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1권, 영조 8년 1732년 3월

싸라리리 2025. 9. 1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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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무오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3월 3일 경신

헌납 민정(閔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경외(京外)에서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하면서 더러는 거짓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더러는 빠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청컨대 각부와 제도에 신칙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진휼을 마친 뒤 어사가 염탐할 때에 진휼한 곡식의 많고 적음을 논하지 말고, 반드시 민호(民戶)가 보존되었는지 흩어졌는지 굶어 죽은 송장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출척(黜陟)하는 정사(政事)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양주(楊州)의 진휼하는 밑천으로 지난번에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관리하는 쌀로 갈라서 지급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산성을 관리하는 쌀은 이미 모두 조곡(糶穀)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청컨대 총융청(摠戎廳)의 원래의 군량[元軍餉] 5백 석(石)을 갈라서 지급하고, 그들로 하여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도로 갚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상소로 인하여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쌀 각기 1천 석을 본도에 머물러 두었다가 진휼하는 자료로 보충하기를 청했었는데, 그 대신 강도(江都)의 쌀 2천 석을 금위영과 어영청에다 갈라서 지급하고, 호서(湖西)로 하여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강도에다 도로 갚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릉(長陵)의 석물(石物)에 손상된 흔적이 있었으므로, 대신 홍치중(洪致中)을 파견하여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3월 4일 신유

전라도(全羅道)에 정배(定配)된 죄인을 소석(疏釋)하도록 명하였다. 당초에 비변사에서 호남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도내에 정배된 죄인을 자원(自願)에 따라 조금 풍년이 든 지역으로 옮겨서 주인과 나그네가 함께 곤궁한 폐단을 펴게 하기를 청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감사가 자원하는 무리를 가려서 보고하였는데, 1백 90여 명이 되도록 많았었다. 조정에서는 배소(配所)를 옮기는 즈음에 도리어 소요(騷擾)를 이룰까 염려하여 정상과 죄를 참작해서 품지(稟旨)하여 소석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월 5일 임술

임금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시강관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삼남(三南)에 기근(飢饉)이 들어 살아 있는 자는 떠돌아다니고 죽은 자는 구렁을 메우니, 더욱 불쌍히 여김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굶어서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려 있으나 썩은 살을 덮어 주지 못하였다. 살아서는 생업(生業)을 편안하게 할 수 없었고, 죽어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백성들의 부모(父母)된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좋은 밥도 편치 않다. 호랑이에게 물리거나 물에 빠진 경우에도 휼전(恤典)이 있었는데, 더구나 나의 얇은 덕으로 인하여 이런 죽음을 당한 자에게 어찌 슬프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고, 인해서 삼남에 영(令)을 내려 거두어 묻어 주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원 【 헌납 민정(閔珽)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신년059)   이후로 남쪽 지역의 인심이 크게 변하였습니다. 김제(金堤) 사람 이정운(李鼎運)은 역적 이인좌(李麟佐)의 친족으로서, 나성(羅姓)인 역적의 친족과 체결(締結)하여 신분에 어긋나는 것을 제멋대로 범하여 죄악이 드러났으므로, 관장(官長)이 감영(監營)에 보고하고는 가두어 다스렸습니다. 그러자 이광연(李光然)·나치공(羅致恭) 등이 각기 창과 칼을 가진 종의 무리를 많이 거느리고 밤중에 관아(官衙)의 동헌(東軒)에 침범하여, 창문과 벽을 때려 부수고는 군수(郡守)를 부르며 찾아서 죽이려 하였으나, 군수가 겨우 모면하였으니, 그러한 변괴(變怪)는 거의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청컨대, 이정운·이광연을 도신으로 하여금 엄중히 다스리게 하소서. 그리고 나치공·나행룡(羅行龍)·나행추(羅行樞) 등 제당(諸黨)의 30여 인(人)은 이미 도망하여 흩어졌다 하니, 또한 경외(京外)로 하여금 염탐하여 체포해서 엄중히 조사하여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引見)하고, 진휼청(賑恤廳)에 명하여 태학(太學)060)  의 선비들을 지공하는 데 소요되는 물품을 갈라 주도록 하였다. 당시 태학의 노비 공세(奴婢貢稅)를 흉년이 들었다 하여 재량하여 감했었는데,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그것을 대신 지급하도록 청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응교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에 먼 변방의 인재(人才)가 헛되이 늙어간다고 하여 오군문(五軍門)061)  에다 각기 서북인(西北人)을 대상으로 하는 한 벼슬자리를 설치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장신(將臣) 이기하(李基夏)가 숙위(宿衛)는 중요한 지위이므로, 먼 지역의 사람을 충차(充差)할 수 없다고 말하자, 숙종[肅廟]께서 그의 실언(失言)을 책망하고 서북인을 별군직(別軍職)에다 특별히 임명하셨습니다. 신이 지난해 북로(北路)를 왕래하면서 재능을 지니고서도 헛되이 늙어가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청컨대, 선조의 전례에 의거하여 서북에 각기 한 사람씩 따로 가려 뽑아 별군직에다 임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신무일(愼無逸)·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송성명(宋成明)을 대사헌으로, 황재(黃梓)를 사간으로, 신만(申晩)을 정언으로, 윤양래(尹陽來)를 우윤으로 삼았다.

