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 1731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1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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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신묘

유성(流星)이 삼기성(參旗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릿때 같았으며, 빛깔은 붉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기민(圻民)의 기곤(飢困)을 근심하여, 경리청(經理廳)의 포목(布木) 3백 동(同)을 획급(劃給)해 진자(賑資)에 보탤 것을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무명의 저장량이 모자라서 1만 꿰미의 돈으로 대신할 것을 명하였다.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그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강력하게 말하고, 또 미리 다음해를 대비해야 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널리 은혜를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요(堯)·순(舜)도 오히려 어렵게 여겼다. 눈으로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내년의 계획을 위해 구제하지 않는 것은 왕정(王政)에 있어서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고, 이어서 돈 1만 꿰미와 강도(江都)의 쌀 7천 곡(斛)과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쌀 3천 곡을 경기에 줄 것을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거듭 주금(酒禁)을 분명히 하여 소비를 줄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술이 없으면 백성이 그 조상을 제사지내지 못할 것이니, 다만 그 더욱 심히 드러난 자만을 금하라."
하였다.

 

이때 주전(鑄錢)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다. 임금이 호조와 진휼청(賑恤廳)에 명해서 주전소(鑄錢所)를 나누어 설치하여, 간위(奸僞)·문란(紊亂)의 폐단을 막게 하였다.

 

집의 황정(黃晸)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장릉(長陵)의 참봉(參奉)을 승륙(陞六)시킨 상전(賞典)은 정도에 지나침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고 또 능(陵)에 거둥할 때에 어영(御營)의 후군(後軍)이 대오를 이루지 못하고 어지러이 흩어져 기강이 없었으니, 마땅히 해당 병영(兵營)으로 하여금 그 군사를 통솔한 자를 조사해서 곤장(棍杖)을 치게 해야 합니다. 호서(湖西)의 한 부유한 사람이 사적으로 1천여 곡(斛)의 곡식과 5백 꿰미의 돈을 지난해 진정(賑政) 때 내놓아 사람을 살린 것이 매우 많았는데, 조정에서 일찍이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이 없었으므로, 호서 사람들이 그의 낭비를 비웃으며 서로 경계를 삼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부자는 곡식을 나누어 주려는 뜻이 없고, 가난한 자는 환란을 구제할 도리가 없으니,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게 하여 조속히 상전(賞典)을 베푸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능관(陵官)의 일은 전례가 있다. 어영군의 일은 해당 병영으로 하여금 조사해 처리하게 하고, 상소 말미에 청한 것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신방(申昉)을 부제학으로, 임정(任珽)을 수찬으로 삼았다.

 

10월 2일 임진

박사정(朴師正)을 부응교로, 이덕수(李德壽)를 대제학으로, 정석오(鄭錫五)를 도승지로, 유정(柳珽)·이봉익(李鳳翼)·서명구(徐命九)를 승지로 삼았다.

 

좌윤(左尹) 이세근(李世瑾)이 이때 나이 68세였다. 상소하여 고사(故事)를 인용하며 치사(致仕)하기를 원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병(病)이 있다 하여 정고(呈告)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지제교(知製敎)에게 비답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10월 3일 계사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희었다.

 

조석명(趙錫命)을 도승지로, 김상규(金尙奎)·한사득(韓師得)을 승지로, 이종백(李宗白)을 부교리로 삼았다.

 

10월 4일 갑오

임금이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경휘전(敬徽殿)에서 친히 행하였다.

 

관상감(觀象監)에서 《관상완점(觀象玩占)》을 인쇄하여 올렸다.

 

10월 5일 을미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였다. 《주역(周易)》의 명이괘(明夷卦)453)  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윤동형(尹東衡)이 말하기를,
"여기서 밝음이라는 것은 군주의 밝음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총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군주가 진실로 스스로의 총명만을 믿는다면, 여러 사람들의 총명을 수렴할 수 없고, 군하(群下)도 역시 그 실정을 다 말할 수가 없으니, 그래서 밝음이 도리어 밝지 못함이 되는 것입니다. 밝음을 사용하면 작은 곳에는 밝겠지만 큰 곳에는 어둡게 되니 반드시 모름지기 밝으면서도 감춤을 사용한 후에야 크게 밝음이 되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밝음[明]’이라는 한 글자가 어찌 성상에 부족한 점이겠습니까마는, 군하가 염려하는 바는 혹시라도 살핌에 지나칠까 두려워 함이니, ‘성격이 편벽되어 극복하기 어려운 곳을 극복해 나간다.’는 것이 어찌 격언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또 야대(夜對)를 시행하였다. 《성학집요(聖學輯要)》의 회덕량장(恢德量章)에 이르러 윤동형이 또 말하기를,
"군주는 택산(澤山)의 함(咸)454)  에서 상(象)을 취하는데,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까닭은 그 국량(局量)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사묘(私墓)에 거둥하실 때 여러 신하들이 그만두기를 청한 것은 성궁(聖躬)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모두 충성과 사랑의 뜻에서 나왔는데, 듣기 싫어하는 뜻이 있는 듯하여 비지(批旨)에 불평스러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비록 비답(批答)을 다시 내리는 조처가 있었지만, 그 비답(批答)을 다시 내리는 것이 어찌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던 것만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역시 우악하게 답하고, 하교하기를,
"나의 병통을 나 역시 스스로 알고 있으니, 실로 도량이 넓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윤동형이 또 향회 연식(嚮晦燕息)455)  의 의미를 진달하여 성궁을 보호하는 도리를 권면하였다.

 

10월 6일 병신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었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영남에는 이미 돈 2만 꿰미를 주었고, 호남에도 또한 1만 5천 꿰미를 주었습니다. 호서와 경기에도 각각 1만 꿰미를 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비록 성명(成命)이 있었지만 먼 곳에 전수(轉輸)하자면 소모되는 비용이 또한 많을 것입니다. 마땅히 각도(各道)로 하여금 각 군문(軍門)으로 응당 납부해야 할 것을 덜어 남겨 두어서 그것에 충당시키고, 그 대가(代價)는 새로 주조한 돈으로 대신 지급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조(吏曹)에서 복계(覆啓)하기를,
"금성 현감(錦城縣監) 이형곤(李衡坤)과 철원(鐵原)의 전(前) 부사(府使) 민사연(閔思淵)은 모두 선치(善治)하였으니, 마땅히 가자(加資)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재주가 직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형(文衡)은 경(卿)이 아니면 안된다."
하고, 빨리 직무를 보게 하였다.

 

10월 7일 정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친 뒤 시독관(侍讀官) 권혁(權爀)이 나아가 말하기를,
"국가에 의리(義理)가 밝지 않습니다. 이른바 의리라는 것은 바로 군신(君臣)의 윤의(倫義)인데, 한번 어두워지자 신축년456)  ·임인년457)  의 일이 있었고, 재차 어두워지자 무신년458)  의 변란이 있었으니, 이는 윤의가 밝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네 신하의 일은 연차(聯箚)에 지나지 않는데, 어떤이는 신구(伸救)하고 어떤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어찌 반상 낙하(半上落下)459)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그 아버지의 풍도를 따르지 않고 도리어 시상(時象) 가운데로 들어갔다. 기유년460)  에 문을 닫은 이후로 예전 일을 덮어두고 다시 거론(擧論)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나의 의리이다. 지난날의 당론(黨論)은 오물(汚物)을 버리듯이 한 뒤에라야 다른 사람과 나의 차별이 없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권혁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매양 당론을 가지고 하교하시지만, 조정에서 탕평(蕩平)을 의리로 삼는 것은 김일경(金一鏡)의 무리와 무신년 역적을 구별한 후에라야 바야흐로 의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김일경의 무리도 또한 명환(名宦)이 된 경우가 있습니다."
하고, 아직 말을 채 끝맺지 않았는데, 임금이 평상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권혁이 망발을 하는구나. 김일경의 무리란 말을 어찌 감히 다시 꺼낼 수 있겠는가? 권혁이기 때문에 죄주지 않고 면유(面諭)하는 것이다."
하였다. 대개 권혁은 바로 고(故) 판서(判書) 권상유(權尙游)의 아들인데, 그때 조정 신하로서 의리를 아는 자들은 대부분 시골에 있고 벼슬하지 않았으나, 권혁만 홀로 경악(經幄)에 출입하였던 까닭으로 임금의 위자(慰藉)461)  함이 이에 이르렀던 것이다.

