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기미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해 기전(畿甸)과 삼남(三南)의 심한 가뭄은 근고(近古)에 없던 바이니, 농사를 권장하는 정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아! 농사는 백성들에게 하늘 같은 존재이니, 누가 농사를 부지런히 하지 않겠는가마는, 종자와 식량이 부족한데, 아무리 농사에 전념하려 하더라도 어느 겨를에 할 수 있겠는가? 모내기를 한 폐단은 지난해에 심한 피해를 입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척박한 지역의 사람들은 의(義)를 향하여 힘쓰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은 모름지기 힘쓰도록 하라. 아! 따뜻한 봄이 돌아와 만물이 소생하려고 하는데, 기전과 삼남의 백성들은 굶어 죽는 일이 서로 잇달고 있으니, 그대 도신과 수령은 각각 진휼하는데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도성의 백성들은 일정한 전토가 없어 일정한 식량이 없고, 의뢰하는 바는 오직 공물(貢物)뿐이다. 지금 첫봄을 맞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도성도 구제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도신(道臣)이 교화 펴기를 바라겠는가? 묘당(廟堂)과 진휼청(賑恤廳)의 신하들은 구제하여 살리는 정치를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기곡제(祈穀祭)001) 를 사단(社壇)에서 지내려 하였는데, 마침 아이를 낳은 후궁(後宮)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궐 안에 이미 정결을 기하는데 흠이 되는 일이 있으니, 기곡제의 친행(親行)이 적당한지의 여부(與否)를 대신(大臣)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고례(古禮)에는 비록 근거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끝내 재계(齋戒)하고 목욕(沐浴)하는 뜻에 흠이 되니, 아마도 친히 기도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마침내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다.
호남과 영남에 포제(酺祭)002) 를 행하도록 명했다가, 조금 후에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지난 겨울 호남과 영남에 벌레가 보리 뿌리를 갉아먹었는데,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가 장문(狀聞)하였으므로, 임금이 봄철 뒤에 점점 성해질 것을 염려하여 이런 명령이 있었다. 그러나 충재(蟲災)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먼저 포제를 행하는 것은 정성으로 신(神)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도로 우선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1월 3일 신유
부사직 이세근(李世瑾)이 다시 상소하여 치사(致仕)003) 하기를 원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월 4일 임술
홍문관 【응교(應敎) 이종성(李宗城)·부수찬(副修撰) 윤휘정(尹彙貞)이다.】 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맨 먼저 선덕(善德)을 체득하여 인(仁)을 행하도록 청하고, 다음으로, ‘전하께서 처음 즉위해서는 정치에 힘쓰셨는데, 그럭저럭 원만(晼晩)해지고 지기(志氣)가 떨어지고 해이해졌으니 한 번 시작하는 정치는 지금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하고, 인해서 몸을 수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진달하였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인욕(人慾) 이기기를 얼음 녹듯이 하며, 천리(天理) 보존하기를 만물 싹트듯이 하며, 나라 다스리는 도리가 돌기를 북두성이 돌듯이 하고, 무너진 기장 진작시키기를 우레가 벼락을 치듯 하며, 때맞춰 내리는 비가 만물을 자라게 하듯이 하고, 볕이 온화하듯이 세속의 더러움을 씻고, 백성들의 곤궁함을 구제하여 전진을 일삼도록 생각하고, 지나치면 반드시 개혁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여 덕(德)이 하늘과 같게 하소서."
하고, 마지막으로 뜻 세우기를 진실되고 전일하게 하고, 제때에 학문하는 뜻을 말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1월 6일 갑자
호조 낭청(戶曹郞廳)을 파견하여 함경도(咸鏡道) 안변부(安邊府)에서 동(銅)을 캐게 하였는데,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의 주청을 따른 것이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교외(郊外)에서 도성으로 들어오자, 임금이 청음정(淸陰亭)에서 불러 보았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국가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운데, 후궁(後宮)에서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부터 중외(中外)에서 목을 빼어 크게 기다리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헛되게 되고 말았습니다. 전하의 춘추(春秋) 이미 40이 가까우니, 신은 우려(憂慮)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박문수(朴文秀)가 송축(頌祝)하는 말이 있으므로, 내가 듣고서 감격하여 소나무 길러 정자 구경하겠다는 전교를 내린 적이 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앞으로 받을 경사(慶事)가 있다.’고 하였으니, 내가 만약 착한 일을 쌓았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현종(顯宗)에게 아뢰기를, ‘옛날에는 궁중의 법도가 엄숙하여 매일 정궁(正宮)과 후궁(後宮)을 나열하여 적고, 수점(受點)하여 성장(盛裝)한 옷차림으로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종(中宗)께서는 언제나 내전(內殿)에다 점을 찍었으므로, 내전에서 늘 말하기를, 「나이가 젊은 후궁도 많은데 어찌하여 매일 늙은 몸에게 점을 찍으십니까? 성장한 옷차림도 감당하기 어려우니, 원하건대, 이렇게 하지 마소서.」 하였습니다.’ 하자, 신의 외조부(外祖父)인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이 송시열의 말로 인하여 아뢰기를, ‘중종께서는 여색(女色)을 탐하는 마음이 없고 내전에서는 후궁에게 양보하는 덕(德)이 있었으므로, 규문(閨門) 안이 이와 같았으며, 자손이 많고 복록(福祿)이 무궁한 까닭이 되었으니, 진실로 후세의 임금이 당연히 본받아야 할 바입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전하에게 즉시 숙원(淑媛)을 뽑도록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후사(後嗣)를 구하는 도리는 광박(廣博)을 우선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많이 하여 백성들과 화합하는 것으로 오래도록 복을 기원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내가 덕(德)이 적은 까닭에 자책하는 마음 실로 많다."