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임술
임금이 친히 삭제(朔祭)를 경휘전(敬徽殿)에서 행하였다. 수릉관(守陵官) 해흥군(海興君) 강(橿)과 시릉관(侍陵官) 박찬문(朴贊文), 제주관(題主官) 송성명(宋成明) 등에게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고, 그 나머지는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7월 2일 계해
밤에 유성(流星)이 주성(廚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3,4척쯤 되었고, 빛깔은 희었다.
7월 3일 갑자
도승지 송성명(宋成明)이 말하기를,
"숭의전(崇義殿)에서는 봄·가을로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제사를 지내는데, 해당 신위(神位)에 대하여는 전고(專告)하는 축문(祝文)이 있으나 부제(祔祭)하는 현종(顯宗)·문종(文宗)·원종(元宗)의 세 분 신위(神位)에 있어서는 다만 고축(告祝)이 있을 뿐입니다. 이번에 따로 치제(致祭)를 행할 때에도 역시 이 준례를 적용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전례와 같이 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도승지에게 그곳에 나아갈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친히 추향 대제(秋享大祭)를 경휘전(敬徽殿)에서 행하였다.
좌의정 이집(李㙫)이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臣)이 일찍이 ‘익릉(翼陵)의 정자각(丁字閣)은 기둥 하나가 손상을 당하였으니 수개(修改)해야 된다.’는 것을 말했는데,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완전히 고치질 않고 약간 수리만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살펴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전에 사관(史官)을 잡아 국문하라는 분부는 가노 재피(可怒在彼)256) 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억탁(臆度)으로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뒷날의 폐단에 관계됨이 있으니, 마땅히 도로 환수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 정자각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토록 하라. 사관의 일은 경연(經筵)에서의 일을 근거없이 전파하였으니, 몹시 무엄한 일이며, 그것이 와전(訛傳)되어 이에 이르렀다. 이번에 내린 이 부분는 바로 후일을 징계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윤동형(尹東衡)을 부교리로, 황정(黃晸)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4일 을축
이때 여러 도(道)에서 파손된 선박으로 인해 사람이 빠져죽고 물건이 가라앉은 상황이 계속해 들려오니, 임금이 그것을 측은하게 여기며 본도(本道)로 하여금 특별히 고휼(顧恤)을 더하고 그 존몰(存沒)을 수문(搜問)하여 아뢰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곡물을 건져낼 즈음에 사람을 건지는 데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다 하니, 아! 유정지공(惟正之供)257) 이 비록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람의 목숨에 비하면 도리어 경미한 것이다. 아! 선인(船人)들을 장차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내게 될 터이니, 마치 아픔이 나 자신에게 있는 듯하다. 여러 고을에 각별히 타일러서 표류하는 시체들을 낱낱이 건져내고 그 중에 주인이 없는 것은 소재처의 고을로 하여금 건져내는 대로 시체를 묻어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배에 물건을 적재함에 있어 한도를 넘기는 폐단을 신칙(申飭)하였다.
함경도 사람 차일원(車一元)이 그 아우를 구제하기 위하여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 임금이 도신(道臣)의 장계(狀啓)를 보고 그 행실을 가상하게 여기어 특별히 고휼(顧恤)을 가할 것을 명하였다.
교리 김상석(金相奭)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가뭄이 몹시 혹독하여 백성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호남(湖南)이 더욱 심합니다. 진안(鎭安)하는 방도는 다만 진활(賑活)하는 데 달려 있으니, 청컨대, 조전(漕轉)258) 하지 말게 하시고, 대동미(大同米)와 전작미(錢作米)를 남겨서 진휼(賑恤)에 필요한 물자에 보충하도록 하소서. 각사(各司)의 도망하거나 죽은 노비를 인족(隣族)에게 징수하는 것도 또한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이 됩니다. 더구나 흉년을 당해서는 더욱 진념(軫念)해야 하니, 마땅히 도신과 수령으로 하여금 상의하고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해야 합니다. 각 고을에서 삼국(三局)에 바치는 보미포(保米布)는 징수하지 못한 경우가 대체로 많습니다. 징수할래야 징수할 데가 없어서 아직도 준봉(準捧)하지 못하고 있는데 경국(京局)에서는 곧바로 저인(邸人)259) 을 수감하여 엄하게 독촉을 가하자, 심지어 저인이 대신 공납한 경우도 있으니, 실로 이는 지탱하기 어려운 단서입니다. 더구나 조정에서 금령(禁令)이 있었으니 마땅히 각 고을로 하여금 기한을 너그럽게 잡아서 수납(收納)하도록 하고 이미 저인에게 징수해 들인 것은 마땅히 돌려주도록 하되, 종전에 내린 금령을 거듭 밝혀서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진(疏陳)한 두 가지 일은 이미 묘당(廟堂)에서 신칙(申飭)한 것이며, 소말(疏末)의 일은 진달한 바가 진실로 그러하다. 삼국에 엄하게 타일러서 이러한 폐단이 없게 하라. 그리고 그 근본은 수령이 부지런하지 못한 데 연유한 것이니, 또한 신칙(申飭)함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 수환(水患)과 풍재(風災)가 예년에 없이 엄청나게 발생하였는데, 호남이 더욱 심하였다. 더러는 바람에 맞아 급사한 사람도 있었고, 장흥(長興)의 백성 2백 30여 호(戶)는 표류하여 실종되고 무너져 깔려 죽었다. 모두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경상도 경주(慶州)에서는 한 배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은 백성이 있었고, 영산(靈山)의 민가(民家)에서는 소가 숫송아지를 낳았는데 머리 둘 발 여섯 꼬리는 둘이었다. 도신(道臣)이 변이(變異)로 장문(狀聞)하였다.
사간 허옥(許沃)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평소에 자기 혼자만의 지혜로써 세상을 다스려 여러 신하들을 경시하는 병폐가 있으시고, 총명으로 스스로 잘난 체하여 좋은 말을 받아들이는 아량이 부족합니다. 부드러워서 제어하기 쉬운 사람을 좋아하고 바른말 하는 사람은 명예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시니,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안색이 진실로 이미 천리 밖에서 사람을 막습니다. 궁장(宮庄)의 절수(折受)와 궁속(宮屬)이 제멋대로 날뜀은 영남(嶺南) 도신(道臣)의 사계(査啓)가 있기에 이르렀는데, 한결같이 가리고 덮어 부당하게 두둔함을 보이셨습니다. 육지(陸贄)260) 의 이른바 ‘말로써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느끼는 바가 이미 얕고, 말 또한 절실하지 않으니, 사람이 누가 즐거이 따르겠습니까?’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전하의 사심(私心)을 능히 버리지 못한 결과로 인해 위로 성덕(盛德)을 더럽힌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고, 사관(史官)을 잡아다 국문한 일이 정도에 지나쳤음을 논하니, 임금이 ‘면계(勉戒)한 것을 마땅히 유의하겠다.’고 우답(優答)하였다.
7월 5일 병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 형조 판서 윤유(尹游)가 말하기를,
"형조와 호조의 낭관(郞官)은 바로 사송(詞訟)261) 이니 6개월을 채워야만 비로소 다른 관직으로 전직(轉職)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형조·호조·의금부·장례원(掌隷院)의 낭관이나 감찰(監察) 등의 관원은 6개월이 되기 이전에는 이차(移差)할 수 없고, 승차(陞差)나 읍(邑)을 계청(啓請)함에 있어서는 비록 6개월이 되지 않았더라도 현주(懸註)262) 할 수 있으나, 만일 3개월이 되기 이전에는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윤유가 또 말하기를,
"도배(徒配)를 당하여 도망을 가서 1년을 기준하여 사면하지 않은 자는 매우 많고, 20년 동안 돌아오지 않은 자도 있으며 3,40년이 지나 자신이 죽었는데도 석방되지 않은 자도 있으니, 마땅히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죄가 무거운 자는 비록 죽었더라도 의논할 수 없으며, 가벼운 자는 10년을 한도로 잡아 별단(別單)으로 적어 올려 탕척(蕩滌)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윤유가 또 말하기를,
"소를 도살하는 데 적용하는 형률은 처음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263) 이었으나 을사년264) 이후로는 그 형률을 경감하여 심지어는 3차의 형(刑)을 가한 뒤 방송(放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새로 교령(敎令)을 받은 것은 죄질은 같은데 적용하는 형률은 다르니, 마땅히 귀일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이 다음에 다시 교령을 받을 것을 명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대흥 산성(大興山城)은 중간에 포기해서 군향(軍餉)이 적고 기계(器械)가 낡았습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보수를 가하였습니다. 이른바 태안창(泰安倉)이란 곳은 대흥 산성과 청석동(靑石洞)의 중간에 있어 좌우의 접응(接應)하는 곳이 되는데, 약간의 거민(居民)들이 무신년265) 의 변란(變亂) 때에 도망하여 흩어졌기 때문에 창고와 관아가 몹시 허술합니다. 그러므로 전 유수(留守) 이기진(李箕鎭)이 백성을 모집하여 초(哨)를 만들었는데, 지금 거의 90여 명이 되고 아병(牙兵)이라 칭합니다만, 기계가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삼군문(三軍門)266) 과 수어(守禦)·총융(摠戎) 두 청(廳)으로 하여금 조총(鳥銃)을 나누어 지급하도록 하고, 나머지 부족한 수효는 마땅한 본부(本府)로 하여금 준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서명균이 또 말하기를,
"개성부의 문신(文臣)으로 병조에 적합한 자와 무변(武弁)으로 내삼청(內三廳)267) 에 가합한 자는 마땅히 종전대로 허통(許通)해야 하고 장교(將校)로서 오래 근무한 자는 만일 벼슬자리가 모자랄 때가 아니면 정식(定式)에 따라 수용(收用)해야 하며, 교수(敎授)는 본부(本府)의 사람으로써 차송(差送)하고, 유생(儒生)으로서 문지(門地)와 재행(才行)이 서사(筮仕)268) 에 적합한 자는 마땅히 거기에 합당한 직위를 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따라 양전(兩銓)에 신칙(申飭)하였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능(陵)을 천장(遷葬)할 때에 외정(外庭)에서 배제(陪祭)하는 백관(百官)들이 형편상 나누어 침례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정자각(丁字閣)과 영악전(靈幄殿) 중앙에다 반차(班次)를 만드소서."