 

10월 8일 무술

사헌부 【지평 이유신(李裕身)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윤봉조(尹鳳朝)의 죄명(罪名)은 중대한 것인데, 방석(放釋)하라는 명령이 있자 대각(臺閣)에서는 쟁집(爭執)을 생각하지 않고 성급하게 정계(停啓)하였으니, 청컨대 양이(量移)462)  된 죄인 윤봉조(尹鳳朝)를 석방하라는 명령을 환수(還收)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남(三南) 수령이 온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을 금지시킨 것은 대개 폐단을 줄이고자 한 것인데, 근래에 듣건대, 간혹 몰래 가족을 데리고 가는 자가 있다 하니, 마땅히 자수(自首)하게 하여 과죄(科罪)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평시서(平市署)를 설치한 것은 바로 물가를 조절하고 경중을 알맞게 하기 위한 것인데, 주전(鑄錢)의 명령이 내려지고부터 쌀을 저축해 이익을 꾀하는 자들이 시기를 타서 낮추었다 높혔다 하려고 하여, 돈은 천하고 쌀은 귀함을 핑계삼아 조등(刁蹬)463)  이 절제가 없으니, 조금 재정(裁定)을 가한 후에야 백성이 폐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돈 한 꿰미의 값어치가 세 말의 쌀을 대신하니, 비록 시세에 따라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적어도 두 말 다섯 되에 내려가지는 않게 하여 내년 맥추(麥秋)464)  까지를 기한으로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형배(刑配)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되나 말을 적게 하는 자도 또한 이 준례를 따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아뢰기를,
"흉년의 주금(酒禁)은 폐지할 수 없는 것이지만, 또한 너무 성급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상례(喪禮)·제례(祭禮)·혼례(婚禮)·빈례(賓禮)에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1개월로 한정하여 먼저 그 이미 빚은 술은 판매하게 하고 다시 술을 빚는 것은 금지하여 곡식을 넉넉하게 하는 방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사장(私庄)의 곡식을 사서 배로 운반해 상경(上京)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아 서울에 곡식이 귀하게 되는 폐단을 없애고, 또 여러 도(道)에 신칙(申飭)해서 유개(流丐)가 지경을 벗어나는 것을 금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는 도리를 다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성균관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함열(咸悅)의 성당(聖堂), 용안(龍安)의 난포(蘭浦), 임천(林川)의 남당(南塘), 보령(保寧)·결성(結城) 두 읍(邑)의 어장(漁場)을 영원히 본관(本館)에 소속(所屬)시켜서 그 세입(稅入)을 거두어 양사(養士)의 수용(需用)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대제학 이덕수(李德壽)로 하여금 반궁(泮宮)465)  에 가서 선비들을 시험보일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수석(首席)을 차지한 이인환(李寅煥)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으니, 구일제(九日製)466)  를 이달에 추행(追行)한 것이다.

 

10월 9일 기해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전날 연신(筵臣)이 품정(稟定)한 바에 따라 전경 문신(專經文臣)으로 하여금 두 사람의 낙점(落點)을 받은 사람을 초계(抄啓)해서 강연(講筵)에 들어오게 하기를 전강(殿講)의 예와 같이 하여 문의(文義)를 강론(講論)하게 하되, 특진관(特進官)·경연관(經筵官)·옥당(玉堂)을 고관(考官)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강(講)을 마친 뒤 동지사(同知事) 송인명(宋寅明)이 문의(文義)로 인해 ‘신하 부리기를 예로써 하고, 사령(辭令)을 마땅히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10월 10일 경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明)이 말하기를,
"경기(京圻)의 양천(陽川)은 고을이 아주 적은데도 군액(軍額)이 도리어 원호(元戶)467)  의 수효보다 훨씬 많아 한 고을의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청컨대 다른 고을에 이송(移送)하여 원액(元額)을 감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지부(地部)468)  의 은화(銀貨)가 바닥이 났으니, 저축할 방도라고는 다만 산림천택(山林川澤)의 이익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재화가 있지만, 사용할 줄을 알지 못해서 도리어 재화가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듣건대, 함경도 정평(定平)에 은(銀)이 생산되는 곳이 있고, 안변(安邊)에 동(銅)이 생산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청컨대 호조의 낭관(郞官)을 보내서 은점(銀店)을 설치하고 세(稅)를 거두어 경비의 사용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선조(宣祖)의 《보감(寶鑑)》을 보니, 거기에 ‘은을 캐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하교가 있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요(堯)·순(舜)을 본받고자 한다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은점을 설치하기 전에 간민(奸民)들이 몰래 캐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뒤에 대신이 아뢴 바로 인해 안변에는 단지 주전(鑄錢)할 때에만 은점을 설치하여 캐서 사용할 것을 허락하고, 주전을 끝마치면 곧바로 파(罷)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주전(鑄錢)할 때 이른바 감동(監董)이란 자를 중서(中庶)469)  에서 차출하기 때문에 상하(上下)를 통제하고 간세(奸細)를 막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실직(實職)이 있고 재능이 많은 자를 ‘감동’이라 이름하여 성과를 책임지울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하순(下詢)하니,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간세를 방지하는 방도는 전적으로 감동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래에 규모가 날로 좁아져서 수령은 혹시라도 하리(下吏)가 도둑질할까 두려워하고, 도신(道臣)은 또 수령이 속일까 두려워하며, 서울의 각사(各司)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러하므로 상하가 손발을 놀릴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비단 주전 한 가지 일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규모를 조금 변경시켜 다소 관대한 정사를 시행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모든 일은 너무 간결하게 하면 폐단이 있으니, 경이 아뢴 것이 진실로 대체(大體)를 얻었다. 이 마음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어서 삼남(三南)의 수령이 금령(禁令)을 범하고 몰래 가족을 데리고 간 경우는 영(令)을 내린 뒤에 한하여 조사해서 처분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앞서 이미 대계(臺啓)를 윤허했기 때문이었다.

 

사간원 【정언(正言) 조명겸(趙明謙)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합계(合啓)는 매우 중대한 것이니, 마땅히 정지시킬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비록 유봉휘(柳鳳輝)를 포용하시어 부당하게 보전(保全)시키더라도 대각(臺閣)에 있어서는 합계를 낸 것이 또한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무리들이 단지 사당(私黨)을 비호할 줄만 알아 조금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앞질러서 정계(停啓)했으니, 비록 박한 파직을 시행하였지만 죄가 여기에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정계한 대관(臺官)을 삭출(削黜)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을 내렸으니, 다시 어찌 가율(加律)하겠는가?"
하였다. 전계(前啓) 가운데서 이의천(李倚天)의 일과 남부 낭관(南部郞官)의 일은 정계하였다. 조명겸이 또 아뢰기를,
"비변사의 계사(啓辭) 가운데 ‘쌀값을 재정(裁定)하여 조등(刁蹬)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는 것도 또한 시행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미곡(米穀)이 밖에서 수입(輸入)되는 것이 전연 없으니, 그 값이 뛰어 오르는 것은 원래 그런 법입니다. 마땅히 먼저 쌀을 생산하는 근원에 신칙(申飭)하여 중간에 끊어지는 우려를 면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이어서 하교(下敎)하기를,
"장법(贓法)이 엄중하지 않다면 그만이지마는, 이미 엄중한다면 천주(薦主)470)  를 연좌시켜 파직하는 법을 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 수의(繡衣)의 계청(啓請)으로 인해 장죄(贓罪)에 연류되어 도배(徒配)된 자는 천주에게도 또한 견파(譴罷)의 법을 시행해서 법령에 기록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11일 신축

밤에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5자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고 광채는 땅을 비췄다.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2일 임인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관 위에 배(背)가 있었는데, 빛깔은 모두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10월 12일 임인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윤동형(尹東衡)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황희(黃喜)는 덕망과 공업(功業)이 아조(我朝)의 명상이 된 분인데, 묘(墓)가 교하(交河)에 있습니다. 그가 퇴거(退居)한 곳은 옛 장릉(長陵) 곁에 있는데, 자손이 그 화상(畫像)을 영당(影堂)에 봉안했습니다. 숙종(肅宗)께서 온천(溫泉)에 거둥하실 때 또한 지나는 길에 명신묘(名臣墓)에 들러 치제(致祭)하신 전례가 있는데, 치제는 이제 비록 시기가 늦었지만, 듣건대, 그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 매우 가난하다 하니, 마땅히 녹용(錄用)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또 예관(禮官)을 보내어 그 묘(墓)에 제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지평 이윤신(李潤身)이 일찍이 윤봉조(尹鳳朝)의 방석(放釋)을 도로 거두라는 계사(啓辭)를 올렸는데, 그 뒤에 정언 조명겸(趙明謙)이 비난하고 배척하는 말을 하였다. 이에 이윤신이 인피(引避)하며 심지어 말하기를,
"간신(諫臣)이 이의천(李倚天)에 대해 정계(停啓)한 것도 역시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까?"
하니, 조명겸도 또한 이로 인해 인피하였다. 옥당(玉堂)에서 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다 하여 모두 출사(出仕)시킬 것을 청하였다.

