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 1731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1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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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경신

임금이 친히 삭제(朔祭)를 경휘전(敬徽殿)에서 행하였다.

 

임금이 빈양문(賓陽門)에 나가 장릉(長陵)을 천장(遷葬)할 때 입은 시복(緦服)을 벗은 뒤 곡(哭)하고 사배(四拜)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분부를 받고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소견(召見)하여 두루 지극히 위석(慰釋)하니, 홍치중이 말하기를,
"조관빈(趙觀彬)의 상소에 이른바 ‘위관(委官)이 재차 문후(問候)를 하였다.’는 것은 신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신이 과연 두 번 이광좌(李光佐)를 만나보았는데, ‘후(候)’자는 마치 신이 기세(氣勢)를 승망(承望)한 사람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신도 또한 대신(大臣)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성상께서 저쪽과 이쪽을 통틀어 쓰고자 하시는 그 생각이 몹시 거룩한 것입니다. 비단 신의 소견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조문명(趙文命)·송인명(宋寅明)의 의사도 또한 신과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상소 가운데 ‘송인명이 대관(臺官)을 모집하여 신을 공격해 축출하였다.’는 것은 실상이 아니라 바로 지나치게 의심을 한 것입니다. 조문명에 이르러서는 무신년522)   전후로 김일경(金一鏡)의 당(黨)을 미워하기를 개인적인 원수와 같이 하고 또 편계(偏係)함이 없이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하였는데, 조관빈이 한마디로 단정해 말하니, 당한 사람이 어찌 불안함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도성(都城)을 나간 것은 지나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관빈이 탕평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소를 올린 것이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조관빈은 이미 벼슬을 하고자 하는 자가 아니지만 또 나라를 해치고자 하는 자도 아닙니다. 성질이 본래 편협하고 막힌데다가 또 화변(禍變)을 겪는 바람에 거의 실성한 자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언론을 조금만 너그럽게 하는 것을 보면 곧 바로 화를 내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그와 계교를 하지 않는데, 조문명도 또한 반드시 매우 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배(島配)시키라는 분부는 처분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대개 도헌(都憲)의 직책은 다른 대각(臺閣)에 비교할 바가 아니니, 어찌 살아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도헌이 아니었다면 그가 어찌 전정(殿庭)에서의 국문(鞫問)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 아비를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피차를 융통(融通)하여 오직 인재만을 등용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가 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문치(文治)로는 태평을 이루시고 무략(武略)으로 화란(禍亂)을 평정시켰으니, 만일 또 붕당을 제거한다면 더욱 어찌 뛰어나게 성덕(聖德)의 광휘(光輝)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복관(復官)되지 않은 두 신하의 일을 주달한 바가 있는데, 이것은 아호(阿好)해서가 아니라 의리(義理)가 본디 그런 것입니다. 이제 시상(時象)을 바로잡아 고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와 같이 한 후에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무신년 무렵에 만일 두 신하의 복관을 허락하였다면 거의 난만하게 동귀(同歸)하였을 터인데, 기회를 상실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523)  ·임인년524)   이후의 사람들은 그 기세(氣勢)가 바야흐로 꺾여 있고, 갑진년525)  ·을사년526)   이후의 사람들은 그 기세가 본래 왕성하다. 꺾여 있는 자들은 내가 그들이 능히 나랏일을 해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고, 왕성한 자들은 내가 항상 억제하여 지나침이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또 갑진년·을사년 이후에는 한 사람이 희다고 말하면 모두가 희다고 말하고 한 사람이 검다고 말하면 모두가 검다고 말하였는데, 가령 사우(祠宇)를 세우는 일 같은 것은 결국 잘못이었다. 두 신하의 일은 다른 사람은 혹시 말할 수 있지만 조관빈은 감히 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한 사람이 말을 꺼내면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모두 같다고 하는 것은 또한 의논하지 않고서 의견이 서로 통하는 것이니, 대개 마음은 다른데도 말로만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옛 성인(聖人)은 반드시 인심을 순응시켰으니, 인심을 순응시키면 이치에 위배됨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2일 신유

우박이 쏟아졌는데, 모양이 팥알 같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사과(司果) 양득중(粱得中)이 또한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어떤 사람에게 수학(受學)했느냐고 물으니, 양득중이 말하기를,
"윤증(尹拯)에게 배웠습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학문은 오로지 허위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속(世俗)을 살펴보건대, 허위가 아닌 사람이 없으므로, 신도 또한 허위의 사람입니다. 이번에 부름을 받고 온 것은 실은 걸해(乞骸)527)  하여 떠나가고자 한 것이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허위의 사람들을 엄중히 배척하고 진실의 공부에 성의를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은 세상을 개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조의(朝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박한 태도가 있는 것이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지난번에 이종성(李宗城)이, 시골 구석의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라 하여 유자(儒者)를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경계하였는데, 이미 올라왔다가 이제 갑자기 걸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양득중이 말하기를,
"신이 세상 물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올라왔습니다. 만일 알았으면 애당초에 반드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양득중이 이어서 녹봉과 시탄을 하사한 것을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소대(召對)의 분부가 있음을 듣고, ‘임금이 부르면 탈 것이 준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달려나간다.’는 의리로써 바삐 달려 왔는데, 말이 능히 잘 걷지 못하자 승정원에 또 재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을 대우하기를 마치 각사(各司)의 민원을 대우하는 것과 같이 한다면 산림(山林)에 거처하는 자가 누가 올라오기를 즐겨하겠는가? 이것은 승정원에서 잘못한 것이다."
하였다. 승지 서명연(徐命淵)이 말하기를,
"그 말은 비록 박야(樸野)하지만 더욱 치의(緇衣)528)  에 대한 성의를 돈독히 하여 권여(權輿)529)  의 탄식이 없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서명연이 또 말하기를,
"전 좌의정 이집(李㙫)이 그 친상(親喪)의 발인(發靷) 행차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고(故) 상신(相臣) 노수신(盧守愼)이 친상을 당하여 발인의 행차를 따라 갔을 때는 성조(聖祖)께서 특별히 어의(御醫)를 보내 호송(護送)하셨으니, 여기서 대신(大臣)을 존경하는 의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미처 모를 뻔했다."
하고, 이어서 어의에게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호송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또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에게 수서(手書)를 내렸는데, 사지(辭旨)가 간곡하고 진지하였다. 도승지를 보내 그와 함께 오도록 하였다. 조문명이 누차 돈유(敦諭)를 받고 또 칙사(勅使)의 행차가 점차 박두해 옴으로 인해 드디어 상소해 비답을 받고 나와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걸맞지 않는 자리를 탐하여 보탬이 되는 바가 없었습니다. 나라를 보좌하는 효과는 거두지 못한 채 나라를 그르쳤다는 이름을 얻고 나라를 저버렸다는 의혹을 샀으니, 신의 죄는 죽어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관빈(趙觀彬)은 다만 탕평(蕩平)이 이미 성취되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경(卿)을 축출해서 나로 하여금 함께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없게 하고자 하였으니, 그 계획이 오활(汚濶)하다 하겠다. 내가 갑진년530)  부터 이미 경 등의 마음을 살피고 드디어 이러한 조정을 화합시키는 조처를 하였으니, 조관빈의 말과 같은 것은 족히 개의할 것이 없다."
하였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신은 조관빈이 성품이 좁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가 질병이 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신(大臣)이 도헌(都憲)의 배척을 듣고 편안히 있는다는 것이 어찌 도리이겠습니까? 조관빈이 신을 논핵한 까닭은 모두 의사(疑似)를 갖는 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모자 밑의 적(賊)’이라는 말과 ‘선류(善類)를 인진(引進)한다.’는 말은 신이 혹시 다른 사람에게 수작한 것이 있으며, 국청(鞫廳)의 수창(酬唱)에 이르러서는 전배(前輩)들도 또한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사환한 것이 점차 승진하지 않고 명위(名位)가 너무 빨리 진취되니, 이는 신이 밤낮으로 두려워하는 바로서 조관빈의 이 논핵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혈성(血誠)이 있어서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注意)하는 바는 사심(私心)에 연유된 것이 아니다. 조관빈의 이성을 잃어버린 말은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옛적에 문언박(文彦博)531)  은 당개(唐介)532)  를 소환(召還)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지금 조관빈은 다만 신 만을 논핵하였을 뿐이 아니며, 또 성상의 처분을 생각할 때 바로 세도(世道)를 위해서 깊이 염려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문억박과 같은 청을 할 수는 없으나, 절도(絶島)로 유배(流配)시킨 것은 끝내 정도에 지나친 것 같으니, 신의 마음이 더욱 편안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분을 이와 같이 한 것은 다만 경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니, 어찌 머나먼 바다로 추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언 이윤신(李潤身)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관빈(趙觀彬)이 별안간 간사한 꾀를 내서 교활한 혀를 내둘러 끔찍한 칼날과 독한 화살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미쳤습니다. 악역(惡逆)의 죄안(罪案)을 구성하여 위협할 계획을 세워서 반드시 화해를 주장하는 자로 하여금 좌우로 눈치보며 스스로 몸을 둘 수가 없도록 하려고 하였는데, 대사간 이성룡(李聖龍)과 지평 조명겸(趙明謙)이 서둘러 영호(營護)하여 당비(黨比)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삭탈 관직(削奪官職)시켜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명겸은 이미 파직시켰고 이성룡은 비록 그런 잔재가 있기는 하지만 굳이 깊이 책망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11월 3일 임술