 

3월 7일 갑자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죄인 김성절(金盛節)은 바로 고(故) 시직(侍直) 김성익(金盛益)의 서얼(庶孽) 동생입니다. 김성익이 김성절의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 마침내 틀림없이 화(禍)를 끼칠 것임을 알고 일찍이 그의 아들에게 경계를 남겼으므로, 그 뒤에 김성절이 2품(品)으로 장차 추영(追營)062)  하려 하였지만, 김성익의 여러 아들들이 아비의 경계를 준수하여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성절이 복법(伏法)되자, 김성익의 여섯 아들도 모두 연좌되어 귀양가서 어미의 상사(喪事)를 당했으나, 달려가 곡(哭)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인정과 의리에 있어서 불쌍히 여겨야 할 뿐만 아니라, 국조(國朝)에서 법(法)을 적용함이 매우 관대하여 비록 난역(亂逆)의 가까운 친척이라 하더라도 만약 먼저 그의 악(惡)함을 알고 그와 더불어 서로 절교하였으면, 특별히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고 판서 서필원(徐必遠)은 서양갑(徐羊甲)의 적질(嫡姪)로 처음에는 연좌되었다가, 뒤에 용서받아 명신(名臣)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윤인발(尹仁發)이 역적 이괄(李适)의 반란에 가담하자, 그의 숙부(叔父)인 윤의립(尹毅立)과 윤경립(尹敬立) 등이 장차 연좌되는 처지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었는데, 옥성 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이 상소하여 그들이 평소 〈윤인발과〉 절교했던 상황을 진달하니, 인조(仁祖)께서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벼슬로 대우하기를 그전처럼 하였습니다. 지금 김성익의 여러 아들들이 김성절과 서로 절교한 증거는 전 좌의정 이집(李㙫)이 곡절을 익히 알고 있어서 신과 여러 번 이 일을 말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성익(金盛益)의 여러 아들들은 윤의립(尹毅立)과 서로 비슷하다. 이미 그의 추증(追贈)을 사양하였는데, 도로 그 죄를 받게 한 것은 왕자(王者)의 상벌(賞罰)을 시행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마침내 석방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김제군(金堤郡)의 모든 죄수를 경옥(京獄)으로 송치하여 엄중히 조사하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홍치중이 아뢰기를,
"역적의 일족이 이와 같이 위세를 떨쳐서 곧바로 지방관을 살해하려고 하였으니,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듣건대, 감사가 먼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견해가 없지 않았다고 하니, 추조(秋曹)063)  로 하여금 잡아다 조사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0일 정묘

유수(柳綬)를 승지로 삼았다.

