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을묘
임금이 경휘전(敬徽殿)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8월 2일 병진
예조에서 경휘전 담제(禫祭)의 의주(儀註)를 진헌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신료(臣僚)들의 기제(期制)가 이미 끝났는데도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과 배제(陪祭)하는 백관(百官)들이 모두 천담복(淺淡服)을 입는 것은 상복(上服)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의주를 살펴보건대, 출궁(出宮)할 때 성상께서는 아직도 참포(驂袍)를 입게 되어 있는데, 시종(侍從)과 배제하는 백관들은 먼저 흑단령(黑團領)을 입게 되어 있으니, 이는 상복을 따르는 의의가 아닌 것입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품정(稟定)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예조 판서 송성명(宋成明)이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 담제의(禫祭儀)의 소주(小註)에 이르기를, ‘내상(內喪)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고 되어 있으며,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담사 절목(禫祀節目)에는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참포(驂袍)를 입고 백관은 길복(吉服)을 입는데, 이른바 길복이라는 것은 오사모(烏紗帽)·흑단령(黑團領)·오각대(烏角帶)를 말한다.’고 되어 있으며, 병인년192) ·경오년193) 의 담사 때 복색(服色)도 그러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기제(期制)가 끝난 뒤에 현재의 천담복을 올린 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인가? 이것이 곧 청성(淸城)194) 이 처음 만든 것인가?"
하였다. 송성명이 아뢰기를,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국휼(國恤) 때 청성이 이 예법(禮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담제복(禫祭服)은 또한 흑포(黑袍)를 썼습니다. 아마도 내상(內喪)의 담사에는 조신(朝臣)이 복색을 바꾸는 예법이 없기 때문에 먼저 흑포를 입게 한 것은 복색을 바꾸는 혐의를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반드시 복색을 바꾸는 것을 혐의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입었을 것이다. 지금도 또한 의주(儀註)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금 있다가 병조의 절목(節目)으로 인하여 시위(侍衞)하는 장사(將士)들이 모두 천담복을 입었기 때문에 임금이 병판(兵判) 김취로(金取魯)를 불러 하문하였다. 김취로가 대답하기를,
"엊그제의 삭제(朔祭)에 이미 천담복을 입었는지라 이제 와서 먼저 흑포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경자년195) 국휼의 담사(禫祀) 때에도 또한 천담복을 입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근시(近侍)와 시위하는 여러 신하들은 천담복으로 고쳐 입도록 명하였다.
예조 판서 송성명(宋成明)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가 곧이어 추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는 예조의 의주(儀註)에 담사를 파하고 환궁(還宮)할 때 백관들의 복색을 홍포(紅袍)로 의정(議定)했는데, 김재로(金在魯)가 ‘무릇 동가(動駕)할 때 여러 신하들은 으레 흑포를 입는 것인데 어떻게 홍포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드디어 송성명을 추고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하교하기를,
"백관은 시신(侍臣)과 달라서 배종(陪從)하는 사례가 없고 문안(問安)에만 참여할 뿐이다. 의주(儀註) 가운데 홍단령(紅團領)은 곧 《오례의(五禮儀)》를 모방하여 마련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전에 명한 것을 정지시켰다.
8월 3일 정사
임금이 경휘전(敬徽殿) 담제(禫祭)의 의주(儀註)를 거행하였다. 임금이 담복(淡服)을 갖추어 입고 들어가 판위(板位)에 나아가서 부복(俯伏)하여 곡(哭)하고 사배(四拜)한 다음 소차(小次)로 들어가서 다시 현포(玄袍)로 갈아 입고 들어가 위차(位次)에 나아가니, 찬례(贊禮)가 임금을 인도하여 초헌례(初獻禮)를 거행하고 나서 다시 내려와 위차로 돌아왔다. 다음 헌관(獻官)이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를 거행하니, 임금이 곡하고 사배하였다. 예를 마치고 임금이 재실(齋室)로 들어가 용포(龍袍)를 입고 환궁(還宮)하기를 의주와 같이 하였다.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번 하나의 하찮은 일로 인해 재신(宰臣)에게 심한 공척(攻斥)을 당했습니다. 대개 이세구(李世矩)를 기읍(畿邑)에 제배(除拜)했을 적에 그 고을의 조잔(凋殘)함을 싫어하여 가는 곳마다 비난하고 공갈하였는데, 제조(提調)가 상소하여 잉임(仍任)시키기를 청하자 여러 사람들이 마구 떠들어댔고 대계(臺啓)가 과연 발론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낭청(郞廳)이 되어 자신의 일 때문에 제거(提擧)196) 가 대간(臺諫)의 평을 받기에 이르렀는데도, 한 차례 정장(呈狀)하고서는 의기 양양하게 행공(行公)하고 있어 그 처의(處義)가 놀란 만하였기 때문에 신이 과연 그의 사장(辭狀)을 미루어 초기(草記)를 올려 체직시킬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구의 처음 사장에서 제조가 추고받은 것을 가지고 인혐(引嫌)했기 때문에 신의 초기에서 그의 전후 사장에 의거하여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신(宰臣)이 이것을 고집하면서 허물을 삼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뜻밖이었습니다."