함은군(咸恩君) 이삼(李森)이 조관빈(趙觀彬)의 상소로 인해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관빈이 신을 무함한 것에는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신년533)                   적(賊)의 공초(供招) 가운데 무고(誣告)한 일이고, 둘째는 나필웅(羅必雄)의 변란이 반드시 신이 다시 친병(親兵)을 관장하는 시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며, 셋째는 신겸제(申兼濟)가 경조(京兆)의 세 당상(堂上)을 논파(論罷)한 일입니다. 신에게 서조카 세 사람이 과연 있는데, 그 당시에 신이 과연 사실을 들어서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고 기주관(記注官)이 곁에 있었으니, 감히 속일 수 없는 일입니다. 나필웅의 일은 신이 이미 박도창(朴道昌)을 붙잡아 이어서 여러 역적을 조사해 밝혀냈고, 박도창이 형을 받기 전에 죽은 뒤에 이르러서는 또 그 의심스러운 자인 송지락(宋之洛)을 붙잡아 정사효(鄭思孝)·정도륭(鄭道隆) 등 여러 적(賊)과 순정(順貞)·옥정(玉貞)의 간사한 꾀가 이로 인해 모두 탄로가 나게 했으니, 신이 그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무함을 받는다는 것은 신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신겸제는 신이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 적(賊)의 시신으로 잘 검험(檢驗)하지 못했다 하여 경조의 당상을 논파(論罷)하였으니, 신의 몸과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 당시에 훈련 대장(訓鍊大將)의 낙점(落點)을 받은 것은 특교(特敎)의 처분에서 나온 것인데, 그가 은연중에 현재 장권(將權)을 변환(變幻)시킨 단서로 돌리니, 이것이 어찌 마음에 생각하고 입에 발설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신은 실로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경(卿)의 마음을 안 것이 오래이니, 의심하였다면 임용하지 않았을 것이며 임용한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참설(讒說)이 어찌 감히 오늘에 실현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하원(李夏源)을 대사헌으로, 김약로(金若魯)를 지평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응교로, 양평군(陽平君) 이장(李檣)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이춘제(李春躋)를 부사(副使)로, 윤득화(尹得和)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11월 4일 계해

북사(北使)534)   대리시 소경(大理寺少卿) 파덕보(巴德保) 등이 장차 입경(入京)하려 하자 임금이 포과 익선관(布裹翼善冠)·오서대(烏犀帶)·백포(白袍)를 착용하고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막차(幕次)에 들어가 참포(黲袍)·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로 바꾸어 착용했다. 백관(百官)들은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부고(訃告)를 전달하는 칙사(勅使)를 영접했는데, 먼저 돈의문(敦義門)으로부터 환궁(還宮)하여 명정전(明政殿) 뜰의 막차로 들어갔으며, 북사가 당도하자 임금이 전(殿)에 올라 부고를 받았다. 그 글에는 ‘황후(皇后) 나랍씨(那拉氏)가 9월 29일에 붕서(崩逝)하였다.’라고 쓰여 있었다. 임금이 장차 북사를 접견하려 할 적에 거애(擧哀)하는 것의 합당한가 아니한가를 응교 이종성(李宗城)에게 묻기를,
"충신(忠信)은 만맥(蠻貊)에서도 행할 수가 있는 것인데, 나는 곡(哭)하지 않으면서 다만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조애(助哀)535)  하게 한다는 것은 성의가 결여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국가가 소국(小國)으로써 대국(大國)을 섬기매 모든 일에 폄굴(貶屈)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어찌 유독 절목(節目) 사이의 일에 있어서 의문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오랑캐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반드시 성신(誠信)으로써 감동시키고자 하시니, 성인(聖人)도 또한 권도(權道)를 쓸 때가 있습니다. 거애하는 것도 또한 성인의 일시적인 권도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옳게 여겼다. 곡(哭)하고 사배(四拜)를 행한 뒤 칙사에게 예를 갖추어 읍(揖)하고, 전(殿)으로 올라오게 하였다. 연회는 베풀지 않고 다만 다례(茶禮)만 행한 뒤 조금 있다가 파하였다. 그 이튿날 갑자일(甲子日)에 임금이 남관(南館)에 거둥하여 북사를 접견하였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말하기를,
"칙사가 삼전도(三田渡)의 비각(碑閣)을 가서 보고 모레쯤 마땅히 회정(回程)할 것입니다. 전례에 근시(近侍)·대신(大臣)·중사(中使)가 차례로 머물기를 청한 일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례와 같이 할 것을 명하였다.

 

11월 6일 을축

우박이 쏟아졌는데, 모양이 팥알 같았다.

 