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백성들과 화합하는 도리도 여러 가지이지만, 각사(各司)와 제궁(諸宮)의 절수(折受)004) 등과 같은 일은 일체 혁파한 후에야 바야흐로 백성들과 화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수찬 홍봉조(洪鳳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신년005) 역적의 변고는 근본이 깊고 견고해서 남겨 놓은 흉측함과 해독이 갈수록 더욱 가혹해져 나필웅(羅必雄)의 칼과 나홍언(羅弘彦)의 책자는 그 계획한 바가 이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오늘날의 급무(急務)는 오직 엄중하게 징토(懲討)해서 의리(義理)를 밝히고 간악한 싹을 영영 꺾어서 국가의 정책을 크게 안정시킴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한 번 탕평(蕩平)의 논의가 일어나면서부터 충신과 역적이 뒤섞이고 의리가 어지러워졌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진실로 탕평을 업무로 삼으신다면, 한갓 그 이름만 좋아하지 마시고 그 실상을 얻도록 힘쓰소서. 어떤 경우를 한갓 그 이름만 좋아한다고 말하느냐 하면, 충성과 간사를 살피지 아니한 채 붕당(朋黨)을 깨뜨리는 것만으로 주장을 삼는 것이니, 이는 한(漢)나라·당(唐)나라와 소성(紹聖)006) 때 이미 겪은 일이며, 주문공(朱文公)이 유정(留正)과의 편지에서 상세히 말하였습니다. 어떤 경우를 그 실상을 얻도록 힘쓴다는 것이냐 하면, 홍범(洪範)007) 황극장(皇極章)에 선유(先儒)가 해석하기를, ‘치우치는 것과 기우는 것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에서 생기고, 치우치고 공정하지 못하며 상도에 어긋나고 바르지 못한 것은 자신의 사사로움이 일에 나타난다.’ 하였으니, ‘사사로움을 없앤다[去己私]’는 세 글자가 바로 탕평의 주장이 되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 요즈음의 행동거지가 한나라·당나라, 소성(紹聖) 때의 일과 서로 비슷하며, 홍범과는 서로 비슷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혐의스럽다는 한 글자를 마음에 먼저 드러내시니, 혐의스럽다는 것은 바로 사사로움입니다. 그래서 닿는 곳마다 병폐를 받게 되고 좌우(左右)로 막히게 되어 정령(政令)과 행동거지가 순수하게 천리(天理)의 공정함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벌과 포상으로 말하면 ‘전하에게 충성하는 자는 바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충성하는 것인데, 자신에 대한 사사로운 충성과 같이 보고 아직도 쾌하게 신원(伸冤)하지 않으셨으며, 전하에게 반역하는 자는 바로 종묘와 사직에 반역하는 것인데 자신에 대한 사사로운 반역같이 보아 오히려 덮어 주십니다. 그리고 인재를 기용하는 것으로 말하면, 그 임용한 바는 대부분 허물을 지닌 사람과 심술이 바르지 않고 아첨을 잘하는 무리이며, 그 물리쳐버린 바는 대부분 정도를 지키는 인사와 고지식하고 순박한 부류들이니, 장차 의리가 흔적도 없어지는 데 이르고 천지가 어두운 밤처럼 될 것이니, 흉당(凶黨)에게 있어서는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세상의 도덕과 종묘 사직에는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세력과 이익이 모이는 곳에는 저절로 당(黨)이 만들어지고 자기네 편끼리 비평을 하는데, 절반은 한(漢)나라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오랑캐의 심장을 가진 자들이니, 사류(士類)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굳은 지조로 벼슬하는 자가 어찌 기꺼이 함께 더러운 가운데로 뒤섞여 들어가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상소를 보고 기뻐하지 않으면서 승정원으로 하여금 돌려주게 하였다.
1월 7일 을축
사헌부 【지평 정희보(鄭熙普)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수(尹邃)에게 사형을 감(減)하여 섬에다 귀양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엄중히 국문(鞫問)하도록 청하였으며, 남태적(南泰績)을 섬으로 귀양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엄중히 국문하도록 청하였으며, 역적 이탄(李坦)의 처자(妻子)를 연좌시켜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도록 청하였으며, 이명언(李明彦)은 다시 잡아다 국문하도록 청하였으며, 김중기(金重器)를 귀양지로 도로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였으며, 권섭(權攝)에게 사형을 감하여 섬으로 귀양 보내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였으며, 물고(物故)한 죄인 이엽(李燁)·이전(李)의 여러 아들은 조사해내어 섬으로 귀양 보내도록 청하였으며, 이형(李炯)과 이식(李烒)의 정배(定配)를 도로 정지하고 엄중히 국문하도록 청하였으며, 목천현(睦天顯)·목성관(睦聖觀)에게 사형을 감하여 섬으로 귀양 보내는 것을 정지하고 엄중히 국문하도록 청하였으며, 이하택(李夏宅)은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히 형신(刑訊)하도록 청하였으며, 이봉상(李鳳祥)은 형률(刑律)에 의거하여 처단(處斷)하기를 청하였다.】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월 8일 병인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선정신 이이(李珥)가 도통(道統)을 전한 차례를 정한 것을 보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첫머리에 두었다. 사성(四聖)008) 의 이름을 휘(諱)한 것은 효종조(孝宗朝)에서 시작하였는데, 유독 문왕과 무왕에게만 강독하는 자리에서 휘하지 않으니, 성인(聖人)을 높이는 도리가 아니다. 이 뒤로는 일체 휘하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구경산(丘瓊山)009) 의 《대학연의(大學衍義)》는 매우 정밀하고 상세하지만, 오히려 이 책처럼 절실하고 긴요하지는 못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진정표(陳情表)010) 를 읽고 몹시 슬퍼하는 마음이 없으면 효자(孝子)가 아니며, 출사표(出師表)011) 를 읽고 격렬해지는 마음이 없으면 충신(忠臣)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나도 말하기를, ‘선정의 차자를 읽고 흥기(興起)하는 마음이 없으면 학문에 나아갈 수 없다.’ 하였다. 내가 선정의 자운 서원(紫雲書院) 편액(扁額)을 쓰려고 하였었는데 효종(孝宗)께서 이미 사액(賜額)하셨음을 들었기 때문에 특별히 《성학집요》의 서문(序文)을 지어 표장(表章)하는 뜻을 보인다."
하고, 인해서 기사관(記事官) 조명리(趙明履)에게 쓰도록 명하여 《성학집요》의 서문을 삼게 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선정의 후사(後嗣)가 영체(零替)하여 단지 서손(庶孫)이 있을 뿐인데, 전(前) 현감(縣監) 이연(李綖)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사람을 본 뒤에 기용하는 것이 가하다. 승정원에서 분부하여 그를 올라오게 하라."