하고, 이어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깊이 혐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송성명(宋成明)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담제(禫祭)의 의주(儀註)에 백관이 흑단령(黑團領)을 입는 것과 문안(問安)할 때에 홍포(紅袍)를 입는 것은 곧 선조(先朝) 때 이미 행한 규례입니다. 신료(臣僚)들의 복색이 상복(上服)과 다른 것은 《오례의(五禮儀)》 소주(小註)에 ‘내상(內喪)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고 한 글로 인해 참작하여 정한 것인데, 또한 순길(純吉)의 복색으로 하지 않는 것은 강쇄(降殺)한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문안할 때에 이르러서는 곧 전하께서 길복을 입으신 뒤이므로 백관들이 시복(時服)을 입어도 조금도 방해될 것이 없겠기에 본조(本曹)에서 의심없이 준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근시(近侍)의 복색은 출궁(出宮)할 때 잠시 천담복을 입게 하자는 뜻으로 정원(政院)에 〈서면으로〉 왕복한 것이였은즉 승지들이 흑단령을 착용한 것에 대해서는 신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정한 것은 예(禮)에 당연한 것이다."
하였다.
부수찬 조명택(趙明澤)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송징계(宋徵啓)가 이유신(李裕身)의 일에 대해 논하면서 말한 가운데, ‘제일 먼저 말하지 않는 대신(臺臣)을 논박하여 장차 꺼리는 것이 없는 풍채(風采)를 보이려 했는데, 소매 속의 탄문(彈文)을 미처 다 아뢰기도 전에 경연(經筵)의 어전(御前)에서 거론하여 파직시킨 것은 본정(本情)을 헤아리지 못한 처사입니다.’ 했는데, 이는 신이 소대(召對)할 때 논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신이 과연 당연히 논해야 하는데도 논하지 않은 잘못을 이유로 전계(傳啓)한 대신(臺臣)의 파직을 청한 것은 규경(規警)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유신이 이재후(李載厚)를 논박한 것은 장차 풍채를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신이 이유신을 논한 것은 그 본정(本情)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고 이르니, 이것도 공심(公心)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본관(本館)의 권록(圈錄)이 이제 1년이 지났는데 도당(都堂)의 합좌(合坐)가 지금까지 미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명(聖明)께서 항상 학문에 힘쓰시는 공력이 이 때문에 간단(間斷)되고 있으니, 의당 즉시 완록(完錄)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장 말미의 일은 마땅히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8월 4일 무오
정언 김상신(金相紳)이 상소하여 이도원(李度遠) 등을 부첨(付籤)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고, 또 지난번 율문(律文)을 조사하게 하라는 하교는 실로 과중한 것이었다고 말하니, 비답하기를,
"전후의 경연(經筵)에서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8월 5일 기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하였다. 좌참찬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기전(畿甸)이 이미 적지(赤地)가 되어 유민(流民)들이 흩어져 서북(西北)으로 들어갔으니, 그곳에 도착한 뒤 누가 그들을 구활(救活)하려 하겠습니까? 가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죽지 않으면 반드시 떼를 지어 도적이 될 것입니다. 서북의 감사(監司)에게 신칙(申飭)하여 편의에 따라 접제(接濟)시키게 하고, 내년 보리 농사를 지을 때에는 도로에서 먹을 양식을 지급하고는 이문(移文)하여 도로 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선기 옥형(璿璣玉衡)197) 이 완성되었다. 제술관(製述官) 조명익(趙明翼)에게 명하여 명(銘)을 짓게 하고 감역관(監役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게 하였다.
