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2권, 영조 8년 1732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1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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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을묘

임금이 특지(特旨)로 교리 이흡(李潝)을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교리 조한위(趙漢緯)를 가산 군수(嘉山郡守)로, 수찬 한현모(韓顯謨)를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내쳤는데, 누차 소명(召命)을 어겼기 때문이다. 곧이어 우의정 서명균(徐命均)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아울러 모두 정지시키게 하였다.

 

남태경(南泰慶)을 헌납으로, 신방(申昉)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이세근(李世瑾)을 지의금(知義禁)으로, 심성희(沈聖希)를 부교리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일 병진

신무일(愼無逸)을 대사간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부수찬으로, 조명택(趙明澤)을 부교리로 삼았다.

 

10월 4일 무오

정시(庭試)를 행하였다. 임금이 정시의 시관(試官) 망단자(望單子)에 두 사람을 주의(注擬)했다 하여 해방 승지(該房承旨)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정시와 알성시(謁聖試)의 시관은 반드시 3원(員)을 의망하게 하고 이어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10월 4일 무오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언섭(鄭彦燮)이 장계(狀啓)하기를,
"의여(義如)는 곧 평미일(平彌一)의 고친 이름입니다. 봉행(奉行)의 정서(呈書)는 뒷날 빙험(憑驗)이 되기에 충분하니, 진실로 전례에 의거 접대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 ‘당초에 책유(責諭)한 것은 단지 두 나라가 교제(交際)하는 체통이 중하기 때문이었고, 오로지 평미일이 명호(名號)를 고친 데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이제 봉행(奉行)의 정서(呈書)라 하여 즉각 접대를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순치(順治)병신년243)  의 전례가 근거를 삼을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뒤 을사년244)  에 이미 신규(新規)가 있었으니, 이제 신규를 버리고 구규(舊規)를 인용하여 풍속이 다른 사람들의 오만하고 쉽게 여기는 습관을 열어놓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사리에 의거해 효유(曉諭)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0월 5일 기미

정시(庭試)의 방(榜)을 내고 오대관(吳大觀) 등 10인을 뽑았다.

 

10월 6일 경신

우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지금 백성의 일이 급박하기가 지난해보다 더 심합니다. 진청(賑廳)으로 하여금 급궤(給饋)하게 하고 싶지만 실로 계속하기가 어려운 근심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방금 옷이 얇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245)  를 지급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위에 있는 사람이 본시 널리 은택을 베풀 수는 없는 것이니, 사람들이 모두 동포(同胞)의 의(義)를 생각하여 각기 보는 대로 행랑 아래 데려다 두고서 추위와 배고픔을 면하게 해 준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버려진 아이를 구해 살려줄 경우 그 아이를 부릴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명이 있어 외방에는 알린 적이 있는데, 서울에는 반포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각별히 각부(各部)에 신칙하여 집집마다 데려다 기르게 한다면 길거리에서 죽어 넘어지는 참혹한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거행 조목을 내어 각부에 분부(分付)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병이 위독해 상소하여 정승의 직임에서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은 외람되게도 크게 알아 주시고 예우(禮遇)하심을 받아 벼슬이 이에 이르렀으나, 불충(不忠)하고 성실하지 못한 탓으로 천지 사이에 한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영원히 하직할 때를 당하여 이것이 늘 마음속에 맺혀 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은 것이니 무슨 말인들 다하지 못하겠습니까? 한 실날같은 목숨이 끊기기 전에 이 정승의 직책을 해면시켜 주신다면 성상(聖上)께 있어서는 훈신(勳臣)을 포상 찬미하는 것이 될 뿐만이 아니라 미신(微臣)에게 있어서 어찌 더욱 불세(不世)의 은총이 되지 않겠습니까? 옛말에도 ‘요순(堯舜)을 본받으려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대도(大道)는 한결같이 인조(仁祖)와 효묘(孝廟)처럼 할 것으로 마음을 정하여 강대(剛大)하고 분발하는 뜻을 실추시키지 마소서. 말은 길지만 기운은 짧아서 오열(嗚咽)하면서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기를,
"사직한 정승 직임에 대해서는 경(卿)의 마음이 이미 움직였으니, 이때에 경을 위로하는 것이 어찌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지금 우선 억지로 소청을 따라서 경의 마음을 위로하는 바이다. 상소 끝에 면계(勉啓)한 말은 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윤휘정(尹彙貞)을 사간으로 삼았다.

