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무오
병조에 신칙하여 문신(文臣)으로 순장(巡將)을 선발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각 관사에 묘시(卯時)094) 에 출사(出仕)하고 유시(酉時)095) 에 퇴근하는 법을 거듭 밝혔다.
장연(長淵)의 유학(幼學) 김태규(金兌珪) 등이 상소하여 본읍(本邑)의 기자 사우(箕子祠宇)에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자, 비답하기를,
"도(道)가 밝혀지고 밝혀지지 않는 것은 몇 글자의 은액(恩額)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5월 3일 기미
병조 정랑 정형복(鄭亨復)과 전 정랑 김상익(金尙翼)을 파견하여 제도(諸道)에 기민 구제를 염탐하게 하였다.
타공(舵工) 정수강(鄭守强)을 용산 강변에서 주벌(誅罰)하였는데, 해주(海州)의 곡식을 옮길 때에 쌀을 훔치고 물을 섞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사람도 경중(輕重)을 나누어 처벌하고 귀양보냈다.
전교하기를,
"선조(先朝) 때에 서북(西北)의 사람을 특별히 별군직(別軍職)으로 차임(差任)하였던 것은, 성의(聖意)가 있었음이었는데, 지금은 서북의 사람이 없으니 어찌 선조의 뜻을 준수하겠는가? 서북의 무사로 활을 잘 쏘고 용감하고 건장한 자 각기 2,3인을 해조로 하여금 선발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5월 4일 경신
조명신(趙命臣)을 승지로 삼았다.
5월 5일 신유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단오제(端午祭)를 행하였다.
5월 6일 임술
부제학 민응수(閔應洙)를 특별히 내쫓아 죽산 부사(竹山府使)로 삼도록 하였는데,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수찬 김상석(金相奭)이 상소하여 권혁(權爀)을 섬에다 귀양 보내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교하였다."
하였다.
장령 박규문(朴奎文)이 상소하기를,
"군향(軍餉)이 급박할 때를 위한 수용(需用)이지만, 한결같이 융통성 없이 지키기만 하다가 백성들을 모두 죽게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곡식을 옮겨 경기(京畿)의 고을에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묘당에 널리 물어 황정(荒政)을 미리 강구하게 하고, 수령으로서 잘 다스린 자에게는 당연히 포상(褒賞)하는 뜻을 보이되, 자주 옮기지 말도록 할 것이며, 부호(富戶)의 권분(勸分)도 의당 염찰을 더하여 폐단을 일으키지 않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옥천 군수(沃川郡守) 이저(李著)는 은결(隱結)을 사사로이 썼으며 화전(火田)에서 백징(白徵)하였습니다. 그리고 굶주리는 백성을 보조하려고 초록(抄錄)하면서 태반을 소홀하게 누락시켰고, 진구(賑救)하는 데 보충한다고 빙자하여 부호(富戶)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죽산 부사(竹山府使) 남익엽(南益燁)은 재결(災結)을 몰래 써버리고 세금으로 바친 콩과 돈을 모두 착복하였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전(京甸)을 어찌 돌보지 않겠는가마는, 군향도 모두 써버리기는 어렵다. 제2건의 일은 당연히 유념하겠으며, 제3건의 일은 이미 거듭 신칙하였다. 이저는 마땅히 처분해야 하며, 남익엽(南益燁)은 금오(金吾)의 관원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단하게 하겠다."
하였다.