하였으나, 이연이 늙고 병들어 오지 못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해도(該道)로 하여금 봉사손(奉祀孫)을 탐문(探聞)하여 조용(調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월 9일 정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장차 교외(郊外)로 돌아가려 하므로, 임금이 청음정(淸陰亭)에서 불러 보았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비절(悲切)한 전교를 받았는데, 소나무를 길러 정자를 구경하겠다는 비유에 이르러서는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국가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움이 옛날부터 오늘날과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숙종(肅宗)의 혈속(血屬)이 비록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효종과 현종의 혈속이 있을 것 같으면, 진실로 곧장 세자로 세우도록 청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지금은 이미 지향(指向)할 곳이 없으므로, 형세가 장차 성사(聖嗣)의 탄생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르고 늦어지는 것은 점칠 수 없으니, 종묘와 사직을 장차 어디에다 의탁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속에 잠자코 운영함이 있겠지만, 만약 명종조(明宗朝)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수자(數字)의 친서(親書)를 은밀하게 내전(內殿)에다 붙이고, 뒷날 성사(聖嗣)가 탄생하기를 기다린 뒤에 내전에서 그 친서를 없애도록 한다면, 거의 일맥(一脈)이나마 의뢰하는 방법이 있게 되고, 인심이 위태롭고 두렵게 여김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진달한 바가 국가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나, 오늘날의 세도(世道)가 옛날과 달라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를 하늘에 맡기고 조용하게 진정시킬 뿐이다."
하였다.
1월 10일 무진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 유언통(兪彦通)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적곡(糴穀)을 징수하는 기간은 당연히 추수가 시작되는 초기에 있어야 하는데, 제도(諸道)에서 분등(分等)하는 계문(啓聞)과 묘당(廟堂)에서 사목(事目)을 반포하는 것이 더러 깊은 겨울철에 이르기도 하므로, 수령들이 그 지시를 기다리기 어려워 전례대로 부과하여 재촉하니, 백성들이 어떻게 끊임없이 소란스럽게 흩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제도와 비변사(備邊司)에 신칙(申飭)해서 각도의 분등은 반드시 추말(秋末)에 장계(狀啓)하도록 하고, 묘당의 사목은 반드시 초동(初冬)에 반강(頒降)하도록 하되, 만일 견감(蠲減)하는 혜택이 기한에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을 경우 도신(道臣) 및 비국(備局)의 당상관(堂上官)을 종중 논벌(從重論罰)하도록 영구히 정식(定式)을 삼으소서. 그리고 봄철이 이미 닥쳐 진구(賑救)하는 일이 바야흐로 시급한데, 각 고을에서 기민(飢民)을 가려내는 즈음에 적곡의 납부를 회피하는 백성은 모두 대상에 넣은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구렁에 뒹굴어도 그들을 구제하지 않으니, 각 고을로 하여금 포흠(逋欠)에 구애하지 말고 모두 가려내어 진휼하도록 허락하여 편안하게 모여 살도록 하는 방도가 적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강교(江郊)에서 도둑이 발동한 근심은 국가의 기강(紀綱)에 관계되는데, 마침내 중형(重刑)으로 다스리는 조처가 부관(部官)에게 돌아갔습니다. 대체로 지체나 신분이 낮고 한미하기는 부관보다 더 심함이 없으니, 아무리 동선(董宣)의 강항(强項)012) 을 본받아 박격(搏擊)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명문가(名門家)의 자제(子弟)로 식견이 뛰어난 자를 가려서 제수하여 그 작질(爵秩)을 드러나게 하고, 권력을 빙자해서 그들로 하여금 규금(糾禁)하고 적발(摘發)하게 한다면, 국가의 체모가 높아지고 정치의 교화가 행해질 것입니다. 또 듣건대, 포도청(捕盜廳)에서 이미 몇 명의 간악한 무리를 체포하였다고 하는데, 이들은 반드시 부하(部下)의 불량 소년들로, 강외(江外)에서 불러 모은 무리와 얼음을 타고 서로 유인하여 횃불을 올린 변고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근기(近畿)의 각 고을로 하여금 염탐하여 뒤쫓아 체포하도록 함이 적당합니다."
하고, 끝 부분에 또 삼남(三南)의 조선(漕船)을 일부러 패몰(敗沒)시킨 폐단을 말하고, 제도에 경계하여 각도(各島)와 각포(各浦)에 나아가 별도로 염탐해서 일일이 죄상을 감안하여 처단하게 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모두 그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충청 도신의 장문(狀聞)으로 인해서 안면도(安眠島)의 잡목(雜木)을 베어다 소금을 구워 진휼하는 데 보충하도록 특별히 명하셨는데, 장차 도끼를 들고 난입(亂入)하여 반드시 생소나무를 베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전선(戰船)의 재료로는 오로지 안면도만을 의뢰하고 있으니, 신은 〈잡목을 베도록〉 허락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어보고 마침내 지난번의 명을 정지하게 하였다.
지금부터 한림(翰林)으로 시정기(時政記)를 수납(修納)하지 않은 자는 6품(品)에 승진시키지 말게 영구히 정식(定式)을 삼도록 명하였는데, 좌참찬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당시 한림원(翰林苑)의 옛날 규정이 해이해져 박문수(朴文秀)·이주진(李周鎭) 같은 이는 모두 사기(史記)를 편수하지 않고 6품에 승진하였기 때문에, 김재로가 주청한 것이었다.
1월 11일 기사
조명교(曺命敎)를 대사간으로, 김권(金權)·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송인명(宋寅明)을 예조 판서로,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가 《당감(唐鑑)》을 강독하였다. 시강관(侍講官)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수(隋)나라 왕실의 자손을 죽이지 않고 또 녹용(錄用)하였으니, 이는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국초(國初)에 왕씨(王氏)의 자손을 배에다 싣고 바다에 빠뜨린 일은 바로 정도전(鄭道傳) 무리의 계책이며, 성조(聖祖)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왕씨 자손을 추천하여 아뢰라는 전교가 있었으나, 전후에 송경 유수(松京留守)013) 가 한 사람도 추천하지 않았다."