11월 6일 을축

송성명(宋成明)을 반송사(伴送使)로, 윤광운(尹光運)을 헌납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정언으로, 심성희(沈聖希)를 부교리로, 황정(黃晸)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7일 병인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사은 겸 동지 정사(謝恩兼冬至正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과 부사(副使)        조상경(趙尙絅)과 서장관(書狀官)        이일제(李日躋)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여 하교하기를,
"본조(本朝)의 《열전(列傳)》을 간출(刊出)하여 먼저 반포하는 일을 마땅히 청을 할 것인가 않을 것인가?"
하니, 탱 등이 말하기를,
"자문(咨文)을 가지고 갔다가 마땅히 기회를 보아서 올려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진주(眞珠)·명마(名馬)를, 전사(前使)가 상명(尙明)에게 준다고 약속한 것을 곧바로 주어서 만맥(蠻貊)에게 신의를 잃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일제가 돌아올 때 짐바리가 지나치게 많은 폐단을 진달하여, 조령(朝令)에 따라 평안 도사(平安都事)로 하여금 짐바리를 맞이할 사람들을 이끌고 책문(柵門)에 들어오게 해서 그 간교한 폐단을 방지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서 납제(臘劑)536)                  와 초모(貂帽)를 하사하고 위유(慰諭)하여 보냈다. 사신(使臣)이 가지고 간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朝鮮國王)은 간박(懇迫)한 정리(情理)를 감히 아뢰어 긍민(矜愍)을 베풀기를 바랍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지난 옹정(雍正) 4년(1726) 2월에 당직(當職)537)                  이 감히 외사(外史)에 기록된 바, 선조(先祖) 장목왕(莊穆王)538)                  의 무함을 입은 사장(事狀)을 가지고 사유를 갖추어 진주(陳奏)하여 정사(正史) 중에 이 한 단원을 개정해 주기를 요구하였는데, 이에 황상(皇上)의 지극히 인자한 은덕을 입어 조속히 소설(昭雪)을 명하시고 이어서 선시(宣示)를 허락하셨습니다. 당직은 이 허락을 얻은 이래로부터 온 나라의 신민(臣民)과 함께 기쁨과 경사스러움이 지극한 나머지 오직 낮과 밤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성은(聖恩)을 축복하였습니다. 이미 황은(皇恩)을 멀리 입은 것에 감사하였으나 또 성서(成書)를 빨리 보게 되기를 크게 기다리며 하루이틀 마음 조이며 안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印刊)이 완료되어 반강(頒降)하는 것이 곧 조만간의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다만 눈으로 보지 못하여 감히 선령(先靈)에게 경사를 고할 수 없으니, 명명(冥冥)한 가운데 원한을 안고서 오히려 상협(箱篋)을 이미 깨끗이 씻고 천도(泉塗)539)                  의 개조(改照)540)                  한 것이 이와 같은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당직의 슬픈 마음이 하늘까지 사무쳐 잠시도 살아 있을 수 없는 것 같고, 그 기망(跂望)의 간절한 바는 은지(恩旨)를 얻기 이전보다도 심함이 있는 까닭입니다. 지난번에 본국(本國)의 《열전(列傳)》을 먼저 간행하여 먼저 반포하자는 뜻으로 지레 먼저 번거롭게 자문(咨文)을 올려 그것이 외설(猥屑)의 결과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도 가책을 느끼며 송구스런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감히 다시 더럽힐 수 없기에 묵묵히 기다려 온 지가 이제 이미 6,7년이란 오랜 세월이 되었습니다. 항상 이 구구한 것을 안고서 선조(先祖)에게 돌아가 아뢸 대책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조(聖祖) 인황제(仁皇帝)께서는 소방(小邦)에 대해 내복(內服)541)                  과 똑같이 보시어 무릇 고하여 하소연하는 것이 있으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황상(皇上)에 이르러서는 그 은혜로 돌보시는 바가 한결같이 선조(先朝)와 같되 더함이 있으니 당직의 괴롭고 절실한 심정이 있는 것을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머뭇거린다는 것은 또한 인복(仁覆) 아래에 서로 막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반복해 생각하던 나머지 두렵고 의심스러워 감히 주광(黈纊)542)                   앞에 직접 아뢰지는 못하고 감히 부당(部堂)의 제대인(諸大人)에게 사사로이 피력하나이다. 함부로 번거롭게 한 죄 더욱 면할 바 없을 줄 깊이 알지만 다만 원한이 맺힌 망극한 심정으로 인하여 한 시각이 시급한 염원이 있기에 홀홀(忽忽) 망망(惘惘)히 오직 빨리 성전(盛典)을 보지 못하는 것을 지극한 유감으로 여기나이다. 혹시 귀부(貴部)에서 전후의 진실된 정성과 애처로운 청을 특별히 가련히 여기시어 황제께 진달해서 내리신 은덕이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다면, 어찌 유독 당직만이 그 은혜를 뼈에 새길 뿐이겠습니까? 곧 동토(東土)의 백성들이 모두 장차 운수(隕首)543)                  ·결초(結草)544)                  하여 보답하기를 생각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당직은 간절히 기축(祈祝)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지어 올렸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관소(館所)에 가서 먼저 어첩(御貼)을 올려 청사(淸使)에게 머물기를 청하고 또 다례(茶禮)를 행하기를 청하니, 칙사(勅使)가 답하기를,
"우리들은 부고(訃告)를 전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다례는 연례(宴禮)나 다름이 없습니다. 어제는 국왕(國王)의 청이므로 감히 사양하지 못했지만, 오늘 배신(陪臣)의 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감히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반드시 정면(停免)하고자 하였다. 조문명이 준례에 따라 상(床)을 배분(排分)하여 들여갈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가림 부부인(嘉林府夫人)의 발인(發靷) 장례(葬禮) 때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내별당(內別堂)에서 거애(擧哀)하였으니, 이것이 예(禮)이다.

 

임금이 천둥의 재이(災異) 때문에 감선(減膳)의 하교를 내려, 자신을 꾸짖고 협조를 구하는 뜻으로 효유(曉諭)하였다. 이어서 공경(公卿)과 백집사(百執事)에게 근신하고 화합할 것을 명하고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여러 도(道)의 장문(狀聞)의 민사(民事)를 구휼한 것을 복주(覆奏)하여 인애(仁愛)로 권고(眷顧)하는 뜻에 답하게 하였다.

 

11월 8일 정묘

응교 이종성(李宗城)·교리 조적명(趙迪命)·부교리 이종백(李宗白)·수찬 임정(任珽)·부수찬 황정(黃晸) 등이 천둥의 재이(災異) 때문에 청대(請對)해 입시(入侍)하였다. 이종성 등이 각각 진면(陳勉)한 바가 있었는데, 요지는 모두 ‘군주(君主)의 한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본이 되니, 반드시 정대하고 공평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종성이 또 말하기를,
"신이 진달하려고 하는 바가 두 가지 일이 있는데, 지난번에 사묘(私墓)에 거둥하였을 때, 김진성(金振聲)을 제직(除職)하라는 분부와 이번의 천릉(遷陵) 상전(賞典) 가운데 영역 부장(領役部將)의 노력은 똑같이 했는데 상전을 달리한 것입니다. 하나는 사묘의 주인이고, 하나는 나인(內人)의 친속(親屬)입니다. 여항에 이따금 몰래 의논하는 자가 있지만 여러 신하들이 또한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전하께서 도량이 협소하시기 때문에 능히 간언(諫言)을 용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그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병통이 도량이 좁은 데 있다는 것은 나도 또한 스스로 알고 있다. 이번에 천릉의 역사를 치르고난 이후에 상전의 높낮이를 정한 것은 내가 스스로 짐작해 헤아림이 있었던 것이며, 또한 사사로운 뜻으로 가볍게 하고 무겁게 한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신(儒臣)이 면계(勉戒)한 것이 옳다. 다만 전적으로 창자 속에 가득한 사사로운 마음으로 돌린다면 나의 본뜻이 아니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신이 만일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진달하지 않는다면 임금에게 숨김이 없는 의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창자 속에 가득한 사사로운 뜻’이라는 하교는 비록 겸손하신 말씀에서 나온 것이지만, 순연(純然)히 천리(天理)가 된다는 것도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더욱더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임정이 말하기를,
"임금이 명철하면 신하가 정직하게 되는 것이니, 이종성의 말을 마땅히 우악하게 용납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의 군주가 ‘모름지기 이 전사옹(田舍翁)545)  을 죽여야겠다.’는 말을 한 이가 있었다. 내가 만일 매우 싫어하였다면 마땅히 미안하다는 하교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황정이 말하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지덕(知德)이 가장 뛰어났다고 여기지 마시고 또한 일세에 너무 뛰어나려고 하지 마시어 간언(諫言)을 용납하는 도리에 더 성의를 기울이신다면, 하늘의 재앙을 소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임금이 기호(畿湖)의 진정(賑政)이 바야흐로 시급하다 하여 별도로 어사(御史)를 보내고자 하여, 이종성(李宗城)을 경기(京畿)에 보내고, 황정(黃晸)을 호서(湖西)에 보낼 것을 명하였다. 조적명(趙迪命)이 말하기를,
"이종성은 다만 문학(文學)뿐만 아니라 또 나라를 위한 정성이 있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어느 곳에서 얻어 올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마땅히 경악(經幄)에 두어야 하며, 어찌 매양 외방의 사신으로 번거롭게 보내는 데 이를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일이 비록 급하다고 하지만 수의(繡衣)546)  의 분부가 마침 논사(論事)하던 나머지에 나왔으니, 신은 실로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있었던 말로 인해서 외방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어서 별유(別諭)를 내려 기민(飢民)에게 선포(宣布)하니, 우상(憂傷)하는 뜻이 사표(辭表)에 넘쳤다. 재촉해 사조(辭朝)토록 하니, 이종성 등이 드디어 이날로 즉시 출발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관빈(趙觀彬)의 도배(島配)를 환수(還收)하라는 일과 조상행(趙尙行)을 파직시키라는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승정원에서 천둥의 재이(災異) 때문에 또한 진계(陳啓)하였다.

 

부안 현감(扶安縣監) 조명택(趙明澤), 김제 군수(金堤郡守) 이정(李淨), 정읍 현감(井邑縣監) 조종유(趙宗裕), 만경 현감(萬頃縣監) 심약로(沈若魯) 등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남쪽 지방의 참혹하게 흉년이 든 상황과 곤궁한 백성들의 황급한 형세와 재결(災結)547)  을 백징(白徵)548)  하고 원통함을 장황하게 진달하고 정협(鄭俠)549)  이 유민(流民)의 참상(慘狀)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던 뜻으로써 증휼(拯恤)의 은혜를 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리고, 심지어는 ‘이제 그대들의 상소를 보니, 마치 아픔이 나에게 있는 듯하다.’는 것으로 하교하기까지 하였다.

