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사묘(私廟)에 거둥하였다가 효장묘(孝章廟)에까지 두루 임어하였다.
9월 2일 병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비국(備局)의 관문(關文)을 살피건대, 대마도 왜인(倭人)의 가호(家戶)가 잇따라 불탔다 하여 장차 경자년224) 의 전례에 의거해 쌀을 지급하여 위문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교린(交隣)하는 도리는 단지 약조(約條)를 신중히 하고 성신(誠信)을 지키며, 때에 따라 빙문(聘問)하고 예(禮)에 의거해 경조(慶弔)하는 데 있는 것은 물론이고, 또한 반드시 사명(使命)을 서로 고한 뒤에야 시행하는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저들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저들이 생각하기도 전에 지레 곡진히 베풀어 준 뒤에야 비로소 환심을 얻고 교호(交好)를 온전히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내부(萊府)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여 본 바 그해에 과연 위문한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지급한 미석(米石)을 맡은 역관(譯官)의 무리가 배가 작다는 핑계로 관중(館中)에 유치했다가 결국 태만하게 방기하여 마구 써버렸기 때문에 단지 바다를 건너가는 역관(譯官)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돌아가게 하였으니, 국가의 수치와 모욕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재차 잘못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국의 관문이 도착하기 며칠 전에 왜인이 처음으로 전례를 이야기하면서 슬그머니 내부의 의사를 타진해 왔는데, 내부에서 굳게 거절하는 뜻을 보이자 저들은 다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스스로 발설하여 장차 고칠 수 없는 영원한 법식을 만들려 하고 있으니, 저들이 만일 이익이 됨을 달갑게 여겨 해마다 화재(火災)가 났다는 핑계로 3백 석의 쌀을 내어 줄 것을 독책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겠습니까? 또한 신이 듣건대 조의(朝議)는 ‘도중(島中)의 7천 호(戶)가 연소(延燒)되고, 도왜(島倭)가 여러해 기근에 시달렸고, 관시(館市)가 여러 달 정지되어 공미목(公米木)을 이제 일일이 준급(準給)할 수 없다.’고 했다는데, 이는 모두 실상과 어긋난 말인 것입니다."
하고, 이어 조목별로 그 정상에 대해 진달했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대저 이 네 가지 이야기는 전부가 맹랑한 말입니다. 왜역(倭譯)이 바다를 건너 가는 역사에 만약 위문(慰問)하는 임무도 겸하게 되면 왜인들이 으레 증여하는 것 이외에 더 증여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경자년의 위문은 실제로 그때 왜역을 맡았던 김근행(金謹行)의 무리가 왜인에게 아첨하여 이익을 희구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증급(贈給)하는 거조도 바다를 건너가는 역관들이 그들의 덕색(德色)을 첨가하여 후한 뇌물을 요구하는 밑천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이에 감히 유언 비어를 지어내어 조정의 청문(聽聞)을 속여 경동시킨 것인데, 묘당(廟堂)에서는 이러한 곡절을 상세히 모른 채 건백(建白)하기에 이른 것이니, 이는 본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맡은 역관의 무리가 허무한 말을 떠벌이고 나라를 팔아 자신들의 이익을 획책하였으니, 그 정상을 논한다면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벼울 것입니다. 해원(該院)225) 에서 조사·적발하여 철저히 추문함으로써 실정을 알아내어 법에 의거해 처치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왜역 양시웅(粱時雄)이 직무에 태만하여 잘 살피지 않은 죄를 형추(刑推)한 다음 정배(定配)시켜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연사(年事)의 재황(災荒)에 대한 정상과 진정(賑政)을 요리(料理)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요부(徭賦)를 감해 줄 것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중간 정도되는 임금인데도 조세(租稅)를 감면시키라는 조서(詔書)가 사서(史書)에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문제가 평세(平歲)에 행할 수 있었던 것을 전하께서 유독 거듭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에 허덕이는 이런 때에 행할 수 없다면 어찌 개연(慨然)스런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아래로 부탁할 수 있는 저사(儲嗣)가 없이 외로이 만백성 위에 서 계시니 믿을 것이라고는 단지 민심(民心)뿐입니다. 