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을유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삭제(朔祭)를 지냈다.
수릉관(守陵官)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 이하 여러 신하들에게 각각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수릉관·시릉관(侍陵官)은 가자(加資)하고 말·노비(奴婢)·전지(田地)를 하사하였으며, 참봉(參奉)은 승륙(陞六)152) 시키고 아마(兒馬)를 하사했으며, 경휘전(敬徽殿)의 입번(入番) 종신(宗臣)은 가자하고, 참봉은 승진시켜 직장(直長)을 제수하였으며, 내관(內官)은 가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4책 3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11면
【분류】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註 152] 승륙(陞六) : 7품 이하의 벼슬아치가 6품으로 올라가는 것.
7월 2일 병술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이의현(李宜顯)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경묘(景廟)의 행장(行狀)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 가운데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미령하실 때 경묘께서 곁에서 모시고 있었고 신의 형 민진후(閔鎭厚)도 입시해 있었는데, 그때 왕후께서 영결(永訣)하시는 하교를 발설하셨으나, 경모께서는 슬퍼하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시다가 문 밖에 나와서야 신의 형의 손을 잡으시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경묘의 독실한 효성으로 의당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聖母)의 환후가 위독해졌을 때에도 죽음을 슬퍼하는 뜻이 있지 않았으니, 어찌 영결하는 말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신의 형제가 명을 받들고 입시했었습니다만, 신의 형은 간혹 공고(公故) 때문에 입시하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양 혼자서 입시했었는데 만일 이런 일이 있었다면 신이 어찌 몰랐겠습니까? 성모께서 평소 달관(達觀)하고 계셨던 덕을 이제 이렇게 기재하였으니, 어찌 혐의스러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성모께서 미령하실 때 일찍이 경묘의 지극한 행실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라고 칭찬하신 적이 있었고, 신도 경술년153) 봄에 전하께 이 말씀을 아뢴 적이 있었던 것을 전하께서도 틀림없이 기억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의당 행장에 기록했어야 할 것인데도 지금 기재하지 않고 도리어 이렇게 사실에 어긋난 말을 기록했으니, 신은 삼가 개연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 신이 아뢴 것을 사관(史官)이 일기(日記)에 상세히 기록한다면 뒷사람들이 절로 행장에 기록된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겠기에 감히 고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내(大內)에서 내린 행록(行錄) 이외에 사신(詞臣)이 찬술하여 올린 것에 간혹 빠뜨리거나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은 전부터 이미 그러했었다. 경(卿)이 한 말은 사관이 상세히 기록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잘못임을 알도록 하겠다."
하였다.
7월 3일 정해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검토관(檢討官) 조명택(趙明澤)이 아뢰기를,
"황재(黃梓)·이도원(李度遠) 등이 소장을 올리고 차자를 올린 것은 의리(義理)를 밝히고자 함이니, 이는 바로 공언(公言)입니다. 그런데도 아울러 비답을 내리지 않고 부첨(付籤)을 명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환수(還收)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조명택이 또 금오(金吾)로 하여금 율문(律文)을 조사하게 하라는 하교를 도로 정지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율(漢律)을 상고해 보건대, 나는 그것이 대불경(大不敬)에 해당되는 것인 줄로 알고 있다. 이런 하교를 듣고도 태연히 집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승지 서명연(徐命淵)이 소장을 올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기근(飢饉)을 진구(賑救)할 방책에 대해 상의할 것과 대비과(大比科)154) 를 물려서 시행할 것을 청하고, 끝에는 사마광(司馬光)이 태후(太后)의 상(喪)에 달려가지 않은 것과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이 중묘(中廟)의 상에 달려가지 않은 것을 인용하여 금오(金吾)로 하여금 율문(律文)을 조사하게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식년과(式年科)는 소장의 내용에 따라 시행하게 하라. 소장의 끝에 거론한 일은 실로 세도(世道)를 위한 부득이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교리 임정(任珽)이 응지(應旨)하여 진소(陳疏)하였다. 임금의 하교 가운데 아홉 가지로 자책(自責)한 일에 대해 반복해서 논계(論戒)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여항에서 사치를 서로 숭상하여 공교하게 만들고 기이하게 꾸미면서 번번이 궁가(宮家)의 양식(樣式)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검소함을 밝히는 근본은 절약하는데 있는 것인데, 대내(大內)로 실어 들여가는 것이 상액(常額)에서 벗어나는 것이 많고 궁장(宮庄)에서 절수(折受)155) 한 것이 간혹 응당 부세(賦稅)를 낼 땅을 점유한 경우도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먼저 궁위(宮闈)를 신칙시켜 화려하게 하는 풍조를 배척하게 하소서. 주금(酒禁)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하찮은 일입니다만, 금하기도 하고 금하지 않기도 하여 법에 신용이 없는가 하면 원망하는 말이 따라서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근년(近年)에 수령들이 사사로이 조곡(糶轂)을 사들이는 것이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는데, 금년 여름 호남의 수령이 또 1천 석의 보리를 사들일 것을 청하자 진청(賑廳)에서 허락하였으니, 이것은 엄히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자신의 총명을 지나치게 믿으시고 군하(群下)들의 의견을 가볍게 보시기 때문에 마음속에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고집하거나 기필하는 것을 면치 못하시며, 정에 끌려 그때마다 다시 빠져드십니다. 일이 비록 잘못된 것이라 해도 반드시 자기 혼자만의 지혜를 믿고, 말이 아첨과 친압에 관계되는 것인데도 매양 간언을 거절하는 안색을 보이십니다. 그리하여 위엄과 노여움을 가하여 강압적으로 짓누르기도 하고 기휘(忌諱)하여 꾸며대기도 합니다. 임금의 말이 번거롭게 중복되는 것이 사륜(絲倫)156) 과 같이 해야 된다는 아름다움에 어긋나는 것이며 작은 일을 몸소 직접하시는 것은 유사(有司)의 직임을 많이 행하는 것이 되어, 규모는 점점 넓고 큰 데서 멀어져가고 기상(氣象)은 너무도 각박하고 다급한 데에 가까워져 끝내는 잗단 일을 살피는 데로 귀결됨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기강은 국가에 있어 실로 원기(元氣)가 되는데, 장정(章程)은 점점 문란해지고 체통은 더욱 손상되고 있습니다. 연석(筵席)에서의 주달(奏達)은 태반은 외설스러운 것이고 조정의 위의(威儀)는 날로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기우(祈雨) 때의 진배관(進排官)을 미처 적간(摘奸)하기도 전에 위에서는 밀어주고 아래에서는 끌어당겨 주어 문(門)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는가 하면, 거짓말로 급한 병을 핑계하여 뇌물을 바치고 모면을 도모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작은 일이지만 또한 조정의 기강에 관계가 됩니다. 