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 1731년 9월

싸라리리 2025. 9. 1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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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신유

사헌부 【지평(持平)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천릉(遷陵)하여 발인(發靷)할 때 집사 내관(執事內官)이 정대(整待)하지 못하여 왕후위(王后位)의 제사 마련을 제때에 맞춰 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내관을 나처(拿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 유언통(兪彦通)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임금의 한 몸은 만기(萬機)를 총괄하니, 널리 중인(衆人)의 말을 듣고 널리 보지 않는다면 두루 살필 수 없고,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관대하게 용납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궐실(闕失)을 듣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신료(臣僚)를 가볍게 보시고, 언관(言官)을 싫어하고 냉대하시어 능행(陵幸) 때 양사(兩司)가 청대(請對)한 일로 인해 승지를 책벌(責罰)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정도에 지나친 한가지 단서입니다. 전하께서 대각(臺閣)을 대우하심이 한결같이 이와 같다면 비록 충성스런 신하가 나란히 서고 곧은 선비가 조정에 가득하다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무릇 제배(除拜)·승천(陞遷)하는 바는 모두 작록(爵祿)으로 구사(驅使)413)  하는 데로 돌아가고, 들락거리며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이 분부를 받들고 하교를 받는데 지나지 않는다면, 이런 것을 간관(諫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지금 사람들이 진실로 언책(言責)의 중요함을 알고 진퇴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지킨다면, 반드시 간관의 대열에 성급히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흠집이 생긴 근원을 궁구해보면 사실 전하의 한마음의 극치(克治)가 미진한 데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기에 아주 깊이 공력을 쏟으시어 사(私)가 공(公)을 이기지 못하게 하소서.
또 상벌(賞罰)은 군주의 큰 권한인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은상(恩賞)을 가벼이 보고 계십니다. 가령 근래 박종유(朴宗儒) 등이 기주(記注) 때문에 나국(拿鞫)되기에 이른 것은 평윤(平允)함이 크게 모자라고 또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니,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조속히 환수(還收)를 명하소서. 흉년이 들어 진휼(賑恤)을 의논할 때에는 1군(郡)·1현(縣)도 또한 책임자를 마땅히 조심스럽게 선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방백(方伯)의 소임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새로 제수한 충청도 관찰사 이춘제(李春躋)는 진실로 근밀(近密)에서 주선하는 것이 합당하고 일로(一路)로 탄압(彈壓)하여 칭색(稱塞)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 지금 개차(改差)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것은 마땅히 유의하겠다. 박종유(朴宗儒) 등의 일은 처분(處分)한 데 뜻이 있었다. 충청 감사의 일은 청한 바가 또한 지나치지 않겠는가?"
하였다.

 

9월 3일 계해

사헌부 【지평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각(臺閣)에 나아가 전계(傳啓)할 때 사관(史官)이 구비되지 않아서 안일과 편의를 추구한 점이 있습니다. 하번 한림(下番翰林) 조명리(趙明履)를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사간원 【사간 유언통(兪彦通)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온양 군수(溫陽郡守) 이창석(李昌錫)은 전정(田政)에 허록(虛錄)·가징(加徵)한 원망이 있고, 첨정(簽丁) 때 뇌물을 받고 면역(免役)을 허락한 폐해가 있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자산(慈山)의 이속(吏屬)이 그 관장(官長)을 원망하여, 체임되어 돌아갈 적에 말을 빼앗아 도망해 돌아갔으니, 마땅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형배(刑配)해 그 습관을 징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윤허하였다.

 

임금이 전날 이병상(李秉常)이 천릉(遷陵) 때 내곡반(內哭班)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여 부처(付處)414)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하교하여 외직에 있는 여러 신하들로서 오지 않은 자들을 혹은 파직(罷職)하고 혹은 삭직(削職)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교리로, 윤광운(尹光運)·홍성보(洪聖輔)를 수찬으로,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삼았다.

