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기축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2월 2일 경인
병조에서 아뢰기를,
"본조에서 관리하는 금군(禁軍)의 접제(接濟)038) 는 오로지 가포(價布)039) 에 의지하는데, 지난해 재감한 것이 거의 3백 동(同)에 이르며, 매달 줄어들어 잇따라 지급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훈련 도감의 사례에 의거하여 황해 병영(黃海兵營)의 창고에 유치해 둔 전포(錢布) 가운데 3백 동을 한정하여 나누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2일 경인
이조 참판 이덕수(李德壽)가 장령 이기헌(李箕獻)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상소하여 대변(對辨)하기를,
"홍상인(洪尙寅)이 연좌된 것은 신이 기억할 수 없으며, 대계(臺啓)가 나온 뒤에 비로소 대략 들은 바가 있습니다. 대신(臺臣)이 이것으로 신을 죄주려 하니, 신은 죄를 알겠습니다. 부관(部官) 같은 데 이르러서는 종전에 많이 중인(中人)과 서얼(庶孽)이 입사(入仕)하는 계제로 삼았었습니다. 그러나 간신(諫臣)이 이미 상소하여 윤허를 받았었기 때문에 삼망(三望) 가운에 그 이망(二望)은 사대부(士大夫)로 비의(備擬)하고 일망(一望)은 이기방(李基邦)을 주의하였습니다. 이기방은 바로 고(故) 훈련 대장 이여발(李汝發)의 서자(庶子)입니다. 이여발의 아비는 이목(李穆)으로 이괄(李适)의 역변(逆變)에 죽었으며, 조부(祖父)는 이의배(李義培)로 쌍령(雙嶺)의 전투에서 죽었으니, 대대로 의열이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신이 두 번이나 호당(湖堂)을 초선(抄選)하는 명을 받았으니 마땅히 즉시 봉행(奉行)했어야 하겠지마는, 이제 듣건대, 구례(舊禮)에 문형(文衡)040) 이 이조 판서·예조 판서와 합좌(合坐)해서 의논하여 초선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장(銓長)이 고향에 있으니 거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문비(問備)하도록 청했는데, 경이 어찌 지나치게 혐의스럽게 여기는가? 상소 끝 부분의 일은 구례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4일 임진
빈대(賓對)041) 를 행하였다.
구성임(具聖任)·조빈(趙儐)을 좌우의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2월 5일 계사
장령 이기헌(李箕獻)을 파직하고 전 사간 유언통(兪彦通)을 파직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었다. 처음에 유언통이 상소하여 전조(銓曹)에서 부관(部官)을 뽑는 것을 신칙하도록 청하였는데, 이조 참판 이덕수(李德壽)가 이기방(李基邦)을 검의(檢擬)하여 수점(受點)하자, 이기헌이 천얼(賤孼)을 의망(擬望)한 것은 가리지 않았음을 면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전관(銓官)을 추고(推考)하도록 청하였었다. 또 대신(臺臣)이 무시를 당하였는데도 끝내 스스로 인피(引避)하지 않는다고 여겨 유언통을 파직하도록 청하여 모두 윤허를 받았는데, 뒤에 이덕수가 대변(對邊)한 상소로 인하여 이기헌이 피혐(避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홍문관 【부교리 이종백(李宗白)·수찬 임정(任珽)이다.】 에서 차자를 올리기를,
"당초의 논계(論啓)는 한 사람의 부관을 비의(備擬)하는 것으로 인하여 간신의 파직을 강청(强請)하였으나, 정신이 집중된 곳은 실제로 전지(銓地)에 있었으니,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바로잡을 것을 칭탁하여 안으로는 쳐서 흔들 계교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의사와 태도가 아름답지 못하니, 청컨대 이기헌을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유언통이 부관을 가려 뽑도록 주청한 것은 대체로 모든 관료를 신중히 가려 뽑아야 한다는 뜻에서 나왔으며, 전조에서 가려서 주의한 것 역시 대간의 말을 준용(遵用)하였음을 볼 수 있으니, 간신의 입장으로는 애당초 인피할 만한 혐의가 없었으며, 이기헌이 파직하도록 청한 것은 여파(餘波)가 뜻하지 않게 미친 데 불과합니다. 청컨대 유언통을 파직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모두 윤허한다고 비답하였다.