 

후일 강연(講筵)에서 임금이 말하기를,
"한 도(道)의 일은 이미 도신(道臣)에게 위임하였으니 재황(災荒)의 상황은 도신이 마땅히 봉계(封啓)하여야 할 것이며, 다시 어찌 수령(守令)의 진소(陳疏)로까지 번거롭게 할 것이 있겠는가? 도신이 스스로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또 수령을 시켜서 상문(上聞)한다면 그 백성들이 반드시 따라 움직이면서 모두 말하기를 ‘도신과 수령들은 자기들을 사랑하는데 조정에서는 구휼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이어서 원망을 돌린다면 흉황(凶荒)은 오히려 여사(餘事)가 되고 민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가 될 것이다. 내가 일찍이 도신을 역임한 바 있는 이광덕(李匡德)으로 하여금 가서 조가(朝家)의 덕의(德義)를 하유(下諭)케 하고자 한다."
하니, 교리 조적명(趙迪命)이 말하기를,
"이광덕의 사람됨은 곧바로 생사(生死)를 내던져두고 한 마음으로 순국(殉國)하고자 하니 이것이 그의 장점이고, 매사를 반드시 자기의 의사대로 모두 실행하고자 하니 이것이 그의 단점입니다.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또한 명철한 군주가 사람을 쓰는 방도입니다."
하였다. 수찬 임정(任珽)은 말하기를,
"조금 전에 도신에 대한 하교는 마치 이수항(李壽沆)을 외읍(外邑)에 사신보내자 진소(陳疏)하여 공동(恐動)한 것 같은 점이 있으니, ‘성인(聖人)은 남이 자기를 속일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지 않는다.’는 의리에 혐의스러움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매우 좋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양득중(粱得中)이 진소(陳疏)하여 향리(鄕里)로 돌아갈 것을 고(告)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부수찬 김상석(金相奭)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관빈(趙觀彬)을 절도(絶島)로 유배(流配)시키라는 분부를 신은 삼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징토(懲討)의 의리는 이미 쓸모없는 것이 되었고 탕평(蕩平)의 배척은 바로 시휘(時諱)가 되었는데, 조관빈이 고(古) 상신(相臣)의 아들로 홀로 다른 사람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머나먼 바다로 추방하여 거의 흉당(凶黨)이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것처럼 하시니, 신은 실로 통탄스럽게 생각합니다. 신은 조관빈과 본래 혐원(嫌怨)이 있으니 그를 돌보아 애석하게 여김이 있는 것이 아니며, 바로 성조(聖朝)의 지나친 조처를 애석히 여기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지헌(持憲)과 간장(諫長)이 혹은 계(啓)를 올리고 혹은 소(疏)를 올린 것은 말은 비록 초초하였지만 또한 그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대각(臺閣)에 있는 자가 삭탈 관직(削奪官職)을 청하기까지 하여 주상의 뜻에 영합하였으니, 마땅히 견책(譴責)을 가하여 대각(臺閣)의 기풍(氣風)을 격려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감히 구습(舊習)을 실현시키려 하니, 매우 미안한 일이다."
하였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아뢰기를,
"칙사(勅使)의 예단(禮單)과 청구한 것은 준례에 따라 입급(入給)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면주(綿紬) 각종은 청컨대 절은(折銀)550)  으로 대체하여 짐짓 상역(象譯)551)  으로 하여금 이치에 의거하여 방색(防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11월 9일 무진

북사(北使)가 장차 회정(回程)하려 하자 임금이 친히 교관(郊館)에서 전송하였는데, 반행(班行)이 시끄럽고 요란하여 정돈되지 않았다 하여 병조의 금훤랑(禁喧郞) 한봉조(韓鳳朝)를 잡아들여 와서 곤장을 칠 것을 명하였다. 또 병조의 교련관(敎鍊官)을 잡아들여 친히 곤장을 때리며, 심지어 ‘사대부는 두려워하고 군부(君父)는 업신여긴다.’는 말까지 하여 엄중한 하교가 화평을 잃은 것이 많이 있었다. 교리 이종백(李宗白)과 수찬 임정(任珽) 등이 시신(侍臣)으로써 어가(御駕)를 따르다가 나아가 말하기를,
"병조의 낭관(郞官)이 소란을 단속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죄가 있으나, 곤장을 친 것은 지나친 일입니다. 교련관에 이르러서는 군문(軍門)의 미천한 장교(將校)에 지나지 않으니, 진실로 그 죄가 있다면 군문(軍門)에 맡겨서 다스리면 족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미천한 장교를 징치하기 위해 어가(御駕)가 오랫동안 교차(郊次)에 머무르게 되니, 신은 나라의 체모를 손상함이 많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다만 사대부가 있는 것만 알고 군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죄를 다스리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11월 10일 기사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이종백(李宗白)이 말하기를,
"어제 교차(郊次)에서 한 명의 미천한 장교가 죄가 있음으로 인해 노여움이 진첩(震疊)하고 사령(辭令)이 중도에 지나쳤으니, 보고 듣는 이마다 해괴하게 여기고 의혹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 일은 비록 이미 지나갔지만, 다만 바라건대, 과오를 두 번 다시 범하지 않는 도리에 더 유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임금이 타는 말의 나이를 헤아려 보아도 죄가 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타는 말도 또한 그러한데 하물며 임금에게 불경(不敬)하는 것이겠는가? 진 시황(秦始皇)이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제한 것은 폐단이 없지 않지만 또한 주(周)나라 말기(末期)의 쇠약한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이종성의 말은 이미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니, 어찌 이것으로 노여움을 옳길 수가 있겠는가? 다만 여러 신하들이 사사로이 군상(君上)의 득실을 논평한다면 그 끼쳐질 폐단이 반드시 윗사람을 비방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의리(義理)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명색이 사대부라 하면 명절(名節)로써 서로 숭상하여 반드시 할말을 다하여 숨기지 않는 것을 임금을 섬기는 도리로 삼는데, 일이 궁위(宮闈)에 관계되면 감히 질정(質正)해 말하지 못하고 또한 그 분수에 지나칠까 두려워합니다. 이종성이 생각한 바를 숨기지 않은 것은 가상한 일인데 성상의 하교가 이를 군하(群下)가 사사로이 군상의 득실을 논평한 것으로 돌리시니, 충지(忠智)한 선비가 어찌 해체(解體)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신(重臣)의 말이 진실로 좋으나, 우리 나라 사람이 명예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 것이다. 이종성은 오랫동안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항상 나로 하여금 감오(感悟)하는 바가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과연 그의 말을 듣기를 즐겨하였으며 기탄(忌憚)하는 바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옛적에 효종(孝宗)께서 김홍욱(金弘郁)의 일로 인하여 사기(辭氣)가 자못 과격하게 되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이 진계(陳戒)하니, 성조(聖祖)께서 기뻐하고 그대로 따랐다.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는 일찍이 성색(聲色)으로써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더러는 느슨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근래에는 마음이 오랫동안 상하여 있었던 까닭에 간혹 참으려고 해도 되지 않는 병통이 있으니, 이다음에는 마땅히 더 유의하겠노라."
하였다. 임금이 곡례편(曲禮篇)의 문의(文義)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사가(私家)에서도 제기(祭器)를 만드는 것은 우선으로 하는데, 지금 듣건대, 각처(各處)에 제기가 구비되지 않아서 서로 취용(取用)한다고 한다. 악독(岳瀆)의 제사에 산천(山川)의 제기를 빌려 쓰는 것은 매우 불결하며 또한 신을 공경으로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그것을 해조(該曹)에 신칙(申飭)하여 산천과 악독의 제기를 뒤섞여 어지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사헌부 【지평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흉년이 든 해에는 재생청(裁省廳)을 설치하여 궁성(宮省)의 용도를 절감하고 제사(諸司)의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는 것이 바로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입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에 문의하여 조속히 재생청을 설치해서,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 방도를 의논하소서. 훈련 정(訓鍊正) 유경장(柳經章)은 늦게 배반(陪班)에 당도하여 심지어는 대감(臺監)이 정과(呈課)한 일까지 있었으니, 청컨대 그 직(職)을 삭탈(削奪)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재생(裁省)은 하필 청(廳)을 설치하여 한갓 원망만 초래할 필요가 있겠는가? 검약은 마땅히 내몸으로부터 시작하고 절손(節損)은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유경장은 그 직을 삭탈하는 것은 지나치니, 무겁게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정세(情勢)를 들어 정고(呈告)하니, 임금이 ‘하늘의 재앙이 있고 백성이 우환에 차 있으니 대신(大臣)이 사직(辭職)할 시기가 아니라.’ 하여 도승지를 보내 가서 개유(開諭)하게 하고 그와 함께 오도록 하였다.