 

10월 13일 계묘

박사정(朴師正)을 동부승지로, 김취로(金取魯)를 병조 판서로, 윤동형(尹東衡)을 집의로, 조관빈(趙觀彬)을 대사헌으로, 이광세(李匡世)를 대사간으로, 홍현보(洪鉉輔)를 호조 참판으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로, 홍성보(洪聖輔)를 부수찬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교리로, 홍봉조(洪鳳祚)를 수찬으로, 이일제(李日躋)를 겸 장령(兼掌令)으로 삼았다.

 

10월 14일 갑진

서명연(徐命淵)과 홍상빈(洪尙賓)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15일 을사

임금이 망제(望祭)를 경휘전(敬徽殿)에서 친히 거행하였다.

 

10월 16일 병오

임금이 친히 유생(儒生)의 전강(殿講)에 나아가서 수석(首席)을 차지한 유학(幼學) 강수규(姜守珪)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강(講)을 끝마치자 대사성 정우량(鄭羽良)이 말하기를,
"본관(本館)에서 거두는 영종도(永宗島) 어세(漁稅)의 대가(代價)를 지부(地部)에서 대급(代給)하는 것이 4,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여, 양사(養士)의 비용을 번번이 전복시(典僕寺)에다 징책(徵責)함을 면하지 못하니, 일이 매우 구간(苟簡)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사의 비용은 보통과 다르니, 지부에 신칙(申飭)해서 그 대가에 준하여 수송(輸送)하게 하라."
하였다.

 

지평 조상행(趙尙行)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술을 빚는 것은 곡식을 소모하는 단서가 됩니다. 청컨대 대찬(代撰)하는 신하에게 계주(戒酒)의 뜻을 충분히 기술하도록 명하시어 먼저 중외(中外)에 하유(下諭)하시고, 이어 금주(禁酒)의 영(令)을 반포하여, 흉년의 민식(民食)471)  을 도와주소서. 생각하건대, 지금 쌀은 귀하고 돈은 천한데, 지금의 주전(鑄錢)은 한두달에 끝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장차 반드시 봄을 지내고 여름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비록 보통의 토목 공사라 하더라도 봄·여름에 하게 되면 가뭄을 초래(招來)합니다. 더구나 큰 풀무를 나란히 벌려놓고 여러 화로가 동시에 작동하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뻗치며 화기(火氣)가 활활 타오르면, 어찌 가뭄을 돕지 않겠습니까? 을해년472)  의 주전(鑄錢)은 마침내 병자년473)  과 정축년474)  의 흉년을 초래하였습니다. 지난일을 거울삼을 만하니 우선 철파(撤罷)하여 풍년이 들기를 기다림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가볍게 찬을 청하였으니, 퍽 경솔한 점이 있다. 지금 이 주전은 실로 본뜻이 아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니, 그것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더구나 ‘가뭄을 초래한다.’는 설은 혹시 한유(漢儒)에게서 배운 것475)  이 아닌가?"
하였다.

 

대사간 이광세(李匡世)가 상소하여, 돈은 천하고 쌀은 귀하기 때문에 주전(鑄錢)하는 일을 그만두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영남의 노비(奴婢)를 추쇄(推刷)476)  하는 것은 이미 아랫사람을 이롭게 하는 정치가 아니고, 해서(海西)의 도고(逃故)를 사정(査正)하는 것은 백성을 동요시키는 결과를 면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정지하게 해서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 전념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추쇄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도고를 충정(充定)하는 일은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니, 더욱 불쌍하고 가련하다. 더구나 해서는 영남과 다르니, 굳이 중간에 철회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언섭(鄭彦燮)이 장계(狀啓)하기를,
"새로 임명된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도서(圖書)477)  를 개청(改請)하여 이미 차왜(差倭)를 보냈으니, 마땅히 접위관(接慰官)을 보내서 유체(留滯)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하고, 그들이 보내 온 서계(書契)478)   및 특송사(特送使)의 노인(路引)도 또한 올려 보냈다. 예조(禮曹)에서 관례에 따라 복계(覆啓)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 뒤로는 동래부에 왜선(倭船)이 오고갈 적에 봉상(封上)하는 서계와 노인은 이것에 의해서 하였다.

 

10월 17일 정미

밤에 달이 동정성을 범하고, 화성(火星)이 태미원(太微垣)의 왼쪽 집법성(執法星)을 범하였다.

 

헌납 박준(朴㻐)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주전(鑄錢)은 바로 보통 해의 통화(通貨)의 자본이지, 흉년에 구급(救急)하는 물건은 아닙니다. 지금 곡가(穀價)가 뛰어 오른 것은 전적으로 여기에 연유한 것이니, 우선 정파(停罷)하여 다른 해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여항(閭巷)의 사치한 풍속이 지금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니, 마땅히 성상께서 몸소 검약을 실천하시어 지성(至誠)으로 아랫사람에게 미더움을 주셔야 됩니다. 그리고 또 재앙을 만나 소결(疏決)479)  함은 대개 성상께서 흠휼(欽恤)하시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처수(申處洙)와 이만유(李萬維)는 애당초 감률(勘律)480)  이 이미 너무 무거웠고, 여러 번 큰 은덕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용서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장윤(朴長潤)의 정리(情理)가 참혹하기 짝이 없음은 도리어 신처수보다 심합니다. 듣건대, 그 늙은 어미가 병이 위독하여 울부짖으며 죽어간다고 하니, 더욱 가련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신처수와 이만유의 일은 중대한 바 있으니, 경솔하게 의논할 것이 아니다. 박장윤은 뭍으로 나오게 한 것은 또한 참작한 것이니, 어찌 성급하게 석방할 수 있겠는가? 단지 말미를 허락하여 그 어미를 문안하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당선(唐船)의 왕래가 요즘 더욱 심해졌습니다. 백령도(白翎島) 한 진(鎭)은 해서(海西)에서 으뜸가는 요충지인데, 도민(島民)이 매우 적어서 당선을 몰아내고 제지할 방법이 없습니다. 목장(牧場)은 비옥하여 좋은 밭을 만들 만한데, 대청도(大靑島)는 바로 본도(本島)와 서로 바라보이는 곳입니다. 갑신년481)  에 본진(本鎭)에서 보고한 것으로 인해 태복시(太僕寺)에서 목마(牧馬)를 대청도에 이송(移送)했다 합니다. 지금 만약 백령도의 나머지 말을 대청도에 다 옮기고, 백령도에 있는 옛목장은 백성들에게 농사지어 먹도록 허락해 준다면, 땅은 이미 경작할 수 있고 백성도 또한 많이 들어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비단 당선을 몰아 내는 힘을 얻을 뿐만 아니라, 태복시의 마정(馬政)에도 유익할 듯합니다. 도신(道臣) 서종옥(徐宗玉)의 말도 역시 그렇다고 하니, 청에 따라 시행함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0월 18일 무신