따라서 민심이 한 번 원망을 품고 이산(離散)한다면 장차 어느 곳에서 안주(安住)해야 하실지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남해 현감(南海縣監) 정수방(鄭壽邦), 기장 현감(機張縣監) 배정도(裵正度), 언양 현감(彦陽縣監) 이의태(李宜泰)는 잉임(仍任)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의 일은 옳으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서서히 문서로 보고하기를 기다려 거행하게 하라. 소장 끝에 거론한 일은 유사(有司)의 신하가 어렵게 여겨 버티더라도 백성의 부모된 몸으로 어떻게 차마 소홀히 볼 수 있겠는가? 세 고을의 수령은 아직 대임자(代任者)를 내지 않은 곳은 특별히 잉임시키도록 하고 이미 대임자를 낸 곳은 말을 주어 내려 보내게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번신(藩臣)이 상소하는 사체는 여느 경우와는 자별한 것이다. 영백(嶺伯)의 상소에 있는 ‘외롭다’는 말은 비록 강개한 마음에서 격발된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도 번신으로서의 체통이 없으니, 감사 조현명을 파직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정언 조진세(趙鎭世)가 상소에서 정주(政注)에 관한 일을 말했습니다. 대저 인물의 진퇴는 일세(一世)의 공의(公議)를 따를 뿐입니다. 따라서 별다른 이유가 없는 사람은 신이 아울러 모두 극선(極選)의 의망(擬望)에 참여시켰습니다만, 윤용(尹容)에 이르러서는 발거(拔去)시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발거하거나 의망하는 것은 본래 수(數)를 갖추어서 맞게 권형(權衡)하는 것인데, 이제 간신(諫臣)이 이에 치우치게 막았다고 개탄하고 나선 것은 진실로 뜻밖의 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깊이 혐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9월 3일 정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주진(李周鎭)·김상신(金相紳)을 정언으로, 조정(趙侹)을 지평으로 삼았다.
9월 4일 무자
형조 참판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경상도 전 감사(監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에서, 신이 전일 진달한 바 있는 대마도(對馬島)에 쌀을 사여(賜與)하는 일의 잘못을 크게 논하면서 심지어 역설(譯舌)226) 을 철저히 추문하라는 청이 있기까지 하였었습니다. 아! 선조(先朝) 때 재변(災變)을 구제하고 인국(隣國)을 구휼하는 뜻도 또한 이미 저들의 청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망령되이 논진(論陳)한 것이었는데, 이제 그 말이 장황하게 분노를 터뜨렸으니, 신은 실로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상소에 일컬은 바 왜호(倭戶)의 연소(延燒)는 단지 3천 호(戶)였으니, 7천 호라는 말을 조현명이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공작미(公作米)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1만여 석을 쌀이 귀할 때에 발매(發賣)해 중간에서 요판(料販)하면 그 이익이 끝이 없다는 말이 낭자하게 전해지고 있는데, 조현명은 도리어 진당(賑堂)에서 약간 기한을 물려서 봉납(捧納)하라는 명령을 빙자하여 내부(萊府)에서 요판한 자취를 숨겨 주려고 했으니, 어찌하여 애오(愛惡)의 지나친 치우침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중도에 지나친 말이 경(卿)에게 무슨 혐의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9월 5일 기축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하였다. 좌우 포장(左右捕將)을 중추(重推)하고 종사관(從事官)은 태거(汰去)하라고 명하였으니, 남산(南山) 아래에서 횃불을 든 사람을 즉시 체포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봉수대(烽燧臺)의 장졸(將卒)을 엄히 형신(刑訊)한 다음 충군(充軍)시켰는데, 잘 살펴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대사성 서종옥(徐宗玉)이 본관(本館)의 일 때문에 법식을 정할 것을 진청(陳請)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문명(趙文命)이 다시 아뢰어 판하(判下)받았다.
1. 관노비(館奴婢)를 추쇄(推刷)할 때 뇌물을 받고 간계(奸計)를 부린 경우 해당 관원(官員)은 금고(禁錮)에 처하고 서리(書吏)와 전복(典僕)은 공사천(公私賤)을 숨긴 죄에 의거해 경중을 나누어 조율(照律)한다.
