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 1731년 8월

싸라리리 2025. 9. 10. 09:57
반응형

8월 1일 신묘

임금이 친히 삭제(朔祭)를 경휘전(敬徽殿)에서 행하였다.

 

8월 2일 임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고 진정(賑政)을 논의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금년의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는 삼남(三南)이 가장 혹독한데, 여러 도(道)도 또한 그러합니다. 진휼을 의논하는 정사를 진실로 마땅히 미리 강구해야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건량(乾糧)359)  을 백급(白給)360)  하는 법이 생겨나면서부터 지방의 간민(奸民)이 간혹 기민(饑民) 속에 함부로 끼어들어온 경우가 있어 허실을 매양 서로 속이는 일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다만 기민을 선별하기를 정밀하게 하여 죽(粥)을 쑤어서 먹이는 것이 실질적인 효과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 중에서 어떤이는 백급을 편리하다 하고 어떤이는 죽을 마련해 주는 것이 낫다고 하여 의논이 귀일되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죽을 쑤어 준다면 필시 널리 베풀 수 없을 것이나, 그래도 그만두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백급을 허락하지 않고 다만 죽만을 마련해 주도록 한다면 백성중에 반드시 실망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죽을 쑤어서 나누어 주거나 백급을 하거나를 물론하고 다만 수령이 그 성의를 다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니, 잘하지 못하는 자는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라. 비록 이웃 마을에 곡식을 축적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이웃의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못하여 굶어서 구덩이에 빠져 죽게 한다면, 마땅히 처벌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국법(國法)을 따르는 신하를 가려서 나누어 파견하여 편안하게 하기를 명하고, 이어서 진휼(賑恤)을 감독하게 한다면 더욱 실효가 있을 듯하다. 대신은 그런 이를 천거하라."
하였다. 조문명이 김상익(金尙翼)·이거원(李巨源)을 상주(上奏)하니, 임금이 김상익을 호남으로, 이덕재(李德載)를 호서로, 이거원을 영남으로 보냈다. 이거원은 바로 목호룡(睦虎龍)의 교문(敎文)을 제진(製進)한 자로서 여러 해 동안 고폐(錮廢)되어 있었는데, 대신이 그 재능을 애석하게 여겨 마침내 천거했던 것이다. 조문명이 또 말하기를,
"흉년이 든 해에 주구(賙救)하는 계책은 다만 안으로 절손(節損)의 덕을 행하고 밖으로 감생(減省)의 혜택을 베푸는 길이 있을 뿐인데, 외읍(外邑)에 대해 권분(勸分)361)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가 됩니다. 그러나 만일 격려·권장하는 도리가 없다면 힘을 발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관작(官爵)을 판매하는 한가지 일은 비록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또한 흉년을 구휼하는 중요한 계책이 됩니다. 효종(孝宗)·현종(顯宗) 양조(兩朝)에 일찍이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었고, 주자(朱子)가 왕회(王淮)362)  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조가(朝家)에서 매양 일이 있으면 권유하였다가 일이 지나면 인색하여 그대로 백성에게 신용을 잃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백성이 따르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서작(敍爵)과 상사(賞賜)는 비록 남용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가령 주부(主簿)·동추(同樞)·군함(軍銜)과 같은 직책은 어찌 족히 아낄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그러나 공명첩(空名帖)으로 곡식을 모으는 것을 방지하여 백성에게 억지로 징수하는 자는 더욱 마땅히 통렬히 금해야 하니, 그 점을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조문명이 또 말하기를,
"나라의 큰 정사(政事)로 조운(漕運)363)  만한 것이 없는데, 무신년364)  에 파손된 선박이 40여 척이고 금년에 또 90여 척이 파손되었습니다. 만일 풍락목(風落木)365)  을 연읍(沿邑)에 분배하여 각자 배를 만들도록 하고, 상납(上納)할 때 두량(斗量)을 높고 무겁게 하는 폐단을 엄중하게 방지하여 선인(船人)들로 하여금 운수(運輸)에 대해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한다면,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운의 길이 장차 끊어질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유안(劉晏)366)  의 말을 외워서 고(告)하고, 묘당(廟堂)에서 연해(沿海) 여러 고을에 관칙(關飭)367)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문명이 또 말하기를,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경납전(京納錢) 2만여 꿰미와 쌀 1천여 곡(斛)과 공목(貢木)368)   40여 동(同)을 자기 멋대로 남겨두어서 진자(賑資)에 대비한 것은 비록 마땅히 겨울에 가서 거기 준하는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이나, 그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은 점은 마땅히 문비(門備)의 처벌이 있어야 합니다.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의 전후에 걸쳐 계청(啓請)한 것은 ‘모조리 시행할 것을 허락하라.’는 청이 있으니, 또한 번신(藩臣)의 체모를 잃었습니다. 마땅히 무겁게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충청 감사 신방(申昉)은 바야흐로 대언(臺言)을 만났고 임기도 또한 다 되었으니, 체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주달한 바를 모두 옳게 여겼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내관(內官) 정중명(鄭重明)이라는 자가 있어 추예(騶隷)369)  를 많이 거느리고 가다가 길옆에서 신(臣)을 만났는데,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환시(宦寺)가 감히 외조관(外朝官)과 서로 대항하는 것은 진실로 이미 교만 방자한 일이지만, 또한 성덕(聖德)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무거운 견책을 내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정중명을 파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황정(黃晸)을 부수찬으로, 유엄(柳儼)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8월 3일 계사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비로소 《예기(禮記)》를 강(講)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덕수(李德壽)가 말하기를,
"지만(志滿)의 반대는 바로 겸손함이고 낙극(樂極)의 반대는 바로 검소함입니다. 신이 나이 예순에 가까워 세상을 열력(閱歷)함이 많은데, 일찍이 보면 사대부(士大夫)로서 벼슬을 한 사람들 중에서 진실로 그 의지가 자만하거나 권세를 탐하여 즐기면 실패하지 않은 자가 적었습니다. 이 이치는 분명하여 속일 수가 없는 바가 있으니, 사대부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제왕(帝王)이겠습니까? 지난날을 통해서 보면 오만 때문에 재앙을 부른 자가 전후에 걸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가령 호해(胡亥)370)  의 이목(耳目)과 심지(心志)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한 것 같은 경우는 2세(世)를 지나지 못하고 그쳤으니, 낙(樂)은 끝까지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더욱 증험할 수 있습니다. 《주역(周易)》의 64괘(卦)가 매 괘(卦)의 육효(六爻)마다 길흉이 서로 섞여 있는데 다만 겸괘(謙卦)만은 육효(六爻)가 모두 순길(純吉)이어서 흉함이 없으니, 겸손함이 하늘과 인간의 돕는 바가 된다는 것을 따라서 알 수가 있습니다. 군주는 신민(臣民)의 위에 처해 있으니, 마땅히 겸에는 힘쓸 일이 없을 것 같지만, 만일 혹시 스스로 거룩한 체하고 스스로 자랑하여 여러 신하들을 깔보고서 마음을 비워 협조를 요구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면, 과오는 날로 드러나 끝내 반드시 항룡 유회(亢龍有悔)371)  에 이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주가 마땅히 경계해야 할 바는 오만함이고 마땅히 힘써야 할 바는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또 하늘이 미워하는 바로서 사치한 것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근래에 풍속이 날로 사치한 데로 흐르니, 백성이 가난하고 재정이 궁핍한 것이 모두 여기에 연유된 것입니다. 옛날 우리 선조(宣祖)께서는 검덕(儉德)이 매우 밝아 비록 공주(公主)의 귀한 몸이라지만 그 자녀들을 다 굵은 무명베에다 푸른 물감을 들여서 입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귀한 집의 아이인 줄을 알지 못했으므로, 궁중에서는 지금까지 전하여 말해 오고 있습니다. 선조의 후손들이 번창한 것은 또한 검소함을 숭상한 효험이라 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멀리 열조(烈祖)의 성덕(盛德)을 본받고 아래로는 군하(群下)의 사치함을 신칙(申飭)하여, 비록 두 옹주(翁主)가 이다음에 이강(釐降)372)  할 때라도 무릇 여러 가지 혼구(婚具)를 힘써 간략함을 좇아서 복을 기르는 방도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송진명(宋眞明)이 말하기를,
"무신년373)   난에 신이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있을 때 교졸(校卒)로서 충성을 바쳐 용감히 싸운 자들을 신이 제대로 포양(褒揚)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러 민멸(泯滅)되기도 하였습니다. 가령 이기(李機) 같은 자는 정탐(偵探)을 잘하여 안성(安城)·죽산(竹山)에서의 승전(勝戰)은 이기의 공로에 연유된 것인데, 끝내 그의 공로에 보상한 것이라고는 마첩(馬帖) 하나를 얻었을 뿐입니다. 전연 충절(忠節)을 권장하는 것이 못되니, 마땅히 이기에게 한 변방의 벼슬자리를 주어서 다른 사람을 권장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대정(大政)374)  에 수용(收用)할 것을 명하였다.