사간 한덕후(韓德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황해 감사 윤용(尹容)은 역적 윤수(尹邃)의 지친(至親)으로서, 역적 윤수가 바야흐로 국옥(鞫獄)에 있을 때 엄중히 신문하라는 계청(啓請)이 날마다 대신(臺臣)의 간책(簡策)에 올랐었는데, 윤용은 절부(節符)를 지닌 채 양양하게 무릅쓰고 부임하였습니다. 왕도(王導)가 진흙에 닿도록 머리를 굽혀서 죄를 청한 것096) 을 진실로 이 사람에게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음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견벌(譴罰)을 베푸심이 마땅합니다. 영암 군수(靈巖郡守) 오명후(吳命厚)는 본래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의 사객(私客)으로서, 남의 추천으로 인연하여 능력이 없으면서 외람되게 기성(騎省)097) 에 끼어 있다가, 이수항이 자벽(自辟)하는 제목(題目) 아래에 들기를 꾀하여 얻었으므로, 물의가 진실로 이미 비웃으며 손가락질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지(任地)에 부임한 이후로 집안 상사(喪事)의 부의(賻儀)라고 일컬으며 짐바리가 계속 잇달고 있으니, 파직(罷職)함이 마땅합니다. 이수항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협박에 따른 것은 다스리지 말라는 옛날의 교훈이 있다. 무신년098) 의 반역(反逆)을 양성(釀成)한 것은 다른 시상(時象)이 아니니, 시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비록 날마다 흉악한 역적을 주벌(誅罰)한다 하더라도 폐단의 근원은 막기 어렵다. 그 근본을 다스리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하여 애매한 족속(族屬)을 다스려야 하겠는가? 윤용이 그 아비의 아들로 어떻게 윤수에게 물들었겠는가? 상소 끝 부분의 일은 사람을 논함에 있어 결단코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다."
하고, 얼마 있다가 한덕후를 체임(遞任)하도록 명하였다.
평안도(平安道)의 성천(成川)과 자산(慈山)에 우박(雨雹)이 내렸는데, 크기가 거위알만 하였다.
이진망(李眞望)을 판윤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지의금부사로, 유척기(兪拓基)를 형조 참판으로, 황정(黃晸)을 응교로, 이종성(李宗城)을 교리로, 이종백(李宗白)을 부교리로, 조적명(趙迪命)을 수찬으로 삼았다.
5월 7일 계해
판중추부사 이의현(李宜顯)이 고향에서 도성으로 들어왔는데, 대개 사행(使行)을 떠나는 일로 임금이 간곡하게 권면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의현이 이미 도성에 들어와서 또 녹봉(祿俸)을 사양하고 받지 않으므로,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진보현(眞寶縣)에 황모(黃蟊)의 재해가 있었다.
5월 8일 갑자
동지 정사(冬至正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부사(副使) 조상경(趙尙絅), 서장관(書狀官) 이일제(李日躋)가 《명사(明史)》의 조선 열전(朝鮮列傳)을 받들고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책을 받아 펼쳐 보고 인하여 하문(下問)하기를,
"우리 태조조(太祖朝)의 일은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는데, 이는 누구의 의논인가?"
하자, 조상경이 아뢰기를,
"바로 한인(漢人) 왕유돈(汪由敦)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명사(明史)》의 본문(本文)인가?"
하자, 조상경이 아뢰기를,
"《명사》로 인하여 청나라 사람이 수찬(修撰)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립(自立)했다는 ‘자(自)’는 끝내 고치지 못했다."
하자, 조상경이 아뢰기를,
"명본기(明本紀)에도 이 두 글자가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개국(開國)하는 즈음에는 으레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촉한(蜀漢)은 바로 정통(正統)인데도 주자(朱子)가 특별히 한중왕(漢中王)이 자립(自立)했다고 썼으니, 우리 조정의 일도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내 마음에 오히려 석연치 못하다."
하였다. 탱(樘)이 또 〈명나라〉 태조(太祖)와 희종(熹宗)의 본기(本紀)를 받들어 올리면서 아뢰기를,
"태조 본기(太祖本紀)에는 우리 태조조의 일이 기재되어 있고, 희종 본기(熹宗本紀)에는 인조조의 일이 기재되어 있는데, 모두 대강(大綱)을 간략하게 썼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제신(諸臣)은 등본(謄本)을 인본(印本)보다 못하다고 여기지만, 나의 뜻은 그렇지 않다. 옹정(雍正)099) 이 어문(御門)에서 친히 반포(頒布)한 것이니, 어찌 믿을 만한 사기(史記)가 아니겠는가? 다만 반드시 전부(全部)의 간본(刊本)을 얻은 후에야 바야흐로 성공했다고 하겠다."