1. 매년 관노비 신공(身貢)의 미수(未收)가 꼴찌인 수령은 초기(草記)를 올려 나문(拿問)한다.
1. 노비를 진고(陳告)한 실상이 없는데도 상을 받은 경우는 10년을 한정하여 모두 환속(還屬)시키게 하고 이 뒤로는 구안(舊案)의 노비 때문에 시상(施賞)하지 않게 한다.
1. 공신(功臣)의 사패(賜牌)227) 에 들어 있는 관노비는 일일이 환속시킨다.
1. 관노비의 공목(貢木)은 구전(舊典)에 의거하여 남자는 1필(疋) 반으로, 여자는 1필로 법식을 고쳐 정한다.
김시형(金始炯)을 경상 감사로, 박사수(朴師洙)를 황해 감사로, 김흥경(金興慶)을 판돈녕(判敦寧)으로, 최명상(崔命相)을 지평으로, 조명택(趙明澤)을 교리로, 조적명(趙迪命)을 부수찬으로, 서종섭(徐宗燮)을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삼았다.
9월 6일 경인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역상(曆象)의 신법(新法)이 나온 뒤 시헌력(時憲曆)의 칠요 전도(七曜躔度)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십사기(二十四氣)·합삭(合朔)228) ·현망(弦望)229) 에 이르러서는 시각(時刻)에 이르고 늦음이 있어 간혹 몇 각(刻)의 차이가 있는 것이 대여섯 군데에 이르고 있습니다. 즉시 고쳐서 바로잡지 않는다면 차이가 난 데에서 또 차이가 나서 작은 것이 쌓여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달의 크고 작음과 절서(節序)의 앞뒤가 장차 모두 어긋나게 될 것인데, 역관(曆官)들이 그 이유를 궁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력법(大統曆法)은, 우리 나라에서는 오로지 구법(舊法)으로 추보(推步)해서 책력을 만들었는데, 당본(唐本) 대통력을 보니 절후가 드는 진퇴(進退)가 혹 3,4일에 이르기도 하고 윤달을 두는 선후도 또한 3,4개월의 차이가 나는데도 역관들이 까마득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절행(節行) 때에 본감(本監)의 관원을 가려 보내어 시헌력이 점점 차이가 나는 단서와 대통의 신수법(新修法)을 배워 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9월 7일 신묘
이덕재(李德載)를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9월 8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9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반제(泮製)를 설행(設行)하였다. 생원(生員) 유만추(柳萬樞)가 으뜸을 차지하였으므로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9월 11일 을미
유만중(柳萬重)을 승지로, 서종급(徐宗伋)을 예조 참판으로, 조명익(趙明翼)을 병조 참판으로, 박내정(朴乃貞)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12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특지(特旨)로 국상(國祥) 때 외방에 있으면서 참여하지 않은 여러 신하들을 【경재(卿宰) 이상은 삭출(削黜)시키고 당상(堂上)은 삭직(削職)시키고 당하(堂下)는 시종(侍從)만 파직시키고 서용(敍用)하지 않게 하였다.】 파삭(罷削)시켰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서명(胥命)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비로소 하교하기를,
"촉(蜀)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준엄한 것을 숭상한 것230) 이 어찌 즐겨 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나 엄한 하교를 보고도 예사로 여겨 국상이 지나도록 머뭇거리고 있었으니, 이것이 곧 신하의 도리란 말인가? 한(漢)·당(唐)의 율을 조사하게 한 것도 즐겨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율은 곧 대불경(大不敬)이었으므로 하교(下敎)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임금이 신하를 부릴 적에는 예(禮)로 한다는 것을 부자(夫子)231) 께서 말씀하셨으니, 신하된 자가 시상(時象)에 골몰하여 임금이 있는 줄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위에 있는 사람으로 어찌 이것을 이유로 성인(聖人)이 경계하신 것을 훼손시킬 수 있겠는가? 이번 처분은 예로써 부린다는 뜻을 보인 것으로 그 가운데 이재(李縡)·김진상(金鎭商)에 대해서는 이미 하교한 적이 있으니, 어찌 시행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논하지 말고 대신(大臣)과 아주 노쇠한 사람도 논하지 말라."
