준분(駿奔)144)  하는 아름다움이 부적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밤을 지새워 제사를 지내려면 감히 혹시라도 게으른 적이 없고 음복(飮福)을 행하지 않고는 감히 돌아오지 않았다. 혹 준분(駿奔)하는 반열(班列)에서 언건(偃蹇)145)  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에 그르게 여겼다. 지난번 연신(筵臣)의 말을 듣건대 외읍(外邑) 사단(社壇)의 위판(位版)을 자루 속에 넣어 매달아 놓은 자도 있다고 하니, 어찌 설만(褻慢)하지 않은가? 나는 평상시에도 ‘천(天)’자가 쓰인 종이라도 혹은 땅에 떨어질까 염려하였고, 국기판(國忌板)이 걸린 곳에는 또한 감히 드러눕지 못했으며 가끔 의자에 기대어 글을 보다가 명조(明朝)146)   및 우리 조종(祖宗)의 사적에 이르면 마음이 감동되어 자리로 내려앉지 않음이 없었는데, 어려서부터 이러하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인데 저 제사에 임해 불경(不敬)하는 자는 유독 무슨 마음인가?"
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거상(居喪)하시면서 예(禮)를 다하시니 나라 사람들은 모두 성궁(聖躬)을 손상함이 있을까 근심하고 있습니다. 제왕(帝王)이 효성을 하심은 서민들과 다른데 연달아 친제(親祭)를 행하시는 것은 역시 보호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자호(自護)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질통(疾痛)이 없기 때문에 차마 사람을 시켜 대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총호사(摠護使) 홍치중(洪致中) 등이 여러 능(陵)의 방혈(旁穴)과 교하(交河)의 읍치(邑治)를 간심(看審)하고, 돌아와 복명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지관(地官)들이 모두 말하기를,
"교하(交河)는 산세(山勢)의 배포(排布)가 국장(國葬)의 자리에 합당합니다."
하고, 도감 당상(都監堂上) 조원명(趙遠命)과 윤유(尹游) 등 역시 극구 칭찬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공조 판서 권이진(權以鎭)·수원 부사(水原府使) 이형좌(李衡佐)가 함께 가서 다시 살피라."
하였는데, 권이진과 이형좌가 범안(凡眼)147)  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었다.

 

5월 10일 임신

죄인 성탁(成琢)이 무함하여 끌어댄 여러 신하들이 달을 넘기도록 서명(胥命)하니, 임금이 여러 차례 면유(勉諭)하고, 권이진과 박문수(朴文秀)를 불러 보니, 모두 오열(嗚咽)하면서 눈물을 흘리므로 임금이 매우 후하게 위로하였다.

 

5월 11일 계유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니,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 역시 명을 받들고 함께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전후로 사람들의 탄핵을 입은 것이 무릇 몇 번이나 되지만 어찌 성탁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이 전에 당한 것은 모두 급서(急書)였고, 이제 또 이름이 국초(鞫招)에서 나왔는데 성상께서 정상을 통촉하시어 무고(誣告)한 사람으로 하여금 승복하게 하셨습니다. 은혜를 입음이 망극하나 갚을 길이 없으니 이것이 신의 마음 아파하는 바입니다. 신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문득 ‘충(忠)·효(孝)’ 두 글자를 알았는데, 지금 부모는 모두 죽고 단지 나라와 임금만 있으니 우러러 의지하는 정성은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지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운 악언(惡言)을 들었으니 이런 것을 지니고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고는, 인하여 소리를 내고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세도(世道)에는 도리어 성탁이 나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데, 후에 어찌 계속하는 자가 있겠는가? 경은 반드시 개의하지 말고 참으라."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을 무함하는 말이 어찌 전후로 한정이 있겠습니까만 김일경(金一鏡)을 승자(陞資)한 한 가지 일 이외에 혹시라도 실제의 말이 있었습니까? 혹 성교(聖敎)처럼 신을 무함하는 자가 점차 적어지면 이는 당론(黨論) 역시 조금 줄어드는 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다섯 군데의 겸대(兼帶)를 사직하니, 임금이 단지 태상 도제조(太常都提調)만 체직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예서(禮書)》에 연제(練祭) 후에는 곡(哭)이 없는데, 기축년148)  ·기해년149)   국휼(國恤) 때에는 연제 후 담제(禫祭) 전 삭망전(朔望奠)에 곡을 하였으니, 대신과 의논하여 시행한 것입니다. 또 갑인년150) 인선 황후(仁宣王后) 국휼(國恤) 때 연제 후 친제(親祭) 때 아헌관(亞獻官) 이하 근시(近侍)는 성상을 따라 외정(外庭)에서 곡하였고, 배제(陪祭)하는 백관은 혼전(魂殿)문에 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곡을 하지 않게 했습니다. 섭행(攝行)할 때에는 헌관 역시 마땅히 곡림(哭臨)하였고 산릉(山陵)에도 역시 일체로 곡례(哭禮)를 행하였습니다. 이번 연제 후 혼전과 산릉의 제례에도 이에 의해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 연제 후에 경휘전(敬徽殿) 산릉(山陵)의 헌관(獻官) 이하의 복색(服色)을 천담복(淺淡服)으로서 향(香)을 받아 제사를 지내고, 친제(親祭) 때에 백관도 천담복으로 입참(入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중사(中祀)는 소상(小祥) 후에 악(樂)을 쓰는 일로 을축년151)  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시행하였으니, 이번 연제 후 중사는 이에 의해 악을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5월 12일 갑술

이때에 날씨가 오래 가물어 예조에서 14일에 기우제(祈雨祭)를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비가 오려다가 내리지 않고 서늘한 바람만 연달아 불고 있어 가뭄이 이와 같으니, 생각이 백성의 일에 미치매 민망스런 마음이 간절하다. 연달아 여러 도(道)의 장문(狀聞)을 보건대 가뭄이 도처에 일반이니 만약 지금 비가 오지 않으면 백성들의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또 국가의 중요한 일은 제사에 있으니, 백성을 위한 기우제는 오직 경건하고 정성스러워야 한다. 해조로 하여금 제관(祭官)과 여러 집사(執事)를 특별히 가려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한사선(韓師善)을 승지로, 윤급(尹汲)·윤광운(尹光運)을 지평으로, 김상석(金相奭)을 교리로, 이종백(李宗白)을 수찬으로, 김용경(金龍慶)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3일 을해