 

사간원 【사간 한사득(韓師得)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여사군(轝士軍)을 초정(抄定)할 때에 부리(部吏)가 뇌물을 받고 조종한 폐단이 있으니 마땅히 해부(該部)의 관원을 도태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잡아다 처치할 것을 명하였다.

 

사헌부 【지평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상벌(賞罰)은 권한이 위에 있으므로 아랫사람이 간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원(水原) 교졸(校卒)의 상(賞)을 논한 것과 우하형(禹夏亨)의 함부로 사람을 죽인 것은 그 사실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재신(宰臣)과 한 옥당(玉堂)이 서로 따라 진청(陳請)하였으니, 매우 외람되고 참람한 일입니다. 마땅히 문비(問備)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나는 부사(府使)로 있을 때 목격한 것이고, 하나는 어사로 갔을 때 염찰(廉察)한 것이다. 사실대로 임금에게 고(告)한 것이니, 무슨 죄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청한 바가 옳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8월 3일 계사

함경도 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지난 6월에 우박이 쏟아졌다.

 

8월 4일 갑오

임금이 도감 당상(都監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새 능(陵)을 교하(交河)에 정했다 하여 본현(本縣)을 승격시켜 군(郡)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아뢰기를,
"천릉(遷陵)할 때 군병(軍兵)으로 영여(靈轝)를 모시는 자와 어가(御駕)를 따라 호위(扈衛)하고 유주(留住)하는 자는 계축년375)  의 천릉과 온천에 행행(行幸)하는 준례에 따라 모두 양비(粮費)를 지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새 릉(陵)의 화소(火巢)376)  는 주봉(主峰) 뒤 가사내산(加沙乃山)부터 법흥산(法興山)을 경유하여 경계가 되고, 청룡(靑龍) 바깥부터 당산(堂山)까지가 경계가 되고, 또 당산으로부터 노정(盧亭)까지가 경계가 되고, 또 노정으로부터 학당포(學堂浦)·약산동(藥山洞)을 경유하여 또 꺾어서 남쪽으로 금단산(黔丹山)을 돌아서 법흥산(法興山)에 합해지는 데까지가 경계가 되니, 주의가 15리 가량 됩니다. 그 안에 있는 황폐한 민전(民田)을 지부(地部)로 하여금 가격을 계산해서 지급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이재후(李載厚)를 정언으로, 이만영(李萬榮)을 장령으로, 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송성명(宋成明)을 공조 판서로, 윤혜교(尹惠敎)를 대사헌으로, 윤순(尹淳)을 우참찬으로, 윤동형(尹東衡)을 응교로, 조한위(趙漢緯)를 교리로, 윤흥무(尹興茂)를 장령으로, 이덕부(李德孚)를 대사간으로, 조원명(造遠命)을 부제학으로, 유시모(柳時模)를 헌납으로, 윤광운(尹光運)을 부수찬으로, 이종백(李宗白)을 부교리로 삼았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 참판 조상경(趙尙絅),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의 정사(政事)였다.

 

8월 6일 병신

수찬 임정(任珽)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중용(中庸)》의 구경(九經)의 의미와 추성(鄒聖)377)  의 예사(禮使)378)  의 훈계를 진실로 충분히 강론하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번에 과실을 책망하는 하교가 의정(議政)의 자리에까지 내려지고 업신여기는 안색이 갑자기 연석(筵席)에 나타났습니다. 여사(閭舍)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은 비록 신칙(申飭)함이 있었으나, 대신 군교(軍校)를 유배(流配)시킨 것은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도리를 아주 상실한 것이고, 편전(便殿)에서 사대(賜對)할 적에 일을 아뢰기를 기다리지 않고 유신(儒臣)을 질책한 것은 언자(言者)를 거절하는 뜻을 역력히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만물(萬物)을 혼자서 다스리는 지혜로써 여러 신하들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으신 것이며, 다만 일시적인 과오일 뿐이 아니니, 삼가 본원(本源)의 자리에 이러한 병의 근원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염려스럽습니다. 진실로 힘차게 극치(克治)를 가하지 않는다면 대신을 종처럼 꾸짖고 여러 관원들을 돼지처럼 질타하는 데 거의 이르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탕평(蕩平)의 정책을 우선적으로 강구하시어 인협(寅協)379)  의 도리를 힘쓰게 하심에도 조정의 신하들은 한결같이 모가 나는 일이 없기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색목(色目)이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비록 옳더라도 감히 옳다고 말하지 못하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비록 그르더라도 감히 그르다고 말하지 못하여 위와 아래에서 죄를 면하려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결백 정직한 기풍은 점차 미약해지고 허위와 구투(苟渝)380)  의 습관은 날로 자라나서 당색(黨色)의 여전함을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임시변통으로 꾸려나가며 시일을 넘기는 것은 옳겠지만, 서로가 공경하고 사랑하며 편당(偏黨)이 없는 곳에 함께 나아가기를 추구하려 한다면 아마도 이름과 실상이 서로 위배되고 일과 효험이 더욱 멀어질 듯 합니다. 이것이 비록 여러 신하들의 과오이긴 하지만, 혹시나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이 일을 아뢰고 사람을 논평하는 즈음에 미리 당동 벌이(黨同伐異)381)  로 의심을 하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자들이 성상의 뜻을 엿보고 서로 이끌어 암아(媕婀)382)  ·농조(籠罩)383)  의 설(設)을 하는 데 습관이 된 것인가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말을 들을 즈음에 혹시라도 당색(黨色)이 같고 다름을 의심하심으로 그 중간에서 속단하지 마시고 한결같이 그 옳고 그름의 실상을 구명(究明)하소서.
주전(鑄錢)의 폐해는 이해(利害)가 서로 반반입니다. 비록 혹시 목전의 시급함을 구제한다 하더라도 속마(粟麻)·사백(絲帛)의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저축한 곡식을 모조리 꺼내어 무용한 것을 유용한 것으로 만들었다가 끝내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어 전황(錢荒)384)  의 폐단이 또 오늘날과 같음에 이른다면, 장차 해마다 추가로 주전(鑄錢)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이익의 근원이 한 번 열리면 도둑이 더욱 일어나게 될 것이니, 결단코 그것이 불가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팔도(八道)의 도신(道臣)들은 진실로 이미 한 도(道)를 떼어서 맡겨 주었으니, 무릇 수재(水災)나 한재(旱災)를 당해서는 마땅히 한결같이 그들의 구획(區劃)하는 바를 따르고 역량이 모자라는 자는 파면시키면 될 뿐입니다. 그런데 묘당재신(廟堂宰臣)이 각도(各道)를 분장(分掌)하는 것은 설관(設官)·분직(分職)의 뜻에 위배됨이 있으니, 마땅히 혁파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을 종처럼 꾸짖는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하여 한 말인가? 이처럼 파연(罷軟)385)  한 이론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탕평의 설은 구습(舊習)에서 가려움을 느낀 것이 아닌가?"
하였다.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목릉(穆陵)386)  의 왕손(王孫)으로는 다만 회원군이 있을 뿐인데 나이 90세를 넘기면서 사조(四朝)를 내리 섬겨 소심(小心)하고 근신(謹愼)하였으니, 가상스러운 일이라 하여 구재(柩材)를 보내 주고 3년 동안의 녹미[廩]를 지급할 것을 명하고, 절혜(節惠)387)  의 은전도 또한 행장(行狀)을 기다리지 않고 내리게 하였다.