 

9월 4일 갑자

충청도 면천(沔川)의 유학(幼學) 임태등(林泰登) 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근래에 토호(土豪)들이 유궁(儒宮)을 빙자하여 토주(土主)415)  를 몰아냄이 이미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본군(本郡)의 유생(儒生) 윤학해(尹學海) 등이 갑자기 성묘(聖廟)416)  를 천동(遷動)하려는 계획을 내어, 이에 본군수(本郡守) 정윤선(鄭潤先)이 임지에 도착한 뒤에 성묘를 옮겨 세우기를 극력 청하였는데, 정윤선이 몸소 살펴보고서 허락하지 않자, 윤학해의 무리들이 크게 분한 감정을 품고 후욕(詬辱)이 아주 극심하였습니다. 또 예산(禮山)의 유생 성원(成源) 등에게 부탁해서 태학(太學)에 통문(通文)하여 본수(本倅)의 죄를 성토하게 하니, 정윤선이 그 직책을 불안하게 여겨 말미를 받아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도신(道臣)이 엄중히 죄를 다스리려고 장문(狀聞)하기에 이르자, 윤학해의 무리가 도피하여 나타나지 않았으니, 청컨대 윤학해가 토주를 무함한 죄를 엄중히 다스려, 정윤선으로 하여금 임지에 돌아와 기민(飢民)을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선비의 습관이 아주 몹시 해괴하다. 수창자(首唱者)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아주 먼 변방에 귀양보내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이집(李㙫)과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을 소견(召見)하여, ‘천봉(遷奉)의 예(禮)가 처음에는 근심스러웠는데, 마침내 유감이 없었다.’는 뜻을 하유(下諭)하고, 또 하교하기를,
"조금이나마 슬픈 마음을 펴는 것은 다만 복(服)을 벗지 않았을 때 새 능(陵)을 참배하는 데에 있으니, 새 장릉(長陵)에 거둥할 기일을 정하라. 환가(還駕)하는 길에 사묘(私墓)에 들러 참배하려 하니 길을 넓게 닦지 않도록 하여 민폐(民弊)를 덜며, 호망(虎網)417)  을 설치하지 말고 다만 환위(環衛)418)  를 굳게 하라. 내수사(內需司)의 쌀 1백 곡(斛)을 반급(頒給)하여 고양(高陽)·교하(交河)·양주(楊州) 세 고을의 군졸을 모집하여 길을 수선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하였다. 대개 거둥이 겹쳤기 때문에 백성을 진휼하는 은혜를 보인 것이다.

 

9월 5일 을축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6일 병인

강원 감사 이보혁(李普赫)과 배천 군수(白川郡守) 여선장(呂善長)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이보혁이 말하기를,
"본도(本道)에는 양전(量田)하지 않은 고을이 많아서, 검전(檢田)의 정사에 있어서 허실(虛實)을 조사하기 어려우니,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지 말고 오로지 도신(道臣)에게 위임하여 주전(廚傳)419)  의 폐해를 없애게 하소서."
하고, 여선장은 말하기를,
"본읍(本邑)의 군향(軍餉)을 산성(山城)에 수송함은 큰 민폐(民弊)가 되니, 청컨대 여현진(礪峴鎭)에 납부하여 도리(道里)의 편리하고 가까움을 취하게 하소서."
하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도민(都民)의 5년간의 빙미(氷米)420)  를 면제해 줄 것을 명하였다. 대개 여군(轝軍)이 이제 막 능역(陵役)을 거쳤기 때문에 판윤(判尹) 이삼(李森)의 말을 채용한 것이다.

 

지평 조진세(趙鎭世)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양근(楊根) 읍내에 화적(火賊)이 제멋대로 날뛰며 사대부의 집을 밤을 타서 겁탈하고 노략질하니, 토포사(討捕使)가 만약 밤 순찰을 경계하고, 기포(譏捕)를 엄중히 하였다면 소취(嘯聚)421)  의 무리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먼저 문비(問備)하고, 해당 고을의 수령(守令)도 또한 마땅히 장형(杖刑)을 집행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간 유언통(兪彦通)은 가볍게 충청 감사 이춘제(李春躋)의 잘못을 논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전라도 강진(康津)의 생원(生員) 이언일(李彦一) 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진정(賑政)을 베푸는 일은 만약 재원(財源)을 크게 개설(開設)하지 않는다면 백성을 구제할 대책은 아득해져 손 댈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해란초(海蘭草)라는 것이 있어 큰 바다의 깊은 바닥에서 나는데, 풍랑(風浪)에 떨어져 씻기운 나머지가 포구(浦口)에 쌓여 있습니다. 바람과 서리에 닳고 씻겨서 갈대꽃보다도 희고 계등(溪藤)422)  보다 부드러우니, 잘 두드려 가루를 만들어 닥나무와 섞어 종이를 떠서 만들면, 우리 나라의 지보(至寶)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 재화를 사용해서 각도(各道)의 감진사(監賑使)로 하여금 각 주현(州縣)의 식년(式年)423) 장적(帳籍)424)  의 지가미(紙價米)425)   및 일하(日下) 지가미로 끌어다 진자(賑資)로 삼게 한다면, 한 도(道)에서 가져다 쓰는 수량이 요컨대 몇 만 석(石)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피해가 더욱 심한 도(道)는 두 가지의 지가미(紙價米)가 부족하면, 또 조금 충실한 도의 지가미를 끌어다 써도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공명첩(空名帖)의 판매를 허락하여 명기(名器)를 더럽히고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에 비유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인심이 날로 타락해가는 세상에 이런 따위의 이익을 취하는 일은 경솔히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