하자, 이종성이 아뢰기를,
"왕씨 자손이 반드시 모두 송경에만 사는 것이 아니고, 기읍(畿邑)에 흩어져 사는 이도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백(畿伯)에게 추천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고려조의 신하 김주(金澍)의 자손을 거두어 기용하게 하였다. 김주는 고려 말엽에 중국에 사명을 받들고 갔다가 되돌아와서 압록강에 이르러 고려가 이미 망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3일 동안 통곡하다가 조복[朝衣]을 집안 사람에게 부쳐 보내어 혼(魂)을 불러 장사지내게 하고, 마침내 중국으로 들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아니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검토관(檢討官) 윤동형(尹東衡)이 임금에게 아뢰고 그 자손을 녹용하도록 청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재신(宰臣)을 파견하여 신라 시조(新羅始祖)의 숭덕전(崇德殿)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숭덕전은 경주(慶州)에 있는데, 시강관 이종성(李宗城)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치제하도록 주청하고, 또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바야흐로 명을 받들고 도내(道內)에 있으니, 재신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한다면 더욱 성덕(聖德)이 빛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인해서 치제한 뒤에 그 능침(陵寢)을 봉심(奉審)하도록 명하였다.
승지를 파견하여 평양(平壤)의 단군묘(檀君廟)에 치제하도록 명하였다가 도로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지난해에 이미 단군묘에 치제하고 동명왕묘(東明王墓)에 배향(配享)하였는데, 또 바야흐로 치제하려 하기 때문에 그 번독(煩瀆)을 혐의스럽게 여긴 것이었다.
1월 12일 경오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이정박(李挺樸)을 사적(仕籍)에서 영원히 삭제하고 탐리(貪吏)의 사례에 의거하여 자손들은 청현직(淸顯職)에 임용을 허락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이정박이 남포(藍浦)의 전토(田土) 일로 윤명(尹明)이란 자와 서로 소송하였는데, 윤명이 곤장을 맞다가 죽는 데 이르렀었다. 이때에 이르러 형조(刑曹)에서 조사하여 아뢰니, 당시 이정박이 벌써 죽었지만 임금이 그를 몹시 가증스럽게 여겨 이런 명이 있었다. 그 당시 남포의 수령도 삭적(削籍)되고 도신은 파직(罷職)되었다.
헌납 엄경하(嚴慶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해의 기근(飢饉)은 을사년014) 과 병오년015) 보다 심합니다. 경도(京都)는 국가의 근본이 되고, 급박함을 구제하는 정치는 단지 발매(發賣)하는 데 달려 있으므로, 세후(歲後)에 나누어 지급하라는 성명(成命)이 있었지만,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윽이 듣건대, 묘당의 의논은 3등(等)과 6등 사이에 있는데, 만일 넉넉한 숫자의 조곡(糶穀)을 내어 널리 구제하는 데 힘쓰고자 한다면, 국가의 재력으로는 지급하여 구휼하지 못할 바가 있고, 경비(經費)를 염려하여 전적으로 줄이는 것을 일삼는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장차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은 흩으면 오히려 다시 모을 수 있겠지만, 백성이 없으면 어떻게 나라 구실을 하겠습니까? 신은 한 달에 두 등급으로 하는 것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생각건대, 시중의 가격이 공평하면 백성은 저절로 굶주리지 않게 됩니다. 지금 만약 발매(發賣)를 후하게 하여 한 달에 1만여 석(石)의 쌀을 항상 민간에 두고서 모든 공가(貢價)는 으레 전포(錢布)로 나누어 주던 것을 쌀로 내어 준다면 시중의 가격은 반드시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양하길(梁夏吉)이 자진하여 미곡(米穀)을 내어 한 지경의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므로, 조용(調用)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전조(銓曹)에서 아직도 거행을 늦추고 있으니, 분명한 전지를 내려 즉시 거행하도록 함이 적당하겠습니다.
마전 군수(麻田郡守) 정동윤(鄭東胤)은 조정에서 준 재결(災結)을 당초에 백성들에게 주지 않았는데, 백성들의 원망이 시끄러워진 후에야 대동재(大同災)라고 일컬으며 결(結)마다 단지 4되의 쌀만 감해 주어 책망을 면하는 계책을 삼으려 하였으니, 먼저 파직시키고 그대로 잡아다 조사함이 적당하겠습니다.
그리고 황정(黃晸)과 권이진(權以鎭)의 사건은 시비(是非)를 서로 제기하여 떠들석함을 금하지 못하였는데, 어사(御史)가 억지로 봉고(封庫)016) 한 것과 중신(重臣)이 서사(書辭)를 가리지 않은 것은 균등한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이미 권이진을 재능이 없다 하지 않으시고 경재(卿宰)의 반열에 두셨습니다. 지금 당당한 천승지국(千乘之國)의 경재로써 받은 죄명(罪名)이 인색하다는 데 있으니, 만일 한(漢)나라 때 기절(氣節)이 있는 인사가 이런 입장을 당하였더라면, 반드시 자결하여 스스로 변명하였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권이진을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조정의 체모를 높이소서.
그리고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현명(趙顯命)이 진주 목사(晋州牧使) 이정작(李庭綽)을 개차(改差)하기를 장청(狀請)하고, 인하여 지명(指名)하여 자벽(自辟)017) 하였다고 합니다. 대체로 재능에 따라 임용하는 것은 전조의 직분이며, 다스리는 실적을 살펴보고 승진시키거나 내쫓는 것은 방백(方伯)의 책임인데, 조현명이 자기 권한 밖의 일을 멀리서 주관하며 오직 배척하기를 호소하는 마음뿐이니, 자기 마음대로 함이 심함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억제를 가함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위 항목의 사건은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도신이 자벽(自辟)하는 것은 바로 전례인데,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양하길(梁夏吉)은 이미 조용하도록 명하였으니, 다시 하교할 필요가 없으며, 나머지 다른 일은 모두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당시 해마다 큰 흉년이 들었는데 권이진이 호서(湖西)의 의장(義庄)에다 곡식을 쌓아 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어사 황정(黃晸)이 강제로 그 창고를 봉(封)해버렸으므로, 권이진이 화를 내어 말한 적이 있었는데, 어사가 그것을 들추어내어 파직하는 데 이르렀기 때문에 엄경하(嚴慶遐)의 상소가 이와 같았었다. 그 뒤에 연신(筵臣) 이종백(李宗白)이 또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들인 도적 같은 신하라는 등의 말로 권이진을 논박하며 배척하니, 윤동형(尹東衡)이 아뢰기를,
"권이진이 인색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어서가 앞질러 자의로 봉고(封庫)한데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예조에 명하여 관원을 보내어 중화(中和)의 동명왕묘(東明王墓)에 치제하게 하였는데, 지경연사 김취로(金取魯)이 말을 따른 것이었으며, 묘를 새로 수축하였기 때문이었다.
