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29권, 영조 7년 1731년 6월

싸라리리 2025. 9. 1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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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진

임금이 경휘전에서 삭제를 친히 행하였다.

 

6월 2일 계사

조강(朝講)과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정덕재(鄭德載)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때에 가뭄이 심하여 묘당에서 진휼책(賑恤策)을 미리 강구할 의논을 했다. 영사(領事)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각읍 환곡(還穀)의 절반을 창고에 보류해 두는 법을 다시 엄히 신칙하고, 선혜청(宣惠廳)에서 공가(貢價)로 출급하는 것은 모두 무명과 돈으로 대급(代給)하며, 주어야 할 곡물은 모조리 저축하여 유비 무환(有備無患)의 기반(基盤)으로 삼아야 합니다. 백관의 늠록(廩祿)도 역시 돈이나 무명으로 대급하여 창고의 곡식을 저축하고, 또 마땅히 주전(鑄錢)하여 그 용도를 넉넉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이때 혜국 당상(惠局堂上)을 겸하고 있으면서 역시 찬성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전(鑄錢)의 폐단이 도리어 심할 것이다. 여간한 동철(銅鐵)의 주조는 이미 진구(賑救)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백관에게 녹봉을 돈으로 대신 주는 것은 더욱 충신(忠信)과 녹봉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 아니며, 군병(軍兵)에 있어서는 대신 돈으로 주는 것이 더욱 불가하다."
하고는, 그 청을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숙종(肅宗)의 어제(御製) 가운데 석척 기우제(蜥蜴祈雨祭)192)   때 동자(童子)의 축사(祝辭)를 대신해 친히 지은 한 편(篇)을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에게 내어 보이며 동자들로 하여금 이번 춘당대(春塘臺) 기우제 때 외도록 했다. 대개 동자의 축사가 상스럽고 문리(文理)가 없는데다 또 영고(寧考)193)  께서 하늘을 경외(敬畏)하고 가뭄을 민망하게 여기신 성덕(聖德)을 천양(闡揚)하려고 해서였다.

 

6월 3일 갑오

전교하기를,
"아! 과덕(寡德)한 내가 부족한 덕으로서 조종(祖宗)을 이어 백성들에게 임어한지 이제 7년이 되었으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은혜가 아래에 젖어들지 못하여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민생(民生)의 괴로움이 오늘날 같은 적이 없었으니, 하늘이 경계를 보인 것은 실로 인애(仁愛)하고 권고(眷顧)한 것이다. 음양(陰陽)이 조화되지 않아 이변(異變)이 달마다 생기고 이제 가뭄 역시 심히 참혹한데 싸늘한 바람이 계속 불어 비가 올 뜻이 막막하다. 전야(田野)가 갈라지고 만물이 타들어 말라가니, 만약 지금 비가 오지 않으면 백성들의 명맥이 끊어질 것이다. 죄는 나에게 있으니 아! 백성들이 무슨 죄인가? 아! 하늘을 감응시키는 것은 성실(誠實)로써 할 것이요 형식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니, 먼저 내 허물을 말하고, 그 다음에 조정의 안일(安逸)함을 말하여 서로 면려(勉勵)하는 뜻을 보이겠다. 아! 내 허물은 내가 안다. 마음으로는 다스리고자 하지만 이치를 밝힘이 분명하지 못하고 일처리가 마땅함을 잃은 것은 바로 나의 잘못이다. 지성(至誠)으로 백성을 구제하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7년 동안 임어하면서 혜택이 털끝만큼도 백성에게 미친 것이 없는 것은 한갓 그런 마음만 있었고 그 실효가 없었기 때문이니, 이는 내 허물이다. 밤낮으로 깊이 민망하게 여긴 것은 바로 시상(時象)이 혼잡한 것이었으나 건강(乾剛)이 부족하여 위엄이 헛된 소란을 제압하지 못하고, 집법(執法)이 굳지 못하여 이동(異同)을 복종시키지 못했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다. 어찌 현인(賢人)을 임용하고 능력 있는 자를 부리고 싶지 않겠느냐만, 사람을 알아봄이 밝지 못하여 쓰고 버리는 것이 무상(無常)하였으니, 누가 즐겨 심력(心力)을 다하겠으며 누가 즐겨 감복해 기뻐하겠는가? 이것도 나의 허물이다. 매양 정성으로서 여러 신하를 칙려(飭勵)하였으나 정령(政令)이 흔들리고 가차(假借)함을 제거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말로만 가르친 것이요 몸소 본을 보여 가르친 것이 아니니, 이것도 나의 허물이다. 분발하고 격려하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혹은 시작하였다가 혹은 철폐하였다. 임금은 바람과 같고 백성은 풀과 같으니 그 표형(表形)이 이와 같은데 그 그림자야 어찌 말하겠는가? 이는 그중에서 큰 것인데 작은 것이야 어찌 이루 말하겠는가? 아! 윗사람이 되고서 아무리 실정(實政)을 행하지 못하고 실효(實効)를 거두지 못하며 여러 신하들이 아무리 나를 돌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독 그들의 아비와 할아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데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풀리지 않고 편착(偏着)하는 습성을 억지로 지켜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모(自謀)하는 계책을 삼았고, 몸을 사림으로써 스스로 편할 계책을 삼아 퇴폐(頹廢)함이 습성을 이루고 고식(姑息)으로 날을 보내어 장차 국가로 하여금 떨쳐지지 못하게 한 후에 그만두려 한다. 서적(徐積)194)  이 말하기를, ‘부모(父母)가 그것을 했으면 하고 향인(鄕人)이 그것을 영화롭게 여기는데, 제군(諸君)은 어찌 군자(君子)가 되지 않으려 하는가?’ 하였다. 그 임금이 밤낮으로 칙려(飭勵)하고 그대들의 아비와 할아비도 역시 그 자손으로 하여금 고쳐서 인협(寅協)195)  하게 하고자 하는데 시상(時象)의 잘못된 습성을 따르면서 오히려 차마 고치지 않고 있으니 비록 임금에게는 야박하게 하더라도 그대들의 할아비나 아비에게는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여러 신하들을 인협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천지(天地)의 화기(和氣)를 부르고 역시 널리 현능(賢能)을 뽑아 국사에 전적으로 마음을 쓰게 하여 우리 백성을 구제하는 도리(道理)로 삼고자 해서이다. 아! 생각건대 내가 믿는 바는 오직 경사(卿士)와 민생(民生)인데 여러 경들은 시상(時象)을 중하게 여기고 외로운 나를 돌보지 않는다. 백성들은 거꾸로 위태롭게 매달렸고 가뭄의 재변이 또 이와 같은데도 임금이 되어 우리 신료(臣僚)들을 화협(和協)하게 하지 못하고 우리 창생(蒼生)을 구제하지 못했으니, 한갓 임금된 즐거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후일 돌아가 열조(列祖)의 얼굴을 뵈올 수가 없게 되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나의 부덕(否德)으로 인해 조상(朝象)이 이에 이르게 만들었으니, 아! 슬프다. 우리 백성이 도대체 무슨 죄인가? 두 번이나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는데도 보잘것없는 정성이 감동시키지 못하여 신명(神明)이 나를 돌보지 않고 명응(冥應)이 더욱 막막하니 마치 불에 타는 듯하다. 극진한 도리를 쓰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니 마땅히 먼저 자신을 책하여 이 회포를 조금 펴는 바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상시(常時)와 다르니 피전(避殿)196)  하는 거조는 논할 바가 아니요, 오늘부터 상선(常膳)을 감하고 본전(本殿)의 주방(酒房)을 정지하며, 시사(視事)와 법강(法講)은 오늘부터 정당(正當)의 월대(月臺)197)  에서 시행하여 폄손(貶損)하는 뜻을 보일 것이다. 아! 너희 근밀(近密)의 신하들은 나의 이 초교(草敎)를 윤색(潤色)하고 의당 정부에서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라. 내가 마땅히 가납(嘉納)할 것이요, 말이 비록 맞지 않는다 해도 죄를 주지 않을 것이나 시상(時象)을 협잡한 자는 바로 내 뜻을 저버린 것이니, 모두 자세히 알라."
하였다. 정원에서 대초(代草)하지 말고 곧바로 비망(備忘)으로 반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명리(趙明履)를 검열(檢閱)로 삼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관서 어사(關西御史) 이종성(李宗城)이 돌아와 아뢴 것으로 인해 본도의 정초 장무대(精抄壯武隊)와 양삼수군병(良三手軍兵)을 한결같이 모두 감포(減布)하게 했는데, 마땅히 감해야 할 포가 1백 70여 동(同)입니다. 그 대신으로 본도에서 나온 것으로 대신 충당하는 것은 끝내 명분이 없는 데 가까우니, 본사(本司)에서 관리하는 감영(監營)의 요군목(遼軍木)과 병영(兵營)의 정장목(精壯木)으로 그 대신을 충당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유학(幼學) 유의(柳嶷) 등이, 상한(常漢) 출신인 고희태(高希泰)란 자가 강상(江上)에 사는 전(前) 현령(縣令) 유흡(柳潝)을 능욕(凌辱)한 악언(惡言)과 패습(悖習)은 명분(名分)을 무너뜨리고 풍화(風化)에 관계된다고 진소(陳疏)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금오(金吾)로 하여금 조사해 다스리게 하였다.

 

임금이 가뭄을 민망하게 여겨 송조(宋朝)의 연영전(延英殿)의 고사(故事)에 의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이 와서 모일 것을 명하여 진구(賑救)할 계책을 상확(商確)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건백(建白)한 것은 주전(鑄錢)하는 한 가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의논도 일치되지 않았으며, 임금의 뜻 역시 어렵게 여겼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진달하기를,
"무곡(貿穀)이 급선무이며 대동미(大同米)를 견감하는 것도 역시 저축하는 방법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어공(御供)을 감하더라도 실효(實効)가 아니니 오직 진상(進上)을 제감(除減)해야만 쌀을 저축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물러가지 말고 모두 빈청(賓廳)에 모여 곡식을 여유 있게 하는 대책을 강구해 아뢰라."
하였다.

