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1권, 영조 8년 1732년 윤5월

싸라리리 2025. 9. 11. 10:36
반응형

윤5월 1일 병술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윤5월 2일 정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지금 북병사 한범석(韓範錫)의 계본(啓本)을 보았더니, 청나라 사람 6명이 두만강(豆滿江) 강변에서 초막을 짓고 오래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이전에도 청나라 사람이 간혹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하러 강가를 왕래하였으나, 초막을 짓고 오래 머무는 데 이르러서는 이미 갑자년106)  에 이자(移咨)하여 철거시킨 전례가 있었으니, 병사와 지방관이 평상시대로 보고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모두 종중 추고하고, 그들로 하여금 잘 타일러서 속히 돌아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윤5월 3일 무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전라도 남원부(南原府)의 백성 우창(禹昌)이 호랑이에게 물렸는데, 그의 아들이 호랑이의 두 눈을 찔러 죽였으므로, 우창이 살아날 수 있었다.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급복(給復)하도록 명하였다.

 

형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제(金堤)의 옥사는 실로 드물게 있는 변고입니다. 나치경(羅致慶)이 이미 죽자 그의 아들 나종(羅綜)이 아비의 죄가 없는데 죽였다고 여겨, 형제와 종의 무리를 거느리고는 도끼를 가지고 관청에 들어가 창문을 부수며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신이 개남(介男)의 초사(招辭)를 살펴보고서야 비로소 이광연(李光然)과 나치형(羅致亨)이 수창(首唱)하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엄중히 신문하였으나, 아직도 죄를 자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명률(大明律)》에 이르기를, ‘부민(部民)으로서 고을의 관장(官長)을 죽이려고 도모하거나 이미 실행한 자는 장(杖) 1백 대에, 유(流) 2천 리이며, 이미 상처를 낸 자는 교수형(絞首刑)에 처하며, 이미 죽인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광연과 나치형이 죄를 자복할 것 같으면, 당연히 이미 실행한 율(律)로 주당(奏當)107)  해야 할 따름이나 이미 반드시 죽여야 할 죄가 아닌데도 지나치게 날마다 형신을 베푼다면, 경폐(徑斃)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청컨대 대신에게 물어서 처결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형벌을 신중히 하기를 청하니, 체모(體貌)를 얻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무신년108)   이후로 인심이 함닉(陷溺)되어 관장을 죽이려고 꾀하는 변고가 해마다 있었다. 이광연과 나치형이 만약 왕법(王法)을 모면한다면, 이는 국가에 기강(紀綱)이 없는 것이다. 날마다 엄중히 형신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부승지 홍상빈(洪尙賓)이 상소하여 관서(關西) 강가 일곱 고을의 민사(民事)와 군정[戎政]을 변통(變通)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진달하자, 원소(原疏)를 궁중에 머물러 두게 하고, 빈대(賓對)할 때에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선혜청 당상관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삼공(三公)이 으레 선혜청의 〈도제조(都提調)를 〉 겸임하는데, 우의정 서명균(徐命均)은 신과 처남 매부 사이로 당연히 상피(相避)109)  해야 할 혐의가 있습니다. 청컨대 신의 선혜청 당상관직을 해임하소서."