하였다. 이리하여 권업(權𢢜)·이병상(李秉常)·윤순(尹淳)·권이진(權以鎭)·김유경(金有慶) 등은 모두 삭출(削黜)시키고, 박성로(朴聖輅)·이중협(李重協)·임주국(任柱國)·권적(權𥛚)·한덕전(韓德全) 등은 모두 삭직(削職)시키고, 황재(黃梓)·이도원(李度遠)·송수형(宋秀衡)·송사윤(宋思胤)·임진하(任震夏) 등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않았다.
9월 14일 무술
윤동형(尹東衡)을 승지로 삼았다.
9월 15일 기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정언 김상신(金相紳)이 상소하여 서명(胥命)하고 있는 여러 신하들을 삭출·파직하라는 명을 정침하고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미안스러운 전교를 환수할 것을 청하고, 이어 후원(喉院)에서 작환(繳還)232) 하지 않은 잘못과 현고(現告)하여 취사(取捨)를 조종한 죄를 논하였다. 상소를 봉입(捧入)하니 도로 내어주라고 명하고, 이내 하교하기를,
"이런 근거없는 상소는 내가 보고 싶지 않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에 대한 처분은 비망기에 상세히 유시(諭示)하였다. 신하된 자가 어떻게 감히 용납해 비호할 수 있단 말인가? 정언 김상신을 체차(遞差)시키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불경(不敬)을 삭출(削黜)로 감단(勘斷)한 것은 말감(末減) 중의 말감인즉 이를 감히 영호(營護)하는 자는 고의로 불경을 범한 것이다. 김상신을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좌의정 조문명(趙文命) 등이 아뢰기를,
"대관(臺官)의 대우를 이렇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상신이 〈비망기 가운데〉 미안스런 전교를 고치려고 했는데, 무슨 말로 고쳐야만 비로소 김상신이 좋아하겠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불경이라는 두 글자는 끝내 중도를 벗어난 데 관계가 되니, 이는 당연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오직 시상(時象)만 알 뿐 임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찌 대불경(大不敬)이 아니겠는가? 이병상(李秉常)의 경우 삭출(削黜)이 곧 상을 준 것이다. 처음에는 중도 부처(中道付處)233) 를 명하려고 했었지만 그의 노모(老母)를 생각하여 벌을 적용한 것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김상신의 무리가 감히 영호(營護)할 마음을 품게 된 것이다."
하고, 이어 이병상을 중도 부처하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바로 시상의 와주(窩主)인 자이다."
하였다. 소배(少輩)들이 이병상의 청개(淸介)함을 보고 스승처럼 존경하였으므로 조문명·송인명(宋寅明)이 교대로 나아가 극력 간하니, 임금이 드디어 부처(付處)하라는 명을 정침하였다.