하물며 지금 북방의 소식이 염려스러워 스스로 힘써야 하는 것이 더욱 급한 때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난번 사사(謝使)가 관(館)에 머물러 있을 적에 따라가던 역졸(驛卒)들이 제왕(諸王)157) 과 공주(公主)에게 끌려 들어가 중한 법금을 범하기에 이른 것을 여러 일행들이 전설(傳說)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말하기조차 추잡하거니와, 나라의 법금이 여지없이 해이해진 것입니다. 신은 법금을 범한 역졸은 속히 명하여 효시(梟示)하게 하고, 역관(曆官)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잡아 가두어 다스리게 하고, 당시의 세 사신(使臣)에게도 책벌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국상(國祥)이 있는 날에 시골에 있는 신하로서 병고(病故)가 있어 억지로 움직이기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누군들 달려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율문(律文)을 상고해서 들여오라는 하교는 너무도 지나친 성기(聲氣)인 것으로서 전하께서 심덕(心德)을 함양하는 공부가 끝내 미진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가 절실하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혜청(惠廳)에 대한 일은 각별히 신칙시키겠다. 역졸에 대해서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엄하게 신문하게 하겠고, 상역(象譯)158) 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으며, 세 사신은 중추(重推)하겠다. 진배관은 아울러 태거(汰去)시키겠다. 말단에 거론한 일은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뒤에 역관의 공초(供招)와 여러 신하들의 의논으로 인하여 드디어 하교하기를,
"만부(灣府)159) 에서 구인(驅人)한 것이 과연 유신(儒臣)의 소장과 같다면 그가 어떻게 극률(極律)을 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뜬말이 전해진 것이 이미 공초(供招)의 내용과 같다면, 그가 비록 지극히 하찮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왕자(王者)가 법을 적용함에 있어 경솔하게 결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상을 참작하여 도배(島配)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7월 3일 정해
사헌부 【지평 이유신(李裕身)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상방 제조(尙方提調) 김동필(金東弼)·박문수(朴文秀)가 별제(別提) 이세구(李世矩)를 잉임(仍任)시킬 것을 소장을 올려 청하고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재해(災害)가 든 해에 조잔(凋殘)한 고을에서 하나의 양리(良吏)를 얻는 것이 한가로운 관사(官司)에 구임(久任)시키는 것과 견주어 관계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를 잉임시키자고 청한 것은 묘당(廟堂)에서 나라를 자기 몸처럼 여기는 도리가 아닌 것으로 생각되니, 청컨대, 김동필과 박문수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삼화 부사(三和府使) 이광보(李匡輔)는 공무(公務)를 포기하고 그저 놀기만을 일삼으면서 여색(女色)에 빠져 관전(官錢)을 마구 썼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정언 이재후(李載厚)는 대각(臺閣)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났고 출사(出仕)한 지도 오래 되었는데, 한결같이 입을 다문 채 무리를 따라 들어왔다가 무리를 따라 나가기만 하니, 체차(遞差)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말단의 세 건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7월 4일 무자
사복시(司僕寺)에서 아뢰기를,
"본시(本寺)의 각 목장(牧場)에서 세금으로 받아들이는 목화(木花) 6천 근(斤)을 매년 북도(北道)로 들여보내고, 간혹 재신(宰臣)의 진품(陳稟)으로 2천여 근을 더 보내기 하는데, 정유년160) 에 흉년이 들어 잠정적으로 감하게 한 전례가 있습니다. 목화가 이제 또 큰 흉년이 들었으니, 청컨대, 정유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우선 더 정한 숫자는 감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국경을 넘어 몰래 장사를 한 죄인 이지영(李之永)을 효시(梟示)하고 벌등 만호(伐登萬戶) 홍처인(洪處仁)을 잡아다 처치하라 명하였는데, 평안 병사(平安兵使)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다.
지평 정형복(鄭亨復)이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귀서(李龜瑞)가 공사(供辭)를 올리면서 기망(欺罔)한 죄를 논하여 아뢰기를,
"만약 그의 공사와 같다면 신의 염안(廉按)하여 논계(論啓)한 것이 허위로 귀결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이귀서가 진자전(賑資錢)·저치미(儲置米)와 재결(災結)161) 을 사사로이 쓴 정상에 대해 논하니, 임금이 금오(金吾)로 하여금 엄하게 국문하게 하였다.
7월 4일 무자
수찬 조한위(趙漢緯)가 응지(應旨)하여 진소(陳疏)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비록 이번 진청(賑廳)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당상(堂上)은 낭청(郞廳)에게 맡기고 낭청은 하리(下吏)에게 맡긴 탓으로 초록(抄錄)한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 분급(分給)한 것이 고르지 못하여 장차 죽게 된 기민(飢民)은 휘두르는 몽둥이에 유린된 반면 부잣집의 나무하고 꼴베는 종은 옷을 바꾸어 입고 여러 번 진곡(賑穀)을 받았으니, 진황(賑荒)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난 신해년162) 신의 종조(從祖) 문간공(文簡公) 조복양(趙復陽)과 고(告)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진청의 당상이 되어 훈련원(訓鍊院)에 청(廳)을 설치하고 남녀를 분별하여 지성으로 나누어 진구(賑救)하다가, 조복양이 과로로 지쳐 죽자 기민들이 모여 통곡을 했습니다. 민정중은 여역(癘疫)에 걸려 앓으면서도 병을 무릅쓰고 진휼을 감독하였는데, 심지어는 한여름에 더운 모자를 쓰고 몸소 병막(病幕)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의 진청 당상들은 옛사람에 비해 대단히 부끄러운 점이 있으니, 어떻게 조금이나마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가을이 된 뒤에는 반드시 옹주(翁主)의 혼례(婚禮)를 거행해야 되는데, 이송(釐送)163) 하는 범절을 되도록 간략하게 하도록 힘쓴다면 또한 검소함을 밝히고 흉년을 구제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군향(軍餉)·환곡(還穀)·군포(軍布)는 재이(災異)가 더욱 극심한 곳을 조사하여 의당 정봉(停捧)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을 동요시키는 정사를 단연코 방색(防塞)한다면 백성들이 편안히 보전될 것이니, 자목(子牧)164) 의 신하를 의당 가려서 선발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옛날 하던 투식을 따르지 말게 하고 묘당(廟堂)에 분부하여 자격에 구애없이 각각 한두 사람씩을 천거하여 자리가 나는 대로 차견(差遣)하게 하소서. 전번에 관료(館僚)들이 패초(牌招)를 어겼을 적에 내리신 하교는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경휘전(敬徽殿)의 종상(終祥) 때에 시골에서 올라오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한율(漢律)을 조사해 내도록 하였는데, 이는 사령(辭令)이 너무 지나친 것이니, 속히 전의 유지(有旨)를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7월 5일 기축
임금이 대신(大臣)·비당(備堂)과 사은 삼사(謝恩三使)를 인견(引見)하였다. 정사(正使) 이의현(李宜顯)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사개(使价)가 일찍이 청인(淸人)에게 ‘사사(史事)에 대한 소청을 준허(準許)하여 주면 의당 종묘(宗廟)에 고하겠으며 자문(咨文)에도 이 일을 언급하겠다.’ 했는데, 이번의 사행(使行)에 저들이 혹 이에 대해 문의할 수도 있으니, 마땅히 미리 강정(講定)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하문하였다. 어떤 이는 아뢰기를,
"종묘에 고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어떤 이는 아뢰기를,
"전질(全帙)을 보내 준 뒤에야 비로소 종묘에 고할 수 있습니다."