 

11월 11일 경오

임금이 감한(感寒)의 증후가 있으므로 약원(藥院)에서 들어가 진찰하였다. 제조(提調)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조관빈(趙觀彬)의 상소는 대개 탕평(蕩平)을 공격한 것인데, 이른바 ‘탕평’이란 것이 비록 홍범(洪範)의 본래 뜻은 아니지만, 또한 피차를 혼륜(混圇)시키고 흑백을 구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 있어 벼슬하지 않는 자가 유독 조관빈뿐만이 아니니, 그의 상소가 비록 적합하지 않음이 있더라도 해도(海島)로 찬축(竄逐)하는 것은 어찌 더욱 정도에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른 사람을 들어 쓰고 바르지 않은 사람을 내버리는 뜻이다. 오늘날의 의리(義理)는 인협(寅協)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경도 또한 여기에 더 유의하고 옛마음은 잊어버리라."
하였다.

 

이덕수(李德壽)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1월 12일 신미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예기(禮記)》를 강(講)하다가 국군 사사직장(國君死社稷章)에 이르러 특진관(特進官) 이정제(李廷濟)가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으로 사직(社稷)을 위해 죽은 이가 한(漢)·당(唐) 이후로 있지 않았는데, 유독 명(明)나라의 숭정 황제(崇禎皇帝)552)  만이 그것을 이행하였습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숭정 황제가 일찍이 하교하기를, ‘나는 망국(亡國)의 군주가 아닌데 여러 신하들은 바로 망국의 신하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열(嗚咽)하였다. 명나라가 멸망한 것도 또한 당론(黨論)에 연유된 것이니, 이 점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명나라 말기에 소인(小人)이 진출하고 군자(君子)는 물러갔지만,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이쪽에도 이미 군자와 소인이 있고 저쪽편에도 또한 군자와 소인이 있으니, 분변하기도 어렵고 타파시키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숭정 황제가 만일 태평 성세를 만났더라면 족히 수성(守成)하는 군주(君主)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원숭환(袁崇煥)553)  과 같은 무리를 끝까지 신임하지 못하여 결국은 이로 인해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군신(君臣)·상하(上下)가 비록 숭정 황제가 당(黨) 때문에 나라를 멸망한 것을 알고는 있지만 또한 반드시 다시 그 전철(前轍)을 밟게 될 것이다. 군자와 소인은 본디 논할 것이 없고 붕당(朋黨)이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전감(前鑑)이 멀지 않으니, 어찌 서로 면려(勉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무재(武宰)가 초헌(軺軒)을 타는 것과 병곤(兵閫)이 교자(轎子)를 타는 것을 금할 것을 명하였으니, 검토관(檢討官) 임정(任珽)의 말을 따른 것이다.

 

11월 13일 임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장령 권상일(權相一)이 영남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성학(聖學)과 시무(時務)를 논하였다. 그가 성학을 논한 것에 이르기를,
"마음이 발동하지 아니하였을 때는 계구(戒懼)로써 먼저 하고 장차 마음이 발동하려 할 때는 성찰을 계속하며, 경연(經筵)에 나아가면 천인(天人)·성명(性命)의 근원을 강구하고 만기(萬機)에 대응하면 의리(義理)·공사(公私)의 분간에 살펴 처리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감사(監司)를 잘 골라서 수령(守令)을 단속하고, 장관(長官)을 잘 선택해서 여러 관료들을 관찰하고, 서원(書院) 세우는 것을 금지해서 사습(士習)을 변화시키고 주사(主司)를 잘 선택해서 과거 규정을 혁신하고, 도학(道學)을 장려해서 교화(敎化)를 베풀고, 대신(大臣)을 예우해서 체통을 높이고, 대각(臺閣)을 존중해서 언로를 열어야 하는데, 그 근본은 성상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몸과 가정에 근본하여 닦고 또 닦으며 다스리고 또 다스려서 적루(積累)·훈증(薰蒸)의 교화(敎化)로 하여금 중외(中外)에 흘러 넘치게 하며, 이어서 조종(祖宗)의 법도를 시행하여 더욱 노력하여 해이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말은 매우 절실하여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원소(原疏)를 유중(留中)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국조보감(國朝寶鑑)》를 강(講)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옛날 성조(聖祖)의 시대에는 향례 집사(享禮執事)가 각각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는데, 지금은 강신(降神)한 이후로부터 다만 보잘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부터 이미 정성을 드리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 이것이 비록 내가 박덕(薄德)하여 성조에 미치지 못함이 아주 멀어서 그런 것이지만, 또한 여러 신하들을 위해서도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니, 그것을 특별히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종옥(徐宗玉)을 대사간으로, 정희보(鄭熙普)를 지평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으로, 윤휘정(尹彙貞)을 부수찬으로, 이정제(李廷濟)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11월 14일 계유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기신(忌辰)이 이미 임박하여 장차 전향(傳香)을 하려 함에 있어 하교하기를,
"3년이 어느새 지나가 기일(忌日)이 처음 닥치고 보니, 슬픈 감회를 억제하기가 어렵다."
하고, 이어서 친히 지은 제문(祭文)을 내려 도승지로 하여금 가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11월 15일 갑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17일 병자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안흥(安興)을 살펴보고 돌아오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선박이 파손되는 폐단은 늦게 출발한 데서 연유한 것이며 물길이 불편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서 소매 속에서 지도(地圖)를 꺼내어 낱낱이 가리켜 진달하기를 매우 상세히 하며 말하기를,
"연사(年事)가 여러 해 풍년이 들어 배에서 얻어지는 이익은 매우 적기 때문에 취재(臭載)가 여기에 연유된 것입니다. 명년 봄에는 필시 이런 걱정이 없을 것이니, 새로운 법을 만들지 말고 종전대로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관방(關防)의 중요한 곳을 경솔히 관통하고 막아서 물길을 병들게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소금을 굽는 폐해가 반드시 금송(禁松)에 미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호서(湖西)의 민간의 일에 대해 물으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금년에 큰 흉년이 들어서 열 집에 아홉 집은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신이 호서에 장곡(庄穀)이 있기 때문에 1백 곡(斛)의 곡식을 출연(出捐)하여 공주(公州)에 주어 진자(賑資)를 돕도록 해서 호서 사대부들의 창도(倡導)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조정에서 지휘한 바는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있다가 하교하기를,
"경은 주사(籌司)554)  에 가서 대신(大臣)들과 진구(賑救)할 방책을 상의하라."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의 말은 묘당(廟堂)에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도 경의 말을 능히 용납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경우이겠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관서(關西)와 해서(海西)의 영곤(營閫)에 저축된 돈 3만 8천 꿰미와 면포(綿布) 1천 4백 동(同)을 삼남(三南)에 이송(移送)하여 곡식을 무역(貿易)하여 진자(賑資)에 대비(對備)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가 뒤에 마침내 그 말을 따랐다.