하였는데,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선혜청은 본래 임시로 설치한 아문이므로, 상피(相避)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김재로가 당상관이 되어 쌀과 베를 관리하는 중요한 지위에서 상피가 없을 수 없다고 비로소 생각하고, 법식을 정하기를 진품(陳稟)한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례는 아닙니다."
하자, 임금이 김재로에게 사임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윤5월 4일 기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원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사직 엄경하(嚴慶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의 양역(良役)은 실로 1백 년이 되어도 구제하기 어려운 폐단입니다. 호포(戶布)·구전(口錢)·유포(遊布)·결포(結布) 등에 대한 의논은 결코 그것이 방해가 됨을 알고 있습니다마는, 만약 한 필의 제도를 행하려고 한다면, 군보(軍保)의 수고스럽고 편안함을 고르게 함이 마땅합니다. 대저 각 고을의 보인(保人)은 모두 1년에 한 필의 구실을 부담하는데, 기병(騎兵)이나 보병(步兵)은 16개월에 두 필을 바칩니다. 그리고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군사는 4년에 한번 상번(上番)하는데, 또 자보(資保)110)  를 지급합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기병과 보병이 바치는 면포는 감하여 1년에 한 필로 하고,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는 임시로 윤번(輪番)을 파하고 장정(壯丁)을 뽑아 훈국(訓局)의 승호포수(陞戶砲手)처럼 장기간 호위하게 하되, 번을 들러 나가지 않는 자는 한 해에 한 필씩 바치도록 할 것이며, 이것도 부족하면 각도의 전결잡역(田結雜役)으로 이개(釐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삼가 조목으로 열거하여 아룁니다.
1. 서울의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에서의 두 필(疋) 구실은 1년에 거둬들이는 것이 33만 6천 9백여 필인데, 지금 한 필의 제도를 시행한다면 이 숫자의 군사가 있은 후라야 이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병과 보병 그리고 금위영과 어영청 군사의 변통한 면포를 통계한다 하더라도 부족한 숫자는 오히려 3만 7천 7백여 필이 되며, 각도(各道)의 방군(防軍)과 수군(水軍) 및 능군(陵軍)의 군보(軍保)는 합쳐서 12만 9천 6백여 명이 되는데, 지금 한 필의 제도를 시행한다면 부족한 것은 군사의 액수만큼 됩니다.
1. 각도의 봉수 원군(熢燧元軍) 및 보인(保人)은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으니, 만약 봉화(熢火)마다 참작해서 5호(戶)로 정한다면 남은 군사가 의당 4만 2천 6백여 명이 될 터이니, 각기 면포를 거두어서 부족한 숫자에다 옮겨서 보충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1. 각도의 전결잡역(田結雜役)의 고되고 수월함이 같지 않습니다. 지금 또 참고로 헤아려 보면 삼남(三南)은 1결마다 1냥(兩)을 징수하고, 경기(京畿)에서는 1결마다 1냥 5전을 징수하며, 양서(兩西) 및 관동(關東)·관북(關北) 역시 삼남에 의거하여 1결에 1냥씩 징수하되, 그 가운데 특별히 각 영읍(營邑)에 제급(除給)하고, 대저 닭과 땔나무 등의 잡비는 나머지를 부족한 것의 대신으로 옮겨서 채우게 하소서.
1. 금위(禁衛)·어영(御營) 두 군영의 군사 10초(哨)111)  의 승호(陞戶)한 자는 의당 훈국(訓局)의 사례와 같이 해마다 사람들에게 각각 9필의 면포를 지급하되, 이것은 경상 비용 밖의 것으로 삼남과 해서의 결전(結田) 가운데서 미루어 옮기게 하소서. 그리고 금위영과 어영청에 소속된 해서의 별효위(別驍衛) 및 별마대(別馬隊)의 상번(上番)은 폐단이 있으니, 우선 번드는 것을 정지하도록 하여 본도(本道)의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옮겨서 소속시키고, 해마다 시험에 나아가게 하며, 직부(直赴)는 별무사(別武士)의 예(例)와 같이 하고, 그 보군(保軍)은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면포를 거두어 승호(陞戶)에게 9필씩 지급하는 숫자에 보충하게 하소서.
1. 각도 군총(軍摠) 및 전결잡역전을 전부 모아 묘당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윤5월 5일 경인