하니, 임금이 홍살문 안에서 배제할 것을 명하였다. 신사철이 말하기를,
"이번의 이 천릉은 계축년269) 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정자각과 영악전에 각기 신위(神位)를 마련하니, 수빈관(守殯官)과 시빈관(侍殯官)이 왕래하며 일을 보는 데 구애스러운 단서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마땅히 각각 한 사람씩을 더 차출하여야 합니다. 대전관(代奠官)은 전작(奠酌)하고 독축(讀祝)하는 절차가 있는데, 또 수빈관의 직임을 겸하였습니다. 분향(焚香)·전작하고 독축하며 오르내리는 것은 사체(事體)가 구차스럽고 곤란한 점이 있으니, 청컨대, 도감 낭청(都監郞廳) 중에서 두 사람을 대축으로 가려 차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임금이 외방(外方)의 연로(年老)한 사람을 마땅히 추은(推恩)270) 하여야 하는데, 미처 하지 못한 이들에 대해서 그 아들이 상언(上言)했음에도 해조(該曹)에서 복계(覆啓)를 지체하고 있는 것은 노인들을 민망히 여기는 뜻이 아니니, 회계(回啓)를 재촉해 사흘을 경과하지 않도록 하여 원방(遠方)의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내 하교하기를,
"역적 이해(李垓)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미 상세히 하유(下諭)하였다.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장릉(長陵)을 우러러본다면 어찌 차마 굳이 간(諫)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장령 김정윤(金廷潤)이 인혐(引嫌)하고 체직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거조(擧措)가 황망(慌忙)하고 또 향암(鄕闇)271) 이라 비난하고 물리쳤다.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이 계사(啓辭)는 증오할 만한 일이 아닌데, 전하께서 사기(辭氣)가 너무 지나치시어 조금도 용서가 없으시니, 아마 대각(臺閣)을 경시하는 결과를 면치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이것을 지나치다고 생각한다면 장차 무언(無言)의 임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에 우로(雨露)만이 있을 뿐이니, 어찌 상설(霜雪)이 없겠는가?"
하였다.
박사익(朴師益)을 좌참찬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우참찬으로, 이대원(李大源)을 지평으로 삼았다.
7월 6일 정묘
밤에 유성(流星)이 자미 동원(紫微東垣) 안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4,5척쯤 되었고, 빛깔은 붉었다. 새벽에 유성이 또 권설성(卷舌星) 밑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3,4척쯤 되었고, 빛깔은 희었다.
7월 6일 정묘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윤동형(尹東衡)이 ‘성(性)’ 자를 논하기를,
"성상근(性相近)272) 의 성(性)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기질(氣質)의 성품이라.’ 하였는데, 대개 ‘천명(天命)의 성(性)’은 ‘서로 가깝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령 ‘생지위성(生之謂性)273) ’이라든가 ‘식색개성(食色皆性)274) ’의 성(性)은 다 기질의 성품이니, 천명의 성과 기질의 성의 구분이 분변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품은 동일하나 기질에는 차이가 있고 기질에는 착함과 악함이 있으나 성품은 착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황정(黃晸)이 말하기를,
"한원진(韓元震)의 상소는 그 내용이 패망(悖妄)하지만 성상께서 이미 유신(儒臣)으로 대우하셨으니, 만일 이것을 가지고 죄를 준다면 성조(聖朝)의 지나친 조처가 될 것입니다. 사관(史官)에 있어서는 그 관직은 비록 낮지만 그 임무는 무거우니 잡아다 국문하라는 분부는 너무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환수(還收)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원진이 또한 일찍이 경연(經筵)에 출입하였으니, 어찌 내가 이런 말을 하였는데도 오히려 내가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줄 여겼겠는가. 내가 마땅히 스스로 반성해야 할 일이니 어찌 그를 탓하겠는가? 한원진이 옛날에 초야(草野)에서 상소를 올렸을 때 괴격(乖激)한 말이 있었으나 성조(聖祖)께서 처벌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개 말 때문에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임징하(任徵夏)에 대해서도 내가 오히려 죄를 다스리지 않았는데 이제 어찌 유독 한원진만을 무겁게 처벌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지난날 열성조(列聖朝)로부터 명(明)나라를 숭봉(崇奉)하여 이 의리가 유독 해동(海東)에서 밝았는데도 한원진의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까지 감히 언급되었으니, 이 다음에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그 스승을 볼 것인가? 사관에 있어서는 만일 유전(流傳)한 것이 사실과 틀린다는 것으로써 국문한다면 거의 우어(偶語)의 법(法)275) 과 같을 것이나, 다만 나처(拿處)는 약간 경미하기 때문에 ‘국(鞫)’ 자를 거기에 추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관이 죄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였다. 황정이 말하기를,
"후세에 사실은 알지 못하고 다만 사책(史冊)에 쓴 것만 보고서 ‘국’ 자를 반드시 성세(聖世)의 일이라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원진은 아성(亞聖)276) 이 아니니, 뜻이 실로 협잡(挾雜)한 바 있다. 명나라의 일에 있어서는 나의 말을 사설(邪說)로 돌리기까지 하였으니, 그가 별도로 의리(義理)를 내세운 것은 진실로 통탄할 만한 일이다."
하였다. 황정이 말하기를,
"먼저 국문하라는 분부를 내리고 마침내 선처(善處)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 거룩한 덕(德)의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애당초 이런 일이 없었던 것만 같지는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달(奏達)한 바가 옳다. 다만 여러 신하들이 매양 내 뜻의 천심(淺深)을 엿보니, 이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옛날 효종조(孝宗朝)에 있어서도 또한 사관을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니,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아니다. 그런 뒤에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7월 7일 무진
좌부승지 조명신(趙命臣)이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사관을 잡아다 국문하라는 분부는 성조(聖朝)의 정도에 지나친 조처가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또 환수(還收)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정언(正言) 이윤신(李潤身)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한원진(韓元震)의 상소 내용은 패만(悖慢)하나 시골에 사는 고루한 사람이 도리를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불치지율(不治之律)’로 다스리어 골머리를 썩이는 걱정이 없도록 하소서. 사관을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분부도 마땅히 도로 중지해야 합니다. 또 연석(筵席)에서 한 말을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기 때문에 후사(喉司)에서 감추고 숨기기를 지나치게 하여 삼사(三司)의 시종(侍從)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귀머거리처럼 아무것도 모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청컨대, 후사에 타일러서 일의 긴요하고 긴요하지 않은 것을 물론하고 삼사에서 간단하게 묻는 것이면 구례(舊例)에 따라 상세히 알려 주도록 하여, 마땅히 말해야 될 것을 말하지 않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고, 말미에 또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수항(李壽沆)을 추고(推考)한 일에 대해 논하기를,
"한 해의 농사가 장차 큰 흉년이 들 형편으로 백성의 일이 바야흐로 시급한데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능히 미리 손을 쓸 수가 없도록 만들었고, 바야흐로 진휼(賑恤)하는 시기에 미쳐서는 묘당(廟堂)에서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는 고갈된 수레바퀴 자국의 〈붕어에〉 한 동이의 물에 지나지 않았는데, 창졸히 재물을 마련한다는 것도 또 그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수항이 일계(一啓)·재계(再啓)를 올리며 국곡(國穀)을 그대로 보류하기를 극력 청했던 까닭인데, 전하께서는 일체 방지하여 막았고, 또 따라서 엄중한 하교를 내려 책벌(責罰)하셨으니, 아마도 백성을 진휼하는 성덕(盛德)에 손상됨이 있을 듯하며, 도신의 성의를 다해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하여금 또한 해이해지게 만들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무릇 여러 도(道)에서 진휼의 일로 장문(狀聞)하는 자는 정신을 써서 재처(裁處)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원진의 일은 관계가 지극히 중대하다. 오늘날의 법을 집행하는 신하들은 시상(時象)에 관계된 것은 의심하고 배척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군부(君父)에 관계된 일은 보통으로 보아넘겨 도리어 다스리지 말 것을 청하니, 오늘날의 의리(義理)를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사관의 일은 이미 하유(下諭)하였고, 간단히 질문하는 일은 전례가 없다. 호남 도신의 일은 문비(問備)277) 할 것을 특별히 명하였는데, 도신이 스스로 제멋대로 하는 습관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며 백성에게 소홀히 한 것이 아니었다."
하였다. 이에 앞서서 전라 감사 이수항이 상납하는 군작미(軍作米)278) 로 본도(本道)에 있는 것을 보류하여 진자(賑資)에 보충할 것을 청하였는데 묘당에서 허락하지 않고 임금이 또 무겁게 추고(推考)하였으므로, 이윤신이 상소에서 언급한 것이다.
이조에서 어사(御史)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복주(覆奏)하기를,
"운봉 현감(雲峰縣監) 윤취리(尹就履)는 치적(治績)이 여러 고을 가운데서 가장 높으니 마땅히 가자(加資)해야 하고, 영천 군수(永川郡守) 김시희(金始熺)와 의흥 현감(義興縣監) 이사제(李思悌)는 마땅히 준직(準職)을 주어야 하고, 대구 판관(大丘判官) 한덕필(韓德弼)은 승서(陞敍)하고 함양(咸陽)의 전(前) 군수(郡守) 김광(金洸)은 마땅히 표리(表裏)279) 를 하사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7월 8일 기사
임금이 총호사(摠護使) 홍치중(洪致中)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천릉(遷陵)의 시기는 이미 날짜를 잡았으니, 여러 신하들은 매양 양양 여재(洋洋如在)280) 와 오희 불망(於戲不忘)281) 으로 마음을 가져야만 모든 일에 있어 정성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여러 신하들의 복색(服色)에 관한 수의(收義)를 가져올 것을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이 시복(緦服)282) 은 명칭은 비록 시복이지만 3년을 가지고서 시복으로 입는 것이다. 이렇게 상복(喪服)이 아주 명백한 시기를 당하여 구차스럽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문의(問議)한 바가 있었다. 문무 백관들 중 응당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어야 할 사람들은 시복으로 성복(成服)하되, 성복에 불참한 자들은 사서인(士庶人)과 동일하다. 사서인은 이미 흑립(黑笠)으로 예(禮)를 행하니 성복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오모(烏帽)·각대(角帶)를 하도록 하고, 또한 의리에 해롭지 않은 자는 단지 백포(白袍)로 반열(班列)에 참여하도록 하라. 능(陵)의 안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은 15일 동안에는 오모·흑대(黑帶)를 하는 것이 미안할 듯하니, 관리(官吏)나 능 안의 집사(執事)를 물론하고 모두 흰색 옷을 입도록 하라. 옛 능을 열 때 이미 망곡(望哭)하고 성복하니, 유독 제복(除服)하는 날에 무단히 벗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유신(儒臣) 정제두(鄭齊斗)의 헌의(獻議)가 상세히 살폈다고 할 만하니, 망곡을 한 뒤에 제복하게 하는 뜻을 다시 부표(付標)하도록 하라. 다른 나머지 일은 자연 예문(禮文)에 따라 행하여야 될 것이나, 원릉(園陵)을 합봉(合奉)하는 것은 바로 영릉(英陵) 이후에 두 번째로 행하는 것이다. 《오례의(五禮儀)》에 이미 ‘석회(石灰)로 막되 창을 열어놓으라.’는 조문이 있으니,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에 있어서 마땅히 준행하여야 할 것이다. 양릉(兩陵)의 석회를 막는 것을 예문을 상고하여 ‘창(窓)을 내는 제도’를 모방하라는 일을 도감(都監)에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최천약(崔天若)은 교묘한 솜씨가 있고 손수담(孫壽聃)은 사리를 잘 아는데 모두 천부(遷祔)의 역사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며, 변이진(卞爾晉)이라 하는 자도 또한 그러합니다. 청컨대, 모두 가위장(假衞將)에 차임하여 능을 열 때 관대(冠帶)를 갖추고 일을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치중이 또 말하기를,
"새 능에 흙을 메꾸고 사초(莎草)를 입힐 때 역군(役軍)이 몹시 부족합니다. 청컨대, 송도(松都)·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의 군병을 각각 1천 명씩 징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도의 군사는 계축년283) 의 전례(前例)가 있으니, 조발(調發)할 수 있다. 수어청의 아병(牙兵)은 멀어서 부역에 나가기가 어려우니 그대로 두고, 총융청의 군병 1천 명은 특별히 그 수미(收米)의 절반을 감면해 주고 부역에 나오도록 하라. 그 나머지 역민(役民)들은 선혜청(宣惠廳)에서 나누어 준 삭선미(朔膳米) 2백 곡(斛)을 가지고 분배하여 고용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홍치중이 또 말하기를,
"계축년의 등록(謄錄)에는 대여(大轝)와 장강(長杠)284) 의 부건(副件)이 있는데, 지금은 길이 멀지 않으니, 청컨대 근례(近例)에 따라 부건을 사용하지 말아서 폐단을 줄이소서, 내재궁(內梓宮)은 견여(肩輿)로 육로를 통해 모시고 가고, 외재궁(外梓宮)은 수로를 따라서 운반하기를 다 마땅히 계축년의 전례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수도각(隧道閣)을 영건(營建)할 때는 고제(告祭)를 끝마치고 총호사(摠護使) 이하의 관원이 모두 능 밖으로 나갔다가 시간이 되면 공장(工匠)과 역부가 차례대로 각각 기계(器械)를 가지고 나아가되, 먼저 혼유석(魂遊石)에 나아가 고석(鼓石)과 대석(臺石)의 역사를 시작하고, 이어서 장명등(長明燈)을 철거하여 능의 산등성이로 굴려 내린 뒤 마침내 수도각을 건립해야 합니다."