 

6월 4일 을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장률(贓律)로 금고(禁錮)된 전(前) 목사(牧使) 송요경(宋堯卿)을 탕척(蕩滌)하고, 도류(徒流)198)   이하로 여러 해 된 자는 석방하라고 명하였으니, 가뭄을 민망히 여겨 소결(疏決)한 것이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유만중(柳萬重)을 파직하라고 명한 것은 개시(開市)를 신칙하지 못한 일 때문이었다. 또 창성 부사(昌城府使)        박민웅(朴敏雄)에게 표리(表裏)199)                  를 내리고 삼등 현령(三登縣令)        임상정(林象鼎), 강서 현령(江西縣令)        송익보(宋翼輔), 상원 군수(祥原郡守)        유경장(柳經章)은 아울러 준직(準職)을 초수(超授)하라고 명하였는데, 관서 어사(關西御史)        이종성(李宗城)이 잘 다스린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우의정 조문명(趙文明)이 북병사(北兵使)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강변(江邊)에 막(幕)을 친 청인(淸人)들에게 효유(曉諭)하여 즉시 철거하게 하고 따르지 않은 자는 갑오년200)   예에 의해 이자(移咨)하여 금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문명이 또 말하기를,
"열성(列聖)의 태실(胎室)은 보수(步數)의 규제(規制)가 각기 다른데 현종(顯宗)·숙종(肅宗)의 태실은 모두 3백 보(步)가 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묻기를,
"곤양(昆陽)의 태실 보수는 얼마나 되는가?"
하고는, 인하여 전교하기를,
"열조(列祖)의 유의(遺意)를 본받아 예전대로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대개 당저(當宁)201)  의 태실을 봉(封)하게 되어 보수를 널리 점령해 민전(民田)에 해를 끼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임금이 운각(芸閣)에 명하여 《선조보감(宣祖寶鑑)》을 간행해 올리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인쇄해 바쳤다.

 

전에 북도에 특별히 보낸 중신(重臣) 윤순(尹淳)이 돌아와 아뢴 것으로 인해 철령(鐵嶺) 서쪽 삼방령(三防嶺) 주막(酒幕)을 철거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조문명이 일찍이 그곳 도신(道臣)을 지내고 입시(入侍)한 자에게 묻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사성(大司成)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이 고개는 초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처음에는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였는데 근래에는 관행(官行) 역시 거쳐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 안변(安邊)과 회양(淮陽) 사이에 있으니 고개 마루의 방수에 먼저 유의(留意)할 것이요 주막을 철거하는 것은 말단의 일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묘당의 계책(計策)은 대체를 지녀야 하니 다만 나무를 길러 길을 막으면 족하고, 주막을 철훼하는 것은 도신(道臣)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하였다. 조문명이 또 말하기를,
"외방의 의옥(疑獄)이 지체됨은 실로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하는 한 단서입니다. 청컨대 삼사(三司)에 출입하는 자를 각도(各道) 도사(都事)로 차임하고 그로 하여금 사핵(査覈)하여 소결(疏決)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목(耳目)의 직책도 다 갖추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외방의 막좌(幕佐)이겠는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강명(剛明)한 수령(守令)과 함께 모여 조사해 재결(裁決)하게 하고, 지극히 결단하기 어려운 자는 경사(京司)로 이송(移送)하게 하라."
하였다.

 

한사득(韓師得)을 사간으로, 한덕후(韓德厚)를 헌납으로, 조상행(趙尙行)·윤흥무(尹興茂)를 정언으로, 임수적(任守迪)을 응교로, 임정(任珽)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정원(政院)에서 응지(應旨)하여 진계(陳戒)하였는데, 말하기를,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자신의 총명(聰明)을 내세우며, 말에 긴헐(緊歇)을 물론하고,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며, 자주 경연을 열지만 몸소 실천함이 없고 백성을 근심하심이 간절하나 절수(折受)를 파하는 것을 아끼십니다. 사람을 등용하는 데도 취사(取舍)와 출척(黜陟)에 반드시 양쪽을 대립시키기에 힘쓰고, 죄수를 심사(審査)함에 있어도 석방과 잉치(仍置)와 경중(輕重)이 하나같이 예재(睿裁)에서 나옵니다. 이 여섯 가지 단서는 실로 전하의 일심상(一心上) 병통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전교하기를,
"가뭄이 이와 같으니, 어찌 삼농(三農)202)  을 바라겠는가? 농사를 생각하면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다. 어제 비망기에서도 역시 하늘에 응답하는 것은 실제로 해야 한다는 뜻을 유시했었다. 오늘날 유유(悠悠)203)  한 만사 가운데서 백성을 구제할 계책을 강구하는 것 만한 것이 없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도는 곡식을 저축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없다. 그런데 경외(京外)의 저축이 텅 비었으니, 비록 곡식을 저축하고자 해도 장차 어떻게 시행하겠으며 비록 감선(減膳)을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금년 탄일(誕日)·동지(冬至)의 방물(方物)·물선(物膳) 가운데 동조(東朝)204)  에 봉진(封進)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임시로 감해 그 가미(價米)로서 조금이나마 곡식을 저축하게 하여 위에서 감손(減損)하는 뜻을 보이라. 안으로는 대신 경재(卿宰)와, 밖으로는 도신(道臣)·수재(守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곡식이 생기는 일이라면 어찌 내 뜻을 본받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때 가뭄의 재변이 극심해서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고 돌보는 것이 애연(藹然)하게 지성에서 나와 어공(御供)을 감하고 여러 신하들을 신칙하는 데 이르렀으니, 조정 신하들은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임금의 근심을 덜어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여러 재상들이 헌의(獻議)한 것은 백관들의 녹봉을 감하는 것과 희생(犧牲)의 요(料)를 줄이는 것과 수령들의 월름(月廩)을 반으로 나누어 저장하는 것과 주전(鑄錢)하는 의논을 실천하는 것과 영진사(營賑使)를 보내자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들이 말한 바가 거의 모두 용잡하고 잗달았으며 한 사람도 용도를 절약하고 사치를 없애자는 말을 하여 임금이 구조(救助)하려는 뜻을 돕지 못했다. 또한 자기부터 시작하여 그 사치하고 과장(誇張)하는 습성을 없애지 못했으니 진구(賑救)하는 계책이 끝내 효과가 없었고 한갓 태만하고 한만(閒漫)하여 세월만 보낸 데로 돌아간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소결(疏決)할 때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신처수(申處洙)는 늙은 어머니가 있어 죄는 비록 중하나 정상이 매우 불쌍하니, 가까운 땅으로 이배(移配)함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유최기(兪最基)의 소는 원래 크게 긴요한 데 관계된 것이 없고, 또한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의 자(字)도 없었으며, 또 그 사람은 쓸 만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날 합계(合啓) 및 성탁(成琢)이 고변한 것을 성상께서 매양 혹 사주(使嗾)한 자가 있는가 의심하십니다. 그러나 합계는 신하의 분의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성탁은 그가 스스로 지어 낸 것이지 어찌 사주한 자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매양 이러한 일로 사람을 의심하니 참으로 지나치십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경이 합계가 당연하다고 한 것이 바로 사주한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복관(復官)되지 못한 두 신하에게 만약 죄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만이나, 무죄라고 생각한다면 복관을 허락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김창집(金昌集)은 숙종(肅宗)께서 친히 그의 화상찬(畫像贊)을 지어 이르시기를, ‘백발(白髮) 늙은 나이에 일편단심 변함 없으니 낭묘(廊廟)의 명망(名望)이 중하도다.’라고 하였으며, 이이명(李頤命)에게는 ‘나라를 근심하여 집을 잊었으니 이것이 그 마음에 간직한 바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신하의 사람됨이 이와 같고 또 함께 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이제 이미 복관된 두 신하와 두 갈래로 나뉘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두 신하를 죽인 자는 바로 김일경(金一鏡)과 박필몽(朴弼夢)의 무리인데, 지금 김일경과 박필몽은 이미 죽임을 당했는데도 두 신하만 유독 복관되지 않는다며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신하의 일은 스스로 짐작하고 있으니, 아래에 있는 자가 감히 청할 바가 아니다. 이 두 신하에게 원통함이 있다면 원통하다고 할 뿐인데 어찌 반드시 훌륭하게 보는가? 내 뜻으로는 병조 판서가 여기에 대해 마음속이 종기처럼 맺힌 것 같다가 이제 이미 해결(解決)하였으니 다시는 맺힘이 없어야 한다."
하였다.

 

비국(備局)의 문낭청(文郞廳)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관서(關西)의 강변(江邊) 고을은 본래 돈을 쓰지 않고, 백성에게 부과한 것은 단지 미포(米布)였습니다. 근래에는 전화(錢貨)가 통행되어 변방의 금단(禁斷)이 엄하지 못하니, 기한을 정해 엄중히 금해야 할 것입니다. 또 듣건대 칙사(勅使)가 일찍이 우리 나라 돈 1문(文)을 가지고서 책망하는 말까지 있었다고 하니, 뒷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자 혹은 금지하기가 쉽다고 말하고, 혹은 금지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마땅히 해영(該營)으로 하여금 은(銀)으로 바꾸게 하여 기어이 돈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먹는 것도 주지 말고 팔지도 않으면 저절로 쓸 데가 없게 된다. 강변 사람으로 하여금 내지(內地)의 장사꾼에게 산매(散賣)하게 하여 수삼 개월을 기해 모조리 교역하게 하고, 후에 범한 자가 있으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중률(重律)로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이때 소결(疏決)로 인해 금부(禁府)와 형조(刑曹)의 도배(徒配) 이하를 석방(釋放)하였다. 이어 양이(量移)한 죄인 신익흠(申益欽)과 원배(遠配)한 죄인 한사억(韓師億)을 석방하라고 명하고 옥에서 죽은 전(前) 감역(監役) 홍구장(洪九章)을 추후하여 석방하였다. 홍구장은 이감(李椷)의 초사에 원인(援引)되었는데 구핵(究覈)하기 전에 지레 죽었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의 아룀으로 인해서였다.

 

충청도 서산(瑞山)·태안(泰安) 등의 고을에 각사(各司) 및 여러 궁방(宮房) 소속의 어전(漁箭) 및 염분(鹽盆)이 있었는데, 비국 당상 송인명이 청하기를,
"금년에는 비국에서 전담하여 수세(收稅)를 관리하여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소서."
하고, 김재로(金在魯)는 청하기를,
"해서(海西)의 어염세(魚鹽稅)도 역시 이 예에 따르게 하소서."
하고, 박문수(朴文秀)도 역시 청하기를,
"각도에 있는 각 궁방과 제사(諸司)와 감영(監營)·통영(統營)·병영(兵營)·수영(水營) 소속의 선세(船稅)와 염세(鹽稅) 두 세는 아울러 명년 봄까지 한정하여 취해 써야 합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청하기를,
"상당 산성(上黨山城)에 남아 있는 전화(錢貨)를 모두 추이(推移)하여 진구(賑救)를 돕게 하고 추후에 갚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울러 따랐다. 비국 당상 8인에게 명하여 팔도의 진휼하는 일을 구관(句管)하게 하였다. 경기도 조상경(趙尙絅), 호서는 송인명(宋寅明), 호남은 이광덕(李匡德), 영남은 박문수(朴文秀), 해서는 김재로(金在魯), 관서는 윤유(尹游), 관동은 이정제(李廷濟), 관북은 송진명(宋眞明)인데, 모두 대신이 청한 바에 따른 것이다. 비당 구관(備堂句管)이란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전(前) 헌납(獻納)        이일제(李日躋)가 일찍이 논하기를,
"서북계(西北界)에 간첩(間諜)을 방수(防守)할 길이 없어 일의 소루함이 많으니, 청컨대, 송(宋)나라 때의 한기(韓琦)205)                  ·부필(富弼)206)                  의 고사에 의해 묘당의 신하로 하여금 서북을 분장(分掌)하여 통괄해 거느리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 소를 여러 신하에게 내렸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신이 평사(評事)로서 백두산(白頭山)에 올라갔더니, 그때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경계를 정했는데, 이 산과 영고탑(寧古塔)과는 한 줄기의 강물을 사이에 두고 있어 혹시 사변이 있으면 저들이 반드시 길을 빌리고자 할 것입니다. 북쪽의 이미 호(胡)의 경계에 접하고, 서쪽 역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만일 적합한 인재를 얻을 수 있어 주(周)나라의 동서섬(東西陜)처럼 나누어 관장하게 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기·부필 같은 사람을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금의 묘당은 역시 송나라의 추밀(樞密)과 같으니, 반드시 별도로 명호(名號)를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여러 신하들은 항상 서북쪽을 잊지 않는 마음을 두어야 한다."
하였다.