하였다. 조상경이 아뢰기를,
"신 등이 반드시 전부를 가지고 오려고 하였지만, 장정옥(張廷玉)이 어렵게 여겼습니다. 대체로 《명사(明史)》의 편집(編輯)은 강희(康熙)100) 때부터 웅사리(熊賜履)·왕홍서(王鴻緖) 등이 시작하였었는데, 단지 열전(列傳)만 찬집하여 올리자, 강희(康熙)가 묻기를, ‘어찌하여 본기(本紀)를 먼저 찬집하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명나라 조정의 문자에 기휘(忌諱)할 부분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강희가 말하기를, ‘노(奴)자 같은 것은 바로 욕설(辱說)이니 삭제하는 것이 좋고, 노(虜)자 같은 것은 옛날에도 있었으니 두는 것이 좋다.’고 하므로, 인하여 본기 20여 권과 열전 74권을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장정옥이 총괄하여 잇따라 지(志)와 표(表)를 편수(編修)하였다고 하니, 전부를 아직 반포하지 않는 것은 기휘(忌諱)하는 글자를 아직 모두 고치지 못해서인 듯합니다."
하고, 탱(樘)이 아뢰기를,
"이 책을 미처 보지 못하였을 때에는 우려(憂慮)가 실로 많았었는데, 이제 종계(宗系)에 관한 일과 열성조(列聖朝)에 관한 일은 모두 뜻대로 고쳤으니, 만번 다행스럽게 여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상명(常明)과 유보(留保)의 힘이 진실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은화(銀貨)와 과하마(果下馬)·진주(眞珠) 등의 물품을 상명이 요구하기 때문에 신 등이 수석 역관(首席譯官)으로 하여금 임시 방편으로 대답하게 하였으나,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는 예(禮)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에 갇혔을 때에 무왕(武王)이 미녀(美女)와 옥백(玉帛)을 사용하였었다.101) 이미 선왕의 무함을 분변하려고 한다면, 어찌 뇌물을 주는 혐의를 피할 수 있겠는가? 은(銀)은 윤필(潤筆)의 대가라는 명목으로 지급하고, 진주와 말은 명분이 없는 물건이니 이목을 번거롭게 한다는 것으로 핑계대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역관(譯官) 김경문(金慶門)을 나문(拿問)하여 핵실(覈實)해서 처단하도록 명하였는데, 세 사신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이보다 먼저 사행(使行)이 책문(柵門)을 나올 때에 세금을 바치는 규정이 없는데, 김경문이 물화(物貨)를 많이 싸가지고 저들의 지경에 들어가면서 교자(轎子)를 타고 양산(陽傘)을 펼치고는 처음으로 세금 명목의 은(銀)을 지급하여 장차 뒷날의 폐단을 이루었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5월 9일 을축
소대를 행하였다.
동지 정사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에게 말을 내리고, 부사 조상경(趙尙絅)과 서장관 이일제(李日躋)에게는 아울러 자급(資級)을 더하도록 명하였는데, 《명사(明史)》의 본국 열전(本國列傳)을 주청하여 고친 공(功) 때문이었다.
동지사가 가지고 온 초피(貂皮) 2백 장(張)과 금단(錦鍛)을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내려 주어 진구(賑救)하는 자료로 보충하도록 명하였다.
5월 10일 병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이 군졸로 하여금 곡식을 바치게 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켜 주고, 〈그 곡식을〉 가져다 진구(賑救)하는 밑천으로 보충하고 있습니다. 흉년에 관작(官爵)을 파는 것도 오히려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더구나 군액(軍額)을 파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금오(金吾)에 명하여 잡아다 추문(推問)하고 조사하여 처단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경기(京畿) 고을의 곡물이 이미 바닥이 났는데도 보릿 가을은 이르지 않아, 백성들의 형세가 매우 급박합니다. 청컨대 양서(兩西)에서 운반하여 선혜청(宣惠廳)에 비치한 쌀 1만 석(石)을 지금 나누어 주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도로 받아들여서 조적(糶糴)을 만드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인하여 삼남(三南)에서 받아들여 보관하고 있던 대동미(大同米)도 삼남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조적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강도(江都)의 쌀과 선혜청(宣惠廳)의 쌀 각 1만 석을 지부(地部)에 나누어 주었다. 당시 국가의 비용이 이미 바닥이 나서 겨우 여름과 가을까지 버틸 형세였으므로, 호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이 청했기 때문이었다.