하고, 어떤 이는 아뢰기를,
"제향(祭享)할 때 고유(告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일은 매양 이러하다. 부형(父兄)의 병을 저들 덕분에 치료할 수 있게 된다면, 은혜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먼저 고유제(告由祭)를 행하고 전질을 보내 온 뒤에 비로소 고묘(告廟)하게 하였다. 그리고 예조의 관원 가운데 품하지 않은 사람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였다.
비변사에 명하여 권분(勸分)165) 한 부민(富民)들에게 시상하는 절목(節目)을 논정(論定)하게 하였다. 1천 석(石) 이상인 경우, 【실동지(實同知)·첨지(僉知)는 그의 본품(本品)에 따라 승차(陞差)시키고 무음 초사(武蔭初仕) 가운데 상당(相當)하는데 따라 차제(差除)한다.】 5백 석 이상인 경우, 【통정(通政)·절충(折衝)은 교지(敎旨)를 만들어 주어 사로(仕路)에 통할 수 있게 하되, 일찍이 당상의 품계를 받은 자는 가선(嘉善)을 제수하여 군직(軍職)에 붙여 주고, 일찍이 가선의 품계를 제수받은 자는 실동지에 차임한다. 1천 석과 5백 석을 막론하고, 일찍이 곡식을 바치고 가설(加設) 등의 자급을 받은 자는 모두 그 본품(本品)에 따라 다시 정자(正資)로 고쳐 제수한다. 상한(常漢)이어서 사로를 허통(許通)시키기에 부당한 사람은 동지·첨지의 첩문(帖文)을 만들어 준다.】 1백 석 이상인 경우, 【판관(判官)·주부(主簿)·찰방(察訪) 가운데 가설첩(加設帖)을 만들어 주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다시 통덕랑(通德郞)·부사과(副司果) 등의 정직 교지(正職敎旨)를 제수하고 아울러 10년을 한정하여 연역(煙役)을 부과하지 않도록 한다. 혹 첩문 가자(帖文加資)를 받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역시 들어준다.】 50석 이상인 경우, 【납속 통정첩(納粟通政帖)을 지급하되 이미 통정이 된 사람에게는 가선첩(嘉善帖)을 지급하고, 첩문을 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10년을 한정하여 연역을 부과하지 않도록 한다.】 10석 이상인 경우, 【3년을 한정하여 연역을 부과하지 말게 하고 첩문은 서울에서 만들어 보낸다. 석수(石數)는 모두 피곡(皮穀)166) 으로 숫자를 계산했는데, 쌀이나 돈을 낸 사람은 모두 피곡으로 환산한다.】
【태백산사고본】 24책 3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12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구휼(救恤)
[註 165] 권분(勸分) : 지방의 수령(守令)이 관내의 부자(富者)들에게 권하여 굶주리는 사람을 구제하게 하는 것.[註 166] 피곡(皮穀) : 껍질을 벗기지 아니한 곡식.
처음에 교리 임정(任珽)이 소장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기헌(李箕獻)이 소장에다 추한 모욕을 낭자하게 더했습니다. 아! 이기헌이 남의 구기(口氣)를 받들어 암암리에 농간을 부렸으니, 그 정태(情態)가 가증스러웠습니다. 이것이 신이 논박하여 파직시키게 한 차자(箚子)가 있게 된 까닭으로 신의 붓끝을 어지럽힌 것을 신은 지금까지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광란한 말에 대해 떠들썩하게 계교하며 변명할 필요가 무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장령 이기헌이 상소하여 대변(對辨)하기를,
"임정의 상소가 다시 자는 불꽃을 일으켜 짓밟으면서 모욕을 가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거조란 말입니까? 아! 세도(世道)가 공정하지 못하고 인심이 사사로움에 빠져 일이 사호(私好)에 관계된 것이면 번번이 반드시 용납해 비호하고 나섭니다. 지난번 홍상인(洪尙寅)을 서둘러 주의(注擬)한 것이 공의(公議)에 흡족한 반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신이 과연 간략하게 논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가 이 때문에 독심(毒心)을 품고 신의 옥하(屋下)의 사어(私語)에 대하여 기필코 화풀이를 하려 하다가 홍상인의 일에 분노를 터뜨렸고, 장주(章奏)에 늘어놓은 것에서 간신(諫臣)을 파직시킨 일을 가탁하여 은밀히 죄에 얽어넣기 위해 모욕을 가한 것이 이에 이른 것입니다. 아! 무신년167) 의 역란(逆亂) 이후 의리의 분간에 눈을 밝히지 아니함이 없어 제방(隄防)하는 방도를 엄하게 하고 있는데, 유독 저 임정만이 겉으로는 함께 마음을 합쳐 국사에 힘쓴다는 뜻을 보이면서 속으로는 꼬리를 흔들면서 아첨하고, 안으로는 불평하는 마음을 품은 채 칼날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면서 조정을 맴돌며 흉계를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공의(公議)를 원수처럼 여기고 악역(惡逆)을 편드는 것이 그의 본래의 가법(家法)입니다."
하니, 비지(批旨)에 이르기를,
"임정의 소장 내용도 중도에 맞는 것이 아니지만, 그대가 한 말은 더욱 말을 가리지 않은 것에 저촉된다."
하였다.
장령 송사윤(宋思胤)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무신년의 역변(逆變)은 전고의 역사에 없던 것인데, 전하께서는 당론(黨論)을 통렬하게 배척하는 마음을 먼저 가슴속에 지니시고서 그 역변을 당론에 의해 격발된 것으로 귀결시키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여립(鄭汝立)·이괄(李适)·허견(許堅)도 모두 당론에 격발되어 일어난 것인지요? 지금 의리가 캄캄하게 막히고 시비가 뒤섞이어 지극히 원통함도 펼 수 없고 거간(巨奸)은 법망을 빠져 나갔습니다. 그런데도 조정 신하들 가운데 충성을 다해 조정의 일을 말하는 사람을 가리켜 반드시 시상(時象)이라느니 속투(俗套)라느니 합니다. 그리하여 깊은 바다와 먼 변방으로의 찬출(竄黜)이 서로 잇달았고 재신(宰臣)의 장주(章奏)를 궐정(闕庭)에서 불태웠으며, 삼사(三司)의 상소와 차자에 비답을 내리지 않은 채 도리어 이것을 당론을 제거하고 표준을 확립시키는 요도(要道)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나라꼴을 이룬 경우는 신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소를 봉입(捧入)하니,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부총관(副摠管)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신이 찬진(撰進)한 경묘(景廟)의 행록(行錄) 가운데 한 조항의 말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했습니다. 이는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고(故) 현감(縣監) 민진영(閔鎭永)이 고 부사(府使) 이희주(李熙鑄)를 대신하여 이 일을 언급하면서 경묘의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라고 차탄했다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일이 진신(搢紳)들 사이에 성대하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의 말을 들으니, 신은 은근히 의아하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신이 직접 민진영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니, 그 믿음성이 또 어찌 대신이 말한 것만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경솔하게 소문을 믿고 망령되이 기록한 잘못임이 분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혐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을 판윤(判尹)으로, 이덕재(李德載)를 정언으로, 윤동형(尹東衡)을 수찬으로, 김재로(金在魯)를 호조 판서로, 이진망(李眞望)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이성룡(李聖龍)을 부사(副使)로, 오원(吳瑗)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7월 6일 경인
정언 조상행(趙尙行)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번의 극심한 가뭄은 전고에 없던 것으로 하늘과 사람이 교감(交感)하는 것이 북채로 북을 쳐서 소리가 나는 것보다 더 빠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스스로 총명함을 믿으시고 군공(群工)들의 의견을 경시한 채 혼자서 만기(萬機)를 운용하시고 겸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정성이 전혀 없으신지라, 상하가 막혀 정지(情志)가 통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건도(乾道)가 크게 항진(亢進)되어 이런 재변(災變)이 야기된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삼가 듣건대, 상방(尙方)에서 으레 북방에 가서 사오는 것이 있는데, 초피(貂皮) 하나의 값이 10여 금(金)을 밑돌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뜻에서 특별히 재감(裁減)시키도록 명한다면, 어찌 이웃 나라에서 보고 듣기에 빛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가에서 사람을 기용함에 있어 오로지 과목(科目)만을 숭상하고 있는데, 문자(文字)를 표절(剽竊)하는 것으로 사로(仕路)에 나아가는 지름길을 삼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세도(世道)를 위해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서한(西漢)의 현량과(賢良科)의 법식과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인재를 수방(搜訪)하는 데 대한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경외(京外)로 하여금 각기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훌륭한 선비를 천거하게 한 다음 친림(親臨)하여 시험을 보인다면, 인재도 배양되고 경술(經術)이 천명(闡明)될 것입니다.
