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무자
밤에 목성(木星)이 태미원(太微垣)의 집법성(執法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除)를 행하였다.
4월 2일 기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장령 유경시(柳敬時)가 상소하여 김시발(金時發) 등을 석방하여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고, 또 김정(金)이 무함(誣陷)당한 것을 신구(伸救)하였다. 김시발은 바로 김성절(金盛節)의 적통(嫡統)의 조카로 연좌(緣坐)되어 귀양갔다가 대신이 경연에서 아뢴 것으로 인하여 석방된 자이고, 김정은 남의 공(功)을 빼앗아 자급이 오르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벼슬 이름을 부르다가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은 자였다. 비답(批答)하기를,
"김시발의 일은 바로 구례(舊例)가 있으며, 김정(金)의 일은 벌써 그것이 어긋난 것임을 알았다."
하였다.
동지 사신(冬至使臣)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등이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치계(馳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황제(皇帝)가 역사에 관한 일이라 하여 특별히 사례를 고찰하고 의논해서 아뢰라는 칙지(勅旨)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본국 열전(本國列傳)을 베껴서 반포하라는 명을 내리고, 주청에 따라 고치라는 황지(皇旨)를 먼저 내각(內閣)에 보내며, 순환부(循環簿)086) 에다 황명(皇命)을 붙여 13성(省)에 두루 보이고, 3월 15일에야 처음으로 본국 열전(本國列傳) 등본을 신에게 반급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시랑(漢侍郞) 왕도병(王圖炳)이 수석 역관(首席譯官) 이추(李樞)를 불러 말하기를, ‘황상(皇上)께서 국왕의 성효(誠孝)에 감동하여 전질(全帙)의 사기(史記)를 간행 반포하기 전에 이렇게 특별히 반급하셨으니, 돌아가면 국왕에게 보고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사책(史冊)은 신 등이 받들고 가는 것이 적당하겠으며, 태조(太祖)·인조(仁祖) 양조(兩朝)의 일을 고친 부분은 4장의 종이에 베껴서 우선 봉하여 올립니다. 처음에는 조정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아 더러 주청을 막는 의논을 주장하기도 하고, 더러 깎아내리는 의논을 내세우기도 하고, 더러 실록(實錄)을 따라야 한다는 의논으로 버티기도 하였으므로, 십중팔구로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웠으나, 유독 예부 상서 삼태(三泰)가 주청을 따르도록 극력 주장하고, 총재관(摠裁官) 그 장정옥(張廷玉)이 곁에서 가세하여 결정하도록 도우니, 허다하게 틀리던 말들이 모두 순조롭게 끝이 났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사신이 치계한 것을 보니, 실로 우리 나라에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없다. 선래 군관(先來軍官) 이세급(李世伋)·조상유(趙尙綏)는 모두 자급(資級)을 더하도록 하라."
하고, 인해서 사은사(謝恩使)를 파견하도록 명하였다.
4월 3일 경인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강관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갑산(甲山)은 우후(虞候)와 유방장(留防將)을 철수시키고부터 대신 남병사(南兵使)의 군관(軍官)을 보내는데, 여러 가지로 폐단을 끼치고 있으니, 혁파하라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영경연사(領經筵事) 조문명(趙文命)은 도신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서로 의논하여 장문(狀聞)하게 한 뒤에 처리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진휼청(賑恤廳)에서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형좌(李衡佐)가 옛날에 진제(賑濟)하던 뜻을 준수하여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도록 청하였습니다. 청컨대 호남(湖南)의 예와 같이 절목(節目)을 만들어 내려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덕수(李德壽)를 대사헌으로,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유복명(柳復明)을 대사간으로, 한덕후(韓德厚)를 사간으로, 유척기(兪拓基)를 부제학으로, 윤동형(尹東衡)을 교리로, 김상석(金相奭)을 부수찬으로, 송성명(宋成明)을 판윤으로, 이진망(李眞望)을 지돈녕부사로, 이의현(李宜顯)을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조최수(趙最壽)를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이귀휴(李龜休)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4월 4일 신묘
주강을 행하였다.