2월 7일 을미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참찬관 유정(柳綎)이 아뢴 바로 인하여 선정신 김정국(金正國)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물어보라는 명이 있었는데,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의논은 모두 시호를 내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의논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선정신 이이(李珥)의 봉사손(奉祀孫)을 거두어 기용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경연사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이이의 증손(曾孫)인 이후시(李厚蒔)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가 서로 의논하여 이연(李綖)을 이후시의 아들로 정하였는데, 이연이 실제로 제사를 주장하는 종손(宗孫)이며 지금 나이 80입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이연은 가자(加資)하고, 그의 아들 이진오(李鎭五)는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다.
2월 8일 병신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와 전 판서 김간(金榦)은 집안이 본래 청빈(淸貧)하니, 이와 같은 흉년을 당하여 급박한 형편에 처한 사람을 구제하는 은전을 베푸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해도(該道)에 명하여 넉넉히 구휼하게 하였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홍성보(洪聖輔)가 사폐(辭陛)042) 하면서 아뢰기를,
"범월(犯越)과 잠상(潛商)은 강계(江界)의 큰 폐단인데, 연변(沿邊)의 파수(把守)를 엄중히 경계하면 범월은 금지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잠상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고산리(高山里)·벌등(伐登)·만포(滿浦) 세 진(鎭)을 따라서 하므로, 강계와의 거리가 매우 머니, 청컨대, 세 진의 장수로 하여금 날마다 적간(摘奸)하여 금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홍성보가 또 연변(沿邊)의 일곱 고을은 사별무사(射別武士)의 규례에 의거하여 다시 포별무사(砲別武士)를 설치하되, 재주를 시험하여 논상(論賞)해서 급박할 때를 대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2월 10일 무술
이세근(李世瑾)을 대사헌으로, 심준(沈埈)을 대사간으로, 권상일(權相一)을 장령으로, 조진세(趙鎭世)·남태량(南泰良)을 지평으로, 유언통(兪彦通)을 사간으로, 윤광운(尹光運)을 헌납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정언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응교로, 황정(黃晸)을 부수찬으로, 서명균(徐命均)을 판윤으로, 오명신(吳命新)·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삼사(蔘絲) 값을 은(銀)으로 바꿀 것을 말하는데, 교활한 오랑캐의 정상은 본래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지금 변경해서 바꾼 것이 만약 혹시라도 뜻하는 바가 있다면 앞으로의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니, 한결같은 법을 지킴이 마땅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은으로 바꾸는 여부는 우선 논하지 말고, 양국에서 물화를 교통하면서 폐단이 없는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이니, 결단코 굽혀 고쳐서 기한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
하고, 형조 판서 이정제(李廷濟)는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사대(事大)하는 데는 두려워하여 움츠리기를 한없이 하고, 교린(交隣)하는 데는 굽혀서 따르기를 매우 많이 하기 때문에, 교활한 오랑캐가 이를 알고 번번이 따라주기 어려운 청을 하였습니다. 마땅히 은으로 바꾸는 것과 기한을 어기는 것은 모두 불가하다는 것을 준엄한 말로 물리치고 장계를 아뢴 변신(邊臣) 또한 견책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동래 부사 정언섭(鄭彦燮)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왜학 훈도(倭學訓導)와 별차(別差)를 잡아다 추문하도록 명하였다.