근래 묘당(廟堂)의 사무에 적체된 것이 많아서 팔로(八路)의 장청(狀請)이 걸핏하면 열흘 내지 한 달을 넘기고 서로 미루어 재단(裁斷)이 잘못되기 일쑤입니다. 신은 특별히 재보(宰輔) 가운데 10인을 가려서 팔도(八道)와 만부(灣府)·내주(萊州)를 나누어 관장하기를, 송(宋)나라의 한기(韓琦)·부필(富弼)이 서쪽과 북쪽 지방을 나누어 관장하고 명(明)나라의 13성(省)을 도어사(都御史)가 각기 주관했던 것과 같이 하되, 해도(該道)의 군정(軍政)·전결(田結)·민은(民隱)·재부(財賦)를 잘 헤아려 익히 강구해서 모든 장청(狀請)을 각자 나누어 예속시켜 책임지운다면, 주관하여 왕명을 봉선(奉宣)하는 효험이 있을 것은 물론이요, 중간에 적체되어 늦어지는 폐단이 없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재(水災)·한재(旱災)·기근(饑饉)이 들 경우에는 해당 당상(堂上)을 발송하여 순무(巡撫)하면서 진정시키게 한다면, 절로 익숙해지고 편의해지는 방도가 있게 될 것입니다.
작년에 진장(賑場)을 설치한 고을에서는 백성의 곡식을 적탈(籍奪)했는가 하면 매질까지 가하였습니다. 신은 10석(石) 이하를 억지로 빼앗은 수령은 조사해 내어 책벌을 가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곡식을 바치고 상을 받는 것은 시골의 자호(自好)하는 자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고 관가(官家)에서 백성의 곡식을 탈취하는 것도 매우 명분이 없는 것이니, 의당 새로 정식(定式)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수령으로 하여금 기민(飢民)을 정밀하게 가려서 부유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몇 사람을 구제하여 살리면 아무 상(賞)을 주고 아무 역사(役事)를 면제해 준다고 한다면, 백성들에게는 실제적인 효험이 있게 되고 사람들은 원망하는 말이 없게 될 것이니, 어찌 강제로 곡물(穀物)을 빼앗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일전에 응교(應敎) 이종백(李宗白)이 좌죄(坐罪)되어 파직당할 적에 승선(承宣)168) 과 사관(史官)이 서로 쟁집(爭執)했는데, 어떤 이는 부첨(付籤)에 두어야 옳다고 하고 혹은 파직(罷職)에 두어야 옳다고 하므로, 끝내 구별하지 못하고서 덮어둔 채 거의 1개월이 지났으니, 정원(政院)의 당랑(堂郞)을 아울러 중추(重推)해야 할 것입니다. 임정(任珽)은 소장을 올려 이기헌(李箕獻)을 공척(攻斥)하면서 온갖 말로 모욕을 가했으며 이기헌은 소장을 올려 변해(辨解)하면서 한껏 추한 말로 비난을 가했으니, 이 두 사람은 의당 아울러 파직시켜야 합니다. 금천 현감(衿川縣監) 이장(李樟)은 흉역(凶逆) 민관효(閔寬孝)의 삼촌(三寸)으로 인품이 못나 숙맥(菽麥)도 분변하지 못하는 자이며, 포천 현감(抱川縣監) 이간(李侃)은 무식한 한량(閑良)으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자이므로 제목(除目)이 내려지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실소를 터뜨렸으니, 일체 개차(改差)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戒)한 내용은 절실한 것이었다. 조목별로 진달한 내용은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조금 구애되는 단서가 있다. 임정·이기헌·이장·이간의 일은 아울러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7월 7일 신묘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이 임정(任珽)의 상소로 인해 상소하여 대변(對辨)하기를,
"신 등이 관(館)에 머무를 때 통관(通官)이 와서 말하기를 ‘십이왕(十二王)이 동쪽에서 온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 하였는데, 역관(譯官)들이 말하기를, ‘이런 일은 전부터 자주 있어 왔던 것이니, 청컨대, 역졸(驛卒) 한 사람을 보내소서.’ 하였습니다. 그런데 보낸 사람이 조금 있다가 즉시 되돌아와서는 기필코 편발(編髮)한 모양을 한 사람을 보고 싶다고 한다기에 고군(雇軍)을 정하여 보냈는데, 얼마 안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벌거벗겨 목욕을 시키고 둘러서서 구경하는 거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신 등은 심히 놀랍고 괴이하게 여겨 역졸들을 엄히 신칙하여 다시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말이 이역 땅에서 나왔기 때문에 보태어 말하기가 쉽고 일행의 하인배들이 서로 돌려가면서 조롱해 웃으며 만리 밖에까지 입과 입을 거쳐 전파된 것인데, 그것을 짐작하여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쉽사리 말하였으니, 신은 그 의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어제 연석(筵席)에서 이미 하유(下諭)하였는데, 이제 경의 소장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실을 알았다."
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송인명(宋寅明)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의 도기(到記)169) 가 찬 유생(儒生)을 시험하게 하였다.