사간 한덕후(韓德厚)가 상소하기를,
"권혁(權爀)이 논한 바는 진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왔는데, 두 번씩이나 바다로 내쫓으시니, 후하게 용납하는 도량에 혐의스러움이 있습니다. 원하건대, 빨리 지난번의 명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4월 5일 임진
조최수(趙最壽)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이미 역사에 관한 일을 고쳤고, 사은사(謝恩使)를 차출(差出)하였으니, 다시 재자관(䝴咨官)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황후를 추시(追諡)한 데 대한 진하표(陳賀表) 및 조칙(詔勅)의 반사(頒賜)에 대한 사은표(謝恩表)를 이번의 사신 행차에 모두 부치는 것이 적당합니다. 청컨대, 진하 겸 사은(進賀兼謝恩)으로 사신의 명칭을 삼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관동(關東)의 납월 공삼(臘月貢蔘)의 절반을 감하도록 명하였는데, 지평 정희보(鄭熙普)의 상소를 따른 것이었다.
예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태묘(太廟)의 축식(祝式)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그런데 더러 사왕(嗣王) 신(臣)이라고 호칭(號稱)하고, 더러는 효증손(孝曾孫) 사왕 신이라고 호칭하고, 더러는 효증질손(孝曾姪孫) 사왕 신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오직 덕종실(德宗室)만 국왕(國王) 신이라고 호칭하였으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윤순(尹淳)의 말을 인하여 이미 수의(收議)한 바가 있었는데, 이는 반드시 열성조(列聖朝)에서 미처 겨를이 없었던 소치이다. 성종(成宗) 때에는 사왕(嗣王)이라고 호칭할 경우 역시 불안(不安)하기 때문에 단지 국왕(國王)이라고 호칭하였었으니, 지금에 와서 고치더라도 〈선대(先代)의 일을〉 잘 계승하는 데에는 해롭지 않다. 전번에 좨주(祭酒) 정제두(鄭齊斗)가 효증질손(孝曾姪孫)으로 호칭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이치가 있다."
하자, 좌참찬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예종(睿宗)과 명종(明宗)은 정통(正統)과 다름없는데, 명종의 경우에는 효증손(孝曾孫)이라 호칭하고 예종의 경우에는 단지 사왕(嗣王) 신(臣)이라고 호칭하니, 이는 더욱 궐전(闕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종의 축식(祝式)도 ‘효증손(孝曾孫)’ 세 글자를 더하는 것이 적당하며, 덕종의 축식도 ‘효증질손(孝曾姪孫)’ 네 글자를 더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리고 정종(正宗)·문종(文宗)·단종(端宗) 여러 실(室)도 이에 의거하여 추가(追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응교 이종성(李宗城)은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상소하여 태묘(太廟)의 축식(祝式)이 한결같지 않음을 논하고, 개정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등록(謄錄)을 널리 상고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간원 【사간 한덕후(韓德厚)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정(金)이 남의 공(功)을 빼앗고 방자하게 역적의 벼슬을 일컬은 죄는 금오(金吾)에서 조사하고 있으므로, 아직 감단(勘斷)하지 않았는데, 법(法)을 집행하는 관원들이 번갈아가며 서로 영호(營護)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전후로 김정을 신구(伸救)한 대신(臺臣)을 모두 파직(罷職)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직책이 경악(經幄)에 있으면 마음에 품은 것은 숨김이 없어야 하니, 말하는 즈음에 설령 성심(聖心)에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진실로 우악하게 용납함이 마땅합니다. 더구나 그 논한 바가 모두 공의(公議)에 근거하였는데도 두 번씩이나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쫓아내시니, 물정(物情)이 불평(不平)을 합니다. 청컨대 권혁(權爀)을 지방으로 보임(補任)한 명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4월 6일 계사
소대를 행하였다.
4월 7일 갑오
소대를 행하였다.
4월 9일 병신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하향(夏享)을 행하였다.
4월 10일 정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부사직 이유(李瑜)가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도련포(都連浦)는 태조(太祖)께서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에 제성단(祭星壇) 및 치마장(馳馬場)을 설치하여, 뒤에 유린(游鱗)·현표(玄豹) 등 팔준마(八駿馬)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숙종조(肅宗朝)의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이 마장(馬場)을 설치하도록 논의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백성들에게 경작과 개간을 허락하였으니, 아마도 옛날의 자취가 파묻혀 없어질 듯합니다."