임금이 친히 ‘성묘를 높이고, 사습을 바로잡아 성실하도록 힘쓰라.[尊聖廟正士習務誠實]’는 아홉 글자를 써서 대사성        서종옥(徐宗玉)으로 하여금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들에게 전하여 선포하게 하고, 또 유시하기를,
"내가 얇은 덕(德)으로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 교화는 많은 선비들을 감동시킬 수 없어 밤낮으로 개탄(慨嘆)하고 있다. 제생(諸生)들이 진실로 예전의 나쁜 풍습을 씻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엄숙하고 장한 아름다움을 가진다면, 어찌 나라의 다행함이 아니겠는가? 아! 그대 대사성은 구임(久任)으로 권장(勸奬)하는 뜻을 체득하여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윤5월 6일 신묘

대사성 서종옥(徐宗玉)이 여러 유생들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공경히 사례하고 인해서 소(疏)를 올려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진달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내가 비록 기(夔)112)  에 명할 교화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대는 마땅히 기를 스승으로 삼아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김담(金墰)이 상소하여 언로(言路)를 꺾은 잘못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며칠 전에 유신(儒臣)을 멀리 전보시킨 것과 간신(諫臣)을 특별히 체임한 것은 모두 중도에 지나친 일인데, 승정원에서 끝내 한 마디도 복역(覆逆)113)  하는 일이 없었으니, 경책(警責)이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한덕후(韓德厚)의 정태(情態)와 권혁(權爀)의 공정(公正)하지 못함은 남의 심부름하는 하인도 아는 바인데, 도리어 승정원을 배척하니, 참으로 이상하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지평 최명상(崔命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봉상(李鳳祥)의 누명을 벗게 한 은전(恩典)은 이미 예단(睿斷)을 거쳤는데, 3년이 지난 뒤에 고율(考律)을 논하니,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어찌 심하게 하십니까? 다툴 만하면 다투고 다툴 수 없는 경우는 정지하는 것이 대각(臺閣)의 관례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렇지 않아 겨우 정지하였다가 도로 발론하여 보기를 하나의 큰 기관(機關)으로 여겨 완전히 끝날 기약이 없습니다. 며칠 전에 헌신(憲臣)이 인혐(引嫌)한 것은 참으로 의견이 있었는데, 처치(處置)가 마침내 낙과(落科)에 돌아갔으니, 신은 그윽이 동료 대관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권혁(權爀)을 정배(定配)한 것은 명목이 비록 육지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처벌이 도리어 무겁게 되었으니, 그때의 승지는 도로 거두도록 청함이 마땅한데도 끝내 한 마디 말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봉상(李鳳祥)의 일을 지금까지 서로 버티고 있으니 나도 지나치다고 여기지만, 승지를 추고하도록 청한 것은 중도에 지나침을 면하지 못한다."
하였다.

 

함경도(咸鏡道)의 부령(富寧)과 무산(茂山)에 서리와 눈이 내렸다.

 

윤5월 7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이자(李滋)를 장령으로, 유건기(兪健基)를 지평으로, 송성명(宋成明)을 판윤으로, 이진망(李眞望)을 참찬으로, 이유(李瑜)를 이조 참의로,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정랑으로, 김재로(金在魯)를 판돈녕부사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로, 박사수(朴師洙)를 동지춘추관사로, 김응복(金應福)·이일제(李日躋)를 승지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서울에 전염병이 점점 치성해져서 활인서(活人署) 한 기관에서 두루 보살피며 구료(救療)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양의사(兩醫司)114)  로 하여금 따로 의관(醫官)을 정하고 약물(藥物)을 넉넉히 주어 구료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윤5월 8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사간원 【 헌납 채응복(蔡膺福)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김준(金浚)이 진구하는 정책은 도외시한 채 버려두고 창고에 보관한 곡물(穀物)을 별환(別還)하는 데 모두 주어, 배에 싣고 육지로 운반하기를 서울과 지방에 널리 행하였습니다. 또 창고에 보관된 곡물 중 8백 석을 방역(防役)·고마(雇馬) 두 청(廳)에다 옮겨 기록하고 날마다 하리(下吏)와 사복을 채우는 계책을 은밀히 모의하였으니, 청컨대 잡아다 조사하고 죄를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요즈음 이봉상(李鳳祥)의 일로 부계(府啓)를 감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도 있고, 또 정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가 있어서 하나의 기관(機關)이 되었다. 이봉상이 비록 망명(亡命)했다고 하더라도 을사년115)  에 내가 이미 처분하였으면 다시 거론하지 않는 것이 가한데, 추후에 발계(發啓)하니 어찌 지나치지 않는가? 이봉상의 아비가 이미 자복하지 않았는데도 그 당시 역적 김일경이 법 밖의 율을 시행하려고 하였으니, 이 율은 지금 시행할 수 없고, 옛날부터 당연히 행해야 할 전례(典例)를 적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고율(考律)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고, 마침내 부계(府啓)를 그대로 윤허한다고 명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율에 의거하는 것이 정법(正法)인 것 같지만, 실상 정법이 아니다. 해부로 하여금 이 율의 전례를 상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율문(律文)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죄인이 포박(捕縛)을 거부하는 조목에 이르기를, ‘무릇 죄를 범하고 도주하여 포박을 거부한 자는 각기 본죄(本罪)에다 두 등급을 더하되, 장(杖) 1백 대, 유(流) 3천 리에 그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봉상의 일은 성상께서 이미 법 밖의 율을 지금 시행할 수 없다고 전교하셨으니, 연좌시키는 한 조항은 다시 논할 수 없으며, 본죄에다 두 등급을 더하는 것도 증거하기 어렵습니다. 무슨 죄로 결단하여 등급을 더하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법 밖의 율을 시행하려 했던 것을 어찌 오늘날에 논하겠는가? 율문에 이미 자세하고, 또 도배(島配)하는 일을 겪었으니, 내버려 두도록 하라."
하였다.

