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 1731년 12월

싸라리리 2025. 9. 1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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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경인

일식(日食)이 있었다.

 

12월 2일 신묘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동지(冬至)가 방금 지나갔으니, 바로 성인(聖人)이 관문을 닫고 양기를 부식(扶植)할 시기입니다. 한 생각의 사이에 선(善)한 마음이 도래하여 회복되면, 한 점(點)의 양기가 만물이 생겨나지 아니한 시기에 비로소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함양(涵養)의 공부에 더욱 성의(誠意)를 기울이소서."
하고, 검토관(檢討官) 황정(黃晸)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치우침이 없는 정치에 유의하시나 오히려 피차간에 애석(愛惜)의 구별을 면치 못하십니다. 이유(李瑜)의 아우 이후(李)와 조상경(趙尙絅)의 아우 조상기(趙尙紀)에 있어서는 세도 있는 집안의 자제로서 척박한 고을을 염피(厭避)하여 차례로 정체(呈遞)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기강이 떨치지 못한 일단(一端)입니다. 또한 바라건대, ‘정대 공평(正大公平)’ 네 글자에 더 성의를 기울이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는 일찍이 조정이 화합한 뒤에야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성학집요(聖學輯要)》에 안민장(安民章)이 기강장(紀綱章) 다음에 있는 것을 보고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척연(惕然)히 스스로 반성하였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비록 세수(歲首)이기는 하지만 입춘(立春)이 안되었으니 마땅히 형(刑)을 집행하여야 할 것이나, 삼양(三陽)의 달582)  로써 대벽(大辟)583)  의 형벌을 거행한다는 것은 끝내 왕정(王政)의 마땅한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개 삼복(三覆)584)  을 상후(上候)의 정섭(靜攝)으로 인해 물려서 행하였는데 세율(歲律)이 장차 다하려 하기 때문에 이종성의 말이 여기에 미친 것이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정월(正月) 초3일에 마땅히 사직단(社稷壇)에 기곡(祈穀)의 친제(親祭)를 거행해야 하는데, 비록 3년 이내라 하지만 예의상 당연히 풍악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2월 3일 임진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가 자문(咨文)의 어구(語句)를 자기 멋대로 고치고 역관(譯官) 김시유(金是瑜)를 스스로 데리고 갔습니다. 자문의 자구(字句)를 추후에 바꾼 것은 비록 원용할 수 있는 전례(前例)가 있다 하겠지만, 김시유는 묘당(廟堂)에서 방색(防塞)한 자인데 자기 멋대로 데리고 간 것은, 《춘추전(春秋傳)》에 비록 ‘대부(大夫)가 국경(國境)을 나가면 자기 마음대로 해도 가하다.’는 조문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일은 국경 안에서 있었으니, 후일의 폐단에 관계가 있습니다. 정사(正使)·부사(副使)를 모두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성룡(李聖龍)과 조명신(趙命臣)을 승지로, 윤동형(尹東衡)과 윤휘정(尹彙貞)을 교리로 삼았다.

 

12월 5일 갑오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반궁(泮宮)에서 황감제(黃柑製)585)  를 실시하게 하여 수석(首席)을 차지한 유학(幼學) 한익모(韓翼謨)에게 전시(殿試)의 직부(直赴)를 하사(下賜)하였다.

 

12월 6일 을미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황정(黃晸)이 말하기를,
"신(臣)이 전일에 호서(湖西)에 갔을 때 들으니, 청주 좌수(淸州座首) 정동혁(鄭東爀)이라는 자가 무신년586)  의 변란을 당하여 개연히 의분심(義奮心)을 갖고 일어나 먼저 그 흉악한 격문(檄文)을 전달한 자를 가둔 뒤 고을의 군사를 조발하고 군량(軍糧)을 정치(整治)하여 사수(死守)할 계획을 하였다 합니다. 열군(列郡)이 풍미(風靡)하던 시기에 그 수립한 공로가 가상한데 아직까지 포상(褒賞)이 없었으니, 충성하는 자들을 권면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신치운(申致雲)·조명신(趙命臣)·서명연(徐命淵)·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삼았다.

 

사헌부 【장령 윤지원(尹志遠)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국서(國書)를 제멋대로 고친 것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고 역관(譯官)을 스스로 데리고 간 것은 조령(朝令)에 크게 위배됩니다. 청컨대 동지 삼사신(冬至三使臣)을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잡아다 문초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도 제주(濟州)에서 선박(船舶)이 파손되어 익사한 자가 60명이나 되었다. 목사(牧師)가 이 사실을 장문(狀聞)하니, 휼전(恤典)을 베풀 것을 명하였다.

 

12월 7일 병신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여 경휘전(敬徽殿)의 망제(望祭)를 섭행(攝行)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도제조(都提調)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진자(賑資)를 장청(狀請)하니, 나리포(羅里鋪)의 쌀을 보낼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로부터 매양 해도(海島)를 진념(軫念)하였으니, 내가 마땅히 우러러 백성을 구휼하는 덕의(德意)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리포의 곡물(穀物)은 본래 제주를 위해 마련한 것으로서, 아마 시기를 놓치는 우려가 있을까 염려되니, 2천 곡(斛)을 속히 운송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언 송징계(宋徵啓)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지평 유건기(兪健基)가 올린 한 통의 상소는 진실로 궐유(闕遺)를 광구(匡救)하려는 데서 나왔는데 가납하지 않으시고 또 파직시켰으니, 마음을 비워서 받아들이는 도량이 미진한 바가 있는 것이므로, 신은 가만히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삼남(三南)에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장차 굶어 죽을 형편이어서 주진(賙賑)의 대책을 이미 도신(道臣)에게 위임하였는데, 또 이처럼 사신(使臣)을 별도로 파송(派送)하는 조처가 있는 것은 다만 주전(廚傳)을 허비할 뿐이니, 또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전적으로 도신에게 책임을 맡기고 사신을 파견하라는 분부를 빨리 환수해야 합니다.
듣건대, 박문수(朴文秀)가 스스로 사장(私庄)의 곡식을 내어놓은 뒤 시골에 거처하는 중재(重宰)들의 곡식을 비축한 것을 죽세어서 심지어 나누어 징수하라는 청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진정(賑政)이 비록 몹시 급하다고는 하지만 경재(卿宰)의 사체(事體)는 다른 사람과는 본래 구별이 있습니다. 어찌 조정에서 억지로 곡식을 바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굶주린 백성을 진활(賑活)하지 못하여 약간의 조석(租石)을 경재의 집에서 징수해 낸다는 것은 얻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은 매우 클 것이니, 그것이 나라의 체모에 손상됨이 많을 것입니다. 또한 마땅히 그 명령을 도로 중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권분(勸分)의 명령은 비록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도리어 백성을 해치는 까닭이 됩니다. 사나운 아전이 뇌물을 받고서 부유한 백성은 양탈(攘奪)에서 면하고 이임(里任)이 농간을 부려 힘없는 백성들만 도리어 소요(騷擾)를 겪게 되니, 마땅히 엄중하게 금지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논핵하기를,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교자(轎子)를 타고 삭시사(朔試射)587)  를 할 때에 질병을 핑계하였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서 칙려(飭勵)함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영진사(營賑使)가 도신과 상의해 결정하도록 한 것은 실제로 그랬던 일이고 영성군(靈城君)588)  이 진달한 바는 애당초 조정에서 권유한 것이 아니다. 권분을 신칙하는 일과 병랑(兵郞)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사옹원(司饔院)에서 아뢰기를,
"전라도에서 봉해 올린 생저(生猪)가 몸집이 작으니, 마땅히 되돌려 보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시기에 어공(御供)도 오히려 줄여야 하는데, 하물며 납육(臘肉)589)  이겠는가? 받들어 올리라."
하였다.