 

9월 7일 정묘

충청도 유학(幼學) 김집(金濈) 등이 상소하여 면천 군수(沔川郡守) 정윤선(鄭潤先)이 고향을 비호하고 선비를 무함하여 예(禮)를 거스리고 성인(聖人)을 모만(侮慢)한 죄를 핵실(覈實)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감사(監司) 신방(申昉)까지 논급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외방(外方)의 향전(鄕戰)이 지금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 김집 등이 당초에 범한 것은 스스로 반성할 줄 알지 못하고 거짓을 떠벌리며 상소에 기록하여 군부(君父)를 현혹시켰으니, 더욱 해괴하다. 더구나 방백(方伯)과 읍주(邑主)를 논핵하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였으니, 이를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나라가 장차 법이 없어질 것이다. 소두(疏頭)426)  를 아주 먼 변방에 귀양보내라. 지난번 면천(沔川) 유생들에 있어서는 이미 수창자(首唱者)를 처벌하였는데, 김집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감히 소두가 되었으니, 제멋대로 굶이 극심하다."
하고, 이어서 봉입(捧入)한 승지를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9월 8일 무진

밤에 번개가 쳤다.

 

9월 9일 기사

대사간 한사선(韓師善)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臣)이 며칠전에 두 무신(武臣)을 논계(論啓)한 뒤로 여러 사람이 시기하고 싫어하며 결국에는 백안시하였습니다. 한형(韓珩)의 공초(供招)에는 신이 종형(從兄)을 위해 보복하려는 계획으로 이러한 취모 멱자(吹毛覓疵)427)  함이 있었다고 했고, 백수일(白守一)의 공초에는 신이 인삼(人蔘)을 요구하다 얻지 못했기 때문에 논계(論啓)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여 대관(臺官)을 위협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그 윤기(倫紀)가 없는 말은 가소로워 족히 변명하여 바로잡을 것도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옛날 선조(先朝) 때 강계 부사(江界府使) 신건(申鍵)이 인삼을 선물로 보낸 일 때문에, 대계(臺啓)로 인해 나문(拿問)당하고 엄한 형벌을 받은 뒤 정배(定配)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금고(禁錮)되었다 하였으니, 율명(律名)의 엄중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장리(贓吏)가 논핵을 당하면 도리어 감정을 갖고서 대관(臺官)을 짓밟고 비방하니,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어제 연중(筵中)에서 한 중신(重臣)이 백수일을 위해 분소(分疏)428)  하고 신을 공격 배척하며 조금도 고자(顧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 중신이 이미 그 선물을 받고서 또 뒤따라 백수일을 위해 분소까지 하였으니, 염우(廉隅)의 한 절조는 말해 보아야 도움될 것이 없습니다. 이 뒤로는 은밀히 사주하고 몰래 중상함이 다만 중신의 현척(顯斥)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니, 신이 어떻게 전하의 조정에 끼여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과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청대(請對)하여 사묘(私墓)에서 유숙(留宿)하는 일의 미안함을 말하였다. 또 능행(陵幸)의 기일을 물려 정해 밭에 있어 미처 베지 못한 화곡(禾穀)을 손상하지 않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하교하기를,
"옛날에 한 문제(漢文帝)가 이르기를, ‘짐(朕)은 고황제(高皇帝)의 측실(側室)의 아들이다.’ 하였다. 나는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의 아들이니, 중외(中外)에서 누군들 알지 못하겠는가? 내가 사친(私親)에 대해서 만약 예(禮)에 지나친 일을 행한다면 여러 신하들이 간쟁하는 것이 옳지만, 지금 지나면서 성묘(省墓)하는 것을 막는 것은 진실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조신(朝臣)들도 또한 성소(省掃)를 청하니,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감회가 어찌 크고 작음이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과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모두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무릇 모든 거둥은 한결같이 예법(禮法)에 따라야 하고, 지숙(止宿)429)  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더욱 신중히 해야 하는 법입니다. 이번의 숙소(宿所)는 이미 군읍(郡邑)이 아니고, 또 행전(行殿)430)  도 아니며, 또한 능침(陵寢)도 아니니, 결코 유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구나 임금의 일동 일정은 만세의 법도가 되는 것이니, 지나는 길에 사묘를 참배하는 일이 비록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거칠고 외떨어진 산골 촌락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는 것이 어찌 예전에 없던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논의하게 한다면 전하께서 감정에 따라 경솔히 행동했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마음은 귀하건 천하건 다름이 없는 법이다. 10년 동안이나 성묘를 못하였으니, 심회(心懷)가 어떻겠는가? 이번의 지나치는 길에 성묘함은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평일에 지난날 조심했던 지극한 뜻을 인식하여 힘써 간략함을 따랐는데도, 경 등은 오히려 또 양해하지 못하고 있다. 경 등의 깨끗함을 주장하는 의논은 비록 고상하다고 하겠지만, 깨끗해서는 안될 경우에 깨끗한 것을 나는 ‘마음이 좁다.’고 생각한다. 또한 임금을 대접함이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하였다.