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지손(支孫)인 정석(鄭錫)에게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당시에 조정에서 정몽주에게 치제(致祭)하였는데, 종손(宗孫)으로 공경히 받을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관상감(觀象監)의 관원 이세징(李世澄)이 청(淸)나라에서 개정한 만년력(萬年曆)을 사가지고 왔으므로, 이세징에게 한 자급(資級)을 더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병술년043) 에 허원(許遠)이 청나라의 만년력을 구하여 왔었는데, 그뒤로 역법(曆法)에 차이가 없었으나, 임인년044) 이후로 역주(曆註)의 길흉(吉凶)과 의기(宜忌)가 가끔 차이나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세징이 역관(譯官) 정태현(鄭泰賢)과 청나라 만년력 신본(新本)을 구하고, 또 방기(方技)045) 의 여러 서책을 구하여 오니, 【《오두통서(鰲頭通書)》·《육임지남(六壬指南)》·《역림보유(易林補遺)》·《연해자평(淵海子平)》·《육임금구결(六壬金口訣)》·《화성세초(火星細草)》·《격해자평(格海子平)》·《지리사탄자(地理四彈子)》·《칠요추보고(七曜推步稿)》·《기신록(忌辰錄)》이다.】 관상감에서 계청(啓請)하여 포상(褒賞)하도록 청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2월 11일 기해
사간원 【정언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이시번(李時蕃)을 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도록 청하였고, 역적 이탄(李坦)을 연좌시켜 그 처자(妻子)를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도록 청하였고, 강세윤(姜世胤)을 잡아다 추국(推鞫)하고 엄중히 신문하도록 청하였고, 조덕보(趙德普)를 잡아다 추국하고 엄중히 신문하도록 청하였고, 이형(李炯)과 이식(李烒)을 멀리 귀양보내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고 다시 엄중히 국문하도록 청하였고, 황익재(黃翼再)를 다시 엄국(嚴鞫)하도록 청하였으며, 박해정(朴海正)을 그대로 엄국하도록 청하였고, 이하택(李夏宅)을 잡아다 추국하고 엄중히 신문하도록 청하였으며, 목중형(睦重衡)을 다시 엄중하게 국문하도록 청하였다.】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백수일(白守一)의 사건은 정계(停啓)하였다.
2월 12일 경자
대사헌 이세근(李世瑾)이 상소하여 거듭 휴치(休致)046) 를 청하고, 또 희로(喜怒)를 신중히 하고 말씀을 화평하게 하는 것으로 철에 따라 옥체를 조섭(調攝)하는 근본을 삼도록 진달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휴치는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충청 감사 이형좌(李衡佐)가 상소하기를,
"굶주리는 백성이 날마다 늘어나는데, 진휼할 밑천이 부족합니다. 청컨대 진휼할 곡식을 속히 구분해서 나누어 주소서."
하고, 또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영(營)의 작미(作米)를 덜어 유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지평 조진세(趙鎭世)가 상소하기를,
"사람에게 벼슬을 제수하면서 유능한지의 여부는 묻지 않고 오직 문벌(門閥)만을 보는 것이 실로 우리 나라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사대부(士大夫)라 하여 반드시 모두 현명한 것도 아니고, 서얼(庶孽)이라 하여 반드시 모두 불초(不肖)한 것은 아닌데, 부관(部官)도 주기를 아낀다면, 서얼이 된 자들이 어찌 곤궁하게 막히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재능을 따라 수록(收錄)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석에서 탄식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거듭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2월 13일 신축
밤에 화성(火星)이 방수(房宿)를 범하였다.
사헌부 【지평 조진세(趙鎭世)이다.】 에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적(糶糴)047) 은 곤궁한 백성의 명맥(命脈)이 되는데도 요즈음 경화(京華)048) 의 사대부가 어지럽게 구하여, 가난하여 의지할 데 없는 무리로 하여금 갈고 씨뿌리는 자본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도신(道臣) 및 수어청(守禦廳)과 경리청(經理廳)에다 신칙하여 토착인(土着人) 외의 사대부에게는 환곡(還穀)을 지급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성상(聖上)의 복제(服制)가 끝나지 않았으니, 신자(臣子)들이 음악을 듣는 것은 부당합니다. 청컨대 경외(京外)에 음악을 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2월 13일 신축