 

8월 7일 정유

약방(藥房)에서 임금의 기후(氣候)를 진찰하였다. 임금이 도제조 홍치중(洪致中)에게 묻기를,
"새 능(陵)의 흙 빛깔이 어떠하던가?"
하니, 홍치중이 말하기를,
"흙의 성질이 굳고 단단하여 그 빛깔이 깎아낸 납(蠟)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또 귀룡(龜龍)의 무늬와 같아서 화사(畫師)로 하여금 모사(模寫)하게 한다 하더라도 또한 그처럼 방불(彷彿)하게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혈(穴)이 있는 곳에는 산 거북이 엎드려 있었는데 아침에 나가 보자 갑자기 없어졌으니, 분명히 그곳이 길지(吉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매우 기뻐하였다. 부제조 박문수(朴文秀)가, ‘따로 선전관(宣傳官)으로서 시위(侍衞)하는 자를 가려서 내시부(內侍府)의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자들을 엄중하게 신칙(申飭)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치중이 또 ‘여사군(轝士軍)으로서 고양(高陽)·파주(坡州)의 중간에 주둔하는 자들이 반드시 촌락에 폐해를 끼쳐 위세(威勢)로써 제어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여사 대장(轝士大將)에게 신칙하여 만일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자가 있으면 군율(軍律)로써 다스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능(陵)에 거둥할 때 각사(各司)에서 공인(貢人)에게 말을 요구하는 폐단을 금할 것을 명하고, 대신(大臣) 이하의 배종(陪從)하는 자들은 스스로 밥을 지참하게 하여 각사(各司)에 폐(弊)를 덜어주도록 하였다.

 

8월 8일 무술

달이 심성(心星)를 범하였다.

 

사헌부 【지평(持平)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서천 군수(舒川郡守) 이경석(李慶錫)은 몸가짐이 비루하고 적성 현감(積城縣監) 조일제(趙一濟)는 사람됨이 혼암(昏暗)하고 용렬하니, 청컨대 모두 개차(改差)하소서. 전라 도사(全羅都事) 조창래(趙昌來)는 명칭(名稱)이 본래 없으니, 청컨대 그 직책을 바꾸소서. 강원 도사(江原都事) 최규태(崔逵泰)는 도내(道內)의 사람으로 본도(本道)의 아막(亞幕)388)  으로 임명하여 검전(檢田)·고시(考試)의 일을 맡기기가 부당하니, 청컨대 체직시키소서. 이봉명(李鳳鳴)의 비루함과 이양(李瀁)의 용렬함을 다 함부로 기랑(騎郞)389)  에 의망(擬望)하고, 시골 구석의 이력(履歷)이 없는 자와 상역(象譯)390)  으로 공로(功勞)가 없는 자를 또한 동추(同樞)391)  에 의망하였으니, 동전(東銓)·서전(西銓)의 해당 당상관(堂上官)에게 모두 문비(問備)를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8월 9일 기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헌부 【지평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창래(趙昌來)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8월 10일 경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강세작(康世爵)의 자손으로 북방(北方)에 있는 자와 호두필(胡斗弼)의 오봉(五峰)392)  의 후예(後裔)가 된 이는 모두 중국(中國)으로부터 왔는데, 조정에서 본래 우대하던 자들이니, 모두 마땅히 급복(給復)393)  하여 진휼(軫恤)함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도 또한 자손을 녹용(錄用)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강(康)·호(胡) 두 사람은 모두 그 후손을 녹용하고 또한 급복하게 하라."
하였다. 조문명이 또 말하기를,
"충청도 안흥항(安興項)은 바로 삼남(三南)의 조운(漕運)하는 길인데, 그 험하기가 구당(瞿塘)394)  과 같아서 선박이 파손되는 일이 이곳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전조(前朝)에서 포구를 굴착한 일이 있어 옛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굴착했던 곳은 이미 메꾸어지고 취재(臭載)395)  가 서로 연이어져 심지어는 남북(南北)에 창고를 설치하자는 의논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거기 소모되는 비용이 매우 많아서 그대로 중지하여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마땅히 따로 안흥항을 굴착하여 뱃길을 빠르게 해야 하는데, 듣건대, 그 포(浦) 안에 또 방파(旁派)가 조석(朝夕)으로 토납(吐納)하는 물을 받아서 서로 격사(激射)하여 떠내려온 모래가 정체되어 거의 모래벌을 이루었으니, 취재의 우려가 모두 여기에서 연유된다고 합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축대를 쌓아 방파의 횡설(橫洩)을 막아서 모래가 정체되는 우환을 제거하고 제방 안의 기름진 땅에 천석(千石)의 곡식을 심는다면, 비용은 적게 들고 거두는 이익은 클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고, 이내 소매 속에서 도본(圖本)을 꺼내어 가리키며 진달하기를,
"창고를 설치하자는 의논은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주창하였는데, 전적으로 맡겨 완성을 책임지울 것을 자청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김육에게 위임하였던 일을 신에게 위임한다면, 신이 마땅히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동 부사(河東府使) 이선(李譔)은 일찍이 안흥 첨사(安興僉使)에 임명되었으므로 그곳 지리에 익숙하니, 마땅히 그에게 그전 직임(職任)을 다시 주어서 그와 함께 가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성공하면 이익이 있겠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해가 있을 것이니 대신(大臣)이 경솔하게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보내어 이선과 함께 가서 살펴보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원 【대사간 한사선(韓師善)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강계 부사(江界府使) 백수일(白守一)은 열 냥의 인삼(人蔘)을 권재(權宰)396)  에게 주었고, 전 함종 부사(咸縱府使) 한형(韓珩)은 설면(雪綿)의 경의(輕衣)를 세도가에게 뇌물로 바쳤습니다. 뇌물을 숭상하는 습관은 마땅히 징계하여야 되니, 청컨대 모두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풍문에 전하는 말을 믿을 수 없으니, 모두 잡아다 사실을 조사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령 이만영(李萬榮)은 장통(掌通)397)  에 화를 내고 정관(政官)을 질책하여 모욕하였으니, 매우 해괴하고 망령된 일입니다. 청컨대 그를 파직시키소서. 사옹 첨정(司饔僉正) 심상찬(沈尙燦)과 공조 정랑(工曹正郞) 윤창래(尹昌來)는 모두 너무 늙어서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니, 청컨대 모두 체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대신(臺臣)이 백수일의 일로 전계(傳啓)하기를 마치니, 우의정 조문명(趙文命),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 판윤 이삼(李森), 형조 판서 윤유(尹游), 대사성 송진명(宋眞明) 등이 다 말하기를,
"백수일에게 인삼을 받은 것은 그 수량은 비록 대신(臺臣)이 말한 바와 같지 않지만, 이미 받은 바가 있으니 감히 숨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묻지도 않았는데, 대관(大官)이 먼저 그것을 말하고 여러 재신(宰臣)들도 또한 따라 말하니, ‘임금을 섬김에 속이지 않는 뜻’은 진실로 아름다우나, 그런 일이 있었다면 고치고 없었다면 더욱 힘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다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서명구(徐命九)를 부응교로, 한현모(韓顯謨)를 부교리로 삼았다.