 

지평 조진세(趙鎭世)가 상소하기를,
"새 능(陵)을 참배하는 예(禮)는 이미 길일을 가려 놓았지만, 어로(御路)를 닦고 수선하자면 곡식을 수확하는 일에 방해될 것이니, 자못 성상께서 민천(民天)431)  을 소중히 여기시는 뜻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열흘쯤 뒤로 물리소서. 향교(鄕校)를 옮겨 세우는 일이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혹은 은밀히 묘지(墓地)를 경영하는 것에 연유하고, 혹은 향과(鄕科)가 나오지 않는 것에 연유하기도 하니, 만일 홍수(洪水)의 침해가 아니면 옮겨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능행(陵幸)의 일은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말단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헌납 민정(閔珽)이, 기민(畿民)의 곤췌(困悴) 때문에 새 능(陵)에의 거둥과 사묘를 지나는 길에 성묘하는 일을 그만둘 것을 상소하여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이 거둥은 바로 정례(情禮)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하였다.

 

9월 10일 경오

가림 부부인(嘉林府夫人) 조씨(趙氏)가 졸(卒)하였다. 예조에서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거애 의주(擧哀儀注)를 올리기를,
"대내(大內)에서 거애한 뒤 조정(朝廷)에서 봉위 문안(奉慰問安)을 거행한다. 4일째 되는 날 성복(成服)하고 최복(衰服)을 올리며, 13일 동안 공제(公除)432)  하고 소복(素服)을 올리는데, 13개월 만에 벗는다. 당전 내관(當殿內官)은 백포 모대(白袍帽帶)를 착용한다."
하였다. 예조에서 또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전하께서 외조부모(外祖父母)의 상(喪)을 위해서 외전(外殿)에서 거애하는 절목(節目)이 있는데, 성상께서 바야흐로 상중에 계시니, 청컨대 시사복(視事服) 차림으로 거애하시고, 또 숙종 대왕의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433)   초상 때의 준례를 따라 복제(服制)를 마련하여 부음(訃音)을 들은 그날로 거애하고, 이어서 추포대(麤布帶)를 착용했다가 5일 만에 벗으며, 중궁전(中宮殿)께서는 마땅히 시복(緦服)을 사흘 동안 착용하고 벗어야 합니다. 다만 중궁전께서 부음을 들은 날로부터 계산하여 사흘 만에 벗는다면, 상복을 벗음이 마땅히 성복(成服)하기 이전에 있어야 할 것이요, 만약 성복한 날로부터 계산한다면 도리어 대전(大殿)께서 상복을 벗으신 뒤가 되게 됩니다. 예조의 관례에 근거할만한 것이 없으니, 청컨대 홍문관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해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드디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434)  에서 거애하고, 이어서 하교하여 애도하는 뜻을 보였다. 예장(禮葬)의 모든 물품을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435)  의 전례에 따르고 각사(各司)·각관(各官)은 각기 그 물건을 가지고 몸소 그 상(喪)을 보조하고, 관[柩]의 재목을 가려서 지급하며, 10필(疋)의 비단, 5동(同)의 포목(布木), 50곡(斛)의 쌀을 부부인(府夫人)의 집에 실어다 줄 것을 명하였다.