서종급(徐宗伋)을 대사헌으로, 민정(閔珽)·박준(朴㻐)을 장령으로, 유최기(兪最基)·심명열(沈命說)을 지평으로, 심성희(沈聖希)를 부수찬으로, 이진망(李眞望)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8월 6일 경신
임금이 장차 명릉(明陵)을 배알(拜謁)하려 하였다. 하교하기를,
"길을 범해가며 곡식을 심는 것은 이 또한 기강(紀綱)에 관계된 소치인 것이다. 무지한 백성이 비록 기강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곡식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런 해에는 곡식 알 하나하나가 신고(辛苦)의 결정(結晶)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길을 닦을 즈음에 겨우 가교(駕轎)만 통하게 할 것이며, 여러 가지 일들은 힘써 절약하는 쪽으로 따르게 하여 백성들의 힘을 편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7일 신유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특지(特旨)로 교리 김상성(金尙星)을 외방으로 내쳐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삼고, 부교리 이종백(李宗白)을 내쳐 강진 현감(康津縣監)을 삼게 하였는데, 누차 소명(召命)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이종백은 늙은 부모가 있다 하여 곧이어 연천 현감(漣川縣監)으로 옮겨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부터 간택(揀擇) 때 혼인을 허락하는 다섯 조항 이외에 단자(單子)를 받아들이지 말게 한 것이 또 네 조항이 있습니다. 【가장(家長)이 상중(喪中)에 있는 경우, 형체(形體)에 질병이 있는 경우, 출계자(出繼者)로서 이미 입안(立案)을 낸 경우, 그리고 외방(外方) 향품(鄕品)의 부류들이다.】 기미년198) 간택 때 아비는 있는데 어미가 없는 사람과 후취(後娶) 소생은 성상의 하교로 인하여 단자를 받아들였으니, 지금도 이 전례를 준행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이때 화순 옹주(和順翁主)의 가례(嘉禮)를 행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유(李瑜)를 이조 참의로, 정우량(鄭羽良)을 대사간으로, 윤혜교(尹惠敎)를 형조 참판으로, 김상옥(金相玉)을 예조 참판으로, 김동필(金東弼)을 좌참찬으로, 유척기(兪拓基)를 도승지로, 조명신(趙命臣)·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삼았다.
8월 8일 임술
예조의 의주(儀註)에 경휘전(敬徽殿)에 고제(告祭)할 때 《오례의(五禮儀)》에 의거하여 잔(盞)을 쓰게 하였는데, 임금이 대상(大祥) 뒤 삭망(朔望)의 제례(祭例)에 의거하여 작(爵)을 쓰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유척기(兪拓基)를 파직시켰는데, 버티면서 출사(出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석명(趙錫命)을 도승지로 삼았다.
8월 9일 계해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부묘(祔廟)가 내일이기 때문에 장차 고제(告祭)를 행하게 되어 임금은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입고 백관들은 금관(金冠)에 조복(朝服)을 입었다. 제사를 지낼 때 임금은 면류관(冕旒冠)에 흑곤포(黑袞袍)를 입었고, 승지·사관(史官)은 제복(祭服)을 입었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 신주(神主)를 받들어 연(輦)에 모시고 종묘(宗廟)로 나아갔는데, 임금도 그 뒤를 따라서 재실(齋室)로 들어갔다. 종묘 제조(宗廟提調) 김재로(金在魯)와 예조 판서 송성명(宋成明)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제10실(第十室)의 왕후(王后) 신위(神位)를 덮은 청저(靑紵)와 남주(藍紬) 두 가지 박(帕)이 겹쳐서 설치되어 있으니, 그 하나는 제거하게 하소서. 【남주(藍紬)로 싸맨 박(帕)을 제거하였다.】 제11실과 12실의 신위(神位)의 독대(櫝臺)의 자욕(紫褥)은 안쪽을 흰색으로 받쳤기 때문에 각실(各室)의 홍색(紅色)과 다른 점이 있으니, 개조(改造)토록 하소서. 12실의 독대욕(櫝臺褥)의 상하에 모두 석(席)이 있는데, 각실(各室)에는 단지 상석(上席)과 하욕(下褥) 두 건(件)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만 유독 세 건이 있으니, 하나는 철거하게 하소서. 영녕전(永寧殿) 각실의 독대의 홍색욕(紅色褥)은 태묘(太廟) 각실과 법제가 다르니, 의당 개조해야 됩니다." 【뒷날 자색(紫色)으로 고쳤다.】 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4책 32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315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의생활(衣生活)
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8월 10일 갑자
임금이 부제(祔祭)를 행하였다. 환궁(還宮)할 때 고취(鼓吹)하는 절차는 진설만 해 놓고 연주하지 않았다. 남은 슬픔이 다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사유문(赦宥文)에 이르기를,
