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병진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6월 2일 정사
재신(宰臣)을 파견하여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용산강(龍山江)과 저자도(楮子島)에서 지냈다.】
【태백산사고본】 24책 31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07면
【분류】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지평 이유신(李裕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며칠 전의 당차(堂箚)는 오로지 편파적인 데에서 나왔으니, 세상 도리에 대한 근심이 참으로 적지 않습니다. 성교에 이르기를, ‘그래도 유시하지 못한 하교가 있다.’고 하였는데, 제신(諸臣)이 더러 받들어 듣지 못했다면, 저 언자(言者)가 어떻게 임금의 의도를 우러러 헤아려서 서로 이기려는 사사로운 마음을 제멋대로 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일 전하께서 그 전지를 숨기지 않으시고 그 유시하지 않은 부분을 유시하여 저승에서 길을 잃어 버리는 것을 면하게 한다면, 어찌 다투는 것을 그치게 하고 소란을 진정시키는 도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유시하지 않은 전교는 뜻한 바가 있다."
하였다.
6월 3일 무오
전교하기를,
"올해 또 흉년이 든다면 탄식하는 백성들을 어떻게 구제하여 살리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마음이 타는 듯하다.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친히 기도하는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사단(社壇)에 기우(祈雨)하라는 명을 내렸다.
홍호인(洪好人)을 승지로 삼았다.
6월 4일 기미
임금이 사단(社壇)에 나아갔는데, 비를 내리도록 빌기 위해서이다. 궁궐에서 나갈 때에 소여(小輿)를 탔는데, 햇볕이 쨍쨍 내려 쬐었지만 일산(日傘)을 물리치고 시종(侍從)하지 못하게 하였다.
6월 5일 경신
임금이 기우제 의주(祈雨祭儀註)를 행하였다. 【전하께서는 흑원령포(黑圓領袍)·옥대(玉帶)·흑화(黑靴) 차림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향(香)을 올릴 때에도 이 복장을 착용하였다. 백관(百官)은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기우제를 마치고 궁궐로 돌아왔다.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서(典獄署)에 달려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하고, 또 의금부(義禁府)의 죄가 가벼운 죄수 및 형조와 한성부에 구류(拘留)된 사람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인하여 법사(法司)에서 구류를 금지하는 규정을 분명하게 정식(定式)으로 만들고, 범(犯)하는 자는 당상관이나 낭청을 물론하고 드러나는 대로 논죄하도록 하였다.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에 소결(疏決)을 행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6월 6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헌부 【지평 이유신(李裕身)이다.】 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성현 찰방(省峴察訪) 권만(權萬)은 무신년125) 의 역적 초사(招辭)에 여러 번 나왔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추문(推問)하지 말라는 성교가 비록 영남 사람을 위안하는 의도라 하더라도 오늘날에 이르러 조용(調用)하는 것은 너무 빠릅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행 사직(行司直) 박사수(朴師洙)가 한재(旱災)로 인해 상소하여 청하기를,
"먼저 본원(本源)의 바탕을 따라 점검(點檢)을 통렬히 더하고, 무릇 은미(隱微)한 허물도 일체 씻어 버리고, 또 공경(公卿)과 시종(侍從)을 맞이하거나 방문하여 백성을 살릴 계책을 빨리 강구하고, 조야(朝野)의 사서(士庶)를 격려하여 모두 귀에 거슬리는 충고의 말을 바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6월 6일 신유
부응교 황재(黃梓)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을사년126) 이후로 오래도록 논사(論思)의 지위에 있으면서 망령되게 토벌하고 회복하는 뜻을 아뢰었지만, 마침내 정미년127) 에 이르러 충신과 역적이 갑자기 변경되고 시비(是非)가 전도되었습니다. 대저 저 무리들이 명맥(命脈)을 만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전일(專一)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단지 연차(聯箚)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4대신이 모두 신설(伸雪)하게 된다면, 이 안(案)이 헛된 데로 돌아가므로, 비로소 가리질하며 현혹시키고 어지럽히면서 별도로 한 가지 안(案)을 만들어 거듭 양신(兩臣)을 단련하였으니, 그 계교가 교활하고 비참합니다. 정미년의 추탈(追奪)을 단지 연차만 논하였다면, 이는 4대신의 억울하고 억울하지 않는 것이 오직 연차가 반역인가 반역이 아닌가에 관계되며, 연차가 반역인가 반역이 아닌가 하는 것 또한 사대신을 신설해야 하느냐 신설하지 않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만약 추탈한 구안(舊案)이 비록 보존되었다 하더라도 연차를 올린 의리가 모두 풀렸다고 한다면, 어찌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승복시키고 후세의 의심을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정도(正道)을 유지하는 논의가 다행스럽게 삼사(三司)의 반열에서 나왔지만, 가부(可否)를 내리지 않으시고 곧바로 물리치셨습니다. 가령 오늘날 이목(耳目)의 직임을 맡은 자가 온순하게 맹종하며 잠자코 비굴하게 남의 비위나 맞추고 오직 성상의 뜻만 살핀다면, 바야흐로 신자(臣子)의 직분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더러 잘못을 바로잡고 허물을 다스리며 일마다 모두 말하여 임금을 정당한 도리로 인도하면서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침내 분수를 범하고 의리에 어긋나는 데로 돌아가게 됨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전하께서 나쁜줄 알면서도 간쟁(諫諍)을 물리치는 권한을 잡은 것이니, 자사(子思)가 이른바 ‘감히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하고, 부수찬 김상석(金相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흉당(凶黨)이 연차(聯箚)를 올려 대리하도록 한 것을 가지고 사대신의 죄를 얽어 역율(逆律)에 둔 것은 그 마음먹은 바가 장차 어떻게 하려는 것이었겠습니까? 하늘이 종묘[宗祊]를 도와 흉역(凶逆)을 이미 꺾었으니, 일체로 사직(社稷)을 도운 충신에게는 빨리 모두 소설(昭雪)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두 가지로 나누어 더러는 억울함을 펴게 하고 더러는 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처분이 마침내 구차스러운 데 관계되고 의리가 캄캄하게 막히게 됨을 면하지 못하여 장차 천하 후세에 밝게 보일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고, 수찬 이도원(李度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차자(箚子)를 올려 진달한 바는 바로 온 천지(天地)와 두루 고금(古今)에 하루도 민멸(泯滅)되지 않을 대의리(大義理)이었습니다. 