하였는데, 응교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신이 어사(御史)로서 도신(道臣)과 상의하여 해자(垓子)를 파고 표(標)를 세워 경계를 정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제성단(祭星壇)을 설치했던 가까운 곳에다 보수(步數)를 정하여 수리하고, 감히 혹시 하고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뜻을 다시 도신에게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 수재(水災)로 인하여 목장(牧場)을 내놓고 백성들의 경작을 허락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이유가 이와 같이 아뢴 것이다.
사간원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날 역적인 환관(宦官)과 요비(妖婢)가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흉악한 박필몽(朴弼夢)과 서로 안팎이 되어 종묘 사직을 거의 전복시키려 하였었는데, 우리 선왕(先王)의 지성 지명(至聖至明)으로 과단성 있는 정치를 행하여 마침내 음모(陰謀)와 흉계(凶計)로 감히 양궁(兩宮)을 이간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행록(行錄)을 찬진(撰進)한 신하가 전혀 견해를 제기하지 않고 선왕의 위대한 공열(功烈)을 덮어둔 채 드러내지 않았으니, 사신(詞臣)에게 첨가하여 넣도록 명하는 것이 마땅하며, 찬진한 사람은 엄중한 견책을 더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 연명 차자(聯名剳子)를 올려 대리하게 했다는 무함이 환하게 풀렸으니, 사대신(四大臣)에 대한 도리도 다름이 없을 것인데, 더러는 원한을 풀기도 하고 더러는 풀지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자가 별도로 아들과 손자에 대한 말을 만들어 억지로 구분(區分)하려고 하니, 이것이 과연 사리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조정의 처분이 처음에는 정성껏 하다가 중도에 흐지부지 그만두어 제신(諸臣)이 더러 진출하거나 더러는 은퇴하면서 정적(情跡)이 편안하지 못한 것은 역시 잡고 있는 의리를 모두 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광운(李光運) 등이 합계(合啓)를 낸 것은 진실로 군부(君父)를 높이는 징토(懲討)를 엄중히 하는 뜻이었는데, 위노(威怒)를 거듭 더하셔서 삭출(削黜)한 지 해가 지났으니, 용서하여 석방함이 적당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소장을 들이자, 임금이 되돌려 주도록 명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시장(諡狀)에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는 쓰지 말도록 명하였다."
하니,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시장에는 비록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사실을 기록하는 문서에는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헌납 민정(閔珽)이 상소하여 권혁(權爀)을 지방에다 보임(補任)한 명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지평 최명상(崔命相)이 상소하기를,
"요사이 한재(旱災)가 심합니다. 청컨대 지체된 옥사(獄事)를 빨리 처결하고, 수령(守令)을 공정하게 뽑고, 백성들에게 곡식 종자와 농사 지을 식량을 지급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권혁(權爀)을 지방에다 보임하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려 모두 그대로 시행하게 하되, 권혁에 대한 일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정광제(鄭匡濟)를 장령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우윤으로, 이흡(李潝)을 수찬으로, 서명균(徐命均)을 판돈녕부사로 삼았다.
4월 11일 무술
대사헌 이덕수(李德壽)를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도로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유복명(柳復明)의 상소에 이미 비답 없이 되돌려 주게 하자, 대신 홍치중(洪致中)이 비답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역적 박상검(朴尙儉)의 사건을 내가 시장(諡狀)에 쓰지 말도록 명하였던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비록 그러하더라도 행록(行錄)을 짓는 자는 당연히 그대로 두어야 할지 빼어버려야 할지 진품(陳稟)했어야 하는데, 시장(諡狀)의 사례를 인용하여 쓰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살피지 않은 실수이다."
하고, 마침내 이덕수를 파직하도록 명하였었는데, 조금 있다가 또 하교하기를,
"살피지 않은 것은 관심이 없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고, 파직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고 충신 남연년(南延年)의 처(妻)에게 염습(斂襲)하고 장례(葬禮)를 치를 물품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활인서 제조(活人署提調) 유숭(兪崇)이 상소하기를,
"지금 여기(癘氣)가 더욱 치성하여 병든 자의 절반이 떠돌아다니며 빌어먹고 있는데, 반드시 죽을 쑬 자료가 있은 후에야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건량(乾糧)을 주는 예(例)에 의거하여 매달 세 차례 쌀을 지급하게 하소서. 그리고 본서(本署)는 본래 서울에 관사(官司)가 없으므로, 낭청(郞廳)이 입직(入直)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서부(西部) 취현동(聚賢洞)에 있는 역적 민암(閔黯)의 집터에다 서울 관사를 새로 짓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4월 12일 기해
소대를 행하였다.