 

3월 11일 무진

임금이 한식제(寒食祭)를 경휘전(敬徽殿)에서 행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3월 12일 기사

사간원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비변사에서 전 전라 우수사 김광(金洸)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호남 좌도와 호남 우도의 송전(松田)을 부근의 진장(鎭將)을 시켜 관리하고 금양(禁養)하게 하였는데, 수영(水營)에서 불시에 적간(摘奸)하여 근면하고 태만함을 고과(考課)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전라 감영(全羅監營)의 재포(災布)를 가지고 수영(水營)의 보포(保布)에서 재량하여 감한 대신 채워서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대체로 수영과 각진(各鎭)의 장교(將校)와 병졸(兵卒)의 보포가 세 필(疋)이었는데, 무신년064)  부터 감하여 두 필로하고, 한 필은 감영에 보관해 두었다가 만약 재년(災年)을 만나 재량해서 감해야 할 경우 그것으로 대신 지급하도록 하는 것을 재포라고 말하는데, 간혹 진휼하는 자본으로 활용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전 수사 김광(金洸)의 말로 인해서 비국에서 허락하도록 계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김흥경(金興慶)이 임금의 명을 받고 나오다가 신창현(新昌縣)에 이르러 상소(上疏)하여 병(病)이 들었음을 진달하고 바로 돌아가니, 비답(批答)하기를,
"어제 경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쁘고 위로가 되었는데,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처음 생각과는 너무 어긋난다."
하였다. 잠시 후에 내주(內廚)의 음식을 보내게 하고, 인하여 16자(字)의 수찰(手札)을 내리면서 ‘많은 유시(諭示)가 필요 없으니, 경은 모름지기 이를 체득하라’하였다.

 

지평 이덕재(李德載)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제(金堤) 사람들이 장리(長吏)를 살해하려고 도모한 것은 실로 이보다 더 큰 변고가 없습니다. 더구나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은 모두 무신년065)   여러 역적들의 가까운 친족(親族)들이니, 방백(方伯)이 된 자는 즉시 기회를 엿보고 체포하여 등문(登聞)함이 마땅한데, 심상하게 보았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그리고 지난번 청주(淸州)의 변고 때 신천영(申天永)의 아우로 아명(兒名)이 신열증(申悅曾)이란 자가 역적을 따라 진(陣)에 나아갔다가 패배하여 도망하였었는데, 조정에서 팔로(八路)에 공문을 보낸 지 4년 뒤에야 비로소 잡았습니다. 또 금오(金吾)에서는 대충 연좌시키는 율을 시행하여 마침내 현륙(顯戮)066)  하는 법에서 도망하게 하였으므로, 여정(輿情)이 모두 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열증을 율에 의거하여 죄상을 감안하여 처단하고, 그때의 해부(該府) 당상관을 견책하여 파직하소서.
남태량(南泰良)이 홍성보(洪聖輔)를 광주부(廣州府)의 일을 가지고 논한 것은 수령이 부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관곡(官穀)을 멋대로 사용할 수 있었겠으며, 관서(關西)의 일로 논한다면 비루하고 잗단 행동이 많았다고 지목하였으니, 더욱 사리에 어둡습니다. 청컨대, 경책(警責)을 베풀어 남을 모함하여 곤경에 빠뜨리는 풍습을 징계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김제(金堤)의 일은 벌써 도신에게 특별히 추문(推問)하게 하였다. 열증(悅曾)의 일은 왕부(王府)로 하여금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해부(該府)의 당상관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였고, 남태량(南泰良)의 일은 그의 말이 중도(中道)에 지나침을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장령 권상일(權相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정(金)이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벼슬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중간에서 서로 좋게 여기지 않는 자가 억지로 끌어다 말을 꾸며서 수의(繡衣)의 귀에 들린 것에 불과합니다. 김정의 평생 언행(言行)은 창의(倡義)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은 논할 것도 없고, 세 번 극읍(劇邑)067)  을 맡아 모두 특이한 치적(治績)이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악명(惡名)을 입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김정(金)을 잡아오도록 명한 것은 또한 사람을 암담(黯黮)한 곳에다 두지 않으려고 해서이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충청도 조운 도사(忠淸道漕運都事) 이귀휴(李龜休)를 불러다가 보고 진정(賑政)에 대하여 하문하자, 이귀휴가 백성들의 실정이 황급(遑急)함을 갖추 진달하고, 또 어떤 백성이 노모(老母)를 봉양하지 못하고 어린 자식을 굶겨 죽인 자가 있다고 말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자식은 효도하고 어미는 애육(愛育)하는 것이 오륜(五倫)의 떳떳함인데, 나의 얇은 덕(德)으로 인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연달아 도랑과 골짜기에 넘어지게 하고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잃어버리게 하여, 자식은 부모(父母)를 봉양할 수 없고 부모는 자식을 보호할 수 없도록 하였으므로, 침식(寢食)을 잊은 채 자신을 책망하기를 겨를하지 못하겠는데, 군신(君臣)은 또한 서로 힘쓰는 것이 당연할 것이니, 방백이 풍교(風敎)를 받들고 교화 펴기를 잘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고, 인하여 충청 감사 이형좌(李衡佐)를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현종조(顯宗朝)에 처음 만든 혼천의(渾天儀)를 수리하게 하였는데,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윤순(尹淳)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처음에 좨주(祭酒) 송준길(宋浚吉)이 현종에게 보고하여 혼천의를 처음 만들었는데, 그 제도가 육합(六合)068)  과 삼진(三辰)069)  은 갖추었으나, 사유(四游)070)  ·옥형(玉衡)·남북극(南北極)의 출지(出地)와 입지(入地)가 없었으며, 주조(鑄造)하여 도수(度數)를 정하였는데, 대체로 채침(蔡沈)의 《서경집전(書經集傳)》을 모방하여 조금 변통시킨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세월이 오래되어 파괴되어 손상되었으므로, 윤순이 고치고 수리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월 13일 경오