교리 이종성(李宗城)을 과천(果川)에, 병조 정랑 이주진(李周鎭)을 양지(陽智)에 파견하여 조적(糶糴)과 절미(折米)의 창고에 보관된 허실(虛實)을 염찰하게 하였다.
5월 11일 정묘
이귀휴(李龜休)를 사간으로, 유엄(柳儼)을 전라 감사로, 유척기(兪拓基)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과천 어사(果川御史) 이종성(李宗城)이 복명(復命)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신이 길에서는 굶어 죽은 시체를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돌아오다가 경성(京城)에 이르러 처음으로 굶어 죽은 것을 보고 진실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과궁(寡躬)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방백만 못하고, 경청(京廳)에서 백성을 진휼하는 것이 수령만 못하다는 것인가? 이는 진실로 내가 구렁에 밀어 넣은 것이니, 자책하기에 겨를이 없다. 진휼청의 당상관을 아울러 종중 추고하고, 낭청은 잡아다 처단하고, 부관(部官)은 도태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2일 무진
전염병에 걸려 앓는 사람들에게 양미(糧米)를 지급하게 하였는데, 당시 도성에 전염병이 날로 치성하여 병든 자가 1천 5백여 명에 이르고, 죽는 자가 서로 잇달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장령 김담(金墰)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성상께서 선왕(先王)을 계승하신 광명(光明)과 마음에서 우러난 효우(孝友)는 간책(簡策)에도 드문 바로서, 뭇 신하들이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꾸짖고 태양을 욕하는 역적이 전후로 잇따라 일어나, 저주하는 물건을 묻거나 비수(匕首)를 품는 흉칙함이 궁중에서 계속해서 발견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당연히 다스려야 할 것을 다스리지 않아 난적(亂賊)으로 하여금 기운이 더 솟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상검(朴尙儉)의 옥사 같은 데 이르러서는 관계됨이 매우 중대합니다. 우리 경종(景宗)에게 있어서 어떠한 대처분(大處分)인데,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가 공공연하게 덕(德)을 형용하는 문자에서 빼어버린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의심하는 데 이르러서는 단지 대수롭지 않게 잊어버렸다고 말하였으니, 아! 이것은 무슨 마음입니까? 성상께서 비록 추가하여 고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신다 하나, 추가로 고치는 미안(未安)함이 빼어버려 미안하게 된 것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가볍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행록(行錄)에 대한 일은 이미 하교(下敎)하였다."
하였다.
5월 13일 기사
최명상(崔命相)을 헌납으로,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부교리로, 이재(李縡)를 우윤으로, 유척기(兪拓基)를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5월 14일 경오
양지 어사(陽智御史) 이주진(李周鎭)이 복명(復命)하자, 임금이 다시 이주진을 파견하여 진휼(賑恤)을 베풀고 있는 여러 고을을 염찰하게 하였다.