7월 8일 임진
생원(生員) 서해조(徐海朝)를 직부 전시(直赴殿試)170) 하도록 명하였는데, 반제(泮製)에서 으뜸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인 유정무(柳鼎茂)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니, 유정무의 책문(策文)에,
"반일(半日) 비바람에 소회를 다 진달하지 못했으니, 뒷날 경연(經筵)에서 다시 남은 회포를 진달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있었는데, 임금이 그의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어필(御筆)로 ‘좋은 기상을 드러내었다.[雖露好氣像]’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내리고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그뒤 며칠 지나서 서해조가 성균관에 정문(呈文)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저는 과장(科場)에 들어갔을 적에 백지(白紙)를 냈고 이복령(李復齡)이 시권(試券)을 냈는데, 제가 으뜸으로 출방(出榜)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착오가 나서 시권이 바뀐 소치이니, 무릅쓰고 과명(科名)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복령도 정문하여 말하기를,
"제가 서해조가 버린 글을 써서 바쳤는데, 시지(試紙)가 과연 착오로 뒤바뀐 것입니다."
하였다. 이런 사실을 성균관에서 예조에 보고하니, 예조에서 아뢰기를,
"과장(科場)은 사체가 지엄한 곳이니, 그대로 버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서해조에게 직부(直赴)하게 한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홍현보(洪鉉輔)를 대사간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지평으로, 이자(李滋)를 장령으로, 한현모(韓顯謨)를 교리로, 이종백(李宗白)을 부교리로, 황정(黃晸)을 부수찬으로, 이명상(李命祥)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삼았다.
7월 9일 계사
윤양래(尹陽來)를 경기 감사로, 송수형(宋秀衡)을 헌납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정언으로, 윤급(尹汲)을 지평으로 삼았다.
7월 10일 갑오
사책(史冊)의 변무(辨誣)에 대한 일로 태묘(太廟)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인하여 추향 대제(秋享大祭)를 겸하여 지냈다.
7월 11일 을미
평안도(平安道) 평양(平壤) 등 18개의 고을에 흑충(黑蟲)의 재해(災害)가 있었다.
지평 박필재(朴弼載)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명분(名分)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어제 태묘에 고유제를 지낸 것은 무슨 명분입니까? 선조(先朝)를 무멸(誣衊)한 데 대해 오래도록 중국의 사책(史冊)에서 간정(刊正)하지 않았는데 절사(節使)가 돌아올 적에 비로소 고쳐진 사책을 가지고 왔으니, 한 번 저들에게 보사(報謝)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응당 주자(朱子)가 이른바 통분을 참고 억울함을 머금은 채 부득이한 형세에 핍박된 뜻을 지녀야 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예절(禮節)도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반강(頒降)했을 때에 견줄 수는 없는 것이니, 경건하게 고유제를 지낸 일은 끝내 과장된 데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국상(國祥)에 달려오지 않은 여러 신하들에 대해 내린 책유(責諭)가 엄절(嚴切)하였는데, 근래 듣건대, 경연(經筵)에서의 하교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서명(胥命)171) 여부에 대해 하문하시고 서명하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고 하셨다 하니, 이는 아마도 전하께서 국상에 달려오지 않은 것을 죽을 죄라고 여겨 율문(律文)을 조사하게 한 것이 아닌지요? 특별히 이로 인해 그들이 입성(入城)하여 서명하기를 기다려 구금해서 옥에 가두려는 방도로 삼으려 하니, 왕자(王者)의 기강이 이를 연유하여 더욱 비하(卑下)되고, 임금의 위엄이 이로 말미암아 떨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 대선(臺選)이 더욱 경솔해져서 풍헌(風憲)을 관장하는 사람을 더욱 신중히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자(李滋)처럼 용렬하고 어리석어 오랫동안 지색(枳塞)당했던 사람은 개정(改正)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유(事由)를 진달하는 일은 그 가운데 소중한 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의 말대로라면 보사(報謝)와 중진(重陳)이 경솔한 처사란 말인가? 이것이 서생(書生)의 오활한 말인 것이다. 이자의 일도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였다.
7월 12일 병신
간원(諫院)에서 【정언 이덕재(李德載)이다.】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유신(李裕身)은 전후 대관(臺官)으로 있으면서 하직(下直)하는 수령에게 친소(親疎)를 막론하고 번번이 걸태(乞駄)172) 를 청하였습니다. 지난번 해서(海西) 지방의 긴요한 고을에 수령 자리가 나자, 온갖 계책을 다해 점유하기를 도모하였다가 끝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감히 원한을 갚을 계책을 품었습니다. 그리하여 대각(臺閣)에 들어가던 날 정관(政官)을 있는 힘을 다하여 침척(侵斥)하였으니, 이렇게 사심(私心)을 품고 원한을 갚는 데에서 그가 비루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이봉명(李鳳鳴)을 논한 일은 더더욱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봉명은 아직 수령을 거치지 않았으니 고을을 다스리는 데 대한 선부(善否)는 본시 미리 알기 어려운 것인데도 급급하게 서둘러 논핵(論劾)한 것은 또 무슨 뜻이었는지요? 대개 이봉명은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벨 것을 청했기 때문에 일종(一種)의 김일경의 당여(黨與)들이 마치 피맺힌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호남(湖南)의 좌막(佐幕)으로 나가서는 처음 정사효(鄭思孝)에게 무함당한 것을 시작으로 그뒤 직책에 제수될 적마다 이 무리들에게 박축(迫逐)당하여 왔습니다. 이유신도 그들의 여론(餘論)을 이어받았으니, 그가 흉역(凶逆)을 잊지 못해 하면서 은밀히 보복하려 한 정상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초계 군수(草溪郡守) 허수(許樹)는 일찍이 포천(抱川)에 부임하였을 적에 외람되이 재결(災結)을 사사로이 썼고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들였습니다. 공산 현감(公山縣監) 김기석(金箕錫)은 지난번 함흥(咸興)에 제수되었을 적에 문란한 행정이 많았던 탓으로 도신(道臣)과 어사(御史)가 상의하여 장계(狀啓)를 올려 파직시켰습니다. 그러데 지금 현직에 제수되어서는 정사를 하리(下吏)들에게 맡겨 폐해가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시희(李時熙)는 흉년에 진장(賑場)을 설치하였으되 백성을 구제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3,40필의 제주산(濟州産) 양마(良馬)를 사다가 길러 비싼 값으로 팔았으며, 은밀히 경상(京商)에게 4,5백 관의 돈을 받아가지고서는 그 전액을 사사로이 써버렸습니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오명서(吳命瑞)는 평소 청렴한 명성이 모자란 사람인데, 외람되이 웅부(雄府)에 있으면서 매년의 연분(年分)을 강제로 풍년에 견주어 매기고는 상사(上司)에 보고할 적에는 숫자를 감하였으며, 거기서 남는 여결(餘結)을 사사로이 쓴 것이 많습니다. 상납(上納)하는 곡물(穀物)은 번번이 요리(料理)한다고 핑계하면서 일체 모두 돈으로 만들어 강제로 부호(富戶)에게 주고는 받아 내느라 매질이 낭자하였습니다. 흉년이 들면 권분(勸分)하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것인데, 빈부(貧富)를 막론하고 모두 다 초록(抄錄)하여 가지고는 엄혹(嚴酷)한 형벌을 가하기 때문에 원망의 소리가 들끓고 있습니다. 청컨대 허수·김기석은 파직시키고 이시희·오명서는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잡아오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이유신이 과연 윗 조항에서 논한 것과 같은 짓을 했다면, 이는 응당 사판에서 삭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봉명의 일에 대해서는 정사효가 역적 김일경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이유신이야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이제 와서 역적 김일경을 위하려 하겠는가? 이봉명을 위하여 이와 같이 반박하니, 이것을 곧 공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13일 정유