 

10월 7일 신유

한현모(韓顯謨)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교리 조한위(趙漢緯)가 상소하여 호서(湖西)의 연사(年事)가 흉년이 든 것과 조정에서 재결(災結)을 준 것이 너무 적다는 것을 극력 논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더 주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을 체파(遞罷)시킨 것은 중도에 지나친 조처였음을 논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상소 끝에 진달한 일은 처분이 사체를 중히 여겨서인 것이다."
하였다.

 

10월 8일 임술

정언 권해(權賅)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조정에서 말하는 것을 경계로 삼고 있으므로 정직한 말이 들리지 않고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마디 말이 저촉되어 거스르기만 하면 견벌(譴罰)이 뒤따라 섬이나 변방으로의 귀양이 서로 잇달았으며, 여러 번 큰 사면(赦免)이 있었어도 선발하여 서용하기를 꺼리기에 이르렀으니, 그 누가 우레 같은 위엄을 범하고 만균(萬勻) 같은 권위에 항거하여 스스로 꺾이고 부서지는 지경에 빠져들려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 대명(待命)한 여러 신하들에 대한 처분이 중도에 지나쳤다는 것을 논하고 쾌히 탕척시키는 은전(恩典)을 내려 경재(卿宰)와 시종(侍從)으로서 견책을 당한 사람은 즉시 너그럽게 석방시킬 것과 전후 삼사(三司)의 관원 가운데 찬출(竄黜)된 사람들도 아울러 소환(召還)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대 또한 오랫동안 침체된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영호(營護)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모쪼록 그 직명(職名)을 돌아보고 이렇게 추부(趨附)하는 마음을 제거토록 하라."
하였다.

 

교리 이흡(李潝)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은 부첨(付籤)된 유신(儒臣)들과 애당초 이미 함께 의논했으니, 진퇴 영욕(進退榮辱)이 의리상 혼자서만 다를 수 없습니다. 한쪽은 아직도 벌적(罰籍)에 들어 있는데 한쪽은 영도(榮塗)를 활개치고 달린다는 것은 염치로 헤아려 보건대, 결코 이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니, 도로 내어주라고 명하였다.

 

10월 9일 계해

풍릉 부원군(豐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이 졸(卒)하였다. 조문명은 인품이 총명 영오하고 간결 민첩하였으며,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다. 신축년246)  ·임인년247)  에 김일경(金一鏡)의 무리가 충량(忠良)한 신하들을 도륙(屠戮)하던 때를 당하여 능히 그들을 배척하는 말을 창도하였고, 신임을 받아 등용되기에 이르러서는 힘써 보합론(保合論)을 견지하여 탕평(蕩平)의 정치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본색(本色)을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취여(取與)한 것이 실제로 공의(公議)에 합치되지 않았고 세도(世道)에 해를 끼친 것이 있었다. 번갈아 5영(營)의 대장을 지내 교대로 양전(兩銓)을 장악하였으며, 끝내는 상부(相府)에까지 들어갔으니, 국은(國恩)이 매우 두터웠다. 하지만 보답한 공효는 별로 없었다.