전교하기를,
"지난번 신칙했는데도 비국(備局)의 문(門)을 열지 않은 날이 많으니, 이렇게 하고서 제사(諸司)를 진숙(振肅)할 수 있겠는가? 묘당을 위해 개탄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가뭄이 이와 같아 농사가 참으로 민망스러운데 이럴 때에 묘당이 범연히 넘길 수 있겠는가? 칙려(飭勵)는 나부터 시작해야 하니, 내일은 비록 재계(齋戒)하는 날이지만 와서 모이라."
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총호사(摠護使) 홍치중(洪致中) 등이 교하(交河)를 간심하고 돌아오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권이진(權以鎭)·이형좌(李衡佐) 등이 모두 말하기를,
"객사(客舍) 뒤가 정혈(正穴)인 듯합니다."
하고, 당상 윤유(尹游)는 말하기를,
"지사(地師)들은 혹 향교(鄕校) 뒤가 정혈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곳 가운데 어느 곳이 진혈(眞穴)인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이 결정하기 어렵다."
하였다. 이어 명하기를,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가서 살피라."
하였다.

 

5월 14일 병자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니, 권이진과 여러 지사가 함께 들어왔다. 임금이 물어본 후에 명하기를,
"새 능은 교하에 정하되 화소(火巢)152)  는 간약(簡約)하기에 힘쓰고, 호조(戶曹)의 경비는 관서(關西)의 별비전(別備錢)에서 취용(取用)하며 민역(民役)을 제거하라. 본읍(本邑)의 전세미(田稅米) 1백 70포(包)와 증미(拯米)153)   1백 40곡(斛)을 본읍에 남겨 두어 역사의 쓰임에 대비하라."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선릉(先陵)을 옮겨 봉안하기 위해 이미 길지(吉地)를 가렸은즉, 빨리 휼민(恤民)하는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니, 이는 성조(聖祖)의 끼친 뜻을 본받는 것이다. 만약 생존하셨을 때 섬기는 뜻으로 말한다면 옮겨 모시는 것은 구체(口體)를 공양(供養)하는 도리요, 휼민은 바로 양지(養志)하는 도리이다. 화소(火巢) 안의 민가(民家)는 많이 헐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의 전답에도 후한 값을 주며, 옆에 있는 백성들 무덤 역시 파 가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과 좌의정 이집이 말하기를,
"가뭄의 재변이 있는데, 가뭄을 구제하는 계책으로는 제언(堤堰)을 수리하고 물을 저장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외읍(外邑)의 제언이 허물어져 버린 것이 많으니 수보(修補)했다고 하는 것도 일시의 이익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일찍이 선조(先祖) 때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해 별도로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고 여러 도(道)를 전관(專管)하게 하였으나 근래에는 이 법이 폐지되고 단지 호조 판서가 겸관(兼管)하여 살피게 하였지만, 두루 살피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비변사의 당상 한 사람을 당상으로 차출하여 전적으로 마음을 써 구관(句管)하게 한다면 이미 구전(舊典)에 밝아 마땅히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여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와 형조 판서 윤유(尹游)를 당상으로 삼고, 낭청(郞廳)한 사람으로 하여금 겸관(兼管)하게 하였으니, 비국에서 제언 당상(堤堰堂上)을 차출한 것이 이에서 비롯되었다. 이집이 또 말하기를,
"형조(刑曹)의 옥수(獄囚)에 심지어 20년이나 오래 되도록 미결된 자가 있으니, 이 역시 화기(和氣)를 해치는 한 단서입니다."
하니, 임금이 형조 당상에게 명하여 즉시 의논하여 처결하게 하였다. 도승지 송성명(宋成明)이, 북한(北漢)의 수첩 군관(守堞軍官)은 역(役)이 헐하기 때문에 기민(畿民)이 많이 투속(投屬)하여 갓 낳아 머리털이 마르기 전에 거짓으로 차첩(差帖)154)  을 얻어 군액(軍額)은 많아지면서 양정(良丁)은 줄어들고 있으니 큰 민폐가 된다고 앙주(仰奏)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윤순(尹淳)을 경리청(經理廳) 당상으로 삼아 즉시 바로잡게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고(故) 함성군(咸城君)155)  의 후손인 전(前) 현감(縣監) 이상길(李尙吉)의 손자 이희조(李喜祖)의 재주가 아깝습니다. 청컨대 권무 군관(勸武軍官)으로 조용(調用)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소대(召對)에서 《성학집요(聖學輯要)》의 뒤를 이어 강(講)할 자료를 운각(芸閣)156)  으로 하여금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간행해 바치도록 명하였다.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서 기우제를 실행하였다.

 

5월 15일 정축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경휘전에서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5월 16일 무인

전교하기를,
"소상일(小祥日)에 천담복(淺淡服)으로 그날을 마치는 것은 알 수가 없다. 임오년157)  에는 날로써 달을 바꾸었기158)   때문에 천담복으로 그날을 마쳐도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하였는데, 이번에는 기년(朞年)이 이미 다 되었으니 상일(祥日)에 바로 길복(吉服)을 입더라도 어찌 미안함이 있겠는가? 기유년159)  에는 상일(祥日)에 길복을 입었으니 지금과 대소 경중이 비록 다르나 길복을 입은 한 절차(節次)는 다를 것이 없을 듯하다."
하니, 영의정 홍치중이 말하기를
"그때는 상하가 모두 복(服)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민(臣民)은 비록 복을 벗었지만 성상께서는 미처 복을 벗지 못하였으니 백관이 그날 길복을 입는 것은 미안함이 있습니다. 또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제사를 지내는 날에 그대로 천담복을 입은 예가 있었기 때문에 의주(儀註)에 옛 규례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제(禮制)로 말하자면 복을 다 마쳐야 길복을 입는 것이니, 사람의 일로써 올리거나 낮추어서는 부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천담복으로 그날을 마치는 것은 예(禮)에 없는 예여서 마침내 구차하게 된다. 또 상제(喪制)를 선조(先朝) 때 이미 복구했으니, 이번에 조금이라도 미진함이 있으면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일이 중대하니 대신에게 문의(問議)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집(李㙫)은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부터 기년(朞年)의 복제(服制)가 다되는 날에는 모두 천담복으로 그날을 마쳤으니, 아마도 기일(忌日)에 소복(素服)을 한 뜻에 가까운 듯합니다. 지금 비록 상제(喪制)를 복고하였지만 이러한 절목은 심히 의(義)를 해치지 않으니, 전대로 해도 무방합니다. 기유년에 변복한 절목은 그때 성상께서 이미 길복(吉服)을 입었으니, 오늘날 인용(引用)하는 것은 불가할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의 의논은 이집과 같았다. 의논에 의해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강원도 암행 어사 한현모(韓顯謨)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양역(良役)의 여러 폐단에 대해 물으매, 한현모가 말하기를,
"어찌 폐단이 없다고 말하겠습니까마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적어 삼남(三南)처럼 심한 데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울진 현감(蔚珍縣監) 이식명(李植命)은 역족(逆族)으로 이 고장에 정배된 민천효(閔天孝)를 우대하고, 또 민씨 일족을 죄부(罪簿) 가운데 썼기 때문에 고을 아전들이 민천효의 아비를 대감(大監)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는 놀라 나국(拿鞫)하라고 명하였다.