하였다. 총호사가 또 품지(稟旨)하기를,
"안에 있는 섬돌과 좌우에 있는 망주(望柱)·양석(羊石) 등의 석물(石物)을 철거하되, 좌우의 곡장(曲墻) 각 두 칸도 또한 철거하여 능을 열 때의 역사(役事)에 편리하게 해야 합니다. 먼저 고유제(告由祭)를 행한 뒤에 각양의 석물들을 마땅히 차례대로 철거하여 먼저 새 능으로 수송해야 되는데, 수로를 통해 인(靷)285) 을 받들고 간다는 것은 다만 신중히 하는 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지체될 염려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소소한 민전(民田)의 손상은 걱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육로를 통해 가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주달(奏達)한 것에 대해서 모두 옳게 여기었다.
도승지 박문수(朴文秀)가 숭의전(崇義殿)에 치제(致祭)하고 돌아오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박문수가 숭의전을 창건할 때의 일을 매우 상세히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전관(殿官)은 감(監)으로부터 영(令)을 경유하고 수(守)를 역임한 뒤 부사(副使)로 승진하여 3품으로써 한정하는데, 부사가 사망하면 조정에서 으레 치제하여 삼각(三恪)286) 을 우대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지금 전수(殿守)로 있는 왕성원(王聖元)의 경우 그 증조(曾祖) 이후로부터 승진하여 부사(副使)가 된 자가 없고 왕성원 또한 헛되이 늙었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그의 종제(從第) 왕정원(王鼎元)은 사람됨이 자못 등용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왕성원을 부사로 삼을 것을 특별히 명하고, 이어서 왕정원을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로를 가지고도 단지 덩그런 한 채의 전우(殿宇)가 있을 뿐인데, 그것마저도 황폐해져 수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다만 후손들이 불초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또한 고려 말기의 신하들이 보잘것이 없어서 제대로 보도(輔導)를 하지 못하여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신 등이 불충(不忠)으로 성상을 섬기고 전하께서 나태하여 떨치지 못하신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오늘을 보기를 또한 어찌 오늘의 사람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매우 옳게 여겼다. 박문수가 또 지나친 길의 농사가 흉년이 든 것과 기역(畿驛)의 조잔(凋殘)한 상황을 진달하니, 임금이 ‘우휼(優恤)하라.’는 뜻으로써 도신(道臣)에게 엄중하게 신칙(申飭)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의 상소를 오랫동안 유중 불하(留中不下)287) 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승정원에 내리고 하교하기를,
"세도(世道)는 점차 타락하고 습속은 갈수록 잘못되어 진정한 의리(義理)가 혼륜(混淪)한 가운데 있어 온 지 오래이다. 그러므로 조정에는 분의(分義)가 모두 상실되었고 진신(搢紳)의 사이에는 시기하는 풍조가 서로 만연되어 점차로 역란(逆亂)을 자아내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지난해에 합문(閤門)을 걸어 잠그고 깊이 심각하게 자책했던 것인데, 이제 또 무륜(無倫)·패의(悖義)한 말로 감히 의리의 긍경(肯綮)288) 으로 삼고 있다. 아! 여러 신하들이 상대에게 이기기를 힘쓰는 것은 비록 사의(私意)의 부억(扶抑)에서 연유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군부(君父)로서 성인을 모독한 죄과로 직접 몰아치는 것을 신하의 직분이라 할 수 있겠는가? 명색이 산야(山野)의 선비라는 자가 말을 골라 쓰지 않는 것이 많았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비록 정도에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긴 하였으나 그가 군신(君臣)을 엄격히 했던 기상은 백세(百世) 뒤에서도 오히려 상상할 수가 있는 일인데, 단지 일시적으로 시세(時勢)를 개탄한 말로 인해서 무설(誣說)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에 언급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바로 과인(寡人)의 잘못이다. 그가 인용한 바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이란 것은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일을 가르킨 것인데, 그들의 이기기를 힘쓰는 마음이 실현될 곳이 없자 별도로 신기한 의리를 만들어 이에 군부를 위협하고자 하였다. 선정(先正)의 존주(尊周)의 의리를 실추시키고 고인(古人)의 존귀한 이를 휘(諱)하는 혐의를 범하였으니, 마땅히 경연(經筵)에 두어서 강토(講討)를 하게 할 수는 없다. 그 이름을 초선(抄選)289) 의 열록(列錄)에서 특별히 빼내어 버리도록 하라. 하지만 한원진 한 사람의 패의(悖義)한 행동으로 인해 끝내 산야의 선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 나의 이 뜻을 알도록 하라. 이것을 가지고 다시 말을 해서 장주(章奏)를 번거롭게 하는 자가 있으면, 승정원에서는 절대로 봉입(捧入)하지 말고 의리가 더욱 밝아지게 하라."
하였다.
이삼(李森)을 돈체사(頓遞使)290) 로, 서종섭(徐宗燮)을 이조 참의로, 김상익(金尙翼)을 지평으로, 서명구(徐命九)를 수찬으로 삼았다.
7월 9일 경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황정(黃晸)이 말하기를,
"어제 한원진(韓元震)에 대한 처분(處分)은 자못 매우 윤당(允當)한 것이지만, 장주(章奏)를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하교에 있어서는 비록 진정시키고 안정시키는 의도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아마 공정하게 듣고 모두를 관찰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혹시 한원진을 옳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 어지럽게 진소(陳疏)한다면, 이것은 더욱 고황제(高皇帝)를 무함하는 일이 된다. 금지하여 봉입하지 말게 한 것은 단지 명(明)나라에 관련된 일을 가리킨 것이며 다른 것은 아니다. 이 뜻을 중외(中外)로 하여금 알게 하라."
하였다.
한범석(韓範錫)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7월 10일 신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10일 신미
예조에 명하여 인렬 왕후(仁烈王后)의 친속(親屬) 가운데 관직(官職)에 있는 자를 방문(訪問)하게 하여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한덕량(韓德良)을 능(陵)을 천장(遷葬)할 때의 집사(執事)로 차임하였다. 한덕량은 바로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봉사손(奉祀孫)이다. 그 밖에 사인(士人) 가운데서 식견이 있는 자도 또한 한덕량에게 문의하여 함께 참여하게 하였다.
임금이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오부(五部)291) 의 여사(閭舍)를 빼앗아 들어간 자를 알아보게 하였다. 예조 정랑(禮曹正郞) 유굉(柳紘)이 향인(鄕人)으로 여사에 셋방살이를 하였는데, 이 일이 알려지자 임금이 하교하여 유굉이 민간의 거처를 침탈(侵奪)한 죄를 꾸짖고 이어서 멀리 유배(流配)시켜 해부(該部)의 관직(官職)을 삭탈(削奪)하게 하였다. 경조(京兆)의 낭관(郞官)은 신칙(申飭)하지 않았다 하여 그 관직을 삭탈하였고 전후의 경조 당상(京兆堂上)들도 또한 무겁게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대개 사대부가 민간의 집을 빼앗는 것이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가끔 안정되게 살 수 없는 백성이 있게 되었다. 임금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부터 여염(閭閻)의 질고(疾苦)를 심각히 인식하고 법을 만들어서 엄격히 금지시켰는데, 이때에 잘 살펴보도록 하여 마침내 성헌(成憲)으로 삼았다.
유엄(柳儼)을 우부승지로, 한사득(韓師得)을 사간으로, 이성효(李性孝)를 정언으로, 윤지원(尹志遠)을 장령으로, 윤광운(尹光運)을 교리로, 익녕군(益寧君) 이제(李梯)를 사은 동지 정사(謝恩冬至正使)로 삼았다.
7월 11일 임신
임금이 전경 문신(專經文臣)292) 의 강(講)을 친히 시험하였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정권(鄭權)은 영남 사람이다. 《춘추(春秋)》의 강으로 인해 문의(文義)를 진언(進言)하기를,
"《춘추(春秋)》에서 재이(災異)를 조심하여 비록 미미한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하였던 것은 대개 군주로 하여금 공구(恐懼)·수성(修省)하여 항상 멸망에 대한 경계를 간직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금년에 대단한 가뭄이 들고 심한 장마가 졌으니, ‘비가 너무 적게 오면 가뭄이 되고 너무 많이 오면 장마가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팔로(八路)가 허둥지둥하여 유망(流亡)하는 자가 길을 메우고 있으니, 전하께서 하늘에 대응하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도리는 오직 마땅히 본원(本源)에서 구하여 중화(中和)·위육(位育)의 공(功)을 이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천심(天心)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재앙이 혹시나 이를까 하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본원의 공부에 힘쓰지 않을 수가 없겠으나 현재 진휼(賑恤)에 대한 논의가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으니, 이를 구제할 수 있는 대책을 진달하라."
하니, 정권이 또 ‘흉년든 곳으로 곡식을 옮기고 세금을 적게 거두는 도리’를 우러러 주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평일에 공부가 쌓인 바가 있기 때문에 창졸히 대답하는 바도 능히 이와 같은 것이다."