조명신(趙命臣)을 좌승지로,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을 사은 겸 동지 정사(謝恩兼冬至正使)로, 김상옥(金相玉)을 형조 참판으로, 정형익(鄭亨益)을 함경도 관찰사로, 홍현보(洪鉉輔)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10월 19일 기유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예기(禮記)》를 강(講)하다가 임금이 말하기를,
"예서(禮書)는 의문스러운 곳이 많은데, 산림(山林)에서 독서한 사람 가운데 혹은 익숙하게 강(講)하는 자가 있을 듯하다."
하니, 지사(知事)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예(禮)를 강론하신 나머지 산림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셨으니, 뜻이 매우 거룩합니다."
하고, 이어서 한원진(韓元震)의 삭일(削逸)482)  이 정도에 지나침을 말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재(李縡)가 비록 과목(科目)을 통해 나왔지만 물러나서 강학(講學)하고 있으니, 바로 산림 가운데 사람입니다. 초빙하여 강학한다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원진을 바야흐로 처분하였으니,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는 선비를 어찌 오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원진은 존주(尊周)의 의리를 무너뜨렸으므로, 마지못해 죄준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을 죄주어 여러 신하들의 진신(進身)하는 길을 막기에 이른다면, 산림을 초치하려는 것이 도리어 그 문(門)을 닫는 것이 될 것이다. 경의 말은 사사로운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또 문의(文義)로 인한 것이니, 내가 만약 고치지 않는다면 잘못을 분식(粉飾)하는 데 가까울 것이다."
하고, 한원진을 삭일하라는 전교(傳敎)로 도로 들여올 것을 명하여, 마침내 고쳤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지금 곧바로 환침(還寢)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어서 찬선(贊善) 김간(金幹)의 나이가 몇이냐고 물으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올해 여든 여섯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의 나이는 몇인가?"
하니, 서명연(徐命淵)이 말하기를,
"여든 셋입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또 전조(前朝)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충절(忠節)을 진달하면서 사복(嗣服)한 이후로 지금껏 치제(致祭)하지 않았으니 크게 결여된 전례라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치제할 것을 명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칙사(勅使)가 황후(皇后)의 부음(訃音)을 전하기 위해 나오는데,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부음을 전할 때에 성상께서 참포(黲袍)·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를 착용하고, 백관(百官)은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칙사를 영접하며, 선칙(宣勅)한 뒤에는 거애(擧哀)의 절차가 있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관례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대사헌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대저 신축년483)  ·임인년484)   이후로 성상(聖上)의 무함(誣陷)이 변정(卞正)되고 안되는 것은 오직 사가(四家)가 신원(伸冤)되고 안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아! 흉적(凶賊)의 무리들이 전하에 대해 백방으로 계략을 써 온 지가 오래입니다. 유봉휘(柳鳳輝)와 김일경(金一鏡)으로부터 박상검(朴尙儉)과 목호룡(睦虎龍)이 되고, 박상검과 목호룡으로부터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이 되며, 나필웅(羅必雄)이 되었습니다. 또 몇번의 흉기(凶機)가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몰래 감추어져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그 또한 위태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臣)의 근심하는 바에 이것보다 심한 것이 있습니다. 다만 저들이 손을 놀려 분수를 범하고 군사를 일으켜 비수를 쥔 자들은 그 꾀가 쉽사리 엿보이고 그 죄가 쉽사리 밝혀지지만 머리를 감추고 꼬리를 가려서 흉측한 계책을 도운 자들에 이르러서는 계획한 것이 느슨할수록 더욱 독해지고 해로움은 오래 될수록 더욱 커지는 법입니다. 한데 뒤섞어 버리자는 논의는 비록 너그럽고 온화한 것 같지만 고의적으로 징토(懲討)를 느슨하게 해서 흉적(凶賊)들의 형세를 몰래 복돋아 주는 것이고, 대거(對擧)의 정치는 비록 공평한 듯하지만 명리(名利)로 유인하여 점점 순강(純剛)의 기운을 녹여 없애는 것이니, 진회(秦檜)485)  가 송(宋)나라를 그르치고 장의(張儀)486)  가 초(楚)나라를 우롱(愚弄)하게 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의사(疑似)에 현혹되시고 고식적인 데 안주하시어, 무릇 성상께서 무함이 대관(大關)에 관계된 것을 한결같이 모두 선천(先天)에 맡기시어 나의 광명(光明)한 성덕(盛德)으로 하여금 후일에 밝게 게시할 수 없게 하고, 막대한 의리를 일세(一世)의 기휘(忌諱)가 되게 하였으니, 저들 무리는 비록 부귀를 편안히 누려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 여기겠지마는, 전하께서는 위에 고립되시어 장차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믿겠습니까? 신이 을사년487)  에 입대(入對)하여 목욕(沐浴)의 의리488)  를 우러러 진달하고, 이어서 ‘징토(懲討)를 엄중히 하지 않으면 사변(事變)이 반드시 생긴다’는 뜻을 언급하였는데, 급기야 무신년489)  에 이르러 불행히도 적중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신의 오늘 말한 것이 또 뒷날에 경험이 되지 않을는지 알겠습니까?"
허나,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 상소는 오늘날 보고싶지 않으니, 그 소장을 되돌려 주라."
하였다.

 

파주(坡州)의 유학(幼學) 김여(金礪) 등이 상소하여 본읍(本邑)의 민폐(民弊) 두서너 가지를 진달하였다. 그 첫째는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탄(柴炭)을 사들이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었고, 그 둘째는 경기(京畿) 백성의 세(稅)를 감해준 은전(恩典)이 유독 파주에만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며, 그 셋째는 이제 막 천릉(遷陵)의 대례(大禮)를 겪었으니 마땅히 과거를 베풀어 위열(慰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답하기를,
"소진(疏陳)한 것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설과(設科)는 온천의 거둥을 예(例)로 끌어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10월 20일 경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예기(禮記)》의 하경위장(下卿位章)에 이르러 지사(知事)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것은 대신(大臣)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옛적 임금과 신하가 서로 대우하는 도리는 후세와 달라, 신하가 병들면 임금이 친히 문병하였고 신하가 죽으면 임금이 친히 보았습니다. 고례(古禮)는 이와 같았는데,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대신이 교외(郊外)의 노차(路次)에서 지영(祗迎)490)                  할 적에 대가(代駕)가 그냥 지나치고 위문하지 않으니, 실로 대신을 존경하는 도리에 흠이 있습니다. 원로 대신과 산림의 유현(儒賢)이 간혹 길 옆에서 영송(迎送)할 적에 잠시 연(輦)에서 내려 인접(引接)하여 노문(勞問)491)                  한다면 예(禮)에 손상될 것이 없으며, 9경(九經)의 대신을 존경함과 예경(禮經)의 황발(黃髮)492)                  을 공경한 것을 어찌 병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신을 존경한 뒤에라야 체통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과 지금은 비록 다르지만, 경의 말은 옳다."
하였다. 강(講)을 마치고 나서 대신과 금오(金吾)의 당상관을 명소(命召)493)                  하여, 국수(鞫囚)로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을 판결해서 석방하게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해마다 국청(鞫廳)을 설치했는데, 추관(推官)을 논상(論賞)하는 관례가 있는가?"
하니,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옛적에는 금오관(金吾官)을 녹훈(錄勳)하였으므로, 선조조(宣祖朝)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와 인조조(仁祖朝)의 무진년494)                  의 옥사에서 허적(許𥛚)이 또한 녹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대신(臺臣)의 논계(論啓)로 인해 개록(改錄)하였으므로, 고(故) 상신(相臣) 오윤겸(吳允謙)이 상소하여 녹훈을 사양하였습니다. 그 이후부터 녹훈의 법은 비록 폐지되었으나, 상(賞)을 준 관례는 간혹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 이미 정식(定式)이 있었으니, 녹훈은 지금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또 어사(御史)의 장계(狀啓) 가운데 들어 있는 권부(權孚)와 이시명(李蓍命) 등 두 사람은 법대로 금고(禁錮)하고 천주(薦主)도 또한 조사하여 파직시킬 것을 명하였으니, 대개 이들은 허록(虛錄)으로써 발각된 자들이다.

 