"상제(喪制)를 겨우 마치니 개연(慨然)해 하고 확연(廓然)해 하던 때도 문득 지나가고, 부례(祔禮)를 이루고 나니 이에 널리 고하는 교지(敎旨)를 반포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은 슬픔이 가시지 않았으니, 무슨 마음으로 경하(慶賀)를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삼가 생각하건대, 경순 효인 혜목 선의 왕후(敬純孝仁惠穆宣懿王后)께서는 선조(先朝)의 치신(治臣)이었고 일국(一國)의 성모(聖母)이셨다. 만물을 감싸주는 은덕이 후하시니 자은(慈恩)이 군생(群生)에게 흡족하였고, 계체(繼體)의 의리가 높으니 영양(榮養)을 장락(長樂)199) 에서 극진히 하였다. 아! 오야(梧野)200) 에서의 남은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영혼은 갑자기 운향(雲鄕)에 노님을 재촉하고, 동관(彤管)201) 이 아름다운 덕을 전하니 온 나라의 백성들이 다 함께 울부짖으며 통곡하는구나. 보렴(寶奩)202) 이 슬픔을 자아내니 효심(孝心)에 스스로 상사(喪事)를 극진히 다할 것을 생각하였다. 문득 여막(廬幕)에서의 상제(喪制)가 끝난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으므로 드디어 노묘(魯廟)203) 에 일이 있게 되어 우뚝하게 하늘과 짝하게 되었다. 이에 임자년204) 8월 초10일에 태묘(太廟)에 부향(祔享)하게 되었다. 이제 대례(大禮)를 이미 완료함에 이르러 내가 추모하는 마음이 어찌 이리도 깊고 간절하단 말인가? 신여(神轝)를 청도(淸道)로 인도하니 황연(怳然)히 주량(舟梁)205) 의 의식(儀式)을 보는 듯하고, 한 감실(龕室)에서 보좌(黼座)를 나란히 하시니 함께 난간에 의지하여 꽃을 감상하시던 모습이 완연하다. 의문(儀文)은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입게 되었으나 곤면(袞冕)을 입으니 미안스럽고,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이 임어하신 것만 같아 타는 향불을 보니 복받치는 슬픔만 더하나, 신하들이 다시 경하하며 위로하는 것은 예(禮)에 있어 당연하다. 평소 살리기를 좋아하신 인덕을 추모한다면, 어찌 모든 것을 사유(赦宥)하는 은전(恩典)이 없을 수 있으랴? 3년 동안 함께 슬퍼하던 뒤인지라 이에 같이 기뻐하는 심정에 답하겠노라. 아! 빠른 세월이 어느덧 여러 번 바뀌니, 길흉(吉凶)도 순하게 변하고, 엄숙한 저 종황(琮璜)206) 소리가 질서가 정연하니 희비(喜悲)가 가슴속에 교차되는도다. 이에 옛날을 슬퍼하는 마음으로 힘써 유신(維新)의 교화를 도모하라."
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송인명(宋寅明)이 지어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24책 32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31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註 199] 장락(長樂) : 대비(大妃)의 거처.[註 200] 오야(梧野) : 창오산(蒼梧山) 아래 들판이라는 말로 순(舜)임금이 붕어(崩御)한 곳인데, 여기서는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빈소(殯所)를 가리킴.[註 201] 동관(彤管) : 붉은 빛의 대붓. 옛날에는 여사(女史)가 적필(赤筆)을 가지고 궁중의 정령(政令)이나 왕비의 언행 등을 기록하였음.[註 202] 보렴(寶奩) : 경대(鏡臺).[註 203] 노묘(魯廟) : 부묘(祔廟)하는 것을 말함.[註 204] 임자년 : 1732 영조 8년.[註 205] 주량(舟梁) : 천자(天子)가 황후(皇后)를 맞이할 때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만드는 의식(儀式)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신주(神主)를 경종(景宗)에게 부묘(祔廟)시키는 것을 살았을 때 친영(親迎)하는 것에 견주어서 한 말임.[註 206] 종황(琮璜) : 옥홀(玉笏)과 패옥(佩玉).
신택하(申宅夏)를 정언으로, 이춘제(李春躋)를 좌윤(左尹)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8월 11일 을축
예조에서 아뢰기를,
"부묘(祔廟)한 뒤에는 으레 경과(慶科)가 있는 법이니, 마땅히 삼백 별시(三百別試)를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뒤에 흉년 때문에 다시 정시(庭試)를 설행하였다.
능성 부수(綾城副守) 이삼(李森)이 소장(疏章)을 갖추어 숙묘(肅廟)의 어필(御筆)을 바쳤는데, 일찍이 금령(禁令)이 있었기 때문에 정원(政院)에서 논계(論啓)한 다음 봉입(捧入)하였다. 임금이 신한(宸翰)207) 은 봉류(奉留)하게 하고 포상(褒賞)은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8월 12일 병인
부제(祔祭) 때의 헌관(獻官)·집사(執事)와 도감(都監)의 당랑(堂郞)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아헌관(亞獻官) 조문명(趙文命)과 종헌관(終獻官) 서명균(徐命均)에게는 숙마(熟馬)를 하사하였고, 도승지 조석명(趙錫命)과 예방 승지 조명익(趙明翼)에게는 가자(加資)하였고,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조문명(趙文命)에게는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고, 제조(提調) 김동필(金東弼)·김취로(金取魯)·송인명(宋寅明)·신방(申昉)과 도청(都廳) 윤동형(尹東衡)·엄경하(嚴慶遐)에게는 가자하였다. 낭청(郞廳)은 승서(陞敍)하게 하여 말을 하사하기도 하고 활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감조관(監造官)과 별공작(別工作)은 아울러 6품으로 천전(遷轉)시켰다.