하고, 이어서 6품으로 승진시켜 장용(奬用)할 것을 명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이종성(李宗城)을 관서(關西)를 안렴(按廉)하러 보내면서 세 가지 사항으로 이종성에게 별유(別諭)를 내렸는데, 그 첫째는 ‘관서의 군제(軍制)가 편고(偏苦)한 폐단이 있어 왕자(王者)가 모든 백성을 차별이 없이 똑같이 사랑하는 의리가 아니니, 도신(道臣)·수신(帥臣)과 서로 의논하여 개정(改正)하라.’는 것이었고, 그 둘째는 ‘서북(西北)의 인재를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매양 진발(振拔)하였는데 근래에 매우 엄체(淹滯)되어 있으니 어사(御史)로 하여금 상격(常格)에 구애하지 말고 듣는 대로 천양(薦揚)하게 하라.’는 것이었고, 그 셋째는 ‘덕화(德化)를 받들어 베푸는 것은 비록 안찰(按察)의 신하에게 맡겼지만 풍속을 상패(傷敗)하는 것은 바로 군사(君師)의 허물이니 그 향사(鄕士)·부로(父老)에게 효유(曉諭)하여 각자 면려(勉勵)하게 해서 풍동(風動)을 기약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이 종성이 별유(別諭)를 사관(史官)에게 주어 기주(記注)293) 에 기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셨다. 대개 어사의 봉서(封書)는 일기(日記)에 재록(載錄)하는 법규가 없는데, 별유는 성상의 뜻이 서토(西土)를 권휼(眷恤)하는 데서 나와 한만(閑漫)한 봉서와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삼남(三南)의 농사 상황이 이미 큰 흉년으로 결판이 났습니다. 흉년을 대비하는 대책은 다만 곡식을 무역하는 길이 있을 뿐인데, 경사(京司)의 전목(錢木)294) 이 또한 텅 비어 저축된 것이 없습니다. 지부(地部)295) 와 선혜청(宣惠廳)에 비축되어 있는 것으로 먼저 공가(貢價)를 지급하여 공인(貢人)의 다급한 것을 해소시켜 주고, 삼남 공곡(公穀)으로 상납할 것들을 우선 받아서 본도(本道)에 받아둘 것을 허락하여 천천히 조치를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우부승지 홍상빈(洪尙賓)이 상주(上奏)하기를,
"외읍(外邑)에서 석채(釋菜)296) 할 때의 축문(祝文)이 태학(太學)의 석전제(釋奠祭) 축문과 착오나는 것이 있으며 사직단(社稷壇)의 축문도 또한 그러하니, 의조(儀曺)로 하여금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되어 있는 바를 상고해서 상세한 것을 알아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간원 【사간(司諫) 한사득(韓師得)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구성임(具聖任)·김몽로(金夢魯)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말하기를,
"능(陵)을 천장(遷葬)하는 것은 큰 일인데도 지부(地部)에 저축된 것이 적으니, 청컨대 관서(關西)의 무명 5백 동(同)을 가져다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비변사에서 또 말하기를,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전선가미(戰船價米) 4천 곡(斛), 저치미(儲置米) 2만 곡, 별향미(別餉米) 5천 곡을 먼저 대여해 주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진자(賑資)로 삼을 것을 청하였는데,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과 충정 감사 신방(申昉)도 또한 각각 장청(狀請)이 있었습니다. 호남의 저치미 1만 곡과 호서의 저치미 7천 곡을 나누어 주기를 영남의 예와 같이 하고, 본도(本道)에서 기부(記付)한 전목(錢木)도 또한 편리한 방법을 따라 곡식과 바꾸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선혜청(宣惠廳)에서 말하기를,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본도(本道)의 금년 대동전(大同錢) 2만 3백 40꿰미와 쌀 1천 곡(斛)을 남겨두어 진자(賑資)에 보충할 것과 조정에서 이미 허락한 해세(海稅)를 추동(秋冬)쯤에 가서 대납(代納)하려 한다는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정지공(惟正之供)을 함부로 자기 멋대로 집류(執留)하는 것은 비록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뒷날의 폐단과 관계됨이 있으니,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지평 김상익(金尙翼)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비가 너무 적게 오면 가뭄이 되고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장마가 된다는 것’이 금년 같은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비가 한번 조금 내리자 성상의 마음이 드디어 해이해져 군신(君臣) 상하가 옹용(雍容)297) ·가예(暇豫)298) 함이 마치 태평한 기상(氣象)처럼 하고 있으니, 처음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가 나중에는 나태한 것이 중외(中外)에 웃음을 사지 않겠습니까? 도민(都民)들이 의지하여 먹는 것은 공미(貢米)인데, 지난번에는 또 공가(貢價)를 전(錢)으로 대신하겠다는 청이 있었으니, 이것은 매우 잘못 계획한 것입니다. 국가에서 곡식을 모으는 것은 백성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쌀값이 싸면 억지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쌀값이 비싸면 이에 그것을 방지하려고 하니, 하필 백성의 입속에 들어 있는 식물(食物)을 빼앗아 ‘살점을 깎아서 상처를 치료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 있겠습니까? 무릇 재앙을 대비하는 도리에 있어서 항상 손상(損上)299) 의 의리와 예비하는 대책으로써 낭묘(廊廟)에 칙려(飭勵)하는 것이 진실로 구구(區區)한 소망입니다.
오늘날 세도(世道)는 타락하고 풍절(風節)은 위축되어 대각(臺閣)의 일종의 기운은 마치 저승 사람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명류(名流)의 거취(去就)에 있어서는 스스로 구차하게 할 수 없는 일인데도 어제 헌신(憲臣)이 무단히 두 차례나 소명(召命)을 어긴 것은 결코 의례적인 파직으로 그치고 경계함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전(前) 지평(持平) 남태제(南泰齊)는 파직(罷職)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각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또한 전하께서 그렇게 시킨 바 있는 것입니다. 대각이 능히 자존(自尊)하지 못하고 군주가 또 따라서 경시한다면 이목(耳目)이 존엄하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후사를 세우도록 명하신 것은 참으로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대군의 옛집은 스스로 마땅히 타령(妥靈)300) 의 장소로 될 터인즉, 전하께서 반드시 그 논의를 정지시키고자 한 것은 분명히 지사(指使)하고 구제(驅制)한 의도가 있습니다. 만일 대각이 발계(發啓)함에 있어 반드시 성상의 뜻을 받들고, 정계(停啓)함에 있어 반드시 성상의 뜻을 품의한다면, 대리(臺吏) 한 사람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대각이 무슨 소용될 것이 있겠습니까?
어제 김정윤(金廷潤)이 재차 옥당(玉堂)을 인피(引避)한 것은 비록 대각의 체모에 어긋남이 있기는 하지만 전하께서 일례(一例)로 억눌러서 재어하신 것은 또한 결국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교(聖敎)의 전후에 걸쳐 대각에 엄중하게 꾸짖은 것을 모조리 환수(還收)하소서. 전(傳)에 이르기를, ‘나라에 간쟁하는 신하가 있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고 집안에 간쟁하는 자식이 있으면 집안이 망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자들이 반드시 전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면, 전하의 비위를 거스리는 자들이 참으로 전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드높고 빛나는 공렬(功烈)은 전적으로 과실을 말해 주는 것을 듣기를 즐거워한 데 근본하였고,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공평하고 현명한 정치는 또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을 차별이 없이 동일하게 본 데 달려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마땅히 본받을 바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신은 전하의 조정에 능히 몇 사람의 간쟁하는 신하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궁중·부중의 일을 논한 자는 이광덕(李匡德)의 무리 약간명에 지나지 않는데, 전하께서는 일체 명예를 좋아하는 것으로 의심하여 싫어하고 박대하는 기색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옛날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일찍이 말하기를, ‘학자(學者)의 심술(心術)을 말미암아 논한다면 명예를 좋아하는 수치는 천유(穿踰)301) 보다 심하지만 군주의 용사(用舍)302) 를 가지고 논한다면 명예를 좋아하는 자를 버릴 수 없다303) .’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명예를 좋아한다[好名]’는 두 글자를 가지고서 신하의 충성하기를 바라는 길을 가로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삼대(三代)의 아래에서 선비를 구한다면 오직 명예를 좋아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 신하들의 고직(沽直)304) 여부는 원래 군주가 당연히 물을 바가 아닙니다. 또한 깊이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 중의 유의해야 할 것은 유의하겠노라. 그 외의 조목별로 진달한 것은 모두 다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김용경(金龍慶)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어제 내리신 전교(傳敎)는 사어(辭語)가 엄준(嚴峻)하였는데, 한원진(韓元震)을 경연(經筵)의 초선(抄選)에서 빼내 버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신은 삼가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원진은 곧바로 군부(君父)를 성현을 모독한 죄과로 몰아 넣은 것이 전혀 아니며 본래의 심정은 다른 뜻이 없었는데, 선입(先入)의 말을 지나치게 듣고서 실정을 떠난 하교를 내리시게 되었으니, 신은 산림(山林)에서 자중(自重)하고 있는 선비들이 목을 웅크리고 자취를 걷어 정직하고 순박한 말들이 진달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주(章奏)를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더욱 상도(常道)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관(史官)을 잡아다 국문하라는 분부를 도로 회수하시라는 청을 일체 윤허를 않고 계시니, 그것이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볼 때 또 어떻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사신의 일은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장소(章疏)를 봉입하지 말라는 일은 이미 반한(反汗)305) 하였다. 한원진의 일은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나 거기에는 중대한 점이 있으니, 오늘날 신하들이 어찌 감히 변명 두호할 수가 있겠는가? 한 모퉁이의 청구(靑丘)306) 에 의리(義理)가 장차 어두워지게 될 것이니, 그대들은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멀리 화양동(華陽洞)을 바라보매 화양동은 바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타령(妥靈)하는 곳이다."
하였다.
7월 12일 계유
포도청(捕盜廳)에서 아뢰기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최위(崔暐)가 어젯밤에 문 밖에 와서 만나보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역리(驛吏) 김삼금(金三金)이라는 자가 있어 처음에는 자기집 종과 싸우다가 이어서 임금을 향하여 부도(不道)한 말을 하고 여러 가지로 발악했는데, 모두가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성균 박사(成均博士) 이시홍(李時弘)도 곁에 있으면서 함께 들었다. 이미 들은 것이 있기에 고발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두 잡아다 가두고 김삼금에게 직공(直供)을 받았는데, 이것은 본청(本廳)에서 함부로 결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청컨대 의금부로 이송(移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로부터 연일 본부(本府)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최위를 신문하니, 최위가 공술하기를,
"김삼금이 신의 종 일벽(一璧)과 술에 취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불러들여 힐책(詰責)했더니 김삼금이 이내 부도(不道)한 말로 성상을 무욕(誣辱)하여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시홍도 자리에 있다가 같이 들었습니다."
하였다. 이시홍을 신문하니, 이시홍이 공술하기를,
"신이 마침 최위의 집에 갔다가 김삼금이 국가(國家)를 두려워하지 않고 악언(惡言)을 많이 발설하는 거사를 들었습니다."
하였다. 이의 사실 여부를 김삼금에게 신문하니, 김삼금이 공술하기를,
"신이 마침 술에 취해 길옆을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최가(崔哥)의 종과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신이 화해하기를 권할 즈음에 최가가 무단히 잡아들여 형장(刑杖)을 치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공갈을 쳐서 도망갈 꾀를 내어 최위에게 말하기를, ‘네가 일찍이 나에게 열 다섯 꿰미의 돈을 주고 함께 역모(逆謀)를 하였는데, 내가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제 나를 죽이려 하느냐?’ 하였더니, 최위가 과연 결박한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부도(不道)한 말에 이르러서는 애당초 일찍이 입에서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어찌 감히 위로 국가를 핍박할 수 있겠습니까? 포도청에서 심문할 때도 또한 이것을 승복하지는 않았습니다."