 

12월 8일 정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장차 분부를 받아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는데,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이번 신의 출행(出行)에 기민(飢民)을 위유(慰諭)하고 진정(賑政)을 검속(檢束)하되 또한 팔량치(八良峙)의 관액(關阨)과 명지도(鳴止島)의 형편을 겸하여 살펴서 소금을 굽는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데, 도신(道臣) 조현명(趙顯命)은 옛것을 그대로 지키는 데는 남음이 있으나 융통성이 부족하고 신은 융통성은 남음이 있으나 옛것을 지키는 데 부족하니, 마땅히 서로 협조해서 함께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바야흐로 멀리 떠남에 있어 납언(納言)·용간(用諫)의 도리로 우러러 권면하겠습니다.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명철함은 필시 전하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지만, 오히려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으니, 군주의 성덕(盛德)으로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이것으로써 신년(新年)의 축원을 삼고자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적덕(積德)과 전하의 지극한 인덕(仁德)으로써도 무신년590)  의 가슴아픈 일이 있었으니, 신이 밤낮으로 소망하는 바는 다만 왕자(王子)가 탄강(誕降)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나이 40인데 종사(宗社)가 외롭고 위태하며 백성들의 기곤(飢困)이 또 이와 같다. 이제 경(卿)을 보내노니, 만일 억조(億兆)의 백성들을 구제하여 살리게 된다면 하늘에 영원한 천명(天命)을 기원하는 방도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종사의 한없는 복입니다."
하였다. 박문수가 이때 형조 참판(刑曹參判)의 직임을 갖고 있었는데, 또 진달하기를,
"고(故) 지평 이정박(李挺樸)은 그의 절친한 벗인 이익환(李益煥)으로 하여금 남포(藍浦)의 옥토(沃土)를 사들이게 하였는데 염가(廉價)로써 상한(常漢) 윤명(尹明)의 전답(田畓)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그가 정소(呈訴)함에 미쳐서 이정박이 형관(刑官)을 사주하여 윤명이 사대부를 능욕했다고 일컫고는 남포에서 윤명과 그 아우·조카 세 사람을 가두어 형벌을 가하게 하였습니다. 끝내는 윤명으로 하여금 옥중(獄中)에서 유사(瘐死)591)  하게 하였으며, 단 그 아우를 유배(流配)시키고도 도리어 그 돈을 윤명의 일족(一族)에게서 징수하였습니다. 그 조카 윤필(尹弼)이 울면서 신에게 하소연하였는데, 매우 애처로웠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반드시 엄중히 조사하고 무겁게 추궁한 후에야 무단(武斷)의 습관을 징계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정박은 이세환(李世煥)의 아들이고 이세환은 선정(先正) 박세채(朴世采)의 문인(門人)이니, 보고 들은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는 다를 터인데도, 이러한 일이 있으니 또한 세도(世道)를 볼 수가 있겠다."
하고, 이어서 추조(秋曹)592)  에 명백하게 조사하여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9일 무술

유정(柳綎)과 성덕윤(成德潤)을 승지로, 황정(黃晸)을 헌납으로 삼았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또 소견(召見)하여 별유(別諭)를 내려 가서 선유(宣諭)하게 하기를,
"삼남(三南)의 흉년은 근고(近古)에 없는 바로서 매양 도신(道臣)의 장문(狀聞)을 들을 때마다 마치 슬픔이 내 몸에 있는 듯하여 음식을 먹어도 입에 맛있지 않고 잠을 자도 잠자리가 편치 않다. 지난 여름에 여러 도(道)를 비국(備局)의 당상관에게 맡아서 관할하도록 나누어 명한 것은 단지 유명 무실하게 되었으니, 당초에 어찌 나누어 관할할 뜻이 있었는가? 경기와 호서에는 이미 어사(御史)를 보내 위유(慰諭)하였으나, 양남(兩南)에 있어서는 왕성(王城)까지의 거리가 더욱 요원하니, 아! 백성들이 비록 지극한 고통이 있더라도 어찌 구중 궁궐에 전달할 수가 있겠는가? 특별히 본도(本道)를 맡아서 관할하는 당상관을 보내어 가을의 수확을 살펴 우리 적자(赤子)를 위로하게 하며, 이어서 기민(飢民)의 형세와 진정(賑政)의 근만(勤慢)을 알아보게 한다. 아! 그대들 도신과 수령들은 나의 뜻을 깊이 인식하여 각각 두려워하는 마음을 간직하도록 하라. 도내(道內)에 크고 작은 유배자(流配者)는 비록 경중의 구별이 있겠으나, 역적(逆賊)으로 응당 연좌해야 할 자들은 형률(刑律)을 감하여 유배시키도록 했으니, 이미 그 목숨을 살려 주도록 했다면, 그 구렁에 빠져 죽어가는 것을 책임져야 한다. 비록 굶주려 죽더라도 구휼하지 않는 것이 또한 어찌 왕정(王政)의 차마 할 바이겠는가? 앉아서 죽을 날만을 기다릴 것이 분명한데, 이러한 무리들 중 더구나 본현(本縣)에 종이 된 자도 또한 고을의 백성이니, 유의하여 진활(賑活)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10일 기해

임금이 의금부와 형조에 명하여, 하루 종일 관아(官衙)를 열어 체옥(滯獄)이 없게 하라 하였다.