함은군(咸恩君) 이삼(李森)이, 관서(關西) 강변(江邊) 고을의 산중턱 이상에는 화전(火田)을 금지하여, 수목(樹木)을 기르는 땅으로 삼을 것을 주청(奏請)하고, 비변사에서, 문성(文城)의 옛 진(鎭)인 민을령(民乙嶺)에 농사짓는 것을 금지하고 나무를 길러서 하나의 영애(嶺阨)495)  로 만들기를 청하니, 모두 허락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이광세(李匡世)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유유한 만사(萬事)가 성상의 마음의 사이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본원(本源)의 자리에 성의를 더하시고 성정(誠正)의 공부에 힘을 기울이시며, 하늘을 공경하되 허식으로 하지 않고, 백성을 진휼하되 반드시 정성으로써 하며, 사람에 대해서는 그 질실(質實)함을 취하고 일에 나아가서는 그 근면하고 근신함을 요구하며, 영변(英辯)496)  으로 군하(群下)의 말을 꺾지 말고 승기(勝氣)로 군하의 아첨을 유도하지 않는다면, 세도(世道)를 만회하고 속습(俗習)을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이 문낭청(文郞廳)497)  을 차출할 적에 조사(朝士)의 아무개가 간청한 바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세진(李世璡)이 계하(啓下)한 뒤 투자(投刺)498)  하는 날에 장붕익이 이세진을 대하여 조사를 모욕하기를 몹시 패악하고 사리에 어긋나게 하였습니다. 이세진이 또한 간청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물론하고 그 수치와 모욕이 어찌 저자거리에서 종아리를 맞을 정도일 뿐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 여기지 않고 마음에 달갑게 여겨 행공(行公)499)  하였으니, 신은 이세진을 엄중히 견벌(譴罰)을 가해야 하고 장붕익도 또한 마땅히 무겁게 논책(論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병조 판서 김재로(金在魯)는 본래 재주나 명망이 있는데다 또 성적(聲績)이 드러났으니, 조정에서 인재를 선택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장용(奬用)하여야 하는데, 하필 그가 조정에 돌아오기를 기다려 아우로써 형을 대신할 것이 있겠습니까? 당사자가 불안한 것은 고사하고 나라 체모의 구간(苟簡)함이 막심하니, 마땅히 변통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 옥당(玉堂)에서 두 대신(臺臣)을 처치(處置)할 적에 조어(措語)가 구차하고 입론(立論)이 모호하여 현격히 우물쭈물하며 비방을 회피하는 형적이 있었으니, 그날 처치한 유신(儒臣)을 마땅히 체직(遞職)시켜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가 절실하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붕익과 이세진의 일은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옥당의 일은 이미 소패(召牌)를 어기어 법률을 적용받았으니 다시 베풀 만한 처벌이 없고, 병판(兵判)의 일은 이미 이친 형제(異親兄弟)요 또 구례(舊例)가 있으니, 청한 바가 또한 경솔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때 날씨가 차가워지자 숙위군(宿衞軍)에게 동옷을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10월 21일 신해

밤에 달이 헌원(軒轅) 우각성(右角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전옥관(典獄官)을 앞으로 나오라 명하여 하유(下諭)하기를,
"날씨가 차가움이 이와 같으니,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을 시키면 되겠지만, 죄가 무거운 죄수로서 옥에 갇혀 있는 자들은 힘써 진념(軫念)을 가하여 얼어 죽지 않게 하라."
하였다. 이어서 소대(召對)를 행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종성(李宗城)이 ‘도(道)가 부합하면 복종하고 옳지 않으면 떠나간다.’는 의미를 논하여 말하기를,
"임금이 항상 도덕이 높은 자가 합하지 않아서 떠나갈까 두려워한다면, 다만 나라가 거의 다스려질 뿐이 아니니, 반드시 신하로 하여금 떠나갈 만한 의리가 없도록 한 후에야 바야흐로 군주가 된 도리를 다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더 유의하겠다."
하였다. 이종성이 또 말하기를,
"주상께서 매양 마음이 아주 상하신 듯한 하교가 있으시고 일전에 능(陵)에 거둥하실 때에도 또한 ‘정리(情理)를 펼 수가 없으니,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설혹 정리를 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강학(講學)에 관심이 없고 만기(萬機)에 관심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삼강(三講)500)  과 만기는 바로 전하의 집안일인데 사령(辭令)이 이와 같으신 것은 또한 칠정(七情)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이니, 바라건대, 더욱 함양에 유념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유신(儒臣)을 보지 못하였더니, 이제 또 좋은 말을 들었노라."
하였다. 이종성이 또 말하기를,
"오늘날 나라의 형세는 외롭고 위태로우며 백성의 일은 끝이 없으니, 마땅히 더욱 성심(聖心)을 분발하고 치도(治道)를 넓게 펼쳐서 중흥의 대업을 이룩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 가납하였다.

 

또 야대(夜對)를 행하여 《성학집요》를 강(講)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임정(任珽)이 말하기를,
"가정을 바르게 하는 방도는 안팎의 분별을 엄중하게 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예로부터 명철한 군주는 여기에 유의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궁금(宮禁)을 엄중히 하는 방도를 능히 다하셨다면, 작년에 어찌 역적 환관(宦官)이 담장을 넘는 변고가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담장을 넘은 변고는 궁금이 엄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여항(閭巷) 사람들이 또한 간혹 궁금의 일을 추측하는 경우가 있으니, 어찌 외부의 말이 대내(大內)에 들어오지 않는 줄 알 수 있겠습니까? 옛적에 현종조(顯宗朝)에 있어서 일찍이 이것을 진계(陳啓)하는 자가 있자 현종께서 소문의 출처를 하문(下問)하니, 그 사람이 황공하여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홍명하(洪命夏)가 말하기를, ‘대내(大內)의 말이 외부로 나가는 연고를 아시고자 하신다면, 바라건대, 외부의 말이 대내로 들어오는 길을 살피소서.’ 하니, 현종께서 드디어 중지하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조정의 가법(家法)으로 삼을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이 폐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가령 외부의 말이 대내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귀에 들어오도록 하지 않는다면, 또한 안팎을 엄중히 하는 방도가 된다."
하였다. 당(唐)나라 구사량(仇士良)501)  의 일을 강함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구사량이 그 군주로 하여금 독서를 하거나 유신(儒臣)을 접견하지 못하게 하도록 그 도당(徒黨)들에게 가르친 것은 그 계략이 흉악하다."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아조(我朝)에 엄시(閹寺)502)  의 화(禍)가 없는 것은 다만 열성(列聖)의 가법(家法)이 엄정해서 그럴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사람의 현부(賢否)에도 달려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반드시 잘 골라서 맡기신다면, 진실로 우려할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라는 뜻에 대하여, 바라건대, 더욱 유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明)나라는 이로 인해 멸망하였으나 고려(高麗)와 아조는 그렇지 않은데, 앞에는 박상검(朴尙檢)이 있고 뒤에는 나필웅(羅必雄)이 있었으므로 내가 경험한 바이니, 또한 세도(世道)를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문형(文衡)이 이미 호당(湖堂)에서 나온 바 있으니, 준례에 따라 초계(抄啓)하여 연소한 문신(文臣)을 권면하라."
하였다. 분부가 내려진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극력 사양하고 초계하지 않으니, 이윽고 중지되었다.

 

지평 조상행(趙尙行)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이미 동인(東人)·서인(西人)을 조정하자는 논의를 주장하였는데, 선정신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문성공의 유의(遺意)를 추술(追述)하여 또한 붕당(朋黨)을 혁파하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았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반드시 피차를 합하고 물아(物我)를 없애서 함께 화해를 이루게 하고자 하시니, 그 뜻은 매우 거룩하다 하겠습니다. 대사헌 조관빈(趙觀彬)의 한 통 상소는 오로지 괴란(壞亂)시키려는 계획에서 나왔으니, 그가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에게 원한을 갚으려 들고 조정의 의논을 저패(沮敗)시키고자 한 것은 이미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더구나 또 모욕하고 공갈함이 아울러 공(公)을 앞세우고 사(私)를 뒷전으로 하여 국사(國事)에 마음을 같이하는 여러 사람들에게까지 미쳐 다만 조정이 혹시라도 화평(和平)의 복을 누릴까 두려워하였으니 아! 역시 가슴 아픈 일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휴척(休戚)을 함께하고 있는 자들은 어찌 한 배를 타고 있다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저 조관빈의 집안은 일찍이 당동 벌이(黨同伐異)한 일로써 화(禍)까지 당하였는데, 또 홀로 무슨 마음으로 이에 도리어 파란을 조장하여 경함(傾陷)하기를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것입니까? 그의 마음씀이 너무 편벽되고 지론(持論)이 매우 위태로우니, 마땅히 견벌(譴罰)을 내려서 그러한 습관을 징계해야 합니다. 어제 두 대간(臺諫)의 인피(引避)는 서로 공정하지 못함을 비난하였으니, 그 대체(臺體)에 있어서 모두 매우 군색한 것으로서 마땅히 양편을 파직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관빈의 상소 내용을 어찌 통촉하지 못하겠는가마는, 죄를 다스리지 않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이다. 두 대간의 일은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0월 22일 임자

화성(火星)이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서명연(徐命淵)이 말하기를,
"옛적에 동양위(東陽尉)의 옹주(翁主)가 일찍이 대내(大內)에 들어와서 궁장(宮墻)을 내려다보는 이웃집을 사들이기를 청하니 선조(宣祖)께서 답하지 않으시고, 갈대발을 하사해서 가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전송(傳誦)되고 있으니, 바라건대, 옹주께서 하가(下嫁)할 때 무릇 여러 혼구(婚具)를 힘써 줄이고 덜어 선조 대왕의 뜻을 본받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한 바가 매우 좋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지평 조상행(趙尙行)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헌납(獻納) 박준(朴㻐)이 귀양간 세 사람의 석방을 청한 것은 협잡(挾雜)하고 합벽(闔闢)503)  한 의사가 없지 않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진실로 이미 성실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충후하고 관대한 말은 묘당(廟堂)에 있어서는 혹시 옳을 수도 있으나, 실로 대각(臺閣)의 본색은 아닙니다. 근래에 언의(言議)가 날로 퇴색되어 아호(阿好)에 이끌려서 노력하는 바가 은혜를 요구하는 데 있으니, 마땅히 파직시켜 타락한 기풍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10월 23일 계축