 

윤5월 9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하고, 북병사(北兵使) 한범석(韓範錫)은 추고하고, 길주 목사(吉州牧使) 정양빈(鄭暘賓)은 병사(兵使)로 하여금 곤형(棍刑)을 집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길주는 저절로 방영(防營)을 겸하므로, 해마다 조련(操鍊)을 본주(本州)에서 마련하여 시행하였었다. 그리고 병사는 3년마다 순찰하며 점고하도록 명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한범석이 잘못된 규정으로 인하여 그 정식을 어기고 해마다 순찰하며 점고하므로, 정양빈이 영접하지 않고 서로 치계(馳啓)하여 논박하며 배척하였다. 그래서 임금이 한범석이 정식을 어기고 순찰 점고한 것과 정양빈이 상관을 침범한 것은 체통에 관계가 있다고 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아뢰기를,
"방어사는 이미 밀부(密符)를 패용하고 있으므로, 병사(兵使)에게 곤장을 맞도록 할 수 없습니다.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밀부를 빼앗도록 함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간원          【 헌납            채응복(蔡膺福)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권혁(權爀)의 일에 이르러 비답하기를,
"전후로 다투고 고집한 것이 권혁에게는 후하게 하고 군부(君父)에게는 무엄(無嚴)하였다고 말할 만하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참작하여 육지로 나오게 한 것은 너무 너그럽게 하는 데 실수하였다. 권혁을 정의현(旌義縣)에다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감히 공의를 일컬으며 기필코 군부(君父)를 이기려고 힘쓰는 오늘날의 권혁을 돕는 자는 모두 나의 신자(臣子)가 아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아뢰기를,
"사령(辭令)이 중도에 지나침은 평소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아마도 미진한 듯합니다. 원하건대, 더욱 반성하고 살피소서."
하고, 승지 양정호(梁廷虎), 영의정        홍치중(洪致中) 등이 잇따라 처분이 정당함을 잃었다고 진달하자, 임금이 그제야 도로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윤5월 10일 을미

주강을 행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예조 판서 송인명(宋寅明)이 아뢴 바로 인하여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군향(軍餉)을 갈라 주도록 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청컨대 경상도 순영(巡營)의 별회 모곡(別會耗穀) 2천 석, 평안도의 관향 모곡(管餉耗穀) 1천 5백 석, 황해도의 상정 여미(詳定餘米) 1천 석, 삼도 통제사 군영(軍營)의 별회 모곡 5백 석을 매년 새로 바칠 차사원(差使員)이 정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수송하되, 강도와 남한 산성은 한 해씩 걸러서 돌아가며 보태어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5월 11일 병신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윤5월 12일 정유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검토관 이흡(李潝)이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예(禮)로 부려야 합니다. 만약 한갓 벼슬과 녹봉으로 구속한다면, 청렴함을 지키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가 반드시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정말로 청렴을 지키는 이는 오직 이재(李縡)·이진망(李眞望)·김진상(金鎭商) 두어 사람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시상(時象) 가운데서 절개를 지키는 자이므로, 내가 취하지 않는 바이다."
하였다. 지경연사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교관(敎官)을 설치한 것은 장차 동몽(童蒙)을 가르치려는 것인데,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어 문득 쓸모없는 관원이 되었습니다. 청컨대 교관과 학교수(學敎授)에게 신칙하여 합좌(合坐)해서 고강(考講)하게 하고, 준수한 자를 뽑아 청금록(靑衿錄)116)  에 기입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석강을 행하였다.

 

평안도 덕천(德川) 등의 고을에 황재(蝗災)가 있었다.

 

윤5월 13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주강을 행하였다.