춘추관(春秋館)에서 아뢰기를,
"《경종실록(景宗實錄)》을 이미 완성하였으므로, 시정기(時政記) 및 중초(中草)071)  를 신 등이 실록청(實錄廳)의 당상관·낭청과 일제히 차일암(遮日巖)에 모여 구례(舊例)대로 세초(洗草)072)  하고 네 곳의 사고(史庫)에다 실록을 차례로 봉안(奉安)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청하였는데, 사관(史官)이 단지 1원(員)뿐이니, 청컨대, 우선 1건(件)을 오대산(五臺山)에다 봉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날 실록청의 당상관과 낭청이 차일암(遮日巖)에 모여 세초(洗草)하였는데, 임금이 숙배 사은(肅拜謝恩)하지 않았거나 사진(仕進)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나아가 참석하도록 명했다.】


【태백산사고본】 24책 31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299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71] 중초(中草) : 사초(史草)를 뽑을 때 초초(初草)를 수정한 것.[註 072] 세초(洗草) : 존치(存置)할 가치가 없는 문서(文書)를 없애버림. 실록(實錄)이나 선원보략(璿源譜略)의 편찬을 마치고 그 원고(原稿)의 폐기, 또는 정세 변동이나 기휘 저촉(忌諱抵觸)에 의하여 보관할 필요가 없는 문서의 폐기 등을 이르는 말. 초(草)했던 원고나 폐기 문서를 물에 빨아 먹물을 빼고 환지(還紙)를 만드는데 이용하였으므로 세초(洗草)란 말이 생겼음.

 

낙성 부수(樂城副守) 이단(李壇)의 고신(告身)을 빼앗게 하였는데, 빚을 주고 이자(利子)를 불려 남의 전민(田民)을 위협하여 취했으므로, 의금부(義禁府)의 조율(照律)을 따른 것이었다.

 

3월 14일 신미

홍문관에 명하여 선현(先賢)의 격어(格語)를 어병(御屛)에 쓰도록 하였다.