 

간원 【사간(司諫) 한사득(韓師得)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옥매(玉梅)와 석정(石丁)을 일체로 율(律)에 의해 처단하라는 일과 이징성(李徵聖)·이창수(李昌壽)·황응추(黃應樞)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헌부 【장령(掌令) 김정윤(金廷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함평(咸平) 사람 임봉래(林鳳來)는 간악한 사람으로 요망하고 허탄스런 술책을 끼고서 경외(京外)를 출입하며 종적이 수상합니다. 그가 혹세무민(惑世誣民)한 일이 한둘이 아닌데 가장 통분한 것은 여염 사이에 만약 상변(喪變)을 자주 당한 자가 있으면 스스로 점을 잘 친다고 일컬으면서 반드시 말하기를, ‘저주(咀呪)한 빌미이다.’라고 하면서 갖가지로 공동(恐動)시키는데, 그 주인 되는 사람은 미혹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미리 그 집에 묻어 두었다가 그가 스스로 파내고 재능을 자랑하여 값을 받아낼 계책을 하므로 혹은 가사(家舍)를 파헤친 자도 있고, 혹은 함부로 비복(婢僕)을 죽인 자도 있으니, 그 정상을 논하자면 대단히 절통합니다. 근래에는 또 한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 변을 일으켜 심지어 인골(人骨) 등의 물건을 몰래 부엌에 묻을 즈음 옆 사람에게 발각되어 또 도망하였다고 하니, 어찌 이처럼 요망하고 사악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결코 하루라도 도성(都城) 아래에 두어 그 간사한 싹틈을 조장하게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극변(極邊)에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무리의 간악한 사람을 정배에 그쳐서는 안된다. 추조(秋曹)로 하여금 엄히 형문(刑問)한 후 절도(絶島)에 정배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계축년207)   능을 옮길 때 등록(謄錄)에는 능을 계폄(啓窆)한 후부터 우제(虞祭) 전까지는 크고 작은 제사를 아울러 정지하였습니다. 이번 역시 마땅히 이 예에 의해 구릉(舊陵)을 파헤친 후에는 재궁(梓宮)이 빈소(殯所)에 있게 되어, 모든 일이 한결같이 초상(初喪)과 같으니, 혼전(魂殿)과 산릉(山陵)의 조석 상식(上食)은 비록 폐할 수 없으나 삭망(朔望)의 은전(殷奠)208)  은 예(例)에 의해 마땅히 정지해야 합니다."
하고, 산릉 도감(山陵都監)에서 또 아뢰기를,
"새 장릉(長陵)은 마땅히 합릉(合陵)의 제도를 따라야 하니, 청컨대 낭관(郞官)을 보내어 영릉(英陵)209)  에 가서 원경(圓徑)을 재어 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 아룀을 옳게 여겼다.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장계로 본도(本道)의 가뭄 및 우박의 정상을 아뢰고, 관북(關北)에서는 또 단천(端川) 이남의 한재(旱災) 및 삼수·갑산에서는 5월에 서리가 내렸다고 계문하였다.

 

6월 6일 정유

이때 7차 기우제를 지냈으나 영응(靈應)이 더욱 막막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명하여 기해일에 묘사(廟社) 및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평시에도 곡식을 저축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는 것은 나라의 중요한 일이다. 하물며 이런 때이겠는가? 대저 인심은 쉽게 흔들리기 마련인데 만약 수재나 한재가 있으면 곧 먼저 요동하게 된다. 또 조가(朝家)에서 진구(賑救)를 미처 하기 전에는 백성들이 믿지 못하고 먼저 스스로 흩어지게 되니 곡식을 저축하는 것은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경외에서 미리 곡식을 저축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믿게 되어 두려워하지 않는다. 경외의 곡식을 관장하는 신하로 하여금 먼저 돈을 흩어 곡식을 저축하는 방도에 힘쓰게 하고, 또 묘당의 신하로 하여금 미리 재물을 넉넉하게 하여 백성 보호하는 방책을 강구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구릉(舊陵)을 파헤친 후부터 우제 전까지는 비록 제향(祭享)을 폐지하지만 오는 8월 15일 종묘와 각 능전(陵殿)의 분향(焚香)은 의당 예(例)에 의해 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함흥 사람 이치혁(李致赫)이란 자가 납(鑞)을 모아 은(銀)을 만들어 사람을 속이고 돈으로 바꾸었는데 일이 발각되자 승복하였다. 그러나 형조에서 감률(勘律)하기에 이르러서는 또 말을 바꾸어 옥사가 오랫동안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대신의 헌의(獻議)로 인해 감사(減死)해 절도(絶島)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6월 9일 경자

해에 좌이(左珥)가 있었다.

 

대사간 김용경(金龍慶)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네 신하의 일을 말하자니 슬픕니다. 그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충성은 공(功)이 일체로 같아 그 밝음이 해나 별과 같습니다. 정미년210)  에 이르러서 관작과 시호를 추탈(追奪)한 것은 네 신하가 동일하였는데 정국(政局)이 여러 차례 바뀐 후에 억지로 명목(名目)을 만들어 둘로 나누어 추복(追復)하는 전례(典禮)가 유독 두 신하에게만 미치지 않았고 피차를 얽매어 억지로 탕평(蕩平)하였으니, 시비가 전도되고 의리(義理)가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빨리 분명한 명령을 내리시어 두루 애영(哀榮)을 베푸소서. 지난번 합계(合啓)한 대신(臺臣)은 공공의 의논을 채택하여 하루의 책임을 이루었는데, 계사(啓辭)를 환급(還給)하라는 명이 이미 뜻밖에 나왔고, 또 삭출(削黜)하는 벌을 시행했으니 전하께서는 왜 한낱 유봉휘(柳鳳輝)만 생각하시어 이와 같은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擧措)를 하십니까?"
하고, 또 가뭄으로 임금을 면계(勉戒)하여 진달하기를,
"더욱 하늘을 대하는 정성을 돈독히 하시고 수성(修省)하는 공부를 더하시어 크게 경동(警動)하고 크게 진작하여 인심에 합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게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진구(賑救)하는 방책을 강구하여 녹림(綠林)211)  ·황지(黃池)212)  의 근심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 끝의 일은 바로 백성을 위하는 데서 나왔으니,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이어 전교하기를,
"이러한 상소를 한 자는 비록 심력(心力)을 허비했더라도 나는 비답을 내리지 않을 것이니, 곧 심력을 허비하지 말하라는 뜻이다."
하였다.

 

우승지 신치운(申致雲)이 말하기를,
"왕성(王城) 가까운 곳에 어린아이 무덤이 잇대어 있어 농경지(農耕地)로 침범해 들어오니, 경조(京兆)로 하여금 금지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외방의 사계(査啓)가 매양 늦은 것을 근심하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심한 자는 도신(道臣)을 추고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이어 전교하기를,
"전에 기자사(箕子祠)의 편액(扁額)을 반사(頒賜)하는 일로써 공의(公議)를 채납하여 아뢰게 했는데, 보고하지 않은 것이 6년이란 오랜 세월이 되었다. 해도(該道)의 전후 도신(道臣)을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여러 도에서 여역(癘疫)을 상문(上聞)하였는데, 영남은 바야흐로 앓는 자가 1천 9백 15명, 이미 나은 자가 2백 70명, 죽은 자가 3백 25명이요, 호서는 처음 앓는 자가 1천 50명, 사망한 자가 3백 78명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 다섯 고을에 이미 나은 자가 없고, 안동(安東)은 사망자가 자그만치 백여명이나 된다. 수령이 된 자가 만약 동포(同胞)의 뜻과 유곤(庾袞)213)  의 일을 생각했다면 어찌 진(秦)나라 사람이 월(越)나라 사람 보듯 했겠는가? 여러 도에 신칙하라. 또 활인서(活人署)는 한갓 그 이름만 있으니, 묘당과 해서(該署)에 명하여 그 근만(勤慢)을 조사하여 전최(殿最)214)  에 쓰라."

 

수찬 윤동형(尹東衡)과 부수찬 황정(黃晸) 등이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번 소결(疏決)은 역시 가뭄을 민망하게 여기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습니다. 중외 죄수의 숫자가 매우 많은데 그 가운데에는 찬배(竄配)된 지 혹 해를 넘겨 정상이 불쌍한 사람도 있으니, 바라건대 유사(攸司)의 신하에게 물으시어 죄범이 조금 가벼워 용서할 만한 자와 부모와 있어 정상이 안타까운 자는 아울러 광탕(曠蕩)의 은전을 베풀어 대성인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仁德)을 미루어 주소서. 임금은 하늘이 위에서 운행하는 것을 본받아 사시(四時)의 차례가 있는 것 같아야 하는데 도유 우불(都兪吁咈)215)  하는 즈음에 가부(可否)가 들리지 않으니, 혹 홀로 사(私)에 맡기고 스스로의 지혜만 쓰는 데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원하옵건대, 중인(衆人)의 마음과 힘을 모아 한 몸의 마음과 힘으로 삼고, 중인의 이목(耳目)을 모아 한 몸의 이목으로 삼으소서. 양역(良役)에 이르러서는 실로 소민(小民)들이 괴롭게 여겨 머리를 앓는 것인데도 끝내 변통해 개혁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고 또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백성들의 위급함을 돌보기를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자를 구하듯 하시고,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제거하기를 좀을 없애고 해충(害蟲)을 잡아내듯 하시되 명색으로만 하지 마시고 반드시 그 실제로 하시며 마음으로만 하지 마시고 반드시 정사(政事)로써 하소서. 일의 시비를 굳게 지녀 흔들리지 마시고, 사람의 현부(賢否)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혼동시키지 말며 나의 권형(權衡)을 공평히 하고 법칙을 바루어 반드시 성심(誠心)으로 행하시고 사의(私意)를 뒤섞지 마소서. 삼대(三代)216)   때에는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혹 판축(版築)217)   가운데서 쓰기도 하고, 혹은 고도(鼓刀)218)   가운데서 뽑기도 하여 현인을 쓰는 데 일정한 방도가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이러했는데 지금은 쓰는 바가 불과 세족(世族)과 화벌(華閥)에 지나지 않으니 세가의 자손이라 하여 어찌 모조리 재주와 지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편현(便嬛)219)  하고 자만(自慢)한 사람은 전하께서 좋아하는 바이며, 충후(忠厚)하고 박실(樸實)한 인사는 전하께서 좋아하지 않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조경(躁競)220)  과 요박(澆薄)221)  의 습성이 날로 자라나며 근후하고 돈실(敦實)한 풍도를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전적으로 구변이 좋은 사람만을 뽑지 마시고, 전적으로 심각한 논의만을 숭상하지 마시어 널리 별달리 녹용(錄用)하신다면 하나의 기예(技藝)나 하나의 재능(才能)을 가진 자라도 거의 다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말은 모두 절실하여 매우 가상히 여기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인하여 원차(原箚)를 금중(禁中)에 머물러 두라고 명하였다.