봉교(奉敎) 조명리(趙明履)를 삭직(削職)시키고 이어 별겸춘추(別兼春秋)를 차출하여 조속히 신천(新薦)을 시행하게 하였다. 이때 조명리가 이태중(李台重)을 응천(應薦)하였는데, 박문수(朴文秀)가 ‘이태중은 사람은 가합하지만 단천(單薦)은 공정하지 아니하다.’고 했기 때문에 드디어 그 천거를 폐기시켰던 것이다. 조명리가 이 때문에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패천(敗薦)된 사람은 으레 다시 사국(史局)에 들어 갈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사직(司直) 이재(李縡)가 상소하여 여러 신하들과 함께 똑같은 죄벌을 줄 것을 청하고, 이어 소회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부자(父子) 사이는 은애(恩愛)를 위주로 삼고 군신(君臣) 사이는 의리(義理)를 위주로 삼기 때문에 혹 범간(犯諫)함은 없어도 숨김이 있기도 하고 범간함은 있어도 숨김이 없기도 하며, 나아가 봉양함에 있어서도 유방(有方)과 무방(無方)의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비가 허물이 있어 세 번 간해도 듣지 않으면 울부짖으면서 따르는 것은 곧 은애요, 임금이 허물이 있을 경우 세 번 간해도 듣지 않으면 떠나는 것은 의리인 것입니다. 지금 국휼(國恤)·국상(國祥)에 달려 오지 않은 사람들의 일로 말하자면, 선현(先賢)들이 대처한 의리를 여러 신하들이 이미 진달했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패악(悖惡)한들 어찌 친상(親喪)에 달려가지 않는 자가 있겠으며 대상(大祥)·소상(小祥)에 참여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그 이치는 하나이지만 분별은 다른 실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매양 아들의 도리를 신하에게 책망하고 계시니, 이대로 따라가면 장차 순종함만 있고 어김이 없어서 따르는 자만 있고 떠나는 자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올바른 이치이겠습니까? 《논어(論語)》에 ‘군신(君臣)의 의(義)를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고, 그 아래에 이어 ‘군자가 벼슬길에 나오는 것은 의(義)를 행하기 위한 것이다.’ 했는데, 정자(程子)가 ‘의(義)’라는 한 글자를 해석하여 ‘자신의 행동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인륜을 혼란시켜서도 안되지만 또한 이익을 따르기 위해 의리를 잊어서도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도 ‘마땅히 나아가야 할 때에 나아가는 것이 공손함이 되지만 마땅히 나아가서는 안될 때는 나아가지 않는 것도 또한 공손함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런 도리가 아니면 구구한 소충(小忠)이 장차 천하의 명절(名節)을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시상(時象)’이란 두 글자가 무슨 말인지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당(黨)’이라는 글자를 말하기 싫어하시어 조금 그 이름을 달리 한 것이 아닌지요? 시상에는 치(治)와 난(亂), 호(好)와 불호(不好)가 있고 당(黨)에는 군자(君子)의 당과 소인(小人)의 당이 있으니, 함께 뒤섞여 한덩어리로 만들 수 없는데, 전하께서는 시비(是非)를 묻지 않고 왕직(枉直)을 구분하지도 아니하신 채 단지 ‘시상’이라는 두 글자로 휘어잡고 몰아붙여 군하(群下)들로 하여금 입도 열지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붕당(朋黨)을 미워하여 제거하려 하다가 가끔 나라를 망하게 한 것에 거의 가깝지 않습니까? 신은 또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개연(慨然)히 제갈양(諸葛亮)의 정치와 황조(皇朝)의 법에 뜻을 두시어 조조(鼂錯)가 조의(朝衣)를 입고 동시(東市)에 참수(斬首)되었던 일을 거론하기까지 하셨다 합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요? 전하께서는 인성(仁聖)하신 분인지라 신은 본시 결단코 이런 일이 없었으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가령 전하께서 곧바로 신 등에게 대불경(大不敬)이라는 주책(誅責)을 가하신다면, 오늘날 조정의 신하로서 전폐(殿陛)에 서서 간쟁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옛날의 군자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았는데 지금의 군자는 임금의 잘못을 성취케 하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스스로 신중을 기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에서 진달한 바 그 대체(大體)는 옳다. 그러나 경(卿)도 막힌 데가 있다."
하였다.
9월 16일 경자
신방(申昉)을 동춘추(同春秋)로, 정익하(鄭益河)·이주진(李周鎭)을 별겸춘추(別兼春秋)로, 임정(任珽)을 수찬으로, 박사정(朴師正)을 대사간으로, 박규문(朴奎文)을 헌납으로, 권해(權賅)를 정언으로 삼았다.