부수찬 이흡(李潝)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김정(金)의 원사(爰辭)를 보고 신이 앞서 들었던 사실이 진실되고 확실하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신이 서계(書啓)하여 논한 김정의 죄는 바로 다른 사람의 공(功)을 빼앗은 것과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높이 일컬은 것과 이론을 내세운 통문(通文)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정이 허물을 감추려고 꾸며도 꾸밀 수 없는 것이 저절로 많이 드러났습니다. 나학천(羅學川)이 수창(首唱)한 공을 그가 일찍이 상소하여 아뢰어 없앴지만, 이제야 비로소 엄폐할 수 없게 되었으며, 역적 김일경을 높이 일컫고 이론을 세운 등의 말에 대해서는 그가 또 감히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니, 근거없는 말이 어느 곳에서 나왔겠습니까? 권상일(權相一)·유경시(柳敬時)가 상소하여 영구(營救)하고 왕부(王府)에서 사실을 조사하기 전에 상소하여 영구(營救)한 것은 방자하다고 말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되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삼남(三南)에 전염병이 치성하므로, 도신에게 명하여 해도(該道)의 중앙(中央)에다 단(壇)을 설치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祈禱)하게 하였다. 또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로 하여금 약물(藥物)을 넉넉히 보내도록 하였는데, 예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4월 13일 경자
주강을 행하였다.
장령 정광제(鄭匡濟)가 상소하여 대사헌 이덕수(李德壽)를 이미 파직하였다가 도로 그대로 둔 것은 불가하다고 논하고, 빨리 견책을 더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였다.
경기 어사 엄경하(嚴慶遐)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양성 현감(陽城縣監) 김집(金潗)은 이미 백성들의 원망이 많고, 또 조곡(糶穀)을 옮긴 사실을 듣고서 특별히 파출(罷黜)하도록 명하였다.
대조전(大造殿)을 수리할 때의 중관(中官)을 나처(拿處)하도록 명하였는데, 그것을 빙자하여 폐단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궁노(宮奴)로서 폐단을 일으킨 자는 형조(刑曹)에서 엄중히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유언통(兪彦通)을 장령으로, 황재(黃梓)를 부응교로, 이도원(李度遠)을 교리로, 윤순(尹淳)을 판의금부사로, 서종급(徐宗伋)을 동의금부사로 삼았다.
4월 14일 신축
전교하기를,
"진휼청(賑恤廳)에서 양식을 나누어 줄 때에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다 쓰러져 죽은 사람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게 하라."
하였다.
4월 15일 임인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4월 16일 계묘
주강을 행하였다.
전경 문신(專經文臣)087) 을 고강(考講)하였다.
심공(沈珙)을 대사간으로, 박규문(朴奎文)·김담(金墰)을 장령으로, 김취로(金取魯)를 동의금부사로 삼았다.
4월 17일 갑진
주강을 행하였다.
경자년088) 의 양안(量案) 뒤에 묵은 전지는 백성들이 일구어 경작 하도록 허락하고, 속전(續田)089) 의 예에 의거하여 기경(起耕)한 대로 세금을 거두도록 명하였는데, 지경연사 송인명(宋寅明)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예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덕종실(德宗室)의 축식(祝式)은 예조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선조(先朝) 정묘년090) 에 승지 이언강(李彦綱)이 아뢴 바로 인하여 영녕전(永寧殿)의 축식(祝式)을 수의(收議)한 적이 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의논하기를, ‘고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으나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고, 선정신 박세채(朴世采)는 의논하기를,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인년091)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였을 때 시책문(諡冊文)에 처음으로 ‘효증손(孝曾孫)’ 세 글자가 있으므로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영녕전의 각실(各室)에 더러 국왕(國王) 신(臣)이라고 호칭하기도 하고, 더러는 사왕(嗣王) 신(臣)이라고 호칭하기도 하였는데, 유독 인종(仁宗)·명종(明宗) 양실(兩室)만 효증질손(孝曾姪孫)·효증손(孝曾孫)의 칭호를 썼으니, 이는 틀림없이 인조조(仁祖朝)에 호칭한 것을 이어서 따른 것으로 당연히 고쳤어야 할 것을 고치지 않은 것입니다. 단종(端宗)의 축(祝)도 단지 사왕 신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최석정의 뜻은 틀림없이 영녕전은 바로 친진(親盡)092) 한 신주(神主)를 옮겨다 모신 곳이므로, 속칭(屬稱)을 제거하여 태묘(太廟)와 구별함이 합당하다고 여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례의(五禮儀)》의 축식(祝式)을 상고해 보았더니, 의묘실(懿廟室)에는 ‘국왕 신’ 세 글자 위에 본래 ‘효질(孝姪)’ 두 글자가 있었는데, 조천(祧遷)할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속칭을 제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단지 국왕 신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 하여 다시 이미 제거한 속칭을 더하려 하시니, 어찌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고, 선조(先朝)에서 고치지 아니한 것을 지금 갑자기 고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우선 그대로 두도록 명하였다.