 

총호사(摠護使)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갑인년222)   이후 퇴광(退壙)에 배설(排設)하는 금정기(金井機)223)  는 좌우를 5촌(寸)씩 감하고, 길이는 재궁(梓宮)에 따라 감하면 두 자 남짓을 감하게 되며, 광안의 회격(灰隔)은 4척(尺)이니, 이는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장릉(長陵)과 영릉(寧陵)은 모두 5촌을 감하였고, 계축년224)   천릉(遷陵)할 때와 갑인년 후에는 모두 1척을 감하였는데, 대개 광중(壙中)이 너무 넓은 것을 지가(地家)에서 꺼리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마땅히 이 예(例)를 써야 하나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의 합장(合葬)은 으레 중간을 회로 막는데 이번 합릉(合陵)에는 근거할 만한 규례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대부 집에서는 몇 자(尺)를 쓰는가?"
하였다. 도감 당상(都監堂上)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방회(傍灰)는 7촌(寸)을 쓰고 회격(灰隔)은 2,3촌을 쓰는데, 능광(陵壙) 안의 방회를 3척으로 쓴다면 회격은 1척을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홍치중이 또 말하기를,
"각 능의 표석(表石)은 모두 강도(江都)의 돌을 쓰는데, 지금 강도의 돌이 다 되었고 남포(藍浦)의 돌 품질이 좋으니 척수가 맞는 것으로 대신 써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새 능안의 민전(民田)은 비록 사들이라 명하셨으나 사전(私田) 역시 왕토(王土)이니 반드시 값을 따져 주지 말고, 청컨대 구례(舊例)에 의해 대토(代土)를 허급(許給)하되 역적(逆賊) 집에서 적몰(籍沒)한 것을 대신 주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사대부들은 비록 대토를 주어도 본래 원망이 없으나 하천(下賤)들은 땅을 경작(耕作)하여 살아가니, 값을 주어 사들이게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합니다."
하니, 임금이 홍치중의 말을 옳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천릉(遷陵)할 때 복제(服制)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홍치중이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마땅히 3개월의 시마(緦麻)의 복제를 행하셔야 하고, 백관들은 모두 성상을 따라야 하며, 전함(前銜) 및 사서인(士庶人)들은 제복을 착용하지 않고 단지 흰 옷을 흰띠를 착용하며, 서리(書吏)·녹사(錄事)의 무리들은 비록 능소(陵所)의 소속이라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흑건(黑巾)으로 한다고 예조에서 이로써 의주(儀註)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홍치중이 또 말하기를,
"새 능 근처에 가까워서 파내야 할 분묘(墳墓)가 없으며 유독 대신(大臣) 이건명(李健命)의 묘가 비록 안산(案山) 밖에 있으나 그 집안에서 불안하게 여겨 방금 이장(移葬)한다고 합니다. 대신의 이장에는 마땅히 장례의 수용(需用)을 도와주는 전례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왕비(王妃)의 영악전(靈幄殿)에는 마땅히 시빈(侍殯)하는 중관(中官)이 있어야 하고, 집사(執事)는 마땅히 궁인(宮人)을 써야 한다. 수빈관(守殯官)으로서 전관(奠官)을 겸하도록 해조로 하여금 계하(啓下)하게 해야 한다."
하였다.

 

《숙종실록(肅宗實錄)》을 이미 다 마쳐 총재관(摠裁官) 이집(李㙫)이 예에 의해 세초(洗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이어 명하기를,
"사국(史局)의 당상(堂上)·낭청(郞廳)을 일찍이 거친 자에게 아울러 군함(軍銜)을 주어 진참(進參)하게 하고, 12일 계묘(癸卯)에 탕춘대(蕩春臺)에서 세초하라."
하였다. 【연회(宴會)는 국휼(國恤)을 당했기 때문에 정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9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261면
【분류】역사-편사(編史)

 

6월 9일 경자

간원 【정언(正言) 윤흥무(尹興茂)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고희태(高希泰)가 사대부를 능욕한 것은 기강에 관계되니, 법부(法府)에서 스스로 그 죄에 따라 다스릴 것인데 유사(儒士)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강상(江上)의 유생들이 통문(通文)하여 정소(呈疏)하였으니, 거조가 해괴합니다. 청컨대 수창(首倡)한 사람은 정거(停擧)하고, 소를 받아들인 승지는 추고하며, 고희태의 죄도 역시 금부로 하여금 중히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전(前) 부사(府使) 구성임(具聖任)이 지난번 한 소(疏)는 매우 놀랍고 망령되므로 특별히 하교하여 견파(譴罷)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거두어 쓰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의 침고(沈痼)된 당습(黨習)과 분의(分義)를 모르는 죄는 가볍게 파직했다가 곧 서용할 수 없으니, 마땅히 그 명을 중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울러 윤허하였으나 유독 구성임에 대한 일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吏曹)에서 강원도 어사(御史) 한현모(韓顯謨)의 서계(書啓)로 인해 말하기를,

"안협 현감(安峽縣監) 신의집(申義集), 정선 군수(旌善郡守) 송필환(宋必煥), 평창 군수(平昌郡守) 최창억(崔昌億), 낭천 현감(狼川縣監) 이도재(李道載)는 치민(治民)의 실적이 없으니 파직해야 합니다. 철원 부사(鐵原府使) 민사연(閔思淵), 고성 군수(高城郡守) 박필기(朴弼琦), 안협(安峽)의 전 현감 홍중구(洪重耉)는 치적이 있으니, 마땅히 등급을 나누어 논상(論賞)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6월 10일 신축

밤에 불 같은 기운이 있어 곤방(坤方)에서 빛났다.

 

명하기를,
"지금부터 연중(筵中)에서 품정(稟定)한 것은 ‘탑전 정탈(榻前定奪)’이라 쓰고, 연석에서 하교한 것은 ‘탑전 하교(榻前下敎)’라고 쓰는 것은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우의정 조문명(朝文命)이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문(狀聞)으로 인해 청하기를,
"새로 정한 금령(禁令)에 의해 의주(義州)에서 은(銀)을 몰래 가지고 국경을 넘다가 붙잡힌 박동화(朴東華)의 죄는 본율(本律)에 의하여 감단(勘斷)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문명이 또 말하기를,
"무변(武弁) 김주(金鑄)란 자가 있는데 강명(剛明)·종핵(綜覈)하여 신의 동생 조현명(趙顯命)도 역시 호조(戶曹)나 선혜청(宣惠廳)에 시험해 볼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조에 말해 호조의 낭관에 제수하였는데 이조에서 뜬말로 요동시켜 그로 하여금 갑자기 정체(呈遞)하게 하였고, 전당(銓堂)225)   역시 허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비국을 통하여 잉임(仍任)시킬 것을 계청하였는데 그가 출사(出謝)하기에 미쳐서 한 승지가 또 말하기를, ‘그는 행공(行公)하기에 마땅치 않다.’ 하고 숙단(肅單)226)  을 돌려주려고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승선의 일은 참으로 의아하고, 이 사람을 쓰지 못함도 역시 애석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숙단을 물리친 것은 매우 부당하다."
하고는, 인하여 추고를 명하고, 해조로 하여금 김주를 재촉해 출사하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조문명은 융숭한 은혜를 입어 지위가 보상(輔相)인데도 일찍이 어진 사람을 천진(薦進)하지도 못하고 불초(不肖)한 자를 물리치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이에 한낱 김주를 두둔하여 번거롭게 상문(上聞)하기에 이르렀으니 김주에게 무슨 재주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작은 것만 살피고 큰 것은 빠뜨렸다고 말할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9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261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인사(人事)


[註 225] 전당(銓堂) : 이조 당상(吏曹堂上).[註 226] 숙단(肅單) : 숙배 단자(肅拜單子).
사신은 논한다. "조문명은 융숭한 은혜를 입어 지위가 보상(輔相)인데도 일찍이 어진 사람을 천진(薦進)하지도 못하고 불초(不肖)한 자를 물리치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이에 한낱 김주를 두둔하여 번거롭게 상문(上聞)하기에 이르렀으니 김주에게 무슨 재주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작은 것만 살피고 큰 것은 빠뜨렸다고 말할 수 있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본조(本曹)의 도안(都案)에 이른바 경기병(京騎兵)이란 자들은 그 보포(保布)를 외방에서 받아 그 값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役)이 천하고 또 번거롭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회피하여 혹 다른 역(役)에 투속(投屬)하거나 혹은 도망쳐 버렸고 남아 있는 약간명(若干名)은 또 부리(部吏)의 사용(私用)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고(故)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일찍이 연석에서 아뢰기를, ‘5백 명을 정원으로 해서 5부(五部)에 분배해 즉시 대신을 충당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그후에도 구태의연하여 다 충당하지 못했습니다. 근래에는 국역(國役)이 호번해도 입역(立役)하는 자가 없으며 또 포를 바치는 자도 없어 약간의 보포로 사람을 고용(雇用)하는데, 보포도 또한 이어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다시는 입역(立役)을 시키지 말아 싫어하고 회피하는 폐단을 제거하고 매 명마다 단지 포(布) 1필씩을 거두어 사람을 고용할 밑천에 보태고 대신을 충당하지 못한 자는 오부(五部)로 하여금 천천히 그 액(額)을 충당하되 금년을 한정으로 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문명(趙文命)이 또 말하기를,
"대계(臺啓)에 논란한 임봉래(任鳳來)가 흉물을 묻은 일은 아주 흉악하니, 마땅히 엄히 조사하여 법을 바루어 세속(世俗)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의율(擬律)은 너무 관대한 잘못이 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히 신문하여 취복(取服)하게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윤흥무(尹興茂)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곡식과 재물을 소모하는 것은 술의 피해가 가장 심한데 근래에는 금주(禁酒)가 해이해졌으니, 청컨대 단속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이 사대부(士大夫)에게는 행해지지 않는데 반드시 상천(常賤)에게만 행하려고 하니, 나는 실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간관이 일찍이 세력 있는 자는 적발하지 못하고 범연히 엄하게 금지할 것을 청하니, 가히 근본은 버려두고 말단만 다스리는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 윤흥무가 이에 인피(引避)하고 물러갔다.