정언 송징계(宋徵啓)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정언 이덕재(李德載)가 이유신(李裕身)을 논척(論斥)하면서 이봉명(李鳳鳴)이 직임을 제수받을 적마다 번번이 이들 무리에게 박축당했다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봉명이 외람되이 기랑(騎郞)173) 에 주의(注擬)되었을 적에 신이 과연 논핵(論劾)한 적이 있는데, 이덕재가 말한 것은 신까지도 아울러 가리킨 것입니다. 이봉명이 감여술(堪輿術)을 대강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대부들과 교제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만, 문지(門地)가 미천하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역적 김일경을 베라고 청한 한 장의 소장(疏章)이 벼슬에 오르는 매계(媒階)가 되어 비의(備擬)가 지나치고 외람되어도 사람들이 감히 논척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덕재가 이에 흉역(凶逆)을 위해 보복하려 한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협박할 계책을 세우려 하고 있으니, 아! 이것이 무슨 말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이덕재가 이유신을 공격하는 것은 단지 이봉명만을 위해서 발한 것이 아닙니다. 이유신이 대각(臺閣)에 들어와 제일 먼저 말을 하지 않는 대신(臺臣)을 논박함으로써 장차 꺼리는 것이 없다는 풍채(風采)를 보이려 했던 것인데, 소매 속의 탄문(彈文)이 다 진달되기도 전에 연석(筵席)의 어전(御前)에서 파직을 논한 것은 그 본정(本情)을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번에 수재(守宰)에게 걸태(乞駄)했다는 것과 풍요로운 고을을 점유하려고 도모했다는 이야기들은 은밀히 죄에 얽어넣기 위해 전적으로 꾸며낸 말인 것입니다. 이덕재가 근거없이 떠도는 이야기에 대해 무슨 놀라 겁낼 일이 있기에 이렇게 죄에 밀어넣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것이 공론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대는 더욱 무슨 혐의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7월 14일 무술
이광세(李匡世)를 승지로 삼았다.
7월 15일 기해
임금이 경휘전(敬徽殿)에서 망제(望祭)를 거행하였다.
7월 16일 경자
김상신(金相紳)을 정언으로, 김상성(金尙星)을 교리로, 윤동형(尹東衡)을 부수찬으로, 박찬신(朴纘新)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정언 이덕재(李德載)가 송징계(宋徵啓)의 소척(疏斥)으로 인해 상소하여 대변(對辨)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경당(鏡黨)’이라는 두 글자는 이들의 기휘(忌諱)하는 바를 크게 건드린 말입니다. 지금 송징계가 이유신(李裕身)을 대신하여 담당하고 나서서 분노를 이와 같이 내뿜는 데는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박필우(朴弼禹)의 처남(妻娚)으로 심유현(沈維賢)과는 한솥에 밥을 먹어 온 지극한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역적 한유(韓游)와는 벼루를 함께 한 사우(死友)입니다. 따라서 무신년174) 초에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자 해서(海西) 고을로 나아가려고 도모하였던 것이니, 멀리 피하여 있으면서 자정(自靖)할 계책에 연유된 것입니다. 세월이 점차 오래되어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 다시는 무신년 이전의 송징계가 아니었으므로 의논하는 자들도 ‘저 사람이 흉역(凶逆)과 결련(結連)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외(內外) 종당(宗堂)들의 지도와 감화에 힘입어 마음을 고쳤으니, 일일이 따져가며 논함으로써 스스로 새롭게 할 길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논의는 또한 인후(仁厚)한 풍조에 해가 될 것이 없겠기에 신의 원계(原啓)에서는 그 성명(姓名)을 빼고 대략 미의(微意)만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에 크게 화를 내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면서 마치 기를 쓰고 이기려는 사람처럼 하고 있습니다. 무신년부터 지금까지는 불과 4,5년입니다. 천일(天日)이 위에 있고 귀신(鬼神)이 곁에 있는데, 그가 아무리 부리의 길이가 석 자나 된다 하더라도 ‘경당’이라는 두 글자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면대하여 걸태했다는 말을 신이 이미 하직한 수령에게서 직접 들었으며, 연줄을 통하여 읍재(邑宰)를 도모한 것도 신이 또 이유신의 수필(手筆)에서 목격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고 그 수필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지라, 이유신으로 하여금 대변(對辨)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다 숨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왕부(王府)로 하여금 이유신을 잡아다가 신문하게 한다면 송징계가 당여를 비호하고 임금을 기망한 것이 저절로 탄로날 것입니다. 그리고 소매 속의 탄문(彈文)이란 말에 이르러서는 이는 하나의 웃음거리도 못되는 것입니다. 이유신이 만일 논할 만한 것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대각(臺閣)에 있을 당시에 발론하지 않고 이제 체직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말하기를, ‘소매 속의 탄문을 오히려 진달하지 못하였다.’고 한단 말입니까? 그가 말한 근거없이 유전(流傳)된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펴보면, 마치 이유신이 장차 논할 것이 있는데도 근거없이 유전된 말을 경솔하게 이야기함으로써 경연(經筵)의 어전(御前)에서 논파(論罷)하게 만든 것처럼 하였고, 신이 또 계속해서 탄핵한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진달하지 못한 탄문은 과연 아무의 아무 일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채 이에 이와 같이 모호하게 말한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왕도(王導)175) 에게 왕돈(王敦) 같은 종형(從兄)이 있었고, 석착(石錯)176) 에게 석후(石厚) 같은 아들이 있었다. 더구나 남매사이나 벼루를 함께 한 사이야 말할 것이 무어 있겠느냐? 이런 등류의 풍습은 결단코 오늘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통쾌하게 여기겠지만 나는 실로 협애하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7월 17일 신축
임금이 거재 유생(居齋儒生)177) 의 식년(式年)과 증광(增廣) 과시(科試)를 설행할 때 허부(許赴)하는 원점(圓點)178) 의 숫자와 증광시에서의 원점이 무슨 연유로 정폐(停廢)되었는지를 하문(下問)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예조에 문의하여 아뢰기를,
"식년시의 원점은 만 3백 점이 된 뒤에야 허부하며, 관시(館試)에서는 50인을 뽑으며, 증광시의 원점은 과거(科擧) 날짜의 원근에 따라 40점으로 하기도 하고 20점으로 하기도 하고 15점을 하기도 하는데, 그때의 상황을 참작하여 품정(稟定)하는 것이 옛 규례(規例)입니다. 지난 신축년179) 대증광(大增廣)을 설행할 적에 영부사(領府事) 이경석(李景奭)의 의논에 따라 우선 정지했는데, 이는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을묘년180) 증광시 때에도 공궤(供饋)와 원점의 폐단 때문에 대신(大臣)의 변통하자는 헌의(獻議)에 따라 양소(兩所)에 합쳐서 설행하였고, 이어 원점을 정폐했었습니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유생들이 거재(居齋)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원점에 의거하여 과거를 설행하려고 이런 하문이 있었던 것이다.