무신년128) 이후 전하의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 더욱 마땅히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입이 닳도록 극력 다투며 기필코 신설하고야 말아야 하겠기에 신이 어쩔 수 없이 맨먼저 진청(陳請)했던 것인데, 이것이 어찌 기회를 틈탔다고 논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삼사(三司)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말하고 의논하는 것으로 직무를 삼는데, 신의 경우는 전후에 진언(進言)한 것이 한 가지도 채택되지 않았으니, 이 직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알 만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비답을 내리지 않고 엄중한 하교를 내려 책망하였다. 인해서 패초(牌招)하여 거취를 정하도록 명하였다.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신사철(申思喆)을 공조 판서로, 김진상(金鎭商)을 부교리로, 구수훈(具樹勳)을 북병사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부묘(祔廟)129) 때 일찍이 효종(孝宗) 음복연례(飮福宴禮)는 신묘년130) 의 하교(下敎)로 인하여 대신에게 의논해서 권정례(權停例)로 하였으며, 그 뒤로는 모두 이 전례를 따랐습니다. 청컨대 이번에도 권정례로 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전교하기를,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비가 내리도록 빌었으나, 미미한 정성이 이르지 않아 비가 내릴 뜻이 더욱 멀어진 듯하다. 저 농민(農民)을 생각하면 조처할 바를 모르겠다."
하고, 이에 명하야 계해일(癸亥日)에 남교(南郊)에 대신을 파견하여 우사(雩祀)131) 를 지내게 하고,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비가 내리도록 빌게 하였다.
6월 8일 계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6월 9일 갑자
임금이 친히 금오(金吾)의 죄적(罪籍)을 처결하여 정배(定配)된 자로 석방된 자가 13명, 중도 부처(中道付處)된 자가 1명, 감등(減等)한 자가 18명, 양이(量移)한 자가 19명, 육지로 보낸 자가 2명이었다. 이날 죄인 김홍석(金弘錫)을 석방하는 것이 타당한지의 여부(與否)를 대신에게 물었다.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대답하기를,
"김홍석(金弘錫)은 바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무리입니다. 정미년132) 초기에 신이 전관(銓官)으로 김홍석의 벼슬길을 막기는 하였지만, 귀양보내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마침내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역적 윤휴(尹鑴)의 자손(子孫)으로 무신년133) 에 발배(發配)된 자는 대신에게 명하여, 그 문안(文案)을 상고하여 더러는 그대로 두고 더러는 양이(量移)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신처수(申處洙)를 석방함이 마땅하다고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보감(寶鑑)이 얼마나 엄중한데, 감히 말참견을 하는가? 내가 신처수(申處洙)·박장윤(朴長潤)·이만유(李萬維) 등의 일은 갑자기 의논하고 싶지 않다."
하였다. 부교리 이흡(李潝)이 아뢰기를,
"신처수는 용서할 만하며, 김홍석은 석방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을 귀양지에서 풀어주고 권혁(權爀)을 중도(中道)에 양이(量移)하도록 명하였다.
6월 9일 갑자
부응교 황재(黃梓), 수찬 이도원(李度遠), 부수찬 김상석(金相奭)을 시종안(侍從案)에 부첨(付籤)하도록 명하였는데, 지난번에 패초(牌招)하여 거취를 정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받들어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헌납 민정(閔珽)이 아뢰기를,
"충청 도사(忠淸都事) 박종윤(朴宗潤)이 일찍이 해막(海幕)에 임명되어 과거 시험을 관장하면서 사사로움을 따랐으니, 다시 과거 시험에 관한 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그리고 죄인 이석형(李錫衡)의 초사(招辭)에 이른바 과표(科標)는 허망(虛妄)한 데 관계되는 듯하지만, 이름이 글 초사에 나온 자는 갑자기 청선(淸選)에 의망(擬望)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지평 송국위(宋國緯)는 체차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병인일(丙寅日)에 재신(宰臣)을 파견하여 북교(北郊)에서 기우(祈雨)하도록 청하니, 선농단(先農壇)에 친제(親祭)하도록 명하였다.
부교리 이흡(李潝)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양신(兩臣)의 일은 성교(聖敎)에 이미 기필코 신설(伸雪)하도록 허락하셨고, 전후에 연석(筵席)에서 아뢴 자도 한두 사람이 아니니, 어찌 유독 지금의 당차(堂箚)에 크게 놀랍고 괴이한 바가 있겠습니까? 만약 군부(君父)의 위엄으로 억누르고 구속하는 뜻을 경솔하게 보인다면, 구부러진 것을 바로잡으려다 너무 곧게 되어 의심과 노여움이 더욱 심해지는 것입니다. 청컨대 더욱 살피고 조심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정언 조상행(趙尙行)이 상소하기를,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석복(李碩復)이 일찍이 진주 영장(晋州營將)이 되어 무신년134) 역적을 토벌하였을 때에 처음에는 머뭇거리면서 관망(觀望)하다가 나중에는 또 남의 공(功)을 빼앗아 스스로 자랑하였었습니다. 그런데 감란록(勘亂錄)을 찬집(纂輯)하는 제신(諸臣)이 모두 도신(道臣)의 장주(狀奏) 및 사서(私書)에 의거해서 기재(記載)하니, 이석복이 제신을 꾸짖고 욕하기를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파직시켜 서용하지 않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비변사에서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종성(李宗城)이 아뢴 바로 인하여 해서(海西)의 상정미(詳定米) 1천 8백 석(石)을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갈라 주어 군향(軍餉)으로 보태어 채우도록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박사수(朴師洙)를 도승지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성상께서 보련(步輦)으로 나아가시면 배종(陪從)하는 백관(百官)은 당연히 걸어서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남교(南郊)·북교(北郊) 및 선농단(先農壇)에 기우(祈雨)하였을 때에는 일찍이 말을 타도록 허락한 전례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례대로 말을 타도록 명하였다.