하고, 이내 버티며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김삼금의 일은 무식한 상놈이 술기운을 이용해 마구 말한 소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시홍의 공초를 보면 김삼금이 특별히 무상(誣上)한 말이 없었는데, 최위의 공초 중에는 ‘상궁(上躬)을 무욕(誣辱)했다.’느니 ‘무신년307) 의 여당(餘黨)이라.’느니 하는 등의 말이 있으니, 매우 망측하다. 반좌(反坐)308) 의 형률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것으로 문목(問目)을 첨가하여 엄중하게 심문하고 다시 심문하였으나, 최위가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김삼금(金三金)이 술에 몹시 취한 중에 패악(悖惡)한 말로 최위(崔暐)를 침욕(侵辱)한 데 불과할 뿐이며 원래 국가를 무욕(誣辱)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포도청에서 자백을 하였다는 것도 별달리 조목별로 대답한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인하여 일률(一律)로 처치(處置)한다면, 비록 여대(輿儓)의 미천한 목숨이라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어찌 지극히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사실이 아닌 일을 가지고서 사실로 돌린다면 듣는 이의 의혹을 자아냄이 어떠하겠습니까? 최위의 망령된 무고(誣告)는 처벌할 수 있지만, 김삼금은 성급하게 일률로 처치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답(優答)하였다. 뒤에 국청(鞫廳)의 의계(議啓)로 인하여 김삼금을 형조(刑曹)에 이송(移送)하여 엄형(嚴刑)을 가한 뒤 아주 먼 변방에 유배(流配)시키고, 남을 무고(誣告)한 죄로써 최위를 절도(絶島)에 작배(酌配)시키고, 이시홍(李時弘)은 참고 증인에 지나지 않을 뿐이란 이유로 특별히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
사헌부 【장령 윤지원(尹志遠), 지평 김상익(金尙翼)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과법(科法)이 엄정하지 않고 요행으로 출세하는 길이 점차 넓어져, 북관(北關) 유생(儒生)의 탁제(擢第)를 특명(特命)한 것과 서변(西邊) 무사(武士)의 직부(直赴)309) 를 모두 허락한 것은 모두가 격외(格外)의 은혜에 관계된 것이며, 금영(禁營)의 별군관(別軍官)은 대장(大將)의 한 막비(幕裨)310) 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사(試射)를 포상하는 것은 또한 각영(各營)에 통행(通行)하는 것이니, 일시(一時)에 육량(六兩)311) 을 멀리 발사한 것으로 인하여 갑자기 종전에 없던 규례를 만드는 것은 또한 과제(科第)를 소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금영의 별군관을 직부하게 하라는 분부를 환수(還收)하소서.
명기(名器)가 날로 혼탁해지고 정격(政格)이 날로 문란해져서 음관(蔭官)이 출륙(出六)312) 한 지 반 년이 되지 않으면 승서(承敍)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없는데도 갑자기 품계(品階)를 승진시키고, 무변(武弁)은 발신(發身)한 지 10년이 안되었는데도 거의 차례를 밟지 않고 탁용(擢用)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서둘러 곤수(閫帥)로 승진시키고, 동반(東班)의 잡기(雜技)를 빈자리에 따라 번갈아 천직(遷職)시켜 바로 유례(流例)가 되었고, 서반(西班)의 정직(正職)을 얼른 체직시켜 돌아가면서 보임하여 거의 허정(虛政)313) 이 없으니, 청컨대 이조와 병조의 당상관(堂上官)을 모두 추고(推考)를 명하여 각별히 신칙(申飭)을 가하도록 하소서.
연석(筵席)의 설화(說話)는 지엄하고 또 비밀스런 것이지만 군주의 어묵(語默)·동정(動靜)은 세상의 표준이 됩니다. 그 말을 꺼내어 착하면 사방의 모범이 될 수가 있고 그 말을 꺼내어 착하지 못하면 사방의 간언(諫言)을 오게 할 수가 있으니, 다만 마땅히 그 잘못 누설 하거나 뒤집어 전달하는 것만을 엄중하게 신칙해야 할 뿐이며, 하필 법을 만들어 일체 금지할 것이 있겠습니까? 연어(筵語)의 진와(眞訛)는 다만 기주(記注)를 잘하고 못하는 데 달려 있는데, 근래에 연소한 신진(新進)들이 당후관(堂后官)314) 을 기피하는 것이 이미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고, 후원(喉院)이 다급하면 구차하게 인원을 채우는 것은 부당하게 인정과 안면을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고 겸춘추(兼春秋)의 직임(職任)에 있어서도 신중한 간택(簡擇)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청컨대 모두 택차(擇差)할 것을 명하소서. 각사(各司)의 낭속(郞屬)을 초기(草記)315) 에 그대로 두기를 청한 것은 너무 번거롭고 좀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비록 어제 지부(地部)의 낭관(郞官)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맡은 바가 이미 긴요함과 긴요하지 않음이 있으니, 일을 처리함에 어찌 생소하고 익숙함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두 낭관을 모조리 그대로 두기를 청한 것은 자못 선별(選別)하는 의미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호조의 해당 당상관을 추고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세 건(件)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한사득(韓師得)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문신(文臣)이 변방의 수령을 기피하는 것이 또한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종성(鐘城)과 길주(吉州)는 몇 해 동안 혹은 중등(中等)과 혹은 하등으로써 법을 굽히고 사정에 따라 갑자기 체직을 시켜 물의(物議)를 빚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청컨대 함경 감사 윤양래(尹陽來)를 무겁게 추고(推考)하소서. 남포 현감(藍浦縣監) 유적(柳摘)은 정령(政令)이 해괴하여 포민(浦民)을 침학(侵虐)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건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백년에 가까운 선침(仙寢)316) 을 이봉(移奉)하는 예(禮)가 막중하고 그 역사(役事)가 매우 거창하니, 친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드디어 의조(儀曹)로 하여금 날짜를 가리지 않고 8월 15일로써 거둥하는 시기로 정하게 하였다. 약원(藥院)이 청대(請對)를 요구해 중지하기를 청하고, 승정원에서도 또한 잇달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리로 보나 예의로 보나 모두 그만둘 수가 없는 일인데, 이처럼 무리하게 떠들어대니 이는 도리어 보호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연신(筵臣) 중에 ‘15일을 구기(拘忌)317) ’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사(東史)에 여주(女主)의 구기(拘忌)를 비난하였는데, 경(卿) 등은 이제 이것으로 나를 인도하는가? 이것은 부시(婦寺)318) 가 하는 충성이다. 만일 오늘날의 사관(史官)이 이 일을 기록하기를, ‘능행(陵幸)을 구기로 인해 정지하였다.’고 한다면, 경 등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지만 장차 나를 어떤 군주로 여기겠는가?"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윽고 능(陵)에 거둥할 때 길을 넓히고 닦느라 백성의 논밭에 있는 곡식을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찌는 무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고 새 능(陵)도 또한 길이 멀어서 여러 신하들이 혹시나 성체(聖體)가 손상을 받을까 염려하여 거둥을 마땅히 정지해야 된다는 것을 누차에 걸쳐서 청하고 전후에 걸쳐 강력하게 간쟁하였으나, 임금이 번번이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로 억눌러 제어하니, 여러 신하들이 청한 것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지평 김상익(金尙翼)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성조(聖祖)의 의관(衣冠)이 소장된 곳을 장차 백년의 뒤에 열려고 하니, 전하께서 반드시 친히 거둥을 하시고자 하는 것은 정리나 예의상으로 보아서는 옳습니다. 그러나 백리길에 노동(勞動)하셨다가 만에 하나 손상이라도 입게 되는 날이면 뉘우친들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이 우려하고 사랑하는 것은 소중한 면이 있으니, 가부간에 조용히 개유(開諭)하는 것이 위와 아래가 둘 다 타당함을 얻는 데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절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엄중하게 꾸짖기를 너무 심히 하시고 조금만 거스린 점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함이 없으시니. ‘충서(忠恕)’ 두 글자가 어디서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삼사(三司)의 신하에 이르러서는 그 처우하는 바가 자별하니, 말이 온당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견벌(譴罰)을 내리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말이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업신여기어 꾸짖음을 경솔히 하면서 ‘무엇하러 들어왔느냐?’고 물리치고 ‘어찌해서 물러가지 않느냐?’고 윽박지르시니, 전하께서 신료(臣僚)를 능멸함이 이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이 거둥은 정리나 예(禮)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중도에 지나친 하교를 어찌 내가 좋아서 하겠는가?"
하였다.
7월 13일 갑술
밤에 유성(流星)이 규성(奎星)의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4,5척쯤 되었고, 빛깔은 붉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사헌부 【지평(持平) 김상익(金尙翼)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시상(施賞)은 마땅히 소원(疏遠)하고 미천한 이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처벌은 마땅히 존귀(尊貴)하고 가까운 이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自身)이 향관(享官)319) 이 되어 애당초 수향(受香)320) 에 신중을 기하지 않고서 막중한 축문(祝文)을 추후에 배진(陪進)하게 하였으니, 전에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위질(位秩)이 약간 높다고 해서 단지 문비(問備) 박벌(搏罰)만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니, 청컨대 그날의 태묘(太廟)·영녕전(永寧殿)·영희전(永禧殿) 세 군데의 헌관(獻官)을 모두 파직하라 명하소서.
나라의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조정의 금령이 엄중하지 아니하여 사대부집에서 술을 팔아 이익을 독점하는 폐단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전석동(磚石洞)의 이진사(李進士) 집과 안국동(安國洞)의 김동지(金同知) 집에서는 제멋대로 술을 크게 빚어 온 세상의 이익을 긁어 모았습니다. 세밀하게 염방(廉訪)을 가한다면 낭자(狼藉)한 실태를 엄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청컨대 해부(該府)로 하여금 가장(家長)의 이름을 밝혀내어 형률에 따라 처벌을 내리게 하소서.
각사(各司)의 묘유(卯酉)의 법(法)321) 은 다만 기회(期會)322) 를 위해 분주(奔走)할 뿐만 아닙니다. 국가에서 관직을 설치하고 직무(職務)를 나눈 것은 각기 관장하는 바가 있어 크게는 판적(版籍)·전부(田賦)로부터 작게는 도로(道路)·택량(澤梁)에 이르기까지 그 명칭을 돌아보고 의미를 생각해 보면 직사(職事)를 수명(修明)하는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청컨대 각사로 하여금 구전(舊典) 가운데서 응당 시행해야 할 조건들을 뽑아서 따로 준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세 건의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전날 한원진(韓元震)의 상소로 인해 사관(史官)을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기사관(記事官) 홍창한(洪昌漢)·박종유(朴宗儒)와 가주서(假注書) 이하술(李河述) 등의 원사(爰辭)에 모두 ‘한원진이 어떤 상황인지를 알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고윤(高允)323) 의 말을 인용하여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은 것을 꾸짖고 다시 신문하여 공술하기를 또 전과 같이 할 것을 명하였으며, 기주를 중시하고 뒷날의 폐단을 막는다는 의미로 세 사람 모두 삭출(削黜)하였다.
전라도 영암(靈巖)에 풍재(風災)가 있고 금구(金溝)에 수환(水患)이 있었다. 도신(道臣)이 재이(災異)가 괴상하다 하여 계문(啓聞)하였다.