 

예조에서 또 아뢰기를,
"무릇 무거운 상(喪)을 벗지 않았는데 가벼운 상을 당하면, 그 상복(喪服)을 만들어서 곡을 하고 마치고난 뒤에는 다시 무거운 복(服)을 입으며, 가벼운 복을 벗을 때에는 마땅히 도로 가벼운 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번에 올린 추포대(麤布帶)는 예문(禮文)대로 5일 만에 벗으시고, 벗으신 포대(布帶)는 내시(內侍)로 하여금 매안(埋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9월 11일 신미

밤에 유성(流星)이 기성(箕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었다. 또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었다.

 

9월 12일 임신

이형좌(李衡佐)를 충청도 관찰사로, 홍현보(洪鉉輔)를 대사헌으로,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로, 황정(黃晸)을 응교로, 임정(任珽)을 수찬으로, 김상성(金尙星)을 교리로, 이흡(李潝)을 부수찬으로, 한현모(韓顯謨)를 부교리로, 이춘제(李春躋)를 대사간으로,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삼았다.

 

정언 김정윤(金廷潤)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새 능(陵)에 거둥하고 사묘(私墓)를 지나는 길에 성묘함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군하(群下)된 자가 누군들 감히 막으려는 뜻이 있겠습니까만, 혹은 형세를 헤아려 보고 혹은 백성의 일을 염려한 나머지 차자를 올리고 상소를 하였으니, 모두 나랏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의정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과 승지의 상소에 대한 비답은 사지(辭旨)가 절엄(截嚴)하여, 화평(和平)함이 아주 결여되었으니, 실로 대신(大臣)을 존경하고 대각(臺閣)을 대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다만 바라건대, 미안한 하교를 도로 거두소서. 그리고 또 삼가 듣건대, 사묘를 지나는 길에 참배할 때 모든 거행하는 일을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다 합니다. 이것은 비록 백성들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시려는 거룩한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법가(法駕)436)  가 나아가는 곳에는 그 지방에 있는 신하가 길을 닦고 정제(整齊)하여 기다리는 법이니, 사체(事體)가 원래 그러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당당한 천승(千乘)의 존귀함을 가지시고서 어찌 이런 구차하고 간략한 일을 하십니까? 전하께서 만약 기민(圻民)의 수고로움과 피곤함을 염려하신다면, 요역(徭役)을 덜어주고 은혜를 베푸는 것은 오히려 괜찮지만, 물력(物力)을 사사로이 지급하는 것은 나라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 될 것이니, 빨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으니, 어찌 신칙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마는, 그대의 말은 옳다."
하였다. 이어서 길을 닦는 일 및 마료(馬料)437)  에 대한 모든 절차를 모두 본관(本官)에 위임하여, 내수사를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대개 김정윤(金廷潤)의 말을 따른 것이다.

 

9월 13일 계유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빙 둘렀다.

 

이날은 바로 임금의 천추절(千秋節)438)  이다. 하교하기를,
"아! 사람의 생일에 만일 부모가 자신을 낳아서 기른 수고로움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마음이 갑절이나 아플 것이다. 비록 평일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위로해야 할 것이니, 하례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물며 요즘 같은 시기이겠는가? 이 뒤로는 탄일(誕日)의 진하(陳賀)는 모두 계품(啓稟)하지 말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일찍이 《국조보감(國朝寶鑑)》에서 성교(聖敎)를 봉람(奉覽)하고 나도 모르게 감동하여 왼 적이 있었다. 지난번 소대(召對) 때 문의(文義)로 인해 이런 하교가 있었는데, 반시(頒示)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의조(儀曺)로 하여금 알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도로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4일 갑술

임금이 진연(診筵)에서 하교하기를,
"29일은 바로 우리 자전(慈殿)의 탄신(誕辰)이니, 하루전에 마땅히 환궁(還宮)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승지 이성룡(李聖龍)이 말하기를,
"탄일(誕日)의 진하(陳賀)를 계품(啓稟)하지 말라고 하신 하교는 진실로 정도에 지나칩니다. 당(唐)의 천추절(千秋節) 금감록(金鑑錄)439)  은 지금도 훌륭한 일로 칭송해 오고 있으며, 우리 역대 임금들께서도 오히려 하례(賀禮)를 폐지하지 않으셨으며, 《오례의(五禮儀)》에도 실려 있습니다. 지금 비록 그만둘 것을 명하셨지만 3년 뒤에는 마땅히 예(禮)와 같이 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5일 을해

임금이 친히 망제(望祭)를 경휘전(敬徽殿)에서 행하였다.