밤에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두세 자쯤 되었으며, 빛깔은 희었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양득중(粱得中)·윤동수(尹東洙)·심육(沈錥) 세 사람은 능히 안분(安分)하여 결국 유속(流俗) 중의 사람들보다 나으니, 법연(法筵)에서 모시게 한다면 반드시 신 등보다 나을 것입니다. 여타의 경연관(經筵官)들은 또한 한직(閑職)을 제수하여 출입하며 강론(講論)하게 한다면, 어찌 성상의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사림(士林)의 선비들도 또한 시상(時象)에 구애되어 서로가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니, 이것도 고질적인 병폐이다. 전조(銓曹)로 하여금 차례대로 한직을 맡겨서 올라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종성이 또 주자(朱子)가 유정(留正)에게 보낸 편지를 논하여 말하기를,
"오늘날의 붕당(朋黨)은 옛적의 붕당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일찍이 보합(保合)의 이론을 전개하였고, 전하의 탕평(蕩平)의 정치도 또한 선정의 뜻과 같으니, 신은 본디 무어라 흠잡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나라의 근본을 세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잡스러운 패도(霸道)의 공리(功利)와 구차스러운 미봉의 술책에 돌아가게 됩니다. 지금 외관상으로 보아서는 비록 당(黨)이 없는 것 같지만, 조정을 돌아보면 실은 정신을 모아서 백성의 일에 마음을 다하는 자가 없으니, 이와 같고서는 성상의 뜻만 한갓 수고로울 뿐 이루어질 시기가 없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피차가 보합하는 가운데 서로 나라를 도모하는 도리를 힘쓰는 것이 바로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은혜와 원수를 둘 다 잊게 하고자 한다. 가정을 다스리는 데 비유한다면, 두 사람이 서로 다툴 경우 모두 한 곳에 두고 정의(情意)가 서로 미덥게 되어 피차간에 다툼이 없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내가 고심하는 바이다."
하였다.

 

10월 24일 갑인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상빈(洪尙賓)을 승지로, 이윤신(李潤身)을 정언으로, 엄경하(嚴慶遐)를 헌납으로, 조명겸(趙明謙)을 지평으로, 박필주(朴弼周)를 집의로, 조언신(趙彦臣)을 호조 참판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좌참찬으로 삼았다.

 

10월 25일 을묘

이성룡(李聖龍)을 대사간으로, 윤순(尹淳)을 한성부 판윤으로, 박사익(朴師益)을 개성 유수로, 김상성(金尙星)을 응교로 삼았다.

 

10월 26일 병진

밤에 유성(流星)이 우성(牛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 갔는데, 빛깔이 붉었다. 또 필성(畢星)의 위에서 나와 손방(巽方)을 들어갔는데, 빛깔이 붉었다.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리기를,
"온역(溫繹)504)  의 기한이 마땅히 오늘에 그쳐야 하는데 후원(喉院)에서 잘못 알고 품의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승지를 추고(推考)하소서."
하고, 이어서 개강(開講)을 청하니, 임금이 직무를 집행한 일이라 하여 가상하게 여기고 그 청을 따랐다.

 