전날에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연석(筵席)에서 ‘한원진(韓元震)을 삭일(削逸)한 것은 정도에 지나친 것’이라고 진달한 것으로 인해 우의정 조문명(趙文命)도 또한 따라 진달하였는데, 그 며칠 뒤에 임금이 특교(特敎)로 송인명을 중추(重推)하게 하니, 조문명도 스스로 펀안히 있지 못하고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중신(重臣)을 특교로 추고하여 사지(辭旨)가 매우 엄중하온데, 그날의 망발은 신이 실로 앞장이 된 것입니다. 한원진이 애당초에 과연 성상의 몸에 의논이 미치고 명 태조(明太祖)를 모욕 핍박할 의사가 있었다면, 신도 또한 마땅히 그 죄를 성토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이나, 한원진은 궁벽한 시골 사람으로서 와전된 말을 지나치게 듣고 스스로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뜻에 붙여 그 말이 오활하고 망령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사 협잡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 의심하고 노여워하심이 너무 지나치시어 견벌(譴罰)이 따랐던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까마귀와 솔개가 알을 깨뜨리매 봉황이 이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실로 이것을 우려하여 감히 말한 바가 있었던 것인데, 도리어 성상의 마음에 번뇌를 자아내게 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신과 같이 알아줌을 받음이 가장 깊은 자로서도 오히려 충정(衷情)을 밝게 통촉함을 입지 못하온데, 한원진처럼 소원하고 미천한 자야 더욱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임금과 신하가 등져 막힘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어찌 얼굴을 들고 몰염치하게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중신을 특별히 추고(推考)한 것은 칙려(飭勵)한 데 지나지 않으니, 경은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하였다.
7월 14일 을해
함경도 함흥부(咸興府)에 배꽃이 봄처럼 활짝 피었다.
7월 15일 병자
정언 이성효(李性孝)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상(朝象)은 날로 어긋나고 백관(百官)들은 태만해졌습니다. 금주(禁酒)의 영(令)은 일분(一分)의 폐단을 구제할 수가 있는데도 중간에 거둠을 면치 못하였고, 주전(鑄錢)의 의논은 거의 도사(道舍)의 역(役)324) 과 같이 되어 지금까지도 확정된 계획이 없습니다. 나랏일을 생각하매 길이 탄식이 나옴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여가(閭家)의 금령(禁令)은 즉위하신 이래로부터 엄중하게 과조(科條)를 제정했으니, 어제 처분하신 것도 깊이 징계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대관(大官)이 있어 몸소 이 금령을 범하였고 경조(京兆) 해당 부(部)에서는 감히 보고해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마땅히 다시 조사하게 하여 해당 부의 당상관과 낭관에게 별도의 책벌(責罰)을 가하여야 합니다.
방금 진사(賑事)가 앞에 당면하였고 호서 지방이 가장 심한데도 감사 신방(申昉)은 자애와 이해심은 남음이 있으나 전결(專決)과 처리가 부족하여 청단(聽斷)할 즈음에 매양 소홀하고 지연되는 일이 많고 생선을 점퇴(點退)325) 하여 사람들의 말썽을 사기도 하였으니, 흉년든 해에 있어 주진(賙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마땅히 그 직임을 갈아야 할 것입니다.
도신과 수령은 체모가 보통과 다르니, 진실로 치적(治績)이 있을 경우는 장포(狀褒)를 하면 되는 것인데,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은 순행(巡行)하여 어떤 고을에 이르러 본고을 수령을 치성(治聲)이 있다고 여겨서 그 공형(公兄)326) 을 불러 술을 따라 권하며 치하하였습니다. 거조(擧措)가 자질구레하고 좀스러워 사면(事面)을 무겁게 손상시켰으니, 마땅히 문비(問備)의 처벌을 내려야 합니다.
수의(繡衣)327) 는 그 책임이 지극히 엄중하고 또 비밀에 속하니, 험한 일과 어려운 일을 모두 겪으면서 한 마디 말이나 글자도 감히 경솔히 누설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관서 어사 이종성(李宗城)이 사람을 대신시켜 염문(廉問)하게 한 것과 관동 어사 한현모(韓顯謨)가 집에 있으면서 서계(書啓)를 만든 것은 모두 종전에 듣지 못한 일입니다. 후일의 폐단에 크게 관계된 것이니, 마땅히 견책(譴責)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 가운데서 신칙(申飭)할 것은 신칙하고 유의할 것은 유의하겠노라. 그런데 이른바 ‘차입(借入)한 대관(大官)’이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못 통탄할 만한 일이니, 승정원으로 하여금 문계(門啓)하도록 하고, 전후의 경조 당상관은 모두 파직시키도록 하며 낭청(郞廳)과 부관(部官)은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하라. 신방의 일은 풍문(風聞)을 그대로 따라 믿을 수는 없고 도백(道伯)을 경솔히 체직시킬 수도 없다. 이수항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이종성과 한현모의 일은 뒷날의 폐단에 관계됨이 있으니, 그 관직을 파면시키라."
하였다.
조석명(趙錫命)을 대사간으로, 박사정(朴師正)을 응교로, 김상성(金尙星)을 부응교로, 김상석(金相奭)을 부교리로, 윤휘정(尹彙貞)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16일 정축
산릉 당상(山陵堂上)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병풍석(屛風石)을 마땅히 배설(排設)해야 하는데, 《오례의(五禮儀)》에 ‘병풍석 안쪽과 상설(象設)한 여러 석물(石物)의 아래에다 회삼물(灰三物)328) 로 메꾸어 쌓는다.’는 조문이 있으니, 마땅히 석회(石灰)를 구워 제조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정언 이성효(李性孝)의 상소 가운데 지칭한 바 대관(大官)은 바로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왕자(王者)가 법 적용이 어찌 대소(大小)의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한(漢)나라의 소하(蕭何)는 상림(上林)의 백성 땅을 차용(借用)한 데 지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또한 하옥(下獄)을 시켰다. 더구나 군부(君父)가 칙려(飭勵)할 때에 영의정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서 맨 먼저 금령을 범하였으니, 이를 만일 처벌하지 않는다면 이 법은 단지 미관(微官)과 서료(庶僚)들에게만 시행될 것이다.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영의정이 평소 조심하는 것을 내가 아는 바이니, 비록 대신(大臣)을 존경하는 도리로 불문에 붙일 수도 있으나 금령을 신칙하는 뜻은 폐지할 수가 없다. 양청(兩廳)의 민가(民家)를 차용한 군교(軍校)의 사무를 관장한 자를 모두 해조(該曹)로 하여금 도배(徒配)케 하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모두 금령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뜻을 알도록 하고, 또한 홍치중에게 선유(宣諭)하게 하여 대명(待命)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지부(地部)에 공사(公舍)를 지정해 줄 것을 명하였다. 대개 홍치중은 수어청(守禦廳)의 도제거(都提擧)로써 여사(閭舍)를 매입(買入)하여 군교들이 머물러 있는 처소로 삼았는데, 홍치중이 가끔 와서 거처했기 때문이었다. 우승지 조명신(趙命臣)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법은 진실로 엄정함을 위주로 하지만, 체통을 보존하는 것은 조정을 존중하는 까닭입니다. 대신은 나라의 팔다리로 군주가 예모(禮貌)를 갖추고 맡기는 바가 어떠합니까? 그런데 어쩌다 조금 금령에 저촉이 되었다 해서 곧바로 법에 따라 거의 서료(庶僚)들과 같은 죄과로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대신이 참으로 범죄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양찰(諒察)하여 체모를 보존시켜야 합니다. 더구나 그 사실이 그렇지도 않은데, 이제 대각(臺閣)의 말로 인하여 이름이 현고(現告)에 들어가고 대신 편비(褊裨)329) 를 유배시키게 하여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낭패하여 처벌을 기다리도록 하니, 진실로 성상의 뜻이 법령을 엄중히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 줄은 알겠지만, 유독 당폐(堂陛)330) 의 의리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의 말로 인해 외방(外方)의 문·무사(文武士)로서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하며 벼슬살이하는 자들을 모두 부관(部官)으로 하여금 금지하지 말게 하여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해서 진휼(軫恤)하는 뜻을 보였다. 그로부터 며칠 지난 뒤 홍치중이 상소하여 인구(引咎)하고, 또 ‘들어살던 집이 여염집이 아니고 바로 사인(士人) 신형(申瀅)의 집이었는데 중간에서 매수(買受)를 주관한 자가 오성(吳姓)의 역관(譯官)이었기 때문에 와전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대언(臺言)을 번거롭게 하는 데 이르렀다.’고 진달하니, 임금이 온화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고, 이어서 군교 및 경조관(京兆官)을 견벌(譴罰)하라는 분부를 중지시켰다.