 

9월 16일 병자

장령 이기헌(李箕獻)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표겁(剽劫)440)  의 환란이 곳곳에서 발생한다고 하니, 청컨대 여러 도(道)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명해서 토포사(討捕使)의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상고하여 소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출파(黜罷)를 분명히 거행하게 하시고, 따로 서전(西銓)441)  에 신칙(申飭)하여 빈자리에 따라 택차(擇差)하게 하소서. 백수일(白守一)과 인삼을 선물한 일은 준 것과 받은 것이 다 죄가 되니, 마땅히 다시 백수일을 엄중히 신문하여 허실을 조사해서, 진신(搢紳)과 경재(卿宰)들을 불분명하게 의심하는 가운데에 오랫동안 놓아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의 인쇄 작업은 이미 끝마쳤는데, 행장(行狀)을 찬술(撰述)하지 못해서 마무리지을 기약이 없으니, 마땅히 일찍이 문형(文衡)을 역임한 사람이나 현직 관각(館閣)의 사람에게 조속히 지어 올리게 해야 합니다."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9월 17일 정축

대사간 이춘제(李春躋)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용모(容貌)와 사기(辭氣)는 바로 덕(德)의 증거이며, 더욱이 말을 꺼내는 것은 길흉을 부르게 됩니다. 여항(閭巷)의 필서(匹庶)로서 배움의 뜻을 둔 자들도 오히려 9용(九容)442)  과 4물(四勿)443)  에 뜻을 기울이는데, 전하께서는 도(道)에 가까운 용모와 학문에 힘쓰는 공부로서도 유독 말을 쉽게 하여 허탄하고 번다(煩多)하여 지리한 병통을 면하지 못하십니다. 성지(聖志)에 간직한 바를 반드시 이루고자 하실 경우, 먼저 하나의 차선의 의리(義理)를 설정해서 사람들의 입을 제지하는 자료로 삼으시고, 혹은 인신(人臣)으로서는 감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려놓고서 번번이 다시 마음에 상처가 있는 것으로 돌리시니, 혹시 성품의 편벽됨을 극복하기 어렵고 과단성 있게 제지함이 부족해서입니까? 예우(禮遇)하는 대신(大臣)에 대해 한 마디 말로도 헤아려 주지 않으시니, 사지(辭旨)가 혹 각박하게 책망하는 데 가깝고, 면직되기를 바라는 양전(兩銓)444)  을 급히 나오라고 독촉하는 것은 성상의 하교가 거의 기미(羈縻)445)  에 가까우니, 이것도 또한 성실히 부족한 하나의 단서입니다. 더욱 마땅히 정자(程子)의 언잠(言箴)446)  에 더 힘쓰셔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啓)한 것에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9일 기묘

좌의정 이집(李㙫)이 모상(母喪)을 당하였다. 임금이 고(故) 상신(相臣) 노수신(盧守愼)과 정태화(鄭太和)가 부모상을 당한 전례를 적용하여 승지를 보내 조문(吊問)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호상(護喪)하고 역부(役夫)를 주게 하였다.

 