 

8월 11일 신축

동의금(同義禁) 이세근(李世瑾)이 상소 진계(陳戒)하여 날로 성덕(聖德)을 새롭게 하고 날로 대업(大業)을 넓힐 것을 청하고, 또 한 책자를 올렸는데 명칭을 《성조갱장록(聖朝羹墻綠)》이라 하였다. 대개 열성조(列聖朝)의 가언(嘉言)과 선정(善政) 가운데서 본받을 만하고 실행할 만한 것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임금이 열람하고 그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비답을 내려 포유(褒諭)하였다.

 

이조 참의 이광덕(李匡德)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성탁(成琢)이 신(臣)을 무함한 것은 세 가지 일인데, 그 첫째는 심유현(沈維賢)의 담양 군수(潭陽郡守) 장파(狀罷)를 만류했다는 것이고, 그 둘째는 적(賊)을 위해 양식을 끌어 모아 공사(公私)의 선적(船積)을 금했다는 것이며, 그 셋째는 은밀히 적(賊)을 위한 계략을 세워 조경(趙儆)으로 하여금 물러가 산성(山城)을 지키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은 황세(荒歲)의 수령(守令)을 실화(失火)한 이유로 공죄(公罪)로 단정하여 파직시킬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만류하였으나 나중에 가서 그만둔 것은 심유현의 죄가 오로지 실화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번째 것은 공곡(公穀)을 운반하기 전에는 사상(私商)으로 하여금 먼저 출발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선상(船商)에게 원한을 사서 근거없는 말을 자아내게 된 것입니다. 그 세 번째 것은 조경을 병사(兵使)로써 입암 산성(笠巖山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조경이 한 곳에 머무르고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그 죄를 계론(啓論)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일을 근거할 만한 문부(文簿)가 있으니, 많은 말씀을 드릴 일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서 척퇴(斥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통촉하였다.’고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8월 13일 계묘

한사득(韓師得)을 집의로, 유언통(兪彦通)을 장령으로, 민정(閔珽)을 헌납으로, 박사정(朴師正)·김진상(金鎭商)을 부교리로, 권혁(權爀)·심성희(沈聖希)를 수찬으로, 임정(任珽)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천릉(遷陵)하는 날에 현궁(玄宮)을 열 때 친림(親臨)하려고 하였다. 연신(筵臣)이 ‘지기(地氣)가 울적(鬱積)된 것이 백년이니 몸소 가보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면서 굳이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부인(婦人)의 일에 가까운 것이다."
하였다. 또 성복(成服)한 뒤로부터 성빈(成殯)이 이를 때까지 소찬(素饌)을 올릴 것을 명함으로 인해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이 누차 간쟁하였으나, 임금이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8월 15일 을사

영남의 수령(守令)에게 우선 권솔(眷率)398)  을 정지시키고, 양남(兩南)도 또한 이와 같이 해서 민폐를 덜고 진사(賑事)에 전념하게 할 것을 명하였으니, 감사 조현명(趙顯命)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다.

 

함경도 영흥부(永興府)에 우박이 쏟아졌는데, 크기가 달걀만 하였다.

 

응교 윤동형(尹東衡), 부수찬 황정(黃晸)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3년 이내에 능(陵)의 거둥에 있어 성상께서 백철릭[白貼裏]을 착용하는 것은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청컨대 당초의 의주(儀註)에 따라 익선관(翼善冠)과 백포(白袍) 차림으로 능소(陵所)에 나아가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8월 16일 병오

이날 묘시(卯時)가 장릉(長陵)의 구릉(舊陵)을 파는 시각이었다. 그 시간이 되자 임금이 시복(緦服)을 갖추어 입고 빈양문(賓陽門)에서 성복례(成服禮)를 행하였는데, 곡(哭)하고 사배(四拜)하였다. 백관(百官)들도 또한 따라서 성복하였다. 이보다 앞서 예조에서 성복의 의주(儀註)를 올렸는데, 그 의주(儀註)에,
"임금은 세숙포(細熟布)의 시복(緦服)을 착용하고 【시사(視事)할 때나 연거(燕居)할 때는, 평상시의 소복(素服)을 그대로 착용한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은 세숙포의 대수(大袖)·장군(長裙)과 개두(蓋頭)·두수(頭𢄼) 및 대(帶)와 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한다. 【연거할 때는 백의상(白衣裳)·흑개두(黑蓋頭)·두수 및 백대(百帶)·백피혜를 착용한다.】  중궁전(中宮殿)은 임금의 복(服)과 같고, 빈궁(嬪宮)은 대왕 대비전과 같고, 명부(命婦)의 복은 중궁전과 같고, 대왕 대비전의 상궁(尙宮) 이하 및 빈궁의 수규(守閨)399)   이하는 백의상·흑개두·두수 및 대·백피혜를 착용하고 대전(大殿)·중궁전 상궁 이하는 백의상·개두·두수와 대·백피혜를 착용한다. 【평상시에는 그대로 소복을 착용한다.】  종친(宗親)·문무 백관(文武百官) 및 녹(祿)을 받지 않는 관원, 대소 사신(使臣), 외관(外官)은 세숙포의 시복을 착용하고, 【공무를 볼 때는 백포 단령(白布團領)·오사모(烏紗帽)·흑대를 착용하고 평상시에는 흑립·백의·백대를 착용한다.】  변지(邊地)의 수령은 변복(變服)을 하지 말며, 종묘(宗廟)·사직(私稷)과 각 능전(陵殿)의 관원들도 모두 상복(常服)을 착용한다. 【출직(出直)할 때는 백관의 복과 같다.】  본릉(本陵)의 참봉(參奉)은 개릉(開陵)하는 날로부터 출직(出直)·입직(入直)할 때에는 백관의 복과 같고, 생원(生員)·진사(進士)·유학(幼學)은 흑두건·흑립·백의·백대를 착용하며, 서인(庶人)은 흑립·백의·백대를 착용한다. 개릉(開陵)하는 날로부터 능(陵) 안에서 일을 보는 사람은 포모(布帽)·포대(布帶)를 착용하고, 영악전(靈幄殿)의 시위(侍衞)와 액정서(掖庭署)의 차비인(差備人) 등은 백두건·백의·백대를 착용하고 시위·나인(內人)은 백의상·백개두·두수·백대·백피혜를 착용한다. 각전(各殿)의 시복(緦服)은 개릉하여 망곡(望哭)하는 날로부터 석 달을 끝마치고 벗으며, 【백관(百官)들도 같다.】  복을 벗을 때에도 또한 곡하고 사배하기를 위의 의식과 같이 한다고 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백립(白笠)·소철릭[素貼裏]·백화(白靴)를 갖추어 입고 장릉(長陵)에 거둥하였다. 연로(輦路)의 좁은 곳을 군병(軍兵)으로 하여금 원앙대(鴛鴦隊)를 만들어 화곡(禾穀)을 손상하지 않게 하였다. 정오에는 청담(淸潭)에서 휴식하고, 저녁에는 고양(高陽) 행궁(行宮)에서 유숙하였다.