비변사에서 경기 어사(京畿御史) 이주진(李周鎭)이 아뢴 바로 인하여 교동(喬桐)의 무사(武士)들이 강도(江都)의 관무재(觀武才)에 응시하는 것을 일체로 허락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6월 10일 을축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였는데, 비가 내리도록 빌기 위해서이다.
6월 11일 병인
임금이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경기 감사(京畿監司) 홍현보(洪鉉輔)를 불러 도내(道內)의 민사(民事)를 묻고, 인하여 부로(父老)를 불러 농사 형편을 물었다.
6월 12일 정묘
임금이 친히 형조의 죄적(罪籍)을 처결하여 정배자(定配者)를 석방한 것이 47명, 감등(減等)한 자가 23명, 양이(量移)한 자가 7명이었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으며, 사간원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가뭄이 더욱 흑심하다고 하여 자신을 책망하는 전교를 내리고 감선(減膳)하고 저자를 옮기도록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석척 기우제(蜥蜴祈雨祭)135) 가 비록 형식에 가깝다 하더라도 석척 동자(蜥蜴童子)136) 는 순양(純陽)이니 그 정성이 이르는 바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 격식과 차례에 구애하지 말고 전례대로 마련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참의 신치운(申致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가만히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해 보았더니, 전폐(奠幣)에서 망예(望瘞)에 이르기까지 여섯 가지 큰 절목(節目)이 있는데, 별도로 집례(執禮)가 ‘기(起)한다.’고 한 것은 대체로 여섯 가지 절목이 제사의 시작과 끝이 되며, 그 사이의 작은 절목은 유사(有司)가 스스로 담당하여 거행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친제(親祭)의 홀기(笏記)137) 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절목을 아울러 일체 불러서 종사(從事)하게 하니, 삼헌(三獻)하는 사이에도 절차를 매우 오래 끌어 비록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도리어 게을러지는 데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청컨대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널리 의논해서 증거에 의거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옛날 동중서(童仲舒)138) 가 언제나 비가 내리도록 빌면서 번번이 양기(陽氣)를 막고 음기(陰氣)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전(鑄錢)하는 풀무와 화로를 많이 설치한 것은 아마도 극심하게 가물어 늘 무더운 데로 돌아가는 단서가 될 듯합니다. 청컨대, 정지하여 없애소서."
하니, 임금이 후하게 비답을 내리고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장령 이기헌(李箕獻)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경외(京外)에서 진구(賑救)한 나머지 국가의 저축이 떨어진데다가 가뭄 또한 이와 같으니, 대궐에서부터 먼저 경비를 일체 줄이고, 모든 관사에서도 쓸데없는 경비를 일체 임시로 줄이며, 각도(各道)와 각 고을에서도 줄일 만한 것을 일제히 재감(裁減)하여 조금이라도 진구하는 방법으로 삼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리고 경기(京畿)에서 세금으로 내는 대동미(大同米)는 배로 운반하여 바치지만, 삼국(三局)의 보미(保米) 같은 데 이르러서는 군인(軍人)이 스스로 바쳐야 하므로, 양세(糧貰)와 잡비(雜費)가 장차 20여 두(斗)를 넘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금부터 세금을 운반하는 배에다 보태어 싣도록 허락하여 영원토록 정식(定式)을 삼게 하소서.
그리고 여러 유신(儒臣)에게 부첨(付籤)한 것은 다시 기용하지 못하게 함을 보인 것인데, 중도(中道)에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니, 빨리 명을 거두심을 적합합니다. 그리고 이수신(李守身)은 탐욕스럽고 모람되어 법을 준수하지 않았는데도 상대하여 논의하며 죄가 없는 것처럼 하였으므로, 섬의 백성들이 시끄럽게 원망하니, 체임시키거나 파면시키도록 명하심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힘쓰도록 경계한 것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그리고 나머지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그리고 유신(儒臣)에 대한 부첨(付籤)도 말감(末減)하겠다. 이수신(李守身)에 대해서는 이미 죄가 없음이 판명된 후이므로 막을 수 없다."
하였다.
충청도에 전염병이 치성하여 죽은 백성이 많았다.
6월 13일 무진
임금이 형조의 죄적(罪籍)을 친히 처결하여, 정배(定配)된 자로 석방한 자가 53명, 감등한 자가 20명, 양이(量移)한 자가 27명, 육지로 내보낸 자가 1명 있었다. 이날 임금이 추조(秋曹)의 여러 당상관에게 이르기를,
"선조(先朝)에 사람을 물에 던져 죽인 자가 있었는데, 상명(償命)139) 한 뒤에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왔으므로, 선조에서 가엾게 여겨 병장(屛障)을 만들어 옥사(獄事) 처결의 어려움을 서술하였다. 서명(西銘)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이므로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죄수를 보고 수레에서 내려 울었다. 형관(刑官)이 만약 〈죄수를〉 동포처럼 보는 뜻이 있다면, 어찌 차마 옥안(獄案)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서 상명(償命)의 의논을 하겠는가? 금오(金吾)의 이졸(吏卒) 역시 간교한 폐단이 있으며, 심지어 형조(刑曹)에서도 문득 하나의 이익을 얻는 소굴로 삼아, 재산이 있는 자는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도 살 수가 있고, 재산이 없는 자는 살아 나와야 하는데도 죽으러 들어가게 하니, 형벌을 맡은 관원이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고 하였다."