7월 17일 무인
전(前) 군수(郡守) 윤봉구(尹鳳九)가 향리(鄕里)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강연(講筵)에서 토론한 바는 바로 《성학집요(聖學輯要)》입니다. 신의 스승인 선정신(先正臣) 권상하(權尙夏)가 항상 말하기를, ‘이 책은 마땅히 한천(寒泉)331) 의 편찬에 나란히 나열해야 한다.’ 하였고,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은 또 효종 대왕(孝宗大王)께 고(告)하기를, ‘주자의 시대는 오늘의 시대와 가장 가깝고 조우(遭遇)한 바의 시세(時世)도 또 그와 서로 동일하기 때문에 그 말이 낱낱이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시기의 앞뒤는 5백여 년이고 국가의 크고 작음은 중화(中華)와 외국의 구별이 있는데도 그 말이 다 적용될 수 있음이 이미 이와 같습니다. 더구나 이이(李珥)는 바로 우리 동국(東國)의 대현(大賢)이고 또 본조(本朝)의 규모는 선조(宣祖) 이하로부터서는 바로 하나의 도철(塗轍)332) 입니다. 그 시사(時事)를 우려한 의논이 오늘날에 적중되지 않음이 없는데, 또 그 의리(義理)가 모두 주자에게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주자가 유정(留正)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군주가 먼저 ‘오붕당(惡朋黨)333) ’이란 세 글자를 가슴속에 넣어 둔 채 그 현부(賢否)와 충사(忠邪)를 따지지 않고 동일한 예로 미워한다면, 저들 소인(小人)으로서 편현(便儇)334) ·교밀(巧密)하여 윗사람의 마음을 잘 엿보는 자들이 군주의 미워하는 뜻으로 인하여 은밀히 기관(機關)335) 을 설치하여 이에 ‘군자(君子)의 옳고 곧음을 자부(自負)하며 동도(同道)로 붕우가 된 자를 편당(偏黨)에 용감한 것으로 지목할 것이고, 방정(方正)하고 엄의(嚴毅)하여 사인(邪人)을 배척해 요동되지 않는 것을 또 경알(傾軋)336) 과 희사(喜事)337) 로 돌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하는 바, 달콤한 말과 조용한 말씨는 혹 나랏일을 위하는 데 가깝기도 하고 부드러운 얼굴빛과 간사한 태도는 또 군주를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여, 군주로 하여금 그것을 보면 참으로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인은 친근함을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친근해지고 군자는 미워함을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미워져서 점차로 군자의 도(道)는 사라지고 소인의 도는 자라나 나라가 필경 멸망하고 마는 데 이를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기미는 현인(賢人)과 사인(邪人)을 변별하여 아주 분명히 심찰(審察)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이가 살피는 도리에 대해 상세히 논하였습니다. 이른바 ‘살핀다.’는 것은 그 마음을 살피는 것이니, 그 마음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바치는 데 있으면 당(黨)이 더욱 성(盛)할수록 나라는 더욱 편안하고, 그 마음이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뒷전으로 하는 데 있으면 그 당이 비록 적더라도 또한 나라를 멸망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군주가 먼저 이치를 밝히지 않고 한갓 억측과 지레 짐작만으로 관찰을 한다면, 공(公)으로써 사(私)를 삼고 아첨으로써 충성을 삼지 않을 경우가 적습니다. 이치를 밝히는 것은 바로 《대학(大學)》의 궁리(窮理)의 공부인데, 거경(居敬)은 또 궁리의 근본이 됩니다. 한원진이 한번 망언(妄言)한 것으로 인해 혹 중벌이라도 가한다면 옛사람의 이른바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쓴다.’는 의미로 볼 때 아마 이와 같이 해서는 부당할 것이며, 평일에 선비를 대우하는 예의가 장차 이로부터 파괴될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 이것을 나아가기 어려운 의리로 끌어대니, 비답하기를,
"산림(山林)에서 독서하는 것은 궁격(窮格)338) 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인데, 그대의 상소 중에 ‘당(黨)이 더욱 왕성할수록 나라가 더욱 편안하다.’는 등의 말은 혹시 궁리·격물이 도리어 지나친 것이 아니가? 이것이 내가 사림(士林)을 위해서 개탄스럽게 여기는 까닭이다. 한원진의 일은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침모(侵侮)하였으니, 그 상소가 엄폐하기 어렵다. 이번의 처분은 또한 참량(參量)함이 있었으니, 사양하지 말고 올라와서 나의 부족한 점을 보좌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천릉(遷陵) 발인(發靷) 때 노제(路祭)를 의정부와 충훈부에서 동시에 설행한 전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정부에서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제례를 행하는 것은 신자(臣子)가 조도(祖道)339) 를 받들어 전송하는 성의를 펼치기 위한 것이지만, 충훈부에 있어서는 다만 예전(禮典)에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독설(瀆褻)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그 뒤의 국휼(國恤) 및 천릉 때에는 다만 의정부에서만 시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구례에 따라 다만 의정부로 하여금 설행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사간원 【사간 한사득(韓師得)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목중형(睦重衡)은 역적의 공초(供招)에 긴박하게 나와 역모(逆謀)를 한 정절(情節)이 매우 낭자했습니다. 누차에 걸쳐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나, 아직 자백을 받지 못하였는데, 본청(本廳)으로 이송(移送)시킨다면 국체(國體)가 거꾸로 됨이 있습니다. 청컨대 다시 설국(設鞫)하여 엄중하게 심문해서 왕법(王法)을 바루소서. 삼조(三曹)의 낭관(郞官)은, 각각 일과(一窠)로써 구전(舊典)을 거듭 밝혀 청컨대 일찍이 삼사(三司)를 역임한 자로써 차출하여 그대로 춘추관(春秋館)의 직임을 겸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송징계(宋徵啓)를 지평으로, 임정(任珽)을 수찬으로 삼았다.
7월 18일 기묘
천릉 도감 당상(遷陵都監堂上)이 구대(求對)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천릉(遷陵) 때 발인(發靷)을 사시(巳時)로 정하였는데, 비록 깜깜한 밤과는 다르지만 산릉(山陵)을 올라갈 때에 또한 망촉(望燭)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청컨대 8백 자루로 작정(酌定)하여 방민(坊民)의 폐해를 덜어주도록 하소서. 죽산마(竹散馬)340) 와 의장(儀仗)은 먼저 수로(水路)로 배진(陪進)하고 외재궁(外梓宮)과 내재궁(內梓宮)도 또한 마땅히 이 예(例)를 적용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국상(國喪)의 발인 때 대왕(大王)의 영여(靈轝)는 전후의 사대(射隊)가 도합 8백 명이요, 왕후(王后)의 영여는 4백 명이 되는데, 이제 양릉(兩陵)을 같이 옮기니, 시위(侍衞)는 비록 각각 앞뒤에 갖추어야 하지만 사대는 8백 명으로 통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동필이 또 말하기를,
"새 능은 안은 자좌(子坐)인데 밖은 임좌(壬坐)이니, 묘표(墓表)의 음기(陰記)에 마땅히 ‘외즉임좌(外則壬坐)’란 네 글자를 자좌의 아래에 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굳이 주(註)로 달 것이 없으며 ‘모원(某原)’의 아래에 바로 이 네 글자를 쓰는 것이 옳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발인 때 총호사(摠護使)와 도감 당상 1원(員)은 대왕의 영여 뒤를 따르고 도감 당상 2원은 왕비의 영여 뒤를 따르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번에 능에 거둥하실 때는 시위의 의복은, 마땅히 흑립(黑笠)·백천익(白天翼)으로 하고, 금군(禁軍)과 협연장(挾輦將)·별군직(別軍職)은 마땅히 흑전립(黑戰笠)·백전복(白戰服)으로 해야 하고, 대장(大將)·중군(中軍)은 흑립을 쓰되 장식을 제거하고 절반을 물들인 청천익(靑天翼)으로 하고, 도성(都城)에 남아 있는 장신(將臣)들도 또한 이와 같이 하며, 발인 때는 시위관은 백립(白笠)·백천익을 착용하고 협영여장(挾靈轝將)과 포수(砲手)·살수(殺手)는 전립(戰笠)·전건(戰巾)을 착용하되 다 마땅히 백색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시복(緦服)으로 복제(服制)를 하니 발인 때의 시위는 다 마땅히 백립·백의를 착용해야 하고, 지방(紙榜)을 모신 신연(神輦)을 배종(陪從)하는 자는 마땅히 길복(吉服)을 착용해야 하며, 대가(大駕)341) 의 시위는 성복하기 전에는 천담복(淺淡服)을 착용하고 성복을 한 뒤에는 여러 장수들은 마땅히 흑립과 백의를 착용해야 하고, 여러 신하들은 오모(烏帽)·백의·오대(烏帶)를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행행(行幸)할 때는 대장과 중군은 전립·전복을 착용하되 다 마땅히 순길(純吉)을 사용해야 한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여러 신하들은 마땅히 오사모(烏紗帽)를 착용해야 하는데, 산릉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백모(白帽)를 착용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능 위에서 왕래하는 인원 이외에는 시위하는 여러 신하들과 장사(將士)들은 변복(變服)을 하는 것이 부당하다."
하고, 이어서 이에 따라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뒤에 또 김재로 등이 진달한 바로 인해 성복할 때에 전함관(前銜官)으로서 문신(文臣)은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을 역임한 자나 무신(武臣)은 일찍이 곤수(閫帥) 이상을 역임한 자는 다 제복(祭服)을 착용할 것과 당하관(堂下官)의 직책이 없는 자는 흑립·백의대(白衣帶)를 착용한 뒤 참반(參班)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또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구릉(舊陵)을 계봉(啓封)한 뒤에 시위(侍衞) 【분병조(分兵曹)·분총부(分摠府) 당상관·낭청(郞廳) 각 2원, 대왕위(大王位) 선전관(宣傳官) 4원, 무겸(武兼) 8원, 위장(衞將) 2원, 왕후위(王后位) 무겸(武兼) 4원, 위장(衛將) 2원은 본원(本員)으로 수효에 따라 정하여 보내고, 대왕위의 금군(禁軍)은 30인이고 왕후위의 금군은 20인이며, 뒤에는 분승지(分承旨) 4원과 분주서(分注書) 2원이 수행한다.】 를 임시로 차출하고, 우제(虞祭)는 중(重)한 쪽을 먼저하는 예(禮)로써 마땅히 대왕위에 먼저 행해야 하며, 능을 열어 성빈(成殯)한 뒤에 아침·저녁의 제전(祭奠)에 생물(生物)을 봉진(封進)하는 것에 있어서는 계축년342) 의 전례에 따라 여덟 가지 종류로 각도(各道)에 분정(分定)해야 합니다.’ 한 것으로 인해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구휼하는 거룩한 뜻을 우러러 본받아 분정(分定)하지 말고, 단전(單殿)에 진상(進上)하는 전례로써 봉진(封進)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7월 19일 경진
임금이 국청(鞫廳)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무신년343) 에 역적 이사성(李思晟)의 첩(妾)을 이성(利城)의 비(婢)로 삼은 것을 다시 법의 당부(當否)를 살펴서 신(臣)의 부(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였는데, 역적 이사성을 정법(正法)에 처할 때에 이괄(李适)·한명련(韓明璉)의 전례를 적용하여 이미 그 처(妻)를 교살(絞殺)하였으니, 처와 첩(妾)은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대답도 또한 신사철의 말과 같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첩은 아내와는 다르니, 마땅히 응좌율(應坐律)을 적용해야 한다. 응좌의 형률이 어디에 해당하는가?"
하니, 신사철이 말하기를,
"비(婢)로 삼는 것이 바로 응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응좌율로 시행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0일 신사
임금이 정관(政官)344) 에 명하여 옥서(玉署)345) 의 궐원(闕員)을 차출하라 하였다. 대개 첫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점차 들므로 장차 강연(講筵)을 열려고 한 것이다.
전라도에 큰 비가 내려 무덤이 무너져 내리고 관곽(棺槨)이 표류한 경우까지 있었다. 도신(道臣)이 그러한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애처롭게 여기고 관(官)에 명하여 장례 비용을 보조해 묻어 주게 하였다.
윤심형(尹心衡)을 응교로, 황정(黃晸)을 교리로, 황재(黃梓)를 집의로 삼았다.
경상도에 큰 비가 내려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고 촌락의 가옥이 또 침몰되었다. 휼전(恤典)을 베풀 것을 명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올해 주상의 탄신(誕辰)과 동지(冬至)의 방물(方物)·물선(物膳)을 동조(東朝)에 진상하는 이외에는 권감(權減)346) 하라는 분부가 있으셨는데,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진상하는 동지와 정조(正朝)의 방물로 전일에 권감하였던 것은 마땅히 준례와 같이 봉진(封進)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성(慈聖)의 하교이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제주(濟州)에 큰 바람이 불어 가옥이 무너지고 나무가 부러졌다.
충청 감사 신방(申昉)이 장계(狀啓)하기를,
"흉년이 든 해에 육지에서 조련하고 성(城)을 쌓는 것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농사를 방해하니, 청컨대 정지하고 단지 순찰·점검만을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7월 22일 계미
판윤(判尹) 이삼(李森)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양릉(兩陵)의 산역(山役)에는 마땅히 송도군(松都軍) 5백 명을 써야 하고 발인(發靷) 때는 마땅히 도유군(都遊軍) 5백 명을 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도군은 굳이 쓸 것이 없으며 다만 도유군을 쓸 수가 있으니, 발인할 때와 산역에 나누어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삼이 또 ‘도감(都監) 각방(各房)의 도유군은 50명을 더 책정하고, 전어군(傳語軍) 3백 명은 무신년347) 의 전례에 따라 감소시키고, 각사(各司)의 공인(貢人)과 액정 소속(掖庭所屬)은 응당 면제할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길을 닦는 역사(役事)에 사용하는 데 대비하고, 훈조계(燻造契)348) 에 맡겨서 민폐(民弊)를 덜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중관(李重觀)을 좌부승지로, 윤동형(尹東衡)을 응교로, 이귀휴(李龜休)를 장령으로, 이대원(李大源)을 지평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정언으로, 민정(閔珽)을 장령으로 삼았다.