유신(儒臣)을 파견하여 자운 서원(紫雲書院)에 치제하게 하였다. 당시에 임금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독하면서 친히 서문(序文)을 짓고 선정(先正)에 대하여 흥취를 느껴 이런 명이 있었다.
대사성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태학(太學)의 재임(齋任)을 염피(厭避)하는 부류는 번번이 모두 저절로 삭제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저절로 삭제된 사람은 5년을 기한하여 정거(停擧)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지경연사 김취로(金取魯)가 아뢰기를,
"선비들의 풍습을 경계하고 힘쓰게 하는 것은 사유(師儒)의 책임이니, 이는 연석(筵席)에서 진품(陳稟)할 것이 아닙니다. 또 정거시키는 여부를 가지고 사자(士子)를 조절(操切)하는 것은 아마도 교도(敎導)하는 좋은 법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참으로 옳다. 저절로 삭제되는 폐단은 오로지 단지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엄중히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강관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그 근본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비록 지난날 조윤성(曹允成)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역시 선비를 대우하는 예의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조윤성은 일찍이 태학(太學)의 재임 추천(齋任推薦)에 들었었는데, 재임으로 추천되고서 권무(勸武)한 자는 예전에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권무를 염피(厭避)하는 것은 그 풍습이 진실로 미워할 만하나, 이것으로 인하여 심지어 ‘효시(梟示)’ 두 글자로 협박하기에 이른다면, 어찌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너무 지나치게 곧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계(兪棨)의 손자에 역시 유주기(兪胄基)가 있다. 인재(人才)가 적고 장재(將才)는 더욱 어려우니, 지금 미리 저축하는 것은 대체로 뜻이 있어서이다."
하였다.
1월 13일 신미
교리 권혁(權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비록 매우 어리석기는 하지만 그 벼슬이 삼사(三司)에 속하며, 말은 비록 고요하지만 관련되는 것은 대의(大義)입니다. 대저 삼사의 관원으로 망령되게 대의를 논하다가 해야 할 말을 못한다면, 신은 실로 그 직분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미 그 직분을 상실하고서도 오히려 다시 반열에 나아가는 것은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올린 한 번의 상소에 대해서도 비답(批答) 없이 도로 내리시고, 심지어 보고 싶지 않다는 전교가 있었으니, 신이 어찌 감히 삼사의 관원으로 자처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신료(臣僚)들에게 책임을 지워 부리는 방법이 이미 언의(言議)를 널리 채택하여 실질적인 성과를 보존하도록 힘쓰지 아니하고, 오직 모두 거두어 함께 임용하고자 하여 형식을 꾸미고 독촉하는 것을 일삼음이 거의 마소[馬牛]에게 굴레를 씌워 노예(奴隷)처럼 부리는 것과 같으니, 성명(聖明)께서 예우하여 부리는 뜻에 있어 과연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엄중한 하교를 내리고 그 상소를 되돌려 주게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경연(知經筵) 송성명(宋成明)이 아뢰기를,
"이번에 칙사(勅使)를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신이 철옹 산성(鐵瓮山城)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실로 하늘이 만든 관방(關防)이었습니다. 옛날에 상신(相臣) 황희(黃喜)가 처음으로 이 성을 설치하면서 규모와 제도가 넓고 원대하였는데, 요즈음에는 등한시하여 내버려두어 양식도 점점 줄어들어 현재 남아 있는 수효가 4만 석(石)에 불과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본도(本道)에서 구획(區劃)하도록 거듭 경계하여 10만 석을 한도로 머물러 두게 해서 환란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송성명이 어천 역관(魚川驛館)을 영변 성내(寧邊城內)로 옮기기를 청하고, 또 북관(北關)의 친기위(親騎衞)018) 예(例)에 의거하여 별무사(別武士) 수백 명을 영변에다 창설해서 배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해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1월 13일 신미
이찬(李譔)을 특별히 임명하여 별군직(別軍職)으로 삼았다. 이찬은 바로 안흥진(安興鎭)에 방죽을 쌓는 의논을 주장한 자인데, 이때에 이르러 무신(武臣)으로서 경연(經筵)에 시강하고 있었다. 임금이 이찬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전교하기를,
"안흥진(安興鎭)의 일은 박문수(朴文秀)가 살펴본 뒤에 진달한 내용이 그대와 다르니, 이해(利害)와 형편을 그대가 상세히 아뢰도록 하라."
하자, 이찬이 아뢰기를,
"지도(地圖)를 살펴보실 것 같으면 거의 환하게 아실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소매에서 그 곳의 지도를 올리며 아뢰기를,
"이 진(鎭)은 처음에 동양위(東陽尉)가 절수(折受)한 지역으로 해상 방어의 요충(要衝)이 되어 강도(江都)의 요해처를 만들었으므로, 효종조(孝宗朝)에 나주(羅州)의 구목장(舊牧場)을 동양위 집에다 바꿔 주고 성을 쌓기 시작하여 진을 설치하였으며, 현재 방죽을 쌓는 것이 실제로 본진(本鎭)의 대사(大事)가 되었습니다. 대체로 안흥(安興)은 육지와 40리(理)를 연(連)해 있고 바다에 걸쳐 섬을 이루었으며, 성 밖에는 높은 산이 첩첩이 둘러 있습니다. 물은 하루에 두 차례의 밀물이 있는데, 조수가 물러가고 물이 없어지면, 문득 대로(大路)를 이루게 되며, 조수가 밀려와 물이 차면 문득 장강(長江)을 이루게 됩니다. 적(賊)이 이때를 기다렸다가 육지에서는 보병(步兵)과 기병(騎兵)으로 도달하게 하고 물에서는 배로 소통하게 한다면, 방어하는 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만약 방죽을 쌓아 조수를 차단하여 영원토록 진창인 수전(水田)을 만들고, 성 안의 백성들이 이것을 의지하여 농사를 지으며 사시(四時)로 항상 머물게 한다면, 혹시 급박함이 있더라도 한번 호령하는 사이에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평탄하게 몰아칠 적로(賊路)를 끊어 버렸고, 또 성을 지킬 만한 건장한 군졸을 얻었으니, 이른바 한 가지 일을 하여 두가지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칭찬하고 마침내 특별히 차임하였다.