 

하교(下敎)하기를,
"아! 나와 풍릉(豐陵)은 서로를 잘 알고 대우한 군신(君臣) 사이라고 할 만하다. 그가 당색(黨色)에 물들지도 붕당을 짓지도 않는다는 것을 임용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는데, 어제 그의 소본(疏本)을 열람해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그런데 지금 이 소식을 들으니, 도리어 사실이 아닌 것만 같다. 아아! 영의정이 먼저 세상을 버리고 풍릉이 또 떠났으니, 나의 고굉(股肱)을 빼앗음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른단 말인가? 새벽부터 지금까지 멍한 것이 꿈속인 것만 같다. 녹봉(祿俸)은 3년을 기한하여 그대로 지급하고 구재(柩材)는 해서(該署)로 하여금 가려서 보내게 하라. 상수(喪需)와 장수(葬需)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후하게 제급(題給)하게 하고 시호(諡號)는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거행토록 하라. 그리고 승지를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부원군(府院君)의 상사(喪事)에 빈궁(嬪宮)은 당연히 거애(擧哀)해야 합니다. 《오례의(五禮儀)》의 세자빈(世子嬪)이 부모(父母)를 위하여 거애하는 의절(儀節)에 소복(素服)으로 변복(變服)하고 제4일에 이르러 최복(衰服)으로 성복(成服)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래 제복의(除服儀) 소주(小註)에 ‘13개월에 제복하는데, 공제(公除)248)  하는 예(禮)는 13일 만에 제복한다.’고 되어 있으니, 지금 의당 이에 의거해서 행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공제하는 예는 전부터 품지(稟旨)한 뒤에 거행해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10월 12일 병인

이조에서 아뢰기를,
"경기도 안성 군수(安城郡守) 조영록(趙榮祿)과 경상도 밀양 부사(密陽府使) 정혁선(鄭赫先)은 진구(賑救)를 잘한 것이 도내(道內)에서 으뜸이니, 가자(加資)해야 마땅합니다. 상주(尙州)의 전 목사(牧使) 최창민(崔昌敏)은 잘 진구했습니다만 이미 당상(堂上)을 지냈으니, 이제 갑자기 덕 있는 이에게 임명하는 명기(名器)를 제수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숙마(熟馬)를 하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차등을 두어 논상(論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도목정(都目政)249)  을 행하였다. 김동필(金東弼)을 판돈녕(判敦寧)으로, 조원명(趙遠命)·이정소(李廷熽)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송인명(宋寅明)을 우참찬(右參贊)으로, 홍원익(洪元益)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이한필(李漢弼)을 승지로 삼았다. 이한필은 무신(武臣)이다.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참판 신방(申昉)·참의 이유(李瑜)와 병조 판서 김취로(金取魯)의 정사(政事)였다.

 

10월 13일 정묘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연사(年事)가 거듭 흉년이 든데다가 경외(京外)의 저축이 바닥이 났으니 삼남(三南)과 경기영(京畿營)의 관수(官需)는 종전대로 아울러 8분의 1을 감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양의 응당 내려주어야 할 선가(船價) 이외에는 8분의 2를 감하게 하고 경기영과 관수 가운데 잡비(雜費)는 삼남의 준례에 의거하여 8분의 2를 감함으로써 절약하고 감손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날 또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윤광운(尹光運)을 부교리로, 심성희(沈聖希)를 부수찬으로, 안경운(安慶運)을 장령으로, 정희보(鄭熙普)를 정언으로, 신방(申昉)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김흥경(金興慶)을 지중추(知中樞)로 삼았다.

 

10월 14일 무진

월식(月蝕)이 있었다.

 