 

이춘제(李春躋)와 김상규(金尙奎)를 승지로, 이삼(李森)을 공조 판서로, 송성명(宋成明)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윤용(尹容)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경기 별견 어사(京畿別遣御史) 이종성(李宗城)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소견(召見)하여 민간의 일과 수령의 진제(賑濟)의 잘하고 잘못함을 물으니, 이종성이 매우 상세하게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굶주린 백성들이 이따금 도둑질을 하고 진위(振威)의 사이에서는 표략(剽掠)이 서로 잇달아 일어나서 사대부로서 창상(創傷)을 입은 자가 두 사람이나 됩니다. 마땅히 실질적인 혜택을 펼쳐서 용사(龍蛇)로 하여금 적자(赤子)가 되게 하고 토포사(討捕使)를 엄중하게 신칙(申飭)하여 살피고 잡는 방도를 다하게 하고, 봄철 대동미(大同米)의 상납(上納)하는 것을 감면하여 백성의 힘을 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허락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예기(禮記)》를 강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김재로(金在魯)가 문의(文議)로 인해 아뢰기를,
"간쟁하는 신하는 간쟁하는 자식과 다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성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종아리를 때려 피가 흐를지라도 감히 미워하거나 원망할 수 없고 다시 공경하고 다시 효도하면서 충분히 간(諫)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지만, 신하가 임금에게 있어서는 의리(義理)로써 합한 것이기 때문에 말이 쓰이지 않으면 떠나갑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齊)나라로 가고 초(楚)나라로 가던 때와는 달라서 다른 데로 갈 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군주도 또한 자주 간언(諫言)을 드림으로 인해서 소원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어찌 성덕(聖德)의 빛남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검토관(檢討官) 임정(任珽)은 말하기를,
"위에 있는 이가 그 범안(犯顔)555)  을 허락한 후에야 언로가 비로소 열리는 것이니, 이이(訑訑)한 안색으로써 천리의 밖에서 사람을 거절해서는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지평 유건기(兪健其)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영역 부장(領役副將)으로서 김씨 성을 가진 무인(武人)에게 포상한 일은 혹은 사은(私恩)에 관계되고 혹은 전례(前例)에 위배되어 외간(外間)에서 지탄의 소리가 없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이종성(李宗城)이 망령되이 돌보아줌을 믿고 할말을 다하여 숨기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그 충애(忠愛)의 정성을 살피지 않으시고 군하(君下)의 비난을 지나치게 염려하시어, 이에 이와 같은 정도에 지나친 하교(下敎)가 있으신 것입니까? 그리고 병랑(兵郞)을 곤장을 친 것에 있어서도 거조(擧措)가 칭량(稱量)556)  함에 실수하였습니다. 만일 성상께서 열병(閱兵)하는 장소나 하룻밤을 묵어가는 거둥의 경우에 사율(師律)에 종사(從事)한다면 종신(從臣)의 죄를 범한 자를 진실로 마땅히 곤벌(棍罰)로써 다스려야 하지만, 지금은 법복(法服)을 입고 난로(鑾輅)557)  를 타고 객사(客使)를 전송하는 것이니, 비록 이것이 교외 행차라고는 하지만 바로 전폐(殿陛)와 같습니다. 돌아보건대, 여기서 조사(朝士)를 잡아 곤장을 친다는 것은 조정에서 조신(朝紳)에게 곤장을 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대저 우리 나라는 사대부를 대우함이 너무 과중하여 진실로 시속의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예의(禮義)로써 꾸짖지 않으시고 형장(刑杖)을 가하여 종이나 돼지처럼 대하시고 포박해 질타하여 조금도 어려워함이 없으시니, 신은 지절(志節)이 소멸되어 다시 염치가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이어서 ‘존심(存心)·양성(養性)과 극기(克己)·제욕(制欲)의 설을 진달하고, 끝에 가서 ‘준절(撙節) 재감(裁減)’의 마땅함을 말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말은 대체는 옳다. 기랑(騎郞)에게 곤장을 친 것은 뒷날을 징계하기 위한 것인데, 감히 조사(朝士)라 일컬으면서 문신(文臣)을 치우치게 비호하니, 매우 편치 아니하다."
하였다.

 

집의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충청 감사 이형좌(李衡佐)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관청에 저축된 곡식이 전혀 없어서 백성들은 먹고 살 대책이 없는데, 연분(年分)558)  의 정사는 풍년든 해에 비교해 요구하고 면포(綿布)를 재촉하는 관문(關文)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맨손만 쥐고 있는 가난한 백성들이 더욱 어찌 잠시인들 죽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생각건대, 경사(京司)의 사세(事勢)와 탁지(度支)의 용도는 반드시 진청(賑廳)과 강도(江都) 두 곳에 의뢰하는데, 전이(轉移)하는 물품은 진실로 넉넉한 수량을 공급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고 다만 양서(兩西)에서 조금 손을 돌릴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 4만 석의 한도 내에서 경창(京倉)으로 운송해 와 경사(京司)의 수용(需用)하는 방도로 삼고 그 대신 본도(本道)에서 상납(上納)할 미곡(米穀)은 참작해서 우선 남겨두어 형세를 관망하여 백성을 진휼(賑恤)하는 용도로 삼도록 하며, 다행히 사용하지 않게 되면 추후에 상납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록 경(卿)의 상소가 없다 하더라도 백성의 일에 대한 염려야 어찌 잠시나마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는가? 이 상소를 묘당(廟堂)에 내리어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1월 18일 정축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기읍(畿邑)의 주진(賙賑)은 실로 그 대책이 없습니다. 환모(還耗)559)  가 비록 심히 영성(零星)하지만 더욱 극심한 차등을 비교해서 등급을 나누어 급여를 허락하여 진구(賑救)에 보충하는 물자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임금이 관서(關西)의 수세(收稅)한 쌀을 운반해 오는 일에 적당한 사람이 없음을 난처하게 생각하니, 연신(筵臣)이 이종백(李宗白)을 천거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백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삼남(三南)의 영진사(營賑使)를 명하되 먼저 관서(關西)에 가서 도신(道臣)과 상의해 결정하여 시기에 맞추어 운송해 오도록 하며, 해서(海西)는 굳이 다시 다른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으며 전적으로 신백(新伯) 윤용(尹容)에게 위임하여 조속히 운송해 오게 하여 삼남의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기호(畿湖)는 어사(御史)가 방금 돌아왔는데, 양남(兩南)의 흉년에 대한 보고가 더욱 심함이 있으니, 영진사를 칙려(飭勵)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따로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은 본도(本道)의 일을 익숙히 잘 알고 있는 이를 보내는 것만 같지 못하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와 부사직(副司直) 이광덕(李匡德)을 양남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들을 위유(慰諭)하고 이어서 진사(賑事)를 살피게 하되 조속히 갔다 오도록 하라."
하였다.

 

황정(黃晸)을 헌납으로, 신만(申晩)을 정언으로, 김상익(金尙翼)을 지평으로 삼았다.

 

11월 19일 무인

수찬 홍봉조(洪鳳祚)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언관(言官)이 말한 것으로써 죄를 얻는 것은 원래 성세(盛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조관빈(趙觀彬)과 같은 자는 설령 처벌할 만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십세(十世) 동안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리에 있어 진실로 마땅히 관대히 용서하여야 합니다. 또 그 말한 바는 본래 축적한 바로써 곧바로 진달하여 숨김이 없었던 것에 지나지 않고, 질통(疾痛)의 부르짖음은 우분(憂憤)에서 나왔으니, 말이 혹시 과격함이 있더라도 마땅히 용서하여야 합니다. 이번의 처분을 신은 몹시 개탄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처분도 또한 말감(末減)한 것이다."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함경 감사 정형익(鄭亨益)을 소견(召見)하니, 정형익이 말하기를,
"북관(北關)에 만일 폐막(弊瘼)이 있다면 신이 마땅히 경계에 이른 뒤에 장문(狀聞)할 것이나, 육진(六鎭)은 바로 변경(邊境)의 울타리입니다. 근래에 수재(守宰)들을 대부분 적임자를 선택하지 못해서 백성들에게 재물을 약탈하는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감영(監營)과 멀리 떨어져 있어 도신(道臣)의 위엄과 명령이 간혹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고 수령이 유능하고 무능한 것도 또한 상세히 살필 길이 없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 있어서는 ‘곤수(閫帥)를 반드시 일찍이 육진(六鎭)의 수령을 역임한 자로써 임명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중간에 중지되고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전조(銓曹)로 하여금 구제(舊制)를 신칙(申飭)하여 특별히 변방의 수령들을 선발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20일 기묘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어제 연중(筵中)에서 환곡(還穀)과 신포(身布)를 혹은 정지하고 혹은 경감해주는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여러 의논을 말하기를, ‘삼남(三南)을 등급을 나누는 중에 영남이 비록 약간의 수확을 한 몇 군데 고을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 흉년이 든 해의 약간 결실한 것에 비교하여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더욱 극심하거나 약간의 결실이 있는 것을 물론하고 옛 환자(還子)는 모조리 거두어 들이는 것을 정지하고 새 환자는 호남의 운봉(雲峯)·진도(珍島)와 영남의 청하(淸河) 등 열 여섯 고을은 마땅히 똑같이 절반은 정지하고 절반은 봉입(捧入)해야 하며, 신포는 호남의 운봉과 영남의 청하 등 열 여섯 고을은 마땅히 전부 감면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병(騎兵)·보병(步兵)의 군포(軍布)에 있어서는 바로 3년에 걸쳐 두 차례 하는 부역입니다. 그 가운데 더욱 극심한 고을은 마땅히 3분의 1을 감면해 주어야 하고 약간의 결실이 있는 고을은 논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1월 21일 경진