1월 14일 임신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경종(景宗)의 행장(行狀)을 지어 올렸다.
서명연(徐命淵)·김응복(金應福)을 승지로 삼았다.
1월 15일 계유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1월 16일 갑술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아뢰기를,
"본국(本局) 군병(軍兵)들의 옷감을 오로지 보포(保布)에 의뢰하는데, 비록 흉년을 만나더라도 원래 재량하여 감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로 청한 것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재량하여 감하고, 대신 호조(戶曹)·병조(兵曹) 양조와 경외(京外)의 영문(營門)에서 가져다 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년에 개량하여 감한 뒤에 부족한 수가 4백 50여 동(同)에 이르는데, 호조와 병조에 저축한 것 또한 모두 떨어졌습니다. 청컨대,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 병영의 별도로 준비한 은전(銀錢)과 면포(綿布) 5백 동(同)을 한정해서 나누어 정해서 획급(劃給)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양천(陽川) 수군(水軍)의 액수 72명을 해서(海西)의 여러 고을에 옮기도록 명하였는데, 양천 이 고을은 작으면서 군사가 많기 때문이었다.
평안도(平安道) 안릉현(安陵縣)을 승격시켜 안주목(安州牧)으로 삼았다. 처음에 안릉은 흉역(凶逆)이 발생한 곳이라 하여 강등시켜 현으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10년의 기한이 찼기 때문에 옛이름으로 회복시킨 것이다.
김약로(金若魯)를 지평으로 삼았다.
제주(濟州)의 공마(貢馬)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사복시 도제조(司僕寺都提調) 홍치중(洪致中)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당시에 양호(兩湖)019) 에 크게 흉년이 들었는데, 제주에도 진휼(賑恤)을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양남(兩南)020) 에서 대동곡(大同穀)을 유치시켜 진구(賑救)하게 하는 대신 지금 관서(關西)의 곡식을 수송하여 오는데, 창고 속에서 묵어서 썩어 저절로 축이 나는 것이 많습니다. 일찍이 신해년021) 에 곡식을 옮겼을 때 본도(本道)의 감사였던 민유중(閔維重)이 1곡(斛)마다 쌀 10두(斗) 5승(升)을 더 주었는데, 9두 5승은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모곡(耗穀)022) 을 제외하고 도로 거두어 들였으므로, 곡식은 축나는 것이 없고 백성 또한 원망하지 않았으니,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거행함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남 어사 이광덕(李匡德)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이광덕이 호남의 사정을 익숙하게 알기 때문에 특별히 경영하여 진휼(賑恤)하게 하였는데, 이광덕이 여러 차례 병(病)이 들었다고 말하고 부임하지 않으므로,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어 파직시킨 것이다.
1월 17일 을해
정언 이윤신(李潤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관서(關西)의 전곡(錢穀)을 옮겨서 수송하라는 명은 대체로 남방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성의(聖意)에서 나왔으나, 서번(西藩)에서 비축한 것은 바로 변경(邊境)에서의 환란에 대비한 것이니, 전번의 명을 정지함이 적합하겠습니다. 그리고 경기(京畿)의 백성은 구실이 무거워서 1결(結)에 납부하는 것이 거의 5,6냥(兩)에 이르니, 방백(方伯)으로 하여금 상세히 방문(訪問)하여 품지(稟旨)하게 해서 참작하여 결정함이 적당하겠습니다. 해서(海西)의 감영(監營)에서는 20년을 내려오면서 각역(各驛)의 복호(復戶)023) 를 사들여 봄에 값을 치르고 가을에 이익을 취하며 영부(營府)에서 역졸(驛卒)과 이익을 다투니, 사체가 자질구레합니다. 즉시 혁파하고 그것을 처음 시작한 도신을 처벌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지난번 세 사람의 사신(使臣)이 마음대로 국서(國書)를 고친 것은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되므로, 잡아오도록 청한 계문(啓聞)이 이미 법을 집행하는 뜻에서 나왔는데, 바로 특교(特敎)로 인하여 가볍게 처분하였으나, 발설하였다가 도로 정지하였습니다. 신은 잡아오도록 청한 계문은 끝내 허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정계(停啓)한 대신(臺臣)은 견책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강호(降號)한 고을은 햇수를 기준하여 도로 승격시키는 것이 바로 바꿀 수 없는 전례입니다. 홍양(洪陽)은 기한이 찼는데도 아직 강등시켜 둔 것은 비록 흉년이 들어 영송(迎送)을 염려한 데에서 나왔다 하나, 사체가 구차스러우니, 즉시 칭호를 승격시켜 국법(國法)을 보존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지난번 칙사(勅使)의 행차가 해서(海西)에 도착하였을 때 호행 대장(護行大將)과 도차사원(都差使員)이 불화가 생긴 일이 있었으며, 심지어 통역관[通渭]에게 절을 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동정을 빌었으니, 그들이 국가에 치욕을 끼친 것이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잡아다 문초하여 정죄(定罪)함이 적당합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위 항목의 일은 삼남에 흉년이 든 것을 위해서인데, 사정에 어두운 무리들이 이를 저지하며 방해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백성을 부리는 일은 도신 또한 변통할 수 있는데, 어찌 반드시 품지(稟旨)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복호에 대한 일은 도신에게 분부하였는데, 과연 이런 폐단이 있다면 금지하여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신에 대한 일은 만약 청한 바에 준거한다면 공과(功過)가 서로 맞먹어 처벌을 베풀 데가 없으니, 먼저 그 직임을 삭탈한 것도 참작하고 헤아린 것이다. 홍양(洪陽)을 아직 강등시켜 둔 것은 바로 흉년이 들어 백성을 염려하는 뜻에서이다."