가례청(嘉禮廳)에서 아뢰기를,
"전부터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의 가례(嘉禮)의 외선온(外宣醞)이 있을 때에는 단지 내자시(內資寺) 관원만 진참(進參)했습니다. 무자년250)   왕자 가례의 외선온 때에 소시(小寺)의 말단 관리가 행례(行禮)하는 것이 실로 너무 간략하고 소홀히 여기는 데에 관계된다 하여 승지(承旨)에게 진참하도록 명했는데, 그뒤 그대로 준례가 되었습니다. 지금 화순 옹주(和順翁主)의 가례의 납채일(納采日)·납폐일(納幣日)·친영일(親迎日)에 있을 외선온 때에도 또한 전례에 의거하여 승지를 진참하게 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국상(國祥)에 참여하지 않은 여러 신하들의 직첩(職牒)을 도로 내어 주고 파직한 자는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염우(廉隅)가 너무 지나친 때를 당하여 불경(不敬)하다 이르면서 행공(行公)하라고 핍박하는 것은 신하를 예(禮)로 부린다는 도리에 어긋나는 처사이다. 지난번 판부(判付) 가운데 ‘대불경(大不敬)’이라는 세 글자를 중법(重法)이라고 고쳐서 여러 신하들이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송성명(宋成明)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바야흐로 《예기(禮記)》를 강(講)하고 계신데 《예기》는 편간(編簡)에 착오가 많고 전주(箋註)에도 의심스러운 곳이 많아 하나의 미완성된 책인지라, 끝내 절실하게 공부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신은 그 가운데 성학(聖學)과 방례(邦禮) 등에 절실한 약간편(若干篇)을 뽑아내어 먼저 강하고, 강이 끝난 뒤에는 범연히 다른 책을 볼 필요 없이 바로 《논어》·《맹자》·《중용》·《대학》을 가지고 반복해서 깊이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대(召對)에 이르러서는 정자(程子) 등 여러 현인(賢人)의 주차(奏箚)를 취해 따로 한 책을 만들어 항상 그것을 열람하신다면 항상 힘써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양사(兩司)의 신하가 소매에 홀기(笏記)251)  를 넣고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면 전하께서는 어탑(御榻)에 앉아 굽어보시는데 그때 이미 하찮게 여기는 기색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러니 대각(臺閣)의 풍절(風節)이 자연히 저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윤회 장령(輪回掌令)’이라는 네 글자를 거론하셨는데 이 또한 전하의 실언이었습니다. 속설(俗說)이 이러하더라도 임금의 큰 도량으로 어찌 이런 하교를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면계(勉啓)한 일에 어찌 유의하지 않겠는가? 책자(冊子)는 홍문관으로 하여금 영사(領事)에게 문의(問議)하여 품지하게 하라."
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여 사국(史局)의 단천(單薦)이 공평하지 못한 데 대한 폐단을 극력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당쟁이 극도에 이르러 살벌(殺伐)을 일삼으면 화복(禍福)이 이와 관계되는지라 모두 공손하고 연약한 데 힘씁니다. 벼슬에 대한 욕심이 극심하여 아첨하고 빌붙는 것이 풍습을 이루면 귀천(貴賤)이 이와 관계되는지라 구차스런 짓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위에서는 아래를 검속하는 정사가 없고, 아래에서는 위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탓으로 방백(方伯)이 법을 범해 가면서 아내를 데리고 가는가 하면 곤수(閫帥)가 법을 범해 가면서 어미를 데리고 갑니다. 때문에 금석(金石) 같은 법전(法典)이 크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령(守令) 중에 마음대로 관소(官所)를 버린 자를 박한 벌로 정배(定配)시켰다가는 곧이어 석방하고, 탐리(貪吏)로서 방금 장물(贓物)을 추징당하고 있던 자가 갑자기 풍요로운 고을에 부임되어 가는데, 대신(大臣)은 그것이 그른 것인 줄 알면서도 죄줄 것을 청하지 않고 있고, 대관(臺官)은 그것이 그른 줄을 알면서도 말을 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법을 엄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일이 점점 느슨해져 범법자가 경계할 줄을 모르고 있으며, 전하께서 탐욕을 징계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조금만 세력이 있으면 주의(注擬)하는 자가 어렵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조정의 거조가 이러하니 이를 보고 듣는 사방 사람들이 그 누가 두려워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 삼남(三南)의 흉황(凶荒)과 저축이 공허한 정상에 대해 진달하고 또 관동(關東)의 곡식을 제때 조속히 운송하여 오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아뢰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중도에 지나친 데가 없지는 않지만 말은 절실한 것이었다."
하였다.

 

10월 15일 기사

우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관동의 곡식 2만 석을 기백(畿伯)에게 보내어 재해를 당한 각 고을에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0월 16일 경오

달이 정성(井星)으로 들어갔다.