포청(捕廳)에서 아뢰기를,
"봉대(烽臺)에서 횃불을 든 사람을 비로소 체포했는데, 바로 전 봉장(烽將) 백은창(白殷昌)이었습니다. 새 봉장 강세번(姜世蕃)을 제거하고 그의 대임(代任)으로 차임되기를 도모하려 한 것이니, 법조(法曹)에 이송시켜 엄히 감죄(勘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 이주진(李周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장단(長湍)의 전 부사(府使) 이오(李悟)의 탐욕스럽고 교활하며 불법을 저지른 죄에 대해 신이 안핵(按覈)하여 논계(論啓)한 적이 있었는데, 사안(査案)에서 감죄(勘罪)한 것을 보니, 일체 모두 탕척(蕩滌)해 버렸습니다. 좌죄된 것은 단지 여결(餘結)뿐이고 율명(律名)은 도배(徒配)에 그쳤으니, 신은 삼가 놀랍고 통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고, 이어 저치미(儲置米)의 작전(作錢)을 마음대로 써버린 죄와 요망한 첩(妾)이 뇌물을 받고 백성을 침학한 정상을 진달하였다. 또 그의 아들 이도섭(李道燮)이 관전(官錢)을 마음대로 쓰고, 아전의 딸을 강간(强奸)한 죄를 논하여 먼 곳에 정배(定配)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오의 일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이도섭의 일은 부자(父子)를 아울러 율법(律法)에 처하는 것이니, 어찌 왕정(王政)에 해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조정에서 엄히 징계해야 하는 것은 수령에게 있는 것이지 아객(衙客)234) 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9월 17일 신축
윤광운(尹光運)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교리 조명택(趙明澤)이 상소하여 김상신(金相紳)을 삭출(削黜)하라는 명을 도로 정침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8일 임인
전 판교(判校) 강우량(康友諒)이 상소하여 태상시(太常寺)의 제주(祭酒)가 깨끗하지 않은 폐단에 대해 논하고, 또 관동(關東)의 황장목(黃腸木)235) 을 몰래 베어 내는 폐단을 논하면서 삼사(三司) 가운데서 풍력(風力)이 있고 법을 지키는 사람을 가려 보내어 목근(木根)의 다소(多少)를 살펴 죄를 논하게 하고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이 도벌(盜伐)을 범한 경우에는 일률(一律)로 논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두 건의 일은 태상시에 신칙하겠다."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국상(國祥)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현고(現告)를 추가로 봉상(捧上)하였다. 이에 이하원(李夏源)·이광덕(李匡德)·김정(金)·유승현(柳升鉉)·윤대영(尹大英) 등은 모두 삭직(削職)하고, 유경시(柳敬時)·이광도(李廣道)·이경석(李慶錫)·안성(安晟)·신겸제(申兼濟)·권상일(權相一)·박징빈(朴徵賓)·주형리(朱炯离)·정광제(鄭匡濟)·신택하(申宅夏)·이이제(李以濟)·박사순(朴師順)·윤서교(尹恕敎) 등은 모두 파직해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9월 19일 계묘
달이 정성(井星)으로 들어갔다.
윤휘정(尹彙貞)을 부교리로 삼았다.
함경 감사 정형익(鄭亨益)이 북병사(北兵使) 한범석(韓範錫)과 운두 산성(雲頭山城)의 수성(守城)에 대한 방략(方略)을 의논한 다음 여섯 조항의 편의(便宜)에 대해 장문(狀聞)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뢴 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납 박규문(朴奎文)이 상소하여 제신(諸臣)의 처분이 중도에 지나침과 김상신(金相紳)을 삭출(削黜)시킨 것이 잘못임을 논하면서 아울러 도로 정침할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여산 부사(礪山府使) 윤하(尹㵑)는 부임한 이후 고을 백성들이 원망하고 비방하고 있으며, 순창 군수(淳昌郡守) 이형수(李衡秀)는 날마다 술마시는 것을 일삼아 정령(政令)이 어긋났습니다. 평택 현감(平澤縣監) 심화(沈樺)는 첨정(簽丁)들에게 봉초(捧招)하여 은밀히 뇌물을 받는 문을 열어놓고 있으며, 으레 바치는 어염(魚鹽)을 억지로 돈으로 바치게 하고 있으니, 아울러 파직시킴이 마땅합니다. 명릉 참봉(明陵參奉) 허경(許憼)의 제배(除拜)는 법식에 어긋난 것이고 의영 직장(義盈直長) 이강(李洚)은 공인(貢人)을 침학하고 있으니, 청컨대 아울러 태거(汰去)하소서. 강화 유수(江華留守) 윤유(尹游)는 한 가지 조그만 일로 인해 이에 탑전에서 대신(大臣)에게 모욕을 가했고 또 비당(備堂)들이 많이 앉아 있는 가운데서 대신을 질타했습니다. ‘조(趙)·송(宋)의 건곤(乾坤)이라 기력(氣力)이 두렵다.’는 등의 말은 더더욱 놀랍고 패려하였습니다. 사체에 있어 책벌(責罰)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 진달한 일은 극히 무엄하며 두 고을의 수령을 잉임(仍任)시킨 것은 그 의도가 실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심화는 금오(金吾)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겠으며 허경·이강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윤유의 인품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데 혹시 풍문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박규문이 김상신을 영호(營護)한 것은 일이 매우 무엄하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집의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1일 을사