하였다.
제도(諸道)의 감사와 양도(兩都)의 유수에게 명하여 죄수를 관대히 처결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윤혜교(尹惠敎)를 도승지로, 이귀휴(李龜休)를 승지로 삼았다.
6월 14일 기사
대신(大臣)을 파견하여 태묘(太廟)에서 비를 내리도록 빌게 하고, 가선 대부(嘉善大夫)인 무신(武臣)을 나누어 파견하여 동자 석척 기우제(童子蜥蜴祈雨祭)를 춘당대(春塘臺)와 경회루(慶會樓) 못가에서 행하였는데, 무릇 3일 동안 하고서 그쳤다. 【춘당대(春塘臺)가 대궐 안에 있었기 때문에 헌관(獻官)과 감찰(監察)이 청양문(靑陽門) 밖에서 유숙(留宿)하고, 동자(童子) 1백 명은 예조와 형조의 낭관(郞官)이 거느리고 홍화문(弘化門) 밖에서 유숙하였다.】 이날 내려 쬐는 볕이 대단하므로 임금이 특별히 어장(御醬)을 동자(童子)들이 기우하는 곳에 내렸는데, 대체로 장(醬)은 더위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6월 15일 경오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6월 16일 신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하고 호남(湖南)의 곡식 1천 5백 석(石)을 제주(濟州)로 운송(運送)하도록 명하였는데, 홍수의 피해를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북교(北郊)에서의 친도(親禱) 때 악독(嶽瀆)의 경우는 음악을 연주하고 산천(山川)의 경우는 음악을 연주하지 말며, 악독의 축사(祝辭)는 관각 당상(館閣堂上)이 지어 올리도록 하고, 산천의 축사는 지제교(知製敎)가 지어 올리도록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대체로 북교에서의 친제(親祭)는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되지 않은 바이고, 성상이 왕위를 계승한 후 처음 행하는 것이며, 산천과 악독은 차이가 있으므로, 악독에 제사지내는 글에는 어휘(御諱)를 쓰고 산천에 제사지내는 글에는 단지 국왕(國王)이라고 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런 명이 있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악독(嶽瀆)에는 음악을 연주한다는 글이 없으며, 악장(樂章)도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하니, 마침내 음악을 연주하는 절차는 도로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예조에서 입추일(立秋日)에 평상시대로 복선(復膳)하기를 청하자, 비가 내린 뒤에 복선하도록 명하였다.
한덕후(韓德厚)를 진하 겸 사은 서장관(陳賀兼謝恩書狀官)으로 삼았다.
6월 17일 임신
임금이 북교(北郊)의 어재소(御齋所)에 나아가 예조 참의 신치운(申致雲)을 불러 전교하기를,
"태묘(太廟)·사단(社壇)·경휘전(敬徽殿)의 의식 절차가 각기 다른데, 이것은 모두 수복(守僕)이 잘못된 것을 답습해서이다. 홀기(笏記) 가운데 빼버려야 할 부분은 점(點)을 찍어 고치는 것이 타당하다."
하자, 신치운이 아뢰기를,
"북교(北郊)에서의 친제(親祭)는 본래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된 바가 아니기 때문에 이번에 보태고 보충하여 홀기(笏記)를 만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단(南壇)에는 효종(孝宗) 때 처음으로 친제(親祭)를 행하였고, 선농단(先農壇)에는 숙종(肅宗) 때 처음으로 친제를 행하였으므로, 북교(北郊)에는 내가 을사년140) 에 이러한 전례를 모방하여 친제하였다."
하였다.
6월 18일 계유
임금이 악독(嶽瀆)에 비를 내리도록 빌고, 3품(品) 관원으로 하여금 산천(山川)에 비를 내리도록 빌게 하였다.