 

10월 17일 신미

충청도 예산(禮山)의 유학(幼學) 신대수(辛大遂)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고(故) 참찬(參贊) 김간(金榦)을 본고을에 있는 기묘 명현(己卯明賢) 김구(金絿)의 서원(書院)에 배향(配享)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진이를 높이는 일은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합향(合享)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흡(李潝)을 교리로 삼았다.

 

이흡(李潝)·이주진(李周鎭)을 별겸춘추(別兼春秋)로 삼았다.

 

10월 19일 계유

임금이 특별히 비국(備局)과 진청(賑廳) 및 기호(畿湖)의 도신(道臣)에게 칙유(勅諭)를 내려 진제(賑濟)의 공효가 있게 하도록 하였다.

 

10월 19일 계유

충청도의 진사(進士) 곽수엽(郭守熀) 등 2백 31인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행 사직(行司直) 이재(李縡)는 학문에 뜻을 둔 나이 때부터 도(道)를 탐구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갑과(甲科)에 합격하였었으나 영도(榮塗)를 사양하고 즉시 산림(山林)으로 돌아가 학문을 강론하면서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인덕(仁德)을 배양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고 성세(聖世)의 숙덕(宿德)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여러 신하들을 책벌할 적에도 전하께서 이재가 종전에 염퇴(恬退)했다 하여 특별히 구별하게 하셨으니, 진실로 성명(聖明)께서 대우하심에 제료(諸僚)들과는 차이를 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돌아가기를 고하면서 올린 상소는 의리가 명백하고 성의가 흘러 넘쳐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세도(世道)를 만회시키기에 충분했는데도, 전하께서는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거절하는 사색(辭色)을 보였으니, 전하께서 이재를 대우하심이 어쩌면 그리도 박할 수 있습니까? 이재는 도덕이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스스로 늘 부족하게 여겼으며 학문이 천인(天人)의 관계를 통달하였어도 늘 부족하게 여기면서 유자(儒者)로 자처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조정에서 진달한 사람이 있지 않았으니, 전하께서 들으신 것은 글을 읽은 사람이라는 것에 불과하였고 보신 것은 염퇴한 절조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를 이처럼 하찮게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 등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혹 이재가 애초 과목(科目)을 거쳤다 하여 이렇게 경시하시는 것인지요? 아니면 붕당(朋黨)을 미워하시는 마음이 너무 지나치신 나머지 이재가 당외(黨外)의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싫어하고 박하게 대하는 것입니까? 예로부터 유현(儒賢) 중에는 과제(科第)를 거쳐 벼슬에 나아간 사람이 많았습니다. 정백자(程伯子)는 전전(殿前)에서 급제·발탁되었고, 주회암(朱晦菴)은 진사(進士)로 출신(出身)하였으며,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이 모두 과목 속의 사람들로서 멀리 염락(濂洛)252)  의 통서(統緖)를 이었으니, 과목이 또한 당세의 대유(大儒)가 되는 데 무슨 해가 될 것이 있습니까? 맹자(孟子)는 일찍이 양주(楊朱)·묵적(墨翟)을 물리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성인(聖人)의 문도(門徒)로 여겼습니다. 이는 바로 맹자 또한 공자(孔子)의 당(黨)이요, 정자(程子)는 낙당(洛黨)253)  의 우두머리며 주자(朱子)는 위학(僞學)254)  의 괴수가 되었던 것이니, 당이 또한 무슨 해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선조(先朝)의 학문을 숭상하던 뜻을 본받아 힘써 성의(誠意)를 쌓으시어 이재를 초치하고 그로 하여금 빈연(賓筵)에 출입하게 하여 계옥(啓沃)255)  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소를 봉입(捧入)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하교하기를,
"내가 증오하는 것은 군부(君父)의 마음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재가 염결(廉潔)하다는 것은 내가 이미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번 소장의 말에 찌꺼기가 없지 않았기 때문에 간략히 은미한 뜻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린 지 오래되지 않아서 호유(湖儒)를 칭탁하여 감히 군부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고 있다. 낙당(洛黨)·촉당(蜀黨)256)  이니 한탁주(韓侂胄)257)  니, 주자니 하는 이야기들은 이것이 이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로 마음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키려 하니 그 계획이 오활하고도 졸렬하다. 원소(元疏)는 도로 내어주고 그 무리들로 하여금 물러가서 학업을 연마하게 하라."
하고, 또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재의 문도(門徒)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모록(冒錄)한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이런 뜻으로 소두(疏頭)258)  에게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10월 20일 갑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하였다. 함경 감사 정형익(鄭亨益)이 장계(狀啓)하여 흉황의 재변에 대해 극력 진달하고, 본도(本道)의 진상가(進上價) 중 특교(特敎)로 권감(權減)한 잡곡(雜穀) 1천여 석(石)과 제방미(除防米) 1천여 석을 진구(賑救)의 자본에 보태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우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불가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 곡식을 저장한 것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찌하여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별히 획급(劃給)하고 제방미도 그 절반을 지급하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서명균이 이어 아뢰기를,
"호서(湖西)에 큰 흉년이 들어서 도적의 우환이 점차 크게 일어나고 있으니, 견감(蠲減)하고 안집(安集)시킬 방도를 강구해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구환상(舊還上)과 구신포(舊身布) 가운데 기유년259)  ·경술년260)  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독책을 늦추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백성들의 죄가 아니라 곧 수령과 감사의 죄다. 지금 경용(經用)이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진념(軫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명(皇明)의 일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이자성(李自成)261)  의 변란은 오로지 민심을 잃은 데 연유한 것이었다. 호서의 미수된 구조(舊條)를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시키게 하라."
하였다. 좌참찬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기유년·경술년은 곧 풍년이 든 해인데 어찌 받아들이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투절(偸竊)하는 것을 수령이 잘 검칙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경술년 조를 받아들이지 못한 수령들 가운데 이미 체직된 사람은 왕부(王府)에서 결장(決杖)하고 현임(現任)에 있는 사람은 영문(營門)에서 결장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수령이 교자(轎子) 타는 것을 금하게 하고 별성(別星)262)  의 지공(支供)을 감하게 하였으니,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따른 것이다.