 

임금이 장차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려 하니, 예조에서 말하기를,
"남교(南郊)의 기우제를 친히 지낼 때의 복색은 마땅히 북교(北郊)의 예에 의해 흑단령포(黑團領袍)와 옥대(玉帶)·흑화(黑靴)를 착용하고, 백관(百官)은 흑단령으로 배제(陪祭)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6월 11일 임인

임금이 비를 빌려고 남단(南壇)에 행행(幸行)하였다. 이때 햇볕이 타는 듯했는데 보련(步輦)을 타고 산선(繖扇)과 일산(日傘)을 걷었으며 단소(壇所)에서 노숙(露宿)하였다. 밤 4고(鼓)에 임금이 단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는데 예용(禮容)이 숙연하였고, 환궁하기에 미쳐서는 늙은 농부를 불러 농사 형편을 물었다.

 

전라도에 가뭄이 심하였는데 진산(珍山)에는 5월에 우박(雨雹)이 내리고 6월에 서리가 내렸다. 황해도의 해주(海州)·강령(康翎)과 경기의 수삼 개 고을에 처음으로 비가 약간 내렸다.

 

6월 13일 갑진

비가 약간 내렸다. 임금이 명하기를,
"대신을 보내어 또 농단(農壇)에서 비가 빌게 하라."
하였다.

 

이조에서 관서 어사(關西御史) 이종성(李宗城)의 서계로 인해 복주(覆奏)하기를,
"청컨대, 양덕 현감(陽德縣監) 남윤관(南胤寬)을 파직하고, 개천 군수(价川郡守) 홍태두(洪泰斗), 맹산 현감(孟山縣監) 이희하(李喜夏), 황주 목사(黃州牧使) 이성제(李誠躋)를 아울러 시상(施賞)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6월 13일 갑진

집의(執義) 어유봉(魚有鳳)이 향리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또 면계(勉戒)를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듣건대 연중(筵中)에서 바야흐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신다고 하는데, 선정(先正)의 이 책은 규모가 광대하고 조리가 정밀합니다. 경전(經傳)에서 널리 채택하고 이따금 자기의 견해를 부쳐 전에 발명하지 못한 바를 발명해 명백하게 밝혔습니다. 성학(聖學)의 고명(高明)하심과 통달하심으로 마땅히 구구한 강설(講說)을 기다리시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부열(傅說)이 은 고종(殷高宗)에게 말하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이 책을 참으로 깊이 본받아 역행(力行)하시면 한 마디 한 구절이 모두 도(道)로 나아가는 요결(要訣)이요 병을 치료하는 좋은 약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소한 바가 절실하니, 유의하지 않겠는가? 사양하지 말고 올라와 나의 부족한 점을 도우라."
하였다.

 

이날 비로소 큰 비가 내렸다. 전교하기를,
"단비가 막 쏟아져 수표(水標)를 잇따라 알려오고 있으니, 농사를 생각하매 다행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또 신명(神明)을 섬기는 것은 마땅히 정성을 해야 하니, 내일 기우(祈雨)를 우선 중지하라."
하였다.

 

김시환(金始煥)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장붕익(張鵬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의만(李宜晩)을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한현모(韓顯謨)를 부수찬으로, 박사정(朴師正)을 부교리로, 김상성(金尙星)을 부응교로, 김약로(金若魯)를 정언으로, 김상규(金尙奎)를 동부승지로 삼았다.

 

경기의 여주(驪州)의 강물이 붉고 흐린 것이 열흘이 되었다고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6월 14일 을사

또 비가 내렸다. 도승지(都承旨) 송성명(宋成明)이 청하기를,
"비가 왔다고 해서 계구(戒懼)하는 성심(聖心)을 해이하게 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비는 바로 하늘이 내린 것인데 내가 우러러 본받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홀만히 여긴 것이니, 어찌 비가 왔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해이해지겠는가?"
하였다.

 

6월 15일 병오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6월 16일 정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전(殿)에 임어하지 않고 그대로 월대(月臺)에 임어했는데, 이때 마침 비가 와서 장막과 자리가 모두 젖었다. 강을 마치자 부사과(副司果) 이종성(李宗城)이 마치 함께 들어왔다가 인하여 진언(進言)하기를,
"예로부터 도(道)에 뜻을 둔 임금은 아주 적었습니다. 전하께서 춘궁(春宮)에 계시면서 뜻을 세우고 스스로 기약한 것이 과연 어떠하셨습니까? 그런데 근년 이래로 점차 게으른 마음이 생기니 어떻게 성취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옛날 한 무제(漢武帝)는 사인(詞人)의 글을 보고도 오히려 동시(同時)에 참여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번 강하는 《성학집요(聖學輯要)》의 글은 바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것인데, 선정이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되게 하려는 마음으로써 만약 지금의 때를 당하게 했더라면 우리 임금을 권면함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지(知)·인(仁)·용(勇) 세 가지는 임금의 대덕(大德)인데, 또한 전하의 병통은 용을 갖추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옥안(玉顔)이 초췌하고 성상의 마음이 타는 듯 근심하심은 비단 가뭄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하옵건대 용(勇) 자에다 뜻을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과연 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대개 마음이 이미 상하여 바로 잡을 수 없기 때문인데, 어떻게 닦으면 되겠는가?"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비애(悲哀)하고 공구(恐懼)하면 역시 바른 것을 얻지 못합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모름지기 성품이 편벽되어 극복하기 어려운 곳으로부터 극복해 나가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광대 공평(廣大公平)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반드시 일이 응한 다음에 그만둔다면 내 자신은 예전과 다름이 없게 될 것이니, 이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법으로 삼으면 일이 마음에 유착되지 않아 오래되면 마땅히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절실하다고 칭찬하였다. 이종성이 또 청하기를,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평안도 양천석(梁千碩)이 거짓으로 입안(立案)을 내어 공천(公賤)을 면하고자 도모한 자에게서 뇌물을 받은 것과 의주(義州)의 잠상(潛商)으로 간사한 일을 저지른 한익량(韓翊良) 등 3인을 조사하여 정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명하기를,
"위원(渭原) 별무사(別武士) 안순성(安順星) 등 3인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라."
하고, 또 명하기를,
"평안도의 1백 1세(歲)된 노인 김용만(金龍萬)에게 가자(加資)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뜻을 보이라."
하고, 또 명하기를,
"황해도 금천(金川)의 절수(折受)된 3면(面) 가운데서 육상궁(毓祥宮)227)  에 들어간 것을 환급(還給)하여 민폐를 없애라."
하였다. 이종성이 일어나다가 엎드리며 말하기를,
"전하께서 사친(私親)을 위해 마련한 제전(祭田)은 사체가 지극히 중한데 신의 한 마디 말로 환급하기를 허락하시니, 이는 성덕(聖德)의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건지산(乾芝山)과 절영도(絶影島)의 절수에 대한 일에 전후로 말한 여러 신하가 어찌 한정이 있었겠는가만 이는 모두 이름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유신(儒臣)에게서 그 마음이 이름을 얻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거림낌없이 따른 것이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일이 궁방(宮房)에 관계된 것은 지나치게 성기(聲氣)를 내시어 심지어는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리셨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시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름을 좋아하는 것이 과연 폐가 있기는 하나 삼대(三代) 이후에서 선비를 구하려면 오직 이름을 좋아하지 않을까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 어찌 옛사람들의 격언(格言)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지난날 연중(筵中)에서 ‘평소 청(淸) 자를 싫어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덕(聖德)으로 아래에 임하시면서 자기가 솔선하여 남을 바르게 하여 좌우·전후에 있는 자가 모두 정인(正人)이 되면 본디 청탁(淸濁)을 구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한데도 탁한 자를 쓰는 것은 차라리 청한 자를 쓰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의 하교는 마침 그랬었는데 문(文)도 아니고 무(武)도 아닌데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하는 자가 어찌 질실(質實)하고 충후(忠厚)한 사람과 같겠는가?"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가뭄을 민망히 여기고 재변을 걱정하여 바로 어려운 때를 당했을 때 악장(幄帳)228)  의 죽삭(竹索)229)   값에 5백 동(銅)을 소비했다고 하니, 노대(露臺)의 백금(百金)의 비용을 아낀 데에 비해 어떻습니까? 호조에서 복계(覆啓)하지 않고 지레 먼저 거행하여 성상의 절약하는 뜻이 도리어 허비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더욱 개탄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는데, 아뢴 바가 옳다."
하였다. 또 명하기를,
"내수사(內需司)에서 본도의 민전(民田)을 강제로 사들인 것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라. 평안도에서 기유년230)  에 진고(陳告)231)  하여 면천(免賤)한 자는 아울러 환천(還賤)하고, 인하여 진고하는 폐단을 금하여 간사한 계책을 막으라."하고, 또 명하기를,
"선우씨(鮮于氏) 가운데서 준수한 자를 가려서 숭인전(崇仁殿)232)   제사를 받들고 기자묘(箕子墓)를 수리하게 하라. 그리고 승지를 보내어 그 묘(廟)에 치제(致祭)하라."
하였는데, 모두 이종성의 말을 따른 것이다. 또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숭의전(崇義殿)에 제사지내게 하면서 전교하기를,
"막 동사(東史)를 강하니 고려(高麗)의 태조(太祖)에게서 느낌이 일어난다."
하였는데, 대개 영고(寧考)233)  께서 홍범(洪範)234)  을 강하면서 기자를 제사한 성의(聖意)를 추술(追述)한 것이다.