하였다. 끝 부분의 호행 대장에 관한 일은 비답이 없었는데, 뒤에 유신(儒臣) 이종백(李宗白)의 말로 인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조 판서 김흥경(金興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명(聖明)께서 근본 법칙을 세워 바야흐로 탕평(蕩平)하는 정치를 힘쓰시는데, 다만 정주(政注)하는 즈음에 오로지 뒤섞는 것만 일삼아 옳고 그름[涇渭]이 구분되지 않고 행동 거지가 적당함을 어겨 당당한 청조(淸朝)가 문득 골동품 장소가 되었습니다. 신이 만약 무릅쓰고 나온다면 반드시 장차 자칫 거스름을 당할 터이니, 이것이 나아갈 수 없는 큰 단서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은 오늘날의 정주(政注)를 골동품이라고 여기지만 나는 이러한 벼슬하지 않는 의리를 시상(時象)에 빠져 골동품임을 알지 못한다고 여기며, 경의 말을 결단코 허락하기 어렵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19일 정축
윤휘정(尹彙貞)을 사간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부응교로, 윤광운(尹光運)을 부수찬으로, 신방(申昉)을 동의금부사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20일 무인
대사간 조명교(曺命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수규(首揆)024) 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지위인데, 한 사람의 대신(臺臣)이 말을 하면 곡절을 물어 보지 않고 경솔하게 막비(幕裨)를 지방으로 귀양보내며, 숭품(崇品)은 경월(卿月)025) 의 지위인데, 이름을 숨긴 자가 상언(上言)하면 조금도 구명해 보지 않고 먼저 문비(問備)026) 를 시행하도록 하니, 아무리 해와 달이 밝다고 하지만 곧바로 빛도 돌아가게 되는데, 어찌 처음부터 신중히 하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대각(臺閣)의 신하는 옛날에 재상(宰相)과 같다고 일컬었고, 이목(耳目)을 의뢰함이 오로지 이들에게 달려 있는데, 사기를 꺾고 미워하여 냉대함이 거의 여지(餘地)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사선(韓師善)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의 행동 거지는 참으로 거칠고 경솔했지만, 삭출(削黜)하는 처벌은 마침내 중도에 지나친 데 관계됩니다. 그리고 이윤신(李潤身)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의도가 숨김이 없는 데에서 나왔고 계책이 변경(邊境)을 중시하는 데 있었으니, 저지하여 방해한다는 하교는 실로 실정 밖에서 나왔습니다. 신은 이로부터 대각에 있는 자가 비록 잠잠한 일이라도 감히 다시 진달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에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공가(貢價)는 물종(物種)을 감하는 것과 분수(分數)를 감하는 편부(便否)를 아직 결정하지 않았는데, 여러 의논이 분수를 재감(裁減)할 것을 많이 주장하고 있으나, 신과 예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은 생각하기를, 국가의 일은 마땅히 대체(大體)를 살펴보아야 하므로, 물종으로 감하는 것이 명분도 바르고 말도 사리에 맞아 분수를 감하는 것보다 나을 듯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좌참찬 김재로(金在魯),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 등은 모두 아뢰기를,
"분수를 재감(裁減)하면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고, 물종을 재감하면 도성의 백성들이 이익을 잃게 됩니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아뢰기를,
"선정신 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가 일찍이 물종을 재감하도록 하는 상소를 올려 거듭 도성 사람들의 원망과 비방을 불렀지만, 그때의 묘의(廟議)가 단연 이를 시행하였습니다. 조정에서 공인(貢人)의 호소에 동요되어 요탈(撓奪)을 면하지 못한다면 경시(輕視)당하는 것이 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송인명의 의논을 따라 물종을 재감하도록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이 또 아뢰기를,
"진정(賑政)에서 설죽(設粥)027) 과 건량(乾粮)의 편부(便否)도 한군데로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김동필·김재로는 건량(乾粮)이 낫다고 하고, 송인명은 설죽이 낫다고 하니, 임금이 김동필·김재로의 의논을 따라 사대부(士大夫)와 하천(下賤)을 논하지 말고, 건량을 환과 고독(鰥寡孤獨)028) 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진휼청(賑恤廳)의 쌀을 발매(發賣)하는 것은 청컨대 헌납 엄경하(嚴慶遐)의 상소에 의거하여 한 달에 두 차례 참작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20일 무인
사헌부 【지평 정희보(鄭熙普)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前) 호남 어사(湖南御史) 이광덕(李匡德)은 사명을 받고서도 해가 지나도록 상소만 하고 오지 않으니, 실로 기강(紀綱)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죄인 윤수(尹邃)에게 통부(通訃)029) 한 사건으로, 초기(草記)한 의금부의 수당(首堂)이 논박을 당하여 사임하고 체직되었는데, 동의금부사 이정소(李廷熽)는 허둥지둥 상소하고 편안하게 공무를 집행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 부사 김정(金)은 다른 사람이 창의(倡意)한 공을 빼앗아 직질(職秩)을 올리는 은전을 차지하려고 도모하였으니, 이미 매우 놀랍게 여길 만한데,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감히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작호(爵號)를 일컬었습니다. 만일 김정이 조금이나마 군신(君臣)의 대의(大義)을 알고 있었다면, 어찌 감히 역적을 비호함이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청컨대 잡아다 신문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한 번 청(廳)을 설치하여 돈을 주조(鑄造)하고부터 동기(銅器)를 훔쳐 사사로이 주조하는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청컨대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수색하여 체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월 21일 기묘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중화(中和)의 의열사(義烈祠)는 바로 임진년030) 의 의사(義士) 임중량(林仲樑) 등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입니다. 조정에서 만약 선액(宣額)031) 한다면 관서 지역에 풍교(風敎)를 수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관서의 풍속은 바탕을 숭상하니 문채를 숭상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여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참찬관 유정(柳綎)이 아뢰기를,