 

5월 17일 기묘

용산(龍山)과 저자도(楮子島)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5월 17일 기묘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간원 【정언(正言)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릇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으로 편배(編配)된 자는 함부로 한 걸음도 떠나서는 안되는데, 근래에는 지방관들이 거의 법을 벗어나 수유(受由)를 허락하고 심한 경우 혹 고의로 도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비록 성탁(成琢)의 초사로 보더라도 여러 도(道)에 편배된 자들이 무시로 왕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청컨대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경범죄로서 정배(定配)된 자가 부모의 장례를 위해 가는 일 이외에는 일체 수유를 허가하지 말게 하고, 인하여 정식(定式)을 삼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공조 정랑(工曹正郞) 홍서하(洪敍夏)는 사람됨이 용렬하고, 남부 주부(南部主簿) 이징성(李徵聖)과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 황응추(黃應樞)는 모두 용렬하여 전혀 사리(事理)를 알지 못하니, 마땅히 그 관직에서 도태시켜 사로(仕路)를 맑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전교하기를,
"지금 《고려사(高麗史)》를 본즉, 조준(趙浚)의 상서(上書)에 산재(散齋)·치재(致齋)란 말이 있으니, 개탄스럽다. 나는 비록 성효(誠孝)가 천박하지만 크고 작은 제사에 반드시 재계(齋戒)하고 목욕을 하는데, 들은즉 제관(祭官)으로 차임된 자가 수복(守僕)이 세수하기를 청하면 말하기를, ‘이미 했다.’고 하면서 씻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고도 감히 제사를 경건히 지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치재(致齋)할 때에는 감히 집에 있어서는 안되고 모든 재계와 목욕을 예문(禮文)에 의해 시행하게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풍헌(風憲)의 신하는 그때마다 살펴 바로잡으라."
하였다.

 

임금이 승지 유정(柳綎)에게 녹비(鹿皮) 한 장을 직접 하사하였으니, 유정이 일찍이 황주(黃州)와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치적(治績)이 있어 연달아 어사의 포계(褒啓)에 들었기 때문이다. 도승지 송성명(宋成明)에게 명하여 함께 입시하게 하고 윤음(綸音)을 송성명에게 전하여 경기 백성 및 교하(交河) 백성들에게 가서 선유(宣諭)하기를,
"이번 원릉(園陵)을 옮겨 모시는 것은 사람의 아들된 자의 통박(痛迫)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새 능을 오랫동안 자리잡지 못해 더욱 민망스러웠다. 이제 좋은 곳을 이미 정했으니 슬픔과 다행한 마음이 교차된다. 삼공(三公)이 간심(看審)케 한 것은 그 일을 중히 여겨서였다. 옛날 영릉(寧陵)160)  을 봉심(奉審)하면서 이미 육경(六卿)과 지신사(知申事)가 함께 간 일도 있었기에 대신(大臣)이 갈 때 역시 함께 가게 하였었다. 다만 근년 이래에 기읍(畿邑) 백성들이 연달아 나라의 역(役)을 만나 조잔(凋殘)함이 특히 심하였고, 이제 또 고을을 옮기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내가 매우 민망히 여긴다. 아! 왕자(王者)의 효(孝)는 계술(繼述)하는 것이 큰 것인데 교하의 백성인들 어찌 우리 성조(聖祖)의 적자(赤子)161)  가 아니겠는가? 이제 은자(銀子) 2천 1백 50냥을 내리노니, 1천 냥은 교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옮기는 비용을 돕고, 1천 냥은 기영(畿營)에 주어 천봉(遷奉)하는 역(役)을 도우며, 1백 50냥은 교하현에 주어 관사(官舍)를 뜯어다 옮기는 비용으로 쓰고, 어사(御史)에게 적발된 관동(關東)의 재목 역시 묘당으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 나누어 주어 관해(官廨) 짓는 것을 돕게 하여 성조(聖祖)께서 평일에 백성 돌보는 덕의(德意)를 체득하도록 의당 가서 유시하여 모두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유정(柳綎)·이춘제(李春躋)를 승지로, 민응수(閔應洙)를 부제학으로, 김진상(金鎭商)을 수찬으로 삼았다.