윤대(輪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대사성 서종옥(徐宗玉)의 말로 인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영남(嶺南)의 도신(道臣)이 올린 학규(學規)를 강정(講定)하여 태학(太學)으로 보내고 제도(諸道)에 반포하게 하였다. 서종옥이 또 아뢰기를,
"지난 기유년236) 에 대사성 조현명(趙顯命)이 반과(泮科) 가운데 인일제(人日製)237) 와 칠석제(七夕製)238) 등은 단지 반유(泮儒) 가운데서 이미 원점(圓點)이 찼거나 여러 번 석채(釋菜)239) 에 참여한 자들에게만 허부(許赴)하게 해야 된다는 뜻으로 아뢰었더니, 묘당에서 회의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의 우견(愚見)에는 삼일제(三日製)240) ·구일제(九日製)241) 와 황감 사제(黃柑賜製)242) 는 이미 응당 행해야 하는 절목이 없고 특은(特恩)에서 나온 것이니, 인일제·칠석제도 성상께서 한때 처분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혹은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혹은 원점, 혹은 도기(到記)로 시취(試取)하여 혹은 직부 회시(直赴會試)하게 하면 또한 용동(聳動)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니, 절목을 정하여 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예조 판서 송성명(宋成明)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박규문(朴奎文)이 상소하여 논한 윤유(尹游)에 대한 말은 허무 맹랑한 말을 부연하여 기괄(機括)의 수단을 교묘하게 부린 것으로 그 말은 동쪽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뜻은 실제로 서쪽에 있는 것이어서 결단코 윤유를 미워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의 삼종 형제(三從兄弟)의 명위(名位)가 나란히 드러나서 문호(門戶)가 너무 성만(盛滿)한데도 계단이나 진흙구덩이를 걷듯이 갈팡질팡하며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갈 줄을 모른 탓으로 이런 말이 성상께 들리게 하였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감히 한 순간인들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도성(都城) 밖으로 나아가니, 비답하기를,
"박규문의 소장이 윤유를 핑계대기는 했지만 그 말이 매우 무상(無狀)하다. 이는 세도(世道)가 부랑(浮浪)한 소치에 불과하니, 입에 올릴 것이 무어 있겠는가?"
하였다.
9월 23일 정미
별이 옥정성(玉井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크기가 바리때만 했고 꼬리의 길이는 4,5척(尺)쯤 되었다. 적색(赤色)이었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다.
9월 24일 무신
송성명(宋成明)을 대사헌으로, 윤광운(尹光運)을 헌납으로, 조상명(趙尙命)을 정언으로, 송인명(宋寅明)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이익한(李翊漢)을 한성 우윤(漢城右尹)으로, 이흡(李潝)을 교리로, 김시환(金始煥)을 예조 판서로, 조엄(趙儼)을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삼았다.
전라도에 여역(癘疫)이 크게 번졌다. 영광군(靈光郡)에 해일(海溢)이 일어났다.
경상도 풍기(豐基)·예천(醴泉)·용궁(龍宮)·영천(榮川)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9월 25일 기유
도승지 조석명(趙錫命)이 세 번 정사(呈辭)하였으나, 임금이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박규문(朴奎文)이 윤유(尹游)를 핑계하여 경알(傾軋)하려고 한 정상을 이미 통촉하여 알고 있다. 도승지가 곧이어 단자(單子)를 올린 것도 반드시 여기에 연유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경알하는 무리들이 오늘 갑성(甲姓)을 써서 바치고 내일 을성(乙姓)을 써서 바쳐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모두 축출시키고야 말 것이다. 이 뒤로 이 일로 인하여 현도(縣道)를 통하여 봉장(封章)을 올리는 경우는 모두 봉입(捧入)하지 말도록 특별히 신칙을 더하라. 그리고 입성(入城)하도록 재촉하라."