지평 남태량(南泰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해에 사명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머물 때 그윽이 마음에 헤아린 것이 있었는데, 옛날부터 오랑캐가 중국을 주재(主宰)할 때에는 인의(仁義)와 덕례(德禮)로 천하의 인심을 복종시킴이 있어서 신사(臣事)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중국과 오랑캐가 섞여 살면서 화변(禍變)이 겹쳐서 생기니, 진실로 성인(聖人)이 시운(時運)에 응함이 없으면, 막북(漠北)049) 의 제종(諸種)들이 반드시 앞으로 그 쇠미한 것을 인하여 대신할 것입니다. 대체로 지금 오랑캐의 운수가 곤궁함은 십수 년을 가지 않아 결판이 날 것인데, 몽고(蒙古)가 강성해지면 뒷날 병합이 되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요사이 사역원(司譯院)에서 몽고말의 잘못된 것을 이어받아 잘못을 답습하였으므로, 더욱 본래의 진상을 잃어버렸으니, 뒷날 위기(危機)가 번갈아 닥치더라도 전대(專對)050) 하는 신하는 문자(文字)가 통하지 않고 역관[譯舌] 무리의 언어가 틀리게 된다면 국가의 우환(憂患)이 반드시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니, 제때에 변통함이 마땅합니다. 오랑캐가 이미 쇠약해지고 있으면 장차 한없는 요구를 할 것인데, 국가에서 임시 방편으로 응접(應接)하는 것은 한갓 한 사람의 사신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통역관을 설치한 이후부터 사신은 문득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청컨대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여 사신으로 하여금 예부에 이르러서 일을 의논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국가의 환란을 대비하는 데 이르러서는 변방을 다스리는 장수를 가려뽑고 곡식을 쌓아 군사를 힘쓰게 하는 계책을 한두 가지로 갑자기 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연변(沿邊)은 중요한 지역인데도 인재를 가려뽑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김성발(金聖發)의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것과 홍성보(洪聖輔)의 탐욕스럽고 교활함 같은 것은 모두 무능하면서 재능이 있는 척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모두 개차(改差)하소서. 그리고 진주 목사 이정주(李挺周)는 바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적에게 항복한 사람의 형(兄)으로, 남들의 평판이 매우 많은데도 스스로 처신할 줄 모르고 있으니, 청컨대, 개차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유념하겠다. 두 고을 수령의 일은 중도(中道)에 지나침을 면하지 못했다. 홍성보(洪聖輔)는 임명한 지 오래 되었는데, 탐욕스럽고 교활하다고 지목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겠는가? 이정주(李挺周)는 개차(改差)하고 승선(承宣)으로 출입하는 사람을 가려서 임명하도록 하라."
하고, 인해서 원소(原疏)를 궁중에 머물러 두도록 명하였다.
2월 14일 임인
서종옥(徐宗玉)을 대사성으로, 윤유(尹游)를 강화 유수로 삼았다.
2월 15일 계묘
사간원 【정언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진양(晋陽)은 어지럽게 염피(厭避)하여 여러 차례 수령을 바꾸었으니, 국가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기강(紀綱)에 관계되는 것은 문책이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전후의 진주 목사로 배척받아 인혐(引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직시켜 서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요즈음 인심이 날마다 야박해져서 간사하게 속이는 것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름을 쓰지 않고 상언(上言)하여 까닭 없이 남을 무함하고, 간사한 백성이 수령을 모함하며, 도깨비 같은 무리가 조정의 대신을 몰래 해치면서 이 술책을 쓰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만약 엄중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을 막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포도청(捕盜廳)에 명하여 조사해 잡아서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언신(趙彦臣)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강원도(江原道) 간성군(杆城郡)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2월 16일 갑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2월 17일 을사
소대를 행하였다.
2월 18일 병오
밤에 화성(火星)이 벌성(罰星)을 범하였다.