 

진청 당상(賑廳堂上)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마른 식량을 계속 잇대어 주기 어려우니 결국 죽을 쑤어서 주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정(賑政)은 마른 식량이나 죽을 쑤어 주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당상(堂上)의 선(善)과 불선(不善)에 달려 있다. 정유년263)   이후 백성들이 많이 죽지 않은 것은 실로 이 마른 식량에 힘입은 것이다. 마른 식량을 속이고 받아가는 폐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우리 백성들에게 잃는 것이니, 불가할 것이 없다. 마른 식량을 발매(發賣)하고 죽을 쑤어 3층(層)으로 나누어주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진청 당상(賑廳堂上) 2원(員)과 낭청(郞廳) 4원을 더 차출하라고 명하였는데, 우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청한 것이다.

 

다시 영변(寧邊)·용천(龍川) 두 고을에 토포사(討捕使)를 겸임시키게 하였다. 이에 앞서 군제(軍制)를 변통할 적에 모두 혁파하는 데로 들어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사(兵使) 김흡(金潝)이 복구를 청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전 경상 감사 조현명(趙顯命)을 삭직(削職)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조현명이 신백(新伯)과 미처 교귀(交龜)264)  하기 전에 그의 형인 조문명(趙文命)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의 인부(印符)를 가도사(假都事)에게 주고서 곧바로 상경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10월 21일 을해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2일 병자

조원명(趙遠命)을 대사간으로, 김진상(金鎭商)을 사간으로, 유최기(兪最基)를 지평으로 삼았다.