8월 13일 정묘
좌의정 조문명(趙文命), 호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성(城) 밖에서 서명(胥命)하고 있던 여러 신하들이 또 엄한 하교로 인하여 성으로 들어와 금오(金吾)에서 서명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의당 속히 처분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은거(隱居)해 있는 고상(高尙)한 선비는 진실로 세 번 부르는 예(禮)를 기다리는 것이 있지만, 녹봉을 먹는 신하가 어찌 세 번 부르기를 기다려서 서명하는 일이 있단 말인가? 이병상(李秉常) 같은 자는 시의(時議)가 종주(宗主)로 여기고 있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대불경(大不敬)’이라는 세 글자는 전하께서 실언하신 것입니다. 조조(鼂錯)208) 의 일을 가지고 전하께서 증거로 삼으셨는데, 참으로 경제(景帝)를 본받아야 한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본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한법(漢法)이 엄하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이재(李縡)·김진상(金鎭商)에 대해서는 구별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만, 이 두 신하도 모두 대명(待命)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재는 학문과 식견에 있어서 실로 인망(人望)을 받고 있는 사람인데, 숙묘조(肅廟朝) 때에도 송규렴(宋奎濂)·윤진(尹搢)·박세당(朴世堂) 등을 권장 발탁하여 혹 숭품(崇品)에 이르게 하기도 하였으니, 지금도 이런 전례를 이들에게 적용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재와 김진상을 높이 기용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들을 대우하는 것이다."
하였다.
8월 14일 무진
홍상빈(洪尙賓)을 승지로, 조적명(趙迪命)을 부교리로, 조명택(趙明澤)을 교리로 삼았다.
8월 16일 경오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 경릉(敬陵)·익릉(翼陵)을 두루 배알(拜謁)하였다. 그리고 대신(大臣)을 창릉(昌陵)·경릉(敬陵)·익릉(翼陵)에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순회묘(順懷墓)에는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주정소(晝停所)209) 에 이르러 경기 감사 윤양래(尹陽來)와 차원(差員)·수령(守令)을 인견하였다. 장차 남관왕묘(南關王廟)로 행행(幸行)하려 하니, 삼사(三司)와 약원(藥院)의 신하들이 교대로 극력 간하면서 성명(成命)을 정지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남관왕묘에 이르러 장차 배례(拜禮)를 행하려 하니, 우승지 조명신(趙命臣)이 아뢰기를,
"읍례(揖禮)를 행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승지 조명익(趙明翼)은 아뢰기를,
"옛날 숙묘(肅廟)께서도 처음에는 읍례(揖禮)를 행하였다가 뒤에 수의(收議)로 인하여 재배(再拜)하는 것을 법식으로 정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8월 17일 신미
판부사(判府事) 민진원(閔鎭遠)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번 신이 감히 경묘(景廟)의 행장(行狀)에 기록된 것이 잘못된 연유를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뒤 이덕수(李德壽)의 상소를 얻어 보니 신의 망제(亡弟)를 증인으로 내세웠으므로 신은 놀랍고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저 인현 성모(仁顯聖母)께서 미령하실 적에 숙묘(肅廟)께서 신의 형과 신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한 것이 하루에도 몇 차례에 이르렀었습니다만, 신의 아우는 나이 겨우 약관(弱冠)이어서 한 번도 입시에 참여한 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모(聖母)의 하교와 경묘께서 시탕(侍湯)하신 범절을 그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물러나왔을 때 매양 서로 경묘의 성효(誠孝)에 대해 감탄하는 것을 그가 곁에 있다가 들었을 것입니다만 신 등이 보고 듣지 않은 일을 전혀 전설(傳說)할 리가 없습니다. 저 듣는 사람들이 혹 추측하고 부연하여 서로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잘못된 것이 여기에 이를 수야 있겠습니까? 대저 경묘의 성덕(聖德) 가운데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신이 경술년210) 의 연주(筵奏)에서 더욱 상세하게 말씀드렸는데, 그 내용 가운데, ‘경진년211) ·신사년212) 에 시질(侍疾)하실 때 성모께서 하교하시기를, 「세자(世子)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아침저녁으로 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이 몸을 애경(愛敬)하기를 사친(私親)보다도 더하며 사친을 뵈러 갈 적에도 반드시 나에게 고하고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 나의 병이 만약 더 침중한 날에는 또한 감히 사친을 뵈러 가지 않았고 내가 반드시 가서 뵈라고 한 연후에야 비로소 갔었다. 사친이 혹 세자의 귀에 대고 은밀히 하는 말을 듣고서도 세자는 그때마다 묵묵히 말을 하지 않아서 구타까지 당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오기도 하니 참으로 매우 사랑스럽고 가긍(可矜)하기도 하다」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경묘의 효행(孝行)이 순수하고 독실하기가 이와 같았고 인륜(人倫)의 변고에 선처(善處)하심이 또 이와 같았으니, 경묘의 어린 나이에 그 성덕(聖德)을 상세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는 신과 같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감히 경묘의 어제(御製)이신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을 수초(手草)한 것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이때 경묘의 춘추가 13세였는데 문리(文理)가 넉넉하고 트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예절과 선비가 스스로 지키는 도리를 십분 다 말씀하셨으니, 그때의 성학(聖學)이 이미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전하께서 드디어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는 하교를 내리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진달한 그 모두가 지행(至行)이요, 의덕(懿德)인데 행장(行狀) 속에 조금도 나타내지 않고 단지 이 잘못된 말만 기록했을 뿐이므로, 신은 삼가 마음 아파 눈물이 흐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에서 진달한 경묘의 성효(盛孝)에 대해서는 그 일이 내교(內敎)에 관계된 것이다.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진달한 것을 반드시 사관(史官)이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고, 원소(原疏)는 유중(留中)하였다.