용인 현령(龍仁縣令) 심악(沈)을 먼저 파직시킨 뒤에 잡아오도록 명하였는데, 진휼(賑恤)하는 정치를 잘못하였다고 어사(御史)가 아뢴 바로 인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5월 15일 신미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5월 16일 임신
영남(嶺南) 고성현(固城縣)의 법천사(法泉寺) 중이 스스로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화상(畫像)이 있다고 말하므로 도신이 계문(啓聞)하자, 임금이 종신(宗臣)에게 가서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종신이 돌아와 아뢰기를,
"화상(畫像)이 오래 된 필적(筆跡)이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본도에서 역마(驛馬)를 타고 받들어 오도록 명하고, 대신과 예관으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아뢰기를,
"두건과 가죽신의 제도가 옛날과 이미 다르고, 또 흉배(胸背)에 학(鶴)을 수놓은 것과 품대(品帶)을 금(金)으로 한 것은 모두 왕자(王子)의 품복(品服)이 아니니, 결단코 이것은 위조본[贋本]입니다. 청컨대 씻어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선 예조에 비치해 두고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경종실록(景宗實錄)》의 총재관(摠裁官) 이집(李㙫)에게 안구마(鞍具馬)를 내리고, 도청 당상관(都廳堂上官) 서명균(徐命均), 낭청 이춘제(李春躋)에게는 아울러 자급을 더하고, 여러 당상관과 낭청에게는 차등 있게 상(賞)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5월 17일 계유
진휼청(賑恤廳)에서 진구(賑救)를 마친 뒤 떠돌며 빌어먹는 의지할 데 없는 자를 가려내어 설죽(設粥)하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홍치중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전교하기를,
"조정에서 활인서(活人署)를 설치한 것은 그 백성을 위하는 뜻이 융성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어서 병이 들어 죽는 자가 많으니, 비국으로 하여금 약물을 제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료(救療)하는 데 더욱 마음을 쓰게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어제 어사(御史)가 아뢰는 것을 들었는데, 만약 굶주려 죽은 시체를 보았으면, 음식이 어찌 목구멍에 내려가겠는가? 건량(乾粮)을 나누어 지급하는 것은 왕명을 부지런히 이행하는 데 불과하니, 이후로 설죽(設粥)한들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지탱하겠는가? 백성들의 부모(父母)가 되어 만약 구제하고 살리지 못한다면, 아! 적자(赤子)들이 어느 곳에서 먹을 것을 바라겠는가? 서울의 양식도 이미 떨어졌지만, 지방에는 보리가 추수기에 접어들었으니, 떠돌며 빌어먹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에게 멀고 가까움을 참작해서 양식을 지급하여 길에서 굶주리는 것을 구제하도록 하고, 갈 수 없는 자에게는 장차 설죽(設粥)하여 먹이도록 하라. 이렇게 굶주리는 백성을 생각하면 어찌 차마 평상시처럼 이바지하게 할 수 있겠는가? 설죽하는 기간 동안 3일마다 어미(御米) 세 되를 진휼청에 덜어주어 진휼하는 자료에 보태게 하고, 대궐에서 장(醬) 10옹(甕)을 진휼청에 내려주어 보태어 쓰게 하라. 아! 진휼청에서 주관하는 신하는 나의 감선(減膳)하는 뜻을 생각하여 더욱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영양현(英陽縣)에 서리가 내렸다.
5월 20일 병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권혁(權爀)이 상소하여 홍문록(弘文錄)을 논한 것은 실제로 지척(指斥)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며, 본래 저지하여 방해하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또 들으니, 권혁이 중로(中路)에서 병이 걸려 매우 심하다고 합니다. 만약 멀리 바다를 건너게 한다면 죽어서 돌아올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육지(陸地)로 내보내어 해남현(海南縣)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판의금부사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김정(金)이 공(功)을 빼앗아 직질(職秩)이 더해지기를 도모한 한 조항은 그가 발명(發明)한 것 또한 근거한 바가 있지만,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벼슬을 일컬은 한 조항은 어사(御史)의 계사(啓辭)와 대간(臺諫)의 공론이 이미 명백하니, 전례대로 논의하여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정(金)이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였다면, 이런 말이 어디에서 생기겠는가? 삭직(削職)하여 놓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1일 정축
소대를 행하였다.