 

3월 15일 임신

임금이 망제(望祭)를 경휘전(敬徽殿)에서 행하였다.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덕부(李德孚)가 상소하여 본읍에 적곡(積穀)이 적은 폐단을 진술하고 평상시에 진휼할 모곡(耗穀)을 얻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화전세(火田稅)를 이전에는 작목(作木)073)  하여 지부(地部)074)  에다 갖다 바쳤는데, 궁방(宮房)에서 절수(折受)하고부터 백성들의 폐해가 매우 많습니다. 청컨대 도로 탁지(度地)075)  에 소속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3월 16일 계유

전 장령 신겸제(申兼濟)의 직첩(職牒)을 되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신겸제가 좌의정 이집(李㙫)이 차자(箚子)로 청한 것으로 인하여 삭직(削職)을 당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신겸제가 청한 의금부(義禁府)와 경조(京兆)076)  의 당상관을 파직하고 낭관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아뢴 것은 바로 신과 조현명(趙顯命)이 박도창(朴道昌)이 독약을 마시고 경폐(徑斃)한 것은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으로 신겸제에게 말하여 발계(發啓)한 것이었습니다. 이집(李㙫)이 신겸제를 청주(淸州) 역적의 족척(族戚)이라고 여겨 일부러 일을 끌면서 정지하지도 않고 연좌시키지도 않고 삭직(削職)하도록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겸제는 청주의 역적과는 10여 촌이 되니, 가까운 친척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직첩(職牒)을 되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사간원 【 헌납 민정(閔珽)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통화문(通化門)에서 수직(守直)하는 향군(鄕軍)으로 굶주려 죽은 자가 많은데도 병조(兵曹)에서는 변통(變通)하여 진휼(軫恤)하는 일이 없습니다. 청컨대, 병조의 당상관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지금 굶주려 거의 죽게 된 자에게는 보포(保布) 중 재량하여 감한 것을 대신하여 채워서 지급하게 하고, 또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건량(乾糧)을 나누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부사직 김간(金榦)이 상소하여 주급(周急)을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뜻이 선비를 높이고 늙은이를 공경하는 데 있으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3월 17일 갑술

장령 유경시(柳敬時)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해 흉년은 을해년077)  과 병자년078)   보다 심하여, 곤궁한 백성이 1백 묘(畝)의 수확을 모두 모아도 오히려 적곡(積穀)을 바치기에 부족합니다. 따라서 길거리에서 갓난 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많고, 대낮에도 남의 재물을 위협하여 공공연하게 빼앗고 있습니다.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진구(賑救)하는 계책을 강구하고 있으나, 백성은 많고 곡식은 적으니, 청컨대, 상평청(常平廳)과 진휼청(賑恤廳)의 원회 모곡(元會耗穀)과 각영(各營)의 별회 모곡(別會耗穀)을 일제히 합쳐 여러 고을에다 갈라서 지급하여 진휼하는 자본으로 보충하게 하소서."
하고, 또 대동미(大同米)를 작포(作布)하여 받아들이던 것을 절반은 우선 물려서 추수를 기다리도록 청하였다. 또 절검(節儉)을 숭상함으로써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는 근본을 삼고,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함으로써 재앙을 그치게 하고 화기를 이루는 방법을 삼기를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상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으며, 권면하고 경계한 말은 의당 유념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특진관 이정제(李廷濟)가 아뢰기를,
"경기(京畿)에 진휼하는 자본이 아주 떨어져서 장차 시작은 있어도 끝맺음이 없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강화(江華)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군량 3천 석을 갈라서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실록(實錄)을 봉안(奉安)하는 행사에는 으레 음악을 연주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기유년079) 《숙종실록(肅宗實錄)》을 봉안하였을 때 비록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상사(喪事)를 당하였으나, 대신이 진품(陳稟)하여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였으니, 지금도 전례를 따라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년(朞年)인 복제(服制)와 3년의 상제(喪制)는 경중이 같지 않으니, 악기(樂器)는 진열하되 연주하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이 상소하여 고(故) 종신(宗臣) 영원군(靈原君) 이헌(李櫶)의 효행(孝行)을 진달하고, 정려(旌閭)하기를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러한 흉년을 당하여 종신(宗臣)으로 빈궁한 자는 쉽게 의지할 데가 없게 됩니다. 청컨대, 급박한 형편을 구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영원군(靈原君)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빈궁(貧窮)한 종신은 해조로 하여금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하게 하겠다."
하였다.