기우제(祈雨祭)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장차 기우제를 지내려 하였는데, 기일에 임박하여 비가 내렸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4월 19일 병오
주강을 행하였다.
윤급(尹汲)을 지평으로, 홍호인(洪好人)을 승지로 삼았다.
강원도(江原道) 홍천현(洪川縣)에 눈이 내렸다.
4월 20일 정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형좌(李衡佐)가 도내(道內)에 굶주려 죽는 자가 잇달고 곡물은 이미 다 떨어졌으므로, 경상도 영저(嶺底) 일곱 고을의 전세(田稅)를 바꾸어 바치고 남은 것을 가져다 진자(賑資)에 보충하려고 영남 도신과 이문(移文)을 주고받았는데, 본도에서 거두어 보관하고 있는 대동미(大同米)와 기유년093) 의 군작미(軍作米) 가운데에서 참작하여 나누어 줄 것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세(田稅)는 바로 유정지공(惟正之供)이니, 조정에서 허락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백성들에게 보탬이 된다면 어떻게 경중(輕重)을 논하겠는가? 청한 바 세금을 바꾸도록 하는 일은 그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권상일(權相一)·유경시(柳敬時)를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권상일 등이 김정(金)을 영구(營救)하였다 하여 간신(諫臣)이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 것을 아뢰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영남 사람은 마땅히 진념(軫念)하여 거두어 채용해야 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이 아뢰기를,
"근래에 오랫동안 권무과(勸武科)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경향(京鄕)의 무사(武士)들이 기예(技藝)를 연습함이 전보다 못한 것이 많습니다. 청컨대, 베풀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헌납 민정(閔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경종(景宗)의 행록(行錄)에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를 싣지 않았는데, 이것이 참으로 선조(先朝)의 대처분(大處分)이기는 하지만, 민몰(泯沒)시킬 수는 없습니다. 실록(實錄)을 비록 이미 봉안하였다 하나, 행록이 붙어 있는 권(卷)은 더 써넣고 고쳐서 인쇄하여 뒷날 포쇄(曝曬)할 때에 추가로 가져가서 간직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 양근 군수(楊根郡守) 구억(具億)을 대간(臺諫)의 공론으로 인하여 잡아오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는 오로지 조곡(糶轂) 1백여 석(石)을 고을의 사대부에게 지급한 데서 나왔습니다. 이는 굶주리는 백성들의 입 안에 든 물건을 빼앗아 재력(財力)이 있는 자에게 가져다 주어 남기는 밑천으로 삼게 한 것입니다. 종전의 죄범(罪犯)은 비록 사령(赦令)으로 조사하는데 미치지 않았다 하나, 이 한 사건만은 다시 잡아다 조사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진휼(賑恤)을 맡은 관사의 낭청(郞廳)이 오로지 친한 이만 기록하니, 굶주리는 백성으로 누락된 자가 많습니다. 더구나 건량(乾糧)을 나누어 주는 때를 당하여 간혹 뒤섞여서 거듭 받는 자가 있기도 하고 간혹 밟히고 깔려서 죽는 자가 있기도 합니다. 해당 낭청을 청컨대 도태시켜 버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는 이미 정사(正史)에 기록하였는데, 어찌 행록(行錄)에 덧붙여 간인할 필요가 있겠는가? 구억에 대한 일과 해당 낭청(郞廳)에 대한 일은 모두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한덕후(韓德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간장(諫長)과 헌신(憲臣)이 상소하자, 비답 없이 되돌려 주도록 하셨는데, 이는 대신(臺臣)을 대우하고 언로(言路)를 통하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선왕의 시장(諡狀)에 박상검(朴尙儉)의 옥사를 기재하지 않은 것은 성상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어서였겠지만, 우리 나라의 사실을 기록하는 문서에는 이미 구애받을 것이 없었는데, 어떻게 빼버리고 기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옥돌에다 새기는 작업이 지금 비록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두어 줄의 글은 고치기는 매우 쉬우며, 사각(史閣)에 추가로 간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경휘전(敬徽殿)의 하향 대제(夏享大祭)와 망일제(望日祭)의 반열에 진참(進參)하지 않은 재신(宰臣)과 숭품(崇品)이 많았으니, 모두 파직(罷職)하는 벌(罰)을 시행하심이 적당합니다. 