 

5월 18일 경진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서전(書傳)》의 필명(畢命)을 강하였다. 동지사(同知事)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화궐중(和厥中)’의 ‘중(中)’자는 포황(包荒)162)   혼후(渾厚)하여 숙특(淑慝)163)  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창선(彰善)·단악(癉惡)이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근일의 일로 말하건대, 무신년164)   난리 초에 신이 장붕익(張鵬翼)의 종사(從事) 이덕재(李德載)를 보고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당론(黨論)이 어찌 있어야겠는가? 이번 난리의 근본은 실로 당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발본 색원(拔本塞源)해야 한다. 금일 이전의 일은 모두 혼돈(混沌)에 붙여 한결같이 모두 잊어버린 연후에야 당론이 저절로 사그라진다. 이는 위에 있는 사람이 전이(轉移)한 사이에 있는 일이다.’라고 하였더니, 이덕재 역시 신의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신은 시비를 분별하지 않고 하나의 혼돈 세계를 만들어야 바야흐로 피차의 사람을 합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계(世界)가 비록 변하더라도 인심이 어찌 변하겠는가? 인정으로 참으면서 오래되면 저절로 잊게 된다. 부자(夫子)가 말하기를, ‘기뻐하기만 하고 참뜻을 찾지 않는다.’하였는데, 이덕재가 경의 말을 듣고 옳게 여겼으나 처음 대각(臺閣)에 제수되자 구습을 드러냈으니, 이른바 불역(不繹)한 자라 할 수 있다."
하였다. 수찬 윤동형(尹東衡)이 말하기를,
"하나의 혼돈 세계가 되면 장차 시비가 없는 나라가 되고 맙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틀렸다. 시비란 것이 어찌 당론에서 생기지 않는가? 처음에는 서로 시비를 따지다가 끝에 가서는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게 되니, 어찌 나라의 절반이 전부 옳고 전부 그를 이치가 있겠는가?"
하니, 송진명이 말하기를,
"새로운 시비는 비록 분별하더라도 옛 시비는 일체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이금이 건극(建極)165)  의 다스림에 힘써 동이(同異)를 보합하여 조치하는 뜻을 삼았으니, 이 때문에 송진명의 혼돈의 설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의리(義理)를 밝히고 충역(忠逆)이 나누어지는 데 이르러서는 거의 빙탄(氷炭)이 서로 합해지지 못하고, 훈유(薰蕕)가 서로 같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어찌 신구(新舊)의 시비를 억지로 혼합하여 일체 서로 잊어버리는 데 두어 변별하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송진명의 말은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데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그의 말과 같다면 당을 없애야 한다는 것은 세도(世道)의 해가 되기에 족하다. 참으로 말을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헌부 【장령(掌令) 박준(朴㻐)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성탁(成琢)과 이윤중(李允中)이 무망(誣罔)한 정상은 이미 천감(天鑑)이 통촉하신 바입니다. 그러나 성탁의 초사 가운데 정덕재(鄭德載)가 성탁의 무리와 같은 뜻으로 참여한 정상 역시 환하여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무리는 드러나는 대로 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정덕재를 먼 곳으로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전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예기(禮記)》를 강하다가 다 마치지 못하였는데, 옛사람 역시 육아장(蓼莪章)을 폐했었다. 선조께서 강하다 마치지 못한 권(卷)은 차마 이어서 강하지 못하겠으니, 유신으로 하여금 이런 뜻을 알아서 그 권은 건너뛰어 진강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8일 경진