하였다.
9월 26일 경술
정언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박규문(朴奎文)의 상소를 신은 적이 개탄하고 분완(憤惋)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먼저 조씨(趙氏)·송씨(宋氏)의 여러 사람들을 발탁하여 임용하시는 지라 일종의 불령한 무리들이 ‘조(趙)·송(宋)의 건곤[趙宋乾坤]’이라는 네 글자를 지어 내어 비방하는 계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지난번 윤유가 송성명(宋成明)과 정목(政目) 사이의 일로 인해 ‘이것도 이른바 조(趙)·송(宋)의 건곤이라는 것인가?’ 하고 농담하면서 서로 한바탕 웃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상소에 쏟은 정신이 동쪽에 뜻을 두고 있으면서 서쪽을 말하고 겉으로는 돕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배척하고 있습니다. 엄한 비답을 내려 무겁게 감단(勘斷)하지 않으신다면 아첨하는 무리들을 장차 징계하여 금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박규문의 일은 지금 그대의 상소를 살펴보고서야 본건의 일을 상세히 알았다. 이런 부류들에게 어떻게 청직(淸職)을 더럽히게 할 수 있겠는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는 헌직(憲職)에 의망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9월 27일 신해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윤유(尹游)가 박규문(朴奎文)의 말로 인해 상소하여 대변(對辨)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그의 상소에 이른바 ‘탑전(榻前)에서 능욕을 가했다.’는 말은 그날의 주대(奏對)가 오로지 진자(賑資)를 청해 얻으려는 데 있었을 뿐이었으니 어찌 한 마디인들 대신(大臣)과 승강이한 적이 있었습니까? 단지 식량을 구하려는 뜻이 지극히 간절했기 때문에 강도(江都)의 백성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는지라, 대신이 이로 인해 추고할 것을 청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른바 대신에게 욕설을 가했다고 운운한 것에 대해서는, 신과 대신은 척의(戚誼)와 교분(交分)이 세상에서 이른바 성(姓)이 다른 형제라는 그런 사이입니다. 신이 등대(登對)하기 전에 몸소 그의 집에 가서 진사(賑事)에 대해 간절히 부탁을 했는데도 전석(前席)에 등대하여서는 도리어 어렵게 여기는 기색이 있었기 때문에 좁은 마음에 분개스러움이 없지 않아서 물러나와 두서너 친구에게 말하기를, ‘대신이 백성을 위하는 일에 대해 돌아보려 하지 않고 있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인정이 없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가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정신을 쏟은 것이 오로지 조(趙)·송(宋)의 설에 있었던 것같이 하니, 그 계책을 꾸민 것이 여기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이 예판(禮判) 송성명(宋成明)과 우연히 농담을 하긴 했습니다만 신도 후회하였습니다. 그런데 뒤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일종의 틈을 노리는 자가 이 말을 잡고 늘어져 기화(奇貨)로 삼고 있다고 했는데, 이제 대신(臺臣)도 억지로 뜯어 맞추어 말을 만들어서 아울러 중상한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아! 또한 참혹한 일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 일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어제 조상명(趙尙命)의 상소로 인해 더욱 상세히 통촉하고 있다."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송인명(宋寅明)이 박규문(朴奎文)의 상소로 인해 또 상소하여 대변(對辯)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통촉하고 있다."
하였다.
9월 30일 갑인
윤광운(尹光運)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32권, 영조 8년 1732년 11월 (0) | 2025.09.11 |
|---|---|
| 영조실록32권, 영조 8년 1732년 10월 (1) | 2025.09.11 |
| 영조실록32권, 영조 8년 1732년 8월 (0) | 2025.09.11 |
| 영조실록32권, 영조 8년 1732년 7월 (0) | 2025.09.11 |
| 영조실록31권, 영조 8년 1732년 6월 (0) | 2025.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