《경종대왕실록(景宗大王實錄)》이 이루어졌다. 【7권(卷)이다.】 좌의정 이집(李㙫)·우의정 조문명(趙文命) 등이 총괄하여 재결하고, 대제학 이덕수(李德壽)·부제학 서명균(徐命均) 등이 찬수(纂修)하였는데, 병오년051) 8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이달에 완성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부호군 정제두(鄭齊斗)가 상소하여 주급(周急)052) 을 사양하자, 비답하기를,
"이번의 주급(周急)은 바로 선비를 높이고 늙은이를 공경하는 뜻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9일 정미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시강관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당감(唐鑑)》은 이미 강독을 마쳤으니, 당연히 《절작통편(節酌通編)》을 잇따라 강독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이 지은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가 고증(考證)을 발휘하여 주자(朱子)의 문하(門下)에 공로가 있습니다. 대체로 김창협은 경학(經學)이 순수하고 깊었기 때문에 이 책을 만들어 후세에 좋은 선물을 하였으니, 강관(講官)이 자료로 활용하여 참고하고 열람함이 참으로 좋습니다. 한가한 여가에 가끔 가져다 보신다면 어찌 조금의 보탬이 없겠습니까? 듣건대, 그 책이 지금 김창협의 문생(門生)에게 있다고 하니, 청컨대 본관(本館)에서 한 본(本)을 베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20일 무신
전관 목장(箭串牧場)에 명하여 마조제(馬祖祭)를 행하도록 하였다. 당시 내구마(內廐馬)가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이 20여 필(匹)이었는데, 사복시(司僕寺)에서 《대전(大典)》과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된 것과 현종조(顯宗朝)에 이미 시행한 사례에 의거하여 구단(舊壇)에서 제사를 마련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 【정언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화폐(貨幣)의 경중(輕重)은 일정한 법식이 있는데, 해조(該曹)와 해청(該廳)에서는 돈을 만들면서 많이 만드는 것을 이롭게 여겨 그 무게를 점점 가볍게 하니, 벌써 화폐를 소중히 여기는 본래의 뜻을 잃었습니다. 더구나 간사한 백성들이 구리와 주석을 모아 부정하게 만들면서 오로지 얇고 열약한 것만 일삼아 손에 닿기만 하면 부서지기가 거의 아안(鵝眼)053) 과 같습니다. 청컨대 해사의 당상관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낭청(郞廳)은 잡아다 추문하여 정죄(定罪)하소서. 그리고 부정하게 만든 자는 포도청으로 하여금 수색해서 체포하여 율에 의거해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양근 군수(楊根郡守) 구억(具億)은 조정에서 갈라 준 재결(災結)을 애당초 백성들에게 주지 않고 삼세(三稅)054) 를 일정의 기준대로 받아들이게 하여 모두 제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따라서 굶주리는 백성 가려내기를 잘못하여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바라보일 지경입니다.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홍원(洪原)에는 이미 영장(營將)을 겸하게 하였으니, 미천한 부류로 구차하게 보충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현감 변의(邊儀)는 〈집안의〉 내력이 본래 낮고 한미하니, 청컨대 개차(改差)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대사헌 이세근(李世瑾)이 상소하여 거듭 휴치(休致)를 청하였으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고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현(大賢)이 저술한 책은 어느 것이든 절실하지 않겠는가마는, 이 통편은 실로 경전(經傳)과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 재상(宰相)에게 올린 편지에서 상전(賞典)을 빨리 시행하여 부잣집을 격려하고 권장하라는 말은 바로 오늘날에 닥친 일이다. 지난번 호남(湖南)의 양하길(梁夏吉)을 조용(調用)한다는 명이 있었는데, 제신(諸臣)들이 거듭 명기(名器)를 아껴 진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국가에서 어떻게 신의를 잃을 수 있겠는가? 전조로 하여금 빨리 관직에 임명하게 하라."
하였다. 시강관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올해에는 부호(富戶)의 권분(勸分)055) 이 도로 폐단이 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수령이 잘 받들어 행하지 못해서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듣건대, 수령이 부민(富民)을 가두고 곡물(穀物)을 강제로 빼앗은 자가 있었다고 한다. 진휼을 마친 뒤에 염찰하여 과죄(科罪)함이 적당하니, 제도에 거듭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1일 기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관을 인견(引見)하였다. 응교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무신(武臣)으로서 패초(牌招)를 어긴 것은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으로부터 시작되었었는데, 그때 명신(名臣)들이 이미 그것을 근심하였습니다. 지난번 공조 판서 이삼(李森)과 전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이 모두 패초를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으니, 실로 국가의 체모에 관계됩니다. 장붕익은 바야흐로 견책하여 파면하였으니 논하지 말고, 이삼은 추고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전교하기를,
"은혜와 위엄은 치우치게 폐할 수 없다. 아! 세도(世道)가 경박하고 조정의 상황이 분리되었다. 조관빈(趙觀彬)이 기회를 틈타 원한을 마음대로 갚았는데도 그를 해도(海島)에 귀양보낸 것은 바로 형벌을 가볍게 한 것이었으나, 다만 그의 아비가 해도에서 후명(後命)056) 을 받았으니,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정치를 미루어 봄이 마땅하다. 조관빈을 특별히 육지로 나오게 하라."
하였다.