8월 18일 임신
예조에서 아뢰기를,
"작년에 진곡(賑穀)을 보충하기 위하여 탄일(誕日)·동지(冬至)에 올리는 각도(各道)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특별히 권감(權減)하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금년에는 마땅히 전례대로 봉진(封進)하게 해야 합니다. 대비전(大妃殿)의 동지·정조(正朝)의 방물은 무신년213) 에 권감하게 한 뒤 아직 복구(復舊)시키지 않고 있으니, 구례(舊禮)에 의거하여 봉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금년의 농사가 또 다시 이와 같으니 탄일의 방물과 물선은 특별히 봉진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또 자성(慈聖)의 하교에 의해 전교(傳敎)하기를,
"이제 막 큰 흉년을 겪었으니 민폐(民弊)를 돌아보아야 한다. 금년에도 또한 봉진하지 말게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자성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뜻을 봉양하는 도리에 있어 강청(强請)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하였다.
8월 19일 계유
충청 감사 이형좌(李衡佐)가 크고 작은 선문(先文)214) 에 인(印)을 찍는 일 때문에 장계(狀啓)를 올려 거조(擧條)215) 를 내주기를 청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연설(筵說)이 아닌데도 거조를 내는 것은 일찍이 이런 전례가 없었고, 또 번신(藩臣)이 곧바로 청하는 것은 자못 체통을 잃은 것이라는 이유로 추고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부 【지평 심명열(沈命說)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전 병사(兵使) 김몽로(金夢魯)는 인품이 참람하고 교활하여 촉석 산성(矗石山城)의 군향미(軍餉米) 수백 석을 모두 사탁(私槖)에 넣었는데, 감진 어사인 비당(備堂) 박문수(朴文秀)가 그 문서를 가져다 조사하여 보니 칼로 긁어 내고 고쳐 쓴 자취와 농간을 부려 훔쳐 낸 정상이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즉시 장문(狀聞)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박문수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게 하소서. 그리고 김몽로는 잡아다가 상세히 조사해서 법에 의거하여 무겁게 다스리게 하소서. 지금의 대감(臺監)은 곧 예전의 전중 어사(殿中御史)인데, 지난번 한두 명의 감찰(監察)이 법부(法府)에 지피(持被)하는 날과 대제(大祭)의 수계(受戒)가 있고 난 뒤에도 기생을 끼고 놀면서 멋대로 음란하고 외설스런 행동을 하였으니, 청컨대 조사해 내어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게 하소서.
근래 민속(民俗)이 날로 잘못되어 변괴가 허다하고 고독(蠱毒)216) 으로 사람을 해치는 변이 자주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항간에 일종의 요사스런 무격(巫覡)들이 소굴을 만들어 놓고는 은밀히 더러운 물건들을 모아다가 몰래 저주하는 부적을 만들어서 중한 값을 받고 팖으로써 남의 집에 화액(禍厄)을 끼치고 있다고 합니다. 일찍이 포청(捕廳)에서 살펴서 체호하라는 명령이 있은 지 지금 몇 년이 되었습니다만 아직껏 잡지 못하고 있으니, 다시 신칙시켜 기필코 체포하여 율법에 의거해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말단의 세 건(件)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혜교(尹惠敎)를 부제학으로, 조한위(趙漢緯)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충청도 충원현(忠原縣)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등에 또 두 개의 다리가 있었다. 감사(監司)가 장문(狀聞)한 것이다.