6월 19일 갑술
임금이 육사(六事)141) 로 하교(下敎)하며 스스로 책망하기를,
"성실을 힘쓰려고 하여도 도리어 거짓이 많으니 이것이 나의 허물이고, 사치를 없애려 하여도 크게 시행됨을 보지 못하니 이것이 나의 허물이고, 백성을 위하려고 하지만 실질적인 혜택이 없으니 이것이 나의 허물이고, 기강(紀綱)을 진작시키려 하여도 분의(分義)가 날마다 떨어지니 이것이 나의 허물이고, 시상(時象)을 조화시키려 하여도 어긋나고 과격함이 더욱 심하니 이것이 나의 허물이며, 모든 관사를 신칙하려 하여도 날짜만 보내는 것이 그전과 같으니 이것이 나의 허물이다. 아! 정치에는 근본이 있고 일에는 요긴함이 있는데, 묘당(廟堂)에서는 쇠약함이 풍습을 이루었고 부옥(蔀屋)142) 에서는 근심과 원통함을 펴지 못하니, 내가 만약 그 근본과 요긴함을 알았더라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하고, 인해서 정부(政府)에 명하여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게 하였다. 그뒤 며칠 만에 또 아무리 공정하게 하도록 신칙하였지만, ‘반성하며 책망할 수 없었으니 이는 나의 허물이고, 항상 번잡하고 잗단 것을 미워하면서도 작은 일 살피기를 면하지 못하니 이는 나의 허물이고, 뭇 신하들을 신칙하고 힘쓰게 하면서 스스로 빠뜨리거나 잊는 것이 많으니 이는 다시 나의 허물이다.[雖飭其公及求未能此予愆常惡煩瑣未免察小此予愆飭勵群工自多遺忘此予愆]’라는 33글자를 써서 내리며 여섯 가지를 허물 아래 덧붙이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내가 사단(社壇)에 재차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돌이켜 생각하건대, 군병(軍兵)이 이글거리는 화롯가에 있는 듯하니 동가(動駕)하는 삼엄(三嚴)을 해가 진 시기로 늦추어 정하고, 의장(儀仗)과 군병의 절목(節目)도 줄이는 것이 마땅하며, 대가(大駕)를 따르는 백관(百官)도 해조(該曹)로 하여금 줄이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원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지평으로, 이흡(李潝)을 이조 정랑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으로, 황정(黃晸)을 부수찬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부교리로, 윤동형(尹東衡)을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부수찬 황정(黃晸)이 한재(旱災)로 인해 상소하여 경계를 진달하고, 유사(有司)에게 분명히 명을 내려 내년의 진정(賑政)을 미리 강구하게 하고, 언로(言路)를 크게 열어 사방에서 간(諫)하러 오도록 하기를 원하자, 임금이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고, 원소(原疏)는 대궐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6월 20일 을해
임금이 장차 사단(社壇)에서 비를 내리도록 기도하려 하자, 여러 대신과 약원의 제신(諸臣)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더위를 무릅쓰고 동가(動駕)하여 밤을 지새우며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것이 벌써 여러 번이니, 성궁(聖躬)이 손상(損傷)될 것입니다. 원하건대, 친도(親禱)를 정지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말이 민사(民事)에 미치자 눈물을 흘렸다.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억울함을 풀어 주고 체옥(滯獄)을 관대히 처결하여 안으로는 원망이 없게 하고 밖으로는 직무를 게을리함이 없도록 하는 방법을 진달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판중추부사 이태좌(李台佐)가 여항(閭巷)에서 사치하는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는 무명 이불을 썼는데, 나는 명주 이불을 쓰니, 이것도 선조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궁중(宮中)에서 상투 높이기를 좋아하자 사방에서 높이를 한 자[尺]나 되게 하였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쏠리게 되니, 위에서 시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 것이 가하다. 만약 위령(威令)으로 그 사치를 금지시킨다면 백성을 교화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이태좌가 또 아뢰기를,
"역적을 다스리는 국옥(鞫獄)은 원래 포도청(捕盜廳)으로 이송(移送)하는 규정이 없습니다만, 무신년143) 부터 처음으로 이송하였습니다. 그런데 포도청에는 전도주뢰지형(剪刀周牢之刑)이 있어 매우 혹독(酷毒)합니다. 만약 이 형신(刑訊)을 시행하면 아무리 억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거짓으로 자복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영원히 혁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형구(刑具)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양청(兩廳)에 분부하여 혁파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조문명(趙文命)과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주뢰의 형벌을 전부 혁파하는 것은 불가하며, 단지 전도주뢰(剪刀周牢)만 혁파하는 것이 적합니다."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봉익(李鳳翼)을 좌승지로 삼았다.
6월 21일 병자
임금이 사단(社壇)에서 비를 내려 주기를 기도하고 대궐로 돌아와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좌우 포도청(左右捕盜廳) 및 추조(秋曹)·경조(京兆)에 급히 가서 중죄수(重罪囚)를 제외하고 모두 즉시 석방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승지 서명연(徐命淵)이 아뢰기를,
"포도청(捕盜廳)에는 일찍이 근시(近侍)가 적간(摘奸)한 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좌우 포도 대장을 불러 전교(傳敎)를 듣게 하였다. 이날 포도청의 죄수로 석방된 자는 무릇 13인이었다.
전교하기를
"희생과 폐백을 드리는 〈제사를〉 두루 거행하였는데도 신(神)이 우리에게 혜택을 내리지 않으니, 허물이 나에게 있다. 백성들에게 실로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양삭(兩朔)의 진선(進膳)은 특별히 봉진(封進)을 정지하도록 하라. 지금은 군병(軍兵)이 한데에서 밤을 세우는 것을 돌보아야 하니, 옛날 사람의 묵묵히 반성하는 것을 본받아 조용히 반성하며 자신을 책망하려 한다. 유사(有司)가 기도하는 것은 전례를 따라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 명하여 쌍령(雙嶺)과 험천(險川)의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에게 단(壇)을 설치하고 사제(賜祭)하여 남모르는 억울함을 위로하게 하였다.
신처수(申處洙)에게는 위리(圍籬)를 철거하고 양이(量移)하게 하였으며, 박장윤(朴長潤)은 근도(近道)에다 양이하게 하였고, 이만유(李萬維)는 육지로 내보도록 명하였는데, 한재(旱災) 때문에 관대히 처결한 것이었다.