임금이 산릉(山陵)의 노고를 이유로 총호사(摠護使) 영의정 홍치중(洪致中)과 식재궁관(拭梓宮官)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에게 안구마(鞍具馬)447)   한 필(匹)을 하사하고, 개폐봉관(開閉封官) 집의 한사득(韓師得), 제조 김흥경(金興慶)·조원명(趙遠命), 도청(道廳) 서명구(徐命九)·이세진(李世璡)에게는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또 하교하여 봉애책 증옥백관(奉哀冊贈玉帛官) 영의정 홍치중, 지문 제술관(誌文製述官) 우의정 조문명,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에게 안구마 한 필을 하사하고, 지문 서사관(誌文書寫官) 서평군(西平君) 요(橈),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 유수(留守) 유척기(兪拓基), 표석 전문 서사관(表石篆文書寫官) 참판 홍현보(洪鉉輔), 음기 서사관(陰記書寫官) 참판 이정제(李廷濟)·참의 이정소(李廷熽), 상자 서사관(上字書寫官) 부사직(副司直) 조석명(趙錫命), 여선군(驪善君) 이학(李壆), 제조(提調) 판서 신사철(申思喆)·김동필(金東弼), 참판 조상경(趙尙絅)·도청(都廳) 조적명(趙迪命)에게는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였다. 별도로 가위장(假衛將) 최천약(崔天若)을 계청(啓請)하자, 첨사(僉使)에 제수할 것을 명하였으니, 대개 그 공로를 칭찬한 것이다. 지방관으로 파주 목사(坡州牧使) 이굉(李㙆)과 교하 군수(交河郡守) 홍중주(洪重疇)에게 모두 가자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경중을 나누어 시상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 【정언 김정윤(金廷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감찰 이우명(李遇命)은 사람됨이 요사하고 간악하며, 행동이 음흉하고 비밀스러워 박성건(朴成建)의 공초(供招)에서 긴박하게 나왔고, 그 아비의 이름이 또 이태(二太)의 공초에서 나왔으니, 박도창(朴道昌)과 서로 일을 주선하였음을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청컨대 아주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소서.
정배한 죄인에게는 마음대로 말미를 주지 못하는 법인데, 지금 듣건대, 인제현(麟蹄縣) 토산(兎山)에서 정배된 죄인 박태번(朴泰蕃)이 배소(配所)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곧바로 말미를 받고 돌아와서 편안히 집에 있어도 오랫동안 돌아오기를 독촉하지 않는다고 하니, 청컨대 토산 현감(兎山縣監) 백태운(白泰運)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박태번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다른 도(道)에 이배(移配)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전계(前啓)의 윤봉조(尹鳳朝)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9월 20일 경진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8도에 재황(災荒)이 심하였으므로,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백성을 구제하고 굶주림을 진휼(賑恤)할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여러 신하들 중 어떤이는 주전(鑄錢)의 이익을 청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자염(煮鹽)448)  의 편리함을 말하기도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주전에 대해 난색을 보였지만, 마침내 허락하였다. 어염(魚鹽)에서 거두는 세(稅)도 가져다가 진자(賑資)에 보태어 사용하게 하였으니, 대개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과 선혜청(宣惠廳) 당상(堂上) 송인명(宋寅明)의 말을 따른 것이다. 충청 감사 이형좌(李衡佐)도 또한 함께 들어와서 진자를 얻기를 청하고, 이어서 숙종조(肅宗朝)의 고사(故事)를 진달하니, 임금이 돈 1만 꿰미, 무명 2백 동(同), 세미태(稅米太) 각각 1만 곡(斛)을 허락해서 진자에 보태 줄 것을 명하였다. 또한 군작미(軍作米) 4만 곡을 전라도에 나누어 주어서 기민(飢民)을 구제할 것을 허락하였으니, 감사 이수항(李壽沆)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다.

 

사헌부 【지평 조진세(趙鎭世)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상전(賞典)에서 지방관을 논상(論賞)한 것은 의리가 없습니다. 감조관(監造官)으로서 사진(仕進)하지 않은 자도 섞여 들어갔으니, 마땅히 성명(成命)을 중지시켜 상전을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통영(統營)의 생소나무를 도벌하여 배를 만든 것이 6,7척에 이른다고 하니, 나핵(拿覈)하여 엄중히 추궁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황해 도사(黃海都事) 김성용(金聖鎔)은 전에 황장 경차관(黃腸敬差官)449)  이 되었을 때 하배(下輩)들을 금속(禁束)하지 못해 점퇴(點退)하고 뇌물을 받아 직분을 다하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방관은 옛 관례가 있다. 감조관과 도벌한 사람의 일은 아뢴 대로 하고, 김성용의 일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서 계문(啓聞)하게 하라."
하였다.

 

장령 이기헌(李箕獻)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제주(濟州) 전(前) 목사(牧使) 이수신(李守身)은 탐욕스럽고 잔학하여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였고, 또 불법적인 일이 많으니, 청컨대 먼저 나문(拿問)하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해 처리하게 하소서. 도감 낭청(都監郞廳) 조적명(趙迪命)은 준직(準職)450)  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승질(陞秩)451)  하였으니, 즉시 환수(還收)함이 마땅합니다.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형서(李衡瑞)는 사람됨이 어리석고 굼떠서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이며, 백성들을 학대한 놀랄만한 일들이 이루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마땅히 파직을 명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수신의 일은 해도(海島)의 소문을 어찌 반드시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이형서의 일도 풍문(風聞)이니, 또한 준거하여 믿기 어렵다. 수령은 자주 교체할 수 없는 것이며, 조적명에게는 다시 준직을 주라."
하였다.