8월 20일 갑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하였다. 지평 심명열(沈命說)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남산(南山)의 봉대(烽臺) 아래서 밤중에 불을 올리는 것은 일이 수상한 데 관계됩니다. 포청(捕廳)에서 본시 각별히 사찰(査察)하여 기필코 체포해야 할 것인데 지금 열흘이 지나도록 아직껏 잡지 못하고 있으니, 좌우 포장(左右捕將)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엊그제 홍양현(洪陽縣)을 목(牧)으로 승격(陞格)하고 현감(縣監) 윤경룡(尹敬龍)을 그대로 목사(牧使)에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목사는 바로 정3품이고 윤경룡은 신진(新進) 6품관입니다. 관직의 서차(序次)에 있어서 갑자기 등급을 뛰어 넘게 해서는 안됩니다. 봄에 안릉현(安陵縣)을 목(牧)으로 승격시킬 적에 현감(縣監) 박필재(朴弼載)를 전례에 의거하여 이미 체임(遞任)시켰으니, 법례(法例)에 있어 다르게 조처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윤경룡을 그대로 목사에 제수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격시키고 그대로 목사에 제수하게 한 의도는 실로 백성을 위한 것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승지 조명익(趙明翼)이 부묘(祔廟)를 당하여 그 예식이 이루어지기 전에 소장을 올려 예(禮)에 대해 논하고 또 병방(兵房)·형방(刑房)을 사퇴(辭退)하였습니다. 근력이 부치고 병 때문에 억지로 감당하기 어렵다면 상소하여 원직(原職)을 사퇴하는 것이 도리어 합당합니다. 그런데 유독 방임(房任)만을 거론하고 말을 늘어놓으면서 체면(遞免)해 주기를 청한 나머지 마침내 예방(禮房)에 이배(移拜)되었고 이어 자급(資級)이 승진되었으니, 그 일이 기회를 엿본 것에 관계되어 사람이 모두 비웃고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방이나 병방·형방은 그가 미리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비록 사심(私心)을 품고 도모하려 했더라도 어떻게 힘을 쓸 수가 있었겠는가? 그에 대해 논열(論列)한 것은 너무 지나쳤다는 말을 면할 수 없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 낭서(郞署)가 외람되고 용잡(冗雜)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기성(騎省)217) 에 이르러서는 더욱 특별히 가려야 하는데도 강덕언(姜德彦)같이 용렬하고 미련한 부류들이 또한 외람스럽게 끼어 있어 거조가 해괴하고 처사가 광패스럽습니다.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대사간 정우량(鄭羽良)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은전(恩典)은 외람되이 베풀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김동필(金東弼)의 숭록(崇祿)과 엄경하(嚴慶遐)의 통정(通政)은 날짜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상으로 주기도 하였고, 준직(準職)218) 을 거치지 않았는데도 가자(加資)하기도 하였으니, 전례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채응복(蔡膺福)이 처음 대의(臺擬)에 올랐을 적에 대장(臺章)이 준열하게 발론되었으니, 공의(公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아간(亞諫)에 의망(擬望)하였으니, 외람된 것이 너무도 심합니다. 청컨대, 이조 당상(吏曹堂上)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전계(前啓) 가운데 이유신(李裕身)·김기석(金箕錫)·이시희(李時熙)·오명서(吳命瑞)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정배(定配)된 죄인 윤정상(尹鼎相) 4부자(父子)를 옮겨 한 고을에 같이 정배시키게 하였는데, 윤정상은 윤휴(尹鑴)의 자손이다. 이에 앞서 각 고을에 흩어져 정배되어 있었는데,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역적에 관계된 일일지라도 연좌(緣坐)된 경우는 각기 따로 보내는 법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들 부자(父子)가 떨어져 있다는 말을 듣고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역적 민관효(閔觀孝)·민원보(閔元普)의 원족(遠族)으로서 찬배(竄配)된 사람들을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무신년219) 에 민관효 등이 법에 의해 복주(伏誅)되고나서 민가(閔哥)의 여러 족속들을 모두 흩어서 정배했는데 이에 이르러 그것이 법 밖의 조처였다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고 드디어 칠촌친(七寸親) 이하로 한정해 모두 방송시키게 하였다. 또 제주(濟州)로 옮겨 종으로 삼은 죄인 박태회(朴泰晦)를 육지로 내보내 종을 삼게 하였다. 박태회는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의 아들인데, 과옥(科獄)에 간범(干犯)되었기 때문이었다.
재해가 우심(尤甚)한 고을은 가을의 대동(大同)·신포(身布)의 반을 감면하게 하고 지차(之次)의 고을은 3분의 1을 감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의 능행(陵幸)이 있을 적에 길가의 나락 이삭을 가져오게 하여 그것이 부실한 것을 보고서, 하교하기를,
"옛날에 봄에는 농사짓는 것을 살펴보고 가을에는 거두어 들이는 것을 살펴보아 부족한 것을 도와준다고 한 말이 있다. 이런 사실을 보기 전이라도 미리 구획(區劃)해야 하는 것인데 더구나 직접 목도하고 온 것이겠느냐?"