 

12월 11일 경자

임금이 초복(初覆)을 행하여 여러 죄수를 의논한 뒤, 임금이 모두 아직 삼복(三覆)을 기다릴 것을 명하였다. 영흥(永興)의 그 질녀(姪女)를 목매달아 죽인 죄인 조승윤(趙承允)의 추안(推案)에 이르러 하교(下敎)하기를,
"이것은 바로 윤상(倫常)의 극변(極變)으로서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영흥은 바로 풍패(豐沛)593)  의 유허(遺墟)인데, 이러한 변괴가 있으니, 어찌 척연(惕然)하지 않겠는가? 순제(舜帝)가 설(契)을 명함에 있어 오품(五品)594)  이 불손한 것을 우려하였으니, 내가 만일 도솔(導率)의 방도를 다하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실로 나의 허물이며 또한 도신(道臣)이 승류(承流)595)  를 잘하지 못한 책임이니, 별유(別諭)로 해당 도신에게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또 영유(永柔)의 아내를 살해한 죄인 정지발(鄭之發)의 추안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살옥(殺獄)에 있어 의언(議讞)596)  은 중대한 일인데, 대충대충 심문하고 구차하게 성안(成案)을 하여 ‘호사 난어(胡辭亂語)597)  ’를 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소루함이 심하다."
하였다. 인신(印信)을 위조(僞造)한 죄인 김산이(金山伊)·이기하(李己夏) 등의 추안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요사이 외읍(外邑)의 인신을 보면 마손(磨損)된 것이 심한 편이다. 개운포(開雲浦)의 인신도 또한 그러하여 심지어 바가지 조각으로 위조하는 폐단이 있기에 이르렀기에 일찍이 개주(改鑄)하여 내려보내라는 뜻으로 신칙(申飭)한 바가 있었다. 예판(禮判)이 또 바야흐로 등연(登筵)하였으니 서울과 지방의 인신으로서 닳았거나 깨진 것들을 가져다가 일일이 개주하여 간사한 백성이 몰래 주조(鑄造)하는 습관을 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응교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풍속과 교화(敎化)가 날로 무너져 민간의 풍습이 옛날같지 않습니다. 비록 계복(啓覆)598)   문안(文案)을 보더라도 지친간(至親間)에 서로 살해한 경우가 다섯 사람에 이르니, 이는 다만 법률로써만 다스릴 수 없으며 진실로 마땅히 인륜을 두텁게 하고 교화를 힘쓰는 정치에 더 성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삼가(三嘉)의 남을 저주한 죄인 박천득(朴賤得) 문안(文案)의 ‘그 어머니 정절(情節)을 그 아들 박우득(朴偶得)에게 심문한 것’은 추관(推官)의 체모를 아주 잃은 것이므로, 윤기(倫紀)를 존중하여 사방에 보이는 바가 전혀 아닙니다. 마땅히 해당 추관을 무겁게 추고(推考)하여 중외(中外)에 신칙(申飭)하고, 무릇 죄수를 안치(按治)하는 데 있어 매양 윤리를 부식하는 의미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전라도 진사(進士) 이홍직(李弘稷) 등이 상소하여, ‘남원부(南原府) 고(故) 봉상 판관(奉常判官) 안처순(安處順)은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등과 서로 좋게 지냈는데, 그 학행(學行)의 순독(純篤)함과 출처(出處)의 뛰어남으로 볼 때 마땅히 포증(褒贈)의 은전(恩典)이 있어서 많은 선비들의 희망을 위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처음에 한사억(韓師億)이 죄로써 관서(關西)에 귀양을 갔는데 함종(咸從)의 전(前) 부사(府使) 한형(韓珩)과 틈이 있어 한형을 모함하여, 이에 한 간단한 글로써 증산 현감(甑山縣監) 이전(李塼)을 협박하여 어사(御史)에게 전달하였다. 일이 이미 발각되자 옥에 갇혀 여러 차례의 추고(推考) 끝에 비로소 승복하였다. 의금부에서 말하기를,
"한사억은 귀양살이하는 몸으로 계략을 세워 사람을 모함했고 또 바른 대로 고하지도 않았으니, 더욱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사억이 보잘것없는 것은 본디 말할 것도 없지만 내가 덕이 없어서 능히 덕으로 인도하지 못한 소치로 이에 이런 사심(私心)을 갖고 임금을 기만하는 무리가 있게 된 것이다."
하고, 이어서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멀리 유배(流配)시킬 것을 명하였다. 또 전 대사간 한사선(韓師善)은 종제(從弟) 한사억(韓師億)의 말을 듣고 믿어, 해괴한 행동을 하고 군부(君父)를 기만했다 하여 그 관직(官職)을 삭탈(削奪)시켜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고, 한형·이전 등은 모두 완전히 석방시켰다.

 

12월 12일 신축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양국(兩國)의 통화(通貨)는 일이 지극히 중대한 것인데, 왜은(倭銀)이 전후에 걸쳐 변개(變改)되었으니, 또한 교활한 속임수를 볼 수 있는 것으로서 후일에 폐단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또 교린(交隣)의 도리는 약조(約條)를 굳게 지킨 후에야 조정의 권위가 서고 성신(誠信)이 시행되는 것이니, 마땅히 준례에 따라 물리쳐 팔성(八成)599)  이나 천은(天銀)600)  을 가져오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개 피집(被執)601)   삼가(蔘價)로 종전에 십성은(十成銀)을 가져오던 것이 바뀌어 팔성은이 되고 또 바뀌어 정은(丁銀)602)  이 되었으므로,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계문(啓聞)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2월 13일 임인