햇무리 하는데, 좌이(左珥)가 있었다.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고 관의 위에는 배(背)가 있었으며,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양서(兩西)의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의 목면(木綿) 1천 4백 동(同)을 마땅히 쌀로 바꾸어서 가져와야 하는데, 관서(關西)는 해로(海路)가 몹시 험난하여 배로 운송해 오는 데 염려스러운 점이 있으니, 마땅히 해서(海西)에서 쌀로 바꾸어 가져와야 합니다. 병조에서 관할하는 기병(騎兵)·보병(步兵)과 훈국(訓局)의 포보(砲保)560)   이외에, 해서 각읍(各邑)에 있는 각군문(各軍門)·각아문(各衙門)의 노비공(奴婢貢)561)   및 각양(各樣)의 가포(價布)562)  는 모두 시중의 값에 따라 쌀로써 수봉(收捧)하게 하고, 기타의 경우는 양서에서 가져온 면포로써 각영과 각아문에 나누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원하고 이어서 현덕(賢德)이 있는 이로 정승을 고쳐 임명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방금 삼가 대사헌 조관빈(趙觀彬)의 소본(疏本)을 보니 칼날이 가리킨 곳에는 사람들이 죄를 면함을 얻는 이가 적었습니다. 그리고 신의 형의 죄를 성토한 것은 참독(慘毒)이 여지가 없습니다. 그 공격의 여파는 또한 신의 몸에도 미쳤으니, 비록 온 일족을 깨끗이 멸족을 시킨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 것입니다. 청컨대 전리(田里)의 사이에 물러가 엎드려 있어 솥과 도마 위의 고기가 됨을 면했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이 관서(關西)에서 추동(秋冬)철에 전최(殿最)563)  를 봉진(封進)하라는 분부를 그대로 받들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고적(考績)의 정사는 지극히 엄정하고 또 중요합니다. 신이 비록 번임(藩任)에서 대죄(待罪)하였지만, 오히려 출척(黜陟)이 분명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이미 체직이 된 뒤에 또다시 남의 일을 대신하여 담당한다는 것은 다만 사체(事體)가 구간(句簡)스러울 뿐이 아닙니다. 신백(新伯)이 임지에 도착함이 이미 이번 달에 있었으니, 뒷날을 기다려 봉(封)해 올리더라도 진실로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최는 신백의 기한이 다 차기를 기다려 봉해 올리게 하라."
하였다.

 

11월 22일 신사

밤에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고 광채는 땅까지 비치었다.

 

임금이 감후(感候)가 오래 낫지 아니하여 약원(藥院)에서 진대(診對)를 행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질병을 들어 정고(呈告)하자 임금이 돈소(敦召)하기를 부지런히 하니, 비로소 나와 입대(入對)하고 사직(辭職)하며 말하기를,
"신은 세상의 분당(分黨)이 반드시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이르게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성상께서 그 폐단을 바로잡으시려는 의사가 있으셨기 때문에 신이 이에 받들어 행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것을 죄로 삼아서 몸과 이름을 더럽히고 욕되게 하였습니다. 신을 만류해 보아야 도움이 없으니, 신을 물리쳐 물러가게 하는 것도 또한 풍속과 교화(敎化)의 일조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당(黨)이 없다는 것은 내가 아는 바이다. 정미년564)   초기에 경을 이의(吏議)565)  로 삼아 한두 사람의 뜻을 같이하는 신하를 차례로 수용(收用)한 것은 외관상으로 환국(換局)한 것 같았지만, 실제는 당을 없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경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경은 물러갈 수 없다. 더구나 조관빈의 말을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조문명이 말하기를,
"무신년566)  의 변란(變亂)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신은 일찍이 하루도 물러갈 것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배회하며 떠나가지 못하였던 것은 다시 동룡문(銅龍門)이 열리는 날을 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이르러 몸을 받들어 물러간다면, 어찌 신하와 임금이 모두 영화롭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온 세상이 인협(寅協)하기를 기다려 성공을 고한 뒤에 물러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조관빈의 말은 전적으로 신(臣)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감히 청하지 못하였으나, 도배(島配)를 완전히 풀어 주는 것은 지나치니, 육지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신처수(申處洙)를 처분한 것은 윤순(尹淳)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늘 조관빈을 처분한 것도 또한 경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어찌 성탁(成琢)의 졸도(卒徒)가 되는 도헌(都憲)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조문명이 말하기를,
"신이 명지도(鳴止島)의 소금을 굽는 일로 박문수(朴文秀)와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적에 제(齊)나라는 일면(一面)이 바다를 접한 곳으로서도 그 이익을 다 거두어 능히 부강(富强)을 이룩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삼면(三面)이 바다를 접해 있는데도 오히려 가난을 면치 못하는 것은 염리(鹽利)를 얻지 못한데 연유하기 때문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과 고(故) 처사(處士) 이지함(李之菡)도 또한 이 일을 말하였으니, 그 말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은 안면도(安眠島) 한 섬에 있는데, 박문수는 금송(禁松)을 벨까 두렵다고 염려하니, 이것도 마땅히 생각해야 될 점입니다."
하였다.

 

11월 22일 신사

임금이 홍치중(洪致中)의 말을 따라 관서(關西)에서 가져와 삼남(三南)의 진자(賑資)를 보충하도록 명한 것이, 목면(木綿)이 1천 4백 동(同), 은(銀)이 1만 냥, 돈이 5만 꿰미가 되는데, 1만 꿰미의 돈은 교하(交河) 백성들 중 전답(田畓) 값을 받지 못한 자에게 지급하게 하였다.

 

11월 23일 임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시골에 있으면서 조관빈(趙觀彬)의 상소로 인해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조관빈의 이른바 ‘면전에서 함부로 현혹(眩惑)하였다.’는 것은 바로 신이 무신년567)  에 세 가지 일을 앙달(仰達)한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당시 일기(日記)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고 성상의 하교가 명확합니다. 신이 어찌 감히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반평생 동안 남의 억울한 무함을 받고서도 일찍이 스스로 변명을 하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저들의 심정이 지나쳐서 남을 모함하기를 잘하는 자들과 수다스럽게 사리를 변별하여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더구나 조관빈에게 더욱 어찌 족히 더불어 변명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구허 날무(構虛捏無)’란 네 글자면 족합니다. 그러나 그 무함한 말이 지극히 혹렬(酷烈)하여 애원(哀冤) 붕박(崩迫)한 나머지 울부짖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다 부촉(俯燭)하였으니 다시 어찌 많은 하유(下諭)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난번의 별유(別諭)에서 또 심곡(心曲)을 상세히 말하였으니, 경(卿)은 안심하고 다시는 개의하지 말라."
하였다.

 

동지(冬至)의 진위(陳慰)의 예(禮)를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대개 탄일(誕日)에 하례를 정지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승정원에서 제품(提稟)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월 24일 계미

함경 도사(咸鏡都事) 안경운(安慶運)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온성(穩城)·경성(鏡城)·삼수(三水)·갑산(甲山)·경원(慶源)·경흥(慶興) 등의 여섯 고을을 눈으로 직접 보니 한황(旱蝗)568)  과 상설(霜雪)의 재앙을 참혹하게 입어서 가을의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본도(本道)는 이미 급재(給災)한 일이 없기 때문에 부세(賦稅)의 수봉(收捧)을 다만 풍년든 해에 따라 할 뿐으로서 백성의 무리 천백 명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신에게 하소연하며 혹은 조적을 정지하여 부세를 감면해 주기를 청하기도 하고 혹은 곡식을 옮겨와서 진자(賑資)를 마련해 주기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백성의 실정이 실로 딱하니, 마음을 써서 진구(賑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검전(檢田)의 일로써 경성(鏡城)에 가서 상세히 알아보고 끝까지 조사해 보았더니, 본부(本府)의 전총(田摠)을 갑진년569)  에 다시 심사할 때에 감색(監色)570)  의 무리들이 면세(免稅)의 전답(田畓)을 구분하지 않고 다시 기경(起耕)된 것으로 여겨 묵정밭에 함부로 기록한 것이 3백여 결(結)이라는 많은 분량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필경 지정하여 징수할 곳이 없기 때문에 갑진년으로부터 지금까지 8년 동안을 그 납부(納賦)에 대해서 전적으로 일을 잘못 처리한 감색에게 책임지우고 있습니다. 조가(朝家)의 부세를 균등히 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이와 같음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허록(虛錄)된 전결(田結)에 대해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각 감면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을 내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1월 25일 갑신

경상도 영양(英陽)·고성(固城)·울산(蔚山) 등의 고을에 천둥하였다.