 

신무일(愼無逸)·홍상빈(洪尙賓)·오명신(吳命新)을 승지로, 윤순(尹淳)을 좌참찬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우참찬으로, 황정(黃晸)을 수찬으로, 윤광운(尹光運)을 부수찬으로, 장태소(張泰紹)를 황해 병사로 삼았다.

 

3월 18일 을해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을 고강(考講)하였다.

 

이봉익(李鳳翼)·조상경(趙尙慶)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9일 병자

유생(儒生) 이산두(李山斗)·김덕린(金德麟)·박홍규(朴鴻逵)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080)  하도록 명하였었는데, 강경(講經)에서 수석(首席)을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대사성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전복(典僕)081)  에 빚을 주는 것을 묘당(廟堂)에서 지난(持難)하고 있는데, 흉년이 든 이후로 전복의 무리는 선비를 지공하는 구실을 당할 때마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어 혹 자문(自刎)하고 혹 독약을 마시기도 합니다. 들판에 굶주려 죽은 시체가 있어도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한데, 더구나 성묘(聖廟)의 수복(守僕)이겠습니까? 각 아문에 저축한 것이 많지 않으니, 비록 절반만 꾸어 주도록 허락하더라도 역시 눈앞의 급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참작하여 지급하도록 하였다.

 

청(淸)나라에서 황후(皇后) 나랍씨(那拉氏)의 시호(諡號)를 효경(孝敬)이라 하고, 우리 나라에 조서(詔書)를 반포하면서 청주(淸主)가 조사(詔使)가 우리 나라에 폐단이 됨을 염려하여 칙서(勅書)를 병부(兵部)에 부쳤었다. 이날 백관(百官)이 교외(郊外)에 나아가 맞이하였는데, 참석한 사람은 단지 공조 참판(工曹參判) 유숭(兪崇)뿐이었으므로, 임금이 중신(重臣)과 재신(宰臣) 이하를 모두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3월 20일 정축

최명상(崔命相)·정희보(鄭熙普)를 지평으로, 김상신(金相紳)을 정언으로, 김상옥(金相玉)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수찬 황정(黃晸)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어진 신하를 친애하고, 상하(上下)가 서로 구제하여 정치와 학문을 함께 가다듬어 하늘의 도리를 극진히 체득하며, 어긋나는 법을 제거하고 너그러운 법을 적용하며,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와서 간쟁(諫諍)하도록 해서 자신의 사욕(私慾)을 이성(理性)으로 이겨 인(仁)을 구(求)하려는 방법을 다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잡범(雜犯)과 사죄(死罪)를 사면하고, 백관에게 한 자급을 더하도록 하였는데, 청나라에서 황후(皇后)의 시호(諡號)를 올리고 칙서(勅書)를 반포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21일 무인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引見)하고, 북관(北關)의 곡식 1만 석(石)을 더 나누어 영남(嶺南)에 이전하도록 명하였는데,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훈영(訓營)082)  에서 재감(裁減)한 것으로 인하여 군사들의 봄옷 자료를 아직 나누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양서(兩西)의 병영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전포(錢布)를 5백 동(同)에 한하여 나누어 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월에 지급해야 마땅한 옷감 자료를 3월에 이르도록 지급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윗사람을 사랑하여 그 어른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는가? 양서 병영의 면포 각 1백 동을 나누어 정하고 진휼청(賑恤廳)의 발매포(發賣布) 2백 동을 즉시 수송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2일 기묘

반제(泮製)083)  를 베풀고 생원 홍계유(洪啓裕)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는데, 반제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3일 경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 헌납(獻納) 엄경하(嚴慶遐)를 파견하여 경기(京畿) 고을의 민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3월 25일 임오