7월 19일 계묘
빈대(賓對)를 거행하였다.
김담(金墰)을 정언으로, 조한위(趙漢緯)를 수찬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1일 을사
간원 【정언 김담(金墰)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다. 계사(啓辭) 내용에 이유신(李裕身)의 일에 대해 그 조어(措語)를 고쳐서 말하기를,
"면대하여 걸태(乞駄)한 것과 연줄을 통하여 읍재(邑宰)가 되기를 도모했다는 것은 발계(發啓)한 대신(臺臣)이 이미 직접 들은 것이니, 그가 시기하여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남을 동요시키려는 습관은 진실로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청컨대, 이유신을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하였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원성(原城)의 유학(幼學) 이주익(李周翊)은 나이 85세인데, 상소하여 열 가지 방책을 진헌(進獻)하였다. 그 내용은 재용(財用)을 절약할 것, 농상(農桑)을 권면할 것, 수령을 가릴 것, 부세(賦稅)를 감면할 것, 용관(冗官)을 줄일 것, 상록(常祿)을 감손할 것, 급히 진제(賑濟)의 실혜(實惠)가 있도록 추진할 것, 인족(隣族)을 마구 침학하는 것을 엄절하게 금지할 것, 금령(禁令)을 만들어 재물을 허비하는 길을 막을 것, 작상(爵賞)을 신중히 하여 모속(募粟)에 응하는 백성을 넓힐 것 등이었는데, 임금이 불러서 접견하고 비답을 내렸다. 그리고 응지(應旨)한 것을 가상히 여기고 또 나이 늙은 것을 안스럽게 여겨 부관(部官)을 제수하게 하였는데, 그가 이미 노직(老職)을 지냈다는 말을 듣고는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서전(西銓)181) 에 명하여 상당한 직책을 제수하게 하였다.
삼남(三南)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양전(良田)에다 남초(南草)182) 를 심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이주익(李周翊)의 상소로 인해 승지 이귀휴(李龜休)가 거듭 청했기 때문이다.
지평 박필재(朴弼載)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무신년183) 이후 ‘경당(鏡黨)’이란 두 글자가 드디어 사람을 막는 하나의 큰 자부(資斧)184) 가 되었습니다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맹랑하기 짝이 없는 일을 당한 것이 어찌 이유신(李裕身)·송징계(宋徵啓)와 같은 경우가 또 있겠습니까? 이유신은 적당(賊黨)이 막다른 고비에 처해 있을 적에 겨우 급제(及第)하였으며, 그의 아비 이준상(李寯相)이 과연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절친한 사이였다면 역적 김일경이 권세를 잡고 있을 적에 그의 문장(門墻)의 빈객(賓客)들이 차례로 기용되었는데, 어찌하여 유독 이준상만이 초라한 일명(一命)185) 이 비로소 지난 겨울에야 있었단 말입니까? 간원(諫院)의 계사(啓辭) 가운데 상단의 두 조항은 그가 들은 것이 사실을 변환(變幻)시킨 것이 많았으니, 아마도 풍전(風傳)이 잘못된 데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송징계의 일에 이르러서는 머리에서 꼬리까지 나열한 것이 기필코 헤아릴 수 없는 죄과에 밀어넣으려는 것인데, 그 근거는 인친(姻親)과 붕우간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송징계는 심유현(沈維賢)과 과연 한솥에 밥을 먹은 정의가 있습니다만, 처음 심유현이 마구 날뛰면서 비류(非類)들과 교결(交結)할 적에 송징계가 면대하여 맹렬히 꾸짖고서는 드디어 소원한 사이가 되었으니, 심유현의 반역이 송징계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박필우(朴弼禹)의 경우 바로 양가(楊家)의 육당(陸棠)인 것인데, 또한 송징계에게 무슨 누(累)가 미칠 것이 있겠습니까? 그 이른바 ‘역적 한유(韓游)와는 벼루를 함께 한 사우(死友)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송징계가 역적 한유와 한 마을에 살아서 대략 안면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과업(課業)의 길이 달랐고, 추향(趨向)에 있어서도 그 방향이 달랐으니, 이는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억지로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어쩌면 이처럼 극도에 이른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 그대의 상소를 살펴보니, 분병하다고 할 만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친(姻親)이라고 하고 근족(近族)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병통인데, 그대는 어떻게 그리도 거침없이 말하느냐?"
하였다.
심공(沈珙)을 부제학으로, 황정(黃晸)을 교리로, 조명택(趙明澤)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7월 23일 정미
교리 황정(黃晸)이 이주익(李周翊)의 일로 인해 상소하기를,
"전고의 사첩(史牒)을 두루 고찰하여 보건대, 세상에 필요했던 사람들이 초택(草澤)에 묻혀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우(唐虞) 때 사람을 뽑는 방법에도 또한 ‘그의 말을 진달하여 올리게 한 다음 능력을 시험한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중외(中外)의 선비들로 하여금 백성의 고통과 정사의 잘못을 극진히 말하게 하되 거리가 멀어서 올 수 없는 사람은 봉사(封事)로 만들어 현관(縣官)에 바치게 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게 한다면, 임하(林下)에 묻혀 있는 말이 거의 모두 어전(御前)에 진달될 것입니다. 이것을 가려서 쓰신다면 실로 군재(群才)를 총괄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7월 25일 기유
정언 김담(金墰)이 상소하여 스스로 이유신을 사판에서 삭거하라는 계사(啓辭) 가운데 아랫 조항을 빼버린 잘못에 대해 진달하고, 또 송징계(宋徵啓)·조한위(趙漢緯)·박필재(朴弼載)가 이덕재(李德載)를 논척(論斥)한 것은 당습(黨習)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논하면서 아뢰기를,
"과연 박필재의 말과 같다면 역적 김일경이 역적이 됨을 아는 사람이 이처럼 많은데도, 신축년186) 에서 갑진년187) 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한 사람도 성토하여 죄주라고 한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리고 ‘말운(末運)’이라는 두글자는 혼동해서 써서는 안되는 것인데, 역적 김일경의 말운이라고 말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무엄하기 짝이 없단 말입니까?"
하고, 또 부제학 심공(沈珙)이 이름을 지목하여 천거해서 대임(代任)하게 한 잘못에 대해 논하였다. 심공이 일찍이 사소(辭疏)에서 서명빈(徐命彬)·이종성(李宗城)이 부제학에 가합하다고 논했기 때문이었다. 비답하기를,
"이유신에 대한 계사(啓辭)를 정지하지 않는 것은 자못 지나친 데에 관계된다. 박필재·조한위를 무엄하다고 한다면 지금 그대가 이덕재를 위하여 편들고 나서는 것 또한 무엄한 것이 아니겠느냐? 진실로 괴이하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봉명(李鳳鳴)의 일은 당연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징계와 면려를 엄하게 해야 하겠지만, 그 강개한 마음과 갱운(賡韻)188) 한 일은 내가 또한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비록 이를 참작한다 하더라도 징계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다시는 청망(淸望)에 천거하여 주의(注擬)하지 말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봉명은 한 미관(微官)에 불가한 사람이다. 그가 있고 없는 것이 조정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어떤 사람은 부추기고 어떤 사람은 억제하면서 시상(時象)의 기괄(機括)로 삼고 있는가? 이덕재는 이봉명을 부장(扶奬)하면서 치우치게 이유신을 억눌렀고, 김담은 이덕재를 편들고 나섰으니,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이냐? 송징계가 앞서 이봉명을 논박한 것은 이미 칙려(飭勵)하는 뜻이 아니었으며, 박필재가 이유신을 신구(伸救)한 것 또한 지리한 데 관계가 된다. 위에 있는 사람이 날마다 칙려를 일삼고 있는데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옛 습관을 답습하고 있으니,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덕재·김담은 아울러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 것이며, 송징계·박필재도 아울러 파직하라."