 

11월 26일 을유

이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대정(大政)을 네 번 겪고 사장(辭章)을 다섯 차례 올렸는데, 질병으로 면직되었다. 김흥경(金興慶)을 이조 판서로, 이흡(李潝)을 헌납으로, 심전(沈㙉)을 장령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지평으로, 윤동형(尹東衡)을 부수찬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송징래(宋徵來)를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 삼았다.

 

11월 27일 병술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병조 판서 김취로(金取魯)를 소견(召見)하여 관서(關西)의 농사에 대해 물으니, 김취로가 말하기를,
"팔도가 모두 흉년이 들었으므로, 관서(關西)도 또한 흉년을 면치 못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모름지기 조용히 진정을 시켜야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니, 지나치게 동요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지나치게 동요를 하는 것도 또한 안정시키는 도리가 아니지만, 신은 조정에서 노는 것을 즐기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 도리어 병통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일은 미리 하면 성취된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성인(聖人)의 가르침으로써 법을 삼아야 한다."
하고, 이어서 김취로(金取魯)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을 안 것이 을사년571)  부터인데, 서번(西藩)의 치적(治蹟)에 대해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었다. 중요한 지위로 임명한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며 사(私)를 위한 것이 아니니, 노력할 것이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당습(黨習)이 망국(亡國)의 조짐이 됨은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개주(介胄)572)  가 당론(黨論)을 하고 있으니, 마땅히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신칙(申飭)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김취로를 앞으로 나오라 명하여 말하기를,
"무신(武臣)의 당습에 대해 내가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훈련 대장(訓鍊大將) 장붕익(張鵬翼) 같은 이도 이런 당습을 면치 못하고 있다. 경은 바로 전(前) 병판(兵判)의 종제(從弟)이기에 내가 경의 형에게 신칙하여 권면했던 것으로 경에게 개유한다."
하였다. 김취로가 말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조정의 잘못이지만, 가령 계묘년573)   방목(榜目) 출신(出身)의 경우는 이미 ‘토역(討逆)’이라는 두 글자가 있으니, 이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단지 인재(人才)만 살펴보고서 등용할 것이지 과명(科名)을 어찌 논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김취로가 말하기를,
"일찍이 명칭을 고쳐서 따로 시험을 보이라는 하교가 있으셨는데 이어서 다시 ‘토역’이라는 명칭으로 하였으니, 그 명칭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도 또한 등용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처분(處分)이 전도(顚倒)되었다 하여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부사직(副司直) 이세근(李世瑾)이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하였다. 남지(南至)로써 복괘(復卦) 육잠(六箴)을 올려 양복(陽復)의 경계를 거듭하고 또 치사(致仕)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시기를 인하여 잠(箴)을 올리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나, 인년(引年)의 청은 이미 처음의 비답에서 하유(下諭)하였다."
하였다.

 

11월 28일 정해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한두 자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11월 29일 무자

호서 어사(湖西御史) 황정(黃晸)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소견(召見)하여 호서의 재황(災荒)의 상태와 진정(賑政)의 잘하고 못하는 것을 물으니, 황정이 대답하기를 매우 상세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이병상(李秉常)이 바야흐로 귀양가서 홍산(鴻山)에 있는데, 가난이 극심한데도 문유(問遺)574)  를 받지 않으며 그 노모(老母)를 떠나 있으니, 정상이 또 가련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병상은 성질이 비록 고집스러우나 또한 장점도 많이 있으니, 버릴 수 없다." 하고, 이에 그를 사면하였으며, 같이 죄를 입은 사람들도 또한 다시 서용(敍用)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또 탄식하기를,
"만일 이병상·권업(權𢢜)·김흥경(金興慶) 등으로 하여금 나와서 벼슬하게 한다면, 조정에 어찌 인재(人才)가 없음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영남 어사(嶺南御史) 이거원(李巨源)이 또한 복명하였다. 임금이 소견하니, 이거원이 영남 수령들의 진제(賑濟)를 잘하고 못하는 것에 대해서 대강 진달하였다. 황정이 말하기를,
"파손된 선박에서 건져낸 쌀을 도둑질한 일로 서산(瑞山)과 태안(泰安)에서 잡혀 갇혀 있는 자가 40여 명이나 됩니다. 큰 바다에서 파손을 당한 경우 건져낸 쌀이 많지 않은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고 이미 장물(贓物)을 적발한 것도 없으니, 잡혀 갇혀 있는 자들도 또한 원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핵(綜核)575)  의 정사는 또한 삼대(三代) 이후의 일이다. 내가 너무 심한 일은 하지 않은데, 다만 탐관 오리(貪官汚吏)는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도려내니 마지못해서 죄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건져낸 쌀을 도둑질한 자와 같은 유(類)는 가령 먹을 것을 도둑질했다 하더라도 영실(寧失)576)  의 의리로써 불문에 붙이고 석방시키라."
하였다.

 

북도(北道)의 별과(別科) 문급제(文及第) 정시린(鄭時麟)을 6품직에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으니, 나이 70이 되었다 하여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의 말에 따른 것이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아비를 시해(弑害)한 죄인 정금(丁今)을 준례에 따라 삼성 추국(三省推鞫)577)  하고 결안(結案)하여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서계 부수(西溪副守) 이습(李熠)과 해봉수(海篷守) 이인(李橉)은 연오(連五) 등 본시(本寺)의 강좌(講座)에서 수석(首席)을 차지하였으니, 마땅히 준례와 같이 가자(加資)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전라도 전주(全州) 등의 고을에 천둥하였다. 장흥(長興) 땅에서는 나무가 바람에 엎어져 쓰러져 있은 지 몇 개월이 되었는데, 갑자기 또 바람이 몰아치자 모두 절로 벌떡 섰다. 감사(監司)가 친히 살펴보고서 변이(變異)로 계문(啓聞)하였다.

 

11월 30일 기축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경중(京中)의 진정(賑政)이 마땅히 내년 봄에 있어야 할 터인데, 봄이 지난 뒤에는 유개(流丐)들이 사방에서 몰려올 것이니, 마땅히 먼저 접제(接濟)할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호조와 양창(兩倉)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담지 않은 빈 섬[空石]을 진청(賑廳)에 수송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경외(京外)에 도둑이 성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여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무겁게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고, 기읍(畿邑)에도 또한 무신(武臣)을 골라 보낼 것을 명하였다.11월 30일 기축

조적명(趙迪命)을 헌납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정언으로, 윤지원(尹志遠)을 장령으로, 권신(權賮)을 지평으로, 황정(黃晸)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충청 전 감사 신방(申昉)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말하기를,
"상당 산성(上黨山城)을 수비하는 절목(節目)을 만들어 보냈는데, 호궤(犒饋)578)   등의 절차는 영남의 금오진(金烏鎭)의 예(例)와 같이 3승(升)으로써 허락하고 대변장(待變醬)579)  은 둔전(屯田)580)  에서 세(稅)로 받은 콩으로 1백 60 곡(斛)의 한도 내에서 돌아가면서 바꾸어 담구며, 군수(軍需)의 전포(錢布)는 양서(兩西) 병영(兵營)의 예(例)에 따라 병사(兵使)로 과체(瓜遞)581)  한 자가 스스로 돈 1천 꿰미를 갖추어 이식(利息)을 취해 용도에 보충하도록 법식을 정하여 준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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