밤에 목성(木星)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에 들어갔다.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이 상소하여 김제(金堤)의 옥사(獄事)를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 옥사(獄事)에 있어서 하나는 고을의 주민 이정운(李鼎運)이 묘지(墓地)에 관한 소송 사건으로 군수(郡守)가 은결(隱結)을 사사로이 활용했다는 것이고, 하나는 고을의 주민 나치경(羅致慶)이 옥문(獄門)을 때려 부수고 이정운을 탈옥(脫獄)시키려고 했다가 군수에게 곤장을 맞아 그 때문에 죽은 것이며, 하나는 나치경의 친족(親族)이 원수를 갚는다고 일컬으며 관문(官門)에 변고를 일으키고 관장(官長)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정운의 자부(子婦)가 신의 종매(從妹)가 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마음씀이 또한 기구합니다. 사문서(私文書)를 거짓으로 만들어 도성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현혹시켜 신이 진실로 인친(姻親)의 관계가 있어서 일부러 느슨하게 다스리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이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引見)하고 북관(北關) 육진(六鎭) 관고(官庫)의 조총(鳥銃)을 매월 두세 차례 입번(入番)하는 군사에게 내주어 쏘는 것을 시험하고 연습한 뒤에 병사와 수령이 직접 거두어다 간직하는 것을 감독하여 간교한 폐단을 방지하도록 명하였는데,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대체로 육진의 백성들이 사냥 때문에 범월(犯越)하므로, 일찍이 조총 연습을 금지시킨 적이 있었는데, 군사에 관한 정책이 이로 인해 더욱 허술해졌었다. 이때에 이르러 북병사 한범석(韓範錫)이 장계(狀啓)하고 장붕익이 거듭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허락하였다.

 

예조에 명하여 고려의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에게 치제(致祭)할 때에 제문(祭文)의 서두에 공(公)이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말도록 하였다. 대체로 선조조(宣祖朝)의 치제 때부터 이미 이 명이 있었고, 숙종(肅宗)을해년084)  에는 또 정몽주 및 길재(吉再)를 모두 공(公)이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명하여 그대로 정식(定式)이 되었었는데, 경종조(景宗朝)에 치제할 때에 해조(該曹)에서 살피지 못하고 잘못하여 그 이름을 썼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그 사실을 듣고서 이런 명이 있었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6일 계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고 대사헌 박응남(朴應男)의 관작과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게 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으며, 고(故) 지평 임숙영(任叔英)의 벼슬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수찬 윤동형(尹東衡)이 아뢰기를,
"임숙영은 광해조(光海朝) 때 대책문(對策文)에서 직언(直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조(先朝) 때 고 판서 박권(朴權)이 관작과 시호를 추증하도록 청하자, 고 상신 남구만(南九萬)이 관질(官秩)이 정2품에 이르지 않으므로, 격식 밖의 시호를 추증할 수 없다 하여 일이 비록 정지되었으나, 절의(節義)와 도학(道學)이 있는 사람에게는 품질(品秩)에 구애하지 않는 전례가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선조에서 허락하지 않았던 것을 지금 가볍게 허락할 수는 없다고 전교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지경연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고(故) 대사헌 박응남(朴應男)은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에게 종유(從遊)하여 학식(學識)이 매우 높았습니다. 대간(臺諫)으로 있을 적에는 거리낌없이 말하는 기풍이 있어 전후에 탄핵하고 논박한 것이 80여 인(人)에 이르렀는데, 윤원형(尹元衡)·이양(李樑) 등과 같은 권간(權奸)을 모두 배격하여 제거하였으니, 선조조(宣祖朝)의 청명한 정치에 그의 힘이 많았습니다. 청컨대, 신응시(辛應時)·조석윤(趙錫胤)의 예(例)에 의거하여 비록 정경(正卿)이 아니라 하더라도 시호를 추증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임숙영(任叔英) 역시 일체로 추증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문의(問議)하도록 명하였는데, 뒤에 대신이 아뢴 바로 인하여 이 명이 있었다.