 

부제학 민응수(閔應洙)가 여주(驪州)에 있으면서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유봉휘(柳鳳輝)가 역적임을 모르시는 바 아닌데도 단지 조정에 소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시고, 혹 탕평(蕩平)하는 데 방해될까 싶어 언관(言官)을 불러들여 거의 종을 꾸짖듯이 하셨습니다. 이는 대개 전하께서 혹 난역(亂逆)의 발생이 당습(黨習)에서 근본하므로 토역(討逆)이 논의가 도리어 격변(激變)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일체 지난 일을 모두 과거(過去)에 부쳤으며, 분의(分義)를 범한 무리들과 조정을 혼란시키고 임금을 무함한 역적들도 또한 모두 그 근원이 당습에서 나온 것으로 미루어 거론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길들여져 의리가 점차 어두워지고 난역(亂逆)이 더욱 두려워하는 바가 없어, 토복(討復)하는 청을 도리어 꺼리게 되고 영호(營護)하는 습성을 함부로 자행(恣行)하는 데에 내맡겨 두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이미 떠본다고 의심하셨고, 아래에서는 또 뚫고 나온다고 배척하였으며, 대각에 들어간 자는 기회를 틈타 함부로 정계(停啓)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덕(君德)에 누를 끼쳤는데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고, 후사(喉司)에서는 다시 위복(違覆)235)  하지 아니합니다. 지척의 전석(前席)에서 진달한 것은 치우치게 옹호하는 말이고, 장황하게 상소하여 헐뜯는 것은 춘추(春秋)의 의리니, 무엄한 일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습니다. 아! 전하께서 금하고자 한 바는 당습(黨習)인데 당습을 이미 금하지 못하여 목욕(沐浴)하고 토죄하기를 청한236)   신하만 한갓 죄벌(罪罰)을 입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죄가 역절(逆節)에 관계된 자는 구분없이 억울함을 씻는 은택을 입었으니, 그러고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끝에 가서는 자신을 신칙하여 재변을 늦출 방도를 말하였다. 비답하기를,
"말단의 면계(勉戒)는 대의가 옳으니, 유의하지 않은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7일 무신

헌부(憲府) 【장령 김정윤(金廷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종부시 정(宗簿寺正)은 선록(璿錄)을 주관하여 제종(諸宗)을 규검(糾檢)하니, 그 임무가 가볍지 않는데, 시임(時任) 정(正) 이진엽(李震葉)은 지망(地望)237)  이 평소 가볍고 사람됨이 혼용(昏庸)하여 여론이 시끄러워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빨리 개정을 명하여 관방(官方)을 중하게 하소서. 무변(武弁)으로서 삼조(三曹)238)  에 임명된 것은 극선(極選)이라 할 것인데, 호조 좌랑 김주(金鑄)는 평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고 또 이력(履歷)이 부족하여 승지가 이미 자처(自處)하게 하였고 전조(銓曹)에서는 그 대임을 차출하고자 하였으니, 이미 체직된 관원인 것입니다. 비록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해 재촉하여 직임을 살피도록 하였으나 염우(廉隅)로 보아 결코 행공(行公)하기 어렵고 나라의 체통도 역시 구차하게 되었으니, 청컨대 빨리 개차(改差)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종부시 정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김주의 일에 있어서 재촉해 직임을 살피도록 한 것은 재능을 쓰는 데 뜻이 있다. 하교할 때에 네가 어찌 듣지 못하였기에 도리어 이렇게 아뢰는가?"
하였다.

 

6월 18일 기유

윤섭(尹涉)을 수찬으로, 심성희(沈聖希)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6월 19일 경술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강하였는데, 강관(講官)이 해석하지 못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가까운 경기(京畿)에 있는 유신(儒臣) 전(前) 집의(執義) 박필주(朴弼周), 전 지평(持平) 심육(沈錥)을 유시해 함께 경연에 들어와 고문(顧問)에 응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실록(實錄)을 찬집한 공로로 총재관(摠裁官) 민진원(閔鎭遠)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고, 당상 신방(申昉)과 낭청 서종급(徐宗伋) 등은 사일(仕日)이 가장 많아 아울러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간원(諫院) 【정언 윤흥무(尹興茂)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진주 목사(晋州牧使) 구택규(具宅奎)가 병사(兵使) 김몽로(金夢魯)와 하찮은 일로 서로 다투었는데, 김몽로가 악언(惡言)을 했습니다. 이처럼 오만 불손한 무리를 곤임(閫任)에 두어서는 안되니, 김몽로를 파직하소서."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문관 수령의 오만 불손함도 역시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김몽로는 절도사(節度使)이고 구택규는 하나의 영(營) 아래에 있는 하관(下官)인데, 하관은 일 때문에 절도사를 파직하면 혹 변이 있어도 영 아래에 있는 관원에게 명령을 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홍주(洪州)의 유학(幼學) 이일장(李日章)이 상소하여 시폐(時弊) 8조(條)를 아뢰니, 비답하기를,
"응지(應旨)한 정성을 내가 가상히 여긴다. 조진(條陳)한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6월 20일 신해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의 장계로 인해 말하기를,
"전주(全州)의 장세(場稅)는 본래 공용(公用)을 위한 것이어서 사수(私需)로 돌아가지 않으니, 혁파(革罷)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비국 당상 김재로(金在魯)·송인명(宋寅明) 등의 의논도 모두 같았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시장(市場)에서 세금을 받지 않음은 바로 삼대(三代)의 일이나 후대에 어찌 옛법을 다시 행하겠습니까? 청인(淸人)의 법은 백성들의 부세(賦稅)는 가볍고 상인의 부세는 무겁습니다. 이 때문에 부강(富强)하게 되었으니,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재산을 불리는 요령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세는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또 한 도신(道臣)이 장계로 청하여 이미 혁파한 것을 문득 회복시키는 것은 소각(銷刻)239)  한 데에 가깝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여러 도의 이해를 물어 상세히 하기를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후에 이수항이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각읍을 장세를 징수하니 중추(重推)하라 명하였으며, 함경 감사 윤양래(尹陽來)와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환곡(還穀)을 반분(半分)하여 보류(保留)하는 법을 어겼으므로 또한 중추를 명했으니, 모두 조문명의 말로 인해서였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관서 어사(關西御史) 이종성(李宗城)이 시사(試射)할 때에 몰기(沒技)240)  한 자를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한 것은 지나친 은혜이니, 청컨대 중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니, 후에는 예(例)를 삼지 말라."
하였다. 또 김재로의 말로 인하여 명하기를,
"국경을 넘어온 청인(淸人)을 붙잡은 자는 우리 나라 사람이 국경을 넘어간 자를 가리켜 잡은 자와 같은 상(賞)을 주라. 금려(禁旅)가 바로 숙위(宿衛)하는 것은 다른 군졸(軍卒)과 차이가 있으니 비록 총관(摠管)이라 하더라도 사사로운 일로써 죄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함은군(咸恩君) 이삼(李森)이 말하기를,
"정삼장(精三壯) 신포(身布)를 이미 전감(全減)하였으니, 서관(西關)의 군정(軍政)이 반드시 허술할 것입니다. 대개 수령(守令)들이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데에 전념(專念)하여 단속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또 연습하는 도리에도 어두워 혹 위급한 일이 있어도 쓸 수가 없을 것이니, 마땅히 엄히 신칙해야 합니다."
하였다. 비국 당상 윤유(尹游)가 말하기를,
"청남(淸南)241)  의 정삼장(精三壯)은 고을마다 정원이 많아 족히 한 영(營)의 제도를 이룰 수 있고, 청북(淸北)242)  은 한 고을에 불과 3,40명이어서 단속하는 자는 모두 병영(兵營)에 소속된 수영패(隨營牌)와 연별대(演別隊)입니다. 수영패는 정삼장과 더불어 동시에 설립하여 병사(兵使)의 친병(親兵)이 되었고, 연별대는 유비연(柳斐然)이 창설한 바인데 그 숫자가 역시 천 수백 명입니다. 다 같이 대(隊)를 만든 군사인데, 정삼장은 포(布)를 감하고 수영패와 연별대는 감해 주지 않았으니, 이미 고르지 못하며 또 원망이 있게 됩니다. 이제 마땅히 조금 분별을 가하여 청남에는 전대로 영장(營將)을 두고 별달리 조련(操鍊)하여 포를 감해 준 효과가 있게 할 것이요, 청북은 정삼장을 2천여 명으로 한정하여 병사(兵使) 김흡(金潝)의 소청에 의하여 병영(兵營)에 붙여서 친병을 별도로 두어 번을 들게 해 조련하기를 마치 감영(監營) 장십부(壯十部)의 예에 의하면 되나,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묘당으로 하여금 감사·병사에게 절목(節目)을 보내어 강확(講確)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사성(大司成)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비변사는 마땅히 먼 곳 사람을 회유(懷柔)하고 변방의 정세에 익숙해지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합니다. 새로 차임한 무낭청(武郞廳) 주표(朱杓)는 바로 북방의 걸출(傑出)이며 또 문필(文筆)이 뛰어나 대신과 여러 재상들이 모두 가하게 여기는데, 유독 낭속(郞屬)만은 천망(薦望)의 자격이 없다 하여 저지(沮止)합니다. 청컨대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북쪽 사람 황여집(黃汝楫)을 쓴 예에 의해 구애받지 말게 하소서."
하였다. 윤유(尹游)와 송인명(宋寅明) 등이 또 관서(關西) 사람을 참작해 써야 한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북(西北)을 물론하고 그 가운데서 뛰어난 자를 뽑아 이따금 차임하여 변방 일에 익숙하게 하고 인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이때에 청(淸)나라 예부(禮部)에서 망우초(莽牛哨) 지방에 수로(水路)를 설치하여 추신(秋汛)243)  을 방어하는 일로 우리 나라에 이자(移咨)하였다. 망우초는 바로 봉황성(鳳凰城) 근처의 초하(草河)와 애하(靉河)가 합해 감돌아서 들어오는 곳인데 경계가 우리 나라와 서로 접해 있으니, 북자(北咨)의 뜻은 땅을 개척하는 데 있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순치(順治)244)   때부터 책문(柵門) 밖 1백여 리의 땅을 버려두고 피차 서로 접하지 못하게 했으니, 그 뜻이 심원(深遠)했던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변방 백성들이 근래 매우 간악하여 경계를 넘어 이거(移居)하는 자가 있으니 마침내 반드시 대국(大國)에 죄를 얻을 염려가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이자하여 방색(防塞)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관각(館閣)으로 하여금 회자(回咨)를 지어 날짜를 정하여 출발해 보내도록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 김정윤(金廷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과명(科名)을 중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서 결코 전에 없던 은상(恩賞)을 창출(創出)함은 옳지 아니하니, 청컨대 관서(關西)의 세 무사(武士)를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또 윤허하지 않았다. 김주(金鑄)에 대한 전계는 정지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천릉(遷陵)의 역을 6월 12일 묘시(卯時)에 시작하여 참파토(斬破土)245)  는 6월 23일 진시(辰時)에, 사후토(祠后土)246)  는 같은 날 새벽에 개금정(開金井)은 8월 초2일 사시(巳時)에, 외재궁(外梓宮) 배진(陪進)은 8월 초7일 묘시에, 산릉(山陵) 출발은 8월 30일 축시(丑時)에, 하현궁(下玄宮)은 8월 30일 진시에, 구릉(舊陵)을 파는 것은 8월 16일 묘시(卯時)에, 계찬궁(啓攅宮)은 8월 27일 진시에, 발인(發靷)은 같은 날 사시(巳時)에 하는 것이 길(吉)하며, 천릉할 때 재궁(梓宮) 상자(上字)를 쓰는 것은 8월 26일 사시가 길합니다. 마땅히 대전관(代奠官)으로 하여금 그날 조전(朝奠)을 올릴 때에 고유(告由)하게 할 것이며 능에 있는 백관은 마땅히 초상(初喪)의 예에 의해 반곡(班哭)에 들어와야 합니다. 대왕(大王)·왕후(王后)의 명정(銘旌)을 고치는 것은 8월 15일 진시가 길하니, 청컨대 이렇게 지위(知委)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때 연일 비바람이 몰아쳐 종묘(宗廟)와 능침(陵寢)의 나무가 많이 부러졌으므로,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백수일(白守一)이 금령(禁令)을 어기고 단파장(丹把將)에게서 삼(蔘)을 징수하다 일이 발각되어 삭직(削職)되었다.