하였다.
7월 26일 경술
우참찬(右參贊) 김간(金榦)이 졸(卒)하였다. 김간의 자(字)는 직경(直卿)인데,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에게 수학(受學)하였다. 널리 연구하고 힘써 실천하였는데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견해가 정밀하고 깊었고 조수(操守)가 돈독하였다. 국가의 예우(禮遇)를 입어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광주(廣州)에 거처하면서 스스로 후재(厚齋)라 호(號)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이 87세로 졸하였다. 부음(訃音)을 듣자 임금이 애도하는 하교를 내렸고, 구재(柩材)와 상장(喪葬)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하였다.
7월 27일 신해
조명익(趙明翼)을 승지로, 장붕익(張鵬翼)을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예조 참판으로, 이춘제(李春躋)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조진세(趙鎭世)를 정언으로, 민계(閔堦)를 지평으로, 한현모(韓顯謨)를 수찬으로 삼았다.
7월 28일 임자
사은 정사(謝恩正使) 이의현(李宜顯), 부사(副使) 조최수(趙最壽), 서장관(書狀官) 한덕후(韓德厚)가 장차 출발하기 위해 사폐(辭陛)189) 하니, 임금이 잠상(潛商)의 폐단을 엄금하도록 명하였다.
7월 29일 계축
하교하기를,
"김담(金墰)의 소장에서 거론한 물의(物議)라는 말은 매우 무엄한 것이다. 파직만 하고 그만둘 수 없으니,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시키라."
하였다.
7월 29일 계축
처음 임금이 외방에 있는 여러 신하들 가운데 국상(國祥)에 달려오지 않은 사람에 대해 금오(金吾)로 하여금 한(漢)·당(唐)의 율문(律文)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고, 또 와서 서명(胥命)하지 않는다 하여 잇따라 엄한 하교를 내렸다. 그 뒤 여러 신하들이 와서 성(城) 밖에 도착하였는데, 또 엄한 하교를 내리기를,
"이것이 서명인가, 아니면 성 밖에 거주하려는 것인가? 만일 서명하려 한다면 마땅히 곧바로 금오(金吾)로 와야 하는데,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고의로 전일에 하교하여 여러 신하들을 오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종환(從宦)하게 하려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내가 어찌 이렇게 몰아세우는 거조를 하겠는가?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어찌 벼슬하려 하겠는가? 반드시 종사(從仕)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성 밖에서 서명한 사람으로 중신(重臣)은 이병상(李秉常)·권업(權𢢜) 등이었고 재신(宰臣)은 이재(李縡)·김유경(金有慶) 등이었으며, 당상(堂上)은 권적(權樀) 등이었고 당하(堂下)는 황재(黃梓) 등이었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상방(尙方)의 일 때문에 상방 별제(尙方別提) 이세구(李世矩)를 구임(久任)시킬 것을 청한 적이 있었는데, 전조(銓曹)에서 성명(成命)을 무시하고 임의로 외임(外任)에 천전(遷轉)시켰습니다. 신이 이에 소장을 올려 잉임(仍任)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대신(臺臣)이 추고하기를 청하는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어제 들은 바에 의하면 전조의 장관이 상방의 아전을 불러 책하면서 이세구(李世矩)로 하여금 정장(呈狀)하고 입계(入啓)하라고 핍박했는데, 초기(草記)190) 속에 이른바 ‘제조(提調)가 이미 대언(臺言)을 만나면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고 한 등등의 말은 본래 이세구가 어제 올린 장사(狀辭)의 내용에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고, 이어 전조의 장관을 매우 강력하게 공척(攻斥)하니, 비답하기를,
"해조(該曹)에서 핍박하여 체직(遞職)시킨 것은 정당한 데에 어긋나는 처사이기는 하다. 그러나 경(卿)의 소장 속의 말도 사기(辭氣)가 지나치게 노출되었으니, 이는 경의 병통이다."
하고, 이어 전조의 장관과 박문수를 아울러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부사직(副司直) 박사수(朴師洙)가 진소(陳疏)하여 대마도(對馬島) 왜인(倭人)이 기근에 시달리고 또 화재(火災)를 만난 상황을 진달하고, 현묘조(顯廟朝) 경자년191) 에 저들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특명(特命)으로 쌀을 지급하게 했던 전례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인하여 영영(嶺營)과 내부(萊府)에서 공작미(公作米)를 요판(料販)하여 이익을 늘리는 폐단에 대해 진달하기를,
"지금처럼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야 될 시기에 만일 전처럼 요리(料理)하면서 제 기한에 맞추어 수송하지 않는다면, 왜인들의 사세가 바야흐로 군색한 상황이어서 그들의 원망이 반드시 깊게 될 것이니, 의당 도신(道臣)에게 각별히 신칙하여 제때에 수송시키게 하소서."
하고, 또 삼(蔘)과 동(銅)의 사의(事宜)에 대해 논하니, 비답하기를,
"윗 조항에 관한 일은 속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즉시 전례를 상고하여 우선적으로 구처(區處)하게 하고,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즉시 대마도로 보내게 하라. 기타 다른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곧이어 묘당의 복주(覆奏)로 인하여 공작미를 왜관(倭館)에 지급하지 않고 유치시켜 요판함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자는 장률(贓律)로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지평 민계(閔堦)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지난 가을 한사선(韓師善)에게 허구 날조된 무함을 참혹하게 받았는데, 그 무욕(誣辱)이 신의 아비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신의 아버지가 전에 정산(定山)에 부임해 있을 적에 변란(變亂)을 당했는데 그때 신이 신의 아비에게 도망하여 피하라고 권했다고 했습니다만, 이에는 한 마디로 간파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 흉역의 관문(關文)이 처음 정산에 도착했을 적에 신의 아비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즉시 관문을 가지고 온 자를 감옥에 잡아 가두고 영문(營門)에 급히 보고하는 한편, 즉시 성화같이 군대를 점열(點閱)하여 몸소 거느리고 가서 영장(營將)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때의 문서 보고가 모두 호영(湖營)에서 보고한 가운데 들어 있고 흉적의 관문도 계문(啓聞)에 들어 있어 모두 증험할 수 있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의 소장을 살펴보고서 본건의 일에 대해 알았다. 그대는 지나치게 혐의할 것이 무어 있겠느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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