삼복(三覆)을 행하여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 무릇 일곱 사람을 처단하고 나머지는 혹 작처(酌處)하여 멀리 귀양보냈다. 또 하유(下諭)하기를,
"살옥(殺獄)에 윤상(倫常)의 변(變)이 많은 것은 교화(敎化)가 밝지 않은 것에 연유한 것이다. 옛날 한연수(韓延壽)603)  는 한 읍재(邑宰)의 몸으로서도 오히려 문을 닫아걸고 잘못을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임금이 된 자이겠는가? 내가 바야흐로 스스로 반성하고 있노니, 아! 방백(方伯)·수령(守令)들도 또한 마땅히 선화(宣化)의 책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죄수를 의논할 즈음에 매양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아니하는 안색을 보였고, 여러 의견의 이동(異同)을 참작한 뒤 반복해 신중히 살펴서 감형(減刑)시켜 살려 주자는 논의를 많이 펼쳐서 살생(殺生)하기를 꺼리는 덕(德)이 언사(言辭)의 표면에 넘치니, 연신(筵臣)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고양(高陽)에 장(張)가 성(姓)을 가진 한 백성이 있어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적곡(糴穀)을 먹었는데, 현관(縣官)의 독촉에 몰려 결국은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 데 이르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임금이 한참 동안 측연(惻然)히 여기다가 본도(本道)에 휼전(恤典)을 베풀기를 명하고 하교하기를,
"죽어서 휼전을 베푸는 것은 애당초 죽음이 없도록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여러 도(道)에 신칙(申飭)하여 적곡(糴穀)을 받아들임에 있어 너무 독촉을 하지 말도록 해서 백성의 힘을 펴주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治中)이 말하기를,
"북한 산성의 곡식을 운송하여 산성에 바치게 하는데 운반할 즈음에 백성들이 감당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받아서 본읍(本邑)에 남겨두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2월 14일 계묘

판부사 이태좌(李台佐)가 차자를 올려 경휘전(敬徽殿)의 망제(望祭)를 섭행(攝行)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5일 갑진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부제조 조석명(趙錫命)이 말하기를,
"장단(長湍) 사람으로 상언(上言)한 자는 누구인지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익명(匿名)으로써 감히 경재(卿宰)를 무함한다는 것은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는 바가 큽니다. 그리고 또 윤유(尹游) 형제는 용렬하고 잗단 무리가 아니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에 있는 자가 지극히 명철하고 지극히 공정하며 조정이 화합한다면, 비록 이런 무리가 천백 명이 있더라도 어찌 감히 그 흉계를 실현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장단의 백성 가운데 그 이름을 숨기고 상언하여, ‘윤순(尹淳) 형제가 시골에 있으면서 불법한 일이 많다.’고 무함한 이가 있어, 임금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장단 백성임을 가탁하여 악의(惡意)를 가지고 죄에 빠뜨리려는 것’으로 의심하고, 경기 감영에 명하여 그 사람을 조사하도록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는데, 또 한 상언으로 절반은 한문(漢文)이고 절반은 언문(諺文)인 글로써 백성의 일을 논한 것이 있었다. 여러 신하들이, 혹시 정신(廷臣)들을 모함하기를 장단 백성과 같이 한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며 서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을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런 일은 없으며, 그 상언은 내가 이미 불에 태워버렸다."
하였다. 이 당시 상언의 분잡함과 민습의 해괴함을 통해서 또한 기강을 볼 수 있었다.

 

임금이 정섭(靜攝)한 나머지 빈연(賓筵)을 오랫동안 비워 두었었는데,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여 삼남(三南)을 진제(賑濟)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세종 대왕·단종 대왕·예종 대왕·현종 대왕의 태실(胎室) 석물(石物)을 마땅히 명년 봄에 수개(修改)하여야 하는데, 마침 흉년이 든 시기를 만났으니, 청컨대 명년 가을을 기다리게 하소서. 식년(式年)의 대소과(大小科)도 또한 마땅히 명년 가을로 물려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2월 17일 병오

이흡(李潝)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2월 18일 정미

임금이 친히 납향 대제(臘享大祭)를 경휘전(敬徽殿)에서 행하였다.

 

12월 19일 무신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비용을 아끼기를 너무 심히 하면 재물을 모으는 것에 가깝습니다. 옛날에 선조조(宣祖朝)에 있어서는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내탕고(內帑庫)를 폐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오늘날은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하겠으니, 자못 어려운 일을 하라고 권유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은 또한 전하께서 마땅히 반성하셔야 할 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초기에는 실질을 숭상하다가 세종조(世宗朝)에 이르러 문채(文采)가 아주 구비되었다. 선조조(宣祖朝)에는 유술(儒術)을 크게 숭상하여 산림(山林)의 선비들이 많이 나아갔으나, 명예를 좋아하는 폐단이 오늘의 시대와는 같지 않았다. 오늘날은 스스로 의리(義理)를 조작하여 이에 도리어 의리를 어지럽게 멸망시키어 조론(朝論)의 이기기를 다투는 데서 시작해서 결국은 무신년604)  의 역변(逆變)에 이르게 되었다. 그 중에 보통보다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고집스럽고 꽉 막힌 병통이 없지 않으니, 마땅히 순박한 방향으로 돌아오도록 하여야 할터인데, 아마 내가 풍속을 바꾸는 교화를 이룩할 수 없을까 두렵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역변이 어찌 명예를 좋아하는 데서 나왔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예를 좋아하여 역변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승(文勝)의 폐단이 결국은 문(文)과 질(質)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데 이르니, 이것이 쇠약하여 나라를 망치는 조짐이 된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의리를 어지럽혀 멸망시킨 나머지 결국은 역변이 되었다는 것은 성상의 의사가 비록 정미(精微)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명절(名節)은 마땅히 부식(扶植)시켜야 하는 것인데 매양 명예를 배척하는 하교가 있으시니, 신의 생각에는 아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집스럽고 꽉 막힌 자들은 참으로 명예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만일 진실(眞實)한 데로 돌아온다면 그 효과가 장차 어떠하겠는가? 내가 문채(文采)를 모조리 제거하여 명예를 숭상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명예를 좋아하는 말과 실상을 힘쓰는 말은 반드시 이치를 살피기를 정밀히 하고 깊게 한 후에야 분변할 수가 있습니다. 공손하고 거역하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즈음에는 실상을 힘쓰는 것을 명예를 좋아하는 것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니, 마땅히 여기에 살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연석(筵席)에서 한두 가지 일을 의논하였을 때 주상께서 ‘나는 창자 속에 사사로운 뜻이 가득 찼다.’는 하교를 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은 겸손한 말씀인 듯하지만, 만일 혹시 전하의 비위를 거스리어 이런 하교가 있으셨다면 신 등의 불충이 전하께서 정도에 지나친 사령(辭令)을 내리시도록 만든 것이니,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진정으로 이런 하교가 있으신 것이라면 몹시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전에 했던 말은 단지 농담이었을 뿐이다. 내가 어찌 참으로 창자 가득히 사사로운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윤휘정(尹彙貞)이 말하기를,
"이종성의 내탕고에 관한 설은 과감히 혁파할 것을 청한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혁파해야 된다는 생각을 항상 간직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 홍상빈(洪尙賓)은 말하기를,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만일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에 조속히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내탕고를 폐지해야 된다면 곧바로 폐지를 요청할 일이지 하필 어렵게 여겨 미룰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에 결국 구애되는 점이 있으니, 대개 해독이 도리어 백성에게 미칠까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태좌(李台佐)가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어제 재집(宰執)의 여러 신하들을 특별히 불러서 주진(賙賑)의 대책을 강구하고 밤이 깊은 뒤에 이르러서야 파하니, 풍성(風聲)의 미치는 바에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기뻐합니다. 옛날에 인조조(仁祖朝)에 고(故) 명상(名相) 이경석(李景奭)이 《주례(周禮)》의 황정(荒政) 12조(條)를 차록(箚錄)하여 한 통(通)을 베껴서 좌석의 오른편에 걸어 둘 것을 청하여, 채택 시행됨을 입었고, 효종조(孝宗朝)에 이르러서 또 이것으로써 경계를 드려서 근근간간(勤懃懇懇)한 의사가 전후에 걸쳐 한결같았습니다. 대저 고(故) 상신(相臣)의 순충 우국(純忠憂國)으로써도 그 양조(兩朝)에 올린 말씀이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대개 주공(周公)의 유법(遺法)이 지극히 정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신이 전하에게 우러러 권면할 바도 또한 어찌 여기에서 벗어나겠습니까?"
하고, 이어 《주례》 대사도편(大司徒篇)의 황정조(荒政條)와 여러 선비들이 해석한 말을 기록하여 올리니, 비답하기를,
"조목별로 진달한 것은 권권(眷眷)한 성의를 볼 수가 있으니, 매우 감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원차(原箚)를 유중(留中)할 것을 명하였다.