지평 정희보(鄭熙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숙종(肅宗)께서 기로소(耆老所)102) 에 들어간 경사는 실로 천고의 성대한 아름다움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한두 재신(宰臣)의 연갑(年甲)이 마침 선조(先朝)와 똑같아 더러 은대(銀臺)103) 의 반열로 당일의 잔치에 참예하였으니, 특별히 우수한 예(禮)를 베푸심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요즈음 시골 백성들이 경중(京中)의 이서(吏胥)와 인연하여 녹사(錄事)·창준(唱準)을 차지하려고 꾀하고, 언제나 군정(軍丁)의 세초(歲抄)를 당해서는 첩문(帖文)을 가지고 모면하기를 구합니다. 청컨대 각 아문(衙門)에 신칙하여 단지 옛날의 액수(額數)만 두고 새로 차임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전 호남 감사가 군정(軍丁)을 팔아 진구(賑救)할 밑천을 보충한 것은 반드시 영하(營下)의 수령들이 획책(畫策)한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청컨대 아무개라는 것을 지목하여 현지에서 보고하도록 해서 일체로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 아산 현감(牙山縣監) 이태진(李泰鎭)은 스스로 염아(恬雅)를 지켰었는데, 금고(禁錮)를 당한 지 거의 10년이 지났습니다. 전 창평 군수(昌平郡守) 최창억(崔昌億)은 결점이 있는 정치가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어사(御史)의 논박을 받았습니다. 전 양양 부사(襄陽府使) 권부(權孚)는 청렴하다는 소문이 대단했었는데, 갑자기 장오(贓汚)의 죄과(罪科)에 빠졌습니다. 관동(關東)의 전 도신(道臣) 유복명(柳復明)은 청렴하고 간솔함을 가지고 자신을 단속하였는데, 한번 대계(臺啓)가 들어가자 치욕을 씻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굽어살피시고 용서해 주소서.
고(故) 역관(譯官) 변이창(卞爾昌)이 자식이 없어 조카 변정로(卞廷老)를 후사(後嗣)로 삼았었는데, 족손(族孫) 변국신(卞國臣)이 변이창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변정로를 쫓아 내고는 자신이 그의 제사(祭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실정을 조사하여 엄중히 다스리게 하소서. 그리고 김제(金堤)의 죄인을 경옥(京獄)에 나치(拿致)하여 몇 달을 끌면서 가두고 있습니다. 청컨대 빨리 조사하여 결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따르고, 오직 세 수령(守令)에 관한 일은 내용이 간청(干請)하는 데 관계된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윤득화(尹得和)를 지평으로, 이용(李榕)을 사간으로, 조최수(趙最壽)를 형조 참판으로, 심공(沈珙)을 동지의금부사로, 윤동형(尹東衡)을 부교리로 삼았다.
5월 22일 무인
진향사(進香使) 양평군(陽平君) 이장(李檣), 부사 이춘제(李春躋), 서장관 윤득화(尹得和)가 복명(復命)하였다.
5월 23일 기묘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시독관 황정(黃晸)이 아뢰기를,
"기묘 명현(己卯名賢)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의 후사(後嗣)가 쇠잔하고 미약하여 제사가 끊겼으니, 그 자손을 거두어 녹용(錄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자전(慈殿)이 선혜청(宣惠廳)에서 바친 삭선미(朔膳米) 2백 석을 진휼청(賑恤廳)에 특별히 내려 주어 설죽(設粥)하는 자료에 보충하게 하였다.
5월 25일 신사
밤에 목성(木星)이 태미원(太微垣)의 좌집법성(左執法星)을 범하였다.
장령 박규문(朴奎文)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에 신처수(申處洙)를 먼 곳에다 귀양 보낸 것은 한때 성지(聖旨)를 거스른 데에서 나왔는데, 3년 동안 먼 변방에서 모자(母子)가 서로 떨어져 지내고 있으니, 효제(孝悌)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아래에서 근심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배도(裵度)104) 가 유우석(劉禹錫)의 어미가 늙었는데, 〈유우석이〉 멀리 좌천되었음을 아뢰니, 헌종(憲宗)이 특별히 연주 자사(連州刺史)로 고쳐서 차임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처수의 말이 각박하고 지나치지만 유우석이 나라를 그르치게 한 죄와는 다르며, 성상의 효제를 두루 미치게 하는 어짊은 또한 헌종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불쌍히 여기시고 살펴 주소서.