 

경기 어사(京畿御史) 이주진(李周鎭)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여러 고을의 진구하는 정치를 하문하자, 이주진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마치고, 여주(驪州)의 전세(田稅)인 황두(黃豆)를 마음대로 꺼내어 백성을 구제한 죄를 스스로 진술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세금으로 받은 황두 2백 석을 아까워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호조에 명하여 특별히 탕감하여 본고을의 조적(糶糴)으로 환산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진위 현령(振威縣令) 윤세관(尹世觀)을 전조로 하여금 준직(準職)하여 제수하도록 하고, 인천 부사(仁川府使) 조재박(趙載博)에게는 표리(表裏)를 내려 주고, 교동 수사(喬桐水使) 구성익(具聖益)에게는 말을 내려 주게 하였는데, 어사가 칭찬하였기 때문에서이다.

 

비변사(備邊司)로 하여금 가끔 낭청(郞廳)을 파견하여 영종 행궁(永宗行宮)의 비단으로 인천부(仁川府)에 있는 것을 포쇄(曝曬)하도록 하였는데, 어사 이주진(李周鎭)의 아룀을 따른 것이었다.

 

서울과 경기(京畿)에 여제(癘祭)를 마련하도록 명하였는데, 전염병이 날마다 치성하여 죽은 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유언통(兪彦通)을 사간으로, 민정(閔珽)을 헌납으로, 임정(任珽)을 정언으로, 허석(許錫)을 장령으로, 이흡(李潝)을 이조 정랑으로, 서명연(徐命淵)을 승지로, 윤동형(尹東衡)을 검상으로, 황정(黃晸)을 부교리로 삼았다.

 

윤5월 14일 기해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소의문(昭義門) 안의 선혜청 별창(宣惠廳別倉)에 불이 나서 29간(間)이 연소되고, 곡식 수천 석을 손실하였다.

 

정우량(鄭羽良)을 승지로 삼았다.

 

윤5월 15일 경자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윤5월 16일 신축

사간 유언통(兪彦通)이 상소하여 ‘의지를 가질 것[持志]’과 ‘기미를 살필 것[審幾]’과 ‘홀로 있을 적에도 조심하는 것[謹獨]’ 세 가지 조목의 경계를 진달하자,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전라도에 전염병이 치성하여 백성들이 많이 죽었다.

 

윤5월 17일 임인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친히 대정(大政)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참판 신방(申昉)·참의 이유(李瑜), 병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참석하여 송인명(宋寅明)을 좌참찬으로, 박횡(朴鐄)을 충청 수사로, 유만증(柳萬增)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전라도 어사(全羅道御史) 정형복(鄭亨復)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수령의 치적(治績)을 하문하자, 정형복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마치고, 또 아뢰기를,
"기민의 구제를 시작한 고을에서의 권분(勸分)은 도리어 폐단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고부(古阜) 같은 곳에서는 뽑아서 정하고 독촉하여 징수하는 것이 거의 강제로 빼앗는 것과 같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 외에는 권분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형복(鄭亨復)이 또 아뢰기를,
"운봉(雲峯)의 황산(荒山)에 우리 태조(太祖)의 전승 비각(戰勝碑閣)이 있는데, 바로 만력(萬曆) 3년117)  에 세운 것이며, 중간에 깨어지고 손상된 부분이 많습니다. 청컨대 수선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5월 18일 계묘

대정(大政)을 행하여 이진망(李眞望)을 예조 판서로, 김간(金榦)을 좌참찬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예문관 제학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수찬으로, 신택하(申宅夏)·윤급(尹汲)을 지평으로, 박사수(朴師洙)를 대사헌으로 삼고, 고(故)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의 시호(諡號)를 의민(懿愍)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된 김정국(金正國)의 시호를 문목(文穆)으로 내렸다.

