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32권, 영조 8년 1732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1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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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갑신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일 을유

서명구(徐命九)를 승지로, 민정(閔珽)을 장령으로, 한현모(韓顯謨)를 수찬으로 삼았다.

 

11월 3일 병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4일 정해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작년에 큰 흉년이 든 끝에 금년이 또 이러하니, 아! 생민(生民)들을 어떻게 구제하여 살린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옥식(玉食)이 어찌 편안하랴? 더구나 양복(陽復)269)  이 내일로 다가와 바로 하늘의 도(道)를 본받아 인(仁)을 행해야 할 때를 당해서야 말해 무엇하랴? 삼명일(三名日)270)  에 봉납하는 갑주 가미(甲胄價米)를 특별히 감면하여 기호(畿湖)에 나누어 주게 함으로써 내년의 진제(賑濟)에 보태게 하라. 그리고 기호(畿湖)와 양남(兩南)의 정조 방물(正朝方物)도 정봉(停封)하게 하고 그 가미(價米)를 진제에 보태게 하라. 수령과 도신들은 내가 정섭(靜攝)하고 있는 가운데 간절하게 생각하는 뜻을 몸받아 태만하거나 소홀히 함이 없도록 하여 작년에 겨우 살아난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호유(湖儒)들이 소장을 올려 이재(李縡)를 소환(召還)할 것을 청했을 적에 특히 내린 비망기(備忘記)의 사지(辭旨)가 엄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대저 재신(宰臣)이 부화(浮華)함을 버리고 실상을 취택하며, 학문을 독실히 하여 뜻을 이루기를 추구하는 것은 또한 이미 옛사람에 견주어 부끄러울 것이 없어 한 세상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진달한 한 상소의 비교(批敎)는 공평함을 잃어 싫어하고 박대하는 뜻을 현저히 드러내어 보이셨습니다. 예로부터 유현(儒賢)을 부르기를 청하는 상소는 모두 많은 선비들의 공론(公論)에서 나오는 것으로 직접 수업한 제자들은 혐의하여 참여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상소에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호중(湖中)의 선비들로서 그의 문도들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비망기에서 문도라고 말하신 것은 의심이 너무 지나침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장황하게 모록(冒錄)했다느니 간상(奸狀)을 타파해야 한다느니 하는 등의 하교는 너무 박절한 데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특히 대성인(大聖人)의 사령(辭令)이 아니니, 삼가 바라건대, 도로 비망기를 들여오게 하여 일일이 산삭(刪削)함으로써 성덕(聖德)이 더욱 빛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의 하교는 유자(儒者)들로 하여금 덕업에 힘쓰고 문화(文華)를 제거하게 하기 위한 뜻이었을 뿐이었다. 본디 이재를 싫어하거나 박하게 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하였다.

 

11월 6일 기축

송교명(宋敎明)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전 영평 현감(永平縣監)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하고 공명첩(空名帖)을 제도(諸道)에 내려주어 곡식을 사서 진구(賑救)에 보태게 하였다. 이때 해마다 큰 흉년이 들어 곡식의 저축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11월 7일 경인

홍경보(洪景輔)를 승지로, 이흡(李潝)을 집의로, 김동필(金東弼)을 형조 판서로, 유최기(兪最基)를 정언으로, 조명택(趙明澤)을 부교리로, 조적명(趙迪命)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사헌부 【지평 유건기(兪健基)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전 지평 이유신(李裕身)이 아뢰지 못하고 소매 속에 간직하고 있던 소장(疏章)이란 곧 전 충원 현감(忠原縣監) 정익하(鄭益河)를 논한 것이었습니다. 계사(啓辭)의 말은 등람(登覽)되지 못하였으나 송징계(宋徵啓)의 상소에서 또한 이미 이 일에 대해 언급하였으니, 곧 이미 발론된 백간(白簡)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가 논핵한 말 가운데서 큰 것을 지적해 취한다면 그 조목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5천 냥의 결전(結錢)을 자기 집으로 실어간 것, 2백 석(石)의 관미(官米)를 은밀히 고을에다 숨겨 둔 것, 60간의 큰 집을 본경(本境)에다 지은 것, 한 큰 들녘의 기름진 토지를 이웃 고을에 점유해 놓았다는 일이었습니다. 아! 진실로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익하는 본시 애석해 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풍문에 전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 아니라면 어찌 정익하에게 지극히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체(國體)에 있어서도 의당 한 번의 구핵(究覈)은 있어야 할 것이니, 정익하를 잡아다 추문하여 핵실(覈實)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익하의 인품은 참하(參下) 때부터 알고 있은 지 오래다. 그가 탐오하다는 것은 너무도 가깝지 않은 말이다. 틀림없이 의저(疑阻)의 소치인 것 같으나, 또한 애매하게 방치해 둘 수는 없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나문(拿問)하자 정익하의 공사(供辭)가 대계(臺啓)와 상반되었으므로, 임금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다.