 

10월 23일 정축

빈궁(嬪宮)이 복(服)을 벗었는데, 이는 사친(私親)을 위해 공제(公除)한 것이다. 그 의주(儀註)에 이르기를,
"그날 3각(刻) 전에 장정(掌正)이 빈궁의 제복위(除服位)를 별당(別堂) 동쪽 벽에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양제(良娣) 이하의 곡위(哭位)와 봉위위(奉慰位)를 빈궁위(嬪宮位) 앞에 설치한다. 2각 전에 양제 이하가 최복(衰服)을 입고 합문(閤門) 밖에 나열하면 수칙(守則)이 꿇어앉아 내엄(內嚴)을 찬청(贊請)한다. 1각 전에 수칙 1인이 동쪽 계단 위로 올라가서 서고 장서(掌書) 1인은 동쪽 계단 밑에 서고 장봉(掌縫)이 광주리에다 소복(素服)을 받쳐들고 동쪽 계단에 올라가서 북쪽을 향하여 서면 여시자(女侍者)가 양제 이하를 인도하여 들어가 자리로 나아간다. 수칙이 꿇어앉아 외비(外備)를 아뢰면, 빈궁이 최복(衰服) 차림으로 나와 좌석으로 나아가고 시위(侍衞)하기를 평상시와 같이한다. 장서가 ‘재배(再拜)’를 창(唱)하면 양제 이하가 재배하고, 수칙이 ‘곡(哭)’을 찬청(贊請)하면 빈궁이 곡한다. 【시녀(侍女)들도 모두 곡한다.】  장서가 꿇어앉아 부복(俯伏)하고 곡하라고 창하면 양제 이하가 꿇어앉아 부복하고 곡한다. 【열 다섯 번 곡소리를 낸다.】  수칙이 지곡(止哭)·제복(除服)을 찬청하면 빈궁은 곡을 그친다. 이에 장서가 ‘지곡·흥(興)·평신(平身)’을 창하면 양제 이하가 곡을 그치고 일어나 평신한다. 장봉이 소복을 받들고 꿇어앉아 올리면 수칙이 꿇어앉아 ‘변복(變服)’을 찬청한다. 【변복할 때 임시로 보장(步障)을 설치했다가 곧 제거한다. 시녀들도 따라 변복한다.】  여시자가 양제 이하를 인도하여 임시 물러갔다가 변복한 뒤에 도로 들어와 자리로 나아간다. 수칙이 꿇어앉아 곡을 찬청하여 빈궁이 곡하면  【시녀들도 모두 곡한다.】  장서가 꿇어앉아 ‘부복·곡’을 창하여 양제 이하가 꿇어앉아 부복하고 곡한다. 【열 다섯 번 곡소리를 낸다.】  수칙이 꿇어앉아 지곡을 찬청하여 빈궁이 곡을 그치면, 장서가 ‘지곡·흥·재배·평신’을 창하여 양제 이하가 곡을 그치고 일어나 평신한다. 여시자·반수(班首)가 봉위위(奉慰位)로 나아가 꿇어앉고 장서가 ‘꿇어앉으라’고 창하여 양제 이하가 꿇어앉으면, 반수가 진명(進名)하고 봉위(奉慰)한다. 장서가 ‘부복·흥·평신’을 창하면 양제 이하가 부복하고 일어나 평신하고 반수는 본위(本位)로 돌아간다. 수규가 빈궁을 인도하여 안으로 돌아가면 시위(侍衞)하기를 평상시와 같이하며, 여시자가 양제 이하를 인도하여 나아간다."
하였다.

 