 

윤5월 19일 갑진

석강을 행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경휘전(敬徽殿)의 대상(大祥) 뒤 담제(禫祭) 전의 삭망제(朔望祭) 및 추향 대제(秋享大祭)는 이미 태묘(太廟)의 예(例)에 의거하여 봉행(奉行)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청컨대, 신묘년118)  과 병진년119)  의 정식(定式)을 대조하여 곡림(哭臨)하는 것으로 의주(儀註)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5월 20일 을사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사간원 【사간 유언통(兪彦通)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며칠 전 진창(賑倉)에서의 실화(失火)로 수천 석의 곡식을 일시에 태워버렸으니, 국가의 저축을 생각하면 매우 놀랍고 걱정이 됩니다. 창고의 뜰에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한 것은 애당초 이미 실책(失策)이었으며, 해당 관장(管掌)이 잘 단속하여 살피지 못하고 아래 관속들은 조심하고 두려워할 줄 몰랐습니다. 청컨대 진휼청의 당상관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낭청(郞廳) 및 감독관은 아울러 잡아다 조처하고, 원역(員役)과 공장(工匠) 등은 가두어 다스리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남(湖南) 전 감사 이수항(李壽沆)의 고신(告身)을 빼앗았는데, 기민 구제를 시작한 때에 군사들에게 곡식을 징수하였기 때문이다.

 

윤5월 20일 을사

교리 이도원(李度遠)·부교리 심성희(沈聖希)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축년120)  의 두 신하는 선조(先朝)에서 지우(知遇)를 받아 국가에 충성을 다하여 머리털이 희도록 마음은 변함이 없어 군주(君主)의 칭찬이 매우 융성하였으니, 나라 일을 걱정하여 집안 일을 잊은 것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만합니다. 두 상신(相臣)과 함께 마음을 합하여 주선하며 반드시 왕실(王室)을 돕고 보호하려 하다가, 마침내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이진유(李眞儒)·박상검(朴尙儉)의 무리들에게 모함받아 자신은 참혹한 화(禍)를 만나고 온 집안이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적 김일경이 복주(伏誅)되고, 사대신을 가엾이 여기는 은전(恩典)이 모두 거행되었으니, 그의 변함없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을 전하께서 진실로 이미 환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뒤따라 죄주는 일이 다시 천양(泉壤)에 미쳤으니, 이는 역적 김일경이 비록 패몰(敗沒)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논의는 다시 세상에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흉당의〉 남은 부류들이 미쳐 날뛰다가 반역하는 정상이 모두 드러났으니, 사대신의 죄명(罪名)은 더욱 빨리 신설(伸雪)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협잡(挾雜)하는 논의가 있어 사건이 같고 죄가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러는 원통함을 펴게 하고 더러는 펴지 못하게 하니, 처분이 뒤섞여 시비(是非)가 분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사대신의 죄를 꾸며서 곧바로 흉역(凶逆)으로 결단하였고, 중간에는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으며, 나중에는 죄가 있다고 말하여 때에 따라 낮추거나 올린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애당초 이미 역적이란 이름을 억지로 더하여 도륙(屠戮)을 멋대로 행하였었는데, 지금에 와서 억울함이 풀리고 무죄가 드러난다면, 여러 해 거짓을 덮어 씌운 것이 모두 헛된 데로 돌아갈 것이므로, 유지시키면서 버리지 않고 바로 사리에 맞지 않는 말로 갖가지 죄명(罪名)을 만들어 내어 두 가지로 나누고, 인하여 일률(一律)로 버려둔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비록 다른 죄로 연좌시킨다고 말하더라도 실상 연차(聯箚)를 올린 죄명은 그대로 있습니다. 을사년121)   성교(聖敎)에서 이른바, ‘사대신의 억울함이 풀리면 임금의 무함이 분변되는 것도 저절로 그 가운데 있다.’고 한 것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이는 전하께서도 사대신의 죄명이 사대신의 억울함이 되는 데 그칠 뿐만이 아님을 아시지만, 4년 동안 우물쭈물 한결같이 지난(持難)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군상(君上)의 처분은 신하가 감히 간청(干請)할 바가 아니라는 전교를 내리는 데 이르렀습니다. 아래에 있는 자가 사사로운 일을 모람되게 진달하였다면 간청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관계가 매우 중대하며 옛날의 사첩(史牒)을 상고하여 신설(伸雪)하는 일이 신료(臣僚)가 분변하여 밝히는 데서 많이 나왔습니다. 만약 간청하는 것이라고 여겨 신변(伸辨)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옛 충현(忠賢)으로 억울하게 죄망(罪網)에 걸린 자가 끝내 억울함을 펼 날이 없게 될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빨리 분명한 명을 내려서 두 신하의 억울함을 아울러 풀어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차자(箚子)를 열람하고 전교하기를,
"세상에서 이른바 의리(義理)는 정말로 의리가 아니다. 내 마음은 철석(鐵石)과 같은데, 오늘날 신자(臣子)가 되어 어찌 감히 다시 말하는가? 이 원차(原箚)를 궁중에 머물러 두어 세속의 투(套)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겠다."
하였다.