 

11월 8일 신묘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9일 임진

날씨가 춥다 하여 옷이 얇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홍창한(洪昌漢)·조명리(趙明履)를 봉교(奉敎)로 삼았다.

 

11월 11일 갑오

윤혜교(尹惠敎)를 대사헌으로, 조한위(趙漢緯)를 수찬으로, 유수(柳綏)를 승지로, 윤광운(尹光運)을 겸 교서 교리(兼校書校理)로 삼았다.

 

11월 14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16일 기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7일 경자

조명익(趙明翼)을 행 도승지(行都承旨)로, 정우량(鄭羽良)을 대사간으로, 유척기(兪拓基)를 좌윤(左尹)으로, 이흡(李潝)을 사인(舍人)으로, 임정(任珽)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18일 신축

전 지평 이유신(李裕身)이 상소하였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어제 들은 바에 의하면 어떤 대신(臺臣)이, 신이 올리지 못한 탄문(彈文)에 대해 대략 논계(論啓)했는데, 수인(囚人) 정익하(鄭益河)가 스스로 해명하면서 올린 공사(供辭)가 매우 방자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신이 다 진달하지 않으면 그 간상(奸狀)을 파헤칠 수 없을 듯합니다. 아! 저 정익하가 백성을 침학하고 탐오를 자행한 정상이 낭자하게 전파되어 어떤 이는 ‘궁방(宮房)의 세지(稅地)에서 강제로 전세(田稅)를 징수했다.’ 하고, 어떤 이는 ‘진제(賑濟)에 보탠다는 핑계로 복호(復戶)271)  를 팔아 돈을 받아들였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은결(隱結)에 대해 돈을 받아 은밀히 유리(由吏)272)  에게 건네주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관미(官米) 수백 석을 교묘한 명목으로 만들어 고을 아래 근처에 내어다 두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복호한 세태(稅太)를 모두 도점(盜占)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저치미(儲置未)를 사사로이 썼다.’고 하고, 어떤 이는 ‘6백 석(石)의 조(租)를 미처 몰래 옮기지 못했던 탓으로 신관(新官)에게 발각당하자 백문(白文)으로 중기(重記)273)  에 추록(追錄)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환조(還租)를 내어다 팔아서 관속(官屬)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요리(料理)하여 비납(備納)하게 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한 큰 들녘을 단양(丹陽)에 사서 점유하고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청풍(淸風)의 전세(田稅)를 청풍 본가(本家)에 유치(留置)시키고 충원(忠原)에서 추이(推移)해 실어다 놓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창역(倉役) 때문에 기와를 굽는다고 핑계대고 민가(民家)의 구목(丘木)274)  을 베어다가 경강(京江)에서 팔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환조(還租)를 대봉(代捧)하여 그 잉여곡을 진곡(賑穀)으로 지급한다고 제하고 나서는 진곡은 조금도 쓴 것이 없다’고 하고, 어떤 이는 ‘진청(賑廳)의 첩문(帖文)을 가지고 콩을 사서 장(醬)을 담구어 관모선(官耗船)에 주어 본가(本家)로 운송하여 가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외의 자질구레한 조항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 죄목을 열거하여 신관(新官)에게 정장(呈狀)하기도 하고, 배를 타기 위해 강으로 내려가던 날 질타하며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혹은 내아(內衙)의 담장 밖에서 꾸짖고 욕하기도 하고 혹은, 초우(草偶)275)  를 만들어 화살을 대신 쏘기도 했다고 합니다. 떠다니며 전파된 말을 신 또한 감히 다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만일 정익하가 하나라도 혹시 이런 짓을 범했다면 그가 어떻게 장오(贓汚)의 이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분노하게 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선성(先聲)이 전파되자 그가 이에 의심하고 겁먹은 나머지 그 내형(內兄)인 이덕재(李德載)를 시켜 흉언(凶言)을 지어내 은밀히 먼저 사람을 제압할 계책을 세우고는 이미 체직된 신을 공박함으로써 장차 일세(一世)를 공갈 위협하여 많은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덕재는 평생 무사(武事)에만 종사해 왔고 문자(文字)에는 뜻을 둔 적이 없었으니, 그의 계사(啓辭)나 필적이 어찌 그 스스로 한 것이겠습니까? 정익하는 이덕재가 잘 등전(謄傳)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직접 백간(白簡)에 대신 써서 아주 은밀하게 전수(傳受)하였을 것이니, 그는 대각(臺閣)에 나아가서 봉행(奉行)한 것뿐입니다. 대저 대계(臺啓)는 대각에 나아가 등서(謄書)하여 전하는 것이 본디 3백 년 동안 행하여 온 고규(故規)인데, 대신 쓴 한 조항이 정익하로부터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일세(一世)의 공의(公議)가 놀랍고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역(黨逆)이라는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신이 이덕재와 함께 왕부(王府)에 나아가 하나하나 질변(質辨)하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이미 처분을 내렸다."
하고, 하교하기를,
"이덕재와 이유신을 대질시키는 것은 금오(金吾)의 사체에 있어 당연한 것이나 애석한 것은 대간의 지위이고 돌아보아야 할 것은 후일의 폐단이다. 비록 참작하더라도 정익하에게 묻지 않고 다시 누구에게 묻겠는가? 이것을 문목(問目)에 첨가하여 직접 구초(口招)를 받으라."
하였다.