10월 26일 병진

대사헌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막대한 것은 오직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인륜이니, 그것이 있는 바에 목숨을 바쳐 오직 의리만을 볼 따름입니다. 신은 신의 아비의 자식으로서 전하의 신하가 되었는데, 또 능히 할말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아비를 죽게 하는 것이고 임금을 잊는 것입니다. 신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정미년505)  에 추가로 삭탈 관직(削奪官職)한 것은 전하께서 좋아서 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이광좌(李光佐)의 위협에 협박당한 것이며, 두 집안이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는 것도 또한 전하께서 그렇게 하기를 좋아하시어 그런 것이 아니고, 다만 저들 무리의 조절(操切)에 구애를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임금의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현명하심으로써 흉당(凶黨)에게 속고 가리워짐을 면치 못하여 처분이 끝내 뒤죽박죽으로 귀결되고 의리(義理)가 점차 회색(晦塞)되는 데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이 《감란록(勘亂錄)》을 보았더니,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의 십적(十賊)을 역적의 괴수(魁首)로 삼았는데, 십적은 다만 보잘것없는 광망(狂妄)하고 교활한 무리일 뿐입니다. 만일 그 당시의 장상(將相)들이 모두가 전하께서 가까이하고 신임하는 사람으로서 과연 국가와 더불어 안위(安危)를 함께 할 마음이 있었다면, 비록 이인좌·정희량의 무리가 천만 명이 있다 한들 또한 어찌 감히 하루아침에 창궐하여 방자하게 거침없이 몰아쳐서 대궐을 침범할 계획을 하였겠습니까? 반드시 거흉(巨凶)·대특(大慝)으로 그 안에서 모략을 세워 그 기회를 빌려 그 세력을 조장한 자가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부녀자와 어린아이의 어리석음으로도 다 이광좌와 이삼(李森)을 무신년506)  의 역괴(逆魁)로 여기는 까닭입니다. 이광좌의 죄상에 대해서는 이양신(李亮臣)이 12조로 나열한 상소보다 상세한 것이 없습니다.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은 흉계에 있어서는 더욱 막대한 죄안(罪案)이 되는데, 그 자신이 변명한 말에서도 또한 그 정절(情節)을 다 엄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머리를 들고 버젓이 살아 있으니, 그래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가 고발되었을 때의 일로 말하더라도 조금도 황송해 하거나 위축되는 의사가 없이 손님을 맞이하기를 스스로 보통사람과 같이 하여 경재(卿宰)가 몰려들고 거마(車馬)가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는 안옥(按獄)하는 위관(委官)507)  으로 하여금 왕명(王命)을 기다리는 사차(私次)에 재차 문안을 드리도록 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기세와 권력을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다시 조정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도록 한다면, 어찌 후일의 화(禍)가 무신년보다 심하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
이삼은 여러 번에 걸쳐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왔으니 본디 살려 둘 만한 이치가 없으며, 또한 의심할 만한 정절(情節)이 있습니다. 조카를 보내 가서 의논하였다는 설은 처음에 역적의 입에서 나왔는데, 감히 하순(下詢)할 즈음에 ‘열 살 남짓한 서조카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삼에게 장성한 서조카가 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인데, 단지 열 살 남짓한 어린애만을 들었으니, 분명히 은휘(隱諱)한 정상이 있습니다. 국체(鞫體)로써 논한다면 그가 어찌 감히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나필웅(羅必雄)의 변란이 반드시 이삼이 다 친병(親兵)을 관장하는 시일을 기다린 것도 또한 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매우 의혹스럽게 여기는 바이며, 신겸제(申兼濟)가 경조(京兆)의 세 당상(堂上)을 공격해 제거하여 장임(將任)을 변환(變幻)하는 기회로 삼은 것은, 더욱 이삼의 의심할 만한 하나의 긴요한 단서입니다. 오늘날 탕평을 주장하는 자들은 위포(韋布)508)  로 있을 때부터 일찍이 이러한 의논을 주장하였고, 신도 또한 그 마음이 반드시 참으로 나라를 그르치게 하고자 하는데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견처(見處)가 밝지 못하고 용처(用處)가 바르지 못합니다.
사류(士類)가 옳고 충성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에 도리어 겉으로는 협조하고 속으로는 배척하며 저들의 무리가 잘못이고 역적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닌데도 으레 비호하고 추켜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그 설에 현혹되시어 온나라를 기울여 그 말을 들으시고, 당(黨)을 제거하는 성효(成效)를 책임지우시며 나라의 근본 법칙을 세우는 다스림을 기대하십니다. 음양(陰陽)은 구분이 고정되어 본디 사람의 힘을 변개(變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따로 양도 아니고 음도 아닌 물건이 있어 음양과 나열하여 셋이 되어, 나아가서는 군자(君子)가 되지 못하고 물러가서는 차라리 소인(小人)도 되지 못하니, 이것이 근래에 탕당(蕩黨)509)  의 칭호가 하나의 새로운 색목(色目)이 된 까닭입니다. 한번 탕당이 출현한 이후로부터 기상이 갑자기 바뀌고 풍절(風節)이 모조리 사라져 군주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을 서로 잊어버리는 곳에 두고 아름다운 관직과 좋은 작위만을 제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니, 이와 같은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장차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못하고 나라는 나라의 도리를 못하게 될 것입니다. 불행히 국가의 변고를 당하여 권흉(權凶)의 저 왕망(王莽)·동탁(董卓)510)  과 같은 자가 이익으로 달래고 위력으로 공갈한다면 크게는 순욱(筍彧)511)  과 진군(陳群)512)  이 모주(謀主)가 되어 힘을 바칠 것이고, 작게는 문울(文蔚)513)  과 풍도(馮道)514)  가 보책(寶冊)을 받들어 신하라 칭할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기가 막히고 마음이 떨립니다.
더욱 통탄할 만한 일은 그 사람의 자임(自任)하는 바가 어떠하고 전하께서 의지하고 믿는 것이 어떠한데 혈성(血誠)으로 나를 구원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사리(私利)를 앞세워 자신을 도모할 계획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신년 변란(變亂)이 일어났을 즈음에 비록 전혀 그 공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경영하고 계교하여 상하를 광혹(誑惑)시켰습니다. 일찍이 신의 종형(從兄)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을 개오(開悟)시키고 선류(善類)를 이끌어 진출시키는 것은 오직 내가 있을 뿐이라.’ 하였고, 또 달려와 묻는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외부에 있는 적(賊)은 족히 염려할 것이 없고 모자[帽] 밑의 적이 가장 걱정스럽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변화가 약간 진정되자 능히 본색(本色)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가 부식(扶植)한 바는 지난번에 이른바 모자 밑의 적의 무리가 아님이 없었으니, 이른바 나라와 휴척(休戚)을 같이 한다는 신하도 또한 이와 같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국옥(鞫獄)을 심리(審理)하는 사체(事體)야말로 얼마나 엄중하고 시급한 것입니까? 그런데 죄수를 심문하는 일은 마음 밖에 두고서 시구(詩句)나 수창(酬唱)하며 한가로운 풍류나 즐겼으니, 그가 옥정(獄情)을 소홀히 여기고 나랏일에 무관심한 것을 여기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법을 수호하는 가제(家弟)와 법을 전하는 전장(銓長)의 운용(運用)하는 기괄(機括)이 동일한 수법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역적(逆賊) 김일경(金一鏡)을 상소 때문에 주벌(誅伐)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오로지 육적(六賊)을 애호(愛護)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고, 이광좌의 지금의 영수(領袖)라는 칭호도 또한 차마 드러내놓고 배척하지 못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 마음가짐과 지론(持論)은 몹시 험악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송인명(宋寅明)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심함이 있습니다. 바야흐로 변란이 처음 발생하였을 때 감히 역적 남태징(南泰徵)을 곧바로 참형(斬刑)에 처하기를 청하였다가 결국은 단서를 알 수 없도록 만들었으니, 인심이 분개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들 가운데의 한 평범한 무리로서 불시에 갑자기 발탁되어 지위가 총재(冢宰)515)  에 이르고 은우(恩遇)가 특별하여 분수에 넘치니,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마땅히 공평한 정사로 나라에 진력하고 겸손한 도리로 자신을 신칙(申飭)해야 할 것인데, 정주(政注)를 사정(私情)에 따른 것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이며, 세력은 온세상을 기울게 하니, 감히 힐문(詰問)할 수도 없었습니다. 태복시(太僕寺)의 제거(提擧)에 있어서는 본래 좋은 벼슬자리로 칭하는데, 일부러 그 자리를 남겨 두었다가 필경은 자신이 차지하였으니, 그 방자하고 비루한 것은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해도 오히려 소소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김일경의 무리들과 단절할 것을 허락하였다가 종말에는 차례로 불식(拂拭)하고 다시 구별함이 없어 스스로 임금을 망각하고 역적을 비호하는 죄과로 돌아감을 달갑게 여겼으니, 아! 역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의 권력을 탐하고 세력을 좋아함은 더욱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류(士類)들이 이광좌를 성토할 때 송인명이 사실 협조하였으니, 그 뜻이 징토(懲討)에 엄정한 것 같으나 병용(柄用)516)  됨에 이르러서는 또한 이광좌가 하던 투식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광좌를 배척했던 까닭은 그의 흉악함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의 권력을 빼앗고자 함에서였던 것입니다. 처음에 수상(首相)과 결탁하여 탕평(蕩平)의 당(黨)이 되었을 때는 그 입은 꿀과 같고 그 마음은 칠(漆)과 같았는데, 그의 세력과 지위가 점차 핍박함에 미쳐서는 또 대관(臺官)을 모집하여 암암리에 물리쳐 축출하는 모략을 실현시켰습니다. 그의 앞으로의 형세를 살펴본다면, 만일 온나라를 저 혼자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만족하지 않을 것아니, 신은 그윽이 이를 근심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우의정 조문명이 곧바로 도성(都城)을 나가 명소를 반납했다. 승정원에서 그 사실을 계달(啓達)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 환수(還授)할 것을 명하였고, 조관빈으로 하여금 와서 대명(待命)하게 하였다.

 

10월 27일 정사

밤에 유성(流星)이 필성(畢星)의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대사헌 조관빈(趙觀彬)이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노하여 꾸짖기를,
"경(卿)의 상소 가운데 음(陰)도 아니고 양(陽)도 아니라는 말이 있으니, 오늘날 탕평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이기에 감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하니, 조관빈이 말하기를,
"탕평은 아래에서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는데 전하께서 그 술수 가운데 빠진 것입니다. 《주역》에서 양을 군자에 비유하고 음을 소인에 비유하였는데, 탕평을 주장하는 신하는 이미 군자가 되지 못하고, 소인의 심한 자에 비하면 조금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갑진년517)  ·을사년518)  으로부터 실제 탕평을 주장하였는데, 경은 어찌하여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물건에게 충성을 하기를 원하는가?"
하니, 조관빈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차마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고 또 을사년에 모여서 함께 조정에 나아간 것이 어찌 일찍이 탕평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처지로서 나랏일은 생각하지 않고 어찌 이런 괴란(乖亂)한 행동을 하는가?"
하니, 조관빈이 말하기를,
"온 세상이 머뭇거리고 감히 우상(右相)과 이판(吏判)을 논핵하는 사람이 없지만, 신은 그들의 사람됨이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말하는 것이니, 신의 나라를 위한 고심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설사 두 손으로 임금을 떠받드는 충성이 있더라도 조정을 괴란(乖亂)시키고자 하는 자는 충성이 아니다. 내가 마땅히 국문(鞫問)을 해야 할 것이나, 그 직책을 애석하게 여기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승지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의 오늘의 사기(辭氣)가 이와 같이 조용한 것은 일전에 유신(儒臣)이 나에게 함양(涵養)을 권면한 까닭이다."
하였다.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기를,
"대사헌 조관빈을 우선 체직(遞職)시키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조관빈이 처음 상소에서 이미 남몰래 품고 있는 의도를 보였었는데, 그 두 번째의 상소에 있어서는 당심(黨心)을 드러내었다. 아! 오늘날 널리 포용함은 장차 망하려는 국세(國勢)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니, 그가 비록 개인적인 복수에 급하다 하더라도 홀로 공도(公道)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의 이 일은 위에 있는 이가 주장하는 것인가 아래에 있는 자가 주장하는 것인가? 위에 있는 이가 주장하는데 아래에 있는 자에게 그것을 돌렸으니,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라는 말은 어찌 감히 부도(不道)의 죄과를 면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한 것은 더욱 무상(無狀)한 것으로서 당초에는 엄중한 심문을 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비록 형편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직책이 도헌(都憲)인지라 참작해 주는 것은 그 직책을 애석히 여기기 때문이다. 그를 대정현(大靜縣)에 귀양보내라."
하였다.