 

8월 17일 정미

어가(御駕)가 파주(坡州)를 향하여 가다가 낮에는 분수원(分水院)에서 휴식하고 파주 행궁(行宮)으로부터 장릉(長陵)에 이르렀다. 도승지 박문수(朴文秀)에게 민폐를 알아보도록 명하니, 백성들이 ‘개천이 뒤집혀 모래가 뒤덮인 재앙과 백골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억울함과 옛 환자(還子)의 납부를 독촉하는 괴로움’이라고 답하였다. 임금이 ‘마땅히 진휼(軫恤)하겠노라.’고 하유(下諭)하고, 이어서 세 고을의 죄질이 무거운 죄수로서 사건의 결말이 나지 않아 오랫동안 옥(獄)에 갇혀 있는 자들을 석방하여 흠휼(欽恤)하는 뜻을 보일 것을 명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 등이 길 왼쪽에서 공경히 영접하니, 임금이 어가를 멈추고 위로하였다. 여러 신하로서 온 자도 모두 내반(內班)에 참여시킬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홍살문에 나아가 곡(哭)하고 사배(四拜)하였다. 이를 마치자, 이어 대왕(大王)의 능(陵)에 나아가 휘장을 걷고 두루 살펴보았다. 다음엔 왕후(王后)의 능에 나아가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총호사(摠護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돌 틈바구니에 뱀의 뼈가 많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뱀의 뼈뿐만 아니라 흙 빛깔도 또한 아름답지 못하니, 실로 경솔하게 천장(遷葬)한다는 후회가 없다. 천봉(遷奉)한 이후에 이 지역을 마땅히 내버려야 할 것인가?"
하니, 홍치중이 말하기를,
"백호(白虎)의 건너편 사좌(巳坐)의 언덕을 옛부터 길지(吉地)라 칭합니다. 그리고 또 효종 대왕께서 손수 심은 회목(檜木)이 있어서 자란 것이 백년에 가깝습니다. 함께 마땅히 지방관으로 하여금 봉금(封禁)하여 수호(守護)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잡은 뱀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놓아줄 것을 명하였으며, 죽은 것은 묻어 주었다. 군병(軍兵)으로 호위(扈衛)하는 자들을 위로하였다.

 

8월 18일 무신

임금이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자 판위(板位)에 배례(拜禮)를 행하고 이어서 능(陵) 위에 봉심(奉審)한 뒤 역군(役軍)에게 전(錢) 백 꿰미와 무명베 1동(同)을 나누어 주었다. 이날 신시(申時)에 현궁(玄宮)을 여는 예(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임시(臨視)하여 곡(哭)하자, 여러 신하들이 잠시 피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마치 부모가 몹시 가까이 계시는데 거처하시는 집의 문호(門戶)를 자식이 스스로 열지 않고 종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편안하겠는가 편안하지 않겠는가? 이 이치가 매우 분명하니, 경(卿) 등은 어찌 차마 풍속에서 꺼린다 하여 나의 지극한 정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현궁의 왼쪽에 나아가 개봉관(開封官)에게 명하여 개봉하게 하였다. 이에 개봉되자 임금이 광(壙) 앞에서 곡하고 이어서 재궁(梓宮)을 봉심하였는데, 견고하기가 금석(金石)과 같아 다른 염려가 없자 그대로 도로 닫았다.

 

8월 19일 기유

친히 계빈전(啓殯奠)400)  을 행하였다. 윤여(輪輿)에서 대왕(大王)의 재궁(梓宮)을 받들고 나와 임금이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곡하고 사배(四拜)하였다. 이를 마친 뒤 재궁을 닦고 속이불을 덮고 구의(柩衣)를 입히고 영좌(靈座)를 베풀고 지방(紙牓)을 받들어 전(奠)을 행하기를 예(禮)와 같이 하였다. 또 왕후(王后)의 능에 나아가 재궁을 받들고 나와 대왕 능의 예(例)와 같이 하였다. 경갑(鏡匣)을 봉심하고 한참동안 어루만지다가 말하기를,
"손때가 오히려 남아 있으니, 장인(匠人)의 손에 맡겨 둘 수 없다."
하고, 집사(執事)에게 명하여 친히 스스로 보완(補完)하여 묶어 쌌다. 이를 마치고 나서 성빈(成殯)하는 전(奠)을 행하였으며, 아침저녁 상식(上食)을 올리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여러 신하로서 부반(赴班)하여 온 자들이 모두 곡반(哭班)에 들어갔는데, 행 사직(行司直) 이병상(李秉常)은 미처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아주 먼 변방에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변명하여 구(救)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예조에서 천릉(遷陵)의 의주(儀註)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유사(有司)가 기일에 앞서 깨끗이 닦은 재궁(梓宮)을 설치하고, 연도(羨道)401)  의 남쪽에 장전(帳殿)을 임시로 마련한다. 또 식건(拭巾)·상욕(床褥)·장병(帳屛)을 현궁(玄宮)의 남쪽에 설치하고, 대왕(大王)과 왕후(王后)의 지방(紙牓)을 장전(帳殿)의 서쪽에 설치하며, 장병(帳屛)을 악내(幄內)에 설치한다. 지방은 우주(虞主)의 척수(尺數)에 따르되 서식(書式)은 묘주(廟主)의 예(例)에 따르고, 쓰기를 마치면 대축(大祝)이 영좌(靈座)에 봉안(奉安)한다.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은 의식에 따라 꿇어앉아 쓰되 옛 명정은 깨끗한 곳에서 불태운다. 계릉(啓陵)할 때에는 총호사(摠護使)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인솔하고 하광(下壙)·개봉(開封)할 때에 각기 최복(衰服)을 갖추어 입고 자리에 나가 곡(哭)하여 슬픔을 다 하고서 사배(四拜)한다. 이를 마치면 대축이 연도의 남쪽에 나아가 꿇어앉아서 능을 개봉하는 연유를 고한다. 좌의정이 재궁을 마주 드는 관원을 인솔하고 윤여(輪輿)로써 재궁을 이끌어 정자각(丁字閣)에 봉안한 뒤 찬궁(攢宮)을 설치하고 영좌(靈座)를 설치하며, 우의정이 빈궁(殯宮)에 둘러친 나무와 위에 도식(塗飾)한 것을 열기를 마치면 선공 감관(繕工監官)이 그 관속(官屬)들을 인솔하고 올라가 둘러친 나무와 도식한 것을 걷어낸다. 왕후의 찬궁을 열 때에도 역시 위의 의식과 같이 한다. 현궁에 하관(下棺)한 뒤에는 이어서 우제(虞祭)를 행하되, 백관(百官)은 오사모(烏沙帽)·오각대(烏角帶)·백포 단령(白布團領) 차림으로 능(陵)을 하직하는 예(禮)를 행한다. 그날 시간이 당도하면 내전(內殿)께서 별전(別殿)에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고 소찬(素饌)을 들며, 능을 개봉하는 날로부터 현궁에 하관하는 그 이튿날에 이르러 평상시대로 회복한다.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가취(嫁娶)를 금하고 도살(屠殺)을 금하여 역시 능을 개봉하는 날로부터 현궁에 하관하는 날에 이르러 그치며, 우제를 지낸 뒤에는 혼백(魂魄)과 지방을 새 능의 정결한 곳에 묻는다. 대왕·왕후의 지방 서사관(紙牓書寫官) 각 1명, 【문신(文臣) 정3품(正三品)이다.】  개폐 봉관(開閉封官) 【집의(執義)이다.】  대왕의 지방 출납(紙牓出納) 대축 1명, 【문신(文臣) 4품 이상이다.】  왕후의 지방 출납, 【궁위령(宮闈令)이다.】  섭좌통례(攝左通禮) 각 8명, 섭사복시 정(攝司僕寺正) 각 2명, 향로(香爐)·향합(香盒)을 받드는 자 각 1명, 계빈(啓殯)을 고(告)하는 대축 각 1명, 【문신(文臣) 4품이다.】  애책(哀冊)을 받드는 자 각 2명, 재궁을 마주 드는 자 각 2명 【무신(武臣) 4품이다.】 이다."
하였다.