 

6월 21일 임자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인견(引見)하고 명하기를,
"윤대관이 입시(入侍)하는 차례를 《대전(大典)》에 기록된 관사(官司)의 이름에 의하여 서로 뒤섞이지 말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옛날 재상들은 사람이 상한 것은 묻지 않고 소가 헐떡이는 것을 물었다고 하나,247)   임금에게 중한 것은 인명(人命)이다. 지난번 모화관(慕華館)의 남문(南門)을 본즉 기와가 없었으니 풍우가 치면 반드시 쉽게 쓰러질 것이다. 만약 과장(科場)을 설치하게 된다면 어찌 허다한 거자(擧子)가 다치지 않겠는가? 유사는 한갓 눈앞의 작은 비용만 생각하고 후일 인명이 다칠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매우 사람을 돌보는 뜻이 아니다. 고쳐 수즙(修葺)하게 하라."
하고, 인하여 해조의 당상을 추고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응교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어제 신이 대궐 안에서 듣건대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궁차(宮差)가 소란을 피운 일을 장문(狀聞)하였다고 하는데, 그 죄는 양녀(良女)를 겁탈하고, 군정(軍丁)을 늑매(勒買)했으며, 금송(禁松)을 벴다는 것으로 이 세 가지 죄가 모두 발각되어 사실에 의해 장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 외읍(外邑)의 백성이 비록 부녀자나 어린아이 또는 미천한 자도 모두 성상께서 백성을 사랑하는 덕(德)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여항(閭巷)의 사부(士夫)로 말하더라도 그의 건장하고 사나운 노복(奴僕)을 풀어서 평민들과 서로 다투어 원망하는 말이 있게 되면 사대부인 자도 또한 반성(反省)하여 겸연쩍은 뜻이 있을 것인데, 더군다나 전하께서는 당당한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써 도리어 궁차(宮差)를 조종하지 못해 성지(聖旨)를 빙자(憑藉)하여 불법을 자행하게 했으니, 마땅히 통렬히 징치(懲治)를 가해 여러 듣는 사람들을 용동(聳動)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예에 따라 계하(啓下)하고, 해조 역시 예대로 감죄(勘罪)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성상께서 결단하여 특별히 엄히 다스리어 하찮은 궁차로 하여금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이름은 평소 알지 못하는 자이다. 반드시 외읍 사람이 차인(差人)이란 이름을 빌린 것 같으니 이번 해조에 계하(啓下)한 것이 또 어찌 누를 끼치는 데 이르겠는가?"
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신이 진달한 바는 단지 궁차의 죄가 혹 군덕(君德)에 누를 끼칠까 염려한 것이요, 해조에 계하했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구릉(舊陵)을 파는 것이 8월 16일, 하현궁(下玄宮)이 같은 달 30일이니, 모든 크고 작은 제사는 8월 16일부터 30일까지 정지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그이 옳게 여겼다.
명하기를,
"서북(西北) 무사(武士)의 우등(優等) 몰기(沒技)한 이가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는 법을 회복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러 신하들이 외방 몰기자의 간위(奸僞)가 많고 은상(恩賞)이 지나치다고 진달한 일이 있었고, 혹은 그 화살의 숫자를 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마침내 윤허하였다. 그후 관서의 무사들이 억울하다고 함이 많았기 때문에 임금이 진념(軫念)하여 마침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헌부 【장령 김정윤(金廷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기조랑(騎曹郞)248)  은 당하관으로서 청망(淸望)이 되는데, 좌랑(佐郞) 남전(南纏)은 평소 명칭이 부족한데다 늙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으로,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6월 22일 계축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새 능의 표석(表石)은 너비가 2척, 길이가 7척이어서 체양(體樣)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마땅히 너비 4촌(寸)을 더해야 하나 구제(舊制)와 다르게 되니, 품재(稟裁)를 거쳐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홍치중이 또 말하기를,
"영릉(英陵)의 원경(園徑)을 이미 재어 가지고 왔으나, 석물(石物)을 배설하는 것은 역시 마땅히 이에 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릉은 동자석(童子石)에 12방위(方位)를 새겼고, 장릉(長陵)에는 인석(引石)에 새겼으니, 어느 것을 따라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원경 및 석물의 배설은 영릉에 따르고, 방위는 장릉과 같게 하라."
하였다.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가 말하기를,
"근래에 무과(武科) 출신들이 매우 적체되고 있는데 대개 과거(科擧)가 너무 잦은 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수(身手)가 좋고 재예(才藝)가 많은 자들이 그 재능을 시험하지 못해 군문(軍門)의 장교(將校)에 소속되기를 많이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영청(御營廳) 초관(哨官)이 1백 20명이던 것을 감하여 80명이 되었고, 또 감하여 40명이 되었습니다. 숙종조 신사년249)  에 대장(大將) 이기하(李基夏)의 말로 인해 다시 80명으로 하였으나 경자년250)  에 또 임시로 38명으로 감해 중간에서 늘이고 감한 것이 한결같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복구한다면 거의 소통(疏通)하여 위안할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금위영(禁衞營)·어영청(御營廳) 두 영에 12명씩을 더 하라."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이 또 말하기를,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사우(祠宇)에 향화(香火)가 끊어진 것이 이미 2년입니다. 일찍이 입후(立後)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아직껏 처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군의 후사(後嗣)는 의원군(義原君)의 아들이 있으니, 특별히 입후하도록 함이 옳다."
하였다.

 

 

 

6월 24일 을묘

임금이 이미 의원군의 아들 안흥군(安興君) 숙(琡)을 인평 대군의 후사(後嗣)로 삼으라 명하고, 또 전교하기를,
"해(垓)251)  에 대한 계사를 아직껏 윤허하지 않은 것이 어찌 그 사람을 위해서이겠는가? 만약 윤허한다면 척강(陟降)하는 성조(聖祖)의 영혼이 나를 어떻게 여기시겠는가? 매양 이 계사를 들으면 내 마음이 쓰라리니, 이 계사를 정지하지 않으면 대군(大君)의 신주(神主)를 박루(薄陋)한 곳으로 옮기게 될 것이다. 이 이름이 비록 입후라고는 하나 사실은 제사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 된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어제 대신이 진달한 바를 들으니 대군의 향화(香火)가 끊어진 지 이미 해를 넘겼다고 하니, 아! 박덕(薄德)한 내가 구족(九族)과 친목하지 못해 시복지친(緦服之親)으로 하여금 서로 이어 고금에 드문 일이 있게 만들었다. 대군의 향화가 이와 같이 오랫동안 끊어졌으니 어찌 그 자손만 불충(不忠)해서이겠는가? 이는 또한 나의 허물이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특별히 대군의 사당에 치제(致祭)하게 하라."
하였다.
헌부 【장령 김정윤(金廷潤)과 지평 남태제(南泰齊)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는데, 해(垓)의 일에 이르러서는 계사를 고쳐 말하기를,
"역적 해의 집을 파 못을 만들자는 한 조항은 해를 넘기면서 쟁집(爭執)했으나 아직껏 윤허를 아끼시니 여론이 진실로 이미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가내린 비망기를 보건대, ‘이를 빨리 정지하여 신도(神道)를 위로하고 내 마음이 풀리게 하라.’라고 하교하셨으니, 신들은 의아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아! 해는 왕실의 지친으로서 형제가 함께 역적질을 하여 일시에 복법(伏法)되어 옛날의 기업(基業)을 장차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전하께서는 옛날을 깊이 생각하시고 친족(親族)과 같이 돈목함이 지극하시니, 마땅히 마음이 상하시어 이 때문에 대군의 입후(入後)를 하게 된 것입니다. 다만 역절(逆節)이 극도로 흉악함이 해(垓)·기(圻)와 같은 두 역적에게도 이미 시조(市朝)에서 상형(常刑)을 쾌히 바루지 못하였고 차례로 응당 시행해야 할 율(律)에 이르러서도 또 시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난적(亂賊)을 징계하고, 국법을 엄히 하겠습니까? 청컨대 유사에게 명하여 역적 해의 집을 파헤쳐 못을 만드는 율을 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해의 일은 위에 있는 사람이 법을 굽히려는 것이 아니니, 아래에 있는 자가 버틸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은 척강(陟降)하는 마음을 우러러 본받고 있는가? 하교가 실로 측달(惻怛)하는 데서 나왔으니, 대신(臺臣)이 고집함은 부당하다. 빨리 정계(停啓)하라."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심육(沈錥)이 교외(郊外)에 있으면서 진소(陳疏)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를 생각하던 중에 또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하게 되어 특별히 들어올 것을 명하였다. 관직(官職)으로 부른 것이 아니요 바로 학문 때문인데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즉시 올라오라."
하였다.

 

 

 

이윤신(李潤身)을 정언으로, 박사정(朴師正)을 응교로, 임정(任珽)을 수찬으로 삼았다.
6월 25일 병진

가평(加平) 등 고을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잠겼으며, 함경도 북청(北靑)에는 서리가 내렸다고 도신(道臣)이 아울러 계문하였다.


 

6월 27일 무오

햇무리가 졌는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청적색(靑赤色)이었다.

 

 

 