사간원 【정언 송징계(宋徵啓)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호조(戶曹)와 진휼청(賑恤廳)의 돈을 만드는 당상관과 낭청을 논죄(論罪)하는 일과, 양근 군수(楊根郡守) 구억(具億)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는 일과, 홍원 현감(洪原縣監) 변의(邊儀)를 개차(改差)하는 일은 모두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전 포도 대장 장붕익(張鵬翼)과 박찬신(朴纘新)을 특별히 서용하고, 다시 장붕익을 훈련 대장으로 삼았다.
봉교 홍창한(洪昌漢)을 내쫓아 성현 찰방(省峴察訪)으로 삼았다. 홍창한은 연설(筵說)을 누설한 것으로 죄를 얻었는데, 용서하는 전교를 여러 번 내렸지만 오히려 부름을 어겼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2월 22일 경술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경연사 송성명(宋成明)이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공물(貢物)을 재량하여 감해 주는 것은 실로 흉년에 경비를 줄이는 방법에서 나온 것인데, 태상(太常)057) 의 공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바로 제사에 소요되는 바 사체(事體)가 중대합니다. 아마도 섞어서 재량하여 감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2월 23일 신해
별이 하고성(河鼓星) 아래로 지나갔다.
호조와 진휼청에 명하여 새로 만드는 돈의 경중(輕重)을 한결같이 구전(舊錢)과 같게 하였다. 당시 호조와 진휼청에서 돈 만드는 〈역사를〉 마치지 않았는데, 갑자기 행전(行錢)058) 하였으므로, 간사한 백성이 구전 2전(錢)의 무게를 가지고 훼손시켜 1전 5푼의 무게로 만들어 도시에서 관전(官錢)과 섞어서 사용하였다. 해조(該曹)와 해청(該廳)에서는 부정하게 만드는 것을 방지하려 하였으나, 또 많이 만드는 것을 이롭게 여겨 새 돈을 줄여서 1전 7푼의 무게로 만들었는데, 한갓 얇고 열약하다는 비난만 불러들이고 간사함은 금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각과 묘당에서 번갈아 그 폐단을 진달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2월 25일 계축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조 참판 이덕수(李德壽)를 파직하고 신방(申昉)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덕수가 이기헌(李箕獻)의 논박과 배척으로 인하여 여러 번 부름을 어기고 나아가 공무를 집행하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그를 파직시킨 것이다.
경상도(慶尙道) 금산군(金山郡)에 지진(地震)이 있었고, 각 고을에 전염병이 치성하여 죽은 백성이 많았다.
2월 27일 을묘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홍상빈(洪尙賓)·정우량(鄭羽良)을 승지로, 권적(權𥛚)을 대사간으로, 민정(閔珽)을 헌납으로, 김약로(金若魯)를 정언으로, 송징계(宋徵啓)·이덕재(李德載)를 지평으로, 조정만(趙正萬)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2월 28일 병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봉성(鳳城)에 장차 급히 통보해서 우리 나라의 차관(差官)을 본성(本城)에 보내어 칙지(勅旨)를 영접하겠다고 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칙사(勅使)를 파견하지 않고 대신 칙지(勅旨)만 보낸다고 하니, 그전에 없던 일입니다. 평상시 사례로 중강(中江)에서 칙지를 영접해야 하는데, 지금 이미 봉성에 나아가 영접하게 한다면 의절(儀節)은 더욱 매몰(埋沒)시키기가 부당합니다. 청컨대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하여금 의물(儀物)을 갖추어 차원(差員)을 거느리고 봉성에 나아가 영접하게 하고, 의주에서는 이후로 각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번갈아가며 받들게 하고, 감사와 병사는 각기 그 영(營)의 경상(境上)에 나아가 영접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서울에 들어갈 때의 의절(儀節)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금 있다가 윤순(尹淳)·김재로(金在魯)의 말로 인하여 다시 직질(職秩)이 높은 변방의 수령을 영칙관(迎勅官)으로 차정(差定)하고, 변장을 봉칙관(奉勅官)으로 차정하여 용정(龍亭)을 갖추고 봉성(鳳城)에 나아가 영접하게 하였으며, 의주 부윤[灣尹]은 강변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2월 29일 정사
의릉(懿陵)에 거둥하였을 때 어가(御駕)를 수행했던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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