 

3월 27일 갑신

주강을 행하였다.

 

지평 최명상(崔命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오명신(吳命新)에 대한 일을 전하(殿下)께서 만약 정업(貞業)이 공술(公述)한 것에 대해 곧바로 무고(誣告)의 율(律)로 결단하셨더라면 그만이겠지만, 계휘(戒輝)가 포도청(捕盜廳)에서 바친 공초(供招)가 정업과 서로 부합된 후였으니, 법을 집행한 데 대한 논의가 없을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남태온(南泰溫)이 두 역적을 핵문(覈問)하였을 때 신이 비록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나, 이미 들은 것이 있고 대간(臺諫)의 끝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잠자코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강필경(姜必慶)의 사건에 이르러서는 전하께서 친히 나숭열(羅崇說)을 신문하셨는데, 강필경·이석인(李錫仁)의 사건은 버려두고 추문하지 않으시니, 너무나 옥체(獄體)에 적합한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이 나홍언(羅弘彦)이 끌어댄 초사를 즉시 〈전하〉 앞에서 아뢰고, 공경히 성교(聖敎)를 받들어 추문하였습니다. 그 당시 강필신(姜必愼) 또한 문사 낭청(問事郞廳)의 대열에 있으면서 혐의를 멀리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리어 스스로 참섭(參涉)하였습니다. 바르게 경계하는 책임으로는 그만둘 수 없는 바인데, 이것이 어찌 깊은 의미가 있어서 발설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3월 28일 을유

주강을 행하였다.

 

교리 권혁(權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인군(人君)이 스스로 성군(聖君)이라고 여기는 병은 성군의 위치에 들어가기 어려우며,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병은 정치를 진작시킬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영기(英氣)가 너무 드러나셔서 예지(睿智)를 혼자 운영하여 일이 크고 작은 것은 물론하고 성심(聖心)이 한 번 정해지면 남들이 감히 돌이킬 수 없습니다. 조정에 가득한 잠신(簪紳)들이 진실로 모두 어지러이 따르면서 꺼려함을 받는 바가 없다면, 성명(聖明)께서 대수롭지 않게 본 것이 괴이하지 않겠지만, 돌아보건대, 전하께서 병이 드신 근원은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으니,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왕이 말을 하는 체모는 간략하고도 정중함을 힘써야 하는데, 언사(言辭)와 하교(下敎)가 번거롭고 중복되는 데 손상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연(經筵)에서는 군덕(君德)을 성취시켜야 하는데, 책을 펴서 입으로 몇 마디 읽다가 파하고, 아랫사람을 다룸에 있어서는 사기를 꺾고 얽어매어 반드시 곤궁한 지경에다 내버려 두고, 출척(黜陟)은 옳고 그름을 추구하지 않고 단지 이쪽저쪽 번갈아 기용한 것만 힘쓰십니다.
금번의 관록(館錄)085)  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반드시 번갈아 기용하고자 하여 이미 지극히 간략하게 하였었는데, 또 이기기를 힘써서 갑절이나 더하려고 하여 숫자를 채우지 못하면 가부(可否)를 불문하고 오직 널리 구하는 것만 일삼아 한 번의 관록이 25인이나 되었음은 근세(近世)에 없던 바이니, 당연히 고쳐서 명기(名器)를 소중하게 해야 합니다. 오명신(吳命新)에 이르러서는 조사를 거치지 않고 끝내 암담(黯黮)한 데에 있게 되었으나, 전후의 대론(臺論)이 끝까지 캐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물의(物議)도 의심스럽게 여기는 이가 많으니, 비록 즉시 악역(惡逆)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시 청현직(淸顯職)에 두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엄교(嚴敎)를 내려 그의 관직을 체임시켜 특별히 대정 현감(大靜縣監)에 전보하였다.

 

3월 30일 정해

양정호(梁廷虎)를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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