전(前) 주부(主簿) 한원진(韓元震)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길에서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연중(筵中)에서 ‘명 태조(明太祖)가 맹자(孟子)를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합니다. 먼 외방에 떠도는 말이어서 비록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혹 털끝만큼이라도 근사(近似)하다면 거의 한 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맹자의 어짊은 한(漢)나라 이후로 매우 존상(尊尙)하였는데 명 태조가 갑자기 배척을 가하였고, 이로 인하여 여러 유현(儒賢)을 더욱 경멸하여 주자(朱子)를 오활(迂闊)한 노유(老儒)라고 지목했으며, 또 친히 논문(論文)을 저술(著述)하여 경설(經說)을 무너뜨렸습니다. 처음에 가르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명나라의 세대(世代)가 마치기까지 도술(道術)이 밝혀지지 않았고 이단(異端)이 분분하게 일어났으며 의리(義理)가 날로 어두워지고 습속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유자(儒者)라고 이름한 자들이 걸핏하면 정주(程朱)에 대해 이론(異論)을 세우고 성현(聖賢)을 능가(凌駕)하여 세도(世道)가 윤상(淪喪)되고 화란(禍亂)이 그 틈을 탔으니, 그 혹심한 화가 거의 서진(西晉)의 청담(淸淡)252)  보다 심했습니다. 이는 비록 명 태조가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그 유폐(流弊)의 원인(原因)이 되었으니 백세 후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태조의 성덕(盛德) 신공(神功)으로써 어찌 도리어 그 보효(報效)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대저 성현(聖賢)이란 천도(天道)가 있는 바인데 천도가 있는 바를 임금이 경시하면 본디 하늘의 보우(保佑)를 받지 못하는 것이 그 이치가 분명하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우리 열성조(列聖祖)께서는 유도(儒道)를 높이고 중히 여겨 치도(治道)가 융성하여 이미 그 보답을 받고 계신데 불행하게도 세도가 점차 낮아져 사설(邪說)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성고(聖考)께서 통렬히 척절(斥絶)을 가하시어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심에 힘입어 혹은 그 사람을 죄주기도 하고, 혹은 그 책을 없애기도 해서 성(聖)을 익히고 도(道)를 보위(保衛)한 공이 실로 우(禹)보다 아래에 가지 않았으니, 억만 년 이어질 아름다움이 또 이에서 터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신서(臣庶)가 전하께 바라는 바는 오직 성고(聖考)의 뜻과 일을 계술(繼述)하는 데 있는 것인데 이제 갑자기 이런 하교가 있어 원근에서 전해 듣고는 못내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성상의 학문이 고명(高明)하시어 반드시 스스로 이런 하교를 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깁니다마는, 혹 참으로 있었다면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회오(悔悟)하는 뜻을 쾌히 보이시어 중외의 의혹을 풀어 주소서. 만약 또 그른 것을 그대로 답습(踏襲)해 나간다면 신처럼 우루(愚陋)하여 한갓 성현을 존숭할 줄만 알고 변통할 줄을 모르는 자들은 어찌 감히 갑자기 전하의 조정에 나아가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소는 재계일(齋戒日)이었기 때문에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었다. 부응교 김상성(金尙星), 부교리 윤휘정(尹彙貞) 등이 차자로 한원진의 소를 변석(辨釋)하기를,
"길에 전파(傳播)된 소문이 어떻든간에 본디 들은 대로 진계함은 해로울 것이 없으나 초야(草野)에 있는 사람이 이로써 거취(去就)를 결정하는 큰 관건을 삼았으니, 그가 정확하게 들은 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 명나라 조정의 그 당시 일은 실로 성덕(聖德)의 누(累)가 되었으니, 전하의 위도(衛道)하는 정성으로 보아 결코 이런 일이 없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원진이 존신(尊信)하는 자를 전하께서 유독 존신하지 못하셨고, 한원진은 그 말을 들었으나 신들은 듣지 못하였으니 어디에서 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자루 붓으로 써내린 것이 아주 적절하지 않으니, 초야의 오만한 말이 이처럼 말을 하는 것은 괴이 할 것이 없습니다. 그의 자처(自處)함이 비록 높다 해도 한결같이 어찌 이처럼 살피지 못하기에 이른단 말입니까? 참으로 전하께 이런 하교가 계셨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천고의 거룩하지 못한 임금이 됨을 면치 못하고, 신들 역시 바로잡지 못한 죄를 면치 못합니다.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하니 마땅히 즉시 허실을 변론하여 중외의 의혹을 풀게 하소서."
하였다. 차자가 들어가자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한원진의 상소를 가지고 입시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한원진의 상소를 보고는 전교하기를,
"세도(世道)가 이미 어그러져 오직 이기기만 힘써 이에 이른 것이다. 태조가 비록 지나친 일을 하였지만 그때 조정에 서지 않는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내가 과연 그런 말을 했다면 어찌 다만 나라를 망칠 뿐이겠는가? 신하가 된 자가 광구(匡救)하는 것은 옳지만 어찌 조정에 서지 못할 의리가 있겠는가? 옛날 처사(處士) 조식(曹植)의 상소 가운데 과격한 말이 많았으나 성조(聖祖)께서 초야의 오활한 말이라 하여 죄를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다. 대개 내가 전에 하교하기를, ‘황명 태조(皇明太祖)의 일이 비록 과중(過中)하나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를 밝힌 것은 매우 엄절(嚴截)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 말기에 충신(忠臣)이 많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연히 요사이의 시상(時象)으로 인해 한 말이었다. 한원진의 상소는 비단 임금을 무함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황조(皇朝)를 비난까지 했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한원진은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들어가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배웠다고 하는데 감히 황조의 일을 이와같이 논하니, 존주(尊周)253)  의 의리에 어떻겠는가?"
하니, 김상성이 말하기를,
"전하의 성인을 높이고 도(道)를 보위하는 정성으로 어찌 한원진의 상소에 있는 말과 같음이 있겠습니까? 이는 전하는 자가 잘못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헛소문이 와전(訛傳)되어 만약 성상이 공맹(孔孟)을 존숭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관계된 바가 역시 작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한원진은 황명 태조와 맹자를 서로 거론하여 감히 별도의 의리를 만들었으니, 참람하고 망령됨이 심하다. 한원진은 산림(山林)에 있는 사람으로 역시 시상(時象) 가운데 들었으니, 내가 매우 그르게 여긴다. 나의 전일 하교는 군신(君臣)의 분의를 엄하게 하려 한 것이지 다른 뜻이 없었는데 도리어 괴이한 말을 하여 서로 유전(流傳)해 풍파(風波)를 일으키니 그런 조짐을 키워서는 안된다. 이는 그때 사관(史官)의 죄이다."
하고, 그날 입시한 사관을 나국(拿鞫)하라고 명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나국과 나문(拿問)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상의 하교를 잘못 전한 것이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만, 언어(言語)와 문자(文字)로서 언근(言根)을 따져 묻는 것은 성세(盛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더군다나 나국의 율은 과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6월 28일 기미

밤에 별이 규성(奎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5,6척이며, 붉은 색이었다.
밤 2경(二更)에 경휘전(敬徽殿)의 제주(題主)를 고치는 예(禮)를 행하였는데, 임금이 공수(拱手)하고 서서 예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6월 29일 경신

임금이 경휘전 연제(練祭)를 친히 행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국휼(國恤) 초상(初喪)의 빈전(殯殿)에는 천신(薦新)하는 절차가 있으나 천릉할 때에는 그런 예가 없습니다."
하니, 예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단천(端川)에 황재(蝗災)가 있었고, 홍원(洪原) 등 고을에는 큰비가 내려 시내가 범람했다.

 

역관(譯官) 김경문(金慶門)을 보내어 회자(回咨)를 지니고 연경(燕京)에 가도록 했는데, 바로 청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에서 수로(水路)를 만들어 추신(秋汛)을 방어하는 일을 물은 데 대한 답이었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상(皇上)의 지극히 인명(仁明)하심이 소방(小邦)의 괴로움에 관계된 것은 반드시 모두 간곡히 생각하시고 불쌍히 여겨 덮어 주셨습니다. 이번에 수로를 설치하여 추신(秋汛)을 방어하는 청은 중함이 간사(姦邪)함을 징즙(懲緝)함에 있는데, 오직 황상께서 만리를 보시어 혹 소방에 불편함이 있을까 염려하시어 특별히 물으시어 이 자문이 있게 되었으니, 더욱 황상께서 소방을 감싸주신 어짊이 주밀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어 우러러 감격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 일의 편리 여부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우리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굉달(宏達)한 규모와 회유(懷綏)하신 덕으로써 봉강(封彊)을 신중히 하여 번방(藩邦)을 돌보아 주신 것이 활략(濶略)과 섬실(纖悉)한 두 가지에 그 도를 다하셨습니다. 설책(設柵)한 후에 비록 번갈아 가며 순검(巡檢)하여 원방(遠方)을 안정시키는 방도를 다 갖추었고, 또 반드시 지계(地界)를 널리 비워두어 인호(人戶)가 유접(留接)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성의(聖意)가 보통에서 만 갑절이나 더하였습니다. 우리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에 이르러서는 영고탑(寧古塔) 수장(守將)이 소방의 북도(北道) 경원(慶源)·훈융진(訓戎鎭)의 건너편에 유병(留兵)을 첨가해 설치하여 막을 치고 전답을 개간하기에 이르렀는데 소방에서 자문으로 진달함으로 인해 성조 인황제께서 특별히 철훼(撤毁)하기를 명하셨으니, 성려(聖慮)가 심원하심이 전후로 한결같았습니다. 소방이 변경의 일로써 황조(皇朝)에게 큰 꾸지람을 면한 것은 오로지 이에 힘입은 것입니다. 대개 이 초하(草河)와 애하(靉河) 두 물이 합쳐 들어오는 곳은 바로 소방의 변계(邊界)인데 소방의 변방 백성들 중에 이따금 완악한 자가 많아 조금만 편리한 기회가 있으면 틈을 타서 문득 다시 간사한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수로를 새로 설치하고 추신(秋汛)을 방어한다면 관리와 병정(兵丁)을 더 파견하여 오랫동안 가까운 곳에 머물게 되어 와포(窩鋪)254)  가 서로 이어지고 주즙(舟楫)이 서로 통할 것이니 그 염려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중강(中江)의 시장(市場)이 그 옆에 있으니 갖가지의 간교한 폐단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방에서 비록 십분 엄히 신칙하고 마음을 써 정찰하더라도 막을 도리가 없어 마침내 죄를 짓게 될 것이니 황조에서 감싸주는 덕으로써도 어떻게 매양 관대히 덮어 주시겠습니까? 이에 황제의 자비하심을 믿고 정상을 모조리 앙대(仰對)합니다. 원하옵건대 그 시작을 신중히 하여 싹트는 것을 막으시고 한결같이 구례(舊例)를 지켜 소방의 변방 백성들의 범죄하고 작간(作奸)하는 폐단을 끊어버리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홍문 제학(弘文提學) 송인명(宋寅明)이 지은 것이었다.

 

 

 

6월 30일 신유

도승지 송성명(宋成明)이 또 말하기를,
"사관(史官)을 나국하는 것은 과중합니다."
하고, 약방 제조(藥房提調) 김재로(金在魯) 역시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한원진(韓元震)의 상소에 이미 말하기를, ‘성상께서 그런 일이 있으면 마땅히 고치시고, 그렇지 않고 그른 것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신은 감히 갑자기 나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니, 이는 의(義)를 어기고 분(分)을 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성상의 처분 역시 마땅히 예(例)에 따라 비답하실 뿐이요, 성인께서 다가오는 사물(事物)에 대하여 순순히 응해주는 도리로써 반드시 지나치게 처분하여 선비를 대우하는 뜻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도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라.’255)  는 말이 있었으니, 만약 나더러 혼암(昏暗)하다고 하면 내가 노하지 않을 것이나 그의 뜻은 시상(時象)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사관이 경연의 말을 전파한 것은 분의를 범한 데 가까우니, 징계가 없어서는 안된다. 내가 그 공사(供辭)를 보아가며 마땅하게 처리한 것이다."
하였다. 송성명이 ‘국(鞫)’자는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분(名分)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불순(不順)한 것이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그날 유신(儒臣)이 진차(陳箚)한 것은 대개 보도(輔導)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은 밤에 인접(引接)하여 상하가 모두 바빴기 때문에 착오가 생긴 것이다. 모든 일은 잘 헤아려 하는 것보다 나음이 없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효종(孝宗)께서는 일찍이 ‘노여워할 만한 일이 있으면 그냥 두었다가 그 노여움이 풀린 다음 이튿날을 기다려 처리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이는 후세의 법이 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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