 

11월 20일 계묘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당(備堂)을 인견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금년의 흉황(凶荒)은 작년에 견주어 더욱 참혹하기 그지없으니, 장차 어떻게 접제(接濟)해야 하겠습니까? 들리는 바에 의하면 호서(湖西)의 양반 가운데 조수(操守)가 있는 사람이 추위와 굶주림에 몰려 소금을 먹고 스스로 죽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대부의 부녀(婦女)들이 남자의 옷으로 변복(變服)을 하고 도둑질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민인(民人)들이 서로 모여 겁략(劫掠)을 일삼는다면 어찌 주군(州郡)을 공격 약탈하는 우환이 없을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4만 석의 곡식을 구획(區劃)·판출하여 성상께서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어 제도(諸道)에 나누어 준다면 조금이나마 급박함을 구제할 수 있어 백성들이 반드시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하고, 또 속히 환곡(還穀)의 봉납을 정지시키라는 명을 내릴 것을 청하고 또 기호(畿湖)와 양남(兩南)을 접제하는 계획에 대해 진달하니, 임금이 드디어 대신(大臣)에게 하문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국가가 의지하는 곳으로 백성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백성의 부모(父母)가 되어 그 적자(赤子)를 범연하게 본다면, 아! 저 창생(蒼生)들이 다시 누구에게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아! 오늘의 생민들은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적자이며, 성고(聖考)께서 백성을 구휼하시던 성대한 뜻을 내가 직접 우러러 목도한 바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한밤에도 잠을 잊는다.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이르면 만곡(萬斛)의 곡식이 있다 한들 뒤늦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기는 상정미(詳定米)276)   2천 석(石)을 전에 이미 백급(白給)하였으나, 2천 석을 또 백급하고 그 나머지 6천석은 이내 군향(軍餉)으로 하라. 호서는 호조의 세태(稅太) 1만 석을 작년에 예에 따라 획급(劃給)하고 혜청(惠廳)의 대동미(大同米) 2천 석을 백급하라. 호남은 상진조(常賑租) 5천 석을 재상(災傷)이 우심(尤甚)한 고을에 백급하고 대동미 7천석을 작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진곡(賑穀)으로 유치하게 하라. 영남은 상진조(常賑租) 7천 석을 우심한 고을에 백급하고 대동미 7천 석을 또한 전례에 의거하여 진곡으로 유치하게 하라. 양남(兩南)의 우심한 고을은 신포(身布)와 신공(身貢)을 호서의 예에 의거해 절반을 탕감시키고 환모곡(還耗穀)을 참작해 헤아려 획급하라. 영동의 우심한 고을의 신포와 신공도 절반을 탕감시키고 모곡(耗穀) 전부를 특별히 허급(許給)하라. 해서의 연안(延安)·배천(白川)은 경기의 우심한 고을과 다름이 없으니 상진조 5백 석을 백급하여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라. 흉년에 안집(安集)시키는 방법으로는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니, 호서의 상번군(上番軍)은 정번(停番)토록 하라. 진제(賑濟)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오로지 자목(字牧)277)  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의당 수의(繡衣)를 보내어 그 능부(能否)를 염찰(廉察)해야 하나, 때늦게 신칙하고 면려시키는 것보다는 먼저 조처하는 것이 나으니, 그대 방백(方佰)들은 각별히 신칙 면려토록 하라. 그리고 만일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최(殿最)278)  를 기다릴 것 없이 즉시 폄체(貶遞)시키라."
하였다.