 

임금이 재전(齋殿)에 무릇 5일 동안 머물렀다. 계능(啓陵)할 때의 의절(儀節)에 대해 크고 작은 일을 논할 것 없이 친히 검찰(檢察)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이 모두 지극하고 애모(哀慕)가 망극하였으며, 민폐를 진휼(軫恤)함에 있어서도 덕의(德意)가 애연(藹然)하니, 보는 여러 신하들이 감동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신해일(辛亥日)이 되어 임금이 빈전을 하직하고 어가(御駕)가 고양(高陽)을 경유하여 환궁(還宮)하였는데, 부수찬 황정(黃晸)을 보내 연로(沿路)의 민폐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사친(私親)의 묘소에 참배하려고 하였으나 평일에 조심하신 뜻을 인식하여 실행에 옮기지 않고, 환관(宦官)을 보내 대신 추모(追慕)의 감회를 펼치게 하였으며, 어가(御駕)를 멈추고 눈물을 한참 동안 머금었다. 경기 감사 정형익(鄭亨益) 등을 소견(召見)하여 특은(特恩)으로 경기 백성의 대동 신포(大同身布)로서 응당 납부해야 할 것 중 3분의 1을 감해 줄 것을 명하고, 어가를 따르는 군병(軍兵) 중에서 들에서 비바람을 맞은 자들에게 죽을 나누어 먹였으며, 새 능에 길을 닦느라 백성의 전답이 잘려 들어간 경우에 대해서는 지부(地部)에 명하여 그 값을 지급하게 하였다. 그 이튿날 임자일에 환궁하였다. 경기 어사 황정(黃晸)이 복명(復命)하여 ‘파주 목사(坡州牧師) 이굉(李浤)은 위맹(威猛)이 조금 부족하고, 고양 군수(高陽郡守) 홍진유(洪晉猷)는 종핵(綜核)402)  이 여유가 있고, 교하 군수(交河郡守) 홍중주(洪重疇)는 치성(治聲)이 있다.’고 상주(上奏)하였다. 또 남양 부사(南陽府使) 이언상(李彦祥)이 이끌고 온 군관(軍官)들이 양식을 지급하지 않아서 촌려(村閭)에서 걸식(乞食)한 상황을 아뢰니, 임금이 다만 이언상을 잡아다 문초할 것을 명하였다.

 

8월 23일 계축

권상일(權相一)을 장령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이, 전주부(全州府) 만마동(萬馬洞)에 냇물이 범람하여 읍리(邑里)가 무너지려 할 적에 영장(營將) 서간세(徐幹世)가 방축(防築)을 감독했다 하여 가자(加資)하여 그의 노고에 보답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8월 25일 을묘

해에 우이(右珥)가 있었다. 유성(流星)이 우림성(羽林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희었다.

 

황해도 해주(海州)·장연(長淵) 등의 고을에 충재(蟲災)가 있었다. 연안(延安)·수안(遂安) 등의 고을에는 우박이 쏟아졌는데, 크기가 거위알만 하였다.

 

8월 26일 병진

충청 감사 신방(申昉)을 면직하고, 이춘제(李春躋)로 대신하였다.

 

8월 27일 정사

이날 장릉(長陵)의 발인(發靷)을 위해 임금이 망곡례(望哭禮)를 빈양문(賓陽門) 밖에서 행하였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고 여사군(轝士軍)의 노고를 염려하여 진청(賑廳)으로 하여금 값을 감해서 쌀을 팔게 하여 진휼(軫恤)하는 뜻을 보이게 하였다.

 

은진(恩津)의 유학(幼學) 강일우(姜一宇)란 자가 있어서 천릉(遷陵)에 관한 일을 상언(上言)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천릉은 이미 뱀의 변괴 때문이요 풍수(風水)에 미혹된 것이 아닌데, 강일우가 감히 함부로 말을 하였다. 비록 무식하다고는 하지만, 마땅히 후일의 폐단을 징계해야 할 것이니, 그를 아주 먼 변방에 귀양보내라."
하였다.

 

8월 27일 정사

대사간 한사선(韓師善)이 상소하기를,
"이병상(李秉常)을 원배(遠配)한 것은 지나치게 무거우니, 청컨대 견벌(譴罰)을 조금 내리소서. 여사 대장(轝士大將) 구성임(具聖任)이 전연 구검(句檢)하지 않고, 직무를 한결같이 하리(下吏)에게 맡겨 농간을 부리게 했으니, 책벌(責罰)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능행(陵幸) 때 지나치는 길의 두 고을에서 그 시기를 이용해 도판(屠販)을 하였으니, 마땅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향읍(鄕邑)을 형벌로 다스리게 하고 도신 또한 무겁게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홍덕망(洪德望)이 진배(進排)403)  라는 핑계로 잡물(雜物)을 여러 면(面)에 나누어 정하고, 가전(價錢)을 강제로 거두어 들였으니, 마땅히 죄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구성임은 무겁게 추고하고, 홍덕망과 다른 나머지 일도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수찬 권혁(權爀)이 상소하여 탐라(耽羅)의 병폐 및 조목을 진달하고, 또 변통(變通)할 대책을 논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조에서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수항(李壽沆)의 장계(狀啓)로 인해서 말하기를,
"진도 군수(珍島郡守) 조덕기(趙德基)가 진휼(賑恤)을 잘한 것이 한 도(道)의 으뜸이 되었으니, 마땅히 그의 자급(資級)을 승진시켜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옛 장릉(長陵)에서 영여(靈轝)가 발인(發靷)하여 교하(交河)의 새 능에 이르러 성빈(成殯)하기를 예(禮)와 같이 하였다.

 

8월 28일 무오

김시환(金始煥)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유언통(兪彦通)을 사간으로, 김정윤(金廷潤)을 정언으로 삼았다.