 

대사헌 이하원(李夏源)이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흉년을 구제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방도는 마땅히 먼저 적곡(糴穀)을 경감하고 대동 신포(大同身布)를 면제하는 것을 실질적인 혜택으로 삼아야 하며, 그 경비의 용도가 부족한 것은 마땅히 주조(鑄造)한 신전(新錢)으로 그 대신을 보충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대대적으로 주조해서 간폐(奸弊)를 더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진정(賑政)의 죽(粥)을 마련하는 것은 여역(癘疫)의 계제가 되니, 마른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만 못합니다. 상평(常平)·진휼(賑恤) 양청(兩廳)의 창곡(倉穀)을 발매(發賣)하는 규칙과 절전(折錢)을 상납(上納)하는 조령(條令)은 곡식을 저축하는 까닭이 아니니, 마땅히 모두 방금(防禁)해야 합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실상은 용도를 절약하는 데 있으니, 다가올 귀주(貴主)의 이강(釐降)의 예(禮)를 마땅히 검소하게 치러야 합니다. 세선(稅船)은 매양 늦게 출발을 하여 파손을 당하니, 멀리 있는 고을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는 토선(土船)으로 실어 운반하여 5월경에 경구(京口)에 도착되게 하되, 또 마땅히 대감(臺監)과 창관(倉官)을 엄중하게 신칙(申飭)하여 남봉(濫捧)의 폐단을 금해야 합니다. 수령(守令)을 신중히 선택하고 군문(軍門)의 자벽(自辟)605)  하는 법을 폐지하여, 무릇 무변(武弁)으로 만일 문지(門地)와 재주가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비록 오랫동안 벼슬에 종사한 경우일지라도 절대 차견(差遣)하지 말며, 그리고 잡기(雜技)나 외쇄(搌瑣)의 무리에 있어서는 법령을 제정하여 차제(差除)하지 못하도록 한 후에야 쇠잔한 백성들이 거의 소생할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강(江) 연안의 육읍(六邑)과 북도[北路]의 육진(六鎭)은 반드시 시종(侍從) 중에서 성망(聲望)이 있는 자를 선택하되, 간혹 이름 있는 무변으로 염신(廉愼)하고 재능이 있는 자에게 맡겨서 장교(將校)를 훈련 양성하고 군민(郡民)을 어루만져 구휼한 후에야 훗날에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하고, 끝에 가서는 장중(莊重)과 간엄(簡嚴)을 권면하였다.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말은 절실하니, 매우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맨 먼저 진달한 일은 현재 주전(鑄錢)의 원수(元數)가 또한 많지 않다. 양청(兩廳)과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라는 것도 그 말이 또한 옳으니, 따로 신칙을 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0일 기유

임금이 관서(關西)의 곡식을 운반하는 일로 하교하기를,
"열읍(列邑)에 따로 신칙하여 백성의 힘을 크게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백성을 함께 구제하는 일은 인자(仁者)가 마땅히 해야 할 바이요, 수고롭게 하지 않고 잘 처리하는 것은 지자(智者)가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 모름지기 이 뜻을 인식하여 항상 이런 마음을 간직한다면, 남도(南道) 백성을 구제할 수 있고 서도(西道) 백성을 위로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비국(備局)에 명하여 서백(西伯)과 어사(御史)에게 선유(宣諭)하였다.

 