"선정신 김정국(金正國)은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이 선정신 조광조(趙光祖)와 실제로 서로 견주는데, 다만 벼슬이 정경(正卿)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여 아직까지 증시(贈諡)하는 은전이 없으니, 진실로 개탄스럽고 애석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조에 명하여 묘당에 물어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월 22일 경진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특진관(特進官) 이덕수(李德壽)가 아뢰기를,
"북관(北關) 육진(六鎭)의 여러 고을과 서관(西關) 강변(江邊) 일곱 고을의 백성들은 문관(文官)의 수령을 보려는 것이 주리고 목마른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닌데, 조정에서는 돌아보건대, 무엇 때문에 문신 두어 사람을 외직(外職)으로 내보내는 것을 아껴 서북(西北)의 백성들을 위로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바야흐로 전조(銓曹)에 있으니, 지금부터 시작해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3일 신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24일 임오
대마 도주(對馬島主) 평방희(平方熙)가 차왜(差倭) 평진봉(平眞峰)을 보내어 도서(圖書)032) 를 고쳐 주도록 청하므로, 새로 주조(鑄造)하여 주게 하고, 동래관(東萊館)에서 평진봉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1월 25일 계미
임금이 의릉(懿陵)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그날 궁궐로 돌아왔다. 수릉관(守陵官) 해흥군(海興君) 강(橿)과 시릉관(侍陵官) 박찬문(朴贊文)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고, 참봉(參奉)과 충의(忠義) 등에게도 한 자급을 더하게 하였다.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 경기 감사 및 차사원(差使員)을 불러서 보고 민사(民事)를 물으니, 감사 홍현보(洪鉉輔)가 가장 심한 고을이나 그 다음 고을을 논하지 말고 환모(還耗)를 나누어 지급하고 진휼한 자료를 보충하여 줄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광주 부윤 유엄(柳儼)이 진휼한 자료가 부족하다 하여 수어청(守御廳)의 군보미(軍保米)를 나누어 줄 것을 청하였고, 양주 목사 이여적(李汝迪)은 환곡(還穀)이 부족하다 하여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군향미(軍餉米)를 나누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여적이 또 삭녕(朔寧)과 가평(加平)의 곡식을 적당히 헤아려 본목(本牧)에 이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도신에게 명하여 참작하고 요량하여 나누어 주게 하였다.
1월 26일 갑신
유경시(柳敬時)를 장령으로, 서명균(徐命均)을 판돈녕부사로, 이진순(李眞淳)을 동의금부사로 삼았다.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도망한 죄인 정구(鄭搆)는 바로 망명(亡命)한 죄인에게 관계되는데, 일찍이 곤수(閫帥)033) 를 지낸 사람과 시종(侍從)으로 출입하는 신하들이 번갈아 서로 덮어주고 숨겨주어 그로 하여금 도성에서 거드럭거리게 하였으며, 포도청(捕盜廳)에서는 눈여겨 보고서도 감히 체포하지 못하니, 국가의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정구에 관한 사건은 포도청에 엄중히 경계하여 만약 자수하지 않는다면, 망명한 형률(刑律)을 시행하도록 하고, 덮어주거나 숨겨주는 시종과 곤수는 의금부로 하여금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1월 27일 을유
판중추부사 심수현(沈壽賢)이 상소하여 치사(致仕)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소금과 돈은 모두 호부(戶部)에 소속시키고 배와 수레는 모두 공조(工曹)에 소속시키는 것은 국체(國體)에 당연한 것인데, 근래에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衙門)의 선척(船隻)을 ‘세금을 면제한다.’고 말하면서 애당초 수부(水部)에서 관리하지 않으니, 너무나 법의 본의가 아닙니다. 청컨대 궁가와 아문에서 바친 본세(本稅) 중에서 몇 분(分)을 참작해서 감하되, 수부에 옮겨 바쳐서 거듭 징수하는 폐단이 없게 하고 통속(統屬)하는 의의를 보존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전 정언 오원(吳瑗)과 전 통제사 오중주(吳重周)를 의금부에 회부시켰는데, 정구(鄭搆)를 숨겨주었다가 자수하였기 때문이었다. 정구의 죄는 무단 향곡(武斷鄕曲)034) 한 데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추조(秋曹)035) 에 명하여 형신(刑訊)하고 압송(押送)하게 하였다. 오원과 오중주는 장형(杖刑)을 속(贖)바치게 하고 죄상을 조사 신문한 다음 석방하였다.
1월 28일 병술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월 29일 정해
사헌부에서 【장령(掌令) 이기헌(李箕獻)이다.】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간신(諫臣)이 부관(部官)을 명문가의 자제(子弟)로 아주 정밀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일을 상소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정사(政事)에 이르러 천얼(賤孼) 이기방(李基邦)을 수망(首望)으로 주의(注擬)036) 하여 수점(受點)037) 하였으니 대간(臺諫)의 말이 무시당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대각(臺閣)에 나아가 스스로 진술해야 할 것인데, 끝내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대간의 체모를 극도로 훼손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홍상인(洪尙寅)은 지난날 합계(合啓)를 정지함에 이르러 행동 거지가 해괴하고 사리에 어긋나 특별히 파면당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뒤 대신(臺臣)이 준엄한 말을 하였으니, 의논을 정지하고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인데, 갑자기 주의하여 공의(公議)를 어긴 바 있었습니다. 청컨대 이조의 당상관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그 당시 상소한 간관은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지난날 홍봉조(洪鳳祚)가 상소한 내용은 패만(悖慢)함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만약 뜻이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지목하여 배척하는 것이 당연한데, 바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뒤섞어 몰아붙여 한(漢)나라의 얼굴을 한 오랑캐의 심장(心腸)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격렬하게 어긋나고 어지러움을 조성하는 말씨입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변 부사(寧邊府使) 조명익(趙明翼)이 상소하여 철옹성(鐵瓮城)의 형세를 진달하고, 또 군사를 훈련하고 식량을 첨가하는 일의 마땅함을 아뢰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월 30일 무자
이성룡(李聖龍)·김상규(金尙奎)를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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