 

좌포도청(左捕盜廳)에서 아뢰기를,

"작년 국옥(鞫獄) 때에 역적(逆賊) 박도창(朴道昌)의 조카 박성건(朴成建)을 기포(譏捕)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즉시 박성건의 동서로서 정배(定配)된 사람인 표태만(表泰萬)의 고발로 인해 죄인 박성건 곤양군(昆陽郡)에서 잡아 보내어 이름이 국안(鞫案)에 기재되었으니, 마땅히 의금부로 이송(移送)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로부터 연달아 본부(本府)에서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죄인 박성건을 신문하였다. 이보다 앞서 포도청에서 박성건을 신문하기를,

"노몽서(盧夢瑞)의 공초(供招)에 따르면 네가 박도창의 형의 아들로서 박도창의 집 문 밖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또 금부 나장(禁府羅將) 순금(順金)의 공초에 말하기를, ‘박도창의 서찰을 박도창의 첩(妾)에게 전하니, 박가 성을 가진 사람이 약봉지를 내어 주었습니다.’ 하였고, 외직 나장(外直羅將) 박창휘(朴昌輝)의 공초에는 ‘박도창의 아들이 나에게 「아버지가 승관(承款)하면 족속(族屬)을 다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네가 만약 주선(周旋)해 준다면 마땅히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중삼(重三)의 공초에는 ‘어떤 사람이 박창휘의 일가 박초관(朴哨官)이라 하면서 박창휘를 만나 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불러들였는데, 그 오른쪽 손을 보니 종이로 포장한 물건을 쥐고 있었습니다. 무슨 물건인가 묻자 기운을 돕는 약이라 했는데, 이내 박창휘에게 주었습니다. 박창휘가 박초관에게 「박도창이 본부(本府)에 있을 때는 형벌을 많이 받지 않았는데, 약을 사용하여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는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할 것이니, 우선 상궐(上闕)하여 친국(親鞫)하기를 기다려 그때 순창(順昌)에게 전해주어 그로 하여금 약을 먹게 해야 된다.」 하였습니다.’ 하였고, 박도창의 첩(妾)의 동생되는 점상(點尙)의 공초에는 ‘박도창 음독(飮毒)하여 죽은 뒤에 족인(族人)인 박가(朴哥)가 그 형의 집에 왕래하였습니다.’ 하였으니, 박도창에게는 이미 자식이 없고 또 다른 조카가 없는데, 너는 바로 박도창의 형의 아들이니 박도창의 집안 일을 관여하여 알지 못함이 없을 것이니, 네 이름이 이미 노몽서의 공초에서 나왔고, 그 나머지 각 공초에서 혹은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족속이라 하기도 한 것은 모두 너를 가리킨 것이니, 그렇다면 박도창의 역모(逆謀)를 네가 어찌 알지 못하였겠는가? 박도창을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게 한 것도 또한 네가 만든 짓이다."

하니, 박성건이 공초하기를,

"박도창의 5촌 조카로서 순천(順天)에 살다가 경술년404) 1월에 올라와 박도창의 집에 의지하였고, 노몽서 등이 박도창의 처남 정태형(鄭泰亨)의 집으로부터 많은 돈꿰미를 서울로 운반해 왔지만, 저는 실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박도창이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자 박도창의 처가 도피하라고 했기 때문에 두렵고 겁이 나서 도피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포도청에서 다시 신문하기를,

"네 공초에 이미 이르기를, ‘정태형의 집으로부터 돈꿰미를 운반해 들이는 상황을 직접 보았다.’ 하였고, 박도창의 처도 또한 너를 도피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박도창의 집에 모여서 모역(謀逆)한 자들이 누구 누구이며 너로 하여금 약을 전하여 형을 집행하기 전에 박도창을 죽게 한 것은 또한 누가 시킨 것이냐?"

하니, 박성건이 공초하기를,

"약을 먹여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게 한 일은, 저와 세규(世奎)·점상(點尙) 점매(點梅)의 집에 이르니, 점상이 나졸(羅卒)을 불러 와서 저에게 약을 전해 주도록 하였는데, 그 뒤에 박도창이 과연 곧바로 죽었습니다. 박도창이 모역한 일은 무신년 9월부터 박도창 노몽서·정태형 이성(異姓) 친척인 박대강(朴大江) 정태형의 동성족(同姓族)으로 성(姓)이 정(鄭)인 자와 순천(順天)에 사는 김갑(金甲) 등과 함께 밤낮으로 모여서 모의하였습니다. 그때 순천 영장(順天營將)으로 신문(新門) 밖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과 정사효(鄭思孝)의 서제(庶弟), 용산(龍山) 이생원(李生員), 양천(陽川) 이생원(李生員)이라는 자가 또한 와서 이야기를 했는데, 각 사람이 비밀스럽게 말하는 것은 모두 ‘그 약을 그에게 이미 전해 주었느냐 않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문 밖에 사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그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옥관자(玉貫子)를 단 자도 또한 와서 말하기를, ‘네가 모주(謀主)가 되었으니, 그 약에 대한 일을 반드시 잘 처리하라.’ 하였습니다. 또 박태망(朴泰望)이라는 자가 있어 와서 ‘이미 큰 일을 도모하였으니, 그 약을 속히 과녀(寡女)에게 전해 주라.’ 하였고, 장의동(壯義洞) 이가(李哥)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자도 또한 와서 ‘그 약을 과녀에게 전하여 그로 하여금 다시 상궁(尙宮)에게 전해 주게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도동(桃洞) 이병사(李兵使)의 아우가 또 와서 말하기를, ‘그 약을 상궁에게 전달해 동궁(東宮)에게 사용한다.’ 하였습니다. 약은 박도창이 그의 종 사회(四會)·귀익(貴益)을 시켜 과녀에게 전해 주게 하였습니다. 과녀는 박도창의 족속이라 했는데, 박도창이 계집종을 사서 들여보내 상궁의 방자(房子)405) 로 삼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국청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하니, 박성건이 공초하기를,

"박도창이 모역한 정절(情節)은 이미 포도청에 납초(納招)하였고, 함께 참여한 여러 사람들은 혹 성(姓)만 일컫고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는 호(號)를 일컫고 사는 곳을 말하지 않아서 한결같이 포도청의 공초와 같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5, 6년 전에 민참의(閔參議)라는 자가 박도창에게 ‘매양 우리 당(黨)의 패배 때문에 벼슬이 여기에 그쳤으니, 분하고 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 마땅히 너와 함께 모역하리라.’ 하였습니다. 박도창을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게 한 자들은 바로 박도창의 처남으로 이름을 정희산(鄭喜山)으로 바꾼 정흥교(鄭興僑) 박대강 두 사람입니다."

하고, 이어 승복하지 않았다. 박성건이 고발한 여러 사람들을 포도청으로 하여금 발포(發捕)하게 하여, 이침(李梫) 등을 박성건과 면질(面質)시키니, 이침 박성건에게 말하기를,

"네가 무신년406) 9,10월 무렵에 내가 박도창의 집에 갔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병오년407) 에 북우후(北虞候)에 제수되어, 무신년 12월에 서울로 돌아왔으니, 네 말은 저절로 허망한 데로 돌아간다."

하고, 이우명(李遇命)은 말하기를,

"나는 임인년408) 에 출신(出身)하여 비랑 감찰(備郞監察)이 되었으니, 생원(生員)이라는 칭호는 잘못된 것이다."