 

윤5월 21일 병오

교리 이도원(李度遠)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으나, 비답이 없고, 또 엄중한 전교가 있다 하여 인혐(引嫌)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체임(遞任)되었다.

 

서명구(徐命九)·유언통(兪彦通)을 승지로,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이귀휴(李龜休)를 사간으로 삼았다.

 

윤5월 22일 정미

잠상 죄인(潛商罪人) 최만중(崔萬重) 등 3인을 위원(渭原)의 강변(江邊)에서 주벌(誅罰)하였다. 최만중 등이 위원을 따라 범월(犯越)하여 물화(物貨)를 유통시키다가 파수 군졸(把守軍卒)에게 잡혔는데, 관서 도신(關西道臣) 송진명(宋眞明)이 조사하여 자복을 받고 정법(正法)122)  하기를 장청(狀請)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사간원 【 헌납 민정(閔珽)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훈신(勳臣)·현신(賢臣)·청백리(淸白吏)·전망인(戰亡人)의 후손(後孫)은 적장(嫡長)이 아니면 거두어 녹용(錄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새로운 정식(定式)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도목 정사(都目政事)의 초사(初仕) 가운데 지손(支孫)을 함부로 기록하여 의망(擬望)한 경우가 매우 많아 물의(物議)가 떠들썩 합니다. 청컨대 상세히 조사하도록 하여 일체 도태시키고 해당 정관(政官)을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관(政官)을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관직을 위하여 사람을 뽑는 일은 처음 벼슬살이하는 사람부터 하는 것이 적당하다. 만약 현명하다면, 적장(嫡長)과 지손(支孫)을 어찌 구애할 것인가? 한결같이 모두 도태시키는 것 역시 지나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윤5월 23일 무신

북병사(北兵使) 한범석(韓範錫)을 파직하였다. 함경 감사 정형익(鄭亨益)이 한범석이 정식(定式)이 없는데 조련(操鍊)을 멋대로 행하였다 하여 파출(罷黜)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양빈(鄭暘賓)은 남병사(南兵使)로 하여금 곤형(棍刑)을 집행하도록 하자,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도백(道伯)이 병사(兵使)의 죄를 논할 적에는 당연히 묘당에서 품처(稟處)하기를 청해야 하는데, 정형익(鄭亨益)이 직접 파출(罷黜)하도록 청하였으니, 격례에 어긋납니다. 추고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훈련 대장 장붕익(張鵬翼)은 아뢰기를,
"방어사와 병사는 품질(品秩)이 아주 현격한 차이가 없으니, 정양빈(鄭暘賓)은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곤형(棍刑)을 집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윤5월 24일 기유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황해 감사 김흥경(金興慶)이 사폐(辭陛)하자,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유시(諭示)하기를,
"전번에 총재(冢宰)123)  를 사임하였는데, 대의(大義)를 자처함이 너무 지나쳤다. 내가 비록 함께 하기에는 부족하다 하더라도 경이 나를 버릴 수는 없을 것이므로 떠나는데 또 불렀다. 오늘날이 어찌 경이 번경(藩境)을 다스려야 할 시기이겠는가?"
하였다.

 

제주(濟州)에 황모(黃蟊)가 들고 전염병이 치성하게 번졌다.

 

윤5월 25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사간원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관(政官)을 추고(推考)하는 일은 어제 벌써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모람되게 음직(蔭職)을 받아 입사(入仕)한 자에 대해 조사하여 도태시키는 일은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사람을 기용함에 있어 비록 일정한 규정이 없이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정식(定式)이 한번 해이해지면 요행을 바라는 문이 열리게 됩니다. 청컨대 상세히 조사하여 도태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지난번에 아뢴 권혁(權爀)에 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잠상 죄인(潛商罪人) 박처빈(朴處彬) 등 5인을 의주(義州)의 강변(江邊)에서 주벌(誅罰)하였다. 박처빈 등이 압록강(鴨綠江)을 범월(犯越)하여 청나라 사람과 물화(物貨)를 교통하였었는데, 평안 병사(平安兵使) 김흡(金潝)이 조사하여 자복을 받고 정법(正法)하기를 장청(狀請)하자, 임금이 최만중(崔萬重)의 사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함경도의 함흥(咸興)과 정평(定平) 고을에 황재(蝗災)가 들고 평안도 삭주(朔州) 등의 고을에도 황재가 들었다.