6월 22일 정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관을 인견하고, 박치원(朴致遠)의 귀양지를 양이(量移)하도록 명하였는데, 판의금부사 김재로(金在魯)가 그의 부모가 늙었으니, 인정과 도리에 가엾게 여길 만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이양신(李亮臣)을 용서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좌참찬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박문수(朴文秀)가 영남(嶺南)에서 구운 소금이 1만 8천여 석(石)이라고 합니다. 청컨대 1만 석을 수송하여 경기의 백성을 진구(賑救)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제도(諸道)에 재실(災實)의 등급을 나누어 성책(成冊)하여 반드시 가을 구월(九月)까지 해조(該曹)에 만들어 보내고, 그대로 정식(定式)을 삼도록 명하였는데, 송인명(宋寅明)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김재로(金在魯)가 청하기를,
"이제부터 등급을 나누어 계문(啓聞)할 때에 단지 초실(稍實)·지차(之次)·우심(尤甚) 3등급을 매기되, 더욱 심한 가운데 아주 심하다.[尤甚之尤甚]는 명목은 혁파하여 버리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금년에 외방(外方)의 진정(賑政)은 오로지 부자들에게 권분(勸分)한 곡식에 의뢰하였습니다. 지금 또 거듭 기근(饑饉)이 들 염려가 있으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정치를 더욱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1천 석(石)에서부터 10석까지 상을 주는 격식을 정해서 반포(頒布)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간원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허옥(許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사롭지 않은 재해(災害)는 형식으로 대응하거나 숫자를 갖추어 그것이 사라지거나 그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합니다. 청컨대 실질적인 정치를 힘써 빈 말로 돌아가는 경우가 없게 하소서. 그리고 또 모름지기 궁정(宮庭)의 지나친 사치는 획일적으로 절약하고 줄이도록 하며, 제사(諸司)의 용도(用度)로 한결같이 재감(裁減)한 후에야 바야흐로 아래로는 민심(民心)을 위로하고 위로는 하늘의 견책(譴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장령 이기헌(李箕獻)이 상소하기를,
"지난번 진휼청(賑恤廳)에서 실화(失火)한 뒤로 낭청(郞廳) 안상원(安相元)이 불에 탄 곡식을 발매(發賣)한다고 빙자하여 온전한 곡식을 덜어 내었는데, 처음에는 두어 관(貫)의 동(銅)으로 1석(石)을 샀지만, 전매(轉賣)하면서, 6,7관을 징수하고 있습니다. 민간(民間)에 발매하는 것은 모두 타서 시커먼 곡식이므로, 여항(閭巷)에서 원망하고 욕을 하는데, 심지어 안상원을 삶아 죽여야 하늘에서 비가 내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대계(臺啓)가 일어나자, 미봉할 계책을 내어 지구(知舊)에게 두루 간청하여 허위 문서를 만들어 서명하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금오(金吾)로 하여금 잡아다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이유신(李裕身)이 상소하여 궁방(宮房)에서 절수(折受)하는 폐단과 백성들의 기근(飢饉)을 당한 참혹함을 논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에 진휼청(賑恤廳)에서 발매(發賣)하였을 때에 해당 낭청이 사정(私情)에 따라 남의 부탁에 응하고, 변환(變幻)하여 남의 이름을 모칭(冒稱)하며 그 흔적을 엄폐하였는데, 태운 곡식의 숫자는 아직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해당 낭청은 잡아다 조처하고, 해당 당상관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인하여 번고(反庫)144) 하여 실상을 상고하게 하소서. 고성(固城)은 바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인데, 이봉명(李鳳鳴)처럼 어리석고 무식한 이에게 갑자기 이 직임을 임명하였으니, 파직(罷職)시킴이 적당합니다. 그리고 전조(銓曹)의 관원도 신칙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하여 진달한 것을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예조에서 기묘일에 근시(近侍)를 파견하여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서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영의정이 세상을 떠남으로 인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정지하는 당부(當否)를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으며, 인해서 우선 며칠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이진망(李眞望)을 대사헌으로, 조적명(趙迪命)을 교리로, 임정(任珽)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6월 23일 무인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이 졸(卒)하였다. 홍치중은 사람됨이 자애롭고 신실하며 침착하고 중후하여 평생토록 남을 해롭게 하거나 미워하는 행동과 급히 서두는 얼굴빛이 없었다. 다만 이해(利害)를 돌아보고 계교(計較)가 다단(多端)하여, 무릇 사정(邪正)과 현우(賢愚)의 사이에서 엄격하게 분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승(政丞)의 업적으로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다.
부교리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한 마음이 선(善)하면 성운(星雲)이 찬란하고, 한 마음이 악(惡)하면 귀신(鬼神)이 삼연(森然)145) 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정치를 펴는 근본이 문득 하나의 사(私)자에 무너짐을 당하여 천리(天理)는 항상 적고 인욕(人慾)은 항상 많으니, 경법(經法)과 권도(權道)를 서로 번갈아가며 활용하고 의리(義理)를 함께 시행하여도 한 개의 가슴속에는 다소(多少)의 교착과 소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본색(本色)을 벗어나 깨끗해져서 뿌리를 통렬하게 뽑아버릴 수 없었는데, 10년 동안 정치를 한 것이 옛날 그대로 였으니, 단지 그 속에 있었던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습니까? 전하의 춘추(春秋)는 점점 많아지는데, 지기(志氣)는 없어지고, 청명(淸明)함과 쇄락(灑落)146) 함은 옛날의 기상(氣像)을 회복하지 못하니, 신이 어찌 주자(朱子)의 이영(邇英)147) 에 대한 감회가 없을 수 있겠으며, 전하께서 당초의 뜻을 되돌아보시면 또한 어찌 근심스러워 스스로 심기가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천하의 공물(公物)은 이(理)와 의(義)일 뿐입니다. 인주(人主)가 고집하는 것이 올바르면 군하(群下)가 그 뜻을 빼앗을 수 없고, 군하가 고집하는 것이 올바르면 인주 역시 그 뜻을 굽히도록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일체 하고 싶은 바를 반드시 곧바로 하고야 말았고, 오만하게 자신이 옳다고 여겨 오직 나의 뜻을 어기지 말라고 하시니, 대신이 감히 간쟁(諫爭)하지 못하고 대각(臺閣)에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가령 전하께서 불의(不義)를 저지른다면 누가 그것을 돌이키겠습니까? 