하고,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근래 경비를 크게 축소시키고 있으니, 유사(有司)의 신하에게 하문하시어 감면케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황조(皇朝)에서도 유사에게 묻지 말라는 성교(聖敎)가 있었다. 유사는 항상 나라를 위하여 경비를 아끼지만 나는 마땅히 백성을 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8월 23일 정축
사헌부 【지평 심명열(沈命說)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박태회(朴泰晦)가 과장(科場)에서 시지(試紙)를 환절(換竊)한 죄는 실로 고금에 없었던 것으로 왕법(王法)에 있어 용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당초 도배(島配)시킨 것도 또한 말감(末勘)이라 할 것인데, 이번의 육지(陸地)로 나오게 하라는 명은 법 밖에서 나온 조처입니다. 나라의 법이 한 번 흔들리면 뒷날의 폐단을 막기가 어려우니, 과적(科賊) 박태회를 육지로 내보내어 종을 삼으라는 명을 정침하소서. 무신년220) 역변(逆變)이 있을 때 민가(閔哥)의 여러 족속들을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지 않고 모두 변방으로 귀양보낸 것은 화근(禍根)을 막고 간악한 싹을 꺾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은즉, 세월이 좀 오래되었다고 해서 용서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역족(逆族)들을 칠촌(七寸)을 한정하여 방송하라는 명은 너무도 의외의 조처인지라 여정(輿情)이 놀라고 의혹스러워 합니다. 민가 제족 가운데 역적의 칠촌 이상을 아울러 방송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전계 가운데 윤경룡(尹敬龍)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호남(湖南)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종모(種牟)221) 5백 석(石)을 제주(濟州)에 획송(劃送)하게 하였다. 본도(本島)에 흉년이 들어 목사(牧使) 정필녕(鄭必寧)이 장계를 올려 청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8월 25일 기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6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7일 신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사헌부 【지평 심명열(沈命說)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참의(參議) 이세진(李世璡)은 그 자신이 명관(名官)이 되어 낭저(廊底)에서 은밀히 도살(屠殺)하는 것을 능히 금지시키지 못했고, 또 법부(法府)에 체포된 뒤에는 금리(禁吏)를 불러 억지로 방송(放送)시키게 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사헌 서종급(徐宗伋)은 자신이 헌신(憲臣)이 되었으니 진실로 법을 지키고 사심(私心) 없이 국가의 금령을 신장케 하여야 마땅한데도, 금리를 잡아 가두고 억지로 속전(贖錢)을 추인(推引)해 내어 범금인(犯禁人)에게 도로 지급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감찰(監察) 김동현(金東鉉)은 전 지평 민계(閔堦)를 패초(牌招)할 적에 즉시 들어오지 않았다 하여 배리(陪吏)를 불러다가 수죄(數罪)하고 태형(笞刑)을 가했습니다. 이런 사체는 전에 있지 않았던 것이니, 청컨대 태거(汰去)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지평 민계는 자신이 대관(臺官)이면서도 남에게 존중받지 못하여 데리고 있는 배리가 감찰에게 죄를 받았는데도 이를 예사로 보고 태연하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니, 그의 나약하고 줏대가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전계 가운데 조명익(趙明翼)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대사간 정우량(鄭羽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후사(喉司)는 곧 백사(百司)를 호령하는 곳입니다. 육방(六房)이 직무를 나누어 각기 자신의 자리를 생각하면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들어오고, 신시(申時)가 되기를 기다려 물러가는 것은 출납(出納)을 상세히 살피고 지체되거나 태만한 것을 경동(警動)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기강이 점차 해이해져서 혹 새벽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는가 하면 신시가 되기도 전에 물러가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잠시 청좌(廳坐)하고 오직 편하기만을 도모하고 있으니, 일이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경책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승지들을 모두 종중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은대(銀臺)의 장관은 지망(地望)이 자별(自別)한데, 양성규(梁聖揆)·이정소(李廷熽)가 갑자기 그 자리에 의망(擬望)되었으니, 신중히 하고 어렵게 여기는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물정(物情)이 놀랍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전조(銓曹)로 하여금 다시 비의(備擬)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유겸명(柳謙明)을 북평사(北評事)로, 서명연(徐命淵)을 승지로, 박사수(朴師洙)를 형조 참판으로, 조정만(趙正萬)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임정(任珽)을 부교리로, 송성명(宋成明)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정형복(鄭亨復)을 지평으로 삼았다.
8월 28일 임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9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30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헌부 【장령 민정(閔珽)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장릉 참봉(莊陵參奉) 임술(任述)은 본래 강상(江上) 위에서 모리(牟利)나 하는 무리로서 많은 비리를 저질렀으므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시키소서. 지난번 무장현(茂長縣)에서 세태(稅太)222) 를 돈으로 만들어 1천 3백 냥을 사인(私人)에게 맡겨 상납하게 했는데 중간에서 훔쳐 먹은 것이 7백여 냥이나 되었으니, 그의 죄범을 논한다면 강도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부(地部)223) 의 초기(草記)에서는 범연하게 중하게 과죄(科罪)하기를 청하고, 그 허다한 전화(錢貨)를 도로 본고을에서 징수하였으니 민폐(民弊)가 적지 않습니다. 청컨대, 무장현에서 보낸 사인을 포청(捕廳)으로 이송시켜 도적을 다스리는 율(律)로 다스려 철저히 조사해서 추징(推徵)하게 하소서. 그리고 현감 장세량(張世良)은 파직시켜 경솔하게 사인에게 맡긴 죄를 징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말단의 두 건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조한위(趙漢緯)를 교리로, 황정(黃晸)을 부수찬으로, 이성룡(李聖龍)을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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