12월 21일 경술

임금이 황해 감사(黃海監司) 윤용(尹容)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관서(關西)의 백성들은 조정에서 곡식을 옮겨 가는 덕의(德意)를 알지 못하고서 반드시 여기서 빼앗아다 저기에 준다고 여길 것이다. 더구나 해서(海西)도 흉년이 들었는데 게다가 쌀을 운송하는 노고까지 더하게 되므로,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잠을 자나 음식을 먹으나 편치가 않다. 경(卿)은 나의 이 뜻을 본받아 민심(民心)을 위안하는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 공물(貢物)의 재감(裁減)에 대해 의논을 하였는데, 응교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바야흐로 크게 절손(節損)하고 크게 진작시키는 조처가 있으셨으니, 여러 신하들이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옛적에 우리 명(明)나라의 효종 황제(孝宗皇帝)께서 일찍이 경비가 날로 군색하다 하여 호부(戶部)를 문책하니, 대답하기를, ‘세입(歲入)은 종전과 같은데 경비가 날로 증가되니, 청컨대 조종조(祖宗朝)의 세하(歲下)의 수량을 취하여 오늘날과 비교해 보소서.’ 하였습니다. 이 말이 오늘날의 약석(藥石)이 될 수 있습니다. 대내(大內)로부터 비록 절손의 정사를 행하시더라도 여러 상사(上司) 및 각처 비용의 종전보다 갑절이나 늘어난 것을, 청컨대 이미 지나간 어떤 연도로써 준식(準式)을 삼게 하여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 감제(減除)하도록 해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一體)라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주달하기를,
"관서(關西)의 쌀 5만 섬을 마땅히 삼남(三南)에 수송해야 하는데, 해로(海路)가 대단히 멀어서 선척(船隻)이 가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삼남으로 하여금 대동미(大同米)를 봉류(捧留)하기를 관서의 5만의 수량과 같이 하게 하고,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관서의 쌀을 가져다 사용하도록 한다면, 도리(道理)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나 일은 양편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선혜청 당상 송인명(宋寅明)이 매우 어렵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도하(都下)는 사방의 근본이니, 선혜청이 여유가 있어야만 도민(都民)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관서(關西)의 소미(小米)606)  는 매우 질이 낮아 대동미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이종성이 배척하여 말하기를,
"성상께서 바야흐로 지성(至誠)으로 백성을 구제할 뜻으로써 절손의 정사를 시행하고자 하시어 윤음(綸音)을 내리심이 애연(藹然)히 마치 불길이 타오르고 샘물이 흐르는 것과 같으니, 여러 신하들은 진실로 마땅히 받들어 순종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민이 만일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면, 비록 소미(小米)로 나의 옥식(玉食)을 대신한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이 일은 단연코 실행해야만 할 것이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르니, 백성의 무리들이 비록 내일 구렁에 빠져 죽더라도 반드시 다시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관서(關西)의 전목(錢木)을 영남에 양급(量給)하고 해서의 상정미(詳定米) 1만 석을 기내(畿內)에 공급할 것을 명하였다.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각사(各司)에 신칙(申飭)하여 힘써 절손해서 다시 경비를 강요하지 말도록 할 것과 무릇 내외(內外)의 토목(土木) 공사를 명년 가을까지 일체 정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금부 죄인(禁府罪人) 이석형(李錫衡)이란 자는 과표(科標)의 현발(現發)로 3년 동안 옥에 갇혀 있었는데, 네 차례에 걸쳐 형신(刑訊)을 시행하였으나 그래도 승복하지 않았다. 판의금(判義禁)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그 정상이 가련하고 본래 죽을 죄가 아니니, 가령 진정으로 자백(自白)하였더라도 충군(充軍)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또 일이 이미 성취되지도 않았으니, 마땅히 참작해 처리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바로 진신(搢紳)의 대표적인 수치거리이다. 그러나 장폐(杖斃)는 지나치니, 상세히 캐물어서 실정을 알아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임금이 날씨가 차갑다 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시킬 것을 명하고, 또 진청(賑廳)의 쌀을 발매(發賣)하는 것을 세초(歲初)에 미리 거행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 중에 백관(百官)의 봉록(俸祿)을 줄일 것을 청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미관 말직은 이 얼마 안되는 급료에 의해서 살아간다. 그 아내와 자식들의 그걸 바라고 사는 것을 생각할 때 하필 줄일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도 또한 하나의 진제(賑濟)이다."
하였다.

 

12월 22일 신해

김시경(金始慶)을 승지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조적명(趙迪命)이 말하기를,
"이광덕(李匡德)이 호남의 도백(道伯)이 되었을 때 무릇 수령이 사용하는 바를 일체 감생(減省)하여 모조리 백성에게 돌리고 양인(良人)으로 흑립(黑笠)을 쓴 자들도 모두 군역(軍役)에 충당시켰으므로,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사모한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덕이 비록 호남에 공로가 있었으나 그 수령에게 폐해를 끼친 점은 적지 않다. 영남 고을에는 이런 큰 흉년을 만나서 오히려 조치하는 바가 있었는데도 호남은 수재(守宰)가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하니, 이것은 어찌 동쪽에 보탬을 주고 서쪽에 손해를 끼친 것과 다르겠는가? 군정(軍丁)을 충당하기 어려운 것에 있어서는 원생(院生)의 폐단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사대부로서 스스로 그 몸을 아끼는 자도 오히려 주인을 배반하는 종을 싫어하여 간혹 와서 붙좇기도 하는데, 더구나 명색이 서원(書院)이란 곳에서 도리어 이런 ‘정(丁)’자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원생을 수용한다는 것은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명가(名家)·거족(巨族)은 애당초 반궁(泮宮)에 들어오지 않으며, 그리고 또 서원(書院)의 자손은 대부분 공경(公卿)들인데도 또한 그 자제를 보내어 입학시키지 않으니, 선정(先正)의 이른바 ‘인물이 묘연(眇然)하여 도리어 이단(異端)의 시기만도 같지 못하다.’는 것이 진실로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난번에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인일(人日)607)  과 칠석(七夕)에 단지 반유(泮儒)608)  를 시험한다면 경유(京儒)를 인진(引進)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내가 말하기를, ‘과거(科擧)로 사자(士子)를 끌어쓰는 것은 군사(君師)된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풍원군의 말도 또한 세상을 개탄해서 한 말이다."
하였다.

 

12월 24일 계축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해의 위에 배(背)가 있었는데, 빛깔은 푸르고 붉었다.

 