더구나 과오가 있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꾸며대거나 잘못인줄 알면서도 하고마는 것은 자신을 아끼는 사람도 오히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끔 문장(文章)과 변론(辯論)으로 꾸며대어 사람들을 막는 파병(欛柄)을 삼아 일에 접해서는 얽매이게 하여 곳에 따라 융통성이 없습니다. 비록 사사로운 허물이 크다 하나, 궁부(宮府)의 절수(折受)같은 것은 성상의 뜻이 굳게 결정되어 사기(辭氣)도 따라서 사나우니, 저 광구(匡救)하려는 자가 어떻게 반드시 죽기를 작정하고 저항하여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그전부터 내려오면서 전하께서도 다시 이 말을 듣지 못하셨으니, 고요한 밤에 생각하면 부족하게 여기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총명(聰明)을 자부하여 정신(精神)을 지나치게 쓰시면서 밤이 깊어 시각이 늦었는데도 오히려 잠자리에 들지 않으신 채 스스로 편안할 겨를이 없으니, 진실로 제왕(帝王)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모든 제도가 바르게 되고 모든 일이 이치대로 되어야 마땅한데,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한 치[寸] 정도 전진하면 한 자[尺] 정도 후퇴를 하니, 다스려지기를 바라 애쓰시며 사람을 임용하되 편안하게 여길 수 없어서가 아닙니까? 비록 정승을 임명하고 경(卿)을 배치한다 하더라도 애당초 충분히 알지 못하므로, 한 번 믿고 기용하여 가한가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인데, 버리기를 전제(筌蹄)148) 처럼 하여 아침에 한 사람을 바꾸고 저녁에 한 사람을 바꿉니다. 그래서 의정(議政)의 의망(擬望)이 자뭇 10수 차례가 넘으며, 총재(冢宰)의 주의(注擬)도 15, 6차례 뿐만이 아니니, 국가의 공기(公器)를 개인의 도구로 만들어 한갓 사람마다 영광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건극(建極)하는 것이 어찌 좋은 제목(題目)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는 안배(安排)하는 데 애쓰지 않고 본연(本然)의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겠으며, 당색(黨塞)을 없애는 것이 어찌 큰 사업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 천착(穿鑿)하지 않고 본연의 공정함을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료(臣僚)들이 일치하여 직무를 힘쓰고 협력하게 하려면 능력이 있고 없는 이를 아울러서 뒤섞이게 하고, 조정을 안정(安靜)시키려고 하면 옳고 그름을 아울러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의심하여 멀리하고 억측하여 거스르는 해로움이 언제나 임명하고 감찰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는 데 달려 있고, 잗달거나 번거로운 병폐는 오로지 덕성(德性)을 보존함이 견고하지 못한 데에서 연유하니, 저 군하(羣下)들도 망령되게 좋아하고 미워함을 헤아리고, 뜻을 잘 엿보아 한갓 외면(外面)의 가식(假飾)만 가지고 치장하는 자료를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 허위(虛僞)가 풍속을 이루고 길들여져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이 날마다 상실되지 않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조정에서 외면하고 멀리하는 것을 없애려고 한다면, 어찌 성심(聖心)에 외면하고 멀리하는 것을 먼저 없애지 않으시며, 진실로 군하(羣下)의 찌꺼기를 씻으려고 하면서 어찌 성심의 찌꺼기를 먼저 씻지 않으십니까? 위로는 침착하고 준엄하며 대범하고 중후한 체모(體貌)가 없는데다 아래로는 위엄을 업신여기는 폐단이 있으며, 위로는 크고 견고한 도량이 없는데다 아래로는 일을 경시하는 병폐(病弊)가 있습니다. 재주가 많고 말을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면 중후하고 과묵(寡默)한 사람이 멀어지게 되며, 일을 따라 공(功) 세우기에 분주한 무리를 좋아하면 노성(老成)과 충실(忠實)한 자가 소원(疏遠)해집니다.
세도(世道)를 유지시키고 국맥(國脈)을 부식(扶植)하는 데에는 첫째 염치(廉恥)이고 둘째 명절(名節)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사대부(士大夫)는 자수(自守)하는 풍습이 일체 무너지고 상실되어, 벼슬을 구하여 스스로 분경(奔競)149) 을 행하고, 세로(世路)에 뛰어다니며 관절(關節)을 서로 통하고는 청탁을 공공연히 행하고 있으니, 묘당(廟堂)에서의 견발(甄拔)이 유독 임야(林野)에 염퇴(恬退)한 사람은 누락되고 있으며, 대각(臺閣)의 청선(淸選)이 간혹 시골의 지체가 낮고 아첨하는 무리에게로 돌아가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당연히 명절(名節)을 숭상하고 장려해야 하며, 염치(廉恥)를 인도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소나 말을 잡아매듯 사람 대우를 하지 않고 종처럼 꾸짖으며, 사정과 입장이 어떠함은 묻지 않고 곤궁한 지경을 만들도록 강요하기도 하며, 간간이 기지(機智)와 권모(權謀) 베풀기를 중요한 책략으로 간주하면서 홀로 한 번 달음박질하는 즈음에 한 번의 청렴한 절개가 꺾여서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금년의 농사는 경기(京畿) 안은 벌써 적지(赤地)를 이루었습니다. 작년 7월 초에 팔로 영진사(八路營賑使)를 차출(差出)하고, 잇따라 안집(安集)·경차(敬差)란 명칭이 있었는데 먼저 소문이 미치는 곳에는 미리 소요(騷擾)를 이루어 이민(吏民)은 그 토지를 사사로이 하면서 수령에게 속여서 숨기고, 수령은 그 지경을 사사로이 하면서 도신(道臣)을 공동(恐動)하니, 재실(災實)은 이미 뒤섞이고 수확은 이미 다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경차관(敬差官)이 된 자가 아무리 바로잡아 조사하려 하더라도 조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시종(侍從) 가운데 풍력(風力)이 있고 이사(吏事)를 익힌 사람을 별도로 뽑아 추수하기 전에 내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몰래 다니며 염찰(廉察)하고 출도(出道)하여 전지(田地)를 조사하게 한다면, 아전이 감히 농간을 부리지 못할 것이고, 백성이 원통함을 품게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경차관의 관례만 갖추는 것에 비교하면 그 성과가 어찌 서로 갑절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서울에서의 진구(賑救)는 당상관을 낭청(郞廳)에게 맡기고, 낭청은 해당 서리(胥吏)에게 맡겼는데, 경재(卿宰)의 노복(奴僕)과 시정(市井)의 상고(商賈)가 얼굴을 변장하여 옷을 바꾸어 입고는 번갈아가며 받고 중첩으로 나가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정말로 굶주린 백성은 간혹 와서 방황하다가 문 밖에서 짓밟혀 죽기도 하였습니다. 각 고을에서의 진구하는 일이 비록 잘 끝이 났다고는 하지만 5월에 진구하던 것을 파(罷)하면, 굶주려 죽는 백성 또한 자못 적지 않을 것이며, 보리 추수 뒤에도 가난하고 의지할 데가 없어 장차 〈한 사람도〉 남지 않는 데 이를 것입니다. 그러니 수령으로 평소 명성과 업적이 없는 자는 빨리 변통(變通)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비록 중요한 번한(藩翰)150) 이라 하더라도 한갓 체임(遞任)시켜 바꾸는 데 구애될 필요는 없습니다.