 

9월 21일 신사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말하기를,
"본국(本局)에서 새로 준비한 동포(銅砲)가 50이고 홍이포(紅夷砲)가 둘인데, 그것을 싣는 수레는 52폭(輻)입니다. 동포의 탄환 도달 거리는 2천여 보(步)가 되고, 홍이포의 탄환 도달 거리는 10여 리(里)가 되니, 이는 실로 위급한 시기에 사용할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바로 우리 나라에서 새로 제작한 것으로 예람(睿覽)하시도록 올렸으니, 청컨대 감동(監董)한 사람의 노고를 기록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9월 22일 임오

밤에 번개가 쳤다.

 

9월 24일 갑신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9월 25일 을유

이유(李瑜)를 이조 참의로, 황정(黃晸)을 집의로, 박준(朴㻐)을 헌납으로, 이윤신(李潤身)을 지평으로, 권혁(權爀)과 박사정(朴師正)을 교리로, 이흡(李潝)·김상석(金相奭)을 수찬으로, 송진명(宋眞明)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임금이 교하(交河) 장릉(長陵)의 길에 거둥하여, 옛 능에서 옮겨 와 집을 지은 백성들에 대해 묻고, 본군(本郡)에서 돌보고 도와줄 것을 명하였다. 길에서 군수(郡守)의 치적을 칭송한 목비(木碑)를 보고, 해당 군수 홍중주(洪重疇)를 불러서 하유(下諭)하기를,

"비석을 세우는 것은 실정(實政)이 있는 것만 같지 못하니, 그것에 힘쓰라."

하였다. 저녁에 새 능에 나아가 홍살문 밖에서 곡(哭)과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는 능 위와 비각(碑閣)을 봉심(奉審)하였다. 이날 밤 재전(齋殿)에서 자다가 밤 4시경에 예(禮)대로 친향(親享)을 거행하였는데, 애모(哀慕)를 스스로 견디지 못하니, 측근의 신하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또 손수 잣나무를 수십 군데 심고 여러 신하들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옛 능에 효종(孝宗)께서 손수 심으신 것이 있는데, 이번에 옮겨 오지 못해서 마음이 매우 슬프다. 내가 그런 까닭으로 친히 심는 것이니, 그것이 자라기를 기다려 나누어 심는다면 이것도 또한 계술(繼沭)인 것이다."

하였다. 남원군(南原君) 이설(李

)에게 가자(加資)하였으니, 그의 노고에 보답한 것이다.

 

 

9월 27일 정해

어가(御駕)가 파주(坡州)로 향하였다. 저녁에 사묘(私墓)의 행궁(行宮)에 나아가 그대로 유숙하고, 의식(儀式)대로 제사를 행하였다. 신원(新院)에 이르러 각기 일을 맡은 차원(差員)을 불러 보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물은 뒤 북한 산성(北漢山城)에 바칠 군향(軍餉)의 절반을 본읍(本邑)에 봉류(捧留)하여 전수(轉輸)의 수고로움을 덜게 하였다. 저녁에 환궁(還宮)하여 각영(各營) 군병(軍兵)으로서 어가(御駕)를 수행한 자들을 노문(勞問)하였다.

 

9월 29일 기축

각 영(營)에 호궤(犒饋)452)  를 행할 것을 명하였다.

 

김취로(金取魯)를 대사헌으로, 박수(朴璲)를 장령으로, 조명겸(趙明謙)을 정언으로, 조상행(趙尙行)을 지평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응교로, 윤동형(尹東衡)·한현모(韓顯謨)를 교리로 삼았다.

 

약원(藥院)에서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경휘전(敬徽殿) 삭제(朔祭)의 친향(親享)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주 청하는데도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장차 말하기를, ‘경(卿) 등의 정성이 모자란다.’고 할 것이니, 군신(君臣)의 사이에 나는 차마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하고는 특별히 허락하였다.

 

하교하기를
"몇 년 동안 조금 풍년이 든 끝에 이런 큰 흉년을 만났으니, 민생(民生)을 생각한다면 내가 먹고 자는 것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삼남(三南)에 대해서는 이미 획급(劃給)한 바 있지만, 기민(畿民)이 곤췌(困悴)함은 근년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않았으니, 경리청(經理廳)으로 하여금 면포(綿布) 3백 동(同)을 특별히 기영(畿營)에 주어서 백성을 진휼하는 데에 보태게 하라."
하였다.

 

9월 30일 경인

햇무리가 졌다. 밤에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또 별이 북두성(北斗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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