판부사 민진원(閔鎭遠)이 현도(縣道)를 거쳐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번 신이 명을 받들고 여러 능에 갔었는데 후릉(厚陵)166)                  의 방혈(傍穴)을 간심한즉 여러 지사(地師)들이 모두 기뻐 뛰면서 길지(吉地)라고 칭찬했습니다. 신은 비록 평소 지술(地術)에 어둡지만, 범안(凡眼)으로 보건대, 혈의 뒤에서 내려온 산맥(山脈)이 비등(沸騰)하고 융결(融結)하는 형세가 있고, 면전(面前)의 여러 사격(砂格)은 뒤섞어 어지럽게 배립(背立)한 형상이 없었으며, 국내(局內)가 넓고 평탄하며 수구(水口)의 관쇄(關鎖)가 긴밀하였습니다. 그때 함께 간 여러 신하들의 소견이 같았으므로 드디어 뒷산으로 걸어 올라가 제 5절(節)에 이르러 여러 지사(地師)로 하여금 절(節)마다 범철(泛鐵)167)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내려온 맥(脈)이 모두 격(格)에 맞는다.’고 하였습니다. 관소(館所)로 돌아오니 신과 지면(知面)이 있는 개풍(開豐)의 선비들이 모두 와서 하례하기를, ‘후릉의 방혈(傍穴)인 사자항(獅子項)의 언덕은 예로부터 서로 전해오기를 공정 대왕(恭靖大王)168)                  께서 뜻이 있어 남겨 두었는데 유객(遊客)으로 출입하는 자들이 그 기이함을 칭탄해 왔다. 이제 국가에서 쓰게 되었으니, 일이 마치 기다린 듯하다.’고 하므로 신이 스스로 기쁘고 다행스러워 국가의 대계(大計)가 이로부터 정해지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들은즉 재심(再審)의 행역(行役)에 지사 몇 사람을 더 데리고 갔다고 하는데, 방기(方技)의 무리는 학문하는 선비와 달라 한갓 상인(上人)169)                  의 마음으로써 그 사욕만 채울 계책을 하는 것이 도도히 다 그렇습니다. 여덟 사람이 같이 찬양한 곳을 또 다른 사람을 첨가하면 세 번 생각하다 미혹되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구구한 사심(私心)으로 이미 염려했는데, 그후 과연 들으니, 새로 간 자가 감히 계축(癸丑)의 설을 발론하였다고 합니다. 대저 계축의 맥이 들어오는 것은 술가(術家)에서 꺼리는 바인데 처음에 여덟 사람이 쇠를 놓아 보고 계축이 아니라고 말하였는데 나중에 가서 두세 사람이 어찌 계축으로 단정을 짓겠습니까? 더군다나 맥이 혹 계로 들어오거나 축으로 들어오는 것은 현묘(玄妙)하고 미오(微奧)한 일이 아니요, 한 걸음마다 쇠를 놓아 보면서 자세히 간심했으니, 다른 지사를 빌어 허실을 따질 것도 없습니다. 만약 여러 지사가 놓은 쇠의 완급(緩急)이 한결같지 않아 정확히 알 수가 없다면 근래 듣건대 허원(許遠)이란 자가 새로 지남철(指南鐵)을 만들었는데 단지 해의 그림자를 취하여 남북(南北)을 정하니 그 법이 아주 정밀하다고 합니다. 만약 이 법으로 먼저 남북을 정한 연후에 줄을 띄워 재보면 계축을 범했는지 범하지 않았는지를 그 자리에서 바로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실을 물론하고 「계축」이란 두 글자가 지사의 입에서 이미 나왔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일인데 다시 쓰기를 의논하겠는가?’ 하였는데, 신의 어리석음으로는 아마도 통하지 않는 의논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만약 도량(稻粱)과 회자(膾炙)170)                  가 사람을 해치는 물건이라고 한다 해서 신하된 자가 그 감히 군부(君父)에게 올리지 않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지사        마익룡(馬翼龍)이란 자가 감히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탑전(榻前)에서 진달했다고 합니다. 그의 ‘계축’ 두 글자 역시 그의 시기하고 꺼리는 마음을 이루기에 족한데 또 어찌 감히 이러한 흉언으로서 천청(天聽)을 놀라게 한단 말입니까? 옛날 주자(朱子)의 산릉의장(山陵議狀)에 ‘대사(臺史) 형대성(荊大聲)을 척거(斥去)하여 법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역시 마익룡을 법으로 다스리고 후릉(厚陵)의 방혈(旁穴)에 대해 다시 의논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어제 삼가 듣건대 신혈(神穴)을 이미 교하(交河) 읍치(邑治) 뒤에다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 땅의 길흉은 신이 비록 알지 못하나 여러 사람이 이미 많은 칭찬을 하니 길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신이 일찍이 듣건대 기해년171)                   효묘(孝廟)의 대상(大喪) 때에 새 능을 수원(水原) 읍치(邑治)에다 정하고 공역(工役)을 이미 시작하였는데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아들이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양지(養志)하는 것이 큰 것이니 참으로 양지하는 것을 큰 것으로 여긴다면 어찌 살아 있을 때와 죽었을 때가 다르겠습니까?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지극한 인(仁)이 널리 퍼져 은혜를 입지 않은 사물이 없었으니, 수원의 7천 갑병(甲兵)도 사랑을 받는 데 들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읍리(邑里)를 철거하고 그들의 전려(田廬)를 파괴해 한숨짓고 탄식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대행 대왕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 길지를 가리어 선왕(先王)의 장례를 모심에 있어 바로 근심하고 원망하는 지역에 장례를 모시고 선왕의 체백(體魄)이 편안하기를 바라니, 이는 바로 선왕의 뜻을 크게 해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현종(顯宗)께서 감오(感悟)하시어 즉시 역사를 거두셨습니다. 선정신의 충애(忠愛)하는 정성과 현종의 전환(轉環)172)                  하는 도량을 지금까지도 칭도(稱道)하는 것이 줄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교하는 작은 현이여서 이미 7천 명의 갑병이 없으니 수원에 비교하면 경중은 다르나 읍리를 철거(撤去)하고 그 전산(田産)을 파괴하여 한숨짓고 한탄하는 자가 반드시 수백 명에 이를 것이니 또한 어찌 선왕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던 뜻을 상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선정신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반드시 현종(顯宗)의 효성을 전하께 바랐을 것이며, 전하께서도 어찌 현종의 일로 스스로 면려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역시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후릉의 방혈을 끝내 쓸 수가 없다면 오늘날 새 능 자리는 옛 영릉(寧陵)보다 나은 곳이 없을 듯합니다. 대개 귀천(貴賤)간에 장사를 지내는 예는 단지 술사의 말만 의거해 땅속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는데 이것이 효자(孝子) 자손(慈孫)이 종신토록 의심을 품고도 풀지 못하는 바입니다. 지금의 옛 영릉은 계축년173)                   파릉(破陵)할 때에 따뜻한 기운이 증기와 같았고 토색(土色)이 윤택하여 그때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차탄하였습니다. 광중(壙中)에 흠이 없는 상황은 모두 장계(狀啓) 가운데 갖추어져 있고 등록에 실려 있으니 상고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땅속에 흠이 없음을 알고, 또 이는 선릉(先陵)의 방혈이니 지사의 술(術)을 빌릴 필요도 없이 길지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다 장릉(長陵)을 봉천(奉遷)하면 어찌 신(神)의 이치와 사람의 정(情)에 맞지 않겠으며, 전하의 효사(孝思)에 있어서도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전하께서 일찍이 옛 영릉에 메꾸어 쌓는 것이 단단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계축년 등록을 보니 천릉(遷陵)한 후에 별도로 당상과 낭청을 정하여 메꾸어 쌓는 것을 감독했고 역부(役夫)를 쓴 것이 수백 명이 되도록 많았습니다. 그때 일을 처리한 것이 이처럼 정밀했으니 반드시 단단하게 쌓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신은 아마도 성상의 염려가 지나친 듯합니다. 또 삼가 듣건대 조정에서 권이진(權以鎭)이 지술(地術)에 밝다고 하여 특별히 산릉 당상으로 차임해 산을 보도록 했는데 혹 전하기로는 권이진이 영남(嶺南)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 친히 산 하나를 지점(指點)하여 정희량(鄭希亮)으로 하여금 그의 할아비 무덤을 옮기게 했는데 오래지 않아 무신년174)                   일이 일어났으므로 지금까지도 영남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지술을 비웃는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원릉(園陵)을 의논해 정하는 날에 참여시키지 말았어야 온당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신의 이 소(疏)를 내려 다시 더 확실하게 상의하여 큰 일에 유감이 없게 하고 나라의 운회(運會)가 오래 이어지게 한다면 실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무궁한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천봉(遷奉)은 막중 막대한 일이니 신하된 자가 어찌 이에 마음을 쓰지 않겠는가? 무릇 산릉을 정하면서 재차 간심할 때 다른 지사를 데리고 가는 것은 옛 예(例)가 그러한 것이니, 경 역시 전례를 잘 모르는 것을 면할 수 없다. 이런 잡기(雜技)들은 대개 이기기를 먼저 힘쓰고 한 사람이 창도(唱導)하면 여러 사람이 다 뇌동하니, 내가 취하지 않는 바이다. 지극히 중대한 일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지금 마익룡을 죄주면 후일 지사(地師)들이 어찌 구차히 부동(符同)하는 염려가 없겠는가? 옛 영릉이 비록 흠이 없다고는 하지만 백 년에 가까운 원침(園寢)을 이미 천봉한 땅에 옮기면 신자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건원릉(健元陵)175)                   안에 비록 남아 있는 산등성이 있으나 단지 지사의 말만 믿고 억지로 정할 수 있겠는가? 기해년176)                   선정(先正)의 올린 차자를 성조(聖祖)께서 따른 것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다. 지금은 여러 산을 거의 다 써서 새로 교하(交河)에다 정한 것은 부득이해서이다. 권이진의 일을 소장 가운데에 견주어 논한 것은 또한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대저 경의 이런 점을 내가 항상 경을 위해 애석하게 여긴다. 그런 단점을 보완하는 것은 스스로 반성하는 공부이니 어찌 끌어대어 탈만 잡겠는가?"
하였다.