바닷가의 고을로 간혹 풍년이 든 곳이 없지 않으니, 무릇 징수하는 데 관계되는 것은 일체 백성들의 원하는 데에 따라 정미(正米)나 잡곡(雜穀)을 논할 것 없이 시중의 가격을 따라 해당 고을에서 받아서 보관하게 한다면, 봄철이 지난 뒤 진휼을 의논할 때에 반드시 성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관북(關北)은 해마다 풍년이 들기는 하였으나, 면포(綿布)가 매우 귀하니, 지금 각영(各營)에서 저축하여 남겨둔 면포를 바닷가 여러 고을의 곡식과 바꾼다면, 배가 왕래하면서 운송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해서(海西)의 상정미(詳定米) 같은 데 이르러서는 응당 내려준 것이 많겠지만, 지금 양청(兩廳)에서 새로 주전(鑄錢)한 몇만 냥(兩)을 내려 보내어 그 돈을 대신 사용하게 하고 쌀은 보관해 두도록 한다면, 비록 번거롭게 시장(市場)에서 모으지 않더라도 앉아서 몇천 곡(斛)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절실(切實)하니 의당 깊이 반성하겠다. 그리고 거듭 신칙할 만한 것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엄중히 신칙하게 하고, 의논해서 조처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6월 25일 경진
권업(權𢢜)을 예조 판서로, 유척기(兪拓基)를 좌윤으로, 임정(任珽)을 교리로, 조한위(趙漢緯)를 수찬으로, 이광덕(李匡德)을 이조 참의로, 민사연(閔思淵)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6월 26일 신사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근시(近侍)를 파견하여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에서 비를 내리도록 기도하게 하고, 한강(漢江)에서 침호두(沈虎頭)151) 하면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6월 27일 임오
재신(宰臣)을 송악(松岳)·양진(楊津)·박연(朴淵)에 파견하여 비를 내리도록 기도하게 하였다.
6월 28일 계미
예조 판서 권업(權𢢜)을 특별히 체임(遞任)하고 송성명(宋成明)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경휘전(敬徽殿)의 대상(大祥)이 이미 임박했는데도 권업이 고향에 있으면서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외방에 있는 제신(諸臣)으로 국상(國祥)에 나오지 않은 자에 대하여 엄중한 전교를 내려 대신 및 늙고 병든 사람을 제외하고는 금오(金吾)로 하여금 고율(考律)하여 아뢰게 하였다.
판의금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옛날 인종(仁宗)의 상제(祥祭) 및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국휼(國恤)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와서 참여하지 못했으며, 고 전한(典翰) 이수인(李守仁)이 효종(孝宗)의 국휼을 당하여 역시 분곡(奔哭)하지 않았다가 마침내 권점(圈點)을 받지 못하니,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이 현종(顯宗)에게 고하기를, ‘초야(草野)에 있는 사람은 초야에서 곡(哭)하는 것이 예(禮)이니, 이것으로 권점하지 않는 것은 불가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고율(考律)하게 한 전교는 아마도 성인(聖人)의 사령(辭令)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염퇴(恬退)한 이재(李縡)·이진망(李眞望)·김진상(金鎭商) 같은 이는 전교 가운데 미처 구별하지 못하였다. 제신(諸臣)은 내가 근심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은 한(漢)나라 법(法)에서 구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6월 29일 갑신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상제(祥祭)를 행하였다. 의주(儀註)는 임금이 최복(衰服)을 갖추고 상장(喪杖)을 짚고 재전(齋殿)에서 나와 위판(位板)이 모셔진 곳으로 들어가 부복(俯伏)하여 곡(哭)하고 네 번 절하며, 일어나 몸을 바르게 한다. 도로 재전으로 돌아가 최복을 벗고 흑색 익선관(黑色翼善冠)에다 옥색 단령포(玉色團領袍)와 오서대(烏犀帶), 백화(百靴)를 착용하고 재전에서 나와 위판이 모셔진 곳으로 나아가 부복하여 곡하고 네 번 절하며, 일어나 몸을 바르게 하여 전폐례(奠幣禮)와 초헌례(初獻禮)를 행한다. 헌관(獻官)은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을 일반 의식대로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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