 

윤5월 26일 신해

전라도 만경(萬頃)·김제(金堤)·구례(求禮) 고을에 황재(蝗災)가 들었다.

 

윤5월 27일 임자

이종백(李宗白)을 응교로, 심성희(沈聖希)를 부수찬으로, 이흡(李潝)을 부교리로, 이유(李瑜)를 부제학으로, 서종급(徐宗伋)을 대사헌으로, 송사윤(宋思胤)·이제항(李齊恒)을 장령으로, 송국위(宋國緯)·이유신(李裕身)을 지평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정언으로 삼았다.

 

윤5월 28일 계축

우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사은(謝恩)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자, 서명균이 아뢰기를,
"신이 재능과 기국(器局)을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끝내는 일을 그르치리라는 것을 지혜가 있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보좌하는 임무는 당연히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제1의 의리입니다. 요즈음 대신들이 궁장(宮庄)을 절수(折受)하는 폐단을 언급하면, 전하께서는 번번이 받아들이지 않는 기색을 보이셨습니다. 대저 절수하는 것이 신린(臣隣)에게 무엇이 해롭겠습니까마는, 언급하면서 그만두지 않는 것은 진실로 옛날의 제도가 아니고 백성들의 원망을 거두어 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매우 절실하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서명균이 인하여 이병상(李秉常)·권업(權𢢜)·유척기(兪拓基)·윤순(尹淳)·윤용(尹容)·이진수(李眞洙) 등을 기용할 만하다고 추천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황해도 해주(海州)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윤5월 29일 갑인

3품 관원을 파견하여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서 지냈다.】


【태백산사고본】 24책 31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07면
【분류】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호남 도신(湖南道臣)에게 명하여 진곡(賑穀)을 제주(濟州)로 운송하게 하였는데, 목사 정필녕(鄭必寧)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장령 이제항(李齊恒)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당차(堂箚)에서 진달한 양신(兩臣)의 일은 관계가 매우 중대해서 유독 양신만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당차는 복합(伏閤)124)  과 다름이 없는데, 비지(批旨)를 내리지 않으시고 꺾어버리는 의도를 드러나게 보이시니, 대체로 천하에 처음에는 정성껏 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이루지 못하는 의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대신을 더러는 신설(伸雪)하게 하고 더러는 신설하지 못하게 하는 사이에 내버려 두시니, 시비(是非)가 장차 밝혀지려다 오히려 어둡게 되고, 공의(公議)가 장차 펴지려다 도로 굽히게 되었습니다. 원하건대, 빨리 명백한 전지를 내려 뉘우치고 깨닫는 뜻을 보이소서."
하고, 부교리 이흡(李潝)도 상소하기를,
"당차(堂箚)는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한데도 비답이 없이 궁중에 머물러 두게 하셨으니, 실로 이는 전에 없던 잘못된 일입니다. 출납(出納)하는 지위에서 한 번도 복역(覆逆)하지 못했으니,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고 기가 막힙니다."
하고, 교리 한현모(韓顯謨)도 상소하여 이흡(李潝)의 말처럼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비답을 내리지 아니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부교리 이흡(李潝), 장령 이제항(李齊恒)의 여러 상소에 비답 없이 도로 내리셨으니, 실로 경악(經幄)을 대우하고 대각(臺閣)을 높이는 도리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빨리 비지(批旨)를 내려 사체를 보존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준엄하게 책망하였다.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도내(道內)의 선비를 양성하는 규제(規制)를 진달하고, 또 인재를 추천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이 규정 세운 것을 가상하게 여기고, 경이 선비를 추천한 것을 기쁘게 여긴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품처(稟處)하게 하고, 전조로 하여금 조용(調用)하게 하겠다."
하고, 인해서 《대학(大學)》·《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 등의 책을 낙육재(樂育齋)에 하사하였다.

 

김상성(金尙星)을 교리로, 이도원(李度遠)을 수찬으로, 조상행(趙尙行)을 정언으로, 윤택정(尹宅鼎)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