그리고 경기(京畿)는 토지가 척박하여 백성들이 아무리 부지런히 경작하여도 수재나 한재로 흉년이 드는 경우가 절반이 넘습니다. 청컨대 삼남(三南)의 사례에 의거하여 구별해서 진전(陳田)을 일구게 하고 세금을 감해 주는 혜택을 베푸소서. 지난번 간신(諫臣)이 황해 감영(黃海監營)에서 복호(復戶)를 사들이는 행위를 혁파하는 일로 상소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당초 복호를 사들여 나머지를 취하는 것은 오로지 백성들이 빚을 져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복호를 사들이되 결수(結數)를 정하여 이중으로 팔아넘기는 폐단을 막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기(京畿) 안의 민전(民田)에 관한 일과 해서(海西)의 복호(復戶)에 대한 일은 비국으로 하여금 분부하게 하겠다. 그리고 인용한 유우석(劉禹錫)의 일은 무엄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이조 판서 김흥경(金興慶)을 특별히 전보(轉補)시켜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삼았는데, 여러 번 명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빈청(賓廳)에서 복상(卜相)105) 하여 서명균(徐命均)을 우의정으로, 조문명(趙文命)을 승진시켜 좌의정으로 삼았다.
조상경(趙尙絅)을 이조 판서 겸 지경연사로, 채응복(蔡膺福)을 헌납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지평으로, 심공(沈珙)을 예조 참판으로, 유숭(兪崇)을 동지의금부사로, 서종옥(徐宗玉)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김재로(金在魯)를 특별히 발탁하여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사간 이용(李榕)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한덕후(韓德厚)를 특별히 체임(遞任)시킨 것은 언관(言官)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권혁(權爀)을 섬에서 옮겨 육지로 나오게 한 것은 원근(遠近)이 비록 다르지만, 내쫓아 전보시키는 것과 귀양 보내는 것은 경중(輕重)이 아주 다르니, 관대한 것을 따르는 은전이 도리어 죄를 더하는 지경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관대하게 용서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지평 정희보(鄭熙普)가 상소하여 선왕의 화갑(花甲)을 거론한 것은 크게 도리에 어긋나며, 제신(諸臣)에게 은혜를 내리도록 청한 것 역시 매우 외람됩니다. 더구나 처벌받은 여러 사람을 구원하며 정신은 오로지 인척(姻戚)인 권부(權孚)에게 있었으니, 심정과 태도가 모두 드러나서 마음속을 볼 수 있었습니다. 파직시켜 다시는 대간(臺諫)으로 의망(擬望)하지 못하게 하심이 적당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정희보(鄭熙普)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나의 의망하지 말도록 하라는데 이르러서는 지나치다. 끝 부분에는 정희보를 배척하고 머리 부분에서는 권혁(權爀)을 비호하였는데, 그대는 어찌 자신을 용서하는 데는 어두운가?"
하였다.
5월 27일 계미
전라도(全羅道)에 전염병이 치성하여 사망한 자가 매우 많다고 도신이 계문(啓聞)하였다.
이춘제(李春躋)를 도승지로, 조석명(趙錫命)을 동지의금부사로, 최명상(崔命相)을 지평으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8일 갑신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원 【 헌납 채응복(蔡膺福)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교리 권혁(權爀)은 직임이 경악(經幄)에 있었으므로, 마음속에 품은 일은 논해야 하니, 성상께서 언로(言路)를 넓히는 도리에 있어서 〈사기를〉 꺾는 것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의 상소 내용은 모두 공의(公議)에 근거하여 이미 지척(指斥)한 사람이 있었으니, 결단코 저지하며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지나치게 의심과 노여움을 더하여 섬으로 내쫓아 전보(轉補)시키셨다가, 지금은 또 육지로 나오게 한다는 명목으로 귀양 보내는 죄를 더하게 되었으니, 더욱 물정(物情)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도로 정지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경상도 진보현(眞寶縣)에 서리가 내렸다.
5월 29일 을유
충청도 어사 김상익(金尙翼)이 복명하고 아뢰기를,
"호서(湖西)의 큰 폐단은 바로 입본(立本)하여 이식(利殖)을 취하는 것입니다. 군향(軍餉)이나 조곡(糶穀)을 논하지 않고 춘궁기에 한 포(包)의 쌀을 산매(散賣)하고 거두는 값이 10관(貫)인데, 2관을 잔약한 백성에게 도로 주었다가 추수하기를 기다려 한 포의 쌀을 바치도록 하니, 이것이 이른바 입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서(湖西) 한 도뿐만 아니라 제도(諸道)가 모두 그러하다. 지금부터 수령으로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탐오(貪汚)한 사례에 의거하여 죄를 논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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