 

강필신(姜必愼)을 장령으로, 송인명(宋寅明)을 홍문관 제학으로, 이현모(李顯謨)를 부응교로, 홍성보(洪聖輔)를 교리로 삼았다.

 

5월 19일 신사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응교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이 아미 완성되었는데 아직도 세초(洗草)177)  하지 못하였으니, 사연(賜宴)하는 한 절차는 그 시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 석실(石室)에 봉안한 후에 시정기(時政記)178)  는 마땅히 즉시 세초해야 합니다."
하고, 한림(翰林) 홍창한(洪昌漢)은 말하기를,
"예로부터 시정기는 세초할 필요가 없다는 의논이 있었는데, 선배로서 이 직책에 있었던 사람들이 세초를 쟁집(爭執)하지 않은 것은 대개 권질(卷帙)이 많아 보관하기가 어렵고 실록을 이미 완료하면 남겨 두어도 무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의 실록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세초할 때 매몰(埋沒)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연된 것이니, 뜻한 바가 있는 것이다. 시정기를 한결같이 관중(館中)에 보관(保管)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속히 세초하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지금 한재(旱災)가 몹시 긴박한 상태이라 샘물이 다 마르고 전답(田畓)이 모두 갈라져 백성들이 모두 비를 바라고 있습니다. 근일 일변(日變) 및 우박의 재변도 또한 매우 마음에 놀라운데 늙은 농부에게 들으니 크게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합니다. 여러 해 풍년이 든 나머지에 곡식이 천하다가 귀하게 되는 것은 예사입니다.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것은 묘당(廟堂)에 달려 있고, 정성을 다하여 수성(修省)함은 성상께 달려 있습니다. 올해는 신해년179)  인데, 옛날 현종(顯宗) 때 이 해에 마침 큰 흉년이 들어서 정성을 다해 구제하였고, 또 기근(饑饉)과 여역(癘疫)으로 백성들이 많이 요사(夭死)하자 특별히 명하여 동서(東西) 두 교외(郊外)에 단(壇)을 설치하여 뇌제(酹祭)를 특별히 내렸으니, 대성인(大聖人)의 백골에까지 미친 덕은 유명(幽明)을 감읍(感泣)시키기에 족하였습니다. 세성(歲星)이 다시 돌아와 또 이 해를 만났으니 허다한 원울(冤鬱)의 기운이 위로 천화(天和)를 해쳐 재변을 부를지 어찌 알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그 귀신(鬼神)이 아니면 제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전하의 적자(赤子)이니 마땅히 민휼(愍恤)하는 전례(典禮)를 행해야 할 것입니다. 선조(先朝) 정축년180)  에도 역시 강도(江都)에서 전사(戰死)한 사람에게 제사를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신은 단을 설치해 사뢰(賜酹)하는 것이 역시 족히 화기(和氣)를 이끌어 맞이하는 단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실로 내 마음을 감동시킨다. 현묘조(顯廟朝)의 고사(故事)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왕자(王者)가 백성을 돌보는 것은 살고 죽은 차이가 없다. 해조로 하여금 단을 설치하여 치제(致祭)함이 옳다."
하고, 이어 승지 조명신(趙命臣)을 입시하라 명하여 전옥(典獄)으로 달려가 옥에 있는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5월 20일 임오

재신(宰臣)을 보내어 풍운뢰우(風雲雷雨)·산천(山川)·우사(雩祀)에게 기우제를 지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관서 어사(關西御史) 이종성(李宗城)이 복명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이종성이 감사(監司) 김취로(金取魯)의 염결(廉潔)하고 간약(簡約)한 실적(實績)을 성대하게 칭도(稱道)하였다. 김취로는 본디 탐욕스럽고 비루하다는 이름이 있었는데 관서에 가서는 간약(簡約)함을 스스로 지켜 딴 사람처럼 판이하니 사람들이 모두 가식(假飾)하여 이름을 얻은 것으로 의심했으나 후에 과연 본병(本兵)181)  에 발탁되고, 곧 총재(冢宰)에 의망(擬望)되었다.

 

전교하기를,
"연달아 비를 빌었으나 보잘것없는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비는 오려다 오지 않고 가뭄이 이와 같다. 여러 신하들이 진달한 바를 듣고 여러 도(道)의 장문(狀聞)을 보건대, 만약 지금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 형편이 판가름나게 되었다. 백성의 일을 생각해 보면 어쩔 줄을 모르겠다. 간절한 뜻이 어찌 상격(常格)만을 따르겠는가?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친히 비는 것을 어찌 차마 조금이라도 늦추겠는가? 날짜를 가리지 말고 오는 22일에 친히 사직단(社稷壇)에서 빌겠다."
하니, 예조(禮曹)에서 사시(巳時)에 출궁(出宮)하는 것이 길시(吉時)라고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데 어느 겨를에 길시를 가리겠는가? 그만두라."
하고, 인하여 이조에 명하기를,
"특별히 향관(享官)을 가려 경건하게 정성을 드려 치재(致齋)해야 하며 마땅히 근시(近侍)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다. 또 정원(政院)에도 신칙하였다.

 

5월 22일 갑신

햇무리가 지고, 좌이(左珥)가 있었다. 밤에는 유성(流星)이 여성(女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만 하였으며, 꼬리의 길이는 2,3장(丈)이 되고, 빛깔은 붉었다.