금년에는 흉년들어 옥식(玉食)도 달갑지 않습니다. 백성을 진휼하는 정책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금성 현감(錦城縣監) 이형곤(李衡坤)은 사사로이 1천 석에 가까운 쌀을 보내어 경강(京江)에서 발매(發賣)하다가 마침내 양천현(陽川縣)에서 붙잡혀 진휼청(賑恤廳)에 보고되는 데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고, 제사지내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과 이형곤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4월 21일 무신
경상도(慶尙道) 각 고을에 전염병과 천연두가 치성했는데, 영덕현(盈德縣)에서는 괴질(怪疾)로 한꺼번에 64명이 죽었다.
4월 22일 기유
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조최수(趙最壽)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처음에 예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명사(明史)》의 본국 열전(本國列傳)을 가지고 나올 때에 영접하는 의식 절차가 있어야 마땅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에서 아뢰기를,
"여러 대신들이 모두 사행(使行)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넌 뒤에는 해도(該道)에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받들고 오게 하고, 연로의 각 고을에서는 용정(龍亭)과 의장(儀仗)을 갖추어 5리 밖에서 영접하도록 하고, 영은문(迎恩門)에 도착한 뒤에는 예관(禮官)과 사신이 함께 받들어 도성(都城)에 들어가고, 성상께서는 권정례(權停禮)를 써서 공경히 맞이하되 대궐문 안에 자리를 마련하고, 백관(百官)은 마련한 자리 곁에 차례로 서서 공경히 맞이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선조조(宣祖朝)의 《회전(會典)》을 반강(頒降)하였을 때의 이미 근거할만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대신들의 뜻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4월 24일 신해
사간원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4월 25일 임자
정언 신택하(申宅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의 흉년은 영남과 호남이 더욱 참혹한데, 진제(賑濟)할 밑천을 여러 가지로 한데 모아서 절반이 넘게 빌려 주었으나, 형세가 장차 가을이 되면 도로 갚아야 할 것입니다. 10분의 2를 이자(利子)로 받는 영갑(令甲)이 지극히 엄중하니, 지금 진휼을 마친 뒤에 만약 근본을 세운다고 하여 이자를 갑절로 받는 일이 있으면, 지정된 외에 지나치게 징수하였다는 율(律)로 다스리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대동미(大同米)의 징수를 독촉하는 폐단을 논하고, 추수하기를 기다려 〈기한을〉 물려서 바치게 하여 백성들이 곤궁함을 펼 수 있게 하기를 청하자, 비답하기를,
"이자 받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고, 대동미는 바로 유정지공(惟正之供)이니, 〈기한을〉 물려서 바치게 하여 요행을 바라는 길을 열게 할 수 없다."
하였다.
김용경(金龍慶)을 대사간으로, 엄경하(嚴慶遐)를 헌납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대사성으로, 김취로(金取魯)를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이정소(李廷熽)를 병조 참판으로, 민응수(閔應洙)를 형조 참판으로, 윤혜교(尹惠敎)를 동의금부사로, 황정(黃晸)을 교리로 삼았다.
4월 28일 을묘
밤에 화성(火星)이 방수(房宿)에 들어갔다.
4월 29일 병진
서명균(徐命均)을 판의금부사로, 민응수(閔應洙)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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