하고, 최환익(崔桓翼)은 말하기를,

"네가 비록 죽을 곳에서 살기를 구한다지만, 어찌 차마 터무니없이 사람을 모함하느냐?"

하고, 이여명(李汝明)은 말하기를,

"노몽서는 내가 본래 모르는 사람이다."

하고, 이성익(李聖翼)은 말하기를,

"너는 나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서 다시 진위(眞僞)를 알리라."

하여,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박성건이 다시 공초하기를,

"이른바 민참의(閔參議)는 전번 공초에서 잘못 고발한 것으로, 분명히 윤참의(尹參議)입니다."

하였다. 박성건이 또 공초하기를,

"박도창의 모역을 표태만(表泰萬)·정운보(鄭雲普)·정세귀(鄭世龜)·정희태(丁喜泰)가 참여하여 듣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박도창의 종 금이(金伊)를 시켜 정태형(鄭泰亨)의 집에 돈을 실어가게 하고 약을 박도창에게 전달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였다. 박성건이 또 정태진(鄭泰震)과 면질(面質)하여 말하기를,

"네가 김영태(金寧泰)와 함께 어찌 박도창의 시신을 거두지 않았는가?"

하니, 정태진이 말하기를,

"나는 박도창과 본래 혐의가 있었고, 표태만 차강(車江)은 지난해에 다 정배(定配)되었으며, 정운보는 내가 본래 모르는 사람이다. 표태만이 내게 박도창의 시신을 함께 거두기를 요구하였지만, 나는 피하고 가지 않았다."

하고, 이어 승복하지 않았다. 박성건에게 1차 형신(刑訊)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용산(龍山) 이생원(李生員)은 바로 정태진(鄭泰震)의 고모부이고 박태망(朴泰望)은 바로 순천 파총(順天把摠) 박창무(朴昌茂)이며, 순창(順昌)은 바로 민참의(閔參議)의 수청노(守廳奴)입니다. 박도창의 종 이태(二太)를 신문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승복하지 않았다. 이태를 신문하였으나, 이태가 승복하지 않아 박성건의 말과 서로 어긋났다. 박성건 김갑(金甲)과 면질(面質)시키니, 박성건이 말하기를,

"네가 전대(纏帒)에서 약을 꺼낼 때 박도창의 계집종 준엽(俊葉)·부전(富全)이 어찌 참견(參見)하지 않았는가?"

하였으나, 김갑이 승복하지 않았다. 박대강 박성건과 면질시키니, 박성건이 말하기를,

"너는 박도창의 4촌으로 박도창의 집에 와서 어찌 ‘내가 이미 이역(吏役)에 들었으니, 너와 일을 함께 해야 되겠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니, 박대강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관리(官吏)가 되었는데 어찌 박도창 같은 자와 함께 모의(謀議)했겠는가? 무신년에 박도창 감영(監營)에서 형벌을 받을 적에 내가 구함(構陷)한 것 때문에 심지어 죽이려고 하였다고 했는데, 너는 어찌 알지 못하는가?"

하고, 이어 승복하지 않았다. 정흥교 박성건과 면질시키니, 박성건이 말하기를,

"박도창이 ‘이병사(李兵使)의 아우로 신문(新門) 밖에 사는 이영장(李營將) 근동(芹洞)에 사는 이영장(李營將)이 나와 동모(同謀)했으니, 너도 함께 들어와야 된다.’고 말하니, 네가 어찌 ‘우리 집안에 정배(定配)된 사람으로 나라를 원망하는 이가 있고, 또 본관(本官) 및 본관 친족(親族) 중에 함께 일을 할 만한 이들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정흥교가 공초하기를,

"이른바 정배된 사람이란 바로 사간(司諫) 송필항(宋必恒)인데 지금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고, 본관은 바로 박태삼(朴泰三)인데 국옥(鞫獄)에서 죽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기유년409) 겨울이었으니, 어찌 박도창과 함께 공모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이어 승복하지 않았다. 박창무를 신문하니, 박창무가 공초하기를,

"저는 순천에 살면서 박도창과 서로 알고 지내긴 했지만, 갑진년410) 이후로는 서로 대면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승복하지 않았다. 부전(富全)을 신문하니, 부전이 공초하기를,

"16세 이후에는 다시 박도창에게 사역(使役)되지 않았고, 통진(通津)에 와서 거주한 지가 이미 7년이나 되며, 김갑은 본래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고, 승복하지 않았다. 다시 박성건을 신문하니, 박성건이 공초하기를,

"신문 밖에 사는 이영장(李營將)은 처음 공초에서 잘못 고발한 것이므로 지금 비로소 깨달았으니, 바로 일찍이 순천 영장(順天營將)을 지냈던 유일기(兪一基)입니다."

하여, 옥사(獄事)가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못하였다. 10월 을미일에 국청(鞫廳)에서 의계(議啓)하기를,

"죄인 이침(李梫)·이우명(李遇命)은 공초한 내용이 명확하고, 이성익(李聖翼)도 또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으니, 청컨대 모두 석방하소서. 박창무(朴昌茂) 부전(富全)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으며, 정태진(鄭泰震)은 이미 3차의 형벌을 가했고, 이태(二太)도 또한 5차의 형벌을 가했는데, 별달리 어긋나는 단서가 없으니, 청컨대 모두 등대(登對)할 때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뒤에 의금부의 헌의(獻議)로 인하여 최환익(崔桓翼)·이여명(李汝明)·박대강(朴大江)·김갑(金甲)·박창무(朴昌茂)·부전(富全)은 특별히 석방하고, 이태(二太)·정흥교(鄭興僑)는 모두 변방의 먼곳에 정배(定配)하였다. 정태진(鄭泰震) 박성건(朴成建)은 모두 물고(物故)하였다.

 

 

8월 29일 기미

천둥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3,4척 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8월 30일 경신

축시(丑時)에 장릉(長陵)의 천전(遷奠)을 행하였다. 찬궁(攢宮)을 열기를 고하고, 진정(辰正)에 대왕(大王)의 재궁(梓宮)을 받들어 현궁(玄宮)에 안치하고 애책(哀冊)을 올리고 옥백(玉帛)을 증(贈)하고 삽(翣)을 세우는 등의 모든 절차를 모두 예(禮)에 맞춰 하였다. 대왕의 옛 유의(遺衣)411)   한 벌과 새 유의 세 벌, 왕후의 옛 유의 한 벌과 새 유의 다섯 벌을 넣고, 현궁을 닫았는데, 칠포(漆布)를 사용하였으며, 봉서(封書)는 의식(儀式)과 같이 하였다. 이어서 흙을 덮고 축회(築灰)412)  하였으며, 명기(明器) 등을 담은 여러 궤(櫃) 및 옛 유의·명정(銘旌)·구의(柩衣)·어압(御押)·표신(標信)·금잠(金簪) 등의 궤를 진열하기를 모두 옛 능과 같이 하였다. 미시(未時)에 먼저 대왕위(大王位)의 우제(虞祭)를 거행하고, 다음에 왕후위(王后位)의 우제를 거행하였다. 이를 마치자 지방(紙牓)을 받들어 능 위의 곡장(曲墻) 밖의 구덩이 속에 묻고 흙을 채웠다.

 

임금이 장릉(長陵)의 현궁(玄宮)에 안치할 때와 우제(虞祭) 지낼 때 망곡(望哭)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