7월 23일 갑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대원(李大源)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김석구(金錫耉)가 술을 판 것은 사람들이 전하는 말이 많고 헌리(憲吏)의 정탐도 또한 매우 상세하다고 하였는데, 승지 유엄(柳儼)이 경솔히 먼저 번거롭게 진달하여 스스로 해명한 상소를 원용해서 어지럽게 증거하여 반드시 이기기를 힘쓰고자 하였으니 만일, 경려(警勵)함이 없다면 대간(臺諫)의 기풍이 진작되지 못하고 나라의 금령(禁令)이 더욱 해이해질 것입니다. 청컨대 동부승지 유엄을 파직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청컨대 금위영(禁衞營) 별군관(別軍官) 등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라는 분부를 중지하여 과거(科擧)의 규정을 엄중히 하고 요행의 문호를 막으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4일 을유
사헌부 【지평 이대원(李大源)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한원진(韓元震)의 패망(悖妄)한 말은 누군들 매우 해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구해(救解)하는 의논이 전후에 걸쳐 번갈아 나오고 심지어는 대각(臺閣)에서 발론되기까지 하였으니, 청컨대 전 대사간 김용경(金龍慶)을 파직시켜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국가의 법(法)은 반드시 존귀한 이와 가까운 이에게 먼저 적용해야 하는데, 여가(閭家)의 금령(禁令)을 범한 미천한 유굉(柳紘)은 끝내 멀리 유배(流配)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초에 군교(軍校)에 대한 처분을 환수(還收)한 것은 대개 구경(九經)349) 의 ‘대신(大臣)을 존중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렇다면 유굉만이 혼자서 그 처벌을 받는 것은 결국 경중의 치우침을 면치 못합니다. 청컨대 유굉을 정배(定配)시키라는 분부를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사헌부에서 김석구(金錫耉)가 술을 팔아 이익을 독점한 죄를 논핵하니, 승지 유엄이 말하기를,
"김석구는 바로 고(故) 판서(判書) 김석연(金錫衍)의 서제(庶弟)인데, 김석연은 근신(謹愼)하였고 그 아우도 또 이를 본받았기 때문에 애당초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명성 왕후(明聖王后)와 동기간이니, 가령 범죄한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친척에게 돈목(敦睦)하는 의리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사헌부의 여러 대관(大官)들이 유엄의 말로 인해 서로 인솔해 인피(引避)하고, 드디어 이대원의 파직을 청하는 계사(啓辭)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석구는 바로 미천한 사람이다. 죄가 있고 죄가 없는 것은 유사(有司)가 있으니 스스로 마땅히 사실을 조사하여 법에 따라 처결해야 할 것이다. 어찌 감히 이웃 동네에 사는 정리와 체면으로 추조(秋曹)350) 에서 조사하기 이전과 대계(臺啓)가 막 발론된 시기에 먼저 스스로 분소(分疏)351) 할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 유엄은 제멋대로 한 실수가 있는 것이다. 잠깐 파직을 시키는 것은 경미한 처벌인데, 임금이 윤허를 하지 않은 것은 또한 ‘처벌을 존귀하고 가까운 이를 먼저 한다.’는 뜻에 부족함이 있으니, 어찌 방금(邦禁)의 신엄(申嚴)과 조강(朝綱)의 진숙(振肅)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장령 민정(閔珽)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영남(嶺南)궁차(宮差)352) 의 범죄는 도신(道臣)이 이미 사실을 조사하여 장문(狀聞)하였으니, 실로 조금도 용서해 줄 단서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이미 윤허하셨다가 즉시 중지하시니, 분명히 사인(私人)을 비호하는 뜻이 있고 끝내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을 일체로 보는 의미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청컨대 조속히 ‘도로 중지하라.’는 분부를 회수하여 공법(公法)을 엄중히 하고 간폐(奸弊)를 방지하소서.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은 평일에 자임(自任)한 바가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지난번 엄중한 하교를 한번 만난 이래로 곧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일이 궁방(宮房)에 관련된 것이라 해서 고분고분 봉행하여 1만 명이 넘는 농정(農丁)들을 노역(勞役)시켜 성사되지도 않는 모래 제방을 헛되이 축조했습니다. 아주 부득이한 지경에 이른 뒤에야 비로소 계문(啓聞)하였는데, 궁차를 논죄(論罪)한 것은 빙둘러서 비호한 것이라 전혀 조현명의 예전의 말씨와 같지 않았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스스로 반성하는 바 있고 조속히 조현명을 처벌하여 그 마음을 부끄럽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진(疏陳)한 바는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조현명의 일은 계본(啓本)에 애초 비호한 것이 없으니, 청한 바가 지나치다."
하였다.
이덕재(李德載)를 지평으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로 삼았다.
강원 감사 이진순(李眞淳)이 장계(狀啓)하기를,
"금성현(金城縣)에 불이 났습니다. 타서 재가 됨을 당한 민가는 마땅히 주휼(賙恤)을 베풀어야 하고, 이 불에 타버린 창고 곡식은 마땅히 견감(蠲減)을 허락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7월 25일 병술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진희(趙鎭禧)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의 소견(召見)하였다. 조진희가 말하기를,
"본부(本府)는 변방의 중요한 지역인데 병졸이 1천 명도 채 안되어 방어가 허술하니, 청컨대 묘당(廟堂)에 문의하여 군액(軍額)을 첨가시켜 광주(廣州)·수원(水原)의 예와 같이 독진(獨鎭)353) 으로 만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조진희가 또 말하기를,
"변금(邊禁)이 요사이 매우 해이해졌으니, 만일 변민(邊民) 중에 국법(國法)을 무시하고 국경(國境)을 넘어서 타국(他國)으로 가는 자가 있으면, 가지고 가는 것의 많고 적음을 물론하고 일률(一律)을 적용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먼저 참형(斬刑)에 처한 뒤에 아뢸 것을 명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여러 도(道)에서 큰 흉년이 들 것이 판명되었으니, 진휼(賑恤)하는 일이 바야흐로 시급합니다. 청한 바 공명첩(空名帖)354) 수천 장을 마땅히 삼남(三南)과 관동(關東)에 나누어 보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해 곡식을 모으느라 만든 공명첩은 비록 어쩔 수 없는 것이나, 증첩(贈帖)에 있어서는 그 남용(濫用)이 더욱 심하니,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민정(閔珽)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어제 본부(本府)의 신계(新啓)는 뜻은 동쪽에 있으면서 말은 서쪽에 하였으니, 용의(用意)가 기구(崎嶇)합니다. 명분상으로 비록 김용경(金龍慶)을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그 정신을 쏟은 바는 전적으로 위의 사항에 있습니다. 앞뒤로 번갈아가며 발언한 것들은 반드시 정석(鼎席)355) 을 동요시키고 전지(銓地)를 핍박하고자 한 것인데, 그 배포(排布)한 바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 듯합니다. 저 이대원(李大源)은 본래 이사상(李師尙)의 문객(門客)으로 그에게 길러지고 키워졌으니, 그 본말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영남의 경차관(敬差官)이 되었을 때 뇌물의 일 때문에 수의(繡衣)에게 장물(贓物)을 발각당하였습니다. 일의 허실은 물론하고 그 스스로 자중하는 도리에 있어 오직 마땅히 쭈그리고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의기양양하게 함부로 나와서 손과 발을 바쁘고 어지럽게 놀리니, 이것은 그 가운데는 필시 허다한 기괄(機括)356) 이 있을 것이나, 그의 염우(廉隅)357) 에 있어서는 가위 방도(放倒)됨이 여지가 없다 할 것입니다. 신은 이대원에게는 마땅히 삭판(削版)의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전조(銓曹)에서는 쉽게 의망(擬望)하여 조금도 신중을 기하지 않았으니, 해당 당상관(堂上官)을 마땅히 무겁게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엄의 일은 처벌을 논의함이 너무 과중하여 본디 이미 괴이하게 여겼다. 유굉의 일은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의도가 영상(領相)에 있었던 것이며, 김용경의 일은 그 적용한 형률이 결국 너무 지나친 바가 있었다. 이제 그대의 상소를 보고서 그 작태에 대해 크게 깨달았노니, 조속히 삭판을 시행하여 세도(世道)를 면려하고 전당(銓堂)의 문비(問備)도 또한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5일 병술
정언 남태량(南泰良)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하시고 인덕과 은혜가 흡족하나, 거경(居敬)·집의(集義)하여 극기(克己)의 학문에 실지로 힘을 쓰지 않기 때문에 사의(私意)의 싹이 날로 자라고 달로 성해집니다. 정령(政令)을 베풀어 조처하는 즈음에 대체로 대공 지정(大公至正)의 도(道)로써 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은혜와 소소한 혜택의 사이에 구구하게 하여, 형장(刑章)은 타락해 무너지는 탄식이 있고 정령은 굳어 맺히는 효험이 없습니다. 주장은 너무 지나치고 문식(文飾)은 점차 넓어져 아랫사람을 경시해 지레 의심하는 마음이 있고 순리대로 하여 자신을 겸손히 하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조종 운용함이 급박하고 번쇄하여 소인(小仁)으로 하여금 간혹 대인(大仁)을 해치게 하는 결과를 자아내게 하며, 왕도(王道)는 항상 패술(霸術)에 섞여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전하의 병의 근원입니다. 붕당(朋黨)을 타파하려고 하나 능히 공심(公心)·정리(正理)로써 결단하지 못하여 항상 우물쭈물하고 그냥 덮어두는 의사가 있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려고 하나 능히 지성(至誠)·측달(惻怛)로써 미루어 확충하지 못하고 한갓 언어·문자의 지엽적인 것만 일삼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성찰(省察)과 극치(克治)에 성의(誠意)를 더하여 사의(私意)가 용납될 수 없도록 하고 강의(剛毅)로 마음을 간직하고 겸순(謙順)으로 인물을 접대하여 소소한 혜택에 전심하여 본심(本心)의 덕(德)을 해치지 마시고 스스로 현성(賢聖)을 자처하지 말아서 군하(群下)의 심정(心情)을 소통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가운데 진달한 바를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온유(溫諭)하여 서둘러 도성(都城)에 들어오게 하였다.
7월 27일 무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때 큰 비가 내려 연일 그치지 않았는데, 사대문(四大門)에 영제(禜祭)358) 를 지내니 3일 만에 비가 그쳤다.
전라도에 큰 비가 와서 운봉현(雲峰縣) 반야산(般若山)이 무너져 사람과 가축이 많이 깔려 죽었다.
7월 28일 기축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역적 이해(李垓)의 집을 헐고 웅덩이를 파는 일과 유엄(柳儼)·김용경(金龍慶)·유굉(柳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이광덕(李匡德)을 이조 참의로, 송징계(宋徵啓)·조진세(趙鎭世)를 지평으로, 박필균(朴弼均)을 정언으로, 윤동형(尹東衡)을 부교리로, 서명구(徐命九)를 수찬으로, 김흥경(金興慶)을 판돈녕부사로 삼았다.
함경도에 있는 어떤 소가 한꺼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7월 29일 경인
유정(柳綎)을 좌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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