 

11월 21일 갑진

윤휘정(尹彙貞)을 집의로, 이정제(李廷濟)를 우참찬으로, 조명택(趙明澤)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어유룡(魚有龍)을 강원 감사로, 윤급(尹汲)을 지평으로, 김한철(金漢喆)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고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사헌부 【지평 유건기(兪健基)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장릉 참봉(莊陵參奉) 조관(趙寬)은 향곡(鄕曲)의 백도(白徒)로서 치사(致仕)할 나이에 입사(入仕)하여 늙고 혼미하고 무능합니다. 물정(物情)이 모두 놀랍게 여기고 있으니, 태거(汰去)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사헌 윤혜교(尹惠敎)가 상소하여 외람되게 가솔(家率)을 데리고 가는 금령을 거듭 엄하게 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지난번 조현명(趙顯命)을 삭체(削遞)시킨 벌에 대해 논자(論者)들이 너무 가볍다고 말하고 있으니, 본율(本律)에 의거하여 감단(勘斷)하는 것이 진실로 귀근(貴近)에서부터 시작한다는 뜻에 합치됩니다. 그리고 사사로이 부인(符印)을 받은 것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그 일을 당한 사람이 법에 의거하여 사양하고 물리쳤다면 조현명이 마음내키는 대로 출발하려고 한들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의 가도사(假都事)도 일체로 벌을 베풀어야 마땅합니다. 도민(都民) 가운데 군문(軍門)에 의탁하여 방역(坊役)을 면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이미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버렸으니, 오군문(五軍門)279)  과 호위청(扈衛廳)에 신칙하여 모록(冒錄)된 자들을 조사하여 태거(汰去)시킴으로써 방민(坊民)이 치우치게 고통당하는 폐단을 펴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옳기는 하지만 처분은 참작하고 헤아려 한 것이다. 그 당시의 도사는 삭직(削職)시키고 군문에 모속(冒屬)된 사람은 각청(各廳)으로 하여금 이정(釐正)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23일 병오

이성룡(李聖龍)·엄경하(嚴慶遐)를 승지로, 신택하(申宅夏)를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24일 정미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매양 계복(啓覆)280)  할 때를 당할 적마다 내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당 태종(唐太宗)은 중간쯤 되는 군주(君主)였는데도 까치가 감옥에 있는 나무에 깃들어 살았다. 하지만 나의 경우 옥안(獄案)이 이토록 호번하게 많으니, 유독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불경(不經)을 범하는 것이 낫다고 했으니, 상세히 살피고 신중을 기하다가 실형(失刑)하는 것이야 또한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8일 신해

윤광운(尹光運)을 헌납으로, 이흡(李潝)을 응교로 삼았다.

 

11월 29일 임자

화순 옹주(和順翁主)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下嫁)하니, 김한신은 겸판서(兼判書)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이다. 옹주는 정빈(靖嬪) 이씨(李氏)의 소생이다.

 

11월 30일 계축

바다에 표류되었던 청(淸)나라 사람이 제주(濟州)에 와서 정박(碇泊)하였다. 그들의 소원에 따라 육로(陸路)로 북경(北京)에 환송(還送)시켰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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