 

임금이 사단(社壇)에서 기우제를 친히 지냈는데, 고취(鼓吹)를 물리치고 보련(步輦)182)  을 타고 산선(繖扇)을 제거했으며, 대신 이외의 백관들은 모두 걸어서 따르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굳이 일산(日傘) 펴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강원도 평창현(平昌縣)에 우박의 재변이 있어 부상(負傷)한 자와 죽은 자가 9인이고, 우마(牛馬) 역시 다섯 마리가 죽었다.

 

전교하기를,
"몸소 사단(社壇)에 제사를 지냈으나 보잘것없는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해 비가 올 뜻이 더욱 막막하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5차 기우제는 대신으로 하여금 섭행(攝行)하게 하라."
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을 부응교로, 이도원(李度遠)을 교리로, 윤지원(尹志遠)을 지평으로, 신만(申晩)을 정언으로, 이현모(李顯謨)를 사간으로 삼았다.

 

5월 23일 을유

이때 날씨가 매우 가물어 임금이 대신과 금오 당상(今吾堂上)을 인견하고 죄수를 소결(疏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상(時象)을 어그러뜨린 것은 이의천(李倚天)이나, 5년 동안 적소(謫所)에 있어서 혹은 용서할 만하니, 양이(量移)183)  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사간 이현모(李顯謨)가 말하기를,
"시상을 어그러뜨린 죄는 가벼이 의논할 수 없으며, 또 선조(先朝)를 무함한 임징하(任徵夏)를 칭도(稱道)했는데 더욱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의천을 미워하는 것이 어찌 조정 신하보다 뒤지겠는가마는 이미 지나간 일에 부쳤으니, 참작함이 있어야 한다. 이미 지난 일을 만약 추론(追論)하기로 한다면 어찌 다만 이의천 한 사람 뿐이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이제겸(李齊謙)의 일도 역시 억울합니다. 그의 아비 이동표(李東標)는 기사년184)   무렵의 명인(名人)이었는데 그의 아들이 어찌 차마 역적을 따랐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세덕(世德)185)  이다. 박필현(朴弼顯)도 역시 박태보(朴泰普)의 족질(族姪)이 아니던가? 그대로 두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연(尹㝚)은 죄명이 비록 무거우나 역적질을 한 자는 아니니, 양이하라. 권익관(權益寬)은 바로 그가 스스로 취한 것이다. 그가 만약 지론(持論)이 심각하여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지 않았다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그러나 이미 죽었으니 놓아두라."
하였다. 조문명 등이 신처수(申處洙)·이만웅(李萬雄)의 찬적(竄謫)을 감해 줄것을 청하고, 동의금(同義禁) 이정제(李廷濟)·심공(沈珙) 등도 역시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의 억울함은 온 조정의 공공연한 논의입니다. 한낱 윤순(尹淳)을 욕한 것이 무슨 큰 죄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요즈음의 일이다. 이처럼 시상(時象)을 달갑게 여기는 자는 죽은 연후에야 하늘이 비를 내릴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윤봉조(尹鳳朝)의 석방을 명하니, 이현모가 강력히 쟁집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이미 지나간 일에 부친 자인데 방만규(方萬規)에게 관계된다 하여 석방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신축년186)  에 관계된 자는 어떻게 장차 죄를 주겠는가? 윤연(尹㝚)의 죄를 논하지 않고 유독 이의천과 윤봉조를 논하는 것은 어긋난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이현모가 인피(引避)하였다. 퇴대(退待)하지 말라고 명하니, 이현모가 아뢰기를,
"죄인 황옥현(黃玉鉉)은 황소(黃熽)의 상소에 함께 참여한 것이 이미 낭자한데, 다시 배소(配所)로 돌려보낸 것이 크게 옥체(獄體)를 잃었으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목중형(睦重衡)은 전후로 역적의 초사에 이미 낭자한데, 금부로 이송한 것은 실형(失刑)을 면치 못하였으니, 마땅히 다시 엄히 국문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의천이 같은 당인(黨人)을 두둔하고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 일을 성상께서 비록 지난간 일에 부치시지만, 그 죄목(罪目)을 본다면 임창(任敞) 및 임징하(任徵夏)가 상소로 선조(先朝)를 무핍(誣逼)하였는데도 이의천은 극구 칭도하였습니다. 그의 범죄를 논하면 임창 및 임징하와 다름이 없어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니, 양이(量移)는 환수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상(時象)이 이렇게 된 후부터 진짜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혔다. 이로써 복역(覆逆)187)  한 사람도 이미 녹용(錄用)하였는데, 이의천만 유독 어찌 양이하지 못하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방만규의 상소가 윤봉조에게서 나와 그가 이미 납초(納招)하였고 소본(疏本)을 가지고 가서 보여준 일에 대하여 윤봉조가 또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였으니, 윤봉조의 죄명이 이미 매우 중합니다. 또 같은 당인(黨人)을 두둔하고 자신과 다른 자를 배척함이 심한 것도 윤봉조 같은 자가 없는데 이제 전석(全釋)하셨으니, 마땅히 빨리 환수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봉조와 권익관(權益寬)은 그 자취를 보면 비록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이미 지난 일에 부쳤으니 아울러 논하지 말아야 하며, 대체(臺體)로 보아 그만둘 수 없다면 어찌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이현모를 체직시켰다. 또 엄히 하교하고 책유(責諭)하여 용강 현감(龍岡縣監)으로 출보(出補)했는데, 용강은 명읍(名邑)이었다. 임금이 바야흐로 노여움이 심했지만, 이현모는 지우(知遇)가 있었기 때문에 비록 꺾어 누르긴 하였으나 심한 죄는 주지 않았다.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로, 황정(黃晸)을 부수찬으로, 김정윤(金廷潤)·임진하(任震夏)를 장령으로, 어유봉(魚有鳳)을 집의로, 이귀휴(李龜休)를 정언으로 삼았다.

 

5월 24일 병술

밤에 유성(流星)이 천배성(天培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만 하고, 꼬리의 길이는 4,5척이며, 빛깔은 붉었다.