10월 23일 정축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언섭(鄭彦爕)이 장계(狀啓)하기를,
"관수왜(館守倭)265)  가 와서 말하기를, ‘경술년266)  에 도주(島主) 평의성(平義城)이 죽은 뒤 그의 아들 평미일(平彌一)이 어려서 승습(承襲)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아우 방희(方熙)가 우선 임시로 업무를 보살피고 있었는데, 금년 봄 관백(關白)이 평미일에게 4품 대부(四品大夫)의 직을 하사하고 의여(義如)라고 이름을 고친 다음 이어 승습할 것을 허락했으므로 장차 경사(慶事)를 고하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교리 윤광운(尹光運)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처음 전랑(銓郞)에 통망(通望)되었을 적에 낭관(郞官)이 장석(長席)과 크게 서로 다투고 따지다가 붓대를 던지고 일어나 나간 일까지 있었으니, 전장(銓長)의 뜻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신이 일찍이 시강(侍講)하는 자리에서 병을 앓은 탓으로 독서(讀書)하지 못한 일을 거론하면서 심각한 기롱과 배척을 가하여 ‘어찌 이런 옥당(玉堂)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으니, 그가 아울러 관직(館職)까지 저지시키려는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그뒤 좌참찬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기를,
"신이 정조(政曹)에 대죄하고 있을 적에 낭관이 전랑(銓郞)을 새로 통의(通擬)하자는 의논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도당(都堂)의 신록(新錄)이 곧 이루어지려는 상황이었고 신록이 이루어진 뒤에는 장차 본조(本曹)에서 통의할 사람을 기록해야 하겠기에 신이 새로 통의하려고 하지 않았더니, 낭관이 굳이 청하기를 마지 않다가 붓대를 던지고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래서 신이 뜻을 굽혀 억지로 따랐던 것일뿐, 처음부터 천의(薦擬)한 사람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10월 24일 무인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정제(李廷濟)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아조(我朝)에서는 오로지 《대명률(大明律)》만 쓰고 있는데, 중국은 우리 나라와 거리의 멀고 가까움이나 형벌의 가볍고 무거움이 본시 같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전속록(前續錄)》·《후속록(後續錄)》은 열성(列聖)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으로 법을 세운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만, 조목(條目)에 혹 미비한 점이 있고, 《수교집록(受敎輯錄)》은 강희(康熙)무인년267)  에 완성되었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35년 사이에 전후에 수교(受敎)한 것이 또한 매우 많습니다. 혹은 연석(筵席)에서 변통하기도 하고 혹은 특별히 판부(判付)를 내린 것도 있는데 본조(本曹)에 그 등본(謄本)이 없는 것이 많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무인년 이후 중외(中外)에서 수교한 것을 모두 참작과 산삭(刪削)을 가하고 정리해서 수교 속편(受敎續編)을 만들어 운각(芸閣)으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고, 또 각 고을에 편배(編配)된 죄인들이 도망하는 폐단에 대해 말하면서 사면 단자(赦免單子) 가운데 도망한 사람이 많을 경우 도신(道臣)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읍재(邑宰)는 도신으로 하여금 엄한 논감(論勘)을 가하게 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제도(諸道)에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10월 27일 신사

유건기(兪健基)를 지평으로, 김흥경(金興慶)을 공조 판서로, 이기익(李箕翊)을 병조 참판으로, 유척기(兪拓基)를 동의금(同義禁)으로, 황정(黃晸)을 부응교로 삼았다.

 

경기 감사 윤양래(尹陽來)가 상소하여 백성은 굶주리고 곡식은 떨어졌는데, 진제(賑濟)할 방책이 없다는 것을 극력 진달하면서 해서(海西)로 운송할 쌀 1만 석(石)과 관서(關西)의 세태(稅太)를 쓰게 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곧이어 묘당의 복주(覆奏)로 인해 해서의 곡식을 먼저 지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사헌부 【장령 이광식(李光湜)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곤월(閫鉞)268)  의 기탁(寄托)은 어디인들 중임(重任)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서관(西關)에 이르러서는 다른 곳에 견주어 볼 때 더욱 특별한 곳입니다. 새 병사(兵使) 이수량(李遂良)은 늙고 무능한 사람이라 결단코 감당하기 어려우니, 체차(遞差)시키소서. 금산 군수(金山郡守) 이보춘(李普春)은 권분(勸分)을 핑계로 부유한 백성들을 수괄(搜括)하여 강제로 돈과 쌀을 빼앗아 책임막음으로 나누어 주고 나서는 호중(湖中)으로 실어다가 많은 전토(田土)를 매입(買入)하였으며, 또 응당 받아들여야 할 세금 이외에 벼도 받아들이고 쌀도 받아들여 모두 사사로이 써버렸으니,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잡아오게 하소서."
하였으나,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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