 

10월 27일 정사

사간 허옥(許沃)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굶어 죽는 사람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도둑질이 사방에서 일어나니, 이것은 바로 국가가 보존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큰 계기점입니다. 요사이 듣건대, 새로 덕음(德音)을 반포하여 기전(畿甸)과 삼남(三南)에 1만 꿰미의 돈을 나누어 주어 주진(賙賑)의 비용을 보조한다 하니, 매우 거룩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돈을 주조하는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다만 물가를 폭등시키고 미곡(米穀)을 비싸게 할 뿐인데, 이러한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린 시기를 당해서 단연코 그것을 시행하니, 신은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재용을 절약하여 더욱 진구(賑救)의 대책을 강구할 것과 성학(聖學)을 힘써서 조심하고 수신(修身)하는 방도를 다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절실하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에 나아가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講)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종성(李宗城)이, ‘조종조(祖宗朝)의 죄수를 불쌍히 여긴 덕과 검소를 숭상한 방도와 대신을 존신(尊信)한 것과 대각(臺閣)을 우용(優容)한 것 등의 본받을 만한 것’들을 부연하여 진계(陳戒)하고, 또 말하기를,
"단산 부원군(丹山府院君) 이무(李茂)는 좌명(佐命)의 공훈(功勳)으로써도 또한 옥(獄)에 잡혀 가기에 이르렀으니, 열성조(列聖朝)의 기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안옥(按獄)하는 자가 그 자식으로 그 아비를 증거하자 성조(聖祖)께서 ‘자식이 아비를 위해 숨기는 의리’로 특별히 사면하였으니, 윤상(倫常)을 부식(扶植)하신 지극한 뜻을 또한 볼 수가 있습니다. 신이 공주(公州)의 옥사(獄事)에서 아내를 가지고 남편을 증거하게 한 자에 대해서도 또한 진달하여 정법(正法)했는데, 무릇 윤상을 부식시키는 도리에 있어서 더욱 마땅히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기읍(畿邑)의 유민(流民)이 기아(飢餓)에 시달린 나머지 길에다 두 어린아이를 버리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기내(畿內)가 이와 같으니, 삼남은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모조리 죽게 될 우환이 아침 아니면 저녁에 닥쳐 있으니, 급재(給災)519)  하여 무휼(撫恤)하고 덕의를 선포하는 것이 더욱 급선무입니다. 마땅히 별달리 도신(道臣)에게 신칙(申飭)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사(有司)의 신하가 매양 조절(操切)을 가하니, 이것도 또한 나의 허물이다. 백성을 위해 곡식의 풍년을 기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또한 대신시킬 수가 없는 일인데, 《국조보감》 중의 ‘공경히 외워 복(福)을 기원하되 과궁(寡躬)을 위해 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흠탄(欽歎)을 금할 수 없다. 내년 봄에 곡식의 풍년을 기원하는 일은 마땅히 몸소 행할 것이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은 정고(呈告)하고 오랫동안 나오지 않고,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은 조관빈(趙觀彬)의 상소로 인해 도성(都城)을 나가고,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과 함은군(咸恩君) 이삼(李森)은 명(命)을 기다리니, 임금이 송인명 등에게 대명(待命)하지 말라고 명하고, 특별히 수서(手書)를 내려, ‘조관빈이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조정을 괴란시켰는데, 더구나 지금은 흉년이 들고 백성이 곤궁한 상황에서 정석(鼎席)이 모두 비어 있으니 나랏일이 끝이 없다’는 것으로써 심복(心腹)의 유지(諭旨)를 부연하여,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을 보내 홍치중에게 가서 개유하게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를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10월 28일 무오

지평 조명겸(趙明謙)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기지(李器之)에게 이미 종으로 삼거나 적몰(籍沒)할 죄가 없으니 이봉상(李鳳祥)도 또한 처벌한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하지만 망명(亡命)한 한가지 사항은 또한 전연 죄가 없지도 않으니, 청컨대 이봉상을 형률에 따라 죄를 부과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대사헌 조관빈(趙觀彬)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시키라는 분부는 실로 개탄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조관빈은 직책이 바로 헌장(憲長)이니, 일을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직무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말할 수 있는 지위에 두시고서 한 마디 말이 겨우 나오자마자 엄중한 견책을 곧바로 가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에서 대각(臺閣)을 설치한 본뜻이겠습니까? 청컨대 조관빈을 절도로 유배시키라는 분부를 환수(還收)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관빈의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라는 설은 만일 한(漢)나라 법으로 논한다면 장차 부도(不道)의 죄과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조관빈의 관작이 도헌(都憲)이 아니었다면 마땅히 곧바로 친국(親鞫)해야 할 것이다. 그 처분 또한 말감(末減)520)  에서 나온 것이니, 환수하라는 청은 호오(好惡)가 공평함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평 조상행(趙尙行)의 상소는 고(故) 상신(相臣) 조태채(趙泰采)의 죽음을 당동 벌이(黨同伐異)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고 상신의 충(忠)을 위해 죽은 것을 은연중 당동벌이로 돌렸으니, 이것은 무슨 마음인지요? 이것은 혹시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긴 하겠지만 잘못한 실수는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지평 조상행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것은 두 조씨(趙氏)가 차이가 없는데, 한 사람은 환수하기를 청하고 한 사람은 파직을 청하니, 공평한 것인 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조명겸이 인혐(引嫌)하여 물러가 대명(待命)하였다. 윤봉조(尹鳳朝)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정언 이윤신(李潤身)이 상소하여 ‘경외(京外)에 신칙(申飭)하여 굶어죽은 사람을 묻어 주고, 과조(科條)를 제정하여 채무 징수를 금지하고, 등수(等數)를 나누어서 환곡(還穀)을 정감(停減)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수령(守令)은 반드시 양사(兩司)에 일일이 하직 인사를 하여야 하는데, 진천 현감(鎭川縣監) 정희하(鄭羲河)는 신(臣)을 보지도 않고 곧바로 사폐(辭陛)하였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건(上件)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환곡에 관한 일은 이미 하교하였다. 정희하의 일은, 이런 시기에는 수령을 자주 교체하는 것이 부당하니,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옥당(玉堂) 【교리 이종성(李宗城)과 수찬 임정(任珽)이다.】 에서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망명(亡命)한 죄인 이봉상(李鳳祥)은 지은 죄가 지극히 무겁고 법이 아주 엄정한데도 전후의 대관(臺官)들이 자기들 멋대로 스스로 정계(停啓)했으니, 모두가 당(黨)을 비호하는 습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론에 배척당한 처지라면 조어(措語)와 의율(擬律)을 감히 경솔히 고치지 못하니, 바로 대의(臺議)를 존중하고 국체(國體)을 엄정히 하기 때문입니다. 윤봉조(尹鳳朝)에 이르러서는 그 죄를 받은 바가 더욱 경솔히 사면을 의논할 수가 없는데, 이번에 지평 조명겸(趙明謙)이 이미 이봉상의 율명(律名)을 고치고 또 윤봉조의 전계(前啓)를 정계하였습니다. 신 등이 본래 전석(前席)에서 논박하려고 하였으나 조용하지 못한 결함이 있는 것같아 잠자코 물러나왔지만, 결국 그대로 덮어두고 논죄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청컨대 지평 조명겸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의 생각에도 또한 미안하게 여겨서 하교(下敎)하려고 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는데, 차자로 청한 바가 옳다."
하였다.

 

대사간 이성룡(李聖龍)이 또한 상소하여 말하기를,
"조관빈(趙觀彬)에 대한 처분은 정도에 지나친 것이니, 마땅히 조속히 환수(還收)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9일 기미

전 장령 양득중(粱得中)이 시골로부터 도성(都城)에 들어와 전후에 분부를 어긴 죄를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온화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이튿날 소견(召見)하여 하교하기를,
"내가 평소에 유신(儒臣)의 질실(質實)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 올라왔으니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어서 양득중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아뢸 것을 명하니, 양득중이 말하기를,
"이번에 신이 올라올 때에 꾸짖는 친우(親友)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진사(進士) 임석헌(林錫憲) 같은 이도 또한 이름이 알려진 선비인데, 신을 꾸짖기를, ‘조정에서 비록 그대를 부른다 하더라도 산림(山林)의 선비가 마땅히 번거롭게 왕래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또한 허위의 일단(一端)입니다. 신이 벼슬을 하고 싶지 않는 자가 아닌 바에야 군부(君父)가 부르는데 어찌 감히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서원(書院)이 많아지니 군액(軍額)이 감소되고, 향교(鄕校)가 폐지되니 사습(士習)이 타락합니다.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학교의 행정(行政)을 수명(修明)하여 배양(培養)의 도리를 다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또한 질박(質樸)하다."
하고, 군함(軍銜)의 산료(散料)521)  를 지급하고 시탄(柴炭)을 보조하여 여저(旅邸)에 머물게 해서 자주 강연(講筵)에 들어오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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