 

임금이 대신과 형조 당상(刑曹堂上)을 인견하고, 또 정배(定配)된 죄수를 소결(疏決)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오직 형벌(刑罰)을 돌보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왕자(王者)가 나라를 다스리면서 신휼(愼恤)해야 할 바가 형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군다나 이번의 소결은 오로지 가뭄을 딱하게 여기는 데에 연유한 것이니, 만약 윤상(倫常)에 관련된 것과 살옥(殺獄) 및 탐오(貪汚)와 백성을 해치는 강도(强盜)는 내가 비록 부덕(否德)하나 조종의 법을 지켜야 하므로 마음에 비록 측은하나 법을 어찌 낮추거나 올리겠는가? 차라리 지나치게 신중한 실수가 있을지언정 법금(法禁)을 늦추어 백성들로 하여금 쉽게 범하게 할 수는 없다. 금오(金吾)와 형조에서 뽑아들인 자가 또한 수천 명에 이르는데 소결한 자는 불과 1백여 명이니 비록 신중히 살핀 데서 말미암은 것이나 마음에 매우 불쌍하다. 아! 너희 경외(京外)의 법관(法官)들은 조종조에서 흠휼(欽恤)한 거룩한 뜻을 본받아 그 가운데서 형장(刑杖)이 혹독하여도 옥석(玉石)을 구별하기 어려운 자는 안으로는 포청(捕廳)에서, 밖으로는 토포사(討捕使)가 자세히 조사하여 결방(決放)하라. 형조의 형신(刑訊)이 수백 차례에 이르고 체수(滯囚)가 30년이란 오랜 세월이 되었거나 혹은 정법(正法)에 헤당되나 미치지 못한 자가 있는가 하면 억울함을 품고 체수된 자가 있으니,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함이 많다. 시수(時囚)188)   가운데서 부표(付標)하여 내린 자는 해조로 하여금 재계(齋戒)에 구애받지 말고 날마다 부좌(赴坐)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속히 품처하고 또 외방(外方)으로 하여금 형조의 규례와 같이 소석(疏釋)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5일 정해

대신(大臣)을 보내어 태묘(太廟)에서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북로(北路)에 별도로 보낸 중신(重臣) 윤순(尹淳)이 돌아오니, 임금이 불러 보고 북로의 폐단을 물었다. 윤순이 아뢰기를,
"남관(南關)189)   7개 고을에서 개량(改量)190)  하는 것이 폐를 끼치고 있으며, 친기위(親騎衛)를 함부로 뽑기 때문에 이따금 염피(厭避)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수성(輸城)과 거산(居山) 두 역(驛)의 찰방(察訪)은 수유(受由)191)  가 너무 잦아 말에 관한 행정이 소홀하며, 철령(鐵嶺) 북쪽 삼방(三防)의 갈림길은 지름길이 되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이 곳을 거쳐 대로(大路)가 되었는지라 위급할 때에 관방(關防)이 허술해질 염려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명하였다.

 

서명구(徐命九)를 사간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지평으로, 윤순(尹淳)을 판의금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예문관 제학으로, 윤휘정(尹彙貞)을 부교리로 삼았다.

 

5월 26일 무자

소대(召對)를 행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강하였다.

 

근교(近郊)에 드러나 뒹구는 해골(骸骨)을 거두어 묻어 주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전번 능(陵)에 행차할 때 혹 백성들의 무덤이 길을 범했어도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나무하는 자들이 폭로(暴露)시키고 사냥하는 자들이 불태울 걱정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주인이 없는 무덤이라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법령으로 금지해야 한다. 초동(樵童)·목수(牧竪)라도 나의 이 하교를 들으면 또한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나의 이런 뜻을 경외에 신칙하라."
하였다.

 

5월 28일 경인

임금이 북교(北郊)에서 기우제를 친히 지냈는데, 길복(吉服)을 갖추고 제사를 의례(儀禮)대로 지냈다. 제사를 마치자 날이 밝았는데, 임금이 판위(板位)에 서서 소차(小次)로 들어가지 않았고, 환궁하기에 미쳐서는 보련(步輦)을 타고 일산(日傘)을 거두었다. 이때 가뭄과 더위가 심하고 먼지가 얼굴을 덮으므로 약원(藥院)에서 일산을 펼 것을 굳이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창의궁(彰義宮)에 임어하여 전교하기를,
"세자(世子)가 입묘(入廟)한 지 어느덧 2년이 되었으니 내가 가서 보고자 한다."
하고는, 드디어 본궁(本宮)의 양성헌(養性軒)에 연(輦)을 멈추고,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을 입시하라 명하여 울먹이면서 하교하기를,
"지금 나라에 믿을 것이 없고 가뭄이 또 이와 같으니, 백성을 생각하면 구제할 바를 모르겠다. 만약 세자가 살아 있다면 내가 마땅히 근심을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니, 일에 부딪쳐 일어나는 감회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조문명이 말하기를,
"성궁(聖躬)이 편안한 연후에야 종사(宗社)가 영장(靈長)하고 이 묘(廟) 역시 무궁토록 전해질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슬퍼하지 마시고 더욱 강대(强大)·구원(久遠)함을 도모하시는 데 유의하소서."
하였다. 저녁에 환궁하면서 연을 멈추고 하교하기를,
"연달아 여러 도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이달에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 형편이 이미 큰 흉년으로 판가름나게 된다. 성의(誠意)가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해 영응(靈應)이 더욱 막연하니, 마땅히 연달아 친제를 지내야 할 것이나 경휘전(敬徽殿) 삭제(朔祭)와 상치(相値)되고 또 군(軍)과 민(民)은 한가지인데 군졸이 연일 한데서 있는 것도 역시 매우 민망스러우니 예(例)에 의해 섭행(攝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총호사(摠護使) 홍치중(洪致中) 등이 교하(交河)의 새 능의 혈(穴)을 재고 돌아오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우참찬(右參贊)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뒤의 용절(龍節)이 웅위(雄偉)하고, 뒤의 내맥(來脈)이 또 ‘왕(王)’자의 형상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렇던가?"
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또 이기(異氣)가 구름 속에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왕자(王者)를 장사하지 않은 것이 이상합니다."
하고, 홍치중이 말하기를,
"장릉(長陵)의 정자각(丁字閣)은 구제(舊制)에 따르고, 재궁(梓宮)은 마땅히 정자각에 봉안(奉安)하며 영악청(靈幄廳)은 개조(改造)하지 말아 민폐(民弊)를 줄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허락하였다.

 

5월 29일 신묘

햇무리가 졌는데,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고 청적색(靑赤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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