12월 25일 갑인

유성(流星)이 규성(奎星)의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두세 자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정언 송징계(宋徵啓)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성상께서는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시어, 정공(正供)은 보류해서 진자(賑資)를 보충할 것을 허락하셨으니, 인은(仁恩)을 입은 바에 누군들 감읍(感泣)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덕의(德意)를 개시(開示)하여 반드시 절약을 하고자 하시고 백성을 위한 하교는 심지어 어공(御供)의 절감에까지 미치시어 애연(藹然)히 변변치 못한 음식을 드시고 굵은 베옷을 입을 의사가 있으시니, 사방에서 전송(傳誦)하여 반드시 잠시 동안이나마 죽지 말았으면 하는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가 어렵습니다. 과연 능히 실심(實心)으로써 실정(實政)을 행하기를 마치 옛날의 명철한 제왕이 노대(露臺)를 아끼고609)  , 직방(織坊)을 파하며610)  , 궁녀(宮女)를 내보내고 구마(廐馬)를 줄이게 한 것611)  과 같이 한다면, 실상이 없는 데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한갓 그 말만 있으면 비단 거듭 신민(臣民)의 희망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의 천심(淺深)을 따지는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말이 절실하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간 허옥(許沃)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권이진(權以鎭)은 경재(卿宰)가 된 몸으로 시골에서 넉넉하게 살면서 다만 곡물(穀物)에 대해 인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언사(言辭)가 해괴하고 패망하였으니, 마땅히 그 관직을 삭탈하고 그 곡식을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지난번에 호서(湖西)의 쇠잔한 고을을 싫어해 회피한 사람은 마땅히 무겁게 책벌(責罰)을 가해야 하며, 이기헌(李箕獻)이 논핵한 이수신(李守身)의 일은 한 번 조사를 거쳐서 그 허실(虛實)을 밝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먼저 이수신을 잡아다 문초하여 핵실하여 처치하소서.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완(李莞)은 일찍이 군읍(郡邑)을 다스렸는데 이미 해괴한 행위가 많았고, 또 그 이력(履歷)이 이 고을에 합당하지 않으니, 마땅히 그 직(職)을 체직시켜 바꾸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이진의 일은 거조(擧措)가 진실로 지나치니 파직시키도록 하되, 애당초 조정에서 명령한 것이 아니니, 하필 그 곡식을 되돌려 줄 것까지야 있겠는가? 호남 고을의 수령들에 대해서는 이미 문비(問備)를 행하였으니, 하필 추가로 문책할 것까지 있겠는가? 이수신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이완의 일은 사조(辭朝)한 지가 얼마 안되니, 마땅히 시험해 보는 것이 옳으며, 자주 체직시키는 것은 아마 민폐(民弊)를 끼칠 것이다."
하였다. 대개 권이진이 공주(公州)에 사는데, 어사(御史) 황정(黃晸)이 장곡(庄穀)을 억지로 분배하여 사고(私庫)를 봉(封)하는 데까지 이르자, 권이진이 ‘이미 재열(宰列)에 있었으니 부민(富民)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사고를 봉하는 조처를 하고 억지로 분배하는 명령을 하는 것은 조정의 체모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편지를 보내 황정을 책망하였는데, 그 말이 화평을 잃은 것이 많았기 때문에 대간(臺諫)의 상소에서 언급하게 된 것이다.

 

12월 26일 을묘

밤에 유성(流星)이 필성(畢星)의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두세 자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진위 겸 진향 정사(進慰兼進香正使) 양평군(陽平君) 이장(李檣)과 부사(副使) 이춘제(李春躋)와 서장관(書狀官) 윤득화(尹得和)가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여 위유(慰諭)하고 보냈다. 좌참찬(左參贊) 김재로(金在魯)가 또한 입시(入侍)하였는데, 김재로가 절손(節損)의 도리를 논하여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흉년든 해에는 하생(下牲)612)  으로 제사지낸다’는 조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큰 흉년이 든 해를 당해서는 비록 제향(祭享)의 용도를 감쇄(減殺)하더라도 아마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능침(陵寢)과 종묘(宗廟)의 제사는 조종조(祖宗朝)에 비하여 더 많아졌는데, 이밖에 여러 가지 향사(享祀)들이 거의 빈날이 없으니, 이로 말미암아 경비가 옛날보다 배나 증가된 것은 본디 그 형세가 그런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국상[國恤] 3년 동안의 제수(祭需) 가운데 인삼 정과(人蔘正果)의 소비가 매우 많으니, 무익한 것으로 유익한 것을 해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만일 하례를 변경하여 위로로 삼는 절차에 따라 특별히 영원히 폐지할 것을 명하신다면, 실로 성덕에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수(祭需)에 대해서는 진실로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으나, 인삼 정과를 감하는 것은 더욱 의리에 해롭지 않다. 인조조(仁祖朝)에서도 또한 채화(綵花)613)  를 만들지 말 것을 명하였으며, 더구나 경휘전(敬徽殿)의 유지(遺旨)는 항상 검약에 있었다. 동조(東朝)께서 또한 인삼 정과를 긴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여 누차 절지(切至)한 하교를 받았으니, 이것은 마땅히 영원히 제거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진청(賑廳)의 궁핍한 상황을 상세히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과 송인명(宋寅明)을 진청의 당상(堂上)으로 삼아야 내가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27일 병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이미 궁액(宮掖)의 비용을 줄일 것을 명하고 어공(御供)으로부터 이하의 것도 또한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신칙(申飭)하여, 마음을 다해 백성을 살려서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도록 하였는데, 사지(辭旨)가 측달(惻怛)하여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 이해의 흉년은 예전에 없던 바로써 백성이 장차 아침저녁에 구학(丘壑)에 빠져서 죽을 형편이었는데, 임금의 긍휼히 여기고 우민(憂悶)하는 바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진구(賑救)의 대책은 대동미(大同米)의 봉류(捧留)를 허락하는 데 이르고, 재생(裁省)의 조처는 어공(御供)의 제수(諸需)로부터 먼저 하였으니,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덕이 지극하고 극진하다 하겠다. 그리고 소미(小米)로 옥식(玉食)을 대신하겠다는 하교와 여러 신하들에게 우리 백성의 목숨을 살리라고 효유(曉諭)하여 목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오는 데 이르른 것은 더욱 성의(誠意)의 도달한 바를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온 동토(東土) 수천리의 백성들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다 성주(聖主)의 은혜였다. 아! 거룩하다.

 

판의금(判義禁) 김동필(金東弼)이 말하기를,
"국청(鞫廳)의 죄수 윤수(尹邃)가 친상(親喪)을 당하였습니다. 전번에 성상의 하교로 인하여 이미 가식(家食)을 전달하였으니, 통부(通訃)를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좌참찬 김재로(金在魯) 등이 말하기를,
"국청 죄수로서 사형을 감면하여 정배(定配)한 자는 친상(親喪)에도 급유(給由)614)  를 하지 않는데, 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부고(訃告)를 전달한다는 것은 후일의 폐단에 관련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호서(湖西)에 굶주려 죽은 사람이 있어서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휼전(恤典)을 내릴 것을 명하고, 즉시 진문(陳聞)하지 않고 또 진구(賑救)하지 않았다 하여 감사(監司) 이형좌(李衡佐)를 무겁게 추고(推考)하였다.

 

장령(掌令) 권상일(權相一)이 인(仁)·지(智)의 설을 소진(疏陳)하고 또 기질(氣質)을 변화시켜 관용과 위엄을 중도(中道)에 맞게 하는 방도를 논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12월 28일 정사

약원(藥院)에서 청대(請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홍치중(洪致中) 등이 날씨가 차가우므로 사직단(社稷壇)의 기곡제(祈穀祭)를 섭행(攝行)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령 내 몸이 손상을 입는 일이 있을지라도 과연 능히 백성에게 이익이 있을 수만 있다면, 내가 감히 스스로 몸을 아낄 수 없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이 아뢰기를,
"본도(本道)에 충재(蟲災)가 있습니다."
하였는데, 박문수(朴文秀)가 또 아뢰기를,
"영남·호남의 사이에도 또한 충재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내년 봄에 또 충재가 성할 것을 염려하여 미리 포제(酺祭)615)  를 행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講)하였다. 이를 끝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옛적에 우왕(禹王)은 좋은 말을 해주면 절을 하였는데, 나는 이 책에 대하여 또한 경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그 조리(條理)가 정제(整齊)하고 안설(按設)이 격절(激切)한 것을 볼 때에, 선정(先正)이 그 당시 성조(聖朝)에게 권권(眷眷)하였던 바가 거의 마치 나에게 친히 고(告)하는 것과 같으니, 그 사람과 같은 시대에 태어날 수 없었던 점을 한스럽게 여긴다."
하고, 이어서 선정신(先正臣)의 자손의 유무(有無)와 사는 곳의 지명(地名)과 서원(書院)의 칭호(稱號) 등에 대하여 물었다. 또 하교하기를,
"선정이 반드시 조정을 화해시키고자 하였던 것은 더욱 세상에 보기 드물게 서로 감통(感通)하는 바가 있다. 근래 서원(書院)에 온갖 폐단이 한꺼번에 발생하기 때문에 내가 몹시 싫어하지만, 만일 이 일로 인하여 나의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면 또한 밥 먹을 때 목이 메인다 하여 먹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다. 더구나 파평(坡平)은 바로 저번에 연(輦)이 경유했던 곳으로 고(故) 상신(相臣) 황희(黃喜)의 묘소에도 오히려 치제(致祭)토록 하였으니 더구나 선정(先正)이겠는가? 자운 서원(紫雲書院)에 제사를 올리게 하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9일 무오

임금이 계주문(戒酒文)을 내리기를,
"순후(醇厚)한 성품으로써 광패(狂悖)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인데 공격하는 것이 많도다. 더구나 술이 또 뒤따라 해롭게 하는구나. 사람이 싫어하는 바는 악(惡)보다 심한 것이 없고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는 적(賊)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스스로 그 적을 불러들이고 스스로 그 악을 만들어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아!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짓는 것을 가르치고 수인씨(燧人氏)가 화식(火食)하는 것을 가르치니, 다만 사람의 봉양하는 바가 지극하고 극진하다. 또 어찌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곡식으로써 사람을 빠뜨리는 기틀을 삼는 것인가? 옛과 이제의 경패(傾敗)를 낱낱이 기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술로 인해서 사람을 상해하고 사람을 살해하여 부형(父兄)을 위태롭고 욕되게 하는 데까지 이르는데, 스스로 그것이 멸륜(滅倫)·패의(悖義)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도 한다. 아! 사람이 세상에 나서 비록 능히 그 도리를 다해서 그 어버이를 봉양하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구체(口體)의 욕심 때문에 그 어버이를 욕되게 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인생 백년에 질병과 사고(事故)를 제하면 남는 시일이 오히려 적은데, 거기다가 또 광약(狂藥)616)  을 멋대로 마셔 그 천성을 해치고 그 몸을 망치니,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술을 많이 빚는 피해는 재물을 축내는 데 이르고 술을 즐기는 해독은 가산(家産)을 기울게 하는 데 이르게 된다. 그것을 금지하는 방도는 군사(君師)에게 있으니, 그것이 어찌 어렵겠는가마는, 그래도 지난(持難)하는 바가 있는 것은 대우(大禹)가 비록 의적(儀狄)617)  을 소원히 하였으나 이미 술을 없애지 않았고, 성현(聖賢)이 예(禮)를 제정함에 있어 제사(祭祀)와 향음(鄕飮)에 모두 그 술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니, 이것이 술이 없을 수는 없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은 농사가 큰 흉년이 듦으로 인해 모든 여러 가지 비용들을 아미 다 절감하였는데, 제한이 없는 소비가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러나 명령은 마땅히 먼저 해야 하고 법은 마땅히 뒤에 집행해야 한다. 먼저 술을 경계하는 글을 보이고 추후에 술을 많이 빚는 데 대한 금령(禁令)을 내릴 것이다. 아! 그대들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은 나의 이 뜻을 인식하여 술을 함부로 마시지 말고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할 것이며, 아! 그대 소민(小民)들은 먼저 스스로 소요(騷擾)하지 말지어다. 만일 혹시 집에서 많은 술을 빚는다면 어찌 능히 숨길 수가 있겠으며, 장차 금령(禁令)을 범한다면 어찌 법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제사에 쓰기 위한 것이나 호구(糊口)를 위한 정도는 내가 금하지 않을 것이다. 아! 비록 능히 옛사람의 길쌈을 해서 자식을 가르쳐 자손들에게 선행(善行)을 끼쳐 준 일은 본받지 못한다지만, 이런 광패(狂悖)한 약(藥)을 만들어서 우리의 무고(無辜)한 백성을 빠뜨리는 자는 나라에서 비록 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적선(積善)을 하여 후손에게 끼쳐 주는 도리에 있어 또한 어찌 크게 어긋나지 않겠는가? 폐부(肺腑)로부터 나오는 말이며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모름지기 가슴 깊이 새겨서 큰 죄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동조(東朝)에 진헌(進獻)하는 것 이외에는 내온(內醞)으로 봉(封)하는 것은 명년 가을까지 절반으로 줄여서 과인(寡人)으로부터 먼저 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엄경하(嚴慶遐)를 헌납으로, 유언통(兪彦通)을 사간으로, 이윤신(李潤身)을 정언으로, 윤흥무(尹興茂)를 장령으로, 윤동형(尹東衡)을 수찬으로, 김유(金濰)를 승지로 삼았다.

 

전 참판(參判) 채팽윤(蔡彭胤)이 졸(卒)하였다. 채팽윤은 6,7세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이름이 났으며, 19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1세 때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한림(翰林)으로 독서당(讀書堂)에 뽑혔다. 숙종(肅宗)이 항상 액례(掖隷)로 하여금 변복(變服)을 하고 그 뒤를 따르게 하여 매양 한 편의 시(詩)가 나오면 번번이 베껴서 대내(大內)로 들여가니, 이에 시명(詩名)이 일세(一世)에 진동하였다. 중년(中年) 이후에는 전야(田野)에 물러나 살며 더욱 문장(文章)에 힘을 쏟으니, 그 시가 왕양(汪洋)하고 장려(壯麗)하였다. 영종조(英宗朝)에 벼슬이 예문 제학(藝文提學)에 이르렀으며, 63세에 졸(卒